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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12.27 늦가을 산사 나들이 ~ 우이동 윗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도선사 (붙임바위, 우이동계곡)
  2. 2016.11.25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무계원, 안평대군집터...)
  3. 2013.04.26 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종로구 부암동 산책

늦가을 산사 나들이 ~ 우이동 윗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도선사 (붙임바위, 우이동계곡)

북한산(삼각산) 도선사



' 늦가을 산사 나들이, 북한산(삼각산) 도선사 '

도선사 18나한상, 포대화상
▲  도선사 18나한상과 포대화상

도선사 마애불입상

도선사 붙임바위

▲  도선사 마애불입상

▲  붙임바위

 



 

늦가을이 한참 깊어가던 10월 끝 무렵의 어느 평화로운 날, 집에서 가까운 북한산(삼각
산) 도선사를 찾았다.
도선사는 지금까지 10회 남짓 인연을 지었던 절로 그곳의 늦가을 풍경과 늙은 마애불이
문득 그리워 간만에 그곳을 찾은 것인데,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도봉동(道峰洞
) 집을 나서 방학4거리에서 노원구 마을버스 15번(월계동 청백1단지↔덕성여대)을 타고
우이동 도선사입구에서 두 발을 내렸다.
우이동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사이에 자리한 동네로 이들 산을 찾는 산꾼
과 나들이꾼들로 늘 북새통을 이룬다.

우이동(牛耳洞) 109번 시내버스 종점 맞은편에는 도선사행 셔틀버스 정류장이 있다. 도
선사까지 걸어가기에는 다소 거리(약 2.3km)가 있고, 이날은 도선사가 목적이라 버스를
기다리는 행렬에 흔쾌히 동참했다. 하여 10분 정도 기다리니 셔틀버스가 기지개를 켜고
내 앞에 나타나 활짝 입을 벌린다.
이 노선은 우이동(109번 종점 맞은편)에서 도선광장까지 운행하는데, 평일에는 30~40분
간격으로 다니며 휴일에는 증차 운행한다. (석가탄신일은 거의 10분 내외 간격, 입석은
안됨) 차비는 무료이나 굳이 내고 싶다면 승차장에 있는 돈통에 알아서 넣으면 되며 신
도와 절에 볼일 또는 예불을 보러 가는 사람만 가려서 받는다. (산꾼들은 거의 받지 않
음)
버스는 각박한 오르막의 연속인 도선사 길(삼양로173길)을 5~6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다
가 도선광장에 이르러 바퀴를 멈추었다. 우이동에서 도선사를 잇는 신작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닦아준 것으로 그 길로 인해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도선사는 서울 동북부를 대
표하는 고찰(古刹)로 크게 흥하게 된다.

도선광장(마음의 광장)에는 우리나라 최대급의 옥외(屋外) 석불좌상으로 꼽히는 미소석
가불이 이름 그대로 미소를 흩날리고 있다. 그를 중심으로 그 옆에 셔틀 정류장과 주차
장이 있고, 북쪽에는 백운대탐방지원센터와 백운대로 가는 산길이 있으며, 서쪽에는 안
양암과 도선다원이 있고, 그 남쪽에 도선사로 가는 길이 있다.
도선광장에서 도선사 경내까지는 도보 5분 거리로 길은 느긋한 수준이며 천왕문이 제일
먼저 마중을 나와 중생을 검문한다.



 

♠  도선사(道詵寺) 입문

▲  천왕문(天王門)의 뒷모습

맞배지붕을 지닌 천왕문(사천왕문)은 도선사의 정문으로 1987년 11월에 지어졌다. 봉황문(鳳
凰門)이라 불리기도 하며,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 다문천왕,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의 보금자리로 그들은 이곳을 지나는 중생들을 검문하느라 여념들이 없다. 그들의
수고로움이 있기에 오늘도 도선사와 북한산(삼각산)은 평화롭다.


▲  천왕문 남쪽에서 바라본 천하 (해발 300m)
정면에 보이는 진달래능선 너머로 강북구와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지역과
불암산, 아차산, 멀리 남양주 지역의 뫼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왜열도에서 건너온 검은 피부의 청동지장보살상

천왕문을 지나 조금 들어가면 청동지장보살상이 모습을 비춘다. 그는 도선사와 자매결연을 맺
은 왜열도 진언종(眞言宗)의 본사, 고야산 안양원(高野 山 安養院)에서 1983년 11월 15일 청담
대종사 열반재 때 증정한 것인데, 주변 나라와 분쟁이나 일삼으며 툭하면 평화를 깨려고 드는
왜열도 원숭이들의 시커먼 마음을 보여주듯 피부가 아주 검다.


▲  가을 단풍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도선사 경내

경내 직전에 이르면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직진하면 주차장과 도선사 경내로 바
로 이어지며, 오른쪽은 종각과 청담대사비, 청담대종사 사리탑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왼쪽은
북한산(삼각산) 산길로 여기서 해발 260m 정도 오르면 북한산성(北漢山城) 용암문에 이른다.
나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 청담대종사 사리탑을 둘러하고 경내로 들어섰다.


▲  시원스런 추녀 곡선을 지닌 종각(鐘閣, 범종각)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아리를 머금은 사물<범종(梵鐘)과 목어(木魚),
법고(法鼓), 운판(雲版)>의 보금자리로 여기서 북쪽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청담대종사의 사리탑과 그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  수수한 모습의 청담대종사 석상

▲  귀부가 꽤 인상적인 청담대사비


▲  화려한 수작(秀作)을 자랑하는 청담대종사(靑潭大宗師) 사리탑과
그의 뒤를 받쳐주는 조그만 삼천(三千)지장보살상


도선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20세기 큰 승려의 하나로 추앙받는 청담대종사<1902~
1971, 청담당 순호대종사(靑潭堂 淳浩大宗師)>이다.

그는 경남 진주 출신으로 이름은 이순호(李淳浩)이다. 3.1운동에도 참여했으며 금강산 마하연
에서 수행했던 승려 박포명을 만나 불교와 강렬한 인연을 맺게 된다.
'왜 불이 뜨겁고 얼음이 찬 줄 아느냐? 마음이 뜨겁다고 생각하고 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의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법문이 청담을 불교의 세계로 고스란히 인도한 것이다.

1924년 왜열도로 건너가 송운사(松雲寺)에서 행자생활을 했으나 왜열도 불교의 좋지 않은 점<
승려가 마누라를 두고 가정을 꾸림>에 크게 경악하여 바로 본토로 돌아와 고성 옥천사(玉泉寺
)에서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 개운사(開運寺)
불교전수상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하고, 바로 만공(滿空)의 문하에 들어가 수행을 했다.
1928년 조선불교학인대회를 통해 왜정(倭政)에 저항하는 불교에 앞장섰고, 1947년 봉암사(鳳
巖寺) 결사를 통해 왜정의 농간으로 망가진 이 땅의 불교를 정화하고 철저히 계율을 지키며
오로지 참선에 정진하자는 불교정화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허나 청담의 개혁에 발끈한 승려들(대부분 대처승)의 태클도 만만치 않아 그 길은 순탄치 않
았다. 다행히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帶妻僧)에 대해 절에서 나가라며 불교의 개혁을 지지했
고 성철(性徹), 자운 등 깨어있는 승려들도 앞다투어 그의 개혁에 동참했다.

1960년 11월 대법원이 비구승(比丘僧)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이상한 판결을 내리자 청담은 비
밀리에 6명의 비구로 이루어진 순교단을 결성, 판결 다음날 대법원청사에서 할복을 감행했다.
이 행위는 여론을 비구승 쪽으로 돌리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1961년 박정희 군사 정권이 들
어서자 '불교 정화는 비구와 대처승 간의 싸움이 아니라 국민사상 개조 운동'이라며 군부를
설득해 1962년 4월 비구승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통합종단이 출범하게 되었다.

1966년 11월 초대 종정(宗正)인 효봉(曉峰)의 뒤를 이어서 청담이 제2대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불교 근대화의 발판을 위해 내세운 역경(譯經), 도제양성, 포교 등 3대 지표를 포함하여
의식의 현대화, 군승제(軍僧制) 촉구, 신도 조직 강화, 석가탄신일 공휴일 제정, 불교회관 건
립 등 6개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또한 포교의 활성화를 위해 절에서 매주 1회씩 정기법회를
개최하는 것과 불교방송국 및 승가대학 설립을 목표로 세웠다.
그 목표를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1971년 11월 15일, 69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그의 다비
식(茶毘式)에는 무려 20,000여 명의 사부대중이 모여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으며, 1972년
도선사 경내 동쪽 산자락에 자리를 닦고 그의 사리탑과 비석, 석상을 세웠다.

청담의 사리탑은 20세기 후반 제일의 승탑<부도(浮屠)>이라 내세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
주 찬란하고 장엄한 모습이며, 승탑 뒤로 무려 3,000기의 조그만 지장보살을 갖춘 커다란 벽
을 둘러 가히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만큼 청담대사를 향한 도선사와 후학들의 지극정성이 대
단하다. <청담대사의 승탑은 고성 옥천사(☞ 관련글 보러가기)에도 있음>
사리탑 구역은 3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일 밑에 청담의 석상을 두었고, 중간에는 청담대
사비, 윗쪽에는 사리탑을 두었다. 바로 이 구역을 닦으면서 오래된 청동범종과 청동숟가락 5
점, 청동젓가락 1짝, 청동국자 2점, 왜열도에서 건너온 동경(銅鏡, 봉래문경), 상평통보 등
고려 말과 조선 중기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들 유물을 통해 절 건물이 이 자리에 오래 눌러앉았음을 보여주며, 그들 모두 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259호
('도선사 청동종 및 일괄유물')로 지정되어 청담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종각에서 경내로 이어지는 호젓한 길

▲  도선사 호국참회원(護國懺悔院)

