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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2.01 서울 도심에 숨겨진 달달한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옥류정, 명륜동 장면가옥) 1
  2. 2017.02.21 북촌한옥마을에서 만난 원조 한류 명소, 계동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3. 2016.02.06 서울 도심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을 거닐다 ~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돌담길, 송시열집터, 북묘터)
  4. 2013.04.11 서울에서 가볼만한 명소 360곳 (2013년 4월 기준)

서울 도심에 숨겨진 달달한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옥류정, 명륜동 장면가옥)

창덕궁 후원 뒷길, 명륜동 장면 가옥



' 서울 도심의 숨겨진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
(후원 돌담길, 명륜동 장면 가옥)
창덕궁 후원 돌담
▲  창덕궁 후원 돌담
 



 

사계절 풍경 중의 오색 단풍이 천하를 곱게 물들이는 늦가을 풍경이 단연 으뜸이 아닐까
싶다. 이런 늦가을은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내기가 너무 아까워 틈이 날 때마다 카메라
를 들고 서울 곳곳을 누비며 뒤안길로 꽁무니를 빼려는 늦가을 풍경을 붙잡는다.
그렇게 뛰어다닌 곳 중에는 나의 즐겨찾기인 북촌(北村)과 서촌(웃대), 은행나무 명소인
성균관(成均館), 그리고 북촌과 성균관을 빠르게 이어주는 창덕궁 후원 뒷길도 있었다.

북촌(북촌한옥마을)은 이미 200번을 넘게 발걸음을 한 곳이지만 복습의 즐거움이 대단하
여 그날 땡기는 곳을 여럿 둘러보고 취운정(翠雲亭)터 주변 감사원로터리에서 동쪽 길로
들어선다. 그 길이 고려사이버대학교 정문 겸 중앙중고등학교 후문으로 차단봉이 내려앉
은 주차장 정산소 직전에 시야가 확트인 조망대가 있다.
그곳은 중앙중학교 바로 뒷쪽(서쪽) 벼랑으로 여기서는 바로 앞에 중앙중고를 비롯해 창
덕궁과 종로구, 중구 지역이 훤히 두 눈에 바라보인다.


▲  창덕궁 후원 뒷길, 중앙중고 뒷쪽으로 이어지는 길 (주차장 정산소)

도로에 차단봉이 설치되어 있고, 얼핏 봐도 길이 막혀 보여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길을 돌리고 싶은 충동이 생길 수 있다. 허나 그것이 이곳의 함정,
차단봉은 고려사이버대학과 중앙중고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차량들의 주차비 징수를 위한
것이라 뚜벅이들은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며 길은 성균관대까지 이어져 있으니 걱정
은 곱게 접어 하늘로 날려보내기 바란다.


▲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뒷쪽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 옥상이 중앙중학교이다. 옥상 오른쪽 너머로 보이는 근대 건축물
은 중앙고등학교 건물이며, 푸른 잔디가 입혀진 운동장 너머로 펼쳐진 너른 숲은 창덕궁
이다. 그런 창덕궁과 중앙중고교 너머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인 서울의 심장부, 종로구와
중구 지역이 시야에 잡힌다.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 ~
창덕궁(昌德宮)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  중앙중고 후문

주차장 정산소를 지나면 고려사이버대학교와 중앙중고로 내려가는 길(후문)이 나온다. 이들은
모두 고려대 계열로 중앙고교 북쪽에 새롭게 중앙중학교를 만들고 그 뒷쪽 언덕에 고려사이버
대학교를 만들면서 중/고/사이버대학이 한 자리에 있게 되었다.

중앙중고를 놔두고 계속 직진하면 길은 서서히 경사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기와가 얹혀진 창
덕궁 돌담이 궁궐 돌담의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며 오른쪽으로 따라붙는다. 이 돌담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나란히 제 갈 길을 가는데, 동쪽으로 갈수록 돌담의 해발
높이도 높아진다. 또한 돌담 너머로 삼삼하게 우거진 창덕궁 후원이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면
서 도심의 속된 기운을 정화시킨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고려사이버대학 북쪽)를 지나면 길이 얼핏 끊긴 듯 보여 '넘어가는 길이
과연 있을까??'
주저하게 된다. 허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길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
이다.


▲  층층이 이어진 창덕궁 후원 돌담 ▼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궐 후원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창덕궁 후원을 속세로부터 열심히
가리고자 지형을 이용하여 높이 돌담을 둘렀다. 지형이 낮은 곳은 돌담 너머로 후원의 속살이
일부 보이기도 하나 보이는 것은 그저 숲밖에 없다. 참으로 고약했던 왜정(倭政)에 의해 고의
적으로 비원(秘苑)이라 놀림을 받았던 창덕궁 후원, 그는 후원<또는 금원(禁苑), 북원(北苑)>
이지 절대 비원이 아니다.


▲  북악산(백악산)의 물을 받아들이는 후원 수구문(水口門)

창덕궁 후원에는 연못이 참 많다. 그 연못을 살찌우는 물은 바로 북악산(백악산)이 베푼 것으
로 그가 내린 물이 이 수구문을 거쳐 후원으로 들어가 후원 곳곳에 물을 공급한다.


▲  늦가을에 잠긴 후원 뒷길 (너른 공터 직전)

▲  후원 뒷길의 전환점(너른 공터) - 여기서부터 좁은 산길로 변한다.

포장길로 된 뒷길은 고개 정상부 너른 공터에서 끝이 난다. 여기서 길은 산길로 180도 돌변하
며, 차량은 더 이상 바퀴를 들일 수 없다.
너른 공터를 지나면 근래 지은 나무데크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길은 2개로 갈리
는데, 오른쪽은 후원 돌담을 따라 성균관대 내부로 이어지며, 왼쪽은 옥류정과 성대후문 마을
버스 종점으로 이어진다.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은 북촌 권역에서 성균관대, 대학로를 빠르게 이어주는 도심의
상큼한 뒷길로 아는 이가 거의 없어 사람들의 왕래가 적고 한적해서 좋다. 하여 내가 좋아하
는 길의 하나이기도 한데 다만 가로등 시설이 부족하여 햇님이 퇴근한 이후에는 꽤 어둑어둑
하니 통행에 조금 주의가 필요하다.


▲  나무데크 계단길 - 너른 공터를 지나 저 계단을 오르면 된다.
(어차피 오르는 길도 하나 밖에 없음)

▲  옥류정으로 향하는 짧은 산길과 계곡

옥류정으로 인도하는 짧은 산길은 경사가 느긋하다. 그 옆에는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조그만
계곡이 있는데, 그는 북악산(백악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로 적지 않게 인공이 가해진 점이 다
소 옥의 티이다.


▲  옥류정 산길과 계곡

▲  현대적 정자 스타일로 지어진 옥류정(玉流亭)

맑은 물이 흐른다는 뜻의 옥류정, 그 어여쁜 이름 마냥 후원 뒷쪽에 숨겨진 늙은 경승지로 착
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1956년에 지어진 8각형 모습의 현대식 정자(亭子)이다. 그래도 후원 뒤
쪽에 자리한 위치상 내가 알지 못하는 오래된 사연을 머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런 것은 없
었다. 위치와 정자의 이름이 나그네의 마음을 잠시 설레게 만든 것이다.

이곳은 북악산(백악산) 와룡고개(와룡산) 밑으로 바로 동쪽 언덕에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이
있으며, 북쪽 높은 곳에는 와룡공원길이 흘러간다. 북악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옥류정에서 잠
시 묻혔다가 남쪽 연못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옥류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북악
산의 맑은 계곡이 옆구리에 흘러서 붙여진 이름 같기도 하고, 계곡이 후원 옥류천(玉流川)과
도 살짝 이어져있어 그렇게 붙여진 것 같기도 하다. 정자 정면에는 푸른 색깔의 옥류정 현판
이 걸려있는데, 글씨에 생명을 단단히 불어넣은 듯, 아주 명필급이다.

옥류정은 숲에 둘러싸인 구석이라 늘 그늘이 머물고 있으며, 주변 경치는 좋지만 와룡고개가
바로 뒷쪽이라 차량들의 굉음이 수시로 두 귀를 때린다. 그래도 숲바람과 산바람이 교차하는
곳이라 한여름에는 더위를 잊기에 좋다. (정자 동쪽에 성대후문 종점으로 가는 길이 있음)


▲  계곡을 막아서 만든 옥류정 연못

옥류정 앞에는 북악산 물을 머금은 조그만 연못이 닦여져 있다. 2015년에 조성된 것으로 옥류
정에서 잠시 묻힌 계곡은 여기서 다시 속살을 드러내며 졸졸졸~♪ 밑으로 흘러가는데 연못 주
변에는 나무에게 버림 받은 나뭇잎들이 낙엽이란 우울한 존재가 되어 귀를 접고 쓸쓸히 누워
들 있다. 연못은 바로 그들의 인생을 처리해주는 블랙홀인 모양이다.


▲  옥류정에서 창덕궁 후원 뒷길로 내려가는 길
이렇게 보니 정말 첩첩한 산주름 속에 깊숙하게 묻힌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서울 도심 한복판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  다시 창덕궁 후원 뒷길로 (직진하면 돌담길, 중간에 왼쪽으로 가면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 오른쪽은 중앙중고와 북촌 방향)

▲  창덕궁 후원 돌담길 (돌담과 만나기 10m 전)

창덕궁 후원 뒷길은 중앙중고 후문(고려사이버대학교)에서 후원 뒷쪽 돌담길을 따라 성균관대
로 이어지는 1리 남짓의 짧은 고갯길이다. 이곳은 감사원에서 성북동(城北洞)을 이어주는 와
룡고개(와룡공원) 밑부분인데, 봄과 늦가을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달달하게 그려진 수채화처
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돌담 너머로 후원의 청정한 숲이 펼쳐져 있고 돌
담길 주변 역시 나무들이 가득하니 그 아름다움의 농도는 더욱 짙어질 수 밖에 없다.


▲  후원 뒷길 고개
이곳은 창덕궁 후원의 가장 최북단이자 제일 높은 곳으로 여기서는
돌담을 손으로 더듬으며 갈 수 있다.

▲  후원 뒷길 고개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창덕궁의 뒷통수인 후원 뒷길 고개는 돌담 바로 옆구리라 돌담을 만지면서 갈 수 있다. 그 고
개를 넘으면 급하게 펼쳐진 울퉁불퉁한 산길이 나오고, 돌담 너머로 도심의 허파인 창덕궁 후
원이 속살을 비춘다. 숲 너머 동쪽에는 바로 성균관대 건물이 보이는데, 그 산길을 내려가면
돌담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성균관대 서쪽 부분인 법학관과 주차장, 대운동장에 이른다.
서울에 있는 궁궐 돌담길 중 가장 호젓하고 담백한 길을 꼽으라면 나는 이곳을 추천하고 싶다
. 그만큼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길이다.


▲  성균관대로 내려가는 후원 뒷길
산길을 넘어서 들어간 대학교는 이곳이 처음이다. 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성대 교정으로 따로 문이나 철조망은 없다. 그냥 들어가면 된다.

▲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 평탄한 길이 부드럽게 펼쳐진다.
이곳은 성균관대에서 '사유(思惟)의 길'로 삼고 있다.

▲  창덕궁 후원 뒷길의 동쪽 '사유의 길'

후원 뒷길이 숲이 삼삼하다보니 성균관대에서 뒷길의 교내 구간을 '사유의 길'로 삼았다. 번
잡함이 크게 덜한 후원 숲길에서 책도 보고 명상도 즐기며 속세(俗世)의 온갖 유혹에 취약한
자신의 머리와 정신을 가다듬으라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사유의 길이란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숲도 짙고 산바람도 그윽하여 옛날 선비들 같았으면 공
부를 한다며 정자 하나를 짓고도 남았을 것이다.


▲  성대로 넘어온 후원 돌담 (돌담 안쪽은 창덕궁 후원)

▲  잊혀진 제국의 궁궐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후원 돌담

▲  후원 뒷길을 마무리 짓다.

