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01.11 모악산 눈꽃 나들이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전북도립미술관]
  2. 2018.05.04 봄맞이 산사 나들이 ~ 전주 근교 제일의 고찰, 완주 종남산 송광사

모악산 눈꽃 나들이 [선녀폭포, 대원사, 수왕사, 전북도립미술관]



' 모악산 연말 나들이 (대원사, 수왕사) '


▲  모악산 대원사

 


 

겨울 제국(帝國)의 나날이 강성해가던 연말의 어느 평화로운 날 전북 한복판에 자리한 모
악산을 찾았다.
이번 해가 새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지 정말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묵은 해가 되어 다시
금 새로운 해를 맞이해야 된다. 그래서 묵은 해를 정리할 겸, 올해 마지막 답사지를 물색
하다가 모악산 대원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쿨하게 길을 잡았다.

아침 일찍 차디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서초동 남부터미널로 이동하여 전주로 가는 직행버
스를 나를 담았다. 버스도 추위가 싫었는지 남쪽을 향해 질주하여 2시간 20분만에 전주시
외터미널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라는 크고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미리 점심을 먹고 움직이고자
전주(全州)에 올 때마다 거의 꼭 들리는 단골 콩나물국밥집(전주한옥마을 부근)에서 전주
의 명물인 콩나물국밥으로 뜨끈하게 배를 채웠다. 거기에 디저트로 주는 커피까지 섭취하
니 식곤증이 밀려와 나를 희롱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오니 하늘이 순간 시샘을 벌인 듯,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비의 양
은 다행히 적었지만 나들이에서 비가 오면 이것만큼 열받는 것도 없다. 어쨌든 비의 방해
공작을 원망하며 전주시내버스 970번(송천동↔전북도립미술관)을 타고 모악산으로 이동했
다.
모악산관광단지(전북도립미술관 종점)에 이르니 귀찮게 하던 비도 다행히 그쳤으나, 하늘
이 일그러진 인상으로 세상을 굽어보고 있어 언제 비나 눈이 투하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모악산 표석의 위엄


 

♠  모악산(母岳山) 입문

▲  모악산 대원사계곡(시앙골, 물레방아골) 하류

전북 한복판에 장엄하게 누워있는 모악산(794m)은 전주와 완주(完州), 김제(金堤)에 걸쳐있는
산으로 호남평야와 전북 내륙 산간지대의 경계 역할을 하고 있다. 1971년 모악산 일대 42.44
㎢가 모악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정상 밑에 있는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
니의 모습이라 하여 '엄뫼'라 불렸는데, 그걸 한자로 표현하여 어머니의 산이란 뜻의 모악산
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신라 후기에는 '금뫼','금산'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모악산의 원래
이름으로 보는 설도 있다.

신라 후기부터 세상을 구할 미륵(彌勒)의 출현을 열망하던 미륵신앙(彌勒信仰)의 성지(聖地)
인 금산사(金山寺)를 비롯해 귀신사(歸信寺), 대원사, 심원암 등 굵직한 오래된 절이 안겨져
있으며, 왕년에는 80여 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새로운 종교들이 모악산을 기
반으로 여럿 생겨났는데, 증산교(甑山敎)가 그 대표적이다.
모악산은 봄 풍경이 아름다운데, 특히 금산사 입구 벚꽃길이 매우 유명하다. 하여 변산반도(
邊山半島)의 여름 풍경, 내장산(內藏山)의 가을단풍, 백양사(白羊寺)의 설경과 함께 호남4경
의 하나로 격하게 찬양을 받는다.

모악산 산행은 김제 금산사나 전주 중인동, 완주 모악산관광단지에서 시작하면 편하며, 산에
안긴 명소로는 금산사와 귀신사, 대원사, 심원암, 수왕사 등의 오래된 절과 전북도립미술관,
금산사 벚꽃길, 명당(明堂)으로 소문났으나 이곳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든다고 전하는 장군봉,
선녀폭포, 전주김씨 시조묘 등이 있다.


▲  전주김씨 세덕비(世德碑)와 전주김씨 종중공덕비(오른쪽 비석)

모악산 동쪽 자락 원기리에는 '모악산관광단지'가 넓게 터를 닦았다. 모악산을 든든한 후광(
後光)으로 삼은 이곳은 다른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토속 음식을 내세운 식당과 가게(편의점),
까페, 등산용품점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관광단지 남쪽에는 전라북도에서 2004년 10월
에 세운 전북도립미술관이 자리하여 전북 지역 현대 미술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허나 미술관은 애당초 계획이 없었기에 쿨하게 통과했다. 나의 미련한 머릿속에는 오로지 모
악산과 대원사 뿐이었기 때문이다. 혹여 대원사를 보고 나올 때 시간이 남으면 들릴까도 했으
나 역시 인연이 닿지 않았다.

평일이라 썰렁한 관광단지를 지나면 눈에 뒤덮힌 모악산의 설경이 나타나면서 전주김씨 세덕
비와 종중공덕비가 슬쩍 모습을 내민다.
여기서 가까운 산자락에 전주김씨 시조인 김태서(金台瑞)의 무덤이 있다. 그래서 이곳에 이들
비석을 주렁주렁 닦아놓은 것인데, 김태서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4째 아들인 김은열(金殷
說)의 후손으로 그의 터전인 경주가 몽골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자 1254년에 가솔을 이끌고 전
주로 넘어와 정착했다. 이후 그는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고, 그를 시조로 한 전주김씨가 생
겨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남북분단의 원흉으로 북한이란 괴뢰 정부를 세운 김일성이 그의 후손이라는 점
이다. 1993년 손석우란 사람이 '터'란 책을 냈는데, 김일성이 시조 무덤의 지기(地氣)를 받아
북한을 세워 집권했으며, 음력 1994년 9월에 죽을 거라는 내용을 다루었다. 비록 달은 틀리지
만 1994년 7월 김일성이 갑자기 골로 가면서 그 책과 전주김씨 시조묘는 잠시 세상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전주김씨 시조묘는 대원사로 올라가는 길목 부근에 자리해 있어 잠시 들릴까 했으나 눈의 방
해가 심해 올라가지는 못했다. 어차피 계획에도 없던 곳이다.


▲  선녀폭포(仙女瀑布)와 폭포를 품은 사랑바위

전주김씨 세덕비에서 대원사계곡(시앙골)을 옆에 끼고 산길을 오르다보면 선녀폭포와 사랑바
위가 모습을 비춘다.
선녀폭포는 높이 5m도 안되는 조그만 폭포로 볼품은 떨어지나 무려 선녀란 이름까지 지닌 것
을 보면 옛 사람들의 마음을 많이도 앗아간 모양이다. 이런 폭포에는 꼭 옛 사람들이 심심풀
이로 지어놓은 전설이 있는 법, 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아주 먼 옛날, 보름달이 뜨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선녀폭포로 내려와 목욕을 했다. 다른 유사
전설에서는 그냥 목욕만 하고 돌아갔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목욕 외에 수왕사에 들려 약수도
마시고 모악산 신선과도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뭇꾼이 우연히 폭포 옆을 지나다 목욕 중인 선녀를 발견했고 그들의 아름
다운 자태에 미치도록 넋이 나간 그는 결국 상사병 비슷한 병을 얻어 몸저 눕게 되었다.

병으로 힘들어하던 나뭇꾼은 기왕 이 지경이 된 거 선녀의 모습을 1번만 더 보고 죽자며 보름
달이 뜬 날 폭포를 찾아와 그들을 훔쳐봤다. 그러다가 뜻밖에 한 선녀와 눈이 마주치게 되었
는데, 그 선녀도 나뭇꾼이 좋았는지 둘만 살짝 대원사 백자골 숲으로 자리를 옮겨 사랑을 속
삭이며 예민한(?) 일을 벌이려는 찰라, 갑자기 뇌성병력이 그들을 내리치면서 선녀와 나뭇꾼
은 돌이 되고 말았다.
하늘의 시샘에 돌이 된 그들의 모습이 마치 떨어질 줄 모르고 사랑을 속삭이는 듯 하다 하여
사랑바위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으며, 여기서 치성을 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산길에
서 보면 폭포의 모습이 그리 실감나진 않으나, 바로 앞에서 보면 조금은 그럴싸하게 보인다.


▲  대원사계곡(시앙골)을 따라 이어진 모악산 산길

▲  겨울에 잠긴 모악산 산길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털린 나무들은 숨죽이며 봄을 잉태하고 있다.

▲  속세를 향해 흘러가는 대원사계곡(시앙골)
소쩍새가 울 때면 겨울에 묻힌 계곡도 얼음을 박차고 일어날 것이다.


