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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1.05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 나주 지역 제일의 고찰,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나주곰탕 1그릇)
  2. 2017.12.08 무서운 이름을 지녔지만 아늑한 분위기를 지닌 고색의 절집, 김제 모악산 귀신사
  3. 2013.06.03 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늘씬한 숲길과 많은 보물을 간직한 고색의 절집, 정릉 경국사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 나주 지역 제일의 고찰,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나주곰탕 1그릇)

 


'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나주 불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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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회사 석장승
◀ 원진국사 부도
▶ 불회사 진여문과 사천왕문
▼ 불회사 대웅전

불회사 진여문, 사천왕문
   

 


 

겨울 제국이 천하만물의 격한 미움을 받으며 세력 확장에 열을 올리던 12월 첫 무렵에 따
뜻한 남쪽 땅인 전남을 찾았다. 그 전남에서 내가 격하게 반응을 보인 곳은 나주(羅州)의
유서 깊은 고찰 불회사이다. (불회사를 목적지로 정함)

오랜만에 햇님보다 일찍 부지런을 떨며 새벽의 차디찬 기운을 뚫고 한강을 건너 영등포역
으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호남의 중심지인 광주(光州)로 가는 첫 열차를 타고 5시간 가까
이를 달려 광주역에 두 발을 내리니 겨울 제국에게 점령된 북쪽과 달리 가을의 따스한 기
운이 나를 맞이한다.

광주역에서 불회사까지는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접근성도 영 좋지가 않다. 예전에는
광주역을 비롯한 광주 도심부에서 불회사입구까지 바로 가는 나주시내버스가 있었으나 이
제는 남평에서 무조건 환승을 해야된다. (남평에서도 40~50분 정도 들어가야 됨)


 

♠  불회사 입문 (석장승, 원진국사부도)

▲  불회사 일주문(一柱門)

불회사입구에 이르니 웅장한 모습의 일주문이 마중을 나왔다. 문 현판에는 '초전성지 덕룡산
불회사(初傳聖地 德龍山 佛會寺)' 10글자가 쓰여있는데, 여기서 초전성지란 '불교가 처음 전
해진 성지'란 뜻이다. 이는 백제에 불교를 전한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366년에 창
건했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 땅 최초의 절이란 자부심을 담은 것이다. 허나 그 창건설은
그저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며, 실제 그가 불교를 들고 백제를 찾은 것은 384년이다.


▲  일주문 부근에 자리한 도암선사부도(道巖禪師浮屠)와 하얀 승탑

일주문을 지나면 가장 먼저 승탑(부도) 2기와 비석 1기, 그리고 속세와 그들을 이어주는 돌다
리를 만나게 된다. 승탑은 돌다리보다 1단 높은 곳에 나란히 자리해 있는데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진 왼쪽 승탑이 도암선사의 승탑이다.

도암선사(1805~1883)는 장성 백양사(白羊寺)를 중창했던 승려로 성은 차씨이다. 1817년 백양
사 심옥(心沃)에게 출가하여 1827년 인월(印月)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하루에 1끼
만 먹으면서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한편 전국의 이름난 승려를 찾아가 불경을 익혔다.
1840년 화월(華月)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이때부터 백양사에 머물며 후학들을 지도하고 계율
을 엄히 지키도록 했으며, 백양사 뒷쪽 백학봉 밑에 자리한 석실(石室)에 들어가 10여 년 동
안 불도를 닦고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천진암(天眞庵)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883년에 78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가 이승을 뜨자 잠깐 인연이 있던 불회사에 탑을 만들어 사리를 봉안했는데, 승탑과 관련된
어떠한 안내문도 없어 무심히 지나치기가 쉽다. 그 옆에는 한참이나 후배인 하얀 피부의 승탑
이 서있고, 그 앞에 하얀 승탑의 주인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  고색의 때로 자욱한 도암선사 승탑(부도)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승탑으로 검은 주근깨가 여기저기 피어났다.

▲  불회사 숲길 (일주문과 주차장 사이)

▲  그림처럼 펼쳐진 불회사 숲길 (석장승 직전)

불회사 숲길은 자연의 향이 그윽한 아리따운 숲길이다. 사찰 숲길의 갑(甲)으로 칭송받는 곡
성 태안사(泰安寺) 숲길과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전나무 숲길을 바짝 긴장시킬 정도로 아름
답기 그지 없는데, 300~400년 묵은 비자나무와 측백나무, 전나무, 삼나무 등이 무성해 온갖
내음을 누릴 수 있다. 특히 대웅전 뒷쪽에는 춘백(春栢)이 삼삼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5월에
연두빛으로 막 피어날 때 바라보는 대웅전과 그 뒷산의 모습은 놓치기 아까운 봄 풍경으로 꼽
힌다.
게다가 단풍이 늦게 들고 늦게 지기 때문에 11월 후반까지 단풍의 향연을 즐길 수 있고, 단풍
색깔이 광주 인근에서 가장 곱다고 한다. 허나 그 좋은 시기가 싹 지나간 시점이라 단풍은 거
의 다 지고 간신히 나뭇가지에 붙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초췌한 단풍잎만 남아있을 뿐이라
안그래도 늦가을이다 연말이다해서 우울해진 나의 정처없는 마음을 더욱 우울의 끝으로 밀어
넣는다. (불회사 비자나무 숲은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됨)


▲  불회사 석장승 - 국가 민속문화재 11호

랫 주차장에서 3~4분 정도 가면 불회사의 오랜 상징이자 지킴이인 석장승 1쌍이 마중을 한
다.
장승은 예로부터 부정한 기운을 막는 존재로 마을이나 절 입구에 세웠다. 지킴이 역할 외에도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는데, 청동기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선돌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회사 석장승은 절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는데, 절 수호와 절의 경계를 알리는 기능을 담
당했다. 그러니까 석장승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불회사의 영역이 시작되는 것이다. 길 양쪽에
1기씩 자리해 서로를 바라보고 있으며, 돌난간을 두룬 네모난 보금자리에 퉁방울 눈으로 뻣뻣
하게 서 있다. 서쪽 장승은 남자(이하 남장승), 오른쪽 장승은 여자(이하 여장승)로 초보자가
봐도 누가 남자고 여자인지 쉽게 구분이 간다.

남장승(키 315cm, 몸둘레 170cm)은 여장승보다 키가 크며, 동그란 큰 눈은 왕방울처럼 부라리
고 있고, 세모난 코는 주먹처럼 크다. 입은 일자로 그어져 있고, 입 밑에는 수염이 약간 묘사
되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불상의 무견정상(無見頂相)처럼 두툼히 솟아 있다. 몸통에는 그의
이름을 알리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5자가 쓰여 있고, 얼굴 표정은 약간 인상을 쓰고 있
지만 그리 싫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절을 지키는 수호신의 얼굴치고는 좀 귀엽다.

그의 동반자인 여장승(키 180cm, 몸둘레 162cm)은 인심 좋은 아지매를 보듯 표정이 매우 부드
럽다. 두 눈은 남장승 못지 않은 왕방울로 눈 위에는 살짝 구부러진 눈썹과 광장처럼 넓은 이
마가 있으며, 코는 남장승 못지 않게 크다. 입은 아래로 살짝 구부러져 엷은 미소까지 띄우고
있으며, 몸통에는 그의 이름을 알리는 '주장군(周將軍)' 3글자가 쓰여 있는데 원래 이름은 상
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다. 남장승에 비해 키는 작으나 다정한 표정이며, 둘다 귀엽고 익살스
러운 포스로 무서움은 커녕 즐거움을 준다.


아무리 굳은 얼굴이거나 인상을 쓴 얼굴도 그
들을 보면 절로 주름이 풀어질 것이다. 그리고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표정에 넋이 나가 본연의 임무를 깜빡 잊고 돌
아갈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진리가 아닐까?
이들 석장승은 서쪽 산너머에 있는 운흥사(雲
興寺) 석장승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1719년 전
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장승을 숭배하
는 민간신앙과 불교신앙이 혼합된 존재이자 이
땅에 몇 안되는 사찰 장승으로 가치가 높다.

▲  여장승을 늘 살피는 남장승

▲  남장승을 바라보는 여장승

▲  남장승의 뒷모습과 여장승


  연리지(連理枝)라 불리는 느티나무(가운데 나무) -
나주시 보호수 15-4-12-6호


석장승을 지나면 왼쪽 숲에 불회사의 또다른 명물인 연리지가 나온다.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나무로 두 나무가 서로 맞닿아 엉켜있는 모습이 마치 남녀가 예민한(?) 짓거리를 하는 모습처
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절 주변에서 그런 연리지가 종종 목격되어 그것도 참 흥미로운
데 여색을 멀리하며 불도에 정진해야 되는 승려의 한이 모여 나무로 표출된 모양이다.

연리지는 가뭄에 콩 날 정도로 희귀한 나무라 나라의 경사나 부모에 대한 효성, 화목한 부부
등을 상징하며, 그의 수종(樹種)은 느티나무이다. 높이는 30m에 이르러 하늘을 가릴 정도이고
둘레는 1.5m로 키에 비해 꽤 늘씬하다. 나이는 약 600년으로 짐작된다.


▲  불회사 사적비와 소나무

연리지를 지나면 불회사의 장대한 역사를 머금은 사적비(事蹟碑)가 나온다. 듬직하게 생긴 귀
부(龜趺)와 글씨가 빼곡히 담겨진 검은 피부의 빗돌,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 2마리가
생동나게 새겨진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성된지 얼마 안되어 윤기가 주르르 흐른다. 그런 사적비 옆에는 하늘을 향해 곧게 자란 소나무가 주변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  원진국사부도로 오르는 산길

▲  진여문 부근의 승탑들

사적비를 지나면 불회사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에 덕룡산으로 오르는 산길이 나온다. 원진국사
부도를 보고자 한다면 그 산길을 꼭 오르기 바란다. 조그만 계곡을 건너서 대나무숲으로 들어
서면 좌우로 갈라진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부도(승탑)가 나온다.
나는 사적비 뒷쪽 산길을 몰랐던 터라 진여문까지 갔음에도 부도를 알리는 길이 없어 그냥 지
나칠까 했었다. 허나 부도와의 술래잡기는 끝내야겠다 싶어서 길도 없고 경사도 각박한 진여
문 남쪽 산자락을 무대포 정신으로 올라가서 끝내 술래 신세를 면했다.

진여문 남쪽에는 승탑(僧塔) 2기가 초췌한 모습으로 중생들의 눈길을 호소한다. 오른쪽 승탑
은 탑신(塔身)이 온전히 남아있고, 6각형 머릿돌에는 중생들이 올려놓은 돌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 위에는 돌기둥이 서 있는데, 피부색이 전혀 틀려 승탑의 일원은 아니었던 듯 싶다.
탑의 밑도리는 돌에 묻혀 윗도리만 간신히 고개를 내민다.
왼쪽 승탑은 거친 세월의 흐름을 과민하게 탔는지 머릿돌과 바닥돌만 간신히 남은 처량한 신
세이다. 이들 승탑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탑의 주인은 알 수 없다.

▲  머릿돌과 바닥돌만 남은 가련한 승탑

▲  불회사 원진국사부도(圓眞國師浮屠)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25호

경내 남쪽 산자락에 원진국사부도가 살짝 터를 닦고 있다. 원진국사 승형(承逈, 1171~1221)은
능엄선(楞嚴禪)의 주창자로 성은 신씨, 고향은 경북 상주(尙州)이다. 3살 때 고아가 되어 숙
부인 시어사(侍御史) 신광한(申光漢)에게 양육되었으며, 13세에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출
가하여 김제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1197년 스승인 동순(洞純)이 입적하자 승과(僧科)를 포기하고 수도에 정진했으며, 명종(明宗)
이 그의 소문을 듣고 특별히 불러 초선(初選)을 치르게 했다. 이후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에
들어가 지눌(知訥)에게 법요(法要)를 받고 오대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예불한 뒤 크
게 감응을 얻었으며, 춘천 청평사(淸平寺)에서 이자현(李資玄)의 유적을 찾다가 '수릉엄경(首
楞嚴經)은 마음의 본바탕을 밝히는 지름길'
이란 이자현의 문수원기(文殊院記)에 크게 감명을
받아 능엄경을 열심히 연구했다. 그 인연으로 불법(佛法)을 알릴 때 능엄경을 으뜸으로 삼겠
다고 발원했으며, 이후 이 땅의 선종(禪宗)에서 크게 숭상을 받게 되었다.

1210년 연법사(演法寺) 법회의 법주(法主)가 되어 선풍(禪風)을 떨쳤고, 1213년에 삼중대사(
三重大師), 1214년에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이듬해 대선사(大禪師)가 되어 포항 보경사(寶
鏡寺)에 머물렀다. 1220년에는 희종(熙宗)의 4째 아들인 경지(鏡智)의 스승이 되었고, 1221년
능엄경을 설법한 뒤, 팔공산 염불사(念佛寺)로 자리를 옮겨 승려치고는 젊은 50세에 입적했다.

고종(高宗)은 그에게 원진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보경사에 그의 승탑을 세웠으나 사리의 일부
를 가져와 잠깐 인연이 있던 불회사에도 승탑을 두었다. 탑신 밑도리에 연우(延祐, 원나라 인
종의 연호) 4년 5월에 세웠다는 글씨가 있어 1318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탑신 앞
쪽에는 해서체(楷書體)로 '圓眞國師 通照之塔(원진국사 통조지탑)'이라 쓰여있어 탑의 이름과
주인까지 소상히 알려준다.

