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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10.08 북한산성 내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노적사~태고사 <태고사 원증국사탑, 원증국사탑비>
  2. 2015.12.23 서울의 듬직한 뒷산, 북한산~북한산성 겨울 산행 (태고사, 행궁터, 대남문, 문수사)

북한산성 내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노적사~태고사 <태고사 원증국사탑, 원증국사탑비>

북한산 노적사, 태고사



' 북한산 산사 나들이 (노적사, 태고사) '
태고사 원증국사탑
 태고사 원증국사탑
 



 

북한산(삼각산)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명성이 높은 서울과 경기도의 주요 도시인 고양(高陽
)을 끼고 있는 수도권 제일의 자연 공원이자 이 땅의 주요 국립공원이다. 번잡한 지역에 누워
있다 보니 찾는 이가 실로 엄청나 1㎢당 탐방밀도가 무려 5만 명에 이른다. 하여 탐방밀도 부
분 세계 기네스북 1위를 거머쥐고 있다.
서울의 든든한 진산(鎭山)이자 내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고 있
는데, 봄을 몰아낸 여름이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오래간만에 북한산
(삼각산)을 찾았다.

오전 11시에 연신내역(3,6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
을 타고 북한산성입구로 이동했다. 주말이라 버스는 북한산과 도봉산(道峯山), 노고산(老姑山
) 산꾼들로 완전 짐짝수송을 이루었는데, 버스는 간신히 바퀴를 움직이며 시내를 빠져나와 북
한산성입구에서 승객 60% 이상을 쏟아낸다.

북한산성입구에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북한산성계곡(북한천) 하류를 따라 수구문(水口門)
터와 서암사(西巖寺)터를 지나 옛 북한동(北漢洞) 마을에 이르렀다.
북한동은 북한에 있는 동네가 아니라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둥지를 튼 산골 마을로 북한산
성이 조성되면서 형성되었다. 주로 군사들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으며, 마을은 북한동역사관에
서 멀리 태고사 근처까지 형성되었는데, 1930년대에는 100호 이상의 집이 존재했다.

1910년 이후, 왜정(倭政)의 고의적인 북한산성 관리 소홀과 잇따른 자연재해로 북한산성과 마
을이 크게 훼손되자 산성 안에 둥지를 틀던 5개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산성(山城) 내부를 관리
했다. 당시 주민들은 나무를 땔감으로 팔거나 과실을 팔며 생계를 꾸렸는데 이중 살구와 감은
북한동의 특산품이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인근 사람들이 산성 안으로 많이 피신을 했다. 하지만 북한군이 1개 연대
를 보내 숲을 죄다 불태우며 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전쟁이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
이 이곳을 방문했는데 주민들의 궁핍함을 보고는 이곳을 유원지로 개발시키기로 했다. 처음에
는 대성장, 팔경정 두 곳만 식당 허가가 났으나 주민들의 항의로 인해 1974년 모든 집에 식당
허가를 내주게 된다. 그래서 식당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등산물품 가게도 생겨났다.

이후 마을은 등산/탐방객을 상대로 음식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는데, 그들의 무분별한 장사로
인해 계곡이 오염되고 자연이 훼손되는 등, 계속 말썽이 생기자 골머리를 앓은 행정당국은 북
한산의 자연 보전과 계속되는 말썽을 해소하고자 마을을 폭파시키기로 결정, 2001년부터 마을
이주 사업을 단행했다.
처음에는 반대도 많았지만 보상도 심심치 않게 해주었고 북한산성 밑에 자리까지 제공해 주면
서 북한동 마을 55가구는 모두 그곳으로 이주했다. 마을 주민들이 이렇게 고향을 떠나자 북한
산성계곡의 옥의 티를 선사했던 집들을 죄다 부시고 주변 생태계를 복원했으며, 옛 마을의 중
심지에 '북한동역사관'을 세워 세월의 저편으로 흘러간 북한동의 역사를 짧게 다루고 있다.

솔직히 마을이 없어지니 좀 허전하기는 하나 마을로 인해 크게 망가졌던 자연 경관이 활짝 피
어나니 분위기는 더 밝아진 것 같다. 대신 먹을 거리는 북한산성입구나 시내에서 미리 사와야
되는 수고로움이 있으나 그거야 조금 부지런을 떨면 된다. 솔직히 마을은 음식과 간식 가격이
비쌌다. 그 돈으로 시내에서 2배의 양을 사오는 것이 더 이득이다.


▲  북한동 향나무 (나이 약 400년)
옛 북한동마을의 수호목으로 그에게 병이 생기면 마을 전체에 병이 생긴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의 지극정성이 대단했다. 허나 마을은 북한산(삼각산) 생태계를
위해 모두 사라지고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성밖으로 나가면서
아무도 없는 마을을 홀로 지키고 있다.



 

♠  노적봉 밑에 둥지를 튼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
~ 북한산 노적사(露積寺)


노적봉이 더없이 깨끗하여 티끌 하나 없고
만고의 청풍이 노적봉을 불어와 맑고 밝은 기운 돌아오는구나
산영루를 던지고 험악한 산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이라 새겨져 있어
돌길을 따라 진국사 절문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구렁을 이루며 물소리 맑게 들리어라


*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시로 진국사는
지금의 노적사이다.


북한동역사관에서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30분 정도 올라가면 중성문(中城門)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 3분 정도 가면 왼쪽에 노적사로 인도하는 길이 살짝 손을 내밀고, 그 길을 오르면 노적
봉(露積峰) 밑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노적사가 모습을 비춘다.

노적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1712년 성능(性能)이 창건하여 진국사(鎭國寺)라 했다. 성
능은 18세기에 활동했던 승려로 숙종(肅宗) 때 승군(僧軍)의 대장인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에 임명되어 북한산성 보수공사에 참여했다. 그는 산성 안에 있는 중흥사(重興寺)와 태고사를
보수하고, 노적사<현재 상운사(祥雲寺)>와 서암사(西巖寺) 등 절 10곳을 지어 북한산 승병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또한 중흥사와 태고사에 30년간 머물면서 북한산성과 북한산(삼각산)에 있는 절, 유적, 행궁
(行宮), 관청, 기타 여러 시설 등을 정리한 '북한지(北漢誌)'를 작성하기도 했다.

창건 이후 이렇다 할 내력(來歷)도 남기지 못한 채, 감쪽 같이 사라졌는데, 아마도 중흥사(重
興寺)와 국녕사(國寧寺)가 사라진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에 화재나 자연재해로 강제로 문
을 닫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터만 아련히 남아있던 것을 1960년 승려 무위(無爲)가 여러
신도의 도움으로 절을 다시 짓고 노적봉 밑에 있다는 뜻에서 노적사라 하였다.

