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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9.04 황량함과 재건의 공존, 경주 서라벌 절터 나들이 ~~~ (감산사, 연지암, 활성리석불입상, 숭복사)
  2. 2016.11.05 늦가을 경주 나들이 ~~~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벽도산,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3. 2015.10.24 경주 남산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석불, 보리사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보리사 마애석불)

황량함과 재건의 공존, 경주 서라벌 절터 나들이 ~~~ (감산사, 연지암, 활성리석불입상, 숭복사)

 

 

' 여름맞이 서라벌 경주 나들이 '
(감산사, 숭복사)

▲  감산사지 3층석탑


 

여름 제국이 막 기지개를 켜던 6월의 한복판에 신라의 향기가 지독하게 서린 서라벌 경주
(慶州)를 찾았다.
신라 왕릉의 백미(白眉)로 손꼽히는 괘릉(掛陵)을 둘러보고 그 후식거리로 감산사와 숭복
사를 둘러보고자 괘릉안내소 문화유산해설사(이하 해설사)에게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감
산사는 약 20분, 숭복사는 더 들어가야 된다고 그런다. 하여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미
답처(未踏處)에 대한 설레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을 품은 채, 다시 길을 떠났다.

괘릉을 지나면 바로 3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은 감산사, 오른쪽은 숭복사로 이어진다. 3거
리에 감산사 이정표가 있지만 숭복사는 거리가 멀어서 그런 것은 없다. 나는 감산사를 먼
저 둘러보고 숭복사를 거쳐 속세(俗世)로 나갈 생각이라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괘릉초등학교를 지나 멀리 남월산<南月山, 토함산 남쪽 산>의 관찰을 받으며 한적한 시골
길을 거닌다. 오르막도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고, 드넓은 논두렁과 밭두렁이 펼쳐진 그야
말로 목가적(牧歌的)인 풍경의 연속이라 가는 길이 그리 지루하지가 않았다. 그렇게 20분
을 가니 산 밑에 절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그 입구에는 절의 정체를 알리는 표석이 자리
해 있는데, 그의 피부에는 감산사 3자가 쓰여 있다.


▲  감산사 표석과 2층 요사

표석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ㄱ'자 모양의 기와집이 나온다. 이 집은 승려
와 신도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로 거의 한옥 민박이나 펜션 같은 모습이다. 

요사를 지나면 경내로 인도하는 길이 2갈래가 펼쳐진다. 어느 길로 가던 목적지는 같지만
연못을 끼고 가는 길이 더 아기자기하다. 돌과 흙으로 축대(築臺)를 쌓고 그 위에 마련된
연못은 네모난 모습으로 연꽃들이 막바지 와신상담(臥薪嘗膽) 중이라 소소한 연잎들만 가
득하다. 이제 보름 정도 지나면 연꽃의 향기가 눈과 코를 제대로 마비시킬 것이다.

연못에서 들꽃들이 손짓하는 계단을 오르면 대적광전이 있는 감산사 중심에 이른다.


▲  감산사 연못

▲  감산사의 중심지로 인도하는 돌계단
옛 감산사의 주춧돌로 만든 계단 너머로 법당인 대적광전이 슬쩍 머리를 내민다.


 

♠  감산사(甘山寺) 둘러보기

▲  감산사의 법당(法堂)인 대적광전(大寂光殿)

감산사는 토함산의 남쪽 줄기인 남월산 서쪽 자락에 안긴 절이다. 겉으로 보면 근래에 창건된
절처럼 보이지만 겉보기와 달리 매우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이 절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재위 702~737) 시절에 김지성(金志誠, 652~?)이 부모와 가족들,
아내의 명복을 빌고 제왕(帝王)의 만수무강을 빌고자 가산을 털어서 지은 절이다. 이때 감산
(甘山)에 있던 자신의 장전(莊田)을 내놓아 그 자리에 절을 세웠는데, 그 연유로 감산사라 불
리게 되었다.
절을 세운 김지성은 문신(文臣)으로 아버지는 일길찬(一吉粲) 김인장(金仁章), 어머니는 관초
리(觀肖里)부인이다. 그의 어린 시절과 중년 시절에 관한 기록은 없으며, 67세란 적지 않은
나이에 집사부(執事部) 시랑(侍郞)에서 물러났는데, 나름대로 정치 개혁을 꿈꾸다가 지략(智
略)이 얕아 실패하고 자칫 형벌을 받을 뻔했다고 한다. 아마도 형벌 대신 은퇴를 권유받아 시
랑에서 물러난 듯 싶다.
어쨌든 벼슬에서 물러나 719년 2월 자신의 사유지에 감산사를 짓고 현재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에 가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81호)과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82호)을 봉안했다. 미륵
보살 광배(光背) 뒤에 창건 관련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감산사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이것 마저 없었다면 감산사의 존재 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참고로 그 명문은 신라
의 대학자 설총(薛聰)이 썼다고 전한다.

또한 은퇴 이후, 미륵보살의 유가론(瑜伽論)을 연구하고 당(唐)나라에서 건너온 노장사상(老
莊思想)에 크게 빠져들었다. 특히 5천 언에 이르는 노자 도덕경(道德經)을 늘 펼쳐 읽었다고
하니 그의 사례를 통해 신라 귀족들 사이에서 노장사상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김지성이 애지중지 가꾸던 감산사는 김지성 일가의 원찰(願刹) 노릇을 하며 후손들이
정성껏 관리했으나 마땅한 사적(事蹟)은 전해오지 않으며, 고려 이후 쇠퇴의 길을 걷다가 조
선 중기 때 완전히 망했다고 한다.
이후 절터만 황량하게 남게 되었으며, 김지성이 봉안한 석불들은 절이 망하는 과정에서 죄다
땅속에 묻혀 어둠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3층석탑과 석등 대석 등은 비록 생매장은 면했으나
이리저리 뒹구는 신세가 되었으며, 절터는 논밭으로 변해 감산사의 존재는 말끔히 잊혀져 갔
다.

그러다가 1915년경 왜인(倭人)들이 우연히 절터 논밭에서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캐내면서 역사
속에 사라진 감산사의 존재가 다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허나 이들 불상은 서울로 강
제로 옮겨지고 절터는 다시 방치된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비구니들이 들어와 옛터 위에 조그
만 건물을 지어 감산사를 칭했으며, 지금은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극락전 등 여러 건물이
경내를 이루면서 제법 절집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과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으며, 왜정(倭
政) 때 발견되어 서울로 소환된 석불 2개는 국보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절이 산 밑에 있을 뿐, 괘릉리의 너른 전답을 바라보고 있는 평지 절로 경내 건물에서 고색(
古色)의 내음은 맡아볼 수 없으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3층석탑 등 옛 석조물에서는 고색의
향기가 진동한다. 게다가 비구니 절이라 경내가 꽤 정갈하고 깔끔하며 아기자기하다.


▲  현란한 색채의 극치, 대적광전 내부

▲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318호

협시불(夾侍佛)도 없이 혼자 불단(佛壇)을 지키고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은 화강암으로 만든 신
라 후기 불상이다. 전체 높이는 약 1m로 얼굴은 딱히 표정은 없어 보인다. 눈과 코, 입, 머리
,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제대로 남아있으며, 머리는 깨져있던 것을 복원했고, 광배(光
背)와 대좌(臺座)는 새로 만들어 붙였는데, 고색의 때가 가득 입혀진 석불과는 달리 너무 대
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어깨는 듬직해 보이고, 두 손은 비로자나불이 좋아하는 지권인(智拳印)을 취하고 있는데, 이
는 근래에 보수한 것이다.
이 땅에 남아있는 비로자나불 중 거의 초창기 불상이며, 등에 조각된 띠매듭은 석불의 옷주름
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석불 앞에는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려 함일까? 그의 1/15도 안되는 조그만 석불을 갖다두어 마
치 어미와 새끼를 보는 듯 하다. 그의 뒤에는 고운 빛깔로 채색된 아미타후불탱(阿彌陀後佛幀
)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준다.

▲  꽃창살이 아름다운 극락전(極樂殿)

▲  대적광전 뒷뜨락

대적광전 뒤쪽에는 잔디가 입혀진 넓은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감산사터의 일부분으로 3층석
탑과 석등 대석, 옛 주춧돌이 자리를 지키며 까마득한 왕년의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만큼 감
산사의 전성기와 신라란 나라는 우리와 엄청 멀리 떨어진 시대이다.

