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듬직한 뒷산, 북한산성 나들이 (1/2) <옛 폐허 속에서 만난 한송이 꽃>


' 북한산(北漢山) 늦여름 나들이 (2006년 8월 20일)'
'상편 ― 북한산성 대서문 ~ 중성문 ~ 북한리계곡 ~ 중흥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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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상, 하 2편으로 나누어 작성했습니다.


무더위를 앞세운 여름의 제국(帝國)이 서서히 그 말로에 접어들기 시작한 8월의 하순, 온 몸으로 물과
짜릿한 스킨쉽을 즐기는 물놀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원한 계곡에 발과 다리를 담구며 여름의 막바지를
보내고 싶은 간절한 생각에, 아는 이들과 함께 서울의 편안한 뒷동산이자 듬직한 진산(鎭山), 북한산을
찾았다.

북한산의 옛 이름은 삼각산(三角山)으로 북쪽의 도봉산과 오봉산(五峯山)을 하나로 묶어 '북한산 국립
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북한산 일대는 포괄적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승 10호로 지정되었다.

북한산은 서울 시내에서 지척이라 언제든지 오를 수 있는 서울시민들의 뒷동산으로 인수봉(仁壽峯)과
비봉, 칼바위를 비롯한 몇몇을 빼고는 그리 험하지가 않아 쉽게 오를 수 있다. 거기에 다채로운 산행
코스가 베풀어져 있어 골라가는 재미 또한 쏠쏠하니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이번에 우리가 찾은 곳은 북한산성 내(內) '북한리 계곡'으로 1968년 '김신조 사건'이후 근 23년 이상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었던 구역이다. 그 덕에 서울 인근 계곡 중에서 제일 청정함을 자랑하며 수량도
언제나 풍부하다. 거기에 보물로 지정된 '원증국사(圓證國師)'의 비석과 탑을 간직한 태고사(太古寺)를
비롯 중흥사, 노적사 등의 오래된 절과 함께 행궁터, 중성문 등 다양한 문화유적들이 후식꺼리로 산재
해 있어 볼꺼리도 상당하다.

오전 11시, 북한산 등산객들이 만남의 장소로 많이들 삼는 구파발역에서 일행들을 만났다. 거기서 떡과
김밥 등을 한아름 사들고. 등산객과 피서객으로 가득한 서울시내버스 704번(서울역 ~ 송추 부곡리)
타고 서울과 고양시의 경계인 '북한산성입구'에서 내린다.
드넓게 펼쳐진 '북한산길'을 따라 1리 정도 걸어가니 서울에서 제일 작은 초등학교, '북한산초등학교'가
나오고 그 곁으로 별로 반갑지 않은 국립공원 매표소가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도 바라본다.

▲ 북한산성 입구에서 바라본 원효봉(元曉峰)의 위용
내가 그를 올려다 보듯, 그는 나를 내려다 보며 서로 눈맞춤을 한다.


매표소에서 일종의 통과의례를 마치고 안으로 들어서면 대서문 안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버스를 타고 갈까도 했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차라리 걷기로
하였다.

꼬불꼬불한 대서문 고갯길은 경사가 완만하여 오르는데 그리 어려움은 없다. 거의 숲길에
가까운 고갯길은 나무들이 베푼 산내음으로 가득하여 그 향에 취기가 돌 정도이다.
고개를 10분 정도 오르니 북한산성의 서문이자 수레가 유일하게 들어올 수 있는 성문, 대서
문이 그 대문을 활짝 열어제치며 우리를 맞는다.


♠ 북한산성(北漢山城)을 들어서며 ~ 사적 162호

▲ 북한산성 대서문(大西門)
오는 이, 가는 이, 누구 하나 막지 않고 언제나 활짝 열려있는 대서문.
6.25전쟁 때 파괴되어 홍예만 덩그러니 남은 것을 1958년에 문루와 여장을 복원하였으며북한산
성 13개의 성문 중 처음으로 복원된 문이다.


