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채'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21.01.25 북촌에서 2번째로 큰 고래등 기와집, 가회동 백인제가옥
  2. 2020.06.05 보은 땅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선병우고가, 선병묵고가 한옥 나들이
  3. 2019.09.27 고즈넉한 한옥마을 속으로, 북촌한옥마을 구석구석 나들이 ~~ (북촌문화센터, 가회동 이준구가옥, 북촌4~7경, 맹사성집터)
  4. 2017.08.16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숲과 계곡, 폭포, 옛 별서 유적이 어우러진 ~~ 부암동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5. 2013.08.04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 (백석동천, 백사골)

북촌에서 2번째로 큰 고래등 기와집, 가회동 백인제가옥

 


' 북촌한옥마을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가회동 백인제가옥 '

▲  백인제가옥 안채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도심 한복판에 한옥마을의 성지(聖地)로 추
앙받고 있는 북촌(北村, 북촌한옥마을)이 있다.

북촌은 안국역 이북이자(원래는 청계천 이북임)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로 1,000채가 넘는
한옥들이 널려있으나 정작 속시원히 개방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북촌
제일의 고래등 기와집으로 꼽히는 가회동 백인제가옥이 2015년 11월, 세상을 향해 그 대
문을 활짝 열었다.
북촌한옥마을에서 고래등급 한옥으로써는 사상 최초로 빗장을 연 의미 깊은 현장으로 이
런 좋은 곳은 미리미리 발자국을 찍어 둬야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 법이
다. 하여 고래등 기와집의 좋은 기운도 훔칠 겸, 늦가을 평일을 이용해 그곳을 찾았다.

나는 자유관람으로 30분 동안 예습 차원에서 1바퀴 둘러보고 바로 가이드투어로 50분 동
안 가옥 내부(안채, 사랑채, 별당 내부까지)까지 말끔히 둘러보았다.


▲  있는 자들의 폐쇄적인 공간에서 시민들의 열린 공간으로 새로 거듭난
백인제 가옥 입구 (오른쪽 한옥은 관리사무소로 예전 바깥채)


 

♠  20세기 초반 상류층 고래등 한옥의 결정체
가회동 백인제 가옥(白麟濟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22호

▲  백인제가옥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백인제가옥 입구를 들어서면 한옥으로 된 관리사무소와 공터, 그리고 솟을대문이 차례대로 펼
쳐진다.
관리사무소로 쓰이는 한옥은 원래 가옥 바깥채로 세월의 고된 때를 간직한 채, 우중층하게 있
던 것을 손질하여 사무실과 화장실을 두었다. 바깥채 동쪽에는 차량들을 위한 검은 철제 대문
이 있었고 서쪽은 담장과 골목으로 막혀있었으나 바깥채 동쪽이 다른 이에게 넘어가면서 대문
을 밀어버리고 돌담을 둘렀으며, 대신 서쪽을 뚫어서 가옥 입구로 삼았다.

솟을대문 앞 공터 동쪽에는 쉼터가 조촐히 닦여져 있는데, 가이드투어를 신청했을 경우 지정
시간까지 그 쉼터로 와서 대기하면 된다.


▲  예전 백인제 가옥 바깥채 (2011년)

▲  남남이 되버린 바깥채 동쪽 한옥과 담장

바깥채 동쪽 담장 너머에는 깔끔한 모습의 한옥이 있다. 겉으로 보면 아무런 상관도 없는 현
대 한옥처럼 보이지만 그 집도 엄연한 백인제가옥의 일원으로 그 부분만 따로 분리하여 매각
했다.
현재는 친일 성향을 보이는 롯데 회장 일가가 별장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런 도심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한옥 별장까지 둔 그것들이 몹시 부러울 따름이다. 백인제가옥의 태생
도 그리 좋지는 못한 편인데 (친일파 한상룡이 지었음) 그 역사는 속일 수가 없는 것인지 친
일 성향 기업이 바로 옆에까지 들어와 북촌의 꿀을 빨고 있었던 것이다.


▲  솟을대문에 걸린 백인제가옥 현판의 위엄

▲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서쪽 부분, 중문간채

가옥이 개방되었다고는 하지만 솟을대문은 여전히 닫혀있었다. 대문도 주인을 닮는다고 졸부
들의 부질없는 자존심이 아직까지 깃들여진 탓일까? 그렇다고 문짝이 사용 불가일 정도로 부
실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쨌든 정면에 보이는 대문이 빳빳하게 닫혀 있으니 처음 온 사람
은 '이거 개방된거 맞어?' 당황할 터, 허나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대문 옆에 난 조그만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되니까.
솟을대문에는 '백인제가옥'이라 쓰인 한글 현판이 높이 걸려있다. 이 현판은 개방 기념으로
달아놓은 것으로 한글로 점잖게 쓰인 점이 이채롭다.

솟을대문을 지닌 건물을 대문간채라고 한다. 대문을 중심으로 5개의 방을 지니고 있는데, 이
들은 궂은 일을 담당하던 아랫 사람들의 생활공간으로 지금은 3개의 방을 활용하여 백인제가
옥의 100년 역사와 이곳을 거쳐간 4명의 인물(한상용, 최선익, 백인제, 최경진)을 다루는 공
간으로 쓰이고 있다. 가옥과 인물에 대한 설명과 사진, 시청각 자료가 있으며, 열린 공간이기
때문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 된다. 또한 일반 관람시 가옥에서 유일하게 발을 들일 수 있는
방이기도 하다.
그럼 여기서 가옥의 역사와 이곳을 거쳐간 인물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솟을대문 안쪽 모습과 대문간채

① 시작이 좋지 못했던 백인제 가옥, 가옥의 1대 주인, 친일파 한상룡(韓相龍, 1880~1947)
이 가옥을 지은 한상룡은 돈 꽤나 주무르던 친일파 한관수(韓觀洙)의 아들로 인근 재동(齋洞)
에서 태어났다. 그 부친도 더러운 친일파지만 아들도 그 못지 않은 친일파로 악질 친일파로
악명이 대단한 이완용(李完用) 또한 그의 외삼촌이다. 아주 집안과 외가까지 쌍으로 더러운
존재들인 셈이다.

1898년 왜열도로 유학을 가서 그곳의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맺었으며, 1903년에 왜국(倭國)이
친일파 왕족인 이재완(李載完, 흥선대원군의 조카)을 앞세워 한성은행(漢城銀行)을 세울 때,
총무가 되어 실질적인 경영을 맡게 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친일파 집안의 배경이 컸을
것이다.
1908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위원으로 참가해 적지 않은 돈을 쥐기도 했으며, 1923년
한성은행 두취(頭取)로 취임했다. 그리고 친일 유력자 모임인 대정실업친목회 초대 평의장(評
議長)을 지냈으며, 그것도 모자라 데라우치 총독의 동상을 세우고, 안중근(安重根)에게 처단
된 이토 히로부미 기념회와 사이토 마코토 기념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뻔뻔함까지 보였다.
심지어는 1919년 왜정(倭政)에게 조선 사람들 모두 왜식으로 창씨개명을 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1930년대부터 각종 친일 단체에 빠짐없이 얼굴을 비추며 많은 돈을 전쟁에 내놓았으며, 관동
군(關東軍) 사령부의 사무촉탁을 맡기도 했다. 이런 더러운 공로로 왜정에게 많은 훈장을 받
았고, 중추원(中樞院) 참의, 중추원 고문, 칙선 일본 귀족원 의원에 임명되기도 했으며, 1935
년 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하나로 수록되기도 했다.
또한 그의 부인인 이용경도 애국금차회에 참여하는 등 부부가 쌍으로 왜정에 협력했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反民特委)에 넘겨졌으나 이승만의 농간으로 풀려났으며, 1947년 그 더러
운 목숨을 강제로 놓으며 지옥으로 떨어졌다.

한상룡은 가회동 이곳을 점찍어두고 1906년부터 이 일대를 매입했다. 1907년 경성박람회에 압
록강 흑송(黑松)이 소개되자 그 나무를 대량으로 구입해 7년 동안 터를 다지고 공사를 벌여
1913년 7월 완성을 보았다.
당시 서울 장안에서 가장 큰 기와집으로 악명이 자자했는데, 친분이 있는 왜인 사업가와 왜정
관료를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으며, 왜정 총독도 초청하여 술을 대접했다. 또한 미국인 석유
사업가인 록펠러2세도 다녀가는 등, 집의 위세가 대단했다.
허나 한상룡이 은행을 잘못 굴려 적자가 커지자 1928년 6월 한성은행에 집을 넘겼다. 은행 소
유로 바뀌자 천도교 단체가 손병희(孫秉熙) 집과 가까운 이곳을 종종 빌려 지방에서 상경한
교도들의 숙소 및 회합 장소로 사용했다.


▲  중문간채 앞에서 바라본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대문간채 동쪽 방에는 백인제 가옥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담장 너머로 보이는
한옥은 백인제가옥의 잃어버린 부분이다.


가옥의 2대 주인, 개성 출신 부호이자 민족언론인, 최선익(崔善益, 1905~?)
최선익은 개성 출신 부유층으로 불과 19세인 1924년 조선일보사에 주주이자 기자로 언론 활동
을 시작했다. 1932년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했는데, 여운형(呂運亨)을 사
장으로 두고 자신은 부사장을 맡았다.
한성은행에서 매물로 나온 가회동 한옥에 격한 반응을 보이며 1935년 1월 29일 인수했다. 친
일파로 더러운 발자국을 남겼던 1대 주인과 달리 오랜 시간 민족언론인으로 활동했으며 집에
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솟을대문의 위치를 지금처럼 변경하고 필지 정리를 했다.
허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1944년 백인제에게 매각했으며,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어 생사
를 알 수 없다.

③ 가옥의 3대 주인, 집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백인제(白麟濟, 1898~?)
백병원 창립자로 유명한 백인제는 왜정 시절 외과 의사의 1인자이다. 1915년 평북 정주의 오
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6개월 투옥되면서 퇴학을 당했으나 1921년 복교하여 졸업을 했다. 1921년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수(조교), 총독부의원으로 일하다가 1923년 의사면허증을 받게 된다.

1928년 왜열도 동경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해 바로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명되었고, 1935년 조선의사협회가 조직되자 그 간사로 선임되었다. 1936년에 1년 6
개월간 프랑스와 독일, 미국에 유학을 갔었고, 1941년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수를 그만두고 백
외과(현재 백병원)를 세워 병원 원장이 된다.

그는 의술, 특히 외과술이 뛰어나 고위층들이 그의 진료를 받고자 줄을 길게 섰다고 하며, 그
로 인해 적지 않게 돈을 벌어들였다. 그 돈으로 1944년 9월 최선익에게서 이 집을 매입해 자
신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1945년 9월 서울의과대학 외과 주임교수 겸 부속병원장이 되었고, 그해 12월 서울의사회 초대
회장이 되었으며, 1946년 12월 서울대 의과대학 외과주임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다음달 그만두
었다.
1948년 대한외과학회 제3대 회장을 지냈으나, 6.25전쟁 때 미처 피신을 가지 못해 2대 주인,
최선익처럼 북한으로 납치되어 아직까지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그는 이 땅의 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으며, 사냥을 좋아하여 종종 북한산(삼각산)으로 사냥
을 나가 맷돼지나 토끼 등을 뜨락에 던져놓고는 구워먹기도 했다. 장인과 장모를 위해 집 서
쪽에 별채를 지어주기도 했으며, 서재필 박사를 초청해 연회를 열기도 했다.

④ 가옥의 4대 주인, 백인제의 부인인 최경진(崔炅珍, 1908~2011) 그리고 그 이후
백인제가 납북되자 집의 안주인인 최경진이 집 주인이 되었다. 소유기간이 1968년부터라고 하
니 이때부터 실질적인 소유권을 행사한 듯 싶다.
그는 1928년 백인제와 혼인하여 2남 4녀를 두었으며, 백병원의 2대 이사장으로 병원을 재건하
는데 노력했다. 1988년 8월까지 집을 소유하면서 일부만 손댄 것을 제외하면 거의 원형에 가
까운 모습을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여 1977년 3월 서울시 지방민속자료(현 지방민속문화재)
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1988년 아들인 백낙훤에게 소유권을 넘겼으며, 2009년 11월 서울시에서 인수하여 서울시 소유
가 되었다. 2012년 혜화동(惠化洞)에 있는 시장 공관(公館)이 한양도성 복원과 유네스코 등재
사업으로 인해 개방이 결정되자 공관 대체 장소로 백인제가옥을 정했다. 허나 문화유산 훼손
과 친일파 한상룡이 매국노 행위를 했던 현장이라며 비난이 쏟아지자 2013년 5월 그 야심을
버렸으며, 이곳을 속세에 열기로 결정하고 2015년 10월 부분 개방을 거쳐 11월 완전 개방되었
다.

⑤ 고래등 한옥의 결정체, 백인제가옥의 구조
북촌이 내려다보이는 가회동 언덕 2,460㎡에 닦여진 이 집은 장대한 규모의 사랑채와 안채를
중심에 두고 대문간채, 중문간채, 별채를 지었으며,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별당을 두었다.
정원을 넓게 닦고 갖은 화초를 심었으며, 사랑채와 안채를 구별하던 기존의 전통 한옥과 달리
왜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두어 서로 연결시켰다. 그래서 굳이 바깥을 나갈 필요가 없이 사랑채
와 안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화장실도 안에 있었음)
또한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했으니 이는 당시로는 생소한 건축 자재로 부를 과시하
고자 함이며, 안채 일부가 2층으로 되어있는 점도 이곳의 특징이다.

20세기 초반 근대 개량한옥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북촌 제일의 한옥인 안국동 윤보선
가(尹潽善家, 사적 438호)와 함께 북촌을 대표하는 한옥으로 윤보선가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
랑한다. (윤보선가는 아직도 비공개임)

끝으로 가옥 이름을 백인제가옥으로 한 것은 별 이유 없다. 백인제와 그의 부인, 자녀들이 60
여 년을 살던 집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상룡의 더러운 이름을 붙일 수
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시작은 영 좋지 않았으나 그 다음 인수한 사람들로 인해 일종의 면죄
부를 받게 되어 북촌 제2의 한옥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으며, 100년 이상 묵은 잘 남아있는 근
대한옥이니 지방문화재보다는 국가지정 민속문화재로 승급시켜도 손색은 없다고 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93-1 (북촌로7길16, ☎ 02-724-0232)


 

♠  백인제가옥 바깥 둘러보기

▲  사랑채 (대청마루와 사랑방)

대문간채에서 붉은 벽돌문을 지나면 바로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지닌 사랑채가 마중한다. 사랑
채는 집 주인과 아들 등 남자들의 생활공간으로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책을 보는 서재의
기능도 같이 했는데, 넓직한 대청으로 이루어진 사랑방은 많은 손님을 치르기에 부족함이 없
는 규모이며, 방의 4면이 마루로 둘러싸인 특이한 구조이다. 사랑 대청은 전통 한옥의 우물마
루 대신 장마루를 깔았으며, 사랑채 내부는 가이드 투어 시에만 진입이 가능하다.

▲  솟을대문에서 사랑채로 이어지는
붉은 벽돌문

▲  동쪽 뜨락에서 바라본 사랑채


▲  바깥에서 바라본 사랑채 대청마루 (왼쪽은 사랑방)
집 안에 둔 물건 상당수는 백인제 가족이 쓴 것이 아닌 시중에서 구입한 것이다.

▲  상류층 한옥의 여유로움이 묻어난 사랑채 뜨락
뜨락의 구석 가장자리에는 온갖 화초를 심어 뜨락을 아름답게 수식했고
뜨락 한복판에는 잔디를 입혀 부잣집 뜨락의 위엄을 보이게 했다.

▲  뜨락 동쪽에 심어진 키 작은 소나무
백인제가 심은 나무로 여겨진다. 주인은 오래전에 가고 없지만
나무만은 잘 살아남아 주인의 빈자리를 보듬는다.

