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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2.01 서울 도심에 숨겨진 달달한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옥류정, 명륜동 장면가옥) 1
  2. 2018.03.08 대학로의 뒷골목을 거닐다. 명륜동 골목 산책 ~~~ (장면 가옥, 북묘 하마비, 흥덕사터, 우암 송시열집터) 4

서울 도심에 숨겨진 달달한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옥류정, 명륜동 장면가옥)

창덕궁 후원 뒷길, 명륜동 장면 가옥



' 서울 도심의 숨겨진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
(후원 돌담길, 명륜동 장면 가옥)
창덕궁 후원 돌담
▲  창덕궁 후원 돌담
 



 

사계절 풍경 중의 오색 단풍이 천하를 곱게 물들이는 늦가을 풍경이 단연 으뜸이 아닐까
싶다. 이런 늦가을은 하루하루를 그냥 흘려보내기가 너무 아까워 틈이 날 때마다 카메라
를 들고 서울 곳곳을 누비며 뒤안길로 꽁무니를 빼려는 늦가을 풍경을 붙잡는다.
그렇게 뛰어다닌 곳 중에는 나의 즐겨찾기인 북촌(北村)과 서촌(웃대), 은행나무 명소인
성균관(成均館), 그리고 북촌과 성균관을 빠르게 이어주는 창덕궁 후원 뒷길도 있었다.

북촌(북촌한옥마을)은 이미 200번을 넘게 발걸음을 한 곳이지만 복습의 즐거움이 대단하
여 그날 땡기는 곳을 여럿 둘러보고 취운정(翠雲亭)터 주변 감사원로터리에서 동쪽 길로
들어선다. 그 길이 고려사이버대학교 정문 겸 중앙중고등학교 후문으로 차단봉이 내려앉
은 주차장 정산소 직전에 시야가 확트인 조망대가 있다.
그곳은 중앙중학교 바로 뒷쪽(서쪽) 벼랑으로 여기서는 바로 앞에 중앙중고를 비롯해 창
덕궁과 종로구, 중구 지역이 훤히 두 눈에 바라보인다.


▲  창덕궁 후원 뒷길, 중앙중고 뒷쪽으로 이어지는 길 (주차장 정산소)

도로에 차단봉이 설치되어 있고, 얼핏 봐도 길이 막혀 보여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길을 돌리고 싶은 충동이 생길 수 있다. 허나 그것이 이곳의 함정,
차단봉은 고려사이버대학과 중앙중고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차량들의 주차비 징수를 위한
것이라 뚜벅이들은 전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며 길은 성균관대까지 이어져 있으니 걱정
은 곱게 접어 하늘로 날려보내기 바란다.


▲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뒷쪽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 옥상이 중앙중학교이다. 옥상 오른쪽 너머로 보이는 근대 건축물
은 중앙고등학교 건물이며, 푸른 잔디가 입혀진 운동장 너머로 펼쳐진 너른 숲은 창덕궁
이다. 그런 창덕궁과 중앙중고교 너머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인 서울의 심장부, 종로구와
중구 지역이 시야에 잡힌다.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 ~
창덕궁(昌德宮)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  중앙중고 후문

주차장 정산소를 지나면 고려사이버대학교와 중앙중고로 내려가는 길(후문)이 나온다. 이들은
모두 고려대 계열로 중앙고교 북쪽에 새롭게 중앙중학교를 만들고 그 뒷쪽 언덕에 고려사이버
대학교를 만들면서 중/고/사이버대학이 한 자리에 있게 되었다.

중앙중고를 놔두고 계속 직진하면 길은 서서히 경사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기와가 얹혀진 창
덕궁 돌담이 궁궐 돌담의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며 오른쪽으로 따라붙는다. 이 돌담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나란히 제 갈 길을 가는데, 동쪽으로 갈수록 돌담의 해발
높이도 높아진다. 또한 돌담 너머로 삼삼하게 우거진 창덕궁 후원이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면
서 도심의 속된 기운을 정화시킨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고려사이버대학 북쪽)를 지나면 길이 얼핏 끊긴 듯 보여 '넘어가는 길이
과연 있을까??'
주저하게 된다. 허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길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
이다.


▲  층층이 이어진 창덕궁 후원 돌담 ▼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궐 후원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는 창덕궁 후원을 속세로부터 열심히
가리고자 지형을 이용하여 높이 돌담을 둘렀다. 지형이 낮은 곳은 돌담 너머로 후원의 속살이
일부 보이기도 하나 보이는 것은 그저 숲밖에 없다. 참으로 고약했던 왜정(倭政)에 의해 고의
적으로 비원(秘苑)이라 놀림을 받았던 창덕궁 후원, 그는 후원<또는 금원(禁苑), 북원(北苑)>
이지 절대 비원이 아니다.


▲  북악산(백악산)의 물을 받아들이는 후원 수구문(水口門)

창덕궁 후원에는 연못이 참 많다. 그 연못을 살찌우는 물은 바로 북악산(백악산)이 베푼 것으
로 그가 내린 물이 이 수구문을 거쳐 후원으로 들어가 후원 곳곳에 물을 공급한다.


▲  늦가을에 잠긴 후원 뒷길 (너른 공터 직전)

▲  후원 뒷길의 전환점(너른 공터) - 여기서부터 좁은 산길로 변한다.

포장길로 된 뒷길은 고개 정상부 너른 공터에서 끝이 난다. 여기서 길은 산길로 180도 돌변하
며, 차량은 더 이상 바퀴를 들일 수 없다.
너른 공터를 지나면 근래 지은 나무데크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길은 2개로 갈리
는데, 오른쪽은 후원 돌담을 따라 성균관대 내부로 이어지며, 왼쪽은 옥류정과 성대후문 마을
버스 종점으로 이어진다.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은 북촌 권역에서 성균관대, 대학로를 빠르게 이어주는 도심의
상큼한 뒷길로 아는 이가 거의 없어 사람들의 왕래가 적고 한적해서 좋다. 하여 내가 좋아하
는 길의 하나이기도 한데 다만 가로등 시설이 부족하여 햇님이 퇴근한 이후에는 꽤 어둑어둑
하니 통행에 조금 주의가 필요하다.


▲  나무데크 계단길 - 너른 공터를 지나 저 계단을 오르면 된다.
(어차피 오르는 길도 하나 밖에 없음)

▲  옥류정으로 향하는 짧은 산길과 계곡

옥류정으로 인도하는 짧은 산길은 경사가 느긋하다. 그 옆에는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조그만
계곡이 있는데, 그는 북악산(백악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로 적지 않게 인공이 가해진 점이 다
소 옥의 티이다.


▲  옥류정 산길과 계곡

▲  현대적 정자 스타일로 지어진 옥류정(玉流亭)

맑은 물이 흐른다는 뜻의 옥류정, 그 어여쁜 이름 마냥 후원 뒷쪽에 숨겨진 늙은 경승지로 착
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1956년에 지어진 8각형 모습의 현대식 정자(亭子)이다. 그래도 후원 뒤
쪽에 자리한 위치상 내가 알지 못하는 오래된 사연을 머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런 것은 없
었다. 위치와 정자의 이름이 나그네의 마음을 잠시 설레게 만든 것이다.

이곳은 북악산(백악산) 와룡고개(와룡산) 밑으로 바로 동쪽 언덕에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이
있으며, 북쪽 높은 곳에는 와룡공원길이 흘러간다. 북악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옥류정에서 잠
시 묻혔다가 남쪽 연못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옥류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은 북악
산의 맑은 계곡이 옆구리에 흘러서 붙여진 이름 같기도 하고, 계곡이 후원 옥류천(玉流川)과
도 살짝 이어져있어 그렇게 붙여진 것 같기도 하다. 정자 정면에는 푸른 색깔의 옥류정 현판
이 걸려있는데, 글씨에 생명을 단단히 불어넣은 듯, 아주 명필급이다.

옥류정은 숲에 둘러싸인 구석이라 늘 그늘이 머물고 있으며, 주변 경치는 좋지만 와룡고개가
바로 뒷쪽이라 차량들의 굉음이 수시로 두 귀를 때린다. 그래도 숲바람과 산바람이 교차하는
곳이라 한여름에는 더위를 잊기에 좋다. (정자 동쪽에 성대후문 종점으로 가는 길이 있음)


▲  계곡을 막아서 만든 옥류정 연못

옥류정 앞에는 북악산 물을 머금은 조그만 연못이 닦여져 있다. 2015년에 조성된 것으로 옥류
정에서 잠시 묻힌 계곡은 여기서 다시 속살을 드러내며 졸졸졸~♪ 밑으로 흘러가는데 연못 주
변에는 나무에게 버림 받은 나뭇잎들이 낙엽이란 우울한 존재가 되어 귀를 접고 쓸쓸히 누워
들 있다. 연못은 바로 그들의 인생을 처리해주는 블랙홀인 모양이다.


