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길'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22.10.19 성북동 북쪽 끝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 삼각산 정법사 (복천암터, 산사길, 북악산길)
  2. 2020.10.03 도심 속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와 거닐기 좋은 상큼한 뒷동산, 안암동 보타사~개운산 (개운산둘레길) 2
  3. 2018.12.19 김신조 공비패거리가 넘어갔다는 도심 속의 푸른 허파, 북악산 김신조루트 ~~~ (북악하늘길1산책로, 2산책로, 북악산길)
  4. 2012.09.10 서울 도심의 허파이자 신선한 명소 ~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성북동 북쪽 끝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 삼각산 정법사 (복천암터, 산사길, 북악산길)

성북동 정법사, 북악산길


' 성북동 정법사, 북악산길 5월 나들이 '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후배 여인네와 내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인
성북동(城北洞)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를 만나 최순우(崔淳雨) 옛집
과 길상사(吉祥寺) 등 성북동의 여러 단골 명소를 둘러보니 어느덧 17시가 넘었다. 저녁
을 먹기에는 시간도 이르고 입과 위가 섭취 준비가 덜 되어있어서 잠깐 눈요깃감을 생각
하니 번쩍 '정법사'가 뇌리 속에 스친다. 그곳은 길상사에서 북쪽으로 500m 떨어진 절로
성북동을 100회 이상 들락거렸음에도 아직까지 내 손과 발이 미치지 못한 미답처였다.

정법사가 미답처(未踏處)로 버젓이 남아있던 것은 나를 흥분시킬 요소가 전혀 없는 현대
사찰로 보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에 창건된 것으로 알고 있었음) 하지만 그곳도 성
북동에 안긴 명소의 일원이라 서울 장안의 미답지를 1개라도 더 지울 겸 그곳을 찾았다.


▲  정법사 입구에 세워진 정법사 표석
표석 옆으로 놓인 계단길을 오르면 바로 정법사 경내이다. 계단길 옆에는
경사진 포장길이 있어 취향에 따라 골라가면 된다.



 

♠  성북동 꼭대기에 들어앉은 고즈넉한 산사, 조선 후기에
지어진 복천암의 옛터를 지키고 있는 정법사(正法寺)

▲  정법사 대웅전과 그 주변

길상사에서 북쪽 오르막길을 7분 정도 오르면 골목(대사관로13길)이 서쪽으로 크게 구부러진
곳에 정법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성북동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제일 북쪽 구석으로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
선 자락에 있으나 넓게 보면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에도 해당되어 '삼각산 정법사'를 칭
하고 있다. 18세기에 호암 체정(虎巖 體淨, 1687~1748)이 창건한 복천암(福泉庵)에서 비롯되
었다고 하는데,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비는 원찰(願刹)의 역할도 했다고 전한다.
허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감쪽같이 사라져 터만 남은 것을 1959년 건봉사(乾鳳寺) 만일
염불회(萬日念佛會)의 회주(會主)인 보광(葆光)과 석산(石山)이 가회동(嘉會洞)에 있던 건봉
사의 포교당인 정법원(正法院)을 이곳으로 옮겨와 절 이름을 정법사라 짓고 오래전에 끊긴
복천암의 뒤를 잇게 했다.
만일염불회의 고명한 염불승(念佛僧)이었던 석산이 주석하면서 염불수행의 새로운 일가를 이
루었으며, 조금씩 절을 키워나가 지금에 이른다.

아담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산신각, 강당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비록 옛 복천암을 계승
했다고 하나 엄연히 20세기 중반 이후에 중창된 절이라 고색의 내음은 여물지 못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비록 지정문화재는 없으나 조선 후기에 조성된 관세음보살상과 복천암터 주
춧돌, 왜정 때 조성된 산신탱 등을 지니고 있다.

절 바로 서쪽에는 '우리옛돌박물관'이란 이색 박물관이 있는데 서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
고 있으며, 매년 5월과 9~10월에는 성북동 명소를 중심으로 성북동 야행(夜行) 축제가 성황
리에 열린다. 성북동에 있는 문화유산과 여러 명소들, 미술관, 식당, 찻집, 까페들이 거기에
동참하여 달이 기울도록 흥겨운 분위기를 이어가는데, 정법사도 거기에 동참하여 소소하게
음악회를 열거나 전통차 1잔의 여유를 선사한다.

▲  우수에 잠긴 채,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하는 옛 복천암 주춧돌들 ▲

대웅전 뜨락 구석에는 옛 복천암의 주춧돌 여럿이 우두커니 서 있다. 저들은 어느 건물을 받
쳐들던 주춧돌이었을까? 크기를 봐서는 법당으로 여겨지나 저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니 그저
허공에 내뱉는 나의 부질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지금은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크지만 무
게가 없는 하늘을 막연히 이고 있다.

▲  조촐하게 꾸며진 연못과 옛 복천암의
길쭉한 주춧돌들

▲  대웅전 뜨락에 세워진 서쪽 5층석탑
(20세기 중반에 세워짐)


▲  정법사 대웅전(大雄殿)

정법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커다란 팔작지붕 건물이다. 그 앞에
는 뜨락이 닦여져 있고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5층석탑 2기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데 동쪽
탑은 벌써부터 피부가 까무잡잡하여 젊은 나이임에도 다소 늙어 보인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
보이면 그리 좋지는 않지만 문화유산과 탑, 석불은 오히려 나이가 들어 보어야 더 보기가 좋
다.
대웅전 맞은편에는 2층짜리 강당이 있어 1금당(법당) 2탑, 강당 형태의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으며, 법당 안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금동관세음보살좌상과 석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  동쪽 5층석탑
세월을 너무 예민하게 탔는지 벌써부터
검은 때가 가득 끼었다.

▲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 2층 강당(선방)
사진에 보이는 부분이 2층으로 1층에는
종무소와 찻집 등이 들어있다.


▲  경내에서 바라본 천하
성북동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가까이로 성북동과
와룡공원을 비롯해 멀리 잠실, 강남 지역과 남한산성을 품은 남한산(청량산),
대모산(大母山) 산줄기까지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  대웅전 금동석가3존상 (오른쪽이 관세음보살상, 왼쪽은 지장보살상)

서로 미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대웅전의 주인장 석가3존상, 그들 가운데 보관(寶冠)을 눌러
쓴 관세음보살상이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그렇다고 옛 복천암의 유물은 아니며 정법원
시절에 다른 곳에서 업어왔다고 한다. (고향은 알지 못함) 그들 뒤에는 조그만 금동 원불(願
佛)이 빼곡히 자리해 일제히 금빛을 쏘아대고 있는데 그 눈부심에 나의 침침한 두 망막이 멀
어질 지경이다.

▲  속세를 걱정하듯 바라보는 하얀 피부의
미륵불입상 (대웅전 옆)

▲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


▲  산신각 산신탱(山神幀)
산신각에는 산신과 독성이 봉안되어 있다. 산신탱은 1940년에 조성된 것으로
하얀 부채를 든 붉은 옷의 산신 할배와 그의 심부름꾼인 동자, 호랑이 등
산신의 주요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산과 폭포도 그려짐)

▲  산신각 독성탱(獨聖幀)
독성 할배(나반존자)와 동자, 그의 집인 천태산(天台山)이 그려져 있다. 그림이
다소 늙어 보여 산신탱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듯싶다.

▲  주렁주렁 이어진 석조(石槽)
산사에 왔다면 목구멍도 달랠 겸, 물 1모금 마셔줘야 된다. 늦봄 가뭄에도
물이 졸졸 나와 바가지를 금세 채웠고 목구멍에 투하하니 몸속의 때가
싹 가신 듯 마음이 시원해진다. 역시 무더위 갈증에 들이키는
물만큼 달콤한 것은 없다.

▲  정법사에서 만난 정겨운 풍물시, 부뚜막과 검은 가마솥

정법사는 부뚜막에 검은 피부의 가마솥을 두어 밥과 국을 처리하고 있었다. 저기서 숙성된
하얀 쌀밥과 국의 맛은 어떠할까? 몰래 그 뚜껑을 열어 살짝 훔쳐 먹고 싶다. 지금은 전설이
되버린 나의 단양(丹陽) 외가집에도 저런 풍경이 분명 있었는데 이제는 흔적도 없다. 오로지
지우는 것을 좋아하는 세월의 본능 앞에 그 모든 것이 산산이 흩어지고 사라진 것이다.


▲  산사길에서 바라본 정법사 경내와 대웅전의 두툼한 뒷통수

* 정법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330 (대사관로13길 44, ☎ 02-762-0774)
* 정법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 흔쾌히 클릭한다.



 

♠  산사길, 북악산길(북악산로) 거닐기

▲  정법사 뒷쪽 산사길 ①

정법사 서쪽에는 북악산길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다. 절 옆구리를 지나는 산길이라 그에 어울
리게 '산사길'이란 정겨운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나는 정법사만 알고 있었지 그 길의 존재는
전혀 몰랐다. 정법사가 준 뜻밖의 선물에 무척 놀라며 '이 길은 어디로 이어질까?' 두근거리
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그 미지의 산사길로 발을 들였다.

정법사 옆은 나무데크길이 닦여져 있으며, 정법사 경내가 바라보이는 쉼터를 지나면 철조망
과 철책문이 나온다. 문은 탐방객을 위해 늘 열려있으나 어두울 정도로 숲이 무성하고 군사
시설이 여럿 있으며 밤에는 유해동물이 가끔씩 출현하는 경우가 있어 가급적 햇님 근무시간
에 들어가기 바란다.

철책문 이후부터 경사가 잠시 각박해진다. 게다가 나무가 삼삼해 햇살을 느끼기가 어렵다.
허나 북악산길 밑부분이라 차량 소리가 심심치 않게 두 귀를 때려대 '속세가 지척이구나~'
안도감을 준다.


▲  정법사 뒷쪽 산사길 ②

▲  산사길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성북동과 도심 동부, 멀리 관악산까지)

▲  숲속다리 갈림길

정법사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길 직전인 숲속다리 갈림길에 이른다. 여기서 길은 여러
갈래로 쪼개지는데, 북악산길 위에 걸쳐진 숲속다리를 건너면 다모정, 북악산길 산책로와 이
어지며, 서쪽 숲길은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640m)로 그 길의 끝인 북까페에서 북악하늘길 제
2산책로(김신조루트)와 만난다. 그리고 서남쪽 숲길은 경사가 다소 있는데 그 역시 북악하늘
길 제2산책로와 이어지며 그 산책로의 정상 부분인 호경암으로 연결된다.

▲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위에
유연하게 걸쳐진 숲속다리

▲  숲속다리 남쪽 (산사길 방향)


▲  서울의 대표 하늘길이자 드라이브 코스인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이 달리는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 지금은 그저 평화로운 산책
드라이브 코스로 크게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의 탄생 배경은 그리 곱지 못했다. 바로 1968년
1월에 터진 1.21사태(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공비 패거리의 불법 침투 사건)로 뚜껑이 폭
발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서울 수비 강화를 위해 닦여졌기 때문이다.
1968년 2월, 수도 방어를 겸한 관광도로 '스카이웨이(Sky way)'계획을 발표하여 콩 볶듯이
공사에 들어가 그해 9월 28일 완성을 보았다.

북악산길은 돈암동 아리랑고개에서 북악산(백악산) 북쪽 산허리를 지나 자하문고개, 인왕산(
仁王山) 동쪽 허리를 거쳐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지는 10km의 길로 서울에 흔치 않은 산
악도로이자 천하 제일로 꼽히는 드라이브 코스이다. 자하문(창의문)을 경계로 북악산 쪽은
북악산길, 인왕산쪽은 인왕산길로 구분하기도 하며 오랫동안 차량을 위한 길로 뚜벅이들은
접근 조차 불가능했으나 둘레길, 도보길 유행에 따라 길 옆으로 산책로를 닦으면서 마음 편
히 두 다리로 거닐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길은 달랑 1번이 아니라 두고두고 걸어야 나중에 명부(冥府, 저승)에 가서도 꾸
중을 듣지 않는다. 다행히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어서 내 즐겨찾기 명소로 삼아 꾸준
히 재탕하고 있으며 북악산길과 인왕산길 모두 완주했다. 이번에도 계획에는 없었지만 정법
사 옆 산사길에 홀려 그만 여기까지 오고 말았는데, 우리네 인생에는 늘 변수가 있기 마련이
다.


