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듬직한 뒷산, 북한산성 나들이 (2/2)


' 북한산(北漢山) 늦여름 나들이 (2006년 8월 20일)'
'하편 ― 태고사(太古寺) ~ 산영루터 ~ 북한산성 계곡 ~ 서울 청계천'


* 익스플로어 새 창으로 보고자 할 경우
여기를 클릭바랍니다.
* 사진을 올린 블로그와 사진 사이트의 점검 및 기타 사유로 인해 가끔 사진이 안뜨거나 늦게 뜰 수
있으며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과 사진이 다소 비정상적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 본 글은 상, 하 2편으로 나누어 작성했습니다.
상편 (북한산성 대서문, 중성문, 중흥사터, 행궁터) ^^ 보러 가기 ^^


♠ 보우대사(普愚大師, 원증국사)가 세운 고려후기 고찰 ~
북한산 태고사(太古寺)

▲ 머리결을 살짝 치켜올린 태고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이 암자에 내가 살지만 나도 잘 몰라
깊으디 깊고 빽빽하지만 옹색하지 않아
하늘과 땅을 모두 가두었으니 앞과 뒤가 있을 리 없고
동서남북 어디라도 머물지 않네.

* 보우대사가 태고사에 머물며 지은 태고암가(太古庵歌)의 한 수


중흥사(重興寺)에서 동남쪽으로 1리 정도 떨어진 400m고지에 둥지를 튼 고찰로 1341년 원증국사(圓
證國師 = 보우대사)가 창건하여 태고암(太古庵)이라 하였다.
구한말까지 중흥사의 부속 암자로있었으며 1915년 대홍수와 6.25전쟁으로 말끔히 파괴된 것을 1960
년대 이후 다시 세웠다.
거의 암자와 같은 사찰이라 규모는 작고 초라하지만 700년 가까이 명맥을 유지하며 그 자리를지켜
온북한산의 전통 토박이 사찰이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산신각, 요사(寮舍) 등, 3동의 불전이 있으며 문화재로
는 보물로 지정된 원증국사탑비와 부도탑, 그리고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부도 2~3기가 있어 절의 오
랜 역사를 대변해 준다.
비록 등산을 해야 접근이 가능한 곳이지만 서울 시내에서도 가까워 조용한 산사(山寺)의 멋과 여유
를 원없이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속세의 무거운 짐을 잠깐 내려놓고 세상사의 온갖 번뇌를 잠시흘려
보내기에는 아주 그만인 곳이다.

* 태고사 찾아가기 (구파발 기준)
- 북한산성 입구 정류장 (704번 버스) → 매표소 → 대서문 → 북한리 마을 → 중성문 → 비석군
→ 중흥사터 → 태고사 → 원증국사 탑비 (약 4km, 1시간 40분)
- 북한산성 동장대와 용암문 사이로 봉성암, 태고사 방면으로 통하는 산길이 있음

◀ 태고사 귀룽나무 ~ 고양시 보호수 17호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훤칠한 외모의 나
무 1그루가 절을 찾은 중생들을 맞이한다.

이 나무의 이름은 '귀룽나무'로 우리나라에서
매우 희귀한 수목이다.

나무의 나이는 약 150년, 높이는 23m로 허리
둘레는 2.3m에 이른다.
따가운 여름 햇살이 귀룽나무의 위용에 눌려
경내까지는 미치지 못하니 덕분에 경내는그
늘로 가득하여 가을처럼 시원하다.

매년 3월 말이면 나무 전체가 하얀 꽃으로 곱
게 단장을 한다고 하는데 마치 하얀 눈처럼
보인다고 한다.

▲ 대웅보전 추녀 밑 풍경물고기
찾는 이도 별로 없는 고즈넉한 산사의 정적을 조용히 깨뜨리는 풍경물고기. 허공을 바다로 삼고
시원스런 산바람을 파도로 삼은 물고기는 마치 신이라도 난 듯, 부산히 몸을 움직이고, 그가 맨
바닥에 떨어질라 꽉 붙들고 있는 바람방울(풍경)도 덩달아 춤을 추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아낌
없이 베풀어 준다.


