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추천명소'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3.01.23 서귀포 서귀포층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제주올레길2코스 겨울 나들이 (새섬공원)
  2. 2022.02.09 서귀포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주상절리대, 대포연대, 약천사 겨울 나들이
  3. 2021.07.31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서귀포 천제연폭포, 제주올레길8코스 나들이 (천제연관개수로, 선임교, 베릿내오름)

서귀포 서귀포층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제주올레길2코스 겨울 나들이 (새섬공원)

서귀포 겨울 나들이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 서귀포 겨울 나들이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새섬, 혼인지)

새섬에서 바라본 범섬과 남해바다

▲  새섬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혼인지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  혼인지

 



 

묵은 해가 극한 아쉬움 속에 저물고 새해가 시작되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대륙
, 제주도(濟州島)를 찾았다.

간만에 발을 들인 제주도에서 3일 동안 미답처(未踏處)를 중심으로 정말 알뜰하게 돌아다
녔는데, 둘째 날 늦은 오후(17시)에 서귀포시내에 있는 천지연폭포(天地淵瀑布) 주차장에
이르렀다.
천지연폭포는 초등학교 시절에 이미 인연을 지었던 곳이라 애써 고개를 돌리며 새섬이 있
는 남쪽 바닷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둘째 날은 새섬까지 소화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허나
약천사(藥泉寺, ☞ 관련글 보러가기) 이후부터 하늘에 주름진 구름들이 꽉 들어차더만 새
섬방파제에 이르자 지독하게 검은 피부를 보이며 빗방울을 투하한다. 상황이 그러자 새섬
이고 나발이고 싹 내일로 내던지고 바로 시내로 나와 적당한 모텔을 잡아 일찍 휴식에 들
어갔다. (20시에 저녁을 먹으러 잠시 서귀포 시내로 나갔음)

거의 16시간 동안(10시간 정도 잤음) 꿀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10시, 새섬을 잡으러 출동
했다. 모텔 1층 로비에는 감귤의 대표 산지인 서귀포(西歸浦)에 걸맞게 감귤이 든 바구니
가 있었는데, 투숙객들은 마음껏 집어먹으면 된다. 하여 나는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딱 3
개만 집어서 밖으로 나왔다.
전날 저녁과 달리 광합성에 최적화된 아주 쾌청한 날씨로 관광객들로 벌써부터 정신이 없
는 천지연폭포 주차장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가면 새연교와 새섬방파제, 서귀포유람선 선
착장이 나온다. 여기서 잠시 그들에 대한 시선을 접고 벼랑이 펼쳐진 서쪽 해안을 주목해
보자. 그곳에는 매머드(Mammoth)가 담배를 피던 시절, 옛 생물들의 흔적들이 가득 깃들여
져 있다.


▲  연외천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천지연폭포 입구
(사진 중앙에 있는 다리가 칠십리교)



 

♠  천지연폭포 남쪽 바닷가에 깃든 옛 생물들의 희미한 흔적들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西歸浦層 貝類化石産地)
- 천연기념물 195호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해변

새섬방파제 서쪽에는 주름진 벼랑과 큼직한 바위들로 가득한 해변이 있다. 얼핏 보면 평범한
해안으로 여기고 지나치기 쉬우나 이곳은 제주도에서만 발견되는 서귀포층(西歸浦層)이 형성
된 벼랑으로 30여m 높이로 약 1km 정도 펼쳐져 있다. 절벽을 따라 약 40~60m 정도 두께를 보
이고 있으며, 그의 피부와 속살에는 조개 등 많은 화석들이 들어있다.

1928년 왜인(倭人) 학자인 하라구치(原口九萬)가 발견하여 지역 이름을 따 서귀포층이라 하였
는데, 처음에는 이곳 등 일부에만 그런 지층이 확인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 지하수를 캐내고
자 제주도 곳곳을 들쑤시면서 잠자고 있던 서귀포층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제주도 형성 초기
에 무수히 일어났던 화산활동으로 나온 현무암질 화산재 지층과 바다에 쌓인 퇴적암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제주도의 옛날 기후와 해수면 변동을 소상히 알려준다.

서귀포층은 물을 통과시키지 않는 특징이 있어 물이 거의 새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서귀포층
주변은 물이 풍부하여 해안가 지층 틈새로 물이 쏟아져 나오니 이를 용천수(湧泉水)라고 부른
다. 제주도는 누수에 최적화된 현무암 피부의 땅이라 물이 넉넉치가 못한 편인데, 서귀포층은
그 문제를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대자연 형님의 소중한 선물이다. 하여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
기 이전부터 용천수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해안가에 많이 분포하고 있음)


▲  화석들이 고이 잠들어있는 서귀포층 바위들

이곳 벼랑과 바위에는 옛 생물의 화석이 무수히 깃들여져 있다. 이들은 매머드가 뛰어놀던 약
200~300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조개류가 상당수를 이루고 있는데, 달팽이, 전복, 우렁이 등
의 복족류와 굴족류, 완족류, 성게와 해삼, 불가사리 등의 극피동물, 산호화석, 고래와 물고
기 뼈, 상어 이빨 화석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서울대 김봉균 교수에 의해 저서성유공충(底棲性有孔蟲, 호수나 바다의 바닥을 기어다니
는 유공충) 41속 73종과 부유성유공충<浮游性有孔蟲, 플랑크톤 생활을 하는 원생동물(原生動
物)> 8속 18종 등의 미화석(微化石, 눈으로 확인이 불가능한 미생물 화석)도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 나온 화석 대부분은 지금도 흔히 볼 수 있는 생물들이나 현재 서귀포 지역에서는 살지
않는 것들도 여럿 있다. 특히 조개 화석 같은 경우 이곳보다 훨씬 남쪽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그들이 발견된 것을 통해 서귀포층 초창기의 바다가 지금보다 따스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옛 생물의 화석이 풍부히 담긴 탓에 1968년 국가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얻었다. 하지만
해변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고, 행정당국의 오랜 직무유기로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
면서 마구잡이 화석 채취와 훼손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다. 근래에 벼랑 쪽으로 출입금지
안내문이 세워졌으나 그뿐이며, 그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보호용 난간이나 철책을 두룰 필요가
있어 보인다.
또한 새섬방파제 바로 서쪽에 눈에 띄게 있음에도 천지연폭포나 새섬, 유람선에 눈이 어두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치기 일쑤이다. 그러니 새섬이나 천지연폭포를 보러왔다면 이곳도 꼭
둘러보기 바라며, 고된 세월에 지친 그들을 눈으로만 살피기 바란다. (저들을 떼거나 만지는
행위는 삼가하기 바람)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서홍동 707 (남성중로 43)


▲  큰 돌에 담긴 화석들
돌에 박힌 하얀 존재들이 모두 화석이다. 물고기 뼈와 조개 화석으로 저들은
죽어서 대자연의 조화를 받아 조촐하게 그들의 흔적을 남겼다.

▲  옛 수중동물의 넋이 서린 서귀포층 바위
마치 회색빛 어항 속에서 올챙이나 송사리 같은 작은 물고기들이 거니는 것 같다.

▲  다양한 화석과 고된 세월의 주름선이 뒤섞인 서귀포층 바위들 ▼


▲  서귀포층 패류화석산지 해안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

저 멀리 그림의 떡처럼 자리한 범섬은 이름 그대로 호랑이처럼 생긴 섬이다. 절벽으로 이루어
진 무인도로 고려 끝 무렵인 1374년 최영(崔瑩) 장군이 제주도에 잔류하며 저항을 하던 몽골(
원나라)의 목호(牧胡) 패거리를 최종 처리한 현장이기도 하다.


▲  제주도와 새섬을 잇는 새연교 (새섬방파제 쪽)

새섬을 가려면 무조건 새연교를 통해야 된다. 그는 2009년에 닦여진 다리로 새섬과 제주도를
끈끈하게 붙잡고 있는데, 다리 이름인 '새연'은 새섬을 잇는 연륙교의 줄임말로 알고 있었으
나 알고 보니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다리'란 의미라고 한다.
제주도에서 가장 큰 뚜벅이 전용 다리로 서귀포항의 랜드마크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이 다리
가 닦임으로써 바다의 눈치 없이 마음껏 새섬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  새섬방파제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범섬(왼쪽), 서귀포층 벼랑

▲  새연교에서 바라본 서귀포항과 서귀포(서귀동) 시내



 

♠  서귀포항 앞바다에 상큼하게 떠있는 작은 섬, 새섬

▲  새섬에서 바라본 새연교와 서귀포층 벼랑

새섬은 서귀포항 앞바다에 바짝 떠있는 작은 섬으로 천지연폭포에서 흘러내려온 연외천과 남
해바다가 만나는 곳에 자리한다.
이름이 새섬이다 보니 새와 관련된 것으로 여기기 쉬우나 실상은 초가 지붕을 잇는 새(띠)가
많이 나와서 새섬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한자로는 초도(草島), 모도(毛島)라 불리며 섬
의 면적은 104,581㎡, 가장 높은 곳은 해발 17.7m이다.

제주도의 심장인 한라산(漢拏山)이 폭발하면서 거기서 나온 암석이 떨어져 섬이 되었다는 전
설이 있으며, 조선 중기에 사람들이 건너가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섬으로
들어가려면 간조 때 새섬목을 건너거나 배를 이용해야 했으며, 1960년대 중반까지 사람이 살
았으나 모두 철수하여 금지된 무인도가 되었다.
그러다가 2009년 새연교가 닦이면서 도시자연공원으로 천하에 개방되었으며, 천지연폭포와 서
귀포항을 수식하는 명소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비록 속세에 개방은 되었으나 새벽 일출시
부터 22시까지만 개방한다. 그러니 21시까지는 입장해야 무난하게 서귀포항 야경(夜景)도 즐
기며 섬 1바퀴를 돌 수 있다. 또한 섬이다 보니 태풍이 오거나 해상 날씨가 영 좋지 않은 경
우에는 출입이 통제될 수 있다.