1977년 현 주지인 종후가 재정을 털어 절을 크게 확장시켜 삼성각과 나한전, 종각, 요사 등을
새로 세웠으며, 대웅전을 크게 손질했다. 2000년 12월에는 노적사의 오랜 내력이 인정되어
통사찰 201호
로 지정되는 영광을 누렸으나, 2002년 6월 불의에 화재로 종각과 요사가 전소되
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2006년 4월 종후가 히말라야산맥에 묻힌 네팔 팔탄타쉬 지하초사에서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기증받았는데, 2009년 극락전 뒤에 3층사리탑을 세우고, 극락전을 적멸보궁으로 이름을 갈았
다. 그리고 삼보당 2층을 대웅전으로 삼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나한전, 대웅전, 삼성각, 동인당 등 5~6동의 건
물이 있으며, 고색의 때는 진작에 녹아내려 소장문화재는 없다. 다만 조선 후기에 조성된 돌
사자상이 있으니 잘 찾아보기 바란다.
절 배후에는 인수봉을 닮은 노적봉이 든든한 모습으로 절을 지켜주고 있으며, 인근 태고사와
비슷하게 작고 조촐한 산사로 인적도 별로 없어 조용하고 아늑하다.
 
* 노적사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331 (대서문길 311-35 ☎ 02-353-5016)


 노적사 적멸보궁(寂滅寶宮)

경내로 들어서면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梵鍾)의 보금자리 범종
각(梵鍾閣)이 나오고, 그 범종각을 지나면 흙이 곱게 입힌 뜨락이 나온다. 그 뜨락 옆에는 2
층 건물인 대웅전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정면에 보이는 계단 끝에는 적멸보궁이 서쪽을 굽
어본다.

이곳의 법당인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多包)계 팔작지붕 건물로 1960년에 지
어졌다. 허나 공간이 좁고 퇴락하여 1986년에 증축해 지금의 면모를 지니게 되었으며, 처음에
는 대웅전으로 삼았으나, 2007년 극락전으로 현판을 갈았고, 2009년에는 적멸보궁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러니까 50년 동안 이름을 2번이나 바꾼 셈이다.

극락전 시절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아우른 아미타3존상으로 불단을 구성했으나 적멸보궁으로 바뀌면서
그들을 대웅전으로 옮기고 불단 뒤쪽에 창을 내어 진신사리가 담긴 3층사리탑이 보이게끔 했
다. 물론 적멸보궁이니 불단에는 그 흔한 불상도 없다. 그 외에 1987년에 그려진 지장탱, 신
중탱, 아미타후불탱 등이 내부를 구석구석 수식한다.


▲  노적사 대웅전(大雄殿)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대웅전은 2층짜리 팔작지붕 집이다. 원래 삼보당(三寶堂)이라 불렸으
나, 2층을 새롭게 손질하여 대웅전으로 삼았으며, 극락전에 있던 불상을 옮겨왔다. 1층은 승
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로 쓰이고 있으며, 지하1층에는 공양간이 자리해 있다.


▲  노적사 동인당(東印堂)
예전 지장전(地藏殿)으로 지금은 요사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노적사 나한전(羅漢殿)

적멸보궁의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나한전이 나온다. 나한전은 부처와 그의 열성 제자인 나
한(羅漢)을 봉안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 그 자리에는 뒤쪽으로 물러난
삼성각이 있었다.
그러다가 2000년에 철거하여 나한전을 새로 지었으며, 건물 외벽을 수식하는 벽화는 2002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밑에는 2개의 샘터가 있는데, 노적봉이 아낌없이 베푼 샘물이 콸콸 쏟아
져 나와 중생의 목마름을 쿨하게 해결해준다.
(왼쪽 샘물은 일반인들도 마실 수 있으나, 오른쪽 샘물은 예불용으로 아무나 마실 수 없음)


▲  나한전 내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나한상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다.

▲  나한전 뜨락에 자리한 약사여래좌상과 지구를 든 석조미륵불

▲  성림당 월산대종사(聖林堂 月山大宗師) 기념비와 3층사리탑

나한전 뜨락 우측에는 약사여래좌상과 석조미륵불이, 좌측에는 3층사리탑과 근래에 지어진 월
산대종사 기념비가 자리한다.
석조미륵불(彌勒佛)은 원래 3층사리탑 옆에 있었으나 월산 대종사 기념비를 세우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절을 빛낸 월산이 석조미륵불보다 우선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손에는 동그
란 무엇인가가 들려져 있는데,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고 한다. 자세히 보면 지구를 위
/아래로 구분하는 경도와 위도가 나와있으며, 중간에 우리나라가 선명하게 새겨져 눈길을 끈
다. 마치 선서를 하듯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한 모습이 충주 미륵리절터에 있는 미륵리석불
(彌勒里石佛)을 연상케 한다.

 ◀  석가여래의 진신사리가 담긴 3층사리탑
별다른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던 노적사의 새
로운 명물로 불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겨져 있다.

노적사 주지인 종후는 2006년 네팔에 있는 팔
탄타쉬 지하초사에서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선물 받았다. 그래서 2009년에 3층석탑을 만
들어 사리를 봉안했고, 그 곁에 진신사리 기
증 증명서를 세웠다.
탑의 모습은 불국사의 석가탑(釋迦塔)과 닮은
꼴로 근래 들어 이 땅에 부처의 사리를 담은
절이 크게 늘어나고 있으니 과연 어디까지가
진품인지 모르겠다.


▲  인공 바위로 이루어진 노적사 스타일의 삼성각(三聖閣)

나한전에 이르면 '경내는 이게 전부구나, 더 이상 없겠지' 싶은 마음에 발길을 돌리기가 쉽다
. 바로 나한전이 뒤를 고스란히 가렸기 때문이다. 또한 언뜻 보아도 그 뒤에는 아무 것도 없
을 것처럼 보인다. 허나 그것은 함정이다. 나한전 옆구리를 지나면 그 뒤쪽에 전혀 불전(佛殿
)으로 보이지 않는 인공 바위로 울퉁불퉁 조성된 공간이 나온다. 얼핏 봐서는 무슨 창고가 아
닐까 싶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에 '삼성각'이란 현판이 걸려있어 건물의 정체를 두고 아리
송에 빠진 중생을 깨우치게 한다.

예전에는 천막으로 크게 둘러 정말 창고나 실내 체육공간처럼 보였는데, 돈 좀 쏟아부었는지
천막을 걷어내고 인조 돌을 더덕더덕 붙여 놀이공원의 인공폭포나 놀이시설처럼 정말 어색하
게도 만들어버렸다. 차라리 조촐하게 작은 기와집을 올려 삼성각으로 삼는 것이 더 좋을 듯
싶은데, 전혀 불전의 품격이 보이질 않는다.

원래 삼성각은 나한전 자리에 1963년에 지어진 팔작지붕 건물로 동인당으로 바뀐 지장전과 비
슷한 규모를 지녔다. 허나 그런 삼성각을 부시고 나한전을 지었는데, 그 뒤쪽에 대충 천막으
로 자리를 닦고 삼성각으로 삼았으며, 근래에 인조 돌을 덧붙여 부조화의 공간이 되버린 것이
다.