♠ 테고사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 ~ 보물 611호

대웅보전 우측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고려후기 고승(高僧)인 원증
국사의 탑비가 조용히 들어앉아 있다.

원증국사는 1301년 귀족 집안인 홍주홍씨(洪州洪氏
) 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홍연(洪延), 모
친은 정씨로, 13살에양주 회암사(檜巖寺)에 들어
가 머리를 깎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도하였다.

1325년 승과(僧科)의 하나인 화엄선(華嚴選)에 급
제했으나 선수행을 위해 과감히 포기하고 용문산
상원사(上院寺)에 머물다가 감로사(甘露寺)로 자리
를 옮겨 계속 불도에 매달렸다.
그 뒤 북한산 중흥사에 들어와 1341년절 동쪽에
친히 태고사를 세워 그곳에 머물며'태고암가'를
지었다.

1346년 원나라로 넘어가 임제종(臨濟宗) 18대 법손
(法孫)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원나라 왕 순제(順帝)의 초청을받아 그에게 반
야경(般若經)을 강설(講說)하기도 하였다.

▲ 원증국사 탑비와 비각(碑閣)

1348년 귀국하여 광주(廣州)에 머물며 일가 친척을 이 곳으로 죄다 불러 살게 했는데 광주를 현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고려 정부에 건의하여 광주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1356년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원융부(圓融府)에 머물며 승려의 임명권을 장악, 고려 불교계의
1인자가 되었으며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신뢰하면서 보우대사를 약간 멀리하게 되는데 신돈은 그를심하게 견
제하는 과정에서 속리산(俗離山)의 어느 암자에 연금까지 시켜버린다.

신돈이 처단된 후, 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려 했으나 자신을 박대했던 감정 때문인지 병을이유
로 거절한다.

1381년 양산사(陽山寺)로 거처를 옮기는데 이
때 우왕(禑王)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임명되었
으며 1382년 소설사(小雪寺)에서 열반에 드니
그의 나이 81세, 법랍(法臘) 68세이다.

우왕은 그에게 원증(圓證)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탑호(塔號)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
다.

오랜 세월의 무게와 함께 웅장한 멋이 풍기는
이 탑비는 13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碑文)
은 고려 3은(三隱)으로 유명한 이색(李穡)이
썼으며 거북이 등의 귀부(龜趺)를 초석으로 삼
아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
었다.

탑비를 보호하는 비각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6.25전쟁으로 파괴되어 높다란 주춧돌만남아
있던 것을 1980년대 이후에 새로 세웠다.

▲ 원증국사 탑비의 귀부(龜趺)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표정이 매우 밝아보
인다.
왕눈이처럼 또렷한 커다란 두 눈과 약간 마멸이 되
버린 세모 모양의 코, 그리고 진정한 스마일이 무엇
인가를보여주려는 듯한 입,
그러나 사실적인 조각과 함께 화려함을 자랑하던 고
려 전기에 비해서는 약간 뒤떨어지는 것 같으며 조
각도 그저 모양만 갖춘 것 같다.

▲ 경내에서 원증국사 부도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태고사 산신각(山神閣)
북한산의 산신(山神)을 모신 전각으로 특이하게도 나무 대신 돌과 바위로 지어졌으며 건물
내부는 거의 석굴(石窟)과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 산신각 산신도(山神圖)
산신각 내부는 현대적인 조명시설이 없어 상당히 어둡다.
다행히도 산신도 앞으로 자신의 몸을 불사른 촛불들의 희생으로 그림을 보는 데는 그리 어려
움은 없다.

이 곳의 산신도는 바위에 그려진 벽화로 꼬랑지를 높게 쳐들며 하얀 이를 유감없이 드러낸
호랑이의 모습이 제법 용맹스러워 보인다.
벽화 가운데로 긴 흰수염의 산신이 멀뚱한 표정으로 그렇게 앉아 있고 그 옆으로동자(童子)
1명이 시립(侍立)해 있다.