청담대종사 사리탑을 둘러보고 경내로 들어서니 호국참회원이라 불리는 커다란 팔작지붕 건물
이 마중을 한다.
호국참회원은 지상 3층, 지하 1층의 1,000평 규모로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1968년 11월
청담대종사가 우리나라 불교의 중흥과 평화통일의 염원을 담은 호국참회불교를 제창하며 지은
것으로 1977년 증축을 했으며 단양 구인사(救仁寺)의 건물 스타일과 많이 비슷하다. 아무래도
이곳이 첩첩한 산중이고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이라 추가로 건물을 올리기 어려워 이런 식의 건
물을 다진 것이다.
1층에는 공양간이 들어있고, 2층은 어린이회, 학생회, 도서실, 수련원 등이 있으며, 3층은 대
법당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이 깃들여져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도선사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이자 북한산 3대 봉우리의 하나인 만경대(萬景臺) 밑에 자리한 도선
사는 862년에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이곳 산세가 1,000년 뒤 말법시대(末法時代)에 불법(佛法)을 다시 일으킬 곳이라 예견하
고 절을 지은 뒤, 큰 암석을 주장자(柱杖子)로 갈라 마애불을 새겼다고 한다. 그 연유로 사찰
이름을 도선사라 했다는 것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
이며, 그 마애불 조차도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이미 판명이 났다.
다만 청담대종사 사리탑 자리에서 고려 말과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어 적어도 고려 한복판부
터 절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그곳이 경내의 중심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창건 이후, 어찌된 영문인지 오랫동안 일기장을 남기지 못했으며, 조선 숙종(肅宗) 시절 북한
산성을 수리했을 때 승병(僧兵)들이 이 절에서 보초 임무를 선 기록이 있다. 1863년 안동김씨
의 실세인 김좌근(金左根)이 돈을 대어 칠성각을 지었고, 1887년 동호 임준(東湖 任準)이 7층
석탑을 세우고 그 안에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1903년 혜명(慧明)이 고종의 명으로 대웅전을 중건하고 신중도와 지장도 등 14점의 탱화를 봉
안했으며(이때 불상 2기를 개금하고 1기를 개채함) 1904년 국가기원도량으로 지정을 받았다.
1961년 청담이 주지로 주석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절을 크게 불려나갔
으며, 1963년 도선암을 도선사로 격을 높였고, 1968년에 절과 속세를 이어주는 도로가 닦여지
면서 접근성이 한층 좋아졌다.
2001년 청담대종사를 기리고자 청담기념관을 세웠고, 2002년 그 안에 유물관을 두어 청담대종
사의 유물과 절의 문화유산을 전시/보관하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호국참회원, 명부전, 삼성각, 적묵당, 천불전, 요사채 등 10여 동
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마애불입상과 목아미타불 대세지보살상, 석독성상, '청동종 및
일괄 유물(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9호)',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서울 지방유
형문화재 396호
) 등 지방문화재 5점을 품고 있다.
그 외에 오래된 보리수와 19세기 말에 조성된 지장시왕도, 괘불도, 묘법연화경, 7층석탑, 마
애사리탑 등의 비지정 문화유산도 여럿 지니고 있으며, 청담대종사 사리탑과 청담대사비, 18
나한상과 포대화상, 진신사리탑 등의 조촐한 볼거리도 간직하고 있다.
절의 부설 기구로는 금천구 시흥동(始興洞)에 있는 혜명보육원과 실달학원, 청담종합중고교
등이 있으며, '도선법보'등의 정기 간행물을 내놓고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제대로 박힌 고즈넉한 산사로 신작로가 경내까지 뚫려있어 실감이 덜하겠
지만 북한산(삼각산) 서울 구역에 자리한 고찰(古刹) 중 문수사(文殊寺), 일선사(一禪寺) 다
음으로 높은 320~330m 지점에 자리해 있다. 그만큼 이곳은 깊은 산골이다.
만경대와 인수봉(仁壽峯) 그늘에 자리하여 위치도 좋으며,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산꾼과 답사꾼의 왕래도 빈번하다. 또한 마애불입상이 영험하다고 소문이 자자하여 기도 수요
도 상당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264 (삼양로173길504, ☎ 02-993-3161~63)
* 도선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도선사의 오랜 자랑, 마애불입상



 

♠  도선사 둘러보기 (호국참회원, 삼성각 등)

▲  도선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주 아름다운 말이 있다. 호국참회원 1층 공양간이 마침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밥과 국 냄새가 나의 후각을 어지럽히니 이곳 공양(供養) 인심이나 확인할
겸, 1그릇 들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급한 것도 없다.
도선사 공양밥은 다른 절과 비슷한 비빔밥 스타일로 하얀 밥과 김치 등의 나물, 고추장을 먹
을 만큼 담고 별도의 그릇에 미역국을 담아 즐겁게 공양에 임하면 된다. 누구든 무료로 공양
을 할 수 있으며 보통 17시까지 밥을 제공한다. (시간은 상황에 따라 변경 가능) 미역국은 비
록 고기나 해산물은 들어있지 않으나 국물이 진국이다.

어찌하다보니 그릇이 터질 정도로 밥과 나물을 담았는데 이것을 과연 다 먹을 수 있을까? 걱
정이 들었다. 허나 그것은 기우였다. 순간 시장기가 강림하여 거뜬하게 빈 그릇으로 만든 것
이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옆 칸으로 넘어가 내가 먹은 그릇과 수저를 설겆이하고 물 1모금 섭취
한 다음 밖으로 나왔다. 도선사 관람은 이제부터이다.

◀ 청담심지(靑潭心地)
청담대종사가 머물렀던 백운정사 옆에
있던 것으로 2002년에 현 자리로
옮겼다.

◀  돌로 다진 천불전(千佛殿)
종무소(宗務所)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건물로 이름 그대로 조그만 천불이
봉안되어 있다.


▲  배불뚝이 포대화상(布袋和尙)
그의 배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하여 그의 배는 좀처럼 마를 날이 없다.
사람들이 얼마나 문질렀는지 배가 아주 검은 피부가 다 되었으며, 그의
허공에는 조그만 등이 대롱대롱 달려 가을 바람을 즐긴다.

          ◀  도선사 보리수(菩提樹)
명부전 앞에는 불교에서 가장 애지중지하는 나
무인 보리수가 있다. 부처가 보리수 밑에서 깨
달음을 얻었다는 사연 때문이다.
이 나무는 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어느 승려
가 멀리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과연 그
럴까?) 보리수는 염주나무, 각수(覺樹), 성수(
聖樹)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사진이 너무
흐릿하게 나온 것이 다소 아쉽다. (내 역량이
그것 밖에 안되니 어쩔 수 없음...)


▲  청기와를 눌러쓴 명부전(冥府殿)

보리수 그늘에 자리한 명부전은 지장보살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
王), 저승의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지금은 명부전이 자리
를 잡고 있으나 이곳은 원래 청담대종사가 머물렀던 백운정사(白雲精舍) 자리이다.

▲  온화한 표정의 금동지장보살상과
19세기에 그려진 지장시왕탱

▲  죽은 이를 심판하는 저승의 10왕과
시왕탱 (지장보살상 좌측)

▲  저승의 10왕과 시왕탱 (지장보살상 우측)

▲  명부전 앞에 자리한 윤장대(輪藏臺)


▲  도선사 대웅전(大雄殿)과 국화전시장

청기와를 지닌 대웅전은 도선사의 중심 건물인 법당(法堂)이다. 절 초창기 시절부터 있었다고
하나 신뢰도는 떨어지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대웅전이라 석가여래상이 중심으로 있어야 되지만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거느려 아미타3존상을 이루고 있다. 또한 대웅전
현판은 강창회(姜昶會, 1789~?)가 12살에 썼다고 전한다.

내가 갔을 당시 대웅전 뜨락에는 노란 국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뜨락 허공에는 연등이 가득
매달려 국화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경내를 둘러싼 단풍과 더불어 늦가을의 멋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이곳은 매년 11월 경내에서 이렇게 가을 국화전시를 하고 있으며, 석가탄신
일에는 이곳에서 산사음악회와 공연, 법회가 열리는 경내의 광장과 같은 곳이다.


▲  금빛찬란한 대웅전 아미타3존상과 금동후불탱
대웅전 천정에는 하얀 연등이 강인한 협동심을 보이며 보랏빛 색깔을
연출해 황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대웅전 앞을 곱게 수식하고 있는
노란 국화들

▲  연등이 하늘을 가린 대웅전 뜨락
(삼성각에서 바라본 모습)


▲  호국참회원 대법당에 봉안된 목아미타불, 대세지보살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91호


호국참회원 3층에 자리한 대법당에는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아미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아
미타불을 하나도 아닌 둘씩이나 가지고 있는 점이 참 이채로운데 그렇다고 도선사가 아미타불
도량을 칭하지도 않는다. (도선사는 '호국참회도량'을 칭하고 있음)

대법당 불단에 들어앉아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아미타3존상은 크기가 아주 조그만하여 동자승
처럼 귀엽기 그지 없다. 이들 중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
으며, 관세음보살은 근래 새로 지은 것이다.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 뱃속에서는 고맙게도 그들의 조성시기가 적힌 발원문(發願文)이 나
왔는데, 1740년에 여기서 가까운 도봉산 원통암(圓通庵, 원통사)에서 조성하여 북한산 진관암
(津寬庵, 진관사)에 봉안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하여 18세기 서울 지역 보살상과 아미타불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어주며 그 발원문 덕에 지방문화재의 감투까지 받게 되었다. 그리고 아
미타불 이름 앞에 '목(木)'이 붙은 것은 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으로 이후 개금을 하여 현재 모
습이 되었다.

북한산(삼각산) 반대편에 있던 이들이 어찌하여 도선사까지 흘러들어왔는지는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다. 다만 1933년 도선사에서 만든 사찰재산대장에 아미타불, 약사불, 관세음보살이 등
장하는데, 그들이 아미타3존상인지는 불투명하며(관세음보살은 입상으로 나와있음) 1960년대
에 촬영된 사진에는 아미타불 옆에 관세음보살이 있는데, 그 역시 진관사에서 넘어왔다고 한
다.
이후 그의 보관(寶冠)이 일부 손상되어 새 관세음보살을 만들어 붙였으며, 기존 관세음보살은
청담기념관 수장고에 넣어버렸다. (그 관세음보살상이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96호인 석조관음
보살좌상임)
아미타3존상 뒤에는 금동으로 치장된 후불탱과 닫집이 듬직하게 자리하여 그들을 반짝반짝 윤
기를 내준다.


▲  연병장처럼 넓은 호국참회원 대법당
중생들의 지원을 받아 달아놓은 조그만 금동원불이 벽을 가득 도배하고 있다.
이곳은 공간이 넓어서 강당 및 행사장의 역할도 도맡고 있다.

▲  대웅전 옆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석 독성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92호

대웅전 뜨락에서 마애불입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삼성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 치성광여래)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중 독성상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어깨가 딱 벌어지고 체격 또한 단단해 아주 늠름해보이는 이 독성상은 돌로 빚은 것으로 지장
보살처럼 푸른 대머리를 지니고 있다. 시선은 약간 아래로 하고 있으며 무슨 걱정이 있는지
표정이 썩 밝아보이지는 않는다. 몸에 걸친 붉은 가사(袈裟)를 묶은 고리매듭이 왼쪽 어깨에
있으며, 오른손은 바닥에 대고 왼손을 왼쪽 다리를 세운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아줌마 자세처
럼 앉아있다.

그는 원래 마애불입상 주변에 있던 독성각(獨聖閣)에 있었으나 이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으
며, 1962년에 청담이 불교정화운동으로 도선사에 있던 산신각과 칠성각, 용왕당 등 토속신앙
적인 건물을 모두 부시면서 그 건물에 봉안된 산신과 칠성을 모두 독성각에 집어넣고 삼성각
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2년 독성상의 몸을 새롭게 채색을 했는데, 이때 그의 뱃속에서 1876년에 개분(改紛)했음을
알려주는 '독성나반존자 개분 봉안축원문'이 튀어나왔다. 하여 빠르면 18세기에 조성된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에 흔치 않은 돌로 만든 독성상이자 그 시절 독성상 연구에 좋은 자료
로 평가를 받는다. (대부분의 독성상은 나무로 만들었음)

▲  삼성각 산신탱과 산신상

▲  삼성각 칠성탱과 석가3존상

▲  삼성각 밑에 자리한 반야굴(般若窟)
쌍용그룹을 세운 김성곤이 돈을 대어 지은
것으로 11면관세음보살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  반야굴을 장식하고 있는 보살들
가운데가 11면 관세음보살, 좌우가
문수보살, 보현보살



 

♠  도선사 마무리

▲  도선사 마애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호

경내 뒤쪽이자 도선사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높이 20m 정도 되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로 그곳에 도선사의 오랜 명물이자 든든한 밥줄인 마애불입상이 짙게 깃들여져 있다. 도선
사에서는 도선대사가 직접 새겼다고 홍보를 하고 있으나(도선이 손으로 바위를 갈라서 만들었
다고 함;) 조사 결과 고려 때 유행했던 마애불 계통을 이어받은 조선 중기 석불로 크게 보고
있다.