높이 1.7m의 조촐한 모습으로 조각 기법이 형식화되어 딱히 섬세한 면은 없으며, 탑신과 지붕
돌이 8각이고 그 밑도리는 동그란 전형적인 8각원당형 승탑이다. 또한 탑신에 탑의 주인공과
탑 이름, 조성 연대가 쓰여있어 고려 후기 승탑 양식을 연구하는데 아주 소중한 자료가 되어
준다. 바로 이 점이 이 승탑의 강한 매력이다.


▲  승탑의 주인과 탑 이름이 희미하게 쓰여있다. (원진국사 통조지탑)


 

♠  불회사 진여문, 대웅전 주변

▲  한몸으로 이루어진 진여문(眞如門)과 사천왕문(四天王門)

원진국사부도와의 숨바꼭질을 승리로 마무리 짓고 경내를 코앞에 둔 진여문으로 향했다. 진여
문은 하나로 이어진 사천왕문과 함께 1990년대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계곡 위에 홍예 돌다리
를 걸치고 그 위에 복도식 건물을 씌웠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한 지붕을 이고 있는 사천왕문
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은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그들의 목상(木像) 대
신에 그림 4개가 자리를 대신한다.
사천왕문은 원진국사부도가 있는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사천왕의 검문을 거치면 비로소 불
회사 경내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부처의 모임터를 뜻하는 불회사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  홍예 돌다리를 갖춘 진여문

▲  사천왕문 사천왕도

▲  2층으로 이루어진 대양루(大陽樓)

▲  대양루의 1층을 차지하고 있는
천수전(千手殿)

불회사는 덕룡산 북쪽 자락 숲속에 포근히 터를 닦은 오래된 절이다. 경내 앞쪽(남쪽)에는 계
곡이 흐르고, 뒷쪽(북쪽)으로 산을 베게 삼아 누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으로 사방이 덕
룡산의 첩첩한 산줄기에 감싸인 고적한 곳이다. 절 입구에서 절까지 속세의 민가(民家)도 거
의 없으며, 절 부근에는 적당한 마을도 없다.

이 절은 366년(또는 384년)에 인도 승려인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366년이면 고구려(
高句麗)에 불교가 전해지기 무려 6년 전이고, 백제는 18년 전이 된다. (가야는 제외) 불회사
가 366년 창건설을 자신 있게 우기는 것은 1978년 큰법당 기와 불사 때 발견된 '호좌(호남 좌
도) 남평 덕룡산 불호사(불회사의 옛 이름) 대법당 중건 상량문(上樑文)'
에 366년<동진(東晉)
태화 원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연유로 이 땅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
해진 초전성지(初傳聖地) 임을 일주문을 통해 아주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불회사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 땅의 불교사를 다시 정리해야 되겠지만 굳이 그리할 필요는 없
을 것 같다. 마라난타의 366년(384년) 창건설은 어느 기록에도 없고, 백제 유물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가야의 불교 전래설도 외면받고 있는 마당에 불회사의 366년 창건설은 어디 주목이
나 받겠는가?

창건 이후, 656년에 희연조사(熙演祖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며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道詵國
師)가 중창을 하고, 1264년에 원진국사가 크게 중창을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원진은 앞서 그
의 승탑에서 밝혔듯이 1171년에 태어나 1221년에 세상을 떴다. 그런데 뜬금없이 1264년이라니
? 원진이 입적한지 53년 뒤에 홀연히 부활하여 절을 중창했단 말인가?? 허나 경내 주변에 그
의 승탑이 있으니 원진이 절을 손질한 것은 맞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창건했을 지도 모르겠
다.

1798년 화재로 절 전체가 소실되자 주지인 지명(知明)이 1799년에 중건을 했으며, 절의 원래
이름은 부처를 지킨다는 뜻의 불호사(佛護寺)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큰법
당에서 나온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808년 경에 불회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하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절을 크게 손질하여 기존의 가람
(伽藍)배치 외에 동쪽에 진여각과 요사채, 대양루 등을 건립하여 절의 몸집을 더욱 늘렸다.

절을 수식하는 전설 가운데 호랑이와 도승의 이야기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후기에 참의(參議) 벼슬을 지낸 조한용(이하 승려)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불
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치며 벼슬을 그만두고 승려가 되었다. 표주박 하나와 누더기 1벌로 천
하를 떠돌던 그는 불회사에 이르자 쇠락한 절의 모습에 발끈하여 절 중창을 계획하고 주변 마
을로 탁발을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탁발을 하고 절로 돌아오다가 난데없이 호랑이를 만났다. 그런데 호랑
이는 그를 보자 입을 크게 벌리고 눈물을 흘려 애원하는 것이 아닌가. 호랑이의 출현에 염통
이 적지않게 쫄깃해졌던 그는 용기를 내어 입을 살펴보니 글쎄 목에 비녀가 걸려있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사람을 잡아먹지 말아라. 그것을 약속하면 내 비녀를 뽑아주마' 그러자 호랑
이가 '알았어. 앞으로 사람은 해치지 않을테니 비녀 좀 뽑아줘!' 그래서 비녀를 뽑아주니 호
랑이는 고마움을 표하고 사라졌다.

그해 겨울, 호랑이가 그를 찾아왔다 '야 나와봐! 아주 좋은 거 가져왔어!' 그가 나와보니 호
랑이가 어디서 아리따운 여인네를 물어다 마당에 놓고 간 것이 아닌가. 호랑이가 앞서 은혜를
갚고자 참 기특한 일을 하였지만 이미 출가한 몸이라 대놓고 흑심을 품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혼절한 여인을 외면하기도 그래서 일단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알고보니 안동(安東) 만석꾼
김상 공(이하 김공)의 외동딸이었다.
여인이 기력을 회복하자 남장을 시켜 안동으로 데려가니 김공은 너무 기뻐 크게 보답할 길을
알려달라고 했다. 이에 불회사 복원에 필요한 시주를 청하니 김공이 쾌히 승락하자, 승려는
가지고 온 걸망을 꺼내 쌀을 담아 달라고 했다. 걸망이 너무 작아서 이거 얼마나 들어가겠는
가 싶어 김공의 부인은 우려했으나 아무리 부어도 끝없이 들어가는 쌀을 보며, 크게 놀라 아
예 곳간을 열테니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고 했다.
이에 승려는 신통력으로 공양미를 절로 보냈다고 하며, 그때 쌀을 보관한 곳이 인근 화순 중
장터라고 한다.

김공이 준 쌀로 불회사 대웅전을 지으며, 좋은 날을 택해 상량식을 올리려고 했으나 일이 너
무 장대하여 그 시간을 맞추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뒷산 봉우리에 올라가 '호법 선신중이
시여! 부처의 대작불사가 해가 짧아 원만히 회향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피를 드리워 주소서
'
기도를 올리니 해가 잠시 길을 멈추면서 제시간에 상량식을 마쳤다고 한다.
이후 그가 기도를 한 자리에 암자를 세우고 해를 멈추게 한 곳이라 하여 일봉암(日奉庵)이라
했으나 6.25 때 파괴되어 샘터만 남았다.

그 승려는 말년에 건너편에 남암(南庵)이란 암자를 짓고 머물렀는데 아침과 저녁마다 까만 새
가 날라와 뒷편에 있는 잣나무 가지에 앉아 승려와 대화를 했다고 하며, 그 나무를 흑조수(黑
鳥樹)라 불렀다고 한다. 그 나무는 남암터에 2그루가 있었으나 태풍으로 하나가 쓰러지고 지
금은 1그루만 남아있다. (현재 부속 암자는 모두 사라진 상태)

비자나무와 측백나무 등에 싱그럽게 둘러싸인 경내에는 대웅전과 영산전, 명부전, 대양루, 심
검당, 사운당, 천왕문, 진여문, 불국원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과 건칠비로자나불좌상, 민속문화재인 석장승, 지방문화재
인 원진국사부도, 소조보살입상 등이 있고, 그외에 도암선사부도와 조선 후기 승탑, 연리지,
괘불지주 등이 있어 고색의 내음도 숲내음 만큼이나 진하다.

※ 나주 불회사 찾아가기 (2018년 12월 기준)
* 광주 전남대후문과 산수5거리, 조선대, 광주1호선 남광주역(3번 출구), 백운광장, 인성고(
  효천역)에서 나주시내버스 999, 999-1번을 타고 남평정류장에서 하차 → 중장터, 도동 방면
  으로 가는 나주 200번으로 환승하여 불회사 하차 (1일 10회 운행)
* 나주터미널과 영산포터미널에서 나주 403번을 타고 불회사 하차 (1일 13회 운행)
* 승용차 (석장승과 일주문 사이에 주차장이 있으며, 경내에도 있음)
① 광주 → 남평읍내 → 도래마을 → 다도 → 불회사입구 우회전 → 불회사
② 광주 → 칠구재터널 → 도곡온천입구 → 도암면 → 운주사입구 → 중장터 우회전 → 불회
   사입구 → 불회사

* 불회사 입장료는 없음
* 불회사는 산사힐링체험(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7~8월에 열리는 관음대참회 수련
  회, 매월 3째주 토요일에 1박 2일로 열리는 주말산사문화체험, 녹차(비로다)만들기 체험 등
  이 있으며, 자세한 일정과 가격은 불회사 홈페이지를 참조하거나 전화로 문의한다.
* 소재지 :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마산리 999 (다도로 1224-142 ☎ 061-337-3440)
* 불회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불회사 경내와 부드러운 곡선의 덕룡산

▲  대웅전 주변 (대웅전 우측에 극락전, 삼성각 등이 있음)

사천왕문을 지나면 1990년대 후반에 지어진 2층 대양루가 나타난다. 대양(大陽)이란 큰 햇님
으로 부처의 법을 상징하는데, 1층은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통로와 종무소(宗務所), 차 1잔과
공양물품을 판매하는 비로다경실이 있다. 여기서 비로다(榧露茶)는 불회사에서 생산되는 녹차
(綠茶)로 절 주변 비자나무 밑에서 이슬을 머금고 자란 찻잎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비로다는 오랜 역사를 가진 불회사의 살아있는 전통으로 절에서 창건주로 우기고 있는 마라난
타가 불회사를 세우고 재배한 차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을 바탕으
로 이 땅에서 처음으로 차가 재배된 곳이라고 주장까지 하나 실제 재배 시작 시기는 조선시대
> 불회사 녹차로 인해 이곳의 예전 지명은 다소(茶所)였으며, 다도면(茶道面)이란 이름도 바
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2층은 대양루 대신 천수전이란 별도의 간판을 달고 있는데, 천수관음보살(千手觀音菩薩)을 봉
안하고 있으며, 온갖 새와 토끼, 물고기, 소나무, 과일 등을 담은 그림이 평방(平枋) 등에 그
려져 있다. 보통 사찰의 벽화나 그림은 부처를 찬양하고 불교와 관련된 내용을 담기 마련이나
천수전은 그 규칙을 와장창 깨고 민화(民畵)나 사대부들이 그리는 그림처럼 치장되어 있다.


▲  불회사 대웅전 - 보물 1310호

대양루 밑도리를 통해 안쪽으로 들어서면 3단의 기단 위에 높직하게 들어앉아 남쪽을 바라보
는 대웅전 앞에 이른다.
불회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추녀를 살짝 들어올
린 모습이 마치 새가 날개짓을 하듯 경쾌하기 그지 없는데 상량문을 통해 1799년에 중건되었
음이 밝혀졌다.

건물 정면에 달린 문짝은 4분합의 빗살문으로 두터운 통판자로 짜서 창살무늬, 불상, 새와 꽃
등이 꽃살문을 이루며 장식되어 있었으나, 6.25 시절에 공비들이 그들의 소굴을 덮기 위해 모
두 약탈해 갔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초석(礎石)은 덤벙주초로 비교적 큰 편이며, 그 위에 세
운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준다.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놓고, 전/후면의 각 주칸에는 외3출목, 내4출목 공포를 2조씩, 양
측면에는 1조씩 배치했으며, 내부에는 화려한 연꽃봉오리형으로 마무리 지었다. 특히 용 4마
리를 건물 안팎으로 치장하여 법당의 장엄함을 드높였는데, 정면 어칸(가운데 칸)에 2마리의
용머리가 있고, 그 꼬리는 건물 내부 대들보 밑에서 살랑살랑 흔들거리고 있다. 또한 천정 중
앙 대들보에도 용 2마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건물 양측면 중앙에는 건물 내부로 2개의 충량(衝樑)을 걸어 그 머리를 용머리로 장식하여 큰
대들보에 걸쳤는데 이런 결구법은 조선 중기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 내부 천정은 빗천정과 우
물천정을 같이 했는데, 빗천정에는 물고기, 연꽃무늬 등을 조각하여 달았다.


▲  옆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새와 연꽃 등이 그려진 아름다운 우물 천정과 대들보에 고개를 대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용 2마리


건물 내부와 바깥에 용 장식을 달고 연꽃봉오리 등을 장식한 기법은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
웅보전에도 나타나고 있어 같은 장인이나 그 후학들이 만들었음을 짐작케 하며, 조선 후기 건
립 당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어서 2001년 4월에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호에서 보물로 지
위가 높아졌다.