▲  새섬 산책로에서 바라본 새연교의 위엄 (바로 밑이 새섬방파제)

새연교를 건너면 섬을 1바퀴 도는 1.1km의 산책로가 나오는데, 어느 쪽으로 가던 다시 새연교
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천천히 둘러보면 최소 20~30분 정도 걸리며, 섬 북쪽은 연외천과 바다
가 만나는 서귀포항, 동쪽은 서귀포항 중심부, 서쪽과 남쪽은 푸른 바다라 주변 풍경도 아름
답다.

섬 전체는 난대림(暖帶林) 보호구역으로 나무가 울창하며, 새섬목, 담머리코지, 새섬뒤, 노픈
여, 안고상여, 섯자릿여, 자릿여, 모도리코지 등의 소소한 명소들이 있다.

* 새섬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산3-2


▲  새섬에서 바라본 범섬과 황우지, 서귀포 서부 해안

▲  해안을 따라 닦여진 새섬 산책로
이곳 산책로는 흙길과 자갈길, 나무데크길로 이루어져 있다. 거의 평지라 누구든
편히 거닐 수 있으며, 주변 풍경이 고와서 체감 거리가 꽤 짧게 느껴진다.

▲  난대림과 소나무 그늘 속을 지나는 새섬 산책로

▲  새섬에서 바라본 문섬

손에 잡힐 듯 진하게 아른거리는 문섬은 서귀포항에서 1.3km 떨어진 작은 무인도이다. 문섬이
란 이름은 옛날부터 유별나게 모기가 많아서 모기를 뜻하는 한자를 취해 그리된 것으로 녹도(
鹿島)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  새섬에서 바라본 서귀포항 방파제와 섶섬
방파제 너머로 보이는 존재가 파초일엽(芭蕉一葉) 자생지로 유명한 섶섬이다.

▲  새섬 동쪽에 자리한 서귀포항 중심부
서귀포항은 새섬과 새섬방파제, 문섬, 서귀포항 방파제가 포근히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항구의 입지로 아주 좋다.

▲  새섬 주변 바다의 요염한 속살

▲  새섬 북쪽에서 바라본 서귀포항과 서귀포시내
(연외천과 남해바다가 만나는 곳)

▲  새섬 북쪽 산책로

▲  새섬 서쪽에서 바라본 새연교와 서귀포층 벼랑



 

♠  제주도 시조의 혼인설화를 품고 있는 제주도의 영원한 성역
혼인지(婚姻池) - 제주도 지방기념물 17호


▲  혼인지(혼인터) 표석

새섬에 퐁당퐁당 빠져 거의 1시간을 머물다가 아쉽지만 그곳을 등지며 천지연폭포 주차장으로
나왔다. 주차장에는 시내버스 여러 대가 육중한 바퀴를 접고 쉬고들 있었는데, 서귀포시내버
스 641번(천지연폭포↔서귀포시청2청사)이 먼저 기지개를 켜며 부릉부릉 심장 소리를 낸다.
하여 그것을 타고 시내인 동문로터리로 나왔다. 시내까지 거리는 가까우나 천지연폭포는 바다
와 맞닿은 낮은 곳에 있고 시내는 그보다 훨씬 높은 언덕배기에 있어 지형적인 영향으로 버스
와 차량은 서귀포항과 서귀포초교로 다소 돌아간다.

동문로터리에서 다음 답사지인 혼인지를 가고자 제주도 간선 201번(제주버스터미널↔서귀포버
스터미널)을 잡아탔다. 혼인지까지는 40km 거리로 1시간 정도를 신나게 달려 혼인지입구에서
두 발을 내렸다.
한적하기 그지 없는 혼인지입구에서 혼인지로를 따라 조금 들어가면 혼인지 표석이 마중을 나
온다. 제주올레길2코스(광치기해변↔온평포구, 15.2km)가 이 도로의 신세를 지며 혼인지로 가
는데, 표석에는 하얀 글씨로 '혼인지' 3자가 한문으로 쓰여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연못을
뜻하는 '池'가 아닌 터를 뜻하는 '址'가 쓰여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싶어 잠시 혼돈에 빠졌으나 분명 그 혼인지가 맞다. 제주도 시조들이 혼인을 했던 터라 표석
에 그렇게 쓴 것이며, 혼인지입구에서 10분 정도 들어가면 혼인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  남쪽에서 바라본 혼인지

혼인지는 500평 정도의 자연산 못으로 갈대와 수초들이 못 외곽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평
지에 누운 평범한 모습의 못이나 이곳은 제주도의 시조라는 고을나(高乙那)와 양을나(良乙那
), 부을나(夫乙那) 등 이른바 삼신인(三神人)이 장가를 가던 곳이라고 전한다. 하여 그들의
탄생설화가 깃든 삼성혈(三姓穴)과 더불어 제주도에서 가장 유서 깊은 성지로 애지중지되고
있다.

연못 주변에는 제주도에서 넘쳐나는 현무암으로 낮게 담장을 둘러서 속세와 경계를 그었으며,
그 주변을 공원으로 산뜻하게 손질하여 산책로와 숲을 닦았다. 오래된 존재로는 혼인지와 삼
신인이 신방을 꾸렸다는 신방굴이 있으며, 근래에 지은 3공주 추원각과 추원비, 전통혼례관,
탐라생활사료관, 생태연못 등이 혼인지를 수식한다. 그리고 제주올레길2코스가 혼인지 설화를
흠모하며 그의 옆구리를 슬쩍 지나친다.


▲  혼인지 서쪽에 닦여진 탐방로(제주올레길2코스)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혼인지, 그곳에 서려있는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는 대략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4,300여 년 전, 고을나와 부을나, 양을나가 모흥혈(毛興穴, 삼성혈)이라는
곳에서 갑자기 솟아났다. 그들이 있기 전에는 제주도에 그 흔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가죽옷을 입고 동물 사냥과 어로로 생활을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한라산에 올라가
주변을 살피다가 동쪽 바다에서 자주빛 진흙에 봉해진 오색찬란한 큰 목함(木函)이 떠내려온
것을 발견했다. 목함이 상륙한 곳은 혼인지와 가까운 온평리 연혼포(延婚浦, 갯고랑)라고 한
다.
호기심이 불끈 솟은 그들은 그곳으로 달려가 목함을 열었더니 그 안에 석함(石函)이 들어있었
고, 자주빛 옷에 붉은 띠를 두른 사자(使者)가 나타났다. 그리고 석함을 열었더니 푸른 옷을
입은 15~16세 정도의 아리따운 공주 3명과 송아지, 망아지, 오곡(五穀)의 씨앗이 있었다.


▲  늪지대 기운을 지닌 혼인지 (서쪽에서 본 모습)

이들을 데리고 온 사자는 3신인에
'나는 동해 벽랑국(碧浪國)에서 왔습니다. 우리 군주께서 공주 3명을 두었는데 혼기가 차도록
배필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마침 서해 높은 산(한라산)에 3명의 신인이 나와 장차 나라를 세
우려고 하나 배필이 없다는 것을 듣고 저에게 명해 세 공주를 모셔왔으니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십시요~~!'
말을 끝내고는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기쁨에 잠긴 3신인은 나이에 따라 공주 자매를 배필로 정해 바로 이곳 혼인지에서 혼인과 예
민한(?) 신방을 치루고 삼사석(三射石, 제주시 화북동)에서 활을 쏘아 거처할 곳을 정했다.
또한 공주가 가져온 소(송아지)와 말(망아지)을 기르고 오곡 씨앗을 뿌리니 이때부터 제주도
에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상이 혼인지에 서린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이다.


▲  북쪽에서 바라본 혼인지
누렇게 뜬 갈대와 수초들이 덥수룩하게 자라나 자연산 연못의
풍경을 거들어준다.


삼신인은 앞서 언급한 대로 삼성혈 구멍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이때가 4,300년 전이라고 하는
데, 우리 역사가 단군조선에서부터 4,300년 이상 묵었음을 강조하고 있어 그것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3신인이 4,300년 이상 되었다는 자료와 유물이 딱히 없기 때문이다.
또한 1세기 경에 한라산 대폭발로 제주도 사람과 동물들이 대부분 강제 죽음을 당했는데, 겨
우 일부가 살아남아 화산재와 용암으로 지옥이 된 제주도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때 3신인
이라 표현된 인물 3명이 사람들을 잘 이끌어 제주도 세력의 군주가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공주를 보냈다는 벽랑국에 대해서도 왜열도설과 동해(東海) 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없
으며, 왜열도는 공주와 오곡, 소, 말을 보낼만한 수준이 전혀 되지 못한다. 하여 동해안(경상
도나 영동지방, 함경도 등)에 있던 작은 나라나 세력으로 여겨진다. 그곳에서 바다 너머 멀리
떨어진 제주도 세력에게 시집을 보낼 정도라면 서로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탐라(耽羅)라 불리던 제주도 세력은 바닷길을 적극 이용해 4,000리의 영토를 지녔던 삼한(마
한, 진한, 변한)과 백제, 신라, 가야는 물론 멀리 중원대륙과 동남아 제국(諸國)들과도 교역
을 했었다.


▲  삼공주추원비(三公主追遠碑)
어딘지 모를 벽랑국에서 건너와 삼신인의 배필이 되어 제주도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던 3공주를 추모하고자 후손들이 세웠다.


벽랑국이 망하여 그 세력이 제주도로 넘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그들은 가축과 오곡 씨앗, 여
러 좋은 문물을 싣고 떠돌다가 제주도에 상륙했을 것이고, 제주도 세력은 그들을 받아들여 통
합 차원에서 혼인을 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농업과 목축 기술까지 챙기면서 제주도에 제대
로 된 농경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남긴 탁라가(乇羅歌)의 2번째 시
김종직이 제주도를 다녀가면서 탁라가 14수를 남겼는데, 그 2번째 시가
바로 혼인지 설화를 머금고 있다.

