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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삼각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정릉계곡 나들이 (형제봉, 보현봉, 청수천약수)

북한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 북한산 형제봉능선, 일선사, 영취사 봄나들이 ~~~ '

북한산 일선사에서 바라본 서울
▲  일선사에서 바라본 형제봉능선과 서울시내

영취사 5층석탑

형제봉 능선에서 바라본 보현봉

▲  영취사 5층석탑

▲  형제봉능선과 보현봉



 

석가탄신일(부처님오신날, 이하 초파일)을 하루 앞둔 어느 평화로운 봄날, 북한산(삼
각산) 형제봉능선 밑에 깃든 영취사를 찾았다. 영취사는 북한산성 대성문에서 정릉으
로 내려오면서 여러 번 거쳐간 인연이 있는데, 그곳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늙은 5층
석탑이 있다. 허나 그를 제대로 사진에 담은 적이 없어 이렇게 출동한 것이다.

북한산(삼각산) 기점의 하나인 정릉(貞陵) 코스는 어렸을 때부터 익혀온 길이라 이쪽
은 아주 잘 안다고 자부를 했었는데, 시작부터 길을 잘못 들어서 아주 초보적인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날이 초파일 직전이라 절까지 연등이 대롱대롱 달려있기 마련인데,
내가 빠진 길(정릉계곡~신성천약수터 방면)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하지만 약간의 의심만 했을 뿐, '조금만 가면 영취사로 가는 길이 나오겠지' 싶은 안
일한 생각으로 계속 고집을 부리니 신성천약수터와 이상한 능선길이 나온다. 이거 왠
능선인가? 싶어 살펴보니 글쎄 형제봉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던가. 길을 완전히
잘못 들어선 것이다.
허나 형제봉능선에서 영취사나 정릉계곡으로 바로 빠지는 길은 헝클어진 수준의 비법
정길 외에는 없어 일선사입구까지 강제 등산을 해야 된다. 거기까지는 가야 영취사로
가는 법정 탐방로가 나온다. 하여 일정에도 없던 일선사(해발 560m)까지 강제로 덤으
로 보고 영취사로 내려가 5층석탑을 친견한 다음 정릉으로 원점 회기했다. 간단히 영
취사만 보려고 출동한 것이 잠깐의 실수로 아주 파란만장한 북한산 등산이 되버린 것
이다.


▲  두 암벽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북한산 정릉계곡 하류
(정릉탐방지원센터 서쪽)



 

♠  뜻밖에 인연들, 형제봉능선을 거쳐 일선사까지

▲  정릉계곡 하류에서 형제봉능선으로 인도하는 숲길

정릉 코스는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주요 기점의 하나로 도심과 매우 가깝고 교통
편 또한 착하여 이곳을 이용하는 등산/나들이 수요가 상당하다. 정릉동 북한산국립공원 종점(
110, 143, 162, 1020, 1113번 종점)에서 4~5분 정도 가면 정릉탐방지원센터가 마중을 하는데,
여기서부터 풍경은 180도 바뀌어 대자연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정릉계곡을 옆에 끼고 5~6분을 더 들어가면 다리 직전에 3거리가 있는데, 여기서 다리를 건너
면 정릉계곡 상류와 북한산성 보국문, 영취사로  이어지며, 서쪽 길은 형제봉능선으로 빠진다
. 허나 오랜만에 정릉 코스를 찾은 탓일까? 아니면 1살을 먹은 휴유증 때문일까? 판단을 잘못
하여 그만 서쪽 길로 빠지고 말았다. (여기서 다리를 건너 더 들어가야 영취사로 가는 산길이
나옴)
아무리 아는 길이라도 돌다리를 꼭 두들겨 패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뒷탈이 없는데, 자만 때
문에 뜻하지 않은 강제 고행의 길을 밟게 되었다.


▲  형제봉능선으로 이어지는 숲길

▲  빨간줄이 그어진 신성천(新盛泉) 약수터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숲이 매우 짙다. 게다가 사람도 별로 없어 고적하기만 하다. 초
파일 연등이 걸려있지 않아 이상하게 여겼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길을 임하니 완전히 숲
속에 묻힌 신성천약수터가 마중한다.
내 데이터에는 전혀 없는 곳이라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이라도 한 모금 축낼까 했더니 안내문
에 빨간색 줄 2개(부적합 판정)이 매정하게 그어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고 있다. 게다
가 봄가뭄으로 인해 걸려있는 바가지들이 무색할 정도로 물까지 말라버려 목도 축이지 못하고
바로 길을 재촉했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보현봉(普賢峰)
보현봉 밑에 일선사가 자리해 있고 봉우리 너머에 북한산성이 숨어 있다.


신성천약수터에서 5~6분 정도 오르면 낯설은 능선길에 이른다. '여기는 도대체 뭔가?' 두리번
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니 뜻밖에도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아니던가. 그 길을 20여 분 오
르면 형제봉 밑도리에 이르게 되고 그 북쪽(형제봉3거리)에서 형제봉능선에 합류하게 된다.

형제봉(兄弟峰)은 평창동(平倉洞) 동쪽에 우뚝 솟은 북한산(삼각산) 남쪽 봉우리로 큰 형제봉
463m)과 작은 형제봉(461m)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형제처럼 다정하게 보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남북으로 이어진 능선을 형제봉능선이라 부른다. 이 능선은 종로
구와 성북구(城北區)의 경계선 역할도 하고 있으며, 동서로 조망이 펼쳐져 썩 괜찮은 산길로
추앙을 받는다. 그 조망의 끝판왕은 보현봉 밑에 자리한 일선사이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칼바위능선
사진 가운데에 바위가 짙게 깔린 곳이 칼바위로 북한산에서 이름난
바위 능선길이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①
산 밑에 정릉동과 길음동을 비롯하여 성북구, 강북구, 중랑구, 동대문구,
불암산, 아차산~용마산, 구리시 등이 바라보인다.

▲  형제봉 부근에서 바라본 천하 ②
성북구와 강북구, 노원구, 중랑구, 동대문구, 아차산 산줄기, 강동구,
구리 지역


형제봉 능선에서 나의 목적지인 영취사로 가려면 천상 일선사입구까지 가야된다. 중간에 동쪽
으로 내려가는 헝클어진 수준의 비법정 탐방로와 비밀 샛길이 일루 오라며 유혹을 건네나 그
길의 속내를 알 수가 없고 괜히 조금이라도 빨리 가겠다고 금지된 그 길로 발을 들였다가 길
이 더 꼬일 수 있다.

형제봉 능선길은 부드러움과 각박함 2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각박하다고 하여 그렇게 절망
적인 길은 아니며 이 땅에 흔한 초급 능선길이다. 형제봉 북쪽에서 잠시 내리막길이 이어지다
가 다시 오르막길이 몇 배 이상으로 펼쳐지며, 일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느긋한 수준이다.


▲  푸른 옷을 두텁게 두른 형제봉(463m)
형제봉 정상은 접근이 가능하다. 허나 시간 관계상 다음으로 미루고 통과했다.

▲  계단을 이루고 있는 형제봉 북쪽 능선길
능선 북쪽에 일선사가 자리해 있어서 평창동(동령폭포) 갈림길 이후부터는
길이 괜찮게 닦여져 있다.

▲  숲터널을 이루며 넓게 닦여진 형제봉 북쪽 능선길
숲의 등등한 기세에 뜨거운 햇살도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

▲  일선사 입구

마치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발에 불이 나도록 속도를 내며 오르니 어느덧 일선사입구에 이
르렀다. 여기서 왼쪽 길은 일선사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대성문 방면으로 그 길을 조금 가면
바로 오른쪽에 영취사, 정릉으로 내려가는 정식 탐방로가 있다.
여기서 '일선사를 보고 가는가? 그냥 통과하는가?'를 두고 잠시 갈등을 하였다. 아무리 햇님
의 근무 시간이 길어졌다고 하지만 시간은 벌써 17시가 넘었고, 일선사는 막연히 선학원 소속
의 현대 사찰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땡기지가 않았지. 허나 여기까지 올라온 이상 어
찌 생긴 절인지 잠깐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여기서 일선사까지는 200m 거리, 그 산길의 끝에는 일선사가 일품 조망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인공티가 너무 거슬리는 대성문 방면 산길 (일선사입구에서 대성문 방면)
산길의 야성을 순화시키고자 인공티를 너무 과하게 넣은 것 같다. 죽도록 힘든
 구간이 아닌 이상은 흙길로 그냥 두는 것이 진정한 산길이 아닐까 싶다.


▲  일선사입구에서 일선사로 인도하는 산길
오색연등만 따라가면 별탈 없이 일선사에 이른다.



 

♠  서울에 있는 사찰 가운데 가장 조망이 우수한 절집, 절은 작지만
대도시 서울을 앞뜰로 삼은 ~ 북한산 일선사(一禪寺)


▲  일선사 대웅전(大雄殿)

일선사는 보현봉(普賢峰) 동쪽 밑 560m 고지에 둥지를 튼 고적한 산사(山寺)이다. 첩첩한 산
주름에 묻힌 진정한 산사로 시내와도 멀리 거리를 둔 산속이라 제아무리 찰거머리 번뇌라도
감히 따라오지 못한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평창동 평창공원지킴터에서도 1시간 이상을 올라
가야 되며 정릉동 종점에서도 비슷한 시간을 내던져야 이를 수 있으니 이곳에 궁벽한 위치를
알만하다.

하늘과 가까운 곳에 자리한 일선사는 북쪽과 서쪽은 보현봉으로 막혀있어 가파른 벼랑을 이루
고 있고, 남쪽은 낭떠러지에 가까우며, 오로지 동쪽에 바깥 세상과 이어지는 외줄 산길이 있
다. 절은 위치상 도심이 보이는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규모는 비록 작지만 조망(眺望) 하나
는 천하 일품이며,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을 자연히 앞뜰로 삼고 있어 뜨락
또한 기가 막히게 넓다.
특히 서울 사찰 중 조망 맛집 1위를 거머쥔 산사로 가까이에 평창동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을 비롯하여 종로구, 중구, 성북구, 동대문구, 광진구, 아차산 산줄기, 강동/송파구, 강남/
서초구, 동작/관악구, 금천구, 영등포구, 마포구, 관악산~삼성산, 우면산, 대모산 산줄기, 남
한산성까지 아낌없이 시야에 잡힌다. 절과 방향이 다른 도봉구와 강북구, 노원구, 은평구, 서
대문구, 강서구, 양천구 등을 제외하면 서울의 상당수가 일선사에 몸을 보이는 셈이다.
그럼 조망 맛집 2위 사찰은 어딜까? 그곳은 400m 고지에 자리한 도봉산 원통사(圓通寺)로 도
봉구, 강북구, 노원구,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아차산 산줄기 등이 시야에 들어오며, 조
망 맛집 3위 사찰은 310m 고지에 자리한 호암산 불영암(佛影庵)으로 금천구, 구로구, 영등포
구, 광명시, 인천 지역 등이 바라보인다. (1~3위는 그곳을 다녀간 경험을 바탕으로 순위를 매
김)

일선사는 조망도 좋은 만큼 구름과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어 서울 사찰 중 3번째로 하늘과 가
깝다. 제일 하늘과 맞닿은 절은 북한산 문수사(文殊寺)로 해발 640m에 자리해 있지만 조망은
조망 1~3위 절보다는 못하며, 2위는 도봉산 관음암(觀音庵)으로 해발 560~570m 고지이다. 그
다음이 이곳 일선사가 되겠다. 해발고도와 조망 부분에서 가히 서울 사찰 으뜸의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일선사는 언제부터 법등(法燈)을 켰을까?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일선사는 그저 현대 사찰로만 알고 있었다. 허나 내 생각과 달리 나이
를 제법 먹은 절이라고 한다. 절에서 들려주는 창건 설화에 따르면 신라 후기에 도선국사(道
詵國師)가 보현봉 밑 보현굴(다라니굴)에 창건하여 보현사(普賢寺)라 하니 그것이 일선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허나 관련 기록과 유물이 전혀 없는 실정이라 그저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
다.
창건 이후 탄연(坦然)이 절을 중창했다고 하나 이 역시 신뢰도는 없으며, 태조 이성계(李成桂
)가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우면서 서울(한양)로 콩 볶듯이 도읍을 옮기자 무학대사(無學大
師)가 보현사를 두고 서울을 지키는 중요한 터로 격하게 띄워주면서 태조의 명으로 중수했다
고 한다.
서울이 조선의 도읍이 된 이후, 서울 주변에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절(호압사, 개운
사, 사자암 등)이 많이 생겨났는데, 일선사도 그때 지어진 절이 아닐까 짐작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옛날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1600년 이후 서울을 지키
는 외곽 수호사찰로 인정되어 왕명으로 중창했다고 하며, 이후로 300년 이상 뚜렷한 발자국이
전하지 않아 조그만 석굴 암자 규모로 터를 유지하거나 얼마 가지 않아서 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40년에 이르러 절의 화주(化主)인 김만신행이 원래 보현굴 자리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지금의 자리에 절을 옮기고 절 이름을 관음사(觀音寺)로 갈았는데, 이를 통해 왜정 때 작게나
마 절이 있었음을 살짝 귀뜀해 준다.
 
1957년 시인 고은<高銀, 법명 일초(一超)>)이 이곳에 머물며 절 이름을 도선대사의 '선'. 자
신의 법명인 일초의 '일'을 따서 일선사(一詵寺)로 갈았으며, 1962년 재단법인 선학원의 일원
이 되면서 가운데 한자만 바꾸어 지금의 일선사(一禪寺)가 되었다. 그리고 1966년 정덕(幀德)
이 주지로 들어와 30년 동안 불사(佛事)를 일으켜 지금의 일선사를 이룩했다.
그는 1994년에 옛 법당을 밀어버리고 대웅전과 약사전, 요사를 새로 짓거나 증축했다. 그리고
많은 탱화와 불상을 조성하여 봉안했으며, 절로 이어지는 길을 정비했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약사전, 요사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절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고는 하나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산산히 사라져 고색의 유물은 없는 실정이다. 다만
조망은 가히 일품이라 그것으로 절의 부족한 부분이 많이 커버된다. 특히 대웅전은 어느 절
법당(法堂)에 못지 않은 큰 규모라 내심 놀랬다.
원래 절 자리에는 보현굴(다라니굴)이란 석굴이 있는데, 조선 초에 활약했던 기화함허(己和涵
虛)를 비롯해 많은 승려가 그곳의 신세를 졌다고 한다. 현재 절 자리는 1940년 이후이니 일선
사의 과거를 들추려면 보현굴 주변을 뒤집는 수 밖에는 없다.


▲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상
초파일을 맞이하여 미리 밖으로 나와 오랜만에 광합성 작용을 받고 있다.

▲  대웅전 석가여래3존상 (석가여래와 문수보살, 보현보살)

대웅전은 이곳의 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원스런 팔작지붕 건물이다. 정면 앞이 협
소하여 그나마 조금 트인 측면(동쪽)에 대웅전 현판과 출입문을 내어 좁은 측면을 정면으로
삼고 있는데, 건물 내부에는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석가여래3존상을 위시하여 칠성탱과 중생
들의 소망을 머금은 조그만 원불(願佛)이 가득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칠성탱(七星幀)

▲  대웅전 뒷쪽에 자리한 약사전(藥師殿)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약사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하얀 피부의 작은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을 중심으로 풍만하게 생긴 금동관세음보살상,
산신(山神) 가족이 담겨진 산신탱 등이 들어있는데, 이들은 20세기 후반에 마련된 것으로 보
통 산사에는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등 삼성(三聖)의 보금자리를 따로 두기 마
련이나 일선사는 자리가 협소하여 약사전과 대웅전에 나누어 배치했다.

▲  약사전 약사여래불과 약사후불탱,
관세음보살상

▲  산신 가족의 단란한 가족 사진
산신탱(山神幀)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①
종로구, 성북구, 동대문구, 중랑구, 광진구, 성동구, 송파/강동구 등


요사(寮舍) 동쪽에는 물통과 의자 등이 있는 쉼터가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이곳은 조망
이 아주 좋은 자리로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이 나의 발 밑에 펼쳐져 올망졸
망 펼쳐져 있어 잠시나마 천하의 주인이 된 듯 즐거운 기분이 든다. 이런 것이 바로 산을 타
는 재미의 하나이지. 허나 현실은 저 너른 땅에서 내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땅은 나의
작은 집 외에는 단 한 뼘도 없다는 것. 그것이 뼈저린 함정이다.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②
사진 중앙에 보이는 산이 내가 거쳐갔던 형제봉이다. 그 너머 길쭉한 산줄기는
북악산(백악산)이며, 그 너머로 종로구, 중구, 남산, 성북구, 성동구,
강남/서초구, 대모산, 관악산 등이 시야에 잡힌다.

▲  일선사에서 바라본 천하 ③
형제봉과 북악산을 중심으로 인왕산, 종로구, 중구, 서대문구, 마포구,
강남/서초구, 동작/관악구, 관악산, 호암산이 바라보인다.


일선사는 하루 앞으로 다가온 초파일 준비로 승려와 보살 아줌마들이 꽤 부산했다. 낼 중생들
에게 제공할 공양밥과 국을 큰 솥에 미리 만들고 있었는데, 이곳 공양밥 맛이 제법 좋다고 한
다. 초파일 외에 동짓날에는 팥죽을 제공하며, 일요일 점심 시간(12~13시)에도 공양을 제공한
다고 하니 그때 이곳을 지날 일이 있다면 잠시 들려서 한 그릇 들고 가는 것도 좋다.