▲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용의 살랑거리는 꼬리와 붉게 채색된 천정

▲  대웅전 비로자나3존불
가운데 본존불이 불회사 건칠비로자나불좌상 - 보물 1545호
좌우 협시불은 불회사 소조보살입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67호


불회사의 상큼한 보물 창고인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불 대신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중심으
로 한 비로자나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의 중심인 비로자나불은 종이로 만들어 금칠을
입힌 이 땅에 흔치 않은 건칠불(乾漆佛)로 고려 후기 불상 양식을 계승한 조선 초기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붉은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 그의 전용 수인(手印)인 지권인(智拳印)을 취하
고 있으며, 머리는 검은색 나발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 있다. 두 귀는 어깨까
지 축 늘어져 중생의 조그만 하소연까지 듣고자 애쓰고 있고, 얼굴은 약간 굳은 듯한 표정이
지만 입가에서는 엷게 미소가 퍼지고 있다.
그의 좌우에 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상은 흙으로 빚어서 만든 조선 초기
보살상으로 15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잘 만들어진 우수한
작품으로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불상/보살상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  불회사 마무리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우에는 온갖 군소 건물들이 학의 날개처럼 펼쳐져 있는데, 좌측 바로 옆에는 명부전
이 둥지를 틀고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을 비롯한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데, 1402년에 세워져 1799년에 중수되었으며,
근래 손질을 했는지 고색의 기운이 대웅전 보다는 못해 보인다.


▲  후덕한 표정을 지으며 육환장(六環杖)을 쥐고 있는 명부전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밝은 색채의 10왕을 비롯한 저승의 식구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다.

▲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바로 좌측에는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세기
에 중건되었는데, 예전 이름은 칠성각(七星閣)이었다. 산신(山神)과 칠성(七星)을 비롯해 용
왕(龍王)까지 봉안하고 있으며, 그들을 담은 탱화는 모두 근래에 새로 제작되었다.

▲  용을 타고 짙푸른 바다를 질주하는
용왕의 모습이 담긴 용왕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나한전(羅漢殿)
석가불과 그의 열성 제자인 16나한 그리고 고려 때 절을 크게
일으킨
원진국사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예전 이름은 영산전)

▲  나한전 석가불과 16나한상

▲  원진국사의 진영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아미타불과 영가
(靈駕)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공양간과 요사(寮舍)로 쓰이는 사운당
1층은 공양간, 2층은 요사이다.


▲  어처구니를 상실한 옛 맷돌
불회사 승려와 중생들의 공양밥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맷돌, 이제는 절의
찬란했던 역사를 머금은 화석이 되어 대양루 부근에 조용히 누워있다.
어처구니가 불이 나게 돌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애타게 그리워하겠지.

▲  진여문 부근 숲길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불회사를 열심히 둘러보고 대양루 부근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기
분 같아서는 속세(俗世)에서 나란 존재를 잠시 지우며 이곳에서 며칠 머물고 싶지만 내가 있
어야 될 곳이 아니기에 다시 속세로 아쉬운 발걸음을 땐다.
절을 둘러싼 비자나무와 춘백, 소나무의 청정한 내음을 배불리 들어마시며 결코 지루하지 않
는 숲길을 뚜벅뚜벅 걸으니 어느새 연리지와 석장승이 나타나 배웅을 한다. 그들을 지나치기
가 싫어 앞서 지겹게 봤음에도 다시 사진에 담느라 약간의 시간을 흘려보냈고, 다시 길을 재
촉하니 주차장과 도암선사부도, 일주문이 나타난다.


▲  불회사 숲길과 단장의 이별을 하다.
나중에 또 인연을 지을 수 있을까? 그때는 덕룡산과 운흥사(雲興寺) 석장승까지
모두 살펴보고 싶다.

▲  불회사 숲길 (주차장 부근)

불회사입구 정류장에서 다시 두 다리를 쉬며 버스를 기다렸다. 목포로 가야 되기 때문에 나주
시내(영산포, 나주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오면 정말 대환영인데 20분 정도 기다리니 남평으로
가는 나주 200번이 나타나 입을 벌린다. 남평으로 나가면 나주시내로 가는 시내버스가 수시로
있어 그것을 잡아타고 첩첩한 덕룡산 골짜기에서 탈출했다.
남평으로 나와 영산포로 가는 999번 시내버스로 환승하여 나주시내 북부에 자리한 나주터미널
에 두 발을 내렸다.

아직 점심도 제대로 때우지 못한 상태라 나주곰탕이나 한 뚝배기 들고자 터미널 서쪽 금성관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나주곰탕 골목을 찾았다. 이곳은 예전에 2~3번 와본 적이 있는데, 어
느 집으로 갈까 궁리하다가 7년 전에 들렸던 곰탕집으로 들어갔다.


▲  잘 차려져 나온 나주곰탕의 위엄

내가 곰탕집을 찾은 시간은 15시대라 손님은 거의 없었다. 송송(깍두기)과 김치, 양파, 고추
장 등의 밑반찬을 거느린 곰탕이 내 앞에 차려지자 시장기가 왕성하게 솟구쳐 곰탕과 밑반찬
들은 이내 밑바닥을 드러낸다. 그래도 성이 차질 않아서 국물과 밥을 더 청하여 아주 든든하
게 배를 채웠다.

그렇게 늦은 점심을 먹고 부근에 있는 나주목문화관과 정수루를 오랜만에 둘러보고 목포로 넘
어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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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이름을 지녔지만 아늑한 분위기를 지닌 고색의 절집, 김제 모악산 귀신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김제 모악산 귀신사 '

귀신사 대적광전
▲  귀신사 대적광전

귀신사 3층석탑

귀신사 승탑(부도)

▲  귀신사 3층석탑

▲  귀신사 승탑(부도)


 

겨울 제국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인 3월의 첫 무렵에 전북 전주와 김제 지역을 찾았다.
날 전주(全州)에서 친한 후배의 여동생이 시집을 가게되서 그의 요청에 따라 하객 입장으
로 가게 된 것인데 그렇다고 그 여동생과 아는 사이도 아니다. 아무리 후배의 피붙이라고
해도 엄연히 모르는 사람이라 여러 날을 두고 궁리하다가 의리상 가주기로 했다.

서울이 본거지인 신부측에서는 하객 수송을 위해 관광버스 2대를 대절했다. 1대는 가족과
친척들을, 다른 1대는 친척 이외에 사람들을 태웠는데, 8시 반에 발산역(5호선)에서 출발
한다고 하여 아침 일찍 길을 서둘렀다. 허나 일부가 늦게 오면서 9시가 좀 지나서야 버스
는 두툼한 바퀴를 움직였다.
신부 예식 시간은 13시로 교통 정체가 없는 이상은 3시간 내외면 충분히 전주에 도달한다.
다행히 별다른 정체는 없어서 정안휴게소 휴식을 포함하여 3시간 20분 정도 걸렸으며,
배 집안에서 마련한 떡과 귤, 과자, 음료수로 아침을 때웠다.

전주 혼인식장(전주역 부근)에 이르니 주말이라 꽤 북새통이다. 아직 시간이 있어 푸짐하
게 나온다는 점심을 잔뜩 기대하며 시간을 억지로 흘려보내다가 시간이 되자 준비한 축의
금을 내고 혼인식을 관람했다. 허나 나의 돌머리 속에는 혼인식은 온데간데 없고 온통 점
심 생각 뿐이었다.
드디어 지루한(?) 예식이 끝나자 윗층 피로연(披露宴) 장소로 이동했다. 점심은 뷔페식으
로 찬이 매우 풍성해 나의 마음을 너무 기쁘게 했는데, 뷔페의 기본 메뉴인 밥, 고기,
, 나물, 채소류를 비롯해 온갖 초밥과 튀김, , 탕과 국수류(설렁탕과 우동, 잔치국수
), 다양한 디저트, 식혜와 맥주 등 먹을거리가 잔뜩 깔려 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원없이 먹고 싶었으나, 위 용량이 한정되어 있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 주어
진 위의 공간을 적절히 활용하여 여러 먹거리르 섭취했고, 저녁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배가 채워지자 두 손에 꽉 쥐고 있던 수저를 비로소 놓아주었다. (결국 다음날 아침에 탈
이 났음 ㅠㅠ)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덧 14시 반이 넘었다. 후배는 15시에 하객을 태우고 귀경한다며 어
여 타라고 했으나 오랜만에 전주까지 온 거 그냥 올라가면 좀 섭하다. 이미 정처(定處)
정해둔 상태라 아쉽지만 여기서 그들과 작별을 고하며 단독 행동에 들어갔다.


 

♠  이름도 무시무시한 귀신사를 찾아서

▲  청도리에서 귀신사로 가는 마을길

전주에서 정해둔 정처는 전주시내 남쪽에 있는 남고산성(南固山城)과 금산사(金山寺)로 넘어
가는 길목에 자리한 김제 귀신사이다. 마음 같아서는 다 보고 싶지만 해도 얼마 남지 않았고
서로 거리도 멀어 무조건 하나를 택해야 된다.
후배 가족과 작별하고 전주역 정류장에 발을 멈출 때까지만 해도 전주에 왔으니 전주의 명소
를 보는 것이 어울릴 듯 싶어 남고산성에 크게 무게를 두었었다. 허나 시간이 벌써 16시 직전
이라 지금 열심히 가더라도 그곳에서 강제로 일몰을 맞게 된다. 땅꺼미가 짙어지면 야간 렌즈
나 삼각대가 없는 이상은 사진 담기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남고산성을 내버리고 전주시내에서
좀 떨어져 있지만 많이 걸을 필요가 없는 귀신사에 무게를 100% 얹혔다. (전주 경계에서 겨우
2km 거리임)

전주역에서 귀신사를 가려면 전주시내버스 79(전주역금산사)을 타면 된다. 배차간격은 거
25분 정도로 전주시외터미널과 전주고속터미널, 전주한옥마을, 풍남문, 효자동, 삼천동을
거쳐 강원도에 버금가는 고개를 하나 넘으면 행정구역은 전주에서 김제로 갈리면서 귀신사가
있는 청도리(淸道里)에 이른다.

모악산(母岳山) 북서쪽 자락에 안긴 청도리는 조선시대 때 관리와 나그네들의 숙식을 제공하
던 국립 숙박시설, 청도원(淸道院)이 있던 곳이라 하여 청도원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
은 절 밑에 형성된 마을인 사하촌(寺下村)으로 절은 바로 마을 북쪽에 자리해 있으며 오래 걸
을 것도 없이 청도리 버스정류장에서 도보 4~5분이면 충분히 닿는다.

청도리에서 귀신사로 가는 길은 크게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청도리 정류장에서 농가와 경작지
사이로 난 마을길(청도5)을 따라 가는 것이고, 다른 것은 청도리 정류장에서 북쪽으로 180m
떨어진 귀신사입구에서 서쪽 길(청도6)로 방향을 튼다. (전주에서 넘어온 경우는 우회전,
김제는 좌회전) 후자의 경우는 차량을 위해 포장도로가 닦여져 있으며 나는 버스로 왔기 때문
에 정류장과 바로 이어진 마을길을 이용했다.
이제는 흩어진 전설이 되버린 충북 단양(丹陽)의 외가집을 가는 기분처럼 시골 분위기가 그윽
하게 깔린 마을길은 아직 겨울 제국의 치하라 황량하기 그지 없지만 봄의 기운이 슬며시 들어
와 조금씩 녹색 기운을 뿌리며 아직은 거대한 겨울 제국에 대항한다.


▲  귀신사 경내로 인도하는 아랫 돌계단

마을길 끝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진 헝클어진 돌계단이 언덕에 기대어 있다. 그 계
단을 오르면 경내 주차장에 이르는데 돌계단 밑에는 2개의 돌기둥이 우두커니 서 있다.
속세의 민가는 이 계단 앞에서 끝이 나면서 자연히 속세와 절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는데
속세의 일부가 되버린 계단 앞은 원래 귀신사의 영역이었다. 옛날에는 경내 외곽에서 중심으
로 인도하는 계단이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절이 참 작구나 싶겠지만 귀신사의 왕년의 위엄을
잘 보여주는 존재로 세월의 줄기찬 태클에 조금은 비뚤어진 모습을 하게 되었다. 허나 지금의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다. 고색의 때가 잔뜩 묻어나 있고, 계단의 기능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괜히 복원한답시고 딱딱 맞춘다면 그 모습도 꽤 어색할 것 같다.


