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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10.08 북한산성 내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노적사~태고사 <태고사 원증국사탑, 원증국사탑비>
  2. 2022.03.28 고양 최영장군묘, 고양동누리길, 성녕대군묘 역사기행 (대자산, 경안군 및 임창군묘)
  3. 2020.08.02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달달한 폭포, 밤골계곡 숨은폭포 (북한산둘레길 효자길, 효자비)
  4. 2015.12.23 서울의 듬직한 뒷산, 북한산~북한산성 겨울 산행 (태고사, 행궁터, 대남문, 문수사)

북한산성 내에 깃든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 노적사~태고사 <태고사 원증국사탑, 원증국사탑비>

북한산 노적사, 태고사



' 북한산 산사 나들이 (노적사, 태고사) '
태고사 원증국사탑
 태고사 원증국사탑
 



 

북한산(삼각산)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명성이 높은 서울과 경기도의 주요 도시인 고양(高陽
)을 끼고 있는 수도권 제일의 자연 공원이자 이 땅의 주요 국립공원이다. 번잡한 지역에 누워
있다 보니 찾는 이가 실로 엄청나 1㎢당 탐방밀도가 무려 5만 명에 이른다. 하여 탐방밀도 부
분 세계 기네스북 1위를 거머쥐고 있다.
서울의 든든한 진산(鎭山)이자 내 즐겨찾기 뫼의 일원으로 매년 여러 번씩 그의 품을 찾고 있
는데, 봄을 몰아낸 여름이 제국의 기틀을 다지던 6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오래간만에 북한산
(삼각산)을 찾았다.

오전 11시에 연신내역(3,6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
을 타고 북한산성입구로 이동했다. 주말이라 버스는 북한산과 도봉산(道峯山), 노고산(老姑山
) 산꾼들로 완전 짐짝수송을 이루었는데, 버스는 간신히 바퀴를 움직이며 시내를 빠져나와 북
한산성입구에서 승객 60% 이상을 쏟아낸다.

북한산성입구에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북한산성계곡(북한천) 하류를 따라 수구문(水口門)
터와 서암사(西巖寺)터를 지나 옛 북한동(北漢洞) 마을에 이르렀다.
북한동은 북한에 있는 동네가 아니라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둥지를 튼 산골 마을로 북한산
성이 조성되면서 형성되었다. 주로 군사들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으며, 마을은 북한동역사관에
서 멀리 태고사 근처까지 형성되었는데, 1930년대에는 100호 이상의 집이 존재했다.

1910년 이후, 왜정(倭政)의 고의적인 북한산성 관리 소홀과 잇따른 자연재해로 북한산성과 마
을이 크게 훼손되자 산성 안에 둥지를 틀던 5개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산성(山城) 내부를 관리
했다. 당시 주민들은 나무를 땔감으로 팔거나 과실을 팔며 생계를 꾸렸는데 이중 살구와 감은
북한동의 특산품이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인근 사람들이 산성 안으로 많이 피신을 했다. 하지만 북한군이 1개 연대
를 보내 숲을 죄다 불태우며 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전쟁이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
이 이곳을 방문했는데 주민들의 궁핍함을 보고는 이곳을 유원지로 개발시키기로 했다. 처음에
는 대성장, 팔경정 두 곳만 식당 허가가 났으나 주민들의 항의로 인해 1974년 모든 집에 식당
허가를 내주게 된다. 그래서 식당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등산물품 가게도 생겨났다.

이후 마을은 등산/탐방객을 상대로 음식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는데, 그들의 무분별한 장사로
인해 계곡이 오염되고 자연이 훼손되는 등, 계속 말썽이 생기자 골머리를 앓은 행정당국은 북
한산의 자연 보전과 계속되는 말썽을 해소하고자 마을을 폭파시키기로 결정, 2001년부터 마을
이주 사업을 단행했다.
처음에는 반대도 많았지만 보상도 심심치 않게 해주었고 북한산성 밑에 자리까지 제공해 주면
서 북한동 마을 55가구는 모두 그곳으로 이주했다. 마을 주민들이 이렇게 고향을 떠나자 북한
산성계곡의 옥의 티를 선사했던 집들을 죄다 부시고 주변 생태계를 복원했으며, 옛 마을의 중
심지에 '북한동역사관'을 세워 세월의 저편으로 흘러간 북한동의 역사를 짧게 다루고 있다.

솔직히 마을이 없어지니 좀 허전하기는 하나 마을로 인해 크게 망가졌던 자연 경관이 활짝 피
어나니 분위기는 더 밝아진 것 같다. 대신 먹을 거리는 북한산성입구나 시내에서 미리 사와야
되는 수고로움이 있으나 그거야 조금 부지런을 떨면 된다. 솔직히 마을은 음식과 간식 가격이
비쌌다. 그 돈으로 시내에서 2배의 양을 사오는 것이 더 이득이다.


▲  북한동 향나무 (나이 약 400년)
옛 북한동마을의 수호목으로 그에게 병이 생기면 마을 전체에 병이 생긴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의 지극정성이 대단했다. 허나 마을은 북한산(삼각산) 생태계를
위해 모두 사라지고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성밖으로 나가면서
아무도 없는 마을을 홀로 지키고 있다.



 

♠  노적봉 밑에 둥지를 튼 첩첩한 산주름 속의 산사
~ 북한산 노적사(露積寺)


노적봉이 더없이 깨끗하여 티끌 하나 없고
만고의 청풍이 노적봉을 불어와 맑고 밝은 기운 돌아오는구나
산영루를 던지고 험악한 산길을 이리저리 찾아 북으로 가면
세 길쯤 되는 돌에 백운동문이라 새겨져 있어
돌길을 따라 진국사 절문에 당도하니
붉은 나무와 흰 돌이 구렁을 이루며 물소리 맑게 들리어라


*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李德懋)가 지은 시로 진국사는
지금의 노적사이다.


북한동역사관에서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30분 정도 올라가면 중성문(中城門)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 3분 정도 가면 왼쪽에 노적사로 인도하는 길이 살짝 손을 내밀고, 그 길을 오르면 노적
봉(露積峰) 밑에 아늑하게 들어앉은 노적사가 모습을 비춘다.

노적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1712년 성능(性能)이 창건하여 진국사(鎭國寺)라 했다. 성
능은 18세기에 활동했던 승려로 숙종(肅宗) 때 승군(僧軍)의 대장인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에 임명되어 북한산성 보수공사에 참여했다. 그는 산성 안에 있는 중흥사(重興寺)와 태고사를
보수하고, 노적사<현재 상운사(祥雲寺)>와 서암사(西巖寺) 등 절 10곳을 지어 북한산 승병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또한 중흥사와 태고사에 30년간 머물면서 북한산성과 북한산(삼각산)에 있는 절, 유적, 행궁
(行宮), 관청, 기타 여러 시설 등을 정리한 '북한지(北漢誌)'를 작성하기도 했다.

창건 이후 이렇다 할 내력(來歷)도 남기지 못한 채, 감쪽 같이 사라졌는데, 아마도 중흥사(重
興寺)와 국녕사(國寧寺)가 사라진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에 화재나 자연재해로 강제로 문
을 닫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터만 아련히 남아있던 것을 1960년 승려 무위(無爲)가 여러
신도의 도움으로 절을 다시 짓고 노적봉 밑에 있다는 뜻에서 노적사라 하였다.

1977년 현 주지인 종후가 재정을 털어 절을 크게 확장시켜 삼성각과 나한전, 종각, 요사 등을
새로 세웠으며, 대웅전을 크게 손질했다. 2000년 12월에는 노적사의 오랜 내력이 인정되어
통사찰 201호
로 지정되는 영광을 누렸으나, 2002년 6월 불의에 화재로 종각과 요사가 전소되
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2006년 4월 종후가 히말라야산맥에 묻힌 네팔 팔탄타쉬 지하초사에서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기증받았는데, 2009년 극락전 뒤에 3층사리탑을 세우고, 극락전을 적멸보궁으로 이름을 갈았
다. 그리고 삼보당 2층을 대웅전으로 삼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나한전, 대웅전, 삼성각, 동인당 등 5~6동의 건
물이 있으며, 고색의 때는 진작에 녹아내려 소장문화재는 없다. 다만 조선 후기에 조성된 돌
사자상이 있으니 잘 찾아보기 바란다.
절 배후에는 인수봉을 닮은 노적봉이 든든한 모습으로 절을 지켜주고 있으며, 인근 태고사와
비슷하게 작고 조촐한 산사로 인적도 별로 없어 조용하고 아늑하다.
 
* 노적사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331 (대서문길 311-35 ☎ 02-353-5016)


 노적사 적멸보궁(寂滅寶宮)

경내로 들어서면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梵鍾)의 보금자리 범종
각(梵鍾閣)이 나오고, 그 범종각을 지나면 흙이 곱게 입힌 뜨락이 나온다. 그 뜨락 옆에는 2
층 건물인 대웅전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정면에 보이는 계단 끝에는 적멸보궁이 서쪽을 굽
어본다.

이곳의 법당인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多包)계 팔작지붕 건물로 1960년에 지
어졌다. 허나 공간이 좁고 퇴락하여 1986년에 증축해 지금의 면모를 지니게 되었으며, 처음에
는 대웅전으로 삼았으나, 2007년 극락전으로 현판을 갈았고, 2009년에는 적멸보궁으로 이름을
갈았다. 그러니까 50년 동안 이름을 2번이나 바꾼 셈이다.

극락전 시절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아우른 아미타3존상으로 불단을 구성했으나 적멸보궁으로 바뀌면서
그들을 대웅전으로 옮기고 불단 뒤쪽에 창을 내어 진신사리가 담긴 3층사리탑이 보이게끔 했
다. 물론 적멸보궁이니 불단에는 그 흔한 불상도 없다. 그 외에 1987년에 그려진 지장탱, 신
중탱, 아미타후불탱 등이 내부를 구석구석 수식한다.


▲  노적사 대웅전(大雄殿)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대웅전은 2층짜리 팔작지붕 집이다. 원래 삼보당(三寶堂)이라 불렸으
나, 2층을 새롭게 손질하여 대웅전으로 삼았으며, 극락전에 있던 불상을 옮겨왔다. 1층은 승
려의 생활공간인 요사(寮舍)로 쓰이고 있으며, 지하1층에는 공양간이 자리해 있다.


▲  노적사 동인당(東印堂)
예전 지장전(地藏殿)으로 지금은 요사와 선방(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  노적사 나한전(羅漢殿)

적멸보궁의 우측 옆구리로 들어서면 나한전이 나온다. 나한전은 부처와 그의 열성 제자인 나
한(羅漢)을 봉안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 그 자리에는 뒤쪽으로 물러난
삼성각이 있었다.
그러다가 2000년에 철거하여 나한전을 새로 지었으며, 건물 외벽을 수식하는 벽화는 2002년에
완성을 보았다. 건물 밑에는 2개의 샘터가 있는데, 노적봉이 아낌없이 베푼 샘물이 콸콸 쏟아
져 나와 중생의 목마름을 쿨하게 해결해준다.
(왼쪽 샘물은 일반인들도 마실 수 있으나, 오른쪽 샘물은 예불용으로 아무나 마실 수 없음)


▲  나한전 내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가지각색의 모습을 지닌 나한상이 빼곡히 자리를
채우고 있다.

▲  나한전 뜨락에 자리한 약사여래좌상과 지구를 든 석조미륵불

▲  성림당 월산대종사(聖林堂 月山大宗師) 기념비와 3층사리탑

나한전 뜨락 우측에는 약사여래좌상과 석조미륵불이, 좌측에는 3층사리탑과 근래에 지어진 월
산대종사 기념비가 자리한다.
석조미륵불(彌勒佛)은 원래 3층사리탑 옆에 있었으나 월산 대종사 기념비를 세우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절을 빛낸 월산이 석조미륵불보다 우선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손에는 동그
란 무엇인가가 들려져 있는데,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라고 한다. 자세히 보면 지구를 위
/아래로 구분하는 경도와 위도가 나와있으며, 중간에 우리나라가 선명하게 새겨져 눈길을 끈
다. 마치 선서를 하듯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한 모습이 충주 미륵리절터에 있는 미륵리석불
(彌勒里石佛)을 연상케 한다.

 ◀  석가여래의 진신사리가 담긴 3층사리탑
별다른 볼거리가 없어 애태우던 노적사의 새
로운 명물로 불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겨져 있다.

노적사 주지인 종후는 2006년 네팔에 있는 팔
탄타쉬 지하초사에서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선물 받았다. 그래서 2009년에 3층석탑을 만
들어 사리를 봉안했고, 그 곁에 진신사리 기
증 증명서를 세웠다.
탑의 모습은 불국사의 석가탑(釋迦塔)과 닮은
꼴로 근래 들어 이 땅에 부처의 사리를 담은
절이 크게 늘어나고 있으니 과연 어디까지가
진품인지 모르겠다.


▲  인공 바위로 이루어진 노적사 스타일의 삼성각(三聖閣)

나한전에 이르면 '경내는 이게 전부구나, 더 이상 없겠지' 싶은 마음에 발길을 돌리기가 쉽다
. 바로 나한전이 뒤를 고스란히 가렸기 때문이다. 또한 언뜻 보아도 그 뒤에는 아무 것도 없
을 것처럼 보인다. 허나 그것은 함정이다. 나한전 옆구리를 지나면 그 뒤쪽에 전혀 불전(佛殿
)으로 보이지 않는 인공 바위로 울퉁불퉁 조성된 공간이 나온다. 얼핏 봐서는 무슨 창고가 아
닐까 싶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에 '삼성각'이란 현판이 걸려있어 건물의 정체를 두고 아리
송에 빠진 중생을 깨우치게 한다.

예전에는 천막으로 크게 둘러 정말 창고나 실내 체육공간처럼 보였는데, 돈 좀 쏟아부었는지
천막을 걷어내고 인조 돌을 더덕더덕 붙여 놀이공원의 인공폭포나 놀이시설처럼 정말 어색하
게도 만들어버렸다. 차라리 조촐하게 작은 기와집을 올려 삼성각으로 삼는 것이 더 좋을 듯
싶은데, 전혀 불전의 품격이 보이질 않는다.

원래 삼성각은 나한전 자리에 1963년에 지어진 팔작지붕 건물로 동인당으로 바뀐 지장전과 비
슷한 규모를 지녔다. 허나 그런 삼성각을 부시고 나한전을 지었는데, 그 뒤쪽에 대충 천막으
로 자리를 닦고 삼성각으로 삼았으며, 근래에 인조 돌을 덧붙여 부조화의 공간이 되버린 것이
다.


▲  석굴 같은 분위기의 삼성각 내부

삼성각 내부는 없어 보일 것 같은 외부와 달리 넓고 아늑하다. 불단에는 칠성(七星)을 비롯해
독성(獨聖, 나반존자)과 산신(山神)이 석상으로 자리해 있으며, 그들 뒤에는 커다란 돌이 비
스듬히 자리해 있는데, 그 모습이 그들을 덮칠듯 아찔해 보인다. 허공에는 중생의 소망을 한
아름씩 담은 고운 연등들이 환상적인 색채를 내며 내부를 환하게 비춘다.


▲  노적사에서 섭취한 점심공양의 위엄
흰쌀밥에 갖은 나물과 고추장을 넣고 비벼먹는 이 땅에 흔한 절 공양밥이다.
밥과 함께 국도 제공되었는데, 맛도 괜찮고 노적사의 인심도 훈훈하여
배불리 먹고 갈 수 있다. 상황에 따라 떡도 얻을 수 있음
(점심시간은 12~13시, 일반인도 공양 가능)



 

♠  보우대사(普愚大師, 원증국사)가 세운 고려 후기 고찰
북한산 태고사(太古寺)

▲  태고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이 암자에 내가 살지만 나도 잘 몰라
깊으디 깊고 빽빽하지만 옹색하지 않아
하늘과 땅을 모두 가두었으니 앞과 뒤가 있을 리 없고
동서남북 어디라도 머물지 않네

* 보우대사가 태고사에 머물며 지은 태고암가(太古庵歌)의 한 수


노적사를 둘러보고 다시 북한산성계곡으로 나와서 20분 정도 오르면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태고사가 마중한다.

