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마애불'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20.10.03 도심 속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와 거닐기 좋은 상큼한 뒷동산, 안암동 보타사~개운산 (개운산둘레길) 2
  2. 2019.06.15 커다란 조선 후기 마애불을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 중계동 불암산 학도암 ~~~ (서울둘레길, 맛있는 공양밥 1그릇)
  3. 2017.10.11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이 깃들여진 첩첩한 산골의 절집, 북한산 삼천사 ~~~ (삼천사계곡)
  4. 2016.11.05 늦가을 경주 나들이 ~~~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벽도산,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5. 2014.05.20 도심과 가까운 첩첩한 산중의 오랜 절집 ~ 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도심 속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와 거닐기 좋은 상큼한 뒷동산, 안암동 보타사~개운산 (개운산둘레길)

 


' 도심 속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 그리고 상큼한 뒷동산
안암동 보타사~개운산 나들이 '


▲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유희좌 불상,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개운산둘레길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던 4월 한복판의 어느 따사로운 날, 고려대 뒷쪽에 자리한 안암동
(安岩洞) 보타사를 찾았다.
보타사는 10회 이상 인연을 지은 절로 즐겨찾기 급까지는 아니나 집에서도 가깝고 진귀
한 문화유산을 둘이나 간직하고 있어 매년 1~2회 정도 복습하러 간다. 올해도 변함없이
보타사 보물들의 안부가 격하게 궁금하여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오후 한복판에 부랴부
랴 카메라와 지갑을 챙기고 길을 나섰다.

보타사 서쪽에 자리한 개운사(開運寺)를 먼저 둘러보았으나 마음은 벌써 보타사에서 나
를 재촉하고 있어
개운사를 콩 볶듯이 살펴보고 동쪽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 길
의 끝에는 조그만 산사 보타사가 산문을 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활짝 열린 보타사, 대원암 정문


 

♠  보타사(普陀寺) 입문 (대원암)

▲  안암동 대원암(大圓庵)

보타사 정문을 들어서면 양반가 기와집처럼 생긴 한옥이 제일 먼저 마중을 한다. 이곳이 초행
이라면 이것이 보타사인가 싶어 마음이 설레겠지만 그것은 함정이며, 그는 개운사의 부속암자
인 대원암이다.
보타사를 제대로 가리고 앉은 대원암은 기와집 1동이 전부인 조그만 암자로 1845년 지봉선사(
智峰禪師)가 창건했다. 그는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법명(法名)은 우기(祐祈)인데, 북한
산(삼각산) 도선사(道詵寺)에서 인파당 축홍(仁波堂 竺洪)에게 사사하여 그의 법을 이어갔으
며, 효성이 깊고 인품이 넉넉했다. 또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도 친분이 있어 그에게 판
서(判書)직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연유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지봉판서라 불렀다.

왜정(倭政) 때는 현대불교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1870~1948), 법명
은 정호, 영호>
이 이곳에 머물며 불교 교육에 나섰으며 1960년대에는 탄허(呑虛, 1913~1983)
가 역경사업을 벌였던 유서 깊은 현장이기도 하다.


▲  숲속에 자리한 보타사 주차장

대원암을 지나면 녹음이 깃든 숲이 조촐하게 펼쳐진다. 숲은 작으나 나무들의 강인한 협동심
으로 햇살도 우걱우걱 씹어먹을 정도로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마치 깊은 산중의 암자에
들어선 기분이다. 개운사에서 아주 잠깐 이동했을 뿐인데 풍경화는 이렇게나 180도 달라진 것
이다.

햇살도 거의 들어오기 힘든 그곳에 차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고 그 너머로 석축을
쌓고 터를 다진 보타사가 마치 별장 같은 모습으로 들어앉아 있다. 연등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정녕 절집인지 고개 조차 갸우뚱했을 것이다.
주차장 옆에는 키도 제각각인 중창(重創) 송덕비와 사적비(事蹟碑) 등 비석 4기가 있고 그 옆
에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반원(半圓) 모양의 조그만 연못이 장차 다가올 연꽃의 향연을 숨죽여
준비한다.

▲  보타사 송덕비와 사적비

▲  반원 모양의 작은 연못

주차장에서 보타사로 인도하는 계단을 오르면 보타사 현판을 머금은 일주문(一柱門)이 중생들
을 맞는다. 일주문이라고 하나 그냥 일반 주택 대문에 기와 지붕을 얹힌 모습이다.


▲  보타사 일주문

▲  보타사 대웅전(大雄殿)

개운사 동쪽 그늘진 곳에 비구니 절인 보타사가 살포시 자리해 있다. 대원암과 더불어 개운사
의 부속 사찰로 경내가 숲에 완전히 감싸여 있어 바깥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나무들이 무
성해 속세의 온갖 기운과 소음을 거의 털어버린다. 그래서 도심 속에 박혀있음에도 늘 번잡한
안암동 대학가가 지척임에도 고적하고 아늑한 산사(山寺)의 분위기가 진하다. 그야말로 '절간
답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보타사는 개운산<開運山, 안암산(安岩山)>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서쪽을 제외하면 모두
가 막힌 궁색한 곳으로 경내 동쪽과 남쪽은 고려대로 막혀있고, 북쪽은 벼랑으로 완전히 막혀
있으며, 그 벼랑 윗쪽에 개운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북악산길이 흘러가 차량의 굉음이 조금
씩 전해진다. 그리고 서쪽은 고려대 안암학사와 개운사로 나가는 길이 있다.

이곳은 원래 20세기 중반 불교전문강원과 중앙승가대학의 기숙사로 출발했다. 허나 1911년 2
월 경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마애보살좌상 옆에 맞배지붕 건물이 보인다. 그런 것을 보면 개
운사나 대원암에서 마애불 관리를 위해 닦은 조그만 건물이 이전부터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기숙사 건물을 손질해 칠성암(七星庵)이란 간판을 내걸었으며, 1980년대에 보타사로 이
름을 갈아 마애불과 금동보살좌상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절을 꾸리고 있다.

처음에는 개운사의 부속 암자로 조용히 묻혀 지냈고, 마애불 또한 주변 사람만 찾아올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하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란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결국 세상에 그 모습
을 드러내게 된다.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가 서울에 숨겨진 문화유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이
마애불이 발견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늙은 존재로만 주변에 전해졌는데, 조사를
해보니 무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하여 바로 이듬해에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2014년에 국가 보물로 승진하기
에 이른다. 또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치 않은 유희좌 스타일로 그 역시 지방문화재로
있다가 2014년 3월에 보물로 승진되어 같은 해에 무려 보물급 문화재를 2개나 지니는 위엄을
보였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관음전, 선방 등 4~5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2018년 이후 관음전
을 새로 짓는 등, 크게 중창불사를 벌였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마애보살좌상과 금동보살좌상
등의 값비싼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으며, 숲에 묻힌 벼랑 밑부분이라 깊은 산중에 들어선 기
분을 물씬 들게 만들어 이곳이 서울 한복판임을 순간 잊게 한다.


▲  대웅전 내부 (석가여래상과 영산회상도, 신중도)

일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마애불과 벼랑이 있고, 오른쪽에는 선방(禪房), 왼쪽에는 대웅전과
관음전이 자리해 있다.

보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집이다. 불단(佛壇)에는 금색 찬란한 석가여래상이 들어앉아 있는데, 근래에 조성되어 피
부가 아주 탱탱하며, 변색된 부분이 없는 100% 금동 피부로 그의 광배(光背)는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습 같다.
볼살이 많아 보이는 그의 온후한 표정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데,
그 뒤에는 그 흔한 후불탱을 두지 않고 환하게 창문을 내어 마애보살좌상이 보이게끔 하였다.
그러니까 마애불이 일종의 후불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불상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과일과 꽃, 쌀로 상에 금이 갈 지경이며, 건물 좌측 벽에는 석가
여래의 설법 장면을 담은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와 법당 수호용인 신중도(神衆圖)가 걸려있
다. 이들은 2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지 않았다.


 

♠  보타사의 보물들 (마애보살좌상, 금동보살좌상)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磨崖菩薩坐像) - 보물 1828호

대웅전 뒷쪽 벼랑에는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마애보살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마애불
이 고된 몸을 기댄 화강암 벼랑은 거의 80~85도 각도로 불상 윗쪽에는 암벽이 눈썹바위 마냥
앞으로 길게 튀어나와 자연산 모자나 보개(寶蓋)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그 윗쪽에는 개운
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2차선 북악산로가 있어 차량 소리가 가늘게 들린다.

이 마애불은 오랫동안 안암산의 은자(隱者)로 이곳에 살짝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어떤 자료에는 발굴했다고도 나온다. 허나 그는 바깥에
노출된 상태였으므로 발견이 맞다. 서울의 대표적인 고찰(古刹)의 하나인 개운사가 바로 지척
이고 개운사 그늘에 자리한 곳에 조그만 것도 아닌 커다란 마애불이 수백 년이나 숨어왔으니
그의 숨바꼭질 실력이 참으로 대단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 가치를 인정받아 발견된 이듬해(1993년)에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89호
로 지정되었고, 2014년 3월 경내에 있는 금동보살좌상이 국가 보물로 지정되자 그 여세를 몰
아 그해 7월 보물로 승진되었다.

마애불의 높이는 대략 5m, 폭은 4.3m로 조사 결과 고려 후기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홍은동 옥천암(玉泉庵) 마애보살좌상(보도각 백불)을 너
무나 닮았다. 보관(寶冠)은 좀 틀리지만 얼굴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하얀 피부까지 옥천암의
그것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옥천암 마애불 역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같은 사람이 조성하거나 모방하여 만
든 것으로 여겨지며, 고려 후기 서울 변두리에서 아주 잠깐 나타났던 마애불 형식으로 진정한
서울 스타일의 고려 마애불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마애불은 천하에서 서울에 딱 2곳뿐이라는
것이다.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전경

마애불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에는 보관을 눌러쓰고 있는데, 좌우로 관대(冠帶)가 나와있고
그 밑에 보관 장식이 늘어져 있다. 그리고 오른쪽 관대 밑에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긴 장식
이 눈에 띈다. 하얀 얼굴은 약간 볼살이 있어 보이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그 눈썹
사이에 백호가 찍혀 있으며, 검은 두 눈은 지그시 뜨고 있다. 코와 입은 좀 작은 편이며, 입
술은 붉은색이나 빛이 좀 바래있고, 귀는 보관 장식에 가려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왼쪽 가슴을 가로지르
는 스카프 형태의 천의(天衣)가 밖으로 흘러나오도록 표현되어 있다. 왼쪽 팔은 몸에 비해 지
나치게 크고 길게 표현되어 괴물 팔처럼 보이는데, 팔찌를 낀 왼손은 무릎 밑까지 내려와 있
으며, 엄지와 3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그리고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올려 엄지와 2번째 손
가락을 맞대고 있다.
옷의 주름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고, 두 다리는 포개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다. 그리
고 두 발은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마애보살좌상 옆에 새겨진 네모난 원패(圓牌)

마애불 어깨쪽 좌우에는 네모나게 구멍이 파여 있다. 이는 자연산 구멍이 아니라 마애불을 지
켜주던 목조 건물이나 보호각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마애불에 대한 기
록이 전혀 없어 언제 지어지고 어떤 모습을 취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마애불은 보호각을
갑옷으로 삼아 온전하게 살아남았고, 그를 살린 보호각은 장대한 역사의 거친 흐름 속에 형편
없이 녹아 없어져 이렇게 상처 만이 남게 되었다.

마애불 왼손 쪽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네모난 공간이 있는데, 이를 원패라고 부른다. 이 원
패는 제작 당시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南無金剛會上佛菩薩(나무금강회상불보살)'이라 쓰
여 있다. 원패란 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적어 불단 앞에 놓는 것으로 마애불 옆에 새겨진 점이
꽤 이채롭다.


▲  마애보살좌상의 얼굴과 자연이 그에게 씌워준 자연산 돌모자
어깨 양쪽에 파인 홈은 옛날에 사라진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들이다.

▲  바로 밑에서 바라본 마애보살좌상의 위엄
오른쪽 발은 발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했으며, 왼쪽 발은 오른쪽 발에 가려져 있다.
 

현재 마애불은 하얀 피부의 백불이지만 원래부터 백불은 아니었다. 하얗게 호분(胡粉, 여자들
이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하던 것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듬)을 칠한 것은 20세기에 들어
와서이며, 그로 인해 몇몇 부분은 확인이 어렵게 되었다. 참고로 그와 친척뻘인 옥천암 마애
보살좌상은 19세기에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가 호분을 칠했다고 전
한다.


▲  관음전(觀音殿)

대웅전 옆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관음전이 있다. 지금 집은 2018년 이후에 새롭게 지은 것으로
원래는 여염집 모습의 기와집이 있었는데, 중앙승가대학 숙소로 쓰였던 것을 요사(寮舍)와 종
무소(宗務所), 금동보살좌상의 거처까지 담당하던 복합 공간으로 쓰이다가 새 건물을 장만하
면서 모두 분리가 되었다.
관음전이란 이름 그대로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금동보살좌상의 거처이다. 중창불사로
잠시 대원암으로 거처를 옮겼고,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새 관음전에 안착을 했다.

▲  보타사 금동보살좌상(金銅菩薩坐像) - 보물 1818호

관음전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한 불상이나 보살 스타일이 아니다. 오른쪽 다리
는 연화좌에 올려 무릎을 세웠고 왼쪽 다리는 밑으로 내린 모습이기 때문이다. 딱 보면 아줌
마 스타일의 착석 방법과도 비슷한데, 이런 포즈를 유희좌(遊戱座)라고 한다.

유희좌는 9세기 이후 북송(北宋) 시절부터 생겨났는데, 이 땅에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중
기에 가뭄에 콩 나듯 조금씩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매우 귀한 실정이라 그 가치는 대단할 수
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현대사찰 보타사에 버젓히 서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보살상이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제자리가 어디었는지는 귀신
도 모르는 실정이며, 보살상 또한 굳게 입을 다물며 진술을 거절한다. 아마도 이리저리 떠돌
다가 중앙승가대학으로 흘러들어와 기숙사 불단에 봉안되었고, 기숙사 건물이 보타사로 변신
하면서 이렇게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앞서 마애보살좌상이 좀 남성적이라면 이 보살상은 여성적이다. 고품격과 미색(美色)이 느껴
지는 그의 정체는 딱 봐도 관세음보살 누님인데, 덩치는 조그만하고 머리에는 황제의 금관을
털어버릴 정도로 장엄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칼이 조금 나와있다. 얼
굴은 아리따운 여인네처럼 곱기 그지 없어 은근히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카메라도 그를 보고
잔뜩 흥분을 했는지 셔터가 마구마구 눌러진다.
불상과 보살상은 보통 당시 왕족이나 귀족, 특정 인물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만든 경우가 적
지 않아서 아마도 이쁘장하게 생긴 젊은 귀족이나 중년층 여인을 모델로 삼은 듯 싶다.

그의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두 눈은 지그시 떠 있으며 코는 작고, 입술은 작지만 어여
쁜 모습이다. 볼에는 살이 조금 있어 보이며, 가슴에는 온갖 장식물을 달고 있다. 어깨에는
천의(天衣)를 걸치고 있고 그 한 자락을 수직으로 늘어뜨렸는데, 이는 조선 초기 보살상에서
조금 등장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그가 앉아있는 연화좌(蓮花座)는 보타사에서 마련한 것으
로 오래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보살상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과 조그만 불상/보살상이 많이 등장하는 조선 초기 금동상 중에
서 그나마 규모가 큰 점으로 보아 조선 초에 왕실이나 귀족에서 발원하여 특별히 제작된 것으
로 보인다.
비록 고향은 잃었지만 건강 상태는 양호하며, 조선 초기 귀족적인 보살상의 형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케이스이자 조선시대 보살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2006년에 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216호
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3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이처럼 귀한 몸이니 보타사에서 유리막을 설치해 그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끔 했는데, 어찌보
면 유리 감옥에 갇혀있는 듯 답답하게 보이기도 한다. 허나 어찌하랴?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
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걸 두고 바로 필요악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보타사 승려들은 별 거부감 없이 그를 쿨하게 공개하고 있고, 사진 촬영에도 호의적이
라 그것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 보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7 (개운사길 60-46 ☎ 02-928-2074)


▲  고적한 보타사를 뒤로하며~~~

숲속의 절집 보타사를 둘러보고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아직 해가 한참이나 남아있어 보너스
시간을 받은 기분인데, 어디로 가야 널리 칭찬을 받을까 궁리를 하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
다. 개운사와 보타사는 여러 번 인연을 지었지만 정작 그들을 품은 개운산은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다. 즉 자식만 살펴봤지 그 어미는 살펴보지 않은 꼴이다. 게다가 개운산은 서울 장안
에 몇 남지 않은 미답처(未踏處)이기도 하다.
하여 미답지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비록 보타사가 개운산 자락에 있
다고 해도 개발의 칼질로 서로를 바로 이어주는 길은 진작에 끊겼다. 그나마 빠르게 개운산으
로 가려면 고려대 안암학사를 가로질러 정문으로 올라가 북악산길로 나가야 된다.

북악산길은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에서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선과 미아리고개, 개운산 남
부를 거쳐 종암동 개운산입구 교차로까지 이어지는 서울에 대표적인 산악도로이다. 아리랑고
개까지만 북악산길로 알고 있었는데 개운산 산복도로까지 그 일원으로 있었다.
개운산을 넘어 종암동(鍾岩洞)까지 발을 뻗치고 있는 북악산길의 위엄에 새삼 놀라며 안암학
사 정문에서 3분 정도 그 길을 거닐면 성북구의회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개운산 산책을
벌였다.