창덕궁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가리고 있는 후원 돌담은 새로 손질한 부분이 여기저기 있어 옛
날 것과 어색한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 적지 않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후원 북부는 후원 특별 관람 때나 들어갈 수 있는 아주 비싼 곳으로 대운
동장 주차장에서 후원의 북쪽을 이루고 있는 태극정(太極亭) 구역이 시야에 들어오고,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도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에 이르면 지금까지 사각사각 밟고 지나간 흙길과 바위길이 밋밋한 포장
길로 바뀌며, 후원 돌담과도 바다 너머의 섬을 보듯 멀어져 간다. 게다가 주차장부터 학교 돌
담과 철책이 생기면서 둘 사이에 깊숙한 틈이 생기는데, 이는 성균관대가 교내를 넓히면서 후
원 돌담보다 높게 또는 비슷한 높이로 터를 다지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다.
비슷한 높이인 경우에는 후원 돌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돌담의 북쪽 언덕을 끊어 멀리서 보
게끔 했으며, 둘 사이에 생긴 틈은 마치 휴전선이나 성곽(城郭) 주위에 두룬 해자를 보는 듯
하다.


▲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北墻門)

북장문은 후원 북쪽에서 유일하게 속세와 이어지는 문으로 보통 궁궐의 문은 암문(暗門)이라
할지라도 팔작지붕을 얹혀 문의 형식을 갖추는데 반해 이곳은 여닫는 문짝을 만든 것이 고작
이다.

북장문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막바지 현장으로 정변 3일 째(양력 1884년 12월 6일)에 창덕
궁에서 고종(高宗)을 호위하며 머물던 개화당(開化黨) 패거리와 왜군은 명성황후(明成皇后)가
급히 소환한 청군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후원을 거쳐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왜국공사는 꼬랑지를 내리며 군사를 이끌고 급히 후원 뒷길로 도망쳤고, 김옥균(金玉均)과 박
영효(朴泳孝), 서재필(徐載弼)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들을 따라갔다. 단 홍영식(洪英植)과
박영교, 그들을 따르는 군인 7명은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北廟)로 들어갔으나 결국 청군에게
살해되고 만다.

* 창덕궁 후원 뒷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명륜동/와룡동



 

♠  현대사의 살아있는 현장, 명륜동 장면(張勉) 가옥
- 국가 등록문화재 357호

▲  장면 가옥 외경

명륜동(明倫洞)에 자리한 장면 가옥(장면총리가옥)은 서울에 서려있는 현대사의 주요 현장의
하나이다. 바로 제1,2공화국 시절 정치/외교가로 활동했던 장면(장면 총리, 장면 박사라고 많
이 불림)이 살던 집으로 속세의 때가 조금씩 묻어가던 고등학교 시절 4.19와 한 덩어리로 국
사 관련 시험에 단골로 등장했던 인물인데, 이름도 참 외우기 쉽다. 그래도 익히기가 어렵다
면 대중 음식의 하나인 짜장면이나 영화의 한 장면이란 식으로 외우면 연상도 쉽게 된다.

이 집은 장면이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 시절에 지은 것으로 건축가 김정희가 한옥과 양옥의
장점, 그리고 약간의 왜식(倭式)까지 절충하여 지은 개량 한옥의 일종이다. 1930~40년대 서울
중산층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서울 종로구에서 인수하여 가옥 손질을 거쳐 2012
년 12월 실외가 우선 개방되었다.
이후 건물 내부를 손질하고 장면의 유물 중 괜찮은 것을 선별하여 2013년 4월 19일 사랑채와
안채 내부가 장면기념관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날짜를 4월 19일로 잡은 것은 이승
만의 자유당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4.19혁명과 장면의 정치 개혁 의지를 기리
고자 함이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 관람료 없음)


▲  활짝 열린 장면 가옥 대문


▲  경호원동과 나무 1그루


▲  장면의 흉상(胸像)
▼  안채 동쪽에 자리한 장식용 장독대

돌로 1m 높이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다져 들어앉은 장면 가옥은 안채(92.56㎡)를 중심
으로 사랑채(56.2㎡)와 경호원실(9.92㎡), 수행원실(6.61㎡) 등 4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고위관료까지 지낸 사람이라 집이 좀 클 줄 알았더니만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촐해 졸
부들의 고래등 저택에 비해 거부감도 별로 없고 정감도 많이 간다. <같은 시대를 누볐던 자유
당의 우두머리 이기붕(李起鵬)의 집은 저택이었음>
가옥을 둘러싼 담장은 남쪽과 서쪽은 하얀 피부, 동쪽은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담장
의 높이는 2m 정도이다. 가옥 서쪽에는 키다리 빌라가 자리해 가옥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동
쪽에는 2차선 길인 혜화로가 나있다.

가옥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대문은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문으로 개방시간에 한해
문짝 하나를 열어둔다. 문의 높이는 담장만큼 낮으며, 문 우측 기둥에는 주소가 쓰인 패가 있
고, 좌측 기둥에는 집주인의 이름이 적힌 명패가 이 집의 주인을 알려준다. 명패에는 5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옛 주인 장면의 이름 2자가 한자로 쓰여 있어 문을 두드리면 (초인종은 없
음) 그 장면이 스르륵 달려 나와 우리를 맞이해줄 것 같은 기분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담장이 집 안채를 가리며 길을 막아 서는데, 여기서 가족과 친척, 친분
이 두터운 사람들은 왼쪽으로, 언론기자와 기타 손님은 오른쪽으로 갔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사랑채에 딸린 대기실이 나오며,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옆칸에 있는 응접실에서 장면을 접견
했다.
대문에서 왼쪽으로 가면 조그만 경호원동과 앞마당으로 이어진다. 경호원동은 장면의 경호원
들이 대기하던 공간으로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안에 3㎡ 정도의 좁은 지하가 있다. 현재는
이곳을 지키는 관리인이 머물고 있으며, 건물 우측에는 2012년에 조성된 장면의 흉상이 서 있
고, 좌측에는 장면이 심었다고 전하는 높이 7~8m의 작은 나무 1그루가 주인이 가고 없는 집뜨
락에 조촐히 그늘을 드리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장면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운석 장면(雲石 張勉. 1899~1966)의 간략한 생애
장면은 옥산(玉山) 장씨로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에서 장기빈(張箕彬)의 맏아들로 태
어났다. 장기빈은 왜정 때 부산세관장을 지낸 관리로 집안 살림은 넉넉한 편이었다.
8살에 인천성당이 운영하는 박문학교(博文學校)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배웠고, 1917년에 수
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 농생대의 전신)를 졸업, 1919년 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학과를 수석
으로 마쳤다.
이후 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자격으로 미국 맨해튼 카톨릭대 문과에 들어가 1925년에 졸업했으
며, 로마교황청에서 열린 '한국79위 순교복자 시복식(諡福式)'에 참석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근무하다가 동성상업학교에 들어가 교편을 잡았고, 1936년 그곳의 교장
이 되었다. 또한 계성학교의 교장까지 겸임해 1945년까지 교육계에서 일했고, 천주교청년회연
합회 회장이 되어 '구도자의 길','조선천주공교회약사' 등을 출간했다.

해방이 되자 1946년 정계에 진출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과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했으
며, 우익의 일원이 되어 좌익세력과 싸웠다. 또한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정책 수립 등의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48년 서울 종로을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고, 그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
에 조병옥(趙炳玉)과 함께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특사로 로마교황청을 방문했고 귀국 길에 미국 맨
해튼대학에 들려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가 되어 2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으며, 6.25전쟁이 터지자 미국을 설
득해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1951년 국무총리로 임명되면서 귀국했으나 바로 이듬해 물
러났으며, 야당의 일원이 되어 이승만/이기붕의 자유당(自由黨) 독재정권과 싸우기 시작했다.
1955년 신익희(申翼熙), 조병옥과 민주당을 결성해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6년 대선 때 신익
희가 대통령 후보에, 장면이 부통령(副統領) 후보로 나가 정권교체를 노렸다. 이때 자유당은
8년 이상 대통령을 해먹고 있는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야망이 쓸데없이 높던 이
기붕이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백성들의 지지에 힘입어 열심히 유세를 벌이던 신익희는 호남으로 내려가다가 열차 안에서 돌
연 급사를 하면서 정권교체의 꿈은 물 건너갔다. 다행히 신익희 사망에 따른 동정표로 장면이
이기붕을 여유롭게 따돌리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6년 9월 민주당전당대회에서 자유당 정치깡패인 최훈과 김상붕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다행
히 경상으로 그쳤으며, 1957년에 미국 시튼홀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59년 민주
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대선 때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유세 도중 위암으로 사망했으며, 장면은 또
다시 부통령 후보에 나섰다. 그리고 그 유명한 3.15부정선거로 이기붕이 억지로 당선되자 뿔
이 단단히 난 민중들이 봉기하여 마산(창원)과 대구에서 독재정권/부정선거 반대 시위가 일어
났고, 서울에서 4.19가 터지면서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은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

4.19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의 민주당은 의원내각제(議院內閣制)를 실시했고, 장면은 제5
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됨과 동시에 제2공화국 국무총리가 되어 국정을 이끌었다. 하지만 장면
정권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백성들이 피를 흘리며 내려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욕
심과 이해관계에 얽혀 혼란에 빠졌다. 그 와중에 민주당의 구파가 떨어져나가 신민당을 창당
했으며, 그렇게 1년을 쓸데없이 소비하다가 1961년 5.16으로 장면 내각은 싹 털리고 만다.

5.16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은 장면을 연금시켰고, 이주당(二主黨)사건인 반혁명음모사건에 연
루시켜 징역 10년을 선고했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이후 5년간 집에 틀어박혀 신앙생활
에 몰두하다가 1966년 6월 4일 간염으로 67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국민장(國民葬
)으로 치뤄졌으며, 경기도 포천 카톨릭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면은 미국 대사로 2년 가량 외국에 나가있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 집에서 살았다. 그
러니 거의 27년 동안 살았던 셈이다. 집 구석구석 그의 손때가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가
심은 나무가 어엿하게 성장해 주인의 빈자리를 지킨다. 이렇게 보면 장면이 꽤 옛날 인물처럼
비춰지기도 하겠지만 그는 나와 아주 가까운 시대의 인물이다. 그가 가고 10여 년 뒤에 내가
이 세상에 나왔고, 내 부모 세대들은 장면의 모습과 이름 2자를 모두 기억하기 때문이다.


▲  앞마당에 있는 작두펌프(우물펌프)

그리 넓지 않은 앞마당에는 소나무 1그루와 작두펌프가 자리하고 있다. 작두펌프는 우물펌프,
옛날펌프, 무쇠펌프, 작두샘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1980년대까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기구였다.
이 기구는 장면과 그의 가솔(家率)들, 경호원들이 쓰던 것으로 지하에 관정(管井)을 묻고 지
하수를 끌어올리는 공기압의 원리를 이용한 수동식 펌프이다. 패킹이 낡거나 펌프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공기의 압이 빠져 지하수를 끌어올릴 수 없게 된다. 이때 정신줄을 놓은 펌
프를 깨우고자 붓는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  장면 가옥 안채 (장면기념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안채는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장면 가족의 생활공간이다. 장면기념관의
중심으로 거실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 우측에 건너방이 있고, 안방 북쪽에는 부
엌, 건너방 북쪽에는 욕실이 있다. 그리고 대청마루 북쪽과 남쪽에는 미닫이문을 냈다.

대청마루 남쪽 미닫이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되는데, 실내화가 준비되어 있어 그걸 신고
움직이면 된다. 대청마루와 안방, 건너방에는 장면의 체취가 서린 온갖 문서와 사진,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문서 같은 경우 상당수가 복제품이라 아쉬움을 준다. 장면 외에도 그의 부
인 김옥윤이 쓰던 유품도 같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 정치인 가족의 생활상을 아련히 알려준다.


▲  장면 가옥 안채 대청마루 (오른쪽이 사랑방, 북쪽이 부엌)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사랑방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건너방

▲  1948년 9월 6일에 발급된 대한민국 외교관 1호 여권 (복제품)

이 여권은 1948년에 '유엔 파견 대한민국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부여 받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외교관 여권이다. (복제품이란 것은 함정)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교관이기도 하며,
미국과 프랑스 등의 입국사증이 찍혀 있다.


▲  유엔총회 연설문(복제품)과 바티칸 교황청 훈장(오른쪽)

유엔총회 연설문은 1949년 12월 7일,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대한민국 독립 승인을 요구하는 영
어 연설문의 한글 번역본이다. (장면이 직접 썼음) 연설 직후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
로 한국 독립 승인이 통과되었다.


▲  영어로 쓰인 유엔총회 대한민국 승인서 (복제품)
유엔에서 찬성 48표를 얻어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은 그 순간을 기록한 문서로
미국 국무부 고문 달레스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다.

▲  바티칸 교황청에서 준 훈장의 위엄 (진품임)
1951년 5월 22일 국무총리 재직 중에 교황청에서 받은 훈장이다.