태고사는 1341년 원증국사(圓證國師 = 보우대사)가 창건하여 태고암(太古庵)이라 하였다. 이
후 400년 동안 적당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으며, 18세기 중반인 숙종 시절에 북한산성을 정비
하고 산성 안에 사찰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면서 다시금 수면 위로 오르게 된다. 당시 태고사
에는 경서(經書) 출판용 목판 5,700여 매와 활자 11두(斗), 그리고 화약용 흑탄 1,600여 석이
비축되었으며, 절의 규모는 131칸에 이르는 대가람이었다.
허나 1915년 대홍수와 산사태, 6.25전쟁으로 말끔히 파괴된 것을 1964년 청암(靑岩)이 중창하
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절의 규모가 매우 조촐하여 거의 산중암자의 분위기가 진
하게 풍긴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해도 700년 가까이 꾸준히 명맥을 유지한 북한산성 내부에
몇 안되는 전통 토박이 사찰로 자부심이 강하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위시해 산신각과 요사 등, 3~4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원증국
사탑비와 원증국사탑 등 국가 보물을 무려 2점이나 간직하고 있어 이곳의 높은 명성을 알려
준다. 그 외에 조선시대 부도 3기가 산신각 부근에 있고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늙은 귀룽나
무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하다.

차량도 감히 들어올 수 없는 깊숙한 산중이라 등산의 수고로움을 거쳐야 접근이 가능한 곳이
지만 서울 시내에서도 가까우며. 노적사와 마찬가지로 한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첩첩한 산주름 속이라 산새도 감히 넘어오기 힘들고, 제아무리 번뇌라
고 해도 산이 깊고 험해 따라오다가 졸도를 할 정도이다. 그윽한 풍경소리만이 적막에 잠긴
경내를 잔잔히 쓰다듬어주며 속세의 무거운 짐과 번뇌를 북한산성계곡에 모조리 내던지고 며
칠 조용히 안기고 싶은 그런 곳이다.

* 태고사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5 (대서문길 406 ☎ 031-384-5589)


▲  녹음(綠陰)에 잠긴 태고사 귀룽나무 ~ 고양시 보호수 17호

태고사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훤칠한 키의 귀룽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귀룽나무는 이 땅
에서 매우 희귀한 나무로 매년 3월 말이나 4월 초에 나무 전체에 새하얀 꽃이 가득 피어난다.
태고사에 무수히 발을 들였지만 정작 하얀 꽃으로 치장된 그의 모습은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그 꽃의 자태가 마치 하얀 눈과 비슷하다고 한다.
나무의 나이는 약 170년, 높이 23m, 허리둘레는 2.3m에 이르며, 성하(盛夏)의 길목이라 꽃 대
신 푸른 옷을 걸치고 중생을 맞는다.


▲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를 품은 비각(碑閣)

▲  태고사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 - 보물 611호

대웅보전 좌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높다란 비각이 있는데 그 안에 태고사 제일의 보물
인 원증국사탑비가 남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둥지를 텄다. <태고사 대웅보전은 서향(西向)임>

탑비의 주인공인 원증국사는 고려 후기를 주름잡던 고승(高僧)으로 1301년 귀족 가문인 홍주
홍씨(洪州洪氏) 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비는 홍연(洪延), 어미는 정씨로 13살에 양주 회
암사(檜巖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도했다.
1325년 승과(僧科)의 하나인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했으나 선수행을 위해 과감히 포기하고 용
문산 상원사(上院寺)를 거쳐 감로사(甘露寺)에서 계속 불도에 정진했다. 그 이후 북한산(삼각
산) 중흥사에 들어왔고, 1341년 절 동쪽에 태고사를 지어 머물며 그 유명한 태고암가(太古庵
歌)를 
지었다.
1346년 원나라(몽골)로 넘어가 임제종(臨濟宗) 18대 법손(法孫)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어받았으며. 원나라 제왕인 순제(順帝)의 초청을 받아 반야경(般若經)을 강설하기도 했다.

1348년 귀국하여 광주(廣州)에 머물며 일가 친척을 죄다 이곳으로 불러 살게 했는데, 광주를
현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광주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1356년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원융부(圓融府)에 머물며 승려의 임명권을 장악, 고려 불교계의 1인자가
되었으며, 이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통합을 주장했다.
허나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신뢰하면서 보우대사를 멀리하게 되는데 신돈은 그를 심하게 견
제하여 속리산(俗離山) 암자에 연금까지 시켰다.
신돈이 사라진 이후, 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려 했으나 자신을 박대했던 감정 때문인지 병
을 이유로 거절했다.

1381년 양산사(陽山寺)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때 우왕(禑王)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임명되었으
며, 1382년 소설사(小雪寺)에서 열반에 드니 그의 나이 81세, 법랍(法臘) 68세이다. 우왕은
그에게 원증(圓證)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탑호(塔號)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다.

오랜 세월의 무게와 웅장한 멋이 풍기는 이 탑비는 13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碑文)은 고
려 3은(三隱)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이색(李穡)이 썼으며, 거북 등의 귀부(龜趺)를 초석으로
삼아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를 이수(螭首)로 마무리 지었다.

탑비를 보호하는 비각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높다란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을 1980년에 복원했다. 참고로 원증국사의 탑과 탑비는 그와 인연이 깊던 용문산 사나사(舍
那寺)에도 있으며, 그의 사리를 2등분하여 태고사와 사나사에 안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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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증국사탑비의 귀부(龜趺)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표정이 씨익 밝아 보인다. 그의 왕눈이 눈과
세모난 코에는 장대한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들이 배여 있으나 그의
미소 만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몸뚱이에는 푸른 이끼들이 자리도
가리지 않고 싹을 피워 귀부의 건강을 조금 위협한다.

▲  원증국사탑비의 머리 부분
비석의 머리인 이수에는 구름 무늬가 얇게 새겨져 비석의 미를 한층 끌어 올린다.

▲  2009년에 조성된 청암대종사(靑岩大宗師) 부도

원증국사탑비 곁에는 새롭게 청암대종사의 부도가 뿌리를 내렸다. 청암은 1964년 태고사를 중
건했던 승려로 지금의 태고사가 있게 한 인물이다. 그는 이곳에 머물다가 2009년에 입적했는
데, 태고사 창건주(원증국사)의 비석 옆에 자리를 만들어 나란히 기리고 있다.


▲  채색된 산신각 산신도(山神圖)

경내에서 원증국사탑으로 오르는 길목에 산신(山神)을 봉안한 산신각이 있다. 특이하게도 돌
과 바위로 지어졌으며, 건물 내부는 거의 석굴(石窟)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부는 현대
적인 조명시설이 없어 조금은 어둡다. 다행히도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촛불들의 희생이 있기
에 산신도를 보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다.

산신도는 바위를 쪼아서 그린 벽화로 예전에는 거의 흑백 비슷했으나 나중에 채색을 했다. 색
이 입혀져서 예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지만 그려진 폼은 그다지 별로인 것 같다.
꼬랑지를 강하게 쳐들며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모습은 제법 용맹이 깃들여져 보이며, 새하얀
긴 수염을 지닌 산신이 멀뚱한 표정으로 호랑이 앞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
자(童子)가 찻잔을 들고 서 있는데, 동자라 하기에는 너무 늙어보인다. 그래서 내가 일행들에
게 우스개 소리로
'저 찻잔을 든 사람은 원래 산신이었는데, 산신들간의 경쟁에 밀려 산을 말아먹고 길거리에
나앉았다. 그래서 먹고 살려고 저 산신의 비서로 취직한 것이다'

▲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 - 보물 749호

태고사 경내에서 산신각을 거쳐 뒤쪽(봉성암 방면)으로 2분 정도 오르면 수려한 모습의 원증
국사탑을 만날 수 있다. 이 탑은 앞서 언급한 보우대사의 넋이 담긴 부도탑으로 그가 입적하
자 그가 세웠던 태고사에 사리를 봉안하고 일부는 용문산 사나사로 보내 탑을 만들어 봉안했
다.

그는 열반에 들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시를 남겼는데. 그도 죽기 전에야 인생무상을 뼈
저리게 느꼈던 모양이다.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人生命若水泡空
팔십여 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八十餘年春夢中
죽음에 이르러 이제 가죽포대 버리노니   臨終如今放皮袋
둥글고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一輪紅日下西峰

이 부도는 기존의 고려시대 부도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유명한데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그 위에 마치 조그만 부도가 들어앉은 듯한 지붕돌을 두었으며,
그 위에 다시 특이한 모습의 머리 장식을 얹었다.


▲  원증국사탑과 새로운 부도탑

기단의 아랫 부분에는 정교한 꽃무늬가 잔뜩 새겨져 있으며 8각의 가운데 받침돌에는 기둥무
늬와 꽃무늬로 가득하다. 탑의 조성 시기는 1385년 무렵으로 멋드러진 탑의 모습을 통해 고려
조정의 보우국사에 대한 신임과 제자들의 지극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예전에는 원증국사탑만 외로이 서 있었으나 근래에 이르러 어느 승려(이름은 모르겠음)의 탑
을 원증국사탑 아래에 나란히 세워 놓았다. 이곳에 탑을 세울 정도면 청암대종사와 더불어 태
고사 발전에 크게 기여한 승려가 분명하다.
아래쪽 부도는 보우대사에 대한 존경과 일편단심을 표하려는 듯, 위쪽 부도를 바라보고 있으
며, 그 모습도 많이 비슷하다. 특히 충주 정토사(淨土寺) 부도탑과 상당히 비슷한데 시원스레
올려진 지붕돌의 처마가 꽤 인상 깊다.

태고사를 이렇게 둘러보고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대성암과 대남문(大南門)을 거쳐 구기동(舊基
洞)으로 하산했다. 본글은 노적사와 태고사를 중심으로 다룬 글이라 그 외에 자잘한 내용은
쿨하게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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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최영장군묘, 고양동누리길, 성녕대군묘 역사기행 (대자산, 경안군 및 임창군묘)

고양 최영장군묘, 대자동 나들이



' 고양 최영장군묘, 대자동 나들이 '
최영장군묘
▲  최영장군묘



 


겨울 제국의 차디찬 한복판인 1월의 첫 무렵, 친한 후배와 고양시 대자동(大慈洞)을 찾았다.

서울에서 파주, 개성으로 이어지는 1번 국도(통일로)변에 자리한 대자동은 조선 태종의 4째
아들인 성녕대군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대자사(大慈寺)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전원(田
園) 분위기 가득한 이곳에는 나를 여기로 부른 최영장군묘를 비롯하여 성녕대군묘와 온녕군
묘, 경안군묘, 임창군묘 등 늙은 무덤이 즐비해 무덤 답사의 숨겨진 성지(聖地)로 꼽힌다.


▲  겨울잠에 잠긴 대자동 들판



 

♠  고려의 마지막 보루, 풀이 자라지 않는 무덤으로 유명했던
최영장군묘(崔瑩將軍墓) - 경기도 지방기념물 23호

▲  최영장군묘로 인도하는 대양로(고양동누리길)

최영장군묘를 비롯한 대자동 지역의 무덤 답사는 1번 국도(통일로)변에 자리한 필리핀참전비
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3,6호선 불광역과 연신내역, 3호선 구파발역, 3호선 삼송역에서
벽제, 내유동, 금촌, 문산 방향 시내버스와 마을버스 이용>
필리핀참전비 동쪽에는 대자동 안쪽으로 인도하는 2차선 길(대양로)이 있는데, 고양동과 중부
대학교 고양캠퍼스로 이어지는 길로 단풍나무가 길게 가로수를 이루고 있어 늦가을에 오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특히 고양시(高陽市)가 닦은 지역 둘레길인 '고양누리길'의 '고양
동누리길(필리핀참전비~만장고개, 7.56km)'이 이 길을 거쳐 최영장군묘와 대자산으로 흘러가
며, 최영장군묘와 성녕대군묘, 고양향교, 중남미문화원, 대자산 등의 여러 명소를 끼고 있어
볼거리도 풍부하다.

대자동 산하에는 최영장군묘역을 비롯해 성녕대군과 경혜공주, 경안군, 이성군(利城君), 온녕
군(溫寧君), 임창군 등의 조선 왕족들, 김홍집(金弘集)과 김주신(金柱臣) 등의 조선 후기 인
물 등, 오래된 무덤이 즐비하다.
이곳에 이토록 옛 사람들의 무덤이 많은 것은 고려 후기 이후 명당(明堂) 자리로 명성이 자자
했던 탓이다. 처음에 최원직(최영의 부친)이 이곳에 묻혔고, 그 다음 최영장군이, 조선시대로
들어와서는 성녕대군이 최영장군묘 밑에 둥지를 틀기 시작해 많은 왕족과 사대부들이 대자동
산천에 비빌 구석을 마련했다. 이렇게 한 동네에서 고려 말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의 무덤을 만날 수 있어 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그만이다.

필리핀참전비에서 1km 정도 들어가면 대자동회전교차로(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무민로
로 들어서(오른쪽으로 가면 고양동) 3분 정도 가면 대자동 마을회관인데, 여기서 오른쪽 성녕
길로 7분 정도 들어가면 농가와 주차장이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최영장군묘로 인도하는 대자
산 숲길이 활짝 마중을 한다.


▲  최영장군묘, 대자산 입구 (고양동누리길)

대자산(大慈山)은 고양시 대자동과 고양동(高陽洞)에 걸쳐있는 해발 210m의 나지막한 뫼이다.
최영장군과 성녕대군, 경안군 묘역을 품고 있는데, 최영장군묘 밑에서 대자산 정상부를 찍고
고양향교까지 2.5km의 숲길이 달달하게 펼쳐져 있으며, 고양동누리길이 이곳의 신세를 진다.
그 길을 7~8분 정도 들어가면 최영장군묘 안내문과 묘역으로 인도하는 계단이 모습을 비춘다.


▲  겨울에 잠긴 대자산 고양동누리길

대자산 남쪽 자락에는 고려의 마지막 보루였던 최영장군 묘역이 포근히 자리해 있다. 묘역에
는 2기의 무덤이 있는데, 위쪽에는 그의 아버지인 최원직(崔元直)묘가 있으며, 그 밑에 최영
과 부인 문화유씨의 합장묘(合葬墓)가 자리잡고 있다.

최영(崔瑩, 1316~1388)은 워낙 유명하여 모르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동주최씨 집안
으로 동주(東州,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사헌규정(司憲糾正)을 지낸 최원직,
어머니는 지씨이다. 그리고 그의 5대조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유청(崔惟淸, 1095~1174)
이다.

최영은 문인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과 무예가 뛰어났으며, 윤관
(尹瓘)장군처럼 병서(兵書)를 늘 옆에 끼고 살았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는 조언을 받고 그것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하여 재물과는 담을 쌓고 살
았으며, 조선 초기 청백리(淸白吏)인 맹사성(孟思誠)에 버금갈 정도로 검소하고 강직하여 백
성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  누렇게 시든 대자산 고양동누리길 (최영장군묘 안내문 직전)

청년 시절 양광도(楊廣道) 도순문사(都巡問使) 휘하에 있으면서 왜구와의 싸움에서 많은 전공
을 세웠는데, 생포한 왜구가 꽤 되었다. 하여 그 공으로 우다치(亏達赤)에 임명되었다.

1352년 공민왕(恭愍王)의 측근이던 조일신(趙日新)이 반란을 일으키자 안우(安祐), 최원(崔源
)과 함께 이를 때려잡아 크게 존재를 드러냈다. 그 공으로 호군(護軍)에 임명되었으며, 1354
년에 대호군(大護軍)으로 승진되었다. 그리고 그해 중원대륙<서토(西土)>에서 홍건적(紅巾賊)
이 크게 난을 일으켜 온갖 민폐를 부리자 원나라(몽골)에서 고려에 급히 원군을 요청했다. 하
여 공민왕은 최영을 대장군으로 삼아 군사 2,000명을 딸려 원나라로 파견했다.

