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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2.08 무서운 이름을 지녔지만 아늑한 분위기를 지닌 고색의 절집, 김제 모악산 귀신사
  2. 2016.08.01 피서 성지 순례 ~~~ 경기 북부 제일의 명품 계곡, 포천 백운산 백운계곡 (흥룡사)

무서운 이름을 지녔지만 아늑한 분위기를 지닌 고색의 절집, 김제 모악산 귀신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김제 모악산 귀신사 '

귀신사 대적광전
▲  귀신사 대적광전

귀신사 3층석탑

귀신사 승탑(부도)

▲  귀신사 3층석탑

▲  귀신사 승탑(부도)


 

겨울 제국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인 3월의 첫 무렵에 전북 전주와 김제 지역을 찾았다.
날 전주(全州)에서 친한 후배의 여동생이 시집을 가게되서 그의 요청에 따라 하객 입장으
로 가게 된 것인데 그렇다고 그 여동생과 아는 사이도 아니다. 아무리 후배의 피붙이라고
해도 엄연히 모르는 사람이라 여러 날을 두고 궁리하다가 의리상 가주기로 했다.

서울이 본거지인 신부측에서는 하객 수송을 위해 관광버스 2대를 대절했다. 1대는 가족과
친척들을, 다른 1대는 친척 이외에 사람들을 태웠는데, 8시 반에 발산역(5호선)에서 출발
한다고 하여 아침 일찍 길을 서둘렀다. 허나 일부가 늦게 오면서 9시가 좀 지나서야 버스
는 두툼한 바퀴를 움직였다.
신부 예식 시간은 13시로 교통 정체가 없는 이상은 3시간 내외면 충분히 전주에 도달한다.
다행히 별다른 정체는 없어서 정안휴게소 휴식을 포함하여 3시간 20분 정도 걸렸으며,
배 집안에서 마련한 떡과 귤, 과자, 음료수로 아침을 때웠다.

전주 혼인식장(전주역 부근)에 이르니 주말이라 꽤 북새통이다. 아직 시간이 있어 푸짐하
게 나온다는 점심을 잔뜩 기대하며 시간을 억지로 흘려보내다가 시간이 되자 준비한 축의
금을 내고 혼인식을 관람했다. 허나 나의 돌머리 속에는 혼인식은 온데간데 없고 온통 점
심 생각 뿐이었다.
드디어 지루한(?) 예식이 끝나자 윗층 피로연(披露宴) 장소로 이동했다. 점심은 뷔페식으
로 찬이 매우 풍성해 나의 마음을 너무 기쁘게 했는데, 뷔페의 기본 메뉴인 밥, 고기,
, 나물, 채소류를 비롯해 온갖 초밥과 튀김, , 탕과 국수류(설렁탕과 우동, 잔치국수
), 다양한 디저트, 식혜와 맥주 등 먹을거리가 잔뜩 깔려 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원없이 먹고 싶었으나, 위 용량이 한정되어 있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 주어
진 위의 공간을 적절히 활용하여 여러 먹거리르 섭취했고, 저녁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배가 채워지자 두 손에 꽉 쥐고 있던 수저를 비로소 놓아주었다. (결국 다음날 아침에 탈
이 났음 ㅠㅠ)

점심을 먹고 나니 어느덧 14시 반이 넘었다. 후배는 15시에 하객을 태우고 귀경한다며 어
여 타라고 했으나 오랜만에 전주까지 온 거 그냥 올라가면 좀 섭하다. 이미 정처(定處)
정해둔 상태라 아쉽지만 여기서 그들과 작별을 고하며 단독 행동에 들어갔다.


 

♠  이름도 무시무시한 귀신사를 찾아서

▲  청도리에서 귀신사로 가는 마을길

전주에서 정해둔 정처는 전주시내 남쪽에 있는 남고산성(南固山城)과 금산사(金山寺)로 넘어
가는 길목에 자리한 김제 귀신사이다. 마음 같아서는 다 보고 싶지만 해도 얼마 남지 않았고
서로 거리도 멀어 무조건 하나를 택해야 된다.
후배 가족과 작별하고 전주역 정류장에 발을 멈출 때까지만 해도 전주에 왔으니 전주의 명소
를 보는 것이 어울릴 듯 싶어 남고산성에 크게 무게를 두었었다. 허나 시간이 벌써 16시 직전
이라 지금 열심히 가더라도 그곳에서 강제로 일몰을 맞게 된다. 땅꺼미가 짙어지면 야간 렌즈
나 삼각대가 없는 이상은 사진 담기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남고산성을 내버리고 전주시내에서
좀 떨어져 있지만 많이 걸을 필요가 없는 귀신사에 무게를 100% 얹혔다. (전주 경계에서 겨우
2km 거리임)

전주역에서 귀신사를 가려면 전주시내버스 79(전주역금산사)을 타면 된다. 배차간격은 거
25분 정도로 전주시외터미널과 전주고속터미널, 전주한옥마을, 풍남문, 효자동, 삼천동을
거쳐 강원도에 버금가는 고개를 하나 넘으면 행정구역은 전주에서 김제로 갈리면서 귀신사가
있는 청도리(淸道里)에 이른다.

모악산(母岳山) 북서쪽 자락에 안긴 청도리는 조선시대 때 관리와 나그네들의 숙식을 제공하
던 국립 숙박시설, 청도원(淸道院)이 있던 곳이라 하여 청도원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
은 절 밑에 형성된 마을인 사하촌(寺下村)으로 절은 바로 마을 북쪽에 자리해 있으며 오래 걸
을 것도 없이 청도리 버스정류장에서 도보 4~5분이면 충분히 닿는다.

청도리에서 귀신사로 가는 길은 크게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청도리 정류장에서 농가와 경작지
사이로 난 마을길(청도5)을 따라 가는 것이고, 다른 것은 청도리 정류장에서 북쪽으로 180m
떨어진 귀신사입구에서 서쪽 길(청도6)로 방향을 튼다. (전주에서 넘어온 경우는 우회전,
김제는 좌회전) 후자의 경우는 차량을 위해 포장도로가 닦여져 있으며 나는 버스로 왔기 때문
에 정류장과 바로 이어진 마을길을 이용했다.
이제는 흩어진 전설이 되버린 충북 단양(丹陽)의 외가집을 가는 기분처럼 시골 분위기가 그윽
하게 깔린 마을길은 아직 겨울 제국의 치하라 황량하기 그지 없지만 봄의 기운이 슬며시 들어
와 조금씩 녹색 기운을 뿌리며 아직은 거대한 겨울 제국에 대항한다.


▲  귀신사 경내로 인도하는 아랫 돌계단

마을길 끝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진 헝클어진 돌계단이 언덕에 기대어 있다. 그 계
단을 오르면 경내 주차장에 이르는데 돌계단 밑에는 2개의 돌기둥이 우두커니 서 있다.
속세의 민가는 이 계단 앞에서 끝이 나면서 자연히 속세와 절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는데
속세의 일부가 되버린 계단 앞은 원래 귀신사의 영역이었다. 옛날에는 경내 외곽에서 중심으
로 인도하는 계단이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절이 참 작구나 싶겠지만 귀신사의 왕년의 위엄을
잘 보여주는 존재로 세월의 줄기찬 태클에 조금은 비뚤어진 모습을 하게 되었다. 허나 지금의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다. 고색의 때가 잔뜩 묻어나 있고, 계단의 기능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괜히 복원한답시고 딱딱 맞춘다면 그 모습도 꽤 어색할 것 같다.