▲  석굴 같은 분위기의 삼성각 내부

삼성각 내부는 없어 보일 것 같은 외부와 달리 넓고 아늑하다. 불단에는 칠성(七星)을 비롯해
독성(獨聖, 나반존자)과 산신(山神)이 석상으로 자리해 있으며, 그들 뒤에는 커다란 돌이 비
스듬히 자리해 있는데, 그 모습이 그들을 덮칠듯 아찔해 보인다. 허공에는 중생의 소망을 한
아름씩 담은 고운 연등들이 환상적인 색채를 내며 내부를 환하게 비춘다.


▲  노적사에서 섭취한 점심공양의 위엄
흰쌀밥에 갖은 나물과 고추장을 넣고 비벼먹는 이 땅에 흔한 절 공양밥이다.
밥과 함께 국도 제공되었는데, 맛도 괜찮고 노적사의 인심도 훈훈하여
배불리 먹고 갈 수 있다. 상황에 따라 떡도 얻을 수 있음
(점심시간은 12~13시, 일반인도 공양 가능)



 

♠  보우대사(普愚大師, 원증국사)가 세운 고려 후기 고찰
북한산 태고사(太古寺)

▲  태고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이 암자에 내가 살지만 나도 잘 몰라
깊으디 깊고 빽빽하지만 옹색하지 않아
하늘과 땅을 모두 가두었으니 앞과 뒤가 있을 리 없고
동서남북 어디라도 머물지 않네

* 보우대사가 태고사에 머물며 지은 태고암가(太古庵歌)의 한 수


노적사를 둘러보고 다시 북한산성계곡으로 나와서 20분 정도 오르면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태고사가 마중한다.

태고사는 1341년 원증국사(圓證國師 = 보우대사)가 창건하여 태고암(太古庵)이라 하였다. 이
후 400년 동안 적당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으며, 18세기 중반인 숙종 시절에 북한산성을 정비
하고 산성 안에 사찰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면서 다시금 수면 위로 오르게 된다. 당시 태고사
에는 경서(經書) 출판용 목판 5,700여 매와 활자 11두(斗), 그리고 화약용 흑탄 1,600여 석이
비축되었으며, 절의 규모는 131칸에 이르는 대가람이었다.
허나 1915년 대홍수와 산사태, 6.25전쟁으로 말끔히 파괴된 것을 1964년 청암(靑岩)이 중창하
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절의 규모가 매우 조촐하여 거의 산중암자의 분위기가 진
하게 풍긴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해도 700년 가까이 꾸준히 명맥을 유지한 북한산성 내부에
몇 안되는 전통 토박이 사찰로 자부심이 강하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위시해 산신각과 요사 등, 3~4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원증국
사탑비와 원증국사탑 등 국가 보물을 무려 2점이나 간직하고 있어 이곳의 높은 명성을 알려
준다. 그 외에 조선시대 부도 3기가 산신각 부근에 있고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늙은 귀룽나
무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하다.

차량도 감히 들어올 수 없는 깊숙한 산중이라 등산의 수고로움을 거쳐야 접근이 가능한 곳이
지만 서울 시내에서도 가까우며. 노적사와 마찬가지로 한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이라 산새도 감히 넘어오기 힘들고, 제아무리 번뇌라
고 해도 산이 깊고 험해 따라오다가 졸도를 할 정도이다. 그윽한 풍경소리만이 적막에 잠긴
경내를 잔잔히 쓰다듬어주며 속세의 무거운 짐과 번뇌를 북한산성계곡에 모조리 내던지고 며
칠 조용히 안기고 싶은 그런 곳이다.

* 태고사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5 (대서문길 406 ☎ 031-384-5589)


▲  녹음(綠陰)에 잠긴 태고사 귀룽나무 ~ 고양시 보호수 17호

태고사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훤칠한 키의 귀룽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귀룽나무는 이 땅
에서 매우 희귀한 나무로 매년 3월 말이나 4월 초에 나무 전체에 새하얀 꽃이 가득 피어난다.
태고사에 무수히 발을 들였지만 정작 하얀 꽃으로 치장된 그의 모습은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그 꽃의 자태가 마치 하얀 눈과 비슷하다고 한다.
나무의 나이는 약 170년, 높이 23m, 허리둘레는 2.3m에 이르며, 성하(盛夏)의 길목이라 꽃 대
신 푸른 옷을 걸치고 중생을 맞는다.


▲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를 품은 비각(碑閣)

▲  태고사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 - 보물 611호

대웅보전 좌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높다란 비각이 있는데 그 안에 태고사 제일의 보물
인 원증국사탑비가 남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둥지를 텄다. <태고사 대웅보전은 서향(西向)임>

탑비의 주인공인 원증국사는 고려 후기를 주름잡던 고승(高僧)으로 1301년 귀족 가문인 홍주
홍씨(洪州洪氏) 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비는 홍연(洪延), 어미는 정씨로 13살에 양주 회
암사(檜巖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도했다.
1325년 승과(僧科)의 하나인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했으나 선수행을 위해 과감히 포기하고 용
문산 상원사(上院寺)를 거쳐 감로사(甘露寺)에서 계속 불도에 정진했다. 그 이후 북한산(삼각
산) 중흥사에 들어왔고, 1341년 절 동쪽에 태고사를 지어 머물며 그 유명한 태고암가(太古庵
歌)를 
지었다.
1346년 원나라(몽골)로 넘어가 임제종(臨濟宗) 18대 법손(法孫)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원나라 제왕인 순제(順帝)의 초청을 받아 반야경(般若經)을 강설하기도 했다.

1348년 귀국하여 광주(廣州)에 머물며 일가 친척을 죄다 이곳으로 불러 살게 했는데, 광주를
현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광주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1356년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원융부(圓融府)에 머물며 승려의 임명권을 장악, 고려 불교계의 1인자가
되었으며, 이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통합을 주장했다.
허나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신뢰하면서 보우대사를 멀리하게 되는데 신돈은 그를 심하게 견
제하여 속리산(俗離山) 암자에 연금까지 시켰다.
신돈이 사라진 이후, 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려 했으나 자신을 박대했던 감정 때문인지 병
을 이유로 거절했다.

1381년 양산사(陽山寺)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때 우왕(禑王)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임명되었으
며, 1382년 소설사(小雪寺)에서 열반에 드니 그의 나이 81세, 법랍(法臘) 68세이다. 우왕은
그에게 원증(圓證)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탑호(塔號)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다.

오랜 세월의 무게와 웅장한 멋이 풍기는 이 탑비는 13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碑文)은 고
려 3은(三隱)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이색(李穡)이 썼으며, 거북 등의 귀부(龜趺)를 초석으로
삼아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를 이수(螭首)로 마무리 지었다.

탑비를 보호하는 비각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높다란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을 1980년에 복원했다. 참고로 원증국사의 탑과 탑비는 그와 인연이 깊던 용문산 사나사(舍
那寺)에도 있으며, 그의 사리를 2등분하여 태고사와 사나사에 안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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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증국사탑비의 귀부(龜趺)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표정이 씨익 밝아 보인다. 그의 왕눈이 눈과
세모난 코에는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들이 배여 있으나 그의
미소 만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몸뚱이에는 푸른 이끼들이 자리도
가리지 않고 싹을 피워 귀부의 건강을 조금 위협한다.

