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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1.06 한가을에 찾아간 산사 나들이, 화성 비봉산 봉림사
  2. 2016.11.05 늦가을 경주 나들이 ~~~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벽도산,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3. 2015.10.24 경주 남산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석불, 보리사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보리사 마애석불)

한가을에 찾아간 산사 나들이, 화성 비봉산 봉림사

 


' 가을 산사 나들이 ~ 화성 봉림사 (당성) '

▲  비봉산 봉림사


 

가을이 한참 숙성되어가던 10월의 한복판에 화성시 서부에 자리한 봉림사를 찾았다. 수원
역에서 친한 후배를 만나 갈증에 지친 목구멍을 달랠 겸 커피 음료를 섭취하며 갈만한 곳
을 물색하다가 아직 미답처(未踏處)로 남아있는 남양(南陽) 봉림사를 그날의 메뉴로 정했
다.
수원역(수원역 환승센터)에서 봉림사까지는 수원 400-4번(광교웰빙타운↔마도면 바이오단
지입구)을 타면 되는데 그 버스를 잡아타고 40분 정도를 달려 봉림사입구에 두 발을 내린
다. 예전에는 남양/사강/서신 방면 아무 시내버스나 타고 북양1통에서 40여 분 발품을 팔
아야 했으나 근래에 봉림사입구까지 가는 버스편이 생겨 접근성은 좀 좋아졌다. (단 배차
간격이 좀 긴 것이 함정)

봉림사입구에서 일주문 바로 밑까지는 온갖 공장들로 즐비해 꽤나 어수선한 모습이다. 공
장 굴뚝에는 수시로 연기가 피어올라 하늘을 찔러대고, 온갖 소음이 우리의 두 귀를 연신
때려댄다. 게다가 대형차들이 수시로 들락거려 길바닥은 늘 헝클어진 모습이다. 지금까지
300곳이 넘는 오래된 절을 찾았지만 여기처럼 공장 지대를 한참이나 지나야 되는 절은 처
음이다.


 

♠  봉림사(鳳林寺) 둘러보기


▲  봉림사 일주문(一柱門)


▲  껍데기만 남은 천왕문(天王門)

어미도 몰라본다는 세월의 모진 풍파와 개발의 무자비한 칼질로 아비규환처럼 변해버린 북양
동 바닥을 가로질러 비봉산(飛鳳山)의 품으로 들어선다. 거의 끝이 보이지 않던 공장의 행렬,
이러다가 공장이 절까지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지만 다행히 일주문의 위엄 앞에 개발
의 칼질은 푹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애미, 애비도 못알아본다는 이 땅의 천박한 개발주의라
고 해도 양심은 있는지 오래된 절과 그곳을 품은 산까지는 완전히 건드리지는 못했다.
공장과 시가지에 밀려 잔뜩 기가 죽었던 비봉산도 일주문의 응원에 가슴을 피며 호젓한 숲길
을 그려내 보이고 산사(山寺)로 인도하는 산길 분위기도 서서히 회복하면서 일주문 앞까지 펼
쳐진 혼란한 풍경에 제대로 놀란 중생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절의 정문이자 속세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일주문에는 '비봉산 봉림사'란 현판이 있어 이곳의
이름을 알려준다. 바로 옆에 도로가 나 있어 굳이 문의 아랫도리를 지날 필요는 없겠지만 그
래도 절에 왔으니 그의 체면도 세워줄 겸, 문의 밑도리를 지나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얼마 안가서 천왕문이 마중을 한다. 천왕문은 부처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
의 거처로 일주문을 지나온 중생을 검문하는 곳인데, 이곳에 있어야 될 사천왕은 어디로 마실
을 갔는지 보이질 않고 문 안은 텅 비어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절을 들락거렸지만 이렇게 비
어있는 천왕문은 처음이다. 시작부터가 참 이상했던 봉림사. 허나 다행히 사천왕은 멀리 가지
않고 범종루 밑으로 자리를 옮겨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  숲터널을 이루고 있는 봉림사 숲길
숲에서 갑자기 선녀가 튀어나와 나를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호젓한 숲길이다.

▲  경내를 가리고 선 범종루(梵鍾樓)와 금강역사(金剛力士)상

숲길을 지나면 그 길의 끝에 2층 범종루가 계단을 늘어뜨리며 우리를 마중한다. 범종루 앞에
는 우람한 체격에 성난 표정을 지은 금강역사 4기가 자리하여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우리를 쫄
게 만드는데, 우측 뒷쪽의 금강역사는 무려 바위까지 들며 위협을 한다.
아무래도 개발의 칼질이 일주문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와 절을 위협하니 절 입장에서도 그리
마음이 편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두 눈을 부릅뜨며 성난 표정을 지은 저들을 경내 앞에
내세워 속세의 기운을 경계하며 더 이상 선을 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 같다.

▲  범종루 1층에 자리한 사천왕들

금강역사의 검문을 거쳐 범종루의 밑도리를 들어서면 사천왕의 검문을 받게 된다. 이들은 원
래 천왕문에 있다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금강역사와 함께 든든하게 절을 지키고 있는데 성
난 포즈의 금강역사와 달리 사천왕의 얼굴은 귀엽기만 하다. 이들의 공간을 따로 사천왕각(四
天王閣)이라 부르며, 그들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매우 조촐한 크기의 봉림사 경내가 펼쳐진다.


▲  봉림사 3층석탑

경내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법당인 극락전, 왼쪽에는 요사와 선방으로 쓰이는 봉향각, 오른
쪽에는 3층석탑과 1708년에 지어진 'ㄴ'자 건물을 부시고 다시 지은 설법전이 자리한다. 바로
가까이에 자리한 3층석탑은 극락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뱃속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
사리 6과를 봉안하고자 1979년에 세운 것으로 신라 석탑의 백미(白眉)로 통하는 석가탑(釋迦
塔)과 많이도 닮았다.
그럼 여기서 잠시 봉림사의 내력을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  요사(寮舍)와 선방(禪房), 종무소의
역할까지 도맡고 있는 봉향각(奉香閣)

▲  설법전(說法殿)
1883년에 조성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경기도의 중심 도시인 수원(水原)을 서쪽과 남쪽으로 감싸고 있는 화성시(華城市)의 주요 시
가지이자 화성시청을 품고 있는 남양 동쪽 비봉산 자락에 봉림사가 고즈넉하게 안겨져 있다.

이 절은 신라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 시절,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잦은
침공을 부처의 힘을 빌려 물리치려는 심보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이곳은 신라의 당항
성(黨項城) 지역으로 고구려와 백제와도 가까워 그들과의 싸움이 늘 그치지가 않았다. 특히
당항성은 신라가 당나라와 교역을 하던 무역항으로 이곳이 끊기면 신라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기 때문에 악으로 깡으로 이곳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절을 창건할 때 궁궐에서 기르던 봉황이 이곳으로 날라와 숲에 앉았다고 하여 봉황의 숲이란
뜻에서 봉림사라 불리게 되었으며, 절을 품은 산도 봉황이 날라왔다는 뜻의 비봉산이라 불리
게 되었다. 허나 신라 중기(7세기)에 창건되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역사 기록이나 유적이 전
혀 없어 과연 그때 지어졌는지는 심히 회의적이다. 다만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서 지정(至正)
22년(1362년)이란 묵서명(墨書名)이 발견되어 최소 14세기 이전부터 절이 있었음을 보여주니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신라 후기나 고려 초/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본격적인 사적(事蹟)이 등장하는 것은 조선 중기이다. 1621년 안모(安暮)와 자현(慈賢)
이 대웅전과 망양루(望洋樓), 봉향각, 범종각을 개축했다고 전하며, 1708년 요사를 중건했다.
그리고 1883년과 1887년 아미타후불탱을 비롯해 지장시왕탱, 신중탱, 칠성탱을 새로 조성했고,
1978년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새로 개금하는 과정에서 복장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중 사
리 6과를 담고자 뜨락에 3층석탑을 세우고, 나머지 유물은 신변보호를 위해 용주사(龍珠寺)
효행박물관으로 보냈다.
1988년 삼성각을 새로 짓고, 1992년 요사채와 봉향각, 범종각을 개축했으며, 1990년대 후반에
주지로 부임한 성무(性無)가 도로와 주차장을 깔고 가람을 정비하여 지금에 이른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물인 극락
전과 19세기 후반에 조성된 탱화 여럿이 전하고 있다. 법당(法堂)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봉향
각과 설법전, 삼성각, 천왕문 7~8동의 건물이 경내를 메우고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불상을
간직한 오래된 절이라 처음에는 어느 정도 덩치가 있는 절인줄 알았으나 정작 와보니 생각보
다 매우 작은 절이라 다시 한번 놀랬다.
허나 절이 아담하여 두 눈에 넣어 살피기에 별 부담이 없으며, 비록 절 밑까지 속세의 기운이
밀어닥쳤지만 일주문과 천왕문, 비봉산의 가호로 경내 주변은 무성한 숲을 이루며 한적한 산
사의 분위기를 마음껏 드러낸다. 허나 산을 조금만 벗어나면 공장과 시가지 등 속세의 기운이
이빨을 드러내니 졸지에 속세에 갇힌 외로운 처지가 되어버렸다.

