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에 해당되는 글 23건

  1. 2017.11.27 서울 도심의 꿀단지, 서촌 늦가을 산책 ~~~ 옥인동 박노수미술관,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기와집 흔적들
  2. 2017.09.15 짙푸른 숲과 조촐한 계곡을 간직한 도심 속의 싱그러운 쉼터, 북악산 삼청공원 ~~~ (말바위, 영무정, 한양도성. 삼청동길)
  3. 2017.08.16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숲과 계곡, 폭포, 옛 별서 유적이 어우러진 ~~ 부암동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4. 2016.11.25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무계원, 안평대군집터...)
  5. 2015.11.26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 늦가을 나들이 (숙정문~백악마루~창의문)
  6. 2015.08.13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계곡 (백석동천)
  7. 2014.11.10 늦가을이 아름다운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 성북동 산책 (최순우옛집, 삼청각, 북악산) 2
  8. 2014.04.09 풍경과 조망이 일품인 서울 도심의 상큼한 명소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9. 2013.08.04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 (백석동천, 백사골)
  10. 2013.04.26 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종로구 부암동 산책

서울 도심의 꿀단지, 서촌 늦가을 산책 ~~~ 옥인동 박노수미술관,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기와집 흔적들



' 늦가을 서촌 나들이 '

(박노수미술관과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집)


▲  박노수 가옥(박노수 미술관)의 뒷모습

▲  박노수 가옥 뒷쪽 굴뚝

▲  청운동에서 바라본 북악산


 


▲  옛 청휘각(晴暉閣)터 주변에서 바라본 서촌(西村)

서울 도심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서촌(웃대)은 경복궁(景福宮) 서쪽 동네를 일컫는다. <청계
천 이북이자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는 북촌(北村), 청계천 이남은 남촌(南村), 창덕궁 동부는
동촌(東村)이라 불림>
흔히 서촌이라 불리는 경복궁 서부는 옛날부터 웃대라 불렸으며 원래 서촌은 경희궁(慶熙宮)
과 서대문 주변 지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인왕산 동쪽까지 확장된 것이다. 또한 세종대왕이
통인동에서 태어난 인연(1397년 출생)을 내세워 2011년 이후에는 종로구청과 지역 주민 주도
로 새롭게 '세종마을'을 칭하고 있다.

서촌(웃대)은 왕족부터 양반사대부(士大夫)부터 내시와 상궁(尙宮), 의관(醫官), 역관(譯官)
등의 중인(中人)과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이 살았는데 그중 중인 계급이 많이 살았다. 또한 인
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을 병풍으로 두룬 아름다운 절경으로 인해 조선 초부터 도성(都城) 내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런 곳은 늘 귀족들이 군침을 흘리는 법이라 안평대군(安平大君,
세종의 3번째 아들)부터 이항복(李恒福), 정철(鄭澈), 권율(權慄), 김상용(金尙容), 김수항(
金壽恒), 추사 김정희(金正喜)에 이르기까지 많은 귀족들이 집과 별장을 지어 머물렀다.
특히 이곳은 도시와 자연이 경계를 맞닿은 도성의 변두리로 지금과 달리 필운대로와 신교동교
차로만 지나면 완전 자연에 감싸인 한적한 곳이었다. 게다가 궁궐과 육조(六曹) 등의 관청이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워 고위 관리들의 주택, 별서 장소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서촌의 이름난 명소는 겸재 정선(鄭敾)이 그의 노련한 손끝을 통해 그림으로 남겼는데, 그 화
첩이 장동(壯洞)8경첩으로 여기서 장동은 서촌의 일원인 청운동 지역의 옛 이름이다. 조선 후
기에는 중인이던 천수경(千壽慶)이 송석원(松石園)이란 시사(詩社)를 세워 중인들의 문학 공
간으로 키웠으며, 왜정(倭政) 이후에는 윤동주(尹東柱), 이상범(李象範), 박노수(朴魯壽), 이
상(李箱) 등 많은 시인과 화가들이 서촌에 안겨 주옥 같은 작품을 그려냈다.

서촌은 북촌만큼은 아니지만 한옥들이 제법 많이 남아있다. 대략 700여 채의 한옥이 옥인동과
누하동, 사직동, 체부동, 창성동 일대에 흩어져 있는데, 120년 이상 묵은 한옥은 하나도 없고
, 20세기 개량 한옥이 주류를 이루며 박노수 가옥 등의 양옥도 섞여있어 20세기 초/중반 서울
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옥이 많긴 하지만 북촌처럼 정식적으로 한옥마을을 칭하
고 있지는 않다. (비공식적으로 '서촌한옥마을'이라 불리기도 하며, 창성동 일대 한옥을 따로
'창성동 한옥마을'이라 불리기도 함)

조선 후기까지 북촌과 더불어 잘나가는 동네로 이름을 날렸던 서촌이지만 옥인동 일대에 고래
등 저택을 짓고 인왕산의 맑은 공기를 축내던 친일파 윤덕영(尹德榮)과 이완용의 부정 때문인
지 왜정 이후 적지 않게 기울었고 해방 이후 개발제한구역에 묶이면서 거의 시골 읍내처럼 정
체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루면 강산도 변한다는 서울 도심 한복판임에도 북촌과 서촌만큼은 시간도 느릿느릿 양반걸
음을 하거나 뒷걸음을 치는 것이다. 조금만 나가면 21세기 한복판인데 서촌 상당수는 아직 20
세기 한복판에 머물러 있어 서울의 옛 모습을 더듬기에 좋다.
허나 시간이 너무 정체되면 지역 주민들의 삶이 힘들어진다. 북촌도 도심 속의 꿀단지로 화려
하게 재기를 하고 있지만 서촌은 근래까지 낙후된 모습으로 거의 남아있던 것이다. 그러다보
니 한옥 기피증이 생겨나 한옥이 감소하게 되었고 거기에 서울시의 무관심까지 더해져 서촌의
숨겨진 명소들도 은근히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 4월 서울시에서 '경복궁 서측
지구단위계획'을 발표하여 한옥 보존과 신축을 장려했고, 북촌으로 단단히 재미를 본 서울시
와 종로구청이 서촌을 새로운 꿀단지로 개발하면서 서촌도 드디어 때를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새로 지어진 한옥이 나날이 늘고 있고, 종로구청에서 서촌 답사코스를 개발하고 홍보
하는 한편, 새로운 명소를 발굴하고, 기존의 명소를 손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조
금씩 북촌을 추격하고 있다. 특히 수성동계곡 복원(2012년 7월)과 박노수 가옥을 구립 미술관
으로 해방시킨 사건(2013년 9월)은 서촌에 큰 활력을 불어넣는데 충분했다. 게다가 소규모 갤
러리와 공방도 조금씩 둥지를 틀면서 서촌의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서촌에는 수성동계곡과 박노수가옥(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이상범 가옥, 사직단, 황학정(
黃鶴亭), 단군성전, 선희궁(宣禧宮)터, 백호정 바위글씨, 백세청풍 바위글씨, 창성동 한옥단
지, 통의동 백송터, 신익희(申翼熙) 가옥, 백운동천, 송석원터, 청휘각터, 자수궁터, 보안여
관, 필운대, 배화여고 생활관, 체부동(體府洞) 홍종문가옥, 백운동천 바위글씨, 운강대 바위
글씨, 행촌동 은행나무, 딜쿠샤, 홍건희 가옥 등 조선과 근대, 현대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깃
들여져 있으며 갤러리아트가, 대림미술관 등의 온갖 갤러리와 문화공간, 금천교시장(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과 통인시장 등의 전통재래시장이 있다. 특히 금천교시장은 제2의 피마골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먹자골목이 크게 형성되어 있는데, 고깃집과 전집, 횟집, 분식집
등 다양한 식당이 즐비하여 학생과 직장인, 인왕산 등산객, 답사객으로 1주 내내 활기가 넘친
다. (나도 가끔 이용함)

부암동(付岩洞)과 성북동, 북촌과 더불어 나의 마음을 계속 훔치고 있는 서촌은 2011년 늦여
름부터 구석구석 발자국을 남기며 그의 숨겨진 속살을 계속 뒤집고 있다. 별거 없을 것 같은
겉보기와 달리 그 속은 신대륙 이상으로 다양한 보물을 품은 곳이 바로 서촌이다.

서촌 나들이는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나 2, 3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자하
문로나 사직공원 동쪽(경복궁역 1번 출구)의 필운대로를 중심으로 움직이면 되며, 자하문고개
에 있는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에서 주요 명소를 거쳐 경복궁역으로 내려오는 것도 괜
찮다. 또한 조그만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고, 그 속에 여러 명소와 소소한 볼거리 등
이 숨겨져 있으니 너무 큰 길만 살피지 말고 서촌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골목길도 꼭 거닐어
보자. 그러면 정말 배부르고 알찬 서촌 나들이가 될 것이다. 단 서촌도 엄연히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므로 민폐를 부리지말고 조용히 둘러보기 바란다.


 

♠  친일파 윤덕영이 지은 근대 가옥, 화가 박노수의 삶터로 미술관으로
새롭게 거듭난 박노수 가옥(朴魯壽 家屋)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호

서촌 중심에 자리한 통인시장에서 수성동계곡으로 인도하는 옥인길을 따라가다보면 오른쪽 골
목 속에 서촌의 상큼한 명소로 등극한 박노수 가옥이 손짓을 한다. 이곳은 집 이름 그대로 우
리나라 미술계의 원로이자 현대 화가인 남정 박노수의 집으로 인근 이상범 가옥과 함께 현대
미술의 따끈따끈한 산실이며 2013년 9월 이후 속세에 개방되어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이하
미술관)'으로 새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이야 천하에 공개된 현대 화가의 미술관으로 누구든 돈만 내면 안길 수 있는 명소가 되었
지만 이 집의 태생은 그렇게 곱지는 못했다. 바로 친일매국노로 개추잡한 이름을 날렸던 윤덕
영(尹德榮, 1873~1940)이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윤덕영은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큰아버지로 왜정(倭政)에 적극 협
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며 배때기에 기름칠했던 1급 매국노이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친일파로 추잡한 뒷끝을 보인 윤치호(尹致昊) 조차도 '이 비열한 매국노
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며 그의 만행을
꼬집었다.
하지만 사람이기를 포기한 윤덕영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손가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이권에 개입해 많은 부를 쌓았고, 집과 땅에도 징그럽게 욕심을 부려 송석원(松石園)을
비롯한 옥인동(玉仁洞) 일대를 사들여 고래등 양옥 별장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지었다. 그
리고 그 주변으로 가족과 첩을 수요할 14동의 고래등 한옥을 주렁주렁 지어 완전 그만의 조그
만 세상을 만들어놓았다.
박노수 가옥은 그 14동의 하나로 딸과 사위를 위해 이 땅 최초의 근대 건축가인 박길룡(朴吉
龍)에게 의뢰하여 1937~1938년경에 지어진 것이다.


▲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을 연 박노수 가옥(미술관) 대문

▲  벽돌로 지어진 박노수 가옥 (박노수미술관)

이 가옥은 한옥 양식과 중원대륙 양식, 서양식이 잡탕이 된 이른바 절충식 기법의 집이다. 2
층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벽돌 건물로 반지하층을 가지고 있으며, 붉은 벽돌로 된 1층에는 온
돌방과 마루, 복도, 응접실이 있고, 하얀 피부로 이루어진 2층은 나무 구조로 지어졌는데 계
단을 중심으로 마루로 된 방이 널려있다.
그리고 3개의 벽난로를 설치해 온기가 머물 공간을 확보하고 집 서쪽에 현관을 두었으며, 벽
돌로 포치를 설치하여 집의 운치를 더욱 높였다. 지붕은 서까래를 노출한 단순 박공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2층의 증축 부분을 빼면 거의 원형 그대로 잘 남아있다.

박노수가 매국노의 악취가 진동하는 이 집에 들어온 것은 1973년이다. 왜 이곳을 골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승인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의 집과도 가깝고, 집의 모습도 중후하고 운치가
진해 예술가의 집 분위기로는 아주 좋아 보인다. 게다가 뜨락도 넓고, 인왕산도 가깝고, 도심
과도 가까우니 시내 왕래가 잦았던 그에게도 딱 적당한 장소였을 것이다.
남정은 이곳을 집과 화실로 삼아 많은 작품을 그려냈으며, 그의 예술적이고 꼼꼼한 손맛이 담
긴 뜨락에는 그가 수집한 수석과 석물, 문화유산을 배치하고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어 자연과
문화, 수석이 어우러진 아주 참한 공간으로 꾸몄다.

왜정 때 박길룡이 설계한 건물로 당시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고 현대 미술화가인
박노수가 40년 가까이 머물며 작품 활동을 벌였던 현장이라 윤덕영이라는 친일파 괴물이 만든
건물임을 무릅쓰고 1991년 5월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그것도 1호라는 그럴싸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바로 그 점이 참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데 1호나 2호, 3호ㅡ 100호 등은 그저 지정된 번호
일 뿐 가치 순위는 아니기 때문에 그리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1호만큼은 신중
해야 된다고 본다. 국보 2호는 몰라도 1호는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1호의 의미는 이 땅에서
는 꽤 각별하기 때문이다. 해방이 된지 70년이 되도록 친일매국노 청산조차(청산은 커녕 그것
들이 더 활개치고 있음) 제대로 되지 못한 이 땅의 거지 같은 현실을 이 가옥이 보여주는 듯
싶어 마음이 참 쓰라리다.

만약 윤덕영의 후손이 염치없이 계속 살고 있었다면 화염병이나 폭탄을 던져 없는 화마(火魔)
라도 억지로 소환해 집과 함께 날려버려야 마땅하겠지만 박노수가 이곳에 살면서 집에 일종의
면죄부가 붙여졌으니 굳이 때려부실 필요는 없을 것이다. 허나 문화재 지정 후순위로 두어 천
천히 지정을 하던가 요즘 개나 소나 지정된다는 등록문화재로 삼는 것이 어땠을까 싶은 아쉬
움도 살짝 든다. 뭐 이렇게 써봤자 허공에 메아리에 불과하지만...


▲  가옥(미술관) 현관 앞 (가옥 서쪽)

★ 남정 박노수(藍丁 朴魯壽, 1927~2013)의 간략한 생애
박노수는 1927년 2월 17일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에서 태어났다. 1940년대에 청전 이상범의
문하로 들어가 그림을 배웠으며, 해방 이후 서울대 회화과에 진학했다.

그의 작품활동은 주로 국전(國展)에서 이루어졌는데 1953년 국무총리상, 1955년에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1957년에는 추천작가를 지냈다. 이후 5.16민족상, 3.1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
을 받았고, 이화여대(1956~1962)와 서울대(1962~1982)에서 교수를 지냈다. 이후 서울대 명예
교수가 되었고,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역임했으며, 1995년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 6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왜열도 동경과 스웨덴, 미대륙에 다수의 국제전과 10
여 회의 국내외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화제를 취하면서도 간결한 문필과 강렬한 색감, 대담한 터치 등 독자적
인 화풍을 구축해 전통 속에서 현대적 미감을 구현한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으로
는 '달과 소년'이 있으며, 그의 많은 작품이 이곳에 진열되어 속인들의 정처없는 안구와 마음
을 다독거려준다.

남정은 1973년부터 2011년 말까지 이곳에 살았다. 2011년 죽음이 임박해진 그는 집과 소장품
등 재산의 상당수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해 11월 11일 자신의 집에서 미술
계 인사와 후배들, 제자들, 종로구청 관계자 등이 모여 기증협약식을 갖고 약속대로 집과 소
장품을 쿨하게 종로구청에 내주었다.
그가 기증한 물건은 그의 그림이 포함된 미술작품 500점, 수석과 여러 석물 379점, 오래된 가
구 66점, 개인 소장품 49점 등, 약 1,000여 점으로 그의 통 큰 기증은 서민의 쪽박까지 빼앗
으려 드는 졸부와 위정자들로 가득한 이 땅에 한줄기 빛과 같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가 베
푼 대인의 기운은 친일파 집이라는 굴레를 지닌 이 가옥을 180도 달리 보이게 하는데 충분했
다.

종로구청은 남정의 뜻에 따라 기증받은 집을 종로구립 미술관으로 꾸미기로 하고 2012년 10월
에 개관하기로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해 1년 연기되었다. 그 사이 남정은 그의 소망이던 미
술관 개관을 끝내 지켜보지 못하고 2013년 2월 25일, 86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숨을 놓고 말았
다.
그가 사라진 이후, 유족과 종로구청의 노력에 힘입어 남정의 손때와 예술혼이 서린 그의 집은
드디어 2013년 9월 11일,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 천하에 문을
열었다. 개관 기념전으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모아 '달과 소년전'을 가졌으며, 종로구 최초
의 구립 미술관으로 이곳이야말로 남정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작이자 아름다운 선물이다.

나는 근/현대 미술가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보니 남정이 왜정과 현대를 거쳐간 원로 화가의 하
나로만 알고 있었다. 허나 이번에 그의 깊은 부분까지 파고드니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못
지 않은 대인(大人)으로 그의 이름 3자가 제법 크게 다가온다.


▲  무늬가 살아있는 석조대좌(臺座) (현관 앞)
무엇을 받치던 대좌였길래 무늬가 저렇게 요염한 것일까? 허나 대좌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망연히 뜨락 장식물의 일원이 되었다. 정체성과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만큼
무섭고 한심한 것은 없다.

▲  미술관 개원 기념으로 종로구청장이 남정에게 바친 메세지

▲  야외 전시관을 방불케하는 미술관 남쪽 뜨락

박노수 가옥은 크게 미술관으로 변신한 2층 가옥과 남쪽 뜨락, 그리고 북쪽 벼랑에 설치된 전
망대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 뜨락에는 남정이 수집한 온갖 수석과 문화유산 등이 가득 흩어져 있고, 소나무와 감나무
등 여러 나무와 꽃이 자리해 있어 조촐하게 자연과 문화가 잘 버무려진 야외 전시장을 이루고
있다. 특히 그는 수석 취미가 대단하여 뜨락 안팎으로 수석들이 가득한데 군침이 돌 정도로
잘생긴 돌도 적지 않으며, 그가 도안해서 만든 석조 원탁과 돌의자 6기는 가족과 벗, 제자/후
배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던 정겨운 현장이다.

▲  남정이 만든 석조 원탁과 돌의자 6기

▲  비석의 지붕돌인 가첨석(加檐石)


▲  귀여움과 고색의 때가 묻어난 조그만 호랑이상
어디서 데리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조선 후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  또다른 호랑이상
호랑이를 고양이로 만든 옛 사람들의 손때로 피부가 꺼무잡잡하다.

▲  머리 위에 또다른 머리 장식을 둔 특이한 석등(石燈)
피부가 아직 반질반질하고 머리 장식이 특이한 흔치 않은 석등으로 20세기
초/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음)

▲  향로석(香爐石)과 그 위에 수줍게 놓인 작은 수석

▲  물을 머금은 조그만 돌항아리와 분재들
벌써부터 수면에 떨어진 낙엽들이 인생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돌항아리는 저들의 인생을 마무리 짓는 블랙홀인 모양이다.

▲  늦가을이 깃든 상큼한 남쪽 뜨락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  수석과 잡초, 꽃으로 가득한 가옥 동쪽

     ◀  집 동쪽에 솟아난 늘씬한 소나무
박노수가 심은 나무로 하늘과 가까운 줄기 끝
에 소나무 잎이 덩어리로 몰려있는 모습이 특
이하다. 나무의 높이는 거의 가옥 2층 정도 된
다.

▲  키 작은 태산목(목련목)
양옥란(洋玉蘭)이라고도 하며 박노수가
심었다.

▲  포치가 달린 가옥(미술관) 현관
구한말, 왜정 때 지어진 개인 양옥 가운데
포치가 달린 집은 흔치 않다.


▲  현관 앞에 놓인 커다란 돌확


 

♠  박노수 가옥(미술관) 현관과 전망대 주변

▲  현관을 지키고 있는 목조 동자상
세월이 달아놓은 주름으로 빛이 좀 바래 보이지만 앳된 표정은 변함이 없다.

    ◀ 가옥 현관과 여의륜(如意輪) 현판
지금은 유료의 공간이 되버린 박노수 가옥 내
부는 포치가 달린 현관을 통해 들어서면 된다.현관문에서 신발을 버리고 실내화로 갈아타면
되는데, 반지하층을 제외한 1층과 2층 상당수
의 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미술관 사무실은 1층
에 있다. 또한 '달과 소년'을 비롯한 박노수의
그림은 주로 2층을 장식하고 있으며, 1층은 박
노수의 생애와 그림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
다. (내부 촬영은 통제됨)

현관문에는 한자로 쓰인 여의륜 현판이 걸려있다. 글씨가 꽤 큼지막하고 패기가 넘치는 모습
으로 박노수의 집에 있으니 그의 글씨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다.
현판에 담긴 여의륜이란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세간(世間), 출세간 이익을 더하는 것
을 본뜻으로 하는 보살(菩薩)을 뜻하는 말로 추사가 말년에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울 봉
원사(奉元寺)와 봉은사(奉恩寺), 팔공산 은해사(銀海寺), 해남 대흥사(大興寺) 등 천하에 유
명한 절을 유람하며 많은 글씨를 남겼다.

현판 우측에는 '승연노인(勝蓮老人)'이란 낙관이 찍혀있는데, 승연노인은 추사의 다른 아호(
雅號)이다. 이 현판을 손에 넣은 박노수는 현관문에 걸어두어 현관부터 미술가의 집 분위기를
진하게 우려냈다.


▲  근대 양옥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2층 벽난로
난방의 기능은 사라지고 이제는 무늬만 남아 한가로운 말년을 보낸다.

▲  2층 목조 다락방
다락방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남정의 인터뷰 장면(1970~80년대로 여겨짐)이 나와
그의 생전에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 현관 앞에서 바라본 미술관 정문
조금씩 숨겨진 끼를 드러내며 경쟁자 북촌을 긴장시키는 서촌, 박노수 미술관은
바로 그 서촌의 새로운 활력소이자 허브이다. 평일임에도 제법 많은 이들이
찾아와 짧은 시간에 비해 너무 떠버린 이곳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친일파 윤덕영의 딸 내외와 박노수 가족의 목을 축여주었던 우물이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그 수맥이 끊기면서 이제는 껍데기만 남았다.

▲  커다란 수석 (현관 앞)
호랑이나 사자, 낙타가 웅크리고 앉아 망중한에 잠겨있는 모습 같다.

▲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과 홀을 쥐어든 조그만 석인(石人)

가옥 북쪽에는 수풀이 우거진 가파른 벼랑이 있다. 예술과 문학의 향이 깃든 가옥답게 대나무
도 삼삼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벼랑에 계단과 석물을 배치한 고즈넉한 산책로를 내
었고, 그 길의 끝에는 무려 전망대까지 두었다. 이 언덕 산책로와 전망대야말로 박노수 미술
관만이 가진 강한 매력이자 백미라 칭할 만하다.

산책로 입구에는 고색이 묻어난 조그만 석인이 홀을 쥐어들며 안내인처럼 자리해 있다. 제자
리를 잃고 방황하는 그를 남정이 데리고 온 것인데 고향을 잃은 충격 때문일까? 석인은 좀처
럼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긴 이곳에 이끌려온 석조 문화유산 모두 제자리를 잃
은 가련한 처지이다. 아마도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속삭임으로 고향을 잃은 동병상련
의 한을 달래지는 않을까?
투박하게 닦여진 돌계단을 오르면 북쪽으로 난 아주 짧은 샛길이 있는데, 대나무로 둘러싸인
그곳에는 돌의자가 놓인 조그만 쉼터가 있다. 그리고 숲길을 마저 오르면 나무로 지어진 전망
대(전망데크)가 나타난다.

이 전망대는 박노수 가옥을 미술관으로 바꿀 때 지은 것으로 예전에는 그냥 나무와 풀만 있었
다. 숲길에는 조그만 돌의자가 여럿 있는데 남정은 이들 의자에 앉아 천하를 바라보며 작품을
구상하거나 온갖 망중한에 잠겼을 것이다.
전망대까지 인도한 숲길은 담장 앞에서 뚝 끊겨버려 적지 않게 달아오른 숲길의 여흥을 깨뜨
려버린다. 지금이야 이렇게 막혔지만 윤덕영이 한참 인왕산의 산소를 축내던 시절에는 바로
옆에 자리한 벽수산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전망대에 서면 가옥의 뒷모습을 비롯해 옥인동 일부와 옛 인경궁(仁慶宮)터인 배화여자대학이
바라보인다. 이곳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나 두 눈에 들어오는 천하의 범위는 우물안 개
구리 수준이다. 그래도 주어진 공간을 최대로 활용해 이런 곳까지 갖추니 정말 알차긴 알차다.

▲  숲길에서 만난 조그만 향로석

▲  숲길에서 만난 장명등


▲  숲길 끝 벼랑에 다리를 걸친 전망대
숲길과 돌의자, 석물은 박노수 시절의 것이고 전망대는 2013년에 단 것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가옥의 뒷모습과 지붕
건물의 모습은 양옥이지만 지붕만큼은 거의 한옥 스타일이다. 윤덕영이 14동의 한옥을
지을 때 자신의 벽수산장을 제외하고 모두 한옥으로 지었으면서 왜 딸의 집만
이렇게 이채로운 모습으로 지어주었을까?

▲  전망대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옥인동과 통인동 지역이 주류를 이루며, 광화문 부근도 조금씩 시야에 들어온다.

▲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굴뚝
지붕에는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굴뚝 5개가 뿔처럼 솟아나 집의 멋스러움을 한층
수식한다. 1층 지붕에는 2개, 2층에는 3개가 달려있는데, 이중 3개는
벽난로용, 나머지는 부엌용이다.

▲  가옥 북쪽 굴뚝과 언덕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왼쪽)

▲  가옥 동쪽에 자리한 장독대와 창고

남정 일가가 사용하던 장독대가 창고 위에 놓여있다. 남정의 작품은 장독대에서 숙성된 여러
음식의 힘이라고 봐도 절대 과언을 아닐 것이다. 허나 그들이 떠난 이후 이제는 인생처럼 공
허한 장독대가 되어 뜨락 장식물의 일원으로 조용히 묻혔다.

※ 옥인동 박노수 가옥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찾아가기 (2017년 11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
  서 종로구 마을버스 09번을 타고 박노수미술관 하차, 도보 1분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1,2번 출구)에서 도보 15분
* 입장료 : 성인(25~64세) 3,000원 (20명 이상 단체 1,800원) / 청소년 1,800원 (단체 1,200
  원) / 어린이 1,200원 (단체 600원) / 종로구민은 50% 할인
* 관람시간 : 10시~18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과 한가위 당일은 휴관)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68-2 (옥인1길 34, ☎ 02-2148-4171)


 

♠  다쓰러져간 매국노 윤덕영의 고래등 기와집

▲  옛 윤덕영 집 돌계단

옥인동 47-133번지 주변은 새 주택과 헌 주택, 달동네 스타일의 집이 공존하는 현장이다. 바
로 그곳에 윤덕영의 기와집이 1채 남아있다.
윤덕영은 서촌(웃대)에서 가장 풍경이 아름다운 송석원과 옥인동 일대를 싹 매입하여 그곳에
자신의 탐욕을 풀어놓았는데 송석원에 큼지막한 서양식 별장을 짓기로 작정하고 프랑스 공사
(公使)를 지낸 민영찬을 통해 건물 설계도를 의뢰했다. 그 설계도를 바탕으로 독일인 감독관
을 고용하여 1914년 집을 짓기 시작해 10여 년의 공사 끝에 완성을 보았다.

그 집은 무려 222평 크기의 프랑스식 건물로 자신의 호를 따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 하였
다. 또한 송석원에 있다고 해서 '송석원별장'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었다. 산장 주변에는 14동
의 한옥을 지어 가족과 자식, 첩들과 모여 살았는데, 소나무와 사과나무가 무성하던 벽수산장
북쪽에 1고주 7량집의 99칸 기와집을 지어 첩의 거처로 삼았다. 그 집이 바로 이곳이다.

윤덕영이 1940년 골로 간 이후, 그의 자식들이 재산을 말아먹으면서 벽수산장은 왜열도 회사
인 미쓰이에게 넘어가고, 14동의 기와집도 거진 남의 손에 넘어갔다. 6.25 이후 서울의 폭발
적인 인구 증가로 벽수산장 주변에 무허가 집이 난립을 했고, 약간 처지가 괜찮은 이들은 윤
덕영의 한옥을 1칸씩 차지해 서울살이를 했다. 그렇게 서울을 휩쓴 근대화의 회오리로 그의
부질없는 한옥들은 대거 다운당했고, 지금은 박노수 가옥과 이 한옥만 간신히 남게 되었다.

한옥에는 현재 여러 가구가 살고 있는데, 대지를 공동으로 소유하며 각각 별도의 출입구를 두
어 1지붕 여러 가족을 이루고 있다. 매국노의 악취가 코를 찌르는 기와집이 힘겹게 서울살이
를 하는 서민들의 소박한 삶터가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형태가 적지않게 변질되고 수리도 제
대로 받지 못해 20세기 초반 최상류층 고래등 가옥은 이제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허름한 몰꼴
이 되었다. 마치 무관지옥으로 개처럼 끌려갔을 윤덕영과 아비의 재산으로 팔자좋게 살다가
가산을 말아먹은 그 자손들처럼 말이다.

비록 빛은 많이 바랬지만 한 시대를 나쁘게 풍미했던 권력자가 살던 현장이라 집에 쓰인 공사
자재는 거의 고급 수준이며, 단풍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한옥 동쪽에는 제법 품격이 돋보이는
석조 계단을 늘어뜨렸다. 지금이야 주택들 사이에 끼어있는 가련한 신세라 골목길 계단 정도
로 실감이 나진 않겠지만 왕년에는 궁궐 계단 못지 않은 위풍을 자랑했다. 게다가 일반 한옥
에서는 보기 힘든 계단의 소맷돌, 장대석 주초, 처마 장식, 장식이 새겨진 벽 등을 갖추고 있
어 예사 한옥이 아님을 귀띔해준다.
그러다보니 버리기는 좀 아까워 서울시에서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하면서 이 집을 옮
기려고 했는데, 나이에 비해 한옥이 너무 낡아 이전이 불가능하자 부득이 예전 모습 그대로
본을 따서 새롭게 짓는 선에서 끝을 냈다. 그리고 집 이름은 그 더러운 주인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옥인동 윤씨 가옥'이라 하였다. (가옥의 면적은 225.79㎡)

참고로 윤덕영의 아우로 형못지 않던 쓰레기 매국노인 윤택영(尹澤榮, 1866~1935)의 재실(齋
室)도 남산골한옥마을로 옮겨져 한가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  위에서 본 돌계단과 단풍나무

▲  계단 끝에 자리한 옛 윤덕영 집


▲  서민의 삶터가 되버린 옛 윤덕영 집
허름한 모습 속에 아직 고급 기와집의 기품이 남아있다.
 

계단을 오르면 윤덕영 집이 일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북쪽으로 휘어진 계단을 오르면 집
대문인데 서민들의 거처가 되버린 탓에 갖은 생활도구와 가스관, 전깃줄, 편지함으로 주변이
참 어수선하다. 게다가 대문도 굳게 잠겨져 있고, 골목길도 막혀버려 세세한 집 구경은 어려
운 실정이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혹여 나중에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면 이 한옥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다.
이미 남산골한옥마을에 본을 따서 지은 집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곳의 집은 엄연히 새 집
이라 고색의 냄새가 없는 이 땅의 흔한 민속촌의 한옥 같은 인상이다. 반면 이곳은 100년 가
량 묵은 한옥이라 겉모습에서 벌써 고색의 향이 피어올라 고택의 기분을 들게 한다.
이곳을 만약 밀게 된다면 모두 가루로 만들지 말고 지붕과 벽, 목재 등을 모두 수습해 남산골
에 있는 윤씨가옥을 다시 손질했으면 좋겠다. 비록 매국노의 잔재라 껄끄럽긴 하지만 '박노수
가옥'도 박노수 화백 덕분에 개과천선하여 아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이 한옥도 서민들의
오랜 삶터로 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현장이다. 게다가 20세기 초반 상류층 한옥의 형태
를 잘 간직하고 있으니 한옥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옛 윤덕영 집을 끝으로 늦가을 서촌의 일부 더듬기는 막을 내린다. 다른 명소는 별도의 글에
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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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11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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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푸른 숲과 조촐한 계곡을 간직한 도심 속의 싱그러운 쉼터, 북악산 삼청공원 ~~~ (말바위, 영무정, 한양도성. 삼청동길)



'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 나들이
(삼청공원, 말바위)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  숲이 무성한 서울 도심의 든든한 허파, 삼청공원(三淸公園)

▲  감사원 서쪽에 있는 삼청공원 후문

여름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6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촌(北村)을 찾
았다. 북촌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계속 북쪽으로 가니 어느덧 북촌과 북악산(백악산)의 경계인
삼청공원까지 발길이 가게 되었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오랜만에 공원이나 1바퀴 둘러보고자
공원 정문을 통해 그의 품으로 들어섰다.

북악산 동남쪽 자락에 넓게 누운 삼청공원은 서울 도심의 북쪽 끝으로 조선시대에도 한양도성(
都城)의 북쪽 끝을 담당했다. 예나 지금이나 싱그러운 나무가 바다를 이루던 명승지로 서울 사
람들의 오랜 나들이 명소였으며, 봄꽃이 만연할 때는 사대부 여인들이 봄꽃놀이를 즐기던 현장
이기도 하다. 조선 초기 학자인 성현(成俔, 1439~1504)은 그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도성
안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으로 삼청동 골짜기를 꼽았으니 그곳이 바로 삼청공원으로 '산이
높고 나무가 빽빽한데 바위 골짜기가 깊숙하다'
라며 이곳을 표현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 표현은 유효한데, 공원 일대에는 북악산의 명물인 소나무를 비롯해 노간주
나무, 붉나무, 팥배나무, 쪽동백나무, 신갈나무, 때죽나무, 진달래 등 갖은 나무들이 숲을 이
루고 있으며, 골짜기가 깊고 멋드러진 바위가 여럿 포진해 있다.

