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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1.17 새해맞이 산사 나들이, 예산 금오산 향천사 (산사의 조촐한 설경) 2
  2. 2015.10.24 경주 남산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석불, 보리사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보리사 마애석불)

새해맞이 산사 나들이, 예산 금오산 향천사 (산사의 조촐한 설경)

 


' 한겨울 산사 나들이 ~ 예산 금오산 향천사(香泉寺) '

▲  제각각의 모습을 지닌 천불전의 천불(千佛)


 

묵은 해가 저물고 새해가 밝으면 온갖 기대감이 나를 설레게 한다. '올해는 잘될거야','돈
많이 벌겠지~!' 등의 바램 말이다. 그런 희망을 품으며, 새해 첫 답사지로 어디를 갈까 궁
리하다가 문득 충남 예산에 시선이 멈추어 그곳에 있는 향천사를 찾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으나 급하게 갈 이유가 전혀 없어 느림의 미학(美學)이나 누릴 겸, 굼
벵이 1호선 전철을 타고 방학역에서 아산시 신창역까지 내려갔다. 거리는 자그마치 130km,
소요시간은 3시간이다. 그것도 서울역에서 천안으로 가는 급행 전철(1일 3회, 평일만 운행)
의 노력 덕분이다.
그렇게 나의 근성을 오랜만에 테스트하며 수도권 전철의 최남단인 신창역에서 잠시 대기를
탔다가, 예산읍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다시 40분을 달려 예산읍내 동쪽 쌍송배기(쌍송
리)에서 두 발을 내린다.
쌍송배기는 아산이나 신례원, 삽교, 덕산 방면 예산군내버스의 종점이자 유구, 청양(靑陽)
방면으로 넘어가는 요충지로 향천사까지는 2km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이다. 게다가 길도 잘
닦여져 있고 오르막도 거의 없어 산책 삼아 가볍게 거닐면 된다.


▲  향천사 가는 길
읍내를 벗어나도 일주문 직전까지 속인(俗人)들의 집은 계속 줄을 잇는다.


 

  향천사에 들어서다

▲  향천사 일주문(一柱門)

향천사입구인 예산초교에서 20분 정도 걸으니 일주문이 흔쾌히 마중을 한다. 일주문은 절의 정
문으로 대부분의 절이 필수로 갖추고 있다. 절에 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존재로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가르는 역할도 하지만 마음을 하나로 다듬고 절로 들어서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 일주문은 2003년 10월에 세워졌는데, 문을 받치는 2개의 기둥은 가운데가 좀 볼록하며, 기둥
위에는 양쪽으로 누런 꼬랑지의 용 2마리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어 마치 견우와 직녀를 보는 듯
하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평방(平枋) 앞에는 '금오산 향천사(金烏山 香泉寺)'라 쓰인 현판이
있는데, 글씨가 좀 간결해보이면서도 필력이 넘쳐 보인다. 그리고 뒤쪽에도 현판이 있는데, '호
서가람천불선원(湖西伽藍千佛禪院)'이라 쓰여 있어 향천사의 성격을 쿨하게 알려준다.


▲  서로 마주보며 일주문을 수식하는 용 2마리

▲  기둥에 몸을 의지한 용과 그의 꼬랑지

▲  일주문의 뒷모습과 절의 성격을
담은 8글자 현판


▲  창건 유래비가 있는 계단길 입구

일주문을 들어서 1분 정도 가면 넓다란 공간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3갈래로 갈린다. 왼쪽은
향천사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이고, 오른쪽은 금오산 등산로, 정면에 보이는 계단길은 경내로 통
한다. 그러니 두 발로 가는 경우에는 호젓하게 계단길로 가는 것이 좋다. 차량을 이용해 경내로
들어서거나 금오산 등산을 원할 경우는 오른쪽 길을 이용하면 된다.

돌계단 앞에는 절의 창건 유래를 머금은 창건 유래비와 붉은 글씨로 향천사라 쓰인 표석이 있으
며, 이들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외부에서 보이지 않던 향천사의 건물이 지붕부터 슬슬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2번째 돌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경내에 이르게 된다.


▲  경내로 인도하는 1번째 돌계단 ~ 느긋하고 여유로운 모습이다.

▲  2번째 돌계단 너머로 얼굴을 보이는 극락전

▲  잠시 물 1모금의 여유
둥그런 석조(石槽)에는 자연이 베푼 약수가 넘칠 정도로 가득하다.

▲  1번 째 계단보다 조금은 각이 선 2번 째 계단을 오르면 비로소
향천사 경내에 이르게 된다.

▲  향천사 경내 (극락전 주변)

※ 예산 향천사의 간략한 내력(來歷)
예산읍내 동북쪽 금오산(223m) 밑에 포근히 둥지를 튼 향천사는 예산 땅에서 수덕사(修德寺) 다
음가는 절로 655년(백제 의자왕 14년)에 백제의 고승 의각선사(義覺禪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과연 의각이 세웠는지는 믿거나 말거나 창건 설화 외에는 입증할 기록이 없어 그저 답답할 따름
이지만 경내에 있는 9층석탑이 7세기 중반 이후에 세워진 것이라 하므로 그것이 맞다면 대충 창
건 시기는 맞아 떨어진다.

