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약수터'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20.10.14 듬직하게 생긴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인왕산길, 한양도성, 치마바위, 기차바위)
  2. 2018.11.03 옛 무덤일까? 탑일까? 깊은 산골에 숨겨진 신비의 돌무더기, 산청 구형왕릉~왕산 늦가을 나들이 (왕산사지, 유의태약수터)
  3. 2017.03.31 늦겨울 산사 나들이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절집, 청주 낙가산 보살사 (석조이불병립상, 명암저수지)
  4. 2017.02.08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산을 거닐다. 안산 나들이 ~~~ (영천시장, 안산자락길, 무악산 동봉수대)
  5. 2016.05.28 서울 도심의 듬직한 우백호를 거닐다. 인왕산 (개미마을, 북쪽 능선길, 환희사, 큰절골)
  6. 2016.04.12 서울 도심에 포근한 뒷동산을 거닐다. 남산 산책 (한양도성, 남산둘레길, 서울타워, 남산야외식물원...)

듬직하게 생긴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인왕산길, 한양도성, 치마바위, 기차바위)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 나들이 ~~~

▲  인왕산 (가운데 봉우리가 정상)


 

♠  인왕산(仁王山) 입문

▲  인왕산 만수천약수터

봄이 한참 무르익던 4월의 끝 무렵, 일행들과 서울 도심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이자 내 즐
겨찾기 뫼의 하나인 인왕산을 찾았다.
인왕산은 10대 시절 선바위 답사를 시작으로 50번 넘게 인연을 지었는데, 낮 뿐만 아니라 야
간(19시 이후)에도 적지 않게 올라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나의 마음을 비추고 있다. 특히
인왕산에서 바라보는 서울 도심 야경(夜景)은 아주 일품으로 꼽힌다.

경복궁역(3호선)에서 출발하여 인왕산길로 들어서 창의문(彰義門, 자하문) 방면으로 가다보면
인왕천약수터로 인도하는 길이 살짝 손짓을 한다. 이 코스는 인왕산에서 가장 잘나가는 약수
로 추앙을 받던 인왕천약수터를 거쳐 인왕산 능선(한양도성)으로 이어지는데 길이 좀 각박하
다. 하여 그 코스는 쿨하게 통과하고 다음에 나오는 석굴암입구(수성동계곡 상류)에서 인왕산
의 깊은 품으로 들어섰다.

석굴암입구로 들어서면 바로 조촐한 모습의 정자가 나오면서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직진하면
이름도 꽤 낯이 익은 석굴암(石窟庵)이란 석굴 암자가 나온다. 허나 그곳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사실상 막혀있어 정자 옆 북쪽 산길로 올라가야 된다. (석굴암에서 정상으로 통하는 길
이 있긴 하나 통행 금지임)
석굴암입구 정자에서 북쪽 산길을 5분 정도 오르면 160m 고지에 자리한 만수천약수터가 마중
을 한다. 인왕산에 무수히 널린 약수터의 하나로 부적합 빨간줄과 양호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어 앞날이 좀 어려워 보인다. 물론 샘터 주변을 계속 관리해주고 비도 적당량 내려주면 청
색 신호가 뜨는 것은 시간문제이나 날씨 변덕도 심하고 서울 도심이 바로 코앞이라 인왕산 지
하수에도 비상이 걸렸다.

약수터 주변은 나무가 삼삼하여 하늘이란 단어를 거의 잊게 할 정도로 덩치가 큰 바위들이 주
변에 여럿 포진해 있어 약수터의 잔잔한 장식물이 되어주고 있으며, 간단한 체육시설과 의자
등이 놓여져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어가도록 배려했다.


▲  만수천약수터 주변 풍경

큰 바위 밑에는 조그만 자연산 동굴이 있다. 지금은 들어가지 못하게 철창을 씌웠지만 예전에
는 기도나 굿 장소로 쓰였다. 인왕산이 잘생긴 바위가 많고 기가 센 산이라 하여 호랑이가 담
배 맛을 알던 시절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자 굿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굴 앞을
지나니 동굴이 내뱉은 약간 시원한 바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  만수천약수터 뒤쪽 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서촌과 경복궁, 종로)

만수천약수터에서 갑자기 흥분한 산길을 7~8분 정도 오르면 능선(만수천약수터 뒤쪽 능선)에
이른다. 이제부터는 숲속에 가려진 산길이 아닌 천하를 굽어보며 걷는 능선길이 시작되는 것
이다. 그 길을 10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이 흐르는 성곽길(인왕산 주능선)과 만나게 된다.

성곽길과 만나는 갈림길에서 오른쪽(동쪽)으로 내려가면 창의문과 부암동(付岩洞)으로 이어지
며, 왼쪽(서쪽)은 인왕산 정상이다. 우리야 정상이 목적이니 왼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성곽길은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경사가 슬금슬금 각박해져 호흡마저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런
길을 10여 분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여기서 성밖 계단을 내려가면 기차바위 능선이며, 성
곽길을 고수하면 정상이다. 이미 인왕산의 어깨까지 올라탄 상태라 서울 시내가 고루고루 내
려다보여 마치 하늘을 배회하는 큰 새의 등에 올라탄 기분이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더욱 올라간다.


▲  인왕산의 허리를 따라 흘러가는 한양도성(漢陽都城) - 사적 10호

▲  인왕산 북쪽 능선 성곽길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콧대가 높은 천하 굴지의 대도시 서울이 내 발 밑에 펼쳐져 있다. 마치 이 도시가
나의 세상이 된 듯 거만한 착각이 피어올라 잠시나마 기분이 즐거워진다.
허나 현실은 마음 편히 드러누울 땅도 제대로 없다는 것.

▲  정상 북쪽 성곽길 - 저 바위 꼭대기가 인왕산 정상이다.

기차바위로 인도하는 갈림길에서 성곽길은 잠시 진정을 되찾으나 정상을 코 앞에 두고 다시금
격한 흥분을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묵묵히 길을 임하면 좀처럼 닿
지 않을 것 같던 인왕산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


▲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어둠의 역사를 안고 있는 인왕산 치마바위

인왕산 정상 동쪽에 붙어있는 커다란 바위는 인왕산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치마바위이다. 병
풍처럼 넓어서 병풍바위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 바위에는 중종과 단경왕후 신씨의 슬픈 사연
이 깃들여져 있다. 그 사연은 서울 장안에서 꽤 알려진 이야기로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첫 부인은 신수근(愼守勤, 1450~1506)의 딸인 단경왕후(端敬
王后) 신씨(1487~1557)이다.
1506년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 홍경주(洪景舟) 등이 반란을 일으켜 연산군(燕山君
)을 폐위시키고 그의 이복 동생인 진성대군을 익선관(翼善冠)을 씌운 채로 급히 왕위에 올리
니 그가 곧 중종이다. <이 사건을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고 부름>
단경왕후의 아비인 신수근은 반란파에 협조하지 않아 그 형제가 모두 살해되고 말았다. 그들
에 의해 얼떨결에 왕이 된 중종은 부인을 지키고자 재빨리 왕후로 봉했으나 반란파들은 역적
의 딸을 그냥 둘 수 없다며 당장 내쫓을 것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왕후나 그 소
생 왕자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종은 그들을 달래고자 반정 때 몰수한 연산군 측근과 반란 비협조 인물들의 재산을 나눠주
고 기녀(妓女) 300여 명을 주며 회유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유자광(柳子光)은 중종의
생모이자 대비(大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를 찾아가
'중전 신씨를 쫓아내지 않으면 임금을 내쫓겠습니다!!'

협박을 하기도 했다. 이미 반란으로 왕을 한번 갈아치웠으니 그들에게는 그런 것은 일도 아니
었다.
상황이 점점 고통스럽게 변해가자 신씨는 울면서
'소첩이 전하(殿下)를 위해 나가겠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전하에 대한 변치 않은 마음으로 인
왕산 바위에 치마를 걸어두겠사오니. 상황이 좋아지면 꼭 찾아오세요 ㅠㅠ'


그렇게 말하고는 스스로 경복궁을 나가 옛날에 살았던 인왕산 동쪽 본가에 들어갔다. 그리고
는 매일마다 인왕산에 올라 중종과 같이 살던 시절, 자주 입었던 붉은 치마를 바위에 널었다.
그 소식을 들은 중종은 수시로 경회루(慶會樓)에 올라 치마바위를 바라보며 그녀에 대한 생각
에 눈시울을 붉혔다.
반란파들은 그 꼴이 보기 싫어 서둘러 새 왕비를 맞을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장경왕후(章敬
王后) 윤씨가 새 왕비로 들어오게 된다. 또한 10여 명의 후궁까지 맞아들이면서 신씨에 대한
추억과 그녀의 존재감은 완전히 흐릿해진다.

신씨는 왕이 사직단(社稷壇)에 사직대제(社稷大祭)를 지내러 올 때를 기다려 말죽을 쑤어 사
직단 정문에서 기다렸다. 그래서 왕의 말에게 직접 먹이는 등 남편에 대한 애정을 표했지만
결국 남편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1557년 70세의 나이로 소생도 없이 한 많은 삶을 마감
하고 만다. (중종은 1544년 56세의 나이로 승하함)
신씨가 죽자 세상에서는 치마를 널었던 병풍바위를 치마바위라 불렀으며, 소년왕 단종(端宗)
의 부인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더불어 왕실 여인들의 '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한 토
막으로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치마바위 밑에는 20세기에 조성된 미륵마애불이 숨겨져 있으며, 바위 피부에는 옥의 티로 황
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와 왜왕 만세 등의 바위글씨가 요란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들 글씨
는 1939년 가을 '대일본청년단대회'가 열린 것을 기념하고자 왜정과 친일 패거리들이 지원하
여 새겨진 것으로 서울 장안 어디에서든 다 보이는 바위라 하여 이곳에 새겼다고 한다. 글씨
는 해방 이후에 죄다 쪼아 지웠으나 그 흔적은 조금씩 남아 어둠의 시절의 쓰라린 한 단면을
보여준다.


 

♠  인왕산 정상부

▲  정상 동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북쪽 자락과 북악산(백악산)
왼쪽에 보이는 바위 능선이 기차바위이다.

▲  인왕산 정상 남쪽
인왕산 정상은 오로지 남쪽으로만 진입이 가능하다. 서쪽은 성곽 바깥이고
동쪽과 북쪽은 꽤 각박한 낭떠러지기 때문이다.


인왕산은 해발 338m(또는 340m)의 바위 봉우리로 북악산(342m)과 낙산(洛山), 남산과 더불어
서울을 안쪽으로 둘러싼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동북쪽으로 자하문고개를 경계로 북악산(백악산)과 이어져있고 서쪽은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안산(鞍山, 295.9m)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은 홍제천(弘濟川)을 통해 북한산(삼각산)과 이
어진다.
인왕산의 다른 이름으로 필운산(弼雲山)이란 명칭이 있는데, 이는 제왕이 있는 궁궐 오른쪽<
제왕이 정전(正殿)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
는 의미이다. 배화여고 뒷쪽에 있던 이항복(李恒福)의 집 이름인 필운대(弼雲臺)도 여기서 비
롯되었다.


경복궁 서쪽인 서촌(西村, 웃대)과 사직동, 의주로, 부암동, 홍제동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누
워있으나 동서의 폭이 좁아 남북과 달리 경사가 꽤 가파르다. 시내에서 볼 때는 산세가 작아
서 금방이면 올라갈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착시현상을 노린 인왕산의 속임수이다. 그의 품에
들어가보면 보기와 달리 넓고 장대한 모습에 놀라게 된다.
사직공원(사직단)과 독립문역에서 인왕산 정상까지 40~50분 정도 걸리며, 정상을 찍고 홍제동
환희사(歡喜寺)나 개미마을, 홍지문, 창의문 쪽으로 내려가면 보통 2시간 내외면 충분하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돌산으로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능선을 따라 선바위와 치마바위,
모자바위, 범바위, 기차바위 등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걸쭉한 바위들이 산의 장대
한 경관을 돕고 있으며, 정상을 이루는 바위 봉우리는 북악산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해 우백호
에 걸맞는 위엄을 드러낸다. 18세기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명성을 날린 겸재 정선(鄭敾
)은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해 인왕산의 주요 명소와 장면을 그림에 담아
인왕산을 극찬했다.

돌산이다보니 물이 귀할 것처럼 보이지만 약수터가 제법 많아 곳곳에서 나그네의 목을 축여준
다. 하지만 산의 폭이 좁고 경사가 급하여 속시원한 계곡은 거의 없으며, 그나마 개발의 칼질
과 급격한 도시화로 대부분 사라져 수성동(水聲洞)계곡과 큰절골(환희사계곡)만 그나마 좀 남
아있고 청풍계(淸風溪)와 청계동천(淸溪洞天), 백운동천(白雲洞天) 등은 일부만 살아있다.


▲  인왕산 정상 바위
저 바위가 인왕산의 실질적인 정상으로 높이는 1.5m 정도 된다. 바위의 남쪽과
북쪽 피부에는 움푹 패여 하얗게 서린 곳이 많은데, 이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오가면서 생긴 상처이다.


인왕산은 1968년 1.21사건(김신조 공비 패거리 침투 사건)으로 정상 주변과 성곽 능선이 폐쇄
되면서 선바위와 환희사 주변, 인왕산길을 비롯한 산 밑도리만 겨우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
다가 김영삼 정권 때 다시 속세에 개방되었다. 허나 서울 도심을 지키는 요충지라 군부대 시
설이 성곽 능선과 산자락 곳곳에 남아있어 금지된 땅이 다소 있으며, 사진을 찍을 때도 약간
주의를 기울어야 된다.
또한 매주 월요일은 인왕산 정상 주변과 성곽 능선(인왕산 주능선)은 입산이 통제되며, 월요
일이 휴일인 경우에는 다음 날 통제된다. 다만 성곽 능선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제한이 없
다.

인왕산에는 많은 명소가 있는데, 선바위와 국사당(國師堂), 치마바위, 장안 제일의 경승지였
던 수성동계곡, 벽화로 유명해진 홍제동(弘濟洞) 개미마을, 석굴사원인 석굴암(石窟庵), 지방
문화재 불상을 2기나 간직한 환희사 등이 있다. 또한 국사당과 선바위 일대는 토속신앙과 무
속(巫俗), 불교가 어우러진 이색 현장으로 서울 지역 무속신앙의 성지(聖地)이기도 하다.

600년 동안 서울의 우백호로 있다보니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도 많이 서려있다. 태조 때 서울
을 도읍으로 정하고 궁궐 자리를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북악산
과 남산을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로 삼자고 했다. 허나 정도전(鄭道傳)은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을 하여 천하를 다스렸지 동향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태클을 걸면서 무학의 뜻은 꺾이고 만다.
이에 발끈한 무학은
'내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었다고 전하는 '산수비기(山水秘記)'에는
'도읍을 정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국가가 기운이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씨 성을 가진 사람
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서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터져 백성이 어
육이 될 것이다'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5대(정확히는 6대) 만에 세조(世祖)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
년)을 일으켜 조정을 갈아 엎었고, 딱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 내용은 19세기에 편
찬된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실려있는데 아마도 불교를 배척한 정도전과 사대부의 억불숭유 정
책을 신랄하게 까고자 불교 쪽에서 그럴싸하게 지은 전설을 그대로 인용한 듯 싶다.


▲  성곽과 벼랑으로 완전히 막혀있는 정상 북쪽 성곽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이던 이괄(李适)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
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인조는 서인 패거리를 이끌고 급히 충청도 공주(公州)로 줄
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치고자 인왕산 서쪽 안산
에 진을 치자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말하며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췄다. 그리고 군사<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
들을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하니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
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였다. 그 시절 백성들은 하얀 옷을 많이 입었는데, 산을 가득 메운 그
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하여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걸어잠구면서
결국 도성을 버리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로 줄행랑을 쳤다. 허나 부하에게 살해되어 결국
목없는 귀신이 되었고,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
後金)으로 도망가 청태종(淸太宗)에게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정묘호란
(丁卯胡亂)이다.

끝으로 인왕산은 호랑이들이 많았는데, 무서운 정도는 천하 제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궁궐
에 수시로 나타나 난리를 치기 일쑤였고, 심지어 종묘(宗廟)까지 침입했다. 백성들의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란 말도 나
왔으니 인왕산은 그야말로 조선 호랑이의 성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호랑이는 온데간데 없고
그들의 먼 친척인 고양이만 종종 보일 뿐이다.
또한 북악산과 인왕산을 비롯한 서울 호랑이들은 지방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눈도 꿈쩍
안했다고 한다. 그들이 무서워한 것은 다름 아닌 수진궁(壽進宮) 귀신이었다고 하는데, 다음
과 같은 재미난 전설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옛날에 북악산(혹은 인왕산) 호랑이가 먹을거리를 찾으러 경복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송
현(松峴)고개로 마실을 나왔다. 마침 어느 집에서 애기가 징징거리고 우는데, 그 어머니가
'문 앞에 호랑이가 왔어. 뚝!'
허나 애기는 계속 징징거린다. 그러자
'애기야 곶감 줄께. 뚝!'
곶감이란 말에 호랑이는 잠시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역시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곶감의 시대는 이제 갔구나. 이제 흔쾌히 식사나 해야겠다'
환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수진궁 귀신이닷!!'
외치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뚝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호랑이가 지례 겁을 먹으

'엥 수진궁 귀신..? 이건 말도 안돼'
꼬리를 접고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수진궁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조선 왕족의 사당임)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악산과 인왕산 북쪽 능선

인왕산 정상에 올라서면 서울 도심과 서촌(웃대)를 비롯하여 서대문구, 마포구, 은평구, 여의
도, 영등포구, 강서 지역, 동작구, 강남 지역, 동대문구, 성북구, 광진구, 강동 지역, 국립현
충원, 관악산, 삼성산, 호암산, 우면산, 아차산 등 많은 존재들이 고루고루 시야에 들어온다.
높이는 338m(340m)에 불과하나 조망만큼은 한라산과 백두산이 부럽지 않다.
또한 사방이 모두 트여있어 해돋이와 일몰 풍경이 진국이며, 남산(南山)과 함께 서울 도심의
새해 해돋이 명소로 유명하다. 또한 도심이 바로 밑이라 여기서 바라보는 도심 야경 맛이 아
주 좋다. (서울 도심 야경은 인왕산을 제일로 쳐줌)

* 인왕산 정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부암동, 서대문구 홍제동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촌(웃대)과 서울 도심.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서울의 장대함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와 남산(가운데 솟은 산)
저 멀리 관악산과 삼성산, 우면산, 대모산, 남한산까지 싹 시야에 잡힌다.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안산과 서대문구, 마포구, 여의도,
영등포, 강서 지역


 

♠  인왕산 기차바위

▲  기차바위 능선

인왕산 정상에서 잠시 머물다가 기차바위 갈림길로 다시 내려와 성곽길을 버리고 기차바위로
방향을 잡았다. 철계단을 타고 성 밖으로 내려가 북쪽으로 가면 인왕산의 으뜸 바위로 추앙을
받는 기차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  인왕산의 북쪽 하늘길, 기차바위 능선 (북쪽 방향)

인왕산 바위의 갑(甲)으로 칭송을 받는 기차바위는 기차처럼 길쭉한 바위 능선이다. 그렇다고
기차처럼 생기지는 않았으며, 그저 길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된 것 같다. 어린이들이
부르는 노래에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이런 구절이 있다.
그만큼 기차는 길쭉한 존재의 대명사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기차바위 능선은 약 300m 정도로 순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거닐면 실감이 덜하겠지만
세검정초교에서 북악산 백사실(백사골)로 올라가는 길이나 부암동 산복길(백석동길)에서 바라
보면 꽤 두툼한 바위 능선임을 알 수 있다. 사방이 확 트여있어 조망은 1급이나 단 양쪽이 일
체의 자비도 없는 낭떠러지이니 난간을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한다.


▲  기차바위 능선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울시내

가까이로 북악산(백악산)과 서촌(웃대), 경복궁, 서울 도심부부터 멀리 아차산~용마산~망우산
산줄기, 강동구 지역, 남양주와 하남, 성남 지역 산줄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와 눈 속에
서 아주 살살 녹는다.


▲  기차바위에서 바라본 부암동과 평창동, 북한산(삼각산) 남쪽 산줄기

서울 도심 속의 전원마을로 인왕산과 북악산(백악산), 북한산(삼각산)에 포근히 감싸인 부암
동과 신영동, 평창동(平倉洞), 북악산 북쪽 자락과 북한산 남쪽 산줄기가 장쾌하게 시야에 들
어온다. 이렇게 보니 서울의 한복판이 아닌 산악 지방의 소도시를 보는 기분인데, 뫼를 오르
는 재미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조망 맛을 보기 위함이다.


▲  기차바위 북쪽에서 바라본 인왕산 정상(왼쪽)과 안산(鞍山)

▲  기차바위에서 홍제동, 환희사로 내려가는 산길

▲  옥동약수터

기차바위 능선을 지나 북쪽 갈림길에서 홍제동으로 인도하는 서쪽 길로 내려갔다. 중간에 다
시 왼쪽으로 빠져 환희사 방면으로 내려가다가 옥동약수터를 만났는데, 물이 실타래보다 적게
나오고 수질 또한 부적합 빨간 딱지를 받은 상태라 손을 대지 않았다. 마침 약수터에 있던 노
인이
'약수터 주변 정비를 안해서 그렇지, 마셔도 괜찮다. 난 이 물을 20년 동안 마셨다'
며 괜찮다고 그런다. 허나 부적합이란 단어가 계속 마음에 걸려 끝내 마시지는 않았다.

노인의 말로는 이곳을 관리하는 동네 노인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다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
거나 생명이 다해 거의 해체되어 관리하는 이들이 없다고 한다. 왕년에는 인왕산의 제일 가는
약수임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많이 초췌해졌다면서 서대문구청에 지속적으로 민원을 넣었지만
철밥통에 걸맞게 앵무새처럼 알겠다고만 할 뿐, 약수터 관리에 그리 신경을 안쓴다고 한다.


