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시대'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08.16 제주도의 아름다운 서쪽 끝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수월봉 나들이 (차귀도, 산방산탄산온천)
  2. 2019.02.15 세계 구석기시대 유적의 대표 성지, 연천 전곡리선사유적지 ~~ (전곡선사박물관,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3. 2016.07.06 교과서에도 나오는 서울 선사유적의 성지, 가족 나들이 추천 명소 ~~ 암사동 선사유적지 (움집, 선사전시관) 2

제주도의 아름다운 서쪽 끝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수월봉 나들이 (차귀도, 산방산탄산온천)

 


' 제주도 겨울 나들이 '
(제주올레길12코스, 고산리유적, 수월봉)

당산봉에서 바라본 와도와 차귀도

▲  당산봉에서 바라본 와도(앞쪽)와 차귀도(뒷쪽)

제주 고산리유적 엉알해안

▲  제주 고산리유적

▲  엉알해안


 

겨울 제국의 추위 갑질이 한참이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
濟州島)를 찾았다.

햇님보다 훨씬 일찍 김포국제공항으로 달려가 제주도로 가는 6시대 비행기에 나를 담고
1시간 정도를 움직여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하늘 비행시간 50분, 활주로 방황시간
10여 분)
제주도에서 정처(定處)는 이미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되는데 제주도에
발을 딛자마자 서쪽으로 길을 잡아 여러 명소를 둘러보고 15시 경, 한림읍 용수리에 이
르렀다.
용수리에서 절부암(節婦岩)을 먼저 둘러보고 그날의 주메뉴인 제주올레길12코스(용수리
~무릉리, 17.5km)에 발을 들인다. 12코스의 ⅓ 정도 되는 해안길을 따라 수월봉까지 이
동하기로 했으나 햇님의 칼퇴근 본능으로 일몰 전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물
론 가기야 하겠지만 해가 떨어지면 사진 출사도 거의 불가능해지고 속세와도 떨어진 외
진 곳이라 무서움까지 발생할 수 있다. (외딴 산길이나 제주올레길은 가급적 일몰 전에
마치는 것이 좋음) 하여 일단 수월봉 북쪽인 고산리유적을 1차 목적지로 삼고 12코스에
나를 던져놓았다.
12코스를 따라 용수마을 방사탑 2호와 생이기정 등의 조촐한 명소를 둘러보고 올레길을
1굽이 지날 때마다 포즈를 조금씩 달리하는 차귀도와 와도(누운섬)를 옆구리에 끼며 가
다보니 어느덧 당산봉에 이르렀다. 본글은 바로 당산봉에서부터 시작된다.
(당산봉 이전 절부암, 생이기정, 제주올레길12코스 부분은 ☞ 이곳을 클릭한다)


 

♠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고산리 유적)

▲  바로 밑으로 바라보이는 와도와 차귀도(遮歸島)

차귀도와 고산리, 남해바다를 굽어보고 있는 당산봉(堂山峰)은 해발 148m의 낮은 뫼이다. 지
금이야 이 땅에 흔한 뒷동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어 실감은 나지 않겠지만 수억 년 전, 화산이
내뿜은 마그마나 용암이 바닷물과 만나 격하게 이루어진 수성화산체이다.
용암이 물을 만나면 용암은 급히 식고 물은 펄펄 끓는다. 이런 냉각과 가열반응은 격렬히 일
어나 수증기를 포함한 큰 폭발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수성화산활동이라 한다. 작은 알갱이
와 수증기로 이루어진 분출은 제법 패기가 있어 이들 화산쇄설물(火山碎屑物)은 멀리까지 날
라가 퇴적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오름을 응회구(凝灰邱)나 응회환이라고 한다. 응회
구는 성산일출봉(城山日出峯)이 대표적으로 높이가 꽤 되며 응회환은 그 다음 수준으로 수월
봉, 당산봉, 송악산이 이에 해당된다.

당산봉은 산방산, 용머리와 더불어 제주도에서 제일 오래된 화산체이다. 예전 이름은 당오름
으로 산기슭에 뱀을 신으로 봉안한 차귀당이 있었는데 그 신을 '사귀(蛇鬼, 뱀신)'라고 했다.
바로 그 당집 때문에 당오름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이후 그 사귀가 와전되어 '차귀'가
되었고, 봉우리 이름도 잠시 '차귀오름'으로 갈렸다고 전하며, 현재 이름인 당산봉은 당오름
을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봉우리 정상에 넓적한 바위가 있는데 마치 닭벼슬처럼 보여 계관산(鷄冠山)이라 했다는 이야
기도 덧붙여 전해오며, 당산봉 서쪽 꼭대기에는 봉수대가 있었는데 북쪽으로 판포봉수, 남동
쪽으로 모슬봉수와 연락을 했다.

올레길12코스는 당산봉 서쪽 기슭을 지나갈 뿐, 꼭대기는 거치지 않는다. 대신 꼭대기와 당산
봉 주위를 도는 둘레길이 별도로 있어 그 길을 이용하면 완벽한 당산봉 투어가 가능하다. 시
간이 되면 당산봉도 보너스로 거닐고 싶었으나 일몰 시간을 구실로 바로 고산리 유적으로 넘
어갔다. 그때 나에게는 그저 수월봉만 보일 뿐, 당산봉 자체는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당산봉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고산리


▲  오르락 내리락이 반복되는 제주올레길12코스 당산봉 구간

▲  드디어 시야에 들어온 수월봉과 고산리유적
바다를 향해 길쭉하게 고개를 내민 해안 언덕이 바로 수월봉이다. 사진 가운데
벌판은 고산리 유적으로 일몰은 코앞인데 아직도 길이 저만치나 남아있어
발걸음의 고삐를 더욱 조이게 한다.


당산봉을 내려가면 고산리 벌판과 함께 2차선 노을해안로가 나타난다. 제주올레길12코스는 그
길의 신세를 지며 차귀도포구(고산포구)로 이어지는데 그 포구와 엉알해안을 거쳐 수월봉으로
달려간다. 12코스를 정석대로 거쳐야 엉알해안까지 둘러볼 수 있으나 시간도 그렇고 수월봉에
너무 정신이 팔려 올레길12코스를 잠시 내버리고 고산리유적으로 바로 질러가는 편법(?)을 썼
다. 난 그때까지 수월봉 밑도리가 엉알해안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수월봉 북쪽 해안이 엉알
해안)


▲  동쪽에서 본 고산리 유적 (억새 너머 벌판이 고산리 유적임)

▲  제주 고산리(高山里) 유적 - 사적 412호

수월봉과 당산봉 사이 벌판에 고산리 유적이 넓게 누워있다. 유적의 면적은 약 98,465㎡로 풀
이 뒤덮힌 들판 수준이라 이곳이 무슨 유적인가 물음표를 던지겠지만 유적은 보존을 위해 그
밑에 고이 묻어두었으며, 유적 변두리에는 개인 경작지가 존재하고 있다.

이곳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유적으로 제주도의 대표적인 선사시대 유적지이다. 1987년 5
월, 고산리 주민들이 흙을 채취하고자 땅을 파다가 석창과 긁개를 발견했다. 그 소식을 들은
제주대학교는 그것이 발견된 곳을 답사하여 찌르개, 긁개, 돌도끼 1점을 발견하면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고산리유적이 슬슬 깨어나게 된다.
1988년 1월, 영남대학교 대학원생인 강창화가 수월봉에서 북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서 융기
문토기 1점을 수습했다. 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 이전에 쓰이던 것으로 그때는 기원전 4,000
년 이전 것으로 파악했으나 지금은 기원전 6,000년으로 보고 있다.

1991년과 1992년 겨울,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정밀 지표조사를 벌였다. 그때 자구내포구에서
하천변을 따라 수월봉에 이르는 유물산포지를 확인했고 지번별로 약 6,000여 점의 유물을 건
졌다.
1994년 신창~무릉간 해안도로가 신설되면서 고산리 유적을 관통하게 되자 그해 6월부터 8월까
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발굴 범위는 수월봉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에서 포구에 이르
는 약 200m, 폭 12m 구간으로 출토 유물은 석기와 토기 등 3,000여 점이며, 고산리식 토기라
불리는 섬유질토기의 파편이 확인되는 등 성과가 대단했다. 하여 국제학술세미나를 통해 구석
기시대 후기에서 신석기시대 초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유적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허나 유물의 절대연대자료가 부족하고 유적의 층위 분석도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경작으로 유
적과 그곳에 깃든 유물이 계속 파괴되고 고통을 받자 1997년 다시 발굴조사를 하였다. 이때는
17,000여 점의 석기와 1,900여 점의 토기를 끄집어내는 성과를 거둔다.