▲  북악산길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의 위엄
(북악산길과 정릉로10길, 대사관로가 만나는 곳 서쪽 쉼터에서 바라본 모습)

▲  북악산길에서 바라본 정릉동과 성북구, 강북구 지역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산줄기까지 시야에 들어옴)

▲  찻길과 뚜벅이길이 공존하는 북악산길
지형이 여의치 않은 경우 이렇게 나무데크길을 깔아 통행 편의를 배려했다.
뚜벅이길은 폭이 딱 2인용이며 찻길 또한 2차선이다.

▲  숲속을 가르는 북악산길

▲  동쪽으로 흘러가는 북악산길 (정릉 뒤쪽)

숲속다리에서 시작된 북악산길(북악산로) 산책은 성북구민회관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시간도
늦었고(19시가 넘었음) 뱃속도 배고프다고 난리를 친다. 이럴 때는 그저 본능에 따라 조용히
길을 접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여 성북동, 북악산길 산책은 다음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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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2년 10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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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와 거닐기 좋은 상큼한 뒷동산, 안암동 보타사~개운산 (개운산둘레길)

 


' 도심 속에 숨겨진 고즈넉한 산사, 그리고 상큼한 뒷동산
안암동 보타사~개운산 나들이 '


▲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유희좌 불상,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개운산둘레길


 

봄이 파릇파릇 익어가던 4월 한복판의 어느 따사로운 날, 고려대 뒷쪽에 자리한 안암동
(安岩洞) 보타사를 찾았다.
보타사는 10회 이상 인연을 지은 절로 즐겨찾기 급까지는 아니나 집에서도 가깝고 진귀
한 문화유산을 둘이나 간직하고 있어 매년 1~2회 정도 복습하러 간다. 올해도 변함없이
보타사 보물들의 안부가 격하게 궁금하여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오후 한복판에 부랴부
랴 카메라와 지갑을 챙기고 길을 나섰다.

보타사 서쪽에 자리한 개운사(開運寺)를 먼저 둘러보았으나 마음은 벌써 보타사에서 나
를 재촉하고 있어
개운사를 콩 볶듯이 살펴보고 동쪽 골목길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 길
의 끝에는 조그만 산사 보타사가 산문을 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활짝 열린 보타사, 대원암 정문


 

♠  보타사(普陀寺) 입문 (대원암)

▲  안암동 대원암(大圓庵)

보타사 정문을 들어서면 양반가 기와집처럼 생긴 한옥이 제일 먼저 마중을 한다. 이곳이 초행
이라면 이것이 보타사인가 싶어 마음이 설레겠지만 그것은 함정이며, 그는 개운사의 부속암자
인 대원암이다.
보타사를 제대로 가리고 앉은 대원암은 기와집 1동이 전부인 조그만 암자로 1845년 지봉선사(
智峰禪師)가 창건했다. 그는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법명(法名)은 우기(祐祈)인데, 북한
산(삼각산) 도선사(道詵寺)에서 인파당 축홍(仁波堂 竺洪)에게 사사하여 그의 법을 이어갔으
며, 효성이 깊고 인품이 넉넉했다. 또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도 친분이 있어 그에게 판
서(判書)직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연유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지봉판서라 불렀다.

왜정(倭政) 때는 현대불교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1870~1948), 법명
은 정호, 영호>
이 이곳에 머물며 불교 교육에 나섰으며 1960년대에는 탄허(呑虛, 1913~1983)
가 역경사업을 벌였던 유서 깊은 현장이기도 하다.


▲  숲속에 자리한 보타사 주차장

대원암을 지나면 녹음이 깃든 숲이 조촐하게 펼쳐진다. 숲은 작으나 나무들의 강인한 협동심
으로 햇살도 우걱우걱 씹어먹을 정도로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마치 깊은 산중의 암자에
들어선 기분이다. 개운사에서 아주 잠깐 이동했을 뿐인데 풍경화는 이렇게나 180도 달라진 것
이다.

햇살도 거의 들어오기 힘든 그곳에 차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주차장이 있고 그 너머로 석축을
쌓고 터를 다진 보타사가 마치 별장 같은 모습으로 들어앉아 있다. 연등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정녕 절집인지 고개 조차 갸우뚱했을 것이다.
주차장 옆에는 키도 제각각인 중창(重創) 송덕비와 사적비(事蹟碑) 등 비석 4기가 있고 그 옆
에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반원(半圓) 모양의 조그만 연못이 장차 다가올 연꽃의 향연을 숨죽여
준비한다.

▲  보타사 송덕비와 사적비

▲  반원 모양의 작은 연못

주차장에서 보타사로 인도하는 계단을 오르면 보타사 현판을 머금은 일주문(一柱門)이 중생들
을 맞는다. 일주문이라고 하나 그냥 일반 주택 대문에 기와 지붕을 얹힌 모습이다.


▲  보타사 일주문

▲  보타사 대웅전(大雄殿)

개운사 동쪽 그늘진 곳에 비구니 절인 보타사가 살포시 자리해 있다. 대원암과 더불어 개운사
의 부속 사찰로 경내가 숲에 완전히 감싸여 있어 바깥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나무들이 무
성해 속세의 온갖 기운과 소음을 거의 털어버린다. 그래서 도심 속에 박혀있음에도 늘 번잡한
안암동 대학가가 지척임에도 고적하고 아늑한 산사(山寺)의 분위기가 진하다. 그야말로 '절간
답다'는 말이 딱 어울린다.

보타사는 개운산<開運山, 안암산(安岩山)>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서쪽을 제외하면 모두
가 막힌 궁색한 곳으로 경내 동쪽과 남쪽은 고려대로 막혀있고, 북쪽은 벼랑으로 완전히 막혀
있으며, 그 벼랑 윗쪽에 개운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북악산길이 흘러가 차량의 굉음이 조금
씩 전해진다. 그리고 서쪽은 고려대 안암학사와 개운사로 나가는 길이 있다.

이곳은 원래 20세기 중반 불교전문강원과 중앙승가대학의 기숙사로 출발했다. 허나 1911년 2
월 경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마애보살좌상 옆에 맞배지붕 건물이 보인다. 그런 것을 보면 개
운사나 대원암에서 마애불 관리를 위해 닦은 조그만 건물이 이전부터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기숙사 건물을 손질해 칠성암(七星庵)이란 간판을 내걸었으며, 1980년대에 보타사로 이
름을 갈아 마애불과 금동보살좌상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절을 꾸리고 있다.

처음에는 개운사의 부속 암자로 조용히 묻혀 지냈고, 마애불 또한 주변 사람만 찾아올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하지만 낭중지추(囊中之錐)란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결국 세상에 그 모습
을 드러내게 된다.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가 서울에 숨겨진 문화유산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이
마애불이 발견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늙은 존재로만 주변에 전해졌는데, 조사를
해보니 무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하여 바로 이듬해에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2014년에 국가 보물로 승진하기
에 이른다. 또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치 않은 유희좌 스타일로 그 역시 지방문화재로
있다가 2014년 3월에 보물로 승진되어 같은 해에 무려 보물급 문화재를 2개나 지니는 위엄을
보였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관음전, 선방 등 4~5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2018년 이후 관음전
을 새로 짓는 등, 크게 중창불사를 벌였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마애보살좌상과 금동보살좌상
등의 값비싼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으며, 숲에 묻힌 벼랑 밑부분이라 깊은 산중에 들어선 기
분을 물씬 들게 만들어 이곳이 서울 한복판임을 순간 잊게 한다.


▲  대웅전 내부 (석가여래상과 영산회상도, 신중도)

일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마애불과 벼랑이 있고, 오른쪽에는 선방(禪房), 왼쪽에는 대웅전과
관음전이 자리해 있다.

보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20세기 후반에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집이다. 불단(佛壇)에는 금색 찬란한 석가여래상이 들어앉아 있는데, 근래에 조성되어 피
부가 아주 탱탱하며, 변색된 부분이 없는 100% 금동 피부로 그의 광배(光背)는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모습 같다.
볼살이 많아 보이는 그의 온후한 표정에는 미소가 깃들여져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데,
그 뒤에는 그 흔한 후불탱을 두지 않고 환하게 창문을 내어 마애보살좌상이 보이게끔 하였다.
그러니까 마애불이 일종의 후불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불상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과일과 꽃, 쌀로 상에 금이 갈 지경이며, 건물 좌측 벽에는 석가
여래의 설법 장면을 담은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와 법당 수호용인 신중도(神衆圖)가 걸려있
다. 이들은 20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아직 피지 않았다.


 

♠  보타사의 보물들 (마애보살좌상, 금동보살좌상)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磨崖菩薩坐像) - 보물 1828호

대웅전 뒷쪽 벼랑에는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마애보살좌상이 깃들여져 있다. 마애불
이 고된 몸을 기댄 화강암 벼랑은 거의 80~85도 각도로 불상 윗쪽에는 암벽이 눈썹바위 마냥
앞으로 길게 튀어나와 자연산 모자나 보개(寶蓋)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그 윗쪽에는 개운
산의 남쪽 허리를 가르는 2차선 북악산로가 있어 차량 소리가 가늘게 들린다.

이 마애불은 오랫동안 안암산의 은자(隱者)로 이곳에 살짝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어떤 자료에는 발굴했다고도 나온다. 허나 그는 바깥에
노출된 상태였으므로 발견이 맞다. 서울의 대표적인 고찰(古刹)의 하나인 개운사가 바로 지척
이고 개운사 그늘에 자리한 곳에 조그만 것도 아닌 커다란 마애불이 수백 년이나 숨어왔으니
그의 숨바꼭질 실력이 참으로 대단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 가치를 인정받아 발견된 이듬해(1993년)에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89호
로 지정되었고, 2014년 3월 경내에 있는 금동보살좌상이 국가 보물로 지정되자 그 여세를 몰
아 그해 7월 보물로 승진되었다.

마애불의 높이는 대략 5m, 폭은 4.3m로 조사 결과 고려 후기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그
생김새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홍은동 옥천암(玉泉庵) 마애보살좌상(보도각 백불)을 너
무나 닮았다. 보관(寶冠)은 좀 틀리지만 얼굴부터 발끝까지, 그리고 하얀 피부까지 옥천암의
그것과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옥천암 마애불 역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같은 사람이 조성하거나 모방하여 만
든 것으로 여겨지며, 고려 후기 서울 변두리에서 아주 잠깐 나타났던 마애불 형식으로 진정한
서울 스타일의 고려 마애불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마애불은 천하에서 서울에 딱 2곳뿐이라는
것이다.


▲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전경

마애불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에는 보관을 눌러쓰고 있는데, 좌우로 관대(冠帶)가 나와있고
그 밑에 보관 장식이 늘어져 있다. 그리고 오른쪽 관대 밑에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긴 장식
이 눈에 띈다. 하얀 얼굴은 약간 볼살이 있어 보이는데,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그 눈썹
사이에 백호가 찍혀 있으며, 검은 두 눈은 지그시 뜨고 있다. 코와 입은 좀 작은 편이며, 입
술은 붉은색이나 빛이 좀 바래있고, 귀는 보관 장식에 가려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왼쪽 가슴을 가로지르
는 스카프 형태의 천의(天衣)가 밖으로 흘러나오도록 표현되어 있다. 왼쪽 팔은 몸에 비해 지
나치게 크고 길게 표현되어 괴물 팔처럼 보이는데, 팔찌를 낀 왼손은 무릎 밑까지 내려와 있
으며, 엄지와 3째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그리고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올려 엄지와 2번째 손
가락을 맞대고 있다.
옷의 주름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고, 두 다리는 포개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다. 그리
고 두 발은 옷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  마애보살좌상 옆에 새겨진 네모난 원패(圓牌)

마애불 어깨쪽 좌우에는 네모나게 구멍이 파여 있다. 이는 자연산 구멍이 아니라 마애불을 지
켜주던 목조 건물이나 보호각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마애불에 대한 기
록이 전혀 없어 언제 지어지고 어떤 모습을 취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마애불은 보호각을
갑옷으로 삼아 온전하게 살아남았고, 그를 살린 보호각은 장대한 역사의 거친 흐름 속에 형편
없이 녹아 없어져 이렇게 상처 만이 남게 되었다.

마애불 왼손 쪽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네모난 공간이 있는데, 이를 원패라고 부른다. 이 원
패는 제작 당시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南無金剛會上佛菩薩(나무금강회상불보살)'이라 쓰
여 있다. 원패란 부처나 보살의 이름을 적어 불단 앞에 놓는 것으로 마애불 옆에 새겨진 점이
꽤 이채롭다.