▲  원증국사탑비의 머리 부분
비석의 머리인 이수에는 구름 무늬가 얇게 새겨져 비석의 미를 한층 끌어 올린다.

▲  2009년에 조성된 청암대종사(靑岩大宗師) 부도

원증국사탑비 곁에는 새롭게 청암대종사의 부도가 뿌리를 내렸다. 청암은 1964년 태고사를 중
건했던 승려로 지금의 태고사가 있게 한 인물이다. 그는 이곳에 머물다가 2009년에 입적했는
데, 태고사 창건주(원증국사)의 비석 옆에 자리를 만들어 나란히 기리고 있다.


▲  채색된 산신각 산신도(山神圖)

경내에서 원증국사탑으로 오르는 길목에 산신(山神)을 봉안한 산신각이 있다. 특이하게도 돌
과 바위로 지어졌으며, 건물 내부는 거의 석굴(石窟)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부는 현대
적인 조명시설이 없어 조금은 어둡다. 다행히도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촛불들의 희생이 있기
에 산신도를 보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다.

산신도는 바위를 쪼아서 그린 벽화로 예전에는 거의 흑백 비슷했으나 나중에 채색을 했다. 색
이 입혀져서 예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지만 그려진 폼은 그다지 별로인 것 같다.
꼬랑지를 강하게 쳐들며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모습은 제법 용맹이 깃들여져 보이며, 새하얀
긴 수염을 지닌 산신이 멀뚱한 표정으로 호랑이 앞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
자(童子)가 찻잔을 들고 서 있는데, 동자라 하기에는 너무 늙어보인다. 그래서 내가 일행들에
게 우스개 소리로
'저 찻잔을 든 사람은 원래 산신이었는데, 산신들간의 경쟁에 밀려 산을 말아먹고 길거리에
나앉았다. 그래서 먹고 살려고 저 산신의 비서로 취직한 것이다'

▲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 - 보물 749호

태고사 경내에서 산신각을 거쳐 뒤쪽(봉성암 방면)으로 2분 정도 오르면 수려한 모습의 원증
국사탑을 만날 수 있다. 이 탑은 앞서 언급한 보우대사의 넋이 담긴 부도탑으로 그가 입적하
자 그가 세웠던 태고사에 사리를 봉안하고 일부는 용문산 사나사로 보내 탑을 만들어 봉안했
다.

그는 열반에 들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시를 남겼는데. 그도 죽기 전에야 인생무상을 뼈
저리게 느꼈던 모양이다.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人生命若水泡空
팔십여 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八十餘年春夢中
죽음에 이르러 이제 가죽포대 버리노니   臨終如今放皮袋
둥글고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一輪紅日下西峰

이 부도는 기존의 고려시대 부도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유명한데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그 위에 마치 조그만 부도가 들어앉은 듯한 지붕돌을 두었으며,
그 위에 다시 특이한 모습의 머리 장식을 얹었다.


▲  원증국사탑과 새로운 부도탑

기단의 아랫 부분에는 정교한 꽃무늬가 잔뜩 새겨져 있으며 8각의 가운데 받침돌에는 기둥무
늬와 꽃무늬로 가득하다. 탑의 조성 시기는 1385년 무렵으로 멋드러진 탑의 모습을 통해 고려
조정의 보우국사에 대한 신임과 제자들의 지극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예전에는 원증국사탑만 외로이 서 있었으나 근래에 이르러 어느 승려(이름은 모르겠음)의 탑
을 원증국사탑 아래에 나란히 세워 놓았다. 이곳에 탑을 세울 정도면 청암대종사와 더불어 태
고사 발전에 크게 기여한 승려가 분명하다.
아래쪽 부도는 보우대사에 대한 존경과 일편단심을 표하려는 듯, 위쪽 부도를 바라보고 있으
며, 그 모습도 많이 비슷하다. 특히 충주 정토사(淨土寺) 부도탑과 상당히 비슷한데 시원스레
올려진 지붕돌의 처마가 꽤 인상 깊다.

태고사를 이렇게 둘러보고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대성암과 대남문(大南門)을 거쳐 구기동(舊基
洞)으로 하산했다. 본글은 노적사와 태고사를 중심으로 다룬 글이라 그 외에 자잘한 내용은
쿨하게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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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듬직한 뒷산, 북한산~북한산성 겨울 산행 (태고사, 행궁터, 대남문, 문수사)

 


' 북한산(삼각산) 겨울 나들이 '

태고사 원증국사탑
 태고사 원증국사탑


 


겨울이 한참 제국(帝國)의 위엄을 보이던 12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
이자 나의 즐겨찾기 뫼인 북한산(삼각산)을 찾았다.

북한산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과 그의 위성도시인 경기도 고양(高陽)시를
끼고 있는 수도권 굴지의 자연 명소이자 이 땅의 주요 국립공원(國立公園)이다. 번잡한 지역
에 누워있다보니 본의 아니게 탐방 수요가 엄청난데 1㎢당 탐방밀도가 무려 5만 명으로 탐방
밀도 분야 세계 기네스북 1위를 거머쥐고 있다. 또한 산 전체가 국가 명승 10호로 지정 되어
있어 북한산(삼각산)의 위엄을 한층 실감케 한다.

오전 11시, 구파발역(3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북한산 등산객과 예비군들의 오랜 벗인 서울
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을 타고 북한산성입구로 이동했다. 주말이라 버스는 등
산객들로 완전 짐짝수송을 이루었고, 버스는 만원의 기쁨을 누리며 간신히 육중한 네 바퀴를
굴려 북한산성입구에서 승객 7할 이상을 쏟아낸다.

북한산성입구에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북한산성계곡(북한천) 하류를 따라 수구문(水口門
)터, 서암사(西巖寺)터를 거쳐 옛 북한동(北漢洞) 마을에 이르렀다.
북한동은 북한에 있는 동네가 아니라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둥지를 틀었던 산골마을로 북
한산성이 조성되면서 형성된 오래된 마을이다. 지금의 마을은 조선 중/후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주로 군사들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다. 마을은 북한동역사관에서 멀리 태고사 근처까
지 형성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100호 이상의 집이 존재했다.

1910년 이후, 왜정의 고의적인 북한산성 방치와 잇따른 자연재해로 인하여 마을이 다소 피해
를 입었으며, 산성 안에 둥지를 틀던 5개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산성(山城) 내부를 관리했다.
당시 주민들은 나무를 땔감으로 팔거나 과실을 팔며 생계를 꾸렸는데, 이중 살구와 감은 북
한동의 특산품이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인근 사람들이 산성 안으로 많이 피신을 했는데, 북한군 1개 연대가 이곳
에 들어와 숲을 죄다 불태우며 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보였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는데 주민들의 궁핍함을 보고
는 이곳을 유원지로 개발시키기로 했다. 처음에는 대성장, 팔경정 두 곳만 식당 허가가 났으
나 주민들의 항의로 1974년 원하는 집에 죄다 식당 허가를 내주었고, 그로 인해 식당과 등산
용품 가게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마을 사람들은 등산/탐방객을 상대로 음식 장사와 산에서 채집한 나물 등으로 생계를 꾸렸는
데, 그들의 무분별한 장사로 인해 계곡이 오염되고 자연이 훼손되는 등, 계속 말썽이 생기자
골머리를 앓은 행정당국은 북한산을 보존하고 계속되는 민원을 해소하고자 아예 마을을 폭파
시키기로 결정, 2001년부터 마을 강제 이주를 단행했다.
처음에는 주민들의 반대도 많았지만 보상도 심심치 않게 해주었고, 산성 밑에 자리까지 제공
하면서 북한동 마을 55가구는 오래 숙성된 터전을 버리고 모두 그곳으로 이주했다.