▲  뜨락 구석에 조촐히 닦여진 산책로

뜨락 구석에 약간 높게 터를 다져 박석을 깔고 조촐히 산책로를 내었다. 그 주변에는 여러 화
초와 소나무를 심어 아름다움을 더했으니 봄과 늦가을 풍경이 아름답다. 뜨락이 너무 넓어서
박석 산책로까지 냈을 정도이니 왠만한 졸부집 이상급임을 보여준다.
산책로는 사색의 역할도 한다. 비록 그 거리는 짧으나 생각을 하는데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
다. 집을 지은 한상룡은 이 길을 거닐면서 어찌하면 왜정에 잘보여 부귀영화를 누릴까? 그 생
각을 했을 것이고, 백인제는 어떻게 하면 병원이 잘되고 외과술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 생각
을 했을 것이며, 최경진 여사는 납북(拉北)된 남편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  뜨락 구석 산책로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  단풍나무 밑에 자리한 사랑채 뒷쪽 벽돌문
벽돌문에서 사랑채 굴뚝까지 벽돌담이 있었다. 그렇게하여 안주인의 공간인
안채를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끔 완전 가린 것이다. 허나 돌담은 무너져
흔적만 화석처럼 남아있고, 반쯤 열린 벽돌문만 전하고 있다.

▲  사랑채(왼쪽)와 2층 부분(오른쪽)

백인제가옥에는 특이한 공간이 하나 있다. 바로 사랑채 뒷쪽에 달린 2층 공간이다. 한상룡 시
절에 귀빈 접대용으로 주로 사용했다고 전하는데, 아마도 기생까지 소환해 질탕나게 술마시고
놀았던 모양이다. 얼마나 많은 왜정 고위층과 친일파가 저곳을 들락거렸을까?
현재는 2층 보호와 계단 부실을 이유로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사랑채 위에 덧씌운 2층 부분
집 주인이 살아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다.

▲  반쯤 열린 사랑채 뒷쪽 벽돌문과
벽돌담의 흔적

▲  툇마루를 갖춘 안채 뒷쪽 부분


▲  백인제가옥의 뒷쪽, 안채 뒷쪽 주변
뜨락 북쪽에 자연 지형을 이용해 나무를 심고 돌을 다져 조촐하게 동산을 자아냈다.

▲  별당으로 오르는 계단에서 바라본 안채 뒷쪽 부분

▲  안채 서쪽에 있는 부엌

식구도 많고, 부리는 사람도 많고, 거기에 손님도 늘 많았기에 부엌 또한 넓게 닦았다. 안방
쪽으로 부뚜막을 만들어 솥을 달고 장작을 이용해 불을 피웠는데, 이는 음식도 만들고 안채
난방도 고려한 기능이다. 부엌 바닥은 지표면보다 낮고 거의 흙바닥이며, 옆에는 부엌 살림살
이를 담당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찬방(饌房)이 있다. 부엌에서 일하는 아낙들의 거처이기도 하
다.


▲  완전 박제된 부엌처럼 되버린 안채 부엌 내부

왕년에는 부뚜막에서 연기가 꺼질 일이 없었다. 허나 지금은 언제 모락모락 연기를 피웠는지
가물가물할 정도. 더군다나 이제는 사람이 사는 집도 아니고 지체 높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니 더욱 손대기가 그럴 것이다.
이렇게 박제된 모습으로 방치하는 것보다는 가끔은 부뚜막을 깨워서 체험 이벤트를 해보는 것
은 어떨까 싶다. 부뚜막에서 지은 밥과 누룽지, 숭늉, 국 등을 먹어보는 도심 속에서 즐기는
옛 맛 체험 말이다. 아니면 저렴한 가격에 포장 판매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그만큼 이렇
게 놀려두기가 아깝다는 뜻이다. (영화 '암살'의 촬영장소로 잠시 쓰인 적이 있음)


▲  안채 서쪽에 자리한 별채

별채는 백인제가 그의 장인, 장모를 위해 지은 공간이다. 별도로 대문을 내어 가옥의 서쪽 문
으로 삼았는데, 처가 어른까지 모두 끌어안고 살 정도로 처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보여
주며, 그들이 모두 떠난 이후, 집은 빈 공간이 되었다가 현재는 남쪽의 'ㄷ'자형 한옥과 함께
운영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대문은 굳게 닫힌 채 무늬만 남아있다.


▲  부연이 쳐진 운영사무실 한옥과 별채(뒷쪽)

▲  안채 정면과 뜨락 (태극무늬 마크가 달린 부분은 사랑채 복도)

안채는 집의 안주인, 즉 가옥 주인 부인의 생활 공간이다. 부인 뿐 아니라 어머니와 며느리,
딸 등 집안 여인들의 공간으로 안채의 중심인 안방은 오로지 집안 남자만 출입이 가능했다.
백인제가 이북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그의 부인 최경진이 집 주인이 된 이후, 안채 안방과 대
청이 집의 중심이 되었고 그 영향 때문인지 가이드투어 때도 바로 안채에서 안으로 들어선다.
(사랑채로 들어가지 않음)


▲  흑백과 칼라의 조화, 사랑채와 안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사랑채 복도 바깥 벽

섬세한 무늬가 새겨진 벽 한복판에 태극무늬 마크가 또렷히 새겨져 있다. 그냥 흑백TV 같은
다른 벽무늬 보다는 태극무늬가 새겨진 부분이 마치 칼라TV처럼 더욱 돋보인다.


▲  안채 서남쪽 부분과 늦가을이 곱게 깃든 단풍나무
가을도 이곳의 공개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온 모양이다. 이렇게 곱게 다녀간
흔적을 남겨놓고 갔네. 안채 서남쪽 끝부분에는 집안 사람들이
사용하던 화장실이 있다.

▲  지붕의 추녀 곡선이 아름다운 중문간채 (가운데가 안채로 인도하는 중문)

▲  뚜껑이 닫힌 술 수장고 (중문 안쪽에 있음)
수장고에는 집주인이 애지중지하던 온갖 귀한 술이 숙성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동,서양을 망라한 술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괜히
열어보는 일은 없기 바란다. 인생만큼이나 허무한 짓이니까.


 

♠  백인제가옥 내부, 별당 둘러보기

▲  별당으로 인도하는 산책길

가이드투어 시간까지 백인제가옥을 살랑살랑 둘러보고 시간에 맞춰 솟을대문 밑 쉼터로 내려
갔다. 지금까지는 예습 차원에서 가옥 바깥을 자유롭게 둘러보았지만 이제는 급을 높여 심화
학습 및 복습 차원에서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가옥 내부까지 투어를 하게 된다. 투어 시간이
되자 곱게 개량 한복을 차려 입은 아줌마 가이드가 나와서 인사를 하며 안내를 해준다.

솟을대문과 대문간채, 벽돌담, 사랑채 뜨락을 둘러보고 가옥 북쪽 돌담을 따라 이어진 약간
오르막의 산책로를 오른다.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나무와 화초가 무성해 산속 별장으로 순간
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왼쪽 나무 너머로 안채와 사랑채 2층 부분이 보이며 오른쪽은 돌담으
로 그 너머로 북촌 일대가 펼쳐진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별당이 손짓한다.


▲  돌담과 함께 이어진 별당 산책길

▲  돌담 너머로 북촌 북부가 바라보인다. (계동, 가회동 지역)

▲  백인제가옥의 조촐한 피서지, 별당(別堂)

백인제가옥에서 가장 북쪽이자 하늘과 맞닿은 곳에 시원스레 팔작지붕을 휘날리고 있는 별당
이 있다. 누마루 형식으로 이루어진 집으로 1층에는 돌기둥과 계단을 세워 건물의 키를 높였
고 그 2층에 방을 두었는데, 정면에 유리창을 내고, 돌담도 1층 높이 밖에 되지 않아서 정면
이 훤히 트여있다. 북촌 북부는 물론 북악산(백악산)까지 시야에 잡히나 시야의 범위는 그렇
게 넓지는 못하다.
집 주인과 가족은 여기서 휴식을 취하거나 조촐하게 피서를 즐겼으며, 창문만 열면 시원한 바
람이 솔솔 들어오는 피서철 명당으로 백인제는 여기서 온갖 상념을 즐겼다고 전한다.


▲  별당 주변에 둘러진 정겨운 토담

집 주인이 별당에 많은 공을 들였는지 별당의 갑옷인 주변 돌담까지 적지 않은 정성을 들였다.
흙과 자연막돌로 담을 쌓아 그 위에 암키와를 올렸는데, 담장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하얀 피부
의 수막새를 엇갈리게 배치해 담장의 아름다움을 고려했다.
담장의 미(美)도 고려하여 아무리 밤손님이라도 저 담장만큼은 아껴줄 것 같다. 비록 무지 오
래된 존재는 아니나 20세기 근대 고래등 한옥의 생활상과 상류층의 팔자 좋던 인생을 보여주
는 현장으로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다. 다행히 시민의 공간으로 해방되었으니 망정이지 계
속 졸부들의 전용 공간으로 남아있었더라면 그 미움은 더했을지도 모른다.


▲  별당 방에 홀로 자리한 병풍 (내용은 모름, 이곳과는 관련 없는 존재)

▲  고래등 기와집 속의 별천지, 별당 누마루

별당 내부는 오로지 가이드 투어 때만 들어갈 수 있다. 즉 아무 때나 갈 수 없는 비싼 구역이
다. 거추장스러운 신발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타 마루를 들어서면 바로 방인데 방 동쪽에는 별
당의 백미인 누마루가 펼쳐져 있다.
누마루는 누각 형태로 이루어진 마루방으로 집 주인은 여기서 손님과 곡차 1잔 하거나 가족들
또는 혼자 휴식을 취했다. 창문을 열어두면 바람이 솔솔 들어와 몸을 간지럽히니 여름 제국(
帝國) 시절에도 이곳만큼은 여름을 잊어도 좋을 정도이다. 또한 가옥 내부에서 조망이 제일
괜찮은 곳으로 담장 너머로 가회동과 계동, 북악산(백악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보이는
범위는 그 뿐이다. 아무리 언덕에 지었다고 해도 높이가 낮기 때문이다.


▲  별당 누마루에서 바라본 북촌 북부 (가회동, 계동)

▲  남쪽에서 바라본 별당과 별당으로 인도하는 날씬한 기와문
집 속에 다른 집이 들어있는 기분이다. 그만큼 이곳은 넓고 크다.

▲  왕비의 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안채 대청

별당을 둘러보고 안채로 이동했다. 안채 역시 실내화로 갈아타 내부로 들어서면 되는데, 마루
로 이루어진 대청은 안주인의 생활공간으로 그가 앉던 평상(平床) 모습의 높은 의자와 탁자,
방석 등이 놓여져 그들의 높은 위치를 보여준다. 허나 이들은 집을 거쳐간 사람들이 쓴 것이
아닌 서울시에서 구한 늙은 생활 유물로 가옥의 품격에 맞추고자 이런 것을 갖다놓은 것이다.
어쨌든 집 규모부터가 으리으리하니 서민 스타일의 내 눈이 전혀 적응을 하지 못한다.


▲  백인제와 최경진의 빛바랜 혼인 사진 (1928년)
가옥에 있는 물건 대부분은 이곳과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이나 이 사진만큼은
이곳을 거쳐간 사람(최경진)이 남기고 간 몇 안되는 진품의 하나이다.

▲  안채 대청과 안방

▲  안채 안방
대청마루 옆에 안주인이 머물던 안방이 있다. 지금은 바깥에서 수집한 생활유물이
안방을 채우고 있어 마치 민속마을 한옥 방을 보는 듯 하다.

▲  안채 윗방
안방 바로 북쪽에 자리한 작은 방으로
안주인의 옷과 살림살이, 귀중품을
보관하던 장과 농, 반닫이 등을 두었다.

  ▲  안채 서남쪽을 이루고 있는 할머니방
대청 (오른쪽이 할머니방)


▲  안채 할머니방
안살림을 며느리에게 물려준 시어미가 생활하는 방이다. 문 앞에 별도의 대청과
복도를 두었으며, 안방에서 복도로 연결은 되지만 중간에 양식문이 있어
안방 영역과는 분리된다. 이곳에 있는 물건 역시 서울시에서 수집한
민속 유물이다.

▲  부엌과 연결되던 안방 서쪽의 조그만 방

▲  안방 서쪽에 숨겨진 다락방 (부엌 바로 윗쪽임)
지금은 허공처럼 비어있지만 왕년에는 부엌에서 쓰던 식재료와 생활도구 등을
잔뜩 머금은 창고였다.

▲  안채 건넌방

안채 건넌방은 며느리가 머물던 공간으로 사랑방과 안방 중간에 자리한다. 시아비가 며느리를
이뻐해주니 시아비의 소환에 언제든 달려갈 수 있도록 그렇게 자리를 잡은 듯 싶고, 바로 남
쪽으로 집주인 아들방과도 이어지니 아들 부부를 가까이에 있게 하려는 배려도 은근 엿보인다.
방 북쪽에는 별당처럼 시원한 누마루를 만들어 조촐한 피서처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바깥 외
출이 쉽지 않았던 며느리를 배려하고자 그렇게 만든 모양이다.

▲  안채 건넌방의 특별함, 누마루
여인들의 공간이라 발을 쳐서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끔 했다. 한여름에 저기서
자는 잠은 그야말로 꿀잠이겠지~!

▲  안채에서 사랑채(사랑방, 작은 사랑방,
사랑 대청마루)를 이어주는 복도
복도 끝에는 수세식 화장실과 욕실이 있는데,
이는 최경진이 설치한 것이다.


▲  건넌방 주변 방에서 만난 고풍스런 가구와 동그란 그림
서울시에서 구입한 생활 유물로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가고 싶다.

 ◀  사랑채 뒷쪽 복도와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사랑채와 안채는 복도로 서로 이어져 있고, 그
복도로 경계를 삼고 있다.
저 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구역인데, 왼쪽에 삐
죽 나온 대각선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다.
2층은 한상룡이 왜정의 고위층을 불러 배때기
늘어지게 놀던 현장으로 이후 다락방으로 쓰이
다가 지금은 금지 구역으로 출입을 금하고 있
다. 계단이 오르락내리락하기에는 다소 위험하
고, 2층 공간이 그리 넓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
다.


▲  사랑채 사랑방

사랑채 사랑방은 집 주인의 거처로 서울시에서 수집한 여러 가구와 병풍 등이 주인이 없는 방
을 채워주고 있다. 서랍이 많이 달린 가구 위에는 이곳을 거쳐간 백인제의 흑백 사진 3점이
놓여져 있어 생전의 잘나갔던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  사랑방에 놓인 백인제의 빛바랜 사진들

▲  고급진 모습의 사랑채 대청
집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거나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던 공간이다. 개인적인 친분의
사람부터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군상들이 여기서 대접을 받았으며,
창 밖으로 사랑채 뜨락이 훤히 바라보여 시야도 좋다.

▲  정면에서 바라본 사랑채 대청 탁자와 의자들

▲  빛바랜 사진 1장

사랑채 대청에는 백인제 가족이 남긴 흑백사진이 하나 놓여져 있다. 백인제가 서재필(徐載弼)
을 집으로 초청해 연회를 열고 사랑채 뜨락에서 기념 촬영을 한 것으로 순 남자들만 있는 가
운데 여자 1명이 사진 중앙에 홍일점이자 옥의티처럼 자리해 눈길을 끈다.
그렇다면 그 여인은 누구일까? 그는 백인제의 부인인 최경진으로 서재필이 사진 중앙에 있어
야 되지만 사람들의 양보로 부인을 중앙에 앉힌 모양이다. 무릎 밑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긴
머리에 꽃잎으로 보이는 머리 장식을 달고 있는데, 얼굴 또한 괜찮게 생겼다. 남자들 속에 있
어서 다소 부담스러웠던지 시선을 조금 오른쪽으로 향하며 시선 일탈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부인의 왼손 쪽에 앉은 이가 서재필이다. (백인제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음)


▲  중문간채 중문

사랑채를 둘러보고 안채에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안채 뜨락에서 중문까지 나머지 설명을 들
으면서 40여 분에 걸친 가이드투어는 쿨하게 마무리 되었다.
가이드는 관리사무소로 내려갔고, 나는 그냥 사라지기 아쉬워 중문 주변에서 두 발을 멈추었
다. 이렇게 백인제가옥을 최대한 갈 수 있는 범위까지 모두 가본 것이다. 자유관람과 가이드
투어를 포함한 관람시간은 1시간 40분 정도, 서울시는 이곳을 일종의 민속박물관으로 삼으려
고 오래된 생활유물을 수집해 비어있는 방과 부엌에 배치하고 있다. 그들 덕에 방의 허전함은
많이 가셔진 상태. 그들도 없었다면 무척 허전했을 것이다. 특히 안채와 사랑채에는 방이 무
지 많아 숨바꼭질을 벌여도 될 정도이다. 사랑채 지붕 위에 만든 2층 방과 부엌 위에 만든 반
2층짜리 방 등 숨겨진 방도 많으니 말이다.

