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야경'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09.22 부산에서 가까운 우리의 옛 땅, 대마도 북부 나들이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히타까츠항, 미우다해변, 한국전망대)
  2. 2017.11.07 대학로의 포근한 뒷동산이자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 산책 ~~ (한양도성, 낙산공원, 자주동천, 삼군부총무당)

부산에서 가까운 우리의 옛 땅, 대마도 북부 나들이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히타까츠항, 미우다해변, 한국전망대)

 


' 부산 대마도 나들이 '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미우다해수욕장, 한국전망대)


▲  대마도 미우다해수욕장

대마도 한국전망대

▲  한국전망대

▲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킨의 장수 은행나무)


* 대마도의 본토는 대한민국(우리나라)이다. <본글에 나오는 본토는 우리나라를 뜻함>
* 2020년 이후 부산과 대마도를 잇는 뱃편은 1도 없으며 찾는 이도 없다.
* 본글은 2019년 이전에 간 것임을 밝힌다.


 

 

봄과 여름의 마지막 경계선인 5월의 끝 무렵, 대한해협에 길쭉하게 떠있는 대마도를 찾
았다.
대마도(對馬島)는 2004년부터 계속 인연을 노렸으나 그때마다 태풍이 초를 치면서 가지
를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5월에 이르러 1박2일로 갈 기회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날씨가
보우하사 100% 상륙 확정이다.

부산과 구주(규슈, 九州) 사이에 자리한 대마도<왜어(倭語)로 쓰시마, 쯔시마(つしま)>
는 708㎢의 덩치로 유인도 5개, 무인도 102개 등 총 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
북으로 길쭉하다보니 제법 큰 섬으로 다가오며(남북이 82km, 동서 18km) 우리가 잃어버
린 옛 땅의 일원으로 조선 후기까지 조선의 동남쪽 끝을 담당하고 있었다. 우리의 동남
쪽 끝이자, 왜국(일본)의 서북쪽 끝으로 그 예민하고 외로운 위치 때문에 '국경(國境)
의 섬'이라 불린다.
우리 본토에서도 매우 가까워(부산에서 49~50km) 저렴한 금액과 극히 짧은 시간으로 해
외여행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잇점이 있으며, 그 매력으로 본토 사람들의 발길이 상당했
다. (2018년에 무려 40만 명이 찾았음) 허나 분명한 것은 대마도는 우리가 반드시 회복
해야될 땅이라는 것이다. (대마도의 역사와 지리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아침 일찍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에서 대마도로 가는 오션플라워호(대아고속해운)에 나
를 담고 2시간 20여 분을 항해하여 대마도의 중심지, 이즈하라<엄원(嚴原)>에 도착했다.
다행히 바다가 순하게 굴어 뱃길은 매우 순탄했는데 바다가 종종 격하게 흥분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 그때는 배멀미 등의 고통을 각오해야 된다. (대마도 2번째 방문 때는 3m가
넘는 파도로 완전 지옥을 맛보았음;;)
처음으로 발을 들인 대마도의 첫 느낌은 뭐랄까. 본토의 어느 섬에 들어온 듯한 무척이
나 낯익은 모습이다. (완전 '부산광역시 대마군' 같은 기분) 그 즐거운 흥을 마치 회충
이나 세균처럼 생긴 못생긴 왜열도 글자(가나)가 건방지게 깨뜨리려 든다.

첫날은 도보로 이즈하라 시내를 돌아다녔다. 오후 6시까지 여로(旅路)를 듬뿍 살찌우다
가 바다가 바라보이는 이즈하라 동쪽 언덕에 자리한 대아호텔에 여장을 풀면서 첫 날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이즈하라에서 둘러본 명소는 별도의 글에서 소개함)

다음 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간의 기별도 안될 정도로 적게 나온 왜식 정식을 먹고 둘
째 날을 시작했다. (밥은 리필이 되지만 반찬은 안됨)
이 날은 전용버스로 히타까쯔까지 여러 명소를 겯드리며 이동하는 일정으로 대마도를 2
개의 섬으로 나눠버린 만관교(만제키바시), 에보시다케 전망대, 와타즈미신사를 둘러보
고 대마도 북섬의 동쪽 도로인 39번 지방도(도요타마마치~사가~긴~슈시~히타까츠)를 따
라 북쪽으로 향했다.

대마도 39번 지방도는 겨우 구색만 맞춘 좁은 2차선 길로 거의 산악길 일색이라 구불구
불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굴곡을 순화하고자 일부 구간에는 터널과 다리가 닦여졌으나
아직까지도 많이 부족하여 운전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북섬 서쪽 도로인 382번 국
도(가미아카타마치 경유)도 있으나 이즈하라~히타까츠를 잇는 길은 39번 지방도가 조금
지름길이다.
하여 본토 사람을 태운 관광버스는 39번 지방도를 주로 이용을 하고 있는데, 이 구간에
는 장송사 백제은행나무, 슈시강 단풍길, 나루타키폭포 등의 명소가 있다. 이들은 대마
도 여행상품에서 많이 취급하는 것들로 우리는 그중에서 장송사 백제은행나무를 들리기
로 했다. (이즈하라~히타까츠를 왕래하는 시내버스와 투어버스는 382번 국도를 이용함)


 

  대마도 및 왜국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백제 사람이 심었다고 전하는
장송사(長松寺) 백제은행나무 <긴의 장수은행나무>

▲  동쪽에서 바라본 은행나무

대마도의 북쪽 끝을 이루고 있는 상대마정(上對馬町, 가미쓰시마마치)의 남쪽 구석에는 '긴(
琴)'이란 조그만 마을이 있다. 이름도 달랑 1글자인 그 마을에는 장송사란 작은 절이 있는데,
바로 그 뜨락에 대마도에서 가장 늙은 은행나무가 푸른빛 장대한 모습을 드러내며 하늘 높이
솟아있다.

이 은행나무는 추정 나이가 약 1,500년으로 대마도 및 왜국(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이다.
대마도가 본토의 그늘에 묻혀있던 시절부터 대마도의 부모 나무라 불렸으며, 둘레가 63.6m나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상은 높이 23m, 둘레 12.5m이다.
백제(百濟) 사람이 심었다고 전해져 예로부터 백제은행나무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왜열도의
은행나무는 백제가 속방(屬邦)인 왜에 불교를 내리면서 함께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여
이곳 나무 역시 그 과정에서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지금은 '긴'이 작고 하찮은 마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
는 대마도 북부의 관문으로 바쁘게 살았다. <신숙주(申叔舟)가 1471년에 쓴 '해동제국기(海東
諸國記)'에는 40여 호의 집이 있다고 나와있음>
장송사에 있는 나무라 하여 '장송사 백제은행나무'라 하며, 지역 이름을 따서 '긴의 장수은행
나무','긴의 대은행(銀杏木)', 왜어로는 '킨노오이쵸'라 부른다.

1798년 낙뢰를 맞아 가지가 부러지고 나무 속살이 탄 적이 있으며, 1809년에 작성된 대마기사
(對馬記事)에는 '바다에서 보면 울창하여 산과 같다'고 나와있어 낙뢰의 상처에도 그 위엄을
크게 잃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950년 태풍 29호로 기둥나무가 아작나기도 했으나 옆에서 조그만 나무가 자라나 크게 가지를
넓히고 새 잎이 피어났다. 1990년에 열린 '국제 꽃과 초록의 박람회' 때 기획된 '신일본 명목
(名木) 100선'에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조금씩 성장을 보이고 있어 생명력만큼은 젊은
나무 못지 않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백제은행나무', 그리고 백제에서 전래되었음을 안내문에 표시했으
나 역사 왜곡의 달인, 왜국이 대마도와 우리 본토의 끈끈한 인연을 자르고자 백제 두 글자를
지워버렸다. 하여 요즘에는 '긴의 장수은행나무'로 명칭을 고정시키고 그 이름을 강요하고 있
다. (왜는 대마도가 가야와 백제, 신라, 고려, 조선의 영역으로 오랫동안 그들의 지배와 영향
을 받은 흔적과 기록을 왜곡하거나 지우고 있음)


▲  사람을 작은 개미로 만들어버리는 백제은행나무의 위엄

▲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을 1,500년 이상이나
꾸역꾸역 섭취한 백제은행나무의 단단한 아랫도리