▲  재외국인등록증 (복제품)
장면의 50대 모습 사진이 담긴 문서로 주미국대사 재직시(1949년 10월 16일)에
발급 받은 것이다. 지금과 달리 한자가 꽤 많으며, 양력 대신 단기(檀紀)를
쓰고 있는 점도 무척 이채롭다.

▲  주미대사 신임장 (복제품)
1949년 3월 25일 장면 초대 대한민국 주미특명 전권대사가 당시 미국 대통령인
트루먼에게 제정한 신임장(信任狀)이다. 이 문서에도 단기가 쓰여 있다.

▲  장면이 사용했던 영문 타자기

▲  장면이 번역했던 천주교 서적들

2년 동안 주미대사를 지냈을 때 쓰던 타자기이
다. 지금이야 한가롭게 있지만 그 시절에는 정
말 불이 날 정도로 바쁜 시간을 지냈다.

왼쪽은 제임스 기본스가 1876년에 저술한
'교부들의 신앙'으로 장면이 1944년에
번역판을 내놓았다.


▲  장면이 사용했던 기도서와 십자가 목걸이

1921년 성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한 후 얻은 것으로 장면은 이 책을 늘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 전한다. 기도서 위에 십자가 목걸이 역시 그가 기도를 할 때 쓰던 것이다.


▲  장면이 썼던 실크모자 (오른쪽에 실크모자를 쓴 장면의 사진이 있음)

장면이 1949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 취임식 때 썼던 모자이다. 그저 말로만 듣고 바보상자에서
만 보던 그 실크모자를 여기서 처음 그 실물을 접하니 모자가 은근 멋있어 보인다.


▲  무늬만 남은 안채 부엌

안채 부엌은 전통 부엌 양식에 서양식이 더해진 형태로 타일을 깐 아궁이와 부엌 벽, 그리고
그릇과 음식을 씻는 일종의 싱크대까지 갖추고 있다.
장면과 그의 가솔, 경호원들은 이곳에서 만들어진 밥과 온갖 음식의 힘으로 혼란했던 20세기
중반을 살아갔다. 허나 장면 가족이 집을 떠난 이후, 그 껍데기만 남아 모락모락 밥 연기와
국 연기를 뿜어내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장면이 부통령 당선 기념으로 받은 놋그릇(왼쪽)과
바깥 활동 때 늘 가지고 다니던 동그란 도시락통(오른쪽)

▲  장면이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했던 그 비싼 신선로(神仙爐)
장면 일가의 넉넉했던 형편을 보여주는 산증인이다.

▲  장면, 김옥윤 부부의 약력과 기도문이 담긴 카드,
김옥윤이 사용했던 옥비녀와 옥반지

▲  김옥윤이 사용했던 안경과 반짇고리, 그리고 이쁜 꽃신
바느질을 하는 김옥윤 여사의 사진도 같이 있다. 조그만 꽃신에서는 그의
파릇파릇했던 젊은 시절의 향수가 불어오는 듯 하다.

▲  장면이 쓰던 돋보기와 명함, 그의 싸인, 손목시계, 만년필, 수표책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장면의 조촐한 쉼터, 안락의자와 거북선마크 베게

거북선이 그려진 노란색 베게는 그가 애용했던 물건으로 안락의자와 함께 그의 편안한 휴식과
숙면을 인도해주었다. 국정으로 늘 잠이 부족했던 그에게 저 의자와 베게는 소중한 쉼터였으
리라.


▲  3대가 다 모인 장면 가족 사진

▲  장면 가옥 사랑채

앞마당 동쪽에 자리한 사랑채는 사랑방과 응접실, 대기실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는 장면이
손님을 접대하거나, 민주당과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회의나 다과를 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던
그의 공무(公務) 공간으로 현재는 장면기념관의 일부로 그의 유품과 여러 사진이 전시되어 있
다. (내부 관람 가능)


▲  1956년 부통령 선거 때 쓰인 장면 포스터와 약력

그 당시 민주당 구호는 이랬다. '배고파서 못살겠다. 죽기 전에 갈아보자', 그에 대응하는 자
유당 떨거지들의 구호는 '갈아봤자 별 수 없다. 사탕발림에 속지 말자'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가 과로로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정권 교체는 이루지 못했지만, 장면이
이기붕을 여유있게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런데로 체면은 세웠다.


▲  장면이 4대 부통령 시절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그에 대한
이승만의 답신(복제품)

▲  1956년 장면을 저격했던 최훈과 김상붕이 장면에게 보낸
참회의 편지(복제품)

장면은 1956년 자유당에서 사주한 최훈과 김상붕의 총격으로 왼쪽 손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
들은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국무총리가 된 장면은 그들의 감형을 주선하여 사형은 면하게 했는
데, 최훈은 1964년 7월 27일 장면에게 1통의 봉함 엽서를 보내 자신의 심경을 드러냈다.

'인간에게 가장 귀하다는 생명마저 빼앗겼던 저희들은 4.19가 일어난 그해 10월 관대하신 은
총으로 생명이 부활되었고, 그해 12월 친히 오셔서 주신 따뜻한 털내의로 몸을 녹이며 살아온
불초 소인은 하루라도 그 은총을 잊을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조차 효도한 기억이 없는 제가
왜 조석으로 박사님의 온정을 못잊어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박사님께서 원수를 사랑하
라는 예수의 사상을 친히 시범하신 사도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탓입니다'


장면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저격범까지 관용의 정신을 베풀어 살려주는 등, 그의 넉넉한 마음
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  왼쪽은 1960년 8월 27일 민의원에서 열린 제2공화국 국무총리 취임사에서
장면이 발표한 6개항의 시정 방침을 밝힌 시정 연설문(복제품)
오른쪽은 5.16쿠데타 이후 나온 제1차 경제계발 5개년 계획서(복제품)

▲  손님을 맞이했던 사랑채 응접실 (왼쪽 에어컨은 2012년 이후에 설치됨)

▲  장면이 주로 머물렀던 사랑채 사랑방 (이불장, 가구 등이 있음)

▲  1999년 8월 13일, 장면에게 추서된 대한민국 건국훈장(복제품)

▲  자신의 일대기를 직접 저술한 친필 연보(복제품)
어린 시절부터 1965년까지 자신의 일생을 친필로 정리한 일기이다.
자신의 가족과 국내에서의 행적은 물론 자신이 직접 겪은
국제 정세도 소상히 기재해 놓았다.

▲  한자로 쓰인 자신의 좌우명(왼쪽, 복제품) 그리고 장면 사망 8달 뒤
(1967년 2월)에 발간된 그의 기고문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  문과 복도로 이어진 사랑채 내부


* 장면 가옥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 36-1 (혜화로5길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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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한옥마을에서 만난 원조 한류 명소, 계동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 서울 도심의 꿀단지, 북촌 둘러보기 '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중앙고등학교 본관
▲  중앙고등학교 본관


 

봄이 한참 무르익은 5월의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와 북촌(北村, 북촌한옥마을)을 찾았다.
북촌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로 2010년부터 퐁당퐁당 빠진 이래 매년 여러 번 발걸음을
하고 있다. 이미 그곳의 적지 않은 명소와 골목길, 박물관 등과 인연을 지어 이제는 지
겨울 법도 하겠지만 자꾸 손과 발, 마음이 가는 곳이 또한 북촌이다. 게다가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땡기면 언제든지 1시간 이내로 접근할 수 있다. 자고로 좋은 곳
은 1번이 아닌 두고두고 가는 것이 진리라고 했다.

이번 북촌 산책은 한류 명소로 인기가 대단했던 계동(桂洞) 중앙고등학교를 찾았다. 그
곳 외에도 여러 명소와 다시 인연을 지었으나 본글에서는 중앙고교 일대와 그 옆구리에
자리한 창덕궁 신선원전만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로 북촌은 청계천 이북이자 창덕궁(昌德宮)과 경복궁(景福宮) 사이 동네를 일컫는다.
(요즘은 범위가 축소되어 안국역 이북, 창덕궁과 경복궁 중간 동네를 일컬음) 만약 자신
이 북촌 초보라면 제일 먼저 북촌문화센터(☎ 02-2133-1371)로 달려가자. 거기서 북촌의
기본 지식과 안내 자료를 쥐어들고 북촌 산책을 시작하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정독도서관 입구와 재동초교 앞에도 북촌관광안내소가 있음)


 

♠  오래된 근대 건축물을 간직한 독립운동의 현장이자
북촌 속의 한류관광지 -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

▲  중앙고등학교 본관 - 사적 281호

북촌의 주요 간선 골목길인 계동길의 북쪽 끝에는 서울 도심권 명문학교의 하나이자 오랜 역사
를 자랑하는 중앙고등학교(중앙중고교)가 자리해 있다.
보통 본인의 답사기에는 학교나 도서관이 거의 나오질 않는다. 설령 나온다고 해도 그 안에 오
래되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볼거리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이며, 그 볼거리만 중점적으로 다룰 뿐
학교 부분은 간략하게 처리하거나 쿨하게 빼버린다. 허나 중앙고등학교는 사정이 좀 다르다.

이곳은 무려 100년 이상 숙성된 오래된 학교로 왜정(倭政)과 1940~1970년대에 많은 유명인사를
배출했던 현장이다. 또한 사적으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을 3개씩이나 간직하고 있고, 비록 지금
은 없지만 인문학박물관이란 박물관까지 보유하고 있었으며, 창덕궁의 통제구역인 신선원전(新
璿源殿)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21세기 이후 전파를 타고 한류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북촌에서 통과의례로 거쳐야 되는 명소의 하나가 되었다.

계동길의 북쪽 끝인 중앙고 교문(校門)은 언덕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인왕산을 가리고 선 높은
고개를 넘으면 북촌로로 이어지며, 그 중간에 북촌3경이 있는 가회동11번지로 이어지는 조그만
골목길이 왼쪽으로 가늘게 손을 내밀고 있다. 동쪽에도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높은 고개가 버티
고 있는데, 그 고개를 넘으면 원서동(苑西洞)과 창덕궁길로 이어진다. 
 
교문 안쪽에는 500년 묵은 큼직한 은행나무가 각박한 언덕길에 그늘을 드리워준다. 나무 옆에
는 1941년에 지어진 수위실이 있으며, 언덕진 길을 오르면 중앙고등학교 본관이 수면 위로 서
서히 떠오르는 해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짧은 오르막을 다 오르면 정면에 본관, 서쪽에는 원파도서관, 동쪽 높은 곳에는 강당이 있다.
보통 교문을 들어서면 학교 건물 사이로 운동장이 있기 마련이나 여기는 흙먼지가 이는 운동
장 대신 콘크리트를 깐 넓은 공간이 본관 앞에 닦여져 있다. 그리고 그 공간 복판에 동그랗게
자리를 다져 주변에 얕게 난간석을 둘렀으며, 안에는 잔디를 깔아 그 핵심부에 학교를 일으켜
세운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의 동상을 세웠다.
또한 본관의 모습이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본관과 많이도 닮았고, 본관 주변 풍경은 여기가
고등학교가 아닌 고려대나 서양의 명문 대학교에 들어선 기분을 진하게 들게 만든다. 기존에
생각하고 있던 고등학교의 모습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겉모습이 이러니 누가 여길 고
등학교라고 보겠는가? 그냥 사진만 보면 오래된 대학교로 봐도 이상할 것은 없다.

본관을 지나면 뒤에 고색이 깊은 서관과 동관이 있으며, 북쪽을 가린 신관(新館)을 지나면
조 잔디를 깐 축구장 겸 운동장이 나타난다. 운동장 북쪽에 보이는 건물은 중앙중학교이며 운
동장 동쪽 아래에 신선원전이 뉘여져 있다.

* 중앙고등학교의 역사
북촌 동북쪽 끝에 자리한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6월 1일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가 세운 기호
학교(畿湖學校)에서 비롯되었다.
1910년 9월 흥사단(興士團)에서 운영하던 융희(隆熙)학교와 통합되었는데, 그때 교장은 서유견
문(西遊見聞)으로 유명한 유길준(兪吉濬) 그 사람이었다. 이후 기호학회는 호남, 교남, 서북
등 여러 학회와 통합해 중앙학회로 간판을 바꾸고 학교 이름 또한 중앙학교로 갈았으며, 1915
년 4월 인촌 김성수가 이를 인수했다.

1916년 우리나라 최초로 보트를 도입하여 수상스포츠인 조정부를 설치했으며, 1917년 웅원(雄
遠, 높은 이상), 웅견(雄堅, 굳은 의지), 성신(誠信, 성실한 행동)을 학교의 교훈(校訓)으로
삼아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교목(校牧)은 잣나무, 교화(校花)는 무궁화꽃이며,
1917년 12월 김성수의 백부(伯父)인 김기중(金祺中)이 교사(校舍)를 지으면서 현재 자리로 학
교를 이전했다. 김기중은 김성수만큼이나 중앙고에서 비중이 큰 인물이다.

