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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0.27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흔적을 거닐다 ~~ 낙성대, 신림동 굴참나무 (강감찬 생가터, 낙성대공원)
  2. 2016.12.19 겨울의 길목에서 찾아간 무주 적상산 나들이 ~~~ (적상호, 적상산성, 안국사...)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흔적을 거닐다 ~~ 낙성대, 신림동 굴참나무 (강감찬 생가터, 낙성대공원)



'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 장군의 흔적을 찾아서~~ '
(낙성대, 신림동 굴참나무)

▲  낙성대 3층석탑

▲  낙성대 안국사

▲  신림동 굴참나무



봄이 한참 전성기를 누리며 천하만물을 곱게 물들이던 5월의 첫 주말에 일행들과 낙성대를
찾았다.
이제 5월의 시작임에도 철모르고 찾아온 따스함을 넘어선 더운 기운에 여름이 벌써 근처까
지 진군한 모양이다. 이번 여름은 작년보다 더 더울 거라고 구라청으로 유명한 기상청에서
입을 모으고 있으니 여름 제국의 시련을 어떻게 견딜지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오후 3시에 낙성대역(2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부근 마트에서 간단하게 음료수와 김밥을 사
들고 낙성대(안국사)로 향했다. 그곳으로 갈 때는 낙성대입구에서 서울대 후문으로 통하는
낙성대로를 따라가면 손을 뒤집듯 쉽게 갈 수 있지만 그렇게 가지 않고 낙성대동 주택가로
조금 돌아갔다. 그 이유는 밀림 같은 주택가 속에 옛 낙성대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  강감찬 장군이 탄생했던 유서 깊은 현장, 허나 지금은 주택가 속의
외로운 공원이 된 옛 낙성대<(落星垈), 강감찬 생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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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방기념물 3

▲  옛 낙성대 (강감찬 생가터)

봉천동 218번지(낙성대동) 주택가 속에 옛 낙성대가 묻혀 있다. 이곳은 관악구 출신이자 귀주
대첩의 영웅인 강감찬 장군(948~1031)이 태어난 곳으로 흔히 낙성대하면 여기서 남쪽으로 1
정도 떨어진 안국사(安國祠) 일대를 일컫지만 원래 낙성대는 이곳이다. 낙성대란 이름은 별이
떨어진 터란 뜻으로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다음과 같은 탄생설
화가 한 토막 전해온다. <낙성대는 절대로 이상한 대학교의 이름이 아님~~!!>

948년 어느 날 밤, 중원대륙 사신(使臣)으로 표현된 인물(그냥 사신으로 나오기도 함)이 근처
를 지나다가 하늘에서 큰 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광경에 입이 떡 벌어진 그
는 별이 떨어진 집을 찾아가니 그 집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자 금주(衿州, 서울 관악
, 금천구 지역)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姜弓珍)의 집이었는데 마침 그의 부인이 아들을 낳으
니 그가 바로 강감찬이라는 것이다
이후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그를 만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곡성(文曲星)을 못
본지 오래되었는데 여기서 지금 뵈옵습니다'
하며 꾸벅 절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문곡성은 도
(道家)에서 말하는 9개의 별 가운데 4번째 별로 학문을 관장하는 별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떨어진 별이 문곡성이라고 하나 강감찬의 학문이 매우 뛰어나 문곡성을 빌려 표현했을 것이다.

당시 고려는 중원(中原)의 후한(後漢), 진나라 등과 교류를 했는데 고려와 중원의 사신, 무역
상인들은 개경(開京) 인근 벽란도(碧瀾渡, 예성강 하류)에서 배를 타고 서해바다를 오갔다. <
중간에 흑산도나 가거도를 경유하기도 함> 그러니 굳이 내륙인 서울<당시 남경(南京)>로 돌아
갈 이유는 없다.
이곳을 거쳐가지도 않았을 사신을 애써 끌어들인 것은 온갖 문화가 혼합된 중원의 문화를 좋아
하고 중원대륙을 동경하던 옛 사람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며 앞서 문곡성의 예를
통해 문곡성의 화신(化身)으로 여기고 그의 탄생일에 맞춰 그 별이 떨어진 것으로 탄생설화를
꾸민 듯 하다. 그리고 송나라 사신이 그에게 문곡성이라 존칭하며 굽신거렸으니 그에 맞게 중
원대륙 사신을 등장시킨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별은 나라를 세운 시조(始祖)나 영웅의 탄생설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들이 태어났을 때 흔히 별이 떨어졌다 하늘이 기뻐서 별을 내렸다는 식으로 탄생을 추켜세우는
것으로 설화처럼 정말로 별이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짜로 떨어졌다면 강감찬 집은 물론
이고 그 주변은 정말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은 우스개 소리로 딸 수 있을
정도로 작아보이나 그게 코 앞에 다가왔을 때는 꽤나 난감한 상태가 됨>

이곳에 있었다는 강감찬 생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의
집안이 후삼국시대부터 금주 지역을 다스리던 세력가였으니 집은 제법 컸을 것이다. 허나 세월
의 장대한 흐름 속에 집이 녹아내리면서 생전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으며, 강감찬이 세상을
뜬 이후, 그를 흠모하던 사람들은 이곳이 별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낙성대라 불렀다.
13세기 경, 지역 사람들과 후손들이 그의 공덕과 그의 탄생지를 길이 알리고자 생가터에 3층석
탑을 세우니 그것이 낙성대3층석탑이며, 탑의 영향으로 이곳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다.

이후 3층석탑 홀로 이 자리를 지키다가 1974년 이곳 남쪽에 사당인 안국사를 세우면서 탑을 그
곳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는 대신 유허비를 세우고 나무와 꽃을 심어 주변을 산뜻하게 정비했다.
안국사가 조성되면서 그곳이 새 낙성대가 되었으며, 기존의 낙성대는 옛 낙성대가 되어 '낙성
대유지(遺址)'란 이름으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근래에 '강감찬생가터(낙성대)'로 명칭
이 갈렸다.

현재 이곳에는 낙성대유허비와 옛 강감찬 향나무의 뒤를 이은 160년 묵은 향나무가 있으며,
무와 꽃이 가득하여 조촐하게 소공원의 역할을 한다. 강감찬생가터라고 하지만 생가와 관련된
어떠한 흔적도 전해오지 않으나 땅을 파보면 건물 주춧돌이나 당시 유물이 고개를 들고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이 주변을 재개발하거나 싹 밀어버릴 기회가 있을 때 꼭 발굴조사를 벌였
으면 좋겠다.

강감찬생가터(옛 낙성대)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와서 50m 정도 가면 왼쪽으로 낙성대역길이 나온다,
  길을 3분 정도 가면 오르막이 나오면서 길이 왼쪽(동쪽)으로 꺾이는데 그 꺾인 길로 2번째
  골목길인 낙성대역4길로 2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나무가 우거긴 옛 낙성대가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낙성대동) 218-14


▲  수목으로 우거진 옛 낙성대

▲  낙성대유허비(落星垈遺墟碑)

옛 낙성대 한복판에 자리한 유허비는 낙성대의 상징이던 3층석탑이 새 낙성대로 옮겨짐에 따라
허전한 옛 자리를 지키고자 1974년에 세워진 것이다. 안국사 안에 세워진 강감찬사적비를 모델
로 하여 똑같이 만들었는데, 고개를 높이 쳐들며 엉금엉금 기어가는 듯한 거북 머리 귀부(龜趺
)를 밑에 깔고 그 등에 비좌(碑座)를 만들어 '강감찬장군 낙성대유허비'라 쓰인 비신(碑身)
세웠으며 그 위에 2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비석 높이는 2m 정도로 안국사의 강감찬사적비보다 키가 작고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나
1997년에 다시 손질했다.


▲  강감찬 향나무

옛 낙성대의 명물로는 제자리를 떠난 3층석탑과 함께 오랜 숙성을 자랑하는 나이 지긋한 향나
무가 있었다. 향나무는 강감찬과 더불어 자랐다고 전해져 일명 '강감찬나무'라 불리는데 그것
이 맞다면 나이가 무려 1,100살이 된다. 허나 실제 나이는 그 정도까지 미치지 못하며 조선시
대에 강감찬을 흠모하던 지역 사람들이나 후손이 심은 것으로 보인다.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강감찬과 연관된 나무로 묶여진 것이다.
이 나무 외에도 인근 난곡에 그가 심었다고 전하는 굴참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도 강감찬나무란
별명을 지니고 있다. (본글 끝 부분에 있음)

낙성대 향나무는 낙성대와 강감찬을 상징하는 자연 명물로 1968 서울시 보호수 1-23로 지
정되었으나 1987년 무심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숨줄을 놓고 말았다. 그래서 그
에게 부여된 보호수 등급은 해제되었고 죽은 몸뚱이도 문드러져 전설 속의 나무가 되었다.
이후 1996년 관악구에서 옛 낙성대를 확장/정비하면서 향나무의 빈자리를 채울 계획을 세웠고
적당한 나무를 물색하다가 그해 11월 경기도 고양시(高陽市)에서 150년 묵은 향나무를 구입해
비록 씨는 다르지만 강감찬나무의 후예로 삼있다. (나무 앞에 그와 관련된 유래를 머금은 표석
이 누워있음)


 

♠  낙성대공원과 낙성대3층석탑

▲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는 낙성대공원

옛 낙성대를 둘러보고 안국사가 있는 새 낙성대로 이동했다. 낙성대역에서 서울대후문으로 가
는 길목에 자리한 이곳은 19746월에 조성되었는데 크게 안국사와 낙성대공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전 공원에는 팔작지붕 기와집 매점이 전부였으나 그새 빨간 피부의 도서관과 야외놀이
마당, 전통혼례식장 등을 새로 그려넣어 그때보다 더 활력이 넘쳐보인다.

봄이 내려앉은 공원에는 산책,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거의 시장통을 이루었고, 공원 북쪽에 자
리한 전통혼례식장에서는 혼례가 열리고 있어 하객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우리는 그런 풍경의
일부가 되어 의자에 앉아 바깥에서 가져온 음료수와 김밥을 먹으며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  빨간 카페트가 깔린 관악예절원 전통혼례장

▲  안국사로 인도하는 그림 같은 숲길
오랜만에 찾은 새 낙성대에 이런 숲길이 있었다니 결코 낯선 곳이 아님에도
처음 만난 듯 신선하기만 하다. 집으로 살짝 가져와 혼자서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숲길이다.


낙성대공원에서 안국사로 가는 길은 크게 2개이다. 하나는 숲길(윗 사진)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국사 정면으로 난 홍살문으로 가는 것인데 우리는 숲길로 들어가 홍살문으로 나오기
로 했다.
숲길 좌우에는 나무들이 봄이 안겨준 좋은 세상에 심취하며 한참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들이
없다. 그 풍경이 고와 벌써부터 눈이 호강을 누릴 지경인데 늦가을이면 그 화사함에 두 눈이
멀지도 모르겠다.


