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낚시터'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5.01.28 겨울 축제의 성지, 화천 산천어축제 나들이
  2. 2014.07.21 서해바다에 떠있는 아름다운 섬의 무리들 ~ 군산 고군산군도, 선유도 나들이 (장자도, 비응항)
  3. 2014.01.16 부산의 상징을 거닐다 ~ 오륙도 (등대섬, 오륙도등대, 백운포)
  4. 2013.08.27 태안 서해바다 나들이 ~~~ (신진도, 마도, 서해갯벌, 안흥성...)

겨울 축제의 성지, 화천 산천어축제 나들이

 


' 화천 산천어축제 나들이 '

▲  화천 산천어축제 맨손잡기 현장


 

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가 떠오르면 천하 곳곳에서 다채로운 겨울 축제가 열린다. 겨울 제국(
帝國)의 철권통치에 기가 죽어 집밖을 나서기가 쉽지는 않지만 축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겨울
제국에 맞설 수 잇는 명분을 준다. 축제를 보러~ 즐기러~~ 강원도 내륙과 경기도 동북부, 경
북 내륙, 전북 내륙, 왜열도 북해도 등 겨울 축제의 성지(聖地)를 찾아 사람들은 먼 길도 마
다하지 않고 성지 순례를 떠난다.

우리나라 겨울 축제의 오랜 성지는 뭐니뭐니해도 태백산(太白山) 눈꽃축제일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 태백산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강력한 라이벌이 여럿 등장했으니, 그중 하
나가 바로 화천 산천어축제이다. 올해 같은 경우는 토/일요일에만 10만 명 이상이 찾을 정도
로 나날이 대성황을 이루고 있는데, 이제는 이 땅을 넘어 해외에도 널리 알려지면서 외국 관
광객들도 적지 않게 찾아온다. 예전 미국(米國) 양키의 모 방송에서는 세계의 겨울 7대 불가
사의의 하나라며 이 축제를 격하게 띄워주기도 했다.

화천 산천어축제는 이미 2010년 겨울에 참여한 적이 있으나 화천읍 본행사장이 아닌, 토고미
마을에서 낚시를 했다. 그때 일행 10여 명이 얼음 구멍에 달라붙어 3시간 동안 고작 1마리를
잡는게 그쳤지.. (☞ 관련글 보러가기) 그때 산천어를 잡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 커서 다음에
간다면 반드시 산천어의 씨를 말리리라 부질없는 다짐을 했다. 그러다가 이번 1월에 다시 기
회를 잡아 후배 여인네와 화천을 찾았다.

화천 산천어축제와 평창 송어축제, 가평/인제 빙어축제 등에 가려면 견지대라는 조그만 낚시
대를 가져가야 된다. 물론 현지에서 구입해도 상관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견지대, 미끼, 훌치
기 도구를 합쳐서 거의 5천원 이내에 파는 것을 축제장 현지에서는 견지대 하나만 사도 무려
5천원 이상을 요구한다. 게다가 축제 기간이라 수요가 많으니 현지 상인들이 배가 불러 불친
절하게 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니 인터넷과 낚시전용가게에서 미리 사가지고 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나는 며칠 전 인터넷에서 3천원대 견지대와 미끼를 구입했다.

드디어 낚시를 떠나는 날 아침, 월척을 꿈꾸며 집을 나섰다. 겨울의 차디찬 태클을 물리치며
전철을 타고 상봉역으로 이동, 거기서 여인네를 만나 춘천(春川)행 전철을 타고 80분을 달려
남춘천역에 발을 내렸다. (상봉~춘천 경춘선 전철은 20~30분 간격으로 운행)

남춘천역에서 인근에 자리한 춘천터미널로 이동하여 화천행 직행버스를 타는데, 군부대 면회
수요와 산천어축제 수요로 인해 거의 50~60m 정도의 대기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기겁을 할만
한 그 대기줄 앞에 언제 버스를 타고 가나?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임시차가 적절히 투입되어
줄을 선지 30분 만에 춘천을 뜰 수 있었다. (춘천~화천 직행버스는 30~40분 간격)

만석의 기쁨을 누리며 춘천터미널을 출발한 우리의 버스는 춘천역에서 승객 20여 명을 더 태
워 완전 짐짝수송이 되었다. 그런 상태로 춘천시내를 벗어났고 춘천댐을 지나니 단단히 얼어
붙은 북한강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여전히 2차선을 고집중인 화천행 5번 국도를 구불구불 따
라 하얀 수채화가 된 강원도의 산하(山河)를 즐기며 출발 50분 만에 화천터미널에 도착했다.


♠  화천 산천어축제 들어가기

▲  천일막국수에서 먹은 막국수의 위엄

화천에 도착하니 점심 직전이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점
심을 먼저 들고 낚시에 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축제장에도 먹을 곳이 많지만 강원도 산골의
향토 음식인 막국수가 진하게 땡긴다. 그래서 미리 적당한 막국수집을 조사하여 화천3거리 부근
에 자리한 천일막국수를 찾았다.

시골 식당의 향기가 묻어난 이 집은 막국수와 편육, 닭갈비 등을 내놓고 있는데, 막국수의 맛을
1마디로 표현하면 달콤하다. 남북분단을 상징이나 하듯 반토막난 삶은 계란과 오이, 깨, 육수가
어우러져 춘천/화천 스타일의 막국수를 자아내고 있었는데, 반찬은 김치와 나박김치가 전부이다.
정식이나 백반도 아니고 국수이니 반찬은 저 정도면 충분하지. 그렇게 기분 좋게 점심을 마치고
무료로 제공되는 후식 커피를 1잔씩 마시며 밖으로 나오니 밥 먹기 전에는 제법 칼처럼 날카롭
던 화천의 바람이 조금은 시원하게 다가온다.


▲  화천3거리 스케이트장과 산천어등
▲  중앙로에 조성된 선등거리 (화천3거리에서 화천대교 방향)

화천읍내는 산천어축제로 읍내 전체가 거의 잔치 분위기였다. 화천3거리에는 스케이트장이 조성
되어 있고, 화천3거리에서 화천대교로 이어지는 중앙로에는 온갖 산천어등을 허공에 잔뜩 메달
아 거대한 선등거리를 이루고 있다. 햇님의 위엄이 천하 구석구석 미치고 있는 시간이라 등들이
단순한 모형으로 잠자코 있지만 해가 커텐을 치고 나면 서로 몸을 밝히며 장대한 등축제 거리로
변신한다.
산천어축제에 왔다면 낮에는 산천어 낚시와 여러 체험거리를 즐기고, 저녁에는 선등거리의 둥축
제를 구경하면 산천어축제의 낮과 밤을 고루고루 둘러보게 된다.


▲  화천천 위에 조성된 산천어축제장의 레포츠 공간

산천어축제의 중심은 화천읍내 북쪽과 동쪽을 흐르는 화천천(華川川)이다. 이 하천은 북한강 지
류의 하나로 겨울 제국이 입힌 얼음을 30cm 이상 두께로 불려 그 위에 축제장을 깔았는데, 축제
장 길이가 약 1.8km 정도 된다. 축제가 끝나면 축제의 장이던 화천천 얼음판을 녹여 그 흔적을
지운다. 그래서 다른 때에 오면 이곳이 정말 흥성하던 그 축제의 현장인지 고개가 갸우뚱할 정
도이다.


▲  산천어축제의 백미, 산천어 맨손잡기 현장 (배머리교 서쪽)

▲  산천어 용사들이 비장의 각오로 맨손잡기 현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  차가운 물에 발을 담구며 몸을 푼다. (맨손잡기 현장)

▲  드디어 시작된 산천어 맨손잡기 (산천어 학대 현장)

배머리교 서쪽에는 산천어 맨손잡기 현장이 있다. 호랭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되듯
이 산천어를 맨손으로 잡으려면 물에 흔쾌히 들어가야 된다. 한여름이면 들어갈 만하지만 동황
제(冬皇帝)의 위엄에 천하가 오들오들 떠는 1월의 한복판에 차디찬 물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 쉽
지가 않다. 그렇다고 행사를 위해 특별히 따스한 물을 내주느냐. 그것도 아니다. 온수가 나오면
산천어가 힘을 못쓰기 때문에 공정한(?) 게임 법칙에 따라 차가운 물을 링에 풀었다.

산천어 맨손잡기는 산천어낚시 입장료와 별개로 가격이 다소 야박하다. 거의 1~2시간 간격으로
맨손잡기(평일은 1일 4회, 주말은 6회 이상)를 진행하는데, 입장료를 내고 참가를 신청한 다음
탈의실로 들어가 행사장에서 준비한 붉은 반팔 티와 검은 반바지로 갈아입고 순서대로 맨손잡기
링 바깥에 대기한다.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링으로 들어가 앉으면서 반드시 발을 물에 담가야 되며, 여기서 잠시 몇
가지 게임을 하다가 서로에게 물공격을 가하면서 차가운 물에 적응한 다음 온몸을 내던져 산천
어를 잡는다. 산천어가 잘 잡히지 않다보니 온몸이 물에 풍덩하기 일쑤고 적어도 하반신은 물에
젖기 마련이다. 산천어는 1인당 3마리 이하로 제한하고 있으며, 용감하게 나선 사람은 사회자가
특별히 1~2마리를 얹혀주기도 한다. 게임 시간(링에서 물고기 잡는 시간)은 3분 정도로 물이 매
우 차가워 감기 걸리기 쉽겠구나 싶지만 오히려 냉기로 겨울 제국에 대항하는 것이니 감기도 스
스로 도망친다. 그렇게 산천어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다음, 밖으로 나와 따뜻한 물이 나오는 족
욕장 천막에 들어가 씻으면 된다. 링에 나선 사람 중에 양이(洋夷)들도 적지 않은데, 산천어 하
나 잡겠다고 아주 목숨을 건다.

맨손잡기 현장을 구경하려면 링 주변보다는 바로 옆에 있는 배다리교 위에서 보는 것이 괜찮다.
옆에서 보는 거와 위에서 보는 거는 정말 천지 차이다. 그렇게 그 현장을 둘러보고 산천어 얼음
낚시터로 갔다.
얼음낚시터는 현장접수 장소와 예약접수 장소로 구분되어 있는데, 여인네가 미리 인터넷에서 예
약을 해서 예약접수 장소로 가면 된다. 그 장소는 맨손잡기 바로 서쪽에 자리한다. 반면 현장접
수는 배머리교 남쪽에 있는데, 주말에 가는 경우에는 일찍 가야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다.

예약 접수 장소로 가서 예약을 확인하면 표를 2장 준다. 하나는 그냥 표이고, 다른 하나는 출입
증으로 잘보이는 곳에 달아야 된다. 단순 1회 입장이 아닌 1일 내내 입장으로 바깥으로 잠시 나
갔다 들어올 때 그걸 보여주면 된다. 그러니 꼭 잘 간수해야 된다.


♠  화천 산천어축제 즐기기

▲  산천어를 낚기 위한 얼음구멍
얼음구멍을 파려면 현장에 준비된 얼음끌대를 쓰면 된다.


표를 받고 예약접수 얼음낚시터로 들어갔는데, 사람들이 허벌나게 많다. 거의 화천군 인구를 초
과한 머릿수(화천군 인구가 27,000명)인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으니 축제로 벌어들인 돈이
어마어마하겠지. 포크레인 수십 대를 동원하여 돈을 쓸어담아도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이 축제를 통해 음식점과 숙박업소, 온갖 가게들, 화천을 운행하는 시외버스 회사, 화천에 온갖
관광지들도 그 덕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인공으로 뚫은 얼음 구멍 하나씩 차지해 월척을 꿈꾸는 강태공(姜太公)이 되
어 낚시에 임한다. 우리도 간신히 적당한 자리를 찾아 낚시를 시작했는데, 과연 잡히기나 할련
지 모르겠다. 그 인파 가운데 고기를 낚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편, 한동안 낚시에 정적이 감
돌다가 '와 잡았다!' 소리에 일제히 그곳을 향해 부러움 반 경쟁심 반으로 시선이 모아진다.

