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0.09.15 노산군(단종)이 유배살이를 했던 단종애사의 애틋한 현장, 영월 청령포 (청령포 관음송)
  2. 2013.11.27 단종애사가 깃들여진 강원도의 청정한 지붕, 영월 나들이 (금몽암, 낙화암, 동강...)

노산군(단종)이 유배살이를 했던 단종애사의 애틋한 현장, 영월 청령포 (청령포 관음송)

 


' 단종애사의 현장, 영월 청령포 '

▲  서강 너머에서 바라본 청령포


 

 

봄이 천하만물의 격한 지지를 받으며 겨울 토벌에 여념이 없던 3월의 끝 무렵에 친한 후배
와 강원도 내륙 지역을 찾았다.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하여 홍천(洪川)의 여러 벽지 명소를 찍고 평창(平昌)을 거쳐 영월(
寧越) 땅으로 들어섰다. 이날 최종 목적지는 충북 단양(丹陽)으로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일
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넘치고 오랜만에 들어온 곳이라 그냥 지나치기는 섭하다. 하여 읍내
직전에 있는 선돌을 보려고 했으나 실수로 놓쳐버려 이미 2번이나 인연을 지었던 청령포를
복습하기로 했다.

청령포는 영월읍내와 무척 가까운 곳으로 주차장에 이르니 16시가 넘은 시간임에도 주차장
은 거의 만땅이다. 간신히 자리를 잡아 차량을 잠재우고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해 유료
(有料)의 땅, 청령포로 들어선다.


 

♠  하늘이 빚은 천연 감옥, 청령포(淸泠浦, 명승 50호)

▲  청령포 나룻터와 서강 너머로 보이는 청령포

입장료를 내고 서강(西江) 강변으로 내려가면 청령포 나룻터(선착장)가 나온다. 청령포는 창
살도 필요 없는 궁벽한 곳이라 섬이 아닌 육지임에도 무조건 배를 타고 건너야 된다. 나룻배
는 2척이 다니고 있는데, 평일은 보통 1척, 주말과 휴일은 2척을 굴리며, 정해진 출발 시간이
없이 사람이 어느 정도 차면 시동을 걸고 느릿느릿 청령포로 이동한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 배를 돌리기가 무섭게 맞은편 강변에 닿는다. 소요시간은 길게 늘려봐
야 3~4분 정도로 배멀미가 나올 틈도 없으며, 수면이 잔잔하고 중간 부분을 제외하면 수심도
얕다. 허나 온갖 어이없는 재해와 재난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라 너무 방
심은 하지 말자.


▲  청령포와 속세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 청령포 나룻배

▲  나룻배에서 바라본 청령포 나룻터(선착장)

청령포에 대한 설래임을 간직한 나그네를 태운 배는 180도 돌리기가 무섭게 청령포 강변에 닿
는다. 청령포 강변은 인공(人工)이 가해지지 않은 자연산 강변으로 돌이 무지 많으며, 배를
타고 내리는 시설도 따로 없어 그냥 강변 모래벌에서 타거나 내리면 된다.


▲  별 꾸밈없이 자연 그대로 놓아둔 청령포 강변

▲  소나무숲에 묻힌 청령포
청령포의 핵심이자 상징인 단종 유배처가 저 송림에 묻혀있다.


청령포 강변에는 돌이 무지 많다. 그런 돌밭을 지나면 소나무숲이 나오는데, 그 숲속에 단종
애사의 쓰라린 현장, 단종 유배처가 깃들여져 있다.
강변에는 탐방로가 따로 닦여져 있지 않으며, 울퉁불퉁한 돌밭을 알아서 통과해 소나무숲에
안기도록 되어있다. 대신 소나무숲에는 단종어소와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까지 나무데크 탐
방로를 닦아두었다.

청령포는 유독 소나무가 많다. 이곳이 솔내음이 그윽한 공간이 된 것은 단종이 유배된 인연으
로 오랫동안 금표(禁標) 구역에 묶였기 때문이다. 금표란 왕릉이나 왕족 묘역, 제왕(帝王)이
내린 땅, 나무 보호와 국가 시설 보호를 위한 금지된 땅으로 이곳에는 허가된 사람 외에는 함
부로 출입할 수 없었고, 나무 벌채도 일절 금지된다.

청령포 소나무숲은 이곳에서 가장 늙은 나무인 관음송을 시작으로 점차 숲을 이룬 것으로 여
겨지며 수십 년에서 100~400년 묵은 소나무들이 삼삼하게 우거져 하늘을 가리고 단종의 유배
처를 소중하게 품고 있다. 그럼 여기서 청령포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소나무숲에 감싸인 단종어소

청령포는 단종애사(哀史)의 주요 현장이자 장릉(莊陵)과 더불어 영월에 왔다면 꼭 들려야 되
는 영월의 대표 명소이다. 이곳이 크게 유명세를 탄 것은 소년왕 단종의 유배지란 점과 하늘
의 감옥 같은 척박한 지형, 그리고 270도나 크게 굽이쳐 흐르는 서강의 환상적인 모습 때문일
것이다.
서강은 형제인 동강(東江)과 속히 합세해 한강을 따라 보다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만 칼처
럼 솟은 산의 낙원인 강원도의 지형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장대한 세월 동안 오로지 굴곡 노
선 직선화를 위해 청령포 뒷쪽을 열심히 쪼아댔지만 지형이 단단하여 아직까지 성과가 없다.
하지만 직선화를 향한 굳은 집념은 여전하여 지금도 직선화 프로젝트를 놓지 않고 있다.