▲  은행나무 그늘에 묻힌 조그만 신사와 붉은 도리이
본토의 마을 서낭당과 같은 존재로 대마도가 왜화(倭化)가 되면서 저런
신사(神社)로 변질되었다. (매년 신사에서 제사를 지냄)


대마도 뿐 아니라 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라고 추앙하고 있으나 정작 국가 천연기념물이 아
닌 장기현(나가사키) 지방 천연기념물 등급에 머물러있다. (1961년에 지정되었음) 본토 같았
으면 진작에 국가 천연기념물로 삼아 크게 애지중지되었을텐데, 그보다 낮은 지방문화재 등급
에 둔 것을 보면 무슨 사연이 있는 듯 싶다. (본토와 관련된 나무이고, 대마도가 원래 본토
땅이라 문화유산 지정 등급을 일부러 낮게 매긴 모양임)


▲  장송사 법당(法堂)

백제은행나무의 후광(後光)과 그늘을 아낌없이 받고만 있는 장송사는 조동종(曹洞宗) 소속으
로 법당과 요사(寮舍)가 전부인 조그만 절이다. 겉으로 보면 20세기 사찰로 여기고 지나칠 수
있으나 무려 조선 때부터 있어온 절로 고려 현종(顯宗) 때 조성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의
인쇄 목판을 소리없이 간직하고 있다. (인쇄본은 11세기 이후에 많이 인쇄되어 보급되었으나
지금은 상당수가 왜열도에 있음)
대마도에서도 다소 외진 이런 구석탱이에 그런 존재가 숨어있다는 것이 다소 의아스러울 따름
인데, 왜구가 약탈한 것으로 보기도 하나 고려 말에 고려 조정이 왜구의 공격을 불력(佛力)으
로 막고자 왜열도와 가까운 대마도에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이 장송사로 흘러들어와 이
곳의 듬직한 보물이 된 것이다. (대장경 인쇄본은 관람 불가)

본토 관광객들이 은행나무를 보러 많이 찾고 있으나 정작 절 승려나 동네 사람들은 거의 콧배
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단순히 백제은행나무를 보러 오는 곳이라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흥분시킬 건덕지가 없다. 그냥 조용한 절과 마을이 전부이다.

▲  '일본일수령 긴의 대은행(一樹齡
琴の大銀杏)' 나무판

▲  법당에 걸린 왜열도 스타일의
조그만 종


▲  히타까츠항 (항구 서쪽)

백제은행나무를 둘러보고 가을 단풍길로 유명한 주지(舟志, 슈시)와 나루타키폭포 입구를 지
나 히타까츠(히타까쓰, 比田勝)로 이동했다.

히타까츠는 상대마정(가미쓰시마마치)의 중심 마을로 대마도 북부의 중심지이자 북쪽 관문이
다. 대마도에서 2번째로 큰 동네로 동서로 길쭉한 어촌 마을이며, 그 앞바다가 북/서/남 3면
이 육지와 접해있고 그 3면이 동쪽에서 들어온 바다를 감싸고 있어 항구로 아주 적합하다. 대
마도가 지형이 꽤 거칠다보니 항구로 크게 부릴만한 곳이 이곳과 이즈하라 정도로 외지를 잇
는 여객선은 오로지 이 두 곳에서만 뜬다.
히타까츠에서는 부산과 하카타를 잇는 여객선이 오가고 있는데, 부산까지는 1시간 10~30분 정
도 걸린다. 그러니 대마도에 일찍 상륙하고 싶다면 히타까츠를 이용하면 된다. (이즈하라는 2
시간 20분 이상 걸림)


▲  오늘도 평화로운 히타까츠항
잔잔한 파도가 이곳의 적막을 살짝 건드리고 있고 바다 속에는 온갖
물고기들이 유유자적 거닐고 있다.

▲  단조로운 모습의 히타까츠항 건너편 (히타까츠항 남쪽)

▲  히타카츠 마을 (시내라고 하기에는 동네가 작음)

히타까츠 마을은 마치 한물 간 영화세트장처럼 한적하기 그지 없다. 본토에서 배가 들어오거
나 남쪽이나 한국전망대 쪽에서 본토 사람들을 실은 관광버스가 오면 히타카츠 여객터미널을
중심으로 잠깐씩 활기를 되찾다가 그들이 빠져나가면 다시 끝없는 고요 속으로 잠긴다.

이곳에는 본토 사람들이 운영하는 식당과 숙박업소가 여럿 있다. 게다가 본토 말을 구가하는
지역 사람들도 많아서 언어 소통에는 크게 문제가 없다.


▲  히토쓰바타고에서 먹은 왜식 우동과 유부초밥의 초라한 위엄

우리는 히타까츠 여객터미널 부근에 있는 '히토쓰바타고'란 왜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발
음도 어려운 히토쓰바타고는 왜어(倭語, 일본어)로 이팝나무를 뜻한다. 즉 이팝나무식당이다.
히타까츠에서 이름난 식당으로 우동, 회, 왜식 정식 등을 취급하고 있는데, 대마도 여행 상품
중의 히타까츠에서 점심을 먹는 일정이 있으면 이곳과 본토 사람이 하는 식당으로 많이 간다.

여기서는 우동과 유부초밥 2개, 왜식 김밥 2개, 그리고 약간의 고등어회가 차려졌다. 우동은
간의 기별도 안될 정도로 양이 적었고, 고등어회 역시 여러 명이 같이 누리기에는 양이 빈약
하여 1인당 1~2개씩 집어먹으니 이내 빈 그릇이 되었다. 반찬은 단무지와 오랜지가 전부로 저
것을 다 섭취해도 왠만한 성인 남자들은 배가 차지 않는다. 그야말로 왜열도 애들의 좁쌀 같
은 마음처럼 나온 것이다. 하긴 외딴 섬에 물가도 비싸고 이윤도 많이 남겨야되니 그렇게 좁
쌀처럼 굴어야 돈이 남을 것이다.


▲  몇 조각 나오지 않은 고등어회

대마도 주변은 고등어와 방어가 많이 잡힌다. 이곳 밥상에 올라온 저 고등어 역시 대마도 산
일 것이다. 허나 정신줄 놓은 왜국(일본) 정부가 후쿠시마(福島) 해역에서 잡은 물고기를 전
국에 저렴하게 유통시키고 있어 조금은 꺼림칙하다. 수산물 뿐 아니라 육류, 채소, 쌀, 심지
어 맥주(아사히맥주)까지 후쿠시마산을 대놓고 퍼트리고 있어 왜열도에서 음식을 섭취할 때
꼭 주의가 필요하다. (가급적이면 왜열도에 안가는 것이 좋음)


 

♠  대마도 제일의 아름다운 해변, 미우다(三字田)해수욕장

점심 후식거리로 찾아간 미우다 해변은 히타까츠에서 차로 5분 거리이다. 해변 주차장에서 확
트인 동쪽으로 가면 이국적 분위기의 미우다 해변이 쓱 나타나 나그네의 정처 없는 마음을 무
심히 뒤흔든다.

미우다 해변은 미우다하마(三字田濱)라 불리기도 한다. 대마도의 이름난 해변으로 왜국 해수
욕장 100선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는데, 그리 넓은 해변은 아니나 하얀색 고운 모래와 에메
랄드빛 같은 푸르른 바다, 해변을 둘러싼 산, 바로 앞에 떠있는 바위섬까지 서로 어우러져 아
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또한 히타까츠항처럼 북/서/남이 산과 접해있고, 그 3면이 동
쪽에서 들어오는 바다를 깊이 둘러싸 자연산 방파제가 되어주고 있으며, 수심도 얕아 어린이
를 동반한 물놀이 장소로 아주 좋다.
이곳은 대마도의 필수 여행지로 대마도 여행 상품에서 90% 이상 취급하고 있다. 2018년에 40
만 명이 대마도에 발을 들였다고 하니 그중 30만 이상은 이곳에 발자국을 남겼을 것이다. 게
다가 히타까츠항에서도 매우 가까워 본토 사람들이 캠핑, 피서, 낚시로 많이 찾아온다.

▲  미우다해변의 명성을 알려주는
일본100선 해수욕장 표석

▲  미우다 해변 남쪽 부분과 청초한
빛깔의 바다 ①


▲  미우다 해변 남쪽 부분과 청초한 빛깔의 바다 ②

▲  나그네를 유혹하는 매혹적인 바다
여름 제국 시절에 왔다면 그 유혹에 흥분하여 무조건 풍덩했을지도 모른다.