▲  안국사의 정문인 안국문(安國門)

숲길을 들어서니 안국사 관리사무소가 나오고, 그 옆으로 안국사의 외삼문(外三門)인 안국문이
윤기가 흐르는 청기와 맞배지붕을 드러내며 위엄을 뽐낸다. 사당은 안국문부터 내삼문을 거쳐
본전까지 모두 서북향(西北向)을 하고 있는데, 이는 지형상에 이유도 있겠지만 강감찬이 고려
때 인물이므로 옛 고려의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을 바라보게끔 서북향으로 설정한 것이 아닐
까 싶다. 개경(개성)은 여기서 서북향이다.

안국문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운데 문은 사당 주인만 왕래하는 특별한 문으로 제
향 외에는 닫아둔다. 속인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가면 된다. 안국문 앞 계
단은 약 3m 높이로 문의 위엄을 수식하고 있으며, 계단 남쪽에는 낙성대 안내문과 낙성대 바위
글씨가 있다.


▲  커다란 돌에 새겨진 낙성대 바위글씨

낙성대 안내문 옆에 자리한 낙성대 바위글씨는 낙성대가 완성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남긴 낙
성대 3글자를 자연산 바위에 새긴 것이다.
1974년 청와대와 서울시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고 그를 통해 백성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충효의
지를 높이고자 그의 사당을 짓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옛날에 잘나갔던 장군의 사당이 하나
도 없던 상황. 그런 상황에 관악구 출신인 강감찬은 정말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유적인 낙성대는 3층석탑과 향나무만 있었을 뿐, 제를 지내는 어떠한 시설도 없었다.
그래서 자리가 넓은 관악산 북쪽 자락에 넓게 터를 다져 사당을 지었는데 그해 411일 상량
식을 가졌고 불과 2달 만인 610일에 뚝딱 완성을 보았다. 45천이 들었으며 강감찬이 국
내외적으로 크게 불안정했던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 나라가 평안해진 것처럼 나라의 평안을 염
원하는 뜻에서 사당 이름을 안국사라 하였다.

바위글씨 앞 표석에는 박대통령께서 하사하셨다는 식으로 아주 재미없게 쓰여 있어 독재시대의
우울했던 단면을 보여준다. <사당을 지어 영웅을 기리는 것은 좋으나 그 사당을 지은 이를 너
무 높인 것이 옥의 티임>


▲  안국문과 내삼문 중간 (안국문에서 바라본 모습)

안국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내삼문이 보이고, 좌우로 3층석탑과 강감찬장군사적비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서울의 유일한 옛 시대 장군의 국립 사당이라 <민간신앙으로 지어진 원효로 남
(南怡) 장군 사당, 보광동 김유신장군 사당은 제외> 경내가 꽤 깔끔해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  3층석탑과 마주보고 있는 강감찬장군 사적비(事蹟碑)
1974년에 지어진 것으로 옛 낙성대에 있는 유허비와 같은 모습이다.

▲  낙성대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

강감찬사적비 맞은편에는 낙성대의 오랜 상징인 낙성대3층석탑이 자리해 있다.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왜 이곳에 뜬금없이 절탑이 있지~?','인근 절이나 절터에서 가져온 것인가~?'
고개를 갸우뚱하지만 그는 겉모습만 그렇지 불교와는 관련이 없는 석탑이다.

이 탑은 고색의 기운이 없는 낙성대 안국사에서 유일하게 고색의 내음을 뿌려주는 존재로 13
, 지역 사람들과 후손들이 강감찬의 공덕을 기리고자 그의 생가터에 세운 것이다. 공덕을 기
린다고 하면 흔히 비석을 세우기 마련이나 불교 국가인 고려답게 불탑(佛塔) 모양의 탑을 세워
강감찬을 큰 존재로 추앙한 것이다. 이를 통해 옛 금천 지역 사람들의 그에 대한 존경심이 얼
마나 지극했는지를 가늠케 하며 지금은 금지된 도시가 되버린 개성(開城)에도 그를 위해 세운
석탑이 전하고 있다.
이 땅에서 석탑을 불탑도 아닌 영웅을 기리고자 세운 경우는 강감찬 외에도 경남 남해(南海)
정지(鄭地) 장군 석탑이 있다. 그는 14세기에 남해 관음포(觀音浦)에서 왜구를 격퇴해 남해 백
성을 구했는데 지역 백성들이 그의 전승을 기리고자 세웠다.

탑이 영락없는 불탑이라 다른 절에 있던 탑을 가져와 낙성대의 상징물로 삼은 것이 아닌가 여
기는 경우도 있지만 낙성대 주변에서 마땅한 절 흔적이 없다. 오로지 강감찬을 찬양하고자 세
운 탑이라고 봐야된다. 조성시기가 13세기인 것을 보면 그 당시 무척이나 징그러웠던 몽고(
나라)와의 전쟁에서 거란족(요나라) 토벌의 영웅, 강감찬을 그리며 그의 혼령이 몽고를 속시원
히 때려잡아주기를 바라는 뜻도 담겨져 있을 것이다.

탑의 높이는 4.5m로 순 화강암으로 지어졌는데 밑에 바닥돌을 두고 그 위에 길쭉한 기단부(
壇部)를 세운 다음, 3층 탑신(塔身)을 얹혔다. 1층 탑신에는 '강감찬 낙성대'라 쓰여 있어 이
탑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으며 머리장식은 훼손되어 남아있지 않다. 거의 800년을 묵은 탑이지
만 아직 정정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강감찬의 왕년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이 탑은 옛 낙성대에 있었으나 1974년 제자리를 떠나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낙성대의 오랜 상징
으로 이곳에 왔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꼭 살펴보기 바란다. 3층석탑이 없는 낙성대
는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기 때문이다. 안국사도 그가 있기에 빛을 발하는 것이다.


▲  1층 탑신에 희미하게 새겨진 '강감찬 낙성대(姜邯贊 落星垈)'

▲  서쪽에서 바라본 낙성대3층석탑

▲  남쪽에서 바라본 낙성대3층석탑

       ◀  푸르게 익은 낙성대 은행나무
1974년 안국사가 완공되자 박정희 전대통령이
그 기념으로 보낸 나무이다. 나무 앞에 관련
내용이 적힌 표석이 누워있는데 '~~각하께서 ~
~하사하시었다'는 식으로 적혀있어 그 표현에
다소 거부감을 들게 한다.
그래도 역사의 산물이니 어찌하랴. 좋은 뜻에
서 안국사를 세운 것은 분명하니 이런 시대도
있었음을 알리는 뜻에서 그냥 두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본전을 가리고 선 내삼문(內三門)
저 문을 들어서면 안국사의 본전이 나온다.


 

♠  낙성대 안국사(安國祠)

▲  안국사 본전(本殿)

안국사 가장 안쪽에 자리한 본전은 말그대로 이곳의 중심 건물로 강감찬 장군의 영정이 봉안되
어 있다. 가운데 칸에 그의 영정이 자리해 있고, 그 좌우로 그의 생애의 주요 장면(탄생, 조정
출사, 귀주대첩, 영파역에서 현종을 알현하는 모습 등)을 머금은 기록화가 걸려있는데 오직 상
상으로 그려진 것이라 그 당시와는 다소 떨어지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3중으로 된 기단 위에 높이 들어앉아 서북쪽을 바라보는 이 건물은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청기와를 입혔다. 고려 후기 대표적인 건축물인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
殿)을 본따서 지었는데 무량수전 기둥을 따라서 배흘림기둥을 취했다. (기둥 가운데가 볼록함)


▲  옆에서 본 안국사 본전의 위엄

▲  닫집 안에 봉안된 강감찬 장군의 영정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가 볼품이 없으며 평소에는 해지고 때가 묻은 옷을 입고 다녀 많은 사
람들이 그를 몰라봤다고 전한다. 허나 거란() 토벌의 대영웅을 그렇게 수수하게 그리는 것은
좀 아닌 듯 싶어 매우 늠름하고 매서운 눈초리로 표현했다.
이 영정은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1974년에 그린 것이다. 강감찬 생전의 모습
을 담은 그림이 전혀 없고 달랑 키가 작고 외모가 별로라는 내용만 있으니 나름 상상을 발휘하
여 그린 것이다. 그러니 실제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월전이 그린 강감찬 영정이 그의 표준 영
정이 되어 그와 관련된 사당에는 그의 그림이 사당 중앙을 장식하고 있다.
게다가 월전은 조선의 마지막 어진(御眞) 화가이자 친일 화가로 추잡한 경력을 남긴 김은호(
殷鎬)의 제자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화풍을 좀 닮은 것 같다.

이곳 영정은 1998111일에서 12일 사이에 그만 도난을 당했는데 관리인의 신고를 받은 관
악구청은 이를 세상에 알리지 않고 몰래 월전을 찾아가 새로 그려줄 것을 요청했다. 허나 고령
의 나이를 이유로 거절당하자, 급하게 신림동에 사는 금광복이란 화가에게 영정과 똑같이 그려
줄 것을 의뢰하며 160만원을 건네 주었다.
그가 그림을 그려 표구점에 맡기자 구청에서 그 몰래 영정을 가져왔으며, 새로 영정을 봉안할
때 제를 지내 예를 갖춰야 함에도 그런 절차도 없이 3월에 그냥 봉안해 버리는 무례를 범했다.
영정 도난 사건은 냄새를 킁킁 맡은 언론사의 취재로 7월에서야 드러나 관악구청은 두고두고
욕을 먹었는데 당시 사건을 맡은 관악경찰서도 무명 화가의 그림이라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
하여 수사를 일찍 종결시킨 것이 드러나 둘 다 쌍으로 욕을 얻어먹었다. 이에 관악구청 철밥통
관계자는 좀 무안했는지 무속인이 가져간 것으로 둘러댔으나 영정은 끝내 찾지 못했다.
그래도 진짜 영정이 아닌 상상으로 그려진 영정이라 망정이지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온 진품이
었다면 정말 관악구청과 관악경찰서는 분노한 대중들에게 제대로 테러를 당했을 것이다.


▲  강감찬과 고려 군사들이 일군 대작품, 귀주대첩도(龜州大捷圖)

▲  거란군을 토벌하고 개선한 강감찬 장군과 고려군을 현종이
영파역(迎破驛)에서 직접 맞이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화

▲  본전 뒤쪽 풍경 - 나무들도 강감찬을 존경하는지 저마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본전에 그늘을 드리운다.

▲  차가운 이미지의 상징, 안국사 홍살문 - 그 앞에 어린이들이
정신없이 뛰어놀고 있어 근엄한 홍살문의 역할을 무색하게 만든다.

