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보궁'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8.03.16 소백산 자락에 작은 도시처럼 들어앉은 천태종의 중심 사찰, 단양 구인사 (구인사 공양밥, 구봉팔문)
  2. 2017.10.11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이 깃들여진 첩첩한 산골의 절집, 북한산 삼천사 ~~~ (삼천사계곡)
  3. 2014.03.02 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

소백산 자락에 작은 도시처럼 들어앉은 천태종의 중심 사찰, 단양 구인사 (구인사 공양밥, 구봉팔문)



' 늦겨울 산사 나들이, 단양 구인사 '

▲  대조사전 광장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겨울 제국의 쌀쌀한 위엄 앞에 천하만물이 꽁꽁 몸을 사리던 2월의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
와 단양 구인사를 찾았다.
구인사는 이미 10여 년 전 연말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같은 겨울이지만 연
초에 가게 되었다. 그럼 왜 그곳을 다시 찾았을까? 이유는 별거 없다. 그냥 땡겨서이다.

서울의 동쪽 관문, 청량리역에서 8시대에 출발하는 영동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영월(寧
越)에서 군내버스로 구인사로 진입하려고 했으나 여인네가 크게 지각을 하는 바람에 그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열차를 타면 영월읍내에서 구인사행 버스와 30분 이내로 시
간이 맞음) 그래서 별수 없이 9시대 열차를 타고 제천(提川)으로 이동하여 거기서 구인사
로 접근하기로 했다.

열차에서 시내에서 사온 도시락으로 아침을 때우며 스마트폰으로 제천에서 구인사행 직행
버스 시간을 알아보니 제천역 도착시간을 기준으로 거의 10여 분 뒤에 있다. 하여 제천역
에 두 발을 내리기가 무섭게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이동하여 간신히 구인사행 직행버스를
잡아탔다. (그거 놓치면 꼼짝없이 1시간 이상 기다려야 됨)
제천터미널에서 쌍용. 별방, 사지원, 영춘, 온달관광지(온달산성, 온달동굴), 구인사입구
를 경유하여 50분 만에 구인사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은 구인사 건물의 주류를 이루는
3층 기와집으로 1층에 쉼터를 겸한 매표소가 있다.

구인사입구에 이르니 다들 어디서들 왔는지 사람과 차량의 물결이 대도시 못지 않게 쏟아
져 나와 도로가 막힐 지경이다. 그날 구인사에서 본 사람의 수만 어림잡아 수천이 넘으니
하루로 따지만 수만이다. 거의 단양군(丹陽郡) 인구보다 많은 것이다. 구인사가 단양에서
차지하는 땅은 좁쌀 수준이지만 그곳을 찾는 1일 사람 수와 수입은 단양군을 훨씬 능가하
니 이건 완전 단양 속의 조그만 도시나 다름이 없다.


 

♠  구인사 입문

▲  구인사 일주문(一柱門)

구인사터미널에서 거센 물결처럼 밀려오는 인파를 뚫고 2분 정도 오르면 구인사의 정문인 일
주문이 마중한다.
구인사 일주문은 이 땅의 일주문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큰 것으로 문을 지나는 사람과 문의 크
기를 비교하면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뼈저리게 실감이 날 것이다. 문을 들어서면서 장차 장
엄하게 펼쳐질 구인사의 맛보기 버전이라고나 할까..?
일주문의 높이는 대략 10m에 이르며, 문을 들어서면 바로 4층짜리 기와집인 관성당(觀性堂)이
다시 한번 위압감을 선사해 속인(俗人)의 기를 제대로 주눅들게 만든다. 구인사는 이런 식으
로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고 혹여나 잠입할 번뇌를 단죄하는 모양이다.

▲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자리한 관성당

▲  구인사 천왕문(天王門)

구인사의 2번째 관문인 천왕문은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이다. 이곳 천왕
문은 특이하게 2층으로 되어 있는데, 밑층은 경내로 통하는 3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윗층 문루에 바로 사천왕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천왕문은 보통 윗층을 일컫는다. 다른 절의
천왕문은 사천왕상 사이를 무조건 지나가게 하여 그들의 검문을 강제로 받아야 되지만 여기서
는 2층으로 가지 않는 이상은 그들을 마주칠 필요가 없다.

살짝 들려진 천왕문의 추녀를 보면 잡상(雜像)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모두 7개의 잡상이 추
녀마루에 붙어있는데 이들은 보통 궁궐이나 왕릉, 성문 등 지체높은 곳에서 많이 달았다. 지
금이야 그런 것을 지킬 필요가 없지만 절에서는 보통 잡상은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허나 구
인사는 저렇게 천왕문에 그들을 달았다. 그 이유는 잡상의 본 목적인 장식용과 수호용도 있겠
지만 우리나라 현대불교 및 천태종의 성지로 우뚝 선 구인사의 끝없는 자부심과 권위를 진하
게 상징하려는 의도가 더 클 것이다.

▲  용을 쥐어든 광목천왕(廣目天王)과
탑을 든 다문천왕(多聞天王)의 위엄

▲  천왕문에서 바라본 인광당(仁光堂)
구인사 경내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  3층 진신사리탑

천왕문을 거쳐 인광당과 총무원을 차례로 지나면 길 왼쪽에 부처의 사리가 담긴 3층석탑이 있
다. 부처의 법을 상징하는 코끼리가 그를 받치고 있는데, 1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
塔身)을 올리고 바로 그 위에 금색의 보륜(寶輪)으로 치장된 상륜(相輪)을 두었다.

이 탑은 1983년 구인사 2대 대종사(大宗師)인 남대충이 인도의 기원정사(祇園精舍)를 방문했
을 때 그곳 주지승이 선물한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자 만든 것으로 그때 기원정사 주지
승이 '인연이 있는 분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셔가 봉안해주십시요' 말했다.
탑의 모습은 동국대 전임 총장인 조명기 박사가 직접 설계했으며 코끼리 기단은 남대충 대종
사가 창안한 것이다. 1층 탑신에는 돌문을 두었는데 그 돌문을 열면 부처의 사리를 생생하게
친견할 수 있다. (1층 탑신까지는 사람 키와 손이 닿지 않아 아무나 열 수 없음~) 탑 주위로
돌난간을 둘렀고, 난간 기둥 위에는 12지신상(支神像)을 세웠는데, 사람들의 손길이 계속 누
적어 그들 피부가 완전 맨들맨들해졌다.


▲  구인사 삼보당(三寶堂)

3층석탑을 지나 경내를 계속 파고들면 관음전과 삼보당이 나온다. 삼보당은 구인사를 세운 천
태종 1대 종정(宗正)인 상월원각조사의 금동존상과 진영, 그리고 2대 남대충 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상월을 금동으로 장엄한 것은 구인사에서 현세에 부처로 극진히 떠받들고 있
기 때문이다. 건물 이름인 3보도 바로 상월과 남대충, 그리고 현재 천태종 종정인 김도용 대
종사를 일컬으며 만약 현 종정이 입적하고 새로운 이가 그 자리를 이어받으면 사보당(四寶堂)
으로 간판을 갈게 될 것이다.

이곳은 신도와 신참 승려들이 고참 승려에게 인사를 하는 곳이기도 하여 종단 승려들이 고참
승려를 상석에 앉혀 회의나 승려 안거(安居)를 주재하기도 한다. 그리고 삼보당 동쪽에는 조
실(祖室)이 있는데 그곳은 구인사와 천태종의 지배자가 머무는 곳이다. 지금은 3대 종정인 김
도용이 살고 있으며, 하루에 1번씩 삼보당으로 나와 신참 승려와 신도들에게 설법을 한다.
참고로 이곳에서는 대종사에게 예하(猊下)라는 존칭어를 사용한다. 제왕에게 폐하(陛下)라 부
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된다. 그럼 여기서 잠시 구인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천태종의 중심지, 산속에 숨겨진 조그만 도시 같은 구인사(救仁寺)
소백산(小白山) 북쪽 자락에 꽉차게 들어앉은 구인사는 우리나라 천태종(天台宗)의 중심지이
자 20세기 현대불교의 성지(聖地)이다. 이곳의 역사는 이제 70년여 년으로 1945년 초에 상월
원각조사(上月圓覺祖師)가 창건했다.

상월원각조사는 1911년 음력 11월 28일, 강원도 삼척시 상마읍리 봉촌마을의 밀양박씨 집안에
서 태어났다. 이름은 박준동(朴準東), 법명은 상월(上月)이며, 15세에 나름 큰 뜻을 품고 출
가하여 여러 선사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워낙 총명하여 금방 배웠다고 한다.
1940년에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가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수도했다고 전하는 굴에서 도를 닦
으며 솔잎과 쑥으로 2년을 버티다가 1942년 가을, 깨달음을 얻어 현재 구인사 5층 대법당 자
리에 있던 연화지(蓮花池)를 찾았다. 거기서 만개한 백련(白蓮) 사이로 살짝 모습을 비친 관
음보살 누님을 친견했다고 전한다.
하여 그해 겨울 관음성지를 순례하고자 중원대륙으로 건너가 주산열도에 있는 천태산 수선사
(修禪寺)와 대륙 천태종의 중심지인 국청사(國淸寺)를 찾았고 그때 천태종을 접하게 되었다.

천태종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그는 조국에서 반드시 크게 일으켜 다시 천태산(天台山)을 찾겠
노라 다짐하고 예전 관음보살을 친견했던 소백산 연화지로 돌아와 나무와 풀로 초암(草庵)을
지으니 그것이 바로 구인사의 시초이다. 절의 이름은 '억조창생 구제중생 구인사'라 지었으나
이름이 길어서 보통 구인사라고 부른다.

6.25 전쟁 때 이곳까지 들어온 북한군에 의해 절이 파괴되어 1952년 다시 지었으며 상월은 여
기서 속세와 왕래를 끊고 오로지 수행에 전념해 1962년 '한 마음 움직이지 않으면 만법(萬法)
이 일여(一如)하다'
는 경지와 '모든 법이 본래 무상(無常), 무생(無生)하다'는 무상대도(無上
大道)를 깨닫고 다음의 오도송(悟道頌)을 지었다.

山色古今外  산색은 고금 밖이요,
水聲有無中  물소리는 있고 없고 중간이로다.
一見破萬劫  한번 보는 것이 만겁을 깨뜨리니,
性空是佛母  성품 공한 것이 부처의 어머니로다.


천태종과 구인사가 크게 흥하게 된 계기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이다. 박정희가 월남
전을 두고 고심하고 있을 때, 한 측근이 상월이 신통력이 있다며 만나보라고 권하자 즉시 그
를 청와대로 소환했다.
박정희의 고충을 들은 상월은 참전하면 국부(國富)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참전을 적극 권했
다. 대통령 자신도 월남(베트남) 정벌을 원하고 있었으나 반대 여론이 많아 전전긍긍하던 참
이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10년 묵은 체증이 싹 가라앉은 듯, 너무나 기뻐했다고 한다. 그래서
상월에게 뭐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머무는 소백산 골짜기에 불사(佛事)를 하
고 싶다고 답을 했고, 박정희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구인사는 호랑이가 날개를 단 듯, 크
게 흥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군사정권의 도움이 구인사에 큰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 기세를 타고 상월은 천태종 초대 종정이 되어 '참된 자아의 개현','참된 생활의 구현','참
된 사회의 실현'을 위하여 대중불교의 구현, 생활불교의 실천, 애국불교의 건립이라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했으며, 1971년 5월 1일에는 교화의 기본과 지침이 되는 법어(法語)를 발표했
다. 그리고 그해 10월 천태종이 나아갈 방향과 종지(宗旨), 종통에 관한 교시문을 발표한다.

1974년 상월원각조사(시호는 상월원각대조사)가 입적하자 그의 후계자인 남대충(南大忠)이 구
인사 주지 및 천태종 2대 종정이 되었다.
남대충은 1925년 음력 12월 5일 구인사 부근 여의생마을의 영양남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름
은 남익순(南益淳)으로 21살에 구인사에 들어와 상월의 가르침을 받았고, 1960년에 큰 깨달음
을 얻자 상월에게서 후계자의 인증을 받았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받들고 공경했으며, 박정희 정권과 중생들의 시주를 발판 삼아
절을 더욱 크게 일으켰다. 또한 절 주변 야산에 잣나무 등 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숲을 일
구었고 수해 등으로 망가진 단양 관내의 도로 복구 공사에도 참여하는 등 아주 바쁘게 움직였
다. 하여 1980년 4월 사회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포장을 받았고 1987년에는 새마을훈장 자
조장을 받기도 했다.