1998년 11월부터 1999년 2월까지 다시 조사를 벌여 170여 점의 타제석기와 토기를 발굴했으며
, 사적으로 지정될 구역 외 지역에 대한 조사를 벌여 유적의 범위를 파악했다. 그리고 이듬해
국가 사적의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

2012년 1구역 시굴조사와 발굴조사를 벌여 원형움집터 26동, 수혈유구 295기, 야외 불피던 곳
10기, 구상유구 2기, 토기류 87점, 석기류 278점을 발견했는데, 1만년 이전 것으로 파악이 되
어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특히 석촉과 한쪽을 뚫은
옥귀고리 1점은 그 재료가 제주도에는 없는 것들이라 궁금증을 증폭시켰는데, 2013년 1구역을
다시 조사하여(2차 발굴조사) 주거지 7동, 수혈유구 227기, 야외 불피던 곳 3기, 구상유구 1
기, 유물 215점을 건졌고, 석촉 등의 석기가 남해안 일대 암석으로 확인되면서 전남, 경남 지
역 남해안과 교류가 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4년 1구역 3차 발굴조사로 주거지 4동, 수혈유구 78기, 소토(燒土)유구 3기, 구상유구 2기
가 추가로 나왔으며, 2구역 조사에서 문화층의 잔존 범위와 지상식 주거지를 확인했다. 특히
남부지방 신석기시대 전기를 대표하는 토기인 영선동식 토기가 나왔으며, 고산리유적 거주기
간이 2,000년 이상으로 늘어났다.
2015년 1구역 4차 발굴조사로 주거지 1동, 수혈유구 19기, 소토유구 1기를 건졌으며, 화덕시
설로 추정되는 돌무지 시설을 중심으로 거의 원형으로 기둥 구멍들이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
석기 제작과 관련된 유물이 나왔다. 그리고 2구역 2차 발굴조사에서도 여러 석기들이 나왔다.
이후로도 계속 조사를 벌여 지금까지 고산리유적이 쏟아낸 유물은 성형 석기 5,000여 점, 박
편 94,000여 점 등 석기 99,000여 점과 토기조각 1,000여 점 등 도합 10만여 점에 이른다.
또한 구석기 후기와 신석기 초기를 연결하는 유적이 없어 무척 애를 태웠는데 그 고통을 바로
고산리가 속시워하게 풀어준 것이다. 기원전 12,000~10,000년경 눌러떼기 수법으로 지어진 석
기와 섬유질 토기가 다량으로 나와 이 땅에서 구석기시대가 신석기시대로 자연스럽게 넘어갔
음이 드러난 것이다.
하여 시베리아와 연해주, 만주 등 우리의 옛 땅과 우리나라 등 동북아시아 신석기 초기 문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며, 우리나라 신석기 초기 문화의 형성 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애지중지되고 있다.

이곳이 신석기를 비롯한 옛 사람들의 터전이 된 것은 바로 옆 수월봉에서 나온 화산재가 이곳
에 덮히면서 기름지고 평평한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땅에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는
데, 여기서 터전을 일구던 신석기 사람들은 구석기 후기 시절에 수렵과 채집 집단의 석기 제
작 전통을 이어나갔고, 초보적인 형태의 토기를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나온
석기는 석재를 기초 원석으로 직접 타격하여 박편(薄片)을 만든 다음, 간접 타격 또는 눌러떼
기로 2차 가공해 제작했다.
토기는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 조각과 덧무늬토기 조각 등이 나왔고, 특히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는 제주도 스타일의 유일한 토기 형식으로 '고산리식 토기'라 불린다.
덧무늬토기는 양양 오산리 신석기시대 유적과 부산 동삼동 패총(貝塚) 등에서 나온 기하학적
태선 덧무늬토기 형식으로 옆면이 굴곡이 있는 선으로 표현되었다.

* 고산리 유적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3628,3650-1 등 (고산리유적안
  내센터 ☎ 064-772-0041)
* 고산리 유적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너른 들판 같은 고산리 유적

▲  고산리 유적에서 바라본 당산봉
내가 용수리에서 저 당산봉을 넘어 여기까지 왔다.


유적 일대는 거의 들판으로 고산리유적안내센터와 안내문이 전부이다. 유적도 그 보존을 위해
모두 흙으로 덮어놓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유적 남부를 가로질러 가면 2차선의 신창~고산 해안도로(노을해안로)가 나온다. 그 도로는 차
귀도포구에서 나온 길로 그 길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가면 수월봉입구가 마중을 한다.


 

♠  제주도의 서쪽 끝을 잡고 있는 수월봉(水月峰)

▲  영산(靈山) 수월봉 표석의 위엄

수월봉입구에서 길은 5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한경면의 중심지인 고산리로 그
곳에 있는 고산6거리(고산리 중심부)까지 1.1km 거리이다. 대중교통으로 수월봉을 찾을 경우
102, 202번 등 제주도 서일주 노선을 타고 고산환승정류장(고산6거리)에서 내려 도보로 접근
하는 것이 편하다.
북쪽 길은 차귀도포구와 고산리 유적으로, 남쪽 길은 고산리 서남부, 서북쪽은 엉알해안, 서
남쪽은 수월봉이다. 당산봉을 내려와서 잠시 버려둔 제주올레길12코스를 여기서 다시 만나서
수월봉으로 같이 가게 되는데, 설마설마했던 수월봉에 일몰 바로 직전에 도착을 한 것이다.


▲  수월봉 북쪽 엉알해안 (수월봉 화산쇄설층 - 천연기념물 513호)

엉알해안 산책로는 차귀도포구 서남쪽 고산출장소에서 수월봉입구까지 이어지는 1.1km 정도의
해안 벼랑 길이다. 여기서 '엉알'이란 바닷가 언덕 밑을 뜻하는 제주도 사투리로 그 이름 그
대로 벼랑 밑을 지나는 것인데, 이 벼랑이 수월봉의 백미(白眉)이다. 수월봉에 왔다면 수월봉
도 좋지만 이 벼랑길도 꼭 거닐어야 나중에 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는다.

엉알해안 벼랑은 제주도 화산들이 한참 몸을 풀던 시절에 당산봉과 수월봉이 수성화산활동(水
性火山活動)으로 빚어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수월봉과 당산봉은 느긋한 봉우리이나 그 밑 벼
랑은 직각에 가까운 가파른 모습이다. 특히 수월봉은 화쇄난류(火碎亂流, pyroclastic surge)
라 불리는 독특한 화산재 운반작용으로 닦여진 화산체로 화쇄난류층 종류에서 세계 최고의 수
준을 자랑한다. 하여 그와 관련된 논문과 보고서들이 수두룩하게 나와있다.

엉알해안은 수월봉 밑도리까지로 그곳까지는 산책로를 닦지 못하고 수월봉 북쪽 밑까지만 길
을 내었다. 이 산책로도 살펴봐야 했으나 일몰 압박과 코스 혼돈의 무지(無知)로 인해 가지
못하고 이렇게 수월봉 북쪽 입구만 기웃거리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  바다를 향해 고개를 내민 수월봉

▲  수월봉으로 인도하는 길 (제주올레길 12코스)

수월봉은 제주도 본토의 서쪽 끝을 잡고 있는 해발 77m의 해안 언덕이다. (제주도의 서쪽 끝
은 차귀도) 북쪽과 서쪽은 절벽이고 동쪽과 남쪽은 부드러운 산세로 이루어져 있는데, 옛 사
람들이 붙여놓은 수월과 녹고 남매의 슬픈 전설이 속세에서 오염된 두 눈에 이슬을 맺히게 한
다. 수월봉이란 이름은 바로 '수월'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전설은 정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
으나 살펴보면 대략 이렇다.

조선 중기에 수월과 녹고 남매가 홀어미를 모시고 수월봉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그 어머니가
갑자기 중병에 걸리자 온갖 약을 구해보았으나 좀처럼 차도가 없어 애 태우던 중, 집 앞을 지
나던 승려가 그 사연을 듣고 100가지 약초를 알려주었다.
하여 수월 남매는 제주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99가지를 구했으나 나머지 하나인 오갈피를 찾
지 못해 마을 앞 수월봉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봉우리
벼랑에서 오갈피가 눈에 아른거리는 것이다. 오갈피에 난데없는 등장에 그들은 너무 기뻤으나
문제는 절벽 중간쯤에 있다는 것. 그래도 그것을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수월은 남동생인 녹고
의 손을 잡고 벼랑으로 내려가 그것을 뜯어 녹고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은 녹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탄성을 지르다가 그만 실수로 수월이의 손을 놓고 말았다. (또는 수월이가 벼랑을 기
어올라 오갈피를 구했다가 떨어져 죽었다고 함)

수월은 그대로 벼랑 밑으로 떨어져 죽었고, 녹고는 넋을 잃고 17일 동안 누이를 부르며 울었
다. 그 눈물이 바위 틈을 거쳐 엉알해안 벼랑으로 떨어지니 세상은 그 물을 '녹고의 눈물'이
라 불렀다. (현실은 해안 절벽의 화산재 지층을 통과한 빗물이 화산재 지층 밑에 진흙으로 된
불투수성 지층인 고산층을 통과하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것임) 그 사연으로 봉우리 이름이 수
월봉이 되었다고 한다.

전설이라고 하지만 현실성이 나름 있는 일이라 아마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이야기를 짓기 좋아하는 지역 선비들이 효도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그럴싸하게 각색하여 수월
봉 전설로 내놓았을 것이다. 허나 병든 어미 때문에 아리따웠을 것으로 여겨지는 딸이 꽃도
피지 못하고 비명횡사를 했고 남동생은 누이를 죽게 했다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 힘든 삶을
살았으니 그들의 팔자도 나처럼 참 박복하다.


▲  수월봉에서 바라본 차귀도(왼쪽)와 와도(오른쪽)
저들은 용수리 절부암부터 이곳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어
내 눈을 심심치 않게 해주었다.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과 비슷했던 와도는
여기서 보니 그저 그런 모습으로 보인다.

▲  수월봉에서 바라본 와도(왼쪽 섬)와 엉알해안, 당산봉

▲  수월봉 지붕에 자리한 수월정(수월봉 전망대)

수월봉 정상에는 8각형 모습의 수월정과 고산기상대가 자리해 있다. 수월정 서쪽은 벼랑으로
안전펜스가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가 제주도 본토에서 중원대륙과 가까운 곳이다. 우리가 장
차 점유하고 누려야될 중원대륙이 혹여 보일까 싶어 이마에 주름선이 간드러질 정도로 두 눈
을 부릅뜨고 서쪽을 노려봤으나 대륙은 보이지 않았다. 가깝다고는 하지만 실제 거리는 엄청
나다.
바닷바람은 일몰 후광에 힘입어 얼마나 매서운지 내가 날라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
이다.

제주올레길12코스 용수리~수월봉 구간을 일몰 바로 전에 도착하니 마치 수월봉을 모두 가지게
된 듯 무척 기뻤다. 허나 엉알해안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실수를 범했으니 하나를 얻고 하나
를 잃은 셈이 된다. 하여 나중에 또 와야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허나 이런 곳은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중에 또 오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다. 


