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륜당'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1.12.08 조선시대 교육의 중심지이자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깃든 곳, 성균관 늦가을 나들이 (문묘 은행나무, 성균관대성전 은행나무)
  2. 2019.07.07 민통선에 묶여있는 강화도 옆구리의 커다란 섬, 교동도 여름 나들이 ~~ (교동읍성, 교동향교, 성전약수, 화개사, 강화나들길 9코스)
  3. 2018.01.23 의성 허준과 겸재 정선의 체취가 깃든 옛 양천고을의 중심터, 서울 가양동 둘러보기 ~~~ (양천향교, 소악루, 궁산, 양천고성터)

조선시대 교육의 중심지이자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깃든 곳, 성균관 늦가을 나들이 (문묘 은행나무, 성균관대성전 은행나무)

성균관(문묘) 늦가을 나들이



' 조선시대 교육의 중심지, 성균관(문묘) 늦가을 나들이 '

성균관의 자랑, 문묘 은행나무

▲  성균관의 자랑, 문묘 은행나무

성균관 명륜당 성균관 대성전(문묘)

▲  성균관 명륜당

▲  성균관 대성전(문묘)

 



 

대자연이 우리에게 내린 4계절 가운데 오색 단풍과 황금색 은행잎이 흩날리는 늦가을 풍
경이 단연 갑(甲)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은 4~5월 봄 풍경;)
마치 불고기가 불을 만난 듯 아주 맛있게 익어가는 늦가을은 그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
내기가 정말로 아깝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멀리 갈 것도 없이 서울
장안 곳곳과 즐겨찾기 명소, 산을 찾아다니며 늦가을의 짧기만 한 바지 가랑이를 붙잡는
다. 늦가을은 10월 말에서 11월 중순, 길어봐야 11월 말이 고작이라 정말 후딱 간다.

이번에 찾은 늦가을 명소는 조선시대 교육의 중심지인 성균관(문묘)이다. 이곳은 부근의
여러 즐겨찾기 명소(낙산, 북촌, 성북동 등)가 있음에도 이상하게도 손과 발, 마음이 잘
가지 않아서 찾은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인데, 이번에 확실히 그곳을 익히고자 성균관으
로 출동했다.



 

♠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
서울 문묘(文廟)와 성균관(成均館) - 사적 143호

▲  성균관 내부로 인도하는 명륜당 서쪽 문

성균관대학교 교내 동남부에 넓게 자리한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으로 오늘
날의 국립 서울대와 같은 존재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성균관은 고려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에서 비롯되었는데, 고려 충렬왕(
忠烈王) 시절인 1289년 성균감(成均監)으로 이름을 갈았다. 여기서 성균(成均)은 음악의 조율
(調律)을 맞춘다는 의미로 어그러짐을 바로 잡아 이루고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것
이다. 즉 쉽게 풀이하면 어느 누구도 편중됨이 없이 모두 균형에 맞게 가르치겠다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그러니 의미만큼은 참으로 아름답다.

1308년 성균관으로 이름이 갈렸으며, 1356년 다시 국자감으로 바뀌었다가, 1362년 성균관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1392년 천하가 조선으로 바뀐 이후에도 그 이름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국도
(國都)를 개경(開京)에서 서울(한양)로 옮긴 이후, 1395년부터 숭교방(崇敎坊, 지금의 명륜동
)에 새로운 성균관을 닦았다. 이때 대성전과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양현고(養賢庫
) 등 96칸을 지었으며, 1398년에 완성을 보았는데, 성균관대는 바로 1398년을 학교 창립 연도
로 삼으며 장대한 역사를 내세우고 있다.

성균관은 유교식 교육기관이라 유교의 성현(聖賢)을 봉안하는 제사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그
래서 문묘(文廟)라 불리기도 한다. (대성전만 따로 문묘라 부르기도 함;) 그러다보니 성균관
또는 문묘라 섞어 부르기도 하는데, 어느 것이든 모두 정답이다.
또한 최고의 교육기관이란 뜻에서 태학(太學)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고구려(高句麗) 제
일의 교육기관인 태학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 싶으며, 주(周)나라 때 제후(諸侯)가 다스리던
도시에 설치했던 학교의 명칭인 '반궁(泮宮)'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는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꼴통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보인다. 즉 조선 제일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일개 제후
국의 학교로 낮춘 것이다.

성균관 최고 책임자는 정3품인 대사성(大司成)이다. 물론 그보다 높은 정2품 지사(知事)와 종
2품 동지사(同知事)도 있으나 이들은 다른 관직을 겸하는 겸관(兼官)이었으며, 어디까지나 대
표는 대사성이었다. 그 밑에 종3품 사성(司成) 2명, 정4품 사예(司藝) 3명, 정5품 직강(直講)
4명, 정6품 전적(典籍) 13명, 정7품 박사(博士) 3명, 정8품 학정(學正) 3명과 학유(學諭) 3명
, 정9품 학록(學錄) 3명을 두었으며(인원은 시기마다 조금씩 틀림) 유생을 가르키는 교수직은
22명에서 나중에 38명으로 증원되었다.
영조(英祖) 때는 정3품 제주(祭酒)가 신설되어 1,2품관을 겸직하도록 했으며, 정조(正祖) 때
는 대제학(大提學)이 지사를 겸직했다.

그렇다면 성균관 입학 자격은 어떠했을까?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 등, 사마시(司馬
試)에 붙은 사람에게 우선 입학 기회가 주어졌다. 이들을 본과생(本科生)이라고 하며, 상재생
(上齋生)이라 부르기도 했다.
입학 정원은 처음에는 150명이었으나 1429년에 200명으로 늘어났으며, 조선 후기에 100명으로
축소되었다. 입학 연령은 15세 이상이나 나이 상한을 따로 두지 않아서 50살 먹은 사람도 들
어오기도 했다.

그러면 성균관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붙은 사람만 들어간 것일까? 그건 아니다. 늘 예외는 존
재하기 때문이다. 사학(四學)을 배운 유생 중 15세 이상으로 소학(小學), 사서(四書)를 배우
고 5경(五經) 가운데 1경 이상 익힌 사람은 입학 시험인 승보(升補)를 통해 입학하기도 했으
며, 공신(功臣)과 3품 이상의 고위 관료, 왕족 중에 소학에 능통하거나 문과(文科) 및 생원/
진사시의 초시(初試)에 붙은 사람은 음서(蔭敍)로 쉽게 들어가기도 했다. 또한 이미 관직에
진출한 사람 중에 입학을 원하는 자도 상황에 따라 입학이 허용되었다.
이렇게 승보나 음서로 들어간 사람을 하재생(下齋生) 또는 기재생(寄齋生)이라 불렀으며, 왕
세자(王世子)나 성균관 입학을 원하는 왕자는 음서제의 극치를 보이며 그냥 들어왔다. 물론
그들은 궁궐에서 기본적인 유교 교육을 받고 오기 때문에 입학 자격은 충분했다.

▲  성균관 신삼문(神三門)

▲  성균관 사람들의 시계, 북

성균관 유생은 명륜당 좌우에 설치된 동재와 서재에서 기숙 생활을 했는데, 매월 1일에는 관
대(冠帶)를 갖추고 문묘에 나가 4배례(拜禮)를 했다.
매일 동트기 전에 북소리가 1번 나면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해 북소리가 2번
나면 의관을 갖추고 책을 읽는다. 한겨울 같은 경우에는 대략 새벽 5~6시에 첫 북이 울리고,
일출이 시작되는 7시에 2번째 북이 울린다.

북소리가 3번 나면 다들 진사식당으로 우루루 달려가 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했는데, 식사 때
마다 원점(圓點)을 하나씩 찍어주었다. 이것이 일종의 출석 체크로 원점 300점을 넘어야 과거
시험 대과(大科)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퇴장하면 교수들이 명륜당에 정좌하고, 북소리가 또 나면 입정(入庭)하여 상읍
례(相揖禮)를 하고 자기 방 앞으로 가서 서로 절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유생이 교수에게 일강(日講)을 청하면 상재와 하재에서 각각 1명씩 뽑아 읽는 책을 상대로 강
의를 행한다. 북소리가 2번 나면 모든 유생은 읽는 책을 가지고 사장(師長) 앞에 나아가 배운
것을 논란(論難)하여 그것을 해결한 다음 새 것을 배운다.
이때 많이 배우는 것을 힘쓰지 않고 정밀하게 연찬하는 데에 힘쓴다. 과목당 독서 기간을 정
하고 있는데, '대학'은 1개월, '중용'은 2개월, '논어'와 '맹자'는 각각 4개월, '시경','서경
','춘추'는 각각 5개월, '주역'과 '예기'는 각각 7개월이다.

그렇다고 유생들이 무조건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치적인 활동 단체인 재회(齋會
)를 두었으며, 나라의 일에 적극 나서 집단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
면 권당(捲堂. 집단 수업 거부), 공관(空館)이라는 실력행사를 벌여 제왕을 피곤하게 만들기
도 했다. 그래서 절대왕권을 추구하던 연산군(燕山君)은 성균관 유생들이 건방지다며 성균관
을 일시 폐쇄시키는 위엄을 보이기도 했다.

성균관 유생들은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라에서 학전(學田)과 외거노비(外居奴婢) 등을
지급 받았다. 그러니 성균관에 머무는 동안은 학비 걱정, 생활비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교
육 경비로 쓰이는 전곡(錢穀)의 출납은 양현고에서 담당했으며, 유생 상당수가 잘사는 양반들
이라 찬이 매우 호화로웠다고 한다. 특히 소고기 소비가 많았다고 하며, 성균관 부근 명륜동
사람들이 성균관에 필요한 고기와 채소, 쌀을 납품하여 돈을 벌었다.

▲  성균관 문묘 은행나무

▲  하연대

성균관 교과 과정은 사서와 오경을 구재(九齋)로 나누어 가르쳤다. 그 밖에 과문(科文)의 제
술(製述)도 부과하였고, 제사(諸史)도 독서하였다. 하지만 노장사상(老莊思想)과 불경(佛經),
기술과 온갖 잡류(雜流), 백가자집(百家子集)은 가르치지 않았다. 오로지 고리타분한 유학만
취급한 것이다.

수업 방식은 먼저 구재 중 1단계인 대학재(大學齋)에 들어가 '대학'을 배웠다. 그것을 마친
다음 예조(禮曹)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관원 1명과 대간(大諫,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관원이
각각 1명씩 나와서 성균관 교관과 함께 해당 학생에게 질문을 하여 얼마나 이해했는지 따져본
다. 그것을 통과하면 2단계 논어재(論語齋)로 올라가며, 떨어지면 통과할 때까지 대학재에서
나머지 공부를 하도록 했다. 이런 방식으로 논어재, 맹자재(孟子齋), 중용재(中庸齋), 시재(
詩齋), 서재(書齋), 역재(易齋)로 진재(進齋)하도록 했다.
이렇게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모두 통과하면 명부에 기재하여 성균관에 보관했다가 과거가 열
리는 식년(式年)에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왕에게 보고해 문과초시(文科初試)를 보게 했다.
즉 과거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교수와 유생 사이에는 질의응답식의 토론 수업 방식과 개별 지도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교수
1인당 학생 수를 절대로 10명을 넘지 않게 했다.

성균관은 1398년에 완성되었으나 1400년에 화재로 거의 앉은뱅이가 된 것을 1407년에 다시 지
었다. 이후 계속 증축하여 몸집을 불려갔으나 임진왜란 때 죄다 잿더미가 되고 만다.
1601년 성균관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나 재정도 여의치 못했고 성균관이 워낙 넓은 탓에 명륜
당 등 우선 급한 건물부터 공사에 들어가 1607년에 상당수 완공을 보았으며, 그 이후에도 주
변 건물을 계속 재건하여 17세기 중반에 비로소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1869년에 크게 중건하
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허나 조선 후기에는 성균관 재정이 늘 바닥을 보였고, 안동김씨 세력이 나라를 말아먹으면서
과거제도 또한 불공정하게 운영되어 성균관의 기능은 차차 약화되기에 이른다. 그런 와중에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이 발표되어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1895년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칙령(勅令) 제136호에 따라 전국의 향교(鄕校)와 성균관의 교육 기능을 지우면서 제사 기능만
수행토록 했다. (그래도 교육 기능은 조금 남아 있었음) 그로 인해 지체 높은 성균관도 국가
최고의 교육 기관의 자리에서 떨려나 유교 성현에게 제삿밥이나 올리며 유교 전통이나 지키는
공간으로 크게 축소되고 만다.
이때부터 성균관 교육은 1887년에 부설된 경학과(經學科)에서 전담하게 되었으며, 1910년 이
후 왜정(倭政)은 성균관과 전국 향교의 재산을 분리하여 그나마 남은 교육 마저 못하게 하는
한편, 성균관의 명칭을 경학원(經學院)으로 멋대로 바꾸어 버렸다.
이에 전국 유림들은 성균관을 살리고자 여러 활동을 전개하여 1930년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설립했으며, 1933년 명륜전문학원으로, 1942년 명륜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꾸어 성균관의 전통
을 이어나갔다. 허나 왜정의 방해로 1943년 폐교 조치가 되자 청년연성소(靑年鍊成所)로 간판
을 바꾸었다.

1945년 이후, 명륜전문학교를 다시 열었으며, 1946년 9월 성균관대학이 정식 설립되었다. 그
리고 1953년 성균관대학교로 이름을 바꾸면서 종합대학이 되었는데, 이때 독립운동가인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선생이 초대 학장 및 총장이 되었다.
이후 성균관과 성균관대는 늘 한 몸처럼 지내다가 분리되었으며, (그래도 여전히 한 몸) 전국
에 남아있는 234개의 향교를 관리하고 그들과 함께 유교 사상과 전통문화를 이어가는데 그 역
할을 하고 있다.

