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서원'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6.01.23 천원짜리 지폐에도 나왔던 우리나라 서원의 영원한 성지, 안동 도산서원
  2. 2013.10.15 서울의 듬직한 뒷산이자 지붕, 도봉산 나들이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계곡)
  3. 2012.12.18 우리나라 서원의 떠오르는 성지 ~ 달성 도동서원 (다람재, 이노정) 1
  4. 2012.09.24 지리산에 포근히 감싸인 고을 ~ 산청 역사기행 (문익점 목면시배유지, 남명조식유적)

천원짜리 지폐에도 나왔던 우리나라 서원의 영원한 성지, 안동 도산서원

 


' 우리나라 서원의 영원한 성지,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 '
도산서원 현액
▲  전교당에 걸린 도산서원 현액 - 한호(韓濩, 한석봉)의 글씨이다.


 

여름 제국(帝國)이 봄을 몰아내고 한참 성하(盛夏)의 기반을 닦던 6월 한복판에 우리나라
서원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는 안동 도산서원을 찾았다.

아침 일찍 부산에서 동대구행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에서 팔공산 은해사(銀海寺)로 넘어갈
요량이었으나 변덕이 발동하면서 안동(安東)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경북 한복판에 자
리한 안동으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안동 제일의 고찰, 봉정사(鳳停寺)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도산서원 가는 67번
시내버스가 막 기지개를 켜고 있길래 다시 변덕을 발휘하여 그곳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안동 외곽으로 가는 안동시내버스 대부분은 안동역(교보생명)에서 출발하는데 도산서원으
로 가는 버스는 지독한 유명세와 달리 겨우 1일 5회 다닐 뿐이다. 때마침 그 시간과도 맞
아 떨어지니 아무래도 오늘은 그곳과 인연이 있는 듯 하다.

어쨌든 67번 버스를 타고 거의 50분을 달려 도산서원에 도착했다. 서원 입구에는 여느 관
광지와 마찬가지로 조촐하게 가게와 식당이 터를 닦고 있는데, 평일이라 무척이나 한가하
다. 여기서 서원까지는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산책로를 6분 정도 걸으면 되며, 매표소에서
소정의 입장권을 구입해야 된다. 즉 유료의 땅이다.


▲  녹음에 젖은 도산서원 산책로


 

♠  도산서원 가는 길

▲  낙동강을 가르는 키 작은 다리
다리의 길이는 길지만 그 높이는 수면에 닿을 정도로 작다. 안동호의 수량이
넘치거나 폭우가 내리면 꼼짝없이 통제의 비운을 맞으며 다리 주변은
물속에 잠긴다. 저 다리를 건너면 시사단이 있는 의촌리이다.


도산서원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는 중간에 낙동강(落東江)을 옆구리에 낀다. 허나 강물은 저 밑에
흐르고 소나무가 운치를 머금은 산책로는 언덕 높이 둘러져 있으니 보기와 달리 그리 가깝지는
않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안동의 지도를 크게 바꿔놓은 안동댐의 영향이 크다. 댐이 들어서
면서 도산면과 예안면의 많은 땅이 희생되었고, 그 수몰지를 발판으로 안동호(安東湖)가 들어섰
으니, 서원 앞은 안동호의 상류가 된다. 다행히 도산서원은 높은 곳에 터를 잡아 강제 이주를
면했으나 서원으로 가는 길과 강 주변 풍경은 약간의 변화를 겪어야 했다.


▲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서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조망이 일품인 천광운영대가 있다. 이곳은 3글자로 간단히 운영대(雲影
臺)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퇴계 이황이 '빛과 구름 그림자가 같이 돌고 돈다<天光雲影共徘徊
>'
는 주자(朱子)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란 시에서 따온 이름이다. 퇴계는 그가 세운 도산서당
을 엄숙한 학습의 장으로 꾸미면서 하늘의 묘용(妙用)을 깊이 생각하고 자연의 심오한 뜻을 깨
우치는 장소로 삼았다.

이곳에 올라서면 낙동강을 비롯하여 산에 둘러싸인 강 건너 지역(의촌리)이 훤히 두 눈에 바라
보이며, 바로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이다.


▲  천연대(天淵臺)

도산서원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왼쪽 강변 낭떠러지에 천연대가 있다. 이곳은 퇴계 선생
이 심성수양을 위해 산책을 즐기던 장소라고 한다. 천연대란 이름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하늘
에는 새가 날고 물에는 물고기가 뛰어 논다<연비려천 어약우연(鳶飛戾天 魚躍于淵)>'
에서 인용
했다고 하며, 천광운영대와 달리 소나무가 벼랑까지 뿌리를 내려 운치를 머금게 한다.


▲  강 건너로 보이는 시사단(試士壇)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3호

천연대와 운영대를 비롯하여 강과 접한 부분에서 낙동강 건너를 바라보면 잡초가 무성한 들판에
유독 동그랗게 솟은 높다란 언덕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꼭대기에는 기와를 얹힌 비각(碑閣)
이 있는데, 그가 바로 시사단이다.

시사단은 1792년(정조 16년) 정조(正祖) 임금이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자 각신<閣臣, 규장각(奎
章閣) 관리> 이만수(李晩秀)를 보내 도산서원 앞에서 과거시험의 하나인 별시(別試)를 치르게
했는데, 이를 기념하고자 비석을 세운 것이다. 비문(碑文)은 당시 재상(宰相)으로 있던 채제공
(蔡濟恭)이 썼다.

원래는 강가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안전을 장담못하게 되면서 1976년 높이 10m, 반경 10m의
동그란 언덕을 쌓고 그 위로 옮겼다. 지금은 안동호의 수량이 적어 들판의 인공 언덕으로 있지
만 만수(滿水) 때는 주변이 물로 채워져 하나의 조금만 섬을 이루며, 서원에서 강에 놓인 키 작
은 다리를 건너면 시사단으로 접근할 수 있다.


▲  녹음에 잠긴 늙은 느티나무
서원 유생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쉼터를 제공하던 정자나무로 지금은
관람/답사객들에게 그늘과 쉼터를 베푼다.

▲  열정(洌井)

느티나무 옆에는 우물정(井)자를 고스란히 닮은 '井' 모양의 우물이 있다. 우물의 이름은 열정
으로 이는 역경(易經)에 나오는 '정괘(井卦)','정렬한천식(井洌寒泉食)'의 우물의 뜻을 취하여
붙인 것이다. 도산서당 시절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식수로 사용되었으며, 물이 맑고
맛이 좋았다고 한다.

이 우물은 식수의 역할 외에도 다음의 숭고한 뜻도 담고 있다. '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따라가
지 못하고, 물을 길어도 줄지 않으며, 오가는 사람 모두가 즐겨 길어 마시는 것과 같이 사람들
은 주인 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두레박으로 길어 마시듯 자신의 노력으로 인격과 지식을 쌓
아 누구나 즐겨 마실 수 있는 샘물처럼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


현재 우물 안에는 물이 담겨져 있어 살아있긴 하다. 허나 우물의 보존 때문인지 아니면 죽은 우
물에 그냥 물만 형식적으로 넣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물을 속세로 끌어올릴 도구가 없어 거의 그
림의 떡 같은 우물이 되어버렸다. 현재 우물의 역할은 옆에 있는 현대식 수도시설이 대신 한다.


▲  조그만 한옥마을 같은 도산서원

* 우리나라 서원의 성지(聖地), 도산서원(陶山書院) - 사적 170호
우리나라 서원의 대명사이자 옛 1,000원권의 배경(현 1,000원권에는 계상서당이 나옴)인 도산서
원은 동방의 주자(朱子)로 추앙을 받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이 세운 도산서당(陶山
書堂)에서 비롯되었다.

퇴계는 1549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와 2칸짜리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독서
에 열중하며, 제자를 가르쳤다. 허나 제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반해 서당 건물은 이를
받쳐주지 못해 같이 지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더 넓은 새로운 서당을 짓기로 결심하고 제자들
과 주변을 물색하다가 현재 서원 자리를 발견하고 환호를 질렀다.
이곳은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인데다가, 밑에 강물이 흐르는 산수가 잘 어울리는 곳이었던 것이
다. 게다가 좌우 산자락도 적당히 감싸 안은 듯한 지형이라 산속에 궁색하게 박힌 계상서당과는
다르게 아늑하면서도 앞이 탁 트였다. 다만 장차 안동호가 들어설 것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너무
아래가 아닌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으니 이때가 1557년이다.

이렇게 터가 정해지자 서당을 짓기 위해 평소 인연이 있던 용수사(龍壽寺) 승려 법연(法蓮)에게
건축을 의뢰했다. 마침 퇴계는 공조판서(工曹判書)의 벼슬을 받아 서울로 올라왔는데, 설계도인
'옥사도자(屋舍圖子)'를 직접 그려 법연에게 보내 공사를 맡겼다.
허나 공사 과정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공사 중간에 법연이 입적(入寂)하면서 서둘러 같은 절
승려인 정일(淨一)에게 책임을 맡겼으며, 재정적인 어려움과 설계 변경으로 터를 잡은지 3년 만
인 1560년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서당 건축을 승려에게 맡긴 것은 살림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고 한다.
서당이 완성되자 퇴계는 벼슬을 그만두고 그곳으로 내려와 도산서당이라 이름 짓고 제자들을 열
심히 길렀다.

1570년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1572년 서당 뒤쪽에 상덕사(尙德祠)를 지어 그의 위패를 봉안했고
, 1574년 유림(儒林)들의 호응과 지원을 받아 서당 위쪽에 서원을 지었다. 그래서 서당과 서원
은 같은 곳에 있게 된 것이며, (이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도산서원이라 부름) 1575년 조정으로
부터 도산서원이란 사액(賜額)을 받았다. 전교당에 걸린 사액 현판은 조정에서 내려보낸 것으로
석봉 한호(石峯 韓濩)가 쓴 것이다.
서원은 1576년 최종 완공되어 퇴계의 위패를 봉안했으며, 영남지역 유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
였다.

임진왜란 때는 다행히 화를 면했으며, 1615년 퇴계의 제자인 월천 조목(月川 趙穆)을 배향했고,
1792년 정조 임금이 규장각 관리를 보내 치제(致祭)를 내리면서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열었다.
그 기념으로 1796년 강 건너편에 시사단을 지었다. 그리고 1819년 장서를 보관하는 동광명실을
지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야심작 서원철폐령 때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로 그 건재를 과
시했으며, 1930년에는 서광명실(西光明室)을 중건했고, 1969년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복원/정리
사업이 진행되어 1970년 유물전시관인 옥진각을 세웠다. 2003년에는 장판각(藏板閣)에 담겨있던
목판 2,790장을 인근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넘겼다.

우리나라 서원의 성지로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은 몰라도 도산서원은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3살짜리 어린애도 다 안다는 퇴계 이황과 인연이 깊은 곳이고 한때 1,000원권의 배
경지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선비와 양반문화의 고장 안동에서 하회마을, 봉정사와 더불어 꼭 들
려야 직성이 풀린다는 안동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낙동강이 서원 바로 아래까지 들어오며, 주변
풍경이 아름다워 제대로 승경(勝景)을 이룬다.

서원의 구조는 농운정사와 역락재 등 학생들의 기숙사와 도산서당이 앞에 포진해 있고, 중간에
는 교육 공간인 전교당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이 있다. 제일 뒤쪽에는 퇴계의 위패를 모신 상덕
사가 있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띈다. 또한 가장 밑에 있는 역락재에서 전교당, 상덕사
로 올라갈 수록 그 중요성만큼이나 지형이 높아진다.

서원의 건물 중 전교당, 상덕사와 삼문은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 도산서원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① 안동까지 철도 이용
* 서울 청량리역에서 안동행 열차(원주, 제천, 영주 경유)가 1일 7회 떠난다.
* 부산 부전역(태화강, 경주 경유)과 동대구역에서 안동행 열차가 1일 3회 떠난다.
* 안동역 서쪽 교보생명(옛 시외터미널앞)에서 도산서원을 경유하는 안동시내버스 67번이 1일 5
  회 운행한다. (안동 출발 9:40, 10:50, 13:10, 13:50, 16:10)
* 67번 시내버스는 노선이 복잡하다. 반드시 서원 경유를 확인바라며, 차를 놓치거나 시간이 맞
  지 않으면 온혜리 방면 67번 버스(1일 17회, 반드시 행선지 요망)를 타고 도산서원3거리에서
  도보 25분
② 안동까지 버스 이용
* 동서울터미널에서 안동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안동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고양, 부천, 성남, 수원, 인천, 원주, 대전(복합), 청주, 제천에서 안동행 직행버스 이용
* 동대구에서 안동행 고속버스가 20~30분 간격, 대구북부에서 안동행 직행버스가 10~30분 간격
  으로 떠난다.
* 부산, 울산, 구미, 창원(마산), 포항에서 안동행 직행버스 이용
* 안동터미널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시내버스(0, 0-1, 1, 11, 46, 80번 등)를 타고 안동역(교보
  생명, 옛 안동터미널)에서 도산서원 경유 67번 시내버스로 환승
③ 승용차로 가는 경우
* 중앙고속도로 → 서안동나들목 → 안동시내 → 청량산 방면 35번 국도 → 도산서원3거리에서
  우회전 → 도산서원 주차장

※ 도산서원 관람정보 (2016년 1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1,500원 (30인 이상 단체 1,300원) / 청소년,군인 700원 (단체 600원) / 어린
  이 600원 (단체 500원)
* 주차비 : 소형차 2,000원 / 대형차 4,000원
* 관람시간 : 9시~18시 (겨울에는 17시까지)
* 소재지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 054-840-6576, 6599)
* 도산서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도산서원 전교당


 

♠  도산서원 둘러보기 (1) 역락서재, 도산서당

▲  역락서재(亦樂書齋) 외부

서원 앞쪽에 배치된 역락서재(역락재)는 도산서당과 비슷한 시기인 1560년대에 지어진 건물이다.
서원 제일 아래쪽에 위치하며, 담장에 둘러져 거의 독립된 공간으로 자리한다.
역락서재는 서당 학생들의 기숙사로 퇴계의 제자인 정사성(鄭士誠)이 입학할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서 기증했다. 온돌방의 서쪽 반 칸을 비워 아궁이를 설치했으며, 현판은 퇴계의 친필이다.
한때 학생들로 시끌거렸을 역락재,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문화유산의 귀한 몸이 되면서 어
느 누구도 방에 들어가 옛날처럼 숙식을 할 수 없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는 먼지만 흐르는 세
월만큼이나 쌓여간다.


▲  농운정사(隴雲精舍)

농운정사는 도산서당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학생들의 기숙사이다. 퇴계가 직접 설계를
했고 용수사 승려인 법련이 세운 것으로 독특하게도 '工'자 모양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제자들
에게 열심히 공부할 것을 권장하는 뜻에서 그리 지은 것이라고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말리지 않겠으나 저들 가운데 퇴계의 뜻을 이어받아 진정 나라와 백성
에 헌신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다. 대부분 썩어빠진 성리학(性理學)에 빠져 뜬구름 같은
사상이나 논하고 앉았고, 권력과 부에 몰두한 나머지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으며, 명나라에 지극
한 사대(事大)를 벌이고 부국강병을 내팽겨쳐 끝내 나라를 망쳐놓은 이들이 많은 수를 차지할
것이다. 또한 유생이 된 양반들은 먹고 살 걱정은 없으니 서원에 처박혀 평생 공부만 하며 헛된
사상이나 논하다 세상을 마친 이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농운정사의 농은 '隴(땅이름 롱)' 대신에 '膿(고름 농)'을 쓰기도 한다.

