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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5.22 봄맞이 산사 나들이 ~ 비봉능선 밑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2. 2017.12.15 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옛성길~탕춘대능선~구름정원길 (탕춘대성 암문)
  3. 2015.12.23 서울의 듬직한 뒷산, 북한산~북한산성 겨울 산행 (태고사, 행궁터, 대남문, 문수사)

봄맞이 산사 나들이 ~ 비봉능선 밑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금선사 (목정굴)

 


' 봄맞이 산사 나들이, 북한산 금선사 '

▲  금선사 목정굴 수월관음보살좌상


 

♠  금선사(金仙寺) 입문 (목정굴)

▲  목정굴 입구

봄이 한참 익어가던 어느 평화로운 주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금선사를 찾았다. 비봉과
사모바위를 간직한 비봉능선을 오르면서 그 길목에 자리한 금선사를 오랜만에 들리게 되었는
데, 비봉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면 목정굴을 알리는 표석이 마중을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금선사로 이어지나 나는 목정굴 코스를 선호
한다. 그만큼 목정굴은 금선사의 상징으로 그가 없는 금선사는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다름이
없다. (비봉능선으로 바로 가고자 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됨)


▲  문짝이 없는 무당문(無堂門)

목정굴 방면으로 길을 잡으면 잠시 내리막길이 나타나면서 봄가뭄에 영혼까지 털린 말라버린
계곡이 나온다. 계곡에 액체가 좀 있어야 무거운 번뇌를 잠시나마 흘려보낼 수 있을텐데, 그
럴 물도 없으니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그런 계곡을 건너면 다시 오르막길이 펼쳐지면서 문짝
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무당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문은 2008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 이름은 무무문(無無門)이다. '무무'란 불법(佛法)의 깊
은 진리를 깨닫는데 한계가 없다는 뜻으로 일주문이 없던 시절에는 나름 일주문의 역할도 하
였으며, 대자연의 넓은 마음이 담긴 듯, 문짝도 담장도 없는 그냥 문의 형태만 취하고 있다.


▲  커다란 바위에 조성된 목정굴

목정굴로 인도하는 계단의 끝에 이르면 3면이 바위로 막힌 막다른 곳이 나온다. 만약 전쟁에
서 이런 곳으로 내몰려 적의 공격을 받으면 그야말로 아작나기 좋은 지형으로 정면에 보이는
바위에 목정굴이란 석굴(石窟)이 깃들여져 있다.

목정굴은 조그만 자연산 동굴로 오랫동안 기도처로 이용된 도심의 숨겨진 굴이다. 태조 이성
계의 국사(國師)이자 금선사를 창건했다고 전하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기도를 올렸다고 전
하며, 조선 23대 군주인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현장이기도 하다.

석굴 내부는 원래 공터였으나 1996년 동굴을 대폭 손질하면서 수월관세음보살상(수월관음보살
)과 예불공간 등을 만들고 보살상 우측에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을 뚫었으며, 수월관세음보살
을 봉안하면서 금선사는 대내외적으로 관음도량을 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목정굴에는 숨겨진 볼거리가 여럿 있는데, 요란하게 비가 내릴 때는 목정굴 앞에 임시
로 폭포가 형성되어 힘차게 물을 쏟아내며, 석굴 앞 우측 바위를 잘 살펴보면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삼매부처상이 있으니 술래의 심정으로 잘 찾아보기 바란다. (난 찾지 못했
음)


▲  목정굴의 주인, 수월관세음보살(水月觀世音菩薩)

목정굴 안에는 수월관세음보살 누님이 환한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석굴 내부는 무척 시원
하여 이른 무더위를 단죄하고 있으며, 겨울에는 수월관음의 따뜻한 마음이 동굴 내부에 가득
서린 듯 추운 몸을 녹이기에는 아주 그만이다. 동굴 천정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고
석굴 구석으로 흐르는 물과 그들이 내는 졸졸졸~♪ 음악 소리가 경쾌하기 그지 없다.

앙련(仰蓮)으로 뒤덮힌 대좌(臺座) 위에 여인들도 시샘할 정도로 어여쁘게 앉아있는 수월관음
은 왼손에 감로수(甘露水)가 담긴 정병(淨甁)을 쥐어들고 있는데, 병의 크기가 다른 관세음보
살상의 정병보다 조금 커보인다. 그의 정병을 보니
왜 자꾸 동동주나 막걸리 술병 생각이 나
는 걸까? 정말 저게 술병은 아닐까?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 관세음보살 누님이 왜 술을 마시
겠는가? 하지만 그의 하얀 얼굴은 술에 약간 취한 듯, 졸린 표정처럼 보이기도 하니 혹 고적
한 석굴에서 건전하게 몰래 마신 것은 아닐까?

수월관음 앞에는 예불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불단에는 꽃 등이 놓여져 있어 중생들의 높인 인
기를 실감케 한다. 그의 우측에는 금선사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는데, 높이가 낮고 물이 흐르
고 있어 조심해서 오르기 바란다. 잘못하면 암벽에 머리가 쾅 부딪칠 수 있어 암벽을 아프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  옆에서 바라본 수월관세음보살상

▲  경내로 인도하는 비좁은 계단

목정굴에는 금선사의 대표 설화인 순조 탄생 설화가 전해오고 있으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조선 22대 군주인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첫 아들인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잃고 서른
이 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해 늘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88년경, 팔공산 파계사(把溪寺) 승려인 용파(龍波)가 상경하여 정조를 알현하면서
불교계의 폐단과 승려 차별을 시정해 줄 것을 탄원했는데, 정조는 불교 개혁을 약속하면서 대
신 왕자의 탄생을 기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아들을 얻지 못하니 이참에 부
처의 힘을 빌려보고자 했던 것이다.

불교계의 개혁을 위해서라면 지옥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굳었던 용파는 왕의 어려운
숙제를 기꺼이 수용하며 금선사에 머물던 농산(聾山)을 찾아가 같이 기도에 들어갔다. 그들은
같은 곳에서 기도를 하지 않고, 농산은 목정굴에서, 용파는 수락산 동쪽 내원암(內院庵)에서
따로 300일 이상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 용파는 선정(禪定)에 들어 천하를 살펴보니 왕자의 몸을 받아 태
어날 사람이 농산 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하여 농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이번 기회에
금수저로 태어나 팔자를 필 것을 권하니 농산은 흔쾌히 수락했다. 왕자로 태어나는 것인데 어
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래서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꿈에 나타나 왕자로 환생
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기도를 마치고 열반(숨을 거둠)에 들었다고 한다.

이때 왕실에 무기명 서찰 하나가 올라왔는데 그 서찰에는 '경술(庚戌) 6월 18일 세자탄강(世
子誕降)'이라 적혀 있었다고 하며 바로 그날 순조가 태어났다.
순조가 태어나던 날, 도성(都城)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瑞氣)가 궁궐에 닿아 수빈박
씨의 산실(産室)을 휘감았다. 정조는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그 서기의 출처를 찾아보니 바
로 목정굴이었다고 하며, 굴 안을 살피니 좌선을 한 채, 정수리에서 서기를 발산하고 있는 농
산의 시신을 발견했다.
농산이 죽어서 자신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것을 알게 된 정조는 크게 기뻐하며 승려를 차별하
던 폐습을 없애고 내수사(內需司)에 명을 내려 금선사를 크게 중창케 했다. 그 인연으로 지금
까지 순조의 탄신제(誕辰祭)를 지내고 있다.

이 설화대로 농산이 정말 순조로 환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경지가 깊은 승려라고 해
도 그건 사람의 능력 밖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전설이 대구 파계사에도 한 토막 전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내용이 거의 똑같다. 거기서는 숙종(肅宗)이 왕자<영조(英祖)>의 탄생을
부탁하는데, 그 부탁을 받은 승려가 파계사 부근 성전암(聖殿庵)의 현응(玄應)이다. 이 현응
의 법명은 용피<龍被, 또는 용파(龍波)>로 금선사의 용파와 이름까지 같다. 그러니 파계사의
영조 탄생 설화를 금선사에서 등장 인물만 조금 바꾸는 선에서 그대로 모방한 듯 싶다.

설화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지만 용파로 상징되는 파계사 승려와 농산으로 상징
되는 금선사 승려가 왕자의 탄생을 위해 기도를 올린 듯 싶으며, 그들 기도가 효과를 봤거나
아니면 기도 도중 농산이 사망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을 파계사 전설을 가져와 '농산이 왕
자로 환생했다'는 식의 그럴싸한 전설로 포장한 것이다. 어쨌든 순조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았고, 수락산 내원암 사적기(史蹟記)에는 농산, 용파 두 승려가 주고
받은 서신의 내용이 남아있다고 한다.