청령포의 주인공인 단종은 조선 6대 군주로 1441년 7월 23일,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
后) 권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휘(諱, 제왕의 이름)는 홍위(弘暐)로 1448년에 왕세손(王
世孫)에 책봉되었으며,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윤상(尹祥)에게 학문을 배웠다.
1450년 세종(世宗)이 승하하고 그의 첫 아들인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단종은 자연히 왕세자(
王世子)가 되었으며, 문종이 늘 병을 달고 살다가 재위 2년 만인 1452년 5월 18일, 승하하자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철부지 어린 왕자가 왕위에 오르니 왕을 둘러싼 권력 구도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초반
에는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은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이 단종을 보필하며 주도
권을 잡았는데, 세종의 아들이자 문종의 아우 일부가 능력도 좋고 야망이 크니 은근히 위협이
되었다. 그중에서 안평대군(安平大君)은 문무(文武)가 뛰어나고 다재다능했는데, 김종서와 뜻
이 통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을 견제하며, 의정부(議政府) 중심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
를 추진했다.
그들의 견제에 위기를 느낀 수양은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홍달손(弘達孫) 등을 수하에
두고 기회를 엿보다가 1453년 10월, 불시에 김종서 집을 습격해 김종서를 죽이고, 왕명을 빙
자해 신하들을 모두 소환해 황보인과 조극관(趙克寬) 등을 때려죽였다. 이 사건이 그 이름 돋
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은 스스로 영의정에 올라 정권과 병권을 움켜쥐었고, 정인지(
鄭麟趾)와 한확(韓確) 등 자신의 측근을 정승에 앉혔다. 또한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해 왕의 이름으로 받기도 했다.
그렇게 수양의 위세가 강해지며 어린 왕 단종을 은근히 정신적으로 압박하자 의지할 데도 없
고 정신적 두려움에 염통이 쪼그라들던 단종은 결국 1455년 6일 11일, 큰숙부 수양에게 양위
의 뜻을 전하고 친히 대보(大寶)를 넘겼다. 이렇게 해서라도 숙부의 칼날을 피하고 목숨을 부
지하고자 함이었다. 하여 수양은 조선 제7대 군주인 세조(世祖)가 되었고, 단종은 상왕(上王)
으로 물러앉아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가만두질 않는다고 했던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잔뜩 반감
을 품은 박팽년(朴彭年)과 성삼문(成三問), 김문기(金文起) 등 많은 사대부(士大夫)들은 세조
와 그의 측근을 몰아내고 단종 복위를 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다가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이 오자 세조는 그들에게 연회를 베풀기로 했는데, 그때 칼
을 들고 제왕 뒤에 서서 호위하는 운검(雲劍)의 역할을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成勝)이 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세조를 처단하기로 한 것이다. 허나 뭔가 찜찜했던 세조는 운검을 세우지
않으면서 그 좋은 기회는 사라지고 만다.
이후 적당한 기회는 오지 않았고, 단종 복위에 가담한 김질(金質)은 초조하다 못해 염통이 검
게 타들어가 장인 정창손(鄭昌孫)과 함께 밀고를 해버렸다. 이렇게 일어난 것이 그 유명한 사
육신(死六臣) 사건이다.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등의 단종 복위 추진에 뚜껑이 제대로 뒤집힌 세조는 그들을
고문하고 용산 새남터로 보내 사지를 절단 내어 죽였다. 그리고 단종은 사육신 등과 밀모를
했다고 여겨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 유배처를 꼼꼼히 물색하다가 육지 속의 작은 섬과도
같은 이곳 청령포로 유배를 보낸 것이다.
하여 1457년 6월 22일 노산군으로 격하된 단종은 강제로 유배길에 올랐고 영도교(永渡橋, 청
계7가와 청계8가 사이)까지 따라온 부인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와 단장의 이별을 나누었다.
이때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 어득해(魚得海)가 50명의 군사를 대동해 노산군을 호종했으
며, 영월까지는 6일이 걸려 6월 28일 청령포에 도착했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머물 기와집이 급하게 마련되었다. 그는 그 집에 머물며 책을 읽거나 노산
대에 올라 서울과 왕비를 그리워했으며, 관음송 가지에 걸터앉아 쉬기도 했다. 그렇게 하늘이
내린 자연산 감옥, 청령포에서 우울하게 생활하다가 그해 가을 홍수로 청령포 상당수가 물에
잠기게 되자 영월 객사(客舍)인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청령포 생활은 끝을 맺
는다.
허나 순흥(順興, 영주시 순흥면)으로 유배된 그의 또 다른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부
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된통 걸리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세조는 다
시 한번 뚜껑이 열리게 된다. '노산군을 저리 두면 계속 역모가 생길 것이다' 생각한 세조는
결국 후환을 제거하고자 조카에게 사약을 보내는 비정함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유시(酉時), 숙부가 보낸 쓰디쓴 사약을 들이키고 진한
피를 토하며 힘없이 쓰러지니 그때 그의 나이 불과 16세였다.

청령포는 북과 동, 남쪽 등 전체의 ¾이 서강에 감싸여 있고, 북쪽은 급하게 솟아나 낭떠러지
를 이룬다. 서쪽은 비록 땅과 붙어있긴 하나 육육봉(六六峰)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에 막혀
있어 어지간한 독종이 아닌 이상은 넘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다. 자연히 외부와 단절된 상태
로 고적하게 살아야 했으며, 첩첩한 산주름 속에 단단히 묻힌 외로운 곳이다보니 온갖 산짐승
들이 가득해 해가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을 정도였다.

그가 청령포에 있을 때,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거의 밤마다 몰래 찾아와 단종을 위로했
고, 생육신(生六臣)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원호(元昊)는 청령포와 가까운 제천시 송학면에 관
란정(觀瀾亭)을 짓고 매일같이 단종에게 진상할 음식과 서신을 표주박에 담아 서강에 띄워보
냈다. 그것을 청령포에 있던 단종이 받아보았고, 단종이 다시 떠내려보내면 이상하게도 강을
역류하여 관란정으로 갔다고 전한다.

때묻지 않은 강과 칼처럼 솟은 산,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 거기에 역사까지 어우러진 아름
다운 명소로 수십~수백 년 묵은 소나무 덕에 4계절 내내 솔내음이 가득하며, 비록 단종에게
청령포는 지옥보다 더한 곳이겠지만 오늘날 나그네들에게는 잠시나마 정처 없는 마음을 내던
지고 싶은 아름다운 명소이다. 이런 곳에 오면 사진기도 흥분하여 작품들이 마구 나오며, 영
월의 대표 꿀단지이자 단종을 상징하는 명소로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청령포 일대는 국가 명승 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영월10경 중 제2경으로 찬양을 받고 있다.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67-1, 68 (청령포로 133, ☎ 033-374-1317)


 

♠  청령포 둘러보기

▲  단종어소(端宗御所) 기와집

청령포 소나무숲에 들어서면 왼쪽(남쪽)에 돌담에 둘러싸인 단종어소가 있다. 이곳은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공간으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단종이 머물던 팔작지붕 기와집
이 있고, 동쪽에 궁녀와 시녀가 살던 초가 1동(행랑채)이 있다.
단종이 사라지자 화마(火魔)도 크게 뚜껑이 열렸는지 슬그머니 태워먹으면서 아련하게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00년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참고하여 그럴싸하게 재현했다.

기와집과 행랑채 초가에는 단종과 궁녀, 시녀, 아전을 재현한 밀납인형이 있으며, 가구와 책
장, 이불, 장독대 등을 갖다놓아 당시의 모습을 최대한 묻어나게 했다.


▲  방 3개, 부엌, 창고로 이루어진 5칸짜리 초가 행랑채
시녀와 궁녀들은 여기서 생활했는데, 한 방에 2명씩 6명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방 옆에는 부뚜막 연기가 슬쩍 피어오를 것 같은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음식물과 물건을 보관하던 창고(광)가 있다.

▲  초가 행랑채와 돌담, 그리고 삼삼하게 우거진 소나무숲

▲  깨끗하게 정리된 시녀의 작은 방

▲  속 빈 강정처럼 놓여진 장독대

▲  바느질하는 침모(針母)의 모습
단종을 위해 침침한 눈을 극복하며
옷 수선에 여념이 없다.