▲  농운정사 동편 시습재

▲  농운정사 서편 관란헌

농운정사의 동편 마루는 시습재(時習齋)라 하여 학습의 공간으로 삼았고, 서편 마루는 관란헌(
觀瀾軒)이라 하여 휴식의 공간으로 삼았다.


▲  서원의 핵심부로 안내하는 중앙 계단길

▲  도산서당(陶山書堂)

서원 동쪽에 자리한 도산서당은 도산서원의 모태가 되는 곳으로 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깊은
건물이다. 
1557년 용수사 승려 법련과 정일에게 짓게 하여 1560년에 완성되었으며, 퇴계가 직접 설계를 했
다고 전한다. 퇴계는 여기서 제자들과 같이 먹고 자며 그들을 가르쳤는데, 그가 세상을 뜨자 제
자와 유생들의 발의로 서당 뒤쪽에 서원을 지어 퇴계의 위패를 봉안했고,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으면서 지금의 도산서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서원이 서당과 붙어있어 따로 보기도 하지만 엄
연한 서원의 일원이다.

서당 건물은 '一' 형태로 3칸 크기이며, 부엌과 온돌방,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부엌 반
칸과 마루 1칸을 더 달고, 건물 면에 퇴를 놓아 내었다. 덧지붕을 달고 마루를 길게 했으며, 방
은 완락재(玩樂齋),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했는데, 이는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지
니지 못해 바위에 깃들어 조그만 효험을 바란다'
는 뜻, 즉 쉽게 말하면 공부에 자신이 별로 없
으니 바위에 기원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툇마루가 넓어서 마루에 앉거나 신발을 벗고 마루에 들어가 쉴 수 있으며, 단 방에는 들어가면
안된다. 건물이 소박하여 서원 시절의 지어진 건물보다 은근히 정감이 쏟아진다.


▲  몽천(蒙泉)

서당 앞에 있는 몽천은 네모난 우물로 서당 및 서원 사람들의 식수원이다. 우물 이름은 몽천에
는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 간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데, 이는 역경(易經)의 몽괘(蒙卦)
에서 의미를 따서 붙였다. 서원 밖에 열천과 마찬가지로 물은 고여 있지만 먹을 수는 없다.

도산서원은 건물부터 우물, 나무, 강변에 이르기까지 제자의 올바른 길을 바라며 걱정하는 스승
퇴계의 지극하고도 따스한 마음이 듬뿍 함유되어 있어 답사객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실제로
그는 제자를 무척 잘 챙겨주었고 손수 어루만져 주었다고 한다. 자고로 이런 스승이 많아야 세
상이 밝아지는 법인데 오늘날에도 그런 스승은 가뭄에 콩 나듯 하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  도산서당의 마루인 암서헌
오랜 세월의 때가 곱게 깔려 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이 보내온 금송(錦松)
 이 나무는 박정희가 청와대 집무실 앞에 심은
 것으로 1970년 12월 이곳을 방문했을 때 손수
 옮겨 심었다.


▲  낙동강 바람만이 잠시 스치고 지나는 도산서당 뜨락

▲  도산서당 앞에 자리한 연못 - 정우당(淨友塘)

도산서당 앞에 네모난 연못 정우당은 연꽃의 보금자리이다. 퇴계는 연꽃을 꽃 중의 군자라고 칭
송하며 그들의 터전을 만들었는데, 진흙탕에 뿌리를 내려 물을 깨끗히 보듬고, 속은 비고, 줄기
는 곧아 남을 의식하지 않는 청정한 연꽃처럼 되기를 제자들에게 주문하고 있다.


▲  연잎 그늘에 의지해 햇살을 피하고 있는 아름다운 수련(睡蓮)

▲  매화나무 <매화원(梅花園)>
퇴계는 서당 옆에 매화나무를 심어 매화원으로 꾸몄다.
매화는 선비들이 좋아하는 4군자의 하나이다.

▲  절우사(節友社)
도산서당 동쪽에는 냇물이 흐르는데 그 건너편에 '절우사'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곳은 퇴계가 매화, 대나무, 국화, 소나무 등을 심어 가꾸던 서당의
조촐한 정원으로 지금 있는 나무들은 근래에 식재된 것이다.


 

♠  도산서원 둘러보기 (2) 전교당 주변

▲  전교당의 정문인 진도문(進道門)

도산서당에서 서원 중앙에 나 있는 계단길을 오르면 활짝 열린 진도문이 나온다. 서당과 서원을
잇는 공간으로 양 영역을 구분 짓는 역할을 하며, 문을 들어서면 서원의 핵심인 전교당이 모습
을 비춘다.


▲  전교당에서 굽어본 진도문의 뒷모습

▲  진도문에서 내려다본 서원 중앙 계단

▲  진도문 우측의 서광명실(西光明室)

서광명실은 동광명실의 역할을 분담하고자 1930년에 지은 누각식 건물이다. 이곳에는 유학자의
여러 문집과 근래에 낸 책을 비롯하여 왜국(倭國) 유학자 손시교쿠수이(村士玉水)가 쓴 퇴계서
초(退溪書抄)가 있어 퇴계의 학문이 왜열도 유학에 큰 영향을 던졌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보
관된 서적들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있다.


▲  진도문 좌측의 동광명실(東光明室)

동광명실은 원래 광명실이라 불렸다. 그러다가 진도문 우측에 또다른 광명실을 만들면서 이를
구분하고자 편의상 동/서광명실이라 부른다.
이 건물은 서원에 소장된 서적을 보관하고 열람하는 공간으로 지금의 도서관으로 보면 된다. 서
광명실과 마찬가지로 누각식 건물이며, 현판은 퇴계의 친필이다. 건물을 누각식으로 지은 것은
습한 기운으로부터 서적을 보호하기 위함으로 이는 고구려(高句麗)가 만든 국제적인 건축 양식
'부경'과 비슷하다.

지금의 동광명실은 1819년에 지어진 것으로 조선 역대 제왕의 내사서적(內賜書籍)과 퇴계가 보
던 수택본(手澤本)을 보관했다. 이곳의 서적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가 있다.


▲  동광명실에 걸린 북
근래에 새로 달아놓은 북으로 수업시간과 여러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  동재(東齋) = 박약재(博約齋)
도산서원 학생의 기숙사로 박약은 학문을 넓게 배워 예로 행하라는 뜻이다.
건너편으로 서재를 바라보고 있는데, 서재 역시 기숙사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동재에 머무는 학생이 서재 학생보다 더 선배라는 점.

▲  서재(西齋) = 홍의재(弘毅齋)
도산서원 학생의 기숙사로 홍의(弘毅)란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되니, 그 책임은 무겁고 도학의 길은 멀다는 뜻이다.

▲  알맹이가 빈 장판각(藏板閣)

전교당 좌측에 자리한 장판각은 서원에서 낸 서적의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다. 벽체 사방을 나무
판벽으로 만들고 바닥은 우물천정을 깔아 습기의 침입에 대비했다. 바닥도 지면에서 띄우고 전
면 위쪽에는 살창을 내어 통풍을 배려했다.
이곳에는 퇴계의 문집(文集)과 유묵(遺墨), 선조어필(宣祖御筆), 병서(屛書) 등 2,790장의 판각
이 있었으나 보존을 위해 광명실 서책과 함께 한국국학진흥원으로 넘겼다. 현재는 판각이 있던
텅 빈 서장(書欌)만이 남아 옛날을 그리워 한다.


▲  도산서원 전교당(典敎堂) - 보물 210호

도산서원은 서당을 포함하여 몽땅 사적 170호로 지정되어 있다. 허나 서원의 중심 건물인 전교
당과 상덕사는 별도로 분리하여 보물의 지위를 안겨주었다.
전교당은 서원의 교육 공간으로 원장실과 강당(講堂)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진도문을 들어서면
나그네의 기가 바로 오므라들게끔 건물을 받치는 기단(基壇)을 높여 위엄의 정도를 높였다. 성
리학 숭배자들은 짝수 칸을 싫어한다고 하던데 이를 무시하고 정면 4칸, 측면 2칸의 짝수 칸으
로 지었다.
건물 정면 3칸은 문짝을 달지 않은 개방된 마루로 뒷면과 측면은 각 칸 마다 2짝의 여닫이 창호
를 달았으며, 문이 굳게 닫힌 서쪽 1칸은 원장의 거실로 한존재(閑存齋)라 불린다.

이 건물은 1574년에 지어졌으며, 1969년 보수했다. 전교당 정면의 도산서원 현판은 1575년 조선
조정이 도산서원을 서원으로 인정하면서 내린 것으로 글씨로 유명한 한석봉(韓石峯)의 글씨이며,
정조 임금의 사제문(賜祭文)을 비롯한 다양한 현판이 내부를 수식한다. 개방된 마루는 앉아서
쉴 수 있으나, 신발을 벗고 내부로 들어가는 건 삼가해주기 바란다.

▲  한존재 현판

▲  전교당 현판


 

♠  도산서원 둘러보기 (3) 나머지 부분

▲  상덕사 삼문(尙德祠 三門) - 보물 211호

전교당 뒤쪽에는 퇴계와 월천 조목의 위패가 봉안된 상덕사가 자리해 있다. 경내에서 가장 높고
뒤쪽에 위치한 이곳은 서원의 사당으로 사당은 보통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으나 이곳만큼은 팔작
지붕으로 차별화를 두었다. 앞면 반칸은 퇴칸으로 개방하고 퇴칸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으며, 나
머지 1칸 반은 앞면에만 문을 달았다. 앞면을 제외한 3면은 벽으로 두르고 내부는 하나의 통간(
通間)으로 만들었다.
상덕사는 사당이다 보니 제사일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 굳게 입을 봉하며 좀처럼 열릴 줄을 모
르는 고색이 자욱한 태극마크의 삼문 앞에 곱게 발을 돌릴 수 밖에는 없다.

삼문은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내삼문(內三門)이라 불리기도 한다. 상덕사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계단 때문에 문 안쪽과 높낮이의 차이가 생기자 앞면 기둥을 1단 낮은 자리에 세
웠다. 그래서 기단 아래까지 기둥이 내려오는 특이한 형태를 띄는 것이다.


▲  전사청(典祀廳)

상덕사 서쪽 담장 너머에 자리한 전사청은 상덕사 제사 때 쓰일 제수(祭需) 음식을 만들고 보관
하는 공간으로 2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 건물(상덕사와 가까운)을 주청(酒廳)으로 하
고 서쪽 건물은 제사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로 삼았다. 사진에 보이는 방(문이 열려있
는 공간)은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儒士)가 목욕재계하고 하룻밤 지내는 곳이며, 마루에서 제상
을 보관했다.


▲  고직사(庫直舍)

전교당 서쪽에 자리한 고직사는 서원 관리인의 숙사로 서원 관리 및 학생들 식사와 상덕사 제사
를 준비하던 공간이다. 관리인은 주로 일반 백성이나 노비가 맡았는데, 여염집과 비슷한 모습으
로 남북으로 긴 'ㅁ'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방 7칸과 창고, 부엌 등 21칸 규모이다.
서원 경내에는 고직사가 2개 있는데, 전교당 서쪽의 고직사를 상고직사(上庫直舍), 농운정사 뒤
쪽 고직사를 하고직사(下庫直舍)라 구분하기도 한다.

부엌은 별도의 공간을 두지 않고 전사청과 연결되는 동쪽 통로와 하고직사로 통하는 남쪽 통로
옆에 각각 배치시킨 점이 주목을 끈다.

▲  고직사의 빛바랜 부엌들

먼지로 덮힌 솥뚜껑을 열면 모락모락 연기를 풍기는 기름진 쌀밥이 나올까? 하지만 현실은 밥은
커녕 먼지 밖에 없다. 아궁이도 불에 태울 땔감이 없어 멀뚱멀뚱 입만 열고 있다. 저녁 연기를
풍기던 왕년을 그리는 그들의 모습 앞에 막연히 초고속으로 변하는 사회에 매정함이 보인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솥뚜껑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참으로 쓸쓸해 보인다.

▲  고직사의 창고들
쌀과 여러 물품을 보관하던 공간으로 습기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바닥을 땅에서
약간 띄워 놓았다. 현역에서 물러나 굳게 입을 봉한 창고에는
헤아리기 힘든 고색의 때가 잔뜩 묻혀있다.

▲  옥진각에서 상고직사로 올라가는 계단

▲  퇴계의 유품과 서원의 보물이 담긴 옥진각(玉振閣)

역락서재 옆에 자리한 옥진각은 퇴계의 유품과 서원의 보물이 담긴 유물전시관으로 1970년에 지
어졌다. 외부는 한옥으로 내부는 현대식으로 되어 있는데, 건물의 이름인 옥진은 '집대성 금성
옥진(集大成 金聲玉振)의 줄임말이다.
이곳에는 퇴계가 생전에 쓰던 베자리와 베게, 안석(案席)을 비롯하여 백자타호(白磁唾壺), 투호
(投壺), 매화가 새겨진 매화벼루, 옥으로 된 서진(書鎭), 벼루집, 서궤(書櫃), 노년 시절에 짚
고 다닌 청려장(靑藜杖)이란 지팡이, 꽃무늬를 조각한 매화 등이 있으며, 퇴계가 설계하고 제자
이덕홍(李德弘)이 만든 혼천의(渾天儀)가 있어 퇴계가 과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음을 알려준
다. 옥진각 내부는 아쉽게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그곳 유물 관련 사진이 일절 없다. 몰래라도
담으려고 했는데 눈치가 너무 심해서...


▲  도산서원을 뒤로 하며

서원은 유학과 관련된 존재라 절에 비해 재미와 볼거리, 화려함이 많이 떨어진다. 듣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나는 유학의 중심지로 오늘날의 사립 상급학교라고 보면 될 듯 싶다.
향교를 나온 유생들은 학문과 출세를 위해 서원에 진학했고, 서원에서 학문을 갈고 닦아 성균관
(成均館)으로 진학하거나 과거에 응시했다. 또한 서원에 눌러앉아 공부를 하거나, 휼륭한 스승
을 찾아 이 서원, 저 서원 돌아다니는 철새도 적지 않았다. 허나 서원은 엄연한 양반의 공간이
다. 유학을 기본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 조정에서는 유학의 보급과 백성들 교화를 위해 서원에
서적과 노비, 토지, 자금을 두둑히 지원해 주었고, 서원 공사에 백성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하
지만 서원에 죽치고 앉는 유생의 수가 늘고 그 머릿수가 느는 만큼 경비는 늘어난다. 그만큼 국
가의 지원도 늘어나야 되는데, 이 모두 백성들의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이다.

