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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1.27 서울 도심의 꿀단지, 서촌 늦가을 산책 ~~~ 옥인동 박노수미술관,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기와집 흔적들
  2. 2013.10.25 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아름다운 박물관, 성북동 간송미술관
  3. 2013.04.11 서울에서 가볼만한 명소 360곳 (2013년 4월 기준)

서울 도심의 꿀단지, 서촌 늦가을 산책 ~~~ 옥인동 박노수미술관,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기와집 흔적들



' 늦가을 서촌 나들이 '

(박노수미술관과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집)


▲  박노수 가옥(박노수 미술관)의 뒷모습

▲  박노수 가옥 뒷쪽 굴뚝

▲  청운동에서 바라본 북악산


 


▲  옛 청휘각(晴暉閣)터 주변에서 바라본 서촌(西村)

서울 도심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서촌(웃대)은 경복궁(景福宮) 서쪽 동네를 일컫는다. <청계
천 이북이자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는 북촌(北村), 청계천 이남은 남촌(南村), 창덕궁 동부는
동촌(東村)이라 불림>
흔히 서촌이라 불리는 경복궁 서부는 옛날부터 웃대라 불렸으며 원래 서촌은 경희궁(慶熙宮)
과 서대문 주변 지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인왕산 동쪽까지 확장된 것이다. 또한 세종대왕이
통인동에서 태어난 인연(1397년 출생)을 내세워 2011년 이후에는 종로구청과 지역 주민 주도
로 새롭게 '세종마을'을 칭하고 있다.

서촌(웃대)은 왕족부터 양반사대부(士大夫)부터 내시와 상궁(尙宮), 의관(醫官), 역관(譯官)
등의 중인(中人)과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이 살았는데 그중 중인 계급이 많이 살았다. 또한 인
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을 병풍으로 두룬 아름다운 절경으로 인해 조선 초부터 도성(都城) 내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런 곳은 늘 귀족들이 군침을 흘리는 법이라 안평대군(安平大君,
세종의 3번째 아들)부터 이항복(李恒福), 정철(鄭澈), 권율(權慄), 김상용(金尙容), 김수항(
金壽恒), 추사 김정희(金正喜)에 이르기까지 많은 귀족들이 집과 별장을 지어 머물렀다.
특히 이곳은 도시와 자연이 경계를 맞닿은 도성의 변두리로 지금과 달리 필운대로와 신교동교
차로만 지나면 완전 자연에 감싸인 한적한 곳이었다. 게다가 궁궐과 육조(六曹) 등의 관청이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워 고위 관리들의 주택, 별서 장소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서촌의 이름난 명소는 겸재 정선(鄭敾)이 그의 노련한 손끝을 통해 그림으로 남겼는데, 그 화
첩이 장동(壯洞)8경첩으로 여기서 장동은 서촌의 일원인 청운동 지역의 옛 이름이다. 조선 후
기에는 중인이던 천수경(千壽慶)이 송석원(松石園)이란 시사(詩社)를 세워 중인들의 문학 공
간으로 키웠으며, 왜정(倭政) 이후에는 윤동주(尹東柱), 이상범(李象範), 박노수(朴魯壽), 이
상(李箱) 등 많은 시인과 화가들이 서촌에 안겨 주옥 같은 작품을 그려냈다.

서촌은 북촌만큼은 아니지만 한옥들이 제법 많이 남아있다. 대략 700여 채의 한옥이 옥인동과
누하동, 사직동, 체부동, 창성동 일대에 흩어져 있는데, 120년 이상 묵은 한옥은 하나도 없고
, 20세기 개량 한옥이 주류를 이루며 박노수 가옥 등의 양옥도 섞여있어 20세기 초/중반 서울
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옥이 많긴 하지만 북촌처럼 정식적으로 한옥마을을 칭하
고 있지는 않다. (비공식적으로 '서촌한옥마을'이라 불리기도 하며, 창성동 일대 한옥을 따로
'창성동 한옥마을'이라 불리기도 함)

조선 후기까지 북촌과 더불어 잘나가는 동네로 이름을 날렸던 서촌이지만 옥인동 일대에 고래
등 저택을 짓고 인왕산의 맑은 공기를 축내던 친일파 윤덕영(尹德榮)과 이완용의 부정 때문인
지 왜정 이후 적지 않게 기울었고 해방 이후 개발제한구역에 묶이면서 거의 시골 읍내처럼 정
체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루면 강산도 변한다는 서울 도심 한복판임에도 북촌과 서촌만큼은 시간도 느릿느릿 양반걸
음을 하거나 뒷걸음을 치는 것이다. 조금만 나가면 21세기 한복판인데 서촌 상당수는 아직 20
세기 한복판에 머물러 있어 서울의 옛 모습을 더듬기에 좋다.
허나 시간이 너무 정체되면 지역 주민들의 삶이 힘들어진다. 북촌도 도심 속의 꿀단지로 화려
하게 재기를 하고 있지만 서촌은 근래까지 낙후된 모습으로 거의 남아있던 것이다. 그러다보
니 한옥 기피증이 생겨나 한옥이 감소하게 되었고 거기에 서울시의 무관심까지 더해져 서촌의
숨겨진 명소들도 은근히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 4월 서울시에서 '경복궁 서측
지구단위계획'을 발표하여 한옥 보존과 신축을 장려했고, 북촌으로 단단히 재미를 본 서울시
와 종로구청이 서촌을 새로운 꿀단지로 개발하면서 서촌도 드디어 때를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새로 지어진 한옥이 나날이 늘고 있고, 종로구청에서 서촌 답사코스를 개발하고 홍보
하는 한편, 새로운 명소를 발굴하고, 기존의 명소를 손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조
금씩 북촌을 추격하고 있다. 특히 수성동계곡 복원(2012년 7월)과 박노수 가옥을 구립 미술관
으로 해방시킨 사건(2013년 9월)은 서촌에 큰 활력을 불어넣는데 충분했다. 게다가 소규모 갤
러리와 공방도 조금씩 둥지를 틀면서 서촌의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서촌에는 수성동계곡과 박노수가옥(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이상범 가옥, 사직단, 황학정(
黃鶴亭), 단군성전, 선희궁(宣禧宮)터, 백호정 바위글씨, 백세청풍 바위글씨, 창성동 한옥단
지, 통의동 백송터, 신익희(申翼熙) 가옥, 백운동천, 송석원터, 청휘각터, 자수궁터, 보안여
관, 필운대, 배화여고 생활관, 체부동(體府洞) 홍종문가옥, 백운동천 바위글씨, 운강대 바위
글씨, 행촌동 은행나무, 딜쿠샤, 홍건희 가옥 등 조선과 근대, 현대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깃
들여져 있으며 갤러리아트가, 대림미술관 등의 온갖 갤러리와 문화공간, 금천교시장(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과 통인시장 등의 전통재래시장이 있다. 특히 금천교시장은 제2의 피마골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먹자골목이 크게 형성되어 있는데, 고깃집과 전집, 횟집, 분식집
등 다양한 식당이 즐비하여 학생과 직장인, 인왕산 등산객, 답사객으로 1주 내내 활기가 넘친
다. (나도 가끔 이용함)

부암동(付岩洞)과 성북동, 북촌과 더불어 나의 마음을 계속 훔치고 있는 서촌은 2011년 늦여
름부터 구석구석 발자국을 남기며 그의 숨겨진 속살을 계속 뒤집고 있다. 별거 없을 것 같은
겉보기와 달리 그 속은 신대륙 이상으로 다양한 보물을 품은 곳이 바로 서촌이다.

서촌 나들이는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나 2, 3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자하
문로나 사직공원 동쪽(경복궁역 1번 출구)의 필운대로를 중심으로 움직이면 되며, 자하문고개
에 있는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에서 주요 명소를 거쳐 경복궁역으로 내려오는 것도 괜
찮다. 또한 조그만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고, 그 속에 여러 명소와 소소한 볼거리 등
이 숨겨져 있으니 너무 큰 길만 살피지 말고 서촌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골목길도 꼭 거닐어
보자. 그러면 정말 배부르고 알찬 서촌 나들이가 될 것이다. 단 서촌도 엄연히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므로 민폐를 부리지말고 조용히 둘러보기 바란다.


 

♠  친일파 윤덕영이 지은 근대 가옥, 화가 박노수의 삶터로 미술관으로
새롭게 거듭난 박노수 가옥(朴魯壽 家屋)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호

서촌 중심에 자리한 통인시장에서 수성동계곡으로 인도하는 옥인길을 따라가다보면 오른쪽 골
목 속에 서촌의 상큼한 명소로 등극한 박노수 가옥이 손짓을 한다. 이곳은 집 이름 그대로 우
리나라 미술계의 원로이자 현대 화가인 남정 박노수의 집으로 인근 이상범 가옥과 함께 현대
미술의 따끈따끈한 산실이며 2013년 9월 이후 속세에 개방되어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이하
미술관)'으로 새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이야 천하에 공개된 현대 화가의 미술관으로 누구든 돈만 내면 안길 수 있는 명소가 되었
지만 이 집의 태생은 그렇게 곱지는 못했다. 바로 친일매국노로 개추잡한 이름을 날렸던 윤덕
영(尹德榮, 1873~1940)이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윤덕영은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큰아버지로 왜정(倭政)에 적극 협
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며 배때기에 기름칠했던 1급 매국노이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친일파로 추잡한 뒷끝을 보인 윤치호(尹致昊) 조차도 '이 비열한 매국노
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며 그의 만행을
꼬집었다.
하지만 사람이기를 포기한 윤덕영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손가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이권에 개입해 많은 부를 쌓았고, 집과 땅에도 징그럽게 욕심을 부려 송석원(松石園)을
비롯한 옥인동(玉仁洞) 일대를 사들여 고래등 양옥 별장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지었다. 그
리고 그 주변으로 가족과 첩을 수요할 14동의 고래등 한옥을 주렁주렁 지어 완전 그만의 조그
만 세상을 만들어놓았다.
박노수 가옥은 그 14동의 하나로 딸과 사위를 위해 이 땅 최초의 근대 건축가인 박길룡(朴吉
龍)에게 의뢰하여 1937~1938년경에 지어진 것이다.