▲  미우다 해변과 이곳의 상큼한 장식물, 바위섬
해변 바로 앞에는 작은 바위섬이 두둥실 떠있다.

▲  바위섬을 점거한 사람들

▲  대자연이 미우다에 내린 보물, 바위섬
바위섬의 이름은 아직 없다. 만약 저 섬이 없었다면 해변의 운치도 50% 이상
떨어졌을 것이며, 해변과 섬 사이에 수심도 안정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  미우다해변 북쪽 부분

▲  미우다해변의 평화로운 풍경 (북쪽에서 바라본 모습)

▲  바다 너머로 길쭉하게 목을 내민 저곳은?

바다 너머로 길쭉하게 보이는 곳은 도노사키(전기, 殿崎)로 저곳에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왜국이 자화자찬용으로 닦아놓은 '일러우호의 언덕'이 있다.

왜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으로 그 강하다는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마도에서 요행으로 때려잡
았다. 그때 영혼까지 썩 털려 방황하는 러시아군을 대마도 사람들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집으
로 데리고 와 그들을 재워주고 밥을 제공했으며 씻을 수 있게 뜨거운 물도 마련해주었다는 것
이다. 하여 왜는 그것을 엄청 강조하며 러일 우호 및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현장이라고 빡빡
우겨대고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에게는 다소 얄밉고도 씁쓸한 현장으로 몇몇 여행상품에
서는 저곳을 트래킹 명소로 들리고 있다.


 

♠  대마도 북쪽 끝에 자리한 본토 바라기
한국전망대(韓國展望臺)

▲  한국전망대(한국전망소)

미우다해변을 둘러보고 이번 대마도 나들이의 마지막 답사지인 한국전망대로 이동했다. 상대
마정 북부순환로(히타까츠~미우다~도요~와니우라~오우라~히타카츠)를 따라 서쪽으로 조금 가
면 한국전망대 입구가 마중을 나오고, 그곳으로 인도하는 가파른 1차선 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한국전망대가 있다.

와니우라 해안 언덕 정상에 자리한 한국전망대는 대마도의 최북단(부속 섬은 제외)으로 이름
그대로 대마도의 주인인 우리나라(한국)를 바라보는 전망대이다. 1997년 5월에 세워진 것으로
그 성격에 걸맞게 본토식으로 지어졌는데, 본토의 한옥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해 서울 탑골공
원에 있는 팔각정(八角亭)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으며, 건축자재도 모두 본토에서 가져왔다.

오로지 본토 바라기로 지어진 곳으로 여기서는 본토의 부산이 바라보인다. 거리는 약 50km로
날씨가 좋으면 어렴풋이 시야에 들어오나 우리가 갔을 때는 바다 구름이 조금 낀 상태라 부산
은 커녕 영도(影島)도 보이지 않았다. 하여 날씨를 잘 맞춰서 가야 된다. 날씨에 따라 '한국
전망대'가 되느냐 단순히 '대한해협 전망대'가 되느냐 갈리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서 바라보는 부산의 야경(夜景)은 천하일품이라 그 야경을 찍으러 사진쟁이들의 발
걸음이 잦다. 낮에는 비록 부산이 두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밤에는 아주 지독한 흐린 날씨만
아니라면 90% 이상 부산 야경 구경이 가능하다. 여기서 부산 앞바다까지 어둠을 몰아내려는
어떠한 빛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매년 10월 말에 광안리 해변에서 열리는 부산불꽃축
제까지 여기서 구경을 할 수 있다. (밤에는 오로지 부산 지역만 야경이 환함)

▲  정면에서 바라본 한국전망대

▲  동쪽에서 바라본 한국전망대

이곳에 전망대를 세운 것은 단순히 부산이 바라보여서가 아니다. 왜정 때 대마도에 징용 등으
로 온 본토 사람들이 설과 추석에 바다 너머로 희미하게 다가오는 본토를 바라보며 망향의 한
을 달래던 곳이기 때문이다.

1997년 이곳이 지어졌을 때는 부산과 대마도가 뻔히 보임에도 서로를 잇는 뱃편이 없어 본토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 한국전망대는 다소 한가했다. 그러다가 1999년 뱃편이
생겼고, 본토가 바라보이는 그 잇점 하나로 본토 사람들의 발걸음이 크게 늘면서 대마도의 필
수 관광지로 성장했다.
이곳 외에도 여기서 가까운 가미아카타마치의 좌호만(佐護灣, 사고만) 해안에도 부산을 바라
보는 조망대가 닦여져 있다. 그곳 이름은 '이국이 보이는 언덕전망대(異國の見える丘展望臺)'
로 날씨가 좋으면 능히 부산이 바라보인다. 허나 한국전망대의 위엄에 눌려 본토 사람들의 발
길은 적으며, 대마도 여행상품에서도 거의 취급을 하지 않는다.


▲  한국전망대 밑에 펼쳐진 와니우라 포구
이곳은 대마도에서 가장 북쪽 마을이다.


전망대는 2층 규모로 2층에 대마도 관련 여러 정보와 여기서 담은 부산 사진이 여럿 전시되어
있다. 허나 특별한 것은 없으며,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곳은 오로지 본토 바라기용 명소이다.
본토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부산과 대마도가 정말 가깝구나','대마도는 우리 땅','본토와 이
리 가까운데 어찌하여 원숭이들 땅이 되었나?','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해방시키자' 이런 생각
들을 많이 할 것이다.
반면 왜인들은 '한국 땅이 참 가깝다','한국을 반드시 점령하자~' 이런 생각들을 하겠지. 말
로는 대마도와 가까운 부산을 바라보는 단순한 전망대라고 하지만 속뜻은 모른다. 이래서 이
중성이 심한 왜열도 원숭이들을 늘 경계해야되며 반드시 때려잡아야된다.


▲  한국전망대에서 바라본 대한해협 (부산 방향)
저 흐릿한 수평선 너머로 부산이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다. 오늘은
바다 구름이 너무 짙어서 조망의 품질은 이것이 전부이다.

▲  한국전망대에서 바라본 와니우라 앞바다와 해율도(海栗島, 우니지마)

앞바다에 길쭉하게 떠있는 섬은 해율도(우니지마)이다. 저곳이 대마도와 왜국에서 가장 우리
나라와 가까운 최전방으로 해상자위대 군부대를 두어 매의 눈으로 북쪽을 감시하고 있다. 나
중에 우리가 대마도를 무력으로 해방시킨다면 제일 먼저 저곳을 초토화시켜야 된다.


▲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朝鮮國 譯官使 殉難之碑)
(윗쪽 비석이 순난지비, 밑의 검은 피부의 표석이 2003년 3월 7일에 세운 것)


한국전망대 앞에는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가 있다. 돌로 크게 2중의 석단(石壇)을 쌓고 그
위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비석을 올렸는데, 비석의 이름 그대로 역관사의 순난(殉難)을 기억하
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1703년 2월 5일(양력 3월 7일) 조선 역관사 108명과 대마도 선원 4명을 태운 배가 부산포(釜
山浦)를 출발해 대마도로 향했다. 허나 대마도 코 앞인 와니아루 앞바다에서 격한 파도를 극
복하지 못하고 침몰했고, 배에 탄 112명은 모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역관사는 오늘날 공무직 통역사로 대마도와 왜국에서는 그 108명이 모두 대마도 21대 도주(島
主)인 종의진 조문 및 새 도주가 된 종의방 취임 축하를 위해 왔다고 그런다. 허나 한 나라의
왕도 아니고 조선에 속한 변방 섬 도주 따위에 조문과 취임식에 그 많은 인원을 보낼 이유가
전혀 없다.
그때 왜열도는 지방 세력(번주)들이 중앙(에도막부)과 따로 놀던 시절이었다. 하여 규슈와 혼
슈의 많은 지방 세력들은 조선에 조공(朝貢)을 보내거나 정치적, 경제적인 교류를 하고 있었
다. 마침 대마도주 조문과 취임 축하를 위해 역관사를 보낼 일이 있어서 그 배에 에도막부와
지역 세력들에게 파견하는 역관들까지 싹 태워서 보낸 것이다. 아무리 조선의 항해술이 우수
하다고 해도 거친 바다를 뚫고 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닌지라 한꺼번에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대마도 직전에서 침몰하여 그 아까운 외교 인재들이 싹 변을 당한 것이다.