산천어축제장에서 풀어놓는 산천어는 이곳 토종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구입하거나 수입한 산천
어(송어의 일종)를 푼 것이다. 일정 시간이 되면 산천어를 담은 차가 와서 랜덤으로 아무 구멍
이나 산천어를 풀어넣는데, 그때가 되면 가라앉은 낚시터의 분위기와 강태공들의 사기가 다시
상승된다. 이때 산천어를 가져온 인부들에게 이곳에 제발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낚시를 하려면 싱싱한 미끼와 온갖 도구가 필요한데, 이곳은 수질 오염을 이유로 생미끼와 훌치
기를 금하고 있다. 그러니 오로지 견지대 등의 낚시대와 물고기 모양의 미끼에 의존해야 된다.
물론 훌치기 등의 도구를 몰래 들이거나 경험치가 풍부하면 많이 잡을 수는 있지만 상당수는 오
로지 축제장의 요구에 따라 견지대에 의존한다. 그러니 장소와 운빨이 매우 중요하다. 운이 좋
으면 1마리 잡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세월만 낚는 것이다.
축제장으로 들일 수 있는 것은 낚시 의자와 깔고 앉을 것, 그리고 간식거리 정도이다. 얼음박스
는 반입이 안되며, 대신 물고기를 담을 수 있는 봉투를 1인당 1개씩 준다. 또한 1인당 3마리로
제한을 하고 있으나 그건 따로 검사를 하지 않는다.

산천어축제는 인간에게는 여가를 즐기는 축제와 체험의 현장이다. 허나 산천어에게는 자신을 죽
이는 학살의 현장이다. 미끼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그날 그들의 인생은 무참히 끝나기 때문이다.
혹 잡히지 않더라도 물을 가둬서 얼음을 얼린 터라 밖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수명을 며칠 연장하는 꼴 밖에는 되지 않으며, 결국에는 모두 횟감이나 구이로 전락하게 된다.


▲  드디어 잡힌 산천어의 위엄
낚시에 임한지 1시간 여 만에 드디어 산천어 1마리가 걸려들었다.
우리가 그들의 인생을 이렇게 쫑나게 만드는구나..

▲  산천어 2마리 포획

▲  산천어보다 사람이 더 많은 산천어 얼음낚시 현장

▲  산천어 얼음낚시터에서 바라본 화천의 산과 하늘
유난히 맑고 푸른 하늘이 산천어바보들을 바라본다. 그날 하늘나라로
강제로 소환된 산천어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늘나라 수용능력이
초과되어 어쩔 수 없이 환생한 산천어도 혹 있지는 않을까?


3시간 동안 낚시를 하면서 4마리를 잡았다. 4마리를 강제로 세상 및 황천 구경을 시켜준 셈이다.
시간도 벌써 16시에 이르렀고, 슬슬 인원도 빠지는 분위기라 산천어 탄압을 그만두고 자리를 정
리했다.

잡은 산천어를 들고 어떻게 요리해 먹을까 궁리하다가 절반은 회, 나머지는 구이로 먹기로 했다.
그런데 회와 구이를 해주는 행사 천막은 기다리는 사람들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길게 늘어서 있
었다. 힘들게 잡은 산천어를 잡아먹는 것도 참 쉬운 것이 아니구나, 그렇다고 집까지 가져갈 수
도 없는 노릇이니 무작정 그 대열에 합류했다.

회(회센터)와 구이 장소(구이터)는 서로 떨어져 있는데, 구이터가 대기 인원이 좀 적어 먼저 되
었고 회센터는 40분 정도 기다려 회뜨는 곳까지 왔다. 여기서 산천어를 넘기면 칼로 잘 다져 회
로 만들어주는데, 회와 구이 모두 1마리당 2,000원이다.
잡은 산천어가 많은 경우에는 옆 사람에게 1~2마리 넘기라 권하기도 하며, 그렇게 산천어의 한
맺힌 하직 현장을 거쳐 회를 받는 곳으로 가서 계산을 하면 되는데, 이때 소주와 상추, 초장도
구입할 수 있다. 허나 그냥 회만 먹기는 뭐하니 태반이 소주나 상추, 초장을 구입한다. 이들을
모두 구입하면 2마리 기준으로 9,000~10,000원 정도 든다. 초장은 다 먹지도 못할 정도이나 상
추는 좀 부족하며, 소주는 3천원 정도이다. 그리고 다른 먹거리를 원한다면 인근에 있는 먹거리
천막에서 오뎅이나 메밀전병 등을 사들고 와도 된다. 또한 산천어를 잡지 못했을 경우 산천어회
도 사먹을 수 있는데, 이건 가격이 대개 비싸다. (2~3만원선)

그렇게 회와 구이를 들고 빈 자리에 가서 자신을 희생해 (물론 강제로 희생된 것이지) 신(神)과
동물들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인간들에게 일용의 양식을 주신 산천어에게 고마움
과 위로를 올리며 조촐하게 낚시 뒷풀이를 한다. 우리가 잡은 산천어로 이렇게 한상 차려 먹게
되니 소원은 성취한 셈이다. 산천어에게는 미안하지만 인간 입장에서는 이 아비규환 같은 세상
을 살아가려면 먹고 살고 즐겨야 되지 않겠는가?
부디 산천어와 송어/빙어축제 때 학살된 물고기들은 다음 세상에 꼭 인간이나 그 이상의 존재로
태어나 한을 풀기를 바랄 뿐이요. 반대로 그들을 많이 잡은 사람들에 한해 내세에는 송어나 산
천어로 태어나 축제장에서 그들의 입장을 실감나게 체험해야 서로가 공평할 것이다.


▲  산천어회와 산천어구이
회와 구이 모두 맛이 좋다. 2마리를 회로 떴는데 양은 몇 젖가락 되지도 않는다.
저중에 남은 것은 쌈장 뿐..

▲  산천어축제 스케이트장

▲  산천어축제 얼음썰매장

산천어회와 구이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머지 축제 현장을 둘러보았다. 한참 즐거움에 빠져있
는 얼음썰매장과 스케이트장을 비롯해 현장접수 얼음낚시터, 사륜구동(ATV) 체험장 등을 지나
화천 농산물과 먹거리를 파는 천막으로 갔다.
여기서 산천어축제 입장권과 같이 받은 농특산물교환권 5천원권 2장으로 다시금 먹거리를 사먹
으려고 했는데, 오로지 농특산물 구입에만 쓸 수 있다고 그런다. 그 교환권 외에 화천사랑상품
권도 있는데 이것만 먹거리에 사용이 가능하다. 허나 그건 얼음썰매나 기타 레포츠를 이용해야
받을 수 있다. 햇님이 꼴까닥 넘어가기 전이고 몸도 지쳐있어 썰매나 사륜구동 등을 타기도 뭐
해 살짝 자비를 청하니 메밀전병만 해주겠다고 그런다. 마침 내가 먹고 싶은 것이 그거였는데..
그래서 메밀전병과 화천동동주 1병을 더해서 다시금 배를 채운다.

메밀전병은 좀 맵기는 했지만 맛은 고소했고, 거기에 동동주까지 걸치니 몸이 싹 대펴지면서 졸
음이 나를 희롱하려 든다. 아까 먹은 산천어회/구이도 완전 소화가 되지 않은 상태에 그들까지
뱃속에 넣으니 배가 터지려고 그런다. 그래서 그날은 따로 저녁은 먹지 않았다.


▲  산천어축제 레포츠 장소

▲  화천천과 북한강이 하나가 되는 곳 (화천교)

산천어축제장 남쪽에는 현장접수 낚시터와 얼음을 얼리지 않은 루어낚시터가 있다. 그곳을 지나
면 화천교가 나오며, 여기서 화천천과 북한강이 만난다.
북한강은 얇게 얼음이 얼었는데, 주변은 온통 눈의 세상이다. 화천대교를 지나니 강 남쪽 위라
리로 이어지는 부교(浮橋)가 놓여져 있는데, 강 남쪽에 산천어축제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이 있
어 접근 편의를 위해 가설한 것이다. 다리의 길이는 350m 정도로 깊은 강을 건너야 되는 터라
체감 거리는 한 1km 정도 되는 것 같다. 쫄깃해지는 염통을 진정시키며 그 부교를 건너면 화천
체육관과 화천민속박물관이다.


▲  얼어붙은 북한강 - 소쩍새가 우는 날이면 강도 얼음을 박차고 일어나겠지

▲  북한강 부교 - 다리가 조금씩 흔들려 간을 은근히 쫄깃하게 만든다.
강 북쪽은 화천읍내, 다리 건너로 보이는 강 남쪽은 화천민속박물관,
화천체육관 등이 있는 하남면 위라리이다.

▲  영롱하게 피어난 선등거리 (화천읍내 중앙로)

북한강 부교를 왕복하고 화천대교로터리로 나오니 여기서 화천3거리까지 길게 선등거리가 형성
되어있다. 마침 햇님이 퇴근하고 달님이 세상을 비추는 시간이라 햇님의 위엄에 움츠려있던 산
천어 선등이 서로 오색영롱한 불빛을 다투며 어두운 읍내 거리를 비춘다.
선등거리는 중앙로를 중심으로 읍내에 약 5km 정도 형성이 되어있는데, 총 24,000여 개의 산천
어등이 읍내를 장엄한다. 산천어의 수많은 피로 화천의 겨울과 백성들을 책임지며, 산천어축제
도 이렇게 발전한 것이니 선등도 모두 그들로 채운 것이다.
이 거리는 보통 12월 말부터 2월 말까지 운영하며, 17시 30분에서 22시까지 불을 밝힌다.


▲  어둠 속 터널 같은 선등거리 (화천읍내 중앙로)

선등거리를 지나 화천터미널로 나오니 산천어축제나 군면회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가려는 사람들
이 몇십m 길게 줄을 이루고 있었다. 다행히 임시차가 배차되어 앉아 갈 수 있었는데, 서서 가는
사람들은 춘천역까지 다리를 혹사시켜야 했다.
춘천터미널에서 두 발을 내려 터미널 옆에 자리한 이마트에 잠시 들렸다가 남춘천역으로 이동하
여 상봉행 전철을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전철은 자리가 널널해 넓게 자리를 누리며, 잠시 꿈나
라 투어를 청했다. 꿈나라에서도 산천어를 잡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러다 산천어에게 쫓기
는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이렇게 하여 화천 산천어 축제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 화천 산천어축제 찾아가기 (2015년 1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화천행 직행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춘천에서 화천행 직행버스가 30분 간격으로 떠난다. (춘천역 경유)
* 서울에서 경춘선 전철이나 경춘선 Itx-청춘 열차를 타고 남춘천역(춘천터미널 도보 7분 거리)
  이나 춘천역 하차
* 화천터미널에서 산천어축제장인 화천천까지는 도보 15분 이내 거리, 맨손잡이 장소와 예약접
  수 얼음낚시터는 배다리교 서쪽, 현장접수낚시터는 화천군청 옆 화천초등학교 방면으로 가면
  된다. (무조건 화천천만 찾으면 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는 화천군청이나 화천초교, 화천대교 남단, 화천정보산업고, 홍천국
  토관리사무소 화천출장소 등을 이용하면 됨)
① 서울 → 경춘국도 → 춘천시내<또는 403번 지방도(서면) 경유> → 춘천댐 → 화천읍내(산천
   어축제장)
② 중앙고속도로 → 춘천나들목을 나와서 양구 방면 46번 국도 → 신북교차로 → 용산교차로 (
   또는 오음리, 파로호 경유) → 화천읍내

★ 얼음나라 화천 산천어축제 관람정보 (2015년 1월 기준)
* 축제 기간 : 2015년 1월 10일부터 2월 1일까지 (8:30~18:00)
* 입장료 - 중학생 이상과 어른 12,000원 / 초등학생과 경로, 국가유공자 8,000원
* 영유아 얼음낚시는 입장료 없음 (금,토 1일 3회 / 일요일 1일 2회 운영)
* 낚시 시간은 8:30~18:00, 1일 최대 인원은 1만4천명 (예약 6천명, 현장 8천명)
* 산천어축제 관련 정보나 온갖 체험 정보, 온라인 예약은 ☞ 이곳을 클릭한다.
* 소재지 -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화천천 일원 (☎ 1688-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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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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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바다에 떠있는 아름다운 섬의 무리들 ~ 군산 고군산군도, 선유도 나들이 (장자도, 비응항)

 

' 군산 선유도,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 나들이 '

▲  고군산군도

 


봄이 나날이 흥해감과 동시에 여름이 천하를 훔칠 기회를 엿보던 4월 끝 무렵에 군산 선유
도를 찾았다. 이곳은 마음 속 바구니에 담아두며 인연이 닿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
디어 그 인연이 닿았다.