▲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을 연 박노수 가옥(미술관) 대문

▲  벽돌로 지어진 박노수 가옥 (박노수미술관)

이 가옥은 한옥 양식과 중원대륙 양식, 서양식이 잡탕이 된 이른바 절충식 기법의 집이다. 2
층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벽돌 건물로 반지하층을 가지고 있으며, 붉은 벽돌로 된 1층에는 온
돌방과 마루, 복도, 응접실이 있고, 하얀 피부로 이루어진 2층은 나무 구조로 지어졌는데 계
단을 중심으로 마루로 된 방이 널려있다.
그리고 3개의 벽난로를 설치해 온기가 머물 공간을 확보하고 집 서쪽에 현관을 두었으며, 벽
돌로 포치를 설치하여 집의 운치를 더욱 높였다. 지붕은 서까래를 노출한 단순 박공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2층의 증축 부분을 빼면 거의 원형 그대로 잘 남아있다.

박노수가 매국노의 악취가 진동하는 이 집에 들어온 것은 1973년이다. 왜 이곳을 골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승인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의 집과도 가깝고, 집의 모습도 중후하고 운치가
진해 예술가의 집 분위기로는 아주 좋아 보인다. 게다가 뜨락도 넓고, 인왕산도 가깝고, 도심
과도 가까우니 시내 왕래가 잦았던 그에게도 딱 적당한 장소였을 것이다.
남정은 이곳을 집과 화실로 삼아 많은 작품을 그려냈으며, 그의 예술적이고 꼼꼼한 손맛이 담
긴 뜨락에는 그가 수집한 수석과 석물, 문화유산을 배치하고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어 자연과
문화, 수석이 어우러진 아주 참한 공간으로 꾸몄다.

왜정 때 박길룡이 설계한 건물로 당시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고 현대 미술화가인
박노수가 40년 가까이 머물며 작품 활동을 벌였던 현장이라 윤덕영이라는 친일파 괴물이 만든
건물임을 무릅쓰고 1991년 5월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그것도 1호라는 그럴싸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바로 그 점이 참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데 1호나 2호, 3호ㅡ 100호 등은 그저 지정된 번호
일 뿐 가치 순위는 아니기 때문에 그리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1호만큼은 신중
해야 된다고 본다. 국보 2호는 몰라도 1호는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1호의 의미는 이 땅에서
는 꽤 각별하기 때문이다. 해방이 된지 70년이 되도록 친일매국노 청산조차(청산은 커녕 그것
들이 더 활개치고 있음) 제대로 되지 못한 이 땅의 거지 같은 현실을 이 가옥이 보여주는 듯
싶어 마음이 참 쓰라리다.

만약 윤덕영의 후손이 염치없이 계속 살고 있었다면 화염병이나 폭탄을 던져 없는 화마(火魔)
라도 억지로 소환해 집과 함께 날려버려야 마땅하겠지만 박노수가 이곳에 살면서 집에 일종의
면죄부가 붙여졌으니 굳이 때려부실 필요는 없을 것이다. 허나 문화재 지정 후순위로 두어 천
천히 지정을 하던가 요즘 개나 소나 지정된다는 등록문화재로 삼는 것이 어땠을까 싶은 아쉬
움도 살짝 든다. 뭐 이렇게 써봤자 허공에 메아리에 불과하지만...


▲  가옥(미술관) 현관 앞 (가옥 서쪽)

★ 남정 박노수(藍丁 朴魯壽, 1927~2013)의 간략한 생애
박노수는 1927년 2월 17일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에서 태어났다. 1940년대에 청전 이상범의
문하로 들어가 그림을 배웠으며, 해방 이후 서울대 회화과에 진학했다.

그의 작품활동은 주로 국전(國展)에서 이루어졌는데 1953년 국무총리상, 1955년에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1957년에는 추천작가를 지냈다. 이후 5.16민족상, 3.1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
을 받았고, 이화여대(1956~1962)와 서울대(1962~1982)에서 교수를 지냈다. 이후 서울대 명예
교수가 되었고,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역임했으며, 1995년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 6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왜열도 동경과 스웨덴, 미대륙에 다수의 국제전과 10
여 회의 국내외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화제를 취하면서도 간결한 문필과 강렬한 색감, 대담한 터치 등 독자적
인 화풍을 구축해 전통 속에서 현대적 미감을 구현한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으로
는 '달과 소년'이 있으며, 그의 많은 작품이 이곳에 진열되어 속인들의 정처없는 안구와 마음
을 다독거려준다.

남정은 1973년부터 2011년 말까지 이곳에 살았다. 2011년 죽음이 임박해진 그는 집과 소장품
등 재산의 상당수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해 11월 11일 자신의 집에서 미술
계 인사와 후배들, 제자들, 종로구청 관계자 등이 모여 기증협약식을 갖고 약속대로 집과 소
장품을 쿨하게 종로구청에 내주었다.
그가 기증한 물건은 그의 그림이 포함된 미술작품 500점, 수석과 여러 석물 379점, 오래된 가
구 66점, 개인 소장품 49점 등, 약 1,000여 점으로 그의 통 큰 기증은 서민의 쪽박까지 빼앗
으려 드는 졸부와 위정자들로 가득한 이 땅에 한줄기 빛과 같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가 베
푼 대인의 기운은 친일파 집이라는 굴레를 지닌 이 가옥을 180도 달리 보이게 하는데 충분했
다.

종로구청은 남정의 뜻에 따라 기증받은 집을 종로구립 미술관으로 꾸미기로 하고 2012년 10월
에 개관하기로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해 1년 연기되었다. 그 사이 남정은 그의 소망이던 미
술관 개관을 끝내 지켜보지 못하고 2013년 2월 25일, 86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숨을 놓고 말았
다.
그가 사라진 이후, 유족과 종로구청의 노력에 힘입어 남정의 손때와 예술혼이 서린 그의 집은
드디어 2013년 9월 11일,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 천하에 문을
열었다. 개관 기념전으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모아 '달과 소년전'을 가졌으며, 종로구 최초
의 구립 미술관으로 이곳이야말로 남정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작이자 아름다운 선물이다.

나는 근/현대 미술가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보니 남정이 왜정과 현대를 거쳐간 원로 화가의 하
나로만 알고 있었다. 허나 이번에 그의 깊은 부분까지 파고드니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못
지 않은 대인(大人)으로 그의 이름 3자가 제법 크게 다가온다.


▲  무늬가 살아있는 석조대좌(臺座) (현관 앞)
무엇을 받치던 대좌였길래 무늬가 저렇게 요염한 것일까? 허나 대좌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망연히 뜨락 장식물의 일원이 되었다. 정체성과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만큼
무섭고 한심한 것은 없다.

▲  미술관 개원 기념으로 종로구청장이 남정에게 바친 메세지

▲  야외 전시관을 방불케하는 미술관 남쪽 뜨락

박노수 가옥은 크게 미술관으로 변신한 2층 가옥과 남쪽 뜨락, 그리고 북쪽 벼랑에 설치된 전
망대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 뜨락에는 남정이 수집한 온갖 수석과 문화유산 등이 가득 흩어져 있고, 소나무와 감나무
등 여러 나무와 꽃이 자리해 있어 조촐하게 자연과 문화가 잘 버무려진 야외 전시장을 이루고
있다. 특히 그는 수석 취미가 대단하여 뜨락 안팎으로 수석들이 가득한데 군침이 돌 정도로
잘생긴 돌도 적지 않으며, 그가 도안해서 만든 석조 원탁과 돌의자 6기는 가족과 벗, 제자/후
배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던 정겨운 현장이다.

▲  남정이 만든 석조 원탁과 돌의자 6기

▲  비석의 지붕돌인 가첨석(加檐石)


▲  귀여움과 고색의 때가 묻어난 조그만 호랑이상
어디서 데리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조선 후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  또다른 호랑이상
호랑이를 고양이로 만든 옛 사람들의 손때로 피부가 꺼무잡잡하다.

▲  머리 위에 또다른 머리 장식을 둔 특이한 석등(石燈)
피부가 아직 반질반질하고 머리 장식이 특이한 흔치 않은 석등으로 20세기
초/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음)

▲  향로석(香爐石)과 그 위에 수줍게 놓인 작은 수석

▲  물을 머금은 조그만 돌항아리와 분재들
벌써부터 수면에 떨어진 낙엽들이 인생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돌항아리는 저들의 인생을 마무리 짓는 블랙홀인 모양이다.

▲  늦가을이 깃든 상큼한 남쪽 뜨락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  수석과 잡초, 꽃으로 가득한 가옥 동쪽

     ◀  집 동쪽에 솟아난 늘씬한 소나무
박노수가 심은 나무로 하늘과 가까운 줄기 끝
에 소나무 잎이 덩어리로 몰려있는 모습이 특
이하다. 나무의 높이는 거의 가옥 2층 정도 된
다.

▲  키 작은 태산목(목련목)
양옥란(洋玉蘭)이라고도 하며 박노수가
심었다.

▲  포치가 달린 가옥(미술관) 현관
구한말, 왜정 때 지어진 개인 양옥 가운데
포치가 달린 집은 흔치 않다.


▲  현관 앞에 놓인 커다란 돌확


 

♠  박노수 가옥(미술관) 현관과 전망대 주변

▲  현관을 지키고 있는 목조 동자상
세월이 달아놓은 주름으로 빛이 좀 바래 보이지만 앳된 표정은 변함이 없다.