돋음새김으로 짜여진 이 석불은 높이 8.43m(머리 부분 2.15m, 어깨 너비 2.88m)의 장대한 규
모로 오랫동안 산골 구석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19세기 후반, 안동김씨의 후원으로 나라의 기
도도량으로 지정되면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이후 도선사가 '영험한 마애불'로 적극 홍
보하면서 찾는 수요가 나날이 늘어났고, 365일 사람들의 발길이 마를 날이 없다. 완전 서울판
갓바위(관봉 석조여래좌상)가 된 것이다.

이 마애불은 얼굴도 몸통도 모두 두툼하다. 그를 보호하고자 검은 피부의 청동 보호각을 씌워
놓았는데, 그로 인해 얼굴 부분은 거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머리 위에 간단하게 비와 눈을
막을 수 있는 덮개 정도만 설치했으면 좋았을 것을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의 보호각을 씌워놓
아 마치 갇힌 듯한 답답한 모습을 만들어버린 것이 다소 아쉽다.

마애불의 머리는 소발(素髮)로 낮게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솟아있다. 가늘게 뜬 두 눈
은 음각으로 처리해 눈과 주변 살이 두꺼워 보이며, 코는 넓직하고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큰 얼굴에 비해 입은 작으며 수염이 살짝 표현되어 있고, 얼굴과 몸통이 딱 붙어있어
목은 아예 없는 것 같다.
몸통에는 옷주름이 이리저리 그어져 율동을 보이고 있으며, 그의 정체는 관세음보살 누님으로
여겨진다. 그 앞에는 넓게 공간을 닦아 예불 공간으로 삼았고, 주변에 1887년에 동호 임준이
지은 7층석탑이 날씬한 모습으로 자리해 뜨거운 예불 현장을 지켜본다.

도선사에서는 마애불 자체를 석불전(石佛殿)으로 삼아 애지중지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적지
않은 수입을 거둬들이고 있다. 비록 팔공산(八公山) 갓바위만큼은 아니더라도 매일 들어오는
재물이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오늘도 중생들의 소망을 접수하랴. 도선사 곳간을 채워주랴.
마애불의 고생이 참으로 크다. 부디 그렇게 벌어들인 돈, 관세음보살 누님의 뜻에 따라 어려
운 중생을 위해, 속세를 위해 모두 내놓기를 바란다. (자고로 종교는 돈과 정치에 너무 욕심
을 부리면 안됨)


▲  평화의 진신보탑(眞身寶塔) (9층석탑)

마애불을 둘러보고 밑으로 내려가면 평화의 진신보탑과 일심광명각 등이 있는 공간이 나온다.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을 닮은 평화의 진신석탑이 이곳의 중심 역할을 하
고 있는데,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파리와 개미도 미끄러질 정도로 매끄러운 하얀 피부
를 자랑하고 있어 월정사8각9층석탑의 젊은 시절을 보는 듯 하다.


▲  일심광명각(一心光明閣)
반야굴 위에 무지개로 화현(化現)했다는 청담대종사를 위해 만든 공간이다.

▲  일심광명각 내부

▲  평화의 불과 괘불(掛佛)

도선사가 호국참회도량을 칭하다보니 평화를 강조하는 석탑과 불까지 갖추고 있다. 짜투리 공
간을 활용하여 경내의 눈요깃감도 조금 늘릴 겸, 평화를 염원하는 도선사의 마음을 살짝 담은
것인데, 평화의 불 뒤에는 근래 장만한 괘불이 걸려있어 활활 타오르는 불을 지켜보고 있다.


▲  포대화상과 18나한상, 그리고 그들을 보듬은 늦가을 풍경

경내 제일 뒤쪽(진신보탑 뒤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18나한상과 포대화상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들은 일심광명각과 비슷한 사연으로 조성된 것으로 돌 하나에 나한 1명씩 배치해 다
소 여유로운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데, 다들 자유롭고 제각각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포대화상이 그의 치명적인 매력인 똥배를 쑥 내밀고 돈통을 쥐어들며 해
맑은 표정으로 서있어 마치 18나한의 두목 같다.

평화로운 그들 뒤로 늦가을 누님이 질러놓은 고운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속세(俗世)에서 오
염되고 상처 받은 두 안구를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붉게 물든 단풍잎부터 연두색, 녹색, 노란
잎까지 대자연이 물들인 색채들이 너무 곱다. 하여 제아무리 천재 화가라 한들 대자연의 색채
를 감히 흉내내지는 못할 것이다.

▲  윗쪽에 자리한 나한상들

▲  밑쪽에 자리한 나한상들

18나한상까지 모두 둘러보고 잠시 잊었던 청담기념관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호국참회원 밑에
자리해 있는데, 문은 이미 굳게 닫힌 상태였다. 알고보니 개방시간은 16시까지이다. (그때가
17시가 넘었음)
이럴줄 알았으면 미리 그곳을 살펴보고 경내를 둘러보는 것인데 그만 방심을 하고 말았다. 이
렇게 중요한 것을 놓쳐버려 다음에 또 와야 되는 구실을 만들고 말았으나 다행히도 집에서 가
까운 곳이라 언제든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이후 청담기념관도 모두 둘러보았음)


▲  늦가을이 산에 불을 놓았다. 알록달록 타오르는 늦가을 풍경
(도선사 주변)

마음 같아서는 북한산성 용암문까지 훌쩍 올라가고 싶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더 이상의 욕
심을 부리지 않고 우이동으로 얌전히 내려갔다.
내려갈 때는 금지된 곳으로 묶은 우이동계곡의 안부를 확인하고자 셔틀버스에 의지하지 않고
걸어서 내려갔는데, 도선광장에서 조금 내려가니 커다란 바위가 잠시 보고 가라며 발목을 붙
잡는다. 바로 붙임바위이다.


▲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든 붙임바위

도선사까지 신작로가 닦이기 전에는 사람들이 붙임바위에서 많이들 쉬어갔다. 물론 지금도 쉼
터의 역할은 녹슬지 않았다. 산꾼들과 문명의 이기(利器)를 거부하며 두 다리로 오가는 사람
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바위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바위에 조그만 돌을 붙이고 소망을 들
이밀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하여 바위의 배는 물론 옆구리와 주름선 등 돌
이 안착하기 좋은 자리에는 마구 돌을 갖다 붙였다. 심지어는 그의 피부에 상처를 내고 돌을
얹는 사람도 있었다. 하여 돌을 붙이는 바위란 뜻의 '붙임바위'라 불리게 되었고, 이곳 고개
는 '배바위고개'가 되었다.

바위를 딱 봐도 크고 준수하게 생겼으며, 도선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보니 자연스레 주목을 받
은 것이며, 저런 바위는 굳이 절이 아니더라도 산악신앙(山岳信仰)의 대상으로 늘 추앙을 받
기 마련이다. 하여 사람들의 부질없는 소원풀이 도구가 되었고, 옆구리에 신작로가 뚫리면서
5분이 멀다하고 차량들이 소음과 매연을 쏟아붓고 지나가니 그의 고통이 말이 아닐 것이다.
허나 대자연의 넉넉한 마음처럼 딱히 싫은 내색 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도선사의 이정표 역할
을 한다.
지금도 그의 주름과 피부 곳곳에는 사람들이 붙여놓은 돌이 적지 않다. 그만큼 사람들이 속세
의 팍팍한 삶을 그에게 푸는 것이다.


▲  늦가을에 잠긴 도선사 길 (붙임바위 주변)

▲  금지된 계곡, 우이동계곡 (청담폭포, 적취병 주변)

도선사 신작로(청담로, 삼양로173길) 옆에는 우이동계곡(도선사계곡)이 졸졸 흐르고 있다. 북
한산(삼각산) 동부 지역의 이름난 계곡의 하나로 도선사 윗쪽에서 발원하여 속세를 향해 흘러
가는데, 백운천(白雲川)이라 불리기도 하며, 우이동으로 내려가 우이천으로 간판을 갈고 도봉
구와 강북구, 노원구와 성북구의 경계를 이루며 중랑천(中浪川)으로 내려간다.

조선 초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격하게 찬양을 받았던 우이동계곡은 양반사대부의 피서지로
인기가 높았다. 하여 수재정(水哉亭)과 재간정(在澗亭), 겸산루(兼山樓) 등 그들이 지은 정자
와 별장이 계곡 주변에 즐비했으며, (지금은 다 사라짐) 그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여럿 전하고
있다.
이곳을 즐겨찾던 사람 중 이계 홍양호(耳溪 洪良浩, 1724~1802)가 있는데, 그는 여기서 9곳의
괜찮은 명소를 뽑아 '우이동구곡(九曲)'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 식구들은 대략 이렇다. <그의
'우이동구곡기(牛耳洞九曲記)'에 실려있음>
제1곡은 '만경폭(萬景瀑)'이란 폭포로 도선사 밑에 있다. 조현명(趙顯命, 1690~1752)과 이주
진(李周鎭, 1692~1749), 그의 아들인 이은(李殷, 1722~1781) 등이 남긴 바위글씨가 전하고 있
으며, 제2곡은 적취병(積翠屛), 제3곡은 찬운봉(瓚雲峯), 제4곡은 커다란 바위인 진의강(振衣
岡), 제5곡은 옥경대(玉鏡臺), 제6곡은 월영담(月影潭), 제7곡은 회영암(淮纓巖), 제8곡은 명
옥탄(鳴玉灘), 그리고 제9곡은 재간정(在澗亭)이다.

왜정 때는 서울 근교 벚꽃 명소로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봄꽃놀이를 하러 왔다. 이때만 되
면 경성역(서울역)에서 임시 관광열차를 편성하여 우이동 부근인 창동역(倉洞驛)까지 운행했
는데, 창동역부터 여기까지는 걸어서 이동했다.
이처럼 서울 사람들과 귀족들의 눈과 마음을 시리게 해주었던 우이동계곡은 1970년대 이후 상
수원 보호구역이 되면서 계곡 전체가 금지된 계곡으로 꽁꽁 묶여 있다. 하여 우이동9곡 식구
들 상당수는 접근이 통제되어 제대로 더듬기가 어렵게 되었고, 그저 계곡 옆 신작로에서 바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2021년에 9곡 명소와 가까운 곳에 관련 안내문과 조망대를 설치
했으나 만경폭과 적취병 등은 너무 거리가 있어서 제대로 보기가 힘듬)
비록 사람들에게는 다소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그 덕에 인간들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이렇게 청정하고 때 묻지 않은 구석을 자랑하게 되었다. 선녀 누님도 놀러올 것 같은 계곡이
저 밑에 간드러지게 유혹을 하지만 괜시리 잘못 발을 들였다가 벌금형의 고통을 받을 수 있다.

붙임바위 주변 계곡에는 청담폭포와 적취병이 있는데,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벼랑
과 바위들이 늦가을 단풍과 어우러져 일품 수채화를 자아내고 있었다.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보듯 해야 되는 아쉬움이 있으나 굳이 접근 통제의 경고를 무시하면서까지 대자연의
작품에 옥의 티가 되고 싶지는 않다.