1919년에는 교장 송진우(宋鎭禹)와 김성수가 숙직실에서 3.1운동을 계획했으며, 백두산을 상징
하는 백산(白山)으로 학교 이름을 바꾸려고 했으나 왜정의 방해로 1921년 중앙고등보통학교(중
앙고보)로 개명했다. 그리고 그해 4월 고등학교 인가를 받아 굵직하게 본관과 서관, 동관을 세
웠고, 1926년에는 6.10만세 운동을 벌였으며,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하였다.
1934년 12월 원인이 아리송한 화재가 일어나 본관이 속절없이 무너지자 그 남쪽에 다시 본관을
만들어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다. 이 본관이 바로 지금의 본관 건물이다. 1941년에는 창립 30
주년 기념으로 대강당과 수위실을 세웠다.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중앙중학교로 간판을 바꾸었으며, 1939년에 왜정이 무궁화 모표를
폐지하라고 하자 월계관으로 모표를 바꿨다. 1940년에는 당시 중앙고보 역사 교사인 최복현이
4학년 학생 5명과 민족정기 고취와 독립을 목적으로 '5인 독서회'를 조직했는데, 1941년 한 학
생의 연락 편지가 왜경(倭警)에 발각되어 최복현과 관련 학생 모두 함흥교도소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을 '중앙고보 5인 독서회' 사건이라고 한다.
그때 최복현은 재판정에서 '내 수업을 듣고 학생들이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나를 처벌
하고 학생들은 풀어달라'
호소하여 학생들은 3달 뒤 풀려나고 최선생은 2년 후 석방되었다.


1946년 9월, 6년제 중학교로 변경되고, 1950년 4월 대한교육법으로 4년제로 변경되면서 3년제
고등학교를 병설했다. 그래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꾸리게 되었다. 1960년 4.19시절에는
학교 학생들이 4.19시위에 동참했으며, 1964년에는 고려중앙학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1966년 신관을 짓고 김성수의 동상을 세웠으며, 1973년 신선원전과 인접한 운동장 동쪽에 축대
를 쌓아 운동장을 넓혔다. 1981년 학교 본관과 동관, 서관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유산
을 보유한 학교가 되었고, 1986년 6월 7일 교우의 날을 정해 행사를 거행했다.

1992년 2월 원파기념관을 세웠고, 2008년 6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인문학박물관을 개관하면
서 이 땅의 고등학교 가운데 최초로 박물관을 소유한 학교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없음)
또한 주변 나라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요란하게 전파를 타면서 왜열도
와 중원대륙 사람들이 구름처럼 찾아와 북촌 속 한류 관광지로 존재감을 크게 살찌웠다. 솔직
히 그 이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가끔 산책이나 마실을 가는 정도에 불과했었다. 이처럼 학교가
관광지로 유명해지자 교문 앞 문방구와 가게들은 앞다투어 한류스타의 사진과 브로마이드를 판
매하며 적지 않게 재미를 보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팔고 있음)
 
※ 중앙고등학교 찾아가기 (2017년 2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3-1번 출구),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1번을 타
  고 중앙중고에서 하차
* 안국역 3번 출구를 나와서 현대사옥(현대빌딩) 서쪽 골목인 계동길을 따라 도보 12분

★ 중앙고등학교 관람정보
* 평일은 학교 수업으로 개방을 하지 않으며, 토요일과 일요일, 공휴일에만 문을 열어두고 있
  다. (매월 2,4주 토요일은 9시~18시까지 / 1,3,5주 토요일은 13시~18시까지 / 일요일, 공휴
  일은 9시~18시)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1 (창덕궁길 164, ☎ 02-742-1321~2)
* 중앙고등학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1966년에 세워진 친일파 김성수 동상
이렇게 보니 정말 고려대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다.

◀  교문 옆에 자라난 오래된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512호

교문 옆에는 푸른 옷을 걸친 커다란 은행나무
가 살포시 뿌리를 내렸다. 그는 높이 20m, 가
슴둘레 3.1m로 무려 500여 년을 헤아리는 지긋
한 나이를 가지고 있다.

이 나무는 지역의 수호신으로 오랫동안 숭상을
받아와 매년 가을에 오곡백과(五穀百果)를 차
려 당제(堂祭)를 지냈으며, 중앙고등학교가 들
어선 이후에는 학생들 등교길에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그들을 응원한다. 또한 1987년 천안 독
립기념관 개관을 기념하고자 이 나무를 삼목이
식하기도 했다.


▲  6.10만세 기념비

본관 뜨락 서쪽에는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6.10만세 기념비가 3.1운동 책원비가 있는 동
쪽을 바라보고 있다.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이 붕어(崩御)하자 중앙고보 학생을 중심으로
격문(檄文) 3만장을 인쇄해 주변 학교에 뿌렸다. 그리고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에 황
제의 대여(大輿)가 단성사(團成社)를 지나자 중앙고보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수천 명의 학생들
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 1,000매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뿌려 이른바 6.10만세운동의 분
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 기념비는 6.10만세운동의 67주년이 되는 1983년 6월 10일 중앙고등학교 동우회와 동아일보
사가 합심하여 세웠다.


▲  3.1운동 책원비(策源碑)

본관 뜨락 동쪽에도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3.1운동 책원비가 6.10만세 기념비가 있는 서
쪽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다.

3.1운동 발생 2달 전인 1919년 1월 왜열도 동경(東京) 유학생인 송계백(宋繼白. 1896~1920)이
중앙학교 숙직실에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곳 교사인 현상윤(玄相允, 1893~1950)에게 사각모에
담긴 비단에 쓰여진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건네며,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살짝 알렸다.
현상윤은 그것을 교장 송진우와 김성수에게 급히 보여주었는데, 그것을 본 그들은 크게 감동을
받고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그래서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작성하고 3.1운
동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를 기념하고자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에서 세웠다.


▲  원파도서관 (옛 인문학박물관)

본관 서쪽에는 본관을 약간 닮은 서구식 건물인 원파도서관이 있다. '원파'는 학교를 크게 일
으킨 원파 김기중의 호로 이곳에는 2008년 6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개원한 인문학박물관이
야심차게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인문학(人文學) 자료들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던 착한 박물관이
었으나 이 땅의 인문학이 몰락했음을 상징하듯, 결국 10년도 못채우고 문을 닫고 말았다. (나
는 다행히 2010년과 2011년에 2번 관람을 했음)

인간은 일반적인 동물과 달리 정신적 수양도 어느 정도 닦아야 된다. 그래서 인문학(철학, 역
사, 윤리, 문학 등)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 땅의 꼬라지는 어떠한가? 인간의 말초신경
이나 건드리며 백성들의 단순화를 꾀하는 이 나라의 우민화정책, 그리고 그 정책에 춤을 추는
썩어빠진 방송과 언론들, 독서와 교양 지식을 멀리하며 오로지 돈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이 시
대의 사람들, 여유를 부리기 어려울 정도로 팍팍해진 백성들의 경제 사정, 인문학으로는 입에
풀칠 조차 하지 힘든 현실에서 인문학은 점점 바닥을 향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이 나라의 위정자와 졸부들이 바라는 세상일 것이다. 그래야 그들 입맛대로 대대
손손 금수저를 물며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  중앙고등학교 본관의 뒷모습
마치 유럽 중세시대 건축물이나 요새처럼 보인다.


고려대 본관과 많이 빼어닮은 중앙고 본관은 콘크리트 철근의 2층 석조 건물로 1935년에 삽을
떠서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다. 원래 본관은 동관과 서관 사이에 있었으나 1934년 화재로 무
너지자 현 위치에 더 크고 화려하게 다시 지은 것이다.

왜정 때 건축가인 박동진이 서구 학교의 건물을 모델로 삼아 설계하고 건축한 길다란 'H'형태
의 건축물로 지붕 부분을 포함하면 가히 3층 규모인데, 그 시절 이 땅의 사람들이 세운 큰 건
물의 하나이기도 했다.
건물 중앙에는 4층의 중앙탑을 높이 세워 본관의 위엄을 드높였고, 벽면은 돌을 질서있게 쌓아
올렸다. 하여 그 모습이 오래되고 전통이 있는 서양 학교나 중세시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거기에 담쟁이덩굴까지 걸치고 있으니 고색과 중후한 멋까지 마음껏 드러낸다.
학교가 이렇게 크고 잘나갔으니 왜정 때 이곳에 다닌 학생들의 자부심은 자못 대단했을 것이다.
비록 왜인의 눈치를 보며 살던 우울한 시기이나 여기서만큼은 왜인들도 오히려 부러운 눈빛으
로 학교를 바라봤을 것이다.

현재 1층 중앙은 학교 행정공간으로 나머지는 교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근대 초기 양식으로 만
들어진 민족 교육의 현장이자 민간학교의 건물로 유서가 아주 깊다. 또한 왜정과 대한민국 초
기에 이름 꽤나 알려진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현장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널린 학교 건물보다 더욱 정감이 가며, 저 건물에 들어가면 절로 책을 펴고 공부에
임할 정도로 면학분위기도 진하게 나온다. 나도 이곳에 들어와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사는 곳
이 엉뚱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하긴 이곳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워낙 타고난 돌머리라 얼마
나 효과가 있었을지는 미지수이다.


▲  본관 뒤쪽에 자리한 빛바랜 종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중앙고보 시절부터 수업시간과 점심시간, 수업 종료 시간마다 땡땡땡~~♬ 종소리를 내며 학생
과 교사들을 분주하게 만들었던 종, 허나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난 이곳의 옛 유물로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왕년에는 몸을 흔들며 학교를 움직이는 큰 손이었건만, 이제는 종소리를 울릴 일도 없으니 그
의 피부에는 그저 하얀 먼지만 가득하다. 가끔 관광객들이 호기심 삼아 그를 흔들어 주변의 적
막을 살짝 깨뜨리곤 한다. (나도 몇 번 쳐봤음~) 그렇게 울려 퍼진 종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늘
비슷한 목소리다. (그렇다고 요란하게 치지는 말자~~~!)
사람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은퇴하여 뒤로 나앉은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 없다.


▲  왕년을 생각하며 우수에 잠긴 종
종의 청동색 피부에는 무심한 세월의 먼지로 가득하다. 하긴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으랴? 그저 장대한 세월에 아주 잠깐씩 몸을 담굴 뿐이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요. 천하만물의 운명이다.

▲  본관 뒤쪽에 나란히 자리한 서관과 동관
쌍둥이 형제처럼 서로 닮은 모습이다.

▲  중앙고등학교 서관(西館) - 사적 282호

중앙고 서관은 1921년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2층 붉은 벽돌집이다. (지붕을 포함하면 3층) 'T'
자형 구조로 본관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뾰족한 아치형 창틀, 가파른 고딕식 지붕, 그리
고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엇물려 지어 20세기 초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 피부의 벽돌이 고색의 향기를 더욱 우려내고 있으며, 여기서는 조선 소년군 창설과 6.10
만세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는 교실로 쓰이고 있다.


▲  중앙고등학교 동관(東館) - 사적 283호

서관과 마주하고 있는 동관은 1923년 10월에 지어진 2층 붉은 벽돌 건물이다. (지붕 포함하면 3
층) 건물 구조와 전체적인 모습은 서관과 비슷하며 여전히 교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선비의 모습으로 조성된 김기중(金祺中) 동상

동관과 서관 사이에는 원래 본관이 있었다. 허나 1934년 화재를 만나 건물이 주저앉으면서 남
쪽으로 자리를 옮겨 더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본관의 강제 이전으로 비게 된 공간에는 소나무를 심어 조촐히 정원을 닦았는데 그 한쪽에 원
파() 김기중(1859~1933)의 동상이 자리해 있다. 그는 김성수와 더불어 중앙학교를 일으킨
인물로 김성수의 바로 큰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양복스타일의 김성수 동상과 달리 전형
적인 선비 스타일로 동상을 지어 그를 기린다.