향천사를 세웠다고 전하는 의각선사는 백제 승려로 652년 백제의 별채인 왜열도로 건너가 백제
사(百濟寺)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다가 뜻한 것이 있어서 바로 당나라로 가는 배에 몸을 싣고
3년 동안 오자산(五子山)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하면서 석불 3,053개를 비롯하여 전단향(旃檀香
)나무로 만든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16나한상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655년 당나라에 온 백제 사신을 따라서 귀국했는데, 귀국하면서 오자산에서 만든 석불을 바리바
리 싣고 왔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와 오산현(예산) 북포 해안에 이르렀으나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 석불들을 계속 배에 방치했다. 이때 배 안에서 종소리가 나 해변에 진동했다
고 하여 부근 마을 이름을 종성리(鐘聲里)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의각의 방황을 보다 못한 금까마귀 1쌍이 찾아와 지금의 절 자리를 알려주었다
고 한다. 그래서 의각은 그 자리에 향천사를 세워 석불을 봉안하고 까마귀에게 보은(報恩)을 하
는 차원에서 산 이름을 금오산이라 했다고 한다. (이후 의각이 만들었다는 불상의 존재는 나오
지 않음)

그렇게 절이 창건된 이후, 승려 도장(島藏)이 잠시 절을 관리했다. 그러나 660년 가을, 백제가
허망하게 망하자. 백제의 속방(屬邦)인 왜국으로 건너갔다.
왜왕(倭王, 아마도 제명여왕이나 천지왕으로 생각됨)은 그에게 귀의(歸依)할 것을 부탁했고, 마
땅히 갈 곳이 없던 그는 그 청을 받으니 왜왕이 기뻐서 동량지원수(棟梁之願袖)란 존호(尊號)를
주었다고 한다.
이후 옛 백제 땅으로 돌아와 향천사와 송림사(松林寺)에 머물렀는데, 698년(신라 효소왕 7년)
신라 왕실의 지원으로 동관음전과 서로전, 동선당, 향적전, 관음암 등 400여 칸의 건물과 암자
를 지었다고 하며, 그 이후 호서 제일의 명찰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840년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는데, 그는 837년 당나라로 건너가 840년 석
불 1,053개를 가지고 귀국하여 향천사에 천불전과 극락전을 지었다고 한다.

▲  천불선원 표석

▲  향천사 창건 유래비

1359년(공민왕 5년)에는 극락전에 아미타3존불을 봉안했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된 것을
멸운(滅雲)이 1596년에 중건하여 100여 칸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그는 승병 70여 명을 이끌고
금산(錦山)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운 승려이다.

1702년에는 범종을 새로 만들었고, 1950년 6.25때 많은 건물이 파괴된 것을 보산(寶山)이 10년
동안 주석하면서 중건했다. 이후 1971년 극락전을, 1982년에는 서선당과 당월당을 새로 지었으
며, 1985년 천불전과 나한전을 해체 복원하고, 1986년 범종각을 짓고 부설(附設) 향천유치원을
만들었다.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천불전과 나한전, 산신각 등 약 10동에 건물이 경내를 가득 메우고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9층석탑을 비롯하여 천불전과 부도, 괘불도
와 오여래/사보살 팔금강도(국가 등록문화재 627호) 등이 있다. 그외에 1702년에 조성된 범종(
梵鍾, 충남 지방유형문화재 171호)도 있으나 보호를 위헤 현재 수덕사 성보박물관에 가있다. 또
한 천불전을 통해 천불선원(千佛禪院)을 강조하며 천불도량으로 절을 키우고 있다.

산사(山寺)이긴 하지만 깊은 산중에 있는 것은 아니며, 읍내에서 무척이나 가깝고 일주문 부근
까지 속인들의 주택이 밀려와 산사의 질감이 조금은 떨어지는 면이 있다. 허나 조용하고 그윽한
분위기는 여전하여 속세에서 오염된 마음을 가다듬기에는 손색이 없으며, 서울 화계사(華溪寺)
처럼 서양인 승려들이 많이 머물고 있어 눈길을 끈다.

절을 둘러보고 시간이 괜찮다면 그를 품고 있는 금오산이나 관모산(391m)을 오르는 것도 괜찮다.
절에서 넉넉잡아 1시간 정도면 그들 정상에 이르며, 정상에서는 시내처럼 넓은 예산읍내가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眺望)이 천하 명품급이다. 금오산은 읍내 사람들의 포근한 휴식처로 향천사
주변 등산로에 의자와 체육시설, 약수터가 마련되어 있다.

▲  향천사 부도군

▲  향천사 범종각

※ 향천사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① 열차나 전철 이용
* 용산역과 영등포역, 수원역, 천안역, 군산역, 익산역에서 거의 1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예산역 하차
* 수도권 1호선 신창행 열차나 서울~신창 누리로 열차를 타고 신창역 하차
② 예산까지 버스 이용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예산행 직행버스가 1일 5회 떠난다.
* 서울 남부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에서 예산행 직행버스가 3~4회 떠난다.
* 인천, 성남, 대전(서부/동부), 천안, 청주, 서산, 보령에서 예산행 직행버스 이용
* 서대전이나 공주에서 예산행 직행버스를 이용할 경우 임성에서 내리면 된다. 임성에서 향천사
  까지 도보 25분. (임성 정차를 확인바람)
③ 현지 교통
* 예산역을 나와서 오른쪽으로 가면 버스정류장이 있다. 거기서 쌍송으로 들어가는 아무 군내버
  스나 타고 쌍송배기 하차 → 버스에서 내려 왼쪽(동쪽)으로 가면 쌍송3거리이다. 여기서 왼쪽
  (아리랑로) 길로 가면 임성정류장을 지나서 향천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쌍송배기에서
  향천사까지 도보 30분 거리) 만약 예산초교를 경유하는 버스를 탔을 경우 예산초교 하차.
* 신창역에서 예산군내버스 420번(1일 8회 운행)을 타고 쌍송배기 하차
* 예산터미널 내부나 바깥 정류장에서 쌍송 방면 군내버스를 타고 쌍송배기 하차 (중간에 예산
  초교 경유하는 차도 있음) 또는 공주 방면 직행버스를 타고 임성 하차
④ 승용차 (경내에 주차장 있음)
* 당진~영덕고속도로 → 예산수덕사나들목을 나와서 예산 방면 → 주교5거리에서 예산로로 진입
  → 쌍송3거리에서 좌회전 → 향천사 이정표에서 우회전 → 향천사

*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향천리 57 (향천사로 117-20 ☎ 041-335-3556)

▲  향천사 천불전

▲  향천사 서래암(西來庵)


 

 

  향천사 극락전, 서선당 주변

▲  청기와가 입혀진 극락전(極樂殿)

향천사의 법당(法堂)인 극락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1년에 새로 지은 것
이다. 원래는 그 우측 나한전 자리에 있었으며, 1983년 옛 극락전을 철거하면서 지금의 건물이
극락전이 되었다. 불단에는 단향목으로 만든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 3존불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는 1359년에 조성된 거라고 한다. (또는 조선 초기나 중기라고 함)
아미타불은 양쪽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거느리고 있으며, 후불탱화와 지장탱화를 비롯한
수많은 불화(佛畵)들이 내부를 곱게 수식한다. 이들 불화는 1993년에 제작된 것이다.
절의 중심 되는 건물이라 그런지 특별히 푸른 빛깔이 나는 청기와를 입혀 법당의 품격을 높였다.