붙임바위를 끝으로 도선사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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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무계원, 안평대군집터...)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늦가을 산책
(인왕산 자락 명소들) '

▲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

▲ 반계 윤웅렬 별장의 뒷모습

▲ 부암동 무계원



 

늦가을 누님이 그의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며 천하를 곱게 물들이던 11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후배 여인네와 함께 나의 즐겨찾기 명소인 종로구 부암동을 찾았다.

부암동(付岩洞)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仁王山)에 포근히 감싸인 도
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로 천하 제일의 큰 도시로 콧대가 매우 높은 서울의 심장부에 자
리해 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
도로 매우 번잡한 시내가 연상되는 도심과는 전혀 다른 산골마을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어
서울 도심의 또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이곳은 아름다운 경관과 도심과 가까운 잇점으로 조선 초부터 도성(都城) 밖 경승지로 격
하게 찬양을 받아와 그와 관련된 오래된 명소가 많이 서려있다. 이들 명소와 부암동의 수
려한 풍경에 나는 그만 퐁당퐁당 빠져버렸고 매년 적지 않게 찾아와 그에 대한 마음을 표
현한다.

부암동에는 고색의 명소, 현대 명소, 자연 명소 등 볼거리가 상당하여 본글에서는 인왕산
자락에 안긴 명소 몇몇만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로 부암동은 붙임바위에서 유래된 이름으
로 법정동명과 행정동명을 겸하고 있으며, 법정동인 신영동(新營洞)과 홍지동(弘智洞) 등
을 관할하고 있다.


 

♠ 부암동의 새로운 문화체험 공간, 고급 요정으로 악명을 떨친 옛 오진암
건물로 새롭게 재생된 ~~~ 무계원
(武溪園)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창의문로5길' 골목길을 2분 정도 들어서면 부암동의 새로운 명소로 격하
게 주목 받고 있는 무계원이 모습을 비춘다.
무계원은 한옥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겉으로 보면 최근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집처럼 보이겠지
만 실상은 100년 이상 묵은 한옥, 오진암을 가져와 지은 것이다. 부암동을 지겹게 들락거린 본
인 역시 그의 존재를 처음 보는데, 그도 그럴 것이 2013년 겨울 이전에는 없던 존재였기 때문
이다.

이 한옥은 서화가(書畵家)로 유명한 송은 이병직(松隱 李秉直, 1896~1973)이 1910년에 지은 고
래등 기와집으로 원래는 종로구 익선동(益善洞, 종로3가 북쪽)에 있었다. 규모는 700평으로 여
기서 그의 많은 글씨와 그림이 탄생했다. 특히 사군자 중 난과 죽을 잘 그렸으며, 서화 감식에
도 매우 밝았다.
1953년 집을 조모씨에게 팔았으며, 조모씨는 이곳을 요정(料亭)으로 손질하여 장사를 했다. 이
집이 바로 이 땅 최초의 요정이자 서울시에 등록된 음식점 1호인 오진암(梧珍庵)인 것이다. 오
진암이란 이름은 뜨락에 큰 오동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오진암을 시작으로 청운각과 대원각, 삼청각 등의 요정이 서울 도심과 성북동(城北洞)에 생겨
났으며, 이들과 함께 1960~80년대 요정 정치의 산실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흔히 서울 3대 요
정으로 삼청각(三淸閣), 대원각, 청운각을 꼽으나 청운각 대신 오진암을 넣기도 한다.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과 논의하여 그 유명한 7.4남북공동성
명을 이끌어 낸 현장이기도 하며, 권력 실세와 고위 관료, 기업인들이 자주 들락거렸는데, 이
름만 대면 이 땅의 사람들이 거의 알만한 사람들이 이곳 단골이었다. 이후락도 오진암의 단골
로 많이 재미를 봤다고 한다.
또한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늘자 당시 미국 등 철없는 양이(洋夷) 언론들은 이 땅의 요정들
이 기생 관광으로 돈을 번다며 꼬집었고, 그때 오진암이 진하게 언급되기도 하였다.
2006년에는 어느 손님이 290만원을 카드로 결제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으며, 이곳 음식은 맛이
좋고 정갈한 편으로 접대 아가씨들이 매우 친절했으나 대신 가격이 후덜덜한 수준이라 100만원
이상은 훌쩍 넘어간다. 그래서 서민들은 얼씬도 하지 못한 그야말로 있는 자, 권력층의 폐쇄된
공간이었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급 요정도 대거 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원각
은 절로 탈바꿈해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가 되었고, 삼청각은 서울시가 인수해
고급 문화공간이 되었다. 청운각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으며, 오진암은 그들보다 더 오래
버티긴 했으나 손님이 줄면서 주인 조모씨는 결국 2010년에 집을 내놓고 말았다.
이곳을 사들인 사업자는 10층짜리 관광호텔을 짓고자 그해 9월 오진암을 밀어버렸는데 오래된
한옥이고, 20세기 중반 요정/풍류문화가 깃든 현장이라 철거 반대 여론도 적지 않았으나 종로
구에서는 개인 집이고 지정문화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집이 가루가 될 때까지 방관하고 말았다.
다행히 늦게나마 철이 든 종로구는 2010년 10월 호텔 사업자와 협의를 벌여 오진암을 다른 곳
으로 이건(移建)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마땅한 장소가 없어 철거된 목조 자재를 모아두며 시
간을 허비하다가 2012년 2월 안평대군의 별장인 무계정사터 아랫쪽 지금의 자리를 마련해 복원
하기로 했다.
복원 비용은 종로구와 호텔사업자가 부담했으며, 정부에서 건네준 한옥건축지원금을 포함해 23
억이 소요되었다.

2012년 2월 복원 공사를 벌여 2013년 11월 완성을 보았으며, 오진암에서 옮겨온 목재와 안채의
지붕기와, 서까래 기둥 등이 활용되었고, 특히 종로 청진동(淸進洞)에서 발견된 500년 이상 묵
은 건물 주춧돌로 석축을 쌓아 오진암을 그런데로 재현했다. 또한 뛰어난 장인들이 많이 참여
했고 (주)이건창호에서 한옥 화장실을 지어 기증했다.
공사가 완료되자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곳이 무계정사터의 일부임을 내세워 그곳과 연관지어 한
옥의 이름을 정하자고 요청했다. 하여 고심 끝에 무계원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고, 2014년 3월
20일 세상을 향해 활짝 사립문을 열었다.

무계원은 대지 1,654㎡, 연면적 389㎡로 안채와 행랑채, 사랑채, 연못, 돌담, 대문을 두었는데,
들어앉은 지형상 예전 오진암보다는 작게 재현되었으며, 분실된 예전 건물의 부재가 많아 기둥,
건물벽은 거의 새로운 것으로 채워넣었다. 그러다보니 새 집 냄새가 다소 진한 것이다.

다시 태어난 무계원은 전통문화체험 공간으로 개방해 인문학강좌, 서당체험, 다도교실, 국악공
연, 기획전시 등 다양한 전통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종로구와 안견기념사업회가 2016년
5월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의 예술혼을 기리고 그 유적 복원을 위하여 '몽유도원
무계정사 문화축제'를 열기로 했다. (저번 10월에는 황제를 위한 콘서트가 매 주말에 열리기도
했음)

부암동의 새로운 명소이자 꿀단지로 원래 자리도 아니고 이전 과정에서 고색의 내음도 거의 시
들었지만, 권력층과 돈 있는 자의 공간이 시민들의 공간으로 거듭난 의미 깊은 현장이며, 인근
무계정사터(안평대군 집터)와 반계 윤웅렬별장, 청계동천 등 숙성된 오랜 명소와 같이 둘러보
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건물 전체를 전통문화 및 교육 공간으로 쓰는 것보다는 사랑채나 안채 정도는 한옥 체
험 겸 숙박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대문에 걸린 파란색 무계원 현판의 위엄
글씨가 마치 살아서 율동을 부리는 것 같다. '武'자는 꼭 칼질을 하는 것 같고,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로 인도하는 계단이 나온다.

▲ 무계원 행랑채와 전통 굴뚝

▲ 안채에서 바라본 행랑채


▲ 'ㄱ'자 모습의 안채
안채와 행랑채는 모두 'ㄱ' 모습을 취하고 있다. 옛 오진암의 냄새는
거의 없고 근래 새로 지은 한옥 냄새만 가득하다.

▲ 안채 뒷쪽 돌담과 돌로 단단히 다진 석대(石臺)
청진동에서 가져온 조선시대 건물터 석축과 새로 얹힌 하얀 피부의 석축이
어색하게 대비를 이룬다.

▲ 사랑채 통로

▲ 아무도 없는 사랑채 방


▲ 'ㄱ'자 모습으로 이루어진 사랑채 (밑층은 무계원 사무실)

▲ 사랑채 뒷모습과 네모난 굴뚝
굴뚝을 뜨겁게 달구던 연기는 온데간데 없고 차갑게 식어버린 장식용 굴뚝만
멀뚱히 솟아있다.

▲ 무계원 뒷뜨락 (사랑채 동쪽)
건물을 짓고 남은 동쪽 짜투리 공간은 뒷뜨락으로 삼았다. 이곳에는 나무와
조그만 화초 등을 심었으며, 뜨락 끝에는 굳게 잠긴 협문이 있다.

▲ 뒷뜨락에서 바라본 사랑채
새집 냄새가 가득한 무계원은 딱히 오래된 볼거리나 특별한 것이 없어
이 정도로 마무리를 짓고 미련없이 대문을 나섰다.

※ 무계원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부암동주민센터(
무계원) 하차, 버스가 내려간 방향(북서쪽)으로 조금 가면 길 건너편에 부암동주민센터가 있
으며, 그 옆 창의문로5길을 따라 자하미술관 방면으로 도보 2분 (찾기는 쉬움)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과 추석 연휴는 쉰다)
* 입장료는 없으며 단체 관람시 사전 예약 요망
* 전통 공연과 전통문화체험, 기획전시, 인문학강연 등이 부정기적으로 열린다. (자세한 일정
은 무계원에 문의)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27 (창의문로5가길 2 ☎ 02-379-7131)
* 무계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연꽃이 한참 와신상담을 벌이고 있는 네모난 석조 연못
사랑채 뒷쪽에 자리해 있는 것으로 오진암 시절부터 있던 연못인지는 모르겠다.


 

♠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야망이 서린 곳
무계정사
(武溪精舍)터(안평대군 이용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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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2호

▲ 무계동(武溪洞) 바위글씨

무계원에서 다시 골목길(자하미술관 방면)을 1분 들어서면 '현진건 집터'를 알리는 표석이 마
중을 한다.
그 표석에서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왼쪽을 계속 주시하면 커다란 나무를 간
직한 기와집이 보이는데, 그 집 옆에 커다란 바위가 고개를 들고 있다. 바로 그 바위에 '무계
동'이란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으니 그곳이 안평대군 이용의 별장인 무계정사터이다.

※ 안평대군의 생애(1418~1453)
안평대군은 세종(世宗)의 3째 아들로 세종이 왕위에 오르던 1418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용(
李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문(詩文)과 그림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칭송을 받았으며 거문고를 잘타고
무예에도 일가견이 있는 등, 문무(文武)와 예술을 두루 갖춘 팔방미인으로 세종의 18명 아들
중에 가장 능력이 좋았다.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29년 불과 11살의 나이로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
하고 1430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유학 공부를 했다. 1438년에는 두만강(豆滿江) 6진으로
파견되어 두만강 이북의 여진족을 정벌하기도 했다.