▲  옥류정에서 창덕궁 후원 뒷길로 내려가는 길
이렇게 보니 정말 첩첩한 산주름 속에 깊숙하게 묻힌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서울 도심 한복판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  다시 창덕궁 후원 뒷길로 (직진하면 돌담길, 중간에 왼쪽으로 가면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 오른쪽은 중앙중고와 북촌 방향)

▲  창덕궁 후원 돌담길 (돌담과 만나기 10m 전)

창덕궁 후원 뒷길은 중앙중고 후문(고려사이버대학교)에서 후원 뒷쪽 돌담길을 따라 성균관대
로 이어지는 1리 남짓의 짧은 고갯길이다. 이곳은 감사원에서 성북동(城北洞)을 이어주는 와
룡고개(와룡공원) 밑부분인데, 봄과 늦가을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달달하게 그려진 수채화처
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돌담 너머로 후원의 청정한 숲이 펼쳐져 있고 돌
담길 주변 역시 나무들이 가득하니 그 아름다움의 농도는 더욱 짙어질 수 밖에 없다.


▲  후원 뒷길 고개
이곳은 창덕궁 후원의 가장 최북단이자 제일 높은 곳으로 여기서는
돌담을 손으로 더듬으며 갈 수 있다.

▲  후원 뒷길 고개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창덕궁의 뒷통수인 후원 뒷길 고개는 돌담 바로 옆구리라 돌담을 만지면서 갈 수 있다. 그 고
개를 넘으면 급하게 펼쳐진 울퉁불퉁한 산길이 나오고, 돌담 너머로 도심의 허파인 창덕궁 후
원이 속살을 비춘다. 숲 너머 동쪽에는 바로 성균관대 건물이 보이는데, 그 산길을 내려가면
돌담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성균관대 서쪽 부분인 법학관과 주차장, 대운동장에 이른다.
서울에 있는 궁궐 돌담길 중 가장 호젓하고 담백한 길을 꼽으라면 나는 이곳을 추천하고 싶다
. 그만큼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길이다.


▲  성균관대로 내려가는 후원 뒷길
산길을 넘어서 들어간 대학교는 이곳이 처음이다. 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성대 교정으로 따로 문이나 철조망은 없다. 그냥 들어가면 된다.

▲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 평탄한 길이 부드럽게 펼쳐진다.
이곳은 성균관대에서 '사유(思惟)의 길'로 삼고 있다.

▲  창덕궁 후원 뒷길의 동쪽 '사유의 길'

후원 뒷길이 숲이 삼삼하다보니 성균관대에서 뒷길의 교내 구간을 '사유의 길'로 삼았다. 번
잡함이 크게 덜한 후원 숲길에서 책도 보고 명상도 즐기며 속세(俗世)의 온갖 유혹에 취약한
자신의 머리와 정신을 가다듬으라는 뜻으로 보면 될 것이다.
사유의 길이란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숲도 짙고 산바람도 그윽하여 옛날 선비들 같았으면 공
부를 한다며 정자 하나를 짓고도 남았을 것이다.


▲  성대로 넘어온 후원 돌담 (돌담 안쪽은 창덕궁 후원)

▲  잊혀진 제국의 궁궐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후원 돌담

▲  후원 뒷길을 마무리 짓다.

창덕궁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가리고 있는 후원 돌담은 새로 손질한 부분이 여기저기 있어 옛
날 것과 어색한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 적지 않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후원 북부는 후원 특별 관람 때나 들어갈 수 있는 아주 비싼 곳으로 대운
동장 주차장에서 후원의 북쪽을 이루고 있는 태극정(太極亭) 구역이 시야에 들어오고,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도 가까이에 바라보인다.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에 이르면 지금까지 사각사각 밟고 지나간 흙길과 바위길이 밋밋한 포장
길로 바뀌며, 후원 돌담과도 바다 너머의 섬을 보듯 멀어져 간다. 게다가 주차장부터 학교 돌
담과 철책이 생기면서 둘 사이에 깊숙한 틈이 생기는데, 이는 성균관대가 교내를 넓히면서 후
원 돌담보다 높게 또는 비슷한 높이로 터를 다지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다.
비슷한 높이인 경우에는 후원 돌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돌담의 북쪽 언덕을 끊어 멀리서 보
게끔 했으며, 둘 사이에 생긴 틈은 마치 휴전선이나 성곽(城郭) 주위에 두룬 해자를 보는 듯
하다.


▲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北墻門)

북장문은 후원 북쪽에서 유일하게 속세와 이어지는 문으로 보통 궁궐의 문은 암문(暗門)이라
할지라도 팔작지붕을 얹혀 문의 형식을 갖추는데 반해 이곳은 여닫는 문짝을 만든 것이 고작
이다.

북장문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막바지 현장으로 정변 3일 째(양력 1884년 12월 6일)에 창덕
궁에서 고종(高宗)을 호위하며 머물던 개화당(開化黨) 패거리와 왜군은 명성황후(明成皇后)가
급히 소환한 청군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후원을 거쳐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왜국공사는 꼬랑지를 내리며 군사를 이끌고 급히 후원 뒷길로 도망쳤고, 김옥균(金玉均)과 박
영효(朴泳孝), 서재필(徐載弼)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들을 따라갔다. 단 홍영식(洪英植)과
박영교, 그들을 따르는 군인 7명은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北廟)로 들어갔으나 결국 청군에게
살해되고 만다.

* 창덕궁 후원 뒷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명륜동/와룡동



 

♠  현대사의 살아있는 현장, 명륜동 장면(張勉) 가옥
- 국가 등록문화재 357호

▲  장면 가옥 외경

명륜동(明倫洞)에 자리한 장면 가옥(장면총리가옥)은 서울에 서려있는 현대사의 주요 현장의
하나이다. 바로 제1,2공화국 시절 정치/외교가로 활동했던 장면(장면 총리, 장면 박사라고 많
이 불림)이 살던 집으로 속세의 때가 조금씩 묻어가던 고등학교 시절 4.19와 한 덩어리로 국
사 관련 시험에 단골로 등장했던 인물인데, 이름도 참 외우기 쉽다. 그래도 익히기가 어렵다
면 대중 음식의 하나인 짜장면이나 영화의 한 장면이란 식으로 외우면 연상도 쉽게 된다.

이 집은 장면이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 시절에 지은 것으로 건축가 김정희가 한옥과 양옥의
장점, 그리고 약간의 왜식(倭式)까지 절충하여 지은 개량 한옥의 일종이다. 1930~40년대 서울
중산층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서울 종로구에서 인수하여 가옥 손질을 거쳐 2012
년 12월 실외가 우선 개방되었다.
이후 건물 내부를 손질하고 장면의 유물 중 괜찮은 것을 선별하여 2013년 4월 19일 사랑채와
안채 내부가 장면기념관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날짜를 4월 19일로 잡은 것은 이승
만의 자유당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4.19혁명과 장면의 정치 개혁 의지를 기리
고자 함이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 관람료 없음)


▲  활짝 열린 장면 가옥 대문


▲  경호원동과 나무 1그루


▲  장면의 흉상(胸像)
▼  안채 동쪽에 자리한 장식용 장독대

돌로 1m 높이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다져 들어앉은 장면 가옥은 안채(92.56㎡)를 중심
으로 사랑채(56.2㎡)와 경호원실(9.92㎡), 수행원실(6.61㎡) 등 4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고위관료까지 지낸 사람이라 집이 좀 클 줄 알았더니만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촐해 졸
부들의 고래등 저택에 비해 거부감도 별로 없고 정감도 많이 간다. <같은 시대를 누볐던 자유
당의 우두머리 이기붕(李起鵬)의 집은 저택이었음>
가옥을 둘러싼 담장은 남쪽과 서쪽은 하얀 피부, 동쪽은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담장
의 높이는 2m 정도이다. 가옥 서쪽에는 키다리 빌라가 자리해 가옥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동
쪽에는 2차선 길인 혜화로가 나있다.

