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동천'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23.12.17 북악산 북쪽 자락에 깃든 아름다운 별천지,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계곡
  2. 2017.08.16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숲과 계곡, 폭포, 옛 별서 유적이 어우러진 ~~ 부암동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3. 2016.08.22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서촌 제일의 경승지 ~~ 인왕산 수성동계곡 (인왕산길, 기린교)
  4. 2015.08.13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계곡 (백석동천)
  5. 2013.08.04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 (백석동천, 백사골)
  6. 2012.08.13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북악산 북쪽 자락에 깃든 아름다운 별천지,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계곡

부암동 백석동천(백사실계곡)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계곡) 늦가을 나들이 '

백석동천 별서터
백사실 백사폭포 백석동천 별서 사랑채터

 



 

늦가을이 무심히 익어가던 11월 첫 무렵, 나의 오랜 즐겨찾기 명소인 부암동 백석동천(백
사실계곡)을 찾았다.
두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곳의 늦가을 풍경이 몸살 나게 그리워 간만에 찾은 것으
로 이번에는 흔하게 가는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들어가지 않고 그 동쪽인 평창동 화정박
물관에서 접근했다.
박물관 옆 골목길(평창8길)을 3분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서쪽)으로 오솔길이 손을 내미는
데, 그 길은 평창동(平倉洞)에서 백사실계곡을 빠르게 이어주는 지름길이다. 자연이 완전
히 묻힌 싱그러운 숲길로 길도 흙길이고 주변에 밭두렁까지 펼쳐져 있어 이곳이 서울임을
잠시 잊게 한다.

길 중간부터는 남쪽에 3~4m 높이의 석축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그 안에 배드민턴장과 보
호수로 지정된 늙은 소나무가 있다. 간만에 소나무를 보고 갈까 했으나 석축 밑에서도 어
느 정도는 보이므로 그것으로 퉁치고 길을 계속 이어가니 그 길의 끝에 백사실 동쪽 능선
이 소나무 숲길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솔내음이 그윽한 백사실 동쪽 능선에 올라타 남쪽으로 가면 백석동천의 중심인 별서(別墅
)터로 내려가는 산길이 나오며, 평창동 조망점으로 이어지는 북쪽 길로 가서 서쪽으로 내
려가면 현통사와 백사폭포로 이어진다. (본글은 편의상 백사폭포부터 다루도록 하겠음)


▲  소나무가 무성한 백사실 동쪽 능선길



 

♠  백사실계곡(백석동천) 입문

▲  현통사 앞에 자리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일주문) 밑에
는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끄러운 바위 피부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이곳을 찾은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작은 폭포로 웅장하거나 수려한 멋은 딱히 없다. 그저 수수하게
생긴 폭포로 하얀 반석과 잘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나그네로 하여금 백사실계
곡에 대한 첫 인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그곳에 대한 기대감을 크게 돋군다.
서울 도심에서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라 그 희소성이 높은데, 그가 만약 설악산이나 금
강산, 주왕산(周王山) 등 일품 폭포가 즐비한 곳에 있었다면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
러니 사람이나 폭포나 때와 자리를 잘 잡아야 덕을 본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실계곡(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옛날 이름이 동령폭
포란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폭포는 자신의 이름까지
저 멀리 흘려보내고 만 것이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서 폭포수가 실보다 가늘고 누런 낙엽까지 짙게 깔려있지만 비가 많이
오면 폭포수도 제법 패기를 보인다. 여름 제국 시절에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
되며, 사람들이 돗자리를 펴고 잠시 쉬어가는 등, 도심 속의 이색 공간이자 꿀피서지로 인기
가 높다.


▲  백사폭포와 하얀 반석


▲  가을과 낙엽을 속세로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아랫 못

겨울 제국(帝國)의 시련을 견뎌내고자 나무들이 속절없이 털어낸 낙엽들은 폭포 주변에 수북
히 쌓여있다. 이들 낙엽은 폭포 밑에 모여 이곳에서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며, 올해도 변함
없이 도래한 겨울을 원망한다. 몇몇 낙엽은 한이 맺혔는지 폭포 중간에 철썩 같이 달라 붙어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자연은 그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아래로 흘러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니 그
런 낙엽의 발악을 보면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실감한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실계곡 냇물은 넓은 세상을 꿈꾸며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소(沼, 못)에서 큰 세상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다시는 오기 힘들 그리운 고
향, 북악산(백악산)의 그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다리 밑 조그만 폭포를 통해 아
랫 못으로 흘러가며 여기서 신나게 바위를 타고 내려가 홍제천, 한강을 거쳐 서해바다로 종점
없는 여행을 떠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늦가을의 절정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열
심히 매무새를 다듬는다. 저들의 처절한 아름다움 뒤에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잔
잔한 수면에는 귀를 접은 낙엽들이 둥실둥실 떠 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백사실에 머문
늦가을도 낙엽을 데리고 계곡을 통해 저 밑으로 그렇게 흘러간다.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실계곡 밑에 둥지를 트며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는 20세기 이후에 지어진 조그만 산
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의 하나였던 일붕(一鵬)이 머물렀
던 절로 백사실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겨우 2~3번이
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만들만한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실의 시원한 산바람이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
한 풍경소리가 주변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있다.


▲  늦가을이 진하게 깃든 백사실계곡 숲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에 물들게 한다.

▲  운치가 진한 백사실계곡 숲길 (백사폭포~백석동천 별서터 구간)

간만에 백사실계곡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으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한
내음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실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1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
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의 풍경을 완벽히 표현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백사실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 나는 감히 언어로 이곳을 희롱하지 않고 그저 탄
성만 연거푸 지르며, 조용히 백사실계곡을 거닌다.
 
숲에 깃든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숲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실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도롱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줄어들고 서울에서는 이곳을 비롯한 일부 계곡에만 겨우 살아가고 있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  별서터 돌다리에서 바라본 백사실계곡

▲  별서터 돌다리 직전 계곡에 누워있는 바위들
크고 견고하게 생긴 바위들 피부에는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닦을 때 필요한 돌을 떼던 흔적들이다.


계곡에 누워있는 바위들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사실계곡은 백석동천, 백사실, 백사골 등이라 불리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별로 상관은 없
다. 정식 명칭은 백사실계곡으로 이곳 지명이 백사실이며,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줄여 표현
한 이름이다. 그리고 백석동천은 이곳에 반한 선비와 양반들이 붙인 칭호이자 백사실의 다른
이름이다.


▲  별서터 옆을 지나는 백사실계곡 (별서터 징검다리 주변)

백사실계곡 안내도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정겹게 펼쳐진 계곡 징
검다리나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
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닦은 둑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에 별서 주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별서터에서 바라본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앞에 두고 별서터 맞은편인 서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언
덕 정상에 큰 바위 하나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월암은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중 가장 발이 닿기 어려운 궁색한 곳에 자리해 있다. 별서터
바로 서쪽 산자락에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짙은 숲에 가려져 있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99% 이상은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11월 중순 이후나 겨
울에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다 보면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파고 그 안에 월암(月巖) 2자를
새겼는데, 18세기에 백석동천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
정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필 중의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실계곡은 나무가 울창해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1잔 걸치러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
광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 바위에 달바위(월암)란 이름을 붙여
주고 글씨를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  북악산(백악산) 북쪽 자락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벗어나면 여
기가 서울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경치가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
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안긴 분지
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 산간 마을이나 산골에 묻힌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이 바
로 지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산 속에 자리한 탓도 있겠지만 나라
의 예민한 곳이 동네 주변에 많아 개발의 천박한 칼질을 크게 잠재웠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던 부암동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서(별장) 및
휴식 장소로 인기가 대단했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
武溪精舍)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그 외에 세검정(洗劍亭), 탕춘대(
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백악산) 북서쪽 백사실계곡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
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해서 백사실이라 불리고 있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으며,
백사실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북악산(백악산)에서 비
롯되었으나 계곡에 하얀 돌이 많고 경치가 고와 굳이 북악산이 아니더라도 백석동천의 이름
자격은 충분하다. 여기서 동천(洞天)이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경승지의 명예로운
칭호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연못 정자터

▲  사랑채터

백석동천과 관련된 첫 기록은 18세기 인물인 월암 이광여(1720~1783)의 이참봉집(李參奉集)에
있다. 그 책에는
'비가 온 뒤 북한산(삼각산)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가 폭포수를 보았다. 세검정으로 빠지
는 계곡 위쪽에 근원을 알 수 없는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가느다란 폭포(백사폭포)가 있는데
그 위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다. 그곳의 편액은 간정료(看鼎寮)였다'
여기서 간정료는 '솥을 보는 집'이란 뜻으로 차를 끓이는 다조(茶俎)를 말한다. 허씨의 초가
정자가 일찌감치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는데, 여기서 허씨는 허필(許佖)로 여겨진다. 그는 시
문과 그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손가락으로 그리는 지두화(指頭畵)를 잘했다. 1737년 '북
한산 남쪽 백석 별업(別業)에서 정윤, 강세황(姜世晃)과 함께 짓다'
는 제목의 시를 지으니 그
때 이미 '백석(백석동천)'이란 지명이 있었음을 살짝 밝혀주고 있다.

개화파로 유명한 박규수(朴珪壽)도 14살이던 1820년에 외할아버지를 따라 한양도성 북쪽의 여
러 명소를 거닐었는데, 그때 백석동천에도 들려 시문을 남겼다. 그는 석경루 위쪽에 백석정의
옛 터가 있는데 허씨 성을 가진 진인(眞人)이 살던 곳이라 하였고, 백석정은 허도사가 단약(
丹藥)을 달이던 곳이라 언급하며 백석정은 이미 사라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허씨(허도
사)는 허필로 보이며, 백석정은 간정료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2012년에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백석동천에 손을 댄 기록이 발견되었다. 김정희
는 금헌(今軒)이란 친구와 읊은 시에서
'하찮은 문자에도 정령이 배었으니 선인이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나의 북쪽 별서
는 백석정의 옛터에 있다'
는 문구가 나온 것이다. 김정희가 백석동천을 북쪽 별서<북서(北墅)
>라 한 것은 이미 한양도성 동남쪽 금호동(金湖洞)과 경기도 과천(果川)에 별서가 있었기 때
문이며,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편지에는 백석동천 별서를 산루(山樓)라고 표현했다.

서울특별시사 편찬위원회가 1960년대에 낸 '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에는 이곳 별서가 1830년
대에 지어진 것으로 나와있는데 추사가 그때 이곳을 사들여 정자를 짓고 600평 규모의 별서를
지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허나 추사가 계속 소유하고 있지는 않은 듯 싶으며, 이후 이곳
관련 기록에는 주인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친일파로 변절한 윤치호(尹致昊)는 1926년 11월, 이곳을 유람했는데, 그의 '윤치호일기'에 '
백석실'이라 나와있어 백석동천(백사실)의 다른 명칭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1930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에는 '북악8경'의 하나인 '백석곡 팔각정'이 나왔는데, 백석곡은 백석동천의
별칭으로 그 신문에 정자의 사진이 나왔다. 그것이 백석동천 별서터의 유일한 생전의 사진이
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 별서를 둘러싸던
담장이 있었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는데,
안채는 1917년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6.25때 이곳까지 총탄이 날라와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은 기능을 잃었다.
사랑채와 안채는 1970년대까지 살아는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감당치 못
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하여 지금은 사랑채터와 안채터, 동그란 연못, 정자터, 담장터, 돌다
리, 돌계단, '백석동천'과 '월암' 바위글씨 2개가 남아 이곳의 정취를 아련히 전한다.

옛날에는 그래도 마음 놓고 발을 들일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으나 북한이 저지른 1968년 1.21
사태(김신조 공비사건)로 북악산 일대와 백사실계곡이 금지된 곳(청와대 경호구역)으로 꽁꽁
묶이면서 사람들의 발길은 거의 끊기게 된다. 이후 동네 사람들이나 오갈 정도로 비밀의 공간
으로 숨겨져 있다가 2004년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통제구역에서 해방되었고, 그 시절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곳을 두고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
임을 인정해 비지정문화재에서 국가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다. 이후 2008년 1월 명승 36
로 변경되었다.

2010년과 2011년에 별서터 일대를 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
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  백석동천 바위글씨

서울 도심 속의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와
여름의 녹음과 피서삼매, 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고루고루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숲이 매우 삼삼하여 강렬한 여름 햇살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
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실계곡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
나, 침침한 두 눈을 비비며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피서의 성지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터를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로 살고 싶었던 옛 사람(주로 지
배층들)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
으로 들어가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이런 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쭉
남았으면 좋겠다. 찾는 이가 늘면서 바람직하지 못한 작자들까지 섞여 들어와 사랑채터 주춧
돌에 낙서를 하고 계곡을 괴롭히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다행히 2019년 이후 관리인을 두어
이곳을 지키고 있다.
또한 2013년에 종로구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이곳을 들쑤실 생각까지 했었는데, 괜히 복
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기 바란다. 비록 폐허가 되었어도 지금의 모습이 더 운
치가 강하며, 옛 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 있다. 그리고 백사실계곡은 서울시에
서 지정한 도룡뇽 보호구역이니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않기 바란다.


* 백석동천(백사실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 부암동 산25일대


▲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

백사실계곡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
중을 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이어주는 돌계단이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클로 돌계단이 좀 헝클어진 했으나 경사가 완만해 오르락 내리락에는 별로 어려움은
없다. 다만 연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 높이가 고르
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  선명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가 있었다. 허나 아쉽게도 생전
의 사진이나 그림도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무너져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 남아있으며,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정
비되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서 별서 주
인은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를 대접
하여 1잔씩 걸쳤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채 동쪽 부분에는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이 남아
있다.


▲  석축 위에 닦여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누마루가 사라지면서 주춧돌은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우물터
2010년 발굴조사 때 발견된 것으로 우물(또는 작은 연못)로 여겨진다. 지금은
낙엽과 잡석만 가득 널려 황폐의 극치를 보여준다.

▲  공터로 남아있는 안채터
안채가 가고 없는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리에
는 엉뚱하게 배드민턴장이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적지 않게 파괴되고 생매장을 당
했다.
그렇게 별서터를 깔고 앉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
대를 발굴하면서 없앴으며, 땅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건
졌다. 그리고 2011년 3월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고이 묻고 그 위를 풀로 덮
어 완전히 가렸으며, 사랑채와 안채터에서 수습된 주춧돌 등의 돌덩어리들은 안채터 서쪽 구
석에 일부 모아두었다.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
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사랑채 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
과 별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에 잠겼을 별서 주인을 머릿속에 그리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사랑채터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었을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어디까지나 상상에서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이곳의 운치를 크게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 뒷쪽 석축과 담장터

사랑채터와 안채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담장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되며, 석축 윗쪽에는 별서와 속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던 담
장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거진 무너지고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
지 담장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

▲  흔적만 남은 사랑채 뒷쪽 담장터



 

♠  백석동천 별서터의 중심, 연못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살며시 떠있는 그런 흔한 연못이 아닌
나무들이 털어놓은 낙엽, 그리고 잡초로 가득한 모습을 보인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은
연못의 성격과 구성원까지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옛날에 정자터 옆에 배수로를 만들어 백사실계곡 물을 가져와 둥그런 연못을 채웠으며 연못을
채운 물은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돌다리 밑 수로를 통해 계곡으로 빼면서 계속 연못은 물갈
이가 되었다.
허나 이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던 6.25전쟁 때 조용하던 이곳까지 총탄이 날라와 정자가 파괴
되고 연못 또한 손상을 입어 배수가 불가능하게 되면서 무늬만 연못이 되어버렸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연못, 허나 저 연못에도 자연의 생명력
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나고 있다. 게다가 비가 많이 오면 비록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그
런데로 연못티를 풍긴다. 잡초로 가득한 연못의 모습도 나름대로 초록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늦가을에는 낙엽이 한가득 공간을 채우면서 누런 연못이 된다.

연못의 둘레는 약 100m 정도로 주변은 나무들로 삼삼하여 두텁게 시원한 그늘이 펼쳐진다. 거
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울창한 삼림은 이곳을 찾은 나
그네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여기가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은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六茅亭)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궜던 정자는 윗도리와 중심부는
모두 사라지고 6개의 돌기둥과 돌계단만 남아
있다. 정자터 옆구리에는 계곡물을 끌어들이던
배수구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6.25전쟁으로 그
것이 손상되면서 더 이상 물을 소환할 수 없게
되었다.
백석동천 별서터 식구 증 유일하게 생전의 모
습을 남긴 운이 좋은 존재로 1930년 7월 19일
자 동아일보에 백석곡 팔각정으로 등장했다.

▲  옆에서 바라본 정자터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
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며 유유자적 했을 것이다.
비록 터만 남아있으나 지금의 모습도 그리 싫지는 않으며 괜히 복원한다고 난리를 치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둬야 이곳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15~20m에 이르는 커다란 물푸레나무가 연못과 그 주변에 그늘을 드리
우고 있다. 나이는 약 150~200년 정도로 여겨져 추사 김정희가 심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이는
데, 나무 밑에는 커다란 바위가 누워 있어 별서를 닦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두었으니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원이나 별서를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  별서터에서 수습된 돌로 이루어진 소박한 쉼터 (정자터 옆)

별서터 일대에서 수습된 크고 견고한 돌덩어리들을 이곳에 모아두었다. 이들은 아마도 사랑채
와 안채, 정자에 쓰인 석재로 보이는데, 시커먼 피부를 지닌 큰 돌을 가운데 두고, 그보다 작
은 돌덩어리 2개를 좌우에 두어 마치 탁자와 의자와 같은 모습이 되어 조촐하게 이곳의 쉼터
역할을 한다.
나도 둘이나 여럿이서 이곳을 찾았을 때 여기서 앉아 쉬거나 속세에서 가져온 간식을 섭취하
고는 했는데, 저곳에 앉은 횟수는 최소 50회는 넘을 것이다. 저 돌덩어리들과 별서터 유적은
거의 그대로이거늘 나와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계속 늙어가고 변해가니 정말 인상무상이로다.


▲  통돌 2개로 이루어진 작은 돌다리

정자터 옆에 있던 배수구를 통해 옆에 흐르는 백사실계곡 물을 가져와 연못을 채우고 채워진
물은 돌다리(윗 사진)가 있는 작은 수로를 통해 계곡으로 내보내 고인물을 경계했다.
이곳 돌다리는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관련글 보기)의 기린교처럼 길쭉한 통돌 2
개로 이루어진 단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은근히 정감을 가게 한다. 별서가 조성되던 1830년
에 수로, 연못과 함께 닦여진 것으로 보이며, 수로에는 더 이상 물이 나갈 일이 없어 낙엽만
가득하다.