▲  마애보살좌상의 얼굴과 자연이 그에게 씌워준 자연산 돌모자
어깨 양쪽에 파인 홈은 옛날에 사라진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들이다.

▲  바로 밑에서 바라본 마애보살좌상의 위엄
오른쪽 발은 발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했으며, 왼쪽 발은 오른쪽 발에 가려져 있다.
 

현재 마애불은 하얀 피부의 백불이지만 원래부터 백불은 아니었다. 하얗게 호분(胡粉, 여자들
이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하던 것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듬)을 칠한 것은 20세기에 들어
와서이며, 그로 인해 몇몇 부분은 확인이 어렵게 되었다. 참고로 그와 친척뻘인 옥천암 마애
보살좌상은 19세기에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가 호분을 칠했다고 전
한다.


▲  관음전(觀音殿)

대웅전 옆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관음전이 있다. 지금 집은 2018년 이후에 새롭게 지은 것으로
원래는 여염집 모습의 기와집이 있었는데, 중앙승가대학 숙소로 쓰였던 것을 요사(寮舍)와 종
무소(宗務所), 금동보살좌상의 거처까지 담당하던 복합 공간으로 쓰이다가 새 건물을 장만하
면서 모두 분리가 되었다.
관음전이란 이름 그대로 보타사의 2대 꿀단지의 하나인 금동보살좌상의 거처이다. 중창불사로
잠시 대원암으로 거처를 옮겼고,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새 관음전에 안착을 했다.

▲  보타사 금동보살좌상(金銅菩薩坐像) - 보물 1818호

관음전에 봉안된 금동보살좌상은 이 땅에 흔한 불상이나 보살 스타일이 아니다. 오른쪽 다리
는 연화좌에 올려 무릎을 세웠고 왼쪽 다리는 밑으로 내린 모습이기 때문이다. 딱 보면 아줌
마 스타일의 착석 방법과도 비슷한데, 이런 포즈를 유희좌(遊戱座)라고 한다.

유희좌는 9세기 이후 북송(北宋) 시절부터 생겨났는데, 이 땅에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중
기에 가뭄에 콩 나듯 조금씩 생겨났다. 그러다보니 매우 귀한 실정이라 그 가치는 대단할 수
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현대사찰 보타사에 버젓히 서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보살상이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제자리가 어디었는지는 귀신
도 모르는 실정이며, 보살상 또한 굳게 입을 다물며 진술을 거절한다. 아마도 이리저리 떠돌
다가 중앙승가대학으로 흘러들어와 기숙사 불단에 봉안되었고, 기숙사 건물이 보타사로 변신
하면서 이렇게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앞서 마애보살좌상이 좀 남성적이라면 이 보살상은 여성적이다. 고품격과 미색(美色)이 느껴
지는 그의 정체는 딱 봐도 관세음보살 누님인데, 덩치는 조그만하고 머리에는 황제의 금관을
털어버릴 정도로 장엄한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칼이 조금 나와있다. 얼
굴은 아리따운 여인네처럼 곱기 그지 없어 은근히 마음을 설레게 하는데, 카메라도 그를 보고
잔뜩 흥분을 했는지 셔터가 마구마구 눌러진다.
불상과 보살상은 보통 당시 왕족이나 귀족, 특정 인물의 얼굴을 모델로 하여 만든 경우가 적
지 않아서 아마도 이쁘장하게 생긴 젊은 귀족이나 중년층 여인을 모델로 삼은 듯 싶다.

그의 눈썹은 살짝 구부러져 있고, 두 눈은 지그시 떠 있으며 코는 작고, 입술은 작지만 어여
쁜 모습이다. 볼에는 살이 조금 있어 보이며, 가슴에는 온갖 장식물을 달고 있다. 어깨에는
천의(天衣)를 걸치고 있고 그 한 자락을 수직으로 늘어뜨렸는데, 이는 조선 초기 보살상에서
조금 등장하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그가 앉아있는 연화좌(蓮花座)는 보타사에서 마련한 것으
로 오래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보살상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과 조그만 불상/보살상이 많이 등장하는 조선 초기 금동상 중에
서 그나마 규모가 큰 점으로 보아 조선 초에 왕실이나 귀족에서 발원하여 특별히 제작된 것으
로 보인다.
비록 고향은 잃었지만 건강 상태는 양호하며, 조선 초기 귀족적인 보살상의 형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케이스이자 조선시대 보살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2006년에 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216호
로 지정되었다가 2014년 3월 국가 보물로 특진되었다.
이처럼 귀한 몸이니 보타사에서 유리막을 설치해 그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끔 했는데, 어찌보
면 유리 감옥에 갇혀있는 듯 답답하게 보이기도 한다. 허나 어찌하랴? 문화유산 도난이 다반
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현실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걸 두고 바로 필요악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보타사 승려들은 별 거부감 없이 그를 쿨하게 공개하고 있고, 사진 촬영에도 호의적이
라 그것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 보타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7 (개운사길 60-46 ☎ 02-928-2074)


▲  고적한 보타사를 뒤로하며~~~

숲속의 절집 보타사를 둘러보고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아직 해가 한참이나 남아있어 보너스
시간을 받은 기분인데, 어디로 가야 널리 칭찬을 받을까 궁리를 하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
다. 개운사와 보타사는 여러 번 인연을 지었지만 정작 그들을 품은 개운산은 제대로 둘러본
적이 없다. 즉 자식만 살펴봤지 그 어미는 살펴보지 않은 꼴이다. 게다가 개운산은 서울 장안
에 몇 남지 않은 미답처(未踏處)이기도 하다.
하여 미답지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비록 보타사가 개운산 자락에 있
다고 해도 개발의 칼질로 서로를 바로 이어주는 길은 진작에 끊겼다. 그나마 빠르게 개운산으
로 가려면 고려대 안암학사를 가로질러 정문으로 올라가 북악산길로 나가야 된다.

북악산길은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에서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선과 미아리고개, 개운산 남
부를 거쳐 종암동 개운산입구 교차로까지 이어지는 서울에 대표적인 산악도로이다. 아리랑고
개까지만 북악산길로 알고 있었는데 개운산 산복도로까지 그 일원으로 있었다.
개운산을 넘어 종암동(鍾岩洞)까지 발을 뻗치고 있는 북악산길의 위엄에 새삼 놀라며 안암학
사 정문에서 3분 정도 그 길을 거닐면 성북구의회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개운산 산책을
벌였다.


▲  잠깐 거쳐간 북악산길 (안암학사에서 성북구의회 입구 방면)

▲  성북구의회 입구에서 바라본 북악산길 (종암동 방향)


 

♠  성북구 한복판에 누워있는 도심 속의 포근한 뒷동산
개운산<開運山, 안암산(安岩山)>

▲  편안한 둘레길의 정석, 개운산둘레길 (명상의 길)

도심 속에 자리한 개운산(134m)은 성북구 안암동과 종암동, 돈암동(敦岩洞)에 걸쳐있는 조촐
한 뫼이다. 개운산이란 이름은 산 남쪽에 자리한 개운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안암동에 있다고
해서 '안암산', 종암1동에 진씨(陳氏)의 채석장이 있어서 '진석산'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

산 서쪽에는 그 유명한 미아리고개가 있으며, 그 고개를 통해 아리랑고개와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 산줄기와 이어진다. 산 남쪽과 동쪽은 평지이며, 북쪽은 야트막한 산지로 북
한산과 이어진다.
허나 개발의 무분별한 칼춤으로 인해 산 주위로 아파트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산의 목을
조르고 있으며, 그로 인해 도시에 완전히 고립된 외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행히 1982
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더 이상의 험한 꼴은 면했으나 겨우 높은 지대(거의 70~75m 이상)
만 자연의 공간으로 살아남았을 뿐이다.

개운산은 1936년 경성부(京城府, 서울의 왜정 시절 이름)에 편입되면서 그 주변이 신흥 주택
가로 주목을 받아 집들이 많이 들어서고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1940년 공원 지역으로 고시되
었으나 해방 이후 북쪽에서 많은 월남민들이 서울로 몰려들었고, 특히 도심과 가까운 안암산
자락에 마구 집을 닦아 머물면서 수목들이 상당히 희생되었다. 게다가 6.25전쟁으로 미아리고
개~개운산~종암동을 잇는 서울의 최후 방어 저지선을 지키고자 치열한 전쟁이 벌어져 산은 완
전 민둥산 신세가 되어버렸다.
196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다시 숱이 늘어났으나 산 주위로 주택가 확
대와 대학교들의 몸집 불리기로 계속 위협을 당하던 중, 1982년 근린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산
을 향한 개발의 칼질은 크게 줄었다.
2000년 이후 둘레길이 크게 유행을 타자 성북구가 3.4km의 개운산둘레길을 닦았고, 산책로와
산길 정비, 운동시설 확충, 울창한 숲속에 야외도서관과 유아숲체험장 등을 닦아놓아 조그만
산에 정말 없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알차게도 다듬었다. 게다가 숲이 짙어 조촐하게 산림
욕장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개운산은 덩치가 작으니 산행이 아닌 산책이란 말이 어울릴 것이다. 성북구의회에서 나들이를
시작하여 둘레길을 따라 산을 1바퀴 돌아도 되고, 성북구의회에서 북쪽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마로니에마당으로 이동해도 된다. 마로니에마당은 개운산 정상(134m)으로 산의 몸집에 비해
정상이 너무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산으로 인도하는 길은 성북구의회, 북악산길 개운산 구간(중간중간에 산길이 있음), 종암아이
파크2차아파트 남쪽 길(종암로9가길), 종암동 죽림정사, 동부센트레빌아파트, 돈암동 새소리
어린이공원, 돈암풍림아파트 등이 있으니 각자 취향에 따라 골라가기 바란다.
아직은 동네 사람들이 주로 찾는 동네 명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지만 가볍게 오를만한 도
심 속의 아늑한 뒷동산이고, 둘레길도 일품급이니 점차 서울의 주요 명소로 크게 거듭나리라
믿는다. 그럼 지금부터 개운산을 1바퀴 둘러보도록 하자.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종암동, 돈암동


▲  지그재그로 닦여진 개운산둘레길 계단길 (명상의 길)

성북구의회 입구에서 2분 정도 들어가면 좌우로 갈라지는 막다른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
쪽(북쪽)으로 가면 의회, 개운산 정상 방면이고, 오른쪽(남쪽)은 군부대 쪽인데, 오른쪽으로
길을 잡으면 이내 개운산둘레길이 동아줄 같은 길을 살짝 내려놓는다.
여기서 둘레길로 들어서니 시멘트길 대신 정겨운 흙길이 펼쳐져 개운산도 엄연한 산임을 짙게
내비춘다. 아무래도 산이 작아서 사람들이 뒷동산, 언덕이라고 낮춰서 대하니 산도 발끈하여
이런 길을 꺼내든 모양이다. (둘레길은 상당수 흙길이며, 북쪽은 지형상 나무로 닦은 데크길
이 많음)

개운산둘레길은 3.4km로 명상의 길, 연인의 길, 산마루길, 사색의 길, 건강의 길 등 5개 코스
로 이루어져 있다. 허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름일 뿐이며, 산이라 약간의 오르락내
리락이 있을 뿐, 길도 느긋하고 잘 닦여져 있다.
개운산 남쪽 봉우리에는 군부대가 닦여져 있어서 둘레길은 이들의 눈치를 보며 다소 남쪽으로
피해가며, 크게 1굽이를 돌면 종암동 구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  푸른 숲터널, 개운산둘레길 (명상의 길)

▲  개운산둘레길(명상의 길)에서 바라본 천하
숲 사이로 종암동과 청량리, 천장산(天藏山, 홍릉수목원 뒷산), 중랑구 지역,
아차산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비록 하늘로 조금 솟은 뫼이나 조망은 낮은
높이치고는 썩 괜찮은 편이다.

▲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개운산둘레길 (명상의 길)

▲  개운산둘레길 종암동 구간에서 만난 바위들 (명상의 길)
세상이 바위에게 달아준 이름은 아직 없다. 바위들이 병풍처럼 들어선 모습이
그리 예사롭지는 않아 보여 옛날에 산악신앙이나 치성 장소로 쓰이지
않았을까 싶다.

▲  개운산둘레길 종암동 구간에서 만난 운치 깊은 소나무 (명상의 길)
소나무를 해치지 않고 그 양 옆으로 길을 내어 그를 조금이나마 배려해주었다.