아침 해가 떠오르기가 무섭게 집을 나서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군산으로 가
는 일반고속버스를 탔다. 버스는 2시간 40분 동안 열심히 바퀴를 굴려 군산 도심에 자리한
군산고속터미널에 나를 내려준다.

선유도 유람선이 출발하는 비응항까지는 10시 반까지 가야 된다. 남쪽에서 온 일행은 이미
도착한 상태, 군산시내에서 비응항은 시내버스 5개 노선이 운행하고 있는데, 노선 수를 봐
서는 제법 많이 다닐 것으로 보인다. 허나 그것은 치명적인 함정. 그들은 각각 1~2시간 간
격으로 운행하고 있어 인구 28만을 지닌 도시의 시내버스치고는 다소  절망적인 수준이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시외/고속터미널을 경유하는 4개 노선의 버스 시간을 전날 확인해 두
었는데, 그새 시간표가 바뀌었는지 정보 오류인지 차가 좀처럼 오질 않는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지 뱃시간은 다가오지, 초조함으로 제대로 쫄깃해진 염통을 부여잡으며
일단 군산시내버스 상당수가 종점으로 삼는 군산대 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군산대 후문에서
내렸다. 그런 다음 서둘러 택시를 낚아 비응도로 이동했다. 시내에서 바로 택시로 가도 되
지만 그럴 경우 막대한 요금 앞에 뒷목을 잡을 수 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택시는 나의 조급한 마음을 헤아린 듯, 비응도까지 새만금북로로 시원하게 질주했는데, 15
km 거리를 13분에 주파하는 위엄을 보인다. 허나 요금은 14,000원 약간 넘게 나와 늘 돈에
쪼들려 사는 나의 마음을 무척 쓰라리게 만들었지. 고군산군도와 선유도 때문에 이곳에 왔
는데, 그곳을 못본다면 애써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어지고 만다. 그래서 부득이 무리를 하
고 말았다.

비응도(飛鷹島)에 이르니 시간은 오히려 20분의 여유가 있다. 그래서 월명유람선 선착장까
지 안가고 비응항에서 내려 걸어갔는데, 상춘객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선착장에서 일행들을
만나 10시 30분에 출발하는 유람선에 몸을 실었다.


♠  고군산군도 해상 유람 (비응도→선유도)

▲  만선의 꿈을 꾸는 어선들의 보금자리 ~ 비응항(飛鷹港)

고군산군도 유람선인 월명유람선은 비응항(비응도항)을 출발하여 횡경도와 방축도, 명도, 대장
도, 장자도 등을 차례대로 지나 선유도에 배를 대고 잠시 머물다가(1시간 정도 머무는 B코스와
4~5시간을 머무는 C코스가 있음) 다시 비응도로 돌아오는 코스로 비응도에서 선유도까지 약 1시
간, 나오는데 40~50분 정도 걸린다.
비응도에서 방축도와 명도를 경유하여 선유도까지 보통 30~31km 정도 되며, 고군산군도가 한반
도와 좀 떨어져 있긴 하지만 비응도와 오식도(筽篒島)가 섬에서 한반도의 일원이 되면서 서로의
거리가 많이 좁혀졌다. 그 이전에는 군산시내에 위치한 군산항에서 배를 타야 했는데, 꼬박 2시
간 이상 걸렸다. (지금은 1시간) 배를 대는 곳은 오로지 선유도 한곳으로 나머지 섬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나가며, 다른 섬에 발을 들이고 싶은 경우 군산여객선터미널이나 선유도에서 일
반 여객선을 이용해야 된다.
 
유람선은 2층으로 이루어진 배로 1층과 2층 모두 관광객들로 만원을 이룬다. 2층에는 간식과 음
료수, 술을 파는 매점을 비롯해 넓은 노래방 홀까지 갖추고 있는데, 배가 움직이는 내내 중/장
년층 단체객들이 노래방을 점거하며 노래를 부르고 신나게 춤판과 술판까지 벌인다. 일반 여객
선도 아닌 유람선이라 그러려니 해도 너무 지나치면 안하는 것만 못하다고 조금은 눈살을 찌푸
리게 한다. 게다가 그렇게 넋을 놓고 놀다가 만약 사고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하는지 정말 대책
이 안보인다. 물론 배가 움직이는 동안 심한 요동으로 인해 속이 울렁거리거나 현기증이 일어나
거나 심하면 멀미까지 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오가는 시간도 지루하니 그렇게라도 신나게 몸
을 움직이면 그런 것을 잠시나마 떨쳐버릴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어느 정도 선은 지켰으면 좋
겠다. (지켜서 손해볼 것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탄 배는 10시 반에 출발하는 것으로 승선이 지연되어 거의 10시 40분에 뱃고동을 울리며
미끄러지듯 비응항을 출발했다. 그렇게 한반도를 뒤로하며 고군산군도로 느릿느릿 다가선다.
우리는 2층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파도로 인해 배가 좀 요동을 치면서 자연히 속에서 불편한
신호가 왔다. 오랜만에 배를 탄 것도 있겠지만 속이 계속 울렁거려 미칠 것 같다. 그래도 계속
참으며 자리를 지키다가 결국 자리를 뜨고 1층으로 내려온다. 배를 타면서 속이 말썽을 부릴 때
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선창으로 나가 바닷바람을 쐬는 것이 매우 좋지. 1층으로 내려오니 2
층보다는 요동이 적어 불편한 속이 조금 진정이 되었고, 바깥으로 나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다
내음에 심취하니 그나마 남아있던 불편함도 거의 가신다. 게다가 사진기를 꺼내 바다와 가까이
다가오는 고군산군도를 열심히 담으니 정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  비응도를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한반도에서 멀게만 느껴졌던
고군산군도가 그 모습을 서서히 비춘다.

▲  서해바다란 넓은 도화지에 대자연 형님이 점을 여럿 찍으니 그 점이
바로 서해바다의 꽃인 고군산군도이다.

▲  길게 드러누운 횡경도(橫境島)

고군산군도에 이르면 가장 먼저 횡경도가 마중한다. 새만금방조제가 생기기 이전에는 야미도(夜
味島)가 가장 먼저였지만 그곳이 방조제로 인해 육지와 끈끈하게 연결되면서 이제는 횡경도가
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횡경도는 동서로 길쭉한 64.4만㎡의 조그만 섬으로 소횡경도를 거느리고 있다. 사람이 살지 않
는 무인도로 낚시터로 유명해 낚시꾼들의 출입이 잦으며, 이 섬에 들어가려면 선유도나 야미도
에서 어선을 빌려타야 된다. 섬 중앙에는 할배바위(장자할배바위)란 바위가 있는데, 상투에 갓
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은 형상처럼 생겼고, 소횡경도에는 거북이가 목을 뺀 듯한 모습의 거북바
위와 등대가 있다.


▲  보다 가까워진 횡경도(왼쪽)와 소횡경도(오른쪽)

▲  등대가 있는 소횡경도 서쪽 부분 <왼쪽 벼랑이 거북바위>

▲  서남쪽에서 본 소횡경도와 횡경도
속세에서 잠시 나란 존재를 지우고 싶을 때 살짝 찾아와 아무도 모르게
며칠 정도 머물고 싶다. 아니면 내가 중심이 되는 나만의 나라를
이곳에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물론 안될꺼야..)
 

▲  횡경도 해역에서 바라본 야미도와 신시도(新侍島)

▲  횡경도 해역에서 바라본 선유도와 관리도

▲  고군산군도의 방파제인 방축도(防築島)

횡경도를 지나면 방축도란 섬이 나타난다. 이 섬은 선유도 북쪽에 자리하여 고군산군도의 자연
산 방파제의 역할을 하는데, 그런 연유로 방축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유인도로 신라 후기에 바다의 제왕 장보고(張保皐)가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동아시
아의 드넓은 바다를 엄하게 호령하던 시절, 당나라 상인들이 신라에 가다가 표류하여 이곳에 들
어와 정착했다고 전한다. 허나 마을 뒷산에 7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어 이미 청동기시대(靑銅器時
代)부터 이 좁은 섬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살짝 귀뜀해준다.

섬 주변은 암석이 많고, 수심이 얕아서 조류가 거세고 파도가 강하다. 허나 낚시 장소로는 제격
이라 많은 낚시꾼들이 찾아오며 농어가 많이 잡힌다고 한다. 그리고 해변에는 독립문바위와 시
루떡바위, 책바위 등 대자연이 빚은 여러 바위들이 포진해 섬의 아름다움을 더욱 수식해준다.


▲  방축도와 외부를 이어주는 방축도 포구
저 섬에도 잠시 두 발을 들였으면 좋으련만 이렇게 멀리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  방축도 해역에서 바라본 횡경도

▲  방축도 서부


▲  방축도의 명물 독립문바위가 중앙에 보인다.

방축도 서쪽 해안에 자리한 독립문바위는 조그만 돌다리나 고가도로처럼 생긴 참으로 기묘한 바
위이다. 서울의 독립문(獨立門)처럼 생겼다하여 독립문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북문바
위라 불리기도 한다. 바위 서쪽에도 산을 갖춘 섬 같은 땅이 보이는데, 겉으로 보면 별도의 섬
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방축도의 일부로 그 사이가 가늘게 이어져있다.


▲  말도(末島)와 명도(明島), 방축도의 서부
푸른 산과 바다 밖에는 안보이는 말그대로 망망대해(茫茫大海)의 고적한 섬이다.


우리를 태운 유람선은 방축도에서 남쪽으로 꺾는다. 그래서 명도와 말도는 이렇게 아주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밝은 섬이란 뜻의 명도는 달과 해가 합쳐진 것처럼 물이 맑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이다. 사람들
이 살고 있는 아주 조촐한 섬으로 낚시터로 명성이 높으며, 섬의 야트막한 산에는 수십 가지의
각종 약초가 자라나 약산(藥山)이라 불리기도 한다.

말도는 고군산군도의 종점이자 끝으로 가장 서쪽에 자리한다. 끝섬이라 불리기도 하며, 한반도
에서 고군산군도를 왕래하는 여객선의 종점으로 1909년에 지은 말도등대가 서해바다와 군산을
찾는 배들의 밤길을 밝혀준다.
이 섬은 조선 중기부터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며, 심씨 성을 가진 판서(判書)가 귀양을 와서 밭
을 일구고 살면서 인구가 늘었다고 한다. 그가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로 소환된 이후, 섬 사람들
은 그의 공덕을 기리고자 영신당(靈神堂)을 지어 매년 11월에 제를 지냈으나 기독교가 이 섬을
휩쓸면서 당제(堂祭)는 끊기고 말았다.


▲  끝없는 서해바다 - 저 수평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속인(俗人)들이
그렇게나 동경하던 극락이나 유토피아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해가 뜨고 지는 사이에 잠시 머무는 그만의 비밀 공간이 있는지도 모른다.

▲  관리도<串里島, 곶리도>

대장도 서쪽에 자리한 관리도는 곶리도라고도 한다. (어차피 한자는 같음) 원래 이름은 꽂지섬
이었다고 하는데, 섬의 모습이 전쟁에 출진한 장군들이 적의 몸에 화살을 쏘아 꽂아대는 모습이
라 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섬의 지형이 마치 꼬챙이처럼 생겼다
고 하여 꼭지도라고 부르다가 꼬챙이를 뜻하는 관(串)을 붙여 관리도(곶리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섬에는 완전무장한 장군의 모습 같은 투구봉, 말을 탄 무인의 모습을 한 질망봉, 승려로 이
루어진 승군(僧軍)의 모습을 한 중바위(중바우), 시루떡 모양의 시루봉 등이 있으며, 갖가지 바
위들이 섬을 수식하여 눈을 심심치 않게 한다. 섬 사람들은 대부분 전복을 양식하거나 고기잡이
로 생계를 꾸린다.

▲  관리도 해역에서 바라본 횡경도

▲  관리도 해역에서 본 선유도와 장자도


▲  장자도 서쪽에 홀로 떠있는 등대 - 등대 너머로 방축도의 동부와
동서로 길쭉한 횡경도가 보인다.