▲  옥동약수터 주변 동굴

옥동약수터에서 잠시 두 발을 쉬었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가다보니 또 다른 약수터를 만났
는데, 그 약수터는 아예 물이 말라버렸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들이 있고 그들
뒤로 조그만 자연산 동굴이 있는데, 그곳도 기도와 무속 행위로 말썽이 많자 아예 철조망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굴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산산이 불어와 몸을 꼬질꼬질하게 뒤덮던 땀방울을
제대로 단죄한다.

동굴을 뒤로하고 5분 남짓 내려가니 인왕산 서쪽 자락에 안긴 조그만 비구니 산사, 환희사(歡
喜寺)가 모습을 비춘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 2개를 간직한 20세기 현대사찰로 오랜만에
발을 들일까 했으나 이미 18시가 넘어서 쿨하게 통과했다. 환희사는 18시 정도가 되면 대문을
걸어잠군다.
속세애서 절까지는 차량이 마음껏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닦여져있는데, 그 길을 5분 정도 내
려가면 인왕산을 건방지게 가리고 선 홍제원현대아파트와 인왕산현대아파트가 나온다. 이제
완전히 속세로 내려온 것이다. 두 아파트 사이를 가르는 통일로34길을 내려가니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의주로(義州路)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인왕산 나들이는 다음을 기약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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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9월 2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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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무덤일까? 탑일까? 깊은 산골에 숨겨진 신비의 돌무더기, 산청 구형왕릉~왕산 늦가을 나들이 (왕산사지, 유의태약수터)