▲  녹음 속에 펼쳐진 개운산둘레길 (연인의 길)

▲  개운산둘레길(연인의 길)에서 윗쪽으로 오르는 계단길
저 계단의 끝에는 개운산 산책을 시작했던 성북구의회 남쪽과 이어진다.
결국 원점으로 다시 돌아간 셈이다.

▲  개운산스포츠센터 뒷쪽(동쪽) 숲길

▲  솔내음이 두텁게 막을 이루고 있는 담소정 서쪽 소나무숲
이곳 평상에 누워 낮잠 한숨 청하면 정말 꿀잠이 따로 없을 것 같다. 사진에는
짤렸지만 책장이 있는 야외도서관도 있으니 솔내음의 가피 아래 독서의
즐거움도 누려보자~~! (책은 반드시 제자리에 꽂아둘 것)

▲  푸른 기와를 지닌 6각형 모습의 담소정(談笑亭)
정자 이름이 참 인간적이다. 즐겁게 이야기 꽃을 피우라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모양인데, 좋은 사람들과 즐기는 이야기꽃만큼
아름다운 꽃도 없지~~!

▲  담소정에서 개운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개운산둘레길 산마루길)

앞서 잠시 떨어졌던 개운산둘레길은 담소정에서 다시 만나 정상(마로니에마당)까지 함께 한다
. 담소정~정상 구간을 산마루길이라 하는데, 이 구간이 개운산의 지붕 길이자 중심 길로 쿠션
이 느껴질 정도로 길이 잘 닦여져 있어 발도 아주 호강을 누린다.


▲  담소정에서 성북구의회 방면 산책로

▲  개운산둘레길 산마루길 ① (개운산 정상 방면)

▲  개운산둘레길 산마루길 ② (성북구의회 방면)

▲  일품 그늘을 지닌 네모난 초가 정자 (산마루길 옆)

▲  아직은 썰렁한 개운산 자연학습장 (산마루길 서쪽)

▲  드디어 개운산 정상 직전 (저 길의 끝에 마로니에마당이 있음)

▲  개운산 정상, 마로니에마당

개운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마로니에마당은 평평한 너른 공간이다. 이곳의 절반 정도는
푸른 잔디가 잔잔하게 입혀져 있으며 'H'마크가 새겨진 헬기장과 화목정이란 정자를 비롯해
쉼터와 운동시설이 넉넉히 깔려 있어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빈번하다.
정상이라고 하지만 주변에 나무가 빼곡하여 조망은 별로이며, 북쪽으로 둘레길을 따라 내려가
면 길음역과 동부센트레빌아파트 방면, 동쪽은 종암동 죽림정사로 이어진다.

▲  남쪽에서 바라본 마로니에마당

▲  북쪽에서 바라본 마로니에마당과 헬기장

▲  푸른 기와를 지닌 화목정(和睦亭)

▲  개운산 정상 북쪽 밑에서 바라본
종암동과 개운산 남쪽 부분


▲  개운산 정상에서 길음역 방면으로 내려가는 나무계단길
(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 구간)


개운산 북쪽은 산세가 조금 패기가 있다. 그렇다고 아주 험한 것까지는 아닌데, 정상 바로 밑
이다 보니 경사가 다소 흥분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무로 계단을 닦고 길을 내었는데, 둘레길
은 그 계단과 나무테크길을 따라 미아리고개 동쪽인 돈암삼성아파트 뒷쪽으로 이어진다.


▲  개운산 북쪽 자락을 흐르는 나무데크길 (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
산길을 편하게 닦아놓아 거닐기도 좋고, 숲도 삼삼하여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사색에 잠기기에 좋다. 하여 생각 좀 하고 살라는 뜻에서 길 이름을
사색의 길이라 지은 모양이다.

▲  개운산 북쪽 자락 나무데크길(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에서 바라본
길음동 지역과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  동부센트레빌아파트 뒷쪽 산자락을 지나는 개운산둘레길 사색의길

▲  개운산 나들이의 종점, 돈암1동 새소리어린이공원

개운산둘레길을 완전히 1바퀴 돌고 싶었으나 시간도 그렇고, 더 이상 땡기지도 않아서 (여기
서 더 가면 다시 성북구의회임) 둘레길을 버리고 새소리어린이공원으로 내려왔다. 이 공원은
개운산의 북쪽 관문 중 하나로 길음역(4호선) 2,3번 출구에서 도보 5분 거리라 접근성도 아주
좋다.

시간은 어느덧 17시 30분. 그리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개운사와 보타사에 깃든 보물들, 그리고
개운산까지 많은 곳을 둘러보니 정말 배가 부르다. 특히 오랜 미답처였던 개운산은 거의 상당
부분을 둘러보았으니 그와의 첫 인연치고는 성과는 좋다.
욕심은 과하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여기서 쿨하게 길을 접으며 개운산 봄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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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9월 1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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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 공비패거리가 넘어갔다는 도심 속의 푸른 허파, 북악산 김신조루트 ~~~ (북악하늘길1산책로, 2산책로, 북악산길)