▲  연못을 중심으로 한 백석동천 별서터 전경

▲  늦가을이 고스란히 담긴 연못 둘레길 (연못 동쪽)

▲  연못 동쪽 산비탈에 둘러진 석축의 흔적



 

♠  백석동천 마무리

▲  별서터에서 백사실 상류로 인도하는 산길

백사실계곡은 별서터 옆에서 백사실약수터 입구까지의 황금 구간을 도룡뇽과 맹꽁이 등의 수
중 동물 보호를 위해 금줄을 둘러 접근을 금하고 있다. 하여 별서터에서 계곡 상류로 가려면
별서터를 등지고 계곡을 건너 솟대 돌탑과 안내문이 있는 별서터 입구로 나와야 된다.
하지만 통제의 줄이 느슨해 금줄의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가는 사람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
히 여름에는 피서객들의 칩입이 빈번하여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는 2012년에 마련한 산불방제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이 있는데, 솟대 돌탑
은 백석동천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그냥 백석동천 수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돌탑을 지나
면 소나무숲과 늦가을에 잠긴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동쪽)으로
가면 백사실 상류와 능금마을, 북악산길(북악스카이웨이)로 이어지고,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백석동천의 늦가을 경관을 한몫 거들고 있는 짧은 은행나무숲길

▲  아직도 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남쪽) 길로 가면 서쪽을 향해 95~100도 정도 약간 고개를 숙인 큰 바
위가 직각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그 피부에 '白石洞天' 바위글씨가 아주 또렷하게 깃들여져
있다. 여기서 '백석'은 북악산(백악산)을 뜻한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북악산(백악산) 산신
도 모른다. 아마도 월암 바위글씨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지는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조선 때 선비와 양반 등 지배층들은 경관이 수려한 곳에 저렇게 낙서를 남기는 습
성이 있었는데, 백석동천 역시 그들의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
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일 것이다.


▲  백사실계곡의 그림 같은 숲길 (능금마을 방향)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할 것이다. 비록 짧은 거리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백사실계곡의 그림 같은 숲길 (백석동천 별서터 방향)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이어지는 숲길을 조금 가면 잠시 떨어졌던 백사실계곡 상
류가 나타난다.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부터 이끼 옷을 걸친 바위들까지 줄줄이 이어져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과 금강산, 백두산, 주왕산, 지리산 등 큰 산의 계곡만은 못해
도 서울 도심 지척에 저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때묻지 않은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흐르면서 운치를 진하게 우려내는데, 이렇게 순수함을 지닌
백사실 물은 백사아랫폭포부터 속세의 기운을 강제로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속물로 변해간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겠는가?

한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 현장이 되고, 시민들의 소풍/나들이 장소로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
터 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  외나무다리 직전 백사실계곡 상류

▲  백사실계곡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는 외나무다리

백사실계곡 상류의 너른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
도 달달한 풍경을 자아낸다. 길쭉한 목재 2개를 엮어서 닦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
도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나면 어찌해야 될까? 다리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
요는 없다.
사람 많고, 차량 많고, 키다리 건물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게 보이는 서울 도심 지척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신기할 따름이다. 백사실계곡(백석동천)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
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백사폭
포에서 시작된 백석동천은 이 외나무다리에서 사실상 끝이 나며, 백사실계곡은 능금마을 안쪽
까지 이어진다.


▲  백사실계곡 상류와 능금마을 밭두렁 (능금마을 방면)

외나무다리를 지나면 산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줄어든다. 계곡 건너에
는 생뚱맞게도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심히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
을 지나면 집들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종로구가 맞거늘 이런 두멧골이 있었나. 마음을 설레게 하니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
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백사실계곡(백석동천)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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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숲과 계곡, 폭포, 옛 별서 유적이 어우러진 ~~ 부암동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 서울 도심 속의 아름다운 별천지,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늦가을 나들이 '



늦가을이 거의 저물어가던 11월 끝 무렵에 후배 여인네와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인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백사골)을 찾았다. <본글에서 '백사실=백사골'임>

백사실은 서울 장안에서 가장 흠모하는 곳의 하나로 2005년 5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
시키며 처음 발을 들인 이래 매년 6~7회 이상 발걸음을 하고 있다. 그렇게나 많이 찾았으
면<지금까지 80번은 넘게 찾은 듯> 정말 지겹고도 남음이 있을텐데 그에게 제대로 중독된
것일까? 돌아서기가 무섭게 또 들어가고 싶은 곳이다.
 
우선 도심 속의 전원 마을, 부암동(付岩洞)의 여러 명소(☞ 관련글 보러가기)를 둘러보고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弘濟川) 다리를 건너 '세검정로 6다길' 골목으로 들어섰다.
백사실의 눈부신 인기를 보여주듯 그를 알리는 이정표가 자주 비춰주니 길치들도 조금 마
음을 놓고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백사실로 들어가는 골목이 조금 복잡함)
골목길 끝에 자리한 빌라 옆으로 높게 펼쳐진 계단을 오르면 혜문사입구인데 여기서 오른
쪽으로 야트막한 길을 넘으면 바로 백사실의 남쪽 정문인 현통사와 백사폭포(동령폭포)가
모습을 비춘다.


▲  혜문사입구 골목길에서 바라본 서울의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산악 분지(盆地)이다.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산길
저곳을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백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두근두근 백석동천(백사실)의 속살로 들어서다.

▲  현통사 밑에 자리한 백사폭포(白沙瀑布, 동령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 밑에 새하얀 반
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그의 매끄러운 피부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별천지를 꿈꾸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
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수려한 멋은 별로 없다. 그냥 수수하게 생
긴 폭포로 하얀 반석(盤石)과 썩 어우러져 제법 수려한 멋을 풍기면서 백사골에 대한 첫 인상
을 긍정적으로 인도한다.
서울 도심에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로 나름 가치가 높으며, 만약 설악산이나 주왕산(周王
山) 등 1급 폭포가 즐비한 산에 붙어있었다면 그리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
람이나 폭포나 때와 장소를 잘 만나야 된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멋대로 갖다붙인 것인데, 원래 이름은 동령폭포
라고 한다. 하지만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에 자신의 이름마저 계곡에 떠내려보내면서 그의 이름
은 아득히 잊혀지고 말았다.


▲  백사폭포와 하얀 반석

늦가을이라 폭포수가 가늘고 누런 낙엽이 짙게 깔려있지만 비가 많이 오면 폭포수도 제법 패기
를 보인다. 한여름에는 동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 되어주며, 여름 제국(帝國)에
대항하고자 찾아온 피서객들이 돗자리를 피며 한숨 자거나 쉬는 등, 도심 속의 조촐한 꿀피서
지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  낙엽은 물론 가을까지 무심히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아랫 못

겨울 제국의 시련을 견뎌내고자 백사골 나무들이 속절없이 털어낸 낙엽들은 폭포 주변에 수북
히 쌓여있다. 이들 낙엽은 폭포 밑에서 마지막 정모를 즐기며 올해도 변함없이 도래한 겨울을
원망한다. 몇몇 낙엽은 한이 맺혔는지 폭포 중간에 철썩 달라붙어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시 제자리로 가고 싶겠지만 매정한 자연은 그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며 그렇게 발버
둥을 치다가 결국 힘이 다해 떠내려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런 낙엽의 발악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실감한다.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 냇물은 큰 세상을 꿈꾸며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 담(潭)에서
큰 세상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다시는 오지 못할 그리운 고향, 북악산(백악산)의 그
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다리 밑 조그만 폭포를 통해 아랫 못으로 흘러가며 여기
서 다시금 바위를 타고 홍제천으로, 한강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없는 여행을 떠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늦가을의 절정을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열심
히 매뭇새를 다듬는다. 저들의 처절한 아름다움 뒤에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잔잔
한 수면에는 낙엽들이 두둥실 떠 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백사골에 머문 늦가을도 낙엽
을 데리고 계곡을 통해 저 밑으로 쿨하게 흘러간다.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골 밑에 둥지를 튼 현통사는 조그만 현대 사찰로 20세기 후반 큰 승려의 하나로 추앙을 받
는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이다. 백사골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만들만한 구석도 없기 때문
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과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지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덩어리로 몰려있는
데, 대웅전은 서남쪽을, 나머지는 남쪽과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

인적도 거의 없는 적막한 산사에 백사골 산바람이 살며시 들어와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
짝 희롱하고 그 희롱에 놀란 풍경은 그윽한 풍경소리를 풍기며 주변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  늦가을이 깃들여진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자연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대자연이 그린 아름다운 작품, 백사골(백사실계곡) - 별서터 서쪽

간만에 백사골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으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한 내음
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골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1폭의 담채
화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몸살이 날 지경인데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
들 이곳의 풍경을 완전히 표현하는 것은 힘들 것이며,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
는 것은 어쩌면 백사골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탄성만 연거푸 지르며 조용히 백사골에 묻혀간다.
 
숲에 깃든 순결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 땅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롱뇽, 가
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
점 사라지고 이제 이곳이 그들의 몇 안되는 낙원이 된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
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하
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저런 무성한 이
끼를 만나는 것은 보기가 정말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서울 도심의 별천지처럼 청정함을 여
실히 간직하고 있다.


▲  별서터 북쪽 계곡에 드러누운 바위들
오른쪽 하얀 바위에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만들 때
돌을 떼던 흔적이다.


▲  별서터 연못 옆을 지나는 백사골 (별서터 징검다리)

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나 돌다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계곡에 둑
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린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별서 주
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 직전 갈림길(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곳)에서 뒤쪽(서남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눈여겨 살펴보자. 그 언덕 정상에 커다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유심히 살펴보면 글씨가 화석처럼 박혀있는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중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별서터(연못터 주
변) 바로 서남쪽 산자락이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숲에 거의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
람들은 그의 존재감을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들이 강제로 벌거벗는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그나
마 쉽게 눈동자에 들어오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마저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닦고 그 안에 '月巖' 바위글씨를
를 다졌는데, 백사실의 존재를 처음으로 언급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정되
나 확실한 것은 없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필 중의 명필
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늦가을과 겨울을 제외하면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하기가 어렵다. 백
사골의 경치를 즐기러 온 선비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확트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
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굳이 이광여가 아니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
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으며 잔을 걸치고 싶다.


 

♠  북악산(백악산)에 숨겨진 비밀의 옛 별서 유적,
부암동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전경

한양도성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나서면 여기가 정녕 서
울일까? 고개가 갸우뚱거릴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
암동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감싸인 분지로 서
울의 일부라기보다 산간 마을이나 산골에 묻힌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이 바로 지
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지형 탓도 있지만 나라의 예민한 곳이 동
네 주변에 많아 개발의 천박한 칼질을 잠재웠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도성 밖 경승지로 꼽혔던 부암동은 양반과 왕족의 별서(別墅, 별장) 및 피서지
로 인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로 형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완전히 털려 강제로 사라진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부질없는 야망이 깃든 무계정사(武溪精舍),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
(石坡亭), 인조반정(1623년)과 관련이 깊은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의
장소로 닦았던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했던 그들의 메아리를 아련히 전해준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인 백사골(백사실)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의 별장이 있었다 하여 백사실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다고 하며, 백사골
과 별서터를 하나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북악산(백악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북악산의 바위 명소란 뜻인데, 그만큼 하얀 바위와 반석이 많고 경치가 고왔다. 그리고 동천<
洞天, 동학(洞壑)이라고도 함>은 양반과 선비들이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붙어주는 경승지의 명
예로운 칭호이다.

이곳은 백석동천 외에 백사실(계곡), 백사골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으며, 백석정(亭), 백석실(
室)이란 옛 이름도 있다. (백석정은 19세기에 주로 쓰였음) 옛 이름을 제외하고 어느 이름을
쓰던 그건 각자의 취향이나 백사실, 백사실계곡, 백석동천으로 많이 불리며 백사골은 백사실계
곡을 줄여서 표현한 이름이다. (나는 백사골이라 많이 부름)

▲  연못 한쪽에 자리한 정자터

▲  사랑채터

백석동천 별서는 1830년경에 지어진(또는 중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600평 규모의 별서이다. 누
가 지었는지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으나 백석동천과 관련된 최초 기록인 월암 이광여(1720~
1783)의 이참봉집(李參奉集)에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이 조
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
이 있어 현재의 별서 이전(17~18세기)부터 조그만 집이 이미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2012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이곳을 매입하여 별장으로 삼았음이 밝혀지면서
백사실의 비밀이 다소 벗겨졌다. 추사의 문집인 '완당전집(阮堂全集) 권9'에 '선인이 살던 백
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나의 북서(北墅, 북쪽 별서)에 백석정 옛터가 있다'
등의 내용이 있
고 그곳과 관련된 시가 여럿 발견되어 추사가 백석정 자리를 구입하여 크고 아름답게 다시 지
었음이 밝혀졌다. 하여 지금까지 전해오던 1830년 창건설(또는 중건설)의 주인공이 바로 추사
로 여겨진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안채는 4
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
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 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전쟁 때 정자가 파괴되고 그 휴유증으로 연못
마저 그 기능이 상실되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장의 흔적, 바
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몰아넣던 백석동천은 2006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 사람들만 찾
던 그들만의 숨겨진 명소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조용히 잠들어 있
던 그는 2005년 문화재청으로부터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
으로 아름답게 평가를 받으면서 무명 수준에서 바로
적 462호
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변변한 안내문과 이정표조차도 없었으며,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
정표가 설치되었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싹 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
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에서 바라본 연못

▲  사랑채와 안채터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꿀단지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
거니와 여름의 녹음(綠陰), 늦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모두 아름다
운 경승지이다. 숲이 매우 삼삼하여 강렬한 햇살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아 백사골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극락이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터를 둘러보며 옛 사람들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으
로 살았을까? 그려보면서 그들의 생활과 마음을 조금이나마 체험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2006년 이후 이곳의 존재감이 널리 퍼져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이 늘어나면서 고적했던
분위기는 조금 떨어진 것 같다. (평일은 그래도 한적함) 게다가 정신줄을 놓은 사람까지 불순
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돌에 낙서를 하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계곡을 뒤집거나, 수목을 괴
롭히는 행위가 늘면서 이에 대한 대책이 절실해 보인다. 아직은 괜찮다고 해도 지키는 사람도
제대로 없는 첩첩한 산골이라 방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2013년 종로구청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뇌에 주름 잡힌 소리를 일삼아 크게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 개소리는 쏙 들어갔지만 어설프게 복원하려 들지 말고 제발 지금의
모습 그대로 두길 바란다. 비록 폐허의 상태여도 현재 모습이 더 운치가 진하며 옛터 위에 상
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가 있다. 끝으로 개인적인 욕심이지만 이런 곳은 대중적인 명소로
너무 노출되는 것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남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미 그러기에는 그의 존재감이 한라산 꼭대기에 붙어있을 정도로 커버렸다.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찾아가기 (2017년 7월 기준)
* 백사실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
  장 쉽고 가까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이며, 하림각은 경사가 각박하고, 창의문은 거리가 길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AW컨벤션센터) 길 건너편에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다. 그 길(백석동길
   )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면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
   내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자하문터널 방면)으로 가면 백석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 → 신영교를 건너 백석동천 이정표를 따라 '세검정로
   6다길'로 쭉 올라감 → 혜문사입구 → 현통사 → 백사골(백석동천)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4호
   선 길음역(6,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3번 시내버스 이용 → 세검정초교 하차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서쪽(부암동 방향)으로 조금 가면 창의문앞 교차로이
   다. 여기서 오른쪽 길(북악산길 방향)로 꺾어서 백석동길 골목(부암동 산복길)으로 진입해
   산모퉁이와 지하우스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직진하여 계속 들어가면<왼쪽 길
   로 가도 됨> 그 길의 끝에 뒷골마을(능금마을)이 있다.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
   면 바로 백석동천이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
  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 산25일대


 

♠  백석동천 사랑채터

▲  사랑채터 언덕 밑 (백석동천 안내문)

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중을
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이 오롯하게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클로 계단 돌이 좀 헝클어져 있으나 경사가 완만하여 계단의 역할은 그리 녹슬지 않
았다. 반면 연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놓았는데 높이
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를 두었는데, 아쉽게도 생전의 사진
도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영구히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건물터와 주춧돌은 잘 남아있
으며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난 흔적까지 더해 산듯하게 정비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선 별서 주
인이 연못을 바라보며 독서를 하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이 오면 여기서 곡차와 산해
진미를 대접하거나 시 1수 주고 받았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름) 사랑
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이 남아있다.


▲  선명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

▲  석축 위에 세워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바로 옆에서 바라본 사랑채터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 때 발견된 것으로 연못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낙엽과
잡석만 가득 널려 황폐의 극치를 보여준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이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어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
리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고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완전히 생매장을 당했다. 그
러다가 2010년 이곳이 서울시와 문화재청의 조사 대상이 되면서 옥의 티 같은 배드민턴장을 밀
어버렸으며,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습했다. 이후 2011년 3월 문
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묻었다.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담의 흔적이 여럿 남아있으며, 비록 기와를 지닌 사랑채와
안채는 세월이란 용광로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
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었을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헝클어진 남쪽 돌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를 이어주는 서쪽 돌계단


▲  사랑채 뒷쪽 석축과 돌담

사랑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
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된다. 석축 윗쪽에는 별서의 경계를 가르던 돌담이 길게
이어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상당수 허물어지고 지금은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북쪽까
지 돌담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사랑채 뒷쪽 돌담장의 흔적

▲  사랑채와 안채터에서 끄집어낸 기와조각과
그릇 파편


 

♠  물 대신 낙엽과 잡초로 가득한 연못과 정자터

▲  사랑채터에서 바라본 연못 ▼

사랑채터에서 바라보이는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떠있는 물 대신 나무들이 미련없이
떨군 낙엽들이 가득 연못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막 보금자리가 되었다. 세월의 자비 없는 흐름
은 연못의 구성원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옛날에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보름달처럼 둥그런 연못을 채웠으며, 지나가던 햇님과 달님이
그 연못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무들도 연못을 거울 삼아 매무새를 다듬었다. 허나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던 이곳까지 총탄을 휘날려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기능이 상실되어 껍데기만 남았다.