10여 분 정도 사랑채 뜨락과 솟을대문 주변에 머물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쿨하게 고래등 기와
집 대문을 나섰다. 이렇게 하여 백인제 가옥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다음에는 윤보
선가옥도 꼭 개방되어 이렇게 글을 남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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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땅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선병우고가, 선병묵고가 한옥 나들이

 


' 새해맞이 충북 보은 나들이 '

▲  보은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사랑채


 

온갖 아쉬움 속에 묵은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밝았다. 올해는 제발 좋은 일이 많기를
애타게 소망하며 날씨가 최적화된 날을 택해 서울에서 고속/시외버스나 철도로 2시간 내
외 범위에서 새해 첫 답사지를 물색. 고르고 고른 끝에 보은(報恩)의 우당고택이 선정되
었다. 그곳이 그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명당(明堂)이라 하여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
문이다.

차디찬 기운이 가득한 이른 아침, 서울(남부터미널)을 출발하여 청주시내와 미원을 거쳐
보은읍에 이르렀다. 보은 읍내는 마침 5일장이라 장을 보러온 노인들로 활기를 띠었는데
읍내 한복판 중앙4거리에서 관기 방면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15분을 달려 장안3거리
에 두 발을 내린다.

장안3거리<개안리(開安里)>에서 북쪽으로 가면 장안면행정복지센터가 나오는데, 그 맞은
편에 우당고택으로 인도하는 하개교가 있다. 삼가천 위에 걸린 그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선병우고가와 선병묵고가가 있는 개안리 마을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우당고택
이다.


▲  겨울에 잠긴 삼가천 (하개교 주변)
누렇게 뜬 갈대가 겨울 바람에 힘없이 흩날리며 소쩍새가 울 그날을 기다린다.
(왼쪽이 우당고택이 있는 섬, 오른쪽이 장안로와 장안면행정복지센터)


 

♠  20세기 초에 지어진 고래등 기와집, 우당고택<愚堂古宅,
선병국가옥(宣炳國家屋)> - 국가민속문화재 134호

▲  우당고택 사주문(四柱門, 정문)과 돌담길

화개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우당고택 주차장이다. 주차장 한쪽에는 문화유산해설사가 머
무는 조그만 집이 있는데, 거기서 안내 자료를 쥐어들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우당고택으로 이
동했다.

고택에 이르니 제일 먼저 북쪽 대문인 사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곳에는 대문이 남북으로 2개
가 있는데, 바깥에서 들어올 때는 무조건 사주문을 거쳐야 된다. 명문 부잣집의 대문답게 문
의 덩치도 크고 품격도 제법 깃들여져 있으며, 이미 세상에 공개된 집이라 낮에는 대문이 늘
열려있어 나들이객과 답사객, 사진꾼, 이곳에서 공부하는 고시생과 그들을 보러온 가족 등등
사람들이 마를 날이 거의 없다.

대문 옆에는 황토와 돌, 기와로 지어진 돌담이 고색의 내음을 물씬 풍기며, 조촐하게 돌담길
을 이룬다. 서쪽 돌담길로 가면 효열각과 고택의 남문인 솟을대문으로 이어지며, 대문을 들어
서면 고래등 기와집으로 유명한 우당고택 내부가 장대하게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우당고택의 역사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우당고택 서쪽 돌담길

▲  정면에서 바라본 북쪽 대문(사주문)

속리산(俗離山)에서 발원한 삼가천(三街川)이 금강으로 흘러가면서 개안리에 조그만 삼각주(
三角洲) 섬을 빚어놓았는데, 바로 그 섬에 20세기 초기 대표적인 근대 한옥으로 손꼽히는 우
당고택(선병국가옥)이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이곳은 보은 땅의 거의 유일한 자연산 섬으로 이 부근은 조선 때 나라에서 운영하던 마장(馬
場)이 있었다. 그래서 마장 안쪽 동네라 하여 '장안','장내'라 불렸으며, 지금도 그 지명은
유효하다.

우당고택을 지은 이는 보성선씨 집안인 우당 선영홍(愚堂 宣永鴻, 1861~1924)과 그의 큰아들
인 남헌 선정훈(南軒 宣政薰)이다. 이들은 원래 전남 고흥(高興) 출신으로 고흥 지역의 제일
가는 부자였다. 풍요로운 재산만큼이나 인심도 후하여 소작농에게 토지를 골고루 나눠주고 적
은 소작료를 받았으며, 어려운 사람들의 세금을 대신 처리해주는 등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인
심을 베풀었다.

선영홍은 아들이 4명 있었는데, 모두 끝이 훈(薰)자 돌림이다. (정훈, 남훈, 준훈, 동훈) 그
는 아들과 손자, 자손의 번창을 위해 천하에 제일가는 명당으로 터전을 옮기고자 이름난 지관
을 섭외하여 명당 자리를 물색했다. 그는 섬에 집을 지어야만 집안이 흥한다는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그에 걸맞는 자리를 찾은 끝에 서울 여의도와 충남 천안, 보은 개안리가 후보 장소로
꼽혔고, 지관인 심씨의 추천과 속리산과 가까운 개안리의 지형에 단단히 반해 1903년 이곳에
터를 닦았다.
이곳 지형은 삼가천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육지 속의 섬으로 그 모습이 마치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이라 하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불린다. 이런 자리는 꽤 좋은 명
당으로 꼽힌다.

1919년 아들 선정훈과 함께 그 섬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자신과 후손들이 길이길이 살 명당
자리라 천하에서 제일 이상적인 집을 짓기로 했는데, 선정훈이 공사를 주도했으며, 그 시절
잘나가던 목공과 기술자를 비롯해 일꾼들까지 후하게 대접했다. 공사 자재에도 돈을 아끼지
않아 질이 좋은 목재와 재료를 사용했으며, 이때 도편수로 참여한 사람이 궁궐 목수로 이름난
'방대문'이었다.
섬의 지형이 모래로 되어있어 따로 배수시설은 닦지 않았으며, 왜식과 서양식이 섞인 개량형
한옥이 한참 주류를 이루던 때라 너무 전통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 시류에 흔쾌히 동참했다.
이렇게 큰 정성을 들여 5년 만인 1924년 집이 완성되니 집의 전체 면적은 3,900평. 집 크기는
99칸을 자랑했으며, 사랑채와 안채, 사당 3구역으로 구성되어 각각 담장을 둘렀다. 특이한 것
은 사랑채와 안채가 '工'구조로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옛날 집에서는 극히 꺼리던 형태
였다. (부수는 것을 뜻한다고 함)
그럼에도 집의 중요한 공간을 '工' 구조로 한 것은 집터가 길하지 않아서 흉택의 평면인 '工'
구조를 택하면 70~80년 이후부터 길하게 된다는 지관의 해석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즉 후손
대에 반전을 노린 것이다.

선정훈은 아버지와 별도로 대동상사(大東商社)를 운영했는데, 고흥의 토산물인 우뭇가사리를
왜열도와 중원대륙에 수출해 큰 돈을 벌었다. 그의 곳간만해도 무려 33칸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재산의 정도를 알만하다.
그들은 오늘날 이 땅에 썩어빠진 위정자와 상류층과 달리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
던 인물이다. 선영홍은 고흥에 대흥사(大興司)란 서숙(書塾)을 세워 인재를 양성했으며, 보은
에도 집 남쪽에 관선정이란 33칸짜리 서당을 세워 한학(漢學)을 교육시키고 우수한 학자를 초
빙해 수백 명의 후학을 길렀다. 또한 보은향교 명륜당(明倫堂)에 서숙을 지어주기도 했으며,
지역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덕행을 베풀었다.

6.25시절 폭격으로 대문 좌우 바깥행랑채와 주변 부속 건물이 파괴되어 사라졌다. 허나 그 외
에 건물은 별탈 없이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 덕에 20세기 초에 지어진 전통 개량한옥
으로 학술 가치가 대단히 높다. 또한 6.25 때 군부대가 집 동쪽에 주둔을 했는데, 시간이 지
나면서 아예 그곳에 눌러앉았고, 동쪽 토지 2만 평은 그렇게 군부대 땅이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집을 끼고 흐르는 하천 동쪽 물길을 막아 농토를 개간했으나 1980년
과 1998년 집중호우로 집이 물에 잠겨 돌각담들이 여럿 무너졌고, 집을 지키고자 안산(安山)
의 역할로 심은 소나무 숲까지 쑥대밭이 되는 피해를 입었다. 하여 현재 집 주인인 선민혁이
지역 사람들의 동의를 구해 하천을 현재 모습으로 복원했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수해를 입지
않았으며, 소나무 숲도 다시 복원해 옛날의 운치를 되찾았다.

선정훈은 집만 물려주면 된다면서 많은 돈을 썼으나 워낙 돈이 많아 결국 아들에게 많이 상속
되었다. (아 부러워라ㅠㅠ) 현재는 선병국의 아들인 선민혁이 집을 지키고 있으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선병국가옥'이었으나 근래에 선정훈의 호를 따서 우당고택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0년대에 안채에 있는 곳간채를 손질하여 고시원을 열었는데, 최소의 비용만 받고 고시생들
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교육에 아낌없이 돈을 던진 할아버지(선정훈)와 증조부(선
영홍)의 유지를 잇기 위함이다. 또한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문의 별미인 씨간장이 있
는데, 무려 350년 이상 되었다고 전하며, 간장 보존을 위해 특별히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 씨간장에 매년 새로 담구는 햇간장을 부어 보존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명품 로하스 식품
전'에 출품, 1리터가 500만 원에 팔리면서 유명세를 탔다. 그래서 우당고택(선병국가옥)이 천
하에 크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 김정옥 종부(宗婦)가 '선씨 종가 아당골'이란 이름으
로 간장을 판매하고 있으며, 집 안팎에 700여 개의 장독을 두어 씨간장을 숙성/보관하고 있다.

이렇게 전통 한옥과 간장으로 이곳이 크게 떠오르자 보은군에게 2007년에 고택 북쪽에 주차장
을 닦고 대문 앞 소나무숲 주변에 잔디를 입히며 의자와 이정표를 지어주었다. 이곳이 보은의
새로운 꿀로 부상하자 그 꿀에 서둘러 그럴싸하게 단지를 입힌 것이다.

현재 고택 내부는 사랑채와 사주문에서 솟을대문으로 이어지는 통로만 개방되고 있으며, 안채
와 사당, 그밖에 건물은 개방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개방 공간은 변경될 수 있음~~) 고택
바깥에 있는 효열각과 비석, 복원된 관선정은 관람이 가능하며, 안채 곳간채에는 고시생들이
머물고 있는데, 이곳을 거쳐간 고시생이 1,000여명, 사법고시 합격자만 50명을 넘는다고 한다.
시내와 멀리 떨어진 외지이고 적막한 곳이라 고시생의 인기가 대단했으나 최근 관광객의 발길
이 증가하면서 고시생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  행랑채 북쪽에 자리한 장독대의 물결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사당을 품은 담장이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고택 내부로 인
도하는 너른 길이 나오는데, 그 왼쪽에 낮게 돌담을 두르고 키 작은 나무와 조촐한 텃밭, 씨
간장을 품은 장독대들의 공간이 있어 정겨운 분위기를 우려낸다. 그 장독대 너머로 행랑채와
안채가 있다.


▲  사주문에서 안채, 사랑채로 인도하는 너른 길
집 내부에 이렇게 넓은 길이 있다니? 집이 정말 넓기는 넓다. 조선과 왜정 때
지어진 어지간한 큰 기와집을 능가하는 규모로 완전 조그만 궁궐 같다.


▲  사당(祠堂)

양반가는 보통 집 내부에 가묘(家廟)라 불리는 사당을 갖추고 있는데, 이곳 역시 예외는 아니
다.
이곳 사당은 3칸 규모의 사당과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재실<齋室, 제수(祭需)채라고도 함>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당과 재실이 복도채로 연결되어 완전 한 몸처럼 되어 있어 자연히 'ㄱ'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제수채와 복도채를 둔 사당은 거의 흔치 않은 케이스로 복도 폭은 1.1m이며, 사당 각
칸 앞에는 시멘트몰탈로 이루어진 디딤돌이 있는데, 이는 건립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사당을
오래도록 보존하고자 그 시절 새로운 건축 재료가 시도되었다.
 
사당 주위는 돌담으로 꽁꽁 둘렀으며, 사당으로 인도하는 솟을삼문은 굳게 잠겨져 있는데, 선
씨 집안의 선조를 봉안한 공간이라 일반에는 공개하지 않는다.

▲  사당의 솟을삼문(三門)

▲  'ㄷ'자로 이루어진 행랑채


▲  안채 북쪽

사당 남쪽에는 안채와 행랑채가 있다. 돌담으로 주변을 빙 둘러 눈으로 하얗게 바래진 지붕과
집 윗도리만 보일 따름인데, 이곳은 선씨 일가의 생활 공간으로 내부 관람은 통제되어 있다.
그러니 그들의 사생활과 재산 보호를 위해서라도 억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안채는 사랑채 동쪽에 자리하여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사랑채와 모습과 구조, 규모가 똑같
다. 그러니 괜히 안채를 기웃거려 안좋은 소리 듣지 말고 그냥 사랑채를 보면 된다. 집 모습
은 '工' 구조로 이 땅의 한옥 안채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안채를 받치고 있는 기
단(基壇)은 사랑채보다 1단 낮은 2단짜리 석축으로 가운데 4칸짜리 대청을 끼고 왼쪽이 안방,
오른쪽이 건너방이다. 건물 중앙에 마루가 있고, 무려 9개의 온돌방을 갖추고 있으며, 부엌은
큰살림에 걸맞게 상당히 크고 위에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앞뒤에 달린 툇마루가 복도
역할을 하여 모든 방과 부엌으로 이동할 수 있다.
안채 옆에는 'ㄷ'모양의 중행랑채를 두어 안채를 가리고 있는데, 그 사이로 조그만 안마당을
만들었고, 행랑채 남쪽 끝에 안대문을 두었다. 안대문 밖에는 담이 가로질러 있어서 바깥 대
문에서 안채로 가려면 'ㄹ'자로 꺾어 들어가야 했다.
행랑채 옆에는 쌀과 재물을 보관하던 곳간채가 있는데, 1칸 또는 1칸 반, 2칸 간격으로 있었
다. 허나 세월이 흐르면서 더 이상 쌀과 재물을 보관할 필요가 없게 되자 이들을 손질하여 고
시생들의 숙식 공간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곳이 세상에 널리 알려짐에 따라 관광/답사 수요가
늘면서 고시생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도 속세의 때를 크게 탄 모양이다.


▲  반쯤 열린 사랑채 중문

▲  우당고택의 백미, 사랑채

안채 서쪽에는 고택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사랑채가 있다. 안채와 같은 '工' 구조로 주위를
돌담으로 둘렀는데, 동쪽과 남쪽, 북쪽에 바깥과 사랑채를 이어주는 문을 냈으며, 남쪽에는
넓게 뜨락을 닦았다. 그리고 서쪽과 서남쪽, 동쪽, 북쪽 공터에는 소나무와 갖은 화초를 심어
사랑채 주변을 아름답게 꾸몄다.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2고주 5량가로 3단으로 싹둑 다듬
어진 석축 위에 큼직한 집을 세우고 8각으로 다듬은 화강암 주춧돌로 둥근 바깥 기둥을 받쳐
들고 있다. 집 구조는 안채와 같으며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두고 그 좌우로 온돌방 8개, 창고,
부엌을 두었는데, 앞뒤로 툇마루(퇴칸마루)를 두어 일종의 통로를 두었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둘렀는데, 난간의 모양이 섬세하며, 대청에는 사분합문(四分閤門)을 설치했다. 처마는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서까래가 길다. 그리고 합작지붕의 박공면과 마루 밑은 붉은 벽돌로 쌓았는데,
이들은 나중에 손을 댄 것이다.

