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20.04.09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에서 무지개를 보다 ~~ (숙정문에서 청운대, 백악마루, 부암동 창의문까지)
  2. 2019.06.24 북한산둘레길2코스 순례길, 구천계곡 여름 나들이 ~~~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 신익희선생묘, 가인 김병로묘, 단주 유림묘)
  3. 2019.05.05 높은 산에 포근히 감싸인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홍제천~부암동 나들이 (보현산신각, 박종화가옥, 홍지문, 옥천암, 산모퉁이)
  4. 2018.12.19 김신조 공비패거리가 넘어갔다는 도심 속의 푸른 허파, 북악산 김신조루트 ~~~ (북악하늘길1산책로, 2산책로, 북악산길)
  5. 2018.04.24 상큼한 경승지를 많이도 간직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둘러보기 ~~~ (세검정, 석파랑, 석파정별당, 홍지문,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6. 2017.11.17 우이령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외롭게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양주 오봉산 석굴암 ~~~ (유격광장, 우이령길)
  7. 2017.10.11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이 깃들여진 첩첩한 산골의 절집, 북한산 삼천사 ~~~ (삼천사계곡)
  8. 2016.11.17 오랜 세월 굳게 잠겨있던 아름다운 고갯길, 북한산 우이령 늦가을 나들이 (우이령길)
  9. 2016.09.07 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아름다운 계곡을 옆구리에 차고 있는 ~~ 북한산 진관사 (진관사계곡)
  10. 2015.12.23 서울의 듬직한 뒷산, 북한산~북한산성 겨울 산행 (태고사, 행궁터, 대남문, 문수사)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에서 무지개를 보다 ~~ (숙정문에서 청운대, 백악마루, 부암동 창의문까지)

 


'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 나들이 '

▲  북악산에 뜬 무지개

▲  숙정문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가을이 막바지 절정을 누리던 11월 중순 주말에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北
玄武)인 북악산(백악산)을 찾았다.

둥근 햇님이 하늘 높이 떠 있던 오후 2시,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서울시내
버스 1111번(번동↔성북동)을 타고 성북동(城北洞) 서울다원학교 종점에서 두 발을 내렸다.
성북동 종점에서 천하 여러 나라의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성북 우정의 공원'을 지나
삼청각으로 인도하는 조그만 길(성북로31가길)로 들어서니 숲과 계곡, 주택이 뒤섞인 전원
(田園) 풍경이 펼쳐진다. 길 왼쪽(남쪽)에는 진하게 우거진 숲과 함께 북악산이 베푼 계곡
이 졸졸졸~~♬ 흘러가며, 그 계곡은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북악산의 청정한 기운을 가득
머금으며 속세로 흘러간다.
그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함께 약간의 오르막 길이 펼쳐지
는데, 그 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삼청터널은 성북동과 삼청동, 도심을 이어
주는 터널로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히 2차선 덩치를 고수하고 있어 주말과 휴일에는 버벅
거리는 차량의 행렬을 심심치 않게 본다.
(삼청터널은 차량 전용 터널이라 뚜벅이는 통행 금지임)

삼청터널로 향하는 길(대사관로)을 건너면 홍련사로 가는 길과 북악산으로 가는 길이 나란
히 나타난다. 허나 길이 서로 붙어있어 초행자는 자칫 햇갈리기 쉬운데, 오른쪽 평탄한 길
이 홍련사(紅蓮寺) 길이며, 왼쪽 계단길이 북악산과 김신조루트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햇
갈리지 않도록 한다.
홍련사로 가는 길은 오로지 홍련사만 이어줄 뿐이며, 절 입구에 정열적으로 타오른 단풍나
무가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마구 돌을 던진다. 저 길로 들어서면 나도 저들처럼 붉게
물드는 것은 아닐까..?


▲  늦가을이 화사하게 질러놓은 붉은 단풍이 펼쳐진 홍련사 입구(오른쪽)와
북악산, 숙정문 입구(왼쪽)


 

♠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입문

▲  북악산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직전)

북악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을 오르면 2007년에 북악산 개방 기념으로 조림(造林)한 것을 기
리고자 세운 표석이 있고, 그 표석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로 이어지며, 직진을 하면 바로 숙정문안내소
가 나온다.


▲  숙정문안내소

숙정문안내소는 말바위안내소, 창의문안내소와 함께 북악산 주능선(한양도성길)으로 인도하는
관문이다. 예전에는 신분증을 무조건 지참하여 출입신청서를 작성해야 했으나 2019년 4월 5일
부터 그런 것이 폐지되어 다소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허나 북악산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다보니 개방 시간에는 여전히 제한을 두어 여름(5~8월)
에는 7~19시(출입은 17시까지), 봄과 가을은 7~18시(출입은 16시까지), 겨울은 9~17시(출입은
15시까지)이다. 또한 쉬는 날도 사라져 요일 가리지 않고 접근이 가능하다.

숙정문안내소를 지나면 속세살이처럼 각박한 길이 숙정문까지 이어진다. 시작부터 힘든 길이
니 북악산이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님을 느끼게 하는데, 그 각박함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나무데크 계단길을 닦아놓았다.


▲  숙정문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이후, 초겨울)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백악산(白岳山)> - 명승 67호
서울 도심 북쪽에 가파르게 솟아난 북악산(342m)은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駱山, 낙타산
),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지키는 4대 산의 하나이다. 이들을 내사
산(內四山)이라 부르는데, 그들 중 북악산이 맏형이며, 낙산은 막내 동생이다.

서울 도심의 지형은 내사산에 감싸인 분지(盆地)로 조선 태조 때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국도
(國都)를 옮기면서 이들 산의 능선을 따라 18.2km의 도성(都城)을 구축했다. 그리고 풍수지리
에 따라 북악산을 북현무로 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삼았으며,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았다.
이렇게 도성을 만들고 한강 남쪽에 있는 관악산(冠岳山, 629m)을 신하의 산이란 뜻의 조산(朝
山)으로 삼았는데, 그가 주산인 북악산보다 훨씬 높고 산세가 우람해 거의 신하가 왕을 누르
고 있는 형세였다. 게다가 관악산과 그 서쪽에 있는 호암산(虎巖山)이 각각 활활 타오르는 불
의 모습과 호랑이의 모습으로 나란히 서울을 응시하고 있어 조선 위정자들은 비보풍수(裨補風
水)의 일환으로 서울 북쪽에 있는 북한산(삼각산)을 가져와 서울을 지키는 듬직한 진산(鎭山)
으로 삼아 관악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했다. 북한산이 관악산보다 키도 높고 산세 또한 장대하
기 때문이다.

북악산의 옛 이름은 백악산으로 종로구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보이는데, 오랫동안 서울을 상징
하는 산으로 남쪽 자락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닦고, 그 북쪽(지금의 청와
대)에는 넓게 후원을 두었다. 지금은 청와대(靑瓦臺)와 국무총리공간이 둥지를 틀어 이 땅의
정치, 행정 1번지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북악산 주능선에는 한양도성(漢陽都城)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정상 동쪽에는 북
문인 숙정문이 있고, 인왕산과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고개에는 창의문(자하문)이 고색의 모습
으로 고개 중턱을 지킨다.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지키는 예민한 곳으로 성곽을 낀 주능선과 정상 주변은 사람들
의 발길을 통제했는데, 그래도 해방 이후에는 주능선과 북쪽 능선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으나 1968년 1.21 사건 이후 북악산 대부분이 닫힌 땅이 되고 말았다.

주능선과 조금 떨어진 삼청동(三淸洞)과 청운동(淸雲洞)은 한양도성의 북쪽 변두리로 숲이 무
성했다. 삼청동계곡과 대은암(大隱巖)계곡, 백운동(白雲洞)계곡, 청송당(聽松堂)계곡 등의 계
곡이 흘렀으며, 풍경이 아름다워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 및 풍류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그리
고 삼청공원과 숙정문 주변은 사대부(士大夫) 여인들의 봄꽃놀이 장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대
은암계곡 바위글씨를 비롯해 당시의 여러 문화유적이 아련히 남아있으며, 북악산 북쪽 백사골
(백사실)에는 백석동천이란 별서(別墅)유적이 전하고 있다.

북악산은 북쪽으로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숲이 무성하다보니 예로부터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
다. 그들은 궁궐 후원과 북촌까지 침투했는데, 태종(太宗)이 경복궁 후원을 거닐다가 호랑이
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다.
북악산 호랑이는 다른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하며, 대신 수진궁(壽
進宮) 귀신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하여 인왕산, 북악산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왕족의 사당임)

1968년 이후 속세에 개방을 꺼렸던 북악산은 2006년 4월 1일 홍련사에서 숙정문을 거쳐 촛대
바위까지 부분 개방되었으며, 그것도 인터넷 예약을 통해 1일 4회만 출입이 가능했다. 이후
전면 개방을 위해 쉼터와 의자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어 2007년 4월 5일에 말바위에서 정상을
거쳐 창의문까지 전 구간이 개방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2009년 북쪽 능선인 북악하늘길(김신
조루트)이 활짝 열려 시민의 품으로 들어왔는데, 이 길은 약간의 통제구역이 있긴 하지만 제
약이 심한 주능선과 달리 언제든 자유롭게 안길 수 있다.

북악산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유명하여 조선 조정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했으며, 왜정
(倭政)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로 지금은 주능선 일대에 조금 남아있다. 그 외에는
간간히 소나무가 목격된다. 또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있다보니 나무와 식물들이 마음 놓
고 뿌리를 내려 숲이 원시림마냥 울창하다. 게다가 숙정문 주변에는 팔배나무가 군락을 이루
고 있으며, 수목이 무성하여 새들이 많이 산다.
그러다보니 서울 도심의 하늘을 정화시켜주는 허파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인왕산
과 북한산, 관악산과 더불어 대자연이 서울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자 꿀단지로 앞으로도 지금
의 모습 그대로 삼삼한 자연의 공간으로 서울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산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많다보니 개발의 칼질 또한 그 눈치로 마음껏 칼질을 할 수는 없다.


▲  북악산 김신조루트 남마루에서 바라본 북악산 주능선(가운데 산줄기)과
서울 도심

※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한양도성길
2006년 4월부터 순차적으로 개방된 주능선은 창의문에서 정상을 거쳐 말바위로 이어지는 4.3
km 구간으로 숙정문 안내소와 말바위 안내소, 창의문 안내소를 통해 입장할 수 있다. (그 외
에는 출입금지) 또한 탐방구간(말바위안내소~창의문안내소)을 절대로 벗어나면 안되며 도처에
군인이 지키고 서 있으니 엉뚱한 마음을 품으면 곤란하다. (말바위안내소~말바위~삼청공원/와
룡공원 구간은 완전 개방된 구간이라 시간 제한 없음)

주능선에서 만날 수 있는 명소로는 숙정문과 1.21사태소나무,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촛대바
위, 청운대 등이며, 군사시설이 옥의 티처럼 널려 있어 북악산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실감케
한다. 만약 서울이 수도가 아니었다면 북악산은 꽤나 자유로운 몸이 되었을 것이다.
북악산 정상과 청운대에서는 서울 도심이 두 눈 아래로 펼쳐져 조망(眺望)이 일품이며, 숙정
문과 말바위에서는 성북동과 성북구 지역이 보이고, 한양도성을 따라 평창동(平倉洞)과 부암
동, 인왕산, 북한산이 차례대로 보여 그야말로 움직이는 조망대이다.

* 북악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삼청동 / 성북구 성북동
* 말바위안내소 (☎ 02-765-0297~8, 팩스 02-765-0296)
* 숙정문안내소 (☎ 02-747-2152, 팩스 02-747-2153)
* 창의문안내소 (☎ 02-730-9924~5, 팩스 02-730-9926)


 

♠  숙정문에서 청운대까지

▲  약간 측면에서 올려다본 숙정문(肅靖門) - 사적 10호
숙정문 앞은 바로 각박한 산비탈이라 평평한 공간이 적어 성문을
지키기에는 아주 그만인 곳이다.


숙정문안내소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숙정문이 모습을 비춘다. 이 문은 한양도성의 북문(北門)
으로 남대문<숭례문(崇禮門)>, 동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돈의문(敦義門)>과 함께
한양 4대문의 하나였다. 북대문(北大門), 북문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가파른 산능선에 자리해
있어 도성의 대문이라기 보다는 산성(山城)의 조촐한 성문 분위기가 진하다.

문의 이름인 숙정(肅靖)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가운데 1자만 다른 숙청문(
肅淸門)이었다. 1396년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1413년에 풍수학자인 최양선(崔
揚善)이 태종에게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地脈)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이들 문을 닫아걸고 소나무를 잔뜩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래
서 무늬만 문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거 외에도 숙정문을 품은 북악산 주능선은 도성 내부와 바깥이 훤히 바라보이는 예
민한 위치로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출입을 거의 통제했고,
설령 이 성문을 나와도 이어지는 곳은 숲이 무성한 북악산 북쪽 산줄기와 북한산, 성북동가
고작이었다. <성북동은 동소문(東小門)을 통해 갈 수 있음>
그리고 평소와 비가 많이 올 때는 숙정문을 닫아 걸다가 가뭄이 심할 때 남대문을 닫고 이 문
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1416년에 제작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따라서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통행문으로서의 존
재감보다는 도성 수비와 음양의 원리를 따지는 풍수지리적인 존재감이 훨씬 컸던 것이다.

1504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숙청문이 언제 숙정문으로 이름이 갈렸
는지는 북악산 산신(山神)도 모르는 실정이나 1523년부터 숙정문 이름이 등장했다. 숙정문 외
에도 북정문(北靖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들 명칭이 같이 쓰이다가 언제부턴가 숙정문으
로 통합되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대부분과 숙정문 일대가 금지된 땅이 되었으며, 1976년 북악산
일대 성곽을 손질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문루는 비록 새 건물이지만 성벽을 이
루는 성돌에는 고색의 때가 만연해 중후한 멋을 보인다.
2006년부터 다시 속세에 공개되어 제한적이긴 하지만 성문 관람이 가능해졌다. 허나 문 좌우
성곽길과 숙정문안내소 방면만 통행이 가능하며, 남쪽에는 삼청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으
나 금줄이 쳐져 있어 절대로 갈 수 없다.

숙정문 문루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능선과 성북동 일대가 바라보이며, 대자연이 그린 가을
단풍이 산자락을 곱게 수를 놓아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자아낸다. 높은 곳에 자리한 것
은 분명하지만 문 남쪽은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방해하고 있고, 북쪽도 겨우 성북동과 삼청각
, 북악산 북쪽 능선이 전부라 조망은 생각보다 별로다.
매년 봄에는 사대부 여인들이 숙정문 남쪽에서 봄꽃놀이를 즐겼다고 하며, 그거 외에는 딱히
숙정문 주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시(詩)나 문구(文句)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  숙정문의 수수한 뒷모습

▲  숙정문 서쪽 협문(夾門)


▲  숙정문에서 바라본 천하
눈이 시리게 맑은 가을 하늘 아래로 북악산과 북한산 사이에 포근히 둥지를 튼
성북동이 바라보인다. (왼쪽에 보이는 큰 기와집이 삼청각)

▲  숙정문 서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가운데 기와집이 삼청각)

▲  북악산에서 만난 일곱 색깔 무지개의 위엄
비가 잠깐 오더니 이내 일곱 색깔 무지개가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무지개를
본 것이 정말 몇 년 만인지 옛 친구를 만난 듯 무척 반갑고 신기했다.

▲  힘차게 뻗은 숙정문 서쪽 성벽
서울 수비를 향한 굳건한 마음이 뭉쳐 단단한 성벽이 되었다. 성곽을 따라
북악산으로 오르면 시야에 범위도 점차 넓어진다.

▲  촛대바위

숙정문 서쪽에는 촛대바위가 있다. 아마도 촛대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듯 싶은데
현실은 바위의 북쪽과 동쪽 면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곳에서 보면 촛대처럼 보이지도 않아
그저 그런 바위로만 보이는데, 그를 제대로 보려면 바로 정면인 남쪽에서 봐야 되지만 남쪽은
금지된 구역이라 발을 못들이게 한다. 또한 바위 정상도 금지된 곳이니 괜히 바위 위에 올라
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우리가 촛대바위를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왜정(倭政)이 이 땅의 혈을 끊고자 무식하게 쇠말뚝
을 박았던 추악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왜정은 1920년대에 경복궁과 일직선이 되는 이곳에 말뚝을 꽂았는데, 사람으로 친다면 머리의
정수리가 되는 부분이다. 즉 조선 땅의 머리 부분을 아작을 내어 이 땅을 영원히 통치하고 싶
은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다행히 그 말뚝은 제거되었으나 말뚝의 휴유증 때문일까? 이 땅은
아직도 혼돈 속에 잠겨있다. 친일매국노와 그런 것을 추종하는 잡것들이 권력과 부를 챙기고
이 땅을 이간질시켜 나라의 기본부터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언제쯤 촛대바위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까? 그때가 되면 주름진 나라 사정도 좀 펴지겠지.
(왜정의 쇠말뚝에 대해서는 측량용이란 말도 있음)


▲  촛대바위와 그에게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나무 난간 너머와 바위는 감히 발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다.

▲  촛대바위에서 청운대로 오르는 성곽
성곽을 따라 이어진 북악산의 명물 소나무의 푸른 물결..

▲  북악산 주능선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한양도성
(곡장 조망대에서 바라본 모습)
도성 너머로 구름에 감싸인 북한산(삼각산)이 바라보인다.


촛대바위를 지나면 성곽길 경사가 점점 각박해지면서 암문(暗門)이 하나 나온다. 여기서 암문
밖으로 나가서 잠시 성곽 바깥 길을 이용해야 되는데, 이는 성곽에 군사시설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길을 낸 것이다.
길 옆에는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그 너머로 북한산, 평창동 등이 바라보여 마치 휴전선 너머
의 금지된 땅을 보는 듯 하며, 그 길의 끝에 이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나온다. 거
기서 다시 성곽길이 이어진다.


▲  청운대(靑雲臺) 표석 (해발 293m)

촛대바위에서 성 바깥, 안쪽을 들락거리며 2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에서 2번째로 높
은 곳인 청운대가 마중을 한다.
청운대는 푸른 구름의 지대란 뜻으로 근래에 붙여진 이름인 듯 싶다. 이곳은 공간이 넓고 의
자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으며 북쪽으로 성북동과 북한산, 남쪽으로 남산과 서울 도심이
바라보여 조망 또한 괜찮다. (도심 쪽이 괜찮음)


▲  소나무가 짧게 그늘을 드리운 청운대

▲  청운대에서 바라본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 도심과
서울의 영원한 남현무, 남산(목멱산)

▲  청운대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상

▲  청운대 주변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신영동, 부암동, 북한산

▲  여장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들

청운대를 지나면 안내문이 하나 나오는데, 그 안내문에 따라 여장을 살펴보면 글씨들이 희미
하게 아른거릴 것이다. 이 글씨들은 도성을 축조하면서 새긴 공사 구역 표시와 공사 담당 고
을,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으로 이런 것이 새겨진 성돌이 한양도성에 여럿
있다.

1396년 한양도성을 만들 때 성곽 전 구간을 600자(약 180m) 단위로 끊어 97구간으로 구획하고
천자문(千字文) 순으로 공사 구역을 표시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天)으로 시작하여 지(地),
현(玄)... 순으로 해서 북악산 정상 동쪽에서 조(弔)로 끝나며, 구역 다음에 공사 일자와 공
사 책임자의 직책, 이름을 새겼다. 이런 공사 실명제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 되었으며, 이곳
성돌에는 의령시면(宜寧始面)이라 쓰여 있어 의령(경남) 시작 지점을 뜻한다.


▲  남북분단의 쓰라진 비극 - 1,21사태 소나무

성돌글씨 부근에는 1.21사태 소나무라 불리는 소나무가 있다. 북악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
건이 바로 1968년 김신조 공비 패거리의 서울 침공 사건인 이른바 1.21사태로 그들과 총격전
을 나눈 현장의 하나이다. 북악산에는 그와 관련된 쓰라린 장소가 많은데, 이 소나무와 호경
암이란 바위에는 총탄의 흔적이 있으며, 호경암이 있는 북쪽 능선에는 김신조 일당이 도망친
길인 김신조루트(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가 있다.
1.21사태 소나무에서 우리 군과 공비 패거리간의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그때 이 나무에 총탄
15발이 무심하게 박혔다. 이후 그 자리에 흉물스럽게 동그란 표시를 하여 남북분단의 잔인한
현실과 함께 이곳을 지키는 군인들로 하여금 경계로 삼고 있다.

때는 1968년, 북한은 김신조 일당 31명을 보내 청와대를 공격케 했다.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파주와 양주의 여러 산과 북한산 서쪽 자락, 창의문을 거쳐 1월 21일 서울 도심까지 용케 들
어온 김신조 패거리는 청와대를 코앞에 둔 청운동(淸雲洞)에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1932~1968)이 이끄는 경찰에게 저지를 당했다.
경찰이 검문을 한다며 그들의 길을 막자 공비들은 크게 발작하여 외투 속에 감춘 기관단총을
꺼내 먼저 공격을 가했다. 불행히도 최서장은 가슴과 배에 관통상(貫通傷)을 입어 쓰러졌고
'끝까지 청와대를 사수하라!!'
마지막 명령을 내리며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서장의 죽음에 애끓는 복수심에 불탄 경찰은 더욱 반격의 속도를 올려 공비들 상당수를 벌집
으로 만들었다. 이때 김신조를 비롯한 살아남은 공비들은 목을 붙잡고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줄행랑을 쳤는데, 그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바로 이 소나무 부근에서 격전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북악산 북쪽 능선인 호경암에서 격전이 있었고, 1월 21일 이후 14일의 토벌 끝에 김신조
와 도주 1명을 제외한 29명을 사살했다. 도주 1명은 북한까지 도망을 친 것으로 전해지며, 처
단된 공비의 시신은 파주시 적성면 적군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김신조는 투항해 이 땅 어
딘가에 살고 있다.

김신조 일당의 난입 사건을 1.21사태라 부르며, 이 사건을 계기로 단단히 뚜껑이 폭발한 박정
희 대통령은 바로 그해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군작전도로인 북악스카이웨이를 콩볶
듯 급히 만들게 했다. 이 예비군 창설로 인해 이 땅의 남자들은 군제대를 하고도 8년이나 예
비군 훈련을 받아야 되는 불이익을 받게 된 것이다.


▲  1,21사태 소나무의 총탄 흔적
그때 총탄이 박힌 자리에 빨간색과 흰색으로 좀 흉하게 표시를 해두었다.


북악산에 널린 수많은 소나무의 하나로 이제는 북악산의 명물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허나
좋은 뜻에서 그리 되면 모르겠지만 호경암과 함께 1.21사건 같은 영 좋지 않은 사건으로 명물
이 된 것이니 소나무 자신도 마음이 그리 편치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름이 없는 소나무처럼
조용히 묻히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어쩌다가 안좋은 쪽으로 명물이 되었는지 나무나 사람이
나 운과 시간을 잘 만나야 된다.
게다가 호경암처럼 당시에 총탄 흔적까지 안고 있으니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70년 넘게 대치
하고 있는 남북분단의 우울한 비극을 전율이 일도록 느끼게 만든다.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창의문까지

▲  북악산 정상힌 바위 (저 바위가 실질적인 정상임)

청운대에서 10분 정도를 마저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에 이르게 된다. 백악
마루는 해발 342m로 마루란 순수 우리말로 정상을 뜻한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정상 중앙에 백악산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
원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는 사람 키보다 2배 정도 높은 굵직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적인 북악산의 머리이다.
정상 남쪽에는 청운대와 마찬가지로 소나무가 가득해 그윽한 솔내음을 전해주며, 테두리 안에
서만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테두리를 넘으면 나라가 매우 싫어하기 때문에 굳이 넘을
생각은 하지 않도록 한다.
여기서는 동서남북 어디든 촬영이 가능하며, 북쪽으로는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동쪽은 성
북동과 서울 동북부지역, 서쪽은 부암동과 인왕산(仁王山), 그리고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
산(南山)이 속시원히 바라보여 조망이 일품이다.

이곳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천하를 보고 있자면 그 천하가 마치 내 것이 된 듯, 잠시나마 제
왕(帝王)마냥 즐거운 기분이 밀려온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중의 시궁창..) 세계 최대의 대
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이곳만큼 조망이 좋은 곳도
없다. 또한 서울 도심을 둘러싼 뫼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며, 오랜 세월 서울 땅을 지켜온 북
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도 느껴진다.


▲  하얀 돌로 다듬은 백악산 정상 표석

▲  소나무 너머로 바라보이는 서울 도심과 남산
중공 짱깨산 미세먼지로 조망이 영 시원치가 못하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지역
산속에 묻힌 너른 동네가 성북동이고, 그 산 너머로 성북구와 강북구,
노원구 등 서울 동북부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북악산 꼭대기 바위에서 바라본 정상부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북한산
북악산을 받쳐주는 서울의 듬직한 진산, 북한산이 북악산을 굽어본다.
그 남쪽 산자락에는 부자 동네 평창동이 크게 둥지를 틀었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인왕산을 비롯하여 서대문구, 은평구 지역과 서울/고양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봉산, 앵봉산 등)들이 바라보인다.

▲  백악쉼터에서 바라본 북악산 북쪽 산줄기와 평창동,
그리고 북한산의 위용
북악산(삼각산) 북쪽 산줄기는 늦가을이 질러놓은 단풍에 산불마냥 활활
타오르고 있다. 너무 곱게 타올라 깜깜한 밤에도 모두 보일 것만 같다.

▲  백악쉼터에서 창의문으로 내려가는 성곽길
녹음이 짙은 소나무가 아찔한 내리막길을 가려주려는 듯 가운데서 시야를 막는다.

▲  백악쉼터 부근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신영동, 홍지동 지역

북악산 정상에서 창의문으로 가는 성곽길은 북악산에서 가장 고달픈 구간으로 각박한 속세살
이만큼이나 길이 가파르다. 내려갈 때는 올라가는 것보다야 부담이 적겠지만 급하게 펼쳐진
성곽길에 아찔함마저 들 정도이다. 그리고 창의문에서 올라갈 때는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성곽길에 '이게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길인가?' 기를 제대로 질리게 만든다. 거의 30~40도 경
사의 야속한 성곽길을 올라야 되니 말이다.
그래서 등산이 딸리거나 노인과 어린이들은 가급적 숙정문이나 말바위에서 오르기를 권한다.
어차피 거기도 힘들긴 마찬가지이나 서서히 경사가 급해지는 구간이라 덜 힘들다. 창의문이
정상과 가까운 지름길이라고 해서 만만히 보면 후회한다.

정상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백악쉼터라 불리는 조촐한 쉼터가 나온다. 여기는 북악산 개방
을 위해 닦은 공간으로 역사적인 의미는 없다. 이곳에서도 사진 촬영은 가능하나 쉼터 자체는
찍을 거리가 없으며 성곽과 성 밖에 펼쳐진 천하를 찍으면 된다.


▲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한양도성길 (백악쉼터에서 정상 방향)

▲  돌고래쉼터에서 만난 돌고래바위

백악쉼터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돌고래쉼터가 나온다. 쉼터 바로 옆에 돌고래처럼 생긴 바
위가 누워있어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이름도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닌 북
악산을 개방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바위가 돌고래를 닮았다며 거의 주입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내 눈에는 물개
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면서 움직이는 모습 같아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나에게는 이름을 갈아치울 힘이 없다.

돌고래쉼터 주변은 촬영이 가능하나 찍을 만한 것은 돌고래바위와 성곽 너머로 보이는 풍경들
뿐이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보기 바라며, 바위 주변에도 소나무가
그윽하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속살을 비친다.


▲  창의문 - 보물 1881호
자하문고개를 밀어 만든 신작로(新作路)에 밀려 성문으로의 기능은 다소
떨어졌으나 왕년에 도성 성문으로서의 위엄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서울 도심과 부암동(付岩洞)을 잇는 자하문고개에 옛 한양도성의 성문인 창의문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다. 창의문은 성밖 부암동의 계곡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부르
기도 하는데, 창의문보다는 자하문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나도 자하문이라 주로 부름)

이 문은 한양도성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인 북소문이다. 4소문은 동소문
<東小門, 혜화문(惠化門)>,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
)>, 그리고 이곳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
리나 유독 창의문은 북소문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  창의문 안쪽 (도심 쪽)

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지을 때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
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 창덕궁
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하는 등, 철저히 나라 일에만 문을 열었다. 허나 성
밖 부암동 지역에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과 그들의 즐겨찾기 명소가 즐비해 그들의 은밀한 통
행로로 쓰였다. 즉 국가와 높은 사람들의 전용문이었던 것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
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
반정(仁祖反正)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
래서 문루에는 인조반정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를 다시 세
울 것을 건의해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  창의문안내소에서 바라본 창의문 문루와 협문
하얀 추녀에 잡상(雜像)과 용머리가 걸터앉아 성문을 지킨다. 창의문이 무탈했던
것은 저들의 굳은 직업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  문루에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저들의 우매한 권력투쟁과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 국제정세에 우둔함으로
얼마 뒤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삼전도(三田渡) 굴욕의 대치욕을 당하게 되고
그것도 모자라 동아시아의 호구 국가로 이리 털리고 저리 털리다가 결국
나라와 이 땅의 장대한 역사마저 잃게 된다.


창의문은 한양도성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監
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문
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오래되었을 뿐, 문루
와 성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비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가 없었으며, 1958년 중수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런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2월 2일, 국
가 지정 보물로 특진되었다. 비록 일찌감치 국보와 보물 1호 지위를 누린 남대문(숭례문), 동
대문(흥인지문)에 비해 다소 늦은 감도 있고 너무 늦게 빛을 본 서글픔도 있지만 역시나 인생
은 끝까지 살아남고 봐야 된다.


▲  창의문 문루에서 바라본 창의문 안쪽

겨울 제국의 등쌀에 떠밀려 서서히 손을 놓으려는 늦가을이 잠시 이곳에 걸음을 멈추고 그의
마지막 잎새를 잔뜩 그려놓았다. 단풍이 환대하는 저 오솔길을 거닐면 나도 저들처럼 곱게 물
들지는 않을까? 황색 피부가 졸지에 다색(多色) 피부로 변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신작로로 강제로 끊어진 창의문 반대쪽 언덕과 성곽
저 언덕에는 2009년에 터를 닦은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있다. 끊어진 폭은 짧지만
고개를 깊게 깎아놔서 마치 끊어진 강가 절벽을 보는 듯 하다.


오랫동안 도성 성문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으나 1960년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로를
닦으면서 성문의 통행 기능을 잃게 되었다. 요즘이야 산꾼과 답사꾼, 나들이꾼들로 심심치는
않겠지만 그래도 예전 같지는 못하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뒷전에
물러나 앉은 모습은 정말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문 서쪽에 신작로를 내면서 한양도성은 50m 남짓 끊어져 있다.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尹
東柱)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벽이 견우와 직
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간은 도로 위에 흙을 덮어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
은 복원은 어려우며, 창의문 바로 남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하여
문루에 올라가 북쪽 전방을 뚫어지라 바라봤자 북악산길에 가려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없다.


▲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혹은 닭)과 구름무늬

창의문은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
자 특징이 2가지가 있다. 그러니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보기 바란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
꽃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
동 지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
을 가만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으나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황
의 모습이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
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
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하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북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창의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1-1 (창의문로 118)


▲  하늘을 향해 경쾌하게 날개짓을 펼치는 추녀마루의 고운 맵시
선의 유연함과 아름다움이 진하게 배여난 창의문,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선이 또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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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3월 1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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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둘레길2코스 순례길, 구천계곡 여름 나들이 ~~~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 신익희선생묘, 가인 김병로묘, 단주 유림묘)

 


' 북한산 구천계곡, 순례길 나들이 '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 신익희 선생묘 주변)


▲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

▲  신익희 선생묘

▲  유림 선생묘


 

♠  북한산 구천계곡에 숨겨진 옛 분청사기 가마터
수유동(水踰洞) 분청사기 가마터 - 서울 지방기념물 36호

▲  밑에서 바라본 분청사기(粉靑沙器) 가마터

1년의 절반이 허무하게 저물고 나머지 절반이 막 시작되던 7월 첫 무렵, 북한산(삼각산) 구
천계곡 주변에 숨겨진 여러 명소와 숨바꼭질을 하였다.
북한산(北漢山)은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지금까지 수백 번 이상을 안겼으나 아직도 미
답처(未踏處)들이 적지 않다. 하여 미답지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신익희 선생묘 서쪽 숲에
숨겨진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를 찾은 것인데, 그거 하나만 보기에는 무척 허전할 것 같아
서 주변에 있는 애국지사의 묘역 여럿을 후식으로 둘러보았다.

북한산 수유동과 우이동 산자락에는 20세기 초/중기에 활약했던 애국지사의 묘역이 많이 있
으나 정작 가본 곳은 손병희(孫秉熙) 선생묘 뿐이다. 암덩어리 같은 근/현대사에 관심이 거
의 없다보니 소중한 백신 같은 그들에게도 딱히 마음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카데미하우스 종점(강북구 마을버스 01번 종점)에서 신익희 선생묘로 이어지는 길(4.19로
32길)을 가다가 그 묘역 입구에서 오른쪽(북쪽) 숲길로 조금 들어서 왼쪽(서쪽) 산길을 넘으
면 근래 천하에 공개된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가 활짝 마중을 한다. (이정표가 잘되어있어
찾기는 쉬움)


▲  윗쪽에서 바라본 분청사기 가마터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는 북한산(삼각산) 동남쪽 자락으로 구천계곡 바로 북쪽이다. 구천계
곡과 도선사(道詵寺) 밑인 우이동계곡 주변에 조선시대 가마터가 많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들
중의 지방문화재로 지정되고 이렇게 정비까지 받아 천하에 개방된 존재는 오로지 이곳이 유
일하다. 나머지는 세월을 원망하며 죄다 숲속에 묻혀있어 전문가가 아니면 찾기도 어렵다.

이곳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잠깐 등장했던 분청사기를 생산했던 가마터이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중기에 짧게 운영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서울(한양)과 아주 가까워 왕족과 귀
족들의 분청사기 수요를 충당하느라 가마터 굴뚝의 연기는 마를 날이 없었다. 이후 분청사기
의 인기가 하락하고 주변에 괜찮은 가마터들이 생겨나면서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15.6도의 경사를 지닌 무계단식 단실요<單室窯, 아궁이의 열이 경사지를 옆으로 지나면서 그
릇을 익힌 후,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구조>로 길이 19.8m, 최대 너비가 1.5m에 이르는 커다란
가마이다. 가마는 벽과 천장을 돌과 점토로 쌓아 다졌는데 가마 입구인 회구부(灰丘部)와 아
궁이, 연소실(燃燒室), 소성실(燒成室), 폐기장, 온돌 등이 확인되었다.
가마는 앞부분은 잘 남아있으나 뒷부분은 상당수 손상되어 붉게 탄 바닥만 확인되었다. 아궁
이는 타원형으로 길이 1.6m, 내폭 1.3~1.6m, 깊이 0.9m 크기이며, 연소실과 소성실 사이에는
높은 불턱이 있다. 소성실은 가늘고 길쭉한 모습으로 여러 자기편이 나왔으며 폐기장은 아궁
이 우측에서 1.5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온돌도 발견되었는데 길이 3.2m, 폭 2m
정도로 자연석을 이용해 조성되었으며, 가마가 문을 닫은 이후에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  옆에서 바라본 분청사기 가마터

이곳에서는 여러 종류의 도기와 자기, 흑유자, 도침, 동전 등이 출토되었다. 도기류는 접시
와 발이 제일 많이 나왔고 잔, 배, 호, 매병 등도 조금씩 나왔으며 주요 유물로는 도기방상
씨편(도깨비 문양 비슷한 것), 청자상감용문매병편, '上'과 '德'이 새겨진 자기편, 동전 등
이 있다.
상감청자(象嵌靑瓷)에서 분청사기로 넘어가는 도자생산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 평
가되어 2011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했으며 2014년 서울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손질되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가마터는 보존을 위해 겉면에 산뜻하게 풀을 씌워놓았다. 하여 가마터 흔적은 저 안에 고스
란히 묻혀있다. 가마터 동쪽에는 조촐하게 쉼터를 닦아 쉴 구석을 마련해주었는데, 이곳의
존재감이 아직은 미약하여 인적은 드물다. 하여 조촐하게 사색을 즐기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가마터 남쪽으로도 산길이 나있으며 그 길은 자연관찰로로 구천계곡을 거쳐 아카데미하우스
로 이어진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127-1


▲  신익희 선생묘 입구
저 숲길의 끝에 해공 신익희 선생의 유택(幽宅)이 둥지를 틀었다.


 

♠  구천계곡 주변에서 만난 독립 애국지사의 묘역들

▲  신익희 선생 묘 직전 계단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왔던 길로 돌아나가 신익희 선생의 묘역을 찾았다. 우리 귀에 너무나도
숙한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1894~1956), 그는 누구일까?

신익희는 평산신씨 가문으로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판서를 지낸 신단(申壇)의 6남 중 막내
로 자는 여구(汝耉), 호는 해공이며, 중원대륙에서 사용했던 이명(異名)은 왕해공(王海公).
왕방오(王邦午)이다.
어린 시절 한학을 익히고, 1908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한 뒤 동경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들어갔다. 유학 시절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여 총무, 회장 등
을 역임했으며 학지광(學之光)이란 잡지의 발간을 담당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3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고향 광주에 동명강습소(東明講習所)를 열었으며, 중
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부터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송진우(宋鎭禹), 최남선(崔南善)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했으며, 1919년에는 해
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지도자와의 연락을 담당하여 만주, 북경, 상해 등을 오갔다. 그러
던 중 문창범(文昌範), 홍범도(洪範圖)와 연락을 취하고자 만주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
고 돌아오던 중, 평양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서둘러 서울로 돌아와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그래서 제자인 강기덕(康基德), 한창환(韓昌桓) 등과 연락해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하니 그것이 제2차 독립만세시위이다. 이 시위는 3.1운동의 지방 확산에 크
게 기여했으나 그로 인해 왜정의 수배를 받게 되자 급히 상해로 망명했다.


▲  신익희 선생 묘 - 등록문화재 520호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헌정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했으며 내무
차장, 외무차장, 국무원비서장, 외무총장 대리, 문교부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중원대륙 세
력과 합작해 왜를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중국국민당에 가담하여 중장(中將)이 되었으며, 조
선과 중원의 청년 500명을 모아 유격대인 분용대(奮勇隊)를 조직, 군사훈련을 시키며 본토
진입을 꾀했으나 신익희를 돕던 호경익(胡景翼)이 1924년 사망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하여 장개석(蔣介石)을 찾아가 한,만 국경에 왜군을 토벌해야 된다며 협조를 요청했으나 뜻
을 이루지 못했다.
1929년 한국혁명당을 창당하고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해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했으며 '우리
의 길'이란 기관지를 발행하여 중원대륙에 살던 동포들에게 민족정신과 독립의지를 심어주었
다.