3층석탑 북쪽 가장자리에는 특이하게도 네모난 원두막을 두어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그냥
빈터만 덩그러니 있는 것보다는 햇빛을 피할 수 있도록 저런 것이라도 만들어 약간의 자리를
채워넣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  감산사지 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5호

절터 동쪽에 자리한 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신
라 후기 석탑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65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는데, 1층 탑신은 약간의 상처가 있는 것 외에는 그런데로 온전하나 2층과 3층 탑신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완전히 사라져 세월 앞에 장사가 없음을 실감케 한다. 기백(幾百)이
넘는 세월 동안 폐허로 있던 절터에서 저 정도라도 건진 것도 그나마 다행이다.

탑 옥개석(屋蓋石)은 4단 받침이며, 추녀 부분이 위로 살짝 올려져 작은 새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탑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이 남아 있다.


▲  주인을 잃어버린 석등대석(石燈臺石)

3층석탑 인근에 화석(化石)처럼 박힌 석등대석, 꽃잎이 아래로 쳐진 연꽃 무늬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사실적인 모습을 자랑한다. 저기에 그럴싸하게 색깔만 입히면 정말로 연꽃이 따로
없을 것이다. 비록 옛 사람들이 조각한 연꽃 무늬지만 그에 대한 시샘 때문일까? 주변에는 꽃
들이 거의 없었다.
저 수려한 대석에 뿌리를 내린 석등(石燈)은 과연 어떠했을까? 석등의 모습이 거의 거기서 거
기지만 저 석등만큼은 왠지 특별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오늘도 오래 전에 가출한 석등을 애타
게 기다리며 화려한 연꽃잎을 펼쳐 보인다.


▲  바닥에 바짝 엎드린 석등대석과 주춧돌

▲  수습된 주춧돌들 (1)

▲  수습된 주춧돌들 (2)
저들이 받쳐들던 감산사의 옛 건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옛 터에 맞게 고스란히
남아있었더라면 짧은 상상력이라도 발휘해볼 수 있었을텐데, 한쪽에 수습해
놓아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만들었다.

▲  감산사 감로수(甘露水)
감로수란 말에 단단히 각인된 것일까? 물맛이 제법 달콤한 것 같다. 물을
바가지에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목마름에 잠긴 목구멍이 즐겁다며
쾌재를 부르짖는다.

▲  붉은 장미 옷을 걸친 초가 형태의 불연정(佛緣亭)

감산사는 원두막과 불연정 등의 초가를 갖추고 있다. 불연정은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벽 바깥
에는 장미꽃이 가득하여 마치 장미 옷을 걸친 듯, 운치를 가득 돋군다. 땅바닥에는 힘없이 떨
어진 장미꽃잎이 수북하게 쌓여있어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데, 장미가 제아무리 아름답다 해
도 그 역시 잠깐일 뿐.. 세월과 자연은 그 존재조차 희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이래서 세월이란
존재가 무섭다.

* 감산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6-2 (앞등길 117-20 ☎ 054-746-7096)


▲  바위 위에 자리를 편 조그만 석불
몸에 가득 피어난 세월의 때를 보니 제법 오래된 석불 같다. 이 석불은 근래
수습되어 없어진 머리를 새로 만들고 부분부분 손질하였다.


감산사에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숭복사로 가고자 왔던 길로 괘릉으로 나왔다. 날씨도 허벌나
게 덥고 지치기도 해서 다시 괘릉안내소에 얼굴을 들이미니 해설사(50대 후반 아줌마)가 반가
운 표정으로 벌써 2곳을 다 둘러봤냐고 그런다. 하여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이제 감산사 하
나 보고 왔다고 그러니 힘들겠다면서 잠깐 들어와 쉬었다 가라고 그런다.
그래서 안내소에 들어가 앉으니 참외와 사과, 시원한 매실차를 권한다. 마침 시장도 하고 해
서 고마움을 표하며 흔쾌히 섭취에 임했다. 그렇게 다과시간을 가지며 해설사와 괘릉과 감산
사, 숭복사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고, 화제(話題)는 점차 경주와 신라(新羅), 개인적인 이야기
까지 확대되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보니 2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갈 준비를 했지만 귀차니즘 발동으로 발길이 쉽사리 떠지질 않는다. 해설
사와의 이야기도 재미있던 터라 그런 마음은 더했다. 허나 그날 내 자신에게 내린 임무도 있
고 시간도 제법 흘러간 터라 이제 떠나야 된다. 해설사가 날씨가 덥다며 시원한 물을 제공하
니 그 물을 모두 마시고 아쉽지만 작별을 고했다. 그는 잘 보고 가라며 숭복사 가는 길을 알
려주었다.

괘릉을 나와 3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숭복사로 통한다. 중간에 햇갈리는 부분이 있긴 하지
만 그 길(신계입실길)을 따라 한없이 가다보면 숭복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거리를 대
충 헤아려보니 거의 2.3km 정도 된다. 이동 도중에 활성리마을에서 생각치도 못했던 연지암과
활성리석불입상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애타게 손짓을 하여 숭복사는 잠시 넣어두고 그 손짓
에 이끌려 연지암으로 들어갔다.


 

♠  신라 후기 석불을 간직한 조그만 암자, 연지암(蓮池庵)

▲  활성리석불입상의 거처, 연지암 대웅전(大雄殿)

감산사와 숭복사 중간에 자리한 연지암은 팔작지붕 대웅전과 2채의 요사(寮舍)가 전부인 그야
말로 손바닥만한 작은 절이다. 불국사(佛國寺)의 말사(末寺)로 이곳에는 신라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절터가 있었다. 물론 절의 자세한 정보는 전하는 것이 없다.

왜정 시절의 어느 날 김연지화(金蓮池花) 보살이 밭 가운데서 목탁소리가 들려오는 꿈을 꾸었
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기며 그 밭을 찾아 직접 파보니 석불이 하나 발견되었다. 그것이 바로
연지암의 보물인 활성리석불입상이다. 연지화는 그 불상을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우
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연지암이라 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왜경(倭警)이 무슨 심보인지 불상의 출처를 대라며 연지화를 괴롭혔는데, 갑
자기 왜경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꺼꾸러졌다고 한다.

어쨌든 활성리석불의 난데없는 등장으로 태어난 연지암은 그를 든든한 밥줄로 삼아 꾸준히 법
등(法燈)을 유지하고 있으며, 여전히 조촐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절 남쪽에는 나무가 약간
우거져 있고, 주변에는 경작지가 펼쳐진 평지 절이다.

* 연지암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활성리 378 (활성길 120-5, ☎ 054-744-7314)


▲  연지암 대웅전 내부

▲  대웅전 내 서쪽에 있는 활성리석불입상(活城里石佛立像)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6호

연지암의 법당인 대웅전은 1987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그 안에 이곳의 보물인 활성리 석불입
상이 깃들여져 있는데, 마땅히 중심 불단에 있을 줄 알았더만 불단에는 엉뚱하게도 금동(金銅
)으로 다져진 석가3존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정작 당사자는 서쪽 구석에 자리해 있는 것
이다. 지금의 연지암을 있게 해준 존재이건만 한참 후배들에게 밀려나 구석에 있는 것이다.
다소 이해가 가지 않지만 나름 사정이 있을 것이다.

이 석불은 신라 후기 불상으로 주형광배()를 갖추고 있다. 불상 높이는 153cm, 광배
높이는 190cm에 이르며, 광배에는 머리 주변의 두광()과 몸 뒤쪽의 신광()을 새기고
그 바깥쪽에 화염(火焰) 무늬를 새겼다. 얼굴은 다소 훼손되어 지워져 있으며, 귀가 유난히
길어 어깨에 닿는다. 왼손에는 무언가를 쥐고 있는데, 약합(藥盒)인듯 싶으며, 그게 맞다면
그는 약사여래(藥師如來)가 된다. 오른손에도 뭔가가 쥐어져 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머리 꼭대기의 무견정상은 꽤나 두꺼워 보이며,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다. 얼
굴이 좀 지워진 것 외에는 대체로 건강상태는 양호하다.

이렇게 연지암을 덤으로 둘러보고 숭복사로 길을 재촉했다. 숭복사입구에서 이정표의 안내를
따라 왼쪽(동쪽)에 조그만 농로로 한없이 들어서니 넓은 절터와 함께 그 위에 자리한 숭복사
가 모습을 비춘다. 감산사는 그나마 길이 쉽지만 숭복사는 괘릉 해설사와 이정표의 안내가 없
었으면 결코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다.


