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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8.01.12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평지 읍성이자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의 현장, 서산 해미읍성 ~~~ (해미순교성지)
  3. 2016.06.14 현대 문학의 새로운 성지, 옥천 정지용시인 생가~정지용 문학관 (육영수생가, 옥천 구읍 명소들)
  4. 2014.06.18 서울 도심의 심장을 거닐다 ~ 덕수궁, 시청 서울광장 주변 둘러보기 (환구단, 대한문, 서울성공회성당...)

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 나들이 <서상돈고택, 계산동성당, 청라언덕, 선교사 스윗즈 주택...>

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 나들이



' 대구 도심 근대문화유산 나들이 '

대구 계산동성당
▲  대구 계산동성당

청라언덕 사과나무 선교사 스윗즈주택

▲  청라언덕 사과나무

▲  선교사 스윗즈주택

 



 

겨울 제국의 차디찬 한복판인 2월의 첫 무렵, 간만에 대구(大邱) 땅을 찾았다. 팔공산
남쪽 자락에 깃든 북지장사(北地藏寺, ☞ 관련글 보기)와 방짜유기박물관을 먼저 둘러
보고 대구 도심으로 나와 후식거리로 여러 근대문화유산을 더듬었다.

대구시는 중구 지역의 근대문화유산을 손질하고 코스를 여러 개 엮어서 '대구 근대(近
代)로의 여행'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것이 크게 주목을 받으면서 근대문
화유산의 1급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 풍문이 내 두 귀까지 들려오
면서 그곳의 위엄을 내 침침한 두 망막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예전부터 알고 있던 계산동성당으로 이동하다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로 유명한 이상화(李相和) 시인의 고택이 마중을 나와 그를 먼저 둘러보았고, 그 옆에
도 기와집이 하나 있어 살펴보니 구한말 민족 기업가인 서상돈의 고택이다. 본글은 서
상돈 고택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상화 고택은 북지장사글 참조)



 

♠  구한말 대구 지역 민족기업가이자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던
서상돈 고택(徐相燉 古宅)

▲  서쪽에서 바라본 서상돈고택

이상화 고택 동쪽에는 이상화만큼이나 대구에서 자랑스러워하는 인물, 서상돈의 재현된 고택
이 조용히 자리해 있다.

서상돈(1850~1913)은 구한말에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로 1850년 10월 17일 경북 김천
마잠(지좌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달성서씨 집안으로 집안이 유난히도 천주교와 인연이 깊어
천주교 박해로 고통을 겪거나 죽음을 당한 인물이 많았다. 그 역시 집안의 피는 못속여 일찍
부터 천주교를 신봉했다.
1859년 아버지 서광수(徐光修)가 병사하자 어머니는 서상돈 형제를 데리고 외가가 있는 대구
새방골 죽전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외할아버지인 김후상(金厚詳)의 교육과 보살핌을 받았
으며, 시내 상점에서 심부름꾼으로 일하며 어머니를 도왔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터지자 큰아버지 서인순과 삼촌인 서익순, 서태순이 처단을 당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서상돈은 나중에 큰 부자가 되면 꼭 천주교 전교와 자선사업을 하기
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1868년 대구 천주교 원로회장 서용서(김수환 추기경의 외할아버지) 등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
을 받아 보부상(褓負商)을 시작했다. 그는 사업 수완이 뛰어나 사업이 나날이 번창했고 1880
년대 중반에는 수많은 보부상을 거느리며 매년 3만 석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대구에서 제일
잘나가는 대상(大商)이 되었다. 하지만 너무 사업에 열중한 나머지 혼기를 놓쳐 1880년, 30세
의 늦깎이 나이로 수안김씨와 혼인을 올렸다.

1885년 경상도 지역 천주교 영업을 담당하던 로베르<Robert, 김보록(金保祿)> 신부가 신나무
골 교우촌(칠곡군 지천면 연화리)을 찾았다. 이에 서상돈은 사촌 여동생 서마리아와 그를 도
왔고 1891년 12월 대어벌에 임시성당을 세웠다. 그 성당은 1897년 계산동 초가로 자리를 옮겼
으며 1899년 로베르가 십자형 기와집 성당을 세우자 흔쾌히 많은 비용을 제공했다.

1894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대우로 탁지부(度支部) 세무시찰관<稅務視察官, 봉세관(封稅官)
>에 임명되어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의 세정을 관리하기도 했으며, 1896년 독립협회가 설립되
자 거기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교육사업에도 큰 관심을 보이며 돈을 아낌없이 내놓았다. 1899년 계산동성당 부속
건물에 한문 서당인 해성재(海星齋)를 지어 주었고, 그 학교는 1908년 봄, 성립학교로 간판을
바꾸었다. 그리고 1905년 이일우를 도와 달서여학교 설립을 도와주었고, 1910년에는 성립여학
교를 세웠으며 1906년에 출판사인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를 설립해 학교 교과서와 계몽잡지.
신문, 교양서적을 발간하는 등 대구 지역 근대교육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  서상돈 고택 모형도
여기서는 생가로 나와있으나 그가 태어난 곳은 경북 김천이므로 '생가'란 명칭은
맞지가 않다. 엄연히 '서상돈고택'을 칭하고 있으면서 여기서는 생가라고
쓰고 있으니 고택 관리자들의 초보적인 실수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1906년 비리비리한 조선(대한제국) 정부는 왜열도에 1,300만원의 거금을 빌렸는데 그 돈을 갚
지 못해 총체적 난국에 빠지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서상돈은 돈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
한다고 인식하고 1907년 1월 29일, 그 유명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다. 하여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국채를 갚자는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했고 군민대회를 개최해 나라의 빚을 갚자고 호
소했다.
그래서 4월 말까지 외국 동포를 포함해 4만여 명이 흔쾌히 참여해 230만원의 돈을 모았다. 허
나 모처럼의 대동단결도 친일매국노인 일진회와 왜 통감부(統監府)의 방해로 결실을 맺지 못
했다.

1911년 로마교황청이 주교 소재지를 전주와 대구를 놓고 고심을 하자 대구로 낙점될 수 있도
록 힘을 썼으며 임시 주교관(主敎館) 부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3년 6월 30일 새벽
2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3세의 조금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1999년 광복절에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리고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며, 대구
매일신문사를 중심으로 '서상돈상'을 제정했다. 그리고 2002년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고 2011년 10월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 개관되어 늦게나마 그의 자주자강 민족정신을
기린다.

▲  서상돈 고택 사랑채

▲  서상돈 고택 관리사무소

서상돈 고택은 개량한옥 스타일로 여러 동의 집을 지닌 고래등 기와집이었다. 서양식 수목을
심고 연못과 석탑을 두었으며, 서양식과 우리식이 절충된 정원을 지니고 있는 등 대구 제일의
부잣집으로 위엄을 날렸다. 허나 아쉽게도 왜정을 거치면서 집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사
라졌고, 서상돈 일가의 빛바랜 사진을 통해 고택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더듬어 볼 수 있을 따
름이다.

현재 고택은 2008년에 원래 자리 부근에 크게 축소하여 재현한 것으로 건물 3동과 문, 벽돌문
이 전부이다. 키다리 빌딩 뒤쪽에 조그맣게 자리해 있다 보니 초라한 기분도 적지 않게 드는
데 아무래도 마련된 자리가 좁고 고택에 대한 자료도 부족해 되는대로 이렇게나마 재현을 한
것이다. (복원보다는 재현이 맞을 듯)

   ◀  정면이 꽉 막힌 고택 대문과 벽돌문
문은 바로 앞에 신성미소시티아파트가 높이
들어앉아 있어 굳게 닫혀 있다. 하여 뻥 뚫린
고택 서쪽을 통해 내부로 들어서야 된다.

* 서상돈 고택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100 (달구벌대로 2051)



 

♠  대구 최초의 근대 건축 스타일의 천주교 성당
대구 계산동성당(桂山洞聖堂) - 사적 290호

이상화고택 북쪽에는 계산동성당(주교좌 계산대성당)이 이국적인 멋을 드러내며 자리해 있다.
주변에 기라성처럼 널린 키다리 건물들에게 절대로 꿇리지 않는 위엄을 보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계산동성당은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자 최초의 근대식 성당이며, 이 땅에서 3번째로
지어진 근대식 성당으로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을 취하고 있다.

앞서 서상돈 고택에서 언급한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1891년 대어벌 임시성당(인교동)을 지었
는데 1897년 현 성당 자리에 있던 초가를 매입하여 성당을 옮겼다. 1899년 그 초가를 부시고
서상돈의 후원으로 번듯하게 십자형 기와집 성당을 지었으나 1901년 2월 지진으로 화재가 나
서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로베르는 제대로 된 서양 스타일의 성당을 짓기로 마음을 먹고 서상돈의 도움을 다시 받
아 1902년 지금의 성당을 세우게 된다. 설계는 로베르가 했고 서울 명동성당(明洞聖堂) 공사
에 참여했던 청나라 애들을 잡아와 공사를 시켰다.
1911년 주교좌 성당이 되면서 종탑을 2배로 크게 높였고 계속해서 건물을 불려나가 1918년 12
월 24일, 현재의 우람한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성당 정면은 라틴십자형으로 2개의 종각(종탑)이 우뚝 솟아 있어 지역 사람들은 '뾰족집'이라
불렀다. 종탑부에는 8각의 높은 첨탑(尖塔) 2개를 대칭구조로 세웠는데 첨탑을 포함하여 성당
높이가 거의 10층 건물에 버금간다. 앞면과 양측에 장미창으로 장식을 했으며, 화강석 기단(
基壇) 위에 붉은 벽돌로 건물을 닦고 그 위를 검은 벽돌로 고딕적인 장식을 다졌다.


▲  장엄함이 묻어난 계산동성당 내부

성당 내부는 자유 관람 및 출사가 가능하다. (단 예배와 미사시간은 안되며, 성당의 여러 사
정으로 개방되지 않는 경우도 있음) 하여 성당 정문을 통해 내부로 들어서면 되는데 마치 유
럽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듯, 분위기가 정말 서양틱하다.
비록 천주교에 일말에 관심도 없지만 잠시 의자에 앉아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불끈 모아 기도
를 하고 싶은 마음이 피어 오른다. 허나 기도를 해봐야 천주교 주인이 리플이나 댓글도 달아
주지 않을 것이고, 난 어디까지나 답사를 가장한 나그네이니 이 정도로 내부를 살피고 밖으로
나왔다.


▲  1984년 5월 5일, 로마교황청의 주인 요한 바오로2세가 이곳을 다녀간
것을 기리고자 성당에서 달아놓은 동판과 석조 조형물

▲  계산동성당의 다양한 옆문들 ▲
(성당 내부는 정문으로 들어가기 바람)

▲  계산동성당의 뒷모습
성당이 동서로 길쭉한 모습이라 마치 커다란 4발 동물이 고개를 쳐들고
꼬랑지를 흔들며 앉아있는 모습 같다.

▲  계산동성당의 꼬리 부분

▲  성립여학교 2회 졸업식 사진(1913년)

성립여학교는 서상돈이 계산동성당에 지어준 여학교이다. 이 사진은 수녀들이 찍은 것으로 수
녀(2명)와 앳된 모습의 여학생(10명), 교회와 학교 관계자들(3명)이 나란히 촬영에 임하고 있
다. 남는 것은 정말 그림과 사진밖에 없다고 하더만 이미 저 세상으로 훌쩍 가버린 저들은 이
렇게 그들의 생전의 모습을 남겼다.

* 계산동성당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71-1 (서성로10, ☎ 053-254-2300)
* 계산동성당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대구사과의 고향이자 근대 건축물을 3개나 품은 대구 도심의
상큼한 언덕, 청라(靑蘿)언덕

▲  3.1운동계단 윗부분

계산동성당에서 서성로를 건너면 청라언덕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손을 내민다. 속세에서는 그
를 3.1운동계단(3.1만세운동 계단)이라 부르는데 1919년 대구 지역 3.1운동의 현장으로 지역
사람들은 왜정의 감시를 피해 이 계단으로 계산동성당과 도심으로 들어가 만세운동에 참여했
다. 9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계단의 끝에 청라언덕 정상이 있다.


▲  청라언덕과 동무생각 노래가 담겨진 표석

'동무생각'
봄의 교향곡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대구 도심의 상큼한 언덕인 청라언덕은 20세기 초반 동산의료원과 계명대를 꾸렸던 미국 선교
사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그들은 푸른 담쟁이를 많이 심어서 푸른 담쟁이덩굴을 뜻하는 청라
언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달성(達城, 달성공원) 동쪽에 있다고 해서 오랫동안 동산
(東山)이라 불렸다. 달성과 더불어 대구 도심의 야트막한 지붕으로 한때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대구사과의 고향이기도 하다.
현재 언덕에는 선교사들이 살았던 늙은 주택 3동과 3.1운동계단, 사과나무, 우리나라 최초의
가곡(歌曲)인 동무생각 노래비, 동산의료원 구관 현관, 동산의료원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무
덤인 은혜정원이 있다. 대구에서 꼭 가봐야 되는 근대문화유산 명소로 시간이 흐르다가 잠시
졸도하여 정지된 듯, 고풍스런 모습을 지니고 있어 촬영지로도 많이 등장한다.

청라언덕하면 박태준(朴泰俊, 1901~1986)의 '동무생각'이란 노래가 유명하다. 그는 대구 출신
작곡가로 청라언덕 부근에 있던 신명학교의 어느 여학생을 짝사랑했는데 결국 사랑은 이루어
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를 추억하고자 직접 작곡을 했고 이은상(李殷相)이 노랫말을 붙여주
었다. 가사에 나오는 백합과 동무는 그 여학생을 뜻하며 그녀에 대한 그리움의 고통이 너무나
컸던 나머지 이런 명곡이 태어났다.


▲  선교사 챔니스(Chamness) 주택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25호

청라언덕을 장식하고 있는 근대 주택 3동 중 챔니스 주택이 가운데에 자리해 있다. 마치 너른
정원의 별장처럼 이색적으로 생긴 그는 1910년경 미국 선교사들의 주거용으로 지어진 것으로
1907년 대구 도심을 품던 대구읍성이 철거되면서 거기서 가져온 안산암(安山巖) 등의 성돌로
기초를 닦고 붉은 벽돌로 미국식 2층주택을 지었다.

남북으로 약간 긴 사각형 형태로 서쪽 중앙에 있는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2층으로 오르는 계
단홀이 있고 그 홀을 중심으로 거실과 서재, 부엌, 식당을 배치했다. 2층에는 계단실을 중심
으로 좌,우측에 각각 침실을 두고 욕실, 벽장 등을 설치했으며, 지붕은 삼각형으로 2개의 굴
뚝이 있는데, 1층 동남쪽에는 넓은 베란다를 설치했다. 이런 양식의 건물은 그 시절 미대륙
캘리포니아주 남부에서 유행한 방갈로풍으로 당시의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집의 이름인 챔니스는 이곳에 살았던 미대륙 북장로교 선교사로 우리식 이름은 차미수(車米秀
)이다. 1925년 부인과 이 땅에 들어와 대구에서 16년을 살았으며, 1927년 딸 바바라를 얻었으
나 생후 3달 만에 잃고 만다. 1941년 왜정에게 추방당해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1993년까지 동
산의료원 의료원장을 지냈던 모페트(H.F Moffett)가 거주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의료선교박물
관으로 활용하여 개방하고 있으나 내가 갔을 때는 이미 17시가 넘은 때라 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계명대에서 세운 의료선교박물관은 조선 후기에서 20세기까지의 우리나라 의학 역사와 의학자
료, 대구 지역 기독교와 선교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전자는 챔니스 주택에, 후자는 스윗즈
주택에 두었다.
* 의료선교박물관 관람문의 : ☎ 053-250-8700

▲  챔니스 주택의 뒷모습
앞에 하얀 피부의 공간은 20세기 중반
이후에 덧붙여진 것이다.

▲  챔니스 주택의 앞모습


▲  챔니스 주택 산책로와 장식물로 놓인 돌확 등의 석물들

▲  선교사 블레어(Blair) 주택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26호

챔니스 주택 남쪽에는 비슷하게 생긴 2층짜리 블레어주택이 있다. 1910년에 지어진 미국 선교
사 주택으로 블레어란 선교사가 거주했다고 해서 블레어주택이라 불린다.
대구읍성 성돌로 기초를 닦은 챔니스와 스윗즈주택과 달리 콘크리트로 기초와 지하실 부분을
닦고 그 위에 미국식으로 붉은 벽돌 집을 다진 것으로 남북으로 약간 길쭉한 네모 형태를 이
루고 있으며, 1층 서쪽에 현관으로 이어지는 베란다가 있고 현관홀을 들어서면 맞은편에 2층
으로 오르는 계단실이 있다. 그 오른쪽이 집 중앙으로 거실과 응접실이 앞뒤로 있으며 그 좌
우로 침실과 부엌, 식당 등을 두었다.
2층에는 계단홀을 중심으로 3개의 침실과 욕실을 두었고 현관홀 위에는 빛을 받아들이는 선룸
(Sun room)을 설치했다. 지붕은 삼각형으로 2개의 굴뚝을 지니고 있으며, 집의 전체적인 모습
에서 그 시절 미국 양이(洋夷)들의 주택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챔니스와 스윗즈주택은 사진을 여럿 담았으나 블레어주택은 저거밖에 없었다. 다른 것을 우선
담고 나중에 담는다는 것을 깜박했던 모양이다.