▲  나한전(羅漢殿)과 9층석탑

극락전 우측에는 1983년에 옛 극락전을 부시고 만든 나한전이 자리해 있다. 나한전은 부처의 제
자인 16나한(羅漢)의 보금자리로 그 앞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9층석탑이 우중층하게
서 있다.

◀  위와 아래의 피부색 다른 향천사9층석탑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74호
향천사9층석탑은 경내에서 제일 오래된 보물로
높이가 3.75m이다. 이 탑은 이곳의 2번째 주지
를 지낸 도장(島藏)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전하
며, 백제가 사라진 이후인 7세기 중/후반에 조
성된 백제 탑의 후예이다.
이렇게 지긋한 나이를 지니고 있지만 탑신(塔身
)과 기단(基壇) 부분의 피부 색깔이 너무나 틀
려 상당히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기단부는 그
래도 고된 세월의 때가 자욱하여 까무잡잡하지
만 탑신은 그와는 상반되게 하얀 피부를 드러내
고 있기 때문이다.
탑이 이 모양이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절을 파괴하면서 탑을 아작냈기 때문이다. 절에
는 원래 2기의 석탑(5층탑이라는 설이 있음)이
있었는데, 모두 파괴되어 흩어진 것을 모아서
하나의 탑으로 수습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 되
었다고 한다. 그러니 본래 9층석탑으로 보기도
어렵다.

새로 만든 2중의 네모난 바닥돌 위에 얹혀진 이 탑은 2중의 헌 바닥돌 위에 1층 기단을 올리고
그 위에 9층탑을 얹힌 형태로 3층까지는 탑신이 잘 남아있으나 4층부터는 탑신이 없어지고, 여
기저기 깨진 지붕돌만 포개진 모습으로 놓여져 있다. 얇고 넓적한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
을 두고 있으며, 탑 꼭대기에는 사각 받침돌 위에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이 살짝 놓여있다.
비록 백제시대 탑은 아니지만(일부에서는 백제 탑이라고 함) 백제탑을 계승한 탑으로 온전하게
남지 못해 많은 아쉬움을 준다.

▲  극락전 좌측에 자리한 우물

▲  우물 좌측에 자리한 척화실(拓花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건물 이름이 무척 낯설다.


▲  서선당(西禪堂)
극락전 뜨락 우측에 넓게 자리한 서선당은 승려들의 거처인 요사(寮舍)로 1982년에
새로 지었다.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경내에서 가장 크다.


▲  서선당 옆에 놓인 나무 장작들

나무 장작들 참 오랜만에 본다. 옛날에는 정말 흔했지만 연탄과 가스, 석유에 밀려 이제는 찾아
보기 힘든 기억 속의 풍물시가 되어버렸다. 요즘 같은 세상에 아직도 방을 대펴주는 용도로 쓰
지는 않을 터이고, 아마도 부엌에서 밥을 지을 때 쓰는 것 같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궁이에
서 지은 밥과 누룽지가 갑자기 간절해지는구나 ~~


▲  서선당 옆에 'ㄱ'모습의 요사 (북쪽에서 본 모습)
서선당 바로 옆에 자리한 건물은 공양간을 갖춘 요사로 툇마루를 지니고 있다.
툇마루 앞뜨락에는 네모난 석조와 함께 세수를 하거나 설겆이나 빨래를 하는
공간이 있어 옛 한옥 생활을 느끼게 한다.


▲  서선당 옆 'ㄱ'모습의 요사 (남쪽에서 본 모습)

▲  서선당에 달린 조그만 종 (공양시간입니다. 땡땡땡~~)
공양시간을 알릴 때 쓰는 소중한 종이다. 종이 기지개를 켜고 은은한 종소리를
베풀면 곳곳에 흩어진 승려와 신도들이 모여들어 즐거운 공양(식사)시간을
갖는다. 먹는 것 만큼 즐거운 것이 또 어디 있으랴~~


▲  산신각(山神閣)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보는 산신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두 눈에 쏙 넣어도 부담이 없는 조촐한 모습이다.


▲  산신각에 봉안된 산신탱(山神幀)
흰 수염의 대머리인 산신을 비롯하여 호랑이와 동자 등 산신의 주요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산신의 사자(使者)인 호랑이는 용맹함보다는 귀여움이
묻어난 모습으로 표현되어 거의 고양이 같다.


▲  잠시나마 하얀 지붕을 이룬 나한전(오른쪽)과 극락전(왼쪽)

▲  경내에서 천불전으로 넘어가는 다리


 

 

  향천사의 상징적인 공간, 천불전(천불선원)

▲  경내 서쪽에 따로 자리를 닦은 천불선원(千佛禪院)

경내에서 조그만 계곡을 건너 서쪽 언덕을 오르면 따로 담장을 두른 천불선원이 모습을 비춘다.
이곳은 천불도량(千佛道場)을 자처하는 향천사의 중심이자 성지와 같은 공간으로 천불전 주변에
부속 건물 2동을 만들고 이를 담장으로 둘러 천불선원으로 삼았다. 예전에는 속인(俗人)들의 출
입을 통제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다.


▲  활짝 열린 천불선원 문

천불선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이 문이 유일한데, 문의 높이가 좀 낮다. 키가 어느 정도 되는 사
람은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뒷탈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높이를 낮게 한 것은 일부러
머리를 숙이게 만들어 천불에 대한 예의를 표하게 하려는 것으로 자기 자신을 낮추고 천불전에
임하라는 의미이다.
문 양쪽에는 자연석을 차곡차곡 얹혀서 만든 기와 돌담이 정겨운 서정을 불러 일으킨다.


