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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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0.08.16 제주도의 아름다운 서쪽 끝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수월봉 나들이 (차귀도, 산방산탄산온천)
  3. 2020.02.05 아름다운 제주도의 서쪽 끝을 거닐다 ~~ 절부암, 생이기정, 제주올레길12코스 나들이 (차귀도, 와도) 2
  4. 2019.04.21 남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옛 탐라의 현장, 제주도 새해 나들이 (외도 월대, 수산리곰솔, 납읍 금산공원, 제주올레길15,16,17코스)

서귀포 서귀포층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제주올레길2코스 겨울 나들이 (새섬공원)

서귀포 겨울 나들이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 서귀포 겨울 나들이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새섬에서 바라본 범섬과 남해바다

▲  새섬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혼인지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  혼인지

 



 

묵은 해가 극한 아쉬움 속에 저물고 새해가 시작되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대륙
, 제주도(濟州島)를 찾았다.

간만에 발을 들인 제주도에서 3일 동안 미답처(未踏處)를 중심으로 정말 알뜰하게 돌아다
녔는데, 둘째 날 늦은 오후(17시)에 서귀포시내에 있는 천지연폭포(天地淵瀑布) 주차장에
이르렀다.
천지연폭포는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인연을 지었던 곳이라 애써 고개를 돌리며 새섬이 있
는 남쪽 바닷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둘째 날은 새섬까지 소화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허나
약천사(藥泉寺, ☞ 관련글 보러가기) 이후부터 하늘에 주름진 구름들이 꽉 들어차더만 새
섬방파제에 이르자 지독하게 검은 피부를 보이며 빗방울을 투하한다. 상황이 그러자 새섬
이고 나발이고 싹 내일로 내던지고 바로 시내로 나와 적당한 모텔을 잡아 일찍 휴식에 들
어갔다. (20시에 저녁을 먹으러 잠시 서귀포 시내로 나갔음)

거의 16시간 동안(10시간 정도 잤음) 꿀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10시, 새섬을 잡으러 출동
했다. 모텔 1층 로비에는 감귤의 대표 산지인 서귀포(西歸浦)에 걸맞게 감귤이 든 바구니
가 있었는데, 투숙객들은 마음껏 집어먹으면 된다. 하여 나는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딱 3
개만 집어서 밖으로 나왔다.
전날 저녁과 달리 광합성에 최적화된 아주 쾌청한 날씨로 관광객들로 벌써부터 정신이 없
는 천지연폭포 주차장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가면 새연교와 새섬방파제, 서귀포유람선 선
착장이 나온다. 여기서 잠시 그들에 대한 시선을 접고 벼랑이 펼쳐진 서쪽 해안을 주목해
보자. 그곳에는 매머드(Mammoth)가 담배를 피던 시절, 옛 생물들의 흔적들이 가득 깃들여
져 있다.


▲  연외천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천지연폭포 입구
(사진 중앙에 있는 다리가 칠십리교)



 

♠  천지연폭포 남쪽 바닷가에 깃든 옛 생물들의 희미한 흔적들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西歸浦層 貝類化石産地)
- 천연기념물 195호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해변

새섬방파제 서쪽에는 주름진 벼랑과 큼직한 바위들로 가득한 해변이 있다. 얼핏 보면 평범한
해안으로 여기고 지나치기 쉬우나 이곳은 제주도에서만 발견되는 서귀포층(西歸浦層)이 형성
된 벼랑으로 30여m 높이로 약 1km 정도 펼쳐져 있다. 절벽을 따라 약 40~60m 정도 두께를 보
이고 있으며, 그의 피부와 속살에는 조개 등 많은 화석들이 들어있다.

1928년 왜인(倭人) 학자인 하라구치(原口九萬)가 발견하여 지역 이름을 따 서귀포층이라 하였
는데, 처음에는 이곳 등 일부에만 그런 지층이 확인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 지하수를 캐내고
자 제주도 곳곳을 들쑤시면서 잠자고 있던 서귀포층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제주도 형성 초기
에 무수히 일어났던 화산활동으로 나온 현무암질 화산재 지층과 바다에 쌓인 퇴적암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제주도의 옛날 기후와 해수면 변동을 소상히 알려준다.

서귀포층은 물을 통과시키지 않는 특징이 있어 물이 거의 새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서귀포층
주변은 물이 풍부하여 해안가 지층 틈새로 물이 쏟아져 나오니 이를 용천수(湧泉水)라고 부른
다. 제주도는 누수에 최적화된 현무암 피부의 땅이라 물이 넉넉치가 못한 편인데, 서귀포층은
그 문제를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대자연 형님의 소중한 선물이다.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
기 이전부터 용천수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해안가에 많이 분포하고 있음)


▲  화석들이 고이 잠들어있는 서귀포층 바위들

이곳 벼랑과 바위에는 옛 생물의 화석이 무수히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매머드가 뛰어놀던 약
200~300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조개류가 상당수를 이루고 있는데, 달팽이, 전복, 우렁이 등
의 복족류와 굴족류, 완족류, 성게와 해삼, 불가사리 등의 극피동물, 산호화석, 고래와 물고
기 뼈, 상어 이빨 화석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서울대 김봉균 교수에 의해 저서성유공충(底棲性有孔蟲, 호수나 바다의 바닥을 기어다니
는 유공충) 41속 73종과 부유성유공충<浮游性有孔蟲, 플랑크톤 생활을 하는 원생동물(原生動
物)> 8속 18종 등의 미화석(微化石, 눈으로 확인이 불가능한 미생물 화석)도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 나온 화석 대부분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생물들이나 현재 서귀포 지역에서는 살지
않는 것들도 여럿 있다. 특히 조개 화석 같은 경우 이곳보다 훨씬 남쪽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그들이 발견된 것을 통해 서귀포층 초창기의 바다가 지금보다 따스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옛 생물의 화석이 풍부히 담긴 탓에 1968년 국가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얻었다. 하지만
해변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고, 행정당국의 오랜 직무유기로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
면서 마구잡이 화석 채취와 훼손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다. 근래에 벼랑 쪽으로 출입금지
안내문이 세워졌으나 그뿐이며,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보호용 난간이나 철책을 두룰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한 새섬방파제 바로 서쪽에 눈에 띄게 있음에도 천지연폭포나 새섬, 유람선에 눈이 어두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치기 일쑤이다. 그러니 새섬이나 천지연폭포를 보러왔다면 이곳도 꼭
둘러보기 바라며, 고된 세월에 지친 그들을 눈으로만 살피기 바란다. (저들을 떼거나 만지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람)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서홍동 707 (남성중로 43)


▲  큰 돌에 담긴 화석들
돌에 박힌 하얀 존재들이 모두 화석이다. 물고기 뼈와 조개 화석으로 저들은
죽어서 대자연의 조화를 받아 조촐하게 그들의 흔적을 남겼다.

▲  옛 수중동물의 넋이 서린 서귀포층 바위
마치 회색빛 어항 속에서 올챙이나 송사리 같은 작은 물고기들이 거니는 것 같다.

▲  다양한 화석과 고된 세월의 주름선이 뒤섞인 서귀포층 바위들 ▼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해안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

저 멀리 그림의 떡처럼 자리한 범섬은 이름 그대로 호랑이처럼 생긴 섬이다. 절벽으로 이루어
진 무인도로 고려 끝 무렵인 1374년 최영(崔瑩) 장군이 제주도에 잔류하며 저항을 하던 몽골(
원나라)의 목호(牧胡) 패거리를 최종 처리한 현장이기도 하다.


▲  제주도와 새섬을 잇는 새연교 (새섬방파제 쪽)

새섬을 가려면 무조건 새연교를 통해야 된다. 그는 2009년에 닦여진 다리로 새섬과 제주도를
끈끈하게 붙잡고 있는데, 다리 이름인 '새연'은 새섬을 잇는 연륙교의 줄임말로 알고 있었으
나 알고 보니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다리'란 의미라고 한다.
제주도에서 가장 큰 뚜벅이 전용 다리로 서귀포항의 랜드마크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이 다리
가 닦임으로써 바다의 눈치 없이 마음껏 새섬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  새섬방파제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왼쪽), 서귀포층 벼랑

▲  새연교에서 바라본 서귀포항과 서귀포(서귀동) 시내



 

♠  서귀포항 앞바다에 상큼하게 떠있는 작은 섬, 새섬

▲  새섬에서 바라본 새연교와 서귀포층 벼랑

새섬은 서귀포항 앞바다에 바짝 떠있는 작은 섬으로 천지연폭포에서 흘러내려온 연외천과 남
해바다가 만나는 곳에 자리한다.
이름이 새섬이다 보니 새와 관련된 것으로 여기기 쉬우나 실상은 초가 지붕을 잇는 새(띠)가
많이 나와서 새섬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한자로는 초도(草島), 모도(毛島)라 불리며 섬
의 면적은 104,581㎡,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7.7m이다.

제주도의 심장인 한라산(漢拏山)이 폭발하면서 거기서 나온 암석이 떨어져 섬이 되었다는 전
설이 있으며, 조선 중기에 사람들이 건너가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섬으로
들어가려면 간조 때 새섬목을 건너거나 배를 이용해야 했으며, 1960년대 중반까지 사람이 살
았으나 모두 철수하여 금지된 무인도가 되었다.
그러다가 2009년 새연교가 닦이면서 도시자연공원으로 천하에 개방되었으며, 천지연폭포와 서
귀포항을 수식하는 명소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비록 속세에 개방은 되었으나 새벽 일출시
부터 22시까지만 개방한다. 그러니 21시까지는 입장해야 무난하게 서귀포항 야경(夜景)도 즐
기며 섬 1바퀴를 돌 수 있다. 또한 섬이다 보니 태풍이 오거나 해상 날씨가 영 좋지 않은 경
우에는 출입이 통제될 수 있다.


▲  새섬 산책로에서 바라본 새연교의 위엄 (바로 밑이 새섬방파제)

새연교를 건너면 섬을 1바퀴 도는 1.1km의 산책로가 나오는데, 어느 쪽으로 가던 다시 새연교
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천천히 둘러보면 최소 20~30분 정도 걸리며, 섬 북쪽은 연외천과 바다
가 만나는 서귀포항, 동쪽은 서귀포항 중심부, 서쪽과 남쪽은 푸른 바다라 주변 풍경도 아름
답다.

섬 전체는 난대림(暖帶林) 보호구역으로 나무가 울창하며, 새섬목, 담머리코지, 새섬뒤, 노픈
여, 안고상여, 섯자릿여, 자릿여, 모도리코지 등의 소소한 명소들이 있다.

* 새섬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산3-2


▲  새섬에서 바라본 범섬과 황우지, 서귀포 서부 해안

▲  해안을 따라 닦여진 새섬 산책로
이곳 산책로는 흙길과 자갈길, 나무데크길로 이루어져 있다. 거의 평지라 누구든
편히 거닐 수 있으며, 주변 풍경이 고와서 체감 거리가 꽤 짧게 느껴진다.

▲  난대림과 소나무 그늘 속을 지나는 새섬 산책로

▲  새섬에서 바라본 문섬

손에 잡힐 듯 진하게 아른거리는 문섬은 서귀포항에서 1.3km 떨어진 작은 무인도이다. 문섬이
란 이름은 옛날부터 유별나게 모기가 많아서 모기를 뜻하는 한자를 취해 그리된 것으로 녹도(
鹿島)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  새섬에서 바라본 서귀포항 방파제와 섶섬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존재가 파초일엽(芭蕉一葉) 자생지로 유명한 섶섬이다.

▲  새섬 동쪽에 자리한 서귀포항 중심부
서귀포항은 새섬과 새섬방파제, 문섬, 서귀포항 방파제가 포근히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항구의 입지로 아주 좋다.