▲  연못에 들어가서 바라본 사랑채터와 동쪽 돌계단

비록 살아있는 연못은 아니지만 비가 많이 오면 물이 가득히 고여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
찾기도 한다. 연못이 넓기 때문에 이때만큼은 조그만 조각배를 하나 띄워놓고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였다면 단단한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연못, 허나 저 연못에도 자연의 생명력
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나고 있다. 게다가 빗물이 모이면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데로
연못티를 풍긴다. 잡초로 덥수룩한 연못의 여름 모습도 나름대로 초록의 아름다움을 띄고 있으
며 늦가을에는 낙엽이 한가득 공간을 채우면서 누런 연못이 된다.

연못의 둘레는 약 100m 정도로 그 주변은 나무가 무성하여 짙은 그늘이 연못을 덮어주고 있으
며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울창한 삼림은 이곳을 찾
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은 그
다지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허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마음으로 그 허전함을 달래주고 싶구나. 그
렇다고 정자를 복원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시를 읊거나 벗들과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
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아는 사람이면 기생들도 불러 정자 안에서 얼씨구~ 춤과 노래, 시를
즐겼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몸살이 날 정도로 부러울 뿐이다. 이래서 무슨 수를 쓰든
권력층이 되야 되고 부자가 되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과 상상으로만 끝나버린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20m에 이르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이는 대략
150~200년 정도로 여겨진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또는 매입 기념으로 심었을지도 모
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원
을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쯤이나 올련지...?


▲  백석동천 별서터 전경

▲  연못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늦가을)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

백석동천 별서터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허나
통제의 줄이 느슨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히 여름에는 피서객들로 정신
이 없어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우회하여 백사골 상류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는데, 2012년에 주변 산길
을 정비하고 산불방제 장비를 갖춘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을 심어 소소한 볼거리를 선사하
고 있다. 허나 솟대 돌탑은 백사골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이다.
돌탑을 지나면 소나무숲과 처절한 아름다움을 보이며 늦가을에 잠긴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
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부암동 주택가
방면)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별서터 입구에 세워진 오리 솟대 돌탑
예로부터 오리 등의 새는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솟대 꼭대기에 오리 모양을 달아두어
하늘과의 연락을 꾀했다.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층 돕고 있는 호젓한 은행나무숲길

▲  아직도 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 산길로 가면 '白石洞天'이란 문신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이란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관이 아름다운 경승지에 붙여진 이름으로 아무 산천에나
주어지는 이름이 아니다. <백석동천의 유래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음>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썼는지 북악산 귀신도 모른다. 아
마도 월암 바위글씨와 비슷한 시기가 아닐 듯 싶은데 글씨가 정말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
다. 옛 사람들은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저렇게 낙서를 남기는 습성이 있었는데, 백사골 역시
그들의 낙서가 1개도 아닌 2개나 깃들여져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이다.


▲  백사골의 그림 같은 숲길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외나무다리 방향)

 새하얀 반석들이 가득 펼쳐진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동쪽)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뒷골마을(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길을 조금 가면 잠시 떨어졌던 백사
골 냇물이 나타난다. 하얀 피부의 너른 반석과 푸른 이끼 옷을 입은 바위까지 줄줄이 이어지면
서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이나 금강산 등 쟁쟁한 큰 산의 계곡만은 못해도 서울
도심에 저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을 탄압(?)하는 현장이 되고 시민들이 소풍과 나들이로
이곳에 들어와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
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백사골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는 외나무다리

백사골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나타나 깊은 산골의 고적
하고도 정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2개의 목재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도
로 좁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하지만 다리 길이도 짧고 다
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
울 필요는 없다.

사람도 많고, 차량도 많고, 키다리 빌딩도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기만 한 서울 도심 속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백사골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
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만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 방면)
모든 것을 내버린 나무들이 하늘이 두려운지 아니면 벌써 노년에 들어선 건지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허리를 90도 가까이 숙였다.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 직전)

외나무다리를 지나면서 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좁아진다. 계곡 오른쪽에
는 생뚱맞게도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을 지
나면 집들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 종로구가 분명
한데 풍경은 완전히 강원도 두멧골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에 벌인 부암동 백사실(백석동천)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 이후 내용은
분량상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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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7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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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서촌 제일의 경승지 ~~ 인왕산 수성동계곡 (인왕산길, 기린교)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계곡이자 옛 경승지
~ 인왕산 수성동계곡 '

▲  인왕산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

▲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

▲  기린교

 


 

여름 제국이 무더위로 천하 만물을 핍박하던 7월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들과 인왕산 수성
동계곡을 찾았다.

오전 11시,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그들을 만나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북악산 백
사실계곡<백석동천(白石洞天), 백사골 ☞ 관련글 보러가기>을 제일 먼저 찾았다. 속세에
찌든 꼬질꼬질한 두 발을 계곡에 담구며 막걸리 1잔 걸치다가 도심 속의 두멧골, 능금마
을(뒷골마을)을 거쳐 부암동(付岩洞) 산복도로를 따라 창의문(彰義門, 자하문)으로 내려
갔다.

창의문에서 윤동주(尹東柱)시인의 언덕(☞ 관련글 보러가기)에 자리한 서시정(序詩亭)에
서 잠시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다가 인왕산(仁王山) 동쪽 허리를 가르는 인왕산길을 따
라 남쪽으로 넘어갔다.
인왕산길은 사직공원에서 창의문까지 이어지는 산악도로로 북악산길과 서로 이어져 있다.
4발 수레를 위한 2차선 도로와 뚜벅이를 위한 도보길이 공존하고 있어 서로의 눈치 없이
거닐기 좋으며 주변 풍경도 아름다워 지루할 틈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런 인왕산길에
단단히 홀린 듯 정신없이 따라가니 어느덧 석굴암(石窟庵) 입구에 이른다.
여기서 석굴암 약수를 마시고자 잠시 인왕산의 품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무더운 날씨로
인해 반대 여론이 거세 인연을 짓지 못하고 동쪽으로 난 조그만 산길을 따라 수성동계곡
으로 내려갔다.
이 산길은 석굴암 부근에서 발원한 계곡과 나란히 속세로 내려가는데, 그 계곡은 수성동
계곡의 상류가 된다.


 

♠  수성동계곡 상류

▲  숲속에 묻힌 수성동계곡 상류

인왕산에서 수성동계곡 공원으로 이어지는 계곡 상류는 복원된 계곡 중심부와 달리 거의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연산 바위와 온갖 돌들이 좁은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고, 그
사이를 인왕산이 베푼 계곡물이 숨을 죽이며 흘러간다. 계곡 옆에는 시멘트를 발라놓은 산길이
이어져 있는데, 그냥 흙길이었으면 매우 좋았을 것을 시멘트길이라 촉감이 그리 착하지가 않다.
계곡 일대는 숲이 무성하여 강렬한 여름 제국의 햇살도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피해가며 계곡
상류 산길을 2~3분 정도 내려가면 바로 수성동계곡 공원이다.


▲  계곡 산길과 조그만 나무 다리 (석굴암 입구 방향)

▲  계곡 상류에서 만난 조그만 폭포

이 계곡은 청계천의 주요 발원지로 수질이 양호하여 도룡뇽과 가재, 개구리, 버들치 등이 조용
히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좁은 계곡이지만 그들에게는 이만한 보금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계곡에서 괜히 물놀이를 하거나 그들을 탄압하는 행위는 하지 말자. 그들이 사
라지면 그 다음 차례는 신(神)과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나 축내는 우리 인간이 될 지
도 모른다.


▲  수성동계곡 상류의 아랫부분 (수성동계곡 공원의 제일 서쪽)

▲  수성동계곡 공원 가장 윗쪽에 닦여진 황토색 산책로
계곡 일대를 두 눈으로 살피며 거닐 수 있다. 계곡 복원에 걸맞게 흙길이면 좋았을 것을
길을 현대식으로 밀어버린 점이 상당히 아쉽다.

▲  수성동계곡 공원 윗쪽 계곡

▲  수성동계곡의 또다른 상류
숲속에 숨겨진 가느다란 폭포를 타고 수성동계곡으로 살짝 숟가락을 내민다.
폭포 주변에는 수풀을 걸친 벼랑과 흙과 돌이 섞인 자갈밭이
조촐하게 펼쳐져 있어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  협곡을 그리며 내려오는 수성동의 또다른 상류
(인왕천약수터에서 내려온 계곡)


수성동의 상류는 대략 3개 정도로 석굴암에서 내려온 계곡과 그 남쪽에서 내려오는 계곡, 인왕
천약수터에서 내려오는 계곡이 서로 상류를 자처하며 수성동으로 내려온다. 수성동은 이들에게
서 인왕산의 맑은 물을 공급받고 서울 도심으로 청계천으로 흘려보낸다.

인왕산에서 제법 이름이 있는 인왕천약수터도 손을 내밀며 수성동에 아낌없이 물을 보태고 있
는데 이 물줄기는 거의 90도 각도가 진 암벽 사이의 좁은 공간을 타고 내려와 그 풍경이 나름
절경을 이루며, 조그만 폭포 앞에는 얕은 못과 모래밭이 있어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물놀
이를 하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
모래 옆과 다리 주변에 돌로 쌓은 인공의 흔적이 조금 끼여있어 약간의 어색함을 주지만 그 외
에는 예전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수성동 상류의 원초적 모습을 살피는데 도움을 준다.


▲  수성동계곡 서남쪽 산책로


 

♠  옛 한양도성의 오랜 경승지,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었으나 2012년
복원되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도심 속에 흔치 않은 계곡 ~~~
인왕산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 서울 지방기념물 31호

인왕산 동쪽 자락이자 서촌(西村, 경복궁 서쪽 지역) 서쪽에 자리한 수성동계곡은 서울 도심에
이름난 경승지로 조선 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와 한경지략(韓京識略) 등에
서울의 오랜 명승지로 절찬리에 소개된 곳이다. 이곳 계곡을 예로부터 수성동(水聲洞)이라 하
였는데, 이는 계곡 밑에 걸린 기린교란 돌다리 밑에 물소리가 청아하고 좋기로 명성이 자자하
여 물소리가 좋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거대한 돌산으로 제대로 된 계곡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인
왕산이지만 그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계곡이 많음에 놀라게 된다. 수성동을 비롯해 청풍
계(淸風溪), 청계동천(淸溪洞天), 송석원(松石園), 백운동(白雲洞) 등 이름난 계곡이 많이 있
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개발의 칼질에 죄다 사라지고 수성동만 옥인아파트의 압박 속에 간신
히 숨쉬고 있었다. (백운동과 청계동천은 일부만 살아남음) 그외에 환희사계곡(큰절골)과 몇몇
약수터 주변에 조그만 계곡이 있으나 볼품은 별로 없다.

수성동은 도시와 먼 첩첩한 산주름 속이 아닌 도성(都城) 속에 자리해 있어 접근성이 매우 착
했다. 게다가 경복궁(景福宮)과 귀족들이 주로 살던 북촌(北村)과 서촌과도 바로 지척이다. 그
래서 왕족과 사대부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계곡의 풍경을 즐겼는데, 이곳에 단단히 반한 이들은
아예 집이나 별장 등을 지어 머물기도 했다. 이곳에 처음으로 집을 지은 이는 세종의 3번째 아
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으로 계곡 밑 기린교 부근에 비해당(匪懈堂)을 지어 머물렀다.
 
영조(英祖) 시절에는 겸재 정선이 인왕산을 모델로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남기
면서 수성동을 비롯한 장동8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수성동 그림은 계곡 복원에 아주 큰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그 그림에는 기린교를 건너는 선비 3명과 시중을 드는 동자(童子) 1명이 계곡
상류로 걸어가는 모습이 담겨져 있고 가벼운 붓놀림으로 이끼가 낀 바위와 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게다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도 비오는 날에 이곳을 찾아 '수성동 빗속에서 폭포를
구경하다(水聲洞 雨中觀瀑)'란 시를 지어 수성동을 찬양했다.
도시와 가까운 탓에 중인과 평민들도 많이 발걸음을 했는데, 인근 송석원과 더불어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평민/서얼들이 주도하는 문학활동)의 성지(聖
地)로도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  겸재 정선이 그린 수성동 그림 (기린교 돌다리가 그려져 있음)

이렇게 인왕산을 든든한 후광으로 두르며 서울 장안의 경승지로 초절정 인기를 누렸던 수성동
은 1960년대 이후 서울 도심에 개발의 칼질이 정신없이 그어지면서 아작나기 시작했다.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 9동이 건방지게 수성동계곡을 깔고 앉았던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아름답고 착
했던 수성동의 경관은 99% 망가졌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인근 청풍계나 옥류동처럼 계곡이 거의 증발되는 꼴은 면했지만 아파트로
인해 계곡 폭도 줄어들고 아파트 사이를 마치 버려진 하천처럼 흘러가면서 완전 천덕꾸러기 신
세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아파트 9동 앞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어두컴컴한 지하를 거쳐 역시
나 생매장된 청계천으로 서글프게 흘러가야 했다. 그렇게 도시 개발과 생활 편의를 내세운 인
간의 욕심 속에 서울 도심에 많은 경승지는 꽃잎처럼 지고 말았다.

그 이후 수성동의 이름 3자는 속인(俗人)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시들어가고 동네 사람들만 세
월의 저편으로 잊혀져 가던 계곡의 이름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서울 전문을 자처하는 본인
역시 수성동의 존재를 안 것은 2011년, 그 이전에는 인왕산에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몰랐고 그
런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존재감이 밑바닥을 기었던 것이다.
 
옥인시범아파트에 강제로 깔린 채, 40년 가까이 수난의 세월을 보냈던 수성동계곡. 개발의 칼
질에 빼앗긴 계곡에도 과연 봄이 올 것인가? 이러다가 수성동 이름 3자가 영구히 지워지는 것
은 아닐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계곡을 해방시킬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수성
동에게는 절망의 시절이었다.

▲  기린교

▲  사모정 북쪽 산책로

허나 자연과 인간의 대결에서 거의 자연이 이기듯, 수성동에게도 좋은 소식이 날라왔다. 옥인
아파트가 2008년 재난안전위험시설 C급으로 지정되면서 철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수성동의
가치를 뒤늦게 깨달은 서울시는 이번 기회에 아파트를 싹 밀어버리고 계곡을 복원하기로 의견
을 모으고 우선 2010년 10월 21일 기린교를 비롯한 수성동계곡 일대를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삼
아 늦게나마 문화유산으로 대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후 인왕산을 가리며 계곡의 목을 조르던 옥인아파트는 2011년에 모두 철거되었으며, 아파트
주변을 통제하고 1년의 복원공사를 벌여 2012년 7월 마무리가 되었다.

계곡 복원을 위하여 전문가와 사회단체, 문화재청에 자문을 구했고 정선의 수성동 그림을 적극
참조했다. 또한 옛 경관을 어느 정도 재현하고자 소나무를 중심으로 상수리나무, 참나무, 산철
쭉 등 우리 고유의 나무 18,477그루를 심었으며, (그중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제일 많음) 돌단
풍과 바위취 등 다양한 화초를 심어 주변과의 조화를 꾀했다. 그리고 계곡을 크게 넓혀서 계곡
양쪽에 전통 방식으로 돌을 쌓아 암석 지형을 최대한 회복하고자 했으며, 계곡 중간에 전통식
정자를 세워 옛 사람들의 풍류를 조금이나마 느끼도록 했다.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곳으로 여겨지는 계곡 아랫쪽에 관람공간을 닦아 정선의 눈으로 계
곡을 바라볼 수 있게끔 배려하였고, 계곡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산책로를 닦아 인왕산과 어
우러진 시민공원의 성격도 겸하게 했다.

수성동계곡 공원에는 복원된 계곡을 비롯하여 이곳의 터줏대감이자 유일한 오래된 존재인 기린
교가 있으며, 옥인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공원 북쪽에 아파트의 잔재를 일부 남겨두어 수성
동을 거쳐간 개발 지상주의의 그릇됨을 일깨우게 했다. 상류 부분과 사모정 주변은 계곡 출입
이 그런데로 가능하나 계곡 하류와 기린교 주변은 통제하고 있으며, 계곡을 복원했다고는 하지
만 완전한 옛날 모습은 아니다. 게다가 여전히 비슷한 자리(옛 옥인아파트 9동 자리로 지금은
관람 공간으로 바뀜)에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해 청계천으로 흘러간다.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전 구간을 모두 끄집어내 복원하면 참 좋겠지만 이미 시가지가 꽉차게 들
어앉아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계곡이 생매장되는 부분은 계곡이 상당히 밑으로 내려간 상태
이고, 주변 바위들도 날카로운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어 사고의 위험이 있다. 기린교 같은 경우
는 계곡이 3m 밑에 흐르고 있으므로 조금 아찔하다.

도시 개발의 칼질에 희생된 수성동은 인간 중심의 개발의 난도질이 무조건 능사가 아님을 보여
준다. 안그래도 사람도 허벌나게 많고, 빌딩도 많고, 차도 많고, 공기도 탁한 서울 도심에 마
음 편히 의지할 수 있는 공간이 1개 더 생겼으니 그 가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비슷하다 할 것
이다.
비록 옛 모습 그대로 100% 복원된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옛 모습을 되살리고자 노력했고 복원
공사를 벌이는 중에도 여러 의견을 수렴해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했다. 그래서 인왕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아 계곡을 재현했으니 어설프게 재현되어 전기와 세금만 잔뜩 축내는 청계천
과는 차원이 다른 살아있는 계곡이다.

※ 인왕산 수성동계곡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
  서 종로구마을버스 09번을 타고 수성동계곡 종점 하차.
*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에서 자하문로를 거치거나 1번 출구에서 사직공원 못미처에 나오는
  필운대로를 거쳐 수성동계곡까지 가볍게 걸어가도 된다. (17~20분 소요)
* 수성동계곡 관람공간 동쪽에 주차공간이 있으나 충분치는 않다.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79-1, 185-3외


 

♠  수성동계곡 둘러보기

▲  수성동계곡 사모정 주변

몇년 전만 해도 밋밋한 성냥갑 아파트 사이로 그들의 눈치를 보며 눈물처럼 흘러야했던 수성동
계곡은 이제 누구의 눈치도 없이 가슴을 피며 당차게 흘러간다. 소나기가 지나간 이후라 계곡
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어린이와 여중생으로 보이는 애들이 계곡 주변을 서성이며 발을 담
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  수성동의 풍경을 한껏 수식해주는 구수한 양념 - 사모정

수성동계곡 한복판에는 달랑 1칸에 불과한 조그만 정자, 사모정이 맵시를 드러내고 있다. 사모
정이란 네모난 정자를 뜻하는 것으로 새색시처럼 단아한 모습으로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데, 그
는 옛날부터 이곳을 스쳐갔던 정자는 아니며 계곡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달아놓은 것이다.
(정선이 그린 그림에도, 수성동 관련 기록에도 정자의 존재는 나오지 않음)
허나 계곡과 나무만 있는 계곡에 전통 양식의 정자(亭子)를 하나 두니 수성동의 미소와 풍경이
한층 더 살아나는 것 같다.

