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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11.06 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 늦가을 나들이 <정동 회화나무,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구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배재학당 동관>
  2. 2022.05.18 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덕수궁돌담길 역사 기행 (심슨기념관, 유관순우물, 구 신아일보별관, 구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3. 2014.06.18 서울 도심의 심장을 거닐다 ~ 덕수궁, 시청 서울광장 주변 둘러보기 (환구단, 대한문, 서울성공회성당...)

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 늦가을 나들이 <정동 회화나무,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구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배재학당 동관>

서울 정동~덕수궁돌담길 산책



' 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 나들이 '

▲  덕수궁 돌담길 (서울특별시청 서소문청사 앞길)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도심 한복판에 정동(貞洞)이란 고즈넉한 동
네가 뉘어져 있다.
정동은 서울 도심의 주요 명소이자 서울 근대문화유산의 대표 성지(聖地)로 덕수궁 돌담
길과 정동길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데, 꽤 번잡한 서울 도심의 한복판이지만 나무를 머
금은 공간이 많아서 오히려 아늑함이 느껴질 정도이다. 게다가 조선부터 현대까지 600년
이상의 장대한 시간이 녹아든 현장으로 역사, 문화의 향기도 정말 그윽하다. 바로 그 매
력 때문에 오랫동안 천하 사람들의 나들이, 답사 명소로 격한 사랑을 받아왔으며, 나 또
한 이곳에 퐁당퐁당 빠져 종종 발걸음을 하고 있다.



 

♠  정동 회화나무,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유관순 우물

▲  정동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3호

늦가을이 익어가던 11월의 첫 무렵, 오랫만에 정동을 찾았다. 이번에는 정동4거리(5호선 서대
문역과 서울역사박물관 중간)에서 정동길로 접근했는데, 그 길을 3~4분 정도 들어가면 야무지
게 자라난 회화나무 1그루가 마중을 나온다. 그가 정동의 오랜 터줏대감인 정동 회화나무이다.

이 나무는 정동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570년 정도 묵었다. (1976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
정 나이가 520년) 서울 도심부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나무로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과 대자연과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높이 17m, 둘레 5.16m의 큰 나무로 어엿하게 성장
했는데, 그 기세는 정동길을 뒤덮을 정도이다. 하지만 고된 세월에 지쳤을까? 아니면 하늘이
두려운 것일까?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다소 구부러진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나무가 워낙 나이가 많고 수시로 오가는 차량들이 내뱉은 고약한 기운에 매일 시달리면서 한
때 수세가 많이 기울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03년 캐나다가 대사관(大使館) 건물을 신축했는
데, 그 대사관이 자칫 나무를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었으나 캐나다 양이(洋夷)들이 기특하게도
나무를 배려하여 건축 디자인을 변경하고, 지지대를 세우고, 우물을 확장하는 등 깨어있는 모
습을 보여주면서 나무는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  정동 회화나무와 캐나다대사관(왼쪽 건물)
정동의 이름 유래가 된 정릉(貞陵)부터 많은 것들이 창밖에 이슬처럼 정동을
스쳐갔지만 오직 회화나무만이 그 장대한 세월을 극복하며
정동을 지켰다.

▲  정동 회화나무 주변 정동길
회화나무의 그늘 맛을 먹고 자란 정동길, 정동길의 늦가을 풍경은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기로 명성이 높다.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Simpson Memorial Hall)
- 국가 등록문화재 3호


정동 회화나무를 지나면 정겨운 기와 돌담을 두룬 이화여고가 모습을 비춘다. 정문 옆에는 붉
은 피부를 지닌 늙은 3층 건물이 눈길을 끄는데 그것이 이화학당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심
슨기념관이다.

심슨기념관은 1915년에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3층, 건평 129.5평의 벽돌 건축물로 언더우드
가 세웠던 '예수교학당' 자리이다. 이화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근대 건축물로 조선에 머
물던 미국 사람 심슨(Sarah J. Simpson)이 사망하자 그가 남긴 재산으로 지었는데, 그를 기리
고자 그의 이름을 따서 심슨기념관(씸손기념관)이라 했다.
건물 동쪽에는 '씸손기념관'이라 쓰인 동판이 있으며 1961년과 2006년에 보수했다. 이후 내부
를 손질해 이화학당백주년 기념관으로 삼았다가 이화학당(이화여중고)의 역사를 집대성한 '이
화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관람시간은 화~토요일 10~17시, 월요일과 휴일은 휴관)

이화학당(梨花學堂)은 1886년 5월, 미국 선교사 스크랜톤 여사(Mrs. Marry F. Scranton)가 세
운 이 땅 최초의 여자학교이다. 그는 조선에 여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885년 8월 아펜젤러 선
교사와 현 이화여고 본관 뒷편 언덕에 올라 적당한 자리를 살피다가 그해 10월 배밭 6,120평
을 구입했다. <현재 정동 32번지 일대>
그 안에 있던 집을 모두 부시고 새로운 한옥을 착공하려고 하니 마침 선교부로부터 예산 지원
이 어렵다는 통보가 날라왔다. 하여 미국 각지에 원조를 요청하여 겨우 3,700달러의 기부금을
모아 건물을 완성했다. 처음 학교 건물은 'ㄷ'자 모양의 195.5칸에 큰 한옥으로 7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당시 서울 사람들은 그 건물을 양국관(洋國館)이라 불렀다.

그 시절 조선은 여자들 교육에는 매우 인색했다. 그래서 스크랜톤은 조선의 그런 현실을 생각
해 6명을 생각했으나 겨우 1명이 지원하는데 그쳤다. 그 1명으로 교육을 시작하면서 이화학당
의 서막은 열리게 된다.
초창기 학당에 들어온 여학생들은 이름이 없어 영어로 편의상 '1st', '2nd', '3rd' 등으로 불
렀는데, 학생이 점차 증가하면서 서수(序數)로는 적당치가 않아 '수산나','델리아' 등의 세례
명을 붙여주었다.

▲  이화여고 뜨락에 세워진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표석

▲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톤 여사의
흉상


1887년 고종은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에서 '이화학당'이
란 이름을 내렸다. '이화'란 이름은 부근에 있던 이화정(梨花亭)이란 정자에서 따왔다는 설과
이곳이 원래 배밭이었으므로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1897년 학생수가 40명을 넘자 페인(J.O Paine) 학당장(學堂長)은 기존 한옥을 부시고 2층짜리
양관인 메인홀(Main Hall)을 지어 1900년 11월 완성을 보았다. 메인홀은 'T'자형으로 900평에
이르는 큰 건물이었다.
바로 이웃에 자리한 배재학당의 아펜젤러는 이화학당 메인홀을 두고 '서울 장안에서 가장 전
망이 좋은 집'이라며 찬양을 했는데, 그 건물은 6.25시절에 파괴되어 사라졌다. 하여 1970년
그 뒤쪽에 이화여고 본관을 세웠으며, 메인홀터에는 '한국 여성 신문화의 발상지'란 표석과
스크랜톤 부인의 흉상을 세웠다.

1899년 5월 학당에서 여학생을 이끌고 창의문(彰義門) 밖 세검정(洗劍亭)으로 소풍을 갔었다.
그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생 소풍이라고 한다. 그 당시 그들의 소풍은 500년에 처음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장안의 큰 화제가 되었다.


▲  굳게 닫힌 유관순우물

이화학당하면 유관순(柳寬順) 누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했
는데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자 고등과 학생 5명과 몰래 기숙사 뒷담을 넘어 만세운동에 참
여했다.
3월 10일 휴교령이 내려지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와 고향인 천안 병
천으로 내려가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관했으나 왜경에 체포되어 1920년 서대문형
무소에서 18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獄舍)하고 만다.

심슨기념관 뒤쪽에는 굳게 입을 닫은 동그란 조선 후기 우물이 있다. 학교에서는 그 우물을 '
유관순우물'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는데, 원래는 정동 사람들이 쓰던 우물이었으나 이화학당
이 들어서면서 학당 소유가 되었다. 댕기머리 여학생들이 여기서 물을 길어 식수용으로 쓰거
나 빨래를 했으며, 유관순 누님 역시 이곳에서 빨래를 했을 것이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상
징적인 인물이라 그의 이름을 따서 '유관순우물'이라 했다.

지금은 죽은 우물로 뚜껑이 닫혀져 있어 물이 콸콸 치솟던 옛날을 그리워한다.

         ◀  유관순우물과 은행나무
한참 녹음(綠陰)에 젖은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우관순우물에 그늘을 드리우며 수채화처럼 고
운 풍경을 자아낸다. 나무의 나이는 약 100년
정도로 여겨진다.


▲  늦가을에 의해 노란 머리가 되버린 이화학당 사주문(四住門)과
하마비(下馬碑)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수다를 떨며 지나다녔을 기와집 사주문, 지금은 문 옆에 넓은 교문이 닦
여져 있어 후문으로 물러나 있다.
사주문은 이화학당의 옛 정문으로 1923년에 전통 한옥의 사주문 형태로 지어졌다. 지금의 자
리로 이전되면서 왜식(倭式)으로 변형된 것을 1954년에 졸업생들의 흔쾌한 후원금으로 팔작지
붕 기와문으로 교체했다. 그러다가 1999년 8월 원래의 대들보와 상도리, 망와 등 일부를 사용
하여 다시 복원하였다.
문 좌우로 기와를 머리에 인 돌담이 정겹게 펼쳐져 있고 문 옆에는 조그만 비석이 세워져 있
는데, 그 비석은 아무나 세울 수 없었던 콧대 높은 하마비이다.

하마비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 있으니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가란 뜻이다. 조선시대 국립중등교육 기관인 향교(鄕校) 앞에 하마비가 있는
것은 보았어도 신식 학교에 그것이 있는 것이 참 이채로운데 아마도 제왕이 친히 이름을 내리
며 관심을 보인 여학교라 학교 주변 단속도 할 겸, 비석을 내린 모양이다. 이화학당은 제왕이
이름도 내려주고 하마비까지 달아준 정말로 특별한 여학교였던 것이다.

* 심슨기념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2-1 (정동길 26, ☎ 02-2175-1964)
* 이화박물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이화학당 교문 안쪽에 누워있는 손탁호텔터 표석

이화학당 부근에는 이 땅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손탁호텔(Sontag Hotel)이 있었다. 이 호텔은
러시아 사람인 손탁(孫澤, Miss Sontag)이 세웠는데, 그가 32살이던 1885년 동생의 남편인 초
대 러시아공사 베베르(Waeber. K)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다.

1895년 친러파를 중심으로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가 결성되었는데, 그들은 손탁 집에 모여서
고종을 경복궁(景福宮)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데려오는 계획을 논의했다. 손탁과 베베르는 그
들을 적극적으로 도와 고종의 아관파천을 이끌어냈고, 그 공으로 손탁은 고종으로부터 왕실의
부속건물인 기포드(D.L. Gifford) 선교사의 한옥을 하사 받게 된다.
손탁은 자신이 쓰던 건물을 클럽으로 개조하여 외교관들의 사교장으로 만들었으며 정동구락부
의 호스티스(여주인)가 되어 큰 인기를 누렸다.

그 당시 서울에는 외국인을 위한 호텔이 없는지라 조정에서 1902년 2층 규모의 양관을 만들어
고종의 이쁨을 얻은 손탁에게 경영권을 주었다. 그 양관이 바로 손탁호텔<손탁빈관(孫澤賓館)
>로 내부를 서양풍으로 꾸몄다.
조선 정치가와 사업가, 서양 애들, 청나라 애들, 왜국 애들 등 다양한 사람이 이용했으며, 그
들의 숙식 및 모임 장소로 크게 호황을 누렸다. 러일전쟁 때는 영국 수상으로 유명한 처칠이
하룻밤을 묵었고, 1905년 11월에는 이토히로부미가 머물며 을사조약 체결을 위한 행동을 전개
하기도 했다.

손탁호텔은 2층은 국빈용 객실로 쓰였고, 1층은 일반 외국인 객실과 주방, 식당, 커피샵을 갖
추고 있었는데, 특히 커피샵과 서양요리 식당은 이 땅 최초로 의미가 깊으며 외교관들을 모아
놓고 서양 영화를 상영하기도 하여 이 땅에 처음으로 서양 영화를 소개한 현장으로 보는 견해
도 있다.

손탁은 러시아말과 조선어, 영어 등 다양한 언어에도 능통해 고종 황제의 통역관으로 활동하
기도 했으며, 조선에서 24년을 머물다가 1909년 조선에서 번 막대한 재산을 싸들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의 나라인 러시아가 망했기 때문이다.
왜인 기구찌가 쓴 '한말에 등장한 여성'에서 손탁이 조선에 왔을 때는 선망 받는 30세의 꽃같
은 미모였는데, 떠날 때는 아름답던 얼굴이 파란과 비통으로 시들어 볼품이 없다고 적었다.

러시아로 돌아간 손탁은 별장을 지어 재산을 관리하려고 했는데, 동생의 권유로 재산 대부분
을 러시아은행에 예금하고 나머지는 러시아 기업에 투자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
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났고, 소련공산정권은 손탁의 돈을 모두 몰수해버렸다. 하여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은 손탁은 일장춘몽(一場春夢)을 뼈저리게 느끼며, 1925년 71세의 나이로 혼인
도 하지 못한 노처녀 상태로 사망하고 말았다.