▲  새섬 주변 바다의 요염한 속살

▲  새섬 북쪽에서 바라본 서귀포항과 서귀포시내
(연외천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곳)

▲  새섬 북쪽 산책로

▲  새섬 서쪽에서 바라본 새연교와 서귀포층 벼랑



 

♠  제주도 시조의 혼인설화를 품고 있는 제주도의 영원한 성역
혼인지(婚姻池) - 제주도 지방기념물 17호


▲  혼인지(혼인터) 표석

새섬에 퐁당퐁당 빠져 거의 1시간을 머물다가 아쉽지만 그곳을 등지며 천지연폭포 주차장으로
나왔다. 주차장에는 시내버스 여러 대가 육중한 바퀴를 접고 쉬고들 있었는데, 서귀포시내버
스 641번(천지연폭포↔서귀포시청2청사)이 먼저 기지개를 켜며 부릉부릉 심장 소리를 낸다.
하여 그것을 타고 시내인 동문로터리로 나왔다. 시내까지 거리는 가까우나 천지연폭포는 바다
와 맞닿은 낮은 곳에 있고 시내는 그보다 훨씬 높은 언덕배기에 있어 지형적인 영향으로 버스
와 차량은 서귀포항과 서귀포초교로 다소 돌아간다.

동문로터리에서 다음 답사지인 혼인지를 가고자 제주도 간선 201번(제주버스터미널↔서귀포버
스터미널)을 잡아탔다. 혼인지까지는 40km 거리로 1시간 정도를 신나게 달려 혼인지입구에서
두 발을 내렸다.
한적하기 그지 없는 혼인지입구에서 혼인지로를 따라 조금 들어가면 혼인지 표석이 마중을 나
온다. 제주올레길2코스(광치기해변↔온평포구, 15.2km)가 이 도로의 신세를 지며 혼인지로 가
는데, 표석에는 하얀 글씨로 '혼인지' 3자가 한문으로 쓰여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연못을
뜻하는 '池'가 아닌 터를 뜻하는 '址'가 쓰여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싶어 잠시 혼돈에 빠졌으나 분명 그 혼인지가 맞다. 제주도 시조들이 혼인을 했던 터라 표석
에 그렇게 쓴 것이며, 혼인지입구에서 10분 정도 들어가면 혼인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남쪽에서 바라본 혼인지

혼인지는 500평 정도의 자연산 못으로 갈대와 수초들이 못 외곽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평
지에 누운 평범한 모습의 못이나 이곳은 제주도의 시조라는 고을나(高乙那)와 양을나(良乙那
), 부을나(夫乙那) 등 이른바 삼신인(三神人)이 장가를 가던 곳이라고 전한다. 하여 그들의
탄생설화가 깃든 삼성혈(三姓穴)과 더불어 제주도에서 가장 유서 깊은 성지로 애지중지되고
있다.

연못 주변에는 제주도에서 넘쳐나는 현무암으로 낮게 담장을 둘러서 속세와 경계를 그었으며,
그 주변을 공원으로 산뜻하게 손질하여 산책로와 숲을 닦았다. 오래된 존재로는 혼인지와 삼
신인이 신방을 꾸렸다는 신방굴이 있으며, 근래에 지은 3공주 추원각과 추원비, 전통혼례관,
탐라생활사료관, 생태연못 등이 혼인지를 수식한다. 그리고 제주올레길2코스가 혼인지 설화를
흠모하며 그의 옆구리를 슬쩍 지나친다.


▲  혼인지 서쪽에 닦여진 탐방로(제주올레길2코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혼인지, 그곳에 서려있는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는 대략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4,300여 년 전, 고을나와 부을나, 양을나가 모흥혈(毛興穴, 삼성혈)이라는
곳에서 갑자기 솟아났다. 그들이 있기 전에는 제주도에 그 흔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가죽옷을 입고 동물 사냥과 어로로 생활을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한라산에 올라가
주변을 살피다가 동쪽 바다에서 자주빛 진흙에 봉해진 오색찬란한 큰 목함(木函)이 떠내려온
것을 발견했다. 목함이 상륙한 곳은 혼인지와 가까운 온평리 연혼포(延婚浦, 갯고랑)라고 한
다.
호기심이 불끈 솟은 그들은 그곳으로 달려가 목함을 열었더니 그 안에 석함(石函)이 들어있었
고, 자주빛 옷에 붉은 띠를 두른 사자(使者)가 나타났다. 그리고 석함을 열었더니 푸른 옷을
입은 15~16세 정도의 아리따운 공주 3명과 송아지, 망아지, 오곡(五穀)의 씨앗이 있었다.


▲  늪지대 기운을 지닌 혼인지 (서쪽에서 본 모습)

이들을 데리고 온 사자는 3신인에
'나는 동해 벽랑국(碧浪國)에서 왔습니다. 우리 군주께서 공주 3명을 두었는데 혼기가 차도록
배필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마침 서해 높은 산(한라산)에 3명의 신인이 나와 장차 나라를 세
우려고 하나 배필이 없다는 것을 듣고 저에게 명해 세 공주를 모셔왔으니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십시요~~!'
말을 끝내고는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기쁨에 잠긴 3신인은 나이에 따라 공주 자매를 배필로 정해 바로 이곳 혼인지에서 혼인과 예
민한(?) 신방을 치루고 삼사석(三射石, 제주시 화북동)에서 활을 쏘아 거처할 곳을 정했다.
또한 공주가 가져온 소(송아지)와 말(망아지)을 기르고 오곡 씨앗을 뿌리니 이때부터 제주도
에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상이 혼인지에 서린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혼인지
누렇게 뜬 갈대와 수초들이 덥수룩하게 자라나 자연산 연못의
풍경을 거들어준다.


삼신인은 앞서 언급한 대로 삼성혈 구멍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이때가 4,300년 전이라고 하는
데, 우리 역사가 단군조선에서부터 4,300년 이상 묵었음을 강조하고 있어 그것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3신인이 4,300년 이상 되었다는 자료와 유물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또한 1세기 경에 한라산 대폭발로 제주도 사람과 동물들이 대부분 강제 죽음을 당했는데, 겨
우 일부가 살아남아 화산재와 용암으로 지옥이 된 제주도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때 3신인
이라 표현된 인물 3명이 사람들을 잘 이끌어 제주도 세력의 군주가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공주를 보냈다는 벽랑국에 대해서도 왜열도설과 동해(東海)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
으며, 왜열도는 공주와 오곡, 소, 말을 보낼만한 수준이 전혀 되지 못한다. 하여 동해안(경상
도나 영동지방, 함경도 등)에 있던 작은 나라나 세력으로 여겨진다. 그곳에서 바다 너머 멀리
떨어진 제주도 세력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라면 서로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탐라(耽羅)라 불리던 제주도 세력은 바닷길을 적극 이용해 4,000리의 영토를 지녔던 삼한(마
한, 진한, 변한)과 백제, 신라, 가야는 물론 멀리 중원대륙과 동남아 제국(諸國)들과도 교역
을 했었다.


▲  삼공주추원비(三公主追遠碑)
어딘지 모를 벽랑국에서 건너와 삼신인의 배필이 되어 제주도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던 3공주를 추모하고자 후손들이 세웠다.


벽랑국이 망하여 그 세력이 제주도로 넘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들은 가축과 오곡 씨앗, 여
러 좋은 문물을 싣고 떠돌다가 제주도에 상륙했을 것이고, 제주도 세력은 그들을 받아들여 통
합 차원에서 혼인을 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농업과 목축 기술까지 챙기면서 제주도에 제대
로 된 농경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남긴 탁라가(乇羅歌)의 2번째 시
김종직이 제주도를 다녀가면서 탁라가 14수를 남겼는데, 그 2번째 시가
바로 혼인지 설화를 머금고 있다.

먼 옛날 신인이 세 곳에 도읍하셔
해돋는 물가에서 배필을 맞으셨다네
그 시절 삼성(삼신인)이 혼인했던 일은
전해내려오는 주진의 전설과 같네

▲  혼인지의 분위기를 한껏 경건하게 다듬어주는
소나무숲길 (신방굴 주변)

▲  소나무 그늘에 자리한 신방굴

혼인지에 왔다면 소나무숲에 있는 신방굴이란 자연산 굴도 꼭 둘러보기 바란다. 혼인지 연못
과 함께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산 존재로 3신인이 벽랑국 공주를 하나씩 품고 예민한(?)
첫날 밤을 보냈다는 곳이다.

굴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으나 내부가 협소하고 어둡다. 그런 곳을 1쌍도 아니고 3쌍이 좁은
곳에서 예민한 일을 치룬다는 것이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이 동물도 아니고 일명 성
진국(性進國)으로 전세계적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천박한 왜열도 원숭이들도 아닌데 말이다.
하여 못 주변에 대충 집을 짓거나 자신들이 살던 집에서 예민한 첫 밤을 보냈을 것이다. 혼인
지가 3신인과 3공주가 혼인을 했던 현장이라 연못 부근에 있는 이 굴까지 설화의 현장으로 넣
었던 것이다.


▲  속세를 향해 입을 벌린 신방굴
신방굴은 땅 바로 밑에 있는 굴이다. 저런 누추한 곳에서 정말 첫날 밤을
보냈을까? 그것도 제주도 세력가와 벽랑국 세력가의 딸이 말이다.

▲  신방굴 내부로 들어서다
굴 높이가 낮으므로 굴에 절대 피해가 없도록 몸을 푹 쑥이고 들어가야 된다.

▲  어두컴컴한 신방굴 내부

▲  신방굴에서 나오는 3신인과 3공주를
재현한 사진


▲  흑백사진에 담긴 1960년대 초 온평리(혼인지마을) 혼례 모습

▲  돌담 너머로 바라본 삼공주 추원사(追遠祠)
2009년 10월에 지어진 것으로 벽랑국 3공주의 위패를 머금고 있다. 돌담 안쪽
오른쪽 건물이 추원사로 매년 6월 10일 후손들이 추원제를 지낸다.

▲  삼공주 추원사

▲  혼인지 남쪽에 세워진 정자

혼인지는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 때문에 지역 사람들의 혼인 장소 역할을 했다. 지금도 전
통혼례관을 두어 혼인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비록 속세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명소이나
제주도에 신혼여행이나 부부여행으로 왔다면 꼭 들러볼 만하다.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한 곳이
다.

* 혼인지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1693 (혼인지로 39-14, ☎ 064-710-6798)


▲  소나무와 동백꽃이 무성한 혼인지 산책로
동백이 도도한 붉은 피부를 드러내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마구 들었다 놓는다.

▲  혼인지를 마무리 짓다 (전통혼례관 주변 산책로)
혼인지 이후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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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아름다운 서쪽 끝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수월봉 나들이 (차귀도, 산방산탄산온천)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제주올레길12코스, 고산리유적, 수월봉)

당산봉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  당산봉에서 바라본 와도(앞쪽)와 차귀도(뒷쪽)

제주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  제주 고산리유적

▲  엉알해안


 

겨울 제국의 추위 갑질이 한참이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
濟州島)를 찾았다.