먼 옛날 신인이 세 곳에 도읍하셔
해돋는 물가에서 배필을 맞으셨다네
그 시절 삼성(삼신인)이 혼인했던 일은
전해내려오는 주진의 전설과 같네

▲  혼인지의 분위기를 한껏 경건하게 다듬어주는
소나무숲길 (신방굴 주변)

▲  소나무 그늘에 자리한 신방굴

혼인지에 왔다면 소나무숲에 있는 신방굴이란 자연산 굴도 꼭 둘러보기 바란다. 혼인지 연못
과 함께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산 존재로 3신인이 벽랑국 공주를 하나씩 품고 예민한(?)
첫날 밤을 보냈다는 곳이다.

굴 내부까지 들어갈 수 있으나 내부가 협소하고 어둡다. 그런 곳을 1쌍도 아니고 3쌍이 좁은
곳에서 예민한 일을 치룬다는 것이 솔직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이 동물도 아니고 일명 성
진국(性進國)으로 전세계적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천박한 왜열도 원숭이들도 아닌데 말이다.
하여 못 주변에 대충 집을 짓거나 자신들이 살던 집에서 예민한 첫 밤을 보냈을 것이다. 혼인
지가 3신인과 3공주가 혼인을 했던 현장이라 연못 부근에 있는 이 굴까지 설화의 현장으로 넣
었던 것이다.


▲  속세를 향해 입을 벌린 신방굴
신방굴은 땅 바로 밑에 있는 굴이다. 저런 누추한 곳에서 정말 첫날 밤을
보냈을까? 그것도 제주도 세력가와 벽랑국 세력가의 딸이 말이다.

▲  신방굴 내부로 들어서다
굴 높이가 낮으므로 굴에 절대 피해가 없도록 몸을 푹 쑥이고 들어가야 된다.

▲  어두컴컴한 신방굴 내부

▲  신방굴에서 나오는 3신인과 3공주를
재현한 사진


▲  흑백사진에 담긴 1960년대 초 온평리(혼인지마을) 혼례 모습

▲  돌담 너머로 바라본 삼공주 추원사(追遠祠)
2009년 10월에 지어진 것으로 벽랑국 3공주의 위패를 머금고 있다. 돌담 안쪽
오른쪽 건물이 추원사로 매년 6월 10일 후손들이 추원제를 지낸다.

▲  삼공주 추원사

▲  혼인지 남쪽에 세워진 정자

혼인지는 제주도 시조의 혼인 설화 때문에 지역 사람들의 혼인 장소 역할을 했다. 지금도 전
통혼례관을 두어 혼인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비록 속세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명소이나
제주도에 신혼여행이나 부부여행으로 왔다면 꼭 들러볼 만하다.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한 곳이
다.

* 혼인지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1693 (혼인지로 39-14, ☎ 064-710-6798)


▲  소나무와 동백꽃이 무성한 혼인지 산책로
동백이 도도한 붉은 피부를 드러내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을
마구 들었다 놓는다.

▲  혼인지를 마무리 짓다 (전통혼례관 주변 산책로)
혼인지 이후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본글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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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대포주상절리대, 제주올레길8코스, 약천사



' 서귀포 겨울 나들이 '
(대포 주상절리대, 제주올레길8코스, 약천사)

중문, 대포 해안 주상절리대

▲  대포 주상절리대 (중문, 대포해안 주상절리대)

약천사 대적광전 대포연대

▲  약천사 대적광전의 뒷모습

▲  대포연대



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가 열리던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濟
州島)를 찾았다.

하늘을 타고 오랜만에 발을 들인 제주도에서 3일을 머물며 여로(旅路)를 듬뿍 살찌웠는
데, 첫날에는 제주시 서부 지역(외도, 애월, 한림, 한경)을 돌았고, 둘째 날은 서귀포(
西歸浦) 중문 지역으로 들어서 천제연폭포(天帝淵瀑布)를 시작으로 제주올레길8코스(월
평~대평포구, 19.6km)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 본글은 제주올레길8코스의 일원인 대
포주상절리대 서쪽에서부터 시작된다. (대포 주상절리대 이전과 약천사 이후 내용은 별
도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음)


♠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해안 주상절리대(柱狀節理帶) 주변

▲  대포 주상절리대 서쪽 산책로 (제주올레길8코스)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 주상절리대 서쪽 구간은 도시 속의 큰 공원(ex. 여의도공원)처럼 길이
잘 닦여져 있다. 숲길과 쉼터, 온갖 소소한 볼거리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고, 남쪽에는 늘 바
다가 함께하고 있으며, 북쪽에는 제주부영호텔앤리조트(Hotel and Resort)와 제주국제컨벤션
센터가 넓게 자리잡고 있다.


▲  남국(南國)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산책로 (올레길8코스)
뾰족한 잎을 지닌 야자수가 길게 가로수를 형성하며 따스한 남쪽 풍경을 진하게
그려낸다. 바다 건너 북쪽은 겨울 제국(帝國)의 핍박으로 아주 죽을 맛인데
여기는 몸에 걸친 잠바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덜 쌀쌀하다.

▲  옹기종기 모인 선인장들

제주도는 이 땅에서 유일하게 선인장이 뿌리를 내린 곳이다. 제주도 선인장의 고향은 한림읍
월령리로 그곳 선인장이 사람과 자연의 의해 제주도 전역으로 세력을 넓혔다. 이들의 원산지
는 이역만리 떨어진 멕시코로 그 씨앗이 바다를 타고 무려 여기까지 들어와 싹을 틔운 것으로
보고 있다.
아무리 해류를 잘타더라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 머나먼 거리인데 그들의 강인한 근성과 이곳
으로 그들을 인도한 대자연 형님의 조화에 적지않은 경외심이 솟구친다.

▲  올레길8코스에서 만난 돌기둥 장식물과
붉은 피부의 항아리들

▲  슬슬 모습을 비추는 지삿개
대포해안 주상절리대


올레길8코스가 지나는 지삿개 해변에는 '대포 주상절리대(대포 주상절리)'라 불리는 명품급의
해안 벼랑이 깃들여져 있다.
요즘은 '대포 주상절리대'로 속세에 너무 알려져 이곳의 원래 이름은 '지삿개'가 거의 잊혀질
정도인데, 칼로 싹둑 다듬은 듯 4~6각형 형태의 돌기둥과 돌무늬가 계단처럼 늘어서 신비로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다. 이들은 한라산(漢拏山) 등이 흥분하여 뿜어낸 용암이 이곳으로 내려와
바다와 만나면서 급히 냉각되어 형성된 것인데, 반대 성향을 지닌 뜨거운 용암과 차가운 성질
의 바닷물이 격하게 부딪쳐서 이루어진 현장이다.
현무암질(玄武巖質) 용암류에서 나타나는 수직 절리(節理)로 높이는 10~40m, 해변 길이는 1km
정도이다. 허나 소소하게 펼쳐진 주상절리까지 포함하면 약 3.5km로 이 땅의 주상절리 중 최
대 규모를 자랑한다. 현무암 용암이 굳어질 때 일어나는 지질현상과 해식작용에 의한 해안지
형의 발달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고마운 지질자원으로 그 가치가 뛰어나 '중문,대포해안 주
상절리대
'란 이름으로 국가 천연기념물 443호로 지정되었다.

그 길쭉한 주상절리대 해안 중의 가장 핵심부가 이곳 지삿개 해변이다. 예전에는 해안과 벼랑
밑도리까지 접근이 가능했으나 천연기념물의 감투를 받은 이후에는 접근이 통제되었으며, 지
정된 길로만 고분고분 움직여야 된다. 허나 그 길만 따라가도 주상절리대의 멋진 경관을 충분
히 누릴 수 있다.
서귀포시는 지싯개 해변 주변에 담장을 둘렀는데, 가파른 벼랑으로 이루어진 서쪽 해안과 동
쪽 해안은 담장을 두지 않고 그 벼랑 자체로 경계선을 삼았다. 그리고 동쪽과 서쪽에 출입문
을 내어 바로 북쪽에 지나가는 올레길8코스와 연결을 시켰다.
허나 주상절리대 내부를 유료의 공간으로 삼아 수입을 챙기고 있다는 함정이 있다. 입장료는
어른 기준으로 무려 2,000원, 대자연이 오랫동안 부린 재주로 서귀포시가 호주머니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쿨하게 무료 공간으로 바꾸거나 입장료 1,000원이 적당해 보이는
데, 싹수가 있는 곳에 담장을 두르고 대놓고 입장료를 받아먹는 행태가 영 좋아보이지는 않는
다.

서귀포시의 지나친 상업주의 본능에 크게 혀를 차며 그냥 지나칠까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
를 그냥 못지나친다고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 대포주상절리대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2768-1, 2769 (이어도로 36-30,
  ☎ 064-738-1521) 


▲  인공이 가해진 듯, 신비로운 모습의 대포 주상절리대
사람이 빚은 것보다는 자연산이 훨씬 우수하고 섬세하다.

▲  거친 물놀이를 즐기는 주상절리대 밑 부분

마치 불규칙한 계단처럼 켜켜히 들어선 돌기둥들, 그 기둥이나 벼랑에 부딪친 파도는 아주 심
할 때는 높이 20m까지 솟구친다고 한다. 허나 내가 갔을 때는 절리대의 밑도리만 살짝 어루만
지는 정도로 순한 모습을 보였다.
이곳 해안은 대자연의 완성된 작품이 아닌 여전히 미완(未完)의 현재진행형이다. 제주도의 거
센 바람과 파도에 의해 굼벵이 속도로 조금씩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0,000년 뒤에는
지금보다 10~20% 정도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싶다.


▲  대포 주상절리대에서 바라본 남해바다와 중문 서쪽 지역
<저 멀리 우뚝 솟은 산은 산방산(山房山)>

▲  층층이 주름진 주상절리대 밑도리
거친 피부나 두꺼운 껍질을 지닌 무시무시한 생명체가 바다로 들어가는
모습 같다. 밤에 와서 보면 염통이 제대로 쫄깃해질 것 같은 기분.

▲  주상절리대 밑도리에 계속 채찍질을 가하는 바다
파도가 뽀얀 거품을 내며 주상절리대를 거칠게 어루만진다. 그렇게
절리대는 아주 조금씩 세월을 타며 늙어간다.