*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북양리642 (주석로80번길 139, ☎ 031-356-9117)


▲  봉림사의 법당인 극락전(極樂殿)

범종루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북향(北向)을 하고 있는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
붕 집이다. 화강암으로 높이 석축을 다지고 그 위에 조촐하고 묵직하게 들어앉은 극락전은 조
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예전에는 대웅전(大雄殿)이라 불렸으나 아미타불(阿彌陀佛) 거처에
걸맞게 극락전으로 이름을 갈았다.
불단에는 봉림사의 제일 가는 꿀단지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1883년에 제작
된 아미타후불탱과 지장시왕탱 등이 그를 수식한다. 특히 지장시왕탱은 19세기 후반에 경기도
에서 활약했던 대허체훈(大虛體訓)과 수일(守一), 태삼(台三)이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  봉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가운데 불상) - 보물 980호

극락전 불단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한 3존불이 저마다 미소 경쟁을 벌이며, 온화한 표정으
로 중생을 맞이한다. 아미타불 좌우에 자리한 지장보살상과 관음보살상은 아미타불의 허전한
옆구리를 달래고자 근래에 붙여놓은 협시(夾侍) 보살상이며, 그들 뒤에 든든하게 자리한 아미
타후불탱은 1883년에 제작된 것이다.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1978년에 불상에 다시 금칠을 했을
때, 그의 뱃속에서 수많은 복장유물이 쏟아져 나와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때 지정(至正) 22
년(1362년)이라 쓰인 묵서명이 나와 최소한 1362년 이전에 조성되었음을 귀뜀해주며, 1583년
에 새로 개금(改金)을 했음이 밝혀졌다.
이 불상은 높이 88.5cm, 무릎 폭 78cm의 작지만 단아한 모습으로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이 두툼하게 솟아있으며, 살짝 구부러진 눈썹 사이로 백호가 박혀 있다. 얼굴은 단아하고 온
화한 표정을 머금고 있는데, 코는 작지만 오똑하게 솟았고, 붉고 조그만 입술 위에는 수염이
살짝 그어져 있다. 두 귀는 중생의 민원을 하나도 빠짐없이 접수하려는 듯, 어깨까지 늘어져
있고 굵은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다.
몸에 걸친 옷은 통견(通肩) 스타일로 가슴 부분은 U자형으로 처리되어 있고, 옷은 띠매듭 대
신 3줄의 옷주름으로 처리했다. 고려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뱃속에서
나온 유물은 전적(典籍) 8종과 사리병, 섬유류, 종자류, 각종 구슬, 부적 등으로 이들은 '봉
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전적일괄'이란 어려운 이름으로 보물 1095호로 지정되었다. 이들
가운데 사리와 법화경(法華經)을 제외하고 모두 용주사 효행박물관에 가 있다.

아미타불 좌우에는 가히 1,000기는 넘을 듯한 조그만 금동불이 빼곡히 자리해 일제히 금빛을
발산하고 있는데, 이들은 중생의 돈을 받아 만든 원불(願佛)이다.

▲  조그만 연못과 다리를 갖춘 샘터

▲  봉림사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칠성탱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달랑 1칸에 불과한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
로 1988년에 지어졌다.
남쪽을 바라보는 곳에는 산신탱과 독성탱이, 서해바다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칠성탱이
자리해 있는데, 칠성탱은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19세기 후반 경기도에서 활약한 혜산축연의
작품으로 나름 가치가 높다. 그림 중앙에 치성광여래를 두고 그 좌우로 월광보살(月光菩薩)과
일광보살(日光菩薩), 칠원성군(七元星君)을 배치했는데, 붉은 색과 청색이 잘 대조를 보이고
있으며, 19세기 후반 경기도 불화 양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  산신탱과 독성탱
산신과 호랑이, 동자, 소나무, 주름진 산이 표현된 산신탱은 1984년에,
편하게 앉은 독성 할배와 동자, 천태산(天台山)이 그려진 독성탱은
1991년에 조성되었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경내

우리는 삼성각에 들어가 염치불구하고 10분 정도 쉬었다. 건물이 매우 작아서 장정 2명이 들
어가 앉으니 완전 꽉찬다. 여기서 세월과 세상, 근심을 잠시 잊으며 없는 듯 쉬고 있다가 밖
으로 나와 봉향각 툇마루에도 걸터앉아 산사의 고적함을 즐겨본다.

햇님도 슬슬 퇴근할 때가 되었는지 찬 기운이 조금씩 엄습해온다. 우리가 있어야 될 곳은 이
런 절간이 아닌 아비규환의 속세이기에 억지로 발을 떼며 경내를 나왔다.
절에는 하얀 털의 멍멍이 3마리가 절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를 일주문까지 배
웅을 해주고 숲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일부러 배웅해준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몰라도 늘
번잡한 일주문 밑과 달리 절은 고적하기 그지 없으니 그도 사람이 그리웠나보다. 그만큼 봉림
사는 한적한 절간이었다.


▲  봉림사를 뒤로하며, 하얀 털의 멍멍이가 일주문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  신라의 대외무역항인 옛 당항성, 화성 당성(唐城)
- 사적 217호

봉림사에서 남양, 마도, 사강을 지나 서신 방면으로 조금 가면 당성<唐城, '黨城'이라 쓰기도
함>이란 오래된 산성(山城)을 만날 수 있다. (당성이 봉림사와 가까워 편의상 봉림사 글에 통
합했음, 당성은 몇 년 전 3월 말에 갔었음)

당성은 옛 당항성<唐項城, 또는 黨項城>으로 전해지는 곳으로 당성이란 이름은 모를지언정 당
항성 3글자는 아마 지겹도록 들어봤을 것이다.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허벌나게 등장했던, 그것
도 주관식 문제의 단골로 필수로 외워야 했던 그 이름이다. 그 당항성이 바로 화성시에 있는
당성이다.

당성은 서해바다를 향해 약간 튀어나온 남양반도(南陽半島) 서남쪽 구봉산(九峯山)에 위치한
다. 산 정상부와 동쪽 계곡, 서남쪽 능선에 걸쳐 성벽을 쌓았으며, 지금은 간척으로 많이 메
워졌지만 예전에는 산 서쪽까지 서해바다가 넝실거렸다.
백제가 처음 당항성을 지었으며, 5세기 후반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점령하여 당성군(唐城
郡)이라 했다. 그러다가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장악하여 당항성으로 이름을 갈았
다.
신라는 한강 유역과 당항성을 점령하면서 서해바다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중원(中原)대륙으로
바로 이어지는 통로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고구려나 백제를 거치거나 직접 남해바
다를 돌아서 가야 했으니 자연히 대륙과의 교류는 더딜 수 밖에 없었다.

당항성은 대륙을 이어주던 신라의 대외무역항으로 이곳을 통해 중원 왕조와 교류를 했다. 그
런 중요성 때문에 신라는 이곳을 꿀단지처럼 애지중지했다. 문무왕(文武王) 이전까지 이곳만
한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고구려, 백제와 매우 가까운 곳이라 그들은 자주 이곳을 공
격했고 빼앗긴 적도 1~2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라는 국력마저 딸려 그들을 상대하기 벅찼으
나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악으로 깡으로 이곳을 사수했다.