    ◀ 가옥 현관과 여의륜(如意輪) 현판
지금은 유료의 공간이 되버린 박노수 가옥 내
부는 포치가 달린 현관을 통해 들어서면 된다.현관문에서 신발을 버리고 실내화로 갈아타면
되는데, 반지하층을 제외한 1층과 2층 상당수
의 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미술관 사무실은 1층
에 있다. 또한 '달과 소년'을 비롯한 박노수의
그림은 주로 2층을 장식하고 있으며, 1층은 박
노수의 생애와 그림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
다. (내부 촬영은 통제됨)

현관문에는 한자로 쓰인 여의륜 현판이 걸려있다. 글씨가 꽤 큼지막하고 패기가 넘치는 모습
으로 박노수의 집에 있으니 그의 글씨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다.
현판에 담긴 여의륜이란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세간(世間), 출세간 이익을 더하는 것
을 본뜻으로 하는 보살(菩薩)을 뜻하는 말로 추사가 말년에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울 봉
원사(奉元寺)와 봉은사(奉恩寺), 팔공산 은해사(銀海寺), 해남 대흥사(大興寺) 등 천하에 유
명한 절을 유람하며 많은 글씨를 남겼다.

현판 우측에는 '승연노인(勝蓮老人)'이란 낙관이 찍혀있는데, 승연노인은 추사의 다른 아호(
雅號)이다. 이 현판을 손에 넣은 박노수는 현관문에 걸어두어 현관부터 미술가의 집 분위기를
진하게 우려냈다.


▲  근대 양옥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2층 벽난로
난방의 기능은 사라지고 이제는 무늬만 남아 한가로운 말년을 보낸다.

▲  2층 목조 다락방
다락방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남정의 인터뷰 장면(1970~80년대로 여겨짐)이 나와
그의 생전에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 현관 앞에서 바라본 미술관 정문
조금씩 숨겨진 끼를 드러내며 경쟁자 북촌을 긴장시키는 서촌, 박노수 미술관은
바로 그 서촌의 새로운 활력소이자 허브이다. 평일임에도 제법 많은 이들이
찾아와 짧은 시간에 비해 너무 떠버린 이곳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친일파 윤덕영의 딸 내외와 박노수 가족의 목을 축여주었던 우물이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그 수맥이 끊기면서 이제는 껍데기만 남았다.

▲  커다란 수석 (현관 앞)
호랑이나 사자, 낙타가 웅크리고 앉아 망중한에 잠겨있는 모습 같다.

▲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과 홀을 쥐어든 조그만 석인(石人)

가옥 북쪽에는 수풀이 우거진 가파른 벼랑이 있다. 예술과 문학의 향이 깃든 가옥답게 대나무
도 삼삼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벼랑에 계단과 석물을 배치한 고즈넉한 산책로를 내
었고, 그 길의 끝에는 무려 전망대까지 두었다. 이 언덕 산책로와 전망대야말로 박노수 미술
관만이 가진 강한 매력이자 백미라 칭할 만하다.

산책로 입구에는 고색이 묻어난 조그만 석인이 홀을 쥐어들며 안내인처럼 자리해 있다. 제자
리를 잃고 방황하는 그를 남정이 데리고 온 것인데 고향을 잃은 충격 때문일까? 석인은 좀처
럼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긴 이곳에 이끌려온 석조 문화유산 모두 제자리를 잃
은 가련한 처지이다. 아마도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속삭임으로 고향을 잃은 동병상련
의 한을 달래지는 않을까?
투박하게 닦여진 돌계단을 오르면 북쪽으로 난 아주 짧은 샛길이 있는데, 대나무로 둘러싸인
그곳에는 돌의자가 놓인 조그만 쉼터가 있다. 그리고 숲길을 마저 오르면 나무로 지어진 전망
대(전망데크)가 나타난다.

이 전망대는 박노수 가옥을 미술관으로 바꿀 때 지은 것으로 예전에는 그냥 나무와 풀만 있었
다. 숲길에는 조그만 돌의자가 여럿 있는데 남정은 이들 의자에 앉아 천하를 바라보며 작품을
구상하거나 온갖 망중한에 잠겼을 것이다.
전망대까지 인도한 숲길은 담장 앞에서 뚝 끊겨버려 적지 않게 달아오른 숲길의 여흥을 깨뜨
려버린다. 지금이야 이렇게 막혔지만 윤덕영이 한참 인왕산의 산소를 축내던 시절에는 바로
옆에 자리한 벽수산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전망대에 서면 가옥의 뒷모습을 비롯해 옥인동 일부와 옛 인경궁(仁慶宮)터인 배화여자대학이
바라보인다. 이곳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나 두 눈에 들어오는 천하의 범위는 우물안 개
구리 수준이다. 그래도 주어진 공간을 최대로 활용해 이런 곳까지 갖추니 정말 알차긴 알차다.

▲  숲길에서 만난 조그만 향로석

▲  숲길에서 만난 장명등


▲  숲길 끝 벼랑에 다리를 걸친 전망대
숲길과 돌의자, 석물은 박노수 시절의 것이고 전망대는 2013년에 단 것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가옥의 뒷모습과 지붕
건물의 모습은 양옥이지만 지붕만큼은 거의 한옥 스타일이다. 윤덕영이 14동의 한옥을
지을 때 자신의 벽수산장을 제외하고 모두 한옥으로 지었으면서 왜 딸의 집만
이렇게 이채로운 모습으로 지어주었을까?

▲  전망대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옥인동과 통인동 지역이 주류를 이루며, 광화문 부근도 조금씩 시야에 들어온다.

▲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굴뚝
지붕에는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굴뚝 5개가 뿔처럼 솟아나 집의 멋스러움을 한층
수식한다. 1층 지붕에는 2개, 2층에는 3개가 달려있는데, 이중 3개는
벽난로용, 나머지는 부엌용이다.

▲  가옥 북쪽 굴뚝과 언덕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왼쪽)

▲  가옥 동쪽에 자리한 장독대와 창고

남정 일가가 사용하던 장독대가 창고 위에 놓여있다. 남정의 작품은 장독대에서 숙성된 여러
음식의 힘이라고 봐도 절대 과언을 아닐 것이다. 허나 그들이 떠난 이후 이제는 인생처럼 공
허한 장독대가 되어 뜨락 장식물의 일원으로 조용히 묻혔다.

※ 옥인동 박노수 가옥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찾아가기 (2017년 11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
  서 종로구 마을버스 09번을 타고 박노수미술관 하차, 도보 1분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1,2번 출구)에서 도보 15분
* 입장료 : 성인(25~64세) 3,000원 (20명 이상 단체 1,800원) / 청소년 1,800원 (단체 1,200
  원) / 어린이 1,200원 (단체 600원) / 종로구민은 50% 할인
* 관람시간 : 10시~18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과 한가위 당일은 휴관)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68-2 (옥인1길 34, ☎ 02-2148-4171)


 

♠  다쓰러져간 매국노 윤덕영의 고래등 기와집

▲  옛 윤덕영 집 돌계단

옥인동 47-133번지 주변은 새 주택과 헌 주택, 달동네 스타일의 집이 공존하는 현장이다. 바
로 그곳에 윤덕영의 기와집이 1채 남아있다.
윤덕영은 서촌(웃대)에서 가장 풍경이 아름다운 송석원과 옥인동 일대를 싹 매입하여 그곳에
자신의 탐욕을 풀어놓았는데 송석원에 큼지막한 서양식 별장을 짓기로 작정하고 프랑스 공사
(公使)를 지낸 민영찬을 통해 건물 설계도를 의뢰했다. 그 설계도를 바탕으로 독일인 감독관
을 고용하여 1914년 집을 짓기 시작해 10여 년의 공사 끝에 완성을 보았다.

그 집은 무려 222평 크기의 프랑스식 건물로 자신의 호를 따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 하였
다. 또한 송석원에 있다고 해서 '송석원별장'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었다. 산장 주변에는 14동
의 한옥을 지어 가족과 자식, 첩들과 모여 살았는데, 소나무와 사과나무가 무성하던 벽수산장
북쪽에 1고주 7량집의 99칸 기와집을 지어 첩의 거처로 삼았다. 그 집이 바로 이곳이다.

윤덕영이 1940년 골로 간 이후, 그의 자식들이 재산을 말아먹으면서 벽수산장은 왜열도 회사
인 미쓰이에게 넘어가고, 14동의 기와집도 거진 남의 손에 넘어갔다. 6.25 이후 서울의 폭발
적인 인구 증가로 벽수산장 주변에 무허가 집이 난립을 했고, 약간 처지가 괜찮은 이들은 윤
덕영의 한옥을 1칸씩 차지해 서울살이를 했다. 그렇게 서울을 휩쓴 근대화의 회오리로 그의
부질없는 한옥들은 대거 다운당했고, 지금은 박노수 가옥과 이 한옥만 간신히 남게 되었다.

한옥에는 현재 여러 가구가 살고 있는데, 대지를 공동으로 소유하며 각각 별도의 출입구를 두
어 1지붕 여러 가족을 이루고 있다. 매국노의 악취가 코를 찌르는 기와집이 힘겹게 서울살이
를 하는 서민들의 소박한 삶터가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형태가 적지않게 변질되고 수리도 제
대로 받지 못해 20세기 초반 최상류층 고래등 가옥은 이제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허름한 몰꼴
이 되었다. 마치 무관지옥으로 개처럼 끌려갔을 윤덕영과 아비의 재산으로 팔자좋게 살다가
가산을 말아먹은 그 자손들처럼 말이다.

비록 빛은 많이 바랬지만 한 시대를 나쁘게 풍미했던 권력자가 살던 현장이라 집에 쓰인 공사
자재는 거의 고급 수준이며, 단풍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한옥 동쪽에는 제법 품격이 돋보이는
석조 계단을 늘어뜨렸다. 지금이야 주택들 사이에 끼어있는 가련한 신세라 골목길 계단 정도
로 실감이 나진 않겠지만 왕년에는 궁궐 계단 못지 않은 위풍을 자랑했다. 게다가 일반 한옥
에서는 보기 힘든 계단의 소맷돌, 장대석 주초, 처마 장식, 장식이 새겨진 벽 등을 갖추고 있
어 예사 한옥이 아님을 귀띔해준다.
그러다보니 버리기는 좀 아까워 서울시에서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하면서 이 집을 옮
기려고 했는데, 나이에 비해 한옥이 너무 낡아 이전이 불가능하자 부득이 예전 모습 그대로
본을 따서 새롭게 짓는 선에서 끝을 냈다. 그리고 집 이름은 그 더러운 주인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옥인동 윤씨 가옥'이라 하였다. (가옥의 면적은 225.79㎡)

참고로 윤덕영의 아우로 형못지 않던 쓰레기 매국노인 윤택영(尹澤榮, 1866~1935)의 재실(齋
室)도 남산골한옥마을로 옮겨져 한가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  위에서 본 돌계단과 단풍나무

▲  계단 끝에 자리한 옛 윤덕영 집


▲  서민의 삶터가 되버린 옛 윤덕영 집
허름한 모습 속에 아직 고급 기와집의 기품이 남아있다.
 

