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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1.25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한양도성) 늦가을 나들이 ~~ (택견수련터, 감투바위, 단군성전, 행촌동 은행나무)
  2. 2014.02.12 눈꽃의 향연 속으로 ~ 태백산 눈꽃 나들이 (당골, 눈꽃축제장, 석탄박물관)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한양도성) 늦가을 나들이 ~~ (택견수련터, 감투바위, 단군성전, 행촌동 은행나무)

 


' 인왕산자락길, 황학정, 서촌 늦가을 나들이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
▲  인왕산자락길의 만추(晩秋)


 

늦가을이 그 절정에 이르던 11월 한복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서울 도심에 숨겨진 상큼
한 자락길 인왕산자락길(숲길탐방로)을 찾았다.

인왕산자락길은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에 닦인
둘레길로 2개의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코스(2.7km)는 인왕산길을 졸졸 따라가는 길
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사직공원)까지 이어진다. 경사가 완만해 그리 힘들이지 않
고 이동할 수 있으며, 인왕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여럿 손짓해 언제든 정상 쪽으
로 방향을 틀 수 있다. 다만 인왕산길이 차량 왕래가 빈번하다보니 비록 작은 소음이지
만 종종 적막을 깨뜨린다. 

본글의 주인공인 제2코스는 숲길탐방로(3.2km)로 윤동주문학관에서 산길을 따라 이빨바
위, 가온다리, 수성동계곡 윗쪽을 거쳐 택견수련터(황학정 북쪽)까지 이어진다. 인왕산
길과 서촌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길로 제1코스와 달리 차량의 눈치와 소음 걱정에서 벗
어나 아늑하고 달달한 산길의 멋을 누릴 수 있다. 다만 오르락내리락 굴곡이 조금 있어
서 약간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두 다리만 멀쩡하면 삼척동자도 완주가 가능하니 걱정
따위는 인왕산 산바람에 날려보내기 바란다.
제2코스는 인왕산길(제1코스)과 서로 만날 듯 가깝게 거리를 두고, 경쟁을 하듯 펼쳐져
있다. (현실은 청운공원과 택견수련터에서만 만남) 아주 편한 길을 원한다면 제1코스를
, 차량의 눈치 없이 아늑한 산길을 꿈꾼다면 제2코스(숲길탐방로)를 이용하자. 특히 제
2코스에는 숨겨진 명소와 계곡, 약수터가 많고 풍경도 고우며, 서울 도심이 늘 옆에 파
노라마처럼 따라다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번 나들이는 제2코스를 이용하여 윤동주문학관에서 사직단(社稷壇, 사직공원)까지 이
동했다. 늦가을이 겨울 제국의 압박으로 생각보다 명이 짧아서 그가 지기 전에 그의 가
랭이라도 붙잡을 겸 서둘러서 찾았는데, 아직은 늦가을 풍경이 여전해 내 정처 없는 마
음과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오감(五感)을 크게 정화시켜 주었다. 역시 사람은 대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이후 제2코스는 인왕산자락길이라 표시하며, 제1코스는 인왕산길로 표시함)


 

♠  인왕산자락길 (수성동 이남 구간, 택견수련터)

▲  수성동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인왕산자락길

수성동계곡에서 잠시 시원한 계곡 바람을 맞은 인왕산자락길은 다시 남쪽으로 각박한 오르막
길을 오른다. (북쪽 방향도 마찬가지임) 길은 잘 닦여져 있지만 그렇다고 오르막길의 야성을
완전히 잠재운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거친 것을 조금 순하게 다듬었을 뿐이다.

그 길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인왕산길이고, 왼쪽 내리막길
이 인왕산자락길이다. 그러니 자락길을 놓치기 싫다면 무조건 왼쪽으로 붙자. 그 길을 내려가
면 서촌의 일원인 누상동(樓上洞) 주택가와 불과 몇 보 차이로 가까워지며 길은 다시 온순해
진다. 이후 이름 모를 계곡과 체육시설을 지나면 길은 다시 오르막을 보이나 그리 각박하지는
않으며, 그 길을 오르면 배드민턴장과 인왕산길이 모습을 비춘다.


▲  다시 오르막은 시작되고 (인왕산길 배드민턴장 방향)

▲  택견수련터로 인도하는 북쪽 계단길

인왕산길 배드민턴장 남쪽에는 화장실을 갖춘 쉼터가 닦여져 있다. 청운공원 이후 가깝게 거
리를 두며 떨어져 있던 인왕산길과 인왕산자락길은 여기서 잠시 만났다가 이내 헤어진다.
쉼터 남쪽 언덕으로 인도하는 나무 계단길이 자락길로 그 계단을 오르면 자락길의 남쪽 종점
인 택견수련터가 마중을 한다.


▲  택견수련터 주변 체육시설
저 산길의 끝에 택견수련터가 깃들여져 있다.

▲  인왕산 택견수련터

황학정 뒷쪽 산자락에 자리한 택견수련터는 이름 그대로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처음에는
막연히 옛날 사람들이 택견을 닦던 곳으로 알았으나 한때 끊어질 위기에 놓였던 우리 고유의
전통 무술인 택견을 지키고 널리 알렸던 조선의 마지막 택견꾼 송덕기(宋德基, 1893~1987)가
택견을 수련했던 현장이다.

송덕기는 조선의 마지막 한량이자 택견꾼으로 유명하다. 그는 1893년 1월 19일, 이곳과 가까
운 필운동(弼雲洞)에서 하급 관리인 송태희(宋泰熙)의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어머니
김씨는 잡화가게를 꾸리고 있어서 생활은 비교적 여유로웠다.
당시 필운동과 사직골, 누상동, 누하동 등 서촌(웃대) 지역은 택견의 성지로 택견을 갈고 닦
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장안 제일의 택견꾼으로 '인왕산 호랑이'라 불리던 임호(林
虎)도 있었다. 그는 지금의 배화여고 앞에 살고 있었으며, 송덕기는 12살부터 또래 동네 아이
들과 그에게 택견을 배웠다.

송덕기는 선천적으로 힘이 장사이고 운동과 무예에 소질이 상당했다. (나와 완전 반대임) 하
여 16살에 마을 택견꾼과 더불어 사직골 대표로 출전하여 유각골, 옥동, 애오개의 택견꾼과
싸워 이겼으며, 이때부터 '결련택견판(택견의 시합을 지칭하는 말)'에서 그 이름을 날리기 시
작했다. 그는 비록 체격은 작았지만 동작이 매우 날쌔어 적을 정확히 타격했으며, 특히 뛰어
오르며 쓰는 발차기는 매우 일품이라 당할 자가 없었다고 전한다.
17세에 장가를 들었고, 곧 군대에 입대했으나 1주에 2~3번 정도만 출근하면 되었으므로 나머
지 시간에는 택견을 수련하여 종종 결련택견판에 나가 몸을 풀었다. 그리고 이때 이 땅에 막
소개된 축구에도 구미가 당겨 축구를 익혔다.

1910년 8월 이후, 왜정(倭政)은 우리의 상무정신이 깃든 결련택견과 온갖 택견 수련을 금지시
켜 그 맥을 끊으려고 했다. 게다가 집안에서도 계속 택견을 그만두라고 압력을 가하면서 택견
수련도 눈치를 보고 해야될 지경이었다. 당시 그의 부모는 그가 자칫 싸움꾼이 될까봐 걱정되
어 택견 수련에 무조건 정색을 표했다고 전한다.
상황이 그러하니 택견 수련 딱 10년이 되는 22살에 잠시 택견을 접어두고 대신 활쏘기로 관심
을 돌려 황학정에서 국궁(國弓)을 닦았다. 그는 궁술(弓術)에도 꽤 소질을 보여 명궁으로 명
성을 날렸는데, 죽기 전까지 활쏘기를 즐겨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을 오래 쏜 사람이자 최초의
국궁심판으로 '한국인물도감(1982년)'에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군대에서 사병들에게 근대식 체조를 가르쳤고, '조선불교 축구단'에 선수로 스카웃되어
월급 80원을 받으며 축구 선수로 3년 동안 뛰기도 했다. 이때 매년 열리던 평양축구단과의 경
기에 참가해 큰 활약을 보여주었다.

축구를 그만둔 이후 30대 말까지 딱히 두드러지는 행적은 없으며, 40세 때 조선극장(인사동에
있었음)을 운영하던 매부를 도와 극장을 지키는 기도를 하였다. 그래서 극장 주변에서 설치던
건달들을 죄다 때려잡았고, 당시 주먹패 대장으로 유명했던 김두한(金斗漢)과도 맞짱을 뜬 적
이 있다고 한다.
이후 금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으나 소득은 없었으며, 1951년 1.4후퇴 때 경남 밀양(密陽)으
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1958년경. 경무대(청와대)의 이승구 경관이 찾아와 대통령에게 택견 시범을 보여달라고 부탁
을 했다. 당시 택견은 일정한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둘이 맞서서 상대를 때려잡는 실전무
예라 혼자 시범을 보이기가 마땅치 않아 옛날 스승(임호) 밑에서 같이 배웠던 김성한(金成漢)
을 급히 불러 1달 정도 가르친 다음 그해 3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생신 축하 경찰무도대회'
가 열렸던 소공동(小公洞) 유도회관에서 택견을 선보였다.
당시 권력층과 무도인들은 왜열도식 무술에 익숙해 있던 상태라 택견을 보더니 별로라며 고개
를 돌렸다. 하지만 택견에 관심이 있던 이승만은 우리 무술을 발전시켜야 된다며 당시 경무대
경호원을 가르치던 박철희에게 그를 소개해 택견을 배우도록 지시했다.