 


~~~~~ 산청 가을 나들이 ~~~~~
(전 구형왕릉, 왕산사지, 유의태약수터)

▲  전 구형왕릉


 

늦가을이 절정을 이루던 10월의 끝 무렵에 지리산 동쪽에 넓게 누운 경남 산청(山淸)을 찾
았다.
아침 일찍 부산서부터미널에서 진주(晋州)행 직행버스를 타고 냉정분기점까지 줄기차게 이
어진 교통체증을 뚫으며 1시간 50분 만에 진주시외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바로 산청으
로 가는 직행버스를 잡아타고 40분 정도를 달려 9시 40분에 산청터미널에 이르렀다.
산청터미널에서 구형왕릉이 있는 화계리로 가는 군내버스가 10시에 있는데 마침 시간이 딱
맞아 떨어진다.
쌀쌀한 아침 기운에 여남은 졸음을 털어내고 있으니 화계리행 군내버스가 타는 곳에 쑥 머
리를 들이민다. 차에 오르니 거의 노인들 뿐이고, 젋은층은 정말 손에 꼽을 지경이다.

10시가 되자 군내버스는 강인한 심장 소리를 내며 산청터미널을 출발했다. 마침 읍내 주변
은 오리무중(五里霧中)처럼 안개가 자욱했는데, 금서면(今西面) 중심지(매촌리)를 지나 고
개를 오르니 특리(特里)에 이르러 안개에서 완전히 벗어나 광명을 되찾았다. 즉 안개 위로
올라온 것이다.
거의 흔치 않게 경험한 안개 위에 세상은 구름이 거의 없는 푸르른 가을 하늘이 눈 시리게
펼쳐져 있고, 내가 왔던 안개 밑 세상은 여전히 두터운 안개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졸
지에 환경이 달라지니 속세에서 천상(天上) 세계로 승천(昇天)이나 해탈(解脫)을 한 듯한
묘한 기분이 교차한다.

산청군에서 야심차게 닦은 산청한방테마공원을 지나 다시 뱀꼬리 같은 험준한 고개를 넘으
니 구형왕릉을 알리는 이정표와 함께 덕양전이 나온다. 여기서 노인 3명과 같이 내려 늦가
을이 내려앉은 덕양전을 찾았다.


 

  가락국 구형왕(仇衡王)을 봉안한 사당 ~ 덕양전(德讓殿)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50호

▲  홍살문과 굳게 입을 닫은 외삼문(外三門)

구형왕릉 입구에 자리한 덕양전은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의 마지막 군주인 구형왕 내외를
봉안한 사당이다.

구형왕은 신라에 항복하고 구형왕릉 남쪽 왕산사 자리에 있었다는 수로왕(首露王)의 별궁, 수
정궁(水晶宮)에서 5년 정도를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한다. 이후 후손들이 사당을 만들
어 제사를 지냈으나 여러 번 중단되었다고 하며, 1798년에 왕릉 밑에 사당을 새로 짓고 다시
제향(祭享)을 올렸다. 1898년 덕양전으로 이름을 갈았는데 이는 구형왕의 다른 이름이라는 양
왕(讓王)에서 따온 이름으로 그의 덕을 기린다는 뜻이다.
그 이후 1930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으며, 1991년 문화재 정비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
게 되었다.

덕양전은 1,200평 규모로 영정각(影幀閣)과 안향각(安香閣), 연신문(延神門), 추모재(追募齋)
, 정숙당(靜肅堂), 해산루(海山樓), 동재(東齋), 서재(西齋) 등을 갖추고 있으며, 덕양전 본
전(本殿)에 봉안된 구형왕 내외의 영정은 1798년 왕산사터에서 발견된 목함(木函) 속에 있었
다고 한다. 그 안에는 영정 외에도 왕산사기(王山寺記)도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영정은 그때
발견된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정체가 아리송한 돌무더기를 구형왕릉으로 둔갑시키는 과정에
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옛 가야의 쓸쓸한 성지(聖地)인 덕양전은 추모재(왕산재)가 있는 경내 우측 부분만 출입이 가
능하다. (공개 범위는 변경될 수 있음) 본전과 안향각, 서재 등 덕양전의 핵심인 해산루 안쪽
은 제향 때를 제외하고는 문을 굳게 닫아건다. 허나 담장이 낮아 밖에서도 거의다 보이며 옛
가락국의 성역인만큼 출입통제 안내문을 거스르면서까지 억지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덕양전의 매력은 바로 담장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당은 기와를 얹힌 담장을 둘렀으나 이곳은
아산 외암리마을의 돌담처럼 그냥 돌만 쌓은 형태이다. 돌담의 높이는 1.5m 내외로 돌을 차곡
차곡 쌓아 마치 조그만 성곽(城郭)처럼 보이며, 기와를 얹힌 부분이 없고, 높이도 성인 키보
다 좀 작은 높이를 유지하여 동네 돌담처럼 수수한 모습이 그저 정겹기만 하다. 또한 구형왕
릉의 곡장(담장)도 이곳의 돌담과 비슷한 모습인데 덕양전은 그 왕릉의 사당인만큼 그곳의 담
장을 본떠서 만든 듯 싶다.

제향은 매년 봄 음력 3월 16일과 가을 음력 9월 16일에 춘추향례(春秋享禮)를, 음력 초하룻날
과 보름날에 삭망향례(朔望享禮)를 지내며, 제례 때는 산청 지역 주요 인사들과 후손들, 유림
(儒林), 기관단체장 등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참석한다.
* 덕양전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370 (동의보감로 995)


▲  덕양전 추모재(왕산재)로 들어가는 삼문(三門)

늦가을 아침 햇살이 살포시 어루만지고 있는 덕양전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존재는 홍살문이다.
보기만 해도 정덜미가 뚝 떨어질 것 같은 차디찬 인상의 소유자, 홍살문은 관청과 향교 등 국
가 기관과 사당, 향교(鄕校), 서원(書院) 등 양반과 관련이 깊은 장소에 세우는 것으로 이곳
을 찾은 이에게 예의와 엄숙을 요구한다.

홍살문을 지나면 외삼문이 나오는데, 향례 때를 제외하고 늘 문이 닫혀있다. 문에 새겨진 큼
직한 태극마크는 사당의 엄숙함을 더욱 진하게 해준다.


▲  왕산재<(王山齋), 추모재(追募齋)>
덕양전을 관리하는 후손들이 머물거나 모임을 하는 공간이다.

▲  덕양전 사적비를 품은 비각(碑閣)

▲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자리한 해산루

▲  해산루 담장 너머에 자리한 서재(西齋)

▲  해산루 돌담 너머에서 본 내삼문과 그
주변 (내삼문 뒤쪽에 덕양전 본전)


▲  외삼문 돌담 너머로 본 해산루 주변
해산루는 외삼문, 내삼문과 달리 문이 활짝 열려있다. 하긴 내부로 들어가는 문을
죄다 통제해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니 해산루까지 문을 닫아 걸 필요는
없을 것이다.

▲  고색의 때로 자욱한 하마비(下馬碑)

하마비는 하마 서식지가 아닌 말에서 내리란 뜻(下馬)의 비석으로 보통은 홍살문 곁에 두지만
이곳은 다소 거리를 두며 자리해 있다. 덕양전 주차장에서 화계리로 나가는 길가에 빛바랜 모
습으로 있어 자칫 지나치기가 쉽다.

오랜 세월의 때가 가득 낀 하마비는 관청과 향교, 궁궐, 서원, 사당, 왕릉이나 사대부의 묘역
입구에 세우며, 이 앞은 무조건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출 것을 요구한다.


▲  알록달록 옷을 걸쳐입은 덕양전 동쪽 돌담
지체 높은 사당의 돌담보다는 일반 민가의 돌담 같은 정겨운 모습이다. 이렇게 보면
누가 사당의 돌담으로 보겠는가? 담장 높이도 성인 키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라
평소에는 공개하지 않는 콧대 높은 덕양전 내부가 속시원히 바라보인다.

▲  망경루(望京樓)

덕양전 동쪽에 구형왕릉으로 인도하는 2차선 길(구형왕릉로)이 닦여져 있다. 그 길을 5분 정
도 가면 길 서쪽 계곡에 2층 누각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곳은 망경루란 누락으로 조
선 태조가 고려의 충신인 민안부(閔安富)의 충절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라고 한다. 누각의 이
름인 망경(望京)은 서울을 바라본다.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민안부의 서울은 당연 고려의 국도
(國都)인 개경(開京, 개성)이 된다.

민안부는 본관이 여흥(驪興, 여주). 자는 영숙(榮叔), 호는 농은(農隱)이다. 학문이 매우 뛰
어나 일찌기 관직에 진출해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1392) 때 예의판서(禮儀判書)까지 올랐
으나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 이에 반발하여 고려의 유신 70여
명과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세상은 그를 포함한 72명을 두문
동 72현(賢)이라 부른다.

조선 태조(이성계)는 그에게 벼슬을 내려 나올 것을 권했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두문동을 나
와 산청 대포리(大浦里)에 은둔하면서 매월 첫날과 보름에 개경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며 고려
를 그리워했다. 또한 자손들에게도 조선 조정의 벼슬을 하지 말 것을 경계했으며, 현감(縣監)
에 등용된 아들을 사직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누각은 근래에 손질된 것으로 매년 음력 4월 초파일에 유림에서 조직한 '한계회'에서
제를 지낸다고 한다.

망국(亡國)의 제왕이 묻혔다는 왕릉으로 가는 길목에 이렇게 망국의 충신을 위한 누각이 있으
니 참으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일부러 망국 제왕의 능 밑에 지은 것이 아닐까 싶지만 당시
구형왕릉은 정체가 아리송하던 시절이므로 그건 아닌 듯 싶다. 비록 서로의 신분은 달라도 망
국을 강제로 겪었고, 그 한을 달래는 부분에서는 서로가 공통되니 이 골짜기는 망국을 그리는
이들의 조촐한 공간인 셈이다.

▲  김유신이 화살을 쐈다는 장소에 세워진
사대비(射臺碑)

▲  비각 안에 담긴 가락국 유적비(遺蹟碑)

망경루를 지나면 길 오른쪽에 돌로 다진 단(壇) 위에 심어진 비석이 마중을 한다. 비석 피부
에는 '신라 태대각간 순충장렬 흥무왕 김유신 사대비(新羅 太大角干 純忠壯烈 興武王 金庾信
射臺碑)'라 쓰여 있는데, 김유신이 여기서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이를
기리고자 단을 닦고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임)


▲  늦가을이 곱게 봉숭아물을 들인 구형왕릉 가는 길
길을 가다가 갑자기 신선 형님이나 선녀(仙女) 누님이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가락국의 마지막 군주, 구형왕의 능으로 전해오는 신비의 돌무덤
전 구형왕릉(傳 仇衡王陵) - 사적 214호

덕양전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왕산 북쪽 골짜기에 '전 구형왕릉(이하 구형왕릉, 석총)'이
라 전하는 거대한 돌무덤이 신비로움과 수수께끼를 고요히 품은 채 웅크리고 있다. 산청의 대
표적인 명소로 주변의 빼어난 풍광 때문인지 나 같은 범인(凡人)들이 감히 발을 들이는 것이
뭐할 정도로 더욱 신비롭게 다가온다.

이 무덤은 일반적인 흙무덤이 아닌 돌로 쌓은 이른바 석총(石塚)이다. 이 땅에서 석총의 대표
적인 존재로 고구려의 장군총(將軍塚)이 있는데, 그건 덩치로 보아 고구려의 태왕(太王) 무덤
이 확실하다.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의 왕릉으로 보고 있음> 하지만 이곳 석총은
여전히 정체가 아리송하다. 그래서 구형왕릉이란 이름 앞에 전(傳)을 붙인 것이다. 즉 구형왕
릉으로 아련히 전해오는 존재란 뜻이다.

석총의 형태는 경사진 언덕에 돌로 쌓은 기단식 석단(石壇) 형태로 동쪽으로 뻗어있는 경사면
에 잡석으로 앞면을 7단 쌓고, 정상은 봉분(封墳)처럼 타원의 반구형을 이루고 있다. 전체 높
이는 7.15m 정도로 어떤 이는 산청의 피라미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자연 경사를 활용하여 만
든 것이라 평지에 만든 계단식 돌무덤<장군총이나 서울 석촌동고분군>과는 차이가 있다.
석총 중간 부분에는 네모난 구멍이 하나 있는데, 이는 폭 40cm, 깊이 68cm의 감실(龕室)로 그
안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려진 것이 없다. 처음에는 내부로 들
어가는 문으로 생각했지만, 깊이가 1m도 안되니 그것도 아니다. 만약 불교와 관련된 돌탑이라
면 불상을 봉안한 공간이겠지만 그런 증거도 마땅치가 않다. 예전부터 구형왕릉에 가게 되면
반드시 저 구멍을 살펴보겠노라 다짐했으나, 석총으로 올라가는 양 사이드에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장이 있어 그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사람도 없으니 그 경고를 무
시하고 올라가도 되겠지만 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석총 주위에는 돌로 쌓은 키 작은 돌담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데, 돌담의 모습은 아까 덕양전
의 돌담과 비슷하여 덕양전이 1930년 그 자리에 터를 닦을 때, 이곳의 돌담을 따라 만들었음
을 알 수 있다.
석총 앞은 경사가 좀 기울어져 있는데 경사면 앞 평지에 비석과 장명등, 문인석(文人石)과 무
인석(武人石) 1쌍을 두어 석총을 지키게 했다. 이들은 모두 근래에 심은 것으로 석총과는 시
대 차이가 상당하다. 무엇을 모델로 삼아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기존의 문인석, 무인석과는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훤칠한 키의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문인석은 너무 나이가 지긋해 보
인다. 그리고 세월에 지쳤는지 조금은 경직된 표정이다.
석총 북쪽 계곡에는 돌로 터를 다지고 능을 관리하고 제기(祭器)를 관리하는 재실(齋室) 2동
을 만들었고, 근래에 주차장과 무덤으로 건너가는 홍예다리를 가설하고 주변을 정비했다.

▲  구형왕릉 우측 석인(石人)
왼쪽이 문인석, 오른쪽이 무인석이다.

▲  구형왕릉 좌측 석인의 뒷모습

◀  구형왕릉 비석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이라 쓰여 있다.
여기서 양왕릉은 구형왕릉의 다른 이름이다.

이 석총의 정체에 대해서는 왕릉이란 설과 석탑이란 설이 있다. 탑으로 보는 설은 안동(安東)
과 의성 지역에 비슷한 모습의 탑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근처에 왕산사란 절이 있어서 석탑
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탑의 모습은 이 땅의 흔한 스타일이 아닌 이형(異形) 스타일일 것이다.
그리고 구형왕릉이나 왕릉(신라 왕릉으로 구전됨)으로 보는 것은 오래 전부터 구전이나 기록
을 통해 왕릉으로 전해오고 있어서 그렇다. 지금은 왕릉 쪽에 무게가 크게 쏠리고 있으나 불
교 석탑의 견해도 만만치 않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산음현(山陰縣) 부분에 '현 서쪽 10리, 왕
산 산중에 돌로 쌓은 언덕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상에서는 왕릉으로 전한다'
는 기록이 있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옛날부터 왕릉으로 구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이곳이 구형왕릉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홍의영(洪儀永, 1750~1815)의 '왕산심
릉기(王山尋陵記)'에서 비롯되었다. 거기서는 무덤 서쪽에 왕산사란 절이 있고 그 절에서 전
하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쓰여있다고 했으며, 산사기권(山寺記券)에도 그렇게 나와있
다. 또한 산청현읍지(山淸縣邑誌)에는 무오년(戊午年, 1798년)에 구형왕릉을 수리하고 사당을
세워 수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허나 이들도 딱히 신뢰도는 떨어진다. 경주에 있는 많은 신
라 무덤들이 신라 왕족 후손들(박씨, 석씨, 김씨)에 의해 대충 '신라 어느 왕'의 능으로 둔갑
되었듯이 구형왕릉 역시 후손(김해김씨)에 의해 둔갑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석총의 조성시기는 구형왕릉이 맞다면 6세기 중반이 될 것이고, 만약 탑이라면 그 이후가 될
것이다. 이곳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구형왕이 세상을 뜨자
'나라도 구하지 못한 몸이 어찌 흙에 묻히겠는가? 차라리 돌로 덮어달라' 유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를 따르던 신하와 군사들은 시신을 매장하고 그 위에 산에서 뒹굴던 잡석을 하나씩
얹혀서 지금의 석총이 되었다고 한다.

아직 이곳은 구체적인 발굴작업이나 학술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는데, 하루 빨리 발굴조사가 이
루어져 그 속을 속시원히 들추었으면 좋겠다. 왕릉이라면 조촐하게 석실(石室) 같은 것이 있
을 것이고 거기서 괜찮은 단서나 당시 유물이 앞다투어 나올 지도 모른다. 옛날 제왕이나 귀
족의 무덤은 보물단지라 불릴 만큼 유물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  신비한 기운에 감싸인 듯한 구형왕릉

그럼 이곳에 묻혔다는 구형왕(?~537년)은 누구일까? 구형왕을 살피기 전에 일단 가락국을 포
함한 가야(伽倻)에 대해 아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자웅을 겨루던 삼국시대에 당당한 일원임에도 삼국(三國)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가야, 당연히 사국(四國)시대라고 불려야 되지만 가야는 늘 외면을 받고 있다.
가야는 변한(弁韓)을 이루던 12개 나라의 일원인 구야국(狗倻國, 경남 김해)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이곳에서 김수로(金首露)가 지역 촌장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가락국(駕洛國)을 건국했
다. 그 가락국(금관가야)의 건국 시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나 개황록(開皇曆)에 따르면 서기
42년이라고 한다.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니다.

가락국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변한을 통합했으며, 점령한 곳에는 왕족이나 귀족을 보내 그
곳의 왕이나 관리로 삼거나, 항복한 세력의 군장에게
통치권을 부여했다. 이렇게 해서 소위
말하는 13가야를 이루게 되었다. (예전에는 6가야라고 했음)
13개(혹은 그 이상)의 연맹국가(聯盟國家)로 구성된 가야는 경남 대부분을 차지하고, 경북 성
주(星州)와 상주, 문경<고령가야(古寧伽倻)>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북쪽에 있는 신라(新
羅)와 자주 충돌했는데, 초기에는 가야가 우위를 차지했으며, 서로는 마한(馬韓)과 백제와 다
투었다. 또한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열도(倭列島)로 진출, 곳곳을 개척하여 속령(屬領)으로
삼았으며, 이때 건너간 가야인 중 유력한 사람이 왜왕(倭王)이 되어 가야의 명을 받았다.
특히 철이 많이 생산되어 철생산국으로 막대한 부를 모았는데, 그 철을 바탕으로 강력한 기마
군단을 만들어 주변 나라를 벌벌 떨게 했다.

이렇게 부강하던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제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지 못
한 한계점이 있었다. 이들 삼국은 중앙집권체제를 통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고 부국강병을
추구하며 영토 확장에 매진했으나, 가야는 각 연맹국가가 따로국밥처럼 놀아 단결이 쉽게 되
지 못했던 것이다. 가락국과 대가야가 가야연맹의 맹주(盟主) 노릇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맹주일 뿐, 다른 연맹국가를 제어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같은 가야라도 이익 관계에 따라 서
로 치고 박고 싸우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3세기 초반에 안라국(安羅國)이 일으킨 포
상팔국(浦上八國) 전쟁이다.
가락국이 주변 나라와의 해상교역권을 송두리째 차지하며 혼자서만 배를 불리자 안라국 등 경
남 남부 해안 지역에 있던 8개의 나라가 연합군을 결성하여 가락국을 공격했다. 가락국은 서
둘러 신라에 구원을 청했으나, 8국 연합군의 수군이 신라 땅인 울산까지 치고 들어가 그 기세
를 떨치니 가락국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  계곡 위에 닦여진 홍예다리
홍예다리는 근래에 만든 것으로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자아낸다.


4세기 후반, 가락국은 왜열도의 군사를 징발해 약 2만의 군사로 신라 왕경(王京, 경주)을 공
격했다. 신라 내물왕(奈勿王)은 급히 고구려에 살려달라 요청을 했고, 고구려의 태왕인 광개
토태왕(廣開土太王)은 친히 기병 5만을 이끌고 서라벌로 달려가 가야군을 격파했다.
이때 고구려의 기마군과 가야의 기마군이 처음으로 격전을 벌였는데, 둘 다 같은 철갑기병(鐵
甲騎兵)에 철갑옷을 갖췄지만 승자는 고구려였다. 가야의 철갑은 판갑(板甲)으로 방어력은 끝
내주지만 너무 무거워 기동력이 떨어진데 반해 고구려 철갑은 환갑(環甲)으로 방어력은 좀 떨
어지지만 가벼워서 기동력이 좋다. 게다가 고구려군이 전쟁경험도 풍부하니 어찌 가야가 당해
내겠는가.

고구려군은 줄행랑치는 가야군을 쫓아 가야를 풍비박산을 내었고 바다를 건너 왜열도까지 공
격해 쓸어버렸다고 전한다. 그 과정에서 가야연맹국은 큰 혼란에 빠졌고, 이후 소리 없이 쇠
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런 마당에 백제와 신라가 강성해지면서 좌우에서 가야를 압박하
니 하나로 뭉치지 못해 따로 노는 가야연맹은 더욱 힘들어 질 수 밖에 없다. 

가야에게 너무나 가혹했던 6세기가 도래하고, 521년 구형왕이 가락국 10대 제왕이 되었다. 가
락국이 42년에 세워졌다고 쳐도 480년 동안 왕은 겨우 9명이었다는 소리가 된다. 그렇다면 이
들의 평균 재위 기간은 50~55년이라는 소리인데, 이게 말이 될까? 이는 기록의 실수로 중간에
누락된 제왕이 제법 많을 것이다. 세상에 전하는 왕은 구형왕 포함 10명 뿐이니 후세에서 이
를 잘못 계산한 것이다.

구형왕은 구충왕(仇衝王), 구해왕(仇亥王), 양왕(讓王)이라고도 하는데, 왕비는 분질수이질(
分叱水爾叱)의 딸 계화(桂花)이다. 그는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노종(奴宗), 2남은 무
덕(武德), 3남은 무력(武力)이다.

신라 법흥왕(法興王)은 가락국 왕자(또는 왕족)에게 화친의 의미로 신라 왕족 여인을 시집보
냈다. 허나 구형왕은 시집 온 신라 왕녀에게 가야 옷을 입혔고, 이를 들은 법흥왕은 괜한 것
도 아닌데도 뚜껑이 폭발하여 532년 사다함(斯多含)을 시켜 가락국을 공격케 했다.
가야연맹의 오랜 맹주로 위엄을 떨쳤던 가락국은 신라군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결국 국고(國
庫)의 보물을 들고 신하를 대동하여 신라에 항복하고 만다. 이렇게 하여 500년 역사의 가락국
은 532년 그 문을 닫게 되고, 가야의 맹주는 대가야(大伽倻)로 넘어가게 된다. 또한 가락국을
방패 삼아 간신히 나라를 꾸리던 다른 가야연맹국도 차례대로 무너져 561년 안라국(경남 함안
), 562년 대가야의 멸망을 끝으로 가야연맹은 역사에서 영원히 퇴장한다.


▲  늦가을이 깃든 재실 주변
이곳을 지나던 늦가을도 구형왕릉의 신비로움에 반한 것일까?
잠시 길을 멈추고 곱게 작품을 남겼다.


구형왕이 항복하자 신라 조정은 상등(上等)의 벼슬을 내리고 가락국 땅을 식읍(食邑)으로 주
어 심심치 않게 사례를 했다. 또한 구형왕 일가를 신라 진골(眞骨) 귀족으로 대우했다. 허나
왕은 가락국에 있지 않고, 바로 길을 떠나 수로왕의 별궁이라고 전하는 수정궁(水晶宮)에 들
어와 은둔했다고 한다. 수정궁은 구형왕릉 남쪽 왕산사터라고 전한다. 반면 그의 아들은 김해
에 남거나 신라 조정에 출사했다.
그가 김해를 떠나 산청 산골로 들어간 것은 나라를 말아먹은 죄책감에 고개를 들기 힘들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수정궁이 대가야 서쪽이고, 백제 땅과도 가까워 이들의 도움을 받아 후
일을 도모하고자 함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여기서 5년을 머물다가 한많은 삶을 마감했다.

구형왕의 3째 아들인 김무력(金武力)은 신라 조정에 출사해 많은 무공(武功)을 세웠으며, 나
중에 벼슬이 상위 등급인 각간(角干)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인 김서현(金舒玄)은 신라 왕족인
만명(萬明)과 혼인했으며, 그 역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그 유명한 김유
신으로 그도 숱한 전공을 세우고, 왕족인 김춘추(金春秋)를 도와 왕위에 오르게 하면서 군권
을 장악했다. 그가 죽자 왕족이 아님에도 왕으로 추존되었으니 신라에서 그의 위치가 어떠했
는지를 가늠케 해준다. 그의 시호는 흥무왕(興武王)이다.
그를 통해 가야계 김씨들의 세력이 왕성해졌으나 그가 세상을 뜬 이후, 그 세력도 많이 약해
졌으며, 김유신의 자손들도 별로 두드러지는 인물이 없었다.


▲  홍살문 앞에서 바라본 건너편 남쪽 재실(호릉각)

구형왕릉은 새도 들어오기 힘든 심산유곡(深山幽谷)으로 숲이 울창하고 계곡이 졸졸 흘러 한
여름에도 시원하다. 산청에서 띄워주는 명소로 휴일에는 사람이 좀 오지만 평일에는 사람 구
경 하기가 힘들어 새소리와 산바람의 소리만이 이곳에 내려앉은 정적을 살짝 깨뜨린다.
자연을 벗삼아 사색을 즐기기에 아주 좋은 곳으로 왕산 등산로의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여기
서 유의태약수터나 망경대를 통해 왕산으로 오를 수 있다.

홍살문에서 구형왕릉으로 갈 때는 정면 돌다리를 건너 호릉각을 거치거나 홍살문을 지나 삼문
을 거쳐도 된다. 어차피 거리는 둘 다 비슷하다. 다리 건너에 돌로 터를 다져 석축을 3단으로
쌓고 재실인 호릉각을 지었는데, 그곳에 서린 늦가을 풍경이 가히 숨이 막히고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저곳에 들어가면 나도 단풍마냥 알록달록 물드는 것은 아닐까?

▲  왕릉으로써의 애써 위엄을 보이려는
붉은 피부의 홍살문

▲  왕릉 앞에 세워진 삼문(三門)

▲  제사 물품을 보관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호릉각(護陵閣, 남쪽 재실)

▲  호릉각과 북쪽 재실을 이어주는 문


▲  왕릉의 우측 돌담
돌담과 왕릉 뒤쪽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이젠 나이가 상당하여
돌담과 왕릉에 발을 올리기만 해도 스르륵 무너질 것 같다.

▲  약간 우측에서 올려다본 구형왕릉
가을 볕이 살포시 내려앉은 구형왕릉, 워낙 비밀이 많은 곳이다 보니
왕릉을 이루고 있는 돌들도 모두 범상치 않게 다가온다.

▲  북쪽 재실에서 바라본 돌다리와 홍살문

※ 전 구형왕릉 찾아가기 (2018년 10월 기준)
① 산청까지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산청행 직행버스가 1일 8회 떠난다.