모악산관광단지에서 20분 정도 야트막한 산길을 오르면 대원사가 반갑게 모습을 비춘다. 시앙
골다리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이 놓여져 있고, 그 길을 오르면
비로소 대원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  대원사 직전에 걸린 크리스마스 축하 현수막

▲  대원사 경내로 인도하는 시앙골다리와 계단길


 

♠  모악산 동쪽 자락에 안긴 고즈넉한 산사
대원사(大院寺)

모악산 동쪽 자락에는 고색과 숲내음이 깃든 대원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겨울 제국이
내린 두터운 눈을 뒤집어쓰며 겨울 산사의 고적함을 진하게 우려내고 있는데, 종종 나타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와 추녀 밑에 달린 풍경(바람방울)이 들려주는 그윽한 풍경소리가 고요
한 경내를 살짝 어루만진다.

대원사는 670년에 보덕(普德)의 제자인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이 창건했다고 전
한다. 보덕은 고구려 승려로 열반종(涅槃宗)의 개산조(開山祖)인데, 고구려의 대막리지(大莫
離支)인 연개소문(淵蓋蘇文, ?~666)이 당나라에서 도교(道敎)를 받아들이자 이를 개탄하며 백
제로 넘어갔다. 이때 신통력으로 완주 고덕산(高德山)으로 날라와 경복사(景福寺)를 세웠다고
하며, 절을 세운지 얼마 안가서 고구려가 망했다.

보덕의 제자인 일승, 심정, 대원은 경복사가 보이는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워 대원사(大原寺)
라 했다고 전한다. 보덕의 설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나와있지만 대원사 창건까지는 나
와있지 않아 670년 창건설(또는 660년)에 썩 신뢰는 가지 않는다. 게다가 창건 시기를 입증해
줄 신라 후기 유물과 유적은 전혀 없으며, 1066년에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중창했다는 이야기
가 있어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374년 나옹(懶翁)이 중창을 했다고 하며, 1415년에 다시 중창을 벌였다. 그러다가 1597년 정
유재란으로 말끔히 파괴되자 1606년 부처로 추앙받는 진묵(震默)이 다시 일으켜 세웠고, 1733
년 동명 천조(東明 千照)가 중창을, 1886년에는 금강산 건봉사(乾鳳寺) 승려인 금곡(錦谷)과
인오 등이 중창했다. 금곡은 함수산(咸水山) 거사와 함께 대웅전과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내
원암(內院庵)에 있던 염불당을 가져왔다.

1950년 6.25전쟁으로 대부분이 파괴된 것을 덕운이 1959년부터 불사를 일으켜 하나씩 건물을
일으켜 세웠다. 1993년 칠성각을 부시고 요사채를 지었으며, 삼성각을 다시 지었다. 그리고
2001년 이후 명부전과 대웅전 수미단을 손질해 지금에 이른다.

예전에는 비록 음은 같지만 가운데 한자만 살짝 다른 대원사(大圓寺)였으나 근래 지금의 한자
로 갈렸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명부전, 나한전, 범종각, 요사 등 약 10동 정도의 건물이 조
촐한 경내를 메우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삼세불좌상과 용각부도가 있고, 1606년에 조성
된 목각사자상(전북 지방민속문화재 9호)도 있었으나 1988년에 도난을 당했다. 그러다가 1999
년에 서울 가회동(嘉會洞)의 어느 화랑에서 발견되었으나 공소시효를 주장하며 돌려주지 않았
으며, 서울 인사동에 어느 작자에게 넘어가면서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1999년에
지방문화재에서 정리되었음) 그 밖에 오래된 5층석탑 2기와 승탑(부도) 6기가 절의 숙성된 내
력을 알려준다.

이곳은 천하대복지(天下大福地)의 최길상(最吉祥)으로 치는 명당으로 효의 절, 어머니 절, 발
원을 이루는 기도처로 꼽히며, 특히 증산교를 세운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1909)이
도를 깨우친 현장이기도 하다.
매년 1월 1일에는 '촛불기원 해맞이 타종제' 행사가, 4월에는 '모악산 진달래 화전축제'를 열
어 속세에 큰 호응을 받고 있는데, 화전축제는 이곳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  매점과 찻집으로 쓰이는 소화당(笑話堂)

▲  소화당 현판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소화당이란 조그만 목조집이 마중한다. 이 건물은 불교용품과 기
념품, 커피, 전통차를 파는 매점으로 커피는 무려 3,000원대를 받는다. 건물 옆에는 잠시 쉬
어갈 수 있도록 파라솔이 달린 탁자와 의자가 놓여져 있고, 건물 정면에는 소화당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는데, 마치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한 상큼한 모습이다.


▲  겨울 산사의 내음을 진하게 보여주는 대원사 경내

▲  대원사 아랫쪽 5층석탑

소화당을 지나면 바로 대웅전 뜨락이다. 정면에는 대웅전이 마주보고 있고, 오른쪽에는 요사
와 모악당, 샘터, 왼쪽에는 5층석탑과 범종각, 명부전 등이 뜨락을 둘러싸고 있다.
바로 왼쪽에 보이는 5층석탑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20세기 중반 이후에 손질하면서 4
사자5층석탑으로 성형되었다. 그러다보니 고색의 내음이 다소 떨어진다. 그 뒷쪽에는 범종(梵
鍾)의 보금자리인 범종각이 있다.


▲  대원사 대웅전(大雄殿)

동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은 대원사의 중심 건물(법당)로 석축 위에 높이 자리해 있다. 정면
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주심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법당치고는 매우 작은 덩치인데 1886년에 지
어졌으나 6.25때 불탄 것을 1959년 이후에 다시 지었다.
불단(佛壇)에는 목조3세불좌상과 삼신후불탱 등이 있으며, 지금은 없지만 괴목(槐木)으로 만
든 목각사자상이 있었다. 이 사자상은 진묵대사가 축생(畜生)들을 천상(天上)으로 천도하고자
만든 것이라 하며 그 위에 북을 올려놓고 쳤다고 한다. 허나 1988년 불의의 도난을 당했고 다
행히 1999년에 서울 가회동에서 발견되었으나 소유자인 이영옥이 이현수란 사람에게 팔아먹는
등 우여곡절이 심해 아직까지 제자리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  대원사 목조삼세불좌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215호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목조3세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얼굴부터 밑도
리까지 하나 같이 두텁게 생긴 이들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로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약
사불(藥師佛)을 거느린 3세불(三世佛)로 17세기에 조성된 것이다.
석가여래와 약사불, 아미타불로 이루어진 3세불은 조선 중/후기에 많이 나타나는 불상 형태로
중앙에 자리한 석가여래는 중심 불상답게 키가 제일 크며(130cm), 좌우 불상은 116cm 정도이
다. 앞으로 조금 내민 얼굴은 다소 경직되고 딱딱한 표정으로 볼살이 많고 이마가 넓으며, 꼽
슬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수인(手印)만 서로 다를 뿐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의 비슷한 모습이며, 윗도리가 아랫도리보다
다소 살이 찐 모습으로 17세기 호남에서 활동하던 조각승들의 조각 스타일이 잘 반영되어 있
다. 그들 뒤에는 화려한 색채의 삼신후불탱이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대원사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된 명부전이 대웅전을 바라보
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로 1887년에 금곡이 지었으며, 2001년
에 중수했다.


▲  조선 후기에 조성된 명부전 지장보살상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가 그를 보좌한다.

▲  명부전 10왕(시왕)과 판관(判官), 금강역사상

▲  명부전 윗쪽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  종무소로 쓰이는 모악당(母岳堂)

▲  모악당 뒷쪽에 자리한 나한전(羅漢殿)

▲  나한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와 거울 광배

나한전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16나한(羅漢)의 거처이다. 석가
여래의 광배(光背)가 매우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데, 광배 테두리는 검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광배 중앙에 거울까지 달려있어 잠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아마도 그런 의
도로 거울을 갖추었을 것이다.

  나한전 석가후불탱(19세기 작)과
색채감이 돋보이는 16나한상

  모악당 옆에 자리한 샘터


  경내 윗쪽에 자리한 5층석탑

경내 뒷쪽 언덕에는 고색이 느껴지는 5층석탑이 경내를 굽어보고 있다. 대원사는 특이하게 오
층석탑이 2기나 있는데, 법당 앞이 아닌 다들 구석에 자리해 있다. 아마도 비보풍수(裨補風水
)의 일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탑은 2중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석축을 기반 삼아, 네모난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2
중의 기단(基壇)과 5층의 탑신(塔身), 얇은 머리장식을 차례대로 얹혔는데, 탑신 지붕돌이 다
소 헝클어지고, 머리 장식 상당수가 사라진 것 외에는 그런데로 상태는 괜찮다.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용각부도 다음으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다.