이렇게 서울 사람들의 오랜 산책 명소이자 피서지였지만 공원에 서린 옛 흔적은 북악산 주능선
에 붙어있는 숙정문(肅靖門)과 한양도성 밖에는 없다. 이들은 도성 수비용이니 풍류와는 관련
이 없고 기껏해봐야 관리들이 말을 타고 올라와 시를 지었다는 자연산 바위, 말바위 정도가 있
다. <공원 바깥까지 확대한다면 '삼청동문(三淸洞門)' 바위글씨를 비롯한 여러 바위글씨와 유
길준(兪吉濬)이 유폐되어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작성했던 취운정(翠雲亭)터 정도가 있음>

왜정(倭政) 시절인 1934년 3월, 삼청골 일대를 삼림공원으로 삼아 관리하기 시작했으며, 1940
년 3월, 총독부고시 208호에 따라 도시계획공원의 하나가 되었다. 당시 왜정은 도시계획공원
140개를 발표했는데 삼청공원이 그 1호로 당시 공원 면적은 약 432,000㎡였으며, 소나무를 비
롯한 온갖 나무들로 울림(鬱林)을 이룬 이곳에 산책로와 정자, 의자, 풀장 등을 설치했다.

1945년 이후에는 정몽주 시조비 등의 시비(詩碑), 영무정, 어린이놀이터, 운동시설 등을 계속
해서 설치했고 산책로와 계곡을 정비했으며 삼청동길과 계곡(삼청골) 사이에 나무데크길을 닦
았다. 그리고 근래에 후문 부근에 숲속도서관을 짓는 등, 자연에 크게 반(反)하지 않는 범위에
서 얌전하게 손질을 했다.
공원 손질이 얌전했던 이유는 공원 주변에 국가의 예민한 곳이 잔뜩 포진해 있어 천박한 개발
의 칼날을 뚝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하여 자연에 쏙 묻힌 싱그러운 공간으로 도심 속에 남게
된 것이다. 다만 시내 확장과 군부대로 공원 면적은 5만㎡가 줄어 현재는 약 388,109㎡이다.

삼청공원은 도심의 핵심인 광화문(光化門)과 종로에서도 무척이나 가깝다. 게다가 공원과 살을
맞댄 북촌과 삼청동길의 인기가 계속 하늘을 찌르면서 찾는 이도 많이 늘어났다. 숲이 매우 짙
어서 그늘도 꽤 깊으며 조촐하게 자연산 계곡까지 갖추어 북악산 서북쪽 자락에 묻힌 백사실계
곡(백석동천, ☞ 관련글 보러가기)과 더불어 도심 속 피서지로 인기를 더하고 있다.
 비록 천하에 이름 꽤나 있는 계곡 앞에 명함조차 내밀기 쑥쓰러운 수준이지만 도심 속에서 발
을 담구며 간단하게 피서를 누릴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대단하다. 공원을 가로질
러 도심으로 향하는 삼청골은 삼청천(三淸川)이라 불리며 청계천 상류의 하나를 이룬다.

시내에서 공원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삼청동(三淸洞) 마을버스 종점에서 들어가는 것과 감사원
서쪽의 후문으로 가는 길이 가장 일반적이다. 북촌에서 들어간다면 후문을 이용하면 되며, 삼
청동길로 접근하거나 마을버스를 이용한다면 삼청동 마을버스 종점에서 들어가면 편하다. 또한
2009년에 공원에서 말바위로 오르는 산길이 뚫리면서 북악산 주능선과 숙정문은 물론 그 너머
성북동(城北洞) 지역까지 바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이 길이 지나가는 북악산 동남
쪽 자락은 오랫동안 속인(俗人)들의 접근을 허용치 않았던 금지된 곳으로 산길이 닦이면서 이
곳을 잠궜던 자물쇠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공원 서쪽에는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시작된 삼청동길이 마을버스 종점을 지나면서 구불구불 또
아리를 튼 2차선 산악도로의 모습을 보이며 삼청터널을 거쳐 성북동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박
정희 정권 시절 성북동에 서식하던 권력 실세들이 그들의 교통 편의와 땅값 상승, 청와대와 정
부기관에서 삼청각/대원각 등 고급요정으로의 접근 편의를 위해 낸 것으로 당시에는 차량이 많
지 않아 조촐하게 2차선으로 만들었다.
 허나 시간이 흘러 차량들이 쓸데없이 늘어나면서 도로와 터널을 넓혀야될 지경에 이르렀지만
개발제한구역이라 그것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2차선으로 마냥 두고 있는 것이다.

삼청터널과 터널로 이어지는 길(삼청공원~삼청터널 북쪽, 삼청각 구간)은 뚜벅이들의 배려 따
위는 안중에도 없는
오로지 차량을 위한 길이니 괜히 도보로 가는 일이 없기 바라며 삼청동에
서 숙정문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이 길은 오랫동안 통제구역으로 묻혀 속세의 뇌리 속에
잊혀진 상태이다.

※ 삼청공원 찾아가기 (2017년 8월 기준)
* 지하철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을 타
  고 삼청동 종점 하차. 이 버스는 삼청동에서 정독도서관입구, 동십자각, 광화문, 시청, 남대
  문을 거쳐 서울역(서울역전우체국 북쪽)까지 운행한다.
* 지하철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감사원 하차(또는 도보 15
  분), 감사원에서 서쪽(삼청동)으로 내려가면 막다른 3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들어
  가면 공원이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삼청동길)
* 경복궁 동십자각에서 삼청동길을 따라 25분 정도 걷거나 동십자각 북쪽 법련사 정류장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 이용
* 삼청공원 숲속도서관 이용시간 : 10시~18시 (여름은 20시까지, 매주 월요일 휴관, 문의 ☎
  02-734-3900)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1 일대 (북촌로 134-1)


▲  삼청공원 후문 안쪽

공원 후문을 들어서면 수목원 같은 삼청공원의 고운 속살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수목원 같지만
속살을 깊이 들어가면 수목원 분위기는 울림으로 변화하고 산내음과 솔내음이 청정한 기운을
볶아내면서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준다.


▲  숲터널을 이룬 삼청공원 산책로 ▼


▲  시인 김경린(金璟麟, 1918~2003)의 '차창'이 담긴 시비(詩碑)

차창(車窓)
나는 수족관에 온 한마리의 어족
미끄러지는 바깥 세계가 뿜는 향수로
안경은 차웁다

우리나라 현대 시인의 하나인 김경린이 2003년 세상을 뜨자 그의 후학들이
그가 살았던 삼청동에 그의 대표작, 차창을 담은 시비를 세웠다.

▲  동심이 깃든 삼청공원 어린이놀이터
어린이들의 안전과 그들의 흙놀이 공간을 위해 흙으로 놀이터를 닦았다. 나도
어렸을 때 흙장난 참 많이 했었지. 그때는 흙으로 많은 세상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내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도 아리송하다.

▲  삼청공원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옛 약수터
오른쪽에 보이는 네모난 구멍에서 약수가 콸콸 쏟아져 나왔으나
이제는 목구멍이 막힌 죽은 샘터가 되었다.

▲  삼청공원 약수터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담는 약수터로 근래 부적합 판정을 받아 찾는 이가 많이 줄었다.
약수터 맞은편 의자에는 1996년 10월 문화체육부에서 세운 근대 소설가 염상섭
(廉想涉, 1897~1963)의 앉아있는 동상이 있었으나 2014년에 치워버렸다.
(염상섭의 생가터가 이곳 부근이라 동상을 세웠음)


▲  비둘기도 이곳 경관에 반해 뒤뚱뒤뚱 산책을 즐긴다.

▲  정몽주(鄭夢周, 1337~1392)와 그의 어머니의 시조비

정몽주와 그의 어머니의 시조가 담긴 정몽주 시조비는 이곳에서 그나마 오래된 볼거리로 1973
년에 세워진 것이다. 포은(圃隱)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을 덜 초라하게 해준 3은(三隱)의 하
나로 그의 시조비가 떡하니 있어 이곳과 무슨 관련이 있겠구나 싶지만 실상은 서로 아무런 관
련이 없다.

시조비 오른쪽을 장식하고 있는 시조는 백로가(白鷺歌)로 정몽주의 어머니가 간신과 역신(逆臣
) 등 질이 안좋은 무리와 어울리지 말 것을 훈계하고자 지은 시라고 한다. 허나 조선 영조 때
간행된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작자 미상이라 나와있고 조선 말 학자인 이희령(李希齡)이 지
은 약파만록(藥坡漫錄)에는 연산군 시절에 김정구(金鼎九)가 지은 시라고 나와있어 작자에 대
해서는 아직도 말들이 많다.

시조비 왼쪽에는 정몽주가 지은 그 유명한 단심가(丹心歌)가 쓰여 있다. 이 시는 이성계(李成
桂) 패거리가 고려를 뒤엎고 새 나라를 세우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인 이방원(李芳
遠, 후에 조선 태종)이 정몽주를 살짝 찾아와 그 유명한 하여가(何如歌)를 들이밀며 그의 의중
을 물었다.
 허나 정몽주는 그 이름도 높은 단심가로 답을 하며 고려에 대한 일편단심을 강하게 내비췄다.
결국 안되겠다 여긴 이방원은 부하 조영규(趙英珪)를 보내 선죽교(善竹橋)에서 정몽주를 잔인
하게 처단하고 만다. 고려의 마지막 보루인 최영(崔瑩)과 정몽주를 잃은 고려는 더 이상 지탱
하지 못하고 결국 이성계 패거리에 의해 강제로 휘장을 내리게 된다.



백로가(白鷺歌)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빗을 새오나니
창파(滄波)에 좋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하여가(何如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영무정의 4계절' 시비
영무정 보존회에서 2008년 10월에 세운 시비이다.


영무정 시비에서 북쪽을 보면 초록색 철책이 빙 둘러진 후미진 공간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속살에는 조그만 폭포가 동천(洞天)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고 그 밑에 물이 담겨진 욕조처
럼 생긴 통이 있으며, 그 옆에 조그만 정자가 있으니 그곳이 바로 삼청공원의 숨겨진 명물, 영
무정이다.

이곳은 서울에 거의 남지 않은 노천 목욕탕으로 1960년경에 동네 사람들이 목욕터로 만든 곳이
다. 폭포 밑에 3명 정도 들어갈 크기의 욕조를 만들었는데 물이 매우 맑고 차다고 한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사람 여럿이 욕조에 몸을 담구거나 (물론 옷은 입었음) 주변에 앉아 대
화를 하고 있어서 안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특히 아저씨와 노공(老公)>의 오랜 목욕터이나 문제는 시민들이 거니는 공원에서
벌거벗고 목욕과 냉수마찰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계속 논란이 불거지자 종로구청에서
이곳을 없애려고 삽을 들었으나 영무정보존회에서 쌍수 들고 반대하여 철거는 하지 못했다. 또
한 방송에도 여러 번 등장해 그 이름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철거하기에 좀 애매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여 종로구청은 기존에 있던 펜스를 치우고 초록색 철책을 둘렀으며, 벌거벗고 씻지
말라는 경고문을 붙이는 선에서 영무정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허나 장소가 장소인지라 늦은 밤에 몰래 벗고 씻는 이들도 아직 있을 듯 싶으며 구석진 곳이
라 둘만의 조용한 대화(?)를 원하는 이들이 찾기에 좋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이자 내 어린 시절 뒷동산이었던 남산(
南山)의 여러 약수터에는 이런 노천 목욕탕이 거의 딸려있었다. 약수터와 운동시설 옆에 담장
등을 둘러 벗고 씻는 공간을 둔 것이다. 나도 어린 시절 남산 그늘에 살았을 적에 부친을 따라
남산의 모 약수터에서 냉수마찰을 한 적이 있다. 냉수마찰을 해야 감기가 안걸린다는 말에 깜
빡 속아서 말이다.

영무정이 법에는 다소 저촉은 되지만 동네 사람들의 쉼터이자 피서지로 차가운 물이 모였다는
욕조에 들어가 피서를 즐기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단 물놀이에 적당한 가벼운 옷차림(속옷바
람은 안됨)으로 통에 들어가길 바라며, 삼청골 오염을 방지하고자 비누 사용과 음식물 취사행
위를 금하고 있으니 그냥 몸만 시원하게 담구고 오자.


▲  삼청공원 윗쪽 산책로 (영무정 북쪽)
집으로 살짝 가져와 혼자서만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  구부러진 삼청공원 윗쪽 산책로

▲  삼청공원 산책로는 경사가 별로 없어 누구든 마음 편히
거닐 수 있는 착한 오솔길이다.

▲  오랜 가뭄으로 목이 타버린 삼청골
물은 온데간데 없고 흙과 돌만 어지럽게 흩어져 초여름 가뭄의
심각함을 드러낸다.


 

♠  삼청공원의 새로운 산길, 북악산 말바위 산길

▲  말바위 산길 입구

삼청공원 윗쪽에는 북악산 말바위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2008년에 닦기 시작하여 2009년에
완성되어 세상에 선보인 산길로 말바위조망대까지 600m 정도 이어져 있으며, 그곳까지는 가볍
게 10~15분 정도 걸린다. (중간에 갈림길이 있음, 거기서 왼쪽으로 가면 소나무 숲길, 직진하
면 말바위임)

말바위조망대에서 성곽을 따라 서쪽(숙정문 방향)으로 조금 가면 성곽 밖으로 나가는 나무데크
길이 있는데 그 길로 내려가면 바로 성북동으로 북악하늘길 제3코스와 만난다. 여기서 왼쪽(서
쪽)으로 가면 삼청각과 김신조루트라 불리는 북악하늘길2/3코스로 이어지고, 오른쪽(동쪽)으로
가면 와룡공원<여기서 성북동 종점이나 성균관대, 감사원 방면으로 내려가면 됨>으로 이어진다.
 또한 성곽길을 더 가면 말바위안내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숙정문을 거쳐 북악산 정상과 창의문
(彰義門, 자하문)으로 넘어갈 수 있어 코스 또한 다양하다. 그러니 취향에 따라 코스를 잡으면
된다.
허나 숙정문과 북악산(백악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성곽길은 9시부터 16시(동절기는 10
~15시)까지만 출입이 가능하다. (신분증을 지참하여 출입증을 작성해야 됨)

삼청공원에서 말바위로 오르는 산길이 생기기 전에는 거기서 성북동/북악산 방면으로 가는 정
식적인 길이 없었다. 삼청터널이 있지만 거긴 오직 차량 전용이며, 걸어서 간다면 와룡고개로
우회해서 가야했다. 지도에서 보는 거리는 매우 가깝지만 걸어서 가는 체감거리는 이론과 다르
게 꽤 각박했던 것이다.
 허나 말바위 산길이 생김으로써 비록 산을 넘어야되는 부담은 있지만 서로의 거리가 꽤 줄어
들었고 반대로 성북동(삼청각)에서도 삼청공원과 도심 도보 접근이 수월해졌다.

출입절차를 밟아야 되는 말바위안내소에서 창의문으로 이어지는 북악산 주능선과 달리 말바위
등산로와 성곽 밖 북악하늘길은 언제든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단 군사시설이 여럿 있으
므로 그곳은 들어가거나 촬영하지 말 것)
 이렇게 삼청동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산길이 뚫렸다니 참 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한 모양이
다. 국가의 예민한 곳으로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하고 먼산 쳐다보듯 해야 했던, 잘못
들어갔다가는 정말 총 맞을 것 같던 그곳이 말이다. 이제 도성 남쪽인 북악산 남쪽만 개방되면
북악산은 거의 완전히 해방이 된다. 하지만 그곳에는 청와대와 여러 예민한 시설이 있으니 당
장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  말바위 입구에 세워진 건강 돌탑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돌탑이든 우선 건강하고 봐야 된다.
건강이 없다면 바닷가의 힘없는 모래성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  소나무가 운치를 우려내는 말바위 산길

북악산은 호랑이가 곶감의 눈치를 보던 시절부터 소나무가 유명했는데, 조선 조정에서는 특별
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하여 산이 온통 솔내음의 향기가 진동했다. 허나 왜정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 다른 나무의 유입 등으로 소나무가 많이 줄어 지금은 주능선 주변과 고지대에
주로 남아있다. 삼청공원이나 와룡고개 등 속세와 가까운 곳은 소나무가 거의 없고 속세와 어
느 정도 거리를 둔 고지대에서 소나무들이 이슬을 먹으며 자라고 있다.

북악산 일대는 오랫동안 금지된 산으로 묶여있다 보니 나무와 식물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리면
서 숲이 매우 울창하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는데 삼청공원 일대에서는 직
박구리와 박새, 멧비둘기, 오색딱따구리, 꿩, 노랑지빠귀, 다람쥐, 청솔모 등이 살고 있다.


▲  삼청공원과 말바위 사이에 조성된 쉼터
말바위 등산로는 흙길과 나무로 만든 계단길이 적당히 섞여 있다.

▲  한양도성 (말바위 방향) - 사적 10호

삼청공원에서 말바위 등산로를 15분 정도 오르면 한양도성(한양성곽)의 여장이 나타난다. 여장
이란 성곽을 수비하고자 두툼하게 돌벽을 쌓고, 중간에 여러 개의 구멍을 낸 수비시설인데, 이
곳이 성내(城內)이다 보니 여장 안쪽에 있게 된 것이다. 여장 너머는 성밖으로 바로 성북동이
다.


▲  한양도성 (삼청공원 방향)
서울을 지키던 성곽도 부끄러움을 타는 것일까? 몸에 걸친 담쟁이덩굴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성곽은 1974년 이후에 복원한 거라 일부 검은 주근깨가 낀 것을 빼고는
대부분 하얀 피부를 자랑한다.

▲  말바위로 오르는 각박한 계단길 (왼쪽에 보이는 길로 가면 말바위 조망대)

한양도성과 만나는 곳에서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3분 정도 가면 각박한 각도의 계단길이 나타
난다. (동쪽은 군사시설로 길이 막혀 있음)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말바위인데 계단길 중간에
왼쪽으로 통하는 나무길이 있으며 그 길로 들어서면 말바위 조망대가 모습을 비춘다.


 

♠  북악산 말바위조망대와 말바위

▲  도심을 향해 들어앉은 말바위 조망대

말바위 밑에 자리한 말바위 조망대(전망데크)는 커다란 바위 위에 나무로 만든 조망대로 도심
이 있는 남쪽을 향하고 있다. 천하 굴지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밑에 두고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 북악산 정상(342m)이나 그 동쪽 봉우리인 청운대(293m), 인왕산(338m)보다 키
가 낮아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도 사대문(四大門) 안쪽으로 좁다. 하여 이곳이 그리 높다는 생
각도 들지 않는다.
 허나 삼청공원을 비롯해 북악산 남쪽 자락과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그리고 그 안쪽에
둥지를 튼 도심이 속시원히 바라보며 그런데로 후한 점수를 줄만하다. 낮은 높이치고는 제법
선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상과 남쪽 자락
북악산 너머로 인왕산과 서촌<웃대, 경복궁 서쪽 동네> 일대가 바라보인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①
바로 정면에 서울의 남주작인 남산이 바라보인다.

▲  말바위조망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②
삼청공원과 삼청동, 경복궁 주변 일대가 바라보인다.

▲  북악산의 오랜 명소, 말바위

말바위는 촛대바위와 더불어 북악산에 이름난 바위이다. 이곳까지 삼청공원의 영역에 들어가는
데, 북악산의 오랜 명소로 조선시대에 문인(文人)과 관료들이 말을 타고 이곳으로 올라와 시문
을 짓거나 바람을 쐬며 많이들 쉬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을 타고 올라왔다는 뜻에서 말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며, 다른 이야기로는 북악산의 산줄기가 동쪽으로 좌청룡(左靑龍)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그 끝에 자리한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 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니까 말
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 것이다. (바위가 말처럼 생기지도 않았음)

말바위 옆에는 소나무 1그루가 바위 쪽으로 가지를 뻗어 바위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서
로의 끈끈한 정을 자랑한다.


▲  말바위의 옆모습

1968년 1.21사건 이후 말바위는 금지된 바위가 되어 속세에서 잠시 그 모습이 지워졌다가 2007
년 4월 다시 공개가 되었다. 그때 말바위에서 북악산 정상을 거쳐 창의문까지 제한적으로 개방
되었으며, 말바위는 24시간 언제든 발을 들일 수 있는 자유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  말바위에서 바라본 북악산 주능선 (북악산 정상에서 숙정문 구간)

▲  도성 밖으로 인도하는 말바위 나무다리와 한양도성 성곽길
탐방객 유의사항 현수막이 걸린 나무다리를 내려가면 도성 밖 성북동이다.
 

말바위와 말바위안내소 중간에는 성밖으로 나가는 나무다리가 있다. 무지 귀한 몸인 성곽 여장
을 부시고 내려가는 길을 낼 수가 없기에 부득이 성곽 위에 나무 다리를 다져 성밖으로 통하는
길을 냈다.
다리 북쪽에는 조망대를 설치하여 도심 속의 전원 마을인 성북동을 굽어보게 했는데, 삼청각과
길상사(吉祥寺), 북악산 북쪽 능선과 김신조투르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괜찮다. 여기서
다리를 내려가면 성곽 북쪽 자락길로 삼청각(三淸閣)과 숙정문안내소, 북정마을, 와룡공원, 김
신조루트(북악하늘길) 방면으로 이어지며, 성곽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북악산 주능선의 동
쪽 관문인 말바위안내소가 마중한다.


▲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 주능선

▲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바라본 삼청각과 북악산 북쪽 능선
삼청각 뒷쪽에는 2009년에 개방된 북악하늘길(김신조루트)이 숨겨져 있다.

▲  성북동 서부 - 북악산의 두 능선에 막힌 궁벽한 곳이지만 그곳에
자리한 집들은 궁벽과는 거리가 먼 크고 호화로운 집들 투성이다.
빈부격차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 현장이라
눈도 그리 즐겁지가 않다.

▲  성북동 일대
성북동은 북악산 주능선과 북쪽 능선(북악산길이 지나가는 능선) 사이에 포근히 터를
닦은 도심 속의 전원마을이자 완사명월형(浣絲明月形)의 명당 자리로 유명하다.
그러다보니 시커먼 졸부들이 가득 기어들어와 속칭 이 땅의 0.1%가 사는
비싼 동네가 되어버렸다.

▲  성북동 너머로 성북구 삼선동, 돈암동 지역이 바라보인다.

▲  다시 삼청공원으로 (말바위 산길 입구)

말바위 나무다리에서 성밖으로 넘어가 와룡공원을 거쳐 시내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도
늦었고 귀찮기도 하여 왔던 길을 다시 재방송하여 삼청공원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시조비를 거쳐 삼청동길로 나오니 길 동쪽으로 북악산이 베푼 삼청골이 착한 풍경을 도
처에 빚으며 도로와 나란히 흘러간다. 허나 오랜 가뭄으로 비리비리한 모습을 보이니 보는 내
가 답답할 따름이다.


▲  가뭄에 타들어가는 가련한 삼청골 (삼청동길 동쪽 계곡)

▲  삼청동길과 삼청골 사이에 만든 뚜벅이용 나무데크길

▲  삼청동길 나무데크길의 남쪽 종점

서울 도심의 거의 흔치 않은 계곡인 삼청골(삼청천)은 공원 남쪽에 있는 삼청테니스장에서 어
두컴컴한 지하로 흘러간다. 개발의 칼질에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이다. 이 물줄기는 삼청동
길을 따라 경복궁(景福宮) 동쪽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가는데 옛날 경복궁 주변 사진을 보면
경복궁 동쪽과 북촌 주거지 사이로 하천이 하나 보이니 그가 바로 삼청천이다.

삼청공원을 벗어나 2분 정도 가면 삼청동 종점(종로구 마을버스 11번 종점)이 나온다. 삼청동
과 도심을 이어주는 마을버스의 쉼터로 이곳도 엄연한 도심이라 경복궁과 광화문은 물론 시청
까지 걸어가도 될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다.

우리는 지친 몸을 마을버스에 담아 시내로 나왔다. 어차피 종점이라 100% 앉아가는 것은 가능
하다. 이렇게 하여 초여름에 찾아간 북악산 삼청공원, 말바위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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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숲과 계곡, 폭포, 옛 별서 유적이 어우러진 ~~ 부암동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 서울 도심 속의 아름다운 별천지,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늦가을 나들이 '



늦가을이 거의 저물어가던 11월 끝 무렵에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백사골)을 찾았다. <본글에서 '백사실=백사골'임>

백사실은 서울 장안에서 가장 흠모하는 곳의 하나로 2005년 5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
시키며 처음 발을 들인 이래 매년 6~7회 이상 발걸음을 하고 있다. 그렇게나 많이 찾았으
면<지금까지 80번은 넘게 찾은 듯> 정말 지겹고도 남음이 있을텐데 그에게 제대로 중독된
것일까? 돌아서기가 무섭게 또 들어가고 싶은 곳이다.
 
우선 도심 속의 전원 마을, 부암동(付岩洞)의 여러 명소(☞ 관련글 보러가기)를 둘러보고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弘濟川) 다리를 건너 '세검정로 6다길' 골목으로 들어섰다.
백사실의 눈부신 인기를 보여주듯 그를 알리는 이정표가 자주 비춰주니 길치들도 조금 마
음을 놓고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백사실로 들어가는 골목이 조금 복잡함)
골목길 끝에 자리한 빌라 옆으로 높게 펼쳐진 계단을 오르면 혜문사입구인데 여기서 오른
쪽으로 야트막한 길을 넘으면 바로 백사실의 남쪽 정문인 현통사와 백사폭포(동령폭포)가
모습을 비춘다.


▲  혜문사입구 골목길에서 바라본 서울의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산악 분지(盆地)이다.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산길
저곳을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백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두근두근 백석동천(백사실)의 속살로 들어서다.

▲  현통사 밑에 자리한 백사폭포(白沙瀑布, 동령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 밑에 새하얀 반
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그의 매끄러운 피부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별천지를 꿈꾸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
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수려한 멋은 별로 없다. 그냥 수수하게 생
긴 폭포로 하얀 반석(盤石)과 썩 어우러져 제법 수려한 멋을 풍기면서 백사골에 대한 첫 인상
을 긍정적으로 인도한다.
서울 도심에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로 나름 가치가 높으며, 만약 설악산이나 주왕산(周王
山) 등 1급 폭포가 즐비한 산에 붙어있었다면 그리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
람이나 폭포나 때와 장소를 잘 만나야 된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멋대로 갖다붙인 것인데, 원래 이름은 동령폭포
라고 한다. 하지만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에 자신의 이름마저 계곡에 떠내려보내면서 그의 이름
은 아득히 잊혀지고 말았다.


▲  백사폭포와 하얀 반석

늦가을이라 폭포수가 가늘고 누런 낙엽이 짙게 깔려있지만 비가 많이 오면 폭포수도 제법 패기
를 보인다. 한여름에는 동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 되어주며, 여름 제국(帝國)에
대항하고자 찾아온 피서객들이 돗자리를 피며 한숨 자거나 쉬는 등, 도심 속의 조촐한 꿀피서
지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  낙엽은 물론 가을까지 무심히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아랫 못

겨울 제국의 시련을 견뎌내고자 백사골 나무들이 속절없이 털어낸 낙엽들은 폭포 주변에 수북
히 쌓여있다. 이들 낙엽은 폭포 밑에서 마지막 정모를 즐기며 올해도 변함없이 도래한 겨울을
원망한다. 몇몇 낙엽은 한이 맺혔는지 폭포 중간에 철썩 달라붙어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가고 싶겠지만 매정한 자연은 그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며 그렇게 발버
둥을 치다가 결국 힘이 다해 떠내려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런 낙엽의 발악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실감한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 냇물은 큰 세상을 꿈꾸며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 담(潭)에서
큰 세상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다시는 오지 못할 그리운 고향, 북악산(백악산)의 그
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다리 밑 조그만 폭포를 통해 아랫 못으로 흘러가며 여기
서 다시금 바위를 타고 홍제천으로, 한강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없는 여행을 떠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늦가을의 절정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열심
히 매뭇새를 다듬는다. 저들의 처절한 아름다움 뒤에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잔잔
한 수면에는 낙엽들이 두둥실 떠 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백사골에 머문 늦가을도 낙엽
을 데리고 계곡을 통해 저 밑으로 쿨하게 흘러간다.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골 밑에 둥지를 튼 현통사는 조그만 현대 사찰로 20세기 후반 큰 승려의 하나로 추앙을 받
는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이다. 백사골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만들만한 구석도 없기 때문
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과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지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덩어리로 몰려있는
데, 대웅전은 서남쪽을, 나머지는 남쪽과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

인적도 거의 없는 적막한 산사에 백사골 산바람이 살며시 들어와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
짝 희롱하고 그 희롱에 놀란 풍경은 그윽한 풍경소리를 풍기며 주변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  늦가을이 깃들여진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자연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대자연이 그린 아름다운 작품, 백사골(백사실계곡) - 별서터 서쪽

간만에 백사골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으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한 내음
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골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1폭의 담채
화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몸살이 날 지경인데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
들 이곳의 풍경을 완전히 표현하는 것은 힘들 것이며,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
는 것은 어쩌면 백사골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탄성만 연거푸 지르며 조용히 백사골에 묻혀간다.
 
숲에 깃든 순결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 땅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롱뇽, 가
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
점 사라지고 이제 이곳이 그들의 몇 안되는 낙원이 된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
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하
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저런 무성한 이
끼를 만나는 것은 보기가 정말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서울 도심의 별천지처럼 청정함을 여
실히 간직하고 있다.


▲  별서터 북쪽 계곡에 드러누운 바위들
오른쪽 하얀 바위에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만들 때
돌을 떼던 흔적이다.


▲  별서터 연못 옆을 지나는 백사골 (별서터 징검다리)

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나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계곡에 둑
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린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별서 주
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 직전 갈림길(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뒤쪽(서남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눈여겨 살펴보자. 그 언덕 정상에 커다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면 글씨가 화석처럼 박혀있는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중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별서터(연못터 주
변) 바로 서남쪽 산자락이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숲에 거의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
람들은 그의 존재감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들이 강제로 벌거벗는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그나
마 쉽게 눈동자에 들어오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마저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닦고 그 안에 '月巖' 바위글씨를
를 다졌는데, 백사실의 존재를 처음으로 언급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정되
나 확실한 것은 없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필 중의 명필
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늦가을과 겨울을 제외하면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하기가 어렵다. 백
사골의 경치를 즐기러 온 선비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확트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
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굳이 이광여가 아니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
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으며 잔을 걸치고 싶다.


 

♠  북악산(백악산)에 숨겨진 비밀의 옛 별서 유적,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전경

한양도성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나서면 여기가 정녕 서
울일까?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
암동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감싸인 분지로 서
울의 일부라기보다 산간 마을이나 산골에 묻힌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이 바로 지
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지형 탓도 있지만 나라의 예민한 곳이 동
네 주변에 많아 개발의 천박한 칼질을 잠재웠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도성 밖 경승지로 꼽혔던 부암동은 양반과 왕족의 별서(別墅, 별장) 및 피서지
로 인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로 형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완전히 털려 강제로 사라진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武溪精舍),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
(石坡亭), 인조반정(1623년)과 관련이 깊은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의
장소로 닦았던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했던 그들의 메아리를 아련히 전해준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인 백사골(백사실)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의 별장이 있었다 하여 백사실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다고 하며, 백사골
과 별서터를 하나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북악산(백악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북악산의 바위 명소란 뜻인데, 그만큼 하얀 바위와 반석이 많고 경치가 고왔다. 그리고 동천<
洞天, 동학(洞壑)이라고도 함>은 양반과 선비들이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붙어주는 경승지의 명
예로운 칭호이다.