▲  수월봉 지붕 남쪽에 자리한 고산기상대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고산리 서남부와 신도리(대정읍) 지역
수월봉은 당산봉을 제외하고 주변이 온통 바다와 들판이라 낮은 높이에
비해 조망의 품격은 우수하다.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차귀도와 와도, 주름선을 진하게
보이며 뭍과 섬을 세차게 때려대는 남해바다

▲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와도와 엉알해안, 당산봉

수월봉을 둘러보니 어느덧 18시, 그날 목적한 곳을 모두 둘러보아 마음이 참 뿌듯하다. 수월
봉입구로 나오면서 앞서 지나쳤던 엉알해안을 잠시 거닐까도 했으나 땅꺼미가 자욱하여 언제
가 될지 모를 다음으로 내던지고 고산리로 움직였다.
바람의 섬인 제주도에 걸맞게 바다 바람이 얼마나 춥고 징한지 바람을 맞은 스마트폰 밧데리
가 순식간에 70%에서 0%로 떨어져 폰이 급 기절하는 참사까지 발생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
라 다소 당황했으나 이내 진정을 되찾고 길을 재촉했다.

고산리에서 제주도 급행버스 102번을 타고 모슬포(대정)로 나가 유명한 밀면집에서 저녁으로
시원한 밀면 1그릇을 섭취했다. 거기서 폰 충전을 꾀하니 잠시 혼절했던 폰이 다시 깨어난다.
이래서 먼 길을 갈 때는 무조건 폰 충전 케이블을 가지고 간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 제주도 간선 202번을 타고 산방산(山房山) 서북쪽에 자리한 산방산탄산온
천을 찾았다.
요즘 숙박시설의 하나인 게스트하우스(게하)가 인기라 체험이나 해볼 겸 탄산온천에 딸린 게
하에서 하룻밤 머물렀는데, 말로만 듣던 8인용 도미토리 방에서 잠을 잤다. 숙박비도 모텔에
비해 많이 저렴했고 이곳 같은 경우는 온천 이용권 2장을 서비스로 주어 저녁과 아침에 뜨끈
한 온천물에 들어가 몸을 푹 끓이며 편하게 씻을 수 있는 잇점이 있다. 허나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방에서 잔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다음날에는 돈 더 주고 마음 편하게
모텔에서 잤음)
내 듣기에는 같은 방에 자는 사람들끼리 술도 1잔 하고, 게하에서 자체적으로 저녁에 파티도
한다고 하나 파티 같은 경우 별도의 돈을 내야 되고, 몸도 완전 방전된 상태라 땡기지도 않는
다. 다행히 내가 잔 방은 딱 절반만 차서 번잡함은 별로 없었고, 다들 자는 분위기라 22시 넘
어서 잠을 청했다.

이렇게 하여 제주도 첫날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후 내용은 별도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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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7월 25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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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구석기시대 유적의 대표 성지, 연천 전곡리선사유적지 ~~ (전곡선사박물관,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축제)

 


' 천하 구석기 유적의 성지,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 축제)

▲  구석기 스타일의 눈사람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축제장)



선사시대(先史時代, Prehistory)란 문자가 없던 시대로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와 중석기
시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를 일컫는다. (청동기시대도 일부 포함됨)
선사시대는 그리 재미도 없고 관심도 별로 없는지라 이따금씩 관련 유적지나 박물관을 찾
는 것이 고작인데, 겨울의 한복판인 1월에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
축제'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축제의 대한 호기심도 채우고 미답지(未踏地)도 하
나 줄일 겸 친한 후배와 겸사겸사 그곳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복판에 머물던 13시, 집 부근 방학역에서 그를 만나 1호선 전철을 타고 수도
권 전철의 북쪽 끝인 소요산(逍遙山)역으로 이동했다. (소요산행 열차는 거의 30~40분 간
격으로 운행)
소요산역에서 호떡으로 허기를 좀 달래고, 경기도 최북단 고을인 연천(漣川) 땅으로 넘어
가는 의정부시내버스 39번을 타고 차디찬 삭풍(朔風)을 가르며 북쪽으로 더 올라갔다. 수
도권 북방을 가르는 한탄강(漢灘江)을 건너니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누워있는 언덕이 보이
기 시작하고, 그 밑에 둥지를 튼 전곡선사박물관에서 두 발을 내린다. 전곡리 선사유적지
답사는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  밑에서 바라본 전곡선사박물관


 

♠  전곡리 선사유적지 입문

▲  은빛으로 이루어진 전곡선사박물관 지붕 (지붕에 산책로가 있음)

전곡리 선사유적지 남쪽에 자리한 전곡선사박물관은 구석기시대 유적의 영원한 성지(聖地)이
자 상징으로 전곡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구석기시대,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옛 인류의 진
화 과정을 집대성한 선사시대 전문 박물관이다.
박물관을 이루고 있는 건물이 마치 상상 속의 우주 기지를 보는 듯, 심플하게 은색으로 이루
어져 있어 구석기시대를 취급하는 박물관에는 썩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2004년 전곡리 선사유적지 종합정비 기본계획이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자 2005년 도립(道立)박
물관을 짓기로 결정했다. 하여 2006년 온 천하에 박물관 디자인 국제현상공모를 하였는데, 천
하 곳곳에서 앞다투어 응모해 아시아 131건, 아프리카 5건, 유럽 169건, 북미 17건, 남미 20
건, 오세아니아 4건 등 총 346건의 응모작이 접수되었다.
그래서 이들을 심사한 결과 1등은 프랑스 양이(洋夷)가 먹었으며, 2등은 미국 양이, 3등은 미
국 양이와 왜인(倭人)이 수상했다. 이들 수상작 40건을 서울 인사동 학고재에서 그해 4월 17
일부터 4월 23일까지 전시회를 열었고, 박물관 부지의 발굴조사가 끝나자 2009년 3월 23일에
삽을 뜨기 시작해 2011년 4월 25일에 완성을 보았다.

원시 생명체의 아름다운 곡선을 모티브로 했다는 박물관 내부에는 전곡에서 발견된 주먹도끼
를 주인공으로 하여 고고학체험실과 상설전시실, 체험 전시실 등을 두어 구석기시대와 무수한
세월을 겪으며 진화된 원시인의 변화 과정에 대해 소상히 다루고 있으며, 700만 년 전 투마이
부터 1만 년 전 만달인까지 14개체의 원시인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복원하여 전시했다. 그 외
에 도서실, 교육실, 야외체험장 등을 갖추고 있다.

박물관을 구경하고자 입장료를 살펴보니 성인은 무려 4,000원을 받는다. 1,000원 정도로 생각
을 했는데 생각보다 4배 이상이나 얹혀진 가격에 우리는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그 돈을 박
물관에 쥐어주면서까지 구경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리 땡기지도 않아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
로 쿨하게 넘겼다.
(박물관 입장료는 2017년 9월부터 무료로 바뀌었음, 이곳을 포함한 우리나라 박물관 대부분은
월요일과 1월1일, 설날, 추석 당일에 쉬므로 그날은 꼭 피해서 찾기 바람)

* 전곡선사박물관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178-7 (평화로 443번길 2, ☎ 031-
830-5600)
* 전곡선사박물관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전곡 선사박물관 야외에 재현된 구석기 사람들의 매머드 사냥 현장
오른쪽은 지금은 먹을 수도 없는 매머드 고기 육포를 말리는 모습

▲  겨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황야에 재현된 코뿔소로 보이는 동물상

▲  전곡 선사박물관에서 전곡리 선사유적지로 인도하는 계단
계단 앞에는 원숭이와 비슷하게 생긴 옛 인류의 모형이 멀뚱히 서 있다. 오늘날
인간의 과거형이 저런 모습이었다고?? 하지만 진화론도 흔쾌히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그저
궁금~ 궁금할 따름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전곡 선사박물관의 위엄

전곡선사박물관 지붕에는 서쪽 언덕과 동쪽 언덕을 잇는 지붕 산책로가 있다. 지붕에 오르면
한탄강 주변 남쪽 산하가 보이긴 하나 박물관 건물이 키가 좀 작기 때문에 보이는 범위는 그
뿐이다. 박물관 동쪽 언덕에는 산책로와 숲이 있고, 서쪽 언덕 너머에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있다.

선사박물관을 지나 야트막한 북쪽 언덕을 오르면 전곡리 선사유적지 후문이다. 선사유적지는
선사박물관과 별도로 소소하게 입장료를 받고 있는데, (어른 1,000원 / 학생과 어린이 500원)
구석기 축제 기간이라 잠시 무료의 공간으로 해방되어 아주 기분 좋게 선사유적지 내부로 들
어섰다.
(단 구석기축제 행사장은 유료의 공간이며,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은 문을 닫아걸고 쉼)


 

♠  천하 구석기 유적의 소중한 꿀단지,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등장으로
구석기 역사를 새로 쓰게 하였던 전곡리 선사유적지 - 사적 268호

▲  전곡리 선사유적지 내부

한탄강이 'U'자로 크게 굽이쳐 흐르는 전곡읍 서남쪽 강변 언덕에 구석기 유적지의 성지로 추
앙받고 있는 전곡리 선사유적지가 넓게 누워있다.

인류의 본격적인 첫 시대라 할 수 있는 구석기시대는 약 300만년 전부터 1만년 전까지를 일컫
는데 약간의 중석기시대를 거쳐 신석기시대로 발전하게 된다. 구석기 사람들은 강가나 동굴에
주로 살면서 과실을 따먹거나 동물을 사냥해 식량을 해결했으며, 여기까지는 다른 동물과 거
의 비슷해 보인다. 허나 그들은 일반 동물과 다르게 돌을 다듬어서 사냥 도구로 사용했다. 또
한 불을 지피는 방법을 터득하여 추위를 이겨내고 맹수들의 공격을 막았으며, 잡은 동물을 불
로 구워 먹었다. 이것이 동물과 사람의 큰 차이점이다. 