이곳은 일반에 공개된 공간으로 찻집과 전통체험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평일이라 사람이 없
다보니 거의 닫혀있다. (주말에는 북적댄다고 함) 그래서 굳이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고 소심
하게 바깥만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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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치 있게 자라난 사랑채 소나무

▲  이제 무늬만 남은 사랑채 서쪽 우물

▲  사랑채 동쪽 부분

▲  사랑채 뒷쪽(북쪽)


▲  사랑채 정면에 걸린 '위선최락(僞善最樂)' 현판의 위엄

사랑채 정면에는 파란 글씨로 쓰여진 '위선최락' 현판이 걸려있다. 글씨가 마치 살아서 율동
을 부리듯 필체의 힘이 대단한데 '위선최락'이란 '선을 베푸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란 뜻
으로 선영홍/선정훈 부자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 좌우명을 말로만 끝내지 않고 평생 실천하고 살았다. 지역 사람들과 전통 유학을
배우고 지키려는 인재들을 위해 많은 재산을 내던진 것이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송덕비와 시
혜비(施惠碑)까지 세워 그들을 기리겠는가?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위인이자 성인군자라 할만
하다.
이런 상류층이 많아야 이 땅도 정말 희망이 있을 것인데 이 땅의 상류층과 권력층들은 어찌된
것이 하나같이 치졸하고 욕심들이 과한지 모르겠다. (특히 친일매국노의 후손들과 친일 패거
리들, 20세기 중/후반 독재정권 패거리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없는 사람들을 등쳐먹고, 백성
들 등골 빼먹고, 공기업과 도시, 나라까지 말아먹는 걸 예사로 여기니 말이다.
허나 그 치졸한 작자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선정훈 부자가 '위선최락'을 실천하고자 많
은 돈을 썼다. 그렇다면 그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받기만 했을까? 전혀 그
렇지가 않다. 소작농은 소작농대로, 선정훈이 세운 대동상사 사람들은 역시 그들대로 열심히
살며 그를 도왔고, 지역 사람들도 그들 일가에게 호의적이었다. 또한 그들의 지원을 받아 공
부한 인재들은 사회 곳곳에 진출했으니 그들로 인해 선정훈 일가의 이름은 더욱 크게 빛을 발
하는 것이다. 그러니 크게 보면 서로 상부상조하며 살아간 것이다. 선정훈 부자도 그들의 도
움을 크게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계속 집안이 번영을 하고 있고, 그들의 덕을 받은 사람들도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 반면 이 땅 대부분의 상류/권력층들은 거의 일방적으로 뜯어먹기만 하
지 상부상조할 줄을 모른다. 그러니 대다수의 백성들은 빈곤해지고, 상류/권력층의 배때기는
더욱 짙어만 간다. 그들에게 있어 '위선최락'은 '그게 뭐임? 먹는 거임? 그런 건 빨갱이들이
나 하는 거야!!' 하며 현판을 깨부실 것이다.

사랑채에는 '위선최락' 현판 외에도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도 있었다. 이것은 해남 대흥
사(大興寺)에 있던 추사 김정희의 무량수각 현판을 6.25 이후에 모각한 것으로 사랑채에 당당
히 걸려있었다. 허나 우당고택이 천하에 크게 존재감을 드러낸 이후, 찾는 이가 부쩍 늘었고
그 속에 불온한 무리까지 섞여서 들어오면서 2008년 2월 13일과 14일 사이 도난을 당하고 말
았다. 아직까지 현판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그의 빈자리는 여전하다.


▲  솟을대문에서 바라본 사랑채 외곽 (담장과 중문, 사랑채)
사랑채 너머로 이곳의 든든한 후광이자 주산(主山)인 옥녀봉(玉女峯)이 바라보인다.

▲  가옥의 남쪽 대문인 솟을대문
사대부 기와집 대문의 품격이 느껴진다. 대문 바깥에는 너른 공터와 텃밭이
있으며, 서남쪽 소나무 숲에는 효열각과 3기의 비석이 서 있다. 대문
주변에는 바깥행랑채와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으나 6.25 전쟁 때
파괴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대문과 돌담만 남아있다.


 

♠  우당고택 바깥쪽

▲  솟을대문 남쪽에 자리한 3기의 비석들

솟을대문 서남쪽에는 시대를 달리한 비석 3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가장 왼쪽에 있는 비석
은 '전승지성공 정훈공덕비(前承旨惺公 政薰功德碑)'로 20세기 중반에 선정훈을 기리고자 세
워진 것이며, 그 비석을 크게 업데이트한 것이 오른쪽 끝에 자리한 큰 비석 '남헌 선정훈 선
생 송덕비(頌德碑)'로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와 이수(螭首)까지 갖춘 당당한 모습이다.

선정훈은 매년 보릿고개가 되면 우리의 북방 영토인 만주에서 좁쌀을 수입해 보은 지역 빈민
들에게 나눠주었고, 지역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생활고로 고생하면 직접 해결해주곤
했다. 광복 이후, 공산당 세력인 남로당에 가입한 주민들이 많았는데, 국군이 그들을 잡아들
여 이유불문 모두 총살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선정훈이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고, 돈이 필요해 명의를 빌려주고 서명을 한 것 뿐이다!'
라며 주
민 구제에 나섰고 보은군수와 지역 유지, 국군을 설득하여 주민들을 모두 구제했다.
그렇게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공덕을 베푸니 그 은혜에 감동한 지역민들이 송덕비를 세운 것
이다. 처음에는 보은읍내에 있는 동헌(東軒)에 있었으나 근래 이곳으로 이전되었으며, 비문에
는 그의 덕행을 한자 16자로 표현했는데,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학군을 일으키고 가난을 구제하니, 대대로 내려온 덕행이다. 각박한 인심을 순화시키고 경각
심을 일으키니 길이길이 감명되어 마멸되지 않으리라'


▲  관선정 기적비(觀善亭 記蹟碑)

비석 3형제 가운데에 있는 지붕돌 비석은 '관선정 기적비'이다. 남헌 선정훈은 1926년 집 동
쪽에 '착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복을 받는다'는 뜻에 관선정을 지었다. 규모는 33칸으로 이곳
을 서당으로 삼아 왜정에 의해 시들해진 이 땅의 한문학과 유학을 배우고 닦는 공간으로 삼았
는데, 그는 보은향교 명륜당(明倫堂)에도 서숙을 설치해주어 당시 유명한 유학자인 홍치유(洪
致裕)를 초빙해 관선정과 보은향교에서 젊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가르치는 선생과 후학들의 숙식은 물론 생활비까지 두둑히 지원해주니 배우고는 싶으나 가난
앞에서 붓을 꺾어야 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와 시험으로 그들을 가려뽑았다. 무작정 다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곳을 거쳐간 학생 수는 무려 수백 명이 넘었으며, 그 많은 이들
을 선정훈이 다 책임졌다.
이렇게 관선정은 왜정의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이 땅의 전통유학을 교육시켜 민족정신 함양
은 물론 한문학과 전통문화계승 발전에 크게 공헌했는데, 이에 속이 뒤틀린 왜정이 1944년 강
제로 폐쇄시키고 건물까지 부셔버렸다.

관선정에서 수학한 사람들은 1960~70년대 우리나라 한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청명 임창순
(靑溟 任昌淳, 1914~1999)이 그 대표적이다. 그는 14살에 이곳에 들어와 6년 동안 한문학을
배웠다.
이들 관선정 학생들은 1951년 '관선정학우회'를 세워 매년마다 선정훈을 기리는 행사를 가지
고 있으며, 1973년 뜻을 모아 관선정기적비를 세웠다. 비문(碑文)은 왕희지(王羲之)의 필체를
집자(集字)했다.

왜정에 의해 철거된 관선정은 1945년 경북 상주에 다시 지어졌으며, 상주 화북면으로 옮겨져
계속 후학을 기르다가 1951년에 철거되었다.


▲  옛 관선정의 모습과 평면도
관선정은 2개의 공부방, 선생방, 2개의 대청, 부엌, 고지기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선공영홍시혜비(宣公永鴻施惠碑. 선영홍 시혜비)

비석 3형제 부근에는 철로 이루어진 철비(鐵碑)가 있다. 철비는 이 땅에서 그리 흔치 않은 비
석 스타일로 우당고택에서 전혀 생각치도 못한 그를 만나니 생소하면서도 무척 반가웠다.

이 철비는 선영홍을 기리는 시혜비로 시혜비란 은혜를 베푼 것에 대한 고마움의 뜻으로 세운
비석을 뜻한다. 선영홍이 전남 고흥에 살던 시절 자신의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골고루 나눠주
고 소작료도 깎아주었다. 또한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이 굶지 않도록 도왔고, 세금을 대신 내
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하여 그의 덕을 입은 고흥 두원, 점암, 남양, 남면 지역 소작
농은 그의 은덕에 감사를 표하고자 십시일반 돈을 모아 1922년 시혜비를 세웠다. 그러니 거의
100년 정도 묵은 소중한 은혜의 증표인 것이다.
왜정 말기에 고약한 왜정이 전쟁 물자로 쓰고자 몰래 빼돌렸으나 다행히도 여수에서 선영홍의
종손인 선민혁이 주민들의 도움으로 발견해 원래 자리로 옮겼다. 허나 도로 확장 사업으로 제
자리를 떠나야될 상황에 이르자 철비를 만든 사람들의 후손들과 협의해 2004년 이곳으로 옮겼
다.

부자가 많은 선행을 베풀어 그 선행에 감동한 지역 사람들이 손수 지은 비석으로 의미가 정말
남다르다. 정말 인간적인 미와 정이 넘치는 비석인 것이다.


▲  비석의 모습을 취한 선공영홍시혜비

▲  돌담에 둘러싸인 선처흠 효열각(宣處欽 孝烈閣)

시혜비 옆에는 돌담을 두룬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 선처흠 효열각이 담겨져 있다. 이 효열각
은 선영홍의 부모인 선처흠과 경주김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1892년에 명정(命旌)하여 지어진
것으로 편액 우측에는 '효자증조 산대부동몽교관 선처흠지문(孝子贈朝 散大夫童蒙敎官 宣處欽
之門)', 좌측에는 '열녀 선처흠 처금인 경주김씨지문(烈女 宣處欽悽今人 慶州金氏之門)'이라
쓰여 있다.

선처흠(?~1921)은 그의 아버지가 심한 안질로 고생하자 의원을 찾아가 침과 약으로 계속 안질
을 다스렸다. 허나 딱히 차도가 없자 의원이 매고기가 명약이라고 귀뜀을 해주었다. 하여 매
를 잡고자 영마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니 마침 1쌍의 매가 날아와 알아서 잡혀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잡아 부친에게 먹이니 차도가 있었고, 추운 겨울 눈보라를 무릅쓰고 산에 올라
단을 쌓고 7일 동안 기도를 하니 또 다시 매가 알아서 잡혀주어 끝내 안질이 완쾌되었다고 한
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픽션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사건으로 선처흠의 효행은 서울까지 알려
졌다.
선처흠의 부인인 경주김씨도 효성이 지극하고 남편을 잘 따랐는데, 남편이 위독하자 넙적다리
를 베어 먹이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였다고 한다. 이후 남편의 병이 낫자 열녀(烈女)로 명
성이 높아졌다.

그들 부부의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들을 효자와 열녀로 명정하여 효열각을 지어주었으며, 원
래 선처흠이 살던 전남 보성에 있었으나 자손들이 모두 보은으로 들어오면서 1928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효열각 역시 전혀 생각치도 못한 존재라 앞서 시혜비와 함께 우당고택이 나에게 덤
으로 얹혀준 선물이다.

▲  키가 작은 효열각 정문

▲  1칸 크기로 단촐한 효열각


▲  효열각 내부에 걸린 현판
오른쪽은 효자 선처흠, 왼쪽은 열녀 경주김씨의 정려문(旌閭文)이다.

▲  관선정과 간장의 숙성 공간, 장독대

효열각은 우당고택에서 가장 남쪽이다. 여기서 서쪽과 남쪽은 삼가천으로 막혀있으며, 동쪽은
고택의 텃밭이 있어 다시 고택으로 들어오던가 아니면 고택 서쪽 돌담길로 나와야 된다.
돌담길로 들어서면 근래 복원된 관선정과 기와 돌담에 둘러싸인 거대한 장독대의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관선정은 앞서 관선정기적비에서 소상히 다루었는데, 옛날과 달리 새로 지어진
지금은 강당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복원된 의미 정도로 머물러 있다.

관선정 앞에는 장독대들이 넓게 포진해 있는데, 이들은 이곳의 오랜 자랑인 씨간장과 그 간장
을 혼합한 햇간장을 보관하고 있다. 즉 우당고택의 듬직한 꿀단지들인 것이다. 350년째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씨간장에 매년 새로 담근 햇간장을 부어 간장을 생산하고 있는데, 콩 80kg
가마로 만든 메주에 간장이 10L밖에 나오지 않는다. 2009년부터는 문화재청이 밀어주는 '전통
한옥 관광자원 활성화사업'에 일환으로 '전통 장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내놓아 호응을 얻
고 있는데, 바로 전통 간장 덕분에 이곳이 크게 뜬 것이다.

장독대는 각 지역 스타일로 조성하여 지역 별로 모아 두었는데,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 경
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장독대를 재현했으며, 그들은 모두 간장을 품
으며 숙성시키고 있다.

▲  황해도 장독대

▲  평안도 장독대

▲  제주도 장독대

▲  충청도 장독대

▲  관선정 옆 돌담길

▲  관선정 옆 송림에 묻힌 1칸짜리 정자


▲  우당고택 서쪽 돌담길과 돌담에 그려진 자연의 벽화
대자연이 그린 멋드러진 벽화가 황토 돌담의 품격을 드높인다. 그려진 폼을 보니
아마도 그만의 추상화 듯 싶은데, 아무리 천재화가가 모방해본들 자연이
그린 벽화만은 못하다.


서쪽 돌담길을 타고 고택의 시작인 사주문으로 나왔다. 고래등 기와집을 그런데로 1바퀴 둘러
본 셈이다. (통제 구역은 제외)
주차장에 있는 문화유산해설사 사무실을 바라보니 그 안에서 쉬고 있던 해설사 아저씨가 구경
잘 했냐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답을 하고 몇 가지를 물어보니 날도 추운데, 안으로 들어와 커
피 1잔 하라고 그런다. 내가 그런걸 마다할 이유가 없어 안으로 들어가니 따뜻한 커피 1잔을
제공해준다.
해설사 아저씨는 정년퇴직을 하고 해설사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주말에는 관람객이 많
지만 평일은 썰렁하고 해설 요청 수요도 주말 평일 가리지 않고 거의 없다며 거의 대충 보고
간다고 그런다. 그렇게 그와 오랜 시간 세상 이야기를 주고 받으니 어느덧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해 왔다.
날이 겨울인지라 햇님도 동절기 근무로 일찍 퇴근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갈 곳이 몇 곳 남았
는데, 더 이상 꾸물거려서는 안될 듯 싶어 그에게 선병우/선병묵고가, 상현서원에 대해 물어
보고 작별을 고했다.