계단을 오르면 윤덕영 집이 일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북쪽으로 휘어진 계단을 오르면 집
대문인데 서민들의 거처가 되버린 탓에 갖은 생활도구와 가스관, 전깃줄, 편지함으로 주변이
참 어수선하다. 게다가 대문도 굳게 잠겨져 있고, 골목길도 막혀버려 세세한 집 구경은 어려
운 실정이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혹여 나중에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면 이 한옥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다.
이미 남산골한옥마을에 본을 따서 지은 집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곳의 집은 엄연히 새 집
이라 고색의 냄새가 없는 이 땅의 흔한 민속촌의 한옥 같은 인상이다. 반면 이곳은 100년 가
량 묵은 한옥이라 겉모습에서 벌써 고색의 향이 피어올라 고택의 기분을 들게 한다.
이곳을 만약 밀게 된다면 모두 가루로 만들지 말고 지붕과 벽, 목재 등을 모두 수습해 남산골
에 있는 윤씨가옥을 다시 손질했으면 좋겠다. 비록 매국노의 잔재라 껄끄럽긴 하지만 '박노수
가옥'도 박노수 화백 덕분에 개과천선하여 아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이 한옥도 서민들의
오랜 삶터로 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현장이다. 게다가 20세기 초반 상류층 한옥의 형태
를 잘 간직하고 있으니 한옥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옛 윤덕영 집을 끝으로 늦가을 서촌의 일부 더듬기는 막을 내린다. 다른 명소는 별도의 글에
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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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아름다운 박물관, 성북동 간송미술관

 


' 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우리나라 박물관의 성지,
성북동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간송미술관 보화각


늦가을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10월 중순이 되면 나의 이목을 강하게 붙잡는 곳이 하나 있다.
그곳이 어디냐? 바로 성북동(城北洞)에 자리한 간송미술관이다. 우리나라 박물관의 오랜 성지
이자 늦가을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명소로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닌 1년에 딱 2번,
5월과 10월 중/하순에만 문을 연다. 그외에는 들어가지 못하며, 아무리 열려라 참깨를 외치고
참깨를 집어던져도 안으로 절대 들여보내지 않는다.
 
문이 활짝 열리면 간송미술관은 다양한 테마로 무료 특별전을 여는데, 그 특별전에 대한 문화
인들의 관심은 지독하기 그지 없어 중독성이 매우 강하다. 그 중독에 빠지면 간송미술관 사립
문이 열리는 날만 애타게 기다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른다. 보통 10월 초면 신
문을 통해 특별전 소식이 곳곳에 알려지며, 10월 중순이 되면 빗장이 스르륵 열리면서 방방곳
곳에서 문화인들이 몰려와 박물관의 성지를 순례하며 옛것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한다.

본인 역시 간송미술관 특별전을 기다리는 1인으로 올 봄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들어가지 못
했다. 어쨌든 가을 특별전 소식을 접하고 토요일에 후배 여인네와 그곳을 찾았는데, 이번에도
퇴짜맞는거 아닌가 걱정이 들었으나 다행히 운이 따라주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여 정
말 느긋하게 미술관을 관람했다.

간송미술관은 나무가 무성하여 산골에 묻힌 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속세와 공기부터가 확연
히 틀려 서울 도심에 있음을 무색하게 하며, 청정한 공기는 속세(俗世)에 오염된 마음과 돌처
럼 굳어버린 머리를 정화시켜 아무리 어려운 그림 이름도 쏙쏙 머리에 들어올 것만 같다.

본글에서는 특별전 그림에 대한 언급은 뺀다. 대신 간송미술관의 내력과 간송 전형필의 생애,
뜨락에 있는 여러 석조 문화유산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간송미술관 정문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정문의 동쪽 기둥에는 '澗松美術館'이라 쓰인 명패가 있고
서쪽 기둥에는 간송미술관 스타일로 특별전 제목이 쓰인 하얀 종이가 붙여져 있다.



★☆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선생의 생애 ☆★

어둠의 시절,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후학을 양성하고자 자신을 헌신한 진정한 대인(大人)의
정석, 간송 전형필, 그는 1906년 부자집안인 정선 전씨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와 휘문고보(현 휘문중고)를 거쳐 왜국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남들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대신 가족들은 대부분 명줄이 짧아 20대에 친가족 대
부분
-조부모, 친부모, 양부모<養父母, 송의 종숙부(從叔父)인 전명기(全命基)가 후사가 없어
그의 양자로 들어감>, 친형제-
을 잃었다. 심지어는 보통학교와 대학 졸업 때 그의 양부(종숙부
) 상과 부친상을 나란히 당해 상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었을 정도다. 이렇게 가족을 죄다 여의
면서 그 집안의 자손은 간송 하나만 남게 되었고, 자연히 일가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 받아 10만
석을 일컫는 조선 최대의 부자가 되었다.


와세다대학교 재학 중, 왜인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속국(屬國) 백성의 한을 한을 뼈저리게 느끼
자 '나는 무엇을 해야 되나?' 번민에 빠졌다. 허나 그 답을 구하지 못해 주변 선배와 스승에게
자문을 구했고, 휘문고보 시절 그의 미술 선생이던 고희동(高羲東)이 이 땅의 문화유산을 지킬
것을 권하면서 그의 권유에 감동해 대책 없이 방치된 이 땅의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희동은 그런 제자를 기특히 여겨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을 소개시켜 주었다. 간송은 그를
스승으로 받들며 서화와 도기/자기, 불교 문화유산 등 골동품 식견을 쌓아갔으며, 위창은 골동
품 거간(居間)인 이순황(李淳璜)을 소개하여 그를 돕게 했다. 그리고 1930년, 24살에 이른 간송
은 이순황과 함께 본격적으로 문화유산 수호 사업에 뛰어든다.

간송은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이순황에게 맡기고, 그곳을 교두보로 수많은 문화유산을
수집했다.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의 고서적, 고려청자 등의 자기류, 혜원풍속도(蕙園風俗圖) 등
의 서화(書畵), 금동여래입상, 금동삼존불감 등의 불상을 있는데로 사들이고, 1934년 북단장과
함께 1만평 규모의 넓은 뜨락을 조성하면서 석탑과 석불 등을 아낌없이 수집했다.
또한 왜인을 상대로 고미술품을 팔아먹던 인사동(仁寺洞)을 수시로 찾아가 많은 것을 구입했으
며, 왜인들이 군침을 흘리던 문화유산은 미리 선수를 치거나 웃돈을 두둑히 얹혀 사들이니 자연
히 골동품상이 그에게 몰려들어 거래를 했다.
그리고 왜국 동경(東京)에 있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갓스비(John Gadsby)가 자기 나라로 귀국하면
서 소유하던 고려청자를 처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직접 만나 고려청자를 죄다 사들이기도
했으며, 총독부 고위층이 소유한 문화유산을 사들이고자 온고당(溫古堂) 주인인 왜인 골동상 신
보기조(新保喜三)의 도움을 받았다.

그 당시 간송과 그를 돕던 이들의 문화유산 수집 에피소드는 정말로 많았는데, 그중에서 겸재(
謙齋) 정선(鄭敾)의 화첩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왜정 때 이순황과 거래하던 골동상 가운데 장형수(張亨修)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방을 돌며
서화를 구입해 수집가들에게 팔았는데, 1933년경 경기도 용인시 양지면 추계리를 지나다가 친일
파로 악명이 높은 송병준(宋秉畯)의 고래등 기와집을 구경했다. 마침 양지면장이자 중앙자동차
주식회사를 운영하던 송병준의 손자 송재구(宋在龜, 이하 집주인)가 말을 타고 귀가하다가 누구
를 찾냐고 물었다.
그래서 '유명한 댁이라고 해서 지나다가 구경 좀 하고 있소!' 답을 하니, 악질 친일파의 손자라
발작을 하며 쫓아낼줄 알았더만 뜻밖에도 친절을 보이며 안으로 들어가자고 그런다. 사랑방에
자리를 잡자 직업을 묻길래 골동품을 수집한다고 하니, 집주인이 흥미를 보이며 오원 장승업(吾
園 張承業)의 산수화 병풍을 비롯해 고려청자 향합(香盒), 불상 등을 보여줬고, 서로 말이 잘
통해 늦게까지 대화를 하다가 푹 자고 가라고 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잠을 자다가 늦은 밤, 소변이 급해 사랑방 한쪽에 붙은 변소를 가는데 마침 그 집 머슴이 군불
을 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서 뭉치를 마구 아궁이에 쑤셔넣고 있길래 문득 직업 본능이 발동하
여 확인해보니 땔감 가운데 초록색 비단으로 꾸민 책이 하나 있었다. 그래서 그 책을 보니 글쎄
42폭으로 이루어진 겸재 정선의 42화첩(畵帖)이 아닌가? 그 안에 그 유명한 금강산도(金剛山圖)
가 들어있었다. 좀만 늦었으면 그 그림은 영영 되살릴 수 없는 전설이 되었겠지. 그렇게 정선의
화첩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니 장형수의 때를 잘타는 생리 현상에 우리들은 정말 감사해야 될
것이다.

그 화첩을 서둘러 들고 집주인에게 보이며, 방금 전의 일을 말하자 '그런 일이 있었소!~ 그런건
우리집에 흔하오'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불에 타 없어질 뻔했던 것이니 나에게 파시오' 제안
을 하니 집주인이 흔쾌히 응하자 얼마면 되겠냐고 물으니 '생각해서 낼 만큼만 내시오' 그런다.
그래서 20원을 주고 서울로 가져와 이순황에게 팔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순황은 그 그림을 간송에게 보냈고, 장형수는 간송의 인품에 반해 그의 협력자가 되었다.