서원 유생들은 군역의 의무도 없고, 납세의 의무도 없으니 그저 공부한다는 구실로 서원에 죽치
고 앉으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지나치게 유학 이론에 목숨 걸며 이론 논쟁이나 하고 앉았고,
시간이 지날 수록 백성을 위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공간이 아닌 백성을 등처먹고 그들 위에 군림
하며, 쓸데없는 이념 논쟁이나 일삼는 밥버러지 공간이 되었다. 심지어 화양서원(華陽書院) 등
은 큰 조직을 이루며, 관아에 지원을 요구하고 대놓고 백성들을 갈취했다.
그렇게 민폐를 끼치며 독버섯처럼 성장한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정리사업에 보기 좋게 철퇴
를 맞고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47개만 간신히 살아남게 된 것이다.
나는 서원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재미도 없고, 철저히 유학과 관련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관심
이 적은만큼이나 아는 것도 적다. 그래서 서원에는 잘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꿩 대신 닭으로 찾아갔던 도산서원에서 버스 시간 관계로 거의 2시간을 머물러 있었다. 도산서
당 툇마루에 앉아 쉬기도 했고, 전사청 마루에 벌러덩 누워 잠을 청하기도 했으며, 천연대 벤치
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도산서원 초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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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듬직한 뒷산이자 지붕, 도봉산 나들이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계곡)

 

' 서울 도봉산(道峯山) 나들이 '
(자운봉, 포대능선, 만월암, 도봉서원 주변)

▲  도봉산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험준한 도봉산 포대능선

▲  자운봉(紫雲峰)고개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봄이 한참 무르익던 5월 노동절에 옆동네 방학동(放鶴洞)에 사는 후배와 도봉구(道峰區)의 든든
한 뒷산인 도봉산을 찾았다.
도봉산 141번 종점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도봉서원과 도봉산대피소를 거쳐 산중턱에 자리한 천축
사(天竺寺)에서 1시간 정도 머물렀다. 그런 다음 마당바위를 거쳐 각박한 산길을 개미처럼 올라
자운봉고개에 이른다. 고개 직전에 도봉산의 주요 봉우리인 만장봉(萬丈峯)과 선인봉(仙人峰)이
있는데, 죄다 바위 봉우리라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그래도 올라갈 사람은 기를 쓰고 올라감)
자운봉고개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남쪽 주능선을 따라가면 칼바위와 오봉, 우이암
으로 이어지며, 북쪽으로 가면 포대능선을 거쳐 사패산과 의정부(議政府)로 통한다.

자운봉(740m)은 도봉산(道峯山)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봉우리로 도봉산의 실질적인 정상이다.
험준한 외모 탓에 출입이 통제되어 있는데, 통행금지 안내문을 쿨하게 무시하고 봉우리로 오르
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도봉산의 정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포대능선을 비롯한 주능선은 도봉산의
지붕으로 북쪽은 멀리 사패산까지, 남쪽은 우이암을 거쳐 우이동(牛耳洞)까지 이어진다.


▲  자운봉고개에서 바라본 의정부 시내 (건너편 산은 수락산)

◀  순도 100% 바위 봉우리인 도봉산의
머리, 자운봉의 위엄

자운봉고개에서 포대능선으로 진입했다. 마치 학이나 용의 등에 올라탄 듯, 능선 양쪽으로 천하
가 눈 아래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니 조망 또한 천하 일품이다. 수락산과 오봉 등 주변의 기라
성 같은 산들도 알아서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하게 다가오니 도봉산도 참 큰 산이긴 큰 산인 모
양이다. <그래봐야 북한산(삼각산), 용문산, 태백산,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백두산 형님 앞
에서는 고개도 못듬>

포대능선은 처음에는 길이 착하다. 그러다가 10분 정도 가면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여기서 왼
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북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같다. 허나 오른쪽 길이 진정한 포대능
선 길이며, 왼쪽 길은 능선에서 조금 떨어진 구간이다. 그래서 빨리 가려는 생각에 오른쪽 길을
택했는데, 지금까지 보였던 순한 양에서 악한 이리의 모습을 보이며, 등산객을 당황하게 한다.
코스가 완전 지옥이기 때문이다.


▲  포대능선 남쪽 능선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오봉과 여성봉, 양주 장흥면 지역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남쪽 <칼바위와 우이암, 멀리 북한산(삼각산)까지>

포대능선 남쪽 능선 길은 산길인지 지옥의 길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극악의 수준이다. 산길
에 박힌 철난간과 철봉이 아니면 거의 지나가기가 힘든 구간으로 그들에게 의지해 조금씩 움직
이는데, 완전 손에 땀을 쥐게 하며, 다리 밑은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라 간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다. 송곳처럼 뾰족한 바위 위를 갈 때는 발바닥도 아프다고 난리를 친다. '우악~~ 이런 길
이 다 있다니..? 지옥이 따로 없네!!'

산길의 경사도 갑자기 몇십 척을 쑥 내려가더니 다시 몇십 척을 쑥 올라가는 미친 형식으로 높
이의 차도 심하다. 산길의 거리는 고작 1리도 안되지만 그 구간을 지나 716m 봉우리까지 거의
30분 정도 걸린거 같다. 도봉산을 그래도 만만하게 봤건만 이런 미친 구간이 있다니..?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 그 구간을 꿈 속에서 다시 탈까 두렵기만 하다. 이 구간을 가기 싫다면 앞서 갈
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면 된다.


▲  포대능선에서 바라본 서울 북단과 의정부 남부 -
건너편에 보이는 장대한 산은 한때 나의 단골산이던 수락산(水落山, 637m)
우리가 그 수락산보다 더 높이 떠 있다.

▲  포대능선을 장식하는 바위 봉우리의 위엄
포대능선이란 이름은 불교에 많이 등장하는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의 이름을
딴 것으로 여겨진다. 도봉산에 절이 유난히 많으니까 말이다.

▲  포대능선에서 만난 멋드러진 소나무
그 너머로 서울 북부 지역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우리 동네도 훤히 보임)

▲  포대능선 716m 봉우리
봉우리 주변에는 초소를 비롯해 추억이 되버린 군부대 시설이 여럿 있다.


속세처럼 험난했던 포대능선 남쪽 능선길을 간신히 통과해 716m 봉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지
치고 놀란 두 다리를 쉬며 눈 밑에 펼쳐진 천하를 가슴 가득히 굽어본다. 서울 도봉구(道峰區)
와 노원구(蘆原區)를 비롯해 강북구, 성북구, 중랑구, 동대문구를 비롯한 서울 북부 지역과 경
기도 의정부시, 양주시 장흥면과 율정/고읍지구가 훤히 눈에 박혀 속세로부터 오염되고 상처받
은 마음과 눈을 제대로 정화시켜준다.

하늘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하늘과 가까워졌으니 구름을 타고 하늘을 오가는 신선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게다가 발 밑에 펼쳐진 속세를 내려다보니 자연이 빚은 산부터 점보다 작게 아
른거리는 집들까지 저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된 듯 거만한 생각이 솟아 오른다. 정말 그러면 얼
머나 좋을까. 허나 현실은 편히 드러누울 땅도 시원치 않은 시궁창이라는 것.. 저 천하에서 내
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땅이 없다.


▲  하늘 아래로 곱게 펼쳐진 의정부 남부와 서울 북부, 가운데에
보이는 고가도로는 수도권 외곽순환고속도로이다.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  오봉(五峯)과 양주시 장흥면 지역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  북쪽으로 힘차게 내닫는 포대능선 (716m 봉우리에서 본 모습)
포대능선은 716m 봉우리에서 회룡골재를 거쳐 사패산까지 이어진다.

▲  만월암에서 포대능선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길
경사가 워낙 미친 수준이라 나무 계단길을 만들어 통행의 편의를 제공했다.
하늘로 이어진 계단일까? 끝없이 펼쳐진 계단길, 내려갈 때야 쉽지만,
올라갈 때는 그야말로 진땀을 빼게 한다.


♠  서울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조그만 석굴 암자 ~ 도봉산 만월암(滿月庵)

▲  큰 바위 밑에 기묘하게 자리한 만월암 만월보전(滿月寶殿)

포대능선 716m 봉우리에서 동쪽(도봉산역 방향)으로 20분 정도 내려가면 집채보다 더 큰 바위가
보일 것이다. 바로 그 바위 밑에 석굴 암자(庵子)인 만월암이 묘하게 둥지를 틀어 두 눈을 놀라
게 한다.

만월암은 자운봉 동쪽 약 500m 고지에 둥지를 튼 고적한 산중암자로 서울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
한 절이기도 하다. (이곳이 서울의 최북단임)
이 절은 신라 문무왕(文武王) 시절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당시 이 지역은
신라의 변방으로 한강 이북을 둘러싸고 신라와 당(唐)이 한참 전쟁을 벌이던 때이다. 게다가 의
상은 영주에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 전에는 주로 왕경(王京, 경주)에 머물며 화엄종(華嚴宗)
연구 및 귀족 불교를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왕경에서 1,000리 밖에 떨
어진 이곳 변방까지 찾아와 절을 세울 이유는 전혀 없다.

이곳의 지형은 커다란 바위가 지붕을 이루고 있고 2개의 바위가 양쪽에서 그를 받치는 기둥 역
할을 하며, 그 사이에 조촐하게 공간이 생겨 조그만 자연산 동굴을 이루고 있다. 지금이야 등산
로와 이정표가 잘 닦여져 있어 찾기야 쉽겠지만 옛날에는 찾기가 힘들 정도로 외진 곳이다. 그
러다보니 조용히 참선에 임하기에는 그만인 곳이라 오래전부터 보덕굴(普德窟)이라 불리는 참선
석굴도량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애당초 절이나 암자는 없었고, 그냥 참선을 위한 동굴이 전부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도봉산에는 천축사와 망월사(望月寺), 회룡사(回龍寺), 원통사(圓通寺) 등의 크고 작은 오
랜 고찰이 많으니 그 절에 머무는 승려들의 비밀 수행 장소로도 널리 쓰였을 것이다.

지금의 만월암이 생긴 것은 만월보전에 봉안된 석불좌상을 통해 17~18세기 정도로 보이는데, 불
상이 1784년에 개금(改金)되었다는 명문이 있어, 적어도 1700년대(빠르면 1600년대)에 조성되었
을 것이다. 절이란 불상이 있어야 영업이 되니 17~18세기에 조촐하게 암자로 태어났음을 가늠케
하며, 암자의 이름인 만월(滿月)은 석불좌상이 약사여래불이라 그를 상징하는 뜻에서 지어진 이
름이다. (신라 중기 창건설은 그냥 뽀송뽀송한 거품임)

불상을 봉안하고 번듯한 암자로 거듭났지만 따로 건물을 짓지 않고 그냥 동굴을 법당으로 다듬
어 사용한 듯 싶으며, 1940년에 여여거사(如如居士) 서광전(徐光前)이 건물을 짓고 중창을 벌였
다. 그러다가 2002년에 혜공이 만월보전을 지었고, 2004년에 산신각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석굴 자리에 지은 만월보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한 산신각 등 달랑 건물 2동이 전
부이다. 만월보전은 법당과 요사(寮舍)의 역할을 겸하는데, 서쪽 칸은 법당, 동쪽 칸은 요사(寮
舍)와 종무소(宗務所)로 쓰이며, 건물의 크기는 작고 투박하다. 아무래도 궁벽한 곳에 있다보니
불사(佛事)가 어려워 바위 뒤쪽에 자리를 마련해 산신각을 만들었으며,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이 주변을 밀어 건물을 심을 계획이라고 한다. 절을 넓히는 것도 좋지만 그리 하려면 애궂은 숲
을 밀어야 된다. 내 바램이지만 만월암은 지금의 모습이 딱 좋다. 그냥 소박한 석굴도량으로 속
세 곁에 남았으면 하는데 말이다.

이렇게 작은 암자이건만 다행히 소장문화유산이 하나 있어 절을 길거리에 나앉게 만들지는 않는
다. 바로 만월보전의 주인인 석불좌상으로 우리가 여기까지 힘들게 온 것도 다 그를 보기 위함
이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포대능선 지옥 체험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암자에는 승려 1명이 머물고 있으며, 그를 돕는 할머니보살 1명이 낮시간에 암자를 지킨다. 외
진 곳에 있어 석가탄신일이 임박했음에도 연등 수입이 적어 큰일이라고 한다. 이곳 외에도 주변
암자들도 경영난이 심각하다고 하며, 이곳에서 가장 큰 절인 천축사도 연등 수입이 많이 줄었다
고 그런다.


▲  만월암 산신각(山神閣)

만월보전에서 바위 너머 북쪽 산자락에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만월보전에서 여기까지는 도보 2
분 거리로 법당과도 제법 떨어져 있어 별개의 공간처럼 다가온다.
이 건물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지은 것으로 건물 외벽은 갑옷처럼 돌로 둘렀고, 목조 지붕에는
동기와를 올렸다. 2004년에 혜공이 지었으며, 내부에는 같은 해에 조성된 산신탱이 있다.


▲  산신각에 봉안된 산신탱

하얀 수염에 하얀 바탕의 옷을 입은 산신이 중심에 앉아 있고, 그 좌우로 호랑이 2마리가 제법
성난 성난 표정으로 그의 곁을 지킨다. 아마도 산신이 제때 임금을 주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지금까지 본 산신탱 호랑이 가운데 가장 패기가 넘치는 모습임) 그리고 앳된 표정의 동자(童子
) 3명이 양쪽 가장 자리에 배치되어 있다.


▲  만월암 바위 위쪽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
이 바위 밑에 바로 만월보전이 자리해 있다.

▲  만월보전 현판 - 글씨에 생기가 서린 듯 하다.

바위 밑에 자리한 만월보전은 만월암의 중심 건물로 예전 석굴 자리이다. 2002년에 혜공이 지은
건물로 한정된 자리를 활용하다 보니 정면 4칸, 측면 1칸의 'ㄱ'자 모습이 되었으며, 서쪽 칸은
법당으로, 동쪽 칸은 요사로 쓰인다. 요사에는 만월선방(滿月禪房)이란 현판이 걸려 있으며, 법
당과 요사를 바로 이어주는 문은 없고, 툇마루를 통해 이동하면 된다.
법당 안에는 약사여래인 석불좌상을 비롯하여, 관음보살좌상과 지장보살좌상, 1969년에 만든 석
가모니후불탱화와 신중탱, 사천왕탱, 산신탱이 내부를 화려하게 수식한다.


▲  만월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탱(神衆幀)
1969년에 제작된 그림으로 등장인물이 복잡해 정신을 다 빼놓는 다른 신중탱과
달리 조금 여유가 있어 보인다.

▲  만월보전 우측 벽에 걸린 산신탱

만월암은 산신탱이 2개나 있다. 이 그림은 1969년에 조성된 것으로 산신각에 봉안된 것과 거의
비슷한 분위기이다. 앞서 산신각의 그것처럼 호랑이가 많이 성이 나 있으며, 꼬랑지는 산신의
머리를 칠 기세이다. 그리고 동자 2명은 산신의 지팡이와 여러 물건을 들며 산신 옆에 서 있다.


▲  만월암 석불좌상(가운데 큰 불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1호

만월보전 불단에 봉안된 석불좌상은 만월암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소중한 밥줄이다. 포근한
인상을 지으며 속세를 굽어보는 그는 피부부터 옷에 이르기까지 온통 하얀색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원래는 금동불(金銅佛)로 근래에 호분을 씌워 백불(白佛)이 되버린 것이다.

그의 왼손에는 빨간색의 약합(藥盒)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藥師如來)임을 알 수 있으며,
약합 안에는 중생의 갖은 병을 치유하는 약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 약으로 여기까지 온 나부터
치료해주면 좋으련만 약합의 뚜껑은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의 두 귀는 중생의 소망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으려는 것인지 어깨까지 늘어졌다. 코는 오목하
고 눈은 지그시 떴는데, 눈동자가 진하며, 입술은 립스틱을 바른 듯, 매우 붉다. 불상이 지나치
게 하얗다보니 더 진하게 보이는 것이다.