▲  부뚜막으로 이루어진 부엌
나이든 시녀가 단종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단종이 비록 강원도 산골로 쫓겨났지만 전직 제왕에다가 왕족이니 그의 생활공간은 관청 건물
못지 않은 규모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 바로 그의 공간인 것이다.

단종은 햇살이 잘들어오는 남쪽 방에 푸른 도포를 입고 책을 읽는 잘생긴 도련님처럼 재현되
었는데, 바로 옆방에는 어소를 관리하고 단종의 시중을 드는 아전이 바짝 엎드려 단종에게 인
사를 올리고 있고 그 곁에는 다기(茶器)를 머금은 조그만 상이 있다.


▲  기와집 내부, 단종의 방

▲  책을 보며 시름을 달래는 단종

▲  시녀가 생활하던 기와집 방


▲  단종이 지은 어제시(御製詩)
단종의 한과 상처 받은 어린 마음이 잘 나타나 있어 나그네의 옷깃을 잠시
여미게 한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해매니
푸른 솔은 옛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물에 부딪쳐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노라

▲  단묘재본부시유지비(端廟在本府時遺址碑)

어소 기와집 옆에는 비석을 품은 1칸짜리 비각(碑閣)이 있다. 그 안에는 1763년에 영조(英祖)
의 명으로 세운 유지비가 있는데, 이는 터만 아련하게 남은 단종어소의 위치를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비석의 높이는 162cm이다.
하얀 피부의 네모난 기단(基壇) 위에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碑身)을 세웠는데, 그 앞면에
비석의 이름이 된 '단묘재본부시유지비'라 쓰여있고, 뒷면에 '歲皇明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
秋 涕敬書令原營竪石 地名 淸泠浦'라 쓰여있어 조성 시기와 이곳 지명을 알려준다.
여기서 황명(皇明)은 조선이 쓸개까지 내주며 엄청나게 굽신거리고 떠받들던 명나라이고, 숭
정은 명나라 마지막 제왕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숭정 무진은 1628년이다. 그때를 기준으로
계미(癸未)년이 3번이 지난 해의 가을에 세우니 그때가 1763년 가을이다. (조선의 군주와 위
정자, 선비 상당수는 명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명에 대한 아주 꼴사나운 사대주의를 일삼으며
명을 그리워하고 나라의 국력을 개판으로 만듬)
'涕敬書令原營竪石'은 원주감영에 영을 내려 슬픔과 공경으로 세웠다는 뜻이며, '지명 청령포
'는 말 그대로 이곳의 지명이 청령포임을 뜻한다.

오랫동안 홀로 단종어소터를 지키며 소나무 그늘에 있다가 2000년에 비석 주변에 어소가 복원
되면서 어소 뜨락에 있게 되었다. 물론 비석의 위치는 그대로이다.


▲  비각에 소중히 담긴 단묘재본부시유지비

▲  햇님도 맥을 못출 정도로 무성함을 자랑하는 청령포 소나무숲
아직 대낮임에도 숲속은 벌써부터 어두컴컴하다.

청령포 한복판에는 관음송이라 불리는 장대한
소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는 청령포 소
나무의 시조로 다른 소나무들보다 하늘과 더욱
맞닿아있어 그의 위치와 위엄을 실감케 한다.

관음송의 높이는 30m, 가슴높이 둘레 5.19m로
1.6m 높이에서 줄기가 2갈래로 갈린다. 다른
소나무에 비해 줄기 피부가 유난히 붉고 줄기
중간에 잔가지가 없이 매끈하게 자란 제법 아
름다운 소나무로 단종이 이 나무 줄기에 걸터
앉아 시름을 달랬다고 전한다.
지금이야 아주 큰 나무가 되어 오를 엄두도 솟
지 않지만 당시 관음송의 나이를 60~80년 정도
로 추정하고 있으니 줄기가 갈라지는 곳까지는
능히 올랐을 것이다.
나무의 나이는 약 600여 살로 보고 있으며, 그
의 이름은 관세음보살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고 해서
관(觀), 그의 슬픈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음(
音)을 붙여 관음송이라 했다고 한다. 이 이름
은 후대에 단종을 섬기던 영월 주민들이 지어
낸 것으로 보인다.

▲  청령포 관음송(觀音松)
- 천연기념물 349호

나라에 큰 일이 터질 때마다 나무의 피부가 검게 변해 나라의 변고를 알려주었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 어쩌면 단종의 혼이 깃든 나무로 여기고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  단종의 손때가 담긴 망향탑(望鄕塔)

관음송에서 북쪽 벼랑으로 가는 길이 2갈래 있다. 왼쪽으로 가면 망향탑, 오른쪽은 노산대로
북쪽 벼랑은 한 줄기로 이어져 있어 어느 곳을 먼저 오르던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강이 크게 굽이쳐 흐르는 곳에 천연의 감옥인 청령포가 빚어져 있고 3면이 죄다 강에 막혀
있는데 그중 북쪽은 각박하게 벼랑이 형성되어 있어 나름 절경을 자아내며, 여기서 바라보는
경치 맛이 아주 일품이다. 물론 단종에게는 이 모든 것이 지옥처럼 보였겠지만 우리 같은 나
그네들에게는 하루 머물고 싶은 천연의 명소이다.

노산대와 육육봉 사이 벼랑 위에 돌로 쌓여진 조그만 돌탑이 있다. 세상에서는 그를 망향탑이
라 부르는데, 단종이 청령포 생활을 했을 때, 궁궐과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이곳에 오를 때마
다 여기저기 흩어진 잡석을 주워 쌓았다고 한다. 청령포에서 대략 1달 가량 머물렀고 딱히 할
것도 없는 처지이니 이곳을 찾는 횟수가 꽤 많았음을 망향탑이 보여준다. 돌탑을 이루는 돌
가운데, 묵은 때가 담긴 돌은 단종의 손길이 닿았던 것으로 보이며, 하얀 피부의 돌은 근래에
얹혀진 것이다. 현재는 문화유산 보호 철책을 둘러 탑을 보호하고 있다.

과연 단종이 직접 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청령포에 남긴 유일한 흔적으로 그의 착잡한
마음을 가늠케 한다.


▲  망향탑과 노산대(소나무가 우거진 벼랑), 그리고 서강

▲  망향탑 서쪽 막다른 곳

망향탑 서쪽은 길이 막혀있다. 아주 가늘게 육육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있으나 통행이 금지
되어 있고, 양쪽이 거의 벼랑이라 오르기도 쉽지 않아 보인다. 산길 북쪽은 서강이 오랜 세월
을 두고 깎은 거의 수직 각도의 벼랑이며, 남쪽은 수직 정도는 아니지만 각박하긴 마찬가지이
다.

이곳에 전설을 남긴 단종도 이 가느다란 산길을 보며 도망칠 생각이 굴뚝 같았을 것이다. 허
나 그게 녹록치 않음을 알고 있고, 군사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으며,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편하게 자란 그가 이런 산을 넘는 것도 무척이나 어렵다.