▲  1899년을 강조하는 동산병원(동산의료원) 구관 현관(포치, Porch)

머리에 'Since 1899'라 쓰인 이 포치는 동산병원의 구관 중앙입구이다. 동산병원의 전신인 제
중원(濟衆院)은 1899년에 세워진 것으로 1931년 구관(舊館)이 세워졌으며, 2010년 대구지하철
3호선 공사로 인해 부득이 포치를 떼어와 이곳에 두면서 이렇게 허전한 모습을 하게 되었다.
(구관은 그대로 있음)

▲  구관 현관(포치)의 옆 모습

▲  1970년대 고압산소 치료기

구관 현관 안에는 현역에서 물러난 고압산소 치료기가 전시되어 있다. 그는 연탄가스에서 많
이 배출되는 일산화탄소 급성 중독환자 치료에 쓰였던 것으로 1970년대 초 미대륙 북장로교의
밴 클레브(Van Cleve) 선교사가 가져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대구 한성메디칼(구 한성공업사)의
고(故) 최운한 대표가 이 땅 최초로 제작했다.
1972년 동산의료원 응급실에 설치되어 2012년까지 활약했으며 그를 모델로 전국에 고압산소치
료기가 많이 보급되었다. 1970~1990년대에 연탄보일러의 대중적인 공급으로 겨울 제국의 핍박
에서 조금은 벗어났으나 대신 바람직하지 않은 대기물질인 일산화탄소 배출로 연탄가스 중독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 죽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내 주변에도 여럿 있었음) 바로 이 치료기
가 그들을 저승의 문턱에서 많이 꺼내주었다.


▲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청라언덕 대나무군락

겨울 제국(帝國)의 핍박으로 식물들이 모두 누렇게 뜨거나 가지만 앙상한 가운데 유일하게 푸
른 빛을 내는 고고한 존재가 있다. 바로 스윗즈주택 부근의 작게 우거진 대나무군락이다. 대
나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거의 기독교 일변도가 되버린 청라언덕에서 대나무숲을 보니 마치
서라벌 경주(慶州)에서 조선시대 유적을 만난 기분인데 동산의료원 초창기에 여기서 100여m
떨어진 곳에 대나무군락지가 있었다.
허나 그들은 싹 사라지고 뿌리만 땅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것을 의료원 개원 100주년이 되는
1999년에 지금의 자리에서 푸르게 돋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을 '기적의 나무'라 부르고
있는데, 동산의료원과 계명대는 구한말과 왜정 시절에 서양 선교사들이 이 땅의 사람들에게
준 은혜와 사랑이 대나무 뿌리처럼 깊고 단단하게 여기에 뿌리 내린 것이라며 말하고 있다.


▲  선교사 스윗즈(Switzer) 주택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24호

스윗즈 주택은 1906~1910년경에 지어진 2층 벽돌 양옥이다. 지어진 이유는 앞서 두 주택과 같
으며 대구읍성 철거로 나온 성돌을 가져와 터를 다지고 그 위에 지었다.
스윗즈(스위처) 여자 선교사(1880~1929, 한국명 성마리다)는 1911년 이 땅에 들어와 살았으며
이후 계성학교 4대 교장인 핸더슨 해롤드(한국명 현거선), 계명대 초대학장인 캠벨 등의 선교
사가 머물렀는데 전통 한식과 서양식이 조화를 이룬 모습으로 지붕은 한식 기와를 이은 박공
지붕이었으나 나중에 함석으로 개조되었고 다시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계단을 여러 단 설치하여 바닥을 높인 현관(포치)을 들어서면 남면 중앙에 거실, 동쪽에 응접
실과 이어지며, 남쪽 벽을 일부 밀어 창을 설치한 거실은 응접실과 서쪽의 침실, 북쪽의 계단
실과 통하게 되어있다. 계단실의 좁은 마루에서 식당과 화장실로 연결되며 뒤쪽 주방은 작은
홀을 지나 외부로 출입할 수 있다. 그리고 2층에는 계단실 남쪽에 침실 2개를 두고 서쪽에 욕
실을 두었으며, 지붕에는 2개의 굴뚝이 멀뚱히 자리해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시절을 그리워
한다.

1981년 동산의료재단이 인수해 챔니스 주택과 함께 의료선교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주
로 기독교와 선교 관련 유물과 역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곳 역시 관람시간에 닿지 못해
내부를 구경하지 못했다.

▲  정면에서 바라본 선교사 스윗즈 주택

▲  선교사 스윗즈 주택의 옆 모습


▲  개원 100주년 기념 종탑
전국 담장 허물기의 첫 행사로 동산의료원의 정문 및 중문의 기둥과 담장 일부를
이곳으로 옮기고 동산의료원이 초창기에 세운 교회 종을 가져와
개원 100주년(1999년) 기념 종탑으로 삼았다.

▲  대구사과의 고향, 청라언덕 사과나무 - 대구 보호수 01-01호

청라언덕은 대구사과의 고향이다. 1899년 동산의료원 개원 기념으로 초대병원장인 존슨 박사<
Woodbridge O. Johnson, (우리식 이름, 장인차)>는 미대륙 미조리주에서 사과나무를 주문하여
이곳에 심으니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서양식 사과나무이다. 그 나무에서 나온 사과씨앗이 대구
일대로 널리 보급되면서 대구는 사과의 도시가 되었다. (지금은 많이 퇴색됨)
그때 심어진 나무는 벌써 세월이 잡아갔고 그의 아들 나무가 뿌리를 내려 자리를 지키고 있으
며, 높이 7m, 둘레 0.9m로 나이는 약 90년이다. (2000년에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70년) 벌써부터 몸이 부실한지 지탱할 수 있는 시설을 여럿 설치했는데, 사과나무는 대체
로 수명이 짧아서 그런듯 싶다.


▲  여호와 이레의 동산 표석
청라언덕은 대구 기독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하여 기독교 측에서는
이곳을 여호와 이레의 동산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고 있다.

▲  동산의료원 외국인묘지 (은혜정원)

청라언덕 서쪽에는 난데없이 조그만 서양식 공동묘지가 들어앉아 있다. 엄연한 대구 도심 한
복판이고 청라언덕의 일원인 알짜배기 땅에 왜 무덤들이 있나 살펴보니 동산의료원과 계명대
에서 의료, 교육, 기독교 선교를 벌인 20세기 초/중기 미국/유럽 선교사와 그 가족들 16명의
무덤이다.
이곳에 묻힌 사람 중에 생후 1년 남짓 만에 죽은 아기가 5명이나 되는데, 그중 4명은 반년도
못 채웠다. 어쨌든 그들 선교사들에게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무려 은혜정원이라 치켜세우고
있는데 그들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쿨하게 생략한다. (내용이 너무 많음)

청라언덕은 서양식 근대주택과 대구사과 시조의 자손나무, 대나무숲, 3.1운동계단, 거기에 서
양식 공동묘지까지 갖춘 참으로 이색적인 명소이다. 계산동성당만 생각하고 왔는데 서상돈 가
옥에 청라언덕 일대까지 싹 둘러보니 그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지려고 한다.

외국인묘지를 둘러보니 어느덧 18시, 햇님은 그만의 공간으로 쏙 들어가며 커텐을 치고 세상
은 달님의 검은 세상이 되었다. 다시 밤을 만난 겨울은 다시 기세가 드세져 코와 귀 끝이 다
시 얼얼해진다. 그날 목적한 것을 훨씬 초과하여 이룬 상태라 즐거운 기분으로 서울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담아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대구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청라언덕 소재지 :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424 (달구벌대로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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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평지 읍성이자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의 현장, 서산 해미읍성 ~~~ (해미순교성지)


' 서산 해미읍성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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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미읍성 호야나무(회화나무)

▲  해미읍성

▲  해미순교성지


 

차디찬 겨울 제국(帝國)의 한복판에 우리나라 읍성의 성지로 추앙받는 서산 해미읍성을
찾았다.
해미읍성은 이미 여러 번이나 인연을 지은 곳이나 눈을 감고 답사를 했는지 미답(未踏)
의 공간이 적지 않다. 하여 그 공간을 싹 지우고자 날씨가 조금 풀린 틈을 이용해 다시
인연을 지었다.


▲  해미읍성 서쪽 망루


 

♠  조선 초기에 축성된 읍성, 천주교 박해의 아픔이 서린
해미읍성(海美邑城) - 적 116호

▲  해미읍성 서남쪽 망루(望樓)

서산시내에서 동남쪽으로 20여 리 떨어진 곳에 이름도 이쁜 '해미'란 고을이 있다. <'해뫼'라
고도 불렸음~> 해미(현재 해미면)는 서산시(瑞山市)의 일원으로 서산 제일의 명소인 해미읍성
을 품고 있다.
천하가 해미읍성을 격하게 주목하는 이유는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樂安邑城)과 더불어 이 땅
에서 매우 희귀한 평지 읍성(邑城)이며 또한 제대로 남은 몇 안되는 읍성이기 때문이다.

서산의 필수 답사지로 꼽히는 해미읍성은 조선 태종(太宗) 때 축성되었다. 1416년 2월, 태종
은 3째 아들인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과 7,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산 도비산(島飛山)
에서 사냥을 했는데 사냥을 마치고 서산과 태안 일대를 둘러본 다음 해미에 잠시 머물렀다.
이때 왜구(倭寇)의 침범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덕산(德山, 예산군 덕산면)에 있던 충청병
마절도사영<忠淸兵馬節度使營, 크게 줄여서 병영(兵營)이라고 함>을 서해바다와 가까운 이곳
으로 옮기기로 마음 먹고 1417년 해미읍성 축성을 지시했다. 그래서 충청도를 비롯하여 멀리
제주도까지 정남(丁男, 16~60세의 남자)을 징발했고 콩볶듯이 공사를 벌여 1421년 완성을 보
았다.

성이 완성되자 병영을 해미로 옮겼으며 종2품인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주둔하여 충청도의
군사력을 통솔했다. 해미는 지금은 비록 서산에 속한 고을에 불과하나 1421년부터 1651년까지
230년 동안 역모 이상의 죄인을 처벌하고 사회질서의 기능까지 담당했던 충청도 제일의 군사
도시였다.
1491년 성을 보수했으며, 성 주변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많이 심어 탱자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1579년에는 남해바다의 영원한 해신(海神)인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훈련원(訓練院)의
군관(軍官)으로 파견되어 10개월 동안 근무하였다.

1651년 병영이 청주 상당산성(上黨山城)으로 이전되면서 해미현 관아가 그 자리에 들어왔으며
문무(文武)를 겸비한 겸영장(兼營將)을 파견해 충청도 서쪽 13고을을 담당하는 호서좌영(湖西
左營, 충청좌영)으로 삼아 여전히 군사 행정을 담당했다. 정조 시절에는 다산 정약용(茶山 丁
若鏞)이 잠시 유배살이를 하기도 했다.

▲  해미읍성 동쪽 성곽

▲  청허정

해미읍성이 본격적으로 미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정조 이후이다. 전국적으로 천주교도가 폭
발적으로 늘어나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선 정부는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는데, 이때 해
미는 관할구역인 13개 고을에서 잡아들인 천주교도를 처리했다. 여기서 처형된 교도는 확인된
수만 1,000명을 훌쩍 넘었으며, 그중에는 이 땅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의 조부 김진후
(金震厚)도 있었다.

관리와 군인들은 그들에게 천주교 포기를 권했으나 교인 대부분은 거절했다. 그래서 옥사 앞
회화나무(호야나무)에 철사줄로 대롱대롱 매달거나 곤장과 온갖 형벌로 고문을 가했으며, 끝
내는 서문 밖 돌다리로 끌고가 자리개질(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것)로 쳐죽이
거나 화살을 쏴서 죽였다.
허나 잡혀 들어오는 교도가 계속 늘면서 감옥은 미어터질 지경에 이르렀으며, 처리 능력은 그
한계를 넘어서고 말았다. 아무리 죽이고 고문을 해도 별무신통. 하여 여럿을 눕혀 놓고 돌기
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처리하거나 물에 던져 죽였고, 그것도 힘에 부치자 해미천(海美川)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 많은 사람을 한줄로 대롱대롱 엮어 생매장까지 자행하게 된다.

▲  해미읍성 북쪽 성곽

▲  해미읍성 호야나무

1914년 왜정(倭政)은 해미현을 서산군의 일부로 통합시키면서 충청좌도를 담당했던 해미읍성
의 위엄은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왜정에 의해 관아는 모두 파괴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해미면사무소와 학교, 민가가 들어섰다. 다행히 읍성은 목숨을 보전했으나 이미 알맹이를 잃
어버린 상태라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읍성이었다.

1973년 발굴 및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 성내를 가득 메운 관공서와 학교, 민가를 성밖으로 내
보냈으며, 그 자리에는 사적공원을 조성했다. 공원이라고 하지만 성 안에는 호야나무와 언덕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황량한 벌판이었다. 그러다가 1995년 이후, 발굴조사를 벌이
면서 옛 관아의 흔적들이 쏙쏙 빛을 보게 되었고 차근차근 복원공사를 벌여나가 동헌과 내아,
옥사(獄舍), 객사, 민속가옥이 지어졌다. 허나 여전히 풀만 돋아있는 공백이 넓어 다소 허전
하게 다가온다.

읍성의 둘레는 1.8km, 내부 면적은 약 20만㎡로 남문과 동문, 서문 등 성문 3개와 암문(暗門)
1개를 지니고 있다. 읍성 구조는 중앙에 동헌이 있고, 주변에 내아와 객사, 옥사 등이 포진해
있으며, 동헌 동쪽에는 언덕이 있다. 언덕에는 청허정과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으며, 동쪽 성
곽 밖에는 해자가 복원되어 있다. 성내 서/남쪽은 평지이고 동쪽은 언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읍성이라고는 하지만 백성들은 성 밖에서 생활했고, 성 안은 동헌과 병영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행정타운이었다.

천하에 온갖 축제가 우후죽순 생겨나던 2004년 이후 서산시청은 이 땅 유일의 병영테마 체험
축제인 '해미읍성 병영체험축제'을 내놓았다. 그 축제는 이후 '서산 해미읍성축제'로 이름을
갈았는데 태종대왕 강무행렬, 병영훈련체험, 병영음식체험, 전통공예체험, 전통공연과 연극
등이 열리며, 2008년에는 충남 지정 관광 유망축제로, 2017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우리
나라 유망축제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때는 충청도의 군사력을 통솔하던 품격 높은 군사도시이자 충청좌도를 담당하던 고을로, 천
주교 박해의 현장으로 두루두루 살아온 살아온 해미읍성, 비록 읍성을 제외하고 모두 근래 복
원되었지만 낙안읍성, 고창읍성(高敞邑城)과 더불어 이 땅에 대표적인 읍성 관광지로 다시금
명성을 누리고 있다.

▲  민속가옥 초가

▲  남문에서 동헌까지 곧게 이어진 길

※ 해미읍성 찾아가기 (2017년 12월 기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해미행 직행버스가 1일 9회 떠난다.
* 서울 남부터미널, 강남센트럴시티에서 서산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산시외터미널에서 해미행 시내버스가 10~20분 간격으로 있으며, 직행버스도 자주 있다.
* 예산읍(예산터미널, 예산역)에서 해미행 군내버스가 1일 5회 운행
* 해미정류장(터미널)에서 도보 5분
* 승용차
① 서해안고속도로 → 해미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해미읍성

★ 해미읍성 관람정보 (2017년 12월 기준)
* 주차장은 읍성 남쪽에 있으며, 입장료와 주차비는 무료
* 관람시간 : 하절기(3~10월) 5시 ~ 21시 / 동절기(11~2월) 6시 ~ 19시
*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40-1 (남문2로 143 ☎ 041-660-2540)
* 매년 10월에 서산 해미읍성축제가 열린다. (서산 해미읍성축제 추진위원회 ☎ 041-669-5050
  , 해미읍성 축제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


▲  온갖 연이 펄럭이는 해미읍성 서남쪽 성곽


 

♠  해미읍성 둘러보기 (1) - 진남문, 호야나무, 민속가옥

▲  해미읍성의 정문이자 남문인 진남문(鎭南門)

해미읍성의 속살로 들어서려면 진남문(남문)을 지나야 된다. 읍성 성문이 3개나 있지만 속세
에 속시원히 개방된 문은 오직 진남문 뿐이다.
진남문은 읍성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문루(門樓)를 지녔는데 비록 읍성
의 기능은 옛날에 상실되었지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왕년의 위엄을 잃지 않으며 읍성을 찾은
나그네를 굽어본다.

천주교 박해가 극성이던 19세기, 충청좌도 지역에서 잡힌 천주교도들은 이 문을 거쳐 해미관
아로 압송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이 문은 죽음으로 인도하는 저승사자의 입 같은 문이었지만
천주교도 상당수는 천당으로 가는 관문으로 삼으며 성문을 들어섰다고 한다.


▲  해미읍성의 나이와 조선의 우울한 꼬라지를 알려주는
진남문 안쪽의 붉은 글씨 9자


진남문을 들어서면 아직까지는 공백이 많은 읍성 내부가 거침없이 펼쳐진다. 허나 읍성의 중
심인 동헌까지는 조금의 비뚤어짐도 없이 일직선으로 길이 뻗어 있어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
는데 문을 들어설 때 무작정 정면 돌진하지 말고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목운
동도 할 겸 고개를 180도 돌려 문루로 살짝 시선을 올리면 붉은색으로 쓰인 한자 9자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글씨가 크고 또렷해 장님이 아닌 이상은 보는 데 별 지장이 없으며, 한자도
쉬운 수준이다.