그는 단일정당으로 민족의 힘을 모아 왜를 때려잡아야 된다고 역설하며 1932년에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의열단(義烈團), 한국광복동지회 대표와 협의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
對日戰線統一同盟)이란 동맹 단체를 탄생시켰다. 거기서 그는 김규식(金奎植), 박건웅(朴建
雄)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34년 자신의 한국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을 합쳐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했으며, 1935
년 7월, 남경 금릉(金陵)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 아래 신한독립당(윤기섭), 의열단<김
원봉(金元鳳)>, 조선혁명당(최동오), 한국독립당<조소앙(趙素昻)>, 대한독립당(김규식) 등 5
당 통합을 이끌어내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다. 허나 1937년 1월 제2차 전당대회로 비(非) 의
열단 계열의 인사들이 탈당하면서 세력이 위축되고 말았다.

1937년 여름, 왜가 중원대륙 침공을 본격화한 이른바 중일전쟁이 터지자 그는 조선민족전선
연맹 결성에 참여했고, 중원대륙 곳곳을 돌면서 대일항전을 지도했다. 그리고 1938년 9월에
조선청년전위동맹에 가담했으며, 1939년 8월 27일 김구와 김원봉의 주도로 사천성(四川省)
기강에서 광복전선과 민족전선 양측의 7당 통합회의가 열리자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허나 그 7당 통합도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의용대 병력이 있는 낙양(洛陽)으로 가서 김성숙(金星淑)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연
합하여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이들을 지도하면서 1941년 한중합작으로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하여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1943년 4월, 대한민국 잠행관제에 의해 설치된 선전부의 선전위원회에서 조소앙, 엄항섭, 유
림(柳林) 등과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선전계획의 수립과 실행에 나섰으며, 1944년 5월 임시
정부 연립내각 성립 때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중경(重慶)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신익희 선생 묘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 요인의 제2차 환국(還國) 때 서울로 돌아왔으며 모스크바 3상 회
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김구(金九)를 도와 반탁운동에 나섰다. 허나 그와는 정치 노
선이 달라 정치공작대, 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해 이승만에 접근했다.

1946년 경복궁 서쪽에 국민대(현재 정릉동에 있음)를 설립했고 자유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자
주성을 고취시켰다. 미군정 시절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을 지냈고 1948년 정부수립으로
제헌국회에 들어갔으며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1947년에는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민주당과 합당했다. 그리고 이후 개편된 민주국민당의 위원장으로 뽑
혔다.
3선 국회의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나날이 개판을 치며 심지어 그 유
명한 사사오입(四捨五入) 사건까지 일으키자 자유당 타도를 외치며 1955년 장면(張勉), 조병
옥(趙炳玉)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했다.

1956년 대선 때 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정권교체를 노렸다. 이미 민심도 그에게 돌아선
상태라 승산은 넘치도록 충분했으나 5월 5일 유세차 열차를 타고 전주로 가던 중, 이리(익산
) 정도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선거 유세로 너무 과로했던 것이 화근이 된 것
이다. 하여 모두가 그리던 정권교체는 물거품이 되었으며, 대신 장면이 이기붕을 누르고 부
통령에 당선되었다.
허나 4년 뒤, 1960년 대선에 조병옥 박사가 출마했으나 그마저 유세 중에 위암으로 사망하여
정권교체의 기회를 또 잃고 말았다. <하여간 이 나라는 오래 살아야 될 사람이 빨리 죽고,
빨리 없어져야 될 것들이 오래 삼, 그래서 발전이 안됨>
1956년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져 북한산(삼각산) 자락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대
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천하 제일의 싸움꾼으로 널리 알려진 시라소니(이성순)가 그의
경호를 맡았다. 그가 허무하게 죽자 장면 박사의 경호를 맡았는데, 그가 경호하는 동안에는
자유당의 끄나풀인 이정재의 동대문 패거리들이 감히 접근을 못했다.

▲  신익희묘 봉분과 하얀 피부의 상석,
향로석, 장명등

▲  망주석(望柱石)에 새겨진 세호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신익희 묘역은 호석을 두룬 커다란 봉분과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 문인석(文人石) 1쌍, 장명등, 묘비(묘표)로 이루어져 있으며 묘역으로 인도하는 계단 끝
에는 호랑이상 1쌍을 배치하여 악의 기운을 경계한다. 무덤을 지키는 석물들은 파리가 미끄
러질 정도로 매끄럽고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있으며 고색은 아직 여물지 못했으나 장차 20세
기 중반 무덤 양식의 하나로 교과서에 절찬리에 소개될 것이다.

그는 1945년 12월 귀국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 쓸만한 집이 1칸 없다고 집 1채를 마
련하라고 (주변 사람들이) 권고하나 내가 망명 때 항일독립이 평생의 소원이었고 이제 반 조
각이나마 독립된 조국에서 국사를 맡게 되었으니 더 바랄게 있겠는가'

* 신익희 선생묘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 산 74-3


▲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호랑이상
저 패기 돋는 이빨로 친일매국노와 그 쓰레기 같은 후손들, 그리고 이 나라의
적폐들을 싹 물어뜯어주렴.

▲  평산 신하균(平山 申河均) 선생묘

신익희 선생묘 북쪽에는 그의 장남인 신하균(1918~1975) 선생묘가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그는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일찌감치 중원대륙으로 넘어가 상해(상하이) 광화대학 상
과를 졸업했다. 이후 중국국민정부에서 감찰원위임관과 국민정부군의 소교복무원(소령급 문
관), 중앙은행 과원조장, 중앙신탁국조장 등을 지냈으며,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들어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입대해 전지공작, 초모공작 훈련 등 독립운동을 진행하여
정위(正尉)가 되었다.

해방 이후, 늦게 귀국하여 한국연건기업 사장을 지내다가 1955년에는 한국외대 강사를 하기
도 했으며 아버지가 대통령선거 유세 중, 사망하자 정계로 시선을 돌려 경기도 광주 보궐 선
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도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4.19이후 민주당의 구파(舊派)인 신민당에 들어갔으며,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민
정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3선의원이 되었다.

그는 서예에도 뛰어나 1958년 귀국기념서예전에서 이 땅 최초로 중원대륙 고대의 해서체(楷
書體)인 학보자비체(學寶子碑體)를 소개했으며, 여러 차례의 서예전을 열었다.
1950년대 중반 종로구 인사동의 민주당 중앙당사 간판을 신익희가 썼는데 1960년대 중반 관
훈동(寬訓洞)의 민중당 중앙당사 간판은 그 아들인 신하균이 썼으니 이는 보통 인연이 아니
다.

1977년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아비도 그렇고 그 아들도 그렇
고 독립운동에 적지 않은 공을 세우고 해방 이후 정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으니 가히 애국
자의 집안이라 할만하다. 처음에는 신익희의 독립운동 경력이 크게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
나 그의 묘역을 거쳐간 이후 조사해보니 생각 외로 경력이 화려했다.
더러운 친일매국노들로 악취가 심했던 그 시절(지금도 크게 다를 것은 없음 ㅠ), 이런 인물
이 있었던 것이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으며, 만약 그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이승만과 자
유당을 단죄하고 이 나라를 크게 부흥시켰을 것이다. 허나 그 기회를 하늘이 앗아가 버렸고
그 휴유증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니 과연 하늘에게 정의와 양심이 있는지 묻고 싶다.

신하균 묘역은 화려한 그의 아비 무덤과 달리 네모나게 호석이 둘러진 작은 봉분과 상석, 향
로석, 묘비가 전부인 단출한 모습이다.


▲  김병로 선생묘로 인도하는 산길
신익희선생묘에서 운가사, 진달래능선 쪽으로 4~5분 정도 오르면
김병로 선생묘가 쓱 모습을 비춘다.

▲  김병로 선생묘 밑에 자리한 묘비
귀부와 이수(螭首)를 갖춘 당당한 모습으로 묘역 동남쪽에 자리해 있어
신도비(神道碑)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 선생묘

대쪽 판사로 유명한 가인 김병로(1887~1964)는 전북 순창에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
낸 김상희(金相熙)의 1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일찍 여위었으나 할머니가 집안에 독서당(讀書堂)을 만들어 한문 공부
를 시켰으며, 1899년에 불과 12세에 나이로 4살 연상인 연일정씨 정교원의 딸에게 장가를 들
었다. 그가 외아들이고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일찍 혼인을 시킨 것이다.

1902년 당대 거유(巨儒)였던 전우(田愚)의 문하가 되었다가 1904년에 처음 신학문을 접했다.
하여 친구 4~5명과 일신학교(日新學校)란 임시 학교를 세웠는데 직접 강사를 초청하여 영어,
산수, 세계사를 익혔다.
1906년 순창을 찾은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을 듣고 크게 감동을 먹어 5~6명의 포수(砲
手)와 함께 그의 의병부대에 들어갔다. 허나 최익현이 의병을 해산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
왔으며, 광양의 백낙구, 담양의 기우만, 정읍의 유화숙 등과 의병투쟁을 모의하다가 채상순
과 함께 김동신의 의병부대에 합류,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淳昌)의 왜인 관청을 공격
하기도 했다.
허나 왜가 '호남 대토벌작전'을 펼쳐 의병을 때려잡자 무력 투쟁을 그만두고 고정주가 설립
한 창흥의숙(昌興義塾)에 들어가 다시 신학문을 접했으며, 1910년 왜열도 동경으로 유학을
가 일본대학 전문부 법과 청강생이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법조인으로 길을 잡게 된다.

허나 생활고로 공부가 어려웠고 때마침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비보까지 전해듣자 충격이 너
무 커 서둘러 귀국했다. 폐결핵으로 1년 동안 쉬다가 1911년 가을, 다시 동경으로 유학을 갔
으며, 명치대학 법과 3학년에 편입하여 1913년 졸업했다.
귀국하여 가산을 정리해 다시 유학길에 올랐는데 이번에는 명치대학과 중앙대학에서 공동운
영하는 법률고등연구과에서 공부를 했다. 이때 '재동경 조선인유학생 학우회' 간사부장과 '
금연회' 운영을 맡기도 했으며 1914년 창간된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스승인 야마우치(山內)의 권유로 왜열도 변호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왜인(倭人) 외에는 응시
할 수 없다는 내각회의 결정으로 결국 응시하지 못했다.


▲  남쪽에서 바라본 가인 김병로 선생묘

1915년 법률고등연구과 수료증을 받고 귀국하여 경성전수학교 조교수로 일했으며 1919년 부
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그만두고 변호사 자격을 얻어 서대문 자택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 관련자들을 위한 무료 변호에 많이 나섰다. 1923년 이인(李仁), 허헌 등
과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설립했으며 일반 형사사건에서 나온 수임료로 애국지사의 무료변
론은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 챙겨주었다.
그가 맡은 애국지사들의 사건만 보합단 사건(1921년), 김상옥(金相玉) 의거와 제2차 의열단(
義烈團) 사건(1923년), 1926년 6.10만세운동,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과 고려혁명당 사건, 정
의부(正義府) 사건(1927년), 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제3차 간도공산당 사건(1931년), 수
양동우회 사건(1937년) 등 실로 방대하다. 또한 안재홍(安在鴻), 안창호(安昌浩) 등의 민족
지도자들의 변호도 맡아 왜정의 온갖 악법으로부터 그들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또한 농민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주어 1928년 전북 옥구군(沃溝郡)에서 소작쟁의
를 벌인 농민들과 1929년 집단파업을 한 함경남도 원산부두 노동자들과 형평사(衡平社) 조합
원들을 변호했다. 또한 1929년 함경남도 갑산에서 일어난 화전민 박해사건과 1930년 함경남
도 단천에서 농민 살상사건이 터졌을 때 직접 현장을 찾아 조사를 벌여 대책을 강구했다.

또한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1920년에 조선교육협회 창립 발기인, 1922년 보성전문학
교 상임이사, 1924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 산하 고등보통학교 기성회 발기인을 맡았으
며 김성수와 함께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회금보관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4년 동아일보사 간부들이 친일파들의 협박을 받은 '식도원' 사건이 터지자 이를 규탄하는
민중대회 발기준비위원을 맡았으며, 1927년 전조선변호사대회에서 신문지법과 출판법 제정을
촉구하는 등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다. 또한 1923년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고, 1931
년 충무공유적보존운동기금 관리위원을 맡았으며, 신간회(新幹會)에도 가입해 중앙집행위원
장을 맡았다.
그러다보니 왜정의 훼방이 적지 않아 그가 연사로 나서는 집회가 금지되기도 했고 1931년에
는 6개월간 변호사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 하여 잠시 소나기를 피하고자 1934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넘어가 잠시 운둔생활을 하였다.
1945년 왜정이 민족지도자들을 살해할 것이라는 괴소문이 돌자 급히 가평(加平)으로 피신했
고 거기서 해방을 맞이했다.


▲  김병로 선생묘의 동그란 봉분과 상석, 향로석

해방이 되자 원세훈, 백관수와 고려민주당을 세우고 이를 확대해 조선민족당을 창당했다. 여
운형(呂運亨)의 건준을 찾아가 좌우합작을 제의하기도 했고, 미군정 아놀드 군정장관이 건준
과 조선인민공화국을 매도하자 이를 비판하는 논평을 내는 등, 좌우세력을 모두 포용하는 자
세를 보였다.
1946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학생들을 직접 변호해주었으며, 미군정청 사법부
법전 기초위원회 위원과 사법부장 등을 하다가, 1947년 사법부 내 6인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
로 활동하며 이 땅의 사법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초대 대법
원장이 되었으며,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 법조협회 회장을 맡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친일매국노 단죄에 굳은 의지
를 보였다. 친일파에 호의적이던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법 개정을 요청했으나 이를 거부하며
친일파 처벌을 추진했으나 결국 이승만 패거리의 농간으로 무산되고 만다.
1950년 골수염 치료로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으며, 1957년 12월, 70세의 나이로
대법원장에서 정년퇴임했다.

은퇴한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계속되는 불의와 독재를 비판했고 동아일보에 '부정선거는
천추의 한이 될 것'이라며 이승만에게 경고하기도 했다. 1960년 대선에 출마한 조병옥이 위
암으로 사망하자 장면 부통령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기자회견을 통해 호소했다.
4.19혁명이 일어나자 재야 정치인들과 사태수습을 위하여 대정부건의안을 발표했고, 이승만
이 물러나자 과도정부의 개편을 요구했다. 또한 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축재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역설해 부정부패를 때려잡을 것을 촉구했다.
1960년 민의원선거로 고향인 순창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1961년 5.16이 터지자 박정희
(朴正熙)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고 군정의 종식을 촉구했다.

1963년 윤보선(尹潽善), 이인 등과 단일야당 결성을 추진하다가 여의치 않자 직접 민정당(民
正黨)을 창당해 최고위원을 맡았다. 이후에도 야권통합을 계속 추진했으나 그리 순탄치 못했
으며 민정당과 국민의당 대표최고의원에서 물러났다.
바로 그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64년 1월 13일, 인현동 자택에서 77세의 나이
로 별세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루어 북한산 자락에 고이 안장되었다.

대쪽 같은 성품과 지조를 평생 지키고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인물로 천하 법조인의 귀감
으로 추앙을 받는다. 허나 오늘날 그와 같은 법조인이 거의 없다싶이하니 그도 지하에서 통
곡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묘역은 호석을 두룬 봉분과 상석, 향로석, 장명등 2기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이다. 신
익희 묘역보다 외진 곳이라 찾는 이는 별로 없으나 워낙 짙은 숲속에 감싸여있어 잠시 속세(
俗世)를 잊기에는 좋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86-1


▲  단주 유림묘 입구에 세워진 묘비와 호랑이석

김병로 선생묘에서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순례길(북한산둘레길 2구간)로 나와 우이동 방향
으로 조금 가면 왼쪽 구천계곡 건너에 훤칠한 비석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가 유림 묘비로
묘비 밑에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호랑이상 2기가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을 경계하고 있다.
이 땅은 이상하게도 선한 기운보다 악한 기운이 더 판을 치니 저들의 양 어깨가 꽤 무거울
것이다.
그들의 검문을 거쳐 왼쪽 산길로 들어서면 단주 유림 선생 묘가 모습을 드러낸다.


▲  유림묘 입구 (순례길에서 바라본 모습)

유림(柳林, 1894~1961)은 경북 안동 예안면에서 중소 지주인 유이흠(柳頤欽)의 3남으로 태어
났다. <어머니는 김성옥(金性玉)> 전주유씨 집안으로 호는 단주(旦洲), 월파(月波)이며, 본
명은 유화영(柳華永), 중원대륙에서 사용한 이름은 유림, 고상진(高尙眞)이다.

앞서 신익희, 김병로와 마찬가지로 제일 먼저 한학을 배우다가 경상북도 최초의 신식 중등학
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그는 거기서 인생의 스승이 되는 김동삼(金
東三), 유인식을 만나게 된다.
1910년 어둠의 시절이 오자 겨우 16세의 나이로 손을 깨물어 거기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피
로 '충군애국(忠君愛國)' 4자의 혈서(血書)를 쓰며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하여 대구와 안동
을 오가며 계몽운동과 비밀결사 조직 활동을 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안동 임동면
편항 장터에서 열린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협동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이끔)

하지만 3.1운동이 왜정의 고약한 탄압으로 더 이상 효과가 없자 가산을 정리한 뒤 가족을 데
리고 만주로 넘어갔다. 우선 만주 봉천성 요중현에 머물 곳을 마련해 가족들을 그곳에 안착
시키고 홀로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로 이동해 미리 와있던 김동삼과 이상룡, 이회영(李會榮)
등이 닦아놓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합류했다. 이때 군자금 마련을 위해 고향에 남아있
던 나머지 재산도 싹 처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1920년 8월 상해로 이동하여 거기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멤버로 활동하다가 1921년 북경
으로 가서 신채호(申菜浩), 김창숙(金昌淑) 등을 만났다. 그때 신채호가 주관하던 잡지 '천
고(天鼓)'의 발행을 도왔으며 거기서 그의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을
접하고 아나키스트로 노선을 잡는다.


▲  단주 유림 선생묘
'나의 이상은 강제권력을 배격하고 전 민족, 나가서는 전 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하에서 다같이 노동하고 다같이 자유롭게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데 있다' (1945년 12월 귀국직후 기자회견에서)
 

외국어 수학을 위해 1922년 성도(成都)로 이동하여 성도사범대학에 들어갔다. 허나 학비 해
결이 큰 문제라 중원대륙 정부의 관비생(官費生)이 되고자 이름을 '고상진'으로 바꾸며 중원
사람 행세를 했다. 다행히 그게 잘 통하여 별무리 없이 영문과를 마쳤으며 프랑스로 유학을
가고자 프랑스어도 수강하는 등, 상상 이상의 다양한 외국어를 익혔다. 심지어 '에스페란토'
까지 익혔다고 하니 그야말로 외국어의 신이 따로 없다.

1926년 학교를 졸업하고 간도 길림(吉林)으로 이동하여 김종진과 이을규를 만났다. 그들은
중동선(中東線) 해림역으로 이동하여 김좌진 장군를 만났는데, 그는 김좌진과 민족주의와 공
산주의 사상을 두고 여러 번 격론을 벌이며 양 사상의 갈등을 해결해보고자 했으나 워낙 팽
팽하여 설득을 포기하고 길림 화전현으로 돌아왔다.
이후 본토(국내)의 아나키즘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던 중, 1929년 11월 평양에서 '전
조선 흑색사회주의 운동자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최갑룡, 임중학
등과 함께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허나 왜정의 탄압으로 대회는 무산되었
고 그는 왜군에 체포되었다. 허나 딱히 혐의가 발견되지 않아 봉천으로 추방되었다.

1929년 가산을 털어 의성학원(義誠學院, 봉천중학)을 세웠다. 중원대륙 각급 학교 입학을 위
한 예과 과정으로 400명의 학생을 수용했으며 학생들의 중원대륙 학교 입학을 알선했고 직접
영어도 가르치면서 평화롭게 지냈다. 허나 그는 1931년 10월 왜군에게 '조선공산무정부주의
연맹'을 조직하고 활동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는 '원산흑색사건'이란 명목으로 최갑룡, 조중복 등과 함께 함흥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었
으며, 1933년 3월 24일, 5년형을 받았다. 그들은 이에 모두 항소를 했고 서울로 이송되어 경
성복심법원과 경성고등법원을 거쳤으나 별 변화없이 원심대로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
고를 치루고 1937년 10월 8일 출옥했다.

이후 만주로 넘어가 재기를 노렸으나 뜻대로 안되자 북경과 천진에서 한중 항일연합군 조직
에 진력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2년 10월,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을 찾았고 임시정부가 치
룬 경상도구 의원선거회에 나서 김원봉, 김상덕 등 6명이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임시정부를 다시 찾은 것은 '독립을 달성하고 이 나라에 아름다운 낙원을 창조하려면 우선
민족을 대표할만한 어떤 근거가 있어야 된다'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외교위원회 연구위원, 선전위원회 선전위원, 건국강령수개위원회 위원 등
을 지냈으며,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의 대표로 주석단의 1명으로 추대되어 활동했다. 또한
미국와 영국이 한국을 국제 보호 밑에 두기로 했다는 보도를 듣고 중경에서 대회를 열어 한
국의 완전한 독립과 외국의 내정 간섭 반대를 외쳤다.


▲  유림묘 봉분과 상석, 향로석
봉분에 무궁화 무늬들이 꽂혀있는데 처음에는 진짜 꽃인 줄 알았으나
가까이서 보니 그냥 문양이었다. 애국지사 묘역에 걸맞게
무궁화 무늬를 심은 센스가 돋보인다.


해방이 되자 1945년 12월 주한 미군사령부가 보낸 비행기를 타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귀국했
다. 허나 날씨가 좋지 못하여 서울비행장(여의도)에 착륙하지 못하고 군산에 착륙해 거기서
육로편으로 상경했다.
1946년 임시정부의 법통기관인 비상국민회의 부의장이 되었으며, 세계 아나키즘 최초의 아나
키즘 이념정당인 독립노동당(獨立勞農黨)을 창당해 당수로 취임했다. 그리고 노농신문을 발
간하여 노농대중의 계몽과 권익 보호에 힘썼다.
1948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아나키스트 대회'가 열렸는데, 유림은 한국 대표로 초청
을 받았으나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했다.

대한국민의회 의장이 되었으나 국민의회 기능 상실로 다시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결
성하고 대표간사가 되었으며, 1952년 7월 임시수도인 부산(釜山)에서 일어난 '발췌개헌안'에
항의하여 신익희, 장면 등과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세웠다.
국회의원 선거에 여러 번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1961년 4월 1일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
났다. 그해 4월 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루어졌으며 그때 장례위원장인
성균관대 초대총장인 김창숙은 '그대 있어 이 나라가 무겁더니 그대 떠나니 이 나라가 비었
구나'
추도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무덤은 호석을 갖춘 동그란 봉분과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1쌍으로 이루어져 있
다. 특이한 것은 봉분에 무궁화 무늬가 잔뜩 심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곳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9시 직전에 이르렀다. 아무리 여름이라 해가 길어졌다고 해
도 그건 어디까지나 햇님의 퇴근시간이 늦춰졌을 뿐이다. 달의 사제인 땅꺼미가 모락모락 피
어올라 햇님의 세상을 훔치려고 들고, 무더위에 적지 않게 돌아다녔더니 피로감과 시장기가
달덩이만큼이나 크게 솟아오른다. 이럴 때는 욕심을 부리고 속세로 내려가 저녁을 먹는 것이
진리이다.

이렇게 하여 오후에 짧게 누린 북한산 미답지 나들이는 4곳의 미답처를 싹 지우는 큰 성과를
누리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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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에 포근히 감싸인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홍제천~부암동 나들이 (보현산신각, 박종화가옥, 홍지문, 옥천암, 산모퉁이)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평창동~부암동 나들이 '


▲  인왕산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부암동


 

가을이 한참 숙성되던 9월의 끝 무렵, 친한 후배와 서울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인 평
창동과 부암동을 찾았다.
평창동(平倉洞)하면 으리으리한 저택과 빌라가 먼저 떠올릴 정도로 서울의 대표적인 졸부
동네로 꼽힌다. 인근 성북동과 더불어 이 땅의 0.1%가 산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인
데, 이곳이 졸부의 성지(聖地)가 된 것은 북한산(삼각산)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은 빼어난
절경과 더불어 명당 자리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하여 1950년대 이후 돈 꽤나 주무
르던 졸부들이 마구 몰려와 북한산의 살을 마구잡이로 뜯어내고 할퀴며 자리를 가리지 않
고 그들의 모래성을 세운 것이다.

평창동은 북한산으로 가는 길목이라 산꾼과 나들이객 수요가 많다. 하여 졸부들만의 폐쇄
적인 공간이 되는 참상은 면했다. 허나 10초가 멀다하고 나타나는 고래등 집에 온갖 잡동
사니 생각이 다 일어나 정처 없는 마음을 편치 않게 한다. 허나
그렇다고 너무 주눅은 들
지는 말자~!
제아무리 철옹성 저택이라 한들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모래알 같은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
이다. 그러니 기죽지 말고 당당히 어깨를 피며 졸부들로 고통 받고 있는 평창동을 끌어안
아 보자, 또한 이곳에 서린 명당(明堂)의 기운도 조금씩 챙겨가도록 하자.

우리가
평창동을 찾은 것을 이곳에 서린 명소를 보고자 함이다. 우리 주제에 이런 모래성
을 구입하기는 완전 불가능하니 명소만 쏙 챙겨보고 이옷 동네인 부암동으로 넘어갔다.


 

♠  평창동에서 만난 명소들 (박종화 가옥, 보현산신각)

▲  평창동 박종화 가옥(朴鍾和 家屋) - 등록문화재 89호

평창동의 제일 번화가라 할 수 있는 세검정 새마을금고 주변(서울예술고등학교, 평창동주민센
터 정류장 맞은편)에서 평창11길을 따라 12분 정도 올라가면 평창동에 거의 흔치 않은 기와집
인 박종화 가옥이 마중을 나온다.

돈 냄새가 시끄럽게 진동하는 저택과 빌라 숲속에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이곳은 현대 문학가인
월탄(月灘) 박종화가 살던 집이다. 원래는 악질 친일파인 이기원(李起元, 1880~1937)이 왜정
(倭政) 초기에 동대문 부근인 충신동(忠信洞) 55-5번지에 세운 것으로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
704두<인(人)으로 쓰기도 아깝다>의 1두로 등재되어 있다. 또한 그의 아비인 이봉의도 왜왕에
게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부자(父子)가 아주 쌍으로 매국노로 악명을 날렸다.

1937년 6월 이기원이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떨어지자 박종화(이하 월탄)가 이 집을 매입해
분가를 했다. 그러다가 1975년 혜화동과 동대문을 잇는 도로(율곡로)가 뚫리면서 집이 그 대
지에 포함되자 평창동으로 옮겨 원형 그대로 복원을 했다. 그는 세상을 뜨던 1981년까지 이곳
에서 늘 펜을 놓지 않았으며, 그가 간 이후에는 자손들이 살고 있다.

※ 월탄 박종화(1901~1981)의 생애
월탄은 1901년 남대문 밖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높은 벼슬을 누린 부유한 양
반가로 그의 할아버지인 박태윤은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백지(白紙)와 장
지 등의 종이를 팔아 크게 돈을 불렸다. 그렇게 번 돈으로 인쇄소와 책방까지 차렸고, 집 사
랑채에 서당을 열어 집안과 지역 젊은이에게 한학과 신학문, 왜어(倭語)를 가르쳤다. 왜어와
신학문 같은 경우는 유능한 왜인을 초빙하여 강사로 삼았다.

월탄은 할아버지한테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배웠고, 15살에 신학문을 배우고 싶다고 청하여
1년 동안 신학문과 왜어를 배워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 휘문중고교)에 3등으로 입학을 했
다. 여기서 홍사용(洪思容), 정백(鄭白) 등의 벗과 교류를 했으며, 무려 17살에 혼인을 했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친구와 함께 탑골공원으로 달려가 만세를 불렀으며, 1920년 학교를
졸업하자 문학동인지 '문우(文友)'를 발간했다. 그리고 1921년에는 '장미촌(薔薇村)' 창간호
의 그의 첫 작품인 '오뇌의 청춘'과 '우윳빛 거리'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창작의 길에
나선다.
1922년 백조(白潮)의 동인으로 참가하면서 '밀실로 돌아가다','만가' 등의 시와 '영원의 승방
몽'을 내놓았고, 1923년에는 조선 세조 때 활약했던 신숙주(申叔舟)의 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목매이는 여자'를 발표해 충신의 길이 얼마나 가시밭 길인지를 표현했다.

1924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첫 시집인 '흑방비곡'을 냈고, 이어 단편소설인 '순대국'과 '여
명','부세' 등을 차례대로 쓰면서 소설가로 변화를 꾀했다. 1936년 '금삼(錦衫)의 피','대춘
부'를 통해 역사 소설을 탁월하게 엮었으며, 1940년 '다정불심(多情佛心)'을 발표해 역사 소
설가로서 재량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1942년에는 수필집 청태집(靑苔集)을 냈으며, 왜정(倭政
)에 협력하는 나약한 지식인들이 늘어나는 세태를 비판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왜정과 거
리를 두었다.

1946년에는 동국대 교수와 서울신문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1947년 성균관대 교수와 서울시예
술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우익 진영의 대표자로 1949년 발족된 한국문학가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55년 예술원 회장이 되어 제1회 예술원상을 받았으며, 1966년 제1회 5.16민족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으로 월탄문학상을 창설, 같은 해 10월에 제1회 월탄문학상을 받았다.

1945년 이후 그의 손에서 태어난 작품은 무진장 많다. 해방과 더불어 냈던 '민족'은 왜정 시
절에 냈던 '여명','전야'와 함께 3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이었고 1946년에 '홍경래(洪景來)'를,
1947년에는 '청춘승리','논개(論介)'를 냈고, 1954년에 서울신문사 사장을 그만두고 임진왜란
시리즈를 다시 쓰기 시작하여 총 946회를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이후 '황진이(黃眞伊)의 역천(逆天)','벼슬길','여인천하'를 내어 인기를 모았고, 1961년 회
갑 기념으로 '월탄시선(月灘詩選)'을 출간했다. 1962년에는 '자고 가는 저 구름아','제왕3대
'를 연재했고, 1964년 '월탄삼국지(月灘三國誌)'를 한국일보에 4년 동안 연재했다.

1965년에 '아름다운 이 조국'을 중앙일보에, 1966년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부산일보에 연재
했고, 1970년에 수필집인 '한자락 세월을 열고'와 기념 사화집(詞華集)인 '영원히 깃을 치는
산'을 내놓았다. 또한 1969년부터 1977년까지 8년 동안 조선일보에 연재한 '세종대왕'은 우리
나라 신문 소설 가운데 가장 많은 2,456회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말년에는 '화음격음(和
音激音)'과 회고록 '역사는 흐르는데 청산은 말이 없네' 등을 냈다.

1920년대 낭만주의 시인으로 출발했던 그는 1930년대 식민지 현실에서의 이상 추구를 역사소
설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과 민족혼을 부각시키는데 크게 주력하
여 역사소설의 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월탄은 인격적으로도 꽤 대인(大人)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집안일을 하던 하인이 죽자 2일 동
안 글을 멈추고 애통해하며 직접 장례식을 치뤄주었고, 그 가족에게 많은 조위금을 건네 그들
을 위로했다. 또한 많은 문학인들과 교분을 쌓으며 술도 많이 마셨는데, 자제력이 강해 술이
취하면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한 그는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을 세운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의 외종 사촌형으로 간송의 문화 사업에도 크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부유한 환경에서 살던 그였지만 돈 많은 티를 내지 않았고, 솜버선에 한복을 입고 하얀 고무
신을 신고 다녔다. 원고 기일을 한번도 어기지 않은 성실함으로 단골 신문사와 출판사가 많았
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돈을 뜻하는 '전(錢)에 창을 뜻하는 과(戈)가 2개나 들어있으니 조
심해야 된다'며 물질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광주(光州)에 내려가면 제일 먼저 광주학생운동기념탑을 찾아 묵념을 했고, 인천(仁川) 자유
공원에 갔을 때 동행한 문인들이 맥아더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자 왜 다른 나라 사람 동상에
서 사진을 찍냐며 일행을 나무란 일화는 유명하다.

현대 문학의 산실이었던 박종화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 별채, 너른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 누마루를 조수루(釣水樓,
棗樹樓)라 부르며 여기서 '금삼의 피','대춘부','자고가는
저 구름아','세종대왕','아랑의 정조' 등 굵직굵직한 작품을 써내렸다. 그래서 월탄 외에 조
수루주인(釣水樓主人)이란 호도 가지고 있었다.

현재 집은 후손들이 살고 있어 내부 관람은 거의 어렵다. 굳게 닫힌 대문 앞에서 자존심을 곱
게 접고 발길을 접어야 했지. 벨을 눌러 간곡하게 관람을 청해도 되겠지만 그럴 의지와 배짱
까지는 없었고, 박종화에 대해서도 딱히 관심이 없다. 붉은 담장 너머로 다는 아니지만 지붕
과 부연이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으니 그 정도로도 족하다.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안으로 들어갈 인연이 생긴다면 그때 자세히 살펴봐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128-1 (평창11길 80)


▲  굳게 잠긴 박종화 가옥 대문

▲  기품이 돋보이는 박종화 가옥 내부 (문화재청 사진)

▲  보현산신각 입구 (입구에 큰 바위가 있음)

박종화 가옥에서 오르막길(평창11길)을 4~5분 정도 오르면 평창동의 지붕인 평창길이 나온다.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평창마을길도 신세를 지고 있는 그 평창길을 따라 서쪽으로 3분 정도
가면 보현산신각을 알리는 안내문과 함께 고래등 같은 큰 바위가 마중을 한다.

덩굴옷을 걸친 그 바위 밑도리에는 기도처로 쓰이던 조그만 굴이 있다. 보현산신각을 보조하
던 공간으로 산신(山神) 할배가 소원을 잘 들어주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무당과 중생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렸다. 지금은 햇살도 들어오기 힘든 지하 아닌 지하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앞
이 확 트인 공간으로 북악산(백악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평창동에 졸부들이 들어와 주
거지가 마구 형성되면서 바위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그 앞에 골목을 내어 시야를 가로 막았다.


▲  고래등 같은 보현산신각 바위의 뒷모습

▲  평창동 보현산신각(普賢山神閣)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3호

큰 바위 옆구리를 지나면 의자가 여럿 설치된 조촐한 그늘 쉼터가 나온다. 그 너머로 조그만
석성(石城) 같은 돌담을 두룬 아주 조그만 기와집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 집이 평창동의
오랜 명소이자 신앙터인 보현산신각이다.

해발 180m 고지 숲속에 자리한 보현산신각은 이 땅에 흔하고 흔한 산신 제당이다. 보현봉 남
쪽 자락에 안겨 있어 '보현산신각'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북한산 산신각'이라 불리기
도 한다. 평창동 주민들이 동제(洞祭)를 지내던 곳으로 인왕산(仁王山)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
난 무속(巫俗) 장소였는데, 지금은 무척 한가해졌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안에 잘나가던
무속인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굿을 벌였다. 굿은 산신각 안에서 하지 않고 산신각 옆이나 입구
에 있는 바위에서 했으며 '산신각(보현산신각)에 올라갔다 왔다'란 말은 그 시절 잘나가던 무
당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 산신각은 원래 남산신각(男山神閣)으로 언제 지어졌는지는 북한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대략 조선 후기로 여겨진다. 지금은 건물 1동이 전부이지만 예전에는 근처에 여산신각(女山神
閣)과 부군당(府君堂), 부군당에 딸린 신목(神木)이 있어 이 일대가 평창동 사람들의 신앙터
로 무척 애지중지되었다. 매년 음력 3월 1일에 동네 노인들이 돈을 모아 이곳에서 유교식으로
당제를 지냈으며, 제물을 집집마다 분배하여 뒷풀이를 했다.
허나 부군당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녹아 없어지고 여산신각도 1974년에 불에 타 없어지면
서 이 산신각에 통합되었다.

산신각은 나무로 만든 맞배지붕 건물로 달랑 1칸 밖에 안되는 매우 조촐한 당집이다. 굳게 잠
긴 내부에는 가로 97cm, 세로 108cm 크기의 여산신도(원래 여산신각에 있었음)가 봉안되어 있
는데, 산신은 청색 도포(道袍)를 입고 관을 썼으며, 왼손에 우선(羽扇)을 들었다. 뒤쪽에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엎드려 있고, 왼편에는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무릎을 꿇고 천도복
숭아 3개를 든 쟁반을 들고 있다.
그런데 보통 산신하면 할배 산신을 받들기 마련이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할매 산신을 주인공으
로 했다. 그래서 그를 위한 산신각과 산신도(山神圖)를 두었으며, 여산신각이 없어지자 이곳
에 통합하여 주인으로 삼았다. 특히 여산신도는 천하의 유일한 유물로 가치가 높은데, 1923년
8월 24일에 김예안당(金禮安堂)이 그렸다는 기록이 있어 그때 기존의 그림을 버리고 새로 그
린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종이 있는데, 막연히 정유년(丁酉年)이라 새겨져 있어 1897년 또는 1837
년으로 여겨지나 확실한 답은 아니다.

이곳은 흔한 산신각의 하나이지만 여산신을 봉안한 귀중한 신앙 유물로 산신을 받드는 산악신
앙(山岳信仰)과 마을 동제(洞祭)가 어우러진 현장이자 무속 신앙의 현장이다. 그래서 그 가치
를 인정받아 일찌감치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541-1


▲  석축 위에 자리한 보현산신각
산신각과 그곳을 둘러싼 돌담 대문은 동제 외에는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여기서는 열려라 참깨를 외쳐도 소용이 없음~~!

▲  보현산신각의 옆면

▲  위에서 바라본 보현산신각

▲  보현산신각 옆 돌담 계단길 - 돌담은 산신각 보호를 위해 근래에 씌운 것으로
돌담 대신 기와를 얹힌 흙담으로 했으면 더 정겹지 않았을까 싶다.