예전 석굴 석벽에 '乾隆四十九年六月日佛像改金施...'이란 명문(銘文)이 있어 건륭(乾隆) 49년
6월, 즉 1784년에 시주를 받아 개금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개금시기 이전이
확실하고 불상의 양식까지 고려한다면 최대 1600년대까지 가능하며, 참선용 석굴에서 암자로 태
어난 시기도 불상이 조성된 그 시기가 아닐까 여겨진다.

불상의 높이는 78cm로 좌우에는 근래에 만든 하얀 피부의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
菩薩)을 협시(夾侍)로 두어 약사여래3존불을 이루었다. 사람 키에 가까운 높이와 단정한 체구,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통견의(通肩衣)에 보이는 옷 주름 표현에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드러나 도봉산(서울 구역)에 있는 불교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획득했
으며(1999년에 지정됨), 만월암에 한줄기 빛으로 이곳을 먹여살리는 듬직한 존재이다.

만월보전 앞에는 샘터가 있다. 샘터라고 해서 물이 늘 졸졸졸 나오고 석조에 마냥 물이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닌 수도꼭지로 물을 틀어서 마시는 형태로 이곳을 거쳐가는 등산객들의 지친 목을
달래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물은 마음껏 마셔도 되며, 반드시 꼭지를 잠그기 바람)
물을 마시고 절을 둘러보니 할머니보살이 커피 1잔 하겠냐고 그런다. 그래서 1잔 달라고 그러니
종이컵에 커피를 타서 건네준다. 커피를 마시며 석불좌상과 만월보전 구석구석을 사진에 담으니
부처님을 찍으면 실례라고 잔소리를 건넨다. 그래서 적당히 답을 하니 그제서야 표정을 바로 하
고는 그냥 둔다.

만월암이 워낙 작다보니 외딴 산골에 묻힌 여염집처럼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다. 게다가 앉아
갈 수 있도록 툇마루도 있고, 석조약사불의 인자함도 깃든 곳이다 보니 아비규환의 속세를 등지
며 하룻밤 청하고 싶다. (단 해우소 상태는 장담 못함) 번뇌도 멋모르고 뒤쫓아오다가 떡실신할
정도로 깊은 산주름에 묻힌 고적한 암자로 만약 아무도 없는 버려진 공간이었다면 나만의 비밀
아지트로 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만월암에서 30분 정도 머물다가 아쉽지만 다시 길을 떠났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니
기 때문이다. 보살 할머니가 합장을 하며 '이제 망월사로 가십니까?' 그러니 내가 '아니요. 속
세로 내려갑니다'

※ 도봉산 만월암, 포대능선 찾아가기 (2013년 10월 기준)
* 지하철 1,7호선 도봉산역 1번 출구에서 도보 이동, 만월암까지는 1:40~50분, 포대능선은 2:00
  ~2:10 소요, <도봉산역(도봉산역 중앙차로 정류장) → 도봉산 141번종점 → 광륜사 → 도봉서
  원 → 도봉산장 → 만월암 → 716m봉우리 → 포대능선>
  포대능선은 거기서 20분 정도 추가>
* 서울시내버스 141번(도봉산↔염곡동), 142번(도봉산↔방배동), 1127번(도봉산↔수유리), 1128
  번(도봉산↔길음역)을 타고 도봉산 종점에서 내리면 걷는 거리를 10분 줄일 수 있다.
* 만월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29-1 (☎ 02-955-3719)


▲  밑에서 바라본 만월암 만월보전
만월암 석불좌상 문화재 안내판이 만월보전 앞이 아닌 밑에 세워져 있다.
그만큼 만월보전 주변이 협소하다.


♠  도봉산 마무리

▲  도봉서원(道峯書院) 복원 조감도(鳥瞰圖)

만월암을 등지고 정신없이 내려가니 천축사와 길이 갈리는 도봉산장이다. 여기서부터 길은 수월
하여 마치 말에 올라탄 듯, 거침없이 내달려 어느덧 도봉서원에 이른다. 허나 도봉서원은 서원
주변을 철제 담장으로 빙 두르며 복원 공사에 여념이 없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공사는 2014년까
지 진행되며, 조감도에 나온 모습대로 재현된다고 한다.

도봉서원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원으로 나름 희소가치가 있는 명소이다. 한때 서울에
는 노량진(鷺梁津)의 민절서원(愍節書院), 암사동(岩寺洞) 한강변의 구암서원(龜巖書院)이 있었
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내리친 서원철폐령에 앞다투어 사라지고 말았다. 구암서원은 그
나마 조두비(俎豆碑)와 주춧돌이 남아있고, 민절서원은 사육신묘(死六臣墓) 사당이 대체 역할을
하고 있다.

도봉산입구에서 천축사나 자운봉, 우이암으로 가려면 꼭 지나야되는 목좋은 곳에 자리한 도봉서
원은 1573년 양주목사 남언경(南彦經)이 지역 유림(儒林)이 뜻을 모아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세웠다. 원래는 도봉산에 제일 가는 사찰이었다는 영국사(寧國寺)가 있었으
나 유림들이 절을 때려부셨다고 전하며, 조선 말까지 이곳 일대를 영국동(寧國洞)이라 불렀다.

사당을 비롯한 서원의 주요 건물은 1574년에 완성되었으나 남언경이 병에 걸려 양주목사를 그만
두자 서원 공사는 잠시 중단되었고, 뒤를 이어 양주목사가 된 이제민(李齊閔)과 이정암(李廷馣)
이 나머지 공사를 진행하여 1579년 완성을 보았다.
서원이 완성되자 조정에서 도봉(道峯)이란 사액을 내려 도봉서원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
되어 1608년 이후에 중건했다. 1696년에는 도봉서원 단골이던 송시열(宋時烈)을 추가 배향했으
며, 1723년 조정을 장악하던 세력의 압박으로 송시열의 위패가 추방되기도 했으나 1775년 영조
의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받아 다시 제삿밥을 받게 되었다. 서울 근교의 유명 서원으로 많은 유
생들이 찾아와 한가롭게 성리학이나 논하다가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은 아작
이 나고, 위패는 땅에 매장되었다.

1903년 지방유림에 의해 임시로 단이 설치되어 봄과 가을에 향사(享祀)를 지냈으나 6.25가 터지
면서 그마저 중단되고 만다. 그러다가 1972년 '도봉서원 재건위원회'가 구성되어 사우와 신문(
神門)을 복원했으나 왕년의 모습에 1/4도 안되는 규모이다. 서원의 중심 건물인 사당은 정로사
(靜老祠)는 3칸 규모로 조광조와 송시열의 위패가 봉안되었고, 매년 음력 3월 10일과 9월 10일
에 향사를 지낸다. (지금도 지냄) 제품(祭品)은 3변(籩) 3두(豆)로 한때 재산은 전답 700여 평
이 있었다.

사우 외에는 복원을 하지 못했으나 다행히 윤곽이 남아있고 이율곡(李栗谷)의 '도봉서원기'를
비롯하여 옛 자료가 많이 남아있어 복원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2012년부터 기존 건물을
눕히고 한참 복원공사를 벌이고 있는데, 2014년 서원이 완성되면 서울 유일의 서원이자 도봉산
을 수식하는 명소로 선비문화 체험의 장으로 한몫 단단히 할 것으로 기대된다. (도봉구청에서
서원 활용에 매우 열성적임) 또한 공사중에 옛 영국사의 흔적이 나오면 주춧돌은 서원 주변에
두고, 불상 등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넘겨서 유생들에 의해 비명에 간 영국사도 조금은 위로해주
었으면 좋겠다.
도봉서원 주변 도봉계곡은 서울 근교 으뜸 계곡으로 칭송을 받았는데, 서원의 주인인 조광조는
이곳을 즐겨찾기 했으며, 조정 일을 마치면 수레를 몰아 이곳에서 놀았다고 전한다. 또한 송시
열의 수제자로 도봉서원 운영에도 관여한 권상하(權尙夏)는 '물과 돌이 맑고 깨끗하여 원래부터
경기도에서 제일 이름난 곳'이라 찬양했고, (당시 도봉동은 경기도 양주목 관할)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한양 성곽을 등지고 있는 명산이라면 도봉산과 삼각산을 언급하는데, 그 계곡과
수석이 아름답기로는 영국동(도봉계곡)과 중흥동(重興洞, 북한산성계곡)이 가장 뛰어나다'했다.

이들 계곡에는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권상하, 이재(李縡), 김수증(金壽增) 등 옛 사람들이
남긴 바위글씨가 14개 전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서예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되어 2009년 10
월 도봉서원과 하나로 묶어 '도봉서원과 각석군(刻石群)'이란 이름으로 서울 지방기념물 28호
지정되었다.


▲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

도봉서원 바로 앞 계곡에는 고산앙지(高山仰止)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1700년 7월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죽기 1년 전에 새긴 글씨이다. 고산앙지란 옛 사람들
이 필수로 배웠던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이다. 김수
증이 조광조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로 새긴 것으로 보기도 한다.

고산앙지 4글자 가운데 제일 밑에 있는 지(止)는 늘 계곡물에 잠겨 있으며, 앙(仰)은 절반 정도
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은 가뭄 때면 온전하게 볼 수 있다. 위쪽에 쓰인 고산(高山)
은 완전히 뭍으로 나와 햇볕을 쬐고 있다. 이들 글자 가운데 산(山)은 3개의 산봉우리처럼 귀엽
게도 새겨져 눈길을 끈다. 고산앙지 옆에는 글씨를 새긴 시기가 적혀있는데 경진(庚辰) 7월 (밑
에 부분은 물에 잠겨 안보임)이라 쓰여 있다.


▲  광륜사(光輪寺) 앞에 솟아난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5호

도봉서원을 지나 10분 정도 내려가면 광륜사란 절이 나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법등(法燈)의 역
사가 만월암의 신중탱(1969년 제작)보다 더 짧아보이는데, 연혁이 담긴 안내문을 보니 이곳 역
시 67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쓰여있다.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의상대사를 천축사와 만월
암, 광륜사가 아주 사이좋게 우려먹고 있는 것이다.

경내에 오래된 유물은 전혀 없고, 고색의 기운이 말라 구체적인 창건 시기는 파악하기 힘드나
이이(李珥)가 남긴 도봉서원기(道峯書院記)에 광륜사의 옛 이름인 만장사(萬丈寺)가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고려 때나 늦어도 조선 초에 법등(法燈)을 킨 것으로 여겨진다.
한때는 영국사, 천축사와 더불어 도봉산의 대표적인 절이었으나 영국사가 강제로 폐사되면서 그
영향으로 쇠락해오다가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후 터만 간신히 남은 것을 조선 후기
에 신정황후(神貞皇后) 조씨<조대비(趙大妃)>가 부친인 조만영(趙萬永)이 죽자 집안 선산(先山)
과 가까운 만장사터에 지금의 절을 짓고, 인근에 별장을 지어 자주 찾아왔다. <인근 녹야원(鹿
野苑)에 조대비 별장이 남아있음> 그리고 흥선대원군도 조대비 별장을 가끔 찾아와 국정에 지친
머리를 식히기도 했다.
1970년 이후 금득보살이 절을 크게 중창했으며, 2002년에는 신도들의 열화와 같은 시주에 힘입
어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했는데, 이때 무주당 청화대종사가 절의 이름을 광륜사로 갈았다.

광륜사 앞에는 2그루의 나이 지긋한 나무가 서로 앞다투어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다. 윗 사진
의 나무는 나이가 약 215년(1981년 보호수 지정 당시 기준임, 지금은 약 250년)으로 높이 17m,
나무 둘레가 3.8m에 이르며, 광륜사에서 관리한다. 아마도 도봉서원을 들락거리던 선비들이 중
간 휴식처로 삼고자 심은 것으로 여겨진다.

◀  광륜사 앞에 솟아난 200년 묵은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4호
나무 높이 18m, 둘레 1.9m로 앞의 나무보다
키가 1m 더 크고, 둘레가 절반 정도 밖에
안되는 무지 날씬한 나무이다.
(1981년 보호수 지정 당시 추정 나이는
165년, 지금은 200년)


▲  도봉산 서원마을터<서원동(書院洞)> 표석

도봉서원 밑에 형성된 서원마을이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절로 따지면 일종의 사하촌(寺下村)과
비슷한 마을이다. 이곳에 있던 마을은 도봉산을 포함한 북한산국립공원 일대를 정비하면서 모두
밀어버렸다.


▲  북한산국립공원 표석의 위엄
도봉산이 편의상 북한산국립공원에 편입되어 버렸지만 북한산과 도봉산은
엄연히 다른 산이다.

▲  도봉동문(道峯洞門) 바위글씨 - 서울 지방기념물 28호

도봉산탐방지원센터 부근에 있는 도봉동문 바위글씨는 대노(大老), 송자(宋子)로 추앙받는 조선
중기 대학자이자 멸망한 명나라에 충성과 사대(事大)를 보이며 명나라의 부흥을 꿈꾸던 어리석
은 꼴통 친명(親明) 사대주의의 대가 송시열(宋時烈)의 친필이라고 한다.
도봉동문은 도봉서원과 도봉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뜻하며, 대학자가 쓴 글씨가 그런지 필체가
아주 율동을 부린다.


▲  도봉산에서 먹은 순두부찌개와 해물파전의 위엄

도봉산의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내려오니 시간은 어느덧 저녁 7시를 가르킨다. 오후 2시에 올라
갔으니까 5시간 동안 도봉산을 방황한 셈이다. (도봉산 종점 → 천축사 → 마당바위 → 자운봉
고개 → 포대능선 → 716m봉우리 → 만월암 → 도봉서원 → 도봉산 종점)

도봉산(도봉동 지구)은 두부와 순두부 음식이 유명하다. 도봉산 종점과 도봉산탐방지원센터 사
이에 등산복/등산용품 가게와 온갖 식당이 밀집된 공간이 있는데, 그곳의 두부 음식이 괜찮다.
예전에 가봤던 식당에 가볼까 궁리를 하다가 적당한 식당(식당 이름은 까먹음)에 들어가 자리를
피고 앉았다.

나는 순두부조치(찌개)를 시키고, 후배는 산채비빔밥을 골랐다. 그리고 그것만 먹으면 무척 허
전하니 산행뒷풀이용으로 해물파전 1장과 동동주 1동이도 같이 주문했다.
제일 먼저 해물파전이 우리 앞에 나타났는데, 덩어리가 제법 크다. 처음에는 시장기가 상당하여
이거 가지고 되겠나 싶었는데, 먹고 보니 계속 커 보이는 것이다. 그래도 맛은 괜찮아 파전 그
릇을 모두 비웠다. 파전을 1/3정도 먹은 시점에서 순두부찌개와 산채비빔밥, 동동주, 밑반찬이
나타나니 파전에게 일제히 쏠린 시선을 2/3 이상 덜게 해준다.

순두부찌개는 속세에서도 종종 먹는 음식인데, 순두부도 많고, 조개도 많이 들어가 있고, 그런
데로 먹을 만하다. 밑반찬은 김치와 콩나물, 산채나물 등 3가지 정도이며, 동동주 같은 경우는
양이 깊어서 배부른 배를 꾸역꾸역 억지로 눌러가며 간신히 동이를 비웠다.