▲  묘정비각과 대성전 은행나무

▲  좌측에서 바라본 명륜당

드넓은 성균관은 유교 성현을 봉안하며 제를 지내는 대성전을 앞쪽에 두고, 교육 공간인 명륜
당을 뒷쪽에 둔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로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존경각, 육일각,
서월랑, 동월랑, 향관청, 서리청, 정록청, 서벽고, 직방, 진사식당, 서재, 동재, 서무, 동무,
제기고, 삼문, 수복청, 전사청, 비천당, 탕평비각, 묘정비각, 숭보사 등 2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을 지니고 있다. <계성사(啓聖祠) 등 일부 건물은 성균관대 확장 과정에서 사라짐>
경내를 명륜당 구역과 대성전 구역, 성균관의 온갖 일을 돌보던 명륜당 동북 구역 등 3개 구
역으로 나눌 수 있으며, 비천당과 숭보사는 경내 바깥에 깨알처럼 따로 있다.

성균관 전체는 '서울 문묘와 성균관'이란 이름으로 국가 사적 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대성전과 동무, 서무, 삼문, 명륜당을 따로 분리해서 '서울 문묘 및 성균관'이란 어정쩡한 명
칭으로 국가 보물 141호의 지위를 부여했다. 그러니까 대성전과 동무, 서무, 명륜당, 삼문은
사적 등급 외에 보물 등급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숭보사는 따로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
위를 누리고 있으며, (현재 성균관과 분리된 상태) 명륜당 뜨락의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로,
대성전 뜨락의 은행나무는 서울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외부에서 성균관으로 들어가는 길은 크게 2개가 있다. 명륜당 서쪽 문을 이용하는 것과 동재
동쪽 향문을 통해 들어서면 되며, 그밖에 문은 굳게 봉해져 있다. 그리고 신삼문은 석전대제
가 열리는 날에만 잠깐씩 입을 연다.
지금은 없지만 성균관 서쪽과 남쪽, 동쪽에 조그만 물줄기가 흘렀는데, 바로 북악산(백악산)
동쪽 종점인 와룡공원 부근에서 흘러내려온 것으로 지금은 생매장당해 흔적 조차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53일대 (성균관로 25-1, ☎ 02-760-1472)
* 성균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이 살짝 월담을 한 성균관 뒷쪽 돌담



 

♠  성균관 명륜당 동북쪽 구역

▲  존경각(尊經閣)

세상을 향해 활짝 입을 연 명륜당 서쪽 문을 들어서니 바로 명륜당의 육중한 뒷통수가 위압적
으로 다가온다. 그 뒷쪽에는 석축을 쌓고 대나무와 소나무 등 온갖 꽃과 나무를 심어 조촐히
숲을 닦았는데, 그 동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지닌 존경각이 별도의 돌담을
들이밀며 자리해 있다.

존경각은 지금의 도서관으로 성종(成宗) 시절 성균관에 책이 부족하자 한명회(韓明澮) 등의
건의로 1475년에 지어졌다. 보통 장서각(藏書閣)이란 이름을 많이 쓰지만 성종은 유교 경서를
존중한다는 의미로 '존경각'이란 이름을 내리고 많은 책을 하사했다.
책은 보통 교서관(校書館) 등에서 인출되는 것을 받았는데, 책이 부족할 때는 지방에서 인출
되는 책을 납본하게 했으며, 명/청나라에서 수입하기도 했다. 소장 도서는 모두 유교, 성리학
에 관한 것으로 기타 사상과 기술 관련 책은 일절 없었다.

1514년 소실된 것을 재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책 태반이 잿가루가 되버려 남은 책은 1,2종에
불과했다. 하여 급한데로 더러워지거나 낡은 책이라도 비치해 사용하다가 1626년 건물을 중건
했으며, 조선 후기까지 계속 소장 서적을 불려가다가, 1895년 이후 경학과가 설치되면서 근대
교육기관의 도서관으로 변화했다.
허나 왜정과 6.25를 겪으면서 소장 서적은 대부분 사라지고 건물만 남아있으며, 유교의 폐쇄
적인 본능이 깃들여진 듯, 굳게 봉해져 있어 내부 접근은 불가능하다.


▲  명륜당 뒷쪽 (오른쪽 건물이 존경각)

▲  육일각(六一閣)

존경각 동쪽에는 역시나 굳게 닫힌 육일각이 붉은 피부를 드러내며 자리해 있다. 겉으로 봐도
딱 창고처럼 보이는데, 알고 보니 활과 관련된 도구를 보관하던 일종의 무기고였다.
이곳은 대사례(大射禮) 때 사용된 활과 화살, 웅후(熊候, 곰이 그려진 과녁), 미후(麋侯, 사
슴이 그려진 과녁) 등을 보관했다. 대사례란 제왕이 큰 행사의 뒷풀이 차원에서 신하들에게
베풀던 활쏘기 대회로 성적이 좋으면 상을 내리고, 과녁을 맞추지 못하면 벌주(罰酒)를 내리
거나 행사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성균관 대사례는 세종 때 시작되어 성종 때까지 종종 행해졌으나 이후 중지된 것을 영조 시절
에 다시 시행했는데, 제왕이 성균관에 나가 제를 지내면서 대사례를 실시할 때 육일각에 보관
된 무기를 가져와 행사에 사용했고 행사가 끝나면 다시 이곳에 넣었다.
활쏘기는 사대부들이 익혀야되는 육예(六藝)의 하나로 예(禮)와 악(樂). 사(射, 활쏘기), 어
(御), 서(書), 수(數)를 육예라고 하며, 육예중 하나인 활을 보관하는 곳이라 하여 육일각이
라 했다.

현재는 존경각과 마찬가지로 껍데기로 남아있으며, 그 앞에 덥수룩하게 자란 잡초들이 현재의
처지를 말해준다.


▲  팔작지붕의 정록청(正錄廳)

명륜당 동북쪽 협문을 들어서면 말쑥한 모습의 정록청이 마중한다. 이 건물은 성균관 참하관(
參下官)이 성균관 관련 시정(時政)을 기록하던 곳으로 여기서 기록된 문건은 현책(玄冊)이라
불려 따로 독(櫝) 안에 비장해 출납을 금했다.

1398년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26년에 재건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참하관들
의 휴식처로 이용되기도 했으며, 석전대제를 관리하는 관원들이 제사를 준비하던 장소로도 이
용되었다. 1945년 이후 성균관 유도회의 중앙사무실로 이용되었으나 지금은 비어있다.


▲  향관청(享官廳)

성균관 가장 뒷쪽에는 향관청이 동/서월랑을 거느리며 자리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
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대청은 석전대제 때 쓸 향축(香祝)을 봉안했으며, 좌우 방은 제사에 임
하는 향관(享官)들이 향사 전날 재계(齋戒)하며 잠시 머물거나 제사 업무를 담당한 관리들이
머물렀다.

원래 향관청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나 석전대제 때만 되면 준비 공간이 늘 부족해 제사를 준
비하는 관리들이 동재와 서재를 빌려 머물렀다. 그때 쫓겨난 동/서재 유생들은 성균관 관노(
官奴)의 방을 빌려 거처하니 그 폐단을 고치고자 별도의 향관재(享官齋)를 지어줄 것을 청원
하여 1474년에 부랴부랴 지어진 것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53년에 중건했으며, 1740년에 영조가 석전대제에 참여하여 향관청
현판을 내렸다.

▲  서월랑(西月廊)

▲  동월랑(東月廊)

향관청 앞에는 서로 비슷하게 생긴 월랑 2채가 있다. 서쪽에 자리한 월랑은 서월랑, 동쪽 월
랑은 동월랑이라 하는데, 이들은 서로 벽을 보이며 마치 원수를 대하듯 등지고 있는 점이 이
채롭다. 그래서 툇마루와 방문은 뒷쪽에 가야 있다.

월랑은 석전대제 등 성균관의 주요 행사 때 감찰 집사(執事)들이 머물던 공간이다. 하지만 그
들이 머무는 기간은 행사 때 며칠이 전부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유생들의 숙소로 사용했다. 동
재와 서재의 수용 능력이 늘 부족했던 탓이다.
1966년 동/서월랑과 남쪽에 있던 포주(庖廚)가 무너진 것을 1986년에 동/서월랑만 복원했으며,
동월랑 담장 너머에 지금은 성균관에서 분리된 숭보사가 있다.

▲  정록청 동쪽 창고

▲  서리청(書吏廳)과 비복청(婢僕廳)

정록청 동쪽에는 창고를 비롯해 직방(直房), 서리청, 비복청, 서벽고(西壁庫), 주소 등의 조
그만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서리청은 문서의 기록과 관리를 담당하던 서리(書吏)들이 일을 보던 곳이고, 비복청은 음식을
만드는 여인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들 공간은 문이 닫혀 있으며, 서벽고에는 오래된 회화나
무가 주변에 그늘을 드리운다.


▲  비복청과 서벽고, 회화나무

▲  성균관 유생들이 제일 좋아했던 곳, 진사식당(進士食堂)

직방 남쪽에는 성균관 사람들의 밥을 책임지던 진사식당이 길게 자리해 있다. 여기서 진사는
유생을 뜻하는데, 성균관 식구들이 유생부터 교수, 관원까지 워낙 많다보니 33칸 규모로 길쭉
하고 넓게 만들었다. 허나 칸을 두지 않고 오늘날 단체를 취급하는 대형 식당처럼 길게 터서
수백 명이 동시에 숟가락을 들 수 있게 했으며, 음식은 비복청 여인들이 만들어서 가져왔다.

세상에 먹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유생도 그 예외는 아니지. 어쩌면 그들이 제일 좋아했
던 공간이 진사식당이 아닐까 싶다. 서로 마주 앉아서 비록 시끄럽게 떠들지는 못해도 온갖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요. 거의 금수저들의 공간이다보니 찬도 호화로워 디룩디룩 살만 찌는
유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성균관에서는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렸는데, 3번을 치면 식당으로 모여 식사를 했다. 지금과 달
리 아침과 저녁만 먹었으며, 밥을 먹을 때마다 원점을 하나씩 찍어주어 출석을 점검했다.

식당 내부는 굳게 닫혀 있어 내부를 관람하지 못했으며, 유생과 교수, 관원들이 먹다 남은 음
식들은 노비. 비복청 여인 등 소위 아랫 사람들이 섭취했다.



 

♠  성균관 명륜당(明倫堂) 주변

▲  성균관 명륜당 - 보물 141호

명륜당은 유생들을 교육하던 강당(강의실)이다. 명륜(明倫)이란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
는 뜻'으로 성균관과 향교의 교육 공간은 모두 명륜당을 칭했다.
이 건물은 1398년에 지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다시 지었다. 교육 외에 과거시
험 장소로도 종종 쓰였으며, 나라 제일의 교육기관이다보니 건물 크기도 장대하다. 게다가 지
붕 추녀에는 무려 잡상(雜像)까지 갖추어 건물의 품격을 높였다.

건물 구조는 중앙에 맞배지붕을 지닌 명륜당을 두고 좌우에 날개채를 덧붙여서 마치 새가 날
개짓을 하는 모습 같다. 이렇게 3동의 건물이 합심하여 하나의 명륜당을 이루고 있는데, 그
크기가 정면 9칸, 측면 2칸이다. 허나 보통 한옥의 1칸보다 길이가 길기 때문에 왠만한 한옥
25칸 규모 정도는 된다.

명륜당은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유생들이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를 했다.
건물 정면이 뻥뚫려있어 늦봄이나 여름, 초가을에는 공부하기 좋겠지만 늦가을과 겨울, 초봄
에는 추위 때문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여 그때는 동/서재에 각자 배속된 방에서 공부를
했을 것이다.
좌우에 달린 날개채는 팔작지붕을 띄고 있는데, 이들은 교수(선생)들이 거처하던 공간으로 온
돌방과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  명륜당의 육중한 뒷모습

▲  명륜당 동쪽 날개채


▲  명나라 사신이 휘갈긴 명륜당 현판의 위엄

명륜당이 워낙 장대한 규모라서 그 건물의 정체를 알리는 현판 또한 몇 사람으로는 어림도 없
을 정도로 대단한 크기를 자랑해 보는 이로 하여금 주눅을 들게 한다.

명륜당 현판은 이웃에 자리한 대성전 현판과 더불어 글씨의 신(神)으로 추앙받는 한석봉(韓石
峯)이 썼다. 대성전의 그것은 남아있으나 명륜당 현판은 다른 사람의 것으로 교체되고 말았으
니 사연은 다음과 같다.

1606년 명나라에서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 주지번(朱之蕃)이 사신으로 놀러 왔다. 조선은 초
기부터 명나라에 대해 꼴사나운 사대주의를 보이며 그들의 속국을 자처했다. 심지어 명나라를
표현할 때는 '황명(皇明)','대명(大明)'이라 높여 부르기도 다반사였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재조지은(再造之恩)이란 해괴한 4자까지 더해져 간과 쓸개, 심지어 영혼까지 내줄 정
도로 지극의 정도는 가히 암을 유발할 정도로 심해졌다. 하여 명나라의 사신이 떴다하면 조선
조정과 관리들, 유생들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어쨌든 사신이 온다는 말에 선조(宣祖) 임금은 서경 유근(西坰 柳根)을 원접사(遠接使)로 보
내 의주(義州)에서 그들을 맞이하게 했다.

유근은 명나라 사신에게 잘보이려고 온갖 대접을 아끼지 않았고, 서로 시문(詩文)을 주고받으
며 긴 거리의 지루함을 달랬는데, 충북 괴산(槐山)에 있는 자신의 별장, 고산정<孤山亭, 만송
정(萬松亭)>을 은연중 자랑하니 주지번이
'그렇게 절경이요?'
하면서 화공을 시켜 그려오게 했다. 물론 유근이 그리 하라고 허락했거나
유근이 사람을 보내서 그렸을 것이다.
어쨌든 별장 그림을 보자 주지번은 크게 감탄을 먹고 그림 위에 '호산승집(湖山勝集)' 4자를
써서 정자에 걸어달라고 청했다. 이에 유근은 매우 좋아라하며 가보로 삼았다는 것이다.