▲  방파제처럼 튀어나온 주상절리대 밑도리
예전에는 낚시터로 쓰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지체 높은 천연기념물
구역이라 사람들의 발길을 금하고 있다.

▲  주상절리대 동쪽 자갈해안
이곳은 언제든 발을 들일 수 있는 자유 구역이다. 저 주름진 벼랑을 넘으면
바로 주상절리대 핵심부이나 저 벼랑 역시 엄연한 금지된 구역이니 애써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자갈해안만 자유 구역임)

▲  자갈해안과 바다의 끊임없는 속삭임, 그리고 그 속삭임을
훔쳐 듣는 나.

▲  율동을 부리며 경쾌하게 흘러가는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연대 방향)

▲  야자수가 펼쳐진 올레길8코스
(대포연대 방향)

▲  올레길 속으로 자꾸 나를 집어넣다.
(대포연대 방향)


♠  제주올레길 8코스 대포연대, 대포포구

▲  대포연대(大浦煙臺) - 제주도 지방기념물 23-12호

올레길을 거닐다가 남쪽 소나무 숲에 시커먼 피부를 지닌 무엇인가가 눈에 아른거린다. 예사
로운 피사체가 아닌 듯 싶어 올레길을 잠시 버리고 그에게 다가서니 봉수대처럼 생긴 커다란
대포연대가 나를 반긴다.

연대(煙臺)는 제주도 스타일의 옛 통신수단으로 봉수대와 비슷하다. 제주도는 봉수대 외에도
연대까지 갖추어 섬 수비에 만전을 기했는데, 이들이 다른 점이 있다면 봉수대는 산꼭대기에
있었고, 연대는 조망이 좋은 해변과 구릉에 설치되었다. 횃불과 연기로 주변과 연락을 취했으
며, 평상시에는 1개, 수상한 배가 나타나면 2개, 그 배가 땅으로 접근하면 3개, 육지에 발을
들이면 4개, 전투가 벌어지면 5개를 올렸다. 이는 봉수대와 같다.

대포연대는 조선 후기에 현무암으로 지어진 것으로 근래에 정비되었으며, 동쪽으로 마희천 연
대, 서쪽으로 별노천 연대와 신호를 주고 받았다. 연대의 높이는 4m 정도로 북쪽으로 계단을
늘어뜨렸는데, 계단이 협소하고 안전시설이 없어 주의가 필요하다. 계단을 통해 정상으로 오
르면 바로 남쪽으로 바다가 보이며, 서쪽으로 중문해변과 산방산, 동쪽으로 월평포구가 시야
에 들어와 조망도 그런데로 괜찮다. 게다가 주변에 높은 존재가 없다보니 마치 허허벌판에 홀
로 솟은 봉우리에 오른 기분이다.

▲  대포연대 돌계단
계단 폭이 좁으니 통행에 주의하기 바란다.

▲  대포연대 정상부
정상부 테두리에는 낮게 돌담을 둘렀다.


▲  대포연대에서 바라본 서쪽 (중문, 산방산 방향)

▲  정면에서 바라본 대포연대

올레길과 가까운 곳에 있지만 조금 구석진 곳이라 찾는 이는 거의 없다. 소나무숲에 홀로 자
리해 고독을 즐기는 연대 정상에 오르니 시원한 바닷바람이 나를 감싼다. 이곳이 문화재보호
구역이라 출입금지를 알리는 붉은 테두리의 금표가 붙어있으나 돌계단 앞에 뻥 뚫린 문이 있
어 사실상 해방된 상태이다. 딱히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면 올라가도 상관은 없다.

* 대포연대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포동 2506


▲  대포연대 동쪽 해변

▲  올레길8코스(대포 포구 서쪽)에서 만난 제주도 스타일의 무덤
제주도는 현무암으로 무덤 테두리에 낮게 경계선 돌담을 다진다.

▲  평화로운 모습의 대포포구
북쪽과 서쪽은 해안, 동쪽은 방파제로 감싸인 조그만 포구로 여기서는
요트 투어와 제트보트, 제트스키 등의 해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  대포포구에서 만난 절터 주춧돌

대포포구를 지나려니 검은 주근깨가 다소 피어난 하얀색 큰 돌이 발길을 붙잡는다. 얼핏 보면
그냥 버려진 자연석처럼 보이나 자세히 보면 인공(人工)이 가해진 돌임을 알 수 있는데, 옆에
자리한 안내문에 따르면 이곳에는 고려 때 조그만 절이 있었다고 하며, 저 돌은 그 절의 주춧
돌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둥지를 틀며 바다를 바라봤을 절은 어느 세월이 급하게 잡아갔는지 이름을 남길 틈 조
차 주지 않았으며, 절터의 흔적도 마을이 닦이면서 겨우 저것만 남았다. 절의 비밀을 저 돌은
다 알고 있겠지만 워낙 충격이 커서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에 절이 있었던 것만 살짝
알려줄 따름이다.

제주도는 제주올레길 외에 '불교성지순례 절로가는 길'이란 도보길도 내놓았는데, 그중 4구간
이 이곳을 지나간다. 4구간은 '선정(禪定)의 길'이란 간판을 내걸고 있으며, 천제연폭포 동남
쪽에 있는 천제사에서 주상절리, 대포연대, 대포포구 주춧돌, 약천사를 거쳐 법화사(法華寺)
까지 이어지는 10km의 길이다. 그중 천제사~약천사 구간은 제주올레길8코스의 신세를 지며,
약천사에서 법화사까지 4.1km 구간은 독자적인 길을 이용한다.


▲  대포포구 동쪽 해안

대포포구에 이른 올레길8코스는 편한 신작로를 잠시 버리고 울퉁불퉁한 해안길을 따라 대포동
2356-1(이어도로)까지 이어진다. 이 구간의 해안 풍경도 제법 일품으로 검은 피부의 바위들이
파도와 온갖 풍상을 견디며 소소하게 눈요깃감이 되어준다.


▲  올레길8코스가 지나는 대포포구 동쪽 해안 ①

▲  올레길8코스가 지나는 대포포구 동쪽 해안 ②

대포포구 동쪽 해안을 지난 올레길8코스는 '이어도로'와 다시 짧은 만남을 갖는다. 배튼개 입
구 정류장에서 올레길은 북쪽으로 빠지나 나는 올레길을 버리고 편안한 이어도로를 택해 동쪽
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걸으니 왼쪽(북쪽)으로 커다란 기와집이 내 침침한 두 눈에 들어온다. 그
곳이 제주도 현대 사찰의 하나인 약천사로 그곳은 원래 일정에도 없었고, 20세기 현대 사찰에
는 별로 관심이 없어 쿨하게 지나치려고 했으나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지나칠 수가 없다고 잠
깐 살펴보기로 했다. 허나 그 잠깐이 무려 1시간이 될 줄은 누가 알았으랴, 고색도 익지 않은
겉모습과 달리 은근 시간 도둑이었던 것이다.


♠  동양 최대 규모의 법당을 지닌 제주도의 대표적인 현대 사찰
약천사(藥泉寺)


▲  남쪽 '이어도로'에서 바라본 약천사

서귀포 대포동에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현대 사찰인 약천사가 크게 둥지를 틀고 있다. 절 뒷쪽
에 숲이 우거진 야트막한 언덕이 있으나 그 덩치는 매우 작으며 주변이 거의 경작지와 들판이
라 거의 평지 사찰이나 다름이 없다.
절은 바다가 있는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남쪽 전방 1리 거리에 바다가 넝실거리고 있어 여기
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아주 진국이다. 게다가 경내 주변으로 제주도의 특산품인 감귤(柑橘
)나무가 귤을 가득 머금고 있어 따스한 남쪽 사찰의 이색 풍경을 진하게 보여준다.

약천사란 이름은 이름 그대로 약수(藥水)란 뜻이다. 머나먼 옛날부터 절 자리에는 '돽새미'란
우수한 수질의 약수터가 있었는데, 샘터 주위로 그 물을 먹고 자라는 논과 감귤나무 밭이 펼
쳐져 있었다. 돽새미는 이후 '도약샘(道藥泉)', '돽샘'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을 '절터왓'이란 부르기도 했는데, 고려 후기부터 '약천사'라 불리는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 절은 돽새미란 약수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아 꾸려진 것으로 보이며, 제주도
2대(또는 3대) 사찰의 하나였던 법화사와 가까워 그에 속한 조그만 절이 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허나 이를 입증할 역사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어 아직은 뜬구름 같은 이야기이다.

1960년대에 '김형곤'이란 학자가 병을 치료하고자 이곳의 조그만 굴에서 100일 관음기도를 올
리다가 꿈에서 약수를 받아마시고 병이 나았다고 한다. 하여 그 인연으로 작게 약수암(藥水庵
)이란 조그만 암자를 짓고 포교에 전념하다가 입적했다.
이후 18평짜리 초가 법당만 남아있던 것을 혜인이 이곳 일대를 사들여 절을 크게 일으켜 세웠
으며, 이곳에 있던 약수터의 존재감을 살려 절 이름을 약천사라 했다.

혜인은 제주도에 국제적으로 큰 사찰을 짓고자 적당한 터를 물색하다가 현재 자리에 퐁당퐁당
빠졌다. 하여 1981년부터 열심히 벌어들인 돈으로 약수암 주변을 조금씩 매입했으며, 지역 주
민들과 신도들, 그리고 우리의 옛 해양 영토인 왜열도에 거주하는 재일교포와 왜인(倭人)들까
지 그의 뜻에 호응해 많은 돈을 보내왔다.
1988년 어느 정도의 토지를 확보하자 3층 규모의 큰 법당을 짓기 시작하여 1991년 9월 완성을
보았다. (법당 설계와 조감도는 혜인이 직접 했음) 법당이 완성된 그해 상별당이 지어졌으며,
이듬해(1992년) 자모당을 짓고, 큰법당에 단청(丹靑)을 그렸다. 이는 단일 건물로는 가장 큰
규모의 단청불사로 꼽힌다.

