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공양'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20.05.19 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3
  2. 2018.03.16 소백산 자락에 작은 도시처럼 들어앉은 천태종의 중심 사찰, 단양 구인사 (구인사 공양밥, 구봉팔문)
  3. 2017.05.24 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원찰로 지었다고 전하는 회기동 연화사 ~~~ (월계동 기원사)
  4. 2016.04.28 봄맞이 산사 나들이, 대구 팔공산 파계사 (파계사계곡, 성전암)
  5. 2016.03.13 금빛 와불상과 우담바라를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 의왕 청계산 청계사
  6. 2015.06.02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정릉 봉국사 (맛있는 점심공양)
  7. 2014.03.02 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
  8. 2013.07.09 정릉 봉국사

낙산 동쪽에 깃든 고즈넉한 비구니 고찰, 탑골승방 미타사 (미타사의 석가탄신일 풍경)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낙산 미타사
~~~~~

▲  미타사 백의관음도


 

 

올해도 변함없이 즐거운 석가탄신일<사월 초파일(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이 다가
왔다. 비록 불교 신자까지는 아니나 이상하게도 초파일 앓이가 심해 그날에 대한 설레
감이 큰 편이다. 하여 매년 연례행사처럼 내가 서식하고 있는 천하 제일의 대도시, 서
울을 중심으로 고색이 여문 절이나 문화유산을 간직한 현대(20세기 이후) 사찰을 대상
으로 절 투어를 벌이고 있다. (평상시에도 절 답사/투어를 많이 하는 편임)

이번 초파일에는 어디를 가야 칭찬을 받을까?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미답(未踏)으로
남은 서울 지역 사찰은 고갈 직전에 이르렀다. 다행히 보문사(普門寺) 바로 옆에 미타
사가 마치 고갈에 대비한 듯,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어 그를 이번 나들이 동선에 흔
쾌히 넣었다. 그곳은 오래된 석탑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조선 후기 탱화를 다수 보유
하고 있어 은근히 군침이 돌았다.

드디어 초파일의 여명이 밝아왔다. 제일 먼저 집에서 가까운 불암산 학도암(鶴到庵)을
찾아 그곳에 깃든 지방문화재(마애관음보살좌상, 마애사리탑)를 오랜만에 둘러보고 점
심 공양으로 두둑히 배를 채웠다. (☞ 학도암 글 보러가기)
학도암에서 공양까지 마치니 시간은 벌써 13시가 넘었다. 그날따라 해가 참 짧게 느껴
져 점점 기울어가는 햇님을 원망하며 부랴부랴 길을 재촉해 낙산(駱山) 동쪽에 자리한
미타사로 이동했다. 이곳은 보문사 바로 북쪽으로 서로 바짝 붙어있는데 얼핏 보면 같
은 절로 보일 수 있으나 엄연히 다른 절집이다. 허나 그들 모두 비구니 절이고 탑골승
방의 일원이라 이웃사촌 마냥 가깝다.


▲  집으로 경내를 꽁꽁 두룬 미타사 (미타사 정문 앞)


 

♠  미타사(彌陀寺) 입문 (대웅전)

▲  미타사 정문(일주문)

미타사는 사방이 꽁꽁 막힌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다. 마치 속세와 어울리지 않고 혼자서 놀겠
다는 의지처럼 말이다. 절 남쪽은 보문사와 닿아있고, 동쪽과 북쪽은 건물 벽으로 막혀있으며,
서쪽은 나무가 우거진 언덕이나 경동고등학교의 경계선 앞에서 결국 길이 끊긴다. 보문사에서
미타사로 이어지는 골목길(보문사길) 또한 미타사 앞(보문아이파크아파트)에서 짧게 그 길을
접는다.
이곳이 이런 구석진 모양새가 된 것은 서울 시내 팽창에 따른 개발의 영향이 크다. 원래 낙산
숲과 밭두렁이 주를 이루던 변두리였으나 1950년대 이후 시가지 확장으로 주택들이 마구 들어
서면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포위된 외로운 처지가 되버린 것이다. 그래서 절도 속세의 기운
을 경계하고 속세와의 경계를 분명히 긋고자 사방을 건물로 두룬 폐쇄적인 모습이 되었다.

절 앞에 이르면 '미타사' 현판을 내건 정문이 마중을 나온다. 이 문은 속세와 미타사를 이어
주는 존재로 일주문(一柱門)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보문사와 미타사는 들어앉은 위치상 따로
일주문을 둘 처지가 못해 절과 속세의 경계에 이렇게 기와문을 두어 일주문으로 삼았다.


▲  곱게 치장된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그리고 짜릿한 돈맛을
원하는 보시함


정문을 들어서니 바로 정면과 왼쪽에 선방(禪房)과 요사(寮舍)가 있고, 오른쪽에 관음전과 대
웅전 뜨락이, 그리고 뜨락 서쪽 계단 너머로 대웅전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그 뜨락에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로 추앙받는 관불(관정)의식의 현장이 차려져 있다.
초파일을 맞이하여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금빛 피부의 아기부처가 즐거움에 잠긴 얼굴로 오른
손을 치켜들며 서 있고 그 주위를 온갖 꽃으로 치장해 조촐하게 꽃동산으로 꾸몄다. 사람들은
길쭉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그의 몸에 껴얹으면서 나름의 소망을 들이민다. 그 앞에는 보시함
이 옥의 티처럼 자리해 초파일 특수에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그러니 재주는 아기부처가 부리
고 돈은 절이 가져가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미타사의 내력(來歷)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5층석탑에서 바라본 미타사 경내
(바로 앞에 뒷통수를 보인 건물이 삼성각)


서울의 부실한 좌청룡(左靑龍)인 낙산(낙타산) 동쪽 자락에 안긴 미타사는 950년에 혜거(慧居
)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그때 법등(法燈)을 켰는지는 심히 의문이나 1047년에 세웠다는
석탑이 있어(그 탑의 탄생 시기도 확실치 않음) 고려 초/중기에 지어진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이웃 보문사는 1115년에 창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음)

1314년 혜감국사(惠鑑國師) 만항(萬沆)이 중수했다고 하며, 1457년에 단종(端宗)의 왕후인 정
순왕후(定順王后) 송씨가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낙산의 동남쪽 봉우리) 주변에 머물면서
중수했다고 전한다.
조선 초부터 미타사는 보문사와 한 덩어리로 '탑골승방(僧房)'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여
기서 탑골은 미타사에 있는 5층석탑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문사와 미타사 일대를 탑골이라 불
렀는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조선 왕실과의 인연이 두터워 후궁과 상궁(尙宮)들이 인생의
마지막을 의지하거나 기도를 올렸던 곳이다. 
탑골승방 외에도 옥수동 두뭇개승방(미타사), 석관동 돌곶이승방(연화사), 숭인동 새절승방(
청룡사)도 있어 이들을 묶어 한양도성 밖 4대 승방이라 불렀으며, 이들 모두 비구니 절로 탑
골승방과 성격이 비슷하다.

1801년에 중수를 했으며(이때가 4차 중수라고 함) 1836년에 비구니 상심(常心)이 인일(仁一)
의 도움으로 중수했다. 1969년 계주(季珠)가 고봉(古峰)의 도움으로 중수했으며, 이후 계속
불사를 벌여나가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 관음전, 단하각, 요사 등 6~7동의 건물이 있으며, 관음전
은 지하에 공양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남쪽은 보문사와 연결되어 있어 서로 왕래를 한다.
절이 들어앉은 위치상, 대웅전과 삼성각, 단하각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보문사와
비슷하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칠성도와 백의관음도, 아미타후불도 등 지방문화재 8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 모두 2014년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이들은 대웅전과 삼성각에 나눠 봉안되어
있으나 백의관음도는 관음전과 이어진 '불이문'이란 건물에 따로 있다. (그림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음)
그리고 앞서 언급한 1047년에 조성되었다는 5층석탑이 있는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로
탄생 시기는 의심스러우나 고려 때 탑은 분명해 보인다. 탑골이란 이름까지 낳은 장본인이나
조선 후기에 그려진 탱화들도 거뜬히 받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있는 듯 싶다.

현재는 조계사의 말사(末寺)로 조계종(曹溪宗) 소속이며, 낙산 자락에 있지만 '삼각산(三角山
)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비록 북한산(삼각산)이 여기서 거리가 좀 되지만 그 줄기가 낙산까
지 이르고 낙산이 다소 부실하게 생겨 멀리 있는 북한산을 가져와 칭한 것이다. 이곳 뿐만 아
니라 낙산에 안긴 보문사와 청룡사(靑龍寺) 또한 낙산 대신 삼각산을 칭하며 북한산에 의지하
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낙산 일대 절들은 비구니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지금 또한
여전하여 그 점이 참 흥미롭다. 미타사와 보문사, 청룡사, 거기에 최근에 지어진 정각사(正覺
寺)까지 그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왕실과 사대부 여인과의 적지 않은 인연 때문
일 것이다. 

예전에는 숲이 짙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대단했을 것이나 자비 없기로 유명한 개발의 칼질로
보문사와 함께 속세에 갇힌 별천지처럼 되어버렸다. 게다가 보문사의 그늘에 가려져 인지도도
낮은 실정이다. 비록 보문사보다 법등(法燈)의 역사는 조금 길고 문화유산도 풍부하나 이제서
야 처음 인연을 지을 정도이니 그곳의 인지도를 알만하다. 그래도 초파일이라 사람들도 제법
많았고, 관불의식과 연등 만들기, 불화(佛畵) 그리기, 전통차 시음 등의 이벤트도 열리고 있
어서 보문사보다는 덜 심심한 풍경이었다.

참고로 서울에는 이곳 외에도 개화산(開花山)과 옥수동에도 '미타사' 간판을 내건 오래된 절
이 있다. 즉 3개의 늙은 미타사가 서울 하늘 밑에 있는 것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보문동3가 51 (보문사길 6-16, ☎ 02-923-1738)


▲  강렬한 햇살과 연등의 위엄으로 다소 흐릿하게 다가온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미타사의 법당(法堂)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20세기 후반에 지
어진 것으로 오색 연등이 허공을 가리고 있는 동쪽 뜨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석가3존상을 비
롯해 고색이 묻어난 아미타후불도와 감로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등이 내부를 수식하고 있다.

▲  연분홍 연등으로 곱게 분을 바른
대웅전 앞

▲  대웅전 내부


▲  대웅전 석가3존상과 아미타후불도(阿彌陀後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8호
)


대웅전 불단에는 잘생긴 석가여래가 화려한 보관(寶冠)을 눌러쓰며 미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앉아있다. 바로 그 뒷쪽에 색채가 고운
아미타후불도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는데, 석가3존상 뒤에 석가여래도 아니고 아
미타불(阿彌陀佛)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아미타후불도가 걸려있는 점이 꽤 이채롭다.
아무래도 절 이름이 '아미타불'의 줄임말(미타)에서 비롯되었고 따로 아미타불의 거처를 마련
하기도 여의치 않아 이곳에 둔 모양이다.

이 아미타후불도는 1873년에 신중도, 지장시왕도와 함께 조성된 것으로 제작자의 센스 부족으
로 화기(畵記)를 남기지 않아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8대 보살, 10
대 제자, 사천왕(四天王), 금강역사(金剛力士) 등이 빼곡히 모여 정모를 하고 있는 일종의 아
미타극락회상도(阿彌陀極樂會上圖)로 그림 중앙에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로 이루어
진 아미타3존상이 낮은 불단에 마련된 연꽃대좌에 앉아 있으며, 그 주위로 6대 보살과 10대
제자, 금강역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사천왕은 평상에 편하게 앉아 있는데, 이는
다른 탱화와 확연히 틀리다. (다른 탱화의 사천왕은 모두 서 있음)
폭이 넓은 액자형의 화면 크기나 낮은 불단의 연화대좌에 앉아있는 아미타3존상의 모습, 그리
고 평상에 앉은 사천왕의 등장은 경북 예천 서악사의 석가모니후불탱(1770년)의 전통을 계승
한 것으로 그 예가 별로 없다고 한다. 하여 그 때문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미타사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8호

대웅전 남쪽 벽에는 보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아주 복잡한 그림이 있으니 바로 감
로도<감로왕도(甘露王圖)>이다.
감로도는 이름 그대로 '맛있는 이슬'이란 뜻으로 여기서 이슬은 중생들에게 감로와 같은 법문
을 베풀어 해탈로 인도한다는 의미이다.

매우 파란만장한 스타일의 그림이라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그림 해석이 어려워 거의 암이 걸
릴 지경인데, 주로 죽은 사람들, 즉 영가(靈駕)를 위한 그림이라 그 앞에는 영가들의 위패나
영정을 두기 마련이다.
그림의 줄거리는 대체로 석가여래의 수제자인 목련존자(目連尊者)가 아귀도(餓鬼道)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고자 부처에게 그 방법을 물어 답을 듣는 것으로 그림 상단
에는 아미타3존과 7여래, 지옥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 등을 담았
다. 그리고 중단에는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절차, 아귀가 공양을 먹는 장면, 의식
을 주재하는 사람이 불덕(佛德)을 찬양하는 모습과 승려, 성현(聖賢) 등이 그려져 있으며, 하
단에는 지옥과 현실의 모습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이곳 감로도는 1918년에 고산축연(古山竺演) 등이 그린 것으로 다소 질이 떨어지는 합성연료
를 사용한 탓에 밝은 주홍색이 선명하다. 명암법(明暗法)의 일종으로 넓게 칠하는 요철법(凹
凸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청나라에 전해진 서양 화법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유형은 인근
청룡사(1868년) 감로도와 개운사(開運寺, 1883년), 옥수동 미타사(1887년), 봉원사(1905) 감
로도와 비교할만하며, 재를 지내는 행사 장면 위주와 아귀의 규모가 줄어든 점은 그 시절 감
로도의 경향을 보여준다.
어쨌든 19세기 수도권에서 유행하던 감로도의 도상을 계승하고 있으며, 잘 짜여진 구성과 세
부 묘사가 정교하다.


▲  미타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0호

대웅전 북쪽 벽에는 법당 수호용으로 걸린 신중도가 있다. 신중도란 호법신중(護法神衆)을 담
은 그림으로 앞서 감로도만큼은 아니지만 등장 인물이 빼곡해 혼을 제대로 빼놓는다.

이 그림은 1873년 4월 포화당 정수(布和堂 定修)를 증명으로 하고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
이 출초(出草)를 했으며, 동화당(東化堂)과 두흠(斗欽), 만파당 돈조(萬波堂 頓照), 봉흡(奉
洽) 등이 같이 그린 것이다.
그림은 향좌측부터 34cm, 39.3cm, 39.5cm, 39cm, 44.5cm의 비단을 이어 제작했으며 가로로 긴
화면을 2단으로 나누어 상단에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천부중(天部衆)을, 하단에는 위
태천(韋駄天)과 천룡팔부(天龍八部)를, 하단 중앙에는 위태천을 중심으로 칼과 창으로 무장한
천부8부가 그려져 있다. 그림 윗쪽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공간을 두고 구름 처리를 했으며, 인
물들은 대부분 얼굴이 둥글다. 채색은 다홍 계통의 적색과 녹색, 청색을 사용하여 색깔의 조
화도 괜찮은 편이다.

이 신중도는 19세기 후반 수도권 지역에서 활동하던 경선당 응석의 작품으로 수도권에서는 이
초본을 바탕으로 한 신중도가 널리 유행했다. 섬세한 필치와 원만한 인물 형태, 안정적인 색
채로 19세기 말 수도권 신중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9호

신중도 옆에는 지장보살과 저승의 10왕 등 저승(명부, 冥府)의 식구들이 담겨진 지장시왕도가
있다.
이 그림은 계유생(癸酉生, 1813년) 이씨 부인이 부모와 남편인 정축생(丁丑生, 1817년) 남씨
의 극락왕생을 빌고자 돈을 내어 만든 것으로 아쉽게도 제작 시기와 최초 봉안지가 화기에 나
와있지 않다. 허나 1873년에 조성된 신중도 제작에 참여한 포화 정수, 수산당 부윤(秀山堂冨
潤) 등이 제작에 나섰고, 신중도와 양식과 화풍이 비슷해 그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화면은 향좌측부터 14.5cm, 36cm, 36.2cm, 35.8cm, 36cm, 35.5cm의 비단을 이어 그렸는데 여
러 곳이 찢어지고 박락된 부분이 보이는 등 불량한 부분이 조금 있다.
그림 중앙에는 지장보살이 녹색 두광(頭光)과 금색 신광(身光)을 지니며 연화대좌 위에 돋보
이게 앉아있고, 그 좌우에 10왕(시왕)이 지장보살을 바라보고 있으며, 판관(判官)과 사자(使
者), 천녀(天女), 동자(童子) 등이 배치되었다. 특히 지장보살 밑에는 2명의 동자상이 별도로
있는데, 이들 동자는 인간의 선악을 대변하는 선악동자(善惡童子)로 하얀 꽃으로 머리를 장식
했고, 윗도리는 맨살을 좀 드러냈으며, 치마를 두르고 휘날리는 천의로 온 몸을 감싸고 있다.

채색은 붉은색과 녹색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등장 인물의 얼굴에는 흰색을 칠하여 화면이 밝
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필선이 매우 섬세하며 얼굴에 음영을 표현하여 입체감을
주고 있다.
화기가 다소 부실하긴 하지만 19세기 수도권과 경남에서 유행하던 지장시왕도 형식 중 하나인
선악동자를 표현한 작품으로 하얀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동자상은 경기도 화승(畵僧)들이 즐겨
그리던 형식이라 수도권 지장시왕도의 형식을 대표하고 있다.


 

♠  미타사 삼성각, 백의관음도

▲  미타사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바로 이웃에는 삼성각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집으로 그 앞에는 전통차 시음 및 판매, 과자 제공, 연등 만들기, 불화 그리기 등의 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어 미타사의 초파일 분위기를 한껏 밝게 해준다. 보문사와 달리 양이(洋夷)
관광객들도 10여 명 정도 찾아와 이 땅의 신나는 초파일을 즐긴다.

나는 전통차 2잔(녹차 비슷한 것으로 기억남)으로 갈증을 단죄하고, 과자 1컵을 받아 불만에
잠긴 뱃속을 조금이나마 달랬다. 공양밥은 경내와 이곳의 문화유산을 싹 둘러보고 편안히 먹
을 생각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지만 가끔 그 반대가 좋
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  미타사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1호

삼성각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칠성도와 산신도, 독성도가 빛바랜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삼성(三聖)으로 추앙받는 칠성과 산신, 독성(나반존자)을 머금은 그림으로 그들 중에
서 굳이 서열을 둔다면 거의 부처의 대접을 받는 칠성(치성광여래)이 으뜸이라 보통 건물 중
앙에 봉안하고 있다.

칠성도는 그려진 식구들이 많아 대개 복잡해 보인다. 그림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
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협시해 있으며, 그 좌우로 칠원성군(七元星君) 등
을 크기를 달리하여 배치했다. 그리고 화기 일부가 훼손된 것을 빼면 상태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이다.
치성광여래는 머리에 뿔이 달린 소가 이끄는 수레 위에 결가부좌(結加趺坐)로 자리해 있으며,
무릎 밑 좌우에 과일을 받쳐 든 동자가 몸은 본존을 향해 있으면서 얼굴은 정면을 향했다. 본
존 광배 주위를 에워싼 28수는 좌우로 대칭하여 14수씩 그려져 있으며, 그 옆으로는 정수리가
봉긋 솟은 태상노군(太上老君)과 좌우필성(左右弼星)이 있고, 상단에는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삼태(三台)와 6성(六星)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화면 밑 바깥쪽에는 동자상 4위가 있다.

이 그림은 강화도 정수사(淨水寺) 법당 칠성도(1878년), 강남 봉은사(奉恩寺) 북극보전 칠성
도(1886년), 의성 고운사(孤雲寺) 쌍수암 칠성도(1892년) 등과 동일한 형식으로, 19세기 후반
에서 20세기 초반에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경선당 응석과 용계 서익(龍溪 瑞翊),
봉간(奉侃), 현조(現照) 등이 참여하여 조성했다.
수도권과 경상도 지역 칠성도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보존 상태도 넉넉하여 지방문화재
의 지위를 얻었다.


▲  미타사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9호

칠성도 오른쪽에는 산신도가 걸려 있다. 그런데 주인공이 거의 독성 할배와 비슷한 꼴이라 처
음에는 독성도인줄 알았으나 산신의 애완동물인 호랑이가 그려져 있어 산신도가 100% 맞다.

그림에는 붉은 옷을 입은 수염이 지긋한 산신 할배가 하얀 부채를 들고 앉아있고, 그 옆에 호
랑이가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산 등, 구름 등이 뒷배경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그림 밑에 화
기가 남아있어 1915년에 초암세복(草庵世復)과 금명운제(錦溟運齊)가 그렸음을 알려주고 있다.
19~20세기 산신도의 전형적인 화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표현력이 다소 뒤떨어지는 것으
로 평가되고 있으나 조성시기가 확실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  미타사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0호

칠성도 왼쪽에는 독성도가 있다.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과 동자, 그
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려져 있는데, 화기를 통해 1915년에 산신도를 제작했던 초암세복과
금명운제가 조성했음을 알려준다. 19~20세기 독성도의 양식을 보여주는 존재로 조성시기가 분
명하고 보존 상태 또한 좋다.
독성도 앞에는 하얀 피부의 조그만 독성상이 유리막에 감싸여 있는데, 칠성과 산신은 그림만
있는데 반해 독성은 그림과 형상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절에서 다소 각별하게 대우를 받는 것
같다.


▲  미타사 단하각(丹霞閣)

경내 뒤쪽(서쪽) 언덕에는 나무가 조금 우거져 있다. 이곳도 엄연한 낙산의 일부로 지금은 경
동고등학교가 바로 그 위에 터를 닦아 숲의 농도는 엷어졌다. 언덕은 조금 가파른 편이라 돌
로 여러 단의 석축을 다지고 계단을 놓았는데, 그 계단의 거의 끝에 단하각이란 1칸짜리 맞배
지붕 건물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단하각은 무엇일까?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단하각이란 산신각의 다른 이름
으로 산신도가 봉안되어 있다. 이미 삼성각에 늙은 산신도가 있지만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
을 위한 별도의 건물을 닦고 새 산신도를 파서 봉안한 것이다. 여기서 바로 북쪽 계단을 오르
면 그 길의 끝에 5층석탑이 있다.

▲  새 그림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단하각 산신도

▲  경내 뒷쪽 언덕 (단하각과 5층석탑으로
인도하는 계단)


▲  미타사 5층석탑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구석진 곳에 고색의 기운을 듬뿍 머금은 5층석탑이 있다.
주변이 나무와 수풀로 가득하여 이곳만큼은 정말 산사의 석탑 같은 분위기인데, 그는 무려 거
의 1,000년 전인 1,047년에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그것이 만약 맞다면 서울 토박이 탑(외지에
서 옮겨온 것은 제외) 중 가장 늙은 석탑이 된다.
허나 생김새를 봐서는 딱히 1,000년 가까이 숙성된 탑처럼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 때 탑은
분명한 듯 싶으며, 아직까지는 많은 것이 아리송해 한참이나 후배인 19~20세기 탱화들도 받은
지정문화재의 지위 조차 얻지 못했다. 허나 그 탑으로 인해 미타사가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문을 열었음을 살짝 알려주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곳 지명이 탑골이 되었고, 보문사와 미타
사가 탑골승방이란 이름까지 지니게 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基壇)을 세우고, 그 위에 탑신(塔身)을 얹혔는데 3층
까지는 고색의 때가 진하며, 옥개석(屋蓋石)과 탑신 일부에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 형님이 무
심고 할퀴고 간 흔적이 좀 있을 뿐, 대체로 무난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위에 어설프게 얹혀
놓은 2층과 머리장식은 피부가 너무 흰색이라 근래 새로 올린 것으로 보인다.

탑과 한참 무언(無言)의 대화를 즐기고 있으려니 초파일 행사를 도우러 온 보살 아줌마와 절
을 찾은 한 무리의 가족이 올라와 탑을 구경하며 주위를 1바퀴 돈다. 보살 아줌마가 탑을 사
진에 담는 나에게 절 구경을 잘했냐고 묻자 그렇다고 답하며 공양밥과 백의관음도를 문의하니
모두 관음전에 있다며 밥 1그릇을 권한다. 그래서 이따 내려갈테니 알려달라고 답을 하고 5층
석탑과 삼성각을 더 살펴본 다음 관음전(觀音殿)으로 갔다.

관음전은 대웅전 동쪽에 있는 'ㄱ' 구조의 건물로 서쪽은 관음전, 정문과 맞닿은 동쪽 부분은
특이하게도 불이문(不二門)이란 현판을 내걸고 있다. 문도 아닌 방이 딸린 건물에 문을 칭하
는 점이 참 특이하기 그지 없는데, 백의관음도가 관음전에 있을 것이라 여기고 안을 기웃거렸
으나 딱히 오래된 그림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아 방에 있던 나이 지긋한 비구니(주지승으로 여
겨짐)에게 문의를 했다. 그러자 저쪽 그림을 손으로 가르키며 백의관음도라고 하는데 그 그림
은 근래 것이라 내가 찾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방황하던 중, 아까 5층석탑에서 만난 보살 아줌마를 만났다. 그는 관음
전 지하 공양간에서 밥을 먹고 가라며 안내를 했는데, 나는 밥보다 백의관음도가 급해 그 존
재를 다시 문의하니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본 끝에 불이문 방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방에는 보살 아줌마와 할머니 여럿이 이야기꽃을 몇 송이씩 피우고 있었고, 초파일 행사에
동원된 여러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는데, 정문과 맞닿은 벽에 백의관음도가 손짓을 하
고 있었다.


▲  미타사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62호

하얀 옷을 입은 관세음보살 누님이 담겨진 백의관음도는 미타사에 깃든 문화유산 중 단연 백
미(白眉)가 아닐까 싶다. 물론 다른 탱화들도 휼륭하나 다들 흔한 그림인데 반해 오래된 백의
관음도는 서울에서 거의 흔치 않은 존재이다.

이 그림은 1906년 미타사 향로전(香爐殿, 지금은 없음) 불화로 조성된 것으로 석옹 철유(石翁
喆侑, 1851~1917)가 제작했다. 화면 중앙에는 넝실거리는 바다 파도와 백의(白衣)를 입은 관
세음보살이 붉은 연잎을 배로 삼아 옷자락을 휘날리며 서 있다. 오른손에는 버들가지, 왼손에
는 정병을 들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용왕과 천녀, 선재동자(善財童子), 대나무와 파초
, 구름과 새 2마리가 들러리로 그려져 있다.

관세음보살 건너편 뭍에는 녹색 두광을 갖춘 용왕(龍王)이 마치 장군처럼 갑옷 위에 붉은 옷
을 입고 머리에는 비늘 모양의 견갑(肩甲)과 투구를 거치며 관세음보살을 향해 합장(合掌)을
하고 있다. 이는 청나라 판화도상에서 따온 것으로 근대 불화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채색은 청색과 백색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흰색 위에 갈색으로 윤곽선을 칠하여 음영을 표현
하는 등 새로운 기법이 돋보인다.

분출하는 물줄기와 선재동자의 모습에서 기존의 관음보살도와 다른 20세기 불화의 새로운 경
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관세음보살을 향해 예를 표하는 용왕의 모습은 청나라 판화에 등
장하는 도상을 가져온 것이라 청나라 판화와 서양화법을 수용했던 20세기 초반 수도권 불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특히 늙은 백의관음도는 이 땅은 물론 서울에서도 흔치 않은 존재라 그
희소성은 더욱 크다.


▲  그림 제작자의 작은 배려, 백의관음도의 신상이 적힌 화기(畵記)

화기에는 조성 시기와 화주(化主), 제작자, 봉안 장소 등이 적혀 있다. 여기서 삼각산 미타사
는 다름이 아닌 바로 이곳 미타사로 낙산 미타사 대신 삼각산 미타사를 칭하고 있다. 이는 낙
산이 못미더운 탓이다.

화기의 유무와 조성시기 기재 여부에 따라 탱화의 운명도, 가치도 크게 달라진다. 특히 조선
후기 이전 것들은 더욱 그렇다. 그거 하나만으로도 국가 보물까지 지정된 불상이나 그림, 석
조물(석탑, 석불)이 수둑룩한데, 그 기록이 관련 유물의 절대적인 시대적 기준이 되기 때문이
다. 바로 옛 사람들의 이런 작은 센스 하나가 작품의 가치는 물론 그 앞날까지도 크게 열어주
는 것이다.


▲  액자의 눈치를 피해 옆에서 담은 백의관음도의 위엄
용왕과 선재동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서로 관세음보살에게 잘보이고자
애를 쓰고 있고, 선녀처럼 생긴 천녀는 공양물을 들며 관세음보살을
맞이한다.