주지번이 서울에 도착해 성균관을 둘러봤는데, 명륜당에 걸린 한석봉의 현판이 너무 탐이 나
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달라고 징징거리자 조정 관리들은 그 현판을 내주고 대신 새로 하
나 써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신이 난 주지번은 현판을 써주었다. 그 역시 서화(書畵)에 뛰어나다고 명나라에서 명
성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지금의 명륜당 현판이다.

현판 좌측에는 '大明萬曆 丙午年 孟夏(맹하, 초여름)'라 쓰여 있는데, 이는 1606년 초여름에
썼다는 뜻이며, 만력(萬曆)은 당시 명나라의 군주이자 임진왜란 때 국고가 바닥날 정도로 조
선에 너무 퍼줘서 조선천자, 고려천자로 조롱을 받던 신종(神宗)의 연호이다. 명나라 사신이
휘갈긴 현판이라 자신의 나라를 '대명'이라 표현했는데, 그 시절 조선 위정자들 역시 명을 '
대명'으로 극존칭하고 있었으므로 그 당시로서는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  온갖 현판(현액)들이 시커멓게 걸려있는 명륜당 내부

명륜당 내부에는 한자로 쓰인 온갖 현판들이 천정을 번잡하게 메우며 나의 침침한 두 눈을 희
롱한다. 조선 중/후기에 작성된 현판부터 20세기 현판까지 시대도 다양하며, 현판에 실린 글
은 죄다 유교와 관련된 재미없는 것들이다.

▲  박문약례(博文約禮)
널리 경을 배워 예를 지키자는 뜻이다.

▲  덕화만방(德化萬邦)
덕이 만방에 펼쳐지라는 뜻으로 1984년
바다 건너 대만에서 보내온 것이다.

▲  안연이 공자에게 인(仁)이 뭐냐고
묻자 공자의 답을 담은 현판
(내용은 모르겠음)

▲  내배성묘서독노론(來拜聖廟書讀魯論)
성묘(문묘)에 와서 절을 하고 글을 읽으며
공자를 논하라는 뜻이다. (고종의 친필)

◀  명륜당 안쪽에 걸린 또 다른 명륜당 현판
이 현판은 송나라 주희(朱熹, 주자)가 쓴 것으
로 명나라에서 넘어온 것이다.


▲  명륜당 월대(月臺)에 세워진 비석

명륜당 앞에 넓게 닦여진 석축을 월대라고 한다. 돌로 4줄의 기단을 쌓고 정면과 좌우에 돌계
단을 두었는데, 보통은 좌우 계단으로 출입했으며, 정면 계단은 제왕 등 높은 사람들이 이용
했다.
월대에는 네모나게 다진 검은 전돌을 깔아 엄숙함을 더했는데, 이곳 역시 유생들이 돗자리를
피고 공부를 하거나 행사를 치르던 장소이다. 명륜당이 넓다고 해도 그 많은 유생과 교수를
모두 수용하기에는 벅차기 때문이다.

월대 서남쪽 끝에는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늙은 비석이 멀뚱히 서있다. 그에 대한 안내문도
전혀 없고, 피부가 거칠어 글씨 확인도 여의치 않아 나중에 인터넷에서 조사해보니 고종 시절
에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웃기는 것은 오랫동안 그의 정체를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균관 관계자도 몰랐다
고 한다. 비석은 150년 동안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는데도 말이다. 성균관 유일의 수수께
기 존재로 비석 피부가 뭉개져 글씨 확인이 매우 어려웠던 탓에 그의 오리무중(五里霧中)을
더욱 부추겼다. 근래 비문 일부를 확인하여 역사 기록과 대조하니 1871년 3월 12일 고종실록
에서 40여 자의 글자와 그런데로 일치하는 문장을 발견했다.

그때 고종이 성균관을 찾아와 문묘에 작헌례(酌獻禮)를 했다. 그런 다음 동/서재와 사재(四齋
)의 장의(掌議)를 만나고 유생들에게 말하기를
'서원을 설치하는 것을 말하면, 도학에 대한 학문이나 충성, 절개를 지닌 사람으로서 백세 후
에도 바뀌지 않을 공의가 있어야 비로소 의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그렇지 못
하니 이것이 어떻게 서원을 설치한 본의겠는가? 그리고 한 사람의 서원이 4~5군데에 달하기도
하니 이 또한 매우 의미가 없다.
이제부터는 도학의 학문이 깊고 충성과 절개를 지닌 사람으로서 공론에 부합되는 사람 이외에
는 일체 설치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설사 서원을 설치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에 한해서 한 서
원 외에 중첩하여 세우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도학에 대한 학문과 충성과 절개를 갖춘 사람
을 제외하고는 또한 함부로 서원 설립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흥선대원군의 야심작인 서원 철폐에 대해 유생들이 강한 불만을 제기하자 고종이 이렇게
답을 하고 그 내용을 담아 이 비석을 세우게 했다. 허나 유생들의 불만은 그치지 않았고, 제
왕의 이런 하교에도 건방지게도 어떠한 입장도 밝히지 않았으며, 시간이 흐르자 어리석은 유
생들이 비석에 해코지를 하면서 비석 피부를 마모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왕이 세운 비석에 그
런 망나니짓을 할 정도면 서원철폐에 대한 유생 패거리들의 불만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  동재(東齋) 바깥쪽

▲  동재(東齋) 안쪽

명륜당 뜨락 좌우 끝에는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길게 늘어서 있다. 각각 20칸 규모
로 명륜당 뜨락을 향해 벽을 보이고 있으며, 안쪽(동재는 동쪽, 서재는 서쪽)에 방과 툇마루
가 있다.
방은 은근히 좁은 편인데, 이들 공간에 100~200명의 유생이 머물렀다. 특히 동재 일부는 교수
들이 사용하기도 하여 유생을 수용할 방이 부족해 부득이 동/서월랑에 수용하기도 했다.

동재에서 진사식당으로 넘어가는 문에는 방화수(防火水)를 담은 대포 모양의 통을 두어 심술
궂은 화마(火魔)의 습격에 대비했으나 그 통이 작아서 과연 효과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허나
임진왜란을 제외하면 성균관에 이렇다 할 화재는 없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한가하게 있었을 것
이다. 솔직히 방화수가 쓰일 일이 없어야 좋은 것이 아니던가.

▲  서재(西齋) 바깥쪽

▲  서재 바깥쪽 통로


▲  성균관 황엽(黃葉)인가? 누렇게 뜬 붉은 단풍나무
150~200년 정도 되어보이는 단풍나무가 늦가을 향연을 거두고 슬슬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천하를 불태우며 붉은 입술을 드러낸 단풍잎은 이제
누렇게 뜬 모습으로 그 이름도 우울한 낙엽이 되어
명륜당 뜨락을 어루만진다.

▲  문묘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59호

명륜당 뜨락에는 성균관의 오랜 명물이자 꿀단지로 추앙받는 거대한 은행나무 2그루가 아낌없
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은행나무는 유교에서 매우 애지중지하는 나무로 성균관과 향교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동이족
출신인 공자<孔子, 이름은 공구(孔丘)>가 은행나무 밑에서 강의를 했다는 행단(杏壇) 설화 때
문이다. 성균관 역시 그 상징인 은행나무를 경내 곳곳에 심었는데, 중종(中宗) 때 윤탁(尹倬)
이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나무는 임진왜란의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것
으로 보이며, 명륜당을 다시 짓던 1602년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추정 나이는 420
년 정도이다.

나무 높이는 26m, 가슴 높이 둘레 12.09m, 가지의 길이 동서 약 26.8m, 남북 27.2m로 서울에
서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와 더불어 늙고 장대한 은행나무로 꼽힌다. 실제 와서 보니 정말
웅장하기 그지 없는데, 화재의 흔적이 약간 있긴 하지만, 성장력이 왕성하며, 줄기에 양분을
부여하는 유주(乳柱)가 잘 발달된 흔치 않은 나무로 가치가 높다.

성균관에는 명륜당과 대성전 뜨락에 늙은 은행나무 4그루가 있기 때문에 그들이 황금빛 절정
을 이루는 늦가을 풍경이 단연 으뜸이다. 나무들이 하나 같이 장대하여 성균관을 모두 커버하
고도 남음이 있으며, 은행나무 만큼 늦가을에 민감한 나무도 없다. 은행잎이 낙엽이란 이름으
로 내려앉은 10~11월 풍경은 가히 선경(仙境)이 부럽지 않다.


▲  문묘 은행나무의 밑도리
무한리필이 가능한 장대한 세월과 성균관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 제일의
은행나무로 성장했다. 나무의 건강과 은행잎이 마음 놓고 떨어질 수 있도록
밑도리 주변에 넓게 보호 난간을 둘렀다.

▲  서재에서 바라본 문묘 은행나무의 위엄

▲  왕년을 그리워하며 우수에 잠긴 태극무늬 북

동재 남쪽 끝에는 성균관 사람들의 시계 역할을 했던 태극무늬 북이 걸려있다. 그가 1번 울리
면 잠자리에서 일어났고, 2번 울리면 의관을 갖추고 책을 읽었으며, 3번 울리면 진사식당으로
우루루 달려가 밥을 섭취했다. 그만큼 성균관 사람들은 그의 북소리에 충실했던 것이다.
한때는 북에 불이 날 정도로 소리를 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북을 칠 이유도, 울릴 이유도 없
다. 성균관이 현역에서 물러나면서 북 또한 강제 은퇴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북을 치는 방
망이라도 갖다두어 누구든 칠 수 있게 하거나, 관람 종료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활용하면 좋
으련만 그저 허공이나 축내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  성균관 마무리

▲  성균관 대성전(大成殿) - 보물 141호

명륜당 남쪽에는 유교의 성현이 봉안된 대성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
붕 건물로 앞서 명륜당과 비슷하게 장대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는데, 그 역시 지붕 추녀에 무
려 잡상을 갖추고 있어 건물의 품격을 드높였다.

대성전은 1398년에 지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다시 지었는데 대성전 현판은 한
석봉<한호(韓濩)>이 썼다고 전한다. 내부에는 공자와 증자(曾子) 등의 4성, 공문십철(孔門十
哲), 송나라 6현 등이 봉안되어 있었고, 좌우에 자리한 동무와 서무에 서토(西土, 중원대륙)
인물 94위와 신라와 고려, 조선 인물 18위 등 총 133위가 봉안되어 있었는데, 해방 이후 중원
대륙 94위는 모두 추방했으며<이를 출향(黜享)이라고 함> 우리나라 18위를 대성전으로 옮겨
총 35위가 봉안되어 있다. (동/서무는 비어있음) 

대성전과 동/서무를 흔히 문묘라 부르며, 정면에 신삼문을 두었고, 서쪽에 수복청과 전사청,
제기고 등의 부속 시설을 두었다. 동무 옆에는 동삼문을 두었는데, 신삼문과 더불어 현재는
굳게 닫혀 있다. 그리고 명륜당 구역과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이들 사이에 만든 문 2
개를 북장문이라 부른다.

성균관의 정문이자 남문인 신삼문에서 대성전까지는 일종의 참도가 닦여져 있다. 네모난 검은
피부의 전돌이 깔린 참도는 폭이 좁은데, 대성전까지 곧게 가다가 그 직전 월대에서 서쪽으로
꺾어서 월대 서쪽 계단으로 이어진다.
대성전은 높은 석축 위에 자리해 있는데, 명륜당처럼 석축 위를 월대라고 한다. 정면에 돌계
단 2개, 좌우에도 돌계단을 갖추고 있으며, 동삼문에서 전돌이 깔린 참도가 월대 돌계단과 이
어지니 이 길은 제왕이 주로 이용했다.


▲  동삼문(東三門)과 동무(東廡) - 보물 141호

대성전 동쪽에는 동삼문이 자리해 있다. 말 그대로 동쪽 삼문으로 오직 제왕만 드나들 수 있
던 콧대 높은 문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닫아두었으며 문의 규모는 신삼문보다 작다. 아무리
제왕이라 해도 조선은 엄연한 유교 국가이라 대성전에 봉안된 유교 성현을 1단계 높이 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성균관 만큼은 제왕도 유교 성현에게 양보를 하였다.

동무는 서무와 마찬가지로 이 땅과 서토(중원대륙)의 성현을 봉안하던 공간이었는데, 1945년
이후 모두 방을 빼고, 이 땅의 성현 18위를 대성전으로 옮기면서 현재는 빈 방으로 있다. 동
재와 서재만큼은 아니지만 길쭉한 건물로 맞배지붕을 취하고 있다.


▲  동무의 바깥 부분 (성균관 주차장에서 바라본 모습)

▲  묘정비각(廟庭碑閣)

대성전 뜨락에는 묘정비(廟庭碑)를 머금은 묘정비각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묘정비는 성균
관(문묘)의 역사를 담은 비석으로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와 글이 적힌 비신(碑身), 머리 장
식인 이수(螭首)로 이루어진 제법 당당한 모습이다.

이 비석은 1410년에 처음 세워졌다. 그러다가 1511년 중종이 성균관을 수리하면서 비각을 씌
웠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26년에 새로 세웠다. 이때 이정귀(李廷龜, 1564~1635)가
문장을 짓고, 이홍주(李弘胄, 1562~1638)가 글을 썼으며, 제액(題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
다.
묘정비의 보호를 위해 비각(碑閣)을 씌웠지만 붉은 창살이 너무 촘촘하여 비석의 모습을 온전
히 보기도, 담기도 어렵다. 그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답답하게 보일 따름이다.

▲  답답하게 갇혀있는 성균관 묘정비

▲  성균관 대성전 동쪽 은행나무
- 서울 지방기념물 37호


▲  성균관 대성전 서쪽 은행나무 - 서울 지방기념물 37호

대성전 신삼문 좌우에는 장대하게 자라난 은행나무 2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비록 명륜
당 은행나무 만큼의 덩치는 아니지만 그보다 더 숙성된 450~5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중종 때
윤탁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시기가 대략 비슷해 어쩌면 그 나무가 아닐까 여겨진다. 하지만
나무가 야속하게도 말을 해주지 않으니 우리로써는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비밀을 지킬 곳이
니 나에게만 살짝 속삭여주면 안될까?