▲  망향탑에서 바라본 서강
단종의 구슬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서강 강물은 예나 지금이나
청령포 곁을 보듬으며 유유히 자신의 갈 길을 간다. 하긴 서강이 그의
사연을 굳이 알 필요가 없다.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부질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  노산대(魯山臺)

▲  금표비에서 바라본 노산대(魯山臺)

망향탑 동쪽에 각박하게 생긴 층암절벽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노산대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이곳은 단종이 저녁 노을이 질 때나 마음이 갑갑할 때 친히 올라 시름을 달래던 곳이라 전하
며, 그 연유로 노산대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망향탑 못지 않게 각박한 벼랑 위에 자리해 있는데, 지금이야 탐방로가 잘 닦여져 있어 접근
하기가 쉽지만 탐방로가 없다면 결코 쉽게 오르지 못할 언덕이다. 관음송과 금표비 북쪽에 자
리하며, 여기서 바라보는 서강과 주변 풍경이 제법 일품이다.


▲  금표비와 관음송 주변 소나무숲

▲  청령포 금표비(禁標碑)

노산대를 내려와서 나룻터로 가다보면 소나무숲 그늘에 고색의 때가 잔뜩 묻어난 금표비를 만
나게 된다.
이 비석은 단종이 유배된 청령포에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나무 벌채를 금하고자 1726년에 세
운 것으로 앞면에는 한문으로 '청령포 금표'라 쓰여 있고, 뒤면에 '동서 300척, 남북으로 490
척과 이후에 진흙이 쌓여 생기는 곳 또한 금지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이를 통해 단종 시
절에도 그런 제약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측면에 '숭정(崇禎) 99년'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1726년임을 알게 해준다.
비석은 30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세월의 거친 손때로 피부가 잔뜩 헝클어져 있다. 혹 단종의
사연에 비석이 크게 운 것은 아닐까?

청령포 산책은 '나룻터 → 단종어소 → 관음송 → 망향탑 → 노산대 → 금표비 → 나룻터' 순
으로 했는데, 그 반대로 해도 무관하며, 이들은 청령포의 주요 구성원들이니 꼭 살펴보기 바
란다.


▲  금표비 주변 소나무숲

▲  배를 타고 다시 속세로 나오다 (청령포 강변)

금표비를 둘러보고 강변으로 나오니 어느덧 17시 반이 되었다. 청령포의 빼어난 경치에 잠시
눈 호강을 누린 관광객들이 우루루 몰려나와 대기하고 있는 배에 올라탄다. 이 배가 오늘의
마지막 배는 아니며, 관람시간이 18시까지라 청령포에 단 1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운행한다.

배를 타고 잠시만에 청령포 나룻터에 도착, 졸고 있는 차량을 깨워 영월의 이웃 고을인 충북
단양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하여 청령포 나들이는 막을 고하며, 끝으로 단종에게 사약을 전달했던 금부도사(禁府
都事) 왕방연(王邦衍)이 비통한 심정으로 청령포를 바라보며 지은 시를 소개한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 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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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가 깃들여진 강원도의 청정한 지붕, 영월 나들이 (금몽암, 낙화암, 동강...)

 


♠ 단종애사가 서린 강원도의 청정한 지붕, 영월(寧越) 나들이 ♠
영월 금몽암
▲  단종의 꿈속에 나타났던 절, 영월 금몽암(禁夢庵)


 

가을이 맛있게 익어가던 9월의 끝무렵에 강원도의 지붕인 영월을 찾았다. 우선 평창(平昌)
에 들려 미답처인 남산공원과 송학루, 노성산성 등을 둘러보고(☞ 관련글 보러가기) 평창
터미널에서 영월로 넘어가는 군내버스에 나를 담고 영월로 넘어갔다. 언제 봐도 시리도록
좋은 강원도의 아름다운 산하(山河)와 칼처럼 솟은 고개를 마음껏 구경하고 체험하며 40
여 분을 달려 영월읍내 북쪽에 자리한 장릉(莊陵)에 두 발을 내린다.

장릉은 소년왕 단종(端宗, 1441~1457)의 능으로 영월에 왔다면 꼭 찾아야 칭찬을 듣는 영
월의 대표급 명소이다. 방랑시인 김삿갓과 더불어 영월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영월을 먹여
살리는 밥줄이기도 한데, 내가 장릉에서 내린 것은 장릉을 보고자 함이 아니라 다른 미답
지를 보고자 함이다. 장릉은 20대 중반에 이미 2번 거쳐간 곳이라 그리 땡기진 않는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절로 가기 전에 우선 점심을 먹기
로 했다. 오랜만에 장릉보리밥을 먹을까? 아니면 말로만 듣던 강원도의 먹거리 곤드레밥
을 먹을까? 둘을 놓고 궁리하다가 곤드레밥을 파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곤드레는 강원도 700m이상 고지에서 자라는 나물로 학명(學名)은 고려엉컹귀이다. 곤달비
로도 불리며, 영양가가 풍부하고 맛이 좋아 옛부터 강원도 산골의 먹거리로 절찬리에 애
용되었다. 곤드레밥은 바로 곤드레나물을 뒤집어 쓴 밥으로 콩나물밥과 성격이 비슷하다
보면 된다. 밥에는 곤드레나물과 김가루가 들어가 있으며, 산나물 일색의 밑반찬과 간장,
뚝배기에 담긴 된장조치(찌개)를 잘 비벼먹으면 휼륭한 곤드레밥이 된다.

밥을 먹고나니 바로 포만감의 행복과 함께 식곤증이 한숨 자라며 나를 희롱하려 든다. 하
지만 가야될 곳이 있기에 희롱을 뿌리치고 후식으로 커피 1잔 들이키며 보덕사로 길을 재
촉했다.


▲  장릉 건너편 주막에서 먹은 곤드레밥의 위엄

▲  장릉 배견정(拜鵑亭)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오래된 갈참나무
이 나무는 나이가 무려 400년에 이른다고 하며, 높이가 21m, 둘레가 3.8m에 달한다.
강원도-영월-35호


♠  오랜 역사를 간직한 장릉의 원찰(願刹) ~
발본산 보덕사(鉢本山 報德寺)

▲  수목이 울창한 보덕사 서쪽 부분

장릉에서 보덕사, 금몽암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5분 정도 들어가면 길 오른쪽 개울 너머로 장
릉의 수호사찰인 보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절은 668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세운 지덕사(旨德寺)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
시절 의상은 당나라에 머물던 시기(661년에 건너가 670년에 귀국함)이므로 그가 세웠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그 외에 686년(신문왕 5년)에 의상이 세웠다는 설도 있고, 714년에 혜각선사
(蕙覺禪師)가 세웠다고 우기기도 하나 대체로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132년(인종 10년) 설허(雪虛)와 원경국사(元敬國師)가 극락보전과 사성전, 염불암, 침운루(沈
雲樓) 등을 증축했으며, 1457년에는 노릉사(魯陵寺)로 이름을 갈았다. 1705년 장릉을 관
리하는
원찰(願刹)로 지정되면서 한의(漢誼)와 천밀(天密)선사가 큰 종을 만들었으며, 1726년에
는 장릉
의 제수(祭需)를 담당하는 절인 조포사(造泡寺)로 지정되면서 왕실에서 많은 지원을 받
게 된다.
이때 왕실에 바짝 잘보이고자 나라의 덕을 갚는다는 뜻의 보덕사로 이름을 고쳤다.