간송은 문화유산 수집에만 멈추지 않고 왜정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
키고 가꿀 인재를 기르고자 1940년 적자에 허덕이던 보성중학교를 인수했고, 동성학원을 설립하
여 교육 분야에도 아낌없이 돈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 당시 보성중교를 운영하던 고계학원은 학
교 매입금 16만 5천원 외에 학교의 부채와 학교가 소유한 물건까지 값을 매겨 무리한 가격을 요
구했는데, 간송은 쓴소리 하나 없이 장우식, 윤용섭을 통해 대금을 모두 지불했다. 또한 동성학
원 재단설립에 무려 60만원을 들였는데, 이를 위해 황해도 연백군(延白郡)에 있던 3,000석 지기
땅을 처분했다.

1945년 8월 이후 11개월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지냈는데, 이것이 간송의 유일한 공직생활이었
다. 또한 1950년 이후 고적보존위원회,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60년에는 고고
미술동인회를 세워 문화유산 연구와 서적 편찬에 동분서주하였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자신의
재산을 내던지며 문화유산과 교육 발전에 헌신했으나 위인(偉人)은 고난 속에 일찍 죽고 간신배
는 배때기에 기름칠하며 아주 지독하게 오래 사는 이 땅의 더러운 법칙에 따라 야속하리만큼 커
다란 시련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1950년 2월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시행하면서 소작농에게 농지를 분배하고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발행하여 땅주인에게 땅값을 치러주기로 하였다. 허나 6.25전쟁으로 지가증권이 모조리 휴지조
각이 되면서 앉아서 농지를 잃어버린 꼴이 되었으며, 전쟁통에 많은 문화유산과 유동자산을 잃
었다.
거기에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북단장 뜨락마저 무심한 총탄과 폭탄으로 파괴되고 만다. 그런 상
황에 전쟁에서 잃어버린 문화유산을 다시 사들이면서 재정 압박은 갈수록 커져만 갔으며, 1959
년 보성중고교 교장 서원출의 방만 경영으로 엄청난 부채가 쌓이자 이를 해결하고자 동분서주하
던 중 그만 병을 얻어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신우염(腎盂炎)으
로 1962년 1월 26일, 56세의 한참인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가 그렇게 세상을 뜬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는 문화포장(文化褒章)과 문화훈장(文化勳章)을
추서(追敍)했으며, 고고미술 동인회 회원과 간송의 아들, 제자, 벗들이 그의 수집품을 정리하여
그의 호를 딴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을 열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늘상 생각하는 거지만 그가 없었다면 미술관 수장고와 전시실에 있는 문화유
산 대부분은 일찌감치 해외로 빼돌려지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을 것이다. 1446년에 반포된 한글의
해설서인 훈민정음(訓民正音)도 예외는 아니었겠지. 다행히 하늘의 뜻이 있었는지 그의 품으로
들어갔으며, 그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게 훈민정음을 구경하고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가 큰 부자였으니 무량(無量)의 문화유산 수집은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수집한 것을 비싸게 팔거나 중개상 노릇을 한 것도 아니며 어떠한 이익 행위도 취하지 않았다.
이 땅의 문화유산을 수집하여 지키고, 그것을 연구하고 가꿀 후학을 양성하고자 거액의 재산을
내던진 것이다. 허나 무리한 지출이 매년 이어지다보니 적지않은 재산을 처분했고 결국 미술관
주변(그래도 꽤나 넒음, 마음 놓고 구경할 수 있는 미술관 보화각 주변은 그 일부에 불과함)
서울 방학동(放鶴洞) 가옥, 그리고 일부 토지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이윤을 포기한 그의 문화사업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미술사 연구의 큰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의 업적과 문화, 사회적 공헌의 가치는 정말로 값지다 할 것이다.

현재 미술관의 문화유산은 국가 소유가 아닌 간송 일가의 소유이다. 돈과 땅처럼 마음대로 행사
할 수 있는 재산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유동자산 대부분을 문화유산으로
바꾼 것이다. 그의 수집품은 국보나 보물, 지방문화재로 수두룩하게 지정되었고, 특별전 때 소
장 문화유산을 공개하면서 그들의 가치는 연일 하늘을 치고 있다. 왜정 때 1만원을 주고 산 그
림이 지금은 수천~수억을 호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바꿔 말하면 간송의 재산은 줄어든 것
이 아니라 숫자가 모자를 정도로 크게 증가된 셈이다. (간송미술관의 소유 문화유산이 어느 정
도 되는지 아직 구체적인 보고서도 없음)
허나 간송이 그것을 노리고 문화유산 수집에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어둠의 시절을 겪으면서
무방비로 방치된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생각만 했었지 수익을 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문화유산 수호와 민족 교육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자손들도 부유층 수준으
로 넉넉히 살고 있으니 궁색해지지 않는 이상은 문화유산을 팔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배때기를 채우고자 서민들을 쥐어짜고 나라를 팔아먹고 갖은 간계를 부리는 이 땅의
졸부와 권력층과 달리 간송은 그 돈을 정말 어디에 써야 되는지, 어떻게 써야 가치가 높은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몸소 실현한 선각자이다. 적어도 사회 지도층(부유층)이라면 간송의 그런
예를 본받고 행동에 옮겨야 진정 지도층이 아닐까? 지금 이 땅에 간송 같은 위인이 없는 것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  간송미술관 보화각 2층

★ 간송미술관의 역사
간송 선생은 자신이 사들인 문화유산의 효율적인 보관과 연구를 위한 터전을 짓고자 서울 장안
에서 적당한 터를 물색했다.
1930년대까지 간송미술관 자리에는 구한말에 조선에 들어와 비료장사로 부자가 된 프랑스 사람
브레상이 별장을 짓고 팔자좋게 살고 있었다. 그는 자기 나라로 귀국하고자 별장을 비롯한 인근
숲 1만평을 내놓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간송이 그 땅을 둘러보니 명당(明堂)의 기운이 넘치는
좋은 터였다.
그래서 그 일대를 모두 사들이고 1934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북단장(北壇莊)을 세웠다. 북단장
이란 이름은 옛 선잠단(先蠶壇) 부근에 있다는 뜻으로 오세창 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왜정의 민족말살정책이 갈수록 요란해지자 간송은 근대식 박물관을 짓기로 작정하고 1938년 북
단장 옆에 2층 규모의 보화각을 세웠다. 당시 왜정은 전시체제를 이유로 물자통제를 하고 있었
는데, 그것을 비웃듯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을 수입해 계단을 깔고, 진열실 바닥은 쪽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사까에서 화류진열장을 들여왔다. 또한 오세창과 박종화(朴鍾和, 간송의 외
종 사촌형) 등 서화계의 원로와 지식인들을 수시로 초빙해 자문을 구했다.
드디어 1938년 7월 5일 보화각 상량식(上樑式)을 가졌는데, 당시 75세였던 오세창은 너무 감격
스러워 다음의 정초명(定礎銘)을 새겼다.
'때는 무인년 윤 7월 5일 간송 전군의 보화각 상량식이 끝났다. 내가 북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에 명(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하니, 북곽(北郭, 한양도성)을 굽어본다. 만
품(萬品)이 뒤섞여 새집을 채웠구나, 서화 심히 아름답고, 고동(古董)은 자랑할만, 일가에 모인
것이 천추의 정화로다. 근역(槿域, 우리나라)의 남은 주교(舟橋)로 고구(攷究) 검토할 수 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 길이 보존하세'

많은 이의 기대 속에 보화각이 탄생했지만 정작 왜정의 태클로 속세에 공개되지도 못했다. 그러
다가 어느 날,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부임기간 1936~1942년)가 보화각을 구경하고 싶다
고 연락을 했다. 총독비서인 스즈끼의 청을 받은 김승현 박사가 간송에게 이를 전하니 간송은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
허나 막상 미나미가 보화각에 도착했을 때는 마중 나온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미나미의 표정은
잔뜩 울상이 되었고, 당황한 김승현은 급히 간송에게 달려가 총독이 왔음을 알리니 그제서야 자
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세수를 하고 의관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30분을 기다리게 하고서야 총독을 맞이한 간송은 보화각을 구경시켜주고 응접실에서 홍
차 1잔을 대접해 보냈다고 한다.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반도와 만주를 쥐어짠 조선총독이 간송
에게는 그야말로 하찮은 대접을 받고서도 그저 기다릴 대로 기다리고 보여주는 대로 보고 조용
히 돌아간 것이다.

해방 이후로도 어수선한 시대가 계속되어 개방을 하지 못하다가 1950년 6.25가 터졌다. 불과 3
일만에 북한군이 서울을 접수하면서 북단장과 보화각 정원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고 보화각이
품은 막대한 문화유산은 북한에 의해 북송(北送)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북한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던 최순우(崔淳雨)와 소전 손재형(孫在馨)에게 보화각 문화유산
을 죄다 포장해서 지정된 곳으로 옮길 것을 지시했다. 그들은 문화유산을 어떻게든 지키고자 감
독관으로 온 공산당원 기(奇)씨에게 왜국 판화로 된 춘화(春畵)를 보여주어 흥분시키게 하고 보
화각 지하실에 있던 화이트호스 위스키를 권해 허구헌날 술에 곯아 떨어지게 만들었다. 또한 그
들이 무식한 것을 이용하여 문화유산 선별기준에서 좋은 것은 나쁘다. 나쁜 것은 좋다고 속이고
물건을 하나 가져다가 풀면서 이건 아니라고 다시 싸게 하고, 목록이 잘못되었다며 다시 하게
했다.
포장이 진행되면서 감독관에게 '상자를 사오시오. 목수가 없소' 등으로 자꾸 태클을 걸었고 손
재형은 일부러 다리에 붕대를 매 뒤뚱뒤뚱 아픈 시늉까지 하면서 9월 28일 서울수복까지 포장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렇게 기가 막힌 지연작전으로 간송미술관의 유물은 모두 북송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북한이 책임자를 보내 추궁하려는 찰라 우리군과 유엔
군이 때마침 서울을 수복함으로써 화를 면하게 되었다.
허나 1951년 1.4후퇴로 간송이 급히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유물 대부분을 챙기지 못해 상당수는
분실되고 말았다. (분실된 것 중 상당수는 전쟁 이후 다시 사들임)
6.25이후로도 그의 생전에는 공개되지 못했으며, 그가 별세한 후, 그의 아들 전성우가 부친의
유업을 이어받아 유물을 정리하여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을 세우면서 비로소
천하에 공개되었다.