* 우당고택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54 (개안길 10-2, ☎ 043-543-7177)


 

♠  개안리에 있는 선씨 일가의 다른 한옥 둘러보기

▲  보은 선병우 고가(宣炳禹 古家)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5호

개안리에는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외에 선병우, 선병묵고가 등 3채의 오래된 한옥이 있다. 이
는 서울 북촌(北村), 전주한옥마을,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등 한옥 밀집 지역과 오래
된 전통 마을을 제외하고는 거의 흔치 않은 케이스로 이들 모두 선정훈 형제가 세운 것이다.
가장 먼저 선영홍/선정훈이 이곳에 자리를 닦았고 1940년대에 선정훈의 형제들도 본거지인 고
흥을 버리고 이곳으로 올라와 선정훈집(우당고택) 북쪽 삼가천 너머에 집을 지은 것이다. 이
들은 20세기 중반 개량 한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선병우고가는 선정훈의 동생인 선준훈(宣俊薰)이 세운 것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중문 등
을 갖춘 당당한 한옥이다. (선병우는 선준훈의 아들) 집주인이 남쪽에서 올라온 탓인지 집의
구조는 남부 지방 가옥 배치와 유사하며, 간실을 넓게 잡은 것이 특징이다. 건축양식은 우당
고택과 너무 비슷한데, 이는 선정훈이 좋은 목수를 보내주어 도와준 탓이다.
비록 우당고택보다는 작아도 커다란 한옥은 분명한지라 집 상당수를 식당으로 쓰고 있다. 식
당 이름은 '복해가든'으로 닭백숙과 돼지고기, 버섯찌개 등을 내놓고 있는데, 집 관람은 딱히
제한은 없으나 개인 집이기 때문에 안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고 대문 밖에만 잠깐 기웃거리고
선병묵고가로 이동했다.

* 선병우고가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142-1 (개안길 15-9, ☎ 043-543-0606)


▲  선병우고가 앞에 자리한 3기의 비석과 넓게 퍼진 큰 소나무

선병우고가 앞에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의 처
진소나무처럼 좌우로 넓게 퍼진 큰 소나무가
운치를 지어내고 있다. 그 앞에는 3기의 비석
이 나란히 자리해 있는데, 그들 중 가운데에
자리한 늙은 비석이 이 집을 세운 '국당(菊堂
) 선준훈 추모비'이다.
194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나이에 비해 비석
이 너무 낡자 근래에 기존 비석을 업그레이드
시킨 새로운 비석을 옆에 지어놓았다. 그래서
기존 비석에 비해 때깔이 무지 고우며, 비석
형태는 앞서 '남헌 선정훈 선생 송덕비'와 유
사하다.

▲  소나무 앞에 자리한 3기의 비석들


▲  보은 선병묵 고가(宣炳默 古家)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4호

선병우고가에서 동쪽으로 5분 정도 들어가면 뫼로 막힌 막다른 곳에 선병묵고가가 짧은 고색
의 기운을 드러내며 자리해 있다.

이 집은 선정훈의 동생인 선남훈(또는 선동훈)이 1940년대에 지은 것으로 그의 아들인 선병묵
이 소유하고 있다. 집 주위를 황토색 돌담으로 빙 두르고 그 안에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창
고로 쓰이는 초가 등을 두었는데, 남쪽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에 사랑채가 있고, 중
문을 지나야 안채가 나오는 분산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담장 서쪽 길에서 바로 사랑마
당과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서쪽 대문을 따로 내었는데, 이는 시대 변화에 따른 변형으
로 보면 된다.

현재는 우당고택(선병국가옥)처럼 집 일부를 고시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속세에 너무 알려
진 우당고택보다 찾는 이도 훨씬 적고 다소 외진 곳이며, 바로 옆에 산이 있어 공부는 정말
잘 될 것 같다.
이곳도 내부는 그런데로 공개되어 있으나(상황에 따라 비공개할 수도 있음) 개인 집이라 깊숙
하게 들어가지는 않고 사랑채까지만 보고 살짝 나왔다.

* 선병묵고가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내면 개안리 96 (개안길 60)

▲  선병묵 고가 남쪽 대문
대문은 맞배지붕을 취하고 있다.

▲  고가 내부 (남쪽 대문 안쪽)
집 내부에 조촐하게 텃밭을 두었다.

▲  담장 너머로 보이는 사랑채

▲  겨울 제국의 의해 꽁꽁 봉해진 연못


▲  삼가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선병묵고가
검은 피부의 기와집, 하얀 피부의 기와집, 그리고 누런 피부의 초가까지
다양한 집이 망라되어 있다.

▲  삼가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개안리와 옥녀봉

▲  눈에 젖은 삼가천 둑방길

선병묵고가를 둘러보고 아직 햇님 퇴근까지는 시간이 있어 북쪽 서원리에 있는 상현서원(象賢
書院)까지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선병국가옥 입구인 하개교에서 장안로를 따라 1.7km 정도 가면 상현서원인데, 차량의 눈치를
피하고자 장안로 동쪽 건너편, 그러니까 삼가천 둑방길로 걸어갔다. 서원에 다다르면 하천을
건너는 징검다리라도 있을 듯 싶어서였다. 둑방길은 거의 응달이라 눈이 좀 쌓여있었고, 주변
경작지와 삼가천 갈대는 죄다 누렇게 뜬 모습으로 겨울 제국이 속히 지나가기를 염원한다.

한참 둑방길이 잘 이어져 있다가 삼가천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에서 길이 끊기고 말았다. 하천
으로 내려가는 조그만 길은 있지만 눈과 얼음 투성이라 접근이 어려웠고, 괜히 내려가다가 큰
일 날듯 싶어서 자존심을 곱게 접고 되돌아나왔다. 괜히 차량의 눈치를 피한답시고 꾀를 부리
다가 오히려 그 꾀에 당한 셈이다. 그 사이 햇님은 더욱 기울어지고 첩첩한 산속이라 날씨까
지 다시 추워진다.

장안3거리로 다시 나와 군내버스를 타고 보은읍내로 들어서 후식거리로 보은동헌이라도 볼까
했으나 길을 헤매어 결국 우당고택 등 선씨 고택 3채를 보는 선에서 올해 첫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허나 날이 이날 뿐이랴..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숨쉬는 동안은 언제든 보은 땅에 찾아
올 수 있다. 그러니 그리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부디 선영홍/선정훈 부자 같은 대인배 부유/상류층이 많이 나오기를 염원하며 대단
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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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한옥마을 속으로, 북촌한옥마을 구석구석 나들이 ~~ (북촌문화센터, 가회동 이준구가옥, 북촌4~7경, 맹사성집터)

 


'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 북촌 나들이 '

▲  북촌5경 골목길


 

♠  조선 후기 한옥을 개조하여 북촌을 안내하는 공간으로
새로 태어난 북촌문화센터 - 등록문화재 229호

▲  북촌문화센터 대문과 바깥채

여름 제국이 조금씩 숙성되어가던 6월의 첫 무렵에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
촌(北村, 북촌한옥마을)을 찾았다. 이번에 찾아간 북촌 명소들은 이미 여러 번씩 기봤던 곳들
로 복습 차원에서 또 찾게 되었다. 북촌과 인연을 지은 횟수도 벌써 60회가 넘어 이제는 지겨
울 법도 하지만 그곳에 퐁당퐁당 빠진 상태라 뒤돌아서면 또 가고 싶어진다.

이번 북촌 산책의 시작은 북촌문화센터<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3~4분>로 북촌 초행
이라면 이곳부터 인연을 짓고 북촌 나들이에 임하기 바란다.
북촌문화센터로 쓰이는 기와집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양반가로 고종(高宗) 시절 민씨 세도
가(勢道家)의 하나이자 왜정 때 탁지부(度支部) 재무관(財務官)을 지낸 민형기의 집이다. 한
때 '계동마님댁'으로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집 구조는 안채와 바깥채, 앞행랑채, 뒷행랑채, 사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계동마님이
사라진 이후 크게 쇠락하고 만다. 그러다가 2002년에 서울시에서 북촌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
로 매입하여 기존 한옥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말끔히 몸단장을 시켜 그해 10월 북촌을 안
내하는 북촌문화센터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ㄷ'자형 안채와 'ㄱ'형 행랑채가 나오고, 중문을 지나면 'ㄱ'자
형 안행랑채(별당)가 나온다. 안채는 안방과 부엌을 개조하여 서울시청 한옥조성과 사무실과
한옥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상담하는 상담실을 두었으며, 회의실과 주민들의 사랑방을 갖추고
있다.

뒷행랑채는 전부 터서 북촌홍보전시관으로 삼아 북촌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을 여러 자료로 다
루고 있는데, 영상물도 준비하여 북촌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하는 한편, 북촌안내책자와 지도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이곳을 지나면 집의 뒷부분이 나오는데, 여기에 2칸 규모의 아담한 정
자가 있다. 원래 사당이었던 것을 정자로 개조하여 두 다리를 쉬어가는 쉼터로 삼았으며, 서
울 도심에서는 흔치 않은 이색 공간으로 다른 건물과 달리 기단(基壇)이 높아 예전에 사당이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 한다.
정자를 지나면 안행랑채라 불리는 별당(別堂)이 나오는데, 이곳은 온갖 공예와 예절과 다도(
茶道), 전통주 만들기, 민화(속화) 그리기 등 다양한 전통문화 강좌를 연다. (자세한 것은 북
촌문화센터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105 (계동길 37 ☎ 02-2133-1371)
* 북촌문화센터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과 'ㄷ'자형 안채가 나온다.

▲  중문과 안채 서쪽

▲  안채 동쪽 (회의실과 사랑방)


▲  중문과 짧은 담장
중문 담장은 다른 담장과 이어지지 않고 안채 가운데 기둥에서 끝을 맺는다.

▲  북촌홍보전시관으로 탈바꿈한 뒷행랑채
북촌의 역사와 현재, 한옥의 구조에 대한 관련 자료들이 하얀 벽을
조촐하게 채운다.

▲  뒤쪽에 자리한 2칸짜리 정자
원래 사당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누구나 발을 멈추고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정자 뒤쪽에는 외부로 나가는 문이 있는데 늘 닫혀있다.

▲  안행랑채(별당)와 뒷간(왼쪽)

▲  대청마루로 쓰이는 안행랑채 동쪽

정자 동쪽에 자리한 안행랑채는 툇마루를 갖추고 있는데, 여기선 다양한 전통문화를 배울 수
있다. 그 곁에는 뒷간이 있는데, 겉은 한옥이지만 속은 현대식 시설로 무장하고 있어 화장실
걱정은 안해도 된다. 그들 뒤로 현대식 건물들이 이곳을 굽어보고 있으니 과거와 현재가 서로
를 조금씩 인정하며 보듬어주는 북촌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  북촌4경 주변

▲  가회동 김형태 가옥(嘉會洞 金炯泰 家屋)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0호

안국역(3호선) 2번 출구에서 북촌의 주요 간선로인 북촌로를 따라 감사원(監査院) 방면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가회동성당을 지나서 검은 피부의 문화재 안내판이 '잠시 나좀 보고 가소'
발길을 잡는다. 그 안내문 바로 윗쪽에 기와집이 있는데, 그 집이 안내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가회동 김형태 가옥이다.

이 집은 19세기 후반 또는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사랑채와 안채, 문간채로 이루어져 있
다. 안채는 문간채를 포함하여 'ㄷ'자 모양, 문간채는 'ㅡ'모양, 사랑채는 'ㄹ'자 모습으로
팔작지붕의 5량가 가구(樑架 架構)의 기와집이다. 비록 집은 다르지만 이 자리에서 명성황후
(明成皇后) 민씨가 태어났다고 전하며, 집 동쪽은 북촌로와 살을 마주 대고 있는데, 석축이
높게 닦여져 있다. 이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집 동쪽 부분이 잘려나가 그렇게 된 것이다.

현재 김형태란 사람이 소유하고 있으며, 문화
재청에서 그의 이름을 붙여 문화재 명칭으로
삼았다.
엄연히 사람이 사는 집이라 내부 관람은 거의
어렵고, 그냥 바깥에서 얌전히 바라보는 것으
로 만족해야 된다.
또한 집을 보면 19세기 후반 집이 아닌 최근
에 지어진 것처럼 너무 화사한데, 이는 2011
년 후반에 종로구청의 지원을 받아 해체/보수
했기 때문이다. 보수도 좋지만 그로 인해 고
색의 내음은 죄다 증발해버렸다. 오히려 지방
문화재 등급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16-8
(북촌로 67-4)

▲  굳게 입을 봉한 김형태 가옥 대문

 

재동초교와 김형태가옥 중간에는 돈미약국이
있다. (북촌한옥마을 입구 마을버스 정류장)
여기서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안쪽으로 인
도하는 '북촌로11길' 골목길이 있는데, 북촌
나들이에서 그 길은 꼭 둘러보기 바란다.
이곳에는 북촌4경과 5경, 6경, 7경, 8경, 이
준구 가옥, 북촌동양문화박물관 등 북촌의 주
요 꿀단지들이 숨겨져 있고 북촌의 다른 부분
의 비해 한옥의 밀도가 아주 높다.

이곳은 북촌이 뜨던 초창기부터 관광객과 나
들이객들의 발길이 많았고 지금도 늘 미터지
지는데, 안국역에서 가장 빠르게 삼청동길을
이어주는 길이기도 하며, 나도 북촌에서 처음
거닐던 곳이 바로 이 북촌로11길 주변이었다.

▲  북촌로11길에 있는 오래된 회화나무

 

돈미약국에서 북촌로11길을 3분 정도 가면 하늘 높이 솟은 회화나무(회나무)가 마중을 한다.
그는 200년 정도 묵은 이곳의 정자나무로 높이는 약 20m 정도 되는데, 나이가 지긋함에도 그
흔한 보호수 등급도 받지를 못했다. 게다가 그는 집 뜨락이나 조금은 독립적인 공간이 아닌
집과 집 사이에 비좁은 틈에서 샛방살이처럼 지내고 있어 숨이나 제대로 쉴련지 뿌리나 기둥
이 마음껏 자랄 수나 있을련지 걱정이 들 정도이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계속 직진하면 북촌5/6/7경으로 이어지고, 왼쪽 좁은 길로 가
면 북촌4경으로 이어진다. 북촌5/6/7경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지만 4경은 발길도 적고 한
적한 편이다.
북촌4경은 가회동 31번지 언덕으로 그곳 골목길은 매우 좁다. 허나 지대가 조금 높아 북촌5/
6/7경과 가회동 일대 한옥들의 지붕이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은 그런데로 괜찮으며, 특히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이준구 가옥(북촌6경 동쪽)의 모습을 유일하게 살필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4경 골목은 북쪽으로 향했다가 동쪽으로 90도 휘어지고(여기서 직진하면 막다른 골목) 남쪽으
로 다시 90도 휘어져 회화나무와 북촌5경 남쪽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4경으로 들어가는 입구
에서 4경 골목길로 들어가지 않고 서쪽으로 조금 경사가 각박한 고개를 넘어가면 북촌로5나길
로 이어지는데. 그 고갯길 남쪽에는 높다란 석축과 철책이 둘러져 있다. 그 철책 너머가 바로
정독 도서관이다.


▲  북촌4경 입구에서 삼청동길, 북촌로5나길로 넘어가는 고개
(왼쪽 축대와 푸른 철책 너머가 바로 정독도서관)

▲  북촌로11다길 주변 기와집들 ①

▲  북촌로11다길 주변 기와집들 ②

▲  북촌4경 골목길 (가회동 31번지 주변)
이곳에서 오른쪽 담장 너머로 펼쳐진 한옥의 끝없는 물결을 조용히 살펴보자.
(북촌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므로 정숙과 청결을 지키기 바람)

▲  북촌4경에서 바라본 북촌 가회동 한옥들 ①
과거와 현재가 각각 2/3, 1/3씩 사진 화면을 채운다

▲  북촌4경에서 바라본 북촌 가회동 한옥들 ②
여기도 완전 한옥 투성이이다. 그런데 저 멀리 보이는 푸른 지붕은 무엇일까?

▲  푸른 지붕의 주인공, 이준구(李俊九) 가옥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호

북촌6경 동쪽 언덕 위에 푸른 지붕의 집이 있다. 한옥의 고풍스런 물결이 넝실거리는 북촌의
한복판에 뜬금없이 이질적인 양옥이 있어 두 눈과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데, 그는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이준구 가옥이다.

이 가옥은 1938년에 지어진 2층 양옥으로 집을 짓는데 쓰인 재료는 매우 비싼 것을 사용했다.
개성(開城) 송학에서 신돌(화강암)을 들여와 지었으며, 프랑스산 기와로 푸른색의 뾰족 지붕
을 입혔다. 딱 봐도 상류층의 냄새가 역하게 풍기는 서양식 부잣집 가옥으로 이 정도의 집을
지을 정도면 꽤나 돈을 주무르던 사람일 것이다. 그의 대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
지만 제발 친일 관련 졸부가 아니기를 바란다.