그렇게 기분 좋게 저녁 겸 산행 뒷풀이를 마치며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행히 도봉
산과 내 제자리는 무척이나 가깝다는 것. 이렇게 하여 도봉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매년 10월 중순 주말에는 도봉구 가을축제의 일환으로 도봉산축제가 열린다. 도봉산 공영주차
장과 생태공원, 도봉산 제1휴식처(광륜사 부근) 일대에서 등산대회와 도봉서원 추향제(秋享祭),
자연음악회, 도봉산 사찰음식전, 산사음악회 등을 선보이며, 보통 2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문의 도봉문화원 ☎ 02-905-4026, 도봉구청 문화관광과 ☎ 02-2091-2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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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서원의 떠오르는 성지 ~ 달성 도동서원 (다람재, 이노정)

 


♠  대구 현풍(玄風) 나들이 ~ 도동서원, 이노정 ♠
도동서원 담장
▲  도동서원 담장
 


여름의 제국이 한참 무르익어가던 7월 중순, 경북의 중심지인 대구(大邱)를 찾았다. 대구에서
현풍(玄風) 지역 투어를 같이 할 여인네와는 북부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하여 동서울터미널에서
구미행 직행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바로 대구 북부로 가는 차편이 없음)
피서객들로 미어터지는 동서울터미널에서 강원도와 충청도, 전라도, 경주 방면 버스는 대기시
간이 무지 긴데 반해 구미행 버스는 무척이나 한산하다.

피서차량으로 여름 몸살을 앓는 중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하여
구미까지는 무려 4시간이나 걸렸다. 구미에 발을 내리기가 무섭게 대구 북부행 직행버스를 잡
아타고 오후 2시에 북부정류장에 도착했다. 그곳에 이르니 만나기로 한 여인네는 그의 4발 수
레를 끌고 일찌감치 나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차에 오르니 현풍에서 왔다는 그의 친구도
같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셋이서 현풍 나들이를 떠나게 되었지~~

아직 다들 점심을 못먹은 터라 현풍 직전 달성1차공단에서 그들의 단골 식당에 들어가 간단하
게 뼈다귀해장국을 먹었다. 그렇게 점심을 채우고 그의 친구가 만든 과자를 후식으로 배의 나
머지 공간까지 꾸역꾸역 채우니 포만감의 행복에 쓰러질 지경이다.

잠시 현풍터미널에서 들려 부산으로 가는 직행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1번째 답사지인 도동서원
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 여인네는 고향이 달성군 구지면이라 현풍과 구지 일대를 훤하게 꿰고
있어 나들이에 그리 불편은 없었다.

현풍에서 도동서원까지는 성하리와 자모리를 거쳐 낙동강변을 따라가다가 대니산(戴尼山, 408
m) 북쪽에 둘러진 험한 고갯길 다람재를 넘어야 된다. 다람쥐가 연상되는 다람재는 그 귀여운
이름과 걸맞지 않게 강원도의 고갯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험준하기 그지 없어 눈이 오
면 아예 통행이 불가능하다.
구불구불의 극치를 누리며 힘겹게 고개를 오르니 드디어 전망이 확트인 고개 마루에 이른다.
고개 정상에는 고개를 오르느라 지친 나그네와 수레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조촐하게 공
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선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을 비롯하여 도동서원 주변과 강 건너로
고령군 개진면이 시원스레 두 눈에 다가와 조망도 괜찮다. 이런 평화로운 풍경에 마음까지 여
유로워지는 이런 곳에 서면 멋드러지게 시(詩) 한 수 읊어야 폼이 나겠지만 그럴 실력이 되지
못해 그냥 쉽게 감탄사만 연발했다.


▲  다람재 정상에 세워진 6각형 정자
정자에 오르면 낙동강을 비롯하여 도동리, 강 건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리,
오사리, 옥산리 지역이 시원스레 시야에 들어온다.

▲  다람재에서 굽어본 천하 (1)
강 왼쪽은 도동서원이 있는 도동리로 기와가 씌워진 도동서원이 희미하게 보인다.
강 오른쪽은 고령군 개진면이다.

▲  다람재에서 굽어본 천하 (2)
장마로 누런빛을 드러낸 낙동강 너머의 비옥한 평야는 고령군 개진면 옥산리

▲  뭉글뭉글한 다람재 표석
도동서원을 찾는 답사객이 늘자 대구시에서는 서원으로 가는 길목의 하나인 다람재를
정비하고 고갯 마루에 다람재 표석과 정자를 갖춘 아담한 쉼터를
만들어 그들의 발길을 배려했다.

▲  김굉필(金宏弼)의 시 한 수가 담긴 표석

 <
길가의 소나무(路傍松)>
  一老蒼髥任路塵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어
勞勞迎送往來賓  괴로이도 오가는 길손 맞고 보내네
    歲寒與汝同心事  찬 겨울에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
  經過人中見幾人  지나가는 사람 중에 몇이나 보았는가


다람재에서 비록 보이는 범위는 좁지만 눈 아래로 펼쳐진 천하를 바라보며 대니산과 낙동강이
제공헌 선선한 기운을 즐기다가 구비구비 고갯길을 내려와 도동서원을 찾았다. 서원 주차장에
이르니 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먹구름이 조금씩 빗방울을 뿌려 천하를 적히기 시작한다.
서원을 둘러보기 전에 잠시 도동서원의 내력을 흔쾌히 짚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서원 건축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 서원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한 도동서원(道東書院) - 사적 488호
(강당과 사당, 담장은 보물 350호)

▲  다람쥐와 서화 무늬
자모에서 도동으로 넘어오는 다람재란 고개 이름이 이 다람쥐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하늘을 향해 꼬랑지를 흔들며 열심히 올라가는
모습은 조정으로의 출세를 염원하는 유생들의 욕심이 담겨진 것이다.


대구의 대표적인 서원인 도동서원은 앞에는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뒤로는 나지막한 대니산을
배경으로 삼아 자리해 있다. 이 서원은 1568년 조선5현(朝鮮五賢)의 하나로 꼽히는 한훤당 김굉
필(寒暄堂 金宏弼, 1454~150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유림(儒林)에서 현풍 동쪽 비슬산(琵
瑟山) 자락에 세웠다. 여기서 조선5현이란 정여창(鄭汝昌), 이황(李滉), 조광조(趙光祖), 김굉
필, 이언적(李彦迪)을 일컫는다. 1573년 쌍계서원(雙溪書院)으로 정식으로 사액(賜額)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파괴되었다.

1605년 김굉필의 외증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유생들의 후원을 받아 김굉필의 무덤 밑인
지금의 자리에 서원을 재건하고 보로동서원(甫老洞書院)이라 했다. 김굉필의 명성 탓인지 유생
들이 보낸 후원금이 상당하여 제법 많은 돈이 남았다고 하며, 정구는 그 돈을 다른데 쓰지 않고
죄다 서원을 꾸미는 데 쏟아부었다고 한다. (차라리 왜란 이후 어렵게 살던 백성들을 도왔으면
좋지 않았을까?)

1607년 공자(孔子)의 도가 동쪽에 이르렀다는 뜻에서 도동서원으로 사액되면서 동네 이름도 도
동(道東)으로 강제로 변경되었다. 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령도 운좋게 비켜
가면서 조선 중기 서원 양식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달성군이 경상북도 시절에는 도동서원이 경북 제일 남쪽 끝으머리에 자리한 탓에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서원을 이루는 건물도 거의 폐가처럼 변해갔고, 용머리와 여러가지 조각들이 도난
당하고 훼손되기가 바뻤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6년 대구에 강제로 편입된 이후, 비로소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면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곳은 산지형(山地形) 서원의 배치형태로 진입공간과 강학공간, 제향공간으로 나눠져 있다. 진
입공간에는 수월루와 외삼문이 있고, 공부를 하는 강학공간에는 강당과 동재, 서재, 장판각이
있으며, 서원에서 제일 뒤쪽이자 가장 높다란 곳에 제향공간인 사당이 자리한다.

도동서원은 달성군(達城郡)의 이름난 명소로 필수 답사지로 손꼽힌다. 비록 안동 도산서원(陶山
書院)이나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의 명성까지는 아니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고 시간이 흐
를수록 찾는 이도 정비례로 늘어나 우리나라 서원의 새로운 성지(聖地)로 부각되고 있다. 이곳
이 세상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다른 서원과 차별화된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우선 서원 주변을 두르는 흙담장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담장으
로 유명하며, 강당은 기단이 높고, 용머리와 다람쥐 등의 동물상, 서화(瑞花) 등이 조각되어 건
물의 품격을 드높인다. 게다가 강당으로 들어서는 환주문(煥主門)은 특이한 구조로 눈길을 잡아
맨다. 이들 담장과 강당은 서원에서 따로 분리하여 보물 350호로 지정되었다.

서원 앞에는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아름드리 그늘을 드리워주며, 신도비와 사
적비 등이 자리한다. 유물전시관에는 왕이 서원에 내린 서책과 제기(祭器), 경현록(景賢錄) 목
판 등이 전시되어 있으나 거의 문을 열지 않는다.

그윽하고 정겹기 그지없는 도동서원, 400년 묵은 오랜 은행나무가 선사한 그늘로 마음이 시원하
며, 선비의 낭낭한 글읽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서원 내부, 다른 서원과 차별을 둔 다양한 볼
거리로 눈과 마음이 즐거운 곳이다.

※ 도동서원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600, 655, 달성5번 시내버스를 타고 현풍터미널 하차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급행좌석 4번을 타고 유가치안센터 하차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현풍 경유 창녕, 의령 방면 직행버스 이용
* 현풍터미널과 유가치안센터, 구지에서 달성4번(1일 7회 운행)을 타고 도동 종점 하차, 버스에
  서 내리면 바로 도동서원이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이정표가 잘 갖추어져 있어 찾기는 쉬움)
① 구마고속도로 / 중부내륙고속도로 → 현풍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구지 → 수라리 → 도
   동서원
② 구마고속도로 → 달성나들목 → 논공카톨릭병원 → 현풍외곽도로 → 현풍3교 지나서 우회전
   → 자모 → 다람재 → 도동서원

★ 도동서원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관람시간 : 9시 ~ 18시 (겨울은 17시)
* 사당은 향사(享祀)를 지내는 매년 음력 2월 중정일과 8월 중정일에만 공개된다.
* 유물전시관은 평소에는 문이 잠겨져 있다. 사전에 문의하기 바란다.
* 도동서원 뒷산에 김굉필의 묘소가 있다.
* 도동서원 문화관광해설사가 2월부터 11월까지 매일 근무하고 있다. 근무시간은 10시~18시까지
  이며 설과 추석연휴에는 근무하지 않는다. 해설을 원하면 도동서원 관광안내소를 찾는다.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구지서로 726) <☎ 053-617-7620>


▲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은행나무 - 대구 보호구 3-9호

도동서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존재가 바로 김굉필나무라 불리는 커다란 은행나무이
다. 나무의 덩치가 얼마나 거대한지 그의 앞에서는 그저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위대한 자연
의 힘과 400년의 세월이 그를 산만한 덩치로 만든 것이다.
이 나무는 서원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존재로 1607년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있던 한강 정구가
서원이 사액된 기념으로 손수 심은 것이라 전하나 확실하진 않으며, 서원에 배향된 김굉필을 기
리고자 조선 후기에 서원 관계자들이 김굉필나무라 이름을 붙인 것이지 절대 김굉필이 심은 나
무가 아니다.

400년의 지긋한 나이에도 변함없이 울창한 모습을 간직한 은행나무의 자태와 웅장함에 그저 감
탄사 밖에는 쏟아지지 않는다. 천연기념물이나 적어도 지방기념물로 삼아도 정말 손색이 없어
보이는데, 나무의 품격에 걸맞지 않게 아직까지 보호수(保護樹) 등급에 머물러 있다. 먹구름의
영향으로 나무 사진이 다소 흐리게 나왔지만 여름의 제국이 사라지고 가을이 오면 가을에 물든
아름다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  노쇠한 나무의 가지를 받치는 기둥들

아무리 울창하고 거대한 모습을 지녀도 400년의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다. 400년의 노구를
지탱하기 힘들어 기둥을 여러 개 세워 지구의 중력에 힘겹게 저항하고 있다. 나무의 동쪽 줄기
는 이미 장대한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역시나 세월보다 무거운
것은 천하에 아무것도 없다. 손으로 만질 수 없을 따름이지 세월의 무게는 무한대(∞)이기 때문
이다, 옛날에는 동네 애들이 땅에 내려앉은 가지를 타고 나무에 올라가 놀았다고 한다.


▲  서원의 정문인 수월루(水月樓)

수수한 모습을 지닌 수월루는 서원의 정문이자 외삼문(外三門)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누각이다. 누각에 오르면 은행나무 너머로 낙동강의 풍광이 속시원하게 다가온다. 이곳은
유생들이 공부로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며 바람을 쐬는 쉼터 및 교육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누
각으로 들어서는 계단이 2명 정도가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데, 이는 세상의 번잡함을 멀리하고
서원에 지나치게 사람이 많은 것을 경계하며, 정말로 학문에 정진할 소수정예만을 받아들이겠다
는 서원의 의지로 보인다.

수월루란 이름은 누각에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밤하늘을 비추는 달이 바라보여 지어진
풍류적인 이름이다. 강과 달을 바라보며 시를 짓고 헛제사밥을 차려 음식과 곡차를 끼며 달놀이
를 즐기던 현장으로 선비들의 해학적이고 고풍스런 풍류가 와 닿는 공간이다. 지금은 노쇠한 수
월루의 보존을 위해 누각 출입이 통제되어 그들의 풍류를 따라하지 못함이 애석할 따름이다.

◀  수월루에서 강당으로 들어서는 환주문(煥主
門)
수월루를 지나면 강당으로 향하는 조그만 계단
과 함께 환주문이 나온다.
환주문은 주인을 부르는 문이란 뜻으로 주인의
식을 가지고 들어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
다. 이곳의 계단도 수월루의 계단처럼 폭이 좁
고, 문의 높이도 낮아 부득이 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가야 된다. 이는 옛 사람들의 키가 작아서
가 아니라 서원에 들어온 이들에게 자신을 낮추
고 서원에 배향된 김굉필과 서원에 있는 덕망있
는 이들에게 머리를 숙여 예의를 표하란 뜻에서
문의 높이를 일부로 낮게 만든 것이다.
머리가 부딪쳐 혹여나 문이 손상되지 않도록 머
리를 푹 숙여 문을 들어서니 마음가짐이 절로
숙연해진다.

여닫이 문을 고정시키는 정지석(현판이 걸린 평
방의 양쪽 모서리)에는 아름다운 꽃무늬가 새겨
져 있으니 살펴보기 바란다.

▲  도동서원 서재<西齋, 거의재(居義齋)>

▲  도동서원 동재<(東齋), 거인재(居仁齋)>

환주문을 들어서면 강학공간인 강당이 정면에 나타난다. 그 좌우로 서원 유생들의 숙소인 조그
만 서재와 동재가 서로 마주보며 자리해 있는데, 서재는 의로움이 산다는 뜻에서 거의재, 동재
는 인자함이 사는 뜻에서 거인재라 불린다. 서원의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구름처럼 몰려
왔을 유생들의 고무신이 가득했을 섬돌에는 먼지만이 자욱하여 세월의 무상함을 드러낸다. 아무
도 없는 방문에 귀를 대면 학문의 어려움에 넋두리를 떨던 그들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올 것만
같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는 어려운 것이다.


▲  강당 앞뜨락에 머리를 내민 거북이
화마(火魔) 등의 나쁜 기운을 막고자 만든 것으로 보인다.