그들이 모두 떠나자 북한산성계곡의 오랜 옥의 티였던 집과 식당을 모두 밀어버리고 주변 생
태계를 복원했으며, 옛 마을의 중심지에는 북한동 역사관을 지어 세월의 저편으로 강제로 흘
러간 북한동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솔직히 마을이 없어지니 좀 허전하기는 하지만 마을로 인해 망가졌던 주변 자연 경관이 활짝
피어나니 분위기는 더 밝아진 것 같다. 대신 먹을거리는 북한산성입구나 서울 시내에서 미리
사와야 되는 수고로움이 있으나 그거야 조금 부지런을 떨면 쿨하게 해결된다. 솔직히 마을에
있던 식당의 음식과 간식 가격은 시내보다 좀 비쌌다.

 


♠  보우대사(普愚大師, 원증국사)가 세운 고려 후기 고찰
~ 북한산 태고사(太古寺)


▲  태고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이 암자에 내가 살지만 나도 잘 몰라
                         깊으디 깊고 빽빽하지만 옹색하지 않아
                         하늘과 땅을 모두 가두었으니 앞과 뒤가 있을 리 없고
                         동서남북 어디라도 머물지 않네

               * 보우대사가 태고사에 머물며 지은 태고암가(太古庵歌)의 한 수


북한동역사관에서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중성문(中城門), 노적사(露積寺)입구, 중흥사(重興寺)터
를 거쳐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태고사를 찾았다.

태고사는 1341년 원증국사(圓證國師 = 보우대사)가 창건하여 태고암(太古庵)이라 하였다. 이후
400년 동안 마땅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으며, 18세기 중반인 숙종 시절에 북한산성을 정비하고
산성 안에 사찰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면서 다시금 수면 위로 오르게 된다. 당시 태고사에는 경
서(經書) 출판용 목판 5,700여 매와 활자 11두(斗), 그리고 화약용 흑탄 1,600여 석이 비축되었
으며, 절의 규모는 131칸에 이르렀다.
허나 1915년 대홍수와 산사태, 6.25전쟁으로 말끔히 파괴된 것을 1964년 청암(靑岩)이 중창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절의 규모가 조촐해 산중암자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해도 700년 가까이 꾸준히 명맥을 유지했던 북한산성 내부에 몇 안되는 전통 토박
이 사찰로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요사(寮舍)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한참 후배인 인근의 노적사보다 상당히 빈약해 노적사의 부속암자로 착각하기 쉬울 정도이다.
하지만 오랜 사찰에 걸맞게 원증국사탑비와 원증국사탑 등 국가 보물을 무려 2점씩이나 간직하
고 있어 이곳의 높은 명성을 살짝 귀뜀해준다. 그 외에 조선시대 부도 3기가 산신각 부근에 있
고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오래된 귀룽나무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하다.

4발 수레도 감히 들어올 수 없는 첩첩한 산중이라 비록 등산의 수고로움을 거쳐야 접근이 가능
한 곳이지만 서울 시내에서도 가까우며. 노적사와 마찬가지로 한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
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깊은 산골이라 산새도 넘어오기 힘들고, 제아무리 독종인 번뇌라고
해도 산이 깊고 험해 따라오다가 졸도를 할 정도이다. 그윽한 풍경소리만이 적막에 잠긴 경내를
잔잔히 쓰다듬어주며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무거운 번뇌와 잠시 이별하고 싶을
때 며칠 조용히 묻히고 싶은 곳이다.

※ 북한산 태고사 찾아가기 (2015년 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에서 34,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북한산성입구 하차. 주말
  과 휴일에는 8772번 주말임시노선(8~18시까지 10~15분 간격)이 추가 운행된다.
* 서울역(1,4호선 4,9-1번 출구)과 을지로입구역(2호선 3번 출구), 광화문역(5호선 7번 출구),  
  서대문역(5호선 4번 출구), 홍제역(3호선 2번 출구), 불광역(3,6호선 8번 출구)에서 704번 시
  내버스 이용
* 승용차 이용시 북한산성입구 주차장을 이용해야 되며, 산성 내부까지 차량 접근 불가
* 북한산성입구 정류장 → 대서문 또는 서암사터 → 북한동역사관 → 중성문 → 중흥사터 →
  → 태고사(약 5km, 1시간 40분)
* 북한산성 동장대와 용암문 사이에 봉성암, 태고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음
* 매년 음력 9월 22일에 보우대사 헌다식(獻茶式)을 거행한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5 (대서문길 406 ☎ 031-384-5589)


▲  겨울에 잠긴 태고사 귀룽나무 ~ 고양시 보호수 17호

태고사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훤칠한 키의 귀룽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귀룽나무는 이 땅에
서 매우 희귀한 나무로 매년 3월 말이나 4월 초에 나무 전체에 새하얀 꽃이 가득 피어난다. 태
고사에 무수히 발을 들였지만 정작 하얀 꽃으로 치장된 그의 모습은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그
꽃의 자태가 마치 하얀 눈과 비슷하다고 한다.
나무의 나이는 약 160년, 키 23m, 허리둘레 2.3m에 이르며 다른 나무와 마찬가지로 겨울의 제국
에게 모든 것을 공출당하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소쩍새가 울 봄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비각(碑閣)

  태고사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 - 보물 611호

대웅보전 좌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높다란 비각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태고사 제일의 보
물인 원증국사탑비가 남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둥지를 텄다. <태고사 대웅보전은 서향(西向)임>

탑비의 주인공인 원증국사는 고려 후기를 주름잡던 고승(高僧)으로 1301년 귀족 가문인 홍주홍
씨(洪州洪氏) 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비는 홍연(洪延), 어미는 정씨로, 13살에 양주 회암사
(檜巖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도했다.
1325년 승과(僧科)의 하나인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했으나 선수행을 위해 과감히 포기하고 용문
산 상원사(上院寺)를 거쳐 감로사(甘露寺)에서 계속 불도에 정진했다. 그 이후 북한산 중흥사에
들어와 1341년 절 동쪽에 태고사를 지어 머물며 그 유명한 태고암가(太古庵歌)를 지었다.
1346년 원나라로 넘어가 임제종(臨濟宗) 18대 법손(法孫)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어받
았으며. 원나라 황제 순제(順帝)의 초청을 받아 반야경(般若經)을 강설(講說)하기도 했다.