일선사에서 보현봉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비법정으로 묶여서 금지된 산길이 되었다. 그래
서 이제는 완전 막다른 곳이 되어 천상 왔던 길로 돌아나가야 된다. 그렇다고 금지된 길을 무
리해서 가지는 말도록.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유명한 말도 있고, 괜한 모험에 인생을 거는 것
만큼 무모한 것은 없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창동 산6-1 (평창6길 79-141 ☎ 02-379-8697)


▲  일선사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산길 (일선사입구 방면)



 

♠  늙은 석탑을 지닌 깊은 산골의 절집, 북한산 영취사(靈鷲寺)

▲  영취사 5층석탑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0호

일선사에서 20분 정도 머물다가 다시 입구로 내려갔다. 여기서 정릉 방면 산길로 접어들어 원
래 목적지인 영취사로 내려갔는데 그 길이 속세살이만큼이나 제법 각박한 경사였다. 다행히도
내려가는 길이라 덜 힘들지 만약 이 길로 올라왔다면 제대로 땀을 뺐을 것이다.
햇님의 퇴근 시간도 별로 남지 않았고 지나가는 산꾼도 없는 상태라 걸음을 몇 배로 재촉하여
미끄러지듯 10분을 내려가니 인기척 소리가 조금씩 들리면서 숲 사이로 영취사 지붕이 보인다.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듣는 인기척만큼 썩 반가운 것은 없지~! 그렇게 1굽이를 내려가니 영취
사에 이른다. 이 산길은 영취사 경내를 거쳐가기 때문에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 절을
경유해야 된다.

경내에 이르니 이곳 역시 초파일 준비로 조금은 부산해 보였다. 사람들이 연등을 달거나 청소
를 하면서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고 마침 18시가 넘은 상태라 밥 연기도 모락모락 피어올라 나
의 시장기를 자극시킨다. 영취사도 초파일과 동짓날, 그리고 일요일 점심에 산꾼과 중생들에
게 공양밥을 제공한다. 비빔밥 또는 국수를 주고 있는데, 혹여 저녁공양이라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새가슴 마냥 요사 주변을 기웃거려봤지만 결국 먹지는 못했다. 예전에는 공양
1그릇 먹고 가도 되냐고 막 들이밀고 그랬는데 나이를 먹으니 점점 소심해지는 것 같다.

해발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영취사는 '절간답다'는 말이 아주 어울릴 정도로 고적한 산사이
다. 경내 주변이 죄다 숲이라 여기서는 하늘 밖에 보이지 않으며, 남쪽이 확 트여 형제봉능선
에서도 능히 바라보이는 일선사와 달리 숲에 푹 묻혀있어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정도
로 심산유곡이다.
허나 일선사와 달리 등산로가 경내를 지나가 주말, 휴일에는 지나가는 이들이 많다. 등산로가
접한 경내 밑부분에는 쉼터와 5층석탑이 있고, 거기서 1단계 올라가면 요사가 있으며, 다시 1
단계 오르면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다.


▲  우중층한 대석(臺石) 위에 자리한 영취사 5층석탑

내가 영취사를 간만에 찾은 것은 경내에 서린 늙은 5층석탑을 보고자 함이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이 석탑은 울퉁불퉁하게 생긴 커다란 대석 위에 작게 서 있는데 2중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얹히고 그 위를 연꽃무늬 석재로 마무리를 했다. 여기서 2중 기단과 5층
탑만 원래 것이고 나머지는 탑의 초라함을 달래고자 20세기 중반 이후에 새로 덧붙인 것들로
탑 자체는 아주 작은 수준이며 어쩌면 천하에서 가장 작은 석탑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원래 요사 앞에 기단부가 묻힌 상태로 있었다고 전한다. 문병대 박사가 직접 찾아와 그
를 평가하니 무려 고려 후기~조선 초기 석탑으로 밝혀졌다. 마침 서울에 토박이 석탑이 별로
없고 고려 말~조선 초기 탑이 매우 희귀하여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어 이곳의 듬직한 꿀단지
가 되었다.
이후 탑은 보다 넓은 지금의 위치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때 여러 장의 돌을 높이 쌓아 대석을
다진 다음 조그만 탑을 올려 키를 높였다. 탑의 왜소함을 극복하고자 대석을 쌓았지만 오히려
대석이 너무 지나치게 커서 탑이 더욱 작아 보인다.
기단은 2중으로 밑 기단은 조금 높으나 고된 세월의 상처가 남아있으며, 손상된 부분 사이에
는 잡석을 끼웠다. 윗 기단은 밑 기단에 비해 높이가 약간 낮으며, 그 위에 5층 탑신을 올렸
는데, 윗층 옥개석(屋蓋石)과 연꽃무늬 석재는 새로 만든 것이다. 탑신은 1층만 달랑 남아있
고 윗층 탑신은 납작하여 무늬만 남은 실정인데, 가장자리에 희미하게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으며, 1층 탑신 중앙에 감실(龕室) 같은 것이 뚫려 있어 불상을 봉안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옥개석은 두툼하나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흔적이 적지 않으며 머리 장식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모두 사라졌고 근래 만든 연꽃무늬 석재만 달랑 놓여있다.

기단부와 탑신의 구성법, 간략화된 옥개석 층급(層級) 표현 등을 통해 고려 후기~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토박이 탑으로 가치가 인정되어 서울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었다.

▲  동쪽에서 바라본 5층석탑 (기단과 탑신)

▲  북쪽에서 바라본 5층석탑

늙은 5층석탑을 지니고 있는 이곳 영취사는 1962년에 신정옥(申貞玉)이 세웠다. 그는 1928년
7월 14일 충남 예산군 신례원에서 독립운동가 신현상(申鉉商)의 딸로 태어났는데, 불명(佛名)
은 대지행(大智行), 호는 초일(草一)로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수양녀(收養女)이기도 했으며,
1947넌에 마곡사(麻谷寺)에서 칩거 수양을 했다.
1972년 영취사 법당을 중건하고 요사를 신축했으며, 계속 절을 살펴주어 경내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그의 남편은 강성진으로 삼보증권회장 및 대한증권업협
회장을 지냈으며, 자녀 또한 모두 사회에서 듬직한 지위를 누렸다.


▲  정면에서 바라본 5층석탑 (기단과 탑신)
중생들이 갖다놓은 작은 불상과 동자상들이 석탑에 기대어 앉아 그들만의
조촐한 세상을 일구고 있다.

▲  5층석탑 앞에 마련된 관불의식의 현장

5층석탑이 영취사의 유일한 보물이자 듬직한 꿀단지라 그 앞에 관불의식의 현장을 정성스럽게
닦아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은 초파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갖 꽃으로 아름답게 치장된 의식
의 현장에 주인공인 아기부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1년 만에 외출을 할 생각에 그도 마음이
너무 설레서 긴장이 된 모양이다. 

▲  영취사 요사 (선방, 공양간)

▲  대웅전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  아주 조촐한 모습의 용왕각(龍王閣)

▲  용왕각에 봉안된 용왕탱

5층석탑에서 대웅전을 향해 1단계 올라가면 오른쪽에는 선방(禪房)과 종무소, 공양간의 역할
을 도맡고 있는 요사가 있고, 왼쪽에는 장난감 집처럼 아주 조그만 용왕각이 있다. 바다와는
전혀 관련도 없는 이런 첩첩한 산골에 바다 용왕(龍王)의 거처인 용왕각이라...? 옛날에 이곳
이 바다였을까?
허나 용왕이라고 꼭 바다만 관리하라는 법은 없다. 그는 바다를 비롯해 천하의 모든 물을 관
리하는 존재라 물이 늘 풍족히 나오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의 거처를 만들어 봉안한 것이다.
용왕각 옆에는 샘터가 있으나 물이 거의 없었고, 대신 요사 밑에 따로 샘터를 만들어 물을 제
공하고 있다.

▲  대웅전 - 기존 맞배지붕 건물에
1칸을 덧붙인 구조이다.

▲  삼성각(三聖閣) - 산신과 칠성,
독성(나반존자)의 보금자리이다.


▲  삼성각에서 바라본 서울
이곳도 결코 낮은 곳은 아니지만 삼삼한 숲의 방해로 겨우 일부만
시야에 들어온다.

▲  대웅전 앞에서 바라본 경내 (바로 밑 지붕이 요사)

▲  대웅전에 봉안된 석가여래3존상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3존상을 이루고 있다. 후불탱이
그들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있으며, 그 좌우로 신중탱 등 온갖 탱화들이
대웅전 내부를 환하게 비쳐준다.


경내 높은 곳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삼성각이 있다. 건물이 다들 조그만 수준으로 1974년 이후
에 중건을 하여 아직 고색의 때는 익지 못했는데, 대웅전 불단에는 벌써부터 갖다놓은 온갖
공양물로 상다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 영취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산1 (☎ 02-911-0005)


▲  대지행 신정옥 영취사 창건 공덕비
창건주 신정옥을 기리고자 절에서 정성을 다해 지은 공덕비이다.



 

♠  북한산(삼각산) 마무리

▲  한데 뭉쳐진 커다란 바위들 (영취사 남쪽)
바위의 모습이 썩 예사롭지가 않아 보여 예로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절찬리에 쓰였던 듯 싶다. 대자연이 그어놓은 주름선들도 멋지고 말이다.


영취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벌써 18시 반이 넘었다. 나날이 길어지는 연장 근무에 입이 한참이
나 삐죽 나왔을 햇님 덕에 아직까지 환한 낮을 유지하고 있지만 산속이 도시보다 밤이 일찍
온다. 그래도 그날의 목적을 모두 이루었고, 거기에 일선사라는 강제 보너스도 받았으니 보람
찬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영취사를 뒤로 하고 정릉계곡을 따라 정릉 기점으로 내려갔다. 이제는 오로지 내려가기만 하
면 되는지라 힘든 것은 없으며, 영취사에서 조금 내려가면 삼봉사 입구가 나온다. 이곳은 딱
히 끌리는 것이 전혀 없는 현대 사찰이라 그냥 통과했다.


▲  속세로 인도하는 정릉계곡 산길 (삼봉사 입구 부근)

▲  계곡과 나란히 이어지는 산길 (삼봉사 입구 남쪽)

▲  가늘게 실타래를 풀어내는 작은 폭포 (폭포 이름은 없음)

▲  푸른 숲터널을 이루는 정릉계곡 산길

▲  마이산(馬耳山) 탑사 돌탑의 후예일까? 거대한 돌탑의 위엄
이곳을 오간 수많은 사람들이 소망 하나를 깃들여 돌을 얹혔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이렇게 세모 모양의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소망을 향한
중생들의 집념이 오랜 세월을 두고 그려놓은 탑이다.

▲  청수천약수<淸水川藥水, 청수천샘터, 청수약천(淸水藥泉)>

정릉계곡 중류 쯤에 이르면 북한산(삼각산)의 유명 약수의 하나라는 청수천샘터가 마중한다.
샘터의 이름인 '청수'는 정릉계곡의 별칭으로 '청수골','청수계곡'이라 불리기도 하며 계곡
하류에 있었던 유명한 고급 요리집 청수장(淸水莊)의 이름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청수천샘터는 2개의 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왼쪽은 계곡 암반에서 나오고, 오른쪽은 바위
밑에서 나온다. 어느 것을 마셔도 상관없으며 그건 취향에 따라 고르면 된다. 나는 물 욕심
이 많아서 양쪽 물을 모두 마셔보았는데 딱히 특별한 맛은 없는 자연의 물맛 그대로이다.
이곳은 물이 풍부하여 물이 마를 날이 거의 없을 정도이며 관리도 썩 잘되어 있는 편이다. 샘
터 앞에는 의자, 정자 등의 쉼터가 베풀어져 있으며, 샘터 옆구리를 흐르는 계곡 풍경이 바위
와 어우러져 걸쭉한 멋을 자아내고 있다. 계곡 물도 티 하나 없이 맑고 수심도 얕아서 성하(
盛夏)의 한복판에 왔더라면 쿨하게 풍덩하고 싶지만 상수원 보호와 계곡 보호를 위해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여기서 계곡 종점(정릉 기점)까지 계속 금지된 계곡으로 묶여 있으니 괜히 발도 들이지 말기
바라며, 계곡에 정 들어가고 싶다면 청수천샘터 윗쪽으로 가야 된다. 그곳은 해방된 공간이나
계곡 풍경은 다소 별로이다.

▲  청수천약수 왼쪽 샘 (계곡 옆)

▲  보호각을 갖춘 청수천약수 오른쪽 샘


▲  청수천약수 곁을 흐르는 정릉계곡
청수천약수를 빚은 정릉계곡은 청정한 빛을 띄우며 속세로 흘러간다.
여기서부터는 접근이 금지된 계곡이니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말자~~!

▲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청수천샘터 옆 계곡 (수심이 1자도 안됨)

▲  연등이 대롱대롱 길을 비추는 정릉계곡 산길 (청수천샘터 남쪽)

▲  정릉계곡 하류 산길 (보국문 갈림길 직전)

▲  암반들이 층층이 주름진 정릉계곡 하류
조그만 폭포들이 주름진 바위를 타고 속세로 신나게 흘러간다. 산행을 시작했던
정릉으로 다시 내려오니 시간은 19시. 이렇게 하여 초파일 전날
북한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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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달달한 폭포, 밤골계곡 숨은폭포 (북한산둘레길 효자길, 효자비)

 


'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숨은폭포(밤골계곡) '



▲  숨은폭포 (윗폭포와 아랫폭포)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8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뒷통수에 숨
겨진 숨은폭포를 찾았다.
날도 징그럽게 더워서 도심에서 가까운 계곡에서 밤을 담구며 잠시 여름의 핍박을 피하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구파발(舊把撥)에서 가까운 진관사계곡이나 사기막골(효자동계곡)을 염두
에 두었으나 밤골계곡에 숨겨진 숨은폭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출동했다.

여름의 기운이 제법 강했던 14시에 연신내(3,6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폭포에서 섭취할 간단
한 먹거리와 막걸리를 구입했다. 그런 다음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을 타
고 박석고개와 구파발역, 북한산성입구, 효자비를 지나 효자2통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밤골계곡으로 인도하는 길을 들어서면 농가들이 여럿 나오는데, 그들을 지나면 바로
무성한 숲길이 펼쳐지면서 천하를 녹여먹을 정도로 강렬한 햇살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진다.
그 숲길을 조금 들어서면 북한산둘레길 11구간(효자길)과 만나게 되며, 거기서 2분 정도 가
면 밤골공원지킴터와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게이트(문)가 나온다.


▲  북한산국립공원 밤골공원지킴터와 공원 게이트(문)


 

♠  밤골계곡(숨은벽계곡)

▲  녹음(綠陰)이 짙은 밤골계곡 산길

밤골공원지킴터를 지나면 본격적인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이다. 숲도 녹음(綠陰)도 더욱 짙어져
원시림(原始林)을 방불케 하는데, 날씨는 덥지만 숲이 베푼 바람과 갖은 내음으로 땀은 줄행
랑 치기가 바쁘다.

밤골계곡은 숨은벽능선 북쪽에서 시작해 창릉천(昌陵川)으로 흘러가는 계곡으로 숨은벽계곡이
라 불리기도 한다. 북한산(삼각산)에는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일품 계곡이 참
많은데, 대표적인 것으로 북한산성계곡, 우이동계곡(우이9곡), 소귀천계곡, 구천계곡(구천폭
포), 정릉계곡, 구기동계곡, 불광사계곡, 진관사계곡, 삼천사계곡 등이 있다. (도봉산과 사패
산 구역은 제외)
이들은 일찍이 천하에 널리 알려져 서울과 경기도 사람들의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는데, 밤골
계곡은 그들에 비해 인지도는 낮으나 계곡 풍경은 그들 못지 않다. 게다가 계곡의 수질도 매
우 청정하여 신선들의 비밀 피서지로 손색이 없으며, 계곡 중간에 있는 숨은폭포는 북한산의
일품 폭포로 찬양을 받는다.

밤골계곡 코스(또는 숨은벽 코스)는 숨은폭포를 지나 숨은벽능선을 거쳐 북한산의 지붕인 백
운대(白雲臺, 837m)로 이어지며. 숨은벽능선은 바위 구간이 많아 제법 험하다고 하는데 대신
조망과 풍경이 국보급이다. 숨은벽이란 이름은 북한산 뒷쪽(북쪽)에 숨은 듯 자리해 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이 참 귀여우면서도 정감이 많이 간다.

북한산(삼각산)을 많이 갔다고 자부하는 본인이나 아직 숨은벽능선은 미답처(未踏處)로 남아
있다. 그 능선으로 들어가는 계곡과 폭포도 이번이 첫 인연이라 기대와 설렘이 아주 큰 편인
데, 밤골안내소에서 숨은폭포까지는 1km 정도 된다. 길은 거의 평탄한 수준으로 처음에는 산
길과 계곡이 조금 거리를 두고 펼쳐지다가 끝내는 서로가 붙어 나란히 이어지면서 폭포에 이
르게 된다.


▲  밤골계곡 물이 잠시 정체를 빚는 계곡 건널목


▲  인적이 거의 없는 밤골계곡 산길
길을 가다가 혹여 신선 형님이나 선녀 누님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폭포에 대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열심히 산길에 임한다.

▲  밤골계곡 산길 ~ 우리들은 점점 푸른 산속에 묻혀 간다.

▲  밤골계곡에서 만난 기묘하게 생긴 바위

숨은폭포로 열심히 가다보면 홀쭉하게 선 기묘한 바위를 만나게 된다. 마치 옛 유적에서 많이
나오는 기와 조각이나 도자기 파편을 크게 확대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하늘에서 천제(
天帝)의 명으로 토목공사를 하다가 인부가 실수로 떨어트린 기와 파편이 그대로 곤두박질 친
것 같다.