 


~~~ 서울의 듬직한 허파이자 상큼한 숲길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남마루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남마루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호경암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  호경암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가을이 여름 제국을 몰아내고 천하를 막 접수하던 9월의 끝 무렵에 일행들과 북악산(백악
산) 북악하늘길을 찾았다. 이곳은 김신조루트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2010년에 처음 발을
들인 이후 매년 1~2회 정도 발걸음을 하고 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14시, 한성대입구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1111번(
번동↔성북동)을 타고 성북동(城北洞) 서울다원학교 종점에 두 발을 내린다.
성북동 종점에서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성북 우정의 공원'을 지나 삼청각으로 인도
하는 조그만 길로 들어선다. 서울의 심장부가 바로 지척이건만 그런 도심(都心)을 비웃듯
숲과 계곡이 어우러진 전원(田園) 풍경이 도시에서 오염된 안구를 어루만진다. 길 옆에는
계곡이 졸졸졸♪~~노래를 부르며 흘러가는데 이 물줄기는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속세로
흘러간다.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건너는 다리와 약간의 산길이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그
산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  우정의 공원에서 북악산(백악산)으로 인도하는 골목길(성북로31가길)


 

  북악산 북악하늘길 입문

▲  도심과 성북동을 바짝 이어주는 삼청터널

삼청터널은 성북동과 도심 북쪽인 삼청동(三淸洞)을 이어주는 2차선 땅굴이다. 이곳은 성북동
의 가장 막다른 구석으로 북악산(백악산)의 산세가 칼처럼 솟은 곳이라 오르기가 좀 각박하다.
그런 구석진 곳에서 다른 곳으로 순간이동을 하듯 넘어갈 수 있는 한줄기 희망을 선사한 것이
바로 삼청터널이 되겠다.

이 터널은 군사정권이 절정에 이르던 1969년에 삽을 떠서 1970년 12월 30일에 완성되었다. 공
사비는 총 2억 4,900만원(민자 1억 9,900만원, 시비 5,000만원)으로 당시 성북동에는 차지철
을 비롯한 군사정권의 실세들이 여럿 살았는데 그들의 청와대 접근 편의와 땅값 상승을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솔직히 그 시절 성북동과 삼청동은 한적한 동네로 두 동네를 이을
터널의 필요성은 그다지 없었다.
터널이 뚫리자 안그래도 졸부들로 가득한 성북동의 땅값이 백두산처럼 치솟아 금싸라기 땅이
되었고,
성북동과 청와대, 서울 도심간의 접근이 한결 편해지면서 대원각, 삼청각 등의 고급
요정과 식당들이 아주 재미를 보았다.

산간지방의 조촐한 터널 같은 삼청터널은 길이 302m, 폭 8.5m(2차선)로 오로지 차량만 들락거
릴 수 있다. 예전에는 권력층과 돈 많은 작자들이 주로 이용하던 터널이었지만 시대가 바뀌고
성북동이 도심 속 명소로 크게 각광을 받으면서 나들이와 드라이브를 즐기려는 차량들이 크게
늘었다. 허나 터널도 그렇고 도로도 그렇고 확장은 커녕 여전히 2차선을 고수하고 있어 휴일
에는 꼬리에 꼬리를 잡고 굼벵이 속도로 가는 차량의 행렬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터널을 지나면 바로 삼청동과 북촌으로 이어지지만 걷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억지로 터널
에 발을 들이지 않도록 한다. (벌금 내야됨) 차라리 쿨하게 택시를 타고 넘어가던가 숙정문안
내소에서 한양도성 북쪽 산길을 타고 말바위쉼터나 와룡고개(와룡공원)를 넘어 북촌으로 넘어
가길 바란다.


▲  삼청각(三淸閣) 정문

성북동의 가장 구석이자 삼청터널 북쪽에는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치장된 삼청각이 있다. 이곳
은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북쪽 능선이 갈라지는 150m 고지로 도심이 바로 지척임에도 이곳
을 감싸고 흐르는 공기부터가 무척 산뜻하고 청정하다.

삼청각은 겉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원래는 고급요정이었다. 1972년에 지어진 이곳은 군사
정권 시절 악명을 떨친 3대 요정-청운각(淸雲閣), 대원각(
大元閣), 삼청각의 하나로 삼청
각이란 이름은 북악산 남쪽에 있는 삼청동(三淸洞)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주로 국빈 접대와 정치적 회담을 위한 요정으로 운영되었는데, 1972년 7월 4일에 벌어
진 7.4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적십자대표단이 만찬을 가졌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권력
실세들의 공간으로 30년 가까이 폐쇄적으로 이어오다가 2001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거쳐 도심 속의 전통문화 공간으로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으며,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관
리하고 있다.

한때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했던 고급 요정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고 전통문화를 즐
기며 식사와 차 1잔의 여유, 혼인, 돌잔치 등을 가질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거듭난 현장
으로 이는 길상사(☞ 관련글 보러가기)란 절집으로 변신한 인근 대원각과 비슷하다.

이곳은 오래된 문화유산도 아니고 비록 속세에 개방되었다고 해도 비싼 이미지는 여전히 깃들
여져 있다. 한식당과 다원의 후덜덜한 음식/차 가격과 행사 비용은 서민들에게는 그리 호락호
락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서울의 허파인 북악산의 품에 포근히 안긴 곳으로 20세기
로 전승된 현대 한옥의 아름다움과 기품, 전통 정원의 미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  2007년 북악산 전면개방 기념조림 표석 (숙정문 안내소 부근)

▲  숙정문 안내소로 인도하는 숲길 (홍련사~숙정문 안내소 구간)

▲  숙정문안내소

홍련사와 삼청터널 사이로 난 산길을 오르면 북악산 전면개방 조림을 기념하는 커다란 표석이
마중을 한다. 지금은 사라진 어느 전(前) 대통령이 남긴 것이라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
서 기념촬영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그 표석을 지나면 북악산 주능선의 주요 관문인 숙정문안
내소가 고개를 내민다.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안내소를 지나 직진하면 숙정문(肅靖門)과 주능선, 북악
산 정상(342m)으로 이어지며, 안내소 직전 왼쪽(남쪽) 길은 한양도성의 북쪽 산길로 말바위나
와룡공원으로 통한다. 그리고 오른쪽(북쪽) 길이 김신조루트로 통하는 북악하늘길이다.


▲  숙정문안내소에서 북쪽 능선으로 인도하는 북악하늘길 계단길
왼쪽은 통제 시절에 닦여진 군부대 계단, 오른쪽은 2011년 이후에 새로 닦여진
계단으로 어느 계단을 이용하든 상관없다. 취향에 따라 고르면 된다.


북악산 북쪽 능선 주변은 통제가 여전한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달리 백성들의 출입이 자유
로운 편이었다. 그러다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공비 패거리가 서울에 침투한
이른바 1.21사태로
금지된 땅이 되었으며, 북악산과 인왕산 허리에 군사 작전 및 관광을 겸한
북악스카이웨이(북악산길)를 급하게 만들었다.

금지된 구역이 된 북악산 북부는 41년이 지난 2009년부터 홍련사에서 말바위를 비롯해 성북동
, 정릉동, 평창동에서
북악산길을 잇는 산길이 속속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2010년 2월 27일
에 홍련사에서 북악산 북쪽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을 손질하여 '북악하늘길'이란 이름으로 속
세에 내놓았다. 그중 제2산책로는 김신조 일당이 도망친 루트라 하여 김신조루트란 이름으로
인기를 더하고 있으며, 북악하늘길의 백미이자, 안보관광지로 가장 볼거리가 많은 산길이다.
(실제로 김신조는 이 길로 가지 않았다고 함)
이곳이 주능선과 다른 점이 있다면 24시간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팔
팔한 시절에 공개되어 이렇게 발을 들이니 기쁘기 그지 없다. 북한이나 휴전선처럼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무려 40여 년 동안 금지되어 속인들의 발길을 거부한 탓에 북악산 북부의 자연은 군부대로 인
한 일부의 훼손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다. 그리하여 생태적인 가치가 높고, 자
연경관이 우수하며, 서울 도심을 비웃듯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어 '서울 속의 비무장
지대','도심 속의 허파','도심 속의 신세계'란 별명까지 지니게 되었다.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대부분은 통제 시절 군인들이 오가던 산길로
군사 시설과 그 당시 지어진 계단길이 줄지어 있으며, 제2산책로는 경사가 좀 각박하여 탐방
객의 편의를 위해 나무로 만든 등산로를 곳곳에 만들었다.

북악산 북쪽 능선을 개방하면서 닦여진 북악하늘길 코스는 다음과 같다.
*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 : 말바위쉼터 - 한양도성 북쪽 산길 - 숙정문안내소 - 성북천발원지
  - 북악팔각정 (1.4km)
* 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호경암 - 하늘전
  망대 - 북까페 - 하늘교 - 하늘마루 (2km)
*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 북까페 - 동마루 - 숲속다리 (640m)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둘러보기 (1)
삼청각쉼터 ~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삼청각쉼터

숙정문안내소에서 북악하늘길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높다란 계단길이 나그네의 기를 주눅 들
게 만든다. 시작부터 각박한 계단이 펼쳐지는 것이다. 김신조루트는 이렇게 첫 이미지에서 보
이듯 계단길이 유별나게 많아 숨을 적지 않게 차게 하는데, 이건 맛보기 버전이다. 여기서부
터 지친다면 김신조루트 산책은 어렵다. 자존심을 곱게 버리고 악으로 깡으로 올라간다면 김
신조루트는 그의 속살을 하나씩 벗겨주며 그대를 반겨줄 것이다. (솔직히 그렇게 힘든 코스는
아님, 오르막과 내리막이 좀 반복되는 것이 있을 뿐임)

계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삼청각쉼터가 마중을 한다. 이곳은 삼청각의 서쪽이자 뒷통수로 소
나무의 산인 북악산답게 소나무 1그루가 쉼터 중간에서 운치를 가득 불어주며 솔내음과 선선
한 그늘을 드리운다. 여기서 잠시 삼청각을 비롯한 좁은 천하를 굽어보고 더 올라가면 제1산
책로와 제2산책로가 갈라지는 성북천발원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삼청각쉼터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삼청각과 성북동, 성북구 지역)
이제 시작 단계라 조망 범위는 매우 좁다. 허나 산길을 오르며 하늘과
보다 가까워질 수록 조망의 품질도 더욱 높아진다.

▲  성북천(城北川) 발원지

성북천은 북악산 동북쪽 자락에서 발원(發源)하여 성북동과 삼선교, 보문동, 제기동(祭基洞)
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7.7km의 지방 2급 하천이다. 조그만 하천의 발원지라 한강의 발
원지인 검룡소(儉龍沼)나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黃池)처럼 뭔가 특별하거나 요란한 것은 없
으며, 속세를 향해 흐르는 계곡 주변에는 바위들이 벌러덩 누워 있고 수심은 매우 얕다.

성북구에서 이곳을 생물 서식처로 가꾸고자 사람들의 계곡 접근을 통제하고 여러 식물을 심으
며, 수질에 각별히 신경을 쓴 결과 가재를 비롯한 여러 수중 동물들이 좀 늘어났다. 하여 이
를 기념하고자 성북천발원지 바로 남쪽에 있는 다리 이름을 가재가 물에서 물장구를 치는 다
리란 뜻에
수고해(水鼓蟹)다리라 하였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기존의 제1산책로로 바로 북악팔각정과 빠르게
이어지며, 오른쪽은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제2산책로로 호경암을 거쳐 하늘교까지 이어지는 2
km의 산길이다. 이 산길은 중간중간 조망이 괜찮은 곳에 '~~마루'와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를 두어 천하를 마음껏 굽어볼 수 있게 했다.


▲  성북천발원지에서 서마루로 오르는 김신조루트 계단길

▲  김신조루트 서마루

성북천발원지에서 서마루까지는 속절없는 세상살이처럼 고통스런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나무
로 지어진 서마루에 오르면 삼청각쉼터보다 1단계 높아진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의자가 넉
넉하게 베풀어져 있어 잠시 숨을 고르며 천하를 굽어보기에 좋다. 이곳에선 북악팔각정이 가
까이에 보이며, 여기서 길은 동쪽을 향해 급하게 내리막길로 돌변한다. 그래서 처음 온 이들
은 '벌써 다 올라온거야? 이거 정말 싱거운데!' 생각을 하며 방심을 하지만 이는 북악산이 내
린 일종의 속임수이니 속지말자.
북악산이 북한산(삼각산)이나 관악산(冠岳山), 수락산(水落山) 등 서울 주변의 쟁쟁한 산들에
비해 키는 낮지만 그래도 악(岳)이 들어가는 서울의 북현무(北玄武)이다. 남산처럼 만만한 산
이 아니란 말이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1)
소나무 너머로 성북동과 와룡공원, 성북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2)
북악산의 두터운 주능선 너머로 서울 도심과 남산이 바라보인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3)
북악산 주능선과 남산, 서울 도심은 물론 멀리 관악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  이름도 시원한 솔바람교

서마루에서 솔바람교까지 220m 구간은 각박한 경사의 내리막이다. 다 올라왔구나 싶겠지만 솔
바람교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흥분기를 보이며 무지막지한 오르막길로 나그네의 기를 죽인
다.
내리막길은 고난 앞에서 잠시 즐기는 여유라고나 할까..? 한라산(漢拏山)도 관음사(觀音
寺) 방면으로 한참 내려갈 때 중간에 오르막길이 나와 속인들을 잠시 좌절하게 만드는데 바로
그 이치이다.
남마루까지는 가파른 길이 계속 이어지니 방심의 늪에 빠지지 말자~~

솔바람교는 계곡 위에 걸린 나무다리로 그 이름이 순 우리말이라 정감이 참 깊다. 주변은 소
나무를 비롯해 온갖 수목이
삼삼하여 그 이름 그대로 솔바람이 나를 날려보낼 것 같다. 계곡
이라고 하지만 워낙 생긴 것이 부실하고 돌만 가득하여 이곳에 올 때마다 늘 황량한 모습을
