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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가 깃들여진 강원도의 청정한 지붕, 영월 나들이 (금몽암, 낙화암, 동강...)

 


♠ 단종애사가 서린 강원도의 청정한 지붕, 영월(寧越) 나들이 ♠
영월 금몽암
▲  단종의 꿈속에 나타났던 절, 영월 금몽암(禁夢庵)


 

가을이 맛있게 익어가던 9월의 끝무렵에 강원도의 지붕인 영월을 찾았다. 우선 평창(平昌)
에 들려 미답처인 남산공원과 송학루, 노성산성 등을 둘러보고(☞ 관련글 보러가기) 평창
터미널에서 영월로 넘어가는 군내버스에 나를 담고 영월로 넘어갔다. 언제 봐도 시리도록
좋은 강원도의 아름다운 산하(山河)와 칼처럼 솟은 고개를 마음껏 구경하고 체험하며 40
여 분을 달려 영월읍내 북쪽에 자리한 장릉(莊陵)에 두 발을 내린다.

장릉은 소년왕 단종(端宗, 1441~1457)의 능으로 영월에 왔다면 꼭 찾아야 칭찬을 듣는 영
월의 대표급 명소이다. 방랑시인 김삿갓과 더불어 영월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영월을 먹여
살리는 밥줄이기도 한데, 내가 장릉에서 내린 것은 장릉을 보고자 함이 아니라 다른 미답
지를 보고자 함이다. 장릉은 20대 중반에 이미 2번 거쳐간 곳이라 그리 땡기진 않는다.

금강산도 식후경(食後景)이란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절로 가기 전에 우선 점심을 먹기
로 했다. 오랜만에 장릉보리밥을 먹을까? 아니면 말로만 듣던 강원도의 먹거리 곤드레밥
을 먹을까? 둘을 놓고 궁리하다가 곤드레밥을 파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곤드레는 강원도 700m이상 고지에서 자라는 나물로 학명(學名)은 고려엉컹귀이다. 곤달비
로도 불리며, 영양가가 풍부하고 맛이 좋아 옛부터 강원도 산골의 먹거리로 절찬리에 애
용되었다. 곤드레밥은 바로 곤드레나물을 뒤집어 쓴 밥으로 콩나물밥과 성격이 비슷하다
보면 된다. 밥에는 곤드레나물과 김가루가 들어가 있으며, 산나물 일색의 밑반찬과 간장,
뚝배기에 담긴 된장조치(찌개)를 잘 비벼먹으면 휼륭한 곤드레밥이 된다.

밥을 먹고나니 바로 포만감의 행복과 함께 식곤증이 한숨 자라며 나를 희롱하려 든다. 하
지만 가야될 곳이 있기에 희롱을 뿌리치고 후식으로 커피 1잔 들이키며 보덕사로 길을 재
촉했다.


▲  장릉 건너편 주막에서 먹은 곤드레밥의 위엄

▲  장릉 배견정(拜鵑亭)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오래된 갈참나무
이 나무는 나이가 무려 400년에 이른다고 하며, 높이가 21m, 둘레가 3.8m에 달한다.
강원도-영월-35호


♠  오랜 역사를 간직한 장릉의 원찰(願刹) ~
발본산 보덕사(鉢本山 報德寺)

▲  수목이 울창한 보덕사 서쪽 부분

장릉에서 보덕사, 금몽암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5분 정도 들어가면 길 오른쪽 개울 너머로 장
릉의 수호사찰인 보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절은 668년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세운 지덕사(旨德寺)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
시절 의상은 당나라에 머물던 시기(661년에 건너가 670년에 귀국함)이므로 그가 세웠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그 외에 686년(신문왕 5년)에 의상이 세웠다는 설도 있고, 714년에 혜각선사
(蕙覺禪師)가 세웠다고 우기기도 하나 대체로 신라 후기나 고려 때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1132년(인종 10년) 설허(雪虛)와 원경국사(元敬國師)가 극락보전과 사성전, 염불암, 침운루(沈
雲樓) 등을 증축했으며, 1457년에는 노릉사(魯陵寺)로 이름을 갈았다. 1705년 장릉을 관
리하는
원찰(願刹)로 지정되면서 한의(漢誼)와 천밀(天密)선사가 큰 종을 만들었으며, 1726년에
는 장릉
의 제수(祭需)를 담당하는 절인 조포사(造泡寺)로 지정되면서 왕실에서 많은 지원을 받
게 된다.
이때 왕실에 바짝 잘보이고자 나라의 덕을 갚는다는 뜻의 보덕사로 이름을 고쳤다.