▲  목정굴 바위 정상

▲  목정굴 정상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수월관세음보살 우측에 뚫린 좁고 어두운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면 목정굴 정상이 나오면서
다시금 찬란한 햇살을 보게 된다. 정상에서는 목정굴 밑 계곡을 비롯해 숲 너머로 탕춘대 능
선과 인왕산(仁王山) 등이 시야에 들어오며, 여기서 목정굴 입구에서 갈라진 오른쪽 산길과
다시 하나가 되어 경내로 이어진다.
경내로 향하면 절을 가리고 선 2층짜리 설선당이 나타나고 그 앞에 금선사 발전에 크게 기여
한 민영택 여사를 비롯한 공덕비(功德碑) 3기와 대원각의 승탑이 있어 그들의 이름 3자를 영
원히 기린다.

▲  민영택을 비롯한 공덕비 3형제

▲  절을 크게 일으킨 대원각의 승탑(僧塔)


▲  2층 규모의 설선당(設禪堂)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는 설선당은 근래에 지어진 따끈따끈한 건물로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하에는 밥을 먹는 공양간이 있으며, 1층과 2층은 종무소와 선방(禪房), 템
플스테이 장소로 쓰인다. 휴일 점심에는 산꾼과 답사꾼에게 흔쾌히 공양밥을 제공하는데 맛이
제법 괜찮다. (주로 비빔밥을 제공함)


▲  연등의 고운 물결, 설선당과 반야전 뜨락

설선당 밑도리에 난 문을 들어서면 숲에 감싸인 금선사 경내가 조촐하게 펼쳐진다. 설선당 옆
에는 청기와로 치장된 2층짜리 반야전이 있는데, 그는 2006년에 지어진 것으로 원래는 그 좌
측 소나무 앞에 법당인 대웅전(大雄殿)이 있었다.
대웅전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석가3존불과 신중도를 머금고 있었으나 2005년 후반에
부셔버리고 옆 공터에 크게 반야전을 지었다. 건물 윗층에는 대웅전에 있던 석가3존불을 가져
와 예전 대웅전의 역할을 담당하게 했고, 아랫층은 별도로 해행당(解行堂)이란 이름으로 요사
(寮舍)와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그럼 여기서 잠시 금선사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  2층으로 이루어진 반야전(般若殿)

북한산(삼각산) 서남부의 대표적인 능선인 비봉능선 남쪽 밑에 금선사가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조계종 소속으로 종로1가에 있는 조계사(曹溪寺)의 말사(末寺)인데, 예로부터
여러 가지 영험담이 전해지고 있는 기도처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목정굴에서 소개
한 순조 탄생 설화이다.
       
이 절은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부탁으로 새 왕조의 도읍지를 정하고자 북한산(삼각산) 일
대를 살펴보던 중, 지금의 절 자리에 북한산의 강인한 정기가 서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부처
가 여기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여기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금선(金仙)은 부처의
별칭으로 창건 설화의 진위여부는 장담하기 어려우나 조선 초나 중기에 산문을 연 것은 분명
해 보인다.

이후 서울 근교 기도도량으로 이름을 떨치면서 많은 왕족과 양반, 상궁(尙宮)들이 자주 찾았
다고 하며, 순조의 탄생을 기원한 인연으로 왕실의 넉넉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허나 왜
정(倭政) 때 절은 폐허가 되었으며, 1949년 승려 도공(道空)이 중건했다.
1996년 목정굴을 손질해 수월관세음보살을 봉안했고, 2008년에 반야전을 지었으며, 계속해서
설선당과 범종루, 일주문 등을 달아 지금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절의 초창기 영역은 목정굴과 반야전 일대였으나 계곡을 따라 윗쪽으로 영역을 넓히면서 대적
광전과 삼성각을 지었고, 그 중간에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으면서 건물이 한데 몰려있지 않고
서로 떨어져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에 비좁게 자리한 탓에 경내가 길고 가늘게 이어진 것이
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적광전을 비롯해 반야전, 설선당, 삼성각, 연화당, 적묵당, 범종루 등 10
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신중도가 있으나 오래된
유물도 그게 전부이다.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으로 금선사의 모든 것이 좌초되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기도처로 유명한 목정굴이 경내 밑에 자리해 있다.

서울 도심에서 불과 10리도 안되는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고적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누릴
수 있으며, 풍경도 아름답다. 또한 최근에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단
단히 재미를 보고 있으며 특히 외국인들의 수요가 많은 편이다.

* 소재지 - 서울 종로구 구기동 196-2 (비봉길 137 ☎ 02-395-9911)
* 금선사 홈페이지는 밑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순조의 탄생설화를 간략하게 담은 반야전 벽화
왼쪽은 용파가 정조를 알현하며 그에게 어려운 숙제를 받는 장면, 중간은
금선사에서 기도에 들어간 용파, 오른쪽은 승려의 육신을 버리고
왕자로 다시 태어난 농산


 

♠  금선사 둘러보기

▲  옛 대웅전터와 오래된 소나무

반야전을 지나면 옛 대웅전이 있던 터와 소나무가 있다. 대웅전은 2005년에 사라졌으나 그 곁
을 지키던 소나무만이 무성하게 솔잎을 피우고 있는데, 나이는 약 200년 정도 묵었다고 한다.

경내에서 목정굴 다음으로 오래된 자연물로 아직 그 흔한 보호수(保護樹) 등급도 얻지 못했지
만 금선사의 오랜 내력을 밝혀주는 몇 안되는 존재라 그가 마음껏 몸을 풀 수 있도록 넓게 공
간을 제공하였다.


▲  옆에서 본 소나무

이 소나무는 장대한 나이에 비해 키는 작다. 하늘로 향하지 못하고 대신 옆으로 몸집을 무한
정 불려 처진소나무처럼 된 것이다. 절에 있는 나이 지긋한 소나무 중에 이런 나무가 적지않
아 참으로 신기할 따름인데, 절에서 주장하는데로 나무에게도 과연 불심(佛心)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자랄 수 밖에 없는 그들의 팔자인 것일까? 궁금하다.

▲  대적광전으로 인도하는 해탈문
(解脫門)과 108계단

▲  윗층과 아랫층의 이름과 용도가
서로 다른 연화당(蓮華堂)


소나무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왼쪽 해탈문은 대적광전으로 바로 이어지는 108계단길로 근
래에 닦여졌다. 그리고 오른쪽 길은 계곡을 따라 연화당, 적묵당, 삼성각을 거쳐 대적광전으
로 이어지는데, 대적광전까지 빨리 가고 싶다면 약간 각박하긴 하지만 108계단길을 이용하면
되고 느긋하고 편하게 가고 싶다면 계곡길을 이용하면 된다.

계곡길을 따라가면 계곡 건너에 나무 다리를 늘어뜨린 2층짜리 연화당을 만나게 된다. 이 건
물은 1층과 2층이 이름과 성격이 서로 틀린데, 1층은 연화당이라 불리는 납골당(納骨堂)으로
영가(靈駕)를 위한 공간이며, 그 중심에 지장보살좌상이 들어앉아 그들의 극락왕생을 챙겨준
다. 금선사의 든든한 밥줄로 약 600여 기의 유골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2층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거처인 미타전(彌陀殿)으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
로 한 아미타3존불과 2004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  연화당 앞에 놓인 나무 다리와 갈증에 빠진 계곡
봄가뭄으로 계곡이 바짝 타들어가면서 물방울도 보이지를 않는다.
계곡 위에 걸린 다리가 무색할 지경..

▲  소나무 뒤에 자리한 적묵당(寂默堂)

연화당 맞은편 석축 위에는 적묵당이 터를 닦았다. 이 집은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저리보면 1
층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3층이니 겉모습에 속지 말자. 팔작지붕을 짊어진 3층은 주지승의 거
처이며 그 밑에 가려진 1층과 2층은 일반 승려의 거처이다.