  대원사 아랫 승탑군(僧塔群)

5층석탑에서 경내 뒷쪽을 거쳐 북서쪽 산길을 조금 오르면 녹색 철책에 둘러싸인 승탑군(부도
군)을 만나게 된다.
승탑<부도(浮屠)>이란 승려의 사리를 머금은 탑으로 대원사에는 9기(또는 10기)의 오래된 승
탑이 전하고 있는데, 용각부도 1기만 제외하고 모두 조선 중/후기 것이다. 이중 대웅전 남쪽
밑에 있던 승탑 3기(또는 4기)는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진 상태이고, 경내 윗쪽에 2개 그룹으
로 4기와 2기 등 총 6기만 전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대원사는 잃어버린 것이 참 많다. 절의
초창기 역사도 그렇고, 목각사자상, 거기에 승탑까지 말이다.

  대원사 용각부도(龍刻浮屠)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71호

대원사 승탑 중의 아주 유별나게 눈에 띄는 존재가 있다. 바로 검은 피부로 이루어진 용각부
도(용각승탑)이다.
높이 187cm의 이 승탑은 이름 그대로 용이 새겨진 것으로 옥개석 아랫부분에는 대모양의 무늬
위에 겹잎으로 된 18개의 연꽃무늬가 있으며, 그 위에 구름무늬를 새기고 가운데 부분에 여의
주(如意珠)를 두고 다투는 2마리 용을 진하게 새겨놓았다. 승탑의 피부가 완전 흑백이라 실감
이 덜해서 그렇지 만약에 칼라였다면 진짜 용도 시샘을 했을 것이다. 용의 비늘과 피부, 구름
무늬 등이 아주 실감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탑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용무늬까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어느 고승의 승
탑으로 여겨진다. 그 고승의 덕과 업적이 대단했던지 제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저 탑을 조성해
스승의 넋을 기렸던 모양이다.

장대한 세월을 거치면서 반질반질했던 피부는 검은 피부로 대부분 타버렸고, 군데군데 주근깨
같은 것도 달려있지만 이들은 세월이 달아준 훈장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머리 장식과 기단부
가 조금 깨진 것을 보면 대부분 잘 남아있는데, 머리 장식은 다른 데서 가져왔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대원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자 제일 가는 꿀단지로 이렇게 화려한 용 문양을 지닌
승탑은 처음 본다. 그러다보니 지닌 다른 승탑은 거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용각부도 주변에는 조선 후기에 지어진 승탑 3기가 있다. 매력 만점의 용각부도에 단단히 묻
힌 탓에 그리 주목은 못받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흔한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스타일의 탑으
로 용각부도와 긴 시간을 뛰어넘으며 나란히 자리한 모습이 마치, 부모와 자식들 같다. 그 옆
에는 마치 버섯이나 양봉통처럼 생긴 조그만 승탑이 있어 귀엽기 그지 없는데, 이들 탑의 주
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전해오는 것이 없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원사 윗 승탑군

아랫 승탑군에서 윗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녹색 철책에 둘러싸인 윗 승탑군이 나온다. 이곳에
는 2기의 승탑이 있는데, 검은 때가 자욱한 왼쪽 탑은 기단부와 바닥돌을 갖추고 있고, 하얀
피부가 역력한 오른쪽 탑은 바닥돌 위에 바로 탑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중/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탑의 주인에 대해서는 전하는 것이 없다.
이들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어 여기서 더 이상 올라갈 공간이 없다.
주변은 대원사 소유의 숲이며 공식 탐방로도 없기 때문이다. (비법정 탐방로만 있음)


  아랫 승탑군에서 바라본 대원사의 뒷모습

  모악산 산길과 이어진 대원사 남쪽 문

  대원사 돌담을 따라 이어진 모악산 산길

승탑을 끝으로 대원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원래는 대원사만 보고 전주로 쿨하게 철수하
려고 했으나, 여기서 정상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물맛이 일품이라는 오래된 절, 수왕사가
있다고 하여 시간도 아직 이르고 해서 거기까지 발을 넓혀보기로 했다. 기왕 모악산의 품에
들어섰으니 그 품을 더 파고들어야 아쉬움이 없겠지. 다행히 수왕사까지는 1km 남짓이다. (산
에서 1km는 평지의 1km보다 훨씬 김)
허나 문제는 산에 눈이 많이 쌓여있고 얼음 길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걱정이 좀 되었다. 올라갈 때야 별로 문제는 안되지만 문제는 내
려올 때가 아니던가? (트래킹화를 신고 온 것이 전부임) 허나 이미 내 마음은 수왕사에 올라
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 거기까지 무작정 올라가기로 했다. 내려갈 때 걱정은 나중이다.

* 대원사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997 (모악산길 243, ☎ 063-221-8502)


 

♠  모악산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고적한 산사
수왕사(水王寺)

  모악산 정상과 수왕사로 인도하는 눈덮힌 산길

대원사에서 수왕사까지는 산길을 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겨울이 내린 눈과 얼음이 두텁게
깔려있어 올라가고 내려가는 길이 그리 넉넉치가 않은데, 앞만 보고 열심히 오른 끝에 해발
약 560m에 자리한 수왕사입구 쉼터에 이르렀다.
여기서 서쪽으로 난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모악산 정상이고, 남쪽으로 나있는 벼랑길로 가면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적한 절집, 수왕사가 반갑게 모습을 비춘다.


  수왕사입구 쉼터

  수왕사입구 쉼터에서 수왕사로 인도하는 벼랑길
안전한 통행을 위해 벼랑길에 철난간을 둘러 절을 찾은 이들을 배려했다.


  소박한 모습의 수왕사 경내

해발 570m 고지에 자리한 수왕사는 모악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절이다. 이곳은 약수가 유
명하여 '물왕이절','무량(無量)이절'이라 불렸는데, 680년에 완주 경천사를 지은 보덕이 수도
장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유적이나 관련 역사 기록이 전혀 없어 신빙성은
없으며, 이곳 밑에 대원사가 있어 대원사나 금산사 승려의 참선 장소로 쓰였다가 조선 때 건
물을 심으면서 절이 된 것이 아닐까 싶다.

1125년에 원명국사(圓明國師)가 중창했다고 하나 이 역시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며, 1597년 정
유재란(丁酉再亂)으로 불탄 것을 1604년 진묵대사가 중건하여 머물렀다. 6.25전쟁이 한참인
1951년 1월 10일, 모악산 일대를 어지럽히던 공비를 토벌하고자 작전상 소실된 것을 1953년에
천석진사(千錫振師)가 다시 세웠다.

이곳은 모악산 정상 북쪽 밑으로 가파른 곳에 간신히 터를 닦은 탓에 절이 매우 단출하다. 법
당과 요사, 진묵조사전이 좁은 경내를 이루고 있으며, 근래에 새로 지어진 탓에 고색의 내음
은 진작에 날라가버렸다. 오래된 유물도 없고, 건물도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여염집 스타일이
라 겉으로 보이는 절집 분위기도 다소 떨어진다. 게다가 첩첩한 산속에 묻혀있다보니 머무는
승려도 거의 없고 절을 찾는 신도나 산꾼도 별로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대원사에 많이 의존
을 한다.
또한 수왕사는 완주 지역 전통민속주로 꼽히는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 송죽오곡주(松竹五穀
酒)를 생산하는 현장으로 주지승인 벽암(碧岩)이 수왕사 약수로 직접 술을 빚는다. 그는 대한
민국 전통식품 명인 1호로 지정된 전통민속주의 장인이자 수왕사의 자랑으로 술을 멀리하는
절에서 곡차(穀茶)로 빗대 표현되는 술을 직접 만든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수왕사 법당

  법당 내부 (석가3존불과 여러 탱화들)

동쪽을 바라보고 선 수왕사 법당은 금동으로 치장된 석가3존불과 석가후불탱, 신중탱, 용왕탱
이 봉안되어 있다. 절은 작고 초라해도 법당 내부에 봉안된 존재만큼은 다른 절 못지 않은데,
바다와 전혀 관련도 없을 것 같은 이곳에 용왕탱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수왕사가 거
의 약수로 지탱하는 절이다보니 물을 관리하는 용왕(龍王)이 담긴 용왕탱을 봉안해 매일 좋은
물이 나오도록 기원하는 것이다.

  법당 신중탱(왼쪽)과 용왕탱(오른쪽)

  수왕사 약수터

수왕사의 든든한 후광인 약수터는 겨울 제국의 심술로 얼음에 완전 봉해진 상태이다. 그래서
이곳의 명물인 약수를 마시지 못했지. 선녀도 와서 마신다는 물인데 이렇게 막혀버렸으니 여
기까지 온 보람이 크게 떨어진다.