나무의 높이는 약 25m 정도로 가지가 부러져 성균관 건물에게 상처를 입혔을 때, 나라에서 위
안제를 지내고 건물을 보수했다고 전한다. 일부 외과 수술이 이루어졌으나 원형은 이상이 없
으며, 성균관의 오랜 내력을 묵묵히 알려주는 존재로 뒤늦게 서울시 지방기념물의 지위를 얻
었다. 성균관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기도 하며, 명륜당 은행나무와 더불어 성균관의 가을 정취
를 크게 돋군다.

▲  굳게 닫힌 신삼문 안쪽

▲  바깥에서 바라본 신삼문


▲  신삼문(神三門)과 대성전 은행나무

대성전 남쪽에 자리한 신삼문은 성균관의 남문이자 정문이다. 석전대제 등 큰 행사가 열리는
날을 제외하고는 늘 닫혀 있으며, 성현들의 넋이 드나드는 문이라 하여 신삼문이라 불린다.
성균관의 정문이다보니 추녀에 잡상까지 주렁주렁 달아놓아 건물의 위엄을 높였다.

▲  제기고(祭器庫)

▲  수복청(守僕廳)

대성전 서쪽에는 제기고와 수복청, 전사청 등의 조그만 부속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그중
제기고는 제사용 그릇과 여러 도구를 보관하던 창고로 건물에 빛바랜 모습이 역력하며, 수복
청은 성균관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노비와 하급 관리들이 머무는 곳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재학당(載學堂)이란 현판이 걸려있으며, 온돌방과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
다.


▲  전사청(典祀廳)과 무늬만 남은 굴뚝

수복청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사청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제사와 석전을 준비하는 공
간으로 제물로 올려질 고기를 살생하고 다듬는 곳이기도 하다.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감쪽 같이 사라진 것을 1986년에 복원했으며, 수복청, 제기고와 더불
어 현역에서 물러나 쓸쓸한 모습을 보인다.


▲  전사청과 명륜당, 서재를 이어주는 문

▲  비천당(丕闡堂)

성균관 경내 바깥에는 비천당과 탕평비각, 하연대, 숭보사 등이 있다. 이들도 엄연한 성균관
식구로 비천당 같은 경우 그 테두리 안에 완벽히 있었으나 현재는 경내 바깥에 있어 별도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명륜당으로 들어서는 서쪽 문 서북쪽이자 국제관 서쪽에 자리함)

비천당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664년에 지어졌다. 송시열(宋時烈)이 쓴 '
비천당기'에 따르면 1661년 도성 안에 있던 인수원(仁壽院). 자수원(慈壽院) 등 왕실에서 관
리하던 비구니 절 2곳을 밀어버리고, 거기서 나온 목재를 송준길(宋浚吉)의 제안으로 북학(北
學) 진흥사업에 쓰려고 했다. 허나 그게 여의치 않자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로 비천당
을 세웠다.
비천당이란 이름은 주자가 성인(聖人)을 찬양한 글 중 '비천대유(丕闡大猷)'라는 글귀에서 따
온 것으로 성균관 유생들이 공부를 하던 곳이다. 또한 제왕이 성균관에 왕림해 과거시험을 시
행할 때 비천당 뜨락을 난장(시험 장소)으로 쓰기도 했다.

건물 중앙을 정청(正廳)으로 삼았으며, 좌우에 협실을 두어 일량재(一兩齋), 벽입재(闢入齋)
라 했는데, 이는 송시열이 지은 것이다. 벽입재는 1784년에 소실되어 그해 9월에 중건했으나
구한말에 일량재와 함께 파괴되었으며, 비천당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다가 1946년 9월 이후에
는 성균관대 대학본부로 쓰이기도 했다. 허나 6.25때 모두 박살이 났으며, 1988년 8월 기존보
다 조금은 작은 184.4㎡의 규모로 복원되어 제법 새 건물티가 물씬 풍긴다.

비천당 동쪽인 국제관 자리에는 공자의 부친인 제국공 공숙량흘(齊國公 孔叔樑紇), 안자의 부
친 곡부후 안무유(曲阜侯 顔無繇), 증자의 부친 내무후 증점(萊蕪侯 曾點), 자사의 부친 사수
후 공리(泗水侯孔鯉), 맹자의 부친 주국공 맹격(邾國公 孟激)을 봉안한 계성사가 있었으나 해
방 이후 성균관대 건물을 짓고자 부셔버렸다. 그러다가 근래 터 일부를 손질해 계성사 삼문(
三門)과 돌계단을 복원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성균관의 위엄을 드러내던 하마비(下馬碑)

성균관대 정문이자 탕평비각 옆에 단촐하게 생
긴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하마비란 궁궐과 관청, 왕릉, 서원, 향교, 높
은 사람의 사당 앞에 세우던 비싼 비석으로 말
에서 내려 걸어가란 뜻이다.
그의 피부에는 '大小人員 過此者 皆下馬'(높고
낮은 사람은 여기를 지날 때 모두 닥치고 말에
서 내려!)라 쓰여 있는데, 그만큼 성균관의 위
엄은 대단했고, 그 위엄을 등에 업고 하마비도
오랜 세월 가슴을 피며 건방을 떨 수 있었다.
그 앞에서는 누구든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
으니 말이다. 허나 성균관의 기능과 위엄이 추
락하면서 하마비는 그야말로 일개 돌덩어리로
전락해 버렸다.

이 비석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터졌던 1519
년 4월에 세워졌으며, 성균관에서 은행나무를
제외한 인공물 가운데 가장 늙은 존재이다. 또
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하마비이기도 하다.

▲  검은 주근깨가 많이 피어난
하마비의 뒷면


▲  탕평비(蕩平碑)를 머금은 탕평비각

하마비 옆에는 1742년에 세워진 탕평비를 머금은 비각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영조 임금은
지나친 당파 싸움을 막고자 능력에 따라 공정하게 관리를 뽑는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했는데,
인재 요람이나 다름 없던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워 자신의 개혁 의지를 널리 알렸다. 비석
내용도 영조가 직접 쓴 것으로
'두루 사귀어 편당(偏黨)을 짓지 않는 것이 군자의 마음이요. 편을 가르고 두루 사귀지 못하
는 것은 소인의 마음이다'
하였다. 그만큼 그 시절에는 당쟁(黨爭)이 심했다.

비석의 구조는 비좌(碑座)를 밑에 깔고 그 위에 비신을 세웠으며, 지붕돌로 마무리를 한 단촐
한 모습이다. 그 역시 묘정비처럼 비각에 굳게 봉해져 있어 온전하게 담기가 어려웠다.


▲  영조의 개혁 의지가 깃든 탕평비

▲  하연대(下輦臺)

제왕이 성균관을 방문할 때는 연(輦)이라 불리는 제왕 전용 가마를 타고 편하게 이동을 했다.
동삼문 동쪽에 돌로 터를 다지고 가마를 내려놓는 하연대를 닦았는데, 제왕은 거기서 연에서
내려 동삼문을 통해 성균관으로 들어섰다.
하연대 북쪽에는 소나무 3그루가 운치있게 들어서 있으며, 바로 북쪽 한옥은 진사식당이다.


▲  성균관과 남남이 되버린 숭보사(崇報祠)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21호

이렇게 보면 성균관은 이제 다 본 것 같다. 접근이 통제된 진사식당의 속살과 서벽고, 서리청
일대를 제외하면 말이다. 허나 이들 말고도 빠뜨린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숭보사이다.

숭보사는 동월랑 동쪽 담장 너머에 자리한 건물로 그렇게 비중이 있는 존재는 아니다. 예전에
는 성균관의 일원이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완전 갈라져 개인 소유가 되어버렸는데, 한때는
집 소유자 이름<명륜동 김종국가(家)>을 따서 문화재 명칭을 삼기도 했다.
엄연한 개인 집이라 내부 관람은 어려운 실정이며, 그저 굳게 닫힌 빛바랜 대문과 돌담, 돌담
너머로 보이는 한옥의 지붕만 바라볼 수 있다.

이 건물은 이름에서 보이듯 원래 문묘 사당의 일원으로 2채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 집은 살림
채로 사당 관리인이 살던 공간이며, 북쪽 집은 사당을 지닌 사당채이다. 살림채는 'ㅡ' 구조
로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중앙에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안방, 동쪽에 건넌방을 두었다.
안방 앞에는 부뚜막이 있고, 대청 앞은 전면이 개방된 토방이 있으며, 건넌방 앞에는 부엌이
있는데, 원래 골방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사당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로 뒷쪽에 신주단을 두어 위패를 봉안했는데, 단 위에 닫집
이 있다. 사당 전면에는 모두 열 수 있는 4짝 문이 있고, 좌우와 뒤쪽은 막혀있다. 사당 안에
닫집과 위패가 그대로 남아있는 점과 옛날에 성균관의 부속 건물이었던 점 때문에 지방문화재
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숭보사를 끝으로 성균관 늦가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숭보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15-1 (성균관로 7길1)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연락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21년 11월 19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 본인의 다음(daum) 블로그 ☞ 보러가기
* 본인의 네이버(naver) 블로그 ☞ 보러가기
 

Copyright (C) 2021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민통선에 묶여있는 강화도 옆구리의 커다란 섬, 교동도 여름 나들이 ~~ (교동읍성, 교동향교, 성전약수, 화개사, 강화나들길 9코스)

 


~~~~~  강화 교동도 나들이
~~~~~

▲  화개산 숲길

▲  교동향교

▲  교동읍성

 


 

강화도(江華島)와 황해도 사이에는 교동도란 커다란 섬이 떠있다. 예전에는 강화도 창후
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으나 2014년 7월,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1969년에 연륙된
강화도와 더불어 한반도의 어엿한 일원이 되었다. 육지(김포시)와 강화도(강화군), 강화
도와 교동도 등 바다에 놓인 다리를 2개나 건너야 되나 섬을 잇는 다리가 생김으로써 더
이상 날씨와 바다의 눈치 없이 차량으로 마음 편히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오랜 세월 목말라오던 교동도와 흔쾌히 인연을 짓고자 여름의 어
느 평화로운 날 아침, 길을 떠났다.
서울 서부와 일산신도시, 김포(金浦), 강화대교를 지나 오전 11시 반에 강화터미널에 도
착했다. 교동도 버스 시간까지는 아직 40~50분 정도 남아있어 환승시간도 연장할 겸, 강
화읍내로 나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여럿 구입하며 시간을 때웠
다. 무더운 날씨긴 했으나 바다에 감싸인 섬이라 여름 제국의 열기(熱氣)는 그리 거세진
않았다.

드디어 교동도(喬桐島)의 새로운 빛이자 발로 등장한 강화군내버스 18번(강화터미널↔월
선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허나 버스는 벌써부터 초만원이다. 다리 개통으로 물이 잔
뜩 오른 교동도 나들이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교동도까지 서서가야 되는가?' 우울한 마음 가득했으나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잡을 권
리는 없었다. 버스 아니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씩 사람이 빠져 다리 이전
인 인화리에서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교동대교 직전에는 인화리 검문소가 매의 눈으로 섬을 찾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다
리가 뚫리긴 했어도 교동도는 여전히 예민한 민통선이자 이 땅 최전방의 하나로 마치 군
사정권 시절로 강제 되감기를 당한 듯, 검문도 조금 까칠하다.
검문소에 이르면 군인아저씨의 통제에 따라 승객들은 버스에서 내려 검문소에 마련된 문
서에 이름과 연락처를 쓰고 신분증 검사를 받는다. 여럿이 온 경우에는 1명만 내려 작성
하면 되나, 상황에 따라 모두 검사를 받을 수 있으니 신분증은 꼭 지참해야 뒷탈이 없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다.
개인 차량으로 왔을 경우, 차에서 내려 신분증 검사와 이름, 연락처 등을 적고 통행증을
받는다. 통행증은 섬에서 나올 때 반환하면 된다.

승객이 많은 탓에 검문 시간이 길어져 버스는 약 7~8분 정도 그 육중한 바퀴를 멈추었다.
마치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국경선에서 출국수속을 밟는 기분이랄까?? 그 까칠한 절차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탑승하자 잠시 늘어졌던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수
평선 너머의 숨겨진 별천지로 인도할 것 같은 교동대교로 들어선다.

교동대교는 강화도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를 잇는 3.44km의 연륙교로 2008년 9월
에 짓기 시작했다. 원래 2012년 개통 예정이었으나 바다 갯벌에 설치된 기초 말뚝이 2011
년 중순 손상되면서 공사 기간이 다소 늘어났다. 2014년 6월 20일 임시 개통을 했고, 10
일 뒤인 7월 1일 정식 개통되어 교동도의 새로운 관문이 되었다.
공사비는 총 904억 원이 소요되었으며, 다리 밑은 서해바다와 검은 갯벌이고, 바다 북쪽
은 바로 황해도(黃海道)로 북한 땅과 가장 가까운 바다 다리가 바로 교동대교가 되겠다.


 

♠  교동도 입문 (교동읍성)

▲  푸르게 익어가는 교동평야 (평야 너머로 보이는 섬이 석모도)

교동대교를 건넌 버스는 봉소리와 고구저수지, 교동도의 중심인 대룡리, 교동향교가 있는 읍
내리(邑內里)를 거처 섬 동쪽에 자리한 월선포에서 바퀴를 접는다. 월선포는 교동도의 옛 관
문으로 2014년 6월까지 강화도 창후리를 잇는 뱃편이 운행했다.