이곳은 백석동천 외에 백사실(계곡), 백사골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백석정(亭), 백석실(
室)이란 옛 이름도 있다. (백석정은 19세기에 주로 쓰였음) 옛 이름을 제외하고 어느 이름을
쓰던 그건 각자의 취향이나 백사실, 백사실계곡, 백석동천으로 많이 불리며 백사골은 백사실계
곡을 줄여서 표현한 이름이다. (나는 백사골이라 많이 부름)

▲  연못 한쪽에 자리한 정자터

▲  사랑채터

백석동천 별서는 1830년경에 지어진(또는 중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600평 규모의 별서이다. 누
가 지었는지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으나 백석동천과 관련된 최초 기록인 월암 이광여(1720~
1783)의 이참봉집(李參奉集)에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이 조
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
이 있어 현재의 별서 이전(17~18세기)부터 조그만 집이 이미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2012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이곳을 매입하여 별장으로 삼았음이 밝혀지면서
백사실의 비밀이 다소 벗겨졌다. 추사의 문집인 '완당전집(阮堂全集) 권9'에 '선인이 살던 백
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나의 북서(北墅, 북쪽 별서)에 백석정 옛터가 있다'
등의 내용이 있
고 그곳과 관련된 시가 여럿 발견되어 추사가 백석정 자리를 구입하여 크고 아름답게 다시 지
었음이 밝혀졌다. 하여 지금까지 전해오던 1830년 창건설(또는 중건설)의 주인공이 바로 추사
로 여겨진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안채는 4
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
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 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전쟁 때 정자가 파괴되고 그 휴유증으로 연못
마저 그 기능이 상실되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장의 흔적, 바
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몰아넣던 백석동천은 2006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 사람들만 찾
던 그들만의 숨겨진 명소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조용히 잠들어 있
던 그는 2005년 문화재청으로부터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
으로 아름답게 평가를 받으면서 무명 수준에서 바로
적 462호
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변변한 안내문과 이정표조차도 없었으며,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
정표가 설치되었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싹 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
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에서 바라본 연못

▲  사랑채와 안채터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꿀단지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
거니와 여름의 녹음(綠陰), 늦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모두 아름다
운 경승지이다. 숲이 매우 삼삼하여 강렬한 햇살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아 백사골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극락이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터를 둘러보며 옛 사람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으
로 살았을까? 그려보면서 그들의 생활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체험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2006년 이후 이곳의 존재감이 널리 퍼져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이 늘어나면서 고적했던
분위기는 조금 떨어진 것 같다. (평일은 그래도 한적함) 게다가 정신줄을 놓은 사람까지 불순
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돌에 낙서를 하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계곡을 뒤집거나, 수목을 괴
롭히는 행위가 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이 절실해 보인다. 아직은 괜찮다고 해도 지키는 사람도
제대로 없는 첩첩한 산골이라 방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2013년 종로구청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뇌에 주름 잡힌 소리를 일삼아 크게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 개소리는 쏙 들어갔지만 어설프게 복원하려 들지 말고 제발 지금의
모습 그대로 두길 바란다. 비록 폐허의 상태여도 현재 모습이 더 운치가 진하며 옛터 위에 상
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가 있다. 끝으로 개인적인 욕심이지만 이런 곳은 대중적인 명소로
너무 노출되는 것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남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미 그러기에는 그의 존재감이 한라산 꼭대기에 붙어있을 정도로 커버렸다.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찾아가기 (2017년 7월 기준)
* 백사실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
  장 쉽고 가까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이며, 하림각은 경사가 각박하고, 창의문은 거리가 길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AW컨벤션센터) 길 건너편에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다. 그 길(백석동길
   )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면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
   내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자하문터널 방면)으로 가면 백석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 → 신영교를 건너 백석동천 이정표를 따라 '세검정로
   6다길'로 쭉 올라감 → 혜문사입구 → 현통사 → 백사골(백석동천)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4호
   선 길음역(6,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3번 시내버스 이용 → 세검정초교 하차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서쪽(부암동 방향)으로 조금 가면 창의문앞 교차로이
   다. 여기서 오른쪽 길(북악산길 방향)로 꺾어서 백석동길 골목(부암동 산복길)으로 진입해
   산모퉁이와 지하우스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직진하여 계속 들어가면<왼쪽 길
   로 가도 됨> 그 길의 끝에 뒷골마을(능금마을)이 있다.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
   면 바로 백석동천이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
  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 산25일대


 

♠  백석동천 사랑채터

▲  사랑채터 언덕 밑 (백석동천 안내문)

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이 오롯하게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클로 계단 돌이 좀 헝클어져 있으나 경사가 완만하여 계단의 역할은 그리 녹슬지 않
았다. 반면 연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놓았는데 높이
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를 두었는데, 아쉽게도 생전의 사진
도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영구히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건물터와 주춧돌은 잘 남아있
으며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난 흔적까지 더해 산듯하게 정비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선 별서 주
인이 연못을 바라보며 독서를 하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이 오면 여기서 곡차와 산해
진미를 대접하거나 시 1수 주고 받았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름) 사랑
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이 남아있다.


▲  선명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

▲  석축 위에 세워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바로 옆에서 바라본 사랑채터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 때 발견된 것으로 연못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낙엽과
잡석만 가득 널려 황폐의 극치를 보여준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이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어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
리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완전히 생매장을 당했다. 그
러다가 2010년 이곳이 서울시와 문화재청의 조사 대상이 되면서 옥의 티 같은 배드민턴장을 밀
어버렸으며,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습했다. 이후 2011년 3월 문
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묻었다.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담의 흔적이 여럿 남아있으며, 비록 기와를 지닌 사랑채와
안채는 세월이란 용광로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
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었을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헝클어진 남쪽 돌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를 이어주는 서쪽 돌계단


▲  사랑채 뒷쪽 석축과 돌담

사랑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
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된다. 석축 윗쪽에는 별서의 경계를 가르던 돌담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상당수 허물어지고 지금은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북쪽까
지 돌담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사랑채 뒷쪽 돌담장의 흔적

▲  사랑채와 안채터에서 끄집어낸 기와조각과
그릇 파편


 

♠  물 대신 낙엽과 잡초로 가득한 연못과 정자터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

사랑채터에서 바라보이는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떠있는 물 대신 나무들이 미련없이
떨군 낙엽들이 가득 연못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막 보금자리가 되었다. 세월의 자비 없는 흐름
은 연못의 구성원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옛날에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보름달처럼 둥그런 연못을 채웠으며, 지나가던 햇님과 달님이
그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무들도 연못을 거울 삼아 매무새를 다듬었다. 허나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던 이곳까지 총탄을 휘날려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기능이 상실되어 껍데기만 남았다.


▲  연못에 들어가서 바라본 사랑채터와 동쪽 돌계단

비록 살아있는 연못은 아니지만 비가 많이 오면 물이 가득히 고여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
찾기도 한다. 연못이 넓기 때문에 이때만큼은 조그만 조각배를 하나 띄워놓고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였다면 단단한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연못, 허나 저 연못에도 자연의 생명력
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나고 있다. 게다가 빗물이 모이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데로
연못티를 풍긴다. 잡초로 덥수룩한 연못의 여름 모습도 나름대로 초록의 아름다움을 띄고 있으
며 늦가을에는 낙엽이 한가득 공간을 채우면서 누런 연못이 된다.

연못의 둘레는 약 100m 정도로 그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짙은 그늘이 연못을 덮어주고 있으
며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울창한 삼림은 이곳을 찾
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은 그
다지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허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마음으로 그 허전함을 달래주고 싶구나. 그
렇다고 정자를 복원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시를 읊거나 벗들과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
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아는 사람이면 기생들도 불러 정자 안에서 얼씨구~ 춤과 노래, 시를
즐겼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몸살이 날 정도로 부러울 뿐이다. 이래서 무슨 수를 쓰든
권력층이 되야 되고 부자가 되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과 상상으로만 끝나버린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20m에 이르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이는 대략
150~200년 정도로 여겨진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또는 매입 기념으로 심었을지도 모
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원
을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쯤이나 올련지...?


▲  백석동천 별서터 전경

▲  연못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늦가을)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

백석동천 별서터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허나
통제의 줄이 느슨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히 여름에는 피서객들로 정신
이 없어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우회하여 백사골 상류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는데, 2012년에 주변 산길
을 정비하고 산불방제 장비를 갖춘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을 심어 소소한 볼거리를 선사하
고 있다. 허나 솟대 돌탑은 백사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이다.
돌탑을 지나면 소나무숲과 처절한 아름다움을 보이며 늦가을에 잠긴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
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부암동 주택가
방면)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별서터 입구에 세워진 오리 솟대 돌탑
예로부터 오리 등의 새는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솟대 꼭대기에 오리 모양을 달아두어
하늘과의 연락을 꾀했다.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층 돕고 있는 호젓한 은행나무숲길

▲  아직도 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 산길로 가면 '白石洞天'이란 문신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이란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관이 아름다운 경승지에 붙여진 이름으로 아무 산천에나
주어지는 이름이 아니다. <백석동천의 유래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음>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썼는지 북악산 귀신도 모른다. 아
마도 월암 바위글씨와 비슷한 시기가 아닐 듯 싶은데 글씨가 정말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
다. 옛 사람들은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저렇게 낙서를 남기는 습성이 있었는데, 백사골 역시
그들의 낙서가 1개도 아닌 2개나 깃들여져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이다.


▲  백사골의 그림 같은 숲길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외나무다리 방향)

 새하얀 반석들이 가득 펼쳐진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동쪽)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뒷골마을(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길을 조금 가면 잠시 떨어졌던 백사
골 냇물이 나타난다.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과 푸른 이끼 옷을 입은 바위까지 줄줄이 이어지면
서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이나 금강산 등 쟁쟁한 큰 산의 계곡만은 못해도 서울
도심에 저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을 탄압(?)하는 현장이 되고 시민들이 소풍과 나들이로
이곳에 들어와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
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백사골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는 외나무다리

백사골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나타나 깊은 산골의 고적
하고도 정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2개의 목재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도
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하지만 다리 길이도 짧고 다
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
울 필요는 없다.

사람도 많고, 차량도 많고, 키다리 빌딩도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기만 한 서울 도심 속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백사골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
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만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 방면)
모든 것을 내버린 나무들이 하늘이 두려운지 아니면 벌써 노년에 들어선 건지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였다.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 직전)

외나무다리를 지나면서 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좁아진다. 계곡 오른쪽에
는 생뚱맞게도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을 지
나면 집들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 종로구가 분명
한데 풍경은 완전히 강원도 두멧골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에 벌인 부암동 백사실(백석동천)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 이후 내용은
분량상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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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부암동 늦가을 나들이 (무계원, 안평대군집터...)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 늦가을 산책
(인왕산 자락 명소들) '

▲ 인왕산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

▲ 반계 윤웅렬 별장의 뒷모습

▲ 부암동 무계원



 

늦가을 누님이 그의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며 천하를 곱게 물들이던 11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후배 여인네와 함께 나의 즐겨찾기 명소인 종로구 부암동을 찾았다.

부암동(付岩洞)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백악산), 인왕산(仁王山)에 포근히 감싸인 도
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로 천하 제일의 큰 도시로 콧대가 매우 높은 서울의 심장부에 자
리해 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
도로 매우 번잡한 시내가 연상되는 도심과는 전혀 다른 산골마을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어
서울 도심의 또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이곳은 아름다운 경관과 도심과 가까운 잇점으로 조선 초부터 도성(都城) 밖 경승지로 격
하게 찬양을 받아와 그와 관련된 오래된 명소가 많이 서려있다. 이들 명소와 부암동의 수
려한 풍경에 나는 그만 퐁당퐁당 빠져버렸고 매년 적지 않게 찾아와 그에 대한 마음을 표
현한다.

부암동에는 고색의 명소, 현대 명소, 자연 명소 등 볼거리가 상당하여 본글에서는 인왕산
자락에 안긴 명소 몇몇만 다루도록 하겠다. 참고로 부암동은 붙임바위에서 유래된 이름으
로 법정동명과 행정동명을 겸하고 있으며, 법정동인 신영동(新營洞)과 홍지동(弘智洞) 등
을 관할하고 있다.


 

♠ 부암동의 새로운 문화체험 공간, 고급 요정으로 악명을 떨친 옛 오진암
건물로 새롭게 재생된 ~~~ 무계원
(武溪園)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창의문로5길' 골목길을 2분 정도 들어서면 부암동의 새로운 명소로 격하
게 주목 받고 있는 무계원이 모습을 비춘다.
무계원은 한옥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겉으로 보면 최근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집처럼 보이겠지
만 실상은 100년 이상 묵은 한옥, 오진암을 가져와 지은 것이다. 부암동을 지겹게 들락거린 본
인 역시 그의 존재를 처음 보는데, 그도 그럴 것이 2013년 겨울 이전에는 없던 존재였기 때문
이다.

이 한옥은 서화가(書畵家)로 유명한 송은 이병직(松隱 李秉直, 1896~1973)이 1910년에 지은 고
래등 기와집으로 원래는 종로구 익선동(益善洞, 종로3가 북쪽)에 있었다. 규모는 700평으로 여
기서 그의 많은 글씨와 그림이 탄생했다. 특히 사군자 중 난과 죽을 잘 그렸으며, 서화 감식에
도 매우 밝았다.
1953년 집을 조모씨에게 팔았으며, 조모씨는 이곳을 요정(料亭)으로 손질하여 장사를 했다. 이
집이 바로 이 땅 최초의 요정이자 서울시에 등록된 음식점 1호인 오진암(梧珍庵)인 것이다. 오
진암이란 이름은 뜨락에 큰 오동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오진암을 시작으로 청운각과 대원각, 삼청각 등의 요정이 서울 도심과 성북동(城北洞)에 생겨
났으며, 이들과 함께 1960~80년대 요정 정치의 산실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흔히 서울 3대 요
정으로 삼청각(三淸閣), 대원각, 청운각을 꼽으나 청운각 대신 오진암을 넣기도 한다.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과 논의하여 그 유명한 7.4남북공동성
명을 이끌어 낸 현장이기도 하며, 권력 실세와 고위 관료, 기업인들이 자주 들락거렸는데, 이
름만 대면 이 땅의 사람들이 거의 알만한 사람들이 이곳 단골이었다. 이후락도 오진암의 단골
로 많이 재미를 봤다고 한다.
또한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늘자 당시 미국 등 철없는 양이(洋夷) 언론들은 이 땅의 요정들
이 기생 관광으로 돈을 번다며 꼬집었고, 그때 오진암이 진하게 언급되기도 하였다.
2006년에는 어느 손님이 290만원을 카드로 결제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으며, 이곳 음식은 맛이
좋고 정갈한 편으로 접대 아가씨들이 매우 친절했으나 대신 가격이 후덜덜한 수준이라 100만원
이상은 훌쩍 넘어간다. 그래서 서민들은 얼씬도 하지 못한 그야말로 있는 자, 권력층의 폐쇄된
공간이었다.

허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급 요정도 대거 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대원각
은 절로 탈바꿈해 길상사(吉祥寺, ☞ 관련글 보러가기)가 되었고, 삼청각은 서울시가 인수해
고급 문화공간이 되었다. 청운각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으며, 오진암은 그들보다 더 오래
버티긴 했으나 손님이 줄면서 주인 조모씨는 결국 2010년에 집을 내놓고 말았다.
이곳을 사들인 사업자는 10층짜리 관광호텔을 짓고자 그해 9월 오진암을 밀어버렸는데 오래된
한옥이고, 20세기 중반 요정/풍류문화가 깃든 현장이라 철거 반대 여론도 적지 않았으나 종로
구에서는 개인 집이고 지정문화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집이 가루가 될 때까지 방관하고 말았다.
다행히 늦게나마 철이 든 종로구는 2010년 10월 호텔 사업자와 협의를 벌여 오진암을 다른 곳
으로 이건(移建)하기로 의견을 모았으나 마땅한 장소가 없어 철거된 목조 자재를 모아두며 시
간을 허비하다가 2012년 2월 안평대군의 별장인 무계정사터 아랫쪽 지금의 자리를 마련해 복원
하기로 했다.
복원 비용은 종로구와 호텔사업자가 부담했으며, 정부에서 건네준 한옥건축지원금을 포함해 23
억이 소요되었다.

2012년 2월 복원 공사를 벌여 2013년 11월 완성을 보았으며, 오진암에서 옮겨온 목재와 안채의
지붕기와, 서까래 기둥 등이 활용되었고, 특히 종로 청진동(淸進洞)에서 발견된 500년 이상 묵
은 건물 주춧돌로 석축을 쌓아 오진암을 그런데로 재현했다. 또한 뛰어난 장인들이 많이 참여
했고 (주)이건창호에서 한옥 화장실을 지어 기증했다.
공사가 완료되자 문화재 전문가들은 이곳이 무계정사터의 일부임을 내세워 그곳과 연관지어 한
옥의 이름을 정하자고 요청했다. 하여 고심 끝에 무계원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고, 2014년 3월
20일 세상을 향해 활짝 사립문을 열었다.

무계원은 대지 1,654㎡, 연면적 389㎡로 안채와 행랑채, 사랑채, 연못, 돌담, 대문을 두었는데,
들어앉은 지형상 예전 오진암보다는 작게 재현되었으며, 분실된 예전 건물의 부재가 많아 기둥,
건물벽은 거의 새로운 것으로 채워넣었다. 그러다보니 새 집 냄새가 다소 진한 것이다.

다시 태어난 무계원은 전통문화체험 공간으로 개방해 인문학강좌, 서당체험, 다도교실, 국악공
연, 기획전시 등 다양한 전통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종로구와 안견기념사업회가 2016년
5월 안평대군과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의 예술혼을 기리고 그 유적 복원을 위하여 '몽유도원
무계정사 문화축제'를 열기로 했다. (저번 10월에는 황제를 위한 콘서트가 매 주말에 열리기도
했음)

부암동의 새로운 명소이자 꿀단지로 원래 자리도 아니고 이전 과정에서 고색의 내음도 거의 시
들었지만, 권력층과 돈 있는 자의 공간이 시민들의 공간으로 거듭난 의미 깊은 현장이며, 인근
무계정사터(안평대군 집터)와 반계 윤웅렬별장, 청계동천 등 숙성된 오랜 명소와 같이 둘러보
면 정말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건물 전체를 전통문화 및 교육 공간으로 쓰는 것보다는 사랑채나 안채 정도는 한옥 체
험 겸 숙박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대문에 걸린 파란색 무계원 현판의 위엄
글씨가 마치 살아서 율동을 부리는 것 같다. '武'자는 꼭 칼질을 하는 것 같고,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로 인도하는 계단이 나온다.

▲ 무계원 행랑채와 전통 굴뚝

▲ 안채에서 바라본 행랑채


▲ 'ㄱ'자 모습의 안채
안채와 행랑채는 모두 'ㄱ' 모습을 취하고 있다. 옛 오진암의 냄새는
거의 없고 근래 새로 지은 한옥 냄새만 가득하다.

▲ 안채 뒷쪽 돌담과 돌로 단단히 다진 석대(石臺)
청진동에서 가져온 조선시대 건물터 석축과 새로 얹힌 하얀 피부의 석축이
어색하게 대비를 이룬다.

▲ 사랑채 통로

▲ 아무도 없는 사랑채 방


▲ 'ㄱ'자 모습으로 이루어진 사랑채 (밑층은 무계원 사무실)

▲ 사랑채 뒷모습과 네모난 굴뚝
굴뚝을 뜨겁게 달구던 연기는 온데간데 없고 차갑게 식어버린 장식용 굴뚝만
멀뚱히 솟아있다.

▲ 무계원 뒷뜨락 (사랑채 동쪽)
건물을 짓고 남은 동쪽 짜투리 공간은 뒷뜨락으로 삼았다. 이곳에는 나무와
조그만 화초 등을 심었으며, 뜨락 끝에는 굳게 잠긴 협문이 있다.

▲ 뒷뜨락에서 바라본 사랑채
새집 냄새가 가득한 무계원은 딱히 오래된 볼거리나 특별한 것이 없어
이 정도로 마무리를 짓고 미련없이 대문을 나섰다.

※ 무계원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부암동주민센터(
무계원) 하차, 버스가 내려간 방향(북서쪽)으로 조금 가면 길 건너편에 부암동주민센터가 있
으며, 그 옆 창의문로5길을 따라 자하미술관 방면으로 도보 2분 (찾기는 쉬움)
* 관람시간 : 9시~18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과 추석 연휴는 쉰다)
* 입장료는 없으며 단체 관람시 사전 예약 요망
* 전통 공연과 전통문화체험, 기획전시, 인문학강연 등이 부정기적으로 열린다. (자세한 일정
은 무계원에 문의)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27 (창의문로5가길 2 ☎ 02-379-7131)
* 무계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연꽃이 한참 와신상담을 벌이고 있는 네모난 석조 연못
사랑채 뒷쪽에 자리해 있는 것으로 오진암 시절부터 있던 연못인지는 모르겠다.


 

♠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야망이 서린 곳
무계정사
(武溪精舍)터(안평대군 이용 집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2호

▲ 무계동(武溪洞) 바위글씨

무계원에서 다시 골목길(자하미술관 방면)을 1분 들어서면 '현진건 집터'를 알리는 표석이 마
중을 한다.
그 표석에서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서면서 왼쪽을 계속 주시하면 커다란 나무를 간
직한 기와집이 보이는데, 그 집 옆에 커다란 바위가 고개를 들고 있다. 바로 그 바위에 '무계
동'이란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으니 그곳이 안평대군 이용의 별장인 무계정사터이다.

※ 안평대군의 생애(1418~1453)
안평대군은 세종(世宗)의 3째 아들로 세종이 왕위에 오르던 1418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용(
李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문(詩文)과 그림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칭송을 받았으며 거문고를 잘타고
무예에도 일가견이 있는 등, 문무(文武)와 예술을 두루 갖춘 팔방미인으로 세종의 18명 아들
중에 가장 능력이 좋았다.
1428년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29년 불과 11살의 나이로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
하고 1430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유학 공부를 했다. 1438년에는 두만강(豆滿江) 6진으로
파견되어 두만강 이북의 여진족을 정벌하기도 했다.

세종이 승하하자 맏형인 문종(文宗)의 신임으로 황표정사(黃票政事 : 왕자들이 추천한 인물 중
에서 왕이 그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를 장악하고 측근의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등,
조정에서 꽤나 영향력을 행사했다. 1452년 조카인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황보인(皇甫仁), 김
종서(金宗瑞)와 손을 잡고 수양대군을 견제하며 자신의 세력을 꾸준히 키워나갔다.

그는 창의문 너머 지금의 자리에 넓게 별장을 지었는데, 그곳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계곡을
닮았다 하여 무계동
(武溪洞)이라 이름 짓고, 별장 이름을 무이정사(武夷精舍, 무계정사)라 하
였다. 원래 이곳은 그의 2째 큰아버지이자 세종의 2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터였다.
별장을 짓자 장정을 모아 숙식을 제공하고 훈련을 시키며 자신의 사병을 키워나갔으며 용산에
담담정(淡淡亭)이란 정자를 지어 문인들과 교류를 하며 자신의 야망을 길렀다.
하지만 2째 형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이후, 크게 존재를 드러내면서
단종을 설득해 안평대군 손아귀에 있던 황표정사를 폐지시켰다. 이는 안평에 대한 심각한 도전
이자 대권에 대한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안평은 함경도에 있던 이징옥(李澄玉)에게 무기를 지원 받아 무력을 앞세워
잠시 황표정사를 회복시켰으나 이는 그의 명을 단축시키는 꼴 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의 무력
도전에 발끈한 수양은 1453년 10월, 그 유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과 황보인
을 순식간에 처단하고, 방심하고 있던 안평을 포박되어 강화도로 유배보냈다.
허나 수양은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질 않는지 다시 강화도 서쪽에 자리한 교동도(喬桐島)로 쫓
아냈고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세상에서 제일 쓴 약, 사약(死藥)을 보
내 빨리 죽을 것을 재촉했다.

안평은 형이 보낸 사약 사발을 쭈욱 들이키며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그리고 형에게 선수를 당
했던 자신의 어리석움을 한탄하며 이내 피를 와장창 토하고 아무런 미련도 없는 듯, 쓰러지니
그의 나이 불과 35살이었다.
이후 18세기 중반까지 복관(復官)되지 못했으며, 영조 23년(1747년)에 이르러 영의정 김재로(
金在魯)의 건의로 그제서야 복관이 되고 시호를 받았다. 그의 시호는 장소(章昭)이며 무덤의
위치는 전해오지 않는다.

그가 이승을 뜬 이후, 그의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는 완전 쑥대밭이 되었으며 그의 권력을 향한
강인한 정열이 느껴지는
'武溪洞' 3글자만이 쓸쓸히 바위에 남아 이곳이 안평의 집터였음을 아
련하게 전해줄 따름이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懈堂)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여름철에는 많은 문인
들이 찾아와 경치를 즐겼다.

※ 문예가(文藝家)로써의 안평대군
그는 무이정사와 담담정으로 문인들을 초청하여 수시로 연회를 베풀었고, 궁중에 소장된 서화(
書畵)와 자신이 수집한 명나라 서화를 연구하여 주위 사람들에게 이를 소개하는 등 그 당시 문
학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체를 사용했는데 이를 나름대로 조선식의 필법으로 발
전시켰다. 조선에 온 명(明)나라 사신들은 그의 글씨를 보고는 조맹부의 글씨보다 더 휼륭하다
며 서로 글씨를 받아가려고 아우성을 떨었다.

한편 무계정사에 머물던 어느 평화로운 날, 꿈 속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냥 기
억 속에 두기가 너무 아까워 그와 친분이 있던 안견(安堅)에게 그 꿈의 내용을 설명하여 그리
게 하니 그는 3일 만에 그림을 완성하여 올렸다. 그것이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이다.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바다 건너 왜열도에 가 있으며, 2009년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
전 때 잠시 귀국한 인연으로 몽유도원도의 현장인 무계정사터를 찾는 답사객이 잠시나마 늘기
도 했다.
또한 여러 문인들의 글을 정리하여 시화첩(詩畵帖)을 만들기도 하였고, 1452년에는 경자자(庚
子字)를 개주(改鑄)해 만든 임신자(壬申字)의 자모(字母)를 쓰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그
의 글씨로는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는 세종대왕 신도비(神道碑), 수원에 있는 청천부원군
심온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자신의 아우인 임영대군묘표(臨瀛大君墓表) 등의 비문이 있다.


'武溪洞' 바위글씨가 있는 기와집은 무계정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존재로 예전에는 개인 소유
였으나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리하여 빈 집이 되었다. 집과 바위글씨 주변은 나무들이 여럿
있을 뿐, 거의 방치되고 있는 수준이며, 서남쪽은 너른 공터가 있는데, 그곳은 현진건의 집터
이다.

10여 년 전 무계동을 찾았을 때는 쥐방울만한 견공(犬公) 2마리가 요란을 떨며 바위를 지키는
통에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글씨를 봤었는데, 이제는 그들도 무계정사처럼 희미한 추억이 되어
버렸다.
2007년 이후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무계정사터'에서
'안평대군 이용집터'로 변경되었으며, 집
으로 들어가는 대문이 굳게 잠겨있어 관람을 애타게 원할 경우 문에 달린 종로구청 문화관광과
연락처로 연락을 하거나 요령껏 넘어가기 바란다.

※ 무계정사터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부암동주민센터(
무계원) 하차, 창의문로5길을 따라 자하미술관 방면으로 도보 5분, 현진건집터 표석만 찾으
면 금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19-4 (창의문로7길 28-4)


▲ 무계동 바위글씨로 인도하는 조그만 골목길
낙엽이 쓸쓸히 내려앉아 만추(晩秋)의 서정을 불러 일으킨다.


▲ 공터가 되버린 현진건 집터
저 뒤쪽 붉게 물든 아름드리 나무가 자리한 곳에 무계동 바위글씨가 있다. 공터
구석에는 은단천(銀丹泉)이라 불리는 샘터가 있으나 수질은 장담 못한다.

▲ 한줄기 신기루가 되어 사라진 '현진건 집터 표석'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은 소설 '운수좋은 날'로 유명한 문인이다. 그는 1930년대에 무계정
사터인 이곳에 조그만 집을 짓고 살았는데, 2000년 이후 개발의 칼질을 당해 사라졌다. 그래도
현대문학의 중추적인 인물의 집인데, 문화유산이나 기념물로 보존하거나 평창(平昌) 봉평의 이
효석(李孝石) 생가처럼 조촐한 문학의 성지(聖地)로 키웠으면 좋았을 것을 위정자들의 철학과
역사의식 부재, 그리고 그들을 등에 업으며 오로지 돈을 위해 마구잡이로 칼질을 일삼는 개발
업자들, 그들이 날뛰는 이 땅의 현실이 그저 딱할 따름이다.


▲ 청계동천(靑溪洞天) 글씨를 지닌 바위

무계정사의 흔적을 둘러보고 인왕산의 품으로 다시 길을 재촉했다. 전원 분위기가 물씬 감도는
부암동, 부암동에 핏줄처럼 얽힌 골목길은 마치 시골길을 거니는 기분이다. 산골에 있어 다소
오르막길이 많긴 하지만 그리 힘든 정도는 아니다.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이 앞다투어 베푼
숲내음에 걷기만 해도 마음이 느긋해지며 온갖 감상을 강하게 불러 일으킨다.

현진건집터와 윤웅렬별장 사이에는 피부를 드러낸 바위들이 여럿 있는데, 청계동천(靑溪洞天)
바위글씨를 품은 바위가 있어 이곳도 한때 동천(洞天)의 칭호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바위
글씨는 작고 얇은 수수한 모습으로 옛 사람들이 이곳 절경에 반해 새겨놓은 것이다. 이름 그대
로 맑고 깨끗한 계곡이 있었다는 뜻인데, 지금은 그 계곡이 사라져 실감이 나지 않지만 윤웅렬
별장 뒤쪽에 가늘게 흐르는 계곡이 이 앞을 흘러갔다. 그러다가 주택을 만들고 길을 내면서 지
하에 생매장된 것이다.

언제 누가 새겼는지는 귀신도 모르나 조선 후기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며, 바위 주변이 개인 소
유 땅이라 주변을 철책으로 꽁꽁 둘렀다. 그래서 바위 코 앞까지는 접근이 어려우나 어차피 길
가에 있고 훤히 다 보이기 때문에 관람에는 그리 지장은 없다.


▲ 청계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한옥,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2호

▲ 윤웅렬별장 문간채 (안쪽 대문)

청계동천에서 1분 정도 오르면 반계 윤웅렬별장(이하 별장)이라 불리는 한옥이 나온다. 이곳은
인왕산 품에 포근히 안긴 그림 같은 기와집으로 1906년 친일파의 하나인 윤웅렬(尹雄烈, 1840
~1911)이 지은 별장이다.

윤웅렬은 해평(海平) 윤씨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1856년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감영중군(
忠淸監營中軍)과 공주중군(公州中軍), 북청병마우후토포사(北靑兵馬虞侯討捕使)를 거쳐 1878년
통리기무아문참사(統理機務衙門參事)과 남양부사를 지냈다.
1880년 수신사(修信使)의 일행으로 왜열도를 시찰하고 왔으며, 1882년 별기군(別技軍)이 창설
되자 훈련원 하도감(下都監)의 신병대장의 영관(令官)이 되었다. 허나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
亂)으로 왜열도로 도망쳤다가 귀국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터지자 김옥균(金玉均)에 의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
나 3일 천하로 싱겁게 끝나면서 화순 능주로 유배를 갔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군부
대신(軍部大臣)으로 있으면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청나라 상해(上
海)로 줄행랑을 쳤으며, 다시 기들어와 1906년 많은 돈을 들여 부암동에 별장을 짓고 머물렀다.
하지만 1910년 이후 왜국의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심히 좋지 않은 뒷끝을 보였다.

윤웅렬의 아들로 그 유명한 이름,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있는데, 그는 개화파 지식인으
로 여러 선각자들과 함께 독립협회와 신민회(新民會)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민중 계몽
에 앞장섰다. 1910년 이후 안창호(安昌浩)가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을 지내면서 민족교
육에 헌신했으나 1911년 105인 사건으로 3년 동안 옥살이를 했으며, 서서히 친일파로 갈아타면
서 부친과 마찬가지로 구린 뒷끝을 보였다.

윤웅렬이 이곳에 별장을 지을 때, 벽돌로 지은 서양식 2층 건물만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가 골로 가면서 3째 아들 윤치창(尹致昌)이 상속을 받았는데, 1930년대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
채, 광채, 문간채를 추가로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별장 안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으며, 안방 앞에는 2칸 부엌이 있
고, 건넌방 앞에는 작은 누마루가 있다. 안채 왼쪽에 광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있는데, 'ㄱ'모
양의 사랑채 한쪽 끝에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이 있다. 사랑채와 2층 건물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앞에 인왕산이 베푼 조그만 계곡이 흘러간다. 그 계곡이 바로 앞서 언급한 청계동
천의 상류로 계곡에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나무를 심어 경관을 아름답게 꾸몄다. 사랑채 지
붕에는 옥상 테라스를 만들어 경관을 감상하는 전망대로 삼았다.
사랑채와 광채는 변형이 심해 원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우며, 한양 도성 밖 부암동에 세워진
별서(별장)의 하나로 외국 건축 양식이 상류층 주택에 적용된 사례로 주목된다. 또한 안채는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가 잘 반영되어 있다.

윤치창 이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봉산서원이라 불리는 미술공간으로 쓰였으며, 이때는 대문(
문간채) 앞 뜨락에 비너스상도 두고 집채만한 큰 바위도 두면서 특이한 모습을 보였는데, 2010
년 이후 어느 기업 회장이 인수하면서 2011년 가을에 크게 보수를 했다. 이때 대문을 새로 만
들고 담장을 추가했으며 집도 새집처럼 산뜻하게 손질했다.
집 보수공사는 2011년 12월에 끝났으며 이후로는 폐쇄적인 상류층의 습성으로 어지간해서는 속
살 개방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이전에 본 것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내 바램이긴 하
지만 이렇게 괜찮은 한옥을 주인 일가만 누릴 것이 아니라 다수가 좀 누렸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한옥 민박이나 게스트하우스로 개방하는 것은 어떨까? 북촌(北村)과 전주한옥마을, 안동
의 오래된 한옥, 경주 양동민속마을 한옥들이 내/외국인을 상대로 한옥 체험 및 숙박 제공으로
단단히 재미를 보고 있다.
이곳 집 크기도 북촌의 왠만한 한옥과 비슷하거나 조금 크며, 뜨락도 넓고, 바로 옆이 인왕산
숲이라 공기도 청정하다. 도심이긴 하지만 첩첩한 산골에 들어온 듯, 전원 분위기도 진하게 풍
겨 도심 속의 이색적인 분위기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방도 많고 사랑채 위에 테라스까지 갖
춘 매력도 있으니 어지간한 한옥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수도 있다. 교통도 도심에서 무척이
나 가깝고 버스정류장에서 도보 10분이니 그만하면 적당하다.


▲ 서쪽 담장 너머로 바라본 윤웅렬별장의 뒷모습

▲ 윤웅렬별장 앞길 (대문과 담장은
2011년 보수 때 새로 했음)

▲ 안채 옆에 있는 또 다른 문
원래 있던 문으로 늘 굳게 닫혀있다.

