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각'에 해당되는 글 17건

  1. 2021.06.10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아차산 영화사 (영화사 느티나무, 영화사에서 먹은 공양밥)
  2. 2020.07.16 초여름 산사 나들이 ~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나한도량을 내세우고 있는 수락산 학림사 (수락산 귀임봉)
  3. 2020.05.19 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3
  4. 2019.06.15 커다란 조선 후기 마애불을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 중계동 불암산 학도암 ~~~ (서울둘레길, 맛있는 공양밥 1그릇)
  5. 2019.05.22 봄맞이 산사 나들이 ~ 비봉능선 밑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6. 2019.01.05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 나주 지역 제일의 고찰,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나주곰탕 1그릇)
  7. 2018.06.01 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 고려대에 둘러싸인 도심 속의 고즈넉한 절집, 안암동 개운사
  8. 2018.05.04 봄맞이 산사 나들이 ~ 전주 근교 제일의 고찰, 완주 종남산 송광사
  9. 2017.08.28 대자연이 빚은 단양8경의 으뜸 명승지, 단양 사인암 ~~~ (북상리 시골, 청련암, 남조천)
  10. 2017.04.07 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작은 석굴암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 낙산 보문사 (보문사 괘불)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아차산 영화사 (영화사 느티나무, 영화사에서 먹은 공양밥)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아차산 영화사



' 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아차산 영화사 '
연등으로 가득한 영화사 대웅전 뜨락
▲  하늘을 훔친 영화사 연등의 위엄 (대웅전 뜨락)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
다.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나 초파일 앓이가 대단하여 그날에 대한 설레감이 다른 날보
다 매우 크다. 하여 매년 거르지 않고 내가 서식하고 있는 서울 지역의 오래된 절과 문
화유산을 품은 현대 사찰을 중심으로 순례/답사를 내세운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평소에도 많은 절을 찾고 있지만 그래도 1년에 오직 하루 뿐인 날이라 심쿵거리는(심장
이 쿵쿵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적당한 절을 찾아보았으나 이제 서울에 남
아있는 미답(未踏) 고찰(古刹)은 완전히 씨가 마른 상태, 하여 수도권으로 눈을 돌려보
았으나 멀리 나가기도 귀찮아 예전에 갔던 시내 절 중에서 사진에 담지 않은 곳을 골라
보니 아차산 영화사 등 여러 곳이 걸려들었다. 하여 그들을 이번 초파일의 주메뉴로 선
정하고 제일 먼저 아차산 영화사를 찾았다.



 

♠  아차산 영화사(永華寺) 입문

▲  영화사 일주문(一柱門)

아차산(峨嵯山) 남쪽 끝에 넓게 둥지를 튼 영화사는 서울 광진구와 중랑구 지역에서 가장 큰
절이다. 날이 날인지라 사람들로 아주 북새통을 이루어 천하 사람들이 거의 절에 모여든 기분
인데 영화사의 정문인 일주문을 들어서면 본격적인 영화사 경내가 펼쳐진다.
경내 또한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지경으로 허공에는 연등이 가득 매달려 초파일 분위기
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으며, 선불장 주변에서는 공양밥을 나눠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밥
부터 먹고 싶었지만 우선 절을 둘러보고 먹기로 했다. 원래 핵심이 되는 것은 끝에 하는 법이
라고 하지 않던가? 초파일 절 투어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영화사의 내력
을 간단히 살펴보자.

영화사는 672년에 그 유명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용마봉(龍馬峰,
용마산) 밑에 절을 짓고 화양사(華陽寺)라 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유물과 자료
는 전혀 없다. 게다가 그 시절 의상은 부석사(浮石寺)와 옥천사(玉泉寺, 경남 고성) 등 자신
이 키우던 화엄종(華嚴宗) 소속의 절 10개-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를 짓고 관리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영화사는 그의 화엄십찰이 아님)
그러니 의상의 창건설은 한낱 부질없는 메아리이자 영화사의 희망사항에 불과하며 경내에 조
선 초에 조성된 미륵석불이 있어 고려 중기나 조선 초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용마산에 있던 시절, 절 등불이 무려 8km 이상 떨어진 한양도성까지 비쳤다고 한다. 그 정도
면 절이 어느 정도 규모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 등불이 궁성(宮城, 도성)까지 비추
는 것에 영 기분이 좋지 않던 조선 태조(이성계)는 명을 내려 1395년 절을 군자동(君子洞) 어
딘가로 강제 이전시켰다.
이후 중곡동(中谷洞) 산자락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07년 현 자리로 이전되어 영화사로 이름
을 갈았다. 1909년 도암(道庵)이 산신각과 독성각을 세웠으며 1992년 월주(月珠)가 중창하면
서 대웅전을 중수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미륵전, 선불장, 요사채, 유치원 등 7~8동의 건
물이 있으며, 400년 묵은 느티나무와 하얀 피부의 늙은 미륵석불입상이 있다. 느티나무는 영
화사가 이곳에 둥지를 틀기 이전부터 있던 것이고 미륵석불입상은 중곡동에서 이곳으로 절을
옮길 때 힘들게 옮겨온 것이다.
그 외에 20세기 초에 조성된 독성탱과 산신탱이 전하며, 1909년에 지어진 삼성각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이다. 허나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를 제외하면 아직 이렇다할 지정
문화재는 없는 실정이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가 넓어 안정적인 느낌을 주며 학생들의 법회활동이 매우 활발해 제법 젊
은 절이다. 아차산 밑에 있기는 하나 아차산과 이어지는 산길은 절에서 모두 끊어버렸다. 하
여 절을 둘러보고 아차산으로 오르고 싶다면 일주문으로 다시 나와서 절 서쪽이나 동의초교
동쪽에서 산길을 이용해야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 9 (영화사로 107, ☎ 02-444-4321)


▲  영화사 선불장(選佛場)
대웅전에 못지 않은 우람한 규모로 선방 및 요사의 역할을 하고 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장대한 규모의 영화사 대웅전(大雄殿)
1992년에 중건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  대웅전 석가3존상과 붉은 기와지붕이 켜켜이 이루어진 닫집

▲  오색연등이 새로운 하늘을 이루고 있는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오색 연등을 가득 달아놓아 마치 하늘이 움푹 낮
아진 기분이다. 옛날 이야기를 보면 태초(太初)에는 하늘과 땅이 붙어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저 정도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 밑에 초파일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관불의식의 현장이 닦여
져 있고 초파일의 흥겨운 분위기를 누리려는 사람들로 꽤나 정신이 없다.


▲  오색연등이 영롱하게 허공을 뒤덮은 대웅전 뜨락
연등 구름 밑은 밤처럼 어둡고, 연등 위는 구름 위의 세상처럼 무척 환하다.

▲  아기부처의 관불(관정)의식 현장

대웅전 계단 앞에는 초파일을 맞이하여 아기 부처가 연분홍 연꽃대좌를 갖춘 코끼리를 타고 1
년 만에 외출을 나왔다. 그 긴 시간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무료하게 지냈던 터라 간만의 화색
이 돈 표정인데 중생들은 그의 머리에 물을 껴얹는 이른바 관불(灌佛)의식을 행하며 그의 생
일을 축하한다. 워낙 사람들이 많아서 정면에서 담지는 못하고 이렇게 측면에서 어설프게 사
진에 담았다.
아기부처 앞에는 불전함이 덩그러니 놓여져 애타게 중생들의 호주머니를 쳐다본다. 마치 오늘
날 돈으로 얼룩진 종교의 한 단면을 보여주듯이... 초파일 특수에 불전함은 거의 터져나갈 지
경이다. (반대로 내 주머니는 나날이 얇아지고 있음 ㅠ)


▲  영화사에서 제일 늙은 집,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옆에는 산신과 독성(나반존자), 칠성의 거처인 삼성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09년에 도암이 지은 경내에서 가장 늙은 집인데, 현판은 물론 겉모습까지
고색의 흔적이 자욱하여 이제 110여 년 되었건만 그보다 훨씬 늙어 보인다. 지방문화재의 자
격이 충분하여 서울시에 문화재 지정을 신청하면 100% 통과될 듯 싶은데 절에서는 아직 그럴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  매우 젊은 칠성탱

▲  20세기 초에 조성된 늙은 독성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산신탱은 독성탱과 비슷한 2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산신을 중심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
이와 어린 비서인 동자(童子), 그리고 산신(山神)의 활동무대인 산이 그려져 있다. 이곳이 아
차산 자락이니 저 산신은 자연히 아차산 산신이 될 것이다.
거의 고양이처럼 그려진 호랑이는 산신 뒤에 자리해 있는데 얼굴은 산신의 왼쪽, 꼬랑지는 오
른쪽에서 살랑살랑거린다. 탱화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간식과 음식, 과일, 술들이 상다리가
절단이 날 정도로 가득하여 초파일 특수를 제대로 누리고 있다.


▲  하얀 연등이 하늘을 훔친 삼성각 뜨락

죽은 영가(靈駕)들을 위한 하얀 연등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푸른 하늘을 흑백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다보니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이 튀어나올 것처럼 우울한 느낌이다. 반면 대웅전
뜨락에는 오색 연등이 펄럭이고 있어 활력도 넘치고 보기에도 좋다. (역시 색이 있어야 보기
에도 좋음)



 

♠  영화사 마무리 (미륵석불입상, 느티나무, 공양밥)

▲  경내에서 미륵전으로 인도하는 숲길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제일 구석진 동쪽 산자락에 미륵석불의 거처인 미륵전이
있다. 오색연등이 대롱대롱 엮어진 숲길을 2분 정도 오르면 미륵전이 활짝 모습을 비추는데,
느긋한 경사의 계단길로 이루어져 누구든 오르기 쉽다.
다만 길 양쪽 수풀에 지네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있고 난간줄도 쳐져 있어 적지 않게
긴장감을 준다.


▲  숲속에 묻혀있는 미륵석불의 거처, 미륵전(彌勒殿)

영화사에 왔다면 대웅전 주변만 살피지 말고 미륵전에 깃든 미륵석불입상도 꼭 친견하기 바란
다.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영험하다고 소문난 석불이기 때문이다.
경내에서 홀로 떨어진 미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정도의 팔작지붕 건물로 미륵석불 덩치에
맞게 짜여졌다. 석불의 키가 3.5m라 건물 높이는 5m 정도 되며 건물의 겉모습에서 고색이 제
법 느껴져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미륵전 앞에는 가건물을 길쭉하게 다져 예불
공간으로 삼았는데 새벽부터 19~20시까지 개방해 그를 친견할 수 있게 했다.

미륵전 현판은 불교학자이자 친일매국노로 더러운 모습을 보였던 권상로(權相老, 1879~1965)
가 쓴 것이다. 영화사도 생각이 있다면 그 현판을 떼어내 장작으로 땠으면 좋겠는데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보여주듯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까지 친일매국노의 흔적이 더럽게 깔려있
어 천하의 정의구현을 소망하는 중생들의 마음을 적지않게 희롱한다.


▲  하얀 피부를 지닌 미륵전의 주인, 미륵석불입상

영화사의 보물이자 든든한 밥줄인 미륵석불은 조선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에 대한 정성이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하얗게 떡칠을 하는 통에 원래 모습을 다소 잃었고
그로 인해 구체적인 나이를 측정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조각 수법도 그저 그런 수준이
라 늙은 석불임에도 그 흔한 지방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했다.
그래도 서울 땅에 몇 남지 않은 고려 말~조선 초기 석불로 그의 몸에 짙게 깔린 하얀 때를 싹
제거하여 인근 광나루에 있는 상부암(上浮庵) 석보살입상(☞ 관련글 보기)처럼 제대로 된 재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

불교에 관심이 지대했던 세조(世祖)가 그를 찾
아와 기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중곡동에
서 여기로 절을 옮길 때 워낙 키다리에 거구로
콧대가 높은 그를 옮기고자 여러 대의 우마차
를 동원해 며칠 동안 낑낑대며 옮겼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경내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그의 거처를 두었으니 여기까지 옮기느라 고생
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석불의 머리는 지나치게 큰 편으로 머리부터
눈, 코, 입, 귀, 검은 수염, 삼도가 그어진 목
까지 표현되어 있으며, 몸통에는 가슴 앞부분
을 드러낸 법의(法衣)를 걸쳤다.
왼손은 바닥을 보이고 오른손은 밑으로 내린
여원인과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다.
현재 절에서는 그를 미륵불(彌勒佛)로 애지중
지하고 있으나 원래부터 미륵불은 아니었던 듯
싶다.

▲  옆에서 본 미륵석불입상


▲  미륵전 주변 숲길
미륵전 뒤쪽이 바로 아차산이나 그곳으로 가는 길은 철조망으로 무심히 끊겨있어
이곳은 사실상 영화사의 막다른 곳이 되었다. 여기서 아차산둘레길이 뻔히
보이나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처럼 바라봐야 된다.

▲  무엇에 쓰던 물건인고? 미륵전 옆에 놓인 돌덩어리

미륵전 옆 바위에 인공이 가해진 동그란 돌덩어리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생김새를 보아하
니 석불의 모자(갓) 같은 기분인데, 이곳 미륵석불의 것으로 보기에는 크기가 형편없이 작다.
이 돌덩어리에 대한 정보가 좀처럼 걸려들지 않아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고색의 때가 별로
끼지 않은 것으로 봐서 영화사가 이곳에 안착된 이후의 것으로 여겨진다.
장대한 세월에게 저것을 지녔을 본체를 빼앗겨 저거만 겨우 남아있으며 정체성까지 상실되어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만큼 무섭고 한심
한 일은 없다.


▲  푸르게 익은 영화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5-2호

시간도 벌써 13시가 넘었고 경내를 이리저리 뛰다보니 시장기가 아주 극에 달했다. 경내를 다
둘러보았으니 이제 초파일 절 투어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공양을 할 시간.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공양을 하려는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삼성각 앞까지 줄이 길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공양을 제공하는 곳은 선불장 느티나무 앞으로 줄의 길이는 대략 200m는
넘어보였는데, 내게 꿩 대신 닭을 고를 권리는 없어 할 수 없이 그 줄에 동참했다.
200m는 짧은 거리가 분명하나 그날의 200m는 거의 20km처럼 장대해보였다. 그렇게 30분 가까
이 기다리니 느티나무 앞까지 이르렀고 여기서 10분 정도를 더 소비하여 그제서야 공양밥과
미역냉채국을 손에 거머쥘 수 있었다.

공양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느티나무는 높이 19.5m, 둘레 4.1m의 덩치로 보호수로 지정될 당
시(1982년 10월) 추정 나이가 약 370년이라고 하니 그새 40년이 덧없이 얹혀져 410살 이상이
된다. 절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이전부터 있던 존재로 늘 좋은 질감의 그늘을 드리워 대자
연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햇살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기다리는 줄이
꽤 고달팠을 것이다.


▲  영화사에서 힘들게 먹은 공양밥의 위엄

힘들게 공양밥을 받았으나 경내의 어지간한 자리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겨우
미륵전 숲길 입구에 자리를 잡고 즐겁게 공양에 임한다.
이곳 공양밥은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비빔밥 스타일이다. 하얀 쌀밥에 콩나물과 고사리, 시금
치 등 나물에 빨간 고추장을 넣어 잘 비벼먹으면 된다. 어떻게 비비느냐에 따라 맛도 천지 차
이, 게다가 고추장이 위장에도 좋다고 하니 듬뿍 넣어 비벼먹는 것도 좋다. 비빔밥에 딸려 나
온 미역냉채국은 시원하고 개운해 비빔밥의 느끼한 맛을 싹 가시게 해준다. (후식거리는 제공
되지 않았음)

그렇게 점심 공양을 마치고 시장통처럼 번잡한 영화사를 뒤로 하며 다음 행선지로 이동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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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1년 5월 2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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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산사 나들이 ~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나한도량을 내세우고 있는 수락산 학림사 (수락산 귀임봉)

 


~~~~~ 초여름 산사 나들이, 수락산 학림사 ~~~~~

▲  학림사 경내

▲  학림사 석불좌상

▲  수락산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슬슬 고개를 들던 7월의 첫 무렵, 서울의 동북쪽 지붕인 수락
산을 찾았다.
수락산(水落山, 638m)은 그의 그늘인 상계1동에 8년을 살면서 수없이 안겼던 뫼로 지금은
도봉산(道峯山) 그늘인 도봉동에 살고 있지만 가끔식 중랑천(中浪川)을 건너 수락산의 품
을 찾는 편이다.
수락산에는 다양한 코스가 있는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학림사로 올라가기로 했다. 지하철
4호선의 북쪽 종점인 당고개역에서 상계3,4동 달동네를 가로질러 수락산의 품으로 들어섰
는데, 길이 좀 복잡하긴 해도 햇갈릴만 하면 이정표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니 헤맬 염려는
거의 없다.

달동네를 벗어나니 여름 제국(帝國)의 은혜로 연두연두하게 익은 숲길이 그림처럼 펼쳐진
다.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포장길이 닦여져 있으며, 길의 경사가 완만하여
그리 힘든 것은 없다.


▲  녹음에 잠긴 학림사 가는 길

▲  학림사 200m 직전 (학림사 부도 앞)


 

♠  학림사 입문 (부도와 석불좌상)

▲  학림사 부도(浮屠)

숲길을 어느 정도 오르면 발을 잠시 쉴 수 있는 나무 벤치와 수락산 안내도, 그리고 늙은 티
가 풍기는 부도(승탑) 2기가 마중을 한다.

이들 부도는 학림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존재로 그들의 모습이 마치 다정함이 물씬 풍기는
부부처럼 다가온다. 왼쪽에 조금 평퍼짐한 부도는 남편, 오른쪽에 홀쭉한 부도는 아내, 그들
이 나에게 기념촬영을 요청하는 것 같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대추알 모양의 길쭉한 탑을 얹히
고 머리장식을 올렸는데, 누구의 부도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그중 1기에 '상궁(尙宮)~
' 명문이 있어 학림사에서 여생을 마친 궁궐 상궁의 부도임을 귀뜀해준다. 부도는 원래 경내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이며, 부도에는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자욱해 중후한 멋을 풍긴다.

▲  나무 벤치와 부도

▲  부도의 뒷모습


▲  학림사 약사전(藥師殿)

부도를 지나 학림사 안내문에 이르면 오른쪽에 약사전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있다. 안내문 옆
높은 곳에 담장을 두르고 들어앉은 약사전에는 학림사에서 자랑하는 오랜 보물이자 영험하기
로 이름난 석불좌상(약사여래상)이 봉안되어 있다.
내가 지금까지 접해온 약사전은 모두 경내에 있었다. 허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경내로 들어서
는 길목에 세워두어 중생들로 하여금 가장 먼저 찾게 하였으니 그만큼 약사불이 학림사의 간
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곳 약사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그만 맞배지붕 건물로 건물 이름이 쓰인 현판을 보니
글씨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힘이 넘쳐보이는데 '藥(약)'자가 '茶(다)'로 보인다. 건물 주변
으로는 담장이 빙 둘러져 있으며 건물 앞에는 석등 1기가 멀뚱히 서 있다.


▲  학림사 석불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2호

약사전의 주인장인 석불좌상은 키가 불과 77cm(어깨 너비 53cm)에 불과한 아주 왜소한 석불이
다. 신체 비례가 너무 떨어져 얼굴 높이가 신체의 거의 2/5에 이를 지경이며, 석불이 앉아있
은 연화대좌(蓮花臺座)는 높이 42cm로 석불보다 덩치가 더 크다. 연꽃이 위로 향한 앙련(仰蓮
)과 아래로 향한 복련(伏蓮)이 대좌를 화사하게 꾸며주고 있는데, 자신보다 큰 대좌 위에 앉
은 모습이 마치 조그만 아이가 커다란 의자에 걸터앉은 것 같다.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석불
은 거의 네모난 얼굴로 두 눈은 살짝 감겨져
있고 코는 깎여나가 윤곽만 남아있다. 입술에
는 약간의 미소가 드리워져 있고, 중생의 소망
을 모두 들으려는 듯, 커다란 두 귀를 지녔다.

목은 두꺼워서 어깨와 단단히 붙었고, 가슴 앞
에 모은 그의 손에는 조그만 약합이 들려져 있
어 그가 약사여래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배꼽
밑 아랫도리는 보이지가 않는데, 오래전에 사
라진 것으로 여겨지며, 그 모습을 통해 아마도
입상(立像)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럼 여기서 잠시 학림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옆에서 바라본 석불좌상과 대좌


▲  학림사 경내 직전 (오른쪽 계단은 용굴암, 수락산 정상 방면)


덕릉고개 너머에 있는 흥국사(☞ 관련글 보러가기)가 약사도량(藥師道場)으로 좀 유명하다면
학림사는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 명성이 조금 자자하다.
학림사란 이름은 절이 들어앉은 위치가 학이 알을 품고 있는 이른바 학지포란(鶴之抱卵)의 지
세라 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다. 이런 지세에는 무거운 돌로 만든 탑이나 석물은 가급적 피해
야 된다는데 근래에 3층석탑과 5층석탑, 석불 등을 잔뜩 지어놓아 자칫 알이 깨져 탈이 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곳은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671년에 원효대사(元曉大
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신빙성은 없으며, 1881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순항(金淳
恒)이 쓴 '학림암중수기(鶴林庵重修記)'에
'절의 내력을 적은 문서가 모두 사라져 절을 창건한 이와 절의 사적(事蹟)을 알지 못한다'

였으니 원효대사의 창건설이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려 후기에는 나옹화상 혜근(懶
翁和尙 慧勤, 1320~1376)이 머물렀다고 하지만 학림암중수기에는 언급조차 없다.

중수기에 본격적으로 기록이 나타나는 건 16세기 이후로 임진왜란 시절인 1597년에 절이 소실
되었다고 한다. 1624년 무공화상(無空和尙)이 터만 남은 이곳에 법당을 지어 절을 다시 일으
켜 세웠으며, 1780년에 최백(崔伯), 궤징(軌澄) 두 승려가 중수하고 1830년에 다시 손질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거의 문 닫기 직전에 이르자 1880년 영상(景惺), 경선(慶船) 두 승려가 나서
절을 일으켜보려고 했다. 허나 돈이 한 푼도 없어 애태우다가 마침 판관 하도일(判官 河道一)
이 절을 찾아오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절의 사정을 전해들은 하도일은 서울로 돌아가 명성황후(明成皇后)에게 학림사 중수를 건의했
고 이에 황후는 천금의 하사금을 지원했다. 그 돈으로 중수가 마무리되자 단청은 찬란하여 빛
을 발했다고 하며, 부처의 성전은 의연하게 자리잡았다고 중수기에는 적고 있다.

1918년 4월 주지 금운(錦雲)이 중수를 했는데 승려 연응(淵凝)이 '학림암대방여각전각중수기(
鶴林庵大房與各殿閣重修記)'에
'전각이 낡고 기울어 거꾸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보다 못한 금운화상이 발심해 작
은 물건까지도 모두 보시(報施)해 다시 세우니, 가히 후세의 귀감이 될만하다'
고 기록했으니
중수 이전 절의 상태가 가히 짐작이 간다.
또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묘역과 지척이라 매년 봄과 가을 제사 때마다 많은 제물을 부담
했다. 심지어는 절을 묘역에 포함시키는 등 그 폐해가 컸다고 하며, 1927년에는 도정궁(都正
宮) 소유가 되면서 절을 찾는 중생이 줄어 수입이 감소하기도 했다.

흥국사처럼 왕실의 원찰(願刹)은 아니나 궁궐 상궁들이 자주 드나들며 자신들의 안녕을 빌었
고 퇴직하여 오갈 데 없는 상궁들이 기거하기도 했다.
6.25 때 상당수의 건물이 파괴되어 다시 쇠퇴의 늪에 빠졌으나 1985년 전각들을 개축하고 대
웅전, 오백나한전 등을 새로 지었으며, 1994년에 노원역 부근에 7층 규모의 불교회관을 지어
올리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선불당, 청학루, 약사전, 삼성각, 오백나한전 등 9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삼신불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1호
)
와 석불좌상, 석조약사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등 지방문화재 3점이 있다. 이중 괘불(掛佛
)은 평소에는 친견하기가 어려워 아예 만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좌상과 부도 2기 등의 비지정문화재가 추가로 전하고 있다.

학이 알을 품은 지세라 그런지 포근함이 느껴지며, 비록 시내와 가깝지만 첩첩한 산골에 들어
선듯 산사(山寺)의 고즈넉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4동 산1
(덕릉로129가길 241 ☎ 02-936-1700)


▲  학림사 옆구리로 흐르는 계곡
계곡과 나란히 한 산길을 1km 오르면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조그만 암자,
용굴암(龍窟庵)이 나온다.


 

♠  학림사 경내 둘러보기

▲  학림사 해탈문(解脫門)과 108계단

약사전을 지나 100m 정도 가면 경내로 인도하는 108계단 앞에 이른다. 계단 중간에는 해탈문
이 걸려있는데, 문 바깥 쪽에는 우람한 모습의 금강역사(金剛力士)상이 그려져 있고, 안에는
사자를 탄 천진난만한 표정의 문수동자(文殊童子)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普賢童子)가 중생
을 맞는다. 그들 뒤로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그려져 있어 천왕문(天王門)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  사자에 올라탄 문수동자

▲  108계단에서 만난 원숭이들 - 그들의 자세에는 모두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다.

108계단에는 4쌍(8마리)의 귀여운 원숭이 조각이 배치되어 있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원숭이
부터 눈을 가린 원숭이, 귀를 막은 원숭이, 두 손을 번쩍 들며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까지 적
당히 거리를 두며 자리하고 있는데, 이들의 자세는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학림사에서
그저 눈요기나 하라고 갖다놓은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우선 손으로 입을 가린 원숭이는 나쁜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쁜 말을 내뱉을 바에는 차
라리 손으로 입을 막는 것이 좋다. 그 다음 눈을 가린 원숭이는 나쁜 것을 보지 말란 뜻이며,
귀를 막은 원숭이는 나쁜 말을 듣지 말라는 뜻이다. 끝으로 두 손을 들며 만세를 외치는 원숭
이는 이들을 모두 지키며 열심히 정진하면 해탈의 환희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만세를 외치는 원숭이를 제외한 3가지의 원숭이는 속인(俗人)들에게 중요한 충고 3가지를 자
세로써 보여주고 있다. 나쁜 것을 말하지 않고,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정말 극
락처럼 아름다울 것인데 사람은 동물과 신(神) 중간에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존재라 좀처
럼 지키려 들질 않는다. 원숭이의 메세지를 뼛속 깊이 새기며 계단 끝에 이르면 청학루 뜨락
이다.


▲  학림사 청학루(靑鶴樓)와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108계단의 끝에는 포대화상과 2층 누각의 청학루가 자리해 있다. 설법전(說法殿)이라 불리기
도 하는데, 대웅전으로 통하는 1층 좌우에 종무소(宗務所)가 있고, 2층은 강당(講堂)으로 쓰
인다. 2층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면 불암산이 비슷한 높이에서 바라보이며, 돌로 다진 청학루
밑에는 공양간 등이 들어있다.

청학루 앞에는 4명의 동자승을 안고 있는 똥배 포대화상이 연꽃대좌 위에 앉아 있다. 복덕원
만(福德圓滿)한 인상을 지닌 그는 많은 절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몸집이 비대하고 배가 축
나왔으며, 항상 커다란 자루를 등에 짊어지고 지팡이를 짚으며 시주를 하거나 인간사의 길흉
을 점쳤다는 승려로 미륵불의 화신으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그의 배를 만지면 복이
오거나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속설이 있어 많은 이들이 그의 배를 살살 문지르며 소망을 들
이민다.


▲  청학루에서 바라본 불암산의 위엄

▲  학림사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나한도량을 자처하는 절답게 대웅전 밑에 오백나한이 봉안된 오백나한전을 두었다.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 안에는 오래된 약사여래상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대
동하여 약사여래3불좌상을 이루고 있으며 그 좌우로 16나한상, 그 뒤로 조그만 500나한을 빼
곡히 배치해 놓았다.
이 땅의 7,000만 인구처럼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 색채를 지닌 500나한의 모습은 이곳을 둘
러보는 중생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한다.


▲  오백나한전 내부 오백나한상과 약사여래3불좌상, 16나한상
오백이 넘는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앞을 향하고 있으니 건물로 들어서는
내가 부담스러워 마주보기가 쑥쓰러울 지경이다.

▲  석조약사여래3불좌상 및 복장유물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6호

500나한과 16나한 등 대식구를 거느리고 있는 약사여래3불좌상은 가운데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조성 시기는 수락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
나 조선 중기 또는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나한(羅漢)들이 죄다 칼라 색채를 지닌데
반해 약사여래3불좌상은 온통 하얀 피부과 검은 머리로 이루어져 흑백사진을 이룬다.
이들은 옥돌로 조성된 것으로 머리를 약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구부정한 자세이다. 표정은 동
자승을 모델로 했는지 작고 귀엽기 그지 없으며,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 선정인(禪定印)을
취하고 있다. 가운데 약사여래는 약합을 들고 있어 그의 정체를 알려주며, 불상의 바닥면에는
복장공이 있고, 내부에는 복장(腹臟)이 들어있으나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모르겠다.


▲  오백나한전과 마주한 선불당(選佛堂)
승려들의 수행공간으로 선불장(場)이라 불리기도 한다.

▲  웃음을 묻어나게 하는 동자상
해맑은 표정의 동자가 엉덩이를 요염하게 쳐들며 연꽃 향기에 심취해 있다.
동자승의 연꽃 심취를 돕고자 대웅전과 소나무가 그에게 늘 그늘을
드리우며 여름 햇살을 막아준다.

▲  대웅전(大雄殿)과 5층석탑

높은 계단 위에 위엄 돋게 자리한 대웅전은 학림사의 법당(法堂)으로 1985년에 새로 지은 것
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고 우기고 있
는 청동석가여래좌상이 있으며, 석가여래상 뒤로 1985년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화가 있고 좌
우 벽면에는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천불탱 등이 깃들여져 있다.


▲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

대웅전 내부는 마침 영가(靈駕)를 위한 49재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깥에서 살짝 담았다
. 유난히 귀가 큰 석가여래상은 청동(靑銅)으로 빚어 금색을 입힌 것으로 좌우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각자의 제스쳐를 취하며 앉아있다.
절에서는 이 석가여래상이 신라 후기(또는 고려 초기) 불상이라고 우기고 있으나 절의 역사나
불상의 양식을 볼 때 조선 불상으로 여겨진다. 옛날이야 신라 불상이라고 우기면 다 통했지만
이제는 불교미술사학과 불상의 시대별 양식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이니 함부로 우기다가
는 망신만 당한다. 그만큼 시대는 바뀌었다.


▲  멋드러진 노송(老松) 1그루
대웅전 뜨락에 그늘을 드리우는 소나무로 그의 나이는 정확하게 가늠할 수는 없으나
약 100~150년 정도로 여겨진다. 보호수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3층석탑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탑으로 2중으로 된
기단부가 탑의 40% 정도를 차지한다.

▲  대웅전에서 바라본 청학루와
오백나한전, 5층석탑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삼성각(三聖閣)
1985년에 지어진 1칸짜리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등장 인물이 무지 많은 칠성탱

▲  산신과 호랑이, 동자가 담긴 산신탱

▲  독성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

▲  특이한 모습의 4사자 3층석탑
사자가 있는 부분이 1층을 이룬다.


▲  석조미륵불입상(石造彌勒佛立像)

경내 서쪽에 서 있는 석조미륵불입상은 근래에 세운 것이나 몸통에 검은 때가 약간 입혀져 나
이가 조금 들어 보인다. 처음에는 100년 이상 먹은 미륵불인가 싶었는데 대략 20년 정도 되었
다고 한다.
온후한 표정을 지닌 석불로 연화대좌 위에 우뚝 서 있으며 머리 위에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데 생김새가 석탑의 옥개석(屋蓋石)과 상륜부(相輪部)를 얹혀놓은 것 같다.

이렇게 학림사를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옆 산길을 통해 노원골 남쪽 능선으로 올라갔다. 여기
서 능선을 통해 귀임봉을 거쳐 노원골로 내려갈 생각에서였다.


 

♠  수락산 귀임봉

▲  노원골 남쪽 능선길 (당고개공원 갈림길)

노원골 남쪽 능선길은 영원암 뒷쪽 노원골갈림길에서 귀임봉을 거쳐 수락산보루(堡壘)까지 이
어지는 환상의 지붕길이다. 경사가 완만하고 느긋하며 마치 구름 위를 거닐듯 편안한 길로 좌
우로 좁게나마 천하가 펼쳐져 있어 조망 또한 좋다. 예전 상계1동에 살 적에 즐겨찾던 산길로
약간의 오르막만 감내하면 도달할 수 있다.


▲  귀임봉 조망대

약간의 오르막, 내리막이 있을 뿐, 완만한 곡선을 이루던 능선길은 귀임봉에서 아주 조금 흥
분기를 보인다. 다시 하늘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귀임봉은 해발 280m로 거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꼭대기 동쪽에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는
데, 수락산 산줄기와 정상, 덕릉고개, 불암산, 상계3,4동 지역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왼쪽에 높은 봉우리가 정상)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남쪽 줄기와 덕릉고개, 불암산 북쪽 줄기

▲  귀임봉에서 바라본 불암산과 당고개역, 상계3,4동 지역

▲  귀임봉 서쪽 바위길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대자연이
수락산 끝에 살짝 빚어놓은 작품이다.

▲  귀임봉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도봉동,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의
장대한 산줄기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중계동, 창동, 도봉구 지역
산 밑이 온통 아파트 일색~~ 이 땅에 너무 흔한 풍경이다. 가까이에 보이는
봉우리 정상에 수락산보루가 깃들여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회색빛
아파트의 물결이 거치게 출렁이는 외로운 섬을 보는 듯 하다.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중계동, 노원구, 중랑구 지역

수락산보루까지 가려고 했으나 일몰시간이 자꾸 눈치를 주어 보루 봉우리 직전에서 노원골로
철수했다. 아쉽긴 하지만 일몰 직전이라 설령 가서 사진에 담더라도 대부분 일그러지게 나올
것이다. 하여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흔쾌히 미루고 미련 없이 속세로 내려왔다. 어차피
집과도 가깝고 나에게도 매우 익숙한 곳이다.

이날 수락산 코스는 '당고개역 → 학림사 → 노원골 남쪽 능선 → 귀임봉 → 노원골'로 소요
시간은 출사 시간을 포함하여 3시간 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수락산 학림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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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낙산 미타사
~~~~~

▲  미타사 백의관음도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사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
왔다. 비록 불교 신자까지는 아니나 이상하게도 초파일 앓이가 심해 그날에 대한 설레
감이 큰 편이다. 하여 매년 연례행사처럼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
울을 중심으로 고색이 여문 절이나 문화유산을 간직한 현대(20세기 이후) 사찰을 대상
으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평상시에도 절 답사/투어를 많이 하는 편임)

이번 초파일에는 어디를 가야 칭찬을 받을까?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미답(未踏)으로
남은 서울 지역 사찰은 고갈 직전에 이르렀다. 다행히 보문사(普門寺) 바로 옆에 미타
사가 마치 고갈에 대비한 듯,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어 그를 이번 나들이 동선에 흔
쾌히 넣었다. 그곳은 오래된 석탑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선 후기 탱화를 다수 보유
하고 있어 은근히 군침이 돌았다.