백의관음도를 신나게 사진에 담고 그의 존재를 찾는데 흔쾌히 도움을 준 보살 아줌마에게 고
마움을 표했다. 그는 여기 공양밥이 아주 맛있다며 꼭 먹고 갈 것을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그렇게까지 식사를 청하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안그래도 먹고 갈려고 했음)

공양간은 관음전 지하에 있는데 정문을 들어서면 공양간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딱히 이
정표가 없어서 초행인 사람은 공양간을 찾기가 숨은그림찾기처럼 어려울 수 있는데, 처음에는
정문에서 바로 정면에 보이는 요사가 공양간인 줄 알았다.
미타사의 숨겨진 공간 같은 지하로 내려가니 방으로 이루어진 공양간이 모습을 비춘다. 시간
이 15시에 이르렀음에도 공양을 드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초파일 절 구경을 온 양이들도 사람
들의 안내를 받으며 서툴게 밥을 먹고 있었다.

초파일이 되면 대부분의 절집에서 오전부터 오후 적당한 시간까지 공양밥과 떡 등 여러 먹거
리를 제공한다. 이는 절의 초파일 인심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미타사는 밥과 나물(호박나물,
콩나물, 김치 등), 고추장은 소신껏 퍼가면 되며, 이들을 그릇에 담아 비벼먹는 이 땅의 흔한
절밥 스타일이다. 그 외에 나박김치와 미역국(고기는 없음)도 있었고, 심지어 부추전 등의 전
도 있어 찬이 매우 풍성했다.
그릇에 무리가 갈 정도로 담았던 밥과 음식은 불과 3~4시간 전에 불암산 학도암에서 배부르게
공양을 했음에도 넘치는 시장기에 그만 모두 빈 그릇으로 만들어 버렸다. 밥이 맛있기도 했지
만 오전부터 이른 더위를 무릅쓰고 절 투어를 벌인 탓에 눈이 침침할 정도로 피곤하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시장기도 상당했다. 아무리 배터지게 먹어도 그만큼 절투어에 칼로리를 모조리 소
비하니 이내 배가 고파지는 것 같다.


▲  미타사에서 먹은 공양밥의 위엄 (미역국, 비빔밥, 나박김치)

기분 좋게 공양을 마치고 구석에 마련된 씽크대에서 그릇과 수저를 설겆이했다. 보통 절집에
서 공양을 할 때 자기가 먹은 그릇은 자기가 씻도록 유도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1그릇 잘
섭취했으니 그 정도의 밥값은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

후식으로는 믹스 커피가 준비되어 있어 식곤증의 희롱에서 벗어날 겸 1잔 마셨다. 아직도 길
이 바쁜데 벌써부터 나른해지면 곤란하다. 초파일은 공양밥에 초파일 행사, 절에 깃든 문화유
산까지 볼거리도 많고 먹거리도 많아 이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모두 누리고 싶은 마음에
욕심이 너무 일어난다. 그러니 초파일 해가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여 그날
만큼은 해를 그 자리에 강제로 붙잡아두고 싶을 따름이다.

공양을 끝으로 약 1시간 반에 걸친 미타사 답사는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본글은 여기서 마
무리를 지으며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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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자락에 작은 도시처럼 들어앉은 천태종의 중심 사찰, 단양 구인사 (구인사 공양밥, 구봉팔문)



' 늦겨울 산사 나들이, 단양 구인사 '

▲  대조사전 광장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겨울 제국의 쌀쌀한 위엄 앞에 천하만물이 꽁꽁 몸을 사리던 2월의 한복판에 후배 여인네
와 단양 구인사를 찾았다.
구인사는 이미 10여 년 전 연말에 인연을 지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같은 겨울이지만 연
초에 가게 되었다. 그럼 왜 그곳을 다시 찾았을까? 이유는 별거 없다. 그냥 땡겨서이다.

서울의 동쪽 관문, 청량리역에서 8시대에 출발하는 영동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영월(寧
越)에서 군내버스로 구인사로 진입하려고 했으나 여인네가 크게 지각을 하는 바람에 그만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열차를 타면 영월읍내에서 구인사행 버스와 30분 이내로 시
간이 맞음) 그래서 별수 없이 9시대 열차를 타고 제천(提川)으로 이동하여 거기서 구인사
로 접근하기로 했다.

열차에서 시내에서 사온 도시락으로 아침을 때우며 스마트폰으로 제천에서 구인사행 직행
버스 시간을 알아보니 제천역 도착시간을 기준으로 거의 10여 분 뒤에 있다. 하여 제천역
에 두 발을 내리기가 무섭게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이동하여 간신히 구인사행 직행버스를
잡아탔다. (그거 놓치면 꼼짝없이 1시간 이상 기다려야 됨)
제천터미널에서 쌍용. 별방, 사지원, 영춘, 온달관광지(온달산성, 온달동굴), 구인사입구
를 경유하여 50분 만에 구인사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은 구인사 건물의 주류를 이루는
3층 기와집으로 1층에 쉼터를 겸한 매표소가 있다.

구인사입구에 이르니 다들 어디서들 왔는지 사람과 차량의 물결이 대도시 못지 않게 쏟아
져 나와 도로가 막힐 지경이다. 그날 구인사에서 본 사람의 수만 어림잡아 수천이 넘으니
하루로 따지만 수만이다. 거의 단양군(丹陽郡) 인구보다 많은 것이다. 구인사가 단양에서
차지하는 땅은 좁쌀 수준이지만 그곳을 찾는 1일 사람 수와 수입은 단양군을 훨씬 능가하
니 이건 완전 단양 속의 조그만 도시나 다름이 없다.


 

♠  구인사 입문

▲  구인사 일주문(一柱門)

구인사터미널에서 거센 물결처럼 밀려오는 인파를 뚫고 2분 정도 오르면 구인사의 정문인 일
주문이 마중한다.
구인사 일주문은 이 땅의 일주문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큰 것으로 문을 지나는 사람과 문의 크
기를 비교하면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뼈저리게 실감이 날 것이다. 문을 들어서면서 장차 장
엄하게 펼쳐질 구인사의 맛보기 버전이라고나 할까..?
일주문의 높이는 대략 10m에 이르며, 문을 들어서면 바로 4층짜리 기와집인 관성당(觀性堂)이
다시 한번 위압감을 선사해 속인(俗人)의 기를 제대로 주눅들게 만든다. 구인사는 이런 식으
로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고 혹여나 잠입할 번뇌를 단죄하는 모양이다.

▲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자리한 관성당

▲  구인사 천왕문(天王門)

구인사의 2번째 관문인 천왕문은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이다. 이곳 천왕
문은 특이하게 2층으로 되어 있는데, 밑층은 경내로 통하는 3개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윗층 문루에 바로 사천왕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천왕문은 보통 윗층을 일컫는다. 다른 절의
천왕문은 사천왕상 사이를 무조건 지나가게 하여 그들의 검문을 강제로 받아야 되지만 여기서
는 2층으로 가지 않는 이상은 그들을 마주칠 필요가 없다.

살짝 들려진 천왕문의 추녀를 보면 잡상(雜像)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모두 7개의 잡상이 추
녀마루에 붙어있는데 이들은 보통 궁궐이나 왕릉, 성문 등 지체높은 곳에서 많이 달았다. 지
금이야 그런 것을 지킬 필요가 없지만 절에서는 보통 잡상은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허나 구
인사는 저렇게 천왕문에 그들을 달았다. 그 이유는 잡상의 본 목적인 장식용과 수호용도 있겠
지만 우리나라 현대불교 및 천태종의 성지로 우뚝 선 구인사의 끝없는 자부심과 권위를 진하
게 상징하려는 의도가 더 클 것이다.

▲  용을 쥐어든 광목천왕(廣目天王)과
탑을 든 다문천왕(多聞天王)의 위엄

▲  천왕문에서 바라본 인광당(仁光堂)
구인사 경내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  3층 진신사리탑

천왕문을 거쳐 인광당과 총무원을 차례로 지나면 길 왼쪽에 부처의 사리가 담긴 3층석탑이 있
다. 부처의 법을 상징하는 코끼리가 그를 받치고 있는데, 1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
塔身)을 올리고 바로 그 위에 금색의 보륜(寶輪)으로 치장된 상륜(相輪)을 두었다.

이 탑은 1983년 구인사 2대 대종사(大宗師)인 남대충이 인도의 기원정사(祇園精舍)를 방문했
을 때 그곳 주지승이 선물한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자 만든 것으로 그때 기원정사 주지
승이 '인연이 있는 분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셔가 봉안해주십시요' 말했다.
탑의 모습은 동국대 전임 총장인 조명기 박사가 직접 설계했으며 코끼리 기단은 남대충 대종
사가 창안한 것이다. 1층 탑신에는 돌문을 두었는데 그 돌문을 열면 부처의 사리를 생생하게
친견할 수 있다. (1층 탑신까지는 사람 키와 손이 닿지 않아 아무나 열 수 없음~) 탑 주위로
돌난간을 둘렀고, 난간 기둥 위에는 12지신상(支神像)을 세웠는데, 사람들의 손길이 계속 누
적어 그들 피부가 완전 맨들맨들해졌다.


▲  구인사 삼보당(三寶堂)

3층석탑을 지나 경내를 계속 파고들면 관음전과 삼보당이 나온다. 삼보당은 구인사를 세운 천
태종 1대 종정(宗正)인 상월원각조사의 금동존상과 진영, 그리고 2대 남대충 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상월을 금동으로 장엄한 것은 구인사에서 현세에 부처로 극진히 떠받들고 있
기 때문이다. 건물 이름인 3보도 바로 상월과 남대충, 그리고 현재 천태종 종정인 김도용 대
종사를 일컬으며 만약 현 종정이 입적하고 새로운 이가 그 자리를 이어받으면 사보당(四寶堂)
으로 간판을 갈게 될 것이다.

이곳은 신도와 신참 승려들이 고참 승려에게 인사를 하는 곳이기도 하여 종단 승려들이 고참
승려를 상석에 앉혀 회의나 승려 안거(安居)를 주재하기도 한다. 그리고 삼보당 동쪽에는 조
실(祖室)이 있는데 그곳은 구인사와 천태종의 지배자가 머무는 곳이다. 지금은 3대 종정인 김
도용이 살고 있으며, 하루에 1번씩 삼보당으로 나와 신참 승려와 신도들에게 설법을 한다.
참고로 이곳에서는 대종사에게 예하(猊下)라는 존칭어를 사용한다. 제왕에게 폐하(陛下)라 부
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된다. 그럼 여기서 잠시 구인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우리나라 천태종의 중심지, 산속에 숨겨진 조그만 도시 같은 구인사(救仁寺)
소백산(小白山) 북쪽 자락에 꽉차게 들어앉은 구인사는 우리나라 천태종(天台宗)의 중심지이
자 20세기 현대불교의 성지(聖地)이다. 이곳의 역사는 이제 70년여 년으로 1945년 초에 상월
원각조사(上月圓覺祖師)가 창건했다.

상월원각조사는 1911년 음력 11월 28일, 강원도 삼척시 상마읍리 봉촌마을의 밀양박씨 집안에
서 태어났다. 이름은 박준동(朴準東), 법명은 상월(上月)이며, 15세에 나름 큰 뜻을 품고 출
가하여 여러 선사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워낙 총명하여 금방 배웠다고 한다.
1940년에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가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수도했다고 전하는 굴에서 도를 닦
으며 솔잎과 쑥으로 2년을 버티다가 1942년 가을, 깨달음을 얻어 현재 구인사 5층 대법당 자
리에 있던 연화지(蓮花池)를 찾았다. 거기서 만개한 백련(白蓮) 사이로 살짝 모습을 비친 관
음보살 누님을 친견했다고 전한다.
하여 그해 겨울 관음성지를 순례하고자 중원대륙으로 건너가 주산열도에 있는 천태산 수선사
(修禪寺)와 대륙 천태종의 중심지인 국청사(國淸寺)를 찾았고 그때 천태종을 접하게 되었다.

천태종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그는 조국에서 반드시 크게 일으켜 다시 천태산(天台山)을 찾겠
노라 다짐하고 예전 관음보살을 친견했던 소백산 연화지로 돌아와 나무와 풀로 초암(草庵)을
지으니 그것이 바로 구인사의 시초이다. 절의 이름은 '억조창생 구제중생 구인사'라 지었으나
이름이 길어서 보통 구인사라고 부른다.

6.25 전쟁 때 이곳까지 들어온 북한군에 의해 절이 파괴되어 1952년 다시 지었으며 상월은 여
기서 속세와 왕래를 끊고 오로지 수행에 전념해 1962년 '한 마음 움직이지 않으면 만법(萬法)
이 일여(一如)하다'
는 경지와 '모든 법이 본래 무상(無常), 무생(無生)하다'는 무상대도(無上
大道)를 깨닫고 다음의 오도송(悟道頌)을 지었다.

山色古今外  산색은 고금 밖이요,
水聲有無中  물소리는 있고 없고 중간이로다.
一見破萬劫  한번 보는 것이 만겁을 깨뜨리니,
性空是佛母  성품 공한 것이 부처의 어머니로다.


천태종과 구인사가 크게 흥하게 된 계기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이다. 박정희가 월남
전을 두고 고심하고 있을 때, 한 측근이 상월이 신통력이 있다며 만나보라고 권하자 즉시 그
를 청와대로 소환했다.
박정희의 고충을 들은 상월은 참전하면 국부(國富)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참전을 적극 권했
다. 대통령 자신도 월남(베트남) 정벌을 원하고 있었으나 반대 여론이 많아 전전긍긍하던 참
이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10년 묵은 체증이 싹 가라앉은 듯, 너무나 기뻐했다고 한다. 그래서
상월에게 뭐 도와줄 것이 없냐고 묻자 그는 자신이 머무는 소백산 골짜기에 불사(佛事)를 하
고 싶다고 답을 했고, 박정희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구인사는 호랑이가 날개를 단 듯, 크
게 흥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군사정권의 도움이 구인사에 큰 밑거름이 된 것이다.

그 기세를 타고 상월은 천태종 초대 종정이 되어 '참된 자아의 개현','참된 생활의 구현','참
된 사회의 실현'을 위하여 대중불교의 구현, 생활불교의 실천, 애국불교의 건립이라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했으며, 1971년 5월 1일에는 교화의 기본과 지침이 되는 법어(法語)를 발표했
다. 그리고 그해 10월 천태종이 나아갈 방향과 종지(宗旨), 종통에 관한 교시문을 발표한다.

1974년 상월원각조사(시호는 상월원각대조사)가 입적하자 그의 후계자인 남대충(南大忠)이 구
인사 주지 및 천태종 2대 종정이 되었다.
남대충은 1925년 음력 12월 5일 구인사 부근 여의생마을의 영양남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름
은 남익순(南益淳)으로 21살에 구인사에 들어와 상월의 가르침을 받았고, 1960년에 큰 깨달음
을 얻자 상월에게서 후계자의 인증을 받았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가장 잘 받들고 공경했으며, 박정희 정권과 중생들의 시주를 발판 삼아
절을 더욱 크게 일으켰다. 또한 절 주변 야산에 잣나무 등 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숲을 일
구었고 수해 등으로 망가진 단양 관내의 도로 복구 공사에도 참여하는 등 아주 바쁘게 움직였
다. 하여 1980년 4월 사회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포장을 받았고 1987년에는 새마을훈장 자
조장을 받기도 했다.

1993년 9월 3일, 남대충이 6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그의 수제자인 김도용(金道勇)이 그 뒤를
이어 구인사와 천태종의 3대 종정이 되었다.
김도용은 1943년 10월 경북 울진군 평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김영춘(金永春)이다. 1977년
출가하여 남대충의 가르침을 받았고 출가 이후, 단 1번도 드러누운 적이 없다고 한다. 피곤하
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거늘 그는 그 본능을 일찌기 탈피한 것이
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저 신기할 따름. 그래서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신도와 승려가
많다.

▲  구인사 어른 승려가 머무는 조실

▲  구인사 대조사전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구인사는 그 형세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즉 황금닭이 알을 품
고 있는 형세의 아주 대단한 명당(明堂) 자리라고 한다. (또는 독수리가 알을 품은 지세라고
도 함) 과연 그래서일까? 구인사의 사세는 끝을 모르고 나날이 번창하여 4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비좁은 산 사이로 길게 들어서 조그만 도시를 이루고 있으며, 승려 수 300여 명, 최대
수용 인원 1만여 명, 거느린 말사(末寺)만 300여 개, 신도 수는 무려 170만을 헤아리는 천하
굴지의 대 사찰(寺刹)이 되었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아주 굵직한 절로 성장한 예는 그리 흔
치가 않으니 예사롭지 않은 명당은 분명하다.

구인사는 영춘면 일대에 상당한 논과 밭,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거기서 자체적으로 경작하
여 쌀과 채소 상당수를 충당한다. 신도가 많다보니 수입도 상상을 초월하여 포크레인으로 돈
을 쓸어 담아도 넘쳐날 지경인데 수입과 절을 찾는 신도 수는 전국 절집 가운데 1위가 아닐까
싶다. 오죽하면 단양군의 1년 수입보다 많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있으니 말이다. 제 아무리 팔
만대장경으로 유명한 해인사(海印寺)도, 소원은 다 들어준다며 과대 광고까지 일삼는 팔공산(
八公山)의 갓바위도,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인 서울 조계사(曹溪寺)도 구인사 앞에서는 감히
불전함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그 천문학 이상의 재정을 바탕으로 구인사와 천태종은 끝없이 팽창을 한 것이며, 단양에서 구
인사로 이어지는 도로 공사 비용까지 구인사가 전액 부담했다고 한다.

허나 구인사가 들어앉은 지형상 절이 커질수록 자연히 소백산의 피부를 깎아야 되는 문제점이
있다. 구인사의 화려한 발전 뒤에는 소백산의 말없는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대조사전
을 끝으로 더 이상 큰 건물은 지어올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아무리 명당이라도 단점은 있게
마련으로 금계포란형 같은 지형에는 무거운 것을 세우면 안된다고 한다. 허나 구인사는 죄다
무거운 것 투성이라 너무 과욕을 부리다가 알이 와장창 깨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흥하기
는 힘들지만 망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다.
또한 구인사를 세우고 천태종을 크게 일으킨 상월원각조사를 기리고 찬양하는 것까지는 좋으
나 그게 너무 지나쳐 부처 이상의 존재로 떠받들고 있고, 경내 남쪽 산자락에는 승려에 걸맞
지 않게 상류층 수준의 그의 무덤(무려 석물까지 갖추고 있음)까지 있어 조금 이질감을 주기
도 한다. 그 무덤을 여기서는 적멸보궁(寂滅寶宮)으로 삼아 경내 성지로 애지중지하고 있고,
경내의 가장 높은 곳에는 호화로운 대조사전을 지어 금으로 만든 그의 존상까지 봉안하고 있
어 불교 사찰인지 상월을 중심으로 한 다른 종교의 절인지 햇갈리게 만든다. (삼보당에도 그
의 금동존상이 있음)
게다가 절을 이루는 건물이나 모든 형상이 하나 같이 커서 썩 정감이 가지 않는다. 허나 절이
좁은 산골에 자리해 있고 방문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그들을 수용하고 다양한 공간을 담을 건
물이 여럿 필요하다. 그래서 구인사 스타일의 다층 콘크리트 기와집이 빌딩처럼 들어선 것이
다.

법등(法燈)의 역사가 아직 짧다보니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물이나 불상은 없지만 꽤 많은 불
교문화유산을 수집하여 가지고 있다.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29(국보 257호),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 74(국보 279호), 묘법연화경(보물 960호), 대방광원각약소주경 권상
의2(보물 1016호), 불설아미타경<언해, 보물 1050호> 등 국가 지정문화재 20여 점과 금동9층
소탑(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09호), 청자발우(충북 지방유형문화재 211호), 사경영험(四經靈驗,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310호) 등 지방문화재 30여 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몽골과 중원대륙, 티
벳, 네팔, 인도,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문화유산도 꽤 된다. 이들은 모두 구인사입구에 지어진
불교천태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 불교천태중앙박물관 관람 정보 :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추석과 설날 연휴는 휴관 / 관람비
없음 / 관람시간 9~17시 (평일은 10시부터) / 국보와 보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은 일부
만 전시 공개됨, 전화 043-423-9103>

그 외에 '삼회향(三廻向)놀이'라고 영산재(靈山齋)의 뒷풀이로 행해지는 축제가 있는데 땅설
법이라고 부른다. 이 축제는 충북 지방무형문화재 25호로 불교의식에 우리 민속이 더해진 불
교 행사이다.

깊은 산골에 묻혀있지만 거의 소도시 같은 곳이라 조촐한 산사의 내음과 고즈넉함을 기대하고
왔다면 적지 않게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절도 있구나 생각하면서 둘러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또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사찰이자 단양에서 꼭 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주요 관광지로 이곳에 대한 역사와 미술사학적 평가는 후세가 알아서 해줄 것
이다.

※ 구인사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① 대중교통
* 동서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제천시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제천역에서 구인사행 제천시내버스 260
  번이 1일 4회 떠난다.
* 단양시외터미널에서 구인사행 직행버스가 50~60분 간격, 터미널 밖 정류장에서 구인사행 군
  내버스가 1일 8회 다닌다. (군내버스가 시외직행버스보다 버스비가 60% 이상 저렴함)
* 영월읍내(세경대학, 영월터미널, 영월역 서쪽 덕포 정류장)에서 구인사행 군내버스가 1일 5
  회 다닌다.
* 구인사터미널에서 3분 정도 걸으면 관성당을 시작으로 구인사 경내가 펼쳐진다.
② 승용차
*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 → 창원3거리에서 우회전 → 군
  간교3거리에서 좌회전 → 영춘교를 건너 우회전 → 구인사입구 주차장
* 구인사입구 주차장에서 구인사 총무원까지 무료셔틀버스가 수시로 운행한다. (총무원까지
  걸어갈 경우 20분 정도 걸림)
* 구인사는 일반인도 며칠 동안 수행/기도가 가능하다. 4박5일을 기본으로 하며, 접수는 구인
  사 총무원 1층에서 한다. (소정의 참가비 있음) 4박5일 기도를 끝낸 사람에 한해 기도실 담
  당 승려의 허락으로 1회(4박 5일) 연장할 수 있다. 또한 교무부 담당 승려의 승인하에 최대
  2~3회 연장이 가능하다.
* 수행/기도 참여자는 간단히 덮을 것과 깔고 앉을 것, 세면도구를 가져와야 되며, 공양시간
  과 기도시간, 휴식시간을 최대한 지켜야 된다.
* 구인사는 휴식형과 체험형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1박에 무려 5만원이며 홍보체험관
  에서 단주와 연꽃, 지화 만들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문의 ☎ 043-420-7397)
*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132-1 (구인사길 73 ☎ 043-423-7100)
* 천태종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삼보당 옆에서 바라본 관음전, 향적당 주변


 

♠  구인사의 핵심 둘러보기

▲  구인사 관음전(觀音殿)

구인사는 일주문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700m에 이르는 지극히 큰 절이다. (대신 좌우 폭은 짧
음) 일주문에서 향적당까지 이어지는 큰 길을 중심으로 갖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향적당에서 길이 2~3갈래로 갈리다가 광명전에서 모두 합쳐진다.

경내를 걷다보면 완전 한옥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거니는 기분이다. 마치 산속에 숨겨진 비밀
의 도시 같은 기분이랄까? 건물 상당수가 왠만한 단양읍내 건물보다 크고 좁은 산자락에 건물
들이 대량으로 몰려있으며, 매일 수천 명이 절에 머무니 구인사 일대를 따로 읍(邑)으로 삼아
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명칭은 '구인읍'이 좋을 듯, 대신 세금은 넉넉히 낼 것)

삼보당을 바라보고 선 관음전은 3층 규모로 그 3층이 관음전이다. 이름 그대로 청동으로 조성
된 관음보살 누님이 봉안된 건물로 그 규모는 5층 대법당보다는 현저히 작지만 그것보다 작을
뿐이지 다른 절의 법당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덩치가 크다.


▲  구인사 5층 대법당 옥상에 자리한 설법보전(說法寶殿)

관음전 북쪽에는 구인사의 법당(法堂)인 5층대법당이 자리해 있다. 천하에서 가장 큰 법당으
로 최대 5천명까지 수용 가능하며, 그 건물 정상에 실질적인 법당인 설법보전이 자리해 천하
를 굽어본다.
이 건물은 상월원각조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했다고 전하는 연화지가 있던 곳으로 1945년 이곳
에 3간 초암(草庵)을 지어 절을 세웠다. 그 초암은 6.25 때 파괴되어 1952년에 재건되었으며
1980년 4월, 그 역사적인 초암을 멀어버리고 지금의 대법당을 지었다. (초암은 자리를 옮겨서
라도 남겨두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음)
건물이 하도 으리으리하여 5층 전체를 사진 1장에 담기도 벅차며, 설법보전 내부에는 석가불
을 중심으로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과 관음보살이 협시한 석가3존불이 봉안되어 있다.

설법보전 내부는 경내를 모두 둘러보고 내려가는 중에 잠시 들렸는데 마침 오후 법회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았다. 고참 승려와 신참 승려들이 여러 전통 악기를 가져와 30분 동안 승무(僧舞)
와 범패(梵唄)를 노련하게 선보이는데, 천하에 300곳이 넘는 절을 다녔지만 승무와 범패는 이
때 처음 구경했다. 꼬깔을 쓰고 동그란 바라를 치며 신들린 듯, 춤에 열중하는 승려의 모습에
는 정말 박수가 나올 정도로 사진과 동영상으로 담지 못한 것이 참 아쉽기만 하다. 허나 설법
보전 내부는 촬영을 금하고 있어 대놓고 찍기도 힘들다. (49재 행사도 여기서 주로 지냄)


▲  설법보전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관음전과 삼보당 사이에는 일종의 광장이 형성되어 있는데 그 광장 남쪽에 향적당(香積堂)이
란 3층짜리 건물이 있다.

향적당은 여러가지 좋은 향기가 담겨있다는 의미로 그 향기란 바로 음식이다. 그러니까 음식
을 먹는 장소, 공양간인 셈이다. 절에서는 부엌을 향적대(香積台)라 부르는데, 1층은 음식을
짓는 부엌이고, 2층은 공양간으로 최대 1,000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
공양(供養)은 아침과 점심, 저녁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먹을 수 있는데, 점심 공양은 보통 11
시 반부터 13시까지 제공되며 상황에 따라 30분~1시간 정도 연장 제공되기도 한다. 아침공양
은 6시 반~7시 반, 저녁은 17시 반~22시까지로 구인사에서 재배한 쌀과 채소로 지어진 밥(보
리밥이 나오기도 함)과 국, 김치 등의 나물과 직접 숙성시킨 고추장을 주며 이들 고추장과 나
물을 밥에 비벼서 먹거나 그냥 먹어도 된다.
나름 맛이 있는지라(김치와 국이 괜찮음) 뚝딱 1그릇을 비우고 식기를 반납하여 밖으로 나오
면 길다방 자판기가 여러 대 대기해 커피 1잔의 여유을 권한다. 그들은 공짜가 아닌 300~400
원을 먹여줘야 커피나 코코아를 제공하는데 정 돈을 받아야겠다면 중생구제를 염원하는 절에
걸맞게 100원만 받아도 충분할 것이다. 절은 중생과 속세를 위해 헌신하는 곳이지 돈을 버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  황색 지붕를 지닌 천태종역대조사전(天台宗歷代祖師殿)

지관당(止觀堂) 부근에 '천태종역대조사전'이라는 절 건물 치고는 이름도 무지 긴 2층 건물이
있다.
이 집은 그 이름 그대로 천태종의 역대 고승(高僧)의 진영(眞影)과 존상이 봉안된 곳으로 천
태종 시조인 용수존자(龍樹尊者, 남인도 비달바국 출신)를 비롯해 고려 승려로 송나라로 건너
가 대륙의 천태종을 크게 발전시킨 제관법사(諦觀法師), 우리나라 천태종의 상징이자 고려 문
종(文宗)의 4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 중원대륙 천태종의 초조(初祖)인 북제
존자 혜문(北齊尊者 慧門), 중원대륙 천태종의 실질적 개창자인 지자대사(智者大師), 백련결
사 운동을 전개했던 고려 중기 승려인 원묘국사(圓妙國師)와 진정국사(眞靜國師) 등 우리나라
천태종 승려 18명(모두 고려 승려)과 중원대륙 승려 18명 등 36명이 봉안되어 있다.

이 조사전은 2003년 5월에 기공하여 2008년 4월 22일 완공되었는데, 그때 존상 봉안식을 거행
했으며, 건물 면적은 206평, 2층은 조사전, 1층은 승려들의 교육 공간인 강원(講院)으로 쓰인
다.
참고로 중원대륙은 1993년에 대륙 천태종의 총본산인 국청사에 중원대륙 천태종의 개창자, 지
자대사와 고려 천태종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 그리고 구인사를 세운 상월원각조사의 존상을
봉안한 중한천태종조사기념당(中韓天台宗祖師記念堂)을 세웠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원간의 천
태종 교류가 활발해지자 우리나라 천태종의 중심지인 구인사에도 중원처럼 천태종 고승을 기
릴 건물을 세울 필요성이 대두되어 구인사의 위엄을 다시 한번 떨칠 겸, 이렇게 장엄하게 천
태종역대조사전을 만든 것이다.