1854년 불의의 화재로 극락보전과 종각이 전소되어 1868년에 중수했으며, 그 시절 절의 규모가
상당하여 절에 속한 밭이 1,000석, 승려는 무려 100명이 넘어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말사(末
寺) 가운데 가장 컸다고 한다. 허나 6.25전쟁으로 극락보전과 해우소를 제외한 대부분이 소실되
어 쪽박을 차게 되었고, 이후 꾸준한 불사를 벌여 예전의 모습을 서서히 회복하고 있다.

보덕사는 발본산(鉢本山) 자락에 안겨있는 산사(山寺)가 분명하지만 절이 들어앉은 터가 평지이
고 마을과도 가까워 산사의 분위기는 조금 떨어진다. 절에서는 발본산 대신 한참이나 멀리 떨어
진 '태백산(太白山) 보덕사'라 칭하고 있으며, 여기서 바라보는 서쪽 동을지산(冬乙旨山)의 일
몰 풍경이 매우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하다. 또한 석양(夕陽)에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절의 범
종소리는 영월8경의 하나로 손꼽혔다.

제법 넓은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선방, 사성전, 칠성각 등 8~9
동의 건물이 있으며, 선방과 칠성각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향(西向)을 취했다. 소장문화유산
으로는 지방문화재인 극락보전과 해우소가 있다.


▲  보덕사로 인도하는 극락1교와 일주문(一柱門)

▲  천왕문에서 바라본 일주문 주변

속세에서 보덕사에 들어가려면 계곡 돌다리를 건너야 된다. 돌다리는 모두 2개로 극락(極樂)이
란 이름을 지녔는데, 일주문 앞 다리는 극락1교, 그 북쪽 것은 극락2교이다. 다리는 근래에 지
어진 탓에 손대기가 아쉬울 정도로 무척이나 하얀 피부를 자랑한다.

번뇌를 계곡에 내던지고 다리를 건너면 다리의 이름 그대로 극락을 염원하는 보덕사 경내가 펼
쳐진다. 절은 계곡만으로도 안심이 되질 않는지 계곡 쪽에 기와를 얹힌 흙담장을 길게 둘러 속
세와 부처 세계의 경계를 다시 한번 그었다. 즉 2중으로 경계선을 설치해 속인들이 지니고 오는
번뇌와 절에 놀러오는 화마(火魔) 등의 악귀를 철저히 경계하는 것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천왕문까지 길이 곧게 이어
져 있다. 그 좌우로 나이가 지긋한 아름드리 나
무들이 앞다투어 중생을 영접한다. 그들 중에선
왼쪽 사진의 느티나무가 가장 연세가 높아 무려
600살이 넘었다고 한다. 거의 보덕사 내력의 절
반 가까이를 산 셈이다. 높이는 25m에 이르러
그 꼭대기는 거의 하늘에 맞닿아 있는 듯하며,
영월군 보호수의 하나로 주변 나무와 함께 자연
과 어우러진 보덕사의 아름다움을 매섭게 드높
인다.

길 오른쪽에는 연꽃과 개구리의 운동장인 조그
만 연못이 자리해 있다. 가을임에도 아직도 백
련(白蓮) 일부가 자꾸 떨구어지는 고개를 간신
히 붙잡으며 올해의 막바지 아름다움을 선보인
다.