▲  잠깐 거쳐간 북악산길 (안암학사에서 성북구의회 입구 방면)

▲  성북구의회 입구에서 바라본 북악산길 (종암동 방향)


 

♠  성북구 한복판에 누워있는 도심 속의 포근한 뒷동산
개운산<開運山, 안암산(安岩山)>

▲  편안한 둘레길의 정석, 개운산둘레길 (명상의 길)

도심 속에 자리한 개운산(134m)은 성북구 안암동과 종암동, 돈암동(敦岩洞)에 걸쳐있는 조촐
한 뫼이다. 개운산이란 이름은 산 남쪽에 자리한 개운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안암동에 있다고
해서 '안암산', 종암1동에 진씨(陳氏)의 채석장이 있어서 '진석산'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

산 서쪽에는 그 유명한 미아리고개가 있으며, 그 고개를 통해 아리랑고개와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산줄기와 이어진다. 산 남쪽과 동쪽은 평지이며, 북쪽은 야트막한 산지로 북
한산과 이어진다.
허나 개발의 무분별한 칼춤으로 인해 산 주위로 아파트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산의 목을
조르고 있으며, 그로 인해 도시에 완전히 고립된 외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 1982
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더 이상의 험한 꼴은 면했으나 겨우 높은 지대(거의 70~75m 이상)
만 자연의 공간으로 살아남았을 뿐이다.

개운산은 1936년 경성부(京城府, 서울의 왜정 시절 이름)에 편입되면서 그 주변이 신흥 주택
가로 주목을 받아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1940년 공원 지역으로 고시되
었으나 해방 이후 북쪽에서 많은 월남민들이 서울로 몰려들었고, 특히 도심과 가까운 안암산
자락에 마구 집을 닦아 머물면서 수목들이 상당히 희생되었다. 게다가 6.25전쟁으로 미아리고
개~개운산~종암동을 잇는 서울의 최후 방어 저지선을 지키고자 치열한 전쟁이 벌어져 산은 완
전 민둥산 신세가 되어버렸다.
196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다시 숱이 늘어났으나 산 주위로 주택가 확
대와 대학교들의 몸집 불리기로 계속 위협을 당하던 중, 1982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산
을 향한 개발의 칼질은 크게 줄었다.
2000년 이후 둘레길이 크게 유행을 타자 성북구가 3.4km의 개운산둘레길을 닦았고, 산책로와
산길 정비, 운동시설 확충, 울창한 숲속에 야외도서관과 유아숲체험장 등을 닦아놓아 조그만
산에 정말 없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알차게도 다듬었다. 게다가 숲이 짙어 조촐하게 산림
욕장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개운산은 덩치가 작으니 산행이 아닌 산책이란 말이 어울릴 것이다. 성북구의회에서 나들이를
시작하여 둘레길을 따라 산을 1바퀴 돌아도 되고, 성북구의회에서 북쪽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마로니에마당으로 이동해도 된다. 마로니에마당은 개운산 정상(134m)으로 산의 몸집에 비해
정상이 너무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산으로 인도하는 길은 성북구의회, 북악산길 개운산 구간(중간중간에 산길이 있음), 종암아이
파크2차아파트 남쪽 길(종암로9가길), 종암동 죽림정사, 동부센트레빌아파트, 돈암동 새소리
어린이공원, 돈암풍림아파트 등이 있으니 각자 취향에 따라 골라가기 바란다.
아직은 동네 사람들이 주로 찾는 동네 명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지만 가볍게 오를만한 도
심 속의 아늑한 뒷동산이고, 둘레길도 일품급이니 점차 서울의 주요 명소로 크게 거듭나리라
믿는다. 그럼 지금부터 개운산을 1바퀴 둘러보도록 하자.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종암동, 돈암동


▲  지그재그로 닦여진 개운산둘레길 계단길 (명상의 길)

성북구의회 입구에서 2분 정도 들어가면 좌우로 갈라지는 막다른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
쪽(북쪽)으로 가면 의회, 개운산 정상 방면이고, 오른쪽(남쪽)은 군부대 쪽인데, 오른쪽으로
길을 잡으면 이내 개운산둘레길이 동아줄 같은 길을 살짝 내려놓는다.
여기서 둘레길로 들어서니 시멘트길 대신 정겨운 흙길이 펼쳐져 개운산도 엄연한 산임을 짙게
내비춘다. 아무래도 산이 작아서 사람들이 뒷동산, 언덕이라고 낮춰서 대하니 산도 발끈하여
이런 길을 꺼내든 모양이다. (둘레길은 상당수 흙길이며, 북쪽은 지형상 나무로 닦은 데크길
이 많음)

개운산둘레길은 3.4km로 명상의 길, 연인의 길, 산마루길, 사색의 길, 건강의 길 등 5개 코스
로 이루어져 있다. 허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름일 뿐이며, 산이라 약간의 오르락내
리락이 있을 뿐, 길도 느긋하고 잘 닦여져 있다.
개운산 남쪽 봉우리에는 군부대가 닦여져 있어서 둘레길은 이들의 눈치를 보며 다소 남쪽으로
피해가며, 크게 1굽이를 돌면 종암동 구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  푸른 숲터널, 개운산둘레길 (명상의 길)

▲  개운산둘레길(명상의 길)에서 바라본 천하
숲 사이로 종암동과 청량리, 천장산(天藏山, 홍릉수목원 뒷산), 중랑구 지역,
아차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비록 하늘로 조금 솟은 뫼이나 조망은 낮은
높이치고는 썩 괜찮은 편이다.

▲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개운산둘레길 (명상의 길)

▲  개운산둘레길 종암동 구간에서 만난 바위들 (명상의 길)
세상이 바위에게 달아준 이름은 아직 없다. 바위들이 병풍처럼 들어선 모습이
그리 예사롭지는 않아 보여 옛날에 산악신앙이나 치성 장소로 쓰이지
않았을까 싶다.

▲  개운산둘레길 종암동 구간에서 만난 운치 깊은 소나무 (명상의 길)
소나무를 해치지 않고 그 양 옆으로 길을 내어 그를 조금이나마 배려해주었다.

▲  녹음 속에 펼쳐진 개운산둘레길 (연인의 길)

▲  개운산둘레길(연인의 길)에서 윗쪽으로 오르는 계단길
저 계단의 끝에는 개운산 산책을 시작했던 성북구의회 남쪽과 이어진다.
결국 원점으로 다시 돌아간 셈이다.

▲  개운산스포츠센터 뒷쪽(동쪽) 숲길

▲  솔내음이 두텁게 막을 이루고 있는 담소정 서쪽 소나무숲
이곳 평상에 누워 낮잠 한숨 청하면 정말 꿀잠이 따로 없을 것 같다. 사진에는
짤렸지만 책장이 있는 야외도서관도 있으니 솔내음의 가피 아래 독서의
즐거움도 누려보자~~! (책은 반드시 제자리에 꽂아둘 것)

▲  푸른 기와를 지닌 6각형 모습의 담소정(談笑亭)
정자 이름이 참 인간적이다. 즐겁게 이야기 꽃을 피우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모양인데, 좋은 사람들과 즐기는 이야기꽃만큼
아름다운 꽃도 없지~~!

▲  담소정에서 개운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개운산둘레길 산마루길)

앞서 잠시 떨어졌던 개운산둘레길은 담소정에서 다시 만나 정상(마로니에마당)까지 함께 한다
. 담소정~정상 구간을 산마루길이라 하는데, 이 구간이 개운산의 지붕 길이자 중심 길로 쿠션
이 느껴질 정도로 길이 잘 닦여져 있어 발도 아주 호강을 누린다.


▲  담소정에서 성북구의회 방면 산책로

▲  개운산둘레길 산마루길 ① (개운산 정상 방면)

▲  개운산둘레길 산마루길 ② (성북구의회 방면)

▲  일품 그늘을 지닌 네모난 초가 정자 (산마루길 옆)

▲  아직은 썰렁한 개운산 자연학습장 (산마루길 서쪽)

▲  드디어 개운산 정상 직전 (저 길의 끝에 마로니에마당이 있음)

▲  개운산 정상, 마로니에마당

개운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마로니에마당은 평평한 너른 공간이다. 이곳의 절반 정도는
푸른 잔디가 잔잔하게 입혀져 있으며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과 화목정이란 정자를 비롯해
쉼터와 운동시설이 넉넉히 깔려 있어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하다.
정상이라고 하지만 주변에 나무가 빼곡하여 조망은 별로이며, 북쪽으로 둘레길을 따라 내려가
면 길음역과 동부센트레빌아파트 방면, 동쪽은 종암동 죽림정사로 이어진다.

▲  남쪽에서 바라본 마로니에마당

▲  북쪽에서 바라본 마로니에마당과 헬기장

▲  푸른 기와를 지닌 화목정(和睦亭)

▲  개운산 정상 북쪽 밑에서 바라본
종암동과 개운산 남쪽 부분


▲  개운산 정상에서 길음역 방면으로 내려가는 나무계단길
(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 구간)


개운산 북쪽은 산세가 조금 패기가 있다. 그렇다고 아주 험한 것까지는 아닌데, 정상 바로 밑
이다 보니 경사가 다소 흥분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무로 계단을 닦고 길을 내었는데, 둘레길
은 그 계단과 나무테크길을 따라 미아리고개 동쪽인 돈암삼성아파트 뒷쪽으로 이어진다.


▲  개운산 북쪽 자락을 흐르는 나무데크길 (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
산길을 편하게 닦아놓아 거닐기도 좋고, 숲도 삼삼하여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사색에 잠기기에 좋다. 하여 생각 좀 하고 살라는 뜻에서 길 이름을
사색의 길이라 지은 모양이다.

▲  개운산 북쪽 자락 나무데크길(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에서 바라본
길음동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  동부센트레빌아파트 뒷쪽 산자락을 지나는 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

▲  개운산 나들이의 종점, 돈암1동 새소리어린이공원

개운산둘레길을 완전히 1바퀴 돌고 싶었으나 시간도 그렇고, 더 이상 땡기지도 않아서 (여기
서 더 가면 다시 성북구의회임) 둘레길을 버리고 새소리어린이공원으로 내려왔다. 이 공원은
개운산의 북쪽 관문 중 하나로 길음역(4호선) 2,3번 출구에서 도보 5분 거리라 접근성도 아주
좋다.

시간은 어느덧 17시 30분. 그리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개운사와 보타사에 깃든 보물들, 그리고
개운산까지 많은 곳을 둘러보니 정말 배가 부르다. 특히 오랜 미답처였던 개운산은 거의 상당
부분을 둘러보았으니 그와의 첫 인연치고는 성과는 좋다.
욕심은 과하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여기서 쿨하게 길을 접으며 개운산 봄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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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조선 후기 마애불을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 중계동 불암산 학도암 ~~~ (서울둘레길, 맛있는 공양밥 1그릇)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불암산 학도
암 ~~~~~

▲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  학도암 마애사리탑

▲  약사전 석조약사3존불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초파일 앓이가 심하여 그날에 대한 설레감이 다른 날보다
무척 크다. 하여 매년 거르지 않고 내가 서식하고 있는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과 문화
유산을 품은 현대 사찰을 중심으로 순례를 가장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예전에는 경기도 지역과 멀리 경북 문경의 봉암사(鳳巖寺, 2003년)까지 찾아가곤 했으
나 2011년부터는 서울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인다. 서울 시내에도 오래된 절이 제법 많
고 역사는 짧아도 문화유산을 간직한 절이 꽤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을 찾아다니
기가 어언 10여 년, 이제는 미답(未踏)으로 남은 절이 고갈 직전에 이르렀다.

그래도 1년에 오직 하루뿐인 초파일이니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예전에 가봤던
오래된 절 중, 문화유산을 보유한 절까지 포함시켜 절 투어 동선을 짜보았다. '어디를
가야만 잘갔다고 칭찬을 들을까~?' 장소를 물색하다가 집에서 가까운 불암산 학도암에
조선 후기 마애사리탑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학도암은 이미 여러 번이 인연을 지은 절이나 정작 마애사리탑은 만나지 못했다. 그는
2015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새내기 문화유산으로 아직까진 낯설은 마애사리탑의 생
김새도 구경하고 학도암의 초파일 인심도 확인할 겸, 그곳을 이번 초파일의 첫 답사지
로 정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초파일의 아침이 밝아왔다.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꿈나라에서
서둘러 벗어나 오전 11시에 도봉동 집을 나섰다. 집 부근에서 도봉구 마을버스 09번을
타고 창동역(1,4호선)으로 이동한 다음, 중계본동으로 가는 1142번 시내버스로 환승하
여 노원우체국에서 두 발을 내린다.
미로처럼 얽히고 설킨 중계본동의 여러 아파트를 지나 학도암으로 인도하는 골목(중계
로14다길)으로 들어섰는데, 날이 날인지라 절로 향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속세와 자연의 경계에 징하게 말뚝을 박은 노원교회를 지나면 키다리 아파트와 주택들
대신 불암산의 싱그러운 숲이 펼쳐진다. 숲 바로 직전에는 황금색 배들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배밭이 펼쳐져 있는데, 이들은 서울의 토산품인 먹골배로 봉화산(烽
火山)과 태릉 주변, 불암산 주변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번잡한 시가지가 주로 연상
되는 서울에서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배밭을 보니 마치 서라벌 경주에서 고구려 청동
호우를 만난 듯 꽤나 낯설고 신선하다.

불암산의 시원스런 산바람에 번뇌를 살짝 부탁하며 숲길을 오르면 천하 둘레길의 성지
로 추앙받는 서울둘레길이 마중한다. 총 거리가 무려 157km에 이르는 서울둘레길은 불
암산둘레길의 신세를 지며 남북으로 흘러간다.
살방한 산길의 정석인 둘레길의 유혹을 뿌리치고 연등의 물결을 따라 계속 오르막길을
고집하면 보이지 않던 학도암 경내와 주차장이 슬슬 꽁무니를 비춘다. 여기서 잠시 경
내를 접어두고 주차장 직전 오른쪽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를 주목해보자. 그 바위 피부
에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마애사리탑이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하지만 너무 없는 듯
자리하고 있어 그의 존재를 눈치 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  학도암으로 인도하는 불암산 숲길
녹음(綠陰)에 잠긴 나무들이 시원한 내음을 베풀며 벌써부터 달라붙은
더위의 산물(땀)을 싹 단죄한다.


 

♠  학도암(鶴到庵) 입문 (마애사리탑)

▲  학도암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4호

경내 직전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에는 마애사리탑 2기가 살짝 서려있다. 마애사리탑이란 적당
한 바위에 감실(龕室)을 파고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조선 후기(19세기)에 서울과 경기도 일부
지역 사찰에서 나타나는 서울 스타일의 사리탑<승탑(僧塔)>이다. 현재 학도암과 도봉산 천축
사(天竺寺)에 19세기 마애사리탑이 전하고 있으며, 인왕산 석굴암(石窟庵)과 상도동 사자암(
獅子庵) 등에 20세기 사리탑이 전할 뿐, 널리 유행하지는 못했다.

마애사리탑을 지닌 절은 하나 같이 산중에 자리해 있어 사리탑을 닦을 자리가 여의치 못했고
재정도 넉넉치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여 절 부근 바위를 활용해 조촐하게 공간을 다듬고 감
실을 닦은 다음 사리함을 봉안한 마애사리탑이 반짝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일반 승탑보다 제작
비용도 많이 저렴하며 공간도 적게 잡아먹을 뿐 아니라 바위만 있으면 되니 갖추기는 쉽다.


▲  바위에 문신처럼 새겨진 마애사리탑
왼쪽은 '청신녀월영영주지탑', 오른쪽은 '환
당선사취근지탑'


학도암 마애사리탑은 바위 피부에 비석 모양으로 길쭉하고 얕게 자리를 만들고 윗쪽에 네모난
감실을 두어 사리함을 봉안했다. 하지만 그 감실은 오래전에 털렸고 그곳에 깃든 사리함 등의
유물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남아있는 것이 전혀 없다.

왼쪽 사리탑은 '청신녀 월영영주지탑(淸信女 月影靈珠之塔)'으로 월영영주란 여인의 납골당이
다. 승려도 아닌 여인 신도의 사리탑을 경내 밑에 만들어줄 정도라면 절에 대한 공헌이 꽤 컸
던 모양이다. '嘉慶(가경)二十四年 己卯十月'이란 글씨가 옆에 새겨져 있어 가경24년 을묘년(
1819년) 10월에 조성되었음을 귀뜀해주고 있으며, 오른쪽에 대자연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
가 하나 있을 뿐,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
그리고 오른쪽 사리탑은 '환□당선사 취근지탑(幻□堂禪師 就根之塔)'으로 '환(幻)'과 '堂'
사이에 마치 총탄이 요란하게 할퀴고 간 듯, 크게 구멍이 나서 그 사이에 자리한 1자는 확인
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머지 글씨는 멀쩡하여 '환ㅇ당 취근 선사'의 사리탑임을 알려준다.
조성 시기는 쓰여있지 않으나 돌을 다듬은 수법이나 양식으로 미루어 왼쪽 사리탑과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다만 누가 더 나이가 많은 지는 견주기가 어렵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마애사리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감실이 잘 남아있으며, 고맙게
도 사리탑 주인공과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19세기 초반 마애사리탑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하여 뒤늦게나마 2015년 8월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만약 그 글
씨가 없었다면 비록 서울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조선 후기 마애사리탑이라고 해도 그 가치
를 저평가 받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사리탑을 조성한 옛 사람들의 작은 센스가 이들의 가치를 돋보이게 해주어 사리탑의 미
래까지 챙겨준 것이다.