햇님보다 훨씬 일찍 김포국제공항으로 달려가 제주도로 가는 6시대 비행기에 나를 담고
1시간 정도를 움직여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하늘 비행시간 50분, 활주로 방황시간
10여 분)
제주도에서 정처(定處)는 이미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되는데 제주도에
발을 딛자마자 서쪽으로 길을 잡아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15시 경, 한림읍 용수리에 이
르렀다.
용수리에서 절부암(節婦岩)을 먼저 둘러보고 그날의 주메뉴인 제주올레길12코스(용수리
~무릉리, 17.5km)에 발을 들인다. 12코스의 ⅓ 정도 되는 해안길을 따라 수월봉까지 이
동하기로 했으나 햇님의 칼퇴근 본능으로 일몰 전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물
론 가기야 하겠지만 해가 떨어지면 사진 출사도 거의 불가능해지고 속세와도 떨어진 외
진 곳이라 무서움까지 발생할 수 있다. (외딴 산길이나 제주올레길은 가급적 일몰 전에
마치는 것이 좋음) 하여 일단 수월봉 북쪽인 고산리유적을 1차 목적지로 삼고 12코스에
나를 던져놓았다.
12코스를 따라 용수마을 방사탑 2호와 생이기정 등의 조촐한 명소를 둘러보고 올레길을
1굽이 지날 때마다 포즈를 조금씩 달리하는 차귀도와 와도(누운섬)를 옆구리에 끼며 가
다보니 어느덧 당산봉에 이르렀다. 본글은 바로 당산봉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산봉 이전 절부암, 생이기정, 제주올레길12코스 부분은 ☞ 이곳을 클릭한다)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 유적)

▲  바로 밑으로 바라보이는 와도와 차귀도(遮歸島)

차귀도와 고산리, 남해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당산봉(堂山峰)은 해발 148m의 낮은 뫼이다. 지
금이야 이 땅에 흔한 뒷동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어 실감은 나지 않겠지만 수억 년 전, 화산이
내뿜은 마그마나 용암이 바닷물과 만나 격하게 이루어진 수성화산체이다.
용암이 물을 만나면 용암은 급히 식고 물은 펄펄 끓는다. 이런 냉각과 가열반응은 격렬히 일
어나 수증기를 포함한 큰 폭발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수성화산활동이라 한다. 작은 알갱이
와 수증기로 이루어진 분출은 제법 패기가 있어 이들 화산쇄설물(火山碎屑物)은 멀리까지 날
라가 퇴적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오름을 응회구(凝灰邱)나 응회환이라고 한다. 응회
구는 성산일출봉(城山日出峯)이 대표적으로 높이가 꽤 되며 응회환은 그 다음 수준으로 수월
봉, 당산봉, 송악산이 이에 해당된다.

당산봉은 산방산, 용머리와 더불어 제주도에서 제일 오래된 화산체이다. 예전 이름은 당오름
으로 산기슭에 뱀을 신으로 봉안한 차귀당이 있었는데 그 신을 '사귀(蛇鬼, 뱀신)'라고 했다.
바로 그 당집 때문에 당오름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후 그 사귀가 와전되어 '차귀'가
되었고, 봉우리 이름도 잠시 '차귀오름'으로 갈렸다고 전하며, 현재 이름인 당산봉은 당오름
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봉우리 정상에 넓적한 바위가 있는데 마치 닭벼슬처럼 보여 계관산(鷄冠山)이라 했다는 이야
기도 덧붙여 전해오며, 당산봉 서쪽 꼭대기에는 봉수대가 있었는데 북쪽으로 판포봉수, 남동
쪽으로 모슬봉수와 연락을 했다.

올레길12코스는 당산봉 서쪽 기슭을 지나갈 뿐, 꼭대기는 거치지 않는다. 대신 꼭대기와 당산
봉 주위를 도는 둘레길이 별도로 있어 그 길을 이용하면 완벽한 당산봉 투어가 가능하다. 시
간이 되면 당산봉도 보너스로 거닐고 싶었으나 일몰 시간을 구실로 바로 고산리 유적으로 넘
어갔다. 그때 나에게는 그저 수월봉만 보일 뿐, 당산봉 자체는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당산봉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고산리


▲  오르락 내리락이 반복되는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구간

▲  드디어 시야에 들어온 수월봉과 고산리유적
바다를 향해 길쭉하게 고개를 내민 해안 언덕이 바로 수월봉이다. 사진 가운데
벌판은 고산리 유적으로 일몰은 코앞인데 아직도 길이 저만치나 남아있어
발걸음의 고삐를 더욱 조이게 한다.


당산봉을 내려가면 고산리 벌판과 함께 2차선 노을해안로가 나타난다. 제주올레길12코스는 그
길의 신세를 지며 차귀도포구(고산포구)로 이어지는데 그 포구와 엉알해안을 거쳐 수월봉으로
달려간다. 12코스를 정석대로 거쳐야 엉알해안까지 둘러볼 수 있으나 시간도 그렇고 수월봉에
너무 정신이 팔려 올레길12코스를 잠시 내버리고 고산리유적으로 바로 질러가는 편법(?)을 썼
다. 난 그때까지 수월봉 밑도리가 엉알해안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수월봉 북쪽 해안이 엉알
해안)


▲  동쪽에서 본 고산리 유적 (억새 너머 벌판이 고산리 유적임)

▲  제주 고산리(高山里) 유적 - 사적 412호

수월봉과 당산봉 사이 벌판에 고산리 유적이 넓게 누워있다. 유적의 면적은 약 98,465㎡로 풀
이 뒤덮힌 들판 수준이라 이곳이 무슨 유적인가 물음표를 던지겠지만 유적은 보존을 위해 그
밑에 고이 묻어두었으며, 유적 변두리에는 개인 경작지가 존재하고 있다.

이곳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유적으로 제주도의 대표적인 선사시대 유적지이다. 1987년 5
월, 고산리 주민들이 흙을 채취하고자 땅을 파다가 석창과 긁개를 발견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제주대학교는 그것이 발견된 곳을 답사하여 찌르개, 긁개, 돌도끼 1점을 발견하면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고산리유적이 슬슬 깨어나게 된다.
1988년 1월, 영남대학교 대학원생인 강창화가 수월봉에서 북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서 융기
문토기 1점을 수습했다. 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 이전에 쓰이던 것으로 그때는 기원전 4,000
년 이전 것으로 파악했으나 지금은 기원전 6,000년으로 보고 있다.

1991년과 1992년 겨울,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정밀 지표조사를 벌였다. 그때 자구내포구에서
하천변을 따라 수월봉에 이르는 유물산포지를 확인했고 지번별로 약 6,000여 점의 유물을 건
졌다.
1994년 신창~무릉간 해안도로가 신설되면서 고산리 유적을 관통하게 되자 그해 6월부터 8월까
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발굴 범위는 수월봉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서 포구에 이르
는 약 200m, 폭 12m 구간으로 출토 유물은 석기와 토기 등 3,000여 점이며, 고산리식 토기라
불리는 섬유질토기의 파편이 확인되는 등 성과가 대단했다. 하여 국제학술세미나를 통해 구석
기시대 후기에서 신석기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유적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허나 유물의 절대연대자료가 부족하고 유적의 층위 분석도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경작으로 유
적과 그곳에 깃든 유물이 계속 파괴되고 고통을 받자 1997년 다시 발굴조사를 하였다. 이때는
17,000여 점의 석기와 1,900여 점의 토기를 끄집어내는 성과를 거둔다.

1998년 11월부터 1999년 2월까지 다시 조사를 벌여 170여 점의 타제석기와 토기를 발굴했으며
, 사적으로 지정될 구역 외 지역에 대한 조사를 벌여 유적의 범위를 파악했다. 그리고 이듬해
국가 사적의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2012년 1구역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를 벌여 원형움집터 26동, 수혈유구 295기, 야외 불피던 곳
10기, 구상유구 2기, 토기류 87점, 석기류 278점을 발견했는데, 1만년 이전 것으로 파악이 되
어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특히 석촉과 한쪽을 뚫은
옥귀고리 1점은 그 재료가 제주도에는 없는 것들이라 궁금증을 증폭시켰는데, 2013년 1구역을
다시 조사하여(2차 발굴조사) 주거지 7동, 수혈유구 227기, 야외 불피던 곳 3기, 구상유구 1
기, 유물 215점을 건졌고, 석촉 등의 석기가 남해안 일대 암석으로 확인되면서 전남, 경남 지
역 남해안과 교류가 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4년 1구역 3차 발굴조사로 주거지 4동, 수혈유구 78기, 소토(燒土)유구 3기, 구상유구 2기
가 추가로 나왔으며, 2구역 조사에서 문화층의 잔존 범위와 지상식 주거지를 확인했다. 특히
남부지방 신석기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토기인 영선동식 토기가 나왔으며, 고산리유적 거주기
간이 2,000년 이상으로 늘어났다.
2015년 1구역 4차 발굴조사로 주거지 1동, 수혈유구 19기, 소토유구 1기를 건졌으며, 화덕시
설로 추정되는 돌무지 시설을 중심으로 거의 원형으로 기둥 구멍들이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
석기 제작과 관련된 유물이 나왔다. 그리고 2구역 2차 발굴조사에서도 여러 석기들이 나왔다.
이후로도 계속 조사를 벌여 지금까지 고산리유적이 쏟아낸 유물은 성형 석기 5,000여 점, 박
편 94,000여 점 등 석기 99,000여 점과 토기조각 1,000여 점 등 도합 10만여 점에 이른다.
또한 구석기 후기와 신석기 초기를 연결하는 유적이 없어 무척 애를 태웠는데 그 고통을 바로
고산리가 속시워하게 풀어준 것이다. 기원전 12,000~10,000년경 눌러떼기 수법으로 지어진 석
기와 섬유질 토기가 다량으로 나와 이 땅에서 구석기시대가 신석기시대로 자연스럽게 넘어갔
음이 드러난 것이다.
하여 시베리아와 연해주, 만주 등 우리의 옛 땅과 우리나라 등 동북아시아 신석기 초기 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며, 우리나라 신석기 초기 문화의 형성 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애지중지되고 있다.

이곳이 신석기를 비롯한 옛 사람들의 터전이 된 것은 바로 옆 수월봉에서 나온 화산재가 이곳
에 덮히면서 기름지고 평평한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땅에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는
데, 여기서 터전을 일구던 신석기 사람들은 구석기 후기 시절에 수렵과 채집 집단의 석기 제
작 전통을 이어나갔고, 초보적인 형태의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나온
석기는 석재를 기초 원석으로 직접 타격하여 박편(薄片)을 만든 다음, 간접 타격 또는 눌러떼
기로 2차 가공해 제작했다.
토기는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 조각과 덧무늬토기 조각 등이 나왔고, 특히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는 제주도 스타일의 유일한 토기 형식으로 '고산리식 토기'라 불린다.
덧무늬토기는 양양 오산리 신석기시대 유적과 부산 동삼동 패총(貝塚) 등에서 나온 기하학적
태선 덧무늬토기 형식으로 옆면이 굴곡이 있는 선으로 표현되었다.

* 고산리 유적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3628,3650-1 등 (고산리유적안
  내센터 ☎ 064-772-0041)
* 고산리 유적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너른 들판 같은 고산리 유적

▲  고산리 유적에서 바라본 당산봉
내가 용수리에서 저 당산봉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


유적 일대는 거의 들판으로 고산리유적안내센터와 안내문이 전부이다. 유적도 그 보존을 위해
모두 흙으로 덮어놓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유적 남부를 가로질러 가면 2차선의 신창~고산 해안도로(노을해안로)가 나온다. 그 도로는 차
귀도포구에서 나온 길로 그 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가면 수월봉입구가 마중을 한다.


 

♠  제주도의 서쪽 끝을 잡고 있는 수월봉(水月峰)

▲  영산(靈山) 수월봉 표석의 위엄

수월봉입구에서 길은 5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한경면의 중심지인 고산리로 그
곳에 있는 고산6거리(고산리 중심부)까지 1.1km 거리이다. 대중교통으로 수월봉을 찾을 경우
102, 202번 등 제주도 서일주 노선을 타고 고산환승정류장(고산6거리)에서 내려 도보로 접근
하는 것이 편하다.
북쪽 길은 차귀도포구와 고산리 유적으로, 남쪽 길은 고산리 서남부, 서북쪽은 엉알해안, 서
남쪽은 수월봉이다. 당산봉을 내려와서 잠시 버려둔 제주올레길12코스를 여기서 다시 만나서
수월봉으로 같이 가게 되는데, 설마설마했던 수월봉에 일몰 바로 직전에 도착을 한 것이다.