그렇다면 저 붉은 글씨는 무엇일까? 그들은 '황명홍치4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로 여기
서 황명은 조선 정부와 지배층이 꼴사납게 지극 정성으로 받들던 명나라를 높인 말이다. 홍치
는 명나라 군주인 효종(孝宗)의 연호로 홍치 4년은 1491년이며, 신해조는 신해년(辛亥年)에
만들었다는 뜻으로 1491년(성종 22년)에 읍성을 중수했음을 진하게 보여준다.
500년이 넘은 글씨이건만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건재함을 과시하나 천하 제일의 호구 국가
로 비루한 목숨을 500년 씩이나 이어온, 심지어 왜열도에게도 역전 당한 조선의 한심함이 돋
보이는 글씨라 하겠다.


▲  진남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雲紋)과 봉황무늬
색채가 고운 오색영롱한 구름이 소용돌이를 치며 흘러가는 가운데
봉황이 날개짓을 하고 있다.

▲  진남문을 지나면 동헌까지 큰길이 곧게 펼쳐져 있다.

▲  해미읍성의 새로운 조형물, 프란치스코 해미읍성 방문 기념 조형물

해미읍성은 거의 5년 만에 와본다. 10년이면 정말 강산도 변한다고 이곳도 나처럼 크게 변하
여 낯선 존재들이 여럿 생겨나면서 예전 해미읍성에 익숙해진 나의 눈을 귀찮게 학습을 시킨
다. 그 낯선 것들 중에는 귀엽게 그려진 프란치스코 방문 기념 조형물이 있었다.
이 조형물은 2014년 8월 17일 카톨릭교의 대장이자 로마교황청의 주인인 프란치스코가 이곳을
방문해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를 연 것을 기념하고자 세운 것이다. 흰머리의 프란치
스코 할배가 오른손으로 아이를 안고 왼손으로 다른 아이를 잡고 있는 모습이 참 정겹게 다가
오는데, 그 옆에는 선녀를 닮은 어린 천사가 손짓을 한다. 그들 옆에는 녹색 피부를 지닌 'A'
와 'Ω' 마크가 있는데 이들은 '시작이요 마침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함'을 의미하는 마
크라고 한다.


▲  남문 안쪽에 조성된 여러 초가들 (제일 왼쪽 집이 전통주막)

남문 바로 안쪽은 예전에 공터였다. 허나 그새 여러 초가들이 뿌리를 내려 조촐하게 초가촌을
이루고 있는데 이들은 전통주막과 전통체험장으로 쓰인다.
전통주막은 소머리국밥과 부침개, 두부, 도토리묵, 막걸리, 동동주 등의 식사거리를 판매하며
간식거리로 호떡도 팔고 있다. 가격은 시중과 거의 비슷한 편, 음식은 따뜻한 방에서 먹어도
되고 바깥 평상에 앉아서 먹어도 된다.


▲  동헌으로 가는 길목에 재현된 옛 무기들
한때 천하를 풍미했던 천자총통(天字銃筒)을 비롯한 온갖 화포와 화차(火車),
검차(檢車), 운제 사다리 등이 재현되어 있다. (모두 모조품)

▲  수십 개의 화살을 동시에 날리던 화차
(왼쪽), 로켓포로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크게 쓰인 천자총통(天字銃筒)

▲  기병을 때려잡는데 효과적인 검차(檢車)
고려 때 많이 쓰인 무기로 귀신 문양이
새겨져 있다.


▲  호야나무라 불리는 해미읍성 회화나무 - 충남 지방기념물 172호

남문과 동헌 사이에는 해미읍성의 상징이자 천주교 박해 기념물인 회화나무가 초췌한 몰골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겨울 제국에게 가진 것을 몽땅 털린 그는 앙상한 가지를 높이 쳐들며 애
타게 봄의 해방군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 나무의 사연을 안다면 그 모습이 정말 오싹하게 다
가올 것이다.

호야나무라 불리기도 하는 그의 나이는 약 300년 이상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해미현감이 기념
으로 심은 것으로 보이는데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난 그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
는 정자나무의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이다.
이렇게 지역 사람들에게 착한 인상이었던 그는 19세기에 들어서 공포의 나무로 둔갑하여 수많
은 천주교도를 죽음으로 내모는 악역을 강제로 맡게 된다. 이곳으로 끌려온 천주교 신자들을
호야나무 동쪽 가지에 철사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했으며, 나무에 매달아 화살을 쏴 죽이
거나 목을 매어 죽이는 등, 그들의 비명소리가 수십 년 동안 그치질 않았다. 그 시절 철사줄
이 박힌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어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아련하게 전해준다. 한낮이라 그리
실감은 나지 않지만 한밤중이었다면 나무에서 죽어간 원귀(寃鬼)들의 울음소리가 들릴 듯, 소
름이 끼쳐 염통이 쫄깃해질지도 모른다.

1940년대에 동쪽 가지가 부러지고, 1969년 가운데 줄기가 폭풍으로 부러져 외과수술을 받았으
나 재차 부패하면서 2004년 4월 외과수술과 토양개량을 통해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살아있
는 천주교 박해 현장으로 천주교에서는 그를 순교 기념물로 삼아 애지중지 하고 있으며, 1950
년대 지어졌다가 철거된 해미공소 강당터에 세운 순교기념비와 근래 만든 순교 조형물을 달아
놓았다. 그러고보면 나무의 팔자가 참 변덕스럽기도 하다.

▲  호야나무 옆에 있는 순교기념비

▲  순교기념비

천주교도들은 어째서 자신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리며 순교라 불리는 죽음을 택했을까? 그들
의 목숨이 한참 지던 19세기는 안동김씨 세력이 권력을 휘어잡고 신나게 나라를 말아먹던 시
절이다. 권력층과 지방관리들은 서로 백성들을 들들 볶았으며, 그들의 고혈을 짜내느라 정신
이 없었다
그에 반해 대다수의 백성들은 계속되는 흉년과 엄청난 조세, 공납(貢納), 역(役)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버겨운 삶을 보내고 있었다.

이처럼 민심이 흉흉하거나 나라가 그야말로 개판일 때는 종교나 신앙이 크게 유행하기 마련으로 17세기 중반 청나라에서 건너온 천주교가 백성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이를 신봉하는 사람들
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처음에는 새로운 종교와 학문에 대한 호기심으로 천주교가 관심을 받았으나 평등을 강조한 천
주교 교리에 빠져든 양반과 백성들이 늘어나면서 점차 유학에 위배되는 행동이 나타났다. 이
에 위기를 느낀 조선 정부는 그들을 국사범(國事犯)으로 간주하며 천주교 때려잡기에 나서게
된다.

해미읍성을 비롯한 천주교도 처리 장소로 끌려간 천주교도들은 이미 권력층에게 뜯길데로 뜯
기고 시달릴데로 시달린 사람들이라 고통스런 삶을 천주교에 의지하고 있었다. 관리들은 그들
을 고문하면서 은근슬쩍 천주교 포기를 권했으나 대부분 배교(背敎)를 거절하고 죽음을 선택
했다. 그들로서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이 고통스런 세상을 떠나 천주교의 내세(來世)라는 천
당에 가서 이승에서 못다한 행복을 누리고자 소망했던 것이다.


▲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옥사(獄舍, 감옥)

이곳은 죄인들을 가두던 감옥으로 남녀 구별하여 2동으로 재현되어 있다. 충청도 서부 지역(
내포) 곳곳에서 잡아들인 천주교 신자들로 넘쳐났던 현장으로 왜정 때 철거되어 사라진 것을
1935년에 간행된 '해미순교자 약사(略史)'의 기록을 토대로 2004년 이후에 복원하였다.
1950년대에 해미 공소(公所) 신자들이 돈을 모아 감옥터 일대 1,800여 평을 구입하여 강당을
세웠는데 1982년 정부에서 해미읍성 관리를 위해 그 터를 사들여 공소 강당을 철거했으며, 대
신 순교기념비를 지어주어 이곳이 공소 자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  서쪽을 바라보는 여자 옥사

 ▲  옥사 안에 재현된 죄수 디오라마

     ◀  옥사 죄수들이 볼일을 보던 뒷간
감방 안에 볼일을 보는 공간이 있는 줄 알았더
만 알고보니 밖에 별도의 뒷간을 두었다. 죄수
들은 옥사를 관리하는 군사에게 부탁하여 저기
서 볼일을 보았던 것이다.

    ◀  옥사와 죄인을 관리하는 포졸(捕卒)
천주교 박해 시절 저들은 제대로 쉬는 날도 없
었을 것이다. 급여는 정말 쥐꼬리보다 더 못했
는데 처리해야될 업무는 나날이 늘고 있으니
말이다.


▲  옥사 남쪽의 복원된 우물
겉모습은 그럴싸하지만 현실은 껍데기만 남은 죽은 우물이다.

▲  읍성 남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민속가옥(초가) 3채

▲  민속가옥 ① 서산 지역 부농(富農)의 집
방 1칸, 부엌 1칸을 기본으로 필요에 따라 칸을 덧붙인 형태로 대청은 없으며
농기구와 농산물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와 부속채를 거느리고 있다.

▲  김이 모락모락 풍길 것 같은 가마솥을
2개나 지닌 부농의 집 부뚜막

▲  부농의 집 뒷쪽에 자리한 토끼와 닭의
보금자리 (토끼와 닭이 살고 있음)

▲  닭장 안을 서성이는 닭
벼슬(관직)이 닭벼슬보다 못하다는
어느 사극의 명언이 생각난다.

▲  뒷간에서 볼일 보는 아이
한참 볼일에 열중하다가 사람들이 쳐다보니
앗 뜨거워라 놀라는 모습이 귀엽다.


▲  민속가옥 ② 텃밭도 갖춘 상인의 집
조선 후기 민가의 보편적인 형태로 부엌 1칸, 방 2칸으로 이루어진 초가 3간이다.
장사가 주업이지만 약간의 텃밭과 농기구도 갖추고 있다.

▲  상인 집 텃밭

▲  전통 윷놀이 체험장
조그만 윷과 엄청 큰 윷이 준비되어 있다.


▲  민속가옥 ③ 말단관리인 서리(書吏)의 집
방 2칸, 부엌 1칸으로 이루어진 서산 지역 초가이다.

▲  독서삼매에 빠진 서리 아저씨

▲  집 뒤쪽 장독대


▲  초가 사이에 닦여진 돌담길


 

♠  해미읍성 둘러보기 (2) - 동헌, 청허정 주변

▲  굳게 닫힌 읍성 동문

▲  해미 관아 (정면에 2층 문루가 동헌 내삼문)

진남문에서 정면으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가면 그 길의 끝에 담장을 두른 해미읍성 관아가 있
다.
이들은 모두 최근에 복원된 따끈따끈한 것들로 호서좌영(湖西左營)이라 쓰인 2층 문루 내삼문
(內三門)을 지나면 관아 중심인데 그 앞에 커다란 은행나무가 주변에 그늘을 드리운다. 이 나
무는 원래 성 안에 있다가 성 밖으로 반출된 것으로 1977년 3월 이곳을 방문한 최규하(崔圭夏
) 국무총리(國務總理)가 그 나무를 매입하여 이곳에 심게 했으며, 나무 앞에는 그때의 사연이
적힌 표석이 멀뚱히 세워져 있다.

▲  해미 관아 내삼문

▲  동헌 부속건물과 닫혀진 우물


▲  해미읍성 동헌(東軒)

동헌은 지금의 시청, 군청 등의 행정기관과 경찰서, 군부대 기능까지 포함된 관청이다. 해미현
감은 이곳에서 행정, 치안, 군사, 사법 등의 일을 처리하였다.
동헌 서쪽에는 해미현감의 생활공간인 내아(內衙)가 있는데, 내아는 다른 말로 서헌(西軒)이라
고도 한다.


▲  해미동헌에 모여 회의중인 충청좌도 고을 수령들
해미는 충청좌도의 군사 중심지로 좌도에 속한 13고을의 수령(首領)들이
모여 군사, 행정 관련 회의를 하였다.

▲  적막이 감도는 객사(客舍)

동헌 정문 우측에 자리한 객사는 조정이나 출장나온 관원의 숙소이다. 건물 가운데 정청(政廳
)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봉안하여 1달에 2번(초하루, 보름) 제왕에 대한 예를 올
렸는데 그 의식을 어려운 말로 향궐망배(向闕望拜)라고 한다. 이때 현감은 금관조복(金冠朝服
)을 갖추고 의식에 임했다.
현재 해미객사는 발굴조사와 고증을 통해 1999년 7월에 복원된 것이다.


▲  청허정 언덕에서 바라본 읍성 관아 (동헌, 내아, 객사)

▲  읍성 동부에 봉긋 솟은 청허정 언덕
동헌 뒤쪽이자 읍성 동부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계단을 통해 언덕을 오르면
언덕 정상부에 단아한 모습을 지닌 청허정이 마중을 나온다.

▲  해미읍성 언덕 정상에 자리를 편 청허정(淸虛亭)

해미읍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언덕 꼭대기에 청허정이 자리해 있다. 청허(淸虛)란 '잡된
생각이 없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1491에년 충청도 병마절도사 조숙기(曹淑沂)가
세웠다.

해미현감과 병마절도사의 휴식 및 연회 장소, 문인들의 팔자좋은 시회(詩會) 장소로 널리 쓰
였으며, 이곳에 올라서면 읍성 내부가 훤히 바라보여 수시로 여기에 올라 읍성을 점검했을 것
이다.
청허정과 관련된 시로는 성현(成俔, 1439~1504)이 지은 '청허정기'와 조위(曺偉, 1454~1503)
가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손(李蓀. 1439~1520)에게 올린 '청허정'이란 시가 있으며, 이경전(李
慶全, 1567~1644)의 시와 '청허정연회도'란 그림이 전한다.
허나 1872년 해미 지도에는 청허정이 고지(古地)로 나와있어 그 이전에 이미 녹아 없어진 것
으로 보이며, 왜정 때는 이곳에 외람되게 신사(神社)가 들어앉아 미관을 적지 않게 말아먹기
도 했다.
오랫동안 터만 아련히 남아오던 것을 2011년 복원했으며, 정자 주변에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
고 있다.


▲  해미읍성 장승동산

청허정 주변에는 붉은 피부의 장승과 나무색 피부의 장승 20여 기가 옹기종기 모여 장승동산
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예전에는 없던 존재들이라 그저 낯설기만 한데, 그들이 지어진 이유
는 이렇다.
2010년 9월, 태풍 곤파스가 천하를 징하게 어지럽혔을 때, 청허정 언덕의 100~200년 묵은 소
나무들이 적지 않게 쓰러졌다. 이들 중 가망이 없는 나무를 수습해서 만든 것이 바로 장승이
다. 그냥 장승만 지어올리면 재미가 없으니 이 땅의 역대 대통령 10명을 모델로 하여 붉은 피
부의 장승 10기를 앞줄에 세웠는데 그들 얼굴의 특정적인 부분을 강조해서 얼굴을 새기고 그
들의 국정지표를 몸통에 새겼다. 그리고 그 뒷쪽에 토속/해학적으로 지어진 장승을 병풍처럼
포진시켰다.


▲  왼쪽은 이승만 장승, 가운데는 윤보선 장승, 오른쪽은 박정희 장승

▲  솔내음이 가득한 청허정 뒷쪽 소나무숲

예전에 왔을 때는 소나무숲이 상당히 짙었는데, 머리의 탈모 현장 마냥 빈 틈이 많아 보인다.
이는 태풍 곤파스가 요란하게 다녀간 탓이다. 그나마 숲을 복원한 것이 이 정도이다. 부정비
리에 얼룩진 상류/권력층, 나라를 좀먹으며 높은 자리에 들어앉은 친일파 후손들, 나에게 전
혀 도움이 안되는 밥버러지들이나 좀 날려버리지 왜 엉뚱하게 애궂은 나무와 서민들만 건드
린단 말인가? 그러고보면 하늘님(환인) 등의 신이나 정의가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의문스
럽다.


▲  고개를 푹 숙인 소나무
하늘이 무서웠던 것일까? 하늘로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옆으로 자라나 짧게 그만의 그늘을 드리운다.

▲  해미읍성 동쪽 성곽
해미읍성은 안쪽은 흙으로, 바깥은 돌로 쌓은 내탁(內托) 공법으로 축성되었다.
그래서 안과 밖이 모두 돌로 이루어진 낙안읍성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  해미읍성 동북쪽 성곽과 해자(垓子)
읍성 동쪽에는 방어력을 높이고자 해자를 팠다. (해자는 근래에 복원됨)

▲  읍성 동북쪽에 소리 없이 자리한 암문
(暗門) - 암문은 비상용 문으로 보통
접근이 어려운 곳에 둔다.

▲  굳게 입을 봉한 암문


▲  운치가 깃든 소나무숲 산책로 (성 안쪽)

▲  읍성과 성 밖 해자

읍성을 지키던 여장은 오래전에 없어진 상태라 성곽길을 거닐 때 각별히 주의하기 바란다. 성
의 높이가 3~4m라 떨어지면 크게 다칠 수 있다. 여장이 없는 성곽길은 시멘트가 발라져 있어
다소 어색함을 주며, 성곽과 바깥에 탐방로가 나있어 남문을 기준으로 삼아 안으로 1바퀴, 밖
으로 1바퀴 돌면 적당하다.


▲  읍성에서 바라본 해미 동쪽 (해미향교 방면)
오늘도 해미 고을은 평화롭다.

▲  읍성 북쪽 성곽 - 성곽길을 따라 옛 깃발이 펄럭인다.