 

♠  홍제천(弘濟川)에서 만난 명소들 (홍지문, 옥천암)

▲  홍지문(弘智門)과 탕춘대성(蕩春臺城)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평창동에 대한 볼일을 마치고 부암동(付岩洞)으로 넘어오면 세검정교차로(상명대입구)가 나온
다. 여기서 홍은동(弘恩洞)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곽이 마
중을 나온다. (세검정교차로에서도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검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성(西
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 임금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에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줄행랑을 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에
신완(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
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짓고자 1715년 홍제천에 홍
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년 8월 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월 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년 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인왕산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
선을 거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이다. 원래는 북한산성까
지 싹 이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해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
능선, 북악산(백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모두 취소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는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
능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여장은 홍지문과 남쪽 성곽 일부에만 남아있음)


▲  서쪽(홍은동)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과 홍지문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인왕산과 북한산의 경계가 되는 홍제천 협곡에 지어진 것으로 탕춘대
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암문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한북문
(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년 이상 별탈없이 살아온 홍지문은 1921년 1월에 지붕에 쌓인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
하고 내려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 홍제천의 물을 흘려보내는 오간
대수문(五間大水門)까지 모두 떠내려가면서 터만 아련하게 남아오다가 1977년 7월에 복원되었
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
원할 때 새로 끼어넣은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을 금지 구역으로 삼았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방면 성곽 300m
정도 구간도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뒷쪽에서 접근해야 된다.
문 남쪽은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아주 잠깐 단절되어 있다. 허나 그 길을 넘으면 성
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놓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에는 최근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이 산책로는 세검정과 옥
천암은 물론 멀리 홍제천인공폭포와 사천교, 한강까지 연결된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이다.


▲  북한산을 향해 힘차게 뻗어가는 탕춘대성 (탕춘대능선 남쪽 끝)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홍제천 산책로가 닦이면
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라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 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하는 경우
에는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홍지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雲紋)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 
하다.


▲  홍제천 건너에서 바라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홍지문에서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 가면 하얀 암반을 앞에 내밀며 큰 바위에 살포
시 깃든 하얀 피부의 커다란 불상이 크게 아른거릴 것이다. 그가 바로 상서로운 관세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 백불'이라
많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얀 마애불과
바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
한 홍제천변에 있어서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
가 된 19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과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
불'은 구한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절,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
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시멘트가 아닌 홍예 돌다
리였으면 운치가 참 진국이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조촐한
문이 있는데, 바로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운 현장으
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이,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있다.

▲  보도각에 깃든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호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8개의 오랜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달랑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로 고려 말에 조
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작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
과 비슷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하여 같은
사람이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의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開城)의 관음굴 석조보살반가상과 비교되는 고
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로 평가받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자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운 왜군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
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모두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
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에서
일어났던 권율 장군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까
지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
(胡粉,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으로 불상 전체를 하얗게 도배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의 소유자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
는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뒷모습

백불의 높이는 5m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예로부터 영험이 있는 마애불로 명성이 높았다.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영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
이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철썩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
과 동전이 적지 않게 보인다. (동전은 옥천암에서 부수입거리로 계속 수거하고 있어서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에 깃들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을 것
이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바로 앞에는 나무로 다
져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시내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어지면
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俗世)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온통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모두
하얀색이었으나 이후 금색으로 갈았고 2016년 이후에 주황색으로 갈았음) 오른손에 걸린 팔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
리고 귀걸이까지 정말 관세음보살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그의 얼굴은 거의 포근한 인상으
로 중생들의 소원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현실은 하나도 안들어주
었음)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一'자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으며,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는다. 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보살상의 몸을 덮고 있
는 옷 주름은 세세히 묘사되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 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좀 맞
지 않아 보인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기도를 올리며 소망을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을 접수만
하느라 힘도 제법 들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하며 소
망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는 모
르지만 그 정성이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길 간
절히 기원해 본다.


▲  백불 옆에 자리한 옥천암(玉泉庵)

백불 동쪽에는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해 있다. 백불이 관세음보살이라 자연
히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 남해 보리암(菩提庵), 강화 석모도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
서의 자부심이 대단한지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해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훨씬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 탄산약수가 아닐까?
)이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
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진작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는 홍제
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藏義寺, 세
검정초교에 있었음)와 사현사(沙峴寺) 등의 쟁쟁한 절들이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가 1396년에 태조의 도움으로 세웠
다는 소림사(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질없는 답이
다.

이곳의 본격적인 사적(事績)이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다.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에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을 지으면서 삼성각의 기능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년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놓고 1998년에 일주문을 달았다.

북한산(삼각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절 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속세의 주택가가 있고 뒤에는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 자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내가 무지 답답하다. 또한 백불 외에는 오래된 문화유산이 없
고 주택가와 접해 있어 산사의 내음은 좀 떨어진다.

* 옥천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동 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  부암동 산모퉁이까페

▲  언덕에 자리한 산모퉁이

창의문(자하문)에서 백석동천(백사실계곡),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부암동 산복도로(백석동길)
를 10분 정도 오르면 아담하게 수식된 별장 같은 산모퉁이 까페가 모습을 비춘다. 서울 도심
과 인왕산이 바라보이는 언덕배기에 뿌리를 내린 이 까페는 갤러리를 갖춘 갤러리까페로 2007
년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지로 유명세를 탄 곳이다.

이곳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원래는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목인박물관 유물의 수장고
이자 작업실이었다. 그러다가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지로 절찬리에 쓰이면서 세상에 주목을 받
았고<그 드라마에서 '최한성'이란 인물의 집으로 나왔음> 시청자들로부터 누구나 찾을 수 있
는 공간으로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면서 목인박물관장은 갤러리를 갖춘 까페로 꾸며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니까 그 드라마의 후광(後光)으로 어두컴컴했던 창고가 새로운 명소이자 돈을
쓸어 담는 꿀단지로 찬란한 변신을 한 것이다.

많은 까페가 서양식 이름을 쓰는데 반해 이곳은 순수한 우리말인 '산모퉁이'를 까페의 이름으
로 삼았다. 그래서 적지 않게 정감이 간다. 산모퉁이란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산모퉁이에 자
리해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  산모퉁이 2층 라운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까페 정원에는 문인석을 비롯하여 아시아의 석인상과 동물 모양의 석상(
石像), 조그만 자동차 모형과 옛날 디자인의 노란색 자동차가 뜨락을 채우고 있다. 지하 1층
은 갤러리로 아시아 곳곳에서 가져온 예술품이 진열되어 있어 조그만 미술관을 이룬다. 물론
여기서도 차를 마실 수 있다.

1층에는 카운터가 있으며, 여기서 차를 주문하면 된다. 1층과 2층은 차를 마시는 라운지로 2
층 옥상에는 조망이 일품인 야외데크가 있어 산 아래 펼쳐진 부암동의 전원 풍경과 창의문 너
머로 펼쳐지는 서울 도심을 바라보며 차 1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특히 햇님이 휘장을 치
고 몸을 숨기는 밤에는 서울의 숨막히는 야경(夜景)을 즐길 수 있으며, 분위기를 강조한 까페
라 청춘남녀의 발길도 빈번하다.

이곳에서 파는 것은 커피류와 홍차, 쿠키, 케익 등으로 유명세 때문인지 시중보다 가격은 조
금 비싸다. 얄미운 수준의 가격이지만 이곳의 명성과 분위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은 물처럼
끊기지가 않는다. (영업시간 11시~22시)


▲  까페 뜨락에 놓인 산모퉁이의 모델, 노란 자동차

까페 앞뜨락에는 이곳에 모델이자 상징인 노란 자동차가 바퀴를 접고 쉬고 있다. 드라마에 나
온 차량으로 까페를 찾은 사람들의 모델이 되어주고 있는데, 저 차량을 보는 순간 우리나라가
아닌 20세기 초반 유럽이나 미대륙의 어느 별장이나 집에 들어선 기분이다. 차 하나의 이렇게
기분이 달라지다니 까페 주인의 미적 감각이 대단하다 여겨진다.


▲  까페 현관에 자리한 2마리의 동물상
호랑이로 보이는 저들의 표정은 너무 익살스럽고 밝은 모습이다. 까페의
수입도 상당할 것이니 그래서 기분이 좋은가 보다.

▲  말 모양의 석상 2기

▲  문인석(文人石) 2기와 조그만 장난감 차

▲  커피프린스1호점 촬영 소품과
촬영 장면을 담은 그림 4장

▲  지하1층 현관에 있는 자태가
고운 호랑이상


▲  산모퉁이에서 일행들과 마신 커피들의 집합

커피에는 거품으로 꽃을 비롯한 다양한 문양을 넣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 문양이 아름
다워 후루룩 마시기에 아까운 마음도 들지만 우리네 인생살이가 바로 저 거품의 문양처럼 부
질이 없다. 문양이 아름답다 한들 얼마나 가겠는가? 흐트러지면 형편없이 사라지는 것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97-5 (☎ 02-391-4737)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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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4월 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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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조 공비패거리가 넘어갔다는 도심 속의 푸른 허파, 북악산 김신조루트 ~~~ (북악하늘길1산책로, 2산책로, 북악산길)