박철희는 육군사관학교 초대 태권도 교관을 지낸 사람으로 그를 자주 초청해 경호원들에게 택
견을 가르치도록 도움을 주었다.


▲  택견수련터 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과 남산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은 우리나라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장에 선보
일 한국 문화로 택견을 선택했다. 그래서 제자 박철희와 함께 경복궁(景福宮)에서 택견 동작
을 사진 촬영했다. (당시 경복궁은 통제구역이었음)

박철희는 경무대 무도사범을 그만두고 '사단법인 택견무도원'을 설립하려고 하였다. 송덕기도
그를 전폭적으로 도왔으나 법인 설립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당시 영향력이 컸던 '수박도협회'
의 방해로 어려움에 빠졌다. 게다가 4.19와 5.16으로 나라가 계속 혼란 속에 잠겼고 법인 설
립도 계속 뜻대로 되지 않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부터 박철희의 조교
이자 같은 사직골 토박이인 김병수가 송덕기의 1등 제자가 되었다.

김병수는 당수도의 고수로 경무대 부사범을 지냈으며, 외국어대학교에 '택견권법부'를 만들었
고, 1963년에는 효자동 오리온다방 3층에 택견도장을 차리기도 했다. 또한 영어에도 능통하여
1964년 '블랙벨트(Black Belt)'와 '가라데 일러스트레이트(Karate Illustrate)'라는 미국의
유명한 무술 잡지에 택견에 대한 기사를 기고한 적이 있다.
허나 그는 해외 진출에 더 무게를 두고 있어서 1968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고, 미국 휴
스턴에 정착해 '김수가라데'란 타이틀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자연무술류'라는 새로운 체계
의 과학적 무술을 창안해 동양무도인의 대표로 위엄을 날렸다.

1972년 '태권도 가을호'에 송덕기가 '살아있는 태권도인'으로 소개되면서 당시 태권도의 1인
자였던 임창수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찾아가 배움을 받았다. 하지만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이
없었고 실생활에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아 금방 사람들이 나갔다.

그는 슬하에 자녀도 없고, 마땅한 제자도 없어서 이것저것 소일거리로 간신히 척박한 삶을 꾸
려나갔으나 1979년 부인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 신한승이 택견을 바로 일으켜보고자 송덕기를 찾아와 택견을 배웠다. 그는 택
견이 살려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길 밖에는 없다고 여겨 문화재관리국을 수시로
찾아가 택견을 홍보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철밥통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저 냉대만 일삼
으며 보다 체계적인 자료를 가져오라고 소위 '갑'질을 벌였다. 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그들
의 요구 양식에 맞추고 택견을 약간 변형시켜가며 해당 자료를 제출했다.
그렇게 하여 간신히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76호'의 지위를 얻으면서 택견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허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송덕기는 신한승의 그런 행동을 못마땅히 여기면서 서
로 갈라진 것이다.

송덕기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1982년부터 젊은 제자를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83년 그 역시 국가 중요무형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이를 기리고자 '택견계승회(현재
사단법인 '결련택견협회')'를 만들었다. 1984년 집 근처에 '박민태권도 도장'을 빌려 제자를
가르쳤고, 제자 중 부유했던 '최유근'의 지원으로 1986년 신촌에 '택견보존회'란 이름으로 본
격적인 택견전수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송덕기는 너무 기뻐서 매일 나와 제자를 가르쳤는데, 택견이란 존재를 매우 생소해하는 현대
인들의 무관심과 체육관을 운영한 경험이 전혀 없는 제자들의 운영 미숙으로 결국 1년도 안되
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나마 남은 제자들도 거의 군대에 들어가면서 죄다 흩어졌고, 1987년
에는 활까지 놓으면서 노인정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우연히 걸린 감기가 커지면서 그해 7월 22
일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9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1981년에 '제1회 대한민국 전통무도예술제'에서 '무도대상(武道大賞)'을 타기도 했으며,
택견을 보존하고 전수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택견의 태반은 이미 사라졌
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택견수련터는 그가 택견을 닦았던 현장으로 그의 후학들(결련택견협
회)이 표석과 안내문을 세워 택견의 성지로 기리고 있으며, 그 주변에는 여러 체육시설이 닦
여져 있어 동네 사람들과 산꾼들이 몸을 풀고 간다. 비록 목적은 다르지만 몸을 푸는 수련터
의 역할은 거의 녹슬지 않은 것이다.


▲  수련터 옆 감투바위 암릉
주름진 바위가 황학정 옆구리까지 느긋하게 내리막을 이루며 펼쳐져 있고,
늦가을이 질러놓은 불(단풍)이 활활 타올라 바위 주변을 화사하게 돋군다.


수련터 옆에는 울퉁불퉁한 바위들이 길게 누워있다. 이들 바위는 저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
라 조촐하게 암릉을 이루며 황학정 동쪽까지 완만하게 내려간다. 그 암릉에 송덕기와 인연이
있는 감투바위가 숨겨져 있으니 한번 숨바꼭질을 해보기 바란다.
그 암릉에 두 발을 딛으면 바로 밑에 황학정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 서부와 남산이 훤히 시야
에 잡혀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인왕산자락길 개설로 수련터를 찾은 사람들은 늘었으나 정
작 바위의 존재감이 없어 지나치기 일쑤이다. 안내문이 없다보니 수련터 바로 옆에서 바위가
예사롭지 않은 눈짓을 보내고 있음에도 다들 지나치는 것이다.
하여 감투바위 암릉은 인적이 거의 없어 무척이나 한적해 천하 최대의 대도시인 서울 도심을
멍을 때리고 바라보며 망중한을 즐기기에는 아주 좋다.


▲  감투바위

사람들이 매우 좋아한다는 감투, 그 감투를 닮은 바위가 암릉 한복판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 속세에 알려지지 않은 인왕산의 비장의 바위로 송덕기가 택견 수련을 하거나 황학정에서 활
쏘기로 몸을 풀고 이곳에 걸터앉아 나라와 택견의 미래를 걱정했다고 한다. 송덕기의 택견 수
련을 묵묵히 지켜봤을 그는 황학정과 사직단, 서울 도심을 늘 지켜보고 있다.


▲  감투바위의 뒷모습

바위 뒷통수에는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긁고 간 흔적들이 역력하다. 지금은 저런 모습이나 여
러 세대가 흘러간 이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지 궁금하다. 대자연 형님의 성형(成形)
속도가 매우 느려서 그렇지 성형 실력만큼은 대자연을 따를 존재가 없다.

택견수련터 서쪽에는 인왕산길과 황학정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내려가면 윤동주문
학관부터 3.2km를 함께 한 인왕산자락길은 그 끝을 맺고 인왕산길에 합쳐진다. 소요시간은 사
진을 찍고 쉬는 시간을 합쳐서 넉넉잡아 1시간 반 정도. 경사가 좀 각박한 구간이 여럿 있지
만, 그것은 산이니까 어쩔 수 없다. 산은 산다워야 오르는 재미가 있지 않겠는가?
도로만 따라가는 인왕산길과 달리 상당수가 흙길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득이한 구간은 나무데
크를 닦아 놓았다. 자락길을 둘러싼 숲은 무성하며 도심을 향해 흘러가는 조그만 계곡들(청풍
계, 옥류동, 수성동 등)을 대부분 거쳐가면서 인왕산에도 계곡들이 꽤 숨바꼭질을 하고 있음
을 귀뜀해준다. 그 계곡들은 시내에 진입하면서 모두 강제 생매장을 당했으며, 2012년에 복원
된 수성동만 제대로 어깨를 피고 있다. (수성동 역시 조금 흐르다가 생매장 당함)
이처럼 인왕산자락길은 인왕산의 숨겨진 속살과 명소를 아낌없이 드러낸 도심 속의 보석이자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사각지대로 이번에 이렇게 인연을 지어 사각지대를 하나 지웠다.