▲  해미읍성 서문인 지성루(枝城樓)

서문(지성루)의 성문 홍예와 문루는 근래 복원된 것이고, 홍예문 좌우 성돌은 옛날 것 그대로
이다. 하여 고색이 깃든 성돌과 하얀 피부의 새 성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서문 밖은 천주교 신자를 자리개질로 처리하던 현장으로 순교 현양비와 자리개질을 치던 넓적
한 돌다리(자리개돌)가 놓여져 당시의 우울했던 상황을 아련히 귀뜀한다. 자리개돌은 1956년
서산 성당으로 이전하여 보존하다가 1986년 제자리로 돌아왔는데, 1989년 순교현양비를 세웠
으며, 도로 개설로 인해 2009년 해미순교성지로 옮겨졌고 서문 밖에는 모조품을 두었다.


▲  서문 밖 순교성지에 세워진 순교현양비와 자리개돌(왼쪽에 너른 돌판)

▲  서문 안쪽 활터와 소나무숲

▲  서문 성 바깥 부분

이렇게 하여 2시간에 걸친 해미읍성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예전에 남겨놓은 미답 공간도 말
끔히 처리했다. 다만 성 바깥 탐방로는 귀찮아서 서문 밖 순교지를 포함한 일부만 거니는 선에
서 쿨하게 마무리 짓고 아직 일몰까지는 여유가 있어 인근 미답지인 해미순교성지로 이동했다.
해미읍성에 왔다면 후식거리로 이곳을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19세기 읍성에서 자행된 천주교
학살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  천주교의 주요 성지로 천주교 박해의 현장
~ 해미순교성지(海美殉敎聖地)

▲  해미천에서 바라본 해미순교성지(여숫골)

해미읍내 서쪽, 해미천 건너에 우리나라의 주요 천주교 성지이자 충청도 굴지의 천주교 성지
인 해미순교성지가 자리해 있다. 이곳이 천주교 성지의 간판을 달게 된 것은 천주교 박해 시
절, 신자들을 생매장해서 죽인 현장이기 때문이다.

179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해미에서 처단된 천주교 신자는 기록으로 남은 것만 약 1천여 명
이다. 그중 천주교측 기록 67명, 해미관아측 기록 65명 등 겨우 132명의 이름만 전해오고 있
으며 기록을 자세하게 남기지 않아 처단된 사람은 족히 수천 명은 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는 해미현감과 관리들이 제대로 된 절차도 없이 마구잡이로 처단했기 때문이다.

해미 관리와 병사들은 관아와 호야나무, 서문 밖에서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처리했는데 서문 밖은 그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루었으며, 1866년부터 1868년
까지 생매장 방법을 써서 지금의 성지 자리에 큰 구덩이를 파서 죽였다. 이때 십여 명씩 데리
고 나가 적당한 곳에 구덩이를 파게 하여 모두 밀어넣은 다음 흙과 자갈로 묻었다.
또한 여름에는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신자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꺼꾸로 던져 죽이기
도 했는데, 사람들은 그 현장을 둠벙이라 불렀고, 그것이 변해 '진둠벙이'가 되었다.


이렇게나 잔인했던 생매장 학살 현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평화로운 경작지가 되었는데, 현장이
현장인지라 농부들이 밭을 갈 때마다 해골이 많이 발견되었다. 특히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
견된 해골도 적지 않아서 생매장의 증거를 보여준다. 허나 사연을 모르던 농부들은 그 해골을
죄다 버렸고, 그나마 홍수로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1935년 서산 본당의 범베드로 신부가 해골 발견 소식을 접하고 이곳을 싹 뒤집어 수
많은 유해와 유품을 발견, 30리 밖 상홍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안치했다가 1995년 9
월 20일, 해미순교성지에 봉안했다.
 
1975년 유해가 나온 자리에 순교기념탑을 세웠으며, 그 부근에 1985년 으리으리한 본당을 지
어 '해미순교선열현양회'를 발족, 2000년 8월 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2003년 6월 기념 성전
을 세워 순교자의 유해를 봉안했다.
2014년 8월에는 로마교황청의 주인인 프란치스코가 이곳을 방문, 여기서 처단된 순교자 3명
인언민 마르티노, 이보현 프란치스코, 김진후 비오(김대건의 친할아버지)
을 시복(諡福)했으
며, 다음 날 시복기념비를 제막했다.

이곳 일대를 '여숫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천주교 신자들이 중얼거리던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지역 사람들은 '여수머리'로 알아들었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점차 '여숫골'이라
불리게 되었다.
천주교 측은 해미읍성 감옥터와 호야나무(회화나무), 서문밖, 한티고개를 천주교 성지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매년 10만여 명 정도가 찾고 있다.

▲  해미순교성지 표석의 위엄

▲  기와를 얹힌 해미순교성지 정문

▲  우람하게 지어진 해미순교성지 대성당
('소성당'도 같이 있음)

▲  초가로 이루어진 '이름없는 집'
순교자를 기억하며 '성경이어쓰기'를
하는 곳이다. (누구든 참여 가능)


▲  유해발견지 비석 - 농부들이 밭을 갈다가 순교자 유해를
발견한 곳에 조촐하게 비석을 세웠다.

▲  서문 밖에 있던 자리개돌(돌다리)
천주교 신자를 자리개질로 처단하던 현장으로 1956년 서산 성당으로 이전되었다가
1986년 제자리로 돌아왔다. 허나 도로 확장으로 2009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고 서문 밖 자리에는 대신 모조품을 두었다.

▲  해미읍성 주변에서 수습해온 조선 중~후기 비석 10기
이들은 해미 고을을 다스렸던 병마절도사와 수령의 선정비와 공덕비이다.
허나 저들 가운데 진정 선정비를 받을 만한 사람은 몇이나 되었을까?

▲  십자가가 있는 노천 야외 성당

▲  연못으로 이루어진 '진둠벙이'


▲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와 순교기념탑

이 무덤은 1935년 이곳에서 발견된 순교자의 유해를 담은 것으로 인근 상홍리 공소 뒷산의 백
씨 문중 묘역에 봉안했다가 1995년 이곳으로 유해를 담았다. 그 뒤로 1975년 지어진 높이 16
m의 순교기념탑이 무덤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덤 앞에는 특이하게도 문인석(文人石) 1쌍이 홀
을 꼭 쥐어들고 자리해 있다.
이곳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들이 묘를 지켜서고 있는 것이 참 이채롭기 그지 없는
데 그들 몸에 자욱한 때를 봐서는 1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보이며, 처음 봉안했던 백씨 문중
묘역에서 가져온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순교기념전시관

해미순교성지 가운데 자리에 무덤 봉분처럼 생긴 순교기념전시관이 자리해 있다. 위에는 봉분
(封墳)처럼 하고 밑에 돌로 다져 전시관을 닦았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순교자의 유품과 해미
일대에서 수습된 천주교와 박해 관련 유물, 그리고 이 땅의 천주교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엄숙
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공간으로 관람은 자유이다.


▲  순교기념전시관에 전시된 칼과 뿔나팔
피부가 꼬질꼬질 녹슨 칼은 천주교 신자를 처단할 때 쓰던 칼이라 전한다.

▲  생매장 현장에서 발견된 순교자의 유품들
사람은 죽어 덧없는 해골이 되고, 그들이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은 살아남아
순교기념전시관과 우리나라 천주교의 소중한 유물이 되었다.

▲  해미읍성으로 끌려오는 천주교 신자를 형상화한 조각품

천주교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내 마음을 앗아갈만한 존재도 없는지라 바깥에 풀어진 존재만
둘러보고 일찍 관람을 마무리 지었다. 하여 본글에서도 해미읍성과 다르게 아주 간단하게 다
루었다.

해미에서 죽어간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1급 존재는 썩어빠진 나라와 권력층이다. 나라가 평안
하고 백성들의 삶이 넉넉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종교
에 너무 의존하려는 나약한 정신과 무지함, 삶을 포기하고 빨리 천당이나 가려는 마인드도 문
제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그들을 탓할 필요는 없다. 그 시절은 그만큼 고달펐던 시대였으니
까. 그리고 시대가 바뀌려는 일종의 격한 통증이었으니까? 그렇게 알고 넘어가면 좋을 것이다.

현재 이 나라 꼬락서니도 왠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과 비슷해 보이는데, 더 이상 백성들
을 격한 궁지에 몰아넣어 저런 사태가 나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물론 단단히 썩어문드러
지고 첫단추부터 잘못된 이런 나라에 그런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사치겠지만...

이렇게 하여 서산 해미읍성 나들이는 미답지 지우기의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해미순교성지 찾아가기 (2017년 12월 기준)
* 해미까지 교통편은 앞의 해미읍성 교통정보 참조
* 해미정류장(터미널)에서 남쪽으로 나 있는 남문5로를 따가라면 해미천이다. 다리(조산교)를
  건너서 오른쪽(서쪽) 둑방길을 쭉 따라가면 해미순교성지가 나온다. (십자가를 머금은 커다
  란 탑과 성당이 보임) 해미정류장에서 도보 12분
*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274-10 (성지1로 13 ☎ 041-688-3183)
* 해미순교성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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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이상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7년 12월 18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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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문학의 새로운 성지, 옥천 정지용시인 생가~정지용 문학관 (육영수생가, 옥천 구읍 명소들)

 


' 옥천(沃川) 늦겨울 기행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 구읍 명소들) '

▲  정지용문학관 로비에 재현된 정지용의 모습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 정지용의 대표 작품인 '향수'

* 스마트폰으로 보실 경우 꼭 PC버전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를 권함)

 


 

겨울 제국(帝國)의 패기가 슬슬 수그러들던 2월 한복판에 대전 동쪽에 자리한 충북 옥천
을 찾았다.

옥천은 지금까지 여러 번 발을 들였지만, 거의 잠깐 스치는 정도에 불과했다. 옥천 땅에
도 굵직한 명소가 참 많건만 이웃 동네 떡에 눈이 어두워 그렇게 된 듯 싶다. 하여 이번
에는 옥천의 명소를 둘러보고자 적당한 곳을 물색하여 읍내에서 가깝고 볼거리도 풍부한
구읍 일대를 답사지로 정했다.

옥천 읍내는 지금의 읍내인 신읍(新邑)과 읍내 북쪽인 구읍(舊邑)으로 나눌 수 있다. 원
래는 구읍(교동리, 죽향리, 하계리, 문정리)이 옥천 고을의 중심지로 관아(官衙)를 비롯
해 향교(鄕校)와 객사(客舍) 등이 있었다. 게다가 양반이 많이 살던 고을이라 그들의 기
와집도 즐비했다. 반면 신읍은 거의 농경지에 백성들이 드문드문 사는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신읍과 구읍의 처지가 정반대가 되버렸으니 그 사연은 대략 이렇다.

때는 바야흐로 황성(皇城, 서울)에서 부산까지 경부선 철도를 한참 닦던 1901년. 경부선
의 원래 옥천 구간은 '마달령~증약~문정~동안~매화~구일~칠방'이었다. 옥천역은 구읍의
일원인 문정에 둘 계획이었으나 그 소식을 들은 읍내 양반들이 크게 발끈하였다. 괴상한
철마가 고을을 지나다니는 것도 못마땅하거니와 철도 건설로 인해 그들의 토지가 줄어들
고 소음과 위험 문제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옥천 양반들의 강렬한 반대에 꼬랑지
를 내린 철도 건설 사업자는 급히 옥천 구간을 수정했다.

드디어 1905년 경부선(京釜線)이 개통되자, 역세권인 옥천역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리면
서 자연히 새로운 읍내, 즉 신읍을 이루게 되었고, 기존 읍내에 있던 관청, 시장, 민가
들도 역 주변으로 우루루 몰려가 신읍을 무럭무럭 살찌우니, 그것이 지금의 옥천읍이다.
반면 기존 읍내는 인구가 감소하여 나날이 쇠퇴를 거듭하니 결국 변두리로 전락되어 구
읍이란 우울한 이름의 시골마을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부자와 양반들은 많이 남았음)

그후로 오랫동안 뒷방 마님 신세가 되버린 채 잊혀진 구읍은 2000년대 이후 구읍 출신인
정지용에 힘입어 다시금 기지개를 켜며 옥천의 새로운 꿀단지로 서서히 도약하고 있다.
정지용 생가를 복원하고 문학관을 지어 현대 문학의 성지로 키우고 있으며, 육영수 여사
의 고래등 기와집을 복원하여 박정희 향수에 젖은 이들의 순례지로 만들었고, 이곳에 유
일하게 남은 조선 후기 기와집을 한정식 및 한옥 체험의 장인 춘추민속관으로 단장했다.

또한 구읍을 지나는 도로를 정지용의 시를 상징하는 '향수길'이라 이름 짓고 마을 식당
과 가게, 민가 외벽에 정지용의 시를 달게 했으며, 개발의 칼질을 제한하고 옛 읍내와
시골의 정취를 고스란히 유지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옛 시골에 대한 향수에 젖게 배려했
다. 그렇게 하여 옥천 관광의 새 중심지이자 문학, 전통의 중심지로 새롭게 거듭났다.
비록 신읍에 밀려 뒷전으로 물러났다고 하지만 오랜 세월 옥천의 행정, 경제, 교육의 중
심지였던 탓에 역사와 전통, 자부심이 짙게 배여있으며, 이를 입증하는 많은 문화유산이
깃들여져 있다.

이렇듯 옥천의 과거가 서린 구읍에는 정지용 생가와 그의 문학관을 중심으로 육영수생가,
옥주사마소, 옥천향교, 죽향리사지3층석탑, 죽향초교의 옛 교사(校舍)가 있으며, 한정식
및 한옥 민박을 할 수 있는 춘추민속관이 있다. 또한 한정식, 비빔밥, 짜장면, 묵밥, 올
갱이국으로 유명한 맛집이 다수 포진해 있어 눈과 코, 귀, 입 등 오각(五覺)과 마음, 정
신을 두루두루 즐겁게 해준다.


 

 

♠  현대문학의 새로운 성지이자 옥천의 굵직한 명소,
지용문학공원 <정지용 생가(鄭芝溶 生家), 정지용문학관>

▲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된 정지용 생가 (왼쪽에 누워있는 표석이
생가터 표석, 가운데는 시 향수를 머금은 비석)


구읍 한복판에 자리한 정지용 생가는 그의 동상과 시비를 포함하여 지용문학공원이라 불리기도
한다. 특정 인물과 관련된 공원이나 기념관, 장소는 인물의 호를 따거나 성씨를 포함한 이름을
붙이지만 이곳은 그냥 이름만 적용하여 친숙함을 배가시켰다.

정지용 생가는 그가 태어나 소년 시절을 지낸 곳으로 1918년까지 살았다. 그가 상경하여 서울
에 자리를 닦자 1929년 효자동(孝子洞)에 집을 마련하여 부인과 아들을 불러 같이 살았으며,
나중에는 부모도 올라와 3대가 같이 살게 되었다. 가족이 모두 서울로 가면서 집은 다른 사람
에게 넘겼고, 이리저리 주인이 바뀌는 동안 집의 모양도 가지각색으로 바뀌었다가 1974년 철거
되어 새 집이 들어섰다.
이후 정지용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풀리자 옥천군청에서 1996년 7월 원래 자리에서 약간 동쪽
인 지금 자리에 생가를 복원했는데, 원래 집은 초가 옆 우물 서쪽과 향수 표석 옆에 누운 생가
터 표석 일대로 지금보다 훨씬 작은 규모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했기 때문이다. 허나 문학계와
옥천군에서 격하게 띄워주는 인물인만큼 작은 모습으로 복원하기에는 체면이 서질 않아 제자리
보다 동쪽에 초가 1동과 헛간 1동을 크게 짓고, 보기만 해도 정겨운 토담을 둘러 관광객을 맞
게 되었다. 그러니까 생가를 있는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크게 부풀리고 가상까지 듬뿍 첨
가하여 완전히 민속촌 초가집이나 민속박물관이 되어 버렸다.


▲  활짝 열린 서쪽 사립문

초가에는 방 2개와 부엌이 있는데, 기존 초가의 방식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었다. 방과 부엌 안
에 담긴 물건들은 새로 만들거나 다른 마을에서 수습한 것으로 정지용 일가가 쓴 것은 단 하나
도 없다. 집은 재현했으나 정작 그들이 쓰던 유물은 남아있지 않으니 시골에서 쓰던 물건이나
오래된 생활도구를 사들여 궁색하게나마 집 안팎을 꾸민 것이다.
초가의 방문과 부엌문은 모두 열려있어 내부를 훤히 구경할 수 있으나 그저 눈으로만 구경하기
바란다. 비록 근래에 지어진 초가이나 엄연히 정지용의 생가를 칭하고 있으니 부엌이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은 통제되어 있다. 단 툇마루에 잠깐 앉는 것은 가능하다.

▲  뚜껑이 닫힌 우물과 장독대
정지용 생가를 복원하면서 갖다놓은
빈껍데기들이다.

▲  정지용 생가터
우물 서쪽 공터와 담장 너머 생가터 표석
일대에 조촐하게 생가가 있었다.


▲  정겨운 풍물시(風物詩) 초가 3간
부엌과 방 3개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초가이다. 정지용의 생가가 아닌
정지용이 살고 싶었던 큰 초가를 재현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  지용유적 1호 현판
정지용을 사모하는 단체인 '지용회'가 1988년에 달아놓은 것으로 그들은
복원된 생가를 지용유적 1호로 삼았다.

▲  정지용의 사진이 걸린 초가 우측 방
정지용이 살던 방을 재현한 모양이다.

▲  추억의 풍물시가 되버린 부뚜막을 갖춘 옛 부엌
옛날 단양(丹陽) 시골 외가집 부엌과 비슷하게 생겨 당시의 소중한 추억을
잠시나마 소환시켜 준다. 부뚜막에 장작을 떼서 지어먹은 밥과
누룽지의 맛은 참 예술이었지...

▲  부엌문 옆에 고된 몸을 기대어
선 돌절구

▲  초가 좌측 방 - 정지용 부모가
살던 방을 재현한 모양이다.