세종이 승하하자 맏형인 문종(文宗)의 신임으로 황표정사(黃票政事 : 왕자들이 추천한 인물 중
에서 왕이 그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를 장악하고 측근의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등,
조정에서 꽤나 영향력을 행사했다. 1452년 조카인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황보인(皇甫仁), 김
종서(金宗瑞)와 손을 잡고 수양대군을 견제하며 자신의 세력을 꾸준히 키워나갔다.

그는 창의문 너머 지금의 자리에 넓게 별장을 지었는데, 그곳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계곡을
닮았다 하여 무계동
(武溪洞)이라 이름 짓고, 별장 이름을 무이정사(武夷精舍, 무계정사)라 하
였다. 원래 이곳은 그의 2째 큰아버지이자 세종의 2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터였다.
별장을 짓자 장정을 모아 숙식을 제공하고 훈련을 시키며 자신의 사병을 키워나갔으며 용산에
담담정(淡淡亭)이란 정자를 지어 문인들과 교류를 하며 자신의 야망을 길렀다.
하지만 2째 형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이후, 크게 존재를 드러내면서
단종을 설득해 안평대군 손아귀에 있던 황표정사를 폐지시켰다. 이는 안평에 대한 심각한 도전
이자 대권에 대한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안평은 함경도에 있던 이징옥(李澄玉)에게 무기를 지원 받아 무력을 앞세워
잠시 황표정사를 회복시켰으나 이는 그의 명을 단축시키는 꼴 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의 무력
도전에 발끈한 수양은 1453년 10월, 그 유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과 황보인
을 순식간에 처단하고, 방심하고 있던 안평을 포박되어 강화도로 유배보냈다.
허나 수양은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질 않는지 다시 강화도 서쪽에 자리한 교동도(喬桐島)로 쫓
아냈고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세상에서 제일 쓴 약, 사약(死藥)을 보
내 빨리 죽을 것을 재촉했다.

안평은 형이 보낸 사약 사발을 쭈욱 들이키며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그리고 형에게 선수를 당
했던 자신의 어리석움을 한탄하며 이내 피를 와장창 토하고 아무런 미련도 없는 듯, 쓰러지니
그의 나이 불과 35살이었다.
이후 18세기 중반까지 복관(復官)되지 못했으며, 영조 23년(1747년)에 이르러 영의정 김재로(
金在魯)의 건의로 그제서야 복관이 되고 시호를 받았다. 그의 시호는 장소(章昭)이며 무덤의
위치는 전해오지 않는다.

그가 이승을 뜬 이후, 그의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는 완전 쑥대밭이 되었으며 그의 권력을 향한
강인한 정열이 느껴지는
'武溪洞' 3글자만이 쓸쓸히 바위에 남아 이곳이 안평의 집터였음을 아
련하게 전해줄 따름이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懈堂)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여름철에는 많은 문인
들이 찾아와 경치를 즐겼다.

※ 문예가(文藝家)로써의 안평대군
그는 무이정사와 담담정으로 문인들을 초청하여 수시로 연회를 베풀었고, 궁중에 소장된 서화(
書畵)와 자신이 수집한 명나라 서화를 연구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이를 소개하는 등 그 당시 문
학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체를 사용했는데 이를 나름대로 조선식의 필법으로 발
전시켰다. 조선에 온 명(明)나라 사신들은 그의 글씨를 보고는 조맹부의 글씨보다 더 휼륭하다
며 서로 글씨를 받아가려고 아우성을 떨었다.

한편 무계정사에 머물던 어느 평화로운 날, 꿈 속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냥 기
억 속에 두기가 너무 아까워 그와 친분이 있던 안견(安堅)에게 그 꿈의 내용을 설명하여 그리
게 하니 그는 3일 만에 그림을 완성하여 올렸다. 그것이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이다.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바다 건너 왜열도에 가 있으며, 2009년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
전 때 잠시 귀국한 인연으로 몽유도원도의 현장인 무계정사터를 찾는 답사객이 잠시나마 늘기
도 했다.
또한 여러 문인들의 글을 정리하여 시화첩(詩畵帖)을 만들기도 하였고, 1452년에는 경자자(庚
子字)를 개주(改鑄)해 만든 임신자(壬申字)의 자모(字母)를 쓰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그
의 글씨로는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는 세종대왕 신도비(神道碑), 수원에 있는 청천부원군
심온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자신의 아우인 임영대군묘표(臨瀛大君墓表) 등의 비문이 있다.


'武溪洞' 바위글씨가 있는 기와집은 무계정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로 예전에는 개인 소유
였으나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리하여 빈 집이 되었다. 집과 바위글씨 주변은 나무들이 여럿
있을 뿐, 거의 방치되고 있는 수준이며, 서남쪽은 너른 공터가 있는데, 그곳은 현진건의 집터
이다.

10여 년 전 무계동을 찾았을 때는 쥐방울만한 견공(犬公) 2마리가 요란을 떨며 바위를 지키는
통에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글씨를 봤었는데, 이제는 그들도 무계정사처럼 희미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
2007년 이후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무계정사터'에서
'안평대군 이용집터'로 변경되었으며, 집
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굳게 잠겨있어 관람을 애타게 원할 경우 문에 달린 종로구청 문화관광과
연락처로 연락을 하거나 요령껏 넘어가기 바란다.

※ 무계정사터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부암동주민센터(
무계원) 하차, 창의문로5길을 따라 자하미술관 방면으로 도보 5분, 현진건집터 표석만 찾으
면 금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19-4 (창의문로7길 28-4)


▲ 무계동 바위글씨로 인도하는 조그만 골목길
낙엽이 쓸쓸히 내려앉아 만추(晩秋)의 서정을 불러 일으킨다.


▲ 공터가 되버린 현진건 집터
저 뒤쪽 붉게 물든 아름드리 나무가 자리한 곳에 무계동 바위글씨가 있다. 공터
구석에는 은단천(銀丹泉)이라 불리는 샘터가 있으나 수질은 장담 못한다.

▲ 한줄기 신기루가 되어 사라진 '현진건 집터 표석'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은 소설 '운수좋은 날'로 유명한 문인이다. 그는 1930년대에 무계정
사터인 이곳에 조그만 집을 짓고 살았는데, 2000년 이후 개발의 칼질을 당해 사라졌다. 그래도
현대문학의 중추적인 인물의 집인데, 문화유산이나 기념물로 보존하거나 평창(平昌) 봉평의 이
효석(李孝石) 생가처럼 조촐한 문학의 성지(聖地)로 키웠으면 좋았을 것을 위정자들의 철학과
역사의식 부재, 그리고 그들을 등에 업으며 오로지 돈을 위해 마구잡이로 칼질을 일삼는 개발
업자들, 그들이 날뛰는 이 땅의 현실이 그저 딱할 따름이다.


▲ 청계동천(靑溪洞天) 글씨를 지닌 바위

무계정사의 흔적을 둘러보고 인왕산의 품으로 다시 길을 재촉했다. 전원 분위기가 물씬 감도는
부암동, 부암동에 핏줄처럼 얽힌 골목길은 마치 시골길을 거니는 기분이다. 산골에 있어 다소
오르막길이 많긴 하지만 그리 힘든 정도는 아니다.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이 앞다투어 베푼
숲내음에 걷기만 해도 마음이 느긋해지며 온갖 감상을 강하게 불러 일으킨다.

현진건집터와 윤웅렬별장 사이에는 피부를 드러낸 바위들이 여럿 있는데, 청계동천(靑溪洞天)
바위글씨를 품은 바위가 있어 이곳도 한때 동천(洞天)의 칭호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바위
글씨는 작고 얇은 수수한 모습으로 옛 사람들이 이곳 절경에 반해 새겨놓은 것이다. 이름 그대
로 맑고 깨끗한 계곡이 있었다는 뜻인데, 지금은 그 계곡이 사라져 실감이 나지 않지만 윤웅렬
별장 뒤쪽에 가늘게 흐르는 계곡이 이 앞을 흘러갔다. 그러다가 주택을 만들고 길을 내면서 지
하에 생매장된 것이다.

언제 누가 새겼는지는 귀신도 모르나 조선 후기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며, 바위 주변이 개인 소
유 땅이라 주변을 철책으로 꽁꽁 둘렀다. 그래서 바위 코 앞까지는 접근이 어려우나 어차피 길
가에 있고 훤히 다 보이기 때문에 관람에는 그리 지장은 없다.


▲ 청계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한옥,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2호

▲ 윤웅렬별장 문간채 (안쪽 대문)

청계동천에서 1분 정도 오르면 반계 윤웅렬별장(이하 별장)이라 불리는 한옥이 나온다. 이곳은
인왕산 품에 포근히 안긴 그림 같은 기와집으로 1906년 친일파의 하나인 윤웅렬(尹雄烈, 1840
~1911)이 지은 별장이다.

윤웅렬은 해평(海平) 윤씨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1856년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감영중군(
忠淸監營中軍)과 공주중군(公州中軍), 북청병마우후토포사(北靑兵馬虞侯討捕使)를 거쳐 1878년
통리기무아문참사(統理機務衙門參事)과 남양부사를 지냈다.
1880년 수신사(修信使)의 일행으로 왜열도를 시찰하고 왔으며, 1882년 별기군(別技軍)이 창설
되자 훈련원 하도감(下都監)의 신병대장의 영관(令官)이 되었다. 허나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
亂)으로 왜열도로 도망쳤다가 귀국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터지자 김옥균(金玉均)에 의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
나 3일 천하로 싱겁게 끝나면서 화순 능주로 유배를 갔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군부
대신(軍部大臣)으로 있으면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청나라 상해(上
海)로 줄행랑을 쳤으며, 다시 기들어와 1906년 많은 돈을 들여 부암동에 별장을 짓고 머물렀다.
하지만 1910년 이후 왜국의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심히 좋지 않은 뒷끝을 보였다.

윤웅렬의 아들로 그 유명한 이름,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있는데, 그는 개화파 지식인으
로 여러 선각자들과 함께 독립협회와 신민회(新民會)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민중 계몽
에 앞장섰다. 1910년 이후 안창호(安昌浩)가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을 지내면서 민족교
육에 헌신했으나 1911년 105인 사건으로 3년 동안 옥살이를 했으며, 서서히 친일파로 갈아타면
서 부친과 마찬가지로 구린 뒷끝을 보였다.

윤웅렬이 이곳에 별장을 지을 때, 벽돌로 지은 서양식 2층 건물만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가 골로 가면서 3째 아들 윤치창(尹致昌)이 상속을 받았는데, 1930년대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
채, 광채, 문간채를 추가로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별장 안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으며, 안방 앞에는 2칸 부엌이 있
고, 건넌방 앞에는 작은 누마루가 있다. 안채 왼쪽에 광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있는데, 'ㄱ'모
양의 사랑채 한쪽 끝에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이 있다. 사랑채와 2층 건물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앞에 인왕산이 베푼 조그만 계곡이 흘러간다. 그 계곡이 바로 앞서 언급한 청계동
천의 상류로 계곡에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나무를 심어 경관을 아름답게 꾸몄다. 사랑채 지
붕에는 옥상 테라스를 만들어 경관을 감상하는 전망대로 삼았다.
사랑채와 광채는 변형이 심해 원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우며, 한양 도성 밖 부암동에 세워진
별서(별장)의 하나로 외국 건축 양식이 상류층 주택에 적용된 사례로 주목된다. 또한 안채는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가 잘 반영되어 있다.