* 인왕산자락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  옛 경희궁의 흔적이자 전통 국궁(國弓)의 성지, 황학정(黃鶴亭)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호

▲  등과정(登科亭) 바위글씨

택견수련터에서 인왕산길로 나와 남쪽(사직단 방향)으로 내려가면 황학정으로 내려가는 입구
(후문)가 나온다. 바로 그곳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커다란 바위가 누워있는데 길 쪽에서
주마등(走馬燈)처럼 지나가면 그냥 의미없는 바위로 여기고 지나치기 쉬우나 황학정 쪽에서
보면 180도 달리 보일 것이다. 그는 옛 기록에나 남아있던 등과정의 아련한 흔적으로 황학정
방향 바위면에 '등과정' 바위글씨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등과정은 서울 장안의 이름난 활터인 서촌5사정의 하나로 그 오사정이란 등과정과 옥동(玉洞)
등용정. 삼청동 운용정(雲龍亭). 사직동 대송정(大松亭). 그리고 누상동 풍소정(風嘯亭)을 일
컫는다. 이중 삼청동(三淸洞)은 북촌의 일원인데, 어찌 서촌5사정에 꼽혔는지 모르겠다.
조선 때는 활쏘기가 양반사대부와 왕족들이 익혀야 될 교양의 일원으로 인식되어 오사정에는
늘 그들로 붐볐다. 무관 같은 경우는 직업상 여기서 활쏘기 연습으로 몸을 풀었고, 다른 이들
은 교양 및 수련의 일원으로 몸을 풀었던 것이다.
허나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군대 무기에서 활이 제외하면서 이들 오사정은 싹 철
거되었고, 등과정만 유일하게 고종 때 새겨진 바위글씨를 흔적으로 남겨 그의 옛 자리를 귀뜀
해준다. 게다가 경희궁의 활터였던 황학정이 왜정 때 이곳에 안착하면서 자연스럽게 등과정을
계승하였다.


▲  황학정8경(八景) 바위글씨

황학정 후문(등과정 바위글씨)에서 황학정으로 내려가 그 뒷쪽 바위를 잘살펴보면 황학정8경
을 담은 바위글씨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바위에 네모난 홈을 닦고 그 안에 글씨들이 담겨져 있는데, 이들은 1928년 9월 금암 손완근(
錦巖 孫完根)이 쓴 것으로 황학정8경이란 제목을 내세웠지만 정작 황학정은 1개도 없고 모두
북악산(백악산)과 인왕산, 경복궁 주변의 풍경을 다루고 있어 제목과 내용이 완전 따로 논다.
여기서 읊은 8경은 다음과 같으며, 이중 금천교와 경복궁 담장 옆 수양버들을 제외하고는 그
런데로 살아있다.

백악청운(白岳晴雲) - 구름이 맑게 갠 북악산(백악산)
자각추월(紫閣秋月) - 자하문(창의문) 문루 위에 가을 달
모암석조(帽巖夕照) - 인왕산 모자바위에 비치는 석양 빛
방산조휘(榜山朝暉) - 인왕산 바위 위의 아침 햇살
사단노송(社壇老松) - 사직단을 둘러싼 노송
어구수양(御溝垂楊) - 경복궁 담장 옆 배수로 둑의 수양버들
금교수성(禁橋水聲) - 금천교 밑을 흐르는 물소리
운대풍광(雲臺楓光) - 필운대의 단풍 광경


▲  사방이 뻥 뚫린 황학정
황학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 밑에 부연을 두어 처마와
추녀의 곡선이 무척 시원스럽다. 정면 중앙에 걸린 황학정 현판은
이승만(李承晩) 전대통령이 쓴 것이다.


사직단 북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황학정은 이 땅에 몇 남지 않은 전통 활터이
다.
조선 말까지 서울 장안에는 서촌오사정 등 활쏘기를 닦던 사정(射亭)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으로 군대 무기에서 화살이 제외되자 서울과 전국의 많은 사정이 문을 닫았고
황학정 자리에 있던 등과정도 그 거친 흐름을 헤어나지 못해 바위글씨만 남긴 채 휩쓸려 사라
졌다.

활쏘기를 좋아했던 고종 황제는 백성들의 심신단련을 위해 궁술(弓術)을 장려하기로 했다. 하
여 1898년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에 황학정을 지어 활터로 삼고 백성에게 개방하여 언제
든 활을 쏘도록 했다.
고종은 자주 황학정을 찾아 활쏘기를 했는데, 그가 사용했던 활 호미(虎尾)와 화살을 보관하
는 전통(箋筒)이 황학정에 전해 내려오다가 1993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천하에 어둠이 내리던 1910년 이후, 왜정은 망국의 황궁(皇宮)인 경희궁을 철저히 산산조각을
냈다. 1918년부터 궁궐을 밀어버리면서 주요 건물을 민간에 팔아먹었고, 1922년 황학정 자리
에 고의로 총독부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황학정까지 밀어버리려고 했다. 이에 국궁을 하
던 사람들이 뜻을 모아 왜정과 협상을 벌여 돈을 건네주고 그 건물을 현 자리로 가져왔다.
앞서 소개했던 택견꾼 송덕기 역시 황학정을 해체 이전했을 때 직접 참여하여 손수 건물을 해
체하고 건물 부재(部材)를 가져와 다시 재조립했다. 또한 황학정 지킴이가 되어 이곳에서 행
패를 부리거나 예의 없이 구는 사람을 혼내주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사직골 호랑이'라고 불
렀다.

1945년 이후 황학정은 전국 활터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으나 6.25 때 건물이 파괴되면서 활
쏘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으며, 이후 황학정을 중수하고 한천각(閑天閣)과 국궁전시관 등 여
러 부속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전통 활터가 많이 사라진 와중에도 여전히 활터 기능을 수행하여 우리나라 전통 궁술의 성지
로 여전히 추앙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는 궁술 대회(매년 12월에 전국궁술경연대회를 개최함)와 관련 행사, 활쏘기 체험이
열리고 있으며, 평일은 물론 휴일에도 활 쏘는 이들을 자주 구경할 수 있다. 천하 제일의 신
궁(神弓)으로 추앙받는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과 조선 이성계(李成桂)를 꿈꾸는 궁수들이
실력을 겨루는 모습도 볼만하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궁술 체험 이벤트도 열고 있다. 아직 활
을 만져본 적은 없지만 기회가 생기면 명중률을 떠나서 쏴보고 싶은 마음은 정말 굴뚝 같다.

* 황학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산1-1 (사직로9길 15-32 ☎ 02-732-1582)


▲  황학정 내부
천정에는 황학정의 내력 등이 적힌 현판 2개가 걸려 있고, 평방(平枋)에는 태극기와
고종 황제의 어진(御眞)이 나란히 자리한다. 황룡포를 입은 그의 어진이
여기에 걸린 이유는 황학정을 세운 그를 기리고자 함이다.

▲  이승만 전대통령이 쓴 황학정 현판의 위엄

▲  화살을 쏘는 동명성왕, 이성계의 후예들

마침 황학정 회원 4명이 활쏘기를 겨루고 있었다. 여기서 과녁까지는 약 130~150m. 평소에는
매우 가깝게 여겼던 그 거리가 여기서 보니 참 까마득하게 보인다. 남산(南山)보다 더 멀리
느껴질 정도. 보는 사람도 그러한데 활을 쏘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들은 주황색 천을 허리에 묶었는데 이는 황학정 국궁 회원임을 뜻하는 모양이다. 정자 이름
이 누런색, 주황색 학을 뜻하기 때문이다. 과녁까지 거리도 멀고 눈도 침침하여 명중을 했는
지. 외곽에 맞췄는지. 아니면 과녁 밖으로 빗나갔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날라간 화살은 전
동식 미니 케이블카에 실려 황학정으로 옮겨진다.

▲  황학정으로 인도하는 길 (국궁전시관 옆)

▲  황학정 표석 (황학정 정문)


 

♠  단군성전과 행촌동 은행나무

▲  단군성전(檀君聖殿)

황학정에서 다시 인왕산길로 나와 남쪽으로 가면 길 동쪽에 단군성전이 마중을 한다. 단군(檀
君)은 옛 조선을 세운 천하의 시조(始祖)로 그의 단군설화는 3살짜리도 모두 알 만큼 유명하
다. 허접스럽기 그지 없는 양이(洋夷)들의 그리스, 로마 설화를 능가하는 알찬 설화로 삼국유
사(三國遺事)에 그 설화가 실려 있으니 내용을 새삼스레 풀어보면 대략 이렇다.

옛날 천하를 다스리던 최고의 신,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부자가 있었다. 환웅이 하늘 아래
로 내려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싶었는데, 환인이 아들의 뜻을 알고 지구를 살펴보니 삼위태
백산(三危太白山) 지역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만하다 여겨져 천부인(天符印) 3개와 3,000명
의 무리를 주어 지구로 내려보냈다.
환웅은 태백산 마루 신단수 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했으며, 바람과 구름, 비를 관
장하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 등 신하를 거느리고 곡식과 인명(人命), 질병, 형벌, 선악(
善惡) 등 사람들의 360여 가지 일을 직접 다스렸다. 이때 굴 속에 함께 살던 호랑이와 곰이
찾아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청하니, 환웅은 쑥 1자루와 마늘 20개를 주며 이를 먹으면서 100
일 동안 햇빛을 안보면 사람이 되리라 했다.
그들은 굴에 들어가 수행을 했으나 호랑이는 이를 견디지 못해 뛰쳐나갔고, 곰은 21일을 버티
면서 여자 사람이 되니 이가 곧 웅녀(熊女)이다.

웅녀는 매일 신단수 밑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원을 하니 환웅이 잠시 남자로 변해 웅녀
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 이가 곧 옛 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단군은 장성하여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여 옛 조선을 세우니 그때가 기원전 2,333년이
다. 우리 땅은 바로 그때를 단기(檀紀) 1년으로 삼아 지금에 이르니 무려 4,350여 년의 역사
를 지니고 있으며 단군은 무려 1,908년을 살았다고 전한다.