드디어 초파일의 여명이 밝아왔다. 제일 먼저 집에서 가까운 불암산 학도암(鶴到庵)을
찾아 그곳에 깃든 지방문화재(마애관음보살좌상, 마애사리탑)를 오랜만에 둘러보고 점
심 공양으로 두둑히 배를 채웠다. (☞ 학도암 글 보러가기)
학도암에서 공양까지 마치니 시간은 벌써 13시가 넘었다. 그날따라 해가 참 짧게 느껴
져 점점 기울어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부랴부랴 길을 재촉해 낙산(駱山) 동쪽에 자리한
미타사로 이동했다. 이곳은 보문사 바로 북쪽으로 서로 바짝 붙어있는데 얼핏 보면 같
은 절로 보일 수 있으나 엄연히 다른 절집이다. 허나 그들 모두 비구니 절이고 탑골승
방의 일원이라 이웃사촌 마냥 가깝다.


▲  집으로 경내를 꽁꽁 두룬 미타사 (미타사 정문 앞)


 

♠  미타사(彌陀寺) 입문 (대웅전)

▲  미타사 정문(일주문)

미타사는 사방이 꽁꽁 막힌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다. 마치 속세와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놀겠
다는 의지처럼 말이다. 절 남쪽은 보문사와 닿아있고, 동쪽과 북쪽은 건물 벽으로 막혀있으며,
서쪽은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나 경동고등학교의 경계선 앞에서 결국 길이 끊긴다. 보문사에서
미타사로 이어지는 골목길(보문사길) 또한 미타사 앞(보문아이파크아파트)에서 짧게 그 길을
접는다.
이곳이 이런 구석진 모양새가 된 것은 서울 시내 팽창에 따른 개발의 영향이 크다. 원래 낙산
숲과 밭두렁이 주를 이루던 변두리였으나 1950년대 이후 시가지 확장으로 주택들이 마구 들어
서면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포위된 외로운 처지가 되버린 것이다. 그래서 절도 속세의 기운
을 경계하고 속세와의 경계를 분명히 긋고자 사방을 건물로 두룬 폐쇄적인 모습이 되었다.

절 앞에 이르면 '미타사' 현판을 내건 정문이 마중을 나온다. 이 문은 속세와 미타사를 이어
주는 존재로 일주문(一柱門)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보문사와 미타사는 들어앉은 위치상 따로
일주문을 둘 처지가 못해 절과 속세의 경계에 이렇게 기와문을 두어 일주문으로 삼았다.


▲  곱게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그리고 짜릿한 돈맛을
원하는 보시함


정문을 들어서니 바로 정면과 왼쪽에 선방(禪房)과 요사(寮舍)가 있고, 오른쪽에 관음전과 대
웅전 뜨락이, 그리고 뜨락 서쪽 계단 너머로 대웅전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그 뜨락에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로 추앙받는 관불(관정)의식의 현장이 차려져 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금빛 피부의 아기부처가 즐거움에 잠긴 얼굴로 오른
손을 치켜들며 서 있고 그 주위를 온갖 꽃으로 치장해 조촐하게 꽃동산으로 꾸몄다. 사람들은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의 몸에 껴얹으면서 나름의 소망을 들이민다. 그 앞에는 보시함
이 옥의 티처럼 자리해 초파일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 재주는 아기부처가 부리
고 돈은 절이 가져가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미타사의 내력(來歷)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5층석탑에서 바라본 미타사 경내
(바로 앞에 뒷통수를 보인 건물이 삼성각)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인 낙산(낙타산) 동쪽 자락에 안긴 미타사는 950년에 혜거(慧居
)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때 법등(法燈)을 켰는지는 심히 의문이나 1047년에 세웠다는
석탑이 있어(그 탑의 탄생 시기도 확실치 않음) 고려 초/중기에 지어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웃 보문사는 1115년에 창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음)

1314년 혜감국사(惠鑑國師) 만항(萬沆)이 중수했다고 하며, 1457년에 단종(端宗)의 왕후인 정
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낙산의 동남쪽 봉우리) 주변에 머물면서
중수했다고 전한다.
조선 초부터 미타사는 보문사와 한 덩어리로 '탑골승방(僧房)'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여
기서 탑골은 미타사에 있는 5층석탑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문사와 미타사 일대를 탑골이라 불
렀는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조선 왕실과의 인연이 두터워 후궁과 상궁(尙宮)들이 인생의
마지막을 의지하거나 기도를 올렸던 곳이다. 
탑골승방 외에도 옥수동 두뭇개승방(미타사), 석관동 돌곶이승방(연화사), 숭인동 새절승방(
청룡사)도 있어 이들을 묶어 한양도성 밖 4대 승방이라 불렀으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탑
골승방과 성격이 비슷하다.

1801년에 중수를 했으며(이때가 4차 중수라고 함) 1836년에 비구니 상심(常心)이 인일(仁一)
의 도움으로 중수했다. 1969년 계주(季珠)가 고봉(古峰)의 도움으로 중수했으며, 이후 계속
불사를 벌여나가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관음전, 단하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관음전
은 지하에 공양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남쪽은 보문사와 연결되어 있어 서로 왕래를 한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상, 대웅전과 삼성각, 단하각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보문사와
비슷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칠성도와 백의관음도, 아미타후불도 등 지방문화재 8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 모두 2014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이들은 대웅전과 삼성각에 나눠 봉안되어
있으나 백의관음도는 관음전과 이어진 '불이문'이란 건물에 따로 있다. (그림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음)
그리고 앞서 언급한 1047년에 조성되었다는 5층석탑이 있는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탄생 시기는 의심스러우나 고려 때 탑은 분명해 보인다. 탑골이란 이름까지 낳은 장본인이나
조선 후기에 그려진 탱화들도 거뜬히 받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있는 듯 싶다.

현재는 조계사의 말사(末寺)로 조계종(曹溪宗) 소속이며, 낙산 자락에 있지만 '삼각산(三角山
)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비록 북한산(삼각산)이 여기서 거리가 좀 되지만 그 줄기가 낙산까
지 이르고 낙산이 다소 부실하게 생겨 멀리 있는 북한산을 가져와 칭한 것이다. 이곳 뿐만 아
니라 낙산에 안긴 보문사와 청룡사(靑龍寺) 또한 낙산 대신 삼각산을 칭하며 북한산에 의지하
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낙산 일대 절들은 비구니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지금 또한
여전하여 그 점이 참 흥미롭다. 미타사와 보문사, 청룡사, 거기에 최근에 지어진 정각사(正覺
寺)까지 그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왕실과 사대부 여인과의 적지 않은 인연 때문
일 것이다. 

예전에는 숲이 짙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대단했을 것이나 자비 없기로 유명한 개발의 칼질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갇힌 별천지처럼 되어버렸다. 게다가 보문사의 그늘에 가려져 인지도도
낮은 실정이다. 비록 보문사보다 법등(法燈)의 역사는 조금 길고 문화유산도 풍부하나 이제서
야 처음 인연을 지을 정도이니 그곳의 인지도를 알만하다. 그래도 초파일이라 사람들도 제법
많았고, 관불의식과 연등 만들기, 불화(佛畵) 그리기, 전통차 시음 등의 이벤트도 열리고 있
어서 보문사보다는 덜 심심한 풍경이었다.

참고로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개화산(開花山)과 옥수동에도 '미타사' 간판을 내건 오래된 절
이 있다. 즉 3개의 늙은 미타사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51 (보문사길 6-16, ☎ 02-923-1738)


▲  강렬한 햇살과 연등의 위엄으로 다소 흐릿하게 다가온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미타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20세기 후반에 지
어진 것으로 오색 연등이 허공을 가리고 있는 동쪽 뜨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석가3존상을 비
롯해 고색이 묻어난 아미타후불도와 감로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이 내부를 수식하고 있다.

▲  연분홍 연등으로 곱게 분을 바른
대웅전 앞

▲  대웅전 내부


▲  대웅전 석가3존상과 아미타후불도(阿彌陀後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8호
)


대웅전 불단에는 잘생긴 석가여래가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쓰며 미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앉아있다. 바로 그 뒷쪽에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도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데, 석가3존상 뒤에 석가여래도 아니고 아
미타불(阿彌陀佛)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아미타후불도가 걸려있는 점이 꽤 이채롭다.
아무래도 절 이름이 '아미타불'의 줄임말(미타)에서 비롯되었고 따로 아미타불의 거처를 마련
하기도 여의치 않아 이곳에 둔 모양이다.

이 아미타후불도는 1873년에 신중도, 지장시왕도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제작자의 센스 부족으
로 화기(畵記)를 남기지 않아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
대 제자, 사천왕(四天王), 금강역사(金剛力士) 등이 빼곡히 모여 정모를 하고 있는 일종의 아
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로 그림 중앙에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로 이루어
진 아미타3존상이 낮은 불단에 마련된 연꽃대좌에 앉아 있으며, 그 주위로 6대 보살과 10대
제자, 금강역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사천왕은 평상에 편하게 앉아 있는데, 이는
다른 탱화와 확연히 틀리다. (다른 탱화의 사천왕은 모두 서 있음)
폭이 넓은 액자형의 화면 크기나 낮은 불단의 연화대좌에 앉아있는 아미타3존상의 모습, 그리
고 평상에 앉은 사천왕의 등장은 경북 예천 서악사의 석가모니후불탱(1770년)의 전통을 계승
한 것으로 그 예가 별로 없다고 한다. 하여 그 때문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미타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8호

대웅전 남쪽 벽에는 보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아주 복잡한 그림이 있으니 바로 감
로도<감로왕도(甘露王圖)>이다.
감로도는 이름 그대로 '맛있는 이슬'이란 뜻으로 여기서 이슬은 중생들에게 감로와 같은 법문
을 베풀어 해탈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매우 파란만장한 스타일의 그림이라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림 해석이 어려워 거의 암이 걸
릴 지경인데, 주로 죽은 사람들, 즉 영가(靈駕)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영가들의 위패나
영정을 두기 마련이다.
그림의 줄거리는 대체로 석가여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고자 부처에게 그 방법을 물어 답을 듣는 것으로 그림 상단
에는 아미타3존과 7여래, 지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등을 담았
다. 그리고 중단에는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절차, 아귀가 공양을 먹는 장면, 의식
을 주재하는 사람이 불덕(佛德)을 찬양하는 모습과 승려, 성현(聖賢) 등이 그려져 있으며, 하
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이곳 감로도는 1918년에 고산축연(古山竺演) 등이 그린 것으로 다소 질이 떨어지는 합성연료
를 사용한 탓에 밝은 주홍색이 선명하다. 명암법(明暗法)의 일종으로 넓게 칠하는 요철법(凹
凸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청나라에 전해진 서양 화법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유형은 인근
청룡사(1868년) 감로도와 개운사(開運寺, 1883년), 옥수동 미타사(1887년), 봉원사(1905) 감
로도와 비교할만하며, 재를 지내는 행사 장면 위주와 아귀의 규모가 줄어든 점은 그 시절 감
로도의 경향을 보여준다.
어쨌든 19세기 수도권에서 유행하던 감로도의 도상을 계승하고 있으며, 잘 짜여진 구성과 세
부 묘사가 정교하다.


▲  미타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0호

대웅전 북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있다. 신중도란 호법신중(護法神衆)을 담
은 그림으로 앞서 감로도만큼은 아니지만 등장 인물이 빼곡해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이 그림은 1873년 4월 포화당 정수(布和堂 定修)를 증명으로 하고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
이 출초(出草)를 했으며, 동화당(東化堂)과 두흠(斗欽), 만파당 돈조(萬波堂 頓照), 봉흡(奉
洽) 등이 같이 그린 것이다.
그림은 향좌측부터 34cm, 39.3cm, 39.5cm, 39cm, 44.5cm의 비단을 이어 제작했으며 가로로 긴
화면을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천부중(天部衆)을, 하단에는 위
태천(韋駄天)과 천룡팔부(天龍八部)를, 하단 중앙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칼과 창으로 무장한
천부8부가 그려져 있다. 그림 윗쪽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공간을 두고 구름 처리를 했으며, 인
물들은 대부분 얼굴이 둥글다. 채색은 다홍 계통의 적색과 녹색, 청색을 사용하여 색깔의 조
화도 괜찮은 편이다.

이 신중도는 19세기 후반 수도권 지역에서 활동하던 경선당 응석의 작품으로 수도권에서는 이
초본을 바탕으로 한 신중도가 널리 유행했다. 섬세한 필치와 원만한 인물 형태, 안정적인 색
채로 19세기 말 수도권 신중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9호

신중도 옆에는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저승(명부, 冥府)의 식구들이 담겨진 지장시왕도가
있다.
이 그림은 계유생(癸酉生, 1813년) 이씨 부인이 부모와 남편인 정축생(丁丑生, 1817년) 남씨
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돈을 내어 만든 것으로 아쉽게도 제작 시기와 최초 봉안지가 화기에 나
와있지 않다. 허나 1873년에 조성된 신중도 제작에 참여한 포화 정수, 수산당 부윤(秀山堂冨
潤) 등이 제작에 나섰고, 신중도와 양식과 화풍이 비슷해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화면은 향좌측부터 14.5cm, 36cm, 36.2cm, 35.8cm, 36cm, 35.5cm의 비단을 이어 그렸는데 여
러 곳이 찢어지고 박락된 부분이 보이는 등 불량한 부분이 조금 있다.
그림 중앙에는 지장보살이 녹색 두광(頭光)과 금색 신광(身光)을 지니며 연화대좌 위에 돋보
이게 앉아있고, 그 좌우에 10왕(시왕)이 지장보살을 바라보고 있으며, 판관(判官)과 사자(使
者), 천녀(天女), 동자(童子) 등이 배치되었다. 특히 지장보살 밑에는 2명의 동자상이 별도로
있는데, 이들 동자는 인간의 선악을 대변하는 선악동자(善惡童子)로 하얀 꽃으로 머리를 장식
했고, 윗도리는 맨살을 좀 드러냈으며, 치마를 두르고 휘날리는 천의로 온 몸을 감싸고 있다.

채색은 붉은색과 녹색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등장 인물의 얼굴에는 흰색을 칠하여 화면이 밝
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필선이 매우 섬세하며 얼굴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감을
주고 있다.
화기가 다소 부실하긴 하지만 19세기 수도권과 경남에서 유행하던 지장시왕도 형식 중 하나인
선악동자를 표현한 작품으로 하얀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동자상은 경기도 화승(畵僧)들이 즐겨
그리던 형식이라 수도권 지장시왕도의 형식을 대표하고 있다.


 

♠  미타사 삼성각, 백의관음도

▲  미타사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바로 이웃에는 삼성각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집으로 그 앞에는 전통차 시음 및 판매, 과자 제공, 연등 만들기, 불화 그리기 등의 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어 미타사의 초파일 분위기를 한껏 밝게 해준다. 보문사와 달리 양이(洋夷)
관광객들도 10여 명 정도 찾아와 이 땅의 신나는 초파일을 즐긴다.

나는 전통차 2잔(녹차 비슷한 것으로 기억남)으로 갈증을 단죄하고, 과자 1컵을 받아 불만에
잠긴 뱃속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공양밥은 경내와 이곳의 문화유산을 싹 둘러보고 편안히 먹
을 생각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지만 가끔 그 반대가 좋
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  미타사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1호

삼성각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칠성도와 산신도, 독성도가 빛바랜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삼성(三聖)으로 추앙받는 칠성과 산신, 독성(나반존자)을 머금은 그림으로 그들 중에
서 굳이 서열을 둔다면 거의 부처의 대접을 받는 칠성(치성광여래)이 으뜸이라 보통 건물 중
앙에 봉안하고 있다.

칠성도는 그려진 식구들이 많아 대개 복잡해 보인다. 그림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
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해 있으며, 그 좌우로 칠원성군(七元星君) 등
을 크기를 달리하여 배치했다. 그리고 화기 일부가 훼손된 것을 빼면 상태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이다.
치성광여래는 머리에 뿔이 달린 소가 이끄는 수레 위에 결가부좌(結加趺坐)로 자리해 있으며,
무릎 밑 좌우에 과일을 받쳐 든 동자가 몸은 본존을 향해 있으면서 얼굴은 정면을 향했다. 본
존 광배 주위를 에워싼 28수는 좌우로 대칭하여 14수씩 그려져 있으며, 그 옆으로는 정수리가
봉긋 솟은 태상노군(太上老君)과 좌우필성(左右弼星)이 있고, 상단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삼태(三台)와 6성(六星)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화면 밑 바깥쪽에는 동자상 4위가 있다.

이 그림은 강화도 정수사(淨水寺) 법당 칠성도(1878년), 강남 봉은사(奉恩寺) 북극보전 칠성
도(1886년), 의성 고운사(孤雲寺) 쌍수암 칠성도(1892년) 등과 동일한 형식으로, 19세기 후반
에서 20세기 초반에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경선당 응석과 용계 서익(龍溪 瑞翊),
봉간(奉侃), 현조(現照) 등이 참여하여 조성했다.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 칠성도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보존 상태도 넉넉하여 지방문화재
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9호

칠성도 오른쪽에는 산신도가 걸려 있다. 그런데 주인공이 거의 독성 할배와 비슷한 꼴이라 처
음에는 독성도인줄 알았으나 산신의 애완동물인 호랑이가 그려져 있어 산신도가 100% 맞다.

그림에는 붉은 옷을 입은 수염이 지긋한 산신 할배가 하얀 부채를 들고 앉아있고, 그 옆에 호
랑이가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산 등, 구름 등이 뒷배경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그림 밑에 화
기가 남아있어 1915년에 초암세복(草庵世復)과 금명운제(錦溟運齊)가 그렸음을 알려주고 있다.
19~20세기 산신도의 전형적인 화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표현력이 다소 뒤떨어지는 것으
로 평가되고 있으나 조성시기가 확실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  미타사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0호

칠성도 왼쪽에는 독성도가 있다.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과 동자, 그
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려져 있는데, 화기를 통해 1915년에 산신도를 제작했던 초암세복과
금명운제가 조성했음을 알려준다. 19~20세기 독성도의 양식을 보여주는 존재로 조성시기가 분
명하고 보존 상태 또한 좋다.
독성도 앞에는 하얀 피부의 조그만 독성상이 유리막에 감싸여 있는데, 칠성과 산신은 그림만
있는데 반해 독성은 그림과 형상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절에서 다소 각별하게 대우를 받는 것
같다.


▲  미타사 단하각(丹霞閣)

경내 뒤쪽(서쪽) 언덕에는 나무가 조금 우거져 있다. 이곳도 엄연한 낙산의 일부로 지금은 경
동고등학교가 바로 그 위에 터를 닦아 숲의 농도는 엷어졌다. 언덕은 조금 가파른 편이라 돌
로 여러 단의 석축을 다지고 계단을 놓았는데, 그 계단의 거의 끝에 단하각이란 1칸짜리 맞배
지붕 건물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단하각은 무엇일까?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단하각이란 산신각의 다른 이름
으로 산신도가 봉안되어 있다. 이미 삼성각에 늙은 산신도가 있지만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
을 위한 별도의 건물을 닦고 새 산신도를 파서 봉안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북쪽 계단을 오르
면 그 길의 끝에 5층석탑이 있다.

▲  새 그림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단하각 산신도

▲  경내 뒷쪽 언덕 (단하각과 5층석탑으로
인도하는 계단)


▲  미타사 5층석탑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구석진 곳에 고색의 기운을 듬뿍 머금은 5층석탑이 있다.
주변이 나무와 수풀로 가득하여 이곳만큼은 정말 산사의 석탑 같은 분위기인데, 그는 무려 거
의 1,000년 전인 1,047년에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그것이 만약 맞다면 서울 토박이 탑(외지에
서 옮겨온 것은 제외) 중 가장 늙은 석탑이 된다.
허나 생김새를 봐서는 딱히 1,000년 가까이 숙성된 탑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 때 탑은
분명한 듯 싶으며, 아직까지는 많은 것이 아리송해 한참이나 후배인 19~20세기 탱화들도 받은
지정문화재의 지위 조차 얻지 못했다. 허나 그 탑으로 인해 미타사가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문을 열었음을 살짝 알려주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곳 지명이 탑골이 되었고, 보문사와 미타
사가 탑골승방이란 이름까지 지니게 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3층
까지는 고색의 때가 진하며, 옥개석(屋蓋石)과 탑신 일부에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 형님이 무
심고 할퀴고 간 흔적이 좀 있을 뿐, 대체로 무난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위에 어설프게 얹혀
놓은 2층과 머리장식은 피부가 너무 흰색이라 근래 새로 올린 것으로 보인다.

탑과 한참 무언(無言)의 대화를 즐기고 있으려니 초파일 행사를 도우러 온 보살 아줌마와 절
을 찾은 한 무리의 가족이 올라와 탑을 구경하며 주위를 1바퀴 돈다. 보살 아줌마가 탑을 사
진에 담는 나에게 절 구경을 잘했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하며 공양밥과 백의관음도를 문의하니
모두 관음전에 있다며 밥 1그릇을 권한다. 그래서 이따 내려갈테니 알려달라고 답을 하고 5층
석탑과 삼성각을 더 살펴본 다음 관음전(觀音殿)으로 갔다.

관음전은 대웅전 동쪽에 있는 'ㄱ' 구조의 건물로 서쪽은 관음전, 정문과 맞닿은 동쪽 부분은
특이하게도 불이문(不二門)이란 현판을 내걸고 있다. 문도 아닌 방이 딸린 건물에 문을 칭하
는 점이 참 특이하기 그지 없는데, 백의관음도가 관음전에 있을 것이라 여기고 안을 기웃거렸
으나 딱히 오래된 그림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방에 있던 나이 지긋한 비구니(주지승으로 여
겨짐)에게 문의를 했다. 그러자 저쪽 그림을 손으로 가르키며 백의관음도라고 하는데 그 그림
은 근래 것이라 내가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방황하던 중, 아까 5층석탑에서 만난 보살 아줌마를 만났다. 그는 관음
전 지하 공양간에서 밥을 먹고 가라며 안내를 했는데, 나는 밥보다 백의관음도가 급해 그 존
재를 다시 문의하니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본 끝에 불이문 방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방에는 보살 아줌마와 할머니 여럿이 이야기꽃을 몇 송이씩 피우고 있었고, 초파일 행사에
동원된 여러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정문과 맞닿은 벽에 백의관음도가 손짓을 하
고 있었다.


▲  미타사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2호

하얀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 누님이 담겨진 백의관음도는 미타사에 깃든 문화유산 중 단연 백
미(白眉)가 아닐까 싶다. 물론 다른 탱화들도 휼륭하나 다들 흔한 그림인데 반해 오래된 백의
관음도는 서울에서 거의 흔치 않은 존재이다.

이 그림은 1906년 미타사 향로전(香爐殿, 지금은 없음) 불화로 조성된 것으로 석옹 철유(石翁
喆侑, 1851~1917)가 제작했다. 화면 중앙에는 넝실거리는 바다 파도와 백의(白衣)를 입은 관
세음보살이 붉은 연잎을 배로 삼아 옷자락을 휘날리며 서 있다. 오른손에는 버들가지, 왼손에
는 정병을 들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용왕과 천녀, 선재동자(善財童子), 대나무와 파초
, 구름과 새 2마리가 들러리로 그려져 있다.

관세음보살 건너편 뭍에는 녹색 두광을 갖춘 용왕(龍王)이 마치 장군처럼 갑옷 위에 붉은 옷
을 입고 머리에는 비늘 모양의 견갑(肩甲)과 투구를 거치며 관세음보살을 향해 합장(合掌)을
하고 있다. 이는 청나라 판화도상에서 따온 것으로 근대 불화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채색은 청색과 백색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흰색 위에 갈색으로 윤곽선을 칠하여 음영을 표현
하는 등 새로운 기법이 돋보인다.

분출하는 물줄기와 선재동자의 모습에서 기존의 관음보살도와 다른 20세기 불화의 새로운 경
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관세음보살을 향해 예를 표하는 용왕의 모습은 청나라 판화에 등
장하는 도상을 가져온 것이라 청나라 판화와 서양화법을 수용했던 20세기 초반 수도권 불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특히 늙은 백의관음도는 이 땅은 물론 서울에서도 흔치 않은 존재라 그
희소성은 더욱 크다.


▲  그림 제작자의 작은 배려, 백의관음도의 신상이 적힌 화기(畵記)

화기에는 조성 시기와 화주(化主), 제작자, 봉안 장소 등이 적혀 있다. 여기서 삼각산 미타사
는 다름이 아닌 바로 이곳 미타사로 낙산 미타사 대신 삼각산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이는 낙
산이 못미더운 탓이다.

화기의 유무와 조성시기 기재 여부에 따라 탱화의 운명도, 가치도 크게 달라진다. 특히 조선
후기 이전 것들은 더욱 그렇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국가 보물까지 지정된 불상이나 그림, 석
조물(석탑, 석불)이 수둑룩한데, 그 기록이 관련 유물의 절대적인 시대적 기준이 되기 때문이
다. 바로 옛 사람들의 이런 작은 센스 하나가 작품의 가치는 물론 그 앞날까지도 크게 열어주
는 것이다.


▲  액자의 눈치를 피해 옆에서 담은 백의관음도의 위엄
용왕과 선재동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서로 관세음보살에게 잘보이고자
애를 쓰고 있고, 선녀처럼 생긴 천녀는 공양물을 들며 관세음보살을
맞이한다.


백의관음도를 신나게 사진에 담고 그의 존재를 찾는데 흔쾌히 도움을 준 보살 아줌마에게 고
마움을 표했다. 그는 여기 공양밥이 아주 맛있다며 꼭 먹고 갈 것을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그렇게까지 식사를 청하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안그래도 먹고 갈려고 했음)

공양간은 관음전 지하에 있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공양간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딱히 이
정표가 없어서 초행인 사람은 공양간을 찾기가 숨은그림찾기처럼 어려울 수 있는데, 처음에는
정문에서 바로 정면에 보이는 요사가 공양간인 줄 알았다.
미타사의 숨겨진 공간 같은 지하로 내려가니 방으로 이루어진 공양간이 모습을 비춘다. 시간
이 15시에 이르렀음에도 공양을 드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초파일 절 구경을 온 양이들도 사람
들의 안내를 받으며 서툴게 밥을 먹고 있었다.

초파일이 되면 대부분의 절집에서 오전부터 오후 적당한 시간까지 공양밥과 떡 등 여러 먹거
리를 제공한다. 이는 절의 초파일 인심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미타사는 밥과 나물(호박나물,
콩나물, 김치 등), 고추장은 소신껏 퍼가면 되며, 이들을 그릇에 담아 비벼먹는 이 땅의 흔한
절밥 스타일이다. 그 외에 나박김치와 미역국(고기는 없음)도 있었고, 심지어 부추전 등의 전
도 있어 찬이 매우 풍성했다.
그릇에 무리가 갈 정도로 담았던 밥과 음식은 불과 3~4시간 전에 불암산 학도암에서 배부르게
공양을 했음에도 넘치는 시장기에 그만 모두 빈 그릇으로 만들어 버렸다. 밥이 맛있기도 했지
만 오전부터 이른 더위를 무릅쓰고 절 투어를 벌인 탓에 눈이 침침할 정도로 피곤하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시장기도 상당했다. 아무리 배터지게 먹어도 그만큼 절투어에 칼로리를 모조리 소
비하니 이내 배가 고파지는 것 같다.