▲  강감찬 장군 동상

낙성대공원 서쪽에 자리한 강감찬 장군의 동상은 말을 달리며 칼을 휘두르는 장군의 모습을 하
고 있다. 청동(靑銅)으로 다져진 이 동상은 199710월에 세워진 것으로 1990년대부터 관악구
의회와 관악문화원에서 동상 건립을 추진했으나 돈이 딸려서 계속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1997년 서울시의 흔쾌한 지원으로 기존의 동상과는 다르게 갖은 요소를 넣어 제법 큰
규모로 건립해 낙성대의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강감찬(姜邯贊) 장군(948~1031)의 생애

강감찬은 금천강씨<금주(衿州)강씨)로 금천 지역 세력가인 강궁진(姜弓珍)의 아들이다. 금천강
씨는 진주강씨에서 분파되었는데 그 시조인 강여청(姜餘淸)이 신라 말에 금천 지역으로 넘어와
터전을 일구었으며 그 4세손이 바로 강궁진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이 되었다.

고려 초기 명장(名將)으로 김유신(金庾信)과 최영(崔瑩), 남이(南怡), 이순신(李舜臣) 등과 더
불어 이 땅의 민중들에게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그
들을 통해 크게 부풀려져 신화처럼 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앞서 그의 탄생 설화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강궁진이 휼륭한 아들을 얻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부인에게 가는 도중 여우 부인
을 만나 그와 인연을 맺어 낳은 것이 강감찬이란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탄생 설화와 여우부인
이야기는 흔히 시조나 위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설화라 100% 믿으면 곤란하다.

강감찬의 어릴 적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관악구에 '은천로'란 도로가 있고, 그의 이름을 딴
'은천동'이란 행정동명(봉천본동과 봉천9동을 통합한 동네)도 있다. 또한 그의 시호인 인헌(
)을 딴 '인헌동'이란 행정동명과 학교들이 부지기수며, 그와 관련된 명소도 적지 않아 관악
구가 완전 강감찬의 세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30대까지 금천에서 대부분을 지냈으며 종종 관악산에 올라가 심신을 단련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오랫동안 야인 생활을 하던 그는 35살이던 성종(成宗, 재위 981~997) 시절에 과거에 응
, 갑과(甲科)로 급제해 조정에 출사했다. 이때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임명되었는데, 흔히 그
를 장군이라 하여 무인으로 알기 쉽지만 문과(文科)로 들어온 문인(文人)이었다. 허나 거란과
의 싸움에 출전했고 귀주대첩을 이뤄낼 정도로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동북9성 여진정벌의 영웅
인 윤관(尹瓘)과 더불어 문무를 두루 겸비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문인으로 출사한 것은 광종(光宗, 재위 949~975)이 지방 세력을 때려잡고 왕권을 강화하
는 과정에서 무인들이 대거 털렸기 때문이다. 지방 세력 태반은 병사를 소유한 무인들로 그들
을 털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하고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도입해
인재를 발탁했는데 조선과 달리 문과만 치루었다. 그러다보니 문과를 거쳐야만 출세가 쉬웠다.
강감찬도 그런 상황에서는 어찌할 도리 없이 문과에 응시해야 했다.

그의 관직생활과 관련하여 여러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오는데 그 일부를 살펴보면
그가 어느 고을에 수령(守令)으로 부임을 했다. 그 고을의 관속(官屬)들은 그가 나이가 어
리다고 무시했는데 강감찬은 그들에게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넣으라고 했다.
그들이 그건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흔들자 강감찬 왈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
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나를 너희들 소매 속에 넣으려고 하나?'
호통을 치니 관속들이
그제서야 잘못했다고 빌었다. 허나 강감찬이 35살 이후에 벼슬살이를 했으므로 나이가 크게 맞
지가 않는다.

그가 강원도 원주(原州)로 출장을 가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객사(客舍) 옆 연못에는 개구리
들이 많아 늘 시끄럽게 울었다. 원주 수령은 강감찬이 편히 잠을 자게끔 하인을 배치해 개구리
의 입을 막게 했는데 아무리 돌팔매질에 나무로 연못 수면을 때려도 오히려 더 크게 우는 것이
. 이를 본 강감찬은 미소를 지으며 부적을 쓰고 연못에 몰래 넣으니 개구리 울음소리는 뚝
그쳤다.
이후 개구리 울음 소리는 커녕 개구리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원주 강원감영 선화
당 연못 설화)

그가 지방으로 출장을 가다가 충북 옥천(沃川)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그곳은 모기가
징그럽게 극성이라 백성들이 찾아와 귀주대첩 때 거란군을 쓸어버린 것처럼 모기 좀 어떻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러자 그가 하천으로 나와 모기들에게 '너희가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백
성을 괴롭히는 행위는 용서하지 못한다. 씨가 마르기 싫거든 당장 떠나라'
호통을 치니 모기들
이 크게 쫄아 다음날 모두 사라졌다. 그곳은 지금도 모기가 거의 없다고 한다. (옥천 청석교
설화)

그가 남경(南京, 서울)을 다스리고 있을 때, 북한산(삼각산)과 남산 등에 호랑이가 득실거
려 호환(虎患) 피해가 극성이었다. 이에 부하를 산으로 보내 승려를 데려오게 하여 그를 크게
꾸짖으니 승려가 호랑이로 변신하여 잘못했다고 굽신거리며 부하 호랑이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또는 강감찬이 호랑이들에게 새끼도 평생 1번 낳게 하고 몇몇 산에서만 살게 했다
고 함)

1009년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하고 태조의 손자인 대량원군<大良院君, 현종(顯宗)>
옹립한 이른바 강조의 난이 일어났다. 고려가 강동6(江東六州)를 점거하고 주지 않는 것에
불쾌감을 드러낸 거란<요나라()> 성종(聖宗)은 강조의 난을 구실로 30만 대군을 이끌고 친히
고려에 쳐들어왔다.
강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검차(檢車)를 이용하여 그들을 여유롭게 때려잡았으나 그만 방심하
여 오히려 역전을 당하고 만다. 강조가 패하자 고려 조정은 벌통이 여러 개나 뒤집힌 듯 큰 혼
란에 빠졌고 염통이 쫄깃해진 많은 신하들이 항복을 주청했으나 강감찬과 하공진(河拱辰)은 강
력히 반대했다.
결국 개경이 함락되었고 현종은 멀리 나주(羅州)까지 힘에 겨운 몽진을 했으나 양규(楊規),
숙흥(金叔興), 강감찬 등의 활약으로 거란은 크게 피해를 입고 줄행랑을 쳤다.

그 이후 한림학사(翰林學士), 서경유수(西京留守),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서북면행
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등을 지냈으며,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로 임명한다는 현종의
조서(詔書)에는 '경술년(1010) 오랑캐(거란) 무리가 우리나라 한강 연안까지 깊숙히 쳐들어
온 전란이 있었다. 그때 강공(강감찬)의 전략을 쓰지 않았다면 온 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을 뻔
했다'
적혀있어 그의 공이 실로 엄청났음을 가늠케 한다.

1018년 거란 성종은 강동6주와 고려 굴복시키기에 대한 미련을 다시 드러냈다. 오랫동안 옛 조
선과 고구려, 발해의 지배를 받아오던 거란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으킨 큰 나라, 요나라
10~11세기에 천하 강국으로 위엄을 날렸지만 고려를 비롯한 인접 국가와의 계속되는 전투로
상황이 넉넉치 못했다. 그래서 간신히 10만 명을 정예병이라고 쥐어짜 소배압(蕭排押)을 총대
장으로 삼아 고려로 보냈다.
참 지긋지긋한 거란의 3번째 침공을 맞이하여 현종은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삼고 208
천의 군사를 주어 거란을 막게 했다. 그때 강감찬의 나이는 칠순이었다. 남들 같으면 이미 꺾
이고도 남을 나이에도 총대장이 되어 말을 타고 종횡무진하니 그의 건강과 무예가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거란군이 압록강을 넘어오자 강감찬은 재미없는 수성전을 버리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12천을 뽑아 압록강 하류 흥화진(興化鎭) 동쪽에 매복시켰는데, 거란군은 꼭 거치던 흥화
진을 그냥 놔두고 고려군이 매복된 곳으로 기어들어왔다. 이때 강감찬은 쇠가죽으로 강물을 막
게하고 거란군이 그 강을 건너자 쇠가죽으로 다진 둑을 터뜨려 그들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
으면서 매복시킨 기병으로 호되게 후려쳤다.
여기서 2만 정도를 잃은 소배압은 자(慈州)에서 강감찬의 부장인 강민첨(姜民瞻, ?~1021)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개경만 점령하면 게임 끝이라는 무모한 생각에 무작정 개경으로
달려갔다. 이에 강감찬은 추격과 매복을 골고루 구사했고, 개경 점령에 눈이 뒤집힌 소배압은
개경과 가까운 신은(新恩)까지 진출했으나 식량도 부족하고 피해가 막대한 아군의 상황을 간신
히 깨닫고는 길을 돌려 열심히 줄행랑을 쳤다.

허나 그 길목에는 이미 고려군이 쫘악 깔려 열심히 그들을 사냥했고, 거란군이 귀주(龜州)까지
후퇴하자 강감찬은 성을 나와 귀주 벌판에 진을 치며 그들을 기다리니 이윽고 소배압의 거란군
은 병든 닭새끼처럼 귀주에 나타났다. 벌판에 진을 친 고려군을 보고 소배압은 간이 배밖으로
튀어나와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의 우수한 기마병의 힘을 보여주마. 각오해라!' 다짐
하며 고려군과 진검 승부를 걸었다.
이에 강감찬은 그들을 크게 포위해서 잡는 작전을 펼쳤다. 기마병을 선두로 하여 보병과 사수(
射手)를 적절히 배치해 그들을 맹렬히 공격했으며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金宗鉉)의 군사
도 때마침 합세하여 안그래도 힘이 딸리는 거란군은 더욱 밀려 거의 전멸을 당하고 소배압은
간신히 목을 붙잡고 도망쳤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불과 수천에 불과했으니 그야말로
거란에게는 개망신에 가까운 패배였으며 이 대승을 두고 고려사에서는 '거란의 패함이 아직 이
와 같이 심함이 없었다'
고 기록을 했다.

거란 성종은 부하를 죄다 잃고 돌아온 소배압을 보자 크게 발작하여 '너가 적지에 너무 깊숙히
들어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다. 무슨 얼굴로 짐을 보려고 하는가? 너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
여야 되나 내가 참는다'
질책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강감찬은 귀주대첩이란 대작품을 일구고 부하 장졸과 함께 수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들고 개경
으로 개선하자 현종은 크게 기뻐하며 친히 도성 밖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와 연회를 베풀었다.
현종은 친히 금으로 만든 8가지의 꽃을 그의 머리에 꽂아준 뒤 왼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오른
손으로 축배를 들어 위로하고 찬양하니 강감찬은 '폐하의 분에 넘치는 황은(皇恩)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의를 표했다.