보여주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다리를 내려오면 쉼터가 있으며 다리 북쪽 구석으로 가면 약수터가 있는데, 이곳이 김신조루
트의 유일한 샘터이다. 산에서의 약수터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라 갈증이 없어도 꼭 물
을 마시기 마련이나 무심한 가을 가뭄 때문인지 물은 이미 사라졌다. 북악하늘길에서 가장 첩
첩한 곳으로 북쪽과 서쪽, 동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남쪽만 가늘게 뚫려있다.


▲  솔바람교 밑에 자리한 약수터 -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이름 없는 약수터이다.

▲  솔바람교 쉼터
이곳은 김신조루트의 중간 정도 지점이다.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둘러보기 (2)
솔바람교 ~ 남마루 ~ 호경암

▲  솔바람교 쉼터에서 남마루로 올라가는 계단길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느껴진다.


솔바람교에서 남마루까지는 다시 지독한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그 거리는 약 600m 정도로 여
기가 김신조루트에게 가장 산행의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 곳이다. 하긴 공비 패거리들이 살아
돌아가려는 일념으로 넘었던 곳인데 오죽 험하겠는가..? 게다가 이곳은 산길도 없던 구간이라
각박한 산세를 순화시키고자 나무로 길게 계단길을 닦고 짧은 간격을 두며 쉼터를 만들어 턱
까지 밀려오는 숨을 잠시나마 제자리를 찾도록 했다.

그렇게 잔뜩 흥분한 산길을 오르면 남마루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은 앞서 서마루보
다 더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더 휼륭한 조망을 선물로 준다. 이곳 이후 흥분했던 산길은 진정
을 되찾으며 호젓한 산길의 기품을 서서히 회복한다.


▲  지옥 끝에 나온 극락, 남마루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1)
성북동과 성북구, 동대문구, 성동구를 비롯한 서울 동부지역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2)
북악산 주능선 너머로 서울 도심과 남산, 관악산, 우면산 등이 보인다.

▲  서서히 진정되고 있는 산길 (남마루와 호경암 사이)

▲  호경암으로 오르는 계단길
이 구간은 거의 벼랑이라 그 옆구리에 계단 잔도를 깔았다.

▲  김신조루트의 상징물, 호경암(虎京岩)

남마루에서 360m 오르면 길 왼쪽에 가득 상처를 입은 큼직한 바위가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도심을 바라보며 자리한 이 바위가 바로 김신조루트의 상징인 호경암이다. 바위는 그리
잘생긴 편은 아니고 그저 평범한 수준인데, 그냥 흔한 바위로 묻힐 뻔한 그가 일약 유명해진
것은 김신조 공비 패거리와 격전을 벌였던 남북분단의 서글픈 현장이기 때문이다.

청운동에서 경찰에게 털린 김신조 패거리는 북악산을 넘어 성북동 뒷산(북악산 북쪽 능선)으
로 줄행랑을 치며 몸을 숨겼다. 39대대 2중대는 호경암 주변을 수색하던 중, 등을 보이고 도
망치는 공비 3명을 발견, 호경암에서 교전을 벌이다가 인근 구진봉 주변에서 모조리 사살했다.

처단된 김신조 패거리 29명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적군묘지(敵軍墓地)에
묻어주었다. 적군묘지는 6.25때 남한 땅에서 죽은 북한군과 중공군의 시신을 묻은 곳으로 김
신조 사건과 동해 잠수함 침투 때 죽은 공비들, 그리고 1987년 KAL기를 폭파시킨 폭파범도 같
이 묻혀 있다.


▲  남북분단의 비극이 안겨준 선물 아닌 선물 - 총탄 자국으로
계속 고통받고 있는 호경암


북악산이 서울 근교 경승지로 조선시대부터 귀족들의 별장과 기와집, 바위글씨가 즐비했던 탓
에 호경암도 그런 곳이 아닐까 생각을 했었다. 허나 막상 확인해보니 1968년에 서울을 지켰던
맹호부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옛 사람들의 손길은 북악산 주능선과 서쪽(부암
동, 청운동), 남쪽(삼청동)에 치우쳐져 있을 뿐, 김신조루트와 북쪽 능선은 전혀 없는 것이다.
아마도 금표(禁標) 구역으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묶인 탓이 아닐까 싶다.

바위 밑에는 이곳이 격전지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는데, 1998년 1월 호경암 주변에서 복무하
는 군장병들의 애국심과 경각심을 크게 돋구고자 안내문을 설치했다고 하며, 울퉁불퉁한 바위
피부에는 당시 총격전으로 생긴 50여 발의 탄흔이 진하게 남아 당시에 긴장되고 숨막히던 상
황을 아련히 전해준다. 그런 악연으로 북악산의 이름 없는 바위는 김신조 사건의 격전지로 이
들을 격퇴한 부대 이름을 따서 호경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고, 이곳이 개방되면서 북악산
의 새로운 명물이자 이 땅의 비극적 현실을 담고 있는 산증인으로 몸값과 이름을 크게 올리고
있다. 좋은 쪽으로 이름을 높여야 되는데 안좋은 쪽으로 높이고 있으니 바위 자신도 참 우울
할 것이다. 바위를 보면 표정이 조금은 굳어져 있는데, 이 땅이 통일이 되면 그의 표정도 씨
익~ 펴지지는 않을까?


▲  이 땅의 비극은 저렇게 깊었다 - 바위에 박힌 탄흔

▲  호경암 정상에 비스듬히 박힌 호경암 표석
이곳에서 바라보는 천하는 앞에서 봐왔던 조망을 훨씬 뛰어넘는 1등급의 조망이다.
(이곳은 통제구역이긴 하나 그 통제의 정도가 느슨함, 낮은 난간만 넘으면 됨)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1)
북악산 일대와 성북동, 서울 도심, 남산 등이 바라보인다.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2)
성북동과 정릉동, 성북구, 중랑구, 강북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3)
평창동과 구기동,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형제봉 등이 바라보인다.

▲  호경암에서 하늘전망대로 인도하는 길
호경암을 지나면 더 이상 오르막길은 나오질 않는다. 가을에 잠긴 잔잔한
숲길만이 조용히 사색을 도울 뿐이다.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마무리

▲  김신조루트 북쪽에 자리한 하늘전망대

호경암에서 4~5분 정도 가면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지금까지 나온 '~~마루'
보다 덩치도 크고 조망도 괜찮은 편으로 그 이름은 북악하늘길에서 따왔지만 그만큼 하늘과도
가까운 곳이라 이름이 썩 어울린다.

서마루부터 호경암까는 성북동과 북악산 주능선, 서울 도심, 남산 등의 남쪽과 성북구와 중랑
구, 동대문구 등 동쪽이 주로 보였다. 허나 호경암을 경계로 능선 남부에서 북부로 넘어왔기
때문에 하늘전망대부터는 그와는 반대인 북쪽으로 파노라마가 바뀌면서 평창동과 구기동, 정
릉동, 북한산(삼각산) 산줄기를 비롯하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서울의 대표 졸부 동네인 평창동(平倉洞)과 구기동(舊基洞)을 비롯하여
탕춘대성 능선과 북한산 서부가 거침없이 시야에 박힌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평창동과 북한산 산줄기, 형제봉 등이 바라보인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정릉동과 길음동, 삼양동,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수락산 등이 흔쾌히
두 눈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4)
정릉동과 돈암동, 성북구, 노원구, 중랑구, 불암산 지역

▲  솔내음이 그윽한 북까페

하늘전망대에서 북쪽으로 110m 가면 북까페라 불리는 소나무숲이 나온다. 이곳에는 책장과 의
자 등이 닦여져 있는데 북한산과 북악산의 산바람이 교차하는 곳이며 솔내음도 그윽하여 독서
도 무지 잘될 것 같다.
그런데 북까페보다는 '독서마당'이나 '소나무 책방','솔내음 책방','사색의 공간'으로 이름을
지었으면 훨씬 부드럽지 않을까? 다른 곳은 '~~마루(마루는 정상을 뜻하는 순 우리말)'나 '하
늘전망대' 등의 우리말을 쓰면서 왜 이곳만큼은 영어로 지었는지 철밥통들의 뇌 속이 궁금할
따름이다.

북까페 책장은 달랑 1개로 책은 많이 담겨져 있으나 상당수는 어린이와 청소년용 책이거나 소
설이다. 집에 버려둔 책이 있다면 썩혀두지 말고 이곳에 기증하는 것도 공익 차원에서 괜찮을
것이다. 다만 이곳의 책은 인간적으로 가져가지 말자. 그리고 책을 봤다면 의자에 두지 말고
반드시 책장에 넣기 바란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북까페를 등지고 북쪽으로 직진하면 하늘교가 나오고, 북
까페를 가로지르면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이다.

▲  조촐하게 생긴 북까페 책장

▲  북악산길 위에 걸린 하늘교


▲  하늘교 밑에 펼쳐진 북악산길
서울 도심 속의 산악 도로로 드라이브 코스로 명성이 자자하다. 특히 야간에는
회색빛 대도시 서울의 야경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다.

▲  김신조루트의 북쪽 종점, 하늘마루

북까페에서 1분 정도 가면 하늘교란 콘크리트 다리가 나온다. 다리 밑에는 2차선 북악산길이
펼쳐져 있는데 차들이 1분이 멀다하고 지나간다. 그 다리를 건너면 하늘마루가 나오니, 이곳
이 김신조루트의 북쪽 종점이다.

하늘마루에는 6각형 정자와 쉼터, 운동기구 등이 있으며,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서
쪽으로 가면 북악팔각정과 부암동, 창의문, 사직공원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가면 북악정과
성북구민회관, 아리랑고개 방면으로 통한다. 중간에 국민대나 배밭골, 성북동 길상사로 내려
가는 길이 있으며, 하늘마루를 조금 지나면 북한산 형제봉으로 가는 산길이 있어 북한산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 산길은 북악터널 위쪽과 여래사(如來寺)를 지나며, 형제봉고개에서 북한
산둘레길과도 만난다. 이렇게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은 북악터널에서 서로 이어져 있고, 북
악산 북쪽 능선은 넓게 북한산의 남쪽 줄기로도 볼 수가 있어 성북동 북쪽에 자리한 길상사와
정법사(正法寺)가 삼각산(三角山)에 있음을 칭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마루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북한산과 형제봉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온다. 그 길로 들
어서면 얼마 안가서 정릉동 배밭골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는데 그 길을 조금 내려가면 조망이
괜찮은 전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전망대 이름은 딱히 없으나 여기서는 국민대 남쪽 전망대라
고 하겠음)


▲  국민대 남쪽 전망대

▲  국민대 남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동쪽 산줄기
거대한 수해(樹海)를 이룬 북한산 산줄기의 녹음이 참 짙기만 하다.

▲  국민대 남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가까이에 국민대를 비롯하여 정릉동과 길음동, 강북구, 수락산~불암산
산줄기가 두 눈에 들어온다.


▲  국민대 남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 동쪽 산줄기와 정릉동, 길음동, 성북구 지역


국민대 남쪽 전망대에서 다시 한번 천하를 굽어본 다음, 여래사를 거쳐 형제봉 방면으로 이동
했다. 원래는 형제봉고개를 거쳐 평창동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시간도 늦어서 북악터널 북쪽
을 거쳐 국민대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도심 속의 허파이자 별천지, 북악산 김신조루트 나
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닫는다.

※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찾아가기 (2018년 11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서울다원학
  교 종점 하차. 여기서 10분 정도 가면 삼청터널이 나오는데 삼청각과 삼청터널 사잇길로 들
  어가면 숙정문안내소로 안내소 직전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김신조루
  트이다.
*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6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구민회관(구민회관
  입구) 종점에서 하차, 여기서 북악산길을 따라 이동한다. (하늘마루까지 1시간 소요)

★ 북악산 북악하늘길 관람정보
*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 단 출입금지 지역과 등산로 외에 구간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 김신조루트는 약수터 1곳과 화장실 1곳(호경암 부근) 밖에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정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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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허파이자 신선한 명소 ~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서울 도심의 허파이자 신선한 명소,
북악산(北岳山)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산책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북악산 김신조루트 남마루에서 굽어본 서울시내


봄이 한참 익어가던 5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북악산을 찾았다. 4호선 한성대입구역(4호선)에
서 일행들을 만나 1111번(번동↔성북동)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명수학교 종점에 발을 내린다.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인 성북동(城北洞)은 내가 즐겨찾는 동네의 하나로 볼거리가 정말 풍
성하다. 십주원<최사영(崔思永) 고택>과 한국가구박물관, 정법사(正法寺) 등을 빼고는 지겹도
록 둘러봤지만 갔다오면 금세 또 가고 싶고, 뒤돌아서면 또 생각나고, 자꾸 가고 싶은 생각만
들게 만드는 그야말로 내 마음을 제대로 훔친 동네이다. 길상사(吉詳寺) 같은 경우는 매년 5~
6회나 찾아갈 정도이고, 간송미술관은 봄, 가을 특별전마다 약속이나 한 듯 찾아간다.

성북동 종점에서 만국기(萬國旗)가 아낌없이 펄럭이는 '우정의 공원'을 지나 삼청각으로 가는
조그만 길로 들어선다.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도심을 비웃듯 시골 풍경을 여실히 비춘
다. 길 왼쪽에는 북악산 계곡이 졸졸졸♪~~노래를 하며 흘러가는데, 이 계곡은 성북천이란 간
판을 달고 속세로 흘러가며, 북악산에서 잔잔히 이는 산바람은 몸에 비친 땀과 더위를 털어가
며 심신을 시원하게 해준다.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함께 약간의 산길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데, 그 산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삼청터널은 성북동과 삼청동(三淸洞), 도심을