※ 교동도(喬桐島)는 어떤 곳인가?
교동도는 약 47.1㎢(또는 46.9㎢)의 넓은 섬으로 논 25.89㎢, 밭 2.57㎢, 임야 11.45㎢를 지
니고 있다. 다른 섬에 비해 유독 논이 넓은 편이라 마치 육지의 너른 평야를 보는 듯 한데 이
들 논을 교동평야(喬桐平野)라 부른다. 섬에 이렇게 너른 논이 있게 된 것은 고려 말부터 자
급자족을 위해 간척사업과 경지 개척을 꾸준히 벌인 탓이다. 게다가 해발 10m 이하의 땅이 섬
의 약 ⅔를 이루고 있어 경지 개척에도 매우 용이했다.
조선과 왜정(倭政)을 거쳐 현대까지 계속 땅을 다지고 수리시설을 개량하는 등 농업에 전념했
으며, 화개산 북쪽에는 섬 호수치고는 꽤 넓은 고구저수지가 있어 교동평야의 많은 농경지를
적셔주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농업에 집중한 결과, 자급자족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농산물을 내놓고 있으
며, 교동도 쌀은 질이 좋기로 명성이 높다. 어느 통계를 보니 교동도에서 1년간 생산된 쌀로
교동도 사람들이 약 58년, 강화군민이 약 4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그만큼 땅이 비
옥하다. 그래서 옛날부터 섬에 부자가 많았으며, 육지 사람들에 비해 전혀 아쉬울 것이 없어
교동민국이란 말도 생겨났다. 쌀 외에 보리와 콩, 감자, 인삼, 밤, 대추, 버섯 등의 농산/임
산물도 풍부하게 나온다.

섬 동쪽에 솟은 화개산(260m)은 섬의 지붕이며, 화개산 외에는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100m 이
하의 구릉들이 여럿 솟아있다. 해안선은 서해안치고는 단조로우나, 죄다 갯벌이다. 게다가 간
만의 차가 커서 선박 출입도 썩 편하지 못하다. 월선포 등의 항구가 있으나 조그만 수준이며,
겨울에는 해안의 유빙(流氷)과 북한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으로 강화도보다 좀 춥다.

교동도 동쪽에는 그를 거느리는 강화도가 자리해 있고, 남쪽에는 역시 강화도에 속한 석모도(
席毛島)가 있다. 그리고 서쪽은 황해도 연안군(延安郡), 북쪽은 황해도 배천군(白川郡)으로
모두 북한이다. 황해도 땅은 섬에서 불과 2~3km 거리에 불과해 섬 북쪽 해안과 화개산에서 뻔
히 바라보인다. 그 땅도 우리 땅이 분명하건만 그곳에는 북한이란 이상한 나라가 들어서 이렇
게 가까운 거리임에도 70년 이상 건너가질 못하고 있다.

교동도는 북방한계선(NLL)의 동쪽 시작점으로 강화도와 교동도 북쪽 바다는 남한과 북한의 완
충지대인 중립구역이다. 교동도 일대는 민통선으로 지금은 그나마 덜해지긴 했지만 출입이 썩
자유롭지 못했으며, 농업 외에는 개발이 어려워 1970~80년대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남북분단의 비극이 교동도의 시간까지 막아버린 것이다.

지금은 하나의 섬으로 되어있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기 이전에는 개화산과 율두산, 수정산
을 중심으로 3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교동평야에는 조수가 흘렀다고 하며, 대자연의
위대한 힘으로 이들 섬은 점차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석모도 상주산 사이의 바다가
육지화되어 사람들이 내왕했다가 1578년에 다시 바다가 되어 간조 때 외에는 왕래하지 못했다
는 기록이 있어 후빙기(後氷期) 이후 해면 변동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교동도는 고구려 때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景德王) 시절에 교동(喬
桐)으로 이름이 갈렸다. 이때 혈구진(穴口縣, 강화도)에 속했는데, 고려 명종(明宗) 때 감무
(監務)를 두어 섬을 통치하게 하면서 강화도에서 분리되었다.
고려의 끝 무렵인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시절에는 피폐된 수군을 재건하고 정신없이 날
뛰는 왜구(倭寇)를 때려잡고자 전라도에서 바다에 익숙한 어부와 바닷가 사람들을 징발했다.
그들에게 경작지를 주는 조건으로 강화도와 교동도로 이주시켜 수군 훈련을 시켰는데, 이때
최무선(崔茂宣)이 개발한 화약을 이용해 화포(火砲) 훈련까지 병행했으며, 최무선은 단련된
그들을 데리고 1380년 금강 하류인 진포에서 왜구 500척을 때려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진포대첩(鎭浦大捷)이다.

1395년에는 만호(萬戶)와 지현(知縣)을 두었고, 이후 교동현으로 삼아 현감을 파견했다. 1629
년 경기수영(京畿水營)을 교동도로 이전하면서 강화도에 버금가는 부(府)로 승격되고 수군절
도사(水軍節度使) 겸 교동부사를 두었으며, 1633년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교동에 두면서
경기도와 충청도, 황해도의 바다를 관리했다.
1777년 교동부를 현으로 낮추었다가 1779년 삼도통어사를 강화로 옮기면서 교동부 겸 방어사(
防禦使)로 승격되었으며, 1789년 삼도통어영이 다시 교동으로 돌아왔다. 1866년에도 이와 비
슷한 일이 있었고, 1884년 해방영(海防營)에 통어사가 이속되면서 부사 겸 통어사로 격이 조
정되었다.
1895년 행정개편으로 강화에 일시 통합되었으나 1896년 교동군으로 분리되었으며, 1914년 강
화군에 편입되어 개화면과 수정면 2개 면을 두다가 1934년 교동면으로 통합되었다.

해방 당시 인구가 8,600명이었으나 6.25이후 실향민들이 북한과 가까운 이곳으로 대거 넘어오
면서 1965년에 12,443명에 달하기도 했다. 허나 민통선이라 개발도 거의 안되고 점차 낙후되
면서 인구가 감소해 현재는 3,000명대까지 떨어졌다.
6.25이전에는 4개의 정기연락선이 강화도와 황해도를 이어주었으나 6.25이후 강화도 외에 모
두 길이 끊기면서 외로운 섬이 되었다. 게다가 민통선이라 방문도 좀 까다롭고 교동도의 이
름 3자가 천하에 그리 알려지지 못해 실향민 외에 외지인의 방문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교
동대교가 닦이면서 섬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었고, 관광객과 답사/등산/낚시 수요가 늘면
서 차량의 왕래가 폭증했다. 다리로 인해 섬은 서서히 물이 오른 것이다.

교동도에는 등산 명소로 부상하고 있는 화개산을 비롯해 교동향교, 교동읍성, 화개사, 연산군
유배지, 대룡시장 등의 명소가 있으며, 강화도 둘레길인 강화나들길 가운데 2개 코스가 섬에
닦여져 교동도에 새로운 악세사리가 되고 있다. 또한 지엄한 민통선이라 개발도 오랫동안 피
해가면서 1960~80년대 농촌마을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염원이 없어 그야말로 청정한 곳
이다.
 
섬까지 강화군내버스가 들어오지만 섬의 동부인 화개산 주변 봉소리, 대룡리, 읍내리 지역만
운행할 뿐, 그외 지역은 대룡시장에서 마을버스를 타거나 택시, 도보, 개인 차량을 이용해야
된다.
교동도의 중심은 대룡리로 면사무소가 있으며, 조그만 대룡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섬 서부로
갈때는 이곳에서 들어가면 된다.
육지와는 가깝지만 은근히 진입이 까칠한 곳이라 고려와 조선 때 유배지로 널리 쓰였으며 서
해바다와 예성강(禮成江), 한강이 만나는 지리적 위치로 군사적 요충지이자 교역지로 바쁘게
살아갔다.


▲  교동읍성(喬桐邑城) - 인천 지방기념물 23호

교동도에서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린 곳은 교동도의 옛 중심지인 교동읍성이다. 화개사입구 정
류장에서 남쪽으로 난 시골길을 조금 들어가면 장대한 세월에 형편없이 짓눌린 교동읍성과 남
문이 그 초췌한 모습을 비춘다.

교동읍성은 교동도에 경기수영이 설치된 1629년에 축성되었다. 성의 둘레는 약 430m로 동문과
남문, 북문 등 3개의 성문을 두었으며 모두 옹성(甕城)을 둘렀다.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
문은 유량루(庾亮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불렸는데, 1753년 여장을 고쳐 쌓았고, 1884
년에 남문을 수리했다. 바로 이 읍성(邑城) 안에 경기수영과 삼도통어영, 교동 고을의 관아가
있었다.

왜정 때 관리소홀과 왜정의 악의적인 훼손으로 동문과 북문은 쥐도새도 모르게 녹아 없어졌으
며, 성곽 역시 거의 앉은뱅이가 되었다. 남문은 다행히 모습은 건졌으나 1921년 폭풍우로 붕
괴된 것을 1975년에 해체,복원했으며 현재 남문과 그 좌우 성벽, 화개사입구에서 남문으로 넘
어가는 길목 등 약 300m 정도만 헝클어진 모습으로 남아있다. 제 아무리 장대했을 읍성도 결
국 세월과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모래성에 불과했던 것이다.


▲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린 교동읍성 남문(南門)

바다를 바라보고 선 남문은 문루를 상실한 채, 홍예문과 성벽, 옹성 일부만 남아있다. (최근
에 문루가 복원됨)
문 주변은 하얀 피부의 성돌이 상당수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 상당수는 1975년에 복원하면서
새로 끼어 맞춘 것이다. 그 좌우에는 고색의 때로 얼룩진 성돌이 가득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  남문 서쪽 성곽과 옹성의 흔적

▲  돌담처럼 낮아진 남문 동쪽 성곽


▲  남문 앞에 웅크리고 앉은 비석의 귀부(龜趺)

남문 앞에는 비석의 일부인 조그만 귀부가 누워있다. 거북 머리와 비석을 꽂던 비좌(碑座)만
남아있는데, 정작 알맹이인 빗돌이 없어 무엇을 머금던 비석이었는지는 귀신도 모른다. 아마
도 왜정 때 저 지경이 된 듯 싶은데, 교동읍성 축성/보수 관련 내용을 담은 비석으로 여겨진
다. (정답은 없음)
하지만 귀부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니 아무리 여기서 답을 내놓은들, 한낱 부질없는 메아리
에 불과하다.


▲  귀부의 뒷모습
귀엽게 표현된 꼬랑지가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 같다.

▲  풍년예감~! 남문 앞에 펼쳐진 교동평야

▲  남문 안쪽

교동읍성 남문 동쪽에는 교동부 관아터와 황룡우물,  연산군(燕山君) 유배지 등의 명소가 있
다. 나는 이들의 존재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남문 주변만 둘러보고 미련 없이 교동향교로 넘
어가고 말았다.
허나 늘 변명이긴 하지만 다음이란 것이 있으니 그리 아쉽지는 않다. 어차피 서울과 가까운
곳이라 나중에 다시 인연을 지으면 된다.

* 교동읍성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일원

▲  성문에 새겨진 남루(南樓) 글씨
성문의 성격과 이름을 말해준다.

▲  삼도(三道)~~ 문(門)이라 새겨진 글씨
여기서 삼도는 삼도통어영을 뜻한다.


▲  금지된 남문 안쪽 성벽
한때 잘나갔던 교동읍성은 이제 무너지는 것을 걱정해야 될 처지가 되었다.
읍성 보호를 위해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니 절대로 성벽을 오르지 말자~

▲  교동읍성의 아련한 흔적 (화개사입구에서 남문으로 넘어가는 길목)

▲  화개사입구 정류장에서 바라본 화개산(華蓋山)의 위엄


 

♠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로 꼽히는 교동향교(喬桐鄕校)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8호

▲  교동향교 입구에 자리한 읍내리 비석군(碑石群)

교동읍성을 둘러보고 화개산 남쪽 자락에 안긴 교동향교를 찾았다. 화개사입구 정류장에서 교
동향교와 화개사를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화개산 쪽으로 1분 정도 들어가면 오래된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인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면 화개산과 화개사, 오른쪽으로 가면 교
동향교이다.

3거리에 무리를 지어 둥지를 튼 이들 비석은 총 40기로 '읍내리 비석군'이란 이름으로 살아가
고 있다. 이들은 읍내리 교동양조장 앞 비석거리에 있었는데, 1970년대에 교동도의 옛 역사를
정립한다는 뜻에서 옛 교동도의 관문인 남산포길로 옮겼다가 1991년 강화군과 교동향교 유림
들이 지금의 위치로 모두 집합시켰다.

비석 대부분이 교동도를 다스린 교동부사와 삼도통어사, 방어사(防禦使)의 선정비(善政碑)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다. 즉 그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인 것이다. 그들 중에 정말로 비
석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선정을 베풀고 큰 업적을 남긴 관리도 있겠으나 공덕이 쥐뿔도 없음
에도 강제로 세우게 한 것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돈
을 뜯어가 자신의 배때기를 불린 관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비석의 주인공이 과분에 넘치는 선정비를 누리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곳의 역사를
조금씩 머금은 교동도의 소중한 일기장으로 그들을 통해 누가 언제 이곳을 다스리고 거쳐갔는
지를 귀뜀해준다.

조선 중기와 후기, 20세기 초반에 걸쳐 지어진 비석들로 그중 앞줄에 자리한 3기는 특이하게
가로로 누워있는데, 이들은 거사대(去思臺)라 불리는 비석이다.


▲  교동향교 홍살문

비석군에서 교동향교로 가다보면 향교의 정문인 홍살문이 마중을 한다. 홍살문은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차가운 모습으로 궁궐과 관아, 향교, 왕릉 입구에 주로 세우는데 문 바로 옆에는 무
조건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下馬碑)가 우두커니 서 있고, 그 옆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
다. 문 앞에 바리케이드 같은 것이 쳐져 있고, 차량 출입금지를 알리는 현대판 하마비가 곁에
서 있어 차를 타고 온 이들은 주차장에서 무조건 내려서 걸어가야 된다. 그러니 하마비의 '마
(馬)'만 달라졌을 뿐, 비석의 기능은 여전히 유효하다.


▲  지엄함이 여전한 하마비의 위엄

보통 하마비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 있으나 이곳은 '수령변장하마비(守
令邊將下馬碑)'라 쓰여 있다. 즉 수령과 변장, 그리고 그 밑은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홍살문과 하마비는 거의 빈껍데기가 되었으나 이곳 하마비의 위엄은 여전하
여 그 앞에서 차를 두고 걸어가야 된다.