현종은 그에게 식읍(食邑) 300호를 하사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 책봉(
)했다. 1030년에는 현종에게 개경 주변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건의, 둘레 23km에 이르는
개경도성(都城)이 구축되었으며 그 공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문하시중이 되자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현종은 절대로 안된다며 3일에 1번씩 입궐
토록 했으며 이듬해(1031) 6월이 되어서야 겨우 사직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해 1031, 83세에 나이로 장대했던 삶을 마감하니 덕종(德宗)3일 동안 조회를 멈
추고 그를 애도했으며 인헌(仁憲)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특지검교태사시중 천수국 개국후(開國
)를 추증(追增)했다. 이후 수태사 겸 중서령(中書令)까지 더하여 현종 묘정(廟庭)에 배향(
)되었다.

강감찬은 키가 작고 외모도 별볼일 없었으나 학문을 매우 좋아하고 무예와 지략, 기개가 뛰어
났다. 그리고 성품이 청백하고 검소하여 재산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평시에는 해지고 때가 묻은
허름한 옷을 입고 다녀 그의 얼굴을 모르는 이들은 일반 백성으로 오인하기 일쑤였다. 또한 엄
숙한 태도로 국사를 처리하고 국책을 결정할 때는 당당한 국가의 중신으로 그 역할을 다했으며,
백성들도 잘 보살펴 그들은 나라가 평온한 것이 강감찬의 공으로 여기고 추앙했다.

그는 고려가 한참 거란과의 싸움으로 안정되지 못한 11세기 초반, 안으로는 내정을 살피고 지
지기반이 부실한 현종을 도왔으며, 밖으로는 거란을 토벌해 국내외적으로 나라를 안정시켜 고
려를 작지만 강한 나라로 우뚝 서게 했다. 고려와의 3차례 전투에서 모두 깨지고 거기에 귀주
대첩에서 완전히 게임이 끝나니 거란도 이제 힘이 딸려 더 이상 강동6주 반환과 고려 제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하지 못했고 오히려 고려의 침공을 걱정해야될 판이었다. 고려 역시 오랜 전
쟁으로 지쳐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고 12세기 초까지 압록강 가교 사건 등을 제외하고
는 양국은 별무리 없이 평화로운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국가가 장차 화패(禍敗)가 올 때 반드시 명현을 내시어 이를
구하시는구나. 목종(穆宗) 말년과 현종 원년에 역신(逆臣)이 난을 일으키고 거란이 내습해 안
으로는 내홍, 밖으로는 환란이 있어 국가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만약 강공(姜公)이 없었
더라면 장차 나라가 어찌 됐을지 알 수가 없다'
는 내용이 있어 그의 존재감과 공이 얼마나 두
터웠는지 보여준다. 그의 찬란한 이름은 현재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3척동자도 '강감찬하면 귀
주대첩~!'을 떠올릴 정도로 이 땅의 대표적인 위인의 하나로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녹아내리
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 구선집(求善集) 등이 있으나 전하지는 않아 무슨 내용
의 책인지는 알 수 없으며 그의 묘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에 있는데 오랫동안 무
덤의 위치를 몰라 애태우던 것을 1963년 후손들이 지석(誌石)을 발견하여 무덤을 복원했다.

낙성대 안국사(낙성대공원)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와서 50m 정도 가면 낙성대역길이 나오고 그 길로 접어
  들어 왼쪽(남쪽)으로 가면 관악구 마을버스 02번 정류장이 있다. (버스가 늘 대기하고 있음)
  그 버스를 타고 낙성대공원(영어마을) 하차
*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와서 3~4분 직진하면 낙성대입구 교차로이다. 거기서 왼쪽(남쪽) '
  성대로'로 진입하여 도보 12(낙성대역에서 도보 15)
* 매년 103째 주에는 낙성대공원에서 관악 강감찬축제가 열린다. 원래는 '낙성대 인헌제'
  1988년 추석(920) 때 처음 시작되었으며, 나중에 관악구의 주요 축제인 '관악산 철쭉제
  '와 통합하여 관악 강감찬축제로 이름을 갈았다.
  강감찬 추모제향을 시작으로 강감찬을 주제로 별페스티벌, 출병식과 전승행렬 거리 퍼레
  이드, 주민화합 한마당, 고려촌 테마부스, 작은 음악회 등 다양한 행사와 볼거리가 열리며
  올해(2017)1020~21일에 열린다. (문의 관악구 문화체육과 ☎ 02-879-5605)
* 안국사 관람시간 : 9~18(겨울은 17시까지, 낙성대공원은 24시간 개방, 입장료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 (낙성대로 77 ☎ 02-877-6896)


 

♠  난곡(蘭谷)에서 만난 오래된 나무들

▲  난곡로 느티나무공원에 자리한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21-1

낙성대를 둘러보고 아직 햇님 퇴근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또다른 강감찬 나무를 찾고자 관악
구 서남쪽 끝으머리에 박힌 난곡으로 이동했다.
난곡은 서쪽으로 금천구 독산동, 남쪽은 금천구 시흥동(始興洞)과 맞닿아 있으며 예전에는 신
림동(新林洞)의 일원으로 그 기치 아래 똘똘 뭉쳐있었으나 신림1~10동이 모두 별도의 이름을
칭하게 되면서 신림7동이던 난곡은 난곡동과 난향동으로 분리되었다.

서울 달동네(산동네)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던 현장으로 달동네 스타일의 분홍색 기와집과 판자
집이 가득했으나 1999년 이후 10년이 넘게 재개발의 칼질이 요란하게 몸을 풀면서 동네 상당수
가 성냥갑 아파트와 단독주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음지에는 아직도 달동네의 흔적이 남아있
으며 재개발의 과정에서 많은 가난한 서민들이 강제로 터전을 떠나야 했다. 개발의 칼질은 늘
있는 것들에게 고분고분하지 일반 백성들에게는 지나치게 포악하다.

난곡이란 이름은 난초 골짜기란 뜻으로 달동네 이름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이곳이 난곡이
라 불리게 된 것은 정정공(貞靖公) 강사상(姜士尙)의 손자인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이 이
곳에서 말년을 보낼 때 난초를 많이 길러 유래되었다는 설과 원래 이름은 낭곡(狼谷)이었는데
강사상의 아들인 강서(姜緖)가 동네 이름이 별로라고 하여 난곡으로 바꾸고 자신의 호도 그리
했다는 설이 있다. 강홍립은 난곡 위쪽에 자리한 조부(祖父), 강사상의 묘역에 묻혀 있다.

난곡에 이르러 난우중학교 정류장에서 내리니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중을 나온다. 그 주위로 '
난곡로 느티나무공원'이 조촐히 터를 이루고 있는데 공원에는 운동시설 여럿이 닦여져 있다.
그 나무의 정체가 궁금해 안내문을 살피니 무려 410살을 먹은 나무로 1972년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때 추정 나이가 약 370)
마르기는 커녕 오히려 넘쳐나는 세월의 샘을 양분으로 삼아 키 17m, 둘레 496cm로 어엿한 노거
수로 성장했는데 나무 주위로 속인들의 주택과 건물이 뿌리를 내려 그를 위협한다, 그래도 그
들에 굴하지 않고 정정함을 과시하며 오늘도 공원에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다.

난곡로 느티나무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5번 출구)에서 506, 5522(B), 5523번 시내버스를 타고 난우중학교 입구
  에서 하차하면 바로 보인다.
*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2번 출구 남쪽 80m 지점)에서 5522(B), 5524번 시내버스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난곡동 697-40


▲  건영2차아파트 남쪽 주차장에서 바라본 굴참나무

곡로 느티나무를 둘러보고 난곡의 명물인 신림동 굴참나무를 보고자 건영2차아파트로 이동했
. 거리는 1km 남짓, 햇님은 퇴근 본능이 발동해 자꾸만 꽁무니를 숨기려고 한다. 날이 어두
워지면 디카도 흥분하지 못해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길은 바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잠시 마트에 들려 음료수로 불만에 잠긴 목을 좀 축이고
미로 같은 골목길을 뚫으며 난곡초교 방면으로 가니 서쪽으로 건영2차아파트가 보인다. 그 아
파트로 다가서면 나를 이곳으로 부른 거대한 굴참나무가 마중을 한다.

이 굴참나무는 키 17m, 가슴 높이 둘레 2.5m, 나무 밑부분 둘레가 2.9m로 나이가 무려 1,000
을 헤아린다고 전한다. 강감찬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랐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연유로 '강감찬나무'란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1018년 거란군을 공격하러 출정할 때
이 나무를 심고 무사 귀환을 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과연 강감찬과 관련이 있는 나무인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관악구 지역은 그의 고향으로
그가 남긴 유적과 전설이 허다하며 백성들이 그를 기리고자 붙인 전설도 여럿 있다.
 
나무의 나이가 1,000년이 맞다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된다. 아파트 주민들도 강감찬
의 지팡이가 자란 나무로 여기고 있는데 그 장대한 세월에 비해 덩치가 작아 고개를 좀 갸우뚱
하게 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원래 나무는 옛날에 죽고 그의 후손이 자라나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는 쪽으로 무게가 쏠리고 있다. 추정 나이는 250년 정도로 여겨지나 이 역시 정확한 것은 아
니다. (사람은 나이가 적으면 좋지만 문화유산은 오히려 많아야 빛을 보는 법임)

굴참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낙엽교목(落葉喬木)으로 세포벽(細胞壁)은 물에 젖지 않아 방수
, 방음, 방열 효과가 있어 이 나무로 코르크(cork)를 생산하며 이 나무 껍질로 지붕을 얹힌 집
이 강원도에서 옛날에 많이 보였던 너와집이다.
나무 인근에는 강감찬 장군의 사당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을 딴 은천사(殷川
)란 조그만 절이 나무를 지키고 있으며, 매년 2회 음력 71일과 101일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제사를 지낸다. (예전에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지냈다고 함)

이 나무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신림동 굴참나무'이다. 이는 이곳이 신림동 관할이기 때문인
데 이제는 신림동이 아닌 난곡동이라 불리고 있으니 명칭을 변경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난곡
동 굴참나무'로 말이다. 물론 그렇게 부르던 저렇게 부르던 그에게는 관심 밖일 것이다. 자신
은 그저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가만 두지를 않으니 말이다.

나무의 높이는 앞서 느티나무와 비슷하고, 둘레는 거의 60% 수준으로 얇으나 대신 가지가 좌우
로 넓게 퍼져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느티나무를 압도한다. 게다가 강감찬과 관련도 있고 나이도
오래되다보니 그런 것들이 이들 나무의 팔자를 바꿔놓은 것이다. 느티나무는 겨우 보호수 등급
, 굴참나무는 국가 지정 천연기념물의 귀한 존재로 말이다.