최영은 원나라에서 살던 고려인 2만 명을 휘하에 넣었으며, 고우(高郵)를 정벌하는 등, 28번
의 전투를 벌이며 많은 공을 세웠다. 허나 이에 배가 아프던 원나라 승상 톡토(脫脫)가 참소
하면서 전쟁이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1355년 회안로(淮安路, 강소성 회안시)에서 홍건적을 방어하면서 팔리장(八里莊)에서 여러 차
례 승리를 거두었으며, 사주(泗州. 강소성 우이현)와 화주(和州, 안휘성 화현)에서 홍건적들
이 8,000여 척의 배로 무더기로 회안성을 포위하자 밤낮으로 수비해 그것들을 잘 다져진 고깃
덩어리로 만들었다. 이후 적들이 다시 침범하여 성을 넘으려고 하자 최영은 여러 번 창에 찔
렸음에도 친히 앞장서 적들을 무수히 때려죽이며 성을 지켰다.

그렇게 홍건적의 난에서 크게 명성을 날리며 대륙의 정세를 살피다가 귀국하여 공민왕의 명으
로 인당(印璫)과 함께 원나라(몽골)를 공격했다. 공민왕은 원나라에게 빼앗긴 요동(遼東)과
남만주 지역을 회복할 큰 계획을 세웠는데, 이때 최영과 인당은 요동과 요서(遼西)의 8개의
참(站)을 점령하여 이후 추진될 공민왕의 요동정벌에 큰 발판이 된다.
또한 왕명으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함경도와 두만강 이북 지역)를 공격하자 원나라(몽골)
의 벼슬을 지내며 쌍성 지역을 관리하던 이자춘(李子春), 이성계(李成桂) 부자가 투항하면서
쉽게 쌍성을 점령했다. 하여 고려의 영토는 함경도와 두만강 이북(길림성, 연해주 지역)까지
크게 확장되었다.


▲  최영장군묘 밑 (안내문과 묘소로 인도하는 계단)

1357년 체복사(體覆使)가 되어 서해, 평양, 니성(泥城), 강계 지역을 살폈으며, 1358년 왜구
가 400여 척의 배로 오차포(吾叉浦)를 공격하자 군사를 매복시켜 승리했다. 그리고 1359년 서
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던 중, 홍건적 패거리들이 4만의 군사로 쳐들어오자 생양역(生
陽驛), 철화현(鐵和縣), 함종현(咸從縣), 서경(西京, 평양) 일대에서 크게 격파했다.

1360년 평양윤(平攘尹) 겸 서북면순문사(西北面巡問使)가 되었는데, 전쟁의 여파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진제장(賑濟場)을 여러 곳에 설치해 양식과 종자를 나눠주면서 농사를 장려
하고 전사자의 유골을 매장해주었다.
1361년 홍건적이 다시 쳐들어와 국도(國都)인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개경을 탈환하고 그들을 때려잡았다. 그때 목을 붙잡고 도망친 홍건적은 불과 수백에 불과했
으며, 그 공으로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승진되었다.
1362년 안우, 이방실과 함께 홍건적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공신각(功臣閣)에
초상이 안치되었으며,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고 부모와 부인도 모두 작위를 받았다.

1363년 공민왕의 측근이던 김용(金鏞)이 반란을 일으켜 흥왕사(興王寺) 행궁(行宮)을 침범했
다. 최영은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그들을 모두 처단했으며, 그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이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되고 진충분의좌
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의 칭호가 내려졌으며 평리(評理)로 전임되었다.

한편 고려의 요동정벌과 반원정책에 뚜껑이 단단히 뒤집힌 원나라 기황후<奇皇后. 고려인 기
철(奇轍)의 여동생이자 원나라 순제(順帝)의 왕비>는 공민왕을 철저히 응징하려고 했다. 하여
원나라에 머물던 덕흥군<德興君, 고려 26대 군주인 충선왕(忠宣王)의 3번째 아들>을 고려 왕
으로 내세우며 최유(崔濡)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고려를 공격하게 했다.
처음에는 선주(宣州)까지 점령하며 승승장구했으나 공민왕이 최영을 도순위사로 임명해 안주
(安州)로 보내면서 상황은 크게 반전되었다. 결국 최유의 원나라군은 최영에게 크게 털려 최
유 등 일부만 간신히 목을 붙잡고 도망쳤다. 적을 토벌하자 공민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 1필,
은 2정을 내렸다.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인 박바이에다이(朴伯也大)가 연주(延州, 평안북도 영변)를 공격하자
최영이 휘하 장수를 보내 단죄했으며, 1365년 왜구가 교동도(喬桐島)와 강화도까지 기들어와
소란을 피우자 최영이 동/서강 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가 되어 동강을 지키며 왜구를 토벌
했다.


▲  석축 위에 터를 다진 최영장군 묘역

한편 공민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신돈(辛旽)은 예전에 밀직(密直) 벼슬에 있던 김란(金蘭)이
딸을 자신에게 바치자 최영이 크게 꾸짖은 일로 인해 그에게 안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최영이 고봉현(高峯縣, 고양시)으로 사냥을 나갔는데, 그것을 구실로 왕에게 참소하니
공민왕은 그를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시켜 내쫓았다.
신돈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최영과 이구수(李龜壽) 등이 환관과 결탁해 왕과 신하를 이간시킨
다고 무고하자 왕은 신돈과 친한 이득림(李得林)을 보내어 최영을 국문케 했다. 최영은 이제
끝난 듯 싶어 거짓 자복하며 죽여달라고 청하자 마음이 약해진 왕은 3품 이상의 작위를 삭탈
하고 그의 전민(田民)을 몰수하여 유배를 보냈다.
이득림은 최영을 어떻게든 죽이려고 난리를 쳤으나 정사도(鄭思道)가 죽기를 각오하고 이득림
의 부당성을 주장했다. 이에 이득림이 신돈에게 보고하여 정사도까지 파면시켰다.

이후 1371년 다시 복귀하여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1373년, 6도 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가
되어 군적(軍籍)을 작성하고 전함(戰艦)을 건조했으며, 장수들의 계급을 진급 또는 강등시키
고 죄지은 수령들을 독단으로 단죄하자 사람들의 비판이 대단했다. 또한 70살 이상 노인들부
터 차등을 두어 쌀을 징수하여 부족한 군량을 충당하자 백성들의 원성까지 자자했다.
1374년 경상도와 전라도, 양광도 도순문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를 두고 헌사(憲司)에서 예전
도순찰사로 있을 때 6도를 소란하게 했다며 반대했다. 이에 최영이 울면서 한탄하며 벼슬을
받지 않자 공민왕은 그를 비판한 대사헌 김속명(金續命) 등을 파면하고 최영에게 '진충분의선
위좌명정난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功臣)'의 칭호를 내려주며 그를 달랬다.

한편 그해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임밀(林密) 등을 제주도에 보내 말 2천 필을 보내라
고 했다. 당시 제주도는 원나라의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관할로 원나라의 잔여 세력<목호(
牧胡)>들이 지방 세력과 결탁해 고려 조정의 명을 거부하며 따로 놀고 있었는데, 겨우 300필
을 보냈다는 소식에 공민왕은 제주도를 공격해 탈환하기로 했다.
그래서 최영을 총대장으로 삼아 양광도와 전라도, 경상도 도통사(都統使)로, 염흥방(廉興邦)
과 이희필(李希泌), 변안열(邊安烈), 목인길(睦仁吉), 임견미(林堅味)를 원수(元帥)로 삼아
314척의 배와 25,600명의 군사를 보냈다.

제주해협을 건널 때 태풍으로 조금 고생을 했으나 제주도에 무사히 상륙, 명월포(제주시 한림
읍)에서 목호 세력 3천여 기를 격파해 30리를 추격했다.
날이 저물자 명월포로 되돌아와 해변에서 숙영을 했는데, 목호들이 기습해 안무사(安撫使) 이
하생(李下生)을 죽였고, 목호 우두머리 3명<시데르비스(石迭里必思), 촉투부카(肖古禿不花),
관음보(觀音保)>이 고려군을 살살 야골리며 유인하려고 했으나 최영이 이를 간파하고 즉시 정
예군을 보내 재빠르게 추격하니 적장은 유인책을 쓸 겨를도 없이 서귀포 남쪽 호도(虎島)로
줄행랑을 쳤다.
최영은 전 부령(副令) 정룡(鄭龍)을 보내 빠른 전함 40척으로 섬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정
예군을 이끌고 뒤쫓았다. 호도에 포위된 시데르비스는 처자와 일당 수십 명을 이끌고 섬 밖으
로 도망쳤으나 생포되었고, 촉투부카와 관음보는 항복을 해도 처형을 면치 못할 듯 싶어 쿨하
게 벼랑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생포된 시데르비스와 그의 아들 3명은 허리를 잘라 죽이고 자
살한 적장의 머리를 베어 조정에 바쳤다.
동도(東道)의 카치(哈赤), 시도시멘(石多時萬). 조장홀고손(趙莊忽古孫) 등은 수백의 무리로
끝까지 저항했으나 모두 토벌했으며, 잔당까지 모두 찾아내 죽이니 적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
다. 이렇게 목호 토벌로 금패(金牌) 9개, 은패(銀牌) 10개, 인신(印信) 30개, 말 1,000필을
노획했고, 포로들은 지역 세력에게 주었으며, 말은 여러 고을에 분산해 기르게 했다. 또한 군
율을 엄하게 하니 군사들은 벌벌 떨며 군율을 어기지 않았다.
그렇게 제주도를 토벌하고 10월에 귀환했으나 그 사이에 공민왕은 시해되고 말았다. 하여 왕
의 빈소에 들어가 제주도 토벌 경과를 보고하다가 끝내 주저앉아 통곡했다.


▲  뒷쪽에서 바라본 묘역 (제일 앞에 보이는 묘가 최원직묘)

공민왕이 시해되자 그의 큰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우왕(禑王, 1374~1388)이다. 우왕은
1375년 최영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삼았으며, 1376년 왕명으로 조정에서 폄직(貶職)되었던
강순룡(康 舜龍)과 정사도(鄭思道), 염흥방(廉興邦), 정몽주(鄭夢周) 등에게 관용을 베풀고자
했다.
그 결정이 내릴 당시 최영은 마침 사냥 중이라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녹사(錄事)가 관련
서류를 가져와 서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최영은 나라의 큰 일을 왜 대신(大臣)들과 합
의하지 않고 멋대로 하냐며 서명을 해주지 않았다.
또한 그의 조카사위인 판사(判事) 안덕린(安德麟)이 사사롭게 사람을 죽였는데, 최영의 권력
이 대단한 터라 어쩌지는 못하고 최영이 관장하던 순위부(巡衛府)로 보냈다. 그러자 최영은
크게 노하며 헌사(憲司)로 보내 죄값을 받도록 했다.

1376년 왜구가 충청도에 칩입했다. 연산 개태사(開泰寺)를 불지르고 조정에서 보낸 관군까지
때려잡는 등 위세가 대단하자 최영은 왕에게 출정을 요청했다. 허나 왕이 나이가 많음을 내세
우며 출정을 거부하자 2~3차례 간청하여 겨우 허가를 받았다.
최영은 급히 군사를 꾸려 왜구가 머물던 홍산(鴻山, 부여 홍산)으로 내려갔는데, 그는 좁은
험로에 의지해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허나 3면이 절벽이고 왜구의 위세가 대단하므로 장졸들
이 쉽게 나서려고 하지 않자. 최영은 정예병을 이끌고 제일 선두로 달리며 간만에 몸을 푸니
왜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며 도망치기 급급했다.
그때 적 하나가 수풀 속에 숨어 화살을 쏘아 최영의 입술을 맞추었는데, 피가 낭자하게 흐름
에도 아무 일도 없듯 화살로 그 적을 쏘아 죽이고 입술에 박힌 화살을 뺐다. 그리고 다시 왜
구 사냥에 나서 왜구 대부분을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와 머리고기로 만들었다. 이 전투가 그
유명한 홍산대첩(鴻山大捷)으로 왜구들은 최영을 머리가 하얀 최만호(崔萬戶)라 부르며 매우
두려워했다.

승리의 소식을 들은 우왕은 크게 기뻐하며 백금 50냥과 의복, 술, 안마(鞍馬)를 하사하고 의
원 어백평(魚伯評)을 보내 상처를 치료하게 했다. 최영이 개경으로 개선하자 왕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교외에서 영접했는데, 그 의장 행렬이 실로 대단했다.
왕은 그에게 시중(侍中) 벼슬을 주려고 했으나 최영은 시중이 되면 자유롭게 지방으로 나갈
수 없으니 왜구가 평정된 후에 받겠다고 거절했다. 이에 그를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으로 봉
하고 전쟁에 나선 장졸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1377년 왜구가 남해바다를 넘어 강화도, 김포까지 쳐들어와 소란을 피웠는데, 최영은 강화도
와 교동도가 전략적 요충지임에도 권세가들이 토지를 점유해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한다면서
사전(私田) 혁파를 건의했다. 그래서 그 지역의 사전을 몰수하여 장정을 남겨 농업에 종사하
게 했다. 그리고 지역 수비를 소홀히 한 장수와 관리들의 처벌을 건의했으나 우왕은 받아들이
지 않았다.
우왕은 왜구의 침입을 우려하며 내륙지역으로 천도를 하려는 엉뚱한 계획을 했다. 이에 최영
은 반대했으나 왕은 똥고집을 부리며 철원에 궁성을 축조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자 태후(太
后)의 거처만 철원으로 옮기자고 건의하니 왕은 이를 받아들여 천도 해프닝은 마무리 되었다.

1378년 왜구가 다시 쳐들어 승천부(昇天府, 개경 인근)를 점령하며 장차 개경까지 쳐들어가겠
다고 위협을 했다. 최영은 이성계와 전략을 짜고 방어태세를 갖추었는데, 왜구는 오로지 최영
만 격파하면 개경을 점령할 수 있다 여기고 고려군이 진을 친 곳을 죄다 지나쳐 최영이 지휘
하는 중군(中軍)이 머물던 해풍군(海豊郡, 개경 인근)으로 진격했다.
최영은 찬성사(贊成事) 양백연(楊伯淵)과 함께 맞서 싸우다가 뒤로 빠졌는데, 그 틈에 이성계
가 기병을 이끌고 협공했다. 그때 최영이 측면에 나타나 왜구를 후려치니 왜구는 거의 전멸을
당했다. 왕은 최영의 전공을 기려 안사공신(安社公臣)으로 봉했다.
그리고 1380년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를 겸하게 되었고, 1381년 수시중(守侍中)으로 승진되
었다.


▲  약간 옆에서 바라본 최영장군묘

1381년 잠시 한양(漢陽, 서울) 천도가 논의되었는데, 최영은 서울을 빨리 옮기자며 성문도감
(城 門都監)을 설치해 5부(五部)의 정남(丁男)들을 동원해 한양 성곽을 수리했다. 허나 얼마
안가 무너지나 도감 일을 맡은 윤순(尹順) 등을 탄핵하고 성곽 수리를 중지시킨 후 귀가 조치
시켰다.
우왕은 교서를 내려 최영을 찬양하면서 최영의 아버지 묘소 주변 토지 230결과 장원정(長源亭
, 개경 근처)의 토지 50여 결을 내렸다.

계속 되는 왜구의 침략의 경상도와 강릉도(江陵道, 강원도), 전라도 지역 백성들의 삶이 매우
곤궁해졌다. 최영은 이들 3도에 시여장(施與場)을 설치해 선량한 사람을 선발하여 관리하도록
하고, 관청의 쌀로 미음과 죽을 쑤어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또한 함선 건조를 위해 군사와
승려를 동원하여 1년 안에 130여 척을 건조했다. 함선 건조에 동원된 사람과 승려들은 불만이
대단했으나 그 배를 요충지에 분산 배치하면서 수군 군사력이 증대되었고, 그로 인해 왜구의
침입이 크게 줄었다.