~~ 북한산성(사적 162호)에 대하여 ~~
북한산성은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 자락에 축성된 석성(石城)으로 백제 개루왕(蓋婁王) 5년(132년)
국도(國都)인 위례성(慰禮城)을 지키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서울 근교에 들어앉은 여러 성남한산성, 반월성
(포천), 아차산성, 풍납토성..
중에서 제일 오래
된 것으로 백제는 이 곳을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역할과 함께 북쪽으로 향하는 전초기지로 삼았으
며 근초고왕(近肖古王)의 고구려 정벌도 여기를
발판삼아 이루어진 것이다.
6세기 중반신라의 진흥왕(眞興王)은 백제와의 맹
약을 깨버리고 한강 유역을 송두리째 가로채면서
서울의 강북지역을 북한산주(北漢山州)라 하였는
데 이 때부터 북한산성이란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신라에게 상실된 한강 유역을 탈환하기
위해 여러 번 이 곳을 공격했는데 백제가 패망한
이듬해인 661년에도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고려에 이르러 1232년 몽고군과 치열한맞짱이 있
었으며, 우왕(禑王) 연간에 성을 보수하였다.
조선은 17세기까지 북한산성에 크게 주목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외침
으로 단단히혼쭐이 나자, 도성(都城) 주변으로
외성(外城)을 구축해야 된다는 축성론이 대두, 숙
종 연간에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

대서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雲紋)
알록달록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물결의
거센 소용돌이를 보는 듯 하다.

(蕩春大城)을 쌓았으며, 토성(土城)인 북한산성을
석성으로대대적으로 증축하였으나, 산성의 서북쪽
부분이상당히 취약하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일종의
내성(內城)인 중성(重城)을 쌓았다.

성내(城內)에는 비상용 행궁(行宮)과 관청 등을 세
웠으며, 성을 지킬 승병들의 숙식을 위해중흥사를
비롯한 12개의 사찰을손질하였다.

그 외에도99개의 우물,26개의 작은 저수지, 8개의
창고를 두었다.

북한산성 중성문

1894년에는 동학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절이 파괴되었으며 왜정 때는 화재와 홍수,관리
소홀로행궁과 여러 절들이 하나,둘 붕괴되어사라져갔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6.25전쟁
으로 문루와 성곽 대부분이 파괴되는비운을 겪는다.

1958년 우선 대서문의 문루를 복원하였으며, 1990년대 이후부터 보국문, 대남문, 대동문등의 문
루를 복원, 1999년에는 중성문과 몇몇장대(將臺)를 다시 세웠으며 지금도 계속 산성 복원 프로젝
트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북한산성의 성문은 조선 후기에는 16개이나지금
은 중성문을 포함하여 13개만 남아 있으며 성곽의
길이는 7620보, 약 9.5km이다.
성 곳곳으로 치(稚)를 설치했는데, 치란 성곽을 외
부로 약간 돌출시킨 부분으로 수성전(守城戰)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즉 적이 쳐들어
오면 정면과 측면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배려한것이다.

산성 내에는 고려시대 사찰인 태고사(太古寺)를 비
롯하여 중흥사, 부왕사, 원각사, 봉성사, 노적사,
대동사 등 12개의 절이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 파괴

잡초만 가득한 중흥사터

되어 사라졌으며, 지금은 태고사, 노적사, 대동사, 상운사 정도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 외에 군지휘소 역할을 하던 동장대와 남장대, 북장대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장대(東將臺)만
이 복원되었다.


* 북한산성 (대서문 코스) 찾아가기 (2007년 1월 기준)
- 서울역(4번 출구), 광화문역(7번 출구), 구파발역(1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704번 이용,
북한산성입구 하차
- 주말, 휴일에는 '구파발역(1번 출구) ~ 북한산성입구' 구간을 순환하는 임시 노선이 운행한다.
- 북한산성 매표소에서 대서문 안쪽까지 무료 셔틀버스가 거의 20분 간격으로 오간다.

* 북한산성 입장료 - 공짜 (2007년 1월 1일부로 국립공원 입장료 전면 폐지됨)

▲ 싱글벙글 석장승 1쌍
뭐가 그리들 신이 났는지 톱니처럼 생긴 못생긴 뻐드렁니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며 등산객들
을반가이 맞이하는 석장승 1쌍,
똘망똘망한 눈에 웃음이 넘치는 저들의 익살스런 모습에 산행의 기분이 더욱 즐거워진다.

◀ 북한리 향나무
수령 350년의 오래된 나무로 고양시 보호수이다.
북한리 마을의 수호목(守護木)으로 나무에 병이
생기면 마을 전체가 병이 난다고 하여. 나무 관
리가 정말 지극 정성이다.