▲  청초한 아름다움을 지닌 백련의 보금자리 보덕사 연못

▲  맵시가 고운 관음보살상

▲  사천왕의 보금자리인 천왕문(天王門)


▲  보덕사 해우소(解憂所) - 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132호

천왕문 우측에서 약 50m 떨어진 곳에 고색의 때가 가득한 창고처럼 보이는 2층 건물이 있다. 바
로 보덕사 해우소이다.
절에서는 뒷간을 해우소라고 부른다. 해우(解憂)는 근심을 풀거나 해결한다는 뜻으로 볼일을 보
면서 몸 속의 노폐물이 싹 내려가는 것을 해우로 비유했다. 뒷간에서 보는 볼일처럼, 볼일을 볼
때 나오는 고약한 냄새처럼 세상사 근심걱정도 싹 내려가고 냄새로 싹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보덕사 해우소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형태를 띈 맞배지붕 건물로 상량문(上樑文)에 따르
면 1882년(고종 19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내부는 앞뒤 2열로 분리하여 각각 6칸씩 볼일 보는
곳을 두었으며, 남녀 사용을 구분했다. 오래된 건물임에도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화장실의
기능을 변함없이 수행하고 있으며, 선암사(仙巖寺) 해우소와 더불어 문화재로 지정된 이 땅에
흔치 않은 옛 해우소이다.


▲  보덕사 극락보전(極樂寶殿) - 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32호

천왕문을 지나면 조그만 돌맹이가 잔잔히 깔린 넓은 뜨락과 극락보전, 선방(禪房), 5층석탑 등
이 나타난다.
극락보전은 보덕사의 법당으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
붕 건물로 1161년 원경국사가 세웠다고 전하며, 지금의 건물은 1868년 화마에 희생된 것을 다시
지은 것으로 건물 현판은 해강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썼다고 한다. 마치 학이 하늘을 향
해 날개짓을 하듯 추녀를 치켜올린 극락전의 모습이 시원스럽다.

극락전 불단(佛壇)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한 목조아미
타3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그 뒤로 색채가 고운 후불탱화가 병풍처럼 자리한다.

▲  극락보전 목조아미타3존불
눈을 지그시 뜨며 엷은 미소를 드러낸 그들이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따스히 맞는다.

▲  극락보전 옆에 자리한 석종형 승탑(僧塔)
1820년에 조성된 것으로 화엄대강사 설허당
대선사(華嚴大講師 雪虛堂大禪師)의 승탑이다.

       ◀  작고 단촐한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은 근래에 지어진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산신(山
神)의 보금자리이다. 건물 내부 우측 벽에는 태
백산신으로 추앙된 단종과 그에게 산머루를 바
치는 추익한(秋益漢)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있
다.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도


▲  단종과 추익한의 마지막 만남이 담긴 그림

단종을 수식하는 충신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추익한(1383~1457)은 1411년 문과(文科)에 급제하
여 한성부윤(漢城府尹)과 호조정랑(戶曹正郞) 등을 지낸 인물이다. 1433년 퇴직하여 영월로 내
려와 학문과 자연을 벗삼으며 팔자 좋은 시간을 보내던 중, 1456년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를 왔다.
그는 단종을 자주 찾아가 문안을 올리며, 시문을 지어주었고, 산에서 따온 산머루와 다래를 진
상하며 우울해하던 단종을 늘 다독거려주었다. 그러다가 1457년 10월 24일, 그날도 여전히 산에
올라가 단종에게 줄 산머루를 따고 있는데, 난데없이 곤룡포(袞龍袍)를 걸친 단종이 백마를 타
고 그 앞에 나타났다. 추익한은 깜짝 놀랐지만 반가운 마음을 보이며 산머루를 올렸다. '전하!
여기 산머루가 맛이 좋습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요'

그러자 단종이 '나는 태백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머루는 관풍헌(觀風軒)에 갖다두십시요~' 하고
는 말을 몰아 급히 사라지는 것이다. 난데 없는 단종 출현에 마음이 불안하여 서둘러 읍내로 내
려가니 글쎄 단종은 이미 처단되어 그 시신이 동강(東江)에 버려진 것이 아닌가. 그가 산에서
본 단종은 태백산으로 가던 단종의 혼으로 추익한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던 것이다. 산신각 우측
의 이 그림은 바로 그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단종이 죽자 추익한은 크게 애통해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를 따랐다. 이에 영월 사람들은
그를 추충신(秋忠臣)이라 부르며 사당을 지어 그의 뜨거운 충절의 얼을 기렸다.