가옥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대문은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문으로 개방시간에 한해
문짝 하나를 열어둔다. 문의 높이는 담장만큼 낮으며, 문 우측 기둥에는 주소가 쓰인 패가 있
고, 좌측 기둥에는 집주인의 이름이 적힌 명패가 이 집의 주인을 알려준다. 명패에는 5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옛 주인 장면의 이름 2자가 한자로 쓰여 있어 문을 두드리면 (초인종은 없
음) 그 장면이 스르륵 달려 나와 우리를 맞이해줄 것 같은 기분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담장이 집 안채를 가리며 길을 막아 서는데, 여기서 가족과 친척, 친분
이 두터운 사람들은 왼쪽으로, 언론기자와 기타 손님은 오른쪽으로 갔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사랑채에 딸린 대기실이 나오며,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옆칸에 있는 응접실에서 장면을 접견
했다.
대문에서 왼쪽으로 가면 조그만 경호원동과 앞마당으로 이어진다. 경호원동은 장면의 경호원
들이 대기하던 공간으로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안에 3㎡ 정도의 좁은 지하가 있다. 현재는
이곳을 지키는 관리인이 머물고 있으며, 건물 우측에는 2012년에 조성된 장면의 흉상이 서 있
고, 좌측에는 장면이 심었다고 전하는 높이 7~8m의 작은 나무 1그루가 주인이 가고 없는 집뜨
락에 조촐히 그늘을 드리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장면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운석 장면(雲石 張勉. 1899~1966)의 간략한 생애
장면은 옥산(玉山) 장씨로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에서 장기빈(張箕彬)의 맏아들로 태
어났다. 장기빈은 왜정 때 부산세관장을 지낸 관리로 집안 살림은 넉넉한 편이었다.
8살에 인천성당이 운영하는 박문학교(博文學校)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배웠고, 1917년에 수
원고등농림학교(서울대 농생대의 전신)를 졸업, 1919년 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학과를 수석
으로 마쳤다.
이후 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자격으로 미국 맨해튼 카톨릭대 문과에 들어가 1925년에 졸업했으
며, 로마교황청에서 열린 '한국79위 순교복자 시복식(諡福式)'에 참석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근무하다가 동성상업학교에 들어가 교편을 잡았고, 1936년 그곳의 교장
이 되었다. 또한 계성학교의 교장까지 겸임해 1945년까지 교육계에서 일했고, 천주교청년회연
합회 회장이 되어 '구도자의 길','조선천주공교회약사' 등을 출간했다.

해방이 되자 1946년 정계에 진출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과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했으
며, 우익의 일원이 되어 좌익세력과 싸웠다. 또한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정책 수립 등의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48년 서울 종로을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고, 그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
에 조병옥(趙炳玉)과 함께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특사로 로마교황청을 방문했고 귀국 길에 미국 맨
해튼대학에 들려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가 되어 2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으며, 6.25전쟁이 터지자 미국을 설
득해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1951년 국무총리로 임명되면서 귀국했으나 바로 이듬해 물
러났으며, 야당의 일원이 되어 이승만/이기붕의 자유당(自由黨) 독재정권과 싸우기 시작했다.
1955년 신익희(申翼熙), 조병옥과 민주당을 결성해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6년 대선 때 신익
희가 대통령 후보에, 장면이 부통령(副統領) 후보로 나가 정권교체를 노렸다. 이때 자유당은
8년 이상 대통령을 해먹고 있는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야망이 쓸데없이 높던 이
기붕이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백성들의 지지에 힘입어 열심히 유세를 벌이던 신익희는 호남으로 내려가다가 열차 안에서 돌
연 급사를 하면서 정권교체의 꿈은 물 건너갔다. 다행히 신익희 사망에 따른 동정표로 장면이
이기붕을 여유롭게 따돌리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6년 9월 민주당전당대회에서 자유당 정치깡패인 최훈과 김상붕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다행
히 경상으로 그쳤으며, 1957년에 미국 시튼홀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59년 민주
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대선 때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유세 도중 위암으로 사망했으며, 장면은 또
다시 부통령 후보에 나섰다. 그리고 그 유명한 3.15부정선거로 이기붕이 억지로 당선되자 뿔
이 단단히 난 민중들이 봉기하여 마산(창원)과 대구에서 독재정권/부정선거 반대 시위가 일어
났고, 서울에서 4.19가 터지면서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은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

4.19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의 민주당은 의원내각제(議院內閣制)를 실시했고, 장면은 제5
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됨과 동시에 제2공화국 국무총리가 되어 국정을 이끌었다. 하지만 장면
정권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백성들이 피를 흘리며 내려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욕
심과 이해관계에 얽혀 혼란에 빠졌다. 그 와중에 민주당의 구파가 떨어져나가 신민당을 창당
했으며, 그렇게 1년을 쓸데없이 소비하다가 1961년 5.16으로 장면 내각은 싹 털리고 만다.

5.16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은 장면을 연금시켰고, 이주당(二主黨)사건인 반혁명음모사건에 연
루시켜 징역 10년을 선고했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이후 5년간 집에 틀어박혀 신앙생활
에 몰두하다가 1966년 6월 4일 간염으로 67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국민장(國民葬
)으로 치뤄졌으며, 경기도 포천 카톨릭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면은 미국 대사로 2년 가량 외국에 나가있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 집에서 살았다. 그
러니 거의 27년 동안 살았던 셈이다. 집 구석구석 그의 손때가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가
심은 나무가 어엿하게 성장해 주인의 빈자리를 지킨다. 이렇게 보면 장면이 꽤 옛날 인물처럼
비춰지기도 하겠지만 그는 나와 아주 가까운 시대의 인물이다. 그가 가고 10여 년 뒤에 내가
이 세상에 나왔고, 내 부모 세대들은 장면의 모습과 이름 2자를 모두 기억하기 때문이다.


▲  앞마당에 있는 작두펌프(우물펌프)

그리 넓지 않은 앞마당에는 소나무 1그루와 작두펌프가 자리하고 있다. 작두펌프는 우물펌프,
옛날펌프, 무쇠펌프, 작두샘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1980년대까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기구였다.
이 기구는 장면과 그의 가솔(家率)들, 경호원들이 쓰던 것으로 지하에 관정(管井)을 묻고 지
하수를 끌어올리는 공기압의 원리를 이용한 수동식 펌프이다. 패킹이 낡거나 펌프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공기의 압이 빠져 지하수를 끌어올릴 수 없게 된다. 이때 정신줄을 놓은 펌
프를 깨우고자 붓는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  장면 가옥 안채 (장면기념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안채는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장면 가족의 생활공간이다. 장면기념관의
중심으로 거실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 우측에 건너방이 있고, 안방 북쪽에는 부
엌, 건너방 북쪽에는 욕실이 있다. 그리고 대청마루 북쪽과 남쪽에는 미닫이문을 냈다.

대청마루 남쪽 미닫이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되는데, 실내화가 준비되어 있어 그걸 신고
움직이면 된다. 대청마루와 안방, 건너방에는 장면의 체취가 서린 온갖 문서와 사진,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문서 같은 경우 상당수가 복제품이라 아쉬움을 준다. 장면 외에도 그의 부
인 김옥윤이 쓰던 유품도 같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 정치인 가족의 생활상을 아련히 알려준다.


▲  장면 가옥 안채 대청마루 (오른쪽이 사랑방, 북쪽이 부엌)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사랑방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건너방

▲  1948년 9월 6일에 발급된 대한민국 외교관 1호 여권 (복제품)

이 여권은 1948년에 '유엔 파견 대한민국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부여 받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외교관 여권이다. (복제품이란 것은 함정)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교관이기도 하며,
미국과 프랑스 등의 입국사증이 찍혀 있다.


▲  유엔총회 연설문(복제품)과 바티칸 교황청 훈장(오른쪽)

유엔총회 연설문은 1949년 12월 7일,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대한민국 독립 승인을 요구하는 영
어 연설문의 한글 번역본이다. (장면이 직접 썼음) 연설 직후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
로 한국 독립 승인이 통과되었다.


▲  영어로 쓰인 유엔총회 대한민국 승인서 (복제품)
유엔에서 찬성 48표를 얻어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은 그 순간을 기록한 문서로
미국 국무부 고문 달레스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다.

▲  바티칸 교황청에서 준 훈장의 위엄 (진품임)
1951년 5월 22일 국무총리 재직 중에 교황청에서 받은 훈장이다.

▲  재외국인등록증 (복제품)
장면의 50대 모습 사진이 담긴 문서로 주미국대사 재직시(1949년 10월 16일)에
발급 받은 것이다. 지금과 달리 한자가 꽤 많으며, 양력 대신 단기(檀紀)를
쓰고 있는 점도 무척 이채롭다.

▲  주미대사 신임장 (복제품)
1949년 3월 25일 장면 초대 대한민국 주미특명 전권대사가 당시 미국 대통령인
트루먼에게 제정한 신임장(信任狀)이다. 이 문서에도 단기가 쓰여 있다.