▲  눈이 두텁게 입혀진 천불전 뜨락과 부속 건물들
천불전의 부속 건물들은 승려의 생활 및 수행 공간으로 좌측에 자리한 건물은
절의 여러 집기를 보관하는 창고 역할도 담당하고 한다.

▲  향천사 천불전(千佛殿)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73호

천불선원의 중심인 천불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세운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
물이다. 경내에서 극락전에 버금가는 건물로 현판에 쓰인 이름 그대로 1,000불을 봉안했다.
이 건물은 의각이 당나라 오자산에서 직접 만든 3,053기의 불상과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
지보살, 16나한을 봉안하고자 세운 것이라고 하며, 840년에 보조국사가 당나라에서 1,053기의
불상을 가져와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이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596년에 멸운이 다시 중건했으며, 1984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1986년에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지금의 새 건물을 지어 옛날의 구수한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경내에서 9층석탑과 부도를 제외하고 고찰이라 내세울 만한 자취
가 사라진 것이다. 건물을 다시 지었음에도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박탈당하지 않은 것은 불단에
봉안된 불상 때문인 듯 하며, 천불의 조성시기는 전설과는 달리 조선 초기로 보인다.

건물의 이름 그대로 1,000기의 불상이 있어야 되지만 정확하게는 그보다 1.5배 많은 1,515기의
불상이 불단을 어지럽게 메우고 있다. 이는 이 땅에 널린 천불전의 불상 수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로 그 흔한 이름 천불보다는 눈에 좀 띄게 천오백불(1,500불)이라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
? 천불과 3천불은 많지만 1,500불은 희귀하기 때문이다.
이들 천불은 미혼자의 혼인 대상자 인물을 점쳤다는 전설이 있으며, 우리나라 7천 만 인구 마냥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으로 개성들이 넘친다. 모두 하얀 불상으로 작은 불상은 대부분 석고상(
石膏像)이고, 큰 불상은 돌로 만들어졌다.


▲  천불전 천불 (천불상이라 쓰고 천오백불이라 부르면 됨)

문을 열고 적막이 깃든 천불전으로 들어서니 가운데 큰 불상을 비롯하여 1,500의 불상이 일제히
나를 바라본다. 정면으로 쏠리는 1,500의 시선이 얼마나 부담스러웠던지,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
울 정도이다. 마치 1,500의 관중 앞에 선 음악가나 연기자가 된 기분이랄까..? 나는 수줍게 향
로에 향을 피우고 3배를 올린 다음, 사진을 찍고 나왔는데, 나의 깜짝 공연이 그들에게 썩 마음
에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  똑같은 모습은 하나도 없는 가지각색의 천불들

천불을 조성하던 당시 승려와 민중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것은 아닐까? 저 많은 불상을 만
드는 것도 그리 쉽지는 않았을텐데, 얼굴 표정(즐거운 표정, 신나는 표정, 귀여운 표정, 우울한
표정,.)과 머리칼(나발과 소발), 덩치(큰 덩치, 작은 덩치, 키다리), 옷, 그리고 자리까지(연화
좌를 갖춘 불상도 여럿 있음) 모두 다르게 만들어 같은 모습이 하나도 없다. 이는 투철한 장인
정신과 불심(佛心)이 빚은 정성 어린 작품들이라 하겠다.


▲  불단이란 관중석에 앉아 나의 공연을 구경하는 천불의 위엄

▲  흐릿한 눈빛의 불상
불상이 하도 많아서 슬쩍 하나 가져가도 모를 것 같다. 기분 같아서는 집에 하나
가져오고 싶은데, 내가 그럴 능력이 되지 못해 마음 속으로만 그러고 말았다.

▲  천불선원 앞에서 바라본 향천사 경내
나무들이 시야를 좀 방해하긴 하지만 보는 데는 그리 지장은 없다.

▲  천불선원 앞에 자라난 나이 350년의 느티나무
(예산군 보호수 8-13-1-252호)

너무 장대하게 오래 살아서 자신의 나이도 아마 모를 것이다. 추정 나이는 350년 정도라고 하며,
높이는 20m로 천불선원에 늘 그늘을 드리워준다. 장대한 세월을 먹고 자란 그의 허리 둘레는 약
3.1m이다.


 

♠ 향천사 마무리

▲  천불선원에서 부도, 서래암(西來庵)으로 가는 길

천불선원에서 서쪽으로 작은 계곡을 하나 더 건너면 금오산 등산로와 함께 'ㄱ'모양의 기와집이
눈에 진하게 들어올 것이다. 그 기와집은 서래암이란 건물로 별도의 암자가 아닌 향천사 소속의
불전이다. 그 서래암 옆에는 부도 4기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이들 가운데 고색이 좀 짙은 2
기를 주목하기 바란다.


▲  향천사 부도군(浮屠群)

▲  향천사 의각/멸운의 부도(가운데는 멸운의 탑비)
- 충남 지방문화재자료 179호

부도 4기 가운데 왼쪽에 검은 때가 자욱한 부도는 절을 세웠다는 의각의 부도라고 전하여, 오른
쪽에 대추처럼 생긴 부도는 16세기에 활약했던 멸운의 부도이다.

까무잡잡한 피부로 상당한 고색이 느껴지는 왼쪽 부도는 두툼한 바닥돌 위에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약간 동그란 탑신을 얹혔다. 그리고 8각형의 지붕돌을 올리고, 머리장식으로 꼭대기를 마
무리한 제법 수려한 모습이다.
기단부 아래 받침돌은 8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구슬을 이은 듯한 기둥 모양을 새기고 그 안에
무늬를 새겼으며, 위에는 잎을 아래로 한 연꽃무늬를 둘렀다. 가운데 받침돌은 8개 모서리에 기
둥을 새기고 각 면마다 불교의 법을 지키는 이들을 조각해 부도의 건강을 기원했다. 윗쪽 받침
돌에는 잎을 위로 향한 연꽃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에 서까래를 표현했고, 윗쪽 면에는 모서리
마다 조각을 돌출되게 새겨 아름다움을 보탰다. 그리고 지붕돌 위에는 머리장식을 두었는데, 가
장 하늘과 가까운 부분에 근래에 새로 얹힌 새하얀 피부의 장식을 얹혀 놓아 아까 9층석탑처럼
약간의 어색한 조화를 선보인다.