1993년 9월 3일, 남대충이 6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그의 수제자인 김도용(金道勇)이 그 뒤를
이어 구인사와 천태종의 3대 종정이 되었다.
김도용은 1943년 10월 경북 울진군 평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김영춘(金永春)이다. 1977년
출가하여 남대충의 가르침을 받았고 출가 이후, 단 1번도 드러누운 적이 없다고 한다. 피곤하
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거늘 그는 그 본능을 일찌기 탈피한 것이
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저 신기할 따름. 그래서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신도와 승려가
많다.

▲  구인사 어른 승려가 머무는 조실

▲  구인사 대조사전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구인사는 그 형세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즉 황금닭이 알을 품
고 있는 형세의 아주 대단한 명당(明堂) 자리라고 한다. (또는 독수리가 알을 품은 지세라고
도 함) 과연 그래서일까? 구인사의 사세는 끝을 모르고 나날이 번창하여 4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비좁은 산 사이로 길게 들어서 조그만 도시를 이루고 있으며, 승려 수 300여 명, 최대
수용 인원 1만여 명, 거느린 말사(末寺)만 300여 개, 신도 수는 무려 170만을 헤아리는 천하
굴지의 대 사찰(寺刹)이 되었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아주 굵직한 절로 성장한 예는 그리 흔
치가 않으니 예사롭지 않은 명당은 분명하다.

구인사는 영춘면 일대에 상당한 논과 밭,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거기서 자체적으로 경작하
여 쌀과 채소 상당수를 충당한다. 신도가 많다보니 수입도 상상을 초월하여 포크레인으로 돈
을 쓸어 담아도 넘쳐날 지경인데 수입과 절을 찾는 신도 수는 전국 절집 가운데 1위가 아닐까
싶다. 오죽하면 단양군의 1년 수입보다 많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있으니 말이다. 제 아무리 팔
만대장경으로 유명한 해인사(海印寺)도, 소원은 다 들어준다며 과대 광고까지 일삼는 팔공산(
八公山)의 갓바위도,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인 서울 조계사(曹溪寺)도 구인사 앞에서는 감히
불전함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그 천문학 이상의 재정을 바탕으로 구인사와 천태종은 끝없이 팽창을 한 것이며, 단양에서 구
인사로 이어지는 도로 공사 비용까지 구인사가 전액 부담했다고 한다.

허나 구인사가 들어앉은 지형상 절이 커질수록 자연히 소백산의 피부를 깎아야 되는 문제점이
있다. 구인사의 화려한 발전 뒤에는 소백산의 말없는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대조사전
을 끝으로 더 이상 큰 건물은 지어올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명당이라도 단점은 있게
마련으로 금계포란형 같은 지형에는 무거운 것을 세우면 안된다고 한다. 허나 구인사는 죄다
무거운 것 투성이라 너무 과욕을 부리다가 알이 와장창 깨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흥하기
는 힘들지만 망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다.
또한 구인사를 세우고 천태종을 크게 일으킨 상월원각조사를 기리고 찬양하는 것까지는 좋으
나 그게 너무 지나쳐 부처 이상의 존재로 떠받들고 있고, 경내 남쪽 산자락에는 승려에 걸맞
지 않게 상류층 수준의 그의 무덤(무려 석물까지 갖추고 있음)까지 있어 조금 이질감을 주기
도 한다. 그 무덤을 여기서는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삼아 경내 성지로 애지중지하고 있고,
경내의 가장 높은 곳에는 호화로운 대조사전을 지어 금으로 만든 그의 존상까지 봉안하고 있
어 불교 사찰인지 상월을 중심으로 한 다른 종교의 절인지 햇갈리게 만든다. (삼보당에도 그
의 금동존상이 있음)
게다가 절을 이루는 건물이나 모든 형상이 하나 같이 커서 썩 정감이 가지 않는다. 허나 절이
좁은 산골에 자리해 있고 방문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그들을 수용하고 다양한 공간을 담을 건
물이 여럿 필요하다. 그래서 구인사 스타일의 다층 콘크리트 기와집이 빌딩처럼 들어선 것이
다.

법등(法燈)의 역사가 아직 짧다보니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물이나 불상은 없지만 꽤 많은 불
교문화유산을 수집하여 가지고 있다.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국보 257호),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 74(국보 279호), 묘법연화경(보물 960호), 대방광원각약소주경 권상
의2(보물 1016호), 불설아미타경<언해, 보물 1050호> 등 국가 지정문화재 20여 점과 금동9층
소탑(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09호), 청자발우(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11호), 사경영험(四經靈驗,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310호) 등 지방문화재 30여 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몽골과 중원대륙, 티
벳, 네팔, 인도,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문화유산도 꽤 된다. 이들은 모두 구인사입구에 지어진
불교천태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 불교천태중앙박물관 관람 정보 :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추석과 설날 연휴는 휴관 / 관람비
없음 / 관람시간 9~17시 (평일은 10시부터) / 국보와 보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은 일부
만 전시 공개됨, 전화 043-423-9103>

그 외에 '삼회향(三廻向)놀이'라고 영산재(靈山齋)의 뒷풀이로 행해지는 축제가 있는데 땅설
법이라고 부른다. 이 축제는 충북 지방무형문화재 25호로 불교의식에 우리 민속이 더해진 불
교 행사이다.

깊은 산골에 묻혀있지만 거의 소도시 같은 곳이라 조촐한 산사의 내음과 고즈넉함을 기대하고
왔다면 적지 않게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절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둘러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또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사찰이자 단양에서 꼭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주요 관광지로 이곳에 대한 역사와 미술사학적 평가는 후세가 알아서 해줄 것
이다.

※ 구인사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① 대중교통
* 동서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제천시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제천역에서 구인사행 제천시내버스 260
  번이 1일 4회 떠난다.
* 단양시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50~60분 간격, 터미널 밖 정류장에서 구인사행 군
  내버스가 1일 8회 다닌다. (군내버스가 시외직행버스보다 버스비가 60% 이상 저렴함)
* 영월읍내(세경대학, 영월터미널, 영월역 서쪽 덕포 정류장)에서 구인사행 군내버스가 1일 5
  회 다닌다.
* 구인사터미널에서 3분 정도 걸으면 관성당을 시작으로 구인사 경내가 펼쳐진다.
②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창원3거리에서 우회전 → 군
  간교3거리에서 좌회전 → 영춘교를 건너 우회전 → 구인사입구 주차장
* 구인사입구 주차장에서 구인사 총무원까지 무료셔틀버스가 수시로 운행한다. (총무원까지
  걸어갈 경우 20분 정도 걸림)
* 구인사는 일반인도 며칠 동안 수행/기도가 가능하다. 4박5일을 기본으로 하며, 접수는 구인
  사 총무원 1층에서 한다. (소정의 참가비 있음) 4박5일 기도를 끝낸 사람에 한해 기도실 담
  당 승려의 허락으로 1회(4박 5일) 연장할 수 있다. 또한 교무부 담당 승려의 승인하에 최대
  2~3회 연장이 가능하다.
* 수행/기도 참여자는 간단히 덮을 것과 깔고 앉을 것, 세면도구를 가져와야 되며, 공양시간
  과 기도시간, 휴식시간을 최대한 지켜야 된다.
* 구인사는 휴식형과 체험형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1박에 무려 5만원이며 홍보체험관
  에서 단주와 연꽃, 지화 만들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문의 ☎ 043-420-7397)
*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132-1 (구인사길 73 ☎ 043-423-7100)
* 천태종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삼보당 옆에서 바라본 관음전, 향적당 주변


 

♠  구인사의 핵심 둘러보기

▲  구인사 관음전(觀音殿)

구인사는 일주문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700m에 이르는 지극히 큰 절이다. (대신 좌우 폭은 짧
음) 일주문에서 향적당까지 이어지는 큰 길을 중심으로 갖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향적당에서 길이 2~3갈래로 갈리다가 광명전에서 모두 합쳐진다.

경내를 걷다보면 완전 한옥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거니는 기분이다. 마치 산속에 숨겨진 비밀
의 도시 같은 기분이랄까? 건물 상당수가 왠만한 단양읍내 건물보다 크고 좁은 산자락에 건물
들이 대량으로 몰려있으며, 매일 수천 명이 절에 머무니 구인사 일대를 따로 읍(邑)으로 삼아
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명칭은 '구인읍'이 좋을 듯, 대신 세금은 넉넉히 낼 것)

삼보당을 바라보고 선 관음전은 3층 규모로 그 3층이 관음전이다. 이름 그대로 청동으로 조성
된 관음보살 누님이 봉안된 건물로 그 규모는 5층 대법당보다는 현저히 작지만 그것보다 작을
뿐이지 다른 절의 법당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덩치가 크다.


▲  구인사 5층 대법당 옥상에 자리한 설법보전(說法寶殿)

관음전 북쪽에는 구인사의 법당(法堂)인 5층대법당이 자리해 있다. 천하에서 가장 큰 법당으
로 최대 5천명까지 수용 가능하며, 그 건물 정상에 실질적인 법당인 설법보전이 자리해 천하
를 굽어본다.
이 건물은 상월원각조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했다고 전하는 연화지가 있던 곳으로 1945년 이곳
에 3간 초암(草庵)을 지어 절을 세웠다. 그 초암은 6.25 때 파괴되어 1952년에 재건되었으며
1980년 4월, 그 역사적인 초암을 멀어버리고 지금의 대법당을 지었다. (초암은 자리를 옮겨서
라도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음)
건물이 하도 으리으리하여 5층 전체를 사진 1장에 담기도 벅차며, 설법보전 내부에는 석가불
을 중심으로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관음보살이 협시한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설법보전 내부는 경내를 모두 둘러보고 내려가는 중에 잠시 들렸는데 마침 오후 법회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고참 승려와 신참 승려들이 여러 전통 악기를 가져와 30분 동안 승무(僧舞)
와 범패(梵唄)를 노련하게 선보이는데, 천하에 300곳이 넘는 절을 다녔지만 승무와 범패는 이
때 처음 구경했다. 꼬깔을 쓰고 동그란 바라를 치며 신들린 듯, 춤에 열중하는 승려의 모습에
는 정말 박수가 나올 정도로 사진과 동영상으로 담지 못한 것이 참 아쉽기만 하다. 허나 설법
보전 내부는 촬영을 금하고 있어 대놓고 찍기도 힘들다. (49재 행사도 여기서 주로 지냄)


▲  설법보전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관음전과 삼보당 사이에는 일종의 광장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 광장 남쪽에 향적당(香積堂)이
란 3층짜리 건물이 있다.

향적당은 여러가지 좋은 향기가 담겨있다는 의미로 그 향기란 바로 음식이다. 그러니까 음식
을 먹는 장소, 공양간인 셈이다. 절에서는 부엌을 향적대(香積台)라 부르는데, 1층은 음식을
짓는 부엌이고, 2층은 공양간으로 최대 1,000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
공양(供養)은 아침과 점심, 저녁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먹을 수 있는데, 점심 공양은 보통 11
시 반부터 13시까지 제공되며 상황에 따라 30분~1시간 정도 연장 제공되기도 한다. 아침공양
은 6시 반~7시 반, 저녁은 17시 반~22시까지로 구인사에서 재배한 쌀과 채소로 지어진 밥(보
리밥이 나오기도 함)과 국, 김치 등의 나물과 직접 숙성시킨 고추장을 주며 이들 고추장과 나
물을 밥에 비벼서 먹거나 그냥 먹어도 된다.
나름 맛이 있는지라(김치와 국이 괜찮음) 뚝딱 1그릇을 비우고 식기를 반납하여 밖으로 나오
면 길다방 자판기가 여러 대 대기해 커피 1잔의 여유을 권한다. 그들은 공짜가 아닌 300~400
원을 먹여줘야 커피나 코코아를 제공하는데 정 돈을 받아야겠다면 중생구제를 염원하는 절에
걸맞게 100원만 받아도 충분할 것이다. 절은 중생과 속세를 위해 헌신하는 곳이지 돈을 버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  황색 지붕를 지닌 천태종역대조사전(天台宗歷代祖師殿)

지관당(止觀堂) 부근에 '천태종역대조사전'이라는 절 건물 치고는 이름도 무지 긴 2층 건물이
있다.
이 집은 그 이름 그대로 천태종의 역대 고승(高僧)의 진영(眞影)과 존상이 봉안된 곳으로 천
태종 시조인 용수존자(龍樹尊者, 남인도 비달바국 출신)를 비롯해 고려 승려로 송나라로 건너
가 대륙의 천태종을 크게 발전시킨 제관법사(諦觀法師), 우리나라 천태종의 상징이자 고려 문
종(文宗)의 4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중원대륙 천태종의 초조(初祖)인 북제
존자 혜문(北齊尊者 慧門), 중원대륙 천태종의 실질적 개창자인 지자대사(智者大師), 백련결
사 운동을 전개했던 고려 중기 승려인 원묘국사(圓妙國師)와 진정국사(眞靜國師) 등 우리나라
천태종 승려 18명(모두 고려 승려)과 중원대륙 승려 18명 등 36명이 봉안되어 있다.