 

♠  숭복사(崇福寺)터 둘러보기

▲  숭복사터
절터 가운데에 나무가 솟아나 얇게나마 주변에 그늘을 드리운다. 저 나무는
이곳이 절터(금당터)인지도 모르고 대책도 없이 뿌리를 내렸으니 자연도
망각할 정도로 숭복사란 존재가 오랫동안 잊혀졌다는 뜻이다.


괘릉에서 도보로 거의 30분 이상 떨어진 말방리 구석에 자리한 숭복사는 괘릉과도 무척 인연
이 깊다.
괘릉의 주인을 속시원하게 밝혀준 이곳은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 이전에 파진찬(波珍
飡)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했다. 당시 이름은 곡사<鵠寺, 또는 동곡사(洞鵠寺)>였다.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시절에 왕이 능자리를 물색하자 신하들이 곡사 자리가 좋다며
추천했다. 이에 왕은 어찌 절에다 능을 쓰냐며 거절했다. 그러자 신하들이
'폐하(陛下), 절이란 자리하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며 어디를 가든지 어울리지 않음이 없어
재앙의 터를 능히 복된 마당으로 만들어 한없는 세월 동안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하는 것입니
다. 무덤이란 아래로는 지맥(地脈)을 가리고 위로는 천심(天心)을 헤아려 반드시 무덤에 사상
(四象)을 포괄함으로서 천대만대 후손에 미칠 경사를 보전하는 것이니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
다. 불법(佛法)은 머무르는 모양이 없고 예(禮)에는 이루는 때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자리함
이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 됩니다.
다만 청오자(靑烏子)와 같이 땅을 잘 고를 수만 있다면 어찌 절이 헐리는 것을 슬퍼하겠습니
까? 또한 이 절을 조사해보니 본래 폐하의 인척에게 속해 있던 것인바 진실로 낮음을 버리고
높은 데로 나아가며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꾀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릉으로 하여금
나라의 웅려(雄麗)한 곳에 자리잡도록 하고 절로 하여금 경치의 아름다움을 차지하게 하면 우
리 왕실의 복이 산처럼 높이 솟을 것이요. 저 후문(侯門)의 덕이 바다같이 순탄하게 흐를 것
입니다.
이는 알고는 하지 않음이 없고 각각 그 자리를 얻는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정(鄭)나라 자산
(子産)의 작은 은혜와 한(漢)나라 노공왕(魯恭王)이 도중에 그만둔 것과 더불어 견주어 옳고
그름을 따지겠습니까?. 마땅히 점괘에 들어맞는 말을 듣게 된다면 용신(龍神)이 기뻐함을 보
게 되실 것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원성왕은 곡사를 매입하여 능을 조성했으며, 절은 지금의 자리로 옮
겼다. 원성왕의 능자리 매입은
한국경제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다. 영토 전체가 제
왕의 땅이라는 이른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지배적이던 시절에 돈을 주고 그 자리를 매입했
기 때문이다.
얼마큼의 돈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잠들 자리이고, 그곳에 신라가 숭배하던 불교사원
이 있었으므로 적지 않은 재정이 지출되었을 것이다.

이후 경문왕(景文王)이 꿈에서 원성왕을 친견하여 곡사를 크게 중건하며 괘릉 수호와 원성왕
의 명복을 빌었으며, 헌강왕(憲康王) 시절에 대숭복사(大崇福寺)로 이름을 갈았다. 이상은 최
치원(崔致遠)이 숭복사비에 남겼다는 비문(碑文)의 내용이다.

신라가 망한 이후, 마땅한 사적은 전해지지 않으나 조선시대까지 그런데로 법등을 유지한 듯
싶으며, 조선의 배불(排佛) 정책으로 경영난이 닥치자 문을 닫고 소리없이 사라진 것으로 보
인다.

이후 이곳은 속세의 뇌리 속에 완전히 잊혀지면서 숭복사란 고유의 이름을 잃은 채, 그저 지
명 이름을 따서 '말방리(末方里)절터'란 이름으로 흘러내려왔다. 그러다가 1931년 입실소학교
에서 이곳으로 소풍을 왔는데, 그때 깨진 비편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있던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과 대조한 결과 이곳이 숭복사터임이 밝혀졌다. 그제서야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은 것이다. 또한 비석은 최치원이 쓴 숭복사비로 밝혀졌고, 비
석의 내용을 통해 경주김씨들이 문무왕릉(文武王陵)이라고 그렇게나 우기던 괘릉이 원성왕릉
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숭복사비는 2마리의 거북이 조성된 쌍귀부(雙龜趺)로 절터에서 수습되어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으며, 비석 조각은 13개가 발견되어 1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그 외에 기와조각과 주
춧돌 등이 다량으로 햇빛을 보게 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3층석탑 2기를 비롯해 금당터과 여러 석재(石材), 주춧돌
등이 남아있으며, '國寺大雄(국사대웅)'과 '蓋瓦大雄(개와대웅)'이 새겨진 평와(平瓦)와 금동
제 금구(金口)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근래에 승려들이 절터 옆에 건물을 짓고 숭복사를 칭하
며 아주 옛날에 끊긴 숭복사의 뒤를 잇고 있다. 지금은 건물 4~5동 정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불전(佛殿)의 품격과는 많이 떨어지는 건물이다. 그나마 저것도 힘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냥 절터만 덩그러니 있어 도난의 위험에 노출되어있는 것보다는 절터도 지키고 석탑도 지킬
겸, 조그만 절집이라도 곁에 있는 것이 숭복사터에게도 좋을 듯 싶다. 다만 욕심과 불사(佛事
)에 너무 눈이 멀어 절터를 훼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  숭복사터 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4호

금당(金堂)터 남쪽에는 옛 숭복사의 영화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3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있다.
서로가 닮은 쌍탑(雙塔)으로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형태인데, 감산사3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신라 후기 탑이다. 게다가 1금당 2탑 형식의 신라 후기 가람배치하고도 맞아떨어
진다.

동쪽 탑은 2층과 3층 탑신, 3층 옥개석이 없어졌고, 서쪽 탑은 2층 탑신이 온데간데 없다. 기
단은 이리저리 깨지고 닳아 그 틈을 이용하여 자연이 심어놓은 잡초가 둥지를 틀었다. 아무리
인간이 만든 것이 위대하다 한들, 자연 앞에서는 언제 사라질지 모를 모래성에 불과하다. 다
행히 탑이 자연의 일부가 되버리기 전에 절터를 수습하여 이렇게나마 숨을 쉬게 된 것이다.

윗층 기단에는 부처의 법을 수호하는 존재인 팔부신장(八部神將)이 새겨져 있는데, 세월의 때
가 가득 끼었지만 알아보는데 별로 어려움은 없다. 1층 탑신에 문(門)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
며, 옥개석은 4단의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  숭복사터 동3층석탑
세월이란 꺼지지 않는 불에 형편없이 녹아내린 듯한 모습이다.

▲  숭복사터 서3층석탑
동탑보다는 낫지만 여기저기 상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  3층석탑 기단에 깃든 팔부신장들 ▼


▲  숭복사 금당터

탑 북쪽에는 두툼하게 솟은 금당터가 있다. 세월의 장대한 흐름에 죄다 휩쓸려 가고 터만 황
량하게 남은 금당의 옛 모습은 어떠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잡초에 쌓여 간신히 주춧돌을
내밀고 있으니 세상살이는 그야말로 무상한 모양이다.
이렇게 하여 감산사와 숭복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숭복사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68-2 (개곡말방길 1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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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8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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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경주 나들이 ~~~ (효현동3층석탑, 법흥왕릉, 벽도산, 율동 마애여래3존입상...)


' 늦가을 경주 나들이 '

▲ 경주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하늘 아래 세상을 평정한 가을이 천하를 곱게 물들이며 한참 전성기를 일구던 10월 막바지
에 신라 서라벌의 향기가 지독하게도 배여있는 경주(慶州)를 찾았다.

찬란한 여명의 재촉을 받으며 아침 일찍 동서울종합터미널을 찾았으나 경주 관광객 폭주로
9시 이후에나 승차가 가능하다고 그런다. (첫차는 7시) 그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구미(龜尾)행 직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울에서 경주로 갈 때 자리가 여의치 않으면 보통
구미를 거쳐 간다. 비록 갈아타야되는 번거로움은 있으나 구미행은 휴일에도 자리가 꽤 널
널한 편이고 경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환승 장소로도 제격이다.
구미에 이르자 바로 포항행 직행버스로 환승, 다시 1시간 30분을 달린 끝에 12시에 경주터
미널에 도착했다.