바위 피부에는 자연이 입힌 이끼와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해 시커먼 모습이며, 중간에는 누구
에게 얻어 맞은 듯, 움푹 패인 자국들이 있다. 바위 윗쪽에는 속인(俗人)들이 얹혀놓은 돌이
널려있는데, 산길에 접한 바위 피부에도 조금의 틈이 보이는 곳에는 꼭 돌들이 여러 개 얹혀
져 있다.
이곳을 지난 사람들이 유독 눈에 띄는 이 바위에 소망과 정성을 담아 얹힌 돌로 일종의 산악
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지어준 이름도 있을 듯 싶으나 전해오는 것은
딱히 없는 것 같으며, 사람들이 얹힌 돌이 많이 붙어있어 그 흔한 '붙임바위'라 불러도 손색
은 없어 보인다. (기와 파편처럼 생겼으니 기와바위라 불러도 될 듯)


▲  기묘하게 생긴 바위 옆모습

▲  여기저기 절경과 벼랑을 빚은 밤골계곡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비경, 숨은폭포(숨은벽폭포)

▲  숨은폭포의 아랫폭포

밤골공원지킴터에서 넉넉잡아 20분 정도 들어가면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진하게 귀청을 때리
면서 숨은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숨은벽폭포라 불리기도 하는데 숨은벽능선으로 오르는 길
목에 있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대자연 형님이 북한산이란 대작품을 빚고 혼자 두고두고 보려고 북한산 뒷쪽에 몰래 이 폭포
를 만든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첩첩한 산주름 속에 소리도 없이 묻혀있다. 북한산에 안긴
폭포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물이 매우 맑고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며, 경승지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였던 선비와 양반들도 이곳의 존재를 몰랐던지 폭포에 대한 기록이나 시문(詩文)은 전하
는 것이 없다. 다만 북쪽에 있는 효자리계곡(사기막골)에 조선 후기에 지어진 육모정과 서산
정사터 등이 남아있어 그곳을 찾은 일부가 이곳에 왔을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폭포는 2~3개(엄밀히 따지면 3개이나 2개로 봐도 무방)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폭포가 더 일품
이다. 단순히 폭포를 보러 온 이들은 윗사진의 아랫폭포가 전부인줄 알고 이거만 보고 돌아가
는 경우가 많은데, 반드시 1단계 더 올라 윗폭포도 보기 바란다. 그래야 괜히 애꿎은 땅을 치
며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숨은폭포에게도 숨겨진 별칭이 있다고 하는데, 아랫폭포를 총각폭포, 윗폭포를 색시폭포(처녀
폭포)라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것은 아니며, 그에 대한 사연과 전설은 딱히 전
해지는 것이 없다. 지금은 많이들 찾아오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네 사람이나 아는 사람만
찾아오던 숨겨진 비경이다 보니 그들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아랫폭포의 높이는 대략 10m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30~40도의 경사진 바위를 미끄럼
을 타듯 내려온다. 어제까지 비가 많이 내려서 계곡의 수량이 크게 증가해 물줄기가 성난 기
세로 쏟아져 마치 하얀 비단을 드리운 듯 하다.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흔드니 여름 제
국도 크게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폭포에서 부는 선선한 바람은 지금이 여름의 한복판이란 사
실 조차 흐릿하게 만든다.
폭포 앞에는 폭포수가 담긴 못이 있는데, 물이 얼마나 해맑은지 바닥이 훤히 보인다. 허나 바
닥이 보인다고 괜히 방심하지는 말자,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앞은 수심이 깊으니 주의해야
된다.


▲  숨은폭포의 아랫폭포의 위엄 ▼



▲  풍덩 안기고 싶은 아랫폭포 못

폭포에 도착한 우리는 어린 아이 마냥 신이 났다. 때가 묻지 않은 폭포수에 발과 다리를 담구
니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이 무척 시원해진다. 기분 같아서는 온몸으로 계곡물과 짜릿하게 스킨
쉽을 즐기고 싶지만 여벌의 옷을 챙겨오지 않아 다리와 발을 담구는 선에서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마치 폭포를 전세낸 듯 한없이 다리를 담구니 다리가 정말 하얗고 매끄러워진
것 같다.

그렇게 발을 담구며 주변 풍경을 사진에 담고 즐거운 간식 시간을 갖는다. 적당한 돌에 속세
에서 사들고 온 막걸리와 김밥, 과자, 커피 음료 등을 차려놓고 열심히 섭취를 했다. 폭포가
안겨준 시장기에 금세 동이 나고, 막걸리 또한 바닥을 보인다.


▲  폭포 윗쪽에서 바라본 아랫폭포

▲  아랫폭포로 빠르게 흘러가는 계곡물

즐거운 간식시간을 마치고 계속 폭포 앞에 머물렀다. 이곳이 분명 숨은폭포는 맞는데 폭포와
관련된 사진에는 이거 말고 폭포가 더 있었다. 그러니 분명히 위로 올라가면 나머지 폭포가
있을 것이다. 하여 윗쪽으로 올라가니 평탄한 계곡이 나오고, 그 계곡을 조금 들어서니 바로
숨겨진 폭포가 모습을 비춘다. 바로 숨은폭포의 윗폭포이다.


▲  숨은폭포 옆구리를 지나는 산길에서 바라본 아랫폭포

▲  윗폭포와 아랫폭포 사이의 계곡

▲  모습을 드러낸 윗폭포 - 폭포수 소리가 여기까지 쩌렁쩌렁 울린다.

▲  정면에서 본 윗폭포의 위엄

아랫폭포과 윗폭포는 대략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같은 숨은폭포 형제지만 서로가 완전
히 다른 모습으로 30~40도의 경사를 이룬 아랫폭포와 달리 윗폭포는 거의 90도 직각을 이루며
패기 넘치게 물을 아래로 내리 쏟는다. 그러다보니 폭포수 소리는 아랫폭포보다 한층 더 우렁
차다.

벽처럼 늘어선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장쾌하게 쏟아지는 윗폭포는 높이가 10m 남짓으로 폭
포 앞에는 물이 담긴 못 대신 바위 하나가 오랜 세월 물을 맞으며 누워있다. 한여름에야 시원
하겠지만 억겁의 세월 동안 종일 물을 맞으니 바위 피부가 완전 매끄럽다 못해 미끄럽다. 이
렇게 폭포 앞에 바위가 있으니 경북 청도(淸道)의 낙대폭포처럼 물맞이 장소로 적당하다.


▲  산길에서 본 윗폭포

윗폭포의 위엄을 제대로 보려면 계곡보다는 등산로(산길)에서 봐야 된다. 산길은 아랫폭포 옆
구리에서 바위를 타고 윗폭포 서쪽을 지나가는데, 윗폭포보다는 높은 곳에 있어 폭포와 그 윗
쪽까지 훤히 바라보인다.
윗폭포 윗쪽에는 못과 함께 폭포가 하나 더 숨어있는데, 그 폭포는 완만한 경사로 높이는 5m
정도 되는 듯 싶다. 허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지 나무에 대부분 가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
고 귀차니즘 발동으로 그곳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
위에 있는 것도 그런데로 폭포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그가 윗폭포가 되고, 윗폭포를 중간폭포
라 불러야 되겠지만 위에 있는 폭포는 느슨한 경사라 윗/아랫폭포보다 멋이 떨어져 별도로 다
루어도 무리는 없어보인다.


▲  윗폭포 윗쪽 부분의 못과 폭포
선녀 누님의 숨겨진 욕탕은 아닐까? 나뭇꾼과 선녀에 나오는 나뭇꾼처럼
주변 숲에 숨어 그들을 노리고 싶다.


윗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아랫폭포로 내려와 20분 정도를 머물다가 17시에 자리를 접고 폭포와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등을 돌리기가 얼마나 섭섭했던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봤는지 모른
다. 삼척(三陟) 미인폭포(☞ 관련글 보러가기) 전설에 나오는 미인처럼 폭포를 끼고 살고 싶
었지만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닌 아비규환의 속세이다. 그러니 돌아가야 된다.

* 숨은폭포, 밤골계곡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산 19-1


 

♠  호랑이와 효자의 애틋한 설화가 깃든 박태성 정려비(朴泰星 旌閭碑)
- 고양시 향토유적 35호

▲  효자비라 불리는 박태성 정려비

밤골계곡지킴터에서 북한산둘레길 11구간(효자길)을 따라 남쪽으로 10분 정도 넘어가면 효자
비(孝子碑)라 불리는 시커먼 피부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박태성 정려비로 비석 앞 도
로(북한산로)에 있는 정류장 이름도 무려 '효자비'이다.

이 비석은 조선 후기에 박태성(朴泰星, 1679~1758)이란 효자를 기리고자 만든 것으로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다.
1679년 박세걸(朴世傑)의 아들로 태어난 박태성은 자가 경숙(景淑), 본관은 밀양이다. 품성이
온화하고 효성이 대단한 인물로 3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에서는 고양시 효자동 뒷
산에 무덤을 썼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는데 그의 효행이 영조(英祖) 때 조
정에까지 알려지면서 음사(蔭仕)로 내의(內醫)에 천거되었다. 허나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데, 무슨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을 받겠습니까??'
하고 거절했다.

그는 효자란 이름에 걸맞게 종로구 효자동(孝子洞)에 살았는데, 부친이 별세한 갑년(甲年, 60
년)이 다가오자 63세에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일찍 집을 나서
고양시 효자동에 있는 부친묘로 성묘를 다녔다. 그리고 성묘를 하고 도성으로 돌아와 궁궐로
등청(登廳)을 했다.
효자동에서 서대문을 거쳐 부친묘까지는 거의 30여 리(10리는 5km) 정도 된다. 지금이야 차량
으로 금방 오갈 수 있지만 그때는 오로지 두 발과 말 밖에는 없었다. 그는 큰 벼슬은 지내지
못했고 호랑이를 만나기 전에는 걸어다녔다고 하니 절하는 시간을 포함해 오가는데 왕복 7~8
시간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도성(都城) 성문이 새벽 3시에 열리니 성묘를 하고 11시까지 등
청을 한 듯 싶으며, 그걸 매일처럼 했다는 것은 지나친 효심과 근면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
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성묘를 하고자 새벽 일찍 집을 나서 무악재를 넘어가는데, 어둠 속에서 갑자
기 무서운 호랑이의 대명사인 인왕산(仁王山)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는 것이다. 그는 순간
쫄았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선친묘에 가는 길이다. 나를 잡아 먹으려면 잡아 먹거라!!'
그 말을 들은 호랑이는 그를 덮치기는 커녕 머리를 반대로 돌리고 뒷걸음질을 하여 그의 곁으
로 다가가 '내 등에 타라!'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알아들은 박태성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의 등에 올라탔다.

호랑이는 그를 태우고 깊은 산중으로 달려갔다. 자꾸 낯선 산속으로만 들어가니 박태성은 산
속으로 납치하여 잡아먹는 것은 아닌가 싶어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막상 당도한 곳은 다름 아
닌 부친묘 앞. 그제서야 마음을 놓은 그는 옷깃을 여미고 무덤에 절을 올렸다. 그리고 무덤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그때 새 1마리가 주변 나무 가지에 앉더니 슬피 울었다고 한다. (몇 년
동안 같이 울었다고 함)
호랑이는 그의 성묘 장면을 지켜보다가 성묘가 끝나자 그에게 다시 타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
래서 그를 타니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 처음 만났던 무악재에서 그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다음날에도 무악재에 이르니 호랑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역시나 왕복으로 태워주어 편하
게 성묘를 다녀왔다. 호랑이는 무임으로 '무악재~효자동 선친묘'구간을 고속으로 셔틀 운행을
해준 것이다. 전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박태성은 자신을 매일처럼 태워주는 그를 위해 종종 고
기를 준비해 주지 않았을까 싶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
이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고 1758년에 박태성은 79세에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후손들은 그의 선
친묘 앞에 그의 묘를 썼다. 며칠 뒤, 후손들이 가보니 그의 묘 앞에 큰 호랑이 1마리가 엎드
려 죽어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박태성을 매일 태워주었던 그 호랑이였다. 이에 후손들은
호랑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 곁에 무덤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박태성의 이야기를 들은 고종(高宗)은 크게 감동을 먹고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1893년
하사금을 내려 사당과 효자비를 세워 포상을 했으며, 비문(碑文)은 박태성의 증손인 박윤묵(
朴允默)이 썼다. 또한 그의 효심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무덤 주변으로 몰려와 마을을 이루
고 살면서 효자리(孝子里)가 되었다고 하며, 그의 효행을 길이길이 기억하게 해주었다.
<비석은 고종이 아닌 영조가 내렸다는 설도 있으며, 박태성이 부친묘에 성묘를 다니자 이곳에
들끓던 호랑이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효자리는 고양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효자동으로 변경
됨>


▲  박태성 정려비

효자비의 설화처럼 호랑이가 부친묘까지 매일
왕복 운행을 해주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호랑이가 동물의 제왕이면서 사람들이 제일로
두려워했던 존재다보니 전설/설화의 격을 높이
는 용도로 많이 등장한다. 이 설화 역시 후손
들이 그의 효행을 드높이고자 호랑이를 넣어
적절하게 꾸민 것으로 여겨지는데, 말을 타고
다닌 것을 호랑이로 둔갑시킨 것은 아닌지 모
르겠다.

1893년에 왕명으로 세운 효자비는 흑요석(黑曜
石)으로 된 검은 피부의 비석이다. 그의 피부
에는 박윤묵이 쓴 12자의 글씨가 있는데, '朝
鮮孝子朴公 泰星旌閭之碑'라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비석의 높이는 117cm, 폭은 40cm, 두께
는 12cm이다.

참고로 효자비에서 동쪽 산자락으로 300m 정도 들어가면 박태성의 묘역이 있다. 그의 묘역을
알리는 이정표가 없어서 나는 길을 찾지 못했는데 그 묘역에는 박태성과 그의 부인인 완산이
씨, 김해김씨의 묘가 있으며, 묘비는 1778년에 흑요석으로 세웠다.
묘 옆에는 귀엽게 만든 호랑이상이 있는데, 이는 효자비 부근에서 농원을 하는 사람이 사비를
들여 만든 것이며, 그 옆에는 호랑이의 묘로 전하는 조그만 봉분(封墳)이 있다. 그리고 묘역
에서 50m 떨어진 곳에 박태성의 부친인 박세걸 묘역이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224


▲  봄이 빚은 아름다운 수채화 (효자비에서 북한산성입구 방향)

▲  효자동 내시묘역길에서 바라본 노고산(老姑山)

노고산에는 예비군훈련장이 많이 안겨져 있는데, 평일에는 예비군의 사격 훈련 총소리가 여기
까지 징하게 울려퍼진다. 그 정겨운 소리를 들으니 바람처럼 흘러간 예비군 시절이 진하게 떠
오른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 숨은폭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효자비와 노고산 사진은 봄에 별도로 담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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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둘레길3구간 흰구름길~삼성암 늦봄 나들이 (빨래골에서 구름전망대, 화계사까지)

 


' 북한산 늦봄 나들이 (빨래골, 삼성암, 흰구름길) '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

▲  삼성암(삼성사)

▲  빨래골 숲길


 

북한산(삼각산, 836m)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으
로 나의 오랜 즐겨찾기의 하나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그의 품을
드나들면서 그가 품고 있는 수많은 명소를 섭렵했지만, 아직도 미답처(未踏處)가 무수히
남아있어 나를 무척 애를 태우게 한다.
미답처 식구 중에는 북한산 동쪽 자락(수유/우이지구)에 안긴 삼성암과 빨래골도 포함되
어 있는데, 이들을 뼛속 깊이 새겨두었다가 5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길을 나섰다.

빨래골은 도봉동 집에서도 무척 가까운 곳이라 여유롭게 15시에 길을 나섰다. 수유역(수
유리)으로 이동하여 강북구 마을버스 03번(빨래골↔수유역)에 나를 담아 수유1동 구석에
자리한 빨래골 종점으로 보냈다.


▲  북한산(삼각산)의 싱그러운 품으로 인도하는 관문, 빨래골공원지킴터
여기서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과 만난다.


 

♠  북한산 빨래골

▲  봄가뭄으로 부실한 모습을 비추는 빨래골 (수유리 빨래터)

빨래골은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에 묻힌 조그만 골짜기이다. 작은 냇가 같은 모습으로 딱
히 유별난 구석은 없으며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을 거닐 때 아주 잠깐 스쳤을 뿐, 제대로 살
펴본 적은 없었다. 그저 골짜기 이름을 통해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동네 아낙네
들이 빨래를 하던 곳으로만 막연히 알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곳이 왜 빨래골이 되었을까?

북한산 동쪽 밑에 자리한 수유동(水踰洞)은 북한산 계곡 물이 많아 '무너미'라 불렸다. 무너
미란 저수지 물이 나태하게 고여있는 것을 막고자 한쪽 둑을 조금 낮추어 물이 넘치면 자연히
흐르게끔 만든 것으로 물이 풍부하다보니 일찌감치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 마을이 이제는 서
울 동북부 부도심이자 강북구(江北區)의 중심지로 어엿하게 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수유동(
수유리) 아낙들이 여기서 빨래를 해서 빨래골이 된 것일까? 물론 그들도 빨래를 하긴 했으나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니다.

조선 왕궁에는 궁궐의 허드렛일을 처리하던 무수리들이 많았다. 그들은 제왕(帝王) 내외와 왕
족들, 궁궐에서 일하는 환관(내시)과 상궁(尙宮), 궁녀, 군사의 옷을 개천(청계천)이나 인근
산골에서 빨았는데, 궁궐 식구들이 많다보니 하루에 나오는 빨래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들 빨
래 중에는 속옷 등의 예민한 옷이나 특별히 다뤄야 되는 빨랫감도 많아 청계천에서 같이 처리
하기가 그랬다. 하여 그런 것들은 특별히 이곳 빨래골에서 처리를 했다. 그래서 '빨래골'이라
불리게 된 것이며, 지역 이름을 따서 '수유리 빨래터'라 부르기도 했다.
여기서 그나마 가까운 궁궐인 창경궁(昌慶宮)까지는 약 7km 거리인데, 계곡 물이 풍부하고 매
우 구석진 한적한 곳이라 이곳을 고른 것 같다. 어쨌든 무수리들은 무거운 빨랫감을 짊어지고
동소문(東小門, 혜화문)을 나와 단장의 미아리고개(또는 아리랑고개)를 넘어 여기까지 낑낑대
고 올라왔다.
그들은 빨래를 마치면 잠시 달콤한 휴식을 취하며 궁궐에서 누리기 힘든 자유를 만끽했고, 한
여름에는 조촐히 물놀이도 즐겼을 것이다. 비록 궁궐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은 고단하지만 휴
양도 누릴 수 있으니 일종의 휴가나 마찬가지라 무수리들의 선호도 대단했을 것이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들의 휴식시설도 있었다고 전하며, 환궁(還宮)이 여의치 않은 경우
인근 화계사(華溪寺)에서 숙박 신세를 지기도 했다.

* 빨래골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일대


▲  윗쪽에서 바라본 빨래골

▲  2004년에 심어진 빨래골 표석
이곳 빨래골은 궁궐 무수리 뿐 아니라 지역 아낙들의 즐겨찾기 빨래터였다.