▲  미타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미역국, 비빔밥, 나박김치)

기분 좋게 공양을 마치고 구석에 마련된 씽크대에서 그릇과 수저를 설겆이했다. 보통 절집에
서 공양을 할 때 자기가 먹은 그릇은 자기가 씻도록 유도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1그릇 잘
섭취했으니 그 정도의 밥값은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

후식으로는 믹스 커피가 준비되어 있어 식곤증의 희롱에서 벗어날 겸 1잔 마셨다. 아직도 길
이 바쁜데 벌써부터 나른해지면 곤란하다. 초파일은 공양밥에 초파일 행사, 절에 깃든 문화유
산까지 볼거리도 많고 먹거리도 많아 이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누리고 싶은 마음에
욕심이 너무 일어난다. 그러니 초파일 해가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여 그날
만큼은 해를 그 자리에 강제로 붙잡아두고 싶을 따름이다.

공양을 끝으로 약 1시간 반에 걸친 미타사 답사는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본글은 여기서 마
무리를 지으며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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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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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조선 후기 마애불을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 중계동 불암산 학도암 ~~~ (서울둘레길, 맛있는 공양밥 1그릇)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불암산 학도
암 ~~~~~

▲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  학도암 마애사리탑

▲  약사전 석조약사3존불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이 다가왔다.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초파일 앓이가 심하여 그날에 대한 설레감이 다른 날보다
무척 크다. 하여 매년 거르지 않고 내가 서식하고 있는 서울 장안의 오래된 절과 문화
유산을 품은 현대 사찰을 중심으로 순례를 가장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예전에는 경기도 지역과 멀리 경북 문경의 봉암사(鳳巖寺, 2003년)까지 찾아가곤 했으
나 2011년부터는 서울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인다. 서울 시내에도 오래된 절이 제법 많
고 역사는 짧아도 문화유산을 간직한 절이 꽤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을 찾아다니
기가 어언 10여 년, 이제는 미답(未踏)으로 남은 절이 고갈 직전에 이르렀다.

그래도 1년에 오직 하루뿐인 초파일이니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예전에 가봤던
오래된 절 중, 문화유산을 보유한 절까지 포함시켜 절 투어 동선을 짜보았다. '어디를
가야만 잘갔다고 칭찬을 들을까~?' 장소를 물색하다가 집에서 가까운 불암산 학도암에
조선 후기 마애사리탑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학도암은 이미 여러 번이 인연을 지은 절이나 정작 마애사리탑은 만나지 못했다. 그는
2015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새내기 문화유산으로 아직까진 낯설은 마애사리탑의 생
김새도 구경하고 학도암의 초파일 인심도 확인할 겸, 그곳을 이번 초파일의 첫 답사지
로 정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초파일의 아침이 밝아왔다.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꿈나라에서
서둘러 벗어나 오전 11시에 도봉동 집을 나섰다. 집 부근에서 도봉구 마을버스 09번을
타고 창동역(1,4호선)으로 이동한 다음, 중계본동으로 가는 1142번 시내버스로 환승하
여 노원우체국에서 두 발을 내린다.
미로처럼 얽히고 설킨 중계본동의 여러 아파트를 지나 학도암으로 인도하는 골목(중계
로14다길)으로 들어섰는데, 날이 날인지라 절로 향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속세와 자연의 경계에 징하게 말뚝을 박은 노원교회를 지나면 키다리 아파트와 주택들
대신 불암산의 싱그러운 숲이 펼쳐진다. 숲 바로 직전에는 황금색 배들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배밭이 펼쳐져 있는데, 이들은 서울의 토산품인 먹골배로 봉화산(烽
火山)과 태릉 주변, 불암산 주변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다. 번잡한 시가지가 주로 연상
되는 서울에서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배밭을 보니 마치 서라벌 경주에서 고구려 청동
호우를 만난 듯 꽤나 낯설고 신선하다.

불암산의 시원스런 산바람에 번뇌를 살짝 부탁하며 숲길을 오르면 천하 둘레길의 성지
로 추앙받는 서울둘레길이 마중한다. 총 거리가 무려 157km에 이르는 서울둘레길은 불
암산둘레길의 신세를 지며 남북으로 흘러간다.
살방한 산길의 정석인 둘레길의 유혹을 뿌리치고 연등의 물결을 따라 계속 오르막길을
고집하면 보이지 않던 학도암 경내와 주차장이 슬슬 꽁무니를 비춘다. 여기서 잠시 경
내를 접어두고 주차장 직전 오른쪽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를 주목해보자. 그 바위 피부
에 나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마애사리탑이 진하게 깃들여져 있다. 하지만 너무 없는 듯
자리하고 있어 그의 존재를 눈치 챈 사람은 거의 없었다.


▲  학도암으로 인도하는 불암산 숲길
녹음(綠陰)에 잠긴 나무들이 시원한 내음을 베풀며 벌써부터 달라붙은
더위의 산물(땀)을 싹 단죄한다.


 

♠  학도암(鶴到庵) 입문 (마애사리탑)

▲  학도암 마애사리탑(磨崖舍利塔)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4호

경내 직전에 자리한 커다란 바위에는 마애사리탑 2기가 살짝 서려있다. 마애사리탑이란 적당
한 바위에 감실(龕室)을 파고 사리를 봉안한 것으로 조선 후기(19세기)에 서울과 경기도 일부
지역 사찰에서 나타나는 서울 스타일의 사리탑<승탑(僧塔)>이다. 현재 학도암과 도봉산 천축
사(天竺寺)에 19세기 마애사리탑이 전하고 있으며, 인왕산 석굴암(石窟庵)과 상도동 사자암(
獅子庵) 등에 20세기 사리탑이 전할 뿐, 널리 유행하지는 못했다.

마애사리탑을 지닌 절은 하나 같이 산중에 자리해 있어 사리탑을 닦을 자리가 여의치 못했고
재정도 넉넉치 못한 경우가 많았다. 하여 절 부근 바위를 활용해 조촐하게 공간을 다듬고 감
실을 닦은 다음 사리함을 봉안한 마애사리탑이 반짝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일반 승탑보다 제작
비용도 많이 저렴하며 공간도 적게 잡아먹을 뿐 아니라 바위만 있으면 되니 갖추기는 쉽다.


▲  바위에 문신처럼 새겨진 마애사리탑
왼쪽은 '청신녀월영영주지탑', 오른쪽은 '환
당선사취근지탑'


학도암 마애사리탑은 바위 피부에 비석 모양으로 길쭉하고 얕게 자리를 만들고 윗쪽에 네모난
감실을 두어 사리함을 봉안했다. 하지만 그 감실은 오래전에 털렸고 그곳에 깃든 사리함 등의
유물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남아있는 것이 전혀 없다.

왼쪽 사리탑은 '청신녀 월영영주지탑(淸信女 月影靈珠之塔)'으로 월영영주란 여인의 납골당이
다. 승려도 아닌 여인 신도의 사리탑을 경내 밑에 만들어줄 정도라면 절에 대한 공헌이 꽤 컸
던 모양이다. '嘉慶(가경)二十四年 己卯十月'이란 글씨가 옆에 새겨져 있어 가경24년 을묘년(
1819년) 10월에 조성되었음을 귀뜀해주고 있으며, 오른쪽에 대자연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
가 하나 있을 뿐,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
그리고 오른쪽 사리탑은 '환□당선사 취근지탑(幻□堂禪師 就根之塔)'으로 '환(幻)'과 '堂'
사이에 마치 총탄이 요란하게 할퀴고 간 듯, 크게 구멍이 나서 그 사이에 자리한 1자는 확인
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머지 글씨는 멀쩡하여 '환ㅇ당 취근 선사'의 사리탑임을 알려준다.
조성 시기는 쓰여있지 않으나 돌을 다듬은 수법이나 양식으로 미루어 왼쪽 사리탑과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다만 누가 더 나이가 많은 지는 견주기가 어렵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마애사리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감실이 잘 남아있으며, 고맙게
도 사리탑 주인공과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19세기 초반 마애사리탑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하여 뒤늦게나마 2015년 8월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만약 그 글
씨가 없었다면 비록 서울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조선 후기 마애사리탑이라고 해도 그 가치
를 저평가 받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사리탑을 조성한 옛 사람들의 작은 센스가 이들의 가치를 돋보이게 해주어 사리탑의 미
래까지 챙겨준 것이다.


▲  주차장에서 바라본 학도암 (오른쪽 바위 위에 석조지장보살상이 있음)

학도암의 낯선 존재, 마애사리탑을 둘러보고 초파일의 흥겨움으로 가득 묻어난 학도암 경내로
들어섰다. 절은 가파른 경사에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포근히 자리를 닦았는데 주차장에서 경
내로 인도하는 길은 크게 2개로 계단길과 차량을 위해 넓게 지은 오른쪽 길이 있다. 어느 길
로 가던 취향에 따라 골라가면 되나 이들 모두 경사의 압박이 조금 있어 잠시 숨을 헐떡이게
한다.


▲  경내에서 바라본 천하
숲 너머로 중계본동과 하계동, 월계동, 성북구, 북한산(삼각산)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잡힌다.


▲  새 건물 냄새가 진동하는 대웅전(大雄殿)

몇년 만에 다시 찾은 학도암은 세월의 흐름 그 이상만큼이나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동안
뇌리 속에 깊히 박힌 학도암의 모습 대신 '내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또다른 모습이 나를 맞이했던 것이다.

예전에는 선방, 요사(寮舍), 종무소(宗務所)의 역할까지 모두 도맡았던 법당이 대웅전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2014년에 그 건물을 부시고 번듯하게 대웅전을 지어올렸고 지장보살상이 있
던 자리에는 종무소를 닦았다. (지장보살상은 바위 쪽으로 밀려남) 그리고 대웅전 아랫쪽에는
공양간을 갖춘 요사를 두어 철저히 분업화시켰다. 하여 예전보다는 정리되고 깔끔한 모습이지
만 한편으로는 낯설게 다가온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석가불과 지장보살, 관음보살로 이
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뜨락에는 하얀 천막과 의자를 넉넉히 깔아 중생들의 편의
를 배려하였고, 관불의식의 현장도 닦아놓아 소소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럼 여기서 잠시 학도암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대웅전 현판의 위엄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

학도암은 불암산(507m) 서남쪽 자락 160m 고지에 포근히 둥지를 튼 조그만 절이다. 숲이 무성
하고 작은 계곡이 옆에 흐르며, 멋드러진 바위가 주변에 포진해있어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낸
다. 예로부터 이렇게 빼어난 경승지에는 학과 관련된 전설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데, 이곳 역
시 학이 날라와 머물렀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하여 학이 왔다는 뜻의 학도암이란 이름을 지니
게 되었다.

이 절은 1624년 무공화상(無空和尙)이 불암산 어딘가에 있던 옛 암자를 옮겨와 창건했다고 한
다. 허나 그 암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으며, 불암산에는 적당한 절터도 전해오
지 않는다. 게다가 관련 기록도 남아있질 않아 창건 시기에 심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허
나 앞서 언급했던 19세기 초반 마애사리탑이 전하고 있어 적어도 17~18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870년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주에 힘입어 절 뒤쪽 바위에 거대한 마애관음보살을 새겼으며
1875년에 벽운화상(碧雲和尙)이 절을 중창했다. 1878년에는 한씨(韓氏) 일가의 시주로 마애관
음보살을 보수했고, 1885년 벽운화상이 수락산 흥국사(興國寺) 출신 화승(畵僧)인 경선(慶船)
에게 부탁하여 불상 1구를 개금(改金)하고 불화 6점을 봉안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1922년 성담(聖曇)이 주지로 있으면서 개인 소유로 넘어갔던 절 소유의 산림 10여 정보를 매
입하여 절의 경계를 넓혔으며, 1966년에 주지 김명호가 법당을 중건했다. 1970년 영산회상도
를 봉안하고 1972년에 삼성각에 칠성탱과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2000년에는 마애불 옆에 있는
조그만 자연동굴을 넓혀 석조약사3존불을 안치해 약사전으로 삼았다.
그리고 2005년에 승려 무이
(無二)가 법당 남쪽 공터를 닦아 석조지장보살상을 봉안했고, 2014
년에 다용도로 쓰이던 법당을 밀고 새로 대웅전과 요사, 종무소를 짓고 대웅전 밑에 공양간을
지어 2016년에 완성을 보았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약사전, 요사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
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마애관음보살좌상과 마애사리탑을 간직하고 있다.

개발의 칼질이 절 밑 500m 아래까지 밀고 들어와 옛날과 달리 속세와 많이 가까워졌지만 짙은
숲이 그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고 있어 적막하고 고즈넉한 산사의 멋과 분위기를 잘 간직하
고 있으며, 절의 규모도 아담하여 두 눈으로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동 3 (종계로14다길 89 ☎ 02-930-6555)

▲  바위 위에 자리를 닦은 지장보살좌상
(2005년에 조성됨)

▲  대웅전 옆에서 바라본 마애관음보살좌상과
그를 품은 거대한 바위


 

♠  학도암 둘러보기

▲  초파일 특수를 위해 고생하는 아기부처의 관불의식 현장

초파일을 맞이하여 아기 부처가 연꽃대좌를 갖춘 코끼리를 타고 1년 만에 화려한 외출을 나왔
다. 그 적지 않은 시간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무료하게 지낸 터라 간만에 외출에 신이 난 표정
인데, 절을 찾은 중생들은 그의 머리에 물을 껴얹는 이른바 관불(관정)의식을 행하며 그의 생
일을 축하한다.
아기부처 바로 옆에는 옥의 티처럼 불전함이 덩그러니 놓여져 애타게 중생들의 호주머니를 쳐
다본다. 마치 오늘날 돈으로 얼룩진 종교의 한 단면을 보여주듯이...


▲  대웅전, 종무소 앞에서 바라본 경내 뒷쪽
사진 가운데에 보이는 바위에 마애관음보살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  삼성각(三聖閣)
마애관음보살 우측 구석에 삼성각이 있다.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1972년에 조성된 칠성탱과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칠성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진 칠성탱

▲  산신 식구들의 단란함이 느껴지는 산신탱


▲  석굴 형식으로 이루어진 약사전(藥師殿)

마애관음보살과 삼성각 사이에 동굴을 품은 장대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밑도리에 약사전
이 아늑하게 둥지를 틀었다. 원래는 1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동굴로 그 내부에 기
도처로 쓰이는 공간이 있었으나 2000년에 동굴 내부를 넓히고 다져서 약사여래좌상과 일광보
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봉안하고 약사전으로 삼았다.
약사전은 석굴 불전(佛殿)으로 한여름에는 시원하고 한겨울에는 따스해 경내의 조촐한 피서지
역할도 도맡고 있다.


▲  약사전 석굴에 자리를 닦은 석조약사3존불
연꽃 무늬가 새겨진 대좌에 앉아 왼손에 약합(藥盒)을 쥐어든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보관(寶冠)을 눌러쓴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좌우를 지킨다.

▲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4호

경내 뒷쪽이자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학도암의 자랑이자 꿀단지인 마애관음보살좌상이 있
다. 약사전을 품은 바위보다 2배 이상이나 커다란 바위에 진하게 깃들여져 있는데 자신이 의
지한 바위만큼이나 장대한 규모로 마애불의 높이가 무려 13.4m에 이른다. 허나 허공을 가득
메운 알록달록 연등이 그의 모습을 온전하게 담는 것을 허용치 않아 사진에 담는데 조금 애를
먹었다.

서쪽을 바라보고 선 그는 1870년 고종의 왕후인 명성황후의 지원으로 조성되었다. 보통 고려
시대 마애불은 각기 개성이 넘치고 거대한 모습을 자랑하는데 반해 조선시대 마애불은 스케일
이 무척이나 좁아터졌던 조선을 닮아서 덩치가 대체로 작았다. (건물이나 성문도 이전 시대보
다 많이 작아짐) 허나 이 불상은 고려 마애불의 화신(化身) 마냥 장대한 규모를 자랑하여 명
성황후의 커다란 야망이 마애불에 고스란히 깃들여진 듯하다.
1870년 한씨 일가의 시주로 마애불을 보수했으며, 불상 왼쪽에 그와 관련된 50여 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조성시기와 제작자, 시주자의 정보를 소상히 알려준다.

서울 지역에서는 북한산(삼각산) 승가사(僧伽寺)에 깃든 고려시대 마애여래좌상(☞ 관련글 보
러가기
)에 버금가는 규모로 암벽에 선각(線刻)으로 처리된 선각 마애불이다. 이제 150년 정도
묵은 한참 때라 선의 아름다운 미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특이하게도 관음보살을 그 대
상으로 하여 조성했는데, 이 땅에서 오래된 마애불이 수천 개가 있지만 정작 관세음보살이 주
인공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  온전하게 담은 마애관음보살좌상의 위엄
(2010년 4월)

▲  연등의 눈치를 피하며 옆에서 담아본
마애관음보살좌상


▲  마애관음보살의 얼굴

마애관음보살의 얼굴은 가늘면서도 볼에 살이 좀 있어 보인다. 좌우로 길쭉한 눈은 지그시 감
겨져 있고 그 위에 무지개처럼 구부러진 눈썹이 떠 있다. 그 눈썹 사이에 동그란 백호가 두텁
게 박혀있고, 코는 크고 두툼하여 복스럽게 보인다. 불상이 선각으로 얕게 조성되었지만 코만
큼은 돋음새김으로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약간 비뚤어져 보이는 입은 굳게 다물고 있으며, 전
체적인 얼굴 표정은 편안해 보인다.

얼굴 주변을 밝히는 동그란 두광(頭光) 안에 보관을 표현했는데, 하얀 피부의 돌에 조각을 해
서 그렇지 정말로 호화로운 보관이다. 이마 위쪽에는 연화대좌를 갖춘 조그만 석가불의 모습
이 보이는데, 보관에 따로 불상까지 갖춘 관음보살은 처음이라 눈길을 단단히 부여잡는다. 보
관 양쪽으로 뻗어나온 관대(冠帶) 양쪽에 구슬처럼 달린 마름모 모양의 사슬 장식이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주렁주렁 달려 있어 보관에 대한 군침을 진하게 자극시키는데, 그가 잠시 보관을
내려놓는 사이에 살짝 가져가 머리에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  마애관음보살의 밑도리

마애불은 활짝 핀 연꽃대좌 위에 앉아있는데, 그 대좌 위로 오른쪽 발이 발가락, 발바닥과 함
께 보인다. 왼발은 옷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왕실의 발원으로 조성된 마애불로 조각 솜씨는 섬세하고 화려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마애
불로 꼽힐 만하다. 게다가 조성 관련 명문이 새겨져 있어 마애불의 가치를 더욱 끌어올려준다.
마애불 앞에는 기도처가 마련되어 있으며, 석등(石燈) 2기가 마애불 주변의 어둠을 몰아낸다.


▲  마애관음보살상에서 바라본 천하 (중계동과 노원구, 성북구 지역)
마애관세음보살 누님의 가피가 있기에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지역들은
오늘도 평안하다.

▲  학도암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초파일 절 투어 재미의 하나이자 백미(白眉)는 바로 공양밥 섭취이다. 지금까지 두 눈과 사진
기를 흥분이 넘치도록 호강을 시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된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마애관음보살좌상이고 뭐고 바로 공양밥 행렬에 동참하고 싶었으나 그 마음을 접고
경내를 우선 둘러보았다. 경내가 조촐하고 마애관음보살과 마애사리탑을 빼면 고색의 유물이
전혀 없기 때문에 답사 시간은 그리 많이 필요가 없다.

공양간 주변은 이미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시장통을 이루었다. 학도암에서 정성을 다해 준비
한 공양밥은 실외에서 나눠주고 있었는데, 그 주변과 공양간 실내까지 사람들로 가득했던 것
이다. 다행히 밥을 받는 줄은 그다지 길지 않아서 금방 밥을 받았다.
이곳 공양밥은 밥이 담긴 그릇에 호박과 콩나물, 시금치 등 갖은 나물과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다. 이른 더위와 비빔밥의 매운 맛을 잠재우고자 시원한
미역냉국이 딸려 나왔고, 후식용으로 수박 1조각과 절편이 담긴 떡 1봉지도 같이 제공되어 아
주 넉넉한 초파일 인심을 보여주었다. (밥과 나물은 리필 가능함)

팔이 부러질 정도로 나온 공양밥을 들고 적당한 자리를 찾다가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어던지고
공양간 내부로 들어가 간신히 자리를 잡고 공양밥 섭취에 임한다. 양이 많아 보이던 공양밥이
지만 시장기가 상당해 숟가락 몇 번 만에 이내 빈 그릇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수박과 절편까
지 섭취하니 그야말로 점심 1끼 배부르게 잘먹었다.
그렇게 공양밥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후식거리로 믹스 커피도 준비되어 있어 커피까지 1잔 챙
겨먹으며 식곤증을 단죄했다. 그 시간에도 학도암에는 많은 사람들이 초파일 분위기를 누리고
자 꾸역꾸역 들어왔고, 공양간 역시 계속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 공양을 끝으로 오랜만에 찾은 학도암과의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나왔다. 나에게는 그
날 학도암이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  학도암을 뒤로하며 ~~~ (불암산 숲길)

▲  중계본동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12호

중계본동 시내로 나오니 중계로 길가에 오래된 느티나무 하나가 나좀 보고 가라며 발길을 붙
잡는다. 뭔가 싶어서 호기심에 살펴보니 110년 정도 묵은 보호수 느티나무였다.
그는 높이 17m, 둘레 3.4m로 2005년에 서울시 보호수의 등급을 받았다. (그 당시 추정 나이는
약 100년) 예전에는 동네 정자나무의 역할을 하였지만 이곳까지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고 아파
트가 마구 들어서면서 이제는 가로수의 역할로 바뀌었다. 길 건너편에도 오래된 보호수가 있
으나 모두 쿨하게 무시하고 다음 미답지 사찰로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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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산사 나들이 ~ 비봉능선 밑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 봄맞이 산사 나들이, 북한산 금선사 '

▲  금선사 목정굴 수월관음보살좌상


 

♠  금선사(金仙寺) 입문 (목정굴)

▲  목정굴 입구

봄이 한참 익어가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금선사를 찾았다. 비봉과
사모바위를 간직한 비봉능선을 오르면서 그 길목에 자리한 금선사를 오랜만에 들리게 되었는
데, 비봉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목정굴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을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금선사로 이어지나 나는 목정굴 코스를 선호
한다. 그만큼 목정굴은 금선사의 상징으로 그가 없는 금선사는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다름이
없다. (비봉능선으로 바로 가고자 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됨)


▲  문짝이 없는 무당문(無堂門)

목정굴 방면으로 길을 잡으면 잠시 내리막길이 나타나면서 봄가뭄에 영혼까지 털린 말라버린
계곡이 나온다. 계곡에 액체가 좀 있어야 무거운 번뇌를 잠시나마 흘려보낼 수 있을텐데, 그
럴 물도 없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그런 계곡을 건너면 다시 오르막길이 펼쳐지면서 문짝
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무당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문은 2008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 이름은 무무문(無無門)이다. '무무'란 불법(佛法)의 깊
은 진리를 깨닫는데 한계가 없다는 뜻으로 일주문이 없던 시절에는 나름 일주문의 역할도 하
였으며, 대자연의 넓은 마음이 담긴 듯, 문짝도 담장도 없는 그냥 문의 형태만 취하고 있다.


▲  커다란 바위에 조성된 목정굴

목정굴로 인도하는 계단의 끝에 이르면 3면이 바위로 막힌 막다른 곳이 나온다. 만약 전쟁에
서 이런 곳으로 내몰려 적의 공격을 받으면 그야말로 아작나기 좋은 지형으로 정면에 보이는
바위에 목정굴이란 석굴(石窟)이 깃들여져 있다.

목정굴은 조그만 자연산 동굴로 오랫동안 기도처로 이용된 도심의 숨겨진 굴이다. 태조 이성
계의 국사(國師)이자 금선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올렸다고 전
하며, 조선 23대 군주인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현장이기도 하다.

석굴 내부는 원래 공터였으나 1996년 동굴을 대폭 손질하면서 수월관세음보살상(수월관음보살
)과 예불공간 등을 만들고 보살상 우측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을 뚫었으며, 수월관세음보살
을 봉안하면서 금선사는 대내외적으로 관음도량을 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목정굴에는 숨겨진 볼거리가 여럿 있는데, 요란하게 비가 내릴 때는 목정굴 앞에 임시
로 폭포가 형성되어 힘차게 물을 쏟아내며, 석굴 앞 우측 바위를 잘 살펴보면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삼매부처상이 있으니 술래의 심정으로 잘 찾아보기 바란다. (난 찾지 못했
음)


▲  목정굴의 주인, 수월관세음보살(水月觀世音菩薩)

목정굴 안에는 수월관세음보살 누님이 환한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석굴 내부는 무척 시원
하여 이른 무더위를 단죄하고 있으며, 겨울에는 수월관음의 따뜻한 마음이 동굴 내부에 가득
서린 듯 추운 몸을 녹이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동굴 천정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고
석굴 구석으로 흐르는 물과 그들이 내는 졸졸졸~♪ 음악 소리가 경쾌하기 그지 없다.

앙련(仰蓮)으로 뒤덮힌 대좌(臺座) 위에 여인들도 시샘할 정도로 어여쁘게 앉아있는 수월관음
은 왼손에 감로수(甘露水)가 담긴 정병(淨甁)을 쥐어들고 있는데, 병의 크기가 다른 관세음보
살상의 정병보다 조금 커보인다. 그의 정병을 보니
왜 자꾸 동동주나 막걸리 술병 생각이 나
는 걸까? 정말 저게 술병은 아닐까?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 관세음보살 누님이 왜 술을 마시
겠는가? 하지만 그의 하얀 얼굴은 술에 약간 취한 듯, 졸린 표정처럼 보이기도 하니 혹 고적
한 석굴에서 건전하게 몰래 마신 것은 아닐까?

수월관음 앞에는 예불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불단에는 꽃 등이 놓여져 있어 중생들의 높인 인
기를 실감케 한다. 그의 우측에는 금선사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는데, 높이가 낮고 물이 흐르
고 있어 조심해서 오르기 바란다. 잘못하면 암벽에 머리가 쾅 부딪칠 수 있어 암벽을 아프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옆에서 바라본 수월관세음보살상

▲  경내로 인도하는 비좁은 계단

목정굴에는 금선사의 대표 설화인 순조 탄생 설화가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22대 군주인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첫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잃고 서른
이 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해 늘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88년경,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승려인 용파(龍波)가 상경하여 정조를 알현하면서
불교계의 폐단과 승려 차별을 시정해 줄 것을 탄원했는데, 정조는 불교 개혁을 약속하면서 대
신 왕자의 탄생을 기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아들을 얻지 못하니 이참에 부
처의 힘을 빌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불교계의 개혁을 위해서라면 지옥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굳었던 용파는 왕의 어려운
숙제를 기꺼이 수용하며 금선사에 머물던 농산(聾山)을 찾아가 같이 기도에 들어갔다. 그들은
같은 곳에서 기도를 하지 않고, 농산은 목정굴에서, 용파는 수락산 동쪽 내원암(內院庵)에서
따로 300일 이상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용파는 선정(禪定)에 들어 천하를 살펴보니 왕자의 몸을 받아 태
어날 사람이 농산 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여 농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이번 기회에
금수저로 태어나 팔자를 필 것을 권하니 농산은 흔쾌히 수락했다. 왕자로 태어나는 것인데 어
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래서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꿈에 나타나 왕자로 환생
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기도를 마치고 열반(숨을 거둠)에 들었다고 한다.

이때 왕실에 무기명 서찰 하나가 올라왔는데 그 서찰에는 '경술(庚戌) 6월 18일 세자탄강(世
子誕降)'이라 적혀 있었다고 하며 바로 그날 순조가 태어났다.
순조가 태어나던 날, 도성(都城)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瑞氣)가 궁궐에 닿아 수빈박
씨의 산실(産室)을 휘감았다. 정조는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그 서기의 출처를 찾아보니 바
로 목정굴이었다고 하며, 굴 안을 살피니 좌선을 한 채, 정수리에서 서기를 발산하고 있는 농
산의 시신을 발견했다.
농산이 죽어서 자신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것을 알게 된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승려를 차별하
던 폐습을 없애고 내수사(內需司)에 명을 내려 금선사를 크게 중창케 했다. 그 인연으로 지금
까지 순조의 탄신제(誕辰祭)를 지내고 있다.

이 설화대로 농산이 정말 순조로 환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경지가 깊은 승려라고 해
도 그건 사람의 능력 밖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전설이 대구 파계사에도 한 토막 전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내용이 거의 똑같다. 거기서는 숙종(肅宗)이 왕자<영조(英祖)>의 탄생을
부탁하는데, 그 부탁을 받은 승려가 파계사 부근 성전암(聖殿庵)의 현응(玄應)이다. 이 현응
의 법명은 용피<龍被, 또는 용파(龍波)>로 금선사의 용파와 이름까지 같다. 그러니 파계사의
영조 탄생 설화를 금선사에서 등장 인물만 조금 바꾸는 선에서 그대로 모방한 듯 싶다.

설화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지만 용파로 상징되는 파계사 승려와 농산으로 상징
되는 금선사 승려가 왕자의 탄생을 위해 기도를 올린 듯 싶으며, 그들 기도가 효과를 봤거나
아니면 기도 도중 농산이 사망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을 파계사 전설을 가져와 '농산이 왕
자로 환생했다'는 식의 그럴싸한 전설로 포장한 것이다. 어쨌든 순조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았고, 수락산 내원암 사적기(史蹟記)에는 농산, 용파 두 승려가 주고
받은 서신의 내용이 남아있다고 한다.


▲  목정굴 바위 정상

▲  목정굴 정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수월관세음보살 우측에 뚫린 좁고 어두운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목정굴 정상이 나오면서
다시금 찬란한 햇살을 보게 된다. 정상에서는 목정굴 밑 계곡을 비롯해 숲 너머로 탕춘대 능
선과 인왕산(仁王山) 등이 시야에 들어오며, 여기서 목정굴 입구에서 갈라진 오른쪽 산길과
다시 하나가 되어 경내로 이어진다.
경내로 향하면 절을 가리고 선 2층짜리 설선당이 나타나고 그 앞에 금선사 발전에 크게 기여
한 민영택 여사를 비롯한 공덕비(功德碑) 3기와 대원각의 승탑이 있어 그들의 이름 3자를 영
원히 기린다.