▲  귀신사 경내로 인도하는 윗 돌계단

아랫 돌계단을 올라 주차장을 지나면 윗 돌계단이 나온다. 아랫 계단과 달리 질서정연한 모습
으로 고색의 기운이 넘치는 그 계단 너머는 귀신사의 중심으로 주요 건물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귀신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2번째 돌계단에서 바라본 청도리(청도원) 마을과 모악산

전북 서부의 주요 명산(名山)으로 추앙받는 모악산(794m) 북서쪽 자락에 귀신사(歸信寺)가 포
근하게 자리를 닦았다. 포근한 분위기와 달리 절 이름은 천하에서 가장 후덜덜한 이름으로 사
연을 모르는 이들은 다들 그 귀신(鬼神)인줄 알고 놀라워하거나 오금을 지려한다. 혹자(或者)
는 귀신이 나오는 절로, 다른 혹자는 귀신을 모신 사당 성격의 절로 여기기도 한다. 허나 이
름을 이루고 있는 한자는 그 귀신이 아닌 믿음이 돌아온다는 뜻의 귀신(歸信)이니 괜히 겁을
먹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귀신사의 창건시기에 대해서는 백제 후기 창건설<법왕(法王, 재위 599~600) 시절로 여겨짐>
과 신라 중기 의상대사(義湘大師) 창건설이 있다.
백제 후기 창건설은 17세기에 활약한 자수무경(子秀無竟, 1664~1737)이 쓴 '무경집(無竟集)'
에 백제의 원당(願堂)으로 창건되었다고 나오며, 경내 뒤쪽에 자리한 석수(石獸)는 백제 왕실
의 자복사찰(資福寺刹)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란 견해가 있다. 게다가 인근에 백제 후기 사
찰인 금산사가 있어 비슷한 시기에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열어두고 있다.
그리고 신라 중기 창건설은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것인데 당시 이름은 국신사(國信寺.
또는 國神寺)였다고 한다. 허나 정작 백제 때 유물은 없으며, 3층석탑이 창건 당시(6~7세기)
에 것이라고 우기고는 있으나 탑의 양식을 보아 고려 때 것으로 여겨진다. 그 외에 탑과 석등
, 주춧돌 일부가 신라 후기 것이다. 또한 최치원(崔致遠, 857~?)이 이곳에 머물며 당나라 법
장화상의 일대기를 적은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신라 후기(8
기 이후)에 법등(法燈)을 켠 것으로 여겨진다.

1120년대에는 원명국사(圓明國師 1090-1141)가 절을 중창했는데, 그 시절에는 구순사(口脣寺
또는 狗脣寺)로 불렸다고 한다. 이는 절 주변이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구순혈형(狗脣穴形)
지형이라 하여 유래된 것이라고 하는데 확실한 것은 없다.
고려 후기인 1376년 왜구(倭寇) 패거리 300명이 귀신사에 들어앉아 갖은 민폐를 부리며 머물
렀는데 이를 병마사(兵馬使) 유실(柳實)이 격퇴했다. 이를 통해 수백 명이 머물 정도로 건물
이 즐비했던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왕년에는 부속 암자만 8개에 이르렀다고 하며,
적광전은 2층 규모였다고 하니 금산사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

허나 조선으로 천하가 바뀌면서 억불숭유(抑佛崇儒)란 장애물 앞에 절은 심히 좌절을 겪게 된
. 생육신(生六臣)의 하나인 김시습(金時習)이 이곳을 방문해 지은 '귀신사허(歸信寺墟)'
시문에 '~~탑은 무너지고 비석은 끊어져 있다'는 내용이 있어 절의 우울한 상태를 알 수 있으
, 시문 제목에 귀신사란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고려 후기나 조선 초에 이름이 바뀌었
음을 알려준다.

임진왜란 시절에는 승병(僧兵)을 양성했다고 전하며 정유재란(1597) 때 절이 모두 파괴되어
쓰러진 것을 1601년 이곳을 지나던 염화, 신허가 전각을 여럿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1624년 승려 덕기가 대대적인 중창을 벌였는데, 이때 옛터가 아닌 새로운 곳에 중창을 했다고
한다. 하여 3층석탑과 석수가 있는 경내 북쪽 언덕이 옛터의 중심지로 여겨진다. 대적광전에
있는 소조비로자나3존불을 비롯하여 미륵보전, 시왕전, 천왕문 등이 이때 세워졌으며, 귀신사
가 남긴 가장 오래된 문서인 상량문(上樑文)1633년에 작성되었는데 이를 통해 덕기의 중창
불사가 1633년에 일단락 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승려 도헌(道軒)이 나한전이 없음을 안타
깝게 여겨 나한전(羅漢殿)을 짓고, 나한전의 주요 식구 25위를 봉안했다.

1657년 비바람으로 전각이 퇴락하자 1657년 대웅전 등을 중수했으며, 1707년과 1715년에 두감
이 대웅전과 팔상전을 새로 짓고 1716년에 팔상전에 불상을 봉안했다. 1873년에는 춘봉(春峰)
이 중창했으며, 1884년 명부전을 중수하고 1914년에 명부전 기와를 개수했다. 그리고 1927
에 명부전, 1934년에 대적광전을 수리했으며, 2005년에 대적광전을 해체/수리했다.

▲  귀신사 3층석탑

▲  대적광전 소조비로자나3존불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명부전과 영산전, 요사 등 약 7~8동의 건물이 있
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과 소조비로자나3존불을 비롯해 3층석탑,
, 승탑(부도)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다. 특히 부도는 경내에서 300m나 떨어진 마을 남쪽 밭
두렁에 홀로 있어 귀신사의 영역이 이곳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며, 경내 서쪽에는 신라 후기부
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를 망라한 석탑과 석등의 부재(部材), 건물의 주춧돌 등이
널부러져 있고 경내 직전의 돌계단 2개도 세월에 제법 숙성된 것이다.

모악산 북서쪽 자락에 안겨 있지만 마을 바로 뒤쪽에 자리해 있어 산사(山寺)의 기운은 조금
떨어진다. 허나 옛터인 경내 북쪽 언덕에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조금은 무시무시한 이름
과 달리 고즈넉하고 조촐한 분위기로 외형만 지나치게 추구하는 상당수의 큰 절집과 달리 은
근히 정감이 간다. 또한 비구니 사찰이라 경내가 정갈하고 깔끔하기 그지 없다.

지금은 금산사보다 별볼일 없는 신세이지만 왕년에는 금산사보다 훨씬 잘나갔던 귀신사, 이곳
도 제대로된 학술/발굴조사를 벌여 경내 북쪽과 청도리 마을, 경작지 일대에 잠들어있는 귀신
사의 숨겨진 과거를 싹 들추었으면 좋겠다.

김제 귀신사 찾아가기 (201711월 기준)
대중교통 (전주 경유)
* 용산역, 영등포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순천역, 여수엑스포역에서 전라선
  열차를 타고 전주역 하차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1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는
  30분 간격으로 떠나며,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다닌다.
* 인천, 고양(화정, 백석), 의정부, 안양, 부천, 성남, 수원, 용인, 평택, 천안, 청주, 대전
  (복합, 유성, 대전청사), 군산, 남원, 광주, 목포, 순천, 대구(서부, 동대구), 경주, 포항,
  울산, 부산(사상, 노포동), 창원(마산), 진주에서 전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전주역 광장과 전주시외터미널, 전주고속터미널에서 전주시내버스 79번을 타고 청도리 하차
  , 도보 5
대중교통 (김제 경유)
* 용산역,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 광주송정역, 나주역, 목포역에서 호남선 열
  차를 타고 김제역 하차 <고속전철(KTX, SRT) 이용시 익산역이나 정읍역에서 무궁화호나 새
  마을호, 누리로 열차로 환승>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김제행 고속버스가 17, 동서울터미널에서 김제
  행 직행버스가 16회 떠난다.
* 인천, 성남, 대구(서부)에서 김제행 직행버스 이용
* 김제역(역전치안센터 건너편)과 김제시외/고속터미널 건너편에서 금산사를 거쳐 청도리로
  가는 김제시내버스 5번이 16회 있다. (김제역 기준 6:40, 8:18, 12:13, 14:33, 15:33,
  17:18) 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금산사로 가는 5, 5-1번 시내버스(120여 회 운행)를 타고
  금산사에서 전주 79번 버스로 환승하기 바란다.
승용차 (경내 밑에 주차장 있음)
* 호남고속도로 금산사나들목을 나와서 금산사 방면 712번 지방도 성암4거리에서 좌회
  월평4거리에서 좌회전 팥정이4거리에서 좌회전 백오동3거리에서 좌회전
  도리(귀신사입구) 귀신사

* 입장료와 주차비 없음
* 소재지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81 (청도640, ☎ 063-548-0917)


 

♠  귀신사 대적광전, 명부전 주변

▲  선방(禪房)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요사(寮舍)

귀신사 경내로 들어서면 흙이 잔잔히 입혀진 뜨락이 펼쳐지면서 바로 정면에 대적광전이 진하
게 모습을 드러낸다. 뜨락 오른쪽에는 요사(선방)가 있고, 왼쪽에는 석탑과 석등의 부재,
돌을 수습한 공간과 영산전이 있으며, 대적광전 좌측에는 명부전과 석수, 3층석탑으로 인도
는 계단이 있다.