정자 안에는 한 무리의 아줌마들이 진을 치고 놀고 있었다. 계곡 바람과 인왕산 바람이 앞다투
어 선선한 바람을 선사하고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솔내음을 불어주는 명당 자리라 저곳에
들어가 낮잠 한숨 청하면 정말 꿀맛일 것 같다.


▲  사모정 동쪽 계곡
계곡과 돌을 대충 배치한 듯 조금은 어색한 모습이다.

▲  사모정과 사모정 북쪽 산책로
산책로 너머로 인왕산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  공원 북쪽 산책로
저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옛 옥인아파트의 초췌한 흔적이 나온다.

▲  공원 북쪽 산책로에서 만난 바위글씨
동그라미 안에 중(中) 또는 신(申)으로 보이는 글씨가 문신처럼 박혀있다.
조금은 오래된 티가 풍기긴 하지만 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다.
(수성동에 바위글씨가 있다는 정보는 듣지 못했음)

▲  공원 북쪽에 자리한 옛 옥인아파트의 잔재 ▼

수성동계곡 북동쪽에는 옛 옥인아파트의 흔적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이 흔적은 아파트 7동의 1
층으로 2008년 철거가 결정되자 아파트 주민들의 요청으로 계곡과 조금 떨어진 7동의 아랫도리
일부만 남겨 이곳의 기념물로 삼았다.

한때 계곡을 깔고 앉아 감히 인왕산을 가리던 옥인아파트의 최후로 이곳을 요란법석 거쳐간 엄
연한 역사의 흔적이다. 아파트를 말끔히 밀어버리는 것보다는 이렇게 일부라도 남겨 개발의 난
도질의 희생된 수성동의 서글픈 과거를 보여주고, 무분별한 개발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교육의 장으로 삼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또한 이곳 아파트에 살았던 사람들의 향수(鄕愁
)와 추억도 조금은 배려하였다.
흔적을 모두 없앤다고 이곳에 40년 가까이 둥지를 틀었던 옥인아파트의 존재와 수성동의 그늘
이 완전 지워지는 것은 아니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20세기 후반 서울 지역 아파트의 양
식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인정되어 등록문화재나 지방문화재 등의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
게 될 수도 있다.

계곡에 둥지를 틀었던 인간의 흉한 창조물은 그 자리를 계곡과 자연에게 다시 내주었고 이제는
그들 눈치를 살살 보며 공원 한쪽 구석에 찌그러진 신세가 되었다. 인간이 아무리 용을 쓰고
만들어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역시나 일개 모래성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파트의
남겨진 흔적은 마치 예비군훈련장의 시가전 훈련장이나 전쟁의 폭격으로 주저앉은 건물처럼 보
인다. 그렇다 대자연의 보복 폭격의 옥인아파트는 저렇게 주저앉은 것이다.


▲  주름진 바위들로 가득한 수성동계곡 (사모정과 기린교 사이)

▲  기린교 서쪽에서 바라본 수성동계곡과 인왕산

▲  한굽이 쉬어가며 조그만 폭포를 빚은 수성동계곡


 

♠  수성동계곡의 오랜 상징 ~ 기린교(麒麟橋)

▲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돌다리 - 기린교

넉넉한 폭으로 흐르던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이전에서 급격히 좁아지고 하얀 피부의 포근한 반
석들도 무시무시한 낭떠러지를 계곡 쪽에 빚으면서 제법 날카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 낭떠러지
바위 사이에 우리네 인생처럼이나 짧은 돌다리가 고색의 때를 간직하며 놓여져 있는데, 그 다
리가 바로 수성동의 오랜 명물인 기린교이다.

기린교는 달랑 길쭉한 통돌 2개로만 이루어진 아주 단촐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다리 남쪽에 다
리를 보조하는 커다란 돌 여럿을 둔 것이 전부이다. 다리 폭은 1m 남짓, 길이는 3m로 언제 조
성되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겸재 정선의 수성동 그림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17세기에 놓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계곡을 찾은 귀족들의 통행 편의를 위해 가설된 듯
싶은데 벼랑으로 이루어진 이 부분이 계곡 가운데 가장 위험하기 때문이다.


▲  높은 벼랑 위에 걸쳐진 기린교

서울 도심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는 누가 뭐
래도 광통교(廣通橋, 광교)이다. 그외에 수표
교(水標橋)와 창경궁(昌慶宮) 옥천교(玉川橋)
도 2위, 3위에 들어간다.
(중랑천 살곶이다리는 도심이 아니므로 제외)
수표교는 청계천 생매장 때 제자리를 떠나 장
충단공원에 둥지를 틀었고, 광통교는 비록 자
리는 지켰지만 생매장의 치욕을 겪다가 청계천
엉터리 복원 때 약간 서쪽으로 옮겨졌다.
그에 반해 기린교는 그들보다 한참 후배이지만
제자리를 지키며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 게다가 통돌로 만든 다리 가
운데 가장 긴 편이다.

인왕산이 빚은 제일 가는 경승지인 수성동계곡
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된 것도 어찌보
면 기린교 덕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계곡
이 아무리 잘났어도 딱히 오래된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계곡은 복원되
었을 망정, 지방문화재까지 지정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  옆에서 바라본 기린교

▲  바로 앞에서 본 기린교
다리 너머로 수성동계곡의 생매장 현장이 보인다.

▲  멋드러진 반석이 잔뜩 널린 기린교 주변
대자연이 칼로 싹둑 손질을 했는지 바위들이 90도 절벽을 이루며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낸다. 저 밑으로 떨어지면 정말 나오기도 힘들다.

▲  기린교 동쪽에 마련된 수성동계곡 관람공간 (계곡 동쪽 광장)

수성동계곡 동쪽에는 잘다져진 평평한 광장이 있다. 이곳은 정선이 수성동 그림을 그린 위치로
여겨지는 곳에 넓게 터를 다진 것으로 그 당시 정선의 눈높이가 되어 수성동계곡과 인왕산의
모습을 바라보도록 지어졌다.
이곳에서는 계곡 상류를 제외한 수성동계곡 일대와 인왕산이 흔쾌히 바라보이는데 보통은 높은
곳에 전경(全景)을 바라보는 자리를 두지만 이곳은 반대로 계곡 밑에 그 자리를 둔 것이 특징
이다.

인왕산이 빚은 수성동계곡은 기린교 밑을 지나 낭떠러지 밑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관람공간 밑
에서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하수구를 통해 어두컴컴한 지하로 생매장된다. 계곡을 복원했다고
는 하지만 옛 옥인아파트 주변만 재현된 것이며, 이후 서촌을 가로질러 세종로 서쪽을 거쳐 청
계천으로 흘러간다. 이 구간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복잡한 시가지로 땅을 열기도 힘들다. 이곳
도 마저 끄집어낼려면 수많은 건물과 도로를 싹 밀어야 되나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하긴 수성동계곡만 그렇겠는가? 삼청골(삼청천)이나 청풍계, 창덕궁 빨래터에서 나오는 냇물도
그렇고 기타 북악산과 인왕산, 남산에서 발원한 수많은 물줄기도 근대 개발의 칼질에 희생되어
대부분 생매장을 당했다.


▲  유연하게 구부러진 수성동계곡 동북쪽 산책로

인왕산길에서 수성동 상류로 내려와 계곡 구석구석을 천천히 둘러보니 어느덧 1시간이 훌쩍 흘
러가버렸다. 보통 20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장소를 뭐 그리 세세히 보겠다고 두 다리를 바쁘게
부렸는지 3배 이상의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그래도 혹 빠진 것은 없는지 모르겠다.

2012년 복원 이후, 시작부터 싹수를 보이며 도심의 인기 명소들을 긴장시켰다. 서촌의 인기와
인왕산의 인기, 그리고 서울 도심에 흔치 않은 계곡이란 타이틀로 나날이 인기가 높아져 이제
는 도심의 주요 경승지이자 서촌 나들이 때 필수로 들려야 직성이 풀리는 서촌 지역의 꿀단지
로 완전히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수성동계곡을 겯드린 도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서울은 내가 서
식하고 있는 곳이라 지방과 달리 달랑 1번이 아니라 계속 찾는 경우가 빈번하다. 일부를 빼고
는 지겹도록 찾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수성동계곡의 가을과 봄 풍경을 담아 소소하게 글로 남
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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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계곡 (백석동천)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별천지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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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무더운 여름 제국(帝國)이 한참 위엄을 부리던 7월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와 북악산 백석동

천(백사실, 백사골)을 찾았다. (본글에서 '백사실=백사골'임)
이곳은 서울 장안에서 내가 가장 흠모하는 곳으로 2005년 5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
며 처음 발을 들인 이래 매년 6~8회 이상 발걸음을 한다. 그렇게 많이 찾았으면 진짜 질릴
만도 할텐데 그에게 단단히 퐁당퐁당 빠진 상태라 어제 갔어도 오늘 또 가고 싶은 곳이다.

이번 백사실 나들이는 공교롭게도 나들이의 1등 방해꾼, 비와 함께 하게 되었다.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좀 일찍 찾았는데, 이미 그 시간대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는 것
이다. 다행히 우산은 가져왔으나 비가 따라붙으니 정말 귀찮기 그지 없다. 허나 다행히 비
는 약한 수준이었고 비 덕분에 한여름에도 사람이 거의 없어 오랜만에 고적한 백사골의 풍
경을 누리게 되었다. 이곳은 무려 50번 이상 발걸음을 하였지만 비가 오는 날에 찾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  혜문사입구 골목길에서 바라본 서울의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도심 속의 전원마을 부암동은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산악 분지이다.


♠  서울 도심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 작지만 멋드러진 하얀 반석이
인상적인 백사폭포(白沙瀑布, 동령폭포)

▲  피서의 성지 자격이 충분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려진 현통사(玄通寺) 대문 밑에 새하얀 반
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끄러운 바위 피부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수줍은 모습으로 별천지를 꿈꾸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
시 들었다 놓는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백사폭포는 높이 3m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수려한 멋은 거의 없다. 그저 수수하게 생긴 조
촐한 폭포로 하얀 피부의 반석(盤石)과 잘 어우러져 수려한 멋을 자아내며 백사골에 대한 첫 인
상을 긍정적으로 인도하는 동시에 그곳에 대한 기대감마저 크게 불러일으키게 한다.
서울 도심에서 거의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로 나름 가치가 높은데, 만약 설악산이나 주왕산 등
폭포가 많은 명산(名山)에 있었다면 그리 주목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폭
포나 때와 자리를 잘 잡아야 된다.
백사폭포란 이름은 내가 백사골의 이름을 따서 임의로 지은 것인데, 원래 이름은 동령폭포라고
한다. 허나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폭포는 그만 자신의 이름 마저 떠내려보내고 말았다.

폭포를 품은 너른 바위는 돗자리를 피고 한숨 청하고 싶은 잘생긴 반석으로 청정한 계곡물이 끊
임없이 바위를 타고 내려와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근래 비가 많이 와서 비의 희롱에 단단히
노했는지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뒤흔들 정도로 패기가 대단하다.


▲  옆에서 본 백사폭포 - 거의 45도 각도를 이루는 바위 미끄럼틀을 타고
백사골 냇물은 아래로 흘러간다.

 
▲  백사골의 냇물과 낙엽을 속절없이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아랫 못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 냇물은 큰 세상을 꿈꾸며 졸졸졸~♪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못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다리 밑에 있는 못으로 내려가 심호흡을 한 다음 정든
고향을 등지며 큰 세상을 향한 장대한 여정을 떠난다. 한번 폭포를 내려왔으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기에 오로지 앞만 보고 흘러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아랫폭포를 타고 홍제천으로 내려가
한강(漢江)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이 없는 여행을 떠난다.

늦가을이 되면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 나무에서 버림 받은 낙엽들이 계곡으로 떨어져 폭포를 타
고 밑으로 내려가거나 그 주변에서 저항하며 고향으로의 컴백을 꿈꾼다. 허나 대자연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아래로 떠내려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
런 낙엽의 발악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실감케 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여름의 절정을 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열심히 매
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저들의 푸른 아름다움 뒤에는 늦가을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있고,
그 뒤에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  급하게 흘러가는 백사골 하류 (백사아랫폭포)

폭포 아랫 못 너머에 펼쳐진 백사골 하류 폭포는 거의 30도 경사가 진 바위를 타고 아주 숨가쁘
게 내려간다.
바위를 타고 경사를 이루며 흐르니 엄연히 폭포는 폭포다. 아직은 이름이 없어서 백사폭포(동령
폭포) 밑에 있다는 뜻에서 백사아랫폭포란 쉬운 이름을 살짝 지어주었다. 폭포의 길이는 100m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려 수량이 많으면 그 흐르는 소리가 멀리서까지 귀를 때린다.

폭포가 흐르는 바위는 넓게 반석을 이루며 제법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데, 폭포 주변을 가득 메
운 주택만 없었다면 정말 설악산이나 금강산(金剛山) 못지 않은 풍경을 자랑했을 것이다.


▲  백사골의 생매장 현장 ~ 자하주택 북쪽(세검정로6길)

서울 제일의 경승지인 백사골은 자하주택 북쪽에서 어두컴컴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한다. 지하에
묻힌 백사골은 약 150m 정도 숨죽여 흐르다가 홍제천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자연이 빚은 얼
큰한 작품, 백사골이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된 것은 물불 가리지 않고 자행되는 개발의 난도질 때
문이다. 나무와 계곡만 있던 이곳까지 주택들이 밀고들어올 줄 누가 생각을 했으랴? 

애시당초 주택가를 들이밀지 말고 한때 서울 제일의 피서지로 명성이 높았던 인근 세검정(洗劍
亭)과 연계하여 서울 도심 제일의 경승지로 가꾸었다면 더욱 빛이 발했을텐데, 개발의 난도질은
그런 여유도 주지 않고 백사폭포 밑까지 올라온 것이다. 다행히 개발의 난도질은 폭포 앞에서
뚝 멈추었지만 나중에 꼭 2012년 여름에 복원된 인왕산 수성동(水聲洞) 계곡처럼 계곡 주변 집
들을 밀어버리고 옛 모습을 꼭 되찾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백사폭포에서 홍제천과 만나는 곳까
지는 말이다. 그러고보면 이 땅에서 자행되는 개발의 칼질은 너무나 생각도, 자비도 없다. 그
칼질에 목이 떨어져 나간 서울의 자연 명소가 어디 한둘이랴...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폭포를 굽어보며 백사골 밑에 둥지를 튼 현통사는 근래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山寺)로 정확
한 내력(來歷)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의 하나였던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로 백사골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딱 1번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
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만들만한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골의 시원한 산바람이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한
풍경소리가 주변의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
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전 아래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덩어리로 몰려있다.


♠  백사골의 속살로 들어서다

▲  소나무가 마중하는 백사골 산길

간만에 백사골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아가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청정한 내음
과 솔내음이 두루 나래를 펼치는 백사골 숲에 들어서게 된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1폭의 수묵담
채화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 풍경을 완벽히 표현한다는 것은 힘들 것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
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백사골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숲에 깃들여진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기운을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
길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
롱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이곳은 이제 그들의 마지막 낙원이 된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  여름이 깃들여진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 속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다.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찾는 이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청정함을 자랑하는 백사골(백사실계곡) <현통사와 별서터 중간>

▲  사진 정면에 보이는 큰 바위에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만들 때 돌을 떼던 흔적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 자
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저런 무
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보기가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마치 서울 도심의 별천지처럼
청정함과 순수함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백사실은 백사실계곡, 백석동천, 백사골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별 상관은 없
다. 정식 명칭은 백사실, 백사실계곡으로 이곳 지명이 백사실이며,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줄여
쓴 이름이다. 또한 백석동천은 이곳에 반한 선비와 양반들이 붙인 칭호이다.


▲  별서터 연못 옆을 지나는 백사골 (별서터 징검다리)

백사실 안내도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별서터 직전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나 돌다
리를 건너면 바로 사랑채터와 연못이 있는 백석동천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
리트로 계곡에 둑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별서 주인이 돌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백석동천 돌다리 - 별서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통돌 2개로 이루어진 단촐한 모습이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 앞에 두고 오른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커다
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박혀있는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가운데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백석동천 별
서터(연못터 주변) 바로 서쪽 산자락에 자리해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숲에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늦가을 후반이나 겨울에
는 눈동자를 잘 굴리다보면 우연히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나마도 잘 눈
에 띄지 않는다.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만들어 그 안에 월암(月巖)을 새
겼다. 이 바위글씨는 18세기에 백사골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
씨로 추정되나 정확한 것은 아니며,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습은 가히 명
필 중에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한잔 걸치러 이곳에 놀러온
선비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광
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
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
으며 함께 잔을 걸치고 싶다.