윤치창 이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봉산서원이라 불리는 미술공간으로 쓰였으며, 이때는 대문(
문간채) 앞 뜨락에 비너스상도 두고 집채만한 큰 바위도 두면서 특이한 모습을 보였는데, 2010
년 이후 어느 기업 회장이 인수하면서 2011년 가을에 크게 보수를 했다. 이때 대문을 새로 만
들고 담장을 추가했으며 집도 새집처럼 산뜻하게 손질했다.
집 보수공사는 2011년 12월에 끝났으며 이후로는 폐쇄적인 상류층의 습성으로 어지간해서는 속
살 개방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이전에 본 것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내 바램이긴 하
지만 이렇게 괜찮은 한옥을 주인 일가만 누릴 것이 아니라 다수가 좀 누렸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한옥 민박이나 게스트하우스로 개방하는 것은 어떨까? 북촌(北村)과 전주한옥마을, 안동
의 오래된 한옥, 경주 양동민속마을 한옥들이 내/외국인을 상대로 한옥 체험 및 숙박 제공으로
단단히 재미를 보고 있다.
이곳 집 크기도 북촌의 왠만한 한옥과 비슷하거나 조금 크며, 뜨락도 넓고, 바로 옆이 인왕산
숲이라 공기도 청정하다. 도심이긴 하지만 첩첩한 산골에 들어온 듯, 전원 분위기도 진하게 풍
겨 도심 속의 이색적인 분위기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방도 많고 사랑채 위에 테라스까지 갖
춘 매력도 있으니 어지간한 한옥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수도 있다. 교통도 도심에서 무척이
나 가깝고 버스정류장에서 도보 10분이니 그만하면 적당하다.


▲ 서쪽 담장 너머로 바라본 윤웅렬별장의 뒷모습

▲ 윤웅렬별장 앞길 (대문과 담장은
2011년 보수 때 새로 했음)

▲ 안채 옆에 있는 또 다른 문
원래 있던 문으로 늘 굳게 닫혀있다.

▲ 윤웅렬별장 위쪽(서쪽) 돌담

▲ 겨울잠에 잠긴 별장 연못
물과 연꽃, 물고기가 넘쳐날 그때를 꿈꾼다.


▲ 윤웅렬 별장의 숨겨진 아름다움 (사랑채 뒤쪽 계곡)

별장 뒤쪽에는 이곳의 숨겨진 비경이 있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절경이 수줍은 듯 숨바꼭
질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조그만 계곡이 없는 듯 흘러가는데 이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이다. 계곡 양쪽에는 돌
로 높게 석축을 쌓았으며, 위쪽에는 2단으로 석축을 둘렀다. 석축 위에는 단풍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이 앞다투어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늦가을의 정취를 진하게 우려낸다. 지나던 가을
도 이 별장에 눈독을 들였는지 뒤쪽에 살며시 들어와 고운 작품을 연출한 것이다. 화사하게 타
오른 단풍과 알록달록 물든 나무들이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슬슬 올해를 정리한다. 겨울
제국(帝國)이 도래하면 모든 것을 다 공출당해 숨죽이고 있다가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 되면 다
시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사랑채 뒤쪽 계곡의 막다른 곳 (바위와 폭포)

계곡의 막다른 곳에는 푸른 이끼를 뒤집어 쓴 바위가 있다. 이끼가 가득하다는 것은 이곳이 그
만큼 청정하다는 것을 강하게 의미한다. 상류에서 내려온 계곡은 이 바위를 타고 아래로 흘러
가 아담한 폭포를 자아내며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폭포의 높이는 2m 정도로 물줄기가 바위 전
체를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닌 한쪽 구석에 답답한 모습으로 흘러간다. 바위 위쪽 주변에는 석축
을 쌓고 계단을 만들었는데, 붉은 색채의 낙엽이 수북히 쌓여 마치 산불이 일어난 듯 하다.


▲ 푸른 이끼의 청정한 안식처 바위와 폭포, 그리고 인왕산 계곡물

▲ 바위 위쪽 부분 (석축과 돌계단)
비록 짧지만 한 세상 멋지게 살다가 쓸쓸히 대지로 떨어진 이쁜 빛깔의
낙엽들이 수북히 쌓여 아름다운 선경(仙境)의 불빛을 이룬다.

▲ 2층 테라스를 갖춘 사랑채와 2층 벽돌집

비경의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랑채는 별장 내부를 남쪽에서 꽁꽁 가리고 있다. 사
랑채 기와 지붕 위에는 특이하게 옥상 테라스를 두어 작지만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으며 사
랑채 바로 옆에는 서양식으로 만든 2층 붉은 벽돌집을 두어 옥상으로 연결하는 계단을 두었다.
벽돌집에는 각 층마다 큰 방이 있어 사랑채의 보조 역할을 하며, 옥상 테라스와 벽돌집은 이곳
만의 강한 매력이자 서울에 있는 근대 한옥 중에서도 유일하다.

▲ 2층 벽돌집과 안으로 들어가는 문

▲ 사랑채 지붕에 마련된 2층 테라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안채

사랑채 지붕으로 올라가려면 2층 벽돌집을 거쳐야 된다. 실내화로 갈아신고 계단을 타고 올라
가 문을 열면 나무로 지어진 테라스이다. 전망용으로 지어지긴 했으나 두 눈에 들어오는 범위
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매우 좁다. 비록 별장 일대와 남쪽 산자락이 고작이지만 주변의 풍경
이 고와 눈이 그리 심심치는 않다. 이곳에 올라 인왕산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 속
세에서 마비된 머리와 정신이 싹 가시는 듯 하며, 머리도 맑아져 공부도 잘될 것 같다.

별장 서쪽 언덕에는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구석에 소나무 등의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가 제
법 다 자란 티를 내며 별장에 작게나마 그늘을 드리워준다. 게다가 커다란 바위도 한쪽에 자리
잡고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숫키와가 얹혀진 담장이 집을 넓게 둘러싸며 속세와 경계를 이룬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부암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다른 명소들은 별도의 글에서 흔
쾌히 다루도록 하겠다.

* 반계 윤웅렬 별장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48 (내부 관람은 거의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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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종로구 부암동 산책

 


'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종로구 부암동(付岩洞) '

▲  인왕산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북악산


하늘 높이 솟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北岳山), 그리고 인왕산(仁王山) 사이로 움푹 들
어간 분지(盆地)가 있다. 그곳에는 수려한 경치를 지닌 부암동이 포근히 감싸여 있는데 서
울 도심과 고작 고개(자하문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임에도 '이곳이 정녕 서울
이 맞더냐~?' 고개가 갸우뚱할 정도로 도심과는 생판 다른 전원(田園) 풍경을 간직하고 있
다.

부암동은 서울의 심장부인 종로구의 일부로 아늑한 전원 분위기와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경
승지가 즐비해 북촌(北村), 성북동(城北洞)과 더불어 두고두고 나의 마음을 앗아가는 곳이
다. 부암동의 주요 경승지로는 북악산 백사골(백사실, 백석동천)을 비롯해 세검정(洗劍亭),
홍지문(弘智門), 석파정, 무계정사터, 반계 윤웅렬별장, 능금마을, 북악산, 청계동천 바위

글씨 등이 있으며, 석파정을 옆구리에 낀 서울미술관을 위시하여 환기미술관, 자하미술관,
유금와당박물관 등 미술관과 박물관도 풍부해 문화의 향기도 진하기 그지 없다.

본글에서는 부암동 명소의 일부인 석파정 별당과 무계정사터(무계동 바위글씨), 청계동천,
반계윤웅렬 별장 등을 소개한다.
☞ 북악산 백사골(백사실) 보러가기
부암동 명소 (장의사지 당간지주/세검정/홍지문 등) 보러가기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의 옛 사랑방 -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호

상명대입구 4거리에 이르면 4거리 서남쪽에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집은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으로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소전 손
재형(素筌 孫在馨, 1903~1981) 선생이 살던 곳이다.

소전은 6.25 시절, 서울을 접수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
리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그곳의 문화유산을 지켜냈으며,
<자세한 내용은 ☞ 간송미술관 답사기 참조> 왜열도로 넘어간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세한도(阮
堂歲寒圖, 국보 180호)를 천신만고 끝에 품에 안고 온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 집은 원래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집으로 인왕
산 동쪽인 옥인동(玉仁洞)에 있었다. 그러다가 소전이 1958년에 매입하여 이곳으로 옮겨 거처로
삼았으며, 그 기세를 몰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의 별당까지 떼어와
집 뒤쪽에 두었다. 이렇게 잘나가던 기와집을 하나도 아닌 2채나 누릴 정도면 소전도 꽤 부자였
음을 알 수 있다. (당시로는 흔치 않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고 있었다고 함)
소전이 1981년 세상을 뜨자 이들 집은 모두 다른 이에게 넘어가 한정식당으로 변했으며, 석파정
의 이름을 따서 석파랑이란 간판을 달았다.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ㄱ'자 형태로 방이 모두 3개이다. 가
운데 큰 방은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다. 그리고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진하게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내부
를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개
되었다.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진리에 따라 별당을 원자리로 돌려놓는 것도 괜찮
을 듯 싶은데, 서로 소유자가 다르다보니 이 또한 쉽지가 않을 것이다.


▲  적막에 사로잠긴 석파정 별당
저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면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  석파랑 정원 (오른쪽 계단 너머에 석파정 별당이 있음)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던 대원군의 별장
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의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이 없이 깨끗하게 보
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별당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석파랑 주차장에서 들어가는 길이 있
는데, 주차장 쪽으로 가는 것이 더 접근이 쉽고 빠르다.


▲  150년 묵은 감나무가 무럭무럭 익어가는 석파랑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한옥은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호벽
이 그대로 남아있다. 뜰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자 1898년
에 경복궁에 세운 것으로 궁궐 건축물의 품격이 고스란히 배여있는 문이다.
또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으며, 조그만 절구를
비롯한 다양한 석물과 나무. 꽃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석파랑은 고급 한정식당이라 가격이 매우 얄미운 수준이다. 점심 상차림은 55,000원에서 11만원
대, 저녁은 95,000원에서 15만 5천원이나 한다. 그것도 10% 부과되는 부가가치세(VAT)와 서비스
비(Service Charge)는 제외이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우리 같은 서민들에게는 정말 특별한 날이
아니면 가기 힘든 아득한 곳이지만 졸부들에게는 그저 가뿐한 장소다. 이 땅에서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님이 많고 봐야 된다.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더러운 세상이니 말이다. 아
직 이곳의 밥은 먹어보진 못했지만 돈을 몇 달치 모아서라도 한번은 먹어보고 싶다.


※ 석파정 별당(석파랑)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번, 1711번, 7016번, 7018번, 7022번, 7212번 시내
  버스를 타고 상명대입구 하차 (1,2호선 시청역 4/7번 출구에서 1711, 7016번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3번 출구)에서 110번, 153, 8153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도보
  2~3분
* 지하철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 석파랑 홈페이지는 위의 석파정 만세문 사진을 클릭한다.
* 석파랑 영업시간 : 12시~15시, 18시~22시 (설날, 추석연휴는 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 (석파랑 ☎ 02-395-2500)


▲  하림각 건너편 길가에 자리한 부침바위터(付岩址)

부암동의 지명유래가 된 부침(붙임)바위는 바위 피부 곳곳에 난 구멍에 돌을 대고 비비면서 소
원을 빌면 아들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부터 뿌리 깊던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민간 신앙의 현장으로 아들을 원하는 서울 장안의 아낙네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바위의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자하문고개를 넘어온 개발의 칼질이 이곳의 명물인 부침
바위를 산산조각 내면서 이제는 그의 어떠한 흔적도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근래에 세운
바위터 표석이 이곳에 예전 그가 있었음을 아련하게 전할 따름이다.