경주에 이르니 벌써부터 나들이 손님들로 터미널 주변은 북새통을 이룬다. 허나 그들이 가
는 곳은 거의 정해져 있다고 보면 된다. 나는 불국사나 석굴암, 대릉원, 분황사지 등 경주
의 기본적인 곳은 거의 질리도록 가본 터라 속세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을 주로 찾는 편
이다.
그렇게 경주에 수많은 문화유적과 명승지에 발자국(헤아려보니 대략 120곳이 넘음)을 남겼
지만 '신라(新羅)', 그 조그만 나라가 무려 1천 년씩이나 쓸데없이 오래 있다보니 그 중심
지였던 경주에는 아직도 갈 곳들이 차고 넘쳐난다. 정말 한 골목, 한 굽이를 돌 때마다 볼
거리가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오는 곳이 바로 경주인 것이다.
상상할 수 없는 볼거리와 찬란한 역사가 깃들여진 경주는 굳이 나쁘게 이르자면 내게는 꽤
부담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볼거리가 지나치게 많고 그들을 효과적으로 보려면 적지 않은
지식을 필요로 하니 차라리 눈을 감고 지나가고 싶을 정도이다.

이번에 문을 두드린 곳은 시내 서쪽인 효현동(孝峴洞)이란 변두리 동네로 그곳에 안긴 3층
석탑과 법흥왕릉, 그리고 남쪽 벽도산에 있는 율동(두대리) 마애불이 이번 목적지이다. 이
들은 거의 인지도가 없어 찾는 이도 뜸하다.
경주고속터미널에서 아화로 가는 경주좌석버스 300-1번을 타고 태종무열왕릉과 효현고개를
넘어 효현교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대천<大川, 고현천> 옆으로 난 조그만 농로(외외
길)로 들어섰다.
갈대가 살랑살랑 춤을 추는 대천, 늦가을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효현동 들판이 속세(俗世)
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를 흔쾌히 정화시켜준다. 4발 차량이 이따금 지나칠 뿐, 사람
의 모습은 거의 보이질 않는다. 그런 시골길을 15분 정도 가면 효현동3층석탑을 알리는 갈
색 이정표가 마중하고, 그의 안내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외외마을이 나오는데, 탑은 마을
서남쪽에 자리해 있다.


▲ 경주의 서쪽 산하를 차례차례 적시며 형산강(兄山江)으로
흘러가는 대천(고현천)


▲ 효현동 시골길(외외길)
인적도 없는 호젓한 시골길을 거닐으니 마치 아비규환의 속세를 벗어난 기분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해탈감이라고나 할까? 비록 잠시뿐이지만...


▲ 늦가을에 슬며시 물들어 가는 효현동 시골길(외외길)
이런 시골까지 문명의 이기(利器)를 전해주는 전봇대 너머로 흐릿하게
눈에 들어오는 산은 남산(南山, 금오산)이다.


 

♠ 소나무를 우산으로 삼으며 옛터를 홀로 지키는
효현동3층석탑 - 보물 67호

효현동 외외마을 서남쪽 멋드러진 소나무 밑에 자리한 효현동3층석탑은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힌 전형적인 신라 후기 석탑이다. 기단 사방(四方)에는 기둥 모양의 조
각을 두었고, 탑신은 각 층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을 새겼으며, 지붕돌 네 귀퉁이는 살
짝 치켜진 것이 마치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지붕돌의 밑면 받침은 4단으로 되어있고, 각 부
분의 조각이 가늘게나마 있어 9세기 정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탑이 있는 자리는 법흥왕이 불도를 닦았다는 애공사(哀公寺)의 옛터로 전한다. 하지만 이를 입
증할 절터의 흔적은 나오지 않아 그마저도 희박하며, 절의 위치와 관련된 기록도 없는 실정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애공사터로 포장된 것은 조선 후기에 경주김씨에서 현재 법흥왕
릉을 그들 조상의 하나인 법흥왕의 능으로 삼으면서 탑이 있던 자리를 애공사터라 우겼기 때문
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법흥왕을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나왔는데, 마침
탑도 있고, 비록 북쪽은 아니지만 서쪽에 이름 모를 고분이 있으니 적당히 끼워 맞춘 것이다.

▲ 효현동3층석탑의 앞부분

▲ 효현동3층석탑의 뒷부분


▲ 효현동3층석탑과 이웃한 우사(牛舍)

이 탑은 기둥 조각 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밋밋한 모습으로 두 눈에 넣어 보기에
도 별 부담이 없다. 오히려 화려함에 찌든 비슷한 시대의 탑들보다도 더 정감이 가는 것 같다.

마땅한 절터도 아닌 잡초 위에 뿌리를 내린 그는 자신의 내력과 정체를 꽁꽁 숨긴 채, 좀처럼
해답을 주려고 하질 않는다. 그의 속사정을 모르는 속인(俗人)들은 동네 이름을 따서 효현동(
효현리)3층석탑이란 이름을 주었으며, 경주김씨는 그를 애공사탑으로 삼아 조상묘를 찾았다는
뿌듯함에 빠져있다.

탑 옆에는 우공(牛公)들이 사는 우사가 있다. 그들의 음매~♪ 소리로 주변이 좀 시끄럽긴 해도
아무 것도 없는 공터에 홀로 외롭게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을 것이다. 우사 주인이나 우공들
이 탑에 해꼬지를 하지 않는 이상 서로 어우러 사는 모습도 괜찮아 보인다.

* 효현동3층석탑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419-1


▲ 효현동 시골길 (법흥왕릉 가는 길)

▲ 가을 수확의 기쁨을 누리며 내년 풍년을 위해
기나긴 휴가에 들어간 효현동 들판

▲ 법흥왕릉 입구
갈색 이정표가 있기 전에는 키 작은 표석이 이정표의 역할을 대신했다.
표석에는 한자로 '법흥왕릉 입구'라 쓰여있다.

▲ 법흥왕릉으로 인도하는 숲길에서 바라본 효현동 들판과
벽도산(율동 마애불을 간직한 산)


 

♠ 법흥왕의 능으로 살아가고 있는 신라 중기 고분
신라 법흥왕릉(法興王陵) - 사적 176호

효현동 서쪽 산자락에 법흥왕릉이라 불리는 오래된 신라 무덤이 말없이 누워있다. 능의 높이는
2m, 지름 14m로 신라 왕릉 중에서 작은 편에 속하는데, 봉분 앞에는 근래 지어진 상석(床石)이
하나 놓여져 무덤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능의 주인이라는 신라 법흥왕은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부터 중,고등학교 국사책, 온갖 수험서에
이르기까지 지겹도록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인물로 불교를 공인하고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을
정벌했으며, 연호를 쓰는 등, 신라에서 제법 업적이 있는 군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업적에 비해 능의 규모가 상당히 초라하여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고개를 갸
우뚱하기 마련이다. 물론 신문왕릉(神文王陵, 신문왕릉 또한 주인이 정확하지 않음) 이전에는
딱히 석물을 두지 않았고, 비석도 무열왕릉(武烈王陵)부터 등장하기 때문에 장식이 없는 건 당
연하다 하겠으나 봉분의 크기가 인간적으로 너무 작다. (왕릉의 보호 구역은 72,816㎡)
봉분 주변에는 드문드문 자연석이 노출되어 있어 무열왕릉처럼 봉토 밑에 호석(護石)을 둔 것
으로 여겨지며, 능 주변으로 소나무 숲이 무성하여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특히 기이한 모습의
소나무가 여럿 있어 신비로움을 안겨준다.

일단 이 무덤은 신라 중기 고분이다. 법흥왕릉이란 이름으로 살고는 있지만 이는 조선 후기부
터이다. 그 이전에는 경주 땅에 널리고 널린 신라 고분의 하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법흥왕의 능이란 증거가 있는가? 딱히 적당한 증거도 없다. 삼국사기에는 법흥왕을 애공사 북
쪽 봉우리에 장사를 지냈다고 나오는데, 애공사가 어딘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18세기 이후, 신라 왕가의 후손인 경주김씨와 경주석씨, 경주박씨들이 한참 조상묘 찾기
사업을 벌이면서 어디에 있다는 짧은 기록에 의지해 경주 땅을 들쑤셨는데, 대충 그럴싸한 곳
을 조상묘로 때려 삼았다. 법흥왕릉 역시 그중의 하나이다.