이 조사전은 2003년 5월에 기공하여 2008년 4월 22일 완공되었는데, 그때 존상 봉안식을 거행
했으며, 건물 면적은 206평, 2층은 조사전, 1층은 승려들의 교육 공간인 강원(講院)으로 쓰인
다.
참고로 중원대륙은 1993년에 대륙 천태종의 총본산인 국청사에 중원대륙 천태종의 개창자, 지
자대사와 고려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 그리고 구인사를 세운 상월원각조사의 존상을
봉안한 중한천태종조사기념당(中韓天台宗祖師記念堂)을 세웠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간의 천
태종 교류가 활발해지자 우리나라 천태종의 중심지인 구인사에도 중원처럼 천태종 고승을 기
릴 건물을 세울 필요성이 대두되어 구인사의 위엄을 다시 한번 떨칠 겸, 이렇게 장엄하게 천
태종역대조사전을 만든 것이다.
이곳에 봉안된 36명 중 생전의 모습을 남기지 못한 승려가 꽤 되는지라 그들은 오로지 상상에
맡겨 진영과 존상을 조성했다. (건물 내부는 촬영 금지)


▲  구인사 광명전(光明殿)

대조사전 광장 바로 밑에는 경내에서 가장 큰 광명전이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구인사
의 위엄에 걸맞게 매우 우람한 규모를 자랑하는데 가파른 벼랑을 손질하여 지은 6층짜리 건물
로 내부 면적도 꽤 상당하다. 건물의 밑부분은 불전(佛殿)이라기보다는 회관(會館) 같은 분위
기가 진하며 그나마 윗부분의 겹으로 이루어진 기와지붕이 이 건물도 엄연한 불전의 일부임을
알려준다.
건물이 크다보니 심지어 엘리베이터를 2대나 갖추고 있으며, 절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기는 구
인사가 처음이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지.

광명전은 강당 및 단체 예불 공간으로 몰려드는 수행 신자를 수용하고자 세웠다. 그래서 기도
/수행 신자들이 강당 일대에 많이 머물며 이불 등을 깔고 잠을 청하거나 휴식을 취한다. 또한
그들을 위해 난방을 두둑하게 틀면서 봄날 마냥 따스해 졸음이 스르륵 몰려든다.
(대조사전으로 갈 때는 광명전 엘레베이터를 이용하는 것이 제일 편함)


▲  광명전 강당 (강당 윗층과 밑층 모두 수행 신자들로 가득함)

▲  광명전 꼭대기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하늘과 한발자국 더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높아진다.

▲  광명전 꼭대기에 자리한 대조사전과 광장

광명전 정상에는 대조사전 광장이 넓게 닦여져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하
늘의 광장 같은 분위기를 진하게 풍기는데 상월원각조사와 남대충 대종사의 탄생 기념 법회와
열반 법회, 대각국사 의천의 탄생 기념 법회 등 구인사의 여러 행사와 축제가 여기서 성대하
게 열린다.


▲  대조사전 광장

▲  대조사전(大祖師殿)의 위엄~~!!

대조사전은 두루마기 옷을 입은 상월원각대조사의 금동존상이 봉안된 곳이다. 구인사에서 그
를 기리는 공간을 세우고자 1985년에 대조사전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단순히 조사전
의 성격에서 벗어나 천태종 부흥의 상징적 역할 및 세계적인 문화재로 만들겠다는 포부까지
듬뿍 넣어 1992년 착공을 시작해 2000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의 총건평 167평, 높이 27m로 이 땅의 목조 건물 중 가장 높다. 구인사의 건물이 모두 콘
크리트 기와집인데 반해 이 건물은 유일하게 나무로만 지어진 것으로 300년 이상 묵은 태백산
춘양목(春陽木) 50만 재를 벌채하여 일체 쇠못을 쓰지 않는 전통 방식으로 만들었다. 또한 건
물 주춧돌 석재는 이 땅 최고의 돌이라는 강화 애석을 썼으며, 기와는 모두 황금색 기와로 덮
어 장엄함을 높였다. 이들 기와는 1,300도에서 구워 금빛을 영구 보존처리했으며, 단청에 들
어간 순금은 무려 2,700돈, 총 공사비는 자그만치 100억이나 소요되었다.
건물 건립에는 국가무형문화재 74호인 대목장 신응수씨가 도편수를 맡았는데, 그는 궁궐 건축
의 1인자로 광화문(光化門)과 숭례문(남대문) 복원공사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대조사전은 천태종 부흥의 상징적 역할과 세계적인 문화재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빼면 단순히
상월을 위한 건물로 불교의 중심인 석가불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 온갖 보살(菩薩)들이 봉
안된 건물보다 더욱 크고 화려하다. 오래된 절들은 보통 그 절을 세우거나 절을 크게 일으킨
승려를 기리는 조사전<祖師殿, 또는 진영각(眞影閣)>을 두기 마련이다. 그 규모는 대체로 법
당보다는 작은 편으로 그들의 모습을 그린 진영(眞影)이 있지, 존상은 없다.
허나 구인사는 그냥 조사전도 아닌 대조사전을 칭하고 있고, 상월의 사진이나 진영도 아닌 금
으로 휘황찬란한 족히 20m는 될 듯한 거대한 존상을 두어 상월을 중심으로 한 다른 종교의 사
원에 들어선 기분이다. 게다가 단청에 엄청난 금을 발랐고, 무려 100억을 들인 건물이라고 하
니 정말 현기증이 날 정도로 호화로움과 웅장함이 넘치고 흐른다.


 

♠  구인사 마무리

▲  소백산이 빚은 장쾌한 산줄기 구봉팔문(九峰八門)

대조사전 서쪽에는 적멸보궁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그곳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나는
처음에는 부처의 사리가 봉안된 곳인줄 알았다. 적멸보궁은 부처의 사리가 담긴 곳이고 그러
다보니 따로 불상을 두지 않는다는 절대진리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 연말에 구인사에
왔을 때 그곳까지 간 기억이 없기에 이번에 몸소 가보기로 했다.

산길 입구에는 산길을 오를 때 쓰라며 나무 지팡이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그냥 오를까 하다
가 손이 허전해 지팡이(나무를 적당히 깎은 것임)를 하나 쥐어들고 산길에 임했다.
처음에는 길이 완만하지만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각박하게 돌변한다. 산자락에 눈이 많
이 쌓여있으나 성지로 가는 길이다보니 길만큼은 눈에서 해방되어 통행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
으며, 신도들의 발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남쪽을 향해 급하게 펼쳐진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상관은 없으나 보통 왼쪽 길로 올라가서 오른쪽 길로 내려가는 것이 편하다. 여기서 다시 10
분 정도 더 다리를 부리면 비로소 적멸보궁(寂滅寶宮)에 이른다.
적멸보궁에 닿고 보니 그 흔한 적멸보궁이 아닌 것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적멸보궁의 주인공
은 다름아닌 상월원각조사로 그곳에는 그의 무덤이 자리해 있었다. 무덤은 봉분(封墳)과 양석
(羊石), 상석(床石) 등 여러 석물로 이루어진 제법 비싼 모습인데, 그곳이 구인사의 적멸보궁
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부처의 진신사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인사 창건주의 승탑(僧塔)도 아
니고 제법 잘 꾸며진 무덤이 적멸보궁이라니?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긴 곳을 적멸보궁이라 부
르는 불가(佛家)의 진리도 여기서는 예외인가 보다. 하긴 구인사에서 상월을 부처로 숭상하는
데 그럴만도 하겠지. 참고로 상월은 바로 여기서 인생의 마지막 숨을 쉬며 열반에 들었다고
전한다.

무덤과 적당히 거리를 둔 북쪽에 예불을 올리는 공간을 두었는데, 절을 올리는 신도들로 자리
가 없다. 그리고 그 북쪽에 무덤을 관리하는 건물을 두었고 건물과 예불 장소 옆은 엄청난 각
도의 내리막이라 주의를 요한다.
무덤 일대는 촬영이 통제되어 있어 굳이 담지는 않았다. 무덤 주위로 사람들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게끔 철조망과 줄을 쳐놓았으며 이곳 역시 기가 막힌 명당이라고 한다. 이렇게 상월의 무
덤이 있으니 당연히 남대충의 무덤도 있다.
그의 무덤은 경내에서 북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남한강 건너(영춘교 서남쪽) 산자락에 자리
해 있는데 그 무덤도 상류층 무덤 수준이다. 이곳은 구인사에서 거리가 좀 있으므로 매일 몇
회 정도 그곳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이곳은 예전에 가봤음)

구인사에서 수행/기도로 머무는 경우 5층대법당과 삼보당, 대조사전, 상월원각조사의 묘역은
매일 둘러봐야 된다고 그런다. (남대충 묘역은 선택 옵션임~) 매일 이들을 둘러보면 다리 하
나는 정말 단단해질 듯.


▲  구봉팔문 전망대

적멸보궁 남쪽에는 구봉팔문전망대가 있다. 묘역 옆으로 난 산길을 3분 정도 가면 그 끝에 전
망대가 달려있는데 전망대라고 해서 무슨 시설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구봉팔문이 잘 보이
는 언덕배기일뿐, 어떠한 인공시설도 없는 자연산 전망대이다.

구봉팔문은 구인사 남쪽 산줄기를 일컫는다. 영춘면 남천리에서 가곡면까지 5개 리에 걸친 소
백산의 북쪽 지맥이 9개의 봉우리를 이루고 그 사이로 8개의 골짜기가 형성되었는데 그 골짜
기를 봉우리로 인도하는 문으로 비유하여 9봉8문이라 부른다. 그 이름 외에도 옛날에 어떤 승
려가 이곳을 법문(法門)으로 오인해 오르려고 애를 쓰던 곳이라고 하여 법월팔문(法月八門)이
라 불리기도 하며, 상월도 이들 봉우리에 올라 정진에 힘썼다고 전한다.

9봉의 이름은 제1봉부터 아곡문봉, 밤실문봉, 여의생문봉. 뒤시랭이문봉, 덕평문봉. 곰절문봉
, 배골문봉, 귀기문봉, 새발문봉이며, 8문의 이름은 1문부터 아골문안골, 밤실문안골, 여의생
문안골, 덕가락문안골, 곰절문안골, 배골문안골, 귀기문안골, 새발문안골이라 부른다. 이들은
영춘면 남천리와 백자리에서 시작해 국망봉 계곡에서 끝을 맺으며, 곰절문봉을 중심으로 '八'
자 모양을 이룬다. 경관이 매우 뛰어나 제2단양8경의 일원으로 꼽히고 있으나 사람들의 발길
도 쉽지 않은 벽지라 아직은 청정한 상태로 남아있다.

이곳 전망대는 길이 막혀있어 더 이상 가지는 못한다. 그냥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
보듯 구봉팔문을 바라보고 다시 되돌아 나가야 된다. 이곳에 올라서면 정말 바람의 소리가 전
부인 고적한 곳으로 대기도 청정해 속세에 찌든 몸과 마음이 싹 정화되는 거 같다. 구인사에
왔다면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이곳 전망대에 올라 소백산의 장대한 기운과 도시에서는 맛
보기 힘든 자연의 멋과 담백한 산정의 기운을 꼭 누리고 가기 바란다.


▲  적멸보궁에서 구인사 경내로 인도하는 산길

▲  구인사 온실 식물원 - 무궁무진한 햇살을 에너지로 삼아 식물원의
식구들을 먹여살린다.