요사는 정면 5,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승려의 생활공간이다. 그 북쪽에는 장독대가
식을 숙성시키며 질서정연하게 들어서 있는데 잘익은 김치나 고추장 생각을 참 간절하게 만
. 저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살짝 뚜껑을 열어 속살을 들춰내고 싶다.
그리고 요사 남쪽에는 견공(犬公)의 보금자리가 있는데, 하얀 털의 백구이다. 처음에는 조용
있더니만 그들을 넌지시 바라보니 은근히 멍멍거리며 구박을 준다. 나는 밤손님이나 화마(
火魔)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분 나쁘게 생긴 편도 아닌데 왜 그리 눈치를 주는 걸까? 마음 같
아서는
확 몸보신용으로 때려잡고 싶지만 나는 이곳을 잠깐 스쳐 지나가는 존재라 그냥 눈감
아주었다
. 마침 요사에서 비구니가 나와 그들을 다독거리니 그제서야 꼬랑지를 내리고 눈을
내린다
.

◀  숙성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귀신사 장독대들


▲  귀신사 영산전(靈山殿)

대적광전 우측에 자리한 영산전은 정면 3, 측면 3칸의 주심포 양식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
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건물이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그의 1급 제자인 아난존자(阿難尊者)와 가섭존자(迦葉尊者)가 양쪽에 자리
해 있으며, 그 좌우로 각각 8명씩 16명의 나한이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각각 1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그들 끝에는 인왕상(仁王像)이 금강역사 못지 않은 위엄 넘치는 포즈로 혹여
문을 두드릴지 모를 악의 기운을 경계한다.


▲  영산전 석가불과 아난/가섭존자

▲  16나한의 우측 나한(羅漢)과 인왕상

▲  16나한의 좌측 나한(羅漢)과 인왕상

    장식용으로 놓인 동그란 석조(石槽)
보름달을 닮은 이쁘장한 석조에는 물이 한가득
담겨져 있다. 절에 왔으면 물 한모금 마셔줘야
되지만 떠마실 바가지도 없고, 수질도 세속화된
종교 마냥 탁해보여 마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여 이곳에선 물을 마시지 못했으니 이런걸 보
고 그림의 떡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  경내 서쪽에 수습된 석탑과 석등 잔재, 건물 주춧돌 무리들

영산전 뜨락에는 석탑과 석등의 잔재, 건물 주춧돌 등이 덩어리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신라 후기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넓은 시대를 아우른 것들로 귀신사의 잃어버린 영화를 잘 보
여주는 유물들이다.
세월의 흐름이 귀신사에게는 꽤나 거칠었는지 숱하게 파괴되고 중창됨을 겪으면서 기존의 많은
건물과 석물들이 가루가 되어 저렇게 암담한 신세가 되었다. 이들 피부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역력하며 깨진 탑재를 모아 한쪽에 엉성하게 석탑을 엮어 놓았다.

▲  길다란 주춧돌에 피어난 1송이 연꽃무늬

▲  우리나라처럼 두 동강이 난 돌덩이
(무엇에 쓰던 물건인고?)

 ◀ 조각난 탑재를 모아서 엮은 소소한 석탑
탑 옥개석에는 중생들이 소망을 담아 심어놓은
조그만 돌탑들이 무럭무럭 뿌리를 내렸다.


▲  귀신사 대적광전(大寂光殿) - 보물 826

귀신사의 법당인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의 거처로 정면 5,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 건물과 그 안에 담겨진 소조비로자나3불좌상은 귀신사의 왜소함
을 능히 커버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값어치가 높다.
경내의 다른 건물과 달리 단청이 입혀져 있지 않아 수수하면서도 좀 이질적인 모습을 보여주
고 있는데 '귀신사 중수기'에 따르면 원래 2층이었다고 하며, 17세기 초에 1층으로 다시 지었
다고 한다. 2층 이상의 불전(佛殿)은 그리 흔치가 않은 것인데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다 수염
을 태워먹던 시절부터 2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귀신사가 결코 예사롭지 않은 절임을 느끼
게 한다.

정면 가운데 칸(어칸)이 좌우 칸보다 조금 넓은 형태로 이는 조선 후기 건축물에서 많이 나오
는 모습이다. 가운데 칸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했고, 나머지는 어칸보다 좀 작게 해서 창문처
럼 한 것이 특징이다. 정면 3칸 문에는 빗살무늬 창호를 달았고 오른쪽과 왼쪽 끝 칸은 벽으
로 만든 것 또한 그만의 특징이다. 기둥 지붕에는 공포 덩어리가 장식되어 있는데 기둥과 기
둥 사이에도 1개씩을 짜놓아 다포(多包) 양식임을 알 수 있으며, 공포도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아 나무의 원초적인 빛깔을 간직하고 있다.

건물 내부의 가구(架構)는 천정을 높이고자 고주(高柱)의 몸 중간에 보를 꽂아 그 끝이 평주(
平柱) 위에 얹히게 했고, 그 보 위에 다시 보를 얹어 고주 위에 얹혔다. 이는 봉안된 불상이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불상 머리 옆에 보가 지나가게 되었는데, 이는 원래 2
(중층)이었던 것을 1층으로 다시 지을 때 고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1823년과 1934
에 중수를 벌였으며, 2005년 해체/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17세기에는 이 건물과 비슷한 구조의 다포계 맞배지붕 불전이 많이 지어졌는데, 논산 쌍계사(
雙磎寺) 대웅전, 고창 선운사(禪雲寺) 대웅보전, 경주 기림사(祇林寺) 대적광전이 대표적이다.
귀신사 대적광전은 이들보다 규모는 좀 작지만 내부에 고식이 남아있고 전면을 벽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  소조비로자나3존좌상(塑造毘盧舍那尊坐像) - 보물 1516

귀신사에 왔다면 이곳의 꽃이자 꿀단지인 대적광전 내부는 꼭 둘러봐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처음에는 조그만 불상이겠지 싶어 건물 좌측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으나
내 머릿 속에 그려진 조그만 불상은 온데간데 없고 허벌나게 큰 불상이 하나도 아닌 3개씩이
나 나란히 대좌(臺座)에 앉아 나를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위엄에 제대로 놀라 입이 벌어지더니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는다. 겉으로 보인 귀신사
의 모습이 아무리 초라하다 한들 이들 앞에서는 그런 생각도 보기좋게 36계를 치고 만다.

이들 불상은 흙으로 빚어 도금을 입힌 소조불로 합장인(合掌印) 비슷한 제스쳐의 지권인(智拳
)을 취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한 약사여래(藥師如來)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배치했다. 그들은 건물이 터질 정도로 대단한 위엄을 간직하고 있어 왠
만한 강심장도 뒷걸음을 치게 만드는데 이런 큰 불상이 17~18세기에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이런 큰 불상이 유행처럼 생겨난 것은 억불숭유로 쇠퇴를 걷던 불교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
직하여 나라를 지키자 조정에서는 불교에 대한 부정적인 정책을 다소 바꾸게 된다. 하여 차별
과 탄압을 줄여주었고 주요 요새(남한산성, 북한산성, 무주 적상산성, 부산 금정산성)에 절을
지어 승병들을 배치했다. 또한 왕실과 사대부가 왕실과 집안의 안녕을 위해 시주를 넉넉히 하
면서 많은 불사가 벌어졌는데, 불교 입장에서는 쇠퇴한 불교를 중흥시키는 안성맞춤의 시기가
온 것이다. 그러니 중흥에 대한 자신감이 이런 큰 불상으로 표현된 것이며, 왕실과 사대부의
비위도 맞추고자 왕실의 안녕을 비는 제스쳐도 많이 취했다. 그래서 유난히 조선 후기에는 왕
과 왕비, 세자, 대왕대비의 복을 비는 문구가 많이 등장한다.