▲  장면이 사용했던 영문 타자기

▲  장면이 번역했던 천주교 서적들

2년 동안 주미대사를 지냈을 때 쓰던 타자기이
다. 지금이야 한가롭게 있지만 그 시절에는 정
말 불이 날 정도로 바쁜 시간을 지냈다.

왼쪽은 제임스 기본스가 1876년에 저술한
'교부들의 신앙'으로 장면이 1944년에
번역판을 내놓았다.


▲  장면이 사용했던 기도서와 십자가 목걸이

1921년 성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한 후 얻은 것으로 장면은 이 책을 늘 손에서 놓지 않았다
고 전한다. 기도서 위에 십자가 목걸이 역시 그가 기도를 할 때 쓰던 것이다.


▲  장면이 썼던 실크모자 (오른쪽에 실크모자를 쓴 장면의 사진이 있음)

장면이 1949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 취임식 때 썼던 모자이다. 그저 말로만 듣고 바보상자에서
만 보던 그 실크모자를 여기서 처음 그 실물을 접하니 모자가 은근 멋있어 보인다.


▲  무늬만 남은 안채 부엌

안채 부엌은 전통 부엌 양식에 서양식이 더해진 형태로 타일을 깐 아궁이와 부엌 벽, 그리고
그릇과 음식을 씻는 일종의 싱크대까지 갖추고 있다.
장면과 그의 가솔, 경호원들은 이곳에서 만들어진 밥과 온갖 음식의 힘으로 혼란했던 20세기
중반을 살아갔다. 허나 장면 가족이 집을 떠난 이후, 그 껍데기만 남아 모락모락 밥 연기와
국 연기를 뿜어내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장면이 부통령 당선 기념으로 받은 놋그릇(왼쪽)과
바깥 활동 때 늘 가지고 다니던 동그란 도시락통(오른쪽)

▲  장면이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했던 그 비싼 신선로(神仙爐)
장면 일가의 넉넉했던 형편을 보여주는 산증인이다.

▲  장면, 김옥윤 부부의 약력과 기도문이 담긴 카드,
김옥윤이 사용했던 옥비녀와 옥반지

▲  김옥윤이 사용했던 안경과 반짇고리, 그리고 이쁜 꽃신
바느질을 하는 김옥윤 여사의 사진도 같이 있다. 조그만 꽃신에서는 그의
파릇파릇했던 젊은 시절의 향수가 불어오는 듯 하다.

▲  장면이 쓰던 돋보기와 명함, 그의 싸인, 손목시계, 만년필, 수표책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장면의 조촐한 쉼터, 안락의자와 거북선마크 베게

거북선이 그려진 노란색 베게는 그가 애용했던 물건으로 안락의자와 함께 그의 편안한 휴식과
숙면을 인도해주었다. 국정으로 늘 잠이 부족했던 그에게 저 의자와 베게는 소중한 쉼터였으
리라.


▲  3대가 다 모인 장면 가족 사진

▲  장면 가옥 사랑채

앞마당 동쪽에 자리한 사랑채는 사랑방과 응접실, 대기실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는 장면이
손님을 접대하거나, 민주당과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회의나 다과를 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던
그의 공무(公務) 공간으로 현재는 장면기념관의 일부로 그의 유품과 여러 사진이 전시되어 있
다. (내부 관람 가능)


▲  1956년 부통령 선거 때 쓰인 장면 포스터와 약력

그 당시 민주당 구호는 이랬다. '배고파서 못살겠다. 죽기 전에 갈아보자', 그에 대응하는 자
유당 떨거지들의 구호는 '갈아봤자 별 수 없다. 사탕발림에 속지 말자'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가 과로로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정권 교체는 이루지 못했지만, 장면이
이기붕을 여유있게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런데로 체면은 세웠다.


▲  장면이 4대 부통령 시절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그에 대한
이승만의 답신(복제품)

▲  1956년 장면을 저격했던 최훈과 김상붕이 장면에게 보낸
참회의 편지(복제품)

장면은 1956년 자유당에서 사주한 최훈과 김상붕의 총격으로 왼쪽 손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
들은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국무총리가 된 장면은 그들의 감형을 주선하여 사형은 면하게 했는
데, 최훈은 1964년 7월 27일 장면에게 1통의 봉함 엽서를 보내 자신의 심경을 드러냈다.

'인간에게 가장 귀하다는 생명마저 빼앗겼던 저희들은 4.19가 일어난 그해 10월 관대하신 은
총으로 생명이 부활되었고, 그해 12월 친히 오셔서 주신 따뜻한 털내의로 몸을 녹이며 살아온
불초 소인은 하루라도 그 은총을 잊을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조차 효도한 기억이 없는 제가
왜 조석으로 박사님의 온정을 못잊어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박사님께서 원수를 사랑하
라는 예수의 사상을 친히 시범하신 사도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탓입니다'


장면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저격범까지 관용의 정신을 베풀어 살려주는 등, 그의 넉넉한 마음
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  왼쪽은 1960년 8월 27일 민의원에서 열린 제2공화국 국무총리 취임사에서
장면이 발표한 6개항의 시정 방침을 밝힌 시정 연설문(복제품)
오른쪽은 5.16쿠데타 이후 나온 제1차 경제계발 5개년 계획서(복제품)

▲  손님을 맞이했던 사랑채 응접실 (왼쪽 에어컨은 2012년 이후에 설치됨)

▲  장면이 주로 머물렀던 사랑채 사랑방 (이불장, 가구 등이 있음)

▲  1999년 8월 13일, 장면에게 추서된 대한민국 건국훈장(복제품)

▲  자신의 일대기를 직접 저술한 친필 연보(복제품)
어린 시절부터 1965년까지 자신의 일생을 친필로 정리한 일기이다.
자신의 가족과 국내에서의 행적은 물론 자신이 직접 겪은
국제 정세도 소상히 기재해 놓았다.

▲  한자로 쓰인 자신의 좌우명(왼쪽, 복제품) 그리고 장면 사망 8달 뒤
(1967년 2월)에 발간된 그의 기고문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  문과 복도로 이어진 사랑채 내부


* 장면 가옥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 36-1 (혜화로5길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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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의 뒷골목을 거닐다. 명륜동 골목 산책 ~~~ (장면 가옥, 북묘 하마비, 흥덕사터, 우암 송시열집터)


 

' 대학로의 뒷골목을 거닐다, 혜화동~명륜동 나들이 '

▲  송시열 집터에 남아있는 증주벽립 바위글씨


 

 

천하의 절반을 차지한 겨울 제국(帝國)이 한참 전성기를 누리던 1월의 한복판, 후배 여인
네와 대학로 북쪽 동네인 명륜동(明倫洞)을 찾았다.
이번 겨울은 제대로 약을 먹었는지 툭하면 강추위에 폭설이 강림해 며칠 전 내린 눈이 아
직도 세상을 덮고 있었다. 하여 햇님의 반격에 겨울의 기세가 조금은 누그러진 14시에 혜
화동로터리에서 그를 만나 장면총리 가옥을 찾았다. 그곳은 혜화동로터리에서 서울과학고
, 성북동 방향으로 3~4분 정도 가면 된다.


 

♠  명륜동 장면(張勉) 가옥 - 등록문화재 357호

▲  장면 가옥 외경

명륜동에 자리한 장면 가옥(장면총리 가옥)은 서울에 서려있는 현대사의 주요 현장이다. 바로
제1,2공화국 시절 정치/외교가로 활동했던 장면(장면 총리, 장면 박사라고 많이 불림)이 살던
집으로 속세(俗世)의 때가 조금씩 묻어가던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4.19와 한 덩어리로 국사
관련 시험에 단골로 등장했던 귀찮은 인물이다. 그나마 다행은 외우기가 참 쉬운 이름이었다
는 것인데 그것도 외우기 어렵다면 대중음식의 하나인 짜장면(자장면)이나 영화의 한 장면이
란 식으로 외우면 연상도 쉽게 된다.

이 집은 장면이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 시절에 지은 것으로 건축가 김정희가 한옥과 양옥의
장점을 뽑아서 지은 개량 한옥의 일종이다. 1930~40년대 서울 중산층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종로구에서 인수하여 가옥 손질을 거쳐 2012년 12월 실외가 우선 개방되었다.
이후 건물 내부를 손질하고 장면의 유물 중 괜찮은 것을 선별하여 2013년 4월 19일, 사랑채와
안채 내부가 장면기념관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날짜를 4월 19일로 잡은 것은 이승
만의 자유당(自由黨)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열망했던 4.19혁명과 장면의 정치개혁 의지
를 기리고자 함이다.