김기중은 1886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1904년 용담(潭, 전북 진안) 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1906년 정3품에 올랐으나 멸망의 끝으로 향하는 나라꼴에 한숨을 쉬며 민중계몽을 교육
사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여 1908년 재산을 털어 영신(永新)학교를 세웠고, 왜열도로 직접
건너가 그곳의 교육 제도를 살폈으며, 조카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그리고 1921
년 다시 재산을 털어 지금의 자리에 교사를 만들면서 중앙학교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1932년 아우 김경중(金暻)과 보성전문(고려대)을 인수하고 민립대학을 꿈꾸던 김성수에게 운
영을 넘겼으며, 그 이듬해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마 10년을 더 살았다면 조카의 비
열한 친일 행위에 분개하며 피를 토하고 죽었을 지도 모르겠다. 결국 조카가 큰아버지의 민족
교육 사업에 똥칠을 했으니 말이다.


▲  창립30주년기념관 (대강당)
본관 동쪽 높은 곳에 자리한 대강당은 1941년 11월, 창립30주년 기념으로 지어졌다.

▲  단촐하게 생긴 삼일기념관(三一記念館)

대강당 뒤쪽에는 삼일기념관이라 불리는 기와집이 있다. 무슨 사연이 있을 듯 싶은데 그에 대
한 마땅한 안내문이 없어 많은 이들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이다. 허나 여기가 바로 1919년 당시
중앙학교 숙직실 자리로 처음으로 3.1운동을 계획하고 논의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기념관 뒤로 담장과 울창한 수목이 보이는데, 담장 너머는 동궐(東闕)이라 불리는 창덕궁이다.


▲  여기도 친일파와 독재 딸랑이의 흔적이??
서정주(徐廷柱, 1915~2000)의 '국화옆에서' 시비(詩碑)


20세기에 이름난 현대 시인의 하나이자 우리 말이 지닌 표현력의 극한을 보여준 것으로 칭송받
는 미당 서정주, 그는 전북 고창 출신으로 인촌 김성수의 대농장을 관리하던 중간 관리인(마름
)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로 올라와 역시 김성수가 손을 대고 있던 중앙고보에 보결생(補缺生
)으로 들어왔으나 광주학생운동 참여로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에 들어갔으며, 죽을 때까지 많은 시집을 내었다. 허나
1943년부터 비열하게 친일 행위(왜정을 찬양하는 시를 작성)에 몸을 담기 시작했으며, 이승만
과 박정희, 전두환에게 두루두루 아부를 떨며 독재를 찬양했다. 또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죄를
반성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 합리화에 열을 올렸던 속 좁은 작자이기도 하다.
문제는 그를 비롯하여 친일 떨거지들의 문학 작품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적지 않게 실린다는
것과 그들을 기리는 문학 행사와 기념관이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 꼬라지가 된
것은 그들의 후학과 그들을 옹호하는 작자들이 문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
다. 이는 식민사관(植民史觀) 계열이 장악하고 있는 역사 분야도 비슷하다. 역사 청산을 제대
로 하지 못한 후유증이 아직도 이 나라의 곳곳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  신관 뒤쪽에 있는 백릉 채만식(白菱 蔡萬植, 1902~1950) 문학비

채만식은 중앙고보 13회 교우로 소설가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지겹도
록 나오는 단골로 1929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수십 편의 걸쭉한 소설을 남겼다.


 

♠  중앙고 철책 너머로 바라본 창덕궁 신선원전(新璿源殿)
- 사적 122호

▲  신선원전

중앙고에 왔다면 꼭 살펴봐야 되는 곳이 있다. 바로 창덕궁의 숨겨진 속살, 신선원전이다. 그
렇다고 신선원전이 중앙고 안에 들어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만약 그들이 교정에 있었다면
중앙고가 지금의 자리에 속시원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중앙고를 둘러보고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면 인조잔디가 펼쳐진 운동장이 나온다. 운동장 북쪽
에는 중앙중학교가 있고, 그 뒤에 삼삼하게 우거진 산이 있는데, 이는 성북동(城北洞)으로 넘
어가는 와룡공원 고개로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의 동쪽이다. 운동장 서쪽은 가회동 주택가로
막혀있고 동쪽은 숲이 보이긴 해도 철책이 높이 쳐져 있다.
본관 주변의 착시현상을 간파하고 서관과 동관을 거쳐 이곳까지 들어온 사람들(대부분의 관광
객들은 착시현상에 빠져 본관 주변만 맴돌다 나감)은 운동장만 보고는 '이제 다 봤다. 가자~'
발걸음을 돌린다.
운동장 동쪽에 철책이 있고 마땅한 안내문도 없으니 비록 밑에 수상한 기와집이 널려있어도 그
냥 통과하는 것이다. 허나 그런 생각은 중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그 철책 너머가 바로 창덕궁
의 비공개 구역이자 어진(御眞)을 봉안했던 신선원전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다른 궁궐과 달리 유난히 통제구역이 많았던 창덕궁이 마음을 고쳐먹고 21세기 이후 후
원(後苑) 대부분과 낙선재(樂善齋)를 쿨하게 공개하고 있지만 아직도 숨겨진 부분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 신선원전은 지금까지도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며 공개를 꺼리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
곳의 존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후원 숲속에서 조용히 속살을 가린 채, 숨바꼭질을 즐기는 신선원전은 중앙고 운동장에서만큼
은 자존심을 곱게 접으며 그 속살을 일정 부분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운동장이 그곳보다 지
대(地臺)가 높기 때문이다. 다만 철책을 통해서 봐야 된다는 한계점이 있다.

중앙고는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중앙고가 창덕궁 궁역(宮域)보다 지대가 좀
높긴 하지만 담장이 있는 곳만큼은 교내보다 높으며, 민가(民家)의 담장도 아닌 지체높은 궁궐
의 담장이라 감히 건드릴 수는 없다. 허나 운동장만큼은 사정이 달라 운동장이 신선원전과 궁
궐 담장보다 더 높은 곳에 들어앉아 있다. 상황이 이리 된 것은 1973년 운동장을 넓히고자 축
대를 높이 다졌기 때문이다. 하여 신선원전이 운동장 눈 밑에 있게 된 것이다. 철조망을 높이
친 것은 자칫 월담을 하거나 공이 넘어가 그곳의 적막을 깨뜨리는 것을 막고자 함이다.

일개 학교 운동장이 궁궐 사당보다 높이 떠있다는 것이 다소 신선하고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아
무리 국제적인 호구짓을 일삼다가 쪽박을 찬 옛 제국의 잔재물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해야 했
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허나 학교 입장에서는 여기말고는 운동장을 다질 땅이 없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어찌보면 패망한 제국의 비애(悲哀)이기도 하다.

▲  비공개로 사람의 손때마저 희미해진 신선원전

신선원전 자리에는 원래 대보단(大報壇)이 있었다. 조선은 명(明)나라의 충직한 제후국(諸侯國
)이라 명이 망하자 옛 명의 황제를 기리고 그들의 은혜를 갚는다는 꼴사나는 이유로 숙종(肅宗)
시절에 지금의 자리에 대보단을 만든 것이다.
대보단에는 명태조 주원장(朱元璋),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낸 신종(神宗), 그리고 명을 완전히
말아먹은 마지막 군주, 의종(毅宗)의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국가 재정을 축내며 제사를 지냈다.

창덕궁에 선원전(璿源殿)이 지어진 것은 1656년이다. 이때 경덕궁(敬德宮, 경희궁)에 있던 경
화당(景華堂)을 인정전(仁政殿) 서쪽으로 옮겨 제왕의 어진을 봉안하여 선원전으로 삼았는데,
<이를 구(舊)선원전이라 부름> 1921년 왜정이 대보단을 부시고 덕수궁에 있던 선원전을 이곳으
로 옮겼으며, 구선원전과 덕수궁 선원전에 있던 어진과 관련 유물도 거의 옮겨와 신선원전이라
하였다. (이전의 선원전과 구분하고자 그리 이름을 지음)

이곳에는 태조에서 순종(純宗)에 이르기까지 제왕 12명의 어진 48본을 봉안했으며, 어진을 걸
어두던 12개 감실(龕室)은 1900년대 의궤도설(儀軌圖說)과 일치해 왕실의 전통적인 법식을 충
실히 따랐음을 보여준다. 어진은 6.25가 터지자 서둘러 부산(釜山)으로 옮겼지만 대부분 관리
소홀로 화마(火魔)의 먹이가 되었으며, 제례에 쓰이던 의장물 상당수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남아있던 노부
(鹵簿, 제왕이 나들이할 때 갖추던 의장물) 등 대부분의 유물은 2002년 국
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용상(龍床)과 오봉도(五峯圖), 모란이 그려진 병풍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들 유물은 19~20세기 궁중 미술의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감실과 당가(唐
家), 용상 등 가구와 시설물은 주칠(朱漆)이 아닌 황색(黃色)으로 칠했다.

신선원전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사당이란 점 때문에 여전히 비공개로 일관하고 있다. 하여 이
곳에서는 인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사람의 손때마저 보이질 않는다. 오늘도 변함없이 고
요하기만 한 신선원전, 이곳이 과연 시끌벅적한 서울 도심 한복판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
다. 거기에 사당이라 그런지 종묘(宗廟)에서 느낄 수 있는 엄숙함도 적지 않게 배여나온다. 다
행히 늦게나마 이곳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이곳을 2년 동안 조사하여
'최후의 진전(眞殿) 창덕궁 신선원전'이란 도록을 발간하기도 했다.

신선원전은 의효전(
懿孝殿)과 재실(齋室), 수직사(守直舍), 몽답정(夢踏亭), 괘궁정(掛弓亭),
진설청(眞說廳) 등을 부속 건물로 거느리고 있으며 이들은 신선원전 권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창덕궁 후원에서 신선원전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으며, 원서동 구석 빨래터에 있는 외삼문(外
三門)은 이곳의 정문이나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 창덕궁 신선원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 (창덕궁5길 22-4)


▲  신선원전 남쪽에 자리한 의효전(懿孝殿)

신선원전 남쪽에 자리한 의효전은 원래 덕수궁(경운궁)에 있었다. 1904년 순종의 왕비인 순명
효황후(純明孝皇后)의 혼전(魂殿)으로 쓰인 적이 있으며 1921년 덕수궁 선원전을 이곳으로 옮
길 때 덩달아 같이 이전되었다.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의효전 옆에는 몽답정(夢踏亭)과 몽답지(夢踏池)란 작은 연못이 있
다. 몽답정은 훈련도감(訓鍊都監)의 훈련대장(訓鍊大將) 김성응(金聖應, 1699~1764)이 지은 것
으로 영조(또는 숙종)가 꿈속에서 이 정자를 찾았다고 하여, 꿈에서 발걸음을 했다는 뜻의 몽
답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조도 몽답정을 자주 찾았다고 하며, 창덕궁과 창경궁의 도
면인 동궐도(東闕圖)에는 나와있지 않아 원래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닌 듯 싶다.


▲  덥수룩한 머리를 지닌 괘궁정(掛弓亭)

신선원전 권역에서 그나마 제일 가깝게 마주할 수 있는 존재가 괘궁정이다. 이곳은 담장이 운
동장 축대 밑으로 막 내려가는 비탈진 곳에 있으며, 중앙고 축구부 휴게실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다.

괘궁정은 1849년(헌종 18년)에 지어진 것으로 훈련도감(訓鍊都監) 북영(北營)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정자의 이름인 괘궁(掛弓)은 활을 걸어둔다는 뜻으로 왕실에서 종
묘만큼이나 애지중지했던 대보단 바로 옆에 활쏘기 연습을 하는 정자를 만든 것이 조금 납득이
가질 않는다.
게다가 정자의 모습을 보면 일반 병사들이 연습을 했다기보다는 훈련대장 등 상위 등급의 무인
(武人)들이 활 연습을 하거나 군영(軍營)을 바라보는 용도로 사용했을 듯 싶다.
북영의 군사들은 제왕의 호위를 담당하며 왕이 궁궐을 옮길 때 그 본부를 같이 옮기는데, 창덕
궁에 머무를 경우, 궁궐에서 다소 구석인 대보단 인근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괘궁정은 달랑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로 돌로 축대를 만들고 그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워 정자
를 지었다. 오랫동안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는지 지붕 머리가 꽤 덥수룩하다. 자연이 지붕
에 심어놓은 푸른 잡초가 기와를 뚫고 자라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정자도 먼지만 가득하니 언
제 사람이 마지막으로 들어왔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언제 문을 두드릴지
모를 화마에 대비하여 소화기가 한쪽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운동장 철조망을 통해 신선원전 일대를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보듯 구경하며 사진에
담았지만 언젠가는 쿨하게 공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때가 되면 까치발처럼 힘들게 구경해야
되는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하여 북촌 중앙고 나들이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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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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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을 거닐다 ~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돌담길, 송시열집터, 북묘터)

 


' 창덕궁 후원 뒷길, 명륜동(明倫洞) 겨울 나들이 '

▲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 ~
창덕궁(昌德宮)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  층층이 이어진 후원 돌담

북촌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감사원(監査院)로터리에서 동쪽 길로 들어서면 고려사이버대학교와
중앙중고교 후문이 나온다. 이들을 지나면 길이 서서히 경사를 이루기 시작하는데, 기와가 얹혀
진 창덕궁 후원 돌담이 오른쪽으로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며 펼쳐져 있다.
이 돌담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란히 제 갈 길을 가는데, 그 사이에 소
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이 경계선 역할을 하며, 동쪽으로 갈수록 돌담의 해발 높이도 높아진
다. 또한 담 너머로 삼삼한 숲의 후원이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며, 도심의 속된 기운을 정화한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입구를 지나면 길이 얼핏 끊긴 듯 보여 '과연 넘어가는 길이 있을까?' 주
저하게 된다. 허나 그런 걱정은 곱게 접어 후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버리고 계속 길을 재
촉하길 바란다. 이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비밀의 숲길(산책로), 창덕궁 후원 뒷길(후
원 뒷길, 후원 돌담길)이다.