구석기 사람들은 자연석을 다듬거나 바위에서 돌을 떼어내 주먹도끼 등을 만들었는데, 주먹도
끼가 바로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역사/국사 교과서에 아주 지겹도록 등장한다. 이
도끼는 구석기 초기에 등장하며, 프랑스 생따슐(St. Acheul)에서 발견되어 지역 이름을 따서
아슐리안 주먹도끼라 불린다.
그 주먹도끼는 전곡리 유적이 발견되기 이전까지 주로 유럽과 아프리카, 서남아 지역에서 많
이들 나왔으며, 1940년대 초, 미국 하버드대학의 모비우스(H.L. Movius) 교수가 그동안의 고
고학 자료를 근거로 내세우며 이상한 학설을 내뱉었다. 인도를 중심으로 그 서쪽 유럽과 아프
리카, 서남아를 아슐리안 주먹도끼 문화권으로, 인도 동쪽 아시아를 찍개 문화권으로 나눈 것
이다. 찍개 역시 돌로 다듬은 도구이나 주먹도끼보다는 다소 떨어진다.
그래서 그걸 두고 구석기시대부터 이미 서양이 동양보다 우월했고 아시아는 주먹도끼가 없으
므로 그때부터 정체되었다고 주장했다. 털만 많은 양놈들의 그런 삐뚤어진 생각을 보기 좋게
참교육시킨 현장이 바로 이곳 전곡리이다.
전곡리의 등장으로 그동안 서양 오랑캐들의 의해 그릇되게 작성된 구석기 역사는 새로 쓰여지
게 되었으며, 천하 굴지의 구석기 유적으로 꽤 무거운 존재가 되었다. 이곳을 통해 동아시아
구석기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게 되었고, 전곡리를 시작으로 아시아 곳곳에서 주먹도끼가 쏟아
져 나왔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발견을 대서특필한 1978년 봄 신문기사들

한탄강변에 자리한 전곡리 선사유적 일대는 숲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속에는 억겁의
세월이 숙성된 보물이 잠들어 있었고, 이미 그 일대에 석기들이 적지 않게 노출되어 속세(俗
世)의 관심을 애타게 바랬건만 사람들은 단순 돌로만 생각했지 아무도 그들을 크게 여기지 않
았다. 허나 주머니 속의 송곳은 언젠가는 크게 드러난다는 말이 있듯이 결국 일이 터지고 말
았다.

때는 1978년 3월 '그렉 보왠(Mr. Gred Bowen)'이란 주한 미군이 한탄강에 놀러왔다. 그는 인
디애나대학교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자로 돈벌이를 위해 주한 미군에 들어왔다.
한탄강을 거닐던 그는 강 주변에 석기로 보이는 돌맹이가 많은 것에 크게 놀랬다. 자신의 짧
은 소견으로 볼 때 분명 선사시대 석기로 여겨져 석기 사진과 발견 경위를 작성하여 프랑스의
저명한 구석기 학자 보르드(Bordes) 교수에게 편지를 보냈다.
보르드는 그 사진을 보고 크게 놀랐다. 바로 아슐리안 주먹도끼였던 것이다. 허나 그 역시 전
형적인 양이라 그걸 쉽사리 믿지 않으며 '이 유물이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면 아
슐리안 문화의 석기가 맞다. 내가 직접 가보고 싶을 정도로 중요한 발견이지만 그럴 수가 없
으니 우선 서울대학교 김원용 교수를 찾아가 자문을 얻으라'
답을 하였다.
그러자 보웬은 그 석기를 들고 서울대를 찾아가 김원용 교수를 만났는데 그 석기를 살펴본 김
원용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여 발굴단을 꾸려 전곡으로 달려갔고, 그해 5월 14일 전곡리
일대를 지표 조사하였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김원용 교수와 영남대 정영화 교수가 진단학보
에 '전곡리 아슐리안 양면핵석기 문화예보'를 발표하여 전곡리 유적은 서양 고고학자들의 염
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로 크게 이름을 드러낸다.


▲  오래 잠들어있던 전곡리 구석기 유적을 깨우다.
1978년 5월 전곡리 유적 지표 조사 장면


1979년 3월 26일, 김원용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박물관 발굴단과 경희대와 영남대, 건국대가
연합해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를 벌였다. 이후 전곡리 유적을 중심으로 전곡리 일대에서 30여
년 동안 17회의 발굴조사를 벌였으며, 약 8,500점의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은
인근 강에서 가져온 강자갈로 제작된 것으로 다소 거칠게 다듬은 아슐리안 주먹도끼와 잘 다
듬어진 찍개, 가로날도끼, 긁개, 소형 박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곡리의 명성을 듣고 다른 나라에서도 앞다투어 교수와 고고학자들이 찾아와 이곳을 조사했
으며,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약 30만 년 전으로 판단되고 있다. 참고로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은 평양(平壤) 부근에 있는 상원 검은모루동굴 유적으로 약 100만년
을 헤아린다.

전곡리 선사유적은 크게 5지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1지구는 처음으로 석기가 발견된 곳이고,
2지구는 1지구 남쪽 건너편으로 주먹도끼가 많이 나왔으며, 3지구는 발굴유구와 습지가 있고,
4지구는 제1차 발굴(1979년) 때 발견된 강 건너 고능리 지역이고, 5지구는 유적지의 동편 언
덕 일대이다.


▲  전곡에서 발견된 아슐리안 주먹도끼의 위엄
그의 등장으로 한참이나 잘못된 구석기 역사는 새로 쓰여지게 되었고, 뼛속까지
서양 우월주의로 물들었던 양이 고고학자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아시아에는 찍개만 있던 것이 아니라 이런 섬세한 주먹도끼도
일찌감치 있었던 것이다.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 돌을 전체적으로 손질하여 끝부분이 뾰족
하고 몸체는 둥근 모습이며, 석기의 양측면에 날카로운 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이용해 나
무를 벗기고나 동물 사냥, 가죽 벗기기 등에 사용했다. 그래서 만능석기라 불리기도 한다.

전곡리에서 나온 주먹도끼는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주먹도끼와 달리 몸체가 두텁고, 자
연면이 많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채석을 통해 규소 성분이 풍부한 양질의 석재를 이용
한 유럽, 아프리카와 달리 전곡리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석영이나 규암 등으로 된 강자갈을 주
로 사용하여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측면날보다는 뾰족한
끝부분의 손질에 더 집중한 경향이 있어 자르는 도구로 주로 사용된 서양과 달리 대상을 찍거
나 땅을 파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  토층전시관에 전시된 전곡리 유적 발굴 이야기와 이곳을 발굴한
구석기시대 전문가 김원용의 빛바랜 수첩
김원용 교수는 1993년 세상을 뜨면서 전곡리 유적에 유해를 뿌려달라는 유언을 했다.
그만큼 이곳은 그에게 의미가 각별한 곳이자 그의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켜준
소중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전곡리 유적의 지층 구조는 2001년에 조사된 E55S20 발굴피트를 통해 알 수 있다. 이곳은 현
무암을 기반암으로 하여 그 위에 사질층, 실트층, 점토층이 쌓여 있는데, 퇴적층의 최상부에
서부터 일정한 간격을 두고 토양쇄기가 4~5차례 반복되며, 1번 째 토양쇄기면과 2번 째 토양
쇄기면 상부에서 왜열도에서 날라온 2개의 화산재와 AT(약 25,000년 전), K-Tz(약 95,000년
전)가 발견되었다. 이들 화산재는 분출된 연대가 대략 밝혀졌기 때문에 전곡리 유적의 장대
한 나이를 추정할 수 있는 소중한 단서가 되었다.
퇴적층 하부의 사질층과 실트층은 하천 퇴적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상부의 붉은 색조의 점토
층에 대해서는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날라온 풍성퇴적물이라는 설과 강의 범람으로 쌓인 퇴적
물이라는 설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구석기 유물 상당수는 붉은 색조의 점토층에서 많이 발견
된다.


▲  전곡리 선사유적 외곽 산책로

홍적세 중기 무렵, 강원도 평강 오리산에서 분출된 용암이 한탄강을 따라 흐르며 전곡을 비롯
한 강 주변을 용암대지(鎔巖臺地)로 칠해버렸다. 이후 수많은 물줄기가 용암대지를 적셔주었
고, 곳곳에 작은 습지와 호수가 만들어졌다. 또한 강에 떠내려온 퇴적물은 용암대지 위에 차
곡차곡 쌓이면서 숲이 우거지고 강에는 물고기들이 둥지를 틀었으며 온갖 동물들이 식량과 식
수 해결을 위해 모여들었다. 구석기 사람들 역시 이곳에 정착을 하였다. (전곡에 살았던 구석
기 사람들을 ''전곡리안'이라 부름) 그때가 약 30만 년 전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언제까지 살다가 사라졌는지는 귀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그들이 떠난 이
후, 그들이 남긴 석기와 흔적은 자연의 거친 흐름 속에 죄다 묻히게 되었다. 그 흔적이 배인
퇴적층이 용암대지 위에 잘 보존되어 수천 년을 비밀리에 숨바꼭질을 하다가 1978년 이후 발
견된 것이다.

발굴조사가 마무리 되자 유물은 전곡선사박물관과 토층전시관, 여러 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
졌고, 유적은 영구 보존을 위해 흙으로 빼곡히 덮고 그 위에 숲과 잔디를 깔았다. 그래서 겉
으로 다가오는 전곡리 선사유적지의 모습은 유적지가 아닌 그냥 공원 같은 분위기이다.