1993년 3월에는 인근 마을 노인들을 초청해 제1회 경로잔치를 열었으며, (경로잔치는 매년 가
지고 있음) 1993년 큰법당에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봉불식(奉佛式)을 가졌다. 이 불상을 만
들고자 백두산에서 가져온 나무로 조성을 했으며, 단일 목불좌상에서는 국내 최대 규모이다. 그리고 1996년에는 대웅전 낙성대법회와 나한전 상량식을 가져 비로소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1997년 혜인은 약천사 회주(會主)로 물러나고 덕조가 새 주지가 되었으며, 1998년 영천 은해
사(銀海寺)의 말사로 등록하여 조계종의 일원이 되었다. 이때 절 건물과 토지는 모두 조계종
소유가 넘어갔다.

2001년 10월, 새 범종을 만들어 공개했는데, 그 소리가 매우 맑고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했
다. 2001년 10월 30일에는 오백나한 봉안식과 국제가사불사 회향대법회를 열었으며, 이때 국
제사찰음식 교류전을 가졌는데, 이 행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었다.
2002년 5월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으며, 특히
외국인의 참여가 많다.
2007년 1월에는 문화관광부 지정 전통사찰이 되었으며, 2009년 11월 26일에는 제주도의 지원
을 받아 태평양전쟁희생자 위령탑을 세웠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중증장애인요양시설인 자
광원을 설치해 복지사업에도 손을 뻗었다.

새집 냄새가 진동하는 경내의 대지 면적은 12만㎡로 법당인 3층짜리 대적광전을 비롯해 요사
채, 후원, 칠보각, 삼성각, 나한전, 굴법당, 상별당, 자모다원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
이 있으며, 요사채와 후원 앞에는 연못이 닦여져 있다.
고색이 아직 여물지 못해 문화유산은 없으나 대적광전에 깃든 목조비로자나불과 목각탱이 아
주 어린 나이임에도 서귀포시 지정 향토유형유산 5호의 작은 지위를 지니고 있다. 또한 제주
올레길8코스가 경내를 가로질러 동,서로 흐르며 '불교성지순례 절로가는 길' 4구간이 여기서
법화사로 흘러간다.

대적광전은 제주도에서 가장 큰 목조 건물로 유명한데, 절 자체가 서귀포 지역의 주요 관광지
로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무척 잦다. 또한 대적광전과 경내에 있는 많은 불/보살상과 탱
화는 전통 양식을 지닌 1990년대~2000년대 불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100년 이후에는 불
교미술사에서 크게 다뤄질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존재를 미리 잘 봐두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약천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포동 1165 (이어도로 293-28 ☎ 064-738-5000)
* 약천사 홈페이지와 템플스테이 정보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야자수가 마중을 하는 약천사 극락교 주변

▲  주황색 감귤이 주렁주렁 열린 경내 앞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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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쭉하게 자리한 요사(寮舍)채 (동쪽은 후원)

경내 중심부로 들어서러면 요사채 가운데에 뚫린 문이나 요사채 옆구리를 지나야 된다. 이곳
요사는 2층 규모로 그 꼭대기에 대적광전 앞뜨락이 있는데, 가운데 문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후원과 공양간이 있으며, 나머지 공간은 요사에 걸맞게 모두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예
불 편의를 위해 대적광전을 잇는 지하 통로를 닦아 날씨에 상관없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요사 양쪽 모서리에는 팔작지붕의 1층 누각을 달아놓아 범종과 법고를 봉안하여 범종루(梵鍾
樓)와 법고루(法鼓樓)로 삼았다. 범종루에 담긴 범종은 2001년에 장만한 것으로 1997년에 조
성된 범종이 있었으나 종소리가 영 좋지가 못해 새로 만들었다.
법고는 지름 2.4m의 큰 북으로 하루에 3번(새벽예불, 사시예불, 저녁예불) 종과 함께 몸을 풀
며, 여기서 바라보는 바다와 주변 풍경은 약천사 제일로 일컬어진다. 또한 요사채 앞에는 연
못이 누워있고 그 복판에 다리가 놓여져 있으며, 연못 남쪽에는 키가 큰 야자수가 1렬로 늘어
서 이색 풍경을 자아낸다.

▲  요사채 앞 연못과 야자수들

▲  약천사 나한전(羅漢殿)

경내 서쪽에 자리한 나한전은 석가여래와 그의 열성제자인 오백나한(五百羅漢)의 거처이다. 2
층 규모로 2층이 나한전으로 쓰이고 있는데, 오백나한전, 영산전(靈山殿)이라 불리기도 하며,
오백나한은 2001년에 봉안된 것으로 이 땅의 5,000만 인구처럼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녔다.


▲  나한전의 주인인 금동석가여래상
석가여래의 체격이 꽤 늠름하고 단단해 보인다. 그의 좌우로 조그만 500나한이
길게 늘어서 그를 호위한다.

▲  오백나한의 일원들
표정과 자세가 참 여유로워 보인다. 저들은
나처럼 생계 걱정은 없으니 그런듯..

▲  나한전 오백나한상
표정과 손에 들고 있는 물건 등 어느
하나 같은 모습이 없다.

       ◀  약천사 샘터 <수각(水閣)>
약천사의 이름 유래가 된 샘터로 이곳을 찾은
나그네들의 갈증 해소를 책임진다. 약천(藥泉)
이라고 해서 내가 요즘 환장하는 탄산약수는
아니며, 이 땅의 흔한 약수의 맛이다.
대자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듯, 물은 늘 끊
이지 않고 나와 연꽃 석조를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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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천사의 상징, 대적광전(大寂光殿)의 위엄

대적광전은 이곳의 법당(法堂)이자 상징물로 지하 1층, 지상 3층(실제는 5층) 규모의 팔작지
붕 집이다. 조선 초기 불교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그는 높이 29m에 키다리로 단일 법당 중에
동양에서 가장 크다. 그리고 면적은 지하 강당을 포함해 1,043평(3,380.84㎡)에 이른다.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의 웅장한 구조를 기본으로 하고, 금산사(金山寺) 미륵전(彌勒
殿)의 3층 구조를 응용해 설계한 것으로 이 땅에서 가장 큰 목불(木佛)인 비로자나불이 봉안
되어 있다. 그의 좌우에는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이 자리해 있는데, 약사여래불은 이곳에 있
던 약수를 마시고 많은 이들이 병치료를 했다는 이야기를 토대로 약사여래불이 그 역할을 계
속 해주길 바라는 뜻에서 봉안했고, 아미타불은 서귀포라는 이름이 서방정토(西方淨土)로 귀
의하려는 사람들의 소망에서 유래된 것이라 하여 그를 봉안했다. (서방정토의 주인이 아미타
불임)
건물을 받치고 있는 4개의 기둥에는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황룡과 청룡의 모습이 깃들여져
있으며, 2층에는 절을 세울 때 돈을 낸 사람들의 원불인 8만 개의 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사람을 개미로 만들 정도로 아주 크고 콧대가 높은 건물로 이를 두고 절의 지나친 외형 키우
기와 무조건적인 큰 건물, 큰 불상 일변도(一邊倒)에 혈안이 된 오늘날 불교계를 꼬집기도 한
다. 하지만 크게 만드는 것도 다 시대적 유행이라고 보면 되며, 우리 역사를 보더라도 고려시
대까지 궁궐과 관아, 왕족과 귀족들의 저택, 절, 불상 등은 정말 크게 만들었다. 그게 조선시
대로 오면서 규모가 싹 작아진 것이다.
사찰 건축물 같은 경우 그 성격에 충실하게 활용하고 공익에 위배되는 행위를 경계한다면 굳
이 쓴소리를 낼 이유는 없다고 본다. 약천사가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도 저 커다란 대적광전
때문이다.


▲  대적광전 1층에서 만난 관세음보살상

비로자나불 불단(佛壇) 좌우에는 뒷쪽 방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는데, 그 문을 들어서면 관세
음보살(觀世音菩薩) 누님의 공간이 있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 관세음보살상, 18,000불
등 봉안된 존재들도 참 많고 공간도 연병장처럼 넓다보니 각 공간마다 보살 아줌마들이 지키
고 있는데, 그들은 각자의 공간을 관리하고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절과 예불을 친절하게 안
내하며 커피와 티백차를 제공한다. (의자와 쉼터가 마련되어 있음)

나는 관세음보살 공간을 지키는 보살 아줌마와 불교와 제주도 관련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홀
로 나들이나 답사를 다닐 때면 객수(客愁)도 달랠 겸, 절이나 답사지 등에서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나그네들과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이는 나홀로 답사의 재미 중 하나로
그 이야기를 통해 그 지역과 해당 명소에 대한 많은 정보를 챙길 수 있다. 여기서도 보살 아
줌마와 20여 분 이야기꽃을 피우며, 절과 제주도의 여러 정보를 들었다. 물론 커피와 녹차 티
백도 얻어마시고 말이다.


▲  3층에 있는 잘생긴 윤장대(輪藏臺)
대적광전 3층에는 4개의 윤장대가 있다. 윤장대란 서적을 보관하는 책장으로
이것을 돌리면 불경을 이해한 것과 같고, 소원도 이루어진다며 속세에
오랫동안 영업을 벌이면서 기존의 성격과는 많이 달라졌다.

▲  3층에서 바라본 비로자나3존불의 위엄

대적광전의 주인장인 비로자나불은 백두산에서 가져온 나무로 1993년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는
4.5m, 대좌의 높이는 4m에 이른다. 이 땅에서 가장 큰 목불로 3층에서 봐도 저 정도로 후덜덜
한 크기인데, 1층에서 보면 제대로 주눅이 들어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진다.
그들 뒤에는 거대한 후불목각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는데, 목조비로자나불과 목각탱 4점은 이
제 30년 남짓 묵은 어린 나이임에도 서귀포시 지정 향토유형유산 5호의 지위를 지니고 있다.
이들 목각탱은 문경 대승사(大乘寺)에 있는 늙은 후불탱을 참조하여 만들었다.


▲  1층에서 바라본 비로자나3존불과 후불목각탱의 위엄

▲  대적광전 3층에서 바라본 요사채와 남해바다
대적광전은 3층까지 싹 둘러볼 수 있다. 내부 계단을 통해 오르면 되며, 3층에서
비로자나불과 창 밖에 펼쳐진 경내와 바다를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니
꼭 3층까지 둘러보기 바란다.