  진묵조사전(震默祖師殿)

보통 절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산신각이나 삼성각을 두기 마련이나 이곳은 절
을 중창한 진묵대사를 봉안한 진묵조사전을 그 자리에 두었다. 여기서만큼은 산신이나 칠성,
지장보살보다 진묵대사를 더 크게 여기기 때문이다.
바위 밑 가파른 곳에 간신히 자리를 닦고 진묵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1칸 크기의 집을 두었
는데, 그곳까지 인도하는 돌계단을 법당 옆까지 늘어뜨려놓았다.


  하늘색 두광(頭光)까지 갖춘 진묵대사의 진영

진묵(1562~1633)은 수왕사와 대원사의 중창주이자 석가여래의 소화신(小化身)으로 격하게 추
앙을 받는 고승으로 그의 흥미로운 이적과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그가 동자승이던 시절, 주지승이 그에게 향불을 피우게 하니 주지승 꿈에 제천(諸天) 등이 나
타나 '부처가 향을 피우니 우리는 받을 수 없소!' 했다는 것, 8만대장경을 모두 암송하고 무
슨 책이든 바로 다 외워버려 따로 스승이 필요 없었다는 것. 해인사에 불이 나자 소나무잎에
물을 묻혀 뿌리니 큰 비가 내려 불이 진화되었다는 것, 동네 사람들이 물고기 매운탕을 먹고
가라며 놀리자 탕이 담긴 가마솥을 번쩍 들어 다 흡입한 다음, 엉덩이를 까서 변을 누니 물고
기가 살아서 나왔다는 설화 등, 술을 흔히 곡차(穀茶)라 부르는데, 이는 그가 술을 즐겨 마시
며 곡차라고 했다는 것, 어머니의 무덤을 '무자식 천년향화지지(無子息 千年香火之地)'란 명
당에 썼다는 것 등 재미나고 신비로운 일화가 전해져 온다.

* 수왕사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산13 (모악산길 246, ☎ 063-287-0485)


  수왕사에서 바라본 천하 (바로 앞에 나무들이 있어서 시야는 별로)

수왕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5시가 넘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뒷쪽인 모악산 정상까
지 오르고 싶었으나 시간도 늦고 산길도 가파르며 거기에 눈과 얼음까지 덮여있으니 오를 엄
두가 나지 않는다. 아이젠이라도 있었으면 모르지만 그것도 없다. 이럴 때는 건방 떨지 말고
자존심을 곱게 접고 무조건 내려가는 것이 상책, 안그래도 수왕사까지 눈길을 뚫고 무리하게
올라온 터라 내려가는 것도 걱정인데 자꾸 일을 벌여봐야 좋을 것이 없다.

산길을 기어가듯 조심에 조심을 기하며 내려가 별탈없이 대원사에 도착했다. 여기서 관광단지
까지는 길이 완만하기 때문에 별 어려움은 없다. 처음에는 대원사만 보려고 들어왔는데, 수왕
사까지 보너스로 겯드리면서 모악산에서의 일정이 다소 연장되었다.

전북도립미술관 종점에 이르니 마침 전주시내버스 970번이 바퀴를 접고 쉬고 있어 그것을 타
고 미련없이 전주시내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연말의 모악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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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산사 나들이 ~ 전주 근교 제일의 고찰, 완주 종남산 송광사


 


' 봄맞이 산사 나들이, 완주 송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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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만물의 희망, 봄이 혹독한 겨울 제국(帝國)을 몰아내고 천하를 한참 해방시키던 3월
한복판에 완주(完州) 제일의 고찰로 손꼽히는 송광사를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 남부터미널로 이동하여 삼례(參禮)로 가는 직행버스에 몸을 담고 딱 2시
간을 달려 삼례터미널에 도착했다. 여기서 바로 전주시내버스 350번(삼례터미널↔평화동
)을 잡아타고 호남의 오랜 중심지, 전주 시내로 들어섰다. 서울에서 바로 전주로 안가고
삼례를 거친 것은 전주행 직행버스 이용객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한산한
삼례행 버스를 택했다. 어차피 삼례에서 전주는 지척 거리이다.

전주의 도심, 전동(全洞)에 두 발을 내렸으나 송광사로 가는 차 시간이 50분이나 남아있
었다. 마땅히 할 것도 없고 점심을 먹기에도 시간이 일러 중앙시장까지 쉬엄쉬엄 걸으며
시간을 억지로 죽였다. 그래도 20여 분이나 남아 정류장에 죽치고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기다리던 전주시내버스 806번(평화동↔앞멀)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이밀며 입을 벌린다.
전주 806번은 거의 3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벽지 노선으로 그를 놓치면 정말 대책이 없다.
(송광사는 806번 외에도 1개 노선이 더 있으나 배차간격이 거의 절망 수준임)
버스는 모래내시장에서 노인들이 가득 타면서 거의 만석의 기쁨을 누렸고 중앙시장 출발
30분 만에 송광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 진흙탕이 되버린 오도천을 건너면 송광사로 인도하는 길이 나온다. 그 짧
은 방죽의 끝에는 완주군 제일의 고찰인 송광사가 일주문을 들이밀며 중생을 맞이한다.


▲  송광사 앞을 흐르는 오도천

▲  송광사 주차장과 둑방길 나무들


 

♠  종남산(終南山) 남쪽에 들어앉은 오래된 고찰
완주 송광사(松廣寺)

▲  송광사 일주문(一柱門)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4호

송광사의 정문인 일주문은 양쪽으로 쭉쭉 뻗은 보기만해도 정겨운 기와 돌담을 거느리고 있다.
보통 일주문은 경내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며 홀로 자리해 있지만 이곳은 경내 바로 앞에
자리하여 홀로 있는 것은 면했다. 바로 옆에는 백련다원이란 찻집이 있고, 문을 들어서면 바
로 금강문과 함께 경내 건물이 두텁게 모습을 비춘다.
일주문은 속세의 문과 달리 여닫는 문이 없어 어느 누구든 가리지 않고 맞이한다. 허나 이곳
은 특이하게도 여닫는 문짝을 달았다. 문짝을 달았다고 해서 사람을 가리는 것은 아니니 어깨
를 피고 들어가도록 하자.

이 문은 맞배지붕 건물로 다른 일주문의 지붕과 달리 간결하고 가벼운 모습이다. 문 기둥 위
쪽과 기둥 사이에 공포(空包) 덩어리를 장식한 다포(多包)식이며, 기둥 앞뒤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진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준다. 문 평방(平枋)에는 '終南山 松廣寺(종남산 송광사)'
라 쓰인 현판이 있는데 이는 1975년에 승려 서암(瑞岩)이 쓴 것이다.
지금은 경내 앞에 있지만 원래는 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나드리에 있었다고 한다. 그 문을
들어서 3km를 더 들어가야 비로소 경내에 이르렀다는 소리로 송광사 땅이 무려 그곳까지 이르
렀다고 한다. 허나 사찰 부지가 계속 줄어들면서 1814년 절과 가까운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고
1944년에 해광극인(海光克仁)이 현 위치로 옮겨 정문으로 삼았다.


▲  일주문 서쪽 돌담

송광사가 산속이 아닌 평지에 둥지를 틀다보니 돌담으로 경내를 빙 둘러 속세의 잡다한 기운
을 경계하고 있다. (서쪽 돌담에 차량 통행을 위해 문을 낸 것을 빼면 거의 돌담으로 감싸임)
고색이 짙은 돌담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시골마을의 담장 같은 정겨운 풍경이다.


▲  일주문을 들어서면 해맑은 표정의 나무 장승 1쌍이 좋은 인연임을 강조하며
중생을 맞이한다. 그들의 인사에 나도 기분이 좋아지고 긴장감도 많이
풀어진다. 그들을 지나면 바로 금강문이 마중한다.