예전에는 이곳이 동네의 높은 곳으로 아랫 동네를 굽어보고 있었으나 철이 없는 개발의 칼질은
나무 주위로 높게 석축을 쌓고 그곳에 터를 다져 건방지게 아파트와 주차장을 올렸다. 아파트
주차장이 나무의 허리 높이 정도 되는데, 나무 밑에서 보면 그런데로 나무가 커 보이지만 주차
장에서 보면 나무가 몇십 년 밖에 숙성되지 않은 그저 그런 나무로 보인다.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1982, 건영2차아파트는 그보다 훨씬 이후에 들어섰다.
무리 개발의 칼질이 개념을 밥말아 먹어도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지닌 굴참나무의 위엄을 건드
리지 말았어야 했거늘, 나무 바로 옆에 아파트를 두게 했으니 참 딱할 따름이다. 나무 동쪽에
있는 집들은 그렇다쳐도 아파트는 좀 가혹했다.
철학과 역사의식이 빈약한 이 땅의 자본주의의 폐해라고나 할까?


▲  동쪽 주택가에서 바라본 굴참나무
태극마크가 새겨진 파란 피부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면 바로 나무 앞이다.

▲  굴참나무의 밑도리
예전에는 이보다 더 너른 땅을 누리고 살았건만 개발의 칼질은 그의 영역을
빼앗아 구석살이 신세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보니 나무 자리가 정말
답답해 보인다. 마치 맹수를 좁은 우리에 가둬놓은 기분..

▲  아파트 주차장에서 바라본 굴참나무의 밑도리

▲  나무 북쪽에 어이없게도 쓰레기통과 분리수거통을 두어 나무에게
제대로 민폐를 부린다. 쓰레기 악취가 그의 건강에
해를 주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  주렁주렁 매달린 굴참나무 꽃
신림동 굴참나무를 끝으로 관악구에서 즐긴 강감찬 장군의 흔적 더듬기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신림동 굴참나무 찾아가기 (201710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5번 출구)에서 506, 5522(B), 5523번 시내버스를 타고 남강중입구 하차
*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2번 출구 남쪽 80m 지점)에서 5522(B), 5524번 시내버스 이용
* 난곡(난향동) 종점 방향 남강중입구 정류장에서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북쪽)으로 가
  면 난곡로35길이 나온다. 그 골목길을 계속 들어가면 건영2차아파트가 나오는데, 아파트단지
  로 들어서 쭉 들어가면 나무가 나오며, 아파트 대신 난곡로35번길을 계속 고집하면 난곡초교
  석축으로 막다른 곳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서쪽)으로 가도 나무가 나온다. 남강중입구
  정류장에서 도보 7~8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721-2 (난곡로35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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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길목에서 찾아간 무주 적상산 나들이 ~~~ (적상호, 적상산성, 안국사...)

 


' 무주 적상산 겨울 나들이 '


▲  적상산 산정에 자리한 적상호

▲  안국사 극락전

▲  적상산사고

 


 

늦가을이 무심히 저물고 겨울이 한참 이빨을 드러내던 11월 마지막 주말에 전북 무주(茂
朱) 땅을 찾았다. 이번에는 멀리 남쪽에서 오는 일행들과 함께 하기로 했는데 서로 본거
지가 극과 극이다보니 무주터미널에서 그들과 합류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도봉동 집을 나서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대전
행 고속버스를 몸을 실었다. 거의 2시간을 달려 대전(大田)에 도착, 새롭게 몸단장을 벌
인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장수행 직행버스를 타고 다시 50분을 내달려 무주의 관문인 무주
터미널에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10분 정도 대기했다가 남쪽에서 온 본대에 합류했다.

이번 무주 기행의 첫 답사지는 적상산이다. 무주시외터미널에서 동남쪽으로 6분 정도 달
리면
적상산 입구인데, 여기서 적상산으로 인도하는 서쪽 길로 들어서면 북창리(北倉里)
가 나온다. 그 마을을 지나면서 길은 서서히 흥분을 드러내고 강원도나 함경도 고갯길에
버금가는 꼬불꼬불 고갯길로 변신하여 정신을 쏙 빼놓는다.

적상산은 단풍이 매우 곱다고 하는데, 가을이 떠나간 시점이라 단풍 구경은 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건 겨울 제국(帝國)에 설설 기고 있는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 뿐, 푸른 기운
을 가진 존재는 소나무와 전나무 밖에는 없었다.


 

♠  적상산(赤裳山)의 품으로 들어서다.

▲  적상산의 지도를 크게 바꿔놓은 산정호수, 적상호(赤裳湖)

구절양장(九折羊腸) 같은 적상산 고갯길을 어느 정도 오르면 적상터널이 나온다. 적상산의 콧
대를 피하고자 산 밑에 판 땅굴로 그 터널을 나와 세 굽이를 지나면 푸른 호수인 적상호가 나
오고 길은 비로소 진정을 되찾는다.

적상산 850m 고지에 마치 백두산(白頭山)의 천지(天池)처럼 들어앉은 적상호는 무주양수발전소
상부댐을 만들면서 조성된 인공 호수이다. 여기서 양수발전소(揚水發電所)란 심야에 남는 전기
로 밑(하부댐)에 있는 물을 위쪽 저수지로 올리고, 필요한 시기에 그 물을 떨어트려 전기를 빚
는 수력발전의 일종이다.
이 발전소는 1988년 4월에 착공해 1995년 5월에 완성을 보았는데, 시설용량은 60만kw이며, 적
상호를 담고 있는 상부댐은 높이 60.7m, 길이 287m, 저수량은 372만㎥이다.

수력발전은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멀쩡한 땅을 수장시켜야 되는 단점이 있다. 계곡을 막아 둑을
쌓고 호수를 만들면서 안국사와 적상산사고터는 제자리를 강제로 내줘야했고, 많은 숲이 억지
로 희생당해야 했다. 또한 호수와 발전소 관리를 위해 적상산의 피부를 깎아 구불구불 도로를
내면서 적상산 정상 밑까지 건방지게 차량들이 올라가게 되었다. 그 덕분에 오로지 두 발로 힘
겹게 올라야 했던 적상산 접근이 보다 쉬워졌고, 적상호는 이곳의 또 다른 볼거리로 부각되었
으며, 양수발전을 통해 무주 지역의 전기를 책임지는 중요한 곳이 되었다.

우리의 버스는 적상호를 지나 안국사 방면 서쪽 길을 조금 오르다가 900m 고지 주차장에서 육
중한 바퀴를 접었다. 절까지 버스 접근은 가능하나 차를 돌릴 공간이 없어서 멈춘 것이다. 허
나 그곳까지는 거리도 매우 가깝고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잘 닦여져 있으며
경사 또한 그리 각박하지 않아 어려운 것은 없다. 그 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안국사 일주문이
활짝 열린 모습으로 마중을 나온다.


▲  적상호에서 안국사로 올라가는 숲길

▲  안국사의 정문인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은 절의 정문으로 앞에는 '적상산 안국사'라 쓰인 현판이, 뒤에는 '국중제일정토도량(國
中第一淨土道場)'이라 쓰인 현판이 자리해 이곳의 이름과 성격을 말해준다. 절 이름이 쓰인 현
판은 1992년에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이 썼으며, 국중제일정토도량 현판은 1995년 여산 권
갑석(如山 權甲石)이 쓴 것으로 다들 필체에 힘이 넘쳐난다.
절을 옮기면서 새로 만든 현판과 달리 문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는 고색의 기운이 약간 느껴져
문이 좀 오래된 존재임을 살짝 속삭여준다.


▲  일주문의 뒷모습

     ◀  일주문 '국중제일정토도량' 현판
이 현판은 무학대사가 안국사를 두고 '국중(國
中) 제일의 길지(吉地)'라 찬양한 설화를 참조
하여 쓴 것으로 안국(安國)과 정토(淨土)를 꿈
꾸는 안국사의 바램이 담겨져 있다.


▲  적상산성(赤裳山城) - 사적 146호

일주문 바로 옆에는 키 작은 돌담이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져있다. 그를 알리는 안내문이 없었
다면 단순히 돌담으로 여겨 넘어가기 쉬울 정도인데, 그는 국가 지정 사적의 지위를 누리고 있
는 적상산의 두툼한 갑옷, 적상산성이다.

적상산성은 적상산 고지대의 분지(盆地)를 둘러싸고 있는 절벽과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전체 길이는 8,143m, 성곽 높이는 거의 1~2m이다. 경사가 각박한 적상산의 정상 주변은
절벽에 둘러싸인 곳이라 그 절벽을 활용하다보니 성곽의 높이는 대부분 낮다. 물론 장대

월의 거친 흐름과 관리 소홀로 인해 무너진 것도 한몫 한다. 현재는 안국사 주변과 서문터 등
일부만 남아있으며, 문은 동/서/남/북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북문과 서문, 남문터만 남았다. 성
내부 면적은 약 214,976㎡에 이른다.

이 산성은 예전에는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축성된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설명을 했다. 하지만
'고려사(高麗史)'를 비롯하여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
輿地勝覽)','여지승람(輿地勝覽)'을 살펴보니 고려 초기인 거란의 2차 침공(1010년) 이전부터
성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바로 거란(요)의 2차 침공 시절, 거란의 군주인 성종(成宗)은 몸소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 고려의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을 힘겹게 점령했다. 고려 군주인 현종(顯宗)은 급히 나
주(羅州)로 몽진을 갔는데, 거란군의 남하를 우려한 인근 백성들이 이곳으로 피신을 온 것이다.
그러니 빠르면 신라 후기, 늦어도 고려 초에 성이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절에는 최영(崔瑩)장군이 이곳을 지나면서 산성을 보수하여 창고를 세
울 것을 건의했으며, 조선 세종 때는 최윤덕(崔潤德)도 이곳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허나 그들
의 건의는 허공의 메아리로 끝났고, 이후 다시금 주목을 받은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光海君)은 우리의 친척 민족인 여진족의 후금(後金)이 나날이 강성
해지자 압록강과 가까운 묘향산사고(妙香山史庫)에 있던 실록과 선원록(璿源錄)의 안위가 걱정
이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던 중, 순안어사(巡按御史) 최현(崔晛)과 무주현감 이
유경(李有慶)이 바로 적상산을 추천했다.
하여 사관(史官)을 보내 적상산을 살피게 했는데, 적상산이 꽤 괜찮다는 사관의 긍정적인 보고
로 1614년 실록전을 짓고, 1618년 선조실록을 넣으면서 사고(史庫)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세
상에서는 이 사고를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라 부른다.