이곳에 봉안된 36명 중 생전의 모습을 남기지 못한 승려가 꽤 되는지라 그들은 오로지 상상에
맡겨 진영과 존상을 조성했다. (건물 내부는 촬영 금지)


▲  구인사 광명전(光明殿)

대조사전 광장 바로 밑에는 경내에서 가장 큰 광명전이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구인사
의 위엄에 걸맞게 매우 우람한 규모를 자랑하는데 가파른 벼랑을 손질하여 지은 6층짜리 건물
로 내부 면적도 꽤 상당하다. 건물의 밑부분은 불전(佛殿)이라기보다는 회관(會館) 같은 분위
기가 진하며 그나마 윗부분의 겹으로 이루어진 기와지붕이 이 건물도 엄연한 불전의 일부임을
알려준다.
건물이 크다보니 심지어 엘리베이터를 2대나 갖추고 있으며, 절에서 엘레베이터를 타기는 구
인사가 처음이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지.

광명전은 강당 및 단체 예불 공간으로 몰려드는 수행 신자를 수용하고자 세웠다. 그래서 기도
/수행 신자들이 강당 일대에 많이 머물며 이불 등을 깔고 잠을 청하거나 휴식을 취한다. 또한
그들을 위해 난방을 두둑하게 틀면서 봄날 마냥 따스해 졸음이 스르륵 몰려든다.
(대조사전으로 갈 때는 광명전 엘레베이터를 이용하는 것이 제일 편함)


▲  광명전 강당 (강당 윗층과 밑층 모두 수행 신자들로 가득함)

▲  광명전 꼭대기에서 바라본 구인사 경내
하늘과 한발자국 더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품질도 높아진다.

▲  광명전 꼭대기에 자리한 대조사전과 광장

광명전 정상에는 대조사전 광장이 넓게 닦여져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하
늘의 광장 같은 분위기를 진하게 풍기는데 상월원각조사와 남대충 대종사의 탄생 기념 법회와
열반 법회, 대각국사 의천의 탄생 기념 법회 등 구인사의 여러 행사와 축제가 여기서 성대하
게 열린다.


▲  대조사전 광장

▲  대조사전(大祖師殿)의 위엄~~!!

대조사전은 두루마기 옷을 입은 상월원각대조사의 금동존상이 봉안된 곳이다. 구인사에서 그
를 기리는 공간을 세우고자 1985년에 대조사전 건립추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단순히 조사전
의 성격에서 벗어나 천태종 부흥의 상징적 역할 및 세계적인 문화재로 만들겠다는 포부까지
듬뿍 넣어 1992년 착공을 시작해 2000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의 총건평 167평, 높이 27m로 이 땅의 목조 건물 중 가장 높다. 구인사의 건물이 모두 콘
크리트 기와집인데 반해 이 건물은 유일하게 나무로만 지어진 것으로 300년 이상 묵은 태백산
춘양목(春陽木) 50만 재를 벌채하여 일체 쇠못을 쓰지 않는 전통 방식으로 만들었다. 또한 건
물 주춧돌 석재는 이 땅 최고의 돌이라는 강화 애석을 썼으며, 기와는 모두 황금색 기와로 덮
어 장엄함을 높였다. 이들 기와는 1,300도에서 구워 금빛을 영구 보존처리했으며, 단청에 들
어간 순금은 무려 2,700돈, 총 공사비는 자그만치 100억이나 소요되었다.
건물 건립에는 국가무형문화재 74호인 대목장 신응수씨가 도편수를 맡았는데, 그는 궁궐 건축
의 1인자로 광화문(光化門)과 숭례문(남대문) 복원공사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대조사전은 천태종 부흥의 상징적 역할과 세계적인 문화재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빼면 단순히
상월을 위한 건물로 불교의 중심인 석가불이나 아미타불(阿彌陀佛), 온갖 보살(菩薩)들이 봉
안된 건물보다 더욱 크고 화려하다. 오래된 절들은 보통 그 절을 세우거나 절을 크게 일으킨
승려를 기리는 조사전<祖師殿, 또는 진영각(眞影閣)>을 두기 마련이다. 그 규모는 대체로 법
당보다는 작은 편으로 그들의 모습을 그린 진영(眞影)이 있지, 존상은 없다.
허나 구인사는 그냥 조사전도 아닌 대조사전을 칭하고 있고, 상월의 사진이나 진영도 아닌 금
으로 휘황찬란한 족히 20m는 될 듯한 거대한 존상을 두어 상월을 중심으로 한 다른 종교의 사
원에 들어선 기분이다. 게다가 단청에 엄청난 금을 발랐고, 무려 100억을 들인 건물이라고 하
니 정말 현기증이 날 정도로 호화로움과 웅장함이 넘치고 흐른다.


 

♠  구인사 마무리

▲  소백산이 빚은 장쾌한 산줄기 구봉팔문(九峰八門)

대조사전 서쪽에는 적멸보궁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있다. 그곳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나는
처음에는 부처의 사리가 봉안된 곳인줄 알았다. 적멸보궁은 부처의 사리가 담긴 곳이고 그러
다보니 따로 불상을 두지 않는다는 절대진리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 연말에 구인사에
왔을 때 그곳까지 간 기억이 없기에 이번에 몸소 가보기로 했다.

산길 입구에는 산길을 오를 때 쓰라며 나무 지팡이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그냥 오를까 하다
가 손이 허전해 지팡이(나무를 적당히 깎은 것임)를 하나 쥐어들고 산길에 임했다.
처음에는 길이 완만하지만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각박하게 돌변한다. 산자락에 눈이 많
이 쌓여있으나 성지로 가는 길이다보니 길만큼은 눈에서 해방되어 통행하는데 별 어려움은 없
으며, 신도들의 발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남쪽을 향해 급하게 펼쳐진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상관은 없으나 보통 왼쪽 길로 올라가서 오른쪽 길로 내려가는 것이 편하다. 여기서 다시 10
분 정도 더 다리를 부리면 비로소 적멸보궁(寂滅寶宮)에 이른다.
적멸보궁에 닿고 보니 그 흔한 적멸보궁이 아닌 것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적멸보궁의 주인공
은 다름아닌 상월원각조사로 그곳에는 그의 무덤이 자리해 있었다. 무덤은 봉분(封墳)과 양석
(羊石), 상석(床石) 등 여러 석물로 이루어진 제법 비싼 모습인데, 그곳이 구인사의 적멸보궁
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부처의 진신사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인사 창건주의 승탑(僧塔)도 아
니고 제법 잘 꾸며진 무덤이 적멸보궁이라니?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긴 곳을 적멸보궁이라 부
르는 불가(佛家)의 진리도 여기서는 예외인가 보다. 하긴 구인사에서 상월을 부처로 숭상하는
데 그럴만도 하겠지. 참고로 상월은 바로 여기서 인생의 마지막 숨을 쉬며 열반에 들었다고
전한다.

무덤과 적당히 거리를 둔 북쪽에 예불을 올리는 공간을 두었는데, 절을 올리는 신도들로 자리
가 없다. 그리고 그 북쪽에 무덤을 관리하는 건물을 두었고 건물과 예불 장소 옆은 엄청난 각
도의 내리막이라 주의를 요한다.
무덤 일대는 촬영이 통제되어 있어 굳이 담지는 않았다. 무덤 주위로 사람들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게끔 철조망과 줄을 쳐놓았으며 이곳 역시 기가 막힌 명당이라고 한다. 이렇게 상월의 무
덤이 있으니 당연히 남대충의 무덤도 있다.
그의 무덤은 경내에서 북쪽으로 4km 정도 떨어진 남한강 건너(영춘교 서남쪽) 산자락에 자리
해 있는데 그 무덤도 상류층 무덤 수준이다. 이곳은 구인사에서 거리가 좀 있으므로 매일 몇
회 정도 그곳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이곳은 예전에 가봤음)

구인사에서 수행/기도로 머무는 경우 5층대법당과 삼보당, 대조사전, 상월원각조사의 묘역은
매일 둘러봐야 된다고 그런다. (남대충 묘역은 선택 옵션임~) 매일 이들을 둘러보면 다리 하
나는 정말 단단해질 듯.


▲  구봉팔문 전망대

적멸보궁 남쪽에는 구봉팔문전망대가 있다. 묘역 옆으로 난 산길을 3분 정도 가면 그 끝에 전
망대가 달려있는데 전망대라고 해서 무슨 시설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구봉팔문이 잘 보이
는 언덕배기일뿐, 어떠한 인공시설도 없는 자연산 전망대이다.

구봉팔문은 구인사 남쪽 산줄기를 일컫는다. 영춘면 남천리에서 가곡면까지 5개 리에 걸친 소
백산의 북쪽 지맥이 9개의 봉우리를 이루고 그 사이로 8개의 골짜기가 형성되었는데 그 골짜
기를 봉우리로 인도하는 문으로 비유하여 9봉8문이라 부른다. 그 이름 외에도 옛날에 어떤 승
려가 이곳을 법문(法門)으로 오인해 오르려고 애를 쓰던 곳이라고 하여 법월팔문(法月八門)이
라 불리기도 하며, 상월도 이들 봉우리에 올라 정진에 힘썼다고 전한다.

9봉의 이름은 제1봉부터 아곡문봉, 밤실문봉, 여의생문봉. 뒤시랭이문봉, 덕평문봉. 곰절문봉
, 배골문봉, 귀기문봉, 새발문봉이며, 8문의 이름은 1문부터 아골문안골, 밤실문안골, 여의생
문안골, 덕가락문안골, 곰절문안골, 배골문안골, 귀기문안골, 새발문안골이라 부른다. 이들은
영춘면 남천리와 백자리에서 시작해 국망봉 계곡에서 끝을 맺으며, 곰절문봉을 중심으로 '八'
자 모양을 이룬다. 경관이 매우 뛰어나 제2단양8경의 일원으로 꼽히고 있으나 사람들의 발길
도 쉽지 않은 벽지라 아직은 청정한 상태로 남아있다.

이곳 전망대는 길이 막혀있어 더 이상 가지는 못한다. 그냥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바라
보듯 구봉팔문을 바라보고 다시 되돌아 나가야 된다. 이곳에 올라서면 정말 바람의 소리가 전
부인 고적한 곳으로 대기도 청정해 속세에 찌든 몸과 마음이 싹 정화되는 거 같다. 구인사에
왔다면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이곳 전망대에 올라 소백산의 장대한 기운과 도시에서는 맛
보기 힘든 자연의 멋과 담백한 산정의 기운을 꼭 누리고 가기 바란다.


▲  적멸보궁에서 구인사 경내로 인도하는 산길

▲  구인사 온실 식물원 - 무궁무진한 햇살을 에너지로 삼아 식물원의
식구들을 먹여살린다.


이렇게 적멸보궁 일대를 둘러보고 다시 경내로 내려왔다. 내려갈 때는 올라갈 때와 달리 길이
쉬워서 금세 대조사전 옆구리에 이르렀다. 잠시나마 함께한 지팡이를 놓아주고 밑으로 내려갔
는데 중간에 5층대법당 설법보전에 들려 오후 법회와 승무, 범패를 구경했다.

설법보전을 끝으로 구인사와의 인연을 싹둑 정리하고 속세로 내려왔다. 시간은 어느덧 17시가
다되어 가지만 경내에는 여전히 사람들로 북새통이었고, 빠지는 인원만큼 계속해서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으니 구인사의 명성과 위엄이 새삼 대단함을 느낀다. 갓바위보다 돈을 더 많이 버
는 절이니 그 수입을 중생과 속세를 위해 과감히 쓰면 좋으련만, 너무 바람직하지 않게 쓰이
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요즘 종교들이 돈을 너무 밝히고 외양 꾸미기에 지나치게 몰두함)

구인사 정류장에서 버스 시간을 확인하니 곧 동서울로 가는 직행버스와 제천역으로 가는 제천
시내버스가 올 시간이다. 일요일 늦은 오후라 버스를 타면 영동고속도로가 100% 막힐 것이니
제천에서 열차로 상경하기로 하고 제천역으로 가는 제천시내버스 260번에 몸을 실었다.

구인사에서 거의 1시간을 달려 제천역에 도착, 여기서 청량리(淸凉里)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
에 몸을 싣고 나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과거완료형이 되버린 연초의 구인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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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도심 사찰 나들이, 연산군이 폐비윤씨의 원찰로 지었다고 전하는 회기동 연화사 ~~~ (월계동 기원사)

 


' 석가탄신일에 즐긴 사찰 나들이 ~ 서울 연화사, 기원사 '

▲  연화사 대웅보전

▲  연화사 천수관음도

▲  기원사 대웅전

 


 

평소에도 답사와 출사, 산책 등으로 많은 절집을 들락거리고 있지만 석가탄신일(사월 초파
일, 이하 초파일)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사찰 투어를 벌인다. 그날 하루를 온전히 절
투어에 쓴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데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도는 아니다. (나는 무교임)
그럼에도 초파일을 챙기는 것은 초파일의 흥겨운 분위기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공
양밥과 과일, 떡 등 갖은 먹거리까지 풍성하여 그 흥겨움을 더해주며, 특히 평소에는 개방
을 꺼리거나 외지인에게 배타적으로 대해 답사쟁이의 카메라를 무력화시키는 절<주로 문화
유산을 간직한 인지도가 별로인 현대 사찰과 오래된 절들~>도 이날만큼은 대부분 경계심을
푼다. 하여 이때를 이용해 그런 절을 찾아가 문화유산을 아낌없이 친견하고 사진에 담는다.

초파일이 코앞에 아른거리자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서울 장안에서 아직 발자국을 남기
지 못한 오래된 절과 문화유산을 품은 현대 사찰을 대상으로 정처(定處)를 물색하였다. 초
파일에는 굳이 멀리 나가지 않고 마음 편히 집에서 가까운 서울 시내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몇 배 이상으로 서울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기 때문에 그런 미답지(未踏地
) 사찰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몇 남지 않은 미답지 사찰을 열심히 쥐어짜니 적당한 절 두 곳이 걸려들었다. 바로
경희대 옆에 자리한 연화사와 월계동의 기원사이다.
연화사는 연산군 시절에 세워진 절로 그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오래된 볼거리가 없는 절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곳에 있는 탱화 여러 점이 2013년에 무더기로 지방문화재로 지정
되면서 관심도 없던 그곳에 슬슬 구미가 오른 것이다.
또한 월계동 기원사는 1980년에 창건된 사찰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가 2점이나 있다.
하여 이들을 먼저 살펴보고 예전에 갔던 오래된 절 여러 곳을 추가로 둘러보기로 했다.


 

♠  경희대 그늘에 자리한 오래된 절집,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 회기동 천장산 연화사(天藏山 蓮華寺)

▲  활짝 열린 연화사의 정문, 일주문(一柱門)

경희대학교 병원 바로 서쪽에는 연화사란 조그만 절이 자리해 있다. 바로 옆에 큰 덩치를 자랑
하는 경희대 병원 건물이 있다보니 절 건물은 거의 장난감처럼 보일 정도인데, 마치 큰 바위에
붙은 조그만 들꽃 같은 모습이다.

지금은 경희대에 완전히 포위된 외로운 공간이 되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하여도 이곳은 소나무
가 무성한 한적한 숲속이었다. 그때는 청량리(淸凉里) 북쪽 영휘원<永徽園, 고종의 후궁인 엄
비의 묘역>에서 오솔길을 따라 절로 들어섰으며, 절 북쪽에는 천장산(141m)이 자리해 연화사와
의릉<懿陵, 조선 20대 군주인 경종의 능>을 감쌌다. 그래서 연화사는 자연히 '천장산 연화사'
를 칭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1955년 종로1가에 있던 경희대(옛 신흥대학)가 이곳으로 오면서 절 바로 옆에 학교 건
물이 들어서게 되었고, 덩달아 주거지까지 조성되면서 절 주변 풍경화는 강제로 180도 달라지
게 되었다. 게다가 연화사를 품었던 천장산은 경희대로 인해 서로 끊어졌고, 절 사방으로 경희
대(경희여중고, 경희대병원)에 완전히 감싸여 외부에서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조계종(曹溪宗) 소속인 이 절은 1499년 폐비윤씨의 묘역인 회묘(懷墓)의 원찰(願刹)로 창건되
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폐비윤씨는 바로 연산군(燕山君)의 어머니로 그 이름을 아주 요란하게
남긴 여인이다.
회묘는 원래 경희대 병원 자리에 있었는데, 억울하게 죽은 어미를 위해 연산군은 1504년 회묘
를 회릉(懷陵)으로 높여 석물을 심고 회묘를 지키는 절을 세웠다. 허나 아쉽게도 연화사의 시
작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원찰의 이름은 아쉽게도 전하지 않는다. (절이 매우 작았던 모양임)

어미를 향한 연산군의 사무친 마음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덧없이 아작이 나버렸고,
연산군 자신은 강화 교동도(喬桐島)로 추방되어 바로 그해 겨울,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어 방치되었고, 연화사 역시 이때 풍비박산이 난 것으로 보인다. 반
정파들은 연산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철저히 깔아뭉개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터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의 능인 의릉이 인근 석관동(石串洞)
에 터를 닦으면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조(英祖)가 1725년 절을 지어 의릉의 원찰로 삼
은 것이다. 허나 그 원찰의 이름도 전하지 않는다.
1870년대에 이르러 승려 묘련(妙蓮)이 절을 중수했는데 그는 성품이 좋아 인기가 대단했다. 그
래서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절을 묘련사(妙蓮寺, 또는 묘련암)라 부르니 이때부터 절의 이
름이 역사에 나타난다.

1882년 임오군란 때 파괴된 것을 1883년에 승려 정담(淨潭)이 남화(南化), 완허(玩虛)의 도움
으로
다시 일으켰으며, 이때 궁인(宮人) 박씨와 상궁(尙宮) 최씨, 김씨 등이 시주하여 여러 불
화를 제작했다. 그렇게 중건이 마무리 되자 1884년 10월 '천장산 묘련사 중건기(重建記)'를 남
겼다.
이후 절은 연화사로 이름이 갈렸는데, 그 시기가 정확하지 않다. 다만 1993년 자음(慈音)이 지
은 '천장산 연화사 삼성각 상량문(上樑文)'에는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
화장(蓮華藏) 세계이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自性)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
아 절 이름을 연화사라 했다'고 적고 있어 연화장 세계에서 절 이름을 따왔음을 귀띔해준다.

1950년대까지 절 주변은 자연에 묻힌 싱그러운 곳이었으나 경희대가 절 옆에 터를 닦으면서 도
심 속의 절이 되어버렸으며, 연화사의 첫 후광(後光)이던 회묘는 1969년 경희대에 밀려 서삼릉
(西三陵)으로 강제 이전되었다.
1990년대까지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미륵전(彌勒殿), 대방(大房), 종각 등의 기와집 건
물이 경내를 이루었으며 극락보전 앞에는 뜨락이 닦여있었고, 경내 뒤에는 약간의 소나무가 운
치를 이루었다. 허나 건물이 낡고 터가 좁아 1993년부터 크게 중수를 벌여 기존의 건물을 부시
고 집약적인 공간인 2층짜리 대웅보전과 삼성각 등을 새로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미륵전 상
량문'과 '묘련암 중수기(1875년)'가 발견되어 절의 숨겨진 역사 일부가 속살을 드러냈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무애당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2013년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칠성도, 천수관음도, 신중도, 지장시왕도, 산신도, 아미
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2호) 등이 있다.
이중 아미타괘불도(阿彌陀掛佛圖)는 1901년 10월 28일에 제작해 다음달 11월 20일에 점안된 것
으로 대은 돈희(
大恩 頓喜)를 중심으로 계은 봉법(啓恩 奉法), 한봉 응작(漢峰 應作), 보암 긍
법(普庵 亘法) 등이 참여해 조성했다. 아미타3존불을 비롯해 가섭존자, 아난존자, 사자와 코끼
리를 탄 문수/보현동자상까지 등장시켰는데, 이는 19세기 중반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던
괘불 양식이다. 날이 날인지라 괘불(掛佛)의 화려한 외출을 기대했으나 아쉽게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밖에 1880년에 제작된 독성도가 있으며, 지방문화재 불화들은 괘불을 제외하고 상당수 삼성
각과 대웅보전 1층에 포진해 있다.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경내로 인도하는 짧은 숲길
봄이 푸르게 붓질을 한 숲길에 고운 빛깔의 연등이 허공을 메우며
초파일 분위기를 한껏 드높인다.


훤칠하게 솟은 일주문을 들어서 찰라와 같이 짧은 숲길을 들어서면 바로 대웅보전 앞이다. 오
색찬란한 연등이 연화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메우며 초파일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연화사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좁게 경내를 이루고 있는데 그 동쪽에 삼성각과 무애당이 있고
서쪽에는 불교용품과 전통차 등을 파는 건물이 있다. 초파일 분위기를 즐기러 나온 수많은 사
람들로 좁은 경내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절은 초파일 특수로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  대웅보전 뜨락에서 펼쳐진 초파일 오후 법회

▲  시장통을 이루고 있는 대웅보전 뜨락

대웅보전 뜨락에는 행사용 천막을 가득 지어 전통차 시음과 다도(茶道) 체험, 연등 만들기, 불
교용품 판매, 간식과 음료수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안그래도 좁은 터에 사람까지 많
은데 천막까지 주렁주렁 지었으니 마치 콩나무시루의 버스나 교실을 보는 듯, 공간이 좀 답답
하다.
전통차는 무료로 제공하고 있는데 조그만 청자 찻잔에 차를 따라준다. 무슨 차였는지는 벌써

터 기억이 가물가물하나 1잔 들이키니 속이 좀 맑아지는 것 같다. 그리고 팝콘은 공짜로 제공
하고 있어 그 기나긴 줄에 동참하여 1봉지를 챙겼다. 그 외에 연등만들기와 다른 간식류는 돈
을 받고 있었다.

▲  무애당(無礙堂)
종무소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  1993년에 새로 지어진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 칠성(치성광여래), 독성(나반존자)>

대웅보전 뒷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친숙
한 산신과 독성, 칠성의 보금자리이다. 건물 바로 뒷쪽에는 콘크리트로 다져진 언덕이 있는데
경희대 건물이 높이 자리해 절을 대놓고 엿본다.

삼성각에는 산신과 독성, 칠성을 담은 3개의 탱화가 봉안되어 있는데, 이중 칠성도와 산신도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허나 독성도는 그들보다 나이가 더 많음에도 아직 지정문화
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으니 그 이유가 자못 궁금하다. 그렇다고 독성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도 아니다.


▲  삼성각 석가불과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3호)

삼성각 중앙에는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금동석가불과 고색이 역력한 칠성도가 자리해 있다. 내
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고색(古色)의 향기이니 내가 그 향기에 이끌려 이제서야 이곳 연화사에
발을 들인 것이다.

칠성도는 치성광여래
(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 칠성
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의 주요 식구들이 복잡
하게 담겨져 있다.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신앙으로 머
물러 있었는데, 조선 때 불교의 일원으로 쿨하게 흡수되면서 그를 봉안하지 않은 절이 거의 없
을 정도이다.

연화좌(蓮花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칠성도의 주인, 치성광여래는 금륜(金輪)
을 들고 있는데, 양어깨를 덮은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으며, 좌우 협시보살은 연화좌 위에
반가좌(半跏坐) 형태로 앉아 본존불을 향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그리고 머리에 쓴 관
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원과 하얀 원이 그려져 있고, 치성광여래 주위로 좌우 대칭되게
배치된 칠성불은 합장한 채 본존불 쪽으로 몸을 향해 있으며, 칠원성군은 각기 홀을 들거나 합
장한 채 치성광여래를 향해 서 있다.

이 그림은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활약한 한곡 돈법(漢谷 頓法)을 중심으로 한명 환조(
漢明 幻照), 두삼(斗三), 태호(太湖), 창호(昌湖) 등이 동참하여 1901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때
아미타괘불도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천수관음도가 같이 제작되었다.


▲  삼성각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6호

칠성도 우측에는 산신(山神)과 호랑이, 동자 등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도가 자리해 있다. 칠
성도만큼이나 고색이 끼어있으나 그와 달리 등장 인물이 단촐해서 보기는 좋다. 언제 제작되었
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23년에 문성(文性)이 산신각을 짓고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
어 이르면 1880년대 후반, 적어도 칠성도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중앙에 붉은 옷을 걸친 산신 할배가 크게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에 모자 모양
의 두건을 쓰고 있고, 까무잡잡한 얼굴은 둥근 넓적하며 포근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왼
손에는 깃털로 된 부채를 들고 있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그의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산신 오른쪽에는 그의 비서인 동자 2명이 그려져 있는데, 모두 기물을 들고 서 있으며, 왼쪽에
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민화(속화)풍으로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시중에 돌고 있는 어느 유명한 민화(民畵)의 호랑이와도 많이 닮아있어 혹 그를 참조하여 그린
것이 아닐까 싶다. 하여튼 옛 사람들은 호환(虎患)이라 하여 두려움의 대상인 호랑이를 고양이
처럼 친근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짙었다.

산신 뒤에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있는데, 노송과 길게 떨어지는 폭포를 그려 심산유곡(深山
幽谷)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  삼성각 독성도(獨聖圖)

칠성도 좌측의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를 담은 그
림으로 아줌마 자세로 편하게 앉은 백발의 독성 할배와 그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려져 있다.
비단 바탕에 채색된 것으로 1880년에 제작되었으며, 삼성각에 깃든 3개의 탱화 중 가장 오래되
었다.


 

♠  연화사의 심장부, 대웅보전(大雄寶殿)

▲  연등을 두룬 대웅보전

연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은 1993년에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하
는 선방(禪房)과 공양간, 2층은 대웅보전, 1층은 강당(講堂)으로 작은 절에 걸맞게 집약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를 보고 싶다면 1층을 기웃거리면 되며 시장기
가 있다면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  대웅보전(2층) 내부

석가불이 관음보살(觀音菩薩)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좌우로 대동하며 자리해 있고, 영산회상
도(靈山會相圖)를 비롯한 후불탱 3점이 그들을 든든하게 받쳐준다.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떡과 과일 등 온갖 음식들로 상다리가 아작날 지경인데, 음식을 쳐다보며 입맛만 다실 뿐, 먹
을 수도 손을 댈 수도 없다. 그러니 음식 모두 승려와 신도의 뱃속으로 고스란히 들어간다. 하
여 때만 잘맞으면 저 음식들을 얻어먹을 수 있다.
허나 이번에는 그런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승려와 절에서 일하는 신도의 허락 없이
마구 집어먹지는 말자~~! 그건 제사음식을 마구 집어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연등이 알록달록 그늘을 드리운 대웅보전(2층) 앞부분
대웅보전 가운데 칸 앞에서는 아기부처에게 물을 끼얹는 관불(灌佛)의식이
열리고 있었다.

▲  관불의식을 기다리는 사람들

대웅보전 2층 앞에는 초파일을 맞아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된 관
정대(灌頂臺)에 우뚝 서 중생들의 인사를 받고 있었다.

관정대 옆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줌마 신도가 관정을 도와주고 있는데 날도 날인지라 한
번 관정을 해봐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하여 기나긴 관불의식 행렬에 동참하여 아기부처를 시
원하게 냉수마찰을 시켜주었다. 물을 맞은 그의 표정이 잠시 빙그레 환해진 듯 싶었는데 햇님
이 퇴근하고나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에 봉인되어 내년 초파일까지 기나긴 잠을 자야된다. 그
러니 오늘 실컷 냉수마찰을 받아야 여한이 없을 것이다.

다른 절에서도 관불의식을 많이 해봤지만 이곳
은 의식을 거행한 사람들에게 손수건을 하나씩
나눠주는 미덕을 보여주었다. 수건에는 연화사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빨간 바탕과 파란 바탕
2가지가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적지않은 절(성당과 교회도 그렇고)들이
사세 확장과 돈 벌기에 지나치게 혈안이 되어
있어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데, 절이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속세를 위해 모든 것을 베푸는
존재가 되야 한다. 더러운 속세를 정화시키는
한 송이 연꽃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초파일
주인의 뜻이며 절의 이름값을 하는 것이다.

 ◀  꽃밭에 선 아기부처, 관불의식의 현장
하얀 코끼리 위에 홍련(紅蓮) 모양의 관정대를
얹히고 그 위에 오른손을 치켜든 아기부처를
세웠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보전 앞뜨락

▲  대웅보전 1층 금동석가3존불과 금동후불목각탱
금동으로 지어진 닫집 안에 금동 피부를 한 석가불이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을
대동하여 앉아 있고, 그 뒤로 금동으로 도배된 후불목각탱이 자리해 있는데
너무 화사한 나머지 두 눈이 정신을 잃을 지경이다.

▲  연화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5호

대웅보전 1층은 강당으로 쓰이고 있다. 중앙에는 금동(金銅)으로 치장된 석가3존불과 후불목각
탱이 자리해 있고, 그 우측 벽에 연화사의 주요 보물인 신중도와 천수관음도, 지장시왕도가 액
자 안에 나란히 담겨져 있다.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과다해 정신을 쏙 빼놓는다.