▲  강당 우측에 자리한 장판각(藏板閣)
서원의 소중한 보물인 경현록(景賢錄)이 있었으나 지금은 유물전시관에 가 있다.

▲  도동서원의 강당인 중정당(中正堂) - 보물 350호

고색의 때가 만연한 서원의 강당(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로 1.5m의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하여 웅장함과 품격이 더욱 돋보인다. 건물 좌측과 우측 방은 온돌방이고
가운데 3칸은 개방된 대청마루로 유생들이 유학의 도를 배우며 토론하던 장이다.
건물의 모습은 여느 한옥과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이 건물의 매력은 바로 기단부에 있다. 기
단을 이루는 돌은 일정한 법칙이 없이 제멋대로의 모습으로 자유분방하게 늘어서 눈길을 끈다.
그런 기단에는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용머리 4개가 삐죽 나와 있으며, 다람쥐 모양의 동
물상과 서화(瑞花)무늬 2쌍이 조각되어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이들 무늬는 모두 나름대로
의 뜻을 담고 있으니, 기단을 유심히 살펴 괜한 보물을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  삐죽 고개를 내민 용머리

멀뚱한 표정으로 기단 밖으로 고개를 내민 4마리의 용은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화마(火
魔)의 피해를 막고자 만든 것으로 여겼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들 용머리는 겉으로 보기에
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여러 차례 도난을 당했던 아픔의 과거를 간직하여 듣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저 중에서 1~2개만 진품이고 나머지는 모조품이
라고 한다. 모조품의 진품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유물전시관이나 대구에 있는 모박물관
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  해학적인 표정의 용머리 ~ 용머리의 눈이 마치 누군가에게 단단히
얻어터진 듯, 밤탱이가 된 것처럼 보여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  강당 내부에 걸린 2개의 현판

▲  강당 좌측에 있는 굴뚝
연기를 모락모락 뿜어내던 왕년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그의 모습에 쓸쓸함이 비쳐진다.

▲  사당으로 들어서는 내삼문(內三門)

강당 뒤에는 서원의 중심인 사당이 있다. 김굉필이 배향된 사당으로 들어서려면 내삼문을 지나
야 되는데 제향일을 제외하고는 입을 굳게 봉한 채,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  도동서원의 백미, 담장 - 보물 350호

고색이 가득 깃들여진 담장은 자연석을 정렬시킨 바닥돌 위에 자연막돌을 쌓고 그 위에 암키와
를 5단으로 놓아 그 사이에 진흙층을 쌓아 거의 1m 간격으로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웠다. 담장에
암키와와 수막새를 사용한 것은 음양(陰陽)의 조화를 통해 담장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장식효과
를 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밋밋한 모습의 다른 서원의 담장과 달리 정겹고 아름다운 모습
으로 우리나라의 오래된 담장 중에서 최초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흙과 돌, 기와를 적절히 이용했으며 수막새를 달아놓은 매력적인 담장으로 나중에 한옥을 짓고
산다면 저런 담장을 만들어 집을 두르고 싶다. 서원과 외부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담장에 미적
(美的)인 부분이 크게 배려되어 밤손님조차도 담을 아껴줄 것 같다. 담에 쓰인 흙에는 오랜 세
월의 누런 때가 가득 끼여 담장에 대한 눈길을 단단히 붙들어 맨다.


♠  김굉필과 정여창 두 노인이 말년을 보내며, 석별의 정을 나누던 곳
이노정(二老亭)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30호

▲  이노정 전경 (정자를 가린 건물은 정자를 관리하는 노부부의 집)

▲  담장 너머로 바라본 이노정

▲  곁에서 바라본 이노정

도동서원을 둘러보고 구지(창리)를 거쳐 내리에 있는 이노정을 찾았다. 모정에서 이노정을 알리
는 갈색 이정표를 따라 조그만 농로로 들어서면 막다른 곳에 녹음이 짙은 숲을 병풍으로 두르며
부뚜막 연기가 뿜어 나올 것 같은 정겨운 풍경의 기와집, 이노정이 나온다.
세상과 거리를 두며 강가에 홀로 자리한 외로운 기와집인 이곳까지는 현대의 이기(利器)는 전혀
들어오지 못하고 전통 방식으로 초롱불로 어두운 밤을 밝히며 장작을 뗄 것 같은 분위기가 엄습
한다. 허나 안으로 들어가보면 티비에 냉장고까지 현대의 이기는 이미 여기까지 손을 썼다. 이
곳은 도동서원처럼 낙동강변에 자리해 있는데 그곳과는 달리 강이 바라보이는 높다란 곳에 터를
잡았다.
 
고색창연해 보이는 이노정은 다른 말로 제일강정(第一江亭)이라고도 하며, 김굉필과 정여창(鄭
汝昌)이 말년을 보낸 곳이라 전한다.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화를 당한 그들이 시골(김굉필은 도
동서원이 있는 도동리, 정여창은 함양)로 내려와 살다가 1504년 이곳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정자를 짓고 학문을 논하며 팔자 좋게 지내다가 연산군(燕山君)이 훈구파(勳舊派)와 건
방진 사림계열 유생들을 때려잡고자 일을 벌린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로 석별의 정을 나누
었고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처단되었다. 정자의 이름인 이노(二老)는 김굉필과 정여창 두 노인
네를 지칭한 것으로 그 당시 그들의 나이는 50대 중반이었다.

도동에 머물던 김굉필은 배를 타고 10km 떨어진 이곳을 자주 왕래했다고 하며 그들이 사라진 이
후 정자는 그들을 추모하는 이들이 관리하였다. 1885년 영남 유림에서 중수를 했고, 1904년에도
수리를 하였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정자의 두 이름(이노정, 제일강정)이 새
겨진 현판과 그들이 지은 유악양(遊岳陽, 악양을 거닐다)이란 시가 걸려있다.

이곳은 우물마루를 둔 정자 건축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평면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천정에는
우물정(井) 모양의 통풍구를 두어 산바람과 강바람이 서로 어우러지게 하여 한여름에도 더위를
잊을 정도로 시원하다. 정자 주변으로는 얕은 담장을 둘렀으며 정자 밖에 뒷간을 두었다.

현재 이노정은 어느 노부부가 관리하고 있다. 그들은 정자 앞에 딸린 조그만 기와집에 살고 있
는데, 드문드문 오긴 하지만 정자를 찾은 답사객에게 정자 내부를 둘러볼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다. 우리가 갔을 때는 처음에는 조금 경계의 눈빛을 보냈는데,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표정을
바로 하고는 구경하고 가라며 내부로 안내해 주었다.

그들은 이노정에서도 가끔 잠을 자고 생활을 하는지, 정자 내부는 모기장이 쳐져있고, 여러 생
활용품이 널려 있는 등 다소 어수선해 보인다. 비록 세상물정 모르고 공자와 성리학 사상만 들
쑤시던 지배층의 전유물이긴 하지만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 살고자 했던 그들의 마음가짐이 보
이는 정자로 두 노인네가 술 한잔 걸치며 시를 짓고 달놀이를 즐길 때 그들의 노비는 강에 돌을
던지며 신세 한탄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비록 벼슬을 박탈당하고 시골에 숨어 사는 처지긴 하
나 잘나가는 집안의 양반이자 조선의 중심계층인 선비이며, 그들을 추종하는 제자들이 많기 때
문에 먹고 사는 문제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  중후한 멋이 엿보이는 이노정 현판

▲  제일강산(第一江山) 현판


▲  정자 밖에 자리한 뒷간 - 하얀 털의 견공(犬公)이 처음 본 우리에게
경계의 메세지를 보낸다.

▲  정자 담장 밖으로 장맛비로 불어난 낙동강이 보인다.
강 건너로 보이는 곳은 고령군 우곡면이다.

▲  온돌방을 지피던 아궁이의 흔적

▲  아마존의 깊은 늪지대처럼 다가서기가 두려운 이노정 앞 낙동강 늪지대
홍수가 심할 때는 저 늪지대는 물론이고 정자 앞까지 강물이 넝실거린다.


※ 이노정 찾아가기 (2012년 12월 기준)

* 대구서부정류장에서 현풍 경유 이방, 의령 방면 직행버스를 타고 모정(내리) 하차 (1일 20회
  남짓 운행)
* 현풍터미널에서 이방, 신반, 의령 방면 직행버스 또는 달성7번 시내버스(1일 6회)를 타고 모
  정(내리) 하차
* 모정에서 대암리, 의령 방면으로 2분 정도 걸으면 이노정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기서
  5분 정도 들어가면 이노정이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이노정까지 차량 접근 가능, 단 길이 좁으므로 정자를 둘러보고 차를 돌
  려 나갈 때 주의 요망)
① 구마/중부내륙고속도로 → 현풍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구지 → 모정 → 이노정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내리 443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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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까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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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니터 크기와 컴퓨터 사양에 따라 글이 조금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2년 12월 13일부터
 
* 글을 보셨다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바로 밑에 있는 네모난 박스 안에 View on을 흔쾌히
   꾹꾹 눌러주시거나 댓글 하나씩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Copyright (C) 2012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


※ 아래는 최근에 본인 다음 블로그에 올린 글과 사진입니다.
(글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글로 바로 이어집니다)

 

지리산에 포근히 감싸인 고을 ~ 산청 역사기행 (문익점 목면시배유지, 남명조식유적)

 


' 지리산에 안긴 고을, 산청(山淸) 나들이 '
세심정에서 바라본 덕산마을
▲  세심정에서 바라본 덕산마을과 덕천강
시내 뒤쪽으로 보이는 산에 남명 조식 선생의 무덤이 있다.


가을이 슬슬 그 절정을 준비하던 10월 초, 지리산 동쪽에 안긴 산청(山淸)을 찾았다. 서울남부
터미널에서 진주로 가는 직행버스에 나를 실어 딱 3시간 15분 만에 산청과 진주 중간에 자리한
원지에 이른다. 원지(院旨)는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의 하나로 육중한 등산 배낭을 맨 등산객들
이 많이 내린다. 나도 지리산에 떡 안기고 싶은 마음 굴뚝 같으나 이미 갈 곳이 정해진 몸이라
마음 만 등산객들 배낭에 몰래 달아 지리산으로 보낸다.
원지에서 경호강을 건너면 단성면소재지가 있는 사월리가 나오는데 단성 시내를 벗어나면 산청
에 주요 명소인 목면시배유지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  문익점이 붓통에 목화를 숨기고 들어와 하얀 목화를 이 땅에 널리
보급시킨 목화의 성지(聖地) ~ 산청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地)
- 사적 108호

몽고에 사신으로 간 문익점(文益漸)이 붓통 속에 목화씨를 넣어 가지고 고향에서 목화를 재배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여 3살배기도 줄줄 외울 정도이다. 그의 목화재배는 이 땅의 의류복식사(
衣類服飾史)에 크나큰 혁명을 일으켰으며, 갈포나 삼베로 추운 겨울을 나야했던 당시 대부분의
백성들에게 따뜻한 무명옷과 그에 따른 수명 연장을 선물로 안겼다.

문익점(1329~1398)은 남평문씨로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1329년에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
양마을에서 문숙선(文淑宣)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그는 이곡(李穀) 선생 문하에서 공부를 하여 1360년(공민왕 9년) 문과에 급제했으며, 김해부사
록(金海府司錄),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거쳐 1363년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계품사(啓稟使)
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몽고(원나라)에 갔다.

이때 몽고왕인 순제(順帝)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던 고려 여인 기황후(奇皇后)는 최유(崔濡),
김용(金鏞) 등과 공모해 눈에 가시같은 공민왕(恭愍王)을 제거하고 몽고에 머물던 충선왕(忠宣
王)의 아들인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그들은 문익점에게 동조하길 권했으나
거절했다고 하며, 1364년 기황후가 덕흥군을 앞세워 고려를 공격하나 최영(崔瑩)에게 보기 좋게
깨진다.


▲  문인으로써의 패기가 돋보이는 문익점 선생의 영정
영정 앞에 하얀 덩어리는 바로 목화씨를 품고 있는 목화솜이다.

고려에게 패한 기황후는 뚜껑이 폭발한 나머지 문익점을 교지국(交趾國, 베트남)과 운남(雲南)
으로 귀양을 보냈다. 거기서 2년 가량 머물다가 1366년 귀양에서 풀려났는데, 탐스럽게 열린 목
화에 입맛을 다시며 몰래 가지고 갈 방법을 연구했다. 당시 목화는 외국으로 반출이 금지된 금
수품(禁輸品)으로 잘못 걸리면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허나 밭을 지키는 노인의 제지를 뿌리치
고 목화씨를 몇 송이 따서 붓통에 넣어 귀국길에 오른다. 몽고 입장에서는 그는 얄미운 산업스
파이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문익점을 크게 추앙하는 과정에서 부풀려진 이야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태조 7년 6월 13일자 기록에는 '길가의 목면나무를 보고 씨 10여 개를 따서 주
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되어있으며, 태종 1년 윤 3월 1일자에는 '목면 종자 두어 개를 얻어
싸가지고 왔다~~'란 구절이 있다. 그러니까 가져온 씨앗 수만 다를 뿐, 붓통에 감추어 귀국했다
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고향인 산청으로 내려와 장인인 정천익(鄭天翼)과 고향마을인 배
양마을에서 목화를 재배했다. 허나 씨앗만 가져왔지 재배기술을 알지 못해 겨우 1그루만 살았다
고 하며 3년 동안 열심히 재배에 기울여 드디어 재배에 성공했다. 또한 고려에 머물던 몽고 승
려 홍원(弘願)을 달달볶아 목화씨를 빼서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방법을 터득해 마을 주
민에게 가르쳤고, 10년도 안되어 전국으로 보급되었다. 이렇게 해서 백성들의 의복은 삼베옷에
서 따뜻한 무명으로 대폭 업그레이드 된다.

1375년(우왕 1년) 목화 보급의 공으로 전의주부(典儀注簿)가 되었으며, 1389년(창왕 1년) 좌간
의대부를 지냈다. 허나 이색(李穡) 등과 함께 이성계 패거리가 추진하려는 사전(私田) 개혁을
반대했다가 조준의 탄핵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고려가 망하자 문을 닫아걸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으며 왕이 친히 사람을 보내 벼슬을 권해도 거절했다. 그러다가 1398년 69세의 나이
로 고려 충신의 한사람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 이후 1440년 세종은 그에게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를 추증했고 충선공(忠宣公)이라 시호를
내려 그를 기렸다.

목화의 가공법은 그의 손자인 문래의 창안이라고도 하고 장인인 정천익이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
나 확실한 것은 아니며, 목화의 전래와 재배, 가공 등에 관한 내용이 '목면화기(木棉花記)'에
실려 있다.


▲  목화기념관 좌측에 자리한 재실(齋室)

이곳 목면시배유지는 사위와 장인인 문익점과 정천익이 힘들여 심고 가꾼 아름다운 현장으로 바
로 인근에 문익점의 고향 배양마을은 우리나라 목화의 성지답게 700년 넘게 목화를 재배하며 문
익점의 숭고한 뜻을 기린다. 그래서 세상은 이곳을 우리나라 최초의 목화 재배지로 추앙하고 있
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가 목화를 가져오기 훨씬 이전인 삼국시대부터 목화와 그 비슷한
것을 재배하고 그 옷을 만들어 입었던 것이다. 하지만 널리 보급은 안된 듯 싶으며, 왕족과 귀
족, 부자들만 주로 입다가 문익점을 통해 전국으로 퍼진 것이다. 그러니까 시배지(始培地)가 아
닌 목화를 널리 퍼트린 목화의 성지로 보면 될 듯 싶다.