▲  대장도(大長島, 왼쪽 섬)와 장자도(오른쪽 섬)

선유도 바로 서쪽에 자리한 대장도는 남쪽으로 장자도와 이어져 있다. 이 섬은 옛날에 어떤 사
람이 섬을 1바퀴 둘러보고는 미래에 크고 긴 다리가 생길 것이라 말을 하고 섬을 떠났는데, 한
반도와의 연륙을 애타게 꿈꾸던 섬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며 섬 이름을 크고 긴 다리를 뜻하
는 대장도로 갈았다고 한다.
과연 그의 예언대로일까 대장도를 잇는 현수교(懸垂橋)가 생겨나 장자도는 물론 선유도까지 걸
어서 이동이 가능해졌고, 새만금방조제의 등장으로 고군산군도의 동쪽을 이루던 신시도와 야미
도 등이 연륙되었으며, 한반도에서 선유도를 붙들어 맬 다리 공사를 진행중이라 그것이 완성되
면 선유도는 물론 대장도까지 4발 수레로 오갈 수 있게 된다. 그리되면 그야말로 크고 긴 다리
가 생기는 셈이다.

섬 동쪽에는 고군산군도에서 꽤나 이름난 장자할매바위가 있는데, 그 모습이 아이를 등에 업은
형상으로 다음과 같은 믿거나 말거나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 (바위는 못봤음)
조선시대(또는 고려시대)에 대장도에 살던 선비 부부가 있다. 남편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서울
로 과거를 보러 나갔는데, 부인은 몇달 동안 한결같이 장자봉에 올라 남편의 과거 급제를 기원
했다. 허나 남편은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때를 한참이나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애가 탄 부인은
매일 아이를 업고 장자봉에 올라 남편을 실은 배가 오기를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남편이 돌아왔다. 허나 과거 급제로 금의환향(錦衣還鄕)을 한 것이 아
니라 육지에서 첩실과 그를 통해 얻은 아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육지에 오랫동안 머물며 소실
까지 맞을 정도면 선비의 집안은 제법 형편이 되었던 모양이다.

남편의 일탈에 크게 뚜껑이 열린 부인은 눈물을 떨구며 뒤로 돌아서는 순간 등에 업힌 아이도
덩달아 발끈했는지 힘을 주었는데, 그 바람에 그들은 즉석에서 돌로 변했다고 한다. 한편 아내
와 아이가 그렇게 사라지자 남편은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며 횡경도에 들어가 그 벌로 돌이
되니 그 돌이 장자할배바위라고 한다.
이 전설은 대장도나 주변 섬에 살던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지만 순간의 실수로 어긋나버린 이
곳에 살던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은 것이 아닐까 싶다. 굳이 과거를 보러 간 것이
아니라도 육지에 일이 있어 나간 남편이 첩을 데리고 오면서 그들의 가정은 파탄이 났고 이에
발끈한 부인은 아이와 함께 장자할매바위에서 투신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아내와 자식이
죽자 발작한 남편도 횡경도에서 자살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이후 사랑하는 이와 이 바위에서 사랑을 약속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믿거나 말거나 속설
이 전해오며, 월명유람선은 대장도 뒷쪽으로 가기도 하고 선유도 사이인 앞쪽으로 가기도 하여
뒷쪽으로 가는 경우에는 이 바위를 만날 수 없다. 그날 운에 맡기는 수 밖에는...

그리고 대장도 남쪽에 자리한 장자도는 선유8경의 하나인 장자어화(壯子漁火)의 현장이다. 한때
멸치포구로 유명했고, 고군산군도 제일의 어항(漁港)으로 많은 배들이 심야에 장자도 앞바다에
서 고기를 잡느라 불야성(不夜城)을 이루었는데, 그 배에서 비치는 불빛이 아름다운 풍경을 자
아내 '장자어화'가 된 것이다.

장자도는 옛날에 힘이 센 장사가 나왔다고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과 가재미와 장재미를 합쳐 장
자도라 했다는 설이 공존한다. 이곳 포구는 자연이 빚은 대피항으로 유명해 예전에는 고군산군
도와 서해바다에서 가장 잘나가는 섬이었다. 섬의 모습은 말 앞에 놓은 커다란 구유처럼 장자봉
이 우뚝 솟은 형국으로 서 있고, 그 앞에 선유도가 맥을 감싸안고 있어 큰 인재가 많이 나오는
지형이라고 하며, 북쪽의 대장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거의 한몸이 되었는데, 서해를 바라보는 사
자바위(사자봉)를 장자도를 지키는 바위로 여기고 있다.
섬 동쪽에는 장자대교를 통해 선유도와 이어져 있다. (차량 통행은 어려움)


▲  대장도 사자바위(사자봉)
사자나 고양이, 개가 땅바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 같다. 오른쪽 봉우리에
머리에 해당되는 조형물만 갖다 붙인다면 영락없이 그 모습인데 말이다.

▲  다른 각도에서 본 대장도 사자바위(사자봉)

▲  선유도 인어등대


▲  장자도 해역에서 본 관리도와 말도, 방축도

▲  장자도와 선유도를 잇는 장자대교


♠  고군산군도의 중심지, 선유도(仙遊島)

▲  선유도선착장에서 바라본 선유대교(무녀도와 선유도를 이어줌)

고군산군도를 1시간 정도 배회한 유람선은 이 군도(群島)의 중심지이자 유일하게 상륙하는 선유
도로 들어와 선유도항(선유도여객터미널)에 고된 몸을 기댄다. 이윽고 여기서 1시간 정도 머무
니 반드시 출발시간을 지켜달라는 안내방송이 강하게 나온다. 오랜 뱃길에 심신이 지치거나 고
군산군도의 매력에 눈과 마음이 지나치게 호식(好食)을 누린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나오면서 썰
렁했던 선유도항은 잠시나마 활기를 누린다.


▲  선유도항에 몸을 기댄 월명유람선

선유도는 고군산군도의 중심 섬으로 예전에는 군산도(群山島)라 불렸다. 섬 북쪽에 있는 봉우리
의 형태가 마치 2명의 신선(神仙)이 마주 앉아 바둑을 두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여 후대에 신
선이 머무는 섬이란 뜻의 선유도란 고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섬의 면적은 2.13㎢로 5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원래는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것을
바다가 실어다준 흙과 모래로 하나의 섬이 되었다. 고려 때는 송(宋)나라와 동남아의 여러 제국
(諸國)을 오가는 중간 기항지로 관청을 두어 그들의 편의와 상거래를 관리했고, 조선 초기에 수
군기지인 군산진(群山鎭)을 두어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파견했다. 군산진은 조선 세종(世宗
) 때 지금의 군산시내로 이전되면서, 군산이란 이름도 같이 따라갔는데, 선유도와 주변 섬들은
옛 군산이 있던 곳이라 하여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1597년에는 천하의 영원한 해신(海神),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진도 울돌목에서 불과 13척의 형
편없는 전력으로 서해바다로 진출하려는 왜선 330여 척을 맞아 분전 끝에 31척을 격파하고 92척
을 사용 불능으로 만들었으며, 18,000여 명의 왜군을 물고기 밥으로 만든 이른바 명량대첩(鳴梁
大捷)의 위업을 이루었는데, (아군의 피해는 왜군의 1%도 안될 정도로 매우 가벼운 수준, 이순
신이 탄 대장선에서 2명 전사, 3명 부상 / 다른 배도 비슷한 수준) 그 대첩을 치르고 잠시 몸을
추스리고자 선유도까지 올라왔다. (1597년 9월 21일)
그는 선유도에 이르자 몸살로 고생을 했으며, 거기에 태풍까지 몰려와 12일 정도 머물렀다. 그
리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완도 고금도(古今島)에 주둔하며 원균(元均)이 말아먹은 조선 수군
을 빛나게 재건했다.

선유도에는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선유8경이 있다.
1. 선유도 해변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아름다움, 선유낙조(仙遊落照)
2. 가늘고 긴 선유도해수욕장의 명사십리(明沙十里)
3, 선유도로 유배를 온 충신들이 매일같이 올라 임금을 그리워했다는 망주봉(望主峰), 특히 여
   름에 큰 비가 오면 망주봉에서 일시적으로 7~8개의 물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지니 이것을 망주
   폭포(望主瀑布)라고 한다.
4, 선유도 모래사장을 위에서 바라보면 마치 내려 앉는 기러기처럼 생겼다 하여 평사낙안(平沙
   落雁)
5. 무녀도(巫女島)에 속한 3개의 무인도가 풍기는 아름다운 모습, 삼도귀범(三道歸帆)
6. 장자어화 (자세한 것은 앞의 장자도 부분 참조)
7. 신시도에 있는 월영봉(月影峰, 199m)의 가을 단풍이 매우 곱다고 하여 월영단풍(月影丹楓)
8. 방축도와 말도 등 12개 섬이 마치 투구를 쓴 군사들이 도열한 모습과 같다고 하여 무산12봉(
   巫山十二峰)


선유도는 명사십리로 유명한 선유도해수욕장을 비롯하여 망주봉, 옥돌해수욕장, 몽돌해수욕장,
수군절제사 선정비(善政碑) 등의 명소가 있으며, 선사시대의 아련한 흔적인 패총(貝塚, 조개더
미)도 있다. 또한 섬마을답게 오룡묘제, 장생제, 수신제 등의 마을 제사와 풍습이 있었으나 지
금은 모두 사라져 아쉬움을 건네며, 주변 섬과는 다리로 이어져 있는데, 동쪽으로 무녀도, 서쪽
으로는 장자도, 대장도와 이어져 있어 배가 아닌 두 다리나 자전거로 둘러볼 수 있다.

한반도와 선유도를 이어주는 나루터는 2곳으로 선유대교 북쪽에 자리한 선유도항이 가장 크다.
여기서는 월명유람선을 비롯하여 군산을 오가는 여객선이 운행하며, 망주봉 동쪽 선유3구 선착
장에서는 야미도에서 출발한 새만금유람선이 오간다. 허나 선유도를 한반도에 단단히 붙들고자
현재 연륙교를 짓고 있어 그것이 완성되면 선유도까지 편히 수레로 오갈 수 있게 되며, 그때가
되면 군산에서 시내버스와 시외버스가 들어와 교통이 보다 좋아질 것이다.
허나 그로 인해 오랫동안 한반도와 고군산군도를 이어주던 해상교통의 희생은 어쩔 도리가 없어
군산을 오가는 여객선과 유람선의 노선 조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  선유도항 주변

선유도와 한반도를 이어주는 교통의 중심지, 선유도항은 여객선표를 구입하는 매표소를 비롯하
여 식당 몇 곳이 전부이다. 선유1구 마을과 선유2구 마을의 중간 지점이기 때문이다.
길가에는 골프장에서 많이 보이는 카트(Cart) 수십 대가 대기를 타면서 하얀 물결을 이루는데,
이들은 선유도와 무녀도에서 숙박업소나 식당을 하는 이들이 가지고 온 것으로 배를 타고 들어
온 관광객들에게 이거 타고 섬 1바퀴 돌라며 강하게 유혹의 메세지를 건넨다. 이곳에서 주어진
시간은 달랑 1시간, 아무리 선유도가 작다고 해도 그 시간 동안 두 다리에 의지해 돌아다닐 수
있는 범위는 좁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많이들 카트에 올라타는데, 대부분 4인승에서 8인승이
다. 카트는 대부분 카트 주인이 직접 운전하지만, 키를 맡겨 돌고 싶은 곳을 돌라고 하는 경우
도 있다. 물론 돈을 더 줘야 된다. 카트 승차비는 카트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보통 5천원 정도
한다.

우리 일행도 카트의 신세를 많이 졌는데, 나도 일행에 끼어 8인승 카트에 올라탔다. 카트 주인
은 식당/펜션을 하는 아줌마로 선유도해수욕장을 비롯한 선유도 북부를 1바퀴 구경시켜주었다.
코스는 선유도항 → 선유도해수욕장 → 망주봉 주변 1바퀴 → 선유3구 선착장 → 선유도해수욕
장 → 선유도항으로 딱 1시간에 맞는 코스였다. 길의 폭은 선유도항 주변을 빼고는 카트 2대가
교행하기에 적당할 정도로 좁았다.
선유도를 돌면서 선유도해수욕장이나 중간에 내려서 발자국을 남길 시간은 없었고, 오로지 카트
만 타고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몽돌해수욕장과 옥돌해수욕장, 장자도와 무녀도도 가고 싶었
지만 시간이 없으니 그건 어렵다. 배가 떠나면 한반도로 나가기가 힘들어진다.