사고를 수비하고자 헝클어진 적상산성을 손질해 4개의 문을 두었고, 성 안에 호국사(護國寺)를
세워 안국사와 함께 지키도록 했다. 사고 외에도 군기고(軍器庫), 사각(史閣), 대별관(大別館)
등의 시설을 두었다. 허나 1910년 이후 적상산사고는 폐지되었고 산성까지 버려지게 되면서 그
이후는 지금의 모습이 잘 말해준다.

산성을 1바퀴 둘러보는 것이 마땅한 도리겠지만 시간 관계상 안국사 주변의 성곽만 둘러봤다.

▲  적상산성의 이모저모

우리가 찾은 적상산(1034m)은 무주군 적상면에 위치한다. 산의 이름인 적상(赤裳)은 붉은 치마
를 뜻하는데, 산의 모습은 장쾌한 남성적인 모습이지만 이름은 의외로 여성적이다. 이는 산을
이루고 있는 붉은 피부의 바위가 마치 붉은 치마를 입은 것처럼 보여 유래되었다고 하며, 봄의
진달래, 가을의 단풍이 붉은 치마를 두룬 것처럼 보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한다.

적상산 정상부는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곳의 주봉(主峯)은 기봉으로 2번째 봉우리인 향
로봉(1025m)과 마주보고 있고, 정상 일대가 토산(土山)이라 숲이 매우 삼삼하다. 산정은 평탄
하지만 산허리까지는 거의 절벽이며, 물이 매우 풍부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요
새로 이용되었다.

산중에는 안국사와 호국사비, 적상산사고터, 적상산성 등의 문화유적을 비롯해 장도바위와 장
군바위, 처마바위, 천일폭포, 송대폭포, 안렴대(按廉臺) 등의 자연 명소가 있으며, 이중 장도
바위는 최영 장군이 적상산을 오르던 중, 바위가 건방지게 길을 막자 장도(長刀)로 내리쳐 길
을 냈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있다.
그리고 안렴대는 고려 초에 거란이 침공했을 때 3도 안렴사(按廉使)가 피난을 왔다고 해서 그
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하며, 정묘호란 때 안국사 승려 상훈이 혼자서 사고에 있던 조선
왕조실록을 이곳 석굴로 옮겨 잠시 보관하기도 했다.

대자연이 빚은 천연의 요새이자 걸작품인 적상산은 인간의 오만으로 자행되는 개발의 칼질 앞
에 강제로 성형수술을 당하는 시련을 겪는다. 바로 1988년 정상부에 무주양수발전소가 들어선
것이다. 그 발전소로 인하여 호수와 댐이 생기면서 산정의 모습은 크게 변하였고, 호수 주변에
도로를 내고 댐 동북쪽에 적상산휴게소와 전망대까지 마구 닦여지면서 적지 않은 혹을 달게 되
었다.


 

♠  적상산의 오랜 터줏대감, 적상산 사고를 지켰던 수호사찰
~ 적상산 안국사(安國寺)

▲  청하루(淸霞樓) 현판 - 송석 이도익(松石 李都翼)이 1859년에 쓴 것이다.

적상산 정상 남쪽 950m 고지에 자리한 안국사는 금산사(金山寺)의 말사(末寺)로 적상산의 유일
한 고찰(古刹)이다. 적성지(赤城誌)와 적상산안국사기(赤裳山安國寺記)에 따르면 1277년 월인(
月印)이 창건하였다고 하며,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가 산성과 함께 중건했는데, 이때 성 안에
는 고경사(高境寺)와 상원사(上元寺), 중원사(中元寺) 등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 후기 창건설 외에도 조선 태조 때 적상산성을 쌓으면서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어느 것
이 정답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게다가 창건 이후 16세기까지 마땅한 내력도
남기지 못해 창건 시기에 대해 다소 의구심을 품게 한다.

안국사의 내력이 본격적으로 나래를 펴는 것은 16세기 이후이다. 임진왜란 시절에 승병(僧兵)
이 주둔했다고 하며, 1614년 적상산사고를 설치하면서 안국사 승려 덕웅(德雄)이 승병 92명을
모집해 적상산성을 중수하고 사고를 수비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터지자 마침 사고를 지킬 승병이 하나도 없어 안국사 승려 상훈
(尙訓)이 혼자서 사고의 서적을 바리바리 싸들고 안렴대에 있는 석굴로 옮겨 보관하기도 했다.
1643년 적상산을 둘러본 이조판서 이직(李稙)은 산성의 수비가 허술하고 승병이 모두 흩어지고
없으며, 창고에 군량도 없는 등, 수비의 어려운 실정을 보고하고 승군 모집을 위해 사찰 건립
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하여 1643년 왕명으로 호국사(護國寺)를 지어 안국사를 보조하도록 했다. 이때 전라감사 윤명
은(尹鳴殷)이 자신의 녹봉을 털어 공사비로 댔고, 승려 각명(覺明)이 일을 맡았으며 무주현감
심헌(沈憲)이 감독을 했다. 호국사란 이름은 삼장법사(三藏法師)의 경축기도(經祝祈禱)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사고를 이웃한 인연으로 조정(朝廷)에서는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수호한다는 의미로 '
안국사'와 '호국사'란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 절도 그 기대에
부응코자 열심히 사고를 지켰고, 그로 인해 적상산사고는 조선 사고 중 유일하게 전쟁과 화재
를 만나지 않은 사고가 되었다.

1728년에는 괘불을 제작하였고, 1758년에는 감로탱을, 1772년에는 극락전 후불탱을 조성했으며, 1788년에 범종을 봉안해 제법 절다운 면모를 갖추었다. 1864년 적상산사고를 방문한 이면광(李
冕光)의 건의로 안국사를 중수했는데 그 기념으로 안국사중수기(重修記) 현판을 남겼다. 그 현
판에
'나라에서 선사 양각(璿史兩閣)을 지어 왕조실록과 왕실의 계보를 비장(秘藏)하고 승병들로 하
여금 수호하게 하였으므로 족히 믿고 근심할 것이 없다. 이 절의 이름을 안국(安國)이라고 붙
인 것과 이 절에 소속된 작은 절을 호국(護國)이라 한 것은 대개 뜻이 있는 것이다. 안국사라
고 이름한 것은 비록 작은 절이기는 하지만 나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큰일을 하는 절이기
때문이다'
란 구절이 있어 조선 조정의 안국사에 대한 높은 신뢰도와 절의 위상을 가늠케 한다.

1872년에는 사고의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改修)했고, 1902년 사고와 안국사를 크게 중수했다.
이때 안국사는 무주에서 가장 큰 절로 성장했으며, 1910년에는 극락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
전과 산신각을 두고 그 앞에 청하루와 승방(僧房)을 세웠다.
1910년 이후 적상산사고가 왜정에 의해 폐쇄되면서 당시 안국사 주지인 친일파 승려 이철허(李
澈虛)가 선원각을 경내로 가져와서 절 건물로 부려먹었다. 1949년 여순(麗順)반란 사건 때 공
비패거리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호국사가 전소되어 비석만 남게 되었으며, 1968년 주지 유정환(
柳正煥)이 선원각을 천불전으로 손질하고 퇴락된 청하루를 철거했다.

1988년이 되자 안국사는 강제로 정든 터전을 버려야 될 상황에 놓이게 된다. 바로 무주양수발
전소 상부댐 건설로 안국사와 적상산사고터가 수몰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땅한 자
리를 물색하다가 적상산 정상 남쪽에 자리한 호국사터로 결정하고 1991년부터 이전 공사에 들
어가 1993년에 마무리를 지었다.
1994년 범종각을 새로 지었고, 1996년에는 3도(전북, 경북, 경남) 접경지에 위치한 이유를 들
어 대화합의 범종을 조성했다. 그리고 1998년에는 주지 원행이 동양 여러 나라에서 수집한 불
상과 불교 유물을 전시하고자 성보박물관을 만들어 또 다른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또한 복
지 사업에도 손을 뻗쳐 노인복지시설인 '무우수마을'을 세웠고, 무주와 영동 지역 병원과 자매
결연을 맺어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비록 개발의 칼질에 제자리를 잃기는 했지만 구름이 창문으로 들어와 방문으로 나갈 정도로 하
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도 좋다. 마치 천상(天上) 세계에서 속세를 굽어보는 기분이랄까? 또
한 속세(俗世)와도 길게 거리를 두고 있어 아무리 끈질긴 번뇌(煩惱)라 한들 쫓아오다 졸도할
정도의 첩첩하고 고적한 산골이다. 차량으로 오면 접근은 다소 편하지만 길이 험해 운전에 각
별한 주의가 필요하며, 대중교통으로 갈 경우에는 내창마을에서 2시간 30분 정도 올라야 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영산회괘불도를 비롯하여 극락전과 호국사비, 목조아미타3
존불상, 범종 등 지방문화재 4점을 간직하고 있다. 그외에 조선 후기 승탑 4기와 선원각을 개
조한 천불전, 1730년에 만든 괘불대(掛佛臺) 등이 있어 고색의 향기는 풍부하며, 법당인 극락
전을 비롯해 삼성각, 지장전, 청하루, 천불전, 성보박물관, 안국선원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경내를 조촐히 메우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넓은 주차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직진을 하면 호국사란 이름의 건물이 나온다.
이 건물은 안국사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옛 가람을 기억하고자 세운 것으로 호국사는 정확히 주
차장 일대에 있었다.
여기서 왼쪽 숲을 살펴보면 조그만 기와집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 집은 호국사의 유일한 흔
적인 호국사비(전북 지방유형문화재 85호)를 머금은 비각이다. 경내를 다 둘러보고 나올 때 보
려고 아껴두었으나 그것이 그만 화근이 되어 깜박 지나치고 말았지. 어느 곳이든 그곳에 서린
볼거리는 다 봐야 직성이 풀리는데, 이렇게 중요한 것을 놓쳤으니 다음에 또 와야 되는 구실을
만들고 말았다. 이렇게 벽지인 곳은 다시는 오지 않아도 서운치 않을 정도로 싹 돌아봐야 되는
데 또 올 생각을 하니 막막하다. 물론 인연이 또 닿으면 알아서 찾아오겠지만 말이다.

주차장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청하루가 자리해 있다. 정
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누각 건물로 수몰된 옛터에 있던 누각을 1992년에 옮긴 것이다.
1층에는 사무실과 불교용품점이 있으며, 정면에 걸린 현판은 송석 이도익이 쓴 명필이다.
그리고 지나치기는 쉽지만 청하루 안에 옛 안국사의 현판이 여럿 있다. 1627년 상훈이 사고의
서적을 옮긴 일화를 4자로 요약한 '석실비장(石室秘藏)'과 '청하루(淸霞樓)','극락전(極樂殿)
','산신각(山神閣)' 등이 있으며, 석실비장은 1902년 절을 중수했을 때 유인철이 상훈의 이야
기를 듣고 쓴 것이다.