▲  활짝 열린 장면 가옥 대문

▲  장면 가옥 등록문화재 필증

▲  장면의 흉상(胸像)

돌로 1m 높이의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다진 장면 가옥은 안채(92.56㎡)를 중심으로 사랑
채(56.2㎡), 경호원실(9.92㎡), 수행원실(6.61㎡) 등 4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고위관료
까지 지낸 사람이라 집이 클 줄 알았더만 두 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조촐하여 썩은 내가 진동
하는 권력층과 졸부들의 고래등 저택에 비해 거부감도 별로 없고 정감도 많이 간다. <같은 시
대를 누볐던 자유당의 우두머리 이기붕(李起鵬)의 집은 저택급이었음>
가옥을 둘러싼 담장은 남쪽과 서쪽은 하얀 피부, 동쪽은 붉은 벽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담장
의 높이는 2m 정도이다. 가옥 서쪽에는 키다리 아파트가 자리해 가옥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동
쪽에는 혜화로가 나있다.

가옥과 바깥 세상을 이어주는 대문은 주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문으로 개방시간에 한해
문짝 하나를 열어둔다. 문 높이는 담장만큼 낮으며 문 우측 기둥에는 주소가 쓰인 패가 있고,
좌측 기둥에는 5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옛 주인 장면의 이름 2자가 한자로 쓰여 있어 혹 문
을 두드리면(초인종은 없음) 그 장면이 스르륵 달려나와 우리를 맞이해 줄 것 같은 기분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담장이 집 안채를 가리며 길을 막아서는데 여기서 가족과 친척, 친분이
두터운 사람은 왼쪽, 언론기자와 기타 손님은 오른쪽으로 갔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사랑채에
딸린 대기실이 나오며,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옆칸에 있는 응접실에서 장면을 접견했다.
대문에서 왼쪽으로 가면 조그만 경호원동과 앞마당으로 이어진다. 경호원동은 장면의 경호원
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겉으로 보면 1층이지만 안에 3㎡ 정도의 좁은 지하가 있다. 현재는 이
곳을 지키는 관리인이 머물고 있으며, 건물 우측에는 2012년에 조성된 장면의 흉상이 서 있고
좌측에는 장면이 심었다는 높이 7~8m의 작은 나무 1그루가 주인이 가고 없는 집뜨락에 조촐히
그늘을 드리운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장면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운석 장면(雲石 張勉. 1899~1966)
장면은 옥산(玉山) 장씨로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에서 장기빈(張箕彬)의 맏아들로 태
어났다. 장기빈은 왜정 때 부산세관장을 지낸 관리로 집안 살림은 넉넉한 편이었다.
8살에 인천성당이 운영하는 박문학교(博文學校)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배웠고, 1917년 수원
고등농림학교(서울대 농생대의 전신)를 졸업, 1919년 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학과를 수석으
로 마쳤다.
이후 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 자격으로 미국 맨해튼 카톨릭대 문과에 들어가 1925년에 졸업을
했으며, 로마교황청에서 열린 '한국79위 순교복자 시복식(諡福式)'에 참석했다. 그리고 귀국
하여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근무하다가 동성상업학교에 들어가 교편을 잡았고, 1936년 그곳의
교장이 되었다. 또한 계성학교의 교장까지 겸임해 1945년까지 교육계에서 일했고, 천주교청년
회연합회 회장이 되어 '구도자의 길','조선천주공교회약사' 등을 출간했다.

1946년 정계에 진출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과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했으며, 우익의 일
원이 되어 좌익세력과 싸웠다. 또한 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정책 수립 등의 활동을 벌이기
도 했다.
1948년 서울 종로 을(乙)에서 제헌의원에 당선되었고, 그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조병옥(趙炳玉)과 함께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
라는 국제적 승인을 받았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 특사로 로마교황청을 방문했고 귀국 길에 미
국 맨해튼대학에 들려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가 되어 2년 동안 외교관 생활을 했고, 6.25전쟁이 터지자 미국을 설득
해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냈다. 1951년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귀국했으나 바로 이듬해 물러났
으며, 야당의 일원이 되어 이승만/이기붕의 자유당 독재정권과 싸우기 시작했다.
1955년 신익희(申翼熙), 조병옥과 민주당을 결성해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6년 대선 때 신익
희가 대통령 후보에, 장면이 부통령(副統領) 후보로 나가 정권 교체를 노렸다. 이때 자유당은
8년 이상이나 대통령을 해먹은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야망이 쓸데없이 컸던 이기붕이 부통
령 후보로 나섰다.

백성들의 지지에 힘입어 열심히 유세를 벌이던 신익희는 호남으로 내려가던 중, 열차 안에서
돌연 급사를 하면서 정권교체의 꿈은 물 건너갔다. 다행히 신익희 사망에 따른 동정표로 장면
이 이기붕을 여유롭게 따돌리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6년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자유당 정치깡패인 최훈과 김상붕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다행
히 경상으로 그쳤으며, 1957년 미국 시튼홀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1959년 민주당 최
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대선 때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유세 도중 위암으로 사망해 정권교체의 기
회를 잃었으며 장면은 또다시 부통령 후보에 나섰다. 그리고 그 유명한 3.15부정선거로 이기
붕이 억지로 당선되자 뿔이 단단히 난 민중들이 봉기하여 마산과 대구에서 독재정권/부정선거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서울에서 4.19가 터지면서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은 길거리에 나앉게 된
다.

4.19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의 민주당은 의원내각제(議院內閣制)를 실시했고, 장면은 제5
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됨과 동시에 제2공화국 국무총리가 되어 국정을 이끌게 되었다. 허나
장면 정권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백성들이 피를 흘리며 내려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욕심과 이해관계에 얽혀 혼란에 빠졌다. 그 와중에 민주당의 구파가 떨어져나가 신민당을
창당했고, 그렇게 1년을 소비하다가 1961년 5.16으로 장면 내각은 모두 털리고 만다.

5.16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은 장면을 연금시켰고, 이주당(二主黨)사건인 반혁명음모사건에 연
루시켜 징역 10년을 선고했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이후 5년간 집에 틀어박혀 신앙생활
에 몰두하다가 1966년 6월 4일, 간염으로 67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는 국민장(國民
葬)으로 거행되었으며, 경기도 포천 카톨릭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면은 미국 대사로 2년 가량 외국에 나가있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이 집에서 살았다. 그
러니 거의 27년 동안 살았던 셈이다. 집 구석구석 장면의 손때가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
가 심은 나무가 어엿하게 성장해 주인의 빈자리를 지킨다. 이렇게 보면 장면이 꽤 옛날 인물
처럼 비춰지기도 하겠지만 그는 나와 아주 가까운 시대의 인물이다. 그가 사망하고 12년 뒤에
내가 이 세상에 억지로 나왔고 부모 세대들은 장면의 모습과 이름 2자를 모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  경호원동과 나무 1그루

▲  앞마당에 있는 작두펌프(우물펌프)
▼  안채 동쪽에 자리한 장식용 장독대

그리 넓지 않은 앞마당에는 소나무 1그루와 작두펌프가 있다. 작두펌프는 우물펌프, 옛날펌프
, 무쇠펌프, 작두샘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데 1980년대까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기구
였다.
이 기구는 장면과 그의 가솔(家率)들, 경호원들이 쓰던 것으로 지하에 관정(管井)을 묻고 지
하수를 끌어올리는 공기압의 원리를 이용한 수동식 펌프이다. 패킹이 낡거나 펌프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공기의 압이 빠져 지하수를 끌어올릴 수 없게 된다. 이때 정신줄을 놓은
프를 깨우고자 붓는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한다.


▲  장면 가옥 안채 (장면기념관)

남쪽을 바라보고 선 안채는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장면 가족의 생활공간이다. 장면기념관의 중
심으로 거실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안방, 우측에 건너방이 자리해 있고, 안방 북쪽에
는 부엌, 건너방 북쪽에는 욕실이 있다. 대청마루 북쪽과 남쪽에는 미닫이문을 냈으며, 2013
년 4월 19일 금지된 집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대청마루 남쪽 미닫이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되는데 실내화가 넉넉히 준비되어 있어 신발
을 벗고 그것으로 갈아신으면 된다. 대청마루와 안방, 건너방에는 장면의 체취가 서린 온갖
문서와 사진,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문서 같은 경우 상당수가 복제품이라 아쉬움을 준다.
장면 외에도 그의 부인 김옥윤이 쓰던 유품도 같이 전시되어 있어 당시 정치인 가족의 생활상
을 아련히 알려준다.