▲  후원 뒷길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부근)

▲  북악산(백악산)의 물을 받아들이는 후원 돌담 수구문(水口門)

▲  새롭게 손질된 돌담 - 오래된 돌담 사이에서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넓은 길이 끝나는 곳에 너른 공터가 펼쳐져 있는데, 여기서 정면에 보이는 계단을 올라 오른쪽
으로 가면 나머지 후원 돌담길이 펼쳐지고 (직선으로 가도 상관 없음) 왼쪽으로 가면 옥류정과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이다.

이곳 돌담길은 야트막한 고개로 흙길이라 상태라 조금 울퉁불퉁하다. 돌담 바로 옆구리로 돌담
을 어루만지며 갈 수 있는데, 그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바로 내리막 길이 펼쳐지고, 돌담 너
머로 도심의 허파인 창덕궁 후원이 살짝 속살을 비춘다. 숲 너머 동쪽에는 성균관대(成均館大)
건물이 진하게 보이는데, 그 길을 내려가면 돌담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성균관대 서쪽 부분인 법
학관과 주차장, 대운동장에 이르게 된다.

후원(後苑) 뒷길은 중앙중고 후문을 기준으로 성대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까지 1리 남짓 거리다.
바로 감사원에서 성북동(城北洞)으로 넘어가는 와룡고개 밑부분으로 도심에서 그리 흔치 않은
조촐한 오솔길이다. 겨울이 깊어가는 시점에 와서 그렇지 봄이 무르익은 4월 이후나, 여름의 한
복판, 늦가을의 한복판에 왔더라면 걸쭉하게 그려진 수채화 속의 주인공처럼 아름다운 산길이다.
 
내가 후원 뒷길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2011년 말, 그 이전에는 이런 숲길이 있다는 것도 몰랐
다. 후원 북부에 워낙 통제구역이 많다 보니 와룡고개와 후원 사이 무성한 숲에는 국가의 예민
한 시설들이 숨겨져 있어서 출입이 금지된 것으로 알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호기심이 강한 나
도 그 공간은 애써 들어갈 생각을 못했는데, 알고 보니 언제든 안길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에
내심 놀라고 말았다. 허나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나 외에도 많을 것이다.
한때 비원(秘苑)이라 놀림 받았던 창덕궁 후원은 3살짜리 어린 애도 다 아는 대중적인 명소이지
만 후원 뒷길은 아는 이가 거의 없다. 서울 도심을 두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고갯길, 와룡고개도
사람과 차량의 통행은 많지만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


▲  후원 뒷길 고개 - 여기서는 돌담을 손으로 더듬으며 갈 수 있다.
이곳은 후원의 가장 최북단이자 제일 높은 곳이기도 하다.

▲  성균관대 쪽으로 급격히 내려가는 후원 돌담

창덕궁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가리며 숨겨진 후원 돌담은 근래에 보수를 하여 무너지거나 낡은
부분은 새로 만들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후원 북쪽 구역은 후원 특별 관람 때 들어갈 수 있
는 비싼 구역으로 대운동장 주차장에서 후원의 북쪽을 장식하는 태극정(太極亭) 구역이 보이고,
후원 북문인 북문(북장문)도 볼 수 있다. (북문과 태극정 주변 숲은 통행 불가)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에 이르면 사각사각 밟고 지나간 흙길은 밋밋한 시멘트 길로 바뀌며, 후원
돌담과도 바다 너머의 섬을 보듯 멀어져 간다. 게다가 주차장부터 학교 돌담이나 철책이 생기면
서 둘 사이에 깊숙한 틈이 생기는데, 이는 성대가 교내를 넓히면서 후원 돌담보다 높게 또는 비
슷한 높이로 터를 다지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다. 비슷한 높이인 경우에는 후원 돌담에 접근하
지 못하도록 돌담의 북쪽 언덕을 끊어 멀리서만 보게끔 했으며, 둘 사이에 생긴 틈은 마치 휴전
선이나 성곽(城郭) 주위에 두룬 해자를 보는 듯 하다.


▲  성균관대 쪽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후원 뒷길

▲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 평탄한 길이 부드럽게 펼쳐진다.

▲  궁궐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후원 돌담

▲  성대 법학관 앞 후원 뒷길

▲  후원 돌담과 성대 돌담, 그 사이에 생긴 틈
사람이 다가서기 힘든 틈 속에는 낙엽이 가득 널려 그들의 마지막 세상을 열어간다.

▲  후원 담장 너머로 애타게 바라보이는 후원 태극정(太極亭)
태극정 부근에 소요정(逍遙亭)과 옥류천(玉流川)이 있다.

▲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北墻門)

후원 북문(북장문)은 후원 북쪽에서 유일하게 속세로 통하는 문으로 보통 궁궐의 문은 암문(暗
門)이라 할지라도 팔작지붕을 얹혀 문의 형식을 갖추는데 반해, 이곳은 담장 중간에 여닫는 문
짝을 만든 것이 고작이다.

북장문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막바지 현장으로, 정변 3일 째(양력 1884년 12월 6일), 창덕궁
에서 고종을 호위하며 머물던 개화당(開化黨)과 왜군은 명성황후가 소환한 청군의 공격에 후원
을 거쳐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왜국공사는 꼬랑지를 내리며 군사를 이끌고 급히 후원 뒷
길을 거쳐 도망쳤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들을 따랐다. 단 홍영식
과 박영교, 그들을 따르는 군인 7명은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로 들어갔다.

※ 창덕궁 후원 뒷길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3-1, 8번 출구)이나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
  을 타고 감사원 하차, 고려사이버대학교 쪽으로 쭉 들어간다. 안국역에서 도보 20분
* 성대입구(명륜3가) 정류장에서 성균관대 교내를 거쳐 법학관과 대운동장 쪽으로 가도 된다.
* 후원 돌담은 굳이 넘으면 안되며, 북장문 주변 돌담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명륜동/와룡동


 

♠  명륜동(明倫洞)에서 만난 조촐한 명소들

▲  흥덕사(興德寺)터 표석과 북묘(北廟) 하마비(下馬碑)

명륜동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에서 북서쪽으로 난 '성균관로 17길'을 따라가면 하마비와 함께 흥
덕사터를 알리는 표석이 나란히 반긴다.

내 정보에는 전혀 없는 명륜동 흥덕사는 1401년(태종 1년) 태조 이성계가 옛집 일대를 회사해서
만든 절이다. 세종 때 불교를 선교(禪敎)와 교종(敎宗)으로 통폐합할 때, 교종의 도회소(都會所)
로 삼으면서 크게 성장했으며, 왕실의 사찰로 법등(法燈)을 두툼하게 유지했으나 연산군(燕山君)
시절 폐사되어 그 흔적을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 있던 불상과 유물은 인근 절로 흩어졌으나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며, 조선 효종 때 송
시열이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그가 살았던 동네란 뜻에 송동(宋洞)이라 불리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가 충주(忠州)로 줄행랑을 치면서 답답한 마음에 도중에
서 만난 이씨 무녀(巫女)에게 환궁 시기를 물었다고 한다. 과연 무녀의 말대로 그 시기에 환궁
을 하게 되자 황후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에게 바라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이에 무녀는 머리
를 조아리며 관우(關羽) 사당을 지어줄 것을 청했고, 그 이듬해 1883년 이곳에 사당을 지어주면
서 방향을 따져 북묘라 하였다. 그가 관우 사당을 요청한 걸 보면 아마도 관우를 중심 신으로
받들었던 모양이다.

관우는 중원대륙의 오래된 허접 소설, 삼국지(三國志)에 주요 인물로 촉나라를 세운 유비(劉備)
의 의제이다. 의형과 의제(장비)를 따라 사내들간의 돈덕한 의리를 남기며, 대륙을 누빈 인물이
나 220년 손권(孫權)의 수하인 여몽, 육손에게 보기 좋게 패해 그가 지키던 형주(荊州) 지역을
모두 잃고 그 자신은 손권에게 처단되고 만다.
이후 관우 신앙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점차 유교에 버금갈 정도로 대륙의 주요 민간신앙
으로 흥행했는데, 그 신앙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조선이 명나라에 원군을 요
구하자 명은 수만의 허접 군사를 보내 갖은 민폐를 아끼지 않았는데, 명나라 군사 중에는 관우
열성 신자가 많았다. 특히 진인(陳寅)이란 장수는 그 신앙이 매우 두터웠으며, 1598년 울산성(
蔚山城)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서울 남대문 밖에 집을 짓고(아마도 선조 임금이 집을 내려준 듯
) 쉬고 있었다. 그때 거처에 관우 사당을 지으니 그 사당이 이 땅 최초의 관우 사당, 남묘(南廟
)가 되겠다.

왜란이 끝나자 명나라 군주, 신종(神宗)은 관우의 혼이 도와 전쟁이 끝난 거라고 격하게 우기면
서 금 4,000냥을 보내 남대문 밖에 관우 사당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제 조선 조정은 그곳에 이
미 사당이 있으니 다른 곳이 좋겠다며 장소를 급히 물색하다가 동대문 밖에 세우게 되니, 이것
이 국립 관우 사당 1호이자 지하철 역에도 있는 그 유명한 동묘(東廟)이다.
17세기 이후 전국 주요 고을에 관우 사당이 지어졌으며, 관우신앙이 민간에도 널리 퍼지면서 민
간신앙의 하나로 조촐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  북묘 하마비

1883년에 명성황후가 지은 북묘는 그 이듬해인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마무리하는 현장이
되면서 크게 이름을 남겼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일을 벌인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당은 왜군과 협조
하여 고종(高宗)과 왕실을 호위하며 창덕궁(昌德宮)에 들어갔으나 청나라군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후원 북장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일이 그르쳤음을 깨달은 김옥균과 박영효, 서
재필(徐載弼) 등은 왜군을 따라 북촌을 거쳐 왜국 공사관(公使館)으로 36계를 치고, 그들과 작
별한 홍영식(洪英植)과 박영교(朴泳敎)는 군사 7명과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에 들어갔으나, 곧
들이닥친 청나라군에게 살해되면서 갑신정변은 막을 내린다.
이후 고종은 1887년, 갑신정변 당시 허벌나게 고생했던 일을 떠올리며 민영환(閔泳煥)에게 글씨
를 쓰게 하여 북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것이 북묘비(北廟碑)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북묘는 1902년 관왕묘(關王廟)에서 관제묘(關帝廟)로 다른 관우사당보다 격이 높아졌다. 하지만
1908년 순종(純宗)의 칙령으로 국립 사당과 제단을 정리하면서 동묘에 싹 통합시켰고, 왜정 때
비어있는 북묘 건물과 토지를 민간에 팔면서 이곳에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과 동광학교(東
光學校)가 들어섰다.
불교중앙학림은 1917년 북묘터에 불교전수학교를 세웠으며, 바로 동쪽에는 수송동(壽松洞)에서
옮겨온 보성고등학교가 뿌리를 내렸다. 1930년 불교전수학교는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인가되었으
며, 1946년 동국대로 이름을 갈아 남산(南山) 북쪽으로 이사를 갔다. 그 빈 자리에는 조양보육
대학이 들어섰고, 1963년에 문을 연 은석초등학교(현재 서울 장안동에 있음)도 그 자리의 일부
를 쓰다가 모두 다른 데로 가면서 현재는 주택가와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들어섰다.