이렇게 적멸보궁 일대를 둘러보고 다시 경내로 내려왔다. 내려갈 때는 올라갈 때와 달리 길이
쉬워서 금세 대조사전 옆구리에 이르렀다. 잠시나마 함께한 지팡이를 놓아주고 밑으로 내려갔
는데 중간에 5층대법당 설법보전에 들려 오후 법회와 승무, 범패를 구경했다.

설법보전을 끝으로 구인사와의 인연을 싹둑 정리하고 속세로 내려왔다.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다되어 가지만 경내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새통이었고, 빠지는 인원만큼 계속해서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으니 구인사의 명성과 위엄이 새삼 대단함을 느낀다. 갓바위보다 돈을 더 많이 버
는 절이니 그 수입을 중생과 속세를 위해 과감히 쓰면 좋으련만, 너무 바람직하지 않게 쓰이
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요즘 종교들이 돈을 너무 밝히고 외양 꾸미기에 지나치게 몰두함)

구인사 정류장에서 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곧 동서울로 가는 직행버스와 제천역으로 가는 제천
시내버스가 올 시간이다. 일요일 늦은 오후라 버스를 타면 영동고속도로가 100% 막힐 것이니
제천에서 열차로 상경하기로 하고 제천역으로 가는 제천시내버스 260번에 몸을 실었다.

구인사에서 거의 1시간을 달려 제천역에 도착, 여기서 청량리(淸凉里)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
에 몸을 싣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과거완료형이 되버린 연초의 구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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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이 깃들여진 첩첩한 산골의 절집, 북한산 삼천사 ~~~ (삼천사계곡)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삼각산) 삼천사 '

▲  삼천사 대웅보전


 

♠  삼천사 입문

▲  알록달록 연등이 길을 안내하는 삼천사 길

따사롭던 5월의 첫 주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삼천사를 찾았다. 연신내역에서 그들을 만
나 서울시내버스 7211번(진관차고지↔신설동)을 타고 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잘 닦여진 길을 따라 그곳으로 다가섰다.


▲  그늘에 자리한 족구장 - 이곳은 절터였다.

삼천사 숲길을 들어서면 식당을 옆에 낀 너른 공터가 나온다. 지금은 식당에 딸린 공간이지만
예전에는 사슴농장이 있었지~. 사슴의 숙성된 뿔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시절이 정말 엊그
제 같거늘, 그들은 죄다 어디로 갔는지 그들의 안부가 새삼 궁금해진다.

겉으로 보면 산이나 계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과 농장의 쉼터이지만 놀랍게도 이곳에 옛
절터의 흔적(삼천리골사지1)이 아주 희미하게 묻혀있다. (안내문은 없음) 그 절터는 공터를 중
심으로 주변 식당들까지 아우르고 있는데, 아직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절의 정체
를 알 수 없다. 다만 진관사(津寬寺)가 근처에 있어 그의 전신(前身)이라는 신혈사(神穴寺)터
로 보기도 하며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편의상 '삼천리골사지(寺址) 1'로 분류했다.
<삼천리골사지2는 삼천사계곡 상류에 있으며 삼천사터의 일부로 여겨짐>
여기서는 다량의 토기와 기와, 청자파편 등이 나왔는데, 행락지로 먹고 사는 사유지다보니 훼
손이 심각해 하루 속히 발굴조사가 절실해 보인다. 혹시 아는가 이곳이 정말 고려 8대 제왕인
현종(顯宗)과 인연이 아주 깊다는 신혈사의 마지막 흔적이었을지도?


▲  녹음(綠陰)이 짙은 삼천사 가는 길
저 짙푸른 녹음 속에 나를 잠시 숨겨본다.


삼천리골사지1을 지나면 식당들이 줄지어 나타나는데, 그 와중에 '삼천탐방지원센터'로 변신한
옛 매표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내야했으나 2007년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면서 더 이상 매표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삼천탐방지원센터에서 3분 정도 가면 고개가 나타난다. 고개 앞에는 삼천사를 알리는 돌기둥이
멀뚱히 서 있는데 여기서 고갯길과 계곡길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던 삼천사는 나오게 되어 있
으나 시멘트길인 고갯길은 다소 각박하고 돌아가는 편이며, 차량들의 왕래가 잦다. 반면 계곡
길은 빠르게 갈 수 있는 지름길로 계곡 주변에 주막들이 여럿 모여 앉아 절을 목전에 둔 속세
의 마지막 유혹을 펼친다.


▲  미타교 직전 고갯길

▲  계곡의 아름다운 경관을 크게 들쑤신 미타교(彌陀橋)

계곡길을 5분 정도 오르면 고갯길과 다시 만나면서 약간 경사가 진 고개가 나타난다. 그 고개
를 넘으면 북한산 일품 계곡의 하나로 널리 추앙받는 삼천사계곡(삼천리골) 중류가 나타난다.

이곳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초소에 출입신고를 하고 신분증을 맡겨야만 들어갈 수 있던 금지
된 구역이었다. 물론 삼천사 승려와 신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1992년 통행제한이 풀
리면서 삼천사계곡을 통해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비봉능선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다. 허나 계
곡 주변에는 군사시설 일부가 옥의 티처럼 남아있으며, 삼천사와 옛 군부대 수영장 사이 계곡
은 여전히 금지된 계곡으로 묶여 속인들의 발길을 거부하고 있다. (옛 수영장 이후와 삼천사
위쪽 계곡은 출입이 가능함)

삼천사로 가려면 계곡을 1번 건너야 되는데 예전에는 키 작은 다리가 놓여있었으나 2011년 이
후 높이와 폭을 높여 미타교란 하얀 피부의 돌다리를 새롭게 깔았다. 다리를 업그레이드한 것
은 좋으나 문제는 주변 환경을 고려치 않고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크게 들쑤시며 만들었다는
것이다.

계곡 다리(미타교)에서 삼천사 중간의 짧은 계곡 풍경(밑에 있는 2011년 사진 참조)은 개인적
으로 참 좋아했던 풍경이었는데 다리를 놓으면서 잘생긴 바위와 반석을 깨뜨리고 자잘한 돌이
계곡 주변을 적지 않게 차지하면서 심히 안좋게 변해버린 것이다.


▲  예전의 경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미타교 주변)
계곡에 자잘한 돌들만 가득하여 마치 돌의 무덤처럼 황량하기 그지 없다.

▲  이제는 전설이 되버린 미타교 주변 삼천사계곡의 옛 모습 (2011년)
선녀 누님이 살짝 내려와 목욕을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고운 절경이었다.
허나 지금은 선녀는 커녕 맷돼지도 외면할 것 같다.


너무나 이질적으로 변해버린 삼천사계곡에 안타까움의 한숨을 여러 번 날려 보낸다. 자꾸 예전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려 부질없이 변해버린 현실을 인정하기가 싫다.

미타교를 건너면 각박한 경사의 오르막길이 중생을 주눅들게 만든다. 그 길을 3분 정도 오르면
옛 발해(渤海)의 국도(國都)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석등(石燈)을 닮은 우람한 석등 1쌍
이 힘들게 올라온 중생들을 맞이하니 여기서부터 산사의 향기와 오래된 마애불의 인자함이 깃
든 산사, 삼천사 경내가 흔쾌히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삼천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경내 직전에 자리한 석등 1쌍

북한산(삼각산) 서쪽 삼천사계곡에 둥지를 튼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磨崖佛)
을 품은 절이자 도심에서도 멀리 떨어진 첩첩한 산골의 산사이다. 1992년까지만 해도 사찰 출
입의 제한이 많았으나 비봉능선과 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방되면서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삼천사는 삼국시대가 한참 정리되고 있던 661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하
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정말로 곤란하다. 그가 세웠다는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고 그
당시 신라를 둘러싼 천하의 정세도 한가롭게 절이나 세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교에
지나치게 목숨을 걸었던 신라(新羅)도 그 시절에는 왕경(王京, 경주)을 중심으로 절이 세워지
고 있었으며 원효대사 역시 바쁘게 움직였던 시기이므로 절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대사, 무열왕(武烈王)과
의 친분으로 그의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에게 장가들어 신라 왕실의 일원이 되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고자 귀족 중심으로 돌아가던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면서 당시 신라 불교
의 1인자였던 자장율사(慈藏律師)를 강원도 산골짜기로 밀어내고 의상(義湘)과 더불어 신라 불
교의 지존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삼천사가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661년, 당나라 고종(高宗)은
'이제 백제도 망했으니 고구려를
쳐도 별무리는 없을 것이다!'
싶은 엉뚱한 생각에 단독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 전
쟁에서는 당나라의 맹장으로 손꼽히는 방효태(龐孝泰)를 주장(主將)으로 하여 많은 군사를 보
냈는데 방효태는 천하장사로 손가락질 받던 그의 아들 12명(혹은 13명)을 모조리 데리고 나가
고구려 정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당군은 요하(遼河)를 건너 요동(遼東)을 용케도 통과, 압록강 부근에서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그 기세를 타고 평양성(平壤城) 부근인 사수<蛇水, 대동강의 지류인 합장강으로 여겨짐>까지
진격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10만 대군은 몰살을 당했고 고구려를 꼭
무너뜨리겠다고 헛소리를 했던 방효태는 그의 아들과 나란히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한편 서해바다를 건너 평양 서쪽으로 기들어온 소정방(蘇定方)은 방효태의 대군이 절단났다는
소식에 그야말로 큰 충격에 빠졌다. 날씨는 춥지. 식량은 부족하지. 언제 고구려군이 들이닥쳐
자신들의 목을 댕강 칠지 모를 위험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하여 소정방은 쫄깃해진 간을 부여잡고 신라에 급히 사자를 보내 식량과 원군을 요구했다. 당
나라에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하며 그들의 비유를 맞추느라 급급했던 신라는 소정방의 요구를
흔쾌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요청을 무시하면 나중에 고구려를 치거나 공격을 받았을
때 도움을 받기가 어렵게 될 것이고 고구려에게 계속 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군량을 수송케 했는데 이때 분황사(芬皇寺)에 있던 원효가
그를 따라 종군(從軍)하게 된다.

김유신의 수송부대가 추운 겨울을 뚫고 고구려의 영역으로 들어오자 고구려군은 그들을 때려잡
기 위해 길목에 매복을 했는데, 소정방이 이를 알아내고 급히 복잡하게 쓰인 암호문을 보냈다.
그 암호문을 바로 원효가 해독한 것이다. 그래서 김유신은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무사히 군량을
수송할 수 있었다.
이것이 661년부터 662년 초까지 원효대사의 행적이다.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던 그가 언제 고구
려와 신라의 접경 지역이자 전운이 감도는 북한산(삼각산)에 절을 세웠겠는가? 이것으로 이미
원효 창건설은 끝이 났다. 그렇다면 절은 언제 지어졌을까?
경내에 있는 마애불과 옛 절터의 유물을 통해 이르면 신라 말, 늦어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18세기에 간행된 북한지(北漢
誌)에는 최
대 3,000명이 머물 정도로 번창했다고 쓰여 있다.

▲  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

▲  삼천사터 금당(金堂) 구역

고려 초에는 개경 현화사(玄化寺)의 초대 주지를 지낸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이 주지로
있었으며, 고려 왕실의 각별한 지원을 받아 큰 절로 성장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
(西山大師)의 지휘 아래 승병(僧兵)의 주요 집결지가 되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파괴되고 말았
다. 그때까지만 해도 절은 지금보다 1.5km 안쪽 산속에 있었으며 절 이름은 지금과 음은 같지
만 한자가 1글자 틀린 삼천사(三川寺)였다.
그 이후 진영화상이 삼천사의 암자가 있던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건하여 3천 명을 뜻하는 삼천
사(三千寺)로 이름을 갈았으며 6.25때 파괴된 것을 1960년에 중건했다.