▲  선유도항 주변 갯벌

▲  부드러운 곡선의 선유도해수욕장

선유도항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고군산군도의 아름다운 입술인 선유도해수욕장이 누워있다. 명
사십리(明沙十里)란 걸쭉한 별명까지 지닌 이곳은 약 1.5km의 백사장으로 10리는 커녕 5리도 안
되는 길이다. 서해에 있는 다른 해변과 마찬가지로 수심이 매우 얕아 바다로 100m를 나가도 겨
우 허리에 닿을까 말까 하며, 해가 그만의 공간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붉게 타오르는 낙조가
대장관을 이루어 선유8경의 하나인 선유낙조의 현장으로 명성이 높다.

물이 빠졌을 때는 팽나무가 자라고 있는 모래톱 끝까지 갈 수 있으며, 둑방 건너편에 긴 자갈밭
이 펼쳐져 선유도해수욕장의 아름다움을 진하게 수식시킨다. 바다낚시와 갯벌체험, 모터보트,
바나나보트 등을 탈 수 있고, 샤워장과 뒷간, 방갈로, 파출소와 보건소, 숙박시설 등이 주변에
있어 여름 피서지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  여유로운 풍경의 선유도해수욕장 - 바다 건너로 진하게 보이는 산은
장자도의 지붕인 장자봉이다.


▲  선유도해수욕장 북쪽

▲  선유도해수욕장에서 선유3구로 가는 길

▲  바위산인 망주봉
(望主峰, 152m)

선유도해수욕장 동북쪽에 자리한 망주봉은 선유도해수욕장과 더불어 선유도의 소중한 꿀단지이
다. 2개로 이루어진 바위 봉우리로 조선시대에 이곳으로 귀양 온 충신들이 매일 같이 올라 서울
에 있는 군주를 그리워했다고 하여 주군을 바라본다는 뜻의 망주봉이 되었다.
평소에는 그저 조용한 바위 봉우리지만 비가 많이 쏟아지면 산으로 떨어진 빗물이 암벽을 타고
약 7~8개의 물줄기를 이루며 아래로 떨어진다. 그 모습이 폭포와 같아서 망주폭포(望主瀑布)라
고 부른다. 그러니까 비가 많이 올 때만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폭포인 셈이다.


▲  선유도항에서 바라본 망주봉의 위엄


♠  고군산군도 마무리

▲  선유도를 떠나다

선유도를 항아리 겉돌 듯 둘러보고 유람선으로 돌아왔다. 떠날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짧은
자유시간을 이용해 선유도 곳곳으로 흩어진 상춘객들도 일제히 돌아와 선착장 주변은 다시 북새
통을 이룬다. 이번에도 늦게 온 몇몇 사람들 때문에 지정 시간보다 15분 정도 늦게 선유도를 출
발했다.

우리는 선유도로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2층에 자리를 잡았는데, 한반도로 돌아가는 길은 대략
50분 정도 걸린다. 선유도로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너울로 배가 조금 들썩였으나 이미 몸
에 익숙해진 터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피곤이 물결처럼 밀려와 나를 희롱하니 슬슬 졸리
기 시작한다. 허나 이제 언제 올지 모를 고군산군도와의 작별이 너무 아쉬워 갑판으로 나가 점
점 멀어져가는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군도의 뒷모습을 열심히 사진에 담았다. 시원하게 느껴졌
던 바닷바람도 이제는 차갑게 다가온다.


▲  선유도 선유3구 선착장 - 야미도에서 오는 새만금유람선이 주로 이용한다.

▲  조금씩 작아지며 흐릿한 점이 되어가는 고군산군도의 식구들

▲  새만금방조제로 한반도의 일원이 된 신시도(新侍島)

선유도를 가리고 선 신시도는 새만금방조제가 섬 동부를 지나가면서 한반도의 어엿한 일원이 되
었다.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면적이 4.25㎢에 이르며, 삼국시대 초반에 가락국(駕洛國
)에서 건너온 김해김씨 일가가 청어를 잡기 위해 제일 먼저 들어와 살았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
은 없다.
신라 후기에는 천하의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이 옥구 자천대(紫泉臺)에 머물러 있다가 신시도
에 우뚝 솟은 월영산(月影山, 당시에는 이름이 없었음)을 보고 천하 명산(名山)이라고 크게 칭
송했다. 그리고 그곳이 급히 땡겼는지 풍선(風船)을 타고 신시도로 건너가 그 봉우리에 단을 쌓
고 거처를 세워 산 이름을 월영봉(199m)이라 했다.
그는 여기서 매일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글을 읽는 소리가 어찌나 낭랑하던지 바다 건너 당나
라 상해(上海)까지 들렸다고 전한다. 물론 글 읽는 소리가 바다 건너 대륙에서까지 들렸다는 것
은 믿거나 말거나 전설일 뿐이나 그가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것은 사실인 듯 싶다.

신시도의 기둥인 월영봉은 선유8경의 하나인 월영단풍의 현장으로 단풍에 물든 월영봉의 자태가
마치 1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신시도란 이름은 왜정 때 지어진 것으로 새만금방조제가 지나
는 동쪽 대각산(187m)에 전망대가 세워져 있고, 그 전망대를 통해 대각산으로 올라가 고군산군
도와 새만금 일원을 두 눈에 조망할 수 있다.


▲  유람선이 남긴 하얀 물보라 자국 ▼

유람선은 푸른 도화지에 물보라를 튀기면서 요란하게 지나간 자국을 남긴다. 허나 그 자국은 이
내 일체의 흔적도 없이 지워지고 다시 원래의 푸른 도화지로 되돌아간다. 나를 비롯해 배에 탄
사람들 모두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군도에 열심히 다녀간 흔적을 남겼지만 결국은 사진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이다.


▲  야미도(夜味島)와 신시도 사이 해역 - 그 사이로 바다의 만리장성이라
자화자찬하는 새만금방조제가 희미하게 보인다.

▲  야미도와 횡경도 사이에 외롭게 뜬 조그만 바위섬, 계도(鷄島, 닭섬)
이렇게 봐서는 닭처럼 생겼는지 꿩처럼 생겼는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  새만금방조제에 붙어있는 야미도

야미도는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한반도와 가까운 섬으로 군산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제일 처음 들
렸던 곳이다. 지금은 새만금방조제로 한반도의 일원이 되면서 신시도와 함께 편히 수레로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이 섬은 밤나무가 많아 밤섬이라 불렸는데, 왜정(倭政)이 이 섬 이름을 지을 때 밤나무를 뜻하
는 율(栗)을 안쓰고 무식하게도 밤을 깜깜한 밤으로 해석해서 야(夜)을 썼다. 그리고 밤은 맛있
다고 하여 맛있다는 뜻의 미(味)를 붙여 본래 섬과는 맞지도 않은 엉터리 이름인 야미도란 이름
을 지니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섬 이름을 뜯어고쳐야 되지 않을까?)
섬 서쪽은 고군산군도가 점점이 떠 있는 서해바다, 오른쪽은 새만금방조제에 갇혀버린 새만금호
로 근래에 일출/일몰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선유도를 출발하여 근 50분 만에 비응항으로 귀항했다. 배가 항구에 몸을 대기가 무섭게 상춘객
들이 우루루 육지로 몰려나오고 선착장에서 애타게 다음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그들의 빈 공
간을 채워주면서 배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바로 선유도로 뜰 준비를 한다.
우리는 관광버스에 올라타 새만금북로 주변에 있는 해물탕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지루할 정도
로 긴 새만금방조제를 넘어 부안 내소사(來蘇寺)로 넘어갔다.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고군산군도 선유도 찾아가기 (2014년 7월 기준)
ⓘ 군산까지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군산행 고속버스가 15~2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군산행 직행버스가 60~9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부천, 성남, 수원, 오산, 천안, 청주, 대전(복합), 익산, 광주, 목포, 대구(서부
  ), 부산(노포동), 창원(마산)에서 군산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평택역, 천안역, 대천역, 익산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군산역
  하차 (거의 1시간 간격으로 운행)
② 군산시내에서 배타는 곳까지
* 연안여객터미널 : 군산역과 군산시외고속터미널에서 7, 85번 시내버스 이용 (2노선 모두 1시
  간 간격으로 운행하며, 군산역에서 7번은 매시 25분, 85번은 매시 40분에 출발)
* 비응항(월명유람선) : 군산역에서 7, 85번 시내버스를 타거나 군산시외터미널에서 7, 8, 85번
  시내버스를 타고 비응항 종점 하차 (91번은 시외터미널 남쪽 팔마광장에서 승차)
③ 선박편
* 비응항 월명유람선(☎ 063-445-2240)에서 선유도행 유람선이 운항한다. 코스는 3시간짜리 B코
  스(2만원)와 6~7시간짜리 C코스(3만원)가 있으며, 유람선 출항시간과 요금, 전화예약은
  ☞ 월명유람선 홈페이지 참조
* 군산연안여객터미널(☎ 063-462-4000)에서 선유도행 여객선이 1일 3~4회 다닌다. 주말과 피서
  철에는 대폭 증회하며, 자세한 출발시간표와 요금 문의는 위의 월명유람선 홈페이지 참조
* 야미도 새만금유람선 선착장(063-464-1919)에서 선유도행 유람선이 1일 3~4회 다닌다. 코스는
  선유도에서 1시간 정도 머무는 B코스와 3~4시간 머무는 C코스가 있다.
  운항시간과 요금, 예약은 ☞ 새만금유람선 홈페이지 참조
④ 배타는 곳까지 승용차 (주차장 있음)
*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나들목) / 호남고속도로(전주나들목) → 전주~군산 21번 국도 → 새만
  금북로 → 비응항(월명유람선)
*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나들목) / 호남고속도로(전주나들목) → 전주~군산 21번 국도 → 새만
  금북로 → 옥녀교차로 우회전 → 구 해양경찰서 4거리 우회전 → 대왕제지3거리 좌회전 → 연
  안여객선터미널
* 서해안고속도로(동군산나들목) / 호남고속도로(전주나들목) → 전주~군산 21번 국도 → 새만
  금북로 → 신시도입구3거리 좌회전 → 새만금방조제 → 야미도 새만금유람선

* 선유도해수욕장은 7월 초/중순에 개장하여 8월 하순까지 해수욕 손님을 맞는다.
* 선유도와 고군산군도 관련 자세한 정보는 ☞ 군산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참조 (월명유람선과
  새만금유람선 홈페이지를 참조해도 된다)
* 선유도 소재지 - 전라북도 군산군 옥도면 선유도리 (문의 ☎ 063-454-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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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7월 1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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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상징을 거닐다 ~ 오륙도 (등대섬, 오륙도등대, 백운포)

 


' 부산의 상징, 오륙도(五六島)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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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륙도

오륙도등대에서 바라본 영도와 조도 백운포 방파제

▲  오륙도등대에서 바라본
영도와 조도

▲  백운포 방파제


여름의 제국(帝國)이 봄을 몰아내고 한참 성하(盛夏)의 기반을 닦던 6월 중순에 천하 제일의
항구 도시인 부산(釜山)을 찾았다.
광안리 해변과 가까운 광안동(廣安洞)의 친한 형님 집에 여장을 풀고 달이 기울도록 회포(懷
抱)를 풀다가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오전, 간단한 차림으로 오륙도와 백운
포를 찾았다. 광안역에서 백운포까지는 거리도 가깝고 부산시내버스 39번(기장읍 교리↔용호
동)이 바로 앞에까지 데려다주니 접근성은 참 좋다.

백운포(白雲浦)는 용호동 남쪽 해안으로 체육공원과 남구국민체육센터, 해군기지가 있고, 서
쪽에는 숲이 무성한 신선대(神仙臺)가 있다. 신선대는 태종대(太宗臺)에 버금가는 해안 경승
지로 유명했으나 신선대컨테이너터미널과 항구 조성으로 옛날의 운치가 많이 녹아내렸다.