손탁이 떠난 이후 손탁호텔은 미국인이 관리하다가 그 자리에 감리교학교가 들어섰으며, 1917
년 이화학당이 미국감리교회에서 모금한 23,060달러로 손탁호텔을 인수해 기숙사로 사용했다.
허나 1922년 호텔을 철거하여 그 자리에 프라이홀(Frey Hall)을 세움으로써 손탁호텔의 역사
는 끊기고 만다.



 

♠  구 러시아공사관터, 정동교회

▲  구 러시아공사관 - 사적 253호
(정동공원에서 바라본 3층 전망탑)


이화학당 교문 맞은편 길로 조금 들어서면 그 길의 끝 언덕 위에 하얀 피부의 날씬한 건물이
자리해 있다. 그가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우울한 현장, 러시아공사관터 3층 전망탑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두만강을 사이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일찍이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여 프랑스를 이용해 소위 이이제이(以夷制夷) 방법으로 러시아를 막아
볼 생각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1884년 러시아와 수교를 맺었는데, 그때 조선
측 대표는 김병시(金炳始), 러시아측 대표는 베베르(K. Waeber)였다.

조선은 1888년 덕수궁(경운궁)의 후원인 상림원(上林園) 일대를 공사관 자리로 제공했다. 러
시아는 그곳을 밀어버리고 공사관과 정교회<正敎會, 동방교회(東方敎會), 1900년에 지어짐>를
세워 서울 속에 조그만 러시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공사관은 1888년 공사에 들어가 1890년 8월 완성을 보았는데, 스위스계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
(Sabatine)이 설계했다. 르네상스식 벽돌조 건물로 공사관 본관은 'H'자형 평면으로 지어졌는
데, 남/동/서측 3면에 아치열주가 있는 아케이드를 두어 3면 모두 정면성을 지니고 있었고 각
각 면에 출입문을 내었으며, 북쪽 끝 모서리에 3층 전망탑을 두었다. 그리고 공사관 초입에 4
면이 아치로 된 개선문 형태의 정문을 두었다.

러시아공사관은 간단히 줄여 아관(俄館)이라고 하는데, 러시아를 가차자(假借字) 표현으로 아
라사(俄羅斯)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전망탑(탑)을 비롯해 공사관에 딸린 건물이 여럿 있었으나 왜정(倭政) 때 상당수 파괴되었으
며, 6.25 때 탑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이 모두 박살이 났다. 탑 역시 그때 무거운 상처를 입어
기우뚱거린 것을 1973년에 복원했다.

3층으로 이루어진 탑의 면적은 65.2평으로 1981년 탑 동북쪽에서 지하실과 20.3m의 비밀통로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과 이웃한 미국공사관으로 속히 줄행랑을 치
기 위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덕수궁이 황궁이 된 1897년 이후, 그 주변에 흩어진 여러 나
라 공사관과 영사관을 잇는 작은 통로를 닦아놓아 유사시에 대비했다. 그 통로는 1945년 무렵
까지 대부분 남아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모두 끊어진 상태이다.


▲  뒤쪽(북쪽)에서 바라본 러시아공사관 전망탑

우리가 보잘것없는 이 하얀 탑에 주목을 해야 되는 이유는 바로 1896년에 일어났던 아관파천
의 우울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1895년 왜가 저지른 을미사변(乙未事變) 사건으로 고종은 왜를 극히 불신하며 경복궁에서 불
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친러파였던 이범진(李範晉)과 이완용(李完用), 이윤용(
李允用) 등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신임공사 스페이어, 손탁과 함께 고종의 파천계획을 모의
하게 된다.
그들은 고종의 총애를 받던 엄귀비(嚴貴妃)를 통해 왕에게 접근, 친일패거리들이 왕의 폐위를
꾸미고 있으니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고종이 흔쾌히 승낙
하며 베베르와 스페이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베베르는 1896년 2월 공사관 수비를 이유로 인천에 머물던 러시아군함에서 포 1문과 군사 120
명을 소환하여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그 준비가 끝나자 2월 11일 새벽, 고종은 왕태자(
순종)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살짝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불이 나게
도망쳤다. 이 사건을 바로 4글자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그렇게 러시아공사관에 샛방을 튼 고종은 왜와 친했던 김홍집(金弘集) 내각(內閣)을 단죄했다.
그래서 김홍집, 어윤중(魚允中)을 처단하고, 김윤식(金允植)을 제주도로 귀양보내니 이에 염
통이 쫄깃해진 유길준(兪吉濬) 등 10여 명의 고위관리들은 왜열도로 줄행랑을 쳤다.
친일내각을 도려내자 친러패거리인 이범진, 박정양(朴定陽), 윤치호 등이 중심이 된 친러내각
이 들어섰다. 그들은 친일파를 역적으로 간주, 단발령(斷髮令)을 보류하고 갑오개혁과 을미개
혁(乙未改革)을 폐지했다.
고종은 이곳에서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을 머물렀는데, 가까운 서대문(西大門)은 임시로 폐
쇄되었고, 정동 일대는 백성들의 통행을 일절 금했다.

▲  옆(서쪽)에서 바라본 전망탑

▲  러시아공사관터 북쪽 부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얹혀사는 동안 어전회의는 무도실에서 했으며, 대신들은 공사관 대회
의실에서 병풍으로 칸막이를 삼아 일을 보았는데 부서별로 회의를 할 때마다 병풍을 이리저리
옮겼다.
고종은 2층 만찬실을 거처로 삼았는데, 만찬실 벽에는 꽃무늬 융단이 걸려있고 천정 가운데에
7가지 촛불로 이루어진 샹들리에가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동쪽 벽에는 소파 모양의 용상(龍
床)이 있었고 그 앞에는 호피(虎皮) 1장이 깔려 있었으며, 거실 서쪽 벽에는 왕의 침대가 있
고, 남쪽 벽에는 소파 세트가 있었다.
만찬실 주변 측실(側室)에는 상궁(尙宮)과 궁녀가 거처하여 왕의 시중을 들었는데, 궁녀들은
방이 따로 없어 공사관 복도에서 칸을 설치하여 지냈다.

만찬실 창 밖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대포 1문이 장착되어 있었고, 정문에서 현
관에 이르는 길에는 러시아군 100명이 수비했다. 그리고 정문 밖에는 칼을 찬 조선군이 길목
을 지켰다.

러시아 공사 스페이어는 고종이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편의를 제공했으며, 명성황후의 제단까
지 마련해주는 등 왕의 가려운 부분을 알아서 긁어주었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에 더욱 친밀을
보이면서 많은 이권을 러시아에 퍼주게 되며, 그로 인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커지
게 된다.


▲  러시아공사관터 동쪽 부분
주름진 공사관터 동쪽 끝에 지하 비밀통로가 있다. 이 통로는 미국공사관
(현 미국대사관저)과 이어져 있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형편없이 깨지자 승리한 왜는 러시아공사관을 접수하여 러시아
공사(公使)와 러시아군 80명, 공사 직원을 죄다 러시아로 추방했으며, 인근 프랑스공사관에서
잠시 관리하였다.
그러다가 왜와 러시아가 국교를 다시 맺으면서 러시아영사관으로 쓰였으며, 1945년 이후 소련
영사관이 되었다. 허나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결렬로 니콜라이 영사가 북한으로 추방되면
서 다시 빈집이 되고 만다.
이후 6.25전쟁으로 전망탑을 빼고 싹 파괴되었고, 1973년 전망탑을 복원하면서 암울했던 근대
사를 나무로 덮으려는 듯, 수양버들 등의 나무를 잔뜩 심어 정동공원을 조성했다. 이후 2009
년 독특한 모습의 하얀 피부의 정자를 공원 한복판에 닦아 지금에 이른다. (정동야행 축제 때
는 음악회 장소로 많이 쓰임)

러시아와 재수교 이후 그것들은 이곳을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요구는 보기 좋
게 묵살되었다. 전망탑에서 남쪽으로 1리 남짓 떨어진 정동교회 뒤쪽에 러시아대사관이 이미
자리해 있어 그 땅을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80년 가까이 홀로 제자리를 지키고 선 하얀 피부의 3층 전망탑, 근대사의 거센 소용돌이의 현
장으로 지금은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하지만 바로 동쪽 옆으로 높이 담장을 두룬 미국대사관
(대사관저)이 들어앉아 있고 그곳을 지키고자 전/의경들이 항시 주둔해 있어 마치 1896년 그
현장이 재현이라도 된 듯, 그리 유쾌하지가 못하다.

* 구 러시아공사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5-3


▲  정동교회(貞洞敎會) - 사적 256호

이화학당 교문에서 덕수궁 방면으로 3분 정도 가면 고색이 창연한 붉은 피부의 교회가 마중을
한다. 그가 이 땅에서 가장 늙은 교회인 정동교회(정동제일교회)이다.

정동교회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 1858~1902)가 1898년에 세운 것
으로 1887년 10월 지금의 한국은행본점 부근에 마련된 배재학당 학생들의 성경 공부방에서 비
롯되었다.
이후 교인 수가 200명이 넘어서자 남녀가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 건축을 추진하게 되었
는데, (그 시절에는 남녀가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예배를 봤음) 아펜젤러는 500명 규모의 큰
서양식 예배당을 제안, 이를 실현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가 모금을 했다. 또한 교인들도 자체적
으로 돈을 걷어 8,000달러의 거금을 마련했다.

새 교회는 선교사 스크랜튼의 시약소(施藥所) 병원 자리의 한옥을 헐고 1895년 9월 9일 정초
식(定礎式)을 했는데, 이때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이 축사를 했다. 교회 설계는 왜인 요시
자와 토모타로(吉澤友太郞)가 했으며, 심의섭(沈宜燮)이 시공을 했다. 1896년 12월에 지붕을
올리고 1897년 12월 26일 교회 봉헌식을 가졌으나 최종 완공은 1898년 12월 26일에 이루어졌
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이 교회는 정동 거리의 상징적인 건물이자 서울 장안의 명물로 구경꾼
들로 가득했으며, 이 땅 최초의 교회란 뜻에서 'high church'라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독립협회운동과 인권운동 등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서재
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이승만(李承晩) 등 이름만 들어도 귀에 부쩍 익은 사람들이 이
곳의 교인으로 활동하며 기독교에 대한 호기심을 풀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정동교회

▲  정동교회의 뒷모습

1900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동교회를 경운궁에 집어넣고자 매입대금 34,000원 가운데 계약금 1
만원을 지불했다. 허나 나머지를 내놓지 않자 이에 뿔이 난 미국공사 알렌이 1901년 5월 나머
지 금액을 속히 처리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편입 작업이 무산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115평 규모의 십자형(十字形) 건물이었으나 늘어나는 신자를 감당하지 못해 1926년
에 양쪽 날개 부분을 확장하여 삼랑식(三廊式)으로 개축하면서 175평으로 넓어졌으며, 건물의
모양도 직사각형을 이루게 되었다. 1918년에는 이화학당의 하란사(河蘭使)가 미국에서 구입한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6.25 때 교회 건물 절반이 박살이 났으며, 파이프오르간도 이때 파괴되었다. 서울 수복 이후
바로 '예배당중수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1950년 11월 23일에 복원했으며, 1970년대에 이르러
벽돌이 풍화되고 문짝이 망가지면서 교회를 새로 지어야 된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오면서 철거
위기에 놓이게 된다. 허나 교단의 내분으로 차일피일 시일만 보내다가 1977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원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  뜨락에 세워진 감리교회 조선 선교(宣敎) 50주년 기념비

정동교회는 다갈색 벽돌로 지어진 것으로 곳곳에 아치형 창문을 두어 고딕 양식의 단순화된
교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돌을 다듬어서 반듯하게 쌓은 기단에는 조선시대 목조 건축
의 솜씨가 다소 배여있다.
마치 서구의 어느 늙은 교회로 뚝 떨어진 듯한 분위기로 하루가 멀다 하고 솟아나는 으리으리
한 교회나 성당과 달리 소박한 모습에 아늑하고 정겨운 느낌이며, 비록 나와는 전혀 맞지 않
은 종교의 중심 현장이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고 저 안에 들어가 잠시 묵상에 잠겨보고 싶은
곳이다. 평일 낮과 토요일, 휴일에는 내부 관람이 가능하며, 정동야행 축제 때는 음악회가 열
린다.

* 정동제일교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3 (정동길 46, ☎ 02-753-0001)



 

  배재학당 동관(培材學堂 東館) - 서울 지방기념물 16호

▲  정면에서 바라본 배재학당 동관

정동교회에서 서소문 쪽으로 넘어가면 고개 정상부(서울시립미술관 서쪽)에 붉은 피부로 이루
어진 옛 배재학당 동관이 마중을 한다.
이 건물은 1916년에 지어진 것으로 100년의 적지 않은 나이를 지녔음에도 키다리 빌딩 속에서
의연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 옆에는 배재학원 소속의 배재정동빌딩이 높이 솟아있음)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발상지이자 이 땅 최초로 벽돌로 지어진 학교 건물로 배재중
고등학교와 배재대학교(대전)의 전신이다. 1885년 7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H.G.아펜젤러가
서울에 들어와 스크랜턴의 집을 사들여 1885년 8월, 학생 2명을 모아 가르치면서 배재학당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고종은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란 뜻으로 '배재학당'
이란 이름을 하사했으며 그해 본관(1887년)이 지어졌다.