웅대한 덩치에 비해 얼굴에는 나름 인자한 표정이 깃들여져 그들에 놀란 중생을 진정시킨다.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며, 무지개처럼 구부러진 눈썹 밑으로 두 눈은 살며시 뜨고 있다.
코는 오똑하게 솟았고, 붉은 입술은 조그만하지만 엷게 미소를 피우고 있다. 입술 주변에는
검은 수염이 칠해져 있고, 볼살은 매우 두툼하다. 양쪽에 달린 두 귀는 중생의 소망을 모두
접수하는 안테나가 되어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으며, 허리가 긴 장신형(長身形)으로 품격 높은 불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쥐고 왼쪽 검지 끝을 오른쪽 검지 1째 마디에
뻗은 지권인의 특이한 표현은 명나라 비로자나불에서 많이 나타나는 수인(手印)이라고 한다.
또한 허리가 긴 장신형도 명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라고 하며 이렇게 명나라 양식을 양분으로
하여 조선 후기 불상의 또다른 종류를 이루었다.

이들 불상은 귀신사가 쓰러진 몸을 한참 일으키던 1624년에서 1633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1633년에 작성된 상량문에는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와있으며 자수무경의 기
록에는 1624년에 중건된 것으로 나와 그 사이가 맞을 것이다. 불상 뒤에는 각자 그에게 걸맞
은 후불탱화가 걸려있는데, 이들은 1983년에 주지 유견성(柳見星)이 그린 것이다.

▲  소조비로자나3존좌상의 본존불인
비로자나불

▲  금색 피부의 화려한 문양을 지닌 전패
(殿牌)와 종이학을 담은 유리통

▲  대적광전 신중탱(神衆幀)

▲  대적광전 산신탱(山神幀)

         ◀  대적광전 독성탱(獨聖幀)
대적광전에는 법당의 청정함을 위해 필수로 배
치하는 신중탱을 비롯하여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탱, 독성(나반존자) 할배를 담은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경내에는 아직 산신과 독성을 위한 보금자리가
따로 없다보니 이렇게 법당에서 샛방살이를 하
고 있는 것이다. 그림의 조성시기는 화기(畵記
)가 없어 알 수 없으나 19세기 후반이나 20
기 초반으로 여겨진다.


▲  귀신사 명부전(冥府殿)

대적광전과 요사 뒤쪽에는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
선 후기에 세워져 여러 차례 수리를 했으나 지금의 건물은 근래에 새롭게 지은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비롯해 도명존자(道明尊者)와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
)의 주요 식구들과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봉안되어 있다.

◀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저승의 시왕들


 

♠  귀신사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유물들

▲  귀신사의 옛 중심지였던 북쪽 언덕 (석탑과 석수)

대적광전과 명부전 뒤쪽에는 북쪽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그 계단을 오르면 귀신사
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3층석탑과 석수를 만날 수 있는데 이곳에 왔다면 대적광전 내부와 더
불어 이곳 유물도 꼭 살펴봐야 뒷탈이 없다. 그만큼 이곳에서 중요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이전 귀신사의 중심은 바로 이곳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잿더미가 된 귀
신사는 1624년부터 1633년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중창을 벌였는데 그때 새 자리에 중창을 했
. 그 새로운 자리는 현재 대적광전과 명부전이 있는 언덕 남쪽이며, 이전 자리는 바로 이곳
북쪽 언덕이다. 아직까지는 옛터에 이렇다할 학술/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옛터의 자세한
것은 그리 알려진 것은 없으며 석탑과 석수, 사적비 등이 옛터를 지키고 있다. (언덕 북쪽은
대나무가 무성하며, 동쪽은 민가와 경작지가 있음)

옛터 식구의 대표격인 석탑은 화강암으로 다진 4.5m 높이의 조촐한 탑으로 절에서는 창건 당
시인 백제 후기 또는 7세기 중반 탑으로 우기고 있으나 확인 결과 고려 때 탑으로 판명이 났
. 현재 이 땅에 남아있는 삼국시대 탑은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 부여 정림사지(
林寺址) 5층석탑, 경주 분황사(芬皇寺) 석탑 등 3기가 고작이다. (고구려와 부여는 석탑이 아
예 없음)
백제 탑의 상징인 정림사지 5층석탑을 많이 닮은 고려 탑으로 1층 탑신(塔身) 이후 급격하게
줄어드는 체감율은 미륵사지 석탑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려 때는 유난히 옛 백제
땅인 충남, 전라도 지역에 정림사지 탑을 닮은 백제 탑의 후예가 많이 등장하는데 백제를 그
리워하는 지역 백성들의 마음과 지역 색채가 강했던 고려 석탑, 불상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이 탑은 바닥돌 위에 여러 개의 돌을 맞추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3층 탑신을 올렸다. 탑신
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조각했고,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처마가 평행을 이루다가 귀퉁이에
서 아주 살짝 들려져 있다. 1층 탑신은 매우 크지만 2층부터 확 줄어드는 모습이며, 탑 꼭대
기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네모난 받침돌인 노반(露盤)이 남아있다.


▲  귀신사 석탑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62


▲  귀신사 석수(石獸)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64

3층석탑 옆에는 석수라 불리는 독특한 모양의 돌조각이 하나 있다. 웅크리고 앉은 사자의 등
짝에 묘하게 생긴 날씬한 돌기둥이 혹처럼 솟아 하늘을 받들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끝부분이
참 낯이 있다. 이 돌기둥은 바로 남근석(男根石)으로 불교의 상징 동물의 하나인 사자(獅子)
와 남근 숭배<또는 성기(性器) 신앙>가 어우러진 아주 기묘한 석물로 이 땅에서는 오로지 이
곳에서만 있는 희소성 100%의 물건이다.

사자상은 머리를 치켜들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오랜 세월의 태클로 좀 헝클어지긴 했지만
알아보는데는 아직 지장은 없다. 그의 등에 곧게 서 있는 남근석은 2단으로 되어있는데, 아랫
부분은 윗부분보다 굵으며 대나무 같이 엷은 마디를 두었다. 그리고 윗부분은 아랫부분보다
굵기가 절반 정도 얇으며, 그 끝부분은 남근의 끝부분과 비슷하게 조각했다.

이 석수는 천하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희귀 석물로 왜 귀신사에 이런 것을 두었는지는 2
지 설이 있다. 하나는 풍수지리상 이곳이 구순혈(狗脣穴)이란 좋지 않은 형상이라 하여 그 터
를 누르고자 세웠다는 것이며, 다른 설은 백제 왕실의 내원사찰(內願寺刹)로 남근을 갖춘 사
자상을 세웠다는 것이다. 참고로 남근석을 둔 절은 백제의 내원사찰 뿐이라고 한다. 하여 이
석수를 근거로 귀신사가 백제 후기에 창건되었다는 설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것.
석수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백제나 신라가 아닌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돌사자의 길이는 158cm, 높이 62cm, 남근석은 아랫부분의 높이 72cm, 윗부
분은 40cm이다.

석수란 이름은 돌로 만든 동물상이란 뜻이다. 단순히 남근석만 있다면 남근석이라 부르면 되
겠지만 사자까지 있으니 이들을 어우른 마땅한 이름이 없어 부르기 쉽게 '석수'라 칭한듯 싶
.

▲  귀엽게 앉아있는 석수

▲  석탑 주변에 놓인 옛터의 주춧돌


▲  귀신사 사적비(事蹟碑)
귀신사의 내력을 담은 비석으로 근래에 지어진 것이다. 옛터 뒤쪽에는 대나무가
무성해 산바람이 한바탕 지나갈 때마다 사각사각 하모니 소리를 들려준다.