*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산청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진주에서 산청행 직행버스가 10~20분 간격으로 운행
② 현지교통
* 산청터미널에서 화계리행 군내버스가 1일 9회 정도 있으며, 화산마을(덕양전)에서 하차하여
  도보 20분
③ 승용차 (주차비 없으며, 덕양전에도 주차장 있음)
* 대전~통영고속도로 → 산청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매촌3거리에서 우회전 → 덕양전에서
  좌회전 → 구형왕릉
* 구형왕릉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


 

  늦가을에 젖은 왕산(王山) <왕산사지, 유의태약수터>

▲  살짝 구부러진 왕산 포장길 (구형왕릉로)

왕산(923m)은 산청군 금서면에 자리한 높은 산이다. 왕산이란 이름은 구형왕릉에서 유래되었
다고 하며, 태왕산(太王山)이라고도 한다. 왕이 오른 고개란 뜻의 왕등재를 비롯하여 관련된
이름이 여럿 전해오며, 특히 고령토(高嶺土) 산지로 예로부터 명성이 높아 특리와 향양리, 방
곡리에 가마터 유적지가 있다.
왕산에는 전 구형왕릉과 왕산사터, 유의태약수터 등의 명소가 있으며, 능선과 정상 주변은 봄
에는 철쭉이, 가을에는 억새가 장관을 이룬다.

구형왕릉에서 유의태약수터까지 가는 길은 2갈래이다. 하나는 산길이고 다른 하나는 포장길을
인데, 서로 떨어진 듯 보이지만 결국 하나로 만난다. 포장길은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
게끔 산 중턱을 지나 자혜리로 이어진다.
산길은 돌이 많고 계곡을 옆에 낀 헝클어진 길이지만 거의 직선이다. 포장길은 잘 닦여진 길
이라 발의 무리는 별로 없지만 험준한 왕산의 눈치 때문에 2배 이상으로 빙빙 둘러가야 된다.
그리고 기왕 산에 왔으니 가을 낙엽이 귀를 접고 누운 산길이 더 호젓할 것이다.

가을이 떠나려는 산길에는 장차 밀려올 겨울을 원망하며 땅으로 곤두박질 친 낙엽들이 가득하
다. 점차 차가워지는 가을산을 따스히 덮어주며 흙으로 들어갈 그 순간을 기다리는 낙엽의 마
지막 여정.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마지막에는 결국 한줌의 흙이 되고 만다. 시작과 중
간은 크게 다를지언정 그 종점은 모두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허무한 모양이다.


햇볕 한점 들어오기 힘든 무성한 산길을 10여 분 오르면 구형왕릉에서 갈라진 포장길과 다시
만난다. 왕산과 유의태약수터를 띄우고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콘크리트로 밀어버렸지만 그
냥 흙길이거나 오솔길 같은 길이었으면 더 운치가 있었을텐데 그 점이 아쉽다.
포장길에는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거대한 자연산 카페트를 이루고 있고, 마치 산불이 일어나
듯 알록달록 타오른 나무들은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광속과 같은 시간을 원망한다. 아
름답게 다가오는 늦가을 풍경에 가히 숨이 막히고 눈이 멀 지경이다. 인간의 한낱 언어나 단
어로 늦가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건방질 정도로 말이다.


▲  낙엽이 가득 깔린 왕산 포장길

평일이라 그런지 이 서정적인 길에 사람은 나 하나 뿐이다. 구형왕릉은 그래도 나들이객들이
여럿 보였지만 그 이상은 차도 사람도 보이질 않는다. 자연의 소리만이 살며시 귀를 간지럽히
는 이 좋은 길을 비록 잠시긴 하지만 내가 완전 무료 전세를 낸 것이다. 소원 같아서는 이 길
을 내 소유로 만들거나 집으로 살짝 가져와 두고두고 거닐고 싶지만, 그저 헛된 망상일 뿐이
다. 그저 오늘만이라도 이곳의 주인공이 된 양 누구의 눈치 없이 마음 편히 둘러보고 사라지
는 것이 최선일 뿐이다.

아무도 없는 길이지만 자연과 벗삼으며 자연 속에 녹아들며 걸으니 결코 지루하지가 않다. 아
니 그런 것을 느낄 겨를도 없다. 포장길과 산길이 만난 곳에서 유의태약수터 입구까지 20분
거리이지만 무엇에 홀린 듯, 그렇게 걷고 보니 금세 약수터 입구이다. 이런 길은 정말 몇 시
간을 걸어도 질리지 않을 것이다.


▲  유의태약수터 입구를 코앞에 두고

▲  유의태약수터로 가는 산길 (왕산사터 주변)

유의태약수터 입구에서 왼쪽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면 초반에는 조촐하게 깔린 계단길이 펼쳐
진다. 경사는 자연의 넉넉한 마음처럼 여유로우니 힘든 것은 별로 없다. 계단길을 오르면 돌
이 박힌 정겨운 풍경의 산길이 펼쳐지는데, 그 길의 끝에 유의태약수터가 있다.
그곳으로 가는 중간에는 구형왕과 관련되어 있다는 왕산사터가 있으니 유의태약수터의 후식으
로 삼아 둘러보기 바란다.


▲  왕산사터(王山寺址) - 경남 지방기념물 164호

구형왕릉에서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왕산 북서쪽 자락에 왕산사터가 숨어있다. 이곳은 유
의태약수터 바로 밑으로 그곳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니 찾기는 쉽다.
예전에는 이곳이 절터긴 하지만 정체가 확실치 않아 이름 앞에 아련히 전한다는 뜻에 전(傳)
을 붙였으나 이제는 완전히 확증이 가는지 과감하게 전을 빼버리고 그냥 안내문과 관련자료에
모두 왕산사지라 표현했다.

이곳에 있던 왕산사는 언제 지어지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망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전하
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승려 탄영(坦暎)이 쓴 왕산사기가 절터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산양현(山陽縣, 산청) 서쪽 모퉁이 방문산(方文山)의 동쪽 산록에 산이 있는데, 왕산이라고
부른다. 산 위에 왕대(王臺)가 있고, 아래에 왕릉이 있어 왕산이라고 한다. 능묘를 수호하였
기 때문에 왕사(王寺)라고 하였는데, 절은 원래 왕산의 정궁(正宮)이었다. 능은 가락국 10대
왕인 구형왕이 자리잡았던 현궁(玄宮)이었다'

즉 구형왕릉을 관리하고 지키던 원찰(願刹)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곳에는 구형왕이 말년을
보냈다는 수정궁이 있었다고 하는데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세웠다고 전하는 궁으로 거의
별궁 수준으로 여겨진다. 그 수정궁이 구형왕이 죽은 이후에 왕산사로 전환되었다고 하며 궁
자리가 넓어서 수정궁 건물을 그대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이곳이 왕대암(王臺庵)으로 나오
며, 1755년에 제작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왕대암이 폐사되고 왕산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왕산사는 적어도 16~17세기까지 법등(法燈)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왕대암은 왕
산사의 다른 이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1793년에는 왕산사에서 오랜 세월 전해오던 나무상자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서 구형왕 내외의
초상화와 옷, 활, 왕산사기 등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 유물은 덕양전에 있는데, 아마도 발
견되었다기보다는 구형왕릉 둔갑 프로젝트 차원에서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구형왕릉은 불
교 탑으로도 강하게 의심을 받고 있어 그것이 맞다면 왕산사와 관련된 탑으로 보인다.

근래에는 가야문화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벌려 건물터 6개와 문터로 추정되는 흔적, 계단 흔
적, 비석 받침과 부도 등을 건졌으며, 산청군에서 2007년과 2009년에 발굴작업을 벌여 수많은
기와조각과 그릇 조각을 꺼냈다. 다만 구형왕과 관련된 가야 유물은 나오지 않아 이곳에 씌워
진 구형왕 관련 이야기에 다소 회의감을 들게 한다.

현재 절터는 대자연이 잡초와 나무로 따스하게 보듬어주어 그 허전함을 덮어주고 있으며, 주
춧돌과 석물은 잡초에 묻혀있다. 왕산사가 아무리 크고 대단하다 한들, 자연 앞에서는 그저
장난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곳을 가득 채웠을 왕산사 왕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 모습을 담은 그림이나 기록이 없으
니 누구도 알 수 없다. 단순히 건물터나 주춧돌 등으로 그 모습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옛터 위에 상상의 나래를 발휘해 이곳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도 괜찮
을 것이다. 절의 건축물이야 뭐 기와집일 것이니 그것을 참조하여 상상을 펼쳐보이면 된다.
어차피 정답은 없으니 말이다.

인적이 없는 고요한 절터를 둘러보며 부도(승탑)를 찾다가 갑자기 맷돼지가 생각이 난다. 요
즘 그들의 개체수가 쓸데없이 늘어나 산에 자주 출몰한다고 하는데, 이곳은 지리산과 가깝고
숲이 무성한 데다가 워낙 외진 곳이라 자칫 멧돼지가 나타날 수도 있다. 자연의 소리만 들리
는 이런 곳에서 그를 만난다면 참 대책이 없을 것이다. 갑자기 다가오는 그 오싹한 기분에 절
터 답사를 팽개치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  숲의 일부가 되버린 왕산사터 산중턱 부분

▲  왕산사터 주춧돌
절터를 가득 메운 잡초와 나무들이 계속 자라서 나중에 왕산사 시절
건물을 그런데로 재현해주지는 않을까?

▲  왕산사터 서쪽 부분

▲  산중턱에 남은 왕산사터 석축


▲  유의태(柳義泰)약수터

왕산사터에서 3분 정도 더 들어가면 그 길의 끝에 유의태약수터라 불리는 약수터가 마중을 한
다. 왕산에 왔다면 구형왕릉, 왕산사터와 더불어 꼭 둘러봐야 되는 명소로 허준(許浚)을 주인
공으로 한 동의보감에 등장하는 그의 스승 유의태의 이름을 딴 것이 이채롭다.
약수터로 인도하는 길은 근래에 박석을 깔아 정비했으며, 약수터 역시 그냥 길가에 물이 솟은
평범한 샘터이던 것을 마치 오래된 유적처럼 손질했다.

이곳이 유의태약수터란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동의보감에 등장하는 유의태가 약수와 치료에
사용했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샘터에는 자연이 베푼 옥계수가 가득 솟고 있는데, 물을 한 바
가지 떠서 들이키니 몸 속의 체증이 싹 가신 듯 목구멍이 즐겁다고 쾌재를 부르짖는다. 그렇
다고 물이 오색(五色)약수나 방동약수처럼 쓴 맛도 아니다. 그냥 일반 샘터에서 마실 수 있는
그런 물이다. 다만 유의태약수 어쩌구 하니까 심리 때문인지 맛이 조금은 달콤하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 물을 마시면 정말 병이 싹 나을 것 같은 기분도 교차한다.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는 동의보감 소설에 나오는 가공의 인물이다. 그의 모델은 18세기에 산
청 지역에서 활약했던 유이태(柳爾泰, 또는 柳以泰 1652~1715)라고 한다. 그러니까 허준 시절
보다 약 100년 뒤에 인물이 된다.
그는 거창유씨로 호는 신연당(), 원학산인(). 인서(西), 자는 백원()이
며, 거창(居昌) 위천 서마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소에는 '泰' 한자를 썼고 의서에는 '
泰'를 사용하여 이름 한자 2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외가가 있는 산청 생초면으로 넘어와 그곳에서 의술활동을 펼쳤다. 이때 그가 진
료에 사용한 물이 바로 이 약수라는 것이다.
1706년 전국적으로 천연두(天然痘)와 마진(痲疹, 홍역)이 유행하여 많은 생명을 앗아가자 마
진경험방()을 토대로 하여 의학서적인 마진편(痲疹篇)을 썼다. 이 책은 1931년 활
자본으로 출간되었다.
숙종(肅宗) 때 어의(御醫)가 되었으며, 안산군수로 발령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고향으로 내려
와 백성들을 치료했다. 의술이 뛰어나 허준과 중원대륙의 명의 판작()에 비유되기도 했으
며, 실험단방(), 인서문견록(西) 등의 저서를 남겼다.

이후 소설 동의보감에서는 허준이 산청에 잠시 머물던 시절, 이 지역 명의였던 유이태를 이름
만 약간 바꿔 유의태로 삼아 그의 스승으로 둔갑시켰다. 그러니 유의태란 인물은 실존 인물이
아닌 것이다. 다만 산청군청과 몇몇 사람들이 유의태가 실존 인물로 정말 허준의 스승이었다
고 주장을 해 눈길을 끈다. 유의태는 1516년 산청군 신안면 상정마을 출신으로 서자(庶子)였
다고 하며, 산청 지역 제일의 명의로 활동하면서 허준을 제자로 삼아 많은 것을 전수했다는
것이다. 임종에 임할 때 허준에게 자신의 몸뚱이를 해부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해부의학(解剖
醫學)의 효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유의태는 왕산의 자생 약초에 이 약수터의 물로 탕액을 만들었다고 하며. 자신이 고치지
못한 병에 이 물을 이용해 낫게 했다는 설화가 있다고 한다. 그는 이 약수를 위암을 다스리는
물이라고 했으며, 위장병과 피부병 등 불치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전해져 인근에서 인기가
높다. 과연 효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유의태가 과연 동의보감에서만 나오는 인물인지 아니면 정말 숨을 쉬던 인물인지는 알 수 없
다. 현재로써는 유이태를 모델로 한 가상인물이란 설이 지배적이다.

* 약수터입구까지 차량 접근 가능, 구형왕릉에서 도보 약 30분

* 왕산사터, 유의태약수터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1외


▲  성큼 다가선 유의태약수터

▲  샘터 위에 약수터의 이름이 점잖게
쓰여 있다.

▲  콸콸 솟아지는 약수


▲  왕산을 뒤로 하며

약수터에서 물이 닳도록 마시니 배가 부르다. 여기서 동쪽 산길을 오르면 망경대와 왕산 정상
으로 이어지는데, 거기까지는 답사 계획에 없으므로 쿨하게 하산하기로 했다. 이때 해는 중천
에 떠서 점심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내려갈 때는 중간에 새는 거 없이 포장길로 구형왕릉까지 내려갔다. 내려가는 동안에도 사람
이나 차량을 하나도 구경을 못했다. 이렇게 운치 그윽한 길을 홀로 걸으니 기분 또한 색다르
며 늦가을의 향연에 잠긴 나무들은 낙엽을 휘날리며 떠나는 나를 전별한다. 다음에 인연이 된
다면 꼭 다시 찾아와 왕산 정상까지 오르고 싶다.


▲  잠시 낙엽에서 해방되다.

▲  포장길(구형왕릉로)이 크게 구부러진 곳에서 바라본 천하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와 함양군 유림면 지역

▲  구형왕릉에서 덕양전으로 내려가는 길
나무들이 서로 불을 지르고 있다.

포장길을 거의 2/3 내려온 지점에서 길이 크게 구부러지는데, 여기서 화계리와 유림면 지역이
두 눈에 조망된다. 그 구간을 지나면 구형왕릉이 나온다.

잠시나마 정들었던 왕산과 다음을 막연히 기약하며, 덕양전을 지나 화계리 마을로 나왔다. 화
계리는 금서면에서 2번째로 큰 마을로 경호중학교와 보건지소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북쪽에
있는 임천교를 건너면 바로 함양군 유림면의 중심지로 임천을 사이에 두고 산청과 함양(咸陽)
행정 경계가 맞대고 있는 것이다.

눈이 시리도록 깨끗한 은빛 물결에 임천을 건너 유림면사무소앞 유림3거리에서 함양읍으로 가
는 군내버스를 타고 함양읍내로 나갔다. 화계리에서 산청읍으로 가는 것보다는 유림에서 함양
읍으로 가는 군내버스가 더 많이 다니는데, 서울이나 인천에서 온다면 함양을 거쳐 이곳 유림
3거리에서 왕산 나들이를 시작하는 것도 괜찮다. 덕양전까지는 도보 15분 정도면 도착하고 여
기서 50분 정도를 더하면 거뜬히 유의태약수터까지 간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구형왕릉, 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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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10월 1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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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절집, 청주 낙가산 보살사 (석조이불병립상, 명암저수지)

 


' 늦겨울 산사 나들이, 청주 낙가산 보살사 (명암저수지)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보살사에 제일 가는 보물, 석조2불병립상


 

겨울 제국이 슬슬 쇠퇴기에 접어들던 2월 끝 무렵, 충청도의 오랜 중심지인 청주(淸州)를
찾았다. 청주에서 나에게 오라는 곳도 불러준 이도 없지만 왠지 그곳의 여러 명소가 땡겨
나그네 본능에 따라 미련없이 길을 나선 것이다.

청주시외터미널(가경동)에 도착하니 시간은 11시가 어느덧 넘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
景)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우선 요기부터 하기로 하고 터미널 2층에 있는 한식뷔페
기사식당에서 두둑히 배를 채웠다. 자고로 뱃속이 든든해야 일이 편한 법이다.
청주에는 이미 정처(定處)는 정해진 상태라 얌전하게 그곳을 찾아가면 되는데, 우선 시내
로 나가는 청주시내버스 832번(석판↔흥덕구청)을 타고 무심천을 건너 충북도청으로 넘어
가 청주시내버스 922번(보살사↔청주대)으로 갈아탔다.

용암지구까지는 시가지가 울창하게 펼쳐져 있다가 롯데마트 상당점을 지나면서 차창(車窓
) 밖 풍경은 겨울에 잠긴 시골 풍경으로 바뀌었다. 그 시골길을 거침없이 내달려 시내 동
남쪽 변두리에 박힌 보살사 종점에서 육중한 바퀴를 접는다.
버스에서 내려 절로 다가서니 경내 밑에 약수터가 있다. 보살사를 포근히 품은 낙가산(洛
迦山, 475m)이 속세에 베푼 약수로 물 낭비를 줄이고자 수도꼭지를 달았다. 하여 물을 마
시려면 집에서 수돗물을 틀듯이 꼭지를 틀면 된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
을 한가득 담아 마시니 몸 속에 낀 속세의 기운이 말끔히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약수를 마시고 오른쪽으로 난 돌담길을 오르면 청주에 숨겨진 오래된 산사(山寺), 보살사
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서서히 떠오르듯 펼쳐진 돌담길은 시멘트 대신 흙을 입혔으면 더
정겨웠을 것을 그것이 좀 아쉽다.


▲  보살사 경내로 인도하는 돌담길


 

♠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절집, 낙가산 보살사(菩薩寺)

▲  보살사 극락보전

낙가산(475m) 서쪽 자락에 아늑하게 둥지를 튼 보살사는 청주 땅에서 가장 오래된 절로 1530년
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거론된 청주의 절집 중, 지금까지 살아있
는 유일한 절이다. 즉 청주 불교의 화석과 같은 존재이다. <직지심경(直指心經)의 탄생지인 흥
덕사(興德寺)는 고려 때 파괴됨, 남이면에 있는 안심사(安心寺)는 청주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생략>

보살사는 법주사(法住寺)를 세웠다고 전하는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이를
증명할 유물이나 기록은 없다. 다만 창건과 관련된 다음에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1토막 전해온
다.
의신조사는 중생을 교화할 새로운 도량를 찾고자 기도에 들어갔다. 회향일(回向日)을 앞둔 어
느 날, 기도를 하던 의신은 비몽사몽간에 선인(仙人)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선인은 '그대의
기도가 지극하니 좋은 인연이 있을 것이오. 지금 대문을 나가보면 한 노파가 있을테니 그에게
물어 보시오'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래서 의신은 밖으로 나가보니 정말로 한 노파가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이에 의신이 노
파를 부르며 불이 나게 쫓아갔지만, 노파는 돌아보지도 않고 제 갈 길만 빠르게 가고 있어 두
사람간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노파는 한참 후에야 발을 멈췄는데, 의신이 다가가
서 얼굴을 보니 그 노파는 다름아닌 관음보살 누님이었다고 한다.

뜻하지 않은 관음보살의 등장에 기쁨에 가득 찬 의신은 무릎을 끓고 절을 올리며, 새로운 도량
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관음보살이 '그대가 찾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하고는 발길
을 돌리려고 하자 의신이 깜짝 놀라 '관음보살 누님께서는 어디로 가려고 합니까?' 물으니 관
음보살이 웃으며 '나는 이곳에 늘 머물러 있을테니 걱정하지 마라' 답하였다. 의신은 그의 센
스 넘치는 답변에 크게 감격을 했다고 한다.

어쨌든 의신은 관음보살이 알려준 곳에 절을 짓고, 그가 일러준 곳이라 하여 '보살사'라 하였
다. 또한 관음보살이 항상 머무는 곳이라는 뜻에서 산 이름을 보타낙가산(寶唾洛迦山)이라 했
으며, 이후 그 줄임말인 낙가산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그 연유로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칭하
고 있다. (충청북도에 널린 수많은 옛 절 가운데 유일한 관음도량이라고 함)
산의 이름에서부터 불교식 이름과 관음보살의 향기가 물씬 배어나오니 창건 당시 또는 중간에
관음도량으로 영업을 하면서 그럴싸한 전설을 지어내었고 산 이름도 낙가산으로 바꾼 것이다.

778년에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제자 융종(融宗)이 중창했다고 하는데, 극락보전에 신라 후기에
조성된 이 땅에 흔치 않은 이불병립상이 있어 이 시기에 융종이 창건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918년에는 고려 태조(太祖)의 5번째 아들인 증통국사(證通國師)가 중창했다고 하는데, 증통은
태조의 3번째 왕후인 신명순성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劉氏)의 소생으로 고려 3대 군주인 정종
(定宗)과 4대 군주인 광종(光宗)의 친동생이 된다. 광종이 925년 생이니 증통은 그 이후에 태
어난 것이 되는데, 어찌 태어나기도 전인 918년에 중창을 했다는 것인지 어이가 달아날 따름이
다. 아마도 시기가 잘못되거나 보살사와 인연도 없는 왕자 출신 승려를 억지로 끼어 넣다 발생
한 치명적인 오류인 듯 싶다.

1107년 자정(慈淨)이 중창을 했다고 하며, 고려 말에는 공민왕(恭愍王)이 절을 꾸리는데 쓰라
며 농토(農土)를 내렸다고 한다. 또한 1458년에는 세조(世祖)의 어명으로 절을 중수했다고 하
니 왕실과도 적지 않게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쓰러진 것을 1626년 벽암(碧巖)의 제자인 경특(瓊特)이 다시 일으켜 세
웠으며, 1683년에 일륜(日輪)이 크게 중수를 벌였다. 그러다가 왜정(倭政)과 6.25를 거치면서
퇴락된 것을 1988년부터 대대적인 중창을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경내 서쪽 산
등성이 너머에도 새로 터를 다져 직지보림선원을 세웠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삼성각, 명부전,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직지보림선원에는 큰법당과 선방 등의 건물이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 1258호로 지정
된 영산회괘불탱을 비롯하여 석조이불병립상, 극락보전, 5층석탑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특히 영산회괘불탱(1649년)은 석가탄신일과 주요 행사 때만 공개되
는 귀한 몸으로 평소에는 관람이 불가능하다.

한참 팽창중인 청주 시내와 적절히 거리를 두며 산 속에 포근히 자리해 있어 고즈넉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으며,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아 절 밑에는 그 흔한 식당도 마을
도 없다. (마을은 1리 정도 나가야 됨)
절도 조촐한 규모로 두 눈에 넣어 보기에 그리 부담이 없으며, 극락보전에는 매우 희귀한 2불
병립상이 있어 겉보기와 달리 보통 절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 낙가산 보살사 찾아가기 (2017년 3월 기준)
청주까지 (버스, 철도)
*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남부터미널, 동서울터미널에서 청주행 고속/직행버스가 수시로 떠난다.
* 부산(노포동, 사상), 대구(동대구), 광주에서 청주행 고속버스 이용
* 김포공항, 고양, 의정부, 부천, 인천, 광명(철산역, 광명역), 안양, 성남, 수원, 평택, 이천
  에서 청주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복합/유성), 대구(서부), 천안, 원주, 강릉, 충주, 제천, 공주, 구미, 창원에서 청주행
  직행버스 이용
* 대전 신탄진역 건너편에서 405, 407번 청주좌석버스 이용 (도청이나 상당공원에서 하차하여
  건너편 정류장에서 922번 이용)
* 서울역, 용산역, 수서역, 광명역, 동대구역, 부산역, 마산역, 익산역, 광주송정역, 여수엑스
  포역에서 고속전철(KTX, SRT)을 타고 오송역 하차
② 현지교통
* 청주시외/고속터미널, 청주역, 오송역(502, 747번), 조치원역(502번)에서 상당공원/도청 방
  면 시내버스를 타고 도청이나 6거리, 상당공원(내린 자리에서 길 맞은 편)에서 922번 시내버
  스로 환승(거의 1시간 간격)
③ 승용차 (절 밑에 주차장 있음, 자세한 경로는 인터넷이나 네비양 참조)
* 경부고속도로 → 청주나들목을 나와서 청주 방면 → 강상촌분기점에서 남청주 방면 3순환로
  → 양촌분기점에서 청주 시내 방면 → 분평4거리에서 1순환로로 우회전 → 방서4거리 직진
  → 용암지하차도로 들어서지 않고 가변으로 빠져서 4거리에서 우회전 → 보살사

* 관람료와 주차비는 없음
*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7 (낙가산로 168 ☎ 043-297-7526)


▲  보살사 극락보전(極樂寶殿)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56호

보살사는 다른 절집과 달리 그 흔한 일주문(一柱門)도 없다. 보통 일주문은 경내에서 멀리감치
나와 중생을 맞이하는데, 아무도 나와있지를 않으니 그저 고개가 갸우뚱할 따름이다. 일주문을
세울 지형적/재정적인 여건이 안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버스에서 내려 돌담길을 오를 때까지만 해도 오랜 내력에 걸맞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절로
생각을 했었으나 돌담길 끝에 이르러 모습을 비추는 경내를 보고 그 생각은 보기 좋게 깨지고
말았다. 바로 앞에 펼쳐진 극락보전(극락전)과 그 주변이 절의 전부였던 것이다. (근래에 터를
