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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2.19 북녘 황해도가 바라보이는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나들이 (화개산성, 화개약수, 강화나들길9코스, 연산군유배지, 대룡시장)
  2. 2019.07.07 민통선에 묶여있는 강화도 옆구리의 커다란 섬, 교동도 여름 나들이 ~~ (교동읍성, 교동향교, 성전약수, 화개사, 강화나들길 9코스)

북녘 황해도가 바라보이는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나들이 (화개산성, 화개약수, 강화나들길9코스, 연산군유배지, 대룡시장)

강화 교동도 화개산 


~~~~~  강화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나들이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교동평야와 고구저수지
(바다 너머로 멍하게 보이는 곳이 북한 땅)

화개약수 화개산 한증막

▲  화개약수

▲  화개산 한증막


 

♠  교동도의 지붕, 화개산 오르기 (봉수대, 화개산 정상)

▲  읍내리에서 바라본 화개산

여름 제국(帝國)이 막바지 절정에 이르던 8월 광복절에 강화도와 황해도(黃海道) 사이에 자리
한 교동도를 찾았다.

아침 일찍 도봉동(道峰洞) 집을 나서 별다른 정체 없이 강화터미널에 도착했다. 강화도는 꿀
명소가 많다 보니 주말과 휴일에 나들이, 답사 수요가 폭발적이라 교통정체를 피하고자 아침
부터 부지런을 떤 것이다.
강화터미널에서 교동도의 발인 강화군내버스 18번(1일 11회)을 타고 송해면과 하점면, 인화리
검문소, 교동대교를 지나 황해도를 코앞에 둔 교동도(喬桐島)의 품으로 들어선다. <일반 차량
은 인화리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으나 강화군내버스 18번 승객은 받지 않음, 허나 특수 상황에
는 버스 승객도 검문을 하는 경우가 있으니 교동도 방문객은 무조건 신분증을 지참 요망>

교동도에 들어서 읍내리에 있는 교동읍성(喬桐邑城)과 교동향교(喬桐鄕校), 화개산 남쪽 자락
에 안긴 화개사(華蓋寺)를 둘러보고 화개사 옆 산길을 따라 화개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교동
읍성과 교동향교, 화개사 부분은 이곳을 클릭한다)


▲  화개산을 오르면서 바라본 교동평야

화개산(華蓋山, 269m)은 교동도의 대표 지붕이자 이곳에서 가장 큰 뫼이다. 교동도 동부에 홀
로 솟아있어 교동도의 대부분 지역과 강화도와 석모도, 서검도, 미법도 그리고 바다 북쪽 너
머로 황해도와 개성(開城) 땅까지 속시원히 시야에 들어와 일품 조망을 자랑한다. 이렇듯 북
녘까지 거침없이 내닫는 조망 덕에 이북 실향민들이 자주 찾아와 코앞에 보이는 북쪽을 바라
보며 넋두리를 하거나 망향제(望鄕祭)를 지내기도 했다.

화개산에는 청동기시대 유적인 성혈바위를 비롯해 화개산성, 봉수대, 효자묘, 화개사, 교동향
교, 연산군유배지, 화개약수 등 많은 문화유산과 명소가 깃들여져 있으며, 고려 후기 삼은(三
隱)의 하나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이 산을 방문하여
'바닷속 화개산은 푸른 하늘에 닿았는데, 산 위 옛 사당은 언제 지었는지 모르네. 제사 지낸
후 잔 마시고 이따금 북쪽을 바라보니 부소산(扶蘇山) 빛이 더욱 푸르구나'

시를 지었다. 그는 화개사에서 독서를 한 적이 있으니 그때 이 시를 지은 모양이다.