▲  사성전 우측의 칠성각(七星閣)
칠성(七星)과 독성(獨聖, 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선방 옆에 자리한 보덕사 샘터
중생에 대한 부처와 자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가뭄에도 물이 마를 날이 없다.


▲  경내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사성전(四聖殿)

사성전은 부처와 보살, 나한(羅漢), 신중(神衆)을 봉안한 건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
겨진다. 지금의 건물은 6.25 이후에 중수한 것으로 석가불과 미륵불, 제화갈라의 3존불과 나한
상, 장군상 등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 불상은 1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불상에서 19세
기 중반 유물이 쏟아져 나와 후불탱화와 더불어 지금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가 있다.

※ 영월 보덕사 찾아가기 (2013년 11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영월행 직행버스가 30~60분 간격으로 떠나며, 강남 센트럴시티에서 영월행
  고속버스가 1일 4회 떠난다.
* 청량리역, 양평역, 원주역에서 강릉, 아우라지행 무궁화호 열차가 1일 7~8회 떠난다.
* 인천, 대전(동부), 원주, 제천, 태백에서 영월행 직행버스 이용
* 영월터미널 부근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연당, 마차, 주천 방면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장릉
  에서 내리거나 도보 30분
* 영월역에서 장릉까지 바로 이어주는 교통편이 없다. 택시를 타고 바로 가는 것이 편하며, 걸
  어갈 경우에는 1시간 정도 잡아야 된다.
* 승용차로 갈 경우 (경내에 주차장 있음)
① 중앙고속도로 → 제천나들목을 나와서 제천, 영월방면 38번 국도 → 방절터널을 지나 서영월
   나들목에서 우회전 → 청령포교차로에서 좌회전 → 청령포입구에서 좌회전 → 장릉3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바로 나오는 3거리에서 보덕로로 좌회전 → 보덕사 주차장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100 (☎ 033-374-3169)


♠  단종의 꿈속에 나타났던 조그만 산중암자, 절집보다는 양반가의 분위기가
진하게 풍기는 금몽암(禁夢庵) - 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25호

보덕사에서 100m 정도 오르면 보덕사의 옆구리로 흐르는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있다. 다리에는
보주(寶珠)를 상징하는 듯한 둥그런 돌이 난간의 역할을 대신한다. 다리를 건너서부터 길은 시
멘트길에서 흙길로 변화되고 민가도 눈에 띄게 줄어든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자리를 바꾼 계
곡 건너는 범인(凡人)은 함부로 들어가선 안되는 신성한 구역처럼 소나무가 빽빽하다. 바로 장
릉(莊陵)을 안고 있는 동을지산이다. 영월에서 장릉은 완전 성역(聖域)이나 다름없다.

다리를 건너 500m 정도 가면 숲이 울창한 발본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되며, 비로소 나그네를 핍
박하던 뜨거운 햇빛에서 자유롭게 된다. 여기서 절까지는 아름다운 숲길로 길 옆에 청류(淸流)
의 개울이 졸졸졸 노래를 흐르며 한강(漢江)으로 흘러간다. 나무들이 베푼 청정한 기운에 속세
에서 지니고 온 번뇌가 싹 씻겨내려간 듯 마음이 시원해진다.


▲  가을에 슬슬 물들어가는 금몽암 숲길
보덕사와 달리 인적이 뜸한 금몽암 숲길, 숲길에 충만한 맑고 청정한 기운을
나 혼자 독점하며 마음껏 누려본다. 이곳의 맑은 공기, 우리집으로 훔쳐와
영원히 맛보고 싶을 따름이다.