1854년 불의의 화재로 극락보전과 종각이 전소되어 1868년에 중수했으며, 그 시절 절의 규모가
상당하여 절에 속한 밭이 1,000석, 승려는 무려 100명이 넘어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말사(末
寺) 가운데 가장 컸다고 한다. 허나 6.25전쟁으로 극락보전과 해우소를 제외한 대부분이 소실되
어 쪽박을 차게 되었고, 이후 꾸준한 불사를 벌여 예전의 모습을 서서히 회복하고 있다.

보덕사는 발본산(鉢本山) 자락에 안겨있는 산사(山寺)가 분명하지만 절이 들어앉은 터가 평지이
고 마을과도 가까워 산사의 분위기는 조금 떨어진다. 절에서는 발본산 대신 한참이나 멀리 떨어
진 '태백산(太白山) 보덕사'라 칭하고 있으며, 여기서 바라보는 서쪽 동을지산(冬乙旨山)의 일
몰 풍경이 매우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하다. 또한 석양(夕陽)에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절의 범
종소리는 영월8경의 하나로 손꼽혔다.

제법 넓은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선방, 사성전, 칠성각 등 8~9
동의 건물이 있으며, 선방과 칠성각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향(西向)을 취했다.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지방문화재인 극락보전과 해우소가 있다.


▲  보덕사로 인도하는 극락1교와 일주문(一柱門)

▲  천왕문에서 바라본 일주문 주변

속세에서 보덕사에 들어가려면 계곡 돌다리를 건너야 된다. 돌다리는 모두 2개로 극락(極樂)이
란 이름을 지녔는데, 일주문 앞 다리는 극락1교, 그 북쪽 것은 극락2교이다. 다리는 근래에 지
어진 탓에 손대기가 아쉬울 정도로 무척이나 하얀 피부를 자랑한다.

번뇌를 계곡에 내던지고 다리를 건너면 다리의 이름 그대로 극락을 염원하는 보덕사 경내가 펼
쳐진다. 절은 계곡만으로도 안심이 되질 않는지 계곡 쪽에 기와를 얹힌 흙담장을 길게 둘러 속
세와 부처 세계의 경계를 다시 한번 그었다. 즉 2중으로 경계선을 설치해 속인들이 지니고 오는
번뇌와 절에 놀러오는 화마(火魔) 등의 악귀를 철저히 경계하는 것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천왕문까지 길이 곧게 이어
져 있다. 그 좌우로 나이가 지긋한 아름드리 나
무들이 앞다투어 중생을 영접한다. 그들 중에선
왼쪽 사진의 느티나무가 가장 연세가 높아 무려
600살이 넘었다고 한다. 거의 보덕사 내력의 절
반 가까이를 산 셈이다. 높이는 25m에 이르러
그 꼭대기는 거의 하늘에 맞닿아 있는 듯하며,
영월군 보호수의 하나로 주변 나무와 함께 자연
과 어우러진 보덕사의 아름다움을 매섭게 드높
인다.

길 오른쪽에는 연꽃과 개구리의 운동장인 조그
만 연못이 자리해 있다. 가을임에도 아직도 백
련(白蓮) 일부가 자꾸 떨구어지는 고개를 간신
히 붙잡으며 올해의 막바지 아름다움을 선보인
다.


▲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닌 백련의 보금자리 보덕사 연못

▲  맵시가 고운 관음보살상

▲  사천왕의 보금자리인 천왕문(天王門)


▲  보덕사 해우소(解憂所) - 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132호

천왕문 우측에서 약 50m 떨어진 곳에 고색의 때가 가득한 창고처럼 보이는 2층 건물이 있다. 바
로 보덕사 해우소이다.
절에서는 뒷간을 해우소라고 부른다. 해우(解憂)는 근심을 풀거나 해결한다는 뜻으로 볼일을 보
면서 몸 속의 노폐물이 싹 내려가는 것을 해우로 비유했다. 뒷간에서 보는 볼일처럼, 볼일을 볼
때 나오는 고약한 냄새처럼 세상사 근심걱정도 싹 내려가고 냄새로 싹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보덕사 해우소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형태를 띈 맞배지붕 건물로 상량문(上樑文)에 따르
면 1882년(고종 19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내부는 앞뒤 2열로 분리하여 각각 6칸씩 볼일 보는
곳을 두었으며, 남녀 사용을 구분했다. 오래된 건물임에도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화장실의
기능을 변함없이 수행하고 있으며, 선암사(仙巖寺) 해우소와 더불어 문화재로 지정된 이 땅에
흔치 않은 옛 해우소이다.


▲  보덕사 극락보전(極樂寶殿) - 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32호

천왕문을 지나면 조그만 돌맹이가 잔잔히 깔린 넓은 뜨락과 극락보전, 선방(禪房), 5층석탑 등
이 나타난다.
극락보전은 보덕사의 법당으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
붕 건물로 1161년 원경국사가 세웠다고 전하며, 지금의 건물은 1868년 화마에 희생된 것을 다시
지은 것으로 건물 현판은 해강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썼다고 한다. 마치 학이 하늘을 향
해 날개짓을 하듯 추녀를 치켜올린 극락전의 모습이 시원스럽다.

극락전 불단(佛壇)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한 목조아미
타3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그 뒤로 색채가 고운 후불탱화가 병풍처럼 자리한다.

▲  극락보전 목조아미타3존불
눈을 지그시 뜨며 엷은 미소를 드러낸 그들이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따스히 맞는다.

▲  극락보전 옆에 자리한 석종형 승탑(僧塔)
1820년에 조성된 것으로 화엄대강사 설허당
대선사(華嚴大講師 雪虛堂大禪師)의 승탑이다.