▲  주차장에서 바라본 학도암 (오른쪽 바위 위에 석조지장보살상이 있음)

학도암의 낯선 존재, 마애사리탑을 둘러보고 초파일의 흥겨움으로 가득 묻어난 학도암 경내로
들어섰다. 절은 가파른 경사에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포근히 자리를 닦았는데 주차장에서 경
내로 인도하는 길은 크게 2개로 계단길과 차량을 위해 넓게 지은 오른쪽 길이 있다. 어느 길
로 가던 취향에 따라 골라가면 되나 이들 모두 경사의 압박이 조금 있어 잠시 숨을 헐떡이게
한다.


▲  경내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중계본동과 하계동, 월계동,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잡힌다.


▲  새 건물 냄새가 진동하는 대웅전(大雄殿)

몇년 만에 다시 찾은 학도암은 세월의 흐름 그 이상만큼이나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동안
뇌리 속에 깊히 박힌 학도암의 모습 대신 '내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또다른 모습이 나를 맞이했던 것이다.

예전에는 선방, 요사(寮舍), 종무소(宗務所)의 역할까지 모두 도맡았던 법당이 대웅전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2014년에 그 건물을 부시고 번듯하게 대웅전을 지어올렸고 지장보살상이 있
던 자리에는 종무소를 닦았다. (지장보살상은 바위 쪽으로 밀려남) 그리고 대웅전 아랫쪽에는
공양간을 갖춘 요사를 두어 철저히 분업화시켰다. 하여 예전보다는 정리되고 깔끔한 모습이지
만 한편으로는 낯설게 다가온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불과 지장보살, 관음보살로 이
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뜨락에는 하얀 천막과 의자를 넉넉히 깔아 중생들의 편의
를 배려하였고, 관불의식의 현장도 닦아놓아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학도암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대웅전 현판의 위엄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

학도암은 불암산(507m) 서남쪽 자락 160m 고지에 포근히 둥지를 튼 조그만 절이다. 숲이 무성
하고 작은 계곡이 옆에 흐르며, 멋드러진 바위가 주변에 포진해있어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낸
다. 예로부터 이렇게 빼어난 경승지에는 학과 관련된 전설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데, 이곳 역
시 학이 날라와 머물렀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하여 학이 왔다는 뜻의 학도암이란 이름을 지니
게 되었다.

이 절은 1624년 무공화상(無空和尙)이 불암산 어딘가에 있던 옛 암자를 옮겨와 창건했다고 한
다. 허나 그 암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으며, 불암산에는 적당한 절터도 전해오
지 않는다. 게다가 관련 기록도 남아있질 않아 창건 시기에 심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허
나 앞서 언급했던 19세기 초반 마애사리탑이 전하고 있어 적어도 17~18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870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주에 힘입어 절 뒤쪽 바위에 거대한 마애관음보살을 새겼으며
1875년에 벽운화상(碧雲和尙)이 절을 중창했다. 1878년에는 한씨(韓氏) 일가의 시주로 마애관
음보살을 보수했고, 1885년 벽운화상이 수락산 흥국사(興國寺) 출신 화승(畵僧)인 경선(慶船)
에게 부탁하여 불상 1구를 개금(改金)하고 불화 6점을 봉안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1922년 성담(聖曇)이 주지로 있으면서 개인 소유로 넘어갔던 절 소유의 산림 10여 정보를 매
입하여 절의 경계를 넓혔으며, 1966년에 주지 김명호가 법당을 중건했다. 1970년 영산회상도
를 봉안하고 1972년에 삼성각에 칠성탱과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2000년에는 마애불 옆에 있는
조그만 자연동굴을 넓혀 석조약사3존불을 안치해 약사전으로 삼았다.
그리고 2005년에 승려 무이
(無二)가 법당 남쪽 공터를 닦아 석조지장보살상을 봉안했고, 2014
년에 다용도로 쓰이던 법당을 밀고 새로 대웅전과 요사, 종무소를 짓고 대웅전 밑에 공양간을
지어 2016년에 완성을 보았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약사전, 요사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
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마애관음보살좌상과 마애사리탑을 간직하고 있다.

개발의 칼질이 절 밑 500m 아래까지 밀고 들어와 옛날과 달리 속세와 많이 가까워졌지만 짙은
숲이 그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고 있어 적막하고 고즈넉한 산사의 멋과 분위기를 잘 간직하
고 있으며, 절의 규모도 아담하여 두 눈으로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동 3 (종계로14다길 89 ☎ 02-930-6555)

▲  바위 위에 자리를 닦은 지장보살좌상
(2005년에 조성됨)

▲  대웅전 옆에서 바라본 마애관음보살좌상과
그를 품은 거대한 바위


 

♠  학도암 둘러보기

▲  초파일 특수를 위해 고생하는 아기부처의 관불의식 현장

초파일을 맞이하여 아기 부처가 연꽃대좌를 갖춘 코끼리를 타고 1년 만에 화려한 외출을 나왔
다. 그 적지 않은 시간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무료하게 지낸 터라 간만에 외출에 신이 난 표정
인데, 절을 찾은 중생들은 그의 머리에 물을 껴얹는 이른바 관불(관정)의식을 행하며 그의 생
일을 축하한다.
아기부처 바로 옆에는 옥의 티처럼 불전함이 덩그러니 놓여져 애타게 중생들의 호주머니를 쳐
다본다. 마치 오늘날 돈으로 얼룩진 종교의 한 단면을 보여주듯이...


▲  대웅전, 종무소 앞에서 바라본 경내 뒷쪽
사진 가운데에 보이는 바위에 마애관음보살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  삼성각(三聖閣)
마애관음보살 우측 구석에 삼성각이 있다.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1972년에 조성된 칠성탱과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칠성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진 칠성탱

▲  산신 식구들의 단란함이 느껴지는 산신탱


▲  석굴 형식으로 이루어진 약사전(藥師殿)

마애관음보살과 삼성각 사이에 동굴을 품은 장대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밑도리에 약사전
이 아늑하게 둥지를 틀었다. 원래는 1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동굴로 그 내부에 기
도처로 쓰이는 공간이 있었으나 2000년에 동굴 내부를 넓히고 다져서 약사여래좌상과 일광보
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봉안하고 약사전으로 삼았다.
약사전은 석굴 불전(佛殿)으로 한여름에는 시원하고 한겨울에는 따스해 경내의 조촐한 피서지
역할도 도맡고 있다.


▲  약사전 석굴에 자리를 닦은 석조약사3존불
연꽃 무늬가 새겨진 대좌에 앉아 왼손에 약합(藥盒)을 쥐어든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보관(寶冠)을 눌러쓴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좌우를 지킨다.

▲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4호

경내 뒷쪽이자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학도암의 자랑이자 꿀단지인 마애관음보살좌상이 있
다. 약사전을 품은 바위보다 2배 이상이나 커다란 바위에 진하게 깃들여져 있는데 자신이 의
지한 바위만큼이나 장대한 규모로 마애불의 높이가 무려 13.4m에 이른다. 허나 허공을 가득
메운 알록달록 연등이 그의 모습을 온전하게 담는 것을 허용치 않아 사진에 담는데 조금 애를
먹었다.

서쪽을 바라보고 선 그는 1870년 고종의 왕후인 명성황후의 지원으로 조성되었다. 보통 고려
시대 마애불은 각기 개성이 넘치고 거대한 모습을 자랑하는데 반해 조선시대 마애불은 스케일
이 무척이나 좁아터졌던 조선을 닮아서 덩치가 대체로 작았다. (건물이나 성문도 이전 시대보
다 많이 작아짐) 허나 이 불상은 고려 마애불의 화신(化身) 마냥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여 명
성황후의 커다란 야망이 마애불에 고스란히 깃들여진 듯하다.
1870년 한씨 일가의 시주로 마애불을 보수했으며, 불상 왼쪽에 그와 관련된 50여 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조성시기와 제작자, 시주자의 정보를 소상히 알려준다.

서울 지역에서는 북한산(삼각산) 승가사(僧伽寺)에 깃든 고려시대 마애여래좌상(☞ 관련글 보
러가기
)에 버금가는 규모로 암벽에 선각(線刻)으로 처리된 선각 마애불이다. 이제 150년 정도
묵은 한참 때라 선의 아름다운 미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특이하게도 관음보살을 그 대
상으로 하여 조성했는데, 이 땅에서 오래된 마애불이 수천 개가 있지만 정작 관세음보살이 주
인공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  온전하게 담은 마애관음보살좌상의 위엄
(2010년 4월)

▲  연등의 눈치를 피하며 옆에서 담아본
마애관음보살좌상


▲  마애관음보살의 얼굴

마애관음보살의 얼굴은 가늘면서도 볼에 살이 좀 있어 보인다. 좌우로 길쭉한 눈은 지그시 감
겨져 있고 그 위에 무지개처럼 구부러진 눈썹이 떠 있다. 그 눈썹 사이에 동그란 백호가 두텁
게 박혀있고, 코는 크고 두툼하여 복스럽게 보인다. 불상이 선각으로 얕게 조성되었지만 코만
큼은 돋음새김으로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약간 비뚤어져 보이는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며, 전
체적인 얼굴 표정은 편안해 보인다.

얼굴 주변을 밝히는 동그란 두광(頭光) 안에 보관을 표현했는데, 하얀 피부의 돌에 조각을 해
서 그렇지 정말로 호화로운 보관이다. 이마 위쪽에는 연화대좌를 갖춘 조그만 석가불의 모습
이 보이는데, 보관에 따로 불상까지 갖춘 관음보살은 처음이라 눈길을 단단히 부여잡는다. 보
관 양쪽으로 뻗어나온 관대(冠帶) 양쪽에 구슬처럼 달린 마름모 모양의 사슬 장식이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주렁주렁 달려 있어 보관에 대한 군침을 진하게 자극시키는데, 그가 잠시 보관을
내려놓는 사이에 살짝 가져가 머리에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  마애관음보살의 밑도리

마애불은 활짝 핀 연꽃대좌 위에 앉아있는데, 그 대좌 위로 오른쪽 발이 발가락, 발바닥과 함
께 보인다. 왼발은 옷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왕실의 발원으로 조성된 마애불로 조각 솜씨는 섬세하고 화려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마애
불로 꼽힐 만하다. 게다가 조성 관련 명문이 새겨져 있어 마애불의 가치를 더욱 끌어올려준다.
마애불 앞에는 기도처가 마련되어 있으며, 석등(石燈) 2기가 마애불 주변의 어둠을 몰아낸다.


▲  마애관음보살상에서 바라본 천하 (중계동과 노원구, 성북구 지역)
마애관세음보살 누님의 가피가 있기에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지역들은
오늘도 평안하다.

▲  학도암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초파일 절 투어 재미의 하나이자 백미(白眉)는 바로 공양밥 섭취이다. 지금까지 두 눈과 사진
기를 흥분이 넘치도록 호강을 시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된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마애관음보살좌상이고 뭐고 바로 공양밥 행렬에 동참하고 싶었으나 그 마음을 접고
경내를 우선 둘러보았다. 경내가 조촐하고 마애관음보살과 마애사리탑을 빼면 고색의 유물이
전혀 없기 때문에 답사 시간은 그리 많이 필요가 없다.

공양간 주변은 이미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시장통을 이루었다. 학도암에서 정성을 다해 준비
한 공양밥은 실외에서 나눠주고 있었는데, 그 주변과 공양간 실내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던 것
이다. 다행히 밥을 받는 줄은 그다지 길지 않아서 금방 밥을 받았다.
이곳 공양밥은 밥이 담긴 그릇에 호박과 콩나물, 시금치 등 갖은 나물과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다. 이른 더위와 비빔밥의 매운 맛을 잠재우고자 시원한
미역냉국이 딸려 나왔고, 후식용으로 수박 1조각과 절편이 담긴 떡 1봉지도 같이 제공되어 아
주 넉넉한 초파일 인심을 보여주었다. (밥과 나물은 리필 가능함)

팔이 부러질 정도로 나온 공양밥을 들고 적당한 자리를 찾다가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어던지고
공양간 내부로 들어가 간신히 자리를 잡고 공양밥 섭취에 임한다. 양이 많아 보이던 공양밥이
지만 시장기가 상당해 숟가락 몇 번 만에 이내 빈 그릇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수박과 절편까
지 섭취하니 그야말로 점심 1끼 배부르게 잘먹었다.
그렇게 공양밥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후식거리로 믹스 커피도 준비되어 있어 커피까지 1잔 챙
겨먹으며 식곤증을 단죄했다. 그 시간에도 학도암에는 많은 사람들이 초파일 분위기를 누리고
자 꾸역꾸역 들어왔고, 공양간 역시 계속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 공양을 끝으로 오랜만에 찾은 학도암과의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나왔다. 나에게는 그
날 학도암이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  학도암을 뒤로하며 ~~~ (불암산 숲길)

▲  중계본동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12호

중계본동 시내로 나오니 중계로 길가에 오래된 느티나무 하나가 나좀 보고 가라며 발길을 붙
잡는다. 뭔가 싶어서 호기심에 살펴보니 110년 정도 묵은 보호수 느티나무였다.
그는 높이 17m, 둘레 3.4m로 2005년에 서울시 보호수의 등급을 받았다. (그 당시 추정 나이는
약 100년) 예전에는 동네 정자나무의 역할을 하였지만 이곳까지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고 아파
트가 마구 들어서면서 이제는 가로수의 역할로 바뀌었다. 길 건너편에도 오래된 보호수가 있
으나 모두 쿨하게 무시하고 다음 미답지 사찰로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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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이 깃들여진 첩첩한 산골의 절집, 북한산 삼천사 ~~~ (삼천사계곡)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삼각산) 삼천사 '

▲  삼천사 대웅보전


 

♠  삼천사 입문

▲  알록달록 연등이 길을 안내하는 삼천사 길

따사롭던 5월의 첫 주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삼천사를 찾았다. 연신내역에서 그들을 만
나 서울시내버스 7211번(진관차고지↔신설동)을 타고 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잘 닦여진 길을 따라 그곳으로 다가섰다.


▲  그늘에 자리한 족구장 - 이곳은 절터였다.

삼천사 숲길을 들어서면 식당을 옆에 낀 너른 공터가 나온다. 지금은 식당에 딸린 공간이지만
예전에는 사슴농장이 있었지~. 사슴의 숙성된 뿔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시절이 정말 엊그
제 같거늘, 그들은 죄다 어디로 갔는지 그들의 안부가 새삼 궁금해진다.

겉으로 보면 산이나 계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과 농장의 쉼터이지만 놀랍게도 이곳에 옛
절터의 흔적(삼천리골사지1)이 아주 희미하게 묻혀있다. (안내문은 없음) 그 절터는 공터를 중
심으로 주변 식당들까지 아우르고 있는데, 아직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절의 정체
를 알 수 없다. 다만 진관사(津寬寺)가 근처에 있어 그의 전신(前身)이라는 신혈사(神穴寺)터
로 보기도 하며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편의상 '삼천리골사지(寺址) 1'로 분류했다.
<삼천리골사지2는 삼천사계곡 상류에 있으며 삼천사터의 일부로 여겨짐>
여기서는 다량의 토기와 기와, 청자파편 등이 나왔는데, 행락지로 먹고 사는 사유지다보니 훼
손이 심각해 하루 속히 발굴조사가 절실해 보인다. 혹시 아는가 이곳이 정말 고려 8대 제왕인
현종(顯宗)과 인연이 아주 깊다는 신혈사의 마지막 흔적이었을지도?


▲  녹음(綠陰)이 짙은 삼천사 가는 길
저 짙푸른 녹음 속에 나를 잠시 숨겨본다.


삼천리골사지1을 지나면 식당들이 줄지어 나타나는데, 그 와중에 '삼천탐방지원센터'로 변신한
옛 매표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내야했으나 2007년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면서 더 이상 매표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삼천탐방지원센터에서 3분 정도 가면 고개가 나타난다. 고개 앞에는 삼천사를 알리는 돌기둥이
멀뚱히 서 있는데 여기서 고갯길과 계곡길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던 삼천사는 나오게 되어 있
으나 시멘트길인 고갯길은 다소 각박하고 돌아가는 편이며, 차량들의 왕래가 잦다. 반면 계곡
길은 빠르게 갈 수 있는 지름길로 계곡 주변에 주막들이 여럿 모여 앉아 절을 목전에 둔 속세
의 마지막 유혹을 펼친다.


▲  미타교 직전 고갯길

▲  계곡의 아름다운 경관을 크게 들쑤신 미타교(彌陀橋)

계곡길을 5분 정도 오르면 고갯길과 다시 만나면서 약간 경사가 진 고개가 나타난다. 그 고개
를 넘으면 북한산 일품 계곡의 하나로 널리 추앙받는 삼천사계곡(삼천리골) 중류가 나타난다.