절에서는 이 부도를 의각의 승탑(僧塔)이라고 주장하는데, 만약 그게 맞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부도탑이 된다. 허나 해동(海東)에서 부도가 등장한 것이 신라 후기이므로 이는 전혀 근
거가 없다. 부도가 생기기 이전까지는 승려의 사리는 그냥 자연에 뿌리거나 부도와는 다른 별도
의 시설에 봉안했다고 한다. 의각과 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던 신라 승려 자장율사(慈藏律師) 같
은 경우는 사리를 석혈(石穴)에 봉안했다고 전하며, 그보다 이른 신라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일
반적인 3층석탑에 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또한 이 부도의 조각 수법을 볼 때 이르면 고려, 늦어도 조선 초기 것으로 여겨지며, 향천사를
거친 이름 모를 승려의 탑을 의각의 것으로 둔갑시킨 모양이다.


▲  검은 피부의 왼쪽 부도
위에만 하얗고 나머지는 까무잡잡하여 마치 위에만 고양이 세수로 씻은 듯 하다.
위에 얹혀진 옥의 티가 아니더라도 제법 수려한 부도임은 분명하다.

▲  온갖 무늬로 정신이 없는 부도의 기단부

▲  부도의 머리 부분


▲  멸운당대사의 비석

오른쪽에 자리한 대추 모양의 부도는 멸운의 부도이다. 그 옆에 멸운의 비석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한 듯 싶다.
이 부도는 두툼한 바닥돌 위에 8각의 기단을 두고 대추 모양의 탑신을 올렸으며, 그 위를 지붕
돌로 마무리한 형태로 일종의 석종형(石鐘形) 부도이다.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밑에
는 면마다 2개씩의 액자 모양을 새기고, 윗쪽에는 연꽃무늬를 둘렀다. 지붕돌은 밑쪽에 서까래
를 새기고, 모서리마다 돌출된 조각을 두어 왼쪽 부도에 비해 다소 밋밋해 보일 수 있는 부도의
조그만 화려함을 불어넣었다. 그 위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렸다.

검은 부도와 멸운의 부도 사이에 솟아난 멸운당 비석은 뒤쪽에 '강희(康熙) 47년 무자월일립(戊
子月日立)'이라 쓰여있어 1708년에 세워졌음을 귀뜀해 준다. 비석의 피부에는 고된 세월의 때가
역력해 멸운의 부도보다 더 고색의 기운을 풍긴다.

▲  멸운 부도 옆에 새롭게 자라난 부도

▲  향림당대용선사(香林堂大用禪師, 1921~
2006)의 부도


▲  겨울에 잠긴 향천사 동쪽 금오산 산길
소쩍새가 우는 그날 거추장스러운 설피(雪皮)를 걷어차고 기지개를 켜며
봄의 해방군을 맞이할 것이다.


1시간 가량 향천사를 정신 없이 둘러보니 시간이 어느덧 점심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경내 곳
곳에 흩어진 승려들이 종소리에 공양간으로 우루루 몰려가면서 겨울 산사의 적막함은 더욱 진해
졌다. 혹여 공양(供養)에 낄 수 있을까 싶어서 새가슴마냥 공양간 주변을 조금 기웃거려봤지만
먹고 가라는 손길은 없었다. 그래서 쿨하게 체념하고 향천사와의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무거
운 발걸음을 하였다.
일주문에 이르니 밖에서 우두커니 기다리던 번뇌(煩惱)가 반가이 나를 맞이해 준다. 이렇게 하
여 향천사 새해 맞이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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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에서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석불, 보리사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보리사 마애석불)

 


경주 남산 나들이 (동남산 미륵곡, 보리사)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신라(新羅) 1,000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땅 경주(慶州), 그 두 자를 들으면 나도 모
르게 가슴이 시려온다. 경주는 밤하늘에 흐르는 별만큼이나 온갖 문화유산이 반짝이고, 융
단처럼 부드러운 잔디의 잎파리만큼이나 깃들여진 신화와 전설이 속삭이는 마음의 고향 같
은 곳이다.

경주는 늘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곳이며, 나에게 늘 정신적으로나 지적으로 아낌없는 포
만감을 안겨주는 풍요로운 곳이다. 하지만 그만큼 부담이 큰 곳 또한 경주이다. 그곳에 서
린 문화유산을 개미목보다 짧은 지식과 하찮은 작문 솜씨로 감히 다룬다는 것이 은근히 두
렵고 떨려 주저한 적도 적지 않았다. 허나 그렇게 걱정을 하면서도 그만큼 많이 찾은 곳이
또한 경주이다.

경주 땅 한복판에는 이름도 친근한 남산(南山, 468m)이 길게 누워있다. 바로 옛 금오산(金
鰲山)으로 경주는 물론 신라에서도 꽤 비중이 높아 '남산에 오르지 않고선 경주를 봤다고
우기지 마라~!'
는 의미심장한 말이 있을 정도로 경주의 필수 답사 코스로 꼽힌다.

신라의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현장(나정, 서출지, 포석정)을 넉넉히 품고 있으
며, 신라의 많은 제왕(박혁거세, 일성왕, 정강왕 등)이 그의 품에 앞다투어 잠들어 있다.
게다가 골짜기가 깊고 기암괴석이 만물상을 이루는 등, 자연미도 풍부하며, 남산을 불국토
(佛國土)로 여긴 신라 사람들이 여기저기 빚어놓은 불교 문화유산이 아낌없이 함축되어 있
는 그야말로 보물의 산이다.
남산에는 40여 곳의 크고 작은 골짜기가 있다. 그 골짜기에 깃들여진 절터만 100곳이 넘으
며, 80여 개의 불상, 70여 개의 석탑 등이 살아 숨쉬고 있어 그야말로 거대한 야외 박물관
을 이룬다. 그러다보니 남산 전체가 사적 31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처럼 뫼 전체가 통
째로 사적으로 지정된 예는 오로지 이곳이 유일하다. (낭산 등의 조그만 산은 제외)
남산은 위치상 통일전과 보리사가 있는 동남산, 포석정과 배리삼존불, 삼릉이 있는 서남산
(西南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번에 문을 두드린 곳은 동남산(東南山) 구역 보리사이다.