이어주는 터널로 수레의 왕래가 잦다. 허나 길은 2차선으로 좁고 신호등은 황색점멸만 일삼아
모른 척 하니, 통행에 주의가 필요하다. 또한 수레 전용 터널이라 도보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여기서는 북악산 주능선(한양성곽 능선)과 김신조루트로 불리는 북악산 북쪽 산길(북악하늘길
)이 시작되며, 홍련사(紅蓮寺)와 삼청각이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해 있다.


  삼청각 주변

▲  도심과 성북동을 가까이 이어주는 삼청터널

삼청터널은 성북동 서쪽에서 도심인 삼청동을 이어주는 2차선 터널이다. 보통 성북동을 드라이
브한다면 삼선교(한성대입구역)에서 성북동을 가로질러 삼청터널을 지나 삼청동으로 가던가 혹
은 그 반대로 가면 된다. 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이곳은 성북동의 가장 막다른 곳이었다. 

이 터널은 군사정권이 절정을 누리던 1969년에 삽을 뜨기 시작하여 1970년 12월 30일에 완성되
었다. 그 시절 성북동에는 차지철을 비롯한 군사정권의 실세들이 여럿 살았는데 그들의 청와대
접근 편의와 땅값 상승을 노리고자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솔직히 당시 성북동과 삼청동은
매우 한적한 동네로 두 동네를 이을 터널의 필요성은 그다지 없었다.
터널이 뚫린 이후, 성북동 땅값은 하늘을 향해 들썩였고, 성북동에서 청와대와 정부청사, 서울
도심과의 접근이 편해지면서 대원각, 삼청각 등의 고급요정이 호황을 누렸다. 

산간지방에 조촐한 터널 같은 삼청터널은 길이가 짧고 폭이 좁아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고 있다. 오로지 수레들만 통행이 가능하다. 예전에는 지배층과 졸부들이 주로 오가던 그들
의 전용 터널이자 청와대의 후문, 도심 속에 숨겨진 터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적
하던 터널이지만, 시대가 바뀌고 성북동이 도심 관광지로 명성을 얻으면서 수레의 발길도 제법
늘었다. 그래서 휴일에는 꼬리에 꼬리를 잡고 버벅거리는 수레의 행렬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수레의 양은 늘었지만 터널은 아직도 옛날 2차선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터널을 지나면 바로 삼청동과 북촌으로 이어지지만 도보가 금지되어 있으므로 터널에 발을 들이
지 않도록 한다. 차라리 택시를 타고 삼청공원으로 넘어가던가 아니면 숙정문안내소 동남쪽으로
나있는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를 타면 산길 중간에 한양성곽이 모습을 진하게 비추면서 성곽 안
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으로 성 안으로 넘어가면 말바위안내소(쉼터) 동쪽
인데, 여기서 삼청공원(三淸公園)으로 내려가면 바로 삼청동과 북촌으로 이어진다.


▲  삼청각(三淸閣) 정문

성북동의 가장 서쪽 구석이자 삼청터널 북쪽에는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치장된 삼청각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햔양도성이 지나는 북악산 본줄기와 북악산길이 지나는 북쪽 능선(북한산의 남쪽
줄기이기도 함) 사이 150m고지로 성북동에서 제일 막다른 곳이다.

삼청각은 겉모습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원래는 고급요정이었다. 1972년에 지어진 이곳은 군
사정권 시절 악명을 떨친 3대 요정<청운각(淸雲閣), 대원각(
大元閣), 삼청각>의 하나로 삼청각
이란 이름은 북악산 남쪽에 있는 삼청동(三淸洞)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주로 국빈(國賓)의 접대와 정치적 회담을 위한 요정으로 운영되었으며, 1972년 7월 4일
7.4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적십자대표단의 만찬을 열었던 뜻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권력실세의
공간으로 30년 가까이 폐쇄적으로 이어오다가 2001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거쳐 도심
속의 전통문화 공간으로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으며,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한때 백성들은 감히 명함도 들이밀지 못했던 고급 요정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고 문화를 즐길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탈바꿈된 현장으로 이는 인근 대원각과 비슷하다. 대원각은 그곳을
관리하던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이 법정에게 통째로 기증하여 절로 변신한 곳으로 비록 과
정은 다소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이곳은 오래된 문화유산도 아니고 비록 속세에 개방된 공간이라 해도 여전히 고급요정의 이미지
가 깃들여져 있다. 한식당과 다원의 얄미운 음식/차 가격에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서울의 허파
인 북악산의 품에 포근히 안긴 곳으로 20세기로 전승된 현대 한옥의 아름다움과 기품, 전통 정
원의 미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 삼청각
☞ 관련 글 보러가기~~*
* 삼청각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


▲  북악산 전면개방 기념조림 표석 - 숙정문 안내소 부근

▲  숙정문안내소 - 여기서 산길은 숙정문 방면과 북악산길 방면으로 갈린다.

홍련사와 삼청터널 사이에 난 산길을 오르면 북악산 전면개방 기념 조림(造林)을 기념하는 커다
란 표석(標石)이 나그네를 맞는다. 지금은 이 땅에 없는 대통령의 업적이라 그를 좋아하는 사람
들은 여기서 기념촬영을 하고 등산에 임한다.

표석을 지나면 숙정문안내소(☎ 02-747-2152~3)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안내
소를 지나 직진하면 한양도성의 북문인 숙정문(肅靖門)으로 통한다. 숙정문에서 북악산의 주능
선을 따라 와룡공원이나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으로 이어지며, 북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342m
)에서 아시아 최대 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도심을 두 눈 아래에 두며 굽어볼 수 있다.
서울을 방어하고자 오랫동안 금표(禁標) 지역으로 있던 북악산이 2006년 속세에 개방이 되었지
만 아직까지는 제약이 많아 숙정문안내소와 창의문안내소, 말바위안내소를 통해 들어가야 되며,
적어도 15시까지는 출입해야 된다. 반드시 신분증을 가져가야 되며, 출입신고서를 작성하고 출
입증을 받아서 가슴에 달거나 목에 걸고 입장해야 된다. 또한 17시까지 등산을 마쳐야 된다.
허나 본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곳은 북악산 주능선이 아닌 북악하늘길이다. (북악산 주능선 관련
정보는 ☞ 이곳을 클릭하여 북악산 관람정보 부분을 참조하거나 숙정문안내소에 문의 요망)
숙정문안내소를 코앞에 두고 오른쪽(홍련사에서 숙정문 방향) 산길로 가면 북악산 북쪽 능선으
로 통하는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이다.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제2산책로는 안내소에서 200m 떨어
진 성북천발원지에서 시작된다.

북악산 북쪽 능선 주변은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백성들의 출입이 자유로웠다. 그러다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공비패거리 31명이 북한산을 넘어 창의문을 거쳐 시내로 침투했
는데, 그들의 침투 소식을 접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1932~1968)은 경찰을 청와대 길목
에  배치하고 직접 현장을 지휘했다.
드디어 공비패거리가 청와대 서쪽 청운동(淸雲洞)에 나타나자 최서장은 그들이 공비임을 눈치채
고 검문을 한다며 길을 막았다. 들통났음을 직감한 공비들은 발작하여 외투 속에 숨긴 기관단총
을 꺼내 선제공격을 가하면서 총격전이 발생했고, 최서장은 불행히도 가슴과 배에 관통상(貫通
傷)을 입고 쓰러지면서 '끝까지 청와대를 사수하라!' 부대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고는 장
렬한 최후를 마쳤다.
서장의 죽음에 애끓는 복수심에 불탄 우리 경찰의 반격으로 공비들은 거의 벌집이 되었고 살아
남은 이들은 인왕산(仁王山)과 북악산으로 도주했다. 이후 14일 동안 수색을 벌여 북악산 북쪽
능선를 끝으로 토벌을 완료했으며, 생포된 김신조와 도주 1명을 뺀 29명을 사살했다.

김신조 사건을 계기로 뚜껑이 단단히 폭발한 박정희 전대통령은 북악산 북쪽 능선 주변을 완전
히 통제하여 군사지역으로 삼았으며, 북악산과 인왕산 허리에 군작전 및 관광을 겸한 북악스카
이웨이(북악산길)를 급하게 닦게 했다.

통제를 당하고 무려 41년이 지난 2009년부터 삼청각에서 와룡공원 방면과 성북동과 평창동, 정
릉에서 북악산 북쪽 능선인 북악산길로 이어지는 산길들이 속속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2010년
2월 27일 삼청각에서 북악산길로 오르는 산길을 손질하여 속세에 개방했다. 그 산길이 이른바
북악하늘길이다. 이 중 제2산책로는 김신조 패거리가 도망친 루트라 하여 김신조루트란 이름으
로 속세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북악하늘길의 백미이자, 안보관광지로 가장 볼거리가 많은 산길
이다. (실제로 김신조는 이 길로 가지 않았다고 함)
이곳이 주능선과 다른 점이 있다면 24시간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팔팔
한 시절에 공개되어 이렇게 가게 되니 기쁘기 그지 없다. 북한이나 휴전선처럼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무려 40여 년 동안 폐쇄되어 속인들의 발길이 닿지 못한 탓에 북악산 북쪽 능선의 자연은 군부
대로 인한 몇몇 훼손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잘 보존되고 있다. 그러 인해 생태적인 가치가 높고
자연경관이 우수하며, 서울 도심을 비웃듯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어 '서울 속의 비무장
지대','도심의 허파','도심 속의 신세계' 등의 신선한 별명까지 지니게 되었다. 또한 마천루(摩
天樓)의 빌딩들이 즐비한 도심 속의 이색 장소로 한나절 나들이 코스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는 출입통제 시절 군인들이 오가던 산길로 쓰여 군사시설과
그 당시 만들어진 계단길이 있으며, 산길이 조금은 험하고 경사가 속세살이처럼 급하여 등산객
의 편의를 위해 나무로 만든 등산로를 곳곳에 설치하여 통행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다.

참고로 북악산 북쪽 능선을 개방하면서 조성된 북악하늘길 코스는 다음과 같으며, 본글에서 북
악산길과 북악하늘길을 절대 혼돈하지 않도록 한다. (북악산길은 북악스카이웨이 도로, 북악하
늘길은 성북동에서 북악산길로 이어지는 산길)
*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 : 말바위쉼터 ~ 한양성곽 북쪽산길(중간에 성곽 안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이 있음) ~ 숙정문안내소 ~ 성북천발원지 ~ 북악팔각정 (1.4km)
* 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 성북천발원지 ~ 계곡마루 ~ 호경암 ~ 하늘전망대 ~ 북까
  페 ~ 하늘교 ~ 하늘마루 (2km)

*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 북까페 ~ 동마루 ~ 숲속다리 (640m)


▲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 계단길 (군사통제시절에 만든 계단)

▲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그뒤로 보이는 북악산 북쪽 능선

▲  울창한 숲너머로 삼청각 일화당(一和堂)이 고개를 내민다.


  삼삼한 숲에 묻힌 북악산 김신조투르 둘러보기 (1)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성북천(城北川) 발원지

숙정문안내소에서 200m 정도 오르면 성북천발원지가 나온다. 성북천은 북악산 동북쪽 자락에서
발원(發源)하여 성북동과 삼선교, 보문동, 제기동을 거쳐 청계천으로 흐르는 7.7km의 하천으로
지방 2급하천이다. 조그만 하천의 발원지라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儉龍沼)나 낙동강의 발원지
인 황지(黃池)처럼 뭔가 특별하거나 요란한 것은 없으며, 속세를 향해 흐르는 계곡 주변에는 하
얀 피부의 바위들이 누워 있고, 수심은 대충 무릎이 닿을까 말까 할 정도로 얕다.
성북구청에서는 이곳을 생물서식처로 가꾸고자 수변(水邊)식물과 조류, 곤충류의 먹이식물을 심
었으며, 성북구를 가로 질러 흐르는 성북천의 시작점인 만큼 계곡으로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개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기존의 제1산책로로 바로 북악팔각정과 빠르게 이어
지며, 오른쪽은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제2산책로로 호경암을 거쳐 하늘교까지 이어지는 2km 산길
이다. 길 중간중간 조망(眺望)이 괜찮은 곳에 '~~마루'와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를 두어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  마치 끝이 없는 하늘로 이어진듯한 김신조루트 계단길 (통제시절의 유물)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1)
북악산 주능선 너머로 서울 도심과 남산이 보인다.
아직까지는 조망이 속시원하지는 못하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2)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이 오른쪽에 보이고, 그 너머로 도심과 용산구, 마포구 지역이 시야에 보
인다. 남산 뒤로 희미하게 관악산(冠岳山)이 모습을 비추며 늘 북악산을 응시한다. 관악산은 풍
수지리적으로 서울을 위협하는 산으로 북악산은 서울을 지키는 주산(主山)인데, 높이로 보나 덩
치로 보나 관악산의 적수가 되질 못했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고자 북한산(北漢山)을 북악산을
돕는 든든한 진산(鎭山)으로 삼아 관악산의 기운을 경계했던 것이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3)
성북구와 동대문구를 비롯한 서울 동부 지역

성북천발원지에서 서마루까지는 오르막길이다. 서마루에는 두 다리를 쉬어갈 수 있도록 의자와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잠시 숨을 고르며 천하를 관망하기에 좋다. 이곳에선 북악팔각정이 가
까이에 보이며, 북쪽으로 난 금지된 계단길이 있는데, 이는 군부대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 길은 동쪽으로 급하게 내리막길이 펼쳐져 있어 '벌써 다 올라온거야? 정말 싱거운데..!'