주로 법당을 지키는 용도로 신중도(신중탱)를 많이 거는데,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위
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좌우측에 대칭으로 자리한 제석천과 범천은 동그란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뒤에 두루
며 머리에 보관(寶冠)을 쓴 채, 두 손으로 꽃을 들고 있으며, 그림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
로 칼로 무장한 팔부중(八部衆)이 있고, 제석천과 범천 주위로 일월대신(日月大神) 등의 천신(
天神)과 산개(傘蓋) 등을 받쳐든 천동(天童),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天女) 등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901년에 수화원 한봉 응작(漢峰 應作)을 비롯해 대은 돈희(大恩 頓喜), 계은 봉법(
啓恩 奉法), 보산 복주(寶山 福珠), 보암 긍법(普庵亘法), 재겸(在謙) 등 12명의 화승(畵僧)이
그린 것으로 이중 계은 봉법, 보암 긍법, 돈법(頓法), 두삼(斗三) 등은 20세기 초 경기도 지역
에서 활약한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과 교류를 가진 화승들이다.
그림의 구도와 형태, 필선, 채색 등이 깔끔하게 처리되었으며, 세부묘사가 정교해 19세기 중반
이후 화풍 흐름을 잘 보여준다.


▲  연화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6호

신중도 옆에 자리한 지장시왕도는 가운데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
道明尊者),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신중도 만큼이나 정신없
어 보이는 이 그림은 언제 그려졌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연화사 불화가 대거 조성되던 1901년에
슬쩍 제작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지장보살은 수미단(須彌壇) 위에 마련된 연화좌에 결가부좌로 앉아있으며, 투
명한 흑색두건을 쓰고 오른손에 보주(寶珠), 왼손에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있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고, 지장보살의 신광(身光)
좌우로는 온갖 모습의 시왕이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는데 시왕 뒤에는 8곡병(曲屛)이 들러져
있으며 광배는 금박을 붙여 장식했다.
이렇게 광배를 금색으로 처리한 수법은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그림의
인물표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두옥졸(牛頭獄卒)과 마두옥졸(馬頭獄卒) 등 인물의 상호에
표현된 음영법이다. 이 음영법 역시 19세기 이후 서울, 경기 지역 불화에서 많이 보인다.

이 그림은 1867년에 경선당 응석이 그린 낙산 보문사(普門寺, ☞ 관련글 보기)의 지장시왕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서울 청룡사(靑龍寺) 지장시왕도와 유사하며, 구한말에 서울, 경기 지
역 지장시왕도의 도상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작품으로 채색 및 인물 표현에서도 19세기 양식
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하여 이를 통해 서울 지역 불화유파(佛畵流派)의 사승(師僧)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  연화사 천수관음도(千手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4호

대웅보전 1층에서 특히 눈여겨볼 그림은 바로 천수관음도이다. 지금이야 천수관음을 담은 그림
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정작 오래된 천수관음도는 이 땅에 매우 드물게 남아있다. 그 희귀한
그림이 무려 연화사에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한봉 응작, 보산 복주, 청암 운조(淸菴 雲照) 등이 1901년에 그린 것으로 바다 중앙
에 봉긋 솟은 연화좌 위에 천수관음이 붉은 색 바탕의 옷을 걸치며 앉아있다. 그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과 경책(經冊)을 받쳐든 4비(臂)를 비롯해 40비를 갖추고 있는데, 그의 커다란 광배
안에는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그려놓아 관음보살의 위엄을 한층 드높였다. 신중도와 달리
등장인물은 달랑 1명이지만 그의 찬란한 광배로 인해 이 그림 또한 혼을 다 빼놓는다.

연화사 천수관음도는 고려와 조선 전기 천수관음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수월
관음도(水月觀音圖)의 도상까지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925년에 제작된 대산사 천수관음
도가 연화사 천수관음도에서 계승을 받으니 그 가치는 꽤 크다. 특히 관음보살의 얼굴은 살이
많고 이목구비가 단정해 경선당 응석의 영향을 조금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  옆에서 바라본 천수관음도의 위엄

▲  대웅보전 1층 천정을 가득 수놓은 조그만 연등의 앙증맞은 물결

▲  연화사 공양밥의 위엄

연화사는 절이 조그만하여 정말 5분이면 다 보고도 남겠지만 이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신이 나
는 초파일 분위기에 너무 취해있다 보니 1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다시는 안와도 될 정도로 경
내를 살폈지만 만나기가 꽤 까칠한 괘불을 친견하지 못했으니 그를 보기 위해서라도 나중에 또
인연을 지어야 될 것 같다. 그래도 그를 제외하면 계획한 바를 모두 누렸으니 오늘은 이 정도
로 충분하다.

초파일에 절에 왔다면 공양밥은 반드시 먹어줘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지금까지 눈과 마음을 지겹게 호강시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된다. 시간
도 점심 시간을 지난 상태라 뱃속에선 밥달라며 난리를 친다. 그래서 공양(供養)을 먹고자 공
양간이 있는 대웅보전 지하로 내려갔다.
방에는 이미 사람들로 거의 만원, 연화사에서 정성을 다해 준비한 공양밥 1그릇을 들고 적당한
곳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한다. 이곳 공양밥은 호박과 김치, 무생채 등 갖은 나물을 밥에 넣
고 고추장으로 비벼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다. 딱히 개성은 없으나 절을 열심히 둘
러보고 먹는 밥이라 정말 꿀맛이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잠시나마 정든 연화사를 나왔다. 나에게는 그날 연화사가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 회기동 연화사 찾아가기 (2017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경의중앙선 회기역(1번 출구)에서 동대문구 마을버스 01번을 타고 의료원입구
  4거리 하차<거리가 가까워 도보로 가도 상관없음, 도보 9분>  길 맞은편(서쪽) '경희대로3길
  '로 들어서 쭉 가다가 CU경희스타점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연화사이다.
* 서울시내버스 201, 273번을 타고 경희대입구 하차, 도보 7분 (경희대병원 서쪽에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109-1 (경희대로3길 56 ☎ 02-962-6186)


 

♠  법등의 역사는 매우 짧으나 오래된 보물 2점을 간직한
조그만 절집 ~ 월계동 영축산 기원사(祈願寺)


▲  기원사 정문

연화사를 둘러보고 젊은 층으로 번잡한 경희대 주변을 벗어나 회기시장으로 나왔다. 여기서 광
운대역(옛 성북역) 부근에 있는 기원사를 가고자 서울시내버스 261번(석관동↔여의도)을 타고
월계3거리에서 하차, 월계동(月溪洞) 주택가를 가로질러 오르막길을 오르면 그 길(광운로17길)
의 끝에 기원사가 문을 활짝 열며 중생을 맞는다.

기원사는 일주문을 두지 않고, 절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기와 담장에 정문을 내어 마치 교외
에 자리한 별장이나 커다란 한식당에 들어선 기분이다. 그 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창고와 해우
소를 갖춘 기와집이 있고, 정면에 뜨락과 팔작지붕을 지닌 2층 기와집이 있다. 그 건물은 요사
와 선방, 종무소, 공양간을 갖춘 복합 공간으로 그 앞에서 오른쪽(북쪽)으로 방향을 틀면 보이
지 않던 대웅전이 고개를 내민다.
대웅전 뒷쪽으로 가면 수풀이 우거진 쉼터와 석굴 모양의 삼성각이 있는데, 여기가 경내의 끝
이다. 절의 규모는 꽤 조촐하나 앞서 연화사보다 터가 좀 너르며, 건물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고 주변이 확 트여있어 체감상 더 넓게 보인다. 반면 연화사는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주
변이 경희대 건물에 포위되어 있어 좀 답답한 구조이다.


▲  기원사에서 바라본 월계동 지역

월계동 주택가 뒷쪽이자 영축산(靈鷲山)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기원사는 조계종 소속으로 비
구니 절집이다. 이 땅에 흔한 현대 사찰의 하나로 없는 것이 없다는 인터넷 조차도 고개를 갸
우뚱거릴 정도로 정보도 거의 없고 인지도도 낮다. 서울을 거의 꿰고 산다는 나도 기원사의 존
재를 안 것은 채 몇 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 절을 내가 이렇게 찾은 것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 2점을 보기 위함이다.
그들의 소환(?)을 받아 발을 들인 기원사는 그런데로 절집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바로
뒤에 월계근린공원으로 포장된 영축산이 있어 산사의 분위기도 어느 정도 풍기고 있다. 주택가
와 영축산 숲이 경계를 이룬 곳에 절이 둥지를 튼 것이다.

그렇다면 기원사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인터넷에 관련 정보가 좀처럼 걸려들지를 않아 나중에
기원사를 다시 찾아 창건송덕비를 살펴보았다. 그것이 바로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절은 1980년에 함경남도 성천군(成川郡) 출신인 한혜숙(당시 60대)이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지었다. 그러니 그가 기원사의 창건주(創建主)가 된다. 절이 세워지자 승려 지연(知淵)이 주지
승이 되어 절을 꾸렸으며, 오래된 독성도와 산신도를 입수하여 절의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
았다.
현재 법당인 대웅전을 위시해 요사, 삼성각 등 4~5동의 건물이 경내를 채우고 있으며, 비구니
절이다보니 경내가 정갈하고 깔끔하다.

기원사를 품은 산의 이름은 영축산이다. 해발 96m의 조그만 동네 뒷산으로 월계동 한복판에 벌
러덩 누워있는데, 그 이름이 공교롭게도 불교에서 매우 좋아하는 산 이름이다. 부처가 설법을
했던 산이 바로 영축산(영취산)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름의 산에는 절이 꼭 있기 마련이라<통
도사(通度寺)를 품은 산 이름도 영축산> 혹시 기원사가 이름이 전하지 않는 옛 절터에 지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오래된 절도 없는 산이 왜 영축산이란 간판을 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원사가 들어선 이
후 절에서 그 산을 '영축산'으로 부르면서 그것이 자연히 퍼져 얼떨결에 산의 이름으로 정착된
것이 아닐까 싶다.


▲  남쪽을 바라보는 기원사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그 주변을 돌난간으로 둘렀다. 겉으
로 보면 1층이지만 엄연한 2층으로 밑층을 반지하 형태로 먼저 깔고 그 위를 돌로 덮어 대웅전
을 올렸다. 밑층에는 신도들의 공간과 창고가 있다.

▲  영축산 기원사 창건 송덕비(頌德碑)
창건주 한혜숙을 기리는 송덕비이다.

▲  대웅전 뒷쪽에 마련된 그늘진 쉼터
자연에 둘러싸인 포근한 공간이다.


▲  대웅전 계단 옆에 마련된 관불의식의 현장

불교의 큰 대목인 초파일임에도 경내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보니 관불의식 현장도 꽤
나 한산했는데 다른 절들은 그 의식의 현장을 하나만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계단 좌우로 2개나
배치했다.
꽃에 감싸인 아기부처는 물기가 마를 정도로 따분한 시간을 보내며 아까운 초파일 시간을 부질
없이 죽이고 있지만 천진난만한 미소만큼은 잃지 않았으며, 그의 곁에는 하얀 피부의 보시함이
놓여져 애타게 돈을 원한다.


▲  대웅전 석가불과 붉은 색채의 석가후불탱
붉은 닫집 밑으로 이글거리는 모습의 광배(光背)를 두룬 석가불이 홀로 앉아
미소를 머금으며 중생들이 헌상한 음식을 바라본다.

▲  하늘에 칠해진 4가지의 색깔, 대웅전 뜨락을 가득 채운 네모난 연등
다른 절들은 보통 동그란 연등을 매달지만 이곳은 네모난 연등으로
절의 하늘을 훔쳤다. (정문과 요사 주변은 동그란 연등을 달았음)

▲  연등이 주렁주렁 매달린 대웅전 옆구리 돌담길
돌담 너머는 영축산 숲으로 경내에서 산으로 넘어가는 길은 없다.

대웅전 뒷쪽에 숨겨진 삼성각은 2004년에 지어
졌다. 지형을 이용하여 다진 석굴(石窟) 모양
의 돌집으로 건물 내부와 천정, 문은 나무로
손질했으며 문 앞에는 머리를 2갈래로 묶은 조
그만 문수동자상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삼성각
을 지킨다.

건물 내부 중심에는 산신이, 방 좌우에는 독성
과 칠성이 한 자리씩 차지하며 중생들의 인사
를 받고 있는데, 산신의 공간이 유독 넓고 그
위로 높게 동그란 천정을 내어 산신이 사실상
삼성각의 주인임을 알려준다. 바로 이 건물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산신도와 독성도가 있으
니 꼭 살펴보도록 하자.

▲  삼성각과 귀여운 문수동자상


▲  기원사 독성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82호

독성도는 천태산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을 담은 그림이다. 소나무 밑에 앉은 독성은
시선을 오른쪽(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향해 있는데 오른손은 무릎에 놓았으며, 그의
허전한 머리 뒤에는 하얀 광배가 그를 비춘다.
그는 빨간색과 녹색이 어우러진 법의(法衣)를 입었는데, 옷 끝단에는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으
며, 그의 오른쪽에는 나무 밑둥치가 있고 바로 그 위에 세발향로가 얹혀져 있다. 소나무 그늘
위로 하얀 구름이 흘러가며 그 사이로 푸른 하늘과 붉은 햇님이 살짝 모습을 비춘다.

그림 우측 하단에 화기(畵記)가 있지만 푸른 안료로 덧칠을 하는 통에 판독이 불가능하게 되었
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조성되었는지는 오리무중(五里霧中)에 감싸인 상태로 '供養(공양)','
圓(원)' 등 몇 자만 겨우 확인이 가능하다. 허나 붉은색과 녹색을 주조로 하얀색과 청색을 같
이 사용하는 색채감과 구도는 19세기 중반 이후 불화에서 많이 나타나 19세기 중/후반에 조성
되었음을 귀띔해주고 있으며, 제자리를 잃고 이리저리 떠돌다가 20세기 후반에 기원사에 안착
하여 이곳의 듬직한 후광이 되었다.


▲  기원사 산신도와 석조 산신상

▲  기원사 산신도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5호

독성과 칠성은 그림만 걸려있지만 산신은 그림 외에 돌로 만든 산신상까지 갖추고 있어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어흥~! 거리는 호랑이를 옆에 끼고 앉은 석조 산신상 뒤에는 독성도와 더불
어 이곳의 오랜 보물인 산신각이 걸려있다.

그림 중앙에는 붉은 도포와 푸른 두건을 걸친 산신이 하얀 부채를 들고 앉아있다. 머리는 좌우
만 조금 남은 대머리로 수염이 무성하며,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자와 여인이 주전자와 찻
잔을 들며 서 있다. 보통 산신도에는 동자만 나오기 마련인데, 산신의 마음을 읽었는지 여자까
지 등장을 시켰다. 호랑이는 산신 맞은편에서 산신을 바라보며 어흥~! 거리고 있는데, 아마도
산신이 제때 밥을 주지 않아 항의하는 모양이다. 보통 호랑이가 산신 뒤나 옆에 있기 마련이지
만 여기는 서로 마주보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산신 옆에는 소나무가 있고 구름과 해가 소나무를 감싸고 있는데, 굵은 줄기에 태점을 찍고 옅
은 수묵을 사용하여 줄기를 표현해 오래된 노송의 질감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명도가 높은 청
색을 사용하고 손발에 음영법이 쓰이는 등 19세기 말 이후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독성도와 달리 그림 밑부분 좌측에 화기가 남아있어 그의 정보를 소상히 알려준다.
화기에 따르면 을유년(1885년) 5월 1일에 조성되어 전라남도 나한산 사태암(어딘지 모르겠음)
에 봉안되었다. 그런데 전라남도란 명칭은 1896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니 아마도 화기를 그 이
후에 작성하거나 수정한 것 같다. 1885년에는 전북, 전남, 제주도가 모두 전라도였기 때문이다.
금어 우곡(雨谷)과 수산 근혜(守山謹惠) 등이 그림을 그렸고, 시주는 식성(湜惺) 등이 했으며,
어찌된 영문인지 제자리를 잃고 천하를 방황하다가 기원사에 흘러들어와 안착을 하였다.

◀  나이가 한참 어린 칠성도
독성도와 산신도에만 한참 눈이 가있다 보니
칠성도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  기원사 공양밥의 위엄

열심히 경내를 둘러보니 다시 시장기가 엄습한다. 부지런히 일을 마쳤으니 공양 1그릇 들고 가
야 되겠지. 하여 이곳의 인심도 확인할 겸, 요사 공양간을 찾았다. 시간이 15시가 넘었지만 밥
은 아직 제공되고 있었다.
밥그릇에는 갖은 나물이 버무려져 있었는데, 밥주걱이 부러지도록 밥을 담고 고추장을 푼 다음
오뎅국이 든 그릇을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절에서 차려준 공양 자리는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자리가 여의치 않았으나 비구니의 배려로 요사 1층에 들어가 다시금 즐거운 공양
시간을 가진다.

이곳 공양밥도 연화사와 마찬가지로 비빔밥이다. 밥과 콩나물, 무생채, 고사리 등 온갖 나물에
고추장을 넣어 빨갛게 해먹으면서 되는데, 특이하게 무와 오뎅, 미역이 든 오뎅국도 제공해 주
었다. 그렇데 공양을 마치고 그릇을 반납하니 뜨락에서 음료수와 솜사탕, 얼음 슬러시를 제공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슬러시 1컵 받아 먹으며 후식까지 채웠다.
이렇게 기원사의 훈훈한 인심을 체험하고 잠시나마 정든 그곳을 뒤로 한 채, 유독 짧아보이는
초파일의 낮을 원망하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콩 볶듯 길을 움직였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 월계동 기원사 찾아가기 (2017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광운대역(1,2번 출구)에서 광운대 방면으로 가면 월계3거리이다. 3거리를 건너
  서 광운대 쪽으로 직진하면 기원사를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나온다. 그 이정표를 따라 들어
  가다가 광운로17길로 진입하여 직진하면 그 길의 끝에 기원사가 있다. 단 길이 조금 복잡해
  초행인 경우 햇갈릴 수 있으니 감이 잡히지 않으면 주민들에게 문의한다.
* 서울시내버스 261, 1017, 1137, 1140번 시내버스를 타고 월계3거리 하차, 도보 6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월계1동 392-106 (광운로17길 48-47, ☎ 02-918-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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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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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가급적 컴퓨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 바람)
* 공개일 - 2017년 5월 4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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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산사 나들이, 대구 팔공산 파계사 (파계사계곡, 성전암)

 


' 봄맞이 산사 나들이, 대구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

▲  파계사 원통전

* 스마트폰으로 보실 경우 꼭 PC버전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컴퓨터 모니터나 노트북으로 보시기를 권함)



봄이 천하를 파릇파릇 물들이던 4월 한복판에 그리운 이들을 보고자 부산으로 길을 떠났다.
부산(釜山)으로 가면서 중간에 대구(大邱)에 들렸는데, 어디를 갈까 궁리를 하다가 팔공산
파계사를 찾기로 했다. 이곳은 이미 13년 전에 가본 곳이지만 기억도 흐릿하고, 그때 보는
것과 지금 보는 것도 확연히 틀리며, 그 당시 안가봤던 파계사의 뒷쪽 부분(성전암과 현응
대사 부도)도 살펴볼 겸 해서 그곳으로 길을 잡았다.

대구역 정류장에서 대구시내버스 101번을 타고 북구청, 복현5거리, 불로동, 지묘동을 차례
대로 지나 거의 1시간 만에 파계사 종점에 도착했다. (대구역 맞은 편에서 101-1번을 타도
됨)

파계사 종점에서 파계사로 인도하는 파계로 주변에는 파계사 지구가 형성되어 편의점과 온
갖 식당, 찻집, 까페, 숙박업소 등이 무리를 지어 앉아 속인(俗人)을 유혹한다. 허나 유혹
의 정도가 적어서 별무리 없이 파계사지구를 통과했다. 숲과 나무에는 녹색의 기운이 점차
강해지고 벚꽃을 비롯하여 개나리, 목련 등이 수줍게 꽃망울을 터트리며 봄의 분위기를 한
층 드높인다.



♠  파계사 가는 길 (느티나무, 하마비)

▲  현응대사 나무라 불리는 느티나무 - 대구 보호수 2-6호

파계사 종점에서 8분 정도 오르면 지긋한 연세의 느티나무가 마중을 한다. 그는 약 250년 정도
묵었는데, 높이 15m, 둘레 4.1m에 이르며, 봄이 천하를 해방시켰건만 아직 잎도 피우지 못하고
겨울의 망령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믿거나 말거나 전설에 따르면 성전암에 머물던 현응대사가 속세로 외출하여 밤에 돌아올 때 그
를 모시는 호랑이가 여기까지 내려와 그를 기다렸다가 성전암까지 태워주었다고 한다. 아마도
일종의 심야 셔틀 노릇을 한 모양이다. 그래서 '범의 정자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하여 대구시
에서 그 전설을 바탕으로 이 나무에게 '현응대사의 나무'란 이름을 지어주어 졸지에 이름이 2
개가 되었다. 허나 속세에서 무슨 이름을 지어주든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절과 산을 찾는 중
생에게 잠깐의 쉼터와 그늘을 제공하는 소중한 존재로 늘 그 자리를 지킨다.

현응대사 느티나무에서 5분 정도 오르면 별로 달갑지 않은 매표소가 중생과 차량을 멈춰 세우며
입장료를 받고 있다. 예전에는 입장료가 없었는데, 꼭 그런 미운 것만 도입하여 돈을 받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2012년 1월부터 차량들에게도 주차비를 물린다며 관련 현수막을 큼지막하게 걸
어놓아 적지 않게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매표소에 이르니 직원이 입장료를 내라고 그런다. 그래서 대학생 할인은 안되냐고 떠보니 인상
을 찌푸리며 그딴 것은 안된다고 한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발길을 되돌리기도 그렇고 나에게
는 딱히 선택권이 없는지라 동전을 다 털어서 1,5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유료(有料)의 땅으
로 들어선다.


▲  매표소 옆에 자라난 거대한 돌탑

파계사와 팔공산을 들락거리던 중생들이 얹힌 자연석이 모이고 모여 저렇게 장대한 돌탑으로 성
장했다. 산악신앙(山岳信仰)의 산물로 이렇게까지 커다란 돌탑은 처음 본다. 중생들의 소망을
양분 삼아 오랜 세월을 두고 다져진 돌탑으로 그의 건강을 위해 주위를 난간으로 둘러 사람들의
출입을 막는다.


▲  슬슬 깨어나고 있는 파계사 계곡
나의 무거운 번뇌를 계곡에 내던지며 일주문을 들어선다. 번뇌가 멀리멀리 흘러가길
바랬건만 흘러가기는 커녕 계곡 옆에서 나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  파계사 일주문(一柱門)

파계사 계곡을 가르는 다리를 건너면 파계사의 정문인 일주문이 나온다. 문 옆에는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2차선 도로가 뚫려있어 굳이 문을 지날 필요는 없겠으나, 절에 왔다면 일
주문은 꼭 지나가주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싶다.

일주문을 지나면 경사가 다소 각박해져 숨이 턱까지 차게 만드는데, 해탈의 세계로 가는 속세의
마지막 고비란 심정으로 길을 임하면 길이 좀 짧게 느껴질 것이다.


▲  계곡물을 모아둔 파계지(把溪池)

일주문을 지나 8분 정도 오르면 둑을 만들어 계곡물을 집합시킨 파계지가 나온다. 파계사 부근
에서 발원하여 큰 세상을 향해 흐르던 계곡물이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정든 고향을 등지고
금호강(琴湖江)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호수 주변은 상수원 보호를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며, 아직 초라한 몰골의 나무들은 봄의 도래에 기뻐하며 호수에 비친 자신의 매무새를 다듬
느라 여념이 없다.

파계지를 지나면 파계사가 모습을 보이면서 길이 2갈래로 갈리는데, 왼쪽 길은 성전암과 대비암
으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 길은 바로 파계사 주차장인데, 예전에는 연못이 있었다. 그 주차장을
지나면 경내로 이어지며, 주차장 한쪽에 있는 관광안내소 옆 길을 오르면 석축(石築) 위에 둥지
를 튼 비석과 부도(浮屠) 형제를 만나게 된다.


▲  부도와 비석들 (제일 오른쪽이 하마비)

부도와 비석 형제는 모두 8기(부도 3, 비석 5)로 조금은 오래된 조그만 부도 2기가 가운데에 있
으며, 하마비 옆 가장자리에는 근래에 지어진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와 비석이 있다.
조그만 부도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에 자리한 비석은 파계사의 장대한 역사를 담은 사적비(事蹟
碑)로 1936년 5월에 세워졌으며,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춘 당당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는 특이하게도 조그만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어 눈길을 끈다.

하마비는 하마 서식지가 아닌 궁궐과 지체 높은 이의 사당, 향교, 관아, 왕릉, 귀족의 무덤 앞
에 세우는 비석으로 80cm 높이의 비석 피부에 '대소인개하마비(大小人皆下馬碑)' 즉 무조건 말
에서 내려 걸어가라는 7자의 글씨가 쓰여 있다. 파계사에 이토록 지엄한 하마비가 있게 된 것은
경내에 있는 기영각이 제왕과 왕실의 안녕을 비는 원당(願堂)이기 때문이다. 이는 현응대사가
양반과 유생의 횡포와 해꼬지로부터 절을 지키고자 숙종 임금에게 왕실의 원당을 설치해줄 것을
요청하여 지어진 것이다. 아무리 절을 깔보는 양반이라고 해도 왕실의 원당이 있는 절까지는 감
히 해꼬지를 할 수 없다.


▲  측면에서 본 부도와 비석들 (부도 3기, 비석 5기)



♠  파계사 입문 (진동루 주변)

▲  파계사 진동루(鎭洞樓)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10호

부도와 하마비를 둘러보고 경내로 향하면 경내의 중심을 가리고 선 진동루를 만나게 된다. 높은
축대 위에 문어발보다 많은 다리를 딛으며 위엄을 뽐내는 2층 규모의 진동루는 속세를 향해 넓
직한 계단을 늘어뜨렸는데, 그 계단을 올라 진동루의 아랫도리를 지나면 원통전이 떠오르듯 모
습을 비춘다. (진동루의 양 옆구리로도 경내 진입이 가능함)

이 건물은 1715년(숙종 41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2층 누각으로
1층 가운데 칸에 경내로 인도하는 통로를 냈고, 우측 칸에는 옛날에 쓰던 거대한 목조(木槽)가
누워있다. 그리고 2층은 법회나 행사 장소로 쓰인 일종의 강당(講堂)으로 우물마루로 천정을 꾸
며 조선 중/후기 양식을 잘 보여준다.

파계사란 절 이름은 파계승(破戒僧)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절 좌우 계곡의 물줄기가 9갈래
나 되어 그 물이 흩어지지 않게 하고 지기(地氣)가 흘러나가는 것을 막고자 계곡을 잡는다는 뜻
의 파계(把溪)로 이름을 지은 것이다. 허나 그 이름으로도 이곳의 기운을 제압하기가 벅찬지 그
기를 마저 잡는다는 의미로 이 누각에 진동루란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  진동루 1층에 있는 목조(木槽, 구유)

진동루 1층 우측 공간에는 커다란 목조(구유)가 누워있다. 얼핏 보면 말이나 돼지가 밥을 먹을
때 쓰는 통으로 오인 할 수 있다. 허나 이것은 승려와 신도들의 밥통으로 부엌에서 지은 밥을
이 통에 담아 공양을 하게 했으며, 수백 명의 밥을 담을 수 있는 크기로 구유 가운데 바닥에는
통을 씻을 수 있도록 원공이 뚫려있다.
파계사가 잘나갔던 조선 후기에 절찬리에 쓰였던 통이지만 이제는 현역에서 강제로 물러나 밥풀
대신 먼지만 가득하며, 숟가락과 주걱이 수없이 드나들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영조(英祖) 임금 나무'라 불리는 느티나무

진동루 앞에는 250년 정도 묵은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다정하게 솟아나 있다. 이 나무는 영
조 임금 나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들으면 진짜 영조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나무로
보일 수 있다. 허나 영조가 파계사에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이곳까지 내려
온 적은 없다. 단순히 경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나무를 골라 '영조임금나무'란 이름을 붙여
이곳의 명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영조하고도 전혀 관련이 없는 나무에게 그런 이름을 무턱대고 주었으니 그도 좀 어이가
없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잠시 파계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팔공산의 주요 사찰인 파계사의 역사
대구의 듬직한 진산(鎭山)이자 대구, 경북 지역의 불교 성지(聖地)로 꼽히는 팔공산(八公山)에
는 동화사(桐華寺)와 북지장사(北地藏寺), 부인사(符人寺), 갓바위(선본사), 파계사, 제2석굴암,
파계사, 송림사(松林寺), 염불암 등 크고 작은 오래된 절들 가득 포진해 있다. 그중에서 동화사
와 갓바위, 제2석굴암의 명성이 단연 갑(甲)이지만 파계사도 그들 못지 않은 고찰로 804년(신라
애장왕 5년)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기록이나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며, 창건 이후 17세기까지 뚜렷한 사적(事
績)을 남기지 못해 창건 시기에 대한 의구심을 가득 돋군다. 절을 알리는 첫 기록은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며,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은 관음전에 봉안
된 건칠관음보살좌상으로 조선 초 이르면 고려 후기에 조성되었다. 그런 것을 보면 빨라도 고려
때 조촐하게 문을 연 것을 인근 동화사 내력에 등장하는 심지왕사를 앞세워 창건 시기를 부풀린
것이 아닐까 싶다.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된 것을 1605년에 계관(戒寬)이 중창했다고 하며, 1695년에 현응대사(玄
應大師)가 3번째 중창을 했다. 현응은 숙종(肅宗)과도 인연이 있는 인물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온다.