동남산 밑에는 갯마을이란 시골 마을이 있다. 그 옛날에 형산강(兄山江) 나룻배가 여기까
지 들어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 입구에는 보리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고, 마을
남쪽에는 경상북도 산림환경연구원이 넓게 자리를 닦고 있어 동네가 온통 푸르다. 토함산(
吐含山)에서 발원한 남천(南川)은 동남산 주변을 부드럽게 감싸돌며 '배반평야'라 부르는
너른 평야를 촉촉히 어루만진다.

걷는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조용함이 깃든 갯마을을 벗어나면 대나무로 창창한 오르막길이
나온다. 그 길의 끝에는 미륵곡 석불의 거처인 보리사가 자리해 있다. 절까지 걸어서 12분
정도 걸리는데, 보리사를 중심으로 남천으로 흐르는 계곡을 미륵골(彌勒谷)이라 부른다.


▲  대나무숲이 터널을 이루는 보리사, 미륵곡 가는 길
남산이 베푼 산바람이 이곳을 스치면서 대나무의 향연이 그윽히 울려 펴진다.

▲  보리사 밑에 자리한 부도와 때깔이 고운 비석들


♠  소나무 숲에 터를 돋군 조그만 산사, 남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불
미륵곡 석불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 남산 보리사(菩提寺)

남산에 100곳이 넘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온전하게 법등(法燈)을 이어온 절은 하나도 없는 실정
이다. 지금 절들은 근래 옛터에 다시 지은 것들이며 내가 찾은 보리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동남산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보리사는 비구니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으로 불국사(
佛國寺)의 말사(末寺)이며, 남산에 있는 절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절의 창건시기와 구체적인 사적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장대한 세월에 묻히
고 역사는 산산이 흩어져 온전한 모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
라 헌강왕(49대, 憲康王)과 정강왕(50대, 定康王)의 능이 보리사 동남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경내에 석조여래좌상과 복원된 3층석탑이 있어 신라 때 절임을 가늠케 할 뿐이다. 허나 정강왕
릉과 헌강왕릉의 위치도 확실한 것이 아니라서 이곳이 신라 때 보리사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
五里霧中)이다.

현재 보리사는 1911년 포항 보경사(寶鏡寺)에서 온 박덕염(朴德念) 비구니가 세운 것으로 절단
되어있던 미륵곡 석불의 머리와 광배를 이어 붙였으며, 1932년에는 남법명(南法明) 비구니가 중
수했다. 1977년 추묘운(秋妙雲)이 주지로 머물면서 3~4년에 걸친 불사 끝에 현재의 면모를 지니
게 되었다. 원래는 지금보다 약간 위쪽인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주변이 경내 중심이었으나 1981
년 지금의 자리로 약간 내려왔다.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산신각, 범종각, 육화당 등 6~7동의 건물을 지녔으며, 비구니 사찰이
라 경내는 깔끔하고 단아하다. 대웅전 앞뜰에는 잔디를 곱게 입혔고 그 사이로 돌을 심어 각 건
물을 이어주는 돌길을 내었다. 자투리공간에는 온갖 화초를 심었으며, 여승의 보살핌을 받은 꽃
들은 한참 꽃망울을 피워 그들의 은혜에 화답한다.


▲  솔내음이 깃든 경내 뒤쪽 부분 (사진 중앙 석불이 미륵골 석조여래좌상)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남산에서 가장 우수한 명품 석불로 꼽히는 석조여래좌상이 있으며, 경내에
서 조금 떨어진 남쪽 바위에 마애석불이 있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곳에 오르면 배반평야와 낭산(狼山), 토함산이 두 눈에 바라보인다. 비
록 높이는 낮지만, 꽤 높은 곳에 올라 천하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절을 에워싼 싱그러운 소나무의 솔내음과 아늑하고 조용한 산사 분위기, 그리고 미륵곡 석불의
인자함과 우아함이 배여 있는 보리사, 속세에 찌든 마음의 여유를 찾기에 이만한 곳도 없을 것
이다.


▲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에 바라본 보리사 경내

※ 남산 보리사 찾아가기 (2015년 10월 기준)
① 경주까지
* 서울역, 광명역, 천안아산역, 대전역에서 부산행 경부선 고속전철 이용 (신경주역 하차)
* 청량리역, 양평역, 원주역, 제천역에서 경주, 부전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1일 2회 운행)
* 동대구역, 부전역, 해운대역, 태화강역에서 경주행 무궁화호 열차 이용
*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동서울터미널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스가 30~50분 간격으로 떠난다.
* 인천, 고양, 의정부, 부천, 성남, 수원, 춘천, 원주, 청주, 전주, 구미, 안동, 창원, 대구(동
  부, 서부), 부산, 울산에서 경주행 고속/직행버스 이용
② 현지교통
*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 경주고속터미널 건너편, 경주역(경주우체국)에서 11번 시내/좌석버스
  를 타고 갯마을 하차, 도보 12분
* 신경주역에서 50, 51, 60, 61, 70, 700번 시내버스를 타고 경주시외터미널 건너편이나 경주역
  (경주우체국)에서 11번 버스로 환승
* 보문관광단지와 불국사, 불국사역에서 10번 시내버스를 타고 갯마을 하차
② 승용차 (경내까지 진입 가능)
* 경부고속도로 → 경주나들목을 나와서 직진 → 고운교 직전에서 문천길로 우회전 → 화랑교
  직전, 갯마을에서 우회전 → 보리사

*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67 (갯마을길 41-30 ☎ 054-748-0794)


▲  대웅전 석가3존불과 후불탱

보리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1981년에 지어진 것이다. 불단(佛壇)에는 금동석가3존불과 후
불탱화가 있으며 그들이 발하는 금빛에 가히 눈이 멀 지경이다. 석가3존불 우측에는 육환장(六
環杖)을 든 지장보살의 보금자리가 있으며, 좌측벽에는 신중도(神衆圖)도 걸려있다.