이곳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초소에 출입신고를 하고 신분증을 맡겨야만 들어갈 수 있던 금지
된 구역이었다. 물론 삼천사 승려와 신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1992년 통행제한이 풀
리면서 삼천사계곡을 통해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비봉능선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다. 허나 계
곡 주변에는 군사시설 일부가 옥의 티처럼 남아있으며, 삼천사와 옛 군부대 수영장 사이 계곡
은 여전히 금지된 계곡으로 묶여 속인들의 발길을 거부하고 있다. (옛 수영장 이후와 삼천사
위쪽 계곡은 출입이 가능함)

삼천사로 가려면 계곡을 1번 건너야 되는데 예전에는 키 작은 다리가 놓여있었으나 2011년 이
후 높이와 폭을 높여 미타교란 하얀 피부의 돌다리를 새롭게 깔았다. 다리를 업그레이드한 것
은 좋으나 문제는 주변 환경을 고려치 않고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크게 들쑤시며 만들었다는
것이다.

계곡 다리(미타교)에서 삼천사 중간의 짧은 계곡 풍경(밑에 있는 2011년 사진 참조)은 개인적
으로 참 좋아했던 풍경이었는데 다리를 놓으면서 잘생긴 바위와 반석을 깨뜨리고 자잘한 돌이
계곡 주변을 적지 않게 차지하면서 심히 안좋게 변해버린 것이다.


▲  예전의 경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미타교 주변)
계곡에 자잘한 돌들만 가득하여 마치 돌의 무덤처럼 황량하기 그지 없다.

▲  이제는 전설이 되버린 미타교 주변 삼천사계곡의 옛 모습 (2011년)
선녀 누님이 살짝 내려와 목욕을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고운 절경이었다.
허나 지금은 선녀는 커녕 맷돼지도 외면할 것 같다.


너무나 이질적으로 변해버린 삼천사계곡에 안타까움의 한숨을 여러 번 날려 보낸다. 자꾸 예전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려 부질없이 변해버린 현실을 인정하기가 싫다.

미타교를 건너면 각박한 경사의 오르막길이 중생을 주눅들게 만든다. 그 길을 3분 정도 오르면
옛 발해(渤海)의 국도(國都)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석등(石燈)을 닮은 우람한 석등 1쌍
이 힘들게 올라온 중생들을 맞이하니 여기서부터 산사의 향기와 오래된 마애불의 인자함이 깃
든 산사, 삼천사 경내가 흔쾌히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삼천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경내 직전에 자리한 석등 1쌍

북한산(삼각산) 서쪽 삼천사계곡에 둥지를 튼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磨崖佛)
을 품은 절이자 도심에서도 멀리 떨어진 첩첩한 산골의 산사이다. 1992년까지만 해도 사찰 출
입의 제한이 많았으나 비봉능선과 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방되면서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삼천사는 삼국시대가 한참 정리되고 있던 661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하
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정말로 곤란하다. 그가 세웠다는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고 그
당시 신라를 둘러싼 천하의 정세도 한가롭게 절이나 세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교에
지나치게 목숨을 걸었던 신라(新羅)도 그 시절에는 왕경(王京, 경주)을 중심으로 절이 세워지
고 있었으며 원효대사 역시 바쁘게 움직였던 시기이므로 절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대사, 무열왕(武烈王)과
의 친분으로 그의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에게 장가들어 신라 왕실의 일원이 되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고자 귀족 중심으로 돌아가던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면서 당시 신라 불교
의 1인자였던 자장율사(慈藏律師)를 강원도 산골짜기로 밀어내고 의상(義湘)과 더불어 신라 불
교의 지존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삼천사가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661년, 당나라 고종(高宗)은
'이제 백제도 망했으니 고구려를
쳐도 별무리는 없을 것이다!'
싶은 엉뚱한 생각에 단독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 전
쟁에서는 당나라의 맹장으로 손꼽히는 방효태(龐孝泰)를 주장(主將)으로 하여 많은 군사를 보
냈는데 방효태는 천하장사로 손가락질 받던 그의 아들 12명(혹은 13명)을 모조리 데리고 나가
고구려 정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당군은 요하(遼河)를 건너 요동(遼東)을 용케도 통과, 압록강 부근에서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그 기세를 타고 평양성(平壤城) 부근인 사수<蛇水, 대동강의 지류인 합장강으로 여겨짐>까지
진격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10만 대군은 몰살을 당했고 고구려를 꼭
무너뜨리겠다고 헛소리를 했던 방효태는 그의 아들과 나란히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한편 서해바다를 건너 평양 서쪽으로 기들어온 소정방(蘇定方)은 방효태의 대군이 절단났다는
소식에 그야말로 큰 충격에 빠졌다. 날씨는 춥지. 식량은 부족하지. 언제 고구려군이 들이닥쳐
자신들의 목을 댕강 칠지 모를 위험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하여 소정방은 쫄깃해진 간을 부여잡고 신라에 급히 사자를 보내 식량과 원군을 요구했다. 당
나라에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하며 그들의 비유를 맞추느라 급급했던 신라는 소정방의 요구를
흔쾌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요청을 무시하면 나중에 고구려를 치거나 공격을 받았을
때 도움을 받기가 어렵게 될 것이고 고구려에게 계속 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군량을 수송케 했는데 이때 분황사(芬皇寺)에 있던 원효가
그를 따라 종군(從軍)하게 된다.

김유신의 수송부대가 추운 겨울을 뚫고 고구려의 영역으로 들어오자 고구려군은 그들을 때려잡
기 위해 길목에 매복을 했는데, 소정방이 이를 알아내고 급히 복잡하게 쓰인 암호문을 보냈다.
그 암호문을 바로 원효가 해독한 것이다. 그래서 김유신은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무사히 군량을
수송할 수 있었다.
이것이 661년부터 662년 초까지 원효대사의 행적이다.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던 그가 언제 고구
려와 신라의 접경 지역이자 전운이 감도는 북한산(삼각산)에 절을 세웠겠는가? 이것으로 이미
원효 창건설은 끝이 났다. 그렇다면 절은 언제 지어졌을까?
경내에 있는 마애불과 옛 절터의 유물을 통해 이르면 신라 말, 늦어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18세기에 간행된 북한지(北漢
誌)에는 최
대 3,000명이 머물 정도로 번창했다고 쓰여 있다.

▲  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

▲  삼천사터 금당(金堂) 구역

고려 초에는 개경 현화사(玄化寺)의 초대 주지를 지낸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이 주지로
있었으며, 고려 왕실의 각별한 지원을 받아 큰 절로 성장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
(西山大師)의 지휘 아래 승병(僧兵)의 주요 집결지가 되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파괴되고 말았
다. 그때까지만 해도 절은 지금보다 1.5km 안쪽 산속에 있었으며 절 이름은 지금과 음은 같지
만 한자가 1글자 틀린 삼천사(三川寺)였다.
그 이후 진영화상이 삼천사의 암자가 있던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건하여 3천 명을 뜻하는 삼천
사(三千寺)로 이름을 갈았으며 6.25때 파괴된 것을 1960년에 중건했다.

1970년대 성운(聖雲)화상이 주지로 들어와 절에 있는 마애불이 오래된 불상임을 밝혀내었고 20
년 동안 계속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1994년에 사회복지법인 인덕원
을 설립해 복지사업에도 손을 뻗쳤다.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산령각, 천태각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
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또한 옛 삼천사터(고양시 북한동)에는 대지국사의 탑비(塔碑)
와 절터 주춧돌이 어지럽게 남아있는데 오랫동안 주목도 받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가 서울역
사박물관에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여 500여 점의 유물을 건져냈다. (2009년
이후에도 여러 번 발굴조사를 했음)
이처럼 북한산(삼각산) 제일의 절터 유적임에도 이상하게도 북한산 관련 지도에는 제대로 표시
조차 되어 있지 않으며, 그에 합당한 지정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계속 방치되고 있다.
(사적이나 지방기념물 등급이 적당해 보임) 또한 이곳에 있는 대지국사비는 태고사(太古寺) 원
증국사탑비와 더불어 북한산에 있는 고려 때 비석이자 북한산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나 그 역
시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절터 관람은 가능함)

※ 북한산 삼천사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
  ) 입구 하차 → 삼천사까지 도보 30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3번 출구에서 7723번 시내버스 또는 1번과 2번 출구 중간에서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에서 하차
*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에서 삼천사 셔틀버스가 1일 4회 운행한다. (구파발역 출발 시간은
  8:20, 10시, 11시, 13:30) 법회와 절 행사가 있는 날에는 오전 8시부터 11시 3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석가탄신일에는 저녁까지 수시로 운행
* 삼천사까지 차량 접근이 가능하며 경내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음

* 삼천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 25-2 (연서로54길 127 ☎ 02-353-3004)
* 삼천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삼천사 종형사리탑과 마애여래입상


 

♠  삼천사 5층석탑, 대웅보전 주변

▲  나한사리를 머금은 5층석탑

삼천사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4마리의 석사자가 탑신(塔身)을 받들고 있는 5층석탑을 만
나게 된다. 1988년 삼천사 주지인 성운화상이 미얀마의 마하시사사나 사원을 방문했을 때, 그
곳 대승정(大僧正)인 아판디타에게 부처 사리 3과와 나한사리를 선물로 받았는데, 부처사리는
마애불 앞 종형사리탑에 봉안하고 나한사리는 일주문 앞에 이 탑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이 탑은 바닥돌을 먼저 깔고 그 위에 여러 단으로 된 기단부(基壇部)를 둔 다음, 4마리의 사자
와 5층 탑신, 머리장식을 차례대로 갖춘 형태로 구례 화엄사(華嚴寺)와 제천 빈신사지(頻迅寺
址)의 4사자 석탑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  삼천사의 새로운 명물, 세존진신사리 불탑(佛塔)

5층석탑을 지나면 바로 9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법당도 아닌 경내 외곽에 서로 다른 모습
의 탑을 2개씩이나 지어 올린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삼천사는 법당 앞에 탑을 둘 공간이
여의치가 않아 공간이 넉넉한 이곳에 탑을 심은 것이다.

9층석탑 자리는 원래 주차장의 일부로 미얀마 대승정에게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봉안하
고 절의 위엄도 제대로 드러낼 겸, 거대한 탑을 또 짓기로 결정하고 2012년 초에 자리를 닦아
그해 5월 완성을 보았다. 이 탑 역시 9층석탑처럼 높게 기단부를 쌓고 그 위에 탑을 올렸는데
탑은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탑을 비슷하게 재현했으며 탑의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
는 4두의 금빛 사자상은 인도의 사르나트 아쇼카 석주(石柱)의 사자상을 모방한 것이다.
금빛 사자상은 8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이 담긴 법륜(法輪)에 안치되었고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군주로 평화와 생명존중을 천명한 아쇼카왕(인도 마가다왕조의 3대 왕)의 '담마 왕령(王令)'
정신을 새기고자 아쇼카왕의 상징인 4두 사자상을 꼭대기에 얹혔다. 그리고 9류 중생의 안녕과
화엄 10지에 이른 후 정토세계의 9품 연대에 오르기를 발원하는 보리심을 9층탑으로 묘사했다.

탑이 완성되자 진신사리 7과를 비롯해 조그만 금동석가불과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 대장경(
大藏經) 1질, 600명의 신도들이 손수 제작한 금강경(金剛經) 600부, 신도들이 기증한 갖은 고
가품을 탑에 넣었다.
탑에게 주어진 첫 이름은 '세존진신 다보 9층대탑(世尊眞身 多寶 九層大塔)'이었으나 '세존진
신사리 불탑'으로 간단히 줄였다. 탑이 얼마나 큰지 사람들이 거의 개미로 보이며, 장대한 탑
의 모습이 마치 삼천사의 탄탄한 재정과 세를 부질없이 과시하는 것 같다.


▲  군인들의 안녕을 위해 노력하는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

9층석탑을 지나면 오른쪽 높은 곳에 화강암 통돌로 조성된 지장보살입상이 자리해 있다. 이 보
살상은 9층석탑과 5층석탑은 물론 절 서쪽에 있는 34사단 유격훈련장 방향(산을 올려다보면 유
격장이 보임)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34사단 장병들이 이곳에서 로프를 타고 훈련을 하는데 해마다 사고가 일어났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삼천사 주지승이 장병들의 덧없는 희생을 막고 더 이상의 사고와 살생이 일어나지 않도록
발원하는 뜻에서 유격훈련장이 보이는 곳에 지장보살입상을 세웠는데, 신기하게도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지장보살 형님의 가호가 진하게 피어나 그들
을 지켜준 모양이다.

어진 어미의 모습처럼 자리한 보살상은 8각의 기단을 밑에 깔고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
에 여의주를 오른손에 들고 서 있으며 8각 대좌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와 도명존자(道明尊者)
, 시왕상 등이 새겨져 있다.


▲  연꽃의 와신상담 현장, 연못 (일주문 앞)

▲  삼천사 일주문(一柱門)

9층석탑을 지나면 문짝을 단 큰 문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일주문이라 부른다. 보통 일주문은 절
입구나 길목에 세우기 마련으로 미타교와 5층석탑 사이에 일주문을 둘 자리가 넉넉하나 삼천사
는 그 자리를 모두 내버리고 특이하게 대웅보전 입구에 갖다 놓았다.
세로로 걸린 현판에는 '三角山 三千寺'라 쓰여 있는데 쓰여진 글씨가 꽤 걸출하여 하늘로 날라
갈 것만 같다.


▲  새끼두꺼비 2마리를 등에 짊어진 어미 두꺼비상 (일주문 난간)
절의 지형 때문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갖다둔 것은 아닐까?

▲  삼천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일주문을 들어서면 종무소(宗務所)와 법당인 대웅보전(대웅전)이 차례로 모습을 비춘다. 예전
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절의 법당)을 칭했는데 건물이 얼마나 허벌나
게 큰지 가히 절 이름값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붕 용마루 양쪽에는 치미가 날카롭게 솟아
북한산 봉우리와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고, 건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을 비롯해 지장보살상,
신중탱, 16나한, 500나한상 등이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  대웅보전 앞에도 2마리의 새끼를
등에 진 두꺼비상이 있다.

▲  등장 인물로 빼곡한 신중탱(神衆幀)
모두 104명이 담겨져 있다.


▲  호화로움이 묻어난 석가3존불과 후불(後佛)목각탱

석가불이 조그만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석가3존불을 이
룬다. 그들 뒤에는 호화롭고 복잡해 보이는 후불목각탱화(木刻幀畵)가 병풍처럼 자리해 있는데
이들은 삼세불화(三世佛畵)를 표현한 것으로 가운데에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배치하고 왼
쪽에 약사회도(藥師會圖), 오른쪽에 극락회도(極樂會圖)를 배치했다.

▲ 석가3존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눠진 16나한(羅漢)과 500나한들
우리나라 인구처럼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 의상을 취하고 있어 다들 개성들이 넘친다.


 

♠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명품급 마애불이자 삼천사계곡의 영원한 은둔자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보물 657호

▲  마애불과 그에게 보금자리를 내준 눈썹바위

대웅보전 옆구리를 지나면 왼쪽으로 범상치 않은 모습의 눈썹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 바위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마애불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으니 그가 바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마애불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이다.

불상 앞에는 그에게 예불을 올리는 석조 공간이 넓게 닦여져 있는데 그 공간 밑에는 삼천사계
곡이 일조권을 강제로 빼앗긴 채 숨죽여 흘러간다. 한참 학창 시절이던 1992년 가을, 두근거리
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지금처럼 계곡을 가리고 앉은 돌로 다진 공
간이 없었고 계곡을 건너면 마애불 앞에 조그만 예불 공간이 전부였다.

서울에 있는 4개의 고려시대 마애불<① 승가사 마애여래좌상 ☞ 관련글 보러가기, ② 안암동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관련글 보러가기, ③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④ 삼천사 마애여래입상>
의 일원으로 고려 초기(멀리 신라 말로 보기도 함)에 조성된 선각(線刻) 마애불이다. 불상 대
부분은 선을 그어 처리했지만 일부는 약간 튀어나온 얕음새김으로 전체 높이는 3m, 불상의 높
이는 2.6m이다.

이 마애불은 윤곽을 따라 금분이 칠해져 있었으나 2000년 이후에 사라졌고, 그의 왼쪽(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 부분에는 약간 붉은 색채를 띠고 있는데, 이는 그에게 채색을 했던 흔
적들이다. 마애불에 색을 입힌 경우는 이곳과 경북 칠곡군 왜관(倭館) 부근에 있는 노석리 마
애불상군 등이 있다.


▲  마애불 양쪽에는 네모난 구멍이 2개 있는데 저들은 마애불을 보호했던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으로 그가 감싸주던 부분은 어둠 속의 촛불처럼
유난히도 밝고 하얗다. 마치 광배(光背)에서 나온 빛이 그의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처럼 말이다.


불상의 머리 뒷쪽에 2겹으로 된 둥근 두광(頭光)이 그를 밝히고 있고 소발(素髮)한 머리 위에
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작고 갸름한 편으로 눈은 지그시 감아 명
상에 잠긴 모습이며 코의 끝부분은 두툼하다. 입은 살짝 오무려 약간의 미소를 선보이고 있고
눈썹 사이에는 둥그런 백호(白毫)가 박혀있다.
그의 키는 얼굴에 비해 꽤 긴 편으로 조금은 두꺼워 보이는 법의(法衣)를 걸치며 두 어깨를 가
렸고 발 밑에는 연화대좌(蓮花臺座)가 있으며, 몸 뒤에는 반짝반짝 윤기를 흐르는 광배(光背)
가 새겨져 있다.
신체적인 균형이 그런데로 비슷하며 몸매는 단정하고 단아한 인상을 풍긴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배 앞에서 받쳐든 모습인데, 이는 부처의 성도(成道)를 상징한다고 한다.