대서문을 지나 10분 정도 들어서면 주막들로 가
득한 북한리(北漢里) 마을이 나온다.
이 곳은 200m고지에 자리한 전형적인 산간마을로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이다.

마을 사람들은 등산객들을 상대로 하여 생계를
꾸리고 있는데 먹꺼리를 파는 주막이 그 주류를
이룬다.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온갖 맛있는 냄새는 우리
를 끝없는 고통(?)으로 몰고 갔다. 그래서 파전
한잔 사들고 갈까 했으나 1장에 13,000원씩이나
한다는 말에 그만 단념하고 말았지.

차량은 마을까지 접근이 가능하나 2004년 이후, 차량의 진입을 대폭 제한하여 마을 사람들의
차량들만 들어올 수 있다.
등산로 주변으로 요란하게 들어앉은 주막들은 계곡 주변을 새까맣게 장악하여 천막과 돗자리
등으로 자리와 만들고 시원한 계류와 맛있는 냄새로 지나가는 이들을 유혹하고, 계곡은 온통
'금강산도 식후경'을 즐기는 이들과 물놀이를 즐기는 피서객들이 뒤엉켜 완전 시장통이다.

◀ 마을의 수호신(??)
북한리 마을에서 태고사 방면 계곡을따라 5
분 남짓 오르면 제왕(帝王)을 닮은 범상치 않
은 모습의 석상과 마주친다.
이 돌상은 근래에 만든 것으로 돌의 피부도
반질반질 한 것이 윤기가 감돈다.
수호신으로 세운 것은 확실한데 불상도 아니
고 그렇다고 산신도 아니고, 그 정체가 참 아
리송하다.
그의 모습을 살펴보면 머리에는 부족한 모습
이지만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있고 옷에는
용무늬 같은 것이 있으니 아마도 곤룡포(袞龍
袍)인 모양이다.
그에 비해 아랫도리는 윗도리에 비해 단순하
게 처리했으며 오른손으로 동그란 무엇인가를
손바닥에 붙인 듯 쥐고 있다. 얼굴은 살이 많
은 것이 포근해 보이며, 양쪽 귀는 부처님 귀
마냥 축 늘어져 있다.

▲ 팔작지붕의 중성문(中城門)
북한산성의 보조 성곽인 중성(重城)에 설치된 문으로 숙종 연간에 북한산성 보수공사가마무
리되자 숙종 임금은 친히 시찰을 나와 산성 곳곳을 살펴보던 중, 산성의 서북쪽 부분이 상당
히 취약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내성(內城)에 해당되는 중성을
설치한 것이다.
중성의 역할은 대서문을 뚫고 들어온 적군을 막기 위함으로 계곡에 수문(水門)을 설치했고,
등산로에는 성문을 만들었다.
현재 수문은 그 흔적만 남아 있으며, 중성문도 양쪽에 성곽과 홍예만 남아 있던 것을 문루와
여장을 깨끗히 복원하였다.

중성문의 규모는 조그만 편이며, 문 양쪽에는 100m 남짓의 중성(重城)이 계곡 주변에 펼쳐져
있다.
중성이 축조됨으로써 산성 서쪽에 취약부분을 커버할 수 있고 산성 내부는 더욱 견고(堅固)
해졌다. 산성의 나머지 부분은 가파른 언덕이라서 수비에 유리하다.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머리에 이고 서북쪽을 바라보는 중성문, 마치 등산객들을 검문하는 듯
한 모습이다.

▲ 비석군(碑石群) - 중성문과 중흥사터 중간 지점
18세기에 이후에 세워진 비석들로 약 20기 정도 되는데 그 대부분은 숙종 연간에 추진된
북한산성 증축 프로젝트를 지휘, 감독했던 관리들의 공적(功績)비이다.
바위 위로 마치 나무처럼 솟아난 비석들은 나무 아래 그늘에서 한결같이 서쪽을 바라보며
늦여름 피서를 즐기고 있다.

▲ 북한리 계곡 상류 ~ 이 곳에서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다..
비석군을 지나 점심을 먹고 쉴만한 곳을 찾으며 계속 올라가던 중, 중흥사터 못미쳐로마
땅한 곳을 찾았다.
유리처럼 맑은 계곡물, 그 주변으로 적절히 들어앉은 하얀 피부의 바위들, 부근에 솟아난
나무들은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매무새를 다듬는다.