▲  굴법당 주변 감귤나무 숲길

▲  굴법당 바깥에 자리한 하얀 피부의 마애불
마애불 좌우로 굴법당으로 인도하는 굴이 있고, 마애불 앞에는 연꽃
석조(石槽)를 지닌 샘터가 있어 시원한 약수를 제공한다.

▲  굴법당(窟法堂) 내부

경내 뒷쪽 숲속에는 컴컴한 동굴 스타일의 굴법당이 있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
운 곳으로 대적광전이 지어지기 이전에 조성되었는데, 정교한 최신 공법으로 지어져 제주도에
널린 용암동굴과 비슷한 모습이다. 허나 현실은 인공 땅굴이다.
불단에는 약사여래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그 좌우로 백의관세음보살(白衣觀世音菩薩)과 지장
보살이 자리하여 약사3존상을 이룬다. 그들 옆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두광(頭光)을 지
닌 존재가 있는데, 그는 부동명왕(不動明王)으로 약천사의 모든 재앙을 물리쳐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봉안했다.

굴법당을 끝으로 1시간에 걸친 약천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처음에 10여 분 정도 생각하
고 발을 들였는데, 그게 6배 가까이 늘어나 그만큼의 시간을 앗아간 것이다. 그래도 생각 밖
으로 볼거리도 많고 여수(旅愁, 객수)도 조금 풀었으니 들리길 잘했다.

약천사 주차장으로 나오니 서귀포시내버스 645번(약천사↔중앙로터리)이 바퀴를 접고 쉬고 있
었다. 이곳이 그들의 종점이라 그런 것인데, 마침 버스 1대가 기지개를 켜고 있어 타려고 하
니 운전사가 어디로 가냐고 물어본다. 하여 시내(중앙로터리 주변)로 간다고 답을 했으나 이
버스는 신시가지로 크게 돌아간다며 다른 것을 타라고 그런다. 나는 괜찮다고 그랬으나 끝까
지 이것을 타면 큰일이 날 것처럼 말을 하며 저기 입구로 나가면 520번과 521번이 많이 다니
니 그것을 탈 것을 강하게 권했다.
하여 645번을 포기하고 약천사 입구로 나와서 버스를 기다리니 서귀포시내버스 520번(제주국
제컨벤션센터↔효돈중학교)이 나타나 활짝 입을 벌린다.

그 버스를 타고 서귀포 시내로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외돌개를 오랜만에 볼까 했으나 버스는
그 부근으로는 가지를 않아서 마냥 타고 가다가 서귀포 원도심으로 진입, 천지연폭포 부근인
솔동산입구에서 내렸다.
일몰까지는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어 천지연폭포 남쪽에 있는 새섬을 이날의 마지막 메뉴로
보려고 햇으나 시커먼 구름이 나를 겨낭했는지 서귀포의 하늘을 가득 메우며 빗방울을 투하한
다. 빗방울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았고 만약을 대비해 우산도 챙겨왔으나 시커먼 날씨에 새섬을
보려는 의지가 뚝 떨어졌다. 게다가 너무 여로를 살찌웠는지 몸도 무척 무거워 새섬은 내일로
쿨하게 미루고 오늘은 일찍 쉬기로 했다.
그래서 천지연폭포 입구에 적당한 모텔을 잡아 여장을 풀고 다음날 아침까지 푹 쉬었다. 이렇
게 하여 제주도 둘째 날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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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서귀포 천제연폭포, 제주올레길8코스 나들이 (천제연관개수로, 선임교, 베릿내오름)

서귀포 천제연폭포



' 서귀포 천제연폭포 겨울 나들이 '

천제연폭포 제1폭포

▲  천제연폭포 제1폭포 (천제연)

천제연폭포 제2폭포 천제연폭포 제3폭포

▲  천제연폭포 제2폭포

▲  천제연폭포 제3폭포



 

겨울 제국의 차디찬 한복판인 1월의 첫 무렵, 천하에서 가장 작은 대륙인 제주도(濟州
島)를 찾았다.

아침 일찍 김포공항에서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1시간을 내달려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정말 오랜만에 제주도에 나를 던져놓았으나 정처(定處)는 싹 정해둔 상태라
그곳만 얌전히 찾아가면 되는데, 첫날은 계획대로 외도동 월대(月臺)를 시작으로 서일
주선을 따라 모슬포(摹瑟浦)까지 여러 주옥 같은 명소와 올레길을 둘러보고 20시 넘어
서 산방산(山房山) 부근에 자리한 '산방산 탄산온천 게스트하우스(게하)'에 여장을 풀
었다.
첫날 여로(旅路)가 너무 배불렀는지 눕자마자 바로 꿈나라로 직통하여 9시간 가까이를
푹 잤다. 여관(모텔)이나 호텔, 펜션, 민박 등은 많이 이용해보았으나 게하는 첫 이용
인데, 그렇게 게하란 존재를 체험하고 아침 일찍 탄산온천에서 몸을 푹 끓이고 말리고
다진 다음 길을 나섰다. (탄산온천 숙박객에게 온천 이용권을 줌)

둘째 날은 첫날 못지 않게 아주 빵빵한 수준의 답사 코스를 준비했다. 천제연폭포를 시
작으로 서귀포(西歸浦) 시내까지 움직이는 일정으로 외도 월대부터 이곳까지 신세를 쭉
진 제주도 간선 202번을 타고 20분 정도를 달려 천제연폭포 정류장에 두 발을 내렸다.



 

♠  천제연폭포(天帝淵瀑布) 제1폭포와 제2폭포

▲  천제연폭포 정문

천제연폭포 정문에 이르니 매표소가 나그네의 호주머니를 부담스럽게 노려본다. 여기서 입장
료를 내야 폭포로 들어설 수 있기에 비싼 입장료를 치루고 유료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제주도의 남부를 이루고 있는 서귀포에는 천제연폭포와 천지연폭포(天地淵瀑布), 정방폭포(正
房瀑布) 등 3개의 유명 폭포가 있다. 이들은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지역 명소로
크게 두각을 보인 존재로 그중 천지연폭포와 정방폭포는 까마득한 과거가 되버린 초등학교 시
절(1988년)에 인연을 지었고 천제연폭포는 무려 30여 년이 지난 이제서야 인연을 짓는다. (이
들 폭포 외에 소정방폭포와 엉또폭포, 원앙폭포도 있음)

정문을 지나면 천제연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오고 이내 2갈래로 갈라져 오른쪽(북쪽)은 천
제연폭포(1폭포), 왼쪽(남쪽)은 천제연2폭포, 3폭포로 이어진다. 제2폭포 남쪽에 걸린 선임교
를 건너 여미지식물원과 롯데호텔제주 일대까지 접근이 가능하며, 제3폭포를 지나 제주올레길
8코스와 베릿내오름, 대포 해변(주상절리)까지 접속이 가능하다. 그래서 천제연폭포만 보고
돌아갈 요량이 아니라면 '폭포 정문 → 제1폭포 → 제2폭포 → 선임교 주변과 천제루 → 제3
폭포 → 폭포 후문 → 제주올레길8코스(베릿내오름, 대포해변)' 순으로 이동하길 권한다. 그
러면 영양만점의 여로가 될 것이다.

* 천제연폭포 소재지 :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동 2232 (천제연로 132, ☎ 064-760-6331)


▲  천제연폭포 제1폭포

제주도 최대의 관광단지인 중문관광단지 한복판에 천제연폭포가 자리하고 있다. 천지연폭포와
정방폭포는 1개의 폭포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곳은 무려 3개의 폭포를 지녀 조금은 단조로운
저들과 크게 차별화된 모습을 보인다.
천제연폭포 3형제는 편의상 제1폭포, 제2폭포, 제3폭포라 불리나 제1폭포가 원래 천제연폭포
이다. 폭포의 높이는 22m에 이르며, 그 앞에 펼쳐진 못을 천제연(天帝淵, 웃소)이라 부르는데
, 못의 밑바닥이 흔쾌히 보일 정도로 수질이 좋으나 겉보기와 달리 21m의 깊이를 지녀 만만히
보면 안된다.

호랑이가 담배를 알기 훨씬 이전에 옥황상제 직속의 선녀 7명이 밤이면 이곳에 내려와 목욕을
했다고 한다. 그 선녀의 주인이 옥황상제라 그 명칭을 따서 '천제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
는데, 이는 상상 속의 존재인 선녀와 옥황상제가 군침을 흘릴 정도로 빼어난 절경을 지녔다는
뜻이다. (옛 사람들은 경승지에 학이나 용, 신선, 선녀 등을 엮어놓는 것을 좋아했음)
조선시대에는 천제연 동쪽에 중문원(中文院)을 두었는데, 제주목사(濟州牧使, 현 제주시장)가
이곳에 쉬면서 폭포의 경치를 즐겼다. 이때는 폭포 양쪽 언덕에 표적을 세우고 군사들에게 활
쏘기를 시켰으며, 양쪽 언덕 사이로 긴 줄을 걸어놓고 줄에 매달려 건너가 화살을 수거하도록
했다. 바로 중문원에서 서귀포 시내의 서부를 이루는 중문(中文)이란 지명이 생겨났으며, 천
제연폭포를 빚은 계곡을 중문천이라 부른다.