▲  귀신사 앞 해탈교 (귀신사입구 방면)

귀신사의 오랜 보물을 품고 있는 경내 북쪽 언덕을 둘러보고 다시 경내로 내려왔다. 이리하여
귀신사를 다 둘러본 것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그건 함정이다. 아직 못본 것이 하나 있기 때문
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마을 남쪽 경작지 한복판에 홀로 떨어진 승탑(부도)이다.
기왕 여기까지 먼 발걸음을 했으니 다음에 안와도 될 정도로 싹 다 봐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경내 경비실을 찾아 부도의 위치를 물으니 마을 남쪽 경작지에 있다고 그런다. 그래서 이번에
는 마을길 대신 찻길을 통해 해탈교를 건너 전주~금산사 지방도로 나가 남쪽으로 걸어갔다.
경내에서 부도까지는 기껏해야 1리 남짓이며, 경내 북쪽 언덕에서 보이는 범위 안에 들어있다.
게다가 도로에서도 바라보이니 부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만 안다면 찾기는 매우 쉽다.


▲  귀신사 승탑(부도)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63

▲  북쪽에서 바라본 부도

▲  남쪽에서 지켜본 부도

귀신사 부도는 경내에서 0.3km 정도 떨어진 마을 서남쪽 경작지 한복판에 고적하게 자리해 있
.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탑신과 지붕돌은 팔각을 취하고 있으며, 누구의 넋이 서린 승탑(
僧塔)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만 경내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 왕년의 귀신사가 이곳
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는 유물로 우리가 옛 조선과 고구려, 백제, 발해의 옛 땅과 영광을 생각
하듯 귀신사 승려들도 이 부도와 옛터를 통해 귀신사의 영광을 뼈저리게 생각할 것이다.

부도의 높이는 2.5m로 기단부와 탑신, 머리장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비례가 별로 맞지가
않고 모습도 소박하다. 기둥처럼 길쭉한 기단 가운데 받침돌은 여러 겹의 연꽃을 두른 윗받침
돌을 받치고 있고, 그 위에 탑신의 몸돌과 귀퉁이가 치켜 올려진 지붕돌을 얹혔다. 그리고 그
위를 동그란 공 모양의 머리장식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여기서 절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면 귀신사가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오며 적어도 부도까지가 귀
신사의 영역이었으니 청도리 마을 상당수는 절의 영역이 된다. 그렇게나 잘 나가던 귀신사가
쇠퇴하면서 경내 중심을 제외한 부분이 모두 속세로 떨어져 나가 청도리 마을을 이루게 된 것
이다.

부도를 끝으로 귀신사 관람은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서울로 갈 때는 전주가 아닌 김제(金堤)
를 거쳐가고 싶은데 이곳이 김제 땅임에도 김제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가뭄에 콩 나듯 다니고
오히려 전주시내버스가 더 많이 다닌다.
하여 별로 기대하지 않고 청도리 정류장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김제로 나가는 시간을 물어보니
왠걸 15분 뒤에 버스가 있다고 그런다. 내가 운과 복이 참 지지리도 없는 인간인데 이때만큼
은 용케도 운이 좀 맞아 떨어졌다. 평소에도 그렇게 운이 좀 맞으면 얼마나 좋을꼬? 차 시간
이야 안맞으면 전주로 나가면 그만이 아니던가?

정류장에 들어가 15분의 시간을 억지로 죽이고 있으니 김제시내버스 5번이 슬그머니 들어온다.
이 버스는 청도리 마을회관 앞에서 잠시 바퀴를 접고 쉬다가 출발시간이 되면 외마디 부릉소
리를 남기고 김제로 나간다.
시내로 갈 때는 금산사를 거쳐서 가는데 폭주하는 전주버스와 달리 김제버스는 너무 기어가서
김제역까지 금산사와 원평 대기시간을 포함하여 45분 정도 걸렸다. 그렇게 지루하게 달려 도
착한 김제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열차에 고된 몸을 싣고 도돌이표처럼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귀신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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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 성지 순례 ~~~ 경기 북부 제일의 명품 계곡, 포천 백운산 백운계곡 (흥룡사)



' 포천(抱川) 백운계곡, 흥룡사 여름 나들이 '

▲  포천 백운계곡


 

무더운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번영을 누리던 7월 한복판에 수도권 피서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찬양 받고 있는 포천(抱川) 백운계곡을 찾았다.
그날은 백운계곡 외에도 피서의 새로운 성지로 주목 받고 있는 비둘기낭폭포도 염두에 두
고 도봉동 집을 나섰다. 허나 비둘기낭폭포는 교통이 매우 좋지 않은데다가 포천시청에서
불과 5분이란 시간 차이로 그곳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그 다음 차는 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되기에 그 폭포는 포기하고 백운계곡으로 길을 잡았다.
이제 피서철의 시작이고 그날은 평화로운 평일이라 사람도 별로 없으므로 혼자 가도 전혀
꿀릴 것은 없었다.

오전 11시에 집에서 포천시내버스 72-3번을 타고 의정부시와, 경기도2청사, 축석고개, 송
우리를 지나 포천시청에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달랑 5분 차이로 비둘기낭폭포(대회산리
)로 가는 버스를 놓쳐 바로 백운계곡으로 눈을 돌렸다. 하여 이동으로 가는 포천좌석버스
138-5번(도평리↔의정부역)을 잡아 타고 1시간을 정신 없이 내달려 이동에서 발을 내린다.
이동(二東)은 갈비와 막걸리로 유명한 포천 동북부 끝 동네로 수많은 명산과 계곡을 품고
있다. 그래서 수도권 피서의 성지이자 소고기, 술의 성지로 일찌감치 명성을 날리고 있으
며, 전방과도 가까워 군부대도 많이 포진해 있다. 

이동에서 백운동(백운계곡)까지는 7km 남짓의 가까운 거리이나 시내버스는 겨우 하루에 5
~6번 밖에 없고 시간도 전혀 맞지가 않는다. 그러니 천상 화천군 사창리로 넘어가는 직행
버스의 신세를 져야 된다.
이 직행버스(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는 40~6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데, 운이 좋은지 딱 5~
6분 만에 그 반가운 모습을 비춘다. 그래서 그 버스를 잡아타고 10분 정도를 달려 백운동
에 발을 내린다. 이 노선은 이동 외에도 도평리 버스종점과 일동에서도 승차가 가능하다.


 

♠  백운계곡(白雲溪谷), 흥룡사 입문

▲  백운교에서 바라본 백운계곡 (광덕고개, 사창리 방향)

▲  백운교에서 바라본 백운계곡 (도평리 방향)

경기도(京畿道) 북부권(의정부, 동두천, 연천, 포천)과 동부권(남양주, 가평, 양평)에는 기라
성 같은 계곡들이 즐비하다. 그중에서 단연 으뜸이자 명성이 자자한 계곡은 아무래도 포천 백
운계곡이 아닐까 싶다.
이 계곡은 영평8경의 하나로 조선시대부터 썩 잘나갔던 명소였다. <선유담(仙遊潭)이 영평8경
의 일원임> 그 전통과 위엄은 여전히 녹슬지 않아 지금도 수도권의 이름난 계곡이자 피서의 성
지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것을 반영하듯 372번 지방도(포화로)와 나란히 흐르는 계곡
주변에는 식당과 숙박업소, 캠핑장이 즐비하며, 주말과 피서철에는 등산과 나들이, 피서 수요
가 급증해 여전히 2차선을 고수하고 있는 372번 지방도는 물론 인근 이동, 일동까지 차량들로
단단히 몸살을 앓는다.

백운계곡은
백운산 서쪽 자락에서 발원(發源)하여 흥룡사를 경유하는 계곡과 광덕고개 서남쪽
에서 발원하여 372번 지방도를 따라가는 물줄기('선유담계곡'이라고도 함)를 일컫는데, 이들은
백운교에서 하나가 되어 도평천(都坪川)이 되고, 수입리에서 수입천(水入川)과 합쳐져 영평천
(永平川)으로 간판을 바꾼 다음, 전곡 동쪽에서 한탄강(漢灘江)과 합쳐진다.

직행버스가 바퀴를 멈춘 백운동 정류장은 백운교에서 동쪽으로 약 230m 지점에 있는데, 여기서
찻길을 따라 백운교로 가는 것보다는 정류장 남쪽으로 난 다리를 건너 가기를 권한다. 차량 왕
래가 빈번해 그들의 눈칫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약한 매연까지 무심히 떠넘기고 가
버리니 청정한 계곡과 삼삼한 숲으로 이루어진 이곳까지 와서 그런 굴욕을 당하기는 싫다.