▲  민영택을 비롯한 공덕비 3형제

▲  절을 크게 일으킨 대원각의 승탑(僧塔)


▲  2층 규모의 설선당(設禪堂)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는 설선당은 근래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건물로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에는 밥을 먹는 공양간이 있으며, 1층과 2층은 종무소와 선방(禪房), 템
플스테이 장소로 쓰인다. 휴일 점심에는 산꾼과 답사꾼에게 흔쾌히 공양밥을 제공하는데 맛이
제법 괜찮다. (주로 비빔밥을 제공함)


▲  연등의 고운 물결, 설선당과 반야전 뜨락

설선당 밑도리에 난 문을 들어서면 숲에 감싸인 금선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설선당 옆
에는 청기와로 치장된 2층짜리 반야전이 있는데, 그는 2006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그 좌
측 소나무 앞에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이 있었다.
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석가3존불과 신중도를 머금고 있었으나 2005년 후반에
부셔버리고 옆 공터에 크게 반야전을 지었다. 건물 윗층에는 대웅전에 있던 석가3존불을 가져
와 예전 대웅전의 역할을 담당하게 했고, 아랫층은 별도로 해행당(解行堂)이란 이름으로 요사
(寮舍)와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금선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2층으로 이루어진 반야전(般若殿)

북한산(삼각산) 서남부의 대표적인 능선인 비봉능선 남쪽 밑에 금선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조계종 소속으로 종로1가에 있는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인데, 예로부터
여러 가지 영험담이 전해지고 있는 기도처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목정굴에서 소개
한 순조 탄생 설화이다.
       
이 절은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부탁으로 새 왕조의 도읍지를 정하고자 북한산(삼각산) 일
대를 살펴보던 중, 지금의 절 자리에 북한산의 강인한 정기가 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부처
가 여기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여기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금선(金仙)은 부처의
별칭으로 창건 설화의 진위여부는 장담하기 어려우나 조선 초나 중기에 산문을 연 것은 분명
해 보인다.

이후 서울 근교 기도도량으로 이름을 떨치면서 많은 왕족과 양반, 상궁(尙宮)들이 자주 찾았
다고 하며, 순조의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허나 왜
정(倭政) 때 절은 폐허가 되었으며, 1949년 승려 도공(道空)이 중건했다.
1996년 목정굴을 손질해 수월관세음보살을 봉안했고, 2008년에 반야전을 지었으며, 계속해서
설선당과 범종루, 일주문 등을 달아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절의 초창기 영역은 목정굴과 반야전 일대였으나 계곡을 따라 윗쪽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대적
광전과 삼성각을 지었고, 그 중간에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으면서 건물이 한데 몰려있지 않고
서로 떨어져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비좁게 자리한 탓에 경내가 길고 가늘게 이어진 것이
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반야전, 설선당, 삼성각, 연화당, 적묵당, 범종루 등 10
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신중도가 있으나 오래된
유물도 그게 전부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금선사의 모든 것이 좌초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기도처로 유명한 목정굴이 경내 밑에 자리해 있다.

서울 도심에서 불과 10리도 안되는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고적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누릴
수 있으며, 풍경도 아름답다. 또한 최근에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단
단히 재미를 보고 있으며 특히 외국인들의 수요가 많은 편이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구기동 196-2 (비봉길 137 ☎ 02-395-9911)
* 금선사 홈페이지는 밑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략하게 담은 반야전 벽화
왼쪽은 용파가 정조를 알현하며 그에게 어려운 숙제를 받는 장면, 중간은
금선사에서 기도에 들어간 용파, 오른쪽은 승려의 육신을 버리고
왕자로 다시 태어난 농산


 

♠  금선사 둘러보기

▲  옛 대웅전터와 오래된 소나무

반야전을 지나면 옛 대웅전이 있던 터와 소나무가 있다. 대웅전은 2005년에 사라졌으나 그 곁
을 지키던 소나무만이 무성하게 솔잎을 피우고 있는데, 나이는 약 200년 정도 묵었다고 한다.

경내에서 목정굴 다음으로 오래된 자연물로 아직 그 흔한 보호수(保護樹) 등급도 얻지 못했지
만 금선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몇 안되는 존재라 그가 마음껏 몸을 풀 수 있도록 넓게 공
간을 제공하였다.


▲  옆에서 본 소나무

이 소나무는 장대한 나이에 비해 키는 작다. 하늘로 향하지 못하고 대신 옆으로 몸집을 무한
정 불려 처진소나무처럼 된 것이다. 절에 있는 나이 지긋한 소나무 중에 이런 나무가 적지않
아 참으로 신기할 따름인데, 절에서 주장하는데로 나무에게도 과연 불심(佛心)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자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팔자인 것일까? 궁금하다.

▲  대적광전으로 인도하는 해탈문
(解脫門)과 108계단

▲  윗층과 아랫층의 이름과 용도가
서로 다른 연화당(蓮華堂)


소나무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왼쪽 해탈문은 대적광전으로 바로 이어지는 108계단길로 근
래에 닦여졌다. 그리고 오른쪽 길은 계곡을 따라 연화당, 적묵당, 삼성각을 거쳐 대적광전으
로 이어지는데, 대적광전까지 빨리 가고 싶다면 약간 각박하긴 하지만 108계단길을 이용하면
되고 느긋하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계곡길을 이용하면 된다.

계곡길을 따라가면 계곡 건너에 나무 다리를 늘어뜨린 2층짜리 연화당을 만나게 된다. 이 건
물은 1층과 2층이 이름과 성격이 서로 틀린데, 1층은 연화당이라 불리는 납골당(納骨堂)으로
영가(靈駕)를 위한 공간이며, 그 중심에 지장보살좌상이 들어앉아 그들의 극락왕생을 챙겨준
다. 금선사의 든든한 밥줄로 약 600여 기의 유골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2층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인 미타전(彌陀殿)으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
로 한 아미타3존불과 2004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  연화당 앞에 놓인 나무 다리와 갈증에 빠진 계곡
봄가뭄으로 계곡이 바짝 타들어가면서 물방울도 보이지를 않는다.
계곡 위에 걸린 다리가 무색할 지경..

▲  소나무 뒤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연화당 맞은편 석축 위에는 적묵당이 터를 닦았다. 이 집은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저리보면 1
층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3층이니 겉모습에 속지 말자. 팔작지붕을 짊어진 3층은 주지승의 거
처이며 그 밑에 가려진 1층과 2층은 일반 승려의 거처이다.


▲  계곡 위에 무지개처럼 걸린 홍예다리

▲  경내 윗쪽에 자리한 큰 바위와 약수터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나면 계곡 위에 걸린 홍예다리가 나온다. 근래 마련된 돌다리로 비록 고
색의 내음은 익지도 못했지만 여인의 눈썹처럼 선이 아름답다. 거기에 오색영롱한 연등을 잔
뜩 머금고 있으니 더욱 화사해 보인다.
그 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과 삼성각으로 이어지며,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곡길을 좀 들
어가면 그 길의 끝에 커다란 바위가 웅크리고 있다. 바위 위에는 비봉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여기서는 올라가는 정식 길은 없으며, 바위 밑은 안쪽으로 쑥 들어가 조촐하게 그늘진
공간이 있는데, 비와 눈을 피하기에 아주 좋은 터로 북한산(삼각산)이 베푼 물이 용솟음치는
약수터가 수줍은 듯 자리한다.
금선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의 절반은 이곳에서 시작되어 흐르며, 그 옆에는 봄가뭄에 말
라비틀어진 조그만 폭포가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바위에게 주어진 이름은 딱히 없으며, 바위의 준수하고
거대한 용모를 보니 절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  바위 밑에 자리한 샘터 (물은 안마셨음)

▲  연등의 조촐한 향연이 펼쳐진 홍예다리


▲  삼성각(三聖閣)

홍예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이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으며, 원
래는 그들이 각각 별도의 건물을 지니고 있었으나 2005년에 현 건물을 증축하면서 이곳에 싹
모아두었다.


▲  봄 햇살이 내려앉은 대적광전(大寂光殿)

삼성각과 이웃한 대적광전은 금선사의 공식 법당으로 높직한 곳에 들어앉아 경내를 굽어본다.
비로자나불의 거처로 2005년에 지어졌는데, 옛 대웅전에 있던 불상과 신중도, 그리고 2005년
에 마련된 금고(金鼓)를 가지고 있다.


▲  대적광전 비로자나3존불

대적광전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이 지권인(智拳印)의 제스처를 보이며 앉아있고, 그 좌우로 노
사나불(盧舍那佛), 석가불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중생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들 뒤로
든든히 자리잡은 후불탱은 2005년에 제작된 것으로 색채가 무지 곱다.

       ◀  금선사 신중도(神衆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1호

대적광전 좌측 벽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목정굴과 느티나무 등의 자연물 제외)인
신중도가 액자 속에 소중히 깃들어져 있다.
주위에는 비로사나후불탱과 새로 만든 신중도
등의 번쩍이는 그림이 있으나 고색이 자욱한
신중도에만 오로지 눈길이 쏠린다.

신중도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그려진 불화이
다. 이들은 원래 인도의 토속신이었으나 불교
의 일원으로 흡수되었으며, 지금은 그들의 뜻
과 다르게 부처와 경전을 수호하는 호법신(護
法神)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
르면서 그 수호의 범위가 확대되어 나라를 지
키거나 사람들의 재앙을 막는 역할까지 떠맡게
되어 업무량이 과중하게 늘었다.

이 신중도는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그림 밑부분에 딸린 화기(畵記)에 따르면 김지(金地)가
책임 화원, 경순과 채준이 각각 출초(出草)와 편수(片手)를 담당했다. 또한' 신중탱(神衆幀)
'이란 명문이 쓰여 있어 그림의 성격까지 소상히 알려준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신중탱이
아닌 '신중도')

그림 윗부분에는 연꽃가지를 비껴들고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중심으로 홀을 들고 선 일월자
천(日月自天), 공양물을 든 천동(天童)과 천녀(天女)가 그려져 있으며, 밑부분에는 위태천(
韋太天)과 팔부중(八部衆), 산신 등이 빼곡히 자리해 있다.
오래되고 괜찮은 신중도로 평가를 받아서 2002년 서울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장대한 내력에 비해 오래된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던 금선사에 한줄기 빛을 선사했
다.


▲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대적광전의 새 신중도
대적광전에는 신중도가 무려 2개씩이나 걸려있다. 신중도는 법당을 지키는
그림으로 1개도 아닌 2개나 있으니 제법 든든할 것이다.

▲  반야전에서 대적광전을 이어주는 108계단
누런 털을 걸친 묘공(猫公)이 묵묵히 계단을 오르며 자연을 음미하고 있다. 처음에는
숲으로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내 옆을 유유히 지나쳐 대적광전으로 향했다.
그는 금선사에서 기르는 묘공으로 이 시간대에 늘 경내를 순찰하는 모양이다.

▲  대적광전으로 향하는 묘공의 위엄
대적광전 주변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경계나 인사는 커녕 마치 무인지경으로 내 옆을 지나간다.

▲  속세를 향해 종소리를 울려라~~!
범종각(梵鍾閣)

▲  현판 글씨가 일품인 일주문(一柱門)


10년이 아니라 단지 몇 년만으로도 거뜬히 강산이 변하는 21세기, 오랜만에 발을 들인 금선사
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없던 건물이 마구 솟아나 절을 달리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중도와 대적광전, 소나무 등 기본적인 존재들은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
니 마치 옛 지기와 오랜만에 상봉한 기분이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금선사와의 짧은 인연을 마무리 지으며 비봉능선으로 발길을 재촉했
다. 앞서 절에 들어왔을 때는 목정굴로 왔지만 이번에는 목정굴 동쪽 산길로 갔는데, 근래에
지어진 2층 범종각과 일주문이 잘가라며 차례대로 배웅을 한다.
범종각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시지를 머금은 범종과 목어, 운판, 법고의 보금자리로 1
층은 통로, 2층은 범종각으로 쓰인다. 그 범종각을 지나면 바로 일주문이 나오는데, 그가 있
기 전에는 금선사에 그 흔한 일주문도 없었다.

명필을 자랑하는 일주문 현판은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이 쓴 것으로 '金仙寺'가 아닌 '金
僊寺(금선사)'로 쓰여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비록 음은 같지만 중간 한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허나 그 금선(金仙)이나 이 금선(金僊)이나 서로 같은 뜻이며, 다른 말로 대선(大
仙)이라 불리기도 한다.


▲  길목에 자리한 동자석(童子石)

일주문에서 한굽이 내려가면 동자석과 아리송하게 생긴 돌 하나가 내 발길을 붙잡는다. 동자
석은 두 손으로 홀을 쥐어들고 있어 문인석(文人石)의 냄새도 풍기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정
보는 없지만 생김새와 몸에 낀 고색의 때를 봐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키는 말그대로 어린이 키와 비슷한데, 절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귀족들의 묘역에만 사용할
수 있는 동자석이 절로 가는 길목에 떡하니 서 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인근에 헝
클어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사대부(士大夫)의 묘에서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정작 금
선사 부근과 구기동, 평창동에는 사대부의 묘가 전하지 않는다. (한양도성 밖 10리 이내에는
무덤을 쓸 수 없음)
그러니 절의 수호 의미나 이정표의 역할로 절의 단골 귀족(왕족, 사대부)이 세워준 것으로 여
겨진다. 그렇다고 절 자체적으로 감히 세울 리는 없을테고 말이다. 어쨌든 뭔가 특별한 의미
가 담겨져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며, 그로 인해 금선사의 격이 조금은 달라 보인다.


▲  이 돌의 정체는 무엇인고?

동자석 건너편에는 정체가 아리송한 돌덩어리가 서 있다. 동자석처럼 날씬하게 서 있지만 아
무런 조각이 없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연이야 낸들 알 도리는 없지만 무언가를 만드려다가
만 것 같은 99% 부족한 모습으로 자세히 바라보면 남근석(男根石)과도 비슷해 보인다.


▲  동자석과 정체가 묘연한 돌상의 뒷모습

▲  금선사를 뒤로하며~~~ (동자석과 목정굴 입구 중간)
본글은 여기서 끝. 금선사 이후 내용은 생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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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 나주 지역 제일의 고찰, 덕룡산 불회사 (불회사 석장승, 나주곰탕 1그릇)

 


' 겨울맞이 산사 나들이, 나주 불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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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회사 석장승
◀ 원진국사 부도
▶ 불회사 진여문과 사천왕문
▼ 불회사 대웅전

불회사 진여문, 사천왕문
   

 


 

겨울 제국이 천하만물의 격한 미움을 받으며 세력 확장에 열을 올리던 12월 첫 무렵에 따
뜻한 남쪽 땅인 전남을 찾았다. 그 전남에서 내가 격하게 반응을 보인 곳은 나주(羅州)의
유서 깊은 고찰 불회사이다. (불회사를 목적지로 정함)

오랜만에 햇님보다 일찍 부지런을 떨며 새벽의 차디찬 기운을 뚫고 한강을 건너 영등포역
으로 넘어갔다. 그곳에서 호남의 중심지인 광주(光州)로 가는 첫 열차를 타고 5시간 가까
이를 달려 광주역에 두 발을 내리니 겨울 제국에게 점령된 북쪽과 달리 가을의 따스한 기
운이 나를 맞이한다.

광주역에서 불회사까지는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접근성도 영 좋지가 않다. 예전에는
광주역을 비롯한 광주 도심부에서 불회사입구까지 바로 가는 나주시내버스가 있었으나 이
제는 남평에서 무조건 환승을 해야된다. (남평에서도 40~50분 정도 들어가야 됨)


 

♠  불회사 입문 (석장승, 원진국사부도)

▲  불회사 일주문(一柱門)

불회사입구에 이르니 웅장한 모습의 일주문이 마중을 나왔다. 문 현판에는 '초전성지 덕룡산
불회사(初傳聖地 德龍山 佛會寺)' 10글자가 쓰여있는데, 여기서 초전성지란 '불교가 처음 전
해진 성지'란 뜻이다. 이는 백제에 불교를 전한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366년에 창
건했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 땅 최초의 절이란 자부심을 담은 것이다. 허나 그 창건설은
그저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며, 실제 그가 불교를 들고 백제를 찾은 것은 384년이다.


▲  일주문 부근에 자리한 도암선사부도(道巖禪師浮屠)와 하얀 승탑

일주문을 지나면 가장 먼저 승탑(부도) 2기와 비석 1기, 그리고 속세와 그들을 이어주는 돌다
리를 만나게 된다. 승탑은 돌다리보다 1단 높은 곳에 나란히 자리해 있는데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진 왼쪽 승탑이 도암선사의 승탑이다.

도암선사(1805~1883)는 장성 백양사(白羊寺)를 중창했던 승려로 성은 차씨이다. 1817년 백양
사 심옥(心沃)에게 출가하여 1827년 인월(印月)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하루에 1끼
만 먹으면서 계율을 철저히 지키는 한편 전국의 이름난 승려를 찾아가 불경을 익혔다.
1840년 화월(華月)의 법을 이어받았는데, 이때부터 백양사에 머물며 후학들을 지도하고 계율
을 엄히 지키도록 했으며, 백양사 뒷쪽 백학봉 밑에 자리한 석실(石室)에 들어가 10여 년 동
안 불도를 닦고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천진암(天眞庵)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883년에 78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그가 이승을 뜨자 잠깐 인연이 있던 불회사에 탑을 만들어 사리를 봉안했는데, 승탑과 관련된
어떠한 안내문도 없어 무심히 지나치기가 쉽다. 그 옆에는 한참이나 후배인 하얀 피부의 승탑
이 서있고, 그 앞에 하얀 승탑의 주인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다.


▲  고색의 때로 자욱한 도암선사 승탑(부도)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승탑으로 검은 주근깨가 여기저기 피어났다.

▲  불회사 숲길 (일주문과 주차장 사이)

▲  그림처럼 펼쳐진 불회사 숲길 (석장승 직전)

불회사 숲길은 자연의 향이 그윽한 아리따운 숲길이다. 사찰 숲길의 갑(甲)으로 칭송받는 곡
성 태안사(泰安寺) 숲길과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전나무 숲길을 바짝 긴장시킬 정도로 아름
답기 그지 없는데, 300~400년 묵은 비자나무와 측백나무, 전나무, 삼나무 등이 무성해 온갖
내음을 누릴 수 있다. 특히 대웅전 뒷쪽에는 춘백(春栢)이 삼삼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5월에
연두빛으로 막 피어날 때 바라보는 대웅전과 그 뒷산의 모습은 놓치기 아까운 봄 풍경으로 꼽
힌다.
게다가 단풍이 늦게 들고 늦게 지기 때문에 11월 후반까지 단풍의 향연을 즐길 수 있고, 단풍
색깔이 광주 인근에서 가장 곱다고 한다. 허나 그 좋은 시기가 싹 지나간 시점이라 단풍은 거
의 다 지고 간신히 나뭇가지에 붙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초췌한 단풍잎만 남아있을 뿐이라
안그래도 늦가을이다 연말이다해서 우울해진 나의 정처없는 마음을 더욱 우울의 끝으로 밀어
넣는다. (불회사 비자나무 숲은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됨)


▲  불회사 석장승 - 국가 민속문화재 11호

랫 주차장에서 3~4분 정도 가면 불회사의 오랜 상징이자 지킴이인 석장승 1쌍이 마중을 한
다.
장승은 예로부터 부정한 기운을 막는 존재로 마을이나 절 입구에 세웠다. 지킴이 역할 외에도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는데, 청동기시대에 많이 나타나는 선돌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불회사 석장승은 절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는데, 절 수호와 절의 경계를 알리는 기능을 담
당했다. 그러니까 석장승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불회사의 영역이 시작되는 것이다. 길 양쪽에
1기씩 자리해 서로를 바라보고 있으며, 돌난간을 두룬 네모난 보금자리에 퉁방울 눈으로 뻣뻣
하게 서 있다. 서쪽 장승은 남자(이하 남장승), 오른쪽 장승은 여자(이하 여장승)로 초보자가
봐도 누가 남자고 여자인지 쉽게 구분이 간다.

남장승(키 315cm, 몸둘레 170cm)은 여장승보다 키가 크며, 동그란 큰 눈은 왕방울처럼 부라리
고 있고, 세모난 코는 주먹처럼 크다. 입은 일자로 그어져 있고, 입 밑에는 수염이 약간 묘사
되어 있으며 머리 위에는 불상의 무견정상(無見頂相)처럼 두툼히 솟아 있다. 몸통에는 그의
이름을 알리는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5자가 쓰여 있고, 얼굴 표정은 약간 인상을 쓰고 있
지만 그리 싫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절을 지키는 수호신의 얼굴치고는 좀 귀엽다.

그의 동반자인 여장승(키 180cm, 몸둘레 162cm)은 인심 좋은 아지매를 보듯 표정이 매우 부드
럽다. 두 눈은 남장승 못지 않은 왕방울로 눈 위에는 살짝 구부러진 눈썹과 광장처럼 넓은 이
마가 있으며, 코는 남장승 못지 않게 크다. 입은 아래로 살짝 구부러져 엷은 미소까지 띄우고
있으며, 몸통에는 그의 이름을 알리는 '주장군(周將軍)' 3글자가 쓰여 있는데 원래 이름은 상
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다. 남장승에 비해 키는 작으나 다정한 표정이며, 둘다 귀엽고 익살스
러운 포스로 무서움은 커녕 즐거움을 준다.


아무리 굳은 얼굴이거나 인상을 쓴 얼굴도 그
들을 보면 절로 주름이 풀어질 것이다. 그리고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표정에 넋이 나가 본연의 임무를 깜빡 잊고 돌
아갈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진리가 아닐까?
이들 석장승은 서쪽 산너머에 있는 운흥사(雲
興寺) 석장승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1719년 전
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장승을 숭배하
는 민간신앙과 불교신앙이 혼합된 존재이자 이
땅에 몇 안되는 사찰 장승으로 가치가 높다.

▲  여장승을 늘 살피는 남장승

▲  남장승을 바라보는 여장승

▲  남장승의 뒷모습과 여장승


  연리지(連理枝)라 불리는 느티나무(가운데 나무) -
나주시 보호수 15-4-12-6호


석장승을 지나면 왼쪽 숲에 불회사의 또다른 명물인 연리지가 나온다.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나무로 두 나무가 서로 맞닿아 엉켜있는 모습이 마치 남녀가 예민한(?) 짓거리를 하는 모습처
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절 주변에서 그런 연리지가 종종 목격되어 그것도 참 흥미로운
데 여색을 멀리하며 불도에 정진해야 되는 승려의 한이 모여 나무로 표출된 모양이다.

연리지는 가뭄에 콩 날 정도로 희귀한 나무라 나라의 경사나 부모에 대한 효성, 화목한 부부
등을 상징하며, 그의 수종(樹種)은 느티나무이다. 높이는 30m에 이르러 하늘을 가릴 정도이고
둘레는 1.5m로 키에 비해 꽤 늘씬하다. 나이는 약 600년으로 짐작된다.


▲  불회사 사적비와 소나무

연리지를 지나면 불회사의 장대한 역사를 머금은 사적비(事蹟碑)가 나온다. 듬직하게 생긴 귀
부(龜趺)와 글씨가 빼곡히 담겨진 검은 피부의 빗돌,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 2마리가
생동나게 새겨진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성된지 얼마 안되어 윤기가 주르르 흐른다. 그런 사적비 옆에는 하늘을 향해 곧게 자란 소나무가 주변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  원진국사부도로 오르는 산길

▲  진여문 부근의 승탑들

사적비를 지나면 불회사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에 덕룡산으로 오르는 산길이 나온다. 원진국사
부도를 보고자 한다면 그 산길을 꼭 오르기 바란다. 조그만 계곡을 건너서 대나무숲으로 들어
서면 좌우로 갈라진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부도(승탑)가 나온다.
나는 사적비 뒷쪽 산길을 몰랐던 터라 진여문까지 갔음에도 부도를 알리는 길이 없어 그냥 지
나칠까 했었다. 허나 부도와의 술래잡기는 끝내야겠다 싶어서 길도 없고 경사도 각박한 진여
문 남쪽 산자락을 무대포 정신으로 올라가서 끝내 술래 신세를 면했다.

진여문 남쪽에는 승탑(僧塔) 2기가 초췌한 모습으로 중생들의 눈길을 호소한다. 오른쪽 승탑
은 탑신(塔身)이 온전히 남아있고, 6각형 머릿돌에는 중생들이 올려놓은 돌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그 위에는 돌기둥이 서 있는데, 피부색이 전혀 틀려 승탑의 일원은 아니었던 듯 싶다.
탑의 밑도리는 돌에 묻혀 윗도리만 간신히 고개를 내민다.
왼쪽 승탑은 거친 세월의 흐름을 과민하게 탔는지 머릿돌과 바닥돌만 간신히 남은 처량한 신
세이다. 이들 승탑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탑의 주인은 알 수 없다.

▲  머릿돌과 바닥돌만 남은 가련한 승탑

▲  불회사 원진국사부도(圓眞國師浮屠)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25호

경내 남쪽 산자락에 원진국사부도가 살짝 터를 닦고 있다. 원진국사 승형(承逈, 1171~1221)은
능엄선(楞嚴禪)의 주창자로 성은 신씨, 고향은 경북 상주(尙州)이다. 3살 때 고아가 되어 숙
부인 시어사(侍御史) 신광한(申光漢)에게 양육되었으며, 13세에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출
가하여 김제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1197년 스승인 동순(洞純)이 입적하자 승과(僧科)를 포기하고 수도에 정진했으며, 명종(明宗)
이 그의 소문을 듣고 특별히 불러 초선(初選)을 치르게 했다. 이후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에
들어가 지눌(知訥)에게 법요(法要)를 받고 오대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예불한 뒤 크
게 감응을 얻었으며, 춘천 청평사(淸平寺)에서 이자현(李資玄)의 유적을 찾다가 '수릉엄경(首
楞嚴經)은 마음의 본바탕을 밝히는 지름길'
이란 이자현의 문수원기(文殊院記)에 크게 감명을
받아 능엄경을 열심히 연구했다. 그 인연으로 불법(佛法)을 알릴 때 능엄경을 으뜸으로 삼겠
다고 발원했으며, 이후 이 땅의 선종(禪宗)에서 크게 숭상을 받게 되었다.

1210년 연법사(演法寺) 법회의 법주(法主)가 되어 선풍(禪風)을 떨쳤고, 1213년에 삼중대사(
三重大師), 1214년에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이듬해 대선사(大禪師)가 되어 포항 보경사(寶
鏡寺)에 머물렀다. 1220년에는 희종(熙宗)의 4째 아들인 경지(鏡智)의 스승이 되었고, 1221년
능엄경을 설법한 뒤, 팔공산 염불사(念佛寺)로 자리를 옮겨 승려치고는 젊은 50세에 입적했다.

고종(高宗)은 그에게 원진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보경사에 그의 승탑을 세웠으나 사리의 일부
를 가져와 잠깐 인연이 있던 불회사에도 승탑을 두었다. 탑신 밑도리에 연우(延祐, 원나라 인
종의 연호) 4년 5월에 세웠다는 글씨가 있어 1318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탑신 앞
쪽에는 해서체(楷書體)로 '圓眞國師 通照之塔(원진국사 통조지탑)'이라 쓰여있어 탑의 이름과
주인까지 소상히 알려준다.

높이 1.7m의 조촐한 모습으로 조각 기법이 형식화되어 딱히 섬세한 면은 없으며, 탑신과 지붕
돌이 8각이고 그 밑도리는 동그란 전형적인 8각원당형 승탑이다. 또한 탑신에 탑의 주인공과
탑 이름, 조성 연대가 쓰여있어 고려 후기 승탑 양식을 연구하는데 아주 소중한 자료가 되어
준다. 바로 이 점이 이 승탑의 강한 매력이다.


▲  승탑의 주인과 탑 이름이 희미하게 쓰여있다. (원진국사 통조지탑)


 

♠  불회사 진여문, 대웅전 주변

▲  한몸으로 이루어진 진여문(眞如門)과 사천왕문(四天王門)

원진국사부도와의 숨바꼭질을 승리로 마무리 짓고 경내를 코앞에 둔 진여문으로 향했다. 진여
문은 하나로 이어진 사천왕문과 함께 1990년대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계곡 위에 홍예 돌다리
를 걸치고 그 위에 복도식 건물을 씌웠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한 지붕을 이고 있는 사천왕문
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은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그들의 목상(木像) 대
신에 그림 4개가 자리를 대신한다.
사천왕문은 원진국사부도가 있는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사천왕의 검문을 거치면 비로소 불
회사 경내에 발을 들이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부처의 모임터를 뜻하는 불회사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  홍예 돌다리를 갖춘 진여문

▲  사천왕문 사천왕도

▲  2층으로 이루어진 대양루(大陽樓)

▲  대양루의 1층을 차지하고 있는
천수전(千手殿)

불회사는 덕룡산 북쪽 자락 숲속에 포근히 터를 닦은 오래된 절이다. 경내 앞쪽(남쪽)에는 계
곡이 흐르고, 뒷쪽(북쪽)으로 산을 베게 삼아 누운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으로 사방이 덕
룡산의 첩첩한 산줄기에 감싸인 고적한 곳이다. 절 입구에서 절까지 속세의 민가(民家)도 거
의 없으며, 절 부근에는 적당한 마을도 없다.

이 절은 366년(또는 384년)에 인도 승려인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366년이면 고구려(
高句麗)에 불교가 전해지기 무려 6년 전이고, 백제는 18년 전이 된다. (가야는 제외) 불회사
가 366년 창건설을 자신 있게 우기는 것은 1978년 큰법당 기와 불사 때 발견된 '호좌(호남 좌
도) 남평 덕룡산 불호사(불회사의 옛 이름) 대법당 중건 상량문(上樑文)'
에 366년<동진(東晉)
태화 원년>에 창건되었다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연유로 이 땅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
해진 초전성지(初傳聖地) 임을 일주문을 통해 아주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불회사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 땅의 불교사를 다시 정리해야 되겠지만 굳이 그리할 필요는 없
을 것 같다. 마라난타의 366년(384년) 창건설은 어느 기록에도 없고, 백제 유물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가야의 불교 전래설도 외면받고 있는 마당에 불회사의 366년 창건설은 어디 주목이
나 받겠는가?

창건 이후, 656년에 희연조사(熙演祖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며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道詵國
師)가 중창을 하고, 1264년에 원진국사가 크게 중창을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원진은 앞서 그
의 승탑에서 밝혔듯이 1171년에 태어나 1221년에 세상을 떴다. 그런데 뜬금없이 1264년이라니
? 원진이 입적한지 53년 뒤에 홀연히 부활하여 절을 중창했단 말인가?? 허나 경내 주변에 그
의 승탑이 있으니 원진이 절을 손질한 것은 맞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창건했을 지도 모르겠
다.

1798년 화재로 절 전체가 소실되자 주지인 지명(知明)이 1799년에 중건을 했으며, 절의 원래
이름은 부처를 지킨다는 뜻의 불호사(佛護寺)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큰법
당에서 나온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808년 경에 불회사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하다가 1990년대 후반부터 절을 크게 손질하여 기존의 가람
(伽藍)배치 외에 동쪽에 진여각과 요사채, 대양루 등을 건립하여 절의 몸집을 더욱 늘렸다.

절을 수식하는 전설 가운데 호랑이와 도승의 이야기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후기에 참의(參議) 벼슬을 지낸 조한용(이하 승려)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불
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치며 벼슬을 그만두고 승려가 되었다. 표주박 하나와 누더기 1벌로 천
하를 떠돌던 그는 불회사에 이르자 쇠락한 절의 모습에 발끈하여 절 중창을 계획하고 주변 마
을로 탁발을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탁발을 하고 절로 돌아오다가 난데없이 호랑이를 만났다. 그런데 호랑
이는 그를 보자 입을 크게 벌리고 눈물을 흘려 애원하는 것이 아닌가. 호랑이의 출현에 염통
이 적지않게 쫄깃해졌던 그는 용기를 내어 입을 살펴보니 글쎄 목에 비녀가 걸려있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사람을 잡아먹지 말아라. 그것을 약속하면 내 비녀를 뽑아주마' 그러자 호랑
이가 '알았어. 앞으로 사람은 해치지 않을테니 비녀 좀 뽑아줘!' 그래서 비녀를 뽑아주니 호
랑이는 고마움을 표하고 사라졌다.