아펜젤러는 학당의 설립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가
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

그는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 當爲人役)'이라 쓴 학당훈(訓)을 내걸며 일반적인 교육 외
에 연설회, 토론회 등을 열고 사상과 체육 교육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당시 배재학당에 설치
된 인쇄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인쇄시설이다.

학생수가 계속 늘자 1916년 동관을 지었고, 1923년에 서관을, 1933년 대강당을 차례대로 지어
올려 제법 면모를 갖추게 되었는데, 이들 건물은 조선인 건축가 심의석이 지었다.
1984년 한참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던 강동구 고덕동(高德洞)으로 중고등학교 모두를 옮겼으며
동관만 제자리에 두어 옛 자리를 추억하는 용도로 삼았다. 서관은 고덕동으로 가져왔으나 대
강당과 본관 등은 모두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배재공원을 닦았다.


▲  배재학당 동관(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의 뒷모습

동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교실로 주로 이용되었다. 정면 현관과 양 측면 출입구의
돌구조 현관이 잘 남아있고, 외장 및 치장 쌓기 벽돌구조도 뛰어나며 건물의 형태도 휼륭해
이 땅의 근대건축의 주요 지표로 삼을 정도이다.

학교가 강 건너로 가버린 이후, 빈 채로 두었다가 내부를 손질하여 2008년 7월 24일 배재학당
의 역사를 집대성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삼았다. 지하 1층에 사무실을 겸한 학예연구실
을 두었고, 1층에는 체험교실과 상설전시실1, 특별전시실을, 2층에는 상설전시실2, 기획전시
실을, 그리고 3층에는 세미나실과 회의실을 두었다. 이중 1,2층만 관람이 가능하며 1930년대
배재학당 교실을 재현하여 배재학당의 140년 역사를 유감없이 뿜어내고 있다.

배재정동빌딩 주변에는 1896년에 세워진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의 옛터를 알리는 표석과 신
교육(新敎育) 발상지를 강조하는 표석이 있으며 배재 학생들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졸업사진의
단골 촬영지로도 활약했던 늙은 향나무가 옛 교정을 지킨다.


▲  오랜 세월 배재학당을 지켜왔던 향나무 - 서울시 보호수 2-2호

배재학당 향나무는 약 580년 숙성된 나무로 앞서 정동 회화나무보다 10년 정도 늙었다. <1972
년 10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525년> 높이는 16.5m로 동관과 키가 비슷하며
둘레는 2.25m로 높이에 비해 날씬하다.
왜정 때 활약했던 시인 김소월(金素月)이 좋아했던 나무라고 전하는데, 미국 하버드대 매캔교
수가 1960년대 평화봉사단원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우연히 접한 소월의 주옥 같은 시에 완전
히 퐁당퐁당 빠져들었다. 하여 그의 시를 통해 한국 문학을 공부했으며 소월과 인연이 깊다는
이 향나무의 사연을 전해 듣고 그가 죽지 않도록 보살폈다.

또한 믿거나 말거나 전설도 한 토막 전해오고 있는데, 나무 상부에 박힌 못은 임진왜란 시절
에 서울을 점령한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말을 묶고자 박았다고 한다. 지금은 나무가 훤칠
하지만 그때(1592년)는 기껏해야 140살 정도의 키도 작았으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겠다. 허나
이 역시 부질없는 전설일 뿐이다. (고약한 왜정이 배재학당의 기운을 누르고자 향나무에 그런
말도 안되는 전설을 붙인 것으로 여겨짐)


▲  옛 배재학당의 본관 벽돌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1887년 배재학당 본관을 지을 때 투입된 붉은 벽돌이다. 본관을 밀어버리면서
벽돌 일부를 남겨 이렇게 박물관 안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마침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의 빗장이 활짝 열려 있어 안으로 흔쾌히 들어가보았다. 금지된 구
역을 제외한 개방된 구역을 모두 기웃거려 보았는데, 촬영금지를 알리는 딱딱한 문구가 도처
에서 나를 감시하고 있어 새가슴 마냥 극히 일부만 사진에 담았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담고
싶지만 지나친 욕심은 늘 탈이 생기는 법이다. 그러니 가끔씩 새가슴이 되는 것도 괜찮다.


▲  고종이 1887년에 내린 배재학당 현판의 위엄
명필로 유명했던 정학교(丁學敎)가 고종의 어명을 받아 쓴 것으로 김윤식(金允植)이
학교에 전달했다. 아펜젤러는 이를 매우 감사하게 여기며
자랑스럽게 학교 간판으로 삼았다.

▲  1963년 광복절에 박정희 정권이 이 땅의 근대교육에 크게 기여한
아펜젤러에게 내린 문화훈장증(文化勳章證)

▲  1963년 광복절에 박정희 정권이 아펜젤러에게 내린
문화훈장 국민장 훈장증과 훈장

▲  배재학당 옛터의 싱그러운 변신, 배재공원

배재학당 동관과 러시아대사관 사이에는 배재공원이 달달하게 자리해 있다. 이곳은 옛 배재학
당 자리로 학교가 강동으로 이전되자 본관 등을 밀어버리고 동관 북쪽에 아담하게 공원을 닦
아 옛 정동 시절을 아련히 추억하고 있다.
공원의 동서 폭은 100m 정도로 조촐한 규모이나 회색빛 도심 속의 조그만 오아시스로 주변 직
장인들이 많이 의지하러 오며, 늦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정동은 도심 한복판에 박혀있지만 배재공원, 정동공원 등의 공원이 있고 덕수궁(경운궁)과 미
국대사관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다. 게다가 정동 회화나무, 배재학당 향나무 등 500년 이상 묵
은 나무를 중심으로 가로수도 많이 심어져 있어 비록 높은 빌딩이 주변에 즐비해 도심 분위기
는 어쩔 수 없지만 번잡한 분위기는 그리 나지 않는다. 오히려 대한제국 시절과 현대, 그리고
자연이 적절히 섞인 조그만 도시나 별천지라고나 할까? 그것이 정동의 강한 매력이다.

* 배재학당 동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5 (서소문로11길 19, ☎ 02-319-5578)
*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늦가을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배재공원

▲  늦가을 누님이 살짝 다녀간 서울시립미술관 진입로

정동교회 앞 분수대 교차로에서 박석이 입혀진 숲길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옛 대법원(大法院
) 건물에 둥지를 튼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다. 한참 때는 특별전 초청권이나 공짜표를 어디선가
구하여 여인네들과 자주 찾곤 하였는데 이제는 언제 시립미술관을 스쳤는지 기억 조차 희미하
다.

이렇게 하여 정동 늦가을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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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 근대문화유산의 1번지, 정동~덕수궁돌담길 역사 기행 (심슨기념관, 유관순우물, 구 신아일보별관, 구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정동, 덕수궁돌담길 역사 산책



' 서울 도심의 한복판, 정동~덕수궁돌담길
늦가을 산책 '
덕수궁돌담길
▲  덕수궁돌담길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도심 한복판에 정동(貞洞)이란 고즈넉한 동
네가 뉘어져 있다.
정동은 서울 도심의 근대문화유산 1번지로 칭송을 받는 곳으로 덕수궁돌담길과 정동길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정동의 대표 명소이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궁이었던 덕수궁(
德壽宮, 경운궁)을 핵심으로 구 러시아공사관, 정동교회,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구 대법
원 청사(서울시립미술관), 구 신아일보 별관, 성공회 서울성당, 구세군중앙회관, 배재학
당 동관, 구 미국공사관 등의 근대문화유산이 풍부히 깃들여져 있으며, 국립 정동극장과
서울시립미술관, 이화박물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등의 문화, 전시 공간도 듬뿍 담겨져
있다. (국립정동극장을 제외하고 모두 기존의 근대 건축물을 활용하고 있음)
그 외에 정동 회화나무, 배재학당 향나무, 유관순 우물 등의 문화유산이 있어 정동이 오
랜 시대를 풍미했던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영국, 러시아, 미국, 캐나다, 뉴질랜
드 대사관 등 외국 공관도 많이 산재해 있어 외교 1번지로도 통한다.

비록 도심의 한복판이나 회색빛 가득한 시청과 광화문, 종로 주변과 달리 번잡함이 조금
덜하며 나무를 머금은 공간이 많아 오히려 아늑함이 느껴질 정도이다. 게다가 현대와 근
대,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600년에 장대한 시간이 녹아든 현장으로 역사, 문화의 향기도
그윽하다. 바로 그런 매력 때문에 오랫동안 서울 사람들의 산책, 나들이 명소로 격한 사
랑을 받아왔으며, 나 또한 이곳을 즐겨찾기 명소로 삼아 종종 재활용을 하고 있다.

정동은 조선 개국(開國) 시절부터 요란하게 꿈틀거렸던 현장이다. 조선 최초의 릉(陵)인
정릉(貞陵,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고 그 정릉을 지키
고자 조선 최초의 원찰(願刹), 흥천사(興天寺)가 그 곁에 지어졌다. 정동이란 이름은 바
로 정릉에서 비롯된 것이다. 허나 권력 다툼으로 정릉은 도성 밖 정릉동(貞陵洞)으로 추
방되어 잊혀진 능이 되었고, 흥천사 또한 유생들에게 아작이 나면서 알짜배기 땅에서 방
을 빼야 했다. (지금은 성북구 돈암동에 있음)
성종(成宗)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정동에 저택을 짓고 살았는데, 그 집이 임진왜
란 이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行宮)>이 되었으며, 조금씩 별궁(別宮)으로 몸집을 불려
가다가 1897년 대한제국의 중심 황궁(皇宮)으로 크게 거듭나게 된다. 그 궁궐이 바로 덕
수궁<경운궁(慶運宮)>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3배 이상의 크기로 정동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정동은 조선(대한제국)의 정치, 행정의 1번지이자 제왕이 사는 곳으로 매우 중
요시되었다. <'정동은 황궁과 가까이 있어 만백성이 우러러 보는 지역'이라며 강조했음>

또한 정동은 19세기 후반, 많은 양이(洋夷)들이 정착했던 곳이다. 그들은 서울에 들어와
주로 정동에 서식했는데, 외교관과 군인, 그 가족들, 종교인, 사업가들이 주류를 이루었
으며, 집과 학교, 성당, 교회, 호텔, 공사관 등을 지었다. 바로 여기서 이 땅의 근대 교
육이 시작되었고, 천주교와 기독교 등 여러 서양 종교들이 정동에 본거지를 세워 세력을
확장했다.
그런 인연으로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어 정동길과 덕수궁돌담길만 어슬렁 거려도 근
대사의 주요 부분과 구한말(舊韓末) 건축 양식을 거의 다 꿰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이다.

늦가을을 맞이하여 간만에 정동을 찾았는데, 이번에 찾은 정동의 명소들은 이미 여러 번
씩 복습을 했던 곳이다. 허나 복습이란 예습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라 많이 할수록 좋다.



 

1. 정동 회화나무,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구 신아일보 별관

▲  정동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3호

정동 나들이는 시청역(1,2호선)이나 정동사거리(5호선 서대문역과 서울역사박물관 중간)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이번에는 정동사거리에서 첫 발을 떼어 정동길로 들어섰는데 그 길을 3~
4분 정도 가면 야무지게 자라난 회화나무가 마중을 나온다. 그가 정동의 오랜 터줏대감인 정
동 회화나무이다.
이 나무는 정동에서 가장 늙은 존재로 약 570년 정도 묵었다. (1976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20년) 서울 도심부(4대문 안)에서 가장 늙은 측에 속하는 나무로 500년 이상 제
자리를 지키며 정동의 숱한 변화를 지켜본 유일한 산증인이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과 사람들의 보살핌에 힘입어 높이 17m, 둘레 5.16m의 큰 나
무로 성장했는데, 그 기세는 정동길을 뒤덮을 정도이다. 고된 세월에 지쳤을까. 아니면 하늘
이 두려운 것일까.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옆으로 다소 구부러진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나무가 워낙 나이가 많고 수시로 오가는 차량들이 내뱉은 고약한 기운에 매일 시달리면서 한
때 수세(樹勢)가 많이 기울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03년 캐나다가 대사관(大使館) 건물을 신
축했는데, 그 대사관이 자칫 나무를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었으나 캐나다 양이들이 기특하게도
나무를 배려하여 건축 디자인을 변경하고, 지지대를 세우고, 우물을 확장하는 등 깨어있는 모
습을 보여주어 나무는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  정동 회화나무와 캐나다대사관(왼쪽 건물)
정릉과 흥천사부터 600년 동안 많은 것들이 창밖에 이슬처럼 정동을 스쳐갔지만
오직 회화나무만이 그 장대한 세월을 극복하며 정동을 지켜왔다.


▲  정동 회화나무 주변 정동길
회화나무의 그늘 맛을 매일 먹고 자라는 정동길, 정동길의 늦가을 풍경은
몸살이 날 정도로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하다.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Simpson Memorial Hall) - 국가 등록문화재 3호

정동 회화나무를 지나면 정겨운 기와 돌담을 두룬 이화여고가 모습을 비춘다. 정문 옆에는 붉
은 피부를 지닌 3층 건물이 눈길을 끄는데 그것이 이화학당에서 가장 늙은 건물인 심슨기념관
이다.