백운교 남쪽에는 이동갈비집이 쭉 늘어서 있는데, 그 남쪽에 차량들이 바퀴를 뻗으며 자는 주
차장이 넓게 자리한다. 허나 피서철 직전이고 주중이라 빈 공간이 90%를 넘으며, 식당들도 사
람보다 빈 자리가 훨씬 많아 매우 한산하다. 다들 피서철 대목을 꿈꾸고 있을텐데, 날씨가 그
들의 마음을 몰라주고 비를 마구 퍼부으니 그들도 참 속이 탈 것이다.

백운계곡 주차장을 지나면 삼삼한 숲에 묻힌 오솔길이 나온다. 그 길을 접어들면 채 2분도 안
되어 흥룡사 표석이 있는 흥룡사입구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 왼쪽 계단길을 오르면 바로 흥
룡사 경내가 펼쳐진다. 이곳은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아직 갖추지 못하였으나 계곡과 삼삼
한 숲이 속세의 기운을 털어버리기에 딱 그만이라 이것으로도 일주문의 대체 역할은 충분하다.


▲  흥룡사입구

▲  금색 피부를 지닌 포대화상(布袋和尙)과 깨알같은 불전함

흥룡사 경내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금빛 피부를 자랑하는 똥배 포대화상이 불전함을 들이밀며
돈을 요구한다. 어떻게 절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돈부터 요구하고 있는지 절에 대한 이미
지를 순식간에 부정적으로 몰아놓는다.
그런 포대화상을 지나치면 정면에 우람하게 생긴 대웅전이, 왼쪽에는 요사와 찻집이, 오른쪽에
는 샘터와 공양간이 자리해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흥룡사의 내력을 더듬어 보도록 하자.

※ 백운계곡을 옆에 낀 심산유곡의 절집, 세속화된 불교의 씁쓸한 흑역사를 보여주었던 현장,
   ~~ 백운산 흥룡사(白雲山 興龍寺)
부드러운 백운산 봉우리와 삼삼한 숲, 그리고 청결하고 수려한 경치의 백운계곡을 든든한 후광
(後光)으로 삼은 흥룡사는 백운산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山寺)이다.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신라 말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하여 내원사(內院寺)라 했다고 우
기고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에 따르면 도선은 절 자리를 잡고자 나무로 3마리의 새
를 만들어 날려 보냈고 그중 하나가 앉은 자리가 마음에 들어 절을 세웠다는 것이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절에서 지은 설화일 뿐이며, 조선 초기까지 적당한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어 도선국사 창건설의 물음표를 던지게 한다. 그나마 오래된 유물은 17세기 승탑이고, 몇줄
전해오는 조선 초기 기록도 딱히 신빙성은 떨어져 보이니 아마도 조선 초/중기에 조촐한 암자
나 수행처 수준으로 법등(法燈)을 연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고려 태조 때 비보사찰로 창건되
었다는 설도 있으나 역시나 물음표일 따름..)

조선 초에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창했다고 하며, 1407년에는 왕실의 복을 비는 88개 자복
사(資福寺)의 하나로 선정되었는데, 이때 잠시 천태종(天台宗)의 일원이 되었다고 전한다. 또
한 세조는 그의 어필족자(御筆簇子)를 하사했다고 하나 아쉽게도 그 족자는 어느 세월이 잡아
갔는지 전하지 않는다.
그나마 기록과 유물이 보다 확실해지는 시기는 조선 중기 이후이다. 1638년 무영
(無影)이 제자
시십(時什), 인해(印海) 등과 법당과 시왕전 등 14채, 500여 칸의 건물을 중건했다고 하며, 불
상을 개금(改金)하고 종을 만들어 창건 당시보다 절이 컸다고 전한다. 1639년에는 무영의 제자
지혜(智惠)가 100여 칸의 상선암(上禪庵)을 지었으며, 1648년에는 청암(淸巖)이 50여 칸의 보
문암(普門庵)을 지었고, 1786년에는 태천(泰天)이 절을 중건하고 이름을 백운사(白雲寺)로 갈
았다.

1922년 설하(渫河)가 대웅전을 중수하고 흑룡사로 이름을 고쳤다가 얼마 안가서 흥룡사로 갈았
으며, 6.25때 절이 잿더미가 된 것을 1957년 지금의 위치에 관음전을 지어 절을 재건했다. 이
후 1982년에 백운당을, 1987년에는 대웅전을 중건했으며, 1990년에 요사인 원각당을 새로 지었
다. 그리고 1993년에는 기존의 대웅전과 백운당을 싹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너른 크기의 대웅
전을 지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평범한 내력을 지녔구나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우려
하는 종교의 지나친 세속화, 그리고 종교 단체들의 지나친 재물 욕심의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
적인 사건이 바로 이곳에서 터져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자고로 승려란 부처와 관음보살,
지장보살의 뜻에 따라 자신을 불태우며 중생을 챙기고 깨달음을 향한 수행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거늘 그것을 역행하는 땡중과 절이 너무 많다.
때는 1987년, 절 주변이 백운계곡 관광지로 지정되자 흥룡사 주지는 크게 돈 욕심을 내며 종단
(宗團)의 승인 없이 멋대로 개발업자와 손을 잡고 그들에게 절 땅을 빌려주었다. 허나 개발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개발업자 또한 하나 같이 비리비리하여 개발 주체가 계속 바뀌었다.
그 과정에서 절과 개발업자와의 손실과 갈등이 커지면서 2015년까지 무려 30여 건의 소송에 휘
말렸고, 개발 실패에 따른 손실이 무려 11억에 이르렀다.
욕심꾸러기 주지는 그 부채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고 법원은 절과 절 토지(약 20만 평)를 경매
에 넘기겠다고 통보를 했다. 그러자 주지는 울상이 되어 흥룡사를 관리하는 윗 사찰인 봉선사
(奉先寺)에 애걸을 했고, 봉선사는 절의 정상화를 위해 심사숙고 끝에 그 돈을 치뤄주고 절을
살렸다. (그 돈도 대부분 중생들이 내준 시주금임)
그런 흑역사를 겪은 흥룡사는 그렇게 벼랑 끝에서 살아났다. 땡중들의 돈 욕심에 중생들의 피
땀어린 시주로 이룩된 절이 자칫 홀라당 날라갈 뻔한 것이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원각당, 요사, 공양간, 청산다원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은 포천시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청암당승탑이 고작이다. 그외에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묘화당승탑이 있는데, 이들 승탑이 경내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존재이
자 조선시대 유물로 그들 외에는 고색의 내음은 찾기 힘들다.

삼삼한 백운산 숲에 둘러싸여 청정한 기운이 가득하며, 백운계곡의 청아하고 낭랑한 계곡 소리
에 아무리 무서울 게 없다는 번뇌도 염통이 쫄깃해져 좌불안석이 된다.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깊은 산골의 절집으로 절 바로 밑에까지 식당과 숙박업소가 즐비하게 들어섰지만 그들 사이에
짧게나마 숲이 완충지대를 이루고 있어 산사의 분위기는 전혀 녹슬지 않았다. 또한 길손들을
위해 찻집과 쉼터 등을 갖추고 있어 백운계곡 나들이나 백운산 등산 때 잠시 두 발을 쉬어가기
에 좋으며, 원각당 옆에는 불교용품과 전통차를 파는 찻집이 있어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도 누
릴 수 있다.