이후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1991년에 112개의 영석(靈石)으로 순난지비를 세웠으나 그들의
이름은 모두 애석하게도 전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종가문가사료(宗家文庫史料)'에서 그들
의 이름을 머금은 묵서소책자(墨書小冊子)가 발견되었고, 그들의 300주기가 되는 2003년 3월
7일 기존 순난비 앞에 그들의 명단을 적은 표석을 세웠다.
그때 역관사의 대표는 정역(正譯)인 한천석(韓天錫)이며, 부역(副譯)은 박세량(朴世亮) 등 20
여 명, 50여 명의 중관(中官), 20여 명의 하관(下官)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존재는 대마
도에서 이렇게나마 남게된 것이다.

부산에서 대마도는 거리는 무척 가까우나 바다가 종종 흥분기를 보여 선박 침몰 사고가 많이
있었다. 특히 한국전망대 앞 와니우라 앞바다와 해율도 주변이 가장 말썽으로 1459년 통신사
(通信使)를 태운 배 2척이 침몰해 1명을 빼고 모두 사망한 일이 있었으며,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 대마도로 적지 않게 표류해와 대마도주는 그들을 표민옥(漂民屋)에 수용하여 고향으
로 보냈다. (대마도주는 표류민들의 표민옥 숙박비를 조선 조정에 청구했음)


▲  한국전망대에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산책로

한국전망대는 주변 조망까지 포함해서 20~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우리는 히타까츠 뱃시간 때
문에 20분 남짓 머물다 떠났지만 시간이 널널하다면 주차장 동쪽에 있는 풍포대(豊砲臺)유적
과 주차장 서쪽 언덕에 있는 조그만 신사도 같이 보기 바란다. 신사는 와니우라 마을의 서낭
당 같은 존재로 근래 지어진 작은 건물이나 대마도 해안 마을 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
으며, 풍포대는 왜정 때 대마도 보호를 위해 닦여진 요새의 하나이다.


▲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우리를 옮겨줄 대아고속해운 오션플라워호

한국전망대를 끝으로 대마도 답사는 아쉽게도 마무리가 되었다. 부산행 마지막 뱃시간 때문에
미우다해변과 한국전망대에서 머문 시간이 다소 짧지만 그건 어쩔 도리가 없다. 보통 봄과 여
름, 가을에는 부산행 마지막 배가 16시대에 있고, 겨울과 초봄에는 15시대에 있는데, 그 시간
에 따라 히타카츠 주변 일정도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다시 히타카츠 마을로 돌아와 여객터미널 부근에 있는 면세점(免稅店)에 들렸다. 대마도가 우
리의 옛 땅이나 지금은 외세가 불법 점거하고 있는 상태라 해외로 분류되고 있다. 해외여행에
서 면세점 방문은 필수라 이곳에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는데, 건강식품과 화장품, 빵과 초
콜렛 등의 간식류, 기념 장식용, 담배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여 대마도를 찾는 본토
사람 중에는 오로지 면세점 쇼핑 때문에 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일행들은 담배와 화장품, 왜식 된장인 나토 등의 건강식품을 많이 샀으나 나는 돈도 없고 딱
히 땡기는 것이 없어서 아주 저렴한 고양이 장식물을 샀다. 이른바 오른발을 들고 복을 부른
다는 고양이상이다. 가격은 400엔 정도로 기억한다.
그렇게 면세점의 호주머니를 넉넉히 채워주고 히타카츠 여객터미널로 넘어갔다. 한산한 히타
까츠 마을 거리와 달리 여객터미널은 본토로 돌아가는 본토 사람들과 부산을 찾는 대마도 애
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여기서 30분 정도 대기하다가 16시 넘어서 부산으로 가는 대아고속해운의 오션플라워(Ocean
flower)호에 몸을 싣는다. 이 배는 전날 부산에서 이즈하라로 내려왔을 때 탄 배로 하루만에
다시 신세를 진다.

시간이 되자 배는 입을 모두 봉하고 미끄러지듯 대한해협으로 나간다. 다행히 파도는 잔잔했
고 여로를 너무 살찌우다보니 몸이 고단하여 40분 이상 꿈나라를 방황했다. 그렇게 1시간 10
여 분을 달려 부산항국제여객선터미널에 도착했다. 전날 아침에 이곳을 출발해 다음날 오후
늦게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정말 1박2일 짧기는 짧다. 하긴 인생도 짧다고 하는데 그까짓
1박2일은 정말 티끌만도 못하지.

여기서 일행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나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2004년부터 벼르고 별러서
이제서야 건너간 대마도, 옛날 가야와 신라, 백제가 왜열도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대마도와 대
한해협을 지겹도록 건너갔고 660년 이후, 백제가 망하자 수만 명의 백제 사람들이 대한해협을
거쳐 백제의 속방이자 별채인 왜로 넘어갔다.
신라는 종종 군사를 보내 대마도와 왜를 쳤고, 신라 후기에는 신라해적이라 표현된 신라 수군
과 지방 세력의 수군이 대한해협과 대마도를 오랫동안 휘젓고 다니며 크게 위엄을 과시했다.
(894년 대마도를 공격한 신라해적은 후백제 수군으로 여겨짐) 고려 현종(顯宗) 때는 발해(渤
海) 후손의 일원인 여진족 수군이 대마도와 규슈를 초토화시켰으며, 1274년과 1281년 고려와
원(몽골) 연합군 역시 대마도와 규슈를 아작냈다.
조선통신사는 왜열도와 대마도 단속을 위해 이 거친 바다를 건너갔으며, 20세기 이후에는 많
은 본토 사람들이 이 바닷길을 건너 대마도와 왜열도로 건너갔다.

다음에 대마도를 찾을 때는 꼭 여권 없이 갈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2년 뒤 방문에도 여권은
여전히 필요했다. 그만큼 대마도는 우리에게 애증의 땅이다. 휴전선 이북 회복도 급하지만 툭
하면 독도(獨島)가 지네 땅이라 개소리나 일삼는 왜국의 헛소리 대응용으로 대마도는 꼭 걸고
넘어가 반드시 우리 영역으로 해방시키기를 꿈꿔본다.
대마도도 원하고 있을 것이다 어여 우리를 왜열도 원숭이들로부터 해방시켜달라고. 솔직히 왜
국도 대마도를 변두리 섬으로 여겨 크게 관심도 없고 완전 외면 수준이다. 심지어 왜열도 애
들은 대마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들도 수두룩 하다고 한다. 만약 본토 부산에 편입되면
대마도는 지금보다 훨씬 환경이 좋아지고 찾는 이가 100% 이상 늘어날 것이다. 그러니 대마도
가 살려면 예전 주인에게 오는 것이 맞다. (물론 지나친 난개발은 안됨)

이렇게 하여 대마도 첫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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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의 포근한 뒷동산이자 서울 도심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 산책 ~~ (한양도성, 낙산공원, 자주동천, 삼군부총무당)



' 서울 도심의 영원한 좌청룡, 낙산 나들이 '
(한양도성, 낙산공원, 비우당, 삼군부총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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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공원 한양도성 (낙산에서 동대문 방향)

▲  자지동천(자주동천) 바위글씨

▲  삼군부총무당


 

♠  한양도성(漢陽都城) 혜화문(동소문)에서 낙산공원 구간

▲  혜화문에서 낙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5월의 첫 무렵, 일행들과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 낙산을 찾았다.
한성대입구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혜화동로터리 방면으로 2분 정도 가면 동소문고개가 막
꺾이기 직전에 한양도성과 낙산으로 이어지는 탐방로가 손을 내민다.

이 탐방로는 낙산을 넘어 동대문(東大門)까지 이어지는 2.3km의 도보길로 2012년에 모두 개통
되었다. (동소문 주변이 마지막으로 개통됨) 처음부터 각박한 경사로 사람들을 맞이하는데 그
것도 잠시일 뿐, 길은 서서히 흥분을 가라앉히면서 완만해진다. 삼선동(三仙洞) 주택가 뒤쪽
을 지나지만 낙산 정상까지 녹지대를 완충지대로 삼아 속세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산책
의 기분을 진하게 선사해주며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수준도 높아진다.