제1폭포는 대자연이 절묘하게 빚은 주상절리(柱狀節理)식 벼랑으로 실로 감탄을 머금게 한다.
그런데 그 폭포 위(북쪽)에 천제교란 다리가 걸려있어 적지 않은 옥의 티를 내고 있다. 그 다
리는 서귀포시내와 모슬포를 잇는 다리로 차량의 왕래가 빈번하여 이곳의 적막을 수시로 아작
을 낸다. 도로와 다리를 놓는 것은 좋지만 꼭 폭포 윗도리에 저렇게 볼썽사납게 개설해야 했
는지 의문이 든다. (다리가 보이지 않게 좀 북쪽에 지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폭포라고는 하지만 정작 위에서 떨어지는 물은 없고 음악 무대의 뒷배경처럼 주상절리 벼랑만
덩그러니 있다. 이는 겨울 가뭄으로 중문천 상류에 물이 거의 없어서 그렇다. 그런데 이상한
건 폭포 앞 못(천제연)에는 물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보통 폭포가 쏟아낼 물이 없으면 그 밑
의 못도 갈증을 겪기 마련인데 말이다. 허나 이곳은 절벽과 점토층 사이에서 물이 꾸준히 나
와 천제연을 채우고 있고 폭포 동쪽 동굴에서도 물이 나와 아무리 상류에 물이 증발해도 전혀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이곳 물은 제2폭포, 제3폭포를 빚으며 유유히 바다로 흘러간다.

제1폭포의 폭포다운 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비가 한바탕 온 직후에 가기 바란다. 그 외에는 병
풍처럼 멀뚱히 서 있어 이곳이 폭포인지 단순히 못인지 햇갈리게 만든다.


▲  천제연폭포 제1폭포와 옥처럼 맑은 천제연(웃소)

폭포 동쪽 벼랑에는 조그만 바위동굴이 있다. 그 천장에서는 얼음보다 차가운 물이 흘러내리
고 있는데, 예로부터 물맞이 명소로 백중(百中)과 처서에 이 물을 맞으면 만병통치가 된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허나 지금은 폭포 보호와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접근을 통제
하고 있어 물맞이를 할 수 없다.


▲  물맞이 명소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그림의 떡이 되버린
천제연 동쪽 바위동굴

▲  천제연 제1폭포 앞 계곡(중문천)

천제연폭포와 계곡 좌우에는 푸른 빛의 숲이 짙게 우거져 있다. 제주해협 건너 북쪽은 겨울
제국의 핍박으로 남쪽 바닷가를 제외하고는 자연산 푸른 잎사귀가 거의 사라졌으나 제주도는
겨울의 힘이 미약해 푸른 잎의 나무와 숲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그만큼 제주도는 따뜻한
남쪽 땅이다.

이곳을 장식하고 있는 숲은 보통 숲이 아닌 따뜻한 기후대에서 뿌리를 내리는 난대성식물(暖
帶性植物)의 보금자리로 희귀식물인 솔잎란과 백량금, 죽절초, 담팔수나무, 구실잣밤나무, 조
록나무, 참식나무, 가시나무, 감탕나무, 바람들칡, 마삭줄, 남오미자, 왕모람 등이 식구를 이
루고 있다. 희귀식물과 난대성식물이 어우러진 이 땅의 대표적인 난대림지대로 '천제연 난대
림(暖帶林)
'이란 이름으로 국가 천연기념물 37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제1폭포 서쪽 벼랑에는 높이 13m, 둘레 2.4m 규모의 담팔수(膽八樹)나무가 있는데, 그는
별도로 '천제연 담팔수나무'란 이름으로 제주도 지방기념물 14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담팔
수나무는 아주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나무로 우리나라에는 제주도에만 있다. 천제연계곡에는
20여 그루의 어린 담팔수가 자라고 있는데, 주변에 여러 나무와 뒤섞인 상태라 일반 사람들은
구별하기가 어렵다.


▲  세월을 간지나게 탄 제1폭포와 제2폭포 사이 계곡(중문천)

▲  제1폭포에서 제2폭포로 인도하는 산책로
천제연계곡(중문천) 벼랑에 닦여진 길이라 벼랑 구간이 많다.

▲  천제연 관개수로(灌漑水路) - 등록문화재 156호

천제연폭포 구역에는 대자연이 빚은 중문천(천제연계곡) 외에 사람들이 만든 조그만 관개수로
도 존재하여 2개의 물줄기를 보여주고 있다.
천제연폭포의 작은 운하인 관개수로는 마르지 않는 샘인 천제연 물을 농업용수로 활용하고자
닦은 것으로 대정군수를 지낸 채구석(蔡龜錫, 1850~1920)이 이재하(李載廈), 이태옥(李太玉)
등과 함께 중문과 창천, 감산, 대포리 지역 사람들을 동원하여 2회에 걸쳐 만들었다.

채구석은 제주도에서 오랫동안 관리를 지낸 제주 토박이로 제주판관(判官)과 대정군수를 지냈
다. 1894년 제주판관 시절에 제주도에 흉년이 들자 자신의 봉급을 털어 백성을 구제했고, 대
정군수 시절인 1895년에는 주민들이 갑오개혁(1894년)으로 생겨난 신제도에 반발해 경무청을
파괴하자 이를 진압했다. 또한 1901년 이재수(李在守)의 난을 진압한 공로가 있으나 군수에서
파직되어 3년간 금고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중문에 거주하면서 바다로 매일 버려지는 천제연 물을 보며 '저 물을 이용해 논 농사를
할 수 없을까?'
궁리하다가 3년 동안 폭포 주변 지세를 직접 조사했고 천제연 물을 활용하여
논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하여 1907년 천제연 토지신(土地神)에게 토신제(土神祭)를 지내고
공사에 들어갔다.
 
천제연계곡에는 암반과 벼랑이 많아서 공사가 꽤 힘들었는데, 소주 원액을 쏟아붓고 장작불로
바위를 폭파하기도 했으며, 제1폭포 주변 창구목과 화폭목은 가장 난공사 구간으로 화약을 구
해 화포를 만들어 바위를 건드리거나 장작불로 바위를 부셨다. 그렇게 1년의 공사 끝에 1908
년 수로가 완성되었고, 성천봉(星川峯, 베릿내오름) 밑에 5만여 평(약 231,000㎡)의 논을 닦
으면서 논농사의 불모지였던 제주도에 한줄기 빛을 선사했다.
그리고 1917년 2월, 2차 공사에 들어갔는데, 이때도 채구석과 이재하, 이태옥이 돈을 내어 추
진했다. 하지만 1920년에 채구석이 사망하는 등, 여러 진통이 있었으나 1923년 공사가 마무리
되어 2만여 평의 논밭이 추가로 개척되었다. 하여 중문마을은 동쪽에 자리한 강정마을과 함께
제주도의 대표 쌀 생산지로 번영을 누렸다. (공사에 참여한 일꾼의 일당은 3돈이었다고 함)

1차 공사 때는 천제연폭포(웃소)에서 베릿내오름골 앞을 돌아 국제컨벤션 앞 밀레니엄관까지
수로를 닦았고, 2차 공사는 천제연 제2폭포(알소)에서 국제컨벤션까지 닦았는데, 이들 수로는
채구석, 이재하, 이태옥이 중심이 된 '성천답회'에서 관리하다가 1957년 국유화되어 서귀포시
에서 관리하고 있다.
천제연의 물을 먹고 자란 성천봉 밑 옥답은 중문관광단지가 닦이면서 싹 사라지고 말았다. 제
주도 논농사의 성지(聖地)와 같은 곳인데 일부를 기념으로 남겨두어 약간의 논농사라도 했으
면 좋았을 것을 개발 지상주의는 그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수로의 길이는 1.9km로 최근 정비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콘크리트 떡칠이 되었으나 논농사가
힘들었던 제주도의 자연환경을 극복한 현장으로 그 시절 농업환경을 전해주는 존재라 등록문
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허나 이제는 물을 대줄 논도 모두 사라져 무늬만 남은 상태이며,
일부 수로는 아예 물이 말라버렸다.
그래도 산책로 옆에 이렇게 100년 묵은 수로가 물을 머금고 흘러가 조촐하게 볼거리를 선사하
니 천제연폭포에서 생각치도 못한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다.


▲  오늘도 묵묵히 흘러가는 천제연 관개수로
한때는 농업용수 수송으로 바쁘게 살았으나 이제는 천제연폭포를 수식하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  제2폭포로 인도하는 벼랑 산책로

산책로 오른쪽(서쪽)은 깎아지른 듯한 천제연계곡 벼랑, 왼쪽(동쪽) 역시 주름선이 진한 벼랑
이다. 저 단단한 벼랑과 암벽을 뚫고 힘들게 관개수로를 닦았으니 제주도 농업 발전과 식량확
보에 대한 강인한 집념이 없었으면 불가능하다.


▲  산책로 옆 바위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관개수로
바위들이 목이 많이 말랐는지 이곳 수로는 물이 말라버렸다.

▲  위에서 바라본 천제연폭포 제2폭포

▲  천제연폭포 제2폭포

제2폭포는 제1폭포와 비슷한 높이로 그 앞에 '알소'라 불리는 못(소)이 형성되어 있다. 제1폭
포와 달리 물이 굉음을 내며 떨어져 귀신도 놀라 도망칠 정도인데, 만약 비가 와서 수량이 많
았다면 지금보다 소리가 더 요란했을 것이다.
알소 남쪽에 닦여진 관람공간까지 접근이 가능하나 그 이상의 접근은 통제하고 있다. 제1폭포
는 그래도 못과 계곡의 물을 만질 수 있으나 아랫 폭포로 내려갈수록 자유의 공간이 절반 이
상씩 줄어든다. (제3폭포는 아예 접근도 불가능하여 위에서 바라봐야됨)


▲  확대해서 바라본 천제연폭포 제2폭포의 위엄
폭포 좌우에 우거진 나무들은 '천제연 난대림'의 일원이다.

▲  제3폭포로 흘러가는 제2폭포 앞 계곡(중문천)



 

♠  선임교(仙臨橋) 주변

▲  선임교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선임교는 천제연협곡(중문천)에 높이 걸린 다리로 제2폭포와 제3폭포 사이에 무지개처럼 걸려
있다. 7명의 선녀가 천제연폭포에서 노닐었다는 전설에 맞추어 다리 밑도리에 하얀 피부의 칠
선녀상을 달았는데, 밑도리 옆구리에 각각 7명씩, 총 14명의 선녀상이 새겨져 있다.
선녀의 길이는 1명당 20m로 각자의 악기를 든 선녀 누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
을 웅장하게 자아냈다. 하여 칠선녀다리, 칠선녀교, 구름다리 등의 별칭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오작교(烏鵲橋) 스타일의 아치형 다리로 가운데 부분이 하늘로 향해 볼록 솟
아있으며, 다리 길이는 128m, 폭 4m로 230톤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다. 또한 야경까
지 고려하여 100개의 난간 사이로 34개의 석등을 설치해 햇님의 퇴근 이후, 일제히 빛을 쏟아
내게 했다. 하여 이곳 야경은 천제연폭포에서 가장 일품으로 칭송이 자자하다.