▲  계곡 위에 무지개처럼 걸린 홍예다리

▲  경내 윗쪽에 자리한 큰 바위와 약수터

적묵당과 연화당을 지나면 계곡 위에 걸린 홍예다리가 나온다. 근래 마련된 돌다리로 비록 고
색의 내음은 익지도 못했지만 여인의 눈썹처럼 선이 아름답다. 거기에 오색영롱한 연등을 잔
뜩 머금고 있으니 더욱 화사해 보인다.
그 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과 삼성각으로 이어지며, 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곡길을 좀 들
어가면 그 길의 끝에 커다란 바위가 웅크리고 있다. 바위 위에는 비봉능선으로 오르는 산길이
있으나 여기서는 올라가는 정식 길은 없으며, 바위 밑은 안쪽으로 쑥 들어가 조촐하게 그늘진
공간이 있는데, 비와 눈을 피하기에 아주 좋은 터로 북한산(삼각산)이 베푼 물이 용솟음치는
약수터가 수줍은 듯 자리한다.
금선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의 절반은 이곳에서 시작되어 흐르며, 그 옆에는 봄가뭄에 말
라비틀어진 조그만 폭포가 있다.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바위에게 주어진 이름은 딱히 없으며, 바위의 준수하고
거대한 용모를 보니 절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  바위 밑에 자리한 샘터 (물은 안마셨음)

▲  연등의 조촐한 향연이 펼쳐진 홍예다리


▲  삼성각(三聖閣)

홍예다리를 건너면 바로 대적광전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이 마중을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이 봉안되어 있으며, 원
래는 그들이 각각 별도의 건물을 지니고 있었으나 2005년에 현 건물을 증축하면서 이곳에 싹
모아두었다.


▲  봄 햇살이 내려앉은 대적광전(大寂光殿)

삼성각과 이웃한 대적광전은 금선사의 공식 법당으로 높직한 곳에 들어앉아 경내를 굽어본다.
비로자나불의 거처로 2005년에 지어졌는데, 옛 대웅전에 있던 불상과 신중도, 그리고 2005년
에 마련된 금고(金鼓)를 가지고 있다.


▲  대적광전 비로자나3존불

대적광전 불단에는 비로자나불이 지권인(智拳印)의 제스처를 보이며 앉아있고, 그 좌우로 노
사나불(盧舍那佛), 석가불이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중생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들 뒤로
든든히 자리잡은 후불탱은 2005년에 제작된 것으로 색채가 무지 곱다.

       ◀  금선사 신중도(神衆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61호

대적광전 좌측 벽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목정굴과 느티나무 등의 자연물 제외)인
신중도가 액자 속에 소중히 깃들어져 있다.
주위에는 비로사나후불탱과 새로 만든 신중도
등의 번쩍이는 그림이 있으나 고색이 자욱한
신중도에만 오로지 눈길이 쏠린다.

신중도란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신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조선 후기에 널리 그려진 불화이
다. 이들은 원래 인도의 토속신이었으나 불교
의 일원으로 흡수되었으며, 지금은 그들의 뜻
과 다르게 부처와 경전을 수호하는 호법신(護
法神)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흐
르면서 그 수호의 범위가 확대되어 나라를 지
키거나 사람들의 재앙을 막는 역할까지 떠맡게
되어 업무량이 과중하게 늘었다.

이 신중도는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그림 밑부분에 딸린 화기(畵記)에 따르면 김지(金地)가
책임 화원, 경순과 채준이 각각 출초(出草)와 편수(片手)를 담당했다. 또한' 신중탱(神衆幀)
'이란 명문이 쓰여 있어 그림의 성격까지 소상히 알려준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신중탱이
아닌 '신중도')

그림 윗부분에는 연꽃가지를 비껴들고 있는 제석천(帝釋天)을 중심으로 홀을 들고 선 일월자
천(日月自天), 공양물을 든 천동(天童)과 천녀(天女)가 그려져 있으며, 밑부분에는 위태천(
韋太天)과 팔부중(八部衆), 산신 등이 빼곡히 자리해 있다.
오래되고 괜찮은 신중도로 평가를 받아서 2002년 서울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장대한 내력에 비해 오래된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던 금선사에 한줄기 빛을 선사했
다.


▲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대적광전의 새 신중도
대적광전에는 신중도가 무려 2개씩이나 걸려있다. 신중도는 법당을 지키는
그림으로 1개도 아닌 2개나 있으니 제법 든든할 것이다.

▲  반야전에서 대적광전을 이어주는 108계단
누런 털을 걸친 묘공(猫公)이 묵묵히 계단을 오르며 자연을 음미하고 있다. 처음에는
숲으로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으나 내 옆을 유유히 지나쳐 대적광전으로 향했다.
그는 금선사에서 기르는 묘공으로 이 시간대에 늘 경내를 순찰하는 모양이다.

▲  대적광전으로 향하는 묘공의 위엄
대적광전 주변에 그만의 꿀단지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경계나 인사는 커녕 마치 무인지경으로 내 옆을 지나간다.

▲  속세를 향해 종소리를 울려라~~!
범종각(梵鍾閣)

▲  현판 글씨가 일품인 일주문(一柱門)


10년이 아니라 단지 몇 년만으로도 거뜬히 강산이 변하는 21세기, 오랜만에 발을 들인 금선사
도 조금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없던 건물이 마구 솟아나 절을 달리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신중도와 대적광전, 소나무 등 기본적인 존재들은 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
니 마치 옛 지기와 오랜만에 상봉한 기분이다.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금선사와의 짧은 인연을 마무리 지으며 비봉능선으로 발길을 재촉했
다. 앞서 절에 들어왔을 때는 목정굴로 왔지만 이번에는 목정굴 동쪽 산길로 갔는데, 근래에
지어진 2층 범종각과 일주문이 잘가라며 차례대로 배웅을 한다.
범종각은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메시지를 머금은 범종과 목어, 운판, 법고의 보금자리로 1
층은 통로, 2층은 범종각으로 쓰인다. 그 범종각을 지나면 바로 일주문이 나오는데, 그가 있
기 전에는 금선사에 그 흔한 일주문도 없었다.

명필을 자랑하는 일주문 현판은 학정 이돈흥(鶴亭 李敦興)이 쓴 것으로 '金仙寺'가 아닌 '金
僊寺(금선사)'로 쓰여 있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비록 음은 같지만 중간 한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허나 그 금선(金仙)이나 이 금선(金僊)이나 서로 같은 뜻이며, 다른 말로 대선(大
仙)이라 불리기도 한다.


▲  길목에 자리한 동자석(童子石)

일주문에서 한굽이 내려가면 동자석과 아리송하게 생긴 돌 하나가 내 발길을 붙잡는다. 동자
석은 두 손으로 홀을 쥐어들고 있어 문인석(文人石)의 냄새도 풍기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정
보는 없지만 생김새와 몸에 낀 고색의 때를 봐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키는 말그대로 어린이 키와 비슷한데, 절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고 귀족들의 묘역에만 사용할
수 있는 동자석이 절로 가는 길목에 떡하니 서 있으니 그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인근에 헝
클어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사대부(士大夫)의 묘에서 가져왔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정작 금
선사 부근과 구기동, 평창동에는 사대부의 묘가 전하지 않는다. (한양도성 밖 10리 이내에는
무덤을 쓸 수 없음)
그러니 절의 수호 의미나 이정표의 역할로 절의 단골 귀족(왕족, 사대부)이 세워준 것으로 여
겨진다. 그렇다고 절 자체적으로 감히 세울 리는 없을테고 말이다. 어쨌든 뭔가 특별한 의미
가 담겨져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며, 그로 인해 금선사의 격이 조금은 달라 보인다.


▲  이 돌의 정체는 무엇인고?

동자석 건너편에는 정체가 아리송한 돌덩어리가 서 있다. 동자석처럼 날씬하게 서 있지만 아
무런 조각이 없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연이야 낸들 알 도리는 없지만 무언가를 만드려다가
만 것 같은 99% 부족한 모습으로 자세히 바라보면 남근석(男根石)과도 비슷해 보인다.


▲  동자석과 정체가 묘연한 돌상의 뒷모습

▲  금선사를 뒤로하며~~~ (동자석과 목정굴 입구 중간)
본글은 여기서 끝. 금선사 이후 내용은 생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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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에 숨겨진 상큼한 숲길을 거닐다. 북한산둘레길 옛성길~탕춘대능선~구름정원길 (탕춘대성 암문)



'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구름정원길 가을 나들이 (탕춘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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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춘대성 암문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은평구

▲  구름정원길



 

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9월의 끝 무렵, 친한 후배와 천하 둘레길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는
북한산둘레길을 찾았다.
햇님이 슬슬 고개가 꺾이던 오후 3시, 구기터널에서 길을 시작하여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옛성길로 들어선다. 이 코스는 구기터널3거리에서 탕춘대성 암문, 옛성길전망대를 거쳐 북
한산 생태공원(북한산래미안아파트)까지 이어지는 2.7km의 짧고 굵직한 산길로 구기터널과
독박골에서 오르는 부분이 조금 각박할 뿐, 거기만 오르면 길은 다소 순해진다.