예전에는 문익점 선생의 효자비(孝子碑)와 함께 단성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길가에 있었으나 그
주변을 정화하여 목화전시관을 만들었다. 전시관을 세우고 정화사업을 벌인 것까지는 좋으나 그
걸 구실로 소정의 입장료까지 받아먹고 있다.
전시관은 2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1전시실은 면화의 역사와 물레, 무명이 되기까지
의 과정을 담았고, 제2전시실은 무명으로 만든 우리 고유 의상이 전시되어 있다. 허나 높은(?)
입장료에 비해 솔직히 볼게 없고 썰렁하기 그지없다. 매표소는 전시관 내부에 자리해 있으며,
목면시배지만 보려고 해도 무조건 돈을 내야된다. 야외에는 목면시배지를 비롯하여 효자비와 사
적비, 재실 등이 있으며 동물을 기르는 사육장이 한켠에 자리해 있다.

※ 산청 목면시배유지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원지 경유 진주행 직행버스가 2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원지에서 묵곡으
  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배양에서 내리면 바로 목면시배유지이다. 또는 원지에서 대원사/중
  산리 방면 직행버스(30분 간격)를 타고 단성에서 내려 버스가 가는 방향으로 13분 도보
  (또는 원지에서 35분 도보나 택시 이용)
* 부산서부터미널과 진주에서 대원사, 중산리행 직행버스를 타고 단성에서 하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 단성나들목을 나와서 바로 우회전하면 목면시배유지이다.
② 진주 → 산청방면 3번 국도 → 원지 → 다리를 건너 단성 시내로 진입 → 단성나들목 입구에
   서 직진 → 목면시배유지


▲  삼우당문익점선생 목화시배사적비

★ 목면시배유지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1,000원(20인 이상 단체 800
  원), 군인/청소년 600원, 어린이 500원
* 관람시간은 9시부터 18시까지
*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1 (목화로 887) <☎ 055-973-2445>


▲  목면시배유지 정문

좌/우문이 시원스레 뚫린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늘씬한 크기의 목화시배사적비가 나그네를
반긴다. 정문의 가운데 문은 제사나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은 늘 닫아건다.
사적비와 눈인사를 나누고 왼쪽으로 길을 꺾으면 바로 목화전시관이 나온다. 목면시배유지는 전
시관의 바깥부분을 꼭 거쳐가야 되는데, 전시관 정문에는 별로 반갑지도 않은 매표소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며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애타게 바라보니 울며 겨자먹고 토하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치르고 안으로 들어선다.

전시관에서 다루는 것들 태반은 목화와 관련된 것들로 디오라마와 복제품이 주를 이루며 오래된
유물은 없다. 다만 목화를 실제로 본적이 없는 나를 비롯한 나그네들에게 목화에 대한 여러 정
보와 경험을 제공한다. 허나 그 외에는 그리 내세울 것은 없다.


▲  목화 뿌리

▲  목화에서 무명을 빼는 모습

▲  그치말기

▲  베짜기
목화에서 실을 뽑아 무명옷이 만들어지기까지도 많은 과정과 숙성을 거친다.
우리 옛 여인의 고운 손길과 정성을 거쳐 태어난 무명옷은 옛 사람들을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부터 따뜻하게 보호해 주었다.

▲  디오라마로 다시 태어난 옛 사람들
단란한 한 가족을 보듯 다들 무명옷을 걸치고 나란히 기념촬영에 임한다.

▲  재실 툇마루를 가득 뒤덮은 목화솜
하얀 덩어리가 무엇인가 했더만 바로 목화솜이다. 저들 솜은 인공이 아닌
자연산으로 목화씨를 품으며 가지에 주렁주렁 달린다. 문익점이 몽고에
머물 때 목화밭에 펼쳐진 목화에 군침을 흘리며 가져온
그의 심정이 십분이해가 간다.

▲  우리나라 목화의 성지 ~ 목면시배유지
문익점의 뜻을 받들며 오늘날도 꾸준히 목화를 재배한다.

▲  목화씨앗을 잉태하며 복스럽게 열린 목화솜

숭고한 자연이 인간에게 베풀어준 선물, 목화를 처음으로 보고 만져본다. 목화솜에 대한 첫인상
은 놀라움과 신기함의 연속으로 인공솜과 같은 하얀 솜이 자연 생성된다는 것에 자연 앞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정도이다. 실제 솜처럼 촉감도 좋고 무척 따뜻하며, 그 모습이 마치 눈송이가 가
지에 걸린 듯 하다. 목화에는 조그만 가시가 있으므로 솜을 만지거나 딸 때 주의하기 바란다.


▲  삼우당효자비(三憂堂 孝子碑)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52호


▲  비각 안에 놓여진 효자비
큼지막한 글씨로 효자리(
孝子里)로 쓰여있다.
(문화재청 사진 참조)

목면시배유지 좌측을 담에 둘러쌓인 조그만 비
각(碑閣)이 있다. 바로 문익점의 효행을 기리고
자 세운 효자비이다.
그는 목화를 가지고 돌아온 후, 어머니가 세상
을 떠나자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
묘살이를 하였다. 그 당시 남부지방은 왜구(倭
寇)의 노략질이 극심하여 다들 피난가기가 바뻤
는데, 유독 그만은 어미의 무덤을 바짝 지켰다.
마침 왜구가 이곳에 들이닥쳤는데, 아무리 미개
한 왜구패거리라도 그의 효행에는 적지 않게 감
동을 먹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에
'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표식을 세우고 돌아갔
는데, 그때부터 이 지역이 평안해졌다고 한다.
그후 1383년 고려 정부는 그의 효행을 기리고자
효자비를 내렸으며, 마을 이름을 효자리(孝子里
)라 하였다. 비각은 1563년에 씌운 것이다.

비각 안에 자리한 비석은 낮은 사각 받침돌 위
로 비신(碑身)을 세운 모습으로, 비신의 윗변은
살짝 둥글게 다듬었다.
 


♠  조선 후기 서원, 상해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의 현판으로 가득한
배산서원(培山書院) ~
경남 지방문화재자료 51호

목면시배유지를 둘러보고 다시 단성으로 발길을 돌리면 문익점 선생의 고향인 배양마을이 나온
다. 마을의 북쪽 산자락으로 붉은 색의 홍살문과 함께 고색이 깃들인 기와집들이 떼거지로 눈에
들어오는데, 그곳이 바로 배산서원이다. 목면시배유지와 지척이고 문익점 선생의 고향이라 그를
배향(配享)한 서원으로 오해하기 쉽겠으나 실상은 다르다.

이 서원은 부근 신안면에 있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 조선 정부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자 그곳
에 배향된 청향당 이원(淸香堂 李源)과 죽각 이광우(竹閣 李光友)를 따로 모시고자 1771년(영조
47년)에 지은 것이다.
처음 이름은 덕연사(德淵祠)로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철거되었으며, 1919년 합천
이씨의 대표인 진암 이병헌(眞菴 李炳憲)이 유교의 복원을 위해 서원 복원을 제의하여 문묘(文
廟)와 도동사(道東祠), 강당(講堂)을 짓고 이름을 배산서당(培山書堂)이라 했다. 이때 중국 곡
부(曲阜)의 연성공부(衍聖公府)의 협조를 얻어 그곳에서 공자(孔子)의 진영(眞影)을 가져와 문
묘에 배향했다.
도동사에는 청량당 이원과 친분이 있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죽각(
竹閣)을 배향하고 있다. 특히 강당에는 중국에 유명한 변법자강(變法自强) 운동가이자 공양학자
(公洋學者)인 강유위(康有爲)의 자필로 된 배산서당 현판(縣板)이 있고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
政府)의 주요 인물인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과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營), 우천 조완구(藕
泉 趙琬九). 백암 박은식(白岩 朴殷植) 선생의 배산서당 낙성축문(落成祝文)이 현판으로 남아있
어 보기와 달리 꽤 유서가 깊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5량가구조(五樑架構造)이며 왜정 때 지어진 제법 휼륭
한 한옥 건축으로 손꼽힌다. 문묘는 각각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익공식(翼拱式)이며 서당으로
지어질 당시 유교의 부흥을 염원한 유림(儒林)의 소망으로 1개도 아닌 2개의 사당(祠堂)을 갖추
어 이곳만의 큰 특징을 보여준다. 매년 봄 3월 상해일(上亥日)에 유림들이 춘향(春享)을 올린다.

※ 배산서원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단성까지 교통편은 앞에 목면시배유지를 참조.
* 단성정류장에서 목면시배유지 방면으로 12분 가량 걸으면 단성나들목 입구 못미쳐 길 오른쪽
  으로 배양마을이 있는데, 그 뒤쪽 산자락에 있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서원 앞 도로에 주차하면 됨)
①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 단성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배양마을(배산서원)
② 진주 → 산청방면 3번국도 → 원지 → 다리를 건너 단성 시내로 진입 → 배양마을(배산서원)
* 관람시간은 보통 9시부터 17시까지이다.
*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544-3


▲  공자왈 맹자왈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배산서원의 강당(講堂)

가까이 다가갈수록 고색은 있지만 낡고 허름한 서원의 모습이 커다랗게 다가선다. 엄숙을 요구
하는 홍살문을 지나 태극마크가 새겨진 솟을대문 앞에 이른다. 서원 문은 분명 잠겨있겠지 싶어
대문을 밀어보니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활짝 정도는 아니지만 1명이 들어갈 정도로
문틈이 생기면서 문 뒤에 가려진 서원의 속살이 가을햇살에 비춰 나에게 다가온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은 교육 공간인 강당이다. 강당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백범 김구 등의 상해임
시정부의 주요 인물들이 남긴 낙성축문이 현판으로 소중히 남아있으며, 중국의 변법자강 운동가
인 강유위가 쓴 '배산서당'의 현판이 걸려있어 서원에 대한 상해임시정부 지사들과 중국유학자
들의 지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허나 지금은 잠시 들린 가을 바람만이 맴돌 뿐, 정적만이 감싸고
돈다. 섬돌은 신발이 가득 놓였던 옛 시절을 그리워한 채, 먼지에 뒤덮여 세월을 원망하며, 툇
마루 역시 먼지와 한몸이 된지 오래다. 강당 앞뜰에는 운치가 서린 소나무가 강당의 허전함을
약간이나마 달래준다.

▲  서원 중간에 자리한 도동사(道東祠)

▲  서원 꼭대기에 자리한 문묘(文廟)

강당 옆구리로 뒤로 가면 문묘와 도동사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올라 삼문(
三門)을 지나면 맞배지붕의 도동사(道東祠)가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나그네를 맞는다. 도동사는
청량당 이원과 친분이 있던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선생의 죽각(竹閣)을 배향하고 있으며, 늘
굳게 닫혀 강당과 달리 폐쇄적인 인상을 자아낸다.

도동사 옆구리로 뒤쪽으로 가면 문묘로 가는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서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문묘가 서원 경내와 배양마을을 굽어보며 자리한다. 서원에서 제일 중요한 건
물로 중국에서 보낸 공자의 진영이 들어있다. 서원은 유교의 학당이라 공자나 맹자 등의 성현을
봉안한 건물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그래서 보통 서원이나 향교 제일 높은 곳 또는 제일 뒤쪽에
그들의 공간이 있는 것이다.
문묘는 도동사와 비슷한 크기이며, 그 뒤로 푸른 대나무들이 가득하여 왜정 시절 서원을 세우고
유교의 부흥과 나라의 광복을 열망한 유학자와 애국지사들의 청청한 정신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듯 하다.

이렇게 하여 단성 일대의 주요 명소 2곳을 둘러보았다. 목면시배유지만 생각하고 온 터라 배산
서원의 존재는 미처 생각치도 못했지. 의외의 수확물을 거두고 단성에서 덕산으로 들어가는 직
행버스를 타고 지리산 동쪽 자락에 안긴 덕산으로 이동했다.

덕산은 시천면의 중심지답게 마을이 제법 형성되어 있다. 터미널 남쪽으로 넓직한 시장이 형성
되어 나온 온갖 물품들이 선보이고 있으며, 시내 남쪽에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이 넓은 세
상을 향해 조용히 자신의 갈 길을 재촉한다.

내가 덕산을 찾은 것은 산청을 빛낸 대학자 남명 조식의 유적지를 보고자 함이다. 덕산 서쪽인
원리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고, 동쪽 사리에는 산천재와 별묘, 그의 묘소가 자리해 있다. 
(이들은 '산청 조식 유적'이란 이름으로 사적 305호로 지정됨)


♠  남명 조식을 기리고자 세운 덕천서원(德川書院)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89호

▲  덕천서원의 본당인 경의당(敬義堂)

▲  수업재(修業齋)

▲  진덕재(眞德齋)

덕산에서 중산리 방면으로 1km 정도 가면 길 오른쪽에 남명 조식을 배향한 덕천서원이 나온다.
이 서원은 그의 학덕을 기리고자 1576년에 유림들이 세운 것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2년
다시 지었다.
1609년 조선 정부는 조식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추증하고 덕천서원이란 사액(賜額)을 내리면서
서원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래서 경주 옥산서원(玉山書院),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과 더불어
삼산서원(三山書院, 산자 돌림의 3개의 서원)의 하나로 정조 때 영상을 지낸 채제공(蔡濟恭)이
이곳 원장을 지내는 등, 적지 않은 명성을 누렸다. 허나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사업으
로 문을 닫았으며, 지금의 서원은 1926년에 재건된 것이다.


▲  덕천서원 은행나무

서원 앞에는 차디찬 인상의 붉은 홍살문이 이곳
을 찾은 이들에게 엄숙을 요구하고, 홍살문과
서원으로 들어서는 외삼문(外三門) 사이에는 가
을옷을 걸친 은행나무가 하늘 높이 솟아 위엄을
부린다. 유교와 관련된 서원과 향교에는 꼭 은
행나무가 있기 마련인데 이는 공자가 은행나무
밑에서 강연을 했다는 행단(杏壇)을 상징한다.
가을도 남명의 학식을 흠모했는지 서원 앞에 아
름다운 작품을 빚어놓아 그 마음을 표현한다.
장대한 세월과 서원 사람들의 보살핌을 든든한
양분으로 삼으며 어엿하게 자란 이 나무는 나이
가 무려 400년에 이르러 거의 서원의 역사가 담
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살문 건너편에는 단아한 모습의 이름도 어여
쁜 조그만 정자,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서원
건립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주역의 '성인세심(
聖人洗心)'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취성정(醉醒
亭), 풍영정(風詠亭) 등의 풍류적인 이름도 가
지고 있으며, 서원 유생들의 휴식처로 바로 밑
에는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이 흐른다.

지금은 정자 앞에 2차선 도로가 놓여져 서원과 별개인 듯 보이나 실은 서원의 엄연한 일부이다.
마음을 씻고 닦는다는 정자의 이름처럼 유생들은 정자에서 시를 지으며 지리산에서 불어오는 시
원한 바람에 번잡한 마음을 맡겼을 것이다. 산에 걸쳐진 달을 벗삼아 곡차(穀茶) 1잔 즐기고 머
리를 식혔을 세심정은 정자 앞으로 뚫린 신작로로 수레들이 1분이 멀다하고 굉음을 뿜으며 지나
가니 옛날의 운치는 아쉽게도 많이 사라졌다. 아무리 도로를 뚫더라도 그런 것은 좀 감안하여
강 건너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것이 참 아쉽다. 정자에선 수풀 사이로 덕천강이 바라
보이며, 덕산 시내와 주변 풍경이 아낌없이 두 눈에 다가온다.