▲ 윤웅렬별장 위쪽(서쪽) 돌담

▲ 겨울잠에 잠긴 별장 연못
물과 연꽃, 물고기가 넘쳐날 그때를 꿈꾼다.


▲ 윤웅렬 별장의 숨겨진 아름다움 (사랑채 뒤쪽 계곡)

별장 뒤쪽에는 이곳의 숨겨진 비경이 있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절경이 수줍은 듯 숨바꼭
질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조그만 계곡이 없는 듯 흘러가는데 이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이다. 계곡 양쪽에는 돌
로 높게 석축을 쌓았으며, 위쪽에는 2단으로 석축을 둘렀다. 석축 위에는 단풍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이 앞다투어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늦가을의 정취를 진하게 우려낸다. 지나던 가을
도 이 별장에 눈독을 들였는지 뒤쪽에 살며시 들어와 고운 작품을 연출한 것이다. 화사하게 타
오른 단풍과 알록달록 물든 나무들이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슬슬 올해를 정리한다. 겨울
제국(帝國)이 도래하면 모든 것을 다 공출당해 숨죽이고 있다가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 되면 다
시 기지개를 켤 것이다.


▲ 사랑채 뒤쪽 계곡의 막다른 곳 (바위와 폭포)

계곡의 막다른 곳에는 푸른 이끼를 뒤집어 쓴 바위가 있다. 이끼가 가득하다는 것은 이곳이 그
만큼 청정하다는 것을 강하게 의미한다. 상류에서 내려온 계곡은 이 바위를 타고 아래로 흘러
가 아담한 폭포를 자아내며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폭포의 높이는 2m 정도로 물줄기가 바위 전
체를 타고 흐르는 것이 아닌 한쪽 구석에 답답한 모습으로 흘러간다. 바위 위쪽 주변에는 석축
을 쌓고 계단을 만들었는데, 붉은 색채의 낙엽이 수북히 쌓여 마치 산불이 일어난 듯 하다.


▲ 푸른 이끼의 청정한 안식처 바위와 폭포, 그리고 인왕산 계곡물

▲ 바위 위쪽 부분 (석축과 돌계단)
비록 짧지만 한 세상 멋지게 살다가 쓸쓸히 대지로 떨어진 이쁜 빛깔의
낙엽들이 수북히 쌓여 아름다운 선경(仙境)의 불빛을 이룬다.

▲ 2층 테라스를 갖춘 사랑채와 2층 벽돌집

비경의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랑채는 별장 내부를 남쪽에서 꽁꽁 가리고 있다. 사
랑채 기와 지붕 위에는 특이하게 옥상 테라스를 두어 작지만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으며 사
랑채 바로 옆에는 서양식으로 만든 2층 붉은 벽돌집을 두어 옥상으로 연결하는 계단을 두었다.
벽돌집에는 각 층마다 큰 방이 있어 사랑채의 보조 역할을 하며, 옥상 테라스와 벽돌집은 이곳
만의 강한 매력이자 서울에 있는 근대 한옥 중에서도 유일하다.

▲ 2층 벽돌집과 안으로 들어가는 문

▲ 사랑채 지붕에 마련된 2층 테라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안채

사랑채 지붕으로 올라가려면 2층 벽돌집을 거쳐야 된다. 실내화로 갈아신고 계단을 타고 올라
가 문을 열면 나무로 지어진 테라스이다. 전망용으로 지어지긴 했으나 두 눈에 들어오는 범위
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매우 좁다. 비록 별장 일대와 남쪽 산자락이 고작이지만 주변의 풍경
이 고와 눈이 그리 심심치는 않다. 이곳에 올라 인왕산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면 속
세에서 마비된 머리와 정신이 싹 가시는 듯 하며, 머리도 맑아져 공부도 잘될 것 같다.

별장 서쪽 언덕에는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구석에 소나무 등의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가 제
법 다 자란 티를 내며 별장에 작게나마 그늘을 드리워준다. 게다가 커다란 바위도 한쪽에 자리
잡고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숫키와가 얹혀진 담장이 집을 넓게 둘러싸며 속세와 경계를 이룬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부암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다른 명소들은 별도의 글에서 흔
쾌히 다루도록 하겠다.

* 반계 윤웅렬 별장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48 (내부 관람은 거의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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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 늦가을 나들이 (숙정문~백악마루~창의문)


'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北玄武), 북악산(백악산) 나들이 '

북악산 한양도성길 (백악쉼터 부근)

▲  북악산 한양도성길

숙정문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  숙정문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가을이 한참 절정을 누리던 11월 한복판,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을
찾았다.
오후 2시,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1111번(번동↔성북동)을 타고 성북동 명
수학교 종점으로 이동했다. 서울 도심 속의 전원(田園)마을로 일컬어지는 성북동(城北洞)은
나의 즐겨찾기 명소로 정말 지겹도록 찾은 곳이건만 매년 10번 이상 발을 들일 정도로 나의
마음을 제대로 앗아간 곳이다.

성북동 종점에서 만국기(萬國旗)가 펄럭이는 '우정의 공원'을 지나 삼청각으로 인도하는 조
그만 길로 들어선다. 서울 도심이 바로 지척이건만 도심을 비웃듯 산골 풍경을 여실히 비춘
다. 길 왼쪽에는 진하게 숲이 우거져 있고, 북악산이 베푼 조그만 계곡이 졸졸졸~~♪노래를
하며 흘러가는데, 그는 성북천이란 간판을 달고 속세로 흘러간다.
울긋불긋 타오른 나무들은 늦가을의 절정을 누리고 있고, 그들이 뿌려놓은 은행잎과 단풍잎
은 귀를 접고 누워 있다. 은행잎은 누가 쓸었는지 가장자리로 수습되어 자연산 황금빛 카페
트를 자아낸다.

길의 막다른 부분에 이르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함께 약간의 오르막 길이 펼쳐지는데,
그 길을 오르면 바로 삼청터널 북쪽이다. 삼청터널은 성북동에서 도심을 이어주는 터널인데,
겨우 2차선 크기로 폭이 좁으며, 4발 수레의 왕래가 빈번해 삼청각(三淸閣) 앞에 닦여진 횡
단보도에서 보행자용 신호 버튼을 눌러 파란불을 소환해 건너는 것이 좋다. 물론 수레의 눈
치를 적당히 보며 건너가도 된다.

길을 건너면 홍련사(紅蓮寺)로 가는 길과 북악산으로 가는 길이 나란히 나타난다. 초행자는
자칫 햇갈리기가 쉬운데, 오른쪽 평탄한 길이 홍련사로 가는 길이며, 왼쪽 계단길이 북악산
과 김신조루트로 가는 길이다. 홍련사로 가는 길은 단지 홍련사만 이어줄 뿐, 다른 곳과 이
어지지 않으며, 절 입구에 정열적으로 타오른 단풍나무가 정처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앗아간
다. 저 길로 들어서면 나도 저들처럼 붉게 물드는 것은 아닐까?


▲  늦가을에 잠긴 삼청각, 숙정문안내소 가는 길

▲  늦가을이 화사하게 불을 질러놓은 붉은 단풍이 마중하는
홍련사(오른쪽) 입구와 북악산, 숙정문 입구(왼쪽)


 

♠  북악산(백악산) 입문

▲  북악산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직전)

북악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을 오르면 2007년에 북악산 개방 기념으로 조림(造林)한 것을 기리
고자 세운 표석이 있고, 그 표석을 지나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북악
하늘길 제1산책로와 제2산책로(김신조루트)로 이어지며, 직진을 하면 북악산 주능선의 주요 관
문인 숙정문안내소이다.


▲  북악산의 관문이자 검문소, 숙정문안내소

숙정문안내소에서 출입신청서를 작성하여 신분증과 함께 제출하면 출입 허가를 알리는 목걸이용
패찰을 준다. 물론 신분증도 돌려준다. 단 신분증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들어가지 못하
며, 입장시간(9~16시, 겨울은 15시까지)이 지나면 이 역시 출입이 불가능하다.

숙정문안내소를 지나면 속세살이처럼 가파른 길이 숙정문까지 이어진다. 시작부터 힘든 길이니
북악산이 그리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허나 다행히 북악산을 정비하면서 목조
계단길을 만들어 통행이 조금은 편해졌으며, 가파르기로 이름난 북악산 주능선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간단한 시험 수준이다.


▲  숙정문으로 오르는 산길 (숙정문안내소 이후)

▲  숙정문으로 오르는 계단길

※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 북악산<北岳山, 백악산(白岳山)> - 명승 67호
서울 도심 북쪽에 가파르게 솟아난 북악산(342m)은 서쪽의 인왕산(仁王山, ☞ 관련글 보러가기)
, 동쪽의 낙산(駱山, 낙타산, ☞ 관련글 보러가기),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과 더불어 서
울 도심을 지키는 4대 산의 하나이자 이들의 맏형이다. 이들 4개의 산은 서울의 안쪽을 둘러싸
고 있어 내사산(內四山)이라 불린다.

서울 도심의 지형은 내사산에 감싸인 분지(盆地)로 조선 태조 때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국도(
國都)를 옮기면서 이들 산의 능선을 따라 18.2km의 도성(都城)을 쌓았다. 그리고 풍수지리에 따
라 북쪽의 북악산을 북현무(北玄武)로 하여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삼았으며, 인왕산을 우백호(
右白虎), 낙산을 좌청룡(左靑龍), 남산을 남주작(南朱雀)으로 삼았다.
이렇게 도성을 만들고 한강 남쪽에 솟은 관악산(冠岳山, 629m)을 신하의 산이란 뜻의 조산(朝山
)으로 삼았는데, 문제는 주산인 북악산보다 훨씬 높고 산세가 우람해 거의 신하가 왕을 누르고
있는 형세였다. 게다가 관악산과 그 서쪽에 자리한 호암산(虎巖山)이 각각 활활 타오르는 불의
모습과 호랑이의 모습으로 서울을 응시하고 있는지라 조선 위정자들은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
환으로 서울 북쪽에 있는 북한산(삼각산)을 서울을 지키는 진산(鎭山)으로 삼아 북악산을 보조
하게 하고 관악산의 기운을 누르고자 했다. 북한산이 관악산보다 키도 높고 산세도 훨씬 장대하
기 때문이다.

북악산은 하얀 바위가 많아 원래 백악산(白岳山)이라 불렸으며, 종로구에서는 어디서든 그가 보
인다. 마치 제주도 어디서나 한라산(漢拏山)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조선시대부터 서울을 상징하는 산으로 남쪽 자락에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세웠
으며, 그 북쪽(지금의 청와대)에는 넓게 후원을 두었다. 지금은 청와대(靑瓦臺)와 국무총리공간
이 둥지를 틀고 있어 이 땅의 정치, 행정 1번지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북악산 주능선에는 한양도성(漢陽都城)이 파노라마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정상 동쪽에는 도성
의 북문인 숙정문이 있고, 인왕산과 경계를 이루는 자하문고개에는 창의문(彰義門)이 고색의 모
습으로 고개 중턱을 지킨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요충지로 해방 이후까지 주능
선과 북쪽 능선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으나 1968년 1.21 사건 이후 북악산 대부분
이 금지된 땅이 되고 말았다.

주능선과 조금 떨어진 삼청동(三淸洞)과 청운동(淸雲洞)은 한양도성의 북쪽 변두리로 숲이 무성
했다. 삼청동계곡과 대은암(大隱巖)계곡, 백운동(白雲洞)계곡, 청송당(聽松堂)계곡 등이 흘렀으
며, 풍경이 매우 고와 왕족과 귀족들의 별장 및 풍류(風流) 장소로 각광을 받았다. 또한 삼청공
원과 숙정문 남쪽은 서울 여인들의 봄꽃놀이 장소로 유명했다고 전한다. 대은암계곡 바위글씨를
비롯해 당시의 여러 문화유적이 아련히 남아있으며, 북악산 북쪽 백사골(백사실)에는 백석동천
이란 별서(別墅)유적이 남아 있다.

북악산은 북쪽으로 북한산과 이어져 있고 숲이 무성하다보니 예로부터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
그들은 궁궐 후원과 북촌(北村)까지 침투했는데, 태종(太宗)이 경복궁 후원을 거닐다가 호랑이
의 습격으로 위기를 겪은 적도 있었다. 또한 다른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무서워하지 않았
다고 하며, 대신 수진궁(壽進宮) 귀신을 무서워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왕산과 북악산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왕족의 사
당임)

1968년 이후 빗장을 철저히 닫아걸던 북악산은 2006년 4월 1일 홍련사에서 숙정문을 거쳐 촛대
바위까지 부분 개방되었으며, 그것도 인터넷 예약을 통해 1일 4회만 출입이 가능했다. 이후 전
면 개방을 위해 쉼터와 의자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어 2007년 4월 5일, 말바위부터 북악산 정상
을 거쳐 창의문까지 전 구간이 부분 개방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2009년 북쪽 능선인 북악하늘길
(김신조루트)이 활짝 열려 시민의 품으로 돌아어왔다. 특히 이 길은 약간의 통제구역이 있긴 하
지만 제약이 심한 주능선과 달리 시간 제약이 없다.

북악산은 예로부터 소나무가 유명하여 조선 조정에서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관리했으며, 왜정(
倭政) 이후 관리 소홀과 마구잡이 벌채로 지금은 주능선 일대에 좀 남아있다. 그 외에는 간간히
소나무가 목격된다. 또한 오랫동안 금지된 곳으로 있다보니 식물들이 마음 놓고 뿌리를 내려 숲
이 원시림마냥 매우 울창하다. 숙정문 주변에는 팔배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수목이 무성
하여 새들이 많이 산다.
그러다보니 서울 도심의 하늘을 정화시켜주는 허파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인왕산과
북한산, 관악산과 더불어 대자연 형님이 서울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자 꿀단지로 앞으로도 지금
의 모습 그대로 삼삼한 자연의 공간으로 서울 속에 있었으면 좋겠다. 하긴 산 주변에 국가의 예
민한 시설이 많으니 도읍을 옮기지 않는 이상은 개발의 칼질도 자유롭게 산을 범할 수 없을 것
이다.


▲  북악산 북쪽 산줄기 남마루에서 바라본 북악산 주능선(가운데 산줄기)

※ 북악산 주능선과 한양도성길
2006년 4월부터 순차적으로 개방된 주능선은 창의문에서 정상을 거쳐 말바위, 와룡공원으로 이
어지는 4.3km 구간으로 숙정문 안내소와 말바위 안내소, 창의문 안내소를 통해 입장할 수 있다.
그외에는 절대 출입금지이다. 또한 탐방구간(말바위안내소~창의문안내소)을 절대로 벗어나면 안
되며 도처에 군인이 지키고 서 있으니 엉뚱한 마음을 품으면 곤란하다. (말바위안내소~말바위~
삼청공원/와룡공원 구간은 완전 개방된 구간으로 시간 제한 없음)

주능선에서 만날 수 있는 명소로는 숙정문과 1.21사태소나무,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촛대바위
, 청운대 등이며, 군사시설이 옥의 티처럼 널려 있어 북악산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실감케 한
다. 만약 서울이 수도가 아니었다면 북악산은 꽤나 자유로웠을 것이다.

북악산 정상과 청운대에서는 서울 도심이 두 눈 아래로 펼쳐져 조망(眺望)이 천하 일품이며, 숙
정문과 말바위에서는 성북동과 성북구 서북부 지역이 보이고, 한양도성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평창동(平倉洞)과 부암동, 인왕산, 북한산이 차례대로 보여 그야말로 움직이는 조망대이다.

※ 북악산 한양도성 찾아가기 (2015년 11월 기준)
① 창의문 안내소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윤동주문학관) 하차, 창의문 옆에 바로 안내소가 있다.
② 숙정문 안내소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종점에서 하차, 도보 15분
③ 말바위 안내소 - 지하철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성대후문
   (와룡공원)에서 하차, 성북동 방면으로 3분 걸으면 한양도성이 있는 와룡공원이다. 여기서
   성곽 북쪽 자락길을 10분 정도 가면 말바위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나오며, 계단을 올라 서쪽
   으로 가면 말바위안내소이다. 또는 4호선 혜화역(1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
   고 명륜동 종점에서 2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 이들 안내소는 주차시설이 없으며, 부근에 딱히 수레를 세울 곳이 없으므로 대중교통을 이용
  하기 바란다.

★ 북악산 관람정보 (2015년 11월 기준)
* 북악산(한양도성) 입장시간은 9시부터 16시까지이며, 동절기(11~3월)는 10시부터 15시까지다.
  퇴장은 무조건 18시(동절기는 17시)까지 마쳐야 된다.
* 쉬는 날 -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화요일에 쉼) / 입장료 없음
* 탐방구간
① 창의문 ~ 북악산 정상 ~ 청운대 ~ 숙정문 ~ 말바위안내소 ~ 삼청공원/와룡공원/성북동
② 숙정문안내소 ~ 숙정문 ~ 청운대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 ~ 창의문
* 북악산 탐방 유의사항
① 지정된 코스를 절대로 벗어나면 안된다. 잘못하면 총 맞을 수 있다.
② 탐방로 전 구간은 금연, 금주, 애완동물 출입 제한
③ 안내소(창의문, 숙정문, 말바위)에서 출입신고서를 작성해야 되며,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
   야 된다. 신분증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못들어간다.
④ 안내소 외에는 딱히 편의시설이 없다. 해우소는 안내소에만 있으며, 간단한 먹거리는 안내소
   주변이나 산길 곳곳에 마련된 쉼터에서 먹으면 된다.
⑤ 사진 촬영은 숙정문과 촛대바위, 청운대, 북악산 정상, 백악쉼터, 1,21사태소나무, 돌고래쉼
   터, 창의문에서만 가능하다. (그 밖에 장소는 곤란함)
* 문화유산 해설 : 3~11월까지 문화유산 해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매일 2회<10시(11월은 10시
  30분), 14시> 운영하며, 각각 말바위와 창의문을 출발하여 곳곳을 설명해준다. 별도의 신청은
  받지 않으며, 출발시간까지 집결지에 모인 탐방객에 한해 가이드를 해준다.
* 안내소 연락처 (북악산 한양도성 홈페이지는 이곳을 클릭한다)
① 말바위 (☎ 02-765-0297~8, 팩스 02-765-0296)
② 숙정문 (☎ 02-747-2152, 팩스 02-747-2153)
③ 창의문 (☎ 02-730-9924~5, 팩스 02-730-9926)


 

♠  한양도성의 북문이자 오랫동안 통제구역으로 묶인 금지된 성문,
숙정문(肅靖門) - 사적 10호

숙정문안내소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숙정문이 모습을 비춘다. 북악산 주능선에 자리한 숙정문은
한양도성의 북문(北門)으로 남대문<숭례문(崇禮門)>, 동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돈의
문(敦義門)>과 함께 한양 4대문의 하나였다. 북대문(北大門), 북문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가파른
산능선에 자리해 있어 도성의 대문이라기도 보다는 산성(山城)의 조촐한 성문 분위기가 강하다.

문의 이름인 숙정(肅靖)은 엄숙히 다스린다는 뜻으로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1396
년 지금보다 약간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1413년(태종 13년) 풍수학자인 최양선(崔揚善)이 태종
에게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地脈)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
다'
건의하여 이들 문을 닫아걸고 소나무를 잔뜩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무늬만 문이
된 것이다.
허나 숙정문을 품은 북악산 주능선은 도성 내부와 바깥이 훤히 바라보여 서울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출입을 거의 통제했고, 주변이 첩첩한 산주름 속이라 교통의
기능은 별로였다. 겨우 성북동과 북악산 북쪽 능선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옛날 성북동은 산
지에 선잠단(先蠶壇) 같은 국가 제단만 있었음>
그리고 평소 때와 비가 많이 올 때는 숙정문을 닫아 걸다가 가뭄이 심할 때 남대문을 닫고 이
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1416년(태종 16년) 제작된 기우절목(祈雨節目)에 따라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을 상징하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니 통행문으로서
의 존재감보다는 도성 수비와 음양의 원리를 따지는 풍수지리적인 존재감이 더 컸던 것이다.

1504년(연산군 10년) 성곽을 보수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숙청문이 언제 숙정문으로
간판을 갈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1523년부터 숙정문 이름이 등장했다. 숙정문 외에도 북정문(
北靖門)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들 명칭이 같이 쓰이다가 숙정문으로 통합되었다.

1968년 1.21사태 이후 북악산 대부분과 숙정문 일대가 금지된 땅이 되었으며, 1976년 북악산 일
대 성곽을 손질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문루는 비록 새 건물이지만 성벽을 이루는
성돌에는 고색의 때가 만연해 중후한 멋을 보인다.
매년 봄이 되면 서울 여인들이 숙정문 남쪽에서 봄꽃놀이를 즐겼다고 전하며, 그거 외에는 딱히
숙정문 주변에 대한 옛 사람들의 시(詩)나 문구(文句)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2006년부터 다시 속세에 개방되어 제한적이긴 하지만 성문 관람이 가능하다. 허나 문 좌우 성벽
과 숙정문안내소 방면만 통행이 가능하며, 남쪽에는 삼청동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지만 금줄이
쳐져 있어 절대로 갈 수 없다.

숙정문 문루에 올라서면 북악산 북쪽 능선과 부자 동네로 콧대가 드센 성북동 일대가 훤히 바라
보이며, 대자연이 스케치한 가을 단풍이 산자락을 곱게 수 놓아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자
아낸다. 다만 문 남쪽은 울창한 수목이 시야를 방해하여 조망은 크게 떨어진다.
(숙정문은 사적 10호로 지정된 '한양도성'의 일원임)


▲  숙정문의 수수한 뒷모습

▲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을 연 숙정문
다른 성문과 달리 천정에 그림이 없다. 그냥 맨들맨들한 성돌만 보일 뿐이다.

▲  숙정문 동쪽 협문

▲  서쪽에서 바라본 숙정문 문루


▲  숙정문에서 바라본 천하 (1) 성북동 지역
눈이 시리게 맑은 가을 하늘 아래로 북악산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성북동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왼쪽에 보이는 기와집이 삼청각)

▲  숙정문에서 바라본 천하 (2) 울긋불긋 타오른 북악산 북쪽 능선
북악산길이 흐르는 북악산 북쪽 능선이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사진 왼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기와집이 북악산길의 상징인 북악팔각정이다.

▲  힘차게 뻗은 숙정문 서쪽 성벽
서울 수비를 향한 굳건한 마음이 뭉쳐 단단한 성벽이 되었다.
성곽을 따라 북악산으로 오르면 시야에 범위도 점차 넓어진다.


 

♠  북악산 촛대바위와 청운대

▲  촛대바위

숙정문에서 서쪽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왼쪽에 촛대바위가 있다. 아마도 촛대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듯 싶은데, 현실은 바위의 북쪽과 동쪽 면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곳에서 보
면 촛대처럼 보이지도 않아 그저 그런 바위로만 보인다. 그를 제대로 보려면 바로 정면인 남쪽
에서 봐야 되는데, 남쪽은 통제구역이라 발도 못들이게 하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바위 정상
역시 금지된 곳이니 괜히 바위 위에 올라타는 일이 없도록 한다.

촛대바위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다. 바로 왜정이 이 땅의 혈을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
던 추악한 곳이기 때문이다.
왜정은 1920년대 경복궁과 일직선이 되는 이곳에 말뚝을 꽂았다. 사람으로 치면 머리의 정수리
가 되는 부분이다. 즉 조선 땅의 머리 부분을 아작 내어 이 땅을 영원히 통치하려는 의도를 심
은 것이다. 다행히 그 말뚝은 제거되었다.


▲  촛대바위와 그에게로 인도하는 나무길
나무 난간 너머와 바위는 감히 발도 들일 수 없는 금지된 구역이다.

▲  촛대바위에서 청운대로 오르는 성곽
성곽을 따라 이어진 북악산의 명물인 소나무의 푸른 물결

▲  촛대바위와 청운대 중간의 성곽 바깥 길

촛대바위를 지나면 길의 경사가 점점 각박해지면서 암문(暗門)이 하나 나온다. 여기서 암문 밖
으로 나가서 곡장이라 불리는 높은 곳까지 성곽 바깥 길을 이용해야 되는데, 이는 성곽에 군대
시설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 그렇게 길을 낸 것이다.
길 옆에는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그 너머로 북한산, 평창동 등이 바라보여 마치 휴전선 너머의
미지의 땅을 보는 듯 하며, 저 길의 끝에 이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계단길이 나온다. 거기서
다시 성곽길이 이어진다.


▲  청운대(靑雲臺) 표석 (해발 293m)

촛대바위에서 성 바깥, 안쪽을 들락거리며 2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에서 2번째로 높은 곳인 청
운대에 이른다.
청운대는 푸른 구름의 지대란 뜻으로 근래에 붙여진 이름인 듯 싶다. 이곳은 공간이 넓고 의자
가 마련되어 있어 잠시 두 발을 멈추고 쉬어가기에 좋으며, 북쪽으로 성북동과 북한산, 남쪽으
로 남산과 서울 도심이 바라보여 조망 또한 괜찮다. (도심 쪽이 괜찮음)


▲  소나무가 짧게 그늘을 드리운 청운대

▲  청운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  청운대에서 바라본 북악산 정상

▲  여장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들

청운대를 지나면 안내문이 하나 나오는데, 그 안내문에 따라 여장을 잘 살펴보면 글씨들이 희미
하게 아른거릴 것이다. 이 글씨들은 도성을 축조하면서 새긴 공사 구역 표시와 공사 담당 고을,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으로 이런 것이 새겨진 성돌이 한양도성에 여럿 있다.

1396년 한양도성을 만들 때 성곽 전구간을 600자(약 180m) 단위로 끊어 97구간으로 구획하고 천
자문(千字文) 순으로 공사 구역을 표시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天)으로 시작해 지(地), 현(玄
)... 순으로 해서 북악산 정상 동쪽에서 조(弔)로 끝나며, 구역 다음에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
자의 직책, 이름을 새겼다. 이런 공사 실명제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 되었다. 이곳 성돌에는 의
령시면(宜寧始面)이라 쓰여 있어 의령(경남) 시작 지점을 뜻한다.


▲  남북분단의 쓰라진 비극 - 1,21사태 소나무

청운대를 지나면 성돌 글씨와 함께 1.21사태 소나무라 불리는 소나무를 만나게 된다. 북악산하
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1968년 김신조 공비 패거리의 서울 침공 사건인 이른바 1.21사태로
그들과 총격전을 주고 받은 현장이다. 북악산에는 그와 관련된 쓰라린 장소가 많은데, 이 소나
무와 호경암이란 바위에는 총탄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호경암이 있는 북쪽 능선에는 김신조 일
당이 도망쳤다고 전하는 김신조루트(북악하늘길 제2산책로)가 있다.

때는 1968년 북한은 김신조 일당 31명을 보내 청와대를 공격케 했다. 임진강을 건너 파주와 양
주의 여러 산과 북한산 서쪽 자락, 창의문을 거쳐 1월 21일 도심까지 용케 들어온 김신조 패거
리는 청와대를 코앞에 둔 청운동(淸雲洞)에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 1932~1968)이 이끄
는 경찰에게 저지를 당했다.
경찰이 검문을 한다며 그들의 길을 막자 공비들은 순간 발작하여 외투 속에 감춘 기관단총을 꺼
내 먼저 공격을 가했다. 불행히도 최서장은 가슴과 배에 관통상(貫通傷)을 입어 쓰러지고 '끝까
지 청와대를 사수하라!!'
명령을 내리며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서장의 죽음에 애끓는 복수심에 불탄 경찰은 더욱 반격의 속도를 올려 공비들 상당수를 벌집으
로 만들었으며, 이때 김신조를 비롯한 살아남은 공비들은 목을 붙잡고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줄
행랑을 쳤는데, 그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바로 이 소나무 부근에서 격전이 일어나 15발이 나무
에 박혔다.

이후 북악산 북쪽 능선인 호경암에서 격전이 있었고, 1월 21일 이후 14일의 토벌 끝에 김신조와
도주 1명을 제외한 29명을 사살했다. 도주 1명은 북한까지 도망을 쳤으며, 토벌된 공비의 시신
은 파주시 적성면 적군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김신조는 투항해 이 땅 어딘가에 살고 있다.

우리는 김신조 일당의 난입 사건을 1.21사태라 부르며, 이 사건을 계기로 단단히 뚜껑이 폭발한
박정희 대통령은 바로 그해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군작전도로인 북악스카이웨이를 콩
볶듯 급히 닦게 했다. 예비군 창설로 인해 이 땅의 남자들은 군제대를 하고도 8년이나 예비군훈
련을 받아야 되는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북악산에 널린 수많은 소나무의 하나이지만 이제는 북악산의 명물로 단단히 자리매김을 하였다.
허나 좋은 뜻에서 그리 되면 모르지만 호경암과 함께 1.21사건 같은 우울한 사건으로 명물이 된
것이니 소나무 자신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름 없는 소나무로 조용히 묻히는 것
이 좋았을 것이다. 어쩌다가 안좋은 쪽으로 명물이 되었는지 참. 나무나 사람이나 운과 시간을
잘 만나야 된다.
게다가 호경암처럼 당시에 총탄 흔적까지 진하게 안고 있으니 서로 총을 겨누며 대치하는 남북
분단의 비정한 현실을 전율이 일도록 안겨주는 유쾌하지 못한 곳이다.


▲  1,21사태 소나무의 총탄 흔적
그때 총탄이 박힌 자리에 빨간색과 흰색으로 흉하게 표시를 해두었다.


 

♠  북악산 정상(백악마루)에서 창의문까지

▲  북악산 정상에 박힌 바위

청운대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북악산(백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에 이르게 된다. 백악마루는 해
발 342m로 마루는 순수 우리말로 정상을 뜻한다.

서울 도심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북악산 정상은 청운대보다 공간이 조금 넓으며, 정상 중앙에
는 백악산의 정상 비석과 북악산 옛모습 복원 기념비가 있다. 그리고 정상 북쪽에는 사람 키보
다 2배 정도 높은 굵직한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꼭대기가 실질적인 북악산 정상이다.

정상 남쪽에는 청운대와 마찬가지로 소나무가 가득해 그윽한 솔내음을 전해주며, 지정된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이고 사진을 찍어야 된다. 테두리를 넘으면 절대로 안된다. 여기서는 동서남북 어
디든 촬영이 가능하며, 북쪽으로는 평창동과 북한산, 동쪽으로는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지역, 서
쪽은 부암동과 인왕산, 그리고 남쪽으로 서울 도심과 남산이 속시원히 바라보여 조망이 가히 천
하일품이다. 이곳에 올라 저 발아래 펼쳐진 천하를 보고 있자면 그 천하가 마치 내 것이 된 듯,
잠시나마 제왕(帝王)마냥 즐거운 기분이 밀려온다. (허나 현실은 시궁창..)

세계 최대의 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발 아래 두고 굽어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으로 이곳만
큼 조망이 좋은 곳도 없다. 서울 도심을 둘러싼 산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고 오랜 세월 서울 땅
을 지켜온 북현무로서의 면모와 위엄이 느껴진다.


▲  하얀 돌로 다듬은 백악산 정상 표석

▲  북악산 정상에서 소나무 너머로 보이는 서울 도심과 남산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성북동과 서울 동북부 지역
산속에 묻힌 동네가 성북동이고, 그 산 너머로 성북구와 강북구, 노원구 등
서울 동북부 지역이 앞다투어 바라보인다.

▲  북악산 꼭대기 바위에서 바라본 정상부
정상부는 대머리처럼 아무 것도 없고, 그 주변에 소나무와 여러 식물을 심었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평창동과 북한산(삼각산)
북악산을 받쳐주는 서울의 듬직한 진산, 북한산이 북악산을 굽어본다.
그 남쪽 산자락에 부자 동네 평창동이 둥지를 틀었다.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인왕산 너머로 은평구, 서대문구 등의 서울 서북부 지역과
서울/고양시 경계를 이루는 산들이 보인다.

▲  백악쉼터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인왕산
늦가을 오색 단풍의 물결이 부암동 일대를 화사하게 물들였다.


북악산 정상에서 창의문으로 가는 길은 북악산에서 가장 고달픈 구간으로 각박한 속세살이만큼
이나 가파르다. 내려갈 때는 올라가는 것보다야 부담이 적겠지만 급하게 펼쳐진 성곽길에 아찔
함마저 일 정도이다. 반면 창의문에서 올라갈 때는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성곽길에 저걸 어떻
게 올라가나 정말 까마득하다. 거의 30~40도 경사의 야속한 성곽길을 올라야 되니 말이다.
그래서 등산이 딸리거나 노인과 어린이들은 가급적 숙정문이나 말바위에서 오르길 권한다. 어차
피 거기도 힘들긴 마찬가지지만 서서히 경사가 급해지는 구간이라 덜 힘들다.

정상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백악쉼터라 불리는 조촐한 쉼터가 나온다. 여기는 북악산 개방을
위해 만든 공간으로 역사적인 의미는 없다. 이곳에서도 사진 촬영은 가능하나 쉼터 자체는 찍을
거리가 없으며, 성곽과 성밖에 펼쳐진 천하를 찍으면 된다.


▲  백악쉼터에서 바라본 북악산 북쪽 줄기와 평창동, 그리고 북한산의 위용
북악산 북쪽 줄기는 늦가을이 질러놓은 단풍에 산불마냥 활활 타오르고 있다.
너무 곱게 타올라 깜깜한 밤에도 모두 보일 것만 같다.