▲  귀신사 경내로 인도하는 윗 돌계단

아랫 돌계단을 올라 주차장을 지나면 윗 돌계단이 나온다. 아랫 계단과 달리 질서정연한 모습
으로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그 계단 너머는 귀신사의 중심으로 주요 건물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귀신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2번째 돌계단에서 바라본 청도리(청도원) 마을과 모악산

전북 서부의 주요 명산(名山)으로 추앙받는 모악산(794m) 북서쪽 자락에 귀신사(歸信寺)가 포
근하게 자리를 닦았다. 포근한 분위기와 달리 절 이름은 천하에서 가장 후덜덜한 이름으로 사
연을 모르는 이들은 다들 그 귀신(鬼神)인줄 알고 놀라워하거나 오금을 지려한다. 혹자(或者)
는 귀신이 나오는 절로, 다른 혹자는 귀신을 모신 사당 성격의 절로 여기기도 한다. 허나 이
름을 이루고 있는 한자는 그 귀신이 아닌 믿음이 돌아온다는 뜻의 귀신(歸信)이니 괜히 겁을
먹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귀신사의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백제 후기 창건설<법왕(法王, 재위 599~600) 시절로 여겨짐>
과 신라 중기 의상대사(義湘大師) 창건설이 있다.
백제 후기 창건설은 17세기에 활약한 자수무경(子秀無竟, 1664~1737)이 쓴 '무경집(無竟集)'
에 백제의 원당(願堂)으로 창건되었다고 나오며, 경내 뒤쪽에 자리한 석수(石獸)는 백제 왕실
의 자복사찰(資福寺刹)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란 견해가 있다. 게다가 인근에 백제 후기 사
찰인 금산사가 있어 비슷한 시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열어두고 있다.
그리고 신라 중기 창건설은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것인데 당시 이름은 국신사(國信寺.
또는 國神寺)였다고 한다. 허나 정작 백제 때 유물은 없으며, 3층석탑이 창건 당시(6~7세기)
에 것이라고 우기고는 있으나 탑의 양식을 보아 고려 때 것으로 여겨진다. 그 외에 탑과 석등
, 주춧돌 일부가 신라 후기 것이다. 또한 최치원(崔致遠, 857~?)이 이곳에 머물며 당나라 법
장화상의 일대기를 적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신라 후기(8
기 이후)에 법등(法燈)을 켠 것으로 여겨진다.

1120년대에는 원명국사(圓明國師 1090-1141)가 절을 중창했는데, 그 시절에는 구순사(口脣寺
또는 狗脣寺)로 불렸다고 한다. 이는 절 주변이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구순혈형(狗脣穴形)
지형이라 하여 유래된 것이라고 하는데 확실한 것은 없다.
고려 후기인 1376년 왜구(倭寇) 패거리 300명이 귀신사에 들어앉아 갖은 민폐를 부리며 머물
렀는데 이를 병마사(兵馬使) 유실(柳實)이 격퇴했다. 이를 통해 수백 명이 머물 정도로 건물
이 즐비했던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년에는 부속 암자만 8개에 이르렀다고 하며,
적광전은 2층 규모였다고 하니 금산사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허나 조선으로 천하가 바뀌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란 장애물 앞에 절은 심히 좌절을 겪게 된
. 생육신(生六臣)의 하나인 김시습(金時習)이 이곳을 방문해 지은 '귀신사허(歸信寺墟)'
시문에 '~~탑은 무너지고 비석은 끊어져 있다'는 내용이 있어 절의 우울한 상태를 알 수 있으
, 시문 제목에 귀신사란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이름이 바뀌었
음을 알려준다.

임진왜란 시절에는 승병(僧兵)을 양성했다고 전하며 정유재란(1597) 때 절이 모두 파괴되어
쓰러진 것을 1601년 이곳을 지나던 염화, 신허가 전각을 여럿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1624년 승려 덕기가 대대적인 중창을 벌였는데, 이때 옛터가 아닌 새로운 곳에 중창을 했다고
한다. 하여 3층석탑과 석수가 있는 경내 북쪽 언덕이 옛터의 중심지로 여겨진다. 대적광전에
있는 소조비로자나3존불을 비롯하여 미륵보전, 시왕전, 천왕문 등이 이때 세워졌으며, 귀신사
가 남긴 가장 오래된 문서인 상량문(上樑文)1633년에 작성되었는데 이를 통해 덕기의 중창
불사가 1633년에 일단락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승려 도헌(道軒)이 나한전이 없음을 안타
깝게 여겨 나한전(羅漢殿)을 짓고, 나한전의 주요 식구 25위를 봉안했다.

1657년 비바람으로 전각이 퇴락하자 1657년 대웅전 등을 중수했으며, 1707년과 1715년에 두감
이 대웅전과 팔상전을 새로 짓고 1716년에 팔상전에 불상을 봉안했다. 1873년에는 춘봉(春峰)
이 중창했으며, 1884년 명부전을 중수하고 1914년에 명부전 기와를 개수했다. 그리고 1927
에 명부전, 1934년에 대적광전을 수리했으며, 2005년에 대적광전을 해체/수리했다.

▲  귀신사 3층석탑

▲  대적광전 소조비로자나3존불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명부전과 영산전, 요사 등 약 7~8동의 건물이 있
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과 소조비로자나3존불을 비롯해 3층석탑,
, 승탑(부도)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다. 특히 부도는 경내에서 300m나 떨어진 마을 남쪽 밭
두렁에 홀로 있어 귀신사의 영역이 이곳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며, 경내 서쪽에는 신라 후기부
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를 망라한 석탑과 석등의 부재(部材), 건물의 주춧돌 등이
널부러져 있고 경내 직전의 돌계단 2개도 세월에 제법 숙성된 것이다.

모악산 북서쪽 자락에 안겨 있지만 마을 바로 뒤쪽에 자리해 있어 산사(山寺)의 기운은 조금
떨어진다. 허나 옛터인 경내 북쪽 언덕에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조금은 무시무시한 이름
과 달리 고즈넉하고 조촐한 분위기로 외형만 지나치게 추구하는 상당수의 큰 절집과 달리 은
근히 정감이 간다. 또한 비구니 사찰이라 경내가 정갈하고 깔끔하기 그지 없다.

지금은 금산사보다 별볼일 없는 신세이지만 왕년에는 금산사보다 훨씬 잘나갔던 귀신사, 이곳
도 제대로된 학술/발굴조사를 벌여 경내 북쪽과 청도리 마을, 경작지 일대에 잠들어있는 귀신
사의 숨겨진 과거를 싹 들추었으면 좋겠다.

김제 귀신사 찾아가기 (201711월 기준)
대중교통 (전주 경유)
* 용산역, 영등포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순천역, 여수엑스포역에서 전라선
  열차를 타고 전주역 하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1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는
  30분 간격으로 떠나며,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다닌다.
* 인천, 고양(화정, 백석), 의정부, 안양, 부천, 성남, 수원, 용인, 평택, 천안, 청주, 대전
  (복합, 유성, 대전청사), 군산, 남원, 광주, 목포, 순천, 대구(서부, 동대구), 경주, 포항,
  울산, 부산(사상, 노포동), 창원(마산), 진주에서 전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전주역 광장과 전주시외터미널, 전주고속터미널에서 전주시내버스 79번을 타고 청도리 하차
  , 도보 5
대중교통 (김제 경유)
* 용산역,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광주송정역, 나주역, 목포역에서 호남선 열
  차를 타고 김제역 하차 <고속전철(KTX, SRT) 이용시 익산역이나 정읍역에서 무궁화호나 새
  마을호, 누리로 열차로 환승>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김제행 고속버스가 17, 동서울터미널에서 김제
  행 직행버스가 16회 떠난다.
* 인천, 성남, 대구(서부)에서 김제행 직행버스 이용
* 김제역(역전치안센터 건너편)과 김제시외/고속터미널 건너편에서 금산사를 거쳐 청도리로
  가는 김제시내버스 5번이 16회 있다. (김제역 기준 6:40, 8:18, 12:13, 14:33, 15:33,
  17:18) 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금산사로 가는 5, 5-1번 시내버스(120여 회 운행)를 타고
  금산사에서 전주 79번 버스로 환승하기 바란다.
승용차 (경내 밑에 주차장 있음)
* 호남고속도로 금산사나들목을 나와서 금산사 방면 712번 지방도 성암4거리에서 좌회
  월평4거리에서 좌회전 팥정이4거리에서 좌회전 백오동3거리에서 좌회전
  도리(귀신사입구) 귀신사

* 입장료와 주차비 없음
*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81 (청도640, ☎ 063-548-0917)


 

♠  귀신사 대적광전, 명부전 주변

▲  선방(禪房)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요사(寮舍)

귀신사 경내로 들어서면 흙이 잔잔히 입혀진 뜨락이 펼쳐지면서 바로 정면에 대적광전이 진하
게 모습을 드러낸다. 뜨락 오른쪽에는 요사(선방)가 있고, 왼쪽에는 석탑과 석등의 부재,
돌을 수습한 공간과 영산전이 있으며, 대적광전 좌측에는 명부전과 석수, 3층석탑으로 인도
는 계단이 있다.

요사는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승려의 생활공간이다. 그 북쪽에는 장독대가
식을 숙성시키며 질서정연하게 들어서 있는데 잘익은 김치나 고추장 생각을 참 간절하게 만
. 저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살짝 뚜껑을 열어 속살을 들춰내고 싶다.
그리고 요사 남쪽에는 견공(犬公)의 보금자리가 있는데, 하얀 털의 백구이다. 처음에는 조용
있더니만 그들을 넌지시 바라보니 은근히 멍멍거리며 구박을 준다. 나는 밤손님이나 화마(
火魔)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분 나쁘게 생긴 편도 아닌데 왜 그리 눈치를 주는 걸까? 마음 같
아서는
확 몸보신용으로 때려잡고 싶지만 나는 이곳을 잠깐 스쳐 지나가는 존재라 그냥 눈감
아주었다
. 마침 요사에서 비구니가 나와 그들을 다독거리니 그제서야 꼬랑지를 내리고 눈을
내린다
.

◀  숙성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귀신사 장독대들


▲  귀신사 영산전(靈山殿)

대적광전 우측에 자리한 영산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주심포 양식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
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건물이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그의 1급 제자인 아난존자(阿難尊者)와 가섭존자(迦葉尊者)가 양쪽에 자리
해 있으며, 그 좌우로 각각 8명씩 16명의 나한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각각 1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그들 끝에는 인왕상(仁王像)이 금강역사 못지 않은 위엄 넘치는 포즈로 혹여
문을 두드릴지 모를 악의 기운을 경계한다.


▲  영산전 석가불과 아난/가섭존자

▲  16나한의 우측 나한(羅漢)과 인왕상

▲  16나한의 좌측 나한(羅漢)과 인왕상

    장식용으로 놓인 동그란 석조(石槽)
보름달을 닮은 이쁘장한 석조에는 물이 한가득
담겨져 있다. 절에 왔으면 물 한모금 마셔줘야
되지만 떠마실 바가지도 없고, 수질도 세속화된
종교 마냥 탁해보여 마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여 이곳에선 물을 마시지 못했으니 이런걸 보
고 그림의 떡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  경내 서쪽에 수습된 석탑과 석등 잔재, 건물 주춧돌 무리들

영산전 뜨락에는 석탑과 석등의 잔재, 건물 주춧돌 등이 덩어리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신라 후기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넓은 시대를 아우른 것들로 귀신사의 잃어버린 영화를 잘 보
여주는 유물들이다.
세월의 흐름이 귀신사에게는 꽤나 거칠었는지 숱하게 파괴되고 중창됨을 겪으면서 기존의 많은
건물과 석물들이 가루가 되어 저렇게 암담한 신세가 되었다. 이들 피부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역력하며 깨진 탑재를 모아 한쪽에 엉성하게 석탑을 엮어 놓았다.

▲  길다란 주춧돌에 피어난 1송이 연꽃무늬

▲  우리나라처럼 두 동강이 난 돌덩이
(무엇에 쓰던 물건인고?)

 ◀ 조각난 탑재를 모아서 엮은 소소한 석탑
탑 옥개석에는 중생들이 소망을 담아 심어놓은
조그만 돌탑들이 무럭무럭 뿌리를 내렸다.


▲  귀신사 대적광전(大寂光殿) - 보물 826

귀신사의 법당인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의 거처로 정면 5,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 건물과 그 안에 담겨진 소조비로자나3불좌상은 귀신사의 왜소함
을 능히 커버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값어치가 높다.
경내의 다른 건물과 달리 단청이 입혀져 있지 않아 수수하면서도 좀 이질적인 모습을 보여주
고 있는데 '귀신사 중수기'에 따르면 원래 2층이었다고 하며, 17세기 초에 1층으로 다시 지었
다고 한다. 2층 이상의 불전(佛殿)은 그리 흔치가 않은 것인데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다 수염
을 태워먹던 시절부터 2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귀신사가 결코 예사롭지 않은 절임을 느끼
게 한다.