 


~~~ 서울의 듬직한 허파이자 상큼한 숲길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

남마루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남마루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호경암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  호경암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가을이 여름 제국을 몰아내고 천하를 막 접수하던 9월의 끝 무렵에 일행들과 북악산(백악
산) 북악하늘길을 찾았다. 이곳은 김신조루트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2010년에 처음 발을
들인 이후 매년 1~2회 정도 발걸음을 하고 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14시, 한성대입구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1111번(
번동↔성북동)을 타고 성북동(城北洞) 서울다원학교 종점에 두 발을 내린다.
성북동 종점에서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성북 우정의 공원'을 지나 삼청각으로 인도
하는 조그만 길로 들어선다. 서울의 심장부가 바로 지척이건만 그런 도심(都心)을 비웃듯
숲과 계곡이 어우러진 전원(田園) 풍경이 도시에서 오염된 안구를 어루만진다. 길 옆에는
계곡이 졸졸졸♪~~노래를 부르며 흘러가는데 이 물줄기는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속세로
흘러간다.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건너는 다리와 약간의 산길이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그
산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  우정의 공원에서 북악산(백악산)으로 인도하는 골목길(성북로31가길)


 

  북악산 북악하늘길 입문

▲  도심과 성북동을 바짝 이어주는 삼청터널

삼청터널은 성북동과 도심 북쪽인 삼청동(三淸洞)을 이어주는 2차선 땅굴이다. 이곳은 성북동
의 가장 막다른 구석으로 북악산(백악산)의 산세가 칼처럼 솟은 곳이라 오르기가 좀 각박하다.
그런 구석진 곳에서 다른 곳으로 순간이동을 하듯 넘어갈 수 있는 한줄기 희망을 선사한 것이
바로 삼청터널이 되겠다.

이 터널은 군사정권이 절정에 이르던 1969년에 삽을 떠서 1970년 12월 30일에 완성되었다. 공
사비는 총 2억 4,900만원(민자 1억 9,900만원, 시비 5,000만원)으로 당시 성북동에는 차지철
을 비롯한 군사정권의 실세들이 여럿 살았는데 그들의 청와대 접근 편의와 땅값 상승을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솔직히 그 시절 성북동과 삼청동은 한적한 동네로 두 동네를 이을
터널의 필요성은 그다지 없었다.
터널이 뚫리자 안그래도 졸부들로 가득한 성북동의 땅값이 백두산처럼 치솟아 금싸라기 땅이
되었고,
성북동과 청와대, 서울 도심간의 접근이 한결 편해지면서 대원각, 삼청각 등의 고급
요정과 식당들이 아주 재미를 보았다.

산간지방의 조촐한 터널 같은 삼청터널은 길이 302m, 폭 8.5m(2차선)로 오로지 차량만 들락거
릴 수 있다. 예전에는 권력층과 돈 많은 작자들이 주로 이용하던 터널이었지만 시대가 바뀌고
성북동이 도심 속 명소로 크게 각광을 받으면서 나들이와 드라이브를 즐기려는 차량들이 크게
늘었다. 허나 터널도 그렇고 도로도 그렇고 확장은 커녕 여전히 2차선을 고수하고 있어 휴일
에는 꼬리에 꼬리를 잡고 굼벵이 속도로 가는 차량의 행렬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터널을 지나면 바로 삼청동과 북촌으로 이어지지만 걷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억지로 터널
에 발을 들이지 않도록 한다. (벌금 내야됨) 차라리 쿨하게 택시를 타고 넘어가던가 숙정문안
내소에서 한양도성 북쪽 산길을 타고 말바위쉼터나 와룡고개(와룡공원)를 넘어 북촌으로 넘어
가길 바란다.


▲  삼청각(三淸閣) 정문

성북동의 가장 구석이자 삼청터널 북쪽에는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치장된 삼청각이 있다. 이곳
은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북쪽 능선이 갈라지는 150m 고지로 도심이 바로 지척임에도 이곳
을 감싸고 흐르는 공기부터가 무척 산뜻하고 청정하다.

삼청각은 겉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원래는 고급요정이었다. 1972년에 지어진 이곳은 군사
정권 시절 악명을 떨친 3대 요정-청운각(淸雲閣), 대원각(
大元閣), 삼청각의 하나로 삼청
각이란 이름은 북악산 남쪽에 있는 삼청동(三淸洞)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주로 국빈 접대와 정치적 회담을 위한 요정으로 운영되었는데, 1972년 7월 4일에 벌어
진 7.4남북공동성명 직후 남북적십자대표단이 만찬을 가졌던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권력
실세들의 공간으로 30년 가까이 폐쇄적으로 이어오다가 2001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거쳐 도심 속의 전통문화 공간으로 속세에 활짝 문을 열었으며,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관
리하고 있다.

한때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했던 고급 요정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고 전통문화를 즐
기며 식사와 차 1잔의 여유, 혼인, 돌잔치 등을 가질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거듭난 현장
으로 이는 길상사(☞ 관련글 보러가기)란 절집으로 변신한 인근 대원각과 비슷하다.

이곳은 오래된 문화유산도 아니고 비록 속세에 개방되었다고 해도 비싼 이미지는 여전히 깃들
여져 있다. 한식당과 다원의 후덜덜한 음식/차 가격과 행사 비용은 서민들에게는 그리 호락호
락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서울의 허파인 북악산의 품에 포근히 안긴 곳으로 20세기
로 전승된 현대 한옥의 아름다움과 기품, 전통 정원의 미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  2007년 북악산 전면개방 기념조림 표석 (숙정문 안내소 부근)

▲  숙정문 안내소로 인도하는 숲길 (홍련사~숙정문 안내소 구간)

▲  숙정문안내소

홍련사와 삼청터널 사이로 난 산길을 오르면 북악산 전면개방 조림을 기념하는 커다란 표석이
마중을 한다. 지금은 사라진 어느 전(前) 대통령이 남긴 것이라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
서 기념촬영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그 표석을 지나면 북악산 주능선의 주요 관문인 숙정문안
내소가 고개를 내민다.
여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안내소를 지나 직진하면 숙정문(肅靖門)과 주능선, 북악
산 정상(342m)으로 이어지며, 안내소 직전 왼쪽(남쪽) 길은 한양도성의 북쪽 산길로 말바위나
와룡공원으로 통한다. 그리고 오른쪽(북쪽) 길이 김신조루트로 통하는 북악하늘길이다.


▲  숙정문안내소에서 북쪽 능선으로 인도하는 북악하늘길 계단길
왼쪽은 통제 시절에 닦여진 군부대 계단, 오른쪽은 2011년 이후에 새로 닦여진
계단으로 어느 계단을 이용하든 상관없다. 취향에 따라 고르면 된다.


북악산 북쪽 능선 주변은 통제가 여전한 북악산(백악산) 주능선과 달리 백성들의 출입이 자유
로운 편이었다. 그러다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공비 패거리가 서울에 침투한
이른바 1.21사태로
금지된 땅이 되었으며, 북악산과 인왕산 허리에 군사 작전 및 관광을 겸한
북악스카이웨이(북악산길)를 급하게 만들었다.

금지된 구역이 된 북악산 북부는 41년이 지난 2009년부터 홍련사에서 말바위를 비롯해 성북동
, 정릉동, 평창동에서
북악산길을 잇는 산길이 속속 문이 열리기 시작했고, 2010년 2월 27일
에 홍련사에서 북악산 북쪽 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을 손질하여 '북악하늘길'이란 이름으로 속
세에 내놓았다. 그중 제2산책로는 김신조 일당이 도망친 루트라 하여 김신조루트란 이름으로
인기를 더하고 있으며, 북악하늘길의 백미이자, 안보관광지로 가장 볼거리가 많은 산길이다.
(실제로 김신조는 이 길로 가지 않았다고 함)
이곳이 주능선과 다른 점이 있다면 24시간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팔
팔한 시절에 공개되어 이렇게 발을 들이니 기쁘기 그지 없다. 북한이나 휴전선처럼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무려 40여 년 동안 금지되어 속인들의 발길을 거부한 탓에 북악산 북부의 자연은 군부대로 인
한 일부의 훼손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잘 보존되어 있다. 그리하여 생태적인 가치가 높고, 자
연경관이 우수하며, 서울 도심을 비웃듯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어 '서울 속의 비무장
지대','도심 속의 허파','도심 속의 신세계'란 별명까지 지니게 되었다.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대부분은 통제 시절 군인들이 오가던 산길로
군사 시설과 그 당시 지어진 계단길이 줄지어 있으며, 제2산책로는 경사가 좀 각박하여 탐방
객의 편의를 위해 나무로 만든 등산로를 곳곳에 만들었다.

북악산 북쪽 능선을 개방하면서 닦여진 북악하늘길 코스는 다음과 같다.
*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 : 말바위쉼터 - 한양도성 북쪽 산길 - 숙정문안내소 - 성북천발원지
  - 북악팔각정 (1.4km)
* 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김신조루트) :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호경암 - 하늘전
  망대 - 북까페 - 하늘교 - 하늘마루 (2km)
*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 : 북까페 - 동마루 - 숲속다리 (640m)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둘러보기 (1)
삼청각쉼터 ~ 성북천발원지 ~ 서마루 ~ 솔바람교

▲  삼청각쉼터

숙정문안내소에서 북악하늘길로 접어들면 가장 먼저 높다란 계단길이 나그네의 기를 주눅 들
게 만든다. 시작부터 각박한 계단이 펼쳐지는 것이다. 김신조루트는 이렇게 첫 이미지에서 보
이듯 계단길이 유별나게 많아 숨을 적지 않게 차게 하는데, 이건 맛보기 버전이다. 여기서부
터 지친다면 김신조루트 산책은 어렵다. 자존심을 곱게 버리고 악으로 깡으로 올라간다면 김
신조루트는 그의 속살을 하나씩 벗겨주며 그대를 반겨줄 것이다. (솔직히 그렇게 힘든 코스는
아님, 오르막과 내리막이 좀 반복되는 것이 있을 뿐임)

계단을 오르면 가장 먼저 삼청각쉼터가 마중을 한다. 이곳은 삼청각의 서쪽이자 뒷통수로 소
나무의 산인 북악산답게 소나무 1그루가 쉼터 중간에서 운치를 가득 불어주며 솔내음과 선선
한 그늘을 드리운다. 여기서 잠시 삼청각을 비롯한 좁은 천하를 굽어보고 더 올라가면 제1산
책로와 제2산책로가 갈라지는 성북천발원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삼청각쉼터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삼청각과 성북동, 성북구 지역)
이제 시작 단계라 조망 범위는 매우 좁다. 허나 산길을 오르며 하늘과
보다 가까워질 수록 조망의 품질도 더욱 높아진다.

▲  성북천(城北川) 발원지

성북천은 북악산 동북쪽 자락에서 발원(發源)하여 성북동과 삼선교, 보문동, 제기동(祭基洞)
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가는 7.7km의 지방 2급 하천이다. 조그만 하천의 발원지라 한강의 발
원지인 검룡소(儉龍沼)나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黃池)처럼 뭔가 특별하거나 요란한 것은 없
으며, 속세를 향해 흐르는 계곡 주변에는 바위들이 벌러덩 누워 있고 수심은 매우 얕다.

성북구에서 이곳을 생물 서식처로 가꾸고자 사람들의 계곡 접근을 통제하고 여러 식물을 심으
며, 수질에 각별히 신경을 쓴 결과 가재를 비롯한 여러 수중 동물들이 좀 늘어났다. 하여 이
를 기념하고자 성북천발원지 바로 남쪽에 있는 다리 이름을 가재가 물에서 물장구를 치는 다
리란 뜻에
수고해(水鼓蟹)다리라 하였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기존의 제1산책로로 바로 북악팔각정과 빠르게
이어지며, 오른쪽은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제2산책로로 호경암을 거쳐 하늘교까지 이어지는 2
km의 산길이다. 이 산길은 중간중간 조망이 괜찮은 곳에 '~~마루'와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조망대를 두어 천하를 마음껏 굽어볼 수 있게 했다.


▲  성북천발원지에서 서마루로 오르는 김신조루트 계단길

▲  김신조루트 서마루

성북천발원지에서 서마루까지는 속절없는 세상살이처럼 고통스런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나무
로 지어진 서마루에 오르면 삼청각쉼터보다 1단계 높아진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의자가 넉
넉하게 베풀어져 있어 잠시 숨을 고르며 천하를 굽어보기에 좋다. 이곳에선 북악팔각정이 가
까이에 보이며, 여기서 길은 동쪽을 향해 급하게 내리막길로 돌변한다. 그래서 처음 온 이들
은 '벌써 다 올라온거야? 이거 정말 싱거운데!' 생각을 하며 방심을 하지만 이는 북악산이 내
린 일종의 속임수이니 속지말자.
북악산이 북한산(삼각산)이나 관악산(冠岳山), 수락산(水落山) 등 서울 주변의 쟁쟁한 산들에
비해 키는 낮지만 그래도 악(岳)이 들어가는 서울의 북현무(北玄武)이다. 남산처럼 만만한 산
이 아니란 말이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1)
소나무 너머로 성북동과 와룡공원, 성북구와 동대문구, 중랑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2)
북악산의 두터운 주능선 너머로 서울 도심과 남산이 바라보인다.

▲  서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3)
북악산 주능선과 남산, 서울 도심은 물론 멀리 관악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  이름도 시원한 솔바람교

서마루에서 솔바람교까지 220m 구간은 각박한 경사의 내리막이다. 다 올라왔구나 싶겠지만 솔
바람교를 지나면서 산길은 다시 흥분기를 보이며 무지막지한 오르막길로 나그네의 기를 죽인
다.
내리막길은 고난 앞에서 잠시 즐기는 여유라고나 할까..? 한라산(漢拏山)도 관음사(觀音
寺) 방면으로 한참 내려갈 때 중간에 오르막길이 나와 속인들을 잠시 좌절하게 만드는데 바로
그 이치이다.
남마루까지는 가파른 길이 계속 이어지니 방심의 늪에 빠지지 말자~~

솔바람교는 계곡 위에 걸린 나무다리로 그 이름이 순 우리말이라 정감이 참 깊다. 주변은 소
나무를 비롯해 온갖 수목이
삼삼하여 그 이름 그대로 솔바람이 나를 날려보낼 것 같다. 계곡
이라고 하지만 워낙 생긴 것이 부실하고 돌만 가득하여 이곳에 올 때마다 늘 황량한 모습을
보여주어 안타깝기 그지 없다.
 

다리를 내려오면 쉼터가 있으며 다리 북쪽 구석으로 가면 약수터가 있는데, 이곳이 김신조루
트의 유일한 샘터이다. 산에서의 약수터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라 갈증이 없어도 꼭 물
을 마시기 마련이나 무심한 가을 가뭄 때문인지 물은 이미 사라졌다. 북악하늘길에서 가장 첩
첩한 곳으로 북쪽과 서쪽, 동쪽은 산으로 막혀있고, 남쪽만 가늘게 뚫려있다.


▲  솔바람교 밑에 자리한 약수터 -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이름 없는 약수터이다.

▲  솔바람교 쉼터
이곳은 김신조루트의 중간 정도 지점이다.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둘러보기 (2)
솔바람교 ~ 남마루 ~ 호경암

▲  솔바람교 쉼터에서 남마루로 올라가는 계단길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느껴진다.


솔바람교에서 남마루까지는 다시 지독한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그 거리는 약 600m 정도로 여
기가 김신조루트에게 가장 산행의 회의를 느끼게 만드는 곳이다. 하긴 공비 패거리들이 살아
돌아가려는 일념으로 넘었던 곳인데 오죽 험하겠는가..? 게다가 이곳은 산길도 없던 구간이라
각박한 산세를 순화시키고자 나무로 길게 계단길을 닦고 짧은 간격을 두며 쉼터를 만들어 턱
까지 밀려오는 숨을 잠시나마 제자리를 찾도록 했다.

그렇게 잔뜩 흥분한 산길을 오르면 남마루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이곳은 앞서 서마루보
다 더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더 휼륭한 조망을 선물로 준다. 이곳 이후 흥분했던 산길은 진정
을 되찾으며 호젓한 산길의 기품을 서서히 회복한다.


▲  지옥 끝에 나온 극락, 남마루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1)
성북동과 성북구, 동대문구, 성동구를 비롯한 서울 동부지역

▲  남마루에서 바라본 천하 (2)
북악산 주능선 너머로 서울 도심과 남산, 관악산, 우면산 등이 보인다.

▲  서서히 진정되고 있는 산길 (남마루와 호경암 사이)

▲  호경암으로 오르는 계단길
이 구간은 거의 벼랑이라 그 옆구리에 계단 잔도를 깔았다.

▲  김신조루트의 상징물, 호경암(虎京岩)

남마루에서 360m 오르면 길 왼쪽에 가득 상처를 입은 큼직한 바위가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도심을 바라보며 자리한 이 바위가 바로 김신조루트의 상징인 호경암이다. 바위는 그리
잘생긴 편은 아니고 그저 평범한 수준인데, 그냥 흔한 바위로 묻힐 뻔한 그가 일약 유명해진
것은 김신조 공비 패거리와 격전을 벌였던 남북분단의 서글픈 현장이기 때문이다.

청운동에서 경찰에게 털린 김신조 패거리는 북악산을 넘어 성북동 뒷산(북악산 북쪽 능선)으
로 줄행랑을 치며 몸을 숨겼다. 39대대 2중대는 호경암 주변을 수색하던 중, 등을 보이고 도
망치는 공비 3명을 발견, 호경암에서 교전을 벌이다가 인근 구진봉 주변에서 모조리 사살했다.

처단된 김신조 패거리 29명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적군묘지(敵軍墓地)에
묻어주었다. 적군묘지는 6.25때 남한 땅에서 죽은 북한군과 중공군의 시신을 묻은 곳으로 김
신조 사건과 동해 잠수함 침투 때 죽은 공비들, 그리고 1987년 KAL기를 폭파시킨 폭파범도 같
이 묻혀 있다.


▲  남북분단의 비극이 안겨준 선물 아닌 선물 - 총탄 자국으로
계속 고통받고 있는 호경암


북악산이 서울 근교 경승지로 조선시대부터 귀족들의 별장과 기와집, 바위글씨가 즐비했던 탓
에 호경암도 그런 곳이 아닐까 생각을 했었다. 허나 막상 확인해보니 1968년에 서울을 지켰던
맹호부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옛 사람들의 손길은 북악산 주능선과 서쪽(부암
동, 청운동), 남쪽(삼청동)에 치우쳐져 있을 뿐, 김신조루트와 북쪽 능선은 전혀 없는 것이다.
아마도 금표(禁標) 구역으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묶인 탓이 아닐까 싶다.

바위 밑에는 이곳이 격전지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는데, 1998년 1월 호경암 주변에서 복무하
는 군장병들의 애국심과 경각심을 크게 돋구고자 안내문을 설치했다고 하며, 울퉁불퉁한 바위
피부에는 당시 총격전으로 생긴 50여 발의 탄흔이 진하게 남아 당시에 긴장되고 숨막히던 상
황을 아련히 전해준다. 그런 악연으로 북악산의 이름 없는 바위는 김신조 사건의 격전지로 이
들을 격퇴한 부대 이름을 따서 호경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고, 이곳이 개방되면서 북악산
의 새로운 명물이자 이 땅의 비극적 현실을 담고 있는 산증인으로 몸값과 이름을 크게 올리고
있다. 좋은 쪽으로 이름을 높여야 되는데 안좋은 쪽으로 높이고 있으니 바위 자신도 참 우울
할 것이다. 바위를 보면 표정이 조금은 굳어져 있는데, 이 땅이 통일이 되면 그의 표정도 씨
익~ 펴지지는 않을까?


▲  이 땅의 비극은 저렇게 깊었다 - 바위에 박힌 탄흔

▲  호경암 정상에 비스듬히 박힌 호경암 표석
이곳에서 바라보는 천하는 앞에서 봐왔던 조망을 훨씬 뛰어넘는 1등급의 조망이다.
(이곳은 통제구역이긴 하나 그 통제의 정도가 느슨함, 낮은 난간만 넘으면 됨)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1)
북악산 일대와 성북동, 서울 도심, 남산 등이 바라보인다.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2)
성북동과 정릉동, 성북구, 중랑구, 강북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  호경암 표석에서 바라본 천하 (3)
평창동과 구기동, 북한산(삼각산) 산줄기, 형제봉 등이 바라보인다.

▲  호경암에서 하늘전망대로 인도하는 길
호경암을 지나면 더 이상 오르막길은 나오질 않는다. 가을에 잠긴 잔잔한
숲길만이 조용히 사색을 도울 뿐이다.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마무리

▲  김신조루트 북쪽에 자리한 하늘전망대

호경암에서 4~5분 정도 가면 하늘전망대라 불리는 전망대가 나온다. 지금까지 나온 '~~마루'
보다 덩치도 크고 조망도 괜찮은 편으로 그 이름은 북악하늘길에서 따왔지만 그만큼 하늘과도
가까운 곳이라 이름이 썩 어울린다.

서마루부터 호경암까는 성북동과 북악산 주능선, 서울 도심, 남산 등의 남쪽과 성북구와 중랑
구, 동대문구 등 동쪽이 주로 보였다. 허나 호경암을 경계로 능선 남부에서 북부로 넘어왔기
때문에 하늘전망대부터는 그와는 반대인 북쪽으로 파노라마가 바뀌면서 평창동과 구기동, 정
릉동, 북한산(삼각산) 산줄기를 비롯하여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등이 시야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서울의 대표 졸부 동네인 평창동(平倉洞)과 구기동(舊基洞)을 비롯하여
탕춘대성 능선과 북한산 서부가 거침없이 시야에 박힌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평창동과 북한산 산줄기, 형제봉 등이 바라보인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정릉동과 길음동, 삼양동,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수락산 등이 흔쾌히
두 눈에 들어온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4)
정릉동과 돈암동, 성북구, 노원구, 중랑구, 불암산 지역

▲  솔내음이 그윽한 북까페

하늘전망대에서 북쪽으로 110m 가면 북까페라 불리는 소나무숲이 나온다. 이곳에는 책장과 의
자 등이 닦여져 있는데 북한산과 북악산의 산바람이 교차하는 곳이며 솔내음도 그윽하여 독서
도 무지 잘될 것 같다.
그런데 북까페보다는 '독서마당'이나 '소나무 책방','솔내음 책방','사색의 공간'으로 이름을
지었으면 훨씬 부드럽지 않을까? 다른 곳은 '~~마루(마루는 정상을 뜻하는 순 우리말)'나 '하
늘전망대' 등의 우리말을 쓰면서 왜 이곳만큼은 영어로 지었는지 철밥통들의 뇌 속이 궁금할
따름이다.

북까페 책장은 달랑 1개로 책은 많이 담겨져 있으나 상당수는 어린이와 청소년용 책이거나 소
설이다. 집에 버려둔 책이 있다면 썩혀두지 말고 이곳에 기증하는 것도 공익 차원에서 괜찮을
것이다. 다만 이곳의 책은 인간적으로 가져가지 말자. 그리고 책을 봤다면 의자에 두지 말고
반드시 책장에 넣기 바란다.

이곳에서 산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북까페를 등지고 북쪽으로 직진하면 하늘교가 나오고, 북
까페를 가로지르면 북악하늘길 제3산책로이다.

▲  조촐하게 생긴 북까페 책장

▲  북악산길 위에 걸린 하늘교


▲  하늘교 밑에 펼쳐진 북악산길
서울 도심 속의 산악 도로로 드라이브 코스로 명성이 자자하다. 특히 야간에는
회색빛 대도시 서울의 야경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다.

▲  김신조루트의 북쪽 종점, 하늘마루

북까페에서 1분 정도 가면 하늘교란 콘크리트 다리가 나온다. 다리 밑에는 2차선 북악산길이
펼쳐져 있는데 차들이 1분이 멀다하고 지나간다. 그 다리를 건너면 하늘마루가 나오니, 이곳
이 김신조루트의 북쪽 종점이다.

하늘마루에는 6각형 정자와 쉼터, 운동기구 등이 있으며,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서
쪽으로 가면 북악팔각정과 부암동, 창의문, 사직공원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가면 북악정과
성북구민회관, 아리랑고개 방면으로 통한다. 중간에 국민대나 배밭골, 성북동 길상사로 내려
가는 길이 있으며, 하늘마루를 조금 지나면 북한산 형제봉으로 가는 산길이 있어 북한산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이 산길은 북악터널 위쪽과 여래사(如來寺)를 지나며, 형제봉고개에서 북한
산둘레길과도 만난다. 이렇게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은 북악터널에서 서로 이어져 있고, 북
악산 북쪽 능선은 넓게 북한산의 남쪽 줄기로도 볼 수가 있어 성북동 북쪽에 자리한 길상사와
정법사(正法寺)가 삼각산(三角山)에 있음을 칭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마루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북한산과 형제봉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나온다. 그 길로 들
어서면 얼마 안가서 정릉동 배밭골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는데 그 길을 조금 내려가면 조망이
괜찮은 전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전망대 이름은 딱히 없으나 여기서는 국민대 남쪽 전망대라
고 하겠음)


▲  국민대 남쪽 전망대

▲  국민대 남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동쪽 산줄기
거대한 수해(樹海)를 이룬 북한산 산줄기의 녹음이 참 짙기만 하다.

▲  국민대 남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가까이에 국민대를 비롯하여 정릉동과 길음동, 강북구, 수락산~불암산
산줄기가 두 눈에 들어온다.


▲  국민대 남쪽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 동쪽 산줄기와 정릉동, 길음동, 성북구 지역


국민대 남쪽 전망대에서 다시 한번 천하를 굽어본 다음, 여래사를 거쳐 형제봉 방면으로 이동
했다. 원래는 형제봉고개를 거쳐 평창동으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시간도 늦어서 북악터널 북쪽
을 거쳐 국민대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도심 속의 허파이자 별천지, 북악산 김신조루트 나
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닫는다.

※ 북악산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 찾아가기 (2018년 11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서울다원학
  교 종점 하차. 여기서 10분 정도 가면 삼청터널이 나오는데 삼청각과 삼청터널 사잇길로 들
  어가면 숙정문안내소로 안내소 직전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북악하늘길 제1산책로와 김신조루
  트이다.
*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6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구민회관(구민회관
  입구) 종점에서 하차, 여기서 북악산길을 따라 이동한다. (하늘마루까지 1시간 소요)

★ 북악산 북악하늘길 관람정보
*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언제든 출입이 가능하다. 단 출입금지 지역과 등산로 외에 구간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 김신조루트는 약수터 1곳과 화장실 1곳(호경암 부근) 밖에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정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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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8년 11월 2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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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한 경승지를 많이도 간직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둘러보기 ~~~ (세검정, 석파랑, 석파정별당, 홍지문, 옥천암,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부암동 산책 '

▲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


 

하늘 높이 솟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그리고 인왕산(仁王山) 사이로 움푹하
게 들어간 분지(盆地)가 있다. 그곳에는 수려한 경치를 지닌 부암동(付岩洞)이 포근히 안
겨져 있는데서울 도심과는 고작 고개(자하문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라 '
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의구심을 던질 정도로 도심과는 생판 다른 전원(田園) 분위기
를 지니고 있다.

부암동은 3개의 뫼 사이로 간신히 비집고 들어온 세검정로와 자하문로를 중심으로 가늘게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을 뿐, 6층을 넘는 건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대부분 정원이 딸린
주택이거나 빌라들이며, 밭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특히 산자락에 터전을 일군 집들은 지
방의 시골 마을이나 산골 읍내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진하게 선사한다.
도심이 바로 코 앞임에도 이런 모습을 지니게 된 것은 지정학적 위치로 오랜 세월 개발제
한에 묶인 탓이다.
이렇듯 도심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와 그곳에 깃든 아름다운 풍경으로 조선 초부터 양반사
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크게 각광을 받았다. 자연에 동화되어 살고 싶었던 그
들의 팔자 좋은 바램은 부암동 곳곳에 그림 같은 경승지와 흔적을 빚어놓았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부암동에는 오래된 볼거리가 풍부해 옛 것과 자연에 목말라하는 나그네를 유
혹한다. 북악산 북쪽 백사골(백사실)에는 옛 별서(別墅) 유적인 백석동천(白石洞天)이 숨
겨져 있고, 백사골 상류에는 도심 속 두메산골로 통하는 뒷골마을(능금마을)이 강원도 산
간의 분위기를 선사하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현장이자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
없는 야망이 서린 무계정사터,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구한말에 지어진 반
계 윤웅렬 별장, 인왕산 자락의 경승지인 청계동천(淸溪洞天), 석파정의 별당과 순정효황
후의 집이 하나로 묶여진 석파랑 등이 있다.
그 외에 응선사 산신도(山神圖), 성불사 금동보현보살좌상 등의 불교문화유산이 있고,
울미술관, 환기미술관, 자하미술관 등의 미술관, 산모퉁이 등 분위기를 내세운 까페와 찻
, 온갖 식당들로 즐비하다.

부암동 북쪽으로 흘러가는 홍제천(弘濟川)1970년대까지 서울 시민들의 소풍, 피서지로
각광을 받던 곳으로 세검정, 장의사(藏義寺)터 당간지주(幢竿支柱), 춘원 이광수(春園 李
光洙)의 별장터, 탕춘대성과 홍지문이 있다. 또한 서쪽으로 조금 확장하면 옥천암과 그곳
에 깃든 하얀 피부의 마애보살좌상이 있다.
서울 장안에서 4대문 안을 제외하고 문화유적과 볼거리가 많이 산재한 동네로 넉넉잡아 5
~6시간 정도면 상당수의 명소를 둘러볼 수 있다. 물론 그 이상의 시간을 던져 더 많은 곳
을 더 여유롭게 둘러보는 것도 좋다.

부암동은 나의 즐겨찾기의 1곳으로 그곳에 퐁당퐁당 빠진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봄의 한
복판을 맞이하여 다시 부암동으로 들어가 홍제천을 따라 여러 명소를 흔쾌히 사진에 담았
고 그 명소를 요리하여 이렇게 글로 다시 내놓는다.


 

♠  도성 밖 경승지이자 시민들의 소풍/피서지로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던,
허나 개발의 칼질로 이제는 이름만 남은, 세검정
(洗劍亭)
-
서울 지방기념물 4

신영동3거리에서 홍은동 방면으로 5분 정도 걸으면 멋드러진 바위에 걸터앉아 홍제천을 바라
보고 선 단아한 모습의 세검정이 마중을 한다.

세검정은 팔작지붕을 지닌 'T'자형 정자로 연산군이 1506년 탕춘대(蕩春臺)를 조성하면서 좌
우로 흐르는 물을 가로질러 돌기둥을 세워 옆으로 긴 누각을 세우니 그것이 세검정의 시작이
라고 한다. 물론 그때는 세검정이라 불리지 않았다.
세검정의 세검(洗劍)은 칼을 씻는다는 뜻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쓸데없이 불
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같은 것들이 여기서 광
해군의 폐위를 모의하고 그 결의를 다지고자 칼을 물에 씻었다고 한다
그들은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던 얼떨떨한 능양군(陵陽君)을 앞세워 자하문(창의문)을 뚫
고 도성(都城)을 침범, 창덕궁(昌德宮)을 점령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군주로 옹
립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저지른다. 이렇게 정권을 빼앗은 서인 일당은 반역을 모의
하고 칼을 씻었던 현장을 길이길이 추억하고자 정자 이름을 세검정이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숙종(肅宗) 시절,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다시 세웠다고 하며 영
조 시절인 1748년 총융청(摠戎廳)이 탕춘대 자리로 이전되면서 현재의 세검정이 지어졌다. (
이때 새로 정자를 지었다고 함)
이후 이곳은 자하문 밖(자문 밖) 경승지로 명성을 누렸는데 1749년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이 벗 25명과 여기서 봄놀이를 가졌으며, 1790년 정조 임금이 연융대(鍊戎臺)에서 활쏘기 시
험을 참관하고 세검정에 들렸다가 정자에 걸린 영조의 어제시(御製詩) 현판을 보고 시를 남기
니 내용은 이렇다.

군사 정돈하는 뜻으로 이 정자에 임어(臨御)하니
북한산 높은 하늘에 뿔피리 소리도 맑구나
사랑스럽다 근원이 있는 샘물은 매우 힘차서
시원한 물 한줄기에 온 산이 쩡쩡 울리네

1791년 여름,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이곳을 다녀가 세검정의 명물인 물구경을 했다. 1941
화재를 만나 겨우 주춧돌 하나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 겸재 정선(謙齋 鄭敾)'세검정도'
참조하여 복원했다. <세검정은 '세검정터'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4로 지정되어 있음>

▲  옆에서 바라본 세검정

▲  세검정의 뒷모습

세검정은 규모는 작지만 홍제천과 차일암, 북한산(삼각산)의 시원스런 숲이 서로 어우러진 그
림 같은 현장이다. 또한 질 좋은 바위들이 많아 덕수궁(경운궁) 석조전(石造殿) 기초공사 때
이곳 화강암을 채취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19세기 말 이후에는 양반과 귀족 외에 일반 백성들도 나들이로 많이 찾아왔으며, 서울 시내의
여러 신식 학교들도 이곳으로 소풍을 왔다. 특히 18995월에는 이화학당(梨花學堂) 여학생
들이 여기로 소풍을 왔는데 그것이 이 땅 최초의 여학생 소풍으로 당시 '조선 그리스도인 화
'에는 그때의 사연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정동 이화학당 여학도들이 1년 동안을 애쓰고 공부하다가 봄빛을 따라 창의문(자하문) 밖으
로 화류(花柳) 구경 갔더라 하니 우리가 매우 치하하는 것은 여학도의 화류는 500년에 처음이
..'

왜정(倭政) 이후, 시민들의 소풍 및 피서지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세검정 주변 신영동과 홍
지동은 자두와 능금 명산지로 유명하여 여름만 되면 그들의 달달한 향기가 온 동네에 진동했
. 지금으로서는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을 세검정이 지녔던 것이다.
허나 그렇게 착했던 세검정은 1970년 이후 모진 변화를 강요 받게 된다. 천박한 개발의 칼질
이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부암동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하여 한적했던 동네에 집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서면서 그들이 내뱉은 생활폐수로 세검정을 윤
기 나게 했던 홍제천은 악취가 진동하는 저주받은 하천으로 전락했고, 능금과 자두가 자라던
곳도 주택 개발에 밀려나 자취를 감추었으며, 세검정 옆을 지나는 도로(세검정로)가 확장되면
서 운치가 적지 않게 깎여나갔다.

현재 세검정은 그 뒷통수를 지나는 차량들의 소음과 매연, 그리고 아직도 덜 걸러진 홍제천의
쾌쾌한 냄새로 매일 고통을 받고 있다. 홍제천이 예전보다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비린
내는 여전하며 하천 너머로 주택들이 가득해 옛날의 운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긴 서울 땅
에서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거나 고립된 경승지가 어디 한둘이랴. 너무 사람과 개발만
생각하여 일을 저지르다보니 옛 경승지와 자연을 전혀 배려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  세검정의 오랜 단짝, 차일암(遮日巖)

세검정 밑에는 하얀 피부의 넓적한 반석(磐石)이 누워있는데 이 바위가 조선시대에 사초를 깨
끗히 세초(洗草)했던 차일암이다.
세초란 조선왕조실록의 모태가 되는 사초(史草)를 실록(實錄)으로 편찬한 다음, 사초에 적힌
글씨를 물로 씻겨 지우고 그 종이를 다시 쓰는 것이다. 그것을 마치면 뒷풀이로 세초연(洗草
)을 가졌는데 이때 바위에 햇빛을 가리는 천막인 차일(遮日)을 치며 잔치를 했다. 하여 차
일암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차일암에는 차일 기둥을 세우고자 파놓은 구멍들이 있으며 오랫동안 세검정을 수식하며 서울
장안의 이름난 경승지이자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었다. 무더운 날씨에 벌러덩 누워 한잠 청하
고 싶을 정도로 잘생긴 바위이나 주변 환경이 고약하게 변한 탓에 이제는 그러기가 곤란해졌
. 비록 인간들이 주변에 씌워놓은온갖 굴레들은 어쩌지 못해도 홍제천의 수질만큼은 더 깨
끗하게 거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것도 여전히 어려운 모양이다.

세검정에서 홍제천을 따라 동쪽으로 200m 남짓의 산책로가 닦여져 있으며, 그 길의 끝에는 간
단하게 몸을 풀 수 있는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근래 세검정 밑에서 세검1교 밑도
리로 징검다리가 놓였는데, 그 다리를 통해 홍제천 옆 산책로를 따라 홍지문 방면으로 이동할
수 있다. 다만 물이 아직 깨끗하지 않으니 손이나 발은 담구지 말자.


▲  늦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세검정 산책로

▲  세검정 동쪽 홍제천 산책로
빌라 너머로 보이는 산자락에 부암동의 꿀단지, 백사실계곡(백사골)이 숨겨져 있다.


세검정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를 타고 세검정(상명대)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번을 타고 세검정(상명대)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168-6 (세검정로 244)

         ◀  탕춘대(蕩春臺)터 표석
탕춘대는 1506년 연산군이 세운 누대(樓臺)
홍제천 바위에 자리했다. (표석은 그 위치가
아님) 이후 영조 시절에 여기서 군사를 훈련시
키면서 연융대(鍊戎臺)로 이름이 갈렸다.
(세검정 동쪽 길가)

         ◀  탕춘대 한지마을터 표석
조선 때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造紙
) 소속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다. (세검정초
교 정류장 부근)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에서 홀로 떨어져 나온 기와집,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

세검정을 둘러보고 서쪽으로 조금 가면 상명대입구인 세검정교차로이다. 여기서 서남쪽 길 건
너편으로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 집이 석파정 별당
을 품고 있는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이다.

지금은 비록 식당이지만 원래는 서예가이자 문화유산에 조예가 깊었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
, 1903~1981)의 별서였다.
그는 1945년 왜열도로 건너가 왜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가 가지고 있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의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를 천신만고 끝에 받아온 인물로 유명하며, 6.25시절 서울을 점령
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리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
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문화유산의 강제 북송을 막아내기도 했다.

소전은 금수저 출신(전남 진도 대지주의 아들임)으로 1963년 이곳에 별서를 지었다. 집을 새
로 짓지 않고 도심에 있던 김옥균(金玉均) 가옥, 박영효(朴泳孝) 가옥, 이완용(李完用) 별장,
기생 나합(羅閤) 양씨의 집 등의 한옥을 구입하여 그 자재로 집을 지었다. 또한 태평로 확장
으로 덕수궁(경운궁)의 동쪽 돌담이 철거되었을 때 이를 모두 매입해 석파랑 돌담과 정원 축
대를 쌓을 때 사용했는데 자그마치 트럭 30대 분이었다고 한다. (운현궁 돌담도 사들였음)

그의 별서는 1969년 완성을 보았으며, 1958년에 매입한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옥인
(玉仁洞) 집을 별서 북쪽에 두고, 같은 해에 흥선대원군의 별장, 석파정(石坡亭)에서 가져
온 별당은 뒤쪽에 두었다. 또한 당시로는 그리 흔치 않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
고 있었다고 하니 그의 재력이 엄청났음을 보여준다,

자기의 별서를 조그만 한옥 전시장으로 꾸민 소전은 1981년 세상을 떴고 그의 후손이 가지고
있다가 1993년 주인이 바뀌면서 비싼 한정식당으로 바뀌었다. 석파정 별당의 이름을 따서 석
파랑이란 간판을 내걸었으며 오랫동안 손님 외에는 내부 접근이 어려웠으나 2000년대 이후 빗
장이 열려 마음 편히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이곳은 부암동의 주요 명소로 크게 존
재감을 드러내어 사진쟁이와 답사객의 발길이 늘고 있다. 허나 이곳은 엄연히 개인 식당이기
때문에 별당을 비롯한 건물 내부는 마구 들어가서는 안되며, 18시나 일몰 이후에는 식당 영업
을 위해 관람을 가급적 피해주기 바란다.


▲  석파랑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자 형태로 3개의 방으로 이루어
져 있다. 가운데 큰 방이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며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속살을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
개되었다. (서울미술관 개장으로 개방됨)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법칙에 따라 별
당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마땅하나 서로 떨어진지 60년이 넘은 상태고 서로 소유자가
다르다보니 이 또한 쉽지가 않다. <석파정은 서울미술관 소유, 석파정에서 떨어져 나온 별당
은 석파랑 소유임>


▲  석파정 별당 쪽마루와 섬돌
대청방 문을 살며시 열면 그 안에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섬돌에 신발들이 있는 것을 보니 가운데 방에서 사람들이 한정식을
먹고 있는 모양이다.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결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던 대원군의 별
장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 없이 깨끗하게 보
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아직 방 내부는 구경하지 못했음)
별당으로 다가서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에서 접근하거나 석파랑 전용 주차장에서 스톤힐로 이
어지는 돌계단을 타고 들어가면 된다.


▲  석파랑 본채 동쪽에서 바라본 석파정 별당과 스톤힐 정문

별당 옆에 조성된 돌계단과 돌문, 성곽처럼 다져진 석축은 석파랑에서 스톤힐이란 건물을 지
으면서 닦은 것들이다. 스톤힐(Stone hill)은 이탈리안 음식과 와인을 취급하는 식당으로 전
통과 고풍스런 멋이 깃든 석파랑과 완전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데, 그 옆에 빨간 피부
를 지닌 홍지동 산신각이 있다.
돌의 언덕을 뜻하는 '스톤힐'에 걸맞게 하얀 돌로 그 길목을 꾸민 것이 참 이색적이다. 하지
만 소나무가 무성한 주변 풍경과는 그리 어울려 보이지 않으며, 스톤힐을 만들면서 석파정 별
당의 석축까지 진하게 다져놓아 마치 성곽 위에 집처럼 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  150년 이상 묵은 석파랑 감나무 (가운데 나무)

▲  활짝 열린 석파랑 대문(정문)
지금은 모두에게 개방된 착한 문이지만 예전에는 비싼 밥을 먹으러 오는
손님들에게만 입을 벌리는 차가운 문이었다.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본채는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뜨락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 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
1898년 경복궁에 세운 것인데 심술 고약한 왜정이 이를 매각하자 소전이 매입하여 옮겨놓
은 것이다.
비록 제자리는 잃었지만 소전 덕분에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궁궐 건축물의 고품격이 고
스란히 배여있다. 그리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뜨락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
으며 조그만 절구통과 다양한 석물, , 나무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  석파랑의 중심인 본채
최대 50명까지 밥 손님 수용이 가능하며, 석파랑의 값비싼 한정식을 지어내는
부엌이 이곳에 들어있다.


※ 석파정 별당(석파랑)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
  내버스를 타고 상명대입구(세검정교회) 하차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에서 1711, 7016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시내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도보 2~
  3
* 석파랑 홈페이지는 위의 석파랑 본채 사진을 클릭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 (자하문로 309, 석파랑 ☎ 02-395-2500)


▲  하림각 건너편 길가에 자리한 부침바위터(付岩址)

부침(붙임)바위는 부암동의 지명 유래가 된 유명한 바위이다. 바위 피부에 난 구멍에 돌을 대
고 비비면서 소원을 빌거나 바위에 붙인 돌에서 손을 떼었을 때 그 돌이 척 붙으면 아들을 낳
거나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와 아들을 원하는 여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옛날부터 뿌리 깊게 박힌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기자신앙(祈子信仰)의 애뜻한 현장으로 바
위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잘 남아있었으나 개발의 칼질에 무참히 난도
질을 당해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다만 바위터에 표석을 세워 그가 있던 자리임을 아련하
게 전해줄 따름이며, 세검정교차로 공원에 그를 추억하는 표석을 세웠다. 허나 아무리 그런다
고 강제로 사라진 그가 돌아오지는 않는다.
서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잘생긴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도시화
의 거친 물결과 인간의 욕심으로 많은 바위가 세월의 저 편으로 강제로 사라지고 말았다.
런 바위 가운데 여기서 가까운 응암동(鷹岩洞) 백련산(白蓮山) 자락에는 매 모양의 잘생긴 매
바위가 있었는데 땅값을 노린 집주인이 무식하게 파괴해버렸다.


 

♠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며 도성의 수비력을 높였던
탕춘대성과 홍지문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


▲  고된 세월의 때와 하얀 피부가 공존하는 홍지문

석파랑을 둘러보고 홍은동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홍지문이란 성문과 탕춘대성이라 불리는 성
곽이 마중을 나온다. (석파랑 옆 세검정교차로에서 훤히 바라보임)

홍지문을 거느린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산성(山城)으로 연산군이 세검