1970년대 성운(聖雲)화상이 주지로 들어와 절에 있는 마애불이 오래된 불상임을 밝혀내었고 20
년 동안 계속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1994년에 사회복지법인 인덕원
을 설립해 복지사업에도 손을 뻗쳤다.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산령각, 천태각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
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또한 옛 삼천사터(고양시 북한동)에는 대지국사의 탑비(塔碑)
와 절터 주춧돌이 어지럽게 남아있는데 오랫동안 주목도 받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가 서울역
사박물관에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여 500여 점의 유물을 건져냈다. (2009년
이후에도 여러 번 발굴조사를 했음)
이처럼 북한산(삼각산) 제일의 절터 유적임에도 이상하게도 북한산 관련 지도에는 제대로 표시
조차 되어 있지 않으며, 그에 합당한 지정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계속 방치되고 있다.
(사적이나 지방기념물 등급이 적당해 보임) 또한 이곳에 있는 대지국사비는 태고사(太古寺) 원
증국사탑비와 더불어 북한산에 있는 고려 때 비석이자 북한산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나 그 역
시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절터 관람은 가능함)

※ 북한산 삼천사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
  ) 입구 하차 → 삼천사까지 도보 30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3번 출구에서 7723번 시내버스 또는 1번과 2번 출구 중간에서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에서 하차
*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에서 삼천사 셔틀버스가 1일 4회 운행한다. (구파발역 출발 시간은
  8:20, 10시, 11시, 13:30) 법회와 절 행사가 있는 날에는 오전 8시부터 11시 3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석가탄신일에는 저녁까지 수시로 운행
* 삼천사까지 차량 접근이 가능하며 경내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음

* 삼천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 25-2 (연서로54길 127 ☎ 02-353-3004)
* 삼천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삼천사 종형사리탑과 마애여래입상


 

♠  삼천사 5층석탑, 대웅보전 주변

▲  나한사리를 머금은 5층석탑

삼천사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4마리의 석사자가 탑신(塔身)을 받들고 있는 5층석탑을 만
나게 된다. 1988년 삼천사 주지인 성운화상이 미얀마의 마하시사사나 사원을 방문했을 때, 그
곳 대승정(大僧正)인 아판디타에게 부처 사리 3과와 나한사리를 선물로 받았는데, 부처사리는
마애불 앞 종형사리탑에 봉안하고 나한사리는 일주문 앞에 이 탑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이 탑은 바닥돌을 먼저 깔고 그 위에 여러 단으로 된 기단부(基壇部)를 둔 다음, 4마리의 사자
와 5층 탑신, 머리장식을 차례대로 갖춘 형태로 구례 화엄사(華嚴寺)와 제천 빈신사지(頻迅寺
址)의 4사자 석탑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  삼천사의 새로운 명물, 세존진신사리 불탑(佛塔)

5층석탑을 지나면 바로 9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법당도 아닌 경내 외곽에 서로 다른 모습
의 탑을 2개씩이나 지어 올린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삼천사는 법당 앞에 탑을 둘 공간이
여의치가 않아 공간이 넉넉한 이곳에 탑을 심은 것이다.

9층석탑 자리는 원래 주차장의 일부로 미얀마 대승정에게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봉안하
고 절의 위엄도 제대로 드러낼 겸, 거대한 탑을 또 짓기로 결정하고 2012년 초에 자리를 닦아
그해 5월 완성을 보았다. 이 탑 역시 9층석탑처럼 높게 기단부를 쌓고 그 위에 탑을 올렸는데
탑은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탑을 비슷하게 재현했으며 탑의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
는 4두의 금빛 사자상은 인도의 사르나트 아쇼카 석주(石柱)의 사자상을 모방한 것이다.
금빛 사자상은 8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이 담긴 법륜(法輪)에 안치되었고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군주로 평화와 생명존중을 천명한 아쇼카왕(인도 마가다왕조의 3대 왕)의 '담마 왕령(王令)'
정신을 새기고자 아쇼카왕의 상징인 4두 사자상을 꼭대기에 얹혔다. 그리고 9류 중생의 안녕과
화엄 10지에 이른 후 정토세계의 9품 연대에 오르기를 발원하는 보리심을 9층탑으로 묘사했다.

탑이 완성되자 진신사리 7과를 비롯해 조그만 금동석가불과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 대장경(
大藏經) 1질, 600명의 신도들이 손수 제작한 금강경(金剛經) 600부, 신도들이 기증한 갖은 고
가품을 탑에 넣었다.
탑에게 주어진 첫 이름은 '세존진신 다보 9층대탑(世尊眞身 多寶 九層大塔)'이었으나 '세존진
신사리 불탑'으로 간단히 줄였다. 탑이 얼마나 큰지 사람들이 거의 개미로 보이며, 장대한 탑
의 모습이 마치 삼천사의 탄탄한 재정과 세를 부질없이 과시하는 것 같다.


▲  군인들의 안녕을 위해 노력하는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

9층석탑을 지나면 오른쪽 높은 곳에 화강암 통돌로 조성된 지장보살입상이 자리해 있다. 이 보
살상은 9층석탑과 5층석탑은 물론 절 서쪽에 있는 34사단 유격훈련장 방향(산을 올려다보면 유
격장이 보임)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34사단 장병들이 이곳에서 로프를 타고 훈련을 하는데 해마다 사고가 일어났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삼천사 주지승이 장병들의 덧없는 희생을 막고 더 이상의 사고와 살생이 일어나지 않도록
발원하는 뜻에서 유격훈련장이 보이는 곳에 지장보살입상을 세웠는데, 신기하게도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지장보살 형님의 가호가 진하게 피어나 그들
을 지켜준 모양이다.

어진 어미의 모습처럼 자리한 보살상은 8각의 기단을 밑에 깔고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
에 여의주를 오른손에 들고 서 있으며 8각 대좌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와 도명존자(道明尊者)
, 시왕상 등이 새겨져 있다.


▲  연꽃의 와신상담 현장, 연못 (일주문 앞)

▲  삼천사 일주문(一柱門)

9층석탑을 지나면 문짝을 단 큰 문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일주문이라 부른다. 보통 일주문은 절
입구나 길목에 세우기 마련으로 미타교와 5층석탑 사이에 일주문을 둘 자리가 넉넉하나 삼천사
는 그 자리를 모두 내버리고 특이하게 대웅보전 입구에 갖다 놓았다.
세로로 걸린 현판에는 '三角山 三千寺'라 쓰여 있는데 쓰여진 글씨가 꽤 걸출하여 하늘로 날라
갈 것만 같다.


▲  새끼두꺼비 2마리를 등에 짊어진 어미 두꺼비상 (일주문 난간)
절의 지형 때문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갖다둔 것은 아닐까?

▲  삼천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일주문을 들어서면 종무소(宗務所)와 법당인 대웅보전(대웅전)이 차례로 모습을 비춘다. 예전
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절의 법당)을 칭했는데 건물이 얼마나 허벌나
게 큰지 가히 절 이름값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붕 용마루 양쪽에는 치미가 날카롭게 솟아
북한산 봉우리와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고, 건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을 비롯해 지장보살상,
신중탱, 16나한, 500나한상 등이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  대웅보전 앞에도 2마리의 새끼를
등에 진 두꺼비상이 있다.

▲  등장 인물로 빼곡한 신중탱(神衆幀)
모두 104명이 담겨져 있다.


▲  호화로움이 묻어난 석가3존불과 후불(後佛)목각탱

석가불이 조그만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석가3존불을 이
룬다. 그들 뒤에는 호화롭고 복잡해 보이는 후불목각탱화(木刻幀畵)가 병풍처럼 자리해 있는데
이들은 삼세불화(三世佛畵)를 표현한 것으로 가운데에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배치하고 왼
쪽에 약사회도(藥師會圖), 오른쪽에 극락회도(極樂會圖)를 배치했다.

▲ 석가3존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눠진 16나한(羅漢)과 500나한들
우리나라 인구처럼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 의상을 취하고 있어 다들 개성들이 넘친다.


 

♠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명품급 마애불이자 삼천사계곡의 영원한 은둔자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보물 657호

▲  마애불과 그에게 보금자리를 내준 눈썹바위

대웅보전 옆구리를 지나면 왼쪽으로 범상치 않은 모습의 눈썹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 바위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마애불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으니 그가 바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마애불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이다.

불상 앞에는 그에게 예불을 올리는 석조 공간이 넓게 닦여져 있는데 그 공간 밑에는 삼천사계
곡이 일조권을 강제로 빼앗긴 채 숨죽여 흘러간다. 한참 학창 시절이던 1992년 가을, 두근거리
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지금처럼 계곡을 가리고 앉은 돌로 다진 공
간이 없었고 계곡을 건너면 마애불 앞에 조그만 예불 공간이 전부였다.

서울에 있는 4개의 고려시대 마애불<① 승가사 마애여래좌상 ☞ 관련글 보러가기, ② 안암동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관련글 보러가기, ③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④ 삼천사 마애여래입상>
의 일원으로 고려 초기(멀리 신라 말로 보기도 함)에 조성된 선각(線刻) 마애불이다. 불상 대
부분은 선을 그어 처리했지만 일부는 약간 튀어나온 얕음새김으로 전체 높이는 3m, 불상의 높
이는 2.6m이다.

이 마애불은 윤곽을 따라 금분이 칠해져 있었으나 2000년 이후에 사라졌고, 그의 왼쪽(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 부분에는 약간 붉은 색채를 띠고 있는데, 이는 그에게 채색을 했던 흔
적들이다. 마애불에 색을 입힌 경우는 이곳과 경북 칠곡군 왜관(倭館) 부근에 있는 노석리 마
애불상군 등이 있다.


▲  마애불 양쪽에는 네모난 구멍이 2개 있는데 저들은 마애불을 보호했던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으로 그가 감싸주던 부분은 어둠 속의 촛불처럼
유난히도 밝고 하얗다. 마치 광배(光背)에서 나온 빛이 그의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처럼 말이다.


불상의 머리 뒷쪽에 2겹으로 된 둥근 두광(頭光)이 그를 밝히고 있고 소발(素髮)한 머리 위에
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작고 갸름한 편으로 눈은 지그시 감아 명
상에 잠긴 모습이며 코의 끝부분은 두툼하다. 입은 살짝 오무려 약간의 미소를 선보이고 있고
눈썹 사이에는 둥그런 백호(白毫)가 박혀있다.
그의 키는 얼굴에 비해 꽤 긴 편으로 조금은 두꺼워 보이는 법의(法衣)를 걸치며 두 어깨를 가
렸고 발 밑에는 연화대좌(蓮花臺座)가 있으며, 몸 뒤에는 반짝반짝 윤기를 흐르는 광배(光背)
가 새겨져 있다.
신체적인 균형이 그런데로 비슷하며 몸매는 단정하고 단아한 인상을 풍긴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배 앞에서 받쳐든 모습인데, 이는 부처의 성도(成道)를 상징한다고 한다.

불상 어깨 좌우와 윗부분에는 네모난 구멍과 좌우로 길게 파여진 홈이 있는데 이는 자연현상이
아닌 마애불을 보호하던 목조 가구(架構)를 씌우던 흔적이다. 그 가구는 오래 전에 자연재해나
화재로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가 사라진 이후에는 불상 위쪽에 있는 눈썹바위의 보호를 받으
면서 눈과 비를 피했다. 게다가 첩첩한 계곡 바위에 자리한 탓에 태풍과 거센 바람의 공격을
피하기에 좋아 거의 천 년의 세월을 살았음에도 바위에 진하게 현신한 듯 건강상태는 좋다.

지금은 이렇게 답사객과 순례객의 발길이 빈번하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리 주목을 받
지 못했다. 게다가 민간인 통제구역에 묶여 출입도 부자유스러우니 아는 사람과 절 신도만 조
금 찾는 정도였다. 허나 삼천사와 삼천사계곡에 꽁꽁 씌워진 통제의 굴레가 벗겨지면서 삼천사
의 존재와 함께 마애불의 이름도 약간이나마 알려지면서 찾는 이가 늘었다.


▲  바위에 현신한 듯 두드러진 모습의 마애불 윗부분
불상을 수식하고 있는 두광과 신광은 마치 몸에 빛이 발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도록 그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꾸며준다.


▲  마애불의 아랫도리
연꽃으로 치장된 연화대좌 위에 불상이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에 걸쳐진
법의 밑에 그의 두 발이 나와 있는데 발가락이 다소 두터워 보인다.


내가 그의 존재를 알아챈 것은 1992년 가을, 진관사 부근 야산에 숨어있는 줄 알고 부근 야산
을 열심히 뒤적거리다가 미지의 세계나 다름이 없던 삼천사까지 들어왔다. 당시 적멸보궁이던
대웅보전 뒷쪽에서 나와 숨바꼭질을 한 마애불을 발견하고
'서울에도 이렇게 휼륭한 마애불이 있었다니!!' 감탄을 연발하며 북악산(백악산)의 백석동천<
白石洞天, 백사실계곡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그에게 은근슬쩍 빠져들고 말았지. 하여 매년
적어도 1~2회 정도 그를 찾고 있다. 나는 이곳에 들어올 때마다 점점 늙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비록 인간이 만든 조각물이긴 하지만 여
전히 정정함을 잃지 않으며 오늘도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맞느라 여념이 없다.