♠  북악산에 숨겨진 비밀의 별천지, 북악산(北岳山)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전경

한양도성(漢陽都城)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면 여기가
서울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
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北岳山)과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안
긴 분지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 산간 마을이나 산골에 묻힌 조그만 읍내 같은 분위기이다. 도심
이 바로 지척임에도 도심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은 산 속에 자리한 지형 탓도 있겠
지만 나라의 예민한 곳이 동네 주변에 많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서울 부근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던 부암동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서(別墅, 별장)
및 피서지로 인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
精舍)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서울 제일의 피서지로 명성이 높던 세검
정,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의 장소로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 백사실 계곡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
장이 있었다 하여 백사실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으며, 백사골과 별서터를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하얀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붙여진 것으로
동천(洞天)이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경승지의 명예로운 칭호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별서 돌담의 흔적

▲  백사골 중류

백석동천 별서는 19세기 초반(1830년 경)에 지어진 600평 규모의 별서이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전해오는 것은 없으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이곳을 매입하여 머물렀다는 기록이 발견되
어 그의 손때를 조금 탄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를 비롯해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안채는 4
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 집 한쪽이 기
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월의 무게
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춧돌과 석
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 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 전쟁 때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마저 고자가 되
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장의 흔적, 바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
석동천의 옛 정취를 아련히 전해주고 있으며, 이 정도의 별장을 짓고 소유할 정도면 재력이 상
당한 양반이었을 것이다. 추사도 이곳을 거쳐갔으니 말이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첫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 1720~1783)의 이
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그 책에는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
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이 있어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조그만 별장이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던 백석동천은 2006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 사람들만 찾아오던 동
네 사람들의 숨겨진 피서지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숨바꼭질을 하고 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소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
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2005년에 문화재청에서 이곳에 대해 조선 별서의 구
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이 땅의 휼륭한 전통 정원임을 인정하
여 무명에서 바로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에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된 안내문과 변변한 이정표조차도 없었으며,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
내문과 이정표를 설치했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발굴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수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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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터

▲  백사골 산길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
와 여름의 녹음, 가을 단풍, 겨울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경승지이다.
그중에서 늦봄과 여름에는 도심 속의 조촐한 피서지로 아주 그만이다. 숲이 매우 무성하여 강렬
한 여름 햇빛도 고개를 숙이며, 나무가 베푼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골의 졸졸졸~♪
교향곡을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독서를 하거나, 돗자리를 피고 낮잠을 청하면 정말
꿀피서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유적을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고자 했던 옛 사람(주
로 지배층들)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을 배워보고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2006년 이후 이곳의 존재가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이 늘어나 고적한 분위
기는 좀 떨어졌다. 게다가 정신줄을 놓은 사람까지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돌에 낙서를 남
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거나, 계곡을 뒤집고 수목을 괴롭히는 행위가 늘어나면서 이곳의 건강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어 대책이 절실하다. 아직은 멀쩡하다 해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첩첩한 산주름 속에 있으니 언제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이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내
곁에 남았으면 좋겠다. 또한 근래에 종로구에서 별서터를 복원하겠다며 이곳을 들쑤실 생각을
하고 있는데, 괜히 복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었으면 한다. 비록 폐허가 되었어도
지금의 모습이 더 운치가 강하며,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 있기 때문이다. 괜
히 어설프게 나서지 말고 그냥 두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찾아가기 (2015년 8월 기준)
* 백사실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장
  쉽고 가까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이며, 하림각은 경사가 각박하고, 창의문은 거리가 길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AW컨벤션센터) 건너편 길가에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다. 그 길은 경사
   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면 길 끝에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
   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자하문터널 방면)으로 좀 가면 백석동천 이
   정표가 있다.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 → 홍제천에 걸린 신영교를 건너 백사실 이정표를 따
   라 '세검정로6다길'로 쭉 올라감 → 혜문사입구 → 현통사 → 백사골(백석동천)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2호선
   신촌역(1,6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버스 / 4호선 길음역(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3번 버스 이용 → 세검정초교 하차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가면 창의문교차로이다. 여기서 오른
   쪽으로 꺾어서 북악산길로 인도하는 2차선 찻길로 가지 말고 왼쪽 골목길(백석동길)로 들어
   서면 부암동 산복길이다. 산모퉁이와 G하우스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백
   석동2길)으로 진입하여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왼쪽으로 가도 되나 오른쪽 길을 추천
   함) 그 길의 끝에는 뒷골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면 백석동천이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백사골까지 접근도 힘들고 주차 장소도 마땅치 않다. 대중교통이 진리이다.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부로 냇물
  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일대


♠  백석동천 사랑채터

▲  사랑채터와 안채터가 있는 언덕

백사실 안내도가 있는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검은 피부의 백석동천 안내문이 마중한다.
안내문 너머로 사랑채터가 있는 언덕과 그곳으로 인도하는 돌계단이 있는데, 장대한 세월의 태
클로 계단 돌이 좀 헝클어져 있지만 경사가 완만해 계단의 역할은 그리 녹슬지 않았다. 반면 연
못 쪽에서 오르는 돌계단은 거칠게 다듬은 큰 돌을 계단처럼 얹혀놓았는데, 높이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다소 진땀을 빼야 된다. 어쨌든 돌계단을 오르면 주춧돌만 앙상하
게 남은 사랑채터가 나온다.

연못이 잘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ㄱ' 구조의 5량집 사랑채를 만들었는데, 아쉽게도 1970년경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남아있으나 2010년 발굴조사로 새롭게 드러
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산뜻하게 정비했다.

사랑채 서쪽 부분은 누마루로 주춧돌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에선 별서 주인
이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穀茶)를 대
접하여 1잔씩 주고 받았을 것이다. 사랑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이 남아있다.


▲  윤곽이 진하게 남은 사랑채터

▲  석축 위에 세워진 사랑채터 누마루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한 채,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터 옆에 자리한 네모난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 때 발견된 것으로 연못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잡초와
약간의 고인 물이 그런데로 연못티를 낸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과 주춧돌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스란히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잡초와 낙엽이 서로 보듬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 이후 그 자리
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는데,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생매장을 당했다. 별서터의
건강을 위협하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대를 발굴하면
서 갈아 없앴으며, 땅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습했다. 이
후 2011년 3월 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다시 묻었으며,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
자락에는 돌담의 흔적인 석축이 여럿 남아있다.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채의 기품과 분위
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사랑채 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에 잠겼을 별서의 주인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사랑채터와 안채터 일대
이곳에 있었을 건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말아먹을 수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헝클어진 서쪽 돌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


▲  사랑채 뒤쪽의 석축과 돌담

사랑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된다. 석축 윗쪽에는 별서의 경계를 가르던 돌담이 길게 이어
져 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허물어지고 지금은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지 돌담의 밑
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헝클어진 채 남아있는 돌담의 흔적


♠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  대자연에 의해 잠시 연못의 기능을 회복한 연못

백석동천 별서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못은 둘레가 약 100m 정도 되는 보름달처럼 큰 못이
다. 별서 주인은 많은 돈을 쏟아부어 장안에 솜씨 좋은 목공과 석공을 불러 별서를 만들고 사대
부의 지위를 이용해 인근 백성을 동원하여 연못을 팠을 것이다.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둥그런 연못을 수시로 채웠으며, 정자터 부근에 계곡 물을 끌여들이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물이 팔자좋게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서쪽에 수로를 파 계속 물갈이가 되
도록 유도했다.
연못과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나가던 해와 달도 그 연못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을 것이요.
주변 나무와 꽃들도 연못을 거울 삼아 매무새를 다듬고, 별서 주인은 벗을 불러 곡차와 차 1잔
의 여유를 누리며 상팔자를 누렸을 것이다.

그들이 팔자 좋게 놀던 시절은 세상이 한참 아비규환에 젖어있던 19세기로 백성들의 삶은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민초(民草)들은 지금처럼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가혹한 세금과 양반
들의 수탈에 죄다 털려 힘들게 살아가고 있건만 별서 주인은 다른 나라 이야기마냥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별서의 주인과 이곳을 매입했던 추사 김정희가 가고 여러 대를 거치면서 풍류의 현장이던 이곳
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고, 천하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게 묻힌 이곳까지 총탄을
선사해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강제로 고자가 되었다. 연못 주변에 두른 석축과 정자의 주
춧돌은 이곳이 예전 연못임을 아련하게 귀뜀해줄 뿐이다.

6.25이후 연못은 연꽃이나 물고기, 수초 대신 잡초와 잡석의 공간이 되었고, 늦가을에는 나무들
이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털어낸 낙엽들이 가득 연못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막 보금자리이자
누런 연못이 된다.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연못의 구성원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  정자터 남쪽에서 본 연못과 별서터 일대

세월의 무상함을 진하게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백석동천 연못은 비록 그 기능은
잃었지만 자연의 생명력은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고 있다. 또한 여름의 제국 시절이나 비가
많이 오는 경우 연못에 물이 많이 담겨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찾기도
한다. 그러니까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이지는 못하고 자연이 내린 비에 의지해 연못의 티를 되찾
는 것이다. 마침 오늘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면서 간만에 만수(滿水)의 기쁨을 누린다.
수면 위에는 물을 먹고 자란 풀들이 무성하게 돋아나 초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그
만 생명체의 또다른 세계를 빚어내고 있다. 마치 늪지대 같은 분위기라 다가서기가 좀 껄끄럽다.
연못에 물이 많이 모였다고는 하나 서쪽에 뚫어놓은 수로로 물이 빠져나갈 정도의 수량은 아니
고 물의 깊이도 겨우 성인 무릎에 닿을 정도이다. 이곳에 담긴 물은 자연에 의해 증발할 때까지
머문다.
연못이 제법 넓기 때문에 물만 더 채운다면 조그만 조각배를 하나 띄워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였다면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기고 싶다.

연못을 비롯한 별서터 일대는 숲이 울창해 한여름에도 뜨거운 햇볕이 마음 놓고 내려오기가 힘
들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삼삼한 숲은 이곳을 찾
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의 정
도는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  옆에서 바라본 정자터

▲  연못터 옆에 자리한 돌다리
통돌 2개로 이루어진 단촐한 다리이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허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마음으로 그 허전함을 달래주고 싶구나~! 그
렇다고 정자를 복원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
꽃을 바라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아는 자라면 기생들도 불러 정자 안에서 얼씨구~ 춤과 노래,
시를 즐겼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부러울 뿐.. 이래서 권력층이 되야 되고 부자가 되
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일 뿐이고 상상으로만 끝나버린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키가 약 20m에 이르는 장대한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이
는 약 150~200년 정도로 여겨진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또는 매입 기념으로 심었을지
도 모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
원을 꾸민 이 땅의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노비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를 한
탄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나 올련지...?


▲  별서터에서 수습된 길쭉한 통돌로 조촐하게 이루어진 쉼터
이곳에서 수습된 돌로 대충 의자와 탁자를 흉내냈는데, 그 모습이 참 수수하고
정겹기만 하다. 잠시 앉아 행동식을 먹기에도 별로 불편함이 없다.


▲  연못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늦가을)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계단식 산길

백석동천 별서터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허나
통제의 줄이 느슨하여 들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고, 특히 여름에는 피서객들로 봐글
봐글하여 오히려 도룡뇽이 짐을 싸고 나가야 될 지경이다.
별서터 입구에서 계곡을 우회하여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는데, 2012년에 주변 산길
을 정비하고 산불방제 장비를 갖춘 구제함과 솟대를 품은 돌탑을 심어 소소한 볼거리를 선사한
다. 허나 솟대 돌탑은 백사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이다.

돌탑을 지나면 소나무숲과 푸른 잎을 지닌 은행나무숲이 반짝 펼쳐지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
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별서터 입구에 세워진 오리 솟대 돌탑
예로부터 오리 등의 새는 하늘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중간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소도(蘇塗)에서 비롯된 솟대 꼭대기에는 오리 모양을 달아두어
하늘과의 연락을 꾀했다.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몫 돕고 있는 소나무숲길

▲  백석동천(白石洞天) 바위글씨를 간직한 집채만한 바위

은행나무숲에서 오른쪽 산길로 가면 이곳 이름인 '白石洞天'이란 문신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백석동천 바위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월암과
비슷한 시기가 아닐 듯 싶은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고
자 했던 옛 사람들(선비와 지배층들)은 경관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와 그 기념으로 저렇게 낙서
를 남기곤 했는데, 백사골 역시 그들의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 풍경이 그들의 마음을
통 크게 훔쳐갔기 때문이다.


▲  여름에 잠긴 백사골의 그림 같은 숲길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하리라.. 비록 짧은 거리지만 푸르게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잘생긴 바위들이 파노라마를 이루는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길을 조금 가면 잠시 떨어졌던 백사골 상류가 나
온다. 하얀 피부의 넓은 반석부터 이끼 옷을 입은 바위까지 줄줄이 이어지면서 탄사를 자아내게
하는데, 비록 설악산이나 금강산 등 쟁쟁한 큰 산의 계곡만은 못해도 서울 도심에 저런 계곡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꿀단지나 다름이 없다.
때묻지 않은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흘러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내며, 이렇게
순수함을 지닌 물은 백사아랫폭포부터 속세의 기운을 강제로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속물로 변해
간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간직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겠
는가?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현장이 되고, 시민들이 소풍/나들이로 이곳에 들
어와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  우리가 잠시 머물며 속세에 찌든 발을 정화시키던 백사골 상류
30분 정도 머물며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본다. 정말 오랜만에 흙으로
계곡에 토목공사(?)도 해보았지. 어린 시절 흙장난 정말 재밌었는데
다시 해보니 역시 재밌다.

▲  좁은 바위 틈을 비집고 흐르는 백사골 냇물의 패기

 백사골의 새로운 명물을 꿈꾸는 외나무다리

백사골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지어진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도 정
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2개의 나무 목재를 엮
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다닐 정도로 좁
은데, 만약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하지만 다리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요
는 없다.
사람 많고, 수레 많고, 빌딩 많고, 복잡하고 각박하기만 한 서울 도심 속에 이런 다리가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백사골은 그 존재 자체로도 예사롭지 않지만 캐면 캘수록 보물이 더
나올 것 같은 마르지 않는 샘이나 신세계 같다.

외나무다리를 지나면서 길은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1~2m 정도로 폭이 좁아진다. 계곡 오른쪽에
는 생뚱맞게도 비닐하우스와 밭, 과수원이 펼쳐져 두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데, 그들을 지나
면 집들이 나오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분명 이곳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종로구인
데, 이런 두멧골이 있었다니?? 그곳은 바로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
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백사골 상류 (능금마을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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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 (백석동천, 백사골)

 


' 서울 도심 속의 아늑한 별천지 ~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


여름이 한참 흥이 오르던 7월 첫주에 후배들과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백사골)을 찾았다.
백사골은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이자 서울에서 가장 흠모하는 곳으로 정처 없는 내 마
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곳이다. 2005년 5월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며 처음 발을 들인 이
래 매년 3~4번 정도 발걸음을 이으면서 그곳에 대한 변치 않은 마음을 비추었다.

지하철 경복궁역(3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1711번 시내버스(국민대↔공덕역)를 타고 세검정
초교에서 내려 홍제천(弘濟川)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편의점 옆으로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는데 그의 지시에 따라 주택가 골목(세검정로6다길)을 비집고 들어가
면 빌라 옆으로 긴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혜문사입구인데, 여기서 오른쪽
으로 꺾어 산동네 골목길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백사골의 남쪽 관문인 백사폭포
와 현통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  혜문사입구에서 바라본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
저 고개를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뽀얀 피부의 백사폭포가 나타난다.


♠  서울 도심 속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 작지만 멋드러진 하얀 반석이
일품인 백사폭포(白沙瀑布)

▲  피서의 성지(聖地) 자격이 충분한 백사폭포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문짝에 그려진 현통사 일주문(一柱門) 밑에는
하얗고 뽀얀 피부를 지닌 반석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 매끄러운 바위면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품, 백사폭포가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며 별천지를 꿈꾸
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흔든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이곳은 서울 도심에선 정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로 그 가치는 단연 높다. 만약 쟁쟁한 폭포들
이 많은 설악산(雪嶽山)이나 순창 강천산(剛泉山) 같은 곳에 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아마도 그
저 그런 폭포로 주목도 못받았을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자리 운도 중요하다.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장쾌한 편은 아니다. 수수하고 조촐한 모습
이지만 나름대로 수려한 멋을 풍기며 백사골에 대한 첫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인도하며 그곳에
대한 기대감까지 크게 드높인다.
폭포를 빚은 너른 바위는 돗자리를 피고 한숨 청하고 싶은 잘생긴 반석(盤石)으로 청정한 계곡
물이 끊임없이 바위를 타고 내려와 수채화를 자아낸다. 특히 비가 많이 와서 계곡의 수량이 많
을 때는 시원한 멋도 풍기는데,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뒤흔들 정도로 패기가 넘쳐 귀신도 놀라
도망치게 만든다.

백사골이 무명이던 시절에는 동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이나 동네 사람들의 피서지
로 주로 쓰였으나 속세에 강제로 알려지면서 폭포 주변에 자리를 피고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
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  옆에서 본 백사폭포 - 거의 50도 각도로 이루어진 바위 미끄럼틀을 타고
백사골 냇물은 속세로 흘러간다.
 

▲  백사골의 냇물과 낙엽을 속절없이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서쪽 못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 냇물은 큰 세상을 꿈꾸며 졸졸졸~♪ 폭포를 타고 내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못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다리 서쪽에 있는 못에서 심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고향
을 등지고 큰 세상을 향한 장대한 여정을 떠난다. 한번 폭포를 내려왔으면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기에 오로지 앞만 보고 흘러갈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아랫폭포를 타고 홍제천으로 내려가 한
강(漢江)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종점이 없는 여행을 떠난다.

늦가을이 되면 겨울 제국(帝國)의 핍박으로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낙엽들이 폭포를 타고 속세로
내려가거나 그 주변에서 저항하며 고향으로의 컴백을 꿈꾼다. 허나 자연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
는다. 그렇게 발버둥을 치다가 결국 밑으로 흘러가거나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런 낙엽의 발
악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정말 허언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여름의 절정을 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매뭇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저들의 푸른 아름다움 뒤에는 늦가을의 처절한 아름다움이 있고, 그 뒤
에는 생각하기도 끔찍한 겨울 제국의 혹독한 시련이 기다린다.


▲  급하게 흘러가는 백사골 하류 (아랫폭포)

서쪽 못은 폭포 못보다 조금 넓은 편인데, 그곳에 모인 물은 주택가가 있는 서쪽으로 거의 30~
40도 경사를 이룬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아주 빠르게 내려간다. 각박한 경사를 이룬 바위를
타고 흐르니 폭포로 봐도 무관할 것이다. 폭포의 길이는 150m 남짓으로 강수량이 많아 수량이
많으면 그 흐르는 소리가 멀리서까지 귀를 때린다.

폭포가 흐르는 바위는 넓게 반석을 이루며 제법 절경을 자아내고 있는데, 폭포 주변을 가득 메
운 주택들만 없었다면 설악산이나 금강산(金剛山) 못지 않은 풍경을 자랑했을 것이다.


▲  주택들 사이를 흐르며 볼품없는 꼴이 되버린 백사골의 그늘

▲  백사골의 생매장 현장 ~ 자하주택 북쪽(세검정로6길)

서울 제일의 경승지인 백사골은 자하주택 북쪽에서 어두컴컴한 지하로 생매장을 당한다. 지하에
묻힌 백사골은 약 150m 정도 흐르다가 홍제천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자연이 빚은 얼큰한 작
품이 이런 수모를 당한 것은 개발의 난도질 때문으로 나무와 계곡만 있던 이곳까지 주택들이 마
구잡이로 들어와 백사골 아랫폭포의 목까지 조르고 있다.