동대문에서 낙산공원으로 오르는 성곽 탐방로는 성곽길과 성곽 바깥길 2가지가 있어 골라가는
재미가 있다. 허나 동소문에서 오르는 길은 아직까진 바깥길만 완전하게 나 있다. 동소문고개
에서 성 안쪽을 보면 나무가 좀 무성해 보이는데 그곳에 카톨릭대 성신교정이 넓게 자리를 깔
고 앉은 터라 낙산공원~동소문 성곽길은 그 중간인 제2전망광장까지만 닦였을 뿐, 거기서 카
톨릭대 담장에 사정없이 가로막혔다.
자세한 속사정이야 낸들 모르겠지만 시민들을 위해 성곽길을 흔쾌히 개방하고 성곽이 끊긴 동
소문고개에는 카톨릭대 교내(혜화동성당)로 내려가는 길을 내면 될 것이다. 물론 끊어진 양쪽
을 끈끈하게 이어주는 성곽 모양의 구름다리를 놓는 것이 훨씬 좋겠지만 끊긴 거리가 길고 그
높이마저 상당하며 고갯길 도로(동소문로, 창경궁로)의 교통량이 어마어마해 꽤 난공사가 예
상된다.

동소문고개를 기준으로 15분 정도 오르면 성 안으로 인도하는 암문(暗門)이 나온다. 그 문을
들어서면 낙산공원 놀이광장으로 거기서 2분을 더 가면 낙산의 정상인 낙산공원 마을버스 종
점에 이르게 된다.


▲  주거지(장수마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펼쳐진 성곽 바깥 탐방로

▲  낙산에서 동소문을 향해 힘차게 내려가는 한양도성
낙산 북부에서는 어디서든 북한산(삼각산)과 북악산 산줄기가 시원히 바라보인다.


동소문~낙산 구간의 한양도성은 대체로 잘 남아 있다. 허나 600년이 넘는 장대한 세월을 먹었
고, 왜정과 6.25전쟁으로 여기저기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기면서 새 성돌로 치유된 부분이 많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때가 자욱한 검은 성돌과 하얀 피부의 성돌이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하지
만 둘 사이의 어떠한 갈등도 없이 오랜 세월을 뛰어넘는 강인한 협동심으로 하나의 성곽을 이
루고 있으니 참 든든해 보인다. 그럼 여기서 한양도성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조선의 수도를 지켰던 서울<한양(漢陽)>의 갑옷, 한양도성 - 사적 10호
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란 그 유명한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이 몸담았던 고려 왕조를
엎어버리고 조선이란 아주 비리비리한 왕조를 세운 이성계(李成桂), 세상에서는 그를 조선 태
조라고 부른다.
그는 1394년 남경(南京)이라 불리던 한양(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의 도성 천도 프로젝트
에는 천하 제일의 대학자이자 정치가이며 국방을 강화하여 버릇 없이 까부는 명나라를 혼내주
려고 했던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이 그 중심에 서서 도읍 천도와 도성 축조계획을 세웠다.
1395년까지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 대략적인 한양 시가지를 지어놓고 1396년 1월 도성 축조
에 들어갔는데 도성 코스는 정도전이 짰으며 도읍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내4산(內四山)인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인왕산(仁王山), 남산(南山), 낙산(駱山, 낙타산)을 모두 끼게 했다.
성곽 길이는 59,500자(18.2km)로 고려의 도읍인 개경<開京, 나성(羅城) 길이만 23km>보다 작
은 수준이며, 평지는 토성(土城), 산지에는 석성(石城)을 지었다.
이때 천하에 징발령을 내려 11만 8천명을 동원,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했고, 농사철
이 다가오자 축성을 잠시 멈추고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를 지어야 뜯어먹
을 세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농사철이 끝나는 8월에 다시 79,400명을 콩볶듯이 동원,
49일 동안 빡세게 굴려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 4대문과 4소문까지 지어 도성 축조는 마무리
가 되었다.

토성으로 지은 부분이 마음에 걸렸던 세종은 성곽 전체를 석성으로 싹 다지기로 하고 1422년
1월, 32만의 인부와 기술자 2,200명을 동원하여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그 시절 한양 인구가
10만 명이었으니 무려 3.2배의 인부들이 동원된 조선 최대의 공사였으며 완전 인원빨로 밀어
붙어 불과 38일만에 마무리되었다.
허나 아무리 현군으로 추앙받는 세종이지만 농번기를 피하려고 늦겨울에 무리하게 작업을 벌
였고 공사의 강도가 높아 죽어나간 일꾼이 872명에 달했다. (공사가 끝나고 귀가 도중 죽은
사람들도 꽤 되었음) 그들의 적지않은 희생과 고통으로 성곽 높이 40척 2촌, 여장 4,664첩(堞
), 치성(雉城) 6곳, 곡성(曲城) 1곳, 성랑(城廊) 15곳을 갖춘 아주 늠름한 도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426년 수성금화도감(修城禁火都監)을 두어 도성을 관리케 했는데 성곽을 워낙 단단히
지은 탓에 20세기까지 스스로 붕괴된 적이 없으며, 보수도 겨우 1차례만 벌였다. (인위적으로
철거되거나 전쟁 폭격을 받은 것은 제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宣祖)는 신하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하여
도성은 왜군에게 아주 허무하게 무혈점령되고 만다. 그런 꼬라지를 막고자 온갖 욕을 들어가
며 단단하게 다졌건만 오늘날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소위 윗대가리들의 무능으로 눈을 뜨고
적군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꼴을 지켜봐야만 했다. 하지만 치열한 전쟁이 없어서 성곽과 성문
은 별 피해가 없었다. (한양도성 왈 '내가 이럴려고 단단하게 지어진건가? 자괴감 들어' ;;)

1704년 숙종(肅宗)은 혹시나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신하들의 격한 반대를 물리치고
성곽을 보수했다. 이때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山城)도 크게 손질했는데, 그 안에 행궁(行
宮)과 여러 관청, 창고를 갖춘 조그만 도시를 만들고 도성과 북한산(삼각산)을 잇는 탕춘대성
(蕩春臺城)을 쌓아 도성의 수비력을 한층 드높였다.

이렇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조선의 심장, 서울의 든든한 갑주로 위엄을 드러내던 한양도성은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1899년 이후 팔자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1899년 조선 황실은 미국 사람 콜브란(Corlbran)과 합작해 한성전기주식회사를 만들었다. 콜
브란은 고종에게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능인 홍릉(洪陵)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며 전차(
電車)의 필요성을 건의했다. 하여 그 해 12월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홍릉 남쪽인 청량리(淸
凉里)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전차의 통행을 위해 부득이 동대문과 서대
문의 양쪽 성벽이 싹둑 잘리면서 성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성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1900년에는 종로와 용산을 잇는 전차 노선이 생기면서 남대문 양쪽 성벽도 잘려나갔다. 허나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제의 명으로 시내 교통 편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이해는 된다. 허나 문
제는 1905년 이후이다.

왜국(倭國)은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 그 소속으로 1908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해괴
한 기관을 만들어 도성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1910년 이후 서소문<소의문(昭義門)>과 서대문<
돈의문(敦義門)>, 동소문<혜화문(惠化門)>을 밀어버렸고 적지 않은 성곽까지 덤으로 밀면서
망국(亡國)의 서울을 욕보인 것이다.
그렇게 빼앗긴 들에서 차디찬 시련을 견디며 35년 만에 봄을 찾았건만 바로 무섭게 6.25가 발
발하면서 왜정이 남긴 상처만큼이나 무거운 상처를 입었다. 그래서 6.25이후까지 살아남은 성
문은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 창의문(자하문), 숙정문(肅靖門), 광희문(光熙門) 뿐이며, 성벽은 북악산과 성북동, 낙산, 장충동, 남산, 인왕산 등 10.5km 정도만 겨우 살아남
았다.

이렇게 영욕의 상처를 품고 쓰러진 성곽을 1975년부터 손질하기 시작하여 광희문과 숙정문을
복원하고 남아있던 성곽을 수리했다. 이후 동소문을 제자리 북쪽에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사라
진 성곽에 대한 복원에 착수하여 옛날의 면모를 서서히 되찾고 있다. 또한 2010년 이후에는
시민과 답사객을 위해 성곽을 따라 탐방로를 닦았는데 북악산 주변을 제외하고는 언제든 출입
이 가능하며<인왕산 정상 주변 성곽길은 매주 월요일에는 못감, 월요일이 휴일인 경우에는 그
다음날 문을 닫음> 성곽이 사라진 부분은 인근 골목길을 이용해야 된다.