1971년 '겸재(謙齋)전'을 시작으로 매년 봄, 가을에 특별전을 열고 있으며, 그 특별전에 한해
달랑 30일만 공개하여 상당한 아쉬움을 건넨다. 또한 관람객은 폭증하고 있는데, 전시 공간은
여전히 보화각 1동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관람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많이 부족하고 미술관 홈페
이지도 아직 갖추지 않아 편함을 가중시킨다. 게다가 관람객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경우에는 2~3
시간 심지어는 4~5시간 이상 줄을 서야 되는 등, 관람객을 위한 배려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부디 입장료를 받아도 상관없으니 미술관의 오랜 명성과 간송의 뜻에 걸맞게 이제라도 전시공간
을 확충하고 관람객 편의 제공과 개선에 많은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더 큰 아쉬움은 보화각 주변을 빼고는 관람객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 (통제의 정
도는 나날이 심해지고 있음) 통제 사유는 이 일대가 전씨 일가의 소유로 그 일가의 집이 보화각
을 중심으로 북쪽과 동쪽에 넓게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곳곳에 배치된 상당수의 석조
문화유산과 숨겨진 아름다운 공간을 눈에 넣지 못해 무척이나 섭섭하다. 집 뜨락까진 아니더라
도 일단은 보화각과 가깝고 사생활 침해가 미미한 호랑이상과 괴산 외사리 승탑(僧塔, 보물 579
)까지는 적어도 쿨하게 공개를 해주면 좋겠다. 아니면 2012년 11월에 개방된 부암동 석파정(
石坡亭)처럼 입장료(좀 비싸도 상관은 없음)를 받아도 좋으니 공개 범위를 더욱 넓혀주었으면
좋겠다.

간송미술관은 훈민정음과 동국정운, 청자기린형뚜껑향로,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금동3존불감, 혜
원풍속도 화첩 등 국보 13점과 백자박산형뚜껑향로, 금보(琴譜), 금동여래입상, 문경5층석탑 등
보물 10점, 3층석탑과 석조팔각승탑 등 서울지방문화재 4점을 간직하고 있다.

※ 간송미술관 찾아가기 (2013년 10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111, 2112번 시내버스나 성북03번 마을버스를 타
  고 성북초교 하차, 버스에서 내려서 왼쪽으로 100m가면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온다.
* 한성대입구역(6번 출구)에서 15분 정도 가볍게 걸어가는 것도 괜찮다.
* 미술관 내에 주차시설은 없으며 전시기간 중에는 바로 앞에 있는 성북초교 운동장을 임시로
  개방한다. 하지만 가급적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간송미술관 관람정보
* 입장료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10시~18시이다. (인원이 많은 경우 관람시간 약간 연장 가능)
* 특별전 기간에는 전시하는 그림과 문화유산를 다룬 도록을 판매한다. 가격은 2만원선, 내용이
  좀 어려운 경향은 있으나, 그런데로 볼만하며 소장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7-1
(☎ 02-762-0442)


♠  간송미술관의 문턱을 들어서다

▲  금지된 곳에 아련히 보이는 호랑이상 (사진 중앙에 있음)

미술관 정문을 들어서면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야 미술관의 본관인 보화각에
이르는데, 왼쪽 대신 매서운 기세로 출입금지라 쓰여진 정면의 길을 보면 수풀 너머로 귀여움이
묻어난 석상 2기가 눈에 달려올 것이다. 그들이 바로 이 땅에 흔치 않은 호랑이상이다. 예전에
는 눈치를 살살보며 저들까지 올라가곤 했는데, 열정이 많이 식었는지 이제는 그것도 귀찮다.


▲  호랑이상의 위엄

요즘은 카메라나 스마트폰이 워낙 잘되어있어서 최대한 줌을 땡기면 그들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래도 직접 앞에까지 가서 보는 게 더 좋음)
그들은 무섭고 소름이 돋는 호랑이보다는 밝은 표정에 앙증맞고 귀여운 고양이 같다. 그들은 간
송 선생의 구원으로 이곳에 들어왔는데, 고향과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다.

호랑이상에서 길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숲속에 가려진 주택이 하나 있다. 간송 일가가 머무
는 집의 하나로 여겨지는데, 좀처럼 접근을 못하게 하니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괜히 몰래 접근
하다가 잠복근무중인 멍멍이에게 호되게 쫓기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하기 바라며, 적어도 호랑이
상까지는 접근을 허가해도 괜찮을 듯 싶은데,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보듯 해야 되니
속이 참 쓰릴 정도이다.

▲  무인석(武人石)들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을 지켰을 그들은 간송 선생에 이끌려 지금은 미술관을 지킨다.
칼을 짚고 서 있는 눈맵시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  날렵한 몸매의 3층석탑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塔身)과 노반, 상륜(相輪)을
갖춘 탑으로 그 역시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시대 탑으로 여겨진다.

▲  애꾸눈 석불좌상

간송 선생의 흉상 좌측 수풀 속에 애꾸눈 석불좌상이 숨어있다. 이 불상은 왼쪽 어깨는 옷으로
가리고 오른쪽 어깨는 훤히 드러낸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하고 있는데, 얼굴은 상당히 망가져
있으며, 오른쪽 눈은 파열되어 거의 애꾸눈처럼 되었다. 머리 부분도 3도 화상을 입었는지 매우
울퉁불퉁하여 무견정상(無見頂相 = 육계)과 머리 스타일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석불의 조성시기는 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로 여겨지나 자세한 신상정보는 모른다. 그 역시 간
송 선생의 구원으로 이곳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가 앉아있는 네모난 대좌(臺座)에는 불법(佛法)
을 지키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  애꾸눈 석불좌상 대좌에 새겨진 다문천왕(多聞天王)
사천왕의 하나로 북쪽을 수호하는 다문천왕이 3층보탑(寶塔)과 창을 들고 있다.
이 석불을 미술관에 올 때마다 꼭 사진에 담았지만 다문천왕은 이번에 처음 본다.
왜 이제서야 그를 보게 된 것일까...? 그의 얼굴이 몸의 2/3를 차지할 정도로
신체비례가 맞지 않는 것처럼 나의 눈도 그리 잘 맞지 않는 모양이다.


♠  보화각 주변 둘러보기

▲  간송미술관 보화각(葆華閣)

간송미술관이 뜨락은 참 넓지만 건물은 보화각 하나가 전부이다. (그 외에 집들은 간송 일가의
생활공간)
2층 규모의 보화각은 1938년 북단장 옆에 세운 것으로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대리석으로 계단을
깔고, 진열실 바닥은 쪽나무 판자로 마루를 깔았으며, 오사까에서 화류진열장을 들여 내부를 꾸
몄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건축가인 박길용(朴吉龍, 1898~1943)이 설계한 건물로 의미가 큰데,
이렇게 많은 돈과 정성을 들여 1938년 7월 5일 상량식을 가졌으며, 이때 오세창은 너무 감격하
여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이란 뜻에서 보화각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간송미술관 전시실로 쓰이고 있는데, 건물이 워낙 단단하여 크게 손을 보거나
수정을 가한 부분이 없이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
관이자 간송의 정신과 체취가 서린 현장으로 요즘 흔한 등록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하여 그 예
우를 해줘야 될 듯 싶은데, 아직 그런 소식까지는 들리지 않는다. 2012년에 방학동에 있는 간송
의 가옥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마당에 말이다.

저 작은 건물에 지금까지 수십만 명이 발걸음을 했고 70년이 넘는 연세에도 끄떡이 없으니 20~
30년만 넘으면 비리비리해지는 오늘날 건물과 견주어 참 대단한 건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간
송의 정성과 혼이 아낌없이 담긴 탓일 것이다.

   ◀  미술관(보화각)으로 인도하는 오솔길
보화각으로 가려면 꽃과 나무, 화분으로 가득한
녹음의 오솔길을 지나야 된다. 이 조그만 오솔
길에는 벽돌이 박혀 있으며, 길 양쪽에는 화분
과 수풀이 가득해 분재(盆栽)시장이나 숲속 산
책로를 거니는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미술관이 맞을까? 의문이 들 정도
로 말이다. 자연물 사이로 망향(望鄕)의 한을
달래는 온갖 석물이 서로를 보듬고 있고, 다른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볼
거리인 공작의 보금자리(사육장)까지 지니고 있
어 관람객의 눈길을 단단히 잡아맨다. 이는 다
른 미술관에서는 감히 상상 조차 거부하는 특이
하고도 살아있는 특별 전시물(?)로 문화와 자연
이 공존하는 간송미술관 만의 묘한 매력이라 하
겠다.


▲  간송미술관 만의 매력, 공작의 보금자리

▲  사람 구경에 한참 넋이 나간 하얀 공작의 위엄

▲  공작의 보금자리 옆에 놓인 녹아버린 2개의 석물
잘 다듬어진 석대(石臺, 무덤의 혼유석이나 석물로 여겨짐) 위에 타다 만
흔적처럼 일부만이 남은 돌덩어리가 초췌하게 놓여져 있다.

▲  항아리나 함처럼 생긴 조그만 석물

 ▲  3층석탑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호

오솔길을 장식하고 있는 3층석탑은 바닥돌 위에 2중의 기단(基壇)을 얹히고 그 위에 3층의 탑신
을 세운 형태로 1층의 탑신이 2, 3층보다 크다. 지붕돌 받침이 3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고려 초
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탑 높이는 약 3m이다. 기단부의 상대갑석(上臺甲石)과 하대갑석(下
臺甲石)에 새겨진 연꽃무늬가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처럼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탑의 고향은 알지 못하며 탑에 관련된 어떠한 정보도 전해 오지를 않는다. 다만 왜인들이 빼
돌리려 한 것을 간송 선생의 구원을 받았으나 결국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기억상실증에 걸
린 양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미술관 뜰의 장식물이 되었다.