1348년 귀국하여 경기도 광주(廣州)에 머물며 일가친척을 죄다 이곳으로 소환하여 살게 했는데,
광주를 현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광주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1356년 공
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원융부(圓融府)에 머물며 승려의 임명권을 장악, 고려 불교계의 1인
자가 되었으며, 이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통합을 주장했다. 허나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신뢰
하면서 보우대사를 멀리하게 되는데 신돈은 그를 심하게 견제하여 속리산(俗離山)의 어느 암자
에 연금까지 시켰다.
신돈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이후, 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려 했으나 자신을 박대했던 감정 때
문인지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1381년 양산사(陽山寺)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때 우왕(禑王)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임명되었으며,
1382년 소설사(小雪寺)에서 열반에 드니 그의 나이 81세, 법랍(法臘) 68세이다. 우왕은 그에게
원증(圓證)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탑호(塔號)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다.

오랜 세월의 무게와 웅장한 멋이 풍기는 이 탑비는 13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碑文)은 고려
3은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이색(李穡)이 썼으며, 거북 등의 귀부(龜趺)를 초석으로 삼아 비신(
碑身)을 세우고 그 위를 이수(螭首)로 마무리지었다.

탑비를 보호하는 비각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높다란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
을 1980년에 복원했다. 참고로 원증국사의 탑과 탑비는 그와 인연이 깊던 용문산 사나사(舍那寺
)에도 있으며, 그의 사리를 2등분하여 태고사와 사나사에 봉안했다.
<사나사 답사기 보러가기 ☞
글보러 가기>


▲  원증국사탑비의 귀부(龜趺)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표정이 밝아 보인다. 그의 왕눈이 눈과
세모난 코는 700년의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들이 배여 있으나
그의 미소 만큼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  청암대종사(靑岩大宗師) 부도

원증국사탑비 곁에는 새롭게 청암대종사 부도가
뿌리를 내렸다. 청암은 1964년 태고사를 중건했
던 승려로 지금의 태고사가 있게 한 인물이다. 그는 2009년에 입적했는데, 태고사 창건주의 비
석 옆에 자리를 만들어 나란히 기리고 있다.


▲  원증국사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태고사 산신각(山神閣)
산신(山神)을 봉안한 공간으로 특이하게도 돌과 바위로 건물을 지었다.

▲  채색된 산신각 산신도(山神圖)

산신각 내부는 현대적인 조명시설이 없어 조금은 어둡다. 다행히도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촛불
들의 희생으로 산신도를 보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다.

산신도는 바위를 쪼아서 그린 벽화로 예전에는 흑백모드였으나 나중에 채색을 하여 칼라모드가
되었다. 색이 입혀져서 예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지만 그려진 폼은 좀 별로인 것 같다.
꼬랑지를 강하게 쳐들며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모습은 제법 용맹이 깃들여져 보이며, 하얀 긴
수염을 지닌 산신이 멀뚱한 표정으로 호랑이 앞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자(童
子)가 찻잔을 들고 서 있는데, 동자라 하기에는 너무 연세가 지긋하게 보인다. 그래서 내가 일
행들에게 우스개 소리로
'저 찻잔을 든 사람은 원래 산신이었는데, 산신들간의 경쟁에 밀려 산을 말아먹었다. 그래서 먹
고 살고자 저 산신의 비서로 취업한 것이다'


▲  석종형(石鐘形)부도 3형제
산신각 뒤쪽 숲속에 숨어 있는 석종 모양의 부도로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고색의 무게를 간직하며 양지 바른 곳에 나란히 있는 모습이 정겹다.

▲  태고사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 - 보물 749호

태고사 경내에서 산신각을 거쳐 뒤쪽(봉성암 방면)으로 2분 정도 오르면 수려한 모습의 원증국
사탑을 만날 수 있다. 이 탑은 앞서 언급한 보우대사의 사리가 담긴 부도로 그가 입적(入寂)하
자, 태고사에 사리를 봉안하고 일부는 용문산 사나사로 보내 탑을 만들어 봉안했다.

그는 열반에 들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시를 남겼는데. 그도 죽기 전에야 인생무상을 뼈저
리게 느꼈던 모양이다.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人生命若水泡空
    팔십여 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八十餘年春夢中
    죽음에 이르러 이제 가죽포대 버리노니   臨終如今放皮袋
    둥글고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一輪紅日下西峰

이 부도는 기존의 고려시대 부도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유명한데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그 위에 마치 조그만 부도가 들어앉은 듯한 지붕돌을 두었으며, 그
위에 다시 특이한 모습의 머리 장식을 얹었다.


▲  꽃무늬로 정신이 없는 원증국사탑 기단부

기단의 밑 부분에는 정교한 꽃무늬가 잔뜩 새겨져 있으며 8각의 가운데 받침돌에는 기둥무늬와
꽃무늬로 가득하다. 탑의 조성 시기는 1385년 무렵으로 멋드러진 탑의 모습을 통해 고려 조정의
보우대사에 대한 신뢰와 제자들의 지극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 원증국사부도만이 외로이 서 있었으나 근래에 이르러 어느 승려의 탑을 그 밑
에 나란히 세워 놓았다. 이곳에 탑을 세울 정도면 청암대종사와 더불어 태고사 발전에 크게 기
여했던 승려가 분명하다.

아래쪽 부도는 보우대사에 대한 존경과 일편단심을 표하려는 듯, 원증국사탑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모습도 많이 비슷하다. 특히 충주 정토사(淨土寺) 부도탑과 상당히 비슷한데 시원스레 올려
진 지붕돌의 처마가 꽤 인상 깊다.


▲  오랜 세월을 뛰어넘은 원증국사탑과 새로운 부도탑

 

 


 

♠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내부에 세운 비상용 행궁
북한산성행궁터(北漢山城行宮址) -
사적 479호

▲  행궁 외전터

중흥사터에서 북한산성계곡을 거슬러 15분 정도 가면 행궁터를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여기는
행궁의 외곽 부분으로 남장대(南將臺)로 가는 서남쪽 산길을 꾸준히 오르면 행궁터가 계속 펼쳐
지면서 지금은 주춧돌로 변한 외전터와 내전터가 모습을 비춘다.
행궁(行宮)이란 비상시나 지방 시찰 때 제왕이 머무는 공간이다. 대표적인 조선 때 행궁으로 화
성(華城) 행궁, 온양온천(溫陽溫泉) 행궁, 남한산성(南漢山城) 행궁, 그리고 북한산성 행궁 등
이 있었다.