▲  수월봉 북쪽 엉알해안 (수월봉 화산쇄설층 - 천연기념물 513호)

엉알해안 산책로는 차귀도포구 서남쪽 고산출장소에서 수월봉입구까지 이어지는 1.1km 정도의
해안 벼랑 길이다. 여기서 '엉알'이란 바닷가 언덕 밑을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로 그 이름 그
대로 벼랑 밑을 지나는 것인데, 이 벼랑이 수월봉의 백미(白眉)이다. 수월봉에 왔다면 수월봉
도 좋지만 이 벼랑길도 꼭 거닐어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엉알해안 벼랑은 제주도 화산들이 한참 몸을 풀던 시절에 당산봉과 수월봉이 수성화산활동(水
性火山活動)으로 빚어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수월봉과 당산봉은 느긋한 봉우리이나 그 밑 벼
랑은 직각에 가까운 가파른 모습이다. 특히 수월봉은 화쇄난류(火碎亂流, pyroclastic surge)
라 불리는 독특한 화산재 운반작용으로 닦여진 화산체로 화쇄난류층 종류에서 세계 최고의 수
준을 자랑한다. 하여 그와 관련된 논문과 보고서들이 수두룩하게 나와있다.

엉알해안은 수월봉 밑도리까지로 그곳까지는 산책로를 닦지 못하고 수월봉 북쪽 밑까지만 길
을 내었다. 이 산책로도 살펴봐야 했으나 일몰 압박과 코스 혼돈의 무지(無知)로 인해 가지
못하고 이렇게 수월봉 북쪽 입구만 기웃거리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  바다를 향해 고개를 내민 수월봉

▲  수월봉으로 인도하는 길 (제주올레길 12코스)

수월봉은 제주도 본토의 서쪽 끝을 잡고 있는 해발 77m의 해안 언덕이다. (제주도의 서쪽 끝
은 차귀도) 북쪽과 서쪽은 절벽이고 동쪽과 남쪽은 부드러운 산세로 이루어져 있는데, 옛 사
람들이 붙여놓은 수월과 녹고 남매의 슬픈 전설이 속세에서 오염된 두 눈에 이슬을 맺히게 한
다. 수월봉이란 이름은 바로 '수월'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전설은 정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
으나 살펴보면 대략 이렇다.

조선 중기에 수월과 녹고 남매가 홀어미를 모시고 수월봉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갑자기 중병에 걸리자 온갖 약을 구해보았으나 좀처럼 차도가 없어 애 태우던 중, 집 앞을 지
나던 승려가 그 사연을 듣고 100가지 약초를 알려주었다.
하여 수월 남매는 제주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99가지를 구했으나 나머지 하나인 오갈피를 찾
지 못해 마을 앞 수월봉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봉우리
벼랑에서 오갈피가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다. 오갈피에 난데없는 등장에 그들은 너무 기뻤으나
문제는 절벽 중간쯤에 있다는 것. 그래도 그것을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수월은 남동생인 녹고
의 손을 잡고 벼랑으로 내려가 그것을 뜯어 녹고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은 녹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탄성을 지르다가 그만 실수로 수월이의 손을 놓고 말았다. (또는 수월이가 벼랑을 기
어올라 오갈피를 구했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함)

수월은 그대로 벼랑 밑으로 떨어져 죽었고, 녹고는 넋을 잃고 17일 동안 누이를 부르며 울었
다. 그 눈물이 바위 틈을 거쳐 엉알해안 벼랑으로 떨어지니 세상은 그 물을 '녹고의 눈물'이
라 불렀다. (현실은 해안 절벽의 화산재 지층을 통과한 빗물이 화산재 지층 밑에 진흙으로 된
불투수성 지층인 고산층을 통과하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것임) 그 사연으로 봉우리 이름이 수
월봉이 되었다고 한다.

전설이라고 하지만 현실성이 나름 있는 일이라 아마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이야기를 짓기 좋아하는 지역 선비들이 효도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그럴싸하게 각색하여 수월
봉 전설로 내놓았을 것이다. 허나 병든 어미 때문에 아리따웠을 것으로 여겨지는 딸이 꽃도
피지 못하고 비명횡사를 했고 남동생은 누이를 죽게 했다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힘든 삶을
살았으니 그들의 팔자도 나처럼 참 박복하다.


▲  수월봉에서 바라본 차귀도(왼쪽)와 와도(오른쪽)
저들은 용수리 절부암부터 이곳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어
내 눈을 심심치 않게 해주었다.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과 비슷했던 와도는
여기서 보니 그저 그런 모습으로 보인다.

▲  수월봉에서 바라본 와도(왼쪽 섬)와 엉알해안, 당산봉

▲  수월봉 지붕에 자리한 수월정(수월봉 전망대)

수월봉 정상에는 8각형 모습의 수월정과 고산기상대가 자리해 있다. 수월정 서쪽은 벼랑으로
안전펜스가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가 제주도 본토에서 중원대륙과 가까운 곳이다. 우리가 장
차 점유하고 누려야될 중원대륙이 혹여 보일까 싶어 이마에 주름선이 간드러질 정도로 두 눈
을 부릅뜨고 서쪽을 노려봤으나 대륙은 보이지 않았다. 가깝다고는 하지만 실제 거리는 엄청
나다.
바닷바람은 일몰 후광에 힘입어 얼마나 매서운지 내가 날라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
이다.

제주올레길12코스 용수리~수월봉 구간을 일몰 바로 전에 도착하니 마치 수월봉을 모두 가지게
된 듯 무척 기뻤다. 허나 엉알해안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실수를 범했으니 하나를 얻고 하나
를 잃은 셈이 된다. 하여 나중에 또 와야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허나 이런 곳은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또 오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다. 


▲  수월봉 지붕 남쪽에 자리한 고산기상대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고산리 서남부와 신도리(대정읍) 지역
수월봉은 당산봉을 제외하고 주변이 온통 바다와 들판이라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의 품격은 우수하다.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차귀도와 와도, 주름선을 진하게
보이며 뭍과 섬을 세차게 때려대는 남해바다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와도와 엉알해안, 당산봉

수월봉을 둘러보니 어느덧 18시,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둘러보아 마음이 참 뿌듯하다. 수월
봉입구로 나오면서 앞서 지나쳤던 엉알해안을 잠시 거닐까도 했으나 땅꺼미가 자욱하여 언제
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내던지고 고산리로 움직였다.
바람의 섬인 제주도에 걸맞게 바다 바람이 얼마나 춥고 징한지 바람을 맞은 스마트폰 밧데리
가 순식간에 70%에서 0%로 떨어져 폰이 급 기절하는 참사까지 발생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
라 다소 당황했으나 이내 진정을 되찾고 길을 재촉했다.

고산리에서 제주도 급행버스 102번을 타고 모슬포(대정)로 나가 유명한 밀면집에서 저녁으로
시원한 밀면 1그릇을 섭취했다. 거기서 폰 충전을 꾀하니 잠시 혼절했던 폰이 다시 깨어난다.
이래서 먼 길을 갈 때는 무조건 폰 충전 케이블을 가지고 간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제주도 간선 202번을 타고 산방산(山房山) 서북쪽에 자리한 산방산탄산온
천을 찾았다.
요즘 숙박시설의 하나인 게스트하우스(게하)가 인기라 체험이나 해볼 겸 탄산온천에 딸린 게
하에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말로만 듣던 8인용 도미토리 방에서 잠을 잤다. 숙박비도 모텔에
비해 많이 저렴했고 이곳 같은 경우는 온천 이용권 2장을 서비스로 주어 저녁과 아침에 뜨끈
한 온천물에 들어가 몸을 푹 끓이며 편하게 씻을 수 있는 잇점이 있다. 허나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방에서 잔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다음날에는 돈 더 주고 마음 편하게
모텔에서 잤음)
내 듣기에는 같은 방에 자는 사람들끼리 술도 1잔 하고, 게하에서 자체적으로 저녁에 파티도
한다고 하나 파티 같은 경우 별도의 돈을 내야 되고, 몸도 완전 방전된 상태라 땡기지도 않는
다. 다행히 내가 잔 방은 딱 절반만 차서 번잡함은 별로 없었고, 다들 자는 분위기라 22시 넘
어서 잠을 청했다.

이렇게 하여 제주도 첫날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별도 글에서~~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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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7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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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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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제주도의 서쪽 끝을 거닐다 ~~ 절부암, 생이기정, 제주올레길12코스 나들이 (차귀도, 와도)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절부암 주변, 제주올레길12코스)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에서 바라본 와도(왼쪽)와
차귀도(오른쪽)

절부암 용수리 제주올레길12코스

▲  절부암

▲  용수리 제주올레길12코스


 

묵은 해가 아쉬움 속에 저물고 새해가 막 기지개를 켜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 제주도를 찾았다.

달님이 하늘 높이 걸린 새벽 3시,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심야시내버스(N버스)를 줄
줄이 이어타 김포공항으로 이동했다. 비수기 평일임에도 제주도(濟州島)와 따뜻한 남쪽
을 꿈꾸는 사람들로 김포공항 국내선청사는 이른 아침부터 북새통을 이룬다.
공항에 도착하여 탑승 수속을 마치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나를 제주도로 옮
겨줄 6시대 비행기에 몸을 담는다. 시간이 되자 비행기는 만석의 기쁨을 누리며 활주로
를 10여 분 정도 방황하다가 창공 속으로 높이 날개짓을 펼친다.
이륙 시간을 기준으로 제주공항 착륙까지는 50분 정도가 걸렸고 활주로 이동 시간을 포
함해 1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이 소요시간은 내가 처음 제주도에 갔던 1988년과 별로 차
이가 없다.
제주공항 서쪽 활주로에 사뿐히 착륙하니 공항청사로 인도할 셔틀버스가 넉넉히 대기하
고 있었다. 하여 그 버스에 탑승하여 3분 정도를 달려 제주공항청사로 들어선다.

제주도에 나를 떨어트리긴 했지만 이미 정처(定處)는 싹 정해둔 상태이다. 남들은 거의
렌트카를 이용해 이동을 하지만 나는 극서민이라 마음 편하게 대중교통을 택했다. 제주
도는 육지보다 시내버스 차비가 저렴하고 무엇보다 무료환승이 아주 휼륭하여 섬 1바퀴
(180km)를 기본 요금(1,250원, 카드는 1,150원)에 도는 것도 가능하다. (제주도 간선노
선인 201번과 202번을 이용하면 됨)

제주국제공항을 나와서 제주시내 서부와 애월읍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제주도 간선노
선 202번(제주터미널~고산리~서귀포등기소)을 타고 용수리 충혼묘지에서 내렸다. 202번
은 외도 월대(月臺)부터 다음날 가는 천제연폭포까지 쭉 신세를 진 노선으로 제주도 급
행버스 102번과 함께 서일주(일주서로) 구간을 책임지고 있다. (동일주는 급행 101번과
간선 201번이 맡고 있음)

정류장 바로 남쪽에 용수교차로가 있는데, 여기서 용수리포구로 인도하는 용수1길로 접
어들어 15분 정도 걸으니 이곳에 상륙했던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을 기리는
'성(聖)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이 잠깐 들리라며 손짓을 한다.
원래는 계획에 없던 곳이라 통과하려고 했으나 그냥 지나치기가 조금 아쉬워 여로(旅路
)를 좀 살찌울 겸, 기념관의 손짓에 응했다. 하여 그곳을 둘러보고 커피까지 기분 좋게
얻어 마시며 바로 서쪽에 자리한 용수리 포구로 이동했다.
표착기념관은 옥상을 개방하고 있는데 거기서 바라보는 차귀도와 와도, 용수리 지역 조
망이 제법 괜찮으니 꼭 누려보기 바란다.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에 대한 내용은
생략함)

용수리 포구에는 나를 이곳으로 부른 절부암이 있는데, 바로 그곳을 시작으로 수월봉까
지 제주올레길12코스(용수리↔무릉리, 17.5km)를 거닐었다. 앞서 둘러본 명소들은 코스
요리에서 앞에 먹는 맛보기 음식이고 이번에 다룰 제주올레길 12코스는 그날의 중심 메
뉴라 할 수 있다. 
이 코스는 남해바다와 산, 해안 절벽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해안 올레길로 용수리 방
사탑과 생이기정, 당산봉, 고산리 유적, 엉알해안 등의 상큼한 명소가 있으며, 바다 너
머로 차귀도와 와도가 다양한 각도로 포즈를 취해 눈과 마음이 지루할 틈이 없다.
나의 정처없는 마음을 수없이 앗아가고 놓아준 올레길 12코스, 우리집과 가까웠다면 즐
겨찾기 명소로 삼아 두고두고 누리고 싶지만 서로의 제자리가 너무나 머니 실로 아쉽다.
(내가 조물주라면 우리 동네로 그대로 옮겨오고 싶음)


▲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 옥상에서 바라본 용수리 지역
저 멀리 구름에 감싸인 곳이 제주도의 심장이자 성지인 한라산(漢拏山)이다.
제주도는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한라산이 바라보인다.