※ 포천 백운계곡, 흥룡사 찾아가기 (2016년 7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이동 경유 사창리행 직행버스(30~60분 간격, 1일 20여 회 운행)를 타고 백
  운동 하차 (흥룡사는 도보 6~7분 거리)
* 1호선 의정부역(4,5번 출구를 나와서 가능역 방면으로 도보 5분 거리에 정류장이 있음)과 의
  정부터미널에서 138-5, 138-7번 좌석버스를 타고 이동이나 도평리에서 하차, 백운동으로 들
  어가는 3번 시내버스(1일 5회)나 사창리행 직행버스로 환승
* 인천종합터미널, 안양(WK웨딩하우스 앞)에서 와수리행 직행버스(1일 8회)를 타고, 이동이나
  도평리에서 사창리행 직행버스나 3번 시내버스로 환승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까지 접근 가능)
① 서울 → 의정부(민락로) → 포천 방면 43번 국도 → 만세교에서 37번 국도로 우회전 → 일
   동교차로에서 이동 방면 47번 국도 → 도평교차로에서 우회전 → 도평3거리에서 좌회전 →
   흥룡사입구(백운교)에서 우회전 → 흥룡사, 백운계곡
② 서울(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 퇴계원나들목에서 이동 방면 43번 국도 → 서파 → 도평교
   차로에서 우회전 → 도평3거리에서 좌회전 → 흥룡사입구에서 우회전 → 흥룡사, 백운계곡
* 흥룡사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 38 (포화로 236-73 ☎ 031-535-7363)
* 매년 겨울에 백운계곡에서 '백운계곡 동장군 축제'가 열린다. 보통 12월 말부터 2월 초까지
  열리며, 눈썰매와 전통 썰매, 얼음성 놀이동산, 전통 팽이, 눈사람 만들기, 모닥불체험, 눈
  조각 전시회, 얼음조각 전시회, 향토음식 체험관, 포천농특산물 판매 등의 행사가 있다.
  (축제 문의 ☎ 031-535-7242, 동장군축제 홈페이지는 ☞ 이곳을 쿨하게 클릭한다)
* 흥룡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흥룡사 찻집(청산다원)과 천막 쉼터


 

♠  흥룡사 둘러보기

▲  대웅전(大雄殿)과 5층석탑

이곳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93년에 옛 대웅전과 백운당
을 부시고 만든 것이다. 바깥 벽에는 부처의 일대기를 담은 팔상도(八相圖)와 십우도(十牛圖)
등이 그려져 있으며, 내부 불단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거느리며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그래서 건물도 아미타불의 본거지인 서방정토(西方淨土)를 바라보고자
서쪽을 향하고 있다. (지형상의 이유도 있음)

▲  흥룡사 원각당(圓覺堂)
종무소와 요사(寮舍)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건물로 문수원(文殊院)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  석조지장3존상
대웅전 곁에는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이
경내를 굽어본다. 그 좌우에는 도명존자(道明
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이 나란히
자리하여 야외 지장전의 역할을 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5층석탑과 뜨락

대웅전 뜨락에 심어진 5층석탑은 근래에 조성되어 피부가 매우 하얗고 부드럽다. 기단부(基壇
部)에는 8명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한 자리씩 차지해 앉아 있고 1층 탑신(塔身)에는 사방불
(四方佛)을 새겨 절과 탑의 영원한 안전을 염원한다. 그렇게 철통 같이 지켰건만 내부의 적으
로 인해 절이 경매에 넘어갈
했으니 그들의 가호도 다 부질 없었던 모양이다.


▲  대웅전 아미타3존불과 조그만 원불(願佛)의 금빛 물결
아미타3존불은 1999년에 조성된 것으로 그 좌우에는 원불로 조성된 조그만 원불이
금빛 대물결을 이룬다. (아마도 3천불은 될 듯..? 저게 도대체 다 얼마야..?)

▲  흥룡사 샘터<수각(水閣)>
백운산이 베푼 옥계수로 그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주듯 물이 늘 넘친다.

▲  가까이서 본 샘터(수각)의 위엄
석조 위에 지붕을 씌우고 조촐하게
수각으로 삼았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삼성각이 새롭게 터를 다졌다. 이 건물은 최근에 지어진 것
으로 단청(丹靑)을 칠하지 않아 조금 오래되어 보일 뿐, 대웅전과 원각당에 비해 한참 후배이
다. 내부에는 대웅전에 얹혀살던 산신탱을 비롯하여 독성탱과 칠성탱을 봉안되어 있어 삼성각
이란 이름값을
다.

▲  산신(山神) 가족의 단란함이 묻어난 산신탱

▲  칠성(七星)이 모두 모인 칠성탱

  동자 2명을 거느리며 여유롭게 앉아있는
독성(獨聖, 나반존자) 가족을 담은 독성탱 -
이들 삼성각 탱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산
신탱으로 무려 2000년에 제작되었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흥룡사 경내)

▲  흥룡사에서 만난 새끼고양이의 위엄
(누런 고양이가 알록달록 고양이에게 시비를 걸다)


내를 둘러보던 중 원각당 옆에서 새끼고양이 3마리가 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2마리는 검
은털과 흰털, 누런털이 적절히 섞여있고, 다른 하나는 오로지 누런털 옷을 입고 있다.
이들은 땅바닥에서 풀과 돌을 희롱하고 있었는데, 누런 묘공이 갑자기 풀 희롱에 열중하는 알
록달록 묘공(猫公)에게 시비를 건다. 시비를 건다고 해서 멱살을 잡거나 서로 발톱을 견주며
싸우는 것은 아니다. 그냥 묘공의 흔한 놀이로 쥐나 조그만 동물을 잡기 위한 일종의 훈련도
겸한다.


▲  풀과 나뭇잎을 희롱하다~~

▲  경내 동쪽에 자리한 승탑(부도)들

▲  어깨를 나란히 한 승탑(僧塔)들 - 제일 오른쪽 팔각원당형 승탑이
청암당부도(포천시 향토유적 35호)

경내를 나와 백운계곡 안쪽으로 향하면 왼쪽에 돌담이 둘러진 공간이 있다. 그 안에 3기의 승
탑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자리해 있는데, 이들은 청암당
(淸巖堂)과 묘화당(妙化堂), 운경대선
사자광탑(雲鏡大禪師慈光塔)으로 흥룡사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이곳의 유일한 고색의 유물이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흥룡사의 오랜 내력이 참 무색했을 것이다. (운경대선사탑은 제외)

그들 가운데 뚜껑처럼 생긴 왼쪽 승탑은 운경대선사의 자광탑으로 1905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
나 2000년 2월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에서 열반에 들었다. 그는 1940년에 잠시 이곳 주지를 지
낸 인연이 있어서 이곳과 봉선사에 승탑을 만들었는데, 왜정 시절에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조선
민족해방당을 지원하다 걸려 옥고를 치루기도 했으며, 6.25때 모두 타버린 봉선사를 다시 세우
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가운데 자리한 석종형(石鐘形) 승탑은 묘화당의 것으로 조금은 뾰족한 모습인데, 탑신 앞에 '
묘화당 영조(妙化堂 灵照), 강희 20년(康熙二十年)'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승탑의 주인과 조
성 연대를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강희 20년이면 1681년(안내문에는 1781년으로 한참이나 잘
못 나옴)으로 승탑의 높이는 153cm이다.

오른쪽에 자리한 청암당(淸巖堂)승탑은 동그란 승탑에 8각의 지붕돌을 얹힌 일종의 팔각원당형
승탑으로 탑신 중앙에 '청암당' 3글자가 새겨져 있어 승탑의 주인을 알게 해준다. 그는 1648년
흥룡사의 부속 암자인 보문암을 창건했다고 전할 뿐, 딱히 다른 정보는 없으며, 그곳에 있다가
근래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탑의 높이는 156cm이다.

이들 승탑은 길가에서도 매우 잘 보이므로 (탑신에 새겨진 글씨는 잘안보임) 굳이 담장을 넘을
필요는 없다. (담장 내부는 출입 금지를 권하고 있음) 글씨는 카메라로 최대한 줌을 땡기면 왠
만해선 다 보인다.