지금은 삼천사 경내지만 예전에는 옛 삼천사로 가던 길목으로 조그만 암자와 계곡, 바위만 있
었다. 그러다가 마애불 주변에 삼천사를 세우면서 지금처럼 경내 한복판이 되었고, 지금의 삼
천사를 일군 성운의 노력으로 오래된 마애불임을 입증받아 1979년 국가 보물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이 마애불은 영험(靈驗)이 있기로 소문이 자자해 많은 중생들이 먼 거리를 걷는 수고로움을 마
다하지 않으며 이곳을 찾는다.


▲  마애불 좌측 면에 새겨진 '일붕선사좌선대(一鵬禪師坐禪坮)' 바위글씨
20세기 큰 승려로 추앙받는 일붕(一鵬) 서경보 선사가 이곳에서
좌선한 것을 기리고자 새긴 것이다.

▲  꼬랑지가 인상적인 귀여운 다람쥐상 (마애불 예불 장소 난간)
(그의 존재의 이유는 모르겠음)

▲  부처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종형사리탑(鐘形舍利塔)

마애불 앞에는 네모난 기단 위에 심어진 석종형(石鐘形) 사리탑이 있다. 이 탑은 1988년에 성
운화상이 미얀마 마하시사사나 사원의 아판디타 대승정에게서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봉
안하고 있는데 그 연유로 서울에서 제일 처음 적멸보궁을 마련하여 석가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사찰임을 천하에 어필했다.
마애불과 함께 삼천사의 성역으로 무척 애지중지되다가 2012년 진신사리를 담은 거대한 9층석
탑이 지어지면서 중요성이 조금은 떨어졌다.

◀  종형사리탑 우측의 세존진신사리비
미얀마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과정과 이유를 소상히 담아 넣었다.


 2층 규모의 산령각(山靈閣)

마애불이 의지하고 있는 눈썹바위 옆구리에는 2층짜리 산령각이 있다. 산령각이란 절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산신각(山神閣)의 다른 이름으로 삼천사는 그 흔한 이름 대신 천태각이나 산령각
처럼 생소하고 어려운 이름을 선택해 중생들을 아리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산신
각이긴 하지만 독성(獨聖)과 칠성(七星)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어 삼성각(三聖閣)의 역할을 한
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령각은 2층으로(1층은 창고 등으로 쓰임) 내부 중앙에는 금
칠을 한 거대한 산신탱이 걸려있다. 예전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童子) 등은 나무로 돋음새
김으로 새기고 나머지는 그림으로 상큼하게 처리했으나 돈을 좀 벌었는지 죄다 도금을 하여 금
색 옷으로 갈아입혔다.
화려하게 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산신의 수염과 동자의 머리를 빼고는 모조리 색이 같아서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벌이듯 분간이 쉽지 않아 눈만 아프다.

이렇게 산신탱은 삼천사에서 마애여래입상, 세존진신사리탑 다음으로 자랑하는 보물로 비록 고
색의 기운은 없지만 다른 절과 달리 산신을 크게 내세운 산신도량으로 절을 키우면서 '북한산(
삼각산) 산신이 보좌를 튼 절'임을 진하게 자처하고 있다.


▲  요란한 금칠의 산신탱과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올려진 공양미들

 독성(나반존자)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

 칠성들의 회합 현장, 칠성탱


▲  산령각과 마주한 눈썹바위 - 오랜 세월의 주름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  산령각에서 굽어본 마애불 예불 공간과 종형사리탑 주변,
그리고 대웅보전의 두툼한 뒷모습

▲  산령각에서 굽어본 삼천사 위쪽 다리
저 다리는 삼천사계곡 등산로로 북한산성과 비봉, 옛 삼천사터로 이어진다.
다리 주변 계곡에는 중생들이 쌓아올린 기하학적인 돌탑들로 가득해
조그만 돌탑의 세상을 이룬다.

 삼천사의 독특한 불전 ~ 천태각(天台閣)

산령각 옆에는 천태각이라 불리는 벽돌 건물이 있다. 천태각은 16나한의 하나로 천태산(天台山
)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보금자리로 독성각(獨聖閣)과 비슷하다. 삼천사
는 독성각이란 보편적인 이름을 취하지 않고 그가 일어난 천태산의 이름을 따서 천태각이라 했
는데 산령각에 독성탱이 있음에도 별도로 그만의 건물까지 두어 대우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9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 안에는 108개의 인등(引燈)이 내뿜는 열기와 기름냄
새로 가득해 더울 때 오면 정말 한증막이 따로 없다. 인등은 기름을 담고 심지를 넣어 불을 켠
것으로 하루 종일 불을 밝힌다. 그래서 건물 내부가 더운 것이다.
건물 지붕에는 매일 치솟는 열을 외부로 배출하고 공기를 통하게 하여 내부 온도를 유지시키는
통풍구가 있으며, 다른 건물과 달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2개로 바깥 문인 여닫이문은 언제나
열려있으나 안쪽 문인 미닫이문은 인등을 지키기 위해 항시 닫혀져 있다. 문을 들락날락 거릴
때는 반드시 문을 닫아야 인등의 건강에 지장이 없다.


 천태각의 주인, 독성상과 자연석으로 간단하게 손질한 16나한들

천태각 독성은 대머리의 둥근널쩍한 얼굴, 길다란 귀, 약간 두꺼워 보이는 옷(얼마나 더울까?)
, 그리고 배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를 취한 여유로운 모습이다. 명
상에 잠긴 그의 익살스런 표정은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하며 그 좌우에는 조그만 16나
한상이 포진해 있는데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가져온 자연석으로 정성스럽게 조성한 것이다.


▲  삼천사 위쪽 계곡을 가득 메운 돌탑의 물결

▲  삼천사 돌담길 (삼천사계곡 산길)

삼천사에서 북한산(삼각산)으로 오르려면 종형사리탑 좌측에 있는 대문으로 나가거나 일주문에
서 오른쪽 길로 가야 된다. 마치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기와집이나 궁궐 담장길을 거닐 듯, 운
치가 깃들여진 돌담길은 삼천사의 또다른 명물이라 할만하다.


 아비규환의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하다~~

 연등의 전송을 받으며 ~~
이렇게 하여 봄의 한복판에 찾아간 북한산 삼천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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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龍淵寺) '
용연사 석조계단
▲  용연사 석조계단


 

겨울 제국(帝國)의 기세가 슬슬 꺾이던 3월 첫무렵에 대구 지역의 오랜 고찰, 용연사를 찾
았다.

서울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 달려 대구역에 도착, 대구지하철 1호선을 타
고 서쪽 종점인 대곡역에서 내렸다. 여기서 용연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야 되는데 배차간
격이 참 아름다운 수준이라 조금 걱정은 되었으나 다행히 대기 10분 만에 그곳으로 들어가
는 달성5번 시내버스(대곡역↔용연사↔현풍,유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옛 지기를 만난 듯, 반가운 표정을 지우며 그 버스를 타고 화원읍, 반송리를 지나 비
슬산 북쪽 골짜리에 자리한 용연사 주차장에 두 발을 내리니 곧바로 용연사 매표소가 흐뭇
한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엥 여기도 입장료를 받았었나?'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매표소
아줌마가 직업 본능에 따라 밖으로 나와 돈 받을 준비를 갖춘다. 그때 버스에서 같이 내린
아줌마 신도가 있었는데, 그의 뒤를 바짝 뒤쫓으니 나를 같은 신도라 여기고 아무런 제지
없이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매표소에 적힌 입장료를 보니 어른은 무려 1,500원..

매표소를 무사히 지나 7분 정도 오르면 비슬산 계곡물이 한데 모인 용연지(龍淵池)가 나타
나고 이어 일주문도 얼굴을 드러낸다.


♠  용연사 입문 (일주문, 천왕문)

▲  용연사 일주문인 자운문(紫雲門)

용연지를 지나면 수레들의 쉼터인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 중간에는 고색이 깃든 일주문(一柱
門)이 뿌리를 내렸는데, 4발 수레들에게 둘러싸여 약간은 뒷전으로 밀려난 인상이다. 다른 절은
거의 일주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게 하지만 여기는 일주문 옆에 수레길을 내고 그로 인해 문이
옆으로 상당히 밀려난 형세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문이 아닌 수레길로 경내를 오간다.

절의 일주문은 보통 일주문이라 불리지만 이곳 일주문은 특별히 붉은 구름이란 뜻의 자운문이란
어여쁜 이름을 지니고 있다. 17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지붕은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하고 있
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 부분이 현저히 커서 공포와 지붕 등 문의 윗부분이 문 높이의
거의 60%를 차지하고 있어 다소 육중해 보인다. 지붕을 받치는 문 기둥은 그런데로 굵직함을 지
녔지만 커다란 윗도리 때문에 오랜 세월 어찌 저들을 받쳤을까? 걱정이 들 정도이다. 공포와 평
방(平枋)에는 단청이 채색되어 있으나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이 퇴색했다.

▲  적멸보궁, 석조계단 입구

▲  경내로 인도하는 극락교. 다리를 건너면
용연사 경내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용연사 문화유산 해설사가 머무는 관광안내소가 있다. 내가 나타나니 해설사
아저씨가 모습을 비추며 용연사 안내문을 하나 건네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그런다.
그래서 고마움을 표하며 길을 재촉하니 길은 이내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계단길로 가면
석조계단(적멸보궁), 오른쪽은 경내로 우선은 경내부터 살피기로 하고 오른쪽으로 갔다.

경내 직전에는 계곡에 걸린 극락교(極樂橋)란 다리가 있다. 여기서 절의 주문에 따라 속세의 온
갖 기운과 번뇌를 내려놓고 경내로 임하면 되는데,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천왕문(天王門)
이 나타난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온몸을 가리며 보수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
서 천왕문은 이용하지 못하고 그 옆으로 우회하여 들어갔다.

천왕문은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그들의 검문을 거치면 바로 2층 규모의
안양루(安養樓)가 나온다. 안양루는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 사물
(四物)이 담겨져 있는데, 보광루(寶光樓)라 불린 것을 근래에 안양루로 이름을 갈았다.


▲  천왕문 밑에 자리한 둥그런 석조

▲  절에 왠 악어?

천왕문 밑에는 둥그런 석조(石槽)가 있는데 샘물 대신 먼지만 가득한 거의 죽은 샘터이다. 그런
데 그런 석조 옆에는 생뚱맞게도 악어상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자비(慈悲)와 평화를 강조하는
절집에 왠 무시무시한 악어상이 있는 것일까? 악어와 관련된 불교 설화는 딱히 들어본 적도 없
고. 그렇다고 용연사 주변에 악어 서식지나 관련 설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
도나 소승불교가 전파된 동남아에 악어가 있으니 그곳에 혹 관련 설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
중에 해설사에게 문의를 했다.
그 답변에 따르면 이 악어상은 어느 신도의 집 정원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몇년 전에 절에
기증을 했는데 마땅히 둘 데가 없어서 이 자리에 두었다는 것이다. 사연이 생각 외로 정말 엉뚱
하다. 신도가 준 것이니 차마 안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내에 두기에도 조화롭지 않으니 혹
여 찾아올지 모르는 화마(火魔)와 나쁜 기운이나 막으라고 천왕문 밑에 둔 듯 싶다.

그럼 여기서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용연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안양루의 뒷모습

▲  극락전과 뜨락

※ 비슬산 북쪽에 포근히 안긴 고찰, 비슬산 용연사(琵瑟山 龍淵寺)
팔공산(八公山)과 더불어 대구를 크게 보듬은 비슬산(琵瑟山)에는 유서 깊은 고찰(古刹)이 많은
데, 그중에서 북쪽 계곡에 안긴 용연사가 단연 갑(甲)이다. <유가사는 을(乙) 정도>

용연사는 후삼국시대의 한복판인 912년<신라 신덕왕(神德王) 원년> 보양국사(寶讓國師)가 창건
했다고 전한다. 보양은 청도에 운문사(雲門寺)를 세운 인물로 중원대륙으로 건너가 불법을 배우
고 귀국하는 길에 서해바다 용이 용궁(龍宮)으로 초청해 그를 대접했다.
용은 자신의 아들인 이목(璃目)을 딸려 그를 호위케 했는데, 마침 나라에는 가뭄이 극성이라 보
양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설화이지만 그 연유로 절 이름
에 용(龍)이 들어간 것이다.
상상의 동물인 용까지 내세우며 창건설화를 그럴싸하게 지어냈지만 정작 창건 이후 조선 초기까
지 이렇다 할 바퀴자국을 남기지 못했으며, 다만 극락전 앞에 고려 때 지어진 3층석탑이 있어
적어도 고려 때부터 절이 있었음을 살짝 귀띔해준다.