북한산성 행궁은 1711년(숙종 37년) 북한산성 보수공사를 맡은 김우항(金宇杭)이 국가 비상시 
머물 수 있는 행궁을 세울 것을 건의하면서 조성되었다. 행궁과 더불어 경리창상창, 금위영, 호
조창(戶曹倉), 어영청(御營廳) 등 여러 관청이 행궁 밑에 빼곡히 지어지면서 북한산성계곡 상류
는 그야말로 조그만 도시를 이루었는데, 이는 위급시 이곳으로 피신하여 비상작전을 수행할 임
시 수도의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행궁의 규모는 124칸 정도로 제왕의 생활공간인 외전(外殿)과 왕비의 거처인 내전(內殿)으로 이
루어졌다. 또한 행궁을 동서로 가르며 조그만 계곡이 북한산성계곡으로 흘러가는데 이를 일종의
금천(
禁川)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행궁에 버금갈 정도로 잘 지어졌으나 정작 제왕들
은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 그럴만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상 행궁이라 조선이 천하를 다스릴 때는 그런데로 유지가 되었으나 왜정
이후, 방치에
가까운 관리소홀과 1915년 대홍수로 건물들은 하염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6.25를 겪으면서
나머지 남은 것들도 말끔히 붕괴되어 건물을 떠받들던 주춧돌만이 앙상하게 남게 되었다.

현재 행궁터에는 내전과 외전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축대 일부, 좌우의 담장터 등이 남아 있고
기와조각들이 어지러히 널려 옛날을 그리워한다. 특히 내전터에는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주춧돌이 있고 기단과 석축이 남아 있는데, 성능대사가 작성한 '북한지(北漢誌)'에는 '좌우상방
2칸, 대청 6칸, 사면퇴 18칸, 도사 28칸'
이란 기록이 있어, 정면 5칸, 옆면 2칸 건물에 사방 1
칸씩을 덧단 구조의 전각으로 여겨진다.

행궁터 북쪽 구석에는 잘생긴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피부에 활을 건다는 뜻의 '게궁암(揭弓岩)
' 바위글씨가 있었다. 1992년 겨울, 부친(父親)과 왔을 때 본 기억이 있어 누렇게 뜬 수풀을 비
집고 들어가 보았으나 내가 별로 달갑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새 훼손되어 없어졌는지 결국 만나
지 못했다.


▲  1904년경 북한산행궁의 모습 (문화재청 사진)


▲  수풀에 뒤덮힌 행궁터

북한산행궁은 산자락에 터를 닦았기 때문에 돌로 축대를 다져 건물을 지었다. 비록 행궁의 한계
로 서울 궁궐보다는 훨씬 작게 지어졌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규모는 아니다. 124칸이면 사대부나
부자의 고래등 기와집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던 행궁은 제대로 역할도 하지 못한 채, 마치 아틀란티스 대륙이 쏙 사라진 것처럼 나
무와 수풀의 조그만 나라가 되어 옛터만 황량히 남아있으니 역시 인간의 창조물은 그 아무리 대
단하고 견고하다 한들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먼지에 불과하다.


▲  행궁 내전터 ▼

내전터 한쪽에는 조그만 우물이 있다. 아마도 행궁에 물을 공급했던 우물일 것이다. 대머리처럼
허전하기 그지없는 옛터에는 주춧돌과 축대를 이루던 돌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누렇게 익으며
인생의 말년에 다다른 낙엽이 그 빈 공간을 따스하게 덮어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인간의 부질없음이 담긴 공허한 북한산성행궁터는 고양시와 문화재청에서 복원계획을 가지고 있
으나 워낙 첩첩한 산골이라 공사가 그리 여의치가 않다. 다행히 이곳은 생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놓아 복원에는 문제는 없겠으나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므로 무리하게 벌이
지말고 지금 이대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듯 싶다. 폐허의 현장에서 마음껏 상상의 스케치를 해
보는 것도 답사에 좋은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행궁터에서 실타래처럼 이어진 서쪽 산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남장대터가 나온다. 이곳은 북한
산성 안에서 가장 높은 측에 속하는 해발 700m 고지로 산성 내부와 북한산성 산줄기가 훤히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이 천하 일품이다.

※ 북한산성행궁터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북한산성입구 정류장 → 대서문 → 북한동역사관 → 중성문 → 중흥사터 → 태고사입구 → 행
  궁터 (약 6km, 2시간)
* 대남문과 청수동암문에서 행궁터로 접근해도 된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69일대


▲  경리청상창터(經理廳上倉址)와 북한산성계곡 등산로 ▼

북한산성행궁터 입구에서 대남문 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커다란 돌이 박힌 거대하
고 긴 석축이 마중한다. 이곳은 곡식을 보관하던 경리청상창의 옛터로 축대를 이루는 돌이 행궁
터보다 더 장대하여 비록 터만 남았음에도 위엄이 진하게 돋보인다.

경리청상창은 숙종 시절에 북한산성을 보수하고 비상용 행궁과 여러 관청을 지을 때 세워진 양
곡 창고로 '팔비헌'이란 현판이 있었다. 상창(上倉)은 창고 63칸, 내아(內衙) 12칸, 집사청(執
事廳) 3칸, 군관청(軍官廳) 4칸, 서원청(書員廳) 4칸 등 총 86칸 규모로 북한산성 행정업무를
보던 관성소(管城所)를 같이 두었으며, 행궁을 관리하는 관성장(管城將)이 근무했다.

북한산성의 양식 창고는 상창 외에도 호조창(戶曹倉)과 중창(中倉), 하창(下倉), 그리고 평창(
平倉) 등이 있었으며, 상창은 19세기 후반에 파괴되어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  잡초만 무성한 경리청상창터 내부

▲  금위영이건기비(禁衛營移建記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87호

경리청상창터에서 대남문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길 왼쪽에 문화재 안내문이 손짓 할 것이다. 안
내문 안쪽에는 적당히 닦인 공터가 있는데, 그 오른쪽 구석에 바위에 비문(碑文)을 새긴 독특한
비석, 금위영이건기비가 수줍은 듯 자리해 있다.

금위영(禁衛營)은 병자호란 이후에 서울을 방어하고자 세운 5군영의 하나로 원래는 동소문(東小
門, 혜화문) 안쪽에 있었다. 허나 그 지대가 높고 무너지기가 쉬워서 1715년 북한산성 안 지금
의 위치로 이전하고 그것을 기리고자 이건기비를 세웠다. 비문은 당시 도제조(都提調)를 지낸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이 지었다.

이 비석은 서 있지 않고 길게 누워있는 형태로 화강암 바위면에 비문을 새겼으므로 마애비(磨崖
碑)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비문은 마멸된 부분이 많아서 정상적인 눈으로는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탁본을 해야 전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비석 뒷면은 흙에 묻혀있고, 비문 위쪽에는
낙수면(落水面)이 새겨진 지붕돌이 놓여져 있는데, 이곳의 청정함을 자랑하듯 푸른색 이끼 옷을
걸쳤다.

북한산성계곡 상류(중성문~대성암)가 말끔히 개방되기 이전이자 내가 꼬마 시절이던 1990년 이
비석을 보고는 매우 신기하여 이리저리 살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계곡 상류는 금지된 구역이라
군인에게 신분증을 맡기고 들어가야 했는데, 1992년 이후 개방되어 자유의 땅이 되었다.