당나라를 비롯한 중원대륙으로 가는 신라 사신과 상인, 승려는 대부분 이곳을 거쳤으며, 나중
에 무열왕(武烈王)이 되는 김춘추(金春秋)도 백제에 대해 복수의 개거품을 잔뜩 물며 이곳을
통해 대륙으로 넘어가 당태종(唐太宗)에게 아부를 떨었다. 결국 나중에 저지르게 되는 고구려
와 백제 멸망의 발판을 당항성을 통해 닦은 셈이다.
문무왕 이후 백제가 거닐던 서해(西海)와 서남해를 장악하게 되었지만 698년 이후 신라 이북
에 발해(渤海)가 들어서 대륙과의 육로가 끊기면서 당항성의 인기는 여전히 식을 줄을 몰랐다.
경덕왕(景德王) 때는 당항성 지역을 당은군(唐恩郡)이라 고쳐 부르며 당나라에 잘보이고자 애
를 썼다. 그리고 신라 후기에는 창궐하는 해적을 막고자 당성진(唐城鎭)을 두었다.

신라가 망하면서 500년 가까이 번영을 누리던 당항성은 풍비박산이 났다. 무역항과 대외교류
의 기능이 거의 사라져 해안기지의 기능으로 크게 축소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성을 수리한
흔적이 있어 방어용으로 조선 중기까지 쓰였음을 보여주나 그 이후 제대로 버려지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쇠퇴하고 만다.

당성은 산 정상을 에워싼 테뫼식과 계곡을 포함한 포곡식(包谷式)이 혼합되었다. 백제는 테뫼
식 성을 만들었는데, 테뫼식 성의 둘레는 약 360m 정도로 기단(基壇) 바깥쪽을 보축(補築)하
여 성벽을 견고하게 했으며, 성 남서쪽 높은 곳에 축조된 흔적이 남아있다. 6세기 이후 신라
가 차지하면서 협소한 산성을 넓히고자 포곡식 성을 쌓아 복합적인 구조를 지니게 된 것이다.
현재의 성은 신라 때 것으로 그 평면은 장방형(長方形)을 이루고 있다. 포곡식 성의 둘레는
약 1.1km로 예전에는 당성의 내성(內城)으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신라 후기 유물이 출토되면서
신라 말에 설치된 당성진 성곽으로 여기고 있다.

현재 동문(東門)터와 남문터, 북문터, 우물터, 건물터가 있으며, 서쪽 성곽 정상부에 조선 때
지어진 망해루(望海樓)로 여겨지는 건물 주춧돌이 있다. 성벽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체
로 잘 남아있으며, 성벽의 높이는 2~5m 정도이다. 여장 등의 방어시설은 녹아 사라졌고, 성의
지형은 남쪽은 높고 북쪽은 낮다.
당성을 품은 구봉산은 남양반도에서 가장 서쪽에 자리한 산으로 동쪽을 제외하고는 산이 없어
조망이 매우 좋다. 게다가 바다가 지척이라 대륙으로 가는 관문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  당성으로 가는 숲길

당성 입구인 신흥사 정류장에서 7~8분 정도를 오르면 당성을 지키는 관리소가 나온다. 관리소
동쪽에는 건물터와 성터에서 수습된 돌들이 조그만 보금자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서쪽에 지
붕돌과 이수(螭首)를 갖춘 당성사적비가
우람한 모습으로 속인을 맞는다.


▲  당성 관리소 동쪽에 모인 옛 당성의 성돌들

신라 제일의 무역항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 참말로 엊그제 같은데 세월과 자연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해 성 안에 모든 것은 주저앉고 성벽과 건물을 이루던 돌은 잔해가 되어 산 곳곳
에서 이리저리 흩어져 당당히 성벽의 일부로 살아가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당항성의 내력이 적힌 당성 사적비(史蹟碑)

▲  당성 은행나무 숲길

당성사적비를 지나면 늘씬하게 솟은 은행나무 숲길이 나그네의 마음을 부여 잡는다. 만추(晩
秋) 때 왔더라면 황금색 은행잎이 흩날리는 그림 같은 현장이겠지만 겨울 제국이 모든 것을
공출해 가면서 앙상히 뼈만 드러낸 채, 봄의 해방군을 기다린다. 봄이 바로 앞까지 온 것 같
기는 하지만 아직까지 제국의 잔당들이 설치고 있으니 은행나무들도 마음 놓고 은행잎을 틔우
지 못한다. 어여 얼어붙은 뿌리에 완연한 봄이 내려와 메마른 가지에 살이 붙었으면 좋겠다.
(이때가 3월 초였음)
폐허가 되버린 옛 성에서의 허전함을 달래주는 숲길로 늦봄이나 가을에 거닐고 싶은 길이다.

숲길을 지나면 길이 2갈래로 갈린다.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상관은 없으며, 넉넉잡
아 30분 정도면 충분히 1바퀴를 돈다. 가파른 구간이 별로 없고, 성 남쪽에서는 궁평항과 제
부도(濟扶島),
서신 앞바다가, 서쪽에서는 땅으로 매립된 서신 서부 지역과 대부도(大阜島)가
시야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그림처럼 박힌 섬들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바다도
겨우 보일 정도이다.

성곽 외에는 장대한 세월에 죄다 휩쓸려 내려가 남아있는 것이 없다. 그야말로 폐허의 현장이
다. 중간중간 옛 건물터와 주춧돌, 성돌의 무더기가 눈에 띄며, 은행나무 숲길 끝에는 출토된
기와조각을 차곡차곡 올려 만든 돌탑이 눈길을 끈다.


▲  출토된 기와조각으로 이루어진 돌탑
메마른 수풀을 이불로 삼아 늦겨울을 견디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소복을
걸친 헝클어진 머리의 처녀귀신 누님처럼 보인다.

▲  기와 돌탑 주변의 건물터
건물이 녹아내린 흔적을 자연이 수풀로 보듬으면서 자연의 일부로 녹아들었다.

▲  소나무가 우거진 남쪽 성곽

▲  솔내음이 가득 깃들여진 남쪽 성곽

▲  남문터
성문의 흔적은 없고, 성곽이 끊어진 움푹 패인 부분이 옛날 이곳에
성문이 있었음을 아련히 전해줄 따름이다.

▲  남문터 동쪽 성곽

▲  남문터 서쪽 성곽

▲  서남쪽 성곽

▲  서남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서신면 서부 지역과 대부도)
바다가 산 아래 마을까지 넝실거렸으나 거의 육지로 바뀌면서 바다는 저 멀리
밀려나고 말았다. 산 너머로 대부도가 아련히 얼굴을 내민다.

▲  서쪽 성곽 정상부에 자리한 망해루터 주춧돌
당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이곳에 서해바다를 바라보던 망해루가 있었다.
망해루는 조선 후기에 녹아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누각 주춧돌과
성돌이 한데 고여 커다란 돌무더기를 이룬다.

▲  서쪽 성곽에서 바라본 천하 (서신면 서부)

▲  성곽이 잠시 끊어진 북문터
북쪽을 바라봤을 북문과 문루의 모습이 대충 머리 속에 그려진다.

▲  힘차게 뻗은 동북쪽 성곽

▲  동북쪽 성곽 부근의 건물터

건물 주춧돌과 성돌이 모여 거대한 돌의 나라를 이룬다. 건물터와 성문터에 작게 안내문을 두
어 답사객의 이해를 도왔다면 무척 좋았을 것을 그런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상당히 아쉽다.
저런 식의 건물 유적은 겉으로만 보면 버려진 돌의 의미 없는 공간으로 비춰져 지나치기가 쉽
다.


▲  동남쪽 성곽 (1)

▲  동남쪽 성곽 (2)

보잘 것 없는 돌들이 강인한 협동심을 이루며 거대한 산성을 일구었다. 수석에 끼지도 못하는
저들 자체는 보잘 것이 없지만 그것이 뭉치고 모이면서 하늘까지도 겁을 먹게 만든 요새를 이
루어낸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당성 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 당성 소재지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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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경주 나들이 ~~~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벽도산,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 늦가을 경주 나들이 '

▲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하늘 아래 세상을 평정한 가을이 천하를 곱게 물들이며 한참 전성기를 일구던 10월 막바지
에 신라 서라벌의 향기가 지독하게도 배여있는 경주(慶州)를 찾았다.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아침 일찍 동서울종합터미널을 찾았으나 경주 관광객 폭주로
9시 이후에나 승차가 가능하다고 그런다. (첫차는 7시)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구미(龜尾)행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경주로 갈 때 자리가 여의치 않으면 보통
구미를 거쳐 간다. 비록 갈아타야되는 번거로움은 있으나 구미행은 휴일에도 자리가 꽤 널
널한 편이고 경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환승 장소로도 제격이다.
구미에 이르자 바로 포항행 직행버스로 환승, 다시 1시간 30분을 달린 끝에 12시에 경주터
미널에 도착했다.