♠ 태고사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 ~ 보물 749호

태고사에서 뒤쪽 산자락으로 2분 정도 오르다 보면 수려한 모습의 원증국사탑을 만날 수 있다.
이 탑은 앞서 언급했던 보우대사의 묘탑(墓塔,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으로 그는 열반에 들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시를 남겼다. 그도 죽기 전에야 인생무상을 뼈저리게 느꼈던 모양이다.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人生命若水泡空
팔십여 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八十餘年春夢中
죽음에 다다라 이제 가죽포대 버리노니 臨終如今放皮袋
둥글고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一輪紅日下西峰


이 탑은 기존에 전해오는 고려시대 부도와 전혀 다른 특이한 모습으로 유명한데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그 위로 마치 조그만 부도가 들어앉은 듯한 지붕돌이 있으며
그 위에 다시 특이한 모습의 머리 장식을 얹었다.

기단의 아랫 부분에는 정교한 꽃 무늬가 잔
뜩 들어앉아 있으며 8각의 가운데 받침돌에
는 기둥무늬와 꽃무늬로 가득하다.

비록 진짜 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들을
시샘하듯, 부도 주변으로는 꽃이 한 송이도
눈에 띄질 않았다.

탑의 조성 시기는 1385년 이후로 탑을 통해
고려 조정의 보우국사에 대한 신임(信任)과
그의 인기가 가히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 원증국사탑의 기단 부분

▲ 원증국사를 향한 일편단심 ~ 나란히 서 있는 부도 1쌍
예전에는 원증국사의 부도탑만이 외로이 서 있었는데, 근래에 이르러 태고사의 어느 승려(이름은
모르겠음)가 입적하면서 그의 묘탑을 원증국사탑 아래에 나란히 세워 놓았다.

아래쪽 부도는 보우대사에 대한 존경과 일편단심을 표하려는 듯, 위쪽 부도를 바라보고 있으며 그
모습도 상당히 비슷하다. 특히 충주 정토사(淨土寺)의 부도탑과 많이 비슷한데시원스레 올려진
지붕돌의 처마가 꽤 인상적이다.

이렇게 태고사 경내를 둘러보고 다시 계곡으로 내려와 계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벗삼으며
다시휴식을 즐긴다.
계곡 암반에 벌러렁 누워낮잠도 자고, 유리처럼 맑은 계류에 발과 다리를 푹 담구며 자연의 일부
가 되어 풍류를 즐기던 옛 사람들을 원없이 따라해 보고 싶었는데 나의 그런 지극한 뜻도 모른 채
, 빨리 내려 가자고 보채는 몇몇 이들의 협박(?)으로 그만 자리를 접고 내려와야 했다.


▲ 옛 정취가 희미하게 서린 산영루(山映樓)의 옛 터
북한리 계곡 등산로는 예전에 비해 많이 직선화가 되어 오랜 만에 찾아온 나를 은근히 햇갈리게 만
들었다. 예전 길은 굴곡은 좀 있었지만 계곡과 나란히 이어졌는데, 신작로는 약간 산등성이로 일부
구간에서는 계곡과 상당히 떨어져 있다.

용학사 아래쪽 바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비석군(碑石群)에서 새 길로 가지 말고, 계곡 쪽으로 난
옛 길로 들어서면 잡초 사이로 불쑥 고개만 내민 주춧돌로 이루어진 '산영루' 터가 나온다.

북한리 계곡의 중간 부분으로 계곡이 잘 바라보이는 높다란대(臺) 위에 둥지를 튼 이 곳은 숙종
연간에 세워진 'T'자 형 누각으로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시인묵객들이 앞다투어 찾아오던 서울 근
교의 명승지였다.
이 곳에서는 자주 시회(詩會)가 열려 우수한 시문(詩文)들이 아낌없이 쏟아져 나왔으며 김정희(金
正喜)와 정약용(丁若鏞)도 손수 이 곳을 찾아 산영루의 아름다움을 시로 예찬하였다.

조선 후기 문학의 산실로 이름을 날리던 산영루는 1920년대 화재를 만나 폭삭 붕괴되었으며 지금은
주춧돌과 신발을 벗어두던 섬돌만이 남아 옛 정취를 그리워 할 뿐이다.

▲ 산영루에서 바라본 폭포
북한리 계곡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곳으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곳 중에 하나이다.
마음 같아서는 저 절경을 우리집으로 몰래 빼가고 싶지만.. 그건 이 곳으로 집을 옮기지 않는이상
은 불가능하겠지...