심슨기념관은 1915년에 지어진 지하 1층, 지상 3층, 건평 129.5평의 벽돌 건축물로 언더우드
가 세웠던 '예수교학당' 자리이다. 이화여고에서 유일하게 남은 근대 건축물로 조선에 머물던 
미국 사람 심슨(Sarah J. Simpson)이 사망하자 그가 남긴 재산으로 지었으며, 그를 기리고자
그의 이름을 따서 심슨기념관(씸손기념관)이라 했다.
건물 동쪽에는 '씸손기념관'이라 쓰인 동판이 있으며 1961년과 2006년에 보수했다. 이후 내부
를 손질해 이화학당백주년 기념관으로 삼았다가 이화학당(이화여중고)의 역사를 집대성한 '이
화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일요일과 공휴일은 문을 닫아걸고 쉬므로 토요일과 평
일에 찾아야 됨)

이화학당(梨花學堂)은 1886년 5월, 미국 선교사 스크랜톤 여사(Mrs. Marry F. Scranton)가 세
운 이 땅 최초의 여자학교이다. 그는 조선에 여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885년 8월 아펜젤러 선
교사와 현재 이화여고 본관 뒷편 언덕에 올라 적당한 자리를 살피다가 그해 10월 배밭 6,120
평을 구입했다. <현재 정동 32번지 일대>
그 안에 있던 집을 모두 부시고 새로운 한옥을 착공하려고 하니 마침 선교부로부터 예산 지원
이 어렵다는 통보가 날라왔다. 하여 미국 각지에 원조를 요청하여 겨우 3,700달러의 기부금을
모아 건물을 완성했다. 처음 학교 건물은 'ㄷ'자 모양의 195.5칸에 큰 한옥으로 7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당시 장안 사람들은 그 건물을 양국관(洋國館)이라 불렀다.

그 시절 조선은 여자들 교육에는 매우 인색했다. 그래서 스크랜톤은 조선의 그런 현실을 생각
해 6명을 생각했으나 겨우 1명이 지원하는데 그쳤다. 그래서 그 1명으로 교육을 시작하면서
이화학당의 서막은 열리게 된다.
초창기 학당에 들어온 여학생들은 이름이 없어 영어로 편의상 '1st', '2nd', '3rd' 등으로 불
렀다. 허나 학생이 점차 증가하면서 서수(序數)로는 적당치가 않아 '수산나','델리아' 등의
세례명을 붙여주었다.

▲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톤의 흉상

▲  이화여고 뜨락에 세워진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표석


1887년 고종은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에서 '이화학당'이
란 이름을 내렸다. '이화'란 이름은 부근에 있던 이화정(梨花亭)이란 정자에서 따왔다는 설과
이곳이 원래 배밭이었으므로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하고 있다.

1897년 학생수가 40명을 넘자 페인(J.O Paine) 학당장(學堂長)은 기존 한옥을 부시고 2층짜리
양관인 메인홀(Main Hall)을 지어 1900년 11월 완성을 보았다. 메인홀은 'T'자형으로 900평에
이르는 큰 건물이었다.
바로 이웃에 자리한 배재학당의 아펜젤러는 이화학당 메인홀을 두고 '서울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집'이라며 찬양을 하였다. 허나 그 건물은 6.25 때 파괴되었으며, 1970년에 그 뒤쪽에
이화여고 본관이 세워졌다. 옛 메인홀터에는 '한국 여성 신문화의 발상지'란 표석과 스크랜톤
부인의 흉상이 자리를 지킨다.

1899년 5월에는 학당에서 여학생을 이끌고 창의문 밖 세검정(洗劍亭)으로 소풍을 갔었다. 그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생 소풍이라고 한다. 그 당시 '여학생의 꽃구경은 500년에 처음이
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그들의 소풍은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  굳게 닫힌 유관순우물

이화학당하면 유관순(柳寬順) 누님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했
는데, 1919년 3.1운동이 벌어지자 고등과 학생 5명과 몰래 기숙사 뒷담을 넘어 만세운동에 참
여했다.
3월 10일 휴교령이 내려지자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와 고향인 천안 병
천으로 내려가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관했으나 왜경에 체포되어 1920년 서대문형
무소에서 18세의 어린 나이로 옥사(獄舍)하고 말았다.
그의 묘는 이태원(梨泰院) 공동묘지에 있었으나 그 묘지가 망우리 공동묘지(현재 망우리공원)
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왜정(倭政)이 고의적으로 그의 시신과 무덤을
없앴을 것이다.

심슨기념관 뒤쪽에는 굳게 입을 봉한 동그란 조선 후기 우물이 하나 있다. 서울에 몇 남지 않
은 조선시대 우물로 학교에서는 그 우물을 '유관순우물'이라 부르며 애지중지하는데, 원래는
정동 사람들이 쓰던 우물이었으나 이화학당이 들어서면서 학당 소유가 되었다.
댕기머리 여학생들이 여기서 물을 길어 식수용으로 쓰거나 빨래를 했다고 하며, 유관순 누님
역시 이곳에서 빨래를 했을 것이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상징적인 인물이라 그의 이름을 따
서 '유관순우물'이라 했다.


▲  이화학당 사주문(四住門)과 하마비(下馬碑), 그리고 우수수
은행잎을 털어내는 노란 은행나무


이화학당 여학생들이 수다를 떨며 지나다녔을 기와집 사주문, 지금은 문 옆에 넓은 교문이 닦
여져 있어 후문으로 물러나 있다.
사주문은 이화학당의 옛 정문으로 1923년에 전통 한옥의 사주문 형태로 지어졌다. 이후 지금
의 자리로 이전되면서 왜식(倭式)으로 변형된 것을 1954년에 어느 졸업생의 흔쾌한 후원금으
로 팔작지붕 기와문으로 교체했으며, 1999년 8월 원래의 대들보와 상도리, 망와 등 일부를 사
용하여 초기 모습으로 복원했다.
문 좌우로 기와를 머리에 인 돌담이 정겹게 펼쳐져 있고 문 옆에는 난쟁이 반바지 접은 것보
다 작은 비석이 우두커니 서있는데, 그 비석은 아무나 세울 수 없었던 콧대 높은 하마비이다.

하마비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 있으니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두
말에서 내려 지나가란 뜻이다. 조선시대 국립중등교육 기관인 향교(鄕校) 앞에 하마비가 있는
것은 보았어도 신식 학교에 그것이 있는 것이 참 이채로운데 아마도 제왕이 친히 이름을 내리
며 관심을 보인 여학교라 학교 주변 단속도 할 겸, 비석을 내린 모양이다. 이화학당은 제왕(
고종)이 이름도 내려주고 하마비까지 달아준 특별한 학교였던 것이다.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32-1 (정동길26, ☎ 02-21
  75-1964)
* 이화박물관 홈페이지는 아래 하마비 사진을 클릭한다.

◀  이화학당의 특별함을 보여주는
사주문 옆 하마비의 위엄


▲  구 신아일보 별관(新亞日報 別館) - 국가 등록문화재 402호

이화학당 사주문에서 시청 방향으로 1분 정도 가면 왼쪽(북쪽)에 붉은 피부의 큰 건물이 마중
을 한다. 겉으로 보면 그저 그런 건물로 여기고 지나치기 쉽지만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보면 그
역시 고색이 깃든 건물임을 눈치챌 수 있다.
그는 옛 신아일보의 별관으로 1930년대에 지어진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지금과 달리 지하 1
층, 지상 2층, 연면적 2,000.53㎡ 규모로 미국 업체인 싱거미싱회사(Singer Sewing Machine
Company)의 한국지부로 쓰였다가 1969년 신아일보가 매입했다.

신아일보는 1965년 5월 장기봉(張基鳳)이 창간한 신문으로 처음부터 '상업신문'임을 내세웠다.
다른 수익사업을 병행하지 않고 오직 신문 수입으로 경영하여 소수의 인원으로 신문사를 꾸렸
는데, 매일 8면의 지면을 제작해 신문계에서 '기적의 신문'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창간호(創刊
號)부터 다색도인쇄(多色度印刷)로 발행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다색도인쇄 신문으로 명성이 높
다.
독자투고란인 '세론(世論)'을 만들어 독자참여제도의 문을 열었고, 우리나라 최초로 '종교란'
을 만들어 종교계로부터 찬양을 받았다. 또한 '수도권백과','재계화제' 난을 신설하고 '농수
산소식','소비자 페이지','부부교실','부동산' 난을 만들어 생활경제정보를 많이 제공했다.

1975년 기존 건물에 크게 반하지 않는 선에서 4층까지 올리는 등,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으나
1980년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강제로 경향신문에 통합되면서 사라지고 만다. 이후
2003년 같은 이름의 신아일보가 여의도에 문을 열었으나 예전 신아일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한때는 옛 신아일보의 뒤를 이었다고 내세웠으나 옛 신아일보를 세웠던 장기봉의 반발로 그
부분은 쏙 사라짐>

민간 건물 건축기법으로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일방향 장선 슬라브(One-
way Joist Slab) 구조 및 원형철근 사용 등 왜정 시절 건축구법과 구조 등이 잘 남아있어 근
대 건축기술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1980년 신군부의 어거지성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언
론수난사의 현장으로 나름 가치가 있어서 국가등록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현재는 옛 신아일보를 추억하는 신아기념관으로 일부 쓰이고 있으며, 많은 회사들이 입주하여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 구 신아일보 별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28 (정동길 33, ☎ 02-777-9875)


▲  구 신아일보 별관의 정면 모습
정면에 보이는 붉은색 아치형 문은 지하로 이어지며, 그 위의 문은
건물의 현관이다.



 

2. 구 러시아공사관과 정동교회

▲  구 러시아공사관 - 사적 253호
(정동공원에서 바라본 3층 전망탑)


이화학당 사주문 맞은편(북쪽) 길로 조금 들어서면 그 길의 끝, 언덕 위로 하얀 피부의 날씬
한 건물이 두 망막에 들어올 것이다. 그가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우울한 현장인 러시아
공사관터 3층 전망탑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두만강(豆滿江)과 간도를 사이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흥
선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하여 프랑스를 이용해 소위 이이제이(以夷制夷) 방법으로 러
시아를 막아볼 생각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1884년에 이르러 러시아와 수교를
맺게 되는데, 그때 조선측 대표는 김병시(金炳始), 러시아측 대표는 베베르(K. Waeber)였다.

조선은 1888년 덕수궁(경운궁)의 후원인 상림원(上林園) 일대를 공사관 자리로 내렸다. 러시
아는 그곳을 밀어버리고 그 땅에 공사관과 정교회<正敎會, 동방교회(東方敎會), 1900년에 지
어짐>를 세워 서울 속에 조그만 러시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공사관은 1888년 공사에 들어가 1890년 8월 완성을 보았는데, 스위스계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
(Sabatine)이 설계했다. 르네상스식 벽돌조 건물로 공사관 본관은 'H'자형 평면으로 지어졌는
데, 남,동,서측 3면에 아치열주가 있는 아케이드를 두어 3면 모두 정면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각 면에 출입문을 내고, 북쪽 끝 모서리에 3층 전망탑을 두었다. 그리고 공사관 초입에 4면이
아치로 된 개선문 형태의 정문을 두었다.

러시아공사관은 간단히 줄여 아관(俄館)이라고 하는데, 이는 러시아를 아라사(俄羅斯)라고 불
렀기 때문이다. <가차자(假借字) 표현으로 '아라사'라고 했음> 전망탑을 비롯해 공사관에 딸
린 건물이 여럿 있었으나 왜정(倭政) 때 상당수 파괴되었으며, 6.25시절에 탑을 제외한 나머
지 건물이 모두 박살이 나고 말았다. 탑 역시 무거운 상처를 입어 기우뚱거린 것을 1973년에
복원했다.
3층으로 이루어진 탑의 면적은 65.2평으로 1981년 탑 동북쪽에서 지하실과 20.3m의 비밀통로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과 이웃한 미국공사관으로 속히 줄행랑을 치
기 위해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덕수궁이 황궁이 된 1897년 이후, 주변에 자리한 여러
나라 공사관과 영사관을 잇는 작은 통로를 닦아 유사시에 대비했다.
그 통로는 1945년 무렵까지 대부분 남아있었다고 하며, 이후 모두 사라졌다가 2019년에 정동
공원에서 덕수궁돌담길(덕수궁길)을 잇는 통로가 일부 재현, 복원되어 '고종의길'이란 이름으
로 속세에 개방되었다.


▲  옆(서쪽)에서 바라본 러시아공사관 전망탑

우리가 보잘것없는 이 하얀 탑에 주목을 해야 되는 이유는 1896년에 일어났던 아관파천의 우
울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1895년 왜국(倭國)이 저지른 이른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고종은 왜를 불신하며 경복궁에
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친러파였던 이범진(李範晉)과 이완용(李完用), 이
윤용(李允用) 등이 러시아공사 베베르와 신임공사 스페이어, 손탁과 함께 고종의 파천계획을
모의한다.
그들은 고종의 총애를 받던 엄귀비(嚴貴妃)를 통해 왕에게 접근, 친일패거리들이 왕의 폐위를
꾸미고 있으니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고종이 흔쾌히 승낙
하며 베베르와 스페이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베베르는 1896년 2월 공사관 수비를 이유로 인천에 머물던 러시아군함에서 포 1문과 군사 120
명을 소환하여 왕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그 준비가 끝나자 2월 11일 새벽, 고종은 왕태자(
순종)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살짝 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불이 나게
도망쳤다. 이 사건을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한다.