       ◀  작고 단촐한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은 근래에 지어진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산신(山
神)의 보금자리이다. 건물 내부 우측 벽에는 태
백산신으로 추앙된 단종과 그에게 산머루를 바
치는 추익한(秋益漢)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있
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도


▲  단종과 추익한의 마지막 만남이 담긴 그림

단종을 수식하는 충신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추익한(1383~1457)은 1411년 문과(文科)에 급제하
여 한성부윤(漢城府尹)과 호조정랑(戶曹正郞) 등을 지낸 인물이다. 1433년 퇴직하여 영월로 내
려와 학문과 자연을 벗삼으며 팔자 좋은 시간을 보내던 중, 1456년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를 왔다.
그는 단종을 자주 찾아가 문안을 올리며, 시문을 지어주었고, 산에서 따온 산머루와 다래를 진
상하며 우울해하던 단종을 늘 다독거려주었다. 그러다가 1457년 10월 24일, 그날도 여전히 산에
올라가 단종에게 줄 산머루를 따고 있는데, 난데없이 곤룡포(袞龍袍)를 걸친 단종이 백마를 타
고 그 앞에 나타났다. 추익한은 깜짝 놀랐지만 반가운 마음을 보이며 산머루를 올렸다. '전하!
여기 산머루가 맛이 좋습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요'

그러자 단종이 '나는 태백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머루는 관풍헌(觀風軒)에 갖다두십시요~' 하고
는 말을 몰아 급히 사라지는 것이다. 난데 없는 단종 출현에 마음이 불안하여 서둘러 읍내로 내
려가니 글쎄 단종은 이미 처단되어 그 시신이 동강(東江)에 버려진 것이 아닌가. 그가 산에서
본 단종은 태백산으로 가던 단종의 혼으로 추익한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던 것이다. 산신각 우측
의 이 그림은 바로 그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단종이 죽자 추익한은 크게 애통해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를 따랐다. 이에 영월 사람들은
그를 추충신(秋忠臣)이라 부르며 사당을 지어 그의 뜨거운 충절의 얼을 기렸다.

▲  사성전 우측의 칠성각(七星閣)
칠성(七星)과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선방 옆에 자리한 보덕사 샘터
중생에 대한 부처와 자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가뭄에도 물이 마를 날이 없다.


▲  경내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사성전(四聖殿)

사성전은 부처와 보살, 나한(羅漢), 신중(神衆)을 봉안한 건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
겨진다. 지금의 건물은 6.25 이후에 중수한 것으로 석가불과 미륵불, 제화갈라의 3존불과 나한
상, 장군상 등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 불상은 1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불상에서 19세
기 중반 유물이 쏟아져 나와 후불탱화와 더불어 지금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다.

※ 영월 보덕사 찾아가기 (2013년 11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영월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나며, 강남 센트럴시티에서 영월행
  고속버스가 1일 4회 떠난다.
* 청량리역, 양평역, 원주역에서 강릉, 아우라지행 무궁화호 열차가 1일 7~8회 떠난다.
* 인천, 대전(동부), 원주, 제천, 태백에서 영월행 직행버스 이용
* 영월터미널 부근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연당, 마차, 주천 방면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장릉
  에서 내리거나 도보 30분
* 영월역에서 장릉까지 바로 이어주는 교통편이 없다. 택시를 타고 바로 가는 것이 편하며, 걸
  어갈 경우에는 1시간 정도 잡아야 된다.
* 승용차로 갈 경우 (경내에 주차장 있음)
①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제천, 영월방면 38번 국도 → 방절터널을 지나 서영월
   나들목에서 우회전 → 청령포교차로에서 좌회전 → 청령포입구에서 좌회전 → 장릉3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바로 나오는 3거리에서 보덕로로 좌회전 → 보덕사 주차장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100 (☎ 033-374-3169)


♠  단종의 꿈속에 나타났던 조그만 산중암자, 절집보다는 양반가의 분위기가
진하게 풍기는 금몽암(禁夢庵) - 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25호

보덕사에서 100m 정도 오르면 보덕사의 옆구리로 흐르는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있다. 다리에는
보주(寶珠)를 상징하는 듯한 둥그런 돌이 난간의 역할을 대신한다. 다리를 건너서부터 길은 시
멘트길에서 흙길로 변화되고 민가도 눈에 띄게 줄어든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자리를 바꾼 계
곡 건너는 범인(凡人)은 함부로 들어가선 안되는 신성한 구역처럼 소나무가 빽빽하다. 바로 장
릉(莊陵)을 안고 있는 동을지산이다. 영월에서 장릉은 완전 성역(聖域)이나 다름없다.

다리를 건너 500m 정도 가면 숲이 울창한 발본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되며, 비로소 나그네를 핍
박하던 뜨거운 햇빛에서 자유롭게 된다. 여기서 절까지는 아름다운 숲길로 길 옆에 청류(淸流)
의 개울이 졸졸졸 노래를 흐르며 한강(漢江)으로 흘러간다. 나무들이 베푼 청정한 기운에 속세
에서 지니고 온 번뇌가 싹 씻겨내려간 듯 마음이 시원해진다.


▲  가을에 슬슬 물들어가는 금몽암 숲길
보덕사와 달리 인적이 뜸한 금몽암 숲길, 숲길에 충만한 맑고 청정한 기운을
나 혼자 독점하며 마음껏 누려본다. 이곳의 맑은 공기, 우리집으로 훔쳐와
영원히 맛보고 싶을 따름이다.

▲  금몽암을 찾은 나그네를 오래된 호도나무

금몽암에서 식량을 충당하고자 심은 호도나무로 나이가 무려 250년에 달한다. 결코 없어지지 않
는 오랜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키가 18m에 이르는 어엿한 나무로 성정했으며, 나무 둘레는 0.6m
이다. 강원-영월-58호

▲  제법 묵은 티가 풍기는 금몽암 해우소

▲  보관(寶冠)을 쓴 홀쭉한 미륵불

푸르른 숲길의 끝에는 양반가의 별장 같은 금몽암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그런데 생겨 먹
은 것은 절집과는 거리가 있는 양반가의 기와집 형태를 띄고 있어 이곳에 온 나그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내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허나 그곳은 엄연한 절집 금몽암이다.

금몽암은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보덕사의 전신(前身), 지덕사(旨德寺)의 옛 자리라고 전하나 근
거는 없다. 암자의 이름이 특이하게도 '궁궐<'禁'에는 궁궐이란 뜻도 있음>에서의 꿈'을 뜻하는
금몽암인데 이는 단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와서 관풍헌(觀風軒)에서 마지막 해를 보내던 1457년 어느 날, 근교를 거
닐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궁궐에 있을 때 꿈 속에서 본 절과 완전 같았다고 한다. 그래
서 '궁궐에서 꿈꾸었던 암자'란 뜻에서 금몽암(금몽사)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단종을 배향(配享)하는 원당(願堂)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0년에 영
월군수 김택용(金澤龍)이 중수하여 노릉암(魯陵庵)이라 하였다. 1662년 군수 윤순거(尹舜擧)가
절을 수리하여 지덕암이라 했으나 1698년 보덕사가 장릉의 원찰(願刹)이 되면서 암자는 문을 닫
았다. 그러다가 1745년(혹은 1770년) 장릉 참봉(參奉) 나삼(羅蔘)이 기와집을 짓고 암자로 삼아
금몽암이라 했다.

금몽암은 'ㄱ'자 모습의 툇마루를 갖춘 16칸의 기와집이 전부다. 돌로 높이 석축을 쌓아 그 위
에 높다랗게 지어졌는데, 그 안에 법당과 선방(禪房), 공양간이 담겨져 있으며,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주문(一柱門)이나 천왕문, 석탑은 아예 없다.