1384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다. 우왕은 토지를 내렸으나 최영은 받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쌀 200석을 군량으로 제공했다. 그리고 퇴직을 청했으나 우왕이 도리어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임명하자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으며, 도통사(都統使)의 직인을
반납하려고 했으나 우왕이 계속 곁에 있어줄 것을 청했다.
그러자 궁궐로 나가 왕에게 재상들이 백성들의 토지를 겸병하는 폐해를 극렬히 성토한 후, 겸
병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만들어 다 함께 서명하게 하고는 재상들을 둘러보며
'이후로는 다시 과거처럼 겸병할 자가 있겠소?'라고 다짐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늙어서 사리(事理)에 어두우니 내 행동이 의에 합당하지 않거든, 입을 다물지 말고 이
늙은이에게 충고해 주시오'
하였다.

최영은 이성림(李成林), 이자송(李子松) 등과 조성도감판사(造成都監判事)가 되어 수창궁(壽
昌 宮)을 축조하여 5년 만인 1384년에 완성을 보자 왕에게 하례를 올렸다. 그러자 왕이 무엇
으로 보답할지 물어보니 최영이
'대신들과 국정을 의논하지 않고 소인배와 어울리며 사냥을 일삼으시니 소신들이 장차 어디를
우러러보며 신하의 직분을 다하겠습니까?'
답을 하니 우왕은 부끄러워하며 최영을 판문하부사
(判門下府事)로 삼았다.

1386년 우왕이 서해도(西海道)로 사냥을 가자, 지봉주사(知鳳州事) 유반(柳蟠)이 왕에게 필요
한 물자를 공급한다며 백성들의 재물을 많이 뜯었다. 그러자 최영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행위
라며 그에게 장형(杖刑)을 가했다.

1387년 장방평(張方平) 등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명나라가 거절하여 요동에서 되돌아왔
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고려를 심히 두려워하며 경계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병이 발
작 수준으로 심해져 고려를 더욱 자극시켰다.
좌시중(左侍中) 반익순(潘益淳)이 최영에게
'공께서는 선왕(先王)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온 나라의 신망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나라
가 위태로운데, 어찌 대책을 세우지 않습니까?'
이에 최영은
'집권자가 이익만 밝히고 악생을 거듭해 패망을 스스로 속히 불러들이고 있으니 이 늙은이가
장차 무엇을 하겠소?'
탄식했다. 그때 요동에서 넘어온 어떤 사람이 명나라가 장차 처녀와 수
재(秀才) 및 환관 각 1,000명과 소와 말 각 1,000 마리를 요구할 거라며 제보를 했다. 그 말
을 들은 최영은 '명나라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그것들을 쳐야 된다'
주장했다.

1388년 임견미, 염흥방 등이 반란을 도모했으나 최영과 이성계에게 진압되었다. 최영은 다시
시중에 임명되었는데, 임견미와 염흥방이 등용했던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려고 했으나 이성계
가 덕과 은혜를 베풀어야 된다고 반대했으나 듣지 않았다.

우왕은 최영을 더욱 신뢰하고자 그의 늦둥이 딸을 왕비로 삼으려고 했다. 이에 최영은 눈물을
흘리며
'소신의 딸은 인물도 누추하고 측실 소생이라 제왕의 배필이 안됩니다. 만약 왕비로 삼으려고
하신다면 소신은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허나 우왕이 또 고집을 부리며 최영 집까지 찾아가 말을 하사하자 왕에게 안마와 의대를 바치
며 결국 왕의 뜻을 받아들였다. 우왕은 예전에는 최영의 곧은 성품이 싫어서 그의 집은 찾아
가지도 않았으나 이후로는 영비(寧妃, 최영의 딸)를 총애하여 자주 들렸다.

▲  최영장군묘 서쪽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 묘표(墓表)

▲  최영장군묘 동쪽 문인석과
망주석, 무민공충혼비


한편 명나라는 고려의 기를 더욱 누르고자 1387년 12월, 예전 원나라가 점령했던 철령<鐵嶺,
요동반도 심양(瀋陽) 남쪽> 이북 땅에 멋대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했다. 그리고 1388년 3월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明)을 고려로 보내 철령위 설치를 통고했다.
이때 명나라는 철령위지휘사사(鐵嶺衛指揮使司)를 봉집현(奉集縣)에 설치하고 승차(承差) 이
사경(李思敬)을 보내 철령 이북과 동쪽, 서쪽 지역은 원래 원나라(몽골) 땅이므로 그곳에 사
는 여진, 몽골, 고려, 한인(漢人)의 모든 군인은 요동에 귀속시킨다는 방을 부쳤다.

명나라의 도발에 발끈한 최영은 조정 회의를 열어 명나라 공격과 화친을 두고 의논하니 대신
들 상당수는 화친을 지지했다. 하여 일단 조림(趙琳)을 명나라에 보냈으나 명나라에서 입국을
거절하자 최영은 철령 이북 땅을 줘야 되는가 가부를 물으니 대신들 모두 안된다고 하였다.
이에 우왕은 최영과 독대하여 요동 공격이 어떠냐고 묻자 최영은 찬성했다. 그러자 이자송이
최영을 찾아가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으나 최영은 그가 임견미 패거리라 하여 곤장을 쳐
서 유배를 보냈다가 곧 죽여버렸다.

명나라는 철령위 설치를 행동으로 옮기고자 요동도사 소속 지휘(指揮) 2명과 군사 1천을 파견
해 방을 붙이고 철령위를 설치하려고 했다. 하여 최영은 전국의 군사를 징발하고 개경 동쪽
교외에서 군대를 열병했으며, 얼마 뒤 명나라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에서 요동백호(遼東百
戶) 왕득명(王得明)을 보내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한 사실을 통보했다.
이에 최영은 우왕에게 보고하여 방문(榜文)을 가지고 북쪽 양계(兩界)에 온 요동기군(遼東旗
軍) 21명을 죽이고 이사경(李思敬) 등 5명을 구금시켜 감시했다. 우왕은 사냥을 내세우며 봉
주(鳳州, 황해도 봉산군)에서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을 공격할 것을 주문했다. 이에 이성
계가 4가지의 불가론을 내세워 반대했으나 최영과 우왕은 정벌을 강행했다. 드디어 고려의 대
륙을 향한 마지막 몸부림이 일어난 것이다.

우왕은 서경(西京, 평양)으로 왕림하여 군사들을 독려하고 대호군(大護軍) 배구(裴矩)에게 압
록강에 부교 설치를 맡겼다. 몰수한 임견미와 염흥방의 재산을 배에 실어 군수물자와 상금으
로 쓰게 했으며, 승려도 징발했다.
또한 최영을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아 요동정벌의 총대장으로 삼고, 조민수(曹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았다. 마침 명나라의 영향력
이 조금 미치던 요동 북부 지역에는 명나라군은 거의 없고 성 안에는 지휘 등 일부만 있었다.

최영은 왕에게 자신이 직접 출진하겠다고 했으나 왕은
'선왕께서 장군이 부재 중일 때 시해되셨소. 장군께서 가신다면 누가 짐을 지켜줄 것이고 누
구와 국정을 다스린단 말이오!'
하소연 했다.
하여 최영은 자신은 평양에서 장수들을 지휘할테니 왕에게 개경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허
나 우왕이 또 똥고집을 피우자 결국 우왕 곁에 남기로 했으니 그것이 바로 화근이었다. 최영
이 총대장이라 직접 군을 이끌고 가야 하건만 왕이 걱정되어 차마 가지 못했던 것이다.

정벌군은 군사 10만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좌,우군 38,830명 그에 딸린 인원이 11,634명, 말은
21,682필이다. 즉 5만 정도의 병력이었다. 한때 광군(光軍) 30만을 육성하고 17만의 별무반(
別武班)으로 동북쪽의 너른 땅을 종횡무진했던 고려건만 그 고려의 위엄이 그새 많이 낡았던
것이다.
또한 정벌군 출진 직후 잠시 사용했던 명나라의 홍무(洪武) 연호를 폐하고 백성 일부에게 원
나라 의복을 입게 하니 이는 명에 대한 적개심을 강화시켜 명을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강한 의
지의 표현이었다.

정벌군은 압록강을 건너 현재 단동(丹東) 북쪽의 위화도(威化島)란 곳에 이르렀다. 이곳은 3
면이 강에 접하고 1면만 땅으로 이어진 지형인데, (신의주 압록강에 있는 그 위화도가 아님)
여름 홍수와 군량 부족 등을 이유로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회군을 청하자 최영은 직접 위화
도로 가려고 했다.
허나 우왕이 또 반대하여 가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진군을 독촉했다. 또한 최영은 몽골초원으
로 도망친 원나라의 잔여 세력과 함께 요동과 명나라를 치기로 했으나 그 세력이 완전 털린
상태라 신뢰하기 어렵고, 출진한 장수들이 딴 마음을 품지 못하게끔 그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
으려고 했으나 이 역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위화도에 머물던 정벌군의 불만이 늘어나자 그윽하게 딴 마음을 품었던 이성계는 이를 기회로
삼아 장수들을 설득해 군사를 돌렸다. 이 사건이 그 유명하고도 한스러운 위화도회군으로 칼
의 방향을 명나라에서 개경으로 돌렸다.

갑자기 반란군이 되어 돌아온 5만의 군사가 개경으로 들이닥치자. 나라는 그야말로 벌집을 쑤
신 듯 난리가 났다. 최영와 우왕은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왔고, 반란군은 최영을 내쫓을 것을
요구했으나 우왕은 거절했다. 그러자 반란군은 성문을 뚫고 개경에 칩입했고, 최영은 안소(安
沼)와 함께 개경을 수비했으나 군사가 얼마 없어 결국 개경은 함락되고 만다.


▲  무민공충혼비(武愍公忠魂碑)

최영과 우왕은 화원(花園)으로 피했으나 반란군이 담을 무너뜨리고 뜰로 난입하자 급히 팔각
전(八角殿)으로 피했고 결국 포위되고 만다. 우왕은 최영의 손을 잡고 우니 최영이 2번 절을
하고 미련 없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이성계가
'이번 일은 내 본심이 아닙니다. 요동을 공격하는 것은 대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나라를 위태
롭게 하고 백성을 괴롭혀 그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부득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최영을 바라보며 울었다.

반란군은 최영을 고봉(高峯, 고양시)으로 유배보냈다가 다시 합포(合浦, 마산)로 보냈다. 그
리고 그와 가깝던 이들을 모두 귀양을 보내고 우왕을 폐위하여 그의 어린 아들 왕창(王昌)을
왕위에 올리니 그가 고려 33대 군주인 창왕(昌王)이다.

창왕이 즉위하자 최영을 순군(巡軍)에 가두어 신문하고 다시 충주로 유배를 보냈다. 최영을
싫어하던 사람들과 반란파들은 최영의 처형을 주장했고, 반란파와 이성계 입장에서는 그의 존
재 자체가 이롭지가 않기 때문에 서둘러 개경으로 압송하여 처형시켰다.

최영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던 날, 개경 사람들은 자진해서 모두 철시(撤市)했으며, 개경 사
람들은 어린 아이부터 부녀자, 노인, 청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만큼 그에 대
한 민심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망나니의 칼을 받는 순간까지 최영의 말씨나 얼굴빛은 전혀
흔들리지 않아 마지막까지 역전 노장의 위엄을 보여주었으며, 망나니의 칼이 볼일을 끝내자
백성들의 통곡 소리는 더해 갔다.
이렇게 하여 그는 72세의 적지 않은 나이로 강제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신이 길가에 버려
지자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렸으며, 조정에서는 쌀과 콩, 베, 종이를 부의로 보냈
다.

이성계는 그와의 옛정 때문인지 최영의 부모가 묻힌 이곳에 그를 안장했으며, 무민(武民)이란
시호(諡號)를 올렸다. 무덤을 만들고 풀을 심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풀은 자라지 않아 풀이 돋
지 않은 무덤으로 유명했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이성계 패거리가 최영에게 부정한 짓으로 재물을 모았다고 몰아세우자, 최영은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부정을 저지른 적이 없다. 만약 그랬다면 무덤에 풀이 날 것이며, 그
렇지 않으면 풀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유언을 남겼다.

그가 죽자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의 유언대로 봉분(封墳)에는 풀이 돋아나지 않았다. 아무리
흙을 덮고 금잔디를 심어도 잔디는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6년부터 풀이 돋아나
지금은 무성한데, 이를 두고 억울하게 죽은 최영의 한이 풀린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최영은 고려를 지킨 마지막 방패로 일생 동안 80여 회의 전쟁을 치루면서 통한의 위화도회군
을 제외하고 모두 이긴 불패(不敗)의 장수였다. (80승1패) 북쪽으로는 요동과 요서, 서쪽으로
중원대륙(서토), 동쪽은 함경도, 남쪽은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원나라(몽골)와 홍건적, 왜구
등 다양한 적과 싸워 무용(武勇)을 떨쳤으며, 조금도 두려움 없어 늘 앞장서서 적들을 때려잡
았다.
또한 청렴결백한 인물로 재산을 늘리려 하지 않았고 집이 아무리 누추해도 그에 맞춰 편안하
게 살았다. 의복과 음식은 검소했으며, 오랫동안 병권을 장악하고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뇌물
과 청탁을 받지 않아 세상 사람들은 그의 청렴함에 탄복했다. 항상 큰일에 주로 신경을 써 사
소한 일에는 구애받지 않았으며, 전쟁터에 나가서 종종 시를 짓기도 했다.
남의 의롭지 못한 행위를 보면 배척하고 질타했으며, 어떤 사람이 최영에게 벼슬을 구하자 '
너가 공장(工匠)이나 장사꾼의 일을 배웠다면 절로 벼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라 했다. 이
는 권력을 잡은 자들이 뇌물이나 받아먹는 족속들이라 비꼰 것이다.

그는 공로와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등용했으며, 천거할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은 모두 물리쳤
다.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 중 재산을 늘리고 사사로운 정으로 공직 기강을 해치는 사람이 있
으면 반드시 바로 잡고자 했는데, 이인임(李仁任)도 그에게 한마디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성품이 고지식하고 학문이 좀 부족했으며, 독단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간
대부(諫大夫) 윤소종(尹紹宗)이 최영을 두고
'공은 한 나라를 뒤덮었으나 죄는 천하에 가득 찼다' 논평하니 세상 사람들이 명언이라 했다.

또한 백성을 보살피고 그들에게서 아낌없는 지지를 누리며 나라를 지킨 무인으로 진정한 무인
의 도(道)를 실천한 위인이다. 비록 반란파에게 목숨을 내주고 말았지만 백성들에게 신으로
격하게 추앙을 받으며 우리나라 토속신(土俗神)의 일원이 되었다. 무당(巫堂)이 모시는 신 중
에 최영장군은 거의 꼭 있으며, 오래된 당집을 보면 그의 그림이 있다.
또한 연평도(延坪島)를 비롯하여 부산, 남해, 추자도(楸子島) 등 해안 지역에는 그를 봉안한
사당이 많이 전해오고 있는데, 이는 최영이 왜구를 토벌하면서 그 지역 백성을 살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를 신으로 높여 사당을 짓고 마을과 바다의 수호신으로 떠받들었던 것이다.

후손의 지극정성 관리로 정갈하게 손질된 묘역
은 야트막한 오르막에 석축을 쌓아 터를 다지
고 그 위에 네모난 호석(護石)을 만들어 봉분
을 올렸다. 이는 고려시대 무덤 양식으로 조선
초기까지 나타나는 양식이다.