아무도 없는 대웅전의 고요함을 살짝 깨뜨리며
안으로 발을 들여 향을 피우고 석가3존불에게
예불을 올린다. 예불이라고는 하지만 개인적인
소망도 살짝 넣어 그에게 내밀었다. 소망이 과
연 접수가 될련지는 미지수이지만 예불을 한 것
만으로도 마음이 평안해진다.

석가3존불 우측에는 나의 시선을 붙잡아 맨 귀
여운 존재가 있었다. 바로 연꽃을 든 동자상이
다. <거의 동녀(童女)처럼 보임>
그는 자신의 키에 2배나 높은 연분홍 연꽃을 들
고 있는데, 부처의 법을 상징하는 조그만 코끼
리가 그 곁에 자리해 소소하게 동심을 자아낸다.
 

◀  연꽃을 든 동자상과 코끼리상


▲  보리사 3층석탑

대웅전 뜨락 우측에는 누렇게 바랜 3층석탑이 서 있다. 보통 법당 정면에 탑을 세우지만 보리사
는 다소 우측으로 치우쳐진 특이한 배치를 취했다.
이 탑은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탑재를 끼워맞쳐 복원한 것이다. 없는 부분은 
새롭게 때웠는데, 2중의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을 얹힌 전형적인 신라 후기 탑으로 하얀 빛
의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하고 오랜 세월의 때가 가득하여 제법 고색의 기운을 드러낸다.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자비롭고 우아한 표정에 가슴을 설레게 하는
신라시대 명품 불상,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 보물 136호


보리사 경내 뒤쪽, 담을 두르고 있는 한층 높은 곳에 보리사에 든든한 밥줄, 미륵곡 석조여래좌
상(석불좌상)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동남산을 대표하는 석불로 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1,300년이란 나이가 정말 무색할 정도로 정정한 모습을 지녀 보는 이로 하여
금 놀라움을 선사한다. 그 장대한 세월 동안 그를 괴롭힌 존재가 한둘이 아닐진데 어찌 저리 멀
쩡할 수가 있을까?
그의 건강비결이 사뭇 궁금해진다. 물론 그에게도 적지 않은 시련은 있었다. 그를 관리하던 절
보리사로 단정지울 순 없음―
은 거친 세월의 물결에 휩쓸려 가고 현재 보리사가 터를 닦기 전에
는 불상의 머리와 광배가 몸통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기품이 있는 신라의 귀족 여인을 모델로 한 것을 아닐까? 우아한 기품과 인자함이 서린 그의 표
정은 보기만 해도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기분 같아서는 그를 보쌈하여 우리집에 갖다놓고 싶지
만 그를 업다가는 자칫 내가 그에게 깔려 골로 갈 상황이니 감히 그러지도 못한다.

신라의 미소로 손색이 없으며, 남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으로 내세워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
는 미륵곡 석불은 신라 불상의 백미(白眉)라 일컬어지는 토함산 석굴암(石窟庵) 본존불과 크게
대비된다. 석굴암 본존불은 미소라기보단 나 같은 범인(凡人)들은 차마 접근하기 조차 어려운
위엄이 서려있다. 그 앞에서는 차마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기 바쁠 것이다. 그에 반해 미륵곡 석
불은 그 누구라도 기꺼이 안아주고 보듬어 줄 것 같은 대인적인 느낌이 강하게 밀려온다.

그가 앉은 연화대좌(蓮花臺座)도 그를 닮아서인지 돌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 아름답다. 마치 살
아있는 연꽃이 하늘로 향해 꽃봉오리를 펼쳐보이는 모습은 진짜 연꽃도 시샘할 정도이다. 대좌
높이는 약 1.35m로 그 밑부분에는 땅을 향해 꽃잎을 펼친 연꽃이 묘사되어 있다. 석불이 잠시
마실을 나간 사이에 살짝 앉아보고 싶지만 그가 좀처럼 일어날줄 모르니, 그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있는 그는 앉은키 높이가 2.4m로 그의 머리는 나발(螺髮)
이다. 부처가 인도 사람이다보니 인도 사람의 머리스타일을 취한 것이다.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
가 큼지막하게 솟아 있다.
내면에서 우러나온 미소가 만면에 가득한 그의 얼굴을 살펴보면 가늘고 긴 눈썹 아래로 지그시
뜬 두 눈이 속세를 바라본다. 넓직한 이마 가운데로 둥그런 백호가 있으며, 코는 오목하고 적당
한 크기이다. 미소가 서린 입은 정말 단아한 모습으로 정말 훔치고 싶은 입술이다. 볼은 두툼하
고, 다소 두터워 보이는 목에는 삼도가 획 그어져 있으며, 그의 몸을 걸친 법의(法衣)는 주름이
섬세히 표현되어 있다. 다리 위에 사뿐히 놓은 그의 왼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상징한다.

석불이 기대고 있는 광배(光背)는 높이 2.7m, 폭 1.9m로 석불과는 다른 돌이다. 광배 역시 화려
함의 극치로 당초(唐草)무늬와 보상화문(寶相華紋), 화불 등이 마치 살아있는 줄기를 보듯 유려
(流麗)하게 묘사되어 눈길을 강하게 잡아 맨다.

미륵곡 석불에는 또 다른 불상이 교묘하게 숨어
있다. 분명 겉으로 봐서는 하나의 석불인데, 또
어디에 불상이 있는 것일까? 바로 광배 뒤에 새
겨진 마애불(磨崖佛)이 그 답이다. 자세히 보면
선으로 처리된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두 불상이 등을 맞대며 동거동락하는 신선한 형
태로 광배 뒤쪽에도 불상이 있는 경우는 이 땅
에서는 그 예가 거의 없어 매우 신선하게 다가
온다.
광배에 깃들여진 마애불은 약사여래(藥師如來)
로 그의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다. 그런 이
유로 광배 앞에 있는 석불을 서방정토(西方淨土
)의 주인인 아미타불로 보기도 한다.