▲  모습을 드러낸 금몽암
절집보다는 양반가의 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이렇게 봐서는 그 누가
절이라 여기겠는가~~?

▲  금몽암으로 들어서는 대문
빗장을 열고 열고 들어가면 금몽암 본당과
좁은 뜨락이 나온다.

▲  언제봐도 늘 정겨운 돌담장
울긋불긋한 담쟁이덩굴을 이불로 걸치며
초가을의 단잠을 즐긴다.


▲  금몽암 현판이 걸린 금몽암 본전(本殿)


▲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가운데 석가불이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하며 환한 미소로
중생을 맞는다. 저들은 1978년에 조성되었다.

▲  석가의 설법장면을 담은 영산회상도

▲  불단 한쪽에 자리한 지장보살상


▲  누각 형태의 금몽암의 북쪽 부분
강당 및 손님 맞이 공간으로 벽을 두지 않고 활짝 속살을 보이고 있으며,
그 밑에는 창고가 있다.

▲  북쪽 부분 내부
순전히 나무로 이루어진 우리네 전통 한옥의 형태로 이곳에 자리 피고 앉으면 숲과
계곡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의 희롱을 즐기며 더위를 잊기에 아주 좋다.
탁자에는 차 1잔의 여유를 누리게끔 다기(茶器)가 놓여져 있다.


▲  속세에 숨겨진 숨겨진 금몽암 본전 뒤쪽 부분

본전 기와집이 전부인줄 알았더만 그게 아니었다. 그 뒤쪽에도 저렇게 공간이 있었다. 허나 본
전에 완전히 가려져 외부에는 잘 드러나지 않은 비탈진 공간으로 장독대와 근래에 지어진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촐한 산신각이 자리를 채운다.

부엌 남쪽에는 산에서 해온 듯한 장작더미가 정겨운 풍물시(風物詩)를 연출한다. 절 남쪽 그러
니까 앞의 호도나무 뒤쪽 산자락에는 절에서 꾸리는 넓지 않은 밭이 있으며, 주차장 부근에 옥
계수가 쏟아지는 약수터가 있는데 물맛이 개운하다.

속세의 기운이 들어오기 힘들 듯한 깊은 산중에 터를 닦은 금몽암, 마치 첩첩산 산골에 남몰래
자리한 신선의 별장에 들어선 듯 기분이다. 부엌이 현대화된 것 외에는 조선 후기 한옥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울창한 숲속에 자리해 있어 속세를 잠시 등지고 싶을 때 소리 없이 다
가가 살짝 안기고 싶은 절집이다.

※ 금몽암 찾아가기 (2013년 11월 기준)

* 보덕사에서 12분 정도 걸으면 금몽암이다. (절 앞에 주차장 있음)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117 (보덕사 ☎ 033-374-3169)


♠  단종애사의 현장 낙화암과 민충사, 금강정을 품으며
쪽빛 물결의 동강을 굽어보는 영월 금강공원(錦江公園)

영월 땅에 무수히 서려있는 단종애사(端宗哀史)의 현장 가운데 낙화암(落花岩)을 빼놓을 수 없
다. 낙화암하면 흔히 부여(扶餘)의 낙화암을 떠올릴 것이다. 660년 7월 나당(羅唐)연합군에게
백제의 도읍인 사비성(泗泌城, 부여)이 털리자 여인 수백 명이 한 송이의 가련한 꽃잎이 되어
떨어진 그 현장 말이다. 그 연유로 낙화암이란 이쁘고도 구슬픈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인데, 그런
낙화암이 부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여의 그곳처럼 깎아지른 낭떠러지에 벽수(碧水)가 흐르
는 곳, 거기에 적절한 사연을 가진 여인네가 몸을 던지면 그곳이 바로 낙화암이 되기 때문이다.
영월의 낙화암 역시 그런 조건을 갖추었는데, 이곳에서 몸을 던진 여인은 단종을 시종하던 시녀
(侍女) 6명이다.
그들 중 궁녀(宮女)는 서울에서 같이 내려왔고, 관비(官婢)는 영월 관아에서 단종의 편의를 위
해 딸려주었다. 1457년 10월 24일 유시(17~19시)에 단종이 쓰디쓴 사약을 마시며 인생을 강제로
내려놓자 궁녀와 관비는 슬피 울면서 바로 이곳에서 몸을 던져 단종의 뒤를 따랐다. 이때 죽은
이는 궁녀 자개(者介)와 불덕(佛德), 관비 아가지(阿加之), 무녀 용안(龍眼), 내은덕(內隱德),
덕비(德非)로 전한다. 그들의 넋은 단종의 무덤을 찾아와 두견(杜鵑)이 되었다고 전하는 단종의
영혼 앞에 울면서 절을 했다고 하는데, 그 현장이 장릉 동쪽의 배견정(拜鵑亭)이라는 것이다.

영월 낙화암은 동강을 굽어보는 아찔한 절벽으로 금강정에서 동쪽으로 50m 떨어져 있다. 충절의
꽃을 피운 단장의 현장이라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이곳의 애절한 사연을 아는지 모
르는지 동강은 그저 그의 갈 길만 재촉할 뿐이다. 대자연이 빚은 빼어난 경승지라 풍경은 차관
도 아닌 장관을 이루며, 칼같이 솟은 산자락 사이로 동강과 서강 2개의 강이 만나는 곳에 베개
삼아 누워있는 영월 고을의 포근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는 정자나 누각이 있기 마련으로 조선 세종 때 지어진 금강정이란
정자가 있다. 또한 단종의 뒤를 따른 시녀의 넋을 모신 민충사가 낙화암을 바라보고 있으며, 영
월의 춘향으로 일컬어지는 고경춘의 순절비가 시녀들이 충절을 바치며 몸을 던진 그 자리에 서
있다. 이 일대를 통틀어서 금강공원이라 불리는데, 수목이 울창하고 청정한 동강이 바로 아래라
선선한 강바람이 언제나 공원에 감돈다. 수목에 감싸인 호젓한 산책로는 햇빛이 들어오기 버겨
울 정도로 한여름의 염통마저 쫄깃하게 만든다.

금강정과 낙화암 강변은 천길 낭떠러지라 탐방에 주의가 필요하며, 공원 바로 서쪽에는 KBS영월
방송국이 늘씬한 방송탑을 하늘 높이 띄우고 있다. 그리고 공원 뒤쪽에는 영월8경의 하나인 봉
래산(蓬萊山, 800m)이 장대한 모습으로 읍내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정상에는 영월의 신세대 명
소로 주목을 받는 별마로천문대가 있다.


▲  영월대교에서 바라본 동강과 낙화암(왼쪽)
멀리 보이는 다리는 태백으로 통하는 38번 국도이다.