계곡으로 들어올 때 저 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도 먹으며 물놀이도 하려고 했으나 직선화된 새길만
을 졸래졸래 따르다 보니 그만 저 곳을 놓치고 내려갈 때야 겨우 보게 되었다.

▲ 북한리 계곡의 중류
수정처럼 맑은 계곡물이 큰 세상을 꿈꾸며 하얀 피부의 암반을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저 물에 풍덩 뛰어들었으면 소원이 없으련만. 이제 내년(2007년)을 기약해야 될 것 같다.

▲ 피서삼매(三昧)의 현장 ~ 북한리 계곡 하류
북한리 마을을 지나면서 계곡에 대한 미련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대서문 방면 신작로를 버리고계
곡 하류 쪽으로 통하는 아랫쪽 등산로로 방향을 틀었다.
이 코스는 계곡의 하류를 벗삼아 북한산성 입구 매표소까지 통하는 약 3리의 등산로로 빼어난 절경
을 자랑하는 바위와 담(潭) 등이 연이어 이어져 있다.

대서문 코스는 많이 와봤지만 아랫쪽 길의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했지, 그래서 같은길로
내려가기 식상하여 계곡 길로 과감히 길을 잡은 것이다.
처음에는 별로 기대를 안하고 갔으나, 정말 설악산(雪嶽山) 계곡에 비견될 정도로 놀라운 절경의
연속이었다. 대서문 아랫목에 이렇게 좋은 곳이 숨어 있었다니. 내 눈을 의심할 정도였지.

물론 계곡 상류보다 수질은 별로겠지만 계곡이 나에게 보여준 그 수려한 절경에 좀처럼 눈이 떼어
지질 않는다. 일행들 때문에 저런 곳을 그저 차창 밖 바라보듯 그렇게 지나쳐야 된다는 것이 너무
나안타까울 뿐이다.

계곡 곳곳에는 물놀이를 즐기는 피서객들로 가득, 계류에 온몸을 던지며 물과 찐한 스킨쉽을 즐기
면서 8월의 하순을 보내는 어린이들과 10대 ~ 20대들도 상당하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싱글벙글, 여름의 제국에 대항하며 계곡 물과 시원한 하루를 즐기는 것만
큼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 발굴, 정리중인 서암사(西巖寺)터
계곡 하류를 지나면 길 오른쪽으로 넓은 공터가 나오는데, 이 곳은 북한산성 12개 사찰의 하나인
옛 서암사터이다.
서암사는 조선 숙종 연간에 북한산성에 세워진 사찰로 근래에 들어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절터의
윤곽을 확인했으며, 조만간 복원할 계획을 가지고있다고 한다. 하지만 '중흥사'도 제대로 처리하
지 못하는 상황인데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별로 넓지 않은 절터에는 동그란 우물터가 남아 있으며, 옛 불전을 받쳐들던 주춧돌들이 어지러히
놓여져 옛날을 그리워 한다.


북한산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며 '다음에 또 찾아오리다!!' 마음 속으로 외치면서 북한산성 입구
정류장으로 갔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줄이 뱀꼬리 마냥 길게 이어져 있으나 버스들이 제
깍제깍 와주어 줄은 금방금방 줄어든다.
우리는 구파발역까지만 가는 임시노선을 탔는데 다행히 한 자리씩 차지하며 편안히 앉아서 갔다.

종로2가에서 뒷풀이를 할 생각으로 구파발에서 서울시내버스 471번(고양시 삼송동 ↔ 복정역)
환승할인으로 거의 공짜로 타고 종로2가로 이동하여 삼겹살로 유명한 어느 고깃집을 찾았다.