옛성의 주인공이자 이곳의 알맹이인 탕춘대성과 그에 딸린 암문, 옛성길 전망대 등의 명소
가 있으며 거의 능선길이라 조망도 제법 괜찮다. (1시간 정도면 충분히 완주 가능)


 

♠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탕춘대성 암문)

▲  평창동에서 바라본 탕춘대(蕩春臺) 능선

▲  구기동 주택가를 지나는 옛성길 동쪽

구기터널에서 둘레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를 따라 돈냄새가 요란하게 풍기는 고급 주택가를 지
나면 숲속에 묻힌 그늘진 오르막길이 나온다. 여기가 정녕 서울 도심 종로구(鍾路區)가 맞는
지 물음표를 여러 번 내던지게 하는 외딴 산골 풍경으로 아무리 손등을 꼬집어보아도, 두 눈
을 비벼보아도 이곳은 분명 서울 종로구 구기동(舊基洞)이 맞다. 이 첩첩한 산골까지 주택이
마구 밀려와 150m 고지까지 좁게나마 골목길이 깔려 있다.


▲  옛성길 동쪽 시작점

▲  탕춘대성 암문으로 오르는 옛성길 (1)

옛성길 동쪽 시작점에서 탕춘대성 암문까지는 숨가뿐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다행히 둘레길을
잘 닦아놓아 그리 힘든 구석은 없다.
동쪽 시작점에서 암문까지는 약 10분 정도 걸리는데 중간에 쉼터가 있으며, 소나무가 무성하
여 은은한 솔내음에 속세에서 오염된 청각과 마음을 적지 않게 치유해준다.


▲  탕춘대성 암문으로 오르는 옛성길 (2)

▲  탕춘대성 암문(暗門) - 탕춘대성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북한산둘레길의 일원인 옛성길의 옛성은 바로 탕춘대성을 뜻한다. 조선 19대 군주인 숙종(肅
宗, 재위 1675~1720)은 혹시 모를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고자 버려져 있던 북한산성(北漢
山城)을 크게 증축하고 그 안에 행궁(行宮)과 관청, 창고, 군사시설, 승병(僧兵)을 위한 사찰
을 가득 지어 조그만 산속 도시를 구축했다.
그리고 부암동(付岩洞)과 평창동 지역에 있는 관청과 창고(선혜청, 조지서 등)를 지키고 한양
도성의 방어력을 드높이고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을 축성했다. 그
성의 이름은 연산군(燕山君)이 세검정(洗劍亭) 부근에 세운 탕춘대(蕩春臺)에서 비롯되었다.

이 성은 한양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성(西城)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1715년 홍제천에 홍지문(
弘智門)과 오간대수문을 세웠고, 1718~1719년에 인왕산(仁王山) 동북쪽에서 비봉능선 부근까
지 5.1km의 석성을 쌓았다. 이후 북한산성까지 늘리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고, 보현봉에서
형제봉을 거쳐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을 잇는 성곽도 추진했으나 계획에서 끝났다.

한양(서울)의 북쪽을 지키며 별탈없이 지내오던 탕춘대성은 장대한 세월에 짓눌려 여장과 성
벽 곳곳이 망가졌고 1921년 1월에는 홍지문 문루(門樓)가 세월의 무게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
너졌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대홍수로 오간대수문까지 떠내려가는 등, 계속 고통을 당해 오
다가 1977년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이 복원되었다.

바깥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탕춘대성 암문은 높이가 2m 정도로 구기터널 고개 윗쪽에 자리
한다. 암문(暗門)은 일종의 비밀 문으로 잡초와 뒤섞여 예전의 면모는 많이 떨어졌지만 문과
성벽은 그런데로 잘 남아있으며, 성돌이 헝클어져 통행이 힘들어진 성곽 길의 짐을 덜어주고
자 그 옆에 산길을 내었다. 성곽에 오르면 홍은동과 홍제동, 불광동 등 은평구와 서대문구의
상당수 지역과 신촌, 안산(鞍山) 등이 앞다투어 시야에 들어온다.
암문을 나가면 바로 홍은동(弘恩洞)과 불광동(佛光洞)으로 이어지며 탕춘대성 능선을 따라 남
쪽으로 내려가면 상명대와 세검정, 북쪽으로 올라가면 비봉능선과 북한산성으로 이어진다.
< 탕춘대성은 홍지문과 한 덩어리로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로 지정됨, 지정 명칭은 '홍지문
및 탕춘대성
'>

▲  네모나게 다져진 탕춘대성 암문 안쪽

▲  탕춘대성 암문 바깥쪽


▲  고된 세월에 녹초가 되버린 탕춘대성
인간이 만든 것이 아무리 위엄 돋는다 한들 대자연 앞에서는 한낱 모래성에 불과하다.
그나마 복원을 해서 저 정도라도 유지를 하고 있지. 그렇지 않았다면 산의 일부로
영영 묻혔을 것이다.

▲  탕춘대성 암문에서 바라본 천하 (1)
구름이 점점이 떠있는 하늘 아래로 홍은동과 홍제동, 안산, 신촌 지역이
바라보인다.

▲  탕춘대성 암문에서 바라본 천하 (2) - 불광동과 연신내, 은평구 지역

▲  송전탑 너머로 족두리봉과 향로봉, 비봉 등이 시야에 잡힌다.

▲  소나무가 우거진 옛성길 (암문~옛성길전망대 구간)

▲  옛성길에서 바라본 홍은동과 안산, 서대문구 지역

▲  옛성길 전망대

탕춘대성 암문을 지나면 둘레길은 비로소 진정을 되찾는다.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수 차
례 반복될 뿐, 길은 느긋하다. 능선길이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망이 두 눈과 마음을 시
원스럽게 다독거려주며, 가까이에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인사를 건넨다. 그런 길을 가볍
게 15분 정도 가면 옛성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옛성길 전망대에 이른다.

이 전망대는 해발 220m 지점에 닦여진 조망터로 북한산의 동남쪽 산줄기와 은평구, 서대문구
지역이 훤히 시야에 들어온다.


▲  옛성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북한산 문수봉과 보현봉, 형제봉,
평창동 지역

▲  옛성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향로봉과 비봉, 승가봉, 나한봉, 문수봉

▲  옛성길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불광동 독박골과 족두리봉

인생의 오르막이 있다면 내리막도 반드시 있는 법, 옛성길전망대를 지나면 길은 완전히 내리
막으로 돌변한다. 암문부터 참 온순했던 옛성길은 크게 흥분기를 보여 경사가 좀 각박해지는
데 다행히 내려가는 것이니 망정이지 이 길로 올라왔다면 두 다리가 꽤나 성을 냈을 것이다.
그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면 구기터널 서쪽인 불광동(佛光洞) 독박골이며, 여기서 큰 길(진
흥로)을 건너 북한산래미안아파트 동쪽으로 가면 북한산 생태공원이 나오는데 여기서 옛성길
은 그 끝을 맺는다.

※ 북한산둘레길 옛성길, 탕춘대성 찾아가기 (2017년 12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022, 7212번 시내버스를 타고 구기터널(한국고전번
  역원)이나 독박골(북한산래미안아파트)에서 하차, 7212번을 탔을 경우 구기터널 대신 구기
  동 현대빌라에서 내리면 된다.
* 지하철 3,6호선 불광역(2번 출구)에서 구기터널 방향으로 14분 정도 걸어가면 옛성길과 구
  름정원길이 나온다.
* 지하철 3호선 홍제역(2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에서 서대문구 마을버스 11번을 타고 홍은
  동 국민주택 종점 하차, 여기서 5분 정도 오르면 옛성길과 만나며 거기서 오른쪽으로 2분
  정도 가면 탕춘대성 암문이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 서대문구 홍은1동 / 은평구 녹번동


 

♠  북한산둘레길 구름정원길

▲  구름정원길 남쪽(불광사) 시작점

북한산둘레길 옛성길은 북한산생태공원에서 구름정원길로 간판을 바꾼다. 구름정원길은 북한
산생태공원에서 하늘전망대, 선림사, 옛 기자촌 뒷쪽을 거쳐 진관생태다리까지 이어지는 5.2
km의 기나긴 산길로 진관동 화의군(和義君)묘역~폭포동 힐스테이트아파트 구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주택가와 아파트 뒷쪽을 지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 반복되며 속세를 옆구리에 끼
고 있어 언제든 속세로 뛰쳐나갈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옛성길에 비해선 깊은 산길의 운치는
좀 떨어진다.