▲  2층 규모의 범종각

▲  주지실과 내원(內院)

현응은 성전암 부근 석굴에서 불도를 닦고 있었다. 그는 나라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과 절
과 승려에 물리는 막대한 부역(負役)과 조세, 그리고 나날이 심해지는 유생들의 횡포 등, 절망
적인 불교의 현실에 너무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를 탄원하고자 서울로 올라갔다. 조선시대에는
승려의 서울 도성(都城)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는지라 짧게 기른 머리로 솔잎 상투를 틀고
속세의 옷을 갖추어 도성 안으로 잠입했다.

그는 3년 동안 주막에서 일을 하거나 한강물을 날라 민가에 날라주면서 탄원할 기회를 노렸으나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전화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여 결국 쿨
하게 포기하고 남대문 부근 봉놋방에서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런데 바로 이날 밤 숙종은 남대문 부근에서 청룡과 황룡이 요란을 부리며 승천하는 꿈을 꾸었
다. 꿈이 하도 기이하여 그곳에 뭔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신하를 보내 살펴보니 현응이 행장을
꾸리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현응의 법명은 용피(龍被)였다. <혹은 용파(龍波)>

왕이 보낸 신하의 손에 이끌려 궁궐로 들어간 현응은 드디어 왕을 알현했다. 왕이 서울에 온 이
유를 묻자 그는 현재 불교의 힘든 현실을 이야기하며 탄압을 줄여줄 것을 건의했다. 그 말에 고
개를 끄덕인 숙종은
'너의 탄원을 흔쾌히 들어주겠다. 허나 나도 부탁이 있다. 내가 아직 왕자가 없어서 그러니 한
양 100리 이내에 적당한 곳에서 숙빈(淑嬪) 최씨의 잉태를 빌어줄 수 있겠는가?'

왕의 난이도가 높은 부탁에 현응은 다소 난감했지만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꺼히 해보겠
다고 답을 올렸다. 그리고 친분이 있던 승려 농산(聾山)을 보러 북한산 금선사(金仙寺)를 찾았
다. (☞ 북한산 금선사글 보러가기)

농산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현응은 수락산(水落山) 내원암(內院庵)에서, 농산은 금선사에
서 각각 100일 기도를 올렸다. 70일이 막 지났을 때 현응은 선정(禪定)에 들어 이 땅의 백성 가
운데 다음 세상에서 제왕의 지위에 오를 만한 인물을 찾았다. 허나 적당한 인물을 찾지 못해 천
상 자신 또는 농산이 죽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래야 그 혼이 숙빈의 몸에 들어가 금수저의 진
정한 갑(甲)인 왕자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응은 서울에 온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가 없어 농산에게 편지를 보내
왕자로 다시 태어날 것을 청했다. 이에 농산은
'내가 나라의 위축(爲祝) 기도를 맡은 것으로 인(因)을 삼았는데,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결과가
벌써 돌아왔구려. 50년 동안 망건(網巾)을 쓰게 되었다니~!'
답을 하고 100일 기도를 마치고 죽
었다. 그리고 그날 밤 농산의 혼은 숙종과 숙빈의 꿈에 나타나 현몽했고, 이듬해 1694년에 왕자
로 다시 태어나니 그가 곧 영조가 되는
연잉군(延礽君)이었다.
 
숙종은 고대하던 왕자가 태어나자 기쁜 나머지 용피(현응)에게 현응(玄應)이란 이름을 내리고,
파계사를 중심으로 사방 40리에서 징수하는 세금을 파계사에서 거두도록 했다. 허나 현응은 이
를 거절하고 '절에 선대(先代) 왕의 위패를 모시고 싶습니다. 부디 윤허해 주십시오~~' 청했다.
이에 숙종은 흔쾌히 윤허하고 기영각을 지어 선대왕의 위패를 봉안했다. 이로써 양반들의 해꼬
지를 막을 수 있었으며, 경내 앞에 하마비를 세워 양반들을 살살 기게 만들었다.

▲  응향각(凝香閣)

▲  산령각

여기까지가 현응과 숙종, 영조에 얽힌 설화이다. 허나 설화의 내용과 달리 숙종은 당시 장희빈(
張禧嬪)을 통해 나중에 경종(景宗)이 되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니 왕자가 없어 징징거렸다는 부
분은 맞지가 않는다. 또한 숙빈최씨도 잉태를 위해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숙종과 숙빈과
의 처음 만남에서 일을 치룬 상태였다. (장희빈이 숙빈의 임신에 뚜껑이 폭발해 매질하여 죽이
려는 것을 숙종이 간신히 구했음)
그리고 농산이 자신의 육신을 버리고 숙빈의 몸에 들어가 왕자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이런 전설
은 북한산 금선사 전설에도 거의 똑같이 전해온다. 여기서는 파계사 승려인 용파가 서울로 올라
와 정조(正祖)에게 불교의 폐단을 시정해 줄 것을 건의했고, 이에 정조는 그것을 들어줄 터이니
왕자의 탄생을 기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부탁을 받은 용파는 금선사를 찾아가 농산과 300일 기도를 올렸는데, 왕자로 태어날 이는 농산
밖에 없음을 알고 농산에게 왕자로 태어날 것을 청했다. 이에 농산은 금선사 목정굴에서 기도를
마치고 죽었고, 그 혼이 정조의 후궁인 수빈(綏嬪) 박씨의 몸에 들어가 왕자로 태어났다고 한다.
금선사의 전설과는 시절과 기도를 올린 날짜 수만 다르지 완전 똑같다. 아마도 파계사의 전설을
금선사가 그대로 모방한 듯 싶으며, 농산이 죽어 정말 왕자로 태어났는지는 그야말로 믿거나 말
거나이지만 이런 전설을 통해 왕실과 관련이 있는 절임을 강조하려는 것 같다.
금선사는 정조 때 왕자의 탄생을 기원하던 곳으로 왕실 원찰의 하나였으며, 파계사 역시 현응대
사를 통해 왕실과 인연이 닿아 숙종과 영조의 안녕을 비는 원찰이 된 것이다. 그걸 마치 농산의
혼이 들어가 영조로 태어난 것처럼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숙종의 명으로 만든 기영각에는 선조(宣祖)와 덕종(德宗, 세조의 아들로 추존된 왕), 숙종, 영
조의 위패를 봉안했으며, 1979년 원통전 건칠관음보살좌상에 도금을 입힐 때 불상에서 영조의
도포와 1740년 9월 영조의 지원으로 탱화를 만들고 불상과 나한을 중수했다는 내용의 발원문(發
願文)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성전암에는 영조가 11세에 썼다는 자응전(慈應殿) 편액이 있어
영조가 어린 시절부터 이곳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음은 물론 이들이 영조를 위한 절이었음을 보
여준다.

숙종 이후 여러 차례 건물을 수리한 것 외에는 딱히 별다른 일은 없으며, 계속 몸집을 불려나가
지금은 법당(法堂)인 원통전을 중심으로 설선당, 적묵당, 기영각, 산령각, 내원, 응향각, 진동
루, 극락전, 설법전, 지장전 등 약 20여 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지장전과 극락전은 경내에
서 좀 떨어져 있음)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건칠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 영산회상도, 원통전, 영조대
왕의 도포(중요민속문화재 220호)를 비롯해 설선당과 산령각, 적묵당, 진동루, 기영각, 왕실원
당 관련 고문서 일괄(대구 지방유형문화재 74호), 소장 책판 일괄(대구 지방문화재자료 54호)
등 10여 점의 지방문화재가 있다. 그밖에 숙종이 하사한 병풍 2개와 구슬 2개, 석등, 하마비,
현응대사 부도를 위시한 조선 중기 부도 3기와 탑비, 영조임금나무가 있으며, 성전암과 대비암
등의 부속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번뇌도 쫓아오다가 떡실신할 정도로 팔공산 깊은 산자락 500m 고지에 둥지를 틀고 있으며, 속세
하고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고, 숲이 울창하고 맑은 계곡이 절 양쪽으로 흐르고 있어 공기도
청정하다. 또한 공양밥도 맛있기로 유명해 점심시간에 지나간다면 공양 1끼 하고 가길 권한다.
다만 입장료를 적지 않은 가격으로 징수하는 것이 이곳의 옥의 티이다.

파계사 종점에서 파계사까지는 넉넉잡아 20분 정도 걸리며, 파계재까지 1시간 30분, 성전암까지
50분 정도 잡으면 된다.

※ 팔공산 파계사 찾아가기 (2016년 4월 기준)
* 대구역 건너 정류장, 동대구역 북쪽 지하도, 큰고개역(2호선, 3번 출구), 아양교역(2호선, 2
  번 출구)에서 대구시내버스 101-1번을 타고 파계사 종점 하차
* 대구역앞, 옛 경북도청 건너, 복현5거리에서 대구시내버스 101번 이용
* 불로전통시장, 파군재3거리에서 101, 101-1번 시내버스 이용
* 4월부터 11월까지 주말마다 팔공3번 시내버스가 40~60분 간격으로 다닌다. 이 노선은 칠곡경
  북대병원에서 동명, 송림사, 파계사, 부인사, 수태골, 동화사를 거쳐 갓바위까지 운행한다.
* 승용차편 (경내까지 진입 가능)
① 대구시내 → 서변동 / 불로동 → 지묘동(파계교교차로) → 파계로 직진 → 파계3거리 직진
   → 파계사 매표소 → 파계사

★ 파계사 관람정보 (2016년 4월 기준)
* 관람비 : 어른 1,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
* 주차비 : 승용차 2,000원 / 대형차 5,000원
* 관람/출입시간 : 일출부터 일몰시까지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7 (파계로 741 ☎ 053-984-4550)
* 파계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원통전 수미단(대구 지방유형문화재 73호)과 건칠관음보살좌상



♠  파계사 둘러보기

▲  파계사 설선당(設禪堂)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7호

진동루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3줄로 이루어진 계단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비로
소 경내의 중심인 원통전 앞이다.
원통전 뜨락을 중심으로 원통전은 진동루와 마주보고 있으며, 뜨락 좌우에는 설선당, 적묵당이
얼굴을 마주한다. 그리고 법당 앞에는 흔히 있는 석탑(石塔)이 없는데, 탑을 두기에는 뜨락이
좀 좁긴 하지만 파계사에는 석탑 자체가 없다. 파계사의 지형이 돌을 올리면 깨지는 계란형 지
형이라 그런가..? 아니면 일부로 두지 않은 것일까?

설선당은 1623년에 계관이 지은 것으로 1646년과 1725년, 1762년에 각각 중건을 했고, 1922년과
1973년에 보수 공사를 벌였다. 정면 7칸, 측면 7칸의 'ㄱ'자형 건물로 교육 및 참선의 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요사(寮舍)처럼 툇마루도 갖추고 있어 잠시 두 다리를 쉬었다 가기에 좋다.


▲  파계사 적묵당(寂默堂)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9호

설선당을 마주보고 있는 적묵당은 절이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804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1620년
에 중건을 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없으며, 1695년과 1920년에 중건을 하고 1976년에 번와 공
사를 벌였다.
정면 6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설선당과 마찬가지로 'ㄱ'자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정
확히는 'Γ' 모습이다. 그러니까 설선당과 적묵당이 각각 'ㄱ, Γ' 구조가 된다. 설선당과 달리
단청이나 색이 입혀지지 않은 수수한 모습으로 참선 및 숙소로 쓰인다.


▲  파계사 원통전(圓通殿) - 보물 1850호

진동루가 있는 남쪽을 굽어보고 선 원통전은 파계사의 중심 건물인 법당이다. 관음보살을 봉안
한 건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05년에 계관이 중건하고, 1695년에 현응이 수리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석축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깔고 둥근 기둥을 올렸으며,
불단은 영천 백흥암(百興庵) 극락전의 수미단(須彌壇)과 비슷한 형태로 화려함을 선사한다. 그
리고 불단 위에는 보개(寶蓋)를 씌웠다. 계단 양쪽에는 고된 세월에 지친 키 작은 당간지주(幢
竿支柱) 2쌍과 근래에 심은 뽀얀 피부의 석등 1쌍이 원통전 주변을 수식한다.


▲  원통전 수미단(須彌壇)에 봉안된 건칠(乾漆)관음보살좌상 - 보물 992호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 보물 1214호

원통전 수미단에는 이 건물의 주인인 관음보살좌상이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화유산 도난
이 다반사처럼 일어나는 이 땅의 안타까운 현실을 고려해 그에게 방탄막같은 유리상자를 굴레처
럼 씌웠는데, 철창 안에 갇힌 새처럼 답답하긴 하겠지만 그의 신변을 위해서는 별 도리가 없다.

이 불상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1979년 불상에서 발견된 복장발원문(腹藏發願
文)에는 1447년(세종 29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르면 고려 후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현재 파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높이가 108.1cm에 이르며, 머리에는 꽃모양을 붙인
수려한 보관(寶冠)이 씌워져 있다.

그의 작은 얼굴은 미소가 살짝 드리워져 편안한 인상을 풍기는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
러져 선의 미를 선사하며, 두 눈은 살짝 감겨져 명상에 잠긴 듯 보인다. 코는 작고 끝이 좀 두
툼하며, 다물어진 조그만 입에는 엷게 미소가 담겨져 중생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목에는 두툼
하게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두 귀는 다른 불상에 비해 좀 짧다.
오른손은 어깨 쪽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있으며,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댈 듯이 하여 손바닥을 위로 했다. 옷깃이 양쪽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 오른발 끝을
덮은 상현좌(裳懸坐)를 하고 있으며, 가슴 윗부분은 시원하게 트여 있다. 가슴까지 올라온 상의
(裳衣, 치마)를 주름잡아 끈으로 묶은 것과 손의 모양, 두터운 옷 등은 고려 후기 불상 양식에
서 많이 보이고 있으며, 영덕 장육사(莊陸寺)에 있는 보살상과 비슷한 모습이다.

관음보살 뒤에 후광(後光)처럼 자리한 큰 그림은 부처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는 장면을 비단에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길이 3.4m, 폭 2.54m에 이르며 1707년에 숙종을 비롯
한 왕실의 지원으로 제작된 것으로 채색도 화려하고 색감도 매우 좋다. 18세기를 대표하는 불화
로 다른 영산회상도와 달리 부처의 광배는 신광(身光)만 나와있고, 부처의 옷에 전(田) 비슷한
무늬가 없으며, 부처의 오른쪽 발목에 꽃잎 장식이 없는 등 3가지의 유별난 차별화를 두었다.

관음보살이 앉아있는 수미단은 상,중,하대를 갖춘 조선 후기 일반적인 수미단으로 수호와 공양
을 상징하는 문양과 불교적 색채를 띤 길상문(吉祥紋)이 조각되어 있다. 원통전이 중건된 1605
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영천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과 비슷한 모습이다.


▲  원통전 내부 우측 부분 -
절과 부처를 지키는 호법신(護法神)들이 꾸역꾸역 담긴 신중탱(神衆幀)과
민화(民畵)처럼 그려진 선명한 색채의 그림 2점이 걸려있다.

▲  원통전 내부 좌측 부분
원통전 좌측에 걸린 큰 그림은 삼장탱화로 천장(天藏), 지장(地藏), 지지(地指)보살을
담았다. 삼장탱화는 이 땅에만 있는 불화로 하늘과 땅, 지하를 다스리는
보살을 설정하고 그린 것인데, 18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  파계사 산령각(山靈閣)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8호

원통전 우측 석축 위에는 달랑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산령각이 자리해 있다. 그 모습이 너무
나 단촐하여 두 눈에 쏙 넣어 보기에도 부담이 없다.
원통전보다 1단계 높은 곳에 자리한 산령각은 산신(山神)을 봉안한 건물로 산신각의 다른 이름
이다. 이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겯처마의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건물 천
정은 우물천정으로 되어있고, 내/외부에는 금단청(錦丹靑)을 입혀 올렸다.


▲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山神幀)

산령각에 봉안된 산신탱에는 붉은 옷을 입은 나이 지긋한 산신을 중심으로 그의 시중을 드는 동
자(童子) 2명이 서 있으며,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꼬랑지를 살랑살랑 흔들며 고양이처럼 재
롱을 부린다. 산신 주변에는 학과 소나무, 구름 등이 그려져 신선 세계의 분위기를 그려낸다.


▲  파계사 기영각(祈永閣)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11호

산령각 우측에 자리한 기영각은 1696년에 현응대사가 왕실의 원당으로 세웠다. 영조 때는 매일
마다 그의 안녕을 빌었고 (그래서 영조가 오래 산 것은 아닐까?) 정조 때는 영조를 위해 기도한
건물이란 뜻에서 기영각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영조 외에도 숙종, 선조, 덕종의 위패를 봉
안해 명실상부한 왕실의 원당이 되면서, 절에 해꼬지를 일삼던 양반과 유생들도 파계사 앞에서
는 살살 기었다고 한다.
정조가 내린 어필(御筆)을 보관하여 어필각(御筆閣)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그 어필은 전하지 않
으며, 1910년 이후 제왕의 위패가 모두 서울로 옮겨지면서 건물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 아미타
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한 공간이 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직지붕 건물로 늘씬한 처마선을 자랑하며, 덤벙초석 위에 원주를 세우
고, 기둥 위에 주두(柱頭)의 장식이 번잡하여 조선 후기 공포(空包) 양식을 잘 보여준다. 가구
는 5량가로 우물 천정에 가려져 있다.


▲  기영각 불단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

제왕들의 위패의 빈자리를 대신 채워주며 기영각의 주인이 된 아미타3존불은 아미타불을 중심으
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좌우에 앉아있다. 머리에 보관을 쓴 이가 관음보살이고, 초록색 머리
를 한 이가 지장보살(地藏菩薩)로 그들의 신변을 위해 유리를 씌웠다. 그들 뒤에는 붉은 종이에
금색으로 선묘(線描)된 약사후불탱화가 붉은 빛을 드러내며 아미타불의 뒤를 받쳐준다. 이런 그
림을 유식한 말로 홍지금니화(紅紙金泥畵)라고 한다.

▲  홍지금니화로 그려진 붉은 불화들

▲  삼세불(三世佛)이 그려진 불화와 독성탱
삼세불은 석가불과 약사불, 아미타불이다.


▲  석등(石燈)과 순백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목련

원통전과 응향각 사이에는 경내의 유일한 석물(石物)이라 할 수 있는 석등이 서 있다. 이 석등
은 높이가 2m로 숙종 때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하대석(下臺石)은 사라졌지만 8각 기둥과 앙련
(仰蓮)이 새겨진 상대석(上臺石), 불을 밝히던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屋蓋石)이 진하게 남아
있다. 기영각, 산령각과 견줄 정도로 오래된 존재이지만 아직까진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  설법전(說法殿)에 봉안된 석가불

파계사 경내를 동쪽에서 가리고 선 3층짜리 큰 건물이 있다. 건물 3층은 설법전으로 쓰이고 있
는데, 연병장처럼 무지 넓어 꾸역꾸역 넣으면 능히 2,000명도 가능해 보인다. 교육과 행사 공간
으로 북쪽 끝에 석가불이 봉안된 불단이 있으며, 내부는 은근히 시원하여 에어컨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건물 2층은 밥을 먹는 공양간으로 점심을 먹고자 들어갔더니 식사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 청
소를 하고 나오는 아줌마 신도에게 물으니 공양시간이 끝났다고 그런다. 점심시간은 1시까지인
데 시간은 이미 1시 반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 이런 ~~!' 한숨을 몰아 쉬니 아줌마가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그래서 서울에서
왔다고 답을 하니 멀리서 왔다면서 밥과 반찬이 남아있을 것이니 잠시 기다리라고 그런다. 그러
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뒷정리를 하고 있는 아줌마들에게 이야기를 하더니 같이 냉장고를 뒤적거
려 콩나물과 김치, 시금치, 박나물 등 다량의 반찬을 배식 장소로 가져온다. 밥통은 배식하는
곳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큰 그릇에 밥을 듬뿍 담아주고는 반찬통을 보이며, 먹을 만큼 가져가라고 그런다. 그
래서 양씬 담으니, 아줌마가 빙그레 웃으며 이 그릇에 배가 차겠냐면서 그보다 덩치가 큰 양은
냄비를 가져와 밥과 반찬을 죄다 담아서 준다. 물론 밥도 2주걱을 더 주었고 고추장과 참기름도
넉넉히 부어주었다.

그렇게 공양밥 1그릇을 마련하여 기분 좋게 점심 공양을 들었다. 밥과 나물을 비벼먹는 이 땅에
흔한 절집 비빔밥으로 밥에 나물을 가득 비벼 먹으니 정말 꿀맛이 따로 없다. 처음에는 양이 적
어 보였으나 먹고 나니 상상을 초월하게 양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열심히 숟가락질을
하니 밥은 서서히 줄어들어 이내 1톨의 밥알도 없이 아주 깨끗한 그릇이 되었다.
밥을 먹고나니 아줌마들이 물까지 1컵 따라준다. 절에 들어올 때 입장료 때문에 기분이 좀 그랬
으나 아줌마 신도들의 후한 인심에 감격하여 섭섭한 기분도 바로 풀어졌다. 거액의 입장료는 공
양밥으로 충분히 본전을 뽑은 셈이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서울에서 온 단체 관광객 6명이 공양
간을 찾았는데, 공양시간이 끝았음에도 공양밥을 제공하여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었다.

공양을 마치자 부엌에 들어가 그릇을 씻고 포만감의 행복을 느끼며 밖으로 나온다. 졸음이 그새
살짝 밀려와 한숨 자고 가라며 희롱을 걸면서 눈이 좀 흐려지긴 했으나 아직 갈 길이 아직인 관
계로 과감히 뿌리치고 성전암으로 길을 향했다.


▲  찻집 앞에서 바라본 진동루 주변 (진동루 앞 주차장과 영조임금나무)

▲  지장전(地藏殿)

▲  경내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극락전

파계사에서 성전암으로 가려면 주차장으로 내려가서 가는 길도 있지만 진동루 서쪽으로 난 길을
이용하는 것이 조금은 빠르다. 그 길목에는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
된 지장전과 납골당(納骨堂)을 겸한 극락전(極樂殿)이 자리해 있는데, 경내와는 조금 거리를 두
고 있는 파계사의 변두리로 극락전이 가장 외진 곳이다.



♠  대비암(大悲庵)과 현응대사부도, 험준한 곳에 묻힌 산중암자
성전암(聖殿庵)

▲  대비암 입구

파계사에서 성전암 방면으로 5분 정도 가면 대비암이란 암자가 나온다. 이곳은 2000년에 지어진
아주 따끈따끈한 절로 암자이긴 하지만 경내가 제법 넓으며, 법당인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비롯
하여 선방과 요사, 돌로 만든 관음보살상과 석가여래상이 있다.
선방은 정면 7칸, 측면 4칸에 이르는 큰 규모이며, 뜨락에는 금잔디가 곱게 입혀져 괜찮은 별장
에 들어선 기분이 든다.
대비암은 법등(法燈)이 매우 짧은 절이라 딱히 오래된 볼거리는 없으나, 절 동쪽 산자락에 현응
대사 부도를 비롯한 조선 중기 석종형(石鐘形) 부도가 있으니 꼭 둘러보기 바란다. 성전암으로
가는 산길에서도 진하게 바라보여 부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만 안다면 찾는 것은 무지 쉽다.


▲  대비암에서 가장 높은 곳에 대웅보전이 자리해 있다.

▲  광배를 등에 지고 선 관음보살상
왼손에 꽃을 들며 고운 누님의 모습을 취했다.

▲  조그만 바위에 감실을 파고 들어앉은
석가불좌상


▲  대비암 동쪽 산자락에 있는 비석과 부도
대비암을 일으킨 승려의 탑과 비석으로 근래에 지어진 탓에 피부가 매우 곱다
.

▲  현응대사 부도를 비롯한 부도군

대비암 동쪽 소나무 숲에는 솔내음을 누리고 선 석종형 부도 4기와 비석 1기가 있다. 고된 세월
의 때를 간직한 이들은 조선 중/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현응대사를 비롯해 파계사를 빛낸 승려들
이 고이 잠들어 있는데, 이중에서 제일 오래된 것은 1648년에 조성된 원의(圓義)의 탑이며, 그
다음이 1658년에 지어진 전명(傳明)의 탑, 그 다음이 1701년에 만들어진 현응대사의 탑이다. 허
나 나머지 1기는 주인을 모르겠다.
부도 가운데 현응대사만 유일하게 비석을 갖추고 있는데, 그 비신(碑身)에는 '선종 현응당대사
지고현(禪宗 玄應堂大士之高現)'이라 쓰여 있다. 그런데 큰 승려를 뜻하는 대사(大師) 대신 대
사(大士)로 쓰인 것이 특이하다. 아마도 옛 사람들이 낸 신선한 오타거나 그의 활약을 기리고자
선비, 관리를 뜻하는 '士'를 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비신 윗쪽 가장자리에는 '성상 즉위(聖上 卽位) 37년~~~'이라 쓰여 있어 부도의 나이를
알려주고 있는데, 청나라 연호 대신 성상 즉위라고 쓴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비신 뒤쪽에는 그
의 생애와 업적이 간추려져 적혀 있으나 마멸된 부분이 많다. 팔공산의 조그만 절을 왕실의 원
찰로 크게 일으킨 현응의 마지막 흔적들이지만 아직도 비지정문화재의 서러움 속에서 살고 있으
니 참 이유를 모르겠다. 다른 부도와의 형편성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 흔한 석종형부
도의 하나라서 그런 것일까?


▲  세월의 주름과 기미가 깃들여진 현응대사 탑비

▲  성전암으로 올라가는 길

대비암에서 성전암으로 가는 길은 인간의 고되고 부질없는 인생을 축소한 것처럼 험난하다. 처
음에는 경사가 완만하고 계곡도 옆에 흘러 쏠쏠하게 시원한 바람을 건네니 금방 가겠구나 싶지
만, 가면 갈수록 경사가 각박해져 다시 한번 숨을 차게 만든다.
차량도 힘들어 하는 그 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주차장이 나타나면서 길은 끝나고, 거의 60도 가
까이 이루어진 산자락에 펼쳐진 산길이 시작된다. 그 길이 얼마나 아슬아슬하던지 그야말로 기
겁을 하게 만들며 길도 가늘고 각박하다. 길을 오르다가 뒤를 돌아다보면 천길낭떠러지에서 있
는 기분처럼 두 눈이 놀라 어쩌지를 못할 것이다. 그만큼 길이 고되고 험준하다.
그 길을 10분 정도 타면 성전암이 마치 산속의 요새처럼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며, 절이 늘어뜨
린 계단을 오르면 소박한 모습의 일주문이 나타난다.


▲  성전암 일주문 - 하늘로 오르는 문 같다.

▲  성전암 경내와 현응선원 (커다란 기와집이 현응선원)

파계사에서 25분 정도 올라간 680m 고지에 조그만 암자 성전암이 자리해 있다. 경사면에 석축을
쌓고 터를 다진 이 절은 파계사의 부속암자로 영남 3대 선원도량의 하나로 명성을 날리던 곳이
다. 그래서 조선 후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이 다녀갔는데, 그 이름도 낯이 익은 성
철(性徹, 1912~1993)이 1955년부터 10년 동안 절문도 나서지 않고 동구불출(洞口不出)했던 곳으
로도 유명하다. 성철 외에도 만공, 해월, 서옹 등도 다녀가 이곳의 가치를 드높였다.

성전암의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딱히 전하는 것은 없으나 현응대사가 이곳에서 수행했다고 하며,
1695년에 중창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면 그때가 실질적인 창건 시기가 아닐까 싶다. 파계사와
더불어 영조의 탄생과 건강을 빌었던 곳으로 영조가 자신을 위해 기도를 해주는 현응을 위해 11
세에 현응전(玄應殿)이란 현판을 써서 이곳에 보냈는데, 그 편액이 아직도 현응선원에 걸려있다.
그리고 영조 때 조성된 특이한 모습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조선 후기에 제작된 현응의 영정
과 벽화가 보존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모두 친견하지 못했다.