무덤의 크기는 검소하게 살았던 최영 부자에
걸맞게 작고 조촐하다. 봉분 앞에는 상석이 누
워있고, 무덤 서쪽에는 오래된 묘표가, 동쪽에
는 근래에 만든 충혼비가 자리한다.
그 앞에는 홀을 쥐어든 문인석 1쌍과 망주석 1
쌍이 자리해 있는데, 문인석은 근래 것으로 옛
날 스타일이 아닌 훤칠한 키의 듬직한 어깨,
경직된 표정, 그리고 어색하게 자라난 수염 등
은 최영장군묘와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조상의 묘를 관리하고 꾸미고 싶은 후손의 마
음이야 이해는 하지만 그런 욕심이 너무 앞선
나머지 구두를 신은 고려시대 장군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옛날 묘는 어지간해서는 있는 그
대로의 모습으로 보존하는 것이 더 가치가 클
텐데 말이다.

▲  최영장군 묘표(墓表)


▲  아들 묘역을 굽어보는 최원직 묘

묘역 윗쪽에는 최영의 아버지인 최원직의 무덤이 있다. 무덤의 모습은 아들묘와 비슷하며, 봉
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香爐石)을 세우고, 그 옆에 지붕돌 묘표(묘비)를 세웠다. 묘비에는
고색의 때가 가득하며, 무덤 뒤로는 곡장이란 담장을 둘렀고, 주변으로 소나무가 울창하여 묘
역에 그늘을 드리운다.

최원직(?~1332)은 사헌규정까지 지냈으나 아들의 명성에 너무 가려 인지도가 거의 없다. 죽음
에 임하면서 아들에게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언을 남긴 인물로 아들과 아비 모두 재
물과는 담을 쌓으며 청렴결백하게 살았다. 오늘날 이 땅의 위정자들이 그들 부자(父子)의 청
렴함과 공명함을 좀 배워야될텐데 그딴 것은 애시당초 관심도 없으니 참 나라의 앞날이 오리
무중(五里霧中) 그 자체로다.

* 최영장군묘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



 

♠  최영장군묘 주변에서 만난 후식거리들
(경안군 및 임창군묘역, 성녕대군묘역)

▲  경안군(慶安君) 묘

최영장군묘 입구 남쪽에는 높은 신분이 느껴지는 늙은 무덤이 있다. 경사가 급한 높은 언덕에
자리한 묘는 경안군의 무덤이고 그 밑에 누운 것은 그의 아들인 임창군(臨昌君)묘이다. 그리
고 경안군 무덤 뒷쪽 숲속에는 아들인 임성군(臨城君)의 묘가 숨겨져 있다. 즉 최영장군 묘역
처럼 부자의 묘가 한곳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  경안군 묘의 우측 석물들

▲  경안군 묘의 좌측 석물들

경안군(1644~1665)은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3째 아들로 이름은 이회(李檜)이다.
그는 태어난 이듬해(1645년)에 아비를 잃고, 그 다음해(1646년)에 어머니 강빈(姜嬪)까지 사
사(賜死)되면서 졸지에 고아가 되버렸다. 이는 병자호란 삼전도(三田渡) 굴욕으로 머리가 이
상해진 인조가 청나라를 멀리하고 망한 명나라에 쓸데없이 사대(事大)의 미련을 둔 자신에게
반했다는 이유로 아들 소현세자 내외를 죽였기 때문이다. 특히 소현세자의 사망 원인은 아직
까지도 미스테리이다.
인조는 아들 내외를 처리한 것으로도 모자라 부모가 지은 죄를 갚으라며 1647년에 경안군 3형
제를 자비 없이 제주도로 귀양을 보냈다. 그들 형제의 귀양살이가 혹독하여 큰 형과 2째 형은
일찍 죽고 만다.

그렇게 개쪼잔했던 인조가 1649년에 골로 가자 그의 2째 아들인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효종(孝宗)이다. 그는 1650년 경안군을 도성(都城)에서 가까운 강화도로 옮기고
바로 교동도로 옮겼는데,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김집(金集) 등 많은 이들이 강빈의 복권
과 경안군의 석방을 줄기차게 건의하면서 1656년 악몽 같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된다.
1659년 경안군에 봉해져 팔자가 좀 좋아지나 했으나 어린 시절부터 겪은 귀양살이의 휴유증
때문에 1665년 불과 21살의 창창한 나이에 인생의 휘장을 거뒀다. 그의 부인은 분성군부인(盆
城郡夫人) 김해허씨로 슬하에 임창군과 임성군의 아들을 두었다.

경안군 묘는 부인과 합장된 합장분(合葬墳)으로 봉분 뒤로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곡장을 둘렀
는데, 이는 근래에 만든 것이다. 묘 앞에는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가 있고, 상석과 향로
석(香爐石)을 두고, 좌우로 망주석과 조그만 동자석, 문인석을 1쌍씩 배치했다.
묘 좌측에 서 있는 검은 돌의 신도비(神道碑)는 1704년 아들 임창군이 세운 것으로 이무기가
여의주를 두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담은 이수(螭首)를 갖추었다. 비석 높이는 196cm이며, 신
도비와 석물에는 장대한 세월의 때가 가득해 고색의 멋을 아낌없이 연출한다. 무덤이 있음을
알리는 망주석과 문인석 사이에 자리한 키 작은 동자석의 모습에는 귀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  현란한 이수와 고된 세월의 때를
듬뿍 간직한 경안군 신도비

▲  이수 대신 지붕돌을 지닌
임창군 신도비


임창군(1663~1724)은 경안군의 아들로 이름은 이혼(李焜)이다. 부인은 응천군(凝川君) 부인
박씨로 경안군과 마찬가지로 부부가 합장되어 있다. 봉분 주변으로 묘비와 상석, 향로석, 망
주석, 문인석 등을 갖추었으며, 지붕돌을 갖춘 묘비가 무덤의 주인을 소상히 알려준다. 묘비
는 1725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박사수(朴師洙)가 짓고 글씨는 임창군의 아들인 이감(李堪)
이 썼다.


▲  경안군묘 좌측에 자리한 임성군묘

임성군(1665~1690)은 경안군의 3째 아들로 이름은 이황(李滉)이다. 부인인 익성현부인(益城縣
夫人) 남양홍씨와 합장되어 있으며, 주변으로 상석과 혼유석,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을 갖추
었다.
문인석은 화려한 꽃무늬가 새겨져 눈길을 끈다. 세상에 훤히 모습을 드러낸 경안군과 임창군
의 묘와 달리 숲에 묻혀 있어 조금은 초라하게 다가온다. 앞의 두 묘와 달리 묘비가 봉분 앞
에 있으며, 비석의 높이는 163cm으로 앞의 묘비보다는 작다.
경안군 부자의 묘역은 경안군 및 임창군 묘역이란 이름으로 고양시 향토유적 5호로 지정되었
다.

* 경안군, 임창군 묘역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65-2


▲  성녕대군(誠寧大君) 묘역 - 고양시 향토유적 2호

경안군 묘역을 둘러보고 다시 나오면 길이 남북으로 갈라진 3거리이다. 여기서 북쪽 길(성녕
길)로 들어서면 기와집 하나가 마중을 나오는데, 그는 성녕대군묘의 재실(齋室)이다. 그 재실
을 지나 동쪽 언덕을 오르면 대자동에서 최영장군묘 다음으로 늙은 성녕대군 묘역이 활짝 모
습을 비춘다.

성녕대군(1405~1418)은 조선 태종(太宗)의 4째 아들로 이름은 이종(李種)이다. 그 유명한 양
녕대군(讓寧大君)과 효녕대군(孝寧大君),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의 친동생으로 모후는 원
경왕후(元敬王后) 민씨인데, 세상에 너무 크게 알려진 친형(양녕, 효녕, 충녕대군)들에 비해
인지도는 거의 없다. 워낙 잘난 형들이라 그 그늘에 가리기도 했지만 너무 일찍 죽은 것도 큰
원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행동이 의젓했으며, 글씨를 잘썼다. 하여 태종과 원경왕후가 금지
옥엽처럼 아꼈으나 그만 13살에 어린 나이에 홍역으로 요절하고 만다. 태종 내외는 매우 비통
해하며 무덤 주변에 대자암이란 절을 세워 아들의 명복을 빌었으니 대자동이란 지명은 바로
대자암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녕은 창녕성씨인 성억(成抑)의 딸과 혼인을 했으며, 성녕군에 봉해졌다가 1414년 대군(大君
)에 봉해졌다. 대광보국대부(大匡輔國大夫)의 위계까지 오르기도 했는데, 만약 그가 일찍 죽
지 않았다면 충녕대군과 좋은 라이벌 관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태종 부부의 관심이
컸던 인물이다.

▲  성녕대군의 사당인 대자사(大慈祠)

▲  성녕대군 신도비가 담긴 비각

재실을 지나면 성녕의 사당인 대자사가 나온다.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사당 앞에는 삼문(三門)
이 있고 사당의 이름을 알리는 큼지막한 표석
이 있다.

사당 좌측에는 3개의 비석이 담긴 비각이 있는
데, 가장 우측 비석이 성녕의 신도비이다.
신도비는 왕족과 3품 이상의 고위 관리의 무덤
에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
道)로 통한다는 무덤의 동남쪽에 세운다. 이곳
역시 성녕대군의 유택(幽宅)을 기준으로 동남
쪽에 자리하여 그 법칙을 따랐다.

신도비는 보통 용머리의 귀부와 이무기가 여의
주를 두고 다투는 이수를 갖추기 마련이나 여
기는 이수 대신 지붕돌로 비석 머리를 마무리
했다. 비신(碑身)은 경안군의 묘비처럼 검은
돌로 만들었는데, 양 옆으로 만든 화강암 우주
석에 비신을 끼워 넣은 것이 특이하다.

▲  성녕대군 신도비

이 신도비는 묘를 만들던 1418년 4월에 세운 것으로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짓고 장인인 성개
가 글씨를 썼다. 비석의 높이는 3m로 큰 편이다.


▲  원천군(原川君) 묘역 (앞쪽 무덤이 부인 한양조씨, 뒷쪽 무덤이
원천군과 백천조씨 합장묘)


대자사 뒤쪽 언덕에는 성녕대군 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묘역은 보통 일반에 개방되어 있으며,
사당 옆에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길이 있다.

묘역에는 3기의 무덤이 있는데, 모두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묘역 가장 위쪽에는 성녕대군의
무덤이 있고, 아래쪽에는 그의 양자인 원천군 내외의 무덤이 있는데, 원천군은 원래 효령대군
의 6번째 아들로 이름은 이선(李宣)이다. 성녕이 어린 나이에 죽자 원천군을 그의 양자로 삼
아 후사를 잇게 하면서 이곳에 무덤을 쓴 것이다.

원천군 내외 묘는 근래 크게 손질되어 꽤 젊어졌는데, 그로 인해 고색의 기운이 많이 사라졌
다. 무덤은 좌우로 배치된 것이 아닌 앞뒤로 자리한 부후묘(附後墓) 형태라 각 무덤마다 묘비
와 문인석, 장명등을 따로 갖추고 있는데, 앞쪽 묘는 그의 2번째 부인인 한양조씨의 무덤이며,
뒷쪽은 원천군과 부인 백천조씨의 합장묘이다. 백천조씨가 죽자 한양조씨를 새로 부인으로 맞
아들여 묘가 2개가 된 것이다.


▲  성녕대군과 부인 성씨의 합장묘

▲  뒷쪽에서 바라본 성녕대군묘

묘역의 가장 뒷쪽이자 높은 곳에는 묘역의 주인공인 성녕대군 내외의 무덤이 자리해 있다. 앞
서 최영장군묘처럼 4각의 호석(護石)을 쌓고 그 위에 봉분을 다졌는데, 봉분 주위로 작은 석
호(石虎)와 석양(石羊)을 1쌍씩 배치했고, 묘 앞에는 장명등과 문인석 1상을 두었다. 좌측에
는 근래에 세운 때깔이 고운 묘비를 세웠으며, 무덤 뒤쪽에는 'ㄷ' 모양의 곡장을 둘렀다.

석호와 석양은 무려 600년이 넘는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여기저기 상처도 많이 생겼
지만 그 모습을 알아보기에는 별 무리는 없으며, 조그만 양의 새끼와 호랑이 새끼를 보듯, 귀
여움마저 묻어나 손으로 쓱쓱 쓰다듬고 싶다. 곡장에 둘러진 석축에는 오랜 세월의 때가 수북
히 끼여 고색의 멋을 아낌없이 풍긴다.

성녕대군묘를 끝으로 최영장군묘를 중심으로 한 대자동 무덤 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성녕대군 묘역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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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달달한 폭포, 밤골계곡 숨은폭포 (북한산둘레길 효자길, 효자비)

 


'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숨은폭포(밤골계곡) '



▲  숨은폭포 (윗폭포와 아랫폭포)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8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뒷통수에 숨
겨진 숨은폭포를 찾았다.
날도 징그럽게 더워서 도심에서 가까운 계곡에서 밤을 담구며 잠시 여름의 핍박을 피하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구파발(舊把撥)에서 가까운 진관사계곡이나 사기막골(효자동계곡)을 염두
에 두었으나 밤골계곡에 숨겨진 숨은폭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출동했다.

여름의 기운이 제법 강했던 14시에 연신내(3,6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폭포에서 섭취할 간단
한 먹거리와 막걸리를 구입했다. 그런 다음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을 타
고 박석고개와 구파발역, 북한산성입구, 효자비를 지나 효자2통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밤골계곡으로 인도하는 길을 들어서면 농가들이 여럿 나오는데, 그들을 지나면 바로
무성한 숲길이 펼쳐지면서 천하를 녹여먹을 정도로 강렬한 햇살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진다.
그 숲길을 조금 들어서면 북한산둘레길 11구간(효자길)과 만나게 되며, 거기서 2분 정도 가
면 밤골공원지킴터와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게이트(문)가 나온다.


▲  북한산국립공원 밤골공원지킴터와 공원 게이트(문)


 

♠  밤골계곡(숨은벽계곡)

▲  녹음(綠陰)이 짙은 밤골계곡 산길

밤골공원지킴터를 지나면 본격적인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이다. 숲도 녹음(綠陰)도 더욱 짙어져
원시림(原始林)을 방불케 하는데, 날씨는 덥지만 숲이 베푼 바람과 갖은 내음으로 땀은 줄행
랑 치기가 바쁘다.

밤골계곡은 숨은벽능선 북쪽에서 시작해 창릉천(昌陵川)으로 흘러가는 계곡으로 숨은벽계곡이
라 불리기도 한다. 북한산(삼각산)에는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일품 계곡이 참
많은데, 대표적인 것으로 북한산성계곡, 우이동계곡(우이9곡), 소귀천계곡, 구천계곡(구천폭
포), 정릉계곡, 구기동계곡, 불광사계곡, 진관사계곡, 삼천사계곡 등이 있다. (도봉산과 사패
산 구역은 제외)
이들은 일찍이 천하에 널리 알려져 서울과 경기도 사람들의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는데, 밤골
계곡은 그들에 비해 인지도는 낮으나 계곡 풍경은 그들 못지 않다. 게다가 계곡의 수질도 매
우 청정하여 신선들의 비밀 피서지로 손색이 없으며, 계곡 중간에 있는 숨은폭포는 북한산의
일품 폭포로 찬양을 받는다.

밤골계곡 코스(또는 숨은벽 코스)는 숨은폭포를 지나 숨은벽능선을 거쳐 북한산의 지붕인 백
운대(白雲臺, 837m)로 이어지며. 숨은벽능선은 바위 구간이 많아 제법 험하다고 하는데 대신
조망과 풍경이 국보급이다. 숨은벽이란 이름은 북한산 뒷쪽(북쪽)에 숨은 듯 자리해 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이 참 귀여우면서도 정감이 많이 간다.