▲  금몽암을 찾은 나그네를 오래된 호도나무

금몽암에서 식량을 충당하고자 심은 호도나무로 나이가 무려 250년에 달한다. 결코 없어지지 않
는 오랜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키가 18m에 이르는 어엿한 나무로 성정했으며, 나무 둘레는 0.6m
이다. 강원-영월-58호

▲  제법 묵은 티가 풍기는 금몽암 해우소

▲  보관(寶冠)을 쓴 홀쭉한 미륵불

푸르른 숲길의 끝에는 양반가의 별장 같은 금몽암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그런데 생겨 먹
은 것은 절집과는 거리가 있는 양반가의 기와집 형태를 띄고 있어 이곳에 온 나그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내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허나 그곳은 엄연한 절집 금몽암이다.

금몽암은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보덕사의 전신(前身), 지덕사(旨德寺)의 옛 자리라고 전하나 근
거는 없다. 암자의 이름이 특이하게도 '궁궐<'禁'에는 궁궐이란 뜻도 있음>에서의 꿈'을 뜻하는
금몽암인데 이는 단종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와서 관풍헌(觀風軒)에서 마지막 해를 보내던 1457년 어느 날, 근교를 거
닐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궁궐에 있을 때 꿈 속에서 본 절과 완전 같았다고 한다. 그래
서 '궁궐에서 꿈꾸었던 암자'란 뜻에서 금몽암(금몽사)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단종을 배향(配享)하는 원당(願堂)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0년에 영
월군수 김택용(金澤龍)이 중수하여 노릉암(魯陵庵)이라 하였다. 1662년 군수 윤순거(尹舜擧)가
절을 수리하여 지덕암이라 했으나 1698년 보덕사가 장릉의 원찰(願刹)이 되면서 암자는 문을 닫
았다. 그러다가 1745년(혹은 1770년) 장릉 참봉(參奉) 나삼(羅蔘)이 기와집을 짓고 암자로 삼아
금몽암이라 했다.

금몽암은 'ㄱ'자 모습의 툇마루를 갖춘 16칸의 기와집이 전부다. 돌로 높이 석축을 쌓아 그 위
에 높다랗게 지어졌는데, 그 안에 법당과 선방(禪房), 공양간이 담겨져 있으며,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주문(一柱門)이나 천왕문, 석탑은 아예 없다.


▲  모습을 드러낸 금몽암
절집보다는 양반가의 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이렇게 봐서는 그 누가
절이라 여기겠는가~~?

▲  금몽암으로 들어서는 대문
빗장을 열고 열고 들어가면 금몽암 본당과
좁은 뜨락이 나온다.

▲  언제봐도 늘 정겨운 돌담장
울긋불긋한 담쟁이덩굴을 이불로 걸치며
초가을의 단잠을 즐긴다.


▲  금몽암 현판이 걸린 금몽암 본전(本殿)


▲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가운데 석가불이 좌우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대동하며 환한 미소로
중생을 맞는다. 저들은 1978년에 조성되었다.

▲  석가의 설법장면을 담은 영산회상도

▲  불단 한쪽에 자리한 지장보살상


▲  누각 형태의 금몽암의 북쪽 부분
강당 및 손님 맞이 공간으로 벽을 두지 않고 활짝 속살을 보이고 있으며,
그 밑에는 창고가 있다.

▲  북쪽 부분 내부
순전히 나무로 이루어진 우리네 전통 한옥의 형태로 이곳에 자리 피고 앉으면 숲과
계곡에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의 희롱을 즐기며 더위를 잊기에 아주 좋다.
탁자에는 차 1잔의 여유를 누리게끔 다기(茶器)가 놓여져 있다.


▲  속세에 숨겨진 숨겨진 금몽암 본전 뒤쪽 부분

본전 기와집이 전부인줄 알았더만 그게 아니었다. 그 뒤쪽에도 저렇게 공간이 있었다. 허나 본
전에 완전히 가려져 외부에는 잘 드러나지 않은 비탈진 공간으로 장독대와 근래에 지어진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촐한 산신각이 자리를 채운다.

부엌 남쪽에는 산에서 해온 듯한 장작더미가 정겨운 풍물시(風物詩)를 연출한다. 절 남쪽 그러
니까 앞의 호도나무 뒤쪽 산자락에는 절에서 꾸리는 넓지 않은 밭이 있으며, 주차장 부근에 옥
계수가 쏟아지는 약수터가 있는데 물맛이 개운하다.