우리는 저 계곡 위쪽 암반에 자리를 깔고 모든 것을 내려 놓으며 김밥과 떡, 유부초밥, 과
일로 즐거운 점심 시간을 가졌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지 모든 것이 다 꿀맛
이다. 하지만 먹을 것들은 햇빛을 받기가 무섭게 녹아없어지듯 금세 동이 나버린다.

점심을 먹고 계곡에 발과 다리를 푹 담구어 본다. 기분 같아서는 온 몸으로 물에 풍덩하고
싶지만, 그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질 못해 유감스럽지만 다리와 발만 시원스런 계곡물에
맡기며 다리의 피로도 풀어보고, 계곡이 주는 시원함도 맛보며 막바지 여름피서를 즐겨본
다. 거기에 아지랭이 산바람이 거침없이 나를 희롱하며 배 깔고 한숨 주무시라고 유혹하니
슬슬 나른해지기시작한다.

약 1시간 정도 그렇게 신선놀음을 하다가 일행 몇명과 함께 태고사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
했다.
중흥사 가는 길목에 있는 샘터에서 북한산이 인간들에게 내린 약수를 맛보고, 가지고 온
패트병에 가득 담았다.

샘터를 지나면 거대한 주춧돌로 가득한 중흥사의 옛 터가 '오랜 만에 나좀 보고 가라~'
나의 발목을 꽉 붙잡는다.


♠ 조선 승군(僧軍)의 중심지이자 북한산성 12사찰을 관장하던 큰 절,
허나 지금은 주춧돌만이 남아 옛날을 꿈꾸고 있는 ~
중흥사(重興寺)터 ~ 경기도 지방기념물 136호

북한리 계곡의 상류이자 태고사 입구에는 석축과 주춧돌만 무성하게 놓여 있는 중흥사터가 있다.
이 절은 고려 초기에 창건된 것으로 고려 후기 불교계를 주름잡았던 보우대사(普愚大師, 원증국사)
가잠시 주지로 머물렀던 곳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주까지 줄행랑을 친 선조(宣祖)는 서산대사(西山大師)를 불러 승병을
일으킬 것을 눈물로 호소하는데, 이에 감읍(感泣)한 서산은 즉시 승병을 일으켜 토왜(討倭)에 앞장
선다.
1593년 초, 겨우 서울로 돌아온 선조는 그런 승병(僧兵)을 격려하기 위해 조선 승군을 지휘하는 본
부를 중흥사에 설치하게 되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중흥사는 조선 정부의 각별한 지원을 받는조선
의 주요 대찰(大刹)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숙종 연간에 이르러 북한산성을 보수하면서 승병들을 위해 성내(城內)에 사찰들도 손질을 하면서중
흥사는 136칸으로 확장되었고, 산성 내 12사찰을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중흥사의 운도 다했는지 1904년,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하여 절이 거의 쑥대밭이 되었으며
1915년 대홍수로 절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이후 터만 간신히 남아 있던 것을 2000년대 이후, '한민족 불교 중흥회'에서 중흥사의 복원을추
진, 고양시청과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한참 복원 불사를 진행하고 있으나 별로 신통치가 못한지
아직까지는 종무소로 쓰이는 가건물 1채와 겨우 모습만 갖춘 목조 전각 1동이 전부일 뿐이다.

절터는 산등성이에 자리해 있어 언덕에 석축을 쌓아 2단의 구조로 만들었다. 그 꼭대기에는 당연히
절의 법당(法堂)이 들어앉아 있었다.
중흥사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이 중흥사터 안내문에 담겨져 있는데, 그 규모가 가히 대단하다.
그런 절이 마치 아틀란티스 대륙이 바다 속으로 쏙 사라진 것처럼 잡초만이 무성한그 옛터만 덩그
러니 남았으니 역시나 인간의 창조물은 자연 앞에서는 일개 먼지에 불과하다.

* 중흥사터 찾아가기 (구파발 기준)
- 북한산성 정류장 → 대서문 → 북한리 마을 → 중성문 → 중흥사터(3.5km, 1시간 20분 소요)

▲ 옛날을 꿈꾸는 중흥사터 주춧돌
불전(佛殿)의 초석(礎石)들로 지금은 받쳐들 대상을 잃어버려 마치 대머리처럼 허전하다.
절터를 이리저리 뒹굴며 세월을 원망하고 있을 저들의 원성이 가득 들려오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왠지 편치가 않다.