▲  영월읍내 비석거리와 창절서원(彰節書院)에서 가져온 오래된 비석들
선정비와 불망비 등 고을 원님을 찬양하는 비석이 주류를 이룬다. 허나 저들 중에
속칭 비석치기의 대상이 된 비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  자연의 아름다움이 깃들여진 전나무 숲길
늘씬한 자태를 선보이며 하늘을 향해 솟은 전나무들, 그들의 그늘에는
영월이 낳은 인물들의 기념비가 싹을 틔웠다.


▲  금강공원 산책로
한참 푸르름의 절정에 이른 나무들 사이로 호젓한 산책로가 나그네를 반긴다.
저 길을 거닐다가 갑자기 신선이나 선녀에게 잡혀가는 것은 아닐까?


▲  금강정(錦江亭) - 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24호

금강공원 중간 부분에는 영월읍민의 오랜 휴식처인 금강정이 동강을 굽어보고 있다. 조망이 장
관인 금강정은 1428년 영월군수 김복항(金福恒)이 이곳 절경에 감탄하여 가산(家産)을 털어 지
은 정자라고 전한다. 1684년에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이곳 경관에 반해 금강정기(錦江
亭記)를 썼으며,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도 '錦江亭' 현판을 남기며 이곳에 대한 마음을 비췄다.

금강정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현판이 가운데가 아닌 좌측으로 조금 쏠려 자
리한 것이 특이하며, 정자 앞에는 근래에 만든 조망대가 있는데, 동강과 영월읍내 남쪽이 훤히
바라보여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  금강정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동강에 다리를 담구며 영월읍의 남과 북을 이어주는 2개의 다리(영월대교, 동강대교)가
멀리 바라보인다. 다리 아래로 시리도록 맑은 동강이 넓은 세상을 향해 길을 재촉한다.

▲  금강정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  단종의 뒤를 따른 6명 시녀의 혼이 깃들여진 민충사(愍忠祠) -
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27호

금강정 뒤쪽 언덕에는 영월 낙화암의 주인공인 6명의 시녀를 기리는 민충사가 자리해 있다. 시
녀의 사당이라 그런지 사당은 매우 소박하고 조촐한 규모로 1742년(영조 18년)에 지어져 민충(
愍忠)이란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1791년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중수했다. 그후 6.25 때
파괴된 것을 영월군수 남원수(南元壽)가 다시 지었고, 그들이 동강에 몸을 던진 매년 음력 10월
24일에 영월군수가 제주(祭主)가 되어 제를 올린다.


▲  썰렁한 민충사 내부
시녀와 종인(從人) 2개의 신위(神位)가 멋떨어진 책상 위에 봉안되어 있다.
그들은 천한 신분인지라 개인별로 신위를 두지 않고 달랑 2개로 압축을 했는데
아무리 충절의 여인네라 한들 거기서도 계급상의 차별은 엄연히 존재했다.

▲  낙화암에 세워진 2기의 비석
민충사에 주인공인 6명의 시녀를 기리는
비석이다.

▲  낙화암을 다시금 빛낸 영월의 춘향(春享)
기생 고경춘(高瓊春)의 비석

낙화암을 지나면 고색이 짙은 조그만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세월이 달아준 고된 세
월의 때로 얼룩진 이 비석은 영월의 춘향인 고경춘을 기리고자 세운 비석이다.
그녀는 1757년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생부인 고순익(高舜益)은 마음이 좋은 선비로
평소에 단종을 추모하며 살았다고 전한다. 딸이 태어나자 단종(노산군)이 점지해준 옥같은 딸이
란 뜻에서 이름을 노옥(魯玉)이라 했다.

노옥은 용모가 곱고 문학도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고을에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허
나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면서 남동생과 어렵게 생활하는 처지가 되었고, 추월(秋月)이란 늙은
기생의 수양딸로 들어갔으나, 그 역시 생활이 넉넉치 못해 할 수 없이 기생(妓生)이 되고 만다.

기생이 되면서 경춘(瓊春)이란 기명(妓名)을 사용했는데, 늘 몸가짐을 바로하여 명성이 날로 높
아져 갔다. 그러다가 16세 때 장릉에서 영월부사 이만회(李萬恢)의 아들인 이수학(李秀鶴)을 만
나면서 춘향과 이몽롱처럼 그들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허나 부사는 임기가 만료되어 서
울로 돌아갔고, 이수학 역시 과거를 본다며 상경을 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와 청혼을
할테니 3년을 기다려 달라고 청했고, 서로 끝없는 이별의 눈물을 뿌리며 그렇게 헤어지게 된다.

그후 새로 부임한 부사가 오자마자 병으로 죽자 그 대타로 문장가인 신광수(申光洙)가 영월부사
로 오면서 경춘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는 경춘의 미모에 군침을 흘리고는 수청을 강요했는데,
경춘은 예전 부사의 아들인 이수학과의 관계를 말하며 수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뚜껑이 열린 신
광수는 수청을 들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집요하게 위협을 했다.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부사
는 고집불통이었다. 서울에 있는 이수학에게 연통을 띄워 어떻게든 도움을 청하면 되지 않았을
까 싶지만 영월과 서울은 먼 거리라 연통을 급히 띄울 처지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면서 부모의 산소를 찾아가 하직 인사를 올린 후, 낙화암에서
이수학이 준 사랑의 증표를 꼭 지닌 채, 300년 전 단종을 위해 죽은 시녀들처럼 한 송이의 의로
운 꽃이 되어 동강으로 지고 말았다. 그때 그녀의 나이 불과 16세, 때는 1773년이었다.

그해 12월 신광수는 여러 비리가 밝혀져 관직에서 떨려났으며, 경춘이 순절한 지 20여년이 지난
1795년 순찰사(巡察使)인 손암 이공(遜岩 李公)이 영월을 순시했을 때 경춘의 서글픈 사연을 전
해 듣고 비석 건립을 후원했다. 이때 평창부사 남의로(南義老)가 글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韓
鼎運)이 글씨를 써 그녀가 투신한 현장에 '월기경춘순절지처(越妓瓊春殉節之處)'란 비석을 세우
며, 춘향보다 더 매서운 정절을 지닌 그녀의 의기(義氣)를 기렸다. 그런데 그녀와 혼인을 약속
했던 이수학은 서울로 올라간 이후 어찌되었는지는 내용이 없어 모르겠는데, 아마 곧게 죽지는
못했을 듯 싶다.
금강공원을 끝으로 강원도의 지붕, 영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닫는다. ~~~

※ 금강공원 (금강정, 민충사, 낙화암) 찾아가기 (2013년 11월 기준)
* 영월역을 나와서 왼쪽(읍내 방면)으로 가면 덕포4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읍내 방면 북쪽 길로
  가면 영월대교인데, 다리를 건너면 바로 KBS영월방송국으로 오르는 금강공원길이 나온다. 그
  길로 접어들면 금강공원으로 이어진다. (찾기는 매우 쉬움)
* 영월터미널에서 중앙로를 따라 영월역 방면으로 10분 정도 곧게 가면 왼쪽에 KBS영월방송국으
  로 오르는 금강공원길이 나온다.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78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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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1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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