▲  녹음(綠陰)이 짙은 삼성암 숲길
속세의 번뇌와 먼지를 털기에는 좋은 길이다. 잔잔히 불어오는 산바람에 번뇌를
실어 멀리 날려보내고 싶으나 그 번뇌가 너무 무거워 결국 내가 내려가는
길목에 매복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삼성암 일주문(一柱門)

빨래골 숲길을 오르면 삼성암으로 인도하는 잘 닦여진 오르막길이 나온다. 경사는 그리 각박
하지는 않지만 약간의 더위로 인해 조금은 지친다.
자존심을 곱게 접고 그 언덕길을 조금 오르면 삼성암의 정문인 일주문이 마중한다. 오르막길
에서 봐서 그런지 한층 웅장해보이는데,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는 일주문 현판에는 '삼각산 삼
성암'이 아닌 '삼각산 삼성사'라 쓰여있다. 근래 암(庵)에서 사(寺)로 격을 높이면서 삼성사
를 칭하고는 있으나 속세에서도, 절에서도 삼성암이란 이름을 많이 쓴다. (심지어 삼성암 홈
페이지에도 삼성암이라 나옴)


▲  8각형으로 이루어진 만월당 현종종사탑(滿月堂 玄宗宗師塔)

일주문을 지나 한 굽이 오르면 숲속에 때깔이 고운 부도<浮屠, 승탑(僧塔)> 2기와 비석이 뜨
겁게 눈길을 보낸다. 그들 중 8각형으로 이루어진 맵시가 고운 탑은 '만월당 현종종사'의 사
리가 담긴 승탑으로 만월당은 20세기 후반, 삼성암 주지로 있으면서 절을 크게 일으킨 승려이
다. 그러다보니 그의 제자와 신도들이 크게 정성을 기울여 아름다운 승탑을 지었다.

◀  보광당 중현대선사비(寶光堂 重玄大禪師碑)
중현대선사(박중현)는 왜정 후기에 삼성암
대방을 지은 승려이다.

◀  본공당 성학대선사탑(本空堂 性學大禪師塔)
본공당은 1961년 이후 만월당을 도와
여러 건물을 지은 승려이다.


▲  활짝 열린 삼성암 정문


 

♠  북한산 동쪽 자락에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독성도량을 칭하고 있는
삼성암(三聖庵, 삼성사)

▲  삼성암 외경

삼성암은 빨래골 상류 숲속에 묻힌 조그만 산사로 1872년에 고상진(高商鎭) 거사가 창건했다
고 전한다. 원래 삼성암 자리에는 천태굴이란 조그만 굴이 있었는데, 북한산(삼각산)에 숨겨
진 기도처로 많은 승려가 수도를 했다고 전한다. (천태굴이란 이름은 삼성암이 독성도량을 칭
한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임)

19세기 후반, 서울에 살던 박선묵은 16세에 불교에 귀의했다. 그는 1870년 봄, 고상진, 유성
종 등 7명과 이곳 천태굴에 들어와 3일 동안 독성기도를 올리고 돌아오다가 '이곳의 지세가
절을 지으면 딱 좋은 터요!'
절을 지을 것을 제안, 2년 동안 준비하여 1872년 봄, 여러 칸의
건물을 짓고 작은 절이란 뜻에 '소난야(小蘭若)'라 하였다. 이후 주변 산지를 조금씩 매입했
고 1881년에 독성각을 장만해 절 이름을 삼성암으로 갈면서 본격적으로 독성도량을 칭했다.

1936년 봄, 한동운(韓東雲)이 신도 김용태의 지원으로 칠성각을 다시 짓고, 돌다리와 계단을
닦았으며, 요사를 수리하고 기와를 바꾸는 등 절의 규모가 한층 커졌다. 허나 1942년 7월 폭
우의 희롱에 잔뜩 흥분한 뒷산이 산사태를 일으켜 절을 덮치면서 그만 폐허가 되고 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계사 주지 박회경(朴會鏡)이 중창의 뜻을 밝혔고, 삼성암 승려 박중현
(보광당), 김성섭 등과 함께 쓰러진 절을 일으켜 세웠다. 이때 김용태가 목재를 지원했고, 인
근의 여러 절이 흔쾌히 도움을 주어 1943년 3월 대방 등 12칸을 세웠으며, 그 기념으로 승려
김태흡(金泰洽)이 '화계사삼성암중건기'를 지었다. 그리고 그해 7월 독성각을 다시 세웠다.
현재의 가람은 1961년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본공당, 세민(世敏), 현종(만월당) 등이 계속해
서 규모를 불렸다. 세민은 주지가 되자 대웅전을 고치고 범종루를 지었으며, 현종이 그 마무
리를 지어 지금의 삼성암을 이루게 되었다. 근래에 '사(寺)'로 격을 높였으나 여전히 삼성암
으로 많이 불린다.

삼성암은 초창기부터 독성도량을 칭했다. 그래서 중부 지역의 이름난 독성 기도도량을 자처하
고 있고 그 명성을 누리고 있는데, 독성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져 독성기도를 하러 많은 이들
이 온다. 아직 절의 내력도 짧고 문화유산도 빈약하니 독성도량을 내세워 절의 존재를 천하에
홍보하는 것이다. 나 역시 삼성암의 이름 3자만 아련히 듣고 있었을 뿐, 관심도 보이지 않다
가 그런데로 묵은 절임을 알고 뒤늦게 살짝 찾아온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해 독성각, 명부전, 칠성각, 요사 등 8~9동 정도의 건물이 있
으며, 겉보기와 달리 건물도 제법 있고, 면적도 넓다. 소장 문화유산은 아직 없으나 1908년에
조성된 산신탱과 철원(鐵原) 심원사에서 넘어온 조그만 아미타불, 그리고 상궁윤씨의 헌답기
념비 등이 절의 100년 내력을 살짝 귀뜀해준다.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지만 숲속에 짙게 감싸여 있어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기분이며, 사람
들의 발길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서 고적한 산사의 멋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바람에 잠을
깬 풍경물고기의 풍경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말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1동 산164-5 (인수봉로23길 235 ☎ 02-988-9300, 1996)
* 삼성암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청기와를 눌러쓴 삼성암 명부전(冥府殿)

활짝 열린 정문을 들어서 온갖 봄꽃이 미소 짓는 오르막 길을 오르면 청기와를 지닌 2층 명부
전이 나온다. 2층이긴 하지만 1층은 종무소(宗務所) 등으로 쓰이고 있어 2층이 진짜 명부전인
데, 원래 이름은 지장전(地藏殿)이었다. 그 뒷쪽에는 요사, 선방(禪房) 등이 자리해 있고, 옆
에는 범종각이 있다.


▲  범종을 비롯한 사물(四物)의 보금자리, 범종각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이 담겨져 있다.

▲  북한산의 넉넉한 마음이 담긴 샘터

▲  대웅전 맞은편에 자리한 영월각(소법당)


▲  탐스럽게 익은 불두화(佛頭花)의 위엄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관세음보살상
약간은 통통해 보이는 관세음보살 누님이 어진 표정으로 정병(政柄)을
쥐어들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  청기와로 단장된 대웅전(大雄殿)

명부전에서 1단 더 오르면 법당(法堂)인 대웅전이 나온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머리에 푸른 청기와를 입혀 고급지게 꾸몄으며, 내부에는 아미타3존불과 철원 심원사(深
源寺)에서 넘어온 조그만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다.
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그곳 천불전(千佛殿)에 봉안된 천불(千
佛)의 하나였으나 6.25전쟁으로 심원사가 파괴되자 승려들이 부랴부랴 그것을 챙기고 이곳으
로 넘어왔고, 그 불상을 아미타불로 삼아 대웅전의 중심 불상으로 삼은 것이다. 현재 서울에
는 심원사에서 넘어왔다는 불상과 보살상이 여럿 있어 심원사가 왕년에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허나 그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온 나는 그만 대웅전 내부를 살피지 않고 지나쳤다. 모두 근래
에 조성된 따끈따끈한 불상과 불화만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웅전은 20세기 중반에 지어진 것으로 동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남쪽에는 삼성암의 자랑
인 독성각이 있고, 북쪽에는 칠성각과 관세음보살상, 헌답기념비 등이 있다.


▲  오색 연등이 하늘을 가린 대웅전 뜨락
곧 다가올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일찌감치 오색 연등으로 대웅전 뜨락을 곱게
수놓았다. 하늘을 훔친 연등의 위엄으로 대웅전 머리는 가려져 마치
자욱한 하얀 안개로 산 윗부분이 가려진 것 같다.


▲  바위 위에 자리한 '상궁 청신녀(淸信女) 윤씨 실상행(實相行)
헌답기념비(獻畓紀念碑)'
약간 검은 피부로 이루어진 조그만 비석으로 구한말에 상궁 윤씨가 전답을
시주한 것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그 전답은 삼성암의 살을
찌우는데 크게 보탬이 되었다.

▲  산신각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칠성각(七星閣)

대웅전 좌측 안쪽에는 칠성각이 자리해 있다. 산신(山神)과 칠성의 보금자리로 '칠성각' 현판
외에 주원영 거사가 쓴 '영모각(靈母閣)' 현판도 내밀고 있는데, 여기서 '영모(靈母)'는 산신
할매의 다른 표현 같다.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 그 역시 청기와를 지니고 있는데, 19세기 말
에 지어진 것으로 1936년에 수리한 것을 근래에 산뜻하게 청기와를 입혔다.
건물 바로 뒷쪽에는 벼랑이 바짝 붙어있어 산사태에 다소 취약해 보이는데, 1984년 여름 장마
의 희롱으로 산사태가 일어나 적지 않은 흙과 물이 거세게 칠성각을 향해 밀려왔다. 붕괴 직
전에 놓였으나 뿌리채 뽑혀 떠내려오던 소나무 1그루가 마치 문어가 감싸듯 그 줄기와 뿌리가
칠성각을 감싸 무너지지 않게 지켜준 이변이 발생했다. 우연인지 칠성/산신의 가호인지는 모
르겠으나 어쨌든 산신각은 위기를 모면했고, 절에서는 그 소나무를 치우고 3일 동안 산신 기
도를 올렸다.


▲  등장 인물이 많은 칠성탱 (왜정 때 그려짐)

▲  산신 가족의 단란함이 엿보이는 산신탱

고색이 느껴지는 산신탱은 1908년 석옹 철유(石翁 喆裕)가 출초(出草, 초안을 그림)하고 두흠
(斗欽)과 윤오(允旿) 등이 참여해 구산동 수국사(守國寺)에서 그린 것으로 나중에 삼성암으로
넘어왔다.
붉은 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산신은 호랑이에 기대 앉아있는데, 꼬랑지를 살랑살랑
거리는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귀엽기만 하다. 산신의 왼손에는 잘생긴 부채가 있고, 그들 뒤에
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그려져 있다. 심원사에서 넘어온 아미타불을 제외하면 경내에서 가
장 늙은 보물로 아직 그 흔한 지정문화재 등급은 얻지 못했다.


▲  벼랑 위에 자리한 독성각(獨聖閣)

대웅전 우측 벼랑 위에는 삼성암의 얼굴이자 후광(後光)인 독성각이 걸려 있다. 보통 절에서
산신각이나 산신이 봉안된 삼성각(三聖閣)이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마련이나 삼성각
은 독성도량답게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거처인 독성각을 가장 하늘 가까이에 두어 매우
애지중지하고 있다.

독성각은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그 역시 청기와를 쓰고 있
다. 1881년에 처음 지어졌다고 전하며, 1942년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이듬해 7월에 다시 지었
다. 현재 건물은 근래 손질된 것으로 지형적인 탓에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정면에 유리창을
내어 비록 좁지만 경내를 굽어볼 수 있게 했다. 들어앉은 위치가 경사가 각박하고 자리가 협
소해 지그재그로 돌계단을 내었는데, 비록 그 거리는 짧으나 계단이 우중층하니 주의가 좀 필
요하다.


▲  독성각에서 바라본 대웅전 옆구리

▲  목각으로 이루어진 독성탱

독성각에는 나무로 조각되어 곱게 채색을 입힌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다. 그림 가운데에 두광(
頭光)을 갖춘 독성 할배가 앉아있고, 그 옆에 동자가 서 있으며, 독성 좌우에는 늙은 큰 소나
무가 있고, 뒷쪽에는 독성의 활동 무대인 천태산(天台山)이 주름진 선을 이루고 있다.

독성각이 19세기 후반부터 있던 것으로 보아 그와 연배가 비슷한 독성탱이 있었을 것이나 지
금 독성탱은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고색의 기운은 여물지 못했다. 삼성암은 독성을 주
인으로 삼아 독성도량을 칭하고 있으며, 중부 지방 제일의 독성 도량을 자처하고 있지만 역시
나 아는 사람만 찾을 뿐이다. 나도 이곳에 오기 얼마 전에야 겨우 그 사실을 접했다.

독성탱 앞에는 중생들의 소망이 담긴 조그만 원등(願燈)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이 강인한 협동심으로 몸을 불사르며 독성각 내부를 환히 밝힌다.


▲  마치 자수를 놓은 듯, 꽃잎과 새 등이 그려진 독성각 우물천정

▲  삼성암을 뒤로하며... (일주문 부근)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  삼성암 일주문 밑에 자리한 세심천 약수터

그날의 목적지인 삼성암을 둘러보고 뿌듯한 마음을 품으며 절을 나왔다. 다음 인연이 언제가
될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그때가 되면 이번에 놓친 대웅전의 조그만 아미타불을 꼭 친견하고
싶다. 
절을 뒤로 하며 일주문에 이르니 부근에 세심천약수터가 있다. 산에 왔다면 뫼가 베푼 약수는
꼭 마셔봐야 그 산의 맛과 마음을 아는 법,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물을 들이킨다. 허
나 봄가뭄으로 물이 답답하게 나와 조그만 바가지를 채우는데 꽤 인내를 요했다. 삼성암은 그
래도 물이 넉넉했는데, 이곳은 그렇지가 못하다.
약수터 주변에는 운동시설과 의자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오랫동안 동네 사람들의 몸
풀기 장소로 쓰였던 듯 싶다.


▲  북한산둘레길 흰구름길

약수터를 나와 빨래골로 내려가지 않고 화계사로 질러가는 산길로 방향을 잡았다. 숲에 묻힌
그 길을 정신없이 내려가면 천하 둘레길의 성지(聖地)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이 모
습을 비춘다.
북한산둘레길은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道峯山), 사패산(賜牌山)의 밑도리를 지나는 21개
구간, 71.5km의 장대한 산길인데, 삼성암 입구와 빨래골을 지나는 길은 그 둘레길의 일원인
흰구름길이다. 이름도 참 어여쁜 흰구름길(북한산둘레길 3구간)은 이준열사묘역입구에서 북한
산(삼각산)과 속세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북한산생태숲(성북생태체험관)에 이르는 4.1km의 산
길로 구름을 만날 것 같은 길 이름과는 달리 현실은 해발 100~150m를 왔다갔다하는 구름도 만
질 수 없는 얕은 높이이다. 그러니 괜히 이름에 속지 말자~~!

흰구름길은 북쪽으로 순례길(북한산둘레길 2구간), 서남쪽으로는 솔샘길(둘레길 4구간)과 이
어지며, 그리 각박한 경사가 없는 정말 착한 산길이다. 별로 힘들지 않은 코스라 마실 삼아
가다보면 길게 잡아도 1시간 20분 내외면 완주할 수 있는데, 이 구간에는 화계사(☞ 관련글
보기)와 본원정사(☞ 관련글 보기), 삼성암 등의 오래된 절과 냉골, 빨래골 등의 계곡, 조병
옥(趙炳玉, 1894~1960)박사묘, 구름전망대 등의 명소가 있어 무작정 앞사람의 뒷통수만 보며
산길만 걸을 것이 아니라 이들을 여럿 겯드려서 거닐면 정말 영양가 높은 둘레길 산책이 될
것이다.

흰구름길 구간에는 냉골(화계사와 본원정사 중간)이란 깊은 골짜기가 있다. 도로가 냉골 윗쪽
에 자리한 영락교회기도원까지 닦여져 있어 차량들도 마음 편히 바퀴를 굴릴 수 있는데, 냉골
공원 지킴터에서 칼바위능선으로 조금 오르면 현대사의 주요 인물인 유석(維石) 조병옥박사의
묘소가 있다.

또한 화계사 남쪽 산자락에는 속세를 향해 고
개를 든 3층짜리 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는 둘레길의 이름을 따서 구름전망
대라 부르는데, 그렇다고 구름까지 닿는 높이
는 아니다. 전망대 꼭대기까지는 계단이 빙글
빙글 늘어져 있으며, 20m 내외의 높이인 전망
대 꼭대기에 올라서면 강북구와 도봉구, 성북
구, 노원구를 비롯해 북한산(삼각산) 동쪽의
주요 봉우리와 도봉산, 수락산(水落山), 불암
산(佛巖山) 등이 거침없이 들어와 조망이 제
법 일품이다.


◀  나무로 지어진 구름전망대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동쪽 자락과 도봉산(오른쪽 산줄기)

녹색 물결이 일렁이는 북한산(삼각산) 동쪽 자락, 그 너머로 이 산의 대표 봉우리인 백운대(
白雲臺, 북한산 꼭대기)와 인수봉(仁壽峯)을 비롯해 북한산 동쪽 봉우리 능선이 흔쾌히 시야
에 들어온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우이동, 도봉구, 노원구 지역)
정면 왼쪽에 보이는 산이 도봉산, 오른쪽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쌍문동, 도봉구, 노원구 지역)
정면에 멀리 보이는 산이 수락산, 그 오른쪽이 불암산이다.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수유동, 미아동, 월곡동, 성북구 지역)

▲  구름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미아동, 길음동, 월곡동, 성북구 지역)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잘 닦여진 흰구름길 (화계사 남쪽)

▲  화계사 직전 (흰구름길과 만나는 구간)

간만에 찾은 흰구름길은 화계사까지만 거닐었다. 햇님의 퇴근 시간도 슬슬 임박했고 종종 왔
던 곳이라 그렇게까지 무리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멀리 가고 요란하게 간다 한
들 그 일정의 끝은 언제나 집이다.
이렇게 하여 삼성암을 겯드린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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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둘레길2코스 순례길, 구천계곡 여름 나들이 ~~~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 신익희선생묘, 가인 김병로묘, 단주 유림묘)

 


' 북한산 구천계곡, 순례길 나들이 '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 신익희 선생묘 주변)


▲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

▲  신익희 선생묘

▲  유림 선생묘


 

♠  북한산 구천계곡에 숨겨진 옛 분청사기 가마터
수유동(水踰洞) 분청사기 가마터 - 서울 지방기념물 36호

▲  밑에서 바라본 분청사기(粉靑沙器) 가마터

1년의 절반이 허무하게 저물고 나머지 절반이 막 시작되던 7월 첫 무렵, 북한산(삼각산) 구
천계곡 주변에 숨겨진 여러 명소와 숨바꼭질을 하였다.
북한산(北漢山)은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로 지금까지 수백 번 이상을 안겼으나 아직도 미
답처(未踏處)들이 적지 않다. 하여 미답지를 하나라도 더 지우고자 신익희 선생묘 서쪽 숲에
숨겨진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를 찾은 것인데, 그거 하나만 보기에는 무척 허전할 것 같아
서 주변에 있는 애국지사의 묘역 여럿을 후식으로 둘러보았다.