옛 북묘터를 유일하게 지키고 있는 하마비는 왕릉이나 궁궐, 사당, 향교, 서원 앞에 세우는 비
석으로 그의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있다.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
조리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북묘가 있던 시절에야 지엄한 하마비의 명령이 통했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발로 뻥차고 괴롭혀도 하소연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국가나 서울시에서 관
리하는 지정문화재도 아니니 찬밥 신세는 더하다.
왕년의 시절을 생각하며 우수에 젖은 그 옆에 역시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흥덕사터를 알리는 표
석이 있어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집터에 새겨진 증주벽립(曾朱壁立) 바위글씨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7호

북묘 하마비에서 주택가로 2분 정도 들어가면 길 왼쪽 바위에 또렷하게 새겨진 '증주벽립(曾朱
壁立)' 4자의 바위글씨를 만나게 된다. 이 바위글씨는 송시열이 새긴 것으로 그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 집이 꽤나 넓었는지 동쪽은 북묘 하마비를 넘어 서울과학고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바위에 새겨진 증주벽립이란 '증자(曾子)와 주자(朱子)의 뜻에 따라 높은 절벽이 온갖 비바람에
꿋꿋이 버티듯 의로운 나의 길을 가겠다'
는 아주 의연한 뜻으로 4자의 글씨가 근래에 새겨진 듯
필체가 너무나 선명하고 패기가 넘쳐 흐른다. 그의 바위글씨는 이것 말고도 동쪽에 있는 서울과
학고등학교 교정에 '금고일반(今古一般,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과 '영반(詠盤, 올라앉아
시를 지은 바위)' 등 2개가 더 있다.
송시열이 간 이후, 증주벽립 바위글씨 주변은 송시열이 살았던 동네란 뜻의 송동(宋洞)이라 불
렸으며, 골짜기가 깊고 꽃나무가 많아 숙정문(肅靖門) 남쪽과 더불어 도성 봄꽃놀이 장소로 인
기를 누렸는데, 앵두꽃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1883년에는 이곳에 북묘가 들어섰으며, 왜정 때는 불교전수학교와 보성고등학교가 뿌리를 내렸
다. 이후 여러 학교를 거쳐 주택가로 변하면서 아름다웠던 정취는 죄다 한 토막 전설처럼 사라
지고, 글씨가 새겨진 바위 주변은 물론 그 머리까지 개념 없이 집들이 들어차 보기에도 정말 딱
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명세기 유서가 깊은 바위인데.. 1960년대 이후 무자비하게 자행
된 개발의 칼질이 이 바위에 보기도 흉한 콘크리트 칼을 씌워 죄인 아닌 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콘크리트 칼을 강제로 뒤집어 쓴 바위글씨와 문화유산이 서울에 꽤 있음..)
지금은 힘들겠지만 혹여 나중에 서울시나 종로구에서 바위 주변 집들을 모두 매입해 부시고 바
위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개발의 칼질로 다친 부분을 치료한 다음, 주변에 앵두나무를 심고
소박하게 공원(공원 이름은 '송시열공원'이나 '송동공원'이 좋을 듯)으로 닦았으면 좋겠다. 허
나 아마 안될꺼야. 왜 이곳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대한민국이니까.. 만약 지방문화재로 지정되
지 못했다면 저 글씨도 진작에 돌가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원래 '우암구기각자증주벽립(尤庵舊基刻字曾朱壁立)'이었으나 이
름이 무지 어렵다하여 '우암 송시열 집터'로 가볍게 명칭이 바뀌었다.


▲  가까이서 본 증주벽립 바위글씨

※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참으로 기나긴 인생
송시열은 이율곡(李栗谷)의 학풍을 계승한 노론(老論)의 우두머리로 17세기에 조선의 정치와 사
상을 주름잡던 조선 최대의 유학자였다.

그의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 호는 우암(), 화양동주()로 1607년 충
북 옥천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유학과 사상에 쓸데없이 타고
난 재능을 보였으며, 이후 논산 노성으로 집을 옮겨 김장생(金長生)의 배움을 받았다.

1633년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경릉참봉()이 되었으나 바로 그만뒀으며, 1635
년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스승이 되어 1년 동안 그를 가르켰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인조(仁祖)를 호종하여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불이나게 도망쳤
으며, 1637년 1월 인조가 송파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淸太宗) 앞에 항복하자 열받은 나머
지 고향으로 내려갔다.

1649년 봉림이 왕위에 오르자 예전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청나라에 우호
적이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다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허나 김자점이 파직되
면서 다시 관직으로 돌아왔으나 김자점이 홧김에 조선이 청나라 정벌을 준비한다고 청나라 조정
을 들쑤시는 바람에 그와 관련된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청나라의 압박으로 떨려난다.
그래서 낙향하여 후진을 기르다가 1658년 다시 관직에 나가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며, 우
리나라의 마지막 대외정벌 프로젝트이자 효종의 야망인 청나라 정벌 계획인 북벌(北伐)을 도왔
으나 아쉽게도 이듬해 왕이 승하하면서 북벌 프로젝트는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현종(顯宗) 시절,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 자의대비()>의 복상문제(
)가 발생하자 기년설(: 만1년)을 주장하며 3년 설을 주장한 남인(南人)을 쫓아내 권력을
잡았다. 이렇게 서인(西人)의 우두머리가 되어 좌참찬(左參贊)이 되었으나, 효종의 장지(葬地)
를 잘못 옮겼다는 비난을 받고 다시 낙향을 했고, 1668년 다시 돌아와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
정(左議政) 허적()과의 다툼으로 또 사직했다. 1671년 다시 우의정으로 복귀하고 이듬해 좌
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다시 자의대비(장렬왕후)의 복상문제가 거론되어 대공설
(: 9개월)을 주장했다. 허나 이번에는 남인(南人)이 주장한 기년설(만1년)이 채택되면서
또 떨려나 평안도 덕원(德源)을 시작으로 여러 곳을 유배투어를 했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떨려나자 중추부영사()가 되었으며, 1683년에
벼슬을 사직하여 봉조하(奉朝賀, 특별 명예직)가 되었다. 이후 남인에 대해 과격한 처벌을 주장
한 김석주(金錫胄)를 지지하여 비난을 많이 받았고, 그 사건으로 아끼던 제자 윤증(尹拯)과 감
정싸움이 격해지면서 서인은 윤증의 소론(少論) 패거리와 송시열의 노론(老論)패거리로 분열되
었다.

이후 관직에서 은퇴하여 속리산 화양동(華陽洞)에 팔자좋게 집을 짓고 제자를 기르다가 1689년
숙종이 희빈장씨(禧嬪長氏)의 소생(후에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를 쌍수 들고 반대
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로 떨려났다. 그리고 국문 때문에 서울로 소환되던 중, 정읍
(井邑)에서 숙종이 내린 쓰디쓴 사약을 1사발 쭉 들이키고 82세의 나이로 강제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고향인 충북 옥천을 시작으로 충남 논산, 서울 명륜동, 대전 가양동, 속리산 화양동에 집
을 짓고 살았으며, 유교(성리학, 주자학)의 새로운 역사를 쓴 인물로 제자가 참 많았다. 그래서
송자(宋子)로 추앙을 받았으며, 그를 배향한 서원이 전국에 즐비하다. 저서로는 송자대전(宋子
大全), 우암집(尤庵集), 송서습유(),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 등 방대하며, 그의 제자들이 정리하여 세상에 공개했다.

죽음에 임해서 제자들에게 명나라 군주 신종과 의종(毅宗)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만들 것을 유언
했는데, 그래서 생긴 것이 그 악명 높은 만동묘(萬東廟)이다. 그가 이런 허무맹랑한 유언을 남
긴 것은 우리의 사촌 민족인 만주족(여진족)의 청나라에 대한 강한 반감도 있겠지만 성리학의
영향으로 사대부와 유생들을 중심으로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꼴통 사대주의(事大主義)가 팽배했
고, 거기에 임진왜란 이후 재조지은(再造之恩)까지 가세하여 명나라의 대한 존재가 경외의 수준
으로 커진 탓이다. 동아시아의 약소국이자 호구 국가였던 신라(新羅)도 당나라에 저렇게까지 하
지는 않았는데, 조선은 명나라를 아버지 이상으로 떠받들었던 것이다.
명이 망하고 구한말까지(심지어 왜정 때까지도) 명의 마지막 군주, 의종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두고두고 우려먹었으며,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명의 재건을 간절히 바라던 지배층의 문구가 많이
등장한다. 게다가 조선 왕실도 명나라 군주의 사당인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매년 제사를 지
내니 참 할말을 없게 한다. 명이 백제와 고구려, 또는 백제와 부여국(夫餘國)처럼 조선의 조상
나라라면 이해라도 하지만 둘은 전혀 관련도 없다.
어쨌든 정도전(鄭道傳)과 율곡 이이(李珥),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와 중농학파(重農學派) 계
열 등 몇몇 깨어있는 이들을 제외한 조선 지배층의 우둔함은 결국 부국강병을 멀리하고 민생을
외면했으며, 쓸데없이 유교 교리만 앞세워 헛소리만 떠드니 발전은 커녕 점점 퇴보하여 결국은
섬나라 왜국에까지 밀렸다. (조선 중기부터 밀렸다고 보면 됨) 그래서 결국은 아시아의 진정한
호구 국가가 되었으니, 그 휴유증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굴레처럼 남아있으며, 약소국의 비애
를 두고두고 누리게 만든다. 기분 같아서는 저 증주벽립 바위글씨를 깨부시고 싶지만 저 글씨가
무슨 잘못이 있으랴? 게다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나보다 높은 신분의 존재이니 감
히 해꼬지는 어렵다

※ 송시열집터, 북묘 하마비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3번 출구), 4호선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고 국민생활관 하차, 또는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7번을 타도 된다. 국
  민생활관 정류장에서 내려서 왼쪽(종로 08번 하차 기준, 종로07번은 오른쪽임)으로 올림픽기
  념국민생활관 서쪽 담장길(성균관로17길)을 따라 2분 정도 가면 북묘 하마비이며, 여기서 왼
  쪽으로 2분 더 들어가면 송시열집터 증주벽립 바위글씨가 나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1가 5-99 (성균관로17길 37)


▲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정문 곁에 있는 송시열집터 표석
송시열 집이 쓸데없이 넓었던 모양이다. 증주벽립에서 여기까지 200m나 되니 말이다.
아니면 표석의 위치가 어긋나있을 수도~~ (위치가 틀린 옛터 표석도 은근히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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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볼만한 명소 360곳 (2013년 4월 기준)


★ 서울에서 가볼만한 명소 360곳 (2013년 4월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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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 기준으로 작성된 만큼 쓸데없는 태클은 정중히 사절합니다.


1. 서울 종로구 내부 (북악산~인왕산 줄기 남쪽)
1. 경복궁
2. 국립고궁박물관 (경복궁 남쪽)
3. 국립민속박물관 (경복궁 동쪽)
4. 청와대 앞길
5. 청와대와 육상궁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관람신청)
6. 윤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7. 청운공원

8. 인왕산길

9. 사직단공원 (사직단)

10. 황학정

11. 수성동계곡

12. 선희궁터 사우

13. 통의동 백송터

14. 청와대사랑채

15. 서촌 일대

 

16. 해공 신익희가옥

17. 이상범 가옥(화실)

18. 필운대 (배화여고 안에 있음)

19. 삼청동길

20. 삼청공원

21. 북악산 정상 (촛대바위, 북악산 한양성곽길)

22, 북악산 말바위

23. 숙정문

24. 창덕궁 후원뒷길 (감사원에서 성대로 넘어가는 고개)

25. 와룡고개 (와룡공원)

26. 창덕궁과 후원

27. 창경궁

28. 종묘

29. 성균관 (문묘, 은행나무)

30. 송시열집터 (증주벽립 바위글씨) 

 

31. 대학로거리 (마로니에공원)

32. 이화장

33. 함춘원터 (서울대병원 북쪽)

34. 구 서울대본관

35. 구 대한의원본관 (서울대병원 남쪽)

36. 낙산공원 (낙산 일대)

37. 비우당과 자지동천(자주동천)바위글씨

38. 청룡사와 정업원구기

39. 낙산 이화마을 (이화벽화마을)

40. 서울국립과학관

 

41. 동대문(흥인지문)

42. 청계천 일대

43. 광장시장

44. 동묘

45. 인사동거리

46. 조계사와 불교중앙박물관

47. 우정총국 (우정박물관)

48, 세종문화회관

49. 경희궁

50. 서울역사박물관

 