법흥왕릉을 찾아 나선 후손들은 효현동3층석탑을 발견했고, 덩달아 서쪽 숲속에 잠긴 이 무덤
을 발견하게 된다. 석탑은 이곳에 절이 있었으니 당연히 있었을 것이고, 북쪽도 아니지만 서
쪽에 옛 무덤이 있으니 탑 자리를 애공사라 여기면 법흥왕릉이라 우겨도 될 듯 싶었다. 또한
주변에 다른 고분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여 3층석탑 자리를 애공사터로 때려 삼고 이 무덤을
법흥왕릉으로 삼은 것이다. 이리하여 이름 없는 옛 무덤은 '법흥왕릉'이란 엉뚱한 이름표를 달
게 된 것이다.
그래도 양심이 있는지 예전에는 이름 앞에 막연히 전하고 있다는 뜻에 '전(傳)'을 붙여 '전 법
흥왕릉'이라 했으나 요즘은 아예 '경주 법흥왕릉(문화재청 지정 명칭)'이라 부른다. 진짜 법흥
왕릉이 나타날 때까지는 법흥왕릉이란 이름으로 꼼짝없이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왕릉이 시내에서도 좀 떨어진 외진 곳이라 찾는 이도 적다. 법흥왕이란 인물은 워낙 유명하지
만 그의 능은 반비례로 인지도가 낮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신변의 위험도 늘 도사리고 있어
1966년과 1968년에 도굴을 당한 적이 있으며, 2005년에도 도굴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지금의
봉분은 1968년 도굴 이후에 복원한 것이다.


▲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법흥왕릉

▲ 동쪽에서 바라본 법흥왕릉

▲ 서쪽에서 바라본 법흥왕릉


▲ 손으로 더듬거리고 싶은 법흥왕릉의 뒷태


※ 불교를 공인하고 신라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법흥왕(法興王. ?~540 / 재위 514~540)

법흥왕의 이름은 김원종(金)으로 지증왕(智證王, 437~514 / 재위 500~514)의 아들이다. 키
가 7척(1척은 22~33cm)에 이르며, 성품이 온후해 주변 사람을 아꼈다. 그의 모후(母后)는 연제
부인() 박씨이며, 부인은 보도부인() 박씨이다.

514년 가을, 지증왕이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그 뒤를 이어 신라 23대 군주로 즉위했다.
부왕에게 '지증(智證)'이란 시호(諡號)를 올리니 신라의 시호는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516년 정월, 내을신궁(奈乙神宮)에 제를 지냈는데, 용이 양산 우물에 나타났다.

517년 4월,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설치하고 518년 2월 주산성(主山城)을 쌓았다.

520년 정월, 신라 최초로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처음으로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의 관복(官服)
을 주색(朱色), 자색(紫色) 순으로 제정했다.

521년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522년 3월 가락국<금관가야, 金官伽倻>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다. 그래서 이찬 비조부
()의 누이동생을 보내 혼인에 응했다.

524년 9월, 왕이 남부지역 개척지를 순행(巡行)했는데, 가락국 왕이 찾아와 회견을 했다.

528년, 양나라에서 수입한 불교가 널리 백성들에게 퍼지자 불교를 공인하려 했다. 허나 귀족들
이 반대하여 난항에 부딪치자 이차돈(異次頓)과 짜고 그 유명한 이차돈 순교 사건을 일으켜 귀
족들을 단단히 겁에 질리게 만들고 불교 공인을 선포했다. 이 사건으로 왕권은 한층 강화된다.

529년, 살생을 금하는 명을 내렸다.

531년 3월, 제방을 보수했고, 상대등(上大等) 벼슬을 만들어 국사를 총리(總理)하게 했다.

532년, 가락국이 신라에서 시집 보낸 비조부의 누이에게 가야옷을 입혔다는 엉뚱한 구실을 내
세워 사다함(斯多含)을 보내 가락국을 멸망시켰다. 신라의 파상적인 공격 앞에 가락국의 마지
막 왕 구해왕(仇亥王)이 나라의 국고(國庫)와 보물을 바치고 항복하니 이들을 예우로 맞이하고
상등(上等)의 작위를 내려 본국(김해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내렸다. 그의 3번째 아들 김무력
(金武力)에게는 각간(角干)이란 벼슬을 내렸는데, 그의 손자가 바로 김유신(金庾信)이다.
<가락국 땅에는 금관군(金官郡)을 설치함>

535년, 건원(建元)이란 연호(年號)를 쓰니 이는 신라 최초의 독자적인 연호이다.

536년 정월, 관리들이 외직(外職)에 나갈 때 가족을 대동하고 가는 것을 허락했다.

540년 7월, 왕이 승하하자 시호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 북봉에 장사지냈다.

법흥왕은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고 하며, 애공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에게는
왕위를 이을 왕자가 없어 그의 동생인 갈문왕(葛文王) 김입종(金立宗)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신라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진흥왕(眞興王)이다.
김입종은 조카인 법흥왕의 딸과 혼인하여 진흥왕을 낳았으니 왕족들의 족내혼(族內婚)이 성행
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신라 최초로 율령을 반포했으며, 이차돈을 통해 불교를 공인했다. 그리고 가락국을 정벌
해 낙동강 하류로 진출했고, 외직에 나가는 관리에게 가족 동행을 허가하였으니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으로 왕권이 한층 강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보통 가족은 인질로 왕경(王京)에 두고
가야했음>


▲ 법흥왕릉의 앞모습

▲ 왕릉 부근에서 발견된 돌
그냥 이곳에 널부러진 돌은 아닌 듯 하며, 무열왕릉처럼 봉토 밑에
호석 시설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 법흥왕릉과 속세를 이어주는 소나무 숲길
왕릉은 작지만 그곳으로 통하는 숲길은 왕릉의 품격과 옛 무덤의
신비로움까지 품을 수 있도록 잘 가꾸어져 있다.


※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① 경주까지 버스 이용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버스가 50~60분 간격으로 떠난다.
*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성남, 부천, 수원, 춘천, 청주, 세종시에서 경주행 직행/고속버스 이용
* 대구(북부, 서부, 동부, 동대구), 부산(노포동, 사상), 울산, 포항, 창원(마산), 전주, 광주
, 진주, 순천, 강릉, 동해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철도 이용
* 서울역과 광명역, 천안아산역, 오송역, 대전역에서 신경주역 경유 부산행 고속전철 이용
* 청량리역, 원주역, 영주역, 동대구역, 부전역, 태화강역에서 경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③ 현지교통
* 경주고속터미널(경주시외터미널에서 도보 2분)과 경주역(성동시장)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
, 300-1, 304번을 타고 효현교 하차. 효현동 방면 외외길을 따라 들어간다. 효현동3층석탑까
지는 도보 20분, 법흥왕릉은 도보 25분
* 신경주역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번을 타고 효현다리 하차
④ 승용차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까지 접근 가능)
* 경부고속도로 → 건천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건천읍에서 경주방면 4번 국도 → 광명3거
리에서 경주대 방면 → 와상교를 건너 외외길로 우회전 → 효현동(법흥왕릉, 3층석탑)

★ 법흥왕릉, 효현동3층석탑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주차장은 따로 없으므로 길가나 빈 공간에 알아서 주차
* 법흥왕릉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효현동 63


 


법흥왕릉을 끝으로 효현동에 대한 볼일은 끝났다. 왕릉 주변 잔디밭에 앉아 속세에서 사온 간
단한 먹거리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그날의 마지막 답사지인 율동(두대리) 마애불로 길을 재촉
했다. 그곳은 이미 오래 전에 가본 기억이 있지만 너무 빛바랜 옛날이라 여기까지 온 김에 오
랜만에 친견하기로 했다.
여기서 율동(栗洞) 마애불로 갈려면 우선 효현교로 다시 나가야 된다. 효현교를 건너 8분 정도
가면 율동인데,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 옛 율동역이 있던 중앙선(서울↔경주) 철로와 경부고속
도로의 아랫도리, 그리고 두대마을을 차례로 지나 벽도산의 품으로 20분 정도 파고 들면 깊은
산골에 박힌 율동 마애불이 모습을 비춘다. 마애불까지는 이정표가 잘 되어있고 길도 잘 닦여
져 있어 방황할 염려는 없다.