▲  안채 대청마루 (오른쪽이 사랑방, 북쪽이 부엌)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사랑방

▲  장면의 유품이 깃든 안채 건너방

▲  1948년 9월 6일에 발급된 대한민국 외교관 1호 여권 (복제품)

이 여권은 1948년 '유엔 파견 대한민국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부여 받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
초의 외교관 여권이다. 그러니 눈여겨 보기 바란다.(복제품이란 것은 함정) 그는 대한민국 최
초의 외교관이기도 하며, 미국과 프랑스 등의 입국사증이 찍혀 있다.


▲  유엔총회 연설문(복제품)과 바티칸 교황청 훈장 (오른쪽)

유엔총회 연설문은 1949년 12월 7일,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대한민국 독립 승인을 요구하는 영
어 연설문의 한글 번역본이다. (장면이 직접 썼음) 연설 직후 찬성 48표, 반대 6표, 기권 1표
로 한국 독립 승인이 통과되었다. (반대한 쓰레기들은 주로 공산주의 국가임)


▲  영어로 쓰인 유엔총회 대한민국 승인서 (복제품)
유엔에서 찬성 48표를 얻어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은 그 순간을 기록한 문서로
미국 국무부 고문 달레스의 친필 사인이 담겨져 있다.

▲  바티칸 교황청에서 선사한 훈장 (진품임)
1951년 5월 22일 국무총리 재직 중에 교황청에서 선물로 준 훈장이다.

▲  재외국인등록증 (복제품)
장면의 50대 사진이 담긴 문서로 주미국대사 재직시(1949년 10월 16일)에 발급
받은 것이다. 양력 대신 단기(檀紀)를 쓰고 있는 점이 무척 이채롭다.
(1960년대 초까지 단기를 많이 썼음)

▲ 주미대사 신임장 (복제품)
1949년 3월 25일 장면 초대 대한민국 주미특명 전권대사가 당시 미국 대통령인
트루먼에게 제정한 신임장(信任狀)이다. 이 문서에도 단기가 쓰여 있다.

   ▲  장면이 사용했던 영문 타자기 (진품임)
 
2년 동안 주미 대사를 지냈을 때 이용했던 타
 자기이다. 지금이야 한가롭게 있지만 그 시절
 에는 정말 불이 날 정도로 바쁘게 뛰었다.

▲  장면이 번역했던 천주교 서적들 (진품)
왼쪽은 제임스 기본스가 1876년에 저술한
'교부들의 신앙'으로 장면이 1944년에
번역판을 내놓았다.


▲  장면이 사용했던 기도서와 십자가 목걸이 (진품)
1921년 성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한 후 얻은 것으로 장면은 이 책을 늘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기도서 위에 있는 십자가 목걸이 역시 그가 기도를
할 때 쓰던 것이다.


▲  장면이 썼던 실크모자 (오른쪽에 실크모자를 쓴 장면의 사진이 있음)

장면이 1949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 취임식 때 썼던 모자이다. 그저 말로만 듣고 바보상자에서
만 보았던 그 실크모자를 여기서 처음 그 실물을 접하니 모자가 은근 멋있어 보인다. 나도 한
번 써보고 싶은데 어째 안될까?


▲  무늬만 남은 안채 부엌

안채 부엌은 전통 부엌 양식에 서양식이 더해진 형태로 타일을 깐 아궁이와 부엌 벽, 그리고
그릇과 음식을 씻는 일종의 싱크대까지 갖추고 있다.
장면과 그의 가솔, 경호원들은 이 부엌에서 만들어진 밥과 온갖 음식의 힘으로 혼란했던 20세
기 중반을 살아갔다. 허나 장면 가족이 집을 떠난 이후, 현역에서 물러나 이제는 그 껍데기만
남은 채, 모락모락 밥 연기와 국 연기를 뿜어내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장면이 부통령 당선 기념으로 받은 놋그릇(왼쪽)과 바깥 활동 때
늘 가지고 다녔던 동그란 도시락통 (오른쪽)

▲  장면이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했던 그 비싼 신선로(神仙爐)
장면 일가의 넉넉했던 형편을 보여준다.

▲  장면, 김옥윤 부부의 약력과 기도문이 담긴 카드와
김옥윤이 사용했던 옥비녀와 옥반지

▲  김옥윤이 사용했던 안경과 반짇고리, 그리고 이쁜 꽃신
바느질을 하는 김옥윤의 사진도 같이 있다. 조그만 꽃신에서는 그의 파릇파릇했던
젊은 시절의 향수가 불어오는 듯 하다.

▲  장면이 쓰던 돋보기와 명함, 그의 싸인, 손목시계, 만년필, 수표책

▲  장면의 조촐한 쉼터, 안락의자와 거북선 마크 베게

거북선이 그려진 노란색 베게는 그가 애용했던 물건으로 안락의자와 함께 그의 숙면을 인도해
주었다. 국정(國政)으로 늘 잠이 부족했던 그에게 저 의자와 베게는 소중한 쉼터였으리라.


▲  3대가 다 모인 장면의 가족 사진

▲  안채 뒤쪽에 자리한 비좁은 수행원동

▲ 수수하게 보이는 안채 뒤쪽


▲  눈으로 햐얀 지붕을 이루고 있는 장면 가옥 사랑채

앞마당 동쪽에 자리한 사랑채는 사랑방, 응접실, 대기실로 이루어져있다. 사랑채는 장면이 손
님을 접대하거나 민주당과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회의나 다과를 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던 그
의 공무(公務) 공간으로 현재는 그의 유품과 여러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내부 관람 가능)


▲  1956년 부통령 선거 때 쓰인 장면 포스터와 약력

그 당시 민주당 구호는 이랬다. '배고파서 못살겠다. 죽기 전에 갈아보자', 그에 대응하는 자
유당 떨거지들의 구호는 '갈아봤자 별 수 없다. 사탕발림에 속지 말자'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정권 교체는 이루지 못했지만, 장면이 이기붕
을 여유있게 누르고 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런데로 체면은 세웠다.


▲  장면이 4대 부통령 시절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과 그에 대한
이승만의 답신 (복제품)

▲  1956년 장면을 저격했던 최훈과 김상붕이 장면에게 보낸
참회의 편지 (복제품)


장면은 1956년 자유당에서 사주한 최훈과 김상붕의 총격을 받아서 왼쪽 손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들은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국무총리가 된 장면은 그들의 감형을 주선하여 사형만은 면하게
했다. 이에 최훈은 1964년 7월 27일 장면에게 1통의 봉함 엽서를 보내 자신의 심경을 드러냈
다.
'인간에게 가장 귀하다는 생명마저 빼앗겼던 저희들은 4.19가 일어난 그해 10월, 관대하신 은
총으로 생명이 부활되었고, 그해 12월 친히 오셔서 주신 따뜻한 털내의로 몸을 녹이며 살아온
불초 소인은 하루라도 그 은총을 잊을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 조차 효도한 기억이 없는 제가
왜 조석으로 박사님의 온정을 못잊어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박사님께서 원수를 사랑하
라는 예수의 사상을 친히 시범하신 사도이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탓입니다'


장면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저격범까지 관용의 정신을 베풀어 살려주는 등, 그의 넉넉한 마음
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범인(凡人)은 감히 따라하기 어려운 그 넓은 마음을 말이다. 물론 정
치적인 다른 이유도 조금은 섞여 있겠지. (자세한 것은 당사자만 알 뿐임)


▲ 왼쪽은 1960년 8월 27일 민의원에서 열린 제2공화국 국무총리 취임사에서
장면이 발표한 6개항의 시정 방침을 밝힌 시정 연설문 (복제품)
오른쪽은 5.16쿠데타 이후 나온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서 (복제품)

▲  손님을 맞이했던 사랑채 응접실 (왼쪽 에어컨은 2012년 이후에 설치됨)

▲  장면이 주로 머물렀던 사랑채 사랑방 (이불장, 가구 등이 있음)

▲  1999년 8월 13일, 장면에게 추서된 대한민국 건국훈장 (복제품)

▲ 자신의 일대기를 직접 저술한 친필 연보 (복제품)
어린 시절부터 1965년까지 자신의 일생을 친필로 정리한 일기이다. 자신의 가족과
국내에서의 행적은 물론 자신이 직접 겪은 국제 정세도 소상히 기재해 놓았다.