북한산 수유동과 우이동 산자락에는 20세기 초/중기에 활약했던 애국지사의 묘역이 많이 있
으나 정작 가본 곳은 손병희(孫秉熙) 선생묘 뿐이다. 암덩어리 같은 근/현대사에 관심이 거
의 없다보니 소중한 백신 같은 그들에게도 딱히 마음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아카데미하우스 종점(강북구 마을버스 01번 종점)에서 신익희 선생묘로 이어지는 길(4.19로
32길)을 가다가 그 묘역 입구에서 오른쪽(북쪽) 숲길로 조금 들어서 왼쪽(서쪽) 산길을 넘으
면 근래 천하에 공개된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가 활짝 마중을 한다. (이정표가 잘되어있어
찾기는 쉬움)


▲  윗쪽에서 바라본 분청사기 가마터

수유동 분청사기 가마터는 북한산(삼각산) 동남쪽 자락으로 구천계곡 바로 북쪽이다. 구천계
곡과 도선사(道詵寺) 밑인 우이동계곡 주변에 조선시대 가마터가 많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들
중의 지방문화재로 지정되고 이렇게 정비까지 받아 천하에 개방된 존재는 오로지 이곳이 유
일하다. 나머지는 세월을 원망하며 죄다 숲속에 묻혀있어 전문가가 아니면 찾기도 어렵다.

이곳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잠깐 등장했던 분청사기를 생산했던 가마터이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중기에 짧게 운영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서울(한양)과 아주 가까워 왕족과 귀
족들의 분청사기 수요를 충당하느라 가마터 굴뚝의 연기는 마를 날이 없었다. 이후 분청사기
의 인기가 하락하고 주변에 괜찮은 가마터들이 생겨나면서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15.6도의 경사를 지닌 무계단식 단실요<單室窯, 아궁이의 열이 경사지를 옆으로 지나면서 그
릇을 익힌 후,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구조>로 길이 19.8m, 최대 너비가 1.5m에 이르는 커다란
가마이다. 가마는 벽과 천장을 돌과 점토로 쌓아 다졌는데 가마 입구인 회구부(灰丘部)와 아
궁이, 연소실(燃燒室), 소성실(燒成室), 폐기장, 온돌 등이 확인되었다.
가마는 앞부분은 잘 남아있으나 뒷부분은 상당수 손상되어 붉게 탄 바닥만 확인되었다. 아궁
이는 타원형으로 길이 1.6m, 내폭 1.3~1.6m, 깊이 0.9m 크기이며, 연소실과 소성실 사이에는
높은 불턱이 있다. 소성실은 가늘고 길쭉한 모습으로 여러 자기편이 나왔으며 폐기장은 아궁
이 우측에서 1.5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온돌도 발견되었는데 길이 3.2m, 폭 2m
정도로 자연석을 이용해 조성되었으며, 가마가 문을 닫은 이후에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  옆에서 바라본 분청사기 가마터

이곳에서는 여러 종류의 도기와 자기, 흑유자, 도침, 동전 등이 출토되었다. 도기류는 접시
와 발이 제일 많이 나왔고 잔, 배, 호, 매병 등도 조금씩 나왔으며 주요 유물로는 도기방상
씨편(도깨비 문양 비슷한 것), 청자상감용문매병편, '上'과 '德'이 새겨진 자기편, 동전 등
이 있다.
상감청자(象嵌靑瓷)에서 분청사기로 넘어가는 도자생산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 평
가되어 2011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했으며 2014년 서울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렇게 손질되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가마터는 보존을 위해 겉면에 산뜻하게 풀을 씌워놓았다. 하여 가마터 흔적은 저 안에 고스
란히 묻혀있다. 가마터 동쪽에는 조촐하게 쉼터를 닦아 쉴 구석을 마련해주었는데, 이곳의
존재감이 아직은 미약하여 인적은 드물다. 하여 조촐하게 사색을 즐기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가마터 남쪽으로도 산길이 나있으며 그 길은 자연관찰로로 구천계곡을 거쳐 아카데미하우스
로 이어진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127-1


▲  신익희 선생묘 입구
저 숲길의 끝에 해공 신익희 선생의 유택(幽宅)이 둥지를 틀었다.


 

♠  구천계곡 주변에서 만난 독립 애국지사의 묘역들

▲  신익희 선생 묘 직전 계단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왔던 길로 돌아나가 신익희 선생의 묘역을 찾았다. 우리 귀에 너무나도
숙한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1894~1956), 그는 누구일까?

신익희는 평산신씨 가문으로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판서를 지낸 신단(申壇)의 6남 중 막내
로 자는 여구(汝耉), 호는 해공이며, 중원대륙에서 사용했던 이명(異名)은 왕해공(王海公).
왕방오(王邦午)이다.
어린 시절 한학을 익히고, 1908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한 뒤 동경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들어갔다. 유학 시절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여 총무, 회장 등
을 역임했으며 학지광(學之光)이란 잡지의 발간을 담당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3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고향 광주에 동명강습소(東明講習所)를 열었으며, 중
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부터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송진우(宋鎭禹), 최남선(崔南善)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했으며, 1919년에는 해
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지도자와의 연락을 담당하여 만주, 북경, 상해 등을 오갔다. 그러
던 중 문창범(文昌範), 홍범도(洪範圖)와 연락을 취하고자 만주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
고 돌아오던 중, 평양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서둘러 서울로 돌아와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그래서 제자인 강기덕(康基德), 한창환(韓昌桓) 등과 연락해 3월 5일 남대문역(서울역)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하니 그것이 제2차 독립만세시위이다. 이 시위는 3.1운동의 지방 확산에 크
게 기여했으나 그로 인해 왜정의 수배를 받게 되자 급히 상해로 망명했다.


▲  신익희 선생 묘 - 등록문화재 520호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헌정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했으며 내무
차장, 외무차장, 국무원비서장, 외무총장 대리, 문교부장 등을 역임했다. 또한 중원대륙 세
력과 합작해 왜를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중국국민당에 가담하여 중장(中將)이 되었으며, 조
선과 중원의 청년 500명을 모아 유격대인 분용대(奮勇隊)를 조직, 군사훈련을 시키며 본토
진입을 꾀했으나 신익희를 돕던 호경익(胡景翼)이 1924년 사망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하여 장개석(蔣介石)을 찾아가 한,만 국경에 왜군을 토벌해야 된다며 협조를 요청했으나 뜻
을 이루지 못했다.
1929년 한국혁명당을 창당하고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해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했으며 '우리
의 길'이란 기관지를 발행하여 중원대륙에 살던 동포들에게 민족정신과 독립의지를 심어주었
다.

그는 단일정당으로 민족의 힘을 모아 왜를 때려잡아야 된다고 역설하며 1932년에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의열단(義烈團), 한국광복동지회 대표와 협의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
對日戰線統一同盟)이란 동맹 단체를 탄생시켰다. 거기서 그는 김규식(金奎植), 박건웅(朴建
雄)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34년 자신의 한국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을 합쳐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했으며, 1935
년 7월, 남경 금릉(金陵)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 아래 신한독립당(윤기섭), 의열단<김
원봉(金元鳳)>, 조선혁명당(최동오), 한국독립당<조소앙(趙素昻)>, 대한독립당(김규식) 등 5
당 통합을 이끌어내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다. 허나 1937년 1월 제2차 전당대회로 비(非) 의
열단 계열의 인사들이 탈당하면서 세력이 위축되고 말았다.

1937년 여름, 왜가 중원대륙 침공을 본격화한 이른바 중일전쟁이 터지자 그는 조선민족전선
연맹 결성에 참여했고, 중원대륙 곳곳을 돌면서 대일항전을 지도했다. 그리고 1938년 9월에
조선청년전위동맹에 가담했으며, 1939년 8월 27일 김구와 김원봉의 주도로 사천성(四川省)
기강에서 광복전선과 민족전선 양측의 7당 통합회의가 열리자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허나 그 7당 통합도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의용대 병력이 있는 낙양(洛陽)으로 가서 김성숙(金星淑)의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연
합하여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이들을 지도하면서 1941년 한중합작으로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하여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1943년 4월, 대한민국 잠행관제에 의해 설치된 선전부의 선전위원회에서 조소앙, 엄항섭, 유
림(柳林) 등과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의 선전계획의 수립과 실행에 나섰으며, 1944년 5월 임시
정부 연립내각 성립 때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중경(重慶)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신익희 선생 묘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 요인의 제2차 환국(還國) 때 서울로 돌아왔으며 모스크바 3상 회
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김구(金九)를 도와 반탁운동에 나섰다. 허나 그와는 정치 노
선이 달라 정치공작대, 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해 이승만에 접근했다.

1946년 경복궁 서쪽에 국민대(현재 정릉동에 있음)를 설립했고 자유신문을 발행하여 민족자
주성을 고취시켰다. 미군정 시절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을 지냈고 1948년 정부수립으로
제헌국회에 들어갔으며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1947년에는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여 대표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민주당과 합당했다. 그리고 이후 개편된 민주국민당의 위원장으로 뽑
혔다.
3선 국회의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나날이 개판을 치며 심지어 그 유
명한 사사오입(四捨五入) 사건까지 일으키자 자유당 타도를 외치며 1955년 장면(張勉), 조병
옥(趙炳玉)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했다.

1956년 대선 때 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정권교체를 노렸다. 이미 민심도 그에게 돌아선
상태라 승산은 넘치도록 충분했으나 5월 5일 유세차 열차를 타고 전주로 가던 중, 이리(익산
) 정도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선거 유세로 너무 과로했던 것이 화근이 된 것
이다. 하여 모두가 그리던 정권교체는 물거품이 되었으며, 대신 장면이 이기붕을 누르고 부
통령에 당선되었다.
허나 4년 뒤, 1960년 대선에 조병옥 박사가 출마했으나 그마저 유세 중에 위암으로 사망하여
정권교체의 기회를 또 잃고 말았다. <하여간 이 나라는 오래 살아야 될 사람이 빨리 죽고,
빨리 없어져야 될 것들이 오래 삼, 그래서 발전이 안됨>
1956년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져 북한산(삼각산) 자락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대
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천하 제일의 싸움꾼으로 널리 알려진 시라소니(이성순)가 그의
경호를 맡았다. 그가 허무하게 죽자 장면 박사의 경호를 맡았는데, 그가 경호하는 동안에는
자유당의 끄나풀인 이정재의 동대문 패거리들이 감히 접근을 못했다.

▲  신익희묘 봉분과 하얀 피부의 상석,
향로석, 장명등

▲  망주석(望柱石)에 새겨진 세호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신익희 묘역은 호석을 두룬 커다란 봉분과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 문인석(文人石) 1쌍, 장명등, 묘비(묘표)로 이루어져 있으며 묘역으로 인도하는 계단 끝
에는 호랑이상 1쌍을 배치하여 악의 기운을 경계한다. 무덤을 지키는 석물들은 파리가 미끄
러질 정도로 매끄럽고 하얀 피부를 드러내고 있으며 고색은 아직 여물지 못했으나 장차 20세
기 중반 무덤 양식의 하나로 교과서에 절찬리에 소개될 것이다.

그는 1945년 12월 귀국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 쓸만한 집이 1칸 없다고 집 1채를 마
련하라고 (주변 사람들이) 권고하나 내가 망명 때 항일독립이 평생의 소원이었고 이제 반 조
각이나마 독립된 조국에서 국사를 맡게 되었으니 더 바랄게 있겠는가'

* 신익희 선생묘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7-1, 산 74-3


▲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호랑이상
저 패기 돋는 이빨로 친일매국노와 그 쓰레기 같은 후손들, 그리고 이 나라의
적폐들을 싹 물어뜯어주렴.

▲  평산 신하균(平山 申河均) 선생묘

신익희 선생묘 북쪽에는 그의 장남인 신하균(1918~1975) 선생묘가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그는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일찌감치 중원대륙으로 넘어가 상해(상하이) 광화대학 상
과를 졸업했다. 이후 중국국민정부에서 감찰원위임관과 국민정부군의 소교복무원(소령급 문
관), 중앙은행 과원조장, 중앙신탁국조장 등을 지냈으며,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들어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입대해 전지공작, 초모공작 훈련 등 독립운동을 진행하여
정위(正尉)가 되었다.

해방 이후, 늦게 귀국하여 한국연건기업 사장을 지내다가 1955년에는 한국외대 강사를 하기
도 했으며 아버지가 대통령선거 유세 중, 사망하자 정계로 시선을 돌려 경기도 광주 보궐 선
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도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4.19이후 민주당의 구파(舊派)인 신민당에 들어갔으며,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민
정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3선의원이 되었다.

그는 서예에도 뛰어나 1958년 귀국기념서예전에서 이 땅 최초로 중원대륙 고대의 해서체(楷
書體)인 학보자비체(學寶子碑體)를 소개했으며, 여러 차례의 서예전을 열었다.
1950년대 중반 종로구 인사동의 민주당 중앙당사 간판을 신익희가 썼는데 1960년대 중반 관
훈동(寬訓洞)의 민중당 중앙당사 간판은 그 아들인 신하균이 썼으니 이는 보통 인연이 아니
다.

1977년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아비도 그렇고 그 아들도 그렇
고 독립운동에 적지 않은 공을 세우고 해방 이후 정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으니 가히 애국
자의 집안이라 할만하다. 처음에는 신익희의 독립운동 경력이 크게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
나 그의 묘역을 거쳐간 이후 조사해보니 생각 외로 경력이 화려했다.
더러운 친일매국노들로 악취가 심했던 그 시절(지금도 크게 다를 것은 없음 ㅠ), 이런 인물
이 있었던 것이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으며, 만약 그가 10년만 더 살았다면 이승만과 자
유당을 단죄하고 이 나라를 크게 부흥시켰을 것이다. 허나 그 기회를 하늘이 앗아가 버렸고
그 휴유증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니 과연 하늘에게 정의와 양심이 있는지 묻고 싶다.

신하균 묘역은 화려한 그의 아비 무덤과 달리 네모나게 호석이 둘러진 작은 봉분과 상석, 향
로석, 묘비가 전부인 단출한 모습이다.


▲  김병로 선생묘로 인도하는 산길
신익희선생묘에서 운가사, 진달래능선 쪽으로 4~5분 정도 오르면
김병로 선생묘가 쓱 모습을 비춘다.

▲  김병로 선생묘 밑에 자리한 묘비
귀부와 이수(螭首)를 갖춘 당당한 모습으로 묘역 동남쪽에 자리해 있어
신도비(神道碑)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  가인 김병로(街人 金炳魯) 선생묘

대쪽 판사로 유명한 가인 김병로(1887~1964)는 전북 순창에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
낸 김상희(金相熙)의 1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일찍 여위었으나 할머니가 집안에 독서당(讀書堂)을 만들어 한문 공부
를 시켰으며, 1899년에 불과 12세에 나이로 4살 연상인 연일정씨 정교원의 딸에게 장가를 들
었다. 그가 외아들이고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집안에서 일찍 혼인을 시킨 것이다.

1902년 당대 거유(巨儒)였던 전우(田愚)의 문하가 되었다가 1904년에 처음 신학문을 접했다.
하여 친구 4~5명과 일신학교(日新學校)란 임시 학교를 세웠는데 직접 강사를 초청하여 영어,
산수, 세계사를 익혔다.
1906년 순창을 찾은 면암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을 듣고 크게 감동을 먹어 5~6명의 포수(砲
手)와 함께 그의 의병부대에 들어갔다. 허나 최익현이 의병을 해산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
왔으며, 광양의 백낙구, 담양의 기우만, 정읍의 유화숙 등과 의병투쟁을 모의하다가 채상순
과 함께 김동신의 의병부대에 합류,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淳昌)의 왜인 관청을 공격
하기도 했다.
허나 왜가 '호남 대토벌작전'을 펼쳐 의병을 때려잡자 무력 투쟁을 그만두고 고정주가 설립
한 창흥의숙(昌興義塾)에 들어가 다시 신학문을 접했으며, 1910년 왜열도 동경으로 유학을
가 일본대학 전문부 법과 청강생이 되었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법조인으로 길을 잡게 된다.

허나 생활고로 공부가 어려웠고 때마침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비보까지 전해듣자 충격이 너
무 커 서둘러 귀국했다. 폐결핵으로 1년 동안 쉬다가 1911년 가을, 다시 동경으로 유학을 갔
으며, 명치대학 법과 3학년에 편입하여 1913년 졸업했다.
귀국하여 가산을 정리해 다시 유학길에 올랐는데 이번에는 명치대학과 중앙대학에서 공동운
영하는 법률고등연구과에서 공부를 했다. 이때 '재동경 조선인유학생 학우회' 간사부장과 '
금연회' 운영을 맡기도 했으며 1914년 창간된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스승인 야마우치(山內)의 권유로 왜열도 변호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왜인(倭人) 외에는 응시
할 수 없다는 내각회의 결정으로 결국 응시하지 못했다.