▲ 옛 율동역을 지나는 중앙선 철로 (경주 방면)
경주와 건천 사이에 있던 율동역(栗洞驛)은 오래 전에 녹아 없어지고 그 흔적만 아련히
남아있다. 서울 청량리역을 비롯하여 포항과 동대구, 부전, 강릉으로 가는 열차가
외마디 기적소리를 남기며 이곳을 스쳐간다.
(중앙선 옆으로 보이는 차량들의 행렬은 국가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 옛 율동역을 지나는 중앙선 철로 (영천 방면)

▲ 녹음이 우거진 율동 마애불 가는 길
마애불 아래까지 길이 닦이고 주차장이 깔려 차량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배려했다.


마애불 주차장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율동 마애불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근래에 터를
닦은 성주암(聖主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나온다. 산신각(山神閣)과 심우실이라 불리는 기와집
이 전부로 산신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인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 심우실(尋牛室)이라 불리는 성주암의 중심 건물
심우실은 'ㄱ'모양의 기와집으로 법당(法堂) 겸 요사(寮舍)의 역할을 한다.
허나 불전(佛殿)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여염집 분위기로 툇마루를
갖추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하다.

▲ 절 뒤쪽에 자리한 율동 마애불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다


 

♠ 신라 후기에 조성된 수려한 마애불(磨崖佛)이자 벽도산의 오랜 은인(隱人)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두대리 마애석불)
- 물 122호

▲ 율동 마애불 - 마치 환영(幻影)처럼 그 모습을 은은하게 비춘다.

경주 벽도산(碧桃山, 424m) 동쪽 자락에는 벽도산의 은인(隱人),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이하
율동 마애불)이 조용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 마애불은 소금강산(小金剛山)에 안긴 굴불사지(掘佛寺址) 4면석불(보물 121호)의 양식을 그
대로 계승한 신라 후기 석불로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에 세
우고, 좌우에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협시(夾侍)로 세웠다.

가운데에 자리한 아미타불은 높이 2.5m로 머리가 상당히 커 보인다. 다른 부분은 얕음새김으로
처리했지만 머리는 돋음새김으로 크게 돋게 새겼기 때문이다. 머리에는 육계<무견정상(無見頂
相)>가 두툼히 솟아 있는데, 이는 굴불사지 석불과 비슷하다. 얼굴은 볼이 풍만하게 돋았고 미
소가 은연히 드리워져 있으며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어 그의 정체가 아미타불임을 알 수 있다. 발은 앞으로 내밀지 않고 옆으로 반듯하게
벌리고 있으며, 어깨는 당당한 편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덮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을 취하고 있다.

◀ 측면에서 바라본 율동 마애불

아미타불 왼쪽의 관음보살은 아미타불보다 덩치가 작다. 2m 남짓의 키로 움푹 들어간 허리선과
풍만하게 튀어나온 엉덩이가 눈길을 끄는 날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다. 몸매의 굴곡이 진하게
드러나 있으며, 발은 옆으로 벌리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 위로 올려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왼손에는 정병<政柄, 혹은 보병(寶甁)>을 들고 있어 그가 관음보살 누님임을 알 수 있
다. 게다가 몸매도 영락없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조그
만 얼굴은 두 눈이 형체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상태는 별로 안좋다.

아미타불 오른쪽의 대세지보살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경례를 하는 듯한 모습이며, 전체적인
형태는 관음보살과 비슷하다. 키는 2m 남짓으로 얼굴 부분이 다소 마멸된 것 외에는 건강 상태
는 괜찮다. 이들 불상은 머리 뒤로 두툼하게 표현된 동그란 두광(頭光)을 가지고 있으며, 두광
에 표현된 당초(唐草)무늬 등이 지긋한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섬세하게 남아있다. 몸 뒤에는 신
광(身光)이 얇게 표현되어 그들을 빛나게 한다.

이들은 굴불사지 석불과 기본적으로 같지만, 풍만함이나 발의 모양, 옷주름 모양 등이 달라 조
성시기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 도드라지게 새겨진 아미타불의 얼굴

율동 마애불 부근에는 '벽도산석불입상'과 '천창산(天倉山)선각마애불' 등이 있어 율동 마애불
을 중심으로 벽도산 일대도 조촐하게 불국토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예전에 왔을
때는 인근 능선에서 벽도산 석불입상을 본 듯 한데 기억이 벌써부터 희미하다. 율동 마애불은
인지도가 낮아 속인들의 발길은 적지만 경주 답사 경력이 어느 정도 되는 이들은 왠만큼은 아
는 곳이다.

마애불 앞에 3배의 예를 올리며 살짝 약소하게나마 소망을 들이밀어 본다. 신라 석공(石工)들
의 체취가 담긴, 비록 그들은 사라지고 윤회(輪廻) 사상에 따라 지금은 다른 존재로 살고들 있
겠지만 석불 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하며 중생을 맞는다. 불상 주변에는
푸른 이끼가 피어 있지만 마애불의 위엄 앞에 더는 어쩌지 못하고 적정한 간격으로 그들과 동
거를 한다.
바위가 서쪽을 향하고 있고, 불상을 둘러싼 광배(光背)가 바위에 일정한 홈을 파준 탓에 장대
한 세월이 흐르고 자연의 집요한 괴롭힘 앞에서도 당당하게 건강을 누리며 살고 있음이 참 다
행이라 하겠다.

율동 마애불을 끝으로 소소하게 즐긴 늦가을 경주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율동 마애여래삼존입상 찾아가기 (2016년 11월 기준)
* 경주고속터미널(경주시외터미널에서 도보 2분)과 경주역(성동시장)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
, 300-1, 304번을 타고 율동 두대마을입구에서 하차. 건너편으로 건너가서 두대길을 따라 도
보 25분
* 신경주역에서 경주시내버스 60, 61번을 타고 율동 두대마을 하차
* 승용차로 가는 경우 (마애불까지 접근 가능)
① 경부고속도로 → 건천나들목을 나와서 좌회전 → 건천읍에서 경주방면 4번 국도 → 광명3거
리에서 직진 → 율동에서 마애불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 → 율동 마애불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율동 산60-1 (두대안길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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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석불, 보리사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보리사 마애석불)

 


경주 남산 나들이 (동남산 미륵곡, 보리사)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신라(新羅) 1,0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땅 경주(慶州), 그 두 자를 들으면 나도 모
르게 가슴이 시려온다. 경주는 밤하늘에 흐르는 별만큼이나 온갖 문화유산이 반짝이고, 융
단처럼 부드러운 잔디의 잎파리만큼이나 깃들여진 신화와 전설이 속삭이는 마음의 고향 같
은 곳이다.

경주는 늘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곳이며, 나에게 늘 정신적으로나 지적으로 아낌없는 포
만감을 안겨주는 풍요로운 곳이다. 하지만 그만큼 부담이 큰 곳 또한 경주이다. 그곳에 서
린 문화유산을 개미목보다 짧은 지식과 하찮은 작문 솜씨로 감히 다룬다는 것이 은근히 두
렵고 떨려 주저한 적도 적지 않았다. 허나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도 그만큼 많이 찾은 곳이
또한 경주이다.

경주 땅 한복판에는 이름도 친근한 남산(南山, 468m)이 길게 누워있다. 바로 옛 금오산(金
鰲山)으로 경주는 물론 신라에서도 꽤 비중이 높아 '남산에 오르지 않고선 경주를 봤다고
우기지 마라~!'
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을 정도로 경주의 필수 답사 코스로 꼽힌다.

신라의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장(나정, 서출지, 포석정)을 넉넉히 품고 있으
며, 신라의 많은 제왕(박혁거세, 일성왕, 정강왕 등)이 그의 품에 앞다투어 잠들어 있다.
게다가 골짜기가 깊고 기암괴석이 만물상을 이루는 등, 자연미도 풍부하며, 남산을 불국토
(佛國土)로 여긴 신라 사람들이 여기저기 빚어놓은 불교 문화유산이 아낌없이 함축되어 있
는 그야말로 보물의 산이다.
남산에는 40여 곳의 크고 작은 골짜기가 있다. 그 골짜기에 깃들여진 절터만 100곳이 넘으
며, 80여 개의 불상, 70여 개의 석탑 등이 살아 숨쉬고 있어 그야말로 거대한 야외 박물관
을 이룬다. 그러다보니 남산 전체가 사적 31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처럼 뫼 전체가 통
째로 사적으로 지정된 예는 오로지 이곳이 유일하다. (낭산 등의 조그만 산은 제외)
남산은 위치상 통일전과 보리사가 있는 동남산, 포석정과 배리삼존불, 삼릉이 있는 서남산
(西南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번에 문을 두드린 곳은 동남산(東南山) 구역 보리사이다.