이 집은 그 유명세 덕분인지 찾아오는 사람들이 상당하다. 5층짜리 건물 전체가 고깃집으로 수용
인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는 것은 거의 통과의례처럼 되어버렸다.
예전에 이 곳을 찾았다가 길게 이어진 줄에 굳이 저렇게 줄을 서서 먹어야 되겠는가 싶어서 다른
집으로 갔었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대기시간 3분 만에 자리가 생겼다. 하지만 그 자리는 5층 꼭대
기.. 산행으로 다리가 몹시 지친 상태이지만, 저녁을 먹어야겠다는 집념으로 열심히 올라갔다.
앉을 자리에는 이미 밑반찬 꺼리가 말끔히 차려져 한참 시장기에 빠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기를 주문한지 얼마 안되어 싱싱한 삼겹살이 불판 위에 올려져 우리에게 신고식을 한다.
떡삼겹살 1인분은 무려 8000원, 떡은 밑반찬에 따로 나와 있는데, 고기를 그 떡에 싸서 먹으라는
뜻에서 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이름도 떡삼겹살...

삼겹살과 더불어 김치와 두부, 양파, 버섯도 구이판에 올려놓아 따뜻하게 달아오르길 기다린다.

언제나 구워지려나 싶던 육중한 몸뚱이의 고기가 하나,둘 하얀 모습으로 익어져 간다.
고기가 두꺼워 가위로 싹뚝싹뚝 조각좀 내고 밥과 함께 소주 등의 곡차(穀茶)를 시켜 정말 푸짐하
게 저녁을 먹었다.
밥과 함께 딸려나온 된장국은 거의 진국, 고기보다 더 달콤하여 된장국을 깨끗히 비우고 말았지.
황홀한 냄새를 풍기며 서서히 달아오른 고기들을 배추와 떡에 싸서 된장을 듬뿍발라 입에 넣고
곡차 한잔씩 땡기니 목구멍과 혀가 나보다 더 신명이 나버렸다.

다들 산행으로 시장기가 상당한지 참 많이도 먹었던 것 같다. 8명이서 무려 10인분이 넘는 고기
와 10병이 넘는 소주를 마셨으니 저녁 비용은 12만원을 훌쩍 초과해 버렸다.
이렇게 풍성한 저녁을 먹고, 소화도 시키고 바람이나 쐴 겸, 부근 청계천(淸溪川)을 찾았다.


▲ 하얀 광채를 내며 시원하게 쏟아지는 청계광장의 청계폭포
2차로 청계천에서 맥주를 마시자는 의견이 나와 부근 가게에서 맥주와 간식거리를 바리바리 사
들고 청계천으로 갔다.
청계천의 시작이 청계광장이라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는데 폭포 주변으로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며 너도나도 모델 행세를 하느라 부산한 모습들이다.

청계폭포 아래로 펼쳐진 팔석담(八石潭), 우리나라 8도를 상징한다는 이 곳은 다리를담구며
도심에서의 여름 저녁을 보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술 마실 곳을 찾아 하류 쪽으로 가다가 관수교(청계3가) 부근에 자리를 잡고 물에 발을
의탁하며 맥주 1잔씩 걸친다. 물론 청계천에서 음주를 하는 건 1급 단속대상이지만 맥주를 콜
라라 속이며 간식을 안주 삼아 그렇게 2차를 치른다.

어느덧 시간은 21시를 넘은 가운데, 이제 아쉽지만 헤어질 시간이 왔다.
다들 내일을 위해서 또 열심히 뛰어야 되기 때문에.. 다음을 기약하며 ~~
정말 바람처럼 날아가 재미나게 보냈던 하루, 비록 아쉬움도 많지만 그 때 찾아간 곳들이 그리
워지고 같이 갔던 이들이 그리운 마음에 비록 일천한 수준이지만 이렇게 글로써 그날의전설을
남긴다.

~~ 이렇게 하여 늦여름 북한산성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8월 20일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6년 9월 23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6년 9월 25일
* 숙성기간 ~ 2006년 9월 25일 ~ 2007년 1월 7일
* 공개일 - 2007년 1월 7일부터


★ 본 글은 아래 블로그로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습니다. ~~
☞ daum 블로그 보러가기 ☞ empas 블로그 보러가기
☞ naver 블로그 보러가기 ☞ paran 블로그 보러가기

♥본 글에 대해 의견과 문의사항이 있다면 조금도 지체말고 바로
이 곳으로 메일 보내 주세요 (잘못된 내용, 오타 지적 대환영)~
(단 욕설과 비방, 논쟁은 절대 사절..)

Copyright (C) 2007 by Park Yun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