현응이 일군 성전암은 1915년 보령(保寧)이 중건했고 1955년 성철이 머물면서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완전한 수도도량으로 만들어 영남 3대 선원도량의 하나로 키웠다. 허나 2007년 불의의 화
재로 현응선원이 불에 탔으며, 험한 지형에 공사 자재 운반도 쉽지 않아 간신히 공사를 진행하
여 2010년 3월 3일 낙성식을 가졌다. 이후 경내에서 주차장까지 일종의 모노레일을 만들어 물자
수송이 다소 수월해졌다.

절의 위치도 속세의 기운이 엄습하기 어려운 첩첩한 산중턱 가파른 곳에 매달린 듯 자리해 있고
번뇌도 오다가 졸도할 정도로 궁벽한 곳이라 참선의 공간으로는 아주 제격이다. 굳이 참선이 아
니더라도 속세에서 잠시 나란 존재를 지우고 싶을 때,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속세의
번뇌를 싹둑 정리하고 싶을 때 문을 두드려 안기고 싶은 산중암자이다. 제 아무리 천하의 번뇌
라도 이곳까지는 감히 오르기 힘들 것이다.

* 성전암 소재지 :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 1206 (파계로741 ☎ 053-982-3600)


▲  높은 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보는 성전암의 위엄

경내에는 현응선원과 관음전을 비롯해 약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현응선원 주위로 건물이 몰려
있다. 현응의 영정과 벽화, 불상, 현응전 현판을 빼고는 딱히 오래된 것은 없으며, 그나마 현응
선원 주변은 참선시간에는 참선 공간으로 전환되어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참선 시간은 새
벽 3~5시, 8~10시, 14~16시, 19~21시이며, 그때는 관음전과 종무소 주변에만 머물 수 있다.

▲  성전암의 중심 건물인 현응선원
내가 갔을 때는 오후 참선시간이었음 (15시)

▲  꽃창살이 아름다운 관음전(觀音殿)과
쉼터로 조성된 조그만 정자

▲  현응선원 뒤쪽에 있는 조그만 동굴
현응대사가 참선했던 동굴로 전해진다.

▲  물로 가득한 석조(石槽)
이런 척박한 산중턱에 어디서 저렇게
많은 물이 나오는 건지 신기하다.


▲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현역에서 물러난 맷돌
문명의 이기(利器)가 이곳에 오기 이전까지 쓰였던 맷돌
지금은 석조 주변에서 때아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  관음전에 봉안된 관음보살상

성전암에서 언제나 관람이 가능한 건물은 현응선원 서쪽에 있는 관음전이다. 경내에서 가장 하
늘과 가까운 건물로 문에 새겨진 꽃창살이 매우 아름다운데, 그 때문에 그런지 그 주변에는 꽃
이 없다. 아마도 꽃창살을 시샘해 다른 곳으로 가버린 모양이다.

관음전 불단에는 아주 조그만 관음보살이 가녀린 모습으로 서 있는데, 그가 서 있는 자리는 지
나치게 커서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불상이 자리를 커버할 정도로 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의 좌우에는 협시불 대신에 산신과 문수보살(文殊童子)로 보이는 작은 존재들이 그를 지키고
있으며, 그들 뒤에 관음탱화가 자리한다.


▲  성전암에서 바라본 천하
높은 곳에 자리해 있어 조망이 좋을 것이라 여기겠지만 산들이 첩첩히 시야를
막고 있어 보이는 범위는 저게 전부이다.

            ◀  성전암 5층석탑
경내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수수하게
생긴 5층석탑이 있다. 근래에 세워진 것으로 기
단(基壇)이나 탑신이 서로 비슷한 모습이라 지
식이 짧은 경우에는 6층탑으로 오인하기 쉽다.
탑 주변에는 잠시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쉼터가
닦여져 있으며, 여기서 보는 조망이 경내에서
보는 것보다는 조금은 괜찮다.

성전암에서 파계재를 가려면 이 탑을 거쳐서 가
면 되며, 탑 서쪽 나지막한 곳에 성전암에서 경
작하는 밭이 있다.

성전암은 하필이면 참선시간에 발을 들인 죄로 현응선원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니 마음 놓
고 다리를 부릴 수 있는 곳은 관음전과 종무소, 5층석탑 주변이 고작이다. 석조에서 팔공산이
베푼 물을 한 바가지 마시니 몸 속에 낀 온갖 체증이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정자에 앉아 불만에 잠긴 두 다리와 발을 쉬게 하면서 잠시 머물렀는데, 구름과 비슷한 위치에
있고보니 완전 수미산(須彌山)이나 신선의 세계에 입산한 기분이다. 기분 같아서는 탑 주변 쉼
터에 더 머물며 현응선원 내부를 꼭 보고 싶지만 시간이 나를 압박하면서 아쉽지만 성전암과 작
별을 고하며 혼란한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했다.
내려갈 때는 파계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내려가 파계사 종점에서 대구시내버스 101번을 타고 동
대구역으로 이동해 동대구고속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성전암을 겯드린 대구 파계사 봄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파계사의 점심 공
양과 보살 아줌마들의 후한 인심, 그리고 참선 도량의 품격을 지닌 성전암까지, 정말 배부른 대
구 나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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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와불상과 우담바라를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 의왕 청계산 청계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청계산 청계사(淸溪寺) '

▲  청계사 와불상


 


겨울 제국(帝國)의 차디찬 위엄이 잠시 느슨해진 2월 끝 무렵에 후배들과 의왕시에 자리한
청계사를 찾았다.
그곳은 예전에 2번 발걸음을 한 적이 있는데, 간만에 그를 찾은 이유는 별거 없다. 그곳에
그냥 마음이 갔기 때문이다.

오후 3시, 안양(安養)의 동쪽 요충지인 인덕원역에서 그들을 만나 분식집에서 만두와 여러
과자 등을 사들고 대기하고 있는 청계산행 의왕시 마을버스 10번에 몸을 담는다. 평일이라
등산 수요는 거의 없지만, 대신 청계지구 주민들로 조그만 마을버스는 만석의 기쁨을 누린
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청계사입구에 조성된 청계지구에서 승객을 모두 쏟아내고 우리만 태운
가뿐한 상태에서 청계산의 품으로 들어갔다. '과천~의왕간 고속화도로'의 밑도리를 지나니
아파트와 시가지 대신 산과 들녘이 전부인 농촌 풍경이 정겹게 펼쳐진다.
청계사천(淸溪寺川)을 따라 계속 들어가던 버스는 청계산 주차장에서 그만 두 바퀴를 멈춘
다. 그곳이 그들의 종점이었던 것. 그래서 여기서부터 별수 없이 걸어가야 되는데, 천천히
가도 20분이면 충분하다.


 

♠  청계사계곡 숲길

청계지구에서 청계사로 가는 길목에는 맛과 분위기를 내세운 식당과 찻집이 즐비하다. 절을 목
전에 둔 속세(俗世)의 마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허나 그날이 평일이라 몇몇 식당을 제외하면
대부분 장사를 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청계사 종점에서 7분 정도 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그곳을 경계로 더 이상 속세의 흔적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자연의 비율이 높았지만 여기서부터는 99% 자연 및 부처의 청정한 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또한 청계산에서 발원한 청계사계곡도 여기서 청계사천으로 간판을 바꾸며 속
세로 길을 재촉한다.
그 다리를 건너면 그동안 하나로 쭉 이어진 길(청계로)은 수레길과 숲길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청계사로는 이어진다. 빨리 가고 싶다면 잘 닦여진 수레길을 이용하면 되지만 4발 수레의
적지않은 눈칫밥과 고약한 매연 냄새를 감당해야 된다. 그러니 차라리 친환경적인 숲길로 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이 숲길은 통행 편의를 위해 나무로 길을 닦았는데, 늘씬하고 삼삼하게 솟은 나무들이 앞다투어
신선한 숲내음을 베푼다. 산바람이 아직은 차갑지만 청정하고 해맑은 기운이 담겨져 있어 바람
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오히려 심신(心身)이 맑아지는 기분. 게다가 숲길 옆에는 청계사계곡이
졸졸~♬ 흘러 그 나름대로 계곡의 바람을 선사하니 찰거머리같은 번뇌(煩惱)도 여기서만큼은 바
짝 긴장을 탄다. 

숲길 입구에는 의자가 여럿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서 속세에서 가져온 먹을거리를 섭취했다. 원
래 절 밑에서 먹으려고 했지만 다들 시장기가 높아 잠시 청계사를 잊고 여기서 자리를 펼쳤다.

▲  청계사계곡 숲길
겨울이라 실감이 덜해서 그렇지 봄이나 여름, 가을에는 정말 옆구리에 끼고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숲길이다.

▲  소리없이 봄을 잉태하고 있는 청계사계곡
눈과 얼음의 지배를 받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계곡, 허나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면 거추장스러운 얼음을 박차며 봄의 해방군을 맞이할 것이다.


숲길을 10분 정도 가면 다시 수레길과 만난다. 여기서부터 경사가 잠시 각박해지는데, 그길을 5
분 정도 오르면 청계사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을 지나면 첩첩한 청계산 산주름에 묻힌 청계사
의 바깥 부분이 모습을 드러낸다.


▲  주차장 밑에 자리한 청계사 표석
바위 피부에는 붉은 글씨로 '우담바라 핀 청계사'라 쓰여 있다.

▲  주차장 동쪽에 자리한 승탑과 비석의 보금자리

청계사 주차장 동쪽에는 승탑(僧塔, 부도)과 비석(碑石)의 보금자리가 있다. 이들은 원래 극락
보전 서쪽에 있던 것으로 밑 석축에는 사적비를 비롯한 비석 3기가 심어져 있고, 윗 석축에는
승려의 사리가 담긴 승탑과 승탑 주인의 생애가 담긴 검은 피부의 가로형 비석들이 널려 있다.
이중에서 가장 오래 숙성이 된 존재는 청계사의 내력을 담고 있는 사적비로 고려 후기에 청계사
를 크게 일으킨 조인규(趙仁規)의 11대손 조운
(趙橒)과 조신(趙新)이 1689년에 세웠다. 조운이
문장을 짓고 윤창적(尹昌績)이 글씨를 썼는데, 비석 피부에는 세월이 그어놓은 주름과 검은 때
가 여럿 있지만 아직은 글씨를 알아보는데 지장은 없다.
<청계
사 관련 자료에는 1341년에 세웠다는 조정숙공사당기비(趙貞淑公祠堂記碑)가 있다고 하나
확인하지는 못했음>


▲  아직 정정한 모습을 잃지 않은 청계사 사적비(事蹟碑)

적비와 승탑을 둘러보고 주차장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높은 계단을 오르면 경내 밑부분에 이른
다. 오를 때는 모르지만 계단이 조금 각박하니 내려갈 때는 각별히 주의하기 바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청계사의 내력을 잠시 더듬어보도록 하자.


 

♠  청계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고색의 절집, 와불과 우담바라를
간직한 청계산 청계사(淸溪寺)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호

청계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터를 닦은 청계사는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기록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 도리가 없으며, 조선 후기에 봉은사(奉恩寺)에서 엮은 봉은본말사지(奉恩
本末寺誌)에도 단순히 신라 때 창건되었다는 1줄 뿐이다. 다만 신라 후기나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등(石燈)과 승탑의 잔재가 있다고 하니 (확인은 못했음) 적어도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조금은 열어두고 있다.
그래도 뚜렷한 기록과 유물이 없음에도 원효대사(元曉大師)나 의상대사(義湘大師), 자장율사(慈
藏律師),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세웠다고 강력하게 우기는 상당수의 절보다는 좀 양심적이다.

청계사의 본격적인 기록은 고려 후기부터 등장한다. 고려가 몽골(원)의 그늘에 있던 충렬왕(忠
烈王) 시절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을 지낸 조인규(趙仁規, 1227~1308)가 많은 자금을 들여 청
계사를 중창하고 집안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음) 그리고 절 아랫
쪽에 별당(別堂)을 지어 잠시 머무는 등, 청계사를 특별히 옆구리에 끼었다.
이렇게 당대 실력자인 조인규(평양 조씨)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청계사는 오랜 세월 그
의 후손들의 지원에 힘입어 절을 꾸렸는데, 경내에 조인규의 영당(影堂)을 지어 그를 기렸으며,
1431년과 1448년에 영당을 중건했다고 전한다.

천하가 조선으로 바뀐 이후, 1407년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되면서 천태종(天台宗) 소속이 되었
으며, 1448년 경내에 있던 대장경(大藏經)이 인출되기도 했다. 연산군(燕山君)과 중종(中宗) 시
절에는 흥천사(興天寺)와 원각사(圓覺寺) 등 한양도성의 많은 사찰이 연산군 또는 유생에 의해
대거 박살이 나면서 봉은사를 대신해 선종(禪宗)의 본찰(중심 사찰)인 정법호지도량(正法護持道
場)이 되었다. 그래서 이때 잠시나마 조선 불교의 중심이 된다.
허나 그 영광도 잠시, 광해군(光海君) 시절에는 청계사 소속의 전답과 노비가 나라와 양반들에
게 대거 몰수당하거나 빼앗기는 비운을 겪었으며, 1689년 화재로 건물 대부분이 무너지자 성희
(性熙)가 평양조씨의 도움으로 절을 중건했다. (이때 사적비가 세워짐)

1701년에는 경내 제일의 보물인 동종이 조성되었으며, 정조가 왕세손(王世孫) 시절이던 1761년
친히 이곳을 찾아 원당(願堂)을 짓고, 밤나무 3,000주를 내려 원감(園監)을 두어 관리케 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정조는 1789년 경내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역인 현륭원(顯隆園)의 제각(
祭閣)을 지어 매년 2회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바로 그 해에 평양 조씨인 조심태(趙心泰)의 지
원으로 절을 중창했다.
1862년에는 괘불(掛佛)을 봉안했고, 1876년 3월 무심히 찾아온 화마(火魔)의 위엄 앞에 불전들
이 앞을 다투어 쓰러지자 1879년 주지 은곡(隱谷)이 중건을 벌였으나, 예전만큼은 못하여 간신
히 호흡이나 하는 지경이었다.

1900년 법당인 극락보전을 세웠고, 왜정 시절에는 봉은사의 말사(末寺)가 되었는데, 경허(鏡虛)
를 비롯한 만공(滿空), 월산(月山), 금오(金烏) 등 당대에 유명한 승려들이 주석하면서 선풍(仙
風)을 떨치기도 했다. 1955년 비구니인 아연(娥演)이 주지가 되면서 크게 중창을 벌이기 시작했
고, 1965년에는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변경되었다.

1999년에는 와불상을 조성해 경내에 새로운 볼거리를 이끌어냈고, 2000년 이후 주지 종상이 경
내를 대대적으로 손질하고 진입로를 정비해 접근성을 높였다. 그리고 2001년에 극락보전을 중수
했는데, 바로 전년 10월에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의 협시(夾侍)인 관음보살상 상호 왼쪽 눈썹 주
변에 불교에서 매우 신성시하는 꽃인 우담바라가 피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담바라는
아직도 관음보살상 눈썹 주변에 진을 치고 있으며, 20여 송이나 피었다고 한다. 나는 이들의 존
재를 몰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했지만 청계사에 갈 일이 있다면 그 꽃을 꼭 눈에 담기 바란다.
(우담바라가 풀잠자리 알이라는 이야기도 있음)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삼성각과 지장전, 서요사, 동요사, 동종각 등 10
동 남짓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동종을 비롯하여 지방문화재로 지
정된 신중도와 소장목판(所藏木板, 1622년, 1623년, 1831년에 만든 14종 466판,
경기도 지방유
형문화재 135호
)과 조정숙공사당기비(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76호) 등이 있으며, 그외에 사적
비와 극락보전,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 괘불 등이 앞을 다투며 고색의 향기를 더해준다. (소장
목판은 비공개이며, 괘불은 석가탄신일과 등의 행사일에만 잠깐 얼굴을 비침) 또한 청계사 전체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첩첩한 청계산의 산주름 속에 묻혀 산사의 향기도 매우 진하며, 서울이나 안양, 성남, 의왕 등
기라성 같은 도시와 가까이 있음에도 꽤 멀리 나온 듯한 기분을 누리게 한다. 속세에서 잠시 나
를 지우고 싶을 때 어디론가 가서 마음을 싹둑 정리하고 싶으나 멀리 가기가 어려울 때 무작정
찾아와 안기고 싶은 포근한 산사이다.
또한 이곳은 산세가 수려하고 삼삼한 숲에는 산새가 지저귀며, 청정한 계곡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경승지로 수도권 명소로도 명성이 높다. 또한 청계산으로 오르는 주요 기점의 하나이기도
하여, 이곳을 시작으로 응봉을 경유해 과천(果川) 문원동이나 포일2지구로 내려가거나, 청계산
정상을 거쳐 서울 원지동, 옛골 방면이나 양재동 화물터미널로 내려가도 된다.

※ 청계산 청계사 찾아가기 (2016년 2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2번 출구)에서 의왕시 마을버스 10, 10-1번(10~15분 간격)을 타고 청
  계산 주차장 종점에서 도보 20분. 18시 이후에는 청계산주차장까지 들어가지 않고 그 이전인
  상청계(청계산입구)에서 차를 돌린다, (상청계에서 청계사까지는 도보 30분)
* 분당이나 죽전, 수지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103번(분당 도촌동, 야탑역, 판교 백현마을), 303
  번(분당 오리역, 판교 백현마을), 좌석 1303번(모현 외대, 죽전 단대, 분당 오리역/정자역),
  좌석 1550-3번(광교, 수지구청역)을 타고 양지편에서 하차, 건너편 정류장에서 10, 10-1번
  마을버스를 이용한다. 양지편 전 정류장인 청계동주민센터과 한직골(청계농협)에서 내려도
  되지만 여기서는 10-1번 마을버스 밖에 없다.
* 청계사 셔틀버스가 인덕원역(4호선) 3번 출구 인덕원프라자 앞에서 출발한다. 평일에는 9시
  와 10시, 초하루와 석가탄신일, 백중, 칠석, 동지 때는 오전에 5회 운행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 바로 밑에 주차장 있음)
① 서울(과천)/안양/군포/의왕 → 인덕원4거리 → 안양판교로 → 청계사입구4거리에서 좌회전
   → 청계사
② 성남(분당/판교) → 안양판교로 → 청계사입구4거리에서 우회전 → 청계사

* 소재지 -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산11 (청계로 475 ☎ 031-426-2348)
* 청계사는 매일 12~13시에 점심 공양을 제공한다. (가끔 짜장밥이 나오기도 함)
* 청계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청계사 극락보전 주변 (오른쪽이 동종각)

▲  청계사 수각(水閣)

경내 밑에서 높이 5m 정도 되는 계단을 더 딛으면 비로소 경내에 이른다. 극락보전 뜨락은 하얀
피부의 박석(薄石)이 넓게 바닥을 이루어 꽤 깔끔해 보이는데, 그런 뜨락 중앙에는 달랑 1칸 밖
에 안되는 수각이 자리해 있다.
수각은 산사의 필수 요소인 샘터의 보금자리로 동그란 석조(石槽) 주위에 4개의 붉은 기둥을 세
우고 시원한 처마의 팔작지붕을 얹혀 소박하게 건물을 이루었다. 이렇게 샘터에 건물을 씌워 수
각으로 삼은 절이 꽤 되는데, 이는 물에 대한 일종의 보답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싶
다. 그만큼 물은 어디서든 소중하니 말이다. 특히 고적한 곳에 자리한 산사는 더욱 그렇다.

수각 석조에는 청계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넘쳐나는데, 산사에 왔다면 그곳의 샘물은 꼭 마셔줘
야 된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콸콸콸 마시니 그렇게 담백한 맛은 아니지만 몸
속에 낀 때가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다만 석조 안에 사람들이 무심히 투하한 동전이
여럿 잠들고 있어 그냥 마셔도 뒷탈이 없을지 모르겠다. 기분 같아서는 그들을 구제해주고 싶지
만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어서 그냥 두었다. 절에서는 이들 동전을 계속 방치해 수질에 영향
을 주지 말고 속히 구제하여 좋은 곳에 썼으면 좋겠다. 이들 동전도 다 비싼 세금을 들여서 만
든 것이니 말이다.

수각 서쪽에는 2층 규모의 서요사(西寮舍)와 가건물 찻집이 있다. 찻집에서는 전통차와 커피를
판매하고 있는데, 거기서 차와 커피를 구입하여 서요사 앞에 널린 의자에서 마시면 된다. 차와
커피 가격은 2~3천원선으로 속세와 거의 비슷하거나 조금 저렴한 수준, 서요사 앞에는 그보다
더 저렴한 길다방 자판기가 있어 돈이 궁한 경우에는 그를 이용하면 된다. 자판기 커피 가격은
300원선.. (자판기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청계사 동요사

▲  천의를 휘날리며 하늘을 유유자적하는
비천상(飛天像)의 위엄

▲  수각과 극락보전 경계선에 자리한 12지신상(十二支神像)

수각과 동/서요사보다 1단계 높은 곳에 다양한 모습의 12지신상이 자리해 있다. 거의 90도로 서
있는 다른 12지신상과 달리 편안한 포즈로 정면 또는 좌우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데, 특히 쥐 같
은 경우는 쌀가마니 위에 앉아 쌀을 축내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소소하게 웃음을 건네준다. 마치
이 땅의 현실을 그렇게 함축한 것일까?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  연등을 평방(平枋)에 두룬 청계사 지장전(地藏殿)

뜨락에서 2단계 높은 곳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지장전이 자리해 있다. 극락보전 우측
에 자리한 지장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
는 와불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1999년 와불을 조성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  지장전 뒤쪽에서 졸고 있는 청계사 연(輦)
석가탄신일이나 불교 행사 때 불상이나 불경을 운반하는 용도로 쓰인다.

▲  찻집 주변에 누워있는 옛 석조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로 중간 부분이 깨져 있다. 그래서 새로운 석조에게
수각의 자리를 넘기고 이렇게 뒤로 물러나 물 대신 겨울 제국이 내린
하얀 눈을 강제로 머금으며, 왕년을 그리워한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청계사 삼성각(三聖閣)

지장전 뒤쪽 언덕에는 삼성각이 조촐하게 자리를 닦고 있다. 달랑 1칸짜리 맞배지붕 건물로 3명
의 성스러운 존재,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봉안하고 있는데, 경내에
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천하를 굽어본다.
이 건물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그 뒤쪽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다.

▲  조그만 석불좌상과 칠성탱

▲  산신탱과 독성탱


▲  삼성각에서 바라본 청계사 경내


 

♠  청계사 극락보전, 와불 주변

▲  청계사 극락보전(極樂寶殿)

청계사의 법당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겉으로 보면 200년 정도
들어보이지만 실상은 1900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제 110여 년 정도 되었다. 대들보에서 '
庚子 三
年 三月'이란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시기를 따져보니 1900년이다.

불단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아미타3존불과 신중도 등이 봉안되어 있는데, 특히 아미타불 옆에
자리한 관음보살 상호 왼쪽 눈썹 주변에 우담바라가 피어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꽃이 조그
만하여 두 눈을 크게 부릅 떠야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우담바라는 21송이 정도 피어있으며, 길
이가 겨우 1cm 밖에 안되는 가녀린 존재이다.


▲  극락보전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 (아미타불 왼손 쪽이 관음보살)

극락보전 불단을 지키고 있는 아미타3존불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해 있다. 중심 불상인 아미타불은 높이 110cm, 협시보살은 107cm
로 다들 조선 후기(19세기 정도)에 조성되었다.


이들은 신체에 비해 얼굴이 다소 커보이는데, 거의 네모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볼살이 매우 푸
짐하다.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선의 미를 더해주고 있고, 눈은 좌우로 길고 가늘게
뜨고 있으며, 코는 작고 오목하다. 붉은 입술은 조그만 하며, 얼굴 좌우에 붙어있는 귀는 중생
의 민원을 하나도 빠짐없이 경청하려는 듯,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다들 표정도 온후하여 나름
미소를 선보이며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다독거리며, 두터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다.
특히 아미타불 왼손 쪽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같은 경우는 우담바라가 피어 화제가 되고 있는데,
대세지보살과 양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어 대세지보다 이전에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하체
와 상체, 머리 부분에서 나발의 모습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점은 비슷한 시대의 다른 불상과
는 다소 다른 모습이다.

아미타불을 뒤에서 받쳐주고 있는 아미타후불탱은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아난(阿難)과 가섭(
迦葉), 타방불(他方佛) 등이 그려져 있는데, 조선 철종(哲宗. 재위 1849~1863) 시절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  신중도(神衆圖)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274호

극락보전 좌측에는 색채가 고운 신중도(신중탱)가 자리해 있다. 신중도는 불법(佛法)을 지키는
신(神)들의 무
리를 담은 것으로 법당의 수호를 위해 법당 내부에 많이 걸어둔다.

이 그림은 1844년에 제작된 것으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경성(京城, 서울)
학파 승려의 화풍이 반영되어 눈길을 끈다. 이목구비에 음영을 주고 코발트색과 금니(金泥)를
사용해 색채가 매우 곱지만 등장 인물이 많아 (어림 잡아 30명은 넘음) 다소 빽빽하게 보인다.


▲  동종이 담긴 동종각(銅鍾閣)

극락보전 좌측에는 조그만 동종각(종각)이 자리해 있다. 범종각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다른 절
의 범종각보다 규모도 좀 작은 편이고, 그 안에 담긴 동종 역시 많이 왜소하다. 허나 작다고 그
냥 지나치지 말자. 이 동종은 경내에서 제일 가는 보물로 국가 지정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비싼 몸이다.

▲  청계사 동종(銅鍾) - 보물 11-7호

동종각에 담겨진 동종은 높이 115cm, 입지름 71cm의 조촐한 종으로 그의 청동색 피부에 '康熙四
十年辛已四月日鑄成 廣州靑龍山淸溪寺大鐘七百斤'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어 1701년에 동 700근을
들여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광주 청룡산은 청계산으로 이후에 절의 이름을 따서 청계
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광주(廣州) 고을의 범위가 이곳까지 미쳤음을 알
려준다.
청계사에서 조성된 동종이지만 한동안 봉은사에 머물러 있다가 1975년에 돌아왔으며, 경기도 지
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가 2000년에 사인 비구(
思印 比丘)가 만든 다른 종과 묶어서
보물 11호 계열로 승격되었다.

청계사 동종은 18세기에 활동했던 사인 비구가 만든 조선 후기 종으로 다른 범종에 비하여 작은
편이나 무게가 700근에 이르며, 종 꼭대기에는 2마리의 용이 종을 단단히 붙들고 있고, 종 윗도
리에 보살입상 4구와 9개의 유두가 달린 유곽이 2개 있다. 이 유두는 종을 옮길 때마다 하나씩
떼어낸다.
종 밑도리에는 보상화문(寶相花紋)이 연속으로 새겨져 있어 신라 범종의 제조 기법이 반영되어
있으며, 명/청나라의 범종 양식을 슬쩍 대입한 듯, 2줄의 굵은 횡선이 둘러져 있다. 또한 그 밑
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종의 신상명세를 알려준다.

이 종을 만든 사인은 종을 매우 잘만들었다. 이곳을 비롯하여 천하에 그가 만든 종이 8개가 전
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보물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허나 그의 굵직한 작품에 비해 그의 삶
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야말로 세상에 조용히 나타나 조용히 종만 만들다가 조
용히
세상을 뜬 것이다.


▲  청계사 와불상(臥佛像) ▼

극락보전 좌측에는 너른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 청계사의 새로운 명물인 금빛의 와불상이 있다.
와불은 말그대로 누워있는 불상인데, 완전히 하늘을 보고 누운 것이 아닌 정면을 보며 옆으로
누워있는 자세이다. 이런 불상은 인도와 동남아에서 많이 보이는데, 우리나라에는 기껏해봐야
화순 운주사(雲住寺)의 와불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옆으로 누운 것이 아닌 하늘을 보며 누워있
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와불이 1990년대 이후 거의 유행처럼 번져 이제는 보기가 쉬워졌다.
청계사도 그 유행을 타고 1999년에 하나 장만했는데, 이곳에 있던 지장전을 극락보전 옆으로 밀
어내고 터를 넓게 닦아 와불을 봉안했다. 특히 이곳 와불은 돌을 깎아서 만든 것이 아닌 조그만
자갈을 모아서 만든 것으로 꽤 눈길을 끈다. 보잘 것 없는 자갈이 강인한 협동심을 발휘해 와불
이란 무시못할 작품으로 거듭났으며, 그 자갈을 일일이 모아서 만든 청계사의 노력도 참 대단하
다. 물론 새로운 명물거리를 만들어 절의 명성과 수입을 늘리려는 의도도 크게 작용했다.
처음에는 자갈에 색을 입히지 않아 거의 하얀 피부를 지녔으나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죄다 금칠
을 칠해 졸지에 금색 와불이 되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자갈이 아닌 금동불로 보인다.

와불 앞에는 예불을 올리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고, 와불을 받치고 있는 기단에는 조그만 금동불
을 빼곡히 집어넣어 장관을 이룬다. 이들은 중생의 시주로 넣어둔 원불(願佛)이다.