정 부근에 지은 탕춘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한양(서울) 서쪽(정확히는 북서쪽)에 있다고 해
서 서성(西)으로도 불리며, 겹성이란 별칭도 있었다.
이 성은 숙종(肅宗)이 만약에 있을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서울의 방어력을 높이고 비상시
북한산성 행궁(行宮)으로 신속히 도망칠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위해 조성되었다. 1702년에
(申琬)이 성곽 축조를 제의했는데, 북한산성(北漢山城) 증축과 행궁 조성, 한양도성 보수가
마무리되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을 세우려고 1715년 홍제천에 홍지문을 먼저
닦았다. 그런 다음 1718826일 성곽 공사에 들어갔으나, 겨울이 다가오면서 106일에
일단 공사를 멈추었다가 17192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허나 처음보다 사업이 크게 축소
되면서 3월에 공사를 종료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 능선, 홍지문, 탕춘대능선을 거
쳐 비봉능선 서쪽 수리봉(향로봉 부근)까지 이어진 4km 규모로 원래는 북한산성까지 이으려고
했으나 비봉능선이 험준해 포기했으며, 북한산성 대남문에서 보현봉, 형제봉능선, 북악산(
악산) 북쪽 능선을 거쳐 한양도성을 잇는 탕춘대성 동쪽 성곽도 계획했으나 싹 취소되었다.

인왕산과 북한산(삼각산) 경계인 홍제천에는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을 두었으며, 탕춘대능선에
는 암문(暗門) 1개를 내었다. 그리고 성 안에는 훈련장인 연융대(鍊戎臺)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등의 창고를 설치했으며, 총융청(摠戎廳) 본부도 이곳에 두었다.
탕춘대성이 들어앉은 위치 대부분은 각박한 경사지로 거의 천험(天險)을 자랑한다. 하여 홍지
문을 제외하고는 성을 높이 구축하지 않았으며, 현재는 인왕산 북쪽 능선과 홍지문, 탕춘대능
선에 성곽이 그런데로 남아있다. (여장은 홍지문과 남쪽 성곽 일부에만 남아있음)


▲  홍제천의 물을 하염없이 흘려보내는 오간대수문 (동쪽 모습)
북한산과 북악산에서 발원한 홍제천은 저 문을 통해 한강으로 흘러간다. 마치 냇물 위에
5개의 무지개를 보듯, 유연하게 구부러진 홍예의 곡선이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은 탕춘대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암문은 제외)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
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한북문(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200년 이상 별탈없이 지내온 홍지문은 19211, 지붕에 쌓인 세월의 장대한 무게를 감당하
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해 8월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
지 홍수로 싹 떠내려가면서 터만 아련하게 남아오다가 19777월 복원되었다. 홍지문은 홍예
주변에 고색의 때가 탄 성돌만 옛날 것이며 때깔이 하얀 성돌은 1977년 복원할 때 새로 맞춘
것이다.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문루까지 올라가 놀았던 기억이 난다. 허나 지금은 문화유산 보호를 위
해 문루와 오간대수문은 금지 구역이 되었으며, 오간대수문에서 탕춘대능선 쪽 성곽 200m 정도
구간도 통제되어 탕춘대능선을 가려면 홍지동 주택가나 옥천암 주변으로 돌아가야 된다. 또한
문 남쪽은 세검정로가 지나고 있어 성곽이 아주 잠깐 단절되어 있다. 허나 그 길을 넘으면 성
곽은 다시 소소하게 율동을 부리며 인왕산으로 뻗어간다.
성문 앞뒤로 나무가 심어진 짧은 산책로가 닦여져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오간대수문 바로 밑
홍제천 북쪽에 최근에 산책로가 닦여져 오간대수문의 속살을 구경할 수 있다. 이 산책로는 세
검정과 옥천암까지 이어진다. 또한 문을 경계로 성 안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弘恩洞)이다.


 홍지문의 야경 (홍지문의 앞 모습)
홍지문은 더 이상 서울 수비의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문화유산과 관광지의 의무와 성격만 지니고 있으며,
문은 24시간 열어두고 있다.

 홍지문 천정을 장식하고 있는 고운
빛깔의 와운문(渦雲紋)

▲  홍체천 산책로에서 바라본 오간대수문의
북쪽 홍예문들

   

오간대수문 윗도리는 금지된 다리라 발을 들일 수 없지만 아랫도리는 홍제천 산책로가 닦이면
서 접근이 가능해졌다. 처음으로 살펴보는 오간대수문의 속살, 비록 하천에서 약간 비린내가
풍기긴 했으나 그 정도 냄새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서울 사람임)

홍예문 위쪽에는 용머리가 새겨져 있다. 아무래도 물이 흐르는 수문이라 물을 관장하는 용을
수호용으로 넣은 듯 싶다. 5개의 수문 중, 북쪽 기준으로 1,2,5번째 문은 바닥에 돌이 입혀져
있고, 3,4번째 문은 홍제천이 흐르고 있다. 하늘에서 물폭탄이 내려 홍제천이 흥분한 경우에
5개 문이 모두 수문이 되버린다.

※ 홍지문 찾아가기 (2018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18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를 타고 홍지문 하차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산4


 

♠  북한산 끝자락 홍제천변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고려 후기에
조성된 거대한 하얀 마애불을 간직한 홍은동 옥천암(玉泉庵)


 홍제천 남쪽에서 바라본 옥천암 (왼쪽은 마애보살좌상,
오른쪽이 옥천암)

홍지문에서 한강을 향해 열심히 길을 재촉하는 홍제천을 따라 서쪽으로 7분 정도 가다보면 하
얀 암반이 일품인 하천 건너로 하얀 피부의 커다란 마애불상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가 바로
이곳의 명물이자 상서로운 관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이다.
문화재청은 그를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지역 사람들은 '보도각백불'로 많
이 부르고 있다. (나도 그 명칭이 버릇이 되었음) 여기서 보도각(普渡閣)은 하얀 마애불과 바
위를 보듬은 보호각의 명칭으로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홍
제천변에 있어 옛날부터 '해수관음상'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았으며 강제로 하얀 피부가 된 19
세기 이후에는 '백의관음(白衣觀音)', '백불' 등의 별칭이 추가되었다. 여기서 '백불'은 구한
말에 양이(洋夷)들이 그를 보고 'White Buddha'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견
해도 있다.

마애불 옆에는 그를 관리하는 조그만 암자 옥천암이 둥지를 틀었으며 그들에게 다가서려면 홍
제천에 걸린 보도교(普渡橋)란 유연한 곡선의 다리를 건너야 된다. 시멘트가 아닌 홍예 돌다
리였으면 운치가 정말 진국이었을텐데 그 점이 참 아쉽다. 다리 끝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조촐
한 문이 있는데, 그가 옥천암의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 다리 끝에 달린 흥미로운 현장
으로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도각 백불(마애불), 오른쪽 언덕에 옥천암이 있다.

▲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보물 1820

북한산(삼각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으며 홍제천 바람을 쐬고 있는 이 마애불은 서울에 전하는
8개의 오랜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달랑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 마애불의 일원으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조금 거리가 있는 안암동에 보타사(寶唾寺)란 절이 있는데 그곳에 옥천암 백불과 비슷
하게 생긴 하얀 피부의 마애불이 있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조성 시기도 비슷하여 고려 후기에
같은 사람이나 지역 세력가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여기서 가까운 승가사(僧伽寺)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계열의 작품으로 보기도 하며, 개성(開城)에 있는 관음굴 석조보살반
가상과 비교되는 고려 말 불상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존재로 평가받기도 한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서울로 천도하자 그를 찾아와 예불을 올렸다고 전하며 그
인연으로 조선 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가 되었다고 한다. 15세기에는 성현(成俔, 1439~
1504)이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옥천암 백불을 부처바위를 뜻하는 불암(佛巖)으로 기재
했다. 그것이 이곳에 대한 첫 기록이다.
임진왜란 때는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장군이 여기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는
데 어리석은 왜군들은 백불을 그만 조선군으로 잘못 알고 조총을 정신없이 쏘아댔다. 그렇게
탄환을 다 소비한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그때를 틈타 그들을 보기좋게 때려잡았다는 이야기가
홍제천의 물결을 따라 전해오고 있다. 이는 백불을 서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띄우고자 근처
에서 일어났던 권율의 왜군 토벌전을 끌어들여 지어낸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어머니인 부대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
찾아와 아들의 천복(天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호분(
,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
으로 불상을 하얗게 도배를 하면서 이때부터 팔자에도 없는
백불이 되버린 것이다. 그렇게 하얀 피부가 되면서 마애불은 다소 젊어 보이게 되었으나 대신
문화유산의 큰 매력인 고색의 기운이 다소 꺾여 그리 나이가 지긋해 보이지 않는다.


▲  보도각과 붙임바위의 옆모습

백불의 높이는 5m로 그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인해 예로부터 영험이 깊은 석불로 명성이 높았
. 그 앞에 닦여진 공간에는 그의 영험을 빌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며 특히 입시철에는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백불에게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준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불리는데, 생긴 모습부터
가 예사롭지가 않다. 부암동의 유래가 된 부침바위와 비슷하게 돌(또는 동전)을 바위에 붙이
거나 위로 던져서 바위 위에 붙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바위에 매달린 작은 돌과 동전
이 적지 않다. (절에서 동전을 계속 수거하고 있어 요즘은 별로 안보임) 그래서 불상이 이곳
에 깃들기 이전부터 민간신앙의 소박한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보도각 앞에는 홍제천과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둘러져 있었으나 2016년 이후 그 돌담을 밀면
서 정면이 확 트였다. 키 작은 난간이 돌담 대신 둘러져 있으며 난간 바로 앞에는 나무로 다
진 홍제천 산책로가 닦여져 있고, 그 앞 홍제천에는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반석들이 가득하다.
한때 도심 경승지로 바쁘게 살았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비린내 풍기는 하천으로 떨어지면
서 그 반석이 다소 아깝게 되었다. 아비규환의 속세(俗世)를 상징하는 그런 하천을 걱정스럽
게 굽어보며 중생을 걱정하는 불상의 모습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따뜻한 모습 같다.

그의 몸은 모두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주황색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는 금
색으로 되어있다가 2016년 이후 주황색으로 갈았음) 오른손에 걸린 팔찌, 삼도(三道) 아래로
커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거워 보이는 보관(寶冠), 그리고 귀에 건 귀걸이
까지 정말 관음보살 누님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그의 얼굴은 거의 포근한 인상으로 중생
들의 소원과 고충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현실은 하나도 안들어주었음)


▲  마애보살좌상의 잘생긴 얼굴과 윗도리

홍제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 모습으로 지그시 떠 있으며,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는다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불상의 몸을 덮고 있는
옷 주름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 하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선보이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대고 있는데 왼
팔이 너무 길어보이며 앉아있는 모습치고는 아랫도리가 좀 넓게 표현되어 신체 균형이 좀 맞
지 않는다.

백불 앞에는 중생들이 정성스레 기도를 올리며 고민거리를 슬쩍 내밀고 있었다. 그들의 갖은
소망을 들어주느라 보통 귀찮은 것이 아닐텐데 표정 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한결 같은 표정으
로 그들을 맞이해 고충 하나라도 누락될까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망이 이루어질 확률이 얼마
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 정성이 부디 백불과 하늘을 감동시켜 나를 포함한 중생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  조그만 기와문을 지나면 조촐한 옥천암 경내가 펼쳐진다.

백불 동쪽에는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은 옥천암이 자리해 있다. 백불이 관음보살이다보니 자
연히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이 땅의 3대 관음도량으로 양양 홍련암(紅蓮庵)
, 남해 보리암(菩提庵), 강화 보문사(普門寺)를 꼽는다. 허나 옥천암도 관음도량으로서의 자
부심이 대단하여 비공식적으로 자신들을 포함시켜 4대 관음도량의 하나로 우기기도 한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약효가 있다는 샘물(혹시 탄산약수가 아닐까?)
있어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전하며, 그 연유로 옥처럼 맑은 샘물, 옥천암을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약수는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오래전에 사라졌고, 절 앞을 흐르는 홍제천
또한 세월에 고되게 대이면서 그런 모습은 이제 전설의 한 토막이 되고 말았다.

이 절은 언제 지어졌는지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만 인근에 조선 초기까지 잘나갔던 장의사(
藏義寺, 세검정초교에 있었음)와 사현사(沙峴寺) 등의 쟁쟁한 절들이 있어 백불을 관리하는
부속 암자로 지어진 듯 싶으며, 세검정 맞은편에는 혜철선사(惠哲禪師)1396년에 태조의 도
움으로 세웠다는 소림사(小林寺)가 있는데, 그 절의 부속암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모두 부
질없는 메아리이다.

이곳의 본격적인 사적(事績)이 등장하는 것은 1868년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정관(
淨觀)이 관음전(觀音殿)을 세워 천일기도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1927년에는 주지 이성우(
李成祐)가 칠성각(七星閣)과 관음전을 지었으며, 1932년에 큰방 6칸과 요사(寮舍) 3칸을 고쳤
.
1942년에는 주지 동봉(東峰)이 관음전을 수리했으며, 이후 삼성각, 요사 등을 추가로 갖추었
으나 1987년 삼성각이 소실되고 1988년에 법당인 수덕전(修德殿)이 지어지면서 삼성각의 기능
은 수덕전에 통합되었다. 1989년에 종각을 만들었고 1990년 설법전(說法殿)을 지어 요사의 기
능도 겸하게 했으며, 1996에 홍제천에 보도교란 다리를 놓고 1998년에 일주문을 지었다.

북한산의 서남쪽 끝으머리를 잡으며 홍제천변에 둥지를 튼 조그만 절로 사세확장이 좀 어렵다.
바로 동쪽에는 주택가가 있고 뒤에는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북한산(삼각산) 자락이기 때문
이다. 그래서 경내가 무지 답답하다. 또한 백불 외에는 오래된 유산이 없고 주택가와 접해 있
어 고색과 산사의 내음이 크게 말라버렸다.

▲  요사의 기능도 겸하고 있는 설법전
옥천암 뜨락에도 변함없이 늦가을이 찾아와
이렇게 고운 작품을 남겼다.

▲  옥천암의 법당인 수덕전(修德殿)
수덕전과 설법전은 그 사이에 조그만 벽돌집
을 만들어 거의 하나로 이어져 있다.


▲  수덕전 아미타여래좌상

옥천암은 관음도량이라 보도각 백불이 중심 불상이나 법당에는 따로 아미타불(아미타여래좌상
)을 봉안했다. 불단에는 아미타불 홀로 있으며, 그 흔한 협시불(夾侍佛)은 없다. 불상 주위로
석가후불탱화와 지장탱화, 신중탱화,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등의 불화가 수덕전 내부
를 진하게 수식하고 있는데, 그중 독성탱화가 1954년에 제작된 것으로 백불을 제외하고 제일
오래되었다.


▲  왜식(倭式)으로 지어진 옥천암 5층석탑
5층석탑은 예전에 수덕전 정면 우측에 있었으나 담장 쪽으로 옮겨졌다. 날씬하게
솟은 석탑의 탑신(塔身)에는 조그만 구멍이 무수히 뚫려있어 내부가 보인다.


▲  수덕전 우측에 세워진 키 작은 석등과 3층석탑
사람 키보다 작은 석탑은 2,3층 탑신이 없어지고 지붕돌만 남아있는데 조금 오래되어
보인다. 예전(2010년 이전)에는 그가 없었으나 근래에 주변에서 가져온 모양이다.
(탑의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음)

◀  석가탄신일을 맞아 간만에 외출을 나온 옥
천암 괘불(掛佛)의 위엄
청아한 색채로 그려진 이 괘불은 근래에 조성
된 것이다. 이전 시대의 괘불보다 키와 덩치는
작지만 담길 것은 모두 담겨져 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간만에 화려한 외출을 나와
중생들의 인사를 받으며 상다리가 아작날 정도
로 차려진 제물에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옥천암을 끝으로 부암동 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워낙에 많이 찾았던 곳이라 마치
우리 동네처럼 친근한 곳이다. (부암동은 나를
기억이나 해줄까?)

▲  홍제천에 걸린 보도교와 징검다리

▲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옥천암(보도각 백불) 찾아가기 (2018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18번 버스를 타고 유원하나아파트 하차 도보 2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번 출구)에서 110, 153번 버스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18 (홍지문길 1-38 ☎ 02-395-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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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령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외롭게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양주 오봉산 석굴암 ~~~ (유격광장, 우이령길)


' 늦가을 산사 나들이, 양주 오봉산 석굴암 (우이령길) '

▲  오봉산 석굴암


 

늦가을이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수놓던 10월의 한복판에 친한 여인네들과 우이령 석굴
암을 찾았다.

우이령(牛耳嶺)은 서울 우이동(牛耳洞)과 경기도 양주시 교현리(橋峴里)를 잇는 고개로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뒷통수에 자리한다. 이들 산의 경계선이기도 한데 6.
25 시절에는 경기도 북부 피난민들이 이 고개를 넘어 피난길에 올랐으며 전방으로 군병
력과 군수물자를 수송하고자 미군 공병대에서 길을 닦으면서 지금의 우이령길을 이루게
되었다.
6.25 이후에도 지역 사람들이 이용했으나 북한이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진 이른바 1968
년 1,21사태(김신조 공비패거리 사건)로 1969년에 금지된 길로 꽁꽁 묶이고 만다. 그렇
게 서울 근교의 숨겨진 고갯길로 없는 듯 지냈던 우이령은 2009년 7월, 40년 만에 다시
빗장을 열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비추었다.

가슴을 다시 연 우이령은 인간의 발길이 오랫동안 끊긴 탓에 자연환경이 매우 우수했고
온갖 희귀 동식물이 앞다투어 뿌리를 내려 대자연의 휼륭한 보고(寶庫)로 성장했다. 또
한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길을 자아내는 등, 그야말로 감동의 현장이었다.
허나 지구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인간들이 몰려들면 우이령이 망가지는 것은 시간 문제
이므로 철저하게 탐방객 수를 제한하고 탐방에 적지않은 제약을 주어 우이령 보호에 힘
쓰고 있다.

우이령이 개방된 이후, 애타게 갈 기회를 노렸으나 딱히 인연이 없어 하염없이 잊고 살
다가 친한 여인네의 제안에 힘입어 가게 되었다. 예약은 그가 다했으므로 늦지 않게 가
기만 하면 된다.
연신내역(3,6호선)에서 아침 9시, 일행들을 만나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우이령
으로 다가섰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북한산(삼각산)과 노고산을 찾는 등산객과 단풍
행락객들이 폭주하여 송추(북한산, 도봉산, 오봉산) 방면으로 가는 시내버스는 계속 가
축수송의 위엄을 보였다. 거기에 행락객 차량들이 구파발역부터 북한산성입구까지 가득
들어차 불과 12km 거리(연신내~교현리 우이령입구)가 거의 120km로 느껴질 정도였다.
고작 집에서 가까운 우이령을 가는데 이렇게 속세살이처럼 힘이 드니 서울의 인구가 참
쓸데없이 많기는 많다.

어쨌든 등산/행락객의 거센 물결을 뚫고 간신히 우이령입구에 이르니 시간은 벌써 11시.
정류장 편의점에 주저앉아 김밥과 과자, 컵라면으로 벌써부터 지치고 놀랜 몸과 마음,
뱃속을 달래고 우이령의 품으로 들어섰다.


 

♠  석굴암 입문

▲  우이령의 북쪽 관문, 교현탐방지원센터

북한산로 우이령(오봉산 석굴암) 입구에서 8분 정도 들어서면 속세와 우이령의 경계를 구분짓
는 교현탐방지원센터가 마중을 한다. 길 주변에는 군부대 시설이 즐비하여 부푼 마음을 품고
찾아온 나그네에게 적지 않은 긴장감을 준다.

교현탐방지원센터는 우이령의 북쪽 검문소로 여기서 소정의 출입 절차를 밟아야 되는데, 예약
자의 신분증과 예약확인증을 보여주면 된다. 그리고 석굴암 탐방객은 따로 예약할 필요 없이
신분증만 지참하면 된다. 우이령이 비록 개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북악산(백악산) 한양
도성 능선처럼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공간이라 제약이 좀 있다.

교현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본격적인 우이령 탐방이 시작된다. 속인(俗人)들이 이 길을 걷고
자 1969년 이후 40년이나 목마르게 기다렸던 그 금지된 길이 내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가을
도 우이령에 흠뻑 마음을 빼앗겼는지 길을 멈추고 주변을 화사하게 불지른다. 이렇게 늦가을
과 우이령의 만남으로 우이령은 아름다운 비단길로 거듭났다.
우이령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길이 완만하다. 서서히 올라갔다가 다시 서서히 내려가는 느긋한
코스로 각박한 속세살이와는 정반대이다. 게다가 흙길이 잘 닦여져 있고, 주변 풍경이 고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짧게 느껴져 흔쾌히 왕복을 뛰고 싶은 마음이다.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석굴암입구 유격광장까지는 약 2.3km로 30분 정도 걸린다. 동쪽에는 도
봉산과 오봉이 빚은 우이령계곡이 때묻지 않은 청정함을 간직하며 속세로 흐르는데, 아쉽게도
계곡은 출입금지구역이다. 게다가 길과도 거리를 제법 두고 있어 휴전선 너머 동해바다를 바
라보듯 해야 된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곳을 속세로부터 지키려면 그럴 수 밖에. 앞으로도 계
속 이렇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  늦가을이 온 산천에 알록달록 불을 질렀다.
늦가을의 즐거운 불장난은 11월 이후 겨울 제국에게 모두 진압이 될 것이다.

▲  석굴암입구 유격광장 (유격 표석)

석굴암입구 유격광장은 우이령길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다. 이곳은 군부대의 유격 연병장으로
광장 동쪽에 서 있는 유격 표석이 이곳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갈리는
데 석등을 옆구리에 낀 다리를 건너 북쪽 길을 오르면 석굴암이고, 광장 남쪽으로 난 길로 직
진하면 우이령길 정상이다.

우이령에 왔다면 우이령길만 살피지 말고 석굴암도 둘러보기 바란다. 석굴암이 우이령에서 나
름 꿀단지 같은 곳이라 가는 길이 좀 각박해도 1시간 정도만 투자하면 충분히 둘러보고 나올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우이령을 잠시 버리고 석굴암으로 향했다.


▲  석굴암으로 인도하는 길 (석굴암입구)

▲  유격광장에서 바라본 오봉의 위엄 (왼쪽 바위 봉우리는 '관음봉')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에서는 어디서든 오봉(五峯, 660m)이 바라보인다. 3글자로 오봉산(五峯
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은 도봉산의 뒷쪽으로 5개의 바위 봉우리가 위엄을 뽐내며 속
세를 굽어본다. 이런 멋드러진 봉우리에는 옛 사람들이 붙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는 법,
내용은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를 피다 수염 태워 먹던 시절, 양주 땅에 총각 5명이 살고 있었다. 양주목(楊州
牧) 원님(사또)의 외동딸이 이쁘다고 하여 서로 장가를 들고자 시합을 벌였는데 아마도 원님
이 시합을 붙인 듯 싶다. 시합이란 바로 우이령 서쪽 상장능선에 올라 그곳의 바위를 오봉에
던져 올리는 것, 그들 가운데 누가 이겼는지는 전설을 지은 옛 사람의 생각이 짧아 나오지는
않지만 그들로 인해 오봉이 저렇게 묘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사람 주제에 어찌 저런 봉우리를 만들 수 있을까?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작품
을 가지고 사람이 황당한 전설로 가로채려고 드니 한편으로는 좀 괘씸하기도 하다.

우이령에서 뻔히 보이는 오봉이지만 정작 여기서는 오르지 못한다. 그곳에 가려면 무조건 도
봉산(道峯山)을 거쳐야 되며 우이령과 석굴암에서 오르는 길은 모두 자물쇠로 잠겨져 있다.


▲  석굴암 일주문(一柱門)과 오봉

석굴암입구에서 석굴암까지는 각박한 오르막길이다. 길 주변에는 온갖 유격훈련 시설이 가득
한데 바로 절 밑까지 펼쳐져 있어 군부대 내부를 지나는 기분이다. 이들 훈련장은 1969년 이
후 우이령이 통제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지금도 절찬리에 훈련용으로 쓰이고 있다. 몇몇 유격
시설은 개방되어 산꾼들이 도시락이나 간식을 먹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들어오는데, 수
련장 시설이 아닌 엄연한 군사시설인만큼 그런 것은 삼가하는 것이 옳을 듯 싶다.

훈련 시설을 옆구리에 끼고 10분 정도 오르면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주문이 마중을 나온
다. 보통 일주문은 절 이름이 쓰인 현판을 걸지만 이 문은 그런 것도 없다. 그냥 기둥 2개의
평방(平枋), 공포, 팔작지붕이 전부이다.
그런 일주문을 지나면 주지 도일이 조성한 '오봉산 석굴암 토지불사 공덕비(功德碑)'가 나오
고 다시 2분을 고생하면 주차장이 나온다. 이곳은 석축 위에 둥지를 튼 경내 바로 밑인데 여
기서 윤장대를 거쳐 우회하는 길을 오르면 비로소 석굴암 경내에 이르게 된다.

◀ 오봉산 석굴암 토지 불사 공덕비
주지 도일이 땅 2만평을 매입한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다.


▲  경내 밑부분에서 바라본 석굴암
석굴암 뒤쪽으로 관음봉(서쪽 바위 봉우리)과 오봉이 병풍처럼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중암자, 우이령 개방으로 단단히 덕을 보고 있는
오봉산 석굴암(五峯山 石窟庵)

▲  윤장대 부근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북쪽 산줄기와 상장봉(543m)

흔히 석굴암하면 대부분 경주(慶州) 석굴암을 떠올릴 것이다. 석굴암의 단짝인 불국사(佛國寺
)처럼 말이다. 글을 올릴 때도 지역을 안쓰고 그냥 석굴암이나 불국사라고 쓰면 죄다 경주로
생각하고 살펴본다. 인터넷 용어로 파닥파닥 낚인 것이다. 허나 불국사와 석굴암 그 좋은 이
름을 꼭 경주의 그곳만 써야 된다는 법은 없다. 그들이 이름 특허를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석굴암이란 이름은 석굴을 품었거나 석굴로 이루어진 절로 경주 외에도 석굴암이란 절이 여럿
존재한다. 일단 제2석굴암으로 유명한 군위(軍威) 석굴암이 있고, 도봉산(道峯山)에는 석굴암
이란 절이 무려 3곳이나 존재한다. 의정부 회룡골에 있는 석굴암과 도봉산 만장봉(萬丈峯) 밑
의 석굴암, 그리고 이곳 석굴암이 그것이다. 경주 석굴암이 천하에 널린 석굴암 가운데 가장
인지도가 강해 석굴암의 대명사가 되다보니 다른 석굴암이 제대로 빛을 못본 것이다. 물론 홍
보력 부족과 문화유산이 빈약한 점도 한몫 한다.

이번에 찾은 석굴암은 도봉산 서쪽을 이루는 오봉의 서쪽이자 관음봉(觀音峯) 서남쪽 350m 고
지에 둥지를 틀고 있다. 주변이 온통 수해(樹海)와 산뿐인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외로운 절집
으로 우이령이 통제된 이후 40년 동안은 찾는 이가 별로 없어 더욱 외로웠다. 그렇게 사람과
돈을 몹시나 그리워하다가 우이령의 사슬이 풀린 이후, 방문객이 늘면서 점차 흥하고 있다.
절이 들어앉은 지세는 위로는 도봉이 치닫고 아래로는 삼각산(북한산)이 모여서 마치 여러 별
이 북극성(北極星)을 떠받들고 있는 크고 작은 산세인데 물도 맑고 골이 깊어 속세를 잊고 수
행하기에는 좋은 곳이다. 또한 도봉산은 풍수지리적으로 왕관(王冠)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오
봉은 도봉산을 호위하는 장군기마상(將軍騎馬像)과 같은 모습이라고 한다.

석굴암의 창건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절에서는 신라 중기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
고 우기고 있다. 허나 의상은 화엄종(華嚴宗)과 귀족불교의 발전을 위해 주로 왕경(王京, 경
주)에서 활동하던 짬밥 높은 승려라 당시 고구려(高句麗)와 팽팽하게 접경을 이루던 이곳에
절을 세울 이유도 없었고, 이런 험준한 곳에 개고생을 하며 절을 세울 까닭도 없었다. 의상이
본격적으로 지방에 절을 세운 것은 문무왕 후반대이다. (대표적인 것이 영주 부석사)
또한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이 역시 신뢰도가 없으며 고
려 후기에 나옹화상(奈翁和尙)이 3년 동안 머물며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 또한 믿기가 어
렵다. 경내에 신라/고려 때 유물이나 주춧돌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그런 건 하나도 없고,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불과 석조나한상이 그나마 제일 오래된 것이니 말이다. 아마도 도봉산의 만
월암(滿月庵)처럼 조용한 석굴 수행처로 전해오던 것을 조선 초나 중기에 건물을 세워 비로소
절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여러 기록이 보이고 있는데 1443년에 무학대사의 제자인 설암 관익대사가
중수했다고 하며, 이때 석굴에 지장보살과 나한상을 조성했다고 한다. 1455년에는 단종(端宗)
의 왕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여기서 1,000일 기도를 올리고 거금 1만냥을 내려 왕후
의 원찰(願刹)로 삼았다고 하지만 그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미루어보면 이 역시 고개를 좌우
로 흔들 수 밖에 없다.
1652년에는 고암(高庵)이 기와를 보수하고 지장보살상과 나한상에 개금(改金) 불사를 했으며,
1872년에 광운(光雲)이 대웅전과 칠성각을 중수했다고 한다.

1920년 신계월(申桂月)이 주지로 들어와 1943년까지 머물며 강화도 옆 석모도 보문사(普門寺,
관련글 보러가기)에서 온 박동암 선사(朴東庵 禪師)와 수행을 했다. 박동암은 상해임시정
부(上海臨時政府)의 김구 선생을 도운 승려로 계월이 입적하자 석굴암의 주지가 되어 선풍(仙
風)의 기강을 위해 계속 수행했다.

▲  윤장대

▲  석굴암 요사(寮舍)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우이령 주변은 최대의 격전지가 되었는데 그 여파로 절은 완전 잿
더미가 되고 만다. 다행히 아미타불과 지장보살상, 나한상, 수구다라니 목판 등은 현재 나한
전에 있던 좁은 석굴 안에 들어가 화를 면했다.
그렇게 파괴된 석굴암을 멋지게 일으킨 이가 박동암의 열성 제자인 초안당(超安堂) 유성대선
사(1926~1998, 본명 송만석)이다. 그는 현역으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총상을 입었는데 1954년
5월 의병제대(依病除隊)를 하여 스승인 박동암을 찾았다.
스승은 그에게 석굴암 복원을 간곡히 부탁했고, 그 뜻을 받들고자 바로 그달 26일 어머니 조
병길(조삼매심) 보살과 석굴암을 찾았다. 그들 앞에 펼쳐진 석굴암은 완전 처참한 상태라 석
굴 안에 방치된 불상과 목판을 수습하고 임시 움막을 지어 주변에 널린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
해 화장을 하거나 군에 도움을 청하여 안장(安葬)이 되도록 힘썼다.

1954년 후반에는 지병으로 친정인 교현리에 와있던 윤봉순이 석굴암 부처의 현몽을 받고 석굴
암을 찾아와 불사를 도왔고, 절에서 기도를 올린 신도들의 입소문을 통해 절의 존재가 알려지
면서 불사에 동참하는 신도가 늘어났다. 초안당 역시 낮에는 서울로 나가 탁발을 하고 밤에는
밤을 낮으로 삼아 축대를 쌓고 건물을 짓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1964년 기존 석굴
을 넓혀서 나한전으로 삼아 나한도량의 기치를 높이 세웠다.
허나 1969년 이후 우이령길이 통제되면서 통행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석굴암의 족
쇄로 작용했다. 게다가 위치도 궁색해 차량 접근도 힘드니 초안당과 신도들은 쌀과 기와, 생
필품을 짊어지며 송추와 고양 효자동에서 10리가 넘는 산길을 일일이 날랐다.

그렇게 힘겨운 고난을 거쳐 1972년 범종각이 완성되었고, 그 와중에 1977년 어머니를 잃는 아
픔도 겪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1979년 요사채를 증축했다. 그리고 1981년 고대하던 전기가
들어오면서 환경은 크게 나아지게 된다. 그 여세로 삼성각과 봉향각을 증축했고 경내 대지도
152평으로 넓혔으며 절로 들어서는 길을 확장하고 나한전을 넓혔다.
1990년대에는 30사단 92연대에 쌍용사를 세워 군대 포교에 나섰고, 오갈데 없는 고아 11명을
수습해 길렀으며 봉선사(奉先寺) 승려를 위해 써달라며 장학기금을 내놓았다. 그리고 어려운
사찰 살림을 쪼개 복지사업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98년 초안당이 72세에 나이로 입적하자 대중들의 오열 속에 다비식이 거행되었는데 사리가
무려 59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가 간 이후 그가 친자식처럼 키워온 상좌 도일(度一)이 그 뒤
를 이어 주지가 되었으며, 대지 2만평을 매입하여 제2중창불사를 벌이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
추게 되었다. 이때 지하수를 개발하여 목마름을 해소했고 후불탱화와 불상, 다양한 탱화를 조
성했으며, 건물 기와를 무려 청동기와로 교체하고 설법전을 지었다.
그러다가 2009년 석굴암의 오랜 족쇄였던 우이령 통제가 풀리자 탐방객 수는 더욱 늘어 절의
명성은 조금씩 높아져 갔고, 조선 후기 나한상과 석굴로 이루어진 나한전을 내세워 나한도량
(羅漢道場)을 칭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10월에 단풍음악회를 여는 등, 속세에 절 이름 3자를
알리고자 애쓰고 있다.

▲  석굴암 범종각

▲  삼성각과 3층석탑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 나한전, 요사, 설법전 등 7~8동의 크고 작은 건물
이 있으며, 모두 1960년대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라 고색의 내음은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조
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불좌상(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61호, 아쉽게도 친견하지 못함)과 석조
지장보살좌상, 석조나한상 등 지방문화재 3점을 간직하고 있어 그들을 통해 절의 오랜 내력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다.
또한 이곳은 오봉산 자락에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데 조망이 일품이라 우이령길은 물론
상장봉 등 북한산 북쪽 산줄기가 훤히 바라보여 마음이 시원해지며, 번뇌가 멋모르고 쫓아오
다 졸도할 정도로 깊은 산골이라 풍경소리와 염불 소리, 바람의 소리가 전부인 그야말로 고적
한 절이다.

석굴암은 주말 점심 시간에 중생들에게 공양을 제공하며, 정월대보름에는 오곡밥과 대보름 나
물을, 동짓날에는 팥죽을 주는데 꽤 맛이 좋다고 한다. 그리고 2008년부터 매년 10월마다 단
풍음악제를 여는데 승려 음악가와 절 합창단, 가수, 국악인, 30사단 군악대, 지역 음악가 등
이 출연해 외딴 산사의 분위기를 한층 드높인다. 이때만큼은 고요하던 산사도 우이령길도 꽤
떠들썩해진다.

※ 오봉산 석굴암 찾아가기 (2017년 11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연신내역(3/6호선, 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에서 34,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우이령 오봉산석굴암
  입구에서 하차
* 1,4호선 서울역(4,9-1번 출구), 2호선 을지로입구역(3번 출구), 1호선 종각역(3-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4번 출구), 3호선 홍제역(2,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녹번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04번 시내버스 이용
* 우이령(오봉산석굴암) 입구에서 석굴암까지 도보 1시간. 석굴암 신도와 탐방객은 우이령길
  예약이 필요없으며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신분증 확인을 거쳐 들어가면 된다. 단 우이동(우
  이탐방지원센터)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예약을 해야된다.
* 소재지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1 (석굴암길 519 ☎ 031-826-3573)
* 석굴암 홈페이지는 아래 윤장대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불가의 사치품으로 일컬어지는 윤장대(輪藏臺)를 돌려보자

주차장에서 경내로 오르면 조그만 기와집에 담긴 윤장대가 마중한다. 윤장대는 불경(佛經) 등
의 서적을 담아두는 책장이자 불가의 사치품으로 지금이야 많은 절에서 우후죽순 만들어서 보
기가 쉬워져서 그렇지 예천 용문사(龍門寺)의 윤장대를 제외하면 제대로 오래된 것도 없다.
그만큼 희소성이 크다.
옛날에는 지금보다 문맹률이 높아(거의 90% 이상) 상당수의 백성들은 불경을 읽지 못했다. 그
러니 이해도 힘들었지. 하여 생각한 것이 윤장대를 활용한 것으로 책장 양쪽에 손잡이를 만들
고 그것을 돌리면 경서를 모두 이해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영업을 했다. 또한 윤장대를 돌리면
서 소망을 들이밀면 소망이 이루진다면서 윤장대에 대한 중생들의 관심을 높였다.


▲  경내 밑부분 (왼쪽의 건물은 설법전)

▲  석굴암 대웅전(大雄殿)

윤장대를 지나 경내에 이르면 가장 먼저 이곳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모습을 비춘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살짝 들려진 지붕 추녀의 맵시가 인상적이다.
이 건물은 1975년에 초안당이 지은 것으로 높이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워 제법 위엄
이 있어 보인다. 건물 중앙에는 1970년 우봉(又峰)이 쓴 대웅전 편액과 주련 4기가 걸려있으
며 내부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석가3존불을 이루고 있다.


▲  육체미가 넘치는 석굴암 석가모니3존불과 석가모니 후불탱
후불탱은 1998년 회주 초안, 주지 도인, 금어 박갑철이 조성했다.

         ◀  대웅전 신중탱(神衆幀)
부처의 세계를 수호하는 온갖 신들의 무리가
빼곡하게 담긴 탱화로 1991년 금어 김용희가
그렸다. 건물 내부의 기운을 정화하는 역할을
하여 법당에 많이 걸어둔다.


▲  옆에서 바라본 석굴암 대웅전

▲  석굴을 넓혀서 만든 석굴암 나한전(羅漢殿)

대웅전을 지나면 바위 석굴로 이루어진 나한전이 나온다. 이곳은 원래 3명 정도 들어갈 수 있
는 좁은 굴로 석굴암이란 이름도 바로 이 굴에서 비롯되었다.
호랑이가 곶감을 피해 다니던 시절부터 도봉산 동쪽 자락의 만월암이나 북한산 금선사(金仙寺
)의 목정굴(木精窟)처럼 참선 공간으로 쓰였다가 조선시대에 굴 주변에 건물을 짓고 이름도
편하게 석굴암을 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으로 석굴암이 초토화되자 이곳에 서린 석조불좌상과 나한상, 지장보살상 등이 이곳
에 피신을 했으며, 1954년 초안당이 그들을 수습하고 1964년 석굴을 넓혀 나한상의 보금자리
로 삼았다. 이후 도일이 내부를 넓히고 주변을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나한전 석굴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나한상을 중심으로 조그만 나한상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굴이라 그런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좀 따스하다. 또한 석굴 왼쪽에는 조그만
샘이 있는데 1990년대까지 석굴암의 갈증을 해소해주던 유일한 식수원으로 여기서는 용왕샘이
라 부른다.
지금이야 요사 옆에 지하수를 뚫어 물 걱정은 크게 덜었으나 이 샘은 수량이 적어 자주 바닥
을 드러내곤 했다. 특히 부정한 짓을 하거나 고기를 먹은 이들이 손을 대면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샘이 발끈해 그냥 말라붙었다고 한다.


▲  나한전 내부 - 나한 형님들이 나란히 단체 촬영에 임하고 있다.

▲  석조나한상(石造羅漢像)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62-1호

나한전 불단을 가득 메운 나한상들은 색을 입히지 않아 대부분 하얀 피부이다. 일부는 꺼무잡
잡한 피부를 보이기도 하지만 그리 크게 차이는 안난다. 이들 가운데 정중앙에 자리한 나한이
꽤나 독보적인데 그가 이곳의 주인장인 석조나한상이다. 그러다보니 특별히 연꽃무늬가 새겨
진 대좌와 듬직한 광배(光背)까지 두르고 있으며 검은 색의 옷까지 걸쳐 조그만 나한들의 두
목 역할을 한다.

이 나한상은 앉은 키 60cm, 무릎 폭 40cm의 조그만 모습으로 18세기에 한봉당 창엽(漢峰堂 瑲
曄)과 금곡당 영환(金谷堂 永煥) 등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석조불좌
상과 달리 표정이 밝고 인자하며 기품 있는 모습으로 중생을 맞이하고 있는데 광배와 대좌는
1970년대 이후에 붙인 것이고 옷 색깔은 근래에 입혔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멋이 좀 떨어지긴
했다.
참고로 이곳 나한들은 생쌀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공양도 생쌀을 올리고 있는데 1950년
대에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던 3명의 노파가 절 사람들이 게을러 생쌀을 공양한다며 초안당에
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이 기도를 마치고 나한을 보니 글쎄 생쌀이 나한 몸과 입,
무릎에 붙어있었고 생쌀 불기마다 움푹 패인 자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한의 그런 믿거나 말
거나 영험 사건으로 '석굴암 나한이 생쌀을 먹는다~'는 소문이 퍼져 기도객이 몰려들었고 그
덕에 공양쌀과 시주금이 늘어나 요사채와 삼성각을 무난히 올릴 수 있었다. (과연 나한의 소
행이었을까?)


 

♠  오봉산 석굴암 마무리 (삼성각)

▲  석굴암 석조(石槽)
오봉산이 제공한 옥계수가 쉼 없이 쏟아져나와 중생의 목을 축여준다.
내 목구멍 뿐 아니라 내 인생의 갈증도 싹 축여주면 좋으련만~~

▲  하얀 천막이 설치된 설법전 옥상
설법전은 경내를 받쳐든 석축 앞에 엮은 2층 건물로 그 옥상은 단풍음악제를
비롯한 절의 행사장으로 쓰이고 있다.

▲  석굴암 범종각(梵鍾閣)
초안당이 1980년대에 지은 것으로 1984년에 조성된 범종이 봉안되어있다. 저녁 6시가
되면 자고 있던 범종이 깨어나 우이령 일대에 잔잔하게 종소리를 들려준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과 3층석탑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삼성각이 천하를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1
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이름 그대로 3명의 성스러운 존재,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을 머금고 있어야 되지만 독성은 나한전에 따로 봉안하고 여기서는 약사불과 칠성
탱, 산신탱을 봉안하여 3성을 채웠다.
이들 가운데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약사탱이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지장보살상 뒤에 있
음에도 지장탱을 안달고 약사탱(1985년에 제작됨)을 단 점이 특이하다. 그들 양쪽 구석에는
1985년에 조성된 산신탱과 칠성탱이 좁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삼성각이란 이름보다는 지장
전을 칭하는 게 더 어울려 보인다. (지장보살이 중심에 있기 때문임)

삼성각 앞 벼랑에는 이곳의 유일한 탑인 3층석
탑이 하얀 맵시를 드러내며 서 있다. 왜 대웅
전 뜨락에 안두고 이런 험한 벼랑에 두었는지
모르겠으나 위치가 위치인지라 조망만큼은 아
주 일품이다.
석굴암에서 제일 조망이 좋은 곳이니 꼭 올라
가 그 멋을 체험하기 바란다.


 

◀  천하를 뜨락으로 삼은 석굴암 3층석탑

▲  산신과 호랑이, 동자가 담겨진 산신탱

▲  색감이 무지 고운 칠성탱


▲  삼성각 내부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약사탱의 공간이 꽤 넓어 그들이 삼성각에 중심임을 알 수 있다.
불상 좌우에는 현란한 모습의 옥탑 2기가 자리한다.

▲  석굴암 석조지장보살좌상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62호

약사탱 앞에 자리한 석조지장보살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근래에 도금을 입혀 금빛을
찬란히 드러내고 있는데 불상이 주먹 크기 정도로 매우 작고 마치 얼굴이 겉늙은 동자상에 지
장보살 복장을 입혀놓은 듯하여 귀엽기도 하다. 그는 석조불좌상과 마찬가지로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올린 길상좌를 하고 있는데 얼굴은 뭔가 시름에 잠겨있는 표정 같으며, 눈과 코,
입, 귀, 수염이 뚜렷하다.
그는 6.25시절에 석굴에 들어가 화를 피했으며 초안당이 절을 재건했을 때 삼성각을 세우면서
그 건물에 봉안했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우이령과 상장봉 능선의 장쾌한 위엄
아무리 둘러봐도 주변에 보이는 것은 숲과 칼처럼 솟은 산, 그리고 짙은 파랑색의
하늘 뿐이다. 그만큼 이곳은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고적한 곳이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주변
대웅전 앞에는 잠시 발을 멈추고 쉬어갈 수 있도록 쉼터가 닦여져 있다.


석굴암에 발을 들였을 때는 이곳에 문화유산이 있는 것을 몰랐다. 그냥 역사만 좀 오래되었을
뿐, 고색의 향기가 메마른 절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석
불들을 만나보니 의외에 장소에서 오랜 지기를 만난 듯 반가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석굴암