▲  남쪽에서 바라본 가인 김병로 선생묘

1915년 법률고등연구과 수료증을 받고 귀국하여 경성전수학교 조교수로 일했으며 1919년 부
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그만두고 변호사 자격을 얻어 서대문 자택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 관련자들을 위한 무료 변호에 많이 나섰다. 1923년 이인(李仁), 허헌 등
과 '형사변호공동연구회'를 설립했으며 일반 형사사건에서 나온 수임료로 애국지사의 무료변
론은 물론 그들의 가족까지 챙겨주었다.
그가 맡은 애국지사들의 사건만 보합단 사건(1921년), 김상옥(金相玉) 의거와 제2차 의열단(
義烈團) 사건(1923년), 1926년 6.10만세운동,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과 고려혁명당 사건, 정
의부(正義府) 사건(1927년), 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제3차 간도공산당 사건(1931년), 수
양동우회 사건(1937년) 등 실로 방대하다. 또한 안재홍(安在鴻), 안창호(安昌浩) 등의 민족
지도자들의 변호도 맡아 왜정의 온갖 악법으로부터 그들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또한 농민과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도와주어 1928년 전북 옥구군(沃溝郡)에서 소작쟁의
를 벌인 농민들과 1929년 집단파업을 한 함경남도 원산부두 노동자들과 형평사(衡平社) 조합
원들을 변호했다. 또한 1929년 함경남도 갑산에서 일어난 화전민 박해사건과 1930년 함경남
도 단천에서 농민 살상사건이 터졌을 때 직접 현장을 찾아 조사를 벌여 대책을 강구했다.

또한 교육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여 1920년에 조선교육협회 창립 발기인, 1922년 보성전문학
교 상임이사, 1924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 산하 고등보통학교 기성회 발기인을 맡았으
며 김성수와 함께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회금보관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4년 동아일보사 간부들이 친일파들의 협박을 받은 '식도원' 사건이 터지자 이를 규탄하는
민중대회 발기준비위원을 맡았으며, 1927년 전조선변호사대회에서 신문지법과 출판법 제정을
촉구하는 등 언론의 자유를 지키고자 했다. 또한 1923년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고, 1931
년 충무공유적보존운동기금 관리위원을 맡았으며, 신간회(新幹會)에도 가입해 중앙집행위원
장을 맡았다.
그러다보니 왜정의 훼방이 적지 않아 그가 연사로 나서는 집회가 금지되기도 했고 1931년에
는 6개월간 변호사 정직 처분을 받기도 했다. 하여 잠시 소나기를 피하고자 1934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넘어가 잠시 운둔생활을 하였다.
1945년 왜정이 민족지도자들을 살해할 것이라는 괴소문이 돌자 급히 가평(加平)으로 피신했
고 거기서 해방을 맞이했다.


▲  김병로 선생묘의 동그란 봉분과 상석, 향로석

해방이 되자 원세훈, 백관수와 고려민주당을 세우고 이를 확대해 조선민족당을 창당했다. 여
운형(呂運亨)의 건준을 찾아가 좌우합작을 제의하기도 했고, 미군정 아놀드 군정장관이 건준
과 조선인민공화국을 매도하자 이를 비판하는 논평을 내는 등, 좌우세력을 모두 포용하는 자
세를 보였다.
1946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학생들을 직접 변호해주었으며, 미군정청 사법부
법전 기초위원회 위원과 사법부장 등을 하다가, 1947년 사법부 내 6인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
로 활동하며 이 땅의 사법제도의 기초를 닦았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초대 대법
원장이 되었으며,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 법조협회 회장을 맡았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친일매국노 단죄에 굳은 의지
를 보였다. 친일파에 호의적이던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법 개정을 요청했으나 이를 거부하며
친일파 처벌을 추진했으나 결국 이승만 패거리의 농간으로 무산되고 만다.
1950년 골수염 치료로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으며, 1957년 12월, 70세의 나이로
대법원장에서 정년퇴임했다.

은퇴한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의 계속되는 불의와 독재를 비판했고 동아일보에 '부정선거는
천추의 한이 될 것'이라며 이승만에게 경고하기도 했다. 1960년 대선에 출마한 조병옥이 위
암으로 사망하자 장면 부통령 후보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기자회견을 통해 호소했다.
4.19혁명이 일어나자 재야 정치인들과 사태수습을 위하여 대정부건의안을 발표했고, 이승만
이 물러나자 과도정부의 개편을 요구했다. 또한 부정선거 관련자와 부정축재자 처벌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역설해 부정부패를 때려잡을 것을 촉구했다.
1960년 민의원선거로 고향인 순창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1961년 5.16이 터지자 박정희
(朴正熙)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고 군정의 종식을 촉구했다.

1963년 윤보선(尹潽善), 이인 등과 단일야당 결성을 추진하다가 여의치 않자 직접 민정당(民
正黨)을 창당해 최고위원을 맡았다. 이후에도 야권통합을 계속 추진했으나 그리 순탄치 못했
으며 민정당과 국민의당 대표최고의원에서 물러났다.
바로 그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64년 1월 13일, 인현동 자택에서 77세의 나이
로 별세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루어 북한산 자락에 고이 안장되었다.

대쪽 같은 성품과 지조를 평생 지키고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인물로 천하 법조인의 귀감
으로 추앙을 받는다. 허나 오늘날 그와 같은 법조인이 거의 없다싶이하니 그도 지하에서 통
곡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묘역은 호석을 두룬 봉분과 상석, 향로석, 장명등 2기로 이루어진 조촐한 모습이다. 신
익희 묘역보다 외진 곳이라 찾는 이는 별로 없으나 워낙 짙은 숲속에 감싸여있어 잠시 속세(
俗世)를 잊기에는 좋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86-1


▲  단주 유림묘 입구에 세워진 묘비와 호랑이석

김병로 선생묘에서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순례길(북한산둘레길 2구간)로 나와 우이동 방향
으로 조금 가면 왼쪽 구천계곡 건너에 훤칠한 비석이 눈에 보일 것이다. 그가 유림 묘비로
묘비 밑에는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호랑이상 2기가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을 경계하고 있다.
이 땅은 이상하게도 선한 기운보다 악한 기운이 더 판을 치니 저들의 양 어깨가 꽤 무거울
것이다.
그들의 검문을 거쳐 왼쪽 산길로 들어서면 단주 유림 선생 묘가 모습을 드러낸다.


▲  유림묘 입구 (순례길에서 바라본 모습)

유림(柳林, 1894~1961)은 경북 안동 예안면에서 중소 지주인 유이흠(柳頤欽)의 3남으로 태어
났다. <어머니는 김성옥(金性玉)> 전주유씨 집안으로 호는 단주(旦洲), 월파(月波)이며, 본
명은 유화영(柳華永), 중원대륙에서 사용한 이름은 유림, 고상진(高尙眞)이다.

앞서 신익희, 김병로와 마찬가지로 제일 먼저 한학을 배우다가 경상북도 최초의 신식 중등학
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그는 거기서 인생의 스승이 되는 김동삼(金
東三), 유인식을 만나게 된다.
1910년 어둠의 시절이 오자 겨우 16세의 나이로 손을 깨물어 거기서 뿜어져 나온 뜨거운 피
로 '충군애국(忠君愛國)' 4자의 혈서(血書)를 쓰며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하여 대구와 안동
을 오가며 계몽운동과 비밀결사 조직 활동을 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안동 임동면
편항 장터에서 열린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협동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이끔)

하지만 3.1운동이 왜정의 고약한 탄압으로 더 이상 효과가 없자 가산을 정리한 뒤 가족을 데
리고 만주로 넘어갔다. 우선 만주 봉천성 요중현에 머물 곳을 마련해 가족들을 그곳에 안착
시키고 홀로 남만주 유하현 삼원포로 이동해 미리 와있던 김동삼과 이상룡, 이회영(李會榮)
등이 닦아놓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합류했다. 이때 군자금 마련을 위해 고향에 남아있
던 나머지 재산도 싹 처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1920년 8월 상해로 이동하여 거기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멤버로 활동하다가 1921년 북경
으로 가서 신채호(申菜浩), 김창숙(金昌淑) 등을 만났다. 그때 신채호가 주관하던 잡지 '천
고(天鼓)'의 발행을 도왔으며 거기서 그의 아나키즘<anarchism,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을
접하고 아나키스트로 노선을 잡는다.


▲  단주 유림 선생묘
'나의 이상은 강제권력을 배격하고 전 민족, 나가서는 전 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하에서 다같이 노동하고 다같이 자유롭게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데 있다' (1945년 12월 귀국직후 기자회견에서)
 

외국어 수학을 위해 1922년 성도(成都)로 이동하여 성도사범대학에 들어갔다. 허나 학비 해
결이 큰 문제라 중원대륙 정부의 관비생(官費生)이 되고자 이름을 '고상진'으로 바꾸며 중원
사람 행세를 했다. 다행히 그게 잘 통하여 별무리 없이 영문과를 마쳤으며 프랑스로 유학을
가고자 프랑스어도 수강하는 등, 상상 이상의 다양한 외국어를 익혔다. 심지어 '에스페란토'
까지 익혔다고 하니 그야말로 외국어의 신이 따로 없다.

1926년 학교를 졸업하고 간도 길림(吉林)으로 이동하여 김종진과 이을규를 만났다. 그들은
중동선(中東線) 해림역으로 이동하여 김좌진 장군를 만났는데, 그는 김좌진과 민족주의와 공
산주의 사상을 두고 여러 번 격론을 벌이며 양 사상의 갈등을 해결해보고자 했으나 워낙 팽
팽하여 설득을 포기하고 길림 화전현으로 돌아왔다.
이후 본토(국내)의 아나키즘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던 중, 1929년 11월 평양에서 '전
조선 흑색사회주의 운동자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최갑룡, 임중학
등과 함께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허나 왜정의 탄압으로 대회는 무산되었
고 그는 왜군에 체포되었다. 허나 딱히 혐의가 발견되지 않아 봉천으로 추방되었다.

1929년 가산을 털어 의성학원(義誠學院, 봉천중학)을 세웠다. 중원대륙 각급 학교 입학을 위
한 예과 과정으로 400명의 학생을 수용했으며 학생들의 중원대륙 학교 입학을 알선했고 직접
영어도 가르치면서 평화롭게 지냈다. 허나 그는 1931년 10월 왜군에게 '조선공산무정부주의
연맹'을 조직하고 활동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는 '원산흑색사건'이란 명목으로 최갑룡, 조중복 등과 함께 함흥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었
으며, 1933년 3월 24일, 5년형을 받았다. 그들은 이에 모두 항소를 했고 서울로 이송되어 경
성복심법원과 경성고등법원을 거쳤으나 별 변화없이 원심대로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
고를 치루고 1937년 10월 8일 출옥했다.

이후 만주로 넘어가 재기를 노렸으나 뜻대로 안되자 북경과 천진에서 한중 항일연합군 조직
에 진력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2년 10월,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을 찾았고 임시정부가 치
룬 경상도구 의원선거회에 나서 김원봉, 김상덕 등 6명이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임시정부를 다시 찾은 것은 '독립을 달성하고 이 나라에 아름다운 낙원을 창조하려면 우선
민족을 대표할만한 어떤 근거가 있어야 된다'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외교위원회 연구위원, 선전위원회 선전위원, 건국강령수개위원회 위원 등
을 지냈으며,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의 대표로 주석단의 1명으로 추대되어 활동했다. 또한
미국와 영국이 한국을 국제 보호 밑에 두기로 했다는 보도를 듣고 중경에서 대회를 열어 한
국의 완전한 독립과 외국의 내정 간섭 반대를 외쳤다.


▲  유림묘 봉분과 상석, 향로석
봉분에 무궁화 무늬들이 꽂혀있는데 처음에는 진짜 꽃인 줄 알았으나
가까이서 보니 그냥 문양이었다. 애국지사 묘역에 걸맞게
무궁화 무늬를 심은 센스가 돋보인다.


해방이 되자 1945년 12월 주한 미군사령부가 보낸 비행기를 타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귀국했
다. 허나 날씨가 좋지 못하여 서울비행장(여의도)에 착륙하지 못하고 군산에 착륙해 거기서
육로편으로 상경했다.
1946년 임시정부의 법통기관인 비상국민회의 부의장이 되었으며, 세계 아나키즘 최초의 아나
키즘 이념정당인 독립노동당(獨立勞農黨)을 창당해 당수로 취임했다. 그리고 노농신문을 발
간하여 노농대중의 계몽과 권익 보호에 힘썼다.
1948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아나키스트 대회'가 열렸는데, 유림은 한국 대표로 초청
을 받았으나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했다.

대한국민의회 의장이 되었으나 국민의회 기능 상실로 다시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결
성하고 대표간사가 되었으며, 1952년 7월 임시수도인 부산(釜山)에서 일어난 '발췌개헌안'에
항의하여 신익희, 장면 등과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세웠다.
국회의원 선거에 여러 번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1961년 4월 1일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
났다. 그해 4월 7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루어졌으며 그때 장례위원장인
성균관대 초대총장인 김창숙은 '그대 있어 이 나라가 무겁더니 그대 떠나니 이 나라가 비었
구나'
추도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무덤은 호석을 갖춘 동그란 봉분과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1쌍으로 이루어져 있
다. 특이한 것은 봉분에 무궁화 무늬가 잔뜩 심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곳을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9시 직전에 이르렀다. 아무리 여름이라 해가 길어졌다고 해
도 그건 어디까지나 햇님의 퇴근시간이 늦춰졌을 뿐이다. 달의 사제인 땅꺼미가 모락모락 피
어올라 햇님의 세상을 훔치려고 들고, 무더위에 적지 않게 돌아다녔더니 피로감과 시장기가
달덩이만큼이나 크게 솟아오른다. 이럴 때는 욕심을 부리고 속세로 내려가 저녁을 먹는 것이
진리이다.

이렇게 하여 오후에 짧게 누린 북한산 미답지 나들이는 4곳의 미답처를 싹 지우는 큰 성과를
누리며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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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5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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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과 가까운 첩첩한 산중의 오랜 절집 ~ 북한산 승가사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  석가탄신일 맞이 산사 나들이 ~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승가사 약사전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사 호국보탑

▲  승가사 약사전

▲  호국보탑


높은 바위 산길은 험한데, 지팡이 짚고도 등라(藤蘿) 휘어잡네
처마가엔 가던 구름 머물고, 창앞엔 쏟아지는 폭포 많을세라
차를 끓이니 병에서 가는 소리나고, 물을 길으니 우물에 작은 물결지네
두어명 높은 스님 있어 공(空)한 것 보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네

* 조선 초기 문신 정인지(鄭麟趾)가 승가사에서 지은 시


 

5월 공휴일의 하나인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이 드디어 코앞에 다가왔다. 이번 초파일은 주말
과 겹쳐서 자연스럽게 여러 날 연휴가 형성되었는데, 초파일이 그 연휴의 끝이었다. 그래서 초
파일 전날에 사전 몸풀기용으로 서울에 있는 적당한 고찰을 물색하다가 가본지 20년이 넘은 북
한산(삼각산) 승가사를 찾기로 했다.

해가 조금씩 고개가 꺾이던 오후 2시에 길음역에서 후배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7211번(진관차
고지↔신설동)을 타고 북악터널, 평창동을 지나 구기동(舊基洞)에서 발을 내린다. 여기서 졸부
들의 집과 빌라로 경관이 꼬질꼬질해진 구기동계곡을 20분 정도 오르면 구기탐방지원센터가 나
오며, 이곳을 지나면 비로소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된다.
구기동은 옆동네인 평창동(平倉洞)과 더불어 북한산 자락에 안겨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게다가
명당(明堂)의 기질도 있다고 전해져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졸부들이 마구잡이로 들어와 살았는
데, 문제는 그들의 욕심이 끝이 없어 쥐처럼 계속 북한산(삼각산)의 살을 갉아먹고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경관이 적지 않게 유린을 당했다.
더 이상 졸부들로 인해 북한산이 망가지지 않도록 신축/증축을 금하는 한편, 기존 집들도 모두
밀어버려 서울의 영원한 허파이자 진산(鎭山)인 북한산의 숨통을 확 트이게 했으면 좋겠다.

구기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졸부들의 집과 무자비한 개발의 칼질에 기가 죽은 구기동계곡도 슬
슬 본성을 되찾아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낸다. 게다가 숲도 더욱 짙어져 때이른 더위를 잊게 만
든다. 그런 산길을 20분 정도 오르면 구기갈림길인데, 여기서 직진하면 문수암(文殊庵)과 북한
산성(北漢山城)으로 이어지며, 왼쪽으로 가면 승가사와 비봉이다.
우리는 아직 점심을 먹지 못해 여기서 속세에서 사온 김밥과 과자, 음료수 등으로 배를 채운다.
하늘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곳에서 먹어서 그런지 꿀을 바른 듯 죄다 꿀맛이다. 우리가 사온 김
밥은 모두 5줄인데, 이중 4줄을 먹었고, 과자와 음료수도 절반 정도 처리하니 포만감의 행복이
일파만파로 몰려와 우리를 희롱한다. 그 희롱에 잠시 무방비로 있다가 자리를 싹 털고 다시 길
을 재촉했다. 승가사까지는 30분을 더 가야되기 때문이다.

구기갈림길에서 승가사까지는 경사가 좀 각박한 편이나, 구기동계곡의 상류인 승가사계곡이 바
로 옆에서 시원한 바람과 냇물로 응원하고 있어 그리힘들지는 않다. 그 산길을 25분 정도 오르
면 승가사 갈림길에 이른다.


▲  승가사 갈림길 - 왼쪽으로 가나 오른쪽으로 가나 모두 승가사로 통한다.
(사람은 왼쪽 계단길 추천, 오른쪽 길은 수레를 위한 길)


♠  승가사 입문

▲  청기와로 치장된 승가사 일주문(一柱門)

승가사갈림길에서 왼쪽 계단길을 오르면 승가사의 내력과 가람배치도가 담긴 안내문과 함께 무
려 청기와로 머리를 장식한 일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 문은 1985년에 지어진 것으로 승가사 주변이 국립공원 건축제한구역이라 여러 번 강제 철거
를 당했던 비운의 문이기도 하다. 간신히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설득하여 지금의 문을 두었으며,
평방(平枋)에는 원담(圓潭)이 쓴 '三角山 僧伽寺'란 현판이 걸려있어 이곳의 정체를 알려준다.