차라리 주택가를 들이밀지 말고 서울 제일의 피서지로 명성이 높았던 인근 세검정(洗劍亭)과 함
께 장안 제일의 명승지로 가꾸었다면 더욱 빛을 발했을텐데, 개발의 난도질은 그런 여유도 주지
않고 백사폭포 밑까지 올라온 것이다. 다행히 난도질은 폭포 앞에서 멈추었지만 나중에 반드시
계곡 주변 집을 밀어버리고 2012년 여름에 복원된 인왕산 수성동(水聲洞) 계곡처럼 옛 모습을
되살렸으면 좋겠다. 적어도 백사폭포에서 홍제천 합류지점까지 말이다.
이 땅에서 자행되는 개발의 칼질은 너무나 천박하다. 그 칼질에 목숨이 다한 명소가 어디 한둘
이랴.?


▲  백사폭포 위에 둥지를 튼 현통사(玄通寺)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玄通寺)는 근래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
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로 추앙받는 일붕(一鵬)이 머물렀던 절로 백사골을 오갈 때마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1~2번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애타게 할만한 매력도 없기 때문이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
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다. 대웅전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남쪽을 향한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골의 시원한 산바람은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유발시켜 경내에 깃들여진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  백사골의 속살로 들어서다

▲  소나무가 마중하는 백사골 산길

현통사를 지나면 제일 먼저 솔내음이 그윽한 소나무 숲이 반긴다. 마치 속세를 뒤로 하고 신선
의 세계에 입산한 듯, 아랫세상과 공기부터가 확연히 틀리다. 그것도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말
이다. 시원하고 청명한 산바람에 속세(俗世)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머리와 마음이 말끔히 정화
되는 것 같다.


▲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의 끝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고,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나그네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졸졸졸 흘러가는 청정한 백사골(백사실계곡) <현통사와 별서터 중간>

▲  백사골 중류 (별서터 직전)
사진 정면에 보이는 큰 바위에 일정하게 긁힌 흔적이 있는데, 이는 별서를 만들 때
돌을 떼던 흔적이다.

백사골에 발을 들이면 한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의 풍경을 완벽히 표현한다는 것은 힘들 것
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이곳을 대자연에 대한 명예
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감히 말자랑, 글자랑을 하지 않고 그저 탄성만 연거푸 지
르며, 조용히 백사골을 거닌다.

숲에 깃들여진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길
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도롱
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서울 관내에서
는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이곳은 이제 그들의 몇 남지 않은 낙원이 되었다. 만약 그
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동물과 신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 자
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순결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처럼 청정함과 순수함
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백사골은 백사실, 백사실계곡으로 널리 불리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상관은 없다. (본글에서는
하나로 통일하지 않고 혼용했음) 이곳의 정식 지명은 백사실로 거기에 계곡을 붙여 백사실계곡
이라 불리기도 한다.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의 다른 이름이며,(나는 입버릇처럼 백사골이라 부름)
백석동천은 백사골의 일부로 백사폭포와 별서터, 백석동천 바위글씨 주변을 일컫는다.


▲  백석동천 별서터 갈림길

▲  연못 곁을 지나는 백사골 중류 (징검다리)

백석동천 이정표와 자연보호 안내문이 있는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백
석동천의 중심인 별서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둑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나이 꽤나 묵은 나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별서 주인이 돌
과 흙으로 쌓은 둑이 있었던 모양이다.


▲  별서터로 인도하는 조촐한 돌다리 - 19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계곡에 콘크리트 둑을 쌓으면서 지금의 높이로 조정되었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를 코 앞에 두고 오른쪽 산자락 윗부분을 뚫어지라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커다
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면 글씨
같은 것이 어렴풋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가운데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백석동천 별
서터(연못터 주변)의 바로 서쪽에 자리해 있지만 그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고 숲에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모른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
리다보면 우연히 눈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나마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월암은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만들어 그 안에 월암(月巖
)을 새겼다. 이 바위글씨는 18세기에 백사골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바 있는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정되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
습은 가히 명필 중에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한잔 걸치러 이곳에 놀러온
양반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광
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
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
으며 함께 잔을 걸치고 싶다.


♠  북악산에 숨겨진 비밀의 별천지, 북악산 백석동천(北岳山 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 별서(別墅)터

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서면
여기가 서울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삼각산)에
안긴 분지(盆地)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는 지방이나 고산지대의 소읍(小邑) 같은 분위기이다.
이곳은 녹지 비율이 서울에서 매우 높은 편이며, 백사골 등의 깨끗한 계곡이 살아 숨쉰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명성이 높았던 부암동은 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인
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精舍)를 비롯하
여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서울 제일의 피서지였던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
君)이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적이 풍부하
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 백사실 계곡(백사골)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여 백사실이라 불리지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이 없으며, 조선 후기부터 백사실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석동천이라 부르고 있다.
그 이름은 하얀 피부의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붙여진 것으로 동천(洞天)이란 칭호는 경관
이 아름다운 곳에 부여되는 명예로운 이름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돌담의 흔적

▲  사랑채터

백석동천 별서는 19세기 초반(1830년 경)에 지어진 600평 규모의 별서(별장의 일원)이다. 누가
만들고 이곳의 원래 이름이 무엇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나,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
채, 그리고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별서 주변에는 나무와 온갖 화초(花草)를 심
어 별서를 최대한 꾸몄을 것이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
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마 주
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때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도 무거운 상처를 입으
면서 그 휴유증으로 연못의 기능을 잃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
장의 일부 흔적, 바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아련히 전하며, 이 정도의 별서
을 짓고 소유할 정도면 상당한 재력을 지닌 양반이었을 것이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옛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 1720~1783)의 이
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그 책에는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
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이 있어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정자나 별장 비슷한 것이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허씨의 모정을 그의 후손들이 별서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며, 19세기에
상당한 재력이 있는 사대부가 이 일대를 차지해 별서를 지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내몰던 백석동천은 2005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부암동, 신영동)
사람들만 찾아오던 동네 사람들의 숨겨진 피서지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숨어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소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2005년에 이르러 문화재청에서 이곳을 두고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우리나라의 휼륭한 전통 정원임을 인정하면서 비지정의 서러움에서
벗어나 바로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에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
동안 안내문이나 변변한 이정표조차도 없다가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정표를 설치했
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발굴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량으로 건졌다.

▲  연못에 세워진 정자터

▲  백사골 중류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
와 여름과 가을, 겨울의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절경지이다. 그중에서
늦봄과 여름에는 도심 속의 조촐한 피서의 성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부산하다.
이곳은 숲이 매우 무성하여 강렬한 여름의 햇빛도 굴복시키며 나무가 베풀어준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골의 졸졸졸~♪ 음악소리를 들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며 독서를 하거나 낮
잠을 청하면 정말 극락이 따로 없다. 거기에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유적을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가 되어 신선처럼 살고자 했던 그들(주로 지배층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
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을 배워보고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꽤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발길이 나날이 쓸데없이 증가하면서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까지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돌에 흉물같은 낙서를 남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계곡을 뒤집고, 수목을 괴롭히는
등의 천박한 짓이 늘고 있어 이곳의 건강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다. 아직은 멀쩡하다고 해
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외딴 곳에 있으니 언제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
램인데 이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의 아는 사람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나의
곁에 남았으면 좋겠는데, 이미 그 선은 넘은 듯 싶다. 또한 2013년에 이르러 종로구청에서 별서
를 복원한다며 설치고 있는데, 괜히 복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비
록 폐허가 되긴 했지만 지금 모습이 더 운치가 강하고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수
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복원을 한다면 이건 그냥 두는 것만 못하다.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찾아가기 (2013년 8월 기준)
* 백사실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에서 들어가는 것이며, 하림각은 골목길 경사가 무지 급해
  오르지도 전에 맥이 빠진다. 그리고 창의문은 많이 걸어가야 된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과 자하문터널입구 정류장 사이에 백석동길이란 골목길이 있다. (백석
   동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음) 그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오르면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
   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좀 가면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음)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 다리를 건너면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
   표가 있다. 그 이정표를 따라 쭉 오른다. (구기터널이나 정릉 방면에서 오는 경우는 육교를
   건너 길 건너편으로 이동한다)
※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2호선
   신촌역(6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시내버스 이용 /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버
   스 이용 / 4호선 길음역(7번 출구)에서 153번 버스 이용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북쪽(부암동 방면)으로 가면 창의문3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북악산길로 가는 2차선 길로 가지 말고 왼쪽 골목길(백석동길)로 들어서
   면 부암동 산복길이다. 이 길을 쭉 올라 산모퉁이까페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서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그 길의 끝에는 능금마을(뒷골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가면 백사실이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백사골까지 접근도 힘들고 주차 장소도 마땅치 않다. 대중교통이 진리이다.

★ 북악산 백사실(백석동천, 백사골) 관람정보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개구리 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
  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백사골 일대는 의자를 제외하고 어떠한 편의시설도 없다. 약수터는 능금마을 뒷쪽 산자락에
  하나 있다. (백사실약수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일대


♠  백석동천 사랑채터

▲  사랑채터가 자리한 언덕 (계곡 건너에서 바라본 모습)

▲  윤곽이 진하게 남은 사랑채터
이곳에 있었을 사랑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어디까지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이곳의 운치를 깨뜨릴 수 있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리는 백석동천 별서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
온다. 세월의 태클로 다소 헝클어져 있지만 경사가 완만하여 계단으로서의 역할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그리고 연못 쪽에도 돌계단이 하나 있는데, 다듬은 돌을 계단처럼 얹혀놓은 수수한 모
습이지만 높이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리가 짧은 사람은 오르기 힘들다.

계단 끝 언덕에는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과 석축의 윤곽이 진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가 있다. 연
못이 잘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지어진 'ㄱ' 구조의 사랑채로 아쉽게도 생전의 뚜렷한 사진조차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남아
있으며, 2010년 발굴조사 이후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의 모습으로 산듯하게 정비했다.


▲  2중으로 쌓은 석축 위에 심어진 사랑채터의 높다란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하여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서쪽 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계단

연못쪽으로 돌출된 사랑채 서쪽 부분은 주춧돌의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은
별서 주인의 생활공간으로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穀茶)를 대접하여 1잔씩 주고 받았을 것이다. 사랑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과 석축이 남아있는데, 별서 주인의 서재(書齋)로 여겨진다.


▲  북쪽에서 본 사랑채터

▲  동쪽에서 바라본 사랑채터

▲  사랑채터 옆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석조유구(遺構)로 연못(또는 우물터)으로 여겨진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스란히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푸른 잡초가 따스히 보듬어준다.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고 한다. 이후
그 자리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는데,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별서터의 건강을 위협하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대를
발굴하면서 갈아 없앴으며, 지하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
습했다. 이후 발굴을 정리하고 2011년 3월에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땅속에 묻었으며, 한쪽 구석
에는 이곳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햇살을 된 주춧돌과 기와조각, 여러 돌조각을 한데 수습해 조그
만 돌탑을 이룬다.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  안채터 북쪽 구석 (평창동과 조망점으로 넘어가는 산길)
조그만 시냇물이 백사골로 흐르고 있으며, 예전에 약수터가 있었으나
오래전에 폐쇄되었다.

▲  사랑채 뒤쪽 석축과 돌담

사랑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돌로 다진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있다. 석축은 별서 주변을 다지면서
산사태 등을 막고자 쌓은 것으로 높이는 1.5~2m 정도 된다. 석축 윗쪽에는 별서의 경계를 가르
던 돌담이 길게 이어져있는데, 세월의 무심한 태클에 허물어지고 지금은 안채터 뒷쪽에서 연못
동쪽까지 돌담의 밑도리만 옛 산성(山城)의 잔해처럼 남아있다.


▲  헝클어진 채 남아있는 돌담의 흔적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세월의 용광로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
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방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詩想)에 잠겼을 별서의 주인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  대자연에 의해 잠시 연못의 기능을 회복한 연못

백석동천 별서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못은 둘레가 약 100m 정도 되는 보름달처럼 큰 못이
다. 별서 주인은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장안에 솜씨 좋은 기술자를 불러 별서를 만들
고 사대부의 지위를 이용해 인근 백성을 동원하여 연못을 파고 돌과 나무를 나르게 했을 것이다.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둥그런 연못을 수시로 채웠으며, 정자터 부근에 계곡 물을 끌여들이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물이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서쪽에 수로를 파 계속 물갈이가 되도록 유도
했다.
연못과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나가던 해와 달도 그 연못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을 것이요.
주변 나무와 꽃들도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무새를 다듬고, 별서 주인은 벗을 불러 곡차와 차 1
잔의 여유를 누리며 상팔자를 누렸을 것이다.

그들이 팔자 좋게 놀던 시절(19세기 초/중반)은 천하가 한참 아비규환에 젖어있던 시기로 백성
들의 삶은 매우 퍽퍽했다. 민초(民草)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가혹한 세
금삥과 상당수 양반들의 수탈에 털려 궁색하게 살아가고 있건만 별서 주인은 다른 나라 이야기
마냥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당시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안동김씨나 풍양조씨
일가이거나 그들과 가깝던 자가 아닐까 싶음..)

별서의 주인이 골로 간 이후, 풍류의 현장이던 이곳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고, 천하를 쑥대밭으
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게 묻힌 이곳까지 총탄을 선사해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강제로
고자가 되었다. 그 이후 연못에는 물과 물고기, 연꽃 대신 잡초와 잡석만 무성하게 되었고, 늦
가을에는 나무들이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털어낸 낙엽들이 가득 연못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
막 보금자리가 된다.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연못의 구성원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  정자터 남쪽에서 본 연못과 별서터 일대

▲  동쪽 언덕에서 바라본 연못과 별서터

세월의 무상함을 진하게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백석동천 연못은 비록 그 기능은
잃었지만 자연의 생명력이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고 있다. 여름의 제국 시절이나 비가 많이
오는 경우 연못에 물이 담겨 비록 예전만큼의 위엄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찾기
도 한다. 그러니까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이지는 못하고 하늘이 내린 비에 의지해 연못의 티를
되찾는 것이다. 마침 우리가 오기 며칠 전부터 비가 많이 내려 연못에는 물이 가득했다.

수면 위에는 물을 먹고 자란 풀들이 무성하게 돋아나 초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치
늪지대 같은 분위기라 다가서기가 좀 껄끄럽다. 연못에 물이 많이 고이긴 했으나 서쪽에 뚫어놓
은 수로로 물이 빠져나갈 정도의 수량은 아니며 물의 깊이도 겨우 성인 무릎에 닿을 정도이다.
이곳에 담긴 물은 자연에 의해 해산될 때까지 머문다.
연못이 넓기 때문에 물만 더 채운다면 조그만 조각배를 띄워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나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난쟁이었다면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연못을 비롯한 별서터 일대는 나무가 울창하여 한여름에도 뜨거운 햇볕이 마음 놓고 내려오기가
힘들다. 서울 도심 속에 별천지이자 보석과 같은 곳으로 처음 왔을 때 이곳에서 받은 감동이 슬
슬 되살아난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의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삼삼한 삼림
은 이곳을 찾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동의 정도는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 허나 지금은 저렇게 허
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그 허전함을 달래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정자를 복원
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연못
에 심어진 기둥 중 4개는 높이가 약 2m이며, 나머지 2개는 돌계단 옆에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곡차를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안다면 기생들을 불러 정자 안에서 팔자 늘어지게 놀았
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부러울 뿐.. 이래서 사람들은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
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일 뿐, 상상으로만 끝나기 때문이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높이가 대략 20m 되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가 약 150~200
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기념으로 심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
원을 꾸민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를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
에 한풀이를 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나 올련지...?


▲  연못 우측 수로에 놓은 소박한 돌다리
길쭉한 통돌 2개를 놓는 선에서 간단하게 다리를 마무리지었다.
다리가 놓인 수로는 연못에 물을 빼는 역할을 했다.


▲  연못과 별서터에서 수습한 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쉼터
가운데 길다란 돌에 간식거리를 두고 양쪽 석재에 모여 앉아 간식이나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많이 그랬음~ 그렇다고 저기서 취사행위까지는 하지 말 것~~

▲  연못/정자터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

서터 윗쪽 계곡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
물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하여 예전처
럼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기는 그렇다. 계곡의
통제로 산길로 조금 우회해서 가야된다.
2012년에 별서터 주변 산길을 손질하면서 산불
방제 장비를 둔 붉은 색의 구제함을 두었고 이
곳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돌탑과 오리 솟대를
세워 조촐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산길을 오르면 소나무 숲이 나오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부암동 주택가 방면)으로 가
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  오리 모양이 달린 솟대와 그를 품은 돌탑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몫 돕고 있는 소나무숲

▲  백석동천 바위글씨를 간직한 집채만한 바위

▲  너무나 뚜렷한 백석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소나무숲에서 부암동 주택가로 통하는 서쪽 산길로 접어들면 '白石洞天' 4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산천에 붙여지는 이름으
로 비슷한 말로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곳이 백석동천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하
얀 피부의 바위와 암반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이 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월암과 비슷한 시
기가 아닐 듯 싶은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기를 꿈꾸었
던 선비와 사대부들은 경관이 뛰어난 경승지에는 저렇게 기념 낙서를 남겼는데, 백사골 역시 그
런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의 풍경이 그들을 애타게 감동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거창 수승대(搜勝臺)의 귀연암(龜淵岩,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지나치게 낙서로 도배가 된 것
도 그리 보기는 좋지 않다. 어느 것이든 적당한 것이 좋다.


▲  녹음(綠陰)에 물든 백사골의 호젓한 숲길 ▼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하리라.. 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넓적한 하얀 바위가 파노라마를 이루는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길을 조금 가면 백사골 상류가 나온다. 하얀 피
부의 넓은 반석과 이끼가 낀 까무잡잡한 바위들이 줄줄이 쏟아지면서 탄사를 자아내게 하며, 때
묻지 않은 청정한 냇물이 바위를 타고 흘러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낸다.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현장이 되고, 시민들도 이곳에 들어와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백사골은 능금마을 뒷쪽에서 시작하여 백석동천을 가로질러 홍제천으로 흐른다. 그리고 윗 사진
의 바위부터 백사폭포까지를 백석동천 구역으로 보면 되는데, 그 상류에는 더 이상 괜찮은 바위
나 옛 사람들의 흔적은 나오지 않는다.


▲  백사골 상류 - 이 부분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계곡을 건너 산길로 들어서면 백사골 동쪽 능선과
백사실약수터로 이어진다.