전곡리 유적은 숲과 잔디로 뒤덮힌 지역과 토층전시관, 선사체험마을 등이 있으며,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또한 매년 1월과 5월에는 '전곡리안의 숨소리'라는 태마로 구석기 축제를
열어 크게 호응을 얻고 있다. 5월에는 그냥 '연천 구석기축제'란 이름으로 열고 있으나 겨울
축제는 '연천 구석기 겨울여행축제'란 이름으로 열리고 있는데, 선사시대 체험 프로그램, 원
시 퍼포먼스, 공연 행사, 전문가의 강연과 선사시대 전시 행사 등이 열린다.
구석기시대를 완전히 익히고 싶다면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꼭 찾기 바란다. 그러면 누구든 구
석기 전문가가 될 수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515 (양연로 1510, ☎ 031-832-2570)
* 전곡리 선사유적지 홈페이지는 오른쪽 링크를 클릭하기 바라며 ☞ 전곡리 선사유적지
  겨울 축제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2019년 겨울여행축제는 1월 12일부터 2월 6일까지 열린다.


▲  인공눈이 깔린 전곡리 구석기축제장


 

♠   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 축제장 둘러보기

▲  전곡 구석기축제를 맞이하여 멀리 서유럽에서 온 신석기 사람의 미라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겨울 제국의 매서운 폭정에도 불구하고 구석기 축제로 뜨거웠다. 평일임
에도 어린이를 데리고 온 가족 나들이객들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축제
장 곳곳을 뛰어놀거나 썰매타기, 바베큐 체험 등. 온갖 체험에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고 있
어 겨울 제국을 무색하게 만든다.

축제장 일부에는 인공눈을 깔아 조촐하게 하얀 설원을 자아냈는데 그곳에 썰매장과 얼음 조각
등을 두었으며, 그 서쪽에 여러 부스와 천막을 설치하여 먹거리 장터와 구석기 체험 현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듯이 점심도 제대로 못먹은 시장기를 달래고자 간단
하게 어묵으로 배를 때웠다. 가격은 시중보다 2배 정도 비쌌으나, 꿩 대신 닭을 고를 권한이
여기서는 없는지라 그냥 사먹었다.

그렇게 요기를 마치고 옆 부스로 가니 멀리 서유럽에서 왔다는 뼈다귀 미라가 전시되어 있었
다. 이 미라는 1991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경계선인 외츠탈 알프스에서 발견된 것으로
온몸이 얼음 속에 묻혀있어서 미라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발견된 곳의 이름을 따
서 이미 영혼이 빠져버린 그에게 '외찌'라는 이름을 붙여주면서 아이스맨이란 별명도 지어주
었다.
그는 약 5,300년 전 사람으로 그때면 신석기시대 한복판이다. 그가 어찌하여 알프스 산맥에서
그 지경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전곡리 구석기 축제를 맞이하여 수만 리나 떨어진 이곳까지
소환되어 휼륭한 눈요깃감이 되어준다. 설마 그가 나의 전생은 아니겠지?


▲  구석기 스타일로 지어진 눈사람
인공눈을 빚어서 두텁게 만든 눈사람으로 장소가 장소인 만큼 구석기 스타일로
만들었다. 귀여움이 묻어난 그는 눈, 코, 입, 머리까지 갖추고 있고
오른손에는 돌도끼까지 쥐어들고 있다.

▲  눈 속에 묻힌 돌 운반 체험장
무거운 돌을 끌어야 되는 일종의 3D 체험장이라 체험 수요가 없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어린이들의 인기를 먹고 자라는 눈썰매장 (유료임)
때가 겨울인지라 눈썰매장까지 갖추었다. 딱 30년만 어렸다면 한번 타보는 것인데
다 큰 장정이 눈썰매를 타는 것도 좀 그래서 그냥 구경만 했다.

▲  빙어잡이 삼매경에 빠진 어린이들 (빙어잡이 현장)
조그만 낚시 도구로 빙어를 탄압한다. 여기서 잡은 빙어는 비닐봉지에
담아서 가져가면 된다. 그 이후는 알아서...

▲  빙어잡이 현장 - 빙어의 마지막 몸부림 (죽어있는 빙어도 적지 않음)

▲  돼지고기 바비큐 체험 현장

제아무리 눈썰매와 빙어잡이가 인기가 대단하다 한들 돼지고기 바비큐 체험 앞에서는 어림도
없다.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구석기 축제의 백미(白眉)나 다름없는 바비큐 체험은 길다란 나무 꼬챙이에 돼지고기를 직접
구워 먹는 것으로 흙으로 다진 네모난 화로에 숯을 넣어 고기를 구우면 된다.
편하게 고기를 굽게끔 나무 의자도 설치되어 있으나 고기가 익는데 시간이 다소 걸린다. 또한
나무 꼬챙이를 들고 있어야 되기 때문에 팔도 아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적당하게 걸쳐놓고
딴짓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잘못하면 고기가 화로로 자빠지거나 검게 타버리는 경우도 발생
한다.
돼지고기 바비큐는 1꼬치에 3,000원(예전에는 2,000원)으로 잘만 구우면 유명 고깃집 못지 않
은 맛있는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으나 잘못하면 거의 타버리거나 흙, 숯에 묻혀 난감한 경우
도 생길 수 있다. 여기서는 그저 인내력과 근성, 요령이 있는 사람만이 맛있는 고기를 쟁취한
다. 나는 인내력을 발하며 고기 굽기에 매진한 결과 그런데로 잘 익어서 맛있게 고기 바비큐
를 섭취했다. 허나 후배는 잘못 구워서 반 정도를 버리고 말았지. 구석기 사람들은 이렇게 화
로 비슷한 것에 불을 지피고 사냥한 동물을 구워 먹었다고 한다. 바로 그 체험을 하는 것이다.
단 다른 것이 있다면 숯으로 불을 지핀다는 것과 고기를 돈주고 사먹는다는 것 정도. 구석기
축제에 왔다면 뱃속도 채울 겸 바비큐 체험을 꼭 해보기 바란다.


▲  노릇노릇 익어가는 돼지고기 바비큐

▲  구석기 생활상 복원존(Zone) ▼

축제장 동쪽에는 구석기 사람들의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복원존이 있다. 사냥 모습을 위시하
여 잡은 동물을 손질하는 모습과 구석기 가족들의 단란한 모습, 석기 제작 모습 등이 있으며,
지금은 사라진 그 시절 동물의 모형 등도 담겨져 있다.

▲  말을 사냥하는 모습

▲  구석기 가족의 생활 모습


▲  지금은 사라진 넙적큰뿔사슴
지구 역사상 가장 큰 뿔을 가진 사슴과로 홍적세 중기~후기를 누볐던 동물이다.
구석기 사람들의 좋은 먹잇감으로 평양 상원 검은모루동굴에서 그의
뼈가 출토되기도 했다.

▲  역시나 화석만 남은 검치호랑이
오늘날 호랑이의 조상격으로 길이 18~20cm에 달하는 큰 송곳니를 가진 홍적세
시절 맹수이다. 아주 매섭게 재현되어 비록 모형이지만 오금을 지리게
하는데 동아시아에 살던 검치호랑이는 서양보다 검치의 크기가
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구석기 사람과의 기념촬영 코너
의자는 구석기 스타일에 걸맞게 동물 뼈와 가죽으로 이루어져 있다.
(뼈와 가죽은 가짜임)

▲  매머드 뼈로 지어진 뼈다귀 집

구석기시대 후반(1~2만년 전)에 구석기 사람들이 메머드를 때려잡아 그 뼈로 만든 집으로 이
때부터 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크라이나에서 발견된 매머드뼈 집터를 복원한 것으로 그
안에 불을 피운 흔적이 발견되었다.


▲  사냥감을 들고 귀가하는 구석기 사람들
사슴 같은 것을 잡은 모양이다. 저 사람들은 그날 고기 회식을 했겠지.

▲  겨울 제국에게 영혼까지 싹 털린 연천자생식물원 (야생화단지)
전곡리 선사유적 동편에 야생화 등을 심어놓은 자생식물원을 닦아놓았다. 허나
그러면 뭐하랴? 겨울 제국에게 몽땅 털려 황량한 벌판이 되버린 것을..
이곳의 진면목을 보려면 봄과 여름, 가을에 오기 바란다.

▲  축제장 북쪽에 자리를 닦은 얼음숲 연천 (얼음조각품)
한겨울에 걸맞게 축제장 한쪽에 얼음 조각품을 배치하여 겨울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드높이고 있다. 이들을 한 덩어리로 '얼음숲 연천'이라 이름지었는데,
전곡리 선사유적지의 캐릭터인 고롱이와 미롱이, 매머드를 비롯하여
재인폭포, 움집, 연천의 특산물을 형상화 하였다.

▲  고롱이(왼쪽)와 다롱이(오른쪽) 얼음 조각품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린이 모습에 구석기 스타일을 입혀 이곳의
귀여운 캐릭터로 삼았다.

▲  얼음으로 재현된 매머드

▲  연천의 명물, 재인폭포(才人瀑布)를 겨울 버전으로 형상화하였다.

▲  얼음 미끄럼
바닥이 차갑기 때문에 포대자루 같은 것을 깔고 타면 된다. 타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 그놈의 나이 때문에 그냥 구경만 했다. 얼음 미끄럼을 신나게 타고
내려오는 어린이들의 표정에 화창함이 가득하다.

▲  알록달록 소원지를 달아놓은 현장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소망을 하나씩 머금은 소원지가 차디찬 삭풍에
몸을 떨고 있다. 적당하게 소원지가 들어차면 불에 태워버린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마무리

▲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정면에 내세운 토층전시관

토층전시관은 발굴조사를 벌였던 땅 속 지층(토층) 구조와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 그리고 다
른 나라에서 업어온 구석기 유물을 다루고 있다. 현관 윗쪽에는 전곡리 선사유적의 상징이자
인도 동쪽 아시아에서 최초로 발견된 아슐리안 주먹도끼 황금색 모형을 달아놓았다.


▲  토층전시관 내부에 있는 지층(토층) 구조
저 밑에서 장대한 세월의 의해 봉인되어 있던 구석기 유물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  전곡리 유적에서 나온 구석기 유물들
그 시대 원시인들의 유물은 거의 대부분 돌이다. (동물뼈 일부) 얼핏 보면
그냥 일반 돌맹이처럼 보여 보통 사람들은 구분하기가 어렵다.