▲  초가 옆에 마련된 헛간 - 창고와 뒷간을 재현했다.
정지용 생가와는 애당초 관련이 없는 장식용임

▲  헛간 가운데 칸은 농기구 창고로 재현했다.

▲  정지용문학관으로 이어지는
남쪽 사립문과 생가


▲  남쪽 사립문 앞에 놓인 청석교(靑石橋)

남쪽 사립문을 나오면 조그만 개천과 물레방아가 있는데, 개천 위에는 넓직한 반석(盤石)이 벌
러덩 드러누워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돌다리는 '청석교'라 불리며 원래는 생가 앞에 흐르
는 개천에 걸쳐져 있었다. 지금이야 개천이 정비되어 폭이 좀 넓어지고 반듯해졌지만 예전에는
폭이 좁아 저 돌다리로 개천을 건넜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구읍을 가르는 개천 위에 걸쳐져 구읍의 동,서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으며, 구읍 출신인 정지용과 육영수도 저 다리를 건너 학교를 가고 서울에 가고 했다. 어찌
보면 민속촌 초가처럼 재현된 정지용 생가보다 유서가 깊은 다리지만 마땅한 이정표가 없어 그
냥 지나치기가 쉽다. 허나 정지용문학관 해설사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저 돌다리에 대한 이야기
를 한 토막 들려주니 꼭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다리가 되어 드러누운 이 돌은 매우 단단하고 두꺼운데, 이런 넓은 돌은 옥천에
서만 나온다고 하며, 현재 옥천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목인 금강(錦江) 상류 장계유원지에도 청
석교라는 오래된 다리가 말년을 보내고 있다. (삼국시대에 지어졌다고 함)


▲  정지용 생가 동쪽에 자리한 정지용문학관과 정지용 동상

정지용 생가 동쪽에 터를 닦은 정지용문학관은 2005년 5월에 문을 열었다. 정지용의 생애와 작
품, 문학 세계를 다룬 공간으로 2층 규모이며, 내부는 그리 넓지는 않다. 딱 하나 뿐인 전시실
인 문학전시실은 정지용의 인생과 그가 살았던 시대, 문학(향수, 바다와 거리, 나무와 산, 산
문...)을 설명하고 있으며, 20세기 초/중반 우리나라 현대 시의 흐름과 거기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소상히 다룬다. 또한 그의 시집과 산문집, 그의 손때가 담긴 육필 원고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의 유품은 그게 전부라 아직은 좀 빈약하다.

눈으로 보는 전시실 외에 문학체험의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자신의 손이 스크린이 되어 시를
직접 읽어 보는 '손으로 느끼는 시' 코너와, 음악과 영상을 배경으로 성우의 시낭송을 듣는 '
영상시화' 코너, 뮤직비디오로 제작된 가곡 '향수'를 감상하는 '향수영상', 컴퓨터로 직접 시
어(詩語)들을 검색하는 '시어검색', 노래방처럼 자막으로 흐르는 정지용의 시를 직접 부르는
'시낭송 체험실' 등이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시낭송체험실은 이곳의 백미(白眉)로 다른 문학
관이나 기념관에는 거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그 외에 정지용의 삶과 문학 등을 다룬 다큐멘터
리를 상영하는 영상실과 시/문학 토론, 학습, 문학동아리 활동공간으로 쓰이는 문학교실이 마
련되어 있다. (문학교실은 사전 예약 요망)

관람료는 물론이고 시낭송실 사용까지 모두 공짜이며, 현관에서 실내화로 갈아신고 안으로 들
어서면 안내데스크 좌측에 옛날 복장을 갖춘 사람 하나가 실감나게 앉아 있어 깜짝 놀라게 만
든다. 그 사람은 실제 사람이 아닌 정지용을 재현한 인형으로 기념촬영용이다.


▲  문학전시실 내부 - 정지용의 생애와 시대상이 간략하게 기록된 공간

※ 정지용(鄭芝溶)의 생애 <1902 ~ 1950(?)>
정지용은 1902년 6월 20일(음 5월 15일) 한약상을 하던 정태국(鄭泰國)과 부인 정미하의 장남
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자 이름은 지용(池龍)으로 이는 그의 생모가 연못에서 용이 하늘
로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지용(芝溶)으로 이름을 갈았다. (천
주교 세례명은 프란시스코)

그의 부친은 고향에서 한약상을 개업해 제법 여유롭게 살았다. 하지만 갑자기 밀어닥친 홍수로
가산을 죄다 말아먹고, 고향을 떠나 이곳 구읍으로 넘어와 새 보금자리를 꾸렸으며, 처가 친척
인 송지헌의 농장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목구멍에 간신히 풀칠을 했다. 정지용은 당시를 회상하
'나는 소년적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고 말해 유년 시절
에 가난으로 인한 고초가 매우 심했음을 보여준다.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교)에 입학했으며, 1913년 11살에 나이로 동갑인 송재숙
과 혼인을 했다. (헐~~ 부럽다) 1918년 휘문고보(서울 안국동)에 입학했으며, 성적이 우수하고
교우관계가 좋았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교비생(校費生)으로 학교를 다녔다. 또한 그 시절부
터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문학적 소질을 발견하고 박팔양 등 8명과 함께 요람동인을 만들어 동
인지 요람(搖籃)을 프린트판으로 10여 호를 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교내문제로 야기된 휘문사태의 주동이 되면서 이선근과 1년 무기정
학을 받았다. 그해 12월 서광(瑞光) 창간호에 소설 '3인'을 발표했는데, 이는 그의 유일한 소
설이자 첫 발표 작품이었다.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하여 아버지의 친구인 유복영의 집에서 생활을 했다. 또한 첫 시작품인
풍랑몽(風浪夢)을 썼다. 1923년에는 휘문고보 문우회에서 만든 '휘문' 창간호의 편집위원이 되
었으며,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왜열도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교토에서 시 '석류','민요풍 시편','새빨간 기관차','바다' 등을 썼으며, 학조 창간호에
'까페프란스' 등 9편의 시를, '신민', '문예시대'에 '홍춘' 등 3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활동
을 시작했다.
1927년에는 '갈매기','갑판우','향수'등 30여 편의 시를 냈으며, 1928년 2월(음력)에는 장남인
'정구관'이 태어났다. 이후 동지사문학 3호에 '마(馬)1,2'를 발표하고 1929년 대학을 졸업, 귀
국하여 휘문고보 영어 교사로 일했으며, 옥천에 있는 부인과 장남을 서울로 불러들여 효자동에
집을 마련했다. 12월에는 '유리창'이란 시를 썼다.

1930년 시문학동인으로 참가하여 '조선지광','시문학','대조','신생' 등에 '겨울','유리창' 등
의 시를 발표했으며, 1933년 3남 정구인이 출생했다. 또한 그해 6월에 창간된 '가톨릭 청년'지
의 편집고문을 지냈으며, 해협의 오후 2시, 소묘1,2,3을 발표했다.
1934년에는 종로구 재동(齋洞)으로 이사를 갔으며, 이때쯤 딸 정구원이 태어났다. 1935년에는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을 냈으며, 그동안 발표된 89편이 수록되었다.


▲  1935년에 발간된 정지용 시집

1936년에는 북아현동으로 이사를 갔으며, 그해 3월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조
광','소년' 잡지에 '옥류동','별똥이 떨어진 곳'을 발표하고, 동아일보와 삼천리문학, 여성,
청색지 등에 산문 '꾀꼬리와 국화', 산문시 '슬픈우상' 등 수필 30여 편을 발표하는 한편, 천
주교에서 주관하는 경향잡지를 돕기도 했으며, 1939년에는 문장지의 시부분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趙芝薰), 박두진, 박목월(朴木月) 등을 등단시켰다.

1940년에는 기행문 화문행각(畵文行脚)을 냈고, 문장 22호 특집으로 '진달래' 등 10여 편의 시
가 실리기도 했다. 1944년에는 서울 소개령으로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현 부천시 소사동)으로
이사를 갔으며, 1945년 휘문고보 교사를 그만두고 이화여자전문학교(이대) 교수가 되어 한국어
와 라틴어를 강의했다.

1946년 서울 돈암동으로 이사를 했고, 6월에 '지용시선'이 을유문화사에서 나왔다. 이는 정지
용 시집과 백록담 등 기존의 낸 시집 가운데 25편을 가려 낸 것으로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
과위원장에 위촉되었으나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47년 경향신문사 주간직을 1년 만에 그만두고, 이대 교수로 복귀했으며, 서울대 문리과대학
강사로도 출강을 했다. 그리도 이듬해 이대 교수를 사임하고 녹번동(碌磻洞)에서 서예를 하며
지냈는데, 박문출판사에서 문학독본을 냈으며, 1949년 시문과 수필 55편이 수록된 산문을 출간
했다.

그리고 비운의 1950년이 밝아오자 그해 2월 '문예'에 '곡마단','사사조오수(四四調五首)'를 발
표했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문단 발표였다. 4달 뒤, 6.25가 터지자 미처 피신을 가지 못했
는데, 북한군에 잡혀 정치보위부로 끌려갔다고 하며,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평양감옥으
로 이감되었다. 이후 그의 행적은 지금까지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인데, 폭사 당한 것으로 여겨
지며, 월북을 했다는 설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가 사라지자 이승만 정권은 그가 월북한 것이라 단정짓고, 그의 작품을 통제했다. 그러다가
1982년 장남 정구관을 비롯하여 48명의 문학인과 각계 인사들이 정지용의 문학을 통제에서 풀
어줄 것을 요구하며 정지용 문학 회복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1988년 3월 31일 통제에서 해금
되었으며, 그해 5월 15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 제1회 지용제를 지내게 되었다. 이에 탄력을
받아 지용시문학상이 제정되고, 그의 문학세계와 작품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옥천군
청에서도 그의 생가터를 매입하여 생가를 복원하고 문학관을 만들어 문학의 성지로 꾸몄다.


▲  문학관 로비에 마련된 정지용 인형

정지용의 작품은 중/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서도 징그럽게 많이 등장한다. 특히 '향수'가
약방의 감초 같이 자주 나오는데, 그 노래를 여러 번 들어 거의 외우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현실은 다 까먹음)
학창 시절에 그렇게나 나를 괴롭혔던 시와 시조, 시험을 보면 시 부분은 많이도 틀렸고 외우는
것도 무척 힘이 들었다. 그래서 시를 보기만 해도 진절머리가 났었고, 그런 시를 쓴 시인들을
무척 원망했었지~~ 허나 이제는 시 때문에 머리 아픈 시험을 봐야되는 굴레에서 벗어났고, 나
이를 먹어감에 따라 시의 내용을 저절로 음미하게 되었다. 정지용의 향수도, 윤동주(尹東柱)의
서시도 보면 볼 수록 빛나는 보석과 같은 시임이 틀림 없다.

정지용은 50평생 동안 140여 편의 시를 남겼으며, 바다와 산, 신앙(천주교), 고향이 중심 소재
였다. 향수 또한 고향을 표현한 시로 노래나 가곡으로도 나와있다. 1988년 통제에서 풀린 이후
왜정(倭政) 시절에 활약한 대표적인 시인이자 천재 시인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옥천을
빛낸 위인의 하나이자, 옥천의 든든한 후광(後光)이자 제일의 관광지로 또한 문학의 성지로 점
차 몸값을 높이고 있다.

문학전시관을 1바퀴 둘러보고 나오니 문학관 해설사가 구경 잘했냐고 묻는다. 그래서 그렇다고
답을 하면서 여러 질문을 넌지시 던졌는데, 거기서 생가 복원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과 사립문
앞에 누운 청석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해설사와 작별을 고하고 점심을 먹고자 부근에 30여 년 묵었다는 짜장면집(문정식당)에서 간단
하게 간짜장을 먹었다. (자장면이 유명하다고 함) 별다른 맛은 없으나 밀가루 음식으로 덥수룩
하게 배를 채우고 구읍에 널린 명소들을 마저 둘러보았다.

※ 정지용 생가(정지용 문학관) 찾아가기 (2016년 6월 기준)
① 옥천까지
* 서울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조치원역, 김천역, 구미역, 동대구역, 밀양역, 부산역,
  마산역에서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옥천역 하차 (옥천역 정차 열차를 타야 됨)
* 동서울터미널에서 옥천, 영동행 직행버스가 1일 3회 떠난다.
* 대전복합터미널에서 옥천행 직행버스가 1일 20회, 청주시외터미널에서 1일 17회 떠난다.
* 대전복합터미널 앞, 대전역(중앙시장), 판암역(대전 1호선, 1번 출구)에서 607번 시내버스를
  타고 옥천종합상가 하차
② 현지교통
* 옥천역을 나와서 역전3거리에서 직진하면 우체국 너머로 4거리가 있다. 거기서 왼쪽으로 가
  면 옥천버스종점(군내버스터미널)이 있는데, 거기서 보은, 안남, 안내, 장계, 청산 방면 군
  내버스를 타고 구읍4거리에서 하차하여 도보 3~4분 (석탄리나 수북리 방면 군내버스를 탔을
  경우 구읍3거리에서 내려서 도보 5분)
* 옥천역을 나와서 역전3거리에서 계속 직진하면 구읍이다. 도보 35~40분 거리
* 옥천시외터미널에서 갈 경우에는 구읍까지 가는 버스가 없다. 택시를 이용하면 5~7분 정도면
  가며, 걸어갈 경우는 대전 방면으로 걸으면 삼양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접어
  들어 도보 30분
* 옥천종합상가(607번 정류장)에서 옥천군청 정문을 경유하여 도보 30분, 또는 택시 이용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문학관 앞에 주차장 있음)
* 경부고속도로 → 옥천나들목을 나와서 향수공원4거리에서 좌회전 → 구읍3거리에서 좌회전
  → 구읍4거리에서 우회전 → 정지용 생가

★ 정지용 생가 관람정보 (2016년 6월 기준)
* 관람비와 주차비는 공짜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과 추석 휴관)
* 매년 5월 중순에는 정지용생가와 상계체육공원에서 정지용을 추모하는 지용제가 열린다. 지
  용문학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학행사와 공연, 공예품 전시, 음악회, 야시장 등이 열리며,
  행사기간은 보통 3일이다.
* 소재지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39 (향수길 56 ☎ 043-730-3408)
* 정지용문학관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  옥천 제일의 명당이자 고래등 기와집, 박정희 전대통령의 처가집이자
현 정권의 임시 성지(聖地)로 거듭난 육영수(陸英修)생가 -
충북 지방기념물 123호

▲  솟을대문과 대문채

옥천 구읍 북쪽 끝에는 정지용생가(문학관)과 더불어 구읍의 대들보 명소인 육영수생가 기와집
이 있다. 교동리에 있다고 하여 '교동집'이라 불리기도 하고, 3정승이 살았다고 하여 '3정승집
'이란 체통 있는 이름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집이 고색의 때가 넘치는 묵은 기와집이었
다면 그 가치가 정말 남달랐을텐데, 아쉽게도 2011년 봄에 옛터에 복원된 새집이다.

교동집은 17세기에 정승을 지낸 김씨(이름은 모르겠음)가 지었다고 전한다. 이후 송씨에게 집
이 넘어갔는데, 그 집안에서 정승이 나왔으며, 다시 민씨에게 넘어가 거기서도 정승이 나왔다.
그런 연유로 3정승집이란 별명을 지니게 되었다.
옛 사람들이 신봉하던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따르면 이 집터가 명당(明堂) 중의 상급이라고 하
니, 땅의 기운을 제대로 받은 모양이다. 3정승에 대통령 부인까지 이 자리에서 나왔으니 말이
다. 허나 이곳에 살던 집안들이 대대로 살지 못하고 다른 데로 가버리거나 끝이 좋지 못한 걸
보면 이 자리가 끝은 영 별로인 모양이다.

1918년 육종관(陸鍾寬, 1893~1965)이 민정승의 후손인 민영기에게서 구입하면서 육씨(陸氏) 일
가로 주인이 바뀐다.
육종관은 대지주(大地主) 육용필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금수저로 집안의 막대한 재산을 물
려받았다. 친일 대지주로 악명을 떨치면서 지역 소작농을 달달볶아 재산을 크게 불렸으며, 돈
이 너무 썩어나자 씀씀이도 엄청나 아내인 이경령(李慶齡) 외에 무려 18명의 첩을 두었다. (왜
인 첩도 있었고, 서울에도 첩을 두었음) 아내에게는 육영수를 비롯한 1남 3녀를 두었고, 나머
지 첩에게서 18명을 두어 총 12남 10녀, 무려 22명의 자식을 거느렸다.


▲  육영수 일가의 사진
사진 왼쪽 구석에 아들을 안은 이가 육종관이며, 가운데 자리한 할머니의
왼쪽(왼손 쪽)에 있는 꼬마가 육영수이다. (틀릴 수도 있음)


1925년 안채에서 육영수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살았으며, 1969년 생가를 전면 뜯어고치면서 조
선 후기 한옥 양식을 많이 상실하게 된다. 겉모습을 그냥 두고 내부만 손질했으면 좋으련만 그
것까지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이후 가족들이 모두 외지로 나가면서 집은 무늬만 남게 되었고,
1979년 이후 상속 분쟁으로 인해 도깨비집 수준으로 망가진 것을 1999년에 다 밀어버리면서 그
장대했던 고래등 집은 주춧돌만 앙상하게 남게 되었다.