◀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1호

3층석탑 옆에는 듬직하게 생긴 석불 1구가 높은
대좌 위에 앉아 있다. 두 손을 위아래로 잡고
있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어 비로자나불
임을 알 수 있는데, 석불의 전체 높이는 약 3m
정도이다. 그의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로 머
리 꼭대기에는 상투 비슷하게 육계(肉髻 = 無見
頂相)가 솟아 있으며 얼굴은 살이 많아 인심이
후박한 뚱보 아지매 같다.
불상이 앉은 대좌(臺座)에는 연꽃(앙련)이 새겨
져 있고, 대좌 아래 기단(基壇)에는 결가부좌를
한 조그만 석불이 4면에 새겨져 있다, 이들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끝없는 명상에 나래를 누리
고 있는데 그 뒤로 두툼하게 생긴 동그란 두광(
頭光)과 신광(身光)이 눈에 띈다.

불상의 조성시기는 고려 중기로 여겨지며 자세한 정보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 역시 간송 선생
의 구원에 이끌려 이곳에 안착했으며, 평퍼짐한 엉덩이가 인상적인 그의 뒷모습도 풍만스럽다.


▲  대좌 기단에 새겨진 석불 - 선정인의 포즈로 웅크리고 앉아
명상의 나래를 펼친다.

  ▲  주인 잃은 광배(光背)의 비애

광배에 새겨진 꽃무늬들이 마치 살아 숨쉬는 것 같다. 저 광배에 등을 기댔을 석불은 어디로 간
것일까? 광배는 혹여 찾아올지도 모를 자신의 님을 기다리며 오늘도 화사한 무늬를 펼쳐 보인다.
내가 저 앞에 앉으면 나도 광배를 갖춘 부처나 보살이 되는 걸까? 다음에 오면 그 앞에 결가부
좌로 살짝 앉고 싶다. (그러다가 관람객들에게 싸대기 맞는건 아닌지..?)

◀  석조비로사나불 옆에 자리한 석등(石燈)
그 역시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다.


▲  오랜만에 문을 연 보화각 현관

▲  보화각 현관 좌측 석사자

▲  보화각 현관 우측 석사자

보화각 현관 주변에는 제법 무서운 티가 풍기는 3개의 석사자가 미술관을 지킨다. 현관 바로 옆
에 자리한 석사자는 크게 으르렁거리듯 입을 대문만큼 벌리며 관람객들에게 조용히 관람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현관 앞에는 석사자 2개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모습은 비슷하다.

현관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우측 사자는 오른쪽 발로 구슬을 축구공처럼 만지고 있고, 좌
측 사자는 특이하게 그의 새끼와 발을 맞대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발 밑에 새끼 사자가 누워
어미의 발과 맞장구 치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  늦가을도 걸음을 멈춘 보화각 남쪽 산책로

▲  금지된 땅 - 간송미술관 북쪽(서북쪽) 언덕

보화각 북쪽에는 녹음이 짙은 언덕길이 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사색하며 거닐고 싶은 그 언
덕길의 끝에는 간송 일가의 저택이 있으며, 길이 3갈래로 갈린 중턱에는 석조팔각승탑과 석인(
石人)이 있다. 예전에는 중턱까진 접근이 가능했으나 이번에 갔을 때는 바리케이트도 모자라 사
람까지 배치해 감시를 한다. 그래서 간송미술관에 갈 때마다 무조건 사진에 담는 석조팔각승탑(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9호
)와 괴산 외사리 승탑(보물 579호)을 사진에 담지 못했다. 저렇게 길
을 막는데 내가 권력층이 아닌 이상 무슨 수로 들어가겠는가..?
금지된 구역에 들어가는 경우 관계자의 허가를 받아야 되나 그것도 쉽지가 않다. 눈치껏 살짝
들어가 사진에 담아도 되지만 통제가 심해지니 이러다가는 저 언덕길도 오르지 못하는 것은 아
닌지 모르겠다.

통제구역과 간송 저택 뜰에는 망향의 한을 간직한 석탑, 불상, 승탑, 문인석 등 다양한 석조문
화유산들이 베일에 가린 채 은둔해 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입장료를 받아도 좋으니 제발
속세에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괜찮은 것들만 추스려 보화각 주변에 끄집어내는 것도 괜
찮을 것이다.

이번에 못본 석조팔각승탑과 괴산 외사리 승탑. 문경5층석탑 등이 궁금하다면 이전에 쓴 간송미
술관 답사기를 쿨하게 참조하기 바란다. (☞ 관련글 보러가기)


▲  내년 봄을 그리며 간송미술관과 작별을 고하다.

이렇게 하여 간송미술관 가을 특별전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미술관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답
사객의 발길은 여전했다. 봄과 가을이 한참이나 머물렀다 가는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곳, 미술
관을 알록달록 수놓은 늦가을 풍경은 내년 특별전에서도 변치않는 모습으로 문화에 목마른 사람
들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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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0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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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볼만한 명소 360곳 (2013년 4월 기준)


★ 서울에서 가볼만한 명소 360곳 (2013년 4월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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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종로구 내부 (북악산~인왕산 줄기 남쪽)
1. 경복궁
2. 국립고궁박물관 (경복궁 남쪽)
3. 국립민속박물관 (경복궁 동쪽)
4. 청와대 앞길
5. 청와대와 육상궁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관람신청)
6. 윤동주시인의 언덕 (윤동주문학관)
7. 청운공원

8. 인왕산길

9. 사직단공원 (사직단)

10. 황학정

11. 수성동계곡

12. 선희궁터 사우

13. 통의동 백송터

14. 청와대사랑채

15. 서촌 일대

 

16. 해공 신익희가옥

17. 이상범 가옥(화실)

18. 필운대 (배화여고 안에 있음)

19. 삼청동길

20. 삼청공원

21. 북악산 정상 (촛대바위, 북악산 한양성곽길)

22, 북악산 말바위

23. 숙정문

24. 창덕궁 후원뒷길 (감사원에서 성대로 넘어가는 고개)

25. 와룡고개 (와룡공원)

26. 창덕궁과 후원

27. 창경궁

28. 종묘

29. 성균관 (문묘, 은행나무)

30. 송시열집터 (증주벽립 바위글씨) 

 

31. 대학로거리 (마로니에공원)

32. 이화장

33. 함춘원터 (서울대병원 북쪽)

34. 구 서울대본관

35. 구 대한의원본관 (서울대병원 남쪽)

36. 낙산공원 (낙산 일대)

37. 비우당과 자지동천(자주동천)바위글씨

38. 청룡사와 정업원구기

39. 낙산 이화마을 (이화벽화마을)

40. 서울국립과학관

 

41. 동대문(흥인지문)

42. 청계천 일대

43. 광장시장

44. 동묘

45. 인사동거리

46. 조계사와 불교중앙박물관

47. 우정총국 (우정박물관)

48, 세종문화회관

49. 경희궁

50. 서울역사박물관

 

51. 홍파동 홍난파가옥

52. 딜쿠샤와 행촌동은행나무

53. 보신각

54. 종로2,3가 거리

55. 경인미술관

56. 천도교 중앙대교당

57. 운현궁

58. 관상감 관천대

59. 인왕산

60. 대림미술관

 

61. 목인박물관

62. 광화문광장

63. 북촌한옥마을

64. 북촌문화센터

65. 한국불교미술박물관

66. 원서동 고희동가옥

67. 원서동 빨래터 (신선원전 외삼문)

68. 배렴가옥(북촌게스트하우스)

69. 중앙중고교

70. 인문학박물관

71. 가회민화박물관

72. 한상수자수박물관

73. 재동백송

74. 정독도서관

75. 서울교육박물관

 

76. 북촌생활사박물관

77. 북촌4,5,6,7경

78. 번사창

79. 부엉이공예박물관

80. 동아일보 일민미술관

81. 성곡미술관

82. 떡박물관

83. 혜화문(동소문)

 

 2. 서울 종로구 외곽 (북악산~인왕산 줄기 북쪽)
 1. 창의문(자하문)
 2. 부암동 (부암동 산복도로)
 3. 무계정사터 (안평대군집터)
 4. 반계 윤웅렬별서
 5. 능금마을 (뒷골마을)
 6. 북악산 백석동천
 7. 서울미술관과 석파정

 8. 석파랑 (석파정 별당)
 9. 환기미술관
 10. 홍지문

 11. 세검정
 12. 북악산 백사골 (백사실계곡)
 13. 평창동 소나무 (평창동 남쪽 북악산 자락)

 14. 보현산신각
 15. 북한산 금선사
 16. 동령폭포
 17. 북한산 승가사
 18. 북한산 문수사
 19. 북한산 비봉
 20. 화정박물관


 21. 평창동 박종화가옥

 22. 구기동계곡
 23.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탕춘대성 암문)
 24. 삼성출판박물관

 25. 북한산둘레길 평창마을길

 26. 북악산길

 27. 자하미술관

 

 

 3. 서울 중구
 1. 덕수궁(경운궁)
 2. 덕수궁돌담길
 3. 서울시립미술관
 4. 옛 러시아공사관터와 정동공원
 5. 중명전

 6. 배재학당역사박물관

 7. 이화여고박물관과 유관순우물

 8. 정동교회

 9. 서울광장

 10. 서울도서관 (옛 서울시청사)

 11. 서울시청 신청사

 12. 환구단 (황궁우)

 13. 명동거리

 14. 명동성당

 15. 남대문시장

 

 16. 남대문(숭례문)

 17. 서울역 (문화역 서울284)

 18. 약현성당

 19. 손기정공원 (손기정월계관수)

 20. 화폐금융박물관 (한국은행본관)
 21,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22. 남산 와룡묘

 23. 남산N서울타워

 24. 남산 정상 주변 (봉수대, 팔각정)