서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멋드러진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과 인간들의 속물 근성 앞에 많은 바위가 희생을 당했다. 그 바위 가운데 여기서
가까운 응암동(鷹岩洞) 백련산(白蓮山) 자락에는 매 모양의 잘생긴 매바위가 있었는데, 땅값을
노린 집주인이 무식하게 파괴해 버렸다.


♠  야망의 사나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꿈이 깃든 현장
화려한 별장은 온데간데 없고 무계동 바위글씨만 아련히 남은
안평대군 이용 집터(무계정사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2호

▲  무계동(武溪洞) 바위글씨

석파랑에서 석파정을 품고 있는 서울미술관을 지나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창의로5가길을 들어서면
현진건 집터 표석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 골목길을 들어서 왼쪽으로 20~30도 각도를 바라보면
커다란 나무를 간직한 기와집이 보이는데, 그 집 뜨락 동쪽에 '무계동' 바위글씨가 새겨진 검은
피부의 커다란 고개가 들고 있다. 거기가 바로 한 토막 전설이 되버린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
사의 옛터이다.


※ 안평대군의 생애(1418~1453)
안평대군은 세종(世宗)의 3번째 아들로 세종이 왕위에 오르던 1418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용
(李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으로 그의
호에서 보이듯 꽤나 낭만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문(詩文)과 그림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칭송을 받았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무예에도 꽤 일가견이 있었다. 이렇게 문무(文武)를 두루두루 겸비한 인재로 세종의 18명 아들
가운데서 가장 능력이 좋았다.

1428년에는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29년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했다. 그리고 1430
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공부를 했으며, 1438년에는 두만강(豆滿江) 6진으로 파견되어 두만
강 이북의 여진족을 정벌했다.

세종이 붕어(崩御)한 이후, 맏형인 문종(文宗)의 신임으로 황표정사
(黃票政事 - 왕자들이 추천
한 인물 가운데 왕이 그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
를 장악, 자신의 측근을 요직에 앉혀
조정에서 꽤나 영향력을 행사했다. 1452년 문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단종(端宗)이 즉위하
자,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과 손을 잡고 수양대군을 견제하며 세력을 꾸준히 키워
나갔다.

그는 창의문 북쪽에 별장을 지었는데, 이곳은 자신의 2째 큰아버지이자 세종의 2째 형인 효령대
군(孝寧大君)의 별장이 잠시 있던 곳이다. 안평대군은 이곳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계곡을 닮
았다고 하여 무계동(武溪洞)이라 이름 짓고, 별장 이름을 무계정사<武溪精舍, 또는 무이정사(武
夷精舍)>라 했다.
그리고 힘깨나 쓰는 장정을 모집해 숙식을 제공하며 자신의 사병을 꾸준히 키워나가는 한편 용
산에 담담정(淡淡亭)이란 정자를 지어 문인(文仁)들과 교류를 하며 자신의 야망을 키워갔다.

하지만 2째 형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이후, 크게 존재를 드러내면서
단종을 설득해 안평대군의 꿀단지던 황표정사를 폐지시켰다. 이는 안평대군에 대한 심각한 도전
이자 대권에 대한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안평은 함경도에 있던 이징옥(李澄
玉)에게 무기를 지원받아 무력을 앞세워 잠시나마 황표정사를 회복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이는 그
의 명을 단축시킨 꼴 밖에는 되지 않았다.

동생의 무력도전에 발끈한 수양은 1453년 10월 그 유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순식간
에 김종서, 황보인 등을 처단했다. 방심하고 있던 안평은 꼼짝없이 포박되어 반역의 죄를 뒤집
어 쓰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는데, 수양은 썩 안심이 되질 않았던지 곧 강화도 서쪽인 교동도(喬
桐島)로 추방했으며,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사약 한사발을 보냈다.
안평은 형이 보낸 사약을 쭈욱 들이키며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그리고 형에게 방심했던 자신의
어리석움을 한탄하며 이내 피를 토하고 쓰러지니 그의 나이 불과 35살이었다.

역사에서 쓰라리게 퇴장을 당한 안평대군은 18세기 중반까지 복관(復官)되지 못했으며, 영조 23
년(1747년)에 이르러서야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건의로 복관되면서 죽은 지 300년 만에 편하
게 눈을 감게 되었다. 그의 시호는 장소(章昭)이며 무덤의 위치는 전해오지 않는다.

그가 이승을 뜬 이후, 그의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는 파괴되었으며, 권력을 향한 그의 강인한 정
열이 느껴지는 무계동 바위글씨만 쓸쓸히 바위에 남아 이곳이 무계정사였음을 속삭일 뿐이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懈堂)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여름철에는 많은 문인들
이 찾아와 경치를 즐겼다. 또한 정사 앞에는 기린교(麒麟橋)라는 다리가 있었다.

※ 문예가(文藝家)로써의 안평대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 서화, 거문고에 두루 능했던 안평대군, 그는 무이정사와 담
담정을 짓고 문인들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며, 궁중에 소장된 서화(書畵)와 자신이 수집한 중원
대륙의 서화들을 연구하거나 소개하는 등, 당시 문학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체를 사용했는데, 이를 나름대로 조선식의 필법으로 발
전시켰다. 또한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은 그의 글씨를 보고 조맹부의 글씨보다 더 휼륭하다고
칭송하며 그의 글씨를 서로 받아가려고 굽신거렸다고 한다.

한편 무계정사에 머물던 어느 날, 꿈 속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냥 기억 속에 두
기가 너무 아까워 그와 친분이 있던 안견(安堅)에게 그 꿈의 내용을 설명하여 그리게 하니, 그
그림이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왜국에 가 있으며, 2009
년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때 잠시 귀국한 인연으로 몽유도원도가 그려진 현장인 무계정사
터를 찾는 답사객의 수가 잠시나마 늘기도 했다.
또한 여러 문인들의 글을 정리하여 시화첩(詩畵帖)을 만들기도 하였고, 1452년에는 경자자(庚子
字)를 개주(改鑄)해 만든 임신자(壬申字)의 자모(字母)를 쓰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글씨로는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는 세종대왕 신도비(神道碑), 수원에 있는 청천부원군 심
온묘의 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자신의 아우인 임영대군묘표(臨瀛大君墓表, 의왕시 소재) 등
의 비문이 전한다.

'武溪洞' 바위글씨 곁에 자리한 낡은 기와집은 무계정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집으로 구한말이나
왜정 때 지어진 것이다. 2005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때는 쥐방울 만한 견공(犬
公) 2마리가 바위와 집을 철통같이 지켜 그들의 눈치를 살살 보며 바위글씨를 봐야 했다. 허나
이제는 그들도 안평대군의 부질없는 꿈을 따라 추억 속으로 사라졌고,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
리하고 있다.

2007년 이후 이곳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무계정사터'에서
'안평대군 이용 집터'로 변경되었
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철문이 굳게 잠겨있어 관람을 애타게 원할 경우 문에 달린 종로구청 문
화관광과로 연락을 하거나 철문의 헝클어진 틈을 요령껏 뚫고 들어가면 된다.


※ 무계정사터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버스로 부암동주민센터 하차
  창의문로5가길을 따라 도보 5~6분, 현진건집터 표석만 찾으면 금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19-4


▲  현진건집터에서 바라본 무계정사터
붉게 물든 아름드리 나무가 자리한 곳에 기와집과 무계동 바위글씨가 있다.
공터 남쪽 구석에는 은단천이라 불리는 샘터가 있으나 수질은 장담 못한다.

▲  이제는 표석으로만 남은 현진건 집터

빙허 현진건(憑虛 玄鎭健, 1900~1943)은 소설 '운수좋은 날'로 유명한 소설가이다. 예전에는 그
의 초라한 집이 좀 남아있었으나 개념도 밥말아먹은 개발의 칼질에 무침히 짓밟혀 지금은 표석
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래도 명세기 현대문학의 중추적인 인물의 집인데, 지방문화재나 등록
문화재로 삼아 보존하거나 평창(平昌) 봉평의 이효석(李孝石) 생가처럼 문학 테마 관광지로 특
성화시키면 정말 꿀단지가 되었을 것을 무작정 개발만 내세우는 작금의 현실이 그저 딱할 따름
이다.


▲  청계동천(靑溪洞天) 바위글씨

무계정사의 흔적을 둘러보고 현진건집터 표석으로 나와 인왕산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전원
분위기가 물씬 감도는 부암동, 그런 부암동에 핏줄처럼 얽힌 골목길은 마치 시골길을 거니는 즐
거운 기분이다. 동네가 산지에 있다보니 오르막길이 꽤 많지만 그렇게 죽을 정도는 아니다. 게
다가 인왕산과 북악산이 청정한 기운을 베푸니 도시의 탁한 기운도 거의 없어 머리도 맑아진다.

현진건집터와 윤웅렬별장 사이에는 피부를 드러낸 바위들이 여럿 있는데, 청계동천이란 바위글
씨를 품은 바위가 있어 이곳도 동천(洞天)의 칭호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바위글씨는 작고 얇은 모습으로 옛 사람들이
이곳 절경에 반해 낙서를 남긴 것이다. 지금이
야 계곡 대부분이 주택 개발로 생매장을 당해
실감이 썩 나지 않겠지만 반계 윤웅렬 별장 뒤
쪽에 얇게 흐르는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의 상류
이다.

청계동천 바위 주변은 개인 땅이라 바위 주변을
철책으로 꽁꽁 둘렀다. 그래서 바위 앞까지는
접근이 어려우나 바로 길가에 있기 때문에 관람
과 촬영에는 그리 지장은 없다.

▲  확대해서 본 청계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2호

▲  윤웅렬별장 문간채 (안쪽 대문)

청계동천에서 1분 정도 오르면 반계 윤웅렬별장(이하 별장)이라 불리는 한옥이 나온다. 이곳은
인왕산의 품에 포근히 안긴 그림 같은 기와집으로 1906년에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이 지은
별장이다.

윤웅렬은 해평(海平) 윤씨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1856년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감영중군(忠
淸監營中軍)과 공주중군(公州中軍), 북청병마우후토포사(北靑兵馬虞侯討捕使)를 거쳐 1878년 통
리기무아문참사(統理機務衙門參事)와 남양부사를 지냈다.
1880년 수신사(修信使)의 일행으로 왜국(倭國)을 둘러보고 왔으며, 1882년 별기군(別技軍)이 창
설되자 훈련원 하도감(下都監)의 신병대장의 영관(令官)이 되었으나 곧바로 터진 임오군란(壬午
軍亂)으로 왜국으로 줄행랑을 쳤다가 곧 귀국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면서 김옥균(金玉均)에 의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
었으나, 3일 천하로 허무하게 막을 내리면서 화순 능주로 유배를 갔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
革) 때 군부대신(軍部大臣)으로 있으면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청나
라 상해(上海)로 도망쳤으며, 몇 년 뒤 다시 컴백해 법무대신을 지냈다. 1910년 이후에는 왜정
의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좋지 않은 뒷끝을 보이다가 1911년 인생을 마감했다.