집터만 남았을 당시의 사진을 보니 터 주변이 나무와 수풀로 어지러웠다. 철거 이후에도 관리
는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2000년 9월, 옥천군청에서 구읍을 살려 관광지로 키우려는
목적으로 생가 복원계획을 세우고, 민간이 주체가 된 '육영수여사 생가복원추진위원회'를 결성
하여 2001년 3월부터 활동에 들어갔다. 생가 복원프로젝트에에는 육영수의 회고록이 크게 도움
이 되었으며, 2002년 생가터 지표조사를 마친 다음,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사업비 37.5억원을
쏟아부어 2011년 5월 11일 복원을 마쳤다.

복원된 생가는 99칸 기와집으로 13동의 건물을 갖춘 대저택이다. 후원과 과수원까지 합치면 무
려 26,400㎡의 면적으로 그중 집은 10,000㎡에 이른다. 내부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비롯하
여 안채와 사랑채, 위채, 아래채, 연당사랑, 정자 등 주인 일가의 생활공간과 아래대문채, 중
문채 등 하인들의 거주 공간. 그리고 연자방아, 뒤주, 곳간채, 아래채 창고, 대문 등의 부속
건물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  솟을대문

▲  안채

육영수의 회고에 따르면 대문인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마방(馬房)이 있고, 대문과 마
주보는 곳이 사랑채였다. 사랑채 왼쪽에 건너채가 있고, 사랑채를 돌아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채가 집터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안채에서 왼쪽으로 행랑, 오른편으로 연당사랑, 뒤
로 돌면 별당, 후원에는 사당과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정자 오른쪽에는 뒤채가 있었으며, 바
깥겹집 사랑채만 하여도 누마루, 바깥 사랑방, 안 사랑방, 사랑채 안방, 대청, 광, 다락, 식객
들이 거처하는 방, 사랑채 전용부엌 등이 있었다.
안채의 안방은 웃방과 아랫방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위의 안방에는 어머니 이경영이 거처하였
고, 안방 아랫방에는 작은 아씨로 불리던 육영수 여사가 거처했다. 안방 뒤쪽으로 골방이 있고,
골방을 건너가면 침방이 웃방과 안방으로 나눠져 있는데, 육영수의 동생 육예수가 안채 중에서
도 가장 구석지고 조용한 침방 안방에 살았다고 한다.
사랑채는 마치 관아(官衙)의 동헌(東軒)처럼 꾸몄다고 하는데, 대청마루 옆에는 심부름꾼의 방
이 있었고, 전화기를 둔 전화방과 사진현상용 암실(暗室)도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사랑과 안
채를 잇는 마루 복도는 단아한 지붕을 얹어 정취를 더했다고 한다. 연당(蓮塘)이란 연못은 여
름이 되면 연꽃으로 덮여 장관을 이루었고, 겨울에는 무려 스케이트를 탔다고 하니 정말로 없
는 것이 없는 조그만 궁궐이었다.

2011년 생가가 복원되면서 정지용 생가와 더불어 구읍의 주요 명소로 자리매김했는데, 특히 박
정희 내외에 대한 향수에 젖은 중장년층(특히 이웃 경상도)이 많이 온다.
육영수는 내가 태어나기 4년 전까지 살았고, 박정희는 내가 태어난 이듬해까지 살던 터라 나와
는 가까운 과거의 인물이다. 그들을 좋게 여기는 사람도 있고, 좋지 않게 여기는 사람도 많고,
이 2개의 상반된 여론이 지금도 티격태격하고 있다. 나는 현대사에 관심도 없고, 박정희 내외
도 관심 밖인지라 오로지 생가 한옥에만 열중했다. 그들에 대한 생각을 본글에 적는다면 자칫
이상한 댓글을 주렁주렁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연못을 바라보며 매뭇새를 다듬는
연당 사랑채

▲  사랑채 - 박정희가 방문했을 때는
임시 집무실로도 쓰였다.

그럼 육영수(1925~1974)는 누구일까?
육영수는 1925년 11월 29일 바로 이 고래등 기와집에서 육종관의 2녀로 태어났다. 죽향국민학
교(죽향초교)를 나와 서울로 상경하여 배화여고를 졸업했으며,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옥천여중
교사로 일하다가 6.25가 터지자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에 머물던 중, 당시 육군중령이던 박정희와 가까워져 1950년 12월 혼인을 했는데, 아버지
의 반대가 아주 극심했다. 하여 딸의 혼인식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며, 사위가 대통령이 된 이후
에도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65년 병석에 누워 골로 가기 직전. 병문안을 온 사
위에게 자신이 부덕해 큰 인물을 알아보지 못했다며 사과했다고 한다.

대구에서 3년 정도 머물다가 서울로 올라왔으며,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자 영부인(令夫
人)이 되었다. 남편을 열심히 내조하는 한편 양로원과 고아원을 비롯한 영세/취약계층에 대한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사회복지사업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민생 현장과 재해/재
난 현장을 수시로 찾아가 살피면서 백성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리고 야당/재야 인사들의 여
론에도 귀를 기울여 필요한 것은 남편에게 건의하는 등, 청와대 안의 야당이란 별명까지 갖게
되었다.


▲  박정희와 육영수의 혼인 사진 (1950년 12월)

드디어 그의 마지막 날인 1974년 광복절, 그날 광복절 행사는 서울국립극장(장충동)에서 열렸
다. 청와대를 나서기 전, 뭔가 불길한 징조를 느꼈는지 '오늘은 왠지 행사장에 가고 싶지 않네
요' 말했다고 한다. 이에 박정희는 무슨 소리냐며 등을 살짝 어루만지며 달랬다고 한다. 그 말
에 만약 부인을 데려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박정희 자신이 피살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결국 재
일교포 문세광(文世光)의 저격에 육영수는 힘없이 쓰러지고, 행사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육영수가 피살되자 전국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하며, 애도 물결이 청와대를 뒤덮었다. 국민장
영결식이 8월 19일 10시 중앙청(中央廳, 경복궁 남쪽) 광장에서 각국 조문사절과 내외인사 3천
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고 그날 오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육영수는 거론하기 조차 껄끄러운 1남 2녀를 두었으며, 당시 매우 미인이었다고 한다. 대통령
의 아내임에도 거만함이 별로 없었고, 부드럽게 남을 배려했으며 유머가 풍부해 주변을 늘 웃
음바다로 만들었다. 또한 국내외 안팎으로 동분서주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영부인이다.(이승만
의 아주 젊은 부인은 제외, 한 것이 없으니)

▲  땅에 누운 석빙고(石氷庫) <오른쪽은
위채로 넘어가는 문> 음식과 식재료,
술을 보관하던 공간이다.

▲  위채 - 연당 사랑채 뒤쪽에 독립적으로
자리한 공간으로 일반적인 사랑채나
안채와 비슷한 곳이다.


육영수와 관련된 일화는 참 많지만 그중에서 하나만 소개하고자 한다.
1966년 2월 박정희 내외는 동남아 태국을 방문했다. 당시 태국의 두목인 푸미폰 왕은 만찬회를
열었는데, 그때 푸미폰은 육영수와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푸 - 영부인께서는 평소 자녀에 대해 어떤 교육관을 갖고 계시나요?
- 쓸모있고 지혜로운 인간으로 키우려고 합니다. 대통령 가족이라고 해서 우월감이나 의타
심을 갖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정서적인 면과 도의적인 면을 강조하는 편입니다.(근데 그의 자
식들은 왜 한결같이 삐뚤게 놀까??)
- 대통령께서는 자녀 교육에 다른 의견을 안 가지셨나요?
- 저는 엄하게 가르치려 하는데 대통령은 아이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어 순하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대통령이 저보다 인기가 많아요. 근데 투표권도 없는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어봐야 뭐 하겠습니까'
 
그 말을 듣던 푸미폰은 근엄한 표정을 포기하고 자빠질 정도로 크게 웃었다고 한다. 평소 근엄
함이 쩔어 별로 웃지 않았는데, 그의 요란한 빵터짐에 주위 사람들이 어리둥절했다고 하며, 만
찬회장의 분위기는 한층 밝아졌다.


▲  연당(蓮塘)사랑채와 연못
연당은 연꽃이 있는 연못을 뜻한다. 여름에는 연꽃의 향연이 대단했다고 하며,
희귀한 나무와 꽃이 주변에 가득했다. 또한 겨울에는 얼어붙은 연못 위에서
육영수 가족이 스케이트를 탔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벌써 스케이트라...?

▲  위채 뒤쪽에 펼쳐진 후원
후원은 지금은 볼품이 없지만 예전에는 나무와 꽃, 과수(果樹)들이 가득했다.


육영수 생가는 현재 집만 있을 뿐, 사람이 살지 않기 때문에 생활의 향기와 사람의 냄새가 나
질 않는다. 그냥 육영수의 생가라는 의미에서만 머물고 있으며, 이렇게 빈 집으로 놀려두는 것
보다는 전통문화 체험 및 한옥 민박이나 요즘 유행하는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는 것이 괜찮을
것 같다. 어차피 2011년에 복원된 것이니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오래된 건축물처럼 제약을 많이
둘 필요도 없고, 집과 방이 모두 새것이니 민박에 불편함이 없도록 편의시설만 갖추면 휼륭한
한옥 체험의 장의 될 싹수를 가지고 있다.

▲  대나무 소리가 귀를 들쑤시는 후원 산책로

▲  높이 들어앉은 사당(祠堂)

▲  쌀을 보관하던 2개의 뒤주

▲  육영수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안채 뒤쪽 방


▲  후원 높은 곳에 자리한 초가 정자
정자 주변은 사과, 밤, 배, 포도 등을 기르던 과수원이다. 육영수는 어린 시절 여기서
알밤을 주었다고 하며, 집에 과수원까지 있었다니, 그저 입이 벌어질 따름이다.

▲  현대식 차고(車庫)

육영수 생가의 아주 독특한 요소이자 그의 일가가 매우 부자였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존재
가 바로 차고이다. 차고는 차량을 주차하던 공간으로 육종관은 자동차에도 지나치게 관심이 많
아 왜정 시절부터 외국산 자동차를 소유했다. 이 차고는 4대까지 주차가 가능했으며 보통 2~3
대를 굴렸다. 게다가 그는 손기술도 뛰어나 차량도 직접 수리를 했으며, 라디오도 직접 수리하
고 주파수를 조정하여 다양한 라디오 방송도 들었다. 그 시절(20세기 초/중반) 일반 사람들은
어림도 없던 것을 넘치도록 소유하고 즐겼던 것이다.

★ 육영수 생가터 관람정보 (2016년 6월 기준)
* 정지용 생가에서 동쪽(향수길)으로 도보 9분
* 옥천버스 종점에서 금암리, 수북리, 석탄리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교동에서 하차, 도보 2분
* 관람비와 주차비는 공짜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과 추석 휴관)
* 소재지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313 (향수길 119, ☎ 043-730-3417)


 

♠  구읍에서 만난 여러 명소들

▲  370여 년 묵은 느티나무 (정지용생가와 육영수 생가터 중간)

옛 옥천고을에 선선한 그늘을 드리웠던 정자나무로 나이가 무려 370여 년이라고 한다. 아무리
우걱우걱 먹어도 고갈되지 않는 장대한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어엿하게 자라난 그는 키가 16m
, 허리둘레 5.2m에 이르며, 그의 밑둥에는 마을의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금줄을 쳐놓아 부정한
기운을 막는다.


▲  2열로 배열된 옛 비석들
옛 옥천 고을 사또의 선정비(善政碑)와 불망비(不忘碑)이다. 허나 저들 중 진정으로
선정비를 받을 만한 사또는 과연 몇이나 될까?

▲  죽향초교 구교사(舊校舍) - 등록문화재 57호

옥천 구읍 남쪽에는 죽향초등학교가 자리해 있다. 이 학교는 1909년 10월 사립 창명학교(彰明
學校)로 문을 연 옥천 최초의 근대 초등교육기관으로 1910년 9월 공립으로 개편되어 옥천공립
보통학교로 이름을 갈았다. 이후 1938년 4월 옥천공립심상소학교로, 1941년 9월에는 옥천죽향
공립국민학교, 1945년 이후 죽향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1946년 7월 삼양국교(삼양초교)가 분리되었고, 1966년에는 군동국교(군동초교)가 분리되어 몸
집을 줄였으며, 1978년 12월 본관 교사를 신축하고 1981년 병설유치원을 두었다. 그리고 1996
년 죽향초교로 이름을 갈아 지금에 이른다. 정지용과 육영수도 이곳을 나왔으며, 50대 이상 옥
천읍내 사람들 상당수가 이 학교를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향초교 후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창고처럼 보이는 1층짜리 붉은색 목조 건물이 눈길을 부여잡
는데, 그 건물이 바로 죽향초교의 옛 교사로 1936년에 지어졌다. 교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3개의 교실을 지녔으며, 벽체를 가로로 댄 목재비늘판벽으로 마감한 편복도형 건물로 초기의
모습이 잘 남아있다.
본관 교사가 신축된 이후, 방과후 활동 공간으로 쓰이다가 문화재청에서 등록문화재로 삼으면
서 옥천 지역 교육사를 담은 옥천교육역사관으로 변신했다.

* 죽향초교 소재지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 83 (향수1길 26, ☎ 043-732-0054)
* 옥천역을 나와서 정면으로 보이는 도로(중앙로)로 직진, 도보 30분
* 옥천버스종점에서 수북(석탄), 안남, 보은, 청산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죽향초교 하차
* 옥천교육역사관은 사전에 전화로 예약을 해야 된다. (관람 당일 이용허가 신청서 제출)


▲  죽향리사지 3층석탑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51호

죽향초교 교정 내에 특이하게 생긴 3층석탑이 서 있다. 멋드러진 소나무를 우산으로 삼아 자리
한 이 탑은 죽향리148-1번지 탑선골에 깃든 이름 모를 절터에 있던 것으로 왜정 때 죽향초교로
가져왔다. 탑이 있던 탑선골에는 현재 태고종(太古宗) 사찰인 탑산사가 있는데, 절 주변에서는
고려시대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발굴조사가 절실하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으로 마감한 형태로 3층에는 문비
로 보이는 네모난 창이 있다. 고된 세월의 때가 자욱한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은 층마다 모습
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으나 뒤쪽이 좀 떨어진 상태이며, 탑신과 머리장식은 피부가 하얀 편으
로 근래에 때를 민 듯 보인다.
탑의 모습으로 보아 고려 후기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자세한 정보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지
금은 그저 교정의 장식물로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동심과 함께 하며 나이를 잊고 있을 뿐이다.


▲  옥천성당(沃川聖堂) - 등록문화재 7호

구읍은 아니지만 신읍 북부인 옥천군청 남쪽 언덕에 푸른 피부를 지닌 성당 하나가 눈에 들어
올 것이다. 특이하게도 엷은 파랑색을 띄고 있어 조금은 고색의 냄새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 성당은 1945년 무렵 메리놀외방선교회 소속의 페티프렌(R, Petipren) 신부가 세운 1층짜리
시멘트 벽돌 건물로 지붕은 왕대공형식이 변형된 목재 3각형 지붕틀을 하고 있다. 1966년 종탑
부(鐘塔部)의 부식된 함석마감을 기와로 대체하면서 환기창과 십자가형 첨탑(尖塔)이 철거되었
고, 1991년 10~11월에 증축공사를 벌여 성당 뒷쪽을 트랜셉트<transept, 익랑(翼)>와 제단앱
스<apse, 후진()>를 증축해 직사각형 형식에서 십자가형으로 평면이 바뀌었다. 이후 보수
공사를 벌여 기와지붕 마감재를 함석 마감재로 갈았다.
1940~50년대 현대식 성당 건축물로 이후 성당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전하며, 충북의
유일한 1940년대 성당 건물로 건축사적으로도 가치가 인정되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언덕을 올라서 가까이서 성당을 대하니 밑에서
본 것만큼이나 웅장해 보인다. 성당 내부는 예
배를 보는 너른 공간이 있는데 평상시에도 입
장이 가능하다. (정면 현관이 잠겨 있으면 성
당 옆구리 문을 이용하면 됨)

정지용생가에서 시작된 옥천 나들이는 옥천성
당에서 대단원의 마침표를 찍는다. 구읍에서
둘러본 명소가 더 있으나 내용 분량상 쿨하게
생략했다.

▲  성당 내부

* 옥천성당 소재지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삼양리 158-2 (중앙로 91 ☎ 043-731-9981)
* 옥천역을 나와서 정면으로 보이는 도로(중앙로)로 직진 도보 15분 거리
* 옥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보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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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심장을 거닐다 ~ 덕수궁, 시청 서울광장 주변 둘러보기 (환구단, 대한문, 서울성공회성당...)

 


' 서울 도심의 심장 - 덕수궁, 서울광장 주변 둘러보기 '
(환구단, 대한문, 서울 성공회성당, 구세군 중앙회관)

환구단 석수상
▲  환구단 석수상의 위엄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중심인 시청(市廳) 주변은 늘상 복잡하다. 사
람도 무지 많고, 건물도 많고, 수레들로 늘 도로는 미어터지고, 소음도 즐비하기 때문이다.

1897년 고종(高宗)에 의해 경운궁<慶運宮, 덕수궁(德壽宮)>이 대한제국의 황궁(皇宮)이 되
면서 서울과 천하의 중심지가 된 서울시청 주변에는 덕수궁과 서울도서관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옛 서울시청사, 시청 지하에 자리한 시민의 공간 시민청(市民廳)을 비롯해 시청
앞에 넓게 터를 닦은 서울광장, 무교동(武橋洞)과 다동(茶洞)/북창동(北倉洞) 먹거리 골목,
청계광장, 환구단, 서울시립미술관, 구세군중앙회관, 성공회서울성당, 덕수궁돌담길 등 조
선 중/후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명소가 즐비하다.
기분 같아서는 이들을 모두 걸쭉하게 풀어보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질없는 욕심인지
라 환구단과 대한문, 시청 주변의 근대 건축물 2곳만 풀어본다.