천제교와 천제2교 사이, 천제연협곡에 걸린 유일한 다리로 이렇게 구름다리처럼 높이 닦은 것
은 협곡이 깊고, 천제연 난대림이 우거져 있어 그들의 피해가 덜 가게끔 하고자 함이다.
오로지 뚜벅이를 위한 다리로 그것을 건너면 천제루 구역이며, 중문관광단지의 일원인 여미지
식물원과 이어진다. 허나 천제루 구역만 천제연폭포 관람료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 이상을 가
려면 폭포 서문을 나와서 접근해야 된다.

▲  잘생긴 석등이 마중하는 선임교 동쪽

▲  볼록 솟은 선임교 한복판


▲  선임교에서 바라본 바다 방향 천제연협곡(중문천)
계곡은 천연기념물 난대림에 둘러싸여 있어 금지된 공간이 되었다.

▲  선임교에서 바라본 제1폭포 방향과 한라산(漢拏山)
멀리 구름에 감싸인 높은 뫼가 제주도의 심장이자 성역인 한라산이다.
제주도는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모두 한라산이 바라보인다.

▲  선임교에서 바라본 제2폭포와 무성한 천제연 난대림

▲  나그네의 동전을 노리는 오복천(五福泉)

선임교는 그 길이가 128m라고 하지만 다리 높이가 상당해 은근히 염통을 쫄깃하게 만든다. 하
여 체감거리는 2배 이상으로 다가온다.
다리를 건너면 천제루 구역으로 오복천이란 분수대가 마중을 한다. 여기서 오복(五福)이란 장
수를 뜻하는 거북이와 부자를 뜻하는 돼지, 귀함을 뜻하는 용, 사랑을 뜻하는 원앙, 자식복을
뜻하는 잉어를 뜻한다. 그 동물상 앞에는 복주머니로 포장된 돌통이 각각 설치되어 있어 거기
에 동전이 들어가면 해당 동물상의 복을 받는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그리고 그렇게 긁어
모은 동전은 나중에 불우 이웃을 돕는데 쓴다고 안내문에 당당히 적혀있다. (정말로 그럴까?)


▲  천제연폭포의 칠선녀 전설과 폭포 안내문을 머금은 돌병풍식 석물

▲  꽃길만 걷자~~ 동백이 화사하게 꽃길을 이룬 천제루 주변 산책로
동백(동백꽃)은 친 겨울파의 꽃으로 초봄까지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  천제루 주변 동백 산책로 ①
동백이 붉은 입술을 도도하게 드러내며 나그네의 정처 없는 마음에
마구 돌을 던진다.

▲  천제루 주변 동백 산책로 ②

▲  천제루 주변 동백 산책로 ③

▲  밑에서 바라본 천제루(天帝樓)
선임교 서쪽 높은 곳에 자리한 천제루는 천제연협곡 전망대용으로 세워진 2층
누각이다. 1층은 매점으로, 2층은 전망대로 쓰이며, 2층에 오르면
천제연협곡과 제2폭포가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천제루에서 바라본 천제연폭포 제2폭포와 천제연 난대림

▲  선임교 동쪽에서 바라본 천제연협곡(중문천)과 천제연 난대림

▲  선임교에서 천제연폭포 제3폭포로 내려가는 길

▲  제3폭포로 인도하는 나무데크길

▲  제3폭포 입구 주변 천제연 관개수로
이곳 관개수로는 제2폭포에서 성천봉 옥답을 잇는 수로로 1917년에 닦기 시작하여
1923년에 완성을 보았다.

▲  제3폭포 입구 갈림길



 

♠  천제연폭포 제3폭포와 대포해변

▲  천제연폭포의 막내, 제3폭포

제3폭포는 높이가 10여m로 제2폭포보다 넓은 못(소)을 가지고 있다. 폭포수는 실타래를 굵게
풀어놓은 듯 제2폭포보다 장쾌하게 쏟아지고 있으며 못은 청정하고 요염한 색깔을 보이고 있
다. 아무리 따뜻한 남쪽이라고 해도 엄연한 겨울의 한복판이라 폭포의 유혹이 먹히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여름의 한복판에 왔더라면 그 유혹에 일부러 넘어가 접근 금지를 무시하고 풍덩
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접근이 어느 정도 허용된 제1폭포, 제2폭포와 달리 폭포 주변 접근이 통제되어 있어 폭
포가 보이는 전망대에서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된다.

제1폭포와 제2폭포, 선임교 주변까지는 관광객들이 많았으나 선임교 남쪽부터는 사람 구경하
기가 힘들다. 다소 구석진 제3폭포 주변까지는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기 때문이다. 허나 제3
폭포도 엄연한 천제연 식구이고 제2폭포 못지 않은 외모를 지녔으니 꼭 살펴봐야 나중에 저승
이나 하늘나라에 가서 옥황상제에게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보통은 선임교까지만 둘러봐
도 충분하다 여기고 천제루 구역 쪽으로 빠지거나 천제연폭포 정문으로 되돌아감)


▲  시원하게 쏟아내는 제3폭포의 위엄
폭포 앞 못에 모인 중문천(천제연계곡) 물은 여기서 마지막 휴식을 취하고
지척에 보이는 바다로 길을 재촉한다.

▲  제3폭포 입구에 세워진 성천답관개유적비(星川畓灌漑遺跡碑)

천제연폭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천제연 관개수로를 만들어 제주도 농업사의 커다란 빛
을 주었던 채구석이다. 제3폭포 입구에 채구석을 기리고자 2003년 2월에 세운 '성천답 관개유
적비'가 자리해 있는데, 비좌(碑座)와 검은 피부의 비신(碑身), 이무기가 새겨진 이수(螭首)
를 고루 갖추어 맵시도 좋다.
천제연폭포 정문 주변에도 1957년 8월 대정 지역 유림들이 세운 '통훈대부 채구석기적비(通訓
大夫 蔡龜錫紀蹟碑)'가 있는데 그 기적비는 존재를 몰라서 지나치고 말았다.


▲  제3폭포에서 폭포 후문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와 관개수로(왼쪽)

▲  제주올레길8코스와 만나는 천제연폭포 남쪽 후문

제3폭포 입구에서 나무데크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뻥뚫린 남쪽 후문이 나온다. 철저하게 금
줄을 치며 입장료를 챙기는 정문, 서문과 달리 후문은 지키는 사람도 없고, 제재하는 시설도
없어 그냥 대놓고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내가 갔을 때는 그랬음)
이곳은 밖으로 나가는 문이지 폭포 구역으로 들어가는 문은 아니며 일루 들어가지 말고 정문
을 이용할 것을 권하는 경고판이 인상을 쓰며 지키고는 있으나 정작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 그
경고가 먹혀들어갈 턱이 없다.
천제연폭포의 개구멍 같은 곳으로 이곳의 존재를 알았다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이곳을 이용하
는 것인데, 역시 아는 것이 힘이다. 서귀포시는 이렇게 후문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매표소를
두어 후문 수요라도 좀 챙기기 바란다.


▲  베릿내오름 서쪽 자락 제주올레길8코스

남쪽 후문에서 제주올레길 8코스와 만난다. 8코스는 월평에서 대평포구까지 이어지는 19.6km
의 긴 올레길로 천제2교에서 베릿내오름(성천봉) 서쪽 자락을 지나 폭포 후문을 거쳐 베릿내
오름 정상을 찍고 다시 천제2교로 내려간다. 하지만 나는 오름 정상은 가지 않고 서쪽 자락길
을 통해 천제2교로 내려가 한참이나 떨어진 약천사까지 올레길의 신세를 졌다.
제주올레길 장거리 탐방은 전날 절부암에서 수월봉까지 제주올레길12코스에 이어 2번째이다.


▲  베릿내오름 서쪽 자락길에서 바라본 천제연계곡(중문천)
계곡 너머 언덕에는 중문관광단지의 일원인 별내린전망대와 씨사이드아덴리조트가
둥지를 틀고 있다.

▲  중문천을 바다로 흘려보내는 천제2교와 너른 남해바다
(베릿내오름 서쪽 자락길에서 바라본 모습)

▲  베릿내오름 서쪽 자락길 (제주올레길8코스)

▲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제주올레길8코스 (제주부영호텔앤리조트 옆 구간)

베릿내오름을 완전히 내려가면 천제2교가 나온다. 여기서 올레길8코스는 '중문관광로'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 가다가 제주부영호텔앤리조트 직전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트는데, 그 길을 3분
정도 가면 남해바다와 스킨쉽을 즐기는 대포 해변이 나온다.
대포주상절리까지 제주부영호텔과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남쪽을 지나가는데, 이 일대는 예전 천
제연 물을 먹고 자랐던 제주도 제일의 옥토, 성천답이 있던 터이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 식량
을 조달하던 농업 현장이 이제는 휴식과 여흥의 장소로 싹 바뀐 것인데, 이곳 옥토에 대한 미
련이 없어질 정도로 세상이 조금은 살만해진 모양이다. (밥은 굶지 않게 되었으나 삶이 팍팍
한 것은 여전함)


▲  제주부영호텔앤리조트 옆 제주올레길8코스 (북쪽 방향)

▲  평화로운 바닷가 풍경,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 해변 ①
저 멀리 봉긋 손짓을 하는 산이 산방산이다. 내가 저 부근에서 여기까지
이동을 한 것이다. (천제연폭포 정류장부터 여기까지 도보 이동)

▲  평화로운 바닷가 풍경,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 해변 ②

▲  제주올레길8코스 대포해변 숲길 (대포주상절리 서쪽)
여기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대포 해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대포주상절리가 나온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꺼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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