불상 어깨 좌우와 윗부분에는 네모난 구멍과 좌우로 길게 파여진 홈이 있는데 이는 자연현상이
아닌 마애불을 보호하던 목조 가구(架構)를 씌우던 흔적이다. 그 가구는 오래 전에 자연재해나
화재로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가 사라진 이후에는 불상 위쪽에 있는 눈썹바위의 보호를 받으
면서 눈과 비를 피했다. 게다가 첩첩한 계곡 바위에 자리한 탓에 태풍과 거센 바람의 공격을
피하기에 좋아 거의 천 년의 세월을 살았음에도 바위에 진하게 현신한 듯 건강상태는 좋다.

지금은 이렇게 답사객과 순례객의 발길이 빈번하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리 주목을 받
지 못했다. 게다가 민간인 통제구역에 묶여 출입도 부자유스러우니 아는 사람과 절 신도만 조
금 찾는 정도였다. 허나 삼천사와 삼천사계곡에 꽁꽁 씌워진 통제의 굴레가 벗겨지면서 삼천사
의 존재와 함께 마애불의 이름도 약간이나마 알려지면서 찾는 이가 늘었다.


▲  바위에 현신한 듯 두드러진 모습의 마애불 윗부분
불상을 수식하고 있는 두광과 신광은 마치 몸에 빛이 발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도록 그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꾸며준다.


▲  마애불의 아랫도리
연꽃으로 치장된 연화대좌 위에 불상이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에 걸쳐진
법의 밑에 그의 두 발이 나와 있는데 발가락이 다소 두터워 보인다.


내가 그의 존재를 알아챈 것은 1992년 가을, 진관사 부근 야산에 숨어있는 줄 알고 부근 야산
을 열심히 뒤적거리다가 미지의 세계나 다름이 없던 삼천사까지 들어왔다. 당시 적멸보궁이던
대웅보전 뒷쪽에서 나와 숨바꼭질을 한 마애불을 발견하고
'서울에도 이렇게 휼륭한 마애불이 있었다니!!' 감탄을 연발하며 북악산(백악산)의 백석동천<
白石洞天, 백사실계곡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그에게 은근슬쩍 빠져들고 말았지. 하여 매년
적어도 1~2회 정도 그를 찾고 있다. 나는 이곳에 들어올 때마다 점점 늙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비록 인간이 만든 조각물이긴 하지만 여
전히 정정함을 잃지 않으며 오늘도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맞느라 여념이 없다.

지금은 삼천사 경내지만 예전에는 옛 삼천사로 가던 길목으로 조그만 암자와 계곡, 바위만 있
었다. 그러다가 마애불 주변에 삼천사를 세우면서 지금처럼 경내 한복판이 되었고, 지금의 삼
천사를 일군 성운의 노력으로 오래된 마애불임을 입증받아 1979년 국가 보물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이 마애불은 영험(靈驗)이 있기로 소문이 자자해 많은 중생들이 먼 거리를 걷는 수고로움을 마
다하지 않으며 이곳을 찾는다.


▲  마애불 좌측 면에 새겨진 '일붕선사좌선대(一鵬禪師坐禪坮)' 바위글씨
20세기 큰 승려로 추앙받는 일붕(一鵬) 서경보 선사가 이곳에서
좌선한 것을 기리고자 새긴 것이다.

▲  꼬랑지가 인상적인 귀여운 다람쥐상 (마애불 예불 장소 난간)
(그의 존재의 이유는 모르겠음)

▲  부처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종형사리탑(鐘形舍利塔)

마애불 앞에는 네모난 기단 위에 심어진 석종형(石鐘形) 사리탑이 있다. 이 탑은 1988년에 성
운화상이 미얀마 마하시사사나 사원의 아판디타 대승정에게서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봉
안하고 있는데 그 연유로 서울에서 제일 처음 적멸보궁을 마련하여 석가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사찰임을 천하에 어필했다.
마애불과 함께 삼천사의 성역으로 무척 애지중지되다가 2012년 진신사리를 담은 거대한 9층석
탑이 지어지면서 중요성이 조금은 떨어졌다.

◀  종형사리탑 우측의 세존진신사리비
미얀마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과정과 이유를 소상히 담아 넣었다.


 2층 규모의 산령각(山靈閣)

마애불이 의지하고 있는 눈썹바위 옆구리에는 2층짜리 산령각이 있다. 산령각이란 절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산신각(山神閣)의 다른 이름으로 삼천사는 그 흔한 이름 대신 천태각이나 산령각
처럼 생소하고 어려운 이름을 선택해 중생들을 아리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산신
각이긴 하지만 독성(獨聖)과 칠성(七星)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어 삼성각(三聖閣)의 역할을 한
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령각은 2층으로(1층은 창고 등으로 쓰임) 내부 중앙에는 금
칠을 한 거대한 산신탱이 걸려있다. 예전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童子) 등은 나무로 돋음새
김으로 새기고 나머지는 그림으로 상큼하게 처리했으나 돈을 좀 벌었는지 죄다 도금을 하여 금
색 옷으로 갈아입혔다.
화려하게 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산신의 수염과 동자의 머리를 빼고는 모조리 색이 같아서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벌이듯 분간이 쉽지 않아 눈만 아프다.

이렇게 산신탱은 삼천사에서 마애여래입상, 세존진신사리탑 다음으로 자랑하는 보물로 비록 고
색의 기운은 없지만 다른 절과 달리 산신을 크게 내세운 산신도량으로 절을 키우면서 '북한산(
삼각산) 산신이 보좌를 튼 절'임을 진하게 자처하고 있다.


▲  요란한 금칠의 산신탱과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올려진 공양미들

 독성(나반존자)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

 칠성들의 회합 현장, 칠성탱


▲  산령각과 마주한 눈썹바위 - 오랜 세월의 주름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  산령각에서 굽어본 마애불 예불 공간과 종형사리탑 주변,
그리고 대웅보전의 두툼한 뒷모습

▲  산령각에서 굽어본 삼천사 위쪽 다리
저 다리는 삼천사계곡 등산로로 북한산성과 비봉, 옛 삼천사터로 이어진다.
다리 주변 계곡에는 중생들이 쌓아올린 기하학적인 돌탑들로 가득해
조그만 돌탑의 세상을 이룬다.

 삼천사의 독특한 불전 ~ 천태각(天台閣)

산령각 옆에는 천태각이라 불리는 벽돌 건물이 있다. 천태각은 16나한의 하나로 천태산(天台山
)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보금자리로 독성각(獨聖閣)과 비슷하다. 삼천사
는 독성각이란 보편적인 이름을 취하지 않고 그가 일어난 천태산의 이름을 따서 천태각이라 했
는데 산령각에 독성탱이 있음에도 별도로 그만의 건물까지 두어 대우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9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 안에는 108개의 인등(引燈)이 내뿜는 열기와 기름냄
새로 가득해 더울 때 오면 정말 한증막이 따로 없다. 인등은 기름을 담고 심지를 넣어 불을 켠
것으로 하루 종일 불을 밝힌다. 그래서 건물 내부가 더운 것이다.
건물 지붕에는 매일 치솟는 열을 외부로 배출하고 공기를 통하게 하여 내부 온도를 유지시키는
통풍구가 있으며, 다른 건물과 달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2개로 바깥 문인 여닫이문은 언제나
열려있으나 안쪽 문인 미닫이문은 인등을 지키기 위해 항시 닫혀져 있다. 문을 들락날락 거릴
때는 반드시 문을 닫아야 인등의 건강에 지장이 없다.


 천태각의 주인, 독성상과 자연석으로 간단하게 손질한 16나한들

천태각 독성은 대머리의 둥근널쩍한 얼굴, 길다란 귀, 약간 두꺼워 보이는 옷(얼마나 더울까?)
, 그리고 배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를 취한 여유로운 모습이다. 명
상에 잠긴 그의 익살스런 표정은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하며 그 좌우에는 조그만 16나
한상이 포진해 있는데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가져온 자연석으로 정성스럽게 조성한 것이다.


▲  삼천사 위쪽 계곡을 가득 메운 돌탑의 물결

▲  삼천사 돌담길 (삼천사계곡 산길)

삼천사에서 북한산(삼각산)으로 오르려면 종형사리탑 좌측에 있는 대문으로 나가거나 일주문에
서 오른쪽 길로 가야 된다. 마치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기와집이나 궁궐 담장길을 거닐 듯, 운
치가 깃들여진 돌담길은 삼천사의 또다른 명물이라 할만하다.


 아비규환의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하다~~

 연등의 전송을 받으며 ~~
이렇게 하여 봄의 한복판에 찾아간 북한산 삼천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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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9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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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경주 나들이 ~~~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벽도산,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 늦가을 경주 나들이 '

▲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하늘 아래 세상을 평정한 가을이 천하를 곱게 물들이며 한참 전성기를 일구던 10월 막바지
에 신라 서라벌의 향기가 지독하게도 배여있는 경주(慶州)를 찾았다.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아침 일찍 동서울종합터미널을 찾았으나 경주 관광객 폭주로
9시 이후에나 승차가 가능하다고 그런다. (첫차는 7시)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구미(龜尾)행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경주로 갈 때 자리가 여의치 않으면 보통
구미를 거쳐 간다. 비록 갈아타야되는 번거로움은 있으나 구미행은 휴일에도 자리가 꽤 널
널한 편이고 경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환승 장소로도 제격이다.
구미에 이르자 바로 포항행 직행버스로 환승, 다시 1시간 30분을 달린 끝에 12시에 경주터
미널에 도착했다.

경주에 이르니 벌써부터 나들이 손님들로 터미널 주변은 북새통을 이룬다. 허나 그들이 가
는 곳은 거의 정해져 있다고 보면 된다. 나는 불국사나 석굴암, 대릉원, 분황사지 등 경주
의 기본적인 곳은 거의 질리도록 가본 터라 속세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을 주로 찾는 편
이다.
그렇게 경주에 수많은 문화유적과 명승지에 발자국(헤아려보니 대략 120곳이 넘음)을 남겼
지만 '신라(新羅)', 그 조그만 나라가 무려 1천 년씩이나 쓸데없이 오래 있다보니 그 중심
지였던 경주에는 아직도 갈 곳들이 차고 넘쳐난다. 정말 한 골목, 한 굽이를 돌 때마다 볼
거리가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오는 곳이 바로 경주인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볼거리와 찬란한 역사가 깃들여진 경주는 굳이 나쁘게 이르자면 내게는 꽤
부담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볼거리가 지나치게 많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보려면 적지 않은
지식을 필요로 하니 차라리 눈을 감고 지나가고 싶을 정도이다.

이번에 문을 두드린 곳은 시내 서쪽인 효현동(孝峴洞)이란 변두리 동네로 그곳에 안긴 3층
석탑과 법흥왕릉, 그리고 남쪽 벽도산에 있는 율동(두대리) 마애불이 이번 목적지이다. 이
들은 거의 인지도가 없어 찾는 이도 뜸하다.
경주고속터미널에서 아화로 가는 경주좌석버스 300-1번을 타고 태종무열왕릉과 효현고개를
넘어 효현교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대천<大川, 고현천> 옆으로 난 조그만 농로(외외
길)로 들어섰다.
갈대가 살랑살랑 춤을 추는 대천, 늦가을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효현동 들판이 속세(俗世)
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를 흔쾌히 정화시켜준다. 4발 차량이 이따금 지나칠 뿐, 사람
의 모습은 거의 보이질 않는다. 그런 시골길을 15분 정도 가면 효현동3층석탑을 알리는 갈
색 이정표가 마중하고, 그의 안내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외외마을이 나오는데, 탑은 마을
서남쪽에 자리해 있다.


▲ 경주의 서쪽 산하를 차례차례 적시며 형산강(兄山江)으로
흘러가는 대천(고현천)


▲ 효현동 시골길(외외길)
인적도 없는 호젓한 시골길을 거닐으니 마치 아비규환의 속세를 벗어난 기분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해탈감이라고나 할까? 비록 잠시뿐이지만...


▲ 늦가을에 슬며시 물들어 가는 효현동 시골길(외외길)
이런 시골까지 문명의 이기(利器)를 전해주는 전봇대 너머로 흐릿하게
눈에 들어오는 산은 남산(南山, 금오산)이다.


 

♠ 소나무를 우산으로 삼으며 옛터를 홀로 지키는
효현동3층석탑 - 보물 67호

효현동 외외마을 서남쪽 멋드러진 소나무 밑에 자리한 효현동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신라 후기 석탑이다. 기단 사방(四方)에는 기둥 모양의 조
각을 두었고, 탑신은 각 층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을 새겼으며, 지붕돌 네 귀퉁이는 살
짝 치켜진 것이 마치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지붕돌의 밑면 받침은 4단으로 되어있고, 각 부
분의 조각이 가늘게나마 있어 9세기 정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탑이 있는 자리는 법흥왕이 불도를 닦았다는 애공사(哀公寺)의 옛터로 전한다. 하지만 이를 입
증할 절터의 흔적은 나오지 않아 그마저도 희박하며, 절의 위치와 관련된 기록도 없는 실정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애공사터로 포장된 것은 조선 후기에 경주김씨에서 현재 법흥왕
릉을 그들 조상의 하나인 법흥왕의 능으로 삼으면서 탑이 있던 자리를 애공사터라 우겼기 때문
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법흥왕을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나왔는데, 마침
탑도 있고, 비록 북쪽은 아니지만 서쪽에 이름 모를 고분이 있으니 적당히 끼워 맞춘 것이다.

▲ 효현동3층석탑의 앞부분

▲ 효현동3층석탑의 뒷부분


▲ 효현동3층석탑과 이웃한 우사(牛舍)

이 탑은 기둥 조각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밋밋한 모습으로 두 눈에 넣어 보기에
도 별 부담이 없다. 오히려 화려함에 찌든 비슷한 시대의 탑들보다도 더 정감이 가는 것 같다.

마땅한 절터도 아닌 잡초 위에 뿌리를 내린 그는 자신의 내력과 정체를 꽁꽁 숨긴 채, 좀처럼
해답을 주려고 하질 않는다. 그의 속사정을 모르는 속인(俗人)들은 동네 이름을 따서 효현동(
효현리)3층석탑이란 이름을 주었으며, 경주김씨는 그를 애공사탑으로 삼아 조상묘를 찾았다는
뿌듯함에 빠져있다.

탑 옆에는 우공(牛公)들이 사는 우사가 있다. 그들의 음매~♪ 소리로 주변이 좀 시끄럽긴 해도
아무 것도 없는 공터에 홀로 외롭게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을 것이다. 우사 주인이나 우공들
이 탑에 해꼬지를 하지 않는 이상 서로 어우러 사는 모습도 괜찮아 보인다.

* 효현동3층석탑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419-1


▲ 효현동 시골길 (법흥왕릉 가는 길)

▲ 가을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내년 풍년을 위해
기나긴 휴가에 들어간 효현동 들판

▲ 법흥왕릉 입구
갈색 이정표가 있기 전에는 키 작은 표석이 이정표의 역할을 대신했다.
표석에는 한자로 '법흥왕릉 입구'라 쓰여있다.

▲ 법흥왕릉으로 인도하는 숲길에서 바라본 효현동 들판과
벽도산(율동 마애불을 간직한 산)


 

♠ 법흥왕의 능으로 살아가고 있는 신라 중기 고분
신라 법흥왕릉(法興王陵) - 사적 176호

효현동 서쪽 산자락에 법흥왕릉이라 불리는 오래된 신라 무덤이 말없이 누워있다. 능의 높이는
2m, 지름 14m로 신라 왕릉 중에서 작은 편에 속하는데, 봉분 앞에는 근래 지어진 상석(床石)이
하나 놓여져 무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능의 주인이라는 신라 법흥왕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부터 중,고등학교 국사책, 온갖 수험서에
이르기까지 지겹도록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인물로 불교를 공인하고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을
정벌했으며, 연호를 쓰는 등, 신라에서 제법 업적이 있는 군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업적에 비해 능의 규모가 상당히 초라하여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고개를 갸
우뚱하기 마련이다. 물론 신문왕릉(神文王陵, 신문왕릉 또한 주인이 정확하지 않음) 이전에는
딱히 석물을 두지 않았고, 비석도 무열왕릉(武烈王陵)부터 등장하기 때문에 장식이 없는 건 당
연하다 하겠으나 봉분의 크기가 인간적으로 너무 작다. (왕릉의 보호 구역은 72,816㎡)
봉분 주변에는 드문드문 자연석이 노출되어 있어 무열왕릉처럼 봉토 밑에 호석(護石)을 둔 것
으로 여겨지며, 능 주변으로 소나무 숲이 무성하여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특히 기이한 모습의
소나무가 여럿 있어 신비로움을 안겨준다.

일단 이 무덤은 신라 중기 고분이다. 법흥왕릉이란 이름으로 살고는 있지만 이는 조선 후기부
터이다. 그 이전에는 경주 땅에 널리고 널린 신라 고분의 하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법흥왕의 능이란 증거가 있는가? 딱히 적당한 증거도 없다. 삼국사기에는 법흥왕을 애공사 북
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냈다고 나오는데, 애공사가 어딘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18세기 이후, 신라 왕가의 후손인 경주김씨와 경주석씨, 경주박씨들이 한참 조상묘 찾기
사업을 벌이면서 어디에 있다는 짧은 기록에 의지해 경주 땅을 들쑤셨는데, 대충 그럴싸한 곳
을 조상묘로 때려 삼았다. 법흥왕릉 역시 그중의 하나이다.