▲  단군성전 정문(외삼문)

▲  단군성전 뜨락 은행나무


▲  푸근한 인상의 단군왕검상 (오른쪽에 단군 영정)

※ 단군이 세운 옛 조선(고조선)
오로지 상상으로 제작된 단군상, 그리고 그의 영정, 후덕한 인상과 긴 수염, 황색 옷이 인상
적이다. 단군은 옛 조선(고조선) 군주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조선 군주가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하던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였다.

옛 조선은 기원전 2333년 경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강제로 문을 닫은 장수국가로 한반도
를 비롯하여<남한 지역에 있던 삼한(三韓)도 조선의 간접 영역으로 보기도 함> 요동(遼東),
만주, 요서, 연해주, 산동반도를 포함한 화북(華北) 지역을 다스린 천하 대국이었다. (중원대
륙 상당수를 점유하고 있었다는 견해도 있으며, 서안 등 산서성에는 옛 조선이 세운 거대한
무덤 유적이 많이 있다고 함)

조선의 건국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해 기원전 2333년 건국설도 솔직히 무리가 있다. 산
소도 아까운 식민사관 패거리들은 기원전 10세기 이내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영역도 한
반도 북부와 요동, 남만주로 크게 축소시켰다.
옛 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보이며,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대륙에 다시금 영향
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철기(鐵器)로 중무장한 연나라의 반격에 오히려 크게 밀려 요하(遼河
)를 비롯한 2,000리 이상의 땅을 잃고 만다. 당시 조선은 청동기 무기였다. 그러니 어찌 게임
이 되겠는가?
이후 대륙에서 넘어와 준왕(準王)의 신임을 받은 위만(衛滿)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쫓아내
고 왕이 되었다. 준왕은 그를 따르는 신하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건너가 한왕(韓王)을 칭했다
고 하는데, 아마도 마한(馬韓) 영역인 전라도나 충청도로 내려간 것이 아닐까 싶다.

위만이 조선을 장악하자 철제무기를 개발하고 국력을 길러 한나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를 공격
해 사방으로 크게 영토를 넓히고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에 한나라
무제(武帝)는 조선이 동방(東方) 무역 독점으로 배를 불리며 나날이 커지는 것에 크게 위협을
느끼며 우선 주변 나라를 말끔히 정리하고 그 자신감으로 섭하(涉河)를 사신으로 보내 조선을
협박했다.
당시 조선의 군주는 조선의 마지막 제왕인 우거왕(右渠王)으로 한나라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
부하며 비왕(裨王, 제후왕)을 시켜 사신을 전송케 했다. 허나 섭하는 그 호의에 배은망덕하게
도 마부로 가장한 무사를 시켜 비왕을 죽이고 도망쳤다. 이에 한무제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옛
조선과 가까운 요동(지금의 요동이 아님)으로 보내 요동도위(都尉)로 삼았다.

비왕이 암살된 것에 적지 않게 뚜껑이 열린 조선은 섭하가 요동도위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
자 바로 한나라를 공격해 그 요동을 점령하고 섭하를 쳐죽었다. 그렇게 조선이 먼저 공격을
하자 한무제는 그것을 구실로 조선을 공격했다. 아마도 섭하를 떡밥으로 보내 조선을 건드리
려는 수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허나 조선의 반격과 한나라군 내부 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패했다. 하여 뚜껑이 단
단히 폭발한 한무제가 다시 군사를 다그치자 정신을 차린 한나라군은 정비를 가다듬고 공격을
가해 끝내 왕검성까지 포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며 끙끙 앓던 차에 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우거왕이 반
대파에게 피살되고, 왕을 잃은 조선 조정은 그 혼란을 잠재우지 못하여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렇게 옛 조선은 망하고, 그 땅 일부에 그 유명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그것도 조
선 사람들의 끊임없는 비협조와 반발,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 등의 등장으로 그
땅에 제대로 침도 바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한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여전히 말들이 많으나, 식민계열 쓰레기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요
동 일부로 보고 있으며, 많은 사학자들은 요동과 요서 지역으로 보고 있다. 한사군의 하나로
유명한 낙랑(樂浪)이란 존재는 낙랑군 외에 비슷한 이름에 낙랑국도 있었다고 하는데, 낙랑국
은 평양 지역, 낙랑군은 요서로 보고 있다.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 설화로 유명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이다.
만약 낙랑군이라면 낙랑공주는 공주를 칭할 수가 없다. 그냥 군을 다스리는 태수(太守)의 딸
일 뿐이다.

옛 조선은 전성기였을 때 인구가 무려 1억 8천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조선의 문화와 문
명은 중원대륙과 주변의 많은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漢字) 같은 경우도 동이족(東夷族)
으로 대표되는 조선(또는 은나라)에서 만들어 전파했다는 견해가 많으며, 그 문자가 대륙에서
크게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통용 글자가 되었다.
또한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주변에서 일어난 홍산문명(紅山文明) 또한 조선의 찬란했던 흔
적으로 보고 있으며, 한반도와 만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고인돌(지석묘) 또한 조
선의 청동기시절 흔적이다. 그리고 비파형동검도 조선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 단군성전(백악전)의 역사
단군성전은 1968년 이숙봉(李淑峰) 여사의 3자매(이정봉, 이숙봉, 이희수)가 세웠다. 이후 사
단법인 현정회(顯正會)로 이관되었으며, 1973년 서울시로부터 보호문화재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1990년에는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의 지원으로 성전을 개축했다.

전체 대지면적 약 800㎡, 성전 52.92㎡, 태극정문(太極旌門), 관리실 등을 갖추고 있으며, 건
물 색깔이 죄다 베이지색을 띄고 있는데, 이는 박정희 시절 그가 좋아하는 색으로 칠했기 때
문이다. 이곳 뿐 아니라 많은 사당과 문화유산이 그 시절 베이지색으로 색 변경을 당했다. 성
전 현판은 김응현, 홍익인간 글씨는 원중식, 내외삼문 간판은 이현종이 썼다.
또한 옛 조선이 열렸던 유서깊은 10월 3일 개천절<어천절(御天節)이라고도 함>에는 이곳에서
개천절대제전(開天節大祭典)이 성황리에 열린다. 전통제례와 전통공연, 온갖 체험행사(제례복
체험, 국궁체험 등) 등이 열리며, 일반인도 참여 가능하다.

* 단군성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28 (인왕산로 22, 현정회 ☎ 02-736-6375)


▲  단군성전 앞에 펼쳐진 늦가을 동화

단군성전 남문은 바로 사직공원(사직단)과 이어진다. 허나 평소에는 늘 닫혀있고 사직공원에
서 그곳을 이어주는 길 또한 봉쇄되어 있어 별 수 없이 인왕산길로 우회해 외삼문(外三門)으
로 들어서야 된다. 그 덕분에 사직공원~단군성전 지름길에 인적이 거의 끊기면서 사람의 발자
국 대신 노란 은행잎이 가득 쌓여 늦가을 정취를 아주 진국으로 끌어올린다.
벌써부터 겨울 제국의 보이지 않는 압박이 시작되면서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들은 나뭇잎을 하
나, 둘 땅바닥으로 털어낸다. 우리는 그 잎을 낙엽이라고 부른다. 늦가을에 어울리면서도 한
편으로는 우울증을 유발시키는 그 이름 말이다. 은행잎이 금지된 길과 그 주변에 수북히 쌓여
이 일대는 그야말로 노란 세상을 이룬다. 마치 황금색 비단이 쫙 깔린 듯한 모습으로 말이다.

우리야 귀를 접고 누운 그들을 보면서 늦가을 분위기를 즐기지만, 그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노
래하며 서서히 끝을 준비한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은행잎, 인간이 지은 건물이나 인생은 모
두 부질 없는 모양이다. 시작이야 어쨌든 그 종점은 다 같지 않던가.


▲  한양도성 밖 인왕산로1길 (인왕산, 무악동 방향)

▲  인왕산입구 한양도성 탐방로 (인왕산 방향)

단군성전 앞 교차로에서 서쪽 인왕산로1길로 들어섰다. 길 왼쪽(남쪽)은 사직동 주택가와 종
로문화체육센터가 있고, 오른쪽은 인왕산의 싱그러운 숲으로 그 산줄기는 경희궁(慶熙宮)까지
미치지만 숲은 여기서 뚝 끊기고 만다. 그러니 인왕산로1길이 속세와 자연의 팽팽한 경계선인
셈이다.
그 길을 4분 정도 가면 고색이 짙은 한양도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크게 5거리를 이루
는데, 성 밖 북쪽 길(인왕산로1길)은 무악동과 인왕산 쪽으로, 서쪽(사직로1가길)은 독립문
방면, 남쪽(송월1길)은 홍파동, 경희궁 쪽으로 이어지며, 5거리 동쪽(성곽 안쪽) 인왕산입구
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성곽길을 타면 인왕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  송월1길과 한양도성 (홍파동, 경희궁 방향)

▲  사직동 한양도성 (5거리 서남쪽)
인왕산에서 내려온 한양도성은 여기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만다.
(사직동~월암근린공원 구간 성곽은 아직 복원되지 못함)

▲  은행잎의 마지막 삶터이자 정모 현장, 한양도성 여장
나무에게 버림받은 은행잎들이 딱딱한 여장 위에 모여 앉아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한다. 여장 뿐 아니라 그 주변은 온통 황금색 은행잎의 세상이다.