▲  덕천서원 유생들의 휴식처, 세심정

▲  글씨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듯한
세심정 현판의 위엄

▲  서원 홍살문과 외삼문 ~ 이곳 홍살문에는
태극마크가 달려있지 않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진 덕천서원 내부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바로 정면에
는 서원의 본당인 경의당(敬義堂)이 있고, 우측에는 수업재가 좌측으로 진덕재가 자리해 있다.
수업재와 진덕재는 서원 유생들의 숙식공간으로 잘나가던 옛 시절에는 섬돌에 그들의 신발이 가
득 널렸을 것이고, 방에는 그들의 온기로 가득했겠지만 지금은 먼지가 입혀진 섬돌과 툇마루가
옛날을 그리워할 뿐이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뒷전으로 물러나 앉은 모습은 참으로 쓸
쓸해 보인다.

남명의 학문은 크게 경(敬)와 의(義)로 집약되는데, 이는 주역의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 경은 내적 수양을 통해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여 근본을 세우는 것이고, 의는 경
을 근본으로 하여 제반사를 대처함에 있어 과단성있게 실천하는 것)에서 따온 것으로 서원의 본
당도 거기서 이름을 취해 경의당이라 했다.
이 건물은 유생들의 학습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 모서리로 날
씬한 기둥 4개를 설치하여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아마도 배흘림 기둥인듯 하다. 유생들의 창랑
한 글 읽는 소리로 떠들썩했을 경의당에는 바람의 소리만이 내 귀에 작게 속삭일 뿐이다.

▲  경의당 천정에 달린 현판

▲  서원 제일 끝에 자리한 숭덕사(崇德祠)

경의당 옆구리를 통해 뒤쪽으로 가면 내삼문이 나오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남명을 배향(配享)
한 사당, 숭덕사가 의연한 모습으로 내게 다가선다. 서원 제일 뒤쪽에 자리한 숭덕사는 서원에
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이곳의 존재의 이유가 바로 남명을 배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숭덕사 양쪽 벽에는 절의 불전(佛殿)처럼 벽화가 그려져 있어 눈길을 잡아맨다. 우측 벽에는 호
랑이가 나무 아래서 으르렁거리는 모습이, 좌측 벽에는 푸른 용이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 담겨져
있는데, 용은 아마도 조정에 진출하여 출세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듯 하며, 호랑이 역시 비
슷한 의미를 지닌 듯 하다. 입을 벌려 으르렁거리고 있다지만, 그다지 무서운 모습은 아니며 마
치 고양이가 열심히 야옹거리는 모습처럼 귀엽게 다가온다.

▲  숭덕사 우측 벽에 그려진 호랑이

▲  숭덕사 좌측 벽에 그려진 푸른 용

※ 덕천서원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원지까지는 앞에 산청 목면시배유지 참조, 원지에서 중산리/대원사행 직행버스를 타고 덕산에
  서 하차
* 부산 서부터미널에서 덕산행(중산리/대원사 방면) 직행버스가 1일 7회 떠나며, 진주에서는 중
  산리/대원사행 직행버스가 30분 간격으로 다닌다. 덕산에서 하차하여 중산리 방면으로 도보
  12분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서원 앞 길가에 주차)
① 대전~통영 고속도로 → 단성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중산리 방면 20번 국도 → 덕산 → 원
   리교를 건너 직진 → 덕천서원 
② 진주 → 산청 방면 3번 국도 → 원지에서 중산리 방면 → 덕산 → 원리교를 건너 직진 → 덕
   천서원

★ 덕천서원 관람정보
* 관람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대략 9시부터 18시까지이다.
* 지리산둘레길 9코스(덕산~위태,상촌)가 덕천서원 동쪽 천평교를 지나간다.
*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 222-3


♠  남명 조식 묘소 (산청 조식 유적) - 사적 305호

▲  남명 묘역으로 오르는 길 ~ 남명 선생의 드높은 의기(義氣)를 상징하듯
소나무가 울창하다. 그들이 선사하는 솔내음에 정신이 싹 맑아지는 것 같다.

덕천서원을 둘러보고 다시 덕산으로 나와 단성 방면으로 2km 정도 가면 남명의 묘소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의 안내로 잘 닦여진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남명의 묘역이 모습을
비춘다.
묘역은 특이하게도 산비탈에 높다랗게 석축(石築)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닦아 무덤을 쓴 형태로
마치 돌로 쌓은 조그만 성곽을 보는 듯 하다. 무덤 주변에는 얕게 돌담을 둘렀는데, 그 모습이
현무암으로 묘역을 두른 제주도의 무덤을 보는 듯 하다.


▲  남명 묘역으로 가는 도중에 바라본 지리산의 동쪽 줄기 ~
저 산은 지리산이 아닌 구곡봉(961m)이다. 산 아래로 덕산 시내가 포근히 다가온다.

▲  성처럼 쌓여진 석축 위에 자리를 닦은 남명의 묘역

석축 위에 마련된 묘역에는 남명과 그의 숙부인(淑夫人) 은진송씨의 묘소가 있다. 숙부인의 무
덤은 묘역 아랫쪽에 있으며, 가장 위쪽에 남명의 유택(幽宅)이 자리한다. 묘자리는 남명이 직접
정한 것으로 전해지며, 대곡 성운(大谷 成運)이 지은 묘갈명(墓碣銘)가 있다.
무덤의 봉분(封墳)은 일반 백성의 무덤처럼 조그만하며, 무덤 주변을 장식한 석물도 망주석(望
柱石) 2기와 비석, 상석(床石) 등 기본적인 것이 전부로 매우 검소한 모습이다. 그러면 여기서
잠깐 남명 선생의 일생을 짚어보도록 하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창녕 조씨로 1501년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
다. 아버지는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낸 조언형(曺彦亨)이고 어머니는 인천 이씨(인주
이씨)이다.
조식의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으로 어린 시절 외가에서 자랐으며, 아버지가 벼슬길에 나가
자 그의 임지를 따라 다니며 공부를 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림파(士林派)가 대거
숙청을 당하고 그의 숙부까지 이에 연류되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는 잘못된 정치의 폐단에 회
의를 느낀다.

30살에 처가가 있는 김해로 내려가 신어산 아래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힘쓰면서 제자
를 길렀다. 48살에 고향인 합천으로 돌아와 뇌룡정(雷龍亭)과 계부당을 짓고 제자를 가르쳤으며,
사림파를 이끄는 지도자로 크게 명성을 얻었다. 조정에선 그에게 벼슬을 주었으나 나가지 않았
고, 55살에 단성소(丹城疏)를 올려 조정의 잘못을 지적했다. 그리고 1561년 산청 덕산으로 들어
와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후진을 양성했다.

그의 교육철학은 개인의 자질에 따라 가르치며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하여 그것을 자기 것
으로 만드는 것을 중시했다. 또한 기존의 고리타분한 유학자와 달리 학문의 실천과 학문과 삶이
일치되야 함을 강조했으며, 제자들에게 성리학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학, 궁마(弓馬) 등 다
양한 학문을 가르치고 또한 열심히 배울 것을 권했다.
선조(宣祖) 임금은 그에게 여러 번 벼슬을 내렸으나 흔쾌히 거절했으며, 68세에 무진봉사(戊辰
封事)를 올려 정치의 폐단과 이를 개혁할 대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한평생 선비의 삶을 지키며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다가 71세인 1572년 2월 8일 산천재에서 조용히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부고를 들은 선조는 크게 애통해하며 자신을 소자(小子)라 칭하고 그에게 '인자한 나라의
큰 어른'이라 칭하며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다. 그리고 광해군(光海君)은
그에게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남명의 학문은 경(敬)과 의(義)로 집약되며, 백성들의 삶을 살피는 위민정치를 강조하였다. 그
의 문하에서는 정말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는데, 정탁(鄭琢)과 정구(鄭逑), 김우옹(金宇顒) 등
은 남명의 학덕을 계승하여 그들만의 학파를 이루어 사림의 중심세력이 되었으며, 곽재우(郭再
祐), 정인홍(鄭仁弘), 김면(金沔) 등 50여명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키니 이는
남명의 정신을 충실히 이어받은 결과이다. 그의 학문과 정신이 유학의 중심이 되면 참 좋으련만
조선의 위정자와 유학자들은 전혀 그러지를 못했고 그저 쓰잘데기 없는 괘변 논쟁이나 일삼으며
나라와 백성, 국방을 소홀히하다 결국 나라를 말아먹고 만다.


▲  묘역 아랫쪽에 자리한 숙부인 은진송씨의 묘역

▲  남명 묘역 밑에 서 있는 비석들
이들은 모두 남명 선생을 기리는 비석들이다.

▲  남명 묘역 좌측 밑에 담장이 둘러진 공터
가 있다. 상석이 누워있는 것으로 보아
제사 공간인 듯 싶다.


▲  조촐한 모습의 남명 선생의 무덤
무덤 곁에 귀부와 지붕돌을 갖춘 비석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며,
망주석은 540년 세월의 때로 꽤 얼룩해졌다.

▲  남명 선생 무덤 뒤쪽에서 바라본 천하
저 아래로 사리마을과 시천~단성간 우회국도(지리산대로)가 보인다.

◀  남명 선생 무덤 앞에 세워진 묘비
무거운 빗돌을 받쳐든 귀부는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표정에 웃음이
만연하다.


♠  남명기념관

▲  남명기념관

▲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남명 선생 신도비(神道碑)

▲  기념관 우측으로 정겹고 아늑한
돌담길이 늘어져 있다.

남명 묘역을 둘러보고 아까와 달리 조그만 산길을 타고 내려가면 담장으로 몸을 두룬 남명기념
관이 나온다. 이 기념관은 그의 유물을 보존하고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탄생 500주년(
2001년)에 설립이 추진되어 2004년에 문을 열었다.
남명 선생과 관련된 유물들을 한 자리에 모았으며, 그의 서책과 유품, 덕천서원과 산천재 관련
서적들이 아낌없이 진열되어 있다, 여기서는 전시 유물 중 극히 일부만 소개한다.
* 관람시간 : 10시 ~ 18시 (매주 월요일 쉬며, 관람료 없음)


▲  남명 선생이 늘 달고 다녔다는 성성자(惺惺子) 방울

남명은 2개로 된 작은 쇠방울을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는데 그 이름을 성성자라 했다. 여기서 성
(惺)은 깨닫는다는 뜻으로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방울소리가 날 때마다 자신을 일깨우고 학문
에 전념했다고 한다. 저 성성자는 근래 복원된 것이다.


▲  남명 선생이 역시 늘 지니고 다닌 경의검(敬義劍)
칼에는 그의 사상인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가 새겨져 있다.
저 칼도 근래에 복원된 것이다.

▲  남명 선생의 철학이 담긴 신명사도(神明舍圖)

신명사도는 마음의 작용을 마치 제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이치에 비유하여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림에서 성곽의 안쪽은 사람의 마음이고, 바깥쪽은 외부세계를 의미하며, 신체
내외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나타낸다.
남명은 사람의 마음과 마음 바깥의 경계를 굳은 성곽으로 나타낸 것은 신체 외부에서 마음으로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된다는 굳은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신명사도의 내용을 생활화하려고 했으며, 그가 합천에서 지은 뇌룡전은 신명사도에 따라 지은
것이다.


▲  사성현유상병풍(四聖賢遺像屛風)
남명 선생이 직접 그린 병풍으로 공자(孔子), 주렴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
주자(朱子)의 유상병풍이다.

▲  광해군이 남명의 제자인 정인홍(鄭仁弘)을
 영의정으로 삼는다는 교지(敎旨)
 여기서 만력 46년은 1618년으로 명나라 신종
(神宗)의 연호이다.

▲  남명기념관 가운데에 자리한
남명 선생의 영정
선비의 지조와 스승의 인품이 느껴지는 그의
영정은 상상에 의지하여 그려진 것이다.

▲  덕천원생록(德川院生錄)
덕천서원을 찾은 원생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  남명 선생의 상소문과 여러 문서를 정리하여 담은 서적들


♠  남명 조식의 별묘(別廟)와 산천재(山天齋) - 사적 305호

남명기념관 좌측에는 남명 선생의 별묘가 있다. 별묘는 집안 조상에게 제를 올리는 가묘(家廟)로
창녕조씨 문중에서 해마다 제례를 올린다.


▲  남명 선생과 그의 정경부인, 숙부인의 위패가 모셔진 여재실(如在室)

▲  남명기념관과 별묘 정문인 성성문

▲  선조가 남명의 죽음에 크게 애통해하며
보낸 사제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담은
비석으로 산천재 입구에 있다.


▲  산천재(山天齋)

남명기념관 남쪽 국도 너머에 자리한 산천재는 남명이 1561년에 이곳에 들어와 지은 것으로 정
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이다. 규모는 두 눈에 쏙 넣어도 부담이 없을 정도
로 조촐하다.
남명은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며 열심히 후학을 양성했는데, 여기서 무려 100여 명의 인재가 배
출되었다. 그들은 남명의 학풍을 계승하여 사림의 중심을 이루었고, 곽재우 등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다.

건물 주변에는 붉은 소나무를 비롯하여 여러 수목이 운치를 자아내며, 건물 앞에는 덕천강이 유
유자적 흐른다. 건물 기와에서 1576년과 1597년에 만든 것들이 보여 1576년과 보수를 하고 임진
왜란 때 불탄 것을 1597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  산천재 좌측에 있는 건물로 제자들이
머물던 숙소이다.

▲  남명 선생의 문집이 보관된
장판각(藏板閣)

산천재 좌측에는 아담한 건물 2채가 있는데, 앞쪽은 제자들의 숙소이다. 그 뒤로는 정면과 측면
이 1칸인 손바닥만한 건물이 있는데, 남명 선생의 문집이 보관된 장판각이다. 그의 문집은 1604
년 해인사에서 처음 간행되었으며, 여러 차례 업데이트를 거쳤다.
이곳에 보관된 문집은 경남 지방유형문화재 164호로 보관을 위해 굳게 입을 봉했다. 허나 문집
상당수는 아마도 남명기념관에 가 있을 것이다. 거기서 보관하는게 더 도난의 위험이 적기 때문
이다. 이렇게 하여 문익점과 남명 조식을 테마로 한 산청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 산청 조식 유적(산천재, 남명기념관, 남명 묘소) 찾아가기 (2012년 9월 기준)
* 덕산까지 교통편과 차량 접근법은 앞에 덕천서원 참조, 원지에서 덕산행 직행버스를 타고 들
  어갈 때 사리에서 내리면 바로 산천재, 남명기념관이 있으며, 묘소는 기념관 우측으로 올라가
  는 산길이 있다.

★ 관람정보
* 관람료는 없으며 남명기념관 외에는 휴관이 없다.
* 매년 10월에는 남명기념관을 중심으로 남명선비문화축제가 열린다. 축제기간은 2일 정도로 남
  명 제례와 의병출정식, 전국한시백일장, 학생풍물경연대회, 학생백일장, 선비체험, 민속놀이
  경연대회, 마당극, 국악 공연 등이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 남명선비문화축제 문의는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055-748-9147~8 (☞ 홈페이지 가기)>
* 지리산둘레길 8코스(운리~덕산)가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을 지나간다.
* 산천재, 남명기념관 소재지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72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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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2년 9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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