정면 가운데 칸(어칸)이 좌우 칸보다 조금 넓은 형태로 이는 조선 후기 건축물에서 많이 나오
는 모습이다. 가운데 칸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했고, 나머지는 어칸보다 좀 작게 해서 창문처
럼 한 것이 특징이다. 정면 3칸 문에는 빗살무늬 창호를 달았고 오른쪽과 왼쪽 끝 칸은 벽으
로 만든 것 또한 그만의 특징이다. 기둥 지붕에는 공포 덩어리가 장식되어 있는데 기둥과 기
둥 사이에도 1개씩을 짜놓아 다포(多包) 양식임을 알 수 있으며, 공포도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아 나무의 원초적인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

건물 내부의 가구(架構)는 천정을 높이고자 고주(高柱)의 몸 중간에 보를 꽂아 그 끝이 평주(
平柱) 위에 얹히게 했고, 그 보 위에 다시 보를 얹어 고주 위에 얹혔다. 이는 봉안된 불상이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불상 머리 옆에 보가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는 원래 2
(중층)이었던 것을 1층으로 다시 지을 때 고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1823년과 1934
에 중수를 벌였으며, 2005년 해체/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17세기에는 이 건물과 비슷한 구조의 다포계 맞배지붕 불전이 많이 지어졌는데, 논산 쌍계사(
雙磎寺) 대웅전, 고창 선운사(禪雲寺) 대웅보전, 경주 기림사(祇林寺) 대적광전이 대표적이다.
귀신사 대적광전은 이들보다 규모는 좀 작지만 내부에 고식이 남아있고 전면을 벽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  소조비로자나3존좌상(塑造毘盧舍那尊坐像) - 보물 1516

귀신사에 왔다면 이곳의 꽃이자 꿀단지인 대적광전 내부는 꼭 둘러봐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조그만 불상이겠지 싶어 건물 좌측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으나
내 머릿 속에 그려진 조그만 불상은 온데간데 없고 허벌나게 큰 불상이 하나도 아닌 3개씩이
나 나란히 대좌(臺座)에 앉아 나를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위엄에 제대로 놀라 입이 벌어지더니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는다. 겉으로 보인 귀신사
의 모습이 아무리 초라하다 한들 이들 앞에서는 그런 생각도 보기좋게 36계를 치고 만다.

이들 불상은 흙으로 빚어 도금을 입힌 소조불로 합장인(合掌印) 비슷한 제스쳐의 지권인(智拳
)을 취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한 약사여래(藥師如來)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배치했다. 그들은 건물이 터질 정도로 대단한 위엄을 간직하고 있어 왠
만한 강심장도 뒷걸음을 치게 만드는데 이런 큰 불상이 17~18세기에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이런 큰 불상이 유행처럼 생겨난 것은 억불숭유로 쇠퇴를 걷던 불교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
직하여 나라를 지키자 조정에서는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정책을 다소 바꾸게 된다. 하여 차별
과 탄압을 줄여주었고 주요 요새(남한산성, 북한산성, 무주 적상산성, 부산 금정산성)에 절을
지어 승병들을 배치했다. 또한 왕실과 사대부가 왕실과 집안의 안녕을 위해 시주를 넉넉히 하
면서 많은 불사가 벌어졌는데, 불교 입장에서는 쇠퇴한 불교를 중흥시키는 안성맞춤의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러니 중흥에 대한 자신감이 이런 큰 불상으로 표현된 것이며, 왕실과 사대부의
비위도 맞추고자 왕실의 안녕을 비는 제스쳐도 많이 취했다. 그래서 유난히 조선 후기에는 왕
과 왕비, 세자, 대왕대비의 복을 비는 문구가 많이 등장한다.

웅대한 덩치에 비해 얼굴에는 나름 인자한 표정이 깃들여져 그들에 놀란 중생을 진정시킨다.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며, 무지개처럼 구부러진 눈썹 밑으로 두 눈은 살며시 뜨고 있다.
코는 오똑하게 솟았고, 붉은 입술은 조그만하지만 엷게 미소를 피우고 있다. 입술 주변에는
검은 수염이 칠해져 있고, 볼살은 매우 두툼하다. 양쪽에 달린 두 귀는 중생의 소망을 모두
접수하는 안테나가 되어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허리가 긴 장신형(長身形)으로 품격 높은 불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쥐고 왼쪽 검지 끝을 오른쪽 검지 1째 마디에
뻗은 지권인의 특이한 표현은 명나라 비로자나불에서 많이 나타나는 수인(手印)이라고 한다.
또한 허리가 긴 장신형도 명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라고 하며 이렇게 명나라 양식을 양분으로
하여 조선 후기 불상의 또다른 종류를 이루었다.

이들 불상은 귀신사가 쓰러진 몸을 한참 일으키던 1624년에서 1633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1633년에 작성된 상량문에는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와있으며 자수무경의 기
록에는 1624년에 중건된 것으로 나와 그 사이가 맞을 것이다. 불상 뒤에는 각자 그에게 걸맞
은 후불탱화가 걸려있는데, 이들은 1983년에 주지 유견성(柳見星)이 그린 것이다.

▲  소조비로자나3존좌상의 본존불인
비로자나불

▲  금색 피부의 화려한 문양을 지닌 전패
(殿牌)와 종이학을 담은 유리통

▲  대적광전 신중탱(神衆幀)

▲  대적광전 산신탱(山神幀)

         ◀  대적광전 독성탱(獨聖幀)
대적광전에는 법당의 청정함을 위해 필수로 배
치하는 신중탱을 비롯하여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탱, 독성(나반존자) 할배를 담은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경내에는 아직 산신과 독성을 위한 보금자리가
따로 없다보니 이렇게 법당에서 샛방살이를 하
고 있는 것이다. 그림의 조성시기는 화기(畵記
)가 없어 알 수 없으나 19세기 후반이나 20
기 초반으로 여겨진다.


▲  귀신사 명부전(冥府殿)

대적광전과 요사 뒤쪽에는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
선 후기에 세워져 여러 차례 수리를 했으나 지금의 건물은 근래에 새롭게 지은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비롯해 도명존자(道明尊者)와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
)의 주요 식구들과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봉안되어 있다.

◀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저승의 시왕들


 

♠  귀신사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유물들

▲  귀신사의 옛 중심지였던 북쪽 언덕 (석탑과 석수)

대적광전과 명부전 뒤쪽에는 북쪽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그 계단을 오르면 귀신사
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3층석탑과 석수를 만날 수 있는데 이곳에 왔다면 대적광전 내부와 더
불어 이곳 유물도 꼭 살펴봐야 뒷탈이 없다. 그만큼 이곳에서 중요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전 귀신사의 중심은 바로 이곳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잿더미가 된 귀
신사는 1624년부터 1633년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중창을 벌였는데 그때 새 자리에 중창을 했
. 그 새로운 자리는 현재 대적광전과 명부전이 있는 언덕 남쪽이며, 이전 자리는 바로 이곳
북쪽 언덕이다. 아직까지는 옛터에 이렇다할 학술/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옛터의 자세한
것은 그리 알려진 것은 없으며 석탑과 석수, 사적비 등이 옛터를 지키고 있다. (언덕 북쪽은
대나무가 무성하며, 동쪽은 민가와 경작지가 있음)

옛터 식구의 대표격인 석탑은 화강암으로 다진 4.5m 높이의 조촐한 탑으로 절에서는 창건 당
시인 백제 후기 또는 7세기 중반 탑으로 우기고 있으나 확인 결과 고려 때 탑으로 판명이 났
. 현재 이 땅에 남아있는 삼국시대 탑은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 부여 정림사지(
林寺址) 5층석탑, 경주 분황사(芬皇寺) 석탑 등 3기가 고작이다. (고구려와 부여는 석탑이 아
예 없음)
백제 탑의 상징인 정림사지 5층석탑을 많이 닮은 고려 탑으로 1층 탑신(塔身) 이후 급격하게
줄어드는 체감율은 미륵사지 석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는 유난히 옛 백제
땅인 충남, 전라도 지역에 정림사지 탑을 닮은 백제 탑의 후예가 많이 등장하는데 백제를 그
리워하는 지역 백성들의 마음과 지역 색채가 강했던 고려 석탑, 불상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이 탑은 바닥돌 위에 여러 개의 돌을 맞추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3층 탑신을 올렸다. 탑신
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했고,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처마가 평행을 이루다가 귀퉁이에
서 아주 살짝 들려져 있다. 1층 탑신은 매우 크지만 2층부터 확 줄어드는 모습이며, 탑 꼭대
기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네모난 받침돌인 노반(露盤)이 남아있다.


▲  귀신사 석탑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62


▲  귀신사 석수(石獸)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64

3층석탑 옆에는 석수라 불리는 독특한 모양의 돌조각이 하나 있다. 웅크리고 앉은 사자의 등
짝에 묘하게 생긴 날씬한 돌기둥이 혹처럼 솟아 하늘을 받들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끝부분이
참 낯이 있다. 이 돌기둥은 바로 남근석(男根石)으로 불교의 상징 동물의 하나인 사자(獅子)
와 남근 숭배<또는 성기(性器) 신앙>가 어우러진 아주 기묘한 석물로 이 땅에서는 오로지 이
곳에서만 있는 희소성 100%의 물건이다.

사자상은 머리를 치켜들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오랜 세월의 태클로 좀 헝클어지긴 했지만
알아보는데는 아직 지장은 없다. 그의 등에 곧게 서 있는 남근석은 2단으로 되어있는데, 아랫
부분은 윗부분보다 굵으며 대나무 같이 엷은 마디를 두었다. 그리고 윗부분은 아랫부분보다
굵기가 절반 정도 얇으며, 그 끝부분은 남근의 끝부분과 비슷하게 조각했다.

이 석수는 천하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희귀 석물로 왜 귀신사에 이런 것을 두었는지는 2
지 설이 있다. 하나는 풍수지리상 이곳이 구순혈(狗脣穴)이란 좋지 않은 형상이라 하여 그 터
를 누르고자 세웠다는 것이며, 다른 설은 백제 왕실의 내원사찰(內願寺刹)로 남근을 갖춘 사
자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참고로 남근석을 둔 절은 백제의 내원사찰 뿐이라고 한다. 하여 이
석수를 근거로 귀신사가 백제 후기에 창건되었다는 설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것.
석수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백제나 신라가 아닌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돌사자의 길이는 158cm, 높이 62cm, 남근석은 아랫부분의 높이 72cm, 윗부
분은 40cm이다.

석수란 이름은 돌로 만든 동물상이란 뜻이다. 단순히 남근석만 있다면 남근석이라 부르면 되
겠지만 사자까지 있으니 이들을 어우른 마땅한 이름이 없어 부르기 쉽게 '석수'라 칭한듯 싶
.

▲  귀엽게 앉아있는 석수

▲  석탑 주변에 놓인 옛터의 주춧돌


▲  귀신사 사적비(事蹟碑)
귀신사의 내력을 담은 비석으로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옛터 뒤쪽에는 대나무가
무성해 산바람이 한바탕 지나갈 때마다 사각사각 하모니 소리를 들려준다.

▲  귀신사 앞 해탈교 (귀신사입구 방면)

귀신사의 오랜 보물을 품고 있는 경내 북쪽 언덕을 둘러보고 다시 경내로 내려왔다. 이리하여
귀신사를 다 둘러본 것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그건 함정이다. 아직 못본 것이 하나 있기 때문
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마을 남쪽 경작지 한복판에 홀로 떨어진 승탑(부도)이다.
기왕 여기까지 먼 발걸음을 했으니 다음에 안와도 될 정도로 싹 다 봐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경내 경비실을 찾아 부도의 위치를 물으니 마을 남쪽 경작지에 있다고 그런다. 그래서 이번에
는 마을길 대신 찻길을 통해 해탈교를 건너 전주~금산사 지방도로 나가 남쪽으로 걸어갔다.
경내에서 부도까지는 기껏해야 1리 남짓이며, 경내 북쪽 언덕에서 보이는 범위 안에 들어있다.
게다가 도로에서도 바라보이니 부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만 안다면 찾기는 매우 쉽다.


▲  귀신사 승탑(부도)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63

▲  북쪽에서 바라본 부도

▲  남쪽에서 지켜본 부도

귀신사 부도는 경내에서 0.3km 정도 떨어진 마을 서남쪽 경작지 한복판에 고적하게 자리해 있
.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탑신과 지붕돌은 팔각을 취하고 있으며, 누구의 넋이 서린 승탑(
僧塔)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만 경내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왕년의 귀신사가 이곳
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는 유물로 우리가 옛 조선과 고구려, 백제, 발해의 옛 땅과 영광을 생각
하듯 귀신사 승려들도 이 부도와 옛터를 통해 귀신사의 영광을 뼈저리게 생각할 것이다.

부도의 높이는 2.5m로 기단부와 탑신, 머리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비례가 별로 맞지가
않고 모습도 소박하다. 기둥처럼 길쭉한 기단 가운데 받침돌은 여러 겹의 연꽃을 두른 윗받침
돌을 받치고 있고, 그 위에 탑신의 몸돌과 귀퉁이가 치켜 올려진 지붕돌을 얹혔다. 그리고 그
위를 동그란 공 모양의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여기서 절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면 귀신사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오며 적어도 부도까지가 귀
신사의 영역이었으니 청도리 마을 상당수는 절의 영역이 된다. 그렇게나 잘 나가던 귀신사가
쇠퇴하면서 경내 중심을 제외한 부분이 모두 속세로 떨어져 나가 청도리 마을을 이루게 된 것
이다.

부도를 끝으로 귀신사 관람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서울로 갈 때는 전주가 아닌 김제(金堤)
를 거쳐가고 싶은데 이곳이 김제 땅임에도 김제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가뭄에 콩 나듯 다니고
오히려 전주시내버스가 더 많이 다닌다.
하여 별로 기대하지 않고 청도리 정류장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김제로 나가는 시간을 물어보니
왠걸 15분 뒤에 버스가 있다고 그런다. 내가 운과 복이 참 지지리도 없는 인간인데 이때만큼
은 용케도 운이 좀 맞아 떨어졌다. 평소에도 그렇게 운이 좀 맞으면 얼마나 좋을꼬? 차 시간
이야 안맞으면 전주로 나가면 그만이 아니던가?