▲  교동향교 외경

화개산 남쪽에 터를 닦은 교동향교는 고려 중기인 1127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원래는 화
개산 북쪽 자락에 있었다고 하며, 이 땅에 지어진 최초의 향교(鄕校)로 널리 알려져 있다.

향교란 나라에서 각 고을에 세운 중등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에는 서당을 졸업한 학생들이 진
학하여 공부를 했다.
1286년에 유학제거(儒學提擧)로 있던 회헌 안향(晦軒 安珦)이 몽골(원나라)에 갔다가 공자(孔
子)의 초상화를 들고 귀국했는데, 배를 타고 개경(開京, 개성)으로 오다가 개경 바로 밑에 자
리한 교동도에 잠시 들려 교동향교에 그 초상화를 봉안했다고 한다. 고려 제일의 국립 교육기
관으로 지금의 서울대와 같은 국자감(國子監)까지 제치고 지역 향교에 불과한 이곳에 가장 먼
저 공자상이 봉안될 정도라면 교동향교가 당시 꽤 잘나갔던 모양이다.
그 이후 각 고을에 공자와 맹자, 최치원(崔致遠) 등 중원대륙과 신라, 고려의 주요 유교 성현
(聖賢)의 위패를 봉안한 문묘(文廟)가 설치되었다. 그러니 이 땅 최초의 향교이자 유교 성현
을 봉안한 최초의 향교란 타이틀까지 지니게 되었다. 향교 문묘는 바로 대성전으로 이때부터
교육과 제사 2가지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1741년에 지부(知府) 조호신(趙虎臣)이 읍성 북쪽인 지금의 자리로 향교를 옮겼으며, 1966년
에 수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대성전과 명륜당, 동/서무, 동/서재, 제기고, 내삼문,
외삼문 등의 건물이 있으며, 향교 바깥에는 성전약수란 유명한 약수가 있다. 향교 건물은 모
두 18세기 이후 것들로 고려의 흔적은 싹 사라졌으며, 안향이 가져왔다는 공자 초상화도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방의 중등교육을 담당하던 향교는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서서히 교육 기능을 잃
게 되며, 오로지 제사 기능만 남아 거의 빈껍데기가 되어버렸다.


▲  계단을 늘어뜨린 교동향교 외삼문(外三門)

향교는 조선시대에 전 고을에 설치되었다. 그러다보니 옛 고을 중심지에는 꼭 향교가 남아있
기 마련이다. 허나 향교는 고리타분한 유교의 공간이라 건물의 모습도 비슷비슷하고, 볼거리
가 풍부한 절과 달리 두 눈이 호강할만한 볼거리도 별로 없으며, 향교 상당수가 속세(俗世)에
폐쇄적인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어 내부 관람도 그리 쉽지가 않다. 또한 향교의 존재감도 너무
없어 나들이/답사 수요도 별로 없는 실정이다.

허나 교동향교만큼은 사정이 180도 다르다. 처음에는 관람객도 거의 없는 썰렁한 향교를 생각
했으나 정작 와보니 글쎄 관람객들로 북적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관람객이 많은 향교는
난생 처음이라 생소한 풍경에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교동대교 개통으로 교동도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나 향교 또한 그 덕을 제대로 본 탓이지만 화개산, 교동읍성과 더불어 섬의 주요
명소이자 교동도를 소개하는 정보에도 교동향교가 크게 다뤄지고 있어 교동도에 왔다면 꼭 들
려야 되는 필수 명소로 등극을 했다.
또한 향교가 화개산 산길의 기점인 화개사와 매우 가깝고 교동읍성과 강화나들길이 지척에 있
어 위치도 좋다. 게다가 문화유산해설사도 머물고 있어 향교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으니
교동도에 왔다면 1번 꼭 들려보도록 하자.

향교는 사방을 돌담으로 둘렀다. 남쪽에 바깥과 이어지는 외삼문을 냈는데, 문 앞에는 3줄로
이루어진 돌계단이 펼쳐져 있다. 외삼문을 이루는 3개의 문 가운데 오로지 동쪽 문만 열려있
어 그 문을 통해 향교로 들어서면 된다.


▲  교동향교 명륜당(明倫堂)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명륜당이 정면을 막고 선다. 명륜당은 공자왈~맹자왈~! 공부를 하던
교육 공간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교육 기능은 이제 없어졌으니 명륜
당 또한 한가로운 신세가 되어 섬돌에 신발이 가득했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 한다.

명륜당 좌우에는 향교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다른 향교와 달리 특이하게도 '
ㄱ'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재는 향교 사무실로 쓰이고 있으며, 툇마루가 서재보다 넓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동재 옆에는 방을 따스하게 보듬던 온돌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을 긴장시키
던 굴뚝이 서 있는데, 그를 손질하면서 너무 시멘트로 떡칠을 한 점이 다소 아쉽다.

▲  서재(西齋)

▲  동재(東齋)

▲  무늬만 남은 동재 굴뚝

▲  굳게 닫힌 내삼문(內三門)


▲  명륜당 뒷쪽에 비뚤게 자리한 노룡암(老龍巖)

명륜당 뒷쪽에는 노룡암이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가 기울어진 모습으로 서있다. 그의 피부
를 가만히 살펴보면 조그만 글씨들이 깨알같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원래 축대에 쓰
인 돌로 교동고을 동헌터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다. 돌의 상태상 반듯하게 세우기가 애매하
여 저리 비뚤어진 모습으로 세운 것 같다. 어차피 이 나라도 단단히 비뚤어져있으니 돌 하나
비뚤어지게 세운다고 문제될 것은 없다. 글씨만 알아보면 되니까 말이다.

노룡암은 교동고을 관아인 동헌(東軒) 북쪽 뜨락 층계 밑에 있었다. 그러니까 뜨락 석축의 일
원으로 있던 것이다. 층계 위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중 오래된 소나무가 있고, 그
밑에 축대가 있었다. 1717년에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인 충민공(忠愍公) 이봉상(李鳳祥, 1676
~1728)이 그 축대에 늙은 용의 바위란 뜻에 '노룡암' 3자를 새겼는데, 1773년에 이봉상의 손
자인 이달해(李達海)가 이를 기리고자 석축 밑에 글을 새겼다.
1820년 통어사 이규서(李奎書)가 '호거암장군쇄풍(虎距巖將軍灑風)' 7자를 새겼는데, 이는 '
호거암장군이 풍기를 깨끗히 했다'는 뜻이며, 여기서 호거암장군은 이봉상이다. 1831년 봄에
석대로 쌓아있던 것을 1987년 교동향교로 옮겼다.

노룡암 뒷쪽 높은 곳에는 담장을 두른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으로 가려면 내삼문을 거쳐야 되
는데, 내삼문은 향사일(享祀日) 외에는 좀처럼 열리지 않으므로 제기고로 우회해서 들어가면
된다. 제기고는 말그대로 제사 도구를 간직한 창고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
다.


▲  제사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  향교의 중심, 대성전(大成殿)

향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향교의 중심 건물인 대성전이 자리해 있다. 남쪽을 바라보
고 있는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동이족 출신인 문선왕(文宣王) 공자
를 비롯해 증자(曾子), 안자(顔子), 맹자(孟子), 자사(子思) 등 초기 유교를 정립한 5명이 봉
안되어 있다.
청록색 피부를 지닌 대성전 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그 안에는 공자 등 5인의 위패와 위패를
간직한 상(床), 제사 도구 등이 들어있다. 그 앞뜨락 좌우에는 설총(薛聰)과 최치원, 정몽주,
이이(李珥) 등 신라와 고려, 조선의 유학자 20인을 봉안한 동무(東憮)와 서무(西憮)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들은 대성전의 보조 공간이다보니 대성전보다 볼품이 많이 떨어진다.

▲  한쪽 문이 열린 서무

▲  동무 (그 옆에 제기고와 명륜당으로
내려가는 문이 있다)


▲  향교 서쪽에 있는 성전약수(成殿藥水)

교동향교에 왔다면 꼭 맛봐야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대성전 서쪽 담너머에 있는 성전약수이
다. 이 땅에 많은 향교를 가보았지만 무려 약수터까지 갖춘 향교는 이곳이 처음이다.

성전약수는 교동도 제일의 약수로 위장병과 피부병, 아토피에 효험이 있다고 전한다. 게다가
향교 유생들이 이 약수 덕분에 과거에 많이 붙고 문성(文成)을 이룬 이가 많았다고 한다. 허
나 물은 평범한 맛을 지닌 약수로 특별한 것은 없으며, 과연 효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향
교를 수식하는 오랜 명물이자 꿀단지로 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대성전 밑에서 물이 발
원하여 성전약수라 불리니 그야말로 향교 스타일의 약수터 이름이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148 (교동남로 229-49 ☎ 032-932-9457)
* 향교 관리소에 문화유산해설사가 있다. 근무시간은 9~18시(겨울은 17시)로 휴일에는 향교에
  늘 머물러 있으며, 아침 시간과 오후 늦은 시간, 그리고 평일에 왔을 경우 관리소를 찾거나
  위의 연락처로 연락을 하면 향교 해설을 들을 수 있다.


▲  가늘게 쏟아지는 성전약수

▲  향교에 왠 하트 모양이??
성전약수 주변에 돌을 모아서 쌓은 하트 모양의 조형물이 있다. 사랑이란 말을
꺼내면 당장이라도 회초리를 1대 맞을 것 같은 그런 공간에서 이런 뜻밖에
존재를 보게 될 줄이야..? 속세를 향한 교동향교의 수줍은 마음은 아닐까?

▲  서쪽에서 바라본 교동향교
향교 서쪽에는 성전약수와 화장실, 관리소, 화개사로 통하는 숲길이 있다.


 

♠  화개산 남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교동도 화개사(華蓋寺)

▲  교동향교에서 화개사로 이어지는 숲길 (교동다을새길)

교동향교 서쪽에는 화개사로 통하는 울창한 숲길이 있다. 이 숲길은 도보길 유행에 따라 강화
군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강화나들길의 일원인 강화나들길 9코스(교동다을새길)의 일원이다.

교동도에는 강화나들길 9코스와 10코스 등 2개의 길이 닦여져 있는데, 9코스는 월선포에서 교
동향교~화개사~화개산 정상~석천당~대룡시장~남산포~교동읍성~동진포를 거쳐 다시 월선포로
돌아오는 16km의 코스로 화개산 주변을 1바퀴 돈다. 그리고 강화나들길 10코스(교동도 머르메
가는길)는 대룡리에서 난정저수지~수정산~금정굴~애기봉~죽산포~머르메~양갑리마을회관~미곡
처리장을 경유하여 대룡리로 돌아오는 17.2km의 코스로 교동도 서쪽을 돈다. 이들은 교동도의
명물만 골라서 짜놓은 알짜배기 탐방로라 나중에 꼭 거닐고 싶다.

교동향교에서 화개사로 가는 숲길은 선녀(仙女) 누님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림 같
은 흙길이다. 나무가 촘촘해 제아무리 뜨거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어림도 없다. 그 길을 2분
정도 가면 화개사로 오르는 포장길이 나타나며, 여기서 오르막길을 6분 오르면 교동도에서 가
장 오래된 절인 화개사가 빼꼼 모습을 비춘다.


▲  교동향교~화개사 숲길 (교동다을새길)

▲  조촐한 화개사 경내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전부임)

화개산 남쪽 자락에 자리한 화개사는 숲에 감싸인 조그만 산사(山寺)이다. 서울 조계사(曹溪
寺)의 말사(末寺)로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화개산 산신도 모를 정도이나 고려 후기에 목은 이
색(牧隱 李穡, 1328~1396)이 이곳에서 독서를 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있어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진사대부의 핵심인 이색이 찾았을 정도라면 지
금과는 달리 제법 이름이 있던 절임이 분명하다.

조선 후기까지 딱히 전해오는 사적(事蹟)은 없으나 1690년대에 이형상(李衡祥)이 지은 '강도
지(江都誌)'에 절 이름이 나와있고,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쓴 가람고(伽藍考)에 화정
사(火鼎寺)라는 이름으로 나와있어, 조선 중/후기에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했던 모양
이다.
왜정 때는 전등사(傳燈寺)의 말사가 되었으며, 1915년 절이 붕괴된 것을 1928년에 정운(晶雲)
이 중건했다. 1937년 이후 재정 문제로 문을 닫은 적이 있었고, 1967년 화재로 무너진 것을
이듬해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요사(寮舍)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근래에 다시 지어진 탓에
고색의 내음은 진작에 말라버렸다. 지정문화재는 하나도 없으나 조선시대 승탑 1기가 있고,
200년 묵은 장대한 소나무가 서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조금이나마 속삭여준다.

화개산으로 오르는 기점의 하나로 강화나들길 9코스가 이곳을 지나가며, 정상까진 넉넉잡아
30분 정도 걸린다. 산 중턱에 위치하여 서해바다와 석모도가 바라보이며, '절간같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고적한 산사의 멋을 누릴 수 있다.


▲  화개사 승탑(僧塔)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초췌한 모습의 승탑(부도탑) 하나가 마중을 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무척 초라해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겉모습과 달리 무척
값비싼 존재이다. 그러니 꼭 살펴보고 가자.
이 승탑은 언제 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탑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지며
, 동그란 탑신(塔身)과 지붕돌, 두툼히 솟은 머리장식이 전부인 간결한 모습이다. 탑 밑에는
돌과 흙으로 대충 네모나게 바닥돌을 닦았는데, 근래 닦여진 것이라 아마도 제자리는 아닌 듯
싶다.