산길 이름인 구름정원길은 별다른 뜻은 없다. 그냥 구름의 정원을 거닐 듯 편안한 길이란 뜻
에서 동심 어린 이름을 갖다 붙인 듯 싶으며, 하늘전망대와 기자촌전망대 등의 조망터가 마련
되어 있다.


▲  구름정원길 (북한산힐스테이트 1차 뒷쪽)

▲  구름정원길에서 바라본 천하 (1)
북한산래미안아파트와 독박골 주변, 옛성길이 흐르는 탕춘대 능선

▲  구름정원길에서 바라본 천하 (2) 불광동과 녹번동, 백련산(白蓮山)

▲  은평구를 앞 뜨락으로 삼은 하늘전망대

구름정원길의 백미(白眉)는 은평구를 품은 하늘전망대와 길쭉하게 나무로 다져진 다리(데크길
)이 아닐까 싶다. 구름정원길 남쪽 시작점에서 10여 분 정도 오르면 서쪽으로 돌출된 하늘전
망대에 이르게 되는데 벼랑 위에 설치된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의 서북부를 이루고 있는 은평
구 일대가 속시원하게 바라보인다.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불광동과 녹번동, 응암동 지역

▲  하늘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불광2동과 은평뉴타운, 앵봉산을
비롯한 은평구 북부 지역

▲  나무 다리에서 바라본 하늘전망대 (사진 가운데 부분)

▲ 산길 한복판에 자리한 소나무 (나무 다리 직전)
하늘전망대 북쪽에서 나무다리까지는 소나무가 삼삼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다.
나무데크길을 내다보니 소나무가 길 한복판에 있게 되었는데, 그를 강제로
손대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둔 센스와 배려가 무척 돋보인다.

▲  길쭉한 나무 다리 (나무데크길)
이곳은 하늘전망대와 더불어 구름정원길의 상징적인 구간으로 소나무숲 보호와
탐방 편의를 위해 나무로 길게 다리를 깔았다.

▲  북쪽에서 바라본 나무 다리 (하늘전망대 방향)

하늘전망대에서 나무 다리를 지나면 족두리봉 입구가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동쪽) 산길을 오
르면 북한산(삼각산)의 서남쪽 끝 자락을 잡고 있는 족두리봉으로 이어지며, 왼쪽(서쪽)으로
내려가면 불광동 대호아파트, 북쪽으로 직진하면 구름정원길의 나머지 부분이 마저 펼쳐진다.

여기서 둘레길을 따라 5분 정도 전진하면 이름도 긴 북한산힐스테이트3차아파트 뒷쪽이다. 시
간도 어느덧 18시에 임박했고 햇님은 달님과 업무 교대를 하며 칼퇴근을 준비한다. 마음 같아
서는 불광중교까지는 달려가고 싶었으나 시간도 그렇고, 배도 고프고, 슬슬 지치기도 하여 나
머지 구간은 불투명한 다음으로 넘기고 둘레길 나들이를 접었다. 어차피 나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언제든 접근이 가능하다. 그러니 너무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무지개와 같은 북한산둘레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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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듬직한 뒷산, 북한산~북한산성 겨울 산행 (태고사, 행궁터, 대남문, 문수사)

 


' 북한산(삼각산) 겨울 나들이 '

태고사 원증국사탑
 태고사 원증국사탑


 


겨울이 한참 제국(帝國)의 위엄을 보이던 12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
이자 나의 즐겨찾기 뫼인 북한산(삼각산)을 찾았다.

북한산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과 그의 위성도시인 경기도 고양(高陽)시를
끼고 있는 수도권 굴지의 자연 명소이자 이 땅의 주요 국립공원(國立公園)이다. 번잡한 지역
에 누워있다보니 본의 아니게 탐방 수요가 엄청난데 1㎢당 탐방밀도가 무려 5만 명으로 탐방
밀도 분야 세계 기네스북 1위를 거머쥐고 있다. 또한 산 전체가 국가 명승 10호로 지정 되어
있어 북한산(삼각산)의 위엄을 한층 실감케 한다.

오전 11시, 구파발역(3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북한산 등산객과 예비군들의 오랜 벗인 서울
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을 타고 북한산성입구로 이동했다. 주말이라 버스는 등
산객들로 완전 짐짝수송을 이루었고, 버스는 만원의 기쁨을 누리며 간신히 육중한 네 바퀴를
굴려 북한산성입구에서 승객 7할 이상을 쏟아낸다.

북한산성입구에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북한산성계곡(북한천) 하류를 따라 수구문(水口門
)터, 서암사(西巖寺)터를 거쳐 옛 북한동(北漢洞) 마을에 이르렀다.
북한동은 북한에 있는 동네가 아니라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둥지를 틀었던 산골마을로 북
한산성이 조성되면서 형성된 오래된 마을이다. 지금의 마을은 조선 중/후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주로 군사들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다. 마을은 북한동역사관에서 멀리 태고사 근처까
지 형성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100호 이상의 집이 존재했다.

1910년 이후, 왜정의 고의적인 북한산성 방치와 잇따른 자연재해로 인하여 마을이 다소 피해
를 입었으며, 산성 안에 둥지를 틀던 5개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산성(山城) 내부를 관리했다.
당시 주민들은 나무를 땔감으로 팔거나 과실을 팔며 생계를 꾸렸는데, 이중 살구와 감은 북
한동의 특산품이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인근 사람들이 산성 안으로 많이 피신을 했는데, 북한군 1개 연대가 이곳
에 들어와 숲을 죄다 불태우며 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보였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는데 주민들의 궁핍함을 보고
는 이곳을 유원지로 개발시키기로 했다. 처음에는 대성장, 팔경정 두 곳만 식당 허가가 났으
나 주민들의 항의로 1974년 원하는 집에 죄다 식당 허가를 내주었고, 그로 인해 식당과 등산
용품 가게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마을 사람들은 등산/탐방객을 상대로 음식 장사와 산에서 채집한 나물 등으로 생계를 꾸렸는
데, 그들의 무분별한 장사로 인해 계곡이 오염되고 자연이 훼손되는 등, 계속 말썽이 생기자
골머리를 앓은 행정당국은 북한산을 보존하고 계속되는 민원을 해소하고자 아예 마을을 폭파
시키기로 결정, 2001년부터 마을 강제 이주를 단행했다.
처음에는 주민들의 반대도 많았지만 보상도 심심치 않게 해주었고, 산성 밑에 자리까지 제공
하면서 북한동 마을 55가구는 오래 숙성된 터전을 버리고 모두 그곳으로 이주했다.

그들이 모두 떠나자 북한산성계곡의 오랜 옥의 티였던 집과 식당을 모두 밀어버리고 주변 생
태계를 복원했으며, 옛 마을의 중심지에는 북한동 역사관을 지어 세월의 저편으로 강제로 흘
러간 북한동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솔직히 마을이 없어지니 좀 허전하기는 하지만 마을로 인해 망가졌던 주변 자연 경관이 활짝
피어나니 분위기는 더 밝아진 것 같다. 대신 먹을거리는 북한산성입구나 서울 시내에서 미리
사와야 되는 수고로움이 있으나 그거야 조금 부지런을 떨면 쿨하게 해결된다. 솔직히 마을에
있던 식당의 음식과 간식 가격은 시내보다 좀 비쌌다.

 


♠  보우대사(普愚大師, 원증국사)가 세운 고려 후기 고찰
~ 북한산 태고사(太古寺)


▲  태고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이 암자에 내가 살지만 나도 잘 몰라
                         깊으디 깊고 빽빽하지만 옹색하지 않아
                         하늘과 땅을 모두 가두었으니 앞과 뒤가 있을 리 없고
                         동서남북 어디라도 머물지 않네

               * 보우대사가 태고사에 머물며 지은 태고암가(太古庵歌)의 한 수


북한동역사관에서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중성문(中城門), 노적사(露積寺)입구, 중흥사(重興寺)터
를 거쳐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태고사를 찾았다.