※ 완주 송광사(松廣寺)의 오랜 내력
종남산의 남쪽이자 오도천 서쪽 평지에 둥지를 튼 송광사는 신라 후기인 867년 보조국사 체징
(普照國師 體澄)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종남산 남쪽에 영험이 있는 샘물이 솟아나 그 옆에 절
을 짓고 송광사라 했다는데 이를 입증할 사료도, 그 시절 유물도 전혀 없어 창건시기에 대해
심히 회의감을 들게 한다. 백제 후기에 창건되어 백련사(白蓮寺)라 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 역
시 마찬가지이다.
고려 중기에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이곳을 천태종(天台宗) 소속으로 바꾸었다고 하
며 임진왜란 때 절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보조국사의 창건설 말고도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의 점지설이 있다. 그가 이곳을 지
나다가 영천이란 우물을 발견했는데 (절터 주춧돌이 가시덤불 속에 묻혀있었고, 절터 한쪽에
영천이란 우물이 있었다고 함) 그 물을 마셔보니 그 맛이 매우 특이해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하여 이 우물로 인해 이곳에 절을 세우면 크게 될 것이라 여겼으나 당장 절을 세울 여
력이 없어 샘 주변 네 귀퉁이에 돌을 쌓아 자신이 찍어둔 자리임을 밝히고 그곳을 총총히 떠
났다.
이후 순천에서 그 유명한 송광사(松廣寺)를 세우고 머물 때, 제자들에게 '전주 인근 종남산에
괜찮은 절터가 있다. 크게 불법(佛法)이 번창할 곳이니. 그곳에 절을 세워라!'
부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뜻은 실현되지 못했다.
지눌은 고려 중기 고승(高僧)으로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킨 인물이다. 당시 고려 불교계의 1
인자였던 그가 마음에 들어했던 자리에 절을 세우지 못하고 지나친 것도 이상하거니와 스승의
부탁을 받은 제자들도 그 뜻을 받들지 않았다는 점도 의문스러울 뿐이다.

지눌이 지나갔다는 시절에서 400여 년을 더한 1622년에 이르자 응호(應浩)와 승명(勝明), 운
정(雲淨), 덕림(德林), 득순(得淳), 홍신(弘信) 등이 모여 현재 자리에 절을 세웠다. 재정이
여의치 못해 무려 14년 동안 공사를 벌여 1636년에 완성을 보았으며, 당시 무주 적상산(赤裳
山) 안국사(安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 주지로 있던 벽암대사(碧岩大師)를 개창조(開創祖
)로 삼았다고 하니 이때가 실질적인 창건 시기로 여겨진다. 당시 절터 자리는 승명의 증조부(
曾祖父)인 이극룡(李克龍)이 기증했다고 한다.

▲  독특한 구조의 송광사 종루

▲  5층석탑 - 원래는 대웅전 앞에 있었다고

1636년 절이 완성되자 벽암대사를 불러 50일 동안이나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이때 전국에서 수
천 명이 몰려와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완성을 기념하고자 사적비를 세우고 약사전을 지었
으며, 옛날 지눌의 뜻을 받들었다는 의미에서 절 이름을 송광사라 했다고 한다. (순천 송광사
가 워낙 대단한 절이라 그곳의 이름을 따고 지눌의 일화를 그럴싸하게 붙여놓은 것으로 여겨
짐) 참고로 종남산이란 이름은 보조국사가 절터를 구하고자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우물이 풍부
하게 솟은 지금의 자리를 발견하고 더 이상 남으로 내려가지 않았다고 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
다. 즉 남쪽으로 가는 것을 마쳤다는 뜻이 된다.

1640년 명부전에 소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을 만들어 봉안했으며, 1641년 왕실의 지원을 받
아 청나라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의 귀국을 기원하고자 대웅
전에 거대한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을 봉안했다.
1649년 사천왕상을 조성했고, 1656년에 나한전을 지었으며, 1716년에는 범종을 조성했다. 그
리고 1786년에는 왕실의 지원에 호응하고자 왕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목조3전패를
만들고 절을 중수했다. 1813년에는 정준이 약사전을 중수하고, 절의 영역이 크게 줄어듬에 따
라 3km 밖 나드리에 있던 일주문을 조계교 인근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2층이던 대웅전이 기울
자 1층으로 개축했으며, 1814년 명부전 지장후불탱화를 조성했다.

1944년 일주문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고, 1989년에는 삼성각에 탱화를 조성했으며 1993년 대
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복장(腹臟)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2002년에
는 대웅전을 해체복원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고, 2003년에는 2층이던 관음전과 요사채의 위치
를 바꿨다. 그리고 2004년에 천왕문과 사천왕상을 손질했고 2013년 약사전을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  소나무에 조금 가려진 나한전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겉보기와 달리 제법 터가 넓은 송광사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천왕문, 금강문, 종루, 지
장전, 극락전, 첨성각, 나한전, 삼성각, 관음전, 약사전, 요사 등 대략 16~17동에 건물을 지
니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대웅전과 종루, 소조사천왕상, 소조석가여래3불좌상과 복장
유물 등 국가 보물 4점과 일주문과 사적비(전북 지방유형문화재 5호), 동종, 목조3전패, 나한
전, 금강문, 벽암당부도(전북 지방문화재자료 144호) 등 9점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산속 평지에 자리한 절로 마을 바로 옆에 자리해있어 산사의 내음은 조금 떨어진다. 그냥 시
골에 있는 한적한 사찰 정도라고나 할까? 요사와 종무소, 세심정 등을 제외하고 대부분 오래
된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각 건물마다 문화유산이 풍부하여 그들이 풍기는 고색의 내음에 현
기증이 일어날 정도이다. 게다가 경내 서쪽에는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여름과 초가을에는
연꽃의 향연도 구경할 수 있다.

※ 송광사 찾아가기 (2018년 4월 기준)
① 전주까지
* 용산역, 영등포역, 광명역, 수원역, 천안역, 서대전역에서 전라선 열차(고속전철, 새마을호
  , 무궁화호, 누리로)를 타고 전주역 하차
* 여수엑스포역, 순천역, 남원역에서 전라선 열차(고속전철, 새마을호, 무궁화호, 누리로) 이
  용
*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전주행 고속버스가 1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전주행 직행버스가 20~30분 간격, 동서울터미널에서 전주행 고속버스
  가 3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인천공항, 의정부, 고양(화정), 성남, 부천, 안산, 수원, 강릉, 원주, 천안, 대전(복
  합, 유성), 군산, 정읍, 남원, 광주, 목포, 순천, 대구(서부, 동대구), 경주, 포항, 부산(
  사상, 노포동), 창원(마산), 진주에서 전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전주역에서 806번 시내버스(1일 5회)를 타고 송광사 하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6번 시내버
  스를 타고 고려병원에서 하차하여 길 건너편 정류장에서 814번 시내버스(1일 11회 운행)로
  환승
* 전주고속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 부근 금암광장에서 3-1번을 타고 모래내시장 정류장에서
  814번으로 환승, 또는 금암광장이나 전주시외터미널, 고속터미널에서 전동, 전주한옥마을
  방면 아무 시내버스나 타고 중앙시장이나 전동성당, 남부시장 정류장에서 내려서 건너편 정
  류장에서 806, 814번 이용
③ 승용차 (주차장 있음)
* 익산포항고속도로 → 소양나들목을 나와서 진안 방면 26번 국도 → 해월1교차로에서 좌회전
  소양 방면 → 마수교를 건너 우회전 → 송광사

▲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금강문)

▲  사자를 탄 문수동자 (금강문)

★ 송광사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공짜
* 송광사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를 운영하고 있다. 자율/휴식형과 아름다운 순례길, 1박2
  일 템플스테이 등 3가지가 있으며, 자율/휴식형은 절에 머물며 휴식과 수양을 하는 것으로
  아침/저녁 예불과 공양시간만 지키면 된다. (평일은 언제나 참여 가능), 아름다운 순례길은
  전북에 있는 불교, 원불교, 천주교, 개신교 성지를 걸어서 순례하는 것으로 송광사에서 1박
  2일 숙식을 한다.
* 소재지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2 (송광수만로 255-16 ☎ 063-241-8090 / 243
  -8091)
* 송광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템플스테이 정보와 예약 신청 가능)


▲  금강문 안쪽에서 바라본 일주문


 

♠  송광사 천왕문, 금강문

▲  금강문(金剛門)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73호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금강문이 나타나 중생의 번뇌를 검문한다. 이 문은 정면 3칸, 측면 2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부처를 지키는 금강역사(金剛力士)의 보금자리이다.
문의 천정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난 연등천정이며, 대웅전 방향 오른쪽 금강역사는 왼손에 칼
을 들고 싸움 태세를 취하며 약간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왼쪽 금강역사는 오른손에 뱀(아마
도 코브라일듯)을 꽉 쥐어들며 고개를 약간 틀어 오른쪽을 보고 있다. 눈을 크게 부라리며 당
장이라도 칼로 찌를 태세이지만 얼굴은 거의 해학적으로 생겨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
게 한다.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도 그들의 표정에 굳이 싸움을 걸지 않고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돌아갈 것이다.