▲  용수리 포구에서 바라본 성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
김대건이 청나라 상해에서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하다가 풍랑을 만나 용수리에
표착했다. (차귀도에 먼저 표착했다고 함) 그때 타고 온 배는 복원되어
저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깃든 바닷가 언덕, 절부암(節婦岩)
- 제주도 지방기념물 9호

▲  서쪽에서 바라본 절부암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린 용수리 포구에 이르면 유난히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 시선을 붙잡는다.
온갖 나무와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뒤섞여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은 그 언덕은 용수리의 오랜
상징이자 나를 이 머나먼 남국(南國)으로 오게 한 절부암이다.
서쪽을 바라보고 선 절부암은 이름 그대로 절개를 지킨 부인을 기리는 바위로 다음과 같은 슬
픈 이야기가 속삭이듯 서려있다.

때는 1863년 경, 용수리에는 강사철(姜士喆)과 16살(또는 19세) 먹은 고씨 여인이 살고 있었
다. 그들은 서로 좋아하여 혼인까지 했으나 살림이 영 좋지 못해 차귀도에서 대나무를 베어와
바구니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혼인 며칠 후, 강씨는 바구니를 만들 재료를 취하고자 마을 사람들과 테위(테배)를 타고 차귀
도로 건너갔다. 허나 정오가 지나면서 갑자기 강한 바람이 몰아치자 서둘러 마을로 돌아오다
가 강풍의 희롱에 제대로 흥분한 바다 파도로 배가 뒤집혀 모두 죽고 만다. (다른 이야기로는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강풍으로 침몰해 죽었다고 함)
졸지에 남편을 잃은 고씨는 크게 통곡하며 바닷가에 나가 남편의 시신을 찾을 수 있기를 절절
히 빌었다. 그렇게 3달을 빌었으나 남편의 시신은 소식이 없었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결
국 해안 절벽에 있는 팽나무에 목을 매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그때까지 행
방이 묘연하던 남편의 시신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고씨가 목을 맨 자리 밑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 해괴한 일에 지역 사람들은 중원대륙 조아(曹娥)의 일과 같다며 감탄을 했다. 여기서 조아는 조간의 딸로 그가 강을 건너다 급류에 빠져 죽자 조아는 70일 동안 아버지를 찾아 헤매다가 너무 비통하여 강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5일 뒤에 아버지의 시신을 안고 물 위에 떠올랐다고 한다.
고씨 부인의 이야기를 들은 대정(모슬포) 사람 신재우(愼哉佑)는 크게 감동을 먹고 자신이 과
거에 붙으면 고씨의 열녀비(烈女碑)를 세워주겠다고 공언했다. 하여 바다를 건너 서울로 올라
가 과거에 응시했으나 정성 부족인지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풀이 죽은 신씨는 고향으로 가다가 답답한 마음에 점집에 들렸다. 점쟁이는 한 여인이 따라다
니고 있으니 그를 잘 모시면 급제를 할 것이라 답을 했다. 허나 그 여인이 누군지 전혀 알 수
가 없었고 집에 와서도 계속 머리를 굴렸으나 딱히 떠오르는 여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고씨 부인의 이야기가 나왔다. 하여 예전에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라 그 여인이 고씨라 여겨져 고씨의 묘를 참배했다. 그리고 다시 상경
하여 과거에 응시해 드디어 급제를 하였다.
그는 대정판관(大靜判官)의 직을 제수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조정에 상소하여 고씨의 열녀비를
세우는 한편, 70냥을 지원해 고씨 부부의 묘를 당산봉(고산봉) 서쪽 비탈에 합장해 매년 3월
15일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고산과 용수 마을에 100냥을 내주어 제사를 꼭 챙기도록 했으며,
고씨가 목을 맨 절벽을 절부암이라 이름 지었다.

왜정(倭政) 때는 왜정의 태클과 재정 문제로 제사가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마을 부인회가
돈을 모아 300평 정도의 절부암전을 마련하여 그 소출로 매년 꾸준히 제를 지낸다.


▲  북서쪽에서 바라본 절부암

절부암 언덕에는 사철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포나무, 느릅나무, 박달목서(환경부 지정 멸
종위기 야생생물 2급) 등이 모진 바닷바람을 이겨내며 우거져 있다. 예전에는 절부암 바로 앞
까지 바닷물이 넝실거렸으나 개발의 칼질이 여기까지 마수를 뻗치면서 적지 않은 변화를 강제
로 받게 되었다.
절부암 앞에 돌로 다져진 산책로가 닦여 바닷물은 서쪽으로 조금 밀려났으며, 그 앞바다에 도
로가 생기고 항구가 생겼다. 게다가 절부암 뒤쪽에도 집들이 마구 들어서 마치 도시 속에 갇
힌 외로운 공간처럼 되었다. 이곳이 대도시 한복판이라면 그러려니 하겠으나 엄연한 시골 포
구이다. 개발의 칼질에 절부암의 공간이 다소 쪼그라든 느낌을 주며, 절부암 바로 뒷쪽에 옥
의 티를 선사하면서까지 건축 허가를 내줬어야 했는지 제주도 철밥통들에게 실로 회의감이 든
다. (무분별한 난개발로 계속 망가지고 고통받고 있는 제주도의 현실임)


▲  절부암 앞 산책로 (북쪽 방향)

▲  절부암 앞 산책로 (남쪽 방향)

산책로가 닦여진 이곳에는 층층이 주름진 바위들이 있었고 그곳까지 바닷물이 손을 내밀어 절
부암과 진한 정을 나누었다. 산책로 조성으로 절부암 접근이 좀 쉬워지긴 했으나 1980년대 절
부암 사진과 비교해보니 개발이 씌운 굴레에 단단히 갇혀있는 듯한 모습이다.


▲  절부암 제단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을 갖춘 이곳에서 절부암 제사가 이루어진다.
평소에는 먼지가 놀이터로 삼을 정도로 한가하지만 3월 15일만 되면
아주 바쁜 시간을 보낸다.

▲  세월을 너무 간지나게 탄 절부암 바위들

▲  절부암 바위글씨의 위엄
감동 김응하(監董 金應河)가 글을 짓고 동수 이팔근(洞首 李八根)이 글씨를 썼다.
제주도에서 유일하다는 전서체 바위글씨로 독특한 글씨라 절부암이면서도
아닌듯한 아리송한 모습이다.

▲  신재우가 남긴 바위글씨

절부암 바위글씨 주변에는 '同治丁卯紀平三字(동치정묘기평삼자, 여기서 '동치정묘'는 1867년
)','判官愼裁佑撰(판관 신재우찬)' 바위글씨가 있다. 이들은 절부암을 있게 한 신재우의 흔적
들로 그 주변 바위에는 절부암 제사를 주관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어 절부암의
과거와 현재가 깃든 소중한 일기장 같은 곳이다.

* 절부암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4241-5


▲  바다를 향해 작게 입을 벌린 용수리 포구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섬은 와도와 차귀도이다. 저들은 용수리에서
수월봉까지 다양한 각도로 아주 지겹도록 구경을 했다.

▲  차귀도(遮歸島)

손에 닿을듯 가까이 떠있는 차귀도는 0.16㎢의 조그만 섬으로 제주도의 서쪽 끝을 잡고 있다.
지실이섬, 죽도, 와도 등의 작은 섬을 거느리고 있으며, 1970년대까지 약간의 사람들이 거주
하고 있었으나 박정희 정권 시절에 여러 번 터졌던 북한의 도발 행위(1968년 김신조 공비 패
거리 서울 침투, 1974년 공비단 추자도 침투 등)로 외딴 섬들의 안보 취약이 문제가 되자 섬
사람들을 제주도 본토로 이주시켜 무인도가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금지된 섬이 되어 완전 자연의 공간으로 남아있다가 2011년 이후 개방되어 섬
나들이가 가능해졌다.
차귀도는 고산리 차귀도 포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면 되며, 낚시터로도 유명하여 참돔과 돌
돔 등 다양한 물고기들이 잡힌다. (1~3월, 6~12월에 많이 잡힘~) 이번에는 그림의 떡처럼 차
귀도를 대했지만 다음에는 저곳에 꼭 발을 들이고 싶다.

차귀도 일대는 '차귀도 천연보호구역'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422호로 지정되었다.


▲  와도(臥島, 누운섬)

와도는 차귀도에 딸린 작은 바위 섬으로 용수리에서 보면 마치 여자가 누워있는 모습으로 보
인다. 얼굴과 가슴(조금 뾰죡하게 나온 부분은 젖꼭지), 다리 부분이 제법 현실감있는 모습으
로 대자연 형님의 위대한 작품성을 느끼게 한다. 허나 용수리에서 볼 때나 그렇게 보이지 당
산봉과 고산리, 수월봉에서 보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여자가 누워있는 모습의 와도 때문인지 그곳과 가까운 고산리에는 예로부터 과부들이 많았다
고 한다.


▲  바다에 나란히 떠서 물놀이를 즐기는 와도와 차귀도(오른쪽)

▲  용수마을 방사탑(防邪塔) 2호 - 제주도 민속문화재 8-9호

제주도에는 방사탑이라 불리는 동그란 돌탑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이 땅에 흔한 서낭당이나
돌탑 스타일의 탑으로 마을의 재앙을 막고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허한 곳을 채워주는 용
도로 지어졌는데, 답, 답데, 거욱, 거왁, 답단이, 거욱대 등의 별칭을 지니고 있으며, (주로
쓰이는 명칭은 '방사탑') 탑 위에는 돌하르방 모양의 돌이나 사람 얼굴 모양으로 다듬은 돌,
새 모양의 돌을 추가로 올려놓는다.

용수리포구에는 남쪽과 북쪽에 총 2개의 방사탑이 세워져 있다. 차귀도 주변은 바다가 툭하면
심술을 부려 배가 자주 좌초되었고 그때마다 죽은 이들의 시신이 마을로 밀려왔다. 하여 마을
주민들은 그런 재앙을 막고자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화성물 가까이에 있어서 화성물답, 화성물탑이라 불리기도 하며, 탑의 꼭대기에 새의 부리와
비슷하게 생긴 길쭉한 돌이 바다와 차귀도가 있는 서쪽을 향해 세워져 있다. 새 부리 비슷하
게 생긴 돌이 놓여 있어서 '매주제기'라 불리기도 한다.
새는 예로부터 인간과 하늘을 이어주고 인간의 소리를 하늘로 전해주는 존재로 여겨져 용수리
앞바다에 사고가 없게끔 하늘에 민원을 넣는 용도로 단 것으로 보인다.