그해 겨울, 호랑이가 그를 찾아왔다 '야 나와봐! 아주 좋은 거 가져왔어!' 그가 나와보니 호
랑이가 어디서 아리따운 여인네를 물어다 마당에 놓고 간 것이 아닌가. 호랑이가 앞서 은혜를
갚고자 참 기특한 일을 하였지만 이미 출가한 몸이라 대놓고 흑심을 품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혼절한 여인을 외면하기도 그래서 일단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알고보니 안동(安東) 만석꾼
김상 공(이하 김공)의 외동딸이었다.
여인이 기력을 회복하자 남장을 시켜 안동으로 데려가니 김공은 너무 기뻐 크게 보답할 길을
알려달라고 했다. 이에 불회사 복원에 필요한 시주를 청하니 김공이 쾌히 승락하자, 승려는
가지고 온 걸망을 꺼내 쌀을 담아 달라고 했다. 걸망이 너무 작아서 이거 얼마나 들어가겠는
가 싶어 김공의 부인은 우려했으나 아무리 부어도 끝없이 들어가는 쌀을 보며, 크게 놀라 아
예 곳간을 열테니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고 했다.
이에 승려는 신통력으로 공양미를 절로 보냈다고 하며, 그때 쌀을 보관한 곳이 인근 화순 중
장터라고 한다.

김공이 준 쌀로 불회사 대웅전을 지으며, 좋은 날을 택해 상량식을 올리려고 했으나 일이 너
무 장대하여 그 시간을 맞추기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뒷산 봉우리에 올라가 '호법 선신중이
시여! 부처의 대작불사가 해가 짧아 원만히 회향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피를 드리워 주소서
'
기도를 올리니 해가 잠시 길을 멈추면서 제시간에 상량식을 마쳤다고 한다.
이후 그가 기도를 한 자리에 암자를 세우고 해를 멈추게 한 곳이라 하여 일봉암(日奉庵)이라
했으나 6.25 때 파괴되어 샘터만 남았다.

그 승려는 말년에 건너편에 남암(南庵)이란 암자를 짓고 머물렀는데 아침과 저녁마다 까만 새
가 날라와 뒷편에 있는 잣나무 가지에 앉아 승려와 대화를 했다고 하며, 그 나무를 흑조수(黑
鳥樹)라 불렀다고 한다. 그 나무는 남암터에 2그루가 있었으나 태풍으로 하나가 쓰러지고 지
금은 1그루만 남아있다. (현재 부속 암자는 모두 사라진 상태)

비자나무와 측백나무 등에 싱그럽게 둘러싸인 경내에는 대웅전과 영산전, 명부전, 대양루, 심
검당, 사운당, 천왕문, 진여문, 불국원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과 건칠비로자나불좌상, 민속문화재인 석장승, 지방문화재
인 원진국사부도, 소조보살입상 등이 있고, 그외에 도암선사부도와 조선 후기 승탑, 연리지,
괘불지주 등이 있어 고색의 내음도 숲내음 만큼이나 진하다.

※ 나주 불회사 찾아가기 (2018년 12월 기준)
* 광주 전남대후문과 산수5거리, 조선대, 광주1호선 남광주역(3번 출구), 백운광장, 인성고(
  효천역)에서 나주시내버스 999, 999-1번을 타고 남평정류장에서 하차 → 중장터, 도동 방면
  으로 가는 나주 200번으로 환승하여 불회사 하차 (1일 10회 운행)
* 나주터미널과 영산포터미널에서 나주 403번을 타고 불회사 하차 (1일 13회 운행)
* 승용차 (석장승과 일주문 사이에 주차장이 있으며, 경내에도 있음)
① 광주 → 남평읍내 → 도래마을 → 다도 → 불회사입구 우회전 → 불회사
② 광주 → 칠구재터널 → 도곡온천입구 → 도암면 → 운주사입구 → 중장터 우회전 → 불회
   사입구 → 불회사

* 불회사 입장료는 없음
* 불회사는 산사힐링체험(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7~8월에 열리는 관음대참회 수련
  회, 매월 3째주 토요일에 1박 2일로 열리는 주말산사문화체험, 녹차(비로다)만들기 체험 등
  이 있으며, 자세한 일정과 가격은 불회사 홈페이지를 참조하거나 전화로 문의한다.
* 소재지 : 전라남도 나주시 다도면 마산리 999 (다도로 1224-142 ☎ 061-337-3440)
* 불회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불회사 경내와 부드러운 곡선의 덕룡산

▲  대웅전 주변 (대웅전 우측에 극락전, 삼성각 등이 있음)

사천왕문을 지나면 1990년대 후반에 지어진 2층 대양루가 나타난다. 대양(大陽)이란 큰 햇님
으로 부처의 법을 상징하는데, 1층은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통로와 종무소(宗務所), 차 1잔과
공양물품을 판매하는 비로다경실이 있다. 여기서 비로다(榧露茶)는 불회사에서 생산되는 녹차
(綠茶)로 절 주변 비자나무 밑에서 이슬을 머금고 자란 찻잎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비로다는 오랜 역사를 가진 불회사의 살아있는 전통으로 절에서 창건주로 우기고 있는 마라난
타가 불회사를 세우고 재배한 차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을 바탕으
로 이 땅에서 처음으로 차가 재배된 곳이라고 주장까지 하나 실제 재배 시작 시기는 조선시대
> 불회사 녹차로 인해 이곳의 예전 지명은 다소(茶所)였으며, 다도면(茶道面)이란 이름도 바
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2층은 대양루 대신 천수전이란 별도의 간판을 달고 있는데, 천수관음보살(千手觀音菩薩)을 봉
안하고 있으며, 온갖 새와 토끼, 물고기, 소나무, 과일 등을 담은 그림이 평방(平枋) 등에 그
려져 있다. 보통 사찰의 벽화나 그림은 부처를 찬양하고 불교와 관련된 내용을 담기 마련이나
천수전은 그 규칙을 와장창 깨고 민화(民畵)나 사대부들이 그리는 그림처럼 치장되어 있다.


▲  불회사 대웅전 - 보물 1310호

대양루 밑도리를 통해 안쪽으로 들어서면 3단의 기단 위에 높직하게 들어앉아 남쪽을 바라보
는 대웅전 앞에 이른다.
불회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추녀를 살짝 들어올
린 모습이 마치 새가 날개짓을 하듯 경쾌하기 그지 없는데 상량문을 통해 1799년에 중건되었
음이 밝혀졌다.

건물 정면에 달린 문짝은 4분합의 빗살문으로 두터운 통판자로 짜서 창살무늬, 불상, 새와 꽃
등이 꽃살문을 이루며 장식되어 있었으나, 6.25 시절에 공비들이 그들의 소굴을 덮기 위해 모
두 약탈해 갔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초석(礎石)은 덤벙주초로 비교적 큰 편이며, 그 위에 세
운 기둥은 민흘림 수법을 보여준다.
기둥 위에는 창방과 평방을 놓고, 전/후면의 각 주칸에는 외3출목, 내4출목 공포를 2조씩, 양
측면에는 1조씩 배치했으며, 내부에는 화려한 연꽃봉오리형으로 마무리 지었다. 특히 용 4마
리를 건물 안팎으로 치장하여 법당의 장엄함을 드높였는데, 정면 어칸(가운데 칸)에 2마리의
용머리가 있고, 그 꼬리는 건물 내부 대들보 밑에서 살랑살랑 흔들거리고 있다. 또한 천정 중
앙 대들보에도 용 2마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건물 양측면 중앙에는 건물 내부로 2개의 충량(衝樑)을 걸어 그 머리를 용머리로 장식하여 큰
대들보에 걸쳤는데 이런 결구법은 조선 중기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 내부 천정은 빗천정과 우
물천정을 같이 했는데, 빗천정에는 물고기, 연꽃무늬 등을 조각하여 달았다.


▲  옆에서 바라본 대웅전의 위엄

▲  새와 연꽃 등이 그려진 아름다운 우물 천정과 대들보에 고개를 대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용 2마리


건물 내부와 바깥에 용 장식을 달고 연꽃봉오리 등을 장식한 기법은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
웅보전에도 나타나고 있어 같은 장인이나 그 후학들이 만들었음을 짐작케 하며, 조선 후기 건
립 당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어서 2001년 4월에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호에서 보물로 지
위가 높아졌다.


▲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용의 살랑거리는 꼬리와 붉게 채색된 천정

▲  대웅전 비로자나3존불
가운데 본존불이 불회사 건칠비로자나불좌상 - 보물 1545호
좌우 협시불은 불회사 소조보살입상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267호


불회사의 상큼한 보물 창고인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불 대신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을 중심으
로 한 비로자나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의 중심인 비로자나불은 종이로 만들어 금칠을
입힌 이 땅에 흔치 않은 건칠불(乾漆佛)로 고려 후기 불상 양식을 계승한 조선 초기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로자나불은 붉은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 그의 전용 수인(手印)인 지권인(智拳印)을 취하
고 있으며, 머리는 검은색 나발로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 있다. 두 귀는 어깨까
지 축 늘어져 중생의 조그만 하소연까지 듣고자 애쓰고 있고, 얼굴은 약간 굳은 듯한 표정이
지만 입가에서는 엷게 미소가 퍼지고 있다.
그의 좌우에 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상은 흙으로 빚어서 만든 조선 초기
보살상으로 15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본존불과 마찬가지로 잘 만들어진 우수한
작품으로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 불상/보살상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  불회사 마무리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우에는 온갖 군소 건물들이 학의 날개처럼 펼쳐져 있는데, 좌측 바로 옆에는 명부전
이 둥지를 틀고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을 비롯한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는데, 1402년에 세워져 1799년에 중수되었으며,
근래 손질을 했는지 고색의 기운이 대웅전 보다는 못해 보인다.


▲  후덕한 표정을 지으며 육환장(六環杖)을 쥐고 있는 명부전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밝은 색채의 10왕을 비롯한 저승의 식구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다.

▲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바로 좌측에는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세기
에 중건되었는데, 예전 이름은 칠성각(七星閣)이었다. 산신(山神)과 칠성(七星)을 비롯해 용
왕(龍王)까지 봉안하고 있으며, 그들을 담은 탱화는 모두 근래에 새로 제작되었다.

▲  용을 타고 짙푸른 바다를 질주하는
용왕의 모습이 담긴 용왕탱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  나한전(羅漢殿)
석가불과 그의 열성 제자인 16나한 그리고 고려 때 절을 크게
일으킨
원진국사의 진영(眞影)이 봉안되어 있다. (예전 이름은 영산전)

▲  나한전 석가불과 16나한상

▲  원진국사의 진영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가장 최근에 지어진 건물로 아미타불과 영가
(靈駕)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  공양간과 요사(寮舍)로 쓰이는 사운당
1층은 공양간, 2층은 요사이다.


▲  어처구니를 상실한 옛 맷돌
불회사 승려와 중생들의 공양밥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맷돌, 이제는 절의
찬란했던 역사를 머금은 화석이 되어 대양루 부근에 조용히 누워있다.
어처구니가 불이 나게 돌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애타게 그리워하겠지.

▲  진여문 부근 숲길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불회사를 열심히 둘러보고 대양루 부근에서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기
분 같아서는 속세(俗世)에서 나란 존재를 잠시 지우며 이곳에서 며칠 머물고 싶지만 내가 있
어야 될 곳이 아니기에 다시 속세로 아쉬운 발걸음을 땐다.
절을 둘러싼 비자나무와 춘백, 소나무의 청정한 내음을 배불리 들어마시며 결코 지루하지 않
는 숲길을 뚜벅뚜벅 걸으니 어느새 연리지와 석장승이 나타나 배웅을 한다. 그들을 지나치기
가 싫어 앞서 지겹게 봤음에도 다시 사진에 담느라 약간의 시간을 흘려보냈고, 다시 길을 재
촉하니 주차장과 도암선사부도, 일주문이 나타난다.


▲  불회사 숲길과 단장의 이별을 하다.
나중에 또 인연을 지을 수 있을까? 그때는 덕룡산과 운흥사(雲興寺) 석장승까지
모두 살펴보고 싶다.

▲  불회사 숲길 (주차장 부근)

불회사입구 정류장에서 다시 두 다리를 쉬며 버스를 기다렸다. 목포로 가야 되기 때문에 나주
시내(영산포, 나주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오면 정말 대환영인데 20분 정도 기다리니 남평으로
가는 나주 200번이 나타나 입을 벌린다. 남평으로 나가면 나주시내로 가는 시내버스가 수시로
있어 그것을 잡아타고 첩첩한 덕룡산 골짜기에서 탈출했다.
남평으로 나와 영산포로 가는 999번 시내버스로 환승하여 나주시내 북부에 자리한 나주터미널
에 두 발을 내렸다.

아직 점심도 제대로 때우지 못한 상태라 나주곰탕이나 한 뚝배기 들고자 터미널 서쪽 금성관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나주곰탕 골목을 찾았다. 이곳은 예전에 2~3번 와본 적이 있는데, 어
느 집으로 갈까 궁리하다가 7년 전에 들렸던 곰탕집으로 들어갔다.


▲  잘 차려져 나온 나주곰탕의 위엄

내가 곰탕집을 찾은 시간은 15시대라 손님은 거의 없었다. 송송(깍두기)과 김치, 양파, 고추
장 등의 밑반찬을 거느린 곰탕이 내 앞에 차려지자 시장기가 왕성하게 솟구쳐 곰탕과 밑반찬
들은 이내 밑바닥을 드러낸다. 그래도 성이 차질 않아서 국물과 밥을 더 청하여 아주 든든하
게 배를 채웠다.

그렇게 늦은 점심을 먹고 부근에 있는 나주목문화관과 정수루를 오랜만에 둘러보고 목포로 넘
어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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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사찰 나들이 ~ 고려대에 둘러싸인 도심 속의 고즈넉한 절집, 안암동 개운사


' 도심 속에 자리한 고즈넉한 사찰 ~ 안암동 개운사 '

▲  개운사 대웅전 뜨락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4월 초파일, 이하 초파일)의 아침은 밝아왔다.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초파일 절 투어 코스를 근사하게 닦은 다음, 오전 11시에 길을
나섰다.
이번 초파일에는 서울 동북부 지역(동대문구, 성북구, 노원구)의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현대 사찰 등 여러 곳을 둘러보았는데 초파일의 꿀재미인 공양밥과 후식도 배불리
챙겨먹으며 정신없이 신나게 절투어를 즐기니 어느덧 안암동(安岩洞)에 있는 개운사에 이
르렀다. (먹는 재미 때문에 초파일 절투어를 벌이는 것은 절대로 아님;;;)

개운사는 정말 10여 년 만에 방문으로 같은 서울 하늘을 이고 있음에도 인연이 참 지지리
도 없던 절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역사가 짧거나 없는 듯 자리한 것도 아니다. 엄연히 서
울에 이름난 고찰이자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한 절로 일주문부터 사람들로 봐글봐글하다.


 

♠  조선 초기에 창건된 도심 속의 사찰, 우리나라 불교 교육의
중심지로 명성을 날렸던 ~ 개운산 개운사(開運山 開運寺)

개운산<안암산(安岩山)> 남쪽 끝에는 서울의 주요 고찰(古刹)의 하나인 개운사가 고즈넉하게
자리해 있다. 안암동로터리에서 개운사로 이어지는 길(개운사길)은 고려대를 낀 서울의 주요
대학가로 학생과 청춘들로 늘 마를 날이 없는 번잡한 곳이다. 예전에는 개운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城北川)으로 흐르던 개천을 옆에 끼고 있었으나 그 졸졸졸~♪ 소리도 듣지 못하게끔
말끔히 봉인해버렸고, 고려대가 개운산과 개운사 사이를 끊고 건물을 지으면서 겨우 가늘게
개운산을 붙잡고 있다.

고려대와 주택가의 확장으로 절의 북쪽과 서쪽은 고려대에 감싸여있고, 남쪽과 동쪽은 주택들
이 빼곡히 자리를 채웠다. 허나 그 동쪽도 얼마 안간 보타사부터 고려대에 막히니 자연히 3면
이 고려대에 포위된 꼴이다. 게다가 절 주변은 하숙집과 고시원, 식당, 술집, 피시방, 갖은
편의시설이 즐비해 고요함을 추구하는 절과는 너무 맞지가 않다. 완전 절과 밖이 180도 딴 세
상인 것이다.
허나 경내 주변에 나무가 그런데로 무성해 바깥과는 그런데로 다른 색채를 보인다. 그리고 경
내로 들어서면 여기가 대학가의 한복판이 맞는지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나름 고즈넉한 분
위기를 자아내며, 속세의 소음은 절을 둘러싼 나무들과 풍경 물고기가 모두 우걱우걱 씹어먹
는다.

그럼 개운사는 언제 법등(法燈)을 켰을까?
개운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이다. 1396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동대문 밖 5리 정도 되는 지금의 고려대 이공대학과 대광아파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영도사(
永導寺)라 했다고 전한다. 허나 창건 이후 400년 가까이 적당한 사적을 남기지 못해 창건 시
기가 썩 개운치가 않다.
과연 무학이 세웠는지는 개운하게 확인할 길이 없으나 인근에 쟁쟁한 절(보문사, 미타사, 청
룡사, 연화사 등)이 적지 않아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세가 신통치 못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1779년 절은 강제로 개운산 남쪽인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정조(正祖)의 후
궁인 원빈(元嬪) 홍씨<홍국영(洪國榮)의 누이>의 묘역, 명인원(明仁園>을 바로 절 옆에 잡았
기 때문이다. 하여 인파당 축홍(仁波堂 竺洪)은 절을 옮겼다. (또는 1730년에 이전했다고 함)

절 이름이 언제 개운사로 바뀌었는지는 역시나 개운치가 않다. 인파당이 절을 옮기면서 이름
을 갈았다는 설도 있고, 고종(高宗)이 어린 시절 영도사의 도문 처소에서 잠시 양육된 적이
있었는데, 그가 1863년 왕위에 오르자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열었다는 뜻에서 개운사로 고쳤
다는 설도 있다.
1870년 송담 수훈이 지장탱, 시왕탱, 사자탱 등을 봉안했고, 1873년에 명부전(冥府殿)을 중건
했다. 1880년에 이벽송(李碧松)이 대웅전을 중건했으며, 1883년 불상 2개를 개금하고 감로탱,
팔상도, 신중탱, 산신탱 등을 봉안했다. 그리고 1885년에 아산에서 1712년에 제작된 범종 1구
를 가져왔는데 1935년에 왜정(倭政)이 국방 헌납을 이유로 강탈해 갔다.

1912년 왜정이 사찰령(寺刹令)을 시행하자 봉은사(奉恩寺)의 수반말사(首班末寺)가 되었고 김
현암(金玄庵)이 제1대 주지로 부임했다. 1913년 조선 황실 소유의 산림 4정 6반보를 사찰 소
유로 등록했으며, 1926년 김동봉(金東峰)이 강원(講院)을 개설하면서 불교 개혁 및 교육의 근
원지로 역할을 하게 된다.
1929년에 권범운(權梵雲) 등이 독성전을 중건했고, 1932년 이벽봉(李碧峰)이 노전을 지었으며,
한때 태고종(太古宗) 소속으로 1955년 대처승(帶妻僧) 주최로 전국포교사대회가 열리기도 했
다. 허나 이후 조계종으로 갈아탔고, 조계종 종정(宗正)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총무원(總務院)
간판까지 달았다. 또한 1981년 중앙승가대학을 경내로 이전해 오랫동안 불교 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중앙승가대학은 경기도 김포시에 가 있음)

넓은 경내에는 1993년에 새로 지은 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 명부전, 미타전, 종각, 선방, 중
앙승가대학 건물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다. 이중 선방은 수도권에서 제법 큰 규모
를 자랑한다.
허나 절 건물은 죄다 근래에 손질되거나 새로 지어진 것이라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고색(
古色)의 농도는 매우 얇은 실정이다. 하지만 겉과 달리 속은 오래 숙성된 문화유산이 풍부하
여 절의 오랜 내력을 그런데로 가늠케 해준다. 비록 다른 곳에서 가져오긴 했지만 보물로 지
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을 비롯해 지방문화재인 감로도와 신중도, 팔상도, 지장시
왕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 일괄 등 보물 1점, 지방문화재 5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1879
년에 제작된 괘불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동쪽에 대원암과 보타사가 있다. 대원암(大圓庵)은 구한말과 왜정 때 활약했던
고승 박한영(朴漢永)이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해 불교계 석학을 배출했던 현장이며, 보타사(普
陀寺)는 옛 칠성암(七星庵)으로 승가대학 숙소로 사용된 것을 절로 바꾼 것이다. 이곳에는 국
가 보물로 지정된 하얀 피부의 마애보살좌상과 고운 자태의 금동보살좌상이 있으니 꼭 둘러보
기 권한다.


▲  개운사 일주문(一柱門) (2014년)

개운사에 이르면 제일 먼저 장대한 모습의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문짝도 없는 열린 모습으로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초파일 향연의 장으로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문의 머리인 맞배
지붕이 너무 육중해 문 기둥이 애처롭게 보일 정도이다.
지붕과 평방(平枋) 사이에는 금색으로 쓰여진 개운사 현판이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으며,
문 좌우로 절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돌담이 빙 둘러져 속세의 기운을 경계한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넓게 닦여진 주차장이 펼쳐지는데 그 너머 북쪽 언덕에 선방과 종각, 나무
로 경내를 꽁꽁 가린 개운사가 모습을 비춘다. 그리고 일주문 안쪽 동쪽에는 비석들이 옹기종
기 모여있으며, 주차장 서쪽에는 중앙승가대학으로 쓰였던 정진관이 있다. (공양간은 정진관
옆 건물에 있음)


▲ 개운사의 20세기 역사를 머금고 있는 비석들
지붕돌을 지닌 비석부터 대머리 비석까지 10여 기의 비석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들은 왜정과 20세기 중/후반에 세워진 공덕비와 기념비로 가장 이른 것은
1931년에 지어진 승려 경허의 공덕비이다.

▲  개운사 석조관음보살입상

주차장을 지나 가운데 계단을 오르면 날씬한 자태의 관음보살입상이 나온다. 이 석불은 20세
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얼굴 주변에 검은 때가 조금 피어있어 약간 고색이 느껴진다.
두 손으로 감로수가 담긴 정병(政柄)을 꼭 쥐어들고 있어 그가 관음보살임을 알려주고 있는데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에 잠긴 모습으로 대학가로 떠들썩한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주변에
는 연등이 가득 매달려 그의 임시 광배(光背) 역할을 한다.

             ◀  개운사 3층석탑
관음보살입상 바로 옆에는 잘생긴 3층석탑 1기
가 자리해 있다.
개운사의 유일한 석탑으로 20세기 후반에 조성
되었는데 반듯한 바닥돌과 2중의 기단(基壇),
3층 탑신(塔身), 머리장식을 두루 갖추어 안정
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보통 탑은 법당 앞에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무
슨 사연인지 경내 외곽에 두었다.


▲  경내로 인도하는 오르막 길 (종각 남쪽)
오색 연등이 허공을 메우며 초파일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  범종(梵鍾)을 품은 종각과 연등으로 뒤덮힌 선방 옆길
일주문과 주차장에서 경내로 들어서려면 반드시 선방 옆구리를 지나야 된다.

▲  2층 규모의 선방(禪房)

선방 옆구리를 오르면 대웅전과 선방, 명부전, 미타전에 감싸인 대웅전 뜨락에 이른다. 뜨락
에는 영가(靈駕)들을 위한 하얀 연등이 추가되어 6색 연등이 하늘과 땅을 가르고 있는데, 뜨
락을 기준으로 남쪽에 대방이라 불리는 선방이 장대한 덩치로 남쪽을 굽어본다.
선방은 1921년에 중창된 것으로 20세기 후반에 지금의 모습으로 크게 지어졌다. 밑층에는 종
무소 등이 들어있으며, 윗층은 선방으로 이 땅에서 가장 큰 선방으로 꼽히는데, 한참 개운사
가 교육과 불교 개혁에 나섰을 때, 선방은 그 공간으로 분주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선방 앞에는 중생들에게 떡과 수박, 커피, 녹차 등을 제공하는 공간을 두어 초파일의 훈훈한
인심을 보여주었다. 이곳에서도 공양밥을 먹으려고 했으나 절 도착 직전(16시)에 그만 마감이
되버려 꿩 대신 닭으로 간단히 떡과 수박을 섭취하였다.


▲  연등이 하늘을 훔친 대웅전 뜨락
연등의 두터운 물결 앞에 그 장대한 대웅전도 눈치를 살살 보며 간신히 그 일부만
드러내 보이니 그 모습이 마치 구름 위에 자리한 하늘 세계의 궁궐 같다.

▲  관불(灌佛) 의식의 현장과 깨알 같은 복전함들

대웅전 계단 앞에는 초파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어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
된 관정대(灌頂臺)에 서서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다른 절의 아기부처상은 그래도 키
가 좀 있으나 여기는 난쟁이 반바지 반 접은 것보다 훨씬 작다.

사람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아줌마 신도의 도움과 권유를 받으며 나무 바가지에 물을 가
득 담아 아기부처의 머리에 물을 껴얹은 관불(관정)의식을 행한다. 날이 날인지라 나도 그 의
식에 동참해 그를 냉수마찰을 시켜주니 물을 맞은 그의 표정이 잠시 환해진 듯 보였다. 하지
만 저녁이 오고 신나던 초파일이 저물면 아기부처는 강제로 어두컴컴한 창고로 돌아가 내년을
고대해야 된다. 이렇게 1년 만에 나온 외출이니 그의 희열(喜悅)은 대단할 수 밖에...


 

♠  개운사의 보물창고, 미타전(彌陀殿)과 대웅전(大雄殿)

▲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 미타전

대웅전 뜨락 동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인 미타전이 자리해 있다. 미타전
의 주인장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로 절의 제일 보물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이 홀로 봉안되어 있다. 그는 원래 명부전에 얹혀 살았으나 1995년 몸 속에서 온갖 진귀한 보
물이 쏟아져 나오자 지금의 미타전을 손질해 그의 전용 공간으로 삼았다.


▲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보물 1649호

서방정토가 있다는 서쪽을 바라보고 앉은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나무를 조각하여 금색으로 도
금을 입힌 것으로 높이 118cm, 무릎 너비는 92cm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근래 조성된 것처럼 젊어 보이나 그런 겉모습과 달리 고려 후기에 조성
된 나이 지긋한 불상으로 개운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특히 1995년에 그의 몸 속에서
발원문을 비롯한 고려시대 문서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면서 그의 오랫동안 숨겨졌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가치도 몇 곱절이나 높아졌다.

우선 불상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는 검은색으로 꼽슬인 나발이며, 머리 정상에 무견정상(無
見頂相, 육계)이 두툼히 솟아있다. 이마에는 하얀 백호가 찍혀있고,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
러져 있으며, 눈은 지그시 떠서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작고, 입술은 붉으며, 검은 수염이 얕
게 표현되었는데,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살이 있어 보이며, 두 귀는 어깨까지 축 늘어져 중생
의 고충에 귀만 기울인다.
두꺼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손은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나인 하품
중생인(下品中生印)의 변형을 짓고 있으니 이는 화성 봉림사(鳳林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물 980호
) 등 고려 후기 아미타불 수인과 비슷하다.

개운사에서 마련한 목조 대좌(臺座)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데, 체격이 당당해 보이
며,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려 발바닥을 드러낸 이른바 길상좌(吉祥坐)를 취하고 있어 눈
길을 끈다.
불상의 몸을 가린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로 신라시대 법의보다 두터워 보이며, 옷 주름
은 그럴싸하게 접혀 있다. 양쪽 어깨를 옷으로 가리고 가슴 부분은 드러냈는데, 가슴 밑에 표
현된 승각기는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띠 매듭이 없다. 이런 형태는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
여래좌상과 서산 개심사(開心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1619호), 서울 수국사(守國寺) 목
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1580호, ☞ 관련글 보러가기)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착의법과 주름이
거의 일치한다.
이 불상은 이렇게 단엄(端嚴)한 상호와 세련된 조각 기법, 장중하면서도 균형감 있는 조형 감
각, 긴장감 넘치는 선묘(線描), 보존 상태 양호로 완성도 높은 고려 후기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가 순도 100% 고려 후기 불상임이 밝혀진 것은 바로 그의 몸 속에서 나온 유물들 덕
분이다.


▲  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서 나온 중간대사 원문 (문화재청 사진)

불상 뱃속에서는 3장의 귀중한 발원문(發願文)이 나왔다. 이중 '중간대사 원문(中幹大師 願文
)'은 1274년에 작성된 아미타여래좌상 개금(改金) 발원문으로 문서의 크기는 '54x56cm'이다.
이 문서는 1274년에 아산 축봉사(竺鳳寺)에 있던 본 불상을 개금하면서 남긴 것인데, 이를 통
해 불상의 원래 위치를 알려주고 있으며, 그의 조성 시기는 늦어도 1273~1274년, 이르면 13세
기 초/중반임을 귀뜀해 준다. (1274년 이전에 제작됨)
특히 이 땅에 남아있는 고려 후기 불상 중 가장 오래된 중수원문(重修願文)으로 개심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중수원문(1280년)보다 6년이나 빠르며 13세기 불상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더
욱 가치를 발한다.

그리고 '최춘 원문(崔椿 願文)'은 금불복장조성 발원문으로 '56x55.5cm' 크기이며, '천정 혜
흥 원문(天正 惠興 願文)'은 불상을 개금하면서 작성한 10종의 대원(大願)을 담은 발원문으로
'37x220cm' 크기인데 이들 2장은 1322년에 작성되었다. 현재 중간대사 원문을 비롯한 발원문
3장은 신변 보호를 위해 조계사 옆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에 가 있으며,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과 발원문 3장은 한 덩어리로 보물 1649호로 지정되었다.