그렇게 러시아공사관에 샛방을 튼 고종은 왜와 친했던 김홍집(金弘集) 내각(內閣)을 단죄했다.
그래서 김홍집, 어윤중(魚允中)을 처단하고, 김윤식(金允植)을 제주도로 귀양보내니 이에 염
통이 쫄깃해진 유길준(兪吉濬) 등 10여 명의 고위관리는 왜열도로 줄행랑을 쳤다.
친일내각을 도려내자 친러패거리인 이범진, 박정양(朴定陽), 윤치호(尹致昊) 등이 중심이 된
친러내각이 들어섰다. 그들은 친일파를 역적으로 간주, 단발령(斷髮令)을 보류하고 갑오개혁
과 을미개혁(乙未改革)을 폐지했다.
고종은 이곳에서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을 머물렀는데, 그동안 가까운 서대문(西大門)은 임
시로 폐쇄되었고, 정동 일대는 백성들의 통행을 금했다.

▲  윤곽만 남아있는 러시아공사관터
북쪽 부분

▲  러시아공사관 남쪽 정동공원에 있는
하얀 피부의 8각형 정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얹혀사는 동안 어전회의는 무도실에서 했으며, 대신들은 공사관 대회
의실에서 병풍으로 칸막이를 삼아 일을 보았는데, 부서별로 회의를 할 때마다 병풍을 이리저
리 옮겼다.
고종은 2층 만찬실을 거처로 삼았는데, 만찬실 벽에는 꽃무늬 융단이 걸려있고 천정 가운데에
7가지 촛불로 이루어진 샹들리에가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동쪽 벽에는 소파 모양의 용상(龍
床)이 있었고 그 앞에는 호피(虎皮) 1장이 깔려 있었으며, 거실 서쪽 벽에는 왕의 침대가 있
고, 남쪽 벽에는 소파 세트가 있었다. 그리고 만찬실 주변 측실(側室)에는 상궁(尙宮)과 궁녀
들이 거처하여 왕의 시중을 들었는데, 궁녀들은 방이 따로 없어 공사관 복도에서 칸을 설치하
여 아주 불편하게 지냈다.
만찬실 창 밖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대포 1문이 장착되어 있었고, 정문에서 현
관에 이르는 길에는 러시아군 100명이 수비했다. 그리고 정문 밖에는 칼을 찬 조선군이 길목
을 지켰다.

러시아 공사 스페이어는 고종이 불편하지 않도록 갖은 편의를 제공했는데, 명성황후의 제단(
祭壇)까지 마련해주는 등 왕의 가려운 부분을 알아서 긁어주었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에 더욱
친밀을 보이면서 많은 이권을 러시아에 내리게 되며, 그로 인해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은 커지게 된다.


▲  러시아공사관터 동쪽 부분
주름진 공사관터 동쪽 끝에 지하 비밀통로가 있는데, 이 통로는 미국공사관
(현 미국대사관저)과 이어져 있었다. (지금은 끊김)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형편없이 깨지자 승리한 왜는 러시아공사관을 접수하여 러시아
공사(公使)와 러시아군 80명, 공사 직원을 죄다 러시아로 추방했으며, 인근 프랑스공사관에게
관리를 맡겼다.
그러다가 왜와 러시아가 국교를 다시 맺으면서 러시아영사관으로 쓰였으며, 1945년 이후 소련
영사관이 되었다. 허나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니콜라이 영사가 북한으로 추방되
면서 다시 빈집이 되고 만다.
이후 6.25전쟁으로 전망탑을 빼고 모두 파괴되었고, 1973년 전망탑을 복원하면서 암울했던 근
대사를 나무로 덮으려는 듯, 수양버들 등의 나무를 심어 정동공원을 조성했다. 이후 2009년에
독특한 모습의 하얀 정자를 공원 한복판에 닦아 지금에 이른다. (정동야행 축제 때는 음악회
장소로 많이 쓰임)

러시아와 재수교 이후 그것들은 이곳을 달라고 쓸데없이 요구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요구는
보기 좋게 묵살되었다. 전망탑 남쪽으로 약 1리 남짓 떨어진 정동교회 뒤쪽에 러시아대사관이
이미 자리해 있어 그 땅을 줄 이유가 전혀 없던 것이다.

70년 가까이 홀로 제자리를 지키고 선 하얀 피부의 3층 전망탑, 근대사의 거센 소용돌이의 현
장으로 지금은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하지만 바로 동쪽 옆으로 높이 담장을 두룬 미국대사관
(대사관저)이 들어앉아 있고 그곳을 지키고자 전/의경들이 항시 주둔해 있어 마치 1896년 그
현장이 재현된 듯, 그리 유쾌하지가 못하다.

* 구 러시아공사관터(정동공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5-3


▲  정동교회(貞洞敎會) - 사적 256호

이화학당 사주문에서 덕수궁(경운궁) 쪽으로 3분 정도 가면 오른쪽(남쪽)에 고색이 창연한 붉
은 피부의 교회가 마중을 한다. 그가 이 땅에서 가장 늙은 교회인 정동교회(정동제일교회)로
120년이 넘은 노구에도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동교회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 1858~1902)가 1898년에 세운 것
으로 1887년 10월 현재 한국은행본점 부근에 마련된 배재학당 학생들의 성경공부방에서 비롯
되었다. 이후 교인 수가 200명이 넘자 남녀가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 건축을 추진하기
에 이른다. (그 시절에는 남녀가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예배를 봤음)
이에 아펜젤러는 500명 규모의 큰 서양식 예배당을 제안, 이를 실현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가
모금을 했다. 또한 교인들도 자체적으로 돈을 걷어 8,000달러의 거금을 마련했다.

새 교회는 선교사 스크랜튼의 시약소(施藥所) 병원 자리의 한옥을 헐고 1895년 9월 9일 정초
식(定礎式)을 했는데, 이때 법무대신 서광범(徐光範)이 축사를 했다. 교회 설계는 왜인 요시
자와 토모타로(吉澤友太郞)가 했으며, 심의섭(沈宜燮)이 시공을 했다. 1896년 12월에 지붕을
올리고 1897년 12월 26일 교회 봉헌식을 가졌으나 최종 완공은 1898년 12월 26일에 이루어졌
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이 교회는 정동 거리의 상징적인 건물이자 서울 장안의 명물로 구경꾼
들로 가득했으며, 이 땅 최초의 교회란 뜻에서 'high church'라 불리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독립협회운동과 인권운동 등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서재
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이승만(李承晩) 등 이름만 들어도 귀에 부쩍 익은 사람들이 이
곳의 교인으로 활동하며 기독교에 대한 호기심을 풀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정동교회

▲  정동교회의 뒷모습

1900년 대한제국 정부는 정동교회를 경운궁에 집어넣고자 매입대금 34,000원 가운데 계약금 1
만원을 지불했다. 허나 나머지를 내놓지 않자 이에 뿔이 난 미국공사 알렌이 1901년 5월 나머
지 금액을 속히 처리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편입작업이 무산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115평 규모의 십자형(十字形) 건물이었으나 늘어나는 신자를 감당하지 못해 1926년
에 양쪽 날개부분을 확장하여 삼랑식(三廊式)으로 개축하면서 175평으로 넓어졌으며, 건물의
모양도 직사각형을 이루게 되었다. 1918년에는 이화학당의 하란사(河蘭使)가 미국에서 구입한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6.25때 교회 건물 절반이 박살이 났으며, 파이프오르간도 이때 파괴되어 다시 복원했다. 서울
수복 이후 바로 '예배당 중수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1950년 11월 23일에 복원했으며, 1970년
대에 이르러 벽돌이 풍화되고 문짝이 망가지면서 교회를 새롭게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왔다. 허나 교단의 내분으로 차일피일 시일만 보내다가 1977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원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  뜨락에 세워진 감리교회 조선 선교(宣敎) 50주년 기념비

정동교회는 다갈색 벽돌로 지어진 것으로 곳곳에 아치형 창문을 내어 고딕 양식의 단순화된
교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돌을 다듬어서 반듯하게 쌓은 기단에는 조선시대 목조 건축
의 솜씨도 다소 배여있다.
마치 서양의 어느 늙은 교회로 뚝 떨어진 듯한 분위기로 하루가 멀다하고 솟아나는 으리으리
한 교회나 성당과 달리 소박한 모습에 아늑하고 정겨운 느낌이며, 비록 나와는 전혀 맞지 않
은 종교의 현장이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고 저 안에 들어가 잠시 망중한에 잠겨보고 싶은 곳이
다. 평일 낮과 토요일, 휴일에는 내부 관람이 가능하며, 정동야행 축제 때는 음악회가 열린다.
(교회 사정과 행사에 따라 관람이 어려울 수도 있음)

* 정동교회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4-3 (정동길 46, ☎ 02-753-0001)



 

3. 정동의 백미, 덕수궁돌담길을 거닐다.

▲  덕수궁 서쪽 돌담길

덕수궁(경운궁) 대한문에서 정동교회까지 이어지는 덕수궁 남쪽 돌담길은 길을 거니는 사람들
로 늘 만원이다. 하지만 정동교회에서 미국대사관저 옆구리를 거쳐 덕수초교로 넘어가는 서쪽
돌담길은 전,의경들이 경비를 서고 있어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발길을 주저하게 된다. '이 무
거운 분위기는 뭘까?' 하고 말이다. 허나 그 길은 누구나 거닐 수 있는 자유로운 길이니 안심
하고 거닐도록 하자~! 그곳이 돌담길의 백미와 같은 곳이다.

서쪽 돌담길 중간에는 야트막한 고개가 솟아있는데 이를 영성문(永成門) 고개라고 한다. 영성
문은 덕수궁 북쪽 구역 문으로 새문안길(서대문~광화문을 잇는 도로) 부근에 있었다. 대한문
에 버금갈 정도로 아름다운 문이었는데 덕수궁에서 미국공사관, 러시아공사관, 영국공사관과
이어져 '외교의 문'으로 통하기도 했다.
허나 친일파인 윤덕영(尹德榮)이 왜정과 짜고 영성문 안쪽의 부지를 왜인(倭人)에게 팔아 막
대한 이득을 취했다. 윤치호(尹致昊)는 이 사건에 크게 뚜껑이 열려 1919년 11월 22일에 적은
그의 일기(윤치호일기)에서
'이 비열한 매국노들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
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나중에 윤치호도 친일파 떨거지로 변함)

고종이 세상을 뜨기가 무섭게 왜정은 1920년 2월 영성문과 선원전 일대를 철거했다. 이때 영
성문에서 정동교회로 이어지는 언덕을 깎으면서 서쪽 돌담길이 뚫렸는데, 이를 영성문고개라
불렀다. 지금은 그 이름을 아는 이가 손에 꼽을 정도로 잊혀진 상태라 그저 덕수궁 돌담길의
일부로 묻혀져 있다.

▲  호젓하게 펼쳐진 덕수궁 서쪽 돌담길

▲  덕수궁 서쪽 돌담길 (영성문고개)

동쪽의 덕수궁 돌담과 서쪽의 미국대사관저의 높다란 담장 사이로 놓여진 서쪽 돌담길, 좌우
담장 안에는 나무들이 서로 경쟁에 들어간 듯, 앞다투어 담장 밖으로 울창한 가지를 내뻗어
조촐하게 숲길을 이룬다. 도심 한복판임에도 인적도 그리 많지 않아 차분하며 고즈넉한 궁궐
돌담길을 마음껏 누릴 수 있으니 정말 100점짜리 산책로이다.

고갯길이 뚫린 1920년대 이후 이곳은 젊은 남녀들이 남의 이목을 피해 데이트를 즐기던 곳으
로 '사랑의 언덕길'로 통했다. 허나 1950년대 이후 그 명칭도 슬쩍 사라졌으나 여전히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항간에서는 돌담길을 거닐면 헤어진다는 말이 있는데, 1973년
가수 진송남이 부른 '덕수궁 돌담길'이란 노래<한산도 작곡, 정두수 작사>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바로는 작사자인 정두수가 실연을 당하고 비오는 날, 홀로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고 집에 돌아와 자기 심정을 노래로 지었다고 한다.
또한 가정법원이 돌담길 남쪽인 현재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에 있어서 부부가 이혼하러 오는 길
이라 하여 연인들이 발길을 꺼리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세상풍파를 타면서 헤어지는 길로 오
해를 받게된 것이다. 그러니 돌담길이 섭하지 않도록 그런 속설은 신뢰하지 말자~~!

이렇게 호젓하고 아름다운 돌담길이건만 길 곳곳에 전/의경들이 배치되어 지나가는 사람과 차
량을 지켜보고 있으며, 미국대사관저의 건방지게 높은 담장은 이곳의 옥의 티로 이 땅의 우울
한 현실이 여실히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위엄을 날렸던 덕수궁(경운궁)의 일부였건만 지금은 왕년의 1/3 이
하로 줄어들었으며, 반면 미국의 관할인 미국대사관저는 덕수궁 담장보다 더 높아 망국의 황
궁을 짓누른다. 게다가 그것들이 들어앉은 곳도 덕수궁의 잃어버린 옛 땅이다. 반드시 되찾아
복원시켜야 될 땅인 것이다. 하지만 그 옥의 티는 내가 숨쉬는 동안에는 아마도 지우기 힘들
것 같다.
돌담길을 사진에 담을 때는 미국대사관저 방향은 너무 대놓고 찍지 말기 바란다. (찍으면 제
지를 당할 수 있음) 단 덕수궁 쪽이나 돌담길의 한복판은 간섭을 받지 않는다.