▲  여장 위에 내려앉은 은행잎들

▲  행촌동(杏村洞)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1-10호

사직터널 윗쪽이자 인왕산 남쪽 자락의 끝을 잡은 행촌동은 조금은 빛바랜 산동네이다. 그렇
다고 옛날 달동네처럼 주황색 기와를 지닌 허름한 집들이 즐비한 그런 곳은 아니다. 온갖 빌
라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울의 흔한 동네로 그 주택가 속에 행촌동 은행나무와 권율장
군의 집터, 그리고 딜쿠샤란 명소가 숨겨져 있다.

딜쿠샤 곁에 자리한 행촌동 은행나무는 약 420살에 이르는 장대한 나무로 행촌동의 오랜 터줏
대감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덧없는 양분과 동네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
어 높이 23m, 둘레 6.8m에 이르는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했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이곳까지 미치면서 그의 보금자리는 주택에 밀려 많이 좁아졌고, 주택 사이에 비좁게 자리해
있으나 건강은 아직 양호하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이자 이곳에 살았던 권율(權慄)장군이 손수 심었다고 전하며, 주인
은 오래 전에 갔지만 그의 사연을 끈질기게 붙들며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이 나
무 때문에 동네 이름이 행촌동(은행나무 마을)이 된 것이다. 참고로 은행나무는 태반이 사람
이 심은 것이며, 자연적으로 싹을 내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서울에서 오래되고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꼽으라면 방학동(放鶴洞) 은행나무, 성균관(문묘) 은
행나무(대성전 은행나무 포함), 그리고 이곳 은행나무를 격하게 내세우고 싶다.

▲  남쪽에서 바라본 행촌동 은행나무

▲  북쪽에서 바라본 행촌동 은행나무


▲  은행나무 그늘에 자리한 권율장군 집터 표석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권율(1537~1599)의 집터로 인근 필운동(弼雲洞) 배화여고에도 그의 집
이 있었다. 필운동 집은 그의 사위이자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李恒福)에게 물
려주었는데 그 집이 필운대(弼雲臺)이다. (현재 필운대 바위글씨가 남아있음)

그럼 임진왜란의 영웅, 권율(權慄)은 누구일까?
권율은 안동 권씨로 자는 언신(), 호는 만취당()과 모악(). 시호는 충장()
이다. 1582년 식년시 문과(式年試 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는데, 임진왜란 시절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것으로 보아 무예도 제법 갖추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는 승문원정자()와 전적()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使)와 예조정
랑(禮曹正郞), 경성판관(鏡城判官)을 지냈으며, 1591년 평안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급히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임명되어 그곳으로 달려갔으며 전라도
순찰사(巡察使) 이광(李珖)과 방어사(防禦使) 곽영()이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군사 4만을
모아 서울로 올라오자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었다.
이광과 곽영은 수원과 용인에 진을 치고 주변에 있는 왜군을 토벌하고자 했는데, 권율은 주변
에 조금씩 흩어진 적들을 치지 말고 임진강(臨津江)에서 그들의 서진(西進)을 막아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다음 적의 빈틈을 노리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고 의견을 냈다. 허나 뇌에 주름이 가득한 이광은 그 말을 무시하고 오로지 머릿수에 의지해
용인에 있는 왜군을 공격했다.
이광의 군사는 4만(왜국은 10만이라고 주장함)에 이르렀으나 대부분이 칼과 창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오합지졸이었다. 그에 반해 왜군은 왜열도에서 나름 알아주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
安治)가 수백 명의 정예 기병으로 저항을 했다.
허나 조선군은 겨우 수백에 불과한 왜군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싸움에 서툴렀던 선봉장 이시지
(李詩之)와 백광언(白光彦)이 전사하는 등, 그야말로 개망신을 당했다. 허나 권율은 이를 직
감하고 신중하게 처신해 휘하 군사를 잃지 않고 광주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했다.

1592년 가을, 전라도 남원으로 내려가 1,000명의 군사를 모집해 동복현감(同福縣監, 전남 화
순)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전주(全州)로 진출하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왜군을 막았다. 초반에 황진이 조총에 맞아 부상을 입으면서 군사의 사기가 잠시 떨어졌으나
권율이 군사를 독려하여 왜군을 격퇴하고 승리를 거뒀다. 그 공으로 전라도 감사(監事)로 승
진하게 된다.
1592년 12월, 서울 수복을 위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천안 직산(稷山)에서 머물렀는데, 체찰
사(體察使) 정철(鄭澈)이 그 많은 인원을 먹일 군량이 없으니 돌아가서 관내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편지를 보냈다. 허나 행재소(行在所)에서 북상하라는 명이 떨어지면서 곧바로 군을
이끌고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 들어가 진을 쳤다.
한편 권율이 독성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은 왜장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 차단될 것이
두려워 서울에 있던 군사를 이끌고 독산성을 공격했다. 허나 권율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만
할 뿐, 좀처럼 성 밖으로 나오질 않아 왜군의 피해는 나날이 늘어갔다.
뚜껑이 열린 우키타는 사람을 보내 독산성의 약점을 탐지한 결과 물이 부족하다는 정보를 입
수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성 밑에 큰 못을 파니 과연 성 안에 물이 마르면
서 조선군의 식수에 비상이 걸렸다.

허나 권율은 당황하지 않았다. 비범한 인물답게 명쾌한 꾀를 낸 것이다. 그래서 동이 트는 이
른 아침에 왜군이 잘보이는 곳에 말을 세워놓고 쌀을 부어 말을 씻기는 시늉을 벌였다. 그것
을 본 단순한 왜군은 성 안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이 거짓임을 알고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바
로 그때를 이용해 유격전을 펼치며 타격을 가하자 발작한 우키타는 영책(營柵)을 불지르고 바
로 서울로 줄행랑을 쳤다. 그들이 도망칠 때 정예 기병 1,000명을 보내 퇴로를 차단하고 왜군
수천을 죽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세마대 전투)

1593년 1월, 서울 수복을 위해 조경(趙儆)을 보내 근교에 마땅한 곳을 물색하다가 행주산성(
幸州山城)으로 들어가 목책(木柵)을 쳤다. 그곳은 서울과도 가깝고, 한강을 끼고 있으며, 조
망도 좋고, 인근에 여러 요새와 함께 연합 작전을 펴기에 아주 좋은 위치였다. 허나 석성(石
城)이 아닌 야트막한 토성(土城)이라 수비전에는 썩 유리한 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서둘러
목책을 엮은 것이다.
목책이 완성되자 독산성에 병력 일부를 남기고 모두 불러들였으며, 별도로 4,000명을 뽑아 전
라병사(全羅兵使) 선거이(宣居怡)를 시흥 호암산(虎巖山, ☞ 관련글 보러가기)으로 보내 후방
을 돕도록 했다. 그리고 처영(處英)이 이끄는 승병(僧兵) 1,000명이 행주산성에 합류했다.

권율은 소수의 군사를 보내 서울을 공격했고, 고양 혜음령에서 왜군에게 깨진 명나라군을 도
와 그들의 전멸을 막아주었다. 권율의 활약에 적지않게 염통이 쪼그라든 우키타는 행주산성을
쓸어버리기로 마음 먹고 서울과 인근의 군사를 싹 긁어모아 무려 3만의 대군으로 1593년 2월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그때 행주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승병을 합해서 겨우 약 2,800명, 그 외에 군사들을 도우러 성
에 들어온 밥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아낙네들과 지역 사람들이 있었다.

왜군은 7부대로 나눠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행주산성이 견고한 성이 되지 못해 여러 번
위기가 있었으나 군사들은 일당백의 위엄을 드러내며 적들을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었
으며,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등의 새 무기도 크게 활약을 했다. 또한 밥할머
니의 행주치마 부대는 치마로 돌을 나르고 군사들의 밥을 나르는 등, 서로가 단결하니 왜군은
결국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사한 군사들의 시신을 모아 불태우고 줄행랑을 쳤다.
이 싸움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이니 권율과 조경, 처영, 조선군과 승군, 밥할머
니의 아낙네들, 지역 사람들이 빚어낸 대작품이었다.

이후 파주로 옮겨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과 함께 후방을 지켰으며, 전라
도로 내려갔다가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都元帥)로 승진해 경상도에 주둔했다. 1596년에 도망친 병사를 즉결처분한 것으로 잠시 해직되기도 했으나 바로 한성판윤(漢城判尹)
에 임명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와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터지자 명나라군과 함께 왜군이 머무는 울산성(蔚山城)을 공격
했다. 허나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겁에 질려 도망치는 바람에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순천
으로 자리를 옮겨 순천 예교(曳橋)에 있던 왜군을 공격했으나 비리비리한 명나라군의 비협조
로 함락시키지 못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내려왔으나 그해 7월 인생을 마감하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선조(宣祖)는 그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했으며,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1
등으로 삼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해 그의 공을 기렸다.