▲  한자로 쓰인 자신의 좌우명(왼쪽, 복제품), 장면이 서거한지 8달 뒤
(1967년 2월)에 발간된 그의 기고문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 장면 가옥 찾아가기 (2018년 2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를 나와서 대학로를 따라 2분 정도 걸으면 혜화동로터리이다.
  여기서 정면으로 길을 건너 혜화동우체국을 끼고 북쪽으로 난 2차선 도로(혜화로)를 3분 정
  도 가면 길 왼쪽에 장면 가옥이 있다.
*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3번 출구), 4호선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고 혜화초교에서 내리면 길 건너로 장면 가옥이 보인다.
* 관람시간 : 9시 ~ 18시 (겨울은 17시까지) / 입장료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1가 36-1 (혜화로5길 53, 장면박사 기념관 ☎ 070-8239-
  1063)
* 장면박사 기념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문과 복도로 이어진 사랑채 내부


 

♠  명륜동 구석에서 만난 소소한 명소들

▲  흥덕사(興德寺)터 표석과 북묘(北廟) 하마비(下馬碑)

명륜동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에서 북서쪽으로 난 골목길(성균관로17길)을 들어서면 북묘 하마
비와 함께 흥덕사터를 알리는 표석이 마중을 한다.

나의 돌머리 속에는 전혀 데이터가 없던 명륜동 흥덕사는 1401년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그의
옛집 일대를 회사해서 만든 절이다. 세종 때 불교를 선교(禪敎)와 교종(敎宗)으로 통폐합하면
서 교종의 도회소(都會所)로 삼았으며 왕실의 사찰로 번영을 누렸으나 연산군(燕山君) 시절
폐사되어 그 흔적조차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 있던 불상과 탱화들은 인근 절로 흩어졌으나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며, 조선 효종 때
송시열이 이곳에 집을 짓고 서식하면서 그가 살았던 동네란 뜻에 송동(宋洞)이라 불리기도 했
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터지자 명성황후가 충주(忠州)로 줄행랑을 치면서 답답한 마음
에 도중에서 만난 이씨 무녀(巫女)에게 환궁 시기를 물었다고 한다. 과연 무녀의 말대로 그
시기에 환궁하게 되자 황후는 너무나 기뻐 그에게 바라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이에 무녀는
머리를 조아리며 관우(關羽) 사당을 지어줄 것을 청했고, 1883년 이곳에 그 사당을 지어주면
서 방향을 따져 북묘라 하였다.

관우는 중원대륙의 허접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주요 인물로 촉(촉한)을 세운 유비
(劉備)의 의제이자 부하이다. 유비(劉備), 장비와 돈독한 의형제의 의리를 보이며 대륙을 누
빈 장수로 무예도 뛰어나고 머리도 좀 있었으나 워낙 교만한 성격 탓에 219년 조조와 손권의
공격에 크게 털려 형주(荊州) 지역을 말아먹고 끝내 손권(孫權)에게 잡혀 처단되었다. 그때
관우 사냥에 나섰던 장수는 조조 수하로 뛰어난 무예를 자랑했던 조인, 서황과 뛰어난 전략가
인 손권의 부하 육손, 여몽이었다.

손권은 유비의 창끝을 돌리고자 관우의 목을 조조에게 바쳤으나 관우에게 호감이 있던 조조는
오히려 크게 은혜를 베풀어 관우의 묘와 사당을 지어주었다. 이후 관우 신앙이 백성들 사이에
서 싹트기 시작했고 그게 들불처럼 쓸데없이 번져나가 문(文)에 공자(孔子), 무(武)에 관우라
고 할 정도로 대륙의 대표 민간신앙으로 흥하게 된다.
그 신앙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조선이 명나라에 원군을 요구하자 명은 수
만의 허접 군사를 보내 갖은 민폐를 아끼지 않았는데 명나라 군사 중에 관우 열성 신자가 많
았다. 특히 진인(陳寅)이란 장수는 그 신앙이 매우 두터웠으며, 1598년 울산성(蔚山城) 전투
에서 부상을 당해 서울 남대문 밖에 집을 짓고(선조 임금이 집을 내려준 듯) 쉬고 있었다. 그
때 거처에 관우 사당을 지으니 그 사당이 이 땅 최초의 관우 사당, 남묘(南廟)가 되겠다.

왜란이 끝나자 명나라 군주, 신종(神宗)은 관우의 혼이 도와 전쟁이 끝난 거라고 격하게 우기
며 금 4,000냥을 보내와 남대문 밖에 관우 사당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 그곳에
이미 사당이 있으니 다른 곳이 좋겠다며 동대문 밖에 세우게 되니, 이것이 국립 관우 사당 1
호이자 지하철 역에도 있는 그 유명한 동묘(東廟)이다.
17세기 이후 전국 주요 고을에 관우 사당이 지어졌으며, 관우신앙이 민간에도 널리 퍼지면서
민간신앙의 하나로 조촐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1883년에 지어진 북묘는 그 이듬해(1884년)에 벌어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마무리하는 현장
이 되면서 크게 이름을 남겼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일을 벌인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당(開化黨)은 왜
군과 협조하여 고종(高宗)과 왕실을 호위하며 창덕궁(昌德宮)에 들어갔으나 청나라군의 공격
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후원 북장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일이 그르쳤음을 깨달은 김옥균
과 박영효, 서재필(徐載弼) 등은 왜군을 따라 왜국 공사관(公使館)으로 36계를 쳤고, 그들과
작별한 홍영식(洪英植)과 박영교(朴泳敎)는 장교 7명과 왕을 호위하며 북묘에 들어갔으나 곧
들이닥친 청군에게 살해되면서 갑신정변은 허무하게 막을 내린다.
이후 고종은 1887년, 갑신정변 당시 허벌나게 고생했던 일을 떠올리며 민영환(閔泳煥)에게 글
씨를 쓰게 하여 북묘에 비석을 세우니 그것이 북묘비(北廟碑)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북묘는 1902년 관왕묘(關王廟)에서 관제묘(關帝廟)로 다른 관우사당보다 격이 높아졌다. 하지
만 1908년 순종(純宗)의 칙령으로 국립 사당과 제단을 정리하면서 동묘에 싹 통합시켰고, 왜
정 때 비어있는 북묘 건물과 토지를 민간에 팔면서 이곳에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과 동
광학교(東光學校)가 들어섰다.
불교중앙학림은 1917년 북묘터에 불교전수학교를 세웠으며, 바로 동쪽에는 수송동(壽松洞)에
서 넘어온 보성고등학교가 뿌리를 내렸다. 1930년 불교전수학교는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인가되
었으며, 1946년 동국대로 이름을 갈아 남산 동북쪽으로 이사를 갔다.
그 빈 자리에는 조양보육대학이 들어섰고, 1963년에 문을 연 은석초등학교(서울 장안동에 있
음)도 그 자리의 일부를 쓰다가 모두 다른 데로 가면서 주택가와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들
어섰다.

옛 북묘터를 유일하게 지키고 있는 하마비는 왕릉과 궁궐, 사당, 향교, 서원 앞에 세우는 비
석으로 그의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있다.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닥치고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북묘가 있던 시절에야 지엄한 하마비의 명령이 통했지
만 이제는 사람들이 발로 차고 괴롭혀도 하소연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국가나 서울
시에서 관리하는 지정문화재도 아니니 찬밥 신세는 더하다.
왕년의 시절을 그리며 우수에 젖은 그 옆에 역시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흥덕사터를 알리는 표
석이 세워져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집터. 증주벽립(曾朱壁立) 바위글씨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7호

북묘 하마비에서 주택가로 2분 정도 더 들어가면 길 왼쪽 바위에 또렷하게 새겨진 '증주벽립
(曾朱壁立)' 4자의 바위글씨를 만나게 된다. 이 바위글씨는 송시열이 새긴 것으로 그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 집이 얼마나 넓었는지 동쪽은 북묘 하마비를 넘어 서울과학고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증주벽립이란 '증자(曾子)와 주자(朱子)의 뜻에 따라 높은 절벽이 온갖 비바람에 꿋꿋이 버티
듯 의로운 나의 길을 가겠다'
는 아주 의연한 뜻으로 글씨가 근래에 새겨진 듯 필체가 너무나
선명하고 패기가 넘쳐 흐른다. 그의 바위글씨는 이것 말고도 서울과학고 교정에 '금고일반(今
古一般,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과 '영반(詠盤, 올라앉아 시를 지은 바위)' 등 2개가 더
있다.