▲  와불상 뒷쪽

▲  와불상의 발부분

내가 본 와불은 이곳을 비롯해 석모도 보문사(席毛島 普門寺), 기장 장안사(長安寺), 화순 운주
사(雲住寺) 정도이다. 운주사 와불을 제외하면 죄다 근래 조성된 것들로 지금은 그저 그런 존재
로 시선을 받고 있지만 시간이 꽤 흐르고 나면 20~21세기 불상 양식이라 하여 한국 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존재로 애지중지 될 것이다.

와불을 끝으로 간만에 찾은 청계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서요사에 있는 길다방 커피에서 추
위에 시달린 몸을 달랠 겸, 커피 1잔을 뽑아마시며 잠시 두 다리를 쉬게 했다. 2월 하순이지만
햇님이 산을 싫어하는지 산속에서는 속세보다 해가 일찍 저문다. 이제 5시가 넘었음에도 땅거미
의 정도가 진해졌으며, 해가 기운 만큼 겨울 제국의 기운이 다시 용솟음치면서 찬바람의 패기도
제법 높아졌다.

청계사에서 머문 시간은 약 1시간 40분 정도, 겨울 제국의 차가운 등쌀에 떠밀려 청계사와의 짧
은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길을 향한다. 우담바라를 친견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다음에 인연이
된다면 그때 와서 보면 된다. 내가 서울에 있는 한, 언젠가는 또 오지 않겠는가? 나 또는 청계
사가 멀리 떠나지 않는 이상은 언젠가 또 오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청계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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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다음 까페에 올린 글은 2015년 9월부터 문장 줄 간격이 좀 늘어져서 나옵니다. (다음
  에 계속 시정을 요청했으나 소용이 없었음) 그러니 보기에 조금 불편하더라도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다만 다음과 네이버 블로그에 올린 글은 간격 늘어짐이 없이 정상적으
  로 나오고 있으니 블로그글을 보셔도 됩니다.
* 공개일 - 2016년 3월 7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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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 정릉 봉국사 (맛있는 점심공양)

 


' 석가탄신일 절 나들이, 정릉 북한산 봉국사(奉國寺) '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봉국사 석조여래좌상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선인 5월이 되면 3가지의 볼거리가 나를 바쁘게 만든다, 서울연등축
제(연등회)와 석가탄신일, 그리고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특별전이 그것인데, 이중 가장 흥
겨운 것이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과 그 1주 전에 열리는 서울연등회이다.  (간송미술관 특
별전 2014년부터 미술관 대신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고 있음, 특별전 기간도 연장됨)

간송미술관 특별전은 별 인연이 없으면 거르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초파일은 비가 와도 절대
거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불교 신도도 아니고 평소에도 많은 절을 다녀 지금까지 300곳
에 이르는 사찰을 들락거렸지만 초파일에 굳이 순례를 가장한 절 투어를 벌이는 이유는 초파
일의 흥겨운 분위기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공양밥과 떡 등 온갖 먹거리까지 그 흥겨
움을 보탠다. (공양밥 때문에 그럴지도??)

초파일이 다가오자 설레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장안을 대상으로 미답(未
踏)으로 남은 고찰(古刹)을 물색해본다. 초파일 만큼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마음 편하게 가까
운 시내 고찰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의 왠만한 고찰과 문화유산을 간직한 근현대
사찰은 거의 가본 터라 아무리 쥐어짜도 적당한 곳이 나오질 않는다.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지만 개방을 꺼리거나 외지인에게 꽤나 인색하게 구는 곳은 뺐음>
그래서 아주 옛날에 가보거나 1~2번 정도 간 곳을 포함하여 서울 강북 일대를 대상으로 코스
를 짰는데, 이번에는 후배 2명도 같이 가기로 하여 이동이 편하게끔 동선을 고려했고, 그 첫
답사지로 20년 전에 딱 1번 가봤던 정릉 봉국사를 선정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초파일의 서광이 밝았다. 그 서광을 받으며 오전 11시에 길음역(4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국민대로 가는 1213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국사에서 발을 내린다. 봉국사가 비록
도선사(道詵寺), 길상사(吉祥寺) 만큼이나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생의 발길이 적지
않은 절이라 일주문부터 사람과 수레가 꼬리를 꼬리를 문다.


♠  봉국사 입문

▲  봉국사 일주문(一柱門)의 뒷모습 - 지붕에 세월이 달아준
푸른 머리칼이 자라고 있다.

서울의 북서쪽과 동쪽을 이어주는 정릉로는 시
내의 주요 간선도로로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다.
거기에 고가도로로 된 내부순환도로까지 있어
수레의 굉음이 멈추질 않는다. 그런 정신없는
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선 일주문은 봉국사
의 정문이다.
북한산(삼각산)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지만
내부순환로가 떡하니 앞을 가로막고 있어 그 시
야도 시원치 못하며, 문의 크기가 상당하여 시
작부터 중생의 기를 죽인다. 여기는 그런식으로
속세의 기운을 다스리는 모양이다.
문 앞쪽과 뒷쪽에는 절의 이름(삼각산 봉국사)
이 쓰인 현판이 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경내까지 200m 정도의 가파
른 오르막이 펼쳐져 다시 한번 중생의 기를 죽
인다. 절이 산중턱에 있고 경내로 인도하는 길
이 일주문을 경유하는 북쪽 언덕길 뿐이라 꿩
대신 닭을 택할 권리는 없다. 그저 자존심을 곱
게 접고 길을 임하는 수 밖에..


▲  천왕문(天王門)과 범종루(梵鍾樓)를 품고 있는 일음루(一音樓)

일주문을 들어서면 2층 규모의 건물이 중생을 맞는다. 1층에는 천왕문 현판이, 2층에는 범종루
현판이 있어, 한지붕 밑에 2개의 서로 다른 공간이 담겨져 있는데, 이 건물을 통틀어 일음루라
부른다. 일음루는 범종루의 다른 이름으로 그 일음(하나의 소리)이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세지이다.
이 건물은 1979년 10월에 주지 현근(玄根)이 세웠는데, 일음루 편액과 주련은 청사 안광석(晴斯
安光碩)이 썼고, 천왕문 현판은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의 글씨이다.


▲  일음루의 뒷모습 - 일음루 현판이 뒷쪽에 달려 있다.

▲  천왕문 사천왕상(四天王像)
천왕문 양쪽에 늘어서 중생을 검문하는 사천왕, 허나 일음루 옆에 수레를
위한 길이 따로 닦여 있어 사천왕의 눈치를 굳이 볼 필요는 없다.

▲  여염집 같은 종무소(宗務所)

일음루를 지나면 주차장이 나온다. 수레를 끌고 온 이들은 여기서 수레를 접어야 되는데, 주차
공간이 넉넉치 못해 바퀴를 동동 굴리는 수레들도 적지 않았다. 어떤 수레 주인은 주차장 관리
요원과 자리를 두고 말싸움을 벌여 석가탄신일의 경건한 분위기를 해치기도 한다. 봉국사가 교
통이 불편한 시골에 있다면 이해라도 하지만 교통편도 괜찮은 서울 한복판에 자리해 있는데, 잠
깐 편하자고 굳이 수레를 끌고와 불편과 혼잡에 기름을 껴얹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이런 날은
그저 대중교통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주차장을 지나면 길은 180도로 크게 구부러지며, 그 길의 끝에 산중턱에 둥지를 튼 봉국사가 자
리해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국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정릉의 원찰(願刹)이자 약사도량(藥師道場), 봉국사(奉國寺)
북한산(삼각산)의 가장 남쪽 산줄기에 자리한 봉국사는 1395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했
다고 전한다. 예전에는 1354년(고려 공민왕 3년)에 나옹선사(奈翁禪師)가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근래에는 무학대사 창건설로 완전 굳어진 모양이다.
무학은 이곳에 절을 짓고 약사여래불을 봉안해 약사사(藥師寺)라 했다고 전하며, 1468년에는 세
조(世祖)의 지원으로 절을 중창했다고 전한다.
허나 그 이후 정릉(貞陵)이 복원된 17세기 중반까지 200년 동안 적당한 내력이 없어 창건 시기
에 대한 의구심을 던지게 한다. 게다가 조선 초기 유물은 하나도 없으니 무학이 정녕 창건한 것
인지 아니면 15세기의 세조의 지원으로 지어진 것인지, 정릉이 복원된 이후에 지어진 것인지는
좀더 조사가 필요하다.

봉국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1669년 이후이다. 태종(太宗)에 의해 260년 가까이 속세
의 뇌리 속에 잊혀져 쑥대밭이 된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정릉을 현종(
顯宗)의 명에 따라 1669년에 복원되었다. 이때 정자각(丁字閣)과 전례청(典禮廳) 등 정릉의 부
속 건물이 새로 지어지고, 인근 경국사(慶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이곳을 정릉의 원찰로
삼았는데, 이때 나라를 받든다는 착한 뜻에서 봉국사로 이름을 갈았다. 왕실에 더욱 잘보여 절
을 크게 꾸려보겠다는 야심에서 비롯된 소산일 것이다. 참고로 봉국사는 정릉과 같은 산자락에
안겨져 있으며, 정릉에서 바로 북쪽 300m 거리에 자리해 있어 원찰의 자격으로는 충분하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자 성질이 난 군인들에 의해 절이 피해를 입었고, 1883년 한
계(漢溪), 덕운(德雲)이 중건했다. 1885년 3월에는 명부전에 지장탱을 조성했으며, 1898년에 운
담(雲潭), 영암(永庵), 취봉(翠峰) 등이 명부전을 중건하고 시왕도를 봉안했다.
1913년에 주지 종능(宗能)과 화주 월하봉연(月荷奉蓮)이 칠성각을 중건했고, 1938년 화주 금파(
錦坡)가 조인섭(趙寅燮)의 시주로 염불당을 새로 지었다. 1979년에는 주지 현근이 2층 크기의
일음루를 세워 범종루와 천왕문으로 삼았고, 1986년에 산신각을 중수하고 만월보전에 신중탱을
봉안했으며, 1991년에 천불전에 신중탱을 봉안했다.
1994년 3월에는 안심당을 새로 마련해 승려와 신도의 수행처로 활용하고 있고, 주지 선관과 신
도들이 합심해 경내에 나무 1,000여 그루와 온갖 꽃을 심어 도량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살렸다.
그래서 경내에 제법 나무가 무성하여 산사의 티가 진하게 된 것이다.

일주문이 정릉로 도로변에 있어서 그렇지 일주문과 일음루를 지나면 산사의 내음이 오각을 간지
럽힌다. 정릉로와 내부순환도로가 절 앞에 있고 주택가와 가깝지만 숲에 짙게 둘러싸인 경내는
아늑하고 적막해 깊은 산골에 들어선 기분이다. 지금이야 속세의 기운이 절 밑까지 올라와 실감
이 덜하겠지만 옛날에는 완전 첩첩한 산주름 속이었다. 한양(서울) 도성에서 오려면 동소문<(東
小門), 혜화문(惠化門)>을 나와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야 했는데 워낙 외진 곳이라 호랑이의 등장
이 잦았다.

일주문은 북한산이 있는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경내 서쪽과 남쪽, 동쪽은 야산이라 정릉천이
있는 북쪽이 그나마 진입이 쉬웠다. 그래서 그곳에 문을 내고 속세와 왕래했으며, 그 길이 절과
속세를 잇는 유일한 통로이다. 경내는 일주문에서 각박한 오르막길을 200m 올라야 나오는데, 법
당(만월보전)은 지형상의 이유로 동쪽을 향하고 있고, 명부전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법당 뒤쪽
에는 높은 벼랑이 병풍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벼랑에 독성각과 산신각을 아슬아슬하게 걸쳐놓
았다. 이는 경내 확장이 용이하지 못해 그리 한 것이다.
이렇게 조촐한 경내에는 만월보전을 위시하여 명부전, 천불전, 산신각, 독성각, 납골당인 연화
원 등 약 10동의 건물이 터를 메우고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목조석가여래좌상, 석조여래
좌상,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및 권속일괄,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
문화재 351호
), 지장시왕도, 시왕도와 사자상 등 지방문화재 6점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은 2014
년 1월에 한꺼번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고, 교통편도 양호해 접근성은 진짜 좋다. 몇 시간이나 발품을 팔아
야 되거나 수레도 겁을 집어먹는 깊은 산중의 산사에 가기가 여의치 않을 때 아주 잠깐의 발품
으로 언제든 안길 수 있는 산사(山寺)로 산사의 기운을 나름 진하게 간직하고 있어 속세의 기운
을 잠시 털어버리기에 좋다.

※ 정릉 봉국사 찾아가기 (2015년 5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길음역(3번 출구)에서 171, 1213,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봉국사 하차
* 지하철 4호선 미아3거리역(1,6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길음역(7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에서 153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6호선 고려대역 4번 출구에서 1213번, 6번 출구에서 7211번 시내버스 이용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4번 출구)에서 7211번 시내버스 이용
* 경내에 주차장 있음 (주차장까지 진입 가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2동 637 (정릉로 202 ☎ 02-919-0211~2)
* 봉국사 홈페이지(연화원 포함)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초파일 분위기에 잠긴 봉국사 경내


♠  봉국사 만월보전, 명부전 주변

▲  봉국사의 법당인 만월보전(滿月寶殿)

경내로 들어서니 사람들로 진짜 봐글봐글하다. 때가 점심시간이라 공양밥을 먹고자 사람들이 만
월보전 뜨락에 길게 꼬리를 물고 있는데, 지금 그 꼬리에 동참을 하더라도 공양밥이 내 손에 오
기까지는 30분 이상은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밥은 나중에 먹고 일단 경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사람들로 가득한 뜨락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 만월보전은 이곳의 법당이다. 정면 5칸, 측면 3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큰 불전(佛殿)인데, 만월보전이란 약사전(藥師殿)의 다른
이름으로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거처이다. 봉국사가 약사도량을 칭하다보니 자연히 약사여래와
그의 거처가 절의 중심이 되었다.

만월보전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건물은 근래에 새롭게 손질한 것이다. 만월
보전 현판은 조선 후기 것으로 지금은 종무소에 있으며, 그 글씨를 확대한 새 현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  만월보전 불단에 봉안된 불상과 용이 그려진 기둥
불단 가운데가 석조여래좌상, 왼쪽에 보관을 쓴 이가 관음보살,
오른쪽은 목조석가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4호)


만월보전 불단에는 이곳에 주인으로 약사불로 통하는 석조여래좌상을 가운데에 두고 그 좌우에
관음보살과 목조석가여래좌상을 배치했다.
이중 목조석가여래좌상은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어깨가 넓고 둥글며, 머리를 앞으로
살짝 수그려 굽어보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고, 간략해진 옷 주름으로 신체 윤곽이 뚜렷하고 부
피감이 있어 보이는 점으로 보아 18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해맑은 표정의 만월보전 석조여래좌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7호

봉국사의 든든한 밥줄인 석조여래좌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불로 정확한 시기는 전해오지 않
는다. 불상의 얼굴은 거의 동그랗고 볼에는 살이 좀 있어 보이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
러져 선의 미학을 선사한다.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두 눈은 가늘고 살며시 뜨
며 중생과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진 제물을 바라본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붉은 입술은 얼굴 크
기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감이 있으나 입술에 드리워진 미소는 얼굴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두 귀는 중생들의 소망을 모두 경청하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졌으며, 머리칼은 꼽슬인 나발이고,
그 가운데에 하얀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 있다.
목에는 불상에 흔한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지 않고, 몸에 걸친 옷은 어깨를 감싼 통견
(通肩)이
다. 가슴 밑에는 군의(裙衣)가 보이는데, 그 옷깃과 띠가 직사각형으로 정형화되어 표현된 것은
조선 후기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양식이다.
두 손은 다리 위에 모아 금색이 칠해진 무엇인가를 소중히 들고 있는데, 이는 약사여래의 필수
품인
약합(藥盒)로 근래에 금색을 입혔다.

불상을 만들 때 해맑은 동자승을 모델로 하지 않았을까? 그의 동그란 얼굴은
해맑고 귀여워 보
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웃음의 꽃을 머금게 한다. 아무리 세상이 즐거움과 웃음을 앗아가도 그
는 그 웃음을 되찾아주고 치료해주는 의원인 셈이다. 약합보다는 그의 얼굴이 그야말로 약이다.
자신을 보며 늘 웃어주고 밝은 표정을 지어주는 불상 앞에 어느 누가 즐겁지 않으리..? 찰거머
리같은 번뇌도 속세의 부정한 기운도 그 앞에서는 모두 털리게 되어있다.

이 약사불은 도금을 입히지 않고 원초적인 돌의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신체 비례도 거
의 맞고 세부 묘사도 충실해 조선 후기 불상 가운데 괜찮은 작품으로 점수를 받고 있다. 특히나
해맑은 얼굴과 미소는 보물급으로도 손색이 없다. 다행히 조선 후기 서울/경기 지역에서 유행했
던 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뒤늦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  석조여래좌상과 석가후불탱화

▲  호법신(護法神)을 있는데로 끌어 담은 신중탱
법당에 필수적으로 걸어놓는 신중탱은 법당 수호를 목적으로 한다.
허나 그림에 그려진 이들이 너무 많아 누가 누군지 정신이 없다.

▲  봉국사 5층석탑
만월보전 뜨락에 날씬한 몸매의 5층석탑 2기가 서있다. 이들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저들 이전에는 경내에 그 흔한 탑도 없었다.

       ◀  천불전(千佛殿)과 느티나무
남쪽을 바라보고 선 천불전은 석가3존불과 조그
만 금동불 1,000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들이 합
심하여 금빛을 발산하니 그 찬란함에 눈이 마비
될 지경이다.
천불전 앞에는 60여 년 묵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
무 9호
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높이는 약 16m
정도로 경내에 있는 나무 가운데 가장 으뜸이다.


▲  천불전을 장식하고 있는 석가3존불과 조그만 금동불 1,000상의 위엄
조그만 불상은 중생들의 돈으로 조성된 원불(願佛)이다. 즐거운 초파일을 맞이하여
후하게 차려진 제물을 바라보며 봉국사 승려를 대신하여 흐뭇한 미소로 답을 한다.

▲  천불전 옆에 자리한 안심당(安心堂)
승려와 신도들의 수행을 위해 1994년 3월에 지어졌다.

▲  봉국사의 보물 창고, 명부전(冥府殿)

만월보전의 옆구리를 뚫어지라 바라보는 명부전은 조선 후기에 지어졌다. 지금의 건물은 1989년
에 중건된 것인데, 내부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지장시왕도, 시왕도,
사자도 등이 푸짐하게 봉안되어 있어 경내의 보물 창고나 다름이 없다.
특히 건물 현판은 가로가 아닌 세로로 걸린 것이 이채로우며, 현판의 색깔도 검은색이 아닌 붉
은색 바탕에 금색으로 된 것이 꽤 돋보인다. 이런 현판은 여기서도 가까운
흥천사(興天寺) 명부
전(☞ 흥천사글 보러가기)에도 있어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보니 거기 명부전과
여기 명부전이 너무나 닮았다.


▲  명부전 석조지장3존상과 시왕상, 권속일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5호
그 뒤에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2호

명부전 불단에 봉안된 조그만 지장3존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다. 금동 옷을 입은 지장보살상
은 녹색 승려머리로 조금 매서운 맵시로 앉아있는데, 북한산(삼각산) 동쪽에 있는
본원정사(本
精舍) 지장보살상과 비슷한 모습이다. (☞ 본원정사글 보러가기)
지장보살 옆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무독귀왕(無毒鬼王)협시(夾侍)해 있는데, 얼굴이 좀
순하고 단정해 보인다. 그들 뒤에는 1885년에 제작된 지장시왕도가 든든하게 걸려있고, 그 좌우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인 시왕상을 비롯하여 판관(判官), 녹사, 시자상, 동자상, 인
왕상 등이 거의 빠짐없이 자리를 메운다. 시왕도와 사자도는 1898년에 그려진 것으로 19세기 후
반 불화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명부전 시왕상과 시왕도
밑줄에 자리한 상은 판관, 녹사, 시자상

◀  호랑이탈을 쓴 고양이처럼 귀여운
인왕상(仁王像)과 사자도
(시왕도와 사자도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3호)


♠  봉국사 마무리

▲  산신각이 달려있는 경내 뒤쪽 벼랑

만월보전 뒤쪽(서쪽)에는 거의 80도 가까이 솟은 벼랑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다. 그 옹색한 곳에
계단을 내고 좁은 자리를 간신히 닦아서 독성각과 산신각을 내는 기적을 내었는데, 산신각은 각
한 계단을 1분 정도 올라야 된다.
봉국사가 이런 벼랑에 아슬아슬하게 산신각을 걸친 것은 경내가 썩 넓지가 않고,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에 산신각이나 삼성각을 두는 원칙 때문이다. 그래서 욕심을 내어 벼랑 윗부분
에 자리를 닦은 것이다.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예전에는 광응전(光膺殿)이란 생소한 이름으로
불렸다. 산신각이니 당연히 산신(山神) 할배가 중심이 되야겠지만 중심은 엉뚱하게도 약사여래
상이 차지하고 있으며, 산신과 관음보살상이 그 좌우에 자리해 있다. 아무래도 이곳이 약사도량
을 내세우다보니 경내에서 가장 높고 험준한 이곳까지 약사여래를 둔 모양이다.

이곳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각박하지만 다행히 거리는 짧아서 그런데로 올라갈 만하다. 경내에
서 가장 하늘과 가까워 조망은 좋을 것 같지만 숲의 패기가 드높아 조망은 썩 좋지 못하다. 숲
에 가려 경내와 정릉동 일부가 보이는 것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물 주변이 낭떠러지라
추락사고의 위험도 늘 도사리고 있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뒷탈이 없다. 사고가 나면 제아무리
영험하다는 산신, 약사여래라도 구제해주지 못한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산신각

▲  산신각 중수 공덕비(功德碑)


▲  산신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 약사여래상, 관음보살)
이들과 후불탱화는 모두 근래에 조성되었다. (산신각도 마찬가지)

▲  산신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울창한 숲에 가려 보이는 것은 별로 없다.

▲  독성각(獨聖閣, 위쪽)과 용왕단(龍王壇, 아랫쪽)

▲  용왕단 (독성각 바로 밑에 있음)

월보전과 산신각으로 인도하는 계단 입구 사이에 용왕단이 자리해 있다. 말그대로 용왕(龍王)
의 거처로 용왕과는 전혀 관련도 없어보이는 이런 산속에 그의 공간이 있다는 것이 참 이채롭다.
바다 용왕이 바다에서 먼 이런 산골까지 무슨 볼일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이곳에 용왕단을 세운 것은 지금은 제대로 안나오지만 약수터를 지키고자 세운 것이다. 용왕이
라고 해서 꼭 바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 미치는 모든 곳이 그의 관리 영역이다. 허나 독
성, 산신과 달리 번듯한 건물이 아닌 노천에 있어 절에 봉안된 다른 존재와 크게 차별을 두었다.
용왕의 거처는 둥근 초석을 깔고 그 위에 나무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에 용이 새겨져 있으나 색
이 퇴색해서 제대로 안보면 지나치기 쉽다. 마주보는 용머리 위에 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올렸는
데, 이는 최근에 세운 것이며, 그 안쪽을 파서 얕은 감실(龕室)을 두고 거기에 용을 탄 용왕을
봉안했다.


▲  벼랑 위에 둥지를 튼 독성각

용왕단 위에는 맞배지붕을 지닌 독성각이 벼랑 바위에 아찔하게 걸터 앉아있다. 이곳은 독성(獨
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근래에 조성된 독성상과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독성각을 가려면 만월보전 좌측에서 올라가야 되는데, 산신각보다는 접근이 쉽다. 다만 건물 정
면 바깥은 벼랑이기 때문에 내부에서 괜히 뒷걸음질하다가 자칫 골로 가는 수가 있다. 건물 크
기도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손바닥만한 규모라 3명만 들어가도 숨쉬기 힘들다. 추락을
염려하여 2줄로 안전 난간을 둘렀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해 보인다.


▲  독성상과 독성탱 - 초파일 특수로 그에게 올려진 제물이 꽤 풍족하다.
며칠 동안 독성 식구들 제대로 회식했을 듯~~

▲  독성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 오른쪽 녹색 천막에서는 전을 팔고 있었다.

▲  봉국사에서 먹은 점심 공양의 위엄

국사를 정신없이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3시가 되었다. 경내도 다 구경했으니 이제 점심을
먹으며 지친 몸을 달래줘야 되겠지. 공양줄도 제법 줄어든 상태라 줄에 동참하여 공양을 받았다.
이곳 공양은 다른 절집과 비슷한 비빔밥이다. 밥과 갖은 나물, 고추장이 그릇에 담겨
이들을
비벼먹으면 되며, 작은 그릇에는 물김치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떡도 1봉지씩 나눠주면서 후식
도 배려했다.

공양을 받는 건 좋으나 경내가 사람들로 가득하다보니 밥먹을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산
신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간신히 자리를 잡고 즐거운 공양시간을 갖는다. 이들 공양밥 외에도
전과 간식도 있는데, 이들은 돈 주고 사먹어야 된다. 전 1장은 1~2천원선, 후배 1명이 전을 2장
사와서 같이 먹었다. 한참 배가 고플 시간이고 바깥에서 소풍 나온 듯 밥을 먹으니 밥과 물김치,
전이 모두 꿀맛 같다. 밥에 담긴 고추장은 양이 적당하여 모두를 붉게 물들이는데 충분했고, 물
김치는 맛이 시원하여 이내 바닥을 드러냈다.

그렇게 즐겁게 점심 공양을 마치고 봉국사를 뒤로하며 다음 절로 이동했다. 이날 우리의 갈 길
은 아직 멀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만 둘러보고 끝낼 수도 있지만 달랑 1곳으로 초파일 절투어
를 땡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1년에 딱 하루 있는 날이니 이날만큼은 좀 무리하여 초파일 분위
기를 내내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봉국사 글은 여기서 끝 ~~~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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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 대구 비슬산 용연사(龍淵寺) '
용연사 석조계단
▲  용연사 석조계단


 

겨울 제국(帝國)의 기세가 슬슬 꺾이던 3월 첫무렵에 대구 지역의 오랜 고찰, 용연사를 찾
았다.

서울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4시간 가까이 달려 대구역에 도착, 대구지하철 1호선을 타
고 서쪽 종점인 대곡역에서 내렸다. 여기서 용연사로 가는 시내버스를 타야 되는데 배차간
격이 참 아름다운 수준이라 조금 걱정은 되었으나 다행히 대기 10분 만에 그곳으로 들어가
는 달성5번 시내버스(대곡역↔용연사↔현풍,유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옛 지기를 만난 듯, 반가운 표정을 지우며 그 버스를 타고 화원읍, 반송리를 지나 비
슬산 북쪽 골짜리에 자리한 용연사 주차장에 두 발을 내리니 곧바로 용연사 매표소가 흐뭇
한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엥 여기도 입장료를 받았었나?'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매표소
아줌마가 직업 본능에 따라 밖으로 나와 돈 받을 준비를 갖춘다. 그때 버스에서 같이 내린
아줌마 신도가 있었는데, 그의 뒤를 바짝 뒤쫓으니 나를 같은 신도라 여기고 아무런 제지
없이 안으로 들여보내주었다. 매표소에 적힌 입장료를 보니 어른은 무려 1,500원..

매표소를 무사히 지나 7분 정도 오르면 비슬산 계곡물이 한데 모인 용연지(龍淵池)가 나타
나고 이어 일주문도 얼굴을 드러낸다.


♠  용연사 입문 (일주문, 천왕문)

▲  용연사 일주문인 자운문(紫雲門)

용연지를 지나면 수레들의 쉼터인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 중간에는 고색이 깃든 일주문(一柱
門)이 뿌리를 내렸는데, 4발 수레들에게 둘러싸여 약간은 뒷전으로 밀려난 인상이다. 다른 절은
거의 일주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게 하지만 여기는 일주문 옆에 수레길을 내고 그로 인해 문이
옆으로 상당히 밀려난 형세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문이 아닌 수레길로 경내를 오간다.

절의 일주문은 보통 일주문이라 불리지만 이곳 일주문은 특별히 붉은 구름이란 뜻의 자운문이란
어여쁜 이름을 지니고 있다. 17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지붕은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하고 있
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空包) 부분이 현저히 커서 공포와 지붕 등 문의 윗부분이 문 높이의
거의 60%를 차지하고 있어 다소 육중해 보인다. 지붕을 받치는 문 기둥은 그런데로 굵직함을 지
녔지만 커다란 윗도리 때문에 오랜 세월 어찌 저들을 받쳤을까? 걱정이 들 정도이다. 공포와 평
방(平枋)에는 단청이 채색되어 있으나 장대한 세월의 흐름 속에 많이 퇴색했다.

▲  적멸보궁, 석조계단 입구

▲  경내로 인도하는 극락교. 다리를 건너면
용연사 경내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용연사 문화유산 해설사가 머무는 관광안내소가 있다. 내가 나타나니 해설사
아저씨가 모습을 비추며 용연사 안내문을 하나 건네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그런다.