▲  힘차게 내려가는 한양도성 (백악쉼터에서 창의문 방향)

▲  각박한 경사를 자랑하는 한양도성길 (백악쉼터에서 정상 방향)

▲  백악쉼터 성곽 너머로 바라본 천하
북악산 북쪽 줄기와 북한산, 평창동과 부암동

▲  돌고래쉼터와 돌고래바위

백악쉼터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돌고래쉼터가 나온다. 왜 북악산과 전혀 관련도 없는 돌고래
를 쉼터 이름으로 삼았는지 아리송했으나 그곳에 가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바로 돌고래처럼
생긴 바위가 누워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고래쉼터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 그 이름도 원래부
터 있던 것이 아닌 북악산을 개방하면서 지은 이름이다.
돌고래라고는 하지만 내 눈에는 물개처럼 보인다. 바위 동쪽에는 약간의 틈이 있는데, 거의 입
처럼 생겼고 그 위에 눈처럼 보이는 자국도 있다. 가만 보면 물개가 꼬랑지를 흔들면서 움직이
는 모습과 같은데, 차라리 물개바위라고 했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돌고래쉼터 주변은 촬영이 가능하나 찍을 만한 것은 돌고래바위와 성곽 너머로 보이는 풍경 뿐
이다. 돌고래바위는 통제구역이라 그냥 난간 너머로 봐야 되며, 바위 주변에도 소나무가 그윽하
게 운치를 자아낸다. 그런 소나무 사이로 서울 도심이 살짝 속살을 비친다.


 

♠  북악산의 서쪽 종점이자 옛 한양도성의 성문
창의문<彰義門 = 자하문(紫霞門)> - 사적 10호

▲  창의문 바깥쪽 (부암동 쪽)
자하문고개를 밀어 만든 신작로(新作路)에 밀려 성문으로의 기능은 다소 떨어졌지만
왕년에 도성 성문으로서의 위엄은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서울 도심과 부암동을 잇는 자하문고개에 옛 한양도성의 성문인 창의문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다. 창의문은 성밖 부암동에 있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창의문보다는 자하문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문은 한양도성의 8개 성문의 하나이자 4소문(小門)의 하나인 북소문이다. 4소문은 동소문<東
小門, 혜화문(惠化門)>, 서소문<西小門 ,소의문(昭義門)>, 남소문<南小門, 광희문(光熙門)>, 그
리고 이곳 창의문으로 혜화문과 소의문, 광희문은 각각 동소문. 서소문, 남소문이라 불리나 유
독 창의문은 북소문이라 불린 적이 거의 없다.


▲  창의문 안쪽 (도심 쪽)

창의문은 1396년 한양도성을 만들 때 조성된 것으로 문의 이름인 창의(彰義)는 '올바른 것을 드
러나게 하다'는 뜻이다. 1413년(태종 13년)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
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건의하여 1416년 문을 닫아걸었다. 다만 1422년 군인들의 통로로 사용되었고, 1617년(광해군 9
년) 창덕궁을 보수할 때 이 문을 통해 석재를 운반하는 등, 철저히 나라 일에만 문을 열었으며,
성 밖 부암동에 귀족들의 별장과 놀이터가 즐비했고, 부암동을 드나들던 귀족들이 많은 점으로
볼 때 그들의 은밀한 통행로로 쓰였다. 즉 국가와 귀족들의 문이었던 것이다.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
괄(李适) 등은 세검정(洗劍亭)에서 칼을 씻으며 역적질을 모의, 역촌동(驛村洞) 별서에 있던 얼
떨떨한 능양군(陵陽君, 인조)을 앞세워 도성에 쳐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이른바 인조반정을
저질렀다. 그때 그 반역도당들이 부시고 들어간 문이 바로 창의문이다. 그래서 문루에는 인조반
정(仁祖反正)을 저지른 작자들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창의문이 백성들에게 전격 개방된 것은 1741년(영조 17년)이다. 그때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
이 인조반정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라며 성문을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문루
를 다시 세울 것을 건의하여 지금의 문루가 지어졌다.


▲  창의문안내소에서 바라본 창의문 문루와 협문(夾門)
하얀 추녀에 잡상(雜像)과 용머리가 걸터앉아 성문을 지킨다. 창의문이 무탈했던 것도
아마 저들의 굳은 직업정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  문루에 자랑스럽게 걸린 인조반정 반역자들의 명단 현판
기분같아서는 저 현판을 떼서 장작으로 쓰고 싶다. 저들의 우매한 권력투쟁과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사대주의, 국제정세에 우둔함으로 얼마 뒤 병자호란(丙子胡亂)과 삼전도
(三田渡) 굴욕의 대치욕을 당하게 되고 그것도 성에 안차 동아시아의 호구 국가로
이리 저리 털리다가 결국 나라마저 몽땅 말아먹게 된다.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소문은 왜국 통감부(統監
府)가 만든 성벽처리위원회에서 1908년에 무단 철거하여 정확한 위치조차 아리송하고 동소문은
왜정 때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지었다. 남소문인 광희문은 성문만 오래되었을 뿐, 문루와 성
곽은 1970년 이후에 복원되었다.
그에 반해 창의문은 6.25 때도 총탄이 알아서 비켜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1958년 중
수된 것 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 정정함을 과시한다. 바로 그 점이 인정되어 2015년 10월 문화재
청에서 국가 지정 보물로 지정 예고되었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절차를 거쳐 별다른 일이 없는
한 11~12월 중에 보물로 지정될 예정이다.


▲  창의문안내소에서 바라본 창의문 안쪽과 서울 도심
이곳은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공비들이 침투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도성 성문의 하나로 성문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으나, 1960년 이후 자하문고개를 밀어내고 신작
로를 닦으면서 성문의 통행 기능을 잃게 되었다. 요즘이야 산꾼과 답사꾼들로 심심치는 않지만
그래도 예전 같지는 못하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물건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뒷전에 물러나 앉
은 모습은 정말 초라하고 쓸쓸하기 그지없다.

문 서쪽에 신작로를 내면서 한양도성은 50m 남짓 끊어져 있다. 끊어진 반대쪽<현재 윤동주(尹東
柱)시인의 언덕과 청운공원이 들어서 있음>
을 애타게 바라보는 인왕산 쪽 성벽이 견우와 직녀를
보듯 애처롭기까지 하다. 끊어진 구간은 도로 위에 흙을 덮어 성벽을 세우지 않는 이상은 복원
은 어렵다. 또한 창의문 바로 앞에는 북악산길이 지나가 시야를 제대로 방해한다. 문루에 올라
가 북쪽 전방을 뚫어지라 바라봤자 북악산길에 가려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없다.


▲  창의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혹은 닭)과 구름무늬

창의문은 흔히 볼 수 있는 성문의 모습이라 그냥 지나치기가 쉽지만 그만의 매력이자 특징이 2
가지가 있다. 그대로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눈여겨 보기 바란다.
우선 빗물이 잘 흘러가도록 문루 바깥 쪽에 설치된 1쌍의 누혈(漏穴) 장식이 있다. 이것은 연꽃
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성문의 매력을 수식해주고 있으며, 성문 천정에는 화려하게 날개짓을 펼
치는 봉황(鳳凰) 1쌍이 그려져 있는데 속설에는 봉황이 아닌 닭이라고 한다. 성문 밖 부암동 지
형이 지네를 닮았다고 하여 비보풍수에 일환으로 그 천적인 닭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을 가만
히 보면 머리와 목, 날개는 닭을 많이 닮았다. 허나 몸통과 꼬리는 닭과는 거리가 먼 봉황의 모
습이다.

봉황이 1마리가 아닌 둘이 있는 것을 보면 암수 1쌍일 것이다. 그들 주변으로 와운문(渦雲紋)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 모습이 마치 물결의 거센 소용
돌이를 보는 듯하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북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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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계곡 (백석동천)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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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무더운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위엄을 부리던 7월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와 북악산 백석동

천(백사실, 백사골)을 찾았다. (본글에서 '백사실=백사골'임)
이곳은 서울 장안에서 내가 가장 흠모하는 곳으로 2005년 5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
며 처음 발을 들인 이래 매년 6~8회 이상 발걸음을 한다. 그렇게 많이 찾았으면 진짜 질릴
만도 할텐데 그에게 단단히 퐁당퐁당 빠진 상태라 어제 갔어도 오늘 또 가고 싶은 곳이다.

이번 백사실 나들이는 공교롭게도 나들이의 1등 방해꾼, 비와 함께 하게 되었다.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좀 일찍 찾았는데, 이미 그 시간대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는 것
이다. 다행히 우산은 가져왔으나 비가 따라붙으니 정말 귀찮기 그지 없다. 허나 다행히 비
는 약한 수준이었고 비 덕분에 한여름에도 사람이 거의 없어 오랜만에 고적한 백사골의 풍
경을 누리게 되었다. 이곳은 무려 50번 이상 발걸음을 하였지만 비가 오는 날에 찾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  혜문사입구 골목길에서 바라본 서울의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산악 분지이다.


♠  서울 도심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 작지만 멋드러진 하얀 반석이
인상적인 백사폭포(白沙瀑布, 동령폭포)

▲  피서의 성지 자격이 충분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 밑에 새하얀 반
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끄러운 바위 피부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별천지를 꿈꾸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
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3m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수려한 멋은 거의 없다. 그저 수수하게 생긴 조
촐한 폭포로 하얀 피부의 반석(盤石)과 잘 어우러져 수려한 멋을 자아내며 백사골에 대한 첫 인
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하는 동시에 그곳에 대한 기대감마저 크게 불러일으키게 한다.
서울 도심에서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로 나름 가치가 높은데, 만약 설악산이나 주왕산 등
폭포가 많은 명산(名山)에 있었다면 그리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폭
포나 때와 자리를 잘 잡아야 된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임의로 지은 것인데, 원래 이름은 동령폭포라고
한다. 허나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폭포는 그만 자신의 이름 마저 떠내려보내고 말았다.

폭포를 품은 너른 바위는 돗자리를 피고 한숨 청하고 싶은 잘생긴 반석으로 청정한 계곡물이 끊
임없이 바위를 타고 내려와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근래 비가 많이 와서 비의 희롱에 단단히
노했는지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뒤흔들 정도로 패기가 대단하다.


▲  옆에서 본 백사폭포 - 거의 45도 각도를 이루는 바위 미끄럼틀을 타고
백사골 냇물은 아래로 흘러간다.

 
▲  백사골의 냇물과 낙엽을 속절없이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아랫 못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 냇물은 큰 세상을 꿈꾸며 졸졸졸~♪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못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다리 밑에 있는 못으로 내려가 심호흡을 한 다음 정든
고향을 등지며 큰 세상을 향한 장대한 여정을 떠난다. 한번 폭포를 내려왔으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기에 오로지 앞만 보고 흘러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아랫폭포를 타고 홍제천으로 내려가
한강(漢江)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이 없는 여행을 떠난다.

늦가을이 되면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 나무에서 버림 받은 낙엽들이 계곡으로 떨어져 폭포를 타
고 밑으로 내려가거나 그 주변에서 저항하며 고향으로의 컴백을 꿈꾼다. 허나 대자연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아래로 떠내려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
런 낙엽의 발악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여름의 절정을 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열심히 매
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저들의 푸른 아름다움 뒤에는 늦가을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있고,
그 뒤에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  급하게 흘러가는 백사골 하류 (백사아랫폭포)

폭포 아랫 못 너머에 펼쳐진 백사골 하류 폭포는 거의 30도 경사가 진 바위를 타고 아주 숨가쁘
게 내려간다.
바위를 타고 경사를 이루며 흐르니 엄연히 폭포는 폭포다. 아직은 이름이 없어서 백사폭포(동령
폭포) 밑에 있다는 뜻에서 백사아랫폭포란 쉬운 이름을 살짝 지어주었다. 폭포의 길이는 100m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려 수량이 많으면 그 흐르는 소리가 멀리서까지 귀를 때린다.

폭포가 흐르는 바위는 넓게 반석을 이루며 제법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데, 폭포 주변을 가득 메
운 주택만 없었다면 정말 설악산이나 금강산(金剛山) 못지 않은 풍경을 자랑했을 것이다.


▲  백사골의 생매장 현장 ~ 자하주택 북쪽(세검정로6길)

서울 제일의 경승지인 백사골은 자하주택 북쪽에서 어두컴컴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한다. 지하에
묻힌 백사골은 약 150m 정도 숨죽여 흐르다가 홍제천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자연이 빚은 얼
큰한 작품, 백사골이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된 것은 물불 가리지 않고 자행되는 개발의 난도질 때
문이다. 나무와 계곡만 있던 이곳까지 주택들이 밀고들어올 줄 누가 생각을 했으랴? 

애시당초 주택가를 들이밀지 말고 한때 서울 제일의 피서지로 명성이 높았던 인근 세검정(洗劍
亭)과 연계하여 서울 도심 제일의 경승지로 가꾸었다면 더욱 빛이 발했을텐데, 개발의 난도질은
그런 여유도 주지 않고 백사폭포 밑까지 올라온 것이다. 다행히 개발의 난도질은 폭포 앞에서
뚝 멈추었지만 나중에 꼭 2012년 여름에 복원된 인왕산 수성동(水聲洞) 계곡처럼 계곡 주변 집
들을 밀어버리고 옛 모습을 꼭 되찾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백사폭포에서 홍제천과 만나는 곳까
지는 말이다. 그러고보면 이 땅에서 자행되는 개발의 칼질은 너무나 생각도, 자비도 없다. 그
칼질에 목이 떨어져 나간 서울의 자연 명소가 어디 한둘이랴...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폭포를 굽어보며 백사골 밑에 둥지를 튼 현통사는 근래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山寺)로 정확
한 내력(來歷)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의 하나였던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로 백사골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딱 1번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
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만들만한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골의 시원한 산바람이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한
풍경소리가 주변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
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전 아래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덩어리로 몰려있다.


♠  백사골의 속살로 들어서다

▲  소나무가 마중하는 백사골 산길

간만에 백사골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아가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한 내음
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골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1폭의 수묵담
채화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 풍경을 완벽히 표현한다는 것은 힘들 것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
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백사골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숲에 깃들여진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기운을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
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
롱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이곳은 이제 그들의 마지막 낙원이 된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  여름이 깃들여진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청정함을 자랑하는 백사골(백사실계곡) <현통사와 별서터 중간>

▲  사진 정면에 보이는 큰 바위에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만들 때 돌을 떼던 흔적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 자
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저런 무
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보기가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마치 서울 도심의 별천지처럼
청정함과 순수함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백사실은 백사실계곡, 백석동천, 백사골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별 상관은 없
다. 정식 명칭은 백사실, 백사실계곡으로 이곳 지명이 백사실이며,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줄여
쓴 이름이다. 또한 백석동천은 이곳에 반한 선비와 양반들이 붙인 칭호이다.


▲  별서터 연못 옆을 지나는 백사골 (별서터 징검다리)

백사실 안내도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나 돌다
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
리트로 계곡에 둑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별서 주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백석동천 돌다리 - 별서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통돌 2개로 이루어진 단촐한 모습이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 앞에 두고 오른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커다
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박혀있는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가운데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백석동천 별
서터(연못터 주변) 바로 서쪽 산자락에 자리해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숲에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늦가을 후반이나 겨울에
는 눈동자를 잘 굴리다보면 우연히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나마도 잘 눈
에 띄지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만들어 그 안에 월암(月巖)을 새
겼다. 이 바위글씨는 18세기에 백사골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
씨로 추정되나 정확한 것은 아니며,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
필 중에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한잔 걸치러 이곳에 놀러온
선비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광
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
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
으며 함께 잔을 걸치고 싶다.


♠  북악산에 숨겨진 비밀의 별천지, 북악산(北岳山)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전경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면 여기가
서울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
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北岳山)과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안
긴 분지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 산간 마을이나 산골에 묻힌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
이 바로 지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산 속에 자리한 지형 탓도 있겠
지만 나라의 예민한 곳이 동네 주변에 많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부근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던 부암동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서(別墅, 별장)
및 피서지로 인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
精舍)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서울 제일의 피서지로 명성이 높던 세검
정,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의 장소로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 백사실 계곡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
장이 있었다 하여 백사실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으며, 백사골과 별서터를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하얀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붙여진 것으로
동천(洞天)이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경승지의 명예로운 칭호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별서 돌담의 흔적

▲  백사골 중류

백석동천 별서는 19세기 초반(1830년 경)에 지어진 600평 규모의 별서이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은 없으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이곳을 매입하여 머물렀다는 기록이 발견되
어 그의 손때를 조금 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안채는 4
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 집 한쪽이 기
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게
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춧돌과 석
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 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 전쟁 때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마저 고자가 되
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장의 흔적, 바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
석동천의 옛 정취를 아련히 전해주고 있으며, 이 정도의 별장을 짓고 소유할 정도면 재력이 상
당한 양반이었을 것이다. 추사도 이곳을 거쳐갔으니 말이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첫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 1720~1783)의 이
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그 책에는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
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이 있어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조그만 별장이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던 백석동천은 2006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 사람들만 찾아오던 동
네 사람들의 숨겨진 피서지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숨바꼭질을 하고 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소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
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2005년에 문화재청에서 이곳에 대해 조선 별서의 구
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임을 인정하
여 무명에서 바로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에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된 안내문과 변변한 이정표조차도 없었으며,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
내문과 이정표를 설치했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발굴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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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터

▲  백사골 산길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
와 여름의 녹음, 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경승지이다.
그중에서 늦봄과 여름에는 도심 속의 조촐한 피서지로 아주 그만이다. 숲이 매우 무성하여 강렬
한 여름 햇빛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골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꿀피서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유적을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고자 했던 옛 사람(주
로 지배층들)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을 배워보고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2006년 이후 이곳의 존재가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이 늘어나 고적한 분위
기는 좀 떨어졌다. 게다가 정신줄을 놓은 사람까지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돌에 낙서를 남
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계곡을 뒤집고 수목을 괴롭히는 행위가 늘어나면서 이곳의 건강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어 대책이 절실하다. 아직은 멀쩡하다 해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첩첩한 산주름 속에 있으니 언제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이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내
곁에 남았으면 좋겠다. 또한 근래에 종로구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이곳을 들쑤실 생각을
하고 있는데, 괜히 복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었으면 한다. 비록 폐허가 되었어도
지금의 모습이 더 운치가 강하며,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 있기 때문이다. 괜
히 어설프게 나서지 말고 그냥 두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찾아가기 (2015년 8월 기준)
* 백사실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장
  쉽고 가까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이며, 하림각은 경사가 각박하고, 창의문은 거리가 길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AW컨벤션센터) 건너편 길가에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다. 그 길은 경사
   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면 길 끝에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
   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자하문터널 방면)으로 좀 가면 백석동천 이
   정표가 있다.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 → 홍제천에 걸린 신영교를 건너 백사실 이정표를 따
   라 '세검정로6다길'로 쭉 올라감 → 혜문사입구 → 현통사 → 백사골(백석동천)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2호선
   신촌역(1,6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버스 / 4호선 길음역(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3번 버스 이용 → 세검정초교 하차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가면 창의문교차로이다. 여기서 오른
   쪽으로 꺾어서 북악산길로 인도하는 2차선 찻길로 가지 말고 왼쪽 골목길(백석동길)로 들어
   서면 부암동 산복길이다. 산모퉁이와 G하우스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백
   석동2길)으로 진입하여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왼쪽으로 가도 되나 오른쪽 길을 추천
   함) 그 길의 끝에는 뒷골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면 백석동천이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백사골까지 접근도 힘들고 주차 장소도 마땅치 않다. 대중교통이 진리이다.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물
  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일대


♠  백석동천 사랑채터

▲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

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중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이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
클로 계단 돌이 좀 헝클어져 있지만 경사가 완만해 계단의 역할은 그리 녹슬지 않았다. 반면 연
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놓았는데, 높이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어쨌든 돌계단을 오르면 주춧돌만 앙상하
게 남은 사랑채터가 나온다.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를 만들었는데, 아쉽게도 1970년경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남아있으나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
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산뜻하게 정비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선 별서 주인
이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穀茶)를 대
접하여 1잔씩 주고 받았을 것이다. 사랑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이 남아있다.


▲  윤곽이 진하게 남은 사랑채터

▲  석축 위에 세워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 때 발견된 것으로 연못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잡초와
약간의 고인 물이 그런데로 연못티를 낸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과 주춧돌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스란히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리
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는데,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생매장을 당했다. 별서터의
건강을 위협하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대를 발굴하면
서 갈아 없앴으며, 땅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습했다. 이
후 2011년 3월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다시 묻었으며,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
자락에는 돌담의 흔적인 석축이 여럿 남아있다.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
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사랑채 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에 잠겼을 별서의 주인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사랑채터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었을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헝클어진 서쪽 돌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


▲  사랑채 뒤쪽의 석축과 돌담

사랑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된다. 석축 윗쪽에는 별서의 경계를 가르던 돌담이 길게 이어
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허물어지고 지금은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지 돌담의 밑
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헝클어진 채 남아있는 돌담의 흔적


♠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  대자연에 의해 잠시 연못의 기능을 회복한 연못

백석동천 별서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못은 둘레가 약 100m 정도 되는 보름달처럼 큰 못이
다. 별서 주인은 많은 돈을 쏟아부어 장안에 솜씨 좋은 목공과 석공을 불러 별서를 만들고 사대
부의 지위를 이용해 인근 백성을 동원하여 연못을 팠을 것이다.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둥그런 연못을 수시로 채웠으며, 정자터 부근에 계곡 물을 끌여들이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물이 팔자좋게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서쪽에 수로를 파 계속 물갈이가 되
도록 유도했다.
연못과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나가던 해와 달도 그 연못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을 것이요.
주변 나무와 꽃들도 연못을 거울 삼아 매무새를 다듬고, 별서 주인은 벗을 불러 곡차와 차 1잔
의 여유를 누리며 상팔자를 누렸을 것이다.

그들이 팔자 좋게 놀던 시절은 세상이 한참 아비규환에 젖어있던 19세기로 백성들의 삶은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민초(民草)들은 지금처럼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가혹한 세금과 양반
들의 수탈에 죄다 털려 힘들게 살아가고 있건만 별서 주인은 다른 나라 이야기마냥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별서의 주인과 이곳을 매입했던 추사 김정희가 가고 여러 대를 거치면서 풍류의 현장이던 이곳
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고, 천하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게 묻힌 이곳까지 총탄을
선사해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강제로 고자가 되었다. 연못 주변에 두른 석축과 정자의 주
춧돌은 이곳이 예전 연못임을 아련하게 귀뜀해줄 뿐이다.

6.25이후 연못은 연꽃이나 물고기, 수초 대신 잡초와 잡석의 공간이 되었고, 늦가을에는 나무들
이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털어낸 낙엽들이 가득 연못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막 보금자리이자
누런 연못이 된다.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연못의 구성원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  정자터 남쪽에서 본 연못과 별서터 일대

세월의 무상함을 진하게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백석동천 연못은 비록 그 기능은
잃었지만 자연의 생명력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고 있다. 또한 여름의 제국 시절이나 비가
많이 오는 경우 연못에 물이 많이 담겨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찾기도
한다. 그러니까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이지는 못하고 자연이 내린 비에 의지해 연못의 티를 되찾
는 것이다. 마침 오늘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면서 간만에 만수(滿水)의 기쁨을 누린다.
수면 위에는 물을 먹고 자란 풀들이 무성하게 돋아나 초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그
만 생명체의 또다른 세계를 빚어내고 있다. 마치 늪지대 같은 분위기라 다가서기가 좀 껄끄럽다.
연못에 물이 많이 모였다고는 하나 서쪽에 뚫어놓은 수로로 물이 빠져나갈 정도의 수량은 아니
고 물의 깊이도 겨우 성인 무릎에 닿을 정도이다. 이곳에 담긴 물은 자연에 의해 증발할 때까지
머문다.
연못이 제법 넓기 때문에 물만 더 채운다면 조그만 조각배를 하나 띄워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였다면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기고 싶다.

연못을 비롯한 별서터 일대는 숲이 울창해 한여름에도 뜨거운 햇볕이 마음 놓고 내려오기가 힘
들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삼삼한 숲은 이곳을 찾
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의 정
도는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  옆에서 바라본 정자터

▲  연못터 옆에 자리한 돌다리
통돌 2개로 이루어진 단촐한 다리이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허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마음으로 그 허전함을 달래주고 싶구나~! 그
렇다고 정자를 복원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
꽃을 바라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아는 자라면 기생들도 불러 정자 안에서 얼씨구~ 춤과 노래,
시를 즐겼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부러울 뿐.. 이래서 권력층이 되야 되고 부자가 되
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일 뿐이고 상상으로만 끝나버린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20m에 이르는 장대한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이
는 약 150~200년 정도로 여겨진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또는 매입 기념으로 심었을지
도 모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
원을 꾸민 이 땅의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노비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를 한
탄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나 올련지...?


▲  별서터에서 수습된 길쭉한 통돌로 조촐하게 이루어진 쉼터
이곳에서 수습된 돌로 대충 의자와 탁자를 흉내냈는데, 그 모습이 참 수수하고
정겹기만 하다. 잠시 앉아 행동식을 먹기에도 별로 불편함이 없다.


▲  연못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늦가을)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계단식 산길

백석동천 별서터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허나
통제의 줄이 느슨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히 여름에는 피서객들로 봐글
봐글하여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우회하여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는데, 2012년에 주변 산길
을 정비하고 산불방제 장비를 갖춘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을 심어 소소한 볼거리를 선사한
다. 허나 솟대 돌탑은 백사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이다.

돌탑을 지나면 소나무숲과 푸른 잎을 지닌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
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별서터 입구에 세워진 오리 솟대 돌탑
예로부터 오리 등의 새는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솟대 꼭대기에는 오리 모양을 달아두어
하늘과의 연락을 꾀했다.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몫 돕고 있는 소나무숲길

▲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를 간직한 집채만한 바위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 산길로 가면 이곳 이름인 '白石洞天'이란 문신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월암과
비슷한 시기가 아닐 듯 싶은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고
자 했던 옛 사람들(선비와 지배층들)은 경관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와 그 기념으로 저렇게 낙서
를 남기곤 했는데, 백사골 역시 그들의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이다.


▲  여름에 잠긴 백사골의 그림 같은 숲길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하리라.. 비록 짧은 거리지만 푸르게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잘생긴 바위들이 파노라마를 이루는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길을 조금 가면 잠시 떨어졌던 백사골 상류가 나
온다. 하얀 피부의 넓은 반석부터 이끼 옷을 입은 바위까지 줄줄이 이어지면서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이나 금강산 등 쟁쟁한 큰 산의 계곡만은 못해도 서울 도심에 저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때묻지 않은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흘러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내며, 이렇게
순수함을 지닌 물은 백사아랫폭포부터 속세의 기운을 강제로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속물로 변해
간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겠
는가?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현장이 되고, 시민들이 소풍/나들이로 이곳에 들
어와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  우리가 잠시 머물며 속세에 찌든 발을 정화시키던 백사골 상류
30분 정도 머물며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본다. 정말 오랜만에 흙으로
계곡에 토목공사(?)도 해보았지. 어린 시절 흙장난 정말 재밌었는데
다시 해보니 역시 재밌다.

▲  좁은 바위 틈을 비집고 흐르는 백사골 냇물의 패기

 백사골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는 외나무다리

백사골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도 정
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2개의 나무 목재를 엮
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좁
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하지만 다리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요
는 없다.
사람 많고, 수레 많고, 빌딩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기만 한 서울 도심 속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백사골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외나무다리를 지나면서 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좁아진다. 계곡 오른쪽에
는 생뚱맞게도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을 지나
면 집들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종로구인
데, 이런 두멧골이 있었다니?? 그곳은 바로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
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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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이 아름다운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 성북동 산책 (최순우옛집, 삼청각, 북악산)

 


'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 ~ 성북동(城北洞) 산책 '

▲  삼청각 편운정

 


서울 도심의 갑옷인 한양도성, 그 도성의 북문인 숙정문(肅靖門)과 동북문에 해당되는 혜화문
(惠化門, 동소문)을 나서면 바로 성북동이 도심과 다른 모습으로 고개를 내민다. 서울의 주산
(主山)이자 영원한 북현무(北玄武)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과 서울의 늠름한 진산(鎭山) 북
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감싸인 성북동은 천하 최대의 대도시로 콧대가 드쎈 서울 도심의
한복판이란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과 전원 분위기를 자랑하며 다소 예민한 지정학
적 위치상 개발의 물결도 잠잠하다. 하여 성북동에 오면 서울특별시 성북구가 아닌 교외(郊外
)로 나온 듯한 기분이 물씬 든다.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성북동은 조선 초부터 나라에서 운영하는 제단인 선잠단과 영성단(靈
星壇)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 지역의 대부분은 왕실 소유였다. 그러다가 19세기 이후, 성락
원(城樂苑) 등의 사대부 별장(별서)이 나타났고, 구한말과 왜정 때는 부자와 문인들이 앞다투
어 들어와 집과 별장을 지으니 이종석 별장과 이태준 가옥(수연산방), 간송 선생의 보화각 등
이 그 대표적인 흔적이다.
왜정(倭政) 시절에는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심우장(尋牛莊)을 지어 머물면서 이 땅의 독립을
염원했고,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은 드넓은 땅을 프랑스 양이(洋夷)에게 사들여 북단장(北
壇壯)과 보화각(葆華閣)을 지어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연구하였다. 보화각은 나중에 우리
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거듭났다.

해방 이후에는 성북동비둘기로 유명한 김광섭(金珖燮)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들어와 성북동
의 아름다운 정취를 벗삼으며 문학의 꿈을 키웠고, 이 땅의 미술사학에 크게 이바지한 최순우
선생은 간송 선생을 도우며 성북동 한쪽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또한 청와대와 서울 도심과 가까운 이점으로 나는 새도 알아서 떨어지게 한다는 고위관료들도
많이 들어와 살았다. 그들의 교통 편의와 땅값 상승을 위해 북악산 아랫도리에 삼청터널이 뚫
렸고, 대원각과 삼청각 등의 고급요정이 뿌리를 내려 돈을 삽으로 쓸어담을 정도로 호황을 누
렸다. 그리고 1968년 1.21사태 때 김신조의 북한 공비 패거리들이 성북동 북쪽 산자락을 통해
줄행랑을 치다가 우리 군에게 토벌되는 등, 남북분단의 얼룩진 역사가 서려있기도 하다.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성북동을 둘러싼 북/서/남쪽 북악산 산줄기의 통행이 전면 통제되면서 성북
동은 도심 속의 막다른 섬이 되어버렸다.

이처럼 부유층과 권력층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통제 구역도 많았던 성북동은 1990년대 이후 변
화의 바람이 불면서 고급 요정을 모두 시민의 공간으로 해방을 시켰다. 삼청각은 서울시가 인
수해 시민의 문화공간으로 새로 단장했고, 대원각은 주인인 김영한(길상화)이 법정(法頂)에게
기증해 절(길상사, ☞ 관련글 보러가기)로 거듭났다. 또한 2006년 이후 북악산이 조금씩 개방
되면서 숙정문을 비롯한 북악산 주능선은 제한적이긴 해도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고, 2009년
에는 북악스카이웨이(북악산길) 방면 산길이 거의 빗장을 열었다.

성북동을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성북동의 지형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
완사명
월형
(浣紗明月形)'의 명당(明堂)으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완사명월형이란 '밝은 달빛 아래 비
단을 펼쳐놓은 형세'로 그 명당의 기운을 받고자 갖은 졸부(간송 전형필은 제외)들이 밀고 들
어와 본의 아니게 졸부 동네를 형성하게 되었다. 수레가 없으면 다니기도 힘들 정도로 교통도
안좋고 걸어다니기에는 숨이 차는 산동네인 성북동이 말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괜히 땅값만 치솟아 서민들은 들어갈 공간도 여의치 않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 땅의 1%가 아닌 0.1%가 사는 동네라 꼬집기도 한다. (졸부들 집은 성북로 북쪽과 명수학교
주변에 몰려 있고, 성북로 남쪽은 서민들이 주로 살고 있음)
나 같은 서민들이 오기에는 은근히 꺼림칙한 곳이 분명하지만 아름답고 의미있는 명소들이 많
아 그 거부감을 감수하고 발걸음을 한다. 아무리 졸부들의 집이 대궐만하고 대문이 성문(城門)
처럼 두터워도 위대하신 대자연 형님 앞에선 일개 모래성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명소를 보
러온 것이지 졸부들의 하찮은 집들을 보러온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들
러리일 뿐이다. 그러니 괜히 기죽지 말고 가슴을 당당히 피고 관광/답사객의 신분으로 성북동
을 살펴보자. 더러운 졸부들에게 집중되고 있는 명당의 기운도 좀 누리면서 말이다.

성북동은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워 접근성도 나름 괜찮고 아름다운 명소도 즐비하다. 적어도 4
~5시간 정도의 발품으로 충분히 들러볼 수 있으며(간송미술관과 북악산은 별도) 발품을 팔 가
치도 충분하다. 게다가 분위기를 내세운 찻집과 까페, 맛집, 조촐한 미술관(갤러리)들이 산재
해 있어 먹고 마시고 수다 떠는 이른바 5감의 재미를 덩달아 즐길 수 있다.

본글에서는 성북동 가운데서도 나의 즐겨찾기 명소인 선잠단터와 심우장
, 삼청각을 소개한다.