금강역사 옆에는 앳되고 귀여운 동자가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사자(거
의 강아지처럼 생김)에 탄 동자는 문수동자(文殊童子)이며, 작은 코끼리를 탄 보살은 보현동
자(普賢童子)로 표정이 참 천진난만하다. 저들은 저리 표정이 밝건만, 속세에 찌들어 매일 고
통받고 사는 나는 그렇지가 못하니 그 비결을 묻고 싶을 뿐이다. 저 자리에 앉으면 저렇게 변
하는 것일까? 저들이 잠시 마실 나간 사이 그들의 자리를 빼앗아 앉고 싶다.


▲  금강역사와 사자를 탄 문수동자의 위엄

▲  금강역사와 하얀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

▲  금강문과 천왕문 사이에 자리한 굵직한 당간지주(幢竿支柱)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돌기둥에는 고색의 때가 역력하다.

▲  보수공사에 들어간 천왕문(天王門)

금강문을 들어서면 바로 천왕문이 마중을 한다. 천왕문은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의 보
금자리로 보통 일주문처럼 문짝이 없지만 여기는 여닫는 문짝을 두었다.

이 문은 송광사가 한참 몸을 일으키던 1622년부터 1636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1636년에 세
워진 송광사 개창비(開創碑)에 따르면 처음부터 '문'이 아닌 '전'을 칭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또한 다문천왕(多聞天王)의 왼쪽 보관(寶冠) 끝 뒷면에 '順治己丑六年七月日 畢金山畵圓主造
像'이란 묵서(墨書)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순치6년은 1649년이다. (청나라 세조의 연호임)
하여 이를 통해 1649년에 사천왕을 만들어 봉안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왼손에 있는 보탑
(寶塔) 밑에는 '乾隆五十一年丙午五月日…新造成'이란 묵서명이 있어 1786년에 보탑을 새롭게
만들었음을 살짝 알려준다.

▲  천왕전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 - 보물 1225호

이들 사천왕상은 흙으로 만든 것으로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허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천왕문이 보수공사에 들어가면서 문 주변으로 철제 담장을 둘렀고, 사천왕상 앞에 보수 관련
시설을 두면서 온전한 모습을 담기가 어려웠다. 사천왕상도 아무리 그들의 보금자리를 보수하
는 시설이라고 해도 시야를 가려 마치 철창에 갇힌 듯한 모습이니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일 것
이다.

◀  아이들을 품으며 행복에 겨워있는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의 위엄


▲  송광사의 종루(鐘樓) - 보물 1244호

천왕문을 지나면 살이 과하게 찐 똥배 포대화상이 나온다. 똥배에다가 얼굴에 혹부리까지 잔
뜩 나있으니 성인병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을 듯 싶으나 불교의 주요 성자(聖者)의 하나로
그의 배를 문지르면 아들을 낳거나 소망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중생들의 인기가 대단하다.

포대화상 옆에는 '十'자 모양의 묘하게 생긴 건물이 눈길을 단단히 부여잡는데 그가 바로 사
물(四物)의 보금자리인 종루이다. 송광사의 백미이자 상징으로 '十' 모양으로 생긴 탓에 예전
에는 십자각(十字閣)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정확히는 12각형으로 이런 형태에 건물은 천하에서
거의 이곳 밖에 없다. 또한 6각형 이상 건물은 오로지 궁궐이나 국가 제단에서만 세울 수 있
었는데 무려 12각형짜리가 어찌 궁궐도 아닌 절에 버젓히 세워져 있는지 딱히 전하는 사연이
없어 호기심을 크게 자극시킨다.

그는 누각 형태의 팔작지붕 건물로 1층은 2층을 받쳐들기 위한 허공일 뿐이며, 서쪽에 마련된
계단을 타고 2층에 오르면 중앙에 자리한 범종(梵鐘)을 비롯해 운판(雲版), 법고(法鼓), 목어
(木魚) 등의 사물이 매달려 있다.
이 건물은 대웅전을 1층으로 고친 1814년이나 1857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지붕을 받치
는 공포와 지붕이 절반을 넘을 정도로 커서 1층과 2층 기둥이 잘 버틸 수 있을까 싶은 쓸데없
는 걱정까지 들 정도이다.

▲  서쪽에서 본 종루

▲  종루 안에 들어있는 사물

종루에는 2개의 종이 걸려있다. 중앙에 자리한 것은 근래 것이고 그 북쪽(대웅전 방향)에 자
리한 것이 1716년에 조성된 동종(銅鐘)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38호이다,

종의 높이는 107cm, 아랫부분 지름은 73cm로 조그만 크기이며, 윗부분에 꽃무늬가 있고 밑에
는 방패 모양의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밑에 연주형(練珠形) 돌기 60개가 둘러져 있고 9.5
cm 두께의 띠가 그 밑에 있다. 아랫부분에는 지름 6cm의 원이 8개가 새겨져 있고 그 안에 범
자(梵字)를 새겼으며, 그 밑 세로 면에 보살상을 새기고 나머지 한 면에는 전패(殿牌)를 두었
다. 전패에는 '주상삼전수만세(主上三殿壽萬歲)'라 쓰여있어 당시 숙종(肅宗)과 왕후, 대왕대
비(大王大妃)의 만수무강을 기원했다.
종의 가장 밑부분에는 지름 6㎝ 정도에 보상 당초 무늬를 둘렀으며 강희 55년(1712년) 4월에
광주 무등산 증심사(證心寺)에서 만들었다는 내용과 건륭(乾隆) 34년(1769년)에 문광득의 시
주로 종을 보수했다는 내용이 있어 시주자의 인적사항을 빼곡히 적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 범
종 형태를 보여준다.


▲  송광사 극락전(極樂殿)

천왕문 동쪽에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의 거
처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명부전(冥府殿)이었으나 1999년에 바
로 옆에 지장전을 닦으면서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
을 그곳으로 옮기고 이곳을 극락전으로 삼았다.
다른 건물과 달리 문이 중앙에만 있으며, 불단에는 아미타불과 수려한 보관을 쓴 문수보살(文
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아미타3존불을 이루고 있고 좌우 벽에는 조그만 금동불이 가
득 벽을 메우고 있는데 이들은 죽은 이들의 영가(靈駕)를 봉안한 공간이다.


▲  극락전 아미타3존불 - 서방정토의 주인답게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 있는 존재들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는 고색의 때가 가득한 커다란 네모난 돌이 누워있다. 그 위에는 오래
된 연화대(蓮花臺)가 있는데, 그 자리에 새로 만든 하얀 피부의 석불이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인다. 이 네모난 돌은 예전 건물에 쓰였던 주춧돌로 보이며, 연화대 역시 예전에 쓰였거나
주변에서 업어온 것으로 여겨진다. 잉여로 남은 이들 석재를 한쪽에 모아 자리를 만들고 새로
석불을 안치하여 그들에게도 존재의 가치를 심어주었다.
석재 뒤쪽에는 종이와 쓰레기를 태우는 굴뚝이 자리하여 서로를 의지한다.


▲  송광사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1999년에 지어졌다. 극락전에 있던 명부의 식구를 옮겨와 지장전으로 삼았으며, 소
조지장보살3존상을 비롯한 명부(저승)의 식구들은 1640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들을 하나로 묶
어 '소조지장보살3존상 및 권속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68호로 지정했다.
허나 나는 어리석게도 지장전을 지나치고 말았다. 건물 주변에 그들을 알리는 문화재 안내판
이 없었기 때문이다.

▲  세심정 앞에 자리한 귀여운 돌부처
그의 포즈가 꼭 '한푼 내놔~' 그러는 것 같다.
그렇게도 돈이 궁했단 말인가?? 그 앞에
놓인 복전함이 참으로 궁색해 보인다.

▲  대웅전 동쪽 언덕의 세심정(洗心亭)
근래에 지어진 정자로 모습이 양반가의
정자나 별장 같은 분위기이다. 절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풍경~~


 

♠  송광사 나한전, 삼성각, 관음전

▲  송광사 요사(寮舍)

세심정 북쪽에 자리한 'ㄱ'자 모습의 건물은 승려의 생활공간인 요사로 예전에는 약사전(藥師
殿)으로 쓰였다. 1636년에 벽암이 세웠다고 하며, 1814년에 중수했는데, 바로 이 요사 뒤쪽에
1636년에 세워진 송광사 사적비(事蹟碑,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5호)가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그는 일명 송광사 개창비라 불리기도 하는데 신익성(申翊聖)이 비문을 짓고, 선조(宣祖)의 8
번째 아들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이 글씨를 썼다. 이 비석 역시 그의 존재를 몰라 지나
치고 말았다.