교동대교 개통 전에는 거의 교동도와 실향민들의 산으로 숨어있었으나 2014년 7월 다리가 뚫
리면서 등산객과 나들이객 수요가 크게 늘어 강화군의 새로운 꿀단지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화개산 등산은 화개사나 교동면사무소(대룡리)에서 시작하는 것이 편하다. 화개사를 기준으로
봉수대, 정상, 성혈바위, 북벽망루터, 화개산성 북쪽 성곽, 화개약수, 한증막터를 거쳐 교동
면사무소(대룡리)로 내려가면 되는데, 이 코스는 강화나들길 9코스(교동도 다을새길)의 일부
이기도 하며, 화개약수 주변에 효자묘가, 한증막터 근처에 연산군유배지가 있다. 화개사에서
정상까지는 약 30분 정도, 정상을 찍고 교동면사무소까지는 1시간 30분 내외로 걸린다.


▲  화개산 봉수대(烽燧臺) - 강화군 향토유적 29호

화개사에서 20~25분 정도 오르면 주변이 확 트인 능선에 이르고 곧바로 화개산 봉수대가 마중
을 나온다.

화개산 봉수대는 정상 서쪽에 자리해 있는데, 사방이 확 트여있어 봉수대 자리로는 아주 명당
이다. 현재 가로 4.5m, 세로 7.2m의 석축만 남아있는데,, 불을 피우고 연기를 휘날리던 봉수
시설은 장대한 세월에 녹아 없어졌다.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며, 여기서 고려의 국도
(國都)인 개경이 지척이라 그 중요성이 매우 컸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覽)에는 남쪽으로 강화도 덕산봉수대에서 봉화를 받아 동쪽의 강화도 봉천산(奉天山) 봉수대
로 연락을 보냈다고 한다.

이 땅에 수많은 봉수대(봉화대)가 있었지만 그나마 이 정도라도 남은 봉수대는 거의 없다. 고
된 세월에 지쳐 우중층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는 봉수대, 내 나이의 수십 배에 달하는 세월
을 머금고 있는 봉수대 돌은 저렇게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으나 나란 존재는 그들의 1% 인생
도 되지 못하니 참 인생은 부질 없는 것 같다.


▲  봉수대에서 바라본 서해바다와 석모도, 미법도(彌法島)
하늘과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조망의 질은 더욱 높아진다.

▲  봉수대에서 정상으로 인도하는 능선길
능선길은 나무가 제법 삼삼하여 강렬한 햇살과 숨바꼭질을 하며 움직이기에 좋다.

▲  화개산 정상(269m)

봉수대에서 5~6분 정도 가면 교동도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화개산 정상에 이른다. 교동도에
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제일 높은 곳으로 6각형 정자와 초소가 정상을 지키고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품 조망이 펼쳐지는데, 안개와 구름을 제외하면 시야를
방해하는 존재는 그 어느 것도 없다. 허나 여기서는 북한 땅까지 바라보여 산이 높고 조망이
좋은 만큼 남북분단의 비애도 크게 만든다.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①
교동도 서부와 대룡리, 드넓은 교동평야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②

교동평야를 기름지게 적셔주는 고구저수지가 밑에 보이고, 바다 너머로 그 말로만 듣던 황해
도 연백군(延白郡)과 배천군 지역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철없던 어린 시절(1980~90년대)에는 어른이 되기 전에 남북통일이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어른을 한참이나 지난 지금도 통일은 커녕 아직까지도 이북 땅에 발도 들일 수가 없다.
교동도와 황해도는 3~4km로 매우 가까운 거리지만 그 체감거리는 가히 1억 광년 그 이상으로
문제는 그 거리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③
고구저수지와 교동도 북부를 비롯해 바다 너머로 황해도 연백/배천군 지역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④
교동도의 옛 중심지인 읍내리(사진 가운데 부분), 바다 너머로 길게 누운
석모도(席毛島)와 기장섬(오른쪽 섬)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⑤
확대해서 바라본 교동도의 옛 중심지인 읍내리 지역
(사진 가운데 부분에 교동읍성이 있음)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⑥ 석모도와 상주산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⑦
석모도 북부 상주산과 강화도 서부 지역

▲  화개산 정상에서 바라본 천하 ⑧
읍내리와 남산포(사진 가운데 산), 석모도 북서부와 기장섬, 미법도, 서검도 등

           ◀  화개산 정상 표석

정상에 지어진 정자에는 산꾼들이 자리를 펴
쉬고 있었고,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어디가
북한 땅인가?','여기가 북한 땅인가?' 따지며
조망을 즐긴다.