 25. 남산골한옥마을

 26. 동대문쇼핑타운

 27. 동대문역사문화공원
 28. 장충단공원

 29. 신당동 떡복기골목

 30. 신당동 중앙시장


 31. 금호산 (금호산 벚꽃축제)

 32. 광희문(수구문)

 33. 대한성공회성당 서울교구, 경운궁 양이재

 

 4. 서울 강북 서부 (은평, 서대문, 마포, 용산구)
 1. 북한산 삼천사 (삼천리골)
 2. 북한산 삼천사지 (삼천사에서 등산 2km)

 3. 북한산 진관사

 4. 진관사계곡

 5. 숙용심씨묘표

 6. 영산군묘역

 7. 북한산둘레길 내시묘역길 (내시묘역은 없음)

 8. 경천군송금물침비 (내시묘역길 중간에 있음)

 9. 북한산성 대서문

 10. 북한산둘레길 마실길 (은행나무숲길)

 11. 북한산둘레길 구름정원길

 12. 북한산 불광사계곡

 13. 금성당

 14. 금암문화공원 (금암기적비)

 15. 인조별서유기비

 

 16. 수국사

 17. 백련산 백련사

 18. 불광천 (불광천길)

 19. 옥천암 마애좌상 (보도각백불)

 20. 인왕산 환희사

 21. 홍제동 개미마을

 22. 안산(鞍山)

 23. 안산 무악봉 동봉수대터

 24. 봉원사 (연꽃축제)

 25. 서대문역사공원 (옛 서대문형무소)

 26. 독립문과 영은문주초

 27. 인왕산 선바위, 국사당

 28. 연세대 근대건축물 (언더우드관, 스팀슨관 등)

 29. 신촌거리

 30. 홍대거리


 31. 효창공원

 32. 용문동 남이장군 사당 (남이장군제)
 33. 원효로성당

 34. 전쟁기념관

 35. 이태원거리

 36. 남산야외식물원

 37. 용산가족공원

 38. 국립중앙박물관

 39. 공덕동, 마포 먹자골목

 40. 절두산성지와 잠두봉

 

 41. 양화진외국인묘역

 42. 망원정

 43. 평화의공원과 난지연못

 44. 월드컵경기장 주변

 45. 하늘공원과 월드컵공원

 46. 난지캠핑장

 47, 무악재 고갯길

 48. 삼성미술관리움

 49. 화의군묘역

 

 5. 서울 강북 동부 (동대문, 성북, 성동, 광진, 중랑구)
 1. 선농단 (선농대제)

 2. 세종대왕기념관
 3. 영휘원과 숭인원
 4. 홍릉수목원

 5. 고려대박물관

 6. 동망봉

 7. 보문사

 8. 개운사

 9. 보타사

 10. 개운산공원

 

 11. 삼군부총무당 (삼선어린이공원)

 12. 최순우옛집

 13. 돈암장

 14. 선잠단터

 15. 간송미술관

 16. 성북동 성락원

 17. 길상사

 18. 성북동 이종석별장

 19. 수연산방

 20. 성북구립미술관

 

 21. 심우장

 22. 삼청각

 23. 북악산 김신조루트(북악하늘길)

 24. 정릉

 25. 봉국사

 26. 경국사

 27. 정릉계곡

 28. 북한산둘레길 솔샘길

 29. 경동시장과 약령시장

 30. 서울풍물시장

 

 31. 서울숲

 32. 수도박물관

 33. 뚝섬

 34. 화양리느티나무

 35. 어린이대공원

 36. 아차산생태공원

 37. 아차산 홍련봉보루유적
 38. 아차산성과 아차산 보루유적

 39. 용마폭포공원

 40. 서울시립대, 배봉산공원

 

 41. 의릉

 42. 망우리공원 (망우리묘지)

 43. 중랑캠핑숲

 44. 봉화산 (봉화대)

 45. 살곶이다리

 

 6. 서울 강북 북부 (강북, 도봉, 노원구)
 1. 북한산 화계사
 2.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3. 조병옥박사묘

 4. 북한산 본원정사

 5. 북한산 구천폭포

 6. 4.19국립민주묘지

 7. 북한산둘레길 순례길

 8. 우이동 솔밭공원

 9. 북한산 소귀천계곡

 10. 북한산 도선사

 

 11. 봉황각

 12. 손병희선생묘

 13. 우이령길 (우이동~우이동유원지~우이령)

 14. 북서울꿈의숲

 15. 초안산공원 (초안산조선시대분묘군)

 16. 옹기민속박물관

 17. 연산군묘

 18. 방학동은행나무와 원당샘

 19. 양효공안맹담과 정의공주묘역

 20. 북한산둘레길 소나무숲길

 

 21. 도봉산둘레길 (우이동~무수골~도봉산입구)

 22. 중랑천 (중랑천둑방길)

 23. 도봉산 무수골

 24. 도봉산 도봉서원

 25. 도봉산 천축사

 26. 도봉산 만월암

 27. 도봉산 우이암 봉우리

 28. 도봉산 만장봉, 자운봉

 29. 창포원

 30. 수락산 벽운동계곡


 31. 수락산 정상

 32. 수락산 학림사

 33. 불암산 (불암산성, 불암산둘레길)

 34. 불암산 학도암

 35. 이윤탁한글영비 (한글고비)

 36. 태릉 (조선왕릉전시관)

 37. 강릉 (태릉 동쪽, 제한관람)

 38.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39. 화랑대역

 40. 태릉이스턴캐슬공원 (옛 태릉푸른동산)

 

 7. 서울 강서 (강서, 양천, 구로, 영등포, 금천구)
 1. 강서습지생태공원
 2. 개화산 약사사 (개화산)
 3. 개화산 미타사

 4. 서남물재생센터공원

 5. 겸재정선기념관

 6. 양천향교

 7. 궁산공원 (옛 양천고성터)

 8. 허준박물관

 9. 구암공원, 허가바위

 10. 안양천 (안양천 둑방길)


 11. 우장산공원

 12. 서서울호수공원

 13. 궁동 정선옹주묘역

 14. 궁동저수지생태공원

 15. 오류동 류순정, 류홍묘역

 16. 선유도공원

 17. 여의도 여의도둑방길 (여의도 벚꽃축제)

 18. 여의도공원
 19. 63빌딩

 20. 샛강생태공원

 

 21. 가산(가리봉)로데오거리

 22. 금천아트캠프, 금천구청역~독산역 벚꽃거리

 23. 시흥동 은행나무 (은행나무4거리)

 24. 호암산 호압사

 25. 관악산둘레길 호암산 구간

 26. 호암산성터와 한우물, 석구상 (불영암)

 27. 호암산 칼바위

 

 8. 서울 강남 (동작, 관악, 강남, 서초구)
 1. 사육신묘
 2. 흑석동 효사정
 3. 상도동 양녕대군묘역
 4. 국사봉 사자암 (국사봉)
 5. 보라매공원
 6. 신림동 굴참나무

 7. 난곡 강사상/강홍립(진주강씨)묘역, 신도비

 8. 삼성산성지
 9. 관악산 (관악산 철쭉제)

 10. 관악산 둘레길 (사당~낙성대~삼성산성지 구간)

 11. 낙성대
 12. 봉천동마애미륵불
 13. 사당동 임당 정공신도비 (동래정씨묘역)

 14. 효간공 이정영 묘역

 15. 관악산 관음사

 16. 구 벨기에공사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분관)

 17. 국립서울현충원

 18. 호국지장사
 19. 동작충효길 (동작구 둘레길)
 20. 잠실뽕나무 (잠원동)

 

 21. 강남역거리

 22. 도산공원

 23. 봉은사

 24. 삼성역 코엑스 (코엑스 아쿠아리움)

 25. 선정릉

 26. 효령대군묘역

 27. 우면산

 28.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29. 양재시민의숲

 30.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31. 양재천

 32. 구룡산

 33. 대모산

 34. 대모산 불국사

 35. 헌인릉

 36. 광평대군묘역

 37. 완남부원군 이후원 묘역

 38. 한국자수박물관

 39. 호림박물관

 

 9. 서울 강동 (송파, 강동구)
 1. 잠실종합운동장

 2. 석촌호수

 3. 잠실롯데월드

 4. 삼전도비

 5. 석촌동고분군

 6. 방이동고분군

 7. 오금공원

 8.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9. 한성백제박물관

 10. 방이동 생태학습관

 

 11. 풍납토성

 12. 암사동 선사유적지

 13. 일자산 (일자산 해맞이공원, 둔굴)

 14. 일자산 허브천문공원, 강동그린웨이 가족캠핑장

 15. 길동자연생태공원
 
16. 고덕산 (고덕산림욕장, 강동그린웨이, 광주부원군묘역)

 17. 성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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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여행도서] 여행책의 백미, '남한 명승비경 79곳'

"예예원출판사(드라이브사)"에서 만든 "남한 명승비경 79곳" 책을 추천합니다.
이 책은 수도권부터 강원,충청,경상,전라도까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산,계곡, 폭포 등의

명소 79곳을 소개하는 책으로 자세한 설명과 함께 사진,지도가 잘 나와있습니다.

특히 여름휴가철이나 계곡,폭포,명승비경 여행에는 아주 요긴한 책이지요.

책에 실려있는 사진들은 전문사진작가가 찍었다고 하며, 사진은 정말 괜찮습니다.
일부는 사진대회에도 출품하여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하며 여러 번 언론에 소개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책의 단점이 딱 하나 있다면 숲,계곡,폭포 주변 음식점, 숙박업소에 대한 정보가

약간 미흡한 점인데, 그건 별로 신경쓸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만큼 명승지 관련 설명과

사진,정보가 풍부하니까 말이죠.


이 책은 현재 왠만한 유명서점,대형서점에서 판매되고 있구요.
저도 이책 1권을 가지고 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계곡 등에 갈때 이 책을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정확한 제목은 "남한 명승비경 79곳"입니다.
가격은 13000원..

한번 봐보세요.  저도 여기서 많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
후회하지는 않을 겁니다. 노련한 여행/사진 전문가가 만든 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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