집을 둘러싼 벽은 벽돌식으로 모양을 냈고, 출입문은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의 아치형으로 만
들었다. 그리고 여러 곳에 격자무늬 창을 내었고, 높이 굴뚝을 내어 멀리서 보면 오래된 성당
처럼 보이기도 하며, 뜨락에는 정원수와 석탑을 세워 집을 수식한다.
현재 이준구란 사람이 소유하고 있어 문화재 지정 명칭도 그의 이름을 넣었으며, 이 집 주변
에 여러 채의 건물을 두었다. 또한 건물을 포함한 대지가 넓고, 밑에는 차고(車庫)까지 두고
있는데, 집 대문은 졸부의 폐쇄성이 드러난 듯, 거의 작은 성문(城門) 만하다. 또한 언덕 위
에 자리하여 북촌 한옥들을 바라보고 있어 자리도 매우 좋다. 단 개인 집이다보니 내부 관람
은 거의 불가능하며, 앞서 둘러본 김형태 가옥은 길가에서도 대충 보이긴 하지만 이곳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북촌4경 장소가 아니면 집을 보기도 힘들다. 또한 북촌 금싸라기 땅에 있어
집값도 거의 수십 억을 호가할 것이니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이 집은 조금은 세련되고 양호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호라는 괜찮은 등
급을 지녔다. 지정번호가 1호 다음인 2호로 인지도와 상징성도 꽤 큰 편인데, 굳이 이 집이 2
호로 지정될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정 번호는 가치별로 매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일
련번호로 숫자에는 별 의미는 없지만 그만큼 가치를 일찍 인정받아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무슨 기준으로 그리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집은 2호란 숫자가 어울리지는 않아 보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31-1 (북촌로11가길 49)


▲  북촌4경 동쪽 골목길


 

♠  북촌5,6,7경, 북촌로5나길 주변

▲  북촌5경

북촌5경과 6경은 같은 골목길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5경은 밑에서 6경이 있는 윗쪽을 바라보
는 것이고, 6경은 윗쪽(이준구 가옥 서쪽)에서 5경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는 것이다. 5/6/7경
구역은 북촌에서 한옥이 제일 많고 또한 한옥 비율이 가장 높은 곳으로 이 주변은 죄다 한옥
이다.

5/6경은 북촌이 속세에 널리 알려진 초창기 시절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았던 곳으로 옛 골목길
과 한옥의 경관이 잘 남아있어 북촌에서 꼭 발자국을 남겨야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
다는 이곳의 제일가는 명소이다. 천하의 사람을 싹 모아놓은 듯, 늘 관광객들로 미어터져 사
람이 없는 한산한 풍경을 찍는 것은 거의 어렵다.


▲  북촌6경

북촌5경의 반대가 북촌6경이다. 5경에서는 언덕진 골목길을 중심으로 6경 주변 한옥만 보였지
만 6경은 5경보다 조금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조망이 조금은 좋다. 골목길을 사이로 양쪽에
자리한 한옥 지붕 사이로 천하 최대의 대도시 서울 도심의 전경이 펼쳐지며, 처마 끝 사이로
보이는 도심의 전경은 이곳의 백미로 북촌 관련 자료에 꼭 등장하는 유명 명소이다.


▲  북촌6경에서 이준구 가옥으로 이어지는 골목

▲  이준구 가옥 앞에서 바라본 북촌6경
이준구 가옥은 성곽처럼 높다란 석축 위에 숨겨져 있는데, 석축에는 담쟁이덩굴을
비롯한 온갖 덩굴들이 서로 협동심을 발휘하며 완전한 녹색 벽으로 만들었다.

▲  이준구 가옥에서 북촌5경으로 내려가는 골목길

▲  북촌7경 골목길 (가회동 31번지)
북촌7경은 북촌5,6경의 골목길보다 조금은 좁은 소박한 골목으로 마치 어린 시절
친구들과 뛰어놀던 동네 골목길을 떠오르게 한다.

▲  북촌7경 골목길 (위에서 바라본 모습)

▲  대나무를 지닌 북촌7경의 어느 기와집
대문 옆에 조촐하게 보금자리를 닦은 대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비록
크기는 작지만 이렇게 대나무밭을 보다니 두 눈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북촌동양문화박물관 앞에 심어진 맹사성(孟思誠) 집터

조선 초기에 황희(黃喜)와 더불어 청백리(淸白吏)를 다투었던 맹사성(1360~1438)의 집이 동양
문화박물관 서쪽에 있었다. 그는 신창(新昌)맹씨로 고향은 아산이며, 자는 자명(自明)과 성지
(誠之), 호는 동포(東浦), 고불(古佛)로 고려시대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을 지낸 맹희도(盟
希道)의 아들이다. 또한 고려의 마지막 보루 최영(崔瑩)의 손서(孫婿)이기도 하다.

1386년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해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되었으며, 전의시승(典
儀寺丞), 기거랑(起居郎), 사인(舍人) 등을 지내고 수원판관(水原判官)을 거쳐 내사사인(內史
舍人)이 되었다.

조선으로 강제로 하늘이 바뀐 후,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되었고, 정종(正宗) 때 간의우산기상
시(諫議右散騎常侍). 태종 때에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 동부대언(同副代言), 이조참의(
吏曹參議)를 지냈으며, 1407년에는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어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
에 가는 세자(양녕대군)의 시종관(侍從官)으로 따라갔다.
1408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태종의 사위인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의 죄를
묻고자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잡아 족친 사건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태종은 크게 뚜껑이
폭발하여 맹사성을 죽이려고 했으나 성석린(成石璘)의 변호로 죽음은 간신히 면하고 파면당했
다.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判忠州牧使)가 되었는데, 마침 예조(禮曹)에서 그가 음률(
音律)에 정통해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는 작업에 필요하다며 서울로 부를 것을 건의했으
며, 하륜(河崙)도 음악에 정통한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해 악공을 가르치도록 건의했다.

1416년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고, 이듬해에 생원시(生員試)에 시관(試官)이 되어 100명을
뽑았으며, 그해 부친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청했으나 태종은 이를 거부하고 대신 역마(驛馬
)와 약을 내리며 호조판서로 삼았다. 허나 그래도 사직을 원하자 왕은 그의 고향을 고려해 충
청도 관찰사(觀察使)를 제소하여 부친을 봉양하게 했다.

1419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고, 1421년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역임하였으며,
1427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우의정을 지낼 때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 감관사(監館事)
가 되어 태종실록을 감수했다.
실록이 완성되자 세종(世宗)이 한번 읽어보고 싶다고 청했다. 허나 그는 '전하께서 실록을 보
시고 그 내용을 고친다면 후대 왕들이 이를 본받게 되니 사관(史官)들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뢰니 세종은 할 수 없이 고집을 꺾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432년 좌의정(左議政)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은퇴했다. 허나 나라에 중요
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를 찾아 자문을 구했다.

맹사성은 성격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그리 엄하진 않았다고 한다.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
도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서 맞아들였으며, 윗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가 돌아갈 때
도 공손하게 배웅하고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집으로 들어왔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늙은 부친을 위해 벼슬을 사직하려고 했고, 청백하고 검소한 것은 타
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살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식량은 녹봉으로 받는
쌀로 때웠으며, 고향인 아산에 내려갈 때나 외출을 할 때는 소를 타고 다녔는데, 의복도 남루
하여 그를 몰라보고 함부로 대했다는 일화가 여럿 전해온다. 그럴 때는 맹사성은 그저 웃으며
'맹고불(자신을 일컫는 말)이 소를 타고 고향에 가오' 그러며 지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으며,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는 과단성이 있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그저 평범한 골목 같은 북촌로11다길 주변
이렇게 하여 초여름에 벌인 북촌 산책은 마무리를 짓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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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숲과 계곡, 폭포, 옛 별서 유적이 어우러진 ~~ 부암동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 서울 도심 속의 아름다운 별천지,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늦가을 나들이 '



늦가을이 거의 저물어가던 11월 끝 무렵에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백사골)을 찾았다. <본글에서 '백사실=백사골'임>

백사실은 서울 장안에서 가장 흠모하는 곳의 하나로 2005년 5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
시키며 처음 발을 들인 이래 매년 6~7회 이상 발걸음을 하고 있다. 그렇게나 많이 찾았으
면<지금까지 80번은 넘게 찾은 듯> 정말 지겹고도 남음이 있을텐데 그에게 제대로 중독된
것일까? 돌아서기가 무섭게 또 들어가고 싶은 곳이다.
 
우선 도심 속의 전원 마을, 부암동(付岩洞)의 여러 명소(☞ 관련글 보러가기)를 둘러보고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弘濟川) 다리를 건너 '세검정로 6다길' 골목으로 들어섰다.
백사실의 눈부신 인기를 보여주듯 그를 알리는 이정표가 자주 비춰주니 길치들도 조금 마
음을 놓고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백사실로 들어가는 골목이 조금 복잡함)
골목길 끝에 자리한 빌라 옆으로 높게 펼쳐진 계단을 오르면 혜문사입구인데 여기서 오른
쪽으로 야트막한 길을 넘으면 바로 백사실의 남쪽 정문인 현통사와 백사폭포(동령폭포)가
모습을 비춘다.


▲  혜문사입구 골목길에서 바라본 서울의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산악 분지(盆地)이다.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산길
저곳을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백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두근두근 백석동천(백사실)의 속살로 들어서다.

▲  현통사 밑에 자리한 백사폭포(白沙瀑布, 동령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 밑에 새하얀 반
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그의 매끄러운 피부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별천지를 꿈꾸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
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수려한 멋은 별로 없다. 그냥 수수하게 생
긴 폭포로 하얀 반석(盤石)과 썩 어우러져 제법 수려한 멋을 풍기면서 백사골에 대한 첫 인상
을 긍정적으로 인도한다.
서울 도심에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로 나름 가치가 높으며, 만약 설악산이나 주왕산(周王
山) 등 1급 폭포가 즐비한 산에 붙어있었다면 그리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
람이나 폭포나 때와 장소를 잘 만나야 된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멋대로 갖다붙인 것인데, 원래 이름은 동령폭포
라고 한다. 하지만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에 자신의 이름마저 계곡에 떠내려보내면서 그의 이름
은 아득히 잊혀지고 말았다.


▲  백사폭포와 하얀 반석

늦가을이라 폭포수가 가늘고 누런 낙엽이 짙게 깔려있지만 비가 많이 오면 폭포수도 제법 패기
를 보인다. 한여름에는 동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 되어주며, 여름 제국(帝國)에
대항하고자 찾아온 피서객들이 돗자리를 피며 한숨 자거나 쉬는 등, 도심 속의 조촐한 꿀피서
지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  낙엽은 물론 가을까지 무심히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아랫 못

겨울 제국의 시련을 견뎌내고자 백사골 나무들이 속절없이 털어낸 낙엽들은 폭포 주변에 수북
히 쌓여있다. 이들 낙엽은 폭포 밑에서 마지막 정모를 즐기며 올해도 변함없이 도래한 겨울을
원망한다. 몇몇 낙엽은 한이 맺혔는지 폭포 중간에 철썩 달라붙어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가고 싶겠지만 매정한 자연은 그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며 그렇게 발버
둥을 치다가 결국 힘이 다해 떠내려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런 낙엽의 발악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실감한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 냇물은 큰 세상을 꿈꾸며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 담(潭)에서
큰 세상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다시는 오지 못할 그리운 고향, 북악산(백악산)의 그
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다리 밑 조그만 폭포를 통해 아랫 못으로 흘러가며 여기
서 다시금 바위를 타고 홍제천으로, 한강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없는 여행을 떠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늦가을의 절정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열심
히 매뭇새를 다듬는다. 저들의 처절한 아름다움 뒤에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잔잔
한 수면에는 낙엽들이 두둥실 떠 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백사골에 머문 늦가을도 낙엽
을 데리고 계곡을 통해 저 밑으로 쿨하게 흘러간다.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골 밑에 둥지를 튼 현통사는 조그만 현대 사찰로 20세기 후반 큰 승려의 하나로 추앙을 받
는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이다. 백사골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만들만한 구석도 없기 때문
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과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지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덩어리로 몰려있는
데, 대웅전은 서남쪽을, 나머지는 남쪽과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

인적도 거의 없는 적막한 산사에 백사골 산바람이 살며시 들어와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
짝 희롱하고 그 희롱에 놀란 풍경은 그윽한 풍경소리를 풍기며 주변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  늦가을이 깃들여진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자연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대자연이 그린 아름다운 작품, 백사골(백사실계곡) - 별서터 서쪽

간만에 백사골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으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한 내음
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골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1폭의 담채
화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몸살이 날 지경인데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
들 이곳의 풍경을 완전히 표현하는 것은 힘들 것이며,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
는 것은 어쩌면 백사골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탄성만 연거푸 지르며 조용히 백사골에 묻혀간다.
 
숲에 깃든 순결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 땅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롱뇽, 가
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
점 사라지고 이제 이곳이 그들의 몇 안되는 낙원이 된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
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하
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저런 무성한 이
끼를 만나는 것은 보기가 정말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서울 도심의 별천지처럼 청정함을 여
실히 간직하고 있다.


▲  별서터 북쪽 계곡에 드러누운 바위들
오른쪽 하얀 바위에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만들 때
돌을 떼던 흔적이다.


▲  별서터 연못 옆을 지나는 백사골 (별서터 징검다리)

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나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계곡에 둑
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린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별서 주
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 직전 갈림길(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뒤쪽(서남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눈여겨 살펴보자. 그 언덕 정상에 커다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면 글씨가 화석처럼 박혀있는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중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별서터(연못터 주
변) 바로 서남쪽 산자락이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숲에 거의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
람들은 그의 존재감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들이 강제로 벌거벗는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그나
마 쉽게 눈동자에 들어오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마저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닦고 그 안에 '月巖' 바위글씨를
를 다졌는데, 백사실의 존재를 처음으로 언급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정되
나 확실한 것은 없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필 중의 명필
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늦가을과 겨울을 제외하면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하기가 어렵다. 백
사골의 경치를 즐기러 온 선비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확트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
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굳이 이광여가 아니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
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으며 잔을 걸치고 싶다.


 

♠  북악산(백악산)에 숨겨진 비밀의 옛 별서 유적,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전경

한양도성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나서면 여기가 정녕 서
울일까?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
암동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감싸인 분지로 서
울의 일부라기보다 산간 마을이나 산골에 묻힌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이 바로 지
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지형 탓도 있지만 나라의 예민한 곳이 동
네 주변에 많아 개발의 천박한 칼질을 잠재웠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도성 밖 경승지로 꼽혔던 부암동은 양반과 왕족의 별서(別墅, 별장) 및 피서지
로 인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로 형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완전히 털려 강제로 사라진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武溪精舍),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
(石坡亭), 인조반정(1623년)과 관련이 깊은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의
장소로 닦았던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했던 그들의 메아리를 아련히 전해준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인 백사골(백사실)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의 별장이 있었다 하여 백사실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다고 하며, 백사골
과 별서터를 하나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북악산(백악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북악산의 바위 명소란 뜻인데, 그만큼 하얀 바위와 반석이 많고 경치가 고왔다. 그리고 동천<
洞天, 동학(洞壑)이라고도 함>은 양반과 선비들이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붙어주는 경승지의 명
예로운 칭호이다.