▲  능금마을로 가는 백사골 상류 외나무다리 (오른쪽이 경작지)

백석동천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만든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하고도 정
겨운 풍경을 자아낸다. 2개의 나무 목재를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갈 정도로 좁다.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해야 될까? 하지만 다리의 길이도 짧고, 다리 밑 수심도 매
우 얕으며, 다리 곁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여울이 있어 굳이 다리를 두고 싸울 필요는 없다.
여기서 오른쪽(서쪽)에는 여러 농작물이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밭두렁과 비닐하우스 등
이 펼쳐져 있어 도심 속의 생소한 풍경 앞에 두 눈을 잠시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리를 지나서는 길이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2m 미만으로 폭이 좁아진다. 그런 길을 계속 고집
하면 계곡 너머로 집들이 보이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본글은 여기서 끝~~ 능금마을 부분은 추후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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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조촐한 피서지이자 별천지 ~ 북악산 백석동천 (백사실계곡)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비밀의 별천지 ~ 북악산 백석동천(백사실) '

▲  백석동천 별서 유적


가을이 한참 여물어가던 10월 중순에 북악산 백석동천(백사골, 백사실)을 찾았다. 이곳은
서울 장안에서 내가 가장 흠모하는 곳으로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곳이기도 하다.
2005년 5월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처음 찾은 이래 매년 3~5차례 정도 발걸음을
하며 그에 대한 변함없는 마음을 비춘다.

백사골의 품으로 들어가고자 수유리에서 서울시내버스 153번(우이동↔보라매공원)을 타고
세검정초교에서 내린다. 거기서 홍제천(弘濟川) 다리를 건너면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
표가 나오는데, 그의 지시로 주택가 골목(세검정로6다길)을 비집고 들어가면 빌라 옆으로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바로 혜문사 입구인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산동네
골목길을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백석동천(백사골)의 남쪽 관문인 현통사와 백사폭
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혜문사입구에서 백사골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
저 고개를 넘으면 바로 현통사와 백사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  서울 도심 속에 흔치 않은 자연산 폭포, 작지만 멋드러진 하얀 반석이
인상적인 백사폭포(白沙瀑布)
.

서슬이 시퍼런 칼을 쥐어든 금강역사(金剛力士)에 오금을 저리게 하는 현통사 대문 밑에 때깔이
고운 하얀 반석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매끄러운 바위면에는 북악산에서 발원한 백사골이 오
랜 세월 빚어놓은 대작품, 백사폭포(백석폭포라 불러도 무관할 듯)가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
며 별천지를 꿈꾸며 찾아온 나그네의 마음을 살며시 흔든다. 지금도 그러한데 옛날 이곳을 찾았
던 선비와 양반들은 그 마음이 더했을 지도 모른다.

.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백사골의 시냇물은 큰 세
상을 꿈꾸며 졸졸졸~♪ 폭포를 타고 살며시 내
려와 폭포 밑에 마련된 못에서 기나긴 여정을
준비한다. 어쩌면 다시는 오지 못할 그리운 고
향, 북악산의 그리움을 털어내며 길을 재촉한
그들은 홍제천을 따라 한강으로, 다시 서해바다
로 종점 없는 여행을 떠난다.

폭포에는 물을 타고 흘러온 누런 낙엽이 가득하
다. 늦가을을 지나 장차 천하를 지배할 겨울 제
국의 시련을 견뎌내고자 나무가 털어낸 낙엽들
은 폭포에 모여 인생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긴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겨울을 원망하는 그들
의 모습은 인생무상이 허언이 아님을 상기시킨
다.


▲  가을과 낙엽을 속세로 무심히 흘려보내는 백사폭포 서쪽 못

백사폭포는 높이 4m 정도의 조그만 폭포로 웅장하고 장쾌한 편은 아니다. 수수하고 조촐한 모습
이지만 나름대로 수려한 멋을 풍기며 백사골에 대한 첫 이미지를 매우 긍정적으로 인도하고 그
곳에 대한 기대감까지 크게 불러일으켜 심장을 더욱 두근거리게 만든다.
폭포를 빚은 하얀 피부의 너른 바위는 돗자리를 피고 한숨 청하고 싶은 잘생긴 반석(盤石)으로
청정한 계곡물이 끊임없이 바위를 타고 내려와 1폭의 수채화를 자아낸다. 특히 비가 많이 와서
계곡의 수량이 많을 때는 시원한 멋도 풍기는데,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폭포수 소리가 천
하를 뒤흔들 정도로 패기가 넘쳐 귀신도 놀라 도망치게 만든다.

예전 여름에는 동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물놀이 현장 및 동네 주민들의 비밀 피서지였으나 백
사골이 속세에 무심히 알려지면서 폭포 주변에서 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을 청하
며 여름 제국에 대항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잘생긴 폭포와 반석, 시원
한 산바람까지 갖춘 이곳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여간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백사폭포를 거친 계류는 다리 아래에 조그만 폭포를 통해 밑의 못으로 흘러가며 여기서 다시금
바위를 타고 본격적인 세상나들이를 시작한다. 폭포 주변 나무들은 못을 거울로 삼아 늦가을의
절정을 닮아가는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며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저들의 처
절한 아름다움 뒤에는 겨울의 혹독한 시련이 야욕을 드러낸다. 잔잔한 수면에는 낙엽들이 둥실
둥실 떠 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며, 백사골에 머문 늦가을은 낙엽을 데리고 계곡을 통해 저
밑으로 그렇게 흘러간다.


▲  급하게 내려가는 백사골 아랫폭포
서쪽 못에서 경사진 바위를 타고 급하게 내려간 백사골은 주택가 사이를
지나 자하주택 북쪽에서 강제 생매장을 당해 홍제천으로 흐른다.
.
▲  백사폭포 위쪽에서 굽어본 폭포 주변

백사폭포를 굽어보는 현통사(玄通寺)는 근래에 지어진 조그만 산사(山寺)로 정확한 내력(來歷)
은 모르겠다. 이 시대 큰 승려의 하나인 일붕(一鵬)이 머물기도 했던 절로 백사골을 오갈 때마
다 늘 지나치기만 했을 뿐, 경내로 발을 들인 적은 딱 1번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절도 아니고
나를 유혹할 만한 매력도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백사골의 시원한 산바람이 낮잠에 잠긴 풍경물고기를 살짝 건드리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유발시키면서 경내에 깃들여진 적막을 살포시 깨뜨린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大
雄殿)을 비롯하여 산신각(山神閣), 칠성각, 범종각 등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며, 기와를 얹힌 불
전 밑에는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는 슬레이트 지붕집이 한덩어리로 몰려있다. 대웅전은 서쪽
을 바라보고 있고, 나머지는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다.

.
▲  금강역사 마크가 새겨진 현통사 대문
금강역사의 무시무시한 망나니 칼에 선뜻 들어가기가 겁난다.
괜히 문을 들어섰다가 칼에 맞는 것은 아닐까..?

. .

▲  조촐한 모습의 대웅전(大雄殿)

▲  산신각 추녀에 매달린 풍경물고기

돌 대신 시멘트로 기단을 만들어 그 위에 대웅
전과 산신각, 칠성각 등을 올렸다. 앞뜰에는 조
그만 3층석탑과 승려의 사리가 담긴 팔각원당형
(八角圓堂形) 부도 2기가 밋밋한 뜨락을 수식한
다.

백사골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을 단잠에 기지
개를 키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천하에 흘려 보낸
다. 백사폭포에 앉아 풍경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속세의 더러운 말에 오염된 귀가 말끔히 정화될
지도 모른다.


♠  백사골(백석동천)의 속살로 들어서다

▲  백사골 산길
그저 평범해 보이는 저 산길의 끝에는 꿈같은 전설을 간직한 백석동천이 숨겨져 있고,
바람의 소리만이 감도는 이곳은 나그네로 하여금 절로 시상(詩想)에 물들게 한다.

▲  서울 도심이란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청정한 백사골
시원하고 청명한 산바람에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정신과 마음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오랜만에 백사골을 본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 잡아가며 백사폭포를 지나면 온갖 내음
들이 나래를 펼치는 백사골의 울창한 숲에 들어서게 된다. 제일 먼저 소나무숲이 솔내음을 풍기
며 이곳을 찾은 중생을 소독시킨다.

백사골에 발을 들이면 한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처럼 아름답게 다가오는 풍경에 가히 숨이
지릴 지경이다. 인간의 언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곳의 풍경을 완벽히 표현한다는 것은 힘
들 것이다. 또한 인간의 한낱 언어로 억지로 표현하려 드는 것은 어쩌면 백사골과 그것을 빚은
대자연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감히 글자랑을 하지 않고 그저 탄성만
연거푸 지르며, 조용히 백사골을 거닌다.

숲에 깃들여진 청명한 기운은 속세의 때를 말끔히 정화시키기에 충분하며, 정갈하게 깔린 산길
은 두 발을 즐겁게 한다. 또한 거의 1급수를 자랑하는 백사골에는 서울에서는 보기 조차 어려운
도롱뇽, 가재, 개구리, 맹꽁이 식구들이 마음껏 뛰어논다. 인간들의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이 설
땅은 점점 사라져 가고 이곳은 이제 그들의 마지막 낙원이 되었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
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인간의 차례가 될 것이다.

계곡에 누운 바위에는 지의류(地衣類)에 속하는 이끼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들이 가득 자
라고 있다는 것은 여기가 그만큼 깨끗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무성한
이끼를 만나는 것은 정말 보기가 힘들지, 이처럼 백사골은 마치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처럼 청
정함과 순수함을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  자연이 아름답게 채색한 이곳의 풍광은 정말 집으로 살짝 훔쳐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보고 싶다.

▲  언제나 달을 그리는 바위, 월암(月巖) 바위글씨

백석동천 유적을 코 앞에 두고 오른쪽 산자락의 윗부분을 유심히 살펴보면 언덕 정상에 커다란
바위가 나무들 사이로 커다란 바위 하나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바위를 잘 살펴보
면 글씨 같은 것이 보일 것인데, 그 글씨가 바로 달의 바위, 월암이다.
이 바위는 백석동천을 이루는 명소 가운데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해 있다. 위치는 백석동천 별
서터(연못터 주변) 바로 서쪽 산자락에 자리해 있지만 그를 알리는 마땅한 이정표도 없고 숲에
가려져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모른다. 나무들이 벌거벗은 늦가을이나 겨울에는 눈동자를
열심히 굴리다보면 쉽게 시야에 들어오기라도 하겠지만 숲이 무성할 때는 그나마도 잘 눈에 띄
지 않는다.

월암은 바위 한가운데에 높이 110cm, 가로 155cm 크기의 네모난 홈을 만들어 그 안에 월암(月巖
)을 새겼다. 이 바위글씨는 18세기에 백사골의 존재를 기록으로 남긴 바 있는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의 글씨로 추정되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한 글씨의 힘찬 모
습은 가히 명필 중에 명필이라 하겠다.

백사골은 나무가 울창하여 속 시원히 달님을 구경할 수 없다. 곡차 한잔 걸치러 이곳에 놀러온
선비들은 달놀이도 즐길 겸 여기까지 올라와 하늘에 걸린 달을 구경했을지도 모른다. 굳이 이광
여가 자신의 호를 새기지 않더라도 달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달놀이 기념으로 글씨를 새겼을 가
능성도 충분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어두운 밤에 곡차(穀茶) 1병 들고 찾아와 달님을 붙잡
으며 함께 잔을 걸치고 싶다.


▲  연못 서쪽을 지나는 백사골 중류 (징검다리)

백석동천 별서터 서쪽 갈림길에서 계곡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백석동천의 중심인 별서
터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계곡에 콘크리트로 둑을 두른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리는데, 둑 바로
위에 오랜 세월을 머금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짙게 그늘을 드리운다.


▲  별서터로 인도하는 돌다리 - 2개의 통돌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으로
별서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북악산에 숨겨진 옛 정원, 북악산(北岳山) 백석동천(白石洞天) -
명승 36호


▲  백석동천의 중심인 6각형 정자터와 연못

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사소문(四小門)의 하나인 창의문<彰義門, 자하문(紫霞門)>을 지나서면
여기가 서울일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가 막힌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창의문 너머
동네인 부암동(付岩洞)과 홍지동(弘智洞)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仁王山), 북한산에 안긴 분지
(盆地)로 서울의 일부라기보다는 머나먼 지방이나 산악지대의 소읍(小邑) 같은 분위기이다. 이
곳은 녹지 비율이 서울에서 매우 높은 편이며, 백사골 등의 깨끗한 계곡이 살아 숨쉰다.

예로부터 서울 근교 경승지로 명성이 높았던 부암동은 사대부와 왕족들의 별장 및 피서지로 인
기가 높았다. 세종의 3번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인 무계정사(武溪精舍)를 비롯하
여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서울 제일의 경승지이자 피서지였던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君)이 만든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이곳 백석동천까지 옛 사람들의 별장, 풍류 유
적이 풍부하게 남아있다.

백석동천은 북악산 북서쪽 백사실 계곡(백사골) 그늘진 곳에 묻혀있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별장이 있었다고 하여 그의 호를 따서 백사실, 백사골이라 불리지
만 정작 그는 이곳에 머문 적은 없으며, 조선 중기부터 백사골과 별서터를 한 덩어리로 묶어 백
석동천이라 부른다. 그 이름은 하얀 피부의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다워 붙여진 것이다. 동천(洞
天)은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붙이는 명예로운 이름이다.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  사랑채터

▲  사랑채터 북쪽의 안채터

백석동천 별서는 19세기 초반(1830년 경)에 지어진 600평 규모의 별서(별장의 일원)이다. 누가
만들었고 이곳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전해오는 것이 없으며, 별서 주인이 머물던 사랑채와 안채
, 그리고 정자와 동그란 연못이 있었다. 별서 주변에는 나무와 온갖 화초(花草)를 심어 별서를
최대한 꾸몄을 것이다.
안채는 4량(樑)집이고, 사랑채는 'ㄱ' 모양의 5량집으로 누마루가 높았다. 안채는 1917년에 집
한쪽이 기울어져 크게 수리를 했다고 하며,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으나 관리소홀과 장대한 세
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랑채와 함께 폭삭 무너져 끝내 일어서지 못했다. 사랑채는 그나
마 주춧돌과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으나 안채터는 땅속에 묻혀있다.

동그런 연못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데, 6.25때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도 무거운 상처를 입으
면서 그 휴유증으로 연못의 기능 마저 잃고 말았다. 현재는 사랑채터와 안채터, 정자터, 연못,
담장의 일부 흔적, 바위글씨 2개만이 남아 백석동천의 옛 정취를 아련히 전하며, 이 정도의 별
장을 짓고 소유할 정도면 상당한 재력을 지닌 양반이었을 것이다.

백석동천과 관련된 옛 기록으로 18세기에 활약했던 월암 이광여(月巖 李匡呂, 1720~1783)의 이
참봉집(李參奉集)이 있다. 그 책에는 '세검정과 탕춘대 계류 고간(高澗) 세폭(細瀑) 위에 동천
이 조성되어 있고, 그곳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었으며, 모정의 이름은 간정료(看鼎寮)였다'
는 내용이 있어 지금의 별서 이전부터 별장이 둥지를 트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허씨의 모정을 그의 후손들이 별서로 업그레이드 시킨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하며, 19세기에
상당한 재력이 있는 사대부가 이 일대를 사들여 머물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끝없이 내몰던 백석동천은 2005년까지만 해도 거의 동네(부암동, 신영동)
사람들만 찾아오던 그야말로 동네 사람들의 숨겨진 피서지였다. 그 흔한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
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허나 아무리 은둔(隱遁)해 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
소는 주머니 속에 든 송곳처럼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2005년에 이르러 문화재청
에서 이곳에 대해 조선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우리
나라의 휼륭한 전통 정원임을 인정하면서부터 조금씩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2005년 3월 비지정문화재의 서러움에서 벗어나 바로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으며, 2008년
1월에는 명승 36호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된 안내문이나 변변한 이정표조차도
없었으며, 2009년에 겨우 문화재 안내문과 이정표를 설치했다. 또한 2010년에 별서터 일대를 발
굴조사하여 안채터의 윤곽과 조그만 우물터를 확인했으며, 깨진 기와와 백자, 그릇 파편들을 다
량으로 수습했다.

▲  사랑채에서 바라본 연못

▲  백사골 중류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숨겨진 보석이자 별천지 같은 이곳은 꽃과 잎이 돋아나는 봄도 아름답거니
와 여름과 가을, 겨울의 설경(雪景)에 이르기까지 4계절에 모두 아름다운 절경지이다. 그중에서
늦봄과 여름에는 도심 속의 조촐한 피서의 성지로 크게 이름을 날리고 있다.
이곳은 숲이 매우 무성하여 무성하여 강렬한 여름의 햇빛도 녹음 속에 녹아내려 시원하며 나무
가 베풀어준 신선한 기운을 디저트로 삼고 백사골의 깨끗한 계곡물과 졸졸졸~♪ 음악소리를 들
으며 계곡에 다리를 담구거나 독서를 하거나 낮잠을 청하면 정말 피서가 따로 없다. 거기에 지
금은 주춧돌만 남은 별서유적을 둘러보며 자연의 일부가 되어 신선처럼 살아가고자 했던 그들(
주로 지배층들)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상상하며 그들을 배워보고
그들의 생활과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꽤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사람들의 발길이 쓸데없이 늘면서 정신줄을 놓은 사람들까지 불순물처럼 섞여 들어와 주춧
돌에 흉물같은 낙서를 남기거나, 쓰레기를 버리고, 계곡을 뒤집고, 수목을 괴롭히는 등의 무개
념짓으로 이곳의 건강도 적지 않게 위협을 받고 있어 대책이 절실하다. 아직은 멀쩡하다고 해도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외딴 곳에 있으니 언제 더 망가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바램
인데 이곳은 대중적인 명소보다는 소수의 아는 사람만이 찾아오는 비밀의 별천지로 쭈욱 내 곁
에 남았으면 좋겠다. 또한 괜히 별서를 복원하려 들지 말고 지금 모습 그대로 두었으면 좋겠다.
비록 폐허가 되긴 했지만 지금 모습이 더 운치가 강하고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얹힐
수 있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복원을 한다면 이건 그냥 두는 것만 못하다.

참고로 백석동천은 백사실, 백사실계곡, 백사골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어느 이름을 쓰든 상관은
없다. 정식 명칭은 백사실/백사실계곡으로 이곳 지명이 백사실이며, 백사골은 백사실계곡을 달
리 표현한 이름이다. 또한 백석동천은 백사골의 엄연한 일부로 백사폭포에서 백사골 상류 외나
무다리까지를 일컬으며, 외나무다리 윗쪽 계곡과 백사골 동쪽 산줄기는 백석동천의 범위에 들어
가진 않는다.