태고사는 1341년 원증국사(圓證國師 = 보우대사)가 창건하여 태고암(太古庵)이라 하였다. 이후
400년 동안 마땅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으며, 18세기 중반인 숙종 시절에 북한산성을 정비하고
산성 안에 사찰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면서 다시금 수면 위로 오르게 된다. 당시 태고사에는 경
서(經書) 출판용 목판 5,700여 매와 활자 11두(斗), 그리고 화약용 흑탄 1,600여 석이 비축되었
으며, 절의 규모는 131칸에 이르렀다.
허나 1915년 대홍수와 산사태, 6.25전쟁으로 말끔히 파괴된 것을 1964년 청암(靑岩)이 중창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절의 규모가 조촐해 산중암자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해도 700년 가까이 꾸준히 명맥을 유지했던 북한산성 내부에 몇 안되는 전통 토박
이 사찰로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요사(寮舍)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한참 후배인 인근의 노적사보다 상당히 빈약해 노적사의 부속암자로 착각하기 쉬울 정도이다.
하지만 오랜 사찰에 걸맞게 원증국사탑비와 원증국사탑 등 국가 보물을 무려 2점씩이나 간직하
고 있어 이곳의 높은 명성을 살짝 귀뜀해준다. 그 외에 조선시대 부도 3기가 산신각 부근에 있
고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오래된 귀룽나무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하다.

4발 수레도 감히 들어올 수 없는 첩첩한 산중이라 비록 등산의 수고로움을 거쳐야 접근이 가능
한 곳이지만 서울 시내에서도 가까우며. 노적사와 마찬가지로 한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
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깊은 산골이라 산새도 넘어오기 힘들고, 제아무리 독종인 번뇌라고
해도 산이 깊고 험해 따라오다가 졸도를 할 정도이다. 그윽한 풍경소리만이 적막에 잠긴 경내를
잔잔히 쓰다듬어주며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무거운 번뇌와 잠시 이별하고 싶을
때 며칠 조용히 묻히고 싶은 곳이다.

※ 북한산 태고사 찾아가기 (2015년 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에서 34,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북한산성입구 하차. 주말
  과 휴일에는 8772번 주말임시노선(8~18시까지 10~15분 간격)이 추가 운행된다.
* 서울역(1,4호선 4,9-1번 출구)과 을지로입구역(2호선 3번 출구), 광화문역(5호선 7번 출구),  
  서대문역(5호선 4번 출구), 홍제역(3호선 2번 출구), 불광역(3,6호선 8번 출구)에서 704번 시
  내버스 이용
* 승용차 이용시 북한산성입구 주차장을 이용해야 되며, 산성 내부까지 차량 접근 불가
* 북한산성입구 정류장 → 대서문 또는 서암사터 → 북한동역사관 → 중성문 → 중흥사터 →
  → 태고사(약 5km, 1시간 40분)
* 북한산성 동장대와 용암문 사이에 봉성암, 태고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음
* 매년 음력 9월 22일에 보우대사 헌다식(獻茶式)을 거행한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5 (대서문길 406 ☎ 031-384-5589)


▲  겨울에 잠긴 태고사 귀룽나무 ~ 고양시 보호수 17호

태고사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훤칠한 키의 귀룽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귀룽나무는 이 땅에
서 매우 희귀한 나무로 매년 3월 말이나 4월 초에 나무 전체에 새하얀 꽃이 가득 피어난다. 태
고사에 무수히 발을 들였지만 정작 하얀 꽃으로 치장된 그의 모습은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그
꽃의 자태가 마치 하얀 눈과 비슷하다고 한다.
나무의 나이는 약 160년, 키 23m, 허리둘레 2.3m에 이르며 다른 나무와 마찬가지로 겨울의 제국
에게 모든 것을 공출당하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소쩍새가 울 봄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비각(碑閣)

  태고사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 - 보물 611호

대웅보전 좌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높다란 비각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태고사 제일의 보
물인 원증국사탑비가 남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둥지를 텄다. <태고사 대웅보전은 서향(西向)임>

탑비의 주인공인 원증국사는 고려 후기를 주름잡던 고승(高僧)으로 1301년 귀족 가문인 홍주홍
씨(洪州洪氏) 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비는 홍연(洪延), 어미는 정씨로, 13살에 양주 회암사
(檜巖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도했다.
1325년 승과(僧科)의 하나인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했으나 선수행을 위해 과감히 포기하고 용문
산 상원사(上院寺)를 거쳐 감로사(甘露寺)에서 계속 불도에 정진했다. 그 이후 북한산 중흥사에
들어와 1341년 절 동쪽에 태고사를 지어 머물며 그 유명한 태고암가(太古庵歌)를 지었다.
1346년 원나라로 넘어가 임제종(臨濟宗) 18대 법손(法孫)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어받
았으며. 원나라 황제 순제(順帝)의 초청을 받아 반야경(般若經)을 강설(講說)하기도 했다.

1348년 귀국하여 경기도 광주(廣州)에 머물며 일가친척을 죄다 이곳으로 소환하여 살게 했는데,
광주를 현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광주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1356년 공
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원융부(圓融府)에 머물며 승려의 임명권을 장악, 고려 불교계의 1인
자가 되었으며, 이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통합을 주장했다. 허나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신뢰
하면서 보우대사를 멀리하게 되는데 신돈은 그를 심하게 견제하여 속리산(俗離山)의 어느 암자
에 연금까지 시켰다.
신돈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이후, 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려 했으나 자신을 박대했던 감정 때
문인지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1381년 양산사(陽山寺)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때 우왕(禑王)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임명되었으며,
1382년 소설사(小雪寺)에서 열반에 드니 그의 나이 81세, 법랍(法臘) 68세이다. 우왕은 그에게
원증(圓證)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탑호(塔號)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다.

오랜 세월의 무게와 웅장한 멋이 풍기는 이 탑비는 13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碑文)은 고려
3은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이색(李穡)이 썼으며, 거북 등의 귀부(龜趺)를 초석으로 삼아 비신(
碑身)을 세우고 그 위를 이수(螭首)로 마무리지었다.

탑비를 보호하는 비각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높다란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
을 1980년에 복원했다. 참고로 원증국사의 탑과 탑비는 그와 인연이 깊던 용문산 사나사(舍那寺
)에도 있으며, 그의 사리를 2등분하여 태고사와 사나사에 봉안했다.
<사나사 답사기 보러가기 ☞
글보러 가기>


▲  원증국사탑비의 귀부(龜趺)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표정이 밝아 보인다. 그의 왕눈이 눈과
세모난 코는 700년의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들이 배여 있으나
그의 미소 만큼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  청암대종사(靑岩大宗師) 부도

원증국사탑비 곁에는 새롭게 청암대종사 부도가
뿌리를 내렸다. 청암은 1964년 태고사를 중건했
던 승려로 지금의 태고사가 있게 한 인물이다. 그는 2009년에 입적했는데, 태고사 창건주의 비
석 옆에 자리를 만들어 나란히 기리고 있다.


▲  원증국사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태고사 산신각(山神閣)
산신(山神)을 봉안한 공간으로 특이하게도 돌과 바위로 건물을 지었다.

▲  채색된 산신각 산신도(山神圖)

산신각 내부는 현대적인 조명시설이 없어 조금은 어둡다. 다행히도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촛불
들의 희생으로 산신도를 보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다.

산신도는 바위를 쪼아서 그린 벽화로 예전에는 흑백모드였으나 나중에 채색을 하여 칼라모드가
되었다. 색이 입혀져서 예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지만 그려진 폼은 좀 별로인 것 같다.
꼬랑지를 강하게 쳐들며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모습은 제법 용맹이 깃들여져 보이며, 하얀 긴
수염을 지닌 산신이 멀뚱한 표정으로 호랑이 앞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자(童
子)가 찻잔을 들고 서 있는데, 동자라 하기에는 너무 연세가 지긋하게 보인다. 그래서 내가 일
행들에게 우스개 소리로
'저 찻잔을 든 사람은 원래 산신이었는데, 산신들간의 경쟁에 밀려 산을 말아먹었다. 그래서 먹
고 살고자 저 산신의 비서로 취업한 것이다'


▲  석종형(石鐘形)부도 3형제
산신각 뒤쪽 숲속에 숨어 있는 석종 모양의 부도로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고색의 무게를 간직하며 양지 바른 곳에 나란히 있는 모습이 정겹다.

▲  태고사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 - 보물 749호

태고사 경내에서 산신각을 거쳐 뒤쪽(봉성암 방면)으로 2분 정도 오르면 수려한 모습의 원증국
사탑을 만날 수 있다. 이 탑은 앞서 언급한 보우대사의 사리가 담긴 부도로 그가 입적(入寂)하
자, 태고사에 사리를 봉안하고 일부는 용문산 사나사로 보내 탑을 만들어 봉안했다.