발원문 외에도 전적(典籍)류 28점, 문서 13점도 발견되었다. 불상 뱃속에 나온 유물을 복장유
물(腹臟遺物)이라 부르는데, 1995년 아미타여래좌상이 있던 명부전에 정신 나간 도둑이 들어
와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의 절반 정도를 훔쳐갔으며 아미타여래좌상 뱃속까지 손을 대어 사리
장치가 든 후령통(候鈴筒)까지 가져갔다.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불상의 뱃속이 강제로 개방
된 것이다. 이때 개방된 뱃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경판(經板) 15점, 옛 사경(寫經) 7
점, 조선시대 목판본 불서(佛書) 6책, 다라니 8종, 탁본 1점, 족자 1점, 그리고 발원문 3점
등 총 41건 58점이 빛을 보았다. 실로 엄청난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전적 28점 중 22점은 9세기부터 13세기에 간행된 오래된 경전이고, 나머지 4종 6책은 조선 때
간행된 목판본이다. 오래된 22점 가운데 목판본 도장(道藏)인 '영보경(靈寶經)'과 필사본 '보
살보행경(菩薩本行經)'을 제외하고 모두 대방광불화엄경으로 지금까지 수습된 단일 불상의 복
장유물 가운데 가장 수량이 많다.
이들 유물을 통해 1274년 개금 이후 4번 이상 중수를 벌였음이 밝혀졌으며, 신라 후기부터 고
려시대를 거쳐 조선까지 다양한 시대의 불경과 문서들이 들어있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신라 후기와 고려 초에 간행된 불경들은 그 수량이 매우 적은 상태로 그 부족분을
채워줄 수 있는 귀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발원문과 별도로 전적류 21점은 '개운사 목조아미타
여래좌상 복장 전적
'이란 이름으로 보물 1650호로 지정되었다. 이들은 현재 발원문을 따라 불
교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그리고 나머지 16건 33종은 별도로 '개운사 목 아미타불좌상 복장일괄'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
방유형문화재 291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원래 복장유물 전체가 이 등급에 있었으나 2010년
4월에 발원문과 전적 21점을 따로 떼어내 보물로 지정하면서 3개의 다른 이름과 등급을 지니
게 된 것이다. 그만큼 이 불상과 불상 뱃속에서 튀어나온 유물이 유별나고 대단하기 때문이다.
현재 지방문화재 복장 유물은 개운사와 불교중앙박물관에 있으며, 아쉽게도 복장유물 어느 것
도 만나지 못했다. 보존 관리상 개방을 거의 안하기 때문이다.


▲  초파일이 준 고마운 선물, 개운사 괘불(掛佛)

대웅전 뜨락에는 아기부처상 외에도 매우 보기가 힘든 괘불까지 왕림을 하여 나를 무척 들뜨
게 하였다. 그렇다면 괘불이 도대체 무엇이건데 나를 그렇게 기쁘게 했을까?
괘불은 조선 중기부터 등장하는 커다란 불화(佛畵)로 초파일과 절의 주요 행사일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왠만한 운으로도 만나기가 어려우며 그나마 만날 확률이 높은
날이 초파일이다. 내가 평소에도 많은 오래된 절을 돌아다님에도 초파일에 무조건 절 답사에
나서는 이유 중 하나도 바로 레어템<raretem, rare(희귀한)+item(물건)의 합성어>인 괘불을
보고자 함이다.
허나 초파일이라고 100% 외출을 하진 않는다. 이번 초파일에 4곳의 절집을 갔지만 겨우 개운
사에서만 괘불을 봤을 뿐이다. 확률로 따지면 1년에 정말 1번 정도 보는 꼴이다. 그러니 괘불
을 만났다면 꼭 복권을 사기 바란다. 레어템 중의 초레어템을 만났으니 말이다. (당첨은 장담
못함)

개운사 괘불은 1879년에 제작된 것으로 석가불과 지장보살, 나한(羅漢) 등이 그려져 있다. 저
녁이 다가옴에 따라 그 큰 그림이 절반 정도 둘둘 말려져 있는데 괘불 밑에는 그의 거처인 길
쭉한 괘불함이 입을 벌리며 그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괘불은 그리 들어가고 싶은
눈치는 아닌 것 같다. 함에 들어가면 긴 시간을 갇혀 지내야되기 때문이다. 괘불 앞에는 중생
이 진상한 과일과 떡이 놓여져 있고 복전함이 무려 2개씩이나 설치되어 적지 않게 옥의 티를
선사한다.


▲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본 괘불의 뒷모습
붉은 색의 문자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  개운사 대웅전

개운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1993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다. 2006년에 단청 불사를 했으며, 선방 다음으로 큰 건물(정진관 등의 현대식 건물은 제외)
로 뜨락보다 3~4m 정도 높게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다진 탓에 무척 우람해 보인다. 건
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후불탱화, 팔상도 등의 여러 그림이 깃들여져 있는데, 이중 팔상도
와 신중도, 현왕도, 지장시왕도는 지방문화재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그림이 봉안된 위치
는 변경될 수 있음)


▲  대웅전 가운데 칸에서 굽어본 뜨락과 관불의식의 현장
개운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채운 연등이 저 밑에 보이니 마치 오색 구름 위에
올라선 기분이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화
조그만 석가불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좌우에 거느리며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그 앞에는 불단이 무너질 정도로 온갖 음식과 과일들이 진상되어 있다.

▲  개운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2호

감로도는 물과 육지에서 방황하는 영혼과 아귀(餓鬼)를 위로하고자 부처의 법을 강론하고 음
식을 베푸는 수륙재(水陸齋)를 위한 그림이다.
신중도 이상만큼이나 등장 인물이 많고 무대가 넓어서 복잡하기 그지 없는데 그림 상단에는 7
명의 여래(如來)와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아미타내영도(阿彌陀來迎圖)를 배치했고, 하단에
는 의식 장면과 아귀상, 지옥상, 윤회하는 중생도 등 6도중생이 담겨져 있다. 산수와 구름으
로 적절히 경계를 그었고, 다채로운 모습의 인물들과 적/녹/청/황/백색이 어우러진 색감과 안
정적인 필치(筆致), 충실한 풍속 묘사 등이 돋보인다.

이 그림은 1883년에 조성되었으며, 원래가 영가(靈駕)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죽은 이들
의 위패와 영정이 가득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개운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3호

대웅전 동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걸려있다. 신중도란 불법(佛法)을 수호하
는 신들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많아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그림 중
앙에는 제석천(帝釋天)과 천룡(天龍) 등이 자리해 있고, 그 주위로 무장을 한 신들이 배치되
어 있는데 1870년에 제작된 것으로 액자 안에 소중히 담겨져 있다.


▲  개운사 팔상도(八相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4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출생부터 열반까지 8개의 그림으로 정리한 것으로 1883년에 조성되
었다. 그림의 보호를 위해 액자 안에 담겨 있으며, 각 부분에 대한 설명은 쿨하게 생략한다.


▲  개운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215호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저승
의 10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멤버들이 담겨진 것으로 1870년에 제작되었다. 지장보살
밑에는 동자 2명이 그의 육환장(六環杖)과 두건을 들며 서로를 바라본다.


 

♠  개운사 마무리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뜨락 서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지닌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지장보
살상을 중심으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저승의 시왕(10왕), 금강역사(金剛力士) 등이 봉안되
어 있는데, 1995년에 도둑이 침투해 잠시 쑥대밭이 되었던 우울한 현장이기도 하다. 이때 지
장보살상과 시왕상의 절반, 그리고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후령통 등이 사라졌다.
이후 지장보살상과 없어진 시왕상 등을 다시 만들어 채웠고 뱃속이 열린 아미타여래좌상을 미
타전으로 옮겼으며, 뱃속 유물은 불교중앙박물관으로 가져가 정밀 연구를 벌여 그 정체를 밝
혔다.


▲ 지장보살상과 지장후불탱(지장시왕도)
1995년 이후에 새로 만든 지장보살상 뒤쪽에는 고색이 물오른 지장후불탱이 걸려있다.
이 그림은 19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명부전 식구를 그림에 옮겨 놓은 것이다.

▲  모습도 제각각인 시왕상과 시왕탱
시왕상 뒷쪽에 걸린 시왕탱 4점은 1870년에 제작된 것이다.

▲  개운사만의 특별한 초파일 이벤트, 부처되기 포토존
저 앞에 앉아 포즈를 취해보자. 그러면 누구든 부처가 된다. (물론 무늬만~~~) 광배
부분을 더 그럴싸하게 만들었으면 실감이 좀 컸을 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삼성각(三聖閣)

명부전에서 북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그 계단의 끝에 삼성각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아 있는데, 특이하게도 각 칸마다 다른 이름의 현
판을 내걸고 있다. 가운데 칸은 칠성(七星, 치성광여래)의 공간인 금륜전(金輪殿)으로 특별히
전(殿)으로 대우했으며, 서쪽은 산신(山神)의 공간인 산령각(山靈閣), 동쪽은 독성(獨聖, 나
반존자)의 공간으로 그가 몸을 일으킨 천태산(天台山)의 이름을 따서 천태각(天台閣)이라 했
다. 허나 각 칸마다 이름만 달리 했을 뿐, 하나의 삼성각으로 봐도 무관하다.

이 건물은 1929년에 중건했는데, 처음에는 독성각(獨聖閣)이라 불렸으며, 이후 산신과 칠성이
추가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  독성상과 독성탱
독성탱은 1930년에 제작된 것으로 붉은 계통의 옷을 입은 독성 할배와 문관(文官),
승려, 천태산, 소나무, 폭포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림 앞에는 머리가 유난히도
큰 독성 할배상이 지팡이를 들고 앉아있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돋보이는 산신상과 산신탱

그림에 윤기가 나는 것을 보니 아마도 20세기 후반에 제작된 듯 싶다. 그림 중앙에는 붉은 옷
을 입은 산신이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고, 그 좌우로 귀엽기 그지 없는 모습의 호랑이
와 동자가 있으며, 그들 뒤로 산과 소나무, 폭포 등이 그려져 산신탱의 기본 요소는 모두 갖
추고 있다. 그리고 산신탱 앞에는 호랑이를 탄 산신 할배상이 별도로 닦여져 있다.


▲  그림만 홀로 있는 칠성탱

칠성탱은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 칠성
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의 주요 식구들이 복잡
하게 담겨져 있다.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 신앙으로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어엿하게 불교의 일원이 되면서 그를 봉안하지 않은 절이 거의 없을 정
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아무래도 인간의 수명을 관리하는 존재다보니)

삼성각을 끝으로 약 1시간 반 가량 이루어진 개운사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이곳에 깃든 문
화유산은 아미타여래좌상 복장유물을 제외하고 모두 눈과 사진에 담았고, 거기에 생각치도 못
했던 괘불까지 친견하면서 당초 계획했던 볼거리를 100% 초과 달성했다.
이렇게 개운사를 배부르게 둘러보고 동쪽에 자리한 보타사로 이동했다. 주차장 동쪽으로 나있
는 문을 이용해 3분 정도 들어가면 그 골목길의 끝에 보타사 정문이 나온다. 아쉽지만 본글은
여기서 끝~~~ 보타사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안암동 개운사 찾아가기 (2018년 5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안암역 2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면 바로 안암역교차로이다. 교차
  로에서 북쪽 길(개운사길)로 3~4분 정도 가면 일주문이 나오며 그 문을 들어서면 개운사 경
  내이다.
* 서울시내버스 273, 1111, 2115번을 타고 안암역에서 하차하여 도보 5분 (2115번 서경대 방
  향은 개운사입구에서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산4-11 (개운사길 73 ☎ 02-926-4069
* 개운사 홈페이지는 아래 연등길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개운사를 뒤로하며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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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8년 5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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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산사 나들이 ~ 전주 근교 제일의 고찰, 완주 종남산 송광사


 


' 봄맞이 산사 나들이, 완주 송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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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만물의 희망, 봄이 혹독한 겨울 제국(帝國)을 몰아내고 천하를 한참 해방시키던 3월
한복판에 완주(完州) 제일의 고찰로 손꼽히는 송광사를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 남부터미널로 이동하여 삼례(參禮)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담고 딱 2시
간을 달려 삼례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바로 전주시내버스 350번(삼례터미널↔평화동
)을 잡아타고 호남의 오랜 중심지, 전주 시내로 들어섰다. 서울에서 바로 전주로 안가고
삼례를 거친 것은 전주행 직행버스 이용객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한산한
삼례행 버스를 택했다. 어차피 삼례에서 전주는 지척 거리이다.

전주의 도심, 전동(全洞)에 두 발을 내렸으나 송광사로 가는 차 시간이 50분이나 남아있
었다. 마땅히 할 것도 없고 점심을 먹기에도 시간이 일러 중앙시장까지 쉬엄쉬엄 걸으며
시간을 억지로 죽였다. 그래도 20여 분이나 남아 정류장에 죽치고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기다리던 전주시내버스 806번(평화동↔앞멀)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밀며 입을 벌린다.
전주 806번은 거의 3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벽지 노선으로 그를 놓치면 정말 대책이 없다.
(송광사는 806번 외에도 1개 노선이 더 있으나 배차간격이 거의 절망 수준임)
버스는 모래내시장에서 노인들이 가득 타면서 거의 만석의 기쁨을 누렸고 중앙시장 출발
30분 만에 송광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진흙탕이 되버린 오도천을 건너면 송광사로 인도하는 길이 나온다. 그 짧
은 방죽의 끝에는 완주군 제일의 고찰인 송광사가 일주문을 들이밀며 중생을 맞이한다.


▲  송광사 앞을 흐르는 오도천

▲  송광사 주차장과 둑방길 나무들


 

♠  종남산(終南山) 남쪽에 들어앉은 오래된 고찰
완주 송광사(松廣寺)

▲  송광사 일주문(一柱門)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4호

송광사의 정문인 일주문은 양쪽으로 쭉쭉 뻗은 보기만해도 정겨운 기와 돌담을 거느리고 있다.
보통 일주문은 경내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며 홀로 자리해 있지만 이곳은 경내 바로 앞에
자리하여 홀로 있는 것은 면했다. 바로 옆에는 백련다원이란 찻집이 있고, 문을 들어서면 바
로 금강문과 함께 경내 건물이 두텁게 모습을 비춘다.
일주문은 속세의 문과 달리 여닫는 문이 없어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한다. 허나 이곳
은 특이하게도 여닫는 문짝을 달았다. 문짝을 달았다고 해서 사람을 가리는 것은 아니니 어깨
를 피고 들어가도록 하자.

이 문은 맞배지붕 건물로 다른 일주문의 지붕과 달리 간결하고 가벼운 모습이다. 문 기둥 위
쪽과 기둥 사이에 공포(空包) 덩어리를 장식한 다포(多包)식이며, 기둥 앞뒤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진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준다. 문 평방(平枋)에는 '終南山 松廣寺(종남산 송광사)'
라 쓰인 현판이 있는데 이는 1975년에 승려 서암(瑞岩)이 쓴 것이다.
지금은 경내 앞에 있지만 원래는 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나드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 문을
들어서 3km를 더 들어가야 비로소 경내에 이르렀다는 소리로 송광사 땅이 무려 그곳까지 이르
렀다고 한다. 허나 사찰 부지가 계속 줄어들면서 1814년 절과 가까운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고
1944년에 해광극인(海光克仁)이 현 위치로 옮겨 정문으로 삼았다.


▲  일주문 서쪽 돌담

송광사가 산속이 아닌 평지에 둥지를 틀다보니 돌담으로 경내를 빙 둘러 속세의 잡다한 기운
을 경계하고 있다. (서쪽 돌담에 차량 통행을 위해 문을 낸 것을 빼면 거의 돌담으로 감싸임)
고색이 짙은 돌담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시골마을의 담장 같은 정겨운 풍경이다.


▲  일주문을 들어서면 해맑은 표정의 나무 장승 1쌍이 좋은 인연임을 강조하며
중생을 맞이한다. 그들의 인사에 나도 기분이 좋아지고 긴장감도 많이
풀어진다. 그들을 지나면 바로 금강문이 마중한다.


※ 완주 송광사(松廣寺)의 오랜 내력
종남산의 남쪽이자 오도천 서쪽 평지에 둥지를 튼 송광사는 신라 후기인 867년 보조국사 체징
(普照國師 體澄)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종남산 남쪽에 영험이 있는 샘물이 솟아나 그 옆에 절
을 짓고 송광사라 했다는데 이를 입증할 사료도, 그 시절 유물도 전혀 없어 창건시기에 대해
심히 회의감을 들게 한다. 백제 후기에 창건되어 백련사(白蓮寺)라 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 역
시 마찬가지이다.
고려 중기에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이곳을 천태종(天台宗) 소속으로 바꾸었다고 하
며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보조국사의 창건설 말고도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의 점지설이 있다. 그가 이곳을 지
나다가 영천이란 우물을 발견했는데 (절터 주춧돌이 가시덤불 속에 묻혀있었고, 절터 한쪽에
영천이란 우물이 있었다고 함) 그 물을 마셔보니 그 맛이 매우 특이해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하여 이 우물로 인해 이곳에 절을 세우면 크게 될 것이라 여겼으나 당장 절을 세울 여
력이 없어 샘 주변 네 귀퉁이에 돌을 쌓아 자신이 찍어둔 자리임을 밝히고 그곳을 총총히 떠
났다.
이후 순천에서 그 유명한 송광사(松廣寺)를 세우고 머물 때, 제자들에게 '전주 인근 종남산에
괜찮은 절터가 있다. 크게 불법(佛法)이 번창할 곳이니. 그곳에 절을 세워라!'
부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뜻은 실현되지 못했다.
지눌은 고려 중기 고승(高僧)으로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킨 인물이다. 당시 고려 불교계의 1
인자였던 그가 마음에 들어했던 자리에 절을 세우지 못하고 지나친 것도 이상하거니와 스승의
부탁을 받은 제자들도 그 뜻을 받들지 않았다는 점도 의문스러울 뿐이다.

지눌이 지나갔다는 시절에서 400여 년을 더한 1622년에 이르자 응호(應浩)와 승명(勝明), 운
정(雲淨), 덕림(德林), 득순(得淳), 홍신(弘信) 등이 모여 현재 자리에 절을 세웠다. 재정이
여의치 못해 무려 14년 동안 공사를 벌여 1636년에 완성을 보았으며, 당시 무주 적상산(赤裳
山) 안국사(安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주지로 있던 벽암대사(碧岩大師)를 개창조(開創祖
)로 삼았다고 하니 이때가 실질적인 창건 시기로 여겨진다. 당시 절터 자리는 승명의 증조부(
曾祖父)인 이극룡(李克龍)이 기증했다고 한다.

▲  독특한 구조의 송광사 종루

▲  5층석탑 -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다고

1636년 절이 완성되자 벽암대사를 불러 50일 동안이나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이때 전국에서 수
천 명이 몰려와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완성을 기념하고자 사적비를 세우고 약사전을 지었
으며, 옛날 지눌의 뜻을 받들었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송광사라 했다고 한다. (순천 송광사
가 워낙 대단한 절이라 그곳의 이름을 따고 지눌의 일화를 그럴싸하게 붙여놓은 것으로 여겨
짐) 참고로 종남산이란 이름은 보조국사가 절터를 구하고자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우물이 풍부
하게 솟은 지금의 자리를 발견하고 더 이상 남으로 내려가지 않았다고 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
다. 즉 남쪽으로 가는 것을 마쳤다는 뜻이 된다.

1640년 명부전에 소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을 만들어 봉안했으며, 1641년 왕실의 지원을 받
아 청나라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의 귀국을 기원하고자 대웅
전에 거대한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을 봉안했다.
1649년 사천왕상을 조성했고, 1656년에 나한전을 지었으며, 1716년에는 범종을 조성했다. 그
리고 1786년에는 왕실의 지원에 호응하고자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목조3전패를
만들고 절을 중수했다. 1813년에는 정준이 약사전을 중수하고, 절의 영역이 크게 줄어듬에 따
라 3km 밖 나드리에 있던 일주문을 조계교 인근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2층이던 대웅전이 기울
자 1층으로 개축했으며, 1814년 명부전 지장후불탱화를 조성했다.

1944년 일주문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고, 1989년에는 삼성각에 탱화를 조성했으며 1993년 대
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복장(腹臟)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2002년에
는 대웅전을 해체복원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고, 2003년에는 2층이던 관음전과 요사채의 위치
를 바꿨다. 그리고 2004년에 천왕문과 사천왕상을 손질했고 2013년 약사전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  소나무에 조금 가려진 나한전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겉보기와 달리 제법 터가 넓은 송광사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천왕문, 금강문, 종루, 지
장전, 극락전, 첨성각, 나한전, 삼성각, 관음전, 약사전, 요사 등 대략 16~17동에 건물을 지
니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과 종루, 소조사천왕상, 소조석가여래3불좌상과 복장
유물 등 국가 보물 4점과 일주문과 사적비(전북 지방유형문화재 5호), 동종, 목조3전패, 나한
전, 금강문, 벽암당부도(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44호) 등 9점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산속 평지에 자리한 절로 마을 바로 옆에 자리해있어 산사의 내음은 조금 떨어진다. 그냥 시
골에 있는 한적한 사찰 정도라고나 할까? 요사와 종무소, 세심정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 오래
된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각 건물마다 문화유산이 풍부하여 그들이 풍기는 고색의 내음에 현
기증이 일어날 정도이다. 게다가 경내 서쪽에는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여름과 초가을에는
연꽃의 향연도 구경할 수 있다.

※ 송광사 찾아가기 (2018년 4월 기준)
① 전주까지
* 용산역, 영등포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에서 전라선 열차(고속전철, 새마을호
  , 무궁화호, 누리로)를 타고 전주역 하차
* 여수엑스포역, 순천역, 남원역에서 전라선 열차(고속전철, 새마을호, 무궁화호, 누리로) 이
  용
*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1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전주행 고속버스
  가 3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인천공항, 의정부, 고양(화정), 성남, 부천, 안산, 수원, 강릉, 원주, 천안, 대전(복
  합, 유성), 군산, 정읍, 남원, 광주, 목포, 순천, 대구(서부, 동대구), 경주, 포항, 부산(
  사상, 노포동), 창원(마산), 진주에서 전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전주역에서 806번 시내버스(1일 5회)를 타고 송광사 하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6번 시내버
  스를 타고 고려병원에서 하차하여 길 건너편 정류장에서 814번 시내버스(1일 11회 운행)로
  환승
* 전주고속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3-1번을 타고 모래내시장 정류장에서
  814번으로 환승, 또는 금암광장이나 전주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에서 전동, 전주한옥마을
  방면 아무 시내버스나 타고 중앙시장이나 전동성당, 남부시장 정류장에서 내려서 건너편 정
  류장에서 806, 814번 이용
③ 승용차 (주차장 있음)
* 익산포항고속도로 → 소양나들목을 나와서 진안 방면 26번 국도 → 해월1교차로에서 좌회전
  소양 방면 → 마수교를 건너 우회전 → 송광사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금강문)

▲  사자를 탄 문수동자 (금강문)

★ 송광사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공짜
* 송광사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하고 있다. 자율/휴식형과 아름다운 순례길, 1박2
  일 템플스테이 등 3가지가 있으며, 자율/휴식형은 절에 머물며 휴식과 수양을 하는 것으로
  아침/저녁 예불과 공양시간만 지키면 된다. (평일은 언제나 참여 가능), 아름다운 순례길은
  전북에 있는 불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 성지를 걸어서 순례하는 것으로 송광사에서 1박
  2일 숙식을 한다.
*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2 (송광수만로 255-16 ☎ 063-241-8090 / 243
  -8091)
* 송광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템플스테이 정보와 예약 신청 가능)


▲  금강문 안쪽에서 바라본 일주문


 

♠  송광사 천왕문, 금강문

▲  금강문(金剛門)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73호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금강문이 나타나 중생의 번뇌를 검문한다. 이 문은 정면 3칸, 측면 2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부처를 지키는 금강역사(金剛力士)의 보금자리이다.
문의 천정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연등천정이며, 대웅전 방향 오른쪽 금강역사는 왼손에 칼
을 들고 싸움 태세를 취하며 약간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왼쪽 금강역사는 오른손에 뱀(아마
도 코브라일듯)을 꽉 쥐어들며 고개를 약간 틀어 오른쪽을 보고 있다. 눈을 크게 부라리며 당
장이라도 칼로 찌를 태세이지만 얼굴은 거의 해학적으로 생겨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
게 한다.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표정에 굳이 싸움을 걸지 않고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돌아갈 것이다.

금강역사 옆에는 앳되고 귀여운 동자가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사자(거
의 강아지처럼 생김)에 탄 동자는 문수동자(文殊童子)이며, 작은 코끼리를 탄 보살은 보현동
자(普賢童子)로 표정이 참 천진난만하다. 저들은 저리 표정이 밝건만, 속세에 찌들어 매일 고
통받고 사는 나는 그렇지가 못하니 그 비결을 묻고 싶을 뿐이다. 저 자리에 앉으면 저렇게 변
하는 것일까? 저들이 잠시 마실 나간 사이 그들의 자리를 빼앗아 앉고 싶다.


▲  금강역사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의 위엄

▲  금강역사와 하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  금강문과 천왕문 사이에 자리한 굵직한 당간지주(幢竿支柱)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돌기둥에는 고색의 때가 역력하다.

▲  보수공사에 들어간 천왕문(天王門)

금강문을 들어서면 바로 천왕문이 마중을 한다. 천왕문은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
금자리로 보통 일주문처럼 문짝이 없지만 여기는 여닫는 문짝을 두었다.

이 문은 송광사가 한참 몸을 일으키던 1622년부터 1636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1636년에 세
워진 송광사 개창비(開創碑)에 따르면 처음부터 '문'이 아닌 '전'을 칭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또한 다문천왕(多聞天王)의 왼쪽 보관(寶冠) 끝 뒷면에 '順治己丑六年七月日 畢金山畵圓主造
像'이란 묵서(墨書)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순치6년은 1649년이다. (청나라 세조의 연호임)
하여 이를 통해 1649년에 사천왕을 만들어 봉안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왼손에 있는 보탑
(寶塔) 밑에는 '乾隆五十一年丙午五月日…新造成'이란 묵서명이 있어 1786년에 보탑을 새롭게
만들었음을 살짝 알려준다.

▲  천왕전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 - 보물 1225호

이들 사천왕상은 흙으로 만든 것으로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천왕문이 보수공사에 들어가면서 문 주변으로 철제 담장을 둘렀고, 사천왕상 앞에 보수 관련
시설을 두면서 온전한 모습을 담기가 어려웠다. 사천왕상도 아무리 그들의 보금자리를 보수하
는 시설이라고 해도 시야를 가려 마치 철창에 갇힌 듯한 모습이니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일 것
이다.

◀  아이들을 품으며 행복에 겨워있는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의 위엄


▲  송광사의 종루(鐘樓) - 보물 1244호

천왕문을 지나면 살이 과하게 찐 똥배 포대화상이 나온다. 똥배에다가 얼굴에 혹부리까지 잔
뜩 나있으니 성인병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을 듯 싶으나 불교의 주요 성자(聖者)의 하나로
그의 배를 문지르면 아들을 낳거나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중생들의 인기가 대단하다.

포대화상 옆에는 '十'자 모양의 묘하게 생긴 건물이 눈길을 단단히 부여잡는데 그가 바로 사
물(四物)의 보금자리인 종루이다. 송광사의 백미이자 상징으로 '十' 모양으로 생긴 탓에 예전
에는 십자각(十字閣)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정확히는 12각형으로 이런 형태에 건물은 천하에서
거의 이곳 밖에 없다. 또한 6각형 이상 건물은 오로지 궁궐이나 국가 제단에서만 세울 수 있
었는데 무려 12각형짜리가 어찌 궁궐도 아닌 절에 버젓히 세워져 있는지 딱히 전하는 사연이
없어 호기심을 크게 자극시킨다.

그는 누각 형태의 팔작지붕 건물로 1층은 2층을 받쳐들기 위한 허공일 뿐이며, 서쪽에 마련된
계단을 타고 2층에 오르면 중앙에 자리한 범종(梵鐘)을 비롯해 운판(雲版), 법고(法鼓), 목어
(木魚) 등의 사물이 매달려 있다.
이 건물은 대웅전을 1층으로 고친 1814년이나 1857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지붕을 받치
는 공포와 지붕이 절반을 넘을 정도로 커서 1층과 2층 기둥이 잘 버틸 수 있을까 싶은 쓸데없
는 걱정까지 들 정도이다.

▲  서쪽에서 본 종루

▲  종루 안에 들어있는 사물

종루에는 2개의 종이 걸려있다. 중앙에 자리한 것은 근래 것이고 그 북쪽(대웅전 방향)에 자
리한 것이 1716년에 조성된 동종(銅鐘)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38호이다,

종의 높이는 107cm, 아랫부분 지름은 73cm로 조그만 크기이며, 윗부분에 꽃무늬가 있고 밑에
는 방패 모양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밑에 연주형(練珠形) 돌기 60개가 둘러져 있고 9.5
cm 두께의 띠가 그 밑에 있다. 아랫부분에는 지름 6cm의 원이 8개가 새겨져 있고 그 안에 범
자(梵字)를 새겼으며, 그 밑 세로 면에 보살상을 새기고 나머지 한 면에는 전패(殿牌)를 두었
다. 전패에는 '주상삼전수만세(主上三殿壽萬歲)'라 쓰여있어 당시 숙종(肅宗)과 왕후, 대왕대
비(大王大妃)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종의 가장 밑부분에는 지름 6㎝ 정도에 보상 당초 무늬를 둘렀으며 강희 55년(1712년) 4월에
광주 무등산 증심사(證心寺)에서 만들었다는 내용과 건륭(乾隆) 34년(1769년)에 문광득의 시
주로 종을 보수했다는 내용이 있어 시주자의 인적사항을 빼곡히 적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 범
종 형태를 보여준다.


▲  송광사 극락전(極樂殿)

천왕문 동쪽에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의 거
처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명부전(冥府殿)이었으나 1999년에 바
로 옆에 지장전을 닦으면서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
을 그곳으로 옮기고 이곳을 극락전으로 삼았다.
다른 건물과 달리 문이 중앙에만 있으며, 불단에는 아미타불과 수려한 보관을 쓴 문수보살(文
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아미타3존불을 이루고 있고 좌우 벽에는 조그만 금동불이 가
득 벽을 메우고 있는데 이들은 죽은 이들의 영가(靈駕)를 봉안한 공간이다.


▲  극락전 아미타3존불 - 서방정토의 주인답게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 있는 존재들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는 고색의 때가 가득한 커다란 네모난 돌이 누워있다. 그 위에는 오래
된 연화대(蓮花臺)가 있는데, 그 자리에 새로 만든 하얀 피부의 석불이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인다. 이 네모난 돌은 예전 건물에 쓰였던 주춧돌로 보이며, 연화대 역시 예전에 쓰였거나
주변에서 업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잉여로 남은 이들 석재를 한쪽에 모아 자리를 만들고 새로
석불을 안치하여 그들에게도 존재의 가치를 심어주었다.
석재 뒤쪽에는 종이와 쓰레기를 태우는 굴뚝이 자리하여 서로를 의지한다.


▲  송광사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1999년에 지어졌다. 극락전에 있던 명부의 식구를 옮겨와 지장전으로 삼았으며, 소
조지장보살3존상을 비롯한 명부(저승)의 식구들은 1640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들을 하나로 묶
어 '소조지장보살3존상 및 권속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68호로 지정했다.
허나 나는 어리석게도 지장전을 지나치고 말았다. 건물 주변에 그들을 알리는 문화재 안내판
이 없었기 때문이다.

▲  세심정 앞에 자리한 귀여운 돌부처
그의 포즈가 꼭 '한푼 내놔~' 그러는 것 같다.
그렇게도 돈이 궁했단 말인가?? 그 앞에
놓인 복전함이 참으로 궁색해 보인다.