정류장에 들어가 15분의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김제시내버스 5번이 슬그머니 들어온다.
이 버스는 청도리 마을회관 앞에서 잠시 바퀴를 접고 쉬다가 출발시간이 되면 외마디 부릉소
리를 남기고 김제로 나간다.
시내로 갈 때는 금산사를 거쳐서 가는데 폭주하는 전주버스와 달리 김제버스는 너무 기어가서
김제역까지 금산사와 원평 대기시간을 포함하여 45분 정도 걸렸다. 그렇게 지루하게 달려 도
착한 김제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열차에 고된 몸을 싣고 도돌이표처럼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귀신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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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늘씬한 숲길과 많은 보물을 간직한 고색의 절집, 정릉 경국사

 


' 석가탄신일 기념 절 나들이 ~ 정릉 경국사(慶國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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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국사 숲길


올해도 변치않고 찾아온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을 맞이하여 설레는 마음을 다독
이며 순례(巡禮)를 가장한 초파일 절 나들이에 나섰다.
우선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미답(未踏)의 절을 하나라도 지우고자 수유리에 있는 본원정사(本
願精舍, ☞ 관련글 보러가기)를 둘러보고 맛있는 점심 공양으로 배를 두둑히 충전한 다음 정릉
동(貞陵洞)에 있는 경국사로 발길을 향했다.

본원정사에서 경국사까지는 10리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임에도 차편이 시원치가 못하다. 그래서
절 인근에서 바퀴를 돌리는 강북구 마을버스 02번(본원정사↔수유역)을 타고 일단 화계사(華溪
寺)로 나왔다. 화계사는 봉은사(奉恩寺)와 조계사(曹溪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와
더불어 서울 굴지의 사찰이라 폭풍처럼 몰려드는 사람과 수레로 그야말로 대혼돈이었다.
수레들로 완전 마비가 된 화계사입구(한신대)4거리를 간신히 뚫고 화계사종점으로 이동해 서울
시내버스 152번(화계사↔경인교대,삼막사4거리)을 타고 길음역에서 143번 시내버스(정릉↔개포
동)로 환승하여 경국사(정릉4동 주민센터)에 두발을 내린다
(152번을 타고 삼각산동SK아파트 반대편 정류장에서 1166번으로 환승하면 바로 정릉4동으로 넘
어갈 수 있으나 배차간격이 20~30분임;;)

버스에서 내려 북쪽(북한산 방면)을 바라보면 경국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지시에 따
라 왼쪽 길로 들어서면 정릉천에 걸린 극락교가 나오는데, 그 다리를 건너면 조그만 주차장과
함께 일주문이 모습을 비춘다. 앞서 둘러본 본원정사는 초파일 대목이라 사람들이 무지 많았는
데, 경국사는 오늘이 초파일인지 물음표를 던질 정도로 한산했다.


▲  속세와 경국사를 이어주는 유일한 다리 극락교(極樂橋)

▲  경국사와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정릉천(貞陵川)

북한산 정릉계곡에서 발원해 큰 세상으로 흘러가는 정릉천은 가뭄의 갈증에 신음하고 있다. 하
천의 물은 누가 죄다 마셨는지 온데간데 없고 돌과 모래만이 가득해 속세처럼 황량하기만 하다.
무게가 아리송한 번뇌를 정릉천에 쿨하게 내던지고 싶은데 액체는 커녕 고체만 보이고 있으니
아무리 던져봐야 소용도 없을 것 같다, (물론 던져도 마찬가지)


♠  경국사 숲길에서 번뇌를 훌훌 털다

▲  경국사 일주문(一柱門)

극락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향하면 바로 눈앞에 경국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한다. 문이 바로
코앞에서 나를 뚫어지라 굽어보니 안그래도 큰 문이 더욱 장대하게 보여 단단히 주눅을 들게 만
든다. 돌로 만든 굵직한 기둥에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섬세하게 새겨
져 있어 문의 위엄을 더욱
돋구고 있으며, 지붕 밑에는 '삼각산 경국사'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
어 이곳의 정체를 밝힌다.

  극락교 가설기념비(架設記念碑)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있다.


▲  경국사의 싱그러운 보물, 경국사 숲길

일주문을 들어서면 산내음이 진동하는 푸른 숲길이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경국사의 첫
이미지를 긍정으로 인도하고 속세에서 오염된 안구에 한줄기 감동을 선사하는 이 숲길은 이곳의
자랑이자 싱그러운 보물로 비록 거리는 짧으나 서울에 있는 숲길 중의 갑(甲)으로 쳐주고 싶다.
이 숲길은 300년 묵은 소나무까지 100m 정도 곧게 펼쳐져 있고 거기서 서쪽으로 100도 정도 꺾
여 경내로 이어진다. 숲길의 길바닥은 다행히 콘크리트로 밀지 않고 박석(薄石)을 깔아 숲길의
운치를 전혀 해치지 않았다. (흙길이었으면 더 좋으련만..)

숲길에 들어서니 속세(俗世)에서 오염되고 피로감에 찌든 두 눈이 싹 정화되면서 단단히 호강을
누린다. 하늘로 늘씬하게 솟아 하늘과 해를 가린 나무들이 저마다의 빼어난 자태를 뽐내며 앞다
투어 갖은 청정한 기운을 베푸니 머리와 마음마저 어느 정도 정리되는 것 같다. 경국사가 경내
를 앞에 두고 이런 멋드러진 숲길을 내민 것은 극락교와 일주문에서도 살아남은 번뇌와 속세의
기운을 자연의 힘에 의지해 모두 털고 경내에 임하라는 뜻이다.

▲  정처가 없는 내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 경국사 숲길
집으로 몰래 가져와 나 혼자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숲길이다. 허나 조물주가 아닌 이상
그건 불가능하니 사진으로 대신 품으련다. 이 숲길은 봄도 아름답지만 나무들이
처절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늦가을이 단연 백미(白眉)이다.


▲  300년 묵은 소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11호

숲길이 서쪽으로 100도 구부러지는 곳에 숲길의 최고 고참인 소나무가 있다. 나이가 무려 300년
이 넘었다는 오래된 나무로 몸매도 매우 준수하여 키가 무려 20m를 넘는다. 제아무리 잘난 인간
이나 4발 수레도 그의 앞에서는 거의 개미에 불과하다.

하늘을 떠받들며 숲길을 다스리는 이 나무는 매우 지극한 나이임에도 그 흔한 보호수 등급이 아
닌 겨우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등급에 머물러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편
의상 지정하는 등급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 싶겠지만 서울에서는 100~150년이 넘는 나무 가운데
지방기념물 이상의 지위를 가지지 못한 나무들은 거의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300년
이면 100% 보호수로 지정되고도 남을 연세인데 그에 상응하는 적당한 등급을 매겨야 되지 않을
까 싶다. 소나무 앞에는 수레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다.


♠  경국사를 빛낸 큰 승려의 승탑을 만나다

▲  승탑(僧塔)과 탑비들의 보금자리

소나무 북쪽에는 승탑 2기와 비석(碑石) 3기로 이루어진 너른 공간이 있다. 다들 고색의 때가
얇은 존재로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지나치기 쉽다. 허나 이들 승탑은 우리나라 현
대 불교 발전에 크게 빛을 선사한 승려 2명의 사리탑으로 경국사에서도 매우 비중이 큰 인물들
이다. 그러니 한번 더듬고 가길 권한다.
비석 가운데 가장 왼쪽에 있는 큰 존재가 경국사의 오랜 내력이 담긴 사적비(事蹟碑)로 1995년
에 지관이 만든 것이다.


▲  자운대율사 계주원명사리탑(戒珠圓明舍利塔)

모난 넓은 기단 위에 마치 범종(梵鍾)이 그대로 돌로 굳어버린 듯한 모습의 석종형 승탑은 자
운대율사(慈雲大律師, 1911~1992)의 사리탑으로 탑 이름은 계주원명사리탑이다.

자운대율사는 왜정(倭政) 이후 계율을 무시하고 아내를 맞이해 가정을 꾸리며, 심지어 고기까지
먹는 등, 불교가 타락의 끝으로 추락하는 모습에 크게 발끈하여 불교 중흥과 율풍(律風) 진작에
팔을 걷어부쳤다.
그는 1940년부터 서울 도심에 있는 대각사(大覺寺)에 머물며 율장과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매
일 도시락을 싸들며 국립중앙도서관을 들락거렸다. 그래서 만속장경(卍續藏經)에 수록된 오부율
장(五部律藏)과 그 주소(註疏)를 모두 필사해 연구했으며, 1948년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처
음으로 보살계(菩薩戒) 수계법회를 열었다.

1949년에는 천화율원 감로계단(千華律院 甘露戒壇)을 설치해 대각사에서 범망경(梵網經), 사미
율의(沙彌律儀), 사미니율의(沙彌尼律儀), 비구계본(比丘戒本) 등의 간행을 준비했으나 6.25전
쟁으로 모두 분실하고 만다. 허나 이에 굴하지 않고 부산에서 다시 율문(律文)을 준비하여 한문
본(漢文本) 25,000권을 포함해 총 48,000권을 간행해 불교의 법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1981년부터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에 추대되어 1991년까지 많은 승려에게 계를
주었으며, 1992년 2월 7일 해인사(海印寺)의 부속암자인 홍제암(弘濟庵)에서 바쁘게 살아온 삶
을 마무리 지었다.
자운이 세상을 뜨자 그와 인연이 있던 경국사에서 그의 승탑을 만들었는데, 2년 동안 공을 들여
2005년에 완성을 보았다. 승탑은 그의 명성과 업적에 걸맞도록 특별하게 계단형(戒壇形)으로 만
들어 두고두고 그의 업적을 기린다.

자운대율사 사리탑 뒤쪽에 자리한 고운 맵시의 승탑은 보경보현대종사(寶鏡普賢大宗師)의 사리
탑으로 정토사지(淨土寺址)에 있던 고려시대 승탑인 홍법국사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승탑 바로 옆에 자리한 보경의 행적비는 1991년 지관이 찬(撰)을 하고
세운 것으로 그의 일대기가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보경은 1916년 이곳 주지가 되어 60여 년 동안 경국사를 꾸린 인물로 교학(敎學)과 선지(禪智)
를 두루 익혔고, 계율에도 무지 철저해 승가의 귀감이 되었다. 특히 불화(佛畵)를 잘 그려 화승
(畵僧)으로도 널리 활동을 했는데, 경국사의 불화 상당수는 그의 손길에서 탄생한 것이다.


▲  펼쳐진 책 모양의 불교대사림(佛敎大辭林) 편찬발원문

불교대사림(불교대사전)은 지관이 오랫동안 추진한 편찬 사업으로 10여 권을 편찬했다. 이 발원
문은 지관이 정성을 들여 작성한 것인데, 그 내용에서 그의 지성이 제대로 우러나온다.


▲  경국사 샘터
자연이 내린 샘물의 보금자리로 깊이가 좀 있어서 바가지를 들고 한참 팔을
뻗어야 물에 닿는다. 샘터 위에는 광배(光背)를 갖춘 조그만 석불입상 3개가
있고, 그 뒤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 쓰인 표석 3개가 나란히 자리한다.

▲  경내로 인도하는 오르막 숲길 (샘터 주변)

◀  보리수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12호
 (나무 너머로 보이는 건물은 관음성전)

주차장에서 서쪽으로 휘어진 오르막길을 오르면
숲속에 숨겨진 경국사가 모습을 비춘다.
경내 앞에는 넓은 공터가 펼쳐져 있는데, 초파
일 행사가 막 끝났는지 천막과 의자로 어수선하
다. 공양밥도 바로 여기서 제공했는데, 본원정
사에서 공양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지
만 다시 시장기가 밀려와 공양 여부를 물어보니
벌써 마감되었다고 그런다.

이곳에는 3갈래로 솟은 커다란 나무가 있는데,
그는 불교에서 매우 중요시 여기는 보리수나무
이다. 나이는 200년에 이른다고 하며, 앞에 소
나무처럼 보호수 등급도 아닌 성북구의 아름다
운 나무 등급에 머물러 있다. 서울에 거의 흔치
않은 오래된 보리수인데도 말이다.


♠  경국사 관음성전(觀音聖殿)

▲  관음성전의 정면
담장 너머 윗쪽이 관음성전, 천막이 있는 밑쪽이 공양간이다.


▲  관음성전의 뒷모습

보리수나무 뜨락에서 관음성전 좌우로 나있는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경내에 이르는데, 가장 먼
저 중생을 반기는 건물은 보리수나무를 바라보고 선 관음성전이다. 이 건물은 흔히 말하는 관음
전(觀音殿)으로 이 절은 유난히 '聖'과 '寶' 돌림을 좋아하는지, 그 글자가 첨가된 건물이 많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관음성전은 옛 무량수각(無量壽閣) 자리에 2000년대에 새로 지은 'ㄷ'모양
의 건물로 관음보살의 거처이다. 건물이 워낙 넓어 큰방이라 불리기도 하며, 법회와 강의 장소
로 쓰이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밑에는 넓게 자리를 파고 공양간으로 삼으면서 졸지에 2층이 되
버렸다.