다진 서쪽 직지보림선원 구역은 제외) 극락보전 앞에는 5층석탑이 서 있어 1금당 1탑의 가람배
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극락보전 좌우와 5층석탑을 둘러싼 앞 뜨락에는 금잔디가 정갈하게 입
혀져 있었다.

보살사의 법당인 극락보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로 그 주
인을 배려한 탓인지 서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多包)계 맞배지
붕 건물로 전형적인 금당(金堂) 스타일을 지니고 있는데, 뜨락보다 약간 높게 다져진 기단(基
壇)에 주춧돌을 얹히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건물 기둥은 민흘림으로 우주(隅柱)가 평주(平柱)보다 굵고 높으며, 두공은 정연하게 배치되었
다. 창호는 측면의 협칸 없이 3칸이 개방된 정자형(丁字形) 분합문(分閤問)이 달려 있으며, 처
마의 수막새와 암막새에는 범자문(梵字文)과 기년명(紀年銘)이 쓰여 있다.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에는 이곳의 오랜 보물인 석조2불병립상
과 석조지장보살좌상 등이 따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화와 지
장탱, 칠성탱 등의 탱화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이후에 다시 지었으며, 1683년
에 일륜이 중수하고 1872년에 다시 중수했다. 자연석의 주춧돌과 기둥과 지붕의 비례, 공포가
많이 짜여진 다포의 특징 등에서 조선 초/중기 건축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  고색의 검은 때가 가득 깃든 극락보전 앞 계단

▲  보살사 5층석탑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65호

극락보전 앞에 싶어진 5층석탑은 1703년에 세워진 것으로 2층 탑신에 '강희계미(康熙癸未)'란
명문(銘文)이 쓰여있어 그의 탄생 시기를 귀띔해준다. 강희는 청나라 4대 군주인 강희제(康熙
帝, 재위 1661~1722)의 연호로 그 연호에 계미년은 1703년 밖에 없다.

고된 세월의 흔적이 군데군데 끼어있는 이 탑은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올리고 그 위에 복연화
문(複蓮花紋)이 새겨진 1층 기단을 올렸다. 겉으로 보면 기단이 2~3중으로 복잡하게 되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연꽃잎이 새겨진 부분이 전부이다.
기단 위에는 5층의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1층 탑신에는 우주를 새겼으며, 그 안에 2개의 사
각형을 새기고, 다시 그 안에 2개의 동그라미를 넣어 글자 모양을 새겼다. 처음에는 무슨 마크
인가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범자(梵字)라고 한다. 2층과 3,4,5층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은 하나
의 돌로 구성되었고,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줄어드는 모습으로 균형이 제법 잡혀 보인다. 탑
꼭대기인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이 생략된 복발(覆鉢)과 보륜(寶輪), 보주(寶珠)로 이루
어져 있다.

탑의 조성시기가 새겨진 이 땅에 흔치 않은 석탑이자 조선 후기 석탑 양식을 연구하는데 중요
한 단서를 제공하며, 탑의 높이는 바닥돌까지 포함하여 약 3.5m이다.


▲  1층 탑신에 새겨진 강희계미(康熙癸未) 4글자
오른쪽 강희 부분은 조금 마멸되어있으나 눈을 보다 가까이에 대면
글자 확인에는 별로 어려움은 없다. (단 한자는 알아야 됨)

▲  1층 탑신에 고대 문명의 글씨처럼 쓰여진 범자(梵字)
싸인처럼 보이는 저 내용은 무슨 뜻일까?

▲  1층 탑신 북쪽에 새겨진 범자
왼쪽 범자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과 자연의 심술궂은 괴롭힘에 형편없이
녹아 내렸고 오른쪽 범자만 간신히 남아 웃음을 짓고 있다.

▲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과 붉은 닫집

극락보전의 주인인 아미타3존불은 조선 후기 불상으로 근래 산뜻하게 개금(改金)을 입혔다. 아
미타불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화려한 보관(寶冠)을 뽐내며 협시(夾侍
)하고 있는데,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덩치가 비슷하다. 은은하게 미소를 드리며 중생들의 고통
과 보살사의 재정을 어루만지는 그들 뒤로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는
데, 1759년 3월에 조성된 것으로 가로 252cm, 세로 217cm 크기이다.
불단 위쪽에는 날개를 살짝 치켜 올린 듯한 수려한 자태의 닫집이 있어 아미타3존불과 극락전
내부를 더욱 화려하고 장엄하게 수식해 준다.


▲  극락보전 좌측의 석조지장보살상(石造地藏菩薩像)과 지장탱(地藏幀)

극락보전 좌측에 따로 자리를 마련한 지장보살상은 돌로 만든 것으로 1970년 4월 초파일 행사
때 우연히 석조2불병립상과 함께 경내에서 출토되었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는 없으나 상
호는 원만하며 보존 상태도 괜찮다. 허나 도금을 입히면서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 되어
근래에 만든 불상처럼 되어버렸다. 
이 보살상은 석조2불병립상과 마찬가지로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의
등 뒤에는 화사한 색채의 지장탱이 든든한 후광(後光)처럼 자리해 있다.

▲  법당을 지키느라 여념이 없는 여러
호법신들이 그려진 신중탱(神衆幀)

▲  석조2불병립상과 칠성탱
칠성탱은 19세기 후반 것으로 치성광여래를
비롯한 칠성(七星)의 여러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  석조 이불병립상(二佛竝立像)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4호

불단 옆 연화대(蓮花臺)에는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석조2불병립상이 있다. 예전에는 '석조2
존 병립여래상'이란 길고 어려운 이름을 지니고 있었는데, 2자를 줄여서 '석조2불병립상'이라
불린다. 그래도 어려운 건 비슷한 것 같다.

이들은 보살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1970년 4월초파일(석가탄신일) 행사 때 경내에서 우연
찮게 발견되어 화제가 된 주인공이다. 아마도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면서 석조지장보살상과
함께 팔자에도 없는 생매장살이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오랜 세월의 공백을 깨고 다시 햇
살을 받게 되면서 극락보전에 자리를 마련해 중생들의 하례를 받는다. 

이 땅에서 거의 흔치 않은 일광이불상(一光二佛像), 즉 광배 하나에 2기의 불상이 있는 석불이
자, 두 불상이 하나에 돌에 조각된 병립불(竝立佛)이다. (이름도 어렵다) 그들 머리는 나발로
머리 꼭대기에 육계가 솟아 있으며, 얼굴에는 동자처럼 천진난만함이 깃들여져 있어 손으로 쓰
다듬고 싶은 모습이다. 볼은 살이 조금 올랐으며, 코는 심하게 마멸되었으나 양쪽 귀는 중생의
민원을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다. 그리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진하게 그어
져 있어 옛 불상의 모습을 보인다.
그들이 걸친 법의(法衣)는 통견(通絹)으로 옷주름이 굵게 표현되었으며, 양쪽 발은 잘 보이지
는 않지만 정면을 향하고 있다. 수인(手印)은 둘 다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고 있는데, 우
측 상은 오른손에 보주를 들고 있으며, 좌측 상은 복대의 띠 주름을 쥐고 있다.

조성 시기는 신라 후기나 고려 때로 보이며, 그들을 통해 보살사가 적어도 신라 말에 문을 열
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또한 석가불(釋迦佛)과 다보불(多寶佛)의 병존불좌상(竝尊佛坐像)과도
연관성이 있어보이는 귀중한 불상이자 희귀한 문화유산으로 그 가치가 높다. 마땅히 국가지정
보물로 삼아도 손색이 없건만 아직 지방문화재 등급에 머물러 있는 점이 의아스럽다.


▲  보살사 명부전(冥府殿)

극락보전 뒤쪽에 자리한 명부전은 1999년에 지어진 건물로 2002년 10월 금동지장보살상과 도명
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 십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을 봉안
했다. 극락보전에 이미 오래된 지장보살상이 있어 그를 명부전의 주인장으로 삼아도 될 듯 싶
은데, 그러지 않고 따로 지장보살을 만들어 봉안했다.


▲  보살사 삼성각(三聖閣)
경내 가장 뒤쪽에 자리한 삼성각은 1993년에 지어졌다. 삼성각은 말그대로
3명의 성스러운 존재인 칠성과 독성(獨聖), 산신(山神)의 보금자리이다.

▲  독성탱
소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있는 독성 할배와
그의 시중을 드는 동자가 그려져 있다.

▲  칠성탱
극락보전에 이미 칠성탱이 있는데,
또 칠성탱을 제작했다.

◀  산신탱
산신의 부하인 호랑이는 거의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처럼 보인다.

극락보전에서 뒤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숲속에는 보살사 중수비(重修碑)가 있었다. 1683년에
절을 크게 중수한 것을 기리고자 세운 것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던 윤심(尹深, 1633~
1692)이 글을 작성했다.
1988년 보살사에서 중수비를 절 입구로 옮기다가 그만 어이없는 실수로 엎어지면서 절의 내력
을 머금은 비석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아작난 비석의 파편은 버렸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그 비석은 현재 없으며, 다행히 비에 새겨진 내용은 '한국사찰전서'와 충청북도 '사지(寺誌)'
에 전하고 있다.

이렇게 보살사 경내를 둘러보고 서쪽에 새로 닦여진 직지보림선원으로 이동했다. 그곳으로 가
려면 약수터를 지나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야 되는데, (그래봐야 극락보전에서 도보 5분 거리)
고개 중턱에 이곳의 유일한 승탑(僧塔)과 탑비가 서 있다.
이 탑은 제운당 도원(霽雲堂 道源)의 사리탑으로 그의 법호는 제운(霽雲), 법명은 도원(道源)
이다. 그는 보살사에서 30여 년을 머물다가 1984년 10월 9일 새벽에 입적을 했는데 무려 10여
과의 사리가 쏟아져 나와 1985년 승탑과 탑비를 세웠다.

사리가 많이 나온 걸 보니 고승(高僧)은 고승인가 보다. 허나 승려의 몸에서 왜 사리가 나오는
지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그 잘난 과학기술도 그 비밀을 풀지 못해 쩔쩔
매고 있으니 이 세상에는 참 신비스러운 것이 한둘이 아니다.


▲  직지보림선원 7층석탑

제운당 사리탑을 지나면 직지보림선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보살
사의 일부라고 보면 된다. 기존 경내가 확장에 좀 문제가 있는지 버스 종점 서쪽 산자락에 터
를 다지고 큰법당을 비롯한 여러 건물과 7층석탑, 관음보살상을 지었다.

금잔디 중앙에 자리한 7층석탑은 바닥돌 위에 2중의 기단을 세우고, 7층의 탑신, 그리고 보륜(
寶輪) 등의 상륜부를 갖춘 당당한 모습으로 탑신마다 석불이 새겨져 있고, 기단에는 팔부중상(
八部衆像)이 새겨져 있다.


▲  관음보살상

7층석탑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높다란 곳에 관음보살상이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보살상의 높
이는 대략 6m 정도로 요즘 우후죽순 들어서는 대형 석불보다는 조촐한 크기이다. 왼손에는 감
로수가 든 정병(政柄)을 들고 있으며, 어진 성모(聖母)처럼 속세를 걱정만 한다.

▲  한글 현판이 인상적인 큰법당

▲  선방(禪房)과 요사(왼쪽)


▲  큰법당 내부 - 석가3존불이 불단에 봉안되어 있고, 후불탱을 비롯한
탱화 3점이 내부를 수식한다.


 

♠  청주에서 만난 그림 같은 호수, 명암저수지(明岩貯水池)

▲  겨울 제국에게 봉인을 당한 명암저수지(명암지)

생각보다 작았던 보살사를 40분 정도 둘러보고 종점으로 나왔다. 5분 뒤 시내로 나가는 922번
저상버스가 들어와 적막에 잠긴 종점 주변에 힘찬 엔진 소리를 남기며 입을 벌린다.

버스에 올라 어디로 갈까 궁리를 하다가 청주에서 이름난 약수터인 명암약수터에 가기로 했다.
그래서 도청에서 청주시내버스 863-1번으로 갈아타고 명암저수지와 국립청주박물관, 청주드림
랜드(청주동물원)를 거쳐 명암약수터 종점(약수터 종점)에서 내렸다.

산골에 묻힌 명암약수터는 1920년대에 발견된 탄산약수이다. 허나 가는 날이 문닫는 날이라고
그 착했던 약수터는 이미 운명을 한 상태였다. 철분이 기준치 이상으로 계속 검출되어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몸보신 좀 하려고 여기까지 들어왔는데 폐쇄라니;;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진다. 허나 어찌하랴? 부적합 빨간 줄이 그어진 물을 애써 마셔봐야 좋을 것도 없
고 물도 이제 고갈되어 나오지도 않는다.
정보를 미쳐 확인하지 못한 어리석음과 샘터 코 앞에서 물도 마시지 못하고 돌아서야 되는 아
쉬움을 애써 삼키며 약수터를 떠났다.

아 이제 어디로 가야 되나? 신봉동 백제고분군이나 갈까? 정북동토성(井北洞土城)을 갈까? 아
니면 얌전히 청주 도심에 있는 중앙공원이나 갈까? 하지만 모두 땡기지가 않았다. 그렇게 정처
를 잃은 외로운 나그네는 속칭 멘붕에 잠긴 채, 시내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중간에 국립
청주박물관이 있지만 이미 입장시간이 지난 상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덧 명암
저수지 북쪽에 이르렀다.


▲  명암저수지 북쪽과 명암타워

명암저수지(명암지)는 청주에서 가장 큰 호수로 농사와 식수 확보를 위해 1922년에 축조되었다.
청주의 덩치가 커지면서 시민들의 조촐한 휴식처가 되었으며, 청주 유일의 낚시터로 강태공(姜
太公)의 발길도 잦아, 밤낚시 때는 잉어와 붕어가 잘 잡힌다고 한다. 저수지 상류에는 오리배
를 비롯한 뱃놀이를 즐길 수 있고, 호수 주변에 산책로를 둘러 평일 낮시간에도 산책이나 운동
을 하는 시민들이 제법 눈에 띈다.
또한 명암타워가 세워지면서 호수를 바라보며 결혼식 및 각종 연회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각종
식당과 찻집(까페)들이 가득 늘어서 호수의 후광(後光)을 나눠 갖는다.


▲  얼음에서 벗어난 호수 남쪽을 순찰하는 압공(鴨公, 오리)들

▲  압공 3인조가 순찰을 돈다.

지나가는 해와 달도 잠시 걸음을 멈추어 매뭇새를 다듬을 정도로 경관이 좋은 명암저수지는 겨
울 제국의 지독한 시샘을 받으며 제국이 씌워놓은 얼음이란 굴레에 갇히고 말았다. 어느 철없
는 소쩍새가 벌써부터 소쩍소쩍~♪ 울어대지만 겨울은 꿈쩍도 하지 않으며, 그 소리에 호수는
용기를 내며 굴레에서 벗어나려 용을 쓰지만 아직은 미약하다. 그나마 호수 남쪽 일부는 얼음
에서 해방되어 청둥오리를 비롯한 여러 압공들이 순찰을 한다.


▲  갈대가 살랑거리는 명암저수지 남쪽

▲  명암타워 동쪽에 자리한 비석과 표석

명암타워 옆에는 오래된 비석과 표석이 자리해 있다. 호수 산책로 옆에 있어 쉽게 눈에 띄지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들인데다가 그들에 대한 안내문도 없으니 태반의 사람들은 눈길
조차 주지 않고 지나간다. 나도 그냥 지나치려다가 고양이가 생선가게 앞을 그냥 못지나친다고
이렇게 사진에 담았다.

왼쪽 비석은 명암지에서 상당산성으로 넘어가는 상봉재 옛길에 있던 조씨 집안의 비석이다. 내
용을 보니 그들 집안의 충효를 기리고자 세운 비석인데, 왜 이곳으로 옮겨졌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그곳에 길이 만들어지면서 옮겨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른쪽에 누워있는 표석은
1922년에 명암지를 축조하면서 만든 것으로 '명암○도(明岩○道)'라 쓰여 있다. 도(道) 옆에는
가로로 쓰인 글씨가 있는데, 시멘트로 지어져 희미하긴 하지만 왜왕(倭王)의 연호인 소화(昭和
) ○년이라 쓰여 있다.

※ 명암저수지 찾아가기 (2017년 3월 기준)
* 청주체육관이나 사직4거리, 지하상가, 도청에서 862-2, 863-1, 863-2번 시내버스를 타고 명
  암저수지 하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호수 북쪽과 남쪽, 명암타워에 주차장 있음)
① 경부고속도로 → 청주나들목을 나와서 청주 방면 → 터미널4거리에서 우회전 → 가마교차로
  에서 좌회전 → 분평4거리에서 1순환로로 우회전하여 직진 → 용암지하차도 직진 → 명암저
  수지
* 소재지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담동



명암저수지를 1바퀴 돌고 시내로 나갔다. 시간은 이제 17시 반, 땅꺼미가 슬슬 짙어지기 직전

이다. 날도 이제 저물어가니 더 이상 갈만한 곳도 없고 그렇다고 만날 사람도 없다. 어두워지
면 속히 나의 제자리로 철수하여 발 씻고 자는 것이 진리. 그래서 오랜만에 찾은 청주와의 인
연을 정리하고 조치원을 거쳐 서울로 올라왔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청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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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산을 거닐다. 안산 나들이 ~~~ (영천시장, 안산자락길, 무악산 동봉수대)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산, 안산 (무악산 동봉수대) '

▲  무악산 동봉수대(안산 동쪽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천하만물의 마지막 희망, 늦가을이 세월의 저편으로 뉘엿뉘엿 저물고 혹독한 겨울 제국(帝
國)이 한참 기세를 올리던 11월 끝 무렵, 떠나가는 늦가을 누님의 뒷자락이라도 잡아볼 생
각에 친한 후배와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안산을 찾았다.

오후 3시 서대문역(5호선)에서 그를 만나 독립문 남쪽에 있는 영천시장에서 떡복이와 오뎅,
튀김 등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였다. 원래 시장은 일정에 없었으나 안산에 가다보니 자연히
지나치게 되었고,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쿨하게 못지나치듯 시장 먹거리를 온전히 뿌리치기
가 어려웠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아름다운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 그래서
잠시 안산을 잊고 먹거리 섭취에 임했다.
그렇게 요기를 마치고 포만감의 행복을 누리며 독립문 삼호아파트 뒷쪽으로 흘러가는 안산
자락길로 들어섰다. 그 길을 따라 안산의 남쪽 기점인 천연뜨란채아파트로 이동, 거기서부
터 안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안산(鞍山)의 품으로 들어서다.

▲  안산 남쪽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멀리 관악산과 호암산도 덩달아 시야에 들어온다.


서울 도심 북서쪽에 누워있는 안산은 해발 295.9m의 조촐한 산이다. 대륙을 향해 뻗어가는 의
주로(義州路)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仁王山, 338m)
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홍제천(弘濟川)을 사이에 두고 백련산(白蓮山)과 이어진다.
산의 영역은 남쪽으로 천연동(天然洞)과 북아현동(北阿峴洞), 북쪽은 홍제1동과 연희동. 동쪽
은 의주로, 서쪽은 서대문구청 뒷쪽과 연세대에 이르며, 남북으로 아무리 길게 잡아봐야 3km
남짓이다.

안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습이 마치 말과 소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해 사용하는 길마처럼 생겼다
하여 유래된 것으로 <안(鞍)은 안장을 뜻함> 길마재라고도 하며, 모래내, 추모련, 무악산이란
이름도 지니고 있다. 또한 산 꼭대기에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 불리기도 했다. 서울의 남주작
(南朱雀)인 남산(南山, 목멱산)보다는 조금 높지만 인왕산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보다는 조
금 낮으며, 이들 산과 비슷하게 덩치도 고만고만하여 아무리 산행을 길게 잡아도 2~3시간 내외
면 충분하다.
또한 바위와 벼랑이 많은 정상부(동쪽 정상)를 제외하면 산세가 완만하고 산길이 잘 닦여져 있
어 누구든 부담없이 안길 수 있으며, 편한 둘레길의 정석으로 추앙받는 안산자락길이 산 허리
에 둘러져 있다. 게다가 조망도 일품이고 수맥도 풍부하여 20여 개가 넘는 약수터가 나그네의
목마름을 어루만진다.

지리적인 위치를 보면 인왕산과 함께 서울 도심을 서북쪽으로 둘러싼 형태로 예나 지금이나 서
울을 지키는 주요 요충지이다. (지금도 안산 정상에 군사시설이 있음) 하여 산을 둘러싼 다툼
도 여럿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것이 1623년에 일어났던 이괄(李适)의 난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의 주역이던 이괄은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
으켜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했다.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얼떨떨한 인조(仁祖)
는 서인 일당을 데리고 충청도 공주(公州)로 급하게 줄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어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안산에 진을 치
니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에 빠진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자신감을 강하게 내
비췄다. 그리고 군사<군사 중에 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를 이끌고 인왕산
서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했다.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여들었는데, 조선 사람들은 대체로 흰 옷을 즐겨입다보니 산을 가득 메운 그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
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죄다 걸어
잠구면서 도성을 포기하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까지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내부 갈등으로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이때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後金)으로 도망쳤는
데, 그들은 청태종(淸太宗)에게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구실로 조선을 치라고 들쑤셨다. 그
래서 일어난 것이 바로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 되겠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는 청나라군이 안산과 인왕산 사이의 무악재를 눈치를 보며 넘었
으며, 1950년 9월에는 인천(仁川)에 상륙한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되찾고자 북한군과 격전을
벌였던 현장이기도 하다.

안산의 포근한 품으로 들어서려면 서대문구청이나 홍제천인공폭포(연희숲속쉼터). 봉원사, 천
연동, 홍제1동, 무악재역, 한성과학고 등지에서 접근하면 된다. 근래에는 서대문구청에서 안산
자락길이라 불리는 둘레길(7km)을 야심차게 닦았는데, '쉽게 걸을 수 있는 편안한 여행길 10선
'에 꼽혀 국민적인 둘레길로 칭송을 받고 있다.
안산 서남쪽 자락에는 서울 지역의 주요 고찰(古刹)이자 영산재(靈山齋)의 성지(聖地)인 봉원
사가 있고, 산 동쪽 정상에는 무악산 동봉수대가 있으며, 연희숲속쉼터와 안산허브공원, 흔들
바위, 안산자락길, 메타세콰이어숲, 잣나무숲 등의 명소가 즐비해 지루할 틈이 거의 없다.
이렇게 착한 산임에도 오랫동안 인왕산과 북악산, 북한산, 남산에게 제대로 가려져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가 안산자락길을 계기로 동네 명소에서 벗어나 서울 굴지의 꿀단지로 훨훨 나래
를 펼치고 있다.

※ 안산 찾아가기 (2017년 1월 기준)
① 봉원사
*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지하철 2호선 신촌역(3,4번 출구), 서울역버스환승센터에
  서 7024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1번 출구)에서 272, 606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대부고에서 하차, 동쪽
  (오른쪽) GS25시(봉원동4거리) 앞에서 7024번 시내버스로 환승 또는 도보 10분
② 천연동
* 지하철 2,5호선 충정로역(7,8번 출구)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2번(대) 천연뜨란채아파트 방
  면 차량을 타고 뜨란채아파트 101동 종점에서 하차
③ 독립문역
* 지하철 3호선 무악재역 3번 출구에서 1분 정도 가면 통일로23길 골목길이 나온다. 그 가파른
  골목길을 5~6분 정도 오르면 안산자락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 신촌동, 연희동, 홍제동


▲  안산 숲 너머로 바라보이는 서울 시내 (남산과 N서울타워도 덤으로)

▲  안산 산책로에서 만난 조촐한 쉼터

천연동에서 안산 정상까지는 능선길을 따라 30~40분 정도 걸리는데, 경사가 거의 느긋하고 길
도 잘 닦여져 있다. 능선길이라 오로지 직진을 고수하면 무난하게 봉수대가 있는 정상으로 갈
수 있으며, 서울 도심과 독립문, 서대문구/마포구 지역만 보이던 시야도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정비례로 늘어나 조망의 품질도 높아진다.

늦가을의 향연을 누린 나무들은 무심히 다가온 겨울 제국의 눈치를 보며 거추장스러운 잎을 떨
구고 초라한 몰골로 내년 봄을 기다린다. 몇몇 나무들은 나뭇잎을 단단히 붙들며 가을을 끝까
지 고수하지만 이미 하늘마저 겨울로 가득차 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은 귀를 접으며 인