정상의 자리란 오래 있으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 10분 정도 정상을 누리다가 동쪽 능선으
로 철수했다.


 

♠  화개산 내려가기 (성혈바위, 화개산성, 화개약수)

▲  성혈(星穴)바위

정상에서 서쪽 능선으로 가면 봉수대, 화개사, 효자묘(중간 갈림길에서 북쪽), 대룡리로 이어
지고, 동쪽 능선으로 가면 성혈바위, 화개산성, 화개약수로 이어진다. 성혈바위를 지나면 길
은 북서쪽으로 크게 꺾이는데, 화개약수에서 효자묘로 가는 길이 있으며, 효자묘에서 바로 올
라가면 화개사에서 올라온 길과 만난다.

동쪽 능선으로 들어서면 얼마 안가서 성혈바위라 불리는 납작한 바위가 발길을 잡는다. 하얀
금줄이 쳐진 그 안에 얕은 구멍이 여럿 찍힌 성혈바위가 있는데, 성혈이란 바위구멍 그림으로
청동기시대 이후에 많이 나타난다.
성혈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대체로 하늘의 별자리를 표시하거나 풍요, 다산(多産), 자
연 등을 숭배하는 민간신앙이나 제사 현장으로 보고 있다. 바위에 구멍을 내고 여기서 제사를
지내거나 주술행위를 했던 것이다. 이런 성혈 흔적은 자연산 바위 외에도 고인돌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  위에서 바라본 성혈바위
바위 오른쪽에 얕게 파인 동그란 자국들이 성혈이다.

▲  성혈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교동도 읍내리 동부와 석모도 상주산, 강화도 서부가 바라보인다.

▲  북벽 망루(望樓)터

성혈바위를 지나면 산길은 북서쪽으로 크게 꺾인다. 그래서 정상 외에는 보이지 않던 북쪽의
산하가 나의 시야를 점유하게 되었고 그런 길을 조금 내려가면 북쪽을 향한 곳에 북벽망루터
가 허전하기 그지 없는 모습으로 나를 맞는다.

북벽망루는 화개산에 두룬 화개산성 북쪽 성벽에 세운 망루로 산성의 외성(外城)과 내성(內城
)이 교차하는 곳에 자리한다. 산성에서 2개의 망루터가 발견되었는데, 다른 하나는 여기서 북
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다들 망루를 받쳐들던 돌만 아련하게 남아있다.


▲  북벽 망루터에서 바라본 교동평야와 고구저수지
바다 너머로 황해도가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  북벽 망루터에서 바라본 고구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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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벽 망루터에서 바라본 교동도 동북부 (교동대교 방면)
바다 너머로 강화도 양사면 지역이 희미하게 두 눈에 들어온다.

▲  화개산성(華蓋山城) - 강화군 향토유적 30호

북벽망루를 지나면 오른쪽(북쪽) 숲속에 초췌한 모습의 화개산성이 모습을 비춘다. 화개산의
듬직한 갑옷인 화개산성은 내성(1,013m)과 외성(1,155m)으로 이루어진 산성(山城)으로 총 길
이는 약 2,168m이다.
계곡을 포함한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남북으로 길게 닦여졌는데, 이 산성이 언제 축성되었
는지는 화개산 산신도 모르는 실정이나 고려 때 지어진 봉수대를 통해 고려 때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1553년에 최세운이 성을 증축했으며, 1591년 외성을 철거하여 교동읍성(지금
의 교동읍성과는 다름)을 쌓았고, 1737년 개축하여 군창(軍倉)을 두었다.