속세의 기운이 들어오기 힘들 듯한 깊은 산중에 터를 닦은 금몽암, 마치 첩첩산 산골에 남몰래
자리한 신선의 별장에 들어선 듯 기분이다. 부엌이 현대화된 것 외에는 조선 후기 한옥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울창한 숲속에 자리해 있어 속세를 잠시 등지고 싶을 때 소리 없이 다
가가 살짝 안기고 싶은 절집이다.

※ 금몽암 찾아가기 (2013년 11월 기준)

* 보덕사에서 12분 정도 걸으면 금몽암이다. (절 앞에 주차장 있음)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117 (보덕사 ☎ 033-374-3169)


♠  단종애사의 현장 낙화암과 민충사, 금강정을 품으며
쪽빛 물결의 동강을 굽어보는 영월 금강공원(錦江公園)

영월 땅에 무수히 서려있는 단종애사(端宗哀史)의 현장 가운데 낙화암(落花岩)을 빼놓을 수 없
다. 낙화암하면 흔히 부여(扶餘)의 낙화암을 떠올릴 것이다. 660년 7월 나당(羅唐)연합군에게
백제의 도읍인 사비성(泗泌城, 부여)이 털리자 여인 수백 명이 한 송이의 가련한 꽃잎이 되어
떨어진 그 현장 말이다. 그 연유로 낙화암이란 이쁘고도 구슬픈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인데, 그런
낙화암이 부여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여의 그곳처럼 깎아지른 낭떠러지에 벽수(碧水)가 흐르
는 곳, 거기에 적절한 사연을 가진 여인네가 몸을 던지면 그곳이 바로 낙화암이 되기 때문이다.
영월의 낙화암 역시 그런 조건을 갖추었는데, 이곳에서 몸을 던진 여인은 단종을 시종하던 시녀
(侍女) 6명이다.
그들 중 궁녀(宮女)는 서울에서 같이 내려왔고, 관비(官婢)는 영월 관아에서 단종의 편의를 위
해 딸려주었다. 1457년 10월 24일 유시(17~19시)에 단종이 쓰디쓴 사약을 마시며 인생을 강제로
내려놓자 궁녀와 관비는 슬피 울면서 바로 이곳에서 몸을 던져 단종의 뒤를 따랐다. 이때 죽은
이는 궁녀 자개(者介)와 불덕(佛德), 관비 아가지(阿加之), 무녀 용안(龍眼), 내은덕(內隱德),
덕비(德非)로 전한다. 그들의 넋은 단종의 무덤을 찾아와 두견(杜鵑)이 되었다고 전하는 단종의
영혼 앞에 울면서 절을 했다고 하는데, 그 현장이 장릉 동쪽의 배견정(拜鵑亭)이라는 것이다.

영월 낙화암은 동강을 굽어보는 아찔한 절벽으로 금강정에서 동쪽으로 50m 떨어져 있다. 충절의
꽃을 피운 단장의 현장이라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이곳의 애절한 사연을 아는지 모
르는지 동강은 그저 그의 갈 길만 재촉할 뿐이다. 대자연이 빚은 빼어난 경승지라 풍경은 차관
도 아닌 장관을 이루며, 칼같이 솟은 산자락 사이로 동강과 서강 2개의 강이 만나는 곳에 베개
삼아 누워있는 영월 고을의 포근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는 정자나 누각이 있기 마련으로 조선 세종 때 지어진 금강정이란
정자가 있다. 또한 단종의 뒤를 따른 시녀의 넋을 모신 민충사가 낙화암을 바라보고 있으며, 영
월의 춘향으로 일컬어지는 고경춘의 순절비가 시녀들이 충절을 바치며 몸을 던진 그 자리에 서
있다. 이 일대를 통틀어서 금강공원이라 불리는데, 수목이 울창하고 청정한 동강이 바로 아래라
선선한 강바람이 언제나 공원에 감돈다. 수목에 감싸인 호젓한 산책로는 햇빛이 들어오기 버겨
울 정도로 한여름의 염통마저 쫄깃하게 만든다.