▲  백운포에서 바라본 오륙도

▲  백운포 방파제
백운포 둑방에는 많은 강태공(姜太公)들이 월척을 꿈꾸며 낚시삼매에 빠져있고
한국해양대를 품은 조도(朝島)와 영도 태종대가 그리 멀지 않게 바라보인다.


▲  수레들로 가득한 오륙도선착장 주차장


♠  부산의 아담한 상징, 오륙도(五六島)에 들어서다 - 명승 24호

▲  오륙도 - 명승 24호
(가장 왼쪽부터 방패섬과 솔섬,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

▲  오륙도등대에서 바라본 천하

용호동 앞바다 부산만(釜山灣)에 두둥실 떠 있는 오륙도는 6개로 구성된 바위섬이다. 그렇다면
6개의 섬이란 뜻의 육도(六島)라 불려야 맞는 것 같은데 왜 5와 6을 같이 붙인 오륙도가 된 것
일까? 이는 섬의 구성원인 방패섬과 솔섬 때문이다. 이들은 썰물 때는 하나의 섬이 되지만 밀물
때는 엄연히 2개의 섬으로 나눠진다. 이렇게 기가 막힌 자연의 눈속임으로 하루에 2번씩 5개의
섬이 되었다가 6개의 섬이 되는 것인데, 그래서 그 이름도 오륙도가 된 것이다.

오륙도는 12만년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와 이어진 조그만 반도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장대한 세
월이 흐르면서 거센 파도의 시달림에 따른 침식작용으로 한반도와 분리되었으며, 그마저도 내버
려두지를 않아 5~6개의 섬으로 쪼개졌다. (선착장 부근 지질과 방패섬의 지질적 구성이 동일하
여 옛날에 서로 이어져 있었음을 보여줌)


오륙도
란 이름은 1740년에 편찬된 동래부지 산천조(東萊府誌 山川條)에 '오륙도는 절영도(絶影
島, 영도) 동쪽에 있다. 봉우리와 뫼의 모양이 기이하고 바다 가운데 나란히 서 있으니 동쪽에
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되어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기록이
있어 조선 말 이전부터 오륙도라 불렸음을 보여준다.
 
섬의 구성원을 보면 육지와 가장 가까운 방패섬은 거센 바람과 파도를 막아준다는 뜻이며, 방패
섬과 거의 한몸인 솔섬은 섬 꼭대기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방패섬
과 솔섬을 합쳐서 '우삭도'라 부르기도 한다.
그 다음 수리섬은 갈매기를 노려 독수리들이 모여드는 곳이란 뜻이며, 송곳섬은 작고 뾰족하게
생겨서, 굴섬은 오륙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커다란 굴이 있는데, 천정에서 흐르는 물로 능히 1
명 몫의 식수는 해결할 수 있다고 하여 굴섬이라 부른다.
등대섬은 오륙도 형제 가운데 가장 한반도에서 먼 섬으로 선착장에서 1km 해상에 있는데, 오륙
도등대를 달고 있어서 등대섬이라 불린다. 예전에는 섬에 평탄한 곳이 있어서 밭섬이라 불렸으
며, 등대 직원과 관리인이 거주하고 있어 오륙도 유일의 유인섬이다.


오륙도 부근은 조류가 무지 빨라 이곳을 지나던 뱃사람들은 공양미(供養米)를 바다에 던져 해신
(海神)을 달랬다고 한다. 근래까지 용신제(龍神祭)를 지내기도 했으며, 신라 후기에는 동아시아
바다를 점유한 해상왕 장보고(張保皐)가 오륙도 앞 항로를 이용하기도 했다.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단골 소재로 많은 시와 노래에 등장했으며, 그중에서 노산 이은상(李殷
相)의 오륙도란 시가 유명하다. 부산을 드러내는 오랜 상징이자 관문으로 동해바다와 왜열도에
서 부산항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오륙도의 눈치를 보며 지나야 된다.

오륙도는 부산의 대표적인 명소이자 섬이지만 낚시터로도 명성이 높아 섬만 둘러보고 가는 관광
객에 비해 낚시꾼의 비중이 매우 높다. 오륙도 식구를 비롯하여 오륙도일자(一字)방파제(북항방
파제)에는 굳은 날씨를 제외하고는 늘 낚시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한반도에서 오륙도에 가려면 일단 용호동 오륙도선착장으로 가야된다. 거기서 오륙도를 이어주
는 유람선을 타면 되는데, 일정한 운항시간표는 없다. 대체로 30~50분 간격으로 다니며 휴일에
는 거의 20~30분 간격으로 자주 뜬다. 운항노선은 선착장을 출발하여 오륙도일자방파제를 먼저
들른 다음 등대섬과 굴섬, 수리섬, 방패섬을 두루 돌고 육지로 돌아온다. (운항순서는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음)
일반 관광객은 오륙도등대가 있는 등대섬에서 많이 승/하선을 하지만 낚시꾼들은 등대섬을 포함
해 배가 다니는 모든 섬과 방파제에서 승/하선을 한다. 등대섬과 방파제에는 배를 대는 공간이
있어 거기서 타면 되지만 나머지 섬은 따로 들리는 곳이 없다. 손을 흔들어 승차 의지를 밝히면
그 부근에 세워준다. 섬과 방파제를 찾은 사람들은 배가 끊기기 전에 나와야 되며, 그렇지 않으
면 섬에서 강제로 1박을 보내야 된다. 운항시간은 일출 30분 전부터 일몰 30분 후까지이다.

동해바다와 남해바다가 만나는 공간에 자리한 오륙도는 가까이로 신선대와 백운포를 비롯해 조
도와 영도, 태종대가 보이며, 동구(東區), 해운대 일대가 두 눈에 박힌다. 태종대와 더불어 부
산의 해금강(海金剛)으로 전혀 손색이 없으며, 예전에는 부산 지방기념물 22호였으나 2007년 문
화재청 지정 명승 24호로 승진되었다.

▲  방패섬

▲  수리섬과 송곳섬

▲  굴섬

▲  송곳섬

※ 오륙도 찾아가기 (2014년 1월 기준)
* 부산지하철 2호선 경성대부경대역(5번 출구를 나와서 부경대 방면)에서 27, 131번 시내버스를
  타고 오륙도SK뷰 후문에서 하차, 오륙도 선착장까지 도보 5분
* 부산지하철 1호선 부산역(10번 출구)에서 27번 시내버스 이용
* 오륙도 선착장에서 오륙도 유람선이 일출 30분 전부터 일몰 30분 후까지 운항한다. 2척이 운
  항하며, 운임은 어른 1만원, 어린이는 5천원이다. (유람선 문의 ☎ 051-626-8953)
* 소재지 -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산936~941


▲  선착장 주변 풍경

▲  선착장 서쪽 풍경

오륙도선착장을 비롯한 오륙도SK뷰아파트 주변은 2008년까지만 해도 용호농장과 조그만 마을이
전부인 도심 속 시골이었다. 마을 북쪽에는 이기대를 품은 장산봉이 있고, 오륙도와 이기대, 신
선대가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해안 풍경의 갑(甲)을 자랑하던 곳이다.
개발의 칼질은 정말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평화롭던 현장이었는데, 개발의 물결이 소리소문도
없이 밀려오면서 마을과 농장, 숲을 아작 내고 거대한 옥의 티인 아파트가 무차별 솟아났다. 그
리고 선착장 입구까지 넓은 신작로(新作路)가 들어섰으며, 개발의 칼질이 여기저기 난도질을 하
면서 아름다운 풍경에 적지 않은 손상을 주었다. 굳이 여기까지 밋밋한 회색빛 고층아파트를 심
어 오륙도를 눌러야 했는지 관계 당국 철밥통들의 수준이 참 의심된다. 그냥 산듯하게 공원으로
꾸며 태종대나 암남공원에 버금가는 해안 관광지로 꾸미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오륙도를 제
외하고는 주변이 너무 다르게 변질되어 버린 것이 안타깝다.


▲  바위를 희롱하며 하얀 물보라를 자아내는 바다

오륙도선착장 주변은 오륙도를 찾은 탐방객과 낚시꾼들로 북새통이다. 그들이 끌고 온 수레들로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고, 바닷가와 선착장, 주차장 주변에는 해산물을 파는 길거리 행상들로 조
그만 먹거리촌을 이룬다.

선착장 매표소에서 오륙도 뱃표를 구입하니 어른 1인당 무려 10,000원씩이나 한다. 운임은 왕복
요금으로 섬과 방파제에서 다시 한반도로 나올 때는 그냥 타면 된다. 뱃표를 사들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배를 기다리는데, 오륙도 덕분에 정말 간만에 바닷배를 타본다.


▲  한반도와 오륙도를 이어주는 오륙도 유람선
낚시꾼과 관람객들의 소중한 발이다.

10분 정도 기다리니 드디어 배가 선착장에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방파제와 오륙도에서 주섬주섬
태운 사람들이 말끔히 내리자 선장의 안내로 관광객과 낚시꾼들이 승선을 한다. 그렇게 약 20여
명의 승객을 태운 배는 승선이 끝나자 바로 뱃고동을 울리며 바다로 향한다. 우리는 갑판으로
나와 바닷바람을 맞으며 수시로 모습을 달리하는 바다와 오륙도를 열심히 사진에 담았다.

배는 코앞에 보이는 오륙도를 등 뒤에 두고 서쪽에 있는 오륙도일자방파제(북항방파제)로 먼저
갔다. 섬처럼 떠 있는 길다란 방파제에는 이미 강태공들로 자리가 없을 지경인데, 여기서는 오
륙도보다 영도가 더 가깝게 보인다.
방파제에서 볼일을 마친 배는 잠시 잊었던 오륙도로 방향을 돌려 오륙도의 핵심이자 가장 남쪽
인 등대섬에 뱃머리를 댄다. 여기서 낚시꾼을 제외한 관광객이 죄다
내렸다.


▲  잠시 뒤를 바라보는 여유 - 오른쪽 벼랑에 오륙도 스카이워크라는
새로운 명물이 생겼다. (내가 갔을 당시에는 그딴 것은 없었음)


♠  부산의 조그만 해금강, 오륙도 둘러보기

▲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방패섬과 솔섬 (우삭도)
육지와 제일 가깝지만 수영으로 가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일자방파제
다음으로 낚시꾼들이 제일 많이 포진한 곳으로 방패섬 앞부분에
넓고 평탄한 곳이 있어 안전하게 낚시하기에 좋다.

▲  유람선에서 바라본 방패섬(왼쪽)과 솔섬(오른쪽)
썰물 때라 둘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솔섬은 머리 꼭대기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솔섬이라 불리는데, 온갖 풍우를 겪으며 의연함을
잃지 않은 키 작은 소나무의 패기가 무척 돋보인다.

▲  오륙도 인근의 옥의 티, 오륙도SK뷰아파트
허허벌판에 무책임하게 세운 도시처럼 보인다. 저 아파트를 지울 수 있다면
이기대를 품은 장산봉이 속 시원히 미소를 보일텐데..

▲  오륙도와 한반도 사이로 아련하게 보이는 저곳은
해운대 지역이다.

▲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 사이로 우리나라 제2의 도시
부산이 포근히 둥지를 닦았다.

▲  오륙도일자방파제(북항방파제)
방파제는 배를 대는 곳이 마련되어 있어 거기서 여기서 승/하선을 하면 된다.
방파제 너머로 조도와 영도 일대가 바라보인다.

▲  두 푸른색의 만남
아무리 천재화가가 그린다고 해도 결코 나오기 힘든 자연의 색깔~~
사람이 만든 색깔이 어찌 대자연이 만든 천연의 물감만 하리?

▲  오륙도일자방파제에서 바라본 오륙도
오륙도선착장에서 그렇게나 가까이 보이던 오륙도와 저만치나 떨어져 버렸다.

▲  수리섬(왼쪽)과 송곳섬
수리섬은 독수리들이 갈매기 사냥을 위해 모여드는 곳이라 하며, 송곳섬은
작고 뾰족하게 생겨서 불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수리섬은 낚시를
원할 경우 배를 세워주지만 가파른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낚시 장소로는 위험하다.