권율은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명장으로 바다에 이순신(李舜臣)이 있다면 육지에는 정기룡(
鄭起龍)과 곽재우(郭再祐), 권율이 있었다. 비록 초창기 용인 싸움에서 어리버리한 상관들 때
문에 졌고, 정유재란 때는 밥버러지 명나라군 때문에 적지 않은 고생을 했지만 그 외에는 모
두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행주대첩은 적은 군사로 10배 이상의 왜군을 물리친 우리 전쟁사의
길이 빛나는 장쾌한 대첩이다.
그의 활약과 공훈에 대해서는 '권원수실적(權元帥實蹟)'이란 책이 전하고 있으며, 그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에 있으나 인근이 유원지화되어 늘 시끄러우니 숙면이나 제대로 취하고 있
을지 모르겠다.

행촌동 은행나무를 끝으로 늦가을 한복판에 달달하게 벌였던 인왕산과 황학정, 행촌동 나들이
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딜쿠샤는 시간 관계로 사진에 담지 않고 통과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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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의 향연 속으로 ~ 태백산 눈꽃 나들이 (당골, 눈꽃축제장, 석탄박물관)

 

' 태백산(太白山) 눈꽃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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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 설경

장공(長空)에 뛰어들어 안개 속에 파묻히니
 비로소 정상에 오른 줄 알았네
 둥근 해는 머리 위에 나직하고
 주위의 뭇 산봉우리들이 눈 아래에 내려앉네
 구름 따라 몸이 날으니 학(鶴)의 등에 올라탄 듯
 돌을 밟고 허공에 길이 걸렸으니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인가
 비 그치자 골짜기마다 시냇물이 흘러넘치니
 굽이굽이 오십천(五十川) 건널 일이 걱정스럽네


*
고려 후기 문신인 근재 안축(謹齋 安軸, 1282~1348)이 태백산에 올라 지은 시

 


겨울의 한복판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명절인 설날 연휴를 맞이하여 진한 설경을 맛보고자 강원
도 태백(太白)을 찾았다. 마침 후배 하나가 태백 서쪽 동네인 고한(古汗)에 잠시 머물고 있어
서 그와 함께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인 태백산을 찾기로 했다.

원래는 설 연휴 전날 아침에 일찌감치 열차를 타고 가려고 했으나 급히 일이 생겨서 내려가는
것을 취소했다. 그러다가 그날 오후에 급히 연락을 넣어 심야 열차로 가겠다고 하니 사북역에
서 대기하여 합류하겠다고 그런다.

설날 연휴인지라 태백까지 열차표를 힘들게 예약히고 21시 반에 대문을 나섰다. 방학역에서 1
호선 전철을 타고 회기역에서 신통치 못한 배차를 자랑하는 중앙선 용문(龍門)행 전철로 갈아
타서 근 1시간을 달려 용문역에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잠시 대기를 타다가 강릉(江陵)행 심
야 무궁화호 막차에 몸을 싣는다.
거의 2년 만에 타보는 추억의 심야열차, 옛날에는 서울에서 당일로 오가기 버겨웠던 광주, 목
포, 여수, 경주, 부산, 동해 등 장거리를 갈 때 많이 타고 다녔는데, 도로망이 나날이 좋아지
면서 안그래도 비좁은 국토가 더 좁아져 2006년부터 탈 일이 크게 줄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1
년에 1회도 타질 않는다.

용문에서 태백까지는 3시간 반 정도 걸린다. 자리에 앉아 잠을 간곡히 소환해 봤지만 잠이 좀
처럼 강림하질 않으니 아무래도 잠님이 나를 원치 않은 듯 싶다. 한밤중이라 차창 밖 풍경은
온통 검은 도화지라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고 심심치 않게 보이는 불빛이 그런 도화지에
살짝 작은 점을 찍는다. 그렇게 뜬 눈으로 원주와 제천, 영월, 예미를 지나 사북역에 이르니
대기하던 후배가 열차에 올라타 옆 자리에 앉는다.

정선과 태백의 경계를 가르는 두문동재터널을 지나 첩첩한 산주름에 묻힌 태백 관내로 들어서
니 창 밖 풍경이 다소 달라지기 시작한다. 정선 땅까지 별로 보이지도 않던 눈이 터널을 지나
서부터는 완전 눈천지로 변한 것이다. 그래서 차창 밖 검은 도화지는 하얀 색이 추가되어 2색
의 흑백 도화지가 되었다. 단지 터널 하나에 천지가 뒤바뀐 것이다.

열차는 강원도의 산주름을 열심히 지나 드디어 태백역에 도착했다. 열차가 멈추자 등산복으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우루루 나와 적막이 감돌던 태백역에 잠시나마 활력을 불어 넣는다.
밥이나 먹을 겸 식당을 찾아보니 역전 주변 식당은 죄다 자고 있었고, 실비집 한 곳만 환하게
불을 밝히며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집에 들어가니 열차에서 내린 등산객 10여 명 정
도가 밥을 먹으며, 몸을 녹이고 있었다.
우리는 김치찌개를 먹었는데, 생각한 것과 달리 맛이 괜찮았다. 고기도 풍부하게 들어가 있고
밑반찬도 가짓수가 많아서 찬이 제법 풍성했다. 저녁을 먹고 왔지만 다시 시장기가 강하게 돋
으면서 밥을 2그릇이나 먹고 찌개와 반찬을 죄다 비우고서야 식당을 나섰다.

아침이 멀지 않았으니 찜질방에서 잠시 눈이나 붙이자고 했으나 후배는 여관에서 편하게 자자
면서 자기가 방값 내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터미널(역 앞에 터미널 있음) 인근 여관에 들어가
눈을 붙였다.
아침 8시 반이 되자 찬란한 여명의 재촉에 스르륵 잠에서 깨었다. 4시간 밖에는 못잤지만, 더
이상 잠도 오질 않는다. 나는 태백산을 보러 여까지 온 것이지 잠이나 퍼자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도 꿈나라에서 허우적거리는 후배를 강제로 깨워 9시 반에 여관을 나섰다.

고원(高原)의 도시, 태백이라 제법 추울 줄 알았더만 아침임에도 그다지 춥지는 않다. 터미널
로 들어서니 마침 당골로 가는 태백시내버스 7번이 기지개를 켜고 있어 그것을 잡아타고 태백
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터미널에서 당골 종점(태백산관리사무소)까지는 20~25분 정도 걸린다.


▲  당골 종점(태백산관리사무소 앞)


♠  하얗게 분을 칠한 태백산(太白山, 1567m) 간보기

▲  태백산관리사무소에서 당골광장으로 오르는 길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매표소를 겸하고 있는 태백산관리사무소 앞이다. 우리나라의 신령스러운
산인 태백산의 안기려면 반드시 매표소를 거쳐야 되는데, 등산객들의 호주머니를 뚫어지라 쳐다
보는 그곳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하얗게 분을 바른 태백산의 모습이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을 말끔히 정화시켜준다.

이곳에 온 목적은 오랜만(거의 7년 만)에 태백산 정상(1567m)과 천제단(天祭壇, 1561m)을 보고
자 함인데, 후배가 겨울 산행에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신발을 신고 있어서 정상까지 가는 것은
어려웠다. 괜히 그랬다가 119헬기를 불러야 될 상황까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식
총(虎食塚)까지만 갈까 하다가 눈이 제법 많고 미끄러워 후배가 오르기 힘들다고 투정하여 당골
광장에서 1km 정도만 오르고 철수하고 말았다.

태백산은 우리나라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남쪽 척추인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중심 산으로 위엄
돋는 산의 이름만큼이나 험준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허나 정작 올라보면 별로 힘들지 않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금강산(金剛山)이나 설악산과 달리 순수 흙으로 이루어진 육산(肉山)이
라 능선의 곡선이 완만하고 산세가 부드럽기 때문이다. 게다가 버스와 수레로 800~900m 고지(당
골, 백단사, 유일사, 금천동)까지 올라갈 수 있어 거기서부터 등산에 임하면 되며, 제일 단거리
인 유일사와 백단사에서 정상까지 2시간, 당골에서는 2시간 30분(문수봉 경유는 3시간 30분) 정
도면 충분히 닿는다. (금천에서는 4시간 소요)

매표소에서 당골광장까지는 야트막한 오르막 길의 연속이다. 4발 수레들도 마음껏 바퀴를 굴리
게끔 2차선 도로가 놓여져 있는데, 길이 온통 눈투성이라 수레들도 겁을 먹고 가기를 꺼려한다.


▲  태백산 눈썰매장 입구

▲  한참 몸단장중인 눈조각품

태백산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곳이지만 눈으로 뒤덮힌 겨울이 단연 갑(甲)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겨울 산행의 성지(聖地)로 백설(白雪)이 두텁게 쌓인 겨울 산행의 장쾌함을 누리고자
많은 산꾼들이 몰려온다. 봄과 여름, 가을보다는 겨울 산꾼이 훨씬 많다고 하니 기온이 낮을 수
록 찾는 이가 반비례로 늘어난다. 그리고 겨울의 한복판인 1월에는 눈꽃축제(눈축제)를 벌이는
데, 이 축제는 겨울 축제의 성지이자 대명사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미국(米國)을 비롯한 여
러 나라에서 이 축제를 찬양했고, 미국의 CNN방송은 한국에서 가봐야 될 50곳의 하나로 선정하
며 찬양의 수준을 높였다. 솔직히 태백산은 국내에서만 머물기는 진짜 아까운 산이다. 국내 명
소/축제를 넘어 세계적인 겨울 축제와 명소의 성지로 우뚝 서기를 고대해 본다.