예전에는 서울성곽이라 불렸으나 2011년 7월에 '서울성곽'에서 '한양도성'으로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바뀌었다. 허나 서울성곽이란 이름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으며 한양성곽이라 불리기도
한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성곽이고 한양을 쌈싸먹던 성곽이니 서울성곽, 한양성곽이라 불러
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이다. (본글에서는 한양도성으로 통일함) 게다가 서울이란 이름도 이
성곽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왕산 선바위 전설과 조금
비슷함)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으며 어떤 코스로 성을 쌓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데없이 큰 눈이 내렸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글쎄 한양 주위로 마치 성곽 모양으로 눈
이 쌓여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이 친히 성곽 자리를 정해준 것이라 여겨 눈이 쌓인 자리
에 성곽을 쌓게 했다. 눈이 쌓인 자리, 즉 눈울타리<그것을 한자로 하면 설울(雪圍)>를 따라
성을 쌓았다고 하여 설울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울로 변했다고 한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 이름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수도를 뜻하는 명사이기도 하여 수도(首都
) 대신 많이 쓰이기도 한다.


▲  거의 85도로 서 있는 한양도성의 위엄

옛 한양도성은 두터운 성곽을 지니고 있기에 늘 든든했을 것이다. 그렇게 민초들을 닥달하여
쌓은 단단한 성이건만 그 보람도 없이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권력층 때문에 제대로 된 수성전
하나 치르지도 못하고 적에게 떨어지는 수난을 여러 차례나 겪어야 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날, 병자호란...) 성곽은 도시와 백성을 지키고자 있는 것이지 그냥 멀뚱히 서 있는 병풍이
아니다.


▲  낙산 바깥 탐방로에서 바라본 천하 (삼선동과 돈암동, 성북동, 북한산)


 

♠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 낙산(駱山)에 둥지를 튼
~ 낙산공원

▲  낙산공원 남쪽에 자리한 낙산정(駱山亭)

서울 도심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누운 낙산은 해발 125m의 나지막한 산이다. 낙산이란 이름은
산의 모양이 낙타 등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산의 이름인 낙(駱)은 낙타를 뜻한다.
또한 3글자로 낙타산(駱駝山), 타락산(駝駱山)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 모두 낙타를 상징한
다. 그 이름을 간편하게 줄인 것이 낙산이며 조선시대에 궁궐에 우유를 조달하던 관청인 유우
소(乳牛所)가 낙산 기슭에 있어 타락산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여 전해온다.

낙산은 한양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의 하나로 도성의 동쪽을 맡고 있다. 여기서 내사산
이란 한양의 주산(主山)이자 북쪽에 있는 북악산<백악산(342m)>, 서쪽의 인왕산(338m), 남쪽
의 남산(南山, 262m), 그리고 동쪽의 낙산을 이르는데 문제는 그 가운데 낙산이 가장 부실하
게 생겼다는 것이다.

낙산과 멀리감치 마주보고 있는 인왕산은 산세는 좀 작아보이나 꽤나 야무지고 험준하여 예로
부터 호랑이들의 소굴로 유명했다. 북악산 역시 인왕산 못지 않으며, 남산은 그들보다는 세는
약해도 덩치는 좀 있다. 반면 낙산은 그들보다 높이나 덩치에 있어서 형편없이 떨어져 그냥
뒷동산 수준의 언덕이다. 낙산의 그런 부실한 기운을 북돋아주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일
환으로 동대문의 이름을 흥인문(興仁門)에 지(之) 1글자를 추가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한
것도 바로 그 이유이다.
낙산이 그렇게 염려되면 글자로 장난칠 것이 아니라 도성을 동쪽으로 좀 확장하면 어떨까 싶
지만 낙산 동쪽은 신설동 방향으로 조금 뻗은 동망봉(東望峰)을 빼고는 거의 평지이다. 그러
니 별 수 없이 낙산에 성곽을 얹힌 것이다. 게다가 조선은 고려보다 스케일이 비교도 안될 정
도로 작기 때문에 도성을 크게 구축하지 않았다. <고려의 황도(皇都)인 개경(開京)보다 훨씬
작음>

낙산은 야트막한 산으로 숲이 무성하고 잘생긴 바위와 약수터가 많았다. 게다가 도성 내부가
훤히 보일 정도로 조망도 일품이라 도성 주변 경승지로 꼽혀 왕족과 양반들이 낙산에 정자나
별장, 거처를 지어 머물렀다. 효종(孝宗)의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은 석양루(夕陽樓, 지
금의 이화장 정문 앞에 있었음)를 지었고, 이심원(李心源, 1722~1770)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을 비롯하여 이화정(梨花亭)과 백림정(柏林亭) 등이 있었다. 이들은 양반과 시인묵객들이 자
주 발걸음을 했던 낙산의 이름난 명소였다.
또한 조선 후기 한옥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이화장(梨花莊)과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유
명한 이수광(李睟光)의 초가인 비우당(庇雨堂), 낙산의 유방이라 불리던 이화동약수와 신대약
수 등의 약수터, 우물이 나란히 5개가 있었다는 5형제우물터, 단종의 부인인 정순왕후의 애환
이 서린 자지동천(자주동천)과 동망봉, 도성 5대 명승지의 하나로 기이한 바위가 많았던 쌍계
동(雙溪洞, 이화장 주변) 계곡이 있었다.
그 외에 마을 전체가 온통 붉은 열매를 맺는 나무만 있다고 하는 홍수동(紅樹洞, 홍숫골), 동
촌이씨(東村李氏)의 세거지 등이 낙산에 앞다투어 안겨져 있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낙산이었
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낙산에 안겨있던 수많은 명소들은 20세기 이후 어둠의 시절과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 녹아 없어졌고, 서울의 인구가 폭증함에 따라 낙산과 동망봉 일대에 빼곡히 아파트와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옛날의 운치와 정취는 다 말라버렸다. 달동네인 이화마을도 바로 그런
시류를 타고 낙산 남쪽에 살짝 둥지를 튼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것은 낙산의 허리를 가르
는 한양도성과 이화장, 자지동천 바위글씨, 그리고 근래 복원된 비우당이 고작이다. 그 외에
조선 왕실의 원찰(願刹)이던 청룡사(靑龍寺), 고려 때 지어진 비구니 절 보문사(普門寺), 구
한말에 세워진 안양암(安養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절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낙산 중턱에 자리를 피며 산의 미관을 적지않게 말아먹던 시민아파트가 노후화됨에 따라 1990
년대 이후 서울시의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에 따라 이들 아파트와 주변 주거지를 싹 밀어버
리고 정상 주변과 서쪽 일대 61,000여 평을 다져 낙산공원을 만들었다.
공원은 1999년 12월 30일 삽을 뜨기 시작하여 2002년 6월 완성을 보았는데, 운동시설과 휴게
소, 낙산전시관, 중앙광장과 놀이광장, 전망광장 등 3개의 광장을 갖추는 한편, 소나무 등 8
만 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비록 왕년의 손톱 때만큼은 못되어도 도심 속의 포근한 휴식 공간
이자 답사/나들이 장소로 크게 명성을 누리고 있다. 하여 서울의 '몽마르뜨 언덕'이란 별명까
지 얻게 되었다. (낙산공원 면적은 201.779
㎡)

한양도성의 낙산 구간은 동대문에서 동소문까지의 2.3km 구간으로 성곽이 잘 남아있다. 1999
년 이후 산업화의 칼질에 오랫동안 고통받은 낙산을 조금씩 위로하면서 성곽도 보수를 벌였는
데 동대문 북쪽 구간을 복원하고, 성곽과 성밖에 탐방로를 만들었다. 성곽 내부 탐방로는 동
소문에서 카톨릭대 성심교정 사이 약 700m을 제외하고 모두 길이 나있고, 성밖은 동소문에서
동대문까지 모든 구간이 이어져있다.

낙산은 대학로와 무척이나 가깝고 혜화역(4호선)과 한성대입구역(4호선), 동대문역(1,4호선),
창신역(6호선)과도 또한 가깝다. 심지어 낙산공원 정상까지 마을버스가 들어오는 등 교통과
접근성은 매우 착하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뒷동산처럼 야트막하여 누구나 쉽게 안길 수 있고
조망도 일품이다. 특히 서울의 야경(夜景)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포인트라 인기가 더하다.