▲  송곳섬과 굴섬
굴섬은 오륙도 형제 가운데 가장 큰 섬으로 한 사람 몫의 식수가 나오는
커다란 굴이 있어서 굴섬이라고 한다. 섬 대부분이 깎아지른 절벽이라
배는 섬 서쪽에만 잠깐 멈춰준다.


▲  송곳섬의 위엄
바다가 오랜 세월을 빚은 대작품 앞에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감탄사 연발과 사진 찍기 밖에는 없었다.


▲  수리섬 쪽에서 바라본 굴섬
굴섬은 발디딜 평평한 곳이 없는 각박한 경사의 바위섬이다. 허나 그런
척박한 섬에도 불구하고 월척을 꿈꾸는 낚시꾼들의 발길은 막지 못한다. 
비록 위험하긴 하지만 방패섬이나 백운포보다는 인적이 적고
수심이 깊으니 월척의 확률은 그만큼 높아진다.

▲  도시와 바다가 어우러진 부산의 자화상과
굴섬에 뱃머리를 대고 낚시꾼을 태우는 유람선


♠  오륙도등대(五六島燈臺)와 등대섬 둘러보기

▲  오륙도등대와 등대섬

등대섬은 오륙도의 백미로 오륙도등대를 품고 있다. 예전에는 정상에 평탄한 곳이 있어서 밭섬
이라 불렸는데 지금은 등대섬이란 이름으로 속세에 명함을 내밀고 있다. 아무래도 등대가 있으
니 자연히 등대섬으로 강하게 각인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오륙도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한 등대섬 꼭대기에 등대(燈臺)가 둥지를 튼 것은 1937년이다. 그
해 11월 최초 점등을 했으며, 1971년에는 무신호(전기폰)를 설치했고, 1998년 등탑(燈塔)을 개
량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크게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래서 마치 섬을 누르고 앉은 거대한 요새처
럼 다가온다. 그해 12월에는 등명기(燈明機)를 개량했으며, 등대 높이는 53.35m, 면적은 3,416
㎡이다.
예전 오륙도등대 사진을 보면 야트막한 하얀 등대건물이 마치 둥지에 새가 앉은 듯 사뿐한 모습
이었으나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규모도 커지고 등탑의 높이도 상당해져 오히려 섬을 능가하는 수
준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예전보다 주변 풍경과의 어울림이 좀 떨어져 보인다.
 
유람선이 등대섬 뱃터에 머리를 대자 우리는 섬에 상륙했다. 뱃터는 승/하선이 가능하도록 벼랑
아랫쪽에 설치된 것으로 여기서 등대까지는 계단을 올라야 된다. 계단 중간에는 섬의 동쪽 해변
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며, 거기서 굴섬의 남쪽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등대는 가운데 전망대까지만 오를 수 있는데, 등탑은 출입금지이며, 현재 해양항만청 소속 등대
직원들이 2인1조로 3박4일 간격으로 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속세와 무척 가깝긴 해도 배를 타
고 들어가야 되는 엄연한 외딴섬이니 이곳 등대지기도 외로운 신세를 면할 수는 없다.


▲  등대섬 뱃터에서 등대로 오르는 꼬불꼬불 계단길
길이 각박하고 계단 밑은 바닷물이 넝실거리는 벼랑이므로 절대 주의해야 된다.

▲  등대섬 동쪽에서 바라본 굴섬의 옆구리

바다 파도가 허구헌날 오륙도를 쪼아대며 심술을 부리니 육지에서 떨어져 나가고 다시 5,6개의
섬으로 조각난 것이 십분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파도가 저리 보면 약하고 부드러운 것처럼 보여
설마 바위의 피부를 깎겠나 싶지만 띠끌 모아 태산이라고 저런 파도가 1~2번도 아닌 무량의 세
월 동안 친다고 생각해보라. 그 파도 앞에 성할 수 있는 것은 천하에 아무 것도 없다.


▲  오륙도등대에서 바라본 백운포와 신선대

▲  오륙도등대에서 바라본 부산시내 (영도와 중구 일대)
하늘을 수놓은 구름의 모습이 가히 예술이다.

▲  지적측량기준점

▲  지적측량기준점에 적힌 내용들

▲  부산 앞바다를 밝히는 등탑
등탑의 높이는 27.55m에 이른다.

▲  조망이 일품인 등대 전망대에
마련된 8각형 쉼터


▲  등대 전망대에서 굽어본 천하
바다 한가운데로 오륙도일자방파제(북항 방파제)가 보이며, 그 뒤로 건물숲을
이루고 있는 동구와 중구 일대가 덩달아 시야에 들어온다.

▲  등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영도와 조도
왼쪽에 길게 누운 산이 태종대이다. 오륙도를 품은 용호동에서 영도까지는
육상으로 가면 제법 거리가 되지만 바다로 가면 정말 지척이다.
(오륙도에서 영도까지는 4km 남짓)

▲  망망대해에 뜬 외로운 배 1척

▲  오륙도등대의 위엄 ▼


▲  우리가 탈 배가 굴섬 인근으로 오고 있다.

오륙도와 바다의 아름다움에 취해 등대섬에서 1시간 정도 머물렀다. 등대 관리인이 다들 어디로
갔는지 얼굴을 거의 내밀지 않아 전망대와 후미진 곳에서 요란하게 판을 벌이며 밥과 술을 먹는
이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온다. 그들을 수용하거나 간단하게 차 1잔, 간식 1끼 때울 수 있
는 매점이나 까페 같은 것이 있었다면 돈도 좀 벌고, 관광객들도 간단하게 출출함을 달랠 수도
있고, 아무데서나 음식판을 벌이며, 거기서 버려지는 쓰레기도 줄일 수 있고, 정말 금상첨화였
을텐데, 등대의 생각은 아직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예전 가덕도(加德島)등대(☞ 관련글 보러가기) 이후 2번째 등대 방문인 오륙도 등대, 기분 같아
서는 속세에서 나란 존재를 잠시 지우며 며칠 머물고 싶었다. 허나 내가 있어야될 곳은 이런 외
딴섬이 아닌 속세이다. 고독한 등대지기가 될 여유도 없이 한반도로 나가는 유람선이 다가와 승
선을 보챈다. 그래서 속세에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몸을 싣고 등대와 오륙도와의 인연을 모두
정리하며 육지로 나왔다.

대자연의 시리도록 아름다운 작품을 감히 인간의 하찮은 말과 단어를 빌려 표현하는 것은 정말
힘들다. 어쩌면 자연에 대한 불경죄인지도 모르며,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하는 단어가 없을
수도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 훨씬 이상으로 알차고 아름다운 섬이자 남해와 동해의 위대한 합
작품, 오륙도 나들이는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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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서해바다 나들이 ~~~ (신진도, 마도, 서해갯벌, 안흥성...)

 


' 태안(泰安) 서해바다 나들이 '
신진도 갯벌
▲  신진도 갯벌


천하를 꽁꽁 버무리던 겨울 제국의 위엄이 잠시 느슨해진 2월 중순에 태안반도(泰安半島)
에 중심인 충남 태안(泰安)을 찾았다.
서울남부터미널에서 태안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고 약 2시간을 달려 태안의 관문인 태안
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신진도(마도)로 들어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다시 40여 분을 달
려 신진도(新津島) 포구에 두 발을 내린다.


♠  안흥 앞바다에 떠 있는 그림 같은 섬
한반도와 다리 하나로 이어진 신진도(新津島)

▲  안흥항에서 바라본 신진도 동쪽

▲  한반도와 신진도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신진대교

신진도는 태안반도의 일부를 이루는 정죽반도(程竹半島) 서쪽 끝으머리에 달려있다. 안흥과 마
주보고 있는 이 섬은 원래 안흥과 이어진 육지라고 하는데, 자연의 위대한 힘에 강제로 섬으로
분리되면서 나루터가 새로 생기는 통에 신진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신진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 성종(成宗) 시절로 해안 방비를 위해 만호청(萬戶廳)을
이곳에 설치했다고 하며, 고려와 남송(南宋)을 오가는 고려 사신과 남송 사신이 이곳에서 잠시
닻을 접고 산제(山祭)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섬은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높은 곳은 후망봉(後望峰)이란 봉우리로 높이가 132m
이다. 섬의 둘레는 약 7km이며, 태안반도와 마주하는 동쪽은 물굽이가 크게 들어와있고, 동남부
해안은 해식애(海蝕崖)를 이룬다.
푸른 송림과 기암괴석, 그리고 자연의 보고(寶庫)인 갯벌이 어우러진 이곳에 개발의 물결이 밀
려온 것은 1979년이다. 1978년 안흥항이 1종항구로 지정되었는데, 안흥항이 좁아서 총 222억원
을 들여 신진도와 마도, 부억도를 연결하여 외항(外港)을 조성해 어업전진기지로 삼았다. 1989
년 58,000평을 매립 3만평에 배후지를 조성하여 숙박시설과 식당을 만들었다.

1995년에는 한반도와 신진도를 잇는 신진대교(新津大橋)가 개통되어 다시 한반도의 어엿한 일부
가 되면서 더 이상 바다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수레와 두 다리로 편히 오갈 수 있게 되었으며,
, 다리의 개통으로 정죽반도 서쪽 끝이 안흥에서 신진도를 거쳐 마도까지 연장되었다. 신진도와
마도는 1987년 7월 방파제가 축조되어 서로 끈끈하게 이어졌고, 썰물 때는 안흥과 신진도 사이
에 바닷길이 열리기도 한다.
섬을 이루는 마을은 섬 북서쪽의 신진마을과 동쪽 아래목마을이 있으며, 주민 대부분은 어업에
종사한다. 주요 수산물은 멸치와 삼치, 우럭 등이 있으며, 일부는 양식업(養殖業)도 한다. 신진
도항은 신진항, 안흥외항으로도 불리며, 2종항구로 800여 척의 어선을 수용할 수 있다.

신진도는 딱히 명소나 해수욕장은 없지만 신진도항 뒤쪽에 솟은 후망봉에 오르면 신진도항과 마
도, 안흥항을 비롯하여 가의도(賈誼島)와 정족도, 목개도 등 망망대해(茫茫大海)에 그려진 조그
만 섬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조망(眺望)이 천하일품이다. 또한 물고기가 잘 잡혀 바다낚시터로도
명성이 높으며, 민박과 모텔, 해수탕 등 숙박시설과 편의시설이 많고 조개구이와 생선회 등을
취급하는 식당이 많아 1박2일 야유회 등으로 놀러오기 적당하다.
비록 한반도와 이어진 가까운 섬으로 외딴섬의 내음은 많이 씻겨내려갔지만 대신 언제든지 편하
게 안길 수 있는 장점이 섬의 관광 가치를 높여주었다.

신진도 서쪽에 자리한 마도(馬島)는 그 모습이 달리는 말과 비슷하다고 하여 유래된 것으로 마
섬, 말섬 등으로 불린다. 면적은 0.25㎢로 매우 작으며, 안흥8경의 하나인 마도기암(奇巖)이 있
는 곳이다. 약 20세대의 주민이 거주하며 신진도와 마찬가지로 어업과 숙박업으로 생계를 꾸린
다. 바다낚시로 유명하여 참조기와 새우, 갈치 등이 많이 잡히며, 신진도와 이어주는 방파제 서
쪽에서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유물과 조개더미가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산지
에는 보리수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이하며, 태안에서 신진도행 군내버스가 마도 포
구까지 들어간다.

※ 신진도, 마도 찾아가기 (2013년 8월 기준)
* 서울 강남(센트럴시티), 남부터미널, 동서울터미널에서 태안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강남은 1
  일 11회, 남부터미널은 30~4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은 1일 4회 운행)
* 인천, 부천, 수원, 안양, 성남, 고양, 대전(동부), 천안, 아산, 군산, 공주에서 태안행 고속/
  직행버스 이용
* 태안터미널에서 신진도(마도)행 군내버스가 1일 19회 운행한다. (20시 막차는 신진도주차장까
  지만 운행)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해안고속도로 → 서산나들목에서 서산방면 32번 국도 → 태안군청 → 장산교차로에서 안흥
   방면 603번 지방도 → 신진대교 → 신진도, 마도

* 서해의 해금강(海金剛)으로 일컬어지는 안흥8경의 현장을 1바퀴 도는 안흥유람선(☎ 041-674-
  1603)이 신진도항에서 출발한다. 운행코스는 5가지로 사자바위와 가의도, 독립문바위, 정족도
  , 목개도 등을 돌며 소요시간은 1시간에서 3시간 정도이다. 비정기선으로 30명(또는 60명) 정
  도가 모이면 출발한다. 자세한 운행정보는 이곳을 클릭
* 소재지 -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신진도리


▲  평화로운 분위기가 마음을 다독거리는 신진도항(안흥외항)
신진도항은 새우깡의 제왕 갈매기를 몰고 다니는 어선들로 늘 부산하다.