▲  대웅전 동쪽 언덕의 세심정(洗心亭)
근래에 지어진 정자로 모습이 양반가의
정자나 별장 같은 분위기이다. 절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풍경~~


 

♠  송광사 나한전, 삼성각, 관음전

▲  송광사 요사(寮舍)

세심정 북쪽에 자리한 'ㄱ'자 모습의 건물은 승려의 생활공간인 요사로 예전에는 약사전(藥師
殿)으로 쓰였다. 1636년에 벽암이 세웠다고 하며, 1814년에 중수했는데, 바로 이 요사 뒤쪽에
1636년에 세워진 송광사 사적비(事蹟碑,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5호)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그는 일명 송광사 개창비라 불리기도 하는데 신익성(申翊聖)이 비문을 짓고, 선조(宣祖)의 8
번째 아들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이 글씨를 썼다. 이 비석 역시 그의 존재를 몰라 지나
치고 말았다.


▲  송광사 나한전(羅漢殿)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72호

대웅전의 뒷통수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선 나한전은 부처의 제자인 나한(羅漢)의 보금자리이다.
그들을 거느린 석가불을 중심으로 16나한과 오백나한(五百羅漢), 인왕상(仁王像), 동자상, 사
자상 등이 건물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는데, 석가불과 16나한 뱃속에서 나온 유물 중 1656년
에 조성된 발원문이 발견되어 창건시기를 알려준다.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가운데에 문이 있는 구
조이다. 1656년에 벽암이 세웠으며 1934년에 혜광이 중수했다. 이때 중수로 서까래와 천정 등
이 조금 변형되긴 했으나 주요 부재와 천정 구성 등은 17세기 불전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나한전 목조석가여래3존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69호

나한전 석가불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뚱뚱한 어린이의 얼굴처럼 앳되고 포동포
동해 보인다. 두 귀는 중생들의 고충을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내려왔다. 그 좌우에는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협시(夾侍)하고 있는데, 보통은 중앙 불상과 협시불은 간격을 짧
게 하여 바로 좌우에 두지만 여기는 기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배치한 탓에 서로 간의 거리가
길어 마치 독자적인 불상/보살상처럼 보인다.

석가3존불 외에 16나한과 500나한, 범천(梵天)과 제석(帝釋), 동자, 인왕상, 사자상, 천녀상
등 526구가 불단 주변을 빼곡히 메운다. 500나한 중 일부는 나중에 다시 석고로 틀을 만들어
복원한 것이며, 석가3존불을 비롯한 나한전 내부의 모든 존재들은 '나한전 목조석가여래3존상
및 권속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69호로 지정되었다.


▲  나한전 내부 우측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한 16나한과 하얀 피부의 조그만 500나한 등이 보인다.

▲  나한전 내부 좌측 - 존상(尊像)들이 너무 많아서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  송광사 삼성각(三聖閣)

나한전 우측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
로 1980년대에 기존의 건물을 부시고 새로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
부에는 1989년에 조성된 아주 따끈따끈한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삼성각 중앙에 자리한 칠성탱

▲  산신탱과 호랑이를 탄 산신상

▲  독성탱과 윗통을 드러낸 독성상

▲  근래에 새롭게 터를 닦은 미륵불

▲  송광사 관음전(觀音殿)

▲  대웅전 뒤쪽 뜨락

종루 서쪽에 자리한 관음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2층이었다. 1층
은 밥을 먹는 공양간, 2층은 관음전으로 쓰였는데 2003년에 2층을 뚝 떼어냈다. 근래에 조성
된 관음보살상과 관음탱이 있으며, 건물 북쪽에는 매점을 겸하는 종무소가 있고 남쪽에는 공
양간 겸 요사로 쓰이는 적묵당이 있다.

대웅전과 나한전 사이에는 소공원 같은 조촐한 뜨락이 있다. 커다란 나무 그늘에 자리한 짜투
리 공간으로 예전 주춧돌과 맷돌로 쓰인 돌을 가져와 조촐하게 탁자와 의자로 삼았는데 그 모
습이 참 아기자기하다. 그리고 서쪽에는 조그만 비석이 우두커니 서 있는데 그를 알리는 안내
문도 없고 비석의 내용도 마멸이 심해 멀쩡한 두 눈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절과 관
련된 비석이거나 승려의 탑비(塔碑)인 듯 싶다. (옛 사적비라는 말도 있음)

▲  주름잡힌 어처구니 없는 맷돌이
어엿한 탁자가 되었다.

▲  주춧돌로 보이는 커다란 돌을 탁자로
삼고 주변에 작은 돌을 배치해
의자로 삼았다.

◀  정체가 묘한 오래된 비석
얼핏 보면 내용도 없이 그냥 돌만 비석처럼
세운 것 같다.


 

♠  송광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1243호

송광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계 팔작지붕 건물로 그 규모가 상
당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상당히 주눅을 들게 만든다. 1622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처음에는
2층이었다.
지금도 1층 치고는 큰데 2층이었으면 거의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에 버금가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다가 건물이 기울면서 1814년 1층으로 고쳤으며, 1857년에 중수했다.
대웅전 현판은 송광사개창비(사적비)를 썼던 선조의 8번째 아들인 의창군이 쓴 것이니 그만큼
왕실과도 인연이 깊었음을 보여준다.

대웅전은 다른 건물에 비해 가운데 칸이 조금 좁은 편이며, 건물 외벽에는 1칸당 3개의 그림
을 두어 총 48개의 그림을 두었다. 그림에는 신중과 보살, 나한도 등이 그려져 있는데, 다른
법당에서는 볼 수 없는 개성적인 구조로 문이 있는 정면은 그림의 높이가 낮다. 또한 겉으로
보면 조선 후기 건축물의 하나로 단순히 여길 수 있지만 대웅전의 매력은 바로 그 안에 있다.
송광사에서 다른 건 다 놓치더라도 대웅전 내부를 꼼꼼하게 살펴야 여기까지 들인 차비와 기
름값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건물 내부는 높은 기둥을 4개 세웠으며, 옆면의 평주(平柱)보다 뒤로 물린 다음 후불탱을 봉
안했고 그 앞에 불단을 두어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을 안치했다. 이 석가3불좌상은 규모가 대웅
전에 버금갈 정도로 장대하여 보는 이를 다시 한번 주눅 들게 만드니 왜 자꾸 중생의 기를 죽
이는지 모르겠다. 또한 건물 천정에는 보개(寶蓋)를 만들고 그 위에 용, 게, 거북 등을 배치
했으며, 중앙 3칸과 양쪽 구석 천정에는 주악비천(奏樂飛天)을 그린 그림 11폭이 있다. 그리
고 석가3불좌상 사이에는 왕실의 안녕을 비는 3개의 전패(殿牌)를 두었는데, 그 디자인이 매
우 현란하며, 건물 외벽에도 온갖 그림으로 치장되어 있어 그야말로 하나의 불교미술전시관을
보는 듯 하다.

대웅전 앞에는 원래 5층석탑이 있었다. 그래서 1금당 1탑 형태의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근래(2008년 이후)에 미륵불 앞으로 옮겨져 조금은 허전한 형태가 되었다.


▲  대웅전 계단 옆에 고개를 내민 귀수

화마(火魔)의 예고 없는 방문을 막고자 도깨비 얼굴상(귀수)을 건물 정면에 배치했다. 도깨비
라고는 하지만 그리 무서운 표정도 아닌 일주문 장승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그를 본 화마도 자
신의 본분도 저버린 채, 발길을 돌릴 것이다. 그 덕분인지 아직 대웅전은 화마에게 유린된 적
이 없다. 서로를 피곤하게 하며 인상을 찡그리는 강경책보다는 적절히 웃으면서 달래는 회유
책이 한 수 위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  석련대(石蓮臺)
거북 비슷하게 생긴 석상 위에 연꽃을 두룬 석련대가 있다. 불상을 올려두는
돌받침대로 지금은 어디로 마실을 갔는지 세월의 먼지만 가득하다.

▲  온갖 그림으로 가득한 대웅전의 뒷모습
1칸에 3개씩 그림을 배치하여 총 48개의 그림을 두었다. 거기에 천정에 그려진
비천상의 사본 그림까지 배치해 두 눈이 심심해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  대웅전 서쪽

▲  대웅전 동쪽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약사불 쪽에서 본 모습) - 보물 1274호

▲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아미타불 쪽에서 본 모습)

신발을 벗고 대웅전으로 들어서면 건물이 비좁아 보일 정도로 장대한 모습의 소조석가3불좌상
이 마중을 한다. 높이가 무려 5m가 넘는 불상이 1개도 아니고 협시불까지 3개가 있으니 주눅
의 정도는 더하다. 이 땅에 있는 소조(塑造) 불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오래된 법당
의 불상 가운데서도 제일 큰 편에 속한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
타불을 두어 석가3불좌상을 이루고 있으며 석
가불은 높이 5.5m, 무릎너비 4.05m, 무릎높이
72cm로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
고 이마에는 둥그런 백호(白毫)가 있다. 눈썹
은 무지개처럼 부드럽게 구부러져 있고, 코는
끝이 두툼하며 붉은 입술 주위에는 가늘게 수
염이 표현되어 있다. 표정은 약간 굳어보이며,
왼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했다.

석가불 왼쪽의 약사불은 석가불과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그의 이름에 걸맞게 왼손에 약합(藥
盒)이 들려져 있다. 높이는 석가불보다 조금
낮은 5.2m이다.

석가불 오른쪽의 아미타불도 석가불, 약사불과
비슷한 모습으로 약사불과 비슷한 높이를 유지
하고 있다.

▲  대웅전 석가불의 위엄

근래에 석가불 몸통에서 조성기(造成記)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비롯한 불경과 사리함,
복장유물을 넣는 후령통(候鈴筒) 등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조성기를 통해 이들 불상
의 조성시기와 조성배경, 만든 이를 상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조성기에 따르면 1641년 6월 29일에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
나라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의 조속한 귀국을 발원하고자 조성된 것이다. 그
러다보니 왕실과 사대부, 백성들의 시주에 힘입어 저렇게 웅대한 규모의 불상이 태어난 것이
다. 또한 명나라와 청의 연호가 같이 들어있으며, 병자호란의 휴유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
지가 강하게 배여있다. 그런 연유로 태어난 탓인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불상으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조성시기가 명확한 이 땅의 흔치 않은 불상으로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
점과 함께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이란 이름으로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으
며, 복장유물은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현재 김제 금산사(金山寺) 성보박물관에 가 있다.


▲  목조3전패(木造三殿牌)의 하나인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70호

▲  목조3전패의 하나인 세자저하수천추(世子低下數千秋)

▲  목조3전패의 하나인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世)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든 현란한 디자인의 전패 3개가 중생의 두 눈을 매혹시킨다. 약사
불 쪽에는 왕비의 안녕을 비는 전패가 있고, 아미타불 쪽에는 세자의 안녕을 비는 전패가, 석
가불과 아미타불 사이 그늘에는 왕의 안녕을 비는 전패가 숨은 듯 자리해 있다.

왕을 위한 전패는 윗쪽에 용 1마리를 새기고, 밑에 좌우에는 각각 2마리의 용을 새겼다. 왕비
와 세자의 전패는 윗쪽에 용 1마리, 밑에 각각 1마리를 두어 차별을 두었다. 좌대(座臺)도 왕
의 것은 상하에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을 조각한 것에 비해 나머지는 복련만 조각했다. 이
들은 운룡문(雲龍紋)의 조각이 매우 섬세하고 수려하며, 높이도 왕의 전패는 2.28m, 좌우 것
은 2.08m로 이 땅의 전패 가운데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왕의 전패 뒷쪽에는 '순치세(順治歲)'에 만든 것이라 쓰여있어 1644년에서 1661년 사이에 조
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이 나중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귀국을 위
해 만든 것이니 효종(재위 1649~1659) 때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효종(孝宗)이 맞으면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 세자인 현종이 된다. 이후 1792년 전패를 수리했다.

법당에 이렇게 왕과 왕비 등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를 두는 경우도 흔치 않은데, 그만
큼 왕실과 인연이 깊고 그들의 지원을 두둑히 입은 절임을 입증하는 유물이라 하겠다.


▲  등장인물이 104명이나 되는 신중탱(神衆幀)

대웅전 서쪽 벽에는 보기만해도 혼을 다 빼놓는 신중탱이 걸려있다. 이 그림은 화엄경(華嚴經)
에 나오는 104위의 신중(神衆)을 그린 것으로 다른 신중탱과는 다르다. 조금의 여백도 없이 빽
빽하게 들어차 있어 도대체 누가 누군지 눈과 머리가 고통스러울 지경으로 그림 중앙에는 동진
보살과 대범천왕(大梵天王), 제석천왕(帝釋天王) 등을 배치했으며, 1925년에 종인(宗仁)과 상
오(尙旿), 현성(鉉成), 태익(泰翼), 명진(明眞), 해일(海日) 등의 화승(畵僧)이 그렸다.


▲  불단 뒷쪽에 걸린 그림들(극락구품도)

대웅전 내부는 바깥(날씨가 무지 따스했음)과 달리 시원하다. 나무로 된 방바닥은 걸을 때 마
다 삐걱삐걱 소리가 조금씩 나는데 그만큼 건물이 오래되었다는 뜻이 된다. 허나 아무리 쿵쿵
거려도 단단하게 지어졌으므로 무너질 일은 없다.

남들이 잘 안가는 불단 뒷쪽으로 가면 뒷쪽 벽에도 그림이 걸려있다. 1칸당 그림 1폭이 걸려
있어 모두 3폭이 있는데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면 그림마다 구분선이 있어 선을 사이에 두고
다른 내용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1폭당 3개의 그림이 있으니 총 3폭의
9개의 그림이 있는 셈이다.
불가(佛家)에서 8개의 그림은 부처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八相圖)이다. 그럼 9개의 그림은
뭘까? 답은 바로 극락9구품(極樂九品圖)이다. 극락에 대한 9개의 장면을 담은 것으로 이들 그
림은 자세한 정보가 딱히 없어 신중탱과 비슷한 시기 또는 그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  대웅전 천정에 그려진 주악천인도(奏樂天人圖) ①

불단 뒷쪽 복도를 끝으로 대웅전은 이제 다 봤구나 여겨 나름대로의 포만감으로 철수하기 쉽
다. 허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이 하늘을 우러르고 살듯이 이곳도 반드시 천정을 바라
봐야 된다. 불단 앞 천정에 7개와 좌우 천정에 각각 2개씩 모두 11개의 주악천인도가 대웅전
의 하늘을 빛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놓친다면 대웅전의 4할을 놓친거나 다름이 없다.

저들을 보면서 어찌 저 높은 곳까지 그림을 그렸는지 참으로 대단할 뿐이다. 저런 그림이 떡
하니 있으니 천정이 더욱 빛이 나 나의 보잘 것 없는 두 눈은 가히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너
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고개를 90도나 올려서 봐야 되며 워낙 어두운 곳이라 저들을 모두
사진에 담느라 고개가 뚝 부러지는 줄 알았다.


▲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주악천인도 ②

▲  주악천인도 ③

▲  주악천인도 ④ 불단 동쪽 천정

▲  주악천인도 ⑤ 불단 서쪽 천정

▲  송광사 서쪽 연지(蓮池) - 절 너머로 보이는 산이 종남산

오래된 보물이 가득한 송광사 경내를 둘러보고 서쪽으로 나왔다. 경내 서쪽에는 넓은 연못이
있는데 이들은 연꽃의 보금자리인 연지이다. 연꽃은 여름 제국과 친한 식물이라 지금은 계림
황엽(鷄林黃葉)처럼 볼품이 전혀 없으나 앞으로 3달 이내에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며 한참 와
신상담(臥薪嘗膽) 중이다.
연못 너머에 보이는 정자는 백련정(白蓮亭)으로 연꽃이 있다면 연못을 1바퀴 둘러보며 백련정
에 발을 들여보고 싶지만 아무 것도 없고 가기도 귀찮고 해서 연못 남쪽만 서성이고 말았다.

참고로 연지 너머 경내 북쪽 산자락에 부도군(浮屠群)이 있다. 부도(승탑) 16기와 비석 2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에는 절을 세우는데 크게 공헌한 벽암당(碧巖堂)의 승탑이 있다. 이 승
탑은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44호로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해 지나치고 말았다.
(송광사에서 놓친 것이 도대체 몇 개인지...)


▲  연못 남쪽에 있는 고인돌

연못 남쪽에는 엉뚱하게도 청동기시대 유물인 고인돌(지석묘) 1기가 누워있다. 2개의 돌을 기
둥으로 삼아 뚜껑돌을 얹힌 형태로 이런 고인돌을 북방식(北方式) 고인돌이라고 한다. 하지만
북방식과 남방식이 북쪽과 남쪽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퍼져 있어 그것을 나누는 의미는 거의
퇴색되었다.

거의 우리 민족의 특허 유물이나 다름없는 고인돌을 간직한 절은 천하에서 이곳이 유일할 듯
싶다. (내가 가본 300곳이 넘는 절집 중에서 오직 이곳이 유일함~) 그에 대한 자세한 신상은
모르겠지만 이곳에 원래부터 있던 터줏대감으로 여겨지며, 이것 외에도 여러 기가 있던 것으
로 보인다. 허나 지금은 오로지 그만 살아남아 돌이킬 수 없는 머나먼 옛날을 그리워한다.


▲  경내 남쪽에 깔린 정갈한 돌담길

이렇게 송광사를 1시간 반 동안 둘러보니 시간은 13시가 넘었다. 비록 놓친 것이 다수 있어서
무척이나 마음이 아프지만 이건 나의 무지에 따른 소산이므로 어쩔 수가 없다. 아무래도 다음
에 또 오라는 송광사의 뜻인 모양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함)
이렇게 하여 봄맞이 송광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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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이 빚은 단양8경의 으뜸 명승지, 단양 사인암 ~~~ (북상리 시골, 청련암, 남조천)



' 단양 사인암 나들이 '



 

봄이 겨울 제국을 몰아내며 오랜 추위에 지친 천하를 진정시키던 3월 끝 무렵, 친한 후배
와 오랜만에 1박2일 장거리 여행을 나섰다.
렌트카를 이용하여 토요일 아침 8시에 서울을 출발, 백두대간 골짜기에 숨겨진 홍천(洪川
)의 삼봉약수(三峰藥水, ☞ 관련글 보러가기)를 찾아가 몸에 좋다는 탄산약수를 배터지게
섭취했다. 그런 다음 영월(寧越)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저녁 늦게 단양(丹陽)으로 넘어
갔다.

단양은 충북 동쪽 끝에 뉘어진 산간 고을로 나의 외가 동네(단성면 북하리)이다. 서울 다
음으로 오래 머문 곳으로<다 합쳐봐야 1년도 안됨> 지금은 다들 서울과 인천, 경기도, 원
주 등지로 나가고 모친의 작은아버지(나에게는 삼촌뻘~) 가족만 북하리 남쪽인 북상리(北
上里)에 머물며 터전을 지키고 있다. 바로 그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로 했다.

영월읍에서 제천(提川)을 거쳐 가라는 네비양의 안내를 쿨하게 무시하고 남한강을 따라서
고씨동굴, 영춘면, 향산리, 단양읍을 거쳐 저녁 10시가 넘어서 북상리 친척집에 도착했다.
그들의 환대를 받으며 삼겹살로 늦은 저녁을 들고 새벽 4시까지 코가 비뚤어지도록 곡차(
穀茶, 술)를 기울이며 간만에 회포를 풀었다.
곡차의 기운이 몸 속에 진하게 퍼져 이거 아침에 일어날 수나 있겠나 걱정이 들었지만 아
침 9시가 되자 스르륵 잠이 깼다. 천근만근 무거운 두 눈을 비비며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든 다음 10시쯤 그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그곳에 머문 시간은 고작 12시간 남짓, 간
만에 온 것치고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허나 같이 간 후배 때문에 더 머물기도 그랬고 그날 경북의 여러 곳을 둘러보고 올라가야
되서 다음 인연을 격하게 고대하며 단양 친척집을 떠났다.

단양에서 경북으로 가려면 손쉽게 죽령터널(중앙고속도로)을 통하거나 아니면 사인암, 방
곡리를 거쳐 문경으로 넘어가야 된다. 우리는 쉬운 길 대신 미답로인 문경 방면 고갯길을
택했는데 그 길목에 단양8경의 으뜸인 사인암이 요염하게 버티고 있다.
사인암은 예전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었고 이번에는 경북 지역에 크게 비중을 두었으므로
단양은 하룻밤 머무는 선에서 딱 선을 그으려고 했다. 허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
지나친다고 창밖에서 자꾸 손짓하는 사인암을 애써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나 잘생긴
사인암을 훌쩍 지나치는 것도 마음에 좀 걸리고 요즘 같은 난세(?)에 다음을 흔쾌히 기약
할 수가 없어 그곳에서 잠시 바퀴를 멈추고 그의 품으로 들어섰다.


 

♠  단양8경의 으뜸이자 운선9곡(雲仙九曲)의 아름다운 입술
사인암(舍人岩) -
명승 47호

단양8경(丹陽八景)이란 단양의 이름난 경승지 8곳을 일컫는다. 조선 명종(明宗) 시절, 퇴계 이
황(退溪 李滉)이 단양군수(丹陽郡守)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는 단양의 명승지 8곳을 뽑아서
단양8경으로 묶으면서 명나라의 소상8경(瀟湘八景)보다 더 아름답다고 침이 마르도록 찬양을
했다. 그 단양8경을 이루고 있는 식구로는 도담삼봉(島潭三峯)과 석문(石門), 구담봉(龜潭峯),
옥순봉(玉荀峯),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사인암 등으로 그중 도담3봉과 석문을 제외하고 모
두 옛 단양의 중심지였던 단성(丹城) 주변에 몰려있다. (8곳 중, 5곳만 가봤음)

사인암은 단양8경의 으뜸으로 꼽히는 현장으로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70m 높이의 기암절벽(奇
巖絶壁)이 사인암의 핵심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절벽에 상하 좌우로 균형 있게 줄이 그어
져 있어 마치 천연의 바둑판을 보는 듯 한데 하늘나라의 신선 형님들이 인간들이 자고 있을 때
살포시 내려와 이 절벽을 바로 눕혀 내기바둑을 한판 두고, 하늘로 올라갈 때는 인간들이 감히
손을 대지 못하게끔 하늘을 향해 세워두고 가는 모양이다.
절벽 꼭대기에는 낙락장송(落落長松)을 닮은 노송(老松)들이 사인암의 운치를 가득 수식하는데,
어찌 저런 척박한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혹 바둑판이 비와 눈에
젖을까봐 신선이 심어둔 작은 우산은 아닐까?

이곳은 단양 출신인 고려 후기 대학자, 역동 우탁(易東 禹倬, 1263~1342)이 사인(舍人) 벼슬에
있었을 때 휴양했던 곳이라 전한다. 우탁은 단양우씨 집안으로 원나라에서 들어온 정주학(程朱
學) 서적을 처음으로 터득한 인물인데,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 임제광(林齊光)이 우탁이 머무
른 것을 기리고자 그의 벼슬 이름을 따서 사인암이라 했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인 김홍도(金弘道)도 이곳을 다녀가 멋지게 그림으로 남겼고, 많은 시인묵
객들이 찾아와 시문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며 이곳의 절경을 즐겼다.

사인암은 남조천(南造川)을 따라 이어진 운선9곡의 하나로 유리처럼 맑은 남조천의 물이 이곳
을 굽이쳐 흘러 안그래도 절경인 경치에 더욱 윤기를 북돋는다. 사인암 옆에는 고려 때 지어졌
다는 청련암(靑蓮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터를 닦았으며, 사인암 입구에는 1977년 6월 지방 유
림에서 세운 역동우탁기적비(易東禹倬紀績碑)가 서 있다.

예전에는 상선암, 중선암 등에 밀려 좀 한적했으나 서서히 단양의 꿀단지로 부상하면서 주변에
음식점과 민박, 펜션 등이 많이 생겨났으며, 시골 북하리와 10여 리 거리로 가까워 외가 친척
들도 자주 놀러왔던 곳이다. 시골과도 꽤 가까운 곳이 분명하건만 시골을 자주 찾았던 어렸을
적에는 이상하게도 좀처럼 인연이 닿지 않았고 (상선암과 중선암, 하선암도 못가봤음) 다 장성
한 이후에야 겨우 인연이 닿아 이렇게 2번 인연을 지었다.


▲  사인암 앞을 굽이쳐 흐르는 남조천
남한강을 향해 격하게 흐르던 남조천의 물줄기도 이곳만큼은 서행하여
사인암의 절경을 즐긴다.

▲  남조천에 조성된 타원형 모양의 섬
사인암과 조금 떨어진 남조천 한쪽에 흙과 돌로 대(臺)을 쌓고 역동우탁기적비와
운치가 깊은 소나무3그루를 심었다. 남조천 물줄기 틈에 자리해 있어
사인암 속의 조그만 섬을 이루고 있다.

▲  역동우탁기적비 주변에서 바라본 남조천과 사인암

▲  남조천에 사뿐히 걸린 구름다리

▲  우탁의 시를 머금은 커다란 표석

▶ 춘산에 눈 녹인 바람 ◀
춘산(春山)에 눈 녹인 바람 건듯 불고 간 듸 업다
져근 덧 비러다가 마리 우희 불니고져
귀 밋태 해묵은 셔리랄 녹여볼가 하노라

☞ 봄 산에 쌓인 눈을 녹인 바람이 잠깐 불고 어디론가 간 곳이 없다.
잠시 동안 (그 봄바람을) 빌어다가 머리 위에 불게 하고 싶구나.
귀밑에 여러 해 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봄 바람을 이용해 자신의 젊음을 되찾고 싶은 우탁 할배의 부질없는 꿈을 담은 시,
나이를 먹는 것 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그래서 노인들이 좋아하는 폭포가
'미대륙에 있는 나이아가라'폭포라고??)

▲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사인암
그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사인암의 모습도 조금씩 달리 보인다.

▲  바로 건너편에서 바라본 사인암의 위엄

예전 사인암을 찾았을 때(친척들과 같이 갔음)는 정작 사인암 건너편은 가지 않았다. 그 건너
편에서 바로 정면으로 그를 대하니 정말 대자연 형님의 위대한 작품성이 느껴진다. 마치 바둑
판을 하늘로 향해 곧게 세운 듯한 모습, 절벽 꼭대기에 소나무들이 운치를 뽐내며 절벽의 우산
이 되어주는 모습 등 그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선보이며 1폭의 그림 같은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대단하다 설친들 저런 작품은 감히 흉내내지 못할 것이다.


▲  사인암 건너편에서 바라본 청련암


 

♠  사인암에 안긴 조그만 절집, 보기와 달리 깊은 역사를 지닌
청련암(靑蓮庵)


▲  사립문이 활짝 열린 청련암

사인암 옆구리에는 청련암이란 조그만 절집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런 곳에 왠 절이 있나? 싶
을 정도로 좀 쌩뚱맞기도 한데 얼핏보면 근래 지어진 절로 생각하기 쉬우나 현실은 제법 오래
된 절이다.

청련암은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의 말사(末寺)로 1373년(공민왕 22년)에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허나 신빙성은 그리 없어 보이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710년에 중창하
여 청련암이라 했다고 한다.
원래는 여기서 가까운 대강면 황정리 산28번지에 있었는데, 그 부근에 있었다는 대흥사(大興寺
)의 말사로 있었다. 허나 그 대흥사는 19세기 후반 의병(義兵)과 왜군과의 싸움에서 파괴되었
고, 1954년 소백산 공비토벌 작전으로 황정리 일대에 소개령(疏開令)이 내려지자 청련암도 부
득이 방을 빼야 되서 절의 대들보와 기둥을 들고 사인암 옆에 새롭게 터를 닦았다.

청련암은 두 눈에 쏙 넣어도 부담이 없는 조촐한 암자로 법당인 극락전과 옛 법당, 삼성각, 요
사 등이 전부이다. 2013년 4월 새 극락전을 만들어 법당으로 삼았으며, 옛날의 유물로는 18세
기에 조성된 목조보살좌상이 있다.
사인암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 있어 사인암에 온 사람들은 무조건 절에 발을 들이기 마
련이다. 절을 거쳐야만 사인암의 뒷통수로 올라갈 수 있으며, 사인암과 청련암이 완전히 한 덩
어리가 되어 생사고락을 같이한다. 사인암 방문객이 늘면 자연히 절을 찾는 발길도 정비례할
수 밖에 없으니 정말 자리 하나는 잘 잡았다. (당시 주지승의 혜안이 참 놀라울 따름!) 사인암
이 건재하는 동안은 청련암은 결코 법등(法燈)이 마를 날이 없을 테니 말이다.


▲  청련암 경내와 사인암의 옆구리

▲  청련암 극락보전(極樂寶殿)

경내로 들어서면 옛 법당 직전에 극락보전이 산듯한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2013년 4월에 지어진 아주 따끈따끈한 새 건물
로 경내 제일의 보물인 목조보살좌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건물 내부를 살피지 않고 그냥 지나
쳐버려 목조보살좌상을 친견하지 못했다. 그냥 옛 법당에 계속 있는 줄 알았음


▲  예전에 담은 청련암 목조보살좌상(木彫菩薩坐像)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309호

청련암 목조보살좌상은 원래 청련암 법당에 봉안되었던 아미타3존불의 구성원인 대세지보살상
(大勢至菩薩像)이다. 1954년 이곳으로 절을 옮기는 과정에서 그만 본존불(本尊佛)을 잃어버렸
으며,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은 엉뚱하게 제천 원각사로 넘어가고 대세지보살상만 간신히 수
습하여 가져왔다. 그래서 협시불이 본존불로 출세하여 불단 중앙에 홀로 봉안된 것이다. 또한
그의 뱃속에서는 여러 복장(腹臟)유물이 나왔으나 근래 도난당하고 말았다.
불상에 입혀진 도금을 벗기고 새로 개금(改金)을 했을 때 목불(木佛)의 형태를 확인했으며 은
행나무로 조성된 것임이 밝혀졌다. 청련암의 옛 유물로 1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 시절 충청도 지역 불상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보살상의 모습을 보면 마치 어린 동자가 관음보살의 탈을 쓰고 대신 앉아있는 것 같다. 동자와
같은 귀여움과 해맑은 미소가 진하게 드리워진 그의 표정은 너무 밝아 보는 이의 눈을 눈부시
게 하니 사인암과 청련암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도 그의 표정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그냥 돌아갈 것이다.


▲  석불좌상과 옛 법당

극락전으로 쓰인 옛 법당은 법당의 품격과는 좀 거리가 있는 여염집 모습으로 새로운 극락보전
이 지어지자 법당에서 물러나 평범한 신세가 되었다. 현재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목조
보살좌상은 새 극락보전으로 옮겨 청련암 중심 불상의 업무를 계속 수행한다. (이들 불상의 위
치는 절의 사정상 바뀔 수도 있음)
옛 법당 앞에는 조그만 석불좌상이 자리해 있는데, 원래 새 극락보전 자리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  옛 법당에 봉안된 석가3존불

▲  옛 법당에서 바라본 청련암 경내


▲  물이 넘치는 연꽃무늬 석조(石槽)
사인암이 중생들에게 베푼 소중한 옥계수로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몸 속의 때가 싹 가신 듯, 몸과 마음이 시원해진다.