낙산에 간다면 동소문이나 동대문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낙산공원에서
가까운 명소로 이화장과 이화마을, 자지동천(자주동천)과 비우당, 동망봉, 삼군부총무당 등이
있으니 한 덩어리로 같이 보면 제법 알찬 나들이가 될 것이며, 여기서 욕심을 더 부려 청룡사
, 보문사, 안양암, 대학로 주변의 명소들까지 둘러본다면 정말 배터지는 나들이가 될 것이다.

※ 낙산공원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흥인지문 교차로(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9/10번 출구)에서 한양도성을 따라 도보 20분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성곽 탐방로를 따라 도보 15분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에서 도보 10분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
  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낙산공원 종점 하차
* 낙산공원과 한양도성 탐방로는 24시간 개방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 산2-10 일대 (낙산길 41. 낙산공원 관리소 ☎ 02-743-
  7985~6)


▲  낙산 정상부 ① - 낙산공원 마크와 성바깥 산책로

▲  낙산 정상부 ② - 놀이광장 주변

▲  낙산 정상에서 제2전망광장으로 이어지는 성곽길


 

♠  낙산 주변에 숨겨진 명소들

▲  복원된 3칸 초가, 비우당(庇雨堂)

낙산 정상(종로구 마을버스 03번 종점)에서 창신동 방향(동쪽)으로 500m 정도 내려가면 쌍용
아파트2단지 입구라는 정류장이 나온다. (낙산에서 마을버스로 두 정거장) 정류장 남쪽 비탈
에 나무가 우거진 조그만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으로 들어서면 원각사(圓覺寺) 직전에 3칸짜
리 초가가 마중을 한다. 그가 낙산을 수식하는 명소의 하나인 비우당이다. 그럼 이곳에는 비
우당만 있을까? 그것도 아니다. 비우당 바로 뒤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에 자지동천 바
위글씨와 샘이 있다.

우리가 갔을 당시에는 가는 날이 보수하는 날이라고 지붕을 수리하고 파란 천으로 꽁꽁 덮고
있었다. 지붕을 감싼 천이 좀 거슬리긴 했지만 날을 잘못 찾아온 것을 어찌하리? 어차피 집에
서도 가까운 곳이니 아쉬우면 다음에 다시 인연을 지어도 상관은 없다. 그렇다면 비우당은 어
떤 곳인데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일까?

비우당이란 이름은 '비를 가리는 집(우울하게 말하면 간신히 비나 가리는 집)'이란 뜻으로 중
고등학교 국사책과 온갖 국사 관련 수험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주인공,
지봉 이수광<芝峯 李晬光, 1563~1628>이 어린 시절과 말년을 보냈던 곳이다. 그의 호인 지봉
은 낙산 동쪽의 한 줄기인 지봉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이 집은 이수광이 지은 것이 아닌 문화유씨 집안이던 유관(柳寬. 1346~1433)의 집이었다.
그는 낙산 동쪽, 현 자리에서 약간 서남쪽인 쌍용2차아파트 자리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맹사
성(孟思誠), 황희(黃喜) 못지 않은 강력한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다. 집을 짓긴 했지
만 재상(宰相)이란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낡아빠진 초가였고, 지붕에 계속 빗물이 새자 손수
우산을 받치고 살았다고 한다. 그때 그는 부인에게
'우산이 없는 집은 어찌 견딜까??' 남 걱정도 참 팔자인 유명한 농담을 남기니 그 말이 '유재
상의 우산'이란 뜻의 유상수산(柳相手傘)이다.

유관이 죽자 외손인 전주이씨 집안에게 상속되었는데, 그 집안에서 태어났던 이수광이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없어진 것을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로 잠시 관직을 버렸을 때, 홀연히 다시 찾은 것이다.
그는 다시 집을 짓고 유관의 일화를 바탕으로 집의 이름을 비우당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머물며 지봉유설을 비롯한 다양한 서적을 작성했는데,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를 통해
집과 관련된 사연을 적었다. 또한 집 주변의 8곳의 경치를 '비우당 8경(八景)'이라 정하고 시
를 지으니 다음과 같다.

1. 동지세류(東池細柳) - 동대문 밖에 있던 동지(東池)란 연못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버들개
지를 날리고 꾀꼬리가 노래하는 모습을 표현했다. (동지는 현재 없음)
2. 북령소송(北嶺疏松) - 북악산의 산마루가 낮에도 어둑한데 푸른 솔그림자가 집에 드리운
것을 보고 동량으로 쓰이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3. 타락청운(駝酪晴雲) - 아침마다 누운 채 낙산의 구름을 마주하면서 한가한 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4. 아차모우(峨嵯暮雨) - 아차산에서부터 벌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비를 노래했다.
5. 전계세족(前溪洗足) - 비가 오면 개울에 나가 발을 씻고 개울가 바위(자지동천)에 드러눕
다. (현재 낙산에는 계곡이 전멸함)
6. 후포채지(後圃菜芝) - 지봉과 상산(商山, 낙산의 동쪽 줄기의 하나)의 이름에 맞추어 상산
사호(商山四皓)처럼 살고 싶다.
7. 암동심화(巖洞尋花) - 복사꽃 핀 골짜기에서 나비를 따라 꽃을 찾아가는 풍류를 말하다.
8. 산정대월(山亭待月) - 맑은 달밤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은 흠취를 말했다.


조선 중기에 뛰어난 문신이자 학자로 실학(實學)의 시조격인 인물이며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
으로 정국을 이끈 그가 바람처럼 사라진 이후 집은 고된 세월에 지쳐 쓰러졌고, 그가 노래한
비우당8경도 개발의 칼질에 재현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서울시에
서 뒤늦게나마 비우당 표석을 세웠고, 원래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앉으면서 2011년에 그 부근
인 자지동천 앞에 비우당을 복원하여 그를 기리고 있다.

비우당은 툇마루를 갖춘 초가 3칸으로 부엌을 가지고 있다. 초가 주위로 싸리나무로 얇게 담
장을 둘러 옛 초가의 정취도 조금은 풍기는데 사립문이 열려있는 경우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
면 된다. 허나 무심히 닫혀있더라도 담장이 낮아서 안으로 넘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굳이 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바깥에서 거의 다 보이지만 비우당 뒤쪽에 있는 자지동천의
흔적(샘터와 바위글씨)이 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담장 밖에서도 보이기는 보임) 비우당
은 복원된지 10년도 안된 아주 따끈따끈한 초가라 고색의 내음 따위는 기대할 수 없지만 자지
동천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다.


▲  서울시장 조순이 1995년에 세운 비우당 옛터 비석

▲  비우당 동쪽 부분 (굳게 닫힌 사립문과 비우당터 비석)
초가 뒤쪽으로 자지동천 표석과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  자지동천(紫芝洞泉, 자주동천) 표석

▲  비우당 뒷쪽 굴뚝과 자지동천

그럼 이름도 참 거시기한 자지동천(자주동천)은 어떤 사연이 깃든 곳일까?
이곳은 낙산 동쪽에 자리한 오래된 샘터로 조선 6대 군주인 단종(端宗)의 부인, 정순왕후(定
順王后) 송씨(1440~1521)의 슬픈 사연이 서린 현장이다.