  양잠(養蠶)의 번성을 기원하던 조선시대 제단의 흔적
선잠단지(先蠶壇址) - 사적 83호

▲  선잠단터 표석과 누런 잔디

성북초등학교 3거리 동북쪽에 조선시대 주요 제단이던 선잠단이 있다. 지금은 잔디로 덮여있는
옛터와 근래에 세워진 선잠단터 표석, 홍살문만이 옛날 이곳이 신성한 장소였음을 아련히 귀뜀
해주고 있을 뿐, 제단의 흔적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럼 선잠단은 무엇을 하던 곳일까? 이곳은 누에를 관장하는 잠신(蠶神)인 서릉씨(西陵氏)에게
양잠의 번성을 기원하며 제를 지내던 공간으로 그 제례를 선잠례(先蠶禮)라고 한다. 선잠례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어 조선 개국 이후, 8년 정도 중단되었다가 1400년(정종 2년) 3월 초사일(
初四日)부터 다시 행해졌다.
세종은 각 도에 괜찮은 땅을 골라 뽕나무를 심고, 잠실(蠶室)을 지어 누에를 키우게 했으며 중
종(中宗)은 각 도의 분산된 잠실을 지금의 서울 송파구(잠실)와 서초구(잠원동) 일대로 집합시
켰다.
<서울 잠원동 신반포16차아파트 부근 도로변에 그 당시 재배했던 400년 묵은 뽕나무 1그
루가 죽은 채 남아 서울 지방기념물 1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음>

1471년 성종은 선잠례를 지내기 위한 장소로 동소문(東小門, 혜화문) 밖 지금의 자리에 선잠단
을 세웠는데. 단을 쌓은 방법은 사직단(社稷壇)과 비슷하나 남쪽으로 한 단(段) 낮은 댓돌이 있
고, 그 앞쪽 끝에 상징적인 뽕나무를 심어 궁궐 잠실에서 키운 누에에게 먹였다. 1477년에는 창
덕궁 후원에 채상단(採桑壇)을 만들어 누에치기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왕비가 직접 누에를 길러
실을 뽑는 이른바 친잠례(親蠶禮)를 지냈다.

선잠례는 매년 3월 초사일에 지내는데 신하를 보내 제례를 주관했으며, 풍악을 울리고 제를 지
냈다는 기록이 있어 일종의 제례악(祭禮樂)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 의식은 순종 시절까지 이
어져 오다가 1908년 7월(순종 융희 원년) 순종 황제가 '칙령(勅令) 제50호<향사리정(享祀
釐整)
에 관한 건>'를 발표하여 국가에서 관리하는 사당과 제단을 대거 정리하면서 선잠단과 선농단(
先農壇, 서울 제기동)의 신위를 모두 사직단으로 옮겼고, 선잠단은 몸뚱이만 남게 되었다.
 
왜정 때는 왜인(倭人)들이 원 모습을 알지 못하게끔 깔끔하게도 파괴시켰고, 그 터마저 민간에
팔아 먹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문화유산을 조사하면서 1939년 선잠단터
를 문화유산 지정 등급인 보물 17호로 지정해 앞/뒤가 전혀 안맞는 행동을 보였다는 것이다. 부
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문화재로 지정하다니 망국의 제단을 아주 제대로 엿먹인 셈이다.

해방 이후, 터만 황량하게 남아 오던 것을 1990년 이후, 성북구청에서 선잠단 주변 528평을 매
입하여 홍살문을 세우고 뽕나무를 심었으며, 제단터에는 표석과 잔디를 입혔다. 그리고 1993년
부터 다시 선잠제를 여니 1908년 이후 85년 만에 부활이다.

성북구는 매년 5월 초/중순에 열리는 성북구의 대표 축제인 아리랑축제에 맞춰 선잠제(先蠶祭)
를 거행한다. 제례가 열리는 날과 일부 행사/축제일을 제외하고는 문이 굳게 닫혀있으며, 굳이
내부로 들어가고 싶다면 미리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02-920-3413)에 문의를 한다. 허나 바깥
에서도 보일 것은 다 보이기 때문에 굳이 월담을 하면서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다.

참고로 선잠단터 북서쪽인 성북초교 뒤쪽에는 농업을 관리하는 별인 영성(靈星)에게 제를 지내
던 조선시대 제단인 영성단(靈星壇)이 있었다. 이 역시 1908년에 순종의 칙령에 따라 선잠단과
더불어 폐쇄되었다.


▲  선잠단 홍살문
나라에서 신성시 하던 제단은 사라지고 홍살문의 위엄은 녹슨지 오래건만
다시 솟아난 홍살문은 예전의 위엄을 내보이고자 애써 안간힘을 쓴다.

▲  뽕나무로 무성한 선잠단터 내부
60~70년 묵은 아름드리 뽕나무들이 조촐하게 숲을 이룬다. 이들 뽕나무는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되었다.

▲  선잠단터 표석에서 바라본 모습

간송미술관과 가까워 그곳을 찾을 때마다 후식으로 꼭 둘러보는 선잠단터. 역사의 뒤안길에 묻
힌 이곳에는 그저 망국의 쓸쓸함만이 가득하다. 무성하게 우거진 뽕나무는 이곳의 허전함을 조
금이나마 덮어준다.
 
※ 선잠단터 찾아가기 (2014년 11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성북초교 하차, 내린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동쪽)으로 1분 걸으면 성북초교3거리가 나
  오는데, 길 건너 홍살문 뒷쪽 언덕이 선잠단터이다, 도로변에 있어서 홍살문이 어떻게 생겼는
  지만 안다면 찾기는 매우 쉽다.
* 선잠제례는 매년 5월 초/중순에 아리랑축제 기간에 열리며 자세한 일정은 성북구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여기를 클릭)를 참조한다.
* 선잠단터 내부를 보고 싶다면
성북구청 문화체육과(☎ 02-920-3413)에 문의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64-1


♠  시민들이 지켜낸 시민문화유산 1호, 우리나라 고고미술에 평생을 바친
인물, 최순우(崔淳雨) 옛집 -
등록문화재 268호

한성대입구역(4호선) 5번 출구를 나와서 성북동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왼쪽 골목에 빌라와 주택
사이로 별천지처럼 들어앉은 기와집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집이 바로 우리나라 고고미
술에 평생을 바친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1916~1984)의 옛집이다.
이곳은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근래에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성북동의 새로운 꿀단지이다. 속
세에 이름을 떨친 지는 4~5년 정도로 나날이 답사객들이 늘고 있어 주말에 가면 늘 번잡하다.

최순우 옛집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자칫 개발의 칼질 앞에 이슬로 사라질 뻔했으나 뜻있는 시
민들이 발벗고 나서 개인마다 1평씩 구입하여 지킨 문화유산으로 매우 의미가 남다르다. 시민들
이 지키고 가꾼 시민문화유산 1호로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문화유산기금에서
관리하고 있다.

집의 주인이던 최순우는 1916년 4월 27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희순(
熙淳)으로 개성 송도(松都)고보를 나와 1943년 개성박물관에 입사했다. 그는 당시 개성박물관장
인 고유섭(高裕燮)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면서 고미술에 뜻을 굳혔다고 전한다.

1945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겨 학예관과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을 지냈으며, 1950년
6.25가 터지자 한강다리 폭파로 미쳐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북한군에게 잡히고 만다.
서울을 접수한 북한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당시는 북단장과 보화각이라 불림>에 있던 무수
한 문화유산에 군침을 흘리고 박물관에서 일하던 최순우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에게 그것을 포
장해서 지정된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간송은 훈민정음과 일부 문화유산만 급히 챙기고
한강을 건너 피난감)
그들은 감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奇)씨에게 왜국 판화로 된 춘화(春畵)를 보여주고, 보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쩔게 했다. 또한 문화유산 선별기준에
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서 이건 아니라고 다
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고 다시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서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와라, 목수가 없다 등으로 자꾸 똥개훈련을 시켰고, 손
재형은 일부러 생다리에 붕대를 감고 아픈 시늉까지 벌이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완전히 포
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기가 막힌 지연작전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했던 것이며, 그 인연으로 간송과도 가까운 사이가 된다.


▲  최순우 선생 왕년의 모습

6.25 이후 서울대와 고려대, 홍익대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으며, 1967년 이후 문화재위원회 위원
과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를 역임하고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
었다.
1981년 홍익대 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4년 12월 16일, 바로 이곳 성북동
집에서 숙환으로 별세하니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는 고미술 외에 현대미술에도 조예가 깊었고,
우리나라 박물관사에 큰 업적을 끼쳤다. 주요논
문으로 '단원 김홍도 재세연대고(檀園金弘道 在
世年代攷)','겸재정선론(謙齋鄭敾論)','한국의
불화(佛畵)','혜원신윤복론(蕙園申潤福論)','이
조(李朝)의 화가들' 등이 있고 저서는 삼척동자
도 다 안다는 '무량수전(無量壽殿) 배흘림 기둥
에 기대서서','한국미술사' 등이 있다.

최순우 옛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한옥으로 경기도 지방 한옥 양식을 띄고 있다. 'ㄱ'자의 본채
와 'ㄴ'자의 사랑채, 행랑채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ㅁ'자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본채 뜨락에
는 닫혀진 우물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우물이 있다. 최순우가 1976년에 구입하여 1984년 숨을
거둘 때까지 의지하던 집으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사라진 이후, 개발의 칼질이 슬슬 압박을 가해오면서 그의 집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외로
운 신세가 되었다. 이 집을 밀어버리고 빌라를 지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소식을 접한
뜻있는 이들이 시민운동단체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를 창단하여 그 집을 매입하면서 개발의 칼날
은 보기 좋게 부러지고 말았다. 허나 주인이 사라진 옛집은 많이 지치고 초췌해져 있었다. 하여
내셔널트러스트는 돈을 모아 2003~2004년에 복원 공사를 벌었고, 그 집에 '시민문화유산1호'란
별칭을 주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민간에서 문화유산을 구입하여 지킨 곳이기 때문이다.

현재 안채는 전시 공간과 최순우기념관으로 쓰이고 있고, 동쪽 행랑채는 사무실, 서쪽 행랑채는
회의실과 휴식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은 전통식으로 아기자기하게 손질하
여 나무와 풀, 꽃 등이 뜰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으며, 안채 앞뜰 중앙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운다. 뒷뜨락과 모서리 공간에는 간송미술관의 뜨락을 꿈꾸듯 동자상과 맷돌 등 다
양한 석물을 가져와 작지만 넓고 알찬 느낌을 준다. 게다가 뒤뜰에 야외도서관을 두어 최순우가
쓴 글과 여러 서적, 그와 관련된 서적들을 읽으며 독서의 여유도 누릴 수 있으며, 뒷뜰 뒤쪽에
는 높은 담벼락이 있어 그늘이 가득해 시원하다.
안채 내부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나 툇마루에 앉아 도심 속의 한옥의 미와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릴 수 있고, 주말과 공휴일에는 다양한 공연과 전시회 등의 볼거리가 열려 늘 사람들
로 분주한 살아있는 한옥 공간으로 시민 곁에 다가서고 있다. 길상화가 길상사(吉詳寺)란 절을
속세에 선물로 안겼듯이 이곳 최순우옛집은 최순우와 그의 집을 지키던 뜻 깊은 이들이 시민들
에게 남긴 소중한 선물이자 작품인 것이다. 또한 2006년에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국가지정문
화재의 지위를 당당히 누리고 있다.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동네 초입에 자리해 있어 성북동 나들이를 벌일 경우 가장 먼저 들러보는
것도 좋으며, 최순우 선생의 체취를 느끼면서 툇마루에 걸터앉아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을 디저
트 삼으며 잠시 쉬어가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 최순우 옛집 찾아가기 (2014년 11월 현재)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홍익중고 하차, 또는 5번 출구로 나와서 도보 10분, 길가에 최순우 옛집을 알리는 이정
  표가 있어 찾기는 쉽다
* 관람기간 : 4월 1일 ~ 11월 30일까지 (12~3월은 개방안함)
* 관람요일 : 매주 화요일 ~ 토요일 (축제기간에는 일요일도 개방)
* 관람시간 : 10시 ~ 16시 (15시 30분까지 입장 가능 / 축제기간에는 17시까지 개방)
* 관람료 : 공짜 / 20인 이상 단체는 사전 예약 요망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126-20 (☎ 02-3675-3401~2)
* 최순우옛집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


▲  밋밋하게 솟은 빌라와 주택들 사이에 고풍스럽게 들어앉은
최순우 옛집의 위엄 - 개발의 칼날도 고개를 숙인 현장이기도 하다.

▲  굳게 닫힌 최순우 옛집 대문

▲  안채 앞뜰에 높이 솟은 소나무


▲  사무실로 쓰이는 동쪽 행랑

▲  소나무 옆에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최순우를 비롯해 이 집을 거쳐간 이들의 목을 축여주던 네모난 우물,
허나 지금은 뚜껑이 닫힌 채 겉모습만 남아있다.

▲  수풀 사이에 고개를 내민 조그만 동자상
최순우 옛집을 복원하면서 천하 어딘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  조그만 맷돌과 빗물과 꽃잎을 머금은 돌쟁반

▲  옛집의 서쪽 모서리를 지키는 2기의 조그만 문인석(文人石)
저들의 표정에 부질없는 세월의 고된 모습이 묻어난 듯 하다.

▲  안채 뒤쪽 툇마루 (4월 중순)

▲  최순우 선생의 기품과 학식이 고스란히
묻어난 안채 내부 (내부 접근은 통제되어
있으므로 문 밖에서 관람 요망)

▲  안채 뒤쪽 툇마루
서울에서 툇마루에 걸터앉아 여유를
누릴 수 있는 몇 안되는 곳이다.


▲  마루에 놓인 함지박

▲  뒷뜨락에 옹기종기 모인 장독대들
무엇인가가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허나 저들은 알맹이가 텅빈 장식용 장독이다.

▲  장독대 앞에 둥그런 돌탁자
탁자 주변에는 키 작은 7개의 돌의자가 머리에 방석을 쓰며 달처럼 둘러져 있다.

▲  돌이 박힌 뒷뜨락 산책로와 장승을 닮은 조그만 석상 2기

▲  다양한 석조물이 있는 뒷뜨락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여러 도장과 최순우의 어록 1구절
혜곡의 손때가 묻어난 도장들이다.

▲  서쪽 행랑채에 진열된 도장과 조그만 자기들 - 혜곡의 유품

▲  최순우 옛집의 뒷통수 (안채 서쪽 담장길)

흙으로 만든 토담과 시냇물의 징검다리처럼 박석(薄石)이 박힌 정겨운 담장길, 담장 너머가 자
연의 공간이거나 한옥이었다면 그 운치는 곱배기가 되었을텐데, 빌라와 슬레이트 지붕이 그 자
리를 대신하니 그나마 우러난 정겨움과 운치도 절반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지우개가 있다면 담
장 밖 풍경을 싹싹 지우고 싶을 뿐이다.


  권력실세들이 드나들던 고급요정(料亭)에서 시민들의 전통문화공간으로
거듭난 현장 - 성북동 삼청각(三淸閣)

▲  북악산 한양도성 북쪽 산길에서 바라본 삼청각

성북동의 가장 서쪽 구석이자 삼청터널 북쪽에는 으리으리한 한옥으로 치장된 삼청각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한양도성이 지나는 북악산 본줄기와 북악하늘길이 지나는 북쪽 산줄기 사이 150m
고지로 성북동에서 제일 막다른 곳이다.

삼청각은 겉에서 우러나오는 모습처럼 원래는 고급요정이었다. 1972년에 지어진 이곳은 군사정
권 시절 악명을 떨친 3대 요정<청운각(淸雲閣), 대원각(
大元閣), 삼청각>의 하나로 삼청각이란
이름은 북악산(백악산) 남쪽에 있는 삼청동(三淸洞)에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주로 국빈 접대와 정치적 회담을 위한 요정으로 운영되었으며, 1972년 7월 4일 7.4남북
공동성명 직후 남북적십자대표단의 만찬이 열렸던 장소이기도 하다. 권력실세와 졸부들의 공간
으로 30년 가까이 폐쇄적으로 이어오다가 2001년 서울시가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거쳐 전통문화
의 공간으로 속세에 활짝 개방되었으며, 현재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이지 못했던 고급 요정이 누구나 자유롭게 오가며 산책과 전통문화를 즐
길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탈바꿈된 현장으로 이는 인근 대원각과 비슷하다. 대원각은 그곳
의 주인인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이 법정에게 통째로 기증하여 절로 변신한 곳으로 비록 과
정은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성북동의 새로운 꿀단지로 크게 두각을 드러낸 이곳은 북악산 등산의 기점으로 숙정문과 북악산
북쪽 능선으로 오를 수 있으며, 2009년 개방된 북악하늘길, 속칭 김신조루트를 통해 북악산길로
넘어갈 수 있다. 또한 삼청터널을 통해 바로 서울 도심으로 이어지며, 한양도성 앞을 흐르는 산
길을 거쳐 말바위를 경유하여 삼청공원과 북촌으로 넘어갈 수 있다.

비록 속세에 개방된 공간이라 해도 여전히 고급요정의 이미지가 깃들여져 있다. 한식당과 다원
의 높은 음식/차 가격, 시중보다 비싼 전통문화체험, 온갖 피로연, 가족행사 공간에 경악을 금
치 못하지만 서울의 허파인 북악산(백악산)의 품에 포근히 안긴 곳으로 20세기로 전승된 현대
한옥의 아름다움과 기품, 전통 정원의 미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 삼청각 찾아가기 (2014년 11월 기준)
* 삼청각 무료셔틀버스가 1일 12회(10~21시) 운행한다. (17~20시는 매시 20분, 그외는 정각에
  출발) 경유지는 종로1가 영풍문고(1호선 종각역 5번 출구), 을지로입구역(2호선/1번 출구),
  프레스센터(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 광화문 교보문고(5호선 광화문역 3번 출구) 등이며,
  을지로입구역에선 삼청각 출발시간에 20분 정도를 더하면 된다.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동 종점에서 하
  차, 성북로를 쭉 따라가거나, 주암아파트 옆길로 11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 승용차로 갈 경우 (주차장 있으며, 삼청각 이용객에 한해 공짜)
① 광화문4거리 → 삼청동길 → 삼청공원 → 삼청터널 → 삼청각
② 한성대입구역 → 성북로 → 성북동종점 → 삼청각

★ 삼청각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에 제한은 없음
* 일화당 1층에는 고급한식당, 그 윗층에는 찻집 다원이 있다. (가격은 좀 비쌈)
* 매월마다 다채로운 문화공연이 열리고 있으며, 다래와 규방공예, 한복체험, 한국요리 등의 전
  통문화체험강좌가 열린다. (물론 유료임)
* 전통혼례와 가족연회, 세미나 공간도 갖추어져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30-115 (☎ 02-765-3700)
* 삼청각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솟을대문 모습의 삼청각 정문 (그 옆에 삼청각 표석이 있음)
사람들은 기와집 정문으로, 수레들은 북쪽 문으로 들어간다.


▲  지방의 시골길 같은 삼청각, 홍련사 앞길

▲  궁궐의 돌담처럼 기품이 돋보이는 삼청각 돌담길
끝없이 펼쳐진 돌담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는 유하정과 천추전이 있다.

▲  천추당(千秋堂)
고풍과 기품을 갖춘 전통 한옥으로 가족모임이나 돌잔치 장소로 쓰인다.
수용인원은 34명 정도로 소나무가 둥지를 튼 주변 뜨락이 아름답다.


▲  유하정(幽霞亭)
삼청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유하정은 팔각형 정자로 그 곁에 북악산 계곡물이
흐른다. 이곳은 전통문화 배움터나 기업 세미나 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30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

   ◀  벚꽃나무 밑에 자리한 편운정(片雲亭)
유하정 뒤쪽에는 편운정이라 불리는 네모난 원
두막 쉼터가 있다. 여기서 편운(片雲)은 구름조
각이란 뜻으로 세종문화회관이 삼청각을 인수한
기념으로 지었다. 정자를 칭하고 있지만 원두막
에 가까운 모습이며, 그렇다고 화려함이 배여난
삼청각에 걸맞는 모습도 아니다. 그저 수수하고
조촐한 쉼터로 누구든 편안히 신발을 벗고 들어
가 쉴 수 있는 공간이다.

편운정 곁에는 벚꽃나무 1그루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봄의 절정 때는 한송이 눈이 되어 대
지로 내려앉는 벚꽃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깃들
여진 현장이다.


▲  유하정과 편운정 곁을 흐르는 북악산 계곡

이끼가 낀 하얀 피부의 반석이 곳곳에서 고개를 들며 그 사이로 서울의 허파, 북악산이 베푼 청
정한 계곡물이 큰 세상을 향해 졸졸졸~~♬ 흘러간다. 계곡의 내음과 숲의 맑은 내음, 솔솔 하늘
을 가르며 불어오는 산바람은 편운정에서 발길을 멈춘 나그네의 오염된 마음과 정신을 씻기기에
충분하다. 깊숙한 산골에서나 누릴 법한 자연의 향기와 풍경을 번잡함이 연상되는 서울 도심 한
복판에 버젓히 박혀있는 것이 참 신선할 따름이다. 물론 이곳이 청정한 모습을 간직하게 된 것
은 국가의 예민한 곳을 두루 품은 북악산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  청천당(廳泉堂)
고즈넉함이 묻어난 양반가 별채의 모습으로 연회나 약혼식 장소로 쓰인다.
수용인원은 60명 정도로 독립적인 앞뜨락을 갖추고 있다.

◀  일화당 뜨락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5호로 70년을 묵은
소나무이다. 게다가 삼청각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본 산증인이기도 하다.


▲  삼청각의 중심 건물인 일화당(一和堂)

한옥의 당당함이 깃들여진 일화당은 삼청각에서 가장 큰 건물로 이곳의 중심 건물이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때 대표단 만찬이 열렸던 유서 깊은 장소로 사진을 보면 1층으로 보이지만 실
은 2층 규모(실제로는 3층)이다.

사진에 나온 2층은 각종 연회나 혼례식 장소로 쓰이며, 다양한 전통공연이 열리는 200석 규모의
공연장과 전통차와 커피, 와인을 마실 수 있는 다원(茶園)이란 찻집이 있다. 다원은 야외 테라
스가 있어 눈 앞에 펼쳐진 성북동과 북악산(백악산)의 모습을 바라보며 일다경(一茶頃)의 여유
를 누릴 수 있다. 1층에는 한식당이 있는데 정갈한 전통한식을 먹을 수 있으며(가격이 비싼 것
은 함정). 일화당 앞뜨락과 전통놀이마당에서는 종종 전통놀이와 각종 행사가 열린다.


▲  일화당 다원 테라스에서 바라본 천하 (동쪽 방향)
성북동과 북악산이 부분적으로 보이고 그 너머로 동대문구, 성북구 지역이
아련하게 눈에 들어온다.

▲  일화당 1층 벽에 그려진 자연의 벽화
대자연이 그린 멋드러진 벽화가 일화당의 품격을 드높인다. 그려진 폼을 보니 아마도
추상화인 모양이다. 아무리 천재화가가 그린다 한들 자연이 그린 벽화만 할까?

▲  모양도 가지각색인 일화당 장독대들
무엇인가가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을 것이다.


▲  익한당으로 넘어가는 남천문(南天門)
궁궐 후원의 문을 보는 듯 기품이 돋보인다.

▲  일화당 동쪽 송림에 안긴 취한당(翠寒堂)
아담하고 편안한 모습의 별채로 가족단위의 소규모 행사 장소로 쓰인다.
취한당 서쪽에는 비슷한 모습을 지닌 동백헌(東白軒)이 있으며,
가족모임이나 다례, 전통요리 체험 공간으로 쓰인다.



▲  쌍다리돼지불백에서 먹은 돼지불고기백반

▲  서울왕돈까스에서 먹은 왕돈까스

성북동은 볼거리도 풍성하지만 한정식과 한식 종류를 다루는 식당부터 누룽지백숙 등의 영양식,
칼국수와 만두, 돈까스 등의 분식을 다루는 집, 찻집과 까페 등 다양한 먹거리의 맛집들이 즐비
하다. 그중에서 돼지불고기백반과 돈까스집이 눈에 많이 띄는데, 돼지불고기백반집은 쌍다리정
류장 부근에 있고, 돈까스는 성북초교에서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쌍다리 부근에 있다.
제일 위의 사진은 돼지불고기백반으로 이름난 쌍다리돼지불백(쌍다리기사식당)에서 먹은 돼지불
백인데 잘 구워진 돼지고기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의 반찬과 상추, 상추쌈, 조개국이 백반을 이
룬다. 돼지고기를 먹고 싶은데, 고깃집이 1인 손님은 받지를 않으니 집이 아니면 해먹기가 그렇
다. 여기는 그런 점을 해소해준다. 그래서 1인 손님이 제법 많다. 가격은 7,000원으로 그런데로
그런데로 저렴하다. 이곳은 원래 택시기사들이 주로 찾던 기사식당이었으나 지금은 일반인들도
많이 찾는다. 

아랫 사진은 서울왕돈까스에서 먹은 왕돈까스로 크기가 정말 왕만큼 크다. 성북동에 이런 왕돈
까스집이 유독 많은데,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성북동 돈까스집은 특이하게 고추와 고추장이
나온다는 것, 특별한 맛은 없으나 양이 많아서 배불리기는 좋다. 돈까스 리필도 때에 따라 가능
하다. 가격은 8,000~9,000원으로 이 집 옆에는 같은 돈까스를 다루는 오박사네돈까스가 있어 서
로 경쟁이 치열하다.

♣ 성북동 추천 명소와 음식점
* 추천 명소 - 최순우 옛집, 선잠단터, 간송미술관, 이종석별장, 수연산방<壽硯山房, 이태준가
  (家)>, 심우장, 북정마을, 삼청각, 성락원, 길상사, 한국가구박물관, 북악산 김신조루트(북악
  하늘길), 북악산(백악산) 산행, 숙정문, 와룡공원, 한양도성 등
* 음식점 - 성북동집(만두와 만두국, 02-747-6234), 쌍다리돼지불백(돼지불고기 백반, 02-743-
  0325), 성북동돼지갈비집(돼지불고기 백반, 02-764-2420), 금왕돈까스(02-763-9366), 서울돈
  까스(02-766-9370), 성북동메밀수제비/누룽지백숙(02-764-0707), 수연산방(찻집, 02-764-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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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조망이 일품인 서울 도심의 상큼한 명소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 서울 도심의 신선한 명소, 윤동주 시인의 언덕 '
(윤동주문학관, 청운공원)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 소나무


♠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에 터를 닦은 서울의 새로운 명승지
문향(文香)이 가득 깃들여진 '윤동주(尹東柱) 시인의 언덕'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정상에 심어진 서시 비석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序詩)


서울 도심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자하문(紫霞門)고개 정상에 윤동주시인의 언덕이 도심을 굽
어보고 있다. 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성문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서쪽에 둥지를 튼 이곳
은 인왕산 동쪽 자락에 조성된 청운공원의 일부로 2009년 6월, 천하의 큰 시인 윤동주를 기리고
자 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인 북동쪽에 자리를 닦고 그의 이름을 따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하
윤동주 언덕)이라 하였다.
언덕 이름이 그의 이름에 걸맞게도 무척 시적(詩的)이면서도 서정적인데, 그 이름은 지금의 윤
동주 언덕을 있게 한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의 회장 박영우씨가 지은 것이다.

하늘과 맞닿은 윤동주 언덕은 천하에서 가장 큰 윤동주의 유적 겸 기념지이자 38선 이남에서 거
의 유일한 윤동주 기념터로 그의 시를 머금은 비석과 그의 혼이 깃든 영혼의 터, 그를 집대성한
윤동주문학관이 있으며, 야외공연장과 정자(서시정), 벤치 등도 갖추었다. 언덕 좌우는 북악산(
北岳山)과 인왕산(仁王山)으로 막혀있지만, 대신 남북으로 뻥 뚫린 형태로 북악산과 인왕산, 북
한산(삼각산)의 산바람이 모여들며, 앞뒤로 바라보이는 조망(眺望)은 가히 천하 명품급이다. <
특히 도심 야경이 갑(甲)> 게다가 공원의 분위기도 조용하고 차분하여 시 한 수 절로 생각나게
하니 그야말로 시상(詩想)의 공간이다. <언덕의 이름도 제법 시상을 돋군다>

그럼 어째서 이곳이 윤동주의 언덕이 되었을까?
윤동주는 이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았다. 다만 1941년 누상동(樓上洞)에 있던 소설
가 김송의 집에서 연희전문대학(현 연세대) 후배인 정병욱(鄭炳昱)과 하숙 생활을 했는데, 이때
하숙집에서 가까운 자하문고개와 청운공원을 수시로 찾아와 시를 구상했다고 하며, '별헤는 밤
'과 '서시'를 바로 이 언덕에서 지었다고 한다.
바로 그 인연으로 윤동주기념사업회에서 서울시청과 종로구청의 협조를 얻어 그의 언덕을 닦게
된 것이다.

그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고자 했는데, 그 서문(序文)으로 지어진 것이 바로 서시
이다. 허나 출간은 하지 못하고, 3부를 필사하여 이양하(李敭河)와 정병욱에게 1부씩 증정했으
며, 해방 이후 정병욱이 보관하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세상에 공개하였다.


▲  윤동주 형님의 초상화 -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을 초상화한 것이다.

※ 윤동주(1917~1945년)의 간략한 생애
윤동주는 왜정 시절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그의 이름 석자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중/
고등학교 국어/문학 교과서에 서시를 비롯한 그의 굵직한 작품들이 정말 지겹게 나오니 말이다.
숙성이 덜 되던 학창 시절, 나는 시를 싫어했다. 무조건 외우면 장땡인 암기 위주의 잘못된 교
육의 폐해 탓일 것이다. 그런 일그러진 교육과 나의 굳건한 돌머리 앞에서 시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국어/문학 선생이 무조건 가르친 내용대로 외워야 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20세기에 활약했던 윤동주나 김영랑(金永郞), 이육사(李陸史) 등의 유명
문학가들의 이름과 그들의 작품을 보면 정말 이가 갈리곤 했다.
허나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흐르고 나이도 강제로 더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시에 대한 관심이 커지
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시의 내용도 조금씩 이해를 하게 되었고 김광섭(金珖燮)의 '성북동비둘
기'란 시가 무척 땡겨 그 시가 태어난 성북동 성락원(城樂苑, 명승 35호)에 걸터앉아 그 시를
읊고 싶은 생각까지 했었다. (성락원 비공개로 아직까지 실현하지 못했음) 비록 머리가 돌 수준
이라 시를 완벽히 외우지는 못하지만 즐겨찾는 관심사의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하다.

학창 시절 그렇게나 나를 괴롭혔던 윤동주는 1917년 12월, 두만강(豆滿江) 이북인 북간도(北間
島) 명동촌(明洞村)에서 윤영석()과 어머니 김룡()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랍자()학교를 다니다가 용정(龍井)으로 이사가면서 1933
년 그곳 은진()중학교에 들어갔다.

1935년 조선 본토로 넘어와 평양 숭실(崇實)중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나 신사참배 문제로 왜정(倭
政)에 의해 강제로 학교가 문을 닫았다. 그래서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
를 졸업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 문과에 진학하여 1941년에 졸업했다.
그때 누상동 김송의 집에서 정병욱과 하숙생활을 했었다.
학문의 열기가 뜨거웠던 그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왜열도로 건너가 동경(東京) 릿쿄(敎)
대학 영문과에 들어갔으며, 1942년 도시샤대학(同學) 영문과로 옮겼다.

1943년 7월 학업을 멈추고 잠시 고향에 가려고 했으나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왜경에 체포되
었다. 왜경은 그에게 변론의 기회도 제대로 주지 않고 징역 2년형을 때려 후꾸오카 형무소에 집
어넣었는데 거기서 잔인한 생체실험의 희생자가 되어 결국 해방을 목전에 둔 1945년 2월,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28세였다. 목격담에 의하면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
를 계속 강제로 맞았다고 하니, 결국 왜국의 비인간적인 만행에 천재시인 윤동주는 제대로 꽃도
피우지 못하고 강제로 눈을 감게 된 것이다.

윤동주는 그의 조부(祖父)의 영향으로 시에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했다. 그의 동생인 윤일주(
)와 당숙인 윤영춘()도 시인이었다고 하니, 그의 집안은 문학적 소질이 다분한 지식
인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5살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첫 작품은 '삶과 죽음'과 '초한대'이다. 이후 '병아리(1936
년 11월)','빗자루(1936년 12월)''오줌싸개 지도(1937년 1월),'무얼 먹구사나(1937년 3월)','거
짓부리(1937년 10월)' 등을 간도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카톨릭소년'이란 잡지에 소개했다.
연희전문대학 시절에는 조선일보에 '달을 쏘다'를 냈고, 학교 교지 '문우(文友)'에 '자화상','
새로운 길'등이 실렸다. 그리고 '쉽게 쓰여진 시'가 1946년 경향신문에 실렸다.
앞서에서 언급했던 누상동 하숙 시절,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란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고 했으나 내지 못했다. 그때 그가 남긴 시들은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
해 1948년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

그의 시는 청소년 시절에 지은 시와 성년 이후의 시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청소년기에 쓰여진 시
들은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고 대체로 어린 시절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대표작으로는 '겨울'과 '버선본' 등이 있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왜정 시절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시가 주류를 이루니 '서시','자
화상','또 다른 고향','별헤는 밤'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
표 시로 어둠의 시절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비록 뜻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그의 시는 우리나
라 뿐 아니라 왜열도와 중원대륙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특히
그가 다닌 왜열도의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에는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어 해마다 많은
이들이 헌화를 하고 그를 기린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 문학계
의 큰 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윤동주가 세상을 뜨자 그의 시신을 간도 용정으로 옮겨 묘를 썼다. 허나 그 무덤도 한때 위치를
몰라 가족들이 방황하다가 연길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온 왜인 교수의 노력으로 간신히 묘비를 찾
았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대륙의 공산당 정부가 국교를 맺자 가족들은 봉분을 단장하고 묘비
도 새로 세웠으며, 그의 명동촌 생가는 1994년에 복원되었다. 또한 그가 다닌 명동소학교는 윤
동주 관련 단체의 지원으로 옛 건물을 복원하여 윤동주기념관으로 거듭났다.