▲  신진도항에 정박한 어선을 보호하는 방파제가 보인다.
왼쪽 방파제에는 빨간 등대가 오른쪽에는 하얀 등대가 나란히 자리하여
바다의 밤길을 비춘다.

▲  빨간 등대가 있는 방파제 왼쪽 언덕은 부억도의 옛 흔적이다.
부억도는 마도와 더불어 신진도 주변을 장식하던 섬이었으나
신진도항을 만들면서 신진도의 일부로 흡수되고 말았다.

▲  포구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하는 어선들

▲  신진도항 북쪽에서 바라본 마도의 모습

▲  신진도와 마도를 이어주는 방파제길 ▼
갯벌을 메꾸고 돌을 차곡차곡 얹혀 두 섬을 하나처럼 끈끈하게 이어준다.


▲  마도에서 바라본 신진도항

▲  신진도 북쪽 갯벌
갯벌은 서해바다의 매력이자 자연의 보고이다. 그런 갯벌이 인간의 의해 계속 축소되고
사라지고 있으니 이러다가 갯벌이란 단어가 낯설어지는 날이 오는 것은 아닐까?
그날이 되면 인간들도 감히 무탈하지는 못할 것이다.

▲  마도 갯벌에 고단한 몸을 기대며 휴식을 취하는 어선들

▲  신진도와 마도를 잇는 방파제에서 바라본 신진도항
마을 뒤쪽에 보이는 산이 신진도의 진산(鎭山)인 후망봉(132m)

신진도와 마도는 딱히 흥미가 나질 않았다. 신진도항 남쪽 방파제와 후망봉을 비롯해 신진도와
마도 구석구석을 살펴야 도리겠지만 별로 땡기지도 않고 그렇게 하기도 귀찮았다. 그래서 1시간
정도 머물고 나머지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 인연에 내던지며 육지로 나가는 군내버스를 타
고 안흥항으로 넘어갔다.


▲  안흥항과 신진대교

안흥항(안흥내항)은 정죽반도 끝에 자리한 항구로 서해 중부의 중심 어항(漁港)이자 충남의 대
표적인 항구이다. 백제(百濟) 때부터 항구의 역할을 했다고 하며, 백제가 한강 유역을 상실한 5
세기 이후 이곳을 중원대륙 진출의 주요 기지로 삼으면서 많은 무역선과 수군이 들락거렸다.

안흥항의 확장을 위해 신진도에 외항이 조성되면서 많은 어선들이 그곳으로 터를 옮기면서 예전
에 비해 많이 한가해졌다. 그 이후로 안흥항은 내항(內港), 신진도항은 외항으로 불린다. 허나
여전히 어항의 역할은 녹슬지 않았으며, 신진도항도 엄연히 따지만 안흥항의 확장판이다.

이곳은 바다낚시터로 명성이 높아 많은 강태공(姜太公)들이 월척을 꿈꾸며 찾아온다. 항구 앞바
다는 수심이 60~70m에 이르러 우럭이 많이 잡히며 우럭낚시의 본산으로 꼽히기도 한다. 또한 서
해의 해금강으로 불리는 안흥8경의 현장이 안흥 앞바다에 보석처럼 박혀있으며, 안흥 뒷산에 조
선 중기에 축성된 안흥성이 남아있다.


▲  안흥항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서해바다의 넓은 가슴
저 바다에 조그만 배를 띄우고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극락의 세계를 찾아 떠나고 싶다.


♠  서해바다를 지키고자 조선 중기에 축성된 성곽 ~ 안흥성(安興城)
충남 지방기념물 11호

▲  안흥성 북문인 감성루(坎城樓)

안흥성은 1655년(효종 6년)에 축성된 석성(石城
) 겸 산성(山城)으로 태안8경의 2경으로 꼽히는
명승지이다.
효종 시절에 김석견(金石堅)이 서해안을 방어하
고자 안흥진성(安興鎭城)의 축성을 강하게 건의
하자 효종(孝宗)은 지경연사(知經筵事) 이후원(
李厚源)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에 이후원이
'안흥은 바다를 낀 천연의 요새로 군사를 주둔
하고 양곡을 저장하면 안으로 강도(江都)의 표
리(表裏)가 되고 밖으로는 호남과 영남을 통제
할 수 있습니다'

▲  감성루(북문)의 뒷모습

그 말을 들은 효종은 옳거니 여기며 바로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게 명을 띄워 안흥성을
쌓게 했는데, 이때 인근 19개 고을의 정남(丁男, 16~60세 남성)이 징발되었다.

안흥성의 본래 이름은 안흥진성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안흥성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종3품
무관인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주둔하여 성을 지켰다. 1894년 동학운동(東學運動)이 일
어나자 동학군(東學軍)과 관군과의 싸움으로 성내(城內)의 건물과 문루가 상당수 파괴되었으며,
동학군이 진압된 이후 성은 버려져 방치되었다. 그 이후 성내 건물은 모두 파괴되고 그 자리에
는 마을이 들어섰다.

성의 둘레는 1,714m, 높이는 3~4m이며, 동문<수성루(壽城樓)>과 서문<수홍루(垂虹樓)>, 남문<복
파루(伏波樓)>, 북문<감성루(坎城樓)>의 4문을 두었다. 허나 지금은 북문만 문루(門樓)가 남아
있으며, 나머지는 성문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성곽(城郭)은 북쪽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진
하게 남아있으며, 성곽의 방어시설인 여장은 모두 분실되었다. 북문은 바다에 접해있어 지대가
낮으나 서문과 남문, 동문은 산등성이에 자리해 있으며, 북문에서 동문과 서문으로 가는 성곽은
경사가 급하다.
서문에 이르면 쪽빛의 서해바다가 눈과 마음을 시리게 만들며, 여기서 산을 내려가면 바로 안흥
항으로 이어진다. 동문을 지나면 산과 논, 바다가 어우러진 태안 정죽리의 산하가 거침없이 펼
쳐지는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의 경사가 다소 급해 내려갈 때 주의가 필요하다.


▲  안흥앞바다를 굽어보는 서문(수홍루)
문루인 수홍루는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녹아 없어지고 성문만 남았다.
고색의 떼가 잔뜩 낀 성곽은 수천년 묵은 고고학 유적지를 연상케 한다.

▲  서문 북쪽 성곽

▲  서문 안쪽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서 차곡차곡 쌓인 성곽은 주먹처럼 조그만 돌부터 성인 남자의 몸집만한
커다란 돌까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꽉 여물어져 있다. 고색의 무게가 진하게 입혀진 성곽에는
수풀이 무성히 자라 허전한 윗부분을 마치 대머리를 덮듯 따스하게 덮어준다. 딱딱한 성돌에는
이곳의 청정함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이끼가 여기저기 뿌리를 내리며 기생을 한다. 맨돌에도 식
물이 살 수 있단 말인가? 자연의 위대함에 그저 입만 벌어질 뿐이다.
수천 명의 사람을 동원하여 만든 안흥성, 돌로 쌓아서 무척이나 단단해 보이지만 자연 앞에서는
역시나 장난감 성에 불과하다. 동학운동 이후 버려진 성은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해 이렇게
황량하게 변한 것이다. 사람이 만든 것은 그것이 집이든 성이든 사람의 손길이 꾸준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천하제일의 고구려 성이라도 자연 앞에 무책임하게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
제이다.


▲  성돌에 낀 오랜 세월의 주름살
이끼 등의 지의류(地衣類)가 성돌에 뿌리를 내려 그들만의 조그만 나라를 꾸린다.

▲  옛 수홍루의 기와조각이 하나의 화석(化石)이 되어 땅에 박혀있다.

▲  서문에서 바라본 안흥앞바다 (서해바다)
성내마을 사람들은 안흥으로 갈 때 서문을 거쳐간다.

▲  안흥성이란 둥지에 포근히 안긴 성내마을

성내 한복판에는 성내마을이 포근히 자리해 있는데, 20호 정도가 산다. 마을 서쪽은 밭이 약간
펼쳐져 있고, 남쪽은 군사시설이 있어 출입을 금하는 철조망이 눈을 심히 불편하게 한다. 마을
동북쪽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태국사란 조그만 절이 터를 닦았다.


▲  동문에서 바라본 천하 (정죽리 일대)

성내 한복판에는 성내마을이 포근히 자리해 있는데, 20호 정도가 산다. 마을 서쪽은 밭이 약간
펼쳐져 있고, 남쪽은 군사시설이 있어 출입을 금하는 철조망이 눈을 심히 불편하게 한다. 마을
동북쪽 성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는 태국사(泰國寺)란 조그만 절이 터를 닦았다.


▲  안흥성의 동문(수성루)

동문은 서문과 마찬가지로 문루는 녹아 없어지고 뻥뚫린 성문만 있다. 그래도 서문에 비해서는
성문의 천정이 매우 두텁다. 성문 사이로 산과 논이 어우러진 정죽리의 산하가 눈에 들어온다.


▲  동북쪽 성벽에 터를 일군 태국사(泰國寺) - 전통사찰 47호

태국사는 법당과 요사가 전부인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절로 특이하게 성벽 위에 둥지를 틀었다.
이 절은 백제 무왕(武王)이 국태보안(國泰保安)을 빌고자 634년에 세웠다고 전한다. 그래서 절
이름도 태국사라고 하는데, 관련 유물과 기록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없다고 보는 것이 편할 것
이다.

조선 세종(世宗) 때에는 명(明)나라 사신의 무사항해를 빌고자 세종의 명으로 중창했다고 하나
명나라 사신이 굳이 이곳을 지나갈 이유가 없으니 그 또한 신뢰가 떨어지며, 임진왜란 때는 승
병이 주둔했다고 한다. 1894년 동학군과 관군의 싸움으로 안흥성이 피해를 입자 그때 절도 파괴
되어 오랫동안 흔적만 아련히 남아오다가 1982년에 비로소 중창되었다.
고색의 내음은 매서운 세월의 태풍 앞에 모조리 흩날리면서 문화유산은 하나도 없으며, 다만 오
랜 내력이 인정되어 충청남도에서 전통사찰로 지정했다.

안흥성 동북쪽 높은 산자락에 자리해 있고 나무가 별로 없어 산사의 내음은 많이 떨어지나 성내
에서 제법 높은 곳에 있다보니 조망은 제법 괜찮다. 허나 경내에는 그 흔한 석탑이나 승탑 등의
석물은 없어 맞배지붕을 지닌 법당이 아니었다면 그냥 개인 주택으로 오인하기가 쉽다.

태국사를 둘러보니 마도를 출발하여 태안으로 가는 버스시간이 5분도 남질 않았다. 그걸 놓치면
꼼짝없이 1시간 이상을 허공에 내던져야 된다. 그러면 천상 안흥성을 또 1바퀴 돌아야 되겠지. 
절에서 북문으로 내려가는 길은 제법 비탈진 길인데, 그 길을 정신없이 내달려 간신히 버스를
잡아타고 속세로 나갔다.

안흥성은 태안8경의 하나로 꼽히는 태안의 주요 관광지긴 하지만 편의시설과 두 발을 쉴 수 있
는 휴식처가 없다. 게다가 성곽길이 제대로 정비되어있지 않아 성곽을 돌 경우 걸음에 조심을
요한다.

▲  태국사 법당(法堂)

▲  태국사 요사(寮舍)

※ 안흥성 찾아가기 (2013년 8월 기준)
* 태안터미널에서 신진도(마도)행 군내버스를 타고 죽리(성안)에서 하차하면 바로 북문이다. 안
  흥에서 내릴 경우 산길을 이용하여 서문으로 오를 수 있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서해안고속도로 → 서산나들목에서 서산방면 32번 국도 → 태안군청 → 장산교차로에서 안흥
   방면 603번 지방도 → 안흥성
* 소재지 -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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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8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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