송시열이 골로 간 이후, 증주벽립 드변은 송시열이 살았던 동네란 뜻의 송동(宋洞)이라 불렸
으며, 골짜기가 깊고 꽃나무가 많아 숙정문(肅靖門) 남쪽과 더불어 도성 봄꽃놀이 장소로 인
기를 누렸다. 특히 앵두꽃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1883년에는 이곳에 북묘가 들어섰으며, 왜정 때는 불교전수학교와 보성고등학교가 뿌리를 내
렸다. 이후 여러 학교를 거쳐 주택가로 변하면서 참으로 아름다웠던 정취는 죄다 한 토막 전
설처럼 사라지고 글씨가 깃든 바위 주변은 물론 그 머리까지 개념 없이 집들이 들어차 보기에
도 정말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명세기 유서 깊은 바위인데 1960년대 이후 무자비
하게 자행된 개발의 칼질이 이 바위에 콘크리트 칼을 씌워 죄인 아닌 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콘크리트 칼을 강제로 뒤집어 쓴 바위글씨와 문화유산이 서울에 꽤 있음..)
지금은 힘들겠지만 나중에 서울시나 종로구에서 바위 주변 집들을 모두 매입해 부시고 바위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개발의 칼질로 다친 부분을 치료한 다음, 주변에 앵두나무를 심고 소박
하게 공원(공원 이름은 '송시열공원'이나 '송동공원'이 좋을 듯)으로 닦았으면 좋겠다. 허나
아마 안될꺼야. 왜 이곳은 상식이 통하지 않고 불의(不義)가 판치는 대한민국이니까. 만약 지
방문화재로 지정되지도 못했다면 저 글씨도 진작에 돌가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원래 '우암구기 각자증주벽립(尤庵舊基刻字曾朱壁立)'이었으나
이름이 무지 어렵다하여 '우암 송시열 집터'로 가볍게 명칭을 갈았다.


▲  증주벽립 바위글씨의 위엄

※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참으로 기나긴 인생
송시열은 이율곡(李栗谷)의 학풍을 계승한 노론(老論)의 우두머리로 17세기에 조선의 정치와
사상을 주름잡던 조선 최대의 유학자였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화양동주(華陽洞主)로 1607년 충북
옥천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유학과 사상에 쓸데없이 타고
난 재능을 보였으며, 이후 논산 노성으로 집을 옮겨 김장생(金長生)의 배움을 받았다.

1633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바로 때려치웠으며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스승이 되어 1년 동안 그를 가르켰다. 1636년 12월 병자
호란이 터지자 인조(仁祖)를 호종하여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불이나
게 도망쳤으며, 결국 인조가 송파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淸太宗) 앞에 보기좋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자 너무 열받은 나머지 고향으로 내려갔다.

1649년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예전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청나라에
우호적이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다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허나 김자점이
파직되면서 다시 관직으로 돌아왔으나 김자점이 홧김에 조선이 청나라 정벌을 준비한다고 청
나라 조정을 들쑤시는 바람에 그와 관련된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청나라의 압박으로 떨려난다.
그래서 낙향하여 후진을 기르다가 1658년 다시 관직에 나가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며,
조선의 마지막 대외정벌 프로젝트이자 효종의 야망인 청나라 정벌 계획, 이른바 북벌(北伐)을
도왔으나 아쉽게도 1659년 왕이 승하하면서 북벌 프로젝트는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현종(顯宗) 시절,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
題)가 발생하자 기년설(朞年說, 만1년)을 주장하며 3년 설을 주장한 남인(南人)을 쫓아내 권
력을 잡았다. 이렇게 서인(西人)의 우두머리가 되어 좌참찬(左參贊)이 되었으나, 효종의 장지
(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비난을 받고 다시 낙향을 했고, 1668년 다시 돌아와 우의정이 되었으
나 좌의정(左議政) 허적(許積)과의 다툼으로 또 사직했다. 허나 1671년 다시 우의정으로 복귀
했으며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자 다시 자의대비(장렬왕후)의 복상문제가 거론되어 대공
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했다. 허나 이번에는 남인(南人)이 주장한 기년설(만1년)이 채택되
면서또 떨려나 평안도 덕원(德源)을 시작으로 여러 곳을 유배투어를 했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떨려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으며, 1683년
에 벼슬을 사직하여 봉조하(奉朝賀, 특별 명예직)가 되었다. 이후 남인에 대해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胄)를 지지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고, 그 사건으로 아끼던 제자 윤증(尹拯)
과 감정 싸움이 격해지면서 서인은 윤증의 소론(少論) 패거리와 송시열의 노론(老論) 패거리
로 분열되었다.

이후 관직에서 은퇴하여 속리산 화양동(華陽洞)에 팔자좋게 집을 짓고 제자를 기르다가 1689
년 숙종이 희빈장씨(禧嬪長氏)의 소생(후에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를 쌍수 들고
반대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로 떨려났다. 그리고 국문 때문에 서울로 소환되던 중,
정읍(井邑)에서 숙종이 내린 쓰디쓴 사약을 1사발 쭉 들이키고 82세의 나이로 강제로 생을 마
감했다. 이후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고향인 충북 옥천을 시작으로 충남 논산, 서울 명륜동, 대전 가양동, 속리산 화양동 등
참으로 많은 곳에 서식지를 짓고 살았다. 개다가 유교(성리학)의 새로운 역사를 쓴 인물로 제
자가 쓸데없이 많았다. 그래서 송자(宋子)로 추앙을 받았으며, 그를 배향한 서원이 전국에 즐
비하다.
저서로는 송자대전(宋子大全), 우암집(尤庵集), 송서습유(宋書拾遺),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
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등 방대하며, 그의 제자들이 정리하여 세상에 공개했다.

죽음에 임해서 제자들에게 명나라 군주 신종과 의종(毅宗)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만들 것을 유
언했는데 그래서 생긴 것이 그 악명 높은 만동묘(萬東廟)이다. 그가 이런 개미친 유언을 남긴
것은 우리의 사촌 민족인 만주족(여진족)의 청나라에 대한 강한 반감도 있겠지만 성리학의 영
향으로 사대부와 유생들을 중심으로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꼴통 사대주의(事大主義)가 팽배했
고, 거기에 임진왜란 이후 재조지은(再造之恩)까지 가세하여 명나라에 대한 존재가 경외의 수
준으로 커진 탓이다.
명이 망하고 구한말까지(심지어 왜정 때까지도) 명의 마지막 군주, 의종의 연호인 숭정(崇禎)
을 두고두고 우려먹었으며,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명의 재건을 간절히 바라던 지배층의 문구가
많이 등장한다. 게다가 조선 왕실도 명나라 군주의 사당인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매년 적
지 않은 세금을 축내며 제사를 지내니 참으로 할말을 잃게 한다. 명이 백제와 고구려, 백제와
부여국(夫餘國) 관계처럼 조선의 조상 나라라면 이해라도 하지만 둘은 전혀 관련도 없다. <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고려 사람이라는 설이 있긴 함, 그의 어머니도 고려 출신이라는 설이
있음>
어쨌든 정도전(鄭道傳)과 율곡 이이(李珥),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와 중농학파(重農學派)
계열 등 몇몇 깨어있는 이들을 제외한 조선 지배층의 우둔함은 결국 부국강병을 멀리하고 민
생을 외면했으며, 쓸데없이 유교 교리만 앞세워 헛소리만 주구장창 떠드니 발전은 커녕 점점
퇴보하여 결국 우리의 옛 속방인 왜국에까지 밀리게 되었다. (조선 중기부터 밀리기 시작함)
그래서 결국은 아시아의 진정한 호구 국가가 되었으니 그 고통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굴레처
럼 남아있으며, 약소국의 비애를 두고두고 누리게 만든다. (제삿밥도 아까운 조상들이 많아서
후손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님) 기분 같아서는 저 증주벽립 바위글씨를 깨부시고 싶지만 저
글씨가 무슨 잘못이 있으랴? 게다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어 나보다 높은 신분의 존
재라 감히 해코지하기도 어렵다

※ 북묘 하마비, 우암 송시열 집터 찾아가기 (2018년 2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3번 출구), 4호선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고 국민생활관 하차, 또는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7번을 타도 된다.
  국민생활관 정류장에서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서쪽 길(성균관로17길)을 따라 2분 정도 가면
  북묘 하마비이며, 여기서 왼쪽으로 더 들어가면 송시열집터 증주벽립 바위글씨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1가 5-99 (성균관로17길 37)


▲  서울과학고에서 바라본 명륜동 증주벽립(송시열집터) 방향
정면에 보이는 주택가 속에 증주벽립이 숨어있다. 이 일대에 흥덕사와 송시열 집,
북묘 등이 있었고, 도심 경승지로 앵두꽃이 유명했다고 하니 정말 상전벽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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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2월 2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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