이곳은 백석동천 외에 백사실(계곡), 백사골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백석정(亭), 백석실(
室)이란 옛 이름도 있다. (백석정은 19세기에 주로 쓰였음) 옛 이름을 제외하고 어느 이름을
쓰던 그건 각자의 취향이나 백사실, 백사실계곡, 백석동천으로 많이 불리며 백사골은 백사실계
곡을 줄여서 표현한 이름이다. (나는 백사골이라 많이 부름)

▲  연못 한쪽에 자리한 정자터

▲  사랑채터

백석동천 별서는 1830년경에 지어진(또는 중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600평 규모의 별서이다. 누
가 지었는지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으나 백석동천과 관련된 최초 기록인 월암 이광여(1720~
1783)의 이참봉집(李參奉集)에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이 조
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
이 있어 현재의 별서 이전(17~18세기)부터 조그만 집이 이미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2012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이곳을 매입하여 별장으로 삼았음이 밝혀지면서
백사실의 비밀이 다소 벗겨졌다. 추사의 문집인 '완당전집(阮堂全集) 권9'에 '선인이 살던 백
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나의 북서(北墅, 북쪽 별서)에 백석정 옛터가 있다'
등의 내용이 있
고 그곳과 관련된 시가 여럿 발견되어 추사가 백석정 자리를 구입하여 크고 아름답게 다시 지
었음이 밝혀졌다. 하여 지금까지 전해오던 1830년 창건설(또는 중건설)의 주인공이 바로 추사
로 여겨진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안채는 4
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
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 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전쟁 때 정자가 파괴되고 그 휴유증으로 연못
마저 그 기능이 상실되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장의 흔적, 바
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몰아넣던 백석동천은 2006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 사람들만 찾
던 그들만의 숨겨진 명소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조용히 잠들어 있
던 그는 2005년 문화재청으로부터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
으로 아름답게 평가를 받으면서 무명 수준에서 바로
적 462호
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변변한 안내문과 이정표조차도 없었으며,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
정표가 설치되었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싹 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
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에서 바라본 연못

▲  사랑채와 안채터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꿀단지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
거니와 여름의 녹음(綠陰), 늦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모두 아름다
운 경승지이다. 숲이 매우 삼삼하여 강렬한 햇살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아 백사골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극락이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터를 둘러보며 옛 사람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으
로 살았을까? 그려보면서 그들의 생활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체험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2006년 이후 이곳의 존재감이 널리 퍼져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이 늘어나면서 고적했던
분위기는 조금 떨어진 것 같다. (평일은 그래도 한적함) 게다가 정신줄을 놓은 사람까지 불순
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돌에 낙서를 하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계곡을 뒤집거나, 수목을 괴
롭히는 행위가 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이 절실해 보인다. 아직은 괜찮다고 해도 지키는 사람도
제대로 없는 첩첩한 산골이라 방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2013년 종로구청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뇌에 주름 잡힌 소리를 일삼아 크게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 개소리는 쏙 들어갔지만 어설프게 복원하려 들지 말고 제발 지금의
모습 그대로 두길 바란다. 비록 폐허의 상태여도 현재 모습이 더 운치가 진하며 옛터 위에 상
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가 있다. 끝으로 개인적인 욕심이지만 이런 곳은 대중적인 명소로
너무 노출되는 것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남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미 그러기에는 그의 존재감이 한라산 꼭대기에 붙어있을 정도로 커버렸다.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찾아가기 (2017년 7월 기준)
* 백사실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
  장 쉽고 가까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이며, 하림각은 경사가 각박하고, 창의문은 거리가 길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AW컨벤션센터) 길 건너편에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다. 그 길(백석동길
   )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면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
   내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자하문터널 방면)으로 가면 백석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 → 신영교를 건너 백석동천 이정표를 따라 '세검정로
   6다길'로 쭉 올라감 → 혜문사입구 → 현통사 → 백사골(백석동천)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4호
   선 길음역(6,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3번 시내버스 이용 → 세검정초교 하차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서쪽(부암동 방향)으로 조금 가면 창의문앞 교차로이
   다. 여기서 오른쪽 길(북악산길 방향)로 꺾어서 백석동길 골목(부암동 산복길)으로 진입해
   산모퉁이와 지하우스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직진하여 계속 들어가면<왼쪽 길
   로 가도 됨> 그 길의 끝에 뒷골마을(능금마을)이 있다.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
   면 바로 백석동천이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
  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 산25일대


 

♠  백석동천 사랑채터

▲  사랑채터 언덕 밑 (백석동천 안내문)

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이 오롯하게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클로 계단 돌이 좀 헝클어져 있으나 경사가 완만하여 계단의 역할은 그리 녹슬지 않
았다. 반면 연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놓았는데 높이
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를 두었는데, 아쉽게도 생전의 사진
도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영구히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건물터와 주춧돌은 잘 남아있
으며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난 흔적까지 더해 산듯하게 정비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선 별서 주
인이 연못을 바라보며 독서를 하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이 오면 여기서 곡차와 산해
진미를 대접하거나 시 1수 주고 받았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름) 사랑
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이 남아있다.


▲  선명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

▲  석축 위에 세워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바로 옆에서 바라본 사랑채터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 때 발견된 것으로 연못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낙엽과
잡석만 가득 널려 황폐의 극치를 보여준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이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어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
리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완전히 생매장을 당했다. 그
러다가 2010년 이곳이 서울시와 문화재청의 조사 대상이 되면서 옥의 티 같은 배드민턴장을 밀
어버렸으며,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습했다. 이후 2011년 3월 문
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묻었다.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담의 흔적이 여럿 남아있으며, 비록 기와를 지닌 사랑채와
안채는 세월이란 용광로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
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었을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헝클어진 남쪽 돌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를 이어주는 서쪽 돌계단


▲  사랑채 뒷쪽 석축과 돌담

사랑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
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된다. 석축 윗쪽에는 별서의 경계를 가르던 돌담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상당수 허물어지고 지금은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북쪽까
지 돌담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사랑채 뒷쪽 돌담장의 흔적

▲  사랑채와 안채터에서 끄집어낸 기와조각과
그릇 파편


 

♠  물 대신 낙엽과 잡초로 가득한 연못과 정자터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

사랑채터에서 바라보이는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떠있는 물 대신 나무들이 미련없이
떨군 낙엽들이 가득 연못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막 보금자리가 되었다. 세월의 자비 없는 흐름
은 연못의 구성원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옛날에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보름달처럼 둥그런 연못을 채웠으며, 지나가던 햇님과 달님이
그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무들도 연못을 거울 삼아 매무새를 다듬었다. 허나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던 이곳까지 총탄을 휘날려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기능이 상실되어 껍데기만 남았다.


▲  연못에 들어가서 바라본 사랑채터와 동쪽 돌계단

비록 살아있는 연못은 아니지만 비가 많이 오면 물이 가득히 고여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
찾기도 한다. 연못이 넓기 때문에 이때만큼은 조그만 조각배를 하나 띄워놓고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였다면 단단한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연못, 허나 저 연못에도 자연의 생명력
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나고 있다. 게다가 빗물이 모이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데로
연못티를 풍긴다. 잡초로 덥수룩한 연못의 여름 모습도 나름대로 초록의 아름다움을 띄고 있으
며 늦가을에는 낙엽이 한가득 공간을 채우면서 누런 연못이 된다.

연못의 둘레는 약 100m 정도로 그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짙은 그늘이 연못을 덮어주고 있으
며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울창한 삼림은 이곳을 찾
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은 그
다지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허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마음으로 그 허전함을 달래주고 싶구나. 그
렇다고 정자를 복원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시를 읊거나 벗들과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
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아는 사람이면 기생들도 불러 정자 안에서 얼씨구~ 춤과 노래, 시를
즐겼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몸살이 날 정도로 부러울 뿐이다. 이래서 무슨 수를 쓰든
권력층이 되야 되고 부자가 되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과 상상으로만 끝나버린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20m에 이르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이는 대략
150~200년 정도로 여겨진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또는 매입 기념으로 심었을지도 모
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원
을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쯤이나 올련지...?


▲  백석동천 별서터 전경

▲  연못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늦가을)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

백석동천 별서터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허나
통제의 줄이 느슨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히 여름에는 피서객들로 정신
이 없어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우회하여 백사골 상류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는데, 2012년에 주변 산길
을 정비하고 산불방제 장비를 갖춘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을 심어 소소한 볼거리를 선사하
고 있다. 허나 솟대 돌탑은 백사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이다.
돌탑을 지나면 소나무숲과 처절한 아름다움을 보이며 늦가을에 잠긴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
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부암동 주택가
방면)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별서터 입구에 세워진 오리 솟대 돌탑
예로부터 오리 등의 새는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솟대 꼭대기에 오리 모양을 달아두어
하늘과의 연락을 꾀했다.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층 돕고 있는 호젓한 은행나무숲길

▲  아직도 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 산길로 가면 '白石洞天'이란 문신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이란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관이 아름다운 경승지에 붙여진 이름으로 아무 산천에나
주어지는 이름이 아니다. <백석동천의 유래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음>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썼는지 북악산 귀신도 모른다. 아
마도 월암 바위글씨와 비슷한 시기가 아닐 듯 싶은데 글씨가 정말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
다. 옛 사람들은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저렇게 낙서를 남기는 습성이 있었는데, 백사골 역시
그들의 낙서가 1개도 아닌 2개나 깃들여져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이다.


▲  백사골의 그림 같은 숲길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외나무다리 방향)

 새하얀 반석들이 가득 펼쳐진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동쪽)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뒷골마을(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길을 조금 가면 잠시 떨어졌던 백사
골 냇물이 나타난다.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과 푸른 이끼 옷을 입은 바위까지 줄줄이 이어지면
서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이나 금강산 등 쟁쟁한 큰 산의 계곡만은 못해도 서울
도심에 저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을 탄압(?)하는 현장이 되고 시민들이 소풍과 나들이로
이곳에 들어와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
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백사골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는 외나무다리

백사골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나타나 깊은 산골의 고적
하고도 정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2개의 목재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도
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하지만 다리 길이도 짧고 다
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
울 필요는 없다.

사람도 많고, 차량도 많고, 키다리 빌딩도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기만 한 서울 도심 속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백사골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
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만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 방면)
모든 것을 내버린 나무들이 하늘이 두려운지 아니면 벌써 노년에 들어선 건지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였다.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 직전)

외나무다리를 지나면서 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좁아진다. 계곡 오른쪽에
는 생뚱맞게도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을 지
나면 집들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 종로구가 분명
한데 풍경은 완전히 강원도 두멧골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에 벌인 부암동 백사실(백석동천)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 이후 내용은
분량상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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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 (백석동천, 백사골)

 


' 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


여름이 한참 흥이 오르던 7월 첫주에 후배들과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백사골)을 찾았다.
백사골은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이자 서울에서 가장 흠모하는 곳으로 정처 없는 내 마
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곳이다. 2005년 5월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며 처음 발을 들인 이
래 매년 3~4번 정도 발걸음을 이으면서 그곳에 대한 변치 않은 마음을 비추었다.

지하철 경복궁역(3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1711번 시내버스(국민대↔공덕역)를 타고 세검정
초교에서 내려 홍제천(弘濟川)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편의점 옆으로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는데 그의 지시에 따라 주택가 골목(세검정로6다길)을 비집고 들어가
면 빌라 옆으로 긴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혜문사입구인데, 여기서 오른쪽
으로 꺾어 산동네 골목길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백사골의 남쪽 관문인 백사폭포
와 현통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  혜문사입구에서 바라본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
저 고개를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뽀얀 피부의 백사폭포가 나타난다.


♠  서울 도심 속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 작지만 멋드러진 하얀 반석이
일품인 백사폭포(白沙瀑布)

▲  피서의 성지(聖地) 자격이 충분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문짝에 그려진 현통사 일주문(一柱門) 밑에는
하얗고 뽀얀 피부를 지닌 반석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 매끄러운 바위면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별천지를 꿈꾸
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흔든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이곳은 서울 도심에선 정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로 그 가치는 단연 높다. 만약 쟁쟁한 폭포들
이 많은 설악산(雪嶽山)이나 순창 강천산(剛泉山) 같은 곳에 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아마도 그
저 그런 폭포로 주목도 못받았을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자리 운도 중요하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장쾌한 편은 아니다. 수수하고 조촐한 모습
이지만 나름대로 수려한 멋을 풍기며 백사골에 대한 첫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인도하며 그곳에
대한 기대감까지 크게 드높인다.
폭포를 빚은 너른 바위는 돗자리를 피고 한숨 청하고 싶은 잘생긴 반석(盤石)으로 청정한 계곡
물이 끊임없이 바위를 타고 내려와 수채화를 자아낸다. 특히 비가 많이 와서 계곡의 수량이 많
을 때는 시원한 멋도 풍기는데,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뒤흔들 정도로 패기가 넘쳐 귀신도 놀라
도망치게 만든다.

백사골이 무명이던 시절에는 동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나 동네 사람들의 피서지
로 주로 쓰였으나 속세에 강제로 알려지면서 폭포 주변에 자리를 피고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
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  옆에서 본 백사폭포 - 거의 50도 각도로 이루어진 바위 미끄럼틀을 타고
백사골 냇물은 속세로 흘러간다.
 

▲  백사골의 냇물과 낙엽을 속절없이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서쪽 못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 냇물은 큰 세상을 꿈꾸며 졸졸졸~♪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못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다리 서쪽에 있는 못에서 심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고향
을 등지고 큰 세상을 향한 장대한 여정을 떠난다. 한번 폭포를 내려왔으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기에 오로지 앞만 보고 흘러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아랫폭포를 타고 홍제천으로 내려가 한
강(漢江)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이 없는 여행을 떠난다.

늦가을이 되면 겨울 제국(帝國)의 핍박으로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낙엽들이 폭포를 타고 속세로
내려가거나 그 주변에서 저항하며 고향으로의 컴백을 꿈꾼다. 허나 자연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
는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밑으로 흘러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런 낙엽의 발
악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여름의 절정을 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저들의 푸른 아름다움 뒤에는 늦가을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있고, 그 뒤
에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겨울 제국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  급하게 흘러가는 백사골 하류 (아랫폭포)

서쪽 못은 폭포 못보다 조금 넓은 편인데, 그곳에 모인 물은 주택가가 있는 서쪽으로 거의 30~
40도 경사를 이룬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아주 빠르게 내려간다. 각박한 경사를 이룬 바위를
타고 흐르니 폭포로 봐도 무관할 것이다. 폭포의 길이는 150m 남짓으로 강수량이 많아 수량이
많으면 그 흐르는 소리가 멀리서까지 귀를 때린다.

폭포가 흐르는 바위는 넓게 반석을 이루며 제법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데, 폭포 주변을 가득 메
운 주택들만 없었다면 설악산이나 금강산(金剛山) 못지 않은 풍경을 자랑했을 것이다.


▲  주택들 사이를 흐르며 볼품없는 꼴이 되버린 백사골의 그늘

▲  백사골의 생매장 현장 ~ 자하주택 북쪽(세검정로6길)

서울 제일의 경승지인 백사골은 자하주택 북쪽에서 어두컴컴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한다. 지하에
묻힌 백사골은 약 150m 정도 흐르다가 홍제천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자연이 빚은 얼큰한 작
품이 이런 수모를 당한 것은 개발의 난도질 때문으로 나무와 계곡만 있던 이곳까지 주택들이 마
구잡이로 들어와 백사골 아랫폭포의 목까지 조르고 있다.

차라리 주택가를 들이밀지 말고 서울 제일의 피서지로 명성이 높았던 인근 세검정(洗劍亭)과 함
께 장안 제일의 명승지로 가꾸었다면 더욱 빛을 발했을텐데, 개발의 난도질은 그런 여유도 주지
않고 백사폭포 밑까지 올라온 것이다. 다행히 난도질은 폭포 앞에서 멈추었지만 나중에 반드시
계곡 주변 집을 밀어버리고 2012년 여름에 복원된 인왕산 수성동(水聲洞) 계곡처럼 옛 모습을
되살렸으면 좋겠다. 적어도 백사폭포에서 홍제천 합류지점까지 말이다.
이 땅에서 자행되는 개발의 칼질은 너무나 천박하다. 그 칼질에 목숨이 다한 명소가 어디 한둘
이랴.?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玄通寺)는 근래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
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로 추앙받는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로 백사골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1~2번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할만한 매력도 없기 때문이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
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다. 대웅전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남쪽을 향한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골의 시원한 산바람은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유발시켜 경내에 깃들여진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  백사골의 속살로 들어서다

▲  소나무가 마중하는 백사골 산길

현통사를 지나면 제일 먼저 솔내음이 그윽한 소나무 숲이 반긴다. 마치 속세를 뒤로 하고 신선
의 세계에 입산한 듯, 아랫세상과 공기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그것도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말
이다. 시원하고 청명한 산바람에 속세(俗世)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머리와 마음이 말끔히 정화
되는 것 같다.


▲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의 끝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고,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나그네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졸졸졸 흘러가는 청정한 백사골(백사실계곡) <현통사와 별서터 중간>

▲  백사골 중류 (별서터 직전)
사진 정면에 보이는 큰 바위에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만들 때
돌을 떼던 흔적이다.