동남산 밑에는 갯마을이란 시골 마을이 있다. 그 옛날에 형산강(兄山江) 나룻배가 여기까
지 들어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 입구에는 보리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고, 마을
남쪽에는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이 넓게 자리를 닦고 있어 동네가 온통 푸르다. 토함산(
吐含山)에서 발원한 남천(南川)은 동남산 주변을 부드럽게 감싸돌며 '배반평야'라 부르는
너른 평야를 촉촉히 어루만진다.

걷는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조용함이 깃든 갯마을을 벗어나면 대나무로 창창한 오르막길이
나온다. 그 길의 끝에는 미륵곡 석불의 거처인 보리사가 자리해 있다. 절까지 걸어서 12분
정도 걸리는데, 보리사를 중심으로 남천으로 흐르는 계곡을 미륵골(彌勒谷)이라 부른다.


▲  대나무숲이 터널을 이루는 보리사, 미륵곡 가는 길
남산이 베푼 산바람이 이곳을 스치면서 대나무의 향연이 그윽히 울려 펴진다.

▲  보리사 밑에 자리한 부도와 때깔이 고운 비석들


♠  소나무 숲에 터를 돋군 조그만 산사, 남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불
미륵곡 석불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 남산 보리사(菩提寺)

남산에 100곳이 넘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온전하게 법등(法燈)을 이어온 절은 하나도 없는 실정
이다. 지금 절들은 근래 옛터에 다시 지은 것들이며 내가 찾은 보리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동남산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보리사는 비구니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으로 불국사(
佛國寺)의 말사(末寺)이며, 남산에 있는 절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절의 창건시기와 구체적인 사적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장대한 세월에 묻히
고 역사는 산산이 흩어져 온전한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
라 헌강왕(49대, 憲康王)과 정강왕(50대, 定康王)의 능이 보리사 동남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경내에 석조여래좌상과 복원된 3층석탑이 있어 신라 때 절임을 가늠케 할 뿐이다. 허나 정강왕
릉과 헌강왕릉의 위치도 확실한 것이 아니라서 이곳이 신라 때 보리사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
五里霧中)이다.

현재 보리사는 1911년 포항 보경사(寶鏡寺)에서 온 박덕염(朴德念) 비구니가 세운 것으로 절단
되어있던 미륵곡 석불의 머리와 광배를 이어 붙였으며, 1932년에는 남법명(南法明) 비구니가 중
수했다. 1977년 추묘운(秋妙雲)이 주지로 머물면서 3~4년에 걸친 불사 끝에 현재의 면모를 지니
게 되었다. 원래는 지금보다 약간 위쪽인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주변이 경내 중심이었으나 1981
년 지금의 자리로 약간 내려왔다.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산신각, 범종각, 육화당 등 6~7동의 건물을 지녔으며, 비구니 사찰이
라 경내는 깔끔하고 단아하다. 대웅전 앞뜰에는 잔디를 곱게 입혔고 그 사이로 돌을 심어 각 건
물을 이어주는 돌길을 내었다. 자투리공간에는 온갖 화초를 심었으며, 여승의 보살핌을 받은 꽃
들은 한참 꽃망울을 피워 그들의 은혜에 화답한다.


▲  솔내음이 깃든 경내 뒤쪽 부분 (사진 중앙 석불이 미륵골 석조여래좌상)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남산에서 가장 우수한 명품 석불로 꼽히는 석조여래좌상이 있으며, 경내에
서 조금 떨어진 남쪽 바위에 마애석불이 있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곳에 오르면 배반평야와 낭산(狼山), 토함산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비
록 높이는 낮지만, 꽤 높은 곳에 올라 천하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절을 에워싼 싱그러운 소나무의 솔내음과 아늑하고 조용한 산사 분위기, 그리고 미륵곡 석불의
인자함과 우아함이 배여 있는 보리사, 속세에 찌든 마음의 여유를 찾기에 이만한 곳도 없을 것
이다.


▲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에 바라본 보리사 경내

※ 남산 보리사 찾아가기 (2015년 10월 기준)
① 경주까지
* 서울역, 광명역, 천안아산역, 대전역에서 부산행 경부선 고속전철 이용 (신경주역 하차)
* 청량리역,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경주, 부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1일 2회 운행)
* 동대구역, 부전역, 해운대역, 태화강역에서 경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부천, 성남, 수원, 춘천, 원주, 청주, 전주, 구미, 안동, 창원, 대구(동
  부, 서부), 부산, 울산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 경주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경주우체국)에서 11번 시내/좌석버스
  를 타고 갯마을 하차, 도보 12분
* 신경주역에서 50, 51, 60, 61, 70, 700번 시내버스를 타고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이나 경주역
  (경주우체국)에서 11번 버스로 환승
* 보문관광단지와 불국사, 불국사역에서 10번 시내버스를 타고 갯마을 하차
② 승용차 (경내까지 진입 가능)
* 경부고속도로 → 경주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고운교 직전에서 문천길로 우회전 → 화랑교
  직전, 갯마을에서 우회전 → 보리사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67 (갯마을길 41-30 ☎ 054-748-0794)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

보리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1981년에 지어진 것이다. 불단(佛壇)에는 금동석가3존불과 후
불탱화가 있으며 그들이 발하는 금빛에 가히 눈이 멀 지경이다. 석가3존불 우측에는 육환장(六
環杖)을 든 지장보살의 보금자리가 있으며, 좌측벽에는 신중도(神衆圖)도 걸려있다.

아무도 없는 대웅전의 고요함을 살짝 깨뜨리며
안으로 발을 들여 향을 피우고 석가3존불에게
예불을 올린다. 예불이라고는 하지만 개인적인
소망도 살짝 넣어 그에게 내밀었다. 소망이 과
연 접수가 될련지는 미지수이지만 예불을 한 것
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해진다.

석가3존불 우측에는 나의 시선을 붙잡아 맨 귀
여운 존재가 있었다. 바로 연꽃을 든 동자상이
다. <거의 동녀(童女)처럼 보임>
그는 자신의 키에 2배나 높은 연분홍 연꽃을 들
고 있는데, 부처의 법을 상징하는 조그만 코끼
리가 그 곁에 자리해 소소하게 동심을 자아낸다.
 

◀  연꽃을 든 동자상과 코끼리상


▲  보리사 3층석탑

대웅전 뜨락 우측에는 누렇게 바랜 3층석탑이 서 있다. 보통 법당 정면에 탑을 세우지만 보리사
는 다소 우측으로 치우쳐진 특이한 배치를 취했다.
이 탑은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탑재를 끼워맞쳐 복원한 것이다. 없는 부분은 
새롭게 때웠는데,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을 얹힌 전형적인 신라 후기 탑으로 하얀 빛
의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하고 오랜 세월의 때가 가득하여 제법 고색의 기운을 드러낸다.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자비롭고 우아한 표정에 가슴을 설레게 하는
신라시대 명품 불상,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보물 136호


보리사 경내 뒤쪽, 담을 두르고 있는 한층 높은 곳에 보리사에 든든한 밥줄, 미륵곡 석조여래좌
상(석불좌상)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동남산을 대표하는 석불로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1,300년이란 나이가 정말 무색할 정도로 정정한 모습을 지녀 보는 이로 하여
금 놀라움을 선사한다. 그 장대한 세월 동안 그를 괴롭힌 존재가 한둘이 아닐진데 어찌 저리 멀
쩡할 수가 있을까?
그의 건강비결이 사뭇 궁금해진다. 물론 그에게도 적지 않은 시련은 있었다. 그를 관리하던 절
보리사로 단정지울 순 없음―
은 거친 세월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현재 보리사가 터를 닦기 전에
는 불상의 머리와 광배가 몸통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품이 있는 신라의 귀족 여인을 모델로 한 것을 아닐까? 우아한 기품과 인자함이 서린 그의 표
정은 보기만 해도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기분 같아서는 그를 보쌈하여 우리집에 갖다놓고 싶지
만 그를 업다가는 자칫 내가 그에게 깔려 골로 갈 상황이니 감히 그러지도 못한다.

신라의 미소로 손색이 없으며, 남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으로 내세워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
는 미륵곡 석불은 신라 불상의 백미(白眉)라 일컬어지는 토함산 석굴암(石窟庵) 본존불과 크게
대비된다. 석굴암 본존불은 미소라기보단 나 같은 범인(凡人)들은 차마 접근하기 조차 어려운
위엄이 서려있다. 그 앞에서는 차마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기 바쁠 것이다. 그에 반해 미륵곡 석
불은 그 누구라도 기꺼이 안아주고 보듬어 줄 것 같은 대인적인 느낌이 강하게 밀려온다.