* 용수마을 방사탑2호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4288-6번지

▲  가까이서 본 용수마을 방사탑 2호

▲  방사탑 주변 바닷가


 

♠  제주올레길12코스 거닐기

▲  제주올레길12코스 (용수리 방사탑2호~생이기정 구간)

제주올레길 12코스는 용수리 절부암에서 무릉리까지 이어지는 17.5km의 올레길이다. 이 올레
길은 용수리에서 제주올레길 13코스(용수~저지, 15.9km)로 간판이 바뀌며 무릉리에서 제주올
레길 11코스(무릉~모슬포, 17.3km)로 이름이 바뀌어 각자의 방향으로 달려간다.
나는 12코스 구간 중 가장 꿀단지라 할 수 있는 용수리~수월봉 구간을 거닐었는데, 12코스 전
체의 ⅓ 남짓 정도 된다. 허나 일몰 시간의 압박이 내 마음을 크게 흔들어놓는다. 2시간 내에
수월봉까지 가야 일몰의 눈치를 피하며 마음 놓고 사진 셔터를 누를 수 있고, 안전하게 모슬
포(摹瑟浦)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두워지면 출사도 힘들고 올레길 이동도 힘들어짐)

햇님의 퇴근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일단 12코스에 나를 던지기로
하고 길에 임했다. 이 구간은 생이기정 북쪽에 이르면 고산리 유적까지는 완전 속세(俗世)와
등을 지게 되므로 적어도 고산리 유적까지는 무조건 가야 된다.
12코스 구간 중, 용수리~수월봉 구간은 해안 구간으로 당산봉을 넘어가며, 수월봉~무릉리 구
간은 내륙이다. 해안길 중 용수리 방사탑~당산봉까지는 거의 벼랑길로 키 작은 줄난간 외에는
안전시설이 없으므로 괜히 사진 찍는다고 안전선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한다. 게다가 속세와 떨
어진 외진 곳이라 가급적 일몰 전까지는 산책을 마쳐야 뒷탈이 없을 것이다.


▲  누렇게 뜬 억새들이 나그네를 반기는 제주올레길12코스
(용수리 방사탑2호~생이기정 북쪽 구간)


12코스는 제주도의 야심작인 올레길의 일원이라 길은 잘 닦여져 있다. 방사탑2호 남쪽 구간에
는 무려 박석(薄石)까지 입혀져 있어 마치 시내 해안 공원을 거니는 기분이다.
제주도가 아무리 따뜻한 남쪽이라고 하지만 바닷바람이 얼마나 격한지 두 손이 얼어붙을 정도
이다. 그날 제주도 기온은 영상 4~9도라고 나왔으나 체감온도는 거기서 7~8도 정도는 빼야 했
을 정도이다. 너무 두꺼운 잠바까지는 아니더라도 패딩 잠바나 덜 두꺼운 잠바를 입어야 무리
가 없을 것이다. (모자 달린 잠바를 입으면 더 좋음) 대신 내륙 지역은 바닷바람의 간섭을 덜
받아 조금 따스하다.


▲  여기서도 변함없이 나와 놀아주는 와도와 차귀도
마치 양이(洋夷)들이 말하는 천지창조의 현장 같다. 와도와 차귀도가 막
빚어진 듯한 모습, 하늘은 저들을 만드느라 체력이 방전되었는지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다.

▲  가까이서 바라본 와도의 위엄

12코스를 거닐면 꼭 따라다니는 존재가 있다. 바로 차귀도와 와도이다. 이들은 수월봉까지 계
속 나를 따라다니며 그들의 다양한 모습을 비춰준다. 절부암과 용수리포구에서는 윗 사진처럼
보였으나 올레길을 1굽이 돌 때마다 조금씩 다른 자태를 보여주며, 고산리에 이르면 누워있는
여자가 아닌 그저 평범한 바위섬으로 모습이 바뀐다. 사물과 사람을 하나의 각도가 아닌 다양
한 각도로 봐야된다는 진리를 이 올레길12코스가 몸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허나 사람은 동물과 신(神)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는 존재들이라 그 당연하면서 단
순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  해안 벼랑으로 이루어진 제주올레길12코스 (생이기정 북쪽)
이곳은 바다 낚시터로 좋은 곳이라 낚시도구를 챙기고 벼랑 밑으로
내려가는 낚시꾼이 여럿 눈에 띄었다.

▲  제주올레길 12코스 생이기정 북쪽 해안 벼랑
오른쪽에 보이는 섬은 와도와 차귀도이다.

▲  잠시 뒤를 돌아보는 여유 (생이기정 북쪽)
인생이란 이렇게 뒤를 돌아보는 여유도 챙겨야 정신 건강에 좋다.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는 것도 썩 좋은 것은 아니다.

▲  저만치 멀어진 용수리

올레길 12코스 경관에 퐁당퐁당 홀리다보니 어느덧 이곳에 우두커니 선 나를 발견했다. 여기
가 용수리~수월봉 구간의 ¼ 정도 되는 곳으로 길은 한참이나 남았다. 과연 수월봉까지 일몰
직전까지 갈 수 있을까? 수월봉은 내 조급한 마음을 외면하며 아직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
고 있다.


▲  생이기정 북쪽에서 바라본 용수리 앞바다
바다 파도는 제법 패기 있는 모습으로 뭍을 때려대고, 바닷바람은 태풍 같은
기세로 홀로 거니는 나를 때려댄다. 오늘도 고통 받는 내 인생...

▲  바람개비로 정신이 없어 보이는 용수리

제주도 해안과 앞바다에는 거대한 바람개비가 많이 닦여져 있다. 제주도의 거센 바람을 활용
해 풍력발전(風力發電)을 얻고자 설치한 것인데, 바다에 설치된 것들은 해질녘이나 저녁, 흐
린 날에 보면 마치 커다란 괴물이 칼 같을 것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듯 무시무시해 보인다.


▲  슬슬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와도와 차귀도 (생이기정 북쪽)

▲  생이기정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이렇게 보니 와도가 전혀 누워있는 여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차귀도 또한
용수리에서 보이지 않던 숨겨진 남쪽 속살을 비추기 시작한다.

▲  생이기정
난간 너머로 억새들이 펼쳐져 있는데 겉으로 보면 완만해 보이지만 그건
억새가 나그네를 낚으려는 함정이다. 완만해 보이는 억새밭 너머에
천길낭떠러지가 도사리고 있으나 가급적 난간을 넘지 말자.
 

용수리 포구와 고산리 유적 중간에 '생이기정'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제주도 사투리로 새를
뜻하는 '생이'와 절벽을 뜻하는 '기정'이 합쳐진 것으로 새가 날아다니는 절벽길이란 뜻이다.
올레길에서 보면 생이기정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지만 차귀도나 바다에서 보면 꽤 높은 벼랑
으로 화산재와 용암이 바다로 흘러가 켜켜히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생이기정도 그
렇고 엉알해안과 수월봉 모두 용암이 빚은 대작품들이다.


▲  생이기정 남쪽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①
와도의 숨겨진 남쪽 속살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  생이기정 남쪽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②

▲  당산봉에서 바라본 수월봉과 고산리 유적
드디어 수월봉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다를 향해 자라 목처럼
고개를 내민 해안 언덕이 바로 그 수월봉이고, 사진 가운데 들판이 
고산리 선사유적이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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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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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바다를 건너 찾아간 옛 탐라의 현장, 제주도 새해 나들이 (외도 월대, 수산리곰솔, 납읍 금산공원, 제주올레길15,16,17코스)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외도 월대, 수산봉, 납읍리 금산공원)

▲  제주해협이 바라보이는 외도 해변

수산리 곰솔 납읍리 금산공원 (납읍리 난대림)

▲  수산리 곰솔

▲  납읍리 금산공원

 


 

묵은 해가 아쉬움 속에 저물고 새해가 막 기지개를 켜던 1월의 첫 무렵, 사흘 일정으로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 제주도(濟州島)를 찾았다.
제주도는 거의 13년 만에 방문으로 비행기나 장거리 여객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야 되는
부담감 때문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허나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수천~수만 리가 되
는 것도 아니고 고작 500km 남짓에 불과하며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1시간 내외면 충분
히 닿는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천하를 마음대로 주유한다는 내가 제주도에게 너무나 소심하게 대한
것 같고, 이러다가는 제주도란 존재를 깜빡 잊어먹을 것만 같았다. 하여 나를 제주도에
팍 떨어트리기로 작정하고 부랴부랴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봐야 비행기표 예약밖에
는 없음)

평일 아침 6시대 비행기라 널널하게 새벽 2시에 도봉동 집을 나서 심야시내버스(N버스)
를 1회 갈아타고 다시 일반시내버스로 환승하여 5시에 김포국제공항 국내선청사에 도착
했다. (2시 50분대에 방학사거리에서 N15번 시내버스를 타고 종로2가로 이동 → 3시 50
분대에 N26번 시내버스를 타고 공항시장까지 이동 → 4시 50분대에 공항시장 건너편 정
류장에서 6629번을 타고 김포공항 진입)

공항은 여행 비수기인 겨울 평일임에도 이른 아침부터 제주도를 꿈꾸러 온 사람들로 거
의 북새통을 이루었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30여 분 정도 지루하게 시간을 때우다가 제
주로 가는 아시아나항공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시간이 되자 비행기는 그 작은 입을 닫
고 넓은 활주로를 10분 남짓 방황하다가 드디어 하늘 높이 비상한다.
제주도에 처음 발을 들였던 초등학교 시절, 김포공항에서 50분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하
고 있다. 그 소요시간은 여전히 유효하여 제주국제공항에 착륙하여 바퀴를 멈출 때까지
딱 50분이 걸렸다. (보통은 활주로 방황 시간까지 포함하여 1시간~1시간 10분을 소요시
간으로 잡고 있음)

활주로 한쪽에 멈춰선 비행기에서 내려서니 공항청사로 인도하는 저상형 셔틀버스가 대
기하고 있었다. 그 버스를 타고 3분 정도를 달려 공항청사로 이동했는데 공항이 바닷가
와 가까워서 그런지 바람이 다소 매서웠다. 제주도는 여름에만 와봤지 겨울에는 처음이
다. 따뜻한 남쪽이라 별로 춥지 않을 것이라 방심을 하였으나 바닷가는 바람 때문에 오
히려 본토 이상만큼이나 추웠다. (단 내륙 쪽은 따뜻함)

제주도에서 이미 정처(定處)는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된다. 남들은 렌
트카로 많이 이동을 하지만 난 마음 편하게 대중교통을 선택하여 돌아다녔다. 제주도는
비록 일부 노선을 제외하면 버스 배차간격은 긴 편이나 본토보다 시내버스 차비가 저렴
하고 무료환승제가 아주 휼륭해 섬 1바퀴(180km)를 기본요금(현금 1,200원, 카드 1,150
원)이면 돌 수 있다. (제주도 급행버스와 공항버스는 제외)

제주국제공항에서 첫 답사지인 외도 월대를 가고자 제주시내버스 315번(국제여객선터미
널↔수산리)을 탔다. (다른 노선들도 있으나 그것이 먼저 와서 탔음)
버스는 오랜만에 건너온 나에게 신제주 일대를 신나게 강제투어를 시켜주고 8시가 조금
넘어서 외도초교 정류장에 나를 가져다 주었다. 외도초교에서 남쪽으로 가면 광령천(光
令川)이 있는데 바로 그곳에 나를 여기로 부른 월대가 있다.


 

♠  달놀이와 은어로 유명했던 제주시내 외곽 명승지
외도 월대(月臺)

▲  현무암으로 닦여진 월대

월대는 광령천(외도천)과 도근천<都近川, 수정천, 조공천>이 만나는 곳에 닦여진 명승지이다.
월대 앞을 흐르는 광령천을 따로 월대천이라 부르기도 하며, 남해바다도 이곳까지 손을 대고
있어 자연히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수심이 깊고 청정해 예로부터 은어
와 숭어, 뱀장어가 많이 노닐고 있다. (지금도 많이 서식하고 있음)

월대 주위로 하천을 따라 200~300년 숙성된 팽나무와 해송이 멋드러지게 늘어서 있는데 이곳
지형이 반달과 비슷하다고 하며, 달님이 뜰 때 주위와 어우러져 수면에 비친 달빛이 아주 예
술이라고 한다. 반달을 닮은 곳에 달빛 또한 그윽하니 이곳에 퐁당퐁당 빠진 옛 사람들은 누
대(樓臺)를 짓고 신선이 내려와 달놀이를 하던 곳이란 의미로 '월대'라 하였다.