관음성전 정면에는 불당에서 흔치 않은 툇마루가 있어 두 다리를 잠시 쉬어갈 수 있으며, 연병
장처럼 넓은 건물 안에는 목관음보살좌상과 아미타후불탱, 감로도 등의 여러 탱화를 비롯해 중
생들의 시주로 만들어진 무수한 원불(願佛)이 일제히 금빛 물결을 이루며 내부를 장엄한다. 또
한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이 쓴 '화엄회(華嚴會)', '법화회(法華會)' 현판과 이
승만이 쓴 '경국사' 현판이 걸려있다.


▲  관음성전의 중심부

▲  경국사 목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48호

관음성전 불단에는 이 건물의 주인인 관음보살좌상이 자리해 있다. 어린 동자승이 관음보살 누
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의 보관(寶冠)과 복장, 장식물을 슬쩍 착용한 것일까? 아니면
잠시 관음보살 체험을 하는 것일까?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해맑고 천진난만하다. 게다가 덩치도
쥐방울만하니 귀여움도 가득 묻어나 나도 모르게 쓱쓱 쓰다듬고 싶다.

이 불상은 원래 경국사 것이 아니었다. 1703년 전남 영암 도갑사(道岬寺)에서 조성된 것으로 도
갑사의 부속암자인 견성암(見性庵)에 있었다. 청신(淸信)이 화주가 되어 만든 것으로 어찌어찌
하여 서울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는데, 자세한 사연은 모르겠다. 덕분에 경국사의 오랜 문화유
산이 하나 더 늘었으니 경국사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지, 그가 경국사에 들어온 이후에는 한동안
극락보전 우측에 있던 것을 관음성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상의 높이는 60cm에 조그만 크기로 그의 뱃속에서 발견된 발원문(發願文)에 따르면 색난(色難
)을 수조각승(首彫刻僧), 순경(順瓊)을 부조각승으로 하여 행원(幸垣), 대원(碓遠), 일기(一機),
대유(大裕) 등이 같이 조성했다고 한다. 색난은 조선 후기에 호남지역에서 활약한 불상 전문 승
려이다.

앳된 표정이 묻어난 얼굴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으며, 눈은 살
짝 뜨고 있는 것 같다. 코는 끝이 오똑하고,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며, 머리에는 화려하면서 신
라 금관(金冠)처럼 무거워 보이는 보관을 썼는데, 귀 옆까지 관대자락이 내려와 보관의 수려함
을 더욱 드높인다. 그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삐죽 나와있는데, 이마 중간에는 백호가
찍혀 있으며, 볼살은 두툼하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신체는 그런데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작은 어깨에는 법의(法衣)가 걸쳐져 있는데, 목 뒷부분
이 약간 접혀있고, 법의의 왼쪽은 어깨를 완전히 가리고 어깨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면서 무릎 위
에 놓인 왼손을 손목부분까지 완전히 덮고 있다. 그리고 법의 오른쪽은 어깨를 덮은 뒤 오른쪽
팔꿈치 아래로 하여 배 부근으로 내려가 왼쪽에서 내려온 법의 안쪽으로 여며진 모습이다. 이런
착의법은 넓게 트인 가슴과 수평 혹은 연꽃형의 군의 표현과 함께 조선 후기 불상의 가장 전형
적인 모습이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고 첫째 손가락과 3째 손가락을 마주잡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에 대고 그
의 필수품인 정병(政柄)을 살짝 쥐고 있다. 앉은 폼은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오른쪽 발이 훤히
드러나 있으며, 무릎 앞쪽으로는 옷자락이 물결치듯이 좌우로 유려하게 흘러내렸다.

조선 후기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잘 드러낸 불상으로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혔으며, 그의 뒤에
는 아미타불이 중심이 된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한 후광이 되어준다. 이 후불탱은 1924년에 보경
이 그린 것이다.


▲  경국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1호

관음성전 우측 벽에는 고색의 기운이 제법 넘치는 매우 복잡한 그림이 하나 있다. 이 그림은 죽
은 이의 극락왕생을 염원하고자 만든 감로도로 19세기 중/후반에 서울,경기 지역에서 크게 유행
한 감로왕도(甘露王圖)의 하나이다.
그림을 보면 밑부분은 극락왕생을 못해 방황하는 영가(靈駕, 죽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중간
에는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있다. 그리고 가장 윗쪽에는 극락으로 들어간 영가의 환
희가 담겨져 있다.

무수히 많은 인물의 표현과 생동감있는 자세 연출로 조금의 공백도 허용치 않고 알차게 채우고
있으며, 서울,경기와 강원도에서 활동했던 화승(畵僧)인 축연과 철유가 상궁(尙宮)들의 시주로
1887년경에 그린 것으로 왕실의 불화 발원 사례를 잘 보여준다. 조선이 비록 대내외적으로는 불
교를 배척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적지 않게 불교를 옆구리에 낀 것이다. 특히 19세기부터 1910년
이전까지 상궁은 물론 왕비와 후궁의 시주로 그려진 불화가 서울과 경기도 사찰에 상당히 존재
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경국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자칫하면 그냥 넘어갈 뻔 했다.

★ 정릉의 원찰이자 현대 불교의 큰 승려들이 주석했던 북한산 경국사(慶國寺)
북한산(삼각산)의 제일 남쪽, 정릉천을 낀 숲속에 둥지를 튼 경국사는 1325년(고려 충숙왕 12년
)에 자정율사(慈淨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절 위치가 북한산 청봉(靑峰) 밑이라 절 이
름을 청암사(靑岩寺)라 했으며, 1330년 무기(無奇)가 이곳에 머물러 천태종(天台宗)의 교풍을
크게 떨치고, 1331년에는 채홍철(蔡洪哲, 1262~1340)이 절을 증축해 승려들의 수행을 도왔다고
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공식적인 기록이나 유물이 없어 신빙성은 떨어지며, 명부전에 있는 요나라에
서 넘어왔다는 철조관음보살좌상이 경내의 유일한 고려 때 유물이다. 하지만 고려 때는 절이 우
후죽순 들어서던 시기라 그 시류를 타고 고려 후기에 문을 열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서서히 기울다가 결국 중종(中宗) 시절에 풍비
박산이 나고 터만 남았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545년(인종 원년) 왕실의 도움으로 쓰러진 절을
일으켜 세웠고, 1546년에는 조선의 여제(女帝)로 악명을 날린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지원에 힘
입어 크게 중창을 벌였다. 이때 문정왕후에 잘보이고자 부처의 가호로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을
기원하는 뜻에서 경국사(慶國寺)로 이름을 갈았다고 한다.

1669년(현종 10년) 오랫동안 잊혀지고 철저히 파괴된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
씨의 능인 정릉(貞陵)이 복원되자 근처에 있던 봉국사(奉國寺, 국민대 근처)와 흥천사(興天寺,
관련글 보러가기)와 함께 정릉을 지키는 원찰이 되었다. 이때 경국사로 이름을 갈았을 가능
성도 있다. 어쨌든 정릉의 원찰(願刹)이 되어 망할 일은 없게 된 경국사는 이후 탄탄대로를 누
비게 된다.

1698년 연화승성(蓮華昇城)이 절을 중수하고 천태성전(天台聖殿)을 세웠다. 천태성전은 독성각
의 다른 이름으로 당시의 상량문이 남아있다. 1737년에는 낙암의눌(洛巖義訥)이 주지로 부임하
여 절을 손질했고, 1793년에는 천봉태흘(天峰泰屹)이 크게 중수했다.
1855년에는 예봉평신(禮峰平信)이 법당을 다시 세웠고, 1864년에는 고종(高宗)의 즉위를 축하하
는 재를 열어 왕실에 더욱 굽신거렸다. 그리고 1868년에 칠성각과 산신각을 새로 짓고 호국대법
회를 열었는데 이때 왕실에서 범종(梵鍾)을 하사했다. 1870년에는 큰방을 수리했다.

1878년에는 함홍치능(涵弘致能)이 고종의 지원으로 요사를 중수하고, 철종의 왕비인 철인왕후(
哲仁王后) 김씨의 49재를 지냈으며, 1887년에는 석찬(碩讚) 등이 팔상도(八相圖)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현왕도, 감로도 등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어둠의 시절에는 기송석찰(其松錫察)이 1914년에 극락보전을 다시 세웠고, 1917년 정릉천에 반
야교를 놓았다. 1921년부터는 그 유명한 보경(寶鏡)이 주지로 머물면서 절을 크게 일으켜 세웠
는데, 그는 직접 건물에 단청을 입히고 큰방에 아미타후불탱과 구품탱 등을 그렸으며, 1930년에
는 영산전과 산신각, 큰방을 중수하고, 1936년에는 영산전에 석가모니후불탱과 신중탱, 18나한
탱 4폭, 범종을 조성했다. 그리고 1939년에는 삼성보전에 약사탱, 칠성탱을 봉안했다.

6.25전쟁 이후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이 이곳에 들렸는데, 보경의 인격에 크게 감동을 먹어 참다
운 승가(僧伽)의 모범이 이곳에 있다면서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 인연으로 경국사의 단골이
되어 여러 차례 보경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1953년 11월 닉슨 미국 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
하자 이승만이 한국문화의 참모습이 경국사에 있으니 한번 가자며 그를 끌고 오기도 했다. 이때
닉슨은 경국사에서 참배했던 경험이 한국 방문 일정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밝히며 경국사
를 단단히 추켜세우기도 했다.

보경이 사라진 이후, 현대의 큰 승려로 일컬어지는 지관(智冠)이 주지로 머물면서 관음전과 삼
성보전, 영산전, 산신각, 환희당 등 대부분의 건물을 중수해 경국사를 더욱 반석 위에 올렸다.
또한 1989년에는 극락보전을 크게 넓혔으며, 1991년에 보경의 행적비를 세웠다. 이후 사적비를
세우고, 삼성보전과 관음성전을 새로 만들었으며, 자운의 부도인 계주원명사리탑을 세웠다.
최근에는 2012년 1월 지관이 입적하면서 그의 사리를 공개했는데, 이때 많은 중생이 몰려와 그
를 애도하며 사리를 친견했다.

북한산(삼각산)에 안겨있다고는 하지만 거의 주택가에 둘러싸인 형태로 다행히 절 주변이 수목
들로 삼삼해 심산유곡의 산사에 파묻힌 기분이다. 또한 정릉천이 바로 앞에 흘러 속세와 적당히
경계를 이루며, 도심 속의 조그만 오아시스처럼 포근하고 그윽하기만 하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다. 그때는 학생이라 그런지 수상한 짓도 안했음에
도 승려가 나가라고 성을 냈다. 당시의 기억 때문에 경국사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는데, 그래도
뭔가 끌렸는지 이듬해 초파일에 다시 찾은 적이 있다. 허나 또 쓸데없는 잔소리를 들을까 겁이
나 관음성전 앞에서 발길을 돌렸고, 이후 2004년 초파일에 다시 찾아 경내를 둘러보았다. 그때
까지만해도 일주문 앞에 외지인은 들어오지 말라는 차가운 푯말이 있었다.
수행도량의 명성을 누리는 것은 좋으나 대신 외지인에게는 배타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이
유명한 곳도 아니고 관광지도 아니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허나 그런 경국사도 지정문화유산
이 늘어나고 점차 이름이 드러나 답사객의 발길이 조금씩 늘면서 외지인에 대한 배타적인 마음
도 조금은 허물어진 듯 싶다.

청정한 승가의 본가임을 자처하는 이곳에는 극락보전과 관음성전, 삼성보전, 무우정사, 명부전,
영산전, 산신각 등 10여 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을 비롯해 팔상도(八相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2호), 괘불도(
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4호)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다. (괘불도와 팔상도는
관람이 어려움) 그외에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철조관음보살좌상과 보경이 그린 여러 불
화 등이 전한다.
건물들은 죄다 근래에 새로 손질하여 고색의 멋은 없지만 그 속에는 많은 문화유산들이 고색의
기운을 피우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해준다.

※ 경국사 찾아가기 (2013년 5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길음역(3번 출구)에서 110, 143번 시내버스나 성북06번 마을버스를 타고 경국사
  (정릉4동주민센터) 하차, 성북06번은 크게 돌아간다.
*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62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과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1020번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3동 753 (☎ 02-914-5447)


♠  경국사 극락보전(極樂寶殿) 주변

▲  경국사 극락보전

경국사의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관음성전의 뒷통수를
바라보고 있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이 건물은 뜨락보다 한 3m 높은 기단(基壇) 위에 자리해 있
어 자못 웅대해 보이는데, 198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증축한 것이며, 한때는 건물 앞쪽에 1칸
정도 보태어 공간을 넓혔으나 나중에 철거했다.

법당 앞에는 으례 있어야 될 석탑이나 석등은 없고, 그냥 빈 뜨락만 있으며, 그 좌우로 명부전
과 종무소, 삼성보전 등이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  화려하게 속살을 비춘 극락보전 불단과 닫집
극락보전 속에 또다른 건물인 닫집(불단 위에 떠 있는 붉은 피부의 장식물)에는 하늘을
나는 극락조와 공작, 백학과 여의주를 문 2마리의 용, 그리고 연꽃봉오리가 조각되어
극락세계를 장엄하게 재현한다. 저런 극락이라면 한번은 가볼만하지 않겠는가?

▲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 보물 748호

극락보전 불단에는 눈을 매우 부담스럽게 만드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하 목각탱)과 조그만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아미타3존불은 근래에 만든 거지만 그 뒤에 든든하게 자리한 목
각탱은 경국사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며 자랑하는 이곳의 제일 가는 보물이자 이곳 최초의 지
정문화재로 서울에 거의 유일한 조선 후기 후불목각탱이다.