경주에 이르니 벌써부터 나들이 손님들로 터미널 주변은 북새통을 이룬다. 허나 그들이 가
는 곳은 거의 정해져 있다고 보면 된다. 나는 불국사나 석굴암, 대릉원, 분황사지 등 경주
의 기본적인 곳은 거의 질리도록 가본 터라 속세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을 주로 찾는 편
이다.
그렇게 경주에 수많은 문화유적과 명승지에 발자국(헤아려보니 대략 120곳이 넘음)을 남겼
지만 '신라(新羅)', 그 조그만 나라가 무려 1천 년씩이나 쓸데없이 오래 있다보니 그 중심
지였던 경주에는 아직도 갈 곳들이 차고 넘쳐난다. 정말 한 골목, 한 굽이를 돌 때마다 볼
거리가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오는 곳이 바로 경주인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볼거리와 찬란한 역사가 깃들여진 경주는 굳이 나쁘게 이르자면 내게는 꽤
부담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볼거리가 지나치게 많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보려면 적지 않은
지식을 필요로 하니 차라리 눈을 감고 지나가고 싶을 정도이다.

이번에 문을 두드린 곳은 시내 서쪽인 효현동(孝峴洞)이란 변두리 동네로 그곳에 안긴 3층
석탑과 법흥왕릉, 그리고 남쪽 벽도산에 있는 율동(두대리) 마애불이 이번 목적지이다. 이
들은 거의 인지도가 없어 찾는 이도 뜸하다.
경주고속터미널에서 아화로 가는 경주좌석버스 300-1번을 타고 태종무열왕릉과 효현고개를
넘어 효현교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대천<大川, 고현천> 옆으로 난 조그만 농로(외외
길)로 들어섰다.
갈대가 살랑살랑 춤을 추는 대천, 늦가을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효현동 들판이 속세(俗世)
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를 흔쾌히 정화시켜준다. 4발 차량이 이따금 지나칠 뿐, 사람
의 모습은 거의 보이질 않는다. 그런 시골길을 15분 정도 가면 효현동3층석탑을 알리는 갈
색 이정표가 마중하고, 그의 안내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외외마을이 나오는데, 탑은 마을
서남쪽에 자리해 있다.


▲ 경주의 서쪽 산하를 차례차례 적시며 형산강(兄山江)으로
흘러가는 대천(고현천)


▲ 효현동 시골길(외외길)
인적도 없는 호젓한 시골길을 거닐으니 마치 아비규환의 속세를 벗어난 기분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해탈감이라고나 할까? 비록 잠시뿐이지만...


▲ 늦가을에 슬며시 물들어 가는 효현동 시골길(외외길)
이런 시골까지 문명의 이기(利器)를 전해주는 전봇대 너머로 흐릿하게
눈에 들어오는 산은 남산(南山, 금오산)이다.


 

♠ 소나무를 우산으로 삼으며 옛터를 홀로 지키는
효현동3층석탑 - 보물 67호

효현동 외외마을 서남쪽 멋드러진 소나무 밑에 자리한 효현동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신라 후기 석탑이다. 기단 사방(四方)에는 기둥 모양의 조
각을 두었고, 탑신은 각 층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을 새겼으며, 지붕돌 네 귀퉁이는 살
짝 치켜진 것이 마치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지붕돌의 밑면 받침은 4단으로 되어있고, 각 부
분의 조각이 가늘게나마 있어 9세기 정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탑이 있는 자리는 법흥왕이 불도를 닦았다는 애공사(哀公寺)의 옛터로 전한다. 하지만 이를 입
증할 절터의 흔적은 나오지 않아 그마저도 희박하며, 절의 위치와 관련된 기록도 없는 실정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애공사터로 포장된 것은 조선 후기에 경주김씨에서 현재 법흥왕
릉을 그들 조상의 하나인 법흥왕의 능으로 삼으면서 탑이 있던 자리를 애공사터라 우겼기 때문
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법흥왕을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나왔는데, 마침
탑도 있고, 비록 북쪽은 아니지만 서쪽에 이름 모를 고분이 있으니 적당히 끼워 맞춘 것이다.

▲ 효현동3층석탑의 앞부분

▲ 효현동3층석탑의 뒷부분


▲ 효현동3층석탑과 이웃한 우사(牛舍)

이 탑은 기둥 조각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밋밋한 모습으로 두 눈에 넣어 보기에
도 별 부담이 없다. 오히려 화려함에 찌든 비슷한 시대의 탑들보다도 더 정감이 가는 것 같다.

마땅한 절터도 아닌 잡초 위에 뿌리를 내린 그는 자신의 내력과 정체를 꽁꽁 숨긴 채, 좀처럼
해답을 주려고 하질 않는다. 그의 속사정을 모르는 속인(俗人)들은 동네 이름을 따서 효현동(
효현리)3층석탑이란 이름을 주었으며, 경주김씨는 그를 애공사탑으로 삼아 조상묘를 찾았다는
뿌듯함에 빠져있다.

탑 옆에는 우공(牛公)들이 사는 우사가 있다. 그들의 음매~♪ 소리로 주변이 좀 시끄럽긴 해도
아무 것도 없는 공터에 홀로 외롭게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을 것이다. 우사 주인이나 우공들
이 탑에 해꼬지를 하지 않는 이상 서로 어우러 사는 모습도 괜찮아 보인다.

* 효현동3층석탑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419-1


▲ 효현동 시골길 (법흥왕릉 가는 길)

▲ 가을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내년 풍년을 위해
기나긴 휴가에 들어간 효현동 들판

▲ 법흥왕릉 입구
갈색 이정표가 있기 전에는 키 작은 표석이 이정표의 역할을 대신했다.
표석에는 한자로 '법흥왕릉 입구'라 쓰여있다.

▲ 법흥왕릉으로 인도하는 숲길에서 바라본 효현동 들판과
벽도산(율동 마애불을 간직한 산)


 

♠ 법흥왕의 능으로 살아가고 있는 신라 중기 고분
신라 법흥왕릉(法興王陵) - 사적 176호

효현동 서쪽 산자락에 법흥왕릉이라 불리는 오래된 신라 무덤이 말없이 누워있다. 능의 높이는
2m, 지름 14m로 신라 왕릉 중에서 작은 편에 속하는데, 봉분 앞에는 근래 지어진 상석(床石)이
하나 놓여져 무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능의 주인이라는 신라 법흥왕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부터 중,고등학교 국사책, 온갖 수험서에
이르기까지 지겹도록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인물로 불교를 공인하고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을
정벌했으며, 연호를 쓰는 등, 신라에서 제법 업적이 있는 군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업적에 비해 능의 규모가 상당히 초라하여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고개를 갸
우뚱하기 마련이다. 물론 신문왕릉(神文王陵, 신문왕릉 또한 주인이 정확하지 않음) 이전에는
딱히 석물을 두지 않았고, 비석도 무열왕릉(武烈王陵)부터 등장하기 때문에 장식이 없는 건 당
연하다 하겠으나 봉분의 크기가 인간적으로 너무 작다. (왕릉의 보호 구역은 72,816㎡)
봉분 주변에는 드문드문 자연석이 노출되어 있어 무열왕릉처럼 봉토 밑에 호석(護石)을 둔 것
으로 여겨지며, 능 주변으로 소나무 숲이 무성하여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특히 기이한 모습의
소나무가 여럿 있어 신비로움을 안겨준다.

일단 이 무덤은 신라 중기 고분이다. 법흥왕릉이란 이름으로 살고는 있지만 이는 조선 후기부
터이다. 그 이전에는 경주 땅에 널리고 널린 신라 고분의 하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법흥왕의 능이란 증거가 있는가? 딱히 적당한 증거도 없다. 삼국사기에는 법흥왕을 애공사 북
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냈다고 나오는데, 애공사가 어딘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18세기 이후, 신라 왕가의 후손인 경주김씨와 경주석씨, 경주박씨들이 한참 조상묘 찾기
사업을 벌이면서 어디에 있다는 짧은 기록에 의지해 경주 땅을 들쑤셨는데, 대충 그럴싸한 곳
을 조상묘로 때려 삼았다. 법흥왕릉 역시 그중의 하나이다.