◀  아프리카 케냐에서 가져온 구석기 유물


▲  토층전시관 옆에 자리를 닦은 선사체험마을 (연천마당)
이곳은 선사시대 및 전통 체험 공간으로 쓰인다. 마당 한쪽에 옹기종기 모인
초가집은 전통 체험 공간으로 그 남쪽에 선사 체험 공간이 있다. 이곳은
주로 어린이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선사시대 기술, 생활방식 등을 체험할 수 있다.

▲  겨울에 잠겨 한적한 연천마당 (선사체험마을 잔디밭)

▲  선사체험공간 한쪽에 자리한 귀여운 고롱이와 다롱이

▲  토층전시관 옆에 닦여진 움집과 원시인 모형 기념 촬영장
가운데 원시인 모형에 얼굴을 대고 기념촬영을 하면 된다. 그때만큼은
정말 구석기나 신석시기대로 순간 이동을 당한 기분일 것이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산책로 (정문으로 나가는 길)

▲  유럽 양이 스타일의 성(城) 눈조각품

전곡리 유적 정문 남쪽에는 인공눈을 빚어 만든 눈조각품이 막바지 눈 호강을 시켜준다. 옛날
유럽 성을 비롯하여 피라미드와 동굴 등이 재현되어 있는데 눈조각품 주변에는 인공눈이 짙게
깔려 있어 설원을 거니는 기분을 들게 한다.


▲  피라미드, 스핑크스 눈조각품(오른쪽)과
호주 오페라하우스 눈조각품 (그 뒷쪽)

▲  거대한 하얀 언덕 눈조각품 - 저 안에 얼음 동굴이 있다.

▲  하얀 언덕에 새겨진 재미난 형상들
창을 든 원시인과 매머드, 현대인으로 보이는 형상, 그 형상이
내뱉은 수상한 연기(?)가 새겨져 있다.

▲  하얀 언덕 - 왼쪽과 오른쪽에 언덕 동굴로 인도하는 문이 있다.
동굴 내부는 무척 시원하여 여름에 가면 아주 극락이 따로 없겠으나
여름에는 날씨 관계로 눈조각품을 운영하지 않는다.

▲  역 이름이 구석기역(?)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유적지 외곽을 도는 관광 레일카를 운행하고 있다.
그 레일카는 구석기역에서 타면 되며, 속도가 너무 굼뱅이라
1바퀴 도는데 20분 정도 걸린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정문 주변에서 다시 만나는 고롱이와 미롱이
칼라버전 모형들

▲  전곡리 선사유적지 정문
동굴처럼 생긴 정문 위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구석기 원시인의 얼굴상을
달아놓았다. 역시나 전곡리 스타일에 걸맞는 정문이다.


정문을 나섬으로써 2시간에 걸친 전곡리 선사유적지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시간도 벌써 16
시가 넘은 상태, 햇님도 고단한지 벌써부터 칼퇴근을 준비하면서 슬슬 땅꺼미가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껍데기만 남은 딱딱한 선사유적지를 탈피하여 선사시대 관련 다양한 체
험을 누릴 수 있는 현장으로 특히 돼지고기 바비큐 체험이 인상적이었다. 집안에 아이나 조카
들이 있다면 구석기 축제 기간에 맞춰 가족 나들이로 한번 가보기를 바란다.
이렇게 하여 구석기시대로의 짧은 나들이, 전곡리 선사유적지 겨울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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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도 나오는 서울 선사유적의 성지, 가족 나들이 추천 명소 ~~ 암사동 선사유적지 (움집, 선사전시관)

 

 

' 서울에서 즐기는 선사시대로의 여행, 암사동 선사유적지 '

▲  암사동 유적 움집들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인 5월이 저물고 여름의 초기 부분이라 할 수 있는 6월이 밝았다.
이제 6월 한복판임에도 여름 제국은 벌써부터 철통같은 무더위를 드러내며 천하의 숨통을
조인다.
아무리 여름이 시작부터 꽤 당차게 나와도 즐길 것은 즐기고 살아야 된다. 특히 여행이나
나들이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서울 장안을 대상으로 간단하게 어디로 갈까? 눈동자를 굴
리다가 서울 지역 선사 유적의 오랜 성지(聖地)이자 신석기 유적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
는 암사동(岩寺洞) 선사유적지를 찾았다.
이곳은 유년 시절인 1990년대 초반에 2번 정도 인연을 지은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단
한번도 발걸음을 하지 못했다. 아니 안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선사시대가 썩 재
미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구석기(舊石器)와 중석기(中石器), 신석기, 청동기 관련 유
적은 덜 가는 편이다. 가봐야 하품만 나오니 말이다. 그러다가 그날 따라 무슨 바람이 났
는지 그곳 생각이 간절하여 20여 년 만에 다시 인연을 지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14시에 도봉동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타고 천호역(5,8호선)에서
서울시내버스 3411번으로 환승, 선사4거리 남쪽인 삼성광나루아파트(암사동 유적) 정류장
에서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4거리를 건너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북쪽(서원마을)으로 8분 정도 가면 암사
동 유적 정문이 나온다. 정문 동북쪽에는 썩 달갑지 않은 매표소가 있어 사람들의 호주머
니를 간절하게 바라보는데 입장료가 무려 500원이나 한다. (옛날에는 무료였는데 ㅠㅠ)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잡을 권리는 애당초 없는지라 입장권을 구입하고 단촐하게 생겨먹
은 정문을 들어서니 여름 녹음에 잠긴 암사동 선사유적지가 펼쳐진다. 정문은 2개의 나무
기둥을 양쪽에 두고 그 위에 길쭉한 목재를 얹혀 마치 선사시대(先史時代) 마을의 정문처
럼 꾸몄는데 이곳과 하루가 멀다하고 변해가는 바깥 세상과의 경계를 가르는 담장은 모두
나무로 목책 비슷하게 둘렀다. 


▲  수천 년 전, 신석기시대로 인도하는 타임머신, 암사동 유적 정문

▲  신석기시대의 상징,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확대되어 재현된 빗살무늬토기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있음)


 

♠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유적의 성지, 움집으로 유명한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지(암사동 유적) -
사적 267호

▲  나무가 무성한 암사동 선사유적지 (정문 주변)

서울 동쪽 암사동 한강변에 자리한 암사동 선사유적지(암사동 선사주거지, 암사동 유적)는 신
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초/중/고등학교 사회/국사책과 국사 관련 교양서적, 공무원 수
험서에 눈과 귀가 질릴 정도로 등장하는 유명 명소이다. 신석기 이전인 구석기시대 하면 공주
석장리와 연천 전곡리, 상원 검은모루동굴, 웅기 굴포리가 대표적이고 신석기시대 하면 암사동
이 딱 떠올릴 정도로 신석기 유적의 성지 같은 곳이다.

이곳은 억겁의 세월 동안 땅 속에 강제로 묻혀있다가 1925년 그 악명 높은 을축년(乙丑年) 대
홍수로 한강 주변이 죄다 떠내려갔을 때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며 수천 년 만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고대 유적이 쏟아져 나오자 흥분한 왜정(倭政)은 학자 요꼬야마(橫山將三朗)와 후지타
등을 보내 땅을 뒤집게 했는데, 많은 양의 토기와 석기 등이 발견되어 천하를 놀라게 했으며,
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주거유적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발굴 범위가 좁았고 그 이후 별다른 조
사를 벌이지 않고 방치하면서 다시 경작지가 되고 만다.

논밭이 되버린 암사동 유적을 다시 깨운 것은 1957년으로 경희대가 조사팀을 보내 조촐히 발굴
을 벌였고, 1967년 서울대와 경희대 등이 대학연합발굴단을 조직하여 합동발굴을 하였다. 그러
다가 1968년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정식으로 발굴을 하면서 주변을 모두 뒤집기 시작했고, 국립
중앙박물관까지 가세하여 1971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동안 발굴조사를 토대로 하여 1979년 7월 국가 지정 사적의 지위를 받게 되엇으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1981년부터 1988년까지 7년 동안 발굴조사를 벌이면서 유적을 정화하고 이곳
의 명물인 움집을 복원하여 1988년 8월 30일 속세에 개방했다.

1997년 1월 20일에는 '97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성화를 이곳에서 채화(採火)했고, 1998년에는
제2전시관을 만들고자 주변을 발굴하여 많은 유물을 건져냈다. 2000년 1월 제2전시관이 완공되
고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유적지 일대를 정비하여 나무를 심었으며, 2010년 9월 선사체험마을
을 조성하여 살아있는 선사시대 체험의 장으로 변화를 꾀했다.
(2011년 7월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암사동 유적'으로 변경됨)

▲  복원된 움집

▲  재현된 신석기 사람들의 생활모습

암사동 유적은 우리나라에 흔하게 널린 신석기유적 가운데 가장 큰 마을 단위 유적으로 그 이
름과 가치를 크게 드높였다. 방사성탄소(放射性炭素) 측정 결과 약 6,400년부터 3,500년 전에
걸쳐 조성되었음이 드러나 멀리 잡아도 약 7,000년 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음을 귀
띔해준다.
이곳 땅 속에서는 3개의 문화층(文化層)이 발견되었는데, 신석기시대의 상징물인 빗살무늬토기
가 발견된 신석기 문화층이 발굴 지역 전역에서 확인되었으며, 민무늬토기와 청동촉 등이 나온
청동기 문화층, 그리고 백제(百濟) 초기 이음식 독널무덤과 승석문(繩席紋)목단지, 쇠토끼 등
이 나온 백제 문화층도 조금이나마 나와 신석기시대부터 백제 중기(한성백제시대)까지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았음을 알려준다.