법흥왕릉을 찾아 나선 후손들은 효현동3층석탑을 발견했고, 덩달아 서쪽 숲속에 잠긴 이 무덤
을 발견하게 된다. 석탑은 이곳에 절이 있었으니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북쪽도 아니지만 서
쪽에 옛 무덤이 있으니 탑 자리를 애공사라 여기면 법흥왕릉이라 우겨도 될 듯 싶었다. 또한
주변에 다른 고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여 3층석탑 자리를 애공사터로 때려 삼고 이 무덤을
법흥왕릉으로 삼은 것이다. 이리하여 이름 없는 옛 무덤은 '법흥왕릉'이란 엉뚱한 이름표를 달
게 된 것이다.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예전에는 이름 앞에 막연히 전하고 있다는 뜻에 '전(傳)'을 붙여 '전 법
흥왕릉'이라 했으나 요즘은 아예 '경주 법흥왕릉(문화재청 지정 명칭)'이라 부른다. 진짜 법흥
왕릉이 나타날 때까지는 법흥왕릉이란 이름으로 꼼짝없이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왕릉이 시내에서도 좀 떨어진 외진 곳이라 찾는 이도 적다. 법흥왕이란 인물은 워낙 유명하지
만 그의 능은 반비례로 인지도가 낮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신변의 위험도 늘 도사리고 있어
1966년과 1968년에 도굴을 당한 적이 있으며, 2005년에도 도굴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지금의
봉분은 1968년 도굴 이후에 복원한 것이다.


▲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법흥왕릉

▲ 동쪽에서 바라본 법흥왕릉

▲ 서쪽에서 바라본 법흥왕릉


▲ 손으로 더듬거리고 싶은 법흥왕릉의 뒷태


※ 불교를 공인하고 신라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법흥왕(法興王. ?~540 / 재위 514~540)

법흥왕의 이름은 김원종(金)으로 지증왕(智證王, 437~514 / 재위 500~514)의 아들이다. 키
가 7척(1척은 22~33cm)에 이르며, 성품이 온후해 주변 사람을 아꼈다. 그의 모후(母后)는 연제
부인() 박씨이며, 부인은 보도부인() 박씨이다.

514년 가을, 지증왕이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그 뒤를 이어 신라 23대 군주로 즉위했다.
부왕에게 '지증(智證)'이란 시호(諡號)를 올리니 신라의 시호는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516년 정월, 내을신궁(奈乙神宮)에 제를 지냈는데, 용이 양산 우물에 나타났다.

517년 4월,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하고 518년 2월 주산성(主山城)을 쌓았다.

520년 정월, 신라 최초로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의 관복(官服)
을 주색(朱色), 자색(紫色) 순으로 제정했다.

521년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522년 3월 가락국<금관가야, 金官伽倻>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다. 그래서 이찬 비조부
()의 누이동생을 보내 혼인에 응했다.

524년 9월, 왕이 남부지역 개척지를 순행(巡行)했는데, 가락국 왕이 찾아와 회견을 했다.

528년, 양나라에서 수입한 불교가 널리 백성들에게 퍼지자 불교를 공인하려 했다. 허나 귀족들
이 반대하여 난항에 부딪치자 이차돈(異次頓)과 짜고 그 유명한 이차돈 순교 사건을 일으켜 귀
족들을 단단히 겁에 질리게 만들고 불교 공인을 선포했다. 이 사건으로 왕권은 한층 강화된다.

529년, 살생을 금하는 명을 내렸다.

531년 3월, 제방을 보수했고, 상대등(上大等) 벼슬을 만들어 국사를 총리(總理)하게 했다.

532년, 가락국이 신라에서 시집 보낸 비조부의 누이에게 가야옷을 입혔다는 엉뚱한 구실을 내
세워 사다함(斯多含)을 보내 가락국을 멸망시켰다. 신라의 파상적인 공격 앞에 가락국의 마지
막 왕 구해왕(仇亥王)이 나라의 국고(國庫)와 보물을 바치고 항복하니 이들을 예우로 맞이하고
상등(上等)의 작위를 내려 본국(김해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내렸다. 그의 3번째 아들 김무력
(金武力)에게는 각간(角干)이란 벼슬을 내렸는데, 그의 손자가 바로 김유신(金庾信)이다.
<가락국 땅에는 금관군(金官郡)을 설치함>

535년, 건원(建元)이란 연호(年號)를 쓰니 이는 신라 최초의 독자적인 연호이다.

536년 정월, 관리들이 외직(外職)에 나갈 때 가족을 대동하고 가는 것을 허락했다.

540년 7월, 왕이 승하하자 시호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

법흥왕은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하며, 애공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에게는
왕위를 이을 왕자가 없어 그의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김입종(金立宗)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신라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진흥왕(眞興王)이다.
김입종은 조카인 법흥왕의 딸과 혼인하여 진흥왕을 낳았으니 왕족들의 족내혼(族內婚)이 성행
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신라 최초로 율령을 반포했으며, 이차돈을 통해 불교를 공인했다. 그리고 가락국을 정벌
해 낙동강 하류로 진출했고, 외직에 나가는 관리에게 가족 동행을 허가하였으니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으로 왕권이 한층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보통 가족은 인질로 왕경(王京)에 두고
가야했음>


▲ 법흥왕릉의 앞모습

▲ 왕릉 부근에서 발견된 돌
그냥 이곳에 널부러진 돌은 아닌 듯 하며, 무열왕릉처럼 봉토 밑에
호석 시설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 법흥왕릉과 속세를 이어주는 소나무 숲길
왕릉은 작지만 그곳으로 통하는 숲길은 왕릉의 품격과 옛 무덤의
신비로움까지 품을 수 있도록 잘 가꾸어져 있다.


※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① 경주까지 버스 이용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버스가 5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성남, 부천, 수원, 춘천, 청주, 세종시에서 경주행 직행/고속버스 이용
* 대구(북부, 서부, 동부, 동대구), 부산(노포동, 사상), 울산, 포항, 창원(마산), 전주, 광주
, 진주, 순천, 강릉, 동해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철도 이용
* 서울역과 광명역, 천안아산역, 오송역, 대전역에서 신경주역 경유 부산행 고속전철 이용
* 청량리역, 원주역, 영주역, 동대구역, 부전역, 태화강역에서 경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③ 현지교통
* 경주고속터미널(경주시외터미널에서 도보 2분)과 경주역(성동시장)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
, 300-1, 304번을 타고 효현교 하차. 효현동 방면 외외길을 따라 들어간다. 효현동3층석탑까
지는 도보 20분, 법흥왕릉은 도보 25분
* 신경주역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번을 타고 효현다리 하차
④ 승용차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까지 접근 가능)
* 경부고속도로 → 건천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건천읍에서 경주방면 4번 국도 → 광명3거
리에서 경주대 방면 → 와상교를 건너 외외길로 우회전 → 효현동(법흥왕릉, 3층석탑)

★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주차장은 따로 없으므로 길가나 빈 공간에 알아서 주차
* 법흥왕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63


 


법흥왕릉을 끝으로 효현동에 대한 볼일은 끝났다. 왕릉 주변 잔디밭에 앉아 속세에서 사온 간
단한 먹거리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그날의 마지막 답사지인 율동(두대리) 마애불로 길을 재촉
했다. 그곳은 이미 오래 전에 가본 기억이 있지만 너무 빛바랜 옛날이라 여기까지 온 김에 오
랜만에 친견하기로 했다.
여기서 율동(栗洞) 마애불로 갈려면 우선 효현교로 다시 나가야 된다. 효현교를 건너 8분 정도
가면 율동인데,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 옛 율동역이 있던 중앙선(서울↔경주) 철로와 경부고속
도로의 아랫도리, 그리고 두대마을을 차례로 지나 벽도산의 품으로 20분 정도 파고 들면 깊은
산골에 박힌 율동 마애불이 모습을 비춘다. 마애불까지는 이정표가 잘 되어있고 길도 잘 닦여
져 있어 방황할 염려는 없다.


▲ 옛 율동역을 지나는 중앙선 철로 (경주 방면)
경주와 건천 사이에 있던 율동역(栗洞驛)은 오래 전에 녹아 없어지고 그 흔적만 아련히
남아있다. 서울 청량리역을 비롯하여 포항과 동대구, 부전, 강릉으로 가는 열차가
외마디 기적소리를 남기며 이곳을 스쳐간다.
(중앙선 옆으로 보이는 차량들의 행렬은 국가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 옛 율동역을 지나는 중앙선 철로 (영천 방면)

▲ 녹음이 우거진 율동 마애불 가는 길
마애불 아래까지 길이 닦이고 주차장이 깔려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배려했다.


마애불 주차장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율동 마애불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근래에 터를
닦은 성주암(聖主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나온다. 산신각(山神閣)과 심우실이라 불리는 기와집
이 전부로 산신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인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 심우실(尋牛室)이라 불리는 성주암의 중심 건물
심우실은 'ㄱ'모양의 기와집으로 법당(法堂) 겸 요사(寮舍)의 역할을 한다.
허나 불전(佛殿)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여염집 분위기로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 절 뒤쪽에 자리한 율동 마애불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다


 

♠ 신라 후기에 조성된 수려한 마애불(磨崖佛)이자 벽도산의 오랜 은인(隱人)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두대리 마애석불)
- 물 122호

▲ 율동 마애불 - 마치 환영(幻影)처럼 그 모습을 은은하게 비춘다.

경주 벽도산(碧桃山, 424m) 동쪽 자락에는 벽도산의 은인(隱人),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이하
율동 마애불)이 조용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 마애불은 소금강산(小金剛山)에 안긴 굴불사지(掘佛寺址) 4면석불(보물 121호)의 양식을 그
대로 계승한 신라 후기 석불로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에 세
우고, 좌우에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협시(夾侍)로 세웠다.

가운데에 자리한 아미타불은 높이 2.5m로 머리가 상당히 커 보인다. 다른 부분은 얕음새김으로
처리했지만 머리는 돋음새김으로 크게 돋게 새겼기 때문이다. 머리에는 육계<무견정상(無見頂
相)>가 두툼히 솟아 있는데, 이는 굴불사지 석불과 비슷하다. 얼굴은 볼이 풍만하게 돋았고 미
소가 은연히 드리워져 있으며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어 그의 정체가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다. 발은 앞으로 내밀지 않고 옆으로 반듯하게
벌리고 있으며, 어깨는 당당한 편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덮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하고 있다.

◀ 측면에서 바라본 율동 마애불

아미타불 왼쪽의 관음보살은 아미타불보다 덩치가 작다. 2m 남짓의 키로 움푹 들어간 허리선과
풍만하게 튀어나온 엉덩이가 눈길을 끄는 날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다. 몸매의 굴곡이 진하게
드러나 있으며, 발은 옆으로 벌리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 위로 올려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에는 정병<政柄, 혹은 보병(寶甁)>을 들고 있어 그가 관음보살 누님임을 알 수 있
다. 게다가 몸매도 영락없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조그
만 얼굴은 두 눈이 형체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상태는 별로 안좋다.

아미타불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경례를 하는 듯한 모습이며, 전체적인
형태는 관음보살과 비슷하다. 키는 2m 남짓으로 얼굴 부분이 다소 마멸된 것 외에는 건강 상태
는 괜찮다. 이들 불상은 머리 뒤로 두툼하게 표현된 동그란 두광(頭光)을 가지고 있으며, 두광
에 표현된 당초(唐草)무늬 등이 지긋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섬세하게 남아있다. 몸 뒤에는 신
광(身光)이 얇게 표현되어 그들을 빛나게 한다.

이들은 굴불사지 석불과 기본적으로 같지만, 풍만함이나 발의 모양, 옷주름 모양 등이 달라 조
성시기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 도드라지게 새겨진 아미타불의 얼굴

율동 마애불 부근에는 '벽도산석불입상'과 '천창산(天倉山)선각마애불' 등이 있어 율동 마애불
을 중심으로 벽도산 일대도 조촐하게 불국토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전에 왔을
때는 인근 능선에서 벽도산 석불입상을 본 듯 한데 기억이 벌써부터 희미하다. 율동 마애불은
인지도가 낮아 속인들의 발길은 적지만 경주 답사 경력이 어느 정도 되는 이들은 왠만큼은 아
는 곳이다.

마애불 앞에 3배의 예를 올리며 살짝 약소하게나마 소망을 들이밀어 본다. 신라 석공(石工)들
의 체취가 담긴, 비록 그들은 사라지고 윤회(輪廻) 사상에 따라 지금은 다른 존재로 살고들 있
겠지만 석불 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며 중생을 맞는다. 불상 주변에는
푸른 이끼가 피어 있지만 마애불의 위엄 앞에 더는 어쩌지 못하고 적정한 간격으로 그들과 동
거를 한다.
바위가 서쪽을 향하고 있고, 불상을 둘러싼 광배(光背)가 바위에 일정한 홈을 파준 탓에 장대
한 세월이 흐르고 자연의 집요한 괴롭힘 앞에서도 당당하게 건강을 누리며 살고 있음이 참 다
행이라 하겠다.

율동 마애불을 끝으로 소소하게 즐긴 늦가을 경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 경주고속터미널(경주시외터미널에서 도보 2분)과 경주역(성동시장)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
, 300-1, 304번을 타고 율동 두대마을입구에서 하차.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두대길을 따라 도
보 25분
* 신경주역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번을 타고 율동 두대마을 하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마애불까지 접근 가능)
① 경부고속도로 → 건천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건천읍에서 경주방면 4번 국도 → 광명3거
리에서 직진 → 율동에서 마애불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 → 율동 마애불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율동 산60-1 (두대안길 69)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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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11월 1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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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과 가까운 첩첩한 산중의 오랜 절집 ~ 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석가탄신일 맞이 산사 나들이 ~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승가사 약사전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사 호국보탑

▲  승가사 약사전

▲  호국보탑


높은 바위 산길은 험한데, 지팡이 짚고도 등라(藤蘿) 휘어잡네
처마가엔 가던 구름 머물고, 창앞엔 쏟아지는 폭포 많을세라
차를 끓이니 병에서 가는 소리나고, 물을 길으니 우물에 작은 물결지네
두어명 높은 스님 있어 공(空)한 것 보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네

* 조선 초기 문신 정인지(鄭麟趾)가 승가사에서 지은 시


 

5월 공휴일의 하나인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이 드디어 코앞에 다가왔다. 이번 초파일은 주말
과 겹쳐서 자연스럽게 여러 날 연휴가 형성되었는데, 초파일이 그 연휴의 끝이었다. 그래서 초
파일 전날에 사전 몸풀기용으로 서울에 있는 적당한 고찰을 물색하다가 가본지 20년이 넘은 북
한산(삼각산) 승가사를 찾기로 했다.

해가 조금씩 고개가 꺾이던 오후 2시에 길음역에서 후배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7211번(진관차
고지↔신설동)을 타고 북악터널, 평창동을 지나 구기동(舊基洞)에서 발을 내린다. 여기서 졸부
들의 집과 빌라로 경관이 꼬질꼬질해진 구기동계곡을 20분 정도 오르면 구기탐방지원센터가 나
오며, 이곳을 지나면 비로소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된다.
구기동은 옆동네인 평창동(平倉洞)과 더불어 북한산 자락에 안겨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게다가
명당(明堂)의 기질도 있다고 전해져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졸부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와 살았는
데, 문제는 그들의 욕심이 끝이 없어 쥐처럼 계속 북한산(삼각산)의 살을 갉아먹고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경관이 적지 않게 유린을 당했다.
더 이상 졸부들로 인해 북한산이 망가지지 않도록 신축/증축을 금하는 한편, 기존 집들도 모두
밀어버려 서울의 영원한 허파이자 진산(鎭山)인 북한산의 숨통을 확 트이게 했으면 좋겠다.

구기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졸부들의 집과 무자비한 개발의 칼질에 기가 죽은 구기동계곡도 슬
슬 본성을 되찾아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게다가 숲도 더욱 짙어져 때이른 더위를 잊게 만
든다. 그런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구기갈림길인데, 여기서 직진하면 문수암(文殊庵)과 북한
산성(北漢山城)으로 이어지며, 왼쪽으로 가면 승가사와 비봉이다.
우리는 아직 점심을 먹지 못해 여기서 속세에서 사온 김밥과 과자, 음료수 등으로 배를 채운다.
하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지 꿀을 바른 듯 죄다 꿀맛이다. 우리가 사온 김
밥은 모두 5줄인데, 이중 4줄을 먹었고, 과자와 음료수도 절반 정도 처리하니 포만감의 행복이
일파만파로 몰려와 우리를 희롱한다. 그 희롱에 잠시 무방비로 있다가 자리를 싹 털고 다시 길
을 재촉했다. 승가사까지는 30분을 더 가야되기 때문이다.

구기갈림길에서 승가사까지는 경사가 좀 각박한 편이나, 구기동계곡의 상류인 승가사계곡이 바
로 옆에서 시원한 바람과 냇물로 응원하고 있어 그리힘들지는 않다. 그 산길을 25분 정도 오르
면 승가사 갈림길에 이른다.