절의 사적(事績)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419년으로 그때 승려 천일(天日)이 망해가던 용
연사의 모습이 슬픈 마음이 솟구쳐 크게 중창을 했다고 한다. 허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1603년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인잠(印岑)과 탄옥(坦玉), 경천(敬天)에게 명해
다시 짓도록 했다. 이때 지은 건물이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해 5동이었고 거주하는 승려는 20여
명이었다고 한다.

1650년 어느 날 저녁, 난데없이 별똥이 떨어져 대웅전과 요사가 불에 탔으며, 이듬해 일언(一彦
)과 학신(學信)이 동상실(東上室)과 서상실(西上室)을 세웠다. 1653년에는 홍묵(弘黙)이 대웅전
을,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세웠고, 이듬해에 일주(一珠)가 만월루(滿月樓)를 세웠으며, 1661년
까지 함허당(含虛堂)과 관정료(灌頂寮), 관음전(觀音殿), 반상료(返常寮), 명월당(明月堂), 향
로전(香爐殿), 약사전(藥師殿), 두월료(斗月寮) 등을 지었다. 또한 계속 불사를 벌여나가 18세
기 초까지 사리각(舍利閣), 천왕문, 응진전, 영류당(詠流堂), 일주문, 명부전 등이 건립되어 무
려 200칸의 규모를 지닌 대가람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이야 팔공산 동화사(桐華寺)가 대구 지역
사찰의 으뜸이지만 그때는 오히려 동화사가 용연사의 말사(末寺)였다.

1673년에는 임진왜란 때 통도사(通度寺)에서 금강산(金剛山)으로 옮긴 부처의 사리를 다시 통도
사로 가져오면서 그중 1과를 용연사에 봉안하고 사리를 담을 사리탑(舍利塔)과 석조계단(石造戒
壇)을 만들었다. 그와 관련된 내용은 1676년(숙종 2년) 권해(權瑎, 1648-1723)가 쓴 '파사교주
석가여래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 이란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1708년 사리탑을 중수했고, 1715년 찬화(粲和)가 대웅전과 여러 건물을 중수하고 단청(丹靑)을
새롭게 입혔다. 중수를 마치자 1722년 홍문관(弘文館) 교리(狡吏)인 임수간에게 청해 중수비를
세웠는데, 그 중수비에 의하면 당시에는 부속 암자로 명적암과 은적암, 보리암과 법장암이 있었
으며, 절 계곡에 용문교과 천태교 등 5개의 돌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허나 1726년 1월 불이 나
서 대웅전과 다수 건물이 소실되었고, 1728년에 중건을 했는데, 이때 법당 이름이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갈린 듯 싶다.


이렇게 대구 굴지의 사찰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용연사는 1911년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
으로 동화사의 수반말사(首班末寺)가 되면서 처지가 서로 뒤바뀌고 만다. 이후 1934년 석가사리
탑을 수리하면서 탑 주위에 석주(石柱)를 둘렀으며, 그 이후 여러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영산전과 삼성각, 안양루, 사명당 등 약 16~17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
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로 지정된 석조계단과 목조아미타여래3존좌상과 복장
유물 등 보물 2점과 3층석탑과 극락전 등 지방문화재 2점을 지녔다. 그리고 부속 암자로는 은적
암(隱寂庵)과 명적암(明寂庵), 광선암(廣仙庵)을 거느리고 있다.

대구의 남쪽 지붕인 비슬산 북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틀었고,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하여 기
운 또한 청정하며, 티끌 없이 맑은 계곡이 경내를 가로지르며 청정한 기운을 돕는다. 시내와도
멀리감치 거리를 두고 있고, 산새의 지저귐과 바람의 소리가 잔잔하게 경내를 감싸며 산바람에
흥분한 풍경물고기가 그윽한 풍경소리를 베풀어 산사의 고즈넉함을 더해준다.

용연사에서 비슬산을 거쳐 유가사나 비슬산휴양림으로 내려갈 수 있으며, 정상까지는 4시간 정
도 걸린다.

※ 용연사 찾아가기 (2014년 2월 기준)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달성2번, 달성5번 시내버스를 탄다. 달성2번은 지선
  이 무지막지하게 많아서 반드시 용연사행(1일 8회)을 확인하고 타야 된다. 잘못탈 경우 엉뚱
  한 곳으로 강제투어를 당할 수 있다.
  달성5번은 용연사를 경유하여 현풍, 유가사(瑜伽寺)까지 다니며 1일 10회 다닌다. 또한 주말
  과 휴일에는 600번 버스 일부가 '대곡역~용연사~비슬산휴양림~유가사' 구간을 1일 10회 운행
  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 일주문에 주차장 있음, 주차비는 공짜)
① 구마고속도로 → 화원옥포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반송리 → 용연사
② 대구시내 → 화원 → 간경교에서 좌회전 (또는 화원에서 명곡지구를 거쳐 명곡로 경유) →
   반송리 → 용연사

★ 용연사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1,500원 (20인 이상 단체 1,000원) / 청소년 1,200원 (단체 800원) / 어린이
  800원 (단체 400원)
* 용연사 점심공양은 맛이 제법 좋다. 공양시간은 12~13시이며, 음력 초하루나 석가탄신일, 기
  타 절 행사가 있을 때는 연장될 수 있다.
* 용연사 관광안내소에서 문화유산해설사의 용연사 이야기를 들어보자. 2월부터 11월까지 매일
  10시부터 18시까지(겨울 17시) 근무하며, 설과 추석 연휴에는 쉰다. (근무 시간은 변동될 수
  있음)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882 (용연사길 260 ☎ 053-616-8846)


♠  용연사 극락전 주변 둘러보기

▲  요사채와 삼성각

경내 중앙에는 법당(法堂)인 극락전이 뜨락을 굽어보며 좌우로 삼성각과 영산전을 거느리고 있
고, 뜨락에는 3층석탑이 서 있다. 뜨락을 중심으로 극락전과 종무소, 요사채, 안양루가 포근히
감싸는 형태로 법당 하나에 탑이 하나인 이른바 1금당 1탑 형식의 가람배치를 취했다.


▲  용연사 극락전(極樂殿)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41호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653년에 지어졌다. 1726년 화재로 무너진 것
을 1728년에 중건했는데, 이때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간판이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규모는 그리 크진 않지만 좌우로 반토막 크기의 영산전과 삼성각을 거느리고 있어 중심 건물로
서의 기품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건물의 가운데 어칸을 협칸보다 넓게 잡았으며, 불단 위에는
보개(寶蓋)를 얹히고 전면에 운각과 용을 장식해 아름다움을 끌어올렸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3존좌상 - 보물 1813호

극락전 불단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普賢菩薩)을 거느리며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이들은 1655년에 당시 유명한 조각승이던
도우(道祐)가 만든 것으로 근래에 아미타불 뱃속에서 후령통과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 복장전
적(腹臟典籍) 등 발원문 8점과 후령통 3점이 쏟아져 나왔다.
조성발원문을 통해 불상 조성 시기와 조성 주체, 제작자 등이 속시원히 밝혀져 17세기 불상 연
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1762년에 작성된 중수개금기까지 딸려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올해(2014년) 1월 20일 아미타불과 복장유물이 한 덩어리로 국가지정 보물 1813호로 단
번에 승진되었다.
 
보물의 지위를 누린 아미타불과 좌우 보살의 표정에는 자비로움이 가득하여 속세살이에 지친 중
생을 위로하며 그들 뒤에는 1777년에 제작된 영산회상도가 병풍처럼 자리한다.


▲  용연사 3층석탑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28호

극락전 뜨락에 서 있는 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고려시대 탑
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옥개석 받침이 4단인 것과 옥개 낙수면이 짧고 추녀가 얇
은데 반해 받침이 높은 형식으로 이들을 통해 신라 탑에서 변질된 고려 탑으로 여겨진다.
탑 높이는 3.2m로 근래에 보수를 벌여 깨지거나 부실한 부분을 보충했으며, 장대한 세월의 때가
곳곳에 역력하다.


▲  빛바랜 목조 구시

극락전 곁에는 나무로 만든 길쭉한 목조 구시가 누워있다. 이 구시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나무
통으로 쌀을 담거나 법회나 행사 때 공양용으로 쓰였는데, 왕년에는 거의 100명 분의 밥을 담았
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밥 대신 먼지만 가득하니 사람이든 물건이든 뒷전
으로 밀려난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없다. 구시의 체면도 살려줄 겸, 그를 깨끗히 손질하여
옛날 공양 체험 이벤트를 벌여보는 것은 어떨까?


▲  삼성각 밑에 누운 두꺼비상의 위엄
조각 수법이 아까 전 악어상과 비슷하다. 아마도 악어상을 기증한 신도가
악어와 같이 넘긴 것으로 여겨지는데, 확실한 것은 모르겠다.


▲  선열당(禪悅堂)이라 불리는 요사(寮舍) 정면
승려와 신도들의 생활공간으로 공양간과 넓은 방을 갖추고 있다.
점심공양은 요사 뒤쪽 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  종무소(宗務所)로 쓰이는 심검당(尋劍堂)

▲  용연사 영산전(靈山殿)
극락전 우측에 자리한 영산전은 석가3존불과 16나한의 보금자리로 근래에 지어졌다.

▲  영산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좌우를 협시한다.

▲  극락전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우리에게도 무척 친숙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에 봉안된 그림들
오른쪽부터 산신할배의 산신탱, 등장 인물이 무지 많은 칠성탱, 독성할배의
느긋함이 돋보이는 독성탱


♠  용연사 명부전 주변, 그리고 점심공양

▲  요사에서 명부전으로 넘어가는 불이문(不二門)

용연사는 중심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석조계단 등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구역
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명부전 구역은 경내
의 중심인 극락전 구역 남쪽에 있는데 요사 옆구리와 불이문을 지나 청운교(靑雲橋)란 다리를
건너면 바로 나온다. 이 구역에는 명부전과 사명당, 독산각이 자리해 있다.


▲  불이문에서 바라본 명부전 구역
명부전을 비롯한 건물 3동이 조촐하게 구역을 이룬다.

▲  용연사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 판관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
어 있다. 처마 밑에는 어느 갑술년(甲戌年)에 쓰인 공덕기(功德記)와 관음계(觀音契) 현판이 걸
려 있다.


▲  명부전 지장보살상
온화한 미소를 드리우며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헌신하는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시립해 나란히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  문을 꽁꽁 걸어잠군 사명당(四溟堂)

명부전 곁에 높이 축대를 쌓고 황토색 담장을 걸치며 들어앉은 사명당은 절의 가장 어른인 주지
승이 머무는 주지실이다. 원래는 관음전(觀音殿)이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이후 절 중창을 지시
한 사명대사(四溟大師)를 기리고자 사명당이라 했다. 사명당 곁에는 독산각(獨山閣)이라 불리는
작은 건물이 있으며, 이들 건물은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  명부전에서 바라본 청운교와 요사채

명부전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극락전으로 나왔다. 시간은 어언 13시, 1시간 가까이 경내를 방황
하니 시장기가 가득 피어올라 나를 괴롭힌다. 경내에는 적막한 산사의 이미지를 지키듯,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공양간이 있는 요사 뒤쪽으로 들어가니 그 안은 사람들(아줌마와 할머니가
대부분)로 북새통을 이루어 썰렁한 바깥과 완전 대조를 보인다. 그 시간 절에 발을 들인 사람들
2/3 이상이 요사에 있었다고 보면 될 듯 싶다.

점심시간은 13시까지인데, 사람들이 많아 아직도 공양(供養)을 제공하고 있었다. 요사로 들어가
일반인도 공양이 가능한가 물으니 당연히 그렇다며 한숟가락 들고 가라고 그런다. 그래서 기쁜
표정을 띄며 신발을 벗고 요사로 들어가 공양 행렬에 동참했다. 약간 붉은 양파를 비롯한 갖은
채소가 버무려진 그릇에 주걱으로 밥을 담아주는데, 많이 달라고 청하니 2주걱을 더 준다.
밥과 함께 숭늉 1그릇과 떡을 하나씩 거머쥐고 마땅한 자리를 찾았으나 사람들로 미어터져 두
다리를 편히 할 자리가 마땅치가 않았다. 간신히 좁게나마 자리가 하나 생겨 그곳에 낑겨 앉아
열심히 점심 공양에 임했다.