법흥왕릉을 찾아 나선 후손들은 효현동3층석탑을 발견했고, 덩달아 서쪽 숲속에 잠긴 이 무덤
을 발견하게 된다. 석탑은 이곳에 절이 있었으니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북쪽도 아니지만 서
쪽에 옛 무덤이 있으니 탑 자리를 애공사라 여기면 법흥왕릉이라 우겨도 될 듯 싶었다. 또한
주변에 다른 고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여 3층석탑 자리를 애공사터로 때려 삼고 이 무덤을
법흥왕릉으로 삼은 것이다. 이리하여 이름 없는 옛 무덤은 '법흥왕릉'이란 엉뚱한 이름표를 달
게 된 것이다.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예전에는 이름 앞에 막연히 전하고 있다는 뜻에 '전(傳)'을 붙여 '전 법
흥왕릉'이라 했으나 요즘은 아예 '경주 법흥왕릉(문화재청 지정 명칭)'이라 부른다. 진짜 법흥
왕릉이 나타날 때까지는 법흥왕릉이란 이름으로 꼼짝없이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왕릉이 시내에서도 좀 떨어진 외진 곳이라 찾는 이도 적다. 법흥왕이란 인물은 워낙 유명하지
만 그의 능은 반비례로 인지도가 낮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신변의 위험도 늘 도사리고 있어
1966년과 1968년에 도굴을 당한 적이 있으며, 2005년에도 도굴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지금의
봉분은 1968년 도굴 이후에 복원한 것이다.


▲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법흥왕릉

▲ 동쪽에서 바라본 법흥왕릉

▲ 서쪽에서 바라본 법흥왕릉


▲ 손으로 더듬거리고 싶은 법흥왕릉의 뒷태


※ 불교를 공인하고 신라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법흥왕(法興王. ?~540 / 재위 514~540)

법흥왕의 이름은 김원종(金)으로 지증왕(智證王, 437~514 / 재위 500~514)의 아들이다. 키
가 7척(1척은 22~33cm)에 이르며, 성품이 온후해 주변 사람을 아꼈다. 그의 모후(母后)는 연제
부인() 박씨이며, 부인은 보도부인() 박씨이다.

514년 가을, 지증왕이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그 뒤를 이어 신라 23대 군주로 즉위했다.
부왕에게 '지증(智證)'이란 시호(諡號)를 올리니 신라의 시호는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516년 정월, 내을신궁(奈乙神宮)에 제를 지냈는데, 용이 양산 우물에 나타났다.

517년 4월,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하고 518년 2월 주산성(主山城)을 쌓았다.

520년 정월, 신라 최초로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의 관복(官服)
을 주색(朱色), 자색(紫色) 순으로 제정했다.

521년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522년 3월 가락국<금관가야, 金官伽倻>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다. 그래서 이찬 비조부
()의 누이동생을 보내 혼인에 응했다.

524년 9월, 왕이 남부지역 개척지를 순행(巡行)했는데, 가락국 왕이 찾아와 회견을 했다.

528년, 양나라에서 수입한 불교가 널리 백성들에게 퍼지자 불교를 공인하려 했다. 허나 귀족들
이 반대하여 난항에 부딪치자 이차돈(異次頓)과 짜고 그 유명한 이차돈 순교 사건을 일으켜 귀
족들을 단단히 겁에 질리게 만들고 불교 공인을 선포했다. 이 사건으로 왕권은 한층 강화된다.

529년, 살생을 금하는 명을 내렸다.

531년 3월, 제방을 보수했고, 상대등(上大等) 벼슬을 만들어 국사를 총리(總理)하게 했다.

532년, 가락국이 신라에서 시집 보낸 비조부의 누이에게 가야옷을 입혔다는 엉뚱한 구실을 내
세워 사다함(斯多含)을 보내 가락국을 멸망시켰다. 신라의 파상적인 공격 앞에 가락국의 마지
막 왕 구해왕(仇亥王)이 나라의 국고(國庫)와 보물을 바치고 항복하니 이들을 예우로 맞이하고
상등(上等)의 작위를 내려 본국(김해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내렸다. 그의 3번째 아들 김무력
(金武力)에게는 각간(角干)이란 벼슬을 내렸는데, 그의 손자가 바로 김유신(金庾信)이다.
<가락국 땅에는 금관군(金官郡)을 설치함>

535년, 건원(建元)이란 연호(年號)를 쓰니 이는 신라 최초의 독자적인 연호이다.

536년 정월, 관리들이 외직(外職)에 나갈 때 가족을 대동하고 가는 것을 허락했다.

540년 7월, 왕이 승하하자 시호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

법흥왕은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하며, 애공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에게는
왕위를 이을 왕자가 없어 그의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김입종(金立宗)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신라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진흥왕(眞興王)이다.
김입종은 조카인 법흥왕의 딸과 혼인하여 진흥왕을 낳았으니 왕족들의 족내혼(族內婚)이 성행
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신라 최초로 율령을 반포했으며, 이차돈을 통해 불교를 공인했다. 그리고 가락국을 정벌
해 낙동강 하류로 진출했고, 외직에 나가는 관리에게 가족 동행을 허가하였으니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으로 왕권이 한층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보통 가족은 인질로 왕경(王京)에 두고
가야했음>


▲ 법흥왕릉의 앞모습

▲ 왕릉 부근에서 발견된 돌
그냥 이곳에 널부러진 돌은 아닌 듯 하며, 무열왕릉처럼 봉토 밑에
호석 시설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 법흥왕릉과 속세를 이어주는 소나무 숲길
왕릉은 작지만 그곳으로 통하는 숲길은 왕릉의 품격과 옛 무덤의
신비로움까지 품을 수 있도록 잘 가꾸어져 있다.


※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① 경주까지 버스 이용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버스가 5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성남, 부천, 수원, 춘천, 청주, 세종시에서 경주행 직행/고속버스 이용
* 대구(북부, 서부, 동부, 동대구), 부산(노포동, 사상), 울산, 포항, 창원(마산), 전주, 광주
, 진주, 순천, 강릉, 동해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철도 이용
* 서울역과 광명역, 천안아산역, 오송역, 대전역에서 신경주역 경유 부산행 고속전철 이용
* 청량리역, 원주역, 영주역, 동대구역, 부전역, 태화강역에서 경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③ 현지교통
* 경주고속터미널(경주시외터미널에서 도보 2분)과 경주역(성동시장)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
, 300-1, 304번을 타고 효현교 하차. 효현동 방면 외외길을 따라 들어간다. 효현동3층석탑까
지는 도보 20분, 법흥왕릉은 도보 25분
* 신경주역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번을 타고 효현다리 하차
④ 승용차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까지 접근 가능)
* 경부고속도로 → 건천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건천읍에서 경주방면 4번 국도 → 광명3거
리에서 경주대 방면 → 와상교를 건너 외외길로 우회전 → 효현동(법흥왕릉, 3층석탑)

★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주차장은 따로 없으므로 길가나 빈 공간에 알아서 주차
* 법흥왕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63


 


법흥왕릉을 끝으로 효현동에 대한 볼일은 끝났다. 왕릉 주변 잔디밭에 앉아 속세에서 사온 간
단한 먹거리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그날의 마지막 답사지인 율동(두대리) 마애불로 길을 재촉
했다. 그곳은 이미 오래 전에 가본 기억이 있지만 너무 빛바랜 옛날이라 여기까지 온 김에 오
랜만에 친견하기로 했다.
여기서 율동(栗洞) 마애불로 갈려면 우선 효현교로 다시 나가야 된다. 효현교를 건너 8분 정도
가면 율동인데,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 옛 율동역이 있던 중앙선(서울↔경주) 철로와 경부고속
도로의 아랫도리, 그리고 두대마을을 차례로 지나 벽도산의 품으로 20분 정도 파고 들면 깊은
산골에 박힌 율동 마애불이 모습을 비춘다. 마애불까지는 이정표가 잘 되어있고 길도 잘 닦여
져 있어 방황할 염려는 없다.