▲  안국사 성보박물관

청하루를 들어서면 하늘 높이 자리한 안국사 경내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왼쪽을 보면 성보박
물관이 있는데, 보통 성보박물관하면 그 절의 오래된 문화유산이나 부근 절에서 맡긴 문화유산
을 전시하기 마련이나 이곳은 그와는 관련이 없는 다른 나라의 불교 유물이 주류를 이룬다.

이곳에 담긴 유물은 주지인 원행이 15년 간 여러 불교국가를 여행하면서 수집하거나 기증 받은
것들로 이들을 한데 모아 1998년에 조촐하게 성보박물관을 열었다. 중원대륙과 왜열도, 인도,
티벳, 월남, 라오스, 파키스탄 등 동양의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다양한 시대의 불상, 불화, 불
교 유물, 다기류 등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어 조그만 세계불교박물관을 이룬다.


▲  성보박물관 중앙에 자리한 철불 - 중원대륙에서 가져온 불상인 듯 하다.
불상은 수입산이지만 그가 앉은 금동대좌는 국산이다.

▲  동양 불교국가에서 가져온 온갖 불상과 불화들 ▼



▲  안국사 범종각(梵鍾閣)

성보박물관 맞은편에 자리한 범종각은 1994년에 원행이 지은 것으로 조선 후기 동종을 비롯하
여 1996년에 만든 대화합의 범종과 운판(雲版)까지 담겨져 있다. 대화합의 범종은 덕유산을 둘
러싼 3도 중생들의 대화합을 바라는 뜻에서 만든 것으로 범종각 현판은 일중(一中)거사가 썼다.

▲  대화합의 범종

▲  안국사 범종 - 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88호

우람한 대화합의 범종과 달리 그 곁에 있는 범종은 매우 조그만하여 눈길이 잠깐 가다가 만다.
보통 사찰의 종은 크기에 상관없이 허공에 달려 있지만 이건 허공은 커녕 땅바닥에 나무 막대
기를 깔고 앉아있어 안그래도 작은 종, 더 작아 보일 수 밖에 없다. 허나 작은 고추가 맵다고
겉모습은 저래도 이래뵈도 안국사의 오랜 보물의 하나이다. 오히려 대화합의 범종보다 더 눈길
을 줘야 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 범종은 1788년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85cm, 구경 78cm의 작은 종이다. 4개의 유곽과 보살상
이 배치되어 있고, 종을 매달던 용뉴는 아예 사라져 바닥에 나무 막대기를 깔아 그를 받치고
있다. 그의 몸통에는 '乾隆五十三年(건륭53년) 戊申三月日(무신 3월일) 赤裳山安國寺大鍾(적상
산 안국사 대종)'과 '改鑄重(개주중)'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어 그의 탄생 시기를 알려준다.


▲  피부가 바랜 오래된 솥

극락전 뜨락에는 그 옛날 안국사 공양간에서 모락모락 밥과 국의 연기를 피어내던 솥이 놓여져
있다. 겉으로 보면 일광욕을 하며 팔자 좋게 보이지만 현대화된 공양간에 밀려 이제는 바깥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역시 범종처럼 나무 막대기에 의지해 자리해 있는데,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피부가 완전 붉게 변했다.
절을 품은 산도 붉은 피부의 바위, 혹은 진달래와 단풍으로 산이 온통 붉다고 하여 적상산인데
솥 역시 완전히 붉게 변했으니 그 역시 적상산의 기운을 받은 모양이다. 안국사의 오랜 유물인
만큼 낡은 피부를 깨끗히 닦아주고 성보박물관으로 옮겨 남은 여생 편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바다 건너에서 가져온 외국산 불상보다는 오랜 세월 안국사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나고 이곳의
음식을 책임진 저 솥이 더 가치가 높지 않을까?


 

♠  안국사 극락전 주변

▲  안국사 극락전(極樂殿)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42호  
(앞 계단 오른쪽에 남근석이 있음)

청하루를 지나면 바로 정면에 계단을 늘어뜨리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극락전과 시선이 마주
친다. 극락전 뜨락에는 빛바랜 솥과 아주 기가 막히게 생긴 남근석이 서 있어 잠시 얼굴을 붉
히게 하는데, 보통 절로 가는 길목이나 외곽에 남근석을 둔 경우는 봤어도 법당 앞에 둔 것은
처음 본다. 절의 승려나 신도의 상당수를 이루었을 여자 신도들이 법당에 들어가면서 무슨 생
각을 했을까~~?? 절에서 아예 파계를 장려하는 듯한 인상이다.
허나 저 돌이 원래부터 안국사에 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절을 이곳으로 옮길 때 주변
에서 수습한 것이 아닐까 여겨지는데, 왜 하필이면 법당 앞에 두었는지 그저 어리둥절하다. 성
기신앙의 일원이긴 해도 경내 핵심에 두기에는 좀 거시기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2중으로 구축된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은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
물이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1991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잘 다듬어진 자연석 축대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썼으며, 정면에는 꽃빗살문을 칸마
다 두었다. 정면과 좌측은 4분합이나 우측은 2분합으로 협칸의 구조가 특이하며 공포를 촘촘히
박은 다포(多包) 양식으로 외부는 3출목(出目)으로 되어있으나 내부는 4출목이다. 그리고 우측
측면을 보면 단청이 채색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재미난 설화가 전한다.


▲  건물 우측에 단청을 하다만 부분이 있다. (사진 중앙 부분)

극락전을 지은 안국사 주지는 단청 불사를 어찌해야 될지 고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얀 도포를 입은 노인이 찾아와 자신이 그리겠다고 하였다. 이에 기뻐한 주지승이 쾌히 승낙
하자 노인은
'내가 100일 동안 단청을 칠할테니 극락전에 하얀 천막을 치고 물 1그릇만 넣어주시오. 그리고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지 마시오!!'
신신당부를 했다.

범상치 않은 노인의 말에 '명심할테니 걱정 마시오!!' 답을 하고는 궁금증을 억지로 죽여가며
불사가 잘 마무리되기를 기도했다. 허나 겨우 하루를 앞둔 99일째가 되자 주지는 궁금해서 도
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딱 하루만 참으면 정말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인데 더 참다가는 제명에
못죽어 사리만 잔뜩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그만 살짝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지.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천막 안에 노인은 온데간데 없고, 하얀 학이 입에 붓을 물고 단청을 하
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크게 놀란 주지의 인기척에 학은 붓을 내던지고 사라졌다. 그
래서 윗사진처럼 건물 우측의 평방과 창방 일부가 단청이 되지 않은 것이며, 그 남아있는 부분
이 딱 하루치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전설은 강진 무위사(無爲寺)와 부안 내소사(來蘇寺)에도 전하고 있다. 모두
일정 기간 동안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하며 단청이나 그림을 그리다가 딱 하루를 앞두고
훔쳐보는 바람에 그림을 그리던 새가 도망가 일부가 채색되지 않았다는 스토리로 말이다. 이런
전설은 일을 맡은 사람의 개인 문제나 절 내부 문제로 도중에 중단된 것을 그럴싸하게 설화로
빚은 것으로 여겨진다.
무위사 같은 경우는 관음조(觀音鳥)가 그렸다고 하는데, 안국사 주지는 학을 좋아했는지 학으
로 대체했으며 예전에는 극락전에 학 그림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채색되지 않은 달랑 하루
거리의 분량을 그냥 두고 있는 것은 그 설화의 증거물로 내세우는 동시에 학으로 상징되는 노
인이 그림을 그려준 절이라며 속세에 요란하게 홍보하려는 일종의 꼼수로 봐야 될 것이다.
어차피 전체도 아닌 일부에 불과하니 그냥 둬도 무리는 없겠지. 그래서 1% 부족한 모습으로 있
게 된 것이다. 안좋은 이유로 단청이 중단된 것을 전화위복으로 삼은 안국사 주지의 지혜가 참
으로 돋보인다.


▲  극락전 불단을 장식한 목조아미타3존불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01호

화려하기 그지없는 극락전 불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세지보살(勢至
菩薩)이 아미타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나무로 만들어 개금을 한 것으로 불상은 매우 조
그만하지만 나름 미소를 띄우느라 애를 쓴다. 이들 3존불의 중심인 아미타여래는 통견의(通肩
衣)를 입고 있고, 소매자락이 발가락을 덮고 있는데, 높이 67cm, 무릎폭 43.5cm, 어깨폭 30cm
내외이다.

좌측에 자리한 관음보살은 옷주름이 본존불과 비슷하며, 머리에 쓴 보관(寶冠) 밑에 검은 머리
칼을 살짝 표현했는데, 귓바퀴를 1번 감아내려 어깨 위로 흘러내리게 했다. 그의 높이는 63cm,
무릎폭 35.5cm, 어깨폭 26cm 내외이다.
우측에 자리한 세지보살은 관음보살과 손모양이 대칭적이고 불의형(佛衣形) 법의를 입고 있는
데, 대체로 관음보살과 비슷한 모습이다. 높이는 61cm, 무릎폭 36.5cm, 어깨폭 24cm 정도이다.

이들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약간 구부정한 자세와 굵고
짧아진 목, 납작해진 턱과 각진 얼굴, 오똑한 코와 미소, 자연스럽게 처리된 옷주름, 사실적
표현의 손 등으로 볼 때 17~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들 뒤로 화사한 색채
의 후불탱이 병풍처럼 든든히 자리해 있는데 원래는 1772년에 제작된 탱화가 있었으나 관리소
홀로 그만 도난을 당해 1994년에 혜원(慧園)이 그린 아미타후불탱으로 땜빵한 것이다. 법당의
후불탱화면 꽤나 보는 눈이 많아 만지기도 어려울텐데 그것을 극복하고 탱화를 떼어가다니 참
대단한 도둑이 아닐 수 없다. 혹 신이 실수로 가져간 것은 아닐까?

  ◀  극락전 뒷쪽, 괘불이 담긴 길쭉한 상자
극락전 내부에는 1965년에 제작된 신중탱(神衆
幀)과 1995년에 만든 청동금고(靑銅金鼓)가
다. 그리고 불단 뒷쪽으로 가면 길쭉한 나무

자가 눈에 들어올 것인데, 과연 무엇이 들었

래 상자가 저래도 긴 것일까?

그 안에는 바로 18세기에 제작된 영산회괘불도
(靈山會掛佛圖)가 잠들어 있다. 괘불은 석가탄
신일이나 영산재(靈山齋) 등 아주 특별한 날에
만 만날 수 있는 귀한 존재로 평소에는 친견이
불가능하다.
천하에 200곳이 넘는 오래된 절집을 찾아다닌
본인도 괘불을 본 횟수는 겨우 10번도 되지를
않는다. 그만큼 만나기가 힘든 존재로 1년에
고작 한손에 꼽을 정도로 외출을 하며 대부분
의 시간은 괘불함이나 금고 등에 꼼짝없이 갇
혀있어야 된다. 그것이 괘불의 운명이다.