▲  용연사 점심공양의 위엄

공양밥은 다양한 나물이 버무려진 비빔밥이다. 붉은 양파와 콩나물, 시금치, 고사리 등의 나물
이 흰쌀밥과 고추장과 조화를 이루며 어엿한 비빔밥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용연사 공양밥은 공양간 아줌마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담겨 제법 맛이 좋았다. 지금까지 섭취한
공양밥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치켜세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반대로 공양밥 최악의 종
결자는 여기서도 그리 멀지 않은 경산 갓바위(선본사) 공양이었다. 절 나들이에서 공양을 하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지만 안타깝게도 중생들에게 널리 공양을 펼치는 절이 그리 많지 않다.

밥그릇을 아주 깨끗히 비우고, 숭늉과 떡을 먹고 나니 포만감의 행복과 식곤증이 나를 감싸고
돈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5분 정도 머물렀으나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들어
와 자리를 내주고 방을 나섰다. 동화사나 갓바위처럼 그렇게까지 유명한 절도 아닌데 사람(특히
신도들)이 많은 걸 보아 오늘이 무슨 날인가 싶어 문의를 하니 음력 초하루라고 그런다.
자리를 뜨면서 공양할 때 발견하지 못한 된장국을 1그릇 섭취하고 숭늉도 2그릇이나 더 마신 다
음 내가 먹은 그릇을 목욕시키고 밖으로 나왔다.


♠  용연사 석조계단, 적멸보궁

▲  적멸보궁 입구

▲  적멸보궁으로 인도하는 계단

기분 좋게 점심공양을 마치고 용연사의 나머지 부분인 석조계단(적멸보궁)으로 이동했다. 적멸
보궁 입구에는 일주문을 닮은 문이 서 있는데 '비슬산 용연사 적멸보궁(琵瑟山 龍淵寺 寂滅寶宮
)'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문을 지나 잘 다듬어진 계단을 한발짝씩 오르면 초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적멸보궁과 비슬
산으로 갈린다. 초소를 지나니 아까 문화유산 해설사(이하 해설사) 아저씨가 초소에서 나와 구
경 잘했냐고 묻는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금세 표정을 바로 하고 잘 둘러
봤다고 답을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주마간산처럼 보고 가는데 반해 1시간 이상 꼼꼼히 본
것 같다며 칭찬의 말을 건네면서 적멸보궁을 안내해주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그를 따라 적멸보
궁으로 들어갔다.

▲  용연사 주변을 정비한 기념으로 세운 정비불사공덕비(整備佛事功德碑)

▲  시원스런 지붕의 적멸보궁 정문 -
누각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  적멸보궁(寂滅寶宮)

용연사 3대 구역의 하나인 금강계단 구역은 높이 축대를 쌓아 그 위에 적멸보궁과 향로전을 두
고 가장 높은 뒷쪽에 자리를 다져 석조계단과 사리탑을 세웠다.

석조계단을 가리고 선 적멸보궁(이하 보궁)은 극락전에 버금가는 지체 높은 건물로 보통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 앞에 둔다. 사리탑에 불사리(佛舍利)가 있으므로 적멸보궁 불단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그냥 빈 자리로 둔다. 살짝 휘어진 2개의 활주가 지붕 추녀를 받들고 있
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덩어리가 매우 섬세하다. 보궁 어칸(가운데 칸) 앞에는 돌계단이 놓여
있는데, 그 계단은 법회(法會) 때 절의 고참 승려만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계단 외에는 보
궁으로 접근하는 계단이 쉽게 보이질 않아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무심코 그 계단을 오르
락거린다. 허나 건물 양쪽에 보궁으로 가는 계단이 있으니 가운데 계단을 오르는 실례는 범하지
않도록 한다. 물론 제지하는 사람도 없고 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 가면 어디 법을
지키라는 명언처럼 예의는 되도록 지키는 것이 좋다.


▲  적멸보궁 내부
불단에는 불상이 없고, 대신 뒤에 유리창을 내어 석조계단과 사리탑이 보이게끔 했다.

▲  적멸보궁 곁을 지키는 향로전(香爐殿)
적멸보궁을 관리하는 건물로 승려의 거처로 쓰인다.

▲  적멸보궁 좌우에 자리한 조그만 건물들

적멸보궁 좌우에는 고작 1칸에 불과한 조그만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이들 건물은 따로 이름이
없다고 하며, 사리탑과 석조계단을 관리하던 승려의 숙소나 예불을 하던 공간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굳게 문을 봉한 채, 적멸보궁의 좌우를 호위한다.


▲  용연사 석조계단(石造戒壇) - 보물 539호

적멸보궁 뒤에는 용연사의 상징인 석조계단이 자리해 있다.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고도 하며,
네모난 기단에 석종형(石鐘形) 사리탑을 심어 부처의 불사리를 봉안했다. 계단(戒壇)은 흔히 말
하는 오르락 내리락 계단이 아닌 수계의식(受戒儀式)을 거행하던 곳으로 통도사(通度寺) 금강계
단이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통도사 사리탑을 파괴하자 사명대사가 사리를 수습하여 금강산으로 가져가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 어찌하면 좋을 지를 문의했다. 서산은 본래 있던 곳에 마땅히
되돌려 줘야 한다고 답을 하니, 사리함 하나는 통도사에 두고 만약을 위해 다른 하나는 제자 선
화(禪和)에게 주어 태백산 보현사(어딘지??)에 봉안토록 했다. 허나 그때는 아직 경상도 지방이
안정되지 못했고, 선조(宣祖)의 명으로 왜열도(倭列島)에 사신으로 가게 되면서 사리를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임시로 두었다.
그 이후 사명이 입적하자 제자 청진(淸振)이 각림사에 봉안한 사리함을 용연사로 가져와 모시면
서 신도들과 상의하여 사리탑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서산과 사명의 뜻을 모두 받들어 사리 2과
중 1과를 통도사로 보내고 1과만 용연사 북쪽에 봉안했으며, 사리탑은 1673년에 완성되었다.

이 탑은 2단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큼직한 네모난 괴임돌을 놓고 그 위에 얇은 원형 괴임돌을
2개 포개 석종형 사리탑을 올렸다. 사리탑은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넓어졌다가 중간을 지
나면서 좁아지는 것이 영락없이 범종을 닮았는데, 탑 윗부분에는 구슬 무늬를 1줄로 두르고 겹
으로 된 연꽃 무늬 위에 꽃받침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새겼다. 2단의 기단 중 윗층은 두툼한
갑석 아래 사방으로 귀기둥을 세우고 각면 가운데에 탱주를 새겨 4면을 8칸으로 나눈 뒤, 칸마
다 팔부신장(八部神將)을 새겼다. 아래 기단은 아무런 무늬도 없는 장대석으로 마감했다.

기단 네 모서리에는 원래 사천왕상이 있었으나 여러 차례 도난을 당해 지금은 경내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며, 기단 주변으로 12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8각으로 깎은 돌을 그 중간에 끼
워 연결했다. 난간에 쇠창살을 꽂은 것은 1934년에 탑을 보호하고자 설치했으나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계단 앞에는 상석(床石)을 두었고, 그 옆에 조금 비뚤어진 석등(石燈)은 계단에 난간을 달았을
때 같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계단 주변에는 황토 담장을 둘렀고, 계단의 보호를 위해 계단
앞쪽에 보호철책을 두르면서 접근이 어렵게 되었다. (석가탄신일에만 개방한다고 함)

이곳 계단은 통도사 금강계단, 금산사 방등계단(方等戒壇)과 더불어 이 땅의 대표적인 계단으로
꼽히며, 계단에 얽힌 이야기처럼 정말 사리가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다. 수 차례 도굴 시도가
있었다고 하니 도굴이 되었을 가능성도 제법 있다고 한다.


▲  석조계단의 내력이 소상히 적힌 석조계단비 - 비석 이름은
'사바교주 석가여래 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이다.

▲  적멸보궁 부근에 터를 닦은 승탑 형제들

향로전 뒤쪽 담장 너머에 조선 후기 승탑 7기가 1열로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들은 죄다
석종 스타일로 별도로 비석 2기가 서 있는데, 하나는 송파 각민(松坡覺敏, 1596~1675), 다른 하
나는 동운 혜원(東雲慧遠, 1637~1702)의 비석이다. 승탑의 주인이나 승탑 이름에 대해서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으며, 여기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산자락에도 조선 후기 승탑 5기가 숨겨져
있다.

적멸보궁과 석조계단을 둘러보면서 해설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궁금한 것은 정말 은하
계에 널린 별만큼이나 많은데 정작 질문 거리가 생각이 안난다. 머릿 속에서 간신히 질문 거리
를 긁어내어 물어보면서 의문 거리를 일부나마 해소했으나 머리가 장식용이라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해설사는 제법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초청 강연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통
도사에서 해설사를 하다가 용연사로 넘어왔는데 각 절마다 익혀야 될 내용이 너무 많아서 힘들
다고 한다. 간신히 용연사의 모든 것을 꿰었는데. 다른 절로 근무지가 바뀌면 그 절에 대해 처
음부터 공부를 해야 된다. 또한 관람객들이 대충 둘러보고 가는 게 다반사라 너무 사물을 볼 줄
모른다며 따끔한 충고도 건넨다. 상황이 이러니 질문을 건네는 사람도 거의 없을 정도이며, 이
렇게 자신을 귀찮게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의 나이는 50대 후반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대구시티투어버스가 들어왔다. 가이드 2명이 양이(洋夷) 여자 관광
객 2명을 데리고 와서 석조계단을 구경시켜주고 해설사와 인사를 하며 시내로 나갔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더 머물러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한다. 이곳에
발을 들인지 벌써 4시간이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2시간 남짓 있다 갈려고 했는데, 시간
도 참 빠르다. 게다가 부산(釜山)에도 늦지 않게 들어가야 되는 터라 슬슬 떠날 채비를 했다.
속세로 나가는 버스가 20분 뒤에 있길래 매표소 밑 주차장까지 가려고 했으나 마침 해설사와 안
면이 있는 신도 아줌마 3명이 수레를 끌고 속세로 나가려고 하자 해설사가 그들에게 나를 태워
달라고 부탁을 넣으면서 그들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렇게 짧지만 용연사와 해설사와 작별을
고하고 아비규환의 속세로 나갔다.

나를 태워준 아줌마 신도는 모두 대구 사람<1명은 인천 사람으로 대구로 시집 왔음>이다. 수레
를 끌고 온 아줌마는 시지동에서 왔는데, 그들은 절에서 가져온 고사떡과 사과를 나에게도 아낌
없이 나눠주었다.
화원으로 나와서 아줌마 2명과 작별을 고하고 인천 출신 아줌마 신도와 대구시내버스 655번을
타고 대곡역에서 지하철 1호선으로 환승하여 칠성역에서 나머지 작별을 고했다.

이날은 원래 팔공산 부인사(夫人寺)를 가려고 했으나 교통이 좋지 못해 용연사로 바꿨다. 허나
용연사에서 맛있는 점심공양도 먹고 해설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궁금했던 부분을 해소했으며(해
소하면 뭐하나? 다 까먹는데) 아줌마 신도의 도움으로 쉽게 속세로 나왔고, 그들에게 떡과 사과
를 나눠 받는 등, 푸짐한 인심을 느꼈다. 부인사로 갔으면 아마도 이런 것을 누리진 못했을 것
이다. 용연사로 가게 된 것도 다 이런 인연들과 만나고 많은 것을 배우라는 하늘의 지극한 뜻이
었던 것 같다.
용연사에게 나는 잠깐 스치고 사라지는 존재이고, 내 입장에서도 용연사는 1번 아니면 2번 정도
스치는 그런 장소이지만, 지금까지의 사찰 나들이 가운데 제법 인상과 정이 깊었으며, 여러 좋
은 경험과 넉넉한 인심을 체험했던 것 같다. 용연사에서 겪은 그 추억과 인연을 고이 간직하며
다음의 인연을 애타게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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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2월 2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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