생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산꾼들은 낙엽의 사각사각 소리가 듣고자 그들을 밟고 지나간다. 낙
엽의 처절한 말로를 보면서 '올해도 완전 저물었구나, 이제 곧 1살이 강제로 누적되겠지~!' 싶
은 우울감이 나를 감싼다.


▲  안산 능선길 동쪽으로 보이는 독립문 주변과 인왕산
인왕산 너머로 북악산(백악산)과 북한산(삼각산)까지 두 눈에 들어온다.

▲  안산 능선길에서 바라본 천연동, 서대문 주변과 서울 도심

▲  정상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안산천약수터

안산 정상을 10여 분 정도 앞둔 곳에서 길은 능선길과 서북쪽 길로 갈린다. 정상으로 빨리 가
고 싶다면 능선길을 이용하면 되나 거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경사가 좀 각박하여 각별한 주
의가 필요하다. 하여 잠시 여유를 갖고 서북쪽 길로 우회하니 안산에 별처럼 널린 안산천약수
터가 살짝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정상에서 가장 가까운 샘터로 가뭄에도 물이 마를 날이 없다고 하는데, 여기서 안산이
베푼 약수를 몇 바가지나 들이키니 목구멍과 몸 속의 불이 싹 진화되는 것 같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산악회에서 만든 조그만 건물이 여럿 있으며, 여기서 북쪽으로 가
면 무악정이란 2층 정자가 모습을 비춘다. 무악정은 근래에 지어진 8각형 2층 정자(亭子)로 여
기서 길은 크게 3갈래로 갈리는데, 북쪽은 홍제1동과 연희동, 동쪽은 안산 정상이다.


▲  겨울에 잠긴 안산 오솔길 (안산천약수터에서 무악정 방향)
발자국 소리, 낙엽 밟는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고요하기 그지 없다.

▲  정상 입구에 자리한 무악정(毋岳亭)
안산의 구수한 명물로 나그네들의 포근한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안산 정상과 무악산 동봉수대에 이른다.

▲  무악정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서대문구와 마포구, 한강 너머로 강남, 동작, 관악, 영등포구 지역과
관악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  안산 동쪽 정상 밑에 자리한 'H' 마크의 헬기장
(서쪽 정상과 동쪽 정상 사이)


 

  안산 정상과 무악산 동봉수대(毋岳山 東烽燧臺)

▲  안산 동쪽 정상에 자리한 무악산 동봉수대 - 서울 지방기념물 13호

하늘과 맞닿은 안산의 지붕에는 2개의 봉우리가 봉긋 솟아있다. 이중 서쪽 봉우리가 안산의 정
상으로 안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나 그곳에는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 출입이 100% 통제되어 있
다. 하여 자유로운 땅인 동쪽 봉우리(동쪽 정상, 이하 '안산 정상')가 실질적인 정상의 역할을
맡고 있다. 서쪽 봉우리보다 약간 낮을 뿐, 거의 비슷하며 바로 그 봉우리에 무악산 동봉수대(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무악산 동봉수대터')가 천하를 굽어보며 요새처럼 버티고 있다.

봉수대는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불을 피워 연기와 불빛을 이용해 변방의 소식을 중앙으로 빠
르게 전달하던 것으로 주로 산 정상에 자리를 닦았다. 지금처럼 전화나 인터넷이 있던 시절이
아니니 봉수대의 역할은 더욱 클 수 밖에 없었고 그 봉수대를 이용한 봉수체제가 그나마 제일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비와 눈이 내려 연기가 여의치 못할 때는 봉수지기가 다음 봉수대까지
달려가 소식을 전했다.

조선시대 봉수제(烽燧制)는 1438년(세종 20년)에 확립되었는데, 그때 무악산(안산) 정상에 봉
수대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악산은 안산의 다른 이름으로 안산과 인왕산 경계에 자리
한 무악재에서 비롯됨)
지금은 동봉수대 1개 밖에 없지만 원래는 2개로 동,서로 구분되어 있었다. 동봉수대는 조선의
제3봉수로(烽燧路)의 경유지로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시작하여 황해도(黃海道)와 파주, 고양
해포나루, 무악산 동봉수대를 거쳐 남산 훈도방(남산 목멱산 봉수대)에서 그 끝을 맺는다. 이
노선은 직봉 78곳,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그리고 서봉수대는 제4봉수로의 경유지로 황해도에
서 시작하여 경기도 해안을 따라 고양시 고봉, 무악산 서봉수대를 거쳐 남산 명래방으로 연결
되며, 직봉 71처, 간봉 22처를 경유한다.
이들 봉수대는 구한말(舊韓末)에 봉수제가 폐지되면서 귀신도 모르게 녹아 없어졌으며, 그 터
만 아련히 남아 전하던 것을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동쪽 정상에
있던 동봉수대만 대충 복원되었다. 허나 서쪽 정상에 있던 서봉수대터는 군부대가 들어앉은 관
계로 재현되지 못했다.

비록 동봉수대가 복원되긴 하였으나 주위가 문화재와 어울리지 않고 추락사고의 위험이 있다는
문제점이 2008년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하여 그때부터 2011년까지 서울시 문화재위원들이 현
장실사와 고증을 통해 화강석 성곽으로 재현하기로 결정하고 기존의 봉수대를 부시고 2단의 석
축을 다진 다음 그 위에 봉수대를 얹혔다.
허나 이번에는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이 떨어진다고 민원이 들어와 지금의 모습으로 어
색하게 재현되었다. 그러니까 원래의 모습이 아닌 사람들 입맛에 맞게 이리저리 변질된 것이다.
굳이 좋게 포장한다면 융통성 있고 시대에 맞게 재현된 것이 되겠지.
그러다보니 봉수대를 받치고 있는 석축과 불을 피우던 봉수대, 봉수대 주변 테두리의 돌 피부
가 확연히 차이가 나 어색하기 그지 없다. 봉수대 석축을 이루는 돌은 고색의 기운이 약간이나
마 피어있는데 반해 봉수대와 테두리에 쓰인 돌은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맨들맨들한 하얀 피
부이다.


▲  천하를 굽어보며 왕년의 향수를 달래는 봉수대
연기를 모락모락 풍기며 불빛을 날리던 왕년의 시절이 있었건만 이제는
안산 정상을 수식하는 장식용이자 전망대 그 이상도 아니게 되었다.

▲  때깔이 고운 하얀 피부의 봉수대
봉수대 중앙에 있는 네모난 창을 통해 불과 연기를 피웠다. 그 연기는
봉수대 꼭대기를 통해 하늘을 찔렀다.

▲  새롭게 두룬 봉수대 테두리

봉수대를 모자처럼 눌러쓴 안산 동쪽 정상, 그 동쪽은 바위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이고, 북쪽과
남쪽은 경사가 다소 각박하여 봉수대 복원 이후 추락사고의 위험이 늘 제기되었다. 하여 2011
년 이후 봉수대를 새로 갈면서 주변에 하얀 피부의 테두리를 성곽처럼 두른 것이다. 그러다보
니 기존의 봉수대 모습을 좀 잃게 되었다.
아무리 호랑이 담배 빨던 시절에 없어진 것을 복원한 거라고 해도 철저하게 고증하여 재현했으
면 좋겠다. 입맛대로 변형을 가하면 그건 더 이상 문화유산이 아니다.


▲  안산 정상(무악산 동봉수대)에서 바라본 인왕산(仁王山)의 위엄
이렇게 보면 인왕산이 좀 낮아보이겠지만 저곳이 이곳보다 40m 이상 더 높다.
그래도 서울의 우백호(右白虎)가 아니던가~~


안산 정상은 높이에 비해 조망이 제법 일품이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이만저만이 아
닌 서울을 두 발 아래 두며 제대로 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뫼에 오르는 이유는 바로 이런
맛이 아닐까? 이때만큼은 천제(天帝)도 황제도, 청와대 주인도 부럽지가 않다.

정상에서 보이는 범위는 바로 밑에 무악재를 비롯하여 인왕산, 독립문, 홍제동, 홍은동, 신촌,
서울 도심부, 북한산(삼각산), 북악산을 비롯해 멀리로는 서울 동부, 불암산, 아차산, 여의도,
서울 서남부, 동작구, 강남구, 관악산과 호암산(虎巖山)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와 속세에
오염되고 상처받은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그래서 이곳에 왜 봉수대를 씌우고 이괄의
난(1623년)과 6.25전쟁, 그리고 지금까지 군사적인 요충지로 절찬리에 쓰이고 있는지 십분 이
해가 간다.

* 무악산 동봉수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봉원동 산1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1) 홍제동과 홍은동, 불광동, 평창동,
북한산 서남부 지역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2)
홍제동과 홍은동, 녹번동, 연신내를 비롯하여 멀리 고양과 파주 지역의
산줄기까지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3) 서울 도심
도심을 이루는 빌딩숲 너머로 남산과 N서울타워가 시야에 들어온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4)
바로 밑에 서대문독립공원과 독립문 주변을 비롯하여 도심부와 남산,
서울 동부, 강남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5) 안산 남부와 도심부, 신촌 지역
우리가 저 밑의 안산 남쪽 기점(천연뜨란채아파트)에서 길을 시작했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꽤나 올라왔다. (초여름 사진)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6)
안산 남부와 서대문구, 마포구, 용산구, 여의도 63빌딩을 비롯하여
동작구와 관악산, 호암산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7)
일몰이 진행되는 가운데 서대문구와 마포구, 강서 지역이 바라보인다.

▲  안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8)
인왕산 남쪽과 서대문독립공원, 도심부, 서울 동부 지역을 비롯해
불암산과 아차산 산줄기가 까마득하게 바라보인다.

▲  정상 바로 밑 바위 (정상 동쪽)
정상 동쪽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낭떠러지이다. 북쪽과 남쪽은 경사가 가파르며
그나마 서쪽이 좀 접근이 편하다.


안산 정상에서 발 밑에 펼쳐진 천하를 굽어보며 열심히 사진에 담으니 시간은 어느덧 6시가 되
었다. 산바람은 더욱 매서워져 바람과 맞닿은 얼굴이 아플 정도이며, 천하를 비추던 햇님은 달
님에게 모든 것을 넘기고 지평선 너머로 꽁무니를 뺀다. 특히 산에서는 평지보다 일찍 해가 떨
어지기 때문에 서둘러야 뒷탈이 없다. 아무리 안산이 작은 산이라고 해도 염연히 뫼는 뫼이기
때문이다.

짙어져가는 땅거미에 안산 정상을 내주고 봉원사 방면으로 내려가는데 금세 어두워졌다. 길이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흩어져 조금 정신이 없었으나 길눈과 지리에 밝은 나의 직감을 믿고 내
려가니 어느덧 봉원사 경내에 이른다. 봉원사는 일몰 이후에 모든 건물을 잠궈놓기 때문에 그
규모에 맞지 않게 벌써부터 어둠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었다.
봉원사와 절 밑에 펼쳐진 마을(봉원사 승려들의 집이 대부분)을 지나면 7024번 종점과 봉원사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 서울역으로 가는 7024번 시내버스를 타려고 했으나 대기시간이 길어
서 봉원동로터리, 이대부고까지 더 내려갔다. 거기까지만 가면 도심으로 가는 버스는 물 흐르
듯 넘쳐난다.

이대부고 정류장에 이르러 어디서 저녁을 먹을까 궁리를 하다가 북촌(北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아무리 명소나 맛집을 많이 안다고 해도 정작 필요할 때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이 내 돌
머리의 단점이다. 하여 생각난 감에 북촌으로 흔쾌히 넘어가기로 했다.

퇴근/하교 손님들로 가축 수송을 이룬 272번 시내버스(면목4동↔남가좌동)를 타고 안국역에서
내려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인 북촌으로 들어섰다. 한정식을 먹자는 의견이 있어서 마땅한
곳을 물색하던 중, 마침 부근에 '다정'이란 한정식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예전에 가봤던 집을
생각했으나 새로운 집을 개척할 겸, 별 미련 없이 그 집의 사립문을 열었다.


▲  김치 등의 밑반찬과 보쌈, 잡채, 굴

▲  고기 8조각 보쌈의 위엄

▲  달랑 3종류 6조각 전의 초라함

▲  제일 마지막에 나온 칼국수의 위엄

다정에서 2만원대의 한정식을 주문하였다. (가격은 변동 가능) 시장한 배를 달래며 맛이 어떨
까 기대를 하고 있으니 얼마 안가서 김치 등의 밑반찬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것을 시작으로 굴
과 보쌈, 잡채, 전이 차례대로 나왔는데 (그 외 몇 가지가 더 있었으나 생각이 안 남) 높은 가
격에 비해 성인 남자들이 먹기에는 양이 적었다.
좀 두둑하게 나왔으면 좋으련만 쥐꼬리마냥 찔끔찔끔 나오니 나오기가 무섭게 동이 난다. 다행
히 주인 아지매가 인심이 좀 있는지 전과 잡채, 몇몇 반찬을 더 갖다주었으나 그것으로는 택도
없었다.

그렇게 메인 메뉴를 처리하고 나니 제일 끝에 칼국수가 나온다. 칼국수 대신 밥을 먹어도 되지
만 칼국시가 양이 많다고 하여 그것을 택했다. 조개와 호박, 면발이 어우러진 칼국수는 국물이
꽤 진국이었다. 국수와 호박도 괜찮았지. 칼국수가 나오기 전까지는 배가 덜 찼지만 국수로 인
해 배는 완전히 만땅이 되었다. 이건 완전 한정식보다 칼국수가 더 생각이 날 정도로 말이다.
이렇게 비싼 한정식을 끝으로 11월 안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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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1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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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듬직한 우백호를 거닐다. 인왕산 (개미마을, 북쪽 능선길, 환희사, 큰절골)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인왕산 환희사 (인왕산 북쪽 능선) '

▲  환희사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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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급적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를 권함)


 

 

올해도 변함없이 석가탄신일(4월 초파일)을 맞이하여 순례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세우며 서
울 시내 절 투어에 나섰다. 이번에는 절을 좋아하는 후배 2명이 동참을 하였는데, 오전 11
시에 길음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제일 먼저 정릉동(貞陵洞)에 자리한 오래된 절, 봉국
사(奉國寺)의 문을 두드렸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과 탱화를 중심으로 경내를 마음껏 누비며 온갖 나물이 버무려진
비빔밥과 떡, 전으로 이루어진 점심 공양으로 배를 두둑히 다듬었다. 그런 다음 인왕산 환
희사로 이동하고자 110번 시내버스에 몸을 싣고 홍제동(弘濟洞)으로 이동 중, 홍제천(弘濟
川) 변에 보도각 백불(普渡閣 白佛)을 내민 옥천암(玉泉庵)이 진하게 손짓을 하자, 계획에
도 없던 그곳에 잠시 발을 들였다. 거기서 중생들의 하례를 받느라 분주한 고려시대 백불(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을 친견하고 두툼한 떡(백설기)을 하나씩 쥐어들며 잠시 잊었던 환희
사로 이동을 재촉했다.

여기서 환희사까지는 참 애매한 거리이다. 버스를 타고 가기에도 참 어정쩡하여 때이른 무
더위를 무릅쓰고 인왕산을 더듬기로 했다. 옥천암 서남쪽 유원하나아파트에 인왕산으로 넘
어가는 산길이 있는데, 그 길을 타고 북쪽 능선(기차바위 북쪽)을 거쳐 서남쪽으로 내려가
면 1시간 이내에 환희사에 도착한다.
다만 그렇게 가려면 해발 280m까지 올라가야 된다. 절을 목적으로 왔는데, 뜻하지 않게 강
제 등산을 하게 되니 후배들은 버스를 타고 가자며 정색을 한다. 허나 내 마음은 석불처럼
굳어졌다. 산과 산사(山寺)는 물과 물고기와 같은 사이인데 산을 좀 타면 어떠하리~! 몸은
좀 힘들어도 보람은 그만큼 클 것이며 청정한 산내음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게다가 환희
사는 산속에 있기 때문에 버스를 타더라도 산을 좀 올라가야 된다.


 

♠  인왕산을 넘다 (개미마을, 홍심약수터, 옥동약수터)

▲  신록의 도화지를 이룬 인왕산 산길
(유원하나아파트에서 개미마을로 이어지는 산길)


옥천암과 가까운 유원하나아파트는 인왕산 북쪽 끝 세검정로 길가에 자리한 아파트이다. 천박
한 개발의 칼질이 인왕산 북쪽과 서쪽, 남쪽을 마구잡이로 난도질하면서 성냥갑 아파트를 잔뜩
지어올려 대자연의 걸출한 작품 인왕산의 시야를 가리며 농락한다. 특히 통일로로 이어지는 의
주로(義州路) 동쪽은 더욱 심각해 여유 공간도 없을 것 같은 가파른 산자락을 헤집고 온갖 아
파트를 지어놓아 미관을 찌푸리게 한다. 굳이 인왕산을 희롱하며 저렇게 잔뜩 아파트를 지어야
했는지 의문일 따름이다. 이 땅의 개발은 언제나 개념을 탑재하고 바른 길을 갈지 정말로 답이
없다.

유원하나아파트 남쪽에 인왕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조촐한 운
동시설과 공원이 나온다. 여기서 용천약수터를 거쳐 기차바위 능선으로 가려고 했으니 길을 잘
못들어 개미마을로 이어지는 서남쪽 산길로 들어섰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그곳을 강제로 거치
게 되었다.
개미마을로 가는 길은 둘레길마냥 느긋하다. 게다가 숲도 삼삼하여 시원한 산바람이 우리를 보
듬으며,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우리를 향해 미소를 짓는다. 아비규환 같은 속세에 우리를 보고
저리 웃어주는 존재는 거의 흔치 않은데 이렇게 대자연의 위로를 받으니 마음도 편해진다. 그
런 길을 10분 정도 가면 개미마을의 동쪽 부분에 이른다.


▲  벽화마을의 성지(聖地)로 거듭난 개미마을

부암동 뒷골마을(능금마을)과 더불어 서울 도심 속의 산골마을인 개미마을은 인왕산 북서쪽 자
락 100m 고지에 터를 닦은 산동네(달동네)이다. 허나 도시의 흔한 달동네와 달리 숲이 무성한
산자락에 감싸여 있어 완전 산골 벽지마을 같다. 거기에 뻐꾸기가 뻐꾹뻐꾹~♪ 노래하니 그런
기분은 더해져 이곳이 정녕 서울이 맞더냐? 내 자신도 햇갈려 순식간에 강원도 산골 마을로 순
간이동을 당한 줄 알았다.

이곳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3동 9번지, 지하철 3호선 홍제역과 가깝고, 서울 도심
이 바로 지척이다. 그런데도 이런 산골 마을이 도심 턱밑에 자리해 서울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
고 있으니 이런 것을 보면 서울도 참 넓긴 넓은 모양이다. 서울하면 대부분 키다리 빌딩과 사
람, 수레로 뒤엉킨 복잡한 시가지만 있는 것으로 알지 이런 시골 분위기는 생각을 못한다. 그
게 바로 서울에 대해 가지는 흔한 오류이다.

개미마을은 약 15,000평 규모로 200여 가구에 400여 명의 주민이 사는 마을이다. 오래된 마을
까지는 아니고 6.25 이후에 오갈 데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와 천막을 걸치고 살면서 자연
히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옹기종기 천막을 이룬 마을의 모습이 인디언마을과 비슷하다
고 하여 '인디언촌'이라 불렸는데, 인디언처럼 소리지르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그리 불렸다
는 설도 있어 바깥에서 이곳을 썩 좋은 시선으로 보고 있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마을 사람들도 그런 이름이 싫어서 적당한 이름을 물색하다가 1983년 개미마을을 이름으로 삼
았다. 이는 마을 사람들의 부지런함이 개미를 닮았다고 하여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며, 애당
초 마을의 이름은 없었다.

이곳은 가난하고 고된 동네로 서민의 애환과 나날이 격해지는 빈부격차의 현실에 한숨을 쉬게
만드는 곳이다. 독거노인을 비롯해 일용노동자와 국민기초생활수급자가 주류를 이루며, 주황색
슬레이트 지붕을 얹힌 달동네 스타일의 집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마을 위쪽까지 길이 포장되어
있으나 여느 산동네와 마찬가지로 경사가 각박해 눈이 쌓이면 통행에 꽤 애를 먹는다. 그리고
연탄을 연료로 많이 사용하여 색깔이 벗겨진 살색 연탄을 쉽게 구경할 수 있다.
시내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오로지 문화촌에서 들어오는 북쪽 골목(세검정로4길)길이 전부
이다. 그 길로 마을버스와 차량들이 오간다. 마을버스는 산간 벽지처럼 서너 시간에 1대 정도
들어올 것 같지만 거의 10분 간격으로 들어와 접근성은 양호하며, 요즘은 좀 살만해졌는지 차
량을 가진 집도 좀 늘었다. 북쪽 외에는 3면이 죄다 산으로 막혀있으며, 인왕산 산길로는 인왕
산 정상이나 환희사, 홍은동 유원하나아파트로 넘어갈 수 있다.

이 마을의 이름 2자가 속세에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요즘 지나치게 유행을 타고 있는 벽화마
을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2008년 이후 이곳 분위기를 화사하게 바꾸고자 서대문구청과 금호건
설이 '빛 그린 어울림 마을'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이에 성균관대와 건국대, 추계예술대, 상명대, 한성대의 미술 전공 학생들이 몰려와 각기 다른
5개의 주제로 51가지의 그림을 그리면서 우울한 달동네가 화사한 그림 마을로 변신했다. 별로
기대를 하지 않던 마을 사람들도 그림판이 된 마을에 싱글벙글 웃었고, 벽화마을로 크게 언론
을 타자 마을 주민과 약간의 인왕산 등산꾼이 고작이던 이곳에 사진쟁이와 관광꾼들의 발길이
늘면서 도심의 새로운 명소로 성장했다. 또한 이곳과 동대문 이화(梨花)마을을 시작으로 많은
산동네와 시골 마을이 이를 따라하면서 전국적으로 너무 쓸데없이 벽화마을이 유행을 타게 된
것이다.
허나 사람들이 사는 마을임에도 사진 본능에 충실해 갖은 민폐를 부리는 사진쟁이가 적지가 않
고, 어렵게 사는 그들을 부정적인 눈으로 보며 무시하는 이들도 많아 마을 사람들과 적지 않은
충돌이 생긴다. 마을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시도한 벽화마을의 폐해인 셈으로 단순히 외지인들
이 들어와 그림만 그렸을 뿐,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벽화만 두룬 산골 분위기 그
윽한 마을일 뿐이다. 하여 뭣도 모르는 이들은 잔뜩 기대를 하고 들어와 '이게 전부야?' 실망
을 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진쟁이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열게 할만한 꺼리가 없으니 단
지 사진만 찍고 가거나 인왕산을 오가는 경유지에 불과하여 마을 주민들에게도 그리 이익이 되
질 않는다.

이렇게 관광객과 마을 주민과의 조금은 불편한 동거를 줄이려면 마을을 개량하고 주민들도 이
득을 보도록 해줘야 된다. 예를 들면 도심과 가까운 잇점을 이용하여 1박 머물 수 있는 캠핑장
이나 산골, 농촌마을 체험 현장으로 활용하거나 부암동(付岩洞) 능금마을(뒷골마을)처럼 농작
물과 원예물을 재배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으며, 예술인들을 초대하여 북촌(北村)처럼
갖은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예술마을로 키우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개미마을은 아직 개발 계획은 없다. 허나 벽화마을로 뜬 적이 있으니 졸부들의 마수를 경계해
야될 것이며, 마을을 둘러볼 때 사진을 찍는다며 허락도 없이 집에 침투하거나 사생활을 침해
하는 등 호들갑을 떠는 행위는 삼가해야 된다. 그리고 개미마을 하나만으로는 50% 부족하니 인
왕산 등산이나 인근 부암동 답사를 겯드리면 정말 알차고 배부른 나들이가 될 것이다.

※ 홍제동 개미마을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홍제역(1,2번 출구 중간)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7번을 타면 개미마을까지 들
  어간다.
* 서울시내버스 110, 153, 7018, 7730번을 타고 문화촌현대아파트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07번
  으로 환승 또는 도보 15분 (평창동이나 부암동 방면에서 갈 경우에는 길 건너 정류장에서 서
  대문 07번으로 환승)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3동 9번지 일대


▲  개미마을 동쪽 부분

우리는 개미마을의 동쪽만 스치듯 지나갔다. 이런 인위적인 벽화마을에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
문이다. 강원도 산골 같은 한적하고 전원적인 분위기는 참 마음에 들었는데, 단순히 벽화를 보
자고 또 오는 것은 싫다.

개미마을 동쪽 끝에는 홍심약수터가 있다. 처음에는 홍삼약수터로 알고 '이름이 참 건강하네~~
물에 홍삼의 기운이 있나?' 싶었는데, 이름을 다시 보니 홍심이었다. 받침 하나에 약수터의 이
름과 이미지가 싹 바뀌는 순간이다.
이 샘터에는 인왕산이 베푼 약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가뭄이라 그 양이 시원치 못하다. 수질은
다행히 적합을 유지하고 있으며, 물이 나오는 구멍이 위에 2~3개가 더 있는데, 윗쪽이 아래 보
다 물이 더 잘나온다.

우리는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갈증을 해소하며 두 다리를 잠시 쉬었다. 오후 한참 시간이라
날은 덥고 땀은 약수터를 이룰 정도라 미동도 하기 귀찮았다. 허나 환희사를 목적으로 왔으니
목적은 달성해야 뒷탈이 없다. 그래서 나른한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다시 길을 재촉했다.
홍심약수터에서 10분 정도 오르니 소나무가 우거진 북쪽 능선에 이른다. 이 능선은 장차 기차
바위 능선으로 변신을 하는데, 거기까지는 갈 필요가 없고, 그 직전 280m 고지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된다. 사방이 뻥 뚫린 능선길로 서쪽으로 개미마을과 서대문구, 은평구가, 동쪽은 부
암동과 북악산(백악산), 자하문고개가 시야에 들어와 조망도 제법 일품이며, 소나무가 매우 삼
삼하여 솔내음이 진동을 한다.


▲  소나무로 그윽한 인왕산 북쪽 능선길 (1)

▲  소나무로 그윽한 인왕산 북쪽 능선길 (2)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1)