안국사 영산회괘불도는 보물 1267호로 석가가 설법을 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그 주위로 다보
여래(多寶如來)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등이 자리해 있다. 괘
불의 길이는 10.75m, 폭은 7.2m의 큰 그림으로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발원하고자 만들
었으며, 18세기 중반에 경남 고성 운흥사(雲興寺)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비구 의겸(義謙)을 비
롯해 5명의 승려가 제작했다.
제작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화기(畵記)에 '?? 6년'이란 기록이 있는데, 의겸이 활동하던 시
절에 '?? 6년'이라 하면 1728년(옹정 6년)과 1741년(건륭 6년) 밖에는 없으며, 요즘은 1728년
을 제작 시기로 삼고 있다. 1792년과 1809년 그림을 수리했으며, 운흥사 괘불과 부안 개암사(
開巖寺) 영산회괘불탱과 대체로 비슷하다.

이 괘불은 가뭄 때 밖으로 꺼내 기우제를 올리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이야기가 있어 가뭄이 심
하면 추가적으로 외출을 시켜주었으나 요즘은 석가탄신일과 특정 행사 때를 제외하고는 외출을
안시켜 준다.
비록 괘불은 못봤지만 괘불이 담긴 괘불함은 극락전에 보관하고 있어 그 함에 기도를 하는 사
람도 많으며, 높이 10m가 넘는 그 큰 그림이 과연 저 안에 다 들어갈까 싶을 정도로 함이 작아
보인다. (괘불함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안국사 천불전(千佛殿)

극락전 우측에는 천불전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다른 불전과 달리 조금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이는 원래 적상산사고의 선원각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적상산사고가 버려진 이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선원각을 친일파 주지 이철허가 경내로 가져와서
사찰 건물로 부려먹었으며 나중에 천불전으로 바뀌었다. 조선의 사고 가운데 유일하게 화마(火
魔)의 희롱을 받지 않은 건물로 바로 앞에서 보면 1층으로 보이지만 엄연한 2층 구조이며, 밑
은 창고, 위는 천불전으로 쓰이고 있다. 정면 가운데 칸에 강암 송성용이 쓴 천불전 현판이 걸
려있고 좌우 측면에는 내부에 채광을 공급하는 교창이 있다.

내부에는 1995년에 조성된 석가불과 문수/보현보살을 비롯해 석고로 만든 하얀 피부의 조그만
불상 1,000기가 자리해 장관을 이룬다. 유일하게 남은 사고 건물이지만 변형이 심해 지정문화
재의 지위까지는 얻지 못했다.


◀  안국사 지장전(地藏殿)

극락전 옆에 자리한 지장전은 1992년에 원행이
세운 것으로 목조지장보살좌상과 도명존자(道
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안국사 삼성각(三聖閣)

천불전 뒤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는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92년에 원행이 옮겨 세웠으며, 우리 귀에 매우 익은 산신(山神)과 칠
성(七星),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의 보금자리로 그중 칠성을 담은 칠성탱은 1899년 김천 봉
곡사(鳳谷寺)의 부속암자인 극락암(極樂庵)에서 우송 상수(友松 爽洙)가 조성한 것이다. 그가
그린 칠성탱은 무주읍내 북쪽에 있는 북고사(北固寺)에도 있다.


▲  삼성각에 봉안된 칠성탱  (1899년에 우송 상수가 그린 것임)

▲  안국사 부도군(浮屠群)

안국사를 이렇게 둘러보고 호국사비와 천불전 내부를 살피지 못한 아쉬움과 다음 답사지에 대
한 기대를 나란히 품으며 절과의 짧은 인연을 정리한다. 그 2개를 못봤으니 다음에 또 와야되
는 빌미를 만든 것이다.

다음 답사지는 적상산사고인데, 사고로 정신없이 내려가다가 중간에 오른쪽으로 빠지는 산길을
만났다. 일행 몇몇이 그 산길로 들어가길래 '그곳에 뭐가 있나' 싶어 따라 들어가니 그 숲속에
는 안국사의 숨겨진 보물인 승탑(僧塔, 부도) 4기가 푸른 이끼 옷을 걸치며 우리를 맞이한다.

이들 승탑은 석종형(石鐘形) 탑으로 탑신(塔身)에 고맙게도 조성 시기와 탑의 주인이 적혀있다.
모두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이중 가장 오래된 것은 팔각원당형의 지붕 옥개석을 지닌 청운당
사리탑과 그 옆에 머리 부분이 여의두문(如意頭紋)의 보륜(寶輪)으로 이루어진 청운당 봉골탑(
奉骨塔)으로 1717년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그 옆에 꼭대기에 연화보주를 단 승탑은 보운당(寶雲堂)의 넋이 서린 사정탑(思正塔)으
로 1753년에 조성되었으며, 그 옆의 것은 월인당(月印堂)의 영골탑(靈骨塔)으로 1750년에 세워
졌다.

승탑들이 모두 높이 1.3m 미만의 조그만 탑으로 불교의 쇠퇴기이다 보니 신라나 고려처럼 장엄
한 부도는 기대하기 힘들다. 그나마 승탑 주인의 제자들이 정성을 다해 저 정도로 만든 것이다.
이들은 딱히 이정표가 없어 지나치기 쉬우며, 이들도 원래 수몰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  호젓한 분위기의 안국사 숲길 (안국사에서 속세 방향)


 

♠  조선 왕실의 보물 창고, 조선 후기 주요 사고(史庫)의 하나였던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 전북 지방기념물 88호

적상호 서쪽 언덕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2층 기와집 2동이 적상호를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근
래에 복원된 적상산사고로 원래는 적상호에 있었다. 양수발전소 건립으로 이들 보금자리가 강
제로 묻히게 되자 사고터 주춧돌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와 선원각과 실록각을 복원했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 광해군 시절, 우리의 옛 땅인 만주에 또아리를 튼 후금(後金)이 나날이 강
성해지면서 북방에 자리한 묘향산사고에 담긴 왕실 서적과 보물의 안위가 크게 위협을 받자 다
른 장소로 실록을 옮겨야 된다는 의견이 나왔다. 마침 순안어사 최현과 무주현감 이유경이 적
상산을 강하게 추천하자 사관을 보내 현지를 살펴보게 했는데, 아주 긍정적인 답을 받았다. 그
래서 즉시 적상산성을 수리하고 1614년 실록전을 세우면서 적상산사고가 탄생했다. 1618년 9월
묘향산에 있던 실록을 이곳으로 옮기기 시작하여 1633년 마무리를 지었다.

1641년에는 선원각을 세워 선원록(璿源錄)을 봉안하면서 완전한 사고가 된다. 1636년 병자호란
으로 강화도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의 실록이 손실되자. 이를 보완하고자 적상산 사고에 담긴
실록을 참조하여 작업을 했다. 이때 3도 유생 300명이 동원되었다.
적상산사고를 수호하고자 1643년 왕명으로 호국사를 세워 안국사와 함께 사고 수비에 전념토록
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안국사 승려 상훈이 사고의 서적을 안렴대로 대피시키기도 했다.

1872년 실록전과 선원각을 개수했으며, 1902년에 다시 개수를 벌였으나 1910년 왜정이 적상산
사고에 담긴 모든 서적을 서울로 가져가면서 사고는 방치되고 만다. 선원각은 안국사 주지 이
철허가 경내로 가져가 불당으로 부리면서 살아남았으나 나머지 건물은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만큼 완전하게 방치된 것이다.

사고에는 선원각, 실록전을 기본으로 하여 승장청(僧將廳), 군기고, 화약고, 수사당, 문루 등
이 있었으며, 그 흔적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1992년 무주양수발전소 건립으로 그 자리마저 빼앗
기게 된다. 하여 지금의 자리로 흔적을 옮겼고, 1997년에 선원각, 1998년에 실록각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적상산사고는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문화재청의 지정 명칭은 '
적상산사고지 유구(遺構)'이다.

선원각과 실록각은 2층식 창고 형태로 지어졌다. 1층은 허공에 떠 있는 형태로 기둥이 2층을
받치고 있으며, 2층이 바로 서고이다. 이는 혹시나 문을 두드릴지 모를 화마의 방문이나 습기
의 침투, 이 땅을 망치고 있는 쥐들의 공격을 막고 서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함이다. 이
런 식의 창고는 고구려(高句麗)의 창고 건물인 부경에서 비롯되었는데, 우리나라는 물론 왜열
도까지 전파된 국제적인 건축 양식이다.

건물 2층에는 조선왕조실록과 사고, 무주 고을에 관한 설명문과 디오라마, 모형도, 유물 등이
담겨져 있는데, 관람을 원할 경우 적상산사고를 관리하는 문화재해설사한테 요청하면 된다. 건
물은 모두 새것이라 고색의 기운이 피어나기에는 아직도 멀었지만 이곳에서 푸른 물결의 적상
호가 바라보여 호수에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에 마음이 시원해진다.

▲  선원각(璿源閣)

▲  실록각(實錄閣)

▲  실록각 1층 마루

▲  적상산사고 정문

적상산사고를 간단하게 둘러보고 버스에 올라타 적상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무주머루와인동굴
로 이동했다. 이후 내용은 글의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한다.

※ 적상산 (적상산성, 안국사, 적상산사고) 찾아가기 (2016년 12월 기준)
① 무주까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 대전복합터미널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4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광주에서 무주행 직행버스가 1일 6~7회, 전주에서는 1일 14회 떠난다.
* 영동역(경부선)에서 무주행 군내버스가 1일 12회 운행한다.
② 현지교통
* 무주터미널에서 내창행 군내버스 이용 (1일 2회, 11:40, 16:30분)  내창에서 적상산사고까지
  도보 2시간 10분 (무주터미널에서 안국사까지 택시로 접근 가능)
* 무주터미널에서 적상, 안성, 장계, 안천 방면 군내버스(20~50분 간격)를 타고 사천리(서창탐
  방지원센터 입구)에서 하차. 적상산 안국사까지 등산 약 2시간 20분 소요 (사천리→서창탐방
  지원센터→장도바위→서문터→향로봉→안국사
  <등산 출입 시간(서창탐방지원센터 기준) 4~10월은 4~15시, 11~3월은 5~14시, 그 외에 시간
  은 출입 불가>
③ 승용차 (안국사까지 접근 가능)
* 대전~통영고속도로 → 무주나들목을 나와서 무주방면 우회전 → 무주1교차로에서 우회전 →
  적상산입구에서 우회전 → 북창리 → 적상호 → 적상산 안국사

* 적상산 주차비 : 승용차 2,000~5,000원, 버스 6,000~7,500원 (안국사 주차장은 무료)
* 안국사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산184-1
(☎ 063-322-6162)
* 적상산성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괴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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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12월 1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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