금강정과 낙화암 강변은 천길 낭떠러지라 탐방에 주의가 필요하며, 공원 바로 서쪽에는 KBS영월
방송국이 늘씬한 방송탑을 하늘 높이 띄우고 있다. 그리고 공원 뒤쪽에는 영월8경의 하나인 봉
래산(蓬萊山, 800m)이 장대한 모습으로 읍내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정상에는 영월의 신세대 명
소로 주목을 받는 별마로천문대가 있다.


▲  영월대교에서 바라본 동강과 낙화암(왼쪽)
멀리 보이는 다리는 태백으로 통하는 38번 국도이다.

▲  영월읍내 비석거리와 창절서원(彰節書院)에서 가져온 오래된 비석들
선정비와 불망비 등 고을 원님을 찬양하는 비석이 주류를 이룬다. 허나 저들 중에
속칭 비석치기의 대상이 된 비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  자연의 아름다움이 깃들여진 전나무 숲길
늘씬한 자태를 선보이며 하늘을 향해 솟은 전나무들, 그들의 그늘에는
영월이 낳은 인물들의 기념비가 싹을 틔웠다.


▲  금강공원 산책로
한참 푸르름의 절정에 이른 나무들 사이로 호젓한 산책로가 나그네를 반긴다.
저 길을 거닐다가 갑자기 신선이나 선녀에게 잡혀가는 것은 아닐까?


▲  금강정(錦江亭) - 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24호

금강공원 중간 부분에는 영월읍민의 오랜 휴식처인 금강정이 동강을 굽어보고 있다. 조망이 장
관인 금강정은 1428년 영월군수 김복항(金福恒)이 이곳 절경에 감탄하여 가산(家産)을 털어 지
은 정자라고 전한다. 1684년에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이곳 경관에 반해 금강정기(錦江
亭記)를 썼으며,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도 '錦江亭' 현판을 남기며 이곳에 대한 마음을 비췄다.

금강정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현판이 가운데가 아닌 좌측으로 조금 쏠려 자
리한 것이 특이하며, 정자 앞에는 근래에 만든 조망대가 있는데, 동강과 영월읍내 남쪽이 훤히
바라보여 두 눈이 제대로 호강을 누린다.


▲  금강정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동강에 다리를 담구며 영월읍의 남과 북을 이어주는 2개의 다리(영월대교, 동강대교)가
멀리 바라보인다. 다리 아래로 시리도록 맑은 동강이 넓은 세상을 향해 길을 재촉한다.

▲  금강정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  단종의 뒤를 따른 6명 시녀의 혼이 깃들여진 민충사(愍忠祠) -
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27호

금강정 뒤쪽 언덕에는 영월 낙화암의 주인공인 6명의 시녀를 기리는 민충사가 자리해 있다. 시
녀의 사당이라 그런지 사당은 매우 소박하고 조촐한 규모로 1742년(영조 18년)에 지어져 민충(
愍忠)이란 사액(賜額)을 받았으며, 1791년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중수했다. 그후 6.25 때
파괴된 것을 영월군수 남원수(南元壽)가 다시 지었고, 그들이 동강에 몸을 던진 매년 음력 10월
24일에 영월군수가 제주(祭主)가 되어 제를 올린다.


▲  썰렁한 민충사 내부
시녀와 종인(從人) 2개의 신위(神位)가 멋떨어진 책상 위에 봉안되어 있다.
그들은 천한 신분인지라 개인별로 신위를 두지 않고 달랑 2개로 압축을 했는데
아무리 충절의 여인네라 한들 거기서도 계급상의 차별은 엄연히 존재했다.

▲  낙화암에 세워진 2기의 비석
민충사에 주인공인 6명의 시녀를 기리는
비석이다.