바로 밑에 산골마을인 개미마을이 보이고 그 너머로 홍제동과 홍은동을 비롯하여
백련산(白蓮山) 산줄기와 은평구 일부가 바라보인다.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2)
홍은동과 홍제동 일대를 비롯하여 산골고개 너머로 은평구와 서울~고양
경계 산줄기가 바라보인다.

▲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3)
비슷한 높이로 북악산 정상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 밑에 북악산과 인왕산,
북한산(삼각산) 사이에 포근히 들어앉은 부암동이 보인다.

▲  환희사로 내려가는 산길

▲  옥동약수터

인왕산 북쪽 능선에서 서쪽인 홍제동으로 좀 내려가다가 남쪽으로 가늘고 가파르게 이어진 산
길로 접어들면 바위로 이루어진 옥동약수터가 나온다.
이곳은 한때 인왕산 서쪽을 대표했던 약수터로 물 뜨는 동네 사람들이 꼬리를 물었으나 서대문
구청의 관리 소홀과 약수터를 지키는 노공(老公) 회원들의 감소, 수질의 부적합 판정으로 이제
는 초라한 행색이 되었다.

여기서 환희사까지는 작년 초여름에 발자국을 그은 경험이 있어 길은 훤하다. 이곳에서 계곡을
하나 건너면 조그만 약수터와 큰 바위가 나오며, 그들을 무시하고 서쪽으로 6~7분 정도 내려가
면 계곡 건너로 주차장과 연등을 두른 집이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환희사이다.


▲  전원주택 같은 환희사 외경


 

♠  인왕산 서쪽 자락에 소리없이 안긴 조촐한 산사(山寺),
오래된 지방문화재 2점을 간직한 인왕산 환희사(歡喜寺)

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338m)은 바위로 이루어진 각박한 경사의 암산(巖山)이
다. 시내에서 보면 산이 대개 협소해 보이지만 그의 품으로 들어가보면 생각 외로 넓어 놀라게
된다. 겉과 달리 속은 깊고 넓은 것이다.

인왕산에서 가장 경사가 각박하고 건물 지을 자리도 없을 것 같은 서쪽 자락에 조그만 비구니
절인 환희사가 조용히 안겨져 있다. 너무 없는 듯 자리해 있어 이곳의 존재를 안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나도 그만큼 등잔 밑이 어두웠다.

이 절은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정보의 바다로 자부심이 대단한 인터넷 세계에서도
그곳에 대한 정보는 좀처럼 걸려들지 않았다. 하여 누가 언제 창건하고 무슨 과정을 거쳤는지
는 절에 가서 묻지 않는 이상은 알 길이 없다. 그만큼 법등(法燈)의 역사와 인지도의 끈이 매
우 낮은 것이다.
절이 있기 전에는 부근에 무당이 굿을 하거나 사람들이 수행을 하는 석굴이 있었다고 하며 그
인근에 터를 닦고 환희사를 세워 지금은 인왕산의 주요 사찰로 성장했다.

나는 오래된 절을 무척 좋아하는지라 소장 문화유산이 있거나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같은 경
우를 제외한 80년도 안된 절에는 거의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환희사에 주목을 하고 초파
일에 이렇게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상이 무려 2점이나 있기 때문으로 그들의 존재
가 나를 이곳으로 소환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이곳이나 인왕산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
며, 20세기 중반 어느 때에 외지에서 모두 업어온 것이다. 역사가 짧고 딱히 내세울 것이 없는
환희사에서는 이들 불상을 후광(後光)으로 삼아야 장차 절을 꾸리기가 수월하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용화전, 요사로 쓰이는 건물 3동이 전부로 그 흔한 삼성각(三聖閣), 일주문
(一柱門)도 아직 갖추지 못했다. 경내는 작은 편으로 건물 3동에 딱 걸맞는 크기라 두 눈에 쏙
넣고 봐도 부담이 없다.
경내 북쪽과 동쪽, 남쪽은 경사가 급하며, 서쪽으로 속세로 내려가는
길이 닦여져 있다. 절 주변은 속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목이 울창해 산사의 기운을 더해주
며 남쪽에 조촐하게 계곡이 흘러간다.
이곳은 비구니 사찰이라 경내가 꽤 정갈하고 아기자기하다. 여인들의 공간이다보니 이쁘게 꾸
며진 것이다. 경내 곳곳에는 그들의 손맛이 담긴 온갖 귀여운 인형과 장식물이 놓여 있고, 뜨
락은 산뜻하여 먼지 하나 앉을 틈이 없다. 게다가 찬불가나 불교 관련 음악이 아닌 클래식 같
은 잔잔한 음악을 주로 틀어놓아 색다른 기분을 건넨다.
또한 다른 현대 사찰과 달리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별로 없어 평일이나 주말 낮에 오면 종종
차 1잔 얻어마실 수 있으며, 편안한 기분으로 절을 둘러보거나, 쉼터에서 쉬거나, 예불을 보거
나 사진 출사를 하게끔 배려해 주는 착한 절이다. 지방문화재 불상 때문에 외지인에 대한 신경
이 다소 예민할텐데도 말이다. 허나 그렇게라도 해야 간접적으로나마 절의 존재를 조금씩 알릴
수 있다. 인지도가 누적이 되야 사람이 찾아오고 그에 따른 수입도 생기기 때문이다.
다만 18시 이후에는 초파일 등의 경우가 아니면 대문을 걸어잠구며, 18시까지는 밖으로 나가줘
야 된다. (비구니가 대문을 닫으니 나가라고 함) 연약한 비구니들의 공간이고 문화유산을 지키
그렇게 하는 모양이니 그거 외에는 딱히 문제될 것은 없다.

절 밑에는 주차장이 있는데, 주차장에서 대문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면 요사(寮舍)이다. 이 건
물은 경내를 가리며 자리해 있는데, 그 흔한 기와집이 아닌 일반 주택으로 되어있어 겉으로 보
면 절집이 아닌 별장이나 전원주택 같은 분위기이다. 경내를 두른 연등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
곳을 절로 생각이나 했을까? 그런 상식 밖에 요사를 지나면 뜨락이 나오면서 그보다 한층 높은
곳에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그보다 1단계 더 높은 곳에 용화전이 나오니 이들은 다행히 기와
집이라 나름 절집의 분위기를 풍긴다.

절이 작고 조촐하여 정말 5분이면 다 보고도 남음이 있으나 지방문화재 불상 때문에 머무는 시
간은 조금 길어진다. 작년에도 인왕산 정상을 찍고 홍제동으로 넘어오면서 이곳을 들린 적이
있는데, 그때는 용화전에 담긴 석불입상을 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갈 기회를 노리다가 이번 초파일에 인연을 지은 것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인왕
산을 넘어서 왔다. 그들 불상이 아니었다면 굳이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이 절
의 존재를 길이길이 몰랐을 지도 모른다. 그들 덕분에 이렇게 정갈한 비구니 사찰을 알게 되니
나로써는 고마울 따름이다.

절에 들어서니 오후 행사가 막 끝난 터라 경내가 꽤 부산하다. 뜨락 서쪽과 정자에는 가족 단
위 신도와 산꾼, 노공들이 모여 앉아 있었고, 10~20대로 이루어진 행사 요원(학생 신도들)들은
행사 뒷처리와 먹거리를 파느라 바쁘다. 이곳 이전에 갔던 봉국사와 옥천암은 먹을거리를 무상
으로 제공했는데, 이곳은 그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니 공양이나 떡은 꿈도 못꾼다. 게다
가 판매 가격도 속세만큼이나 야박하니 아무래도 초파일 특수를 노려 재정을 채우려는 모양이
다. 부처와 관음보살의 뜻에 따라 중생을 위해야 될 절이 지나치게 돈에 집착하는 것도 썩 좋
은 것은 아니다.


▲  대문 주변에 자리한 5층석탑
이 석탑은 왜정 때(또는 1950~60년대)에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며,
2층 지붕돌과 3,4,5층 몸돌에는 고색의 때가 약간 피어있다.

▲  연등이 춤을 추는 대웅전 뜨락

대웅전 뜨락에는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다. 뜨락 북쪽에는 석불입상을 세우고 서쪽에는 7층석
탑을 세웠는데, 그 주위에 아기자기한 장식물이 널려 있어 사진기를 흥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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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희사 요사 - 승려들의 생활공간으로 종무소(宗務所)도 겸하고 있다.

▲  인자한 표정으로 남쪽을 바라보는
석불입상과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  날씬한 몸매의 7층석탑
대문 앞 5층석탑과 조금 비슷한 모습이다.

▲  작고 귀여운 청개구리상

▲  돌 위에 얹혀진 인형들

▲  이쁘게 치장된 뜨락 화단

▲  오리 솟대(왼쪽)와 인형의 만남


▲  환희사 대웅전(大雄殿)

▲  환희사 목불좌상(아미타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7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절 규모에 걸맞게 조촐한 모습이다. 불단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불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좌우에는 아주 작은 관음보살과 법륜(法輪
)이란 동그란 바퀴를 두광(頭光)으로 두른 지장보살이 자리해 소위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그들 뒤에는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하게 걸려있고, 좌우 벽에는 신중탱(神衆幀), 산
신탱(山神幀), 독성탱(獨聖幀), 칠성탱(七星幀) 등의 탱화가 빼곡히 자리하여 삼성각의 역할도
도맡고 있다.

불단에 앉아 넉넉하고 포근한 미소를 보이고 있는 목불좌상, 그는 원래 연천(漣川)에 있던 심
원사(心源寺)에서 넘어온 것이다. 심원사는 연천 지역에서 꽤 명성이 높았던 절로 6.25 때 파
괴되자 그곳에 있던 숱한 불상들이 고향을 잃고 외지로 흩어졌다. 이 목불좌상도 그중 하나로
환희사에서 어떻게 수습하여 이곳의 중심 불상으로 삼았다.
이 불상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로 17세기 중반 전후에 조성된 것
으로 여겨지며, 덩치는 작은 편이나 그를 협시(夾侍)하는 좌우 불상이 그보다 훨씬 작아 여기
서만큼은 제법 커보인다. 
그의 검은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螺髮)로 그 사이에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있으며, 두 눈
은 명상에 잠긴 듯 포근히 감겨 있다. 눈썹 사이에 푸른 백호가 찍혀있고. 작은 코는 오똑 솟
아있으며, 조그만 입술에는 미소가 넉넉히 드리워져 있다. 코와 입 사이에는 수염이 나있고,
볼살은 별로 없는 작고 갸름한 얼굴로 작은 얼굴을 선호하는 젊은 현대인들에게 부러움을 받는
다. 볼살이 절제되어 있으니 볼살이 많은 불상이나 포대화상(布袋和尙)보다는 더 미남으로 보
인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손은 복잡하다는 아미타9품인(阿彌陀九品印)의 하
나를 취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다.

그는 중부지방 목불상(木佛像)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2006년 9월 서울 지방유형문화
재의 지위를 얻었다.

▲  대웅전 우측의 불화들
(영산회상도, 신중탱, 독성탱 등)

▲  대웅전 옆에 자리한 용화전


▲  환희사 석불입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18호

대웅전 좌측에는 용화전이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는데 그 안에는 지
방문화재로 지정된 석불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의 예전 명칭은 판석부조불입상(板石浮彫佛立
像)으로 발음하기도 참 어렵다.

이 석불은 두꺼운 판석(板石)에 새긴 입상(立像)으로 마애불(磨崖佛)과도 다소 비슷하다. 고려
석불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며, 조선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앞서 목
불좌상과는 달리 신체 비례와 조형감이 많이 떨어진다. 그 역시 다른 곳에서 가져왔으며, 고향
이 어디고 정체가 무엇인지는 자료가 없어서 모르겠다. 여기서는 막연히 미륵불(彌勒佛)로 심
심치 않은 대접을 받고 있다.

판석 위에 새겨진 석불은 보는 시각에 따라 고색의 기운도 별로 느껴지지 않아 근래 것으로 착
각하기도 쉽다. 얼굴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죄다 씻겨가거나 눈과 코, 입의 위치만 확
인할 수 있는 정도이며, 머리에는 무견정상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머리 뒤에는 꽃무늬가 새겨진 동그란 두광이 그를 밝혀주며, 몸에는 양 어깨를 가린 법의(法衣
)가 입혀져 있다. 가슴 밑은 얼굴처럼 닳은 부분이 많고, 몸 뒤에는 신광(身光)이 묘사되어 있
다. 석불입상 옆에는 조그만 귀여운 석상이 있는데, 서로 피부가 비슷해 같은 셋트임을 느끼게
한다. 정체는 알 수 없으나 부처의 열성제자인 나한(羅漢)이 아닐까 살짝 점쳐본다.


▲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지나치게 큰 정병(政柄)을 두 손에 쥐어들며 명상에 잠겨있다. 저 병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를 졸라서 1잔 받아보고 싶다.

▲  환희사의 조그만 극락, 대웅전 우측 정자 쉼터
누구든 신발을 벗고 들어가 쉴 수 있는 쉼터로 간식도 먹을 수 있게끔
조그만 탁자도 닦여져 있다.

▲  정자에 걸린 현판과 음악을 흘려보내는 조그만 스피커의 위엄~~

▲  정자 뒷쪽 풍경
그림 같은 산책로가 수풀 사이로 나 있으나 그 길이는 인생처럼 짧다.

▲  정자에서 바라본 경내 뜨락

▲  환희사를 뒤로하고 다시 속세로 컴백하다

초파일 특수로 간만에 북새통을 이룬 환희사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빈 공간이 늘어간다. 음료
수도 거진 팔았는지 이내 장사도 접고 행사를 돕고 정리하던 앳된 여인네들도 일부만 남았다.
손바닥만한 이곳에서 목적한 2개의 불상을 질리도록 보고 정자 쉼터에서 지친 두 다리를 쉬고
16시에 그곳을 뒤로하며 속세로 길을 향했다.
시내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한데, 길 옆에는 인왕산에 몇 안되는 조그만 계곡이 온
전한 모습을 보이며 흘러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물이 풍부해 밤이면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빨래를 하며 수다를 떨던 곳으로 이 골짜기를 '큰절골', 남쪽 청련사 부근 계곡을 '작은절골'
이라 불렀다. 그러니 이 계곡은 큰절골이라 부르면 되나 요즘에는 '환희사계곡'으로도 불린다.
절까지 길을 닦느라 계곡 북쪽이 좀 깎이거나 콘크리트에 묻힌 옥의 티가 상당하지만 계곡이
맑은지 동네 아이들이 냇물을 뒤집으며 수중 동물을 탄압하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환희사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인왕산을 건방지게 가리고 선 인왕산현대아파트와 홍제원현대
아파트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길은 진정을 되찾으며, 5분 정도 더 가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나
온다. 여기서 마을버스를 타면 의주로와 홍제역으로 바로 이어지는데, 마을버스를 탈 것도 없
이 5분 더 발품을 팔면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의주로가 알아서 모습을 비춘다.

이렇게 하여 인왕산을 겯드린 환희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
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하얀 암반을 미끄럼타고 내려오는 환희사계곡(큰절골)

※ 인왕산 환희사 찾아가기 (2016년 5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홍제역 3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뒤로 돌아가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거기
  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13번을 타고 인왕산현대아파트117동 종점에서 내려 도보 10분
* 지하철 3호선 무악재역(1번 출구)에서 도보 20분 (인왕아파트교차로에서 우회전)
* 환희사는 보통 18시까지 개방한다. 그 이후는 들어가지 못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2동 산1-1 (☎ 02-735-8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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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립니다. 다만 다음과 네이버블로그에 올린 글은 간격 늘어짐이 없이 정상적으로 나오
   고 있으니 블로그글을 보셔도 됩니다.
 * 공개일 - 2016년 5월 2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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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포근한 뒷동산을 거닐다. 남산 산책 (한양도성, 남산둘레길, 서울타워, 남산야외식물원...)

 


' 서울 도심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南山) 나들이 '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 남산 N서울타워
▶ 한양도성 백범광장 구간
▼ 남산 정상에서 바라본 도심

   

 


 

나의 어린 시절 진한 추억이 서려있는 서울의 포근한 뒷동산 남산, 문득 그의 품이 그리워
꼬마 시절의 흐릿한 추억도 잠시 소환해볼 겸, 간만에 남산을 찾았다.

남산으로 오르는 길은 정말 다양해서 취향에 따라 골라 잡으면 된다. 이번에는 나의 첫 동
네였던 약수동(약수역)에서 남산 나들이의 첫 단추를 여밀었는데, 약수역과 동대입구역(장
충동) 중간 고개 정상부에 두 골목길(동호로17길, 동호로20길)과 만나는 4거리가 있다. 그
왼쪽(남쪽) 골목길(동호로17길)에 남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이 눈짓을 보낸다.


 

♠  한양도성(漢陽都城) 장충동 지구 - 사적 10호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1)

다산동(옛 신당2동, 신당2동과 3동 일대를 약수동이라 불렀음)과 장충동(奬忠洞) 경계에 자리한
성곽을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문화재청에서 그렇게 부름)라 부른다. 장충체육관 동쪽에서 반
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옛 타워호텔) 뒷쪽까지 이어지는 약 1.1km의 성곽으로 왜정(倭政)과 6.25
를 거치면서 도성 상당수가 파괴되거나 무거운 상처를 입은데 반해 이 구간은 그 시련을 잘 극
복하여 옛 도성(都城)의 위엄과 고색의 내음을 짙게 선사한다.
허나 '장충체육관~광희문' 구간과 옛 타워호텔 남쪽 구간이 20세기 혼란기를 틈타 장대한 세월
의 의해 지워지면서 양쪽이 모두 끊긴 외로운 처지가 되었다.

장충동 지구 성곽길은 오랫동안 금지된 구역으로 묶여있다가 도보길 유행에 따라 성 바깥에 탐
방로를 내고, 성곽길 또한 모두 해방되면서(신라호텔 구간도 포함) 성 안/바깥 산책이 모두 자
유로워졌다.
이 탐방로는 옛 타워호텔을 거쳐 국립극장, 남산까지 이어지며, 길 중간에 암문이 있어 성곽길
이나 성밖 길로 갈아탈 수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서울 도심의 든든한 갑주, 한양도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란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몸담던 고려 왕조를 싹 갈아엎
고 조선이란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 그는 1394년 남경(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
로 도읍을 옮겼다. 그의 도성 천도 프로젝트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로 명망이 높던
정도전(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는데,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시가지 등을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에 들어갔다.
한양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北
岳山, 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남산,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의 길이는
59,500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는 작은 수준이며,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전국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을 세금
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에 다시 79,400명을 동원,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도성 축조는 마무리가 되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업그레이드 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1422년 1월, 무려 32만 2천명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다고 하니 보수 작업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가늠케 해주며, 이때 동원 규모는 가히 조선 최대였다.
아무리 현군(賢君)으로 추앙받는 세종이라지만 무척이나 공사를 닥달했던 모양이다. 공사 중에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으며, 공사 결과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치성(雉
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한 도성이 되었다.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케 했는데, 성곽을 워낙 단단히 지은 탓
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이 없으며,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되거
나 전쟁 폭격을 받은 것은 제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래서
도성은 왜군에게 아주 허무하게 무혈점령되고 만다. 그런 꼬라지를 막아보고자 온갖 원성을 들
어가며 단단하게 지은 도성이었지만 윗대가리들의 무능으로 눈을 뜨고 적군이 도성 안에 들어오
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던 도성, 허나 치열한 수성전(守城戰)이 없어서 성곽과 성문은 피해가 없
었다.

1704년(숙종 30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
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 했는데, 그 안에 행
궁(行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쌓
아 도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한양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뽐내던 한양도성은 근대
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1899년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사람인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콜
브란은 고종 황제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거둥하시라며 전차(電
車)의 필요성을 건의, 그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경유해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凉里)까지 이
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문의 양쪽 성벽
을 싹둑 자르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龍山)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나
갔다. 허나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제는 1905년 이후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왜국(倭國)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괴상한 기관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이때 서소
문<소의문(昭義門)>이 사라졌고, 1910년 이후 시가지 개발과 도로 확충을 이유로 서대문<돈의문
(敦義門)>까지 헐값에 민간에 매각하여 없앴으며, 동소문<혜화문(惠化門)>까지 밀어버리면서 망
국(亡國)의 서울을 욕보였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발
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문(
城門)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겨우 남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손질하기 시작하여 광희문과 숙정문을 복
원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이 가능
하다. (인왕산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은 못감) 다만 성곽이 사라진 부분<사직터널 윗쪽~월암근린
공원, 서울시교육청~남대문, 남대문~남산육교, 장충단고개~옛 타워호텔 남쪽, 장충체육관 동쪽~
광희문, 광희문~동대문, 동소문고개~성북동>
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
칭이 바뀌었다. 허나 서울성곽이란 이름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한양성곽이라 불리기도 한
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한양을 둘러싸던 성곽이니 서울성곽, 한양성곽이라 불러도 크