에 대해 미리 살피지 않고 간 나의 실수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요사와 설법전 내부. 석조불좌상 등을 제외하면 경내에 왠만한 것은 다 살펴봤으며 이곳 공양
밥이 맛있다고 하는데 제공 시간을 지나쳐서 먹지 못했다. 우이령이 나와 아주 먼 곳에 있었
다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인연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와 가까운 곳에 있으니 (직선거리로
7km도 안됨) 겨울 제국이 저물고 소쩍새가 우는 봄이 오면 그때 다시 인연을 만들어 우이령과
석굴암의 품에 퐁당 안기고 싶다.

이 일대가 개발의 칼질도 숨을 죽이는 영역이라 그 칼질로부터 다소 자유롭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식 개발의 칼질이 워낙 개념없기로 유명하니 자칫 약을 빨고 우이령 일대를 난도질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곳은 천지가 개벽해도 대자연의 깊은 공간이자 북한산(삼각산)과 도봉
산에서 가장 한적한 곳으로 우리 곁에 남기를 소망할 뿐이다.

이렇게 석굴암을 1시간 정도 둘러보고 다시 유격광장으로 내려와 우이령을 타고 서울 우이동
으로 넘어갔다. 우이령 나머지 부분은 본글에서는 생략하며 아래 별도로 링크된 글을 참조하
기 바란다. (☞ 우이령길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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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이 깃들여진 첩첩한 산골의 절집, 북한산 삼천사 ~~~ (삼천사계곡)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삼각산) 삼천사 '

▲  삼천사 대웅보전


 

♠  삼천사 입문

▲  알록달록 연등이 길을 안내하는 삼천사 길

따사롭던 5월의 첫 주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삼천사를 찾았다. 연신내역에서 그들을 만
나 서울시내버스 7211번(진관차고지↔신설동)을 타고 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잘 닦여진 길을 따라 그곳으로 다가섰다.


▲  그늘에 자리한 족구장 - 이곳은 절터였다.

삼천사 숲길을 들어서면 식당을 옆에 낀 너른 공터가 나온다. 지금은 식당에 딸린 공간이지만
예전에는 사슴농장이 있었지~. 사슴의 숙성된 뿔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시절이 정말 엊그
제 같거늘, 그들은 죄다 어디로 갔는지 그들의 안부가 새삼 궁금해진다.

겉으로 보면 산이나 계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과 농장의 쉼터이지만 놀랍게도 이곳에 옛
절터의 흔적(삼천리골사지1)이 아주 희미하게 묻혀있다. (안내문은 없음) 그 절터는 공터를 중
심으로 주변 식당들까지 아우르고 있는데, 아직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절의 정체
를 알 수 없다. 다만 진관사(津寬寺)가 근처에 있어 그의 전신(前身)이라는 신혈사(神穴寺)터
로 보기도 하며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편의상 '삼천리골사지(寺址) 1'로 분류했다.
<삼천리골사지2는 삼천사계곡 상류에 있으며 삼천사터의 일부로 여겨짐>
여기서는 다량의 토기와 기와, 청자파편 등이 나왔는데, 행락지로 먹고 사는 사유지다보니 훼
손이 심각해 하루 속히 발굴조사가 절실해 보인다. 혹시 아는가 이곳이 정말 고려 8대 제왕인
현종(顯宗)과 인연이 아주 깊다는 신혈사의 마지막 흔적이었을지도?


▲  녹음(綠陰)이 짙은 삼천사 가는 길
저 짙푸른 녹음 속에 나를 잠시 숨겨본다.


삼천리골사지1을 지나면 식당들이 줄지어 나타나는데, 그 와중에 '삼천탐방지원센터'로 변신한
옛 매표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내야했으나 2007년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면서 더 이상 매표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삼천탐방지원센터에서 3분 정도 가면 고개가 나타난다. 고개 앞에는 삼천사를 알리는 돌기둥이
멀뚱히 서 있는데 여기서 고갯길과 계곡길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던 삼천사는 나오게 되어 있
으나 시멘트길인 고갯길은 다소 각박하고 돌아가는 편이며, 차량들의 왕래가 잦다. 반면 계곡
길은 빠르게 갈 수 있는 지름길로 계곡 주변에 주막들이 여럿 모여 앉아 절을 목전에 둔 속세
의 마지막 유혹을 펼친다.


▲  미타교 직전 고갯길

▲  계곡의 아름다운 경관을 크게 들쑤신 미타교(彌陀橋)

계곡길을 5분 정도 오르면 고갯길과 다시 만나면서 약간 경사가 진 고개가 나타난다. 그 고개
를 넘으면 북한산 일품 계곡의 하나로 널리 추앙받는 삼천사계곡(삼천리골) 중류가 나타난다.

이곳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초소에 출입신고를 하고 신분증을 맡겨야만 들어갈 수 있던 금지
된 구역이었다. 물론 삼천사 승려와 신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1992년 통행제한이 풀
리면서 삼천사계곡을 통해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비봉능선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다. 허나 계
곡 주변에는 군사시설 일부가 옥의 티처럼 남아있으며, 삼천사와 옛 군부대 수영장 사이 계곡
은 여전히 금지된 계곡으로 묶여 속인들의 발길을 거부하고 있다. (옛 수영장 이후와 삼천사
위쪽 계곡은 출입이 가능함)

삼천사로 가려면 계곡을 1번 건너야 되는데 예전에는 키 작은 다리가 놓여있었으나 2011년 이
후 높이와 폭을 높여 미타교란 하얀 피부의 돌다리를 새롭게 깔았다. 다리를 업그레이드한 것
은 좋으나 문제는 주변 환경을 고려치 않고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크게 들쑤시며 만들었다는
것이다.

계곡 다리(미타교)에서 삼천사 중간의 짧은 계곡 풍경(밑에 있는 2011년 사진 참조)은 개인적
으로 참 좋아했던 풍경이었는데 다리를 놓으면서 잘생긴 바위와 반석을 깨뜨리고 자잘한 돌이
계곡 주변을 적지 않게 차지하면서 심히 안좋게 변해버린 것이다.


▲  예전의 경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미타교 주변)
계곡에 자잘한 돌들만 가득하여 마치 돌의 무덤처럼 황량하기 그지 없다.

▲  이제는 전설이 되버린 미타교 주변 삼천사계곡의 옛 모습 (2011년)
선녀 누님이 살짝 내려와 목욕을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고운 절경이었다.
허나 지금은 선녀는 커녕 맷돼지도 외면할 것 같다.


너무나 이질적으로 변해버린 삼천사계곡에 안타까움의 한숨을 여러 번 날려 보낸다. 자꾸 예전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려 부질없이 변해버린 현실을 인정하기가 싫다.

미타교를 건너면 각박한 경사의 오르막길이 중생을 주눅들게 만든다. 그 길을 3분 정도 오르면
옛 발해(渤海)의 국도(國都)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석등(石燈)을 닮은 우람한 석등 1쌍
이 힘들게 올라온 중생들을 맞이하니 여기서부터 산사의 향기와 오래된 마애불의 인자함이 깃
든 산사, 삼천사 경내가 흔쾌히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삼천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경내 직전에 자리한 석등 1쌍

북한산(삼각산) 서쪽 삼천사계곡에 둥지를 튼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磨崖佛)
을 품은 절이자 도심에서도 멀리 떨어진 첩첩한 산골의 산사이다. 1992년까지만 해도 사찰 출
입의 제한이 많았으나 비봉능선과 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방되면서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삼천사는 삼국시대가 한참 정리되고 있던 661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하
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정말로 곤란하다. 그가 세웠다는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고 그
당시 신라를 둘러싼 천하의 정세도 한가롭게 절이나 세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교에
지나치게 목숨을 걸었던 신라(新羅)도 그 시절에는 왕경(王京, 경주)을 중심으로 절이 세워지
고 있었으며 원효대사 역시 바쁘게 움직였던 시기이므로 절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대사, 무열왕(武烈王)과
의 친분으로 그의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에게 장가들어 신라 왕실의 일원이 되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고자 귀족 중심으로 돌아가던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면서 당시 신라 불교
의 1인자였던 자장율사(慈藏律師)를 강원도 산골짜기로 밀어내고 의상(義湘)과 더불어 신라 불
교의 지존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삼천사가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661년, 당나라 고종(高宗)은
'이제 백제도 망했으니 고구려를
쳐도 별무리는 없을 것이다!'
싶은 엉뚱한 생각에 단독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 전
쟁에서는 당나라의 맹장으로 손꼽히는 방효태(龐孝泰)를 주장(主將)으로 하여 많은 군사를 보
냈는데 방효태는 천하장사로 손가락질 받던 그의 아들 12명(혹은 13명)을 모조리 데리고 나가
고구려 정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당군은 요하(遼河)를 건너 요동(遼東)을 용케도 통과, 압록강 부근에서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그 기세를 타고 평양성(平壤城) 부근인 사수<蛇水, 대동강의 지류인 합장강으로 여겨짐>까지
진격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10만 대군은 몰살을 당했고 고구려를 꼭
무너뜨리겠다고 헛소리를 했던 방효태는 그의 아들과 나란히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한편 서해바다를 건너 평양 서쪽으로 기들어온 소정방(蘇定方)은 방효태의 대군이 절단났다는
소식에 그야말로 큰 충격에 빠졌다. 날씨는 춥지. 식량은 부족하지. 언제 고구려군이 들이닥쳐
자신들의 목을 댕강 칠지 모를 위험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하여 소정방은 쫄깃해진 간을 부여잡고 신라에 급히 사자를 보내 식량과 원군을 요구했다. 당
나라에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하며 그들의 비유를 맞추느라 급급했던 신라는 소정방의 요구를
흔쾌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요청을 무시하면 나중에 고구려를 치거나 공격을 받았을
때 도움을 받기가 어렵게 될 것이고 고구려에게 계속 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군량을 수송케 했는데 이때 분황사(芬皇寺)에 있던 원효가
그를 따라 종군(從軍)하게 된다.

김유신의 수송부대가 추운 겨울을 뚫고 고구려의 영역으로 들어오자 고구려군은 그들을 때려잡
기 위해 길목에 매복을 했는데, 소정방이 이를 알아내고 급히 복잡하게 쓰인 암호문을 보냈다.
그 암호문을 바로 원효가 해독한 것이다. 그래서 김유신은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무사히 군량을
수송할 수 있었다.
이것이 661년부터 662년 초까지 원효대사의 행적이다.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던 그가 언제 고구
려와 신라의 접경 지역이자 전운이 감도는 북한산(삼각산)에 절을 세웠겠는가? 이것으로 이미
원효 창건설은 끝이 났다. 그렇다면 절은 언제 지어졌을까?
경내에 있는 마애불과 옛 절터의 유물을 통해 이르면 신라 말, 늦어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18세기에 간행된 북한지(北漢
誌)에는 최
대 3,000명이 머물 정도로 번창했다고 쓰여 있다.

▲  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

▲  삼천사터 금당(金堂) 구역

고려 초에는 개경 현화사(玄化寺)의 초대 주지를 지낸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이 주지로
있었으며, 고려 왕실의 각별한 지원을 받아 큰 절로 성장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
(西山大師)의 지휘 아래 승병(僧兵)의 주요 집결지가 되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파괴되고 말았
다. 그때까지만 해도 절은 지금보다 1.5km 안쪽 산속에 있었으며 절 이름은 지금과 음은 같지
만 한자가 1글자 틀린 삼천사(三川寺)였다.
그 이후 진영화상이 삼천사의 암자가 있던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건하여 3천 명을 뜻하는 삼천
사(三千寺)로 이름을 갈았으며 6.25때 파괴된 것을 1960년에 중건했다.

1970년대 성운(聖雲)화상이 주지로 들어와 절에 있는 마애불이 오래된 불상임을 밝혀내었고 20
년 동안 계속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1994년에 사회복지법인 인덕원
을 설립해 복지사업에도 손을 뻗쳤다.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산령각, 천태각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
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또한 옛 삼천사터(고양시 북한동)에는 대지국사의 탑비(塔碑)
와 절터 주춧돌이 어지럽게 남아있는데 오랫동안 주목도 받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가 서울역
사박물관에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여 500여 점의 유물을 건져냈다. (2009년
이후에도 여러 번 발굴조사를 했음)
이처럼 북한산(삼각산) 제일의 절터 유적임에도 이상하게도 북한산 관련 지도에는 제대로 표시
조차 되어 있지 않으며, 그에 합당한 지정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계속 방치되고 있다.
(사적이나 지방기념물 등급이 적당해 보임) 또한 이곳에 있는 대지국사비는 태고사(太古寺) 원
증국사탑비와 더불어 북한산에 있는 고려 때 비석이자 북한산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나 그 역
시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절터 관람은 가능함)

※ 북한산 삼천사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
  ) 입구 하차 → 삼천사까지 도보 30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3번 출구에서 7723번 시내버스 또는 1번과 2번 출구 중간에서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에서 하차
*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에서 삼천사 셔틀버스가 1일 4회 운행한다. (구파발역 출발 시간은
  8:20, 10시, 11시, 13:30) 법회와 절 행사가 있는 날에는 오전 8시부터 11시 3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석가탄신일에는 저녁까지 수시로 운행
* 삼천사까지 차량 접근이 가능하며 경내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음

* 삼천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 25-2 (연서로54길 127 ☎ 02-353-3004)
* 삼천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삼천사 종형사리탑과 마애여래입상


 

♠  삼천사 5층석탑, 대웅보전 주변

▲  나한사리를 머금은 5층석탑

삼천사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4마리의 석사자가 탑신(塔身)을 받들고 있는 5층석탑을 만
나게 된다. 1988년 삼천사 주지인 성운화상이 미얀마의 마하시사사나 사원을 방문했을 때, 그
곳 대승정(大僧正)인 아판디타에게 부처 사리 3과와 나한사리를 선물로 받았는데, 부처사리는
마애불 앞 종형사리탑에 봉안하고 나한사리는 일주문 앞에 이 탑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이 탑은 바닥돌을 먼저 깔고 그 위에 여러 단으로 된 기단부(基壇部)를 둔 다음, 4마리의 사자
와 5층 탑신, 머리장식을 차례대로 갖춘 형태로 구례 화엄사(華嚴寺)와 제천 빈신사지(頻迅寺
址)의 4사자 석탑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  삼천사의 새로운 명물, 세존진신사리 불탑(佛塔)

5층석탑을 지나면 바로 9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법당도 아닌 경내 외곽에 서로 다른 모습
의 탑을 2개씩이나 지어 올린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삼천사는 법당 앞에 탑을 둘 공간이
여의치가 않아 공간이 넉넉한 이곳에 탑을 심은 것이다.

9층석탑 자리는 원래 주차장의 일부로 미얀마 대승정에게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봉안하
고 절의 위엄도 제대로 드러낼 겸, 거대한 탑을 또 짓기로 결정하고 2012년 초에 자리를 닦아
그해 5월 완성을 보았다. 이 탑 역시 9층석탑처럼 높게 기단부를 쌓고 그 위에 탑을 올렸는데
탑은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탑을 비슷하게 재현했으며 탑의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
는 4두의 금빛 사자상은 인도의 사르나트 아쇼카 석주(石柱)의 사자상을 모방한 것이다.
금빛 사자상은 8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이 담긴 법륜(法輪)에 안치되었고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군주로 평화와 생명존중을 천명한 아쇼카왕(인도 마가다왕조의 3대 왕)의 '담마 왕령(王令)'
정신을 새기고자 아쇼카왕의 상징인 4두 사자상을 꼭대기에 얹혔다. 그리고 9류 중생의 안녕과
화엄 10지에 이른 후 정토세계의 9품 연대에 오르기를 발원하는 보리심을 9층탑으로 묘사했다.

탑이 완성되자 진신사리 7과를 비롯해 조그만 금동석가불과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 대장경(
大藏經) 1질, 600명의 신도들이 손수 제작한 금강경(金剛經) 600부, 신도들이 기증한 갖은 고
가품을 탑에 넣었다.
탑에게 주어진 첫 이름은 '세존진신 다보 9층대탑(世尊眞身 多寶 九層大塔)'이었으나 '세존진
신사리 불탑'으로 간단히 줄였다. 탑이 얼마나 큰지 사람들이 거의 개미로 보이며, 장대한 탑
의 모습이 마치 삼천사의 탄탄한 재정과 세를 부질없이 과시하는 것 같다.


▲  군인들의 안녕을 위해 노력하는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

9층석탑을 지나면 오른쪽 높은 곳에 화강암 통돌로 조성된 지장보살입상이 자리해 있다. 이 보
살상은 9층석탑과 5층석탑은 물론 절 서쪽에 있는 34사단 유격훈련장 방향(산을 올려다보면 유
격장이 보임)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34사단 장병들이 이곳에서 로프를 타고 훈련을 하는데 해마다 사고가 일어났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삼천사 주지승이 장병들의 덧없는 희생을 막고 더 이상의 사고와 살생이 일어나지 않도록
발원하는 뜻에서 유격훈련장이 보이는 곳에 지장보살입상을 세웠는데, 신기하게도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지장보살 형님의 가호가 진하게 피어나 그들
을 지켜준 모양이다.

어진 어미의 모습처럼 자리한 보살상은 8각의 기단을 밑에 깔고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
에 여의주를 오른손에 들고 서 있으며 8각 대좌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와 도명존자(道明尊者)
, 시왕상 등이 새겨져 있다.


▲  연꽃의 와신상담 현장, 연못 (일주문 앞)

▲  삼천사 일주문(一柱門)

9층석탑을 지나면 문짝을 단 큰 문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일주문이라 부른다. 보통 일주문은 절
입구나 길목에 세우기 마련으로 미타교와 5층석탑 사이에 일주문을 둘 자리가 넉넉하나 삼천사
는 그 자리를 모두 내버리고 특이하게 대웅보전 입구에 갖다 놓았다.
세로로 걸린 현판에는 '三角山 三千寺'라 쓰여 있는데 쓰여진 글씨가 꽤 걸출하여 하늘로 날라
갈 것만 같다.


▲  새끼두꺼비 2마리를 등에 짊어진 어미 두꺼비상 (일주문 난간)
절의 지형 때문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갖다둔 것은 아닐까?

▲  삼천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일주문을 들어서면 종무소(宗務所)와 법당인 대웅보전(대웅전)이 차례로 모습을 비춘다. 예전
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절의 법당)을 칭했는데 건물이 얼마나 허벌나
게 큰지 가히 절 이름값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붕 용마루 양쪽에는 치미가 날카롭게 솟아
북한산 봉우리와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고, 건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을 비롯해 지장보살상,
신중탱, 16나한, 500나한상 등이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  대웅보전 앞에도 2마리의 새끼를
등에 진 두꺼비상이 있다.

▲  등장 인물로 빼곡한 신중탱(神衆幀)
모두 104명이 담겨져 있다.


▲  호화로움이 묻어난 석가3존불과 후불(後佛)목각탱

석가불이 조그만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석가3존불을 이
룬다. 그들 뒤에는 호화롭고 복잡해 보이는 후불목각탱화(木刻幀畵)가 병풍처럼 자리해 있는데
이들은 삼세불화(三世佛畵)를 표현한 것으로 가운데에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배치하고 왼
쪽에 약사회도(藥師會圖), 오른쪽에 극락회도(極樂會圖)를 배치했다.

▲ 석가3존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눠진 16나한(羅漢)과 500나한들
우리나라 인구처럼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 의상을 취하고 있어 다들 개성들이 넘친다.


 

♠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명품급 마애불이자 삼천사계곡의 영원한 은둔자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보물 657호

▲  마애불과 그에게 보금자리를 내준 눈썹바위

대웅보전 옆구리를 지나면 왼쪽으로 범상치 않은 모습의 눈썹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 바위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마애불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으니 그가 바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마애불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이다.

불상 앞에는 그에게 예불을 올리는 석조 공간이 넓게 닦여져 있는데 그 공간 밑에는 삼천사계
곡이 일조권을 강제로 빼앗긴 채 숨죽여 흘러간다. 한참 학창 시절이던 1992년 가을, 두근거리
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지금처럼 계곡을 가리고 앉은 돌로 다진 공
간이 없었고 계곡을 건너면 마애불 앞에 조그만 예불 공간이 전부였다.

서울에 있는 4개의 고려시대 마애불<① 승가사 마애여래좌상 ☞ 관련글 보러가기, ② 안암동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관련글 보러가기, ③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④ 삼천사 마애여래입상>
의 일원으로 고려 초기(멀리 신라 말로 보기도 함)에 조성된 선각(線刻) 마애불이다. 불상 대
부분은 선을 그어 처리했지만 일부는 약간 튀어나온 얕음새김으로 전체 높이는 3m, 불상의 높
이는 2.6m이다.

이 마애불은 윤곽을 따라 금분이 칠해져 있었으나 2000년 이후에 사라졌고, 그의 왼쪽(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 부분에는 약간 붉은 색채를 띠고 있는데, 이는 그에게 채색을 했던 흔
적들이다. 마애불에 색을 입힌 경우는 이곳과 경북 칠곡군 왜관(倭館) 부근에 있는 노석리 마
애불상군 등이 있다.


▲  마애불 양쪽에는 네모난 구멍이 2개 있는데 저들은 마애불을 보호했던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으로 그가 감싸주던 부분은 어둠 속의 촛불처럼
유난히도 밝고 하얗다. 마치 광배(光背)에서 나온 빛이 그의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처럼 말이다.


불상의 머리 뒷쪽에 2겹으로 된 둥근 두광(頭光)이 그를 밝히고 있고 소발(素髮)한 머리 위에
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작고 갸름한 편으로 눈은 지그시 감아 명
상에 잠긴 모습이며 코의 끝부분은 두툼하다. 입은 살짝 오무려 약간의 미소를 선보이고 있고
눈썹 사이에는 둥그런 백호(白毫)가 박혀있다.
그의 키는 얼굴에 비해 꽤 긴 편으로 조금은 두꺼워 보이는 법의(法衣)를 걸치며 두 어깨를 가
렸고 발 밑에는 연화대좌(蓮花臺座)가 있으며, 몸 뒤에는 반짝반짝 윤기를 흐르는 광배(光背)
가 새겨져 있다.
신체적인 균형이 그런데로 비슷하며 몸매는 단정하고 단아한 인상을 풍긴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배 앞에서 받쳐든 모습인데, 이는 부처의 성도(成道)를 상징한다고 한다.

불상 어깨 좌우와 윗부분에는 네모난 구멍과 좌우로 길게 파여진 홈이 있는데 이는 자연현상이
아닌 마애불을 보호하던 목조 가구(架構)를 씌우던 흔적이다. 그 가구는 오래 전에 자연재해나
화재로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가 사라진 이후에는 불상 위쪽에 있는 눈썹바위의 보호를 받으
면서 눈과 비를 피했다. 게다가 첩첩한 계곡 바위에 자리한 탓에 태풍과 거센 바람의 공격을
피하기에 좋아 거의 천 년의 세월을 살았음에도 바위에 진하게 현신한 듯 건강상태는 좋다.

지금은 이렇게 답사객과 순례객의 발길이 빈번하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리 주목을 받
지 못했다. 게다가 민간인 통제구역에 묶여 출입도 부자유스러우니 아는 사람과 절 신도만 조
금 찾는 정도였다. 허나 삼천사와 삼천사계곡에 꽁꽁 씌워진 통제의 굴레가 벗겨지면서 삼천사
의 존재와 함께 마애불의 이름도 약간이나마 알려지면서 찾는 이가 늘었다.


▲  바위에 현신한 듯 두드러진 모습의 마애불 윗부분
불상을 수식하고 있는 두광과 신광은 마치 몸에 빛이 발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도록 그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꾸며준다.


▲  마애불의 아랫도리
연꽃으로 치장된 연화대좌 위에 불상이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에 걸쳐진
법의 밑에 그의 두 발이 나와 있는데 발가락이 다소 두터워 보인다.


내가 그의 존재를 알아챈 것은 1992년 가을, 진관사 부근 야산에 숨어있는 줄 알고 부근 야산
을 열심히 뒤적거리다가 미지의 세계나 다름이 없던 삼천사까지 들어왔다. 당시 적멸보궁이던
대웅보전 뒷쪽에서 나와 숨바꼭질을 한 마애불을 발견하고
'서울에도 이렇게 휼륭한 마애불이 있었다니!!' 감탄을 연발하며 북악산(백악산)의 백석동천<
白石洞天, 백사실계곡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그에게 은근슬쩍 빠져들고 말았지. 하여 매년
적어도 1~2회 정도 그를 찾고 있다. 나는 이곳에 들어올 때마다 점점 늙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비록 인간이 만든 조각물이긴 하지만 여
전히 정정함을 잃지 않으며 오늘도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맞느라 여념이 없다.

지금은 삼천사 경내지만 예전에는 옛 삼천사로 가던 길목으로 조그만 암자와 계곡, 바위만 있
었다. 그러다가 마애불 주변에 삼천사를 세우면서 지금처럼 경내 한복판이 되었고, 지금의 삼
천사를 일군 성운의 노력으로 오래된 마애불임을 입증받아 1979년 국가 보물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이 마애불은 영험(靈驗)이 있기로 소문이 자자해 많은 중생들이 먼 거리를 걷는 수고로움을 마
다하지 않으며 이곳을 찾는다.


▲  마애불 좌측 면에 새겨진 '일붕선사좌선대(一鵬禪師坐禪坮)' 바위글씨
20세기 큰 승려로 추앙받는 일붕(一鵬) 서경보 선사가 이곳에서
좌선한 것을 기리고자 새긴 것이다.

▲  꼬랑지가 인상적인 귀여운 다람쥐상 (마애불 예불 장소 난간)
(그의 존재의 이유는 모르겠음)

▲  부처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종형사리탑(鐘形舍利塔)

마애불 앞에는 네모난 기단 위에 심어진 석종형(石鐘形) 사리탑이 있다. 이 탑은 1988년에 성
운화상이 미얀마 마하시사사나 사원의 아판디타 대승정에게서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봉
안하고 있는데 그 연유로 서울에서 제일 처음 적멸보궁을 마련하여 석가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사찰임을 천하에 어필했다.
마애불과 함께 삼천사의 성역으로 무척 애지중지되다가 2012년 진신사리를 담은 거대한 9층석
탑이 지어지면서 중요성이 조금은 떨어졌다.

◀  종형사리탑 우측의 세존진신사리비
미얀마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과정과 이유를 소상히 담아 넣었다.


 2층 규모의 산령각(山靈閣)

마애불이 의지하고 있는 눈썹바위 옆구리에는 2층짜리 산령각이 있다. 산령각이란 절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산신각(山神閣)의 다른 이름으로 삼천사는 그 흔한 이름 대신 천태각이나 산령각
처럼 생소하고 어려운 이름을 선택해 중생들을 아리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산신
각이긴 하지만 독성(獨聖)과 칠성(七星)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어 삼성각(三聖閣)의 역할을 한
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령각은 2층으로(1층은 창고 등으로 쓰임) 내부 중앙에는 금
칠을 한 거대한 산신탱이 걸려있다. 예전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童子) 등은 나무로 돋음새
김으로 새기고 나머지는 그림으로 상큼하게 처리했으나 돈을 좀 벌었는지 죄다 도금을 하여 금
색 옷으로 갈아입혔다.
화려하게 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산신의 수염과 동자의 머리를 빼고는 모조리 색이 같아서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벌이듯 분간이 쉽지 않아 눈만 아프다.

이렇게 산신탱은 삼천사에서 마애여래입상, 세존진신사리탑 다음으로 자랑하는 보물로 비록 고
색의 기운은 없지만 다른 절과 달리 산신을 크게 내세운 산신도량으로 절을 키우면서 '북한산(
삼각산) 산신이 보좌를 튼 절'임을 진하게 자처하고 있다.


▲  요란한 금칠의 산신탱과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올려진 공양미들

 독성(나반존자)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

 칠성들의 회합 현장, 칠성탱


▲  산령각과 마주한 눈썹바위 - 오랜 세월의 주름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  산령각에서 굽어본 마애불 예불 공간과 종형사리탑 주변,
그리고 대웅보전의 두툼한 뒷모습

▲  산령각에서 굽어본 삼천사 위쪽 다리
저 다리는 삼천사계곡 등산로로 북한산성과 비봉, 옛 삼천사터로 이어진다.
다리 주변 계곡에는 중생들이 쌓아올린 기하학적인 돌탑들로 가득해
조그만 돌탑의 세상을 이룬다.

 삼천사의 독특한 불전 ~ 천태각(天台閣)

산령각 옆에는 천태각이라 불리는 벽돌 건물이 있다. 천태각은 16나한의 하나로 천태산(天台山
)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보금자리로 독성각(獨聖閣)과 비슷하다. 삼천사
는 독성각이란 보편적인 이름을 취하지 않고 그가 일어난 천태산의 이름을 따서 천태각이라 했
는데 산령각에 독성탱이 있음에도 별도로 그만의 건물까지 두어 대우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9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 안에는 108개의 인등(引燈)이 내뿜는 열기와 기름냄
새로 가득해 더울 때 오면 정말 한증막이 따로 없다. 인등은 기름을 담고 심지를 넣어 불을 켠
것으로 하루 종일 불을 밝힌다. 그래서 건물 내부가 더운 것이다.
건물 지붕에는 매일 치솟는 열을 외부로 배출하고 공기를 통하게 하여 내부 온도를 유지시키는
통풍구가 있으며, 다른 건물과 달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2개로 바깥 문인 여닫이문은 언제나
열려있으나 안쪽 문인 미닫이문은 인등을 지키기 위해 항시 닫혀져 있다. 문을 들락날락 거릴
때는 반드시 문을 닫아야 인등의 건강에 지장이 없다.


 천태각의 주인, 독성상과 자연석으로 간단하게 손질한 16나한들

천태각 독성은 대머리의 둥근널쩍한 얼굴, 길다란 귀, 약간 두꺼워 보이는 옷(얼마나 더울까?)
, 그리고 배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를 취한 여유로운 모습이다. 명
상에 잠긴 그의 익살스런 표정은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하며 그 좌우에는 조그만 16나
한상이 포진해 있는데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가져온 자연석으로 정성스럽게 조성한 것이다.


▲  삼천사 위쪽 계곡을 가득 메운 돌탑의 물결

▲  삼천사 돌담길 (삼천사계곡 산길)

삼천사에서 북한산(삼각산)으로 오르려면 종형사리탑 좌측에 있는 대문으로 나가거나 일주문에
서 오른쪽 길로 가야 된다. 마치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기와집이나 궁궐 담장길을 거닐 듯, 운
치가 깃들여진 돌담길은 삼천사의 또다른 명물이라 할만하다.


 아비규환의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하다~~

 연등의 전송을 받으며 ~~
이렇게 하여 봄의 한복판에 찾아간 북한산 삼천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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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굳게 잠겨있던 아름다운 고갯길, 북한산 우이령 늦가을 나들이 (우이령길)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아름다운 고갯길 ~~~
우이령 늦가을 나들이 '

▲ 우이령에서 바라본 오봉

▲ 석굴암입구 유격광장

▲ 우이령길 우이동 구간


 

가을 누님이 눈이 시리도록 곱게 천하를 물들이던 10월의 끝 무렵에 친한 여인네들과 북
한산(삼각산)의 숨겨진 뒷통수, 우이령(우이령길)을 찾았다.

우이령은 개방 이후 애타게 인연을 짓고 싶었지만 딱히 인연이 없어 애태우다가 10월 중순
에 아는 여인네의 제안으로 콩볶듯 계획을 잡게 되었다. 이곳은 미리 탐방예약을 해야되는
데, 평일은 그나마 널널하나 주말에는 자리 구하기가 어렵다. 탐방 인원을 매일 1,000명으
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가 송추 출발로 4명 자리를 확보하여 그냥 흔쾌히 가기만
하면 된다. 하여 친분이 있는 2명을 더 소환하여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비경의 우
이령 탐험을 떠났다.

우이령은 야속하게도 입장시간(오후 2시까지)과 퇴장시간(오후 4시까지)이 정해져 있어 우
이령길 완주에 석굴암 답사까지 널널하게 겯드리려면 가급적 오전에 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아침 9시부터 입장)
잠시 일상을 접고 떠나는 나들이인데 그것마저 콩볶듯이 가면 좀 그렇겠지. 하여 오전 9시
에 연신내역에서 일행들을 만나 김밥과 간단한 먹거리를 사들고 북한산(삼각산) 등산객 인
파 속으로 들어가 송추로 가는 시내버스를 기다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한참 단풍철이다 보니 북한산으로 가는 34, 704번 시내버스
가 타지도 못할 정도로 가축 수송 상태로 오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서 버스를 기다리는 등
산객도 족히 100명은 넘어 육중한 바퀴가 뭉개질 정도로 가득찬 버스에 서로 타고자 경쟁
이 치열하다. 허나 구제받는 사람은 불과 서너 명, 나머지는 강제로 다음 버스를 기다리지
만 오는 버스 모두 무심하게도 가축 수송을 면치 못하고 있다. 마음은 이미 우이령을 헤매
고 있지만 몸은 아직도 서울 연신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연신내에서 40분을 소비하다가 이러면 정말 못갈듯 싶어서 조금이라도 더 전진하고
자 삼천사입구로 가는 701번 시내버스(진관차고지↔종로2가)를 탔다. 그것을 타고 입곡3거
리에서 34, 704번으로 갈아탈 생각이었지. 그렇게 701번에 의지해 입곡3거리(삼천리골입구)
에서 내렸는데, 여기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한산으로 가는 행락객들의 차량들로 도로
가 거의 혼돈의 상태라 걷는 거나 차를 타고 가는 거나 속도가 비슷할 정도이다.

입곡3거리에서 일말의 희망을 품으며 버스를 기다렸으나, 역시나 자리가 빠지지 않아 여전
히 승차 불가, 그래서 백화사입구와 흥국사입구(노고산)까지 걸어가 기회를 엿보았나 역시
승차 불가, 하여 등산객이 많이 빠지는 북한산성입구까지 걸어갔다. 아직까지도 서울을 벗
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서울 땅을 나가기가 어려웠던 말인가?

북한산성입구 정류장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버스를 기다리니 버벅거리는 차량들 행
렬을 쿨하게 뚫고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서울역)이 구세주처럼 나타난다. 이곳이 북
한산 서부의 대표 기점지라 산꾼들이 많이 빠지기 때문에 그제서야 들어갈 공간이 생긴다.
이제 살았구나 싶어 기쁜 마음에 승차했으나 자리는 없다. 여전히 가득찬 상태. 다행히 도
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의 행렬도 여기서 끝을 맺는다. 죄다 여기서 북한산성으로 우회전하
기 때문이다.
그렇게 힘겹게 송추로 가는 버스를 잡아 타고 고양시(高陽市)로 넘어가 효자비와 안골, 사
기동에서 많은 산꾼을 쏟아내니 그제서야 자리가 생긴다.

솔고개를 넘어 양주시(楊州市) 땅으로 진입, 우이령/오봉산석굴암입구 정류장에 발을 내린
다. 연신내에서 이곳까지는 겨우 12km 정도인데 그 짧은 거리를 오는데 무려 2시간이나 걸
린 것이다. 그렇게 모진 과정을 겪고 이곳에 이르니 마치 목적지에 다 온 듯, 안도의 한숨
이 나온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정말 기쁨이 가득했지. 허나 내려보니 현실은 시궁창.. 뜻
하지 않은 나들이 강제 전쟁으로 혼과 기운은 2/3 이상 빠졌고 시간도 벌써 11시가 넘었다.
우이령 탐방은 이제서야 시작이거늘, 겨우 그 입구에 온 것에 불과하다.

벌써부터 지친 몸과 마음, 그리고 심심한 뱃속을 달래고자 정류장 부근 편의점에서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었다. 원래는 산책 중간에 먹으려고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먹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아름다운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속세에서 가져온 김밥과 온갖 과자, 그리고 편의점에서 구입한 컵라면 등으로 열심히 몸을
달래니 다시금 사기가 오르기 시작한다. 이제 밥도 두둑히 먹었으니 슬슬 움직여볼까~! 근
데 어느 세월에 저 까마득하게 보이는 우이령을 넘어가나 은근히 막막해진다. 거기에 식곤
증까지 거침없이 희롱을 하니 사기가 다시 떨어지려고 한다. 그래도 우이령을 목적으로 왔
으니 가야지. 힘차게 발걸음을 떼며 우이령의 품으로 들어선다.


 

♠ 우이령의 품으로 (교현리~석굴암 입구 구간)

▲ 교현(송추) 탐방지원센터

우이령(오봉산 석굴암) 입구에서 10분 정도 들어가면 속세와 우이령의 경계를 짓는 교현탐방지
원센터가 나온다. 길 주변에는 군부대 시설이 즐비해 부푼 마음을 품고 찾아온 탐방객에게 적
지 않은 긴장감을 준다.

교현탐방지원센터는 우이령의 북쪽 검문소로 여기서 소정의 출입 절차를 밟아야 되는데, 예약
자의 신분증과 예약확인증을 보여주면 된다. 동행자의 신분증은 상황에 따라 검사를 안하는 경
우도 있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늘 있으니 반드시 지참해야 뒷탈이 없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예
약을 했어도 예약자의 신분증과 예약확인증이 없으면 최순실이나 대통령급이 아닌 이상은 아무
리 날고 기어도 들여보내지 않는다. 우이령이 비록 개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북악산(北
岳山, 백악산) 한양도성 능선처럼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그렇게 출입 절차를 마치고 꿈에도 그린 고갯길, 우이령으로 들어선다. 그럼 여기서 잠시 우이
령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 북한산과 도봉산의 숨겨진 뒷통수이자 비단처럼 아름다운 고갯길, 우이령(牛耳嶺)
우이령은 순 우리말로 소귀고개라고 한다. 높이 600~800m를 다투는 북한산(삼각산) 영역과 도
봉산(道峯山) 영역 사이에 약간 움푹 들어간 고개로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橋峴里)와 서울 우
이동(牛耳洞)을 잇고 있다. 고갯길 정상을 기준으로 서남쪽은 북한산, 동북쪽은 도봉산 영역이
며 그들의 뒷통수에 자리한다.

예로부터 송추(교현리) 지역과 서울 동북부(강북구)를 빠르게 이어주는 고갯길로 그리 주목을
받는 길은 아니었다.
6.25가 터지자 파주와 양주 사람들이 대거 이 고개로 넘어왔으며, 서울을 수복한 이후에는 병
력 이동과 물자 수송을 위해 미군 공병대가 넓게 길을 닦아 탱크와 4발 차량의 통행이 가능하
게 되었다. 1951년 1.4후퇴 때도 많은 피난민들이 이곳을 통해 넘어왔고, 1953년 휴전까지 많
은 군인과 군수물자가 이 고개의 신세를 지면서 반짝 전성기를 누린다.

휴전 이후 지역 사람들이 이용하다가 1968년 북한의 김신조 공비 패거리가 서울 도심을 습격한
이른바 1.21사태가 터지자 1969년 국가 안보와 서울 방어를 이유로 지금의 교현탐방지원센터에
서 우이탐방지원센터에 이르는 4.46km 구간의 통행이 전면 금지된다. 이때 우이령 뿐만 아니라
인왕산(仁王山)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 삼천사계곡, 북한산성 내부까지 통제 구역으로 묶이
는 비운을 겪는다.
그렇게 금지된 고개가 되버린 우이령은 사람의 발길이 뚝 끊기고 군인과 경찰의 훈련지로 이용
되면서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석굴암입구 구간은 물론 석굴암 밑까지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우이령 개방에 대해서는 1990년대부터 조금씩 이야기가 나왔다. 1994년 4월 17일에는 시민환경
대회를 위해 딱 하루 개방되기도 했으며, 이후 개방 여론이 급물살을 타면서 드디어 2009년 7
월, 제한적이나마 빗장이 열린 것이다. 개방에 앞서 군부대 시설로 망가진 부분은 자연친화적
으로 정비했고 오봉산을 관망하는 전망대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시설과 안내문을 설치했다.

그 망할 북한 공비 때문에 40년이나 강제로 닫힌 우이령, 허나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유명한
말이 있듯이 그 덕분에 지구에 민폐나 끼치며 사는 인간들의 발길이 거의 끊기면서 이곳 생태
계는 매우 우수한 수준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 인간의 개발 칼질에 오갈데 없어진 수리부엉이
와 소쩍새, 산개나리 등 희귀 동/식물이 앞다투어 찾아와 안긴 자연의 보물 창고이자 서울 근
교의 듬직한 허파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서면 북한산의 다른 구역보다 공기가 꽤 상
큼하고 청정하다.
물론 우이령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1994년 이후 서울시와 경기도에서 서울 동북 지역과 경기도
서북 지역을 잇는 도로망 개설을 위해 우이령에 도로를 내려고 했다. 이때 길 너비를 현재 5~6
m에서 8m로 넓히려고 했지. 하지만 환경/시민단체, 국방부가 쌍수를 들고 반대했고, 반대 여론
이 상당하여 보기 좋게 무산되었다. 이곳에 도로가 놓이면 양주 서남부지역과 고양/파주에서
서울 강북구 지역을 빠르게 이어주게 되며, 강북구 지역에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를 빠르게
잇는 역할까지 하게 되면서 나름 소중한 길이 되어줄 것이나 대신 우이령의 희생을 감수해야
된다. 1969년 이곳이 통제가 되지 않았다면 진작에 개발의 칼질이 자행되었겠지. 그 인연으로
이곳은 차량의 도로가 되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왓다. 이것이 하늘이 우이령에게 준 운명이다.

우이령을 개방하면서 이곳의 자연환경을 지키고자 매일 탐방인원을 1,000명으로 제한했다. 덕
분에 천하에서 가장 탐방밀도(1㎢당 5만명)가 높은 북한산국립공원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한적
한 곳으로 남게 되었지. 또한 지정된 길(우이령길과 석굴암으로 가는 길)만 이용토록 했으며,
계곡과 숲으로의 통행을 금했다. 그리고 입장시간과 퇴장시간에 엄하게 제한을 두어 혹여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하게 했다. 허나 사람이란 존재가 지구에는 도움이 안되는지라 마음대로 샛길을
개척하고 식물을 채취하는 행위가 발생해 종종 문제가 되고 있다.

우이령길은 수도권 도보 나들이의 성지(聖地)로 일컬어지는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이다. 북한산
둘레길은 총 21구간 71.5km로 그중에서 가장 으뜸은 바로 우이령길이 아닐까 싶다. (우이령길
찬양~~!!)
우이령길 구간은 교현리 우이령 입구에서 우이동 광장에 이르는 6.8km이다. 이중 4.46km가 아
무나 들어갈 수 없는 예약 탐방구간이며, 교현리 우이령 입구에서 교현탐방지원센터, 우이동광
장에서 우이탐방지원센터 구간은 예약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거닐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우이
령길을 둘러보도록 하자.

※ 우이령길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① 송추 교현리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에서 서울
704번, 의정부 34번 시내버스를 타고 우이령(오봉산 석굴암입구) 하차
* 1,4호선 서울역(4,9-1번 출구), 2호선 을지로입구역(3번 출구), 1호선 종각역(3-1번 출구),
5호선 서대문역(4번 출구), 3호선 홍제역(2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녹번역(1번 출
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704번 시내버스 이용
② 서울 우이동
* 지하철 4호선 수유역(3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01, 120, 130, 153번 시내버스 이용
(120번과 130번은 우이동 종점, 나머지는 우이동 도선사입구 하차) / 수유역 6번 출구에서
도봉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우이동 종점 하차
* 지하철 4,7호선 노원역 5번 출구에서 1144번, 7번 출구에서 노원구 마을버스 15번을 타고 우
이동 도선사입구 하차
* 우이동 도선사입구(우이동 광장)에서 우이탐방지원센터까지 도보 35분

★ 우이령 탐방 정보 (2016년 11월 기준)
* 우이령은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의 '국립공원 예약' 메뉴에 있는 '북한산 우이령 탐방'
게시판에서 예약을 하면 된다. 예약은 10시부터 하루 전 17시까지 하면 된다.
예약 홈페이지로 이동하기
* 탐방객은 매일 1,000명으로 제한하고 있으며, 송추 500명, 우이동 500명이다. 인터넷 예약은
매일 800명으로 1인당 10명까지 가능하다. 전화 예약자는 200명으로 노령층(65세 이상)과 장
애인, 외국인 관광객에 한한다. (전화예약은 9~17시까지)
* 입장시간은 9시부터 14시까지며, 16시까지 무조건 하산을 마쳐야 된다. (16시까지 교현/우이
탐방지원센터까지 나와야 됨) 늦게 하산하면 자칫 벌금을 뜯길 수 있다.
* 석굴암 신도와 탐방객은 우이령길을 예약할 필요가 없으며,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신분증 확
인을 거쳐 들어가면 된다. (석굴암까지만 이동 가능)
* 교현탐방지원센터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 산47-10 (예약/문의 ☎ 031-855-6559)
* 우이탐방지원센터 -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산74 (예약/문의 ☎ 02-998-8365)


▲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 (1)

교현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본격적인 우이령 탐방이 시작된다. 속인(俗人)들이 이 길을 걷고자
40년이나 기다렸던 그 금지된 길이 내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가을도 우이령이 마음에 들었는
지 길을 멈추고 주변을 온통 화사하게 불지른다. 이렇게 늦가을과 우이령의 만남으로 우이령은