그가 앉은 연화대좌(蓮花臺座)도 그를 닮아서인지 돌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 아름답다. 마치 살
아있는 연꽃이 하늘로 향해 꽃봉오리를 펼쳐보이는 모습은 진짜 연꽃도 시샘할 정도이다. 대좌
높이는 약 1.35m로 그 밑부분에는 땅을 향해 꽃잎을 펼친 연꽃이 묘사되어 있다. 석불이 잠시
마실을 나간 사이에 살짝 앉아보고 싶지만 그가 좀처럼 일어날줄 모르니,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는 그는 앉은키 높이가 2.4m로 그의 머리는 나발(螺髮)
이다. 부처가 인도 사람이다보니 인도 사람의 머리스타일을 취한 것이다.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
가 큼지막하게 솟아 있다.
내면에서 우러나온 미소가 만면에 가득한 그의 얼굴을 살펴보면 가늘고 긴 눈썹 아래로 지그시
뜬 두 눈이 속세를 바라본다. 넓직한 이마 가운데로 둥그런 백호가 있으며, 코는 오목하고 적당
한 크기이다. 미소가 서린 입은 정말 단아한 모습으로 정말 훔치고 싶은 입술이다. 볼은 두툼하
고, 다소 두터워 보이는 목에는 삼도가 획 그어져 있으며, 그의 몸을 걸친 법의(法衣)는 주름이
섬세히 표현되어 있다. 다리 위에 사뿐히 놓은 그의 왼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상징한다.

석불이 기대고 있는 광배(光背)는 높이 2.7m, 폭 1.9m로 석불과는 다른 돌이다. 광배 역시 화려
함의 극치로 당초(唐草)무늬와 보상화문(寶相華紋), 화불 등이 마치 살아있는 줄기를 보듯 유려
(流麗)하게 묘사되어 눈길을 강하게 잡아 맨다.

미륵곡 석불에는 또 다른 불상이 교묘하게 숨어
있다. 분명 겉으로 봐서는 하나의 석불인데, 또
어디에 불상이 있는 것일까? 바로 광배 뒤에 새
겨진 마애불(磨崖佛)이 그 답이다. 자세히 보면
선으로 처리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두 불상이 등을 맞대며 동거동락하는 신선한 형
태로 광배 뒤쪽에도 불상이 있는 경우는 이 땅
에서는 그 예가 거의 없어 매우 신선하게 다가
온다.
광배에 깃들여진 마애불은 약사여래(藥師如來)
로 그의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다. 그런 이
유로 광배 앞에 있는 석불을 서방정토(西方淨土
)의 주인인 아미타불로 보기도 한다.

얼굴 부분은 마모가 심해 확인하기 어려우며 전
체 높이는 1.3m다. 미륵곡 석불과 마찬가지로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있다. 중생들의
병을 치료할 약이 담겨져 있을 약합을 소중히
간직한 약사불은 동방세계의 주인이다.

석불 부근에는 옛 보리사의 흔적으로 보이는 탑재 일부와 돌덩어리가 놓여져 있으며, 석불 주변
은 소나무가 울창하다.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인 소나무는 솔내음으로 불상 주변을 깨끗히 정화해
주며 그에 대한 흠모의 뜻을 표한다.


♠  보리사의 숨겨진 신라 후기 마애불
보리사 마애석불(磨崖石佛)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193호

▲  바위에 살짝 깃들여진 보리사 마애석불

보리사 경내를 둘러보고 부근에 숨겨진 마애석불을 보고자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마애불을
온몸으로 알리는 이정표의 안내로 청명한 기운이 서린 대나무 숲길을 지나 4~5분 정도 가면 이
정표가 없는 갈림길이 나그네의 마음을 혼돈으로 밀어넣는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마애불이 나
올까? 지나가는 사람도 없으니 순전히 나의 판단에 의지해야 된다. 나름 직감이 좋기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조금씩 늙어감에 따라 그 직감도 종종 헛탕을 칠 때가 있다.
여기서 확률은 반반. 길의 상태를 보니 오른쪽 길은 가파르고 폭도 가늘어 사람의 왕래가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러니 정답은 아닐 듯 싶다. 그에 반해 직선 길은 오른쪽 길보다 폭도 굵고 사람
들의 왕래도 조금은 있어 보였다. 하여 직선 길에 모든 것을 걸고 그만 직진을 해버렸다. 허나
그게 함정이었다.


▲  마애석불로 가는 대나무 숲길

마애불을 만난다는 생각에 기대를 잔뜩 품으며 열심히 길을 재촉했으나 아무리 가도 나올 생각
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깊이 들어설 수록 길의 상태도 우울해진다. 그런데 어디선가 까마귀 1
마리가 나타나 요란하게 까악까악~~!을 외치며 내 허공을 심상치 않게 맴도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내 머리 위에서 계속 맴돌며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이 수상하다. 내가
그의 영역을 침범하여 뚜껑이 열려 경고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뜻일까?
인적도 없는 궁벽한 산길에서 홀로 까마귀의 난데없는 태클을 받으니 오싹한 기분이 나를 엄습
하고 순간 염통이 쫄깃해진 나는 심상치 않다 여겨 서둘러 길을 돌렸다.

발걸음을 빨리 하여 다시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그래도 마애불에 대한 미련은 여전하여 비탈진
왼쪽(진행 방향 기준) 오르막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방금 전만 해도 내 상공을
맴돌던 까마귀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어쨌든 까마귀의 압박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쉬
며, 산길을 오르니 그 길의 끝에 보리사 마애석불이 잔잔한 미소를 드리우며 나를 기다리고 있
는 것이 아닌가?
아까 그 까마귀는 혹여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서자 이를 알리고자 목을 터지라 소리를 질렀던 것
은 아닐까? 그는 사람 말을 할 줄 모르고, 나는 까마귀 말을 모르니 엉뚱한 길로 빠진 나를 깨
우치고자 까악~ 소리를 높여 갔고, 다시 길을 돌려 맞는 길로 들어서니 그제서야 소리를 접고
사라진 것이다. 물론 그의 영역을 침범하여 나를 쫓아내고자 그리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목적
이야 어찌되었든 까마귀의 경고로 마애불을 찾았으니 그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설마 마애불이
전설처럼 까마귀로 현신하여 길을 알려준 것은 아니겠지? 허나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면 그런
전설이 나돌지도 모르겠다.

보리사에서 남쪽으로 10분 정도 떨어진 가파른
산자락에 절벽을 이룬 커다란 바위가 있다. 그
바위에 바로 결가부좌를 튼 마애석불이 아늑히
들어앉아 속세를 굽어본다.
오르기도 쉽지 않은 비탈진 곳에 숨은 이 불상
은 미륵곡 석불보다 나중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
는 신라 후기 석불로 바위벽을 얕게 파서 불상
의 광배로 삼은 다음 1.1m 정도의 작은 불상을
돋음새김으로 새겼다.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가 두툼히 솟아있고, 머리
칼은 꼽슬인 나발이다.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
진 눈썹 아래로 지그시 뜬 눈이 있으며, 다물어
진 입술에는 그만의 미소가 잔잔히 새어 나온다.
길쭉한 두 뒤는 어깨에 닿으며, 목에는 삼도가
굵직하게 그어져 있다. 법의(法衣)는 그의 몸을
덮고 있으며, 옷주름의 선이 부드럽다. 전체적
으로 위쪽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선의 굵기가
희미해지고 있으며 아랫도리는 선명도가 좀 낮
다.

그가 앉아있는 대좌는 하늘을 향해 잎을 벌린 앙련(仰蓮)이 희미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불상 앞
은 조금의 평지도 허락치 않는 급경사로 절을 하거나 예불을 올리기가 심히 마땅치 않다. 

불상 앞에 이르면 남쪽으로 배반평야가, 동쪽으로 낭산이 두 눈에 박힐 정도로 조망이 좋다. 마
애불의 존재를 아는 이가 적어 여기까지 기를 쓰고 올라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들 보리사 경
내에 있는 미륵곡 석불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석불의 미소에 마음이 즐거워지는 곳 보리사, 그의 건강과 단아한 미소가 미륵불이 온다는 56.7
억년 이후까지 지속되기를 소망하며 본글을 마무리 짓는다.


▲  마애석불에서 바라본 배반평야와 경주 남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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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0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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