▲  덕수궁의 서쪽 문인 평성문(平成門)

평성문은 덕수궁 중심지(중화전, 함녕전)에서 궁궐 외곽인 중명전 구역과 선원전(璿源殿) 구
역을 이어주던 문이다. 허나 그 구역이 대부분 아작나면서<중명전만 살아남았음> 이제는 덕수
궁의 서쪽 문이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뒷문 신세가 되었다. 문은 활짝 열려있지만 관
람객은 출입할 수 없다.


▲  늦가을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영성문고개
왼쪽이 옛 덕수궁 땅을 점유하고 있는 미국대사관저이고, 오른쪽이 망국의 황궁인
덕수궁(경운궁)이다. 이곳은 서양 스타일로 지어진 2층짜리 돈덕전(惇德殿)
구역으로 지금은 고갯길로 변해버렸다.

▲  영성문고개 돌담길 (정동 방향)

▲  옛 선원전터를 홀로 지키고 선 200년 묵은 회화나무

영성문고개를 지나면 돌담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세군 중앙회관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서쪽
담장 너머로 아주 너른 공터가 박혀 있는데, 공터 한복판에 그 허전함을 달래려는 듯, 200년
정도 묵은 회화나무가 홀로 자리해 있다. 이곳은 덕수궁의 옛 땅이자 옛 경기여고 자리로 미
국대사관이 점유하고 있다가 지금은 서울시가 소유하고 있다.
미국 양이들은 2004년 이곳에 대사관 직원들의 숙소를 짓겠다며 한바탕 난리를 부린 적이 있
었다. 이때 많은 시민들이 덕수궁(경운궁) 훼손을 막고자 반대 시위를 벌여 숙소 건축은 보기
좋게 좌절시켰으며, 서울시가 이곳을 살펴본 결과 1897년에 지어진 선원전, 흥복전(興福殿)터
임이 밝혀졌다.
선원전은 고종이 역대 제왕의 어진(御眞)을 봉안하고자 지은 것으로 왜정 때 파괴되었으며 그
어진들은 창덕궁 신선원전(新璿源殿)으로 강제로 옮겨졌다. 그리고 선원전 자리에는 경기여고
가 들어섰다. <현재 경기여고는 개포동에 가 있음>

서울시는 이곳을 해방시켜 덕수궁 복원에 쓸 계획인데, 발굴조사를 벌이는 등 진척이 조금 있
으나 계속 공터로 놀려두고 있다. 서울 도심에 이런 너른 공터가 놀고 있다니 그저 안따까울
따름인데, 예전에는 전/의경들이 공터로 넘어가는 문을 지키고 섰으나 요즘은 경계가 많이 풀
렸다.

이곳을 끝으로 늦가을에 깜짝 방문한 정동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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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심장을 거닐다 ~ 덕수궁, 시청 서울광장 주변 둘러보기 (환구단, 대한문, 서울성공회성당...)

 


' 서울 도심의 심장 - 덕수궁, 서울광장 주변 둘러보기 '
(환구단, 대한문, 서울 성공회성당, 구세군 중앙회관)

환구단 석수상
▲  환구단 석수상의 위엄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 그 중심인 시청(市廳) 주변은 늘상 복잡하다. 사
람도 무지 많고, 건물도 많고, 수레들로 늘 도로는 미어터지고, 소음도 즐비하기 때문이다.

1897년 고종(高宗)에 의해 경운궁<慶運宮, 덕수궁(德壽宮)>이 대한제국의 황궁(皇宮)이 되
면서 서울과 천하의 중심지가 된 서울시청 주변에는 덕수궁과 서울도서관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옛 서울시청사, 시청 지하에 자리한 시민의 공간 시민청(市民廳)을 비롯해 시청
앞에 넓게 터를 닦은 서울광장, 무교동(武橋洞)과 다동(茶洞)/북창동(北倉洞) 먹거리 골목,
청계광장, 환구단, 서울시립미술관, 구세군중앙회관, 성공회서울성당, 덕수궁돌담길 등 조
선 중/후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명소가 즐비하다.
기분 같아서는 이들을 모두 걸쭉하게 풀어보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질없는 욕심인지
라 환구단과 대한문, 시청 주변의 근대 건축물 2곳만 풀어본다.


♠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막바지 상징물, 고종이 황제 위에 올라
하늘에 제를 올렸던 환구단(원구단, 圜丘壇) - 사적 157호

▲  환구단의 유일한 건물 황궁우(皇穹宇)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면 키다리 빌딩들 사이로 3층 규모의 각이 진 기와집
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 뒤에는 높은 키를 자랑하는 웨스틴조선호텔(이하 조선호텔)이 우
뚝 서 있어 자세한 사연을 모르면 자칫 그 호텔의 한옥 별관 정도로 오인하기 쉽다. 지금은 비
록 특급호텔 그늘에 가린 빛바랜 기와집이자 도시인들이 잠시 지친 일상을 달래는 공원으로 살
아가고 있지만 그곳이 바로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 황제 위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원구
단(환구단)의 찬란한 흔적으로 종묘(宗廟)에 버금가는 국가의 신성한 공간이었다. 이쯤까지 알
았다면 이 한옥이 180도 달라 보일 것이다.

이곳은 일찍이 태종(太宗, 재위 1400~1418)의 둘째 공주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사위인 조대림
(趙大臨)이 살던 저택이 있었다. 2째 공주가 산다고 해서 소공주댁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소공
동(小公洞)이란 지명이 유래되었다. 조대림은 개국 공신의 하나인 조준(趙浚)의 아들로 3살 연
상인 경정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했는데, 태종은 이곳에 그들의 집을 지어주었다. 허나 조대림의
후손이 큰 죄를 저지르자 이곳 저택과 토지는 몰수당했다.

1583년(선조 16년) 선조(宣祖)는 이 집을 화려하게 고쳐 당시 총애하던 3째 아들 의안군(義安君
)에게 내렸다. 임진왜란 이후 남별궁(南別宮)으로 이름을 바꾸고 임시로 명나라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조선 후기에 쓰여진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의하면 남별궁에는 명설루(明雪
樓)란 누각이 있고, 그 뒤뜰에 작은 정자와 영험하기로 소문이 높은 돌거북이 있었다고 한다.


▲  환구단 왕년의 모습

이 땅에서 군주가 직접 하늘에 제를 지내는 제천의식(祭天儀式)은 고조선부터 시작되었다. 삼한
(三韓)을 거쳐 삼국시대에도 고구려와 백제는 제천의식을 치렀으며, 고려 성종(成宗, 재위 981
~997)은 983년 송(宋)나라에서 원구단<원단(圜壇)> 제도를 수입하여 개경 남대문(南大門) 밖에
원구단을 설치해 직접 제사를 올렸다.
원구단은 중원대륙 왕조에서 시작된 것으로 황제가 하늘에 제를 지내던 제단이다. 황제는 천자
(天子)를 칭했는데, 이는 하늘의 아들이자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란 뜻이다. 그
래서 황제국에서만 원구단을 두어 제천(祭天)을 지냈으며, 제후국(諸侯國)이나 조그만 나라에서
는 감히 원구단을 둘 수 없었다. 허나 고려는 비록 땅은 작았지만 엄연한 황제국이라 원구단을
두었다.

성종 이후 400년 가까이 원구단을 이어오다가 1385년(우왕 11년) 제후국의 예를 따르며 원구단
을 없앴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원(中原)을 차지한 명나라의 눈치를 적지 않게 보
던 시절이었다.
천하가 조선으로 바뀐 이후 1394년(태조 2년) 태조는 동방신 청제(靑帝)에게 제를 지내고자 원
단(圜壇, 원구단)을 설치했고 1419년(세종 1년) 고려의 예에 따라 원단을 운영했다. 허나 1464
년 세조는 나라의 자존심도 내버리고 스스로 제후국의 예로 낮추면서 원단을 폐지하고 만다.

원단이 사라지고 430년이 지난 19세기 후반,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
낀 고종은 경복궁을 내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들어가 1년을 머물렀다. 이 우울한 사건을 이른
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부른다.
1897년 2월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신하들과 독립협회의 권유로 칭제건원(稱帝建元, 황
제를 칭하고 연호를 씀)을 구상하고 그해 9월 21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할 공간으로 덕수궁과 불
과 100m 남짓 거리인 지금의 자리에 원구단을 쌓을 것을 명했다.

원구단은 3층 건물로, 하늘을 본떠 둥그런 모습으로 만들었다. 즉 하늘은 둥그렇고 땅은 네모진
천원지방(天圓地方)을 따른 것이다. 지금이야 건물을 6각형으로 짓던 10각형으로 짓던 제한이
없으나 옛날에는 원형(圓形)과 8각형 건물은 오로지 황제국에서만 지을 수 있었으며, 조선 개국
부터 1897년 이전까지는 최대 6각형 건물까지만 지을 수 있었다. <경복궁 향원정(香遠亭)이 6각
형임>

드디어 원구단이 완성되자 즉위 날로 잡은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만조백관(滿朝百官)을 거
닐고 원구단으로 행차했다. 그날 아침, 어느 선왕(先王)이 꿈에 나타나 '예로부터 있어 온 유풍
(遺風)을 바꿔서는 안된다'
라 말했다고 한다. 이상한 꿈에 기분이 썩 좋지 않던 고종은 즉위식
장으로 가기 위해 밖으로 터벅터벅 나오는데, 그를 위해 준비된 40명이 메는 대련(大輦)을 보자
갑자기 뚜껑이 열려 4명이 메는 소련(小輦)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탄다고 소란을 피웠다.

급히 마련된 소련에 오른 고종은 삼색기(三色旗)를 든 전위대(前衛隊)가 앞을 서고 대신들이 말
을 타고 그 뒤를 따랐으며, 조선군이 아닌 왜군이 호위를 맡았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돌연 철
종(哲宗)의 사위이자 내부대신(內部大臣)으로 나중에 친일파로 더러운 뒷끝을 보인 박영효(朴泳
孝)가 말에서 뚝 떨어졌다. 고종은 그 모습을 보고 '불길한 일이야~!' 중얼거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덕수궁에서 원구단 정문에 이르는 연도(輦道)에는 즉위식을 보려는 백성들이 축기(祝旗)를 들며
황제를 환호했다. 드디어 원구단에 이른 고종은 하늘과 땅에 고하는 고천지제(告天地祭)를 지내
고 조선의 시조인 태조 이성계를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라 추존하며, 금빛 찬란한 금의상좌(金
椅上坐)에 오름으로써 성대한 즉위식은 끝났다.
그리고 다음날(13일) 덕수궁 태극전(太極殿, 즉조당)에서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으며 나라 이름
을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연호를 건양(建陽)에서 광무(光武)로 갈면서 자신이 황제에 올랐음
을 만천하에 천명했다. 이 일로 조선 초부터 500년 가까이 이어진 명과 청에 대한 지극한 사대
주의를 청산하고 고려 때와 같은 자주적인 제국으로 잠시나마 거듭나게 된다.


▲  황궁우 남문에서 바라본 황궁우의 위엄
환구단에 서린 엄숙한 기운에 이곳을 찾은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황제가 있던 대한제국 시절에는 오죽했을까?


고종이 원구단에서 왕에서 황제로 업그레이드 된 그 시간 수구파(守舊派) 일부 대신들은 황제즉
위식을 반대하며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지방에선 사대주의 유학에 쩔은 꼴통 유생들이 망
배(望拜)를 하며 통곡하고 있었다. 즉위식을 지켜본 어느 외국인은 '세계 역사상 이토록 즐겁지
않은 황제 즉위식은 없었다'
고 기록했다.

1899년 원구단 옆에 황궁우(皇穹宇)가 완성되자 완공 기념으로 태조고황제의 신위(神位)를 하늘
의 배위(配位)로 올리는 배천대제(配天大祭)를 지냈다. 그래서 천신지기(天神地祇)와 태조의 위
패는 황궁우에 모시고 제사는 원구단에서 지내게 된다. 황궁우의 상량문(上樑文)은 윤용선(尹容
善)이 짓고 서정순(徐正淳)이 글씨를 썼다.

황궁우는 8각으로 쌓은 기단(基壇) 위에 3층으로 세운 8각형 전각으로 남쪽에 건물 내부로 들어
가는 출입구를 두었다. 1층과 2층은 통층으로 되어 있고 그 중앙에 천신과 태조의 위패를 모셨
으며, 3층에는 각 면마다 3개의 창을 냈다. 건물 주위로 왕릉의 돌난간을 두르고 일정한 간격으
로 석대(石臺)를 두어 해태와 비슷한 귀여운 돌짐승을 배치해 건물을 지키도록 했으며, 뜨락 주
변으로 넓게 또다른 돌난간을 둘러 2중의 난간으로 황궁우를 에워싼다. 그외에 어재실(御齋室)
과 향대청(香臺廳), 전사청(典祀廳), 광선문(光宣門),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정문 등의 부
속시설을 갖추었다.


▲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리고자 세운 석고단의 석고(石鼓)
3개의 석고는 천제를 지낼 때 쓰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몸통에 용무늬가 진하게
새겨져 있다. 이 무늬는 조선 후기 조각품 중의 가히 일품으로 평가된다.