그는 열반에 들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시를 남겼는데. 그도 죽기 전에야 인생무상을 뼈저
리게 느꼈던 모양이다.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人生命若水泡空
    팔십여 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八十餘年春夢中
    죽음에 이르러 이제 가죽포대 버리노니   臨終如今放皮袋
    둥글고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一輪紅日下西峰

이 부도는 기존의 고려시대 부도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유명한데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그 위에 마치 조그만 부도가 들어앉은 듯한 지붕돌을 두었으며, 그
위에 다시 특이한 모습의 머리 장식을 얹었다.


▲  꽃무늬로 정신이 없는 원증국사탑 기단부

기단의 밑 부분에는 정교한 꽃무늬가 잔뜩 새겨져 있으며 8각의 가운데 받침돌에는 기둥무늬와
꽃무늬로 가득하다. 탑의 조성 시기는 1385년 무렵으로 멋드러진 탑의 모습을 통해 고려 조정의
보우대사에 대한 신뢰와 제자들의 지극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 원증국사부도만이 외로이 서 있었으나 근래에 이르러 어느 승려의 탑을 그 밑
에 나란히 세워 놓았다. 이곳에 탑을 세울 정도면 청암대종사와 더불어 태고사 발전에 크게 기
여했던 승려가 분명하다.

아래쪽 부도는 보우대사에 대한 존경과 일편단심을 표하려는 듯, 원증국사탑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모습도 많이 비슷하다. 특히 충주 정토사(淨土寺) 부도탑과 상당히 비슷한데 시원스레 올려
진 지붕돌의 처마가 꽤 인상 깊다.


▲  오랜 세월을 뛰어넘은 원증국사탑과 새로운 부도탑

 

 


 

♠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내부에 세운 비상용 행궁
북한산성행궁터(北漢山城行宮址) -
사적 479호

▲  행궁 외전터

중흥사터에서 북한산성계곡을 거슬러 15분 정도 가면 행궁터를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여기는
행궁의 외곽 부분으로 남장대(南將臺)로 가는 서남쪽 산길을 꾸준히 오르면 행궁터가 계속 펼쳐
지면서 지금은 주춧돌로 변한 외전터와 내전터가 모습을 비춘다.
행궁(行宮)이란 비상시나 지방 시찰 때 제왕이 머무는 공간이다. 대표적인 조선 때 행궁으로 화
성(華城) 행궁, 온양온천(溫陽溫泉) 행궁, 남한산성(南漢山城) 행궁, 그리고 북한산성 행궁 등
이 있었다.

북한산성 행궁은 1711년(숙종 37년) 북한산성 보수공사를 맡은 김우항(金宇杭)이 국가 비상시 
머물 수 있는 행궁을 세울 것을 건의하면서 조성되었다. 행궁과 더불어 경리창상창, 금위영, 호
조창(戶曹倉), 어영청(御營廳) 등 여러 관청이 행궁 밑에 빼곡히 지어지면서 북한산성계곡 상류
는 그야말로 조그만 도시를 이루었는데, 이는 위급시 이곳으로 피신하여 비상작전을 수행할 임
시 수도의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행궁의 규모는 124칸 정도로 제왕의 생활공간인 외전(外殿)과 왕비의 거처인 내전(內殿)으로 이
루어졌다. 또한 행궁을 동서로 가르며 조그만 계곡이 북한산성계곡으로 흘러가는데 이를 일종의
금천(
禁川)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행궁에 버금갈 정도로 잘 지어졌으나 정작 제왕들
은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 그럴만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상 행궁이라 조선이 천하를 다스릴 때는 그런데로 유지가 되었으나 왜정
이후, 방치에
가까운 관리소홀과 1915년 대홍수로 건물들은 하염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6.25를 겪으면서
나머지 남은 것들도 말끔히 붕괴되어 건물을 떠받들던 주춧돌만이 앙상하게 남게 되었다.

현재 행궁터에는 내전과 외전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축대 일부, 좌우의 담장터 등이 남아 있고
기와조각들이 어지러히 널려 옛날을 그리워한다. 특히 내전터에는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주춧돌이 있고 기단과 석축이 남아 있는데, 성능대사가 작성한 '북한지(北漢誌)'에는 '좌우상방
2칸, 대청 6칸, 사면퇴 18칸, 도사 28칸'
이란 기록이 있어, 정면 5칸, 옆면 2칸 건물에 사방 1
칸씩을 덧단 구조의 전각으로 여겨진다.

행궁터 북쪽 구석에는 잘생긴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피부에 활을 건다는 뜻의 '게궁암(揭弓岩)
' 바위글씨가 있었다. 1992년 겨울, 부친(父親)과 왔을 때 본 기억이 있어 누렇게 뜬 수풀을 비
집고 들어가 보았으나 내가 별로 달갑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새 훼손되어 없어졌는지 결국 만나
지 못했다.


▲  1904년경 북한산행궁의 모습 (문화재청 사진)


▲  수풀에 뒤덮힌 행궁터

북한산행궁은 산자락에 터를 닦았기 때문에 돌로 축대를 다져 건물을 지었다. 비록 행궁의 한계
로 서울 궁궐보다는 훨씬 작게 지어졌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규모는 아니다. 124칸이면 사대부나
부자의 고래등 기와집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던 행궁은 제대로 역할도 하지 못한 채, 마치 아틀란티스 대륙이 쏙 사라진 것처럼 나
무와 수풀의 조그만 나라가 되어 옛터만 황량히 남아있으니 역시 인간의 창조물은 그 아무리 대
단하고 견고하다 한들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먼지에 불과하다.


▲  행궁 내전터 ▼

내전터 한쪽에는 조그만 우물이 있다. 아마도 행궁에 물을 공급했던 우물일 것이다. 대머리처럼
허전하기 그지없는 옛터에는 주춧돌과 축대를 이루던 돌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누렇게 익으며
인생의 말년에 다다른 낙엽이 그 빈 공간을 따스하게 덮어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인간의 부질없음이 담긴 공허한 북한산성행궁터는 고양시와 문화재청에서 복원계획을 가지고 있
으나 워낙 첩첩한 산골이라 공사가 그리 여의치가 않다. 다행히 이곳은 생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놓아 복원에는 문제는 없겠으나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므로 무리하게 벌이
지말고 지금 이대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듯 싶다. 폐허의 현장에서 마음껏 상상의 스케치를 해
보는 것도 답사에 좋은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행궁터에서 실타래처럼 이어진 서쪽 산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남장대터가 나온다. 이곳은 북한
산성 안에서 가장 높은 측에 속하는 해발 700m 고지로 산성 내부와 북한산성 산줄기가 훤히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이 천하 일품이다.

※ 북한산성행궁터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북한산성입구 정류장 → 대서문 → 북한동역사관 → 중성문 → 중흥사터 → 태고사입구 → 행
  궁터 (약 6km, 2시간)
* 대남문과 청수동암문에서 행궁터로 접근해도 된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69일대


▲  경리청상창터(經理廳上倉址)와 북한산성계곡 등산로 ▼

북한산성행궁터 입구에서 대남문 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커다란 돌이 박힌 거대하
고 긴 석축이 마중한다. 이곳은 곡식을 보관하던 경리청상창의 옛터로 축대를 이루는 돌이 행궁
터보다 더 장대하여 비록 터만 남았음에도 위엄이 진하게 돋보인다.

경리청상창은 숙종 시절에 북한산성을 보수하고 비상용 행궁과 여러 관청을 지을 때 세워진 양
곡 창고로 '팔비헌'이란 현판이 있었다. 상창(上倉)은 창고 63칸, 내아(內衙) 12칸, 집사청(執
事廳) 3칸, 군관청(軍官廳) 4칸, 서원청(書員廳) 4칸 등 총 86칸 규모로 북한산성 행정업무를
보던 관성소(管城所)를 같이 두었으며, 행궁을 관리하는 관성장(管城將)이 근무했다.

북한산성의 양식 창고는 상창 외에도 호조창(戶曹倉)과 중창(中倉), 하창(下倉), 그리고 평창(
平倉) 등이 있었으며, 상창은 19세기 후반에 파괴되어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  잡초만 무성한 경리청상창터 내부

▲  금위영이건기비(禁衛營移建記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87호

경리청상창터에서 대남문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길 왼쪽에 문화재 안내문이 손짓 할 것이다. 안
내문 안쪽에는 적당히 닦인 공터가 있는데, 그 오른쪽 구석에 바위에 비문(碑文)을 새긴 독특한
비석, 금위영이건기비가 수줍은 듯 자리해 있다.