▲  승가사 갈림길 - 왼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모두 승가사로 통한다.
(사람은 왼쪽 계단길 추천, 오른쪽 길은 수레를 위한 길)


♠  승가사 입문

▲  청기와로 치장된 승가사 일주문(一柱門)

승가사갈림길에서 왼쪽 계단길을 오르면 승가사의 내력과 가람배치도가 담긴 안내문과 함께 무
려 청기와로 머리를 장식한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 문은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승가사 주변이 국립공원 건축제한구역이라 여러 번 강제 철거
를 당했던 비운의 문이기도 하다. 간신히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설득하여 지금의 문을 두었으며,
평방(平枋)에는 원담(圓潭)이 쓴 '三角山 僧伽寺'란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  경내로 인도하는 청운교 계단길

일주문을 지나면 호국보탑까지는 숨가쁜 계단길의 연속이다. 연등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르면
청운교(靑雲橋)라 불리는 장대한 계단이 기를 질리게 만드는데 계단 앞 좌우에는 용조각이 입을
벌리며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을 경계한다. 계단 중간 오른쪽에는 승가사의 내력이 담긴 사적비(
事蹟碑)가 있으며, 그 계단의 끝에는 승가사의 새로운 명물인 호국보탑이 자리해 있다.


▲  청운교 계단길 (내려갈 때 찍은 모습)
계단 왼쪽에 이수(螭首)를 갖춘 비석이 승가사 사적비이다.

▲  감실 불당까지 갖춘 호국보탑(護國寶塔)

끝없이 펼쳐진 계단에 기가 질린 중생은 그 계단의 끝에 서 있는 호국보탑 앞에서 다시 한번 주
눅이 든다.
인도나 동남아의 불탑(佛塔)처럼 생긴 호국보탑은 승가사가 예로부터 호국기도 도량이었음을 속
세에 강조하면서 조국 통일도 염원하고 절의 위세도 크게 강조하고자 많은 돈을 들여 만든 것이
다. 그러다보니 호국보탑이란 참 아름다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가 세워짐으로서 탑이 없
던 허전함을 제대로 극복하게 되었다. (정식 이름은 '민족통일호국보탑')

장엄한 모습의 이 탑은 절 밑의 바위와 나무를 싹 밀어버리고 지반을 다져서 만든 것으로 1987
년에 짓기 시작하여 1994년에 완성을 본 승가사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탑의 높이는 무려 25m
로 9층석탑이며, 탑신(塔身) 밑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경주 석굴암(石窟庵)을 조금씩 재현했
고 사방(四方)에 문을 냈다.
감실 안에는 석굴암처럼 본존불(本尊佛)과 11면(面) 관세음보살상, 10대 제자상을 돋음새김으로
배치하고 연꽃장식 덮개를 씌웠으며, 바깥쪽에는 사천왕(四天王)을 배치해 본존불과 탑을 지키
도록 했다. 감실이 매우 좁기 때문에 승려만 들어가서 예불을 올리며, 탑 주위로는 문수/보현동
자상과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빼곡히 배치했다.

탑신에는 인도 정부에서 기증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1과와 청옥와불(靑玉臥佛) 1좌, 나한(羅漢)
의 사리 2과, 패엽경(貝葉經) 1질, 무구정광다라니경 경판 1질, 철제9층탑 99기, 화엄경(華嚴經
) 9질을 봉안했다.
조그만 감실 불당까지 갖춘 매우 이형적(異型的)인 큰 탑으로 지금이야 과시용이다 뭐다해서 이
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지만 몇백년 이후에는 한국미술사 20세기 석탑 부분에서 크게 이름을 날릴
유명 인사로 등극할 지도 모르니 미리 봐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민족통일호국보탑 공덕비

▲  위에서 바라본 호국보탑의 위엄


▲  호국보탑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北岳山, 사진 중앙에 엷게 보이는 산줄기)과 인왕산(오른쪽), 그들 너머로
서울 도심이 어렴풋이 바라보인다.

▲  산자락에 요새처럼 자리한 승가사 - 호국보탑에서 올려다본 모습

호국보탑에서 경내까지는 2갈래의 길이 있다. 왼쪽 계단길로 가는 길은 호국보탑을 만들면서 새
롭게 닦은 길이고, 오른쪽에 조금 가파르게 형성된 길은 옛길이다. (옛길로 가면 포대화상을 만
날 수 있음)


♠  북한산 제일의 고찰이자 서울 근교 명승지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
고려시대 보물 2개를 간직한 북한산(삼각산) 승가사(僧伽寺)

▲  산신각에서 바라본 승가사 경내 (대웅전 구역)

북한산(삼각산)의 주요 봉우리이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국보 3호)가 서있던 비봉(碑峰)
동쪽 45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승가사는 빼어난 경관으로 예로부터 많은 문인(文人)들이 찾아와
안긴 명소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쪽의 진관사(津寬寺), 남쪽의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동쪽의
불암산 불암사(佛巖寺)와 더불어 서울 근교 명승 사찰로 꼽혔는데, 승가사는 그 북쪽으로 그들
가운데 단연 갑(甲)으로 찬양을 받았다.

북한산 제일의 고찰로 손꼽히는 승가사는 756년(신라 경덕왕 14년) 수태(秀台)가 창건했다고 전
한다. 그는 당나라 고종(高宗) 시절에 중생들로부터 생불(生佛)로 칭송 받던 승가대사(僧伽大師
)의 행적에 감명을 받아 그를 기리는 뜻에서 승가사라 했으며, 동문선(東文選)에는 1107년에 이
예(李預)가 쓴 중수기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낭적사(狼跡寺) 스님 수태가 승가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
리를 정해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새기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리나
라에 비추었다. 나라에서 천지의 재변과 홍수와 한발 등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리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언제나 효험이 있었다'

고려의 천하로 바뀐 이후, 1024년(현종 15년)에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했고, 1090년에
는 구산사(龜山寺) 주지였던 영현(領賢)이 선종(宣宗)의 칙령(勅令)을 받아 중수했다. 1099년(
숙종 3년)에는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숙종(肅宗)과 함께 세검정에 있던 장의사(藏義
寺)와 승가사에 들렸는데, 이때 불상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했다.

1422년 세종(世宗)이 전국의 사찰을 통합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2개로 나누자 선종에 속하
게 되었으며, 그 시절 고승(高僧)으로 이름을 날린 함허(涵虛)가 여기서 수행을 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으나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여기까지 기어올라온
청나라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150년 가까이 폐허로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780년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이던 성월선사(城月禪師)가 절터에 뒹굴던 돌을 골라
건물을 재건했으며, 구한말에는 명성황후와 엄귀비의 후원으로 절을 수리했다.

1941년 도공(道空)이 중수를 벌였고, 비구니 도원(道圓)이 절을 꾸려나갔으나 6.25때 모두 파괴
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러다가 1957년 도명(道明)이 산신각과 향로각, 동정각, 대방, 요사 등을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켰고, 1971년에는 상륜(相侖)이 주지로 부임, 마애여래좌상으로 오르는 108
계단을 대리석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절 진입로를 확장하는 한편, 전기를 가설했다.
1976년에는 범종을 만들어 동정각에 봉안했고, 7년 동안 갈고 닦아 1994년에 호국보탑을 지어올
리는 등, 왕년의 위엄을 되찾고자 열심히 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각박한 산자락에 터를 닦았지만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신없이 건물을 지었으며, 비
록 겉으로 보이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말라버렸지만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영산전,
향로각, 산신각, 동정각, 적묵당, 승가굴을 개조한 약사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메
우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고려시대에 거대한 마애불인 구기동 마애여래좌상과 역시 고려 때 조성된
석조승가대사좌상 등 보물 2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밖에 옛 석탑의 부재(部材)와 비좌(碑座),
그리고 경내 동쪽에 조선 후기 승탑 등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승가사는 비구니 사찰로 북한산 제일의 선원(禪院)을 칭하고 있으며, 주변 풍경이 빼어나 고려
와 조선의 많은 문인들이 문이 닳도록 찾아와 시와 글을 남겼는데, 고려 고종(高宗)의 스승이던
유원순(兪元淳)은 이곳의 풍경을 8줄의 시로 표현하고 있다.

기구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리 안계(眼界) 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이 밝게 빛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에 이었고
골짜기에서 우는 한가한 새소리 풍경소리를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높은 스님의 생각하는 일인 것이
인간세상의 명리에는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구름도 잡힐 듯한 높은 산중에 묻혀 있고 하늘과도 가까워 제아무리 무거운 번뇌라도 감히 따라
오기 힘들며, (번뇌는 절 밑에서 기다리고 있음, 결국 해탈은 꿈임) 속세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
고 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진하다. 또한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하여 공기도 청정하며, 서울
도심과도 가까워 멀리 갈 것도 없이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거나 마음을 싹둑 가다듬고
싶을 때 언제든 와서 안기고 싶은 곳이다. 거기에 보물급 문화재를 2점이나 품고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며, 비구니의 낭낭한 불경소리를 듣고 있으면 잠시나마 해탈의 기분마저 들게 한다.


▲  나무 장작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 서래당 공양간 부뚜막
이제는 시골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그리운 풍경으로 서울에서 저런 풍경을 만나니
무지 신선하고 반갑다. 쇠솥 안에서 모락모락 익고 있는 국의 맛은 어떨까?
나도 모르게 입 안에 군침이 고인다.


※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찾아가기 (2014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1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6호
  선 역촌역(3번 출구)에서 7212번 시내버스(수색,은평차고지↔옥수동)를 타고 구기동 현대빌라
  나 승가사입구 하차, 승가사까지 도보 약 70분, 현대빌라에서 구기동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것
  이 좀 무난하며, 승가사입구에서 비봉4길(건덕아파트)과 승가산림초소를 거쳐 가는 수레길은
  경사가 좀 각박하다.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시내버스(은평차고지↔이북5도청)를 타고 현대빌
  라나 승가사입구 하차
* 승가사까지 수레길이 닦여 있으나 길이 험하고 상태가 넉넉치 못하며, 일반 차량은 출입을 통
  제한다. (승가사와 국립공원 차량만 통행 가능)
* 승가사 셔틀차량을 이용하면 보다 편리하게 승가사까지 올라갈 수 있다. <승가사입구 정류장
  에서 동북쪽으로 난 비봉4길(승가사 방면)을 오르면 셔틀 타는 곳이 있음, 운행 정보는 승가
  사에 문의 요망>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1 (☎ 02-379-2996)


▲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운 대웅전(大雄殿) 뜨락

동정각의 아랫도리를 들어서면 경내의 핵심인 대웅전 구역이다. 대웅전 뜨락을 중심으로 서쪽에
는 서래당(西來堂), 동쪽에는 적묵당(寂默堂)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뜨락에 들어서니 서래당
앞에서 연등 주문을 받는 아줌마 보살이 밝은 표정을 내비치며 연등 하나 다시라고 그런다. 허
나 연등 시주에는 그리 관심이 없어 가난한 중생이라 돈이 없다고 답을 하니 표정이 180도 싹
바뀐다. 결국 여기도 돈이 갑 중의 갑(甲)이던가? 잠시나마 씁쓸한 기분이 나를 엄습한다.

승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7년에 지어서 1980
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좌우벽과 뒷쪽에는 부처의 전생(全生)을 그린 전생도와 심우도가 그
려져 있는데, 그림 옆에 해석을 달아놓아 이해를 돕게 했다.

뜨락 서쪽에 자리한 서래당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6년에 중창되었다. 겉
으로 보면 1층이지만 엄연한 2층으로 뜨락에 노출된 부분은 종무소(宗務所)와 주지실로 쓰이며
호국대탑에서 경내로 오르는 길목인 아랫층에는 공양간이 있다. 공양간은 장작으로 땐 밥과 국
을 공양(供養)으로 제공하는데, 산꾼과 답사객, 신도 등 누구나 먹고 갈 수 있다.
서래당 맞은편에 자리한 적묵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비구니의 선방(禪房)
이다. 1985년에 중창되어 매년 100여 명의 비구니가 수행 안거(安居)를 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소조여래좌상 1구와 1966년에 제작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전 뜨락과
그 끝에 자리한 동정각(動靜閣)

대웅전 맞은편에는 범종(梵鍾)의 보금자리인 동정각이 마치 천상(天上) 세계의 누각처럼 높다랗
게 들어앉아 속세를 굽어본다. 동정각은 2층 규모로 아랫층은 경내와 속세를 이어주는 통로이며,
윗층은 범종각으로 기존 범종각과는 다른 6각형 정자(亭子)식 건물인 점이 눈길을 끈다.

동정각에 고이 간직된 범종은 1976년에 봉안된 것인데, 그 종을 운반할 때 15명이 꼬박 매달려
무려 1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때는 4발 수레가 감히 올라올 수도 없었던 산속이라 종 밑에 나
무 토막을 깔고 밀어올리는 옛 방식으로 종을 운반했기 때문이다. 아침 4시와 저녁 6시가 되면
비구니가 잠든 종을 깨우며 종소리를 속세로 흘려보내는데, 그 종소리가 매우 은은하다.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불과 후불탱화

대웅전 내부는 모조리 개금(改金)을 한 목각(木刻)탱화들로 두 눈이 부실 지경이다. 불단에 봉
안된 석가불은 꽤나 단련을 했는지 어깨가 쩍 벌어져 있으며, 두터운 얼굴은 다소 경직된 표정
을 머금고 있다. 그의 좌우에는 그 흔한 협시불(夾侍佛)도 없지만 대신 뒷쪽에는 호화로운 금동
후불탱을 배치하여 그를 든든히 받쳐준다.
후불탱(後佛幀)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를 바라보고 있으며, 8대
보살과 아난, 가섭(迦葉)이 그를 에워싸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다. 붉은 지붕의 닫집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으며, 극락조(極樂鳥)와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  나한의 일원으로 천태산(天台山)에서
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가
새겨진 독성탱(獨聖幀)

▲  칠성탱(七星幀)과 신중탱(神衆幀)
이들은 김광한, 김광열 형제가 1985년과
1986년에 만든 것이다.

▲  대웅전 좌측 벽에 그려진 전생도의 일부 - 해석은 각자 알아서 ~~


▲  대웅전 계단 우측에 누운 석조(石槽)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통이지만 첩첩한 산골이다보니 물사정이 너그럽지 못해
거의 항상 비워둔다. 물을 마시려면 꼭지를 틀어 바가지에 받아 마시면 된다.


♠  승가사 산신각, 약사전 주변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1년에 중창되었다. 석가3존불을 비롯해 석
가후불탱, 16나한탱, 신중탱 등이 있는데, 대웅전의 탱화들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모조리 금색을
입혀 등장인물이 다른 것 빼고는 거기서 거기 같고, 너무 찬란함에 치중한 나머지 거부감과 식
상함마저 적지 않게 들게 한다. (지나친 화려함은 오히려 소박함보다 못함)
이들 탱화는 1987년 김광한, 김광열 형제가 조성했다.


▲  영산전 불단
석가불과 미륵불(미래불), 제화갈라보살(과거불)이 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무려 경주 옥석(玉石)으로 만들었다.

▲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이 새겨진 16나한탱


▲  산신각(山神閣)

영산전 좌측 높은 벼랑 위에 산신을 봉안한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과 측면이 달랑 1칸 밖
에 안되는 조촐한 건물로 화재로 무너진 것을 1984년에 다시 지었으며, 그때 서쪽을 바라보고
있던 건물을 남향(南向)으로 조정했다. 내부에는 1986년에 김광한/김광열 형제가 만든 산신탱이
이 있는데, 역시 금칠로 도배를 해놓았다.

산신각에 올라 동쪽(좌측) 밑을 잘 살펴보면 길쭉한 석종형(石鐘形) 승탑과 비석 1기가 눈에 들
어올 것이다. 이들은 1780년에 쓰러진 승가사를 재건한 성월선사(城月禪師)의 탑과 탑비로 비문
에는 '朝鮮國 正憲大夫 城月堂 碑銘竝序(비명병서)'라 쓰여 있어 승탑의 주인을 알려주고 있는
데, 승려임에도 정헌대부의 지위를 받은 것이 이채롭다. 그리고 '嘉慶 七年 壬戌 八月日立' 이
란 내용도 있어 1802년 8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  산신과 호랑이, 동자 2명, 나무 등이 묘사된 산신탱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약사전과 마애여래좌상으로 인도하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1단
계 오르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명부전을 만나게 된다.
대웅전과 약사전 사이에 자리한 이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불전(佛殿)으로 1972
년에 착공해 1975년에 완성을 보았다. 1년 정도면 능히 만들고도 남을 규모지만 궁색한 산중이
라 공사가 더뎌 3년이나 걸린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특이하게도 지장보살상 등의 독립적인 불상은 없고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
의 주요 식구를 한데 몰아 넣은 지장탱화가 전부이다. 이 탱화는 1983년에 김원각, 김석담이 조
성한 것으로 다른 건물의 탱화와 마찬가지로 금칠로 도배를 했다. 다만 다른 것은 지장보살의
머리만 푸른 색을 입혔다는 것이다.


▲  명부전 지장탱화 - 명부전에서 지장탱화만 달랑 있는 경우는 처음 본다.

▲  약사전 앞에 놓인 옛 석탑의 흔적

명부전에서 1단계 더 올라서면 약사전이 나온다. 약사전 앞에는 옛 석탑의 흔적이 우수에 잠긴
채 놓여져 있는데, 두툼하게 생긴 지붕돌과 탑신(塔身)이 겨우 한 덩이씩만 남았다. 탑신이 지
붕돌보다 큰 것을 보면 아마도 제일 아랫층 탑신이었을 것이다.
그들에 대한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이 땅에 흔한 3층석탑이 아닐까 싶
은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절이 파괴되면서 같이 비극을 맞았을 것이며,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참담했는지를 저들이 온몸으로 증명해준다.
이후 일부만 남은 채, 버려진 것을 비좌와 함께 수습하여 약사전 앞에 두었으며, 탑의 사라진
부분이 많아서 복원까진 엄두도 못내고 그저 승가사의 옛 유물로 한가로운 여생을 보낸다.