우리나라에 참으로 굵직한 시인들이 많지만 윤동주만큼 인기와 사랑이 큰 시인도 손에 꼽을 것
이다. 우리나라를 넘어 다른 나라에서도 그의 팬들이 많으니 말이다. 비록 왜의 잔악무도한 만
행으로 일찍 눈을 감게 되었지만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혼은 우리들 마음 속에 길이길이 깃들
여져 있으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영원한 문학신(文學神)이다.


▲  인왕산길 바로 옆에 자리한 윤동주시인의 언덕

서울의 새로운 꿀명소이자 문학의 성지(聖地)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윤동주시인의 언덕은 그 이
름만 들어도 마음의 여유가 생길 듯한 느긋한 언덕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현실은 세상처럼
가파른 언덕이다.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자하문고개에 있다보니 그런 것인데, 고갯길에서
언덕 동쪽으로 오르는 길이 경사가 좀 각박하지만 지름길이며, 윤동주문학관 뒷쪽으로 오르는
길도 있다. 언덕의 날카로운 기세를 좀 피하고 싶다면 청운공원으로 가는 길(자하문로35길)을
이용하여 서시정으로 조금 우회하는 것도 괜찮다.


▲  늦여름 햇살 속에 한가롭게 졸고 있는 야외 공연장

푸른 잔디와 키 작은 나무들이 아낌없이 수식하고 있는 언덕 정상에는 언덕의 이름을 밝힌 두툼
하게 생긴 표석과 야외 공연장이 있다. 공연장에서는 윤동주 시 낭송회와 백일장, 문예 관련 여
러 행사와 공연이 열린다.


▲  언덕 정상에 박힌 윤동주시인의 언덕 간판 표석

▲  시비 앞면을 장식하는 '서시'

▲  시비 뒷면을 장식하는 '슬픈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이 시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 재학 초기에 쓴 것으로
어둠의 시절 속에서 살아가는 민족의 슬픈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흰색은 조선 민중과
삶, 밝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언덕 정상 남쪽에는 서시가 적힌 커다란 시비(詩碑)가 있는데, 대부분은 앞면만 보고 지나친다.
허나 뒤에도 시가 숨겨져 있으니 시비의 속임수에 속지 말자. 뒤에 새겨진 시는 슬픈족속이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북쪽을 장식하는 한양도성 성곽길 (사적 10호)

언덕 북쪽에는 옛 한양도성의 성곽(城郭)이 길게 둘러져 있다. 이 언덕은 성곽 안쪽으로 성곽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서쪽으로 인왕산과 이어지나 인왕산길로 잠깐 끊기며, 동쪽으로 자하문과
이어지지만 문 서쪽에 언덕을 깎고 창의문로를 뚫으면서 서로가 끊겨버렸다. 그래서 윤동주 언
덕의 성곽은 양쪽이 강제로 끊긴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소나무 (윤동주 소나무)

언덕 성곽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청청한 소나무 1그루가 마치 성곽을 지키는 군사처럼 서 있다.
나무 곁에 서면 성곽 여장 너머로 도성 밖 경승지이자 도심 속의 전원(田園) 마을인 부암동(付
岩洞)과 평창동(平倉洞)이 앞다투어 두 눈 밑에 펼쳐지고 그 너머로 서울의 진산(鎭山)인 북한
산(삼각산)이 든든한 모습으로 서울을 살핀다.

이 소나무는 윤동주가 시를 구상하던 곳이라 하여 일명 윤동주 소나무라 불린다. 흔히 이 땅에
서 볼 수 있는 소나무이지만 어둠의 시절, 독야청청(獨也靑靑)한 그의 얼이 깃들여진 듯 청초하
고 고고해 보이며, 높은 곳에 우뚝 솟아 주변을 보는 모습도 예사롭지가 않아 보인다. 정말 그
가 저 나무 그늘에서 시를 구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윤동주 언덕을 상징하는 의미 깊은 나무로
나름 분주한 삶을 살고 있다.


▲  윤동주 소나무에서 바라본 천하
인왕산과 북악산, 북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둥지를 튼 부암동과 홍지동(弘智洞)을
비롯하여 북한산 남쪽 봉우리들도 바라보인다.

▲  윤동주 영혼의 터

야외공연장에서 자하문 쪽으로 내려가면서 오른쪽 잔디밭을 유심히 살펴보면 땅에 박힌 표석 하
나가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 표석은 윤동주 영혼의 터로 서시 시비의 뒷면처럼 많이들 지나치
는데, 이곳은 간도 용정에 있는 그의 무덤에서 흙 한줌을 가져와 뿌린 것으로 그 위에 표석을
박았다. 즉 그의 소소한 가묘(假墓)가 되는 셈이다. 영혼의 터라고 하니 조금은 오싹한 기분도
들긴 하지만 그만큼 근사한 시적 표현이기도 하다.


▲  솔내음이 나래를 펼치는 서시정(序詩亭)

언덕 서쪽 밑에는 서시정이라 불리는 단촐한 모습의 정자가 도심을 굽어보고 있다. 2009년 언덕
을 꾸미면서 지은 것으로 윤동주의 대표작인 서시를 따서 서시정이라 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
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정자로 이곳에 몸을 들여 남쪽을 보면 천하 제일의 도시로 콧대가 이만
저만이 아닌 서울의 심장부가 두 눈 밑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특히 야경이 멋짐)


♠  서촌의 지붕이자 윤동주 언덕을 옆구리에 낀 시민공원
청운공원(淸雲公園)

▲  가을옷을 곱게 걸친 청운공원과 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의 북쪽 끝이자 인왕산 자락 동북쪽에 청운공원이 넓게 자리를 닦았다. 이곳은 청운동 주택
가와도 제법 거리를 둔 자연 지대로 윤동주시인의 언덕이란 신선한 꿀단지를 옆구리에 품고 있
다. 인왕산길이 공원의 북쪽과 서쪽을 지나가며, 이 길은 자하문고개에서 북악산길로 간판을 바
꾸고 북악산 뒷쪽을 통해 성북구로 달려간다. 그리고 공원을 가로지르는 골목길(자하문로35길)
은 윤동주문학관에서 공원을 지나 청운동 주택가를 거쳐 자하문로로 내려간다.

청운공원은 인왕산 품에 조성된 시민공원으로 산자락에 조성된 것 외에는 딱히 볼거리는 없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인왕산 돌을 모아 일종의 돌아파트를 지었고, 2009년 이후 공원 동쪽에 윤동
주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이 자리를 닦으면서 예전보다 더 값비싼 존재가 되었다.
공원이 산자락에 있기 때문에 서울 도심과 부암동, 홍지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여 조망도 일품이
며, 북악산과 인왕산의 청정한 기운이 늘 깃들여져 있어 공기도 맑다. 게다가 서울 장안의 주요
해맞이 성지(聖地)로 매년 1월 1일에 해맞이 축제가 열리며, 나무와 각종 꽃들이 울창하여 봄에
는 벚꽃과 진달래, 개나리가 봄의 향연을 열고, 가을에는 오색영롱한 단풍잎이 가을의 향연을
베푸는 도심 속의 경승지이다.

청운공원에 가려면 자하문고개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자하문터널 남쪽에서 자하문로
35길을 따라 올라가는 방법도 있는데, 그건 경사가 제법 각박하다. 그리고 청운동 안쪽에 자리
한 유진인재개발원 정문 직전에 청운공원으로 오르는 산길이 가늘게 이어져 있고, 사직공원과
수성동(水聲洞)계곡에서 인왕산길을 타고 접근하는 것도 괜찮다.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북악산(백악산)의 위엄

늦가을 단풍이 한참 절정을 이루던 때(11월 초)라 나무들이 진한 붉은색과 노란색, 녹색 등으로
단단히 물들었다.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남은 기력을 모두 발산하는 나
무들.. 죽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무지개처럼 짧은 삶을 원망하는 나뭇잎들.. 인
간은 그들을 보며 늦가을의 정취를 즐기면서도 '올해도 이제 저물었구나, 좀 있으면 강제로 1살
을 더 먹네' 늦가을과 연말 우울증에 부질없는 한숨을 쉰다.


▲  청운공원 서부 (꿈의 분수 주변)

▲  청운공원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그리고 일몰 직전의 하늘

▲  공원 서부에 자리한 청운공원 꿈의 분수

청운공원 서쪽에는 꿈의 분수라 불리는 바닥분수와 넓은 운동장이 있다. 꿈의 분수는 매일 2번
씩 조촐하게 분수쇼를 선보이는데, 그리 현란한 편은 아니며, 그냥 주변을 시원하게 해주는 정
도이다. 가동기간은 4월부터 10월까지로 1차는 11시에서 13시까지, 2차는 15시부터 16시까지이
며, 겨울에는 무조건 쉰다.
분수쇼는 전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분수와 어울려 물놀이를 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 그러니
그냥 눈으로만 보기 바란다.


▲  고양이 같은 인왕산 호랑이상

천하 호랑이의 대명사이자 하늘 아래 제일 무서운 존재였던 인왕산 호랑이, 이제는 숱한 설화만
을 남긴 채, 우리들 뇌리에서 거의 잊혀지고 말았다.
그들을 그리며 만들었다는 인왕산 호랑이상, 어린이들이 울고 갈 정도로 매섭게 좀 만들 것이지
순둥이 비슷하게 만들면서 졸지에 호랑이 탈을 쓴 인왕산 고양이상이 되어버렸다. 곶감도 우습
게 봤다는 천하 제일의 인왕산 호랑이를 제대로 모욕한 셈이다.


▲  인왕산 돌로 만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

서시정에서 윤동주문학관으로 내려가면 돌의 거대한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이것은 2007년 서
울시에서 추진한 '서울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조성된 것으로 인왕산과 그 주변에서
주운 돌을 정리하여 그들의 조촐한 아파트로 만들었다.


♠  윤동주 언덕 밑에 마련된 윤동주문학관

윤동주시인의 언덕 밑이자 자하문고개 정류장 부근에 시인 윤동주를 집대성한 '윤동주문학관'이
심플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이곳에는 원래 청운동 수도가압장 건물이 있었는데, 빈 채로 버려져 있던 것을 2009년 윤동주의
언덕을 만들면서 우선 급한데로 손질해 문학관으로 삼으면서 우리네 정신적 영혼의 가압장이 되
었다. 속은 문학관일지 몰라도 겉은 문학과는 담을 쌓은 우울한 모습이었는데, 윤동주문학사상
선양회에서 서울시청과 종로구청의 지원을 받아 오랜 번데기 생활 끝에 2012년 7월 25일 지금의
모습으로 화려하게 태어났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2011년 3월로 그해 연말까지 여러 번 발걸음을 했는데, 당시 내부
는 좀 어수선했다. 공개시간이 있긴 하지만 평일에는 일찌감치 문을 걸어잠군 경우가 많았으며,
처음에는 정문 옆에 난 조그만 문으로 입장을 해야 했다. 그런 공간이 이제는 윤동주를 닮은 세
련된 문학적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번데기를 탈피한 이 문학관은 2012년 대한민국 공공건축 부분에서 무려 국무총리상을 받았으며,
우리나라 현대건축 Best 20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화려하다 못해 눈부신 나비로 태어난
셈이다.

문학관은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있는데, 제1전시실(시인채)에는 윤동주의 손때가 담긴 친필
원고와 온갖 문서와 서적들, 사진, 윤동주 모교의 의자와 등사기(謄寫機), 떡판 등 그의 유품
133점이 전시되어 있고, 제2전시실(열린우물)은 옛 가압장의 물탱크 윗부분을 개방해 중정(中庭
)으로 꾸미면서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공간으로 삼았다. 그리고 제3전시실(닫힌우물)은 물탱크
를 원형대로 보존하면서 그 안에 윤동주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담은 동영상을 상영한다. 그외에
'별뜨락'이란 쉼터를 만들어 서울 도심을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문학관에 진열된 윤동주의 유품 가운데 그의 생가에서 가져온 나무 우물이 있다. 우물의 목판은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회장인 박영우씨가 직접 간도 용정에서 가져온 것으로 땅을 깊게 파고 그
우물을 보호하고자 나무 판을 4단으로 얹힌 점이 특징이다. 허나 이곳에 안착하면서 우물의 기
능은 상실되고 무늬만 남은 늙은 우물이 되었다. 전시관 안이다보니 깊게 땅을 뚫을 수도 없고,
더군다나 마땅한 수맥도 없기 때문이다.


▲  번데기 속을 헤매던 윤동주문학관 예전 모습 (2011년)

▲  윤동주문학관에 진열된 그의 유품과 초상화들

▲  윤동주 모교에서 가져온 조그만 의자
내 초등학교 시절(1~3학년)까지만 해도 저거와 똑같은 의자에 앉았는데,
기억도 흐릿한 그 시절의 추억을 잠시나마 소환해준 정겨운 의자이다.

▲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

윤동주가 교토 도시샤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학교 친구들과 우지강<우지천(宇治川), 요도가와강
> 강변으로 마실을 나가 찍은 사진이다. 이때 왜인 친구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하자 그는 아
리랑을 우수에 찬 모습으로 불렀다고 한다. 허나 그때까지만 해도 윤동주나 그의 친구들이나 그
것이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얼마 뒤 그는 왜경에 끌려가 후꾸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으로 비온 뒤 잠깐 모습을 드러낸 무지개처럼 짧은 인생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그가 불의의 죽음을 당하자 그의 친구들은 크게 통곡하며 그를 애도했다.


▲  윤동주 생가에서 수습해온 나무 우물
우물 위에 두른 나무판을 가져와 복원한 것이다. 대략 100년 정도 묵었다고 하며.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하여 중후한 멋을 풍긴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 찾아가기 (2014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자하문고개(윤동
  주문학관) 하차, 길 건너편에 윤동주문학관과 언덕이 있다.
* 지하철 1호선 종각역(1번 출구)과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1020,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 관람정보 (2014년 4월 기준)
* 문학관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 1월 1일, 추석과 설날 연휴는 쉼)
* 윤동주 언덕과 청운공원은 관람시간 제한이 없는 열린 공간이다.
* 입장료 없음. 문학관 해설사 운영
* 매년 5월에 윤동주문화제가 열린다. 시낭송회와 백일장, 윤동주상 시상식, 문학콘서트, 문학
  둘레길 걷기대회 등의 행사를 가지며, 문학둘레길 걷기는 인사동 남인사마당을 출발하여 만해
  당(한용운 가옥), 시인마을 보안여관, 이상(李霜)의 집, 윤동주 하숙집터, 세종대왕 생가터,
  정철집터 등을 거쳐 윤동주 언덕까지 걷는 4시간 코스이다.
* 윤동주시인의 언덕(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 다음 까페 ☞ 보러 가기
* 연세대 윤동주기념사업회 ☞ 보러 가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3-100 (창의문로 119, 문의 ☎ 02-2148-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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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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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 (백석동천, 백사골)

 


' 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


여름이 한참 흥이 오르던 7월 첫주에 후배들과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백사골)을 찾았다.
백사골은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이자 서울에서 가장 흠모하는 곳으로 정처 없는 내 마
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곳이다. 2005년 5월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며 처음 발을 들인 이
래 매년 3~4번 정도 발걸음을 이으면서 그곳에 대한 변치 않은 마음을 비추었다.

지하철 경복궁역(3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1711번 시내버스(국민대↔공덕역)를 타고 세검정
초교에서 내려 홍제천(弘濟川)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편의점 옆으로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는데 그의 지시에 따라 주택가 골목(세검정로6다길)을 비집고 들어가
면 빌라 옆으로 긴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혜문사입구인데, 여기서 오른쪽
으로 꺾어 산동네 골목길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백사골의 남쪽 관문인 백사폭포
와 현통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  혜문사입구에서 바라본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
저 고개를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뽀얀 피부의 백사폭포가 나타난다.


♠  서울 도심 속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 작지만 멋드러진 하얀 반석이
일품인 백사폭포(白沙瀑布)

▲  피서의 성지(聖地) 자격이 충분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문짝에 그려진 현통사 일주문(一柱門) 밑에는
하얗고 뽀얀 피부를 지닌 반석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 매끄러운 바위면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별천지를 꿈꾸
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흔든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이곳은 서울 도심에선 정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로 그 가치는 단연 높다. 만약 쟁쟁한 폭포들
이 많은 설악산(雪嶽山)이나 순창 강천산(剛泉山) 같은 곳에 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아마도 그
저 그런 폭포로 주목도 못받았을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자리 운도 중요하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장쾌한 편은 아니다. 수수하고 조촐한 모습
이지만 나름대로 수려한 멋을 풍기며 백사골에 대한 첫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인도하며 그곳에
대한 기대감까지 크게 드높인다.
폭포를 빚은 너른 바위는 돗자리를 피고 한숨 청하고 싶은 잘생긴 반석(盤石)으로 청정한 계곡
물이 끊임없이 바위를 타고 내려와 수채화를 자아낸다. 특히 비가 많이 와서 계곡의 수량이 많
을 때는 시원한 멋도 풍기는데,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뒤흔들 정도로 패기가 넘쳐 귀신도 놀라
도망치게 만든다.

백사골이 무명이던 시절에는 동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나 동네 사람들의 피서지
로 주로 쓰였으나 속세에 강제로 알려지면서 폭포 주변에 자리를 피고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
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  옆에서 본 백사폭포 - 거의 50도 각도로 이루어진 바위 미끄럼틀을 타고
백사골 냇물은 속세로 흘러간다.
 

▲  백사골의 냇물과 낙엽을 속절없이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서쪽 못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 냇물은 큰 세상을 꿈꾸며 졸졸졸~♪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못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다리 서쪽에 있는 못에서 심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고향
을 등지고 큰 세상을 향한 장대한 여정을 떠난다. 한번 폭포를 내려왔으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기에 오로지 앞만 보고 흘러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아랫폭포를 타고 홍제천으로 내려가 한
강(漢江)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이 없는 여행을 떠난다.

늦가을이 되면 겨울 제국(帝國)의 핍박으로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낙엽들이 폭포를 타고 속세로
내려가거나 그 주변에서 저항하며 고향으로의 컴백을 꿈꾼다. 허나 자연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
는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밑으로 흘러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런 낙엽의 발
악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여름의 절정을 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저들의 푸른 아름다움 뒤에는 늦가을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있고, 그 뒤
에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겨울 제국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  급하게 흘러가는 백사골 하류 (아랫폭포)

서쪽 못은 폭포 못보다 조금 넓은 편인데, 그곳에 모인 물은 주택가가 있는 서쪽으로 거의 30~
40도 경사를 이룬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아주 빠르게 내려간다. 각박한 경사를 이룬 바위를
타고 흐르니 폭포로 봐도 무관할 것이다. 폭포의 길이는 150m 남짓으로 강수량이 많아 수량이
많으면 그 흐르는 소리가 멀리서까지 귀를 때린다.

폭포가 흐르는 바위는 넓게 반석을 이루며 제법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데, 폭포 주변을 가득 메
운 주택들만 없었다면 설악산이나 금강산(金剛山) 못지 않은 풍경을 자랑했을 것이다.


▲  주택들 사이를 흐르며 볼품없는 꼴이 되버린 백사골의 그늘

▲  백사골의 생매장 현장 ~ 자하주택 북쪽(세검정로6길)

서울 제일의 경승지인 백사골은 자하주택 북쪽에서 어두컴컴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한다. 지하에
묻힌 백사골은 약 150m 정도 흐르다가 홍제천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자연이 빚은 얼큰한 작
품이 이런 수모를 당한 것은 개발의 난도질 때문으로 나무와 계곡만 있던 이곳까지 주택들이 마
구잡이로 들어와 백사골 아랫폭포의 목까지 조르고 있다.

차라리 주택가를 들이밀지 말고 서울 제일의 피서지로 명성이 높았던 인근 세검정(洗劍亭)과 함
께 장안 제일의 명승지로 가꾸었다면 더욱 빛을 발했을텐데, 개발의 난도질은 그런 여유도 주지
않고 백사폭포 밑까지 올라온 것이다. 다행히 난도질은 폭포 앞에서 멈추었지만 나중에 반드시
계곡 주변 집을 밀어버리고 2012년 여름에 복원된 인왕산 수성동(水聲洞) 계곡처럼 옛 모습을
되살렸으면 좋겠다. 적어도 백사폭포에서 홍제천 합류지점까지 말이다.
이 땅에서 자행되는 개발의 칼질은 너무나 천박하다. 그 칼질에 목숨이 다한 명소가 어디 한둘
이랴.?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玄通寺)는 근래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
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로 추앙받는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로 백사골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1~2번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할만한 매력도 없기 때문이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
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다. 대웅전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남쪽을 향한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골의 시원한 산바람은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유발시켜 경내에 깃들여진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  백사골의 속살로 들어서다

▲  소나무가 마중하는 백사골 산길

현통사를 지나면 제일 먼저 솔내음이 그윽한 소나무 숲이 반긴다. 마치 속세를 뒤로 하고 신선
의 세계에 입산한 듯, 아랫세상과 공기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그것도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말
이다. 시원하고 청명한 산바람에 속세(俗世)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머리와 마음이 말끔히 정화
되는 것 같다.


▲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의 끝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고,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나그네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졸졸졸 흘러가는 청정한 백사골(백사실계곡) <현통사와 별서터 중간>

▲  백사골 중류 (별서터 직전)
사진 정면에 보이는 큰 바위에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만들 때
돌을 떼던 흔적이다.

백사골에 발을 들이면 한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의 풍경을 완벽히 표현한다는 것은 힘들 것
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이곳을 대자연에 대한 명예
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감히 말자랑, 글자랑을 하지 않고 그저 탄성만 연거푸 지
르며, 조용히 백사골을 거닌다.

숲에 깃들여진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길
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롱
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서울 관내에서
는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이곳은 이제 그들의 몇 남지 않은 낙원이 되었다. 만약 그
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동물과 신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 자
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순결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처럼 청정함과 순수함
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백사골은 백사실, 백사실계곡으로 널리 불리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상관은 없다. (본글에서는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혼용했음) 이곳의 정식 지명은 백사실로 거기에 계곡을 붙여 백사실계곡
이라 불리기도 한다.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의 다른 이름이며,(나는 입버릇처럼 백사골이라 부름)
백석동천은 백사골의 일부로 백사폭포와 별서터, 백석동천 바위글씨 주변을 일컫는다.


▲  백석동천 별서터 갈림길

▲  연못 곁을 지나는 백사골 중류 (징검다리)

백석동천 이정표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백
석동천의 중심인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둑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이 꽤나 묵은 나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별서 주인이 돌
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별서터로 인도하는 조촐한 돌다리 - 19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계곡에 콘크리트 둑을 쌓으면서 지금의 높이로 조정되었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 앞에 두고 오른쪽 산자락 윗부분을 뚫어지라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커다
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어렴풋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가운데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백석동천 별
서터(연못터 주변)의 바로 서쪽에 자리해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숲에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모른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
리다보면 우연히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나마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월암은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만들어 그 안에 월암(月巖
)을 새겼다. 이 바위글씨는 18세기에 백사골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바 있는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정되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
습은 가히 명필 중에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한잔 걸치러 이곳에 놀러온
양반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광
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
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
으며 함께 잔을 걸치고 싶다.


♠  북악산에 숨겨진 비밀의 별천지, 북악산 백석동천(北岳山 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서면
여기가 서울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삼각산)에
안긴 분지(盆地)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는 지방이나 고산지대의 소읍(小邑) 같은 분위기이다.
이곳은 녹지 비율이 서울에서 매우 높은 편이며, 백사골 등의 깨끗한 계곡이 살아 숨쉰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명성이 높았던 부암동은 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인
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精舍)를 비롯하
여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서울 제일의 피서지였던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
君)이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
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 백사실 계곡(백사골)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여 백사실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으며, 조선 후기부터 백사실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르고 있다.
그 이름은 하얀 피부의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붙여진 것으로 동천(洞天)이란 칭호는 경관
이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명예로운 이름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돌담의 흔적

▲  사랑채터

백석동천 별서는 19세기 초반(1830년 경)에 지어진 600평 규모의 별서(별장의 일원)이다. 누가
만들고 이곳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
채, 그리고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별서 주변에는 나무와 온갖 화초(花草)를 심
어 별서를 최대한 꾸몄을 것이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
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
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때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도 무거운 상처를 입으
면서 그 휴유증으로 연못의 기능을 잃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
장의 일부 흔적, 바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아련히 전하며, 이 정도의 별서
을 짓고 소유할 정도면 상당한 재력을 지닌 양반이었을 것이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옛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 1720~1783)의 이
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그 책에는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
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이 있어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정자나 별장 비슷한 것이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허씨의 모정을 그의 후손들이 별서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며, 19세기에
상당한 재력이 있는 사대부가 이 일대를 차지해 별서를 지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내몰던 백석동천은 2005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부암동, 신영동)
사람들만 찾아오던 동네 사람들의 숨겨진 피서지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숨어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소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2005년에 이르러 문화재청에서 이곳을 두고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우리나라의 휼륭한 전통 정원임을 인정하면서 비지정의 서러움에서
벗어나 바로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에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
동안 안내문이나 변변한 이정표조차도 없다가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정표를 설치했
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발굴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건졌다.

▲  연못에 세워진 정자터

▲  백사골 중류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
와 여름과 가을, 겨울의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절경지이다. 그중에서
늦봄과 여름에는 도심 속의 조촐한 피서의 성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부산하다.
이곳은 숲이 매우 무성하여 강렬한 여름의 햇빛도 굴복시키며 나무가 베풀어준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골의 졸졸졸~♪ 음악소리를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며 독서를 하거나 낮
잠을 청하면 정말 극락이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유적을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가 되어 신선처럼 살고자 했던 그들(주로 지배층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
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을 배워보고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꽤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발길이 나날이 쓸데없이 증가하면서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까지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돌에 흉물같은 낙서를 남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계곡을 뒤집고, 수목을 괴롭히는
등의 천박한 짓이 늘고 있어 이곳의 건강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다. 아직은 멀쩡하다고 해
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외딴 곳에 있으니 언제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
램인데 이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의 아는 사람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나의
곁에 남았으면 좋겠는데, 이미 그 선은 넘은 듯 싶다. 또한 2013년에 이르러 종로구청에서 별서
를 복원한다며 설치고 있는데, 괜히 복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비
록 폐허가 되긴 했지만 지금 모습이 더 운치가 강하고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수
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복원을 한다면 이건 그냥 두는 것만 못하다.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찾아가기 (2013년 8월 기준)
* 백사실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에서 들어가는 것이며, 하림각은 골목길 경사가 무지 급해
  오르지도 전에 맥이 빠진다. 그리고 창의문은 많이 걸어가야 된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과 자하문터널입구 정류장 사이에 백석동길이란 골목길이 있다. (백석
   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음) 그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오르면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
   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좀 가면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음)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 다리를 건너면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
   표가 있다. 그 이정표를 따라 쭉 오른다. (구기터널이나 정릉 방면에서 오는 경우는 육교를
   건너 길 건너편으로 이동한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2호선
   신촌역(6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시내버스 이용 /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
   스 이용 / 4호선 길음역(7번 출구)에서 153번 버스 이용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북쪽(부암동 방면)으로 가면 창의문3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북악산길로 가는 2차선 길로 가지 말고 왼쪽 골목길(백석동길)로 들어서
   면 부암동 산복길이다. 이 길을 쭉 올라 산모퉁이까페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서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그 길의 끝에는 능금마을(뒷골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면 백사실이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백사골까지 접근도 힘들고 주차 장소도 마땅치 않다. 대중교통이 진리이다.

★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관람정보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개구리 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
  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백사골 일대는 의자를 제외하고 어떠한 편의시설도 없다. 약수터는 능금마을 뒷쪽 산자락에
  하나 있다. (백사실약수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일대


♠  백석동천 사랑채터

▲  사랑채터가 자리한 언덕 (계곡 건너에서 바라본 모습)

▲  윤곽이 진하게 남은 사랑채터
이곳에 있었을 사랑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어디까지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이곳의 운치를 깨뜨릴 수 있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리는 백석동천 별서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
온다. 세월의 태클로 다소 헝클어져 있지만 경사가 완만하여 계단으로서의 역할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그리고 연못 쪽에도 돌계단이 하나 있는데, 다듬은 돌을 계단처럼 얹혀놓은 수수한 모
습이지만 높이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오르기 힘들다.

계단 끝 언덕에는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과 석축의 윤곽이 진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가 있다. 연
못이 잘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지어진 'ㄱ' 구조의 사랑채로 아쉽게도 생전의 뚜렷한 사진조차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남아
있으며, 2010년 발굴조사 이후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산듯하게 정비했다.


▲  2중으로 쌓은 석축 위에 심어진 사랑채터의 높다란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하여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서쪽 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계단

연못쪽으로 돌출된 사랑채 서쪽 부분은 주춧돌의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은
별서 주인의 생활공간으로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穀茶)를 대접하여 1잔씩 주고 받았을 것이다. 사랑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과 석축이 남아있는데, 별서 주인의 서재(書齋)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본 사랑채터

▲  동쪽에서 바라본 사랑채터

▲  사랑채터 옆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석조유구(遺構)로 연못(또는 우물터)으로 여겨진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스란히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푸른 잡초가 따스히 보듬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고 한다. 이후
그 자리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는데,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별서터의 건강을 위협하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대를
발굴하면서 갈아 없앴으며, 지하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
습했다. 이후 발굴을 정리하고 2011년 3월에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묻었으며, 한쪽 구석
에는 이곳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햇살을 된 주춧돌과 기와조각, 여러 돌조각을 한데 수습해 조그
만 돌탑을 이룬다.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  안채터 북쪽 구석 (평창동과 조망점으로 넘어가는 산길)
조그만 시냇물이 백사골로 흐르고 있으며, 예전에 약수터가 있었으나
오래전에 폐쇄되었다.

▲  사랑채 뒤쪽 석축과 돌담

사랑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산사태 등을 막고자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된다. 석축 윗쪽에는 별서의 경계를 가르
던 돌담이 길게 이어져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허물어지고 지금은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지 돌담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헝클어진 채 남아있는 돌담의 흔적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세월의 용광로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
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방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詩想)에 잠겼을 별서의 주인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  대자연에 의해 잠시 연못의 기능을 회복한 연못

백석동천 별서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못은 둘레가 약 100m 정도 되는 보름달처럼 큰 못이
다. 별서 주인은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장안에 솜씨 좋은 기술자를 불러 별서를 만들
고 사대부의 지위를 이용해 인근 백성을 동원하여 연못을 파고 돌과 나무를 나르게 했을 것이다.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둥그런 연못을 수시로 채웠으며, 정자터 부근에 계곡 물을 끌여들이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물이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서쪽에 수로를 파 계속 물갈이가 되도록 유도
했다.
연못과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나가던 해와 달도 그 연못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을 것이요.
주변 나무와 꽃들도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무새를 다듬고, 별서 주인은 벗을 불러 곡차와 차 1
잔의 여유를 누리며 상팔자를 누렸을 것이다.

그들이 팔자 좋게 놀던 시절(19세기 초/중반)은 천하가 한참 아비규환에 젖어있던 시기로 백성
들의 삶은 매우 퍽퍽했다. 민초(民草)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가혹한 세
금삥과 상당수 양반들의 수탈에 털려 궁색하게 살아가고 있건만 별서 주인은 다른 나라 이야기
마냥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당시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안동김씨나 풍양조씨
일가이거나 그들과 가깝던 자가 아닐까 싶음..)

별서의 주인이 골로 간 이후, 풍류의 현장이던 이곳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고, 천하를 쑥대밭으
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게 묻힌 이곳까지 총탄을 선사해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강제로
고자가 되었다. 그 이후 연못에는 물과 물고기, 연꽃 대신 잡초와 잡석만 무성하게 되었고, 늦
가을에는 나무들이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털어낸 낙엽들이 가득 연못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
막 보금자리가 된다.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연못의 구성원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  정자터 남쪽에서 본 연못과 별서터 일대

▲  동쪽 언덕에서 바라본 연못과 별서터

세월의 무상함을 진하게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백석동천 연못은 비록 그 기능은
잃었지만 자연의 생명력이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고 있다. 여름의 제국 시절이나 비가 많이
오는 경우 연못에 물이 담겨 비록 예전만큼의 위엄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찾기
도 한다. 그러니까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이지는 못하고 하늘이 내린 비에 의지해 연못의 티를
되찾는 것이다. 마침 우리가 오기 며칠 전부터 비가 많이 내려 연못에는 물이 가득했다.

수면 위에는 물을 먹고 자란 풀들이 무성하게 돋아나 초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치
늪지대 같은 분위기라 다가서기가 좀 껄끄럽다. 연못에 물이 많이 고이긴 했으나 서쪽에 뚫어놓
은 수로로 물이 빠져나갈 정도의 수량은 아니며 물의 깊이도 겨우 성인 무릎에 닿을 정도이다.
이곳에 담긴 물은 자연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머문다.
연못이 넓기 때문에 물만 더 채운다면 조그만 조각배를 띄워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나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난쟁이었다면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연못을 비롯한 별서터 일대는 나무가 울창하여 한여름에도 뜨거운 햇볕이 마음 놓고 내려오기가
힘들다. 서울 도심 속에 별천지이자 보석과 같은 곳으로 처음 왔을 때 이곳에서 받은 감동이 슬
슬 되살아난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의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삼삼한 삼림
은 이곳을 찾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의 정도는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 허나 지금은 저렇게 허
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그 허전함을 달래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정자를 복원
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연못
에 심어진 기둥 중 4개는 높이가 약 2m이며, 나머지 2개는 돌계단 옆에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곡차를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안다면 기생들을 불러 정자 안에서 팔자 늘어지게 놀았
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부러울 뿐.. 이래서 사람들은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
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일 뿐, 상상으로만 끝나기 때문이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높이가 대략 20m 되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가 약 150~200
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기념으로 심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
원을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를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
에 한풀이를 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나 올련지...?


▲  연못 우측 수로에 놓은 소박한 돌다리
길쭉한 통돌 2개를 놓는 선에서 간단하게 다리를 마무리지었다.
다리가 놓인 수로는 연못에 물을 빼는 역할을 했다.