이 목각탱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색을 입힌 것으로 겉으로 보면 꽤 복잡해 보이지만 잘 살펴보면
구조는 단순하다. 탱화 중앙에는 극락전의 주인인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가 두손을 무릎에 댄
이른바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있는데, 앙련(仰蓮)이 새겨진 여러 층으로 된 대좌(臺座)에 앉
아있다. 그런데 탱화의 주인공임에도 그를 둘러싼 인물들보다 덩치가 작아 귀여운 인상을 풍긴
다. 그래도 그들과 달리 주형광배(舟形光背)를 달아주어 그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고, 광배의
위,아래가 비슷한 폭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양식이다. 또한 광배 안에는 연꽃을 새기
고 일정한 너비의 주연(周緣), 밖으로는 화염(火焰) 무늬를 생겼는데, 그 무늬는 위로 솟구치고
있고, 그 안쪽에 조그만 불상이 4구 정도 있다. (눈에 잘 띄지는 않음)
 
아미타여래의 옷무늬는 통식(通式)으로 조선시대 양식이며, 그의 좌우에는 아미타8대보살을 각
각 4명씩 배치했다. 그들 가운데 지장보살을 제외히고 모두 가지각색의 보관(寶冠)을 쓰고 연꽃
을 들고 있으며, 앙련 위에 앉아있다. 그 밑의 좌우 끝에는 사천왕(四天王)의 하나인 증장천왕
(增長天王)과 지국천왕(持國天王)을 배치해 아미타불의 호위를 부탁했고, 보살들 바깥 좌우에는
나한상(羅漢像) 1구씩 두었다.

탱화의 양식으로 보아 18세기 중반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몇 안되는 조선 후기 목각
탱화이자 서울에 거의 유일한 고색의 목각탱화로 그 가치는 대단하다.


▲  경국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3호

극락보전 좌측 벽에는 호법신장(護法神將)들이 빼곡히 그려진 신중도가 자리해 있다. 이 그림은
1887년 상궁들의 시주로 혜산 축연(惠山 竺演) 등이 조성한 것으로 중앙에는 동진보살(童眞菩薩
)과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이 있고, 그 좌우에 명왕(明王)와 신장(神將) 등이 배치되어 있
다. 이들은 인도의 토속신으로 범천은 무려 힌두교의 창조신인데, 불교에서 이들을 모두 영입해
부처의 세계를 지키는 신장으로 꾸몄다. 특이한 것은 산신(山神)과 조왕신(竈王神) 등 우리나라
의 토속신이 위태천(韋太天)의 협시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극락보전을 서성이고 있으니 마침 아줌마 보살이 부처에게 봉양한 길쭉한 떡을 가져와 중생들에
게 나눠준다. 나도 하나 먹었는데, 부처를 거쳐서 온 떡이라 그런지 맛이 좀 다른 거 같다.


▲  삼성보전(三聖寶殿)과 범종각이 하나가 된 현장

극락보전 좌측에는 삼성보전과 범종을 비롯한 사물(四物)을 담은 범종각이 하나가 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삼성보전은 산신과 독성, 칠성을 봉안한 삼성각(三聖閣)의 다른 명칭으로 생각했다. 허나 이곳
은 전혀 엉뚱하게도 약사여래(藥師如來)을 중심으로 미륵불(彌勒佛), 치성광여래(칠성)를 협시
로 배치한 약사3존불을 봉안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명부전 뒤에 산신각과 천태성전을 두면서
산신과 독성을 그곳으로 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빈 자리에 약사여래와 미륵불을 배치했고 따
로 거처가 없는 칠성(七星)만 이곳에 두어 약사여래의 협시로 삼았다.

하얀 피부의 약사3존불 뒤와 좌우에는 1939년에 보경이 그린 약사회탱과 칠성탱, 미륵탱이 뒤를
받쳐준다.

▲  삼성보전 내부 (가운데가 약사회탱,
왼쪽이 미륵탱, 오른쪽이 칠성탱)

▲  관음성전 북쪽에 자리한 종무소 겸
요사(寮舍)


▲  극락보전 뜨락에 마련된 관불(灌佛) 의식의 현장

관불 현장에는 곱게 차려입은 아줌마 신도가 자리를 지키며 의식을 도와주기 마련인데, 여기는
셀프서비스인 모양이다. 각자 알아서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아기부처에게 부어주면 된다.
1년 만에 외출을 나와 한참 초파일 환희(歡喜)에 잠긴 그도 저물어가는 해가 무척 아쉬울 것이
다. 오늘이 가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로 들어가 1년을 갇혀야 되니 말이다.


♠  경국사 명부전, 영산전 주변

▲  북쪽을 바라보는 명부전(冥府殿)

극락보전 우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조촐한 건물 내부
에는 죽은 이의 극락왕생을 위해 헌신하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하여 시왕(十王)과 판관 등 명부(
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지장시왕도와 사자탱, 시왕탱 등이 걸려있고.

좌측에는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의 철조관음보살좌상이 있다.


▲  명부전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과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60호

푸른 머리의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서 있다.
이들은 보경이 흙으로 직접 빚어서 만든 것으로 그들 뒤에 든든하게 자리한 그림이 지방문화재
로 지정된 지장시왕도이다.
이 그림은 1870년에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 있는 지장시왕도를 참고 삼아
혜산 축연(惠山 竺
演)이 그린 것이다. 혜산은 구한말에 강원도와 서울,경기에서 활동하던 화승으로 서울에는 흥천
사와 경국사를 비롯해 그의 불화 20여 점이 전한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수화사(首畵師)로
활동하면서 불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그림을 보면 선악동자를 함께 그린 전형적인 지장시왕도 형식으로 유난히 가늘고 긴 눈과 아주
작은 입 등 얼굴 한 가운데로 몰려있는 이목구비, 좁은 미간, 눈 주위와 코/뺨 부분에 음영을
표현해 얼굴의 골격을 강조한 점은 다른 지역의 불화와 구별되는 서울,경기 지역 조선 후기 불
화의 특징이다.


▲  명부전 우측의 시왕상과 시왕탱

▲  명부전 좌측의 시왕상과 시왕탱, 철조관음보살좌상

지장보살상 불단 좌우에는 죽은 이를 심판하는 저승의 10왕이 각각 5왕씩 앉아있다. 복장은 다
비슷하지만 손짓이나 얼굴,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서로 다르다. 그들 뒤에는 시왕탱이 있는데,
역시 1왕당 1폭씩 배치하여 총 10폭을 이룬다.

명부전 좌측 벽에는 앉아있는 모습의 커다란 철불(鐵佛)이 있는데, 여기서는 철조관음보살좌상
이라 불린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1세기에 거란족의 나라인 요(遼)나라에서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요나라의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는 않으나 고려와 조선의 불상과는 확연히 차
이를 보이고 있어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것은 확실하며, 언제 무슨 일로 여기까지 들어왔는지는
자세한 사연이 없어 모르겠다.
 
의자에 사람처럼 앉아있는 이 불상은 성인 남자 키 정도 되는데, 얼굴은 그냥 무표정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는데, 손가락에는 특이하게 반지가 끼여져 있다. 적의
(翟衣) 형태의 옷에는 용과 새, 사자 등이 새겨져 있고 보관에는 모란꽃무늬를 매우 정교하게
나타냈다. 그리고 정병(政柄)까지 새겨져 있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로 여겨지나 정병은 근래
에 손질한 것이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허나 경국사에서는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시
절부터 관음보살로 받들고 있어 한때 관음전에 있기도 했으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임에
도 아직까지 지정문화재 등급을 얻지 못하고 있다.


▲  가운데 문을 열어둔 경국사 영산전(靈山殿)

명부전에서 서쪽으로 난 계단길을 오르면 부처와 그의 열성제자 나한들의 공간인 영산전이 모습
을 비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말에 지어진 것을 1930년에 보경이 중
수했다. 어칸 위에 달린 영산전 현판은 해강 김규진이 쓴 것으로 필체가 무척 돋보인다.


▲  영산전 석가3존불과 석가모니후불탱

현란한 보관의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거느린 석가불의 표정이 후덕해 보
인다. 이들 3존불은 보경이 흙으로 직접 빚어서 도금을 입힌 것으로 뒤에 있는 석가모니후불탱
은 1935년에 그가 그린 것이다. 주지승이 직접 불상을 만들고 불화를 그리는 경우는 흔치 않은
데 그림과 조형에 능한 보경이 주지로 있으면서 불상을 조성하고 그림까지 그리니 제작 비용은
크게 절약되었을 것이다.

▲  영산전 18나한상과 18나한탱. 신중도

▲  영산전 18나한상과 18나한탱

영산전 석가3존불 좌우에는 부처의 열성제자인 나한상(羅漢像)과 나한탱이 배열되어 있다. 하얀
피부의 나한상은 좌우에 각각 9개씩 18나한을 이루고 있는데, 16나한은 지겹도록 봤지만 18나한
은 생소하다. 경국사를 찾은 중생처럼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그들 뒤에는 나한탱이 2폭씩, 4
폭이 자리해 있는데, 나한과 동자가 어울려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보경이 만든 것으로 왼쪽에 1폭은 1966년에 다시 그렸고, 우측 벽 구석에 있는 신
중탱은 1966년에 제작된 것이다.


♠  경국사 마무리

▲  경국사 산신각(山神閣)
극락보전 뒷쪽 언덕에서 경내를 굽어보고 있는 산신각은 산신(山神)을 봉안한
공간으로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촐한 건물이다.

▲  산신각 산신탱

소나무와 산을 배경으로 한 산신탱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童子) 등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진
하게 우러나온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그곳에 꿀단지나 아리따운 처자
라도 있는 것일까? 보는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다. 이 그림은 1980년에 덕문(德文)이 조성한 것
으로 그 앞에 산신의 탈을 쓴 애기 같은 산신상은 근래에 봉안된 것이다.


▲  담장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천태성전(天台聖殿)

산신각, 영산전보다 1단계 더 높은 곳에 천태성전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건물로 보통은 산신각이나 삼성각이 제일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데 반해 이곳은 천태성전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건물 이름이 조금 낯설긴 하지만 천태(天台)란 이름에서 이미 답은 나왔다.
바로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거처이다.

독성의 거처는 독성각(獨聖閣)이란 흔한 이름을 쓰지만 북한산 진관사(津寬寺)의 독성전(獨聖殿
)이나 삼천사(三千寺)의 천태각처럼 다른 이름을 쓰기도 하며, 경국사는 그의 거처를 크게 높여
천태성전이라 부른다.

경내의 다른 건물과 달리 담장을 두르고 있어 특별한 이미지를 선사하지만 담장 안에 담긴 천태
성전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건물이다.


▲  담장을 두룬 천태성전

▲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
독성탱은 1980년에 덕문이 조성한 것으로 그 앞에 있는 독성상은 근래에 봉안했다.

▲  무우정사로 인도하는 문수원(文殊院) 기와문

▲  무우정사(無憂精舍)와 3층석탑

종무소에서 해우소(解憂所)로 가다보면 종무소 바로 뒷쪽에 무우정사가 있다. 문수원이란 현판
을 인 기와문을 들어서면 극락보전 앞에도 없는 3층석탑이 나오는데, 그 탑을 중심으로 북쪽에
는 무우정사가 있고, 탑 좌우로 승려들이 생활하는 요사가 좁은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다소 고급 분위기가 풍기는 무우정사는 주지승이 거주하는 건물로 가운데 칸이 반칸 정도 앞뒤
로 삐죽나와 '十'모양의 구조를 이룬다. 지관이 설계하고 지은 것으로 현관에는 금강반야대(金
剛般若臺)란 현판이 걸려있다. 그리고 뜨락에 자리한 3층석탑은 석가탑(釋迦塔)을 그대로 모방
하여 맵시가 고운데, 경국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근래에 만든 것이다. 왜 극락보전을 놔두고 이
곳에 탑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법당보다 주지승의 거처가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무
우정사 주변을 문수원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중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참고로 무우정사의 무우(無憂)는 무우수(無憂樹)에서 유래된 말로 아수가수(阿輸迦樹)를 한자로
번역한 이름이다. 부처는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밑에서 태어났고 과거 1불인 비바시불도 이 나
무 아래에서 성도(成道)했다고 하며, 보리수와 더불어 불교에서 소중히 여기는 나무이다.


▲  경국사를 뒤로하며

오랜만에 발을 들인 경국사를 1시간 반 정도 누비며 문화유산도 괘불도와 팔상도를 빼고는 모두
눈에 넣었다.
경국사를 둘러보고 속세로 나갈 때까지 절을 찾은 중생의 수는 앞서 본원정사보다 훨씬 적었다.
사람은 거의 2~3분 간격으로 꾸준히 들어오긴 했지만 그 수가 적었던 것이다. 흥이 나고 사람들
로 만원을 이루는 초파일 분위기도 좋지만 너무 번잡한 것도 그리 좋지는 않다. 이곳 초파일 분
위기는 기대치에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었지만 대신 그리 번잡하지가 않아 울창한 숲에 묻힌 산
사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제대로 누려서 좋았고 사진을 찍으며 살피기에도 크게 곤란하진 않았다.

이렇게 하여 석가탄신일 경국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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