▲ 옛 율동역을 지나는 중앙선 철로 (경주 방면)
경주와 건천 사이에 있던 율동역(栗洞驛)은 오래 전에 녹아 없어지고 그 흔적만 아련히
남아있다. 서울 청량리역을 비롯하여 포항과 동대구, 부전, 강릉으로 가는 열차가
외마디 기적소리를 남기며 이곳을 스쳐간다.
(중앙선 옆으로 보이는 차량들의 행렬은 국가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 옛 율동역을 지나는 중앙선 철로 (영천 방면)

▲ 녹음이 우거진 율동 마애불 가는 길
마애불 아래까지 길이 닦이고 주차장이 깔려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배려했다.


마애불 주차장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율동 마애불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근래에 터를
닦은 성주암(聖主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나온다. 산신각(山神閣)과 심우실이라 불리는 기와집
이 전부로 산신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인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 심우실(尋牛室)이라 불리는 성주암의 중심 건물
심우실은 'ㄱ'모양의 기와집으로 법당(法堂) 겸 요사(寮舍)의 역할을 한다.
허나 불전(佛殿)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여염집 분위기로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 절 뒤쪽에 자리한 율동 마애불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다


 

♠ 신라 후기에 조성된 수려한 마애불(磨崖佛)이자 벽도산의 오랜 은인(隱人)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두대리 마애석불)
- 물 122호

▲ 율동 마애불 - 마치 환영(幻影)처럼 그 모습을 은은하게 비춘다.

경주 벽도산(碧桃山, 424m) 동쪽 자락에는 벽도산의 은인(隱人),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이하
율동 마애불)이 조용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 마애불은 소금강산(小金剛山)에 안긴 굴불사지(掘佛寺址) 4면석불(보물 121호)의 양식을 그
대로 계승한 신라 후기 석불로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에 세
우고, 좌우에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협시(夾侍)로 세웠다.

가운데에 자리한 아미타불은 높이 2.5m로 머리가 상당히 커 보인다. 다른 부분은 얕음새김으로
처리했지만 머리는 돋음새김으로 크게 돋게 새겼기 때문이다. 머리에는 육계<무견정상(無見頂
相)>가 두툼히 솟아 있는데, 이는 굴불사지 석불과 비슷하다. 얼굴은 볼이 풍만하게 돋았고 미
소가 은연히 드리워져 있으며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어 그의 정체가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다. 발은 앞으로 내밀지 않고 옆으로 반듯하게
벌리고 있으며, 어깨는 당당한 편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덮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하고 있다.

◀ 측면에서 바라본 율동 마애불

아미타불 왼쪽의 관음보살은 아미타불보다 덩치가 작다. 2m 남짓의 키로 움푹 들어간 허리선과
풍만하게 튀어나온 엉덩이가 눈길을 끄는 날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다. 몸매의 굴곡이 진하게
드러나 있으며, 발은 옆으로 벌리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 위로 올려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에는 정병<政柄, 혹은 보병(寶甁)>을 들고 있어 그가 관음보살 누님임을 알 수 있
다. 게다가 몸매도 영락없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조그
만 얼굴은 두 눈이 형체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상태는 별로 안좋다.

아미타불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경례를 하는 듯한 모습이며, 전체적인
형태는 관음보살과 비슷하다. 키는 2m 남짓으로 얼굴 부분이 다소 마멸된 것 외에는 건강 상태
는 괜찮다. 이들 불상은 머리 뒤로 두툼하게 표현된 동그란 두광(頭光)을 가지고 있으며, 두광
에 표현된 당초(唐草)무늬 등이 지긋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섬세하게 남아있다. 몸 뒤에는 신
광(身光)이 얇게 표현되어 그들을 빛나게 한다.

이들은 굴불사지 석불과 기본적으로 같지만, 풍만함이나 발의 모양, 옷주름 모양 등이 달라 조
성시기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 도드라지게 새겨진 아미타불의 얼굴

율동 마애불 부근에는 '벽도산석불입상'과 '천창산(天倉山)선각마애불' 등이 있어 율동 마애불
을 중심으로 벽도산 일대도 조촐하게 불국토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전에 왔을
때는 인근 능선에서 벽도산 석불입상을 본 듯 한데 기억이 벌써부터 희미하다. 율동 마애불은
인지도가 낮아 속인들의 발길은 적지만 경주 답사 경력이 어느 정도 되는 이들은 왠만큼은 아
는 곳이다.

마애불 앞에 3배의 예를 올리며 살짝 약소하게나마 소망을 들이밀어 본다. 신라 석공(石工)들
의 체취가 담긴, 비록 그들은 사라지고 윤회(輪廻) 사상에 따라 지금은 다른 존재로 살고들 있
겠지만 석불 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며 중생을 맞는다. 불상 주변에는
푸른 이끼가 피어 있지만 마애불의 위엄 앞에 더는 어쩌지 못하고 적정한 간격으로 그들과 동
거를 한다.
바위가 서쪽을 향하고 있고, 불상을 둘러싼 광배(光背)가 바위에 일정한 홈을 파준 탓에 장대
한 세월이 흐르고 자연의 집요한 괴롭힘 앞에서도 당당하게 건강을 누리며 살고 있음이 참 다
행이라 하겠다.

율동 마애불을 끝으로 소소하게 즐긴 늦가을 경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 경주고속터미널(경주시외터미널에서 도보 2분)과 경주역(성동시장)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
, 300-1, 304번을 타고 율동 두대마을입구에서 하차.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두대길을 따라 도
보 25분
* 신경주역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번을 타고 율동 두대마을 하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마애불까지 접근 가능)
① 경부고속도로 → 건천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건천읍에서 경주방면 4번 국도 → 광명3거
리에서 직진 → 율동에서 마애불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 → 율동 마애불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율동 산60-1 (두대안길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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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석불, 보리사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보리사 마애석불)

 


경주 남산 나들이 (동남산 미륵곡, 보리사)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신라(新羅) 1,0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땅 경주(慶州), 그 두 자를 들으면 나도 모
르게 가슴이 시려온다. 경주는 밤하늘에 흐르는 별만큼이나 온갖 문화유산이 반짝이고, 융
단처럼 부드러운 잔디의 잎파리만큼이나 깃들여진 신화와 전설이 속삭이는 마음의 고향 같
은 곳이다.

경주는 늘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곳이며, 나에게 늘 정신적으로나 지적으로 아낌없는 포
만감을 안겨주는 풍요로운 곳이다. 하지만 그만큼 부담이 큰 곳 또한 경주이다. 그곳에 서
린 문화유산을 개미목보다 짧은 지식과 하찮은 작문 솜씨로 감히 다룬다는 것이 은근히 두
렵고 떨려 주저한 적도 적지 않았다. 허나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도 그만큼 많이 찾은 곳이
또한 경주이다.

경주 땅 한복판에는 이름도 친근한 남산(南山, 468m)이 길게 누워있다. 바로 옛 금오산(金
鰲山)으로 경주는 물론 신라에서도 꽤 비중이 높아 '남산에 오르지 않고선 경주를 봤다고
우기지 마라~!'
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을 정도로 경주의 필수 답사 코스로 꼽힌다.

신라의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장(나정, 서출지, 포석정)을 넉넉히 품고 있으
며, 신라의 많은 제왕(박혁거세, 일성왕, 정강왕 등)이 그의 품에 앞다투어 잠들어 있다.
게다가 골짜기가 깊고 기암괴석이 만물상을 이루는 등, 자연미도 풍부하며, 남산을 불국토
(佛國土)로 여긴 신라 사람들이 여기저기 빚어놓은 불교 문화유산이 아낌없이 함축되어 있
는 그야말로 보물의 산이다.
남산에는 40여 곳의 크고 작은 골짜기가 있다. 그 골짜기에 깃들여진 절터만 100곳이 넘으
며, 80여 개의 불상, 70여 개의 석탑 등이 살아 숨쉬고 있어 그야말로 거대한 야외 박물관
을 이룬다. 그러다보니 남산 전체가 사적 31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처럼 뫼 전체가 통
째로 사적으로 지정된 예는 오로지 이곳이 유일하다. (낭산 등의 조그만 산은 제외)
남산은 위치상 통일전과 보리사가 있는 동남산, 포석정과 배리삼존불, 삼릉이 있는 서남산
(西南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번에 문을 두드린 곳은 동남산(東南山) 구역 보리사이다.

동남산 밑에는 갯마을이란 시골 마을이 있다. 그 옛날에 형산강(兄山江) 나룻배가 여기까
지 들어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 입구에는 보리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고, 마을
남쪽에는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이 넓게 자리를 닦고 있어 동네가 온통 푸르다. 토함산(
吐含山)에서 발원한 남천(南川)은 동남산 주변을 부드럽게 감싸돌며 '배반평야'라 부르는
너른 평야를 촉촉히 어루만진다.