허나 19세기 이후 성은 버려졌고, 관리의 손길이 떠난 산성에 장대한 세월과 대자연의 고약한
심술이 이어지면서 성곽 대부분이 분해되어 겨우 북벽망루와 화개약수 주변, 남쪽 산자락(화
개사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헝클어진 모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  화개산의 젖, 화개약수

화개산성 안내문을 지나면 깎아지른 듯한 바위 밑에 자리한 화개약수가 마중을 한다. 교동향
교에 있는 성전약수와 더불어 화개산이 속세에 베푼 약수로 푸른 이끼가 짙게 뒤덮힌 돌에서
물이 쏟아진다. (성전약수보다 물맛이 좋음) 산에 왔으니 산의 마음도 확인할 겸, 약수를 한
모금 마셔야 되겠지. 하여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들이키니 갈증과 체내(體內)
의 체증이 싹 가시는 것 같다.
약수터에는 나무로 보호각을 만들었으며, 기둥에는 화개약수를 찬양하는 시가 적혀있으니 읊
어보면 다음과 같다.


▲  오랜 세월을 머금은 갸륵한 맛, 화개약수

'화개약수'  석천(石泉) 김흥기

얼마나 품었길래 그 먼길 돌아 졸졸 쉼없이 흐르는가
수없이 오갔을 세기의 지층을 밟고 귀뚜리 우는 밤에도
산주름 굽이치는 돌틈을 비집고 또르르 굴려오는 은빛 맨발의 낙수
허기진 산비탈 길에서 적막을 견뎌온 너, 천년 비밀의 갸륵한 맛

▲  효자묘(孝子墓) - 실상은 효자 아버지의 묘라고 함

화개약수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직진하면 한증막과 교동면사무소로 이어지고, 왼쪽 오르
막길을 오르면 낮은 봉분(封墳)으로 이루어진 효자묘가 나온다. 이 무덤을 지나 뒷쪽(남쪽)
산길을 오르면 화개사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서쪽 능선길과 만난다.

효자묘는 야트막한 봉분과 낮은 상석(床石)이 전부인 조그만 무덤이다. 무덤의 이름도 참 모
범적이라 부모들이 딱 좋아할만한 이름인데, 누구의 무덤인지는 전하는 것이 없고 그저 막연
하게 효자묘라 불리고 있으니 그 유래는 대략 이렇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안내문에는 삼국시대로 추정된다고 나오나 전설
내용은 거의 조선시대 스타일임> 인근 청주골에 병환중인 아버지와 함께 사는 신씨란 젊은이
가 있었다.
그는 효성이 지극했으나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하여 교동현 군사로 징발된 부잣집 아들을 대신
하여 군대에 들어갔다. 매일 부친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댓가로 대신 들어간 것이다.
 
신씨는 화개산성에서 근무를 하였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안부를 묻고자 산 밑 고읍마을로
을 옮겼다. 마침 전쟁(또는 장거리 훈련)에 나갈 일이 있어 무탈하게 돌아오면 산성 북루(北
樓)에 해가 지기 전까지 하얀 적삼을 달기로 아버지와 약속을 했다.
무탈하게 돌아온 신씨는 약속대로 북루에 적삼을 달려고 했으나 이를 수상하게 여긴 수장(守
長)이 적삼을 빼앗고 관아로 잡아갔다. 당시 문루에 적삼 등의 깃발을 다는 것은 다른 성과
병사들에게 일종의 연락을 취하기 위함인데 수장의 허가도 없이 달려고 하니 당연히 오해를
산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약속된 시간까지 적삼은 달리지 못했고, 그 사연을 알 도리가 없는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것으로 판단해 성급하게 목숨을 끊고 만다.