게 상관은 없다. (본글에서는 한양도성으로 통일함)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밤, 난
데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떠보니 글쎄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
이 쌓여져 있었다.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에 성곽
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
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이 땅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대
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2)

나의 옛 고향인 약수동(藥水洞) 뒷쪽(서쪽)에 병풍처럼 둘러진 장충동 지구 성곽은 조선 태조와
세종 때 축성된 성벽이 거의 그대로 전하고 있다. 성벽을 이루고 있는 대부분의 성돌은 수백 년
이나 숙성된 고색의 때가 아낌없이 깃들여져 있어 까무잡잡한 피부를 이룬다. 그들 사이로 하얀
피부의 새 성돌이 군데군데 자리를 닦으며 선배 성돌을 닮아간다.

성 바깥 탐방로 부분은 예전에는 거의 수풀이 무성했고, 성곽길 통제 구역이라 마음 놓고 발을
들이지 못했는데, 세상이 많이 바뀌어 그 자물쇠가 풀리면서 자유롭게 두 다리를 들일 수 있게
되었다.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들

한양도성을 살펴보면 간혹 성돌에 새겨진 빛바랜 글씨를 만날 수 있다. 이들은 공사 구역 표시
와 공사 담당 고을,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 이름을 적은 것으로 여기서는 담당 고을
과 구역 정도만 나왔는데, '?海始面' 이라 쓰여 있다. (앞 글자는 모르겠음) 그것을 통해 해로
끝나는 고을 사람들의 공사 구간이 여기서 시작됨을 알려준다.

참고로 1396년 한양도성을 지을 때 성곽 전구간을 600자(약 180m) 단위로 끊어 97구간으로 구획
하고 천자문(千字文) 순으로 공사 구역을 표시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天)으로 시작해 지(地),
현(玄)... 순으로 해서 북악산 정상 동쪽에서 조(弔)로 끝나며, 구역 다음에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 이름을 새겼다. 이런 공사 실명제는 조선 후기까지 계속 되었다.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의 암문(暗門)

한양도성은 4대문 4소문 외에도 숨겨진 암문을 여럿 두었는데, 이 암문도 그중 하나이다. 약수
동(다산동)에서 국립극장과 남산으로 빠르게 넘어가는 지름길로 약수동에 살던 시절 많이 이용
했던 문이라 옛 친구처럼 무척 반갑다. 여기서 성안 또는 성바깥 탐방로로 바꿔 탈 수 있다.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3)
국내외 졸부들이 많이 자고 가는 붉은 색의 신라호텔이 바라보인다.

▲  한양도성 장충동 지구 남쪽 종점 (성곽마루 입구)

장충체육관 동쪽에서 시작된 장충동 지구 성곽은 옛 타워호텔 뒷쪽에서 뚝 끊기면서 성곽 탐방
의 흥을 깨뜨린다. 성곽은 남산을 거쳐 북악산까지 내달리고 싶으나 옛 타워호텔과 장충단고개
구간이 복원되지 못해 여기서 옆구리를 보이며 강제로 길을 접고 만 것이다.

이곳에서 성곽길로 갈아타 다시 장충체육관 방면으로 이동해도 되고, 옛 타워호텔 뒷쪽으로 난
산책로로 국립극장 방면으로 넘어가도 된다. 그리고 남쪽에는 성곽마루란 2층 정자가 있으며,
동쪽은 약수동(다산동) 주택가로 6호선 버티고개역과 이어진다.


▲  장충동 지구 남쪽 종점에서 바라본 약수동과 신당동 일대
내 인생의 거의 40% 가까운 시절을 보냈던 약수동과 신당동 일대가 훤히 바라보인다.
약수동도 그렇고 옛 신당3,4동 지역은 달동네의 정석을 보여주던 동네였는데
개발의 칼질로 인해 많은 것이 변해버렸다.

▲  성곽 탐방로 (남쪽 종점 주변)

▲  성곽마루 2층 정자(亭子)

성곽마루는 약수동(다산동)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다산동 주택가 바로 뒷쪽이다. 성곽
탐방로를 닦으면서 새로 지은 정자로 이곳에 오르면 남산 동부와 신당동, 약수동, 한남동, 장충
동 일대가 훤히 시야에 들어와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  성곽마루에서 바라본 약수동과 신당동(新堂洞) 지역

▲  성곽마루에서 바라본 한남동(漢南洞)과 용산구 지역

▲  지워버려야 될 남산의 옥의 티
졸부들이 몸을 푸는 반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
(옛 타워호텔) 운동시설

▲  타워호텔 남쪽을 거쳐 국립극장으로
넘어가는 탐방로


▲  저만큼 멀어진 성곽마루 정자

성곽마루 입구에서 나무로 만든 탐방로를 따라 가면 옛 타워호텔 경내로 이어진다. 지금은 외우
기도 어려운 '반얀트리클럽앤스파서울'로 간판을 갈아서 그 이름만 봐도 적지 않게 눈과 머리를
고달프게 한다. 이름도 외우기 힘들고 말이다,
이곳은 이 땅에 잘나가는 고급 호텔로 졸부들의 낙원과 같은 곳이라 그 이름만큼이나 유쾌한 곳
은 아니다. 한복을 매우 싫어했던 신라호텔과 나란히 손 잡으며 남산의 경관을 해치고 있는 옥
의 티로 도성과 남산 숲 복원을 위해서는 언젠가 쿨하게 지워야 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국립
극장도 마찬가지이나 여긴 대중적인 공간이니 봐주자~!)


 

♠  남산 품에 안기다 ~~~

▲  남산공원길 (남산북측순환로 입구)

옛 타워호텔을 지나 국립극장교차로에 이르니 온갖 나들이객들로 길거리가 북새통을 이룬다. 우
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오뎅과 번데기 등으로 허기진 배를 달랜 다음, 성난 파도처럼 몰려드
는 인파 속의 하나의 점으로 묻혀 남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국립극장 정문을 지나면 남산의 대동맥인 남산공원길(남산둘레길)이 시작된다. 길은 2갈래인데,
북쪽 길은 남산북측순환로 입구에서 남산 북쪽 자락을 거쳐 회현동(會賢洞) 소파로로 이어지며
예전부터 오로지 뚜벅이 전용 산책로로 이용되어 수레의 바퀴 자국을 금하고 있다. 크게 오르락
내리락 부분이 거의 없는 느긋한 길로 장충단공원과 필동(筆洞), 남산1호터널로 내려가는 길이
있으며, 삼국지의 주요 인물인 제갈량(諸葛亮)의 사당 와룡묘(臥龍廟)가 있다.
그리고 남쪽 길은 남산 정상과 N서울타워로 인도하는 길로 차량 통행이 가능하다. 1980년대까지
만 해도 왕복 운행이었으나 일방통행으로 변경되면서 '국립극장→남산 정상 밑→남산도서관' 방
향으로만 바퀴를 굴릴 수 있다.

내가 신당동과 금호동(金湖洞)에 서식했던 어린 시절, 가족 또는 친구와 남산에 물을 뜨러 많이
갔었는데, 가족과 갈 때는 주로 평일 저녁을 이용했다. 그때는 약수터(상춘약수터) 입구까지 차
를 끌고 가서 약수를 뜬 다음 북측순환로 갈림길에 있던 차량 매표소까지 후진하여 국립극장으
로 내려갔지. 일방통행로라 그렇게 하는 것은 조금은 옳지 못하지만 거리도 그리 길지 않고, 매
표소 아저씨의 쿨한 묵인도 있고 해서 몇 년을 그렇게 했었다.

이후 남산의 건강과 도보길 활성화를 위해 도로 폭의 1/3 정도를 잘라서 뚜벅이길을 닦았고 차
량 통행에도 크게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반 차량은 절대로 바퀴를 들일 수 없게 되
었으며, 오로지 시내버스(02,03,05번)와 관광버스, 공원/긴급 차량만 들어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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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뚜벅이들의 낙원이 된 남산공원길 (서울타워 방향)

남산북측순환로입구에서 남쪽 길로 접어들면 숲 사이로 빛바랜 한양도성이 다시 모습을 비춘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여기서 정상 쪽으로 이어지는 성곽 밑에 탐방로를 내었는데, 남산 정상
까지 보다 빨리 가고 싶다면 그 길을 이용하면 된다. 다만 경사가 좀 각박하여 조금은 힘들 수
있으나 도로로 가는 것보다는 짧은 거리이고 제일 최근에 개방된 남산의 따끈한 속살 부분이라
다리만 멀쩡하면 누구든 거닐 수 있다.

성곽을 지나 5분 정도 가면 오른쪽에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2~3분 오르면 운동시설을 갖
춘 상춘약수터가 나오는데, 예전 신당동/금호동 시절 우리집 단골 약수터였다.
약수터 옆에는 약수로 몸을 씻는 노천탕이 있었으니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에 의해 냉수마찰이
라 불리는 샤워를 받곤 했다. 특히 겨울에도 그랬었지. 약수로 냉수마찰을 하면 감기가 안걸린
다나..?
예전에는 노천 목욕터를 가진 약수터가 서울에 적지 않았는데, 대중이 이용하는 약수터에서 아
저씨와 노공(老公)들이 벌고 벗고 씻는다는 것이 오랫동안 문제로 지적되었다. 그래서 차츰 사
라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기억 속의 풍물시(風物詩)가 되어버렸다.


▲  남산공원길 아랫 전망대

▲  남산공원길 아랫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한남동과 보광동(普光洞), 한강을 비롯하여 강남 일대가 상쾌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북측순환로입구에서 남산 정상까지 가다보면 세상을 향해 고개를 내민 전망대 2곳을 만날 수 있
다. 이들은 남쪽이 확 트여있어 조망이 일품인데, 바로 밑에 용산구 지역을 비롯해 한강과 동작
구, 강남/서초구, 관악산, 대모산 등이 사이좋게 시야에 잡힌다. 대기만 청정하다면 보이는 범
위는 더욱 넓어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남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서울의 한복판이자 도심 남쪽에 누운 남산(262m)은 북악산, 인왕산, 낙산(낙타산)과 더불어 한
양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다. 서울의 영원한 남주작(南朱雀)으로 북현무(北玄武)인 북악산(백
악산)을 바라보고 있으며, 도성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산이란 아주 평범한 이름을 지니고 있다.
천하에 보면 남산이란 산이 참 많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시내와 가깝고 시민들이 많이 찾는 휴
식처이며, 경주 남산(468m)과 충주 남산(663m) 등을 제외하면 산세가 낮고 완만해 누구든 편히
오를 수 있는 친근한 산이다. 서울 남산도 대체로 편히 안길 수 있는 스타일로 그 걷는 것도 싫
다면 남산을 오르는 시내버스나 시티투어버스,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금세 정상까지 간다.

남산의 원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으로 그 옛말인 '마뫼'는 남산을 뜻하며, 그 외에 인경산(引
慶山), 잠두봉(蠶頭峰)이라 불리기도 했다.
1395년 태조는 남산을 높여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그를 위한 사당인 목멱신사(木覓神
祠)를 남산 정상에 세웠다. 이후 매년 제를 올리면서 국사당(國師堂)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리
고 남산 능선을 동서로 가로지르며 한양도성이 걸쳐져 있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전국
에서 날라오는 봉화를 받았다. 조선시대 봉화는 5개 노선이 있었는데, 그 종점이자 중심지가 바
로 남산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한양을 점령한 왜장이 산허리에 왜장대(倭將臺)란 성을 쌓았으며, 병자호란 이후
어영청(御營廳)과 금위영(禁衛營) 분영이 남산에 설치되어 서울을 지켰다. 왜정 때는 왜군 헌병
대가 산자락에 있었고, 1945년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1호터널 북쪽에 말뚝을 박으며 갖은 악명
을 떨치기도 했다.

남산은 도성 경승지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양반들이 세운 정자와 그들이 새긴 바위글씨가 즐비
했는데, 지금은 바위글씨 극히 일부를 빼면 남아있는 것이 없다. 또한 가난한 선비와 하급 관리
들이 산자락에 많이 살았으며, 개화기(開化期) 이후 왜인들이 남산 북쪽과 남촌(南村)이라 불리
는 청계천 이남에 두루 터를 닦고 살았고, 왜정 때는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남산 중턱에는 왜성대공원과 경성신사(京城神社)를 지어 그들의 성지(聖地)로 만들었다.
특히 조선신궁을 짓는 과정에서 남산의 오랜 성역이던 국사당이 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다며 왜
정이 속좁게 징징거려 어쩔 수 없이 인왕산으로 자리를 옮기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으니 그렇게
남산의 중심은 토박이 목멱대왕에서 왜열도의 온갖 쓰레기 잡귀들로 바뀌고 말았다.
왜정이 남산에 남긴 잡다한 자국들은 1945년 이후 대부분 지워졌으나 조선신궁 계단과 일부 소
소한 흔적들은 자신의 정체를 꼭꼭 숨긴 채, 1945년 8월 패전 당시, 연합군에 살려달라며 비굴
하게 굴던 왜왕(倭王)처럼 구차한 목숨을 연명한다.

196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케이블카가 놓여 남산의 이름 두 자를 떨쳤고, 1965년 조선신궁 자
리에 남산도서관을, 1969년에는 백범 김구(白凡 金九)의 동상을 세워 주변을 백범광장으로 삼았
다. 1973년에는 국립극장이 지어졌으며, 1975년에는 6년의 대공사 끝에 천하 최대의 타워인 서
울타워(남산타워)가 완성되어 남산의 높이를 배로 높였다. 이 타워는 1980년에 공개되어 남산과
서울의 굳건한 상징이 되었으며, 이후 이름을 N서울타워로 갈았다.


▲  남산공원길 (아랫전망대와 윗전망대 사이)

우리 애국가에 보면 '남산 위에 저 소나무'란 구절이 나온다. 그 구절에서 보이듯 남산은 북악
산과 더불어 소나무로 유명했는데, 특히 금송(金松)이 많이 자랐다. 소나무 외에도 많은 꽃과
나무들이 뿌리를 내리며 남산을 아름답게 수식하고 있고 도심 한복판에 솟아있어 학의 등에 올
라탄 듯 국보급의 조망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산 곳곳에 남산이 베푼 약수터가 뿌리를 내리며 나그네의 목을 축여주고 있는데, 그중에
서 부엉바위 약수터가 제일 유명했다. 허나 이 약수는 남산3호터널이 뚫리면서 그 혈이 막혀 사
라진 상태이다. 그외에 많은 약수터가 있으나 도심 속에 있다는 단점으로 목숨을 장담할 수 없
다. 이미 몇몇은 부적합으로 문닫기 직전이다. 또한 그 흔한 계곡도 거의 남아있지 않고, 겨우
실처럼 흐르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여럿 있을 뿐이다.

남산은 남산공원길과 여러 갈래의 계단길, 숲길이 있는데, 계단길은 장충단공원에서 정상 동쪽
까지, 남산도서관에서 정상까지 이어지는 계단길이 대표적이며, 그외에 남산1호터널과 필동, 후
암동(厚岩洞), 남산야외식물원에서 오르는 길이 있다. 길 외에는 모두 철조망을 쳐놓아 산으로
의 접근을 막았으나 근래에 모두 풀어버렸다. 허나 철조망을 없앴다고 해서 산자락 곳곳을 쑤시
고 다니면 안된다. 무조건 지정된 길로 가야 남산도 좋고, 사람도 좋은 것이다.

남산에는 한양도성과 장충단공원, 와룡묘, 남산봉수대, 한양공원 표석, 남산골한옥마을 등의 문
화유산과 백범광장, 안중근기념관, 남산야외식물원, N서울타워 등의 명소가 있으며, 산 전체가
남산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심 속 산책.나들이 명소 및 조촐한 등산 명소로 나날이 인기를
더하고 있으며, 서울에 오면 꼭 가야 되는 서울의 상징적인 명소로 외국인 관광객까지 날을 가
리지 않고 수십만 씩 몰려든다. (서울을 찾은 관광객의 1/3 이상이 남산을 찾는다고 함)

남산이 없는 서울은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다. 아니 상상하기도 싫다. 도심 속의 허파이자 꿀
단지로 남산이 있으니 인근 북악산, 인왕산, 조선 왕궁과 합세해 도심의 녹지 비율이 좀 되는
편이지 그가 없었다면 서울은 더 지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개인적으로 나의 옛 추억이
수십 권씩 녹아있는 살아있는 일기장으로 나에게도 꽤 의미심장한 곳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제일 많이 오른 산이 바로 남산으로 어림잡아도 500번 이상은 올랐을 것이다.
신당동과 금호동 시절 물을 뜨러 온 횟수만 수백 번이 넘고, 친구들과도 지겹도록 올랐다. 그때
는 오로지 두 다리로 돈 한푼 없이 남산 정상과 약수터를 오갔지. 무일푼으로 갔으니 먹을 수
있는 것은 남산이 베푼 약수와 청정한 기운 뿐이다. 그래도 그때는 참 가슴이 찡할 정도로 재밌
었고 행복했었지. 지금 아무리 많은 돈을 들고 남산에 안겨도 그때의 기분과 행복은 절대 재현
하기 힘들다.
어린 시절 그렇게나 안겼던 남산은 나이를 먹으면서 그 애정도 푹 식어버렸다. 그나마 요즘 들
어 방문 횟수가 조금 늘긴 했지만 몇년 전까지만 해도 1년에 2~3번도 갈까말까였다. 아마도 옛
시절에 지겹도록 안겼던 탓은 아닐까?


▲  남산공원길 윗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한남동과 보광동, 이태원, 강남, 관악산 산줄기, 국립현충원

▲  남산공원길 윗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해방촌과 이태원, 용산구, 동작구 지역

▲  남산공원길 윗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후암동, 용산구, 마포구, 여의도 지역

▲  남산공원길 윗전망대에서 바라본 N서울타워
서울타워는 동양에서 제일 높은 타워로 높이가 236.7m에 달한다.
하늘을 향해 늘씬하게 솟은 저 타워를 과연 어떻게 만들었을까?
 

남산 정상을 코앞에 둔 남산서울타워 종점(02, 03, 05번 종점)에 이르니 정상으로 오르는 사람,
시내로 내려가는 사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뒤엉켜 북새통을 이룬다. 시내버스와 관광버스
가 멈추기가 무섭게 무수한 사람들을 뱉어내면서 그 시장통을 더욱 부추긴다. 여기서는 오로지
시내버스만 길게 바퀴를 접을 수 있으며, 나머지 버스는 승하차가 끝나자마자 바로 자리를 떠야
된다. (주차 공간이 없음)
이곳에서 무수한 인파의 물결을 뚫고 경사가 좀 각박한 서쪽 오르막길을 3분 정도 오르면 남산
정상과 서울타워이며, 서남쪽 남산공원길을 내려가면 남산도서관과 소월길로 이어진다.

※ 남산 정상 찾아가기 (2016년 4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6번 출구를 나와서 180도 뒷쪽으로 돌아가면 4거리 남쪽, 국립극장
  방향에 정류장이 있음)에서 02, 03, 05번 시내버스 이용
* 국립극장(남산, 한남동 방향 정류장)에서 02, 03, 05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4호선 충무로역(2번 출구)에서 02, 05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2호선/신분당선 강남역 중앙차로 정류장과 9호선 신논현역 중앙차로 정류장, 7호선 논
  현역 중앙차로 정류장, 3호선 신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402번 시내버스를 타고 남산도서관
  하차, 정상까지 도보 25~30분
* 지하철 1,4호선 서울역 9번 출구에서 03번 시내버스를 타거나 서울역버스환승센터(9-1번 출구
  )에서 402, 405번 시내버스를 타고 남산도서관에서 하차하여 도보 이동
* 장충단공원(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도보 50~60분
* 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필동, 예장동, 회현동 / 용산구 후암동, 한남동 등
* 남산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중부공원녹지사업소 ☎ 02-3783-5900)


▲  남산서울타워 종점에서 바라본 서울타워
남산 어디서든 구석진 곳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서울타워가 바라보인다.


 

♠  남산 정상에서 남산야외식물원(야생화공원)까지

▲  남산 팔각정(八角亭)

하늘과 맞닿은 남산 정상에는 N서울타워와 팔각정, 남산봉수대 등이 있다. 그 현장에서 남북으
로 펼쳐진 일품 조망을 누려본다.
마치 천상(天上) 세계로 인도하는 탑처럼 하늘 높이 솟은 N서울타워는 초등학교 시절 2~3번 가
본 인연이 있다. 허나 그 이후로는 이상하게 인연이 닿지 않았다. 정상까지 오더라도 그저 타워
밑에서 좀 맴돌다가 내려갔기 때문이다. 막상 가려도 해도 미친 입장료로 딱히 땡기지도 않는다.

N서울타워와 남산봉수대 사이에 자리한 팔각정은 서울타워와 함께 남산을 빛내는 보석의 하나다.
이곳에는 1959년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치켜세우고자 그의 호를 딴 우남정(雩南亭)이 있었
는데, 1960년 4.19의거로 그가 물러나자 바로 철거되었다. 이후 1968년 11월 탑골공원의 팔각정
을 본 따서 지금의 팔각정을 지어 남산타워를 수식하는 존재로 삼았으며, 매년 1월 1일 새해 해
맞이 행사가 성황리에 열린다.

팔각정 서쪽에는 한양도성 여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나무가 무성해 산바람이 늘 머물고 있
으며, 정자 자체는 그리 오래된 존재는 아니나 N서울타워, 봉수대와 더불어 남산 꼭대기를 수식
해주는 남산의 주요 상징물이다.


▲  남산서울타워 종점 남쪽 한양도성과 오솔길

정상이란 자리에 오래 머물러 들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적당히 있다가 내려와야 뒷탈이 없다.
이번에는 남산도서관 방면 대신 오던 길로 내려가 남산야외식물원으로 길을 잡았다.

남산공원길 윗전망대를 지나면 야외식물원으로 인도하는 숲길이 살며시 손을 내민다. 남산에서
는 별로 없는 흙길로 남쪽 자락에 조성된 소나무숲을 지나가는데 그 길을 7~8분 정도 내려가니
남산야외식물원이 활짝 모습을 비춘다.


▲  남산야외식물원

소월로와 접한 남산 남쪽 끝에는 남산야외식물원이 넓게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에는 외인아파
트 2동이 남산을 건방지게 가리며 흉물스럽게 있었는데, 1994년 그 아파트를 쿨하게 밀어버리고
9,811㎡ 부지에 야생화공원을 닦으면서 남산야외식물원은 시작되었다. 즉 아파트의 희생으로 태
어난 신선한 공간인 셈이다.

1995년 전국 광역단체 시도에서 옮겨온 소나무 80그루로 팔도소나무숲을 닦았으며, 1997년 2월
식물원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2002년 4월에는 이 땅의 산야에서 자라는 야생화 185종과 나무
93종을 심었고 생태연못을 조성했다.
야생화공원을 포함한 공원 면적은 59.241㎡, 품고 있는 식물은 10여 개의 주제(죽림원, 알뿌리
식물원, 설화/연료식물원, 양치/음지식물원, 팔도소나무단지, 서울시보호식물원, 화목원, 남산
자생식물원, 나무밑 야생화원, 음지식물원, 4계절야생화원, 약용식물원, 향기식물원, 생태연못
등)로 나눠 배치했으며, 현재 식물 269종 117,132주가 심어져 거대한 야외식물원을 이룬다.

이곳 야외식물원의 중심은 야생화공원이며, 그외는 그냥 자연공원이다. 숲이 짙고 산책로가 잘
닦여져 있으며, 야외식물원이라고 하여 입장료를 받거나 관람시간에 제한이 있는 것은 절대 아
니다. 언제든 안길 수 있는 포근한 공간이다. 이처럼 좋은 곳을 이제서야 오다니! 남산을 안방
처럼 들락거린 나인데, 그동안 등잔 밑이 어두웠던 모양이다.


▲  주말 오후의 여유로움이 묻어난 남산야외식물원 산책로

▲  야생화공원 산책로 갈림길

▲  대나무 잎소리가 사각사각 속삭이는 죽림원(竹林園)

▲  전국에서 가져온 소나무의 안식처 팔도소나무단지
남산이 소나무로 유명하다보니 천하에서 80그루의 소나무를 소환해
이렇게 소나무단지를 닦았다.

▲  솔내음이 속세에 지친 심신을 어루만지는 팔도소나무단지

▲  팔도소나무단지의 상징, 정2품송 맏아들나무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정이품송(正二品松)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이 땅의 소나무 가운데
단연 스타급의 존재이다. 그 나무가 서울에 살짝 아들을 두니 그가 이곳에 있는 정이품송 맏아
들나무이다.
정2품송의 씨앗을 이용하여 심은 그의 첫 후손 나무로 2010년 4월 5일 식목일에 서울시장과 산
림청장 정광수가 식재했다. 지금은 비록 10살도 안된 나이라 많이 초라하지만 기백(幾百)의 세
월이 흐르면 그 아비처럼 멋드러진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내 생애의 그가 어
른이 되는 모습은 볼 수가 없구나.. 사람이 아무리 대단하다해도 나무보다는 생명줄이 훨씬 짧
으니 말이다.


▲  생태연못으로 인도하는 생태계곡 산책로
야외식물원 서쪽에는 2002년에 지어진 생태연못이 있다. 그 연못에서 발원한
조촐한 계곡이 싱그러운 자연을 머금으며 세상으로 흘러간다.

▲  생태계곡의 으뜸 양념, 물레방아의 위엄

▲  수중식물과 개구리가 마음껏 나래를 펼치는 생태연못

2002년에 조성된 생태연못에는 연꽃을 비롯해 많은 수중동물/식물이 살아가고 있다. 식물이 너
무 무성해 마치 자연 속의 늪지대를 보는 듯 한데 연못은 조촐한 크기로 주변에 산책로와 나무
데크길이 놓여져 있으며, 연못 중간에 나무 다리가 운치를 더한다.

생태연못을 끝으로 남산 나들이는 이렇게 막을 고한다. 남산야외식물원은 마치 주마등(走馬燈)
처럼 둘러보았는데, 어차피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 다시금
둘러보고 싶다.~~


▲  서쪽에서 바라본 생태연못

※ 남산야외식물원 찾아가기 (2016년 4월 기준)
* 지하철 6호선 한강진역(2번 출구)에서 405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얏트호텔 하차, 정류장 바로
  뒷쪽이 남산야외식물원이다.
* 서울역버스환승센터(1,4호선 서울역 9-1번 출구)에서 402, 405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얏트호텔
  하차
* 2호선, 신분당선 강남역 중앙차로 정류장, 9호선 신논현역 중앙차로 정류장, 7호선 논현역 중
  앙차로 정류장, 3호선 신사역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402번 시내버스 이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2동 258-148 (소월길 323 ☎ 02-798-3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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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계속 시정을 요청했으나 소용이 없었음) 그러니 보기에 조금 불편하더라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다만 다음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글은 간격 늘어짐이 없이 정상적으
   로 나오고 있으니 블로그글을 보셔도 됩니다.
 * 공개일 - 2016년 4월 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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