▲  화개사에서 바라본 서해바다와 석모도

▲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소나무 - 강화군 보호수 4-9-73호

근래 지어진 여염집 모습의 대웅전 앞에는 자태가 아름다운 소나무가 웅장하게 서있다. 나이
가 약 210년 정도로 높이 14m, 둘레 1.6m의 휼륭한 덩치를 지녔는데 나무가 드리운 시원한 그
늘이 조그만 경내를 거의 커버하고 있어 휼륭한 정자나무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의 그늘 앞
에서는 여름 제국도 슬쩍 비켜간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489-1 (교동남로 229-9, ☎ 032-932-4140)


▲  문무정(文武井)터

화개사를 둘러보고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을 조금 오르면 문무정터가 나온다. 지금이야 외마
디 전설이 되어 바람결에 사라졌지만 이곳에는 원래 동쪽에 문정(文井), 서쪽에 무정(武井)
등 2개의 샘물이 있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문정에 물이 많으면 문관(文官)이 많이 배출되고, 무정에 물
이 많으면 무관(武官)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샘물의 물빛이 바다 건너
송가도(석모도 북부)까지 비추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곳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졌다고 한다
. 그래서 이를 해결하고자 절치부심하던 중, 노승(老僧)이 알려준 방법에 따라 소금으로 우물
을 메우니 비로소 진정이 되었다고 한다.
송가도 사람들은 그 노승이 너무 고마워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는데,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
며, 우물은 나중에 하나로 합쳐졌다가 메워졌다. 이후 교동도에서 문관과 무관 배출이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과연 문무정이 교동도 사람들의 문/무과 급제에 크게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인할 길은 없으나 앞서 교동향교 성전약수와 더불어 이곳 사람들이 입신양명을 기원하고 이
를 상징하던 곳으로 보면 될 듯 싶다.


▲  정상을 향한 열망 ~ 화개산 산길 (문무정 이후)

▲  돌로 수북한 화개산 돌너덜길

섬 사람들의 출세 욕심이 담긴 문무정을 지나 화개산 정상으로 향했다. 자연이 닦아놓은 느긋
한 산길이 계속 이어져 그리 힘들지는 않는데, 삼삼하게 우거진 나무 사이로 서해바다와 석모
도 등의 섬이 바라보인다.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화개산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집니다. <단 블로그와 원본은 1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9년 6월 1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9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의성 허준과 겸재 정선의 체취가 깃든 옛 양천고을의 중심터, 서울 가양동 둘러보기 ~~~ (양천향교, 소악루, 궁산, 양천고성터)

 

' 옛 양천고을의 중심지, 서울 가양동 나들이 '

▲  궁산에 복원된 소악루(小岳樓)

▲  궁산 산책로

▲  소악루에서 바라본 한강


한강 가을물결 무명베를 펼쳐놓은 듯
무지개다리 밟고 가니 말발굽이 가볍다.
사방들녘 바라보니 누런구름 일색인데
양천 일사에서 잠시 군대 쉬어간다.

* 1797년 정조 임금이 양천 관아를 방문하면서 남긴 시


 

여름 제국의 패기가 기승을 부리던 성하(盛夏)의 한복판에 친한 후배와 강서구 가양동(加
陽洞)을 찾았다.

가양동은 한강(아리수)이 바다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동네로 1992년까지 김포평야(金浦平
野)의 일부를 이루던 농촌이었다. 허나 인근 등촌동(登村洞)과 더불어 아파트단지가 조성
되면서 시가지의 일부로 변해버렸다. 지금이야 강서구(江西區)의 일원이자 서울의 1개 동
에 불과하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기 이전부터 양천(陽川) 고을의 중심지이자 양천허씨
의 영원한 고향으로 많은 명소를 숨죽여 품고 있다.

양천 지역은 신라 중기까지 제차파의(齊次巴衣)라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景德王) 시절 공
암(孔巖)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라 후기에 김해허씨 일가가 공암에 터를 닦고 살았는데 김해허씨 시조<가락국 김수로왕
의 부인인 허황옥(許黃玉)>의 30세손이자 양천허씨의 시조가 되는 허선문(許宣文)이 구암
공원 서쪽에 있는 허가바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농사를 지으며 평범하게 살다가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를 공격하고자 군
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널 때 도움을 주고 군량을 제공한 공으로 공암촌주(孔巖村主)의 지
위를 얻었다. 이후 태조는 그의 공을 더욱 치하하고자 장경공(莊景公)의 작위(爵位)와 함
께 공암을 본관으로 내리면서 양천허씨의 명실상부한 시조가 된다.

공암은 1301년 양천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고을 관청이 잠시나마 신정동 연의골로 옮겨
지기도 했으나 조선시대에는 가양동 궁산 남쪽이 쭉 양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조선 200여 고을 가운데 가장 작은 고을로 계속 현(縣)에 머물러 있다가, 1895년 조선8도
를 23부로 개편했을 때 군으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인천부(仁川府)에 속하였다가 13도제를
하면서 경기도 양천군이 되었다. 허나 1914년 김포군에 강제 통합되면서 오랫동안 독립적
인 고을을 유지했던 양천은 사라지게 된다.
이후 1963년 옛 양천 일대가 서울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강서구(江西區)에서 남쪽 일대
를 양천구(陽川區)로 분리하면서 잊혀진 옛 이름 양천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양천 고을의 범위는 현재 강서구와 양천구, 영등포구를 비롯하여 구로구 일부, 김포시 고
촌읍 일부로 매우 작았다. 김포평야의 일부로 너른 평야가 고을 대부분을 이루었으며, 고
을 북쪽에는 한강이 흘러 수많은 선박들이 오갔다. 허가바위 부근에는 서울과 행주나루를
잇는 공암나루가 있었고 광주바위와 소요정(逍遙亭), 소악루 등 한강을 옆구리에 낀 멋드
러진 명승지가 즐비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특히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유명한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양천현감(縣監)으로 부임
하여 양천의 아름다운 풍경을 아낌없이 그림에 담았으며,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쓴 허준(
許浚)의 고향이기도 하다.

서울의 일원이 된 이후, 오랫동안 김포평야를 후광(後光)으로 삼은 시골 마을로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개발이 가양동 일대를 칼질하면서 전원 풍경이 퇴색되고 그 화려했던 명소
들마저 적지 않게 희생되거나 궁색한 처지가 되었다.
한강 남쪽을 가르는 올림픽도로가 닦이면서 허가바위와 궁산 북쪽까지 넝실거리던 한강은
북쪽으로 밀려났으며, 가양택지 개발로 광주바위는 옛날의 명성을 잃고 구암공원 한쪽 구
석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현재 가양동의 명소들은 양천허씨와 관련된 구암공원 주변과 양천 고을과 관련된 궁산 일
대로 나눠볼 수 있다. 구암공원에는 광주바위와 양천허씨의 성지(聖地)인 허가바위, 허준
과 이 땅의 한의학을 집대성한 허준박물관이 있으며, 궁산(宮山)에는 서울 유일의 향교인
양천향교와 오래된 성터인 양천고성터, 근래에 복원된 소악루, 양천관아터, 겸재정선미술
관, 궁산 산책로 등이 있다. 게다가 이들은 서로 거리도 가까워 넉넉잡아 4~6시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  옛 양천현아(陽川縣衙)터

양천향교 남쪽에는 양천 고을을 관리하던 관아가 있었다. 양천현아는 중앙에 고을 현감이
집무를 보던 동헌<東軒, 종해헌(宗海軒)>이 있었고, 동쪽에 객사(客舍)인 파릉관(巴陵館)
이, 북쪽에는 향교가 있었는데 이들을 통틀어 읍치(邑治)라고 한다. 주목할 점은 이 땅의
옛 고을 중 동헌과 객사, 향교 등의 읍치가 50m 반경 내에 싹 몰려있는 곳이 이곳 양천뿐
이라는 것이다. (양천은 읍치와 고을을 지킬 읍성도 갖추지 못했음)

종해헌 남쪽에는 아전들이 일을 보는 길청이 있었고, 향청(鄕廳) 동쪽에는 장교청(將校廳
)이, 그 좌우로 창고가 있었으며, 종해헌 부근까지 한강수가 넝실거렸다고 한다. 허나 왜
정(倭政)에 의해 이들은 고약하게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겨우 향교만 살아남았다.
현재 동헌 자리에는 아파트와 주택이 들어찼고 객사 자리에는 홍원사란 절이 둥지를 틀었
다. 그 외에 사직단(社稷壇), 성황사 등이 향교 주변에 있었으나 겨우 성황사만 남아있다.


 

♠  옛 양천고을 교육의 중심지, 서울 유일의 향교로 주목을 끄는
양천향교(陽川鄕校) - 서울 지방기념물 8호

▲  양천향교 홍살문

향교(鄕校)는 조선 정부가 서울을 제외한 각 고을에 세운 유교식 교육기관으로 지금의 중고등
학교와 비슷하다. 양천향교는 양천고을의 유교식 교육을 담당하던 곳으로 서울 유일의 향교란
점이 크게 주목을 끈다. 지금은 서울의 일부로 조용히 묻혀있지만 1914년 전까지만 해도 경기
도에 속한 별도의 고을이었다. 그래서 향교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 향교는 1411년에 창건되었다.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 이후 교육 기능이 상실되고 제
사기능만 남으면서 슬슬 황폐화된 것을 1945년 명륜전을 중수했으며, 1965년 대성전과 외삼문
을 보수했으나 많이 부실했다. 하여 1977년 복원 계획을 수립, 1980년 복원공사에 들어가면서
1981년 1차 복원공사를 마무리 했으며, 1986년 2차 보수를, 1994년에 3차, 2007년에 4차 보수,
그리고 2008년에 전면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1990년 서울시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문화재청 지정명칭은 '양천향교'가 아닌 '양천향교
터'이다. 아마도 1980년 이후 기존 건물을 싹 갈아서 그렇게 이름을 정한 모양으로 근래에 복
원된 탓에 고색의 무게는 크게 내려앉아 다소 아쉬움을 선사한다. 항상 문이 닫힌 여타 향교
와 달리 속세에 늘 개방되어 있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향교 앞에는 여느 향교와 마찬가지로 붉은색의 뾰족한 홍살문이 아주 차갑게 나그네를 맞이한
다. 홍살문 서쪽에는 유예당(遊藝堂)과 전통놀이마당이 있으며, 홍살문을 지나면 향교로 들어
서는 외삼문과 계단이 나타난다. 계단 서쪽에는 가양동 일대에서 수습된 비석 9기가 똘똘 뭉
쳐 있는데, 이들은 양천현감이나 이곳에 들린 경기도관찰사(觀察使)의 선정비(善政碑)나 불망
비(不忘碑)이다.

좌측만 열린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우로 조그만 동재와 서재가 나란히 바라보고 있는데 이들은
향교 학생들의 숙식공간이다. 그런 동/서재를 바라보고 있는 명륜당(明倫堂)은 교육 공간으로
지금의 교실이나 강의실과 같다. 향교에서 2번째로 중요한 건물이라 규모가 우람하며 현역에
서 은퇴한 신세지만 여전히 위엄이 넘친다.
명륜당 옆구리를 지나면 높다란 계단 끝에 내삼문이 있는데 그 문을 지나면 향교의 중심인 대
성전(大成殿)에 이른다. 허나 내삼문은 석전대제(釋奠大祭) 외에는 늘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
고 있어 굳이 관람을 원한다면 향교 관리자에게 요청하기 바란다. 허나 최근에 복원된 건물이
라 딱히 특별한 것은 없다.

이 향교에는 서울 유일의 홀기(笏記)인 양천현 홀기가 전하고 있다. 이는 양천고을 현감이 참
여하는 행사와 의식 절차를 적은 것으로 홀기 11종, 축문(祝文)과 제문(祭文) 3종 등, 14종의
문건을 하나의 서첩(書帖)으로 만든 것이다. 내용은 객사에서 지내는 망궐례(望闕禮)를 비롯
하여 사직대제(社稷大祭), 성황제(城隍祭), 려제(癘祭), 알성례(謁聖禮)와 국상시(國喪時) 곡
반례(哭班禮) 등으로 19세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4호이다.

◀  양천현 홀기 (문화재청 사진)
이 문서는 관람이 거의 불가능하다.


▲ 태극마크가 그려진 외삼문(外三門)
보통은 좌측문(동쪽문)만 열려있고 가운데 문은 석전대제 때만 열린다.

▲  외삼문 우측에 옹기종기 모인 비석들

외삼문 우측에 심어진 비석 9기는 양천 고을의 오랜 역사를 가늠케 해주는 유물로 양천현감과
경기도관찰사의 선정비 및 불망비이다. 저들 중 진정으로 비석을 받을 자격이 되는 자는 몇이
나 될까? 태반은 형식적인 비석이거나 세금 착취를 위해 만든 비석일 것이다.
가장 오른쪽의 비석은 고색의 무게가 크게 깃들여져 중후함이 느껴지며, 앞줄 가운데 비석은
특별하게도 기와 모양의 지붕돌을 지녔다.

▲  서재(西齋)
일반 백성 자재들의 숙소로 그 모습은
동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  동재(東齋)
양반이나 관리 자재들의 숙소로 지금은
관리사무소로 쓰인다.


▲  공자왈 맹자왈이 들릴 것 같은 명륜당(明倫堂)

명륜당은 교육 공간으로 교궁(校宮)이라 불리기도 한다. 보통 학생 30~50명이 수업을 받았으
며, 교수(敎授) 1명과 직원 1명이 교육을 담당했다. 비록 갑오개혁 이후 교육의 기능은 사라
졌지만 지금은 지역 주민과 초/중/고생을 위한 한문과 서예 등의 교양 강좌가 열리고 있어 명
륜당의 기능은 크게 녹슬지 않았다.

▲  글씨에 힘을 불어넣은 듯한 명륜당
현판의 위엄

▲  대성전을 품은 채, 입을 봉한
내삼문(內三門)


대성전(大成殿)은 향교에서 가장 신성한 공간이자 중심 건물로 공자를 비롯한 유교의 5성(공
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과 송조4현(宋朝四賢,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우리나라 18
현(최치원, 정몽주, 조광조, 이황, 이이 등)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다. 위치가 높은 건물이라
보통 향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둔다.
그곳으로 안내하는 내삼문은 늘 굳게 닫혀져 있어 들어가기가 쉽지가 않은데 관람을 원한다면
향교 관계자의 허락이 필요하다. 담장 너머로 보려고 해도 가파른 곳에 높게 울타리를 친 터
라 대성전의 얼굴 조차 보기 힘들며, 문틈으로 보이는 범위도 매우 한정적이다. 일개 대성전
의 얼굴이 그렇게 비쌌단 말인가? 보물로 지정된 장수향교 대성전(보물 272호)이나 강릉향교
대성전(보물 212호)도 저렇게 비싸게 놀지는 않는데 말이다.