▲  경내로 인도하는 청운교 계단길

일주문을 지나면 호국보탑까지는 숨가쁜 계단길의 연속이다. 연등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르면
청운교(靑雲橋)라 불리는 장대한 계단이 기를 질리게 만드는데 계단 앞 좌우에는 용조각이 입을
벌리며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을 경계한다. 계단 중간 오른쪽에는 승가사의 내력이 담긴 사적비(
事蹟碑)가 있으며, 그 계단의 끝에는 승가사의 새로운 명물인 호국보탑이 자리해 있다.


▲  청운교 계단길 (내려갈 때 찍은 모습)
계단 왼쪽에 이수(螭首)를 갖춘 비석이 승가사 사적비이다.

▲  감실 불당까지 갖춘 호국보탑(護國寶塔)

끝없이 펼쳐진 계단에 기가 질린 중생은 그 계단의 끝에 서 있는 호국보탑 앞에서 다시 한번 주
눅이 든다.
인도나 동남아의 불탑(佛塔)처럼 생긴 호국보탑은 승가사가 예로부터 호국기도 도량이었음을 속
세에 강조하면서 조국 통일도 염원하고 절의 위세도 크게 강조하고자 많은 돈을 들여 만든 것이
다. 그러다보니 호국보탑이란 참 아름다운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가 세워짐으로서 탑이 없
던 허전함을 제대로 극복하게 되었다. (정식 이름은 '민족통일호국보탑')

장엄한 모습의 이 탑은 절 밑의 바위와 나무를 싹 밀어버리고 지반을 다져서 만든 것으로 1987
년에 짓기 시작하여 1994년에 완성을 본 승가사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탑의 높이는 무려 25m
로 9층석탑이며, 탑신(塔身) 밑에는 감실(龕室)을 만들어 경주 석굴암(石窟庵)을 조금씩 재현했
고 사방(四方)에 문을 냈다.
감실 안에는 석굴암처럼 본존불(本尊佛)과 11면(面) 관세음보살상, 10대 제자상을 돋음새김으로
배치하고 연꽃장식 덮개를 씌웠으며, 바깥쪽에는 사천왕(四天王)을 배치해 본존불과 탑을 지키
도록 했다. 감실이 매우 좁기 때문에 승려만 들어가서 예불을 올리며, 탑 주위로는 문수/보현동
자상과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빼곡히 배치했다.

탑신에는 인도 정부에서 기증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1과와 청옥와불(靑玉臥佛) 1좌, 나한(羅漢)
의 사리 2과, 패엽경(貝葉經) 1질, 무구정광다라니경 경판 1질, 철제9층탑 99기, 화엄경(華嚴經
) 9질을 봉안했다.
조그만 감실 불당까지 갖춘 매우 이형적(異型的)인 큰 탑으로 지금이야 과시용이다 뭐다해서 이
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지만 몇백년 이후에는 한국미술사 20세기 석탑 부분에서 크게 이름을 날릴
유명 인사로 등극할 지도 모르니 미리 봐두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민족통일호국보탑 공덕비

▲  위에서 바라본 호국보탑의 위엄


▲  호국보탑에서 바라본 천하
북악산(北岳山, 사진 중앙에 엷게 보이는 산줄기)과 인왕산(오른쪽), 그들 너머로
서울 도심이 어렴풋이 바라보인다.

▲  산자락에 요새처럼 자리한 승가사 - 호국보탑에서 올려다본 모습

호국보탑에서 경내까지는 2갈래의 길이 있다. 왼쪽 계단길로 가는 길은 호국보탑을 만들면서 새
롭게 닦은 길이고, 오른쪽에 조금 가파르게 형성된 길은 옛길이다. (옛길로 가면 포대화상을 만
날 수 있음)


♠  북한산 제일의 고찰이자 서울 근교 명승지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
고려시대 보물 2개를 간직한 북한산(삼각산) 승가사(僧伽寺)

▲  산신각에서 바라본 승가사 경내 (대웅전 구역)

북한산(삼각산)의 주요 봉우리이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국보 3호)가 서있던 비봉(碑峰)
동쪽 450m 고지에 둥지를 닦은 승가사는 빼어난 경관으로 예로부터 많은 문인(文人)들이 찾아와
안긴 명소이다. 조선시대에는 서쪽의 진관사(津寬寺), 남쪽의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동쪽의
불암산 불암사(佛巖寺)와 더불어 서울 근교 명승 사찰로 꼽혔는데, 승가사는 그 북쪽으로 그들
가운데 단연 갑(甲)으로 찬양을 받았다.

북한산 제일의 고찰로 손꼽히는 승가사는 756년(신라 경덕왕 14년) 수태(秀台)가 창건했다고 전
한다. 그는 당나라 고종(高宗) 시절에 중생들로부터 생불(生佛)로 칭송 받던 승가대사(僧伽大師
)의 행적에 감명을 받아 그를 기리는 뜻에서 승가사라 했으며, 동문선(東文選)에는 1107년에 이
예(李預)가 쓴 중수기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낭적사(狼跡寺) 스님 수태가 승가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
리를 정해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새기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리나
라에 비추었다. 나라에서 천지의 재변과 홍수와 한발 등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리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언제나 효험이 있었다'

고려의 천하로 바뀐 이후, 1024년(현종 15년)에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했고, 1090년에
는 구산사(龜山寺) 주지였던 영현(領賢)이 선종(宣宗)의 칙령(勅令)을 받아 중수했다. 1099년(
숙종 3년)에는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숙종(肅宗)과 함께 세검정에 있던 장의사(藏義
寺)와 승가사에 들렸는데, 이때 불상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했다.

1422년 세종(世宗)이 전국의 사찰을 통합해 선종(禪宗)과 교종(敎宗) 2개로 나누자 선종에 속하
게 되었으며, 그 시절 고승(高僧)으로 이름을 날린 함허(涵虛)가 여기서 수행을 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으나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여기까지 기어올라온
청나라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150년 가까이 폐허로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1780년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이던 성월선사(城月禪師)가 절터에 뒹굴던 돌을 골라
건물을 재건했으며, 구한말에는 명성황후와 엄귀비의 후원으로 절을 수리했다.

1941년 도공(道空)이 중수를 벌였고, 비구니 도원(道圓)이 절을 꾸려나갔으나 6.25때 모두 파괴
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러다가 1957년 도명(道明)이 산신각과 향로각, 동정각, 대방, 요사 등을
지어 절을 다시 일으켰고, 1971년에는 상륜(相侖)이 주지로 부임, 마애여래좌상으로 오르는 108
계단을 대리석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절 진입로를 확장하는 한편, 전기를 가설했다.
1976년에는 범종을 만들어 동정각에 봉안했고, 7년 동안 갈고 닦아 1994년에 호국보탑을 지어올
리는 등, 왕년의 위엄을 되찾고자 열심히 불사를 벌여 지금에 이른다.

각박한 산자락에 터를 닦았지만 주어진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신없이 건물을 지었으며, 비
록 겉으로 보이는 고색의 내음은 거의 말라버렸지만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영산전,
향로각, 산신각, 동정각, 적묵당, 승가굴을 개조한 약사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경내를 가득 메
우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고려시대에 거대한 마애불인 구기동 마애여래좌상과 역시 고려 때 조성된
석조승가대사좌상 등 보물 2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밖에 옛 석탑의 부재(部材)와 비좌(碑座),
그리고 경내 동쪽에 조선 후기 승탑 등이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한다.

승가사는 비구니 사찰로 북한산 제일의 선원(禪院)을 칭하고 있으며, 주변 풍경이 빼어나 고려
와 조선의 많은 문인들이 문이 닳도록 찾아와 시와 글을 남겼는데, 고려 고종(高宗)의 스승이던
유원순(兪元淳)은 이곳의 풍경을 8줄의 시로 표현하고 있다.

기구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리 안계(眼界) 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이 밝게 빛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에 이었고
골짜기에서 우는 한가한 새소리 풍경소리를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높은 스님의 생각하는 일인 것이
인간세상의 명리에는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구름도 잡힐 듯한 높은 산중에 묻혀 있고 하늘과도 가까워 제아무리 무거운 번뇌라도 감히 따라
오기 힘들며, (번뇌는 절 밑에서 기다리고 있음, 결국 해탈은 꿈임) 속세와도 적당히 거리를 두
고 있어 산사(山寺)의 내음도 진하다. 또한 절을 둘러싼 숲이 삼삼하여 공기도 청정하며, 서울
도심과도 가까워 멀리 갈 것도 없이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거나 마음을 싹둑 가다듬고
싶을 때 언제든 와서 안기고 싶은 곳이다. 거기에 보물급 문화재를 2점이나 품고 있어 볼거리도
넉넉하며, 비구니의 낭낭한 불경소리를 듣고 있으면 잠시나마 해탈의 기분마저 들게 한다.


▲  나무 장작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는 서래당 공양간 부뚜막
이제는 시골에서도 만나기 어려운 그리운 풍경으로 서울에서 저런 풍경을 만나니
무지 신선하고 반갑다. 쇠솥 안에서 모락모락 익고 있는 국의 맛은 어떨까?
나도 모르게 입 안에 군침이 고인다.


※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찾아가기 (2014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1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6호
  선 역촌역(3번 출구)에서 7212번 시내버스(수색,은평차고지↔옥수동)를 타고 구기동 현대빌라
  나 승가사입구 하차, 승가사까지 도보 약 70분, 현대빌라에서 구기동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것
  이 좀 무난하며, 승가사입구에서 비봉4길(건덕아파트)과 승가산림초소를 거쳐 가는 수레길은
  경사가 좀 각박하다.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시내버스(은평차고지↔이북5도청)를 타고 현대빌
  라나 승가사입구 하차
* 승가사까지 수레길이 닦여 있으나 길이 험하고 상태가 넉넉치 못하며, 일반 차량은 출입을 통
  제한다. (승가사와 국립공원 차량만 통행 가능)
* 승가사 셔틀차량을 이용하면 보다 편리하게 승가사까지 올라갈 수 있다. <승가사입구 정류장
  에서 동북쪽으로 난 비봉4길(승가사 방면)을 오르면 셔틀 타는 곳이 있음, 운행 정보는 승가
  사에 문의 요망>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1 (☎ 02-379-2996)


▲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운 대웅전(大雄殿) 뜨락

동정각의 아랫도리를 들어서면 경내의 핵심인 대웅전 구역이다. 대웅전 뜨락을 중심으로 서쪽에
는 서래당(西來堂), 동쪽에는 적묵당(寂默堂)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뜨락에 들어서니 서래당
앞에서 연등 주문을 받는 아줌마 보살이 밝은 표정을 내비치며 연등 하나 다시라고 그런다. 허
나 연등 시주에는 그리 관심이 없어 가난한 중생이라 돈이 없다고 답을 하니 표정이 180도 싹
바뀐다. 결국 여기도 돈이 갑 중의 갑(甲)이던가? 잠시나마 씁쓸한 기분이 나를 엄습한다.

승가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7년에 지어서 1980
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좌우벽과 뒷쪽에는 부처의 전생(全生)을 그린 전생도와 심우도가 그
려져 있는데, 그림 옆에 해석을 달아놓아 이해를 돕게 했다.

뜨락 서쪽에 자리한 서래당은 정면 7칸, 측면 6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6년에 중창되었다. 겉
으로 보면 1층이지만 엄연한 2층으로 뜨락에 노출된 부분은 종무소(宗務所)와 주지실로 쓰이며
호국대탑에서 경내로 오르는 길목인 아랫층에는 공양간이 있다. 공양간은 장작으로 땐 밥과 국
을 공양(供養)으로 제공하는데, 산꾼과 답사객, 신도 등 누구나 먹고 갈 수 있다.
서래당 맞은편에 자리한 적묵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비구니의 선방(禪房)
이다. 1985년에 중창되어 매년 100여 명의 비구니가 수행 안거(安居)를 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소조여래좌상 1구와 1966년에 제작된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전 뜨락과
그 끝에 자리한 동정각(動靜閣)

대웅전 맞은편에는 범종(梵鍾)의 보금자리인 동정각이 마치 천상(天上) 세계의 누각처럼 높다랗
게 들어앉아 속세를 굽어본다. 동정각은 2층 규모로 아랫층은 경내와 속세를 이어주는 통로이며,
윗층은 범종각으로 기존 범종각과는 다른 6각형 정자(亭子)식 건물인 점이 눈길을 끈다.

동정각에 고이 간직된 범종은 1976년에 봉안된 것인데, 그 종을 운반할 때 15명이 꼬박 매달려
무려 1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때는 4발 수레가 감히 올라올 수도 없었던 산속이라 종 밑에 나
무 토막을 깔고 밀어올리는 옛 방식으로 종을 운반했기 때문이다. 아침 4시와 저녁 6시가 되면
비구니가 잠든 종을 깨우며 종소리를 속세로 흘려보내는데, 그 종소리가 매우 은은하다.


▲  대웅전 불단에 봉안된 석가불과 후불탱화

대웅전 내부는 모조리 개금(改金)을 한 목각(木刻)탱화들로 두 눈이 부실 지경이다. 불단에 봉
안된 석가불은 꽤나 단련을 했는지 어깨가 쩍 벌어져 있으며, 두터운 얼굴은 다소 경직된 표정
을 머금고 있다. 그의 좌우에는 그 흔한 협시불(夾侍佛)도 없지만 대신 뒷쪽에는 호화로운 금동
후불탱을 배치하여 그를 든든히 받쳐준다.
후불탱(後佛幀)은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그를 바라보고 있으며, 8대
보살과 아난, 가섭(迦葉)이 그를 에워싸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다. 붉은 지붕의 닫집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으며, 극락조(極樂鳥)와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  나한의 일원으로 천태산(天台山)에서
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가
새겨진 독성탱(獨聖幀)

▲  칠성탱(七星幀)과 신중탱(神衆幀)
이들은 김광한, 김광열 형제가 1985년과
1986년에 만든 것이다.

▲  대웅전 좌측 벽에 그려진 전생도의 일부 - 해석은 각자 알아서 ~~


▲  대웅전 계단 우측에 누운 석조(石槽)
석조는 물을 담아두는 통이지만 첩첩한 산골이다보니 물사정이 너그럽지 못해
거의 항상 비워둔다. 물을 마시려면 꼭지를 틀어 바가지에 받아 마시면 된다.


♠  승가사 산신각, 약사전 주변

▲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영산전(靈山殿)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1년에 중창되었다. 석가3존불을 비롯해 석
가후불탱, 16나한탱, 신중탱 등이 있는데, 대웅전의 탱화들처럼 천편일률적으로 모조리 금색을
입혀 등장인물이 다른 것 빼고는 거기서 거기 같고, 너무 찬란함에 치중한 나머지 거부감과 식
상함마저 적지 않게 들게 한다. (지나친 화려함은 오히려 소박함보다 못함)
이들 탱화는 1987년 김광한, 김광열 형제가 조성했다.


▲  영산전 불단
석가불과 미륵불(미래불), 제화갈라보살(과거불)이 3존불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무려 경주 옥석(玉石)으로 만들었다.

▲  부처의 열성 제자인 16나한이 새겨진 16나한탱


▲  산신각(山神閣)

영산전 좌측 높은 벼랑 위에 산신을 봉안한 산신각이 자리해 있다. 정면과 측면이 달랑 1칸 밖
에 안되는 조촐한 건물로 화재로 무너진 것을 1984년에 다시 지었으며, 그때 서쪽을 바라보고
있던 건물을 남향(南向)으로 조정했다. 내부에는 1986년에 김광한/김광열 형제가 만든 산신탱이
이 있는데, 역시 금칠로 도배를 해놓았다.

산신각에 올라 동쪽(좌측) 밑을 잘 살펴보면 길쭉한 석종형(石鐘形) 승탑과 비석 1기가 눈에 들
어올 것이다. 이들은 1780년에 쓰러진 승가사를 재건한 성월선사(城月禪師)의 탑과 탑비로 비문
에는 '朝鮮國 正憲大夫 城月堂 碑銘竝序(비명병서)'라 쓰여 있어 승탑의 주인을 알려주고 있는
데, 승려임에도 정헌대부의 지위를 받은 것이 이채롭다. 그리고 '嘉慶 七年 壬戌 八月日立' 이
란 내용도 있어 1802년 8월에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  산신과 호랑이, 동자 2명, 나무 등이 묘사된 산신탱

▲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약사전과 마애여래좌상으로 인도하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1단
계 오르면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명부전을 만나게 된다.
대웅전과 약사전 사이에 자리한 이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불전(佛殿)으로 1972
년에 착공해 1975년에 완성을 보았다. 1년 정도면 능히 만들고도 남을 규모지만 궁색한 산중이
라 공사가 더뎌 3년이나 걸린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특이하게도 지장보살상 등의 독립적인 불상은 없고 지장보살과 명부(冥府, 저승)
의 주요 식구를 한데 몰아 넣은 지장탱화가 전부이다. 이 탱화는 1983년에 김원각, 김석담이 조
성한 것으로 다른 건물의 탱화와 마찬가지로 금칠로 도배를 했다. 다만 다른 것은 지장보살의
머리만 푸른 색을 입혔다는 것이다.


▲  명부전 지장탱화 - 명부전에서 지장탱화만 달랑 있는 경우는 처음 본다.

▲  약사전 앞에 놓인 옛 석탑의 흔적

명부전에서 1단계 더 올라서면 약사전이 나온다. 약사전 앞에는 옛 석탑의 흔적이 우수에 잠긴
채 놓여져 있는데, 두툼하게 생긴 지붕돌과 탑신(塔身)이 겨우 한 덩이씩만 남았다. 탑신이 지
붕돌보다 큰 것을 보면 아마도 제일 아랫층 탑신이었을 것이다.
그들에 대한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자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이 땅에 흔한 3층석탑이 아닐까 싶
은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절이 파괴되면서 같이 비극을 맞았을 것이며,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참담했는지를 저들이 온몸으로 증명해준다.
이후 일부만 남은 채, 버려진 것을 비좌와 함께 수습하여 약사전 앞에 두었으며, 탑의 사라진
부분이 많아서 복원까진 엄두도 못내고 그저 승가사의 옛 유물로 한가로운 여생을 보낸다.


▲  나는 누구일까?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좌(碑座)

향로각 앞에는 비석을 받치던 비좌가 초췌하게 누워있다. 고색의 때로 가득한 이 비좌는 화강암
으로 3단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넓직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무슨 비석의 아랫도리인지는 밝혀진 바는 없으나 고려 중기 승려인 탄연(坦然, 1070~1159)이 쓴
승가굴 중수비(重修碑)가 아닐까 여겨지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때
윗도리가 몽땅 사라져 비석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었고, 비좌 자신도 그 당시의 충격으로 기억
조차 상실했다.
 