▲  송광사 나한전(羅漢殿)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72호

대웅전의 뒷통수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선 나한전은 부처의 제자인 나한(羅漢)의 보금자리이다.
그들을 거느린 석가불을 중심으로 16나한과 오백나한(五百羅漢), 인왕상(仁王像), 동자상, 사
자상 등이 건물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는데, 석가불과 16나한 뱃속에서 나온 유물 중 1656년
에 조성된 발원문이 발견되어 창건시기를 알려준다.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가운데에 문이 있는 구
조이다. 1656년에 벽암이 세웠으며 1934년에 혜광이 중수했다. 이때 중수로 서까래와 천정 등
이 조금 변형되긴 했으나 주요 부재와 천정 구성 등은 17세기 불전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나한전 목조석가여래3존상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69호

나한전 석가불은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뚱뚱한 어린이의 얼굴처럼 앳되고 포동포
동해 보인다. 두 귀는 중생들의 고충을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내려왔다. 그 좌우에는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협시(夾侍)하고 있는데, 보통은 중앙 불상과 협시불은 간격을 짧
게 하여 바로 좌우에 두지만 여기는 기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배치한 탓에 서로 간의 거리가
길어 마치 독자적인 불상/보살상처럼 보인다.

석가3존불 외에 16나한과 500나한, 범천(梵天)과 제석(帝釋), 동자, 인왕상, 사자상, 천녀상
등 526구가 불단 주변을 빼곡히 메운다. 500나한 중 일부는 나중에 다시 석고로 틀을 만들어
복원한 것이며, 석가3존불을 비롯한 나한전 내부의 모든 존재들은 '나한전 목조석가여래3존상
및 권속상 일괄'이란 이름으로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69호로 지정되었다.


▲  나한전 내부 우측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한 16나한과 하얀 피부의 조그만 500나한 등이 보인다.

▲  나한전 내부 좌측 - 존상(尊像)들이 너무 많아서 그야말로 정신을
쏙 빼놓는다.


▲  송광사 삼성각(三聖閣)

나한전 우측에 자리한 삼성각은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
로 1980년대에 기존의 건물을 부시고 새로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
부에는 1989년에 조성된 아주 따끈따끈한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  삼성각 중앙에 자리한 칠성탱

▲  산신탱과 호랑이를 탄 산신상

▲  독성탱과 윗통을 드러낸 독성상

▲  근래에 새롭게 터를 닦은 미륵불

▲  송광사 관음전(觀音殿)

▲  대웅전 뒤쪽 뜨락

종루 서쪽에 자리한 관음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2층이었다. 1층
은 밥을 먹는 공양간, 2층은 관음전으로 쓰였는데 2003년에 2층을 뚝 떼어냈다. 근래에 조성
된 관음보살상과 관음탱이 있으며, 건물 북쪽에는 매점을 겸하는 종무소가 있고 남쪽에는 공
양간 겸 요사로 쓰이는 적묵당이 있다.

대웅전과 나한전 사이에는 소공원 같은 조촐한 뜨락이 있다. 커다란 나무 그늘에 자리한 짜투
리 공간으로 예전 주춧돌과 맷돌로 쓰인 돌을 가져와 조촐하게 탁자와 의자로 삼았는데 그 모
습이 참 아기자기하다. 그리고 서쪽에는 조그만 비석이 우두커니 서 있는데 그를 알리는 안내
문도 없고 비석의 내용도 마멸이 심해 멀쩡한 두 눈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절과 관
련된 비석이거나 승려의 탑비(塔碑)인 듯 싶다. (옛 사적비라는 말도 있음)

▲  주름잡힌 어처구니 없는 맷돌이
어엿한 탁자가 되었다.

▲  주춧돌로 보이는 커다란 돌을 탁자로
삼고 주변에 작은 돌을 배치해
의자로 삼았다.

◀  정체가 묘한 오래된 비석
얼핏 보면 내용도 없이 그냥 돌만 비석처럼
세운 것 같다.


 

♠  송광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1243호

송광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多包)계 팔작지붕 건물로 그 규모가 상
당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상당히 주눅을 들게 만든다. 1622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처음에는
2층이었다.
지금도 1층 치고는 큰데 2층이었으면 거의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에 버금가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다가 건물이 기울면서 1814년 1층으로 고쳤으며, 1857년에 중수했다.
대웅전 현판은 송광사개창비(사적비)를 썼던 선조의 8번째 아들인 의창군이 쓴 것이니 그만큼
왕실과도 인연이 깊었음을 보여준다.

대웅전은 다른 건물에 비해 가운데 칸이 조금 좁은 편이며, 건물 외벽에는 1칸당 3개의 그림
을 두어 총 48개의 그림을 두었다. 그림에는 신중과 보살, 나한도 등이 그려져 있는데, 다른
법당에서는 볼 수 없는 개성적인 구조로 문이 있는 정면은 그림의 높이가 낮다. 또한 겉으로
보면 조선 후기 건축물의 하나로 단순히 여길 수 있지만 대웅전의 매력은 바로 그 안에 있다.
송광사에서 다른 건 다 놓치더라도 대웅전 내부를 꼼꼼하게 살펴야 여기까지 들인 차비와 기
름값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건물 내부는 높은 기둥을 4개 세웠으며, 옆면의 평주(平柱)보다 뒤로 물린 다음 후불탱을 봉
안했고 그 앞에 불단을 두어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을 안치했다. 이 석가3불좌상은 규모가 대웅
전에 버금갈 정도로 장대하여 보는 이를 다시 한번 주눅 들게 만드니 왜 자꾸 중생의 기를 죽
이는지 모르겠다. 또한 건물 천정에는 보개(寶蓋)를 만들고 그 위에 용, 게, 거북 등을 배치
했으며, 중앙 3칸과 양쪽 구석 천정에는 주악비천(奏樂飛天)을 그린 그림 11폭이 있다. 그리
고 석가3불좌상 사이에는 왕실의 안녕을 비는 3개의 전패(殿牌)를 두었는데, 그 디자인이 매
우 현란하며, 건물 외벽에도 온갖 그림으로 치장되어 있어 그야말로 하나의 불교미술전시관을
보는 듯 하다.

대웅전 앞에는 원래 5층석탑이 있었다. 그래서 1금당 1탑 형태의 가람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근래(2008년 이후)에 미륵불 앞으로 옮겨져 조금은 허전한 형태가 되었다.


▲  대웅전 계단 옆에 고개를 내민 귀수

화마(火魔)의 예고 없는 방문을 막고자 도깨비 얼굴상(귀수)을 건물 정면에 배치했다. 도깨비
라고는 하지만 그리 무서운 표정도 아닌 일주문 장승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그를 본 화마도 자
신의 본분도 저버린 채, 발길을 돌릴 것이다. 그 덕분인지 아직 대웅전은 화마에게 유린된 적
이 없다. 서로를 피곤하게 하며 인상을 찡그리는 강경책보다는 적절히 웃으면서 달래는 회유
책이 한 수 위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  석련대(石蓮臺)
거북 비슷하게 생긴 석상 위에 연꽃을 두룬 석련대가 있다. 불상을 올려두는
돌받침대로 지금은 어디로 마실을 갔는지 세월의 먼지만 가득하다.

▲  온갖 그림으로 가득한 대웅전의 뒷모습
1칸에 3개씩 그림을 배치하여 총 48개의 그림을 두었다. 거기에 천정에 그려진
비천상의 사본 그림까지 배치해 두 눈이 심심해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  대웅전 서쪽

▲  대웅전 동쪽


▲  대웅전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약사불 쪽에서 본 모습) - 보물 1274호

▲  소조석가여래3불좌상 (아미타불 쪽에서 본 모습)

신발을 벗고 대웅전으로 들어서면 건물이 비좁아 보일 정도로 장대한 모습의 소조석가3불좌상
이 마중을 한다. 높이가 무려 5m가 넘는 불상이 1개도 아니고 협시불까지 3개가 있으니 주눅
의 정도는 더하다. 이 땅에 있는 소조(塑造) 불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오래된 법당
의 불상 가운데서도 제일 큰 편에 속한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
타불을 두어 석가3불좌상을 이루고 있으며 석
가불은 높이 5.5m, 무릎너비 4.05m, 무릎높이
72cm로 머리에는 큼직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
고 이마에는 둥그런 백호(白毫)가 있다. 눈썹
은 무지개처럼 부드럽게 구부러져 있고, 코는
끝이 두툼하며 붉은 입술 주위에는 가늘게 수
염이 표현되어 있다. 표정은 약간 굳어보이며,
왼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했다.

석가불 왼쪽의 약사불은 석가불과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그의 이름에 걸맞게 왼손에 약합(藥
盒)이 들려져 있다. 높이는 석가불보다 조금
낮은 5.2m이다.

석가불 오른쪽의 아미타불도 석가불, 약사불과
비슷한 모습으로 약사불과 비슷한 높이를 유지
하고 있다.