▲ 폐허 속에 피어난 코스모스
그저 황량해 보이던 폐허 속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운 꽃은 피어난다.
어여쁜 미소를 활짝 보이며 나를 바라보는 가녀린 코스모스의 모습에서 이제 가을의 도래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 절터 돌계단

▲ 잡초 속에 파묻힌 아랫쪽 석축
위대한 대자연(大自然)은 중흥사의 존재를 완전히 없애려고 꾀했던 것일까? 푸른 잡초들이
수북히 자라나 절의 흔적들을 온통 가려버렸다.

◀ 중흥사의 부흥은 언제나? ~
절터의 제일 위쪽, 법당 자리 옆으
로 새로 솟아난 건물로 기둥과 건물
외곽은 그런데로완성이되었으나
아직 내부 손질까지는이르지 못했
다.

잡초만 덥수룩한 절터에는 공사자재
들이 흉한 모습으로 이리저리방치
되어 있어 중흥사 복원불사의 어려
움을 보여준다.

◀ 가건물로 이루어진 중흥사 종무
소(宗務所)

종무소라고는 하지만 거의 법당 겸
요사(寮舍)의 역할까지 도맡고 있다.


♠ 북한산성 행궁(行宮)터 ~ 경기도 지방기념물 160호

중흥사터에서 계곡을 벗삼아 대남문 방면으로 15분 정도 오르면 행궁터를 알리는 안내문을 만나게
된다. 그 뒤쪽 수풀 사이로 세월의 버림을 받은 돌무더기들이 가득 널려져 있으니 바로 옛 북한산
행궁을 떠받들던 주춧돌이다.

북한산 행궁은 조선 숙종 37년(1711년) 북한산성 보수공사 책임을 맡은 김우항(金宇杭)이 비상시산
성 내(內)에 머무를 수 있는 행궁을 세울 것을 상주(上奏)하면서 만들어 진 것이다.

행궁의 전체 규모는 124칸 정도로 중흥사보다는 작으며 제왕의 생활공간인 외전(外殿)과 왕비의거
처인 내전(內殿)으로 이루어졌다.
허나 왜정 이후, 거의 방치에 가까운 관리소홀과 1915년 대홍수로 전각들은 하나,둘 무너져 내리고
결국건물을 떠받들던 주춧돌만이 앙상하게 남게 되었다.

▲ 이 곳에 정말 행궁이 있었을까?? ~~
수풀들 사이로 간신히 고개를 내민 주춧돌만이 자칫 자연 속에 영원히 파묻힐 뻔한
북한산 행궁터의 존재를 애써 알려줄 뿐이다.

현재 궁터에는 내전과 외전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축대 일부, 좌우의 담장터 등이 남아 있고 건물
터 곳곳으로 기와조각들이 어지러히 널려 있다.
특히 내전터에는 정면 7간, 측면 4간 규모의 주춧돌이 있고 기단과 석축 등이 남아 있는데, 북한산
성의 내력을 담은 '북한지(北漢誌)'에 '좌우상방 2칸, 대청 6칸, 사면퇴 18칸, 도사 28칸'이란 기록
이 있어, 정면 5칸, 옆면 2칸의 건물에 사방 1칸씩을 덧단 구조의 전각으로 추정한다.

궁터 서쪽 구석으로 잘생긴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피부에 활을 걸었다는 뜻의 '게궁암(揭弓岩)'이
란 각자가 있다.
1992년 겨울, 부친(父親)과 왔을 때 어렴풋이 본 기억이 있어 수풀과 맞서며 궁터 안쪽으로 깊히 들
어가보았으나 내가 별로 달갑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새 훼손되어 없어졌는지 결국 만나진 못했다.

▲ 태고사 올라가는 길
대남문 가는 길목에 있는 '금위영 이건기비(禁衛營 移建記碑)'까지 올라가려 했으나 어차피 예
전에 다 본 것이므로 그 미련을 내 버리고 태고사로발걸음을 옮긴다.
태고사도 물론 몇 번씩 드나들던 곳이긴 하지만 간만에 원증국사의 흔적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그의 산문(山門)을 찾았다.

~~ 아쉽지만 상편은 여기서 끝.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8월 20일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6년 9월 12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6년 9월 23일
* 숙성기간 ~ 2006년 9월 24일 ~ 2007년 1월 4일
* 공개일 - 2007년 1월 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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