정순왕후는 여산송씨 집안으로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1454년 단종의 왕비가 되었으며 바
로 이듬해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넘기면서 단종은 상왕(上王), 송씨
는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었다. 허나 1457년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
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생애 마지막 강제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송씨는 영도교(永渡橋,
청계8가)까지 울면서 따라와 마지막 이별을 나누게 된다.
그들이 영영 이별한 다리라는 뜻에서 영이별교, 영이별다리라 불렸고, 그것이 영도교로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단종이 떠나면서 송씨 역시 강제로 궁궐을 나와 낙산 청룡사(靑龍寺)에 몸을 의탁했다. 청룡
사는 은퇴한 왕실 상궁(尙宮)과 승하한 제왕의 후궁들이 말년을 보내던 곳으로 그들을 위한
정업원(淨業院)이 설치되어 있었다. 송씨도 그곳에 머물렀으나 세조(世祖)가 마땅히 지원을
해주지 않아서 생활이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서 절과 가까운 자지동샘으로 와서 비단을 빨아 자주색 물감을 들여 바위 위에 널어 말렸
으며, 그 비단으로 댕기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서울 장안이나 동묘 주변에 열렸던
여인시장에 팔아 생계를 꾸렸다. 그때 여기서 비단을 물들이거나 빨래를 할 때 샘물도 그녀의
처지에 피눈물을 흘렸는지 저절로 붉은 색으로 염색이 되었다고 하며, 세상에서는 송씨의 그
런 애환을 위로하고자 함인지, 자주색으로 물들인 샘을 자지동천(자주동천), 자주우물이라 부
르고 바위는 자주바위라 불렀다. 또한 샘터 일대를 자지동(紫芝洞, 자주동), 자줏골, 자주동
이라 불렀다.
이렇게 보면 이름은 많은 것 같지만 정식 이름은 자지동천, 자지동이며 여기서 자지는 거시기
한 그것이 아니라 뿌리가 자주색을 띠는 풀인 지초(芝草)를 말한다. 지금이야 샘이 있는 바위
윗쪽에 잡초만 자라고 있지만 옛날에는 그 지초가 무성히 자라고 그 바위 틈으로 맑은 물이
흘렀다고 전한다.

옛 기록에도 이곳 이름은 그렇게 거시기하게 나오지만 이 땅의 정서상 상당히 예민한 단어인
지라 당당히 쓰기에는 좀 쑥쓰러운 감이 있어 요즘은 자주동천, 자주동샘으로 희석해서 많이
부른다. 비록 단어는 거시기해도 뜻은 그렇지가 않거늘 마치 홍길동(洪吉童)이 아버지를 아버
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자지동천은 자주바위 밑에 파인 'U'자 모양의 돌우물로 왜정 때까지 물이 나왔다고 한다. 허
나 왜정 이후 개발의 칼질로 낙산의 계곡과 물이 씨가 마르면서 죽은 샘물이 되었다. 송씨를
비롯하여 낙산 동쪽에 살던 여인들이 빨래나 염색/식수용으로 사용하던 샘물로 옛날의 정취는
95% 이상 증발되고 겨우 일부만 남아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샘터를 밑도리에 둔 자주바위 피부에는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 쓰인 바위글씨가 있다. 자
지(紫芝) 2글자는 좀 퇴색되긴 했으나 두 눈으로 살피는데 그리 어려움은 없으며, 동천(洞泉)
2자는 꽤 선명하여 글씨에 생동감이 넘쳐 흐른다. 글씨를 쓴 이는 누군지는 전해오는 바는 없
으나 조선 후기에 단종과 정순왕후를 추모하는 선비가 새긴 것으로 여겨진다.


▲  흔적만 남아있는 자지동천 샘터(자주동샘)

▲  자지동천 바위글씨의 위엄
글씨에 검은색을 입혀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글씨의 크기는
세로 72cm, 가로 185cm이다.

▲  자지동천 거북바위

자주바위 윗쪽에는 거북이를 조금 닮은 듯한 커다란 바위가 있다. 하여 바위 이름도 거북바위
인데 그에게도 정순왕후의 한이 담겨져 있다.
정업원에서 먼저 간 남편(단종)을 생각하며 눈물로 잠을 이루던 어느 날, 단종이 거북이를 타
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이상히 여기며 아침 일찍 비단을 빨러 자지동샘에 왔는데 어
제까지만 해도 없던 이 거북바위가 불쑥 나타났다고 한다.
물론 바위가 갑자기 불쑥 나타날 리는 없다. 허나 그런 꿈을 꾼 이후, 빨래를 널고 잠시 쉬면
서 바위를 살펴보니 꿈의 영향인지 거북과 비슷하게 생긴 것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 사연을
동네 아낙들과 승려들에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 이야기가 새끼에 새끼를 치면서 그런 전
설로 변해간 것이다.

※ 비우당, 자지동천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5번 출구), 1/6호선 동묘역(10번 출구), 6호선 창신역(4번 출구)
  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쌍용아파트2단지 입구에서 하차, 도로 남쪽 밑에 나무가
  무성한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 아랫쪽에 있다.
* 낙산공원(낙산 정상)에서 창신역 방면으로 도보 7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9-471 (낙산공원 관리소 ☎ 02-743-7985~6)


▲  삼군부총무당(三軍府總武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7호

낙산 동북쪽이자 한성대 바로 서쪽에는 삼선공원(삼선상상어린이공원)이 있다. 그 안에는 고
색이 창연한 조선시대 관아 건물이 하나 숨겨져 있으니 그가 삼군부총무당이다.

삼군부(三軍府)는 국방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1865년에 흥선대원군이 신설했다. 비변사(
備邊司)를 의정부에 통합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군령 최고 기관으로 무부(武府)라 불리기도 했
는데 광화문 남쪽 예조(禮曹) 자리에 훈국(訓局)의 신영(新營), 남영(南營), 마병소(馬兵所)
및 오영(五營)의 주사서(晝仕所)를 합쳐 삼군부라 칭했으며, 1867년 4월에 완전한 조직을 갖
추었다.
의정부(議政府)와 대등한 지위를 누리며 군무(軍務)와 군비 강화를 비롯한 숙위 문제와 변방
관리를 맡았으나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에게 크게 꺾이면서 1880년 12월 폐지되고 만다.

삼군부총무당은 삼군부가 한참 자리를 잡던 1868년에 현재 광화문 정부종합청사에 세워진 것
으로 삼군부의 중심 건물이다. 양쪽으로 덕의당(德義堂)과 청헌당(淸憲堂)을 거느렸으며, 삼
군부가 폐지된 이후,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관청으로 쓰였다가 갑오개혁(甲午改革) 이
후에는 시위대(侍衛隊) 청사로 쓰였고, 1910년부터 1926년까지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 사령
부로 사용되었다.
허나 순종(純宗)이 1926년 붕어한 이후, 보병대는 폐지되었고, 1930년 왜정(倭政)이 쓸데없이
심술을 부리면서 삼군부의 중심인 총무당을 지금의 자리로 내쫓았다. 또한 덕의당은 부셔버렸
으며, 청헌당(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호)만 홀로 남아있던 것을 1967년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로 보내버렸다.

▲  삼군부총무당의 뒷모습

▲  위에서 본 모습

총무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길쭉한 팔작지붕 건물로 중앙 3칸은 대청이고 양 옆구리에 1
칸짜리 온돌방이 있으며 그 옆에는 광이 있다. 조선이 이 땅을 거쳐간 가장 최근의 나라이지
만 왜정의 심술이 극심해 제대로 남은 관아 건물이 별로 없으며 서울 같은 경우는 총무당과
청헌당이 유일하다. 설령 남기더라도 생색내기용으로 거의 1~2동만 남기는 수준으로 망국의
관청을 완전 고자 수준으로 만들었다. (삼군부 같은 경우는 1동만 자리를 지키게 했음)
뒷끝이 쿨해야 서로가 좋거늘, 왜는 섬나라 사람의 비좁은 본성 때문에 그러지를 못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두고두고 반감만 잔뜩 샀던 것이다.

총무당 주변은 1970년대 이후 동네 주민을 위한 공원이 조성되었고, 어린이놀이터를 더 확장
하여 완전한 어린이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이제와서 총무당을 제자리로 돌리기는 좀 힘들겠지만 따로 놀고 있는 청헌당과는 다시 하나로
이어줘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니까 청헌당이 이곳으로 오던지 아니면 총무당이 육사로
가던지 해서 둘을 같이 있게 해주면 보기도 좋을 것 같다. 덕의당은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복
원을 해서 옆구리에 붙여주면 될 것이다. 비록 망국의 관청이긴 하나 한때 조선의 군정(軍政)
을 관장했던 현장으로 이렇게 동네 구석 어린이공원에 분산되어 처박혀있는 것도 한편으로는
좀 딱해 보이기도 한다.


▲  녹음(綠陰)이 우거진 삼선공원
삼군부총무당을 끝으로 낙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삼군부총무당(삼선공원) 찾아가기 (2017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3번 출구를 나와서 1분 가면 삼선교로4길(삼군부총무당을 알리
  는 어두운 색깔의 이정표가 있음)이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 8분 정도 가면 한양도성과 장
  수마을 표석이 나오면서 좌우로 갈리는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성곽과 반대 방향인 왼쪽
  으로 2분 가면 삼선공원이 나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1가 1-13,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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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10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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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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