▲  누런 잡초만이 가득한 금위영유영지(禁衛營留營址)

금위영이건기비 남쪽에는 금위영의 유영이 있던 공터가 있다. 서울에 있던 금위영을 1715년 이
곳으로 이전했는데, 금영(禁營), 금창(禁倉)으로도 불렸다. 허나 19세기 후반 북한산성에 대한
관리가 끊어지면서 주변의 여러 건물과 더불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  이끼의 보금자리가 된 금위영유영지 축대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 속에 모든 것이 씻겨 내려간 금위영유영터에는
주춧돌과 석축 일부만이 고개를 들며 지나간 세월을 그리워한다. 마치 옛날을 그리워하는 우리
네 인간들처럼 말이다.

* 금위영이건기비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32

 


♠  북한산성 대남문(大南門)과 보현봉 그리고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절집, 문수사(文殊寺)

▲  북한산성 대남문 - 사적 162호

금위영이건기비에서 대성암을 지나 20여 분을 오르면 북한산성 13성문의 하나인 대남문이 마중
한다. 이 문은 1712년에 세워진 것으로 도성(都城)과 산성을 잇는 중요한 문인데, 문을 경계로
안쪽은 경기도 고양시, 바깥쪽은 서울 종로구이다.

왜정 이후 홍예문만 남아있던 것을 1990년 이후에 문루를 복원했다. 이곳에 서면 가까이에 보현
봉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과 한강(漢江), 멀리 강남구와 동작구 지역까지 두 눈에 거침없이 들어
와 조망 하나는 천하 일품이다.

문을 나서서 직진하면 구기동과 평창동이며, 오른쪽으로 가면 고려시대에 창건된 조그만 산중암
자 문수사(文殊寺)가 나온다.


▲  대남문 앞에서 천하를 굽어보다.
서울 도심과 용산, 강남, 동작 지역까지 훤히 바라보인다.

▲  높은 하늘을 이고 천하를 응시하는 보현봉(普賢峰, 700m)의 위엄


▲  문수사 문수굴에 자리를 편 문수보살(文殊菩薩)

한칸 방 어찌 그리 너무도 고요한가, 일만 인연 모두 적막하네
길은 돌 틈으로 뚫고 가고, 샘은 구름 속에서 새어나네
밝은 달 처마 끝에 걸려 있고, 산들바람 숲 속에서 일어나네
누구 저 스님 따라, 고요히 앉아 참 낙을 배우려나

* 탄연(坦然)이 문수사에서 지은 시


북한산성 대남문을 나와서 오른쪽(서남쪽) 길로 3분 정도 가면 해발 640m 고지에 둥지를 문수사
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수사는 문수봉(文殊峰) 바로 밑에 터를 닦은 산사로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절이다. 북
한산에 안긴 절 가운데 가장 조망과 경관이 일품으로 경내에 있는 문수굴은 예로부터 영험 있는
기도처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 절은 1109년(고려 예종 4년) 탄연(坦然)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기암괴
석과 경관, 그리고 천연동굴(현재 문수굴)에 반해 절을 세우고, 문수암(文殊庵)이라 했다고 한
다. 1451년(문종 1년) 문종의 딸인 연창공주(延昌公主)가 중창했으며, 그 이후 500년 가까이 적
당한 자취를 남기지 못해 아마도 오래 못 가서 망한 것으로 보인다.
 
1921년 삼성각과 오백나한전을 중수했는데, 이 사실로 봐서는 이때 오랫동안 꺼진 법등(法燈)이
다시 켜진 듯 하다. 허나 6.25전쟁으로 한줌의 재가 되었으며, 1957년 신수(信洙)가 중건하고,
1983년에 주지 혜정(慧淨)이 삼성각과 나한전을 개축했으며, 2002년에 대웅전과 응진전(應眞殿),
요사 등을 새로 건립하여 지금에 이른다.

절 인근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던 그 유명한 비봉(碑峰)이 있다. 지금 순수비는 건
강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지만 그 비석에 '한성(漢城)을 지나 고개를 올라..(중략) 한
도인(道人)이 석굴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이 있어 그 석굴을 문수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절이 너무 높은 곳에 자리해 있어 오르기는 힘들지만 조망이 국보급이라 문인들이 많이 찾아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는데, 고려 중기 때 이장용(李藏用, 1201~1272)을 비롯하여 최립(崔岦,
1539~1612), 홍세태(洪世泰, 1653~1725) 등이 이곳을 거쳐갔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어머니가
가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이곳까지 찾아와 문수굴에 봉안된 오백나한에게 치성을 올려 이승만
을 낳았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이승만이 80 고령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올라와 '문수사' 현판을
남겼으며, 당시 승려와 찍었던 흑백사진도 아련히 절에 남아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三聖閣), 응진전, 요사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위치가 가파른 곳
이라 사세 확장도 어렵다. 대웅전 옆에는 문수사의 명물이자 지금의 문수사를 있게 한 문수굴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은 아쉽게도 하나도 없다. 다만 대웅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좌상이 명성황후
(明成皇后)가 시주한 것이라 하니 그게 제일 오래된 것이며, 대웅전 석가불은 영왕(英王, 영친
왕)이 봉안한 것이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고색의 때는 오래 전에 증발해서 사라졌으나 그 대신 천하 제일의 조망과 주변경
관을 품고 있어 그 아쉬움을 다소 달래준다. 경내에 오르면 가까이로 구기동(舊基洞)과 부암동
부터 서울 도심, 멀리 한강과 관악산(冠岳山)까지 보인다. 또한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곳이라
구름이 아래로 흘러가며, 공기 또한 속세와 틀리다.

서울 도심과도 무척이나 가까우며, 도심의 상징인 종로구에 있음에도 분위기는 180도 확연히 틀
리다. 구기동에서 2시간을 낑낑대고 올라야 이를 만큼 산행의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되지만 서울
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지붕으로 굳이 멀리 나갈 필요 없이 산중암자의 고즈넉함과 아늑함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  문수사의 명물 문수굴(文殊窟)

문수사 경내에서 눈여겨 볼 곳은 바로 문수굴이
다. 탄연이 이 굴에 반해 절을 지었을만큼 문수
사의 가장 소중한 꿀단지로 거대한 바위에 나
있는 자연동굴이다.
문수사를 거쳐간 승려들이 수도를 했던 곳이지
만 딱히 옛 흔적은 없으며, 1983년 주지 혜정이
동굴 입구에 목조로 문을 만들었다. 문에 걸린
'삼각산천연문수동굴(三角山天然文殊洞窟)'이란
현판은 달랑 29만원으로 악명이 대단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글씨이다.

동굴 내부에는 문수보살을 중심에 봉안했고, 좌
우로 나무로 만든 조그만 문수보살 20여기가 든
든하게 병풍이 되어준다. 예로부터 영험이 있는
기도처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이곳에 있던 오백
나한은 응진전(오백나한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수사를 이렇게 둘러보고 구기동으로 내려가
저녁을 먹고 산행을 마무리 지었다.

※ 북한산 문수사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1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212번(수색,은평차고지↔옥수동)시내버스를 타고 구기동 현대빌라나 승가사입구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시내버스를 타고 구기동 현대빌라나 승가사입구
  하차
* 산행코스 : 구기동(현대빌라, 승가사입구) → 구기분소 → 승가사갈림길 → 깔딱고개 → 문수
  사 (2시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2 (☎ 02-391-2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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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2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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