사라진 비신과 이수(螭首)는 경내와 그 주변을 싹 뒤집으면 일부라도 나오질 않을까 싶은데, 그
작업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  자연산 석굴인 승가굴에 터를 닦은 약사전(藥師殿)

약사전은 큰 바위 밑에 자리한 자연산 석굴(石窟)이다. 승가사를 세웠다는 수태가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승가대사상을 새겼다는 창건 설화가 서린 오래된 굴로 승가굴(僧伽窟)이
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고려 중기에는 탄연이 이곳에서 수행하면서 정체가 아리송한 승가
굴 중수비를 남기기도 했으며, 조선 세종 때는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쾌유
를 빈 인연으로 약사전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하니 아마도 쾌유가 됐던 모양이다.

1960년대 이후 석굴을 크게 손질하여 안과 바깥에 돌로 벽을 쌓고, 승가대사상의 불단과 연화대
를 만들었으며, 그 앞에 기도를 올리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등을 대사상 좌측에 배치해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석굴은 그리 넓지는 않으나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하다.


▲  석조승가대사좌상(石造僧伽大師坐像) - 보물 1000호

약사전에는 승가사의 주요 보물인 석조승가대사좌상이 홀로 봉안되어 있는데, 정작 약사전의 주
인인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은 없고, 승가대사상이 약사불의 자리와 직무를 대신하고 있다.

약사전의 주인인 승가대사(僧伽大師)는 인도의 승려로 당나라로 넘어가 활약했다. 그의 덕이 대
단했던지 관음보살(觀音菩薩)의 화신으로 널리 추앙을 받았으며, 그의 인기가 신라까지 전해져
승가사를 세운 수태가 그의 상을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다고 한다.
허나 이 석상은 전설과 달리 신라 후기가 아닌 1024년(현종 15년)에 지광(智光)이 동량이 되고
광유(光儒) 등이 조각을 했다. 조성 관련 내용은 광배 뒤쪽에 새겨져 있어 고려 초에 만들어진
확실한 조각품으로 당시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석상 높이는 76cm, 광배 높이는 130cm이다.


▲  인등의 강렬한 빛을 즐기고 있는 석조승가대사좌상

승가대사상은 하얀 피부의 석상으로 중간에 호분을 입힌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
고 있어 지장보살의 이미지를 주고 있으며, 손자/손녀를 맞는 할머니와 같이 포근하고도 정이
넘치는 인상으로 그의 표정을 보면 속세에서 상처받은 눈와 마음도 보기좋게 정화될 것만 같고
그 앞에 다가서면 '아이고 힘들지?' 손으로 어루만지며 다독거려 줄 것 같다.

그의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눈은 살짝 뜨며 정면을 바라본다. 코는 오똑하고
입술은 무척 붉으며, 볼살이 많고 광대뼈가 나왔다. 귀는 두건에 가려 거의 보이지 않고, 몸에
걸친 옷은 목 부분을 빼고는 노출된 부분이 없는데, 부처나 보살의 복장과 비슷하다.
연꽃이 새겨진 연화대(蓮花臺, 근래에 만든 것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오른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충북 제천 빈신사지(頻迅寺址)에 있는 4사자3층석탑의 석상과도 유사한 면을
보인다. 또한 상체가 길고 무릎이 넓어 고려 초기에 유행했던 철불(鐵佛)과도 비슷한 특징을 가
지고 있다.

대사상 뒤에 자리한 광배(光背)도 꽤나 명품이다. 커다란 배의 모양을 한 이른바 주형거신광배
(舟形擧身光背)로 신광(身光)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머리 뒤쪽인 두광(頭光)은 신광과
일부 교집합을 이루면서 둥근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잎을 무늬로 두르고 그
바깥쪽을 덩굴무늬와 모란꽃 무늬로 치장했다. 또한 광배 외곽 부분에는 불꽃무늬를 정교하고
실감나게 새겨 광배의 아름다움을 더했다.

이 땅에 흔치 않은 오래된 승려상으로 약 1,000년의 지긋한 나이와 오랜 세월 어두컴컴한 석굴
에서 일광욕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았지만 건강과 피부만큼은 젊은 불상이나 석상에 못지
않게 양호하여 대단한 노익장을 과시한다. 조선 중기에 일어난 2차례에 큰 전란으로 절은 사라
지기 바뻤지만 마애여래좌상과 함께 온전하게 살아남아 자리를 지켰고 이렇게 승가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지 꿀단지로 변함없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석상은 예전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2호였으나 나중에 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아 보물
로 승진했다. 그런데 지정 번호가 우연히도 딱 1,000호이다. 보물 등급 외에는 아직 1,000까지
간 문화재 등급이 없는데 (국보가 300, 사적이 500, 서울 지방유형문화재가 300단위) 매우 흔한
숫자이지만 결코 쉽게 꿰찰 수 없는 번호를 차지한 것이다. 외우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고,
게다가 이 땅의 사람들이 많이 쓰는 숫자이니 이런 우연이 참 어디에 있을까 싶다.


♠  고려 초기에 조성된 거대한 마애불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 보물 215호

▲  마애불로 올라가는 108계단의 위엄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약사전을 나와서 향로각 앞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장대하게 펼쳐진 계단이 마음을 놀라게 만
든다. 그 계단은 절에서 좋아하는 숫자인 108계단으로 그 계단의 끝에 승가사의 꿀단지인 구기
동 마애여래좌상이 집채만한 바위에 둥지를 틀었다.

연화교(蓮花橋)란 볼록 튀어나온 조그만 다리를 건너 108계단에 임하면 되는데, 그렇게까지 각
박한 경사도는 아니어서 그리 힘들지는 않다. 속세의 부질없는 삶처럼 서두르지 않고 쓸데없는
자존심을 곱게 접어 천천히 한 계단씩 임하다보면 멀리 보이던 마애불이 마치 해가 떠오르듯 크
고 웅장하게 솟아오르고, 계단의 끝에 이르면 마애불의 거대한 위엄에 다시 한번 눈과 마음을
놀라게 만든다.


▲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의 위엄

승가사 북쪽에 자리한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하 마애불)은 경내와도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
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의 하
나지만 지정 명칭은 '승가사 마애여래좌상'이 아닌 지역 이름을 딴 '구기동 마애여래좌상'이다.
보통은 그 불상을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절의 이름을 앞에 붙이기 마련인데, 경내와 약간의 거리
를 두고 있고, 승가사의 소유가 아닌 국가 소유로 되어 있어 지역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지정
명칭은 몇년 전까지만 해도 '구기동 마애석가여래좌상'이었으나 지금은 마애여래좌상으로 무려
2글자나 줄였다. (정식 지정 명칭은 '서울 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

이 마애불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서울에서는 삼천사지(三千寺址) 마애여래입상 다음으로
(또는 비슷한) 연세가 높은 마애불(磨崖佛)이다. 승가대사상과 더불어 승가사의 장대한 내력을
과시하는 산증인으로 승가대사상은 조성 관련 글씨라도 있지만 이 불상은 그것 마저 없어서 누
가 더 형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승가대사상이 1살은 더 오래 살지 않았을까?)

직각을 이루며 솟아난 거대한 바위의 남쪽 피부에 얇게 홈을 파고 돋음새김으로 도드라지게 결
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불상을 새겼는데, 그의 건강을 위해 전실(前室, 보호각)을 만들고
머리 위에 8각의 머릿돌을 끼어 얼굴을 보호했다. 그러다보니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피부
도 얼굴 일부를 빼고는 하얀 편이다. 거의 20년 만에 만난 그였지만 여전히 정정한데 반해 나는
10대 꼬마에서 30대의 한복판으로 적지 않게 늙어있었다.

그의 갑옷과 같던 보호각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사라지고 보호각을 끼던 구멍 4개만
윗쪽과 중간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조선 중기 전란 때 파괴된 것이 아닐까 싶지만 마애불에 적
당한 외상이나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없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거나 자연재해로 무너진 것
으로 보인다.


▲  마애여래좌상의 얼굴 (양쪽에 보이는 구멍 4개가 보호각의 흔적)

마애불의 얼굴은 후덕한 인상의 승가대사상과 달리 조금 경직되고 근엄한 표정 같다. 이마 중간
에는 백호가 살짝 찍혀 있고, 진한 눈썹은 무지개처럼 구부러져 있으며, 두 눈은 감겨 있어 눈
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코는 끝이 두툼하고 입술은 두꺼우며, 붉은색을 칠한 흔적이 있는지 빨
간 기운이 조금 남아있다. 귀는 중생의 소리를 모두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내려왔으며, 볼살
이 좀 많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두껍게 솟아 있는데, 바로 위에 8각의 머릿돌을 끼워넣어
앞으로 크게 노출시켜 그의 모자로 삼았다. 모자가 큰 덕분에 얼굴에는 세월이 훈장처럼 달아준
검은 여드름이 여럿 있는 것 외에는 멀쩡하며, 피부도 하얗다. 그리고 모자 밑부분에는 연꽃 무
늬를 새겼다.
몸통과 머리를 잇고 있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어깨는 꽤나 단련을 했는지 당당하
고 듬직한 모습이다. 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으로 오른쪽 어깨와 가슴, 젖꼭지를 속시원히
드러내고 왼쪽 어깨를 옷으로 가린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옷 스타일을 하고 있는데, 우
견편단은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단연 으뜸으로 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 불상에 많이 나타난다.
몸에 걸친 옷은 얇은 편으로 왼쪽 어깨와 배, 두 다리를 가리고 있으며, 왼팔에 묘사된 옷주름
은 세로로 그어져 있어 기하학적인 추상성(抽象性)을 드러내고 있다.


▲  마애불의 가슴과 아랫부분, 그리고 연화대(蓮花臺)

가슴을 비롯한 상반신은 아주 묵직한 모습으로 거대한 마애불의 위엄을 더욱 드높인다. 허리는
밑부분이 쏙 들어가 괜찮은 몸매를 보이고 있으며, 팔은 강철처럼 매우 두꺼워 보인다. 그리고
오른손은 무릎에 대고 왼손은 배꼽 밑에 두어 이른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제스쳐를 취했
다. 또한 오른쪽 발바닥은 하늘을 향해 있는데, 발바닥을 훤히 드러낸 불상이 흔치가 않다.

불상이 앉아있는 연화대좌(蓮花臺座)는 꽃잎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앙련(仰蓮)이 윗쪽에, 반대
로 꽃잎이 땅을 향한 복련(伏蓮)이 밑에 있는데, 연꽃무늬가 2중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꽃잎도 너무 화사하기 그지 없어, 적당하게 색만 입히면 진짜 연꽃이 따로 없을 듯 싶다.

기존 전통의 불상 양식에서 추상성을 조금 보태어 웅장하게 만든 마애불로 고려 초기의 대표적
인 마애불이자 준수한 작품으로 일찌감치 인정받아 북한산에 있는 불교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먼
저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위를 받았다.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과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는 1980년
대에 지정됨) 게다가 상태도 양호하고 선각(線刻)도 선명하여 조성된 지 얼마 안된 따끈따끈한
불상 같다.

고려 초/중기에는 전국적으로 커다란 마애불과 석불이 많이 조성되었다. 이는 지방 세력의 일종
의 세력(勢力) 과시용으로 비슷한 모습이 아닌 지역마다 다른 색을 보여 개성도 강하다. 구기동
마애불 역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당시 서울 지역 세력의 지원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기도 하며,
승가사가 고려 왕실과도 적지 않은 인연이 서린 절이라 제왕과 왕실의 지원으로 수준 높은 석공
들을 투입하여 조성했을 가능성도 높다. 당시 서울은 남경(南京)이라 불리는 고려의 주요 도시
의 하나였고, 고려의 제왕들이 종종 순행을 했던 곳이다. (남경의 중심지는 서울 종로구의 경복
궁, 청와대 일대로 여겨짐)

마애불을 보면서 느끼는 거지만 고려 초기에는 지금처럼 장비와 기술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
다고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 좋게 일부러 드러누웠던 것도 아니다. 줄을 매달고 올라가 일일히
정을 대고 쪼아야 되는데, 그것도 그리 쉽지가 않다. 거의 몇년에서 10년 이상은 족히 걸렸을
것이며, 지극한 정성이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고려 석공(石工)의 뛰어난 능력과 정성,
그들이 공사에 전념하게끔 뒤를 받쳐준 승가사와 지원 세력이 합작으로 이루어낸 대작품이라 할
것이며 이런 명품급 마애불이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마애불이 있는 바위 밑에는 근래에 돌로 벽을 쌓았고, 그 앞에 향로와 용이 휘감고 있는 돌기둥
을 만들어 단(壇)을 설치했다. 그리고 그 앞을 돌출시켜 양쪽으로 계단을 내었으며, 기도는 그
앞에 마련된 공간에서 하면 된다. 또한 바위 주변은 문화재 보호를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어 있
으니 괜히 바위 꼭대기에 오르거나 불상을 만지는 짓은 하지 않도록 하며, 매일 오전 10시부터
11시(시간은 변경 가능)까지는 승가사에서 기도를 올리는 관계로 출입을 금하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2-1


▲  마애불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  승가사 마무리

▲  12지신상이 새겨진 동쪽 옛길
(경내 바로 밑쪽)

▲  12지신상의 하나로 어디론가 터벅터벅
가고 있는 말

마애불을 20분 정도 둘러보고 대웅전과 산신각 주변에서 조금 머물다가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
음을 기약하며 등을 돌렸다.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절이 아닌 속세이기 때문이다.

내려갈 때는 호국보탑으로 바로 내려가는 계단길 대신 동쪽 옛길로 갔다. 옛길은 조금 돌아가는
편이지만 예전에 승가사에 갈 때 꼭 거쳤던 길로 어차피 둘 다 호국보탑으로 이어진다.


▲  쌀가마니를 축내는 쥐새끼들 - 이 땅의 우울한 현실을 제대로 묘사한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똥배 포대화상(布袋和尙)
포대화상은 원래 호국보탑 부근에 있었다. 그러다가 호국보탑이 생기면서
옛길 중턱으로 터전을 옮겼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행복에 겨운 모습이
애를 여럿 둔 뚱보 엄마 같다.

▲  소나무가 숲을 이루는 승가산림초소 주변

▲  승가산림초소에서 속세로 내려가는 길

절을 둘러보고 나오니 배가 슬쩍 고프기 시작한다. 그래서 남은 김밥과 과자, 물을 모두 꺼내서
싹 섭취를 하고 올라올 때와 다르게 수레길로 내려왔다. 수레길은 4발 수레를 위해 닦은 길로
경사가 가파르고 울퉁불퉁해 오르기가 쉽지 않은 길인데, 중간에 승가사 셔틀차량이 노인들을
여럿 태우고 뒤뚱거리며 지나간다. 아무리 수레를 위한 길이라도 경사가 급하고 노면 상태가 고
르지 못해 운전도 꽤 쉽지가 않을 것이다.

수레길을 20분 정도 정신없이 내려가니 승가산림초소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잠시 소나무가 송림
(松林)을 이루는데, 그들이 아낌없이 불어주는 솔내음에 정신과 마음이 약간이나마 개운해진다.
산림초소에서 5분 정도 내려가면 혜림정사란 조그만 절과 함께 빌라와 주택들이 시야를 가린다.
자연에서 아비규환의 속세로 완전히 내려온 것이다. 여기서 빌라를 끼고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구기동계곡이 나오며, 계곡 끝에서 비봉길로 들어서면 구기터널3거리로 이어진다.

비록 찰라와 같은 짧은 코스였지만 엄연히 등산도 했고 시간도 18시가 넘었으니 근사하게 저녁
뒷풀이를 해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디서 먹을까 고심하다가 예전에 가본 적이 있는
옛날민속집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두부음식으로 유명한 식당으로 구기터널에서 신영3거리로 가
는 길목에 있다.


▲  옛날민속집에서 먹은 보리밥의 위엄

무엇을 먹을까 즐거운 고민을 하다가 오랜만에 보리밥을 먹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보리밥을 먹
은 지도 꽤 되었다. 그리고 잠깐이긴 하지만 산도 탔으니 동동주로 목을 시원하게 축여야 밥맛
이 더욱 날 것읻. 그래서 동동주도 1병 주문했다.

5분 정도 지나자 제일 먼저 동동주와 밑반찬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밑반찬이 예전보다 많
아졌네? 알고보니 오른쪽의 전과 김치, 하얀 묵 등 6가지는 원래 밑반찬이고, 왼쪽 5그릇은 보
리밥에 비벼먹을 나물로 콩나물과 당근, 생채, 상추 등 7가지에 이른다. 그래서 찬이 많아진 것
이다.
그리고 잠시 뒤 저녁 식사의 주인공인 보리밥과 비지찌개가 등장한다. 보리밥은 커다란 양은 냄
비에 담겨져 있는데, 담긴 양은 냄비가 아까울 정도로 적다. 보리밥 외에 구수한 된장찌개와 콩
비지가 따라 나왔는데, 이들은 모두 보리밥용으로 보리밥에 딸려 나오는 나물과 찌개가 많으니
가격에 비해 본전 뽑기는 좋다. (단 고기는 없음)

보리밥에 나물 7가지와 콩비지, 된장찌개를 넣고 고추장으로 버무리니 어엿한 비빔밥이 되었고
적어보이던 밥도 그들이 더해져 양이 남부럽지 않게 늘었다. 거기에 누런 동동주까지 겯드리니
정말 제왕의 밥상이 부럽지 않다. 열심히 먹고 보니 밥그릇은 맨바닥을 드러냈고, 나물과 반찬
도 겨우 일부분만 남았을 뿐이다.
식사가 끝나자 누룽지와 수정과가 후식으로 제공되었다. 누룽지는 맛이 구수했고, 수정과는 맛
이 달고 시원해 단숨에 그릇을 비웠다.

이렇게 기분 좋게 저녁을 마치고 신영3거리로 나왔다. 시간은 어느덧 19시 반, 여기서 길음역으
로 넘어가 후배들과 작별을 고하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니 이리하여 북한산(삼각산) 승가사 나
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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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5월 1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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