▲  우탁의 탄로가(嘆老歌)를 머금은 표석

한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우탁은 늙음을 탄식하는 시를 여럿 남겼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탄로가이다. 아무리 발버
둥을 치며 피부와 건강에 힘써도 세월은 자꾸만 흐르고 자신도 강제로 늙어만 가니 정말 무서
운 시가 아닐 수 없다.
나는 30대의 끝 무렵을 달리고 있지만 탄로가의 시 앞에 무책임하게 나이나 처묵처묵하고 있는
내 모습에 정말 열불이 난다. 물론 나이는 강제로 먹는 것이니 거절을 해도 소용은 없다. 아직
까지는 젊다고 자부를 하지만 빛의 속도로 내달리는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신선 세계의
하루는 인간 세상의 몇십~몇백년이라고 하는데 그 세계가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 같다.


▲  탄로가 표석에서 바라본 남조천과 구름다리
단양은 소백산맥에 묻힌 산골이라 봄과 여름은 늦게 오고 겨울은 일찍 온다.
날은 조금씩 따스함이 더해지고 있으나 비록 힘은 잃었지만 아직까지는
겨울 제국의 세력이 적지 않게 남아있어 아직까지 제국의 눈치를 본다.
허나 곧 소쩍새가 울 때면 지긋지긋한 겨울을 완전히 떨쳐내며
다들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사인암의 뒷통수로 오르는 계단길

어떻게 경사도 꽤 각박한 사인암 뒷통수에 감히 건물을 올릴 생각을 했을까? 청련암 주지승의
기발한 생각<사인암 입장에서는 좀 고달프겠지만>으로 궁색한 자리를 극복하여 좁게나마 터를
다지고 삼성각을 지어 속세를 향해 계단을 늘어뜨렸다. 이로 인해 사인암이 삼성각을 업고 있
는 모습이 되었다.
삼성각으로 인도하는 계단은 보기와 달리 상당히 거칠고 고르지가 못해 오르락내리락 할 때 주
의가 필요하다. 예전에는 삼성각 뒤쪽을 통해 사인암 정상으로 오를 수 있었으나 사인암의 건
강과 안전 문제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애써 오르지 않도록 하며 사인암에 왔다면 삼성각에
꼭 올라가보도록 하자. 이곳을 지나쳤다면 사인암의 거의 절반을 놓친거나 다름이 없다.


▲  사인암 뒤쪽 바위 틈에 둥지를 튼 푸른 머리의 삼성각(三聖閣)
이 건물은 예전 칠성각(七星閣)으로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이 봉안되어 있다.

▲  삼성각 중앙에 자리한 칠성탱과 석가불

▲  삼성각 독성탱

◀  삼성각 산신탱


▲  삼성각 우측 바위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바위글씨 '퇴장(退藏)'

사인암의 명성이 멀리 우주 밖까지 전해진 것일까? 너무 유별나게 휘갈겨진 글씨가 바위 피부
에 새겨져 있어 그 정체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허나 그는 외계인의 글씨가 아닌 한
자의 일종인 전서체(篆書體)로 쓰인 '退藏(퇴장, 스스로 물러나 숨는다)'이란 글씨로 조선 전
기에 판교종사<判敎宗師, 불교 교종(敎宗)의 우두머리>를 지낸 운수의 낙관으로 추정될 뿐 확
실한 것은 없다.


▲  삼성각 맞은편 낭떠러지 위에 중생들이 쌓아올린 조그만 돌탑들이
그들의 소망을 머금으며 조촐하게 보금자리를 이룬다. 이곳은
막다른 바위로 바로 밑이 벼랑이니 조심하기 바란다.


▲  삼성각 북쪽 벼랑

▲  삼성각에서 바라본 계단 밑부분과 청련암

이렇게 1시간 동안 사인암과 청련암 세트를 둘러보고 정든 단양 땅에서 퇴장하여 경북 문경 땅
으로 넘어갔다. 처음에는 예천 명봉사(鳴鳳寺)에 가려고 했으나 전날부터 여러 곳의 절을 들린
상태라 후배는 다른 데로 가자고 정색을 한다. (절을 좋아하는 후배임)
그래서 어디로 갈까 궁리하다가 천하의 마지막 주막으로 명성이 높은 예천 삼강주막(三江酒幕)
을 둘러보고 속리산 동쪽 자락에 안긴 여러 폭포를 탐방하기로 했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흔쾌히 소개하도록 하겠다.


※ 단양 사인암 찾아가기 (2017년 8월 기준)

① 단양까지
* 동서울터미널에서 단양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청량리역에서 단양행 열차가 1일 8~9회 떠난다. (양평, 원주 경유)
* 안산, 원주, 청주, 영주, 안동, 대구(북부)에서 단양행 직행버스 이용
* 부산 부전역, 태화강역, 경주역, 영천역,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중앙선 무궁화호 열차 이용
* 대전역, 오송역, 청주역에서 영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1일 2회 운행)

② 현지 교통

* 단양시외터미널 건너편이나 부근 고수대교 종점, 단양역 입구(단양역3거리 북쪽)에서 사인암
  방면 군내버스 이용 (1일 14회 운행, 대강 경유)

③ 승용차 (주차장 있음)

* 중앙고속도로 → 단양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장림4거리에서 좌회전 → 사인암(청련암)


* 사인암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 산27 (청련암 ☎ 043-422-1330)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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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7년 8월 7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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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작은 석굴암을 간직하고 있는 서울 낙산 보문사 (보문사 괘불)

 


' 낙산 동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비구니 사찰, 탑골승방 보문사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보문사 석굴암


 

매년 변치 않고 찾아오는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을 맞이하여 친한 후배들과 함께 서울
장안을 중심으로 절 나들이에 나섰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그날 초파일 나들이는 서울 강북의 여러 오래된 절을 거쳐 보문사
에서 그 마무리를 지었는데, 때이른 무더위와 적지 않은 산행, 너무나 알찬(?) 일정으로
몸은 거의 녹초가 되버렸다.
18시 경, 시원한 국수로 저녁을 때우며 그날 일정을 곱게 정리하려고 했으나 아직까지도
여전한 해를 보니 다시 욕심이 싹트면서 후식거리로 절 1개를 더 챙겨보기로 했다. 그러
자 일행들은 힘들다며 다들 정색을 한다. 그래서 기절 직전(?)인 후배는 고이 집으로 보
내고 나머지 1명과 보문동(普門洞)에 있는 보문사의 산문을 찾았다.


 

♠  보문사(普門寺) 입문

▲  보문사의 정문인 호지문(護持門)

보통 절들은 일주문이나 천왕문(天王門)을 경내 밖으로 내밀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만 보문사
는 도시 한복판에 자리해 있어 그럴만한 공간이 없다. 그렇다고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보문역4
거리나 보문역에서 절로 가는 길목에 억지로 일주문을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여 절과 속세
의 경계이자 정문으로 쓰였던 동쪽에 2층 규모의 호지문을 지어 일주문과 천왕문의 역할을 도
맡게 했다.
호지문이란 계속 지킨다는 뜻으로 이는 천왕문의 역할을 뜻한다. 비록 우람한 사천왕(四天王)
은 없으나 대신 수위실을 두어 수위들이 사천왕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문 위에는 '호지문'
현판이 걸려있고 팔작지붕을 취한 2층에는 '보문사' 현판을 두어 이곳의 존재와 이름을 속세에
밝힌다.

호지문 앞에는 초파일 특수를 노린 행상들이 진을 치며 솜사탕과 음료수, 아이스크림 등을 팔
고 있었고, 절로 들어가는 길목의 가게들도 앞다투어 양초와 공양미 등을 내밀며 초파일 특수
를 나누고 있었다.


▲  봉축한마당 막바지 공연 (춘향전으로 여겨짐) ▼

호지문을 들어서면 바로 초파일 공연으로 떠들썩한 향운각 뜨락이다. 여기서부터 보문사 경내
가 시작되는데, 뜨락 너머로 종각과 법보전 등이 보이고, 공연장 뒤에는 2층으로 이루어진 향
운각(香雲閣)이 자리한다.
향운각 1층은 매점과 불교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으로, 2층은 요사(寮舍)로 쓰이고 있으며, 그
앞뜨락에 공연장을 닦아 흥겨운 봉축한마당 공연을 벌이고 있었다.


▲  꽃동산처럼 꾸며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공연을 뒤로하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초파일의 백미(白眉)인 관불의식의 현장이 나온다. 꽃으로
곱게 치장된 공간 한복판에 단정한 헤어스타일의 아기부처를 두었는데 거의 1년 만에 외출이라
잔뜩 즐거움에 잠긴 모습이다. 사람들은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의 몸에 부으며 슬쩍 소
망을 들이밀고 그 앞에 마련된 복전함은 관불의식의 덕을 톡톡히 보며 디룩디룩 배를 채운다.


▲  보문사 괘불(掛佛)

관불의식 현장 바로 뒤쪽에는 괘불이 거룩하게 자리하여 경내를 비추고 있었다. 괘불은 초파일
이나 절 행사일에 잠깐씩 얼굴을 비추는 비싼 존재로 평소에는 친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여 지
금까지 270곳이 넘는 고찰(古刹)을 답사했음에도 그를 만난 절은 고작 열 손가락 내에 불과하
다. <보문사, 홍은동 옥천암, 우이동 도선사, 돈암동 흥천사, 강남 봉은사, 고양시 흥국사 정
도> 그것도 봉은사(奉恩寺)와 도선사(道詵寺)를 제외하면 모두 초파일에 만났다. 그러니 초파
일에 기를 쓰고 절투어를 벌어야 괘불(특히 오래된 괘불)에 대한 가려움을 어느 정도 긁을 수
있다.

보문사 괘불은 내가 처음으로 만났던 괘불<2004년 초파일에 친견했음>로 이번이 2번째 인연이
다. 정정한 그를 다시 만나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보문사는 8~9회 정도 인연을 지었
음) 그의 구조를 보면 중앙에 큰 석가불을 배치하고 좌우에 보살(菩薩)로 보이는 작은 존재를
두었다. 20세기 중반에 제작되어 매우 반질반질하며 탱화의 높이는 5m 정도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보문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8각9층석탑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 보문동과 안암동(安岩洞) 지역
약간의 산지를 낀 절이라 조망은 썩 별로이다.

① 보문사의 역사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인 낙산(駱山, 낙타산), 그 동쪽 줄기에 단종(端宗)의 왕비
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애환이 서린 동망봉(東望峰)이 있고, 바로 그 봉우리 동쪽에 비
구니 사찰의 성지(聖地)이자 천하 유일의 불교 종파인 보문종(普門宗)의 중심지 보문사가 둥지
를 틀고 있다.

그렇다면 보문사는 언제 법등(法燈)을 켰을까? 불교 학자 겸 승려인 권상로(權相老, 1879~1965
)는 고려 중기인 1115년(예종 10년) 담진국사
(曇眞國師)가 창건했다고 주장했다. '보문사일신
건축기(普門寺一新建築記)'에는 당시까지 전해오던 창건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보문사의 창
건배경과 담진국사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며 고려 때부터 비구니들이 머물며 나라의 안녕과 제왕
의 성수만세(聖壽萬歲)를 기원하는 니사(尼寺)로 언급하고 있다.
허나 아무리 그러면 무엇하랴. 창건 이후 17세기까지 아무런 기록과 유물이 없으니 말이다. 그
불편한 진실을 해소하지 못하는 한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계속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혹
여 경내를 싹 뒤엎고 조사를 벌이면 땅 속에서 고려나 조선 초/중기 주춧돌이나 그 시절 유물
이 나올 수도 있지만 뒤집을 여건도 되지 못한다.

본격적인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후반으로 1692년 묘첨(妙沾)이 대웅전을 중건했다고 한
다. 1826년 수봉법총(秀峰法聰)이 만세루를 세우고 1827년에는 정운(正雲)이 좌우 승당을 세워
제법 가람을 이루었으며, 1842년에는 영전(永典)이 대웅전과 만세루를 개조했고, 1867년 지장
시왕도를 비롯한 여러 탱화를 조성했다. 그리고 1872년에는 금훈(錦勳)이 좌우승당을 새로 지
었다.

조선시대에는 보문사와 바로 이웃에 자리한 미타사(彌陀寺)를 하나로 묶어 '탑골승방(僧房)'이
라 불렀는데, 그 시절 도성(都城) 밖에 있던 4개 비구니 승방의 하나였다. 그 4개 승방이란 탑
골승방과 옥수동(玉水洞)의 두무개승방<미타사(彌陀寺), 두무개는 옥수동 옛 이름>, 석관동(石
串洞)의 돌곶이승방<청량사(淸凉寺)와 연화사(蓮花寺), 돌곶이는 석관동의 옛 이름>, 창신동(
昌信洞)의 새절승방<청룡사(靑龍寺)>으로 이들은 궁궐 상궁(尙宮)과 후궁이 머리를 깎고 말년
을 보냈던 그들의 마지막 의지처였다.
탑골승방은 이름 그대로 탑골에 있는 승방인데, 보문동(普門洞) 일대를 탑골이라 불렀으며, 그
유래는 고려 초(1047년)에 조성된 미타사 5층석탑에서 비롯되었다. (지금도 탑이 있음)

왜정(倭政) 이후에는 1928년 긍탄(亘坦)이 대규모 불사를 벌였는데, 대웅전 석가3존불을 개금(
改金)하고 관음전과 대웅전, 좌우승당을 증축하는 한편, 칠성각과 삼성각을 세웠다. 1945년에
는 보문사의 큰 여승으로 일컬어지는 송은영(宋恩榮)이 주지로 들어와 1980년대까지 불사를 벌
였는데 지금의 가람은 거의 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땅을 크게 확보하여 선불장과 범종각, 극락전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을 지었으며, 1971년
대한불교보문원을 설립하고 1972년에 왜정 때 주지를 지낸 긍탄과 보문종을 개창했다. 보문종
은 천하 유일의 비구니 종단으로 천하 최초의 비구니인 석가모니의 이모, 마하파자파티를 종조
(宗祖)로, 신라 때 비구니인 법류니(法流尼)를 중흥조(中興祖)로 삼고 있다.

보문종이 개창된 그해에 보문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던 석굴암(당시 이름은 석불암)이 완성되었
다. 1970년 8월 1일 착공하여 1972년 6월 16일 완성을 보았는데, 소요된 석재는 화강암 2,400
톤, 철재 25톤, 시멘트 1만 포대로 경주 석굴암을 축소 재현해 눈길을 끈다.
1978년에 거대한 사리탑을 만들어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고, 1986년에는 황법준이 대웅전과 좌
승당을 개조했으며, 1987년 석불암을 석굴암으로 이름을 갈았다. 1988년 주지 이름을 딴 은영
유치원을 세워 복지/교육사업에도 손을 뻗었으며. 1998년과 1999년에 각각 동원정사와 만불전
을 지었다.
현재는 인태가 주지승으로 있으며, 보문종의 중심지로 천하에 30여 절을 말사(末寺)로 거느리
고 있다. (미대륙과 왜열도에도 말사가 4곳 있음)

보문사 대지는 1만여 평으로 건물은 무려 20여 동(일반 주택처럼 생긴 건물이 꽤 많음). 머무
는 비구니는 150명이 넘는다. 소장문화유산은 보물 1164-2호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3~4,
5~7<5권 2책>과 석가불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 지방문화재 3점(이들은 모두 1867년에 제작
됨), 그리고 19세기 이후 왕실에서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연수식과 인로왕보살번(引路王菩薩
幡)이 전하고 있다. 그중 묘법연화경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조선 초에 간행되었으나
원래부터 보문사 것은 아니다. (묘법연화경은 관람 불가)

② 보문사의 구조
절의 정문인 호지문을 들어서 정면으로 계속 가면 석굴암과 사리탑, 선불장으로 이어진다. 그
런데 이상한 것은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통 정문을 들어서 곧장 가면
알아서 법당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곳은 전혀 그러지를 못하여 초행인 사람은 대웅전도 없는
절로 여기기가 쉽다. 나도 처음에는 대웅전도 못보고 갔으니 말이다.

허나 대웅전은 향운각 뒷쪽 구석에서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다. 다른 건물도 아닌 법당이 말이
다. 대웅전으로 가는 길은 좁은 골목길 분위기로 그 길의 끝에 대웅전과 묘슬전, 보광전 등이
자리해 있다. 이처럼 절의 중심 건물이 눈에 쉽게 띄지도 않는 그늘진 곳에 있는 것은 대웅전
주변이 원래 보문사 영역으로 그 공간에 현대식 주택의 건물을 마구 심다보니 이렇게 독특한
구조가 된 것이다. 반면 새로 편입된 서남쪽 부분은 석굴암과 몇몇 건물만 닦아놓아 다소 여유
가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경내는 크게 옛 도심 같은 대웅전 구역과 신도시 같은 서남쪽 구역(석굴암, 선불장)으
로 나눌 수 있다. (대웅전 구역 북쪽에 미타사가 있음)

경내 서쪽 석굴암 주변은 숲이 좀 우거져 있는데, 석굴암과 8각9층석탑 서쪽 숲속에는 비구니
들이 주로 이용하는 오솔길이 있다. 허나 이곳 외에는 나무는 별로 없으며, 주변이 온통 아파
트와 주택가라 산사(山寺)
의 내음은 다소 떨어진다. 옛날에야 그런데로 산사의 내음이 진했으
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칼질이 절 주변을 가만히 두지 않으면서 도시 속에 고립된 별천지
가 되버린 것이다. 게다가 오랜 내력에 걸맞지 않게 고색의 내음도 상당히 식은 상태라 조금은
안타깝다. (대웅전과 삼성각 정도만 고색이 조금 피어있음)

※ 보문사 찾아가기 (2017년 3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보문역 1번 출구에서 도보 3분
* 서울시내버스 103, 142, 152, 272, 273, 1014, 1111, 1162번 시내버스를 타고 보문역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168 (보문사길 20) <☎ 02-928-3797>
* 보문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웅전 내부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 닫집, 용머리 장식)


 

♠  보문사 대웅전(大雄殿) 구역

▲  연등에 가려진 대웅전

완전 동네 골목길 같은 향운각과 남별당 사잇길로 들어가면 동쪽을 바라보고선 대웅전이 나타
난다.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의 위엄에 대웅전은 감히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간신히
계단과 아랫도리만 드러낸다. 지붕과 윗도리는 하늘과 함께 연등에 의해 말끔히 지워진 상태,
이날만큼은 연등이 하늘과 속세의 경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대웅전은 보문사의 법당(중심 건물)으로 이곳이 경내의 옛 중심이다. 지금도 여전히 중심이긴
하지만 일반 주택과 뒤섞인 구석진 곳이라 그 실감이 덜하다. 그러다보니 경내에 편입되어 개
발된 서남부 구역에 비해 무게감도 좀 떨어져 보이고 햇살도 엉거주춤하는 그늘진 곳이라 조금
은 칙칙하기까지 하다.
대웅전 구역은 경내에서 가장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데, 대웅전과 묘승전, 심우당, 삼성각 등은
기와집을 취하고 있지만 일반 주택처럼 생긴 건물이 많아 마치 조그만 마을 같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불전(佛殿)이다.
1842
년과 1865년 중건을 했으며, 이후 여러 차례 손질을 했다. 이 자리에는
보문사를 세웠다는 담
진국사가 정진했다는 토굴이 있었다고 하며, 건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 지장도 등
의 탱화와 1928년에 조성된 범종, 경전(經傳)을 보관하는 경궤(經櫃) 등이 있다. (범종과 경궤
의 보관 위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


▲  대웅전 석가3존불과 석가불도(釋迦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8호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든 조그만 석가3존불이 자리해 있다. 가운데 석가불은 인자하고 동
자승 같은 귀여운 표정이며, 그 좌우로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해 있는데, 석가불과 덩치가 비슷하거나 조금 커 보인다.

그들 뒤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가불도(석가모니후불탱)가 든든한 후광(後光)처럼 걸려 있
다. 비단에 그려진 이 탱화는 가로 140cm, 세로 180cm 크기로 1867년에 제작되었다. 관련 화기
(畵記)가 구석에 남아있는데, 석가불이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의 장면
을 담고 있으며, 그 아랫족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배치하고, 석가불 머리 위쪽에 관음
보살과 지장보살을, 왼쪽에는 10대 제자와 화불(化佛) 2위를 넣었다. 그리고 화면 사방에는 사
천왕을 배열해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았다.
색감은 붉은색을 많이 썼고, 보살과 사천왕상은 모두 두광(頭光)을 지녔다. 이는 그 시절 탱화
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표현기법이 정교하고 구도 또한 좌우 대칭의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99호

대웅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절과 불법(佛法)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을 몽땅 머금은 탱
화이다. 비단에 채색된 가로 200cm, 세로 140cm의 크기로 1867년에 그려졌는데 앞에 석가불도
와 비슷한 색상과 표현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신중도의 중심 멤버인 제석(帝釋)과 범천(梵天)은 그림 상단에, 용왕(龍王)은 중앙에, 위태천(
韋太天)은 하단에 배치했고, 여러 산신과 복덕대신(福德大神), 토지대신(土地大神), 가람대신(
伽藍大神)과 인도의 야차(夜叉), 아수라(阿修羅) 등 10여 명을 빼곡히 배치하여 그야말로 누가
누군지 모를 정도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  대웅전 앞쪽에 자리한 심우당(尋牛堂)
2006년에 참선 수행을 위해 조성된 맞배지붕
건물로 템플라이프와 행사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  시왕전(十王殿) 내부
1970년에 지어진 것으로 지장보살의 공간이다.
시왕(十王)이 담긴 금동목각탱이 건물
내부를 화사하게 밝혀준다.


▲  심우당과 마주하고 있는 묘승전(妙勝殿)

묘승전은 예전 좌승당(左僧堂)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불단에는 조그만
석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석가모니후불탱, 감로
탱, 지장시왕도, 1916년에 그려진 신중도와 현왕도(現王圖) 등이 건물 내부를 채우고 있다.


▲  묘승전 석가3존불과 석가모니후불탱

▲  흐릿한 모습의 묘승전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0호

묘승전 우측 벽에는 3개의 불화가 걸려 있는데, 왼쪽이 신중도, 가운데가 지장시왕도, 오른쪽
이 현왕도(現王圖)이다. 처음에는 지장시왕도의 위치를 몰라 깜박 넘어갈 뻔 했으나 묘승전에
있다는 말을 듣고 절을 나가기 바로 전에 부랴부랴 묘승전으로 들어갔다.
텅 빈 묘승전 내부는 불단을 제외하고 모두 컴컴한 상태, 불을 켰으나 지장시왕도 쪽은 여전히
어둠의 기운이 높아 사진에 담기가 힘들었다. 그때 시간도 초파일 행사가 거의 마무리 되는 19
시 직전이고 비구니와 신도 아줌마가 언제 들어와 잔소리를 던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새가슴마
냥 저 정도만 담고 철수했다.

비단에 그려진 지장시왕도는 1867년에 응석(應釋)이 제작한 것으로 가로 145cm, 세로 200cm 크
기이다. 그림 한복판에 커다란 금니(金泥)가 칠해진 원을 닦아 그 안에 지장3존을 그렸고, 그
좌우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위와 아래 두 줄로 저승의 시왕(十王)을
나누어 배치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석류를 비롯한 여러 지물을 가진 동자(童子)와 동녀(童女), 판관(判官), 녹
사(錄事), 우두(牛頭), 마두(馬頭), 나찰(羅刹), 사자(使者)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을
빼곡히 배치했다. 색감은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며, 조선 후기 지장탱(지장도) 가운데 구도의
특이함과 시왕의 복색 등 여러 면에서 특색이 있는 작품으로 꼽힌다.


▲  대웅전 뒤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북쪽 구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삼성각이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이 건물은 칠성(七星)
과 독성(獨聖), 산신(山神)의 보금자리로 그중 칠성탱은 1874년에 조성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
된 3점의 불화 다음으로 연세가 지긋하다. 허나 지방문화재 불화만 크게 의식을 했지 칠성탱의
존재를 깨닫지 못해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  보문사 석굴암, 사리탑 구역

▲  범종각(梵鍾閣)

▲  법보전에서 바라본 범종각 2층

호지문에서 석굴암으로 가려면 범종각을 지나야 된다. 범종각 밑도리를 통해 가도 되고, 범종
각 직전 왼쪽 계단을 통해 접근해도 된다. (거리는 비슷함)

범종각은 누각 형태로 지어진 2층 건물로 1층에 석굴암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어 석굴암으로 인
도하는 출입구 역할을 하고 있는데, 2층에는 범종과 목어(木魚), 운판(雲版), 법고(法鼓) 등의
사물(四物)이 깃들여져 있다. 이들 사물은 1969년에 조성된 것으로 예전에는 범종을 새벽에 3
번, 점심에 12번, 저녁에 28번을 쳤으나 지금은 새벽과 저녁에만 친다.


▲  뱉어낼 물이 없어 멀뚱히 혀만 내민 채 고통 받고 있는 용머리
보문사도 오래된 절이라 자체 샘터가 있었다. 허나 개발의 칼질로 도심 속의
외로운 공간이 되면서 수질이 악화되고 물줄기까지 끝내 끊기면서
바쁘게 움직이던 바가지도 그를 떠나버렸다.

▲  석굴암 북쪽에 자리한 산령각(山靈閣)

용머리 샘터를 지나 윗쪽으로 오르면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석굴암 구역이다. 석굴
암을 20m 앞둔 곳에 갈림길이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담장에 둘러싸인 산령각
이다.

산령각은 산신을 봉안한 공간으로 산신각의 다른 이름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1963년에 지어졌는데, 경내에서 가장 명당(明堂)으로 꼽히는 터라고 한다. 그런데 앞서
삼성각에서 이미 산신을 봉안하고 있어 산신을 위한 공간이 2개나 있는 셈인데, 삼성각의 산신
은 일반적인 산신이고, 산령각은 보문사를 품은 낙산의 산신을 위한 공간으로 보문사에서 낙산
을 위해 만든 특별한 건물이다. (산신탱 외에 독성이 그려진 독성탱과 독성상도 있음)

▲  정면에서 바라본 산령각

▲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과 독성탱


▲  보문사의 명물인 석굴암(石窟庵)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서쪽 끝에 보문사의 제일가는 명물이자 꿀단지인 석굴암이 있다.
딱히 내세울 명물이 없어 애태우던 보문사에 단비를 뿌려준 존재로 절을 크게 일군 송은영 주
지의 야심작이기도 하다.
경내 서쪽 야산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이를 활용해서 조성했는데, 석굴암이란 그 이름 그대
로 경주(慶州) 석굴암을 축소 재현해 눈길을 끈다. 하지만 본존불(本尊佛)을 제외하면 경주의
그것과 생김새가 많이 다르므로 괜히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경주 석굴암에 왔다고 우기지는
말자.

이곳 석굴암은 1970년 8월 1일 공사를 시작하여 1972년 6월 16일 완성을 보았는데, 소요된 화
강암은 2,400톤, 철재 25톤, 돔용 시멘트 10,000포대, 석공과 조각 담당자는 연 45,000명, 노
동자는 연 25,000명에 이르는 보문사 최대의 프로젝트였다. 총감독을 맡은 이는 현대화가인 한
봉덕 화백으로 석공예(石工藝)에도 일가견이 있어 봉원사(奉元寺)에 석불을 만든 적이 있었다.

1970년 7월, 주지 송은영이 봉원사를 찾았는데, 거기서 한봉덕이 만든 석불을 보고 그만 반하
고 말았다. 안그래도 큰 석불을 지을 계획이라 봉원사에 머물던 탱화 명장(名匠)인 만봉에게
석불을 만든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하여 같이 한봉덕을 찾아 석불 건립을 의뢰했다.
의뢰를 맡은 한봉덕은 공사에 앞서 경주 석굴암을 찾아 그곳을 스케치하면서 석불을 만들었다.
처음 조성 계획은 본존불만 만드는 것이었으나 공사 때문에 여러 차례 석굴암을 다녀오면서 그
만 석굴암 전체를 재현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주지를 설득하여 판을 크게 벌였고
그렇게 보문사 스타일의 석굴암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석굴암의 면적은 1,000평, 건평은 65평으로 본존불에 쓰인 화강암만 15톤에 달한다. 불상 높이
는 3.38m이며, 석굴 내부에 문 3개를 두었다. 허나 석굴 자리가 넓지 못해 팔부중상(八部衆像)
은 만들지 않았다.
석굴암 내부 배치는 바깥 복도에 금강역사와 사천왕을 배치했고, 석굴 안에 본존불을 두었는데,
그 주위로 10대 제자와 관음보살, 대범천왕(大梵天王), 석가탑(釋迦塔) 등을 두어 경주와는 조
금 다르다. 처음에는 석불암(石佛庵)이라 불렀으나 1987년 석굴암으로 이름을 갈았으며, 복도
좌우에 난 통로를 통해 본존불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  석굴암 내부 - 본존불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바깥에만 머물렀다.

▲  석굴암을 지키는 금강역사(金剛力士)와 사천왕의 위엄

▲  보문사 8각9층석탑(사리탑)

석굴암에서 남쪽으로 가면 칼처럼 날렵하게 솟은 8각9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이 탑은 1979년에
주지 송은영이 만든 것으로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을 모방해서 만들었다. 석굴암도
그렇고 이 탑도 그렇고 송은영은 기존의 명성이 높은 불교 문화유산을 본떠서 만드는 것을 좋
아했던 모양이다.
탑 안에는 당시 자운(慈雲)이 스리랑카에서 얻어온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봉안했는데, 그 연
유로 간편하게 사리탑<탑전(塔殿)이라 하기도 함>이라 부르기도 한다.


▲  8각9층석탑에서 극락전으로 이어지는 짧은 산책로

▲  돌담 너머로는 비구니들만의 숨겨진 오솔길이 있어 호기심을
유발시킨다. (일반인은 출입 통제)

▲  선불장(選佛場)
1958년에 지어진 2층 건물로 강당 및
종무소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법보전(法寶殿)
보문사 어른 승려의 요사채이다.


▲  경내 서남쪽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속세를 등지고 북쪽을 바라보고 선 극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공간으로 1970년에 세워졌
다.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죽은 영가(靈
駕)를 위한 공간으로도 쓰이고 있어 그들을 위한 제사가 치루어진다. 그래서 건물 주변에 조금
은 으시시한 하얀 연등을 두른 것이다.


▲  괘불의 철수 현장

경내를 둘러보고 향운각 앞으로 내려오니 괘불이 사람들에 의해 둘둘 말려지고 있었다. 아쉽지
만 괘불함으로 들어가야 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림에 그려진 존재가 석가불이긴 해도 인
간이 편의상 만들고 봉안하는 그림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들 입맛에 맞춰 나왔다가 다시 들어
가야 되는 것이 괘불 부처의 운명이다. 이번에 들어가면 언제나 햇살을 볼까?? 점점 작아지는
괘불 석가불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진다.


▲  이제는 헤어져야될 시간~~ 괘불은 끝내 접히고 말았다.

▲  초파일의 끝을 장식하는 저녁 예불

괘불이 철수하자 경내를 1바퀴 돈 승려와 신도들은 관불의식 현장 앞에 모여 초파일 저녁 예불
을 올린다. 딱히 특별한 것은 없는 것 같아서 조그만 연꽃 모형을 하나 얻고 총총히 내 제자리
로 돌아왔다.

벌처럼 날라가 콩을 볶듯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하루, 벌써 그날이 재생이 불가능한 과거가 되
었다는 현실이 참 소름이 돋긴 하지만 그 짧은 초파일 하루를 정말 야무지게 쓴 것 같아 정말
뿌듯하다. 이렇게 하여 초파일 나들이는 내년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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