싶은 착각과 방심을 불러 일으킨다. 허나 그건 북악산이 내린 일종의 속임수였다.


▲  솔바람교 주변

▲  약수터에서 바라본 솔바람교
(다리 중간에 계곡마루가 있음)

▲  정면에서 본 솔바람교와 돌밭이
되버린 계곡


▲  솔바람교 밑에 자리한 약수터

나무 계단길을 내려서면 솔바람교라 불리는 나무다리가 나온다. 다리 이름이 순 우리말에 어여
쁜 표현을 넣어 정감이 깊은데. 주변에 소나무를 비롯한 수목이 삼삼하여 그 이름 그대로 솔바
람이 나를 날려보낼 것 같다. 이래 봬도 계곡 위에 걸린 엄연한 다리이건만 계곡이 워낙 부실하
고 돌만 가득하여 계곡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다리 중간에는 계곡마루라 불리는 쉼터가 있는데,
늘 그늘이 드리우고 있어 시원하다.

다리를 내려와 구석으로 가면 이름 없는 약수터가 있는데, 이곳이 북악하늘길의 유일한 샘터이
다. 산에서의 약수터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라 갈증이 없어도 꼭 물을 한 바가지 마시
는데, 그래도 산을 조금 탔다고 목구멍이 시원하다고 쾌재를 부른다. 물맛은 별로 특별한 것은
없어 보인다.
약수터 주변은 숲이 바다를 이루고 있어 햇빛이 쉽게 손을 뻗지 못하며, 북악하늘길에서 가장
깊은 곳으로 북쪽과 서쪽, 남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남쪽만 가늘게 뚫려있는 고독한 곳이다.

서마루에서 솔바람교까지 220m 구간은 급한 경사의 내리막길이다. 다 올라왔구나 싶겠지만 그건
북악산이 인간들을 속이고 시험하는 것이다. 솔바람교를 지나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무지막지한
오르막길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리막길은 고난 앞에서 잠시 즐기는 여유라고나 할까..? 한라
산(漢拏山)도 관음사 방면으로 한참 내려갈 때 중간에 오르막길이 나와 속인들을 좌절하게 만드
는데, 바로 그 이치이다. 남마루까지는 가파른 길이 계속 이어지니 방심의 늪에 빠지지 말자~~


  삼삼한 숲에 묻힌 북악산 김신조투르 둘러보기 (2)
남마루 ~ 호경암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1)
성북구, 동대문구를 비롯한 서울 동부지역

솔바람교에서 600m 정도 가파른 길을 오르면 남마루라 불리는 조망대가 나온다. 김신조루트에서
제일 숨이 차는 구간이 솔바람교에서 남마루 구간으로 청운동에서 간신히 도망친 김신조 일당이
목을 붙잡고 열심히 줄행랑을 치던 구간이다.

남마루에 각박한 산길에 지친 두 다리를 쉬게 하며 잠시 천하를 굽어본다. 시원한 산바람이 잠
시 얼굴에 비춘 땀을 보기 좋게 앗아간다. 남마루에서 보이는 범위는 서마루와 거의 비슷하지만
거기보다는 하늘과 좀 더 가까운 곳이라 조망은 좀 업그레이드 된다.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2)
북악산 수림 속에 묻힌 삼청각 일화당의 지붕이 보인다.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3)
성북동과 혜화동, 성북구, 동대문구, 성동구, 중랑구 등이 눈에 박힌다.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4)
북악산 주능선 너머로 서울 도심과 남산(南山)이 보인다.

▲  남마루에서 호경암으로 가는 산길
솔바람교 이후 잔뜩 흥분했던 산길은 남마루 이후 다소 진정을
되찾으며 호젓한 산길의 기품을 보인다.

▲  남마루에서 호경암으로 가는 나무 다리길
이 구간은 길이 야박하여 이렇게 나무다리를 놓았다.

▲  김신조루트의 상징물 ~ 호경암(虎京岩)

남마루에서 360m 오르면 길 왼쪽으로 큼직한 바위가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도심을 바라
보며 자리한 이 바위가 바로 김신조루트의 상징인 호경암이다. 바위는 그리 잘생긴 편은 아니고
그저 평범한 수준인데, 이 바위는 김신조 일당과의 처절했던 격전지라 남북분단의 가슴 아픈 비
극을 더욱 끌어올려 준다.

청운동에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이 이끈 우리 경찰과의 전투에서 간신히 도망친 김신조 일당은
북악산을 넘어 성북동 뒷산(북악산 북쪽 능선)으로 줄행랑을 치며 몸을 숨겼다. 39대대 2중대는
호경암 주변을 수색하던 중,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공비 3명을 발견, 호경암에서 교전을 벌이다
가 인근 구진봉(북악산 북쪽 능선 봉우리의 하나) 주변에서 모조리 사살했다.

처리된 김신조 일당 29명은 그 시신을 버리지 않고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적군묘지(敵軍墓地)에
묻었다. 여기서 적군묘지는 6.25때 남한 땅에서 죽은 북한군과 중공 떨거지들의 시신을 안치한
공간으로 김신조 사건과 동해 잠수함 침투 때 죽은 공비를 비롯하여 1987년 KAL기 폭파범도 같
이 묻혀있는 분단 비극의 숨겨진 속살이다.

호경암이란 이름은 처음에는 북악산 주변에 숨겨진 경승지가 많으므로 조선시대에 지어진 이름
이 아닐까 싶었으나 1968년 당시 서울을 지키던 맹호부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  총알구멍이 선명한 호경암

북악산에 귀족들의 기와집과 별장, 바위글씨들
이 많이 있었지만 그 범위는 북악산 주능선의
서쪽과 남쪽에 치우쳐져 있을 뿐, 북쪽 능선인
이곳까지는 크게 관심을 받지 못했던 모양이다.

바위 밑에는 이곳이 격전지임을 알리는 안내문
이 있는데, 1998년 1월 군장병들의 애국심과 경
각심을 돋게 하고자 설치했다고 하며, 울퉁불퉁
한 바위 피부에는 당시 총격전으로 생긴 50여
발의 탄흔이 진하게 남아 당시의 긴장되고 숨막
힌 상황을 아련히 전해준다.
그런 악연으로 북악산의 이름 없는 바위는 김신
조 사건의 격전지로 이들을 격퇴한 부대 이름을
따서 호경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고, 이곳이
개방되면서 북악산의 새로운 명물이자 이 땅의
처절한 현실을 말해주는 존재로 몸값과 이름을
크게 올리고 있다. 바위를 보면 조금은 표정이
우울해 보이는데, 통일이 되면 그의 표정도 씨
익~ 펴지지는 않을까?


▲  호경암 머리 부분에 난 당시의 상처들

바위 표면에는 당시 인간들이 낸 상처들이 진하게 서려있다. 피부도 괜찮고 그저 조용히 지내던
그가 무슨 죄가 있다고 총알 세례를 받아야 했는지.? 유명해진 것은 좋지만 그때의 상처는 영원
히 치유하지 못하고 간직하고 살아야 되는 호경암에게 인간의 하나로서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  바위에 깊숙히 박힌 탄흔

같은 민족이지만 나라와 이념이 다른 두 존재들이 서로를 죽이고자 총알을 사정없이 갈기던 그
날의 총성이 들리는 듯 하여 마음이 그리 편치가 못하다. 저 총알이 사정 없이 박힌 날, 바위도
울었을 것이다. 얼마나 울었으면 바위 표면이 울퉁불퉁했을까.. 다시는 이 땅의 그 어느 것이라
도 분단 비극의 현실에 희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  호경암 정상에 비스듬히 박힌 호경암 표석
표석이 박힌 호경암 정상은 안전을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허나 이곳에 올라
바라보는 천하는 앞에서 본 조망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의 천하 일품이다.

▲  호경암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도심과 남산 등이 보인다. ▼


  삼삼한 숲에 묻힌 북악산 김신조투르 둘러보기 (3)
하늘전망대 ~ 북까페 ~ 북악산길


▲  호경암에서 하늘전망대로 가는 길
호경암을 지나면 오르막길은 거의 나오질 않는다.
녹음에 잠긴 평평한 오솔길만이 조용히 사색을 도울 뿐~

▲  김신조루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하늘전망대

호경암을 지나 230m 가면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가 나온다. 그동안에 나온 '~~마루' 보다
덩치도 넓고 조망도 일품인데, 김신조루트를 포함한 북악하늘길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하늘전
망대란 이름은 북악하늘길에서 따온 것인데, 그만큼 하늘과도 가까운 곳이다 보니 이름이 딱 어
울린다.

앞에 마루에서는 도심과 남산 등의 남쪽과 중랑구 등의 동쪽이 주로 보였는데, 호경암을 경계로
능선 남쪽에서 북쪽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하늘전망대에 발을 디디면 그와는 반대인 북한산과 강
북구, 성북구, 도봉구, 평창동 등 서울 동북부와 종로구 북부 지역이 훤히 두 눈에 박힌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북한산 동쪽과 성북구, 강북구 일대는 물론 멀리 도봉구와 노원구,
불암산과 수락산 형제도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성북구와 동대문구는 물론 멀리 중랑구와 노원구 일대가 눈에 박힌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가까이에 북부간선도로가 보이고, 서울 동북부가 눈 아래 펼쳐진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형제봉

북한산의 남쪽 봉우리인 형제봉이 넌지시 우리를 굽어본다. 북악하늘길과 북한산은 산줄기가 서
로 이어져 있어 마음대로 오갈 수 있으며, 북한산과 북악산은 다 같은 한북정맥(漢北正脈)의 일
원이다. 북악산 북쪽 줄기를 북한산의 최남단 줄기로 보기도 하며, 그런 이유로 길상사과 정법
사가 삼각산(三角山, 북한산)에 있음을 칭하고 있는 것이다.


▲  솔내음이 그윽한 북까페

하늘전망대에서 북쪽으로 110m 가면 북까페라 불리는 공간이 나온다. 이곳은 소나무가 우거져있
고 한쪽에 책장이 있어 소나무 밑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자연을 벗삼아 책을 읽는 곳이다. 북
한산과 북악산의 산바람이 교차하는 곳이라 독서도 무지 잘될 것 같다.
그런데 북까페보다는 '독서마당'이나 '소나무책방','솔내음책방','사색의 공간'이라 했으면 훤
씬 더 좋지 않았을까? 굳이 서양 흰둥이들의 영어로 이름을 지어야 했을까? 웃기는 것은 다른
곳은 '~~마루(마루는 정상을 뜻하는 순 우리말)','하늘전망대' 등의 순 우리말로 이름을 달았으
면서 말이다.

북까페 책장은 달랑 하나인데, 책들로 가득하다. 허나 아직은 많이 부족하니 집에 버려둔 책이
있다면 썩은 내 풍기게 하지 말고 이곳에 기증하는 것도 괜찮다. 다만 이곳의 책은 가져가지 않
도록 한다. 대부분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책(주로 어린이와 청소년용)들이다. 그리고 책을
봤으면 책장에 정성을 담아 꽂아두기 바란다.

이곳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북까페를 등지고 직진하면 하늘교가 나오고, 북까페를 가로지
르면 북악하늘길 3산책로가 시작된다. 3산책로는 이곳에서 숲속다리까지 이어지는 겨우 1리 정
도의 짧은 산길이다.


▲  북까페 책장 - 어린이 도서관 같은 분위기다.

▲  김신조루트의 종점, 하늘마루

북까페에서 1분 정도 가면 하늘교란 콘크리트 다리가 나온다. 다리 밑에는 북악산길이 펼쳐져
있는데, 수레들이 1분이 멀다하고 지나간다. 하늘교는 난간은 성곽(城郭) 여장처럼 만든 것이
특징인데, 그 다리를 건너면 하늘마루가 나온다. 이곳이 김신조루트의 북쪽 종점이다.

이렇게 해서 2km의 김신조루트를 깔끔히 완주했다. 허나 그건 북악산 산길의 하나를 지나간 것
에 불과하다. 다음에는 제1산책로의 나머지 부분과 제3산책로, 북한산 형제봉으로 핏줄처럼 이
어진 산길에 죄다 발도장을 찍고 싶다.

하늘마루에는 6각형 정자와 쉼터, 운동기구 등이 흩어져 있으며,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하늘교에
서 위 아래로 떨어져있던 북악산길과 만난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서쪽으로 가면 북
악팔각정과 부암동, 창의문,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북악산길이 수레 전용도로긴 하지만 도로 옆
에 뚜벅이를 위한 길을 내어 창의문을 넘어 인왕산(仁王山), 사직공원까지 걸어갈 수 있다. 물
론 거리의 압박은 심하다. 그렇지만 북악팔각정을 지나서부터는 내리막길 수준이라 힘든 건 별
로 없으니 거닐만 하다.
반면 동쪽으로 가면 북악정과 성북구민회관, 아리랑고개, 정릉동 방면으로 통한다. 중간에 국민
대나 배밭골, 성북동 길상사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며, 하늘마루를 조금 지나면 북한산 형제봉으
로 가는 산길이 있어 북한산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 산길은 북악터널 위쪽을 지나는데, 형제봉
으로 가면 중간에 요즘 인기를 한참 닦고 있는 북한산둘레길과도 만난다.
둘레길은 동쪽으로 수유리와 우이동(牛耳洞), 서쪽으로 평창동과 불광동(佛光洞)과 구파발 쪽으
로 연결되어 있어, 마음만 먹으면 북악산에서 북한산 서쪽이나 동쪽을 잇는 장거리 등산도 가능
하다. 
북한산은 북악산과 북악터널에서 서로 이어져 있고, 북악산 북쪽 능선은 북한산의 남쪽 줄기로
도 볼 수 있다. 그래서 길상사와 정법사(正法寺)가 삼각산(三角山, 북한산의 다른 이름)에 있음
을 칭하는 것이다.

저번에 왔을 때는 창의문으로 내려갔으니 이번에는 반대인 아리랑고개 쪽으로 내려갔다. 내려가
는 길의 연속이라 힘든 건 없다. 북악산길을 옆구리에 끼며 가다가 북악정에서 성북동으로 꺾어
서 한국가구박물관을 거쳐 길상사로 내려왔다.


▲  북악산길
서울 도심 속의 산악도로이자 관광도로로 드라이브 코스로 명성이 자자하다.
특히 야간에는 회색빛 대도시 서울의 야경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다.


41년 만에 속세에 개방된 북악하늘길과 김신조루트, 비록 남북분단의 아픈 상처가 서린 서글픈
현장이지만 서울 도심 속의 상큼한 명소로, 자연이 잘 보존되고 경관이 아름다운 보석과 같은
곳이다. 누가 도심에 이런 호젓한 산길이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김신조루트는 마치 미지의 땅에 들어온 듯한 신선한 기분이었고, 서울 땅에서 안가본 곳이 거의
없는 나에게도 공개된지 1년 밖에 안된 서름한 곳이라 길을 거닐면서도 무엇이 나올까? 늘 마음
이 두근거렸다.
이렇게 하여 도심 속의 허파, 북악산 김신조루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명수학교 종점 하차.
  여기서 서쪽(삼청각 방면)으로 8분 정도 가면 삼청터널이 나오는데, 홍련사 옆길로 들어가면
  숙정문안내소이다. 안내소 못미쳐에서 우회전하면 북악하늘길 1산책로와 김신조루트이다.
*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6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구민회관 종점 하차. 여기서
  북악산길을 따라 오른다.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
  하차, 북악산길을 따라 오른다.

★ 북악산 북악하늘길 관람정보
*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 단 군부대 등의 출입금지 지역과 등산로 외에
  구간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
* 김신조루트는 약수터 1곳과 화장실 1곳(호경암 부근) 밖에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정릉동
* 문의 : 성북구청 (☎ 02-920-3796) / 숙정문안내소 (☎ 02-747-2152~3, 팩스 02-747-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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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2년 9월 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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