월대는 제주도에서 가장 흔한 현무암으로 낮게 네모난 기단을 깔고, 그 위에 동그란 낮은 대
를 다져 4각형 위에 동그라미가 있는 모습처럼 되었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이른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돌로 쌓은 석대만 있을 뿐, 건물은 없으며 선비와 관리들, 지역 사람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시
를 짓고 낚시를 하며 풍류를 즐겼다. 그들은 월대를 포함한 외도동(外都洞) 일대에 적당한 풍
경 8곳을 골라 외도팔경(外都八景)이라 이름 짓고 찬양을 하니 그 8경은 다음과 같다.

1. 월대피서(月臺避暑) - 월대에서의 피서
2. 야소상춘(野沼賞春) - 들이소(월대천 남쪽)에서의 봄구경
3. 마지약어(馬池躍漁) - 마지(연대입구 마이못)에서 뛰는 물고기
4. 우령특송(牛嶺特松) - 우왓동산의 큰 소나무
5. 대포귀범(大浦歸帆) - 큰 포구(조공포)로 돌아오는 돛단배
6. 광탄채조(廣灘採藻) - 넓은 여에서 해조를 캐는 모습
7. 사수도화(寺水稻花) - 절물 벼밭에 벼꽃이 핀 모습
8. 병암어화(屛岩漁火) - 병풍바위에서 고기잡이 불구경


▲  시커먼 피부의 월대 비석
비석 피부에 쓰인 '월'이 그 흔한 '月'이 아니라 거의 초승달 같은 모습이다.
(사람이나 동물의 삐뚤어진 눈처럼 보이기도 함)
비석까지도 달을 표현했으니 이곳은 그야말로 달을 찬양하는 공간이다.


월대 주변은 완전 시골이었으나 제주 시내가 동/서/남으로 크게 살을 찌우면서 그 주위로 시
가지가 형성되었다. 하여 옛날의 운치는 다소 깎이긴 했으나 월대와 광령천, 하천을 따라 늘
어선 나무들은 거의 그대로이며, 광령천 동쪽은 전원(田園) 풍경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어 월
대의 위엄은 아직 녹슬지 않았다. 또한 제주도의 야심작인 제주올레길 17코스(제주시내 원도
심~광령, 18.1km)가 이곳을 살짝 지나가며 올레길 뚜벅이들을 인도한다.


▲  월대 주변에 자리한 키 작은 비석 4형제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다 작은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이들은
지역 사람들의 공덕비로 기단석은 현무암으로 지어졌다.

▲  월대 해송 - 제주시 보호수 13-1-15-30(2) / 13-1-15-30(3)호

월대 옆에 제주시 보호수로 지정된 해송 2그루가 있다. 이들은 280년 묵은 것들로(1982년 보
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50년) 지정 번호가 앞선 것을 기준으로 높이는 각각 10m와
3m, 나무둘레는 3.2m와 2m이다.


▲  월대 산책로의 평화로운 아침 풍경 (제주올레길 17코스)

▲  월대 산책로와 오래된 해송<제주시 보호수 13-1-15-30(1)호>
정면에 보이는 수형(樹形)이 좋은 소나무가 제주시 보호수인 해송으로 앞서 언급한
해송들과 나이(약 280년)가 비슷하다. 나무높이는 12m, 나무둘레 3.2m

▲  이제는 무늬만 남은 고망물(수정천)

월대가 있는 외도동에는 조부연대(煙臺)와 고인돌(지석묘), 마이못, 고망물, 수정사(水精寺)
터, 제주도에서 유일한 자갈해변인 알작지 등의 소소한 명소들이 전하고 있다.
나는 월대와 수정사터만 알고 있었지 다른 명소는 전혀 몰랐다. 여기서 덤으로 알게 된 그들
을 싹 보고 가면 좋겠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도 여의치 않았고 마음은 벌써부터 다음 행선
지를 재촉하고 있어서 월대에서 가까운 고망물만 보기로 했다. 그곳은 월대교에서 광령천 천
변길(통물길)을 따라 2~3분 정도만 가면 된다. (제주올레길 17코스가 그 길을 따라감)

고망물은 오래된 샘터로 외도동에 크게 둥지를 틀었던 수정사의 샘터로 전해진다. 그래서 수
정천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수정사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때 원나라(몽고)의 황후(皇后)가 물이 잘 나
오기를 기원하고자 세웠다고 한다. 몽고 왕비(또는 몽고 조정)가 그들과 전혀 관련도 없을 것
같은 머나먼 제주도에 왜 절을 세웠나 싶겠지만 그 시절 고려는 몽고의 그늘에 있었고, 몽고
는 고려의 영역이던 제주도, 함경남도, 평안도, 요동(遼東) 지역을 강제로 접수해 그들 땅에
넣어버렸다. <평안도와 요동에 동녕부(東寧府)를, 함경남도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제주
도에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설치하여 통치함>
기마병 중심인 몽고에게 말은 꽤 중요한 전투 자원으로 제주도는 말목장으로 아주 휼륭했다.
그러니 몽고의 제주도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으며, 절도 여럿 설치하여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그런 배경에서 태어난 수정사는 제주도에서 제법 덩치가 있던 절로 서귀포에 있던 법화사(法
華寺)와 함께 제주도 2대 사찰(또는 3대 사찰)로 꼽혔다. 허나 17세기 말 화마(火魔)의 먹이
가 되어 부질없이 사라졌으며, 20세기 이후에 새로운 수정사가 들어서 작게나마 옛 터를 지키
고 있다.

고망물은 늘 물이 풍부하게 나와 동네 사람들의 식수가 되었으며, 왜정(倭政) 때 지금의 모습
으로 정비하고 그 기념비를 세웠다. 여전히 물은 나오고 있으나 개발의 칼질이 주변까지 미치
면서 수질은 장담이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그러니 아무리 갈증이 나더라도 이곳 물은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  세월이 씌워놓은 온갖 주근깨로 범벅이 된 수정천 신축기념비
왜정 때 고망물을 손질한 기념으로 세워진 것으로 옆구리에 조성시기가 쓰여있다.
허나 시대가 시대인지라 서기 대신 왜왕(倭王)의 연호가 쓰여있었고,
1945년 이후 그 부분은 뜯겨졌다.

▲  고망물에서 바라본 한라산(漢拏山)의 위엄
제주도는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한라산이 바라보인다. 한라산은
제주도를 빚은 장본인이자 제주도의 어머니와 같은 큰 존재이다.

▲  광령천과 바다가 만나는 외도 해변 <조공포(朝貢浦)>

고망물에서 광령천을 따라 월대를 거쳐 외도 해변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고려와 조선 때 제주
도에서 조정으로 보내는 공물선(貢物船)이 오가던 포구로 조공포라 불렸는데, 그 조공선은 도
근천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하여 도근천을 조공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늘에 점점이 떠있는 구름 밑으로 푸르기 그지없는 제주해협이 넓게 펼쳐져 있다. 혹시나 추
자도(楸子島)나 본토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 주름선이 일그러질 정도로 눈에 힘을 주고 살펴봤
으나 역시나 거리 때문인지 보이지가 않는다. 바다 파도는 조금 흥분기를 보이며 뭍을 때리고
있었고 바닷바람은 그리 춥지 않았다.


▲  외도 해변 (대원암 동쪽)
왼쪽에 보이는 돌탑은 대원암에서 만든 것이다.


외도 해변 서쪽에는 천하 유일의 해수관음보살(海水觀音菩薩) 와상(臥像)을 봉안한 대원암이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조그만 절집으로 내가 갔을 때는 와상의 존재도 전혀 몰랐
고, 그곳에는 딱히 손이 가지 않아 해변만 잠깐 기웃거리고 외도초교 정류장으로 나왔다.

* 외도 월대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외도2동 230, 240, 241일대


 

  제주해협을 바라보고 있는 조그만 오름(봉우리)
수산봉(水山峰)과 수산리(水山里) 곰솔

▲  수산봉 충혼묘지(모감동) 기점 (제주올레길 16코스)

외도초교 정류장에서 제주도 간선 202번을 타고 하귀를 지나 모감동에서 내렸다. 202번은 제
주터미널에서 제주도 서쪽 일주로(애월, 한림, 고산, 대정, 화순, 중문)를 따라 서귀포 중앙
로터리(서귀포등기소)까지 가는 긴 노선으로 외도부터 다음날 찾아간 천제연폭포(天帝淵瀑布)
까지 쭉 그의 신세를 졌다. (총 5번을 탔음)
이 노선은 달랑 1km를 가던, 40km를 가던, 전 구간을 가던 무조건 기본 요금이며, 제주시내버
스(300, 400번대)와 서귀포시내버스(500, 600번대), 제주시와 서귀포 외곽버스(700번대), 제
주도 장거리 간선버스(200번대)와 무료환승이 가능하다. (100번대 제주도 장거리 급행버스도
환승이 되나 약간의 차액이 나가며 구간요금 있음)

모감동 정류장 남쪽에 야트막한 산이 손짓을 하니 그곳이 수산봉이다. 차량의 왕래가 빈번한
도로(일주서로)를 신호등의 도움을 받아 건너면 수산봉으로 인도하는 길이 마중을 나오는데,
제주올레길16코스(고내~광령, 15.8km)가 그 길을 따라 수산봉 남쪽까지 이어진다. 16코스는
광령에서 17코스로 간판을 갈아 월대와 제주시내로 달려가며, 고내에서는 15코스로 이름을 바
꾸고 한림읍으로 이어진다.


▲  수산봉 북쪽 산길 (1)

수산봉은 해발 122m의 낮은 뫼로 '수산봉오름','수산오름','물메오름','물메' 등의 별칭을 가
지고 있다. 옛날에는 주로 물메라 불렸는데, 이는 봉우리 정상에 못이 있어서 그렇게 불린 것
이다. (물뫼, 물메)
지금은 딱히 특별한 것이 없어보이는 평범한 뒷동산이나 그 태생은 무시무시했던 화산으로 화
산 폭발로 못과 지금의 산이 형성되었다. 이런 식의 산은 제주도에 매우 많다.

조선 때는 정상에 물메봉수를 두었는데 동쪽에 도두봉수, 서쪽으로 고내봉수와 연락을 했으며,
기우제를 지냈던 터가 있어 영산(靈山)으로 추앙을 받기도 했다. 해송이 울창해 솔내음이 그
윽하며 서쪽 자락에는 애월읍 충혼묘지가 닦여져 있어 호국(護國) 신들이 안식을 취하고 있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크게 모감동(충혼묘지), 대원정사, 수산리 곰솔 등 3개가 있는데, 산이
작다보니 어디로 올라가든 10분 안에 정상부에 닿는다. 산 정상은 군부대가 있어 금지된 곳이
되었으며, 봉수대터는 그 안에 있어 관람이 어렵다.
내가 수산봉을 찾은 것은 봉우리보다는 산 남쪽에 있는 수산리 곰솔을 보고자 함이다. 그곳으
로 가려면 수산봉을 거쳐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  수산봉 북쪽 산길 (2)

▲  수산봉 북쪽 산길 (3)
겨울의 한복판이지만 해송 외에도 많은 나무들이 버젓히 푸른 옷을 걸치고 있어
겨울임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만큼 제주도는 따뜻한 남쪽이다.

▲  수산봉 정상부
바다가 바라보이는 정상부에는 쉼터용 정자와 여러 운동시설이 닦여져 있다.