이곳은 크게 나무가 울창한 남쪽 구역과 움집과 제1,2전시관이 있는 중앙 구역, 그리고 체험마
을과 체험교실이 있는 북쪽 구역 등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남쪽 구역은 숲이 삼삼하여
돗자리를 피고 간식을 먹으며 주말 오후를 보내는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 많으며, 전시관과 움
집이 있는 중앙 구역은 이곳의 핵심이다. 북쪽 구역은 짜투리 땅을 닦아서 만든 선사체험마을
로 딱딱하고 재미가 떨어지는 선사시대 나들이에 약간의 감칠맛을 더한다.

▲  선사박물관 전시관

▲  선사체험마을 움집군락

암사동 유적의 명칭은 '암사동 선사유적지','암사동 선사주거지'로 많이 불리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암사동 유적'이다. 허나 명칭이 무슨 대수랴,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선사유적지로 비록
복원하고 재현한 것이긴 하지만 문명(文明)시대 이전의 향기가 담겨져 있으며, 서울에서 유일
하게 목숨을 건진 선사유적지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암사동 외에도 면목동(面牧洞) 구석기유적, 도곡동(道谷洞) 청동기 유적, 고
덕동(高德洞) 고인돌, 원지동(院趾洞) 고인돌, 우면동(牛眠洞) 고인돌 등의 선사유적이 있으나
제대로 우리 곁에 남은 것은 암사동이 유일하다. (원지동과 우면동, 고덕동 고인돌은 살아있긴
하나 상태가 고르지 못함)

그럼 지금부터 암사동에 서린 선사시대로의 여행을 흔쾌히 떠나 보자. 참고로 선사시대는 글자
가 생기기 이전 시대를 일컫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대가 선사시대인데...!!)

▲  덧무늬토기들

▲  암사동 선사유적지 산책로

※ 암사동 선사유적지 찾아가기 (2016년 6월 기준)
* 지하철 8호선 암사역(1번 출구)에서 강동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암사동 유적 하차
* 지하철 8호선 암사역(2번 출구)이나 5,8호선 천호역(3번 출구)에서 340, 3318, 3411번 시내버
  스를 타고 삼성광나루아파트(암사동 유적) 하차, 도보 10분

★ 암사동 선사유적지 관람정보 (2016년 6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500원 (30인 이상 단체 400원) / 어린이와 중고생 300원 (단체 200원)
* 7세 이하와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장애인 등은 무료
* 관람시간 : 9:30~18:00 (입장은 17:30분까지 / 1월 1일과 매주 월요일은 휴관)
* 동네 주민들을 위한 아침 운동시간 무료개방시간 : 5:30~9시까지 (10~3월은 6시부터임)
* 주차비 : 경차 1,000원 / 소형차 2,000원 / 대형차 4,000원 (이용시간 9:30~18시)
* 매년 10월 상반기에 금,토,일 3일 일정으로 선사문화축제가 열린다. 원시생활 체험과 소망등
  달기와 강동 락페스티벌과 길놀이 등 다채로운 공연 강동구 지역의 오랜 민속놀이인 '바위절
  마을 호상놀이(서울 지방무형문화재 10호), 원시퍼포먼스, 그림 그리기 대회, 직거래 장터
  등이 열린다.
* 초등학생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여러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움집만들기, 토기만들기, 선
  사인의 겨울나기, 수렵체험, 원시인 여름 즐기기, 채집체험, 어로체험, 어린이발굴체험 등이
  있으며, 운영기간은 프로그램마다 모두 다르다. (자세한 정보는 암사동 유적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139-2 (올림픽로 875) <☎ 02-3425-6520)
* 암사동 유적 홈페이지는 아래 빗살무늬토기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암사동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의 위엄


 

♠  암사동 유적의 꽃, 움집 주변

▲  정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3거리와 함께 짙게 우거진 수목이 더위를 잠시
잊게 해준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숲 산책로이고 오른쪽으로 가야
움집과 전시관, 선사체험마을로 이어진다.

▲  신석기시대에 신석기 사람들과 경쟁하며 살았던 동물들의 모형

노루와 맷돼지, 말 등 지금 동물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허나 몇몇 사람들은 왜 공룡이 없지?
의아해한다. 선사시대하면 흔히들 잘못 생각하는 공룡과 신석기 원시인의 공존, 허나 공룡은
여기에 없다. 왜냐? 그들은 공존하지 않아 서로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다. 선사인들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공룡은 빙하기로 죄다 씨가 말랐다.


▲  움집터 입구

▲  움집터 입구 옆에 자리한 커다란 소와
선사시대 어린이의 귀여운 모형

▲  태풍으로 날라간 남쪽 움집


▲  암사동 유적의 꽃, 움집들

움집터 일대에서는 30기의 집터와 돌무지시설 등이 발견되었다. 집터는 동그란 모양과 네 모서
리를 약간 줄인 구조<어려운 말로 말각방형(抹角方形)>로 모래땅에서 50~100cm 정도 움을 파고
그 위에 짚 등을 엮어서 거의 길쭉한 세모 모양으로 만든 형태이다. 집터 중앙에는 강돌을 둘
러 만든 화덕시설이 있고, 집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주로 남쪽에 두었다.
기둥 구멍은 한 집에서 여러 개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주 기둥과 보조기둥 혹은 이전의 기
둥을 갈 때 새로 난 자리가 섞여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집터 밖에는 야외노지(野外爐址)와
음식을 저장하던 저장구덩이, 돌무지시설 등이 있으며, 이들은 불의 기운을 받은 흔적이 역력
하다. 그리고 돌무지 밑에는 불에 탄 흙과 부식토와 함께 목탄이 많이 발견되었으며, 돌무지
사이에는 많은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어 토기를 굽던 가마터 또는 마을 공동의 화덕시설로 보
인다.

토기는 바닥이 뽀족한 것과 바탕흙에 활석이나 석면을 섞은 것, 그리고 무늬가 있는 것들이 주
류를 이루며 나왔다. 그리고 돌도끼와 그물추 등의 석기류도 같이 나왔는데, 뗀석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고 간석기로는 돌끌이나 창, 화살촉 등이 있으며, 갈돌과 갈판, 괭이, 보습, 돌낫 등
도 있다. 그외에 새뼈와 도토리 등이 조금 출토되었다.

집터에는 고증하여 복원했다는 움집 10기가 있는데, 이들은 기존 집터에서 2m 정도 흙을 엎고
그 위에 만든 것이다. 동쪽에 있는 체험용 움집을 빼고는 내부 출입을 막고 있다.


▲  움집들도 비가 마구 새는지 땜질한 흔적들이 역력하다.

▲  더운 여름에 하루나 이틀 정도 원시인이 되어 머물고 싶은 움집
원시인처럼 옷은 중요한 곳만 걸치고 움집에서 며칠 지내보면 어떨까? 물론 취사는
현대식 도구로 해우소나 간단한 세면은 정문이나 전시관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고 말이다. 아무리 선사체험이라고 해도 현대의 이기에 단단히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있어 완벽한 원시인 생활은 불가능하다.

▲  수수한 모습의 움집

한반도와 요동에 살던 구석기 사람들은 빙하기로 거의 다 사라지고 빙하기를 이겨낸 일부 사람
들이 새롭게 신석기시대를 열었다. 그들은 강가와 언덕에 움집을 짓고 마을 단위로 살았으며,
현대 사회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빈부격차와 신분제도가 없었다고 한다.
마을마다 지역마다 집을 짓는 기술과 집의 모습이 조금 차이가 있었을 뿐, 대부분 저런 집을
짓고 수수하게 살던 평등한 사회였다. (물론 가족간의 서열은 있었다)

그랬던 사회가 이른바 청동시기대에 접어들면서 돌로 모든 것을 때우던 시기는 그 막을 내렸으
며, 청동을 비롯한 광물의 등장으로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었다. 또한 신석기시대에 일부 이루
어지던 농경이 크게 확대됨으로써 자연히 빈부격차가 발생하게 되었고, 인간들은 점차 신분제
의 굴레 속에 갇히게 되었다.


▲  유일하게 공개된 동쪽 움집 (움집 생활 체험장)

암사동 10기의 움집 가운데 유일하게 속살이 공개된 동쪽 움집은 기존 움집 규격의 1.5배 정도
를 더해서 만든 것으로 움집 높이 4.5m, 가로 8.5m, 세로 12m에 이른다. 내부에는 4명의 원시
인 가족을 배치했고, 석기 등의 생활용품은 실물 크기로 재현하여 당시의 생활상에 대해 약간
이나마 이해를 돕게 만들었으니 한번 둘러보자.


▲  속세를 향해 문을 연 동쪽 움집 대문

▲  동쪽 움집에 재현된 원시인 가족 4인

동물 가죽 옷을 입은 원시인 가족들이 화덕 주위에 오손도손 둘러앉아 각자 일에 여념들이 없
다. 그들 가운데 유일하게 일어선 이는 이 집의 주인이자 가장인 아버지로 사냥을 할 창을 손
질하고 있고 그 옆에 아줌마 자세로 앉은 사람은 어머니로 돌판 위에 고기를 놓고 썰고 있다.
아들은 물고기를 굽고 있으며, (어머니나 아들이나 겉모습이 비슷하게 생김) 제일 덩치가 작은
꼬마는 막내딸로 어미와 오라비가 해준 음식을 한참 섭취하고 있다.
움집 중앙에 자리한 화덕은 불을 피우던 공간으로 음식을 조리하고 난방을 때워 안을 따스하게
유지하고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는 기능을 했다. 또한 화덕의 연기가 잘 빠져나가도록 천정에
구멍을 냈다.

재현된 모습이긴 하지만 그들의 작업에 방해가 될까봐 발자국 소리를 죽여가며 내부를 살폈다.