걷는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조용함이 깃든 갯마을을 벗어나면 대나무로 창창한 오르막길이
나온다. 그 길의 끝에는 미륵곡 석불의 거처인 보리사가 자리해 있다. 절까지 걸어서 12분
정도 걸리는데, 보리사를 중심으로 남천으로 흐르는 계곡을 미륵골(彌勒谷)이라 부른다.


▲  대나무숲이 터널을 이루는 보리사, 미륵곡 가는 길
남산이 베푼 산바람이 이곳을 스치면서 대나무의 향연이 그윽히 울려 펴진다.

▲  보리사 밑에 자리한 부도와 때깔이 고운 비석들


♠  소나무 숲에 터를 돋군 조그만 산사, 남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불
미륵곡 석불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 남산 보리사(菩提寺)

남산에 100곳이 넘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온전하게 법등(法燈)을 이어온 절은 하나도 없는 실정
이다. 지금 절들은 근래 옛터에 다시 지은 것들이며 내가 찾은 보리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동남산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보리사는 비구니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으로 불국사(
佛國寺)의 말사(末寺)이며, 남산에 있는 절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절의 창건시기와 구체적인 사적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장대한 세월에 묻히
고 역사는 산산이 흩어져 온전한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
라 헌강왕(49대, 憲康王)과 정강왕(50대, 定康王)의 능이 보리사 동남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경내에 석조여래좌상과 복원된 3층석탑이 있어 신라 때 절임을 가늠케 할 뿐이다. 허나 정강왕
릉과 헌강왕릉의 위치도 확실한 것이 아니라서 이곳이 신라 때 보리사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
五里霧中)이다.

현재 보리사는 1911년 포항 보경사(寶鏡寺)에서 온 박덕염(朴德念) 비구니가 세운 것으로 절단
되어있던 미륵곡 석불의 머리와 광배를 이어 붙였으며, 1932년에는 남법명(南法明) 비구니가 중
수했다. 1977년 추묘운(秋妙雲)이 주지로 머물면서 3~4년에 걸친 불사 끝에 현재의 면모를 지니
게 되었다. 원래는 지금보다 약간 위쪽인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주변이 경내 중심이었으나 1981
년 지금의 자리로 약간 내려왔다.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산신각, 범종각, 육화당 등 6~7동의 건물을 지녔으며, 비구니 사찰이
라 경내는 깔끔하고 단아하다. 대웅전 앞뜰에는 잔디를 곱게 입혔고 그 사이로 돌을 심어 각 건
물을 이어주는 돌길을 내었다. 자투리공간에는 온갖 화초를 심었으며, 여승의 보살핌을 받은 꽃
들은 한참 꽃망울을 피워 그들의 은혜에 화답한다.


▲  솔내음이 깃든 경내 뒤쪽 부분 (사진 중앙 석불이 미륵골 석조여래좌상)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남산에서 가장 우수한 명품 석불로 꼽히는 석조여래좌상이 있으며, 경내에
서 조금 떨어진 남쪽 바위에 마애석불이 있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곳에 오르면 배반평야와 낭산(狼山), 토함산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비
록 높이는 낮지만, 꽤 높은 곳에 올라 천하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절을 에워싼 싱그러운 소나무의 솔내음과 아늑하고 조용한 산사 분위기, 그리고 미륵곡 석불의
인자함과 우아함이 배여 있는 보리사, 속세에 찌든 마음의 여유를 찾기에 이만한 곳도 없을 것
이다.


▲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에 바라본 보리사 경내

※ 남산 보리사 찾아가기 (2015년 10월 기준)
① 경주까지
* 서울역, 광명역, 천안아산역, 대전역에서 부산행 경부선 고속전철 이용 (신경주역 하차)
* 청량리역,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경주, 부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1일 2회 운행)
* 동대구역, 부전역, 해운대역, 태화강역에서 경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부천, 성남, 수원, 춘천, 원주, 청주, 전주, 구미, 안동, 창원, 대구(동
  부, 서부), 부산, 울산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 경주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경주우체국)에서 11번 시내/좌석버스
  를 타고 갯마을 하차, 도보 12분
* 신경주역에서 50, 51, 60, 61, 70, 700번 시내버스를 타고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이나 경주역
  (경주우체국)에서 11번 버스로 환승
* 보문관광단지와 불국사, 불국사역에서 10번 시내버스를 타고 갯마을 하차
② 승용차 (경내까지 진입 가능)
* 경부고속도로 → 경주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고운교 직전에서 문천길로 우회전 → 화랑교
  직전, 갯마을에서 우회전 → 보리사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67 (갯마을길 41-30 ☎ 054-748-0794)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

보리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1981년에 지어진 것이다. 불단(佛壇)에는 금동석가3존불과 후
불탱화가 있으며 그들이 발하는 금빛에 가히 눈이 멀 지경이다. 석가3존불 우측에는 육환장(六
環杖)을 든 지장보살의 보금자리가 있으며, 좌측벽에는 신중도(神衆圖)도 걸려있다.

아무도 없는 대웅전의 고요함을 살짝 깨뜨리며
안으로 발을 들여 향을 피우고 석가3존불에게
예불을 올린다. 예불이라고는 하지만 개인적인
소망도 살짝 넣어 그에게 내밀었다. 소망이 과
연 접수가 될련지는 미지수이지만 예불을 한 것
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해진다.

석가3존불 우측에는 나의 시선을 붙잡아 맨 귀
여운 존재가 있었다. 바로 연꽃을 든 동자상이
다. <거의 동녀(童女)처럼 보임>
그는 자신의 키에 2배나 높은 연분홍 연꽃을 들
고 있는데, 부처의 법을 상징하는 조그만 코끼
리가 그 곁에 자리해 소소하게 동심을 자아낸다.
 

◀  연꽃을 든 동자상과 코끼리상


▲  보리사 3층석탑

대웅전 뜨락 우측에는 누렇게 바랜 3층석탑이 서 있다. 보통 법당 정면에 탑을 세우지만 보리사
는 다소 우측으로 치우쳐진 특이한 배치를 취했다.
이 탑은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탑재를 끼워맞쳐 복원한 것이다. 없는 부분은 
새롭게 때웠는데,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을 얹힌 전형적인 신라 후기 탑으로 하얀 빛
의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하고 오랜 세월의 때가 가득하여 제법 고색의 기운을 드러낸다.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자비롭고 우아한 표정에 가슴을 설레게 하는
신라시대 명품 불상,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보물 136호


보리사 경내 뒤쪽, 담을 두르고 있는 한층 높은 곳에 보리사에 든든한 밥줄, 미륵곡 석조여래좌
상(석불좌상)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동남산을 대표하는 석불로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1,300년이란 나이가 정말 무색할 정도로 정정한 모습을 지녀 보는 이로 하여
금 놀라움을 선사한다. 그 장대한 세월 동안 그를 괴롭힌 존재가 한둘이 아닐진데 어찌 저리 멀
쩡할 수가 있을까?
그의 건강비결이 사뭇 궁금해진다. 물론 그에게도 적지 않은 시련은 있었다. 그를 관리하던 절
보리사로 단정지울 순 없음―
은 거친 세월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현재 보리사가 터를 닦기 전에
는 불상의 머리와 광배가 몸통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품이 있는 신라의 귀족 여인을 모델로 한 것을 아닐까? 우아한 기품과 인자함이 서린 그의 표
정은 보기만 해도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기분 같아서는 그를 보쌈하여 우리집에 갖다놓고 싶지
만 그를 업다가는 자칫 내가 그에게 깔려 골로 갈 상황이니 감히 그러지도 못한다.

신라의 미소로 손색이 없으며, 남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으로 내세워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
는 미륵곡 석불은 신라 불상의 백미(白眉)라 일컬어지는 토함산 석굴암(石窟庵) 본존불과 크게
대비된다. 석굴암 본존불은 미소라기보단 나 같은 범인(凡人)들은 차마 접근하기 조차 어려운
위엄이 서려있다. 그 앞에서는 차마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기 바쁠 것이다. 그에 반해 미륵곡 석
불은 그 누구라도 기꺼이 안아주고 보듬어 줄 것 같은 대인적인 느낌이 강하게 밀려온다.