백사골에 발을 들이면 한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의 풍경을 완벽히 표현한다는 것은 힘들 것
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이곳을 대자연에 대한 명예
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감히 말자랑, 글자랑을 하지 않고 그저 탄성만 연거푸 지
르며, 조용히 백사골을 거닌다.

숲에 깃들여진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길
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롱
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서울 관내에서
는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이곳은 이제 그들의 몇 남지 않은 낙원이 되었다. 만약 그
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동물과 신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 자
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순결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처럼 청정함과 순수함
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백사골은 백사실, 백사실계곡으로 널리 불리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상관은 없다. (본글에서는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혼용했음) 이곳의 정식 지명은 백사실로 거기에 계곡을 붙여 백사실계곡
이라 불리기도 한다.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의 다른 이름이며,(나는 입버릇처럼 백사골이라 부름)
백석동천은 백사골의 일부로 백사폭포와 별서터, 백석동천 바위글씨 주변을 일컫는다.


▲  백석동천 별서터 갈림길

▲  연못 곁을 지나는 백사골 중류 (징검다리)

백석동천 이정표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백
석동천의 중심인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둑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이 꽤나 묵은 나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별서 주인이 돌
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별서터로 인도하는 조촐한 돌다리 - 19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계곡에 콘크리트 둑을 쌓으면서 지금의 높이로 조정되었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 앞에 두고 오른쪽 산자락 윗부분을 뚫어지라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커다
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어렴풋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가운데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백석동천 별
서터(연못터 주변)의 바로 서쪽에 자리해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숲에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모른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
리다보면 우연히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나마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월암은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만들어 그 안에 월암(月巖
)을 새겼다. 이 바위글씨는 18세기에 백사골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바 있는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정되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
습은 가히 명필 중에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한잔 걸치러 이곳에 놀러온
양반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광
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
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
으며 함께 잔을 걸치고 싶다.


♠  북악산에 숨겨진 비밀의 별천지, 북악산 백석동천(北岳山 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서면
여기가 서울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삼각산)에
안긴 분지(盆地)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는 지방이나 고산지대의 소읍(小邑) 같은 분위기이다.
이곳은 녹지 비율이 서울에서 매우 높은 편이며, 백사골 등의 깨끗한 계곡이 살아 숨쉰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명성이 높았던 부암동은 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인
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精舍)를 비롯하
여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서울 제일의 피서지였던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
君)이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
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 백사실 계곡(백사골)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여 백사실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으며, 조선 후기부터 백사실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르고 있다.
그 이름은 하얀 피부의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붙여진 것으로 동천(洞天)이란 칭호는 경관
이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명예로운 이름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돌담의 흔적

▲  사랑채터

백석동천 별서는 19세기 초반(1830년 경)에 지어진 600평 규모의 별서(별장의 일원)이다. 누가
만들고 이곳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
채, 그리고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별서 주변에는 나무와 온갖 화초(花草)를 심
어 별서를 최대한 꾸몄을 것이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
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
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때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도 무거운 상처를 입으
면서 그 휴유증으로 연못의 기능을 잃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
장의 일부 흔적, 바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아련히 전하며, 이 정도의 별서
을 짓고 소유할 정도면 상당한 재력을 지닌 양반이었을 것이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옛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 1720~1783)의 이
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그 책에는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
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이 있어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정자나 별장 비슷한 것이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허씨의 모정을 그의 후손들이 별서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며, 19세기에
상당한 재력이 있는 사대부가 이 일대를 차지해 별서를 지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내몰던 백석동천은 2005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부암동, 신영동)
사람들만 찾아오던 동네 사람들의 숨겨진 피서지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숨어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소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2005년에 이르러 문화재청에서 이곳을 두고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우리나라의 휼륭한 전통 정원임을 인정하면서 비지정의 서러움에서
벗어나 바로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에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
동안 안내문이나 변변한 이정표조차도 없다가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정표를 설치했
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발굴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건졌다.

▲  연못에 세워진 정자터

▲  백사골 중류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
와 여름과 가을, 겨울의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절경지이다. 그중에서
늦봄과 여름에는 도심 속의 조촐한 피서의 성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부산하다.
이곳은 숲이 매우 무성하여 강렬한 여름의 햇빛도 굴복시키며 나무가 베풀어준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골의 졸졸졸~♪ 음악소리를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며 독서를 하거나 낮
잠을 청하면 정말 극락이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유적을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가 되어 신선처럼 살고자 했던 그들(주로 지배층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
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을 배워보고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꽤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발길이 나날이 쓸데없이 증가하면서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까지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돌에 흉물같은 낙서를 남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계곡을 뒤집고, 수목을 괴롭히는
등의 천박한 짓이 늘고 있어 이곳의 건강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다. 아직은 멀쩡하다고 해
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외딴 곳에 있으니 언제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
램인데 이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의 아는 사람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나의
곁에 남았으면 좋겠는데, 이미 그 선은 넘은 듯 싶다. 또한 2013년에 이르러 종로구청에서 별서
를 복원한다며 설치고 있는데, 괜히 복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비
록 폐허가 되긴 했지만 지금 모습이 더 운치가 강하고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수
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복원을 한다면 이건 그냥 두는 것만 못하다.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찾아가기 (2013년 8월 기준)
* 백사실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에서 들어가는 것이며, 하림각은 골목길 경사가 무지 급해
  오르지도 전에 맥이 빠진다. 그리고 창의문은 많이 걸어가야 된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과 자하문터널입구 정류장 사이에 백석동길이란 골목길이 있다. (백석
   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음) 그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오르면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
   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좀 가면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음)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 다리를 건너면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
   표가 있다. 그 이정표를 따라 쭉 오른다. (구기터널이나 정릉 방면에서 오는 경우는 육교를
   건너 길 건너편으로 이동한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2호선
   신촌역(6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시내버스 이용 /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
   스 이용 / 4호선 길음역(7번 출구)에서 153번 버스 이용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북쪽(부암동 방면)으로 가면 창의문3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북악산길로 가는 2차선 길로 가지 말고 왼쪽 골목길(백석동길)로 들어서
   면 부암동 산복길이다. 이 길을 쭉 올라 산모퉁이까페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서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그 길의 끝에는 능금마을(뒷골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면 백사실이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백사골까지 접근도 힘들고 주차 장소도 마땅치 않다. 대중교통이 진리이다.

★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관람정보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개구리 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
  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백사골 일대는 의자를 제외하고 어떠한 편의시설도 없다. 약수터는 능금마을 뒷쪽 산자락에
  하나 있다. (백사실약수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일대


♠  백석동천 사랑채터

▲  사랑채터가 자리한 언덕 (계곡 건너에서 바라본 모습)

▲  윤곽이 진하게 남은 사랑채터
이곳에 있었을 사랑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어디까지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이곳의 운치를 깨뜨릴 수 있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리는 백석동천 별서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
온다. 세월의 태클로 다소 헝클어져 있지만 경사가 완만하여 계단으로서의 역할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그리고 연못 쪽에도 돌계단이 하나 있는데, 다듬은 돌을 계단처럼 얹혀놓은 수수한 모
습이지만 높이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오르기 힘들다.

계단 끝 언덕에는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과 석축의 윤곽이 진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가 있다. 연
못이 잘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지어진 'ㄱ' 구조의 사랑채로 아쉽게도 생전의 뚜렷한 사진조차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남아
있으며, 2010년 발굴조사 이후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산듯하게 정비했다.


▲  2중으로 쌓은 석축 위에 심어진 사랑채터의 높다란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하여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서쪽 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계단

연못쪽으로 돌출된 사랑채 서쪽 부분은 주춧돌의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은
별서 주인의 생활공간으로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穀茶)를 대접하여 1잔씩 주고 받았을 것이다. 사랑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과 석축이 남아있는데, 별서 주인의 서재(書齋)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본 사랑채터

▲  동쪽에서 바라본 사랑채터

▲  사랑채터 옆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석조유구(遺構)로 연못(또는 우물터)으로 여겨진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스란히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푸른 잡초가 따스히 보듬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고 한다. 이후
그 자리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는데,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별서터의 건강을 위협하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대를
발굴하면서 갈아 없앴으며, 지하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
습했다. 이후 발굴을 정리하고 2011년 3월에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묻었으며, 한쪽 구석
에는 이곳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햇살을 된 주춧돌과 기와조각, 여러 돌조각을 한데 수습해 조그
만 돌탑을 이룬다.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  안채터 북쪽 구석 (평창동과 조망점으로 넘어가는 산길)
조그만 시냇물이 백사골로 흐르고 있으며, 예전에 약수터가 있었으나
오래전에 폐쇄되었다.

▲  사랑채 뒤쪽 석축과 돌담

사랑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산사태 등을 막고자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된다. 석축 윗쪽에는 별서의 경계를 가르
던 돌담이 길게 이어져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허물어지고 지금은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지 돌담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헝클어진 채 남아있는 돌담의 흔적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세월의 용광로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
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방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詩想)에 잠겼을 별서의 주인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  대자연에 의해 잠시 연못의 기능을 회복한 연못

백석동천 별서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못은 둘레가 약 100m 정도 되는 보름달처럼 큰 못이
다. 별서 주인은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장안에 솜씨 좋은 기술자를 불러 별서를 만들
고 사대부의 지위를 이용해 인근 백성을 동원하여 연못을 파고 돌과 나무를 나르게 했을 것이다.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둥그런 연못을 수시로 채웠으며, 정자터 부근에 계곡 물을 끌여들이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물이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서쪽에 수로를 파 계속 물갈이가 되도록 유도
했다.
연못과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나가던 해와 달도 그 연못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을 것이요.
주변 나무와 꽃들도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무새를 다듬고, 별서 주인은 벗을 불러 곡차와 차 1
잔의 여유를 누리며 상팔자를 누렸을 것이다.

그들이 팔자 좋게 놀던 시절(19세기 초/중반)은 천하가 한참 아비규환에 젖어있던 시기로 백성
들의 삶은 매우 퍽퍽했다. 민초(民草)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가혹한 세
금삥과 상당수 양반들의 수탈에 털려 궁색하게 살아가고 있건만 별서 주인은 다른 나라 이야기
마냥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당시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안동김씨나 풍양조씨
일가이거나 그들과 가깝던 자가 아닐까 싶음..)

별서의 주인이 골로 간 이후, 풍류의 현장이던 이곳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고, 천하를 쑥대밭으
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게 묻힌 이곳까지 총탄을 선사해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강제로
고자가 되었다. 그 이후 연못에는 물과 물고기, 연꽃 대신 잡초와 잡석만 무성하게 되었고, 늦
가을에는 나무들이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털어낸 낙엽들이 가득 연못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
막 보금자리가 된다.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연못의 구성원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  정자터 남쪽에서 본 연못과 별서터 일대

▲  동쪽 언덕에서 바라본 연못과 별서터

세월의 무상함을 진하게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백석동천 연못은 비록 그 기능은
잃었지만 자연의 생명력이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고 있다. 여름의 제국 시절이나 비가 많이
오는 경우 연못에 물이 담겨 비록 예전만큼의 위엄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찾기
도 한다. 그러니까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이지는 못하고 하늘이 내린 비에 의지해 연못의 티를
되찾는 것이다. 마침 우리가 오기 며칠 전부터 비가 많이 내려 연못에는 물이 가득했다.

수면 위에는 물을 먹고 자란 풀들이 무성하게 돋아나 초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치
늪지대 같은 분위기라 다가서기가 좀 껄끄럽다. 연못에 물이 많이 고이긴 했으나 서쪽에 뚫어놓
은 수로로 물이 빠져나갈 정도의 수량은 아니며 물의 깊이도 겨우 성인 무릎에 닿을 정도이다.
이곳에 담긴 물은 자연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머문다.
연못이 넓기 때문에 물만 더 채운다면 조그만 조각배를 띄워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나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난쟁이었다면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연못을 비롯한 별서터 일대는 나무가 울창하여 한여름에도 뜨거운 햇볕이 마음 놓고 내려오기가
힘들다. 서울 도심 속에 별천지이자 보석과 같은 곳으로 처음 왔을 때 이곳에서 받은 감동이 슬
슬 되살아난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의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삼삼한 삼림
은 이곳을 찾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의 정도는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 허나 지금은 저렇게 허
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그 허전함을 달래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정자를 복원
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연못
에 심어진 기둥 중 4개는 높이가 약 2m이며, 나머지 2개는 돌계단 옆에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곡차를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안다면 기생들을 불러 정자 안에서 팔자 늘어지게 놀았
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부러울 뿐.. 이래서 사람들은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
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일 뿐, 상상으로만 끝나기 때문이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높이가 대략 20m 되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가 약 150~200
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기념으로 심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
원을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를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
에 한풀이를 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나 올련지...?


▲  연못 우측 수로에 놓은 소박한 돌다리
길쭉한 통돌 2개를 놓는 선에서 간단하게 다리를 마무리지었다.
다리가 놓인 수로는 연못에 물을 빼는 역할을 했다.


▲  연못과 별서터에서 수습한 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쉼터
가운데 길다란 돌에 간식거리를 두고 양쪽 석재에 모여 앉아 간식이나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많이 그랬음~ 그렇다고 저기서 취사행위까지는 하지 말 것~~

▲  연못/정자터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

서터 윗쪽 계곡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
물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하여 예전처
럼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기는 그렇다. 계곡의
통제로 산길로 조금 우회해서 가야된다.
2012년에 별서터 주변 산길을 손질하면서 산불
방제 장비를 둔 붉은 색의 구제함을 두었고 이
곳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돌탑과 오리 솟대를
세워 조촐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산길을 오르면 소나무 숲이 나오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부암동 주택가 방면)으로 가
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  오리 모양이 달린 솟대와 그를 품은 돌탑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몫 돕고 있는 소나무숲

▲  백석동천 바위글씨를 간직한 집채만한 바위

▲  너무나 뚜렷한 백석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소나무숲에서 부암동 주택가로 통하는 서쪽 산길로 접어들면 '白石洞天' 4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산천에 붙여지는 이름으
로 비슷한 말로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이 백석동천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하
얀 피부의 바위와 암반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이 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월암과 비슷한 시
기가 아닐 듯 싶은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기를 꿈꾸었
던 선비와 사대부들은 경관이 뛰어난 경승지에는 저렇게 기념 낙서를 남겼는데, 백사골 역시 그
런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의 풍경이 그들을 애타게 감동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거창 수승대(搜勝臺)의 귀연암(龜淵岩,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지나치게 낙서로 도배가 된 것
도 그리 보기는 좋지 않다. 어느 것이든 적당한 것이 좋다.


▲  녹음(綠陰)에 물든 백사골의 호젓한 숲길 ▼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하리라.. 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넓적한 하얀 바위가 파노라마를 이루는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길을 조금 가면 백사골 상류가 나온다. 하얀 피
부의 넓은 반석과 이끼가 낀 까무잡잡한 바위들이 줄줄이 쏟아지면서 탄사를 자아내게 하며, 때
묻지 않은 청정한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흘러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낸다.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현장이 되고, 시민들도 이곳에 들어와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백사골은 능금마을 뒷쪽에서 시작하여 백석동천을 가로질러 홍제천으로 흐른다. 그리고 윗 사진
의 바위부터 백사폭포까지를 백석동천 구역으로 보면 되는데, 그 상류에는 더 이상 괜찮은 바위
나 옛 사람들의 흔적은 나오지 않는다.


▲  백사골 상류 - 이 부분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계곡을 건너 산길로 들어서면 백사골 동쪽 능선과
백사실약수터로 이어진다.

▲  능금마을로 가는 백사골 상류 외나무다리 (오른쪽이 경작지)

백석동천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만든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도 정
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2개의 나무 목재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갈 정도로 좁다.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하지만 다리의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
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요는 없다.
여기서 오른쪽(서쪽)에는 여러 농작물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밭두렁과 비닐하우스 등
이 펼쳐져 있어 도심 속의 생소한 풍경 앞에 두 눈을 잠시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리를 지나서는 길이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2m 미만으로 폭이 좁아진다. 그런 길을 계속 고집
하면 계곡 너머로 집들이 보이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능금마을 부분은 추후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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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7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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