▲  낙화암을 다시금 빛낸 영월의 춘향(春享)
기생 고경춘(高瓊春)의 비석

낙화암을 지나면 고색이 짙은 조그만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세월이 달아준 고된 세
월의 때로 얼룩진 이 비석은 영월의 춘향인 고경춘을 기리고자 세운 비석이다.
그녀는 1757년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생부인 고순익(高舜益)은 마음이 좋은 선비로
평소에 단종을 추모하며 살았다고 전한다. 딸이 태어나자 단종(노산군)이 점지해준 옥같은 딸이
란 뜻에서 이름을 노옥(魯玉)이라 했다.

노옥은 용모가 곱고 문학도 뛰어났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고을에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허
나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면서 남동생과 어렵게 생활하는 처지가 되었고, 추월(秋月)이란 늙은
기생의 수양딸로 들어갔으나, 그 역시 생활이 넉넉치 못해 할 수 없이 기생(妓生)이 되고 만다.

기생이 되면서 경춘(瓊春)이란 기명(妓名)을 사용했는데, 늘 몸가짐을 바로하여 명성이 날로 높
아져 갔다. 그러다가 16세 때 장릉에서 영월부사 이만회(李萬恢)의 아들인 이수학(李秀鶴)을 만
나면서 춘향과 이몽롱처럼 그들은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허나 부사는 임기가 만료되어 서
울로 돌아갔고, 이수학 역시 과거를 본다며 상경을 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와 청혼을
할테니 3년을 기다려 달라고 청했고, 서로 끝없는 이별의 눈물을 뿌리며 그렇게 헤어지게 된다.

그후 새로 부임한 부사가 오자마자 병으로 죽자 그 대타로 문장가인 신광수(申光洙)가 영월부사
로 오면서 경춘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는 경춘의 미모에 군침을 흘리고는 수청을 강요했는데,
경춘은 예전 부사의 아들인 이수학과의 관계를 말하며 수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뚜껑이 열린 신
광수는 수청을 들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집요하게 위협을 했다.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부사
는 고집불통이었다. 서울에 있는 이수학에게 연통을 띄워 어떻게든 도움을 청하면 되지 않았을
까 싶지만 영월과 서울은 먼 거리라 연통을 급히 띄울 처지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면서 부모의 산소를 찾아가 하직 인사를 올린 후, 낙화암에서
이수학이 준 사랑의 증표를 꼭 지닌 채, 300년 전 단종을 위해 죽은 시녀들처럼 한 송이의 의로
운 꽃이 되어 동강으로 지고 말았다. 그때 그녀의 나이 불과 16세, 때는 1773년이었다.

그해 12월 신광수는 여러 비리가 밝혀져 관직에서 떨려났으며, 경춘이 순절한 지 20여년이 지난
1795년 순찰사(巡察使)인 손암 이공(遜岩 李公)이 영월을 순시했을 때 경춘의 서글픈 사연을 전
해 듣고 비석 건립을 후원했다. 이때 평창부사 남의로(南義老)가 글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韓
鼎運)이 글씨를 써 그녀가 투신한 현장에 '월기경춘순절지처(越妓瓊春殉節之處)'란 비석을 세우
며, 춘향보다 더 매서운 정절을 지닌 그녀의 의기(義氣)를 기렸다. 그런데 그녀와 혼인을 약속
했던 이수학은 서울로 올라간 이후 어찌되었는지는 내용이 없어 모르겠는데, 아마 곧게 죽지는
못했을 듯 싶다.
금강공원을 끝으로 강원도의 지붕, 영월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닫는다. ~~~

※ 금강공원 (금강정, 민충사, 낙화암) 찾아가기 (2013년 11월 기준)
* 영월역을 나와서 왼쪽(읍내 방면)으로 가면 덕포4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읍내 방면 북쪽 길로
  가면 영월대교인데, 다리를 건너면 바로 KBS영월방송국으로 오르는 금강공원길이 나온다. 그
  길로 접어들면 금강공원으로 이어진다. (찾기는 매우 쉬움)
* 영월터미널에서 중앙로를 따라 영월역 방면으로 10분 정도 곧게 가면 왼쪽에 KBS영월방송국으
  로 오르는 금강공원길이 나온다.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78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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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1월 21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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