1900년 고종은 대신을 이끌고 제천의식을 지내고자 이곳을 찾았다. 원구단의 포장을 두르고 제
사를 올리려는 찰라 갑자기 하얀 포장 틈에서 승려 1명이 불쑥 튀어 나와 '초능력인 천안통(天
眼通)으로 폐하의 앞날을 예언하겠습니다'
외치며 소란을 피운 것이다. 그를 잡아 문초를 해보
니 개운사(開運寺, 서울 안암동)의 승려였다.
승려의 소란에 단단히 뚜껑이 열린 고종은 개화파 이동인(李東仁) 때문에 잠시 허용된 승려의
도성(都城) 출입을 다시 금지시켰다.

1902년 고종 황제의 성덕(聖德)을 찬양하고 즉위 40주년을 경축하고자 3개의 석고를 갖춘 석고
단(石鼓壇)을 세웠다. 이는 주(周)나라 때 선왕(宣王)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북 모양의 돌에 새
겨 10곳에 세웠다는 고사에 따른 것으로 고종의 성덕을 찬양하는 석고문(石鼓文)을 새겼으며,
웅장한 석고각(石鼓閣)을 지어 석고를 보호했다. 그리고 석고단 앞에 광선문을 두었다.


▲  정갈하게 깔린 황궁우 남쪽 산책로 (황궁우 주변 잔디는 모두 제거됨)

이토록 황제가 특별히 옆구리에 끼고 살던 대한제국의 상징이자 성지(聖地)였던 원구단은 1910
년 이후 나라를 잃으면서 오갈데 없는 시련을 당하게 된다.
1911년 2월, 왜정(倭政)은 원구단의 모든 부지와 건물을 조선총독부 철도국으로 이관시켜 1913
년 원구단을 부셔버리고 그 이듬해 붉은색의 서양식 건물인 총독부 소속 철도호텔을 세워 원구
단의 기를 눌렀다.

왜정은 그걸로도 성이 차질 않는지 1927년에는 총독부 도서관을 짓는다며 석고각의 정문인 광선
문을 남산(南山)에 있던 왜식 사찰 동본원사(東本願寺)로 추방시켰다. (지금은 없음) 또한 1935
년에는 석고각마저 이토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博文寺, 장충동 신라호텔 자리)로 보내 그곳
의 종루(鐘樓)가 되는 치욕을 겪었다.
박문사는 1945년 11월 화재가 나면서 알아서 붕괴되었으나 석고각은 다행히 화재를 면했다. 이
승만 전대통령은 1958년 11월 박문사터를 찾아 석고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이 석
고각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았다. 서울 도심의 심장부에 있음에도 관리 소홀로 귀신도
모르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귀신도 모름)

이렇게 문과 집까지 빼앗긴 석고단 석고는 다행히도 자리를 지켰으나 호텔 뜨락의 장식물이 되
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으며, 환구단 건물은 달랑 황궁우와 정문 만을 남겨 석고와 함께 호텔의
장식용으로 삼았다. 아예 부실려면 다 부시던가. 아니면 모두 유지시키던가 해야되는데 왜정은
일부만 남기는 치졸한 방법(조선 궁궐과 관청, 성곽 대부분이 이런 꼴을 당함)으로 망국의 환구
단을 욕보인 것이다. 이로써 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던 성스러움과 엄숙함은 모래성처럼 휩쓸
려 사라지고 말았다.

해방 이후 철도호텔은 조선호텔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1967년 철거하여 18층의 새 호텔을 지었
다. 그 과정에서 어이없게도 환구단의 정문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화유산 보존
과 활용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시절이었다.

2000년 이후 황궁우 주변을 손질하여 문화유산을 겯드린 시민공원(환구단시민공원)으로 꾸몄으
며, 사라진 정문을 우이동(牛耳洞) 그린파크호텔에서 발견하고 2009년 겨울, 소환하여 복원공사
를 벌였다. 그리고 황궁우 주변 잔디를 모두 밀어버리고 문화재 관리인을 두어 매일 망국의 제
단을 지킨다.
비록 옛날의 위엄은 거진 말라버렸지만 삭막한 도심 빌딩숲에서 삶에 지친 도시인들이 잠시 쉬
어가는 공간이자 문화와 역사, 자연의 향기가 깃들여진 도심 속의 소중한 보석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배층의 지엄했던 공간이 백성들의 쉼터로 180도 바뀐 것이다.

▲  황궁우로 인도하는 동쪽 협문

▲  황궁우 서쪽 협문(夾門)

황궁우로 인도하는 협문은 높이가 낮아 들어갈 때 머리를 푹 숙이기 바란다. 그래야 뒷탈이 없
을 것이다. 이렇게 문을 낮게 만든 것은 그 시절 사람들의 키가 작아서가 아니다. 성스러운 공
간이니 엄숙을 지키고 머리를 숙여 예의를 표하라는 뜻이다. 문에 부딪치지 않게 머리를 푹 숙
여 들어서니 마음가짐이 절로 숙연해진다.


▲  삼문(三門)으로 이루어진 황궁우 남문

황궁우 남쪽에는 원구단과 이어지던 문이 있다. 이 문은 벽돌로 만들어 기와를 얹힌 것으로 조
선식 문이라기보다는 명/청나라의 문 이미지가 강하게 풍긴다. 고종과 순종은 원구단에 제를 올
리고 이 문을 통해 황궁우로 들어갔으며, 황제 내외는 당연히 신문(神門)을 상징하는 가운데 문
을 다녔고, 신하와 수행원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왼쪽 문으로 나왔다. 문 좌우로 돌담이 짧게
나마 복원되어 둘러져 있고, 문 앞에는 돌계단이 장엄하게 깔려져 있다.


▲  황궁우로 오르는 돌계단

돌계단은 궁궐 정전(正殿, 중심 건물)의 계단과 비슷한 품격을 지녔다. 황제 내외가 오르던 가
운데 돌계단인 어도(御道)에는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용무늬와 석수(石獸)상이 새겨져 있다.
계단 주변을 두른 돌난간에는 황궁우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석대(石臺)를 두고 가지각색의 표정
을 지닌 돌짐승을 배치했으며, 서쪽 난간의 돌짐승과 동쪽 난간의 돌짐승은 서로를 뚫어지라 바
라 본다.

계단 앞에는 돌로 만든 참도는 없고 어울리지 않게도 검은 돌과 흰돌이 깔려진 막다른 작은 공
터가 있다. 그 앞에는 바로 하늘 높이 솟은 조선호텔이 길과 시야를 제대로 막고 있어 더 이상
갈 수 없다. 뻥뚫린 문이라고는 하지만 문밖이 휴전선처럼 막혀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원구단이 바로 앞에 있었고 시야도 좋았건만 지금은 엉뚱하게도 호텔의 1,2층 식당이
정면에 바라보이는 것이다. 내가 한참 계단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을 때 깔끔한 차림의 식당 종
업원들이 부지런히 식당을 정리하고 있었다. 신성한 제단의 문이 졸지에 호텔의 고급 식당과 거
기서 밥을 먹는 작자들이나 멀뚱히 바라보는 가련한 처지가 되버린 것이다.


▲  황궁우 남쪽에서 바라본 남문
문 바로 앞에 조선호텔 1,2층 식당이 길과 시야를 가로막는다.
얼핏 보면 식당가로 가는 문으로까지 보일 정도이다.
이것이 바로 망한 제국의 비운이다.


원구단을 제대로 복원하고자 한다면 조선호텔을 확 밀어버려 원구단과 황궁우를 잇는 길과 홍살
문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원구단 복원까지는 바라지도 않음) 비록 부질없는 망국(亡國)
의 제단이지만 왜정이 원구단을 부시고 황궁우 바로 앞에 호텔을 세운 것은 대한제국의 성역(聖
域)인 원구단을 훼손하여 이 땅의 역사와 자존심을 제대로 깔아 뭉개려는 간악한 속셈 때문이다.
비록 왜정 때 만든 호텔은 철거되었다고 해도 그 자리에 계속 호텔이 뿌리를 내려 원구단 자리
를 깔아뭉개고 있으니 왜의 속셈은 여전히 먹혀들고 있는 셈이다. 다소 힘들긴 하겠지만 호텔을
다른데로 옮겨서라도 황궁우가 빌딩 그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났으면 좋겠다. 솔직히 그 호텔만
없어도 남쪽은 확 트이고도 남는다.


▲  2마리의 용이 새겨진 용무늬
 아무리 떡을 주물러 무늬를 새긴다 해도 저처럼 정교하지는 못할 것이다.

▲  일그러진 표정의 돌짐승상
원구단을 철저히 깔아 뭉개고 바로 앞에 호텔을 지은 작자들에 대한 분노의 표정은
아닐까? 부디 저들의 표정이 씨익 밝아지는 그날이 왔으면 좋으련만~~

▲  42년 만에 제자리를 찾은 환구단 정문 (지금은 문 옆에 담장을 두름)

환구단 서쪽(시청 방향)에는 환구단의 정문이 자리해 있다. 이 문은 1897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
래는 황궁우 남쪽 지금의 조선호텔 출입구가 있는 소공로(小公路)에 있었으며, 왜정 때도 운좋
게 살아남았으나 1967년 조선호텔을 새로 만드는 과정에서 철거되어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 이후 2007년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호텔이 리모델링 공사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호텔의 기
와집 정문이 1967년에 사라진 환구단 정문임이 밝혀졌다. 어찌하여 그곳까지 흘러들어갔는지는
속시원한 정보는 없으나 문이 발견되자 정문 복원을 추진하여 타향살이 42년 만인 2009년 지금
의 자리로 이전되어 그해 12월 복원되었다. 원래는 본 위치였던 조선호텔 남쪽 소공로에 갖다두
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곳에는 적당한 공간이 없어서 부득이 환구단 서쪽에 복원한 것이다. 뼈아
픈 세월을 겪고 환구단의 정문으로 귀환의 기쁨을 누렸지만 끝내는 원래 자리로 가지 못한 점이
아쉽다.

환구단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삼문(平三門)으로 제왕이 드나드는 가운데 칸을 넓게 만
들고 좌우 협문을 좁게 만들었다. 기둥 위에는 출목(出目)을 갖춘 2익공식(二翼工式) 공포를 달
았고,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인 오얏꽃 문양과 봉양문을 장식으로 달아 문의 품격을 드높였으며,
문 좌우에는 아주 짧게나마 담장이 복원되어 있다. 현재 정문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며, 그 좌
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된다.

※ 환구단 찾아가기 (2014년 6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6번 출구를 나오면 더플라자호텔이다. 호텔 앞을 지나면 바로 길 건너
  로 하나은행이 보이는데, 그 왼쪽에 환구단 정문이 있다. 그 정문 옆을 지나거나 하나은행 남
  쪽에서 웨스틴조선호텔로 들어가도 된다.
*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8번 출구에서 시청 방면으로 가다가 롯데호텔을 지나면 왼쪽으로
  조그만 골목이 있다. 그 길로 가면 환구단 황궁우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87 (소공로 112)


♠  덕수궁(경운궁) 주변 둘러보기

▲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大漢門) - 사적 124호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옛날에는 왕족과 귀족
들만 들어갈 수 있던 금문(禁門)이지만 지금은 시대에 맞추어(물론 강제적이긴 하지만) 소정의
입장료만 내면 누구든 들어갈 수 있는 사적공원의 정문으로 안면을 바꾸었다.

환구단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선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앞에 있던
것으로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 그러다가 1906년 지금의 시청앞 광장으로 자리를 옮
기고 이름을 대한문으로 갈았다. 당시 서울광장을 포함한 시청로터리의 3할 정도는 덕수궁의 영
역으로 왜정 때 태평로의 전신(前身)인 태평통(太平通)이 뚫리면서 그 영역이 크게 축소되었으
며, 1968년 태평로(太平路)를 크게 확장하고자 덕수궁 담장을 지금의 위치로 밀어내면서 대한문
도 덩달아 현재의 자리로 물러나 앉게 되었다.
1919년 2월, 망국의 황제 고종(高宗)이 세상을 뜨자 수많은 백성들이 문 앞으로 구름처럼 몰려
와 애도를 표한 현장이기도 하다.

대한문의 현판(懸板)은 당시 한성판윤(漢城判尹, 서울시장) 남정철(南廷哲)이 썼으며, 문의 이
름을 대안(大安)에서 대한(大漢)으로 바꾼 이유는 다음의 2가지 때문이다.
① 대한(大漢)은 큰 하늘(은하수)을 뜻한다. <
이근명(李根命)이 쓴 대한문 상량문(上樑文)>
   즉 하늘과 같은 황제(고종)가 계신 곳이란 뜻이다.
② 전비서승 유시만(前秘書丞 柳時萬)이 고종에게 건의하기를 '안(安)을 한(漢)으로 고치면 국
   조(國祚)가 연창(延昌)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꿨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

그외에 몇 가지 헛소리로 ①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빗대어
'큰 놈이 드나드는 문'이란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漢)에는 놈이라는 뜻도 있다. 예를 들면 치한(癡漢)> ② '
갓을 쓴 여자(安)' 즉 배정자(裵貞子)가 궁궐을 들락거리는 꼴이 상서롭지 못하여 남자를 뜻하
는 한(漢)으로 바꿨다는 말도 있다. <경성 오백년(1926)>, <경성의 광화(1926)>, <조광 1937년
11월호>, <경성과 인천(1929)>
③ 근본과 핏줄이 엉망인 중원대륙 잡종들이 중원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를 상징한다며 빗
대어 말하는 경우도 있다. 대한은 한족(漢族)과 중원을 뜻한데나 뭐래나?
한족 대부분은 수 천년에 걸쳐 대륙을 침범한 온갖 민족들에게 유린을 당하면서 아버지를 모를
정도로 피가 복잡하게 엉킨 섞어찌개 신세가 되었다. (순수 한족은 1% 정도라는 연구 결과도 있
음) 특히나 17세기 이후에는 우리의 친척 민족인 만주족(여진족)이 대륙을 싹 잡아먹으면서 그
나마 남은 명나라 한족들은 영혼과 머리털까지 싹 털렸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양
이(洋夷)와 왜의 침략으로 중원의 잡종들은 다시 한번 비빔밥이 되고 만다.