북한산(삼각산)을 많이 갔다고 자부하는 본인이나 아직 숨은벽능선은 미답처(未踏處)로 남아
있다. 그 능선으로 들어가는 계곡과 폭포도 이번이 첫 인연이라 기대와 설렘이 아주 큰 편인
데, 밤골안내소에서 숨은폭포까지는 1km 정도 된다. 길은 거의 평탄한 수준으로 처음에는 산
길과 계곡이 조금 거리를 두고 펼쳐지다가 끝내는 서로가 붙어 나란히 이어지면서 폭포에 이
르게 된다.


▲  밤골계곡 물이 잠시 정체를 빚는 계곡 건널목


▲  인적이 거의 없는 밤골계곡 산길
길을 가다가 혹여 신선 형님이나 선녀 누님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폭포에 대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열심히 산길에 임한다.

▲  밤골계곡 산길 ~ 우리들은 점점 푸른 산속에 묻혀 간다.

▲  밤골계곡에서 만난 기묘하게 생긴 바위

숨은폭포로 열심히 가다보면 홀쭉하게 선 기묘한 바위를 만나게 된다. 마치 옛 유적에서 많이
나오는 기와 조각이나 도자기 파편을 크게 확대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하늘에서 천제(
天帝)의 명으로 토목공사를 하다가 인부가 실수로 떨어트린 기와 파편이 그대로 곤두박질 친
것 같다.

바위 피부에는 자연이 입힌 이끼와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해 시커먼 모습이며, 중간에는 누구
에게 얻어 맞은 듯, 움푹 패인 자국들이 있다. 바위 윗쪽에는 속인(俗人)들이 얹혀놓은 돌이
널려있는데, 산길에 접한 바위 피부에도 조금의 틈이 보이는 곳에는 꼭 돌들이 여러 개 얹혀
져 있다.
이곳을 지난 사람들이 유독 눈에 띄는 이 바위에 소망과 정성을 담아 얹힌 돌로 일종의 산악
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지어준 이름도 있을 듯 싶으나 전해오는 것은
딱히 없는 것 같으며, 사람들이 얹힌 돌이 많이 붙어있어 그 흔한 '붙임바위'라 불러도 손색
은 없어 보인다. (기와 파편처럼 생겼으니 기와바위라 불러도 될 듯)


▲  기묘하게 생긴 바위 옆모습

▲  여기저기 절경과 벼랑을 빚은 밤골계곡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비경, 숨은폭포(숨은벽폭포)

▲  숨은폭포의 아랫폭포

밤골공원지킴터에서 넉넉잡아 20분 정도 들어가면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진하게 귀청을 때리
면서 숨은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숨은벽폭포라 불리기도 하는데 숨은벽능선으로 오르는 길
목에 있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대자연 형님이 북한산이란 대작품을 빚고 혼자 두고두고 보려고 북한산 뒷쪽에 몰래 이 폭포
를 만든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첩첩한 산주름 속에 소리도 없이 묻혀있다. 북한산에 안긴
폭포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물이 매우 맑고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며, 경승지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였던 선비와 양반들도 이곳의 존재를 몰랐던지 폭포에 대한 기록이나 시문(詩文)은 전하
는 것이 없다. 다만 북쪽에 있는 효자리계곡(사기막골)에 조선 후기에 지어진 육모정과 서산
정사터 등이 남아있어 그곳을 찾은 일부가 이곳에 왔을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폭포는 2~3개(엄밀히 따지면 3개이나 2개로 봐도 무방)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폭포가 더 일품
이다. 단순히 폭포를 보러 온 이들은 윗사진의 아랫폭포가 전부인줄 알고 이거만 보고 돌아가
는 경우가 많은데, 반드시 1단계 더 올라 윗폭포도 보기 바란다. 그래야 괜히 애꿎은 땅을 치
며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숨은폭포에게도 숨겨진 별칭이 있다고 하는데, 아랫폭포를 총각폭포, 윗폭포를 색시폭포(처녀
폭포)라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것은 아니며, 그에 대한 사연과 전설은 딱히 전
해지는 것이 없다. 지금은 많이들 찾아오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네 사람이나 아는 사람만
찾아오던 숨겨진 비경이다 보니 그들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아랫폭포의 높이는 대략 10m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30~40도의 경사진 바위를 미끄럼
을 타듯 내려온다. 어제까지 비가 많이 내려서 계곡의 수량이 크게 증가해 물줄기가 성난 기
세로 쏟아져 마치 하얀 비단을 드리운 듯 하다.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흔드니 여름 제
국도 크게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폭포에서 부는 선선한 바람은 지금이 여름의 한복판이란 사
실 조차 흐릿하게 만든다.
폭포 앞에는 폭포수가 담긴 못이 있는데, 물이 얼마나 해맑은지 바닥이 훤히 보인다. 허나 바
닥이 보인다고 괜히 방심하지는 말자,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앞은 수심이 깊으니 주의해야
된다.


▲  숨은폭포의 아랫폭포의 위엄 ▼



▲  풍덩 안기고 싶은 아랫폭포 못

폭포에 도착한 우리는 어린 아이 마냥 신이 났다. 때가 묻지 않은 폭포수에 발과 다리를 담구
니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이 무척 시원해진다. 기분 같아서는 온몸으로 계곡물과 짜릿하게 스킨
쉽을 즐기고 싶지만 여벌의 옷을 챙겨오지 않아 다리와 발을 담구는 선에서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마치 폭포를 전세낸 듯 한없이 다리를 담구니 다리가 정말 하얗고 매끄러워진
것 같다.

그렇게 발을 담구며 주변 풍경을 사진에 담고 즐거운 간식 시간을 갖는다. 적당한 돌에 속세
에서 사들고 온 막걸리와 김밥, 과자, 커피 음료 등을 차려놓고 열심히 섭취를 했다. 폭포가
안겨준 시장기에 금세 동이 나고, 막걸리 또한 바닥을 보인다.


▲  폭포 윗쪽에서 바라본 아랫폭포

▲  아랫폭포로 빠르게 흘러가는 계곡물

즐거운 간식시간을 마치고 계속 폭포 앞에 머물렀다. 이곳이 분명 숨은폭포는 맞는데 폭포와
관련된 사진에는 이거 말고 폭포가 더 있었다. 그러니 분명히 위로 올라가면 나머지 폭포가
있을 것이다. 하여 윗쪽으로 올라가니 평탄한 계곡이 나오고, 그 계곡을 조금 들어서니 바로
숨겨진 폭포가 모습을 비춘다. 바로 숨은폭포의 윗폭포이다.


▲  숨은폭포 옆구리를 지나는 산길에서 바라본 아랫폭포

▲  윗폭포와 아랫폭포 사이의 계곡

▲  모습을 드러낸 윗폭포 - 폭포수 소리가 여기까지 쩌렁쩌렁 울린다.

▲  정면에서 본 윗폭포의 위엄

아랫폭포과 윗폭포는 대략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같은 숨은폭포 형제지만 서로가 완전
히 다른 모습으로 30~40도의 경사를 이룬 아랫폭포와 달리 윗폭포는 거의 90도 직각을 이루며
패기 넘치게 물을 아래로 내리 쏟는다. 그러다보니 폭포수 소리는 아랫폭포보다 한층 더 우렁
차다.

벽처럼 늘어선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장쾌하게 쏟아지는 윗폭포는 높이가 10m 남짓으로 폭
포 앞에는 물이 담긴 못 대신 바위 하나가 오랜 세월 물을 맞으며 누워있다. 한여름에야 시원
하겠지만 억겁의 세월 동안 종일 물을 맞으니 바위 피부가 완전 매끄럽다 못해 미끄럽다. 이
렇게 폭포 앞에 바위가 있으니 경북 청도(淸道)의 낙대폭포처럼 물맞이 장소로 적당하다.


▲  산길에서 본 윗폭포

윗폭포의 위엄을 제대로 보려면 계곡보다는 등산로(산길)에서 봐야 된다. 산길은 아랫폭포 옆
구리에서 바위를 타고 윗폭포 서쪽을 지나가는데, 윗폭포보다는 높은 곳에 있어 폭포와 그 윗
쪽까지 훤히 바라보인다.
윗폭포 윗쪽에는 못과 함께 폭포가 하나 더 숨어있는데, 그 폭포는 완만한 경사로 높이는 5m
정도 되는 듯 싶다. 허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지 나무에 대부분 가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
고 귀차니즘 발동으로 그곳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
위에 있는 것도 그런데로 폭포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그가 윗폭포가 되고, 윗폭포를 중간폭포
라 불러야 되겠지만 위에 있는 폭포는 느슨한 경사라 윗/아랫폭포보다 멋이 떨어져 별도로 다
루어도 무리는 없어보인다.


▲  윗폭포 윗쪽 부분의 못과 폭포
선녀 누님의 숨겨진 욕탕은 아닐까? 나뭇꾼과 선녀에 나오는 나뭇꾼처럼
주변 숲에 숨어 그들을 노리고 싶다.


윗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아랫폭포로 내려와 20분 정도를 머물다가 17시에 자리를 접고 폭포와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등을 돌리기가 얼마나 섭섭했던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봤는지 모른
다. 삼척(三陟) 미인폭포(☞ 관련글 보러가기) 전설에 나오는 미인처럼 폭포를 끼고 살고 싶
었지만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닌 아비규환의 속세이다. 그러니 돌아가야 된다.

* 숨은폭포, 밤골계곡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산 19-1


 

♠  호랑이와 효자의 애틋한 설화가 깃든 박태성 정려비(朴泰星 旌閭碑)
- 고양시 향토유적 35호

▲  효자비라 불리는 박태성 정려비

밤골계곡지킴터에서 북한산둘레길 11구간(효자길)을 따라 남쪽으로 10분 정도 넘어가면 효자
비(孝子碑)라 불리는 시커먼 피부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박태성 정려비로 비석 앞 도
로(북한산로)에 있는 정류장 이름도 무려 '효자비'이다.

이 비석은 조선 후기에 박태성(朴泰星, 1679~1758)이란 효자를 기리고자 만든 것으로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다.
1679년 박세걸(朴世傑)의 아들로 태어난 박태성은 자가 경숙(景淑), 본관은 밀양이다. 품성이
온화하고 효성이 대단한 인물로 3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에서는 고양시 효자동 뒷
산에 무덤을 썼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는데 그의 효행이 영조(英祖) 때 조
정에까지 알려지면서 음사(蔭仕)로 내의(內醫)에 천거되었다. 허나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데, 무슨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을 받겠습니까??'
하고 거절했다.

그는 효자란 이름에 걸맞게 종로구 효자동(孝子洞)에 살았는데, 부친이 별세한 갑년(甲年, 60
년)이 다가오자 63세에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일찍 집을 나서
고양시 효자동에 있는 부친묘로 성묘를 다녔다. 그리고 성묘를 하고 도성으로 돌아와 궁궐로
등청(登廳)을 했다.
효자동에서 서대문을 거쳐 부친묘까지는 거의 30여 리(10리는 5km) 정도 된다. 지금이야 차량
으로 금방 오갈 수 있지만 그때는 오로지 두 발과 말 밖에는 없었다. 그는 큰 벼슬은 지내지
못했고 호랑이를 만나기 전에는 걸어다녔다고 하니 절하는 시간을 포함해 오가는데 왕복 7~8
시간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도성(都城) 성문이 새벽 3시에 열리니 성묘를 하고 11시까지 등
청을 한 듯 싶으며, 그걸 매일처럼 했다는 것은 지나친 효심과 근면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
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성묘를 하고자 새벽 일찍 집을 나서 무악재를 넘어가는데, 어둠 속에서 갑자
기 무서운 호랑이의 대명사인 인왕산(仁王山)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는 것이다. 그는 순간
쫄았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선친묘에 가는 길이다. 나를 잡아 먹으려면 잡아 먹거라!!'
그 말을 들은 호랑이는 그를 덮치기는 커녕 머리를 반대로 돌리고 뒷걸음질을 하여 그의 곁으
로 다가가 '내 등에 타라!'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알아들은 박태성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의 등에 올라탔다.

호랑이는 그를 태우고 깊은 산중으로 달려갔다. 자꾸 낯선 산속으로만 들어가니 박태성은 산
속으로 납치하여 잡아먹는 것은 아닌가 싶어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막상 당도한 곳은 다름 아
닌 부친묘 앞. 그제서야 마음을 놓은 그는 옷깃을 여미고 무덤에 절을 올렸다. 그리고 무덤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그때 새 1마리가 주변 나무 가지에 앉더니 슬피 울었다고 한다. (몇 년
동안 같이 울었다고 함)
호랑이는 그의 성묘 장면을 지켜보다가 성묘가 끝나자 그에게 다시 타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
래서 그를 타니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 처음 만났던 무악재에서 그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다음날에도 무악재에 이르니 호랑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역시나 왕복으로 태워주어 편하
게 성묘를 다녀왔다. 호랑이는 무임으로 '무악재~효자동 선친묘'구간을 고속으로 셔틀 운행을
해준 것이다. 전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박태성은 자신을 매일처럼 태워주는 그를 위해 종종 고
기를 준비해 주지 않았을까 싶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
이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고 1758년에 박태성은 79세에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후손들은 그의 선
친묘 앞에 그의 묘를 썼다. 며칠 뒤, 후손들이 가보니 그의 묘 앞에 큰 호랑이 1마리가 엎드
려 죽어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박태성을 매일 태워주었던 그 호랑이였다. 이에 후손들은
호랑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 곁에 무덤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박태성의 이야기를 들은 고종(高宗)은 크게 감동을 먹고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1893년
하사금을 내려 사당과 효자비를 세워 포상을 했으며, 비문(碑文)은 박태성의 증손인 박윤묵(
朴允默)이 썼다. 또한 그의 효심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무덤 주변으로 몰려와 마을을 이루
고 살면서 효자리(孝子里)가 되었다고 하며, 그의 효행을 길이길이 기억하게 해주었다.
<비석은 고종이 아닌 영조가 내렸다는 설도 있으며, 박태성이 부친묘에 성묘를 다니자 이곳에
들끓던 호랑이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효자리는 고양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효자동으로 변경
됨>


▲  박태성 정려비

효자비의 설화처럼 호랑이가 부친묘까지 매일
왕복 운행을 해주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호랑이가 동물의 제왕이면서 사람들이 제일로
두려워했던 존재다보니 전설/설화의 격을 높이
는 용도로 많이 등장한다. 이 설화 역시 후손
들이 그의 효행을 드높이고자 호랑이를 넣어
적절하게 꾸민 것으로 여겨지는데, 말을 타고
다닌 것을 호랑이로 둔갑시킨 것은 아닌지 모
르겠다.

1893년에 왕명으로 세운 효자비는 흑요석(黑曜
石)으로 된 검은 피부의 비석이다. 그의 피부
에는 박윤묵이 쓴 12자의 글씨가 있는데, '朝
鮮孝子朴公 泰星旌閭之碑'라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비석의 높이는 117cm, 폭은 40cm, 두께
는 12cm이다.

참고로 효자비에서 동쪽 산자락으로 300m 정도 들어가면 박태성의 묘역이 있다. 그의 묘역을
알리는 이정표가 없어서 나는 길을 찾지 못했는데 그 묘역에는 박태성과 그의 부인인 완산이
씨, 김해김씨의 묘가 있으며, 묘비는 1778년에 흑요석으로 세웠다.
묘 옆에는 귀엽게 만든 호랑이상이 있는데, 이는 효자비 부근에서 농원을 하는 사람이 사비를
들여 만든 것이며, 그 옆에는 호랑이의 묘로 전하는 조그만 봉분(封墳)이 있다. 그리고 묘역
에서 50m 떨어진 곳에 박태성의 부친인 박세걸 묘역이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224


▲  봄이 빚은 아름다운 수채화 (효자비에서 북한산성입구 방향)

▲  효자동 내시묘역길에서 바라본 노고산(老姑山)

노고산에는 예비군훈련장이 많이 안겨져 있는데, 평일에는 예비군의 사격 훈련 총소리가 여기
까지 징하게 울려퍼진다. 그 정겨운 소리를 들으니 바람처럼 흘러간 예비군 시절이 진하게 떠
오른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 숨은폭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효자비와 노고산 사진은 봄에 별도로 담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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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듬직한 뒷산, 북한산~북한산성 겨울 산행 (태고사, 행궁터, 대남문, 문수사)

 


' 북한산(삼각산) 겨울 나들이 '

태고사 원증국사탑
 태고사 원증국사탑


 


겨울이 한참 제국(帝國)의 위엄을 보이던 12월 한복판에 일행들과 서울의 듬직한 진산(鎭山)
이자 나의 즐겨찾기 뫼인 북한산(삼각산)을 찾았다.