▲  연못과 별서터에서 수습한 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쉼터
가운데 길다란 돌에 간식거리를 두고 양쪽 석재에 모여 앉아 간식이나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많이 그랬음~ 그렇다고 저기서 취사행위까지는 하지 말 것~~

▲  연못/정자터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

서터 윗쪽 계곡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
물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하여 예전처
럼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기는 그렇다. 계곡의
통제로 산길로 조금 우회해서 가야된다.
2012년에 별서터 주변 산길을 손질하면서 산불
방제 장비를 둔 붉은 색의 구제함을 두었고 이
곳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돌탑과 오리 솟대를
세워 조촐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산길을 오르면 소나무 숲이 나오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부암동 주택가 방면)으로 가
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  오리 모양이 달린 솟대와 그를 품은 돌탑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몫 돕고 있는 소나무숲

▲  백석동천 바위글씨를 간직한 집채만한 바위

▲  너무나 뚜렷한 백석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소나무숲에서 부암동 주택가로 통하는 서쪽 산길로 접어들면 '白石洞天' 4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산천에 붙여지는 이름으
로 비슷한 말로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이 백석동천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하
얀 피부의 바위와 암반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이 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월암과 비슷한 시
기가 아닐 듯 싶은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기를 꿈꾸었
던 선비와 사대부들은 경관이 뛰어난 경승지에는 저렇게 기념 낙서를 남겼는데, 백사골 역시 그
런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의 풍경이 그들을 애타게 감동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거창 수승대(搜勝臺)의 귀연암(龜淵岩,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지나치게 낙서로 도배가 된 것
도 그리 보기는 좋지 않다. 어느 것이든 적당한 것이 좋다.


▲  녹음(綠陰)에 물든 백사골의 호젓한 숲길 ▼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하리라.. 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넓적한 하얀 바위가 파노라마를 이루는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길을 조금 가면 백사골 상류가 나온다. 하얀 피
부의 넓은 반석과 이끼가 낀 까무잡잡한 바위들이 줄줄이 쏟아지면서 탄사를 자아내게 하며, 때
묻지 않은 청정한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흘러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낸다.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현장이 되고, 시민들도 이곳에 들어와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백사골은 능금마을 뒷쪽에서 시작하여 백석동천을 가로질러 홍제천으로 흐른다. 그리고 윗 사진
의 바위부터 백사폭포까지를 백석동천 구역으로 보면 되는데, 그 상류에는 더 이상 괜찮은 바위
나 옛 사람들의 흔적은 나오지 않는다.


▲  백사골 상류 - 이 부분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계곡을 건너 산길로 들어서면 백사골 동쪽 능선과
백사실약수터로 이어진다.

▲  능금마을로 가는 백사골 상류 외나무다리 (오른쪽이 경작지)

백석동천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만든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도 정
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2개의 나무 목재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갈 정도로 좁다.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하지만 다리의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
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요는 없다.
여기서 오른쪽(서쪽)에는 여러 농작물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밭두렁과 비닐하우스 등
이 펼쳐져 있어 도심 속의 생소한 풍경 앞에 두 눈을 잠시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리를 지나서는 길이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2m 미만으로 폭이 좁아진다. 그런 길을 계속 고집
하면 계곡 너머로 집들이 보이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능금마을 부분은 추후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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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전원마을을 거닐다 ~ 종로구 부암동 산책

 


' 볼거리가 풍성한 서울 도심 속의 전원 마을 ~
종로구 부암동(付岩洞) '

▲  인왕산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북악산


하늘 높이 솟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北岳山), 그리고 인왕산(仁王山) 사이로 움푹 들
어간 분지(盆地)가 있다. 그곳에는 수려한 경치를 지닌 부암동이 포근히 감싸여 있는데 서
울 도심과 고작 고개(자하문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거리임에도 '이곳이 정녕 서울
이 맞더냐~?' 고개가 갸우뚱할 정도로 도심과는 생판 다른 전원(田園) 풍경을 간직하고 있
다.

부암동은 서울의 심장부인 종로구의 일부로 아늑한 전원 분위기와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경
승지가 즐비해 북촌(北村), 성북동(城北洞)과 더불어 두고두고 나의 마음을 앗아가는 곳이
다. 부암동의 주요 경승지로는 북악산 백사골(백사실, 백석동천)을 비롯해 세검정(洗劍亭),
홍지문(弘智門), 석파정, 무계정사터, 반계 윤웅렬별장, 능금마을, 북악산, 청계동천 바위

글씨 등이 있으며, 석파정을 옆구리에 낀 서울미술관을 위시하여 환기미술관, 자하미술관,
유금와당박물관 등 미술관과 박물관도 풍부해 문화의 향기도 진하기 그지 없다.

본글에서는 부암동 명소의 일부인 석파정 별당과 무계정사터(무계동 바위글씨), 청계동천,
반계윤웅렬 별장 등을 소개한다.
☞ 북악산 백사골(백사실) 보러가기
부암동 명소 (장의사지 당간지주/세검정/홍지문 등) 보러가기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의 옛 사랑방 - 석파정 별당(石坡亭 別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호

상명대입구 4거리에 이르면 4거리 서남쪽에 고풍스런 멋이 깃들여진 고래등 기와집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집은 석파랑(石坡廊)이란 고급 한정식당으로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소전 손
재형(素筌 孫在馨, 1903~1981) 선생이 살던 곳이다.

소전은 6.25 시절, 서울을 접수한 북한이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담긴 문화유산을 죄다 빼돌
리려고 하자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와 함께 뛰어난 재치로 그곳의 문화유산을 지켜냈으며,
<자세한 내용은 ☞ 간송미술관 답사기 참조> 왜열도로 넘어간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세한도(阮
堂歲寒圖, 국보 180호)를 천신만고 끝에 품에 안고 온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 집은 원래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의 집으로 인왕
산 동쪽인 옥인동(玉仁洞)에 있었다. 그러다가 소전이 1958년에 매입하여 이곳으로 옮겨 거처로
삼았으며, 그 기세를 몰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의 별당까지 떼어와
집 뒤쪽에 두었다. 이렇게 잘나가던 기와집을 하나도 아닌 2채나 누릴 정도면 소전도 꽤 부자였
음을 알 수 있다. (당시로는 흔치 않던 서양개 세퍼드를 여러 마리나 키우고 있었다고 함)
소전이 1981년 세상을 뜨자 이들 집은 모두 다른 이에게 넘어가 한정식당으로 변했으며, 석파정
의 이름을 따서 석파랑이란 간판을 달았다.

석파랑 뒤쪽 높은 곳에 자리한 석파정 별당은 맞배지붕의 'ㄱ'자 형태로 방이 모두 3개이다. 가
운데 큰 방은 흥선대원군의 방이고 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이다. 그리고 대청방은 그의
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 특별히 사용했다고 전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해 고급스러운 한옥 분위기를 진하게 자아내고 있으며, 외벽은 벽돌로 도배해 내부
를 가리고 가운데에 동그란 창을 냈다. 이는 청나라의 건축 양식을 부분 반영한 것이다.

소전에게 별당을 빼앗긴(?) 석파정은 오랫동안 비공개로 일관하다가 2012년 겨울에 비로소 공개
되었다.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진리에 따라 별당을 원자리로 돌려놓는 것도 괜찮
을 듯 싶은데, 서로 소유자가 다르다보니 이 또한 쉽지가 않을 것이다.


▲  적막에 사로잠긴 석파정 별당
저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면 열심히 난초를 그리고 있는
대원군 할배가 있는 것은 아닐까?

▲  석파랑 정원 (오른쪽 계단 너머에 석파정 별당이 있음)

석파정 별당은 현재 식당의 일부로 쓰이고 있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던 대원군의 별장
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의 밥먹는 장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별탈이 없이 깨끗하게 보
존되고 있으니 이 정도는 뭐 봐줄 만은 하겠다.
별당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석파랑 주차장에서 들어가는 길이 있
는데, 주차장 쪽으로 가는 것이 더 접근이 쉽고 빠르다.


▲  150년 묵은 감나무가 무럭무럭 익어가는 석파랑

▲  경복궁에서 가져온 만세문(萬歲門)

석파랑 한옥은 순정효황후의 집을 옮겨온 것으로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가져온 청나라식 호벽
이 그대로 남아있다. 뜰에 세워진 만세문은 고종(高宗)이 황제에 오른 것을 기념하고자 1898년
에 경복궁에 세운 것으로 궁궐 건축물의 품격이 고스란히 배여있는 문이다.
또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에는 곳곳에 박석(薄石)을 깔아 돌길을 냈으며, 조그만 절구를
비롯한 다양한 석물과 나무. 꽃 등을 심어놓아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석파랑은 고급 한정식당이라 가격이 매우 얄미운 수준이다. 점심 상차림은 55,000원에서 11만원
대, 저녁은 95,000원에서 15만 5천원이나 한다. 그것도 10% 부과되는 부가가치세(VAT)와 서비스
비(Service Charge)는 제외이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우리 같은 서민들에게는 정말 특별한 날이
아니면 가기 힘든 아득한 곳이지만 졸부들에게는 그저 가뿐한 장소다. 이 땅에서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님이 많고 봐야 된다.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더러운 세상이니 말이다. 아
직 이곳의 밥은 먹어보진 못했지만 돈을 몇 달치 모아서라도 한번은 먹어보고 싶다.


※ 석파정 별당(석파랑)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번, 1711번, 7016번, 7018번, 7022번, 7212번 시내
  버스를 타고 상명대입구 하차 (1,2호선 시청역 4/7번 출구에서 1711, 7016번 이용)
* 지하철 2호선 신촌역(1,3번 출구)에서 110번, 153, 8153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도보
  2~3분
* 지하철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7730번 버스로 세검정(상명대) 하차
* 석파랑 홈페이지는 위의 석파정 만세문 사진을 클릭한다.
* 석파랑 영업시간 : 12시~15시, 18시~22시 (설날, 추석연휴는 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지동 125 (석파랑 ☎ 02-395-2500)


▲  하림각 건너편 길가에 자리한 부침바위터(付岩址)

부암동의 지명유래가 된 부침(붙임)바위는 바위 피부 곳곳에 난 구멍에 돌을 대고 비비면서 소
원을 빌면 아들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부터 뿌리 깊던 아들 선호 사상이 빚어낸
민간 신앙의 현장으로 아들을 원하는 서울 장안의 아낙네들로 늘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바위의 높이는 2m 정도 되었다고 하며, 자하문고개를 넘어온 개발의 칼질이 이곳의 명물인 부침
바위를 산산조각 내면서 이제는 그의 어떠한 흔적도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근래에 세운
바위터 표석이 이곳에 예전 그가 있었음을 아련하게 전할 따름이다.

서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멋드러진 바위가 참 많았는데, 개발만 앞세운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과 인간들의 속물 근성 앞에 많은 바위가 희생을 당했다. 그 바위 가운데 여기서
가까운 응암동(鷹岩洞) 백련산(白蓮山) 자락에는 매 모양의 잘생긴 매바위가 있었는데, 땅값을
노린 집주인이 무식하게 파괴해 버렸다.


♠  야망의 사나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꿈이 깃든 현장
화려한 별장은 온데간데 없고 무계동 바위글씨만 아련히 남은
안평대군 이용 집터(무계정사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2호

▲  무계동(武溪洞) 바위글씨

석파랑에서 석파정을 품고 있는 서울미술관을 지나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창의로5가길을 들어서면
현진건 집터 표석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 골목길을 들어서 왼쪽으로 20~30도 각도를 바라보면
커다란 나무를 간직한 기와집이 보이는데, 그 집 뜨락 동쪽에 '무계동' 바위글씨가 새겨진 검은
피부의 커다란 고개가 들고 있다. 거기가 바로 한 토막 전설이 되버린 안평대군의 별장, 무계정
사의 옛터이다.


※ 안평대군의 생애(1418~1453)
안평대군은 세종(世宗)의 3번째 아들로 세종이 왕위에 오르던 1418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이용
(李瑢), 자는 청지(淸之), 호는 비해당(匪懈堂), 낭간거사(琅玕居士), 매죽헌(梅竹軒)으로 그의
호에서 보이듯 꽤나 낭만적인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문(詩文)과 그림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칭송을 받았으며 거문고를 잘 타고
무예에도 꽤 일가견이 있었다. 이렇게 문무(文武)를 두루두루 겸비한 인재로 세종의 18명 아들
가운데서 가장 능력이 좋았다.

1428년에는 안평대군에 봉해졌으며, 1429년 좌부대언 정연(鄭淵)의 딸과 혼인했다. 그리고 1430
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공부를 했으며, 1438년에는 두만강(豆滿江) 6진으로 파견되어 두만
강 이북의 여진족을 정벌했다.

세종이 붕어(崩御)한 이후, 맏형인 문종(文宗)의 신임으로 황표정사
(黃票政事 - 왕자들이 추천
한 인물 가운데 왕이 그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
를 장악, 자신의 측근을 요직에 앉혀
조정에서 꽤나 영향력을 행사했다. 1452년 문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단종(端宗)이 즉위하
자,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과 손을 잡고 수양대군을 견제하며 세력을 꾸준히 키워
나갔다.

그는 창의문 북쪽에 별장을 지었는데, 이곳은 자신의 2째 큰아버지이자 세종의 2째 형인 효령대
군(孝寧大君)의 별장이 잠시 있던 곳이다. 안평대군은 이곳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의 계곡을 닮
았다고 하여 무계동(武溪洞)이라 이름 짓고, 별장 이름을 무계정사<武溪精舍, 또는 무이정사(武
夷精舍)>라 했다.
그리고 힘깨나 쓰는 장정을 모집해 숙식을 제공하며 자신의 사병을 꾸준히 키워나가는 한편 용
산에 담담정(淡淡亭)이란 정자를 지어 문인(文仁)들과 교류를 하며 자신의 야망을 키워갔다.

하지만 2째 형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이후, 크게 존재를 드러내면서
단종을 설득해 안평대군의 꿀단지던 황표정사를 폐지시켰다. 이는 안평대군에 대한 심각한 도전
이자 대권에 대한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위기를 느낀 안평은 함경도에 있던 이징옥(李澄
玉)에게 무기를 지원받아 무력을 앞세워 잠시나마 황표정사를 회복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이는 그
의 명을 단축시킨 꼴 밖에는 되지 않았다.

동생의 무력도전에 발끈한 수양은 1453년 10월 그 유명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순식간
에 김종서, 황보인 등을 처단했다. 방심하고 있던 안평은 꼼짝없이 포박되어 반역의 죄를 뒤집
어 쓰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는데, 수양은 썩 안심이 되질 않았던지 곧 강화도 서쪽인 교동도(喬
桐島)로 추방했으며, 한명회(韓明澮)의 건의로 그 해를 넘기지 않고 사약 한사발을 보냈다.
안평은 형이 보낸 사약을 쭈욱 들이키며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그리고 형에게 방심했던 자신의
어리석움을 한탄하며 이내 피를 토하고 쓰러지니 그의 나이 불과 35살이었다.

역사에서 쓰라리게 퇴장을 당한 안평대군은 18세기 중반까지 복관(復官)되지 못했으며, 영조 23
년(1747년)에 이르러서야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건의로 복관되면서 죽은 지 300년 만에 편하
게 눈을 감게 되었다. 그의 시호는 장소(章昭)이며 무덤의 위치는 전해오지 않는다.

그가 이승을 뜬 이후, 그의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는 파괴되었으며, 권력을 향한 그의 강인한 정
열이 느껴지는 무계동 바위글씨만 쓸쓸히 바위에 남아 이곳이 무계정사였음을 속삭일 뿐이다.
무계정사는 안평대군의 호를 따서 비해당(匪懈堂)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여름철에는 많은 문인들
이 찾아와 경치를 즐겼다. 또한 정사 앞에는 기린교(麒麟橋)라는 다리가 있었다.

※ 문예가(文藝家)로써의 안평대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문, 서화, 거문고에 두루 능했던 안평대군, 그는 무이정사와 담
담정을 짓고 문인들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며, 궁중에 소장된 서화(書畵)와 자신이 수집한 중원
대륙의 서화들을 연구하거나 소개하는 등, 당시 문학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趙孟頫)체를 사용했는데, 이를 나름대로 조선식의 필법으로 발
전시켰다. 또한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은 그의 글씨를 보고 조맹부의 글씨보다 더 휼륭하다고
칭송하며 그의 글씨를 서로 받아가려고 굽신거렸다고 한다.

한편 무계정사에 머물던 어느 날, 꿈 속에서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냥 기억 속에 두
기가 너무 아까워 그와 친분이 있던 안견(安堅)에게 그 꿈의 내용을 설명하여 그리게 하니, 그
그림이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지금은 유감스럽게도 왜국에 가 있으며, 2009
년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때 잠시 귀국한 인연으로 몽유도원도가 그려진 현장인 무계정사
터를 찾는 답사객의 수가 잠시나마 늘기도 했다.
또한 여러 문인들의 글을 정리하여 시화첩(詩畵帖)을 만들기도 하였고, 1452년에는 경자자(庚子
字)를 개주(改鑄)해 만든 임신자(壬申字)의 자모(字母)를 쓰기도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글씨로는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는 세종대왕 신도비(神道碑), 수원에 있는 청천부원군 심
온묘의 묘표(靑川府院君沈溫墓表), 자신의 아우인 임영대군묘표(臨瀛大君墓表, 의왕시 소재) 등
의 비문이 전한다.

'武溪洞' 바위글씨 곁에 자리한 낡은 기와집은 무계정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집으로 구한말이나
왜정 때 지어진 것이다. 2005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때는 쥐방울 만한 견공(犬
公) 2마리가 바위와 집을 철통같이 지켜 그들의 눈치를 살살 보며 바위글씨를 봐야 했다. 허나
이제는 그들도 안평대군의 부질없는 꿈을 따라 추억 속으로 사라졌고, 현재는 종로구청에서 관
리하고 있다.

2007년 이후 이곳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무계정사터'에서
'안평대군 이용 집터'로 변경되었
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철문이 굳게 잠겨있어 관람을 애타게 원할 경우 문에 달린 종로구청 문
화관광과로 연락을 하거나 철문의 헝클어진 틈을 요령껏 뚫고 들어가면 된다.


※ 무계정사터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버스로 부암동주민센터 하차
  창의문로5가길을 따라 도보 5~6분, 현진건집터 표석만 찾으면 금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19-4


▲  현진건집터에서 바라본 무계정사터
붉게 물든 아름드리 나무가 자리한 곳에 기와집과 무계동 바위글씨가 있다.
공터 남쪽 구석에는 은단천이라 불리는 샘터가 있으나 수질은 장담 못한다.

▲  이제는 표석으로만 남은 현진건 집터

빙허 현진건(憑虛 玄鎭健, 1900~1943)은 소설 '운수좋은 날'로 유명한 소설가이다. 예전에는 그
의 초라한 집이 좀 남아있었으나 개념도 밥말아먹은 개발의 칼질에 무침히 짓밟혀 지금은 표석
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그래도 명세기 현대문학의 중추적인 인물의 집인데, 지방문화재나 등록
문화재로 삼아 보존하거나 평창(平昌) 봉평의 이효석(李孝石) 생가처럼 문학 테마 관광지로 특
성화시키면 정말 꿀단지가 되었을 것을 무작정 개발만 내세우는 작금의 현실이 그저 딱할 따름
이다.


▲  청계동천(靑溪洞天) 바위글씨

무계정사의 흔적을 둘러보고 현진건집터 표석으로 나와 인왕산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전원
분위기가 물씬 감도는 부암동, 그런 부암동에 핏줄처럼 얽힌 골목길은 마치 시골길을 거니는 즐
거운 기분이다. 동네가 산지에 있다보니 오르막길이 꽤 많지만 그렇게 죽을 정도는 아니다. 게
다가 인왕산과 북악산이 청정한 기운을 베푸니 도시의 탁한 기운도 거의 없어 머리도 맑아진다.

현진건집터와 윤웅렬별장 사이에는 피부를 드러낸 바위들이 여럿 있는데, 청계동천이란 바위글
씨를 품은 바위가 있어 이곳도 동천(洞天)의 칭호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바위글씨는 작고 얇은 모습으로 옛 사람들이
이곳 절경에 반해 낙서를 남긴 것이다. 지금이
야 계곡 대부분이 주택 개발로 생매장을 당해
실감이 썩 나지 않겠지만 반계 윤웅렬 별장 뒤
쪽에 얇게 흐르는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의 상류
이다.

청계동천 바위 주변은 개인 땅이라 바위 주변을
철책으로 꽁꽁 둘렀다. 그래서 바위 앞까지는
접근이 어려우나 바로 길가에 있기 때문에 관람
과 촬영에는 그리 지장은 없다.

▲  확대해서 본 청계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는
반계 윤웅렬 별장(磻溪 尹雄烈 別莊)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12호

▲  윤웅렬별장 문간채 (안쪽 대문)

청계동천에서 1분 정도 오르면 반계 윤웅렬별장(이하 별장)이라 불리는 한옥이 나온다. 이곳은
인왕산의 품에 포근히 안긴 그림 같은 기와집으로 1906년에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이 지은
별장이다.

윤웅렬은 해평(海平) 윤씨로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1856년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감영중군(忠
淸監營中軍)과 공주중군(公州中軍), 북청병마우후토포사(北靑兵馬虞侯討捕使)를 거쳐 1878년 통
리기무아문참사(統理機務衙門參事)와 남양부사를 지냈다.
1880년 수신사(修信使)의 일행으로 왜국(倭國)을 둘러보고 왔으며, 1882년 별기군(別技軍)이 창
설되자 훈련원 하도감(下都監)의 신병대장의 영관(令官)이 되었으나 곧바로 터진 임오군란(壬午
軍亂)으로 왜국으로 줄행랑을 쳤다가 곧 귀국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면서 김옥균(金玉均)에 의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되
었으나, 3일 천하로 허무하게 막을 내리면서 화순 능주로 유배를 갔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
革) 때 군부대신(軍部大臣)으로 있으면서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청나
라 상해(上海)로 도망쳤으며, 몇 년 뒤 다시 컴백해 법무대신을 지냈다. 1910년 이후에는 왜정
의 남작(男爵) 작위를 받는 등 좋지 않은 뒷끝을 보이다가 1911년 인생을 마감했다.

참고로 윤웅렬의 아들 가운데 그 유명한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있다. 그는 개화파 지식
인의 하나로 여러 선각자들과 함께 독립협회와 신민회(新民會)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민
중 계몽에 앞장섰다. 1910년 이후 안창호(安昌浩)가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을 지내면서
민족 교육에 헌신했으며, 1911년 105인 사건으로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허나 이후 친일파로
갈아타면서 부친과 더불어 쌍으로 구린 뒷끝을 보였다.

윤웅렬의 별장은 처음에는 서양식 2층 벽돌 건물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윤웅렬이 골로 가면서 3
째 아들인 윤치창(尹致昌)이 상속을 받았는데, 1930년대에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채, 광채, 문간
채를 추가로 지어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별장 안채는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으며, 안방 앞에는 2칸 부엌이 있고
, 건넌방 앞에는 작은 누마루가 있다. 안채 왼쪽에 광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있는데, 'ㄱ'모양의
사랑채 한쪽 끝에 윤웅렬 시절부터 전해오던 서양식 2층 벽돌건물이 있다.
사랑채와 2층 건물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앞에 인왕산이 베푼 조그만 계곡이 흘러간다.
그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의 상류로 계곡에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나무를 심어 경관을 아름답
게 꾸몄다. 사랑채 지붕에는 옥상 테라스를 돋보이게 만들어 경관을 감상하는 전망대로 삼았다.

사랑채와 광채는 변형이 심해 원래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우며, 한양도성(都城) 밖 부암동에 세
워진 별서(별장)의 하나로 외국 건축 양식이 상류층 주택에 적용된 사례로 주목된다. 또한 안채
는 서울 지역 근대 한옥의 변화가 잘 반영되어 있다.

윤치창 이후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봉산서원이라 불리는 미술공간으로 쓰였으며, 이때는 대문(
문간채) 앞 뜨락에 비너스상과 집채만한 큰 바위가 있어 특이한 모습을 보였는데, 2011년에 어
느 졸부가 이곳을 사들이면서 싹 정비해 그들을 내버렸다. 이때 대문을 새로 만들고 담장을 추
가했으며, 집도 새집처럼 산뜻하게 손질했는데, 보수공사 기간에 공사 관계자의 흔쾌한 허가로
2층 테라스를 비롯하여 별장 내부를 구석구석 관람하는 행운을 누렸다.
부암동이 요즘 인기를 누리면서 찾는 이가 쓸데없이 늘긴 했지만 여기까지는 거의 오지 않는다.
설령 용케 왔다고 해도 속사정을 알지 못하니 그저 담장만 찍고 돌아갈 뿐이다.

별장 보수공사는 2011년 12월에 끝났으며, 이후로는 소유자의 뜻에 따라 절대로 속살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그 이전에 본 것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내 바램이긴 하지만 이 괜찮은 한
옥을 집주인 일가만 야속하게 누리지 말고 다수가 좀 누렸으면 좋겠다. 그냥 누리면 좀 미안하
니 요즘 인기를 더하고 있는 한옥체험장(한옥 민박, 게스트하우스)으로 개방하면 어떨까?
북촌과 전주한옥마을, 경주 양동민속마을, 안동의 몇몇 기와집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한옥 체험/
숙박 장사를 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곳 집 크기는 북촌의 왠만한 한옥과 비슷하거나 조금
큰 편이며, 뜨락도 넓고, 바로 옆이 인왕산 숲이라 공기도 매우 상쾌하다. 도심이긴 하지만 깊
숙한 산골 마을에 들어온 듯, 전원 분위기가 그윽하며, 집에 딸린 방이 많고 한옥의 흔치 않은
2층 테라스까지 두고 있으니 소문만 잘나면 어지간한 한옥 숙박집 이상의 인기를 얻을 것이다.
게다가 도심과 가깝고 교통도 괜찮으며, 정류장에서 도보 10분이니 접근성도 그만하면 딱이다.


▲  서쪽 담장 너머로 바라본 윤웅렬별장의 뒷모습

▲  2011년 후반에 새로 지은 바깥 대문
예전에는 그냥 뻥 뚫린 공간이었다
.

▲  안채 옆에 있는 또 다른 문
원래 있는 문으로 늘 굳게 닫혀있다.

▲  윤웅렬별장 앞길 (대문과 담장은 2011년
보수 때 새로 했음)

▲  겨울잠에 잠긴 별장 연못
물과 연꽃, 물고기가 넘쳐날 그때를 꿈꾼다.


▲  윤웅렬 별장의 숨겨진 아름다움 (사랑채 뒤쪽 계곡) ▼

별장 뒤쪽에는 이곳만의 숨겨진 비경이 있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절경이 수줍은 듯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는 조그만 계곡이 없는 듯 흘러가는데, 이 계곡이 바로 청계동천이다. 계곡 양쪽에는 돌
로 높게 석축을 쌓았으며, 위쪽에는 2단으로 석축(石築)을 둘렀다. 석축 위에는 단풍나무를 비
롯한 여러 나무들이 앞다투어 작품이 되면서 늦가을의 정취를 진하게 우려낸다. 지나가던 가을
도 이 별장에 단단히 눈독을 들였는지 뒤쪽으로 슬며시 들어와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을 빚은 것
이다.


▲  사랑채 뒤쪽 계곡의 막다른 곳 (바위와 폭포)

계곡의 막다른 곳에는 푸른 이끼를 뒤집어 쓴 바위가 있다. 이끼가 가득하다는 것은 이곳이 그
만큼 청정하다는 것을 강하게 의미한다. 인왕산에서 흘러온 계곡이 이 바위에서 아담하게 폭포
를 자아내며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폭포의 높이는 2m 정도로 물줄기가 바위 전체를 타고 흐르
는 것이 아닌 한쪽 구석에 답답한 줄기로 흘러간다. 바위 위쪽 주변에는 석축을 쌓고 계단을 만
들었는데, 붉게 타오른 낙엽이 수북히 쌓여 마치 산불이 일어난 듯 하다.


▲  푸른 이끼의 청정한 안식처인 바위와 폭포

▲  폭포 밑에 모인 인왕산 계곡물

티끌 없이 맑은 계곡물이 폭포 밑에 마련된 조그만 담(潭)에 옹기종기 모여 기나긴 여행을 준비
한다. 여기서 숨을 돌리고 길을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드니 그 아쉬움은 정말 대단하겠지. 그
런 못에 낙엽들도 몰려와 그들 생애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주변 나무들은 조그만 못에 비
친 자신을 바라보며 막바지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  바위 위쪽 부분 (석축과 돌계단)
비록 짧지만 한세상 폼나게 살다 쓸쓸히 대지로 떨어진 이쁜 빛깔의 낙엽이
수북히 쌓여 아름다운 선경(仙境)의 불빛을 이룬다.

▲  불의 화신일까..? 붉게 물이 오른 단풍잎

▲  2층 테라스를 갖춘 사랑채와 2층 벽돌집

비경의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랑채는 별장 내부를 꽁꽁 가리고 있다. 사랑채 지붕
위에는 특이하게 옥상 테라스를 두어 작지만 천하를 굽어볼 수 있게 했으며, 사랑채 바로 옆에
는 붉은 피부의 서양식 2층 벽돌집을 두어 옥상으로 연결하는 계단을 두었다.
벽돌집에는 각 층마다 큼직한 방이 있어 사랑채의 보조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옥상 테라스와 벽
돌집은 이곳만의 진한 매력이자 서울에 있는 근/현대 한옥 중에서도 유일한 케이스이다.


▲  측면에서 바라본 2층 벽돌집과 사랑채
붉은 벽돌로 치장한 벽돌집에 중후한 멋이 엿보인다.

▲  별장 안쪽으로 들어가는 통로 - 왼쪽이 사랑채, 오른쪽이 문간채이다.

▲  2층 벽돌집과 안으로 들어가는 문

▲  사랑채 지붕 2층 테라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안채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남쪽 산자락
정말 시리도록 아름다운 늦가을 풍경이다.

▲  사랑채 2층 테라스에서 바라본 별장 뒤쪽 (서쪽)

사랑채 지붕으로 올라가려면 2층 벽돌집을 거쳐야 된다. 실내화로 갈아신어 계단을 타고 2층으
로 올라가 문을 열면 나무로 지어진 2층 테라스로 전망용으로 지어지긴 했으나 시야에 들어오는
범위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매우 좁아 별장 일대와 남쪽 산자락이 고작이다. 하지만 산자락에
나무가 무성해 눈이 그리 심심치는 않으며, 이곳에 올라 인왕산에서 잔잔히 다가오는 선선한 바
람을 맞으면 속세에서 오염된 머리와 마음이 싹 가시는 듯 하다.

별장 서쪽 언덕에는 돌로 2단의 석축을 쌓고 구석에 소나무 등의 나무를 심었는데, 나무가 제법
다 자란 티를 내며 별장에 작게나마 그늘을 드리워준다. 게다가 커다란 바위도 한쪽에 자리잡고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숫키와가 얹혀진 담장이 집을 넓게 둘러싸며 속세와 경계를 이룬다.


▲  텅 비어있는 벽돌집 2층

※ 반계 윤웅렬 별장 찾아가기 (2013년 4월 기준)
* 교통편은 앞의 무계정사 참조, 무계정사 입구 현진건집터에서 큰 골목길로 직진하면 된다.
* 개인 소유라 내부 관람은 어렵다. 관계자의 허가를 받드시 받기 바란다.
* 여기서 인왕산의 품으로 6분 정도 들어가면 자하미술관(02-395-3222)이 있으며, 미술관 직전
  에서 부암약수터를 거쳐 인왕산으로 올라가도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348


▲  부암동 나들이를 마치고 자하손만두에서 먹은 떡만두국
색이 입혀진 만두가 나그네의 입맛과 시각을 제대로 자극시킨다.

부암동을 둘러보니 슬슬 어둠이 내려오면서 시장기가 감돈다. 답사와 등산에서 먹는 재미만큼이
쏠쏠한 것은 없지. 마침 자하문고개까지 올라온 터라 자하문길과 북악산길이 만나는 고개 중턱
에 자리한 자하손만두를 찾았다.
이 만두집은 서울식 만두를 파는 곳으로 서울에서 만두로 꽤 유명한 집이다. 다양한 색과 모양
을 지닌 만두는 입안에서 살살 녹기가 바쁘며, 만두집이라 만두와 떡국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2층 양옥으로 이루어진 이 집은 뜨락에도 상을 놓고 손님을 맞는데, 휴일 저녁이라 자리가 거의
없다. 우리는 편수와 떡만두국을 먹었는데, 가격이 몹시나 얄미운 수준이다. 편수는 11,000원,
만두국은 무려 12,000원이나 한다. 내가 먹은 만두국 가운데 가장 허벌나게 비싸다. 그렇다고
나같은 장정이 먹기에도 썩 넉넉한 양도 아님. 만두를 겯드린 식사를 하려면 2인 기준으로 3~4
만원대는 잡아야 된다.

반찬은 김치와 송송(깍두기)이 전부이며, 식사를 마치면 후식으로 잘 익은 수정과를 준다. (지
금도 주는 지는 모르겠음) 고개 중턱에 자리한 탓에 자리만 잘 잡으면 인왕산과 부암동을 바라
보며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산자락이라 밤공기가 좀 차다.


▲  편수의 위엄
편수는 소고기와 표고버섯, 오이 등이 들어간 만두로 그 모양이 참 이쁘다.
저들의 모습은 소중한 무엇인가를 꼭꼭 품고 있는 모습 같은데, 그 껍질을
벗기면 잘 버무려진 편수의 내용물이 수줍은 듯 속살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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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4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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