▲  나는 누구일까?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좌(碑座)

향로각 앞에는 비석을 받치던 비좌가 초췌하게 누워있다. 고색의 때로 가득한 이 비좌는 화강암
으로 3단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넓직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무슨 비석의 아랫도리인지는 밝혀진 바는 없으나 고려 중기 승려인 탄연(坦然, 1070~1159)이 쓴
승가굴 중수비(重修碑)가 아닐까 여겨지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때
윗도리가 몽땅 사라져 비석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고, 비좌 자신도 그 당시의 충격으로 기억
조차 상실했다.
 
사라진 비신과 이수(螭首)는 경내와 그 주변을 싹 뒤집으면 일부라도 나오질 않을까 싶은데, 그
작업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  자연산 석굴인 승가굴에 터를 닦은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큰 바위 밑에 자리한 자연산 석굴(石窟)이다. 승가사를 세웠다는 수태가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승가대사상을 새겼다는 창건 설화가 서린 오래된 굴로 승가굴(僧伽窟)이
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고려 중기에는 탄연이 이곳에서 수행하면서 정체가 아리송한 승가
굴 중수비를 남기기도 했으며, 조선 세종 때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쾌유
를 빈 인연으로 약사전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하니 아마도 쾌유가 됐던 모양이다.

1960년대 이후 석굴을 크게 손질하여 안과 바깥에 돌로 벽을 쌓고, 승가대사상의 불단과 연화대
를 만들었으며, 그 앞에 기도를 올리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등을 대사상 좌측에 배치해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석굴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하다.


▲  석조승가대사좌상(石造僧伽大師坐像) - 보물 1000호

약사전에는 승가사의 주요 보물인 석조승가대사좌상이 홀로 봉안되어 있는데, 정작 약사전의 주
인인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은 없고, 승가대사상이 약사불의 자리와 직무를 대신하고 있다.

약사전의 주인인 승가대사(僧伽大師)는 인도의 승려로 당나라로 넘어가 활약했다. 그의 덕이 대
단했던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화신으로 널리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인기가 신라까지 전해져
승가사를 세운 수태가 그의 상을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다고 한다.
허나 이 석상은 전설과 달리 신라 후기가 아닌 1024년(현종 15년)에 지광(智光)이 동량이 되고
광유(光儒) 등이 조각을 했다. 조성 관련 내용은 광배 뒤쪽에 새겨져 있어 고려 초에 만들어진
확실한 조각품으로 당시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석상 높이는 76cm, 광배 높이는 130cm이다.


▲  인등의 강렬한 빛을 즐기고 있는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대사상은 하얀 피부의 석상으로 중간에 호분을 입힌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
고 있어 지장보살의 이미지를 주고 있으며, 손자/손녀를 맞는 할머니와 같이 포근하고도 정이
넘치는 인상으로 그의 표정을 보면 속세에서 상처받은 눈와 마음도 보기좋게 정화될 것만 같고
그 앞에 다가서면 '아이고 힘들지?' 손으로 어루만지며 다독거려 줄 것 같다.

그의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살짝 뜨며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오똑하고
입술은 무척 붉으며, 볼살이 많고 광대뼈가 나왔다. 귀는 두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고, 몸에
걸친 옷은 목 부분을 빼고는 노출된 부분이 없는데, 부처나 보살의 복장과 비슷하다.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蓮花臺, 근래에 만든 것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오른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충북 제천 빈신사지(頻迅寺址)에 있는 4사자3층석탑의 석상과도 유사한 면을
보인다. 또한 상체가 길고 무릎이 넓어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철불(鐵佛)과도 비슷한 특징을 가
지고 있다.

대사상 뒤에 자리한 광배(光背)도 꽤나 명품이다. 커다란 배의 모양을 한 이른바 주형거신광배
(舟形擧身光背)로 신광(身光)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머리 뒤쪽인 두광(頭光)은 신광과
일부 교집합을 이루면서 둥근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잎을 무늬로 두르고 그
바깥쪽을 덩굴무늬와 모란꽃 무늬로 치장했다. 또한 광배 외곽 부분에는 불꽃무늬를 정교하고
실감나게 새겨 광배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이 땅에 흔치 않은 오래된 승려상으로 약 1,000년의 지긋한 나이와 오랜 세월 어두컴컴한 석굴
에서 일광욕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았지만 건강과 피부만큼은 젊은 불상이나 석상에 못지
않게 양호하여 대단한 노익장을 과시한다. 조선 중기에 일어난 2차례에 큰 전란으로 절은 사라
지기 바뻤지만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온전하게 살아남아 자리를 지켰고 이렇게 승가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지 꿀단지로 변함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석상은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2호였으나 나중에 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아 보물
로 승진했다. 그런데 지정 번호가 우연히도 딱 1,000호이다. 보물 등급 외에는 아직 1,000까지
간 문화재 등급이 없는데 (국보가 300, 사적이 500, 서울 지방유형문화재가 300단위) 매우 흔한
숫자이지만 결코 쉽게 꿰찰 수 없는 번호를 차지한 것이다. 외우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고,
게다가 이 땅의 사람들이 많이 쓰는 숫자이니 이런 우연이 참 어디에 있을까 싶다.


♠  고려 초기에 조성된 거대한 마애불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 보물 215호

▲  마애불로 올라가는 108계단의 위엄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약사전을 나와서 향로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장대하게 펼쳐진 계단이 마음을 놀라게 만
든다. 그 계단은 절에서 좋아하는 숫자인 108계단으로 그 계단의 끝에 승가사의 꿀단지인 구기
동 마애여래좌상이 집채만한 바위에 둥지를 틀었다.

연화교(蓮花橋)란 볼록 튀어나온 조그만 다리를 건너 108계단에 임하면 되는데, 그렇게까지 각
박한 경사도는 아니어서 그리 힘들지는 않다. 속세의 부질없는 삶처럼 서두르지 않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곱게 접어 천천히 한 계단씩 임하다보면 멀리 보이던 마애불이 마치 해가 떠오르듯 크
고 웅장하게 솟아오르고, 계단의 끝에 이르면 마애불의 거대한 위엄에 다시 한번 눈과 마음을
놀라게 만든다.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의 위엄

승가사 북쪽에 자리한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하 마애불)은 경내와도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
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의 하
나지만 지정 명칭은 '승가사 마애여래좌상'이 아닌 지역 이름을 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다.
보통은 그 불상을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절의 이름을 앞에 붙이기 마련인데, 경내와 약간의 거리
를 두고 있고, 승가사의 소유가 아닌 국가 소유로 되어 있어 지역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지정
명칭은 몇년 전까지만 해도 '구기동 마애석가여래좌상'이었으나 지금은 마애여래좌상으로 무려
2글자나 줄였다. (정식 지정 명칭은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이 마애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서울에서는 삼천사지(三千寺址) 마애여래입상 다음으로
(또는 비슷한) 연세가 높은 마애불(磨崖佛)이다.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승가사의 장대한 내력을
과시하는 산증인으로 승가대사상은 조성 관련 글씨라도 있지만 이 불상은 그것 마저 없어서 누
가 더 형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승가대사상이 1살은 더 오래 살지 않았을까?)

직각을 이루며 솟아난 거대한 바위의 남쪽 피부에 얇게 홈을 파고 돋음새김으로 도드라지게 결
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불상을 새겼는데, 그의 건강을 위해 전실(前室, 보호각)을 만들고
머리 위에 8각의 머릿돌을 끼어 얼굴을 보호했다. 그러다보니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피부
도 얼굴 일부를 빼고는 하얀 편이다. 거의 20년 만에 만난 그였지만 여전히 정정한데 반해 나는
10대 꼬마에서 30대의 한복판으로 적지 않게 늙어있었다.

그의 갑옷과 같던 보호각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사라지고 보호각을 끼던 구멍 4개만
윗쪽과 중간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조선 중기 전란 때 파괴된 것이 아닐까 싶지만 마애불에 적
당한 외상이나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없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거나 자연재해로 무너진 것
으로 보인다.


▲  마애여래좌상의 얼굴 (양쪽에 보이는 구멍 4개가 보호각의 흔적)

마애불의 얼굴은 후덕한 인상의 승가대사상과 달리 조금 경직되고 근엄한 표정 같다. 이마 중간
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진한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러져 있으며, 두 눈은 감겨 있어 눈
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입술은 두꺼우며,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있는지 빨
간 기운이 조금 남아있다. 귀는 중생의 소리를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내려왔으며, 볼살
이 좀 많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껍게 솟아 있는데, 바로 위에 8각의 머릿돌을 끼워넣어
앞으로 크게 노출시켜 그의 모자로 삼았다. 모자가 큰 덕분에 얼굴에는 세월이 훈장처럼 달아준
검은 여드름이 여럿 있는 것 외에는 멀쩡하며, 피부도 하얗다. 그리고 모자 밑부분에는 연꽃 무
늬를 새겼다.
몸통과 머리를 잇고 있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어깨는 꽤나 단련을 했는지 당당하
고 듬직한 모습이다. 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 어깨와 가슴, 젖꼭지를 속시원히
드러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옷 스타일을 하고 있는데, 우
견편단은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단연 으뜸으로 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 불상에 많이 나타난다.
몸에 걸친 옷은 얇은 편으로 왼쪽 어깨와 배, 두 다리를 가리고 있으며, 왼팔에 묘사된 옷주름
은 세로로 그어져 있어 기하학적인 추상성(抽象性)을 드러내고 있다.


▲  마애불의 가슴과 아랫부분, 그리고 연화대(蓮花臺)

가슴을 비롯한 상반신은 아주 묵직한 모습으로 거대한 마애불의 위엄을 더욱 드높인다. 허리는
밑부분이 쏙 들어가 괜찮은 몸매를 보이고 있으며, 팔은 강철처럼 매우 두꺼워 보인다. 그리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배꼽 밑에 두어 이른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스쳐를 취했
다. 또한 오른쪽 발바닥은 하늘을 향해 있는데, 발바닥을 훤히 드러낸 불상이 흔치가 않다.

불상이 앉아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는 꽃잎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앙련(仰蓮)이 윗쪽에, 반대
로 꽃잎이 땅을 향한 복련(伏蓮)이 밑에 있는데, 연꽃무늬가 2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꽃잎도 너무 화사하기 그지 없어, 적당하게 색만 입히면 진짜 연꽃이 따로 없을 듯 싶다.

기존 전통의 불상 양식에서 추상성을 조금 보태어 웅장하게 만든 마애불로 고려 초기의 대표적
인 마애불이자 준수한 작품으로 일찌감치 인정받아 북한산에 있는 불교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
저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과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는 1980년
대에 지정됨) 게다가 상태도 양호하고 선각(線刻)도 선명하여 조성된 지 얼마 안된 따끈따끈한
불상 같다.

고려 초/중기에는 전국적으로 커다란 마애불과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는 지방 세력의 일종
의 세력(勢力) 과시용으로 비슷한 모습이 아닌 지역마다 다른 색을 보여 개성도 강하다. 구기동
마애불 역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당시 서울 지역 세력의 지원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기도 하며,
승가사가 고려 왕실과도 적지 않은 인연이 서린 절이라 제왕과 왕실의 지원으로 수준 높은 석공
들을 투입하여 조성했을 가능성도 높다. 당시 서울은 남경(南京)이라 불리는 고려의 주요 도시
의 하나였고, 고려의 제왕들이 종종 순행을 했던 곳이다. (남경의 중심지는 서울 종로구의 경복
궁, 청와대 일대로 여겨짐)

마애불을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고려 초기에는 지금처럼 장비와 기술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
다고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 좋게 일부러 드러누웠던 것도 아니다. 줄을 매달고 올라가 일일히
정을 대고 쪼아야 되는데, 그것도 그리 쉽지가 않다. 거의 몇년에서 10년 이상은 족히 걸렸을
것이며,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고려 석공(石工)의 뛰어난 능력과 정성,
그들이 공사에 전념하게끔 뒤를 받쳐준 승가사와 지원 세력이 합작으로 이루어낸 대작품이라 할
것이며 이런 명품급 마애불이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마애불이 있는 바위 밑에는 근래에 돌로 벽을 쌓았고, 그 앞에 향로와 용이 휘감고 있는 돌기둥
을 만들어 단(壇)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앞을 돌출시켜 양쪽으로 계단을 내었으며, 기도는 그
앞에 마련된 공간에서 하면 된다. 또한 바위 주변은 문화재 보호를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
으니 괜히 바위 꼭대기에 오르거나 불상을 만지는 짓은 하지 않도록 하며, 매일 오전 10시부터
11시(시간은 변경 가능)까지는 승가사에서 기도를 올리는 관계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2-1


▲  마애불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  승가사 마무리

▲  12지신상이 새겨진 동쪽 옛길
(경내 바로 밑쪽)

▲  12지신상의 하나로 어디론가 터벅터벅
가고 있는 말

마애불을 20분 정도 둘러보고 대웅전과 산신각 주변에서 조금 머물다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
음을 기약하며 등을 돌렸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절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내려갈 때는 호국보탑으로 바로 내려가는 계단길 대신 동쪽 옛길로 갔다. 옛길은 조금 돌아가는
편이지만 예전에 승가사에 갈 때 꼭 거쳤던 길로 어차피 둘 다 호국보탑으로 이어진다.


▲  쌀가마니를 축내는 쥐새끼들 -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제대로 묘사한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화상은 원래 호국보탑 부근에 있었다. 그러다가 호국보탑이 생기면서
옛길 중턱으로 터전을 옮겼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행복에 겨운 모습이
애를 여럿 둔 뚱보 엄마 같다.

▲  소나무가 숲을 이루는 승가산림초소 주변

▲  승가산림초소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길

절을 둘러보고 나오니 배가 슬쩍 고프기 시작한다. 그래서 남은 김밥과 과자, 물을 모두 꺼내서
싹 섭취를 하고 올라올 때와 다르게 수레길로 내려왔다. 수레길은 4발 수레를 위해 닦은 길로
경사가 가파르고 울퉁불퉁해 오르기가 쉽지 않은 길인데, 중간에 승가사 셔틀차량이 노인들을
여럿 태우고 뒤뚱거리며 지나간다. 아무리 수레를 위한 길이라도 경사가 급하고 노면 상태가 고
르지 못해 운전도 꽤 쉽지가 않을 것이다.

수레길을 20분 정도 정신없이 내려가니 승가산림초소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잠시 소나무가 송림
(松林)을 이루는데, 그들이 아낌없이 불어주는 솔내음에 정신과 마음이 약간이나마 개운해진다.
산림초소에서 5분 정도 내려가면 혜림정사란 조그만 절과 함께 빌라와 주택들이 시야를 가린다.
자연에서 아비규환의 속세로 완전히 내려온 것이다. 여기서 빌라를 끼고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구기동계곡이 나오며, 계곡 끝에서 비봉길로 들어서면 구기터널3거리로 이어진다.

비록 찰라와 같은 짧은 코스였지만 엄연히 등산도 했고 시간도 18시가 넘었으니 근사하게 저녁
뒷풀이를 해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디서 먹을까 고심하다가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옛날민속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두부음식으로 유명한 식당으로 구기터널에서 신영3거리로 가
는 길목에 있다.


▲  옛날민속집에서 먹은 보리밥의 위엄

무엇을 먹을까 즐거운 고민을 하다가 오랜만에 보리밥을 먹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보리밥을 먹
은 지도 꽤 되었다. 그리고 잠깐이긴 하지만 산도 탔으니 동동주로 목을 시원하게 축여야 밥맛
이 더욱 날 것읻. 그래서 동동주도 1병 주문했다.

5분 정도 지나자 제일 먼저 동동주와 밑반찬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밑반찬이 예전보다 많
아졌네? 알고보니 오른쪽의 전과 김치, 하얀 묵 등 6가지는 원래 밑반찬이고, 왼쪽 5그릇은 보
리밥에 비벼먹을 나물로 콩나물과 당근, 생채, 상추 등 7가지에 이른다. 그래서 찬이 많아진 것
이다.
그리고 잠시 뒤 저녁 식사의 주인공인 보리밥과 비지찌개가 등장한다. 보리밥은 커다란 양은 냄
비에 담겨져 있는데, 담긴 양은 냄비가 아까울 정도로 적다. 보리밥 외에 구수한 된장찌개와 콩
비지가 따라 나왔는데, 이들은 모두 보리밥용으로 보리밥에 딸려 나오는 나물과 찌개가 많으니
가격에 비해 본전 뽑기는 좋다. (단 고기는 없음)

보리밥에 나물 7가지와 콩비지, 된장찌개를 넣고 고추장으로 버무리니 어엿한 비빔밥이 되었고
적어보이던 밥도 그들이 더해져 양이 남부럽지 않게 늘었다. 거기에 누런 동동주까지 겯드리니
정말 제왕의 밥상이 부럽지 않다. 열심히 먹고 보니 밥그릇은 맨바닥을 드러냈고, 나물과 반찬
도 겨우 일부분만 남았을 뿐이다.
식사가 끝나자 누룽지와 수정과가 후식으로 제공되었다. 누룽지는 맛이 구수했고, 수정과는 맛
이 달고 시원해 단숨에 그릇을 비웠다.

이렇게 기분 좋게 저녁을 마치고 신영3거리로 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19시 반, 여기서 길음역으
로 넘어가 후배들과 작별을 고하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니 이리하여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나
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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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5월 1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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