아름다운 비단길로 거듭났다.

우이령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길이 완만하다. 서서히 올라갔다가 다시 서서히 내려가는 아주 느
긋한 코스로 각박한 속세살이와는 정반대이다. 게다가 흙길이 잘 닦여져 있고, 주변 풍경이 매
우 고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짧게 느껴져 흔쾌히 왕복을 뛰고 싶은 마음이다.

교현탐방지원센터에서 석굴암입구 유격광장까지는 약 2.3km로 30분 정도 걸린다. 동쪽에는 도
봉산과 오봉이 빚은 우이령계곡이 때묻지 않은 청정함을 간직하며 속세로 흐르는데, 아쉽게도
계곡은 금지된 구역이다. 게다가 길과도 거리를 제법 두고 있어 휴전선 너머 동해바다를 바라
보듯 해야 된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곳을 속세로부터 지키려면 그럴 수 밖에.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 (2)
휴일을 맞이하며 북한산과 도봉산의 왠만한 등산로는 늦가을 나들이 인파로 세계
탐방밀도 1위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미어터지는데 반해 이곳은 여기가
북한산의 일부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한적하기 그지 없다.

▲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 (3)

▲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 (4)
숲이 무성해 강렬한 햇빛도 고개를 숙인다.

▲ 우이령길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흘러가는 우이령 계곡
속인의 발길이 오랫동안 금지된 저곳에 선녀(仙女) 누님의 비밀 욕탕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달 깊은 밤에 몰래 찾아와 확인해 보고 싶다~~

▲ 늦가을이 온 산천에 알록달록 불을 질렀다.
늦가을의 즐거운 불장난은 11월 이후 겨울 제국에 의해 모두 진압될 것이다.
단풍으로 타오르는 산 너머로 바위 봉우리인 오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 우이령 계곡과 오봉 산줄기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에서는 어디서든 오봉이 바라보인다.

▲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 (5)


 

♠ 우이령의 심장으로

▲ 석굴암입구 유격광장

우이령길 심장의 서쪽인 석굴암입구 유격광장은 우이령길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다. 이곳은 군
부대의 유격 연병장으로 광장 동쪽에 서 있는 유격 표석이 이곳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여기서
길은 크게 2갈래로 갈리는데, 석등을 옆구리에 낀 다리를 건너 오봉으로 향하는 북쪽 길을 오
르면 석굴암이고, 광장 남쪽으로 난 길을 직진하면 우이령길 정상이다.

유격장은 주로 석굴암으로 오르는 길목에 분포하고 있는데, 군대를 나온 이 땅의 사내들로 하
여금 당시의 향수를 진하게 불러일으킨다. 우이령이 아무리 개방이 되어 탐방 장소로 인기 몰
이를 하고 있어도 이들은 여전히 군사용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니 철조망 안에 있거나 접근이
통제된 유격시설은 괜히 접근치 않도록 한다. 이처럼 우이령은 민간인의 등산/나들이와 군인의
유격장이 공존하는 곳으로 남북분단의 우울한 현실이 담긴 조금은 씁쓸한 현장이기도 하다.

흙이 잘 입혀진 유격광장은 터가 매우 넓어 그늘진 곳에는 산꾼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피고 밥
과 행동식을 먹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우이동까지는 딱히 휴식 장소는 없으니 교현리에서 오를
경우에는 적어도 여기서 먹고 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광장 동쪽에는 우이령 상류를 막아서 만
든 조그만 호수가 있는데, 곱게 몸을 치장한 나무들이 호수를 거울로 삼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
듬느라 여념이 없다. 지금은 서로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1달 뒤면 겨울 제국에게 영혼까지 털려
호수에 비친 앙상한 모습에 시름에 잠길 것이다.


▲ 석굴암으로 인도하는 길 (석굴암입구)

우이령에 왔다면 오봉 서쪽에 안긴 석굴암(石窟庵)은 꼭 둘러보기 바란다. 첩첩한 산주름에 제
대로 묻힌 석굴암은 우이령 개방과 함께 흥한 기운이 찾아들어 요즘 제법 잘나가고 있는데, 절
로 오르는 길은 좀 각박하지만 경내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꽤나 일품이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공양을 제공하고 있으니 시간이 맞으면 공양 1그릇 들고 가는 것도 좋다. (정월대보름에는 오
곡밥에 나물을, 동짓날에는 팥죽을 제공함) 또한 매년 10월에는 번뇌가 쫓아오다 졸도할 정도
의 이 심산유곡(深山幽谷)에서 단풍음악회까지 연다. (2016년에는 10월 29일 토요일에 열림)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내가 이곳을 그냥 통과할리는 없을 터, 잠시 우이령을
잊고 석굴암을 찾았다. 석굴암에 관한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유격 표석의 위엄 - 이제는 이곳의 상징물이 되어 우이령길 사진의
단골 모델로 자주 등장한다.

▲ 유격광장에서 바라본 오봉의 위엄 (왼쪽 바위 봉우리는 관음봉)

우이령길 교현리 구간에서는 어디서든 오봉(五峯, 660m)이 바라보인다. 오봉산(五峯山)이라 불
리기도 하는데, 이들은 도봉산의 뒷쪽으로 5개의 봉우리가 위엄을 뽐내며 속세를 굽어본다. 이
런 멋드러진 봉우리에는 옛 사람들이 붙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있기 마련이라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호랑이가 담배 피다 암에 걸리던 시절, 양주 고을에 총각 5명이 살고 있었는데, 양주목(楊州牧
) 원님(사또)의 외동딸이 참 이쁘다고 하여 서로 장가를 들고자 시합을 벌였다. 아마도 원님이
시합을 붙인 듯 싶다. 시합이란 바로 우이령 서쪽에 있는 상장능선에 올라 그곳의 바위를 오봉
에 던져올리는 것, 그들 가운데 누가 이겼는지는 전설을 지은 옛사람의 생각이 짧아 나오지는
않지만 그들로 인해 오봉이 저렇게 묘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허나 사람 주제에 어찌
저런 봉우리를 만들 수 있을까?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을 사람 따위가 황당한
전설로 가로채려고 하니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하다.

우이령에서 뻔히 보이는 오봉이지만 정작 여기서는 오르지 못한다. 그곳에 가려면 무조건 도봉
산을 거쳐야 되며, 우이령과 석굴암에서 가는 길은 모두 통제되었다.


▲ 석굴암입구~우이령길 정상 구간 (1)

석굴암입구 유격광장을 지나면 우이령길은 기존보다 조금 작아지고 길을 둘러싼 숲은 더욱 삼
삼해진다. 여기서부터 우이탐방지원센터까지가 우이령길의 단연 갑(甲)이자 심장과 같은 구간
으로 인간의 언어와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시건방질 정도로 미치도록 아름답다. 벌써부터 누렇
게 뜬 낙엽이 길 주변을 잔잔히 덮어 겨울 제국의 도래가 멀지 않았음을 가늠케 하며, 사람도
별로 없어 뚜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한적하다. 그야말로 산바람과 새의 지저귀
는 소리가 전부인 자연의 공간이다. 산내음이 진하게 우려진 이런 길을 거닐면 아무리 문학의
문외한이라도 시(詩) 한 수, 읊어주거나 지어야 되는데, 그럴 실력이 되지 못함이 애석하다.


▲ 석굴암입구~우이령길 정상 구간 (2)

▲ 석굴암입구~우이령길 정상 구간에서 만난 조그만 계곡

▲ 오봉과 우이령 산줄기 너머로 보이는 도봉산의 잘생긴 뒷통수

▲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오봉의 기묘한 위엄

▲ 석굴암입구~우이령길 정상 구간 (3)

▲ 우이령길 정상과 대전차 장애물 (우이동 방향)

▲ 우이령길 정상과 대전차 장애물 (송추 방향)

석굴암입구에서 살랑살랑 20분 정도 오르면 우이령길 정상이다. 여기서부터 경기도 양주시에서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으로 바뀌는데, 행정구역이 싹 바뀐다고 해서 고갯길과 주변 풍경이 죄다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이 편의상 그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우이령길 정상에는 돌로 쌓은 방어시설이 있는데, 이는 탱크의 저지를 막는 대전차(對戰車) 장
애물(고가 낙석)이다. 이 장애물은 6.25 이후 북한의 침공에 대비코자 만든 것으로 전차(탱크)
가 밀려올 때 석축 위에 올려진 콘크리트 덩어리를 떨어뜨려 탱크의 진입을 막는 시설이다. 서
울과 경기도 북부(고양, 양주, 구리, 남양주 방면)로 넘어가는 고개, 경기도와 강원도 북부권
고갯길에 주로 설치되었는데, 다행히 저들이 제대로 쓰인 적은 없으며, 근래에는 서울 주변을
중심으로 도시 개발과 도로 개선으로 조금씩 없어지는 추세다. (파주나 양주, 포천, 연천, 화
천 등 전방 쪽은 많이 남아있음)

남북분단이 빚은 어이없는 작품으로 겉모습은 참 정떨어지지만 20세기 중반을 대표하는 국방
시설로 등록문화재로 삼아 보존할 가치는 충분하다 여겨진다. 혹여 나중에 통일이 되고 주변
나라를 아우르는 놀라운 시대가 와도 꼭 국방 유적으로 남겨야 될 것이다.


 

♠ 우이령 마무리 (서울 우이동 구간)

▲ 우이령정상~우이탐방지원센터 구간 (1)

우이령길 정상을 지나면 길은 내리막으로 변하고 그나마 조금 가까워진 하늘은 다시 멀어져 간
다. 우이동으로 내려가는 길도 앞서 교현리 구간처럼 느긋한 경사로 길도 잘 닦여져 있어 등산
보다는 마실이나 산책의 기분이 진하게 든다.

우이령의 우이동 구간은 딱히 명소나 특별한 존재는 없으며, 그저 삼삼하고 비단처럼 고운 숲
길의 연속이다. 하늘과 멀어질 수록 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속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 길을 15분 정도 내려가면 우이령길의 남쪽 검문소인 우이탐방지원센터가 나온다. 이로써
우이령길의 금지된 구간은 모두 완주한 셈이며, 여기서부터 우이동 광장까지는 항시 개방되는
구간이다.


▲ 돌탑의 보금자리
속인(俗人)들이 쌓아올린 산악신앙의 소박한 현장 ▼



▲ 우이령정상~우이탐방지원센터 구간 (2)

▲ 우이령정상~우이탐방지원센터 구간 (3)

▲ 우이령정상~우이탐방지원센터 구간 (4)

▲ 우이탐방지원센터 주변

우이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비로소 자유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우이동
유원지의 번잡함을 피하고 싶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되며, 우이령을 넘어온 북한산둘레길은 바
로 오른쪽 길로 해서 내려간다. 그리고 먹거리나 우이동유원지를 원한다면 그냥 직진한다.

둘레길의 일원인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우이동 계곡인데, 다리 주변에 사람들이 쌓아놓은 돌탑
들이 우리나라 7천만 인구 마냥 가지각색의 모습으로 마이산 탑사(馬耳山 塔寺)의 간지나는 돌
탑을 꿈꾸며 조촐히 장관을 이룬다. 우이동은 우리 동네 옆이라 자주 가는 곳이지만 우이동광
장에서 우이령 구간은 처음 와본다.


▲ 우이동계곡 돌탑들
돌탑이 뿌리를 내린 돌에 푸른 이끼가 가득하니 이곳이 그만큼 청정하다는 뜻이다.

▲ 바위 위에 왠 소나무 분재
돌로 두툼히 석축을 쌓고 키 작은 소나무를 심었다.

▲ 우이동유원지 외곽길 (1)

▲ 우이동유원지 외곽길 (2)

우이령 남쪽에 옥의 티처럼 자리한 우이동유원지는 우이동광장에서 우이탐방지원센터 직전에
이르는 약 1.4km의 길쭉한 산간 마을이다. 이곳은 다른 이름 돋는 산이나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산채비빔밥과 닭백숙, 오리고기, 도토리묵, 동동주, 두부 음식, 고기류, 동동주 등을 다루는
온갖 식당들이 즐비하며, 민박과 산장 등의 숙박시설, 수련원과 연수원 등이 정신없이 들어서
있어 서울 지역 대학교와 직장, 동호회의 당일, 1박 모임 장소로 인기가 높다.

이곳은 엄연히 북한산국립공원 구역이지만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이전부터 형성된 마을이다.
북한산국립공원이 2000년 이후 북한산성(北漢山城) 내부에 오래된 자연 마을인 북한동(北漢洞)
마을을 철거하고 등산로 기점 가운데 어수선한 곳을 많이 정비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우이동유
원지는 아직 손을 대지 못했다. 유원지 남쪽에는 훼밀리랜드와 그린파크호텔도 있지만 현재는
망해서 문이 닫힌 상태이다.

우이동유원지의 번잡함을 피하고 싶다면 외곽길(유원지 기준 서쪽 길, 우이탐방지원센터에서
오른쪽 길 이용)을 이용하기 바란다. 수목이 삼삼히 우거진 완연한 숲길로 길 동쪽에는 유원지
식당과 숙박업소의 철담과 나무 담장이 길게 둘러져 있다. 또한 길 중간에 유원지로 들어가는
조그만 길이 여럿 있으니 먹거리를 원한다면 그 길로 들어가면 된다.

그렇게 우이동유원지 외곽길을 정신 없이 내려가 오후 4시 반에 우이동 광장에 도착했다. 우이
탐방지원센터는 3시 반에 통과했다. 산을 탔으니 조촐하게 뒷풀이는 해야 되겠지. 우이동유원
지에 양의 털처럼 널린 식당에서 먹으려고 했으나 이곳이 초행길이고 정보가 어두워 다 지나쳤
다. 그래서 서울 동북부 부도심인 수유역으로 나와 닭갈비에 맥주로 늦은 점심을 배불리 먹고
그날의 일정을 기분 좋게 마무리지었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우이령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우이령이 비록 제약이 많은 공
간이라 아쉬움은 다소 있지만 서울 근교에서 제법 환경이 잘 보존된 구역인만큼 지금처럼 제한
적 탐방제도를 유지했으면 좋겠다. 근래 양주시에서 예약이 필요없는 자유탐방을 요구하고 있
지만 그건 우이령의 숨통을 끊는 행위라고 본다. 하루 예약 인원을 지금보다 조금 늘리는 선에
서 끝내면 좋을 듯 싶으며, 휴식년제를 도입해 적으면 몇 달, 길면 몇년 정도의 휴식기를 주어
속인들로부터 자유를 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것이 우이령길이 서울 근교의 숨겨진 아름다
운 숲길로 길이 길이 보존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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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11월 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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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아름다운 계곡을 옆구리에 차고 있는 ~~ 북한산 진관사 (진관사계곡)



' 북한산 진관사 여름 나들이 (진관사계곡) '

▲  진관사 경내

진관사 독성전, 칠성각

▲  진관사 독성전과 칠성각

▲  진관사계곡 폭포




뜨거운 도가니와 같았던 7월의 끝 무렵, 여름 제국(帝國)의 혹독한 핍박에서 잠시 벗어나
고 싶은 마음에 북한산(삼각산) 진관사계곡과 진관사로 피서 순례를 떠났다.

서울에서 계곡하면 북한산에 안긴 계곡들을 으뜸으로 쳐주는지라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미
답처(未踏處)인 불광사(佛光寺)계곡으로 가려고 했다. 허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이미
익숙해진 진관사와 진관사계곡으로 마음이 기울면서 오랜만에 진관사로 발걸음을 향했다.
서울 서북부의 중심지인 연신내역에서 일행을 만나 간단히 먹거리를 사들고 서울시내버스
701번(진관차고지↔종로2가)에 의지하여 진관사(삼천사)입구에서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전원 풍경이 눈을 시리게 하는 진관길을 7분 정도 들어서니 일주문이 멀리감치 나와 우리
를 맞는다.

진관사입구에서 일주문 사이에는 조선 성종(成宗)의 아들인 영산군묘역(寧山君墓域)과 영
산군의 생모인 숙용심씨묘표(淑容沈氏墓表) 등의 문화유산이 있고, 1968년 1,21사태를 일
으킨 김신조 공비 일당이 거쳐갔던 산길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으며, 북한산둘레길의 마
실길과 구름정원길이 이곳에서 서로 간판을 바꾸어 제 갈 길로 흘러간다.


 

♠  진관사 입문

▲  진관사의 정문인 일주문(一柱門)

1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진관사도 그 몇 년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새 적지 않은 변화를 보여
주었다. 절에 들어서기도 전에 예전에는 없던 문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으니 그 문은 바로
일주문이다.
그렇다면 그 문이 있기 전에는 진관사에 그 흔한 일주문이 없었을까? 그건 아니다. 여기서 경내
로 더 들어가면 1970년에 지어진 예전 일주문이 있다. 그 문이 40년 동안 일주문 역할을 하였으
나 2012년 속세 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주차장에 나무로 새 일주문을 만들고 기존 일주문은
해탈문으로 용도를 바꾸었다.

이전보다 더 크게 세워진 일주문은 그 위치가 길의 중앙이 아닌 너무 좌측으로 밀려나 있어 조
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기분을 준다. 그러다보니 산꾼과 중생들 대부분은 절의 관문인 일주문을
애써 지나지 않고 옆으로 지나간다. 문에게 그런 굴욕을 준 이유는 절을 찾는 차량들과 사람들
의 통행 편의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일주문 주변은 2008년 이전까지 조그만 마을이 터를 닦고 있었다. 산꾼과 속세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였던 식당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진관사에 갈 때마다 그들이 흘린 음식
냄새에 정신을 잃곤 하였다. 허나 북한산 주변을 정비하면서 마을을 모두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소나무와 갖은 나무를 심었으며, 마을까지 들어왔던 시내버스<7723번, 옛 454-2번>도 진관사입
구로 멀리감치 물러나 거기서 육중한 바퀴를 돌린다.

▲  극락교 밑을 흐르는 진관사계곡
(극락교 우측)

▲  진관사계곡과 나무 탐방로
(극락교 좌측)


▲  진관사 해탈문(解脫門)

일주문을 지나 극락교에서 졸졸졸~♪ 흐르는 계곡에 나의 번뇌를 힘껏 내던지며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번뇌야 제발 바람 따라 멀리멀리 가거라~!' 주문을 해도 그 번뇌가 얼마나 무
거운지 떠내려가지도 않고 나를 기다리며 외친다. '잠시 너를 놓아줄테니 좋은 말 할 때 언능
내려와~~!!'

극락교를 지나면 시원스런 팔작지붕의 해탈문이 중생을 맞는다. 이 문은 원래 진관사의 일주문
으로 1970년에 진관이 만들었다. 전통 방식으로 만들지 않고 콘크리트로 기둥을 세우고 지붕만
나무로 한 형태로 한글로 가로식으로 쓰인 '삼각산 진관사' 현판이 걸려있었다. 콘크리트로 기
둥을 삼은 것도 그렇지만 현판 글씨도 전통식이 아닌 너무 현대식이라 옛 절의 면모가 다소 떨
어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진관사도 그 부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 2012년에 새로
일주문을 짓고 기존의 일주문은 해탈문으로 이름을 갈았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진관사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며, 문의 이름처럼
해탈을 해야 하건만 그게 참 쉽지가 않다. 그래서 부처는 아무나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  석종형 승탑(僧塔)과 2기의 빛바랜 비석들

일주문을 지나면 왼쪽에 숲으로 인도하는 오솔길이 보일 것이다. 그 길은 삼천사로 넘어가는 산
길로 그 오솔길로 들어서면 근래에 지어진 때깔이 고운 사적비와 공덕비를 비롯하여 수풀 속에
자리한 석종형 승탑과 비석들이 나란히 3형제를 이루며 서 있는 모습이 두 눈에 들어올 것이다.

3형제 가운데 왼쪽에 자리한 승탑은 '혜월당대선사우성탑(慧月堂大禪師宇性塔)'으로 승탑에 잠
든 혜월당은 20세기에 활동했던 승려이다. 그 옆에 지붕돌을 인 빛바랜 비석은 조선 후기에 세
워진 것으로 정3품 벼슬을 지낸 전사명(全士明)의 석교송덕비(石橋頌德碑)와 자선송덕비(慈善頌
德碑)이다. 비석을 하나도 아닌 2개씩이나 지어줄 정도면 절에 대한 지원이 꽤 상당했던 모양이
다. 이래서 속세나 절이나 돈은 중요하다.

▲  2012년에 세워진 진관사 사적비(事積碑)와
공적비(功績碑)

▲  초가로 이루어진 진관사 찻집
(2015년 이전)


▲  진관사 돌담길 - 길 오른쪽(홍제루 방향)에는 진관사계곡이
속세를 향해 힘차게 물-질을 한다.

 ◀  진관사 은행나무 - 서울시보호수 12-3호
진관사에는 오래된 보호수가 3그루가 있다. 그
중 찻집 옆에 서 있는 이 은행나무는 그 막내로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지정 당시 나이
가 약 115년이라고 하니 그새 30년의 세월이 추
가되어 약 150년 정도 된다. 높이는 26m로 경내
에서 가장 높으며 둘레는 3m이다.


▲  진관사계곡에 걸려있는 세심교(洗心橋)
선암사 승선교(昇仙橋)를 꿈꾸는 것일까?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세심교는 경내와
함월당, 길상원, 공덕원을 이어주는 돌다리로 근래에 지어졌다.

▲  홍제루 정면

경내를 가리고 선 홍제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중층 건물로 절의 속살을 보이기 싫
은지 좌우로 담장을 두르며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다.
이 건물은 1977년에 진관이 세운 것으로 지붕은 호화롭게 청기와로 꾸몄으며, 아랫 층은 경내로
인도하는 통로로 가운데 계단을 올라서면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흔쾌히 모습을 나타낸다.

홍제루 윗층은 교육 공간으로 수륙재를 비롯한 절의 행사 때는 단체 공양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 (예전 진관사 행사에 참여했을 때 여기서 점심공양을 한 적이 있음) 그리고 홍제루를 들어서
오른쪽으로 가면 커피 자판기와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쉼터가 있다.


▲  홍제루 뒷면 (경내)

▲  홍제루 앞에 자라난 오래된 느티나무

홍제루 앞에는 오랜 세월을 머금은 느티나무 2
그루가 서로를 보듬으며 앞다투어 그늘을 드리
운다. 나무가 뿌리를 내린 위치가 평평한 곳이
아닌 계곡변 90도 벼랑이라 어떻게 저런 험난한
자리에서 어엿하게 자라날 수 있었는지 그저 신
기할 따름이다.
이들 느티나무는 1982년에 서울시 보호수 12-4,
12-5호로 지정되었는데, 지정 당시의 저들 나이
가 230년이라고 한다. 그새 30년에 세월이 얹혀
졌으니 나이는 260년 정도 된다. 높이는 각각
18m, 19m, 둘레는 3.1m, 2.5m이다. 둘이 워낙
따닥따닥 붙어있어 보호수 안내문이 아니면 누
가누군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  석조 옆 화단에 심어진 옛 주춧돌과 석물들
6.25때 파괴된 옛 건물의 주춧돌 3개가 화단에 벌러덩 누워 있다. 어느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이었을까? 받쳐들 상대를 잃은 주춧돌의 허전한 대머리를 달래주려는 듯
합장인을 선보인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거북이상을 그들 머리에 두었다.

▲  진관사 석조(石槽)
석조에는 북한산이 베푼 물로 조그만 바다를 이룬다. (가뭄 때는 맨바닥을 드러냄)
허나 속세의 때를 탔는지 식수 불가가 되어 석조에 고인 물은 그야말로
그림의 물이 되었고, 석조는 경내를 수식하는 장식물이 되고 말았다.
그럼 여기서 잠시 진관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서울 서북부 제일의 고찰, 수륙재의 성지(聖地)인 북한산 진관사(津寬寺)
① 고려 현종의 이야기가 서린 진관사의 창건 설화
북한산(삼각산) 서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진관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의 말
사(末寺)이다. 조선시대부터 불암산 불암사(佛巖寺),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북한산 승가사(
僧伽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더불어 서울 근교 4대 명찰의 하나로 명성을 누렸으며 서울 서
북부에서 가장 크고 잘나가는 절이었다.

진관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고려 8대 제왕인 현종이다. 그는 자신을 구
해준 진관대사(津寬大師, 진관조사)를 위해 이 절을 지어주었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워
낙에 유명한 이야기라 사극이나 영화 소재로 써도 손색은 없을 것이다. (이미 사극 '천추태후'
에서 1번 써먹었음)

현종(992~1031, 재위 1009~1031)은 고려 태조(太祖)의 아들인 안종 왕욱(安宗 王郁, ?~997)과
태조의 손녀인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의 소생으로 이름은 왕순(王詢)이다. 헌정왕후는 태조
의 아들인 대종 왕욱(大宗 王旭, ?~969)의 딸로 그녀의 남편인 안종과 한자만 다를 뿐 이름은
같으며, 헌정왕후도 엄연한 왕씨이나 고려 황족(皇族)들은 족내혼(族內婚)을 너무 선호한 탓에
공주를 비롯한 왕족 여인들은 보통 외가의 성을 땄다. 그래서 외가인 황보<皇甫, 황해도 황주(
黃州) 지역 세력가>씨를 칭하게 된 것이다.

헌정왕후는 사촌인 경종(景宗, 재위 975~981)에게 시집을 갔으나 981년 경종이 붕어(崩御)하자
사저로 나와 살던 중, 숙부가 되는 안종과 친해지게 된다. 그들은 숙부와 조카 사이임에도 그
경계를 넘어섰고, 그 결과 현종(왕순)을 낫게 되었으나 극심한 산고(産苦)로 죽고 만다.
그의 오라버니인 성종(成宗)은 그 책임을 물어 안종을 멀리 경상도 사천(泗川)으로 귀양보냈는
데, 나중에 왕순을 내려보내 직접 기르도록 했다. 하지만 안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하고 997년
거기서 숨을 거둔다.
이후 성종은 왕순을 다시 불러 궁중에서 길렀고, 성종이 997년 붕어하자 왕순의 사촌인 목종(穆
宗)이 제위에 오른다. 목종은 경종과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왕순의 큰 이모)의 아들로 그
가 제위에 오르자 왕후는 그 이름도 유명한 천추태후(千秋太后)를 칭하게 된다.

천추태후는 김치양(金致陽)이란 오랜 정인(情人)이 있는데, 그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아 부부행
세를 하기에 이른다. 유약한 목종은 특이하게도 동성연애를 빠져 점점 병약해지고 아들을 포기
한 태후와 김치양은 그들의 아들을 제위에 올리고자 안간힘을 쓴다. 마침 목종은 아들도 없었으
므로 그가 죽으면 별탈없이 김씨가 제왕이 될 수도 있다. 허나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친조카
인 왕순의 존재였다.

김치양은 고려 왕실을 뒤엎고 새 왕실을 세우려는 욕심 때문인지 왕순을 죽이고자 혈안이 된다.
그래서 그를 숭경사(崇慶寺)에 보내 죽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진관사의 전신(前身)
으로 여겨지는 북한산 신혈사(新穴寺)로 쫓아내 비밀리에 자객을 보냈다.
당시 신혈사에는 진관대사가 머물고 있었는데, 왕순의 위급함을 눈치채고 불단(佛壇) 밑에 굴을
파 그를 숨기는 등 3년 동안 지켜주면서 자객은 결국 헛탕만 치고 만다. 젊은 나이에 드러누운
목종은 왕순을 후계자로 정하며 대량원군(大良元君)에 봉해 즉시 그를 데려오도록 했다.
그래서 왕순은 무사히 개경(開京)으로 돌아왔고, 1009년 북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강조(康兆)에
의해 제위에 오른다.

1010년 요나라(거란) 성종(成宗)이 강조의 난을 따진다는 이유로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
어왔다. 초반에 강조가 검차(檢車)를 이용하여 꽤 선전을 했으나 자만으로 인해 크게 패하였고,
그 여세로 개경이 함락되자 현종은 눈물을 머금고 나주(羅州)까지 먼 길을 몽진했다. 1011년 거
란군이 토벌되어 개경으로 환궁을 했는데, 바로 그 해에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인근에 절을 지어주고 그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했다.
절은 1012년 가을에 완성되었으며, 대웅전이 10칸, 동/서 승당(僧堂)이 각각 30칸, 청풍당(淸風
堂)과 명월요(明月寮)가 10칸, 기타 일주문, 해탈문, 종각 등 규모가 상당했고, 불상과 온갖 물
품까지 현종이 하사했다. 그리고 진관조사를 국사(國師)로 삼았다.
이렇게 제왕의 어려웠던 시절을 구해준 깊은 인연으로 태어난 진관사는 고려 왕실의 지원을 두
고두고 입으며 크게 승승장구한다.

② 딱 천년 묵은 진관사, 창건 이후 지금까지의 과정
1090년 선종(宣宗)은 남경(南京, 서울 도심)에 행차하면서 진관사에 친히 들려 오백나한재(五百
羅漢齋)를 열었다. 그리고 1099년 숙종(肅宗)이, 1110년에는 예종(睿宗)이 남경을 순행하는 과
정에서 들리면서 여러 보물을 하사했다. 당시 진관사는 승가사, 장의사(長義寺)와 더불어 서울
에서 가장 잘나가는 절이었다.

1392년 천하가 조선으로 강제로 바뀐 이후에도 진관사의 명성은 여전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를 뒤엎으면서 마구잡이로 죽인 고려 왕족과 백성들의 혼을 달래고 민심 안정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수륙재(水陸齋)를 계획한다. 그래서 서울과 가까운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 사찰 가운
데 마땅한 장소를 물색했는데, 진관사가 딱 적합하다는 보고에 따라 재를 지낼 수륙사(水陸社)
를 짓게 했으며, 1397년 건물이 완성되자 친히 낙성식에 참여하여 거하게 수륙재를 여는 한편,
권근(權近)에게 '수륙사 조성기(造成記)'를 작성토록 했다. 그 인연으로 진관사는 수륙재의 중
심 도량이 되어 변함없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때 지어진 수륙사와 부속건물은 59칸 규모로 상/중/하단의 3단을 기본 구조로 하여 중/하단에
회랑(回廊)을 설치하는 등, 자못 위엄이 있는 규모였다.

참고로 수륙재는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물과 땅을 헤매는 고혼(孤魂)들을 천도하는 일종의 천도
재로 영산재에 비해 공익성이 큰 불교의 주요 행사이다. 양나라 무제(武帝, 502~549) 때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며, 이 땅에서는 940년(고려 태조 22년) 12월에 처음 시작되었다.

1413년 태종은 일찍 죽은 4번째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해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
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해 경비로 쓰게 했다. 그 이후 매년 1
월 또는 2월 15일에 국가 주도의 수륙대재가 열리면서 왕족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구름처럼 몰
려와 재에 참여했고, 서울 근교 제일의 사찰로 굳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421년에는 세종(世宗)이 부모인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고자 재를 지냈는데, 이때부터 왕실의
각종 재를 지내는 역할까지 담당하게 된다. 또한 1442년 세종은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의 공부
를 독려하고자 독서당(讀書堂)을 경내에 설치해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등 많은 문인
들이 이곳에서 머리를 싸매고 독서를 했다.

1452년에 중수를 벌였고, 1463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타버리면서 1470년에 중건했다. 이후 별탈
없이 지내오다가 1854년과 1858년에 중수했으며, 1879년에 당두화상(堂頭和尙) 경운(慶雲)이 34
칸을 지었다. 그리고 1908년 송암(松庵)이 경내에 오층석탑을 세웠으며, (경내 서쪽 외곽에 있
음) 명부전에 불상과 시왕탱을 개금했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짓고, 자신의 토지를 절에 기
증해 '백련결사염불회'의 자원으로 쓰게 했다.

1950년 6.25전쟁 때 공비 토벌 작전 과정에서 나한전과 칠성각, 독성전을 제외하고 모두 파괴되
는 비운을 겪었으며, 초라한 몰골로 있던 것을 1963년 비구니 최진관<진관(眞觀)>이 이곳 주지
로 들어와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비록 살아남은 칠성각 등 3동을 제외하고는 예전 가람과는
다르게 중창되어 아쉬움이 다소 있으나 진관의 노력으로 예전 규모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며,
1980년 대웅전과 주요 건물의 기와를 청기와로 도배했다. 그리고 1992년 공양간과 요사를 새로
지었으며, 1996년 코끼리유치원, 2007년에 사회복지법인 진관 무위원을 세워 어린이 교육과 사
회복지, 포교에 나섰다.

2009년에는 칠성각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3.1운동 시절 승려 백초월이 사용했던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이 발견되어 매스컴을 크게 흔든 바가 있으며 이때쯤 수륙사터를 발굴 조사하였다.
2012년에는 일주문을 새로 지었고, 2015년에는 경내 북쪽을 싹 밀어 산사음식연구소, 보현다실
등 사찰 음식과 전통 찻집, 템플스테이를 다루는 건물을 요란하게 지어올려 절의 사세를 한껏
뽐내었다.
또한 진관의 주도로 오랫동안 잊혀진 옛 수륙재(국행수륙대재)를 복원하고자 동분서주하여 1982
년 자운율사의 의해 힘들게 복원에 성공, 이후부터 매년 윤년 윤달에 수륙재를 봉행하고 있으며
, 2012년부터는 매년 여름과 가을에도 개최하여 수륙재의 전통을 힘차게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
게 진관사를 반석 위에 올렸던 우리나라 비구니의 원로, 진관은 바로 얼마 전 2016년 7월 3일
한낮에 88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어 영원히 진관사에 깃들게 되었다.

③ 진관사의 현재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독성전, 칠성각, 나한전, 나가원, 요사, 서
별원, 홍제루, 범종각 등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세심교 건너에도 함월당과 길상원, 공덕
원 등의 여러 건물이 있어 도합 약 20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칠성각에서 발견된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등록문화재 458호)를 비롯해 칠성
각과 독성전, 석불좌상, 독성도, 소조3존불상, 소조16나한상, 산신도, 칠성도, 수륙무차평등재
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23호)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간직하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또한 이곳의 자랑인 수륙재는 '진관사 수륙재'란 이름으로
국가 무형문화재 126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100~200년 묵은 보호수 3그루가 있어 고색의
무게를 조금 보탠다.

서울 도심과 가까운 산사로 울창한 숲속에 묻혀있으며, 멋드러진 진관사계곡을 옆에 끼고 있어
경관도 일품이라 세종이 왜 이곳에 독서당을 지었는지 알만하다. 첩첩한 산골에 자리하여 산사
의 내음도 진하게 풍기고 있으며, 비구니 사찰이나 경내가 깨끗하고 정갈해 어수선한 마음마저
싹둑 가다듬게 만든다. 속세에서 나를 잠시 지우고 싶은데 멀리 가기가 힘들 때 찾아와 안기고
싶은 곳으로 한여름에 오면 절을 둘러보고 윗쪽 계곡에 올라가 피서를 즐기면 아주 극락이 따
로 없다.

※ 진관사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
  입구)에서 하차하여 도보 15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3번 출구)에서 7723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에
  서 하차
* 연신내역 3번 출구 밖 하나은행 앞에서 진관사 셔틀버스 이용. 평일은 1일 4회, 행사가 있는
  날과 주말은 9회 운행한다. (8시부터 10시대까지 운행)
* 진관사 일주문 주변에 주차장이 있으며 홍제루까지 차량 접근 가능

★ 진관사 관람정보
* 진관사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주중이나 주말에 1박 2일을 머
  무는 휴식형(14시부터 다음날 10시까지)과 불교문화 체험형, 단체형, 어린이 템플스테이. 청
  소년 템플스테이 등이 있으며, 예불과 참선, 다담(茶談), 발우공양, 108배, 안행(安行), 연꽃
  등 만들기, 사찰음식 체험 등을 제공한다. 1박2일 가격은 성인 7만원, 청소년과 어린이는 5만
  원이며, 템플스테이 신청과 자세한 정보는 진관사 홈페이지를 참조한다.
  (문의 ☎ 02-359-8410)
* 진관사 홍제루에서 계곡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폭포가 등장하며, 여기서부터 진관사계곡의 숨
  겨진 절경이 마음을 앗아간다. 서울에서 제법 잘생긴 계곡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또한 진
  관사계곡 산길은 2015년 이후 길이 다소 정비되었다고 하나 바위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
  심을 기해야 되며, 탐방로에서 계곡까지는 대부분 바위를 타고 내려가야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354 (☎ 02-359-8410)
* 진관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칠성각에 봉안된 귀여운 석불좌상과 칠성도


 

♠  진관사 대웅전 주변

▲  서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大雄殿)

홍제루를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법당인 대웅전이 마주한다. 정면 5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1965년에 진관이 세웠으며, 1980년에 그 비싸다는 청기와를 입혀 화려함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불단에는 1966년에 조성된 석가/미륵/제화갈라보살상을 중심으로 1967년에 제작된 삼신불
후불탱, 신중탱(1967년), 오여래탱(1990년), 범종(1966년), 1934년에 그려진 현왕탱(現王幀) 등
이 내부를 눈부시게 수식한다.

대웅전 뜨락에는 푸른 잔디가 정갈하게 깔려져 입혀져 있고, 건물 바로 앞에 석등(石燈) 2기가
자리한다. 허나 법당 앞에 으례 있는 석탑은 없는데, 원래는 1908년에 세운 5층석탑이 하나 있
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지금은 경내 구석에 몰래 찌그러져 있으니 아마도 풍수지리(風水地理)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곳이 계란을 상징하는 지형인데, 탑을 세우면 계란이 자칫 깨질 수 있
어서 그런듯)


▲  대웅전 불단을 지키는 석가/미륵/제화갈라보살

법당의 3존불이면 보통 중심 불상과 협시불(夾侍佛)을 짧은 간격으로 배치하는데 반해, 이곳은
서로가 조금씩 거리를 두며 독자적인 모습으로 앉아있다. 이들은 1966년에 조성된 것으로 가운
데 앉아있는 불상이 불교의 1인자인 석가불이고, 그의 왼쪽은 미래의 부처로 일컬어지는 미륵보
살(彌勒菩薩), 오른쪽은 과거불인 제화갈라(提華褐羅)보살로 이들은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수기3존불(授記三尊佛)이다.
가운데에 자리한 석가불을 빼고는 모두 보살(菩薩)의 신분이라 탐이 날 정도로 화려한 보관(寶
冠)을 쓰고 있으며, 다들 온화한 미소로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격려한다. 그리고 그들 뒤에
는 각각 후불탱화가 걸려있는데, 이들은 1967년에 제작된 것으로 석가불 뒤에는 비로자나불(毘
盧舍那佛)을 담은 후불탱이, 미륵보살 뒤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이 담긴 후불탱화, 제화갈라
뒤에는 석가모니 후불탱화가 걸려있다.


▲  진관사 나가원(那迦院)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진 대웅전 뜨락 우측에는 나가원이 있다. 정면으로 요사인 동별당을 마주
하고 있는 나가원은 한때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1972년에 진관이 지은 것이다. 정면 7칸, 측
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요사 및 대중방(大衆房), 종무소(宗務所)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신
도를 수용하는 대중방에는 1972~73년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과 아미타후불탱화가 있다.


▲  나가원 뒷쪽(종무소 쪽)에 놓인 맷돌들
조선 후기와 왜정 때 쓰인 맷돌 3형제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뜻하지 않은
장식물이 되어 쓸쓸한 노년을 보낸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뒷전으로 밀려난 모습은 쓸쓸하기 그지 없다.

▲  진관사 동정각(動靜閣)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의 보금자리로 1975년에 지어졌다.
종은 1974년에 조성된 것으로 그 흔한 범종각이 아닌 고요함을 흐트린다는 뜻의
동정각을 칭하는 점이 참 이채롭다.

▲  대웅전과 나가원 뒷쪽

▲  수륙재 행사 천막에 정면이 가려진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1968년에 지어진 것으로 1996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어졌
다. 지붕에는 푸른 기와가 입혀져 화려함을 더하며, 내부에는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10왕, 판관,
사자,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내부를 사진에 담으려고 했으나 마침 비구니 1명이 안에서 염불을 중얼거리고 있어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  진관사의 보물창고 ~~ 나한전, 독성전, 칠성각

▲  왼쪽부터 독성전, 칠성각, 나한전

진관사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경내 좌측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나한전과
칠성각, 독성전 3동(나한전 구역)이 그것이다. 이들은 진관사를 잿더미로 몰아넣었던 6.25 때
도 살아남은 진관사의 옛 건물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것들이다. 겉보기에는 청
기와로 번쩍이고 덩치도 큰 대웅전이나 나가원, 홍제루에 비해 보잘 것도 없고 구석에 몰려들
있어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정말 지나치기 일쑤다.
하지만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명언이 있듯이 진관사의 지정문화재(무형문화재 제외) 가운
데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를 빼고는 모두 이들 건물 안에 담겨져 있다.
게다가 자리 이동도 없이 예전의 가람배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진관사의 예전 모습을 더듬
는데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대웅전과 나가원 등은 대충 둘러봐도 되니 나한전 구역 건물들은 내부까지 꼭 살펴보도록 하자.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독성전과 칠성각은 서울에 있는 칠성각/독성각/산신각 계
열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  진관사 나한전(羅漢殿)

나한전 구역에서 유일하게 청기와를 눌러쓴 나한전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필체의 힘이 넘쳐보이는 명부전 현판은 1886년에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이 쓴 것이라고 전하며, 내부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한 소조3존불을 비롯해 소조
16나한상, 영산회상도, 16나한도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나한전 소(塑, 소조) 3존불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3호
후불탱화로 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5호


나한전 불단 유리 안에 소중히 봉안된 소조 3존불은 흙으로 빚어서 도금을 입힌 것으로 가운데
불상은 석가불이고, 좌우에 보관을 쓴 이들은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다. 대웅전 불단에 봉
안된 수기3존불(授記三尊佛)과 같으며, 석가불은 통통한 얼굴에 좀 경직된 표정이지만 좌우 보
살은 온화한 표정으로 살짝 미소가 드리워져 있다.
이 3존불은 진관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진다. 서울 토박이 불상 가운데서도 나이가 많은 편으로 얼굴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그들이
입은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로 옷주름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3존불상 뒤에 걸린 영산회상도는 부처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1884년 상궁(尙宮)들의
시주로 진철(震徹)이 그린 것이다. 구도는 중앙에 부처가 있고, 그 옆에 4명의 보살과 사천왕(
四天王), 6명의 제자를 배치했는데, 빈 공간에는 채운(彩雲)을 가득 채워 여백이 없다.
부처는 얼굴이 양감(量感)있게 표현되었고, 몸을 꽤나 단련한 듯, 힘찬 모습이다. 법의는 통견
으로 두 손은 아미타수인(阿彌陀手印) 비슷한 수인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제스쳐는 조선 후기
불화에서 많이 나온다. 그리고 부처 좌우에는 문수/보현보살이 큰 연꽃을 들고 서 있고, 사천
왕이 각자의 장비를 들고 그들을 호위한다. 또한 상체만 드러내며 합장인을 보이고 있는 제자
가 좌우에 3명씩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횡축의 화면과 단아한 형태, 밝은 주조색 등 19세기 후반 불화의 양식을 잘보여주고
있으며, 그 당시 서울 지역 불화의 베스트급으로 꼽힌다.



▲  나한전 소(塑) 16나한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4호
16나한도(十六羅漢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6호


3존불 좌우에는 부처의 핵심 제자인 16나한상과 16나한도가 자리해 있다. 불단 좌우에 각각 8
구의 나한상이 16나한을 이루고 있고, 그외에 제석상(帝釋像) 1구, 사자상(使者像) 1구, 활력
이 넘치는 인왕상(仁王像) 2구 등 모두 20구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흙으로 빚어 색을 입힌 것으로 진관사를 찾는 수많은 중생처럼 제각각의 모습이라 어느
하나 같은 얼굴, 같은 포즈가 없을 정도로 개성이 넘친다. 게다가 자세나 얼굴 표정도 어느 양
식에 얽매이지 않은 사실적이고 해학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서울, 경기도 지역의
나한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유물로 가치가 높다.

16나한도는 나한도 4폭과 제석신중도(帝釋神衆圖) 1폭, 사자신중도(使者神衆圖) 1폭 등 총 6폭
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한도(羅漢圖)는 4명의 나한이 산수를 배경으로 시자(侍者)와 동자를 거
느리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제석신중도와 사자신중도는 나한도 좌우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화면
을 2개로 나누어 구름 속에 있는 제석과 신중, 사자와 신중(神衆)을 그렸는데 근대적인 음영법
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그림은 영산회상도와 마찬가지로 상궁의 시주로 1884년에 진철(震徹), 축연(竺衍) 등이 그
린 것으로 세밀한 필선(筆線)과 정교한 문양 표현, 금니(金泥) 사용 등이 주목된다. 그리고 나
한도에 나와있는 경물(景物)은 당시에 유행하던 민화풍으로 그려져 있어 그 시절 회화 연구에
착한 자료가 되어준다.


▲  진관사 독성전(獨聖殿)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4호

칠성각 옆에 자리하며 나한전을 바라보고 있는 독성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아주 단촐한 맞
배지붕 건물이다. 부처의 제자로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보금자리로 2006년까지만 해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독성각이라 불렸으나 진관사에서 이 건물
에 대한 기대감이 큰지 각(閣)에서 전(殿)으로 등급을 높이면서 독성전이 되었다.

이 건물은 1907년에 지어진 것으로 상궁 4명과 부부 2쌍이 돈을 대주었다. 당시에 만들어진 독
성전 공덕기(功德記)에 시주한 사람과 공사 참여자 명단이 기재되어 있는데, 6.25때 운이 좋게
살아남았으며, 1969년에 진관이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그만 내부에는 소조독성상을 비롯해 독성도, 산신도 등이 있는데, 모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독성상과 독성도는 유리로 봉해져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다.


▲  소(塑) 독성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1호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2호