북한산은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높은 서울과 그의 위성도시인 경기도 고양(高陽)시를
끼고 있는 수도권 굴지의 자연 명소이자 이 땅의 주요 국립공원(國立公園)이다. 번잡한 지역
에 누워있다보니 본의 아니게 탐방 수요가 엄청난데 1㎢당 탐방밀도가 무려 5만 명으로 탐방
밀도 분야 세계 기네스북 1위를 거머쥐고 있다. 또한 산 전체가 국가 명승 10호로 지정 되어
있어 북한산(삼각산)의 위엄을 한층 실감케 한다.

오전 11시, 구파발역(3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북한산 등산객과 예비군들의 오랜 벗인 서울
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을 타고 북한산성입구로 이동했다. 주말이라 버스는 등
산객들로 완전 짐짝수송을 이루었고, 버스는 만원의 기쁨을 누리며 간신히 육중한 네 바퀴를
굴려 북한산성입구에서 승객 7할 이상을 쏟아낸다.

북한산성입구에서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북한산성계곡(북한천) 하류를 따라 수구문(水口門
)터, 서암사(西巖寺)터를 거쳐 옛 북한동(北漢洞) 마을에 이르렀다.
북한동은 북한에 있는 동네가 아니라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둥지를 틀었던 산골마을로 북
한산성이 조성되면서 형성된 오래된 마을이다. 지금의 마을은 조선 중/후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주로 군사들과 그의 가족들이 살았다. 마을은 북한동역사관에서 멀리 태고사 근처까
지 형성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100호 이상의 집이 존재했다.

1910년 이후, 왜정의 고의적인 북한산성 방치와 잇따른 자연재해로 인하여 마을이 다소 피해
를 입었으며, 산성 안에 둥지를 틀던 5개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산성(山城) 내부를 관리했다.
당시 주민들은 나무를 땔감으로 팔거나 과실을 팔며 생계를 꾸렸는데, 이중 살구와 감은 북
한동의 특산품이었다.

6.25전쟁이 터지자 인근 사람들이 산성 안으로 많이 피신을 했는데, 북한군 1개 연대가 이곳
에 들어와 숲을 죄다 불태우며 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보였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했는데 주민들의 궁핍함을 보고
는 이곳을 유원지로 개발시키기로 했다. 처음에는 대성장, 팔경정 두 곳만 식당 허가가 났으
나 주민들의 항의로 1974년 원하는 집에 죄다 식당 허가를 내주었고, 그로 인해 식당과 등산
용품 가게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마을 사람들은 등산/탐방객을 상대로 음식 장사와 산에서 채집한 나물 등으로 생계를 꾸렸는
데, 그들의 무분별한 장사로 인해 계곡이 오염되고 자연이 훼손되는 등, 계속 말썽이 생기자
골머리를 앓은 행정당국은 북한산을 보존하고 계속되는 민원을 해소하고자 아예 마을을 폭파
시키기로 결정, 2001년부터 마을 강제 이주를 단행했다.
처음에는 주민들의 반대도 많았지만 보상도 심심치 않게 해주었고, 산성 밑에 자리까지 제공
하면서 북한동 마을 55가구는 오래 숙성된 터전을 버리고 모두 그곳으로 이주했다.

그들이 모두 떠나자 북한산성계곡의 오랜 옥의 티였던 집과 식당을 모두 밀어버리고 주변 생
태계를 복원했으며, 옛 마을의 중심지에는 북한동 역사관을 지어 세월의 저편으로 강제로 흘
러간 북한동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솔직히 마을이 없어지니 좀 허전하기는 하지만 마을로 인해 망가졌던 주변 자연 경관이 활짝
피어나니 분위기는 더 밝아진 것 같다. 대신 먹을거리는 북한산성입구나 서울 시내에서 미리
사와야 되는 수고로움이 있으나 그거야 조금 부지런을 떨면 쿨하게 해결된다. 솔직히 마을에
있던 식당의 음식과 간식 가격은 시내보다 좀 비쌌다.

 


♠  보우대사(普愚大師, 원증국사)가 세운 고려 후기 고찰
~ 북한산 태고사(太古寺)


▲  태고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이 암자에 내가 살지만 나도 잘 몰라
                         깊으디 깊고 빽빽하지만 옹색하지 않아
                         하늘과 땅을 모두 가두었으니 앞과 뒤가 있을 리 없고
                         동서남북 어디라도 머물지 않네

               * 보우대사가 태고사에 머물며 지은 태고암가(太古庵歌)의 한 수


북한동역사관에서 북한산성계곡을 따라 중성문(中城門), 노적사(露積寺)입구, 중흥사(重興寺)터
를 거쳐 400m 고지에 둥지를 튼 태고사를 찾았다.

태고사는 1341년 원증국사(圓證國師 = 보우대사)가 창건하여 태고암(太古庵)이라 하였다. 이후
400년 동안 마땅한 내력을 남기지 못했으며, 18세기 중반인 숙종 시절에 북한산성을 정비하고
산성 안에 사찰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면서 다시금 수면 위로 오르게 된다. 당시 태고사에는 경
서(經書) 출판용 목판 5,700여 매와 활자 11두(斗), 그리고 화약용 흑탄 1,600여 석이 비축되었
으며, 절의 규모는 131칸에 이르렀다.
허나 1915년 대홍수와 산사태, 6.25전쟁으로 말끔히 파괴된 것을 1964년 청암(靑岩)이 중창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절의 규모가 조촐해 산중암자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비록
겉모습은 초라해도 700년 가까이 꾸준히 명맥을 유지했던 북한산성 내부에 몇 안되는 전통 토박
이 사찰로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산신각과 요사(寮舍) 등, 3~4동의 건물이 있으며,
한참 후배인 인근의 노적사보다 상당히 빈약해 노적사의 부속암자로 착각하기 쉬울 정도이다.
하지만 오랜 사찰에 걸맞게 원증국사탑비와 원증국사탑 등 국가 보물을 무려 2점씩이나 간직하
고 있어 이곳의 높은 명성을 살짝 귀뜀해준다. 그 외에 조선시대 부도 3기가 산신각 부근에 있
고 이 땅에서 매우 희귀한 오래된 귀룽나무가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가늠케 하기에 충분하다.

4발 수레도 감히 들어올 수 없는 첩첩한 산중이라 비록 등산의 수고로움을 거쳐야 접근이 가능
한 곳이지만 서울 시내에서도 가까우며. 노적사와 마찬가지로 한적하고 아늑한 산사의 멋과 여
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깊은 산골이라 산새도 넘어오기 힘들고, 제아무리 독종인 번뇌라고
해도 산이 깊고 험해 따라오다가 졸도를 할 정도이다. 그윽한 풍경소리만이 적막에 잠긴 경내를
잔잔히 쓰다듬어주며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무거운 번뇌와 잠시 이별하고 싶을
때 며칠 조용히 묻히고 싶은 곳이다.

※ 북한산 태고사 찾아가기 (2015년 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에서 34, 704번 시내버스를 타고 북한산성입구 하차. 주말
  과 휴일에는 8772번 주말임시노선(8~18시까지 10~15분 간격)이 추가 운행된다.
* 서울역(1,4호선 4,9-1번 출구)과 을지로입구역(2호선 3번 출구), 광화문역(5호선 7번 출구),  
  서대문역(5호선 4번 출구), 홍제역(3호선 2번 출구), 불광역(3,6호선 8번 출구)에서 704번 시
  내버스 이용
* 승용차 이용시 북한산성입구 주차장을 이용해야 되며, 산성 내부까지 차량 접근 불가
* 북한산성입구 정류장 → 대서문 또는 서암사터 → 북한동역사관 → 중성문 → 중흥사터 →
  → 태고사(약 5km, 1시간 40분)
* 북한산성 동장대와 용암문 사이에 봉성암, 태고사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음
* 매년 음력 9월 22일에 보우대사 헌다식(獻茶式)을 거행한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5 (대서문길 406 ☎ 031-384-5589)


▲  겨울에 잠긴 태고사 귀룽나무 ~ 고양시 보호수 17호

태고사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훤칠한 키의 귀룽나무가 중생을 맞는다. 귀룽나무는 이 땅에
서 매우 희귀한 나무로 매년 3월 말이나 4월 초에 나무 전체에 새하얀 꽃이 가득 피어난다. 태
고사에 무수히 발을 들였지만 정작 하얀 꽃으로 치장된 그의 모습은 아직 만나지 못했는데, 그
꽃의 자태가 마치 하얀 눈과 비슷하다고 한다.
나무의 나이는 약 160년, 키 23m, 허리둘레 2.3m에 이르며 다른 나무와 마찬가지로 겨울의 제국
에게 모든 것을 공출당하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소쩍새가 울 봄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비각(碑閣)

  태고사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 - 보물 611호

대웅보전 좌측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높다란 비각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 태고사 제일의 보
물인 원증국사탑비가 남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둥지를 텄다. <태고사 대웅보전은 서향(西向)임>

탑비의 주인공인 원증국사는 고려 후기를 주름잡던 고승(高僧)으로 1301년 귀족 가문인 홍주홍
씨(洪州洪氏) 일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비는 홍연(洪延), 어미는 정씨로, 13살에 양주 회암사
(檜巖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도했다.
1325년 승과(僧科)의 하나인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했으나 선수행을 위해 과감히 포기하고 용문
산 상원사(上院寺)를 거쳐 감로사(甘露寺)에서 계속 불도에 정진했다. 그 이후 북한산 중흥사에
들어와 1341년 절 동쪽에 태고사를 지어 머물며 그 유명한 태고암가(太古庵歌)를 지었다.
1346년 원나라로 넘어가 임제종(臨濟宗) 18대 법손(法孫)인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이어받
았으며. 원나라 황제 순제(順帝)의 초청을 받아 반야경(般若經)을 강설(講說)하기도 했다.

1348년 귀국하여 경기도 광주(廣州)에 머물며 일가친척을 죄다 이곳으로 소환하여 살게 했는데,
광주를 현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광주에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1356년 공
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원융부(圓融府)에 머물며 승려의 임명권을 장악, 고려 불교계의 1인
자가 되었으며, 이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통합을 주장했다. 허나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신뢰
하면서 보우대사를 멀리하게 되는데 신돈은 그를 심하게 견제하여 속리산(俗離山)의 어느 암자
에 연금까지 시켰다.
신돈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이후, 공민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려 했으나 자신을 박대했던 감정 때
문인지 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1381년 양산사(陽山寺)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때 우왕(禑王)으로부터 국사(國師)로 임명되었으며,
1382년 소설사(小雪寺)에서 열반에 드니 그의 나이 81세, 법랍(法臘) 68세이다. 우왕은 그에게
원증(圓證)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탑호(塔號)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다.

오랜 세월의 무게와 웅장한 멋이 풍기는 이 탑비는 13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碑文)은 고려
3은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이색(李穡)이 썼으며, 거북 등의 귀부(龜趺)를 초석으로 삼아 비신(
碑身)을 세우고 그 위를 이수(螭首)로 마무리지었다.

탑비를 보호하는 비각은 옛날부터 있었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높다란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
을 1980년에 복원했다. 참고로 원증국사의 탑과 탑비는 그와 인연이 깊던 용문산 사나사(舍那寺
)에도 있으며, 그의 사리를 2등분하여 태고사와 사나사에 봉안했다.
<사나사 답사기 보러가기 ☞
글보러 가기>


▲  원증국사탑비의 귀부(龜趺)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표정이 밝아 보인다. 그의 왕눈이 눈과
세모난 코는 700년의 세월이 무심히 할퀴고 간 상처들이 배여 있으나
그의 미소 만큼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  청암대종사(靑岩大宗師) 부도

원증국사탑비 곁에는 새롭게 청암대종사 부도가
뿌리를 내렸다. 청암은 1964년 태고사를 중건했
던 승려로 지금의 태고사가 있게 한 인물이다. 그는 2009년에 입적했는데, 태고사 창건주의 비
석 옆에 자리를 만들어 나란히 기리고 있다.


▲  원증국사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태고사 산신각(山神閣)
산신(山神)을 봉안한 공간으로 특이하게도 돌과 바위로 건물을 지었다.

▲  채색된 산신각 산신도(山神圖)

산신각 내부는 현대적인 조명시설이 없어 조금은 어둡다. 다행히도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촛불
들의 희생으로 산신도를 보는 데 그리 어려움은 없다.

산신도는 바위를 쪼아서 그린 벽화로 예전에는 흑백모드였으나 나중에 채색을 하여 칼라모드가
되었다. 색이 입혀져서 예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지만 그려진 폼은 좀 별로인 것 같다.
꼬랑지를 강하게 쳐들며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의 모습은 제법 용맹이 깃들여져 보이며, 하얀 긴
수염을 지닌 산신이 멀뚱한 표정으로 호랑이 앞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산신의 비서인 동자(童
子)가 찻잔을 들고 서 있는데, 동자라 하기에는 너무 연세가 지긋하게 보인다. 그래서 내가 일
행들에게 우스개 소리로
'저 찻잔을 든 사람은 원래 산신이었는데, 산신들간의 경쟁에 밀려 산을 말아먹었다. 그래서 먹
고 살고자 저 산신의 비서로 취업한 것이다'


▲  석종형(石鐘形)부도 3형제
산신각 뒤쪽 숲속에 숨어 있는 석종 모양의 부도로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이다.
고색의 무게를 간직하며 양지 바른 곳에 나란히 있는 모습이 정겹다.

▲  태고사 원증국사탑(圓證國師塔) - 보물 749호

태고사 경내에서 산신각을 거쳐 뒤쪽(봉성암 방면)으로 2분 정도 오르면 수려한 모습의 원증국
사탑을 만날 수 있다. 이 탑은 앞서 언급한 보우대사의 사리가 담긴 부도로 그가 입적(入寂)하
자, 태고사에 사리를 봉안하고 일부는 용문산 사나사로 보내 탑을 만들어 봉안했다.

그는 열반에 들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시를 남겼는데. 그도 죽기 전에야 인생무상을 뼈저
리게 느꼈던 모양이다.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人生命若水泡空
    팔십여 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八十餘年春夢中
    죽음에 이르러 이제 가죽포대 버리노니   臨終如今放皮袋
    둥글고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一輪紅日下西峰

이 부도는 기존의 고려시대 부도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유명한데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그 위에 마치 조그만 부도가 들어앉은 듯한 지붕돌을 두었으며, 그
위에 다시 특이한 모습의 머리 장식을 얹었다.


▲  꽃무늬로 정신이 없는 원증국사탑 기단부

기단의 밑 부분에는 정교한 꽃무늬가 잔뜩 새겨져 있으며 8각의 가운데 받침돌에는 기둥무늬와
꽃무늬로 가득하다. 탑의 조성 시기는 1385년 무렵으로 멋드러진 탑의 모습을 통해 고려 조정의
보우대사에 대한 신뢰와 제자들의 지극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 원증국사부도만이 외로이 서 있었으나 근래에 이르러 어느 승려의 탑을 그 밑
에 나란히 세워 놓았다. 이곳에 탑을 세울 정도면 청암대종사와 더불어 태고사 발전에 크게 기
여했던 승려가 분명하다.

아래쪽 부도는 보우대사에 대한 존경과 일편단심을 표하려는 듯, 원증국사탑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모습도 많이 비슷하다. 특히 충주 정토사(淨土寺) 부도탑과 상당히 비슷한데 시원스레 올려
진 지붕돌의 처마가 꽤 인상 깊다.