그가 앉은 연화대좌(蓮花臺座)도 그를 닮아서인지 돌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 아름답다. 마치 살
아있는 연꽃이 하늘로 향해 꽃봉오리를 펼쳐보이는 모습은 진짜 연꽃도 시샘할 정도이다. 대좌
높이는 약 1.35m로 그 밑부분에는 땅을 향해 꽃잎을 펼친 연꽃이 묘사되어 있다. 석불이 잠시
마실을 나간 사이에 살짝 앉아보고 싶지만 그가 좀처럼 일어날줄 모르니,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는 그는 앉은키 높이가 2.4m로 그의 머리는 나발(螺髮)
이다. 부처가 인도 사람이다보니 인도 사람의 머리스타일을 취한 것이다.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
가 큼지막하게 솟아 있다.
내면에서 우러나온 미소가 만면에 가득한 그의 얼굴을 살펴보면 가늘고 긴 눈썹 아래로 지그시
뜬 두 눈이 속세를 바라본다. 넓직한 이마 가운데로 둥그런 백호가 있으며, 코는 오목하고 적당
한 크기이다. 미소가 서린 입은 정말 단아한 모습으로 정말 훔치고 싶은 입술이다. 볼은 두툼하
고, 다소 두터워 보이는 목에는 삼도가 획 그어져 있으며, 그의 몸을 걸친 법의(法衣)는 주름이
섬세히 표현되어 있다. 다리 위에 사뿐히 놓은 그의 왼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상징한다.

석불이 기대고 있는 광배(光背)는 높이 2.7m, 폭 1.9m로 석불과는 다른 돌이다. 광배 역시 화려
함의 극치로 당초(唐草)무늬와 보상화문(寶相華紋), 화불 등이 마치 살아있는 줄기를 보듯 유려
(流麗)하게 묘사되어 눈길을 강하게 잡아 맨다.

미륵곡 석불에는 또 다른 불상이 교묘하게 숨어
있다. 분명 겉으로 봐서는 하나의 석불인데, 또
어디에 불상이 있는 것일까? 바로 광배 뒤에 새
겨진 마애불(磨崖佛)이 그 답이다. 자세히 보면
선으로 처리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두 불상이 등을 맞대며 동거동락하는 신선한 형
태로 광배 뒤쪽에도 불상이 있는 경우는 이 땅
에서는 그 예가 거의 없어 매우 신선하게 다가
온다.
광배에 깃들여진 마애불은 약사여래(藥師如來)
로 그의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다. 그런 이
유로 광배 앞에 있는 석불을 서방정토(西方淨土
)의 주인인 아미타불로 보기도 한다.

얼굴 부분은 마모가 심해 확인하기 어려우며 전
체 높이는 1.3m다. 미륵곡 석불과 마찬가지로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있다. 중생들의
병을 치료할 약이 담겨져 있을 약합을 소중히
간직한 약사불은 동방세계의 주인이다.

석불 부근에는 옛 보리사의 흔적으로 보이는 탑재 일부와 돌덩어리가 놓여져 있으며, 석불 주변
은 소나무가 울창하다.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인 소나무는 솔내음으로 불상 주변을 깨끗히 정화해
주며 그에 대한 흠모의 뜻을 표한다.


♠  보리사의 숨겨진 신라 후기 마애불
보리사 마애석불(磨崖石佛)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193호

▲  바위에 살짝 깃들여진 보리사 마애석불

보리사 경내를 둘러보고 부근에 숨겨진 마애석불을 보고자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마애불을
온몸으로 알리는 이정표의 안내로 청명한 기운이 서린 대나무 숲길을 지나 4~5분 정도 가면 이
정표가 없는 갈림길이 나그네의 마음을 혼돈으로 밀어넣는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마애불이 나
올까? 지나가는 사람도 없으니 순전히 나의 판단에 의지해야 된다. 나름 직감이 좋기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조금씩 늙어감에 따라 그 직감도 종종 헛탕을 칠 때가 있다.
여기서 확률은 반반. 길의 상태를 보니 오른쪽 길은 가파르고 폭도 가늘어 사람의 왕래가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러니 정답은 아닐 듯 싶다. 그에 반해 직선 길은 오른쪽 길보다 폭도 굵고 사람
들의 왕래도 조금은 있어 보였다. 하여 직선 길에 모든 것을 걸고 그만 직진을 해버렸다. 허나
그게 함정이었다.


▲  마애석불로 가는 대나무 숲길

마애불을 만난다는 생각에 기대를 잔뜩 품으며 열심히 길을 재촉했으나 아무리 가도 나올 생각
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깊이 들어설 수록 길의 상태도 우울해진다. 그런데 어디선가 까마귀 1
마리가 나타나 요란하게 까악까악~~!을 외치며 내 허공을 심상치 않게 맴도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내 머리 위에서 계속 맴돌며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이 수상하다. 내가
그의 영역을 침범하여 뚜껑이 열려 경고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뜻일까?
인적도 없는 궁벽한 산길에서 홀로 까마귀의 난데없는 태클을 받으니 오싹한 기분이 나를 엄습
하고 순간 염통이 쫄깃해진 나는 심상치 않다 여겨 서둘러 길을 돌렸다.

발걸음을 빨리 하여 다시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그래도 마애불에 대한 미련은 여전하여 비탈진
왼쪽(진행 방향 기준) 오르막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방금 전만 해도 내 상공을
맴돌던 까마귀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어쨌든 까마귀의 압박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쉬
며, 산길을 오르니 그 길의 끝에 보리사 마애석불이 잔잔한 미소를 드리우며 나를 기다리고 있
는 것이 아닌가?
아까 그 까마귀는 혹여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서자 이를 알리고자 목을 터지라 소리를 질렀던 것
은 아닐까? 그는 사람 말을 할 줄 모르고, 나는 까마귀 말을 모르니 엉뚱한 길로 빠진 나를 깨
우치고자 까악~ 소리를 높여 갔고, 다시 길을 돌려 맞는 길로 들어서니 그제서야 소리를 접고
사라진 것이다. 물론 그의 영역을 침범하여 나를 쫓아내고자 그리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목적
이야 어찌되었든 까마귀의 경고로 마애불을 찾았으니 그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설마 마애불이
전설처럼 까마귀로 현신하여 길을 알려준 것은 아니겠지? 허나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면 그런
전설이 나돌지도 모르겠다.

보리사에서 남쪽으로 10분 정도 떨어진 가파른
산자락에 절벽을 이룬 커다란 바위가 있다. 그
바위에 바로 결가부좌를 튼 마애석불이 아늑히
들어앉아 속세를 굽어본다.
오르기도 쉽지 않은 비탈진 곳에 숨은 이 불상
은 미륵곡 석불보다 나중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
는 신라 후기 석불로 바위벽을 얕게 파서 불상
의 광배로 삼은 다음 1.1m 정도의 작은 불상을
돋음새김으로 새겼다.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가 두툼히 솟아있고, 머리
칼은 꼽슬인 나발이다.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
진 눈썹 아래로 지그시 뜬 눈이 있으며, 다물어
진 입술에는 그만의 미소가 잔잔히 새어 나온다.
길쭉한 두 뒤는 어깨에 닿으며, 목에는 삼도가
굵직하게 그어져 있다. 법의(法衣)는 그의 몸을
덮고 있으며, 옷주름의 선이 부드럽다. 전체적
으로 위쪽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선의 굵기가
희미해지고 있으며 아랫도리는 선명도가 좀 낮
다.

그가 앉아있는 대좌는 하늘을 향해 잎을 벌린 앙련(仰蓮)이 희미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불상 앞
은 조금의 평지도 허락치 않는 급경사로 절을 하거나 예불을 올리기가 심히 마땅치 않다. 

불상 앞에 이르면 남쪽으로 배반평야가, 동쪽으로 낭산이 두 눈에 박힐 정도로 조망이 좋다. 마
애불의 존재를 아는 이가 적어 여기까지 기를 쓰고 올라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들 보리사 경
내에 있는 미륵곡 석불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석불의 미소에 마음이 즐거워지는 곳 보리사, 그의 건강과 단아한 미소가 미륵불이 온다는 56.7
억년 이후까지 지속되기를 소망하며 본글을 마무리 짓는다.


▲  마애석불에서 바라본 배반평야와 경주 남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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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0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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