참고로 윤웅렬의 아들 가운데 그 유명한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있다. 그는 개화파 지식
인의 하나로 여러 선각자들과 함께 독립협회와 신민회(新民會)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민
중 계몽에 앞장섰다. 1910년 이후 안창호(安昌浩)가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을 지내면서
민족 교육에 헌신했으며, 1911년 105인 사건으로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허나 이후 친일파로
갈아타면서 부친과 더불어 쌍으로 구린 뒷끝을 보였다.

윤웅렬의 별장은 처음에는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윤웅렬이 골로 가면서 3
째 아들인 윤치창(尹致昌)이 상속을 받았는데, 1930년대에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채, 광채, 문간
채를 추가로 지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별장 안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으며, 안방 앞에는 2칸 부엌이 있고
, 건넌방 앞에는 작은 누마루가 있다. 안채 왼쪽에 광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있는데, 'ㄱ'모양의
사랑채 한쪽 끝에 윤웅렬 시절부터 전해오던 서양식 2층 벽돌건물이 있다.
사랑채와 2층 건물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앞에 인왕산이 베푼 조그만 계곡이 흘러간다.
그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의 상류로 계곡에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나무를 심어 경관을 아름답
게 꾸몄다. 사랑채 지붕에는 옥상 테라스를 돋보이게 만들어 경관을 감상하는 전망대로 삼았다.

사랑채와 광채는 변형이 심해 원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우며, 한양도성(都城) 밖 부암동에 세
워진 별서(별장)의 하나로 외국 건축 양식이 상류층 주택에 적용된 사례로 주목된다. 또한 안채
는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가 잘 반영되어 있다.

윤치창 이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봉산서원이라 불리는 미술공간으로 쓰였으며, 이때는 대문(
문간채) 앞 뜨락에 비너스상과 집채만한 큰 바위가 있어 특이한 모습을 보였는데, 2011년에 어
느 졸부가 이곳을 사들이면서 싹 정비해 그들을 내버렸다. 이때 대문을 새로 만들고 담장을 추
가했으며, 집도 새집처럼 산뜻하게 손질했는데, 보수공사 기간에 공사 관계자의 흔쾌한 허가로
2층 테라스를 비롯하여 별장 내부를 구석구석 관람하는 행운을 누렸다.
부암동이 요즘 인기를 누리면서 찾는 이가 쓸데없이 늘긴 했지만 여기까지는 거의 오지 않는다.
설령 용케 왔다고 해도 속사정을 알지 못하니 그저 담장만 찍고 돌아갈 뿐이다.

별장 보수공사는 2011년 12월에 끝났으며, 이후로는 소유자의 뜻에 따라 절대로 속살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그 이전에 본 것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내 바램이긴 하지만 이 괜찮은 한
옥을 집주인 일가만 야속하게 누리지 말고 다수가 좀 누렸으면 좋겠다. 그냥 누리면 좀 미안하
니 요즘 인기를 더하고 있는 한옥체험장(한옥 민박, 게스트하우스)으로 개방하면 어떨까?
북촌과 전주한옥마을, 경주 양동민속마을, 안동의 몇몇 기와집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한옥 체험/
숙박 장사를 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곳 집 크기는 북촌의 왠만한 한옥과 비슷하거나 조금
큰 편이며, 뜨락도 넓고, 바로 옆이 인왕산 숲이라 공기도 매우 상쾌하다. 도심이긴 하지만 깊
숙한 산골 마을에 들어온 듯, 전원 분위기가 그윽하며, 집에 딸린 방이 많고 한옥의 흔치 않은
2층 테라스까지 두고 있으니 소문만 잘나면 어지간한 한옥 숙박집 이상의 인기를 얻을 것이다.
게다가 도심과 가깝고 교통도 괜찮으며, 정류장에서 도보 10분이니 접근성도 그만하면 딱이다.


▲  서쪽 담장 너머로 바라본 윤웅렬별장의 뒷모습

▲  2011년 후반에 새로 지은 바깥 대문
예전에는 그냥 뻥 뚫린 공간이었다
.

▲  안채 옆에 있는 또 다른 문
원래 있는 문으로 늘 굳게 닫혀있다.

▲  윤웅렬별장 앞길 (대문과 담장은 2011년
보수 때 새로 했음)

▲  겨울잠에 잠긴 별장 연못
물과 연꽃, 물고기가 넘쳐날 그때를 꿈꾼다.


▲  윤웅렬 별장의 숨겨진 아름다움 (사랑채 뒤쪽 계곡) ▼

별장 뒤쪽에는 이곳만의 숨겨진 비경이 있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절경이 수줍은 듯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조그만 계곡이 없는 듯 흘러가는데, 이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이다. 계곡 양쪽에는 돌
로 높게 석축을 쌓았으며, 위쪽에는 2단으로 석축(石築)을 둘렀다. 석축 위에는 단풍나무를 비
롯한 여러 나무들이 앞다투어 작품이 되면서 늦가을의 정취를 진하게 우려낸다. 지나가던 가을
도 이 별장에 단단히 눈독을 들였는지 뒤쪽으로 슬며시 들어와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빚은 것
이다.


▲  사랑채 뒤쪽 계곡의 막다른 곳 (바위와 폭포)

계곡의 막다른 곳에는 푸른 이끼를 뒤집어 쓴 바위가 있다. 이끼가 가득하다는 것은 이곳이 그
만큼 청정하다는 것을 강하게 의미한다. 인왕산에서 흘러온 계곡이 이 바위에서 아담하게 폭포
를 자아내며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폭포의 높이는 2m 정도로 물줄기가 바위 전체를 타고 흐르
는 것이 아닌 한쪽 구석에 답답한 줄기로 흘러간다. 바위 위쪽 주변에는 석축을 쌓고 계단을 만
들었는데, 붉게 타오른 낙엽이 수북히 쌓여 마치 산불이 일어난 듯 하다.


▲  푸른 이끼의 청정한 안식처인 바위와 폭포

▲  폭포 밑에 모인 인왕산 계곡물

티끌 없이 맑은 계곡물이 폭포 밑에 마련된 조그만 담(潭)에 옹기종기 모여 기나긴 여행을 준비
한다. 여기서 숨을 돌리고 길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드니 그 아쉬움은 정말 대단하겠지. 그
런 못에 낙엽들도 몰려와 그들 생애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주변 나무들은 조그만 못에 비
친 자신을 바라보며 막바지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  바위 위쪽 부분 (석축과 돌계단)
비록 짧지만 한세상 폼나게 살다 쓸쓸히 대지로 떨어진 이쁜 빛깔의 낙엽이
수북히 쌓여 아름다운 선경(仙境)의 불빛을 이룬다.

▲  불의 화신일까..? 붉게 물이 오른 단풍잎

▲  2층 테라스를 갖춘 사랑채와 2층 벽돌집

비경의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랑채는 별장 내부를 꽁꽁 가리고 있다. 사랑채 지붕
위에는 특이하게 옥상 테라스를 두어 작지만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으며, 사랑채 바로 옆에
는 붉은 피부의 서양식 2층 벽돌집을 두어 옥상으로 연결하는 계단을 두었다.
벽돌집에는 각 층마다 큼직한 방이 있어 사랑채의 보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옥상 테라스와 벽
돌집은 이곳만의 진한 매력이자 서울에 있는 근/현대 한옥 중에서도 유일한 케이스이다.


▲  측면에서 바라본 2층 벽돌집과 사랑채
붉은 벽돌로 치장한 벽돌집에 중후한 멋이 엿보인다.

▲  별장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 - 왼쪽이 사랑채, 오른쪽이 문간채이다.

▲  2층 벽돌집과 안으로 들어가는 문

▲  사랑채 지붕 2층 테라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안채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남쪽 산자락
정말 시리도록 아름다운 늦가을 풍경이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뒤쪽 (서쪽)

사랑채 지붕으로 올라가려면 2층 벽돌집을 거쳐야 된다. 실내화로 갈아신어 계단을 타고 2층으
로 올라가 문을 열면 나무로 지어진 2층 테라스로 전망용으로 지어지긴 했으나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매우 좁아 별장 일대와 남쪽 산자락이 고작이다. 하지만 산자락에
나무가 무성해 눈이 그리 심심치는 않으며, 이곳에 올라 인왕산에서 잔잔히 다가오는 선선한 바
람을 맞으면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이 싹 가시는 듯 하다.

별장 서쪽 언덕에는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구석에 소나무 등의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가 제법
다 자란 티를 내며 별장에 작게나마 그늘을 드리워준다. 게다가 커다란 바위도 한쪽에 자리잡고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숫키와가 얹혀진 담장이 집을 넓게 둘러싸며 속세와 경계를 이룬다.


▲  텅 비어있는 벽돌집 2층

※ 반계 윤웅렬 별장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교통편은 앞의 무계정사 참조, 무계정사 입구 현진건집터에서 큰 골목길로 직진하면 된다.
* 개인 소유라 내부 관람은 어렵다. 관계자의 허가를 받드시 받기 바란다.
* 여기서 인왕산의 품으로 6분 정도 들어가면 자하미술관(02-395-3222)이 있으며, 미술관 직전
  에서 부암약수터를 거쳐 인왕산으로 올라가도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48


▲  부암동 나들이를 마치고 자하손만두에서 먹은 떡만두국
색이 입혀진 만두가 나그네의 입맛과 시각을 제대로 자극시킨다.

부암동을 둘러보니 슬슬 어둠이 내려오면서 시장기가 감돈다. 답사와 등산에서 먹는 재미만큼이
쏠쏠한 것은 없지. 마침 자하문고개까지 올라온 터라 자하문길과 북악산길이 만나는 고개 중턱
에 자리한 자하손만두를 찾았다.
이 만두집은 서울식 만두를 파는 곳으로 서울에서 만두로 꽤 유명한 집이다. 다양한 색과 모양
을 지닌 만두는 입안에서 살살 녹기가 바쁘며, 만두집이라 만두와 떡국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2층 양옥으로 이루어진 이 집은 뜨락에도 상을 놓고 손님을 맞는데, 휴일 저녁이라 자리가 거의
없다. 우리는 편수와 떡만두국을 먹었는데, 가격이 몹시나 얄미운 수준이다. 편수는 11,000원,
만두국은 무려 12,000원이나 한다. 내가 먹은 만두국 가운데 가장 허벌나게 비싸다. 그렇다고
나같은 장정이 먹기에도 썩 넉넉한 양도 아님. 만두를 겯드린 식사를 하려면 2인 기준으로 3~4
만원대는 잡아야 된다.

반찬은 김치와 송송(깍두기)이 전부이며, 식사를 마치면 후식으로 잘 익은 수정과를 준다. (지
금도 주는 지는 모르겠음) 고개 중턱에 자리한 탓에 자리만 잘 잡으면 인왕산과 부암동을 바라
보며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산자락이라 밤공기가 좀 차다.


▲  편수의 위엄
편수는 소고기와 표고버섯, 오이 등이 들어간 만두로 그 모양이 참 이쁘다.
저들의 모습은 소중한 무엇인가를 꼭꼭 품고 있는 모습 같은데, 그 껍질을
벗기면 잘 버무려진 편수의 내용물이 수줍은 듯 속살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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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4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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