▲  오랜 세월을 뛰어넘은 원증국사탑과 새로운 부도탑

 

 


 

♠  조선 숙종 때 북한산성 내부에 세운 비상용 행궁
북한산성행궁터(北漢山城行宮址) -
사적 479호

▲  행궁 외전터

중흥사터에서 북한산성계곡을 거슬러 15분 정도 가면 행궁터를 알리는 안내문이 나온다. 여기는
행궁의 외곽 부분으로 남장대(南將臺)로 가는 서남쪽 산길을 꾸준히 오르면 행궁터가 계속 펼쳐
지면서 지금은 주춧돌로 변한 외전터와 내전터가 모습을 비춘다.
행궁(行宮)이란 비상시나 지방 시찰 때 제왕이 머무는 공간이다. 대표적인 조선 때 행궁으로 화
성(華城) 행궁, 온양온천(溫陽溫泉) 행궁, 남한산성(南漢山城) 행궁, 그리고 북한산성 행궁 등
이 있었다.

북한산성 행궁은 1711년(숙종 37년) 북한산성 보수공사를 맡은 김우항(金宇杭)이 국가 비상시 
머물 수 있는 행궁을 세울 것을 건의하면서 조성되었다. 행궁과 더불어 경리창상창, 금위영, 호
조창(戶曹倉), 어영청(御營廳) 등 여러 관청이 행궁 밑에 빼곡히 지어지면서 북한산성계곡 상류
는 그야말로 조그만 도시를 이루었는데, 이는 위급시 이곳으로 피신하여 비상작전을 수행할 임
시 수도의 역할을 하기 위함이다.

행궁의 규모는 124칸 정도로 제왕의 생활공간인 외전(外殿)과 왕비의 거처인 내전(內殿)으로 이
루어졌다. 또한 행궁을 동서로 가르며 조그만 계곡이 북한산성계곡으로 흘러가는데 이를 일종의
금천(
禁川)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행궁에 버금갈 정도로 잘 지어졌으나 정작 제왕들
은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 그럴만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상 행궁이라 조선이 천하를 다스릴 때는 그런데로 유지가 되었으나 왜정
이후, 방치에
가까운 관리소홀과 1915년 대홍수로 건물들은 하염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6.25를 겪으면서
나머지 남은 것들도 말끔히 붕괴되어 건물을 떠받들던 주춧돌만이 앙상하게 남게 되었다.

현재 행궁터에는 내전과 외전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축대 일부, 좌우의 담장터 등이 남아 있고
기와조각들이 어지러히 널려 옛날을 그리워한다. 특히 내전터에는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주춧돌이 있고 기단과 석축이 남아 있는데, 성능대사가 작성한 '북한지(北漢誌)'에는 '좌우상방
2칸, 대청 6칸, 사면퇴 18칸, 도사 28칸'
이란 기록이 있어, 정면 5칸, 옆면 2칸 건물에 사방 1
칸씩을 덧단 구조의 전각으로 여겨진다.

행궁터 북쪽 구석에는 잘생긴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피부에 활을 건다는 뜻의 '게궁암(揭弓岩)
' 바위글씨가 있었다. 1992년 겨울, 부친(父親)과 왔을 때 본 기억이 있어 누렇게 뜬 수풀을 비
집고 들어가 보았으나 내가 별로 달갑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새 훼손되어 없어졌는지 결국 만나
지 못했다.


▲  1904년경 북한산행궁의 모습 (문화재청 사진)


▲  수풀에 뒤덮힌 행궁터

북한산행궁은 산자락에 터를 닦았기 때문에 돌로 축대를 다져 건물을 지었다. 비록 행궁의 한계
로 서울 궁궐보다는 훨씬 작게 지어졌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규모는 아니다. 124칸이면 사대부나
부자의 고래등 기와집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던 행궁은 제대로 역할도 하지 못한 채, 마치 아틀란티스 대륙이 쏙 사라진 것처럼 나
무와 수풀의 조그만 나라가 되어 옛터만 황량히 남아있으니 역시 인간의 창조물은 그 아무리 대
단하고 견고하다 한들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먼지에 불과하다.


▲  행궁 내전터 ▼

내전터 한쪽에는 조그만 우물이 있다. 아마도 행궁에 물을 공급했던 우물일 것이다. 대머리처럼
허전하기 그지없는 옛터에는 주춧돌과 축대를 이루던 돌이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누렇게 익으며
인생의 말년에 다다른 낙엽이 그 빈 공간을 따스하게 덮어주며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인간의 부질없음이 담긴 공허한 북한산성행궁터는 고양시와 문화재청에서 복원계획을 가지고 있
으나 워낙 첩첩한 산골이라 공사가 그리 여의치가 않다. 다행히 이곳은 생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놓아 복원에는 문제는 없겠으나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므로 무리하게 벌이
지말고 지금 이대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듯 싶다. 폐허의 현장에서 마음껏 상상의 스케치를 해
보는 것도 답사에 좋은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행궁터에서 실타래처럼 이어진 서쪽 산길을 15분 정도 오르면 남장대터가 나온다. 이곳은 북한
산성 안에서 가장 높은 측에 속하는 해발 700m 고지로 산성 내부와 북한산성 산줄기가 훤히 두
눈에 바라보여 조망이 천하 일품이다.

※ 북한산성행궁터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북한산성입구 정류장 → 대서문 → 북한동역사관 → 중성문 → 중흥사터 → 태고사입구 → 행
  궁터 (약 6km, 2시간)
* 대남문과 청수동암문에서 행궁터로 접근해도 된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69일대


▲  경리청상창터(經理廳上倉址)와 북한산성계곡 등산로 ▼

북한산성행궁터 입구에서 대남문 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길 오른쪽에 커다란 돌이 박힌 거대하
고 긴 석축이 마중한다. 이곳은 곡식을 보관하던 경리청상창의 옛터로 축대를 이루는 돌이 행궁
터보다 더 장대하여 비록 터만 남았음에도 위엄이 진하게 돋보인다.

경리청상창은 숙종 시절에 북한산성을 보수하고 비상용 행궁과 여러 관청을 지을 때 세워진 양
곡 창고로 '팔비헌'이란 현판이 있었다. 상창(上倉)은 창고 63칸, 내아(內衙) 12칸, 집사청(執
事廳) 3칸, 군관청(軍官廳) 4칸, 서원청(書員廳) 4칸 등 총 86칸 규모로 북한산성 행정업무를
보던 관성소(管城所)를 같이 두었으며, 행궁을 관리하는 관성장(管城將)이 근무했다.

북한산성의 양식 창고는 상창 외에도 호조창(戶曹倉)과 중창(中倉), 하창(下倉), 그리고 평창(
平倉) 등이 있었으며, 상창은 19세기 후반에 파괴되어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  잡초만 무성한 경리청상창터 내부

▲  금위영이건기비(禁衛營移建記碑)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87호

경리청상창터에서 대남문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길 왼쪽에 문화재 안내문이 손짓 할 것이다. 안
내문 안쪽에는 적당히 닦인 공터가 있는데, 그 오른쪽 구석에 바위에 비문(碑文)을 새긴 독특한
비석, 금위영이건기비가 수줍은 듯 자리해 있다.

금위영(禁衛營)은 병자호란 이후에 서울을 방어하고자 세운 5군영의 하나로 원래는 동소문(東小
門, 혜화문) 안쪽에 있었다. 허나 그 지대가 높고 무너지기가 쉬워서 1715년 북한산성 안 지금
의 위치로 이전하고 그것을 기리고자 이건기비를 세웠다. 비문은 당시 도제조(都提調)를 지낸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이 지었다.

이 비석은 서 있지 않고 길게 누워있는 형태로 화강암 바위면에 비문을 새겼으므로 마애비(磨崖
碑)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비문은 마멸된 부분이 많아서 정상적인 눈으로는 제대로 확인하기가
어렵다. 탁본을 해야 전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비석 뒷면은 흙에 묻혀있고, 비문 위쪽에는
낙수면(落水面)이 새겨진 지붕돌이 놓여져 있는데, 이곳의 청정함을 자랑하듯 푸른색 이끼 옷을
걸쳤다.

북한산성계곡 상류(중성문~대성암)가 말끔히 개방되기 이전이자 내가 꼬마 시절이던 1990년 이
비석을 보고는 매우 신기하여 이리저리 살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계곡 상류는 금지된 구역이라
군인에게 신분증을 맡기고 들어가야 했는데, 1992년 이후 개방되어 자유의 땅이 되었다.


▲  누런 잡초만이 가득한 금위영유영지(禁衛營留營址)

금위영이건기비 남쪽에는 금위영의 유영이 있던 공터가 있다. 서울에 있던 금위영을 1715년 이
곳으로 이전했는데, 금영(禁營), 금창(禁倉)으로도 불렸다. 허나 19세기 후반 북한산성에 대한
관리가 끊어지면서 주변의 여러 건물과 더불어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  이끼의 보금자리가 된 금위영유영지 축대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세월의 장대한 흐름 속에 모든 것이 씻겨 내려간 금위영유영터에는
주춧돌과 석축 일부만이 고개를 들며 지나간 세월을 그리워한다. 마치 옛날을 그리워하는 우리
네 인간들처럼 말이다.

* 금위영이건기비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32

 


♠  북한산성 대남문(大南門)과 보현봉 그리고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절집, 문수사(文殊寺)

▲  북한산성 대남문 - 사적 162호

금위영이건기비에서 대성암을 지나 20여 분을 오르면 북한산성 13성문의 하나인 대남문이 마중
한다. 이 문은 1712년에 세워진 것으로 도성(都城)과 산성을 잇는 중요한 문인데, 문을 경계로
안쪽은 경기도 고양시, 바깥쪽은 서울 종로구이다.

왜정 이후 홍예문만 남아있던 것을 1990년 이후에 문루를 복원했다. 이곳에 서면 가까이에 보현
봉을 비롯하여 서울 도심과 한강(漢江), 멀리 강남구와 동작구 지역까지 두 눈에 거침없이 들어
와 조망 하나는 천하 일품이다.

문을 나서서 직진하면 구기동과 평창동이며, 오른쪽으로 가면 고려시대에 창건된 조그만 산중암
자 문수사(文殊寺)가 나온다.


▲  대남문 앞에서 천하를 굽어보다.
서울 도심과 용산, 강남, 동작 지역까지 훤히 바라보인다.

▲  높은 하늘을 이고 천하를 응시하는 보현봉(普賢峰, 700m)의 위엄


▲  문수사 문수굴에 자리를 편 문수보살(文殊菩薩)

한칸 방 어찌 그리 너무도 고요한가, 일만 인연 모두 적막하네
길은 돌 틈으로 뚫고 가고, 샘은 구름 속에서 새어나네
밝은 달 처마 끝에 걸려 있고, 산들바람 숲 속에서 일어나네
누구 저 스님 따라, 고요히 앉아 참 낙을 배우려나

* 탄연(坦然)이 문수사에서 지은 시


북한산성 대남문을 나와서 오른쪽(서남쪽) 길로 3분 정도 가면 해발 640m 고지에 둥지를 문수사
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수사는 문수봉(文殊峰) 바로 밑에 터를 닦은 산사로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절이다. 북
한산에 안긴 절 가운데 가장 조망과 경관이 일품으로 경내에 있는 문수굴은 예로부터 영험 있는
기도처로 명성이 자자했다.

이 절은 1109년(고려 예종 4년) 탄연(坦然)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기암괴
석과 경관, 그리고 천연동굴(현재 문수굴)에 반해 절을 세우고, 문수암(文殊庵)이라 했다고 한
다. 1451년(문종 1년) 문종의 딸인 연창공주(延昌公主)가 중창했으며, 그 이후 500년 가까이 적
당한 자취를 남기지 못해 아마도 오래 못 가서 망한 것으로 보인다.
 
1921년 삼성각과 오백나한전을 중수했는데, 이 사실로 봐서는 이때 오랫동안 꺼진 법등(法燈)이
다시 켜진 듯 하다. 허나 6.25전쟁으로 한줌의 재가 되었으며, 1957년 신수(信洙)가 중건하고,
1983년에 주지 혜정(慧淨)이 삼성각과 나한전을 개축했으며, 2002년에 대웅전과 응진전(應眞殿),
요사 등을 새로 건립하여 지금에 이른다.

절 인근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던 그 유명한 비봉(碑峰)이 있다. 지금 순수비는 건
강 때문에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지만 그 비석에 '한성(漢城)을 지나 고개를 올라..(중략) 한
도인(道人)이 석굴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이 있어 그 석굴을 문수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절이 너무 높은 곳에 자리해 있어 오르기는 힘들지만 조망이 국보급이라 문인들이 많이 찾아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는데, 고려 중기 때 이장용(李藏用, 1201~1272)을 비롯하여 최립(崔岦,
1539~1612), 홍세태(洪世泰, 1653~1725) 등이 이곳을 거쳐갔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어머니가
가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이곳까지 찾아와 문수굴에 봉안된 오백나한에게 치성을 올려 이승만
을 낳았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이승만이 80 고령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올라와 '문수사' 현판을
남겼으며, 당시 승려와 찍었던 흑백사진도 아련히 절에 남아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삼성각(三聖閣), 응진전, 요사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위치가 가파른 곳
이라 사세 확장도 어렵다. 대웅전 옆에는 문수사의 명물이자 지금의 문수사를 있게 한 문수굴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은 아쉽게도 하나도 없다. 다만 대웅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좌상이 명성황후
(明成皇后)가 시주한 것이라 하니 그게 제일 오래된 것이며, 대웅전 석가불은 영왕(英王, 영친
왕)이 봉안한 것이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고색의 때는 오래 전에 증발해서 사라졌으나 그 대신 천하 제일의 조망과 주변경
관을 품고 있어 그 아쉬움을 다소 달래준다. 경내에 오르면 가까이로 구기동(舊基洞)과 부암동
부터 서울 도심, 멀리 한강과 관악산(冠岳山)까지 보인다. 또한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곳이라
구름이 아래로 흘러가며, 공기 또한 속세와 틀리다.

서울 도심과도 무척이나 가까우며, 도심의 상징인 종로구에 있음에도 분위기는 180도 확연히 틀
리다. 구기동에서 2시간을 낑낑대고 올라야 이를 만큼 산행의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되지만 서울
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지붕으로 굳이 멀리 나갈 필요 없이 산중암자의 고즈넉함과 아늑함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  문수사의 명물 문수굴(文殊窟)

문수사 경내에서 눈여겨 볼 곳은 바로 문수굴이
다. 탄연이 이 굴에 반해 절을 지었을만큼 문수
사의 가장 소중한 꿀단지로 거대한 바위에 나
있는 자연동굴이다.
문수사를 거쳐간 승려들이 수도를 했던 곳이지
만 딱히 옛 흔적은 없으며, 1983년 주지 혜정이
동굴 입구에 목조로 문을 만들었다. 문에 걸린
'삼각산천연문수동굴(三角山天然文殊洞窟)'이란
현판은 달랑 29만원으로 악명이 대단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글씨이다.

동굴 내부에는 문수보살을 중심에 봉안했고, 좌
우로 나무로 만든 조그만 문수보살 20여기가 든
든하게 병풍이 되어준다. 예로부터 영험이 있는
기도처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이곳에 있던 오백
나한은 응진전(오백나한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수사를 이렇게 둘러보고 구기동으로 내려가
저녁을 먹고 산행을 마무리 지었다.

※ 북한산 문수사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1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7212번(수색,은평차고지↔옥수동)시내버스를 타고 구기동 현대빌라나 승가사입구 하차
* 지하철 3호선 녹번역(3번 출구)에서 7730번 시내버스를 타고 구기동 현대빌라나 승가사입구
  하차
* 산행코스 : 구기동(현대빌라, 승가사입구) → 구기분소 → 승가사갈림길 → 깔딱고개 → 문수
  사 (2시간)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2 (☎ 02-391-2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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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2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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