▲ 대성전 우측에 자리한 전사청(典祀廳)
대성전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우측에 자리한 맞배지붕의 전사청만 온전하게 보인다.
전사청은 제례와 제수(祭需)를 준비하는 건물이다.

◀  명륜당 뒤쪽 굴뚝
흙과 기와로 닦여진 그 모습도 정겨운 굴뚝
2개가 명륜당 뒤에 숨어서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양천향교 찾아가기 (2017년 12월 기준)
* 지하철 9호선 양천향교역 1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서 가면 강서농협이 있다. 농협
  앞 골목길(양천로49길)을 따라서 7분 정도 쭉 들어가면 양천향교가 나온다.
* 지하철 5호선 발산역(3번 출구)에서 6630, 6645, 6657번 시내버스를 타고 양천향교역(휴먼빌
  아파트) 하차, 길 건너편에 있는 강서농협으로 건너가서 양천로49길 골목길로 진입하여 쭉
  들어가면 된다.


★ 양천향교 관람정보 (2017년 12월 기준)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10시부터 17시까지이다.
*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 정(丁)이 들어가는 1번째 날>에 석전대제를 지낸다.
* 양천향교역 내부에 향교홍보관을 운영하고 있어 향교 홍보물과 안내를 받을 수 있으며, 외삼
  문에 방명록과 홍보물이 비치되어 있다. 이 땅에 많은 향교가 있지만 이렇게 홍보물과 홈페
  이지까지 갖춘 향교는 거의 없다.
* 단체관람을 원할 경우 미리 연락을 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
* 성년례와 혼례, 상례와 제례 등의 가정의례와 한문, 예절, 충효 등의 교양강좌를 운영한다.
  자세한건 전화 문의 또는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234 (양천로47나길 53 ☎ 02-2659-0076)
* 양천향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가양동의 든든한 뒷동산, 궁산(宮山) 둘러보기

▲  녹음이 짙은 궁산 산책로

양천향교 뒤쪽에는 가양동의 진산(鎭山)이라 할 수 있는 궁산(74.3m)이 야트막하게 누워있다.
한강변에 솟은 조촐한 뫼로 가양동에는 궁산 외에 탑산도 있었으나 개발의 난도질을 당해 겨
우 허가바위 주변만 남아있는 상태이며, 궁산만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평지인 가양동에서 유독 하늘 높이 솟은 궁산은 파산(巴山), 성산(城山), 관산(關山), 진산(
鎭山)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한강이 지나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삼국시대부터 한강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산 자락에는 희미하게나마 백제나 신라 때 지어진 옛 성터가 있으며, 임
진왜란(壬辰倭亂) 때는 관군과 의병들이 집결하여 왜군을 격퇴했다. 18세기에는 겸재 정선이
양천 고을의 현감으로 부임와서(1740~1744년까지) 궁산 주변 풍경을 그림에 담았는데 그 현장
이 바로 소악루이다. 또한 6.25시절에는 국군이 주둔하며 북한군을 격퇴했다.

궁산에는 양천고성터와 복원된 소악루, 관산성황당, 양천향교 등의 오래된 명소가 있으며, 조
망이 일품이라 한강을 배경으로 한 주변 풍경이 아주 예술이다. 강서구에서는 궁산을 근린공
원(면적 약 133,700㎡)으로 삼아 산책로와 운동시설, 조망터 등을 만들었으며, 양천향교 서쪽
과 겸재정선미술관, 마곡금호어울림아파트 쪽에 산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다. 산이 워낙 작아
서 빨리 둘러보면 30분 정도, 아주 여유롭게 둘러보면 1~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특히 소악루
와 궁산 정상은 한강을 낀 야경 출사 장소로 썩 괜찮은 곳이다.


▲  궁산의 작은 꽃, 소악루(小岳樓)

한강이 두 눈에 바라보이는 궁산 북쪽 절벽에 단아하고 조촐한 맵시의 소악루가 있다. 이 누
각은 조선 영조 때 동복(同福, 화순군 동복면) 현감을 지낸 이유(李糅)가 궁산 강변 악양루(
岳陽樓)터에 재건한 것으로 중원대륙 동정호(洞庭湖)에 있는 악양루(岳陽樓)의 경치에 버금간
다하여 소악루라 하였다. 즉 작은 악양루인 셈이다. (이유는 동정호의 악양루를 가본 적도 없
음)

소악루에 오르면 남산(南山)을 비롯하여 인왕산(仁王山)과 안산(鞍山) 등 서울 도심을 둘러싸
고 있는 산과 멀리 관악산(冠岳山), 북한산(삼각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가까이로 탑산과 선유
봉(仙遊峰), 한강 줄기가 이어져 예로부터 문인들의 발길이 잦았다. 겸재 정선도 소악루에 올
라 주변 풍경을 그림에 담았는데 그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 당시의 경관이 고스란히 담
겨져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소악루는 원래 이곳에 있지 않았다. 원래 위치는 가양동 산6-4번지 세숫
대바위 근처로 여겨지는데, 이미 아파트들이 첩첩하게 들어선 상태라 제자리에 세우지 못하고
1994년 지금의 자리에 세운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누각이라기 보다는 공원에 지은 아담한 정자 같다. 게
다가 흙이 아닌 보도블록 바닥에 뿌리를 내린 탓에 정취와 옛 명성이 많이 떨어져 보인다. 복
원을 하더라도 소악루와 주변 풍경을 배려했더라면 좋았을텐데 이 역시 대충대충 탁상행정이
빚어낸 폐해이다.


▲  소악루에서 바라본 천하 (1)
한강을 벗삼아 시원스레 뚫린 올림픽도로와 한강에 다리를 담군 가양대교,
그 너머로 쓰레기를 발판 삼아 어엿한 산맥이 된 하늘공원이 바라보인다.

▲  소악루에서 바라본 천하 (2)
한강 건너편은 고양시 덕은동과 현천동 지역, 저 멀리 북한산(삼각산)의
힘찬 줄기가 살짝 위용을 드러내 보인다.

▲  목멱조돈(木覓朝暾)

소악루에는 겸재가 궁산에서 그렸다는 진경산수화 복사본과 해당 그림의 해설판이 있다. 그러
니 그림에 담겨진 풍경과 실제 풍경을 대조해보며 주변 풍경을 대해보기 바란다. 억겁의 세월
이 한강수처럼 흐르는 동안 그림에 담긴 모습과 현재 모습이 참 많이도 달라졌지만 산줄기만
큼은 그림에 그려진 그대로이다.

목멱조돈은 겸재 정선이 1740년 궁산에서 바라본 남산을 그린 그림이다. 높이 솟은 두 줄기의
산은 북한산(삼각산)이며, 그 아래 야트막하게 목멱산(木覓山, 남산)이 솟아있다. 그 주변에
노고산과 와우산, 만리동고개, 애오개 등의 윤곽이 보이며, 지금은 하늘공원에 가려 만리동고
개와 애오개는 보이지 않는다.


▲  안현석봉(鞍峴夕熢)

안현(鞍峴, 갈마재)은 연세대 뒷산인 안산(鞍山)이다. 겸재가 안산 봉수대에서 피어오르는 저
녁 봉화불을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에 취해 이를 그림에 담은 것으로 가까이에 탑산과 광주바
위(그림 오른쪽 아래)를 그림 앞쪽에 끌어낸 것을 보면 궁산에서 탑산과 안산을 바라본 풍경
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  소악후월(小岳候月) - 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다.

그림 왼쪽에 소악루가 있고, 그 부근에 조그만 기와지붕이 보이는데 그곳이 소악루를 세운 이
유의 집으로 여겨진다. 그림 오른쪽에는 탑산, 선유봉 등이 있고, 멀리 남산과 와우산이 보름
달을 맞이하고 있으며, 그 밑에 바위 절벽인 잠두봉(절두산)이 있다.


▲  양천고성터(陽川古城址) - 사적 372호

소악루 서쪽 산자락에 아련히 남아있는 양천고성터는 궁산 정상부에 축조된 것으로 길이 220m
, 면적은 29,370㎡인 조그만 산성(山城)이다, 백제 또는 신라 중기(6~7세기)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성 이름은 딱히 전해오는 것이 없어 고을 이름인 양천을 따서 양천의 옛 성이란 뜻
의 양천고성이라 불린다. 한강과 접한 북쪽은 경사가 급하며, 남쪽은 느긋하다.

성과 관련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
지(大東地志)' 등에 전하며 성벽을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은 적심석(積心石)과 성돌이
몇몇 남아있고, 높이 2~3m 정도의 성곽 윤곽이 일부 남아 이곳에 산성이 있었음을 희미하게
전할 따름이다.

임진왜란 시절에 권율(權慄) 장군이 오산 독산성(禿山城, 세마대)에서 왜군을 때려잡고 이곳
에 잠시 머물다가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일구어냈으며,
행주산성과 오두산성(파주 통일전망대에 있음) 등과 더불어 한강을 지키던 요새였다.


▲ 양천고성의 흔적
한강을 지키던 산성은 세월의 장대한 흐름 속에 휩쓸려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나무와
수풀만이 가득하다. 역시나 인간이 만든 것은 대자연 앞에 일개 모래성에 불과하다.

▲  민간신앙이 깃들여진 관산성황당(關山成隍堂)

궁산 정상부 남쪽 소나무숲에 자리한 관산성황당은 가양동의 안녕을 기원하던 마을 당집이다.
여기서 관산은 궁산의 옛 이름으로 보통 성황당의 한자는 '城隍堂'인데 반해 이곳은 '城' 대
신 '成'을 쓰는 특이함을 보인다.

이 당집은 '도당(都堂)할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도당할매는 서울 지역 당집에서 많이 봉안하
는 존재이다. 조선 중종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황사(成隍祠)가 성산(궁산의 옛
이름)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500년 이상 묵었음을 보여준다.

성황당의 도당할매는 백성들의 번영과 행복을 도와주고 악귀를 몰아내주며, 재앙과 돌림병을
막아준다고 하여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에 산신제(山神祭)를 올리고 굿을 벌인다. 당집은 퇴
락된 것을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정비했는데 덕분에 오래된 당집 분위기가 완전히 퇴색되고
말았다. 당집이라기 보다는 그냥 창고 같은 분위기다.

조선 후기에 황진(黃瞋)이란 사람이 이곳과 관련된 시를 지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 산봉우리 매우 험한 것은 저절로 된 것이고
한강물이 밀물을 맞아서 띠를 띠웠더라
산 위에 남아있던 성의 담장(양천고성)도 다 없어졌는데
신령님을 숭배하는 마음으로 옛 사람을 본따서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굿을 한다.


▲  누런 풀밭의 궁산 정상

궁산은 거의 야트막한 뒷동산 수준이지만 주변에 마땅한 산이 없어 그 존재가 무척 커 보인다.
그래서 사람이든 산이든 위치를 정말 잘 잡아야 된다.
정상 서쪽에는 조망대가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한강은 물론 행주산성, 서울 서부 지역이 거
침없이 바라보여 조망도 그런데로 휼륭하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산6,7,8일대


▲ 궁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강에 다리를 담군 다리는 인천공항에서 김포공항을 거쳐 서울역까지 달리는 공항전철
다리이다. 그 너머로 인천공항을 연결하는 방화대교가 있으며, 사진 가운데에
자리한 산이 행주대첩의 현장, 행주산성(幸州山城)이다.

▲  궁산 서쪽 산책로

▲  공항칼국수에서 먹은 버섯칼국수의 위엄

이렇게 가양동 나들이를 마치고 시장한 배를 달래고자 김포공항 입구에 있는 공항칼국수집을
찾았다. 가양동이나 등촌동에서 먹어도 되지만 문득 공항칼국수 생각이 간절하여 송정역까지
6631번 시내버스를 타고 그 집을 찾은 것이다.

김포공항입구교차로에 둥지를 튼 공항칼국수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30여 년 묵은 집이다. 그
곳에 들어가니 본격적인 저녁 시간 이전(18시 이전)임에도 사람들이 봐글봐글하다.
우리는 한쪽에 자리를 잡고 버섯칼국수를 주문했는데 끓여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닌 국수사리
와 버섯, 채소가 한몸이 된 검은 피부의 냄비가 나와서 마련된 버너에 몸을 푹 끓인다. 그렇
게 5분 이상을 두면 버섯칼국수가 보글보글 자신을 끓이면서 진국이 된다. 반찬은 고작 김치
하나가 전부, 허전한 반찬을 보며 그래도 2가지는 나와야 덜 허전하지 않겠나 싶었는데 버섯
과 어우러진 칼국수와 국물을 입에 넣는 순간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쏙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김치도 적당히 숙성이 되서 입맛에 그런데로 맞았는데 어느 정도 먹기가 무섭게 식당 아줌마
가 알아서 김치를 갖다주어 김치 수급문제는 없었다.

냄비에 보글보글 끓는 칼국수는 젓가락이나 국자로 각자의 그릇에 담아 먹는 것인데 너무 시
장한 나머지 국수와 버섯이 귀해지자 국수사리 하나를 시켰고, 국물에 밥 2개를 볶아서 말끔
히 냄비를 비운다. 국물과 하나가 된 볶음밥 역시 맛이 괜찮다.

이렇게 하여 한여름에 찾아간 옛 양천고을의 중심지, 가양동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칼국수 국물에 밥까지 싹 비벼먹다.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8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상업적 이용은 댓글이나 메일, 전화연락 등으로 반드시 상의바람, 무단 사용은 안됨)
 * 글씨 크기는 까페와 블로그는 10~12pt, 원본은 12pt입니다.(12pt기준으로 작성됨)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외부링크 문제로 사진이 안뜨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모니터와 컴퓨터 사양, 사용 기기(컴퓨터와 노트북, 스마트폰 등)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7년 12월 26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7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