얼굴 부분은 마모가 심해 확인하기 어려우며 전
체 높이는 1.3m다. 미륵곡 석불과 마찬가지로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있다. 중생들의
병을 치료할 약이 담겨져 있을 약합을 소중히
간직한 약사불은 동방세계의 주인이다.

석불 부근에는 옛 보리사의 흔적으로 보이는 탑재 일부와 돌덩어리가 놓여져 있으며, 석불 주변
은 소나무가 울창하다.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인 소나무는 솔내음으로 불상 주변을 깨끗히 정화해
주며 그에 대한 흠모의 뜻을 표한다.


♠  보리사의 숨겨진 신라 후기 마애불
보리사 마애석불(磨崖石佛)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193호

▲  바위에 살짝 깃들여진 보리사 마애석불

보리사 경내를 둘러보고 부근에 숨겨진 마애석불을 보고자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마애불을
온몸으로 알리는 이정표의 안내로 청명한 기운이 서린 대나무 숲길을 지나 4~5분 정도 가면 이
정표가 없는 갈림길이 나그네의 마음을 혼돈으로 밀어넣는다. 여기서 어디로 가야 마애불이 나
올까? 지나가는 사람도 없으니 순전히 나의 판단에 의지해야 된다. 나름 직감이 좋기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조금씩 늙어감에 따라 그 직감도 종종 헛탕을 칠 때가 있다.
여기서 확률은 반반. 길의 상태를 보니 오른쪽 길은 가파르고 폭도 가늘어 사람의 왕래가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러니 정답은 아닐 듯 싶다. 그에 반해 직선 길은 오른쪽 길보다 폭도 굵고 사람
들의 왕래도 조금은 있어 보였다. 하여 직선 길에 모든 것을 걸고 그만 직진을 해버렸다. 허나
그게 함정이었다.


▲  마애석불로 가는 대나무 숲길

마애불을 만난다는 생각에 기대를 잔뜩 품으며 열심히 길을 재촉했으나 아무리 가도 나올 생각
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깊이 들어설 수록 길의 상태도 우울해진다. 그런데 어디선가 까마귀 1
마리가 나타나 요란하게 까악까악~~!을 외치며 내 허공을 심상치 않게 맴도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내 머리 위에서 계속 맴돌며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이 수상하다. 내가
그의 영역을 침범하여 뚜껑이 열려 경고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뜻일까?
인적도 없는 궁벽한 산길에서 홀로 까마귀의 난데없는 태클을 받으니 오싹한 기분이 나를 엄습
하고 순간 염통이 쫄깃해진 나는 심상치 않다 여겨 서둘러 길을 돌렸다.

발걸음을 빨리 하여 다시 갈림길에 이르렀는데, 그래도 마애불에 대한 미련은 여전하여 비탈진
왼쪽(진행 방향 기준) 오르막길로 들어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방금 전만 해도 내 상공을
맴돌던 까마귀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다. 어쨌든 까마귀의 압박에서 벗어나 안도의 한숨을 쉬
며, 산길을 오르니 그 길의 끝에 보리사 마애석불이 잔잔한 미소를 드리우며 나를 기다리고 있
는 것이 아닌가?
아까 그 까마귀는 혹여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서자 이를 알리고자 목을 터지라 소리를 질렀던 것
은 아닐까? 그는 사람 말을 할 줄 모르고, 나는 까마귀 말을 모르니 엉뚱한 길로 빠진 나를 깨
우치고자 까악~ 소리를 높여 갔고, 다시 길을 돌려 맞는 길로 들어서니 그제서야 소리를 접고
사라진 것이다. 물론 그의 영역을 침범하여 나를 쫓아내고자 그리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목적
이야 어찌되었든 까마귀의 경고로 마애불을 찾았으니 그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설마 마애불이
전설처럼 까마귀로 현신하여 길을 알려준 것은 아니겠지? 허나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면 그런
전설이 나돌지도 모르겠다.

보리사에서 남쪽으로 10분 정도 떨어진 가파른
산자락에 절벽을 이룬 커다란 바위가 있다. 그
바위에 바로 결가부좌를 튼 마애석불이 아늑히
들어앉아 속세를 굽어본다.
오르기도 쉽지 않은 비탈진 곳에 숨은 이 불상
은 미륵곡 석불보다 나중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
는 신라 후기 석불로 바위벽을 얕게 파서 불상
의 광배로 삼은 다음 1.1m 정도의 작은 불상을
돋음새김으로 새겼다.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가 두툼히 솟아있고, 머리
칼은 꼽슬인 나발이다.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
진 눈썹 아래로 지그시 뜬 눈이 있으며, 다물어
진 입술에는 그만의 미소가 잔잔히 새어 나온다.
길쭉한 두 뒤는 어깨에 닿으며, 목에는 삼도가
굵직하게 그어져 있다. 법의(法衣)는 그의 몸을
덮고 있으며, 옷주름의 선이 부드럽다. 전체적
으로 위쪽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선의 굵기가
희미해지고 있으며 아랫도리는 선명도가 좀 낮
다.

그가 앉아있는 대좌는 하늘을 향해 잎을 벌린 앙련(仰蓮)이 희미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불상 앞
은 조금의 평지도 허락치 않는 급경사로 절을 하거나 예불을 올리기가 심히 마땅치 않다. 

불상 앞에 이르면 남쪽으로 배반평야가, 동쪽으로 낭산이 두 눈에 박힐 정도로 조망이 좋다. 마
애불의 존재를 아는 이가 적어 여기까지 기를 쓰고 올라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들 보리사 경
내에 있는 미륵곡 석불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석불의 미소에 마음이 즐거워지는 곳 보리사, 그의 건강과 단아한 미소가 미륵불이 온다는 56.7
억년 이후까지 지속되기를 소망하며 본글을 마무리 짓는다.


▲  마애석불에서 바라본 배반평야와 경주 남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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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0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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