태백산은 겨울 산행의 성지, 겨울 축제의 성지이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던 옛날부터 제천의
식(祭天儀式)을 거행하던 성지였다. 산 정상에는 천제단(天祭壇, 중요민속문화재 228호)과 장군
단(將軍壇)이 있는데, 이들은 천하의 국조(國祖)인 단군(檀君)을 비롯하여 어린 나이에 숨져 태
백산신으로 추앙 받은 단종(端宗)에게 제를 올리던 곳으로 돌로 쌓은 조촐한 제단이지만 강화도
참성단(塹星壇)만큼이나 신령스러운 기운이 가득하다. 이렇게 하나도 아니고 3가지의 성지로 일
컬어지니 태백산의 명성은 나날이 하늘을 찌른다.


▲  설송(雪松) 밑에 자리한 석탄박물관 표석

▲  태백석탄박물관(太白石炭博物館)

당골광장 동북쪽에 자리한 태백석탄박물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탄 전문 박물관으로 1997년 5월
에 문을 열었다. 초창기에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으나 꾸준히 업그레이드를 벌여 이제는 태백
에서 꼭 가봐야되는 명소로 단단히 부각되었다.

박물관 규모는 지상 3층, 지하 1층으로 8개의 전시실과 야외전시장을 갖추고 있으며, 단순히 석
탄 관련 내용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역사와 지질(地質)을 시작으로 광물(鑛物)의 탄생
과 종류, 화석(化石), 석탄과 탄광 관련 문서와 기계/장비, 탄광 정책 관련 자료, 태백 관련 향
토자료, 탄광 광부들의 생활상, 탄광갱도 체험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3층에서 지하로 내려갈
때 엘리베이터는 층수가 아닌 -100m 단위로 거의 -900m까지 수치가 내려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 마치 탄광 엘리베이터를 탄 듯한 오싹함을 선사한다. 지하층으로 내려오면 탄광 체험 갱도관
이 있으며, 그곳을 나오면 기념품과 특산품을 파는 기념품점이 나온다.

태백석탄박물관은 지금까지 2번 구경을 했는데, 이번에는 내려올 때 관람을 했다. 박물관과 관
련된 내용은 이쯤에서 정리를 하겠으며, 전시실을 모두 둘러보는데, 보통 1시간 반 정도, 길게
는 2시간 정도 잡으면 된다.


▲  제1전시실 지질관에서 만난 자수정(紫水晶)의 위엄
지질관에서는 자수정 같은 귀에 익은 광물부터 낯설은 광물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와 지구 곳곳에서 수집한 광물 진품이 진열되어 있다.


※ 태백석탄박물관 관람정보 (2014년 2월 기준)
* 관람시간 : 9시 ~ 18시 (17시까지 입장해야 됨, 쉬는 날 없음)
* 입장료는 공짜인 듯 싶지만 엄연히 태백산도립공원 입장료에 포함되어 있음
*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166 (천제단길 195 ☎ 033-552-7730 / 033-550-2743)
* 석탄박물관 홈페이지는 위의 자수정 사진을 클릭한다.


▲  당골광장 부근에 조성된 공원과 연못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면 연못도 거추장스러운 얼음을 박차고 기지개를 켤 것이다.

▲  당골광장에서 문수봉으로 올라가는 길
당골광장에서 산길은 2개로 갈리는데, 왼쪽은 제당골과 문수봉으로, 오른쪽은
호식총과 망경사, 천제단으로 이어진다. 문수봉으로 가도 천제단까지
갈 수 있으나 3시간 30분 정도 잡아야 된다.

▲  막바지 매뭇새를 다듬고 있는 눈축제장

태백산의 백미(白眉) 중 하나인 눈축제는 보통 1월 중순에 열린다. 허나 우리가 갔을 때는 열리
기 직전이라 축제 분위기도 누리지 못하고 축제를 위해 조성된 눈조각품만 바깥에서 보는 것으
로 만족해야 했다.


▲  설림(雪林)으로 들어서다 (문수봉 방면)

▲  설림에 한가운데에 서다.
키가 큰 늘씬한 수목들이 앞다투어 하늘을 가리면서 산길이 좀 어둡다.
나무들은 겨울 제국이 내린 눈을 소복으로 삼으며 묵묵히 봄을 기다린다.

▲  고려 후기 문인인 안축(安軸)이 태백산에 올라 지은 시가 담긴 표석
시의 내용은 앞부분에 있음 (당골광장에서 망경사 방면)


♠  태백산 마무리

▲  태백산의 또 다른 수호신 석장승 - 강원도 지방민속문화재 4호

당골광장에서 단군성전 입구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별다른 모양이 없는 석상이 마중한다. 이 석
상은 바로 석장승으로 원래는 북쪽으로 1.2km 떨어진 미루둔지(장승둔지)에 있었는데, 1960년대
에 망경사로 옮겼다가 1987년 태백문화원이 지금의 자리에 안착시킨 것이다. 

장승의 모습을 보면 얼굴 부분이 손상된 문인석(文人石)처럼 보이기도 하며, 미륵상으로 보이기
도 한다. 얼굴이 워낙 심하게 손상되어 원래 모습을 알기 힘들며, 머리에는 관(冠)처럼 생긴 것
을 쓴 것으로 보인다. 얼굴 양쪽에는 귀로 보이는 길쭉한 부분이 있다.
그의 탄생시기는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천제단 가는 길목인 태백산 북쪽에 자리해 있어 성
역(聖域) 임을 알리는 역할과 이정표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덩달아 산신의 수호신상의 역
할까지 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코 부분이 많이 닳아있어 마을의 수호신까지 겸한 것으로 여
겨진다. 예전에는 장승 옆에 3마리의 오리가 새겨진 솟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어디로 마실을 갔
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석장승이 많이 전해오고 있지만
정작 강원도에는 이 장승이 유일하다. 옛날에는
태백산 정상 천제단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장승
<장생(長生)>을 많이 세워 성역(聖域) 및 이정
표의 역할을 했으며, 장승모랭, 장승백이, 장승
둔지, 장승거리 등의 지명이 남아있어 태백 땅
에 장승이 제법 많았음을 보여준다.
허나 무심한 세월과 몰지각한 사람들의 만행으
로 장승은 죄다 자취를 감추어 이제는 전설 속
의 이야기가 되었으며, 오로지 당골의 석장승만
살아 남아 태백이 왕년에는 장승의 낙원이었음
을 아련하게 귀뜀해줄 따름이다. 참고로 태백의
조선시대 지명인 장생은 바로 장승에서 유래된
것이다.
<태백을 이루는 동네의 하나인 장성(長省)이 장
생에서 변경된 이름임>


▲  태백산으로 올라가는 하얀 숲터널 (석장승에서 망경사 방면)

▲  당골계곡과 함께 이어진 산길
이 세상에 색깔은 하얀색과 하늘색, 갈색(나무 줄기) 밖에 없는 것 같다.

▲  설림 속을 거닐다
집으로 고이 훔쳐와 혼자서만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절경이다. 허나 나는 조물주가
아닌지가 저 풍경을 가져오지는 못하고 대신 사진이란 것으로
그 장면을 복사해 담아가지고 왔다.

▲  단군성전 앞에 마련된 단군상
명세기 우리의 국조(國祖)인데, 보호각 하나 놓아드려야 되는거 아닐까?
저렇게 눈과 바람을 맞게 놔두는 것은 그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  단군성전(檀君聖殿)

석장승을 지나 대략 1km 정도만 전진하고 발걸음을 접고 말았다. 후배가 힘들다고 그러니 더 이
상 끌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다음 인연을 고대하며 발길을 접
었다. 발을 돌린 지점은 아마도 해발 1,000m 정도 될 것이다. (당골광장이 거의 850m임)

내려가는 길에 당골광장 남쪽에 자리한 단군성전에 들렸다. 이 성전은 옛 조선(朝鮮)의 시조이
자 우리의 국조인 단군의 사당으로 1975년에 구성된 '국조단군봉사회'가 1982년에 성금을 모아
창건하고 단군성전이라 하였다. 그의 사당을 이곳에 지은 것은 그에게 제를 지내는 천제단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1993년에 태백산도립공원 개발계획에 따라 성전을 수리했으며, 매년
10월 3일 개천절(開天節)에 제례를 올리고 있다. 성전 현판의 글씨는 신덕선이 썼다.

비록 오래된 문화유산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뿌리를 생각하게 하는 의미심장한 현장이다. 하지
만 등산객과 탐방객들 대부분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등산로에서 계단을 타고 조금 올라가야 되
는 곳에 있기도 하지만 썩어빠진 이 땅의 권력층에 의해 점차 오염되가는 역사교육의 부실과 무
관심 조장도 한몫한다.