 

♠  백운계곡(흥룡사계곡)에서 즐긴 짧은 피서

이렇게 흥룡사를 둘러보고 백운계곡으로 길을 향했다. 백운계곡 중 흥룡사를 거쳐가는 계곡은
편의상 흥룡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은 수도권 제일의 계곡답게 수량도 많고, 물도 깨끗하며, 골도 깊고, 바위와 암반도 많다.
예로부터 경승지로 널리 칭송을 받았으며, 백운계곡의 일원인 선유담(372번 지방도에 있음)이
영평8경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흥룡사 역시 이 계곡에 퐁당 반해 계곡 옆에 절을 지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백운산 등산도 아니며, 흥룡사 관람과 백운계곡을 조금 따라 올라가 잠시
발을 담구며 쉬는 것이다. 아직 본격적인 피서철이 아닌지라 그 좋은 계곡에는 사람이 거의 없
었다. 만약 1주 뒤에 왔다면 평일이라도 무척 미어터져 정신이 없었을텐데, 그 이전에 와서 한
적한 계곡의 모습에 위안을 받는다. 사람이 많은 것보다는 고적한 것이 보기도 좋고, 자연에도
좋다. 사람이 없으니 계곡에 쓰레기도 없고, 그들의 괴롭힘이 없으니 백운산과 계곡도 더욱 신
이 난다. 그만큼 자연에게 있어 인간은 전혀 도움이 안되는 존재이다.


▲  등산로와 나란히 달리는 흥룡사계곡

흥룡사계곡은 승탑을 기준으로 15분 정도만 올라갔다. 그 정도만 가니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하나는 백운산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계곡을 건너는 것이다. 애당초 산을 타는 것
은 염두에 두지 않아 계곡을 건너려고 했으나 전날까지 계속된 장맛비로 계곡물이 늘어 건너는
것이 거의 어렵게 되었다. 물론 무리를 해서 건너면 가능은 하겠지만 그렇게까지 몸을 혹사시
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갈림길에서 과감히 길을 멈추고 거추장스러운 운동화와 양말을 벗어던져 계곡에 꼬
질꼬질한(?) 발과 다리를 담구며 그들을 잠시 호강시켜주었다. 얼마나 시원하던지 흘러나온 땀
이 바로 줄행랑을 친다. 비록 온몸으로 계곡과 진한 스킨쉽은 하지 못했지만 혼자 와서 그렇게
노는 것도 좀 처량해보인다. 그냥 발과 다리만 담구며 적절히 피서를 즐기면 그만이다.


▲  내가 잠시 머물던 곳 (이름은 딱히 없음)

▲  바위를 타고 밑으로 내려가는 조그만 폭포

계곡에서 신선놀음을 하고 있으려니 여름의 제국이 꽤나 심술이 난 모양이다. 난데없이 소나기
를 퍼붓는데, 좀 내리나 싶더니만 멈추고, 그러다가 또 쏟아지고, 그렇게 심술을 부린다. 허나
다행히 내리는 양은 별로 없어 물가에 앉을 자리를 만들고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며 계곡에 다리
를 담구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거의 15시 40분이 되었다. 거의 1시간 이상을 머문 셈인데 그 사이 지나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완전 나 혼자 이 좋은 계곡을 독점하여 누린 셈이다. 영원히 그러면 좋
을텐데 아쉽게도 일시적인 독점이다. 사람이 없으니 정말 신선(神仙)이 나타나 같이 놀자고 하
거나, 좋은 선녀를 소개시켜주거나, 내기바둑 1판 두자고 청할 것 같았다. 허나 신선은 사람이
만든 상상 속의 존재이니 나타날 일은 없다. 그만큼 이곳은 신선이 반할 경치를 지녔다. 기분
같아서는 속세에서 나란 존재를 잠시 지우며 이곳에 숨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그게 현실이
아님을 알기에 잠시나마 정든 마음을 훌훌 털고 계곡을 등졌다.


▲  녹음이 우거진 백운산 산길

▲  흥룡사계곡

▲  숨겨진 조그만 폭포와 소(沼)

흥룡사에서 저녁공양을 17시부터 8시까지 하는데, 좀만 버티면 그 시간이다. 일반인에게도 밥
을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일행도 없고 나 혼자이니 잘만 구워삶으면 저녁 해결도 가능할 듯 싶
었다.
그래서 바로 내려가지 않고, 중간에 등산로를 잠시 벗어나 계곡으로 내려갔다. 조그만 샛길이
호기심을 자극시켰기 때문이다.
그곳으로 내려가니 크기는 작지만 조촐한 폭포와 폭포수가 담긴 소가 있는데, 물의 색깔이 인
간이 만든 비루한 색이 아닌 완전 대자연의 짙은 푸른색이다. 수심은 약 1.5m 내외로 보였는데.
기분 같아서는 정말 풍덩하고 싶은 매혹적인 곳이다. 다음에 여러 명과 피서를 올 일이 있다면
이곳에 진을 치고 놀고 싶으나 과연 그날이 올지는 장담을 못하겠다.

그런 폭포를 뒤로 하고 다시 흥룡사를 찾으니 주춤했던 소나기가 다시 퍼붓기 시작한다. 그런
데 아까와는 달리 매우 쎄차게 쏟아진다. 그래서 비를 피하고자 공양간으로 들어갔는데, (16시
30분 경) 할머니 보살 1명이 열심히 밥과 반찬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반인도 공양을 할 수
있냐고 물으니 혼자 왔냐고 그런다. 하여 그렇다고 답을 하니 그러면 5시 반에 오란다. 승려가
먼저 밥을 먹고 그 다음 신도나 절과 관련된 사람들이 먹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마움을 표하고
모락모락 저녁밥을 꿈꾸며 시간이나 때울 겸, 인적이 없는 삼성각에 들어가 50분 정도 시간을
때웠다.
나무로 만든 건물 내부는 매우 시원하며 잠시 졸음의 희롱을 즐기며 벽에 등을 기대 졸기도 하
였다. 절집에서 조촐하게 나만의 극락(極樂)을 즐긴 셈이다. 다행히 그동안 이곳까지 오는 사
람이 없어 그 시간 동안 삼성각을 마음껏 독차지했다. 

17시 20분이 되자 삼성각을 어슬렁 나와 공양간으로 갔다. 할머니 보살이 나를 보더니 어여 들
어오라고 그런다. 안으로 들어가니 승려 3명과 일꾼 2명이 밥을 먹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합장
(合掌)을 하고, 공양에 들기 시작했다. 이곳 공양밥은 하얀 쌀밥을 기본으로 약 5~6가지의 나
물이 있으며 거기에 무려 김치찌개까지 있다. (물론 고기는 없음) 이들 외에도 보기 힘든 산나
물도 있었는데 이름은 기억이 안난다.
그릇에 밥과 나물을 터질 정도로 담아 꾸역꾸역 비벼먹고 거기에 김치찌개까지 겯드리니 이것
이 정녕 흥룡사 공양 스타일이다. 맛도 그런데로 괜찮았다. 그렇게 즐겁게 배를 채우고 할머니
보살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바깥으로 나왔다. 아까만 해도 먹구름이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
며 소나기를 내던지더만 이제는 평온하다.

절을 나오기 전, 새끼 묘공이 있던 원각당을 찾았다. 절을 지키며 노느라 지쳤는지 원각당 툇
마루에 서로 부비적거리며 달콤하게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지
정처없는 내 마음을 크게 흔든다. 나도 그 틈에 끼어 같이 자고 싶은데, 그건 민폐겠지. 그들
틈에 끼어서 자면 열대야에 도망친 잠도 무척 잘 올 것 같다.


▲  원각당 툇마루에서 주무시고 있는 새끼 묘공의 위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 같다.


이번 나들이에서 가장 인상이 깊은 존재는 흥룡사 새끼 묘공과 저녁 공양이다. 공양은 보살의
후한 인심에 다음날 점심까지 밥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배를 채웠고, 새끼 묘공은 묘공 특
유의 귀여움을 보이며 나의 시선을 잡아맸다. 그들이 있어 고색(古色)의 내음도 거의 없고 문
화유산도 빈약하며, 돈 욕심에 얼룩진, 내 입장에서는 썩 끌리지 않는 흥룡사가 또 찾고 싶을
정도로 매우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다음에 간다면 새끼 묘공은 어른이 되어있으려나...?


▲  흥룡사와 백운계곡의 모든 것을 뒤로하며 속세로 다시 나오다.

흥룡사를 나오니 시간은 6시가 넘었다. 더 이상 정처를 둘 곳도 없기에 백운동 정류장으로 미
련없이 나와 바깥으로 나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담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백
운계곡, 흥룡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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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7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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