▲  대웅전 석가불의 위엄

근래에 석가불 몸통에서 조성기(造成記)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비롯한 불경과 사리함,
복장유물을 넣는 후령통(候鈴筒) 등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조성기를 통해 이들 불상
의 조성시기와 조성배경, 만든 이를 상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조성기에 따르면 1641년 6월 29일에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
나라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의 조속한 귀국을 발원하고자 조성된 것이다. 그
러다보니 왕실과 사대부, 백성들의 시주에 힘입어 저렇게 웅대한 규모의 불상이 태어난 것이
다. 또한 명나라와 청의 연호가 같이 들어있으며, 병자호란의 휴유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
지가 강하게 배여있다. 그런 연유로 태어난 탓인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는
불상으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조성시기가 명확한 이 땅의 흔치 않은 불상으로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
점과 함께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이란 이름으로 국가 보물로 지정되었으
며, 복장유물은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현재 김제 금산사(金山寺) 성보박물관에 가 있다.


▲  목조3전패(木造三殿牌)의 하나인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
 -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70호

▲  목조3전패의 하나인 세자저하수천추(世子低下數千秋)

▲  목조3전패의 하나인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世)

대웅전 불단에는 나무로 만든 현란한 디자인의 전패 3개가 중생의 두 눈을 매혹시킨다. 약사
불 쪽에는 왕비의 안녕을 비는 전패가 있고, 아미타불 쪽에는 세자의 안녕을 비는 전패가, 석
가불과 아미타불 사이 그늘에는 왕의 안녕을 비는 전패가 숨은 듯 자리해 있다.

왕을 위한 전패는 윗쪽에 용 1마리를 새기고, 밑에 좌우에는 각각 2마리의 용을 새겼다. 왕비
와 세자의 전패는 윗쪽에 용 1마리, 밑에 각각 1마리를 두어 차별을 두었다. 좌대(座臺)도 왕
의 것은 상하에 앙련(仰蓮)과 복련(伏蓮)을 조각한 것에 비해 나머지는 복련만 조각했다. 이
들은 운룡문(雲龍紋)의 조각이 매우 섬세하고 수려하며, 높이도 왕의 전패는 2.28m, 좌우 것
은 2.08m로 이 땅의 전패 가운데 가장 큰 편에 속한다.
왕의 전패 뒷쪽에는 '순치세(順治歲)'에 만든 것이라 쓰여있어 1644년에서 1661년 사이에 조
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소조석가여래3불좌상이 나중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귀국을 위
해 만든 것이니 효종(재위 1649~1659) 때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효종(孝宗)이 맞으면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 세자인 현종이 된다. 이후 1792년 전패를 수리했다.

법당에 이렇게 왕과 왕비 등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를 두는 경우도 흔치 않은데, 그만
큼 왕실과 인연이 깊고 그들의 지원을 두둑히 입은 절임을 입증하는 유물이라 하겠다.


▲  등장인물이 104명이나 되는 신중탱(神衆幀)

대웅전 서쪽 벽에는 보기만해도 혼을 다 빼놓는 신중탱이 걸려있다. 이 그림은 화엄경(華嚴經)
에 나오는 104위의 신중(神衆)을 그린 것으로 다른 신중탱과는 다르다. 조금의 여백도 없이 빽
빽하게 들어차 있어 도대체 누가 누군지 눈과 머리가 고통스러울 지경으로 그림 중앙에는 동진
보살과 대범천왕(大梵天王), 제석천왕(帝釋天王) 등을 배치했으며, 1925년에 종인(宗仁)과 상
오(尙旿), 현성(鉉成), 태익(泰翼), 명진(明眞), 해일(海日) 등의 화승(畵僧)이 그렸다.


▲  불단 뒷쪽에 걸린 그림들(극락구품도)

대웅전 내부는 바깥(날씨가 무지 따스했음)과 달리 시원하다. 나무로 된 방바닥은 걸을 때 마
다 삐걱삐걱 소리가 조금씩 나는데 그만큼 건물이 오래되었다는 뜻이 된다. 허나 아무리 쿵쿵
거려도 단단하게 지어졌으므로 무너질 일은 없다.

남들이 잘 안가는 불단 뒷쪽으로 가면 뒷쪽 벽에도 그림이 걸려있다. 1칸당 그림 1폭이 걸려
있어 모두 3폭이 있는데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면 그림마다 구분선이 있어 선을 사이에 두고
다른 내용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1폭당 3개의 그림이 있으니 총 3폭의
9개의 그림이 있는 셈이다.
불가(佛家)에서 8개의 그림은 부처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八相圖)이다. 그럼 9개의 그림은
뭘까? 답은 바로 극락9구품(極樂九品圖)이다. 극락에 대한 9개의 장면을 담은 것으로 이들 그
림은 자세한 정보가 딱히 없어 신중탱과 비슷한 시기 또는 그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  대웅전 천정에 그려진 주악천인도(奏樂天人圖) ①

불단 뒷쪽 복도를 끝으로 대웅전은 이제 다 봤구나 여겨 나름대로의 포만감으로 철수하기 쉽
다. 허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이 하늘을 우러르고 살듯이 이곳도 반드시 천정을 바라
봐야 된다. 불단 앞 천정에 7개와 좌우 천정에 각각 2개씩 모두 11개의 주악천인도가 대웅전
의 하늘을 빛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놓친다면 대웅전의 4할을 놓친거나 다름이 없다.

저들을 보면서 어찌 저 높은 곳까지 그림을 그렸는지 참으로 대단할 뿐이다. 저런 그림이 떡
하니 있으니 천정이 더욱 빛이 나 나의 보잘 것 없는 두 눈은 가히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너
무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고개를 90도나 올려서 봐야 되며 워낙 어두운 곳이라 저들을 모두
사진에 담느라 고개가 뚝 부러지는 줄 알았다.


▲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주악천인도 ②

▲  주악천인도 ③

▲  주악천인도 ④ 불단 동쪽 천정

▲  주악천인도 ⑤ 불단 서쪽 천정

▲  송광사 서쪽 연지(蓮池) - 절 너머로 보이는 산이 종남산

오래된 보물이 가득한 송광사 경내를 둘러보고 서쪽으로 나왔다. 경내 서쪽에는 넓은 연못이
있는데 이들은 연꽃의 보금자리인 연지이다. 연꽃은 여름 제국과 친한 식물이라 지금은 계림
황엽(鷄林黃葉)처럼 볼품이 전혀 없으나 앞으로 3달 이내에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며 한참 와
신상담(臥薪嘗膽) 중이다.
연못 너머에 보이는 정자는 백련정(白蓮亭)으로 연꽃이 있다면 연못을 1바퀴 둘러보며 백련정
에 발을 들여보고 싶지만 아무 것도 없고 가기도 귀찮고 해서 연못 남쪽만 서성이고 말았다.

참고로 연지 너머 경내 북쪽 산자락에 부도군(浮屠群)이 있다. 부도(승탑) 16기와 비석 2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중에는 절을 세우는데 크게 공헌한 벽암당(碧巖堂)의 승탑이 있다. 이 승
탑은 전북 지방유형문화재 144호로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해 지나치고 말았다.
(송광사에서 놓친 것이 도대체 몇 개인지...)


▲  연못 남쪽에 있는 고인돌

연못 남쪽에는 엉뚱하게도 청동기시대 유물인 고인돌(지석묘) 1기가 누워있다. 2개의 돌을 기
둥으로 삼아 뚜껑돌을 얹힌 형태로 이런 고인돌을 북방식(北方式) 고인돌이라고 한다. 하지만
북방식과 남방식이 북쪽과 남쪽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퍼져 있어 그것을 나누는 의미는 거의
퇴색되었다.

거의 우리 민족의 특허 유물이나 다름없는 고인돌을 간직한 절은 천하에서 이곳이 유일할 듯
싶다. (내가 가본 300곳이 넘는 절집 중에서 오직 이곳이 유일함~) 그에 대한 자세한 신상은
모르겠지만 이곳에 원래부터 있던 터줏대감으로 여겨지며, 이것 외에도 여러 기가 있던 것으
로 보인다. 허나 지금은 오로지 그만 살아남아 돌이킬 수 없는 머나먼 옛날을 그리워한다.


▲  경내 남쪽에 깔린 정갈한 돌담길

이렇게 송광사를 1시간 반 동안 둘러보니 시간은 13시가 넘었다. 비록 놓친 것이 다수 있어서
무척이나 마음이 아프지만 이건 나의 무지에 따른 소산이므로 어쩔 수가 없다. 아무래도 다음
에 또 오라는 송광사의 뜻인 모양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함)
이렇게 하여 봄맞이 송광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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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8년 4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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