♠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막바지 상징물, 고종이 황제 위에 올라
하늘에 제를 올렸던 환구단(원구단, 圜丘壇) - 사적 157호

▲  환구단의 유일한 건물 황궁우(皇穹宇)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면 키다리 빌딩들 사이로 3층 규모의 각이 진 기와집
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 뒤에는 높은 키를 자랑하는 웨스틴조선호텔(이하 조선호텔)이 우
뚝 서 있어 자세한 사연을 모르면 자칫 그 호텔의 한옥 별관 정도로 오인하기 쉽다. 지금은 비
록 특급호텔 그늘에 가린 빛바랜 기와집이자 도시인들이 잠시 지친 일상을 달래는 공원으로 살
아가고 있지만 그곳이 바로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 황제 위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원구
단(환구단)의 찬란한 흔적으로 종묘(宗廟)에 버금가는 국가의 신성한 공간이었다. 이쯤까지 알
았다면 이 한옥이 180도 달라 보일 것이다.

이곳은 일찍이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의 둘째 공주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사위인 조대림
(趙大臨)이 살던 저택이 있었다. 2째 공주가 산다고 해서 소공주댁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소공
동(小公洞)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 조대림은 개국 공신의 하나인 조준(趙浚)의 아들로 3살 연
상인 경정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했는데, 태종은 이곳에 그들의 집을 지어주었다. 허나 조대림의
후손이 큰 죄를 저지르자 이곳 저택과 토지는 몰수당했다.

1583년(선조 16년) 선조(宣祖)는 이 집을 화려하게 고쳐 당시 총애하던 3째 아들 의안군(義安君
)에게 내렸다. 임진왜란 이후 남별궁(南別宮)으로 이름을 바꾸고 임시로 명나라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조선 후기에 쓰여진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의하면 남별궁에는 명설루(明雪
樓)란 누각이 있고, 그 뒤뜰에 작은 정자와 영험하기로 소문이 높은 돌거북이 있었다고 한다.


▲  환구단 왕년의 모습

이 땅에서 군주가 직접 하늘에 제를 지내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은 고조선부터 시작되었다. 삼한
(三韓)을 거쳐 삼국시대에도 고구려와 백제는 제천의식을 치렀으며, 고려 성종(成宗, 재위 981
~997)은 983년 송(宋)나라에서 원구단<원단(圜壇)> 제도를 수입하여 개경 남대문(南大門) 밖에
원구단을 설치해 직접 제사를 올렸다.
원구단은 중원대륙 왕조에서 시작된 것으로 황제가 하늘에 제를 지내던 제단이다. 황제는 천자
(天子)를 칭했는데, 이는 하늘의 아들이자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란 뜻이다. 그
래서 황제국에서만 원구단을 두어 제천(祭天)을 지냈으며, 제후국(諸侯國)이나 조그만 나라에서
는 감히 원구단을 둘 수 없었다. 허나 고려는 비록 땅은 작았지만 엄연한 황제국이라 원구단을
두었다.

성종 이후 400년 가까이 원구단을 이어오다가 1385년(우왕 11년) 제후국의 예를 따르며 원구단
을 없앴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원(中原)을 차지한 명나라의 눈치를 적지 않게 보
던 시절이었다.
천하가 조선으로 바뀐 이후 1394년(태조 2년) 태조는 동방신 청제(靑帝)에게 제를 지내고자 원
단(圜壇, 원구단)을 설치했고 1419년(세종 1년) 고려의 예에 따라 원단을 운영했다. 허나 1464
년 세조는 나라의 자존심도 내버리고 스스로 제후국의 예로 낮추면서 원단을 폐지하고 만다.

원단이 사라지고 430년이 지난 19세기 후반,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
낀 고종은 경복궁을 내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들어가 1년을 머물렀다. 이 우울한 사건을 이른
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부른다.
1897년 2월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신하들과 독립협회의 권유로 칭제건원(稱帝建元, 황
제를 칭하고 연호를 씀)을 구상하고 그해 9월 21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할 공간으로 덕수궁과 불
과 100m 남짓 거리인 지금의 자리에 원구단을 쌓을 것을 명했다.

원구단은 3층 건물로, 하늘을 본떠 둥그런 모습으로 만들었다. 즉 하늘은 둥그렇고 땅은 네모진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따른 것이다. 지금이야 건물을 6각형으로 짓던 10각형으로 짓던 제한이
없으나 옛날에는 원형(圓形)과 8각형 건물은 오로지 황제국에서만 지을 수 있었으며, 조선 개국
부터 1897년 이전까지는 최대 6각형 건물까지만 지을 수 있었다. <경복궁 향원정(香遠亭)이 6각
형임>

드디어 원구단이 완성되자 즉위 날로 잡은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만조백관(滿朝百官)을 거
닐고 원구단으로 행차했다. 그날 아침, 어느 선왕(先王)이 꿈에 나타나 '예로부터 있어 온 유풍
(遺風)을 바꿔서는 안된다'
라 말했다고 한다. 이상한 꿈에 기분이 썩 좋지 않던 고종은 즉위식
장으로 가기 위해 밖으로 터벅터벅 나오는데, 그를 위해 준비된 40명이 메는 대련(大輦)을 보자
갑자기 뚜껑이 열려 4명이 메는 소련(小輦)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탄다고 소란을 피웠다.

급히 마련된 소련에 오른 고종은 삼색기(三色旗)를 든 전위대(前衛隊)가 앞을 서고 대신들이 말
을 타고 그 뒤를 따랐으며, 조선군이 아닌 왜군이 호위를 맡았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돌연 철
종(哲宗)의 사위이자 내부대신(內部大臣)으로 나중에 친일파로 더러운 뒷끝을 보인 박영효(朴泳
孝)가 말에서 뚝 떨어졌다. 고종은 그 모습을 보고 '불길한 일이야~!' 중얼거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덕수궁에서 원구단 정문에 이르는 연도(輦道)에는 즉위식을 보려는 백성들이 축기(祝旗)를 들며
황제를 환호했다. 드디어 원구단에 이른 고종은 하늘과 땅에 고하는 고천지제(告天地祭)를 지내
고 조선의 시조인 태조 이성계를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라 추존하며, 금빛 찬란한 금의상좌(金
椅上坐)에 오름으로써 성대한 즉위식은 끝났다.
그리고 다음날(13일) 덕수궁 태극전(太極殿, 즉조당)에서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으며 나라 이름
을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연호를 건양(建陽)에서 광무(光武)로 갈면서 자신이 황제에 올랐음
을 만천하에 천명했다. 이 일로 조선 초부터 500년 가까이 이어진 명과 청에 대한 지극한 사대
주의를 청산하고 고려 때와 같은 자주적인 제국으로 잠시나마 거듭나게 된다.


▲  황궁우 남문에서 바라본 황궁우의 위엄
환구단에 서린 엄숙한 기운에 이곳을 찾은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황제가 있던 대한제국 시절에는 오죽했을까?


고종이 원구단에서 왕에서 황제로 업그레이드 된 그 시간 수구파(守舊派) 일부 대신들은 황제즉
위식을 반대하며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지방에선 사대주의 유학에 쩔은 꼴통 유생들이 망
배(望拜)를 하며 통곡하고 있었다. 즉위식을 지켜본 어느 외국인은 '세계 역사상 이토록 즐겁지
않은 황제 즉위식은 없었다'
고 기록했다.

1899년 원구단 옆에 황궁우(皇穹宇)가 완성되자 완공 기념으로 태조고황제의 신위(神位)를 하늘
의 배위(配位)로 올리는 배천대제(配天大祭)를 지냈다. 그래서 천신지기(天神地祇)와 태조의 위
패는 황궁우에 모시고 제사는 원구단에서 지내게 된다. 황궁우의 상량문(上樑文)은 윤용선(尹容
善)이 짓고 서정순(徐正淳)이 글씨를 썼다.

황궁우는 8각으로 쌓은 기단(基壇) 위에 3층으로 세운 8각형 전각으로 남쪽에 건물 내부로 들어
가는 출입구를 두었다. 1층과 2층은 통층으로 되어 있고 그 중앙에 천신과 태조의 위패를 모셨
으며, 3층에는 각 면마다 3개의 창을 냈다. 건물 주위로 왕릉의 돌난간을 두르고 일정한 간격으
로 석대(石臺)를 두어 해태와 비슷한 귀여운 돌짐승을 배치해 건물을 지키도록 했으며, 뜨락 주
변으로 넓게 또다른 돌난간을 둘러 2중의 난간으로 황궁우를 에워싼다. 그외에 어재실(御齋室)
과 향대청(香臺廳), 전사청(典祀廳), 광선문(光宣門),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정문 등의 부
속시설을 갖추었다.


▲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리고자 세운 석고단의 석고(石鼓)
3개의 석고는 천제를 지낼 때 쓰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몸통에 용무늬가 진하게
새겨져 있다. 이 무늬는 조선 후기 조각품 중의 가히 일품으로 평가된다.


1900년 고종은 대신을 이끌고 제천의식을 지내고자 이곳을 찾았다. 원구단의 포장을 두르고 제
사를 올리려는 찰라 갑자기 하얀 포장 틈에서 승려 1명이 불쑥 튀어 나와 '초능력인 천안통(天
眼通)으로 폐하의 앞날을 예언하겠습니다'
외치며 소란을 피운 것이다. 그를 잡아 문초를 해보
니 개운사(開運寺, 서울 안암동)의 승려였다.
승려의 소란에 단단히 뚜껑이 열린 고종은 개화파 이동인(李東仁) 때문에 잠시 허용된 승려의
도성(都城) 출입을 다시 금지시켰다.

1902년 고종 황제의 성덕(聖德)을 찬양하고 즉위 40주년을 경축하고자 3개의 석고를 갖춘 석고
단(石鼓壇)을 세웠다. 이는 주(周)나라 때 선왕(宣王)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북 모양의 돌에 새
겨 10곳에 세웠다는 고사에 따른 것으로 고종의 성덕을 찬양하는 석고문(石鼓文)을 새겼으며,
웅장한 석고각(石鼓閣)을 지어 석고를 보호했다. 그리고 석고단 앞에 광선문을 두었다.


▲  정갈하게 깔린 황궁우 남쪽 산책로 (황궁우 주변 잔디는 모두 제거됨)

이토록 황제가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살던 대한제국의 상징이자 성지(聖地)였던 원구단은 1910
년 이후 나라를 잃으면서 오갈데 없는 시련을 당하게 된다.
1911년 2월, 왜정(倭政)은 원구단의 모든 부지와 건물을 조선총독부 철도국으로 이관시켜 1913
년 원구단을 부셔버리고 그 이듬해 붉은색의 서양식 건물인 총독부 소속 철도호텔을 세워 원구
단의 기를 눌렀다.

왜정은 그걸로도 성이 차질 않는지 1927년에는 총독부 도서관을 짓는다며 석고각의 정문인 광선
문을 남산(南山)에 있던 왜식 사찰 동본원사(東本願寺)로 추방시켰다. (지금은 없음) 또한 1935
년에는 석고각마저 이토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博文寺, 장충동 신라호텔 자리)로 보내 그곳
의 종루(鐘樓)가 되는 치욕을 겪었다.
박문사는 1945년 11월 화재가 나면서 알아서 붕괴되었으나 석고각은 다행히 화재를 면했다. 이
승만 전대통령은 1958년 11월 박문사터를 찾아 석고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이 석
고각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았다. 서울 도심의 심장부에 있음에도 관리 소홀로 귀신도
모르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귀신도 모름)

이렇게 문과 집까지 빼앗긴 석고단 석고는 다행히도 자리를 지켰으나 호텔 뜨락의 장식물이 되
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으며, 환구단 건물은 달랑 황궁우와 정문 만을 남겨 석고와 함께 호텔의
장식용으로 삼았다. 아예 부실려면 다 부시던가. 아니면 모두 유지시키던가 해야되는데 왜정은
일부만 남기는 치졸한 방법(조선 궁궐과 관청, 성곽 대부분이 이런 꼴을 당함)으로 망국의 환구
단을 욕보인 것이다. 이로써 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던 성스러움과 엄숙함은 모래성처럼 휩쓸
려 사라지고 말았다.

해방 이후 철도호텔은 조선호텔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67년 철거하여 18층의 새 호텔을 지었
다. 그 과정에서 어이없게도 환구단의 정문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화유산 보존
과 활용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시절이었다.

2000년 이후 황궁우 주변을 손질하여 문화유산을 겯드린 시민공원(환구단시민공원)으로 꾸몄으
며, 사라진 정문을 우이동(牛耳洞) 그린파크호텔에서 발견하고 2009년 겨울, 소환하여 복원공사
를 벌였다. 그리고 황궁우 주변 잔디를 모두 밀어버리고 문화재 관리인을 두어 매일 망국의 제
단을 지킨다.
비록 옛날의 위엄은 거진 말라버렸지만 삭막한 도심 빌딩숲에서 삶에 지친 도시인들이 잠시 쉬
어가는 공간이자 문화와 역사, 자연의 향기가 깃들여진 도심 속의 소중한 보석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배층의 지엄했던 공간이 백성들의 쉼터로 180도 바뀐 것이다.

▲  황궁우로 인도하는 동쪽 협문

▲  황궁우 서쪽 협문(夾門)

황궁우로 인도하는 협문은 높이가 낮아 들어갈 때 머리를 푹 숙이기 바란다. 그래야 뒷탈이 없
을 것이다. 이렇게 문을 낮게 만든 것은 그 시절 사람들의 키가 작아서가 아니다. 성스러운 공
간이니 엄숙을 지키고 머리를 숙여 예의를 표하라는 뜻이다. 문에 부딪치지 않게 머리를 푹 숙
여 들어서니 마음가짐이 절로 숙연해진다.


▲  삼문(三門)으로 이루어진 황궁우 남문

황궁우 남쪽에는 원구단과 이어지던 문이 있다. 이 문은 벽돌로 만들어 기와를 얹힌 것으로 조
선식 문이라기보다는 명/청나라의 문 이미지가 강하게 풍긴다. 고종과 순종은 원구단에 제를 올
리고 이 문을 통해 황궁우로 들어갔으며, 황제 내외는 당연히 신문(神門)을 상징하는 가운데 문
을 다녔고, 신하와 수행원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왔다. 문 좌우로 돌담이 짧게
나마 복원되어 둘러져 있고, 문 앞에는 돌계단이 장엄하게 깔려져 있다.


▲  황궁우로 오르는 돌계단

돌계단은 궁궐 정전(正殿, 중심 건물)의 계단과 비슷한 품격을 지녔다. 황제 내외가 오르던 가
운데 돌계단인 어도(御道)에는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용무늬와 석수(石獸)상이 새겨져 있다.
계단 주변을 두른 돌난간에는 황궁우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석대(石臺)를 두고 가지각색의 표정
을 지닌 돌짐승을 배치했으며, 서쪽 난간의 돌짐승과 동쪽 난간의 돌짐승은 서로를 뚫어지라 바
라 본다.

계단 앞에는 돌로 만든 참도는 없고 어울리지 않게도 검은 돌과 흰돌이 깔려진 막다른 작은 공
터가 있다. 그 앞에는 바로 하늘 높이 솟은 조선호텔이 길과 시야를 제대로 막고 있어 더 이상
갈 수 없다. 뻥뚫린 문이라고는 하지만 문밖이 휴전선처럼 막혀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원구단이 바로 앞에 있었고 시야도 좋았건만 지금은 엉뚱하게도 호텔의 1,2층 식당이
정면에 바라보이는 것이다. 내가 한참 계단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을 때 깔끔한 차림의 식당 종
업원들이 부지런히 식당을 정리하고 있었다. 신성한 제단의 문이 졸지에 호텔의 고급 식당과 거
기서 밥을 먹는 작자들이나 멀뚱히 바라보는 가련한 처지가 되버린 것이다.


▲  황궁우 남쪽에서 바라본 남문
문 바로 앞에 조선호텔 1,2층 식당이 길과 시야를 가로막는다.
얼핏 보면 식당가로 가는 문으로까지 보일 정도이다.
이것이 바로 망한 제국의 비운이다.


원구단을 제대로 복원하고자 한다면 조선호텔을 확 밀어버려 원구단과 황궁우를 잇는 길과 홍살
문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원구단 복원까지는 바라지도 않음) 비록 부질없는 망국(亡國)
의 제단이지만 왜정이 원구단을 부시고 황궁우 바로 앞에 호텔을 세운 것은 대한제국의 성역(聖
域)인 원구단을 훼손하여 이 땅의 역사와 자존심을 제대로 깔아 뭉개려는 간악한 속셈 때문이다.
비록 왜정 때 만든 호텔은 철거되었다고 해도 그 자리에 계속 호텔이 뿌리를 내려 원구단 자리
를 깔아뭉개고 있으니 왜의 속셈은 여전히 먹혀들고 있는 셈이다. 다소 힘들긴 하겠지만 호텔을
다른데로 옮겨서라도 황궁우가 빌딩 그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났으면 좋겠다. 솔직히 그 호텔만
없어도 남쪽은 확 트이고도 남는다.


▲  2마리의 용이 새겨진 용무늬
 아무리 떡을 주물러 무늬를 새긴다 해도 저처럼 정교하지는 못할 것이다.