 

♠  암사동 유적 전시관

▲  제1,2전시관 (왼쪽 현관이 1전시관, 오른쪽이 2전시관)

암사동 유적 전시관은 모두 2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전시관은 1988년에 문을 열었
는데, 유적 발굴터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생활과 문화, 유물 등
을 머금고 있다.
제2전시관은 기존 전시관을 크게 확장할 필요가 있어 1999년에 그 옆에 이어서 만든 것으로 기
존 전시관의 내용을 바탕으로 암사동 유적의 발굴과 선사시대 개관, 서울과 경기도 지역 신석
기 유적 및 초기 청동기시대 문화를 다루었다. 그리고 2곳의 체험코너와 정보검색코너, 영상실
을 갖추어 전시관의 유물과 신석기시대의 이해를 최대한 돕게 했다.

유물들이 모두 선사시대 것이다 보니 화려함과는 극히 거리가 멀어 식상할 수도 있다. 죄다 토
기와 석기 투성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 시대를 발판으로 삼아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鐵器時代
)가 싹틀 수 있었고, 인간은 너무 쓸데없이 진화를 거듭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의 옛 원초적인 모습도 한번 살펴줘야 된다. 그 토기와 석기가 우리가 쓰는 물건들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소장 유물은 408개로 유감스럽게도 절반 이상이 복제품(169점)이거나 다른 데서 빌려온 것(167
점)이며, 순수 암사동 산은 고작 72점에 지나지 않는다. 태반은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이곳 발굴
에 나선 대학교 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복제품은 그만 치우고 그곳에 있는 유물을 건네 받아
암사동 유물과 서울에서 출토된 선사시대 유물로 꽉 채웠으면 좋겠다.


▲  움집터 발굴 현장 - 움집터 8기와 저장공간 1기를 그대로 경화처리하여
보존한 것으로 이곳 전시관의 백미라 할 만하다.

▲  가지무늬토기와 붉은 그릇, 민무늬토기들

▲  빗살무늬토기와 동물의 뼈로 만든 골각기(骨角器)들

▲  빗살무늬토기 - 즐문토기(櫛文土器)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아마도 학창시절 때 귀가 따갑도록 들어봤을 것
이다. 이 토기는 신석기 사람들이 고기와 과실, 채소를 담거나 저장할 때 사용했다고 하며 구
덩이를 파고 500~600도의 온도에서 따끈하게 구워서 붉은 색이나 누런 색을 띄게 되었다. 토기
피부에는 빗살무늬(빗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 무늬를 내기 위해 생선과 동물 뼈를 주로 사
용했으며, 이들 토기를 어려운 말로는 즐문토기라고 한다.
지금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토기이지만 원시 수준의 인간이 저 정도의 잘 생긴 토기를 만들기
까지는 무려 100만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  빗살무늬토기와 돌도끼, 돌살촉

▲  청동기시대 유물인 청동검과 마제석촉 - 이들은 부여 송국리와
화순 대곡리, 창원대에서 빌려온 것이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인간들은 비로소 광물을 다루게 되었다.

▲  전국 곳곳에서 집합시킨 빗살무늬토기와 온갖 토기들

▲  물고기 잡이에 쓰던 어망추와 낚시추바늘

겉으로 보면 주위에 흔한 자연석처럼 보여 눈길이 잘 가지 않는 존재들이지만 저런 돌 하나하
나에 원시인들의 사연과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새삼 다르게 보인다.
판별하기 어려운 저들을 밝히는데 많은 역사,고고학 교수/학자들의 노고가 참 컸다.


▲  타제석기(打製石器)들

▲  돌망치로 쓰인 돌맹이들

▲  제2전시관 한복판에 재현된 움집

▲  세월의 태클에 조각이 나버린 빗살무늬토기 파편들

▲  불에 탄 도토리(가운데)와 갈판과 갈돌, 석기들
탄화된 곡식과 과실 등은 절대로 분해자의 먹이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었던 것이다. 지금 사람들도 도토리로 만든 묵을 즐겨먹는데,
신석기 사람들도 도토리를 채취해서 양식으로 썼던 모양이다.

▲  신석기 사람들의 무덤

신석기 사람들의 수명은 얼마나 되었을까? 지금이야 평균 수명이 너무 길어서 문제지만 그때는
너무 짧아 기껏 길어봐야 40~50 정도였을 것이다. 청동기시대에는 고인돌이라 불리는 돌무덤들
이 많이 있지만 신석기시대에는 적당한 무덤 유적이 거의 없다. 다만 근래에 남해안 지역에서
조개더미유적과 함께 무덤이 발견되어 조금씩 정답을 풀어주고 있다.
신석기시대 무덤은 죽은 이의 키 정도 길이로 얕게 땅을 파고 관곽(棺槨)도 없이 시신을 안치
했다. 시신은 대부분 곧게 안치했으나 쭈그린 상태로 묻힌 경우도 일부 발견되었다. 시신 위에
는 작은 돌을 덮어 봉분으로 삼았으며 아주 드물게 동굴이나 바위 틈의 구덩이를 파고 묻은 경
우도 있었다. 죽은 이는 목걸이와 팔찌 등의 꾸미개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부디 저
세상에 가서 쓰라며 토기와 석기,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재료 등을 두어 사후세계 관념을 가지
고 있었음을 귀띔해준다.

신석기 유적의 성지로 추앙받는 암사동에서는 아직 그들의 무덤이 발견되지 못해 약간은 허전
한 감을 준다. 무덤도 발견되면 아주 완벽한 성지감이 되는데 말이다.


▲  돌살촉과 석기들

▲  암사동 주거지 모형도


 

♠  암사동 유적 마무리 ~~ 선사체험마을

▲  선사체험마을 정문과 시간의 집

선사유적지 전시관 북쪽에는 2010년 9월에 조성된 선사체험마을이 있다. 선사체험마을을 알리
는 나무로 만든 문을 지나 조그만 또랑을 건너면 선사체험마을 구역인데, 시간의 집을 시작으
로 기억의 물길과 어로체험장, 움집마을, 수렵체험장, 발굴체험장, 선사체험교실 등이 있으며,
가장 북쪽에는 발굴체험장과 백제주거지 표석이 있다.
다른 선사유적지나 박물관과 달리 선사시대 체험장을 매우 넓게 닦아서 어린이와 학생들을 대
상으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해 여흥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굳이 체험이 아니더라도
당시를 재현한 여러 볼거리를 비롯하여 온갖 들꽃과 수풀이 무성한 산책로와 언덕, 여름 제국
의 기운을 약화시켜주는 개울까지 갖추고 잇어 전시관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쥐가 난 머리
를 잠시 식히기에는 아주 좋다. 단 그늘이 시간의 집과 개울 건너편 외에는 별로 없어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강렬한 햇빛으로 조금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  시간의 집

시간의 집은 동굴 형태로 구성된 공간으로 밖에서 보면 마치 길고 굵직한 뱀처럼 보인다. 이곳
은 신석기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 자료를 곳곳에 설치
된 모니터를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동굴의 길이는 약 60~70m 정도 된다. 이 동굴을 벗어나면
바로 움집군락으로 이어진다.


▲  시간의 집과 그 옆으로 나 있는 산책로와 개울(기억의 물길)

▲  움집군락에 재현된 움집들 - 이제는 움집도 지겨워진다.
그만큼 암사동 유적에서 차지하는 움집의 비율이 크다는 소리다.

▲  맷돼지 통구이 현장 - 저기서 불만
붙이면 바로 100% 통구이 재현이다.

▲  돌무더기 위에 놓인 빗살무늬토기 모형 -
집으로 가져와서 그릇으로 쓰면 안될까..?

▲  바쁘게 살아가는 신석기 사람들

▲  신석기 사람들의 취락 모습


▲  기억의 물길이라 불리는 서쪽 개울
장대하지만 무심하기도 한 세월이 물처럼 꾸준히 흐른다는 것을 상징하고자
기억의 물길로 이름을 지은 모양이다.

▲  움집군락 서쪽 산책로

▲  수렵체험장 - 맷돼지와 사슴 모형이 체험을 준비한다.

▲  사슴 1마리 월척하고 당당히 집으로 돌아가는 원시인의 위엄
모든 것이 꺼꾸로 보일 사슴이 좀 가련해 보인다.
나의 전생이 혹 저 사슴은 아니었을까..?

▲  발굴체험장

어린이 2명이 한참 흙을 파헤치며 오래된 보물을 꿈꾼다. 하지만 저기서 나오는 것은 흙 밖에
없으니 괜한 헛된 망상은 버리도록~~ 정식 발굴체험을 하는 경우 저 안에 토기와 석기 모형을
여럿 묻는다고 한다. 흙을 파다가 그것들을 발견하면 정말 보물이라도 찾은 듯, 그 기분이 정
말 환희(歡喜) 그 자체일 것이다.


▲  발굴체험장 동쪽에 있는 백제주거지터 표석

2003년과 2008년 11월에 6각형 모양의 백제 집터 1기와 여러 유물이 출토된 곳으로 이곳이 신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뿐만 아니라 백제 중기까지 주거지로 쓰였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이곳 일대는 한성백제 시절 강동/송파구로 여겨지는 도읍(위례성) 북쪽으로 농사를 짓거나 한
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백성들이 살았다. 귀족들은 이곳과 명일동, 고덕동 일대에 큰 농장을
소유하여 굴렸을 것이 분명하니 그와 관련된 유적(창고나 귀족 저택)일 가능성도 크다.


▲  백제주거터 인근에서 수줍게 미소짓고 있는 개망초의 위엄

▲  선사체험교실

▲  야외공연장으로 쓰이는 체험마당

▲  선사의 숲 사이로 난 산책로 - 선사의 숲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다.

▲  전시관 맞은 편에 마련된 농촌 체험 현장

답사 본능에 충실하며 1시간 반 동안 이루어진 '선사시대로의 짧은 여행'은 끝이 났다. 학창
시절에 만났던 옛날의 암사동 유적만을 생각하고 왔는데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나처럼 많이도
변해있어 조금은 놀랬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명소나 관광지나 적당히 변하지 않으면 살기가
힘든 것이 속세의 생리인 모양이다.
이렇게 하여 암사동 선사유적지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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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6년 6월 2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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