 북악산 백석동천 찾아가기 (2012년 8월 기준)
* 백석동천으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산길은 하림각, 세검정초교(현통사), 창의문 등 3개가 있다.
  여기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코스는 세검정초교에서 들어가는 것이며, 하림각은 골목길 경사가
  무지 급해 오르지도 전에 맥이 빠진다. 창의문은 많이 걸어가야 되는데, 북악산 등산이나 북
  악산길 산책을 겯드릴 경우 이용하면 편리하다.
* 각 코스별 접근 방법
① 하림각 코스 - 하림각 건너편에 신도수퍼가 있는데 그쪽에 백석동길이 있다. (백석동천을 알
   리는 이정표가 있음) 그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10분 정도 낑낑대고 오르면 백사골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온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16,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림각 하차 (버스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좀 가면 신도수퍼와 백석동천 이정표가 있음)
② 세검정초교 코스 : 세검정초교 정류장에서 홍제천 다리를 건너면 백사실계곡을 알리는 이정
   표가 있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1711, 7022, 7212번 시내버스 / 2호선 신촌역
   (1,3번 출구)에서 110번, 153번 버스 이용 / 4호선 수유역, 미아3거리역, 길음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153번 버스 이용 → 세검정초교 하차 (구기터널이나 정릉 방면에서 오는 경우는
   육교를 건너 건너편으로 이동한다. 그러면 바로 남쪽에 홍제천이 있음)
③ 창의문 코스 - 자하문고개 정류장에서 북쪽(부암동 방면)으로 가면 창의문3거리이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북악산길로 인도하는 2차선 찻길로 가지 말고 왼쪽 골목길(산모퉁이 방면
   )로 들어서면 부암동 산복길이다. 이 길을 쭉 올라 산모퉁이까페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진입하여 초소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왼쪽으로 가도 되나, 오른쪽 길
   을 추천함) 그 길의 끝에는 뒷골마을(능금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서 왼쪽 계곡길로 내려
   가면 백석동천이다.
※ 교통편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1020, 7018, 7022, 7212번 시내버스 이용
* 승용차로 백사골까지 접근도 힘들고 주차 장소도 마땅치 않다. 대중교통이 진리이다.

★ 북악산 백석동천 관람정보
* 백사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도롱뇽/개구리 보호구역이다. 조용히 살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함
  부로 냇물을 뒤집는 행동은 하지 말 것
* 백사골 일대는 의자를 제외하고 어떠한 편의시설도 없다. 약수터는 백사실 동쪽 산줄기 남쪽
  에 하나 숨겨져 있는데, 이곳에 유일한 약수터이다. (백사실약수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일대


♠  별서 주인의 정취가 담긴 ~ 백석동천 사랑채터 주변

▲  사랑채터 서쪽 - 계단 끝 언덕에 사랑채와 안채터가 있다.

▲  윤곽이 진하게 남은 사랑채터
이곳에 있었을 사랑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기와집인 것은 확실하니 그에
맞춰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허나 상상에서만 멈춰야 될 것이다.
어설픈 복원은 자칫 백석동천 별서터의 운치를 흐트려놓을 수 있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리는 백석동천 별서 입구에서 계곡을 건너면 사랑채로 오르는 돌계단이 나
온다. 정면에 보이는 계단은 아랫쪽와 윗쪽 2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월의 태클로 다소 헝클
어져 있지만 경사가 완만하여 계단으로서의 역할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반면 연못 쪽에서 오르
는 계단은 다듬은 돌만 계단처럼 얹혀놓은 수수한 모습이지만 높이가 고르지 못해 어린이나 다
리가 짧은 사람은 오르기 힘들다.

계단 끝 언덕에는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과 석축의 윤곽이 진하게 남아있는 사랑채터가 있다. 연
못이 잘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지어진 'ㄱ' 구조의 사랑채로 아쉽게도 생전의 뚜렷한 사진조차
남기지 못한 채, 1970년경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다행히 주춧돌과 건물터는 잘남아있
으나 동쪽 부분이 잡초에 묻혀있던 것을 2010년 발굴조사 이후 새롭게 드러난 흔적을 더해 지금
의 모습으로 산듯하게 정비했다.


▲  2중으로 쌓은 석축 위에 심어진 사랑채터의 높다란 주춧돌
받쳐들 대상을 상실하여 지금은 막연히 하늘을 이고 있다.

▲  사랑채로 오르는 서쪽 계단

▲  연못에서 사랑채로 오르는 계단

연못쪽으로 돌출된 사랑채 서쪽 부분은 주춧돌의 높이가 동쪽 부분보다 3배 정도 높다. 이곳은
별서 주인의 생활공간으로 연못을 바라보며 책을 보거나 명상을 즐겼을 것이며,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곡차(穀茶)를 대접하여 1잔씩 주고 받았을 것이다. 사랑채 동쪽 부분은 키 작은 주춧돌
과 석축이 남아있는데, 별서 주인의 서재(書齋)로 여겨진다.


▲  사랑채터 옆에서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연못터
2010년 발굴조사에서 발견된 석조유구(遺構)로 연못(또는 우물터)으로 여겨진다.

▲  허전한 공터가 되버린 안채터
안채터의 흔적은 발굴조사 이후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스란히 묻었다.
그 허전한 터를 푸른 잡초가 따스히 보듬어준다.

.
▲  2010년 발굴조사로 구체적으로 확인된 사랑채터와 안채터

▲  사랑채 뒤쪽 석축과 돌담

▲  돌담의 흔적

사랑채 뒤쪽(북쪽)에는 넓은 안채가 있었는데, 사랑채와 비슷한 시기에 무너졌다고 한다. 이후
그 자리에는 엉뚱하게도 배드민턴장이 들어섰는데, 그 과정에서 안채터가 강제로 생매장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별서터의 건강을 위협하던 배드민턴장은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 2010년 여름부터 별서터 일대를
발굴하면서 갈아 없앴으며, 지하에 묻힌 안채터의 윤곽을 확인하고 여러 토기와 기와조각을 수
습했다. 이후 발굴을 정리하고 2011년 3월에 보존을 위해 안채터를 다시 땅속에 묻었으며, 한쪽
구석에는 이곳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햇볕을 보게 된 주춧돌과 기와조각, 여러 돌을 한데 수습해
조그만 돌탑을 이룬다. 그리고 사랑채와 안채터 동쪽 산자락에는 석축과 돌담의 흔적이 옛 산성
(山城)의 잔해처럼 진하게 남아있다.

비록 기와를 입힌 사랑채와 안채는 세월의 용광로에 녹아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주춧돌은 사랑
채의 기품과 분위기를 흐릿하게 간직하며 망각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또한 방문을 열고 연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곡차 1잔과 시상(詩想)에 잠겼을 별서의 주인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정말로
부러움이 가득 돋아 오른다.


♠  백석동천 연못과 정자터

▲  사랑채터 동쪽 부분에서 바라본 연못

▲  남쪽에서 바라본 연못과 별서터

석동천 별서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못은 둘레가 약 100m 정도 되는 보름달처럼 큰 못이다.
별서 주인은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장안에 솜씨 좋은 목공과 석공 등의 기술자를 불러
거처를 만들고 사대부의 지위를 이용해 인근 백성을 동원하여 연못을 팠을 것이다.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여 둥그런 연못을 수시로 채웠으며, 정자터 부근에 계곡 물을 끌여들이던
흔적이 있다. 그리고 물이 팔자좋게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서쪽에 수로를 파 계속 물갈이가 되
도록 유도했다.
연못과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지나가던 해와 달도 그 연못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을 것이요.
주변 나무와 꽃들도 연못을 거울로 삼아 매무새를 다듬고, 별서 주인은 벗을 불러 곡차와 차 1
잔의 여유를 누리며 상팔자를 누렸을 것이다.

그들이 팔자 좋게 놀던 시절은 세상이 한참 아비규환에 젖어있던 시기로 백성들의 삶은 매우 어
려움을 겪고 있었다. 민초(民草)들은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가혹한 세금삥과 양반들의 수탈
에 죄다 털려 힘들게 살아가고 있건만 별서 주인은 다른 나라 이야기마냥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
을 것이다.

별서의 주인이 가고 여러 대를 거치면서 풍류의 현장이던 이곳은 서서히 고개를 숙였고, 천하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은 조용하게 묻힌 이곳까지 총탄을 선사해 정자가 파괴되고 연못 또한
강제로 고자가 되었다. 땅을 파고 연못 주변에 두른 석축과 정자의 주춧돌은 이곳이 예전 연못
임을 아련하게 알려줄 뿐이다.

6.25이후 연못은 물고기가 수영하고 연꽃이 살며시 떠있던 물 대신 잡초와 조그만 돌이 그 자리
를 메우고 있고, 늦가을에는 나무들이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싹 털어낸 낙엽들이 가득 연못
을 이루어 낙엽의 마지막 보금자리이자 누런 연못이 된다.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연못의 구성원
을 싹 물갈이시켰던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을 진하게 말해주듯, 처량함과 공허함이 가득한 백석동천 연못은 비록 그 기능은
잃었지만 자연의 생명력을 여전히 싹트고 있고, 자라고 있다. 여름의 제국 시절이나 비가 많이
오는 경우 연못에 물이 많이 담겨 비록 예전만큼의 위엄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왕년의 모습을 되
찾기도 한다. 그러니까 백사골의 물을 끌어들이지는 못하고 여름의 제국이나 하늘이 내린 비에
의지해 연못의 티를 되찾는 것이다. 마침 우리가 오기 며칠 전부터 비가 많이 내려 연못에는 물
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수면 위에는 물을 먹고 자란 풀들이 무성하게 돋아나 초록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그
만 생명체의 또다른 세계를 빚어내고 있다. 마치 늪지대 같은 분위기라 다가서기가 좀 껄끄럽다.
연못에 물이 많이 고였다고는 하나 서쪽에 뚫어놓은 수로로 물이 빠져나갈 정도의 수량은 아니
고 물의 깊이도 겨우 성인 무릎에 닿을 정도이다. 이곳에 담긴 물은 자연에 의해 증발할 때까지
머문다.

연못이 제법 넓기 때문에 물만 더 채운다면 조그만 조각배를 하나 띄워 가볍게 뱃놀이를 즐겨도
무방할 듯 싶다. 내가 만약 개미나 걸리버여행기의 나오는 난쟁이었다면 나뭇잎 하나 마련하여
뱃놀이를 즐겼을 지도 모른다.

연못을 비롯한 별서터 일대는 나무가 울창하여 한여름에도 뜨거운 햇볕이 마음 놓고 내려오기가
힘들다. 서울 도심 속에 별천지이자 보석과 같은 곳으로 예전에 이곳에서 받은 감동이 슬슬 되
살아난다. 거의 오염되지 않은 계곡과 창덕궁의 후원(後園)도 울고 갈 정도로 삼삼한 삼림은 이
곳을 찾은 속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만약 이곳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었다면, 그 감
동의 정도는 그리 크지 못했을 것이다.


▲  주춧돌과 돌계단만 덩그러니 남은 6각형 정자터
6각형 정자를 육모정이라 부른다.

연못에 발을 담구며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정자를 떠받치던 6개의 돌기둥들, 허나 지금은 저렇게
허전한 대머리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야 그 허전함을 달래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정자를 복
원하는 것은 쌍수들고 반대한다. 그냥 저렇게 둬야 백석동천의 운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연
못에 심어진 기둥 4개는 높이가 약 2m로 나머지 2개는 돌계단 옆에 있다.

별서 주인은 돌계단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 이야기를
하며 차나 곡차를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몸을 기대며 연못을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았겠지. 그가 풍류를 좀 안다면 기생들을 불러 정자 안에서 팔자 늘어지게 놀았
을 것이고, 아~ 상상만 해도 정말 부러울 뿐.. 이래서 어떻게든 권력층이나 부자가 되야 되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뜬 구름일 뿐, 상상으로만 끝나버린다.


▲  물푸레나무 밑에 누운 바위

연못 우측에는 높이가 대략 20m에 이르는 물푸레나무가 연못에 그늘을 드리운다. 나이가 약 150
~200년 정도 되었다고 하니 별서 주인이 별서 완공 기념으로 심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무 밑에는 거대한 돌이 누워있는데, 이는 별서를 지을 때 부근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그
돌에 따로 손질을 가하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었는데,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
원을 꾸민 이 땅의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 마당쇠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신세를 한탄하던 자리는 아니었을까? 그들
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서 놀지를 못하니 이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
를 한탄했을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정한 평등 사회는 언제나 올련지...?


▲  연못 우측 수로에 놓은 소박한 돌다리
길쭉한 통돌 2개로 이루어진 조촐한 돌다리로 다리 밑에 뚫린
수로는 연못의 물을 빼는 역할을 했다.

▲  연못/정자터 옆으로 흐르는 백사골
콘크리트 둑을 두른 것이 너무 거슬린다. 이런 것을 두고 바로 옥의 티라고 한다.


♠  백사골 상류와 백석동천 바위글씨

 백석동천 별서터 입구에서 백사골 상류로 올라가는 산길

▲  오리 모양이 달린 솟대와 그를 품은 백석동천 돌탑

서터에서 계곡 윗쪽 일부는 도롱뇽 등의 수중 생물들을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하여 예
전처럼 계곡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다만 윗쪽(백사실약수터 입구)에서 조금 내려오는 것
은 괜찮다. 계곡의 통제로 산길로 조금 우회해서 가야되는데, 2012년에 별서터 입구 주변 산길
을 손질하고 그 길 좌측에 산불 방제 장비를 둔 붉은 색의 구제함과 돌탑을 만들어 조촐하게 볼
거리를 선사한다.
백석동천 돌탑은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탑으로 이곳 외에도 백사골 동쪽 산자락에 여럿 심
어져 있는데, 이 탑은 윗쪽에 오리가 달린 나무 솟대를 심어 조금 차별화를 두었다.

산길을 오르면 우거진 소나무 숲이 나오는데, 그 숲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백사골 상류와 능금
마을로 이어지고, 오른쪽(부암동 주택가 방면)으로 가면 백석동천 바위글씨가 나타난다.


 백석동천의 경관을 한몫 돕고 있는 소나무숲길

▲  백석동천 바위글씨를 간직한 집채만한 바위

▲  너무나 뚜렷한 백석동천 바위글씨

소나무숲에서 부암동 주택가로 이어지는 서쪽 산길로 접어들면 '白石洞天' 4자가 새겨진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머물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산천에 붙여지는 이름으
로 아무 산천에나 부여하는 이름이 아니다. <비슷한 말로 동학(洞壑)이라 불리기도 함> 이곳이
백석동천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하얀 피부의 바위와 암반들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바위 피부에 도장처럼 박힌 이 글씨는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월암과 비슷한 시
기가 아닐 듯 싶은데, 정말로 기가 막힌 명필임이 틀림없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기를 꿈꾸었
던 선비와 사대부들은 경관이 기가막힌 경승지에는 저렇게 기념 낙서를 남겼는데, 백사골 역시
그런 낙서가 2개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의 풍경이 그들을 몹시나 감동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허
나 거창 수승대(搜勝臺)의 귀연암(龜淵岩,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너무 낙서로 도배가 된 것
도 그리 보기는 좋지 않다. 어느 것이든 적당한 것이 좋다.


▲  푸르름이 가득한 백사골의 호젓한 숲길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곳만은 못하리라.. 비록 짧은 거리이지만
알록달록 익어가는 숲길을 거닐며 나무들과 잠시나마 말벗이 되어 본다.


▲  넓적한 하얀 바위가 파노라마를
이루는 백사골 상류

백석동천 바위글씨에서 능금마을로 인도하는 숲
길을 조금 가면 백사골 상류가 나온다. 하얀 피
부의 넓은 반석들이 줄줄이 나와 탄사를 자아내
게 하며, 때묻지 않은 청정한 냇물이 바위를 타
고 아래로 흘러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운치를
진하게 우려낸다. 백사폭포까지 순수함을 지닌
물은 백사아랫폭포부터 속세의 기운을 강제로
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속물로 변해간다.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
을 간직한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겠는가?

여름에는 아이들의 물놀이 및 수중 생물의 탄압
현장이 되고, 시민들도 소풍/나들이로 이곳에
들어와 돗자리를 피고 물에 발을 담구거나 낮잠
을 청하며, 피서를 즐긴다. 옛 사람들 역시 반
석에 걸터앉아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
음을 즐겼을 것이다.

백사골(백사실)은 능금마을 뒷쪽에서 시작하여 백석동천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홍제천으로 흐른
다. 그리고 백석동천은 윗 사진의 바위를 지나 외나무다리까지로 백사폭포부터 계곡 상류 외나
무다리까지를 백석동천의 구역으로 보면 된다. 다리를 넘어서는 더 이상 괜찮은 바위가 나오질
않고, 옛 사람들의 흔적도 전혀 나오질 않는다.


▲  백사골 상류 - 이 부분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능금마을로 이어지고, 계곡을 건너 동쪽 산길로 들어서면
백사골 동쪽 능선과 백사실약수터로 이어진다.

▲  백사골 상류 외나무다리

백석동천 상류의 넓직한 반석을 지나면 2012년에 만든 외나무다리가 깊은 산골의 고적한 풍경을
진하게 우려낸다. 2개의 나무 줄기로 엮어서 놓은 것으로 겨우 1명이 지나갈 정도로 좁다. 이런
다리에서 원수를 만난다면 어찌될까? 허나 다리의 길이도 짧고, 물의 수심도 얕으며, 다리 아랫
쪽에 계곡을 건널 수 있는 곳이 있어 굳이 다리의 통행을 두고 싸울 필요는 없다.
여기서 오른쪽(서쪽)에는 비닐하우스와 원두막 비슷한 시설, 그리고 여러 경작물이 무럭무럭 자
라는 밭이 길게 펼쳐져 있어 도심 속의 생소한 풍경에 두 눈이 잠시 방황을 한다.

다리를 지나서는 길이 매우 좁아지고 계곡도 2m 내외로 폭이 좁아진다. 여러 번 계곡을 건너야
되는데,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쌓였을 때는 통행하기가 힘들다. 그런 길을 계속 고집하면
계곡 너머로 집들이 보이면서 작은 산골마을이 모습을 비춘다. 그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의 두
메산골인 능금마을(뒷골마을)이다. (☞ 부암동 능금마을 보러가기)

이렇게 하여 백석동천 가을 나들이는 이렇게 마무리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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