금위영(禁衛營)은 병자호란 이후에 서울을 방어하고자 세운 5군영의 하나로 원래는 동소문(東小
門, 혜화문) 안쪽에 있었다. 허나 그 지대가 높고 무너지기가 쉬워서 1715년 북한산성 안 지금
의 위치로 이전하고 그것을 기리고자 이건기비를 세웠다. 비문은 당시 도제조(都提調)를 지낸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이 지었다.

이 비석은 서 있지 않고 길게 누워있는 형태로 화강암 바위면에 비문을 새겼으므로 마애비(磨崖
碑)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비문은 마멸된 부분이 많아서 정상적인 눈으로는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탁본을 해야 전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비석 뒷면은 흙에 묻혀있고, 비문 위쪽에는
낙수면(落水面)이 새겨진 지붕돌이 놓여져 있는데, 이곳의 청정함을 자랑하듯 푸른색 이끼 옷을
걸쳤다.

북한산성계곡 상류(중성문~대성암)가 말끔히 개방되기 이전이자 내가 꼬마 시절이던 1990년 이
비석을 보고는 매우 신기하여 이리저리 살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계곡 상류는 금지된 구역이라
군인에게 신분증을 맡기고 들어가야 했는데, 1992년 이후 개방되어 자유의 땅이 되었다.


▲  누런 잡초만이 가득한 금위영유영지(禁衛營留營址)

금위영이건기비 남쪽에는 금위영의 유영이 있던 공터가 있다. 서울에 있던 금위영을 1715년 이
곳으로 이전했는데, 금영(禁營), 금창(禁倉)으로도 불렸다. 허나 19세기 후반 북한산성에 대한
관리가 끊어지면서 주변의 여러 건물과 더불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  이끼의 보금자리가 된 금위영유영지 축대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 속에 모든 것이 씻겨 내려간 금위영유영터에는
주춧돌과 석축 일부만이 고개를 들며 지나간 세월을 그리워한다. 마치 옛날을 그리워하는 우리
네 인간들처럼 말이다.

* 금위영이건기비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32

 


♠  북한산성 대남문(大南門)과 보현봉 그리고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절집, 문수사(文殊寺)

▲  북한산성 대남문 - 사적 162호

금위영이건기비에서 대성암을 지나 20여 분을 오르면 북한산성 13성문의 하나인 대남문이 마중
한다. 이 문은 1712년에 세워진 것으로 도성(都城)과 산성을 잇는 중요한 문인데, 문을 경계로
안쪽은 경기도 고양시, 바깥쪽은 서울 종로구이다.

왜정 이후 홍예문만 남아있던 것을 1990년 이후에 문루를 복원했다. 이곳에 서면 가까이에 보현
봉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과 한강(漢江), 멀리 강남구와 동작구 지역까지 두 눈에 거침없이 들어
와 조망 하나는 천하 일품이다.

문을 나서서 직진하면 구기동과 평창동이며, 오른쪽으로 가면 고려시대에 창건된 조그만 산중암
자 문수사(文殊寺)가 나온다.


▲  대남문 앞에서 천하를 굽어보다.
서울 도심과 용산, 강남, 동작 지역까지 훤히 바라보인다.

▲  높은 하늘을 이고 천하를 응시하는 보현봉(普賢峰, 700m)의 위엄


▲  문수사 문수굴에 자리를 편 문수보살(文殊菩薩)

한칸 방 어찌 그리 너무도 고요한가, 일만 인연 모두 적막하네
길은 돌 틈으로 뚫고 가고, 샘은 구름 속에서 새어나네
밝은 달 처마 끝에 걸려 있고, 산들바람 숲 속에서 일어나네
누구 저 스님 따라, 고요히 앉아 참 낙을 배우려나

* 탄연(坦然)이 문수사에서 지은 시


북한산성 대남문을 나와서 오른쪽(서남쪽) 길로 3분 정도 가면 해발 640m 고지에 둥지를 문수사
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수사는 문수봉(文殊峰) 바로 밑에 터를 닦은 산사로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절이다. 북
한산에 안긴 절 가운데 가장 조망과 경관이 일품으로 경내에 있는 문수굴은 예로부터 영험 있는
기도처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 절은 1109년(고려 예종 4년) 탄연(坦然)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기암괴
석과 경관, 그리고 천연동굴(현재 문수굴)에 반해 절을 세우고, 문수암(文殊庵)이라 했다고 한
다. 1451년(문종 1년) 문종의 딸인 연창공주(延昌公主)가 중창했으며, 그 이후 500년 가까이 적
당한 자취를 남기지 못해 아마도 오래 못 가서 망한 것으로 보인다.
 
1921년 삼성각과 오백나한전을 중수했는데, 이 사실로 봐서는 이때 오랫동안 꺼진 법등(法燈)이
다시 켜진 듯 하다. 허나 6.25전쟁으로 한줌의 재가 되었으며, 1957년 신수(信洙)가 중건하고,
1983년에 주지 혜정(慧淨)이 삼성각과 나한전을 개축했으며, 2002년에 대웅전과 응진전(應眞殿),
요사 등을 새로 건립하여 지금에 이른다.

절 인근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던 그 유명한 비봉(碑峰)이 있다. 지금 순수비는 건
강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지만 그 비석에 '한성(漢城)을 지나 고개를 올라..(중략) 한
도인(道人)이 석굴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이 있어 그 석굴을 문수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절이 너무 높은 곳에 자리해 있어 오르기는 힘들지만 조망이 국보급이라 문인들이 많이 찾아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는데, 고려 중기 때 이장용(李藏用, 1201~1272)을 비롯하여 최립(崔岦,
1539~1612), 홍세태(洪世泰, 1653~1725) 등이 이곳을 거쳐갔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어머니가
가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이곳까지 찾아와 문수굴에 봉안된 오백나한에게 치성을 올려 이승만
을 낳았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이승만이 80 고령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올라와 '문수사' 현판을
남겼으며, 당시 승려와 찍었던 흑백사진도 아련히 절에 남아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三聖閣), 응진전, 요사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위치가 가파른 곳
이라 사세 확장도 어렵다. 대웅전 옆에는 문수사의 명물이자 지금의 문수사를 있게 한 문수굴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은 아쉽게도 하나도 없다. 다만 대웅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좌상이 명성황후
(明成皇后)가 시주한 것이라 하니 그게 제일 오래된 것이며, 대웅전 석가불은 영왕(英王, 영친
왕)이 봉안한 것이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고색의 때는 오래 전에 증발해서 사라졌으나 그 대신 천하 제일의 조망과 주변경
관을 품고 있어 그 아쉬움을 다소 달래준다. 경내에 오르면 가까이로 구기동(舊基洞)과 부암동
부터 서울 도심, 멀리 한강과 관악산(冠岳山)까지 보인다. 또한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곳이라
구름이 아래로 흘러가며, 공기 또한 속세와 틀리다.

서울 도심과도 무척이나 가까우며, 도심의 상징인 종로구에 있음에도 분위기는 180도 확연히 틀
리다. 구기동에서 2시간을 낑낑대고 올라야 이를 만큼 산행의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되지만 서울
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지붕으로 굳이 멀리 나갈 필요 없이 산중암자의 고즈넉함과 아늑함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  문수사의 명물 문수굴(文殊窟)

문수사 경내에서 눈여겨 볼 곳은 바로 문수굴이
다. 탄연이 이 굴에 반해 절을 지었을만큼 문수
사의 가장 소중한 꿀단지로 거대한 바위에 나
있는 자연동굴이다.
문수사를 거쳐간 승려들이 수도를 했던 곳이지
만 딱히 옛 흔적은 없으며, 1983년 주지 혜정이
동굴 입구에 목조로 문을 만들었다. 문에 걸린
'삼각산천연문수동굴(三角山天然文殊洞窟)'이란
현판은 달랑 29만원으로 악명이 대단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글씨이다.

동굴 내부에는 문수보살을 중심에 봉안했고, 좌
우로 나무로 만든 조그만 문수보살 20여기가 든
든하게 병풍이 되어준다. 예로부터 영험이 있는
기도처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이곳에 있던 오백
나한은 응진전(오백나한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수사를 이렇게 둘러보고 구기동으로 내려가
저녁을 먹고 산행을 마무리 지었다.

※ 북한산 문수사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1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212번(수색,은평차고지↔옥수동)시내버스를 타고 구기동 현대빌라나 승가사입구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시내버스를 타고 구기동 현대빌라나 승가사입구
  하차
* 산행코스 : 구기동(현대빌라, 승가사입구) → 구기분소 → 승가사갈림길 → 깔딱고개 → 문수
  사 (2시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2 (☎ 02-391-2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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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2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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