51. 홍파동 홍난파가옥

52. 딜쿠샤와 행촌동은행나무

53. 보신각

54. 종로2,3가 거리

55. 경인미술관

56. 천도교 중앙대교당

57. 운현궁

58. 관상감 관천대

59. 인왕산

60. 대림미술관

 

61. 목인박물관

62. 광화문광장

63. 북촌한옥마을

64. 북촌문화센터

65. 한국불교미술박물관

66. 원서동 고희동가옥

67. 원서동 빨래터 (신선원전 외삼문)

68. 배렴가옥(북촌게스트하우스)

69. 중앙중고교

70. 인문학박물관

71. 가회민화박물관

72. 한상수자수박물관

73. 재동백송

74. 정독도서관

75. 서울교육박물관

 

76. 북촌생활사박물관

77. 북촌4,5,6,7경

78. 번사창

79. 부엉이공예박물관

80. 동아일보 일민미술관

81. 성곡미술관

82. 떡박물관

83. 혜화문(동소문)

 

 2. 서울 종로구 외곽 (북악산~인왕산 줄기 북쪽)
 1. 창의문(자하문)
 2. 부암동 (부암동 산복도로)
 3. 무계정사터 (안평대군집터)
 4. 반계 윤웅렬별서
 5. 능금마을 (뒷골마을)
 6. 북악산 백석동천
 7. 서울미술관과 석파정

 8. 석파랑 (석파정 별당)
 9. 환기미술관
 10. 홍지문

 11. 세검정
 12. 북악산 백사골 (백사실계곡)
 13. 평창동 소나무 (평창동 남쪽 북악산 자락)

 14. 보현산신각
 15. 북한산 금선사
 16. 동령폭포
 17. 북한산 승가사
 18. 북한산 문수사
 19. 북한산 비봉
 20. 화정박물관


 21. 평창동 박종화가옥

 22. 구기동계곡
 23.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탕춘대성 암문)
 24. 삼성출판박물관

 25. 북한산둘레길 평창마을길

 26. 북악산길

 27. 자하미술관

 

 

 3. 서울 중구
 1. 덕수궁(경운궁)
 2. 덕수궁돌담길
 3. 서울시립미술관
 4. 옛 러시아공사관터와 정동공원
 5. 중명전

 6. 배재학당역사박물관

 7. 이화여고박물관과 유관순우물

 8. 정동교회

 9. 서울광장

 10. 서울도서관 (옛 서울시청사)

 11. 서울시청 신청사

 12. 환구단 (황궁우)

 13. 명동거리

 14. 명동성당

 15. 남대문시장

 

 16. 남대문(숭례문)

 17. 서울역 (문화역 서울284)

 18. 약현성당

 19. 손기정공원 (손기정월계관수)

 20. 화폐금융박물관 (한국은행본관)
 21,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22. 남산 와룡묘

 23. 남산N서울타워

 24. 남산 정상 주변 (봉수대, 팔각정)

 25. 남산골한옥마을

 26. 동대문쇼핑타운

 27. 동대문역사문화공원
 28. 장충단공원

 29. 신당동 떡복기골목

 30. 신당동 중앙시장


 31. 금호산 (금호산 벚꽃축제)

 32. 광희문(수구문)

 33. 대한성공회성당 서울교구, 경운궁 양이재

 

 4. 서울 강북 서부 (은평, 서대문, 마포, 용산구)
 1. 북한산 삼천사 (삼천리골)
 2. 북한산 삼천사지 (삼천사에서 등산 2km)

 3. 북한산 진관사

 4. 진관사계곡

 5. 숙용심씨묘표

 6. 영산군묘역

 7.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내시묘역은 없음)

 8. 경천군송금물침비 (내시묘역길 중간에 있음)

 9. 북한산성 대서문

 10. 북한산둘레길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11. 북한산둘레길 구름정원길

 12. 북한산 불광사계곡

 13. 금성당

 14. 금암문화공원 (금암기적비)

 15. 인조별서유기비

 

 16. 수국사

 17. 백련산 백련사

 18. 불광천 (불광천길)

 19. 옥천암 마애좌상 (보도각백불)

 20. 인왕산 환희사

 21. 홍제동 개미마을

 22. 안산(鞍山)

 23. 안산 무악봉 동봉수대터

 24. 봉원사 (연꽃축제)

 25. 서대문역사공원 (옛 서대문형무소)

 26. 독립문과 영은문주초

 27. 인왕산 선바위, 국사당

 28. 연세대 근대건축물 (언더우드관, 스팀슨관 등)

 29. 신촌거리

 30. 홍대거리


 31. 효창공원

 32. 용문동 남이장군 사당 (남이장군제)
 33. 원효로성당

 34. 전쟁기념관

 35. 이태원거리

 36. 남산야외식물원

 37. 용산가족공원

 38. 국립중앙박물관

 39. 공덕동, 마포 먹자골목

 40. 절두산성지와 잠두봉

 

 41. 양화진외국인묘역

 42. 망원정

 43. 평화의공원과 난지연못

 44. 월드컵경기장 주변

 45. 하늘공원과 월드컵공원

 46. 난지캠핑장

 47, 무악재 고갯길

 48. 삼성미술관리움

 49. 화의군묘역

 

 5. 서울 강북 동부 (동대문, 성북, 성동, 광진, 중랑구)
 1. 선농단 (선농대제)

 2. 세종대왕기념관
 3. 영휘원과 숭인원
 4. 홍릉수목원

 5. 고려대박물관

 6. 동망봉

 7. 보문사

 8. 개운사

 9. 보타사

 10. 개운산공원

 

 11. 삼군부총무당 (삼선어린이공원)

 12. 최순우옛집

 13. 돈암장

 14. 선잠단터

 15. 간송미술관

 16. 성북동 성락원

 17. 길상사

 18. 성북동 이종석별장

 19. 수연산방

 20. 성북구립미술관

 

 21. 심우장

 22. 삼청각

 23. 북악산 김신조루트(북악하늘길)

 24. 정릉

 25. 봉국사

 26. 경국사

 27. 정릉계곡

 28. 북한산둘레길 솔샘길

 29. 경동시장과 약령시장

 30. 서울풍물시장

 

 31. 서울숲

 32. 수도박물관

 33. 뚝섬

 34. 화양리느티나무

 35. 어린이대공원

 36. 아차산생태공원

 37. 아차산 홍련봉보루유적
 38. 아차산성과 아차산 보루유적

 39. 용마폭포공원

 40. 서울시립대, 배봉산공원

 

 41. 의릉

 42. 망우리공원 (망우리묘지)

 43. 중랑캠핑숲

 44. 봉화산 (봉화대)

 45. 살곶이다리

 

 6. 서울 강북 북부 (강북, 도봉, 노원구)
 1. 북한산 화계사
 2.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3. 조병옥박사묘

 4. 북한산 본원정사

 5. 북한산 구천폭포

 6. 4.19국립민주묘지

 7. 북한산둘레길 순례길

 8. 우이동 솔밭공원

 9. 북한산 소귀천계곡

 10. 북한산 도선사

 

 11. 봉황각

 12. 손병희선생묘

 13. 우이령길 (우이동~우이동유원지~우이령)

 14. 북서울꿈의숲

 15. 초안산공원 (초안산조선시대분묘군)

 16. 옹기민속박물관

 17. 연산군묘

 18. 방학동은행나무와 원당샘

 19. 양효공안맹담과 정의공주묘역

 20. 북한산둘레길 소나무숲길

 

 21. 도봉산둘레길 (우이동~무수골~도봉산입구)

 22. 중랑천 (중랑천둑방길)

 23. 도봉산 무수골

 24. 도봉산 도봉서원

 25. 도봉산 천축사

 26. 도봉산 만월암

 27. 도봉산 우이암 봉우리

 28. 도봉산 만장봉, 자운봉

 29. 창포원

 30. 수락산 벽운동계곡


 31. 수락산 정상

 32. 수락산 학림사

 33. 불암산 (불암산성, 불암산둘레길)

 34. 불암산 학도암

 35. 이윤탁한글영비 (한글고비)

 36. 태릉 (조선왕릉전시관)

 37. 강릉 (태릉 동쪽, 제한관람)

 38.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39. 화랑대역

 40. 태릉이스턴캐슬공원 (옛 태릉푸른동산)

 

 7. 서울 강서 (강서, 양천, 구로, 영등포, 금천구)
 1. 강서습지생태공원
 2. 개화산 약사사 (개화산)
 3. 개화산 미타사

 4. 서남물재생센터공원

 5. 겸재정선기념관

 6. 양천향교

 7. 궁산공원 (옛 양천고성터)

 8. 허준박물관

 9. 구암공원, 허가바위

 10. 안양천 (안양천 둑방길)


 11. 우장산공원

 12. 서서울호수공원

 13. 궁동 정선옹주묘역

 14. 궁동저수지생태공원

 15. 오류동 류순정, 류홍묘역

 16. 선유도공원

 17. 여의도 여의도둑방길 (여의도 벚꽃축제)

 18. 여의도공원
 19. 63빌딩

 20. 샛강생태공원

 

 21. 가산(가리봉)로데오거리

 22. 금천아트캠프, 금천구청역~독산역 벚꽃거리

 23. 시흥동 은행나무 (은행나무4거리)

 24. 호암산 호압사

 25. 관악산둘레길 호암산 구간

 26. 호암산성터와 한우물, 석구상 (불영암)

 27. 호암산 칼바위

 

 8. 서울 강남 (동작, 관악, 강남, 서초구)
 1. 사육신묘
 2. 흑석동 효사정
 3. 상도동 양녕대군묘역
 4. 국사봉 사자암 (국사봉)
 5. 보라매공원
 6. 신림동 굴참나무

 7. 난곡 강사상/강홍립(진주강씨)묘역, 신도비

 8. 삼성산성지
 9. 관악산 (관악산 철쭉제)

 10. 관악산 둘레길 (사당~낙성대~삼성산성지 구간)

 11. 낙성대
 12. 봉천동마애미륵불
 13. 사당동 임당 정공신도비 (동래정씨묘역)

 14. 효간공 이정영 묘역

 15. 관악산 관음사

 16. 구 벨기에공사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17. 국립서울현충원

 18. 호국지장사
 19. 동작충효길 (동작구 둘레길)
 20. 잠실뽕나무 (잠원동)

 

 21. 강남역거리

 22. 도산공원

 23. 봉은사

 24. 삼성역 코엑스 (코엑스 아쿠아리움)

 25. 선정릉

 26. 효령대군묘역

 27. 우면산

 28.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29. 양재시민의숲

 30.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31. 양재천

 32. 구룡산

 33. 대모산

 34. 대모산 불국사

 35. 헌인릉

 36. 광평대군묘역

 37.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38. 한국자수박물관

 39. 호림박물관

 

 9. 서울 강동 (송파, 강동구)
 1. 잠실종합운동장

 2. 석촌호수

 3. 잠실롯데월드

 4. 삼전도비

 5. 석촌동고분군

 6. 방이동고분군

 7. 오금공원

 8.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9. 한성백제박물관

 10. 방이동 생태학습관

 

 11. 풍납토성

 12. 암사동 선사유적지

 13. 일자산 (일자산 해맞이공원, 둔굴)

 14.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

 15. 길동자연생태공원
 
16. 고덕산 (고덕산림욕장, 강동그린웨이, 광주부원군묘역)

 17. 성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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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여행도서] 여행책의 백미, '남한 명승비경 79곳'

"예예원출판사(드라이브사)"에서 만든 "남한 명승비경 79곳" 책을 추천합니다.
이 책은 수도권부터 강원,충청,경상,전라도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산,계곡, 폭포 등의

명소 79곳을 소개하는 책으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사진,지도가 잘 나와있습니다.

특히 여름휴가철이나 계곡,폭포,명승비경 여행에는 아주 요긴한 책이지요.

책에 실려있는 사진들은 전문사진작가가 찍었다고 하며, 사진은 정말 괜찮습니다.
일부는 사진대회에도 출품하여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하며 여러 번 언론에 소개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의 단점이 딱 하나 있다면 숲,계곡,폭포 주변 음식점, 숙박업소에 대한 정보가

약간 미흡한 점인데, 그건 별로 신경쓸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만큼 명승지 관련 설명과

사진,정보가 풍부하니까 말이죠.


이 책은 현재 왠만한 유명서점,대형서점에서 판매되고 있구요.
저도 이책 1권을 가지고 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계곡 등에 갈때 이 책을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정확한 제목은 "남한 명승비경 79곳"입니다.
가격은 13000원..

한번 봐보세요.  저도 여기서 많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
후회하지는 않을 겁니다. 노련한 여행/사진 전문가가 만든 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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