▲  작고 귀여운 소 독성상의 위엄

독성전의 주인장인 독성상은 흙을 빚어서 만든 것으로 인형처럼 귀엽고 아담한 모습이다. 눈썹
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입술은 살짝 다물고 있으며, 입술 위에 엷은 수염이 있다.
눈은 양쪽으로 길게 뜨고 있고, 표정은 동자승을 모델로 만든 듯, 천진난만해 보인다. 이는 독
성의 존재가 백성들에게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왼쪽 어깨에는 옷을 고정한 금구장
식(金具裝飾)이 있으며, 몸통에 비해 얼굴이 좀 크고 무릎이 매우 낮아 신체가 다소 길어 보인
다.
19세기(이르면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고색이 묻힌 독성상이 꽤 많은 것 같지만 정작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는 거의 없어 진관사의 독성상은 꽤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당시 독성
상의 특징과 조각 수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지방문화재자료의 지위를 얻었다.

독성상 뒤에 걸린 독성도는 독성을 비롯하여 시자(비서)와 동자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와 인연이 깊은 천태산으로 보이는 돌봉우리가 여러 개 보이고, 동자 옆에는 소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그림 폭이 2m에 이르러 우리나라 독성도(독성탱) 가운데 제법 큰 편에 속한다. 이 그
림은 1907년 상궁 이씨와 홍순모(洪淳謨)의 시주로 경기도에서 활약하던 화승(畵僧) 경선당 응
석(慶船堂 應釋)이 그린 것으로 채색이 전체적으로 탁해 보이며, 같은 독성인데도 그림에 나온
독성과 앞에 있는 독성상의 모습이 너무 차이가 나 마치 독성의 한참 때 시절과 늙은 시절을
사이좋게 담은 것 같다.


▲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9호

진관사는 독성전과 칠성각을 갖추고 있지만 유독 산신의 건물인 산신각을 갖추지 않았다. 그래
서 독성전 한쪽에 조촐하게 그의 공간을 마련했다.
산신도에는 유난히 빨간 옷을 입은 산신(山神)과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데, 민
화에 나오는 호랑이 이상으로 너무 익살스럽고 귀여워 정말 쓰다듬고 싶다. 그의 긴 꼬랑지는
산신 왼쪽에서 살랑살랑 춤을 춘다. 산신은 인심 좋은 구멍가게 노공(老公) 같으며, 산신도(산
신탱)에 기본으로 등장하는 산은 나와있지 있고, 배경은 그냥 여백으로 남아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자세한 제작시기와 시주자, 화승에 대한 정보는
아쉽게도 전해오지 않는다.


▲  칠성각(七星閣)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3호

독성전 옆에 자리한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1911년에 지어
진 것으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서울, 경기도 지역의 사찰 건물에서 많이 나타나는 건
축 양식인 좌/우/후면을 벽돌로 처리한 화방벽(火防壁)이 설치되었다.
내부에는 석불좌상과 칠성도, 명호 스님 초상화 등이 있으며, 2009년 5월 칠성각을 해체/보수
했을 때 태극기와 독립신문류 등이 발견되어 속세를 한참 떠들썩하게 했다. 


▲  칠성각 석불좌상(石佛坐像)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0호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7호

▲  귀여움이 묻어난 칠성각 석불좌상의 위엄

유리로 봉해진 칠성각 불단에는 아기부처를 닮은 아주 조그만 불상이 앉아있어 보는 이로 하여
금 마음의 편안함을 안겨준다.
이 불상은 옥석(玉石)으로 만든 것으로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으며, 1969년에 진관이 개금(改金
)을 입혔다. 불상의 크기를 봐서는 천불상(千佛像)의 일원으로 조성되었다가 따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여겨지며, 이런 불상은 서울과 경기도 북부, 강원도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불상의 머리는 나발로 머리 윗부분에는 육계(肉髻, 무견정상)가 완만하게 튀어나왔으며, 앳되
고 귀여운 인상으로 내가 친견한 불상 가운데 제일 편안하고, 귀여우며. 근엄하지도 무섭지도
없는 온화한 표정이다. 불상의 양손은 손의 바깥부분이 보이도록 다리에 대고 있는데, 그 의미
는 모르겠다. 저건 도대체 무슨 수인(手印)일까?

석불좌상 뒤에 걸린 그림은 칠성도로 1910년 춘담(春潭), 범천(梵天) 등이 그린 것이다. 그림
중앙에는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심으로 칠성(七星)과 성군(星君) 등이 있다. 청련화(靑
蓮花) 위에 앉은 치성광여래는 붉은 법의를 입고 오른손은 가슴 부위에, 왼손은 무릎 위에서
금륜을 얹고 있으며, 그 좌우에는 7구의 칠성이 여래를 향해 합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밑에
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여의(如意)를 들고 있는데, 일광은 붉은 해를,월광은 하얀 달이 그려진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그 옆에는
도교식으로 표현된 칠원성군(七
元星君)이 홀을 들고 서 있다.

이 그림은 두터운 설채법(設彩法), 붉은 적색의 주조색(主調色)에 감색과 녹색이 조금 섞인 채
색, 등장 인물 얼굴에 칠해진 두터운 호분(胡粉) 등의 표현에서 20세기 초반 불화 양식을 보여
주고 있으며, 조성 연대와 그림을 그린 승려 등이 나와있고 서울에서 보기 드문 칠성도(七星圖
)의 작례(作例)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명호스님 초상(肖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8호

석불좌상과 칠성도 옆에는 독특하게도 승려의 초상(영정)이 걸려있다. 초상의 높이는 106.2㎝,
폭 83㎝로 그림 왼쪽 상단에 세로로 '影入山水圖 數珠看經(영입산수도 수주간경)~'으로 시작되
는 4줄의 찬시(讚詩)가 있고, 오른쪽 상단에는 한글로 '인사졀명호불영뎡'이란 문구가 있어 인
수사(또는 인사사)에 있던 명호의 영정으로 여겨진다.
그림 중앙에는 경상(經床)을 앞에 두고 정면을 향한 채 결가부좌한 승려의 모습을 가득히 그렸
는데, 그의 옆으로 불자(拂子)와 두루마리를 든 시자를 배치해 3존형식을 이루었다. 이러한 3
존 형식의 영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것으로 크게 주목된다.
허나 그림의 제작시기와 그린 사람의 정보, 명호란 인물의 대한 기록과 인수사의 위치, 진관사
에 흘러들어온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그림에 속사정은 알 수 없으나 그림 구도와 채색으로 미
루어볼 때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3존 배치와 찬시, 한
글 제목 등은 다른 불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  90년 만에 햇살을 본 빛바랜 태극기 - 등록문화재 458호

2009년 5월 칠성각을 해체 보수했을 때 불단 내부와 벽체 사이에서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 독립
운동 관련 자료 6종 21점이 발견되어 속세의 진한 주목을 받았다. (이때 대들보에서도 칠성각
상량문이 발견되어 1911년에 지어졌음이 밝혀졌음)
이들은 진관사와 인연이 깊던 백초월(白初月, 1878~1944)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사용한 것
으로 여겨지는데, 독립신문과 자료들은 태극기에 포근히 감싸인 채로 발견되었다.
이렇게 90년 가까이 칠성각에 꽁꽁 숨겨진 것은 왜정의 탄압을 피하기 위함으로 보여지며, 기
나긴 세월 동안 광합성 작용을 받지 못했지만 빛이 좀 바랜 것을 빼고는 대체로 양호하여 알아
보는데 그리 지장은 없다. 단순해보이면서 심오한 뜻이 가득 깃든 태극기를 보니 그동안 진관
사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가슴 뭉클함이 솟아 오른다.

태극기는 가로 89cm, 세로 70cm의 면직물에 바느질되어 있으며 중앙에 32cm 직경의 태극문양이
있고, 건과 곤, 감, 리의 4괘가 갖추어져 있다. 4괘의 위치가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
위원회가 제정한 국기 양식의 4괘와 동일하나 현재와는 위치가 달라 태극기 변천사에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진관사가 서울 지역 불교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음을 살짝 귀뜀해 준다.

태극기 안에 담긴 독립신문류는 신대한<(新大韓), 신채호(申采浩)가 창간한 신문> 3점, 독립신
문<(獨立新聞),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 4점,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 천도교에서 3.1운
동 당시 발행한 신문> 5점, 자유신종보(自由晨鍾報) 6점, 경고문(警告文) 2점으로 이중 자유신
종보는 이번에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진 매우 신선한 자료이다. 신문마다 태극기 도안과 태
극기와 관련된 내용이 게재되어 있고, 경고문은 독립에 대한 확신으로 끝까지 독립투쟁을 하자
고 호소하는 문서이다.
이렇게 귀중한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같은 곳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것에 그 의미가 크며, 1919
년 3.1운동 이후 12월까지 조선과 우리의 옛 땅인 중원대륙에서 펼쳐진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보충해주는 중요 자료로 그 가치가 높다. 현재 태극기는 칠성각에 공개하고 있으며, 독립신문
과 기타 문서는 비공개이다, ('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란 이름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됨) 2010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진관사 태극기' 특별전에 이들이 처음 속세에 공개
되었으며, KBS에서 3.1절 특집으로 '초월의 비장, 진관사 태극기'를 방영하기도 했다.

이 태극기를 사용했던 백초월은 만해 한용운(韓龍雲)에 비견되는 항왜(抗倭) 승려로 3.1운동
이후 진관사에 주로 머물며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44년 왜정에 체포되어 그들의 잔인한 고문
끝에 광복을 1년 앞둔 청주교도소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진관사 뒷쪽에 숨겨진 서울 제일의 명품 계곡 ~ 진관사계곡

▲  진관사계곡에서 만난 1번째 폭포 (폭포 이름은 없음)

진관사에 왔다면 경내만 살피지 말고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발품을 조금 팔아서 절 뒷쪽 계곡에
도 한번 올라가보자. 그렇다고 많이 올라갈 것도 없다. 조금만 가면 윗 사진의 폭포가 나오고,
여기서부터 금강산과 설악산도 질투할 정도로 1품급 경관이 펼쳐져 중생의 정처없는 마음을 단
단히 앗아갈 것이다.

진관사계곡(진관천)은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서 있던 비봉(碑峰) 북쪽에서 발원해 진관
사를 끼고 창릉천(昌陵川)으로 흘러가는 북한산 서쪽 계곡의 하나로 북한산성 안에 자리한 북한
산성계곡, 개연폭포 주변과 견줄 정도로 국보급 계곡을 자랑한다. 북한산에서 가장 빼어난 수준
의 계곡이자 서울 장안 으뜸의 계곡으로 키 작은 폭포가 주렁주렁 달려있어 경관을 크게 돕는다.
이들 폭포는 아직까지는 속세에서 지어준 이름이 없다.

1번째 폭포를 시작으로 대자연 형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그림 같은 절경이 가히 숨을 질리
게 하는데, 1번째 폭포 윗쪽부터는 계곡 접근이 가능하여 여름 제국에 저항하며 피서를 즐기는
이들로 봐글봐글하다. (폭포 밑에서 진관공원지킴터 구간 계곡은 접근 통제)
우리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속세에서 가져온 먹거리로 황제 못
지 않은 간식 시간을 가지며 거울처럼 맑은 못에 꼬질꼬질한 발과 다리를 담구었다. 마음 같아
서는 온 몸으로 진하게 계곡과 스킨쉽을 즐기고 싶지만 여벌의 옷을 갖추지 않았다.


▲  물이 지그재그로 흐르는 2번째 폭포 주변

▲  장대한 세월의 거친 주름이 그어진 90도 벼랑과 계곡
벼랑 밑에 폭포와 좁은 목이 있다. 수심은 얕으나 큰 비가 내려 계곡이
잔뜩 흥분한 직후에는 조심하는 것이 좋다.
 

진관사계곡 산길은 1번째 폭포를 조금 지나 2번째 폭포 직전에서 계곡 북쪽으로 펼쳐지는데, 경
사가 각박한 벼랑길을 올라가야 된다. 다행히 2015년에 길을 크게 순화시켜 통행이 한결 편해졌
는데, 산보다 계곡이 주목적이라면 계곡을 따라 가는 것도 괜찮다. 중간중간 머물 자리도 많고,
계곡의 속살을 깊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이름난 계곡은 여기 외에도 북한산 삼천리골(삼천사계곡)과 불광사계곡, 구기동계곡, 소
귀천계곡, 구천계곡(구천폭포, ☞ 관련글 보러가기), 동령폭포, 도봉산(道峰山) 무수골과 문사
동계곡, 도봉계곡, 북악산 백사실(백사골), 수락산 벽운동계곡, 관악산 암반천계곡 등이 있다.


▲  40~45도 기울어진 하얀 피부의 벼랑과 그 밑을 흐르는 진관사계곡
우리는 등산로에서 40도 벼랑을 타고 내려와 이곳에 자리를 피고 조촐하게
피서를 즐겼다. 끝없이 넓은 여름 제국에 대항하며 머문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임시 낙원이었다.

▲  40도 벼랑 밑에 숨겨진 청정한 못
하늘나라 선녀 누님들이 살짝 몸을 씻는 곳은 아닐까? 달님이 천하를 희미하게
비출 때 몰래 잠입하여 그들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고 싶다.

▲  장쾌하게 쏟아지는 40도 벼랑 밑 폭포의 위엄
하얀 명주를 급하게 늘어뜨린 듯, 폭포수의 기세가 대단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귀신이 다 도망칠 정도이다.

▲  진관사계곡 90도 벼랑
단양 사인암(舍人巖, ☞ 관련글 보러가기)의 축소판일까? 산길에서 보는 것보다는
계곡 40도 벼랑에서 보는 모습이 훨씬 장관이다.

▲  40도 벼랑에서 바라본 진관사계곡 최상류와 비봉 능선
마음 같아서는 더욱 깊숙히 파고들고 싶지만 이후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맡기며 여기서 길을 접었다. 다음에 오면 계곡 끝까지 꼭 올라가보리라~~~!

▲  다시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다. (진관사 앞 길)
이렇게 하여 명품 계곡을 겯드린 진관사 여름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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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듬직한 뒷산, 북한산~북한산성 겨울 산행 (태고사, 행궁터, 대남문, 문수사)

 


' 북한산(삼각산) 겨울 나들이 '

태고사 원증국사탑
 태고사 원증국사탑


 


겨울이 한참 제국(帝國)의 위엄을 보이던 12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
이자 나의 즐겨찾기 뫼인 북한산(삼각산)을 찾았다.

북한산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과 그의 위성도시인 경기도 고양(高陽)시를
끼고 있는 수도권 굴지의 자연 명소이자 이 땅의 주요 국립공원(國立公園)이다. 번잡한 지역
에 누워있다보니 본의 아니게 탐방 수요가 엄청난데 1㎢당 탐방밀도가 무려 5만 명으로 탐방
밀도 분야 세계 기네스북 1위를 거머쥐고 있다. 또한 산 전체가 국가 명승 10호로 지정 되어
있어 북한산(삼각산)의 위엄을 한층 실감케 한다.

오전 11시, 구파발역(3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북한산 등산객과 예비군들의 오랜 벗인 서울
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을 타고 북한산성입구로 이동했다. 주말이라 버스는 등
산객들로 완전 짐짝수송을 이루었고, 버스는 만원의 기쁨을 누리며 간신히 육중한 네 바퀴를
굴려 북한산성입구에서 승객 7할 이상을 쏟아낸다.

북한산성입구에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북한산성계곡(북한천) 하류를 따라 수구문(水口門
)터, 서암사(西巖寺)터를 거쳐 옛 북한동(北漢洞) 마을에 이르렀다.
북한동은 북한에 있는 동네가 아니라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둥지를 틀었던 산골마을로 북
한산성이 조성되면서 형성된 오래된 마을이다. 지금의 마을은 조선 중/후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주로 군사들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다. 마을은 북한동역사관에서 멀리 태고사 근처까
지 형성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100호 이상의 집이 존재했다.

1910년 이후, 왜정의 고의적인 북한산성 방치와 잇따른 자연재해로 인하여 마을이 다소 피해
를 입었으며, 산성 안에 둥지를 틀던 5개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산성(山城) 내부를 관리했다.
당시 주민들은 나무를 땔감으로 팔거나 과실을 팔며 생계를 꾸렸는데, 이중 살구와 감은 북
한동의 특산품이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인근 사람들이 산성 안으로 많이 피신을 했는데, 북한군 1개 연대가 이곳
에 들어와 숲을 죄다 불태우며 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보였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는데 주민들의 궁핍함을 보고
는 이곳을 유원지로 개발시키기로 했다. 처음에는 대성장, 팔경정 두 곳만 식당 허가가 났으
나 주민들의 항의로 1974년 원하는 집에 죄다 식당 허가를 내주었고, 그로 인해 식당과 등산
용품 가게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마을 사람들은 등산/탐방객을 상대로 음식 장사와 산에서 채집한 나물 등으로 생계를 꾸렸는
데, 그들의 무분별한 장사로 인해 계곡이 오염되고 자연이 훼손되는 등, 계속 말썽이 생기자
골머리를 앓은 행정당국은 북한산을 보존하고 계속되는 민원을 해소하고자 아예 마을을 폭파
시키기로 결정, 2001년부터 마을 강제 이주를 단행했다.
처음에는 주민들의 반대도 많았지만 보상도 심심치 않게 해주었고, 산성 밑에 자리까지 제공
하면서 북한동 마을 55가구는 오래 숙성된 터전을 버리고 모두 그곳으로 이주했다.

그들이 모두 떠나자 북한산성계곡의 오랜 옥의 티였던 집과 식당을 모두 밀어버리고 주변 생
태계를 복원했으며, 옛 마을의 중심지에는 북한동 역사관을 지어 세월의 저편으로 강제로 흘
러간 북한동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솔직히 마을이 없어지니 좀 허전하기는 하지만 마을로 인해 망가졌던 주변 자연 경관이 활짝
피어나니 분위기는 더 밝아진 것 같다. 대신 먹을거리는 북한산성입구나 서울 시내에서 미리
사와야 되는 수고로움이 있으나 그거야 조금 부지런을 떨면 쿨하게 해결된다. 솔직히 마을에
있던 식당의 음식과 간식 가격은 시내보다 좀 비쌌다.

 


♠  보우대사(普愚大師, 원증국사)가 세운 고려 후기 고찰
~ 북한산 태고사(太古寺)


▲  태고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이 암자에 내가 살지만 나도 잘 몰라
                         깊으디 깊고 빽빽하지만 옹색하지 않아
                         하늘과 땅을 모두 가두었으니 앞과 뒤가 있을 리 없고
                         동서남북 어디라도 머물지 않네

               * 보우대사가 태고사에 머물며 지은 태고암가(太古庵歌)의 한 수


북한동역사관에서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중성문(中城門), 노적사(露積寺)입구, 중흥사(重興寺)터
를 거쳐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태고사를 찾았다.

태고사는 1341년 원증국사(圓證國師 = 보우대사)가 창건하여 태고암(太古庵)이라 하였다. 이후
400년 동안 마땅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으며, 18세기 중반인 숙종 시절에 북한산성을 정비하고
산성 안에 사찰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면서 다시금 수면 위로 오르게 된다. 당시 태고사에는 경
서(經書) 출판용 목판 5,700여 매와 활자 11두(斗), 그리고 화약용 흑탄 1,600여 석이 비축되었
으며, 절의 규모는 131칸에 이르렀다.
허나 1915년 대홍수와 산사태, 6.25전쟁으로 말끔히 파괴된 것을 1964년 청암(靑岩)이 중창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절의 규모가 조촐해 산중암자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해도 700년 가까이 꾸준히 명맥을 유지했던 북한산성 내부에 몇 안되는 전통 토박
이 사찰로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요사(寮舍)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한참 후배인 인근의 노적사보다 상당히 빈약해 노적사의 부속암자로 착각하기 쉬울 정도이다.
하지만 오랜 사찰에 걸맞게 원증국사탑비와 원증국사탑 등 국가 보물을 무려 2점씩이나 간직하
고 있어 이곳의 높은 명성을 살짝 귀뜀해준다. 그 외에 조선시대 부도 3기가 산신각 부근에 있
고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오래된 귀룽나무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하다.

4발 수레도 감히 들어올 수 없는 첩첩한 산중이라 비록 등산의 수고로움을 거쳐야 접근이 가능
한 곳이지만 서울 시내에서도 가까우며. 노적사와 마찬가지로 한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
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깊은 산골이라 산새도 넘어오기 힘들고, 제아무리 독종인 번뇌라고
해도 산이 깊고 험해 따라오다가 졸도를 할 정도이다. 그윽한 풍경소리만이 적막에 잠긴 경내를
잔잔히 쓰다듬어주며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무거운 번뇌와 잠시 이별하고 싶을
때 며칠 조용히 묻히고 싶은 곳이다.

※ 북한산 태고사 찾아가기 (2015년 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에서 34,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북한산성입구 하차. 주말
  과 휴일에는 8772번 주말임시노선(8~18시까지 10~15분 간격)이 추가 운행된다.
* 서울역(1,4호선 4,9-1번 출구)과 을지로입구역(2호선 3번 출구), 광화문역(5호선 7번 출구),  
  서대문역(5호선 4번 출구), 홍제역(3호선 2번 출구), 불광역(3,6호선 8번 출구)에서 704번 시
  내버스 이용
* 승용차 이용시 북한산성입구 주차장을 이용해야 되며, 산성 내부까지 차량 접근 불가
* 북한산성입구 정류장 → 대서문 또는 서암사터 → 북한동역사관 → 중성문 → 중흥사터 →
  → 태고사(약 5km, 1시간 40분)
* 북한산성 동장대와 용암문 사이에 봉성암, 태고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음
* 매년 음력 9월 22일에 보우대사 헌다식(獻茶式)을 거행한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5 (대서문길 406 ☎ 031-384-5589)


▲  겨울에 잠긴 태고사 귀룽나무 ~ 고양시 보호수 17호

태고사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훤칠한 키의 귀룽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귀룽나무는 이 땅에
서 매우 희귀한 나무로 매년 3월 말이나 4월 초에 나무 전체에 새하얀 꽃이 가득 피어난다. 태
고사에 무수히 발을 들였지만 정작 하얀 꽃으로 치장된 그의 모습은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그
꽃의 자태가 마치 하얀 눈과 비슷하다고 한다.
나무의 나이는 약 160년, 키 23m, 허리둘레 2.3m에 이르며 다른 나무와 마찬가지로 겨울의 제국
에게 모든 것을 공출당하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소쩍새가 울 봄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비각(碑閣)

  태고사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 - 보물 611호

대웅보전 좌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높다란 비각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태고사 제일의 보
물인 원증국사탑비가 남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둥지를 텄다. <태고사 대웅보전은 서향(西向)임>

탑비의 주인공인 원증국사는 고려 후기를 주름잡던 고승(高僧)으로 1301년 귀족 가문인 홍주홍
씨(洪州洪氏) 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비는 홍연(洪延), 어미는 정씨로, 13살에 양주 회암사
(檜巖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도했다.
1325년 승과(僧科)의 하나인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했으나 선수행을 위해 과감히 포기하고 용문
산 상원사(上院寺)를 거쳐 감로사(甘露寺)에서 계속 불도에 정진했다. 그 이후 북한산 중흥사에
들어와 1341년 절 동쪽에 태고사를 지어 머물며 그 유명한 태고암가(太古庵歌)를 지었다.
1346년 원나라로 넘어가 임제종(臨濟宗) 18대 법손(法孫)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어받
았으며. 원나라 황제 순제(順帝)의 초청을 받아 반야경(般若經)을 강설(講說)하기도 했다.

1348년 귀국하여 경기도 광주(廣州)에 머물며 일가친척을 죄다 이곳으로 소환하여 살게 했는데,
광주를 현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광주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1356년 공
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원융부(圓融府)에 머물며 승려의 임명권을 장악, 고려 불교계의 1인
자가 되었으며, 이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통합을 주장했다. 허나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신뢰
하면서 보우대사를 멀리하게 되는데 신돈은 그를 심하게 견제하여 속리산(俗離山)의 어느 암자
에 연금까지 시켰다.
신돈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이후, 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려 했으나 자신을 박대했던 감정 때
문인지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1381년 양산사(陽山寺)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때 우왕(禑王)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임명되었으며,
1382년 소설사(小雪寺)에서 열반에 드니 그의 나이 81세, 법랍(法臘) 68세이다. 우왕은 그에게
원증(圓證)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탑호(塔號)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다.

오랜 세월의 무게와 웅장한 멋이 풍기는 이 탑비는 13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碑文)은 고려
3은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이색(李穡)이 썼으며, 거북 등의 귀부(龜趺)를 초석으로 삼아 비신(
碑身)을 세우고 그 위를 이수(螭首)로 마무리지었다.

탑비를 보호하는 비각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높다란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
을 1980년에 복원했다. 참고로 원증국사의 탑과 탑비는 그와 인연이 깊던 용문산 사나사(舍那寺
)에도 있으며, 그의 사리를 2등분하여 태고사와 사나사에 봉안했다.
<사나사 답사기 보러가기 ☞
글보러 가기>


▲  원증국사탑비의 귀부(龜趺)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표정이 밝아 보인다. 그의 왕눈이 눈과
세모난 코는 700년의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들이 배여 있으나
그의 미소 만큼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  청암대종사(靑岩大宗師) 부도

원증국사탑비 곁에는 새롭게 청암대종사 부도가
뿌리를 내렸다. 청암은 1964년 태고사를 중건했
던 승려로 지금의 태고사가 있게 한 인물이다. 그는 2009년에 입적했는데, 태고사 창건주의 비
석 옆에 자리를 만들어 나란히 기리고 있다.


▲  원증국사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태고사 산신각(山神閣)
산신(山神)을 봉안한 공간으로 특이하게도 돌과 바위로 건물을 지었다.

▲  채색된 산신각 산신도(山神圖)

산신각 내부는 현대적인 조명시설이 없어 조금은 어둡다. 다행히도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촛불
들의 희생으로 산신도를 보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다.

산신도는 바위를 쪼아서 그린 벽화로 예전에는 흑백모드였으나 나중에 채색을 하여 칼라모드가
되었다. 색이 입혀져서 예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지만 그려진 폼은 좀 별로인 것 같다.
꼬랑지를 강하게 쳐들며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모습은 제법 용맹이 깃들여져 보이며, 하얀 긴
수염을 지닌 산신이 멀뚱한 표정으로 호랑이 앞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자(童
子)가 찻잔을 들고 서 있는데, 동자라 하기에는 너무 연세가 지긋하게 보인다. 그래서 내가 일
행들에게 우스개 소리로
'저 찻잔을 든 사람은 원래 산신이었는데, 산신들간의 경쟁에 밀려 산을 말아먹었다. 그래서 먹
고 살고자 저 산신의 비서로 취업한 것이다'


▲  석종형(石鐘形)부도 3형제
산신각 뒤쪽 숲속에 숨어 있는 석종 모양의 부도로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고색의 무게를 간직하며 양지 바른 곳에 나란히 있는 모습이 정겹다.

▲  태고사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 - 보물 749호

태고사 경내에서 산신각을 거쳐 뒤쪽(봉성암 방면)으로 2분 정도 오르면 수려한 모습의 원증국
사탑을 만날 수 있다. 이 탑은 앞서 언급한 보우대사의 사리가 담긴 부도로 그가 입적(入寂)하
자, 태고사에 사리를 봉안하고 일부는 용문산 사나사로 보내 탑을 만들어 봉안했다.

그는 열반에 들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시를 남겼는데. 그도 죽기 전에야 인생무상을 뼈저
리게 느꼈던 모양이다.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人生命若水泡空
    팔십여 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八十餘年春夢中
    죽음에 이르러 이제 가죽포대 버리노니   臨終如今放皮袋
    둥글고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一輪紅日下西峰

이 부도는 기존의 고려시대 부도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유명한데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그 위에 마치 조그만 부도가 들어앉은 듯한 지붕돌을 두었으며, 그
위에 다시 특이한 모습의 머리 장식을 얹었다.


▲  꽃무늬로 정신이 없는 원증국사탑 기단부

기단의 밑 부분에는 정교한 꽃무늬가 잔뜩 새겨져 있으며 8각의 가운데 받침돌에는 기둥무늬와
꽃무늬로 가득하다. 탑의 조성 시기는 1385년 무렵으로 멋드러진 탑의 모습을 통해 고려 조정의
보우대사에 대한 신뢰와 제자들의 지극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 원증국사부도만이 외로이 서 있었으나 근래에 이르러 어느 승려의 탑을 그 밑
에 나란히 세워 놓았다. 이곳에 탑을 세울 정도면 청암대종사와 더불어 태고사 발전에 크게 기
여했던 승려가 분명하다.

아래쪽 부도는 보우대사에 대한 존경과 일편단심을 표하려는 듯, 원증국사탑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모습도 많이 비슷하다. 특히 충주 정토사(淨土寺) 부도탑과 상당히 비슷한데 시원스레 올려
진 지붕돌의 처마가 꽤 인상 깊다.


▲  오랜 세월을 뛰어넘은 원증국사탑과 새로운 부도탑

 

 


 

♠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내부에 세운 비상용 행궁
북한산성행궁터(北漢山城行宮址) -
사적 479호

▲  행궁 외전터

중흥사터에서 북한산성계곡을 거슬러 15분 정도 가면 행궁터를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여기는
행궁의 외곽 부분으로 남장대(南將臺)로 가는 서남쪽 산길을 꾸준히 오르면 행궁터가 계속 펼쳐
지면서 지금은 주춧돌로 변한 외전터와 내전터가 모습을 비춘다.
행궁(行宮)이란 비상시나 지방 시찰 때 제왕이 머무는 공간이다. 대표적인 조선 때 행궁으로 화
성(華城) 행궁, 온양온천(溫陽溫泉) 행궁, 남한산성(南漢山城) 행궁, 그리고 북한산성 행궁 등
이 있었다.

북한산성 행궁은 1711년(숙종 37년) 북한산성 보수공사를 맡은 김우항(金宇杭)이 국가 비상시 
머물 수 있는 행궁을 세울 것을 건의하면서 조성되었다. 행궁과 더불어 경리창상창, 금위영, 호
조창(戶曹倉), 어영청(御營廳) 등 여러 관청이 행궁 밑에 빼곡히 지어지면서 북한산성계곡 상류
는 그야말로 조그만 도시를 이루었는데, 이는 위급시 이곳으로 피신하여 비상작전을 수행할 임
시 수도의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행궁의 규모는 124칸 정도로 제왕의 생활공간인 외전(外殿)과 왕비의 거처인 내전(內殿)으로 이
루어졌다. 또한 행궁을 동서로 가르며 조그만 계곡이 북한산성계곡으로 흘러가는데 이를 일종의
금천(
禁川)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행궁에 버금갈 정도로 잘 지어졌으나 정작 제왕들
은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 그럴만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상 행궁이라 조선이 천하를 다스릴 때는 그런데로 유지가 되었으나 왜정
이후, 방치에
가까운 관리소홀과 1915년 대홍수로 건물들은 하염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6.25를 겪으면서
나머지 남은 것들도 말끔히 붕괴되어 건물을 떠받들던 주춧돌만이 앙상하게 남게 되었다.

현재 행궁터에는 내전과 외전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축대 일부, 좌우의 담장터 등이 남아 있고
기와조각들이 어지러히 널려 옛날을 그리워한다. 특히 내전터에는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주춧돌이 있고 기단과 석축이 남아 있는데, 성능대사가 작성한 '북한지(北漢誌)'에는 '좌우상방
2칸, 대청 6칸, 사면퇴 18칸, 도사 28칸'
이란 기록이 있어, 정면 5칸, 옆면 2칸 건물에 사방 1
칸씩을 덧단 구조의 전각으로 여겨진다.

행궁터 북쪽 구석에는 잘생긴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피부에 활을 건다는 뜻의 '게궁암(揭弓岩)
' 바위글씨가 있었다. 1992년 겨울, 부친(父親)과 왔을 때 본 기억이 있어 누렇게 뜬 수풀을 비
집고 들어가 보았으나 내가 별로 달갑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새 훼손되어 없어졌는지 결국 만나
지 못했다.


▲  1904년경 북한산행궁의 모습 (문화재청 사진)


▲  수풀에 뒤덮힌 행궁터

북한산행궁은 산자락에 터를 닦았기 때문에 돌로 축대를 다져 건물을 지었다. 비록 행궁의 한계
로 서울 궁궐보다는 훨씬 작게 지어졌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규모는 아니다. 124칸이면 사대부나
부자의 고래등 기와집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던 행궁은 제대로 역할도 하지 못한 채, 마치 아틀란티스 대륙이 쏙 사라진 것처럼 나
무와 수풀의 조그만 나라가 되어 옛터만 황량히 남아있으니 역시 인간의 창조물은 그 아무리 대
단하고 견고하다 한들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먼지에 불과하다.


▲  행궁 내전터 ▼

내전터 한쪽에는 조그만 우물이 있다. 아마도 행궁에 물을 공급했던 우물일 것이다. 대머리처럼
허전하기 그지없는 옛터에는 주춧돌과 축대를 이루던 돌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누렇게 익으며
인생의 말년에 다다른 낙엽이 그 빈 공간을 따스하게 덮어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인간의 부질없음이 담긴 공허한 북한산성행궁터는 고양시와 문화재청에서 복원계획을 가지고 있
으나 워낙 첩첩한 산골이라 공사가 그리 여의치가 않다. 다행히 이곳은 생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놓아 복원에는 문제는 없겠으나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므로 무리하게 벌이
지말고 지금 이대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듯 싶다. 폐허의 현장에서 마음껏 상상의 스케치를 해
보는 것도 답사에 좋은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행궁터에서 실타래처럼 이어진 서쪽 산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남장대터가 나온다. 이곳은 북한
산성 안에서 가장 높은 측에 속하는 해발 700m 고지로 산성 내부와 북한산성 산줄기가 훤히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이 천하 일품이다.

※ 북한산성행궁터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북한산성입구 정류장 → 대서문 → 북한동역사관 → 중성문 → 중흥사터 → 태고사입구 → 행
  궁터 (약 6km, 2시간)
* 대남문과 청수동암문에서 행궁터로 접근해도 된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69일대


▲  경리청상창터(經理廳上倉址)와 북한산성계곡 등산로 ▼

북한산성행궁터 입구에서 대남문 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커다란 돌이 박힌 거대하
고 긴 석축이 마중한다. 이곳은 곡식을 보관하던 경리청상창의 옛터로 축대를 이루는 돌이 행궁
터보다 더 장대하여 비록 터만 남았음에도 위엄이 진하게 돋보인다.

경리청상창은 숙종 시절에 북한산성을 보수하고 비상용 행궁과 여러 관청을 지을 때 세워진 양
곡 창고로 '팔비헌'이란 현판이 있었다. 상창(上倉)은 창고 63칸, 내아(內衙) 12칸, 집사청(執
事廳) 3칸, 군관청(軍官廳) 4칸, 서원청(書員廳) 4칸 등 총 86칸 규모로 북한산성 행정업무를
보던 관성소(管城所)를 같이 두었으며, 행궁을 관리하는 관성장(管城將)이 근무했다.

북한산성의 양식 창고는 상창 외에도 호조창(戶曹倉)과 중창(中倉), 하창(下倉), 그리고 평창(
平倉) 등이 있었으며, 상창은 19세기 후반에 파괴되어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  잡초만 무성한 경리청상창터 내부

▲  금위영이건기비(禁衛營移建記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87호

경리청상창터에서 대남문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길 왼쪽에 문화재 안내문이 손짓 할 것이다. 안
내문 안쪽에는 적당히 닦인 공터가 있는데, 그 오른쪽 구석에 바위에 비문(碑文)을 새긴 독특한
비석, 금위영이건기비가 수줍은 듯 자리해 있다.

금위영(禁衛營)은 병자호란 이후에 서울을 방어하고자 세운 5군영의 하나로 원래는 동소문(東小
門, 혜화문) 안쪽에 있었다. 허나 그 지대가 높고 무너지기가 쉬워서 1715년 북한산성 안 지금
의 위치로 이전하고 그것을 기리고자 이건기비를 세웠다. 비문은 당시 도제조(都提調)를 지낸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이 지었다.

이 비석은 서 있지 않고 길게 누워있는 형태로 화강암 바위면에 비문을 새겼으므로 마애비(磨崖
碑)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비문은 마멸된 부분이 많아서 정상적인 눈으로는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탁본을 해야 전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비석 뒷면은 흙에 묻혀있고, 비문 위쪽에는
낙수면(落水面)이 새겨진 지붕돌이 놓여져 있는데, 이곳의 청정함을 자랑하듯 푸른색 이끼 옷을
걸쳤다.

북한산성계곡 상류(중성문~대성암)가 말끔히 개방되기 이전이자 내가 꼬마 시절이던 1990년 이
비석을 보고는 매우 신기하여 이리저리 살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계곡 상류는 금지된 구역이라
군인에게 신분증을 맡기고 들어가야 했는데, 1992년 이후 개방되어 자유의 땅이 되었다.


▲  누런 잡초만이 가득한 금위영유영지(禁衛營留營址)

금위영이건기비 남쪽에는 금위영의 유영이 있던 공터가 있다. 서울에 있던 금위영을 1715년 이
곳으로 이전했는데, 금영(禁營), 금창(禁倉)으로도 불렸다. 허나 19세기 후반 북한산성에 대한
관리가 끊어지면서 주변의 여러 건물과 더불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  이끼의 보금자리가 된 금위영유영지 축대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 속에 모든 것이 씻겨 내려간 금위영유영터에는
주춧돌과 석축 일부만이 고개를 들며 지나간 세월을 그리워한다. 마치 옛날을 그리워하는 우리
네 인간들처럼 말이다.

* 금위영이건기비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32

 


♠  북한산성 대남문(大南門)과 보현봉 그리고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절집, 문수사(文殊寺)

▲  북한산성 대남문 - 사적 162호

금위영이건기비에서 대성암을 지나 20여 분을 오르면 북한산성 13성문의 하나인 대남문이 마중
한다. 이 문은 1712년에 세워진 것으로 도성(都城)과 산성을 잇는 중요한 문인데, 문을 경계로
안쪽은 경기도 고양시, 바깥쪽은 서울 종로구이다.

왜정 이후 홍예문만 남아있던 것을 1990년 이후에 문루를 복원했다. 이곳에 서면 가까이에 보현
봉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과 한강(漢江), 멀리 강남구와 동작구 지역까지 두 눈에 거침없이 들어
와 조망 하나는 천하 일품이다.

문을 나서서 직진하면 구기동과 평창동이며, 오른쪽으로 가면 고려시대에 창건된 조그만 산중암
자 문수사(文殊寺)가 나온다.


▲  대남문 앞에서 천하를 굽어보다.
서울 도심과 용산, 강남, 동작 지역까지 훤히 바라보인다.

▲  높은 하늘을 이고 천하를 응시하는 보현봉(普賢峰, 700m)의 위엄


▲  문수사 문수굴에 자리를 편 문수보살(文殊菩薩)

한칸 방 어찌 그리 너무도 고요한가, 일만 인연 모두 적막하네
길은 돌 틈으로 뚫고 가고, 샘은 구름 속에서 새어나네
밝은 달 처마 끝에 걸려 있고, 산들바람 숲 속에서 일어나네
누구 저 스님 따라, 고요히 앉아 참 낙을 배우려나

* 탄연(坦然)이 문수사에서 지은 시


북한산성 대남문을 나와서 오른쪽(서남쪽) 길로 3분 정도 가면 해발 640m 고지에 둥지를 문수사
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수사는 문수봉(文殊峰) 바로 밑에 터를 닦은 산사로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절이다. 북
한산에 안긴 절 가운데 가장 조망과 경관이 일품으로 경내에 있는 문수굴은 예로부터 영험 있는
기도처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 절은 1109년(고려 예종 4년) 탄연(坦然)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기암괴
석과 경관, 그리고 천연동굴(현재 문수굴)에 반해 절을 세우고, 문수암(文殊庵)이라 했다고 한
다. 1451년(문종 1년) 문종의 딸인 연창공주(延昌公主)가 중창했으며, 그 이후 500년 가까이 적
당한 자취를 남기지 못해 아마도 오래 못 가서 망한 것으로 보인다.
 
1921년 삼성각과 오백나한전을 중수했는데, 이 사실로 봐서는 이때 오랫동안 꺼진 법등(法燈)이
다시 켜진 듯 하다. 허나 6.25전쟁으로 한줌의 재가 되었으며, 1957년 신수(信洙)가 중건하고,
1983년에 주지 혜정(慧淨)이 삼성각과 나한전을 개축했으며, 2002년에 대웅전과 응진전(應眞殿),
요사 등을 새로 건립하여 지금에 이른다.

절 인근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던 그 유명한 비봉(碑峰)이 있다. 지금 순수비는 건
강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지만 그 비석에 '한성(漢城)을 지나 고개를 올라..(중략) 한
도인(道人)이 석굴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이 있어 그 석굴을 문수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절이 너무 높은 곳에 자리해 있어 오르기는 힘들지만 조망이 국보급이라 문인들이 많이 찾아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는데, 고려 중기 때 이장용(李藏用, 1201~1272)을 비롯하여 최립(崔岦,
1539~1612), 홍세태(洪世泰, 1653~1725) 등이 이곳을 거쳐갔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어머니가
가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이곳까지 찾아와 문수굴에 봉안된 오백나한에게 치성을 올려 이승만
을 낳았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이승만이 80 고령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올라와 '문수사' 현판을
남겼으며, 당시 승려와 찍었던 흑백사진도 아련히 절에 남아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三聖閣), 응진전, 요사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위치가 가파른 곳
이라 사세 확장도 어렵다. 대웅전 옆에는 문수사의 명물이자 지금의 문수사를 있게 한 문수굴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은 아쉽게도 하나도 없다. 다만 대웅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좌상이 명성황후
(明成皇后)가 시주한 것이라 하니 그게 제일 오래된 것이며, 대웅전 석가불은 영왕(英王, 영친
왕)이 봉안한 것이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고색의 때는 오래 전에 증발해서 사라졌으나 그 대신 천하 제일의 조망과 주변경
관을 품고 있어 그 아쉬움을 다소 달래준다. 경내에 오르면 가까이로 구기동(舊基洞)과 부암동
부터 서울 도심, 멀리 한강과 관악산(冠岳山)까지 보인다. 또한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곳이라
구름이 아래로 흘러가며, 공기 또한 속세와 틀리다.

서울 도심과도 무척이나 가까우며, 도심의 상징인 종로구에 있음에도 분위기는 180도 확연히 틀
리다. 구기동에서 2시간을 낑낑대고 올라야 이를 만큼 산행의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되지만 서울
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지붕으로 굳이 멀리 나갈 필요 없이 산중암자의 고즈넉함과 아늑함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  문수사의 명물 문수굴(文殊窟)

문수사 경내에서 눈여겨 볼 곳은 바로 문수굴이
다. 탄연이 이 굴에 반해 절을 지었을만큼 문수
사의 가장 소중한 꿀단지로 거대한 바위에 나
있는 자연동굴이다.
문수사를 거쳐간 승려들이 수도를 했던 곳이지
만 딱히 옛 흔적은 없으며, 1983년 주지 혜정이
동굴 입구에 목조로 문을 만들었다. 문에 걸린
'삼각산천연문수동굴(三角山天然文殊洞窟)'이란
현판은 달랑 29만원으로 악명이 대단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글씨이다.

동굴 내부에는 문수보살을 중심에 봉안했고, 좌
우로 나무로 만든 조그만 문수보살 20여기가 든
든하게 병풍이 되어준다. 예로부터 영험이 있는
기도처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이곳에 있던 오백
나한은 응진전(오백나한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수사를 이렇게 둘러보고 구기동으로 내려가
저녁을 먹고 산행을 마무리 지었다.

※ 북한산 문수사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1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212번(수색,은평차고지↔옥수동)시내버스를 타고 구기동 현대빌라나 승가사입구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시내버스를 타고 구기동 현대빌라나 승가사입구
  하차
* 산행코스 : 구기동(현대빌라, 승가사입구) → 구기분소 → 승가사갈림길 → 깔딱고개 → 문수
  사 (2시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2 (☎ 02-391-2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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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2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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