신씨를 추궁하던 수장은 그 사연을 알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시신을 산성 안에 안장하고 3년
시묘를 하며 군복무를 하도록 해주었다. 또한 신씨의 효행을 기리고자 장수와 병사들이 매일
아침 무덤에 참배를 했고 참배 자국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무덤은 효자가
아닌 효자의 아버지 무덤인 것이다. 허나 효자 아버지 무덤이라 하기에는 이름이 기니 효자
신씨를 기릴 겸 효자묘라고 한 것 같다.


 

♠  화개산 마무리

▲  그림처럼 펼쳐진 화개산 서쪽 숲길 (효자묘~한증막 구간)

효자묘를 둘러보고 아름다운 숲길에 취하며 대룡리(교동면사무소)로 내려갔다. 숲이 매우 삼
삼해 제아무리 세상을 녹일 기세인 여름 햇살이라 한들 여기서는 어림도 없다.


▲  빽빽하게 우거진 화개산 숲길

▲  숲길에 달아놓은 조촐한 문
둘레길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둘레길 스타일의 문이다.

▲  화개산 한증막(汗蒸幕)

숲길을 내려가니 아주 단단하게 지어진 커다란 돌집이 마중을 나온다. 생김새를 보니 오래된
돌무덤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쪽에 문까지 나있어 마치 북극 사람들이 살던 이글루의 돌버전
같은 느낌까지 드는데, 뜻밖에도 옛날 사람들이 이용하던 한증막의 흔적이다.

한증막이란 오늘날 우리 목욕 문화의 일원인 찜질방의 옛 형태로 보면 된다. 이곳 한증막은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황토를 밑에 깔고 위에 돌을 쌓아 반 동그라미 모습을 자아냈다.
둘레는 15m, 직경 4.5m, 높이 3m로 인근 냇물에 한증으로 푹 삶은 몸을 식힐 수 있도록 돌을
깐 자리가 남아있다.
돌한증막 작동 원리는 우선 마른 소나무가지 등으로 돌집 안에 불을 지펴 온도를 높인 다음
그 재를 꺼낸다. 그런 다음 무성한 생솔가지를 안에 넣어 바닥에 깔고 그 안에 들어가 땀을
충분히 낸 다음, 옆 냇물에서 몸을 식힌다. 그렇게 한증(汗蒸)을 반복하고 마지막은 목욕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지금의 찜질방과 같은 방식인 것이다.

이 한증막은 1970년대까지 절찬리에 사용되었으며, 교동도에는 이곳 외에도 수정산과 여러 곳
에 한증막을 두어 섬 사람들이 이용했으나 지금은 이곳만 남아있다. 솔직히 한증막 유적은 처
음 보는지라 참 생소하기 그지없는데, 이런 한증막 유적은 이 땅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옛
사람들의 목욕/찜질 문화를 귀뜀해주는 소중한 존재로 '국가 민속문화재'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해도 전혀 손색은 없어보인다. 그렇게 해야 이 한증막도 우리 곁에 더 오래 있을 것이 아
닌가?

* 한증막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산233


▲  냇가 옆 숲속에 터를 닦은 한증막

▲  앞에서 바라본 한증막

▲  한증으로 뜨거워진 몸을 식히던 현장
(냇가에 있음)


▲  한증막 내부로 들어가는 네모난 문

증막 문이 작아서 완전 엎드려서 들어가야 된다. 내부는 옛 무덤의 석실(石室) 같은 모습으
로 너른 공간이 있는데, 거기에 마른 가지 등을 태워 내부를 뜨겁게 달군 다음, 재를 치우고
생솔가지를 바닥에 깔아 한증(찜질)을 하였다.
안에 들어가볼까 했으나 내가 들어가면 자칫 무너질까 겁나서 이렇게 보는 선에서 욕심을 버
렸다. 게다가 버려진지 오래된 한증막이고 한여름이니 안에는 벌레들도 무지 많을 것이다.


▲  연산군유배지로 인도하는 숲길

한증막을 둘러보고 조금 내려가다보면 연산군유배지를 알리는 이정표