▲  수산봉 남쪽 숲길

▲  수산리 곰솔 - 천연기념물 441호

수산봉 동남쪽에 곱게 늙은 곰솔이 있다. 수산저수지를 거울로 삼으며 도도한 모습을 드러내
고 있는 그는 높이 11.5m, 나무둘레 4.7m, 수관폭 26m로 4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나무의 눈덮힌 모습이 마치 백곰이 물을 마시고자 웅크리고 있는 모습처럼 보여 곰솔이라 불
리며 나무 껍질이 검은색이라 흑송(黑松)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바닷가에 많이 자라고 있
어 해송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지상 2.5m 높이에 원줄기가 잘려진 흔적이 있고, 거기서 4
개의 큰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호수 쪽 가지가 밑동보다 2m 정도 낮게 물가에 드리워
져 있어 나무의 자태가 곱다.

이 나무는 수산봉 밑에 마을이 지어졌을 때 그 기념으로 심어진 것이라 전하며, 수산리 사람
들은 그를 수호목으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다. 나무 북서쪽에는 나무에게 당제를 지내는 맞
배지붕 당집이 있다.


▲  물을 향한 마음, 호수로 뻗은 남쪽 가지
물이 많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아니면 갈증이 심했는지도) 나무의 남쪽 가지가
계속 호수로 손을 내밀고는 있으나 호수는 액체라 그의 손을 잡을 만한
것이 없어 서로 뻔히 보임에도 전혀 닿지를 못하고 있다.

▲  수산봉과 곰솔의 잘생긴 거울, 수산저수지

수산저수지는 현무암 피부를 지닌 제주도에서 거의 흔치 않은 저수지이다. 예전에는 유원지가
들어서 한때 시끌벅적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 흔적들이 거의 지워져 고요하다. 다만 그 고요
함을 툭하면 건드리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제주공항으로 착륙하는 비행기들이다.
이곳은 비행기들이 제주국제공항으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5분이 멀다하고 지나간다. 비록 소음
이 있긴 하나 형형색색의 비행기들이 날개를 낮추며 들어서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으며, 저렇
게 많은 비행기가 들어오고 그만큼 바깥으로 나가니 제주도의 위엄과 인기를 정말 실감케 한
다. (현재 제주공항은 거의 포화상태임)

수산봉을 넘어온 제주올레길16코스는 저수지 서쪽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가며, 나는 곰솔과 당
집 주변만 둘러보고 다시 수산봉 정상부를 거쳐 모감동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  수산리 곰솔에게 제를 지내는
마을 당집

▲  곰솔 맞은편에 자리한 무덤들
현무암으로 무덤 경계를 닦았다.

* 수산봉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 수산리 곰솔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1935


 

♠  오래된 난대림을 간직한 납읍리의 상큼한 언덕
납읍 금산공원(錦山公園)


▲  납읍리 돌담길

모감동 정류장에서 다시 202번을 타고 애월을 지나 한림읍내에서 내렸다. 여기서 제주도 간선
291번(제주터미널~한림읍)으로 환승하여 금산공원을 간직한 납읍리에 두 발을 내린다.
모감동에서 여기까지 바로 가는 292번 버스가 있으나 운행횟수가 너무 적고 시간이 전혀 맞지
않아서 부득이 한림으로 돌아간 것이다. (한림읍에서 납읍리로 가는 버스가 30~40분 간격으로
있음)
애월읍 납읍리(納邑里)는 제주도에서 이름난 양반 마을로 꼽힌다. 14세기에 마을이 조성된 것
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납읍을 중심으로 사방 10리 이내에 곽지, 애월, 고내, 상가, 하가, 어
음, 봉성 등 7개의 마을이 들어서 있어 그것을 아우르는 뜻에서 동네 이름에 읍을 쓴 것으로
보인다.
납읍리 지역에서 처음 사람이 산 곳은 곽남(郭南)으로 여겨진다. 그곳의 처음 이름은 곽지남
동으로 그것을 줄여 곽남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후 '곰팡이','둥덩이' 등지에 사람들이 터
전을 닦으면서 마을이 확대되었다.

현재 납읍리는 본동, 서동, 중하동 등 3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동에 나를 이곳으로
부른 금산공원이 있다. 제주시(북제주)에서 가장 감귤이 잘되는 동네로 제주올레길15-A코스(
한림~납읍~고내, 16.5km)가 납읍리와 금산공원 내부를 지난다.


▲  귤나무밭을 가르는 납읍리 돌담길

▲  금산공원 정문

납읍리사무소 정류장(반대편 정류장은 '납읍리')에서 납읍로2길을 따라 9분 정도 들어가면 무
성한 숲을 드러낸 금산공원이 모습을 비춘다. 납읍리사무소에 이르면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양
쪽 길이 비슷하게 생겨서 햇갈리기가 쉽다. (이정표도 없음) 여기서는 무조건 서쪽(진행 방향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된다.
현무암 돌담과 귤나무, 마을 가옥이 잘 어우러진 제주도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로 귤나무 가지
에 감귤이 달린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띄어 제주도 한복판에 왔음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금산공원은 납읍리의 허파이자 아름다운 뒷동산으로 33,980㎡(약 13,000여 평) 면적에 후박나
무와 생달나무, 종가시나무, 모밀잣밤나무, 동백나무, 식나무, 아왜나무, 자금우, 마삭줄, 송
이 등 200여 종의 식물이 우거진 상록수림(常綠樹林)이다. 다른 말로는 난대림(暖帶林)이라고
도 한다. 제주시 서부에서 평지에 남아있는 유일한 상록수림으로 온난한 기후에 적합한 식물
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1년 내내 삼삼한 모습을 자랑한다.

허나 금산공원은 원래부터 숲동산은 아니었다. 옛날에는 돌만 가득한 돌언덕으로 볼품이 없었
다고 하며, 그 언덕 건너편으로 금악봉(430m)이 훤히 바라보여 마을에 화재가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금악봉이 보이지 않게끔 돌언덕에 나무를 심었고 마을
제사를 지내는 포제단을 담으면서 마을의 성역으로 부상하게 된다. 성역을 품은 숲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법칙이라, 마을에서는 나무 벌채나 식물 채취를 엄격히 금하여 숲이 마음
놓고 자라게끔 배려했으며, 숲 주위로 돌담을 둘러 속세와 숲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다.
처음에는 숲 벌채를 금한다는 뜻으로 금산(禁山)이라 불렸으나 나중에 이름을 순화시켜 비단
뫼를 뜻하는 금산(錦山)으로 한자를 갈았다고 한다.

공원을 덮고 있는 숲은 '납읍리 난대림'이란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375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
으며(예전에는 천연기념물 182-4호였음) 공원 전체가 국가 천연기념물 보호 구역이라 지정된
탐방로 외에는 접근을 금하고 있다. 아무리 공원 감독이 느슨하다고 해도 자연보호를 위해 탐
방로를 벗어나거나 식물을 괴롭히는 행동, 나뭇잎과 식물을 따는 행위는 절대로 해서는 안된
다.


▲  금산공원 정문 갈림길

원시림과 같은 공원으로 들어서면 길은 3갈래로 갈린다. 넓은 흙길로 된 중앙 숲길은 이곳의
성역인 포제청으로 이어지며, 서쪽 숲길과 동쪽 숲길은 흙길과 나무데크길이 섞여있다. 어느
길로 가든 남쪽에서 모두 만나며, 다시 정문으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공원으로 들어서는 문은
정문 1개 뿐이며, 공원 밖에는 경작지가 펼쳐져 있다. 즉 밭 한복판에 숲이 있는 것이다.


▲  송석대(松石臺)

정문 동쪽(진행 방향 왼쪽)에는 송석대란 높은 대가 있다. 이곳은 정헌 김용징(靜軒 金龍徵)
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1850년대 말에 그의 제자들이 지었다. 구릉지를 다듬어 3개 층으
로 겹돌을 쌓아 터를 다진 다음 반지름 4.5m의 원형 정자를 닦았는데, 현재 정자는 없고 완전
히 개방된 공간으로 있으며 매년 여름마다 애월문학회에서 시낭송회와 출판기념회를 열고 있
어 문학 공간의 기능은 녹슬지 않았다.


▲  인상정(仁庠亭)

송석대 맞은편(정문 서쪽)에는 인상정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곳은 천문에 능했던 현일문
(玄日文)이 공부를 했던 곳으로 1889년 그의 후학들이 구릉지를 다지고 인상정이라 불리는 공
간을 지었다. 송석대처럼 정자가 없는 그냥 열린 공간으로 그 한복판에 오래된 나무가 자리하
여 고품격의 그늘을 선사한다.


▲  난대림 속에 나를 숨기다 (공원 서쪽 숲길)
아무리 따스한 남쪽이라고 해도 동남아나 아프리카가 아닌 이상은 이렇게까지
푸른 잎을 대놓고 드러내며 무성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이곳은 계절의
변화도 안중에 없는 별천지 같은 곳이다.

▲  밀림처럼 우거진 서쪽 숲길 (1)

▲  밀림처럼 우거진 서쪽 숲길 (2)

통행 편의와 식물 보호를 위해 서쪽 숲길과 동쪽 숲길 일부에 나무데크길을 닦았다.


▲  정낭이 걸쳐진 포제단(酺祭壇) 출입구

금산공원 한복판에는 돌담에 둘러싸인 포제단이 있다. 이곳은 납읍리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마을의 성역으로 서쪽에 제주도 스타일의 정낭이 있는 출입구가 있어 그곳으로 들어서면 된다.
허나 제삿날을 제외하면 정낭이 모두 걸쳐져 있어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다행히 정낭이
그리 높지가 않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살짝 안으로 발을 들였다.

▲  포제청 건물
제사 때를 제외하고는 늘 적적한 모습이다.

▲  난대림에 둘러싸인 포제단 뜨락
저 끝부분에 3개의 단이 있다.


이곳에서 지내는 제사를 '납읍리 포제','납읍리 마을제'라고 하는데, 남자들이 행하는 유교적
마을제인 포제와 여자들이 하는 무속 마을제인 당굿을 같이 벌이고 있다. 예전에는 음력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춘제(春祭)를 지냈고, 7월 초정일에 추제(秋祭)를 지냈으나 20세기 중반 이
후부터는 춘제만 지내고 있다. 그리고 마을에 일이 생겨서 정월 초정일에 제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 그 다음 중정일(中丁日)에 제를 지내는 융통성도 가지고 있다.
포제단으로 들어서면 남쪽(오른쪽)에 포제청이란 기와집이 있다. 이곳은 제를 지내고 준비하
는 건물로 원래는 초가였으나 최근에 기와집으로 손질했다. 북쪽(왼쪽)에는 3개의 조그만 석
단(石壇)이 누워있는데 이들 단은 손님신을 봉안한 포신단(酺神壇), 마을의 수호신을 봉안한
토신단(土神壇), 홍역이나 마마신을 봉안한 서신단(西神壇)이다.
예전에는 포신, 토신, 서신에게 모두 제를 올렸으나 홍역과 마마가 사실상 사라진 상태라 포
신과 토신에게만 제삿밥을 올린다.

이곳 제사는 '납읍리 마을제'란 이름으로 제주도 지방무형문화재 6호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  현무암으로 닦여진 3개의 제단 (서신단, 토신단, 포신단)
제단 앞에는 술이나 향로 등을 두는 조그만 돌이 있고, 단 위에는 위패 역할을
하는 키 작은 돌이 세워져 있다.

▲  금산공원 동쪽 숲길 (1)

▲  금산공원 동쪽 숲길 (2)

▲  주황색 피부를 드러낸 납읍리 감귤

금산공원을 1바퀴 둘러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서쪽 숲길로 들어서 포제청을 찍고 동쪽 숲
길로 나왔으니 공원의 공개된 공간은 모두 본 셈이다. (통제구역은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음)

이렇게 금산공원과의 인연을 마무리 짓고 다음 답사지로 가고자 제주도 간선 291번을 타고 한
림읍으로 나왔다. 이후 내용은 분량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금산공원 소재지 :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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