▲  일그러진 표정의 돌짐승상
원구단을 철저히 깔아 뭉개고 바로 앞에 호텔을 지은 작자들에 대한 분노의 표정은
아닐까? 부디 저들의 표정이 씨익 밝아지는 그날이 왔으면 좋으련만~~

▲  42년 만에 제자리를 찾은 환구단 정문 (지금은 문 옆에 담장을 두름)

환구단 서쪽(시청 방향)에는 환구단의 정문이 자리해 있다. 이 문은 1897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
래는 황궁우 남쪽 지금의 조선호텔 출입구가 있는 소공로(小公路)에 있었으며, 왜정 때도 운좋
게 살아남았으나 1967년 조선호텔을 새로 만드는 과정에서 철거되어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 이후 2007년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호텔이 리모델링 공사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호텔의 기
와집 정문이 1967년에 사라진 환구단 정문임이 밝혀졌다. 어찌하여 그곳까지 흘러들어갔는지는
속시원한 정보는 없으나 문이 발견되자 정문 복원을 추진하여 타향살이 42년 만인 2009년 지금
의 자리로 이전되어 그해 12월 복원되었다. 원래는 본 위치였던 조선호텔 남쪽 소공로에 갖다두
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곳에는 적당한 공간이 없어서 부득이 환구단 서쪽에 복원한 것이다. 뼈아
픈 세월을 겪고 환구단의 정문으로 귀환의 기쁨을 누렸지만 끝내는 원래 자리로 가지 못한 점이
아쉽다.

환구단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삼문(平三門)으로 제왕이 드나드는 가운데 칸을 넓게 만
들고 좌우 협문을 좁게 만들었다. 기둥 위에는 출목(出目)을 갖춘 2익공식(二翼工式) 공포를 달
았고,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 문양과 봉양문을 장식으로 달아 문의 품격을 드높였으며,
문 좌우에는 아주 짧게나마 담장이 복원되어 있다. 현재 정문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며, 그 좌
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된다.

※ 환구단 찾아가기 (2014년 6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6번 출구를 나오면 더플라자호텔이다. 호텔 앞을 지나면 바로 길 건너
  로 하나은행이 보이는데, 그 왼쪽에 환구단 정문이 있다. 그 정문 옆을 지나거나 하나은행 남
  쪽에서 웨스틴조선호텔로 들어가도 된다.
*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8번 출구에서 시청 방면으로 가다가 롯데호텔을 지나면 왼쪽으로
  조그만 골목이 있다. 그 길로 가면 환구단 황궁우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87 (소공로 112)


♠  덕수궁(경운궁) 주변 둘러보기

▲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大漢門) - 사적 124호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옛날에는 왕족과 귀족
들만 들어갈 수 있던 금문(禁門)이지만 지금은 시대에 맞추어(물론 강제적이긴 하지만) 소정의
입장료만 내면 누구든 들어갈 수 있는 사적공원의 정문으로 안면을 바꾸었다.

환구단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선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앞에 있던
것으로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 그러다가 1906년 지금의 시청앞 광장으로 자리를 옮
기고 이름을 대한문으로 갈았다. 당시 서울광장을 포함한 시청로터리의 3할 정도는 덕수궁의 영
역으로 왜정 때 태평로의 전신(前身)인 태평통(太平通)이 뚫리면서 그 영역이 크게 축소되었으
며, 1968년 태평로(太平路)를 크게 확장하고자 덕수궁 담장을 지금의 위치로 밀어내면서 대한문
도 덩달아 현재의 자리로 물러나 앉게 되었다.
1919년 2월, 망국의 황제 고종(高宗)이 세상을 뜨자 수많은 백성들이 문 앞으로 구름처럼 몰려
와 애도를 표한 현장이기도 하다.

대한문의 현판(懸板)은 당시 한성판윤(漢城判尹, 서울시장) 남정철(南廷哲)이 썼으며, 문의 이
름을 대안(大安)에서 대한(大漢)으로 바꾼 이유는 다음의 2가지 때문이다.
① 대한(大漢)은 큰 하늘(은하수)을 뜻한다. <
이근명(李根命)이 쓴 대한문 상량문(上樑文)>
   즉 하늘과 같은 황제(고종)가 계신 곳이란 뜻이다.
② 전비서승 유시만(前秘書丞 柳時萬)이 고종에게 건의하기를 '안(安)을 한(漢)으로 고치면 국
   조(國祚)가 연창(延昌)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꿨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

그외에 몇 가지 헛소리로 ①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빗대어
'큰 놈이 드나드는 문'이란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漢)에는 놈이라는 뜻도 있다. 예를 들면 치한(癡漢)> ② '
갓을 쓴 여자(安)' 즉 배정자(裵貞子)가 궁궐을 들락거리는 꼴이 상서롭지 못하여 남자를 뜻하
는 한(漢)으로 바꿨다는 말도 있다. <경성 오백년(1926)>, <경성의 광화(1926)>, <조광 1937년
11월호>, <경성과 인천(1929)>
③ 근본과 핏줄이 엉망인 중원대륙 잡종들이 중원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를 상징한다며 빗
대어 말하는 경우도 있다. 대한은 한족(漢族)과 중원을 뜻한데나 뭐래나?
한족 대부분은 수 천년에 걸쳐 대륙을 침범한 온갖 민족들에게 유린을 당하면서 아버지를 모를
정도로 피가 복잡하게 엉킨 섞어찌개 신세가 되었다. (순수 한족은 1% 정도라는 연구 결과도 있
음) 특히나 17세기 이후에는 우리의 친척 민족인 만주족(여진족)이 대륙을 싹 잡아먹으면서 그
나마 남은 명나라 한족들은 영혼과 머리털까지 싹 털렸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양
이(洋夷)와 왜의 침략으로 중원의 잡종들은 다시 한번 비빔밥이 되고 만다.


▲  서울 도심에서 만난 중세유럽식 성당
성공회(聖公會) 서울성당(聖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호


덕수궁의 북쪽에는 옛 국회의사당으로 쓰였던 서울시의회 건물이 있다. 등록문화재 11호로 지정
된 서울시 의회(지정 명칭은 서울 구 국회의사당) 뒤쪽에는 마치 로마 바티칸이나 중세 유럽에
온 듯한 착각을 진하게 풍기는 거대하고 고풍스런 성당이 하나 있다. 바로 성공회서울성당이다.
이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 20세기에 지어진 양식(洋式) 건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힌다.

우리나라에 성공회(聖公會)가 들어온 것은 1890년이다. 1889년 11월 영국의 켄터베리 대주교 벤
슨은 이 땅에 성공회를 침투시키고자 영국 해군의 군목(軍牧)인 코프(C.J. Corfe)를 주한(駐韓)
주교(主敎)로 임명했다. 명을 받은 코프는 2명의 영국 의사와 트롤로프와 워너 두 신부를 이끌
고 1890년 9월 인천에 발을 내렸다.
도착 직후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선교를 벌이고 영국대사관 옆 미국인 선교사 집을 빌려 교회
와 시약소(施藥所)를 열었고, 그 해 12월 21일 드디어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열었다. 그때는 외
국인만 참석했으며, 조선인 하인은 바깥에서 불을 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4일 뒤인 25일
크리스마스 미사 때는 조선인 3명이 '이것들 뭔가?' 기웃거리며 바깥에서 구경만 하고 돌아갔다.

1891년 부활절에 충무로1가(현 대연각빌딩)에 교회를 임시로 마련하여 '부활의 집'이라 불렀다.
이듬해 겨울에는 30여 평의 한옥을 새로 짓고 '강림성당'이라 하였는데, 여전히 서구인과 왜인
중심으로 미사를 열 뿐, 조선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99년 12월 18명의 조선인이
세례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위한 한국어 미사가 거행되기에 이른다.

1904년 초대 주교인 코프(우리 이름으로 고요한)가 귀국하면서 터너(A.B. Turner)가 2대 주교가
되었다. 그는 성공회가 운영하는 병원과 학교, 고아원을 자립시키고 교회마다 부설학교를 세워
실업 교육을 실시하고 교회조직과 토착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열중했다. 또한 YMCA
창립준비 작업에 참여하여 1903년 체육위원회 위원장으로 1906년에는 황성기독청년회 회장이 되
었으며, 우리나라에 축구를 도입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러일전쟁 이후 왜인에 의해 부활의 집이 폐쇄되어 임시로 성베드로병원으로 옮겼으나 신자의 수
가 많아지자 한국어와 영어, 왜어(倭語) 3개 국어로 각각 별도의 장소에 미사를 봤다.


▲  목 아프게 바라본 성공회 서울성당의 지붕

1909년 터너는 영국의 'Morning Calm'이란 선교 잡지에 '서울대성당기금' 모금을 호소했다. 이
듬해 6월, 서울에서 열린 교구협의회에서 성당 건립기금 모금을 결의했으나 그 해 10월 병사하
고 말았다.

1911년 그의 뒤를 이어 트롤로프(M.N. Trollope)가 3대 주교가 되었다. 그는 3개 국어로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진행되는 미사를 한곳으로 통합하고자 성공회성당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영국 왕립건축학회(RIBA) 회원인 딕슨에게 설계를 의뢰했는데, 그는 몇 번을 왔다갔다 한 끝에
성채 분위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선택했다. 허나 조선에서 건축비 조달이 어려워 영국에 도움
을 청했으나 1914년에 터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1914년 왜정은 경성부(京城府) 도시계획에 따라 태평통 거리를 확장시키자 성공회는 그 도로변
에 성당을 짓기로 계획했다. 그리고 1920년 영국에서 지원금을 받아 일단 대한제국의 황족과 귀
족들의 교육 공간인 수학원(修學院, 양이재)을 매입하고, 1922년 9월 24일 성당 공사를 시작해
1926년 5월 2일 173평이 완공되어 '성모마리아와 성니콜라 대성당'이라 이름 지었다. 하지만 그
건 완전한 완공은 아니었다. 총 공사비 3만원 중 절반도 안되는 1만 4천원만 모금되었기 때문이
다. 그래서 우선 원래 설계의 절반 정도만 지은 것이다.

트롤로프는 절반의 건축을 마무리 하며 '예비 대성당'이라 불렀다. 그는 왜국에서 열린 주교회
의에 갔다오다가 돌연 병사하면서 성공회성당은 절반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세월을 지내야
했다.


▲  성공회 서울성당 주교관

그 이후 1993년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자 신자들을 독촉해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던 중, 문화재
위원회로부터 김빠지는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증축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성당 측은 '미완성 건물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설득했으나, 문화재청은 '미완성인
형태로 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변형은 절대 안된다. 사실을 증명할 원 설계도가 없는 한
증축은 꿈도 꾸지 마라'
답을 했다.

허나 다행히도 1993년 7월 이곳을 찾은 영국 관광객이 영국 도서관에 이 성당의 건축/설계도면
이 있다는 낭보를 전했다. 이에 성당 대표들은 서둘러 영국으로 날라가 런던 부근 렉싱통도서관
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복사하여 문화재청에 제출하자 문화재위원들은 증축 허가에 도장
을 쾅 찍어주었다. 그리하여 66억의 거금을 쏟아부어 1994년 5월 27일부터 공사를 시작, 1996년
5월 2일 완공을 보았다. 이로써 트롤로프 주교의 못 다 이룬 꿈이 7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성당은 '十' 모양의 건물로 성채처럼 웅장하고 견고하다. 화강석과 붉은 벽돌로 건물을 치장했
으며 종탑(鐘塔)이 있는 종탑부에는 중앙의 큰 종탑과 그 앞의 작은 종탑이 연결되어 있다. 지
하에는 지하성당이 자리해 있는데 트롤로프의 시신이 이곳 마룻바닥 중앙에 안장되어 있다.

이 성당은 특히 1979년 9월, 10월 유신에 대항하여 '선교 자유를 위한 기도회'가 열린 것을 시
작으로 1987년까지 자유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 기도회와 시위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
명동성당과 더불어 민주성지(民主聖地)로 꼽히며, 성당 주교관에는 '6월 민주항쟁 진원지'란 표
석이 자랑스럽게 자리해 있다.


▲  경운궁 양이재(養怡齋) - 등록문화재 267호

성당 뒤쪽에는 옛 덕수궁(경운궁)의 전각이던 양이재가 있다. 1904~1906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
로 황족과 귀족들의 근대식 교육을 담당하던 수학원(修學院)으로 쓰였다. 이후 왜정에 의해 덕
수궁에서 분리되어 민간에 강제 매각되었는데, 대한성공회가 1920년 이 건물을 물어 이곳으로
옮겼다.
건물이 많이 변형되긴 했으나 기본적인 모습은 잘 남아있으며, 2008년에 복원공사를 벌여 지금
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곳에는 이 건물 말고도 넓게 벌려진 'П' 모양의 한옥이 있는데 이는 주
교관(主敎館)이다. 서양 중세식 성당과 우리의 옛 한옥이 한데 어우러진 조화의 현장으로 1999
년 4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곳을 방문한 바 있다.


▲  성공회 서울성당 앞에 누워있는 명례궁(明禮宮)터 표석

성공회성당 앞에는 명례궁 표석이 누워있다. 명례궁은 조선 후기에 비빈(妃嬪)들의 생활공간으
로 덕수궁 북쪽에 지은 것으로 덕수궁의 일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참고로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사저도 명례궁이라 불렸다.

※ 성공회 서울성당 찾아가기 (2014년 6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3분 (이정표가 있음)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6번 출구에서 시청 방면으로 도보 6분
* 성당 관람 시간 : 매주 화~토요일 오전 11시부터 16시까지, 성당 입구에 안내봉사자가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 (문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 02-730-6611)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홈페이지는 위의 명례궁터 표석 사진을 쿨하게 클릭한다.

◀  구세군 중앙회관(救世軍 中央會館)
 - 서울 지방기념물 20호

서울시립미술관입구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북쪽으로 6~7분 정도 가면 돌담이 끝나기가 무섭
게 르네상스풍의 구세군 중앙회관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겨울마다 빨간색 자선냄비를 전국에
뿌리는 구세군의 본거지로 처음에는 구세군 본관(本館)으로 쓰였으나 근래에 중앙회관으로 이름
을 갈았다.

이 땅의 구세군은 1908년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암 부드(William Booth)의 지시로 영국 선교사
로버트 허가드<R, Hoggard, 조선식 이름 허가두(許加斗)> 정령이 5명을 데리고 조선에 들어오면
서 시작된다. 그들은 1909년 서대문 부근 평동에 영문(營門, 구세군 교회를 우리말로 그리 번역
함)을 세워 영업을 벌였는데, 성공회와 달리 금세 많은 교인들을 모집했다. 그래서 새문안(광화
문 부근)과 광교 부근에 영문을 추가로 지었으며 부산과 평양(平壤) 등 지방까지 영업을 확대하
여 큰 성과를 거둔다.
이처럼 구세군이 짧은 기간에 많은 교인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2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세상을
구한다는 구세군이란 명칭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다른 하나는 영국 선교사들이 군복을 입고
교인이 되는 입대를 권하자 그것이 나라를 구하는 군대인줄 알고 몰려든 것인데, 조선 통역인의
엉뚱한 해석도 크게 한몫했다. 예를 들면 선교사가 영어로 '보혈 속죄','회개 성결','마귀 속박
에서 자유'를 외치면 통역인은 '국권회복','국가독립','왜정 지배에서의 독립'으로 해석했던 것
이다. 그러니 나라를 구하고자 순박했던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것이다.
충청도에서는 구세군에 입대하면 군복과 신식 무기를 준다는 방을 붙어 교인을 모집했으며 그들
을 모아 군사 훈련까지 벌였다.

허가드는 조선에서의 구세군 사업이 영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자 '구세신문(지금의 구세공보)'
을 통해 교인들의 정치 참여를 강력히 경고했으며, 독립군으로 잘못 알고 지원한 이들에게 총
대신 성경을 쥐어주며 구세군의 성격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상당수가 실망을 머금으며 구세군을
떠났다.

1910년 신문로에 한국 본영(本營)을 세우고, 한국인 사관을 양성하는 구세군사관학교로 사용했
으며, 1926년 구세군 만국본영 제2대 사령관 브람웰 부드의 70세 생일을 맞아 한국 구세군이 '
미주 순회단'을 조직해 미국과 캐나다를 돌면서 7만원을 모아 1927년 친일기업인의 모임인 대정
친목회(大正親睦會)의 토지 851평을 구입했다. 이 땅은 원래 덕수궁 영역으로 선원전(璿源殿)의
부속 건물이 있었는데, 오로지 영업확장과 건물 신축에만 관심이 있던 구세군은 1928년 이들 건
물을 싹 밀어버리고 지금의 구세군 중앙회관을 지었다.
이후 건물 뒤쪽을 증축했지만 대체로 원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 정면의 4개의 기둥
과 지붕은 덕수궁 석조전(石造殿)과 비슷하다. 붉은 벽돌로 몸을 치장하여 색다른 분위기를 자
아내며, 중앙현관에는 1926년에 세운 국한문과 영문으로 된 석조기념관이 있고, 1층은 100주년
기념관, 2층은 자료전시실로 쓰인다. 왜정 때 지어진 서울의 근대 건축의 하나로 1995년 구세군
역사 자료를 모아 1층에 구세군 역사박물관을 설치했으며, 2002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구세군 중앙회관(한국 구세군 역사박물관) 찾아가기 (2014년 6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1, 12번 출구), 덕수궁 대한문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도보 11분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6번 출구에서 3분 정도 직진하면 왼쪽에 덕수초교를 경유하는 덕수궁
  길이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 3~4분 정도 가면 구세군 중앙회관이다.
* 관람정보 : 매주 월~금요일 10시부터 17시까지 (입장료는 공짜, 토요일은 관람 요청이 있을
  경우 공개 가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23 (덕수궁길 130 ☎ 02-6364-4086)
* 한국 구세군 역사박물관은 위의 구세군 중앙회관 사진을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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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6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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