그래서 고마움을 표하며 길을 재촉하니 길은 이내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 계단길로 가면
석조계단(적멸보궁), 오른쪽은 경내로 우선은 경내부터 살피기로 하고 오른쪽으로 갔다.

경내 직전에는 계곡에 걸린 극락교(極樂橋)란 다리가 있다. 여기서 절의 주문에 따라 속세의 온
갖 기운과 번뇌를 내려놓고 경내로 임하면 되는데, 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천왕문(天王門)
이 나타난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마침 온몸을 가리며 보수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
서 천왕문은 이용하지 못하고 그 옆으로 우회하여 들어갔다.

천왕문은 부처의 경호원인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그들의 검문을 거치면 바로 2층 규모의
안양루(安養樓)가 나온다. 안양루는 범종(梵鍾)과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版) 등 사물
(四物)이 담겨져 있는데, 보광루(寶光樓)라 불린 것을 근래에 안양루로 이름을 갈았다.


▲  천왕문 밑에 자리한 둥그런 석조

▲  절에 왠 악어?

천왕문 밑에는 둥그런 석조(石槽)가 있는데 샘물 대신 먼지만 가득한 거의 죽은 샘터이다. 그런
데 그런 석조 옆에는 생뚱맞게도 악어상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자비(慈悲)와 평화를 강조하는
절집에 왠 무시무시한 악어상이 있는 것일까? 악어와 관련된 불교 설화는 딱히 들어본 적도 없
고. 그렇다고 용연사 주변에 악어 서식지나 관련 설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
도나 소승불교가 전파된 동남아에 악어가 있으니 그곳에 혹 관련 설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
중에 해설사에게 문의를 했다.
그 답변에 따르면 이 악어상은 어느 신도의 집 정원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몇년 전에 절에
기증을 했는데 마땅히 둘 데가 없어서 이 자리에 두었다는 것이다. 사연이 생각 외로 정말 엉뚱
하다. 신도가 준 것이니 차마 안받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내에 두기에도 조화롭지 않으니 혹
여 찾아올지 모르는 화마(火魔)와 나쁜 기운이나 막으라고 천왕문 밑에 둔 듯 싶다.

그럼 여기서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용연사의 내력을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안양루의 뒷모습

▲  극락전과 뜨락

※ 비슬산 북쪽에 포근히 안긴 고찰, 비슬산 용연사(琵瑟山 龍淵寺)
팔공산(八公山)과 더불어 대구를 크게 보듬은 비슬산(琵瑟山)에는 유서 깊은 고찰(古刹)이 많은
데, 그중에서 북쪽 계곡에 안긴 용연사가 단연 갑(甲)이다. <유가사는 을(乙) 정도>

용연사는 후삼국시대의 한복판인 912년<신라 신덕왕(神德王) 원년> 보양국사(寶讓國師)가 창건
했다고 전한다. 보양은 청도에 운문사(雲門寺)를 세운 인물로 중원대륙으로 건너가 불법을 배우
고 귀국하는 길에 서해바다 용이 용궁(龍宮)으로 초청해 그를 대접했다.
용은 자신의 아들인 이목(璃目)을 딸려 그를 호위케 했는데, 마침 나라에는 가뭄이 극성이라 보
양이 이목을 시켜 비를 내리게 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설화이지만 그 연유로 절 이름
에 용(龍)이 들어간 것이다.
상상의 동물인 용까지 내세우며 창건설화를 그럴싸하게 지어냈지만 정작 창건 이후 조선 초기까
지 이렇다 할 바퀴자국을 남기지 못했으며, 다만 극락전 앞에 고려 때 지어진 3층석탑이 있어
적어도 고려 때부터 절이 있었음을 살짝 귀띔해준다.

절의 사적(事績)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1419년으로 그때 승려 천일(天日)이 망해가던 용
연사의 모습이 슬픈 마음이 솟구쳐 크게 중창을 했다고 한다. 허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는
비운을 겪었으며, 1603년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인잠(印岑)과 탄옥(坦玉), 경천(敬天)에게 명해
다시 짓도록 했다. 이때 지은 건물이 대웅전(大雄殿)을 비롯해 5동이었고 거주하는 승려는 20여
명이었다고 한다.

1650년 어느 날 저녁, 난데없이 별똥이 떨어져 대웅전과 요사가 불에 탔으며, 이듬해 일언(一彦
)과 학신(學信)이 동상실(東上室)과 서상실(西上室)을 세웠다. 1653년에는 홍묵(弘黙)이 대웅전
을, 승안(勝安)이 명부전을 세웠고, 이듬해에 일주(一珠)가 만월루(滿月樓)를 세웠으며, 1661년
까지 함허당(含虛堂)과 관정료(灌頂寮), 관음전(觀音殿), 반상료(返常寮), 명월당(明月堂), 향
로전(香爐殿), 약사전(藥師殿), 두월료(斗月寮) 등을 지었다. 또한 계속 불사를 벌여나가 18세
기 초까지 사리각(舍利閣), 천왕문, 응진전, 영류당(詠流堂), 일주문, 명부전 등이 건립되어 무
려 200칸의 규모를 지닌 대가람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이야 팔공산 동화사(桐華寺)가 대구 지역
사찰의 으뜸이지만 그때는 오히려 동화사가 용연사의 말사(末寺)였다.

1673년에는 임진왜란 때 통도사(通度寺)에서 금강산(金剛山)으로 옮긴 부처의 사리를 다시 통도
사로 가져오면서 그중 1과를 용연사에 봉안하고 사리를 담을 사리탑(舍利塔)과 석조계단(石造戒
壇)을 만들었다. 그와 관련된 내용은 1676년(숙종 2년) 권해(權瑎, 1648-1723)가 쓴 '파사교주
석가여래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 이란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1708년 사리탑을 중수했고, 1715년 찬화(粲和)가 대웅전과 여러 건물을 중수하고 단청(丹靑)을
새롭게 입혔다. 중수를 마치자 1722년 홍문관(弘文館) 교리(狡吏)인 임수간에게 청해 중수비를
세웠는데, 그 중수비에 의하면 당시에는 부속 암자로 명적암과 은적암, 보리암과 법장암이 있었
으며, 절 계곡에 용문교과 천태교 등 5개의 돌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허나 1726년 1월 불이 나
서 대웅전과 다수 건물이 소실되었고, 1728년에 중건을 했는데, 이때 법당 이름이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갈린 듯 싶다.


이렇게 대구 굴지의 사찰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용연사는 1911년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
으로 동화사의 수반말사(首班末寺)가 되면서 처지가 서로 뒤바뀌고 만다. 이후 1934년 석가사리
탑을 수리하면서 탑 주위에 석주(石柱)를 둘렀으며, 그 이후 여러 건물을 지어 지금에 이른다.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영산전과 삼성각, 안양루, 사명당 등 약 16~17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
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 보물로 지정된 석조계단과 목조아미타여래3존좌상과 복장
유물 등 보물 2점과 3층석탑과 극락전 등 지방문화재 2점을 지녔다. 그리고 부속 암자로는 은적
암(隱寂庵)과 명적암(明寂庵), 광선암(廣仙庵)을 거느리고 있다.

대구의 남쪽 지붕인 비슬산 북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틀었고,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하여 기
운 또한 청정하며, 티끌 없이 맑은 계곡이 경내를 가로지르며 청정한 기운을 돕는다. 시내와도
멀리감치 거리를 두고 있고, 산새의 지저귐과 바람의 소리가 잔잔하게 경내를 감싸며 산바람에
흥분한 풍경물고기가 그윽한 풍경소리를 베풀어 산사의 고즈넉함을 더해준다.

용연사에서 비슬산을 거쳐 유가사나 비슬산휴양림으로 내려갈 수 있으며, 정상까지는 4시간 정
도 걸린다.

※ 용연사 찾아가기 (2014년 2월 기준)
* 대구지하철 1호선 대곡역(1번 출구)에서 달성2번, 달성5번 시내버스를 탄다. 달성2번은 지선
  이 무지막지하게 많아서 반드시 용연사행(1일 8회)을 확인하고 타야 된다. 잘못탈 경우 엉뚱
  한 곳으로 강제투어를 당할 수 있다.
  달성5번은 용연사를 경유하여 현풍, 유가사(瑜伽寺)까지 다니며 1일 10회 다닌다. 또한 주말
  과 휴일에는 600번 버스 일부가 '대곡역~용연사~비슬산휴양림~유가사' 구간을 1일 10회 운행
  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 일주문에 주차장 있음, 주차비는 공짜)
① 구마고속도로 → 화원옥포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반송리 → 용연사
② 대구시내 → 화원 → 간경교에서 좌회전 (또는 화원에서 명곡지구를 거쳐 명곡로 경유) →
   반송리 → 용연사

★ 용연사 관람정보
* 입장료 : 어른 1,500원 (20인 이상 단체 1,000원) / 청소년 1,200원 (단체 800원) / 어린이
  800원 (단체 400원)
* 용연사 점심공양은 맛이 제법 좋다. 공양시간은 12~13시이며, 음력 초하루나 석가탄신일, 기
  타 절 행사가 있을 때는 연장될 수 있다.
* 용연사 관광안내소에서 문화유산해설사의 용연사 이야기를 들어보자. 2월부터 11월까지 매일
  10시부터 18시까지(겨울 17시) 근무하며, 설과 추석 연휴에는 쉰다. (근무 시간은 변동될 수
  있음)
*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882 (용연사길 260 ☎ 053-616-8846)


♠  용연사 극락전 주변 둘러보기

▲  요사채와 삼성각

경내 중앙에는 법당(法堂)인 극락전이 뜨락을 굽어보며 좌우로 삼성각과 영산전을 거느리고 있
고, 뜨락에는 3층석탑이 서 있다. 뜨락을 중심으로 극락전과 종무소, 요사채, 안양루가 포근히
감싸는 형태로 법당 하나에 탑이 하나인 이른바 1금당 1탑 형식의 가람배치를 취했다.


▲  용연사 극락전(極樂殿) - 대구 지방유형문화재 41호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653년에 지어졌다. 1726년 화재로 무너진 것
을 1728년에 중건했는데, 이때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간판이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규모는 그리 크진 않지만 좌우로 반토막 크기의 영산전과 삼성각을 거느리고 있어 중심 건물로
서의 기품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건물의 가운데 어칸을 협칸보다 넓게 잡았으며, 불단 위에는
보개(寶蓋)를 얹히고 전면에 운각과 용을 장식해 아름다움을 끌어올렸다. 


▲  극락전 목조아미타여래3존좌상 - 보물 1813호

극락전 불단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
현보살(普賢菩薩)을 거느리며 아미타3존불을 이룬다. 이들은 1655년에 당시 유명한 조각승이던
도우(道祐)가 만든 것으로 근래에 아미타불 뱃속에서 후령통과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 복장전
적(腹臟典籍) 등 발원문 8점과 후령통 3점이 쏟아져 나왔다.
조성발원문을 통해 불상 조성 시기와 조성 주체, 제작자 등이 속시원히 밝혀져 17세기 불상 연
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1762년에 작성된 중수개금기까지 딸려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올해(2014년) 1월 20일 아미타불과 복장유물이 한 덩어리로 국가지정 보물 1813호로 단
번에 승진되었다.
 
보물의 지위를 누린 아미타불과 좌우 보살의 표정에는 자비로움이 가득하여 속세살이에 지친 중
생을 위로하며 그들 뒤에는 1777년에 제작된 영산회상도가 병풍처럼 자리한다.


▲  용연사 3층석탑 - 대구 지방문화재자료 28호

극락전 뜨락에 서 있는 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고려시대 탑
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옥개석 받침이 4단인 것과 옥개 낙수면이 짧고 추녀가 얇
은데 반해 받침이 높은 형식으로 이들을 통해 신라 탑에서 변질된 고려 탑으로 여겨진다.
탑 높이는 3.2m로 근래에 보수를 벌여 깨지거나 부실한 부분을 보충했으며, 장대한 세월의 때가
곳곳에 역력하다.


▲  빛바랜 목조 구시

극락전 곁에는 나무로 만든 길쭉한 목조 구시가 누워있다. 이 구시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나무
통으로 쌀을 담거나 법회나 행사 때 공양용으로 쓰였는데, 왕년에는 거의 100명 분의 밥을 담았
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밥 대신 먼지만 가득하니 사람이든 물건이든 뒷전
으로 밀려난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없다. 구시의 체면도 살려줄 겸, 그를 깨끗히 손질하여
옛날 공양 체험 이벤트를 벌여보는 것은 어떨까?


▲  삼성각 밑에 누운 두꺼비상의 위엄
조각 수법이 아까 전 악어상과 비슷하다. 아마도 악어상을 기증한 신도가
악어와 같이 넘긴 것으로 여겨지는데, 확실한 것은 모르겠다.


▲  선열당(禪悅堂)이라 불리는 요사(寮舍) 정면
승려와 신도들의 생활공간으로 공양간과 넓은 방을 갖추고 있다.
점심공양은 요사 뒤쪽 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  종무소(宗務所)로 쓰이는 심검당(尋劍堂)

▲  용연사 영산전(靈山殿)
극락전 우측에 자리한 영산전은 석가3존불과 16나한의 보금자리로 근래에 지어졌다.

▲  영산전 석가3존불
석가불을 중심으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좌우를 협시한다.

▲  극락전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우리에게도 무척 친숙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에 봉안된 그림들
오른쪽부터 산신할배의 산신탱, 등장 인물이 무지 많은 칠성탱, 독성할배의
느긋함이 돋보이는 독성탱


♠  용연사 명부전 주변, 그리고 점심공양

▲  요사에서 명부전으로 넘어가는 불이문(不二門)

용연사는 중심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석조계단 등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 구역
이 한 덩어리로 몰려있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명부전 구역은 경내
의 중심인 극락전 구역 남쪽에 있는데 요사 옆구리와 불이문을 지나 청운교(靑雲橋)란 다리를
건너면 바로 나온다. 이 구역에는 명부전과 사명당, 독산각이 자리해 있다.


▲  불이문에서 바라본 명부전 구역
명부전을 비롯한 건물 3동이 조촐하게 구역을 이룬다.

▲  용연사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시왕(十王), 판관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
어 있다. 처마 밑에는 어느 갑술년(甲戌年)에 쓰인 공덕기(功德記)와 관음계(觀音契) 현판이 걸
려 있다.


▲  명부전 지장보살상
온화한 미소를 드리우며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헌신하는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시립해 나란히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  문을 꽁꽁 걸어잠군 사명당(四溟堂)

명부전 곁에 높이 축대를 쌓고 황토색 담장을 걸치며 들어앉은 사명당은 절의 가장 어른인 주지
승이 머무는 주지실이다. 원래는 관음전(觀音殿)이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이후 절 중창을 지시
한 사명대사(四溟大師)를 기리고자 사명당이라 했다. 사명당 곁에는 독산각(獨山閣)이라 불리는
작은 건물이 있으며, 이들 건물은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  명부전에서 바라본 청운교와 요사채

명부전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극락전으로 나왔다. 시간은 어언 13시, 1시간 가까이 경내를 방황
하니 시장기가 가득 피어올라 나를 괴롭힌다. 경내에는 적막한 산사의 이미지를 지키듯,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공양간이 있는 요사 뒤쪽으로 들어가니 그 안은 사람들(아줌마와 할머니가
대부분)로 북새통을 이루어 썰렁한 바깥과 완전 대조를 보인다. 그 시간 절에 발을 들인 사람들
2/3 이상이 요사에 있었다고 보면 될 듯 싶다.

점심시간은 13시까지인데, 사람들이 많아 아직도 공양(供養)을 제공하고 있었다. 요사로 들어가
일반인도 공양이 가능한가 물으니 당연히 그렇다며 한숟가락 들고 가라고 그런다. 그래서 기쁜
표정을 띄며 신발을 벗고 요사로 들어가 공양 행렬에 동참했다. 약간 붉은 양파를 비롯한 갖은
채소가 버무려진 그릇에 주걱으로 밥을 담아주는데, 많이 달라고 청하니 2주걱을 더 준다.
밥과 함께 숭늉 1그릇과 떡을 하나씩 거머쥐고 마땅한 자리를 찾았으나 사람들로 미어터져 두
다리를 편히 할 자리가 마땅치가 않았다. 간신히 좁게나마 자리가 하나 생겨 그곳에 낑겨 앉아
열심히 점심 공양에 임했다.


▲  용연사 점심공양의 위엄

공양밥은 다양한 나물이 버무려진 비빔밥이다. 붉은 양파와 콩나물, 시금치, 고사리 등의 나물
이 흰쌀밥과 고추장과 조화를 이루며 어엿한 비빔밥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용연사 공양밥은 공양간 아줌마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담겨 제법 맛이 좋았다. 지금까지 섭취한
공양밥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치켜세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반대로 공양밥 최악의 종
결자는 여기서도 그리 멀지 않은 경산 갓바위(선본사) 공양이었다. 절 나들이에서 공양을 하는
재미만큼 쏠쏠한 것은 없지만 안타깝게도 중생들에게 널리 공양을 펼치는 절이 그리 많지 않다.

밥그릇을 아주 깨끗히 비우고, 숭늉과 떡을 먹고 나니 포만감의 행복과 식곤증이 나를 감싸고
돈다. 그렇게 공양을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5분 정도 머물렀으나 계속해서 사람들이 밀려들어
와 자리를 내주고 방을 나섰다. 동화사나 갓바위처럼 그렇게까지 유명한 절도 아닌데 사람(특히
신도들)이 많은 걸 보아 오늘이 무슨 날인가 싶어 문의를 하니 음력 초하루라고 그런다.
자리를 뜨면서 공양할 때 발견하지 못한 된장국을 1그릇 섭취하고 숭늉도 2그릇이나 더 마신 다
음 내가 먹은 그릇을 목욕시키고 밖으로 나왔다.


♠  용연사 석조계단, 적멸보궁

▲  적멸보궁 입구

▲  적멸보궁으로 인도하는 계단

기분 좋게 점심공양을 마치고 용연사의 나머지 부분인 석조계단(적멸보궁)으로 이동했다. 적멸
보궁 입구에는 일주문을 닮은 문이 서 있는데 '비슬산 용연사 적멸보궁(琵瑟山 龍淵寺 寂滅寶宮
)'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문을 지나 잘 다듬어진 계단을 한발짝씩 오르면 초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적멸보궁과 비슬
산으로 갈린다. 초소를 지나니 아까 문화유산 해설사(이하 해설사) 아저씨가 초소에서 나와 구
경 잘했냐고 묻는다. 갑작스런 그의 등장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금세 표정을 바로 하고 잘 둘러
봤다고 답을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주마간산처럼 보고 가는데 반해 1시간 이상 꼼꼼히 본
것 같다며 칭찬의 말을 건네면서 적멸보궁을 안내해주겠다고 그런다. 그래서 그를 따라 적멸보
궁으로 들어갔다.

▲  용연사 주변을 정비한 기념으로 세운 정비불사공덕비(整備佛事功德碑)

▲  시원스런 지붕의 적멸보궁 정문 -
누각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  적멸보궁(寂滅寶宮)

용연사 3대 구역의 하나인 금강계단 구역은 높이 축대를 쌓아 그 위에 적멸보궁과 향로전을 두
고 가장 높은 뒷쪽에 자리를 다져 석조계단과 사리탑을 세웠다.

석조계단을 가리고 선 적멸보궁(이하 보궁)은 극락전에 버금가는 지체 높은 건물로 보통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 앞에 둔다. 사리탑에 불사리(佛舍利)가 있으므로 적멸보궁 불단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그냥 빈 자리로 둔다. 살짝 휘어진 2개의 활주가 지붕 추녀를 받들고 있
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덩어리가 매우 섬세하다. 보궁 어칸(가운데 칸) 앞에는 돌계단이 놓여
있는데, 그 계단은 법회(法會) 때 절의 고참 승려만 이용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계단 외에는 보
궁으로 접근하는 계단이 쉽게 보이질 않아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무심코 그 계단을 오르
락거린다. 허나 건물 양쪽에 보궁으로 가는 계단이 있으니 가운데 계단을 오르는 실례는 범하지
않도록 한다. 물론 제지하는 사람도 없고 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에 가면 어디 법을
지키라는 명언처럼 예의는 되도록 지키는 것이 좋다.


▲  적멸보궁 내부
불단에는 불상이 없고, 대신 뒤에 유리창을 내어 석조계단과 사리탑이 보이게끔 했다.

▲  적멸보궁 곁을 지키는 향로전(香爐殿)
적멸보궁을 관리하는 건물로 승려의 거처로 쓰인다.

▲  적멸보궁 좌우에 자리한 조그만 건물들

적멸보궁 좌우에는 고작 1칸에 불과한 조그만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이들 건물은 따로 이름이
없다고 하며, 사리탑과 석조계단을 관리하던 승려의 숙소나 예불을 하던 공간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굳게 문을 봉한 채, 적멸보궁의 좌우를 호위한다.


▲  용연사 석조계단(石造戒壇) - 보물 539호

적멸보궁 뒤에는 용연사의 상징인 석조계단이 자리해 있다.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고도 하며,
네모난 기단에 석종형(石鐘形) 사리탑을 심어 부처의 불사리를 봉안했다. 계단(戒壇)은 흔히 말
하는 오르락 내리락 계단이 아닌 수계의식(受戒儀式)을 거행하던 곳으로 통도사(通度寺) 금강계
단이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통도사 사리탑을 파괴하자 사명대사가 사리를 수습하여 금강산으로 가져가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에게 어찌하면 좋을 지를 문의했다. 서산은 본래 있던 곳에 마땅히
되돌려 줘야 한다고 답을 하니, 사리함 하나는 통도사에 두고 만약을 위해 다른 하나는 제자 선
화(禪和)에게 주어 태백산 보현사(어딘지??)에 봉안토록 했다. 허나 그때는 아직 경상도 지방이
안정되지 못했고, 선조(宣祖)의 명으로 왜열도(倭列島)에 사신으로 가게 되면서 사리를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임시로 두었다.
그 이후 사명이 입적하자 제자 청진(淸振)이 각림사에 봉안한 사리함을 용연사로 가져와 모시면
서 신도들과 상의하여 사리탑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서산과 사명의 뜻을 모두 받들어 사리 2과
중 1과를 통도사로 보내고 1과만 용연사 북쪽에 봉안했으며, 사리탑은 1673년에 완성되었다.

이 탑은 2단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큼직한 네모난 괴임돌을 놓고 그 위에 얇은 원형 괴임돌을
2개 포개 석종형 사리탑을 올렸다. 사리탑은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넓어졌다가 중간을 지
나면서 좁아지는 것이 영락없이 범종을 닮았는데, 탑 윗부분에는 구슬 무늬를 1줄로 두르고 겹
으로 된 연꽃 무늬 위에 꽃받침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새겼다. 2단의 기단 중 윗층은 두툼한
갑석 아래 사방으로 귀기둥을 세우고 각면 가운데에 탱주를 새겨 4면을 8칸으로 나눈 뒤, 칸마
다 팔부신장(八部神將)을 새겼다. 아래 기단은 아무런 무늬도 없는 장대석으로 마감했다.

기단 네 모서리에는 원래 사천왕상이 있었으나 여러 차례 도난을 당해 지금은 경내 깊숙한 곳에
보관하고 있다고 하며, 기단 주변으로 12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8각으로 깎은 돌을 그 중간에 끼
워 연결했다. 난간에 쇠창살을 꽂은 것은 1934년에 탑을 보호하고자 설치했으나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계단 앞에는 상석(床石)을 두었고, 그 옆에 조금 비뚤어진 석등(石燈)은 계단에 난간을 달았을
때 같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계단 주변에는 황토 담장을 둘렀고, 계단의 보호를 위해 계단
앞쪽에 보호철책을 두르면서 접근이 어렵게 되었다. (석가탄신일에만 개방한다고 함)

이곳 계단은 통도사 금강계단, 금산사 방등계단(方等戒壇)과 더불어 이 땅의 대표적인 계단으로
꼽히며, 계단에 얽힌 이야기처럼 정말 사리가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다. 수 차례 도굴 시도가
있었다고 하니 도굴이 되었을 가능성도 제법 있다고 한다.


▲  석조계단의 내력이 소상히 적힌 석조계단비 - 비석 이름은
'사바교주 석가여래 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이다.

▲  적멸보궁 부근에 터를 닦은 승탑 형제들

향로전 뒤쪽 담장 너머에 조선 후기 승탑 7기가 1열로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들은 죄다
석종 스타일로 별도로 비석 2기가 서 있는데, 하나는 송파 각민(松坡覺敏, 1596~1675), 다른 하
나는 동운 혜원(東雲慧遠, 1637~1702)의 비석이다. 승탑의 주인이나 승탑 이름에 대해서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으며, 여기서 서쪽으로 300m 떨어진 산자락에도 조선 후기 승탑 5기가 숨겨져
있다.

적멸보궁과 석조계단을 둘러보면서 해설사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궁금한 것은 정말 은하
계에 널린 별만큼이나 많은데 정작 질문 거리가 생각이 안난다. 머릿 속에서 간신히 질문 거리
를 긁어내어 물어보면서 의문 거리를 일부나마 해소했으나 머리가 장식용이라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해설사는 제법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초청 강연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통
도사에서 해설사를 하다가 용연사로 넘어왔는데 각 절마다 익혀야 될 내용이 너무 많아서 힘들
다고 한다. 간신히 용연사의 모든 것을 꿰었는데. 다른 절로 근무지가 바뀌면 그 절에 대해 처
음부터 공부를 해야 된다. 또한 관람객들이 대충 둘러보고 가는 게 다반사라 너무 사물을 볼 줄
모른다며 따끔한 충고도 건넨다. 상황이 이러니 질문을 건네는 사람도 거의 없을 정도이며, 이
렇게 자신을 귀찮게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의 나이는 50대 후반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대구시티투어버스가 들어왔다. 가이드 2명이 양이(洋夷) 여자 관광
객 2명을 데리고 와서 석조계단을 구경시켜주고 해설사와 인사를 하며 시내로 나갔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더 머물러 많은 가르침을 받고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한다. 이곳에
발을 들인지 벌써 4시간이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2시간 남짓 있다 갈려고 했는데, 시간
도 참 빠르다. 게다가 부산(釜山)에도 늦지 않게 들어가야 되는 터라 슬슬 떠날 채비를 했다.
속세로 나가는 버스가 20분 뒤에 있길래 매표소 밑 주차장까지 가려고 했으나 마침 해설사와 안
면이 있는 신도 아줌마 3명이 수레를 끌고 속세로 나가려고 하자 해설사가 그들에게 나를 태워
달라고 부탁을 넣으면서 그들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이렇게 짧지만 용연사와 해설사와 작별을
고하고 아비규환의 속세로 나갔다.

나를 태워준 아줌마 신도는 모두 대구 사람<1명은 인천 사람으로 대구로 시집 왔음>이다. 수레
를 끌고 온 아줌마는 시지동에서 왔는데, 그들은 절에서 가져온 고사떡과 사과를 나에게도 아낌
없이 나눠주었다.
화원으로 나와서 아줌마 2명과 작별을 고하고 인천 출신 아줌마 신도와 대구시내버스 655번을
타고 대곡역에서 지하철 1호선으로 환승하여 칠성역에서 나머지 작별을 고했다.

이날은 원래 팔공산 부인사(夫人寺)를 가려고 했으나 교통이 좋지 못해 용연사로 바꿨다. 허나
용연사에서 맛있는 점심공양도 먹고 해설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궁금했던 부분을 해소했으며(해
소하면 뭐하나? 다 까먹는데) 아줌마 신도의 도움으로 쉽게 속세로 나왔고, 그들에게 떡과 사과
를 나눠 받는 등, 푸짐한 인심을 느꼈다. 부인사로 갔으면 아마도 이런 것을 누리진 못했을 것
이다. 용연사로 가게 된 것도 다 이런 인연들과 만나고 많은 것을 배우라는 하늘의 지극한 뜻이
었던 것 같다.
용연사에게 나는 잠깐 스치고 사라지는 존재이고, 내 입장에서도 용연사는 1번 아니면 2번 정도
스치는 그런 장소이지만, 지금까지의 사찰 나들이 가운데 제법 인상과 정이 깊었으며, 여러 좋
은 경험과 넉넉한 인심을 체험했던 것 같다. 용연사에서 겪은 그 추억과 인연을 고이 간직하며
다음의 인연을 애타게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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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2월 2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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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 봉국사

* 정릉 봉국사 - 북한산 남쪽 정릉동에 자리한 봉국사는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가 창건하여 약사사라 했다고 전한다.

조선 현종 때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복원하고

다시 제를 지냄으로써 인근 경국사와 함께 정릉의 원찰로 삼았는데,

이때 봉국사로 이름을 갈았다.

 

* 벼랑에 자리한 독성각

* 천불전과 성북구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된 느티나무

 

* 봉국사의 법당인 만월보전 - 조선 후기 약사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 범종루와 천왕문 (2층은 범종루, 1층은 천왕문)

 

 

* 일주문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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