▲  단군성전에 봉안된 단군 영정

오로지 상상으로 그려진 단군의 영정(影幀), 후덕한 인상과 긴 수염, 황색 옷이 인상적이다. 단
군은 옛 조선 군주의 명칭으로 여겨지며, 조선의 군주가 정치와 제사를 모두 관장한 제정일치(
祭政一致) 사회였다.

옛 조선은 기원전 2333년 경에 건국되어 기원전 108년에 문을 닫은 장수국가로 한반도를 비롯하
여<남한 지역에 있던 삼한(三韓)>도 조선의 간접 영역으로 보기도 함> 요동(遼東)과 만주, 요서,
화북(華北) 일부를 다스린 동아시아 강대국이다. 조선의 건국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하나
산소도 아까운 식민사관(植民史觀) 패거리들은 기원전 10세기 이내로 창건 연대를 잡고 있으며,
영역도 한반도 북부와 요동으로 크게 축소시켰다.

조선의 중심지는 요동으로 보이며,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공격하여 대륙의 지배권을 차지하
려했으나 철기(鐵器)로 중무장한 연나라의 반격에 오히려 크게 밀려 요하(遼河)를 비롯한 서쪽
2,000리의 땅을 잃고 만다. 당시 조선은 청동기 무기였다. 그러니 어찌 게임이 되겠는가?
이후 대륙에서 넘어와 준왕(準王)의 신임을 받은 위만(衛滿)이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남쪽으로
쫓아내고 왕이 되었다. 준왕은 그를 따르는 신하와 배를 타고 남쪽으로 건너가 한왕(韓王)을 칭
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마한(馬韓) 영역인 전라도나 충청도로 내려간 것이 아닌가 싶다.

위만이 조선을 장악하자 철기무기를 개발하고 국력을 길러 한나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를 공격해
영토를 확장하고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해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에 한나라 무제(武帝)는 조선
이 동방(東方) 무역 독점으로 배를 불리며 나날이 국방력을 다지는 것에 크게 위협을 느끼며 우
선 주변 나라를 말끔히 정복하고 그 자신감으로 조선을 협박했다.
조선이 반발하며 먼저 대륙을 공격하자 한무제는 이때다 싶어 군사를 보내 반격을 가했는데, 한
나라군 내부 분열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패했다. 그러자 뚜껑이 단단히 열린 한무제가 다시
군사들을 다그치자 정신을 차린 한군(漢軍)은 정비를 가다듬고 반격을 가해 끝내 왕검성까지 포
위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쉽사리 함락시키지 못하며 끙끙 앓던 차에 조선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조선의 마지막
군주인 우거왕(右渠王)이 반대파에게 피살되고, 왕을 잃은 조선 조정은 그 혼란을 잠재우지 못
해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렇게 옛 조선은 망하고, 그 땅 일부에 그 유명한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데, 그것도 조선
유민들의 끊임없는 비협조와 반발, 그리고 고구려(高句麗)와 부여(夫餘)의 등장으로 그 땅에 제
대로 침도 바르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한사군의 존재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은데, 식민계열 쓰레기들은 평안도와 황해도, 요동 일부로
보고 있으며, 강단사학자와 많은 사학자들은 요동과 요서 쪽으로 보고 있다. 한4군의 하나로 유
명한 낙랑(樂浪)이란 존재도 낙랑국과 낙랑군(樂浪郡) 2개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직 의견이 분
분하나 대체로 낙랑국은 평양 지역, 낙랑군은 요서로 보고 있다. 그러니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 설화로 유명한 낙랑은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으로 보는 것이 맞다. 만약 낙
랑군이라면 낙랑공주는 공주를 칭할 수가 없다. 그냥 군을 다스리는 태수(太守)의 딸일 뿐이다.

옛 조선은 전성기였을 때 인구가 무려 1억 8천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조선의 문화와 문명
은 중원대륙과 주변의 많은 나라와 민족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漢字) 같은 경우도 동이족(東夷
族)으로 대표되는 조선에서 만들어 대륙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며, 그 문자가 대
륙으로 넘어가 크게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통용 글자가 되었다. 또한 대흥안령산맥 쪽에서 발생
한 홍산문명(紅山文明)도 조선의 찬란했던 흔적이며, 한반도와 만주에서 많이 발견되는 엄청난
양의 고인돌(지석묘) 또한 조선의 청동기시절 흔적이다.


▲  하얀 기와집이 된 단군성전 삼문(三門) - 단군성전에서 바라본 모습
성전 뜨락에는 눈이 수북하게 덮여 설경의 극치를 이룬다.

▲  단군성전 삼문 - 바깥에서 본 모습
눈이 지붕에 가득하니 혹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눈 자체는 거의 무게가 없지만 저리 두툼하게 쌓이면 정말 몇톤이 되버린다.

▲  석장승에서 당골광장으로 내려가는 길

▲  눈축제를 위해 조성된 커다란 눈 이글루
마치 눈을 뒤집어 쓴 거대한 석실고분(石室古墳) 같다.

▲  당골광장에서 당골 종점으로 내려가는 길

▲  당골 통나무집에서 먹은 곤드레밥과 반찬들

정상까지 오르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눈 속에 애써 묻으며 당골 종점으로 나왔다. 그때 시간은
12시, 뱃속에서 배고프다고 난리를 친다. 하여 허기진 배를 달래고자 적당한 곳을 찾다가 통나
무집이란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폈다.

이곳은 여행사 단체 손님들로 북적거렸는데, 신발을 벗어야 되는 뜨끈한 방에 들어가 곤드레밥
과 해물파전, 동동주, 소고기국밥을 시켰다. 잠시 뒤 콩나물과 더덕, 김치, 두부 등 8가지의 정
갈한 밑반찬이 앞에 펼쳐진다. 이들 가운데 양념장이 버무러진 커다란 두부는 반찬의 갑(甲)으
로 두부 맛이 좋아 2번 정도 더 시킨 것으로 기억이 난다.

반찬을 먹고 있으니 곤드레밥과 소고기국밥 등의 식사가 나타난다. 곤드레밥은 정선과 평창, 영
월, 태백 지역의 토속음식으로 곤드레나물을 비롯한 산채 나물과 김가루가 버무려진 일종의 비
빔밥이다. 곤드레밥에는 늘 구수한 된장찌개가 짝궁처럼 나타나는데, 이곳의 찌개는 두부가 풍
부하다. 그렇게 먹고 있으려니 동그란 해물파전과 동동주가 3차로 나타난다.
파전은 가격에 비해 좀 커보인다. 허나 반찬과 곤드레밥으로 어느 정도 배가 들어찬 상태기 때
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파전은 일부를 남기고 거진 다 먹었는데, 뱃속에서 그만
보내라고 북소리가 울린다. 그러다보니 동동주는 둘이서 절반 밖에 마시질 못했다.


▲  해물파전의 위엄

이렇게 풍성하게 점심을 먹으니 졸음이 슬쩍 나를 희롱하며 배 깔고 한숨 자라고 보챈다. 졸음
의 희롱을 과감히 내던지고, 커피와 식당 내부 연탄 난로에서 대핀 보리차를 여러 잔 마시며 식
곤증과 추위를 몰아내고 밖으로 나선다.

이렇게 태백산과의 짧은 인연을 마치고, 어디로 갈까 머리를 굴리다가 미인폭포로 가기로 하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그곳으로 향했다. 이후 내용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기 바란다.
(☞ 미인폭포 보러가기)

★ 태백산 당골 찾아가기 (2014년 2월 기준)
① 철도 이용
* 청량리역과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태백역으로 가는 강릉행 무궁화호 열차가 1일 6회(휴
  일에는 7회) 운행한다.
* 강릉역과 동해역에서 청량리행 열차(1일 6회, 휴일 7회)를 타고 태백역 하차
② 시외버스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20~4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부산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6회, 대구(북부)에서 태백행 직행버스가 1일 10여 회(직통은
  1일 9회 운행)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부천, 성남, 안산, 수원에서 태백행 직행버스 이용
* 원주, 제천, 삼척, 강릉, 영주에서 태백행 직행버스 이용
③ 현지교통
* 태백역전에 있는 태백터미널에서 당골행 7번 시내/좌석버스가 1일 20여 회 운행
④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영월 → 고한 → 태백시내 →
  당골주차장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영월 → 상동 → 유일사/백단
  사 → 당골주차장

※ 태백산 관람 정보 (2014년 2월 기준)
* 입장료(단체는 30인 이상) : 어른 2,000원 (단체 1,500원) / 학생,군인 1,500원 (단체 1,000
  원) / 어린이 700원 (단체 500원)
* 주차비 : 대형 4,000원 / 소형 2,000원
* 태백산 눈축제는 1월 중/하순에 2주 정도 열린다. (열리는 시기는 매해마다 다름)
* 당골에는 콘도형 태백산민박촌이 있다. 현재 15동 73실이 있으며, 인터넷에서 예약하면 된다.
  ☞ 태백산 민박촌 홈페이지 가기 (문의 ☎ 033-553-7440~41)
* 태백산 눈썰매장 이용료 : 어른 5,000원 / 어린이 4,000원
* 태백산 당골 소재지 -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 (태백산도립공원 사업소 ☎ 033-550-2741~42)
* 태백산도립공원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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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2월 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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