▲  서울 도심에서 만난 중세유럽식 성당
성공회(聖公會) 서울성당(聖堂)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5호


덕수궁의 북쪽에는 옛 국회의사당으로 쓰였던 서울시의회 건물이 있다. 등록문화재 11호로 지정
된 서울시 의회(지정 명칭은 서울 구 국회의사당) 뒤쪽에는 마치 로마 바티칸이나 중세 유럽에
온 듯한 착각을 진하게 풍기는 거대하고 고풍스런 성당이 하나 있다. 바로 성공회서울성당이다.
이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 20세기에 지어진 양식(洋式) 건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손꼽힌다.

우리나라에 성공회(聖公會)가 들어온 것은 1890년이다. 1889년 11월 영국의 켄터베리 대주교 벤
슨은 이 땅에 성공회를 침투시키고자 영국 해군의 군목(軍牧)인 코프(C.J. Corfe)를 주한(駐韓)
주교(主敎)로 임명했다. 명을 받은 코프는 2명의 영국 의사와 트롤로프와 워너 두 신부를 이끌
고 1890년 9월 인천에 발을 내렸다.
도착 직후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선교를 벌이고 영국대사관 옆 미국인 선교사 집을 빌려 교회
와 시약소(施藥所)를 열었고, 그 해 12월 21일 드디어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열었다. 그때는 외
국인만 참석했으며, 조선인 하인은 바깥에서 불을 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4일 뒤인 25일
크리스마스 미사 때는 조선인 3명이 '이것들 뭔가?' 기웃거리며 바깥에서 구경만 하고 돌아갔다.

1891년 부활절에 충무로1가(현 대연각빌딩)에 교회를 임시로 마련하여 '부활의 집'이라 불렀다.
이듬해 겨울에는 30여 평의 한옥을 새로 짓고 '강림성당'이라 하였는데, 여전히 서구인과 왜인
중심으로 미사를 열 뿐, 조선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99년 12월 18명의 조선인이
세례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위한 한국어 미사가 거행되기에 이른다.

1904년 초대 주교인 코프(우리 이름으로 고요한)가 귀국하면서 터너(A.B. Turner)가 2대 주교가
되었다. 그는 성공회가 운영하는 병원과 학교, 고아원을 자립시키고 교회마다 부설학교를 세워
실업 교육을 실시하고 교회조직과 토착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열중했다. 또한 YMCA
창립준비 작업에 참여하여 1903년 체육위원회 위원장으로 1906년에는 황성기독청년회 회장이 되
었으며, 우리나라에 축구를 도입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러일전쟁 이후 왜인에 의해 부활의 집이 폐쇄되어 임시로 성베드로병원으로 옮겼으나 신자의 수
가 많아지자 한국어와 영어, 왜어(倭語) 3개 국어로 각각 별도의 장소에 미사를 봤다.


▲  목 아프게 바라본 성공회 서울성당의 지붕

1909년 터너는 영국의 'Morning Calm'이란 선교 잡지에 '서울대성당기금' 모금을 호소했다. 이
듬해 6월, 서울에서 열린 교구협의회에서 성당 건립기금 모금을 결의했으나 그 해 10월 병사하
고 말았다.

1911년 그의 뒤를 이어 트롤로프(M.N. Trollope)가 3대 주교가 되었다. 그는 3개 국어로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진행되는 미사를 한곳으로 통합하고자 성공회성당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영국 왕립건축학회(RIBA) 회원인 딕슨에게 설계를 의뢰했는데, 그는 몇 번을 왔다갔다 한 끝에
성채 분위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선택했다. 허나 조선에서 건축비 조달이 어려워 영국에 도움
을 청했으나 1914년에 터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1914년 왜정은 경성부(京城府) 도시계획에 따라 태평통 거리를 확장시키자 성공회는 그 도로변
에 성당을 짓기로 계획했다. 그리고 1920년 영국에서 지원금을 받아 일단 대한제국의 황족과 귀
족들의 교육 공간인 수학원(修學院, 양이재)을 매입하고, 1922년 9월 24일 성당 공사를 시작해
1926년 5월 2일 173평이 완공되어 '성모마리아와 성니콜라 대성당'이라 이름 지었다. 하지만 그
건 완전한 완공은 아니었다. 총 공사비 3만원 중 절반도 안되는 1만 4천원만 모금되었기 때문이
다. 그래서 우선 원래 설계의 절반 정도만 지은 것이다.

트롤로프는 절반의 건축을 마무리 하며 '예비 대성당'이라 불렀다. 그는 왜국에서 열린 주교회
의에 갔다오다가 돌연 병사하면서 성공회성당은 절반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세월을 지내야
했다.


▲  성공회 서울성당 주교관

그 이후 1993년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고자 신자들을 독촉해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던 중, 문화재
위원회로부터 김빠지는 소리를 듣게 된다. 바로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증축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성당 측은 '미완성 건물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설득했으나, 문화재청은 '미완성인
형태로 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변형은 절대 안된다. 사실을 증명할 원 설계도가 없는 한
증축은 꿈도 꾸지 마라'
답을 했다.

허나 다행히도 1993년 7월 이곳을 찾은 영국 관광객이 영국 도서관에 이 성당의 건축/설계도면
이 있다는 낭보를 전했다. 이에 성당 대표들은 서둘러 영국으로 날라가 런던 부근 렉싱통도서관
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복사하여 문화재청에 제출하자 문화재위원들은 증축 허가에 도장
을 쾅 찍어주었다. 그리하여 66억의 거금을 쏟아부어 1994년 5월 27일부터 공사를 시작, 1996년
5월 2일 완공을 보았다. 이로써 트롤로프 주교의 못 다 이룬 꿈이 7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성당은 '十' 모양의 건물로 성채처럼 웅장하고 견고하다. 화강석과 붉은 벽돌로 건물을 치장했
으며 종탑(鐘塔)이 있는 종탑부에는 중앙의 큰 종탑과 그 앞의 작은 종탑이 연결되어 있다. 지
하에는 지하성당이 자리해 있는데 트롤로프의 시신이 이곳 마룻바닥 중앙에 안장되어 있다.

이 성당은 특히 1979년 9월, 10월 유신에 대항하여 '선교 자유를 위한 기도회'가 열린 것을 시
작으로 1987년까지 자유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 기도회와 시위 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
명동성당과 더불어 민주성지(民主聖地)로 꼽히며, 성당 주교관에는 '6월 민주항쟁 진원지'란 표
석이 자랑스럽게 자리해 있다.


▲  경운궁 양이재(養怡齋) - 등록문화재 267호

성당 뒤쪽에는 옛 덕수궁(경운궁)의 전각이던 양이재가 있다. 1904~1906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
로 황족과 귀족들의 근대식 교육을 담당하던 수학원(修學院)으로 쓰였다. 이후 왜정에 의해 덕
수궁에서 분리되어 민간에 강제 매각되었는데, 대한성공회가 1920년 이 건물을 물어 이곳으로
옮겼다.
건물이 많이 변형되긴 했으나 기본적인 모습은 잘 남아있으며, 2008년에 복원공사를 벌여 지금
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곳에는 이 건물 말고도 넓게 벌려진 'П' 모양의 한옥이 있는데 이는 주
교관(主敎館)이다. 서양 중세식 성당과 우리의 옛 한옥이 한데 어우러진 조화의 현장으로 1999
년 4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곳을 방문한 바 있다.


▲  성공회 서울성당 앞에 누워있는 명례궁(明禮宮)터 표석

성공회성당 앞에는 명례궁 표석이 누워있다. 명례궁은 조선 후기에 비빈(妃嬪)들의 생활공간으
로 덕수궁 북쪽에 지은 것으로 덕수궁의 일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참고로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사저도 명례궁이라 불렸다.

※ 성공회 서울성당 찾아가기 (2014년 6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3분 (이정표가 있음)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6번 출구에서 시청 방면으로 도보 6분
* 성당 관람 시간 : 매주 화~토요일 오전 11시부터 16시까지, 성당 입구에 안내봉사자가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3 (문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 02-730-6611)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 홈페이지는 위의 명례궁터 표석 사진을 쿨하게 클릭한다.

◀  구세군 중앙회관(救世軍 中央會館)
 - 서울 지방기념물 20호

서울시립미술관입구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북쪽으로 6~7분 정도 가면 돌담이 끝나기가 무섭
게 르네상스풍의 구세군 중앙회관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겨울마다 빨간색 자선냄비를 전국에
뿌리는 구세군의 본거지로 처음에는 구세군 본관(本館)으로 쓰였으나 근래에 중앙회관으로 이름
을 갈았다.

이 땅의 구세군은 1908년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암 부드(William Booth)의 지시로 영국 선교사
로버트 허가드<R, Hoggard, 조선식 이름 허가두(許加斗)> 정령이 5명을 데리고 조선에 들어오면
서 시작된다. 그들은 1909년 서대문 부근 평동에 영문(營門, 구세군 교회를 우리말로 그리 번역
함)을 세워 영업을 벌였는데, 성공회와 달리 금세 많은 교인들을 모집했다. 그래서 새문안(광화
문 부근)과 광교 부근에 영문을 추가로 지었으며 부산과 평양(平壤) 등 지방까지 영업을 확대하
여 큰 성과를 거둔다.
이처럼 구세군이 짧은 기간에 많은 교인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2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세상을
구한다는 구세군이란 명칭이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다른 하나는 영국 선교사들이 군복을 입고
교인이 되는 입대를 권하자 그것이 나라를 구하는 군대인줄 알고 몰려든 것인데, 조선 통역인의
엉뚱한 해석도 크게 한몫했다. 예를 들면 선교사가 영어로 '보혈 속죄','회개 성결','마귀 속박
에서 자유'를 외치면 통역인은 '국권회복','국가독립','왜정 지배에서의 독립'으로 해석했던 것
이다. 그러니 나라를 구하고자 순박했던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것이다.
충청도에서는 구세군에 입대하면 군복과 신식 무기를 준다는 방을 붙어 교인을 모집했으며 그들
을 모아 군사 훈련까지 벌였다.

허가드는 조선에서의 구세군 사업이 영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자 '구세신문(지금의 구세공보)'
을 통해 교인들의 정치 참여를 강력히 경고했으며, 독립군으로 잘못 알고 지원한 이들에게 총
대신 성경을 쥐어주며 구세군의 성격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상당수가 실망을 머금으며 구세군을
떠났다.

1910년 신문로에 한국 본영(本營)을 세우고, 한국인 사관을 양성하는 구세군사관학교로 사용했
으며, 1926년 구세군 만국본영 제2대 사령관 브람웰 부드의 70세 생일을 맞아 한국 구세군이 '
미주 순회단'을 조직해 미국과 캐나다를 돌면서 7만원을 모아 1927년 친일기업인의 모임인 대정
친목회(大正親睦會)의 토지 851평을 구입했다. 이 땅은 원래 덕수궁 영역으로 선원전(璿源殿)의
부속 건물이 있었는데, 오로지 영업확장과 건물 신축에만 관심이 있던 구세군은 1928년 이들 건
물을 싹 밀어버리고 지금의 구세군 중앙회관을 지었다.
이후 건물 뒤쪽을 증축했지만 대체로 원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 정면의 4개의 기둥
과 지붕은 덕수궁 석조전(石造殿)과 비슷하다. 붉은 벽돌로 몸을 치장하여 색다른 분위기를 자
아내며, 중앙현관에는 1926년에 세운 국한문과 영문으로 된 석조기념관이 있고, 1층은 100주년
기념관, 2층은 자료전시실로 쓰인다. 왜정 때 지어진 서울의 근대 건축의 하나로 1995년 구세군
역사 자료를 모아 1층에 구세군 역사박물관을 설치했으며, 2002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구세군 중앙회관(한국 구세군 역사박물관) 찾아가기 (2014년 6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1, 12번 출구), 덕수궁 대한문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도보 11분
*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6번 출구에서 3분 정도 직진하면 왼쪽에 덕수초교를 경유하는 덕수궁
  길이 나온다. 그 길로 들어서 3~4분 정도 가면 구세군 중앙회관이다.
* 관람정보 : 매주 월~금요일 10시부터 17시까지 (입장료는 공짜, 토요일은 관람 요청이 있을
  경우 공개 가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1-23 (덕수궁길 130 ☎ 02-6364-4086)
* 한국 구세군 역사박물관은 위의 구세군 중앙회관 사진을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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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6월 10일부터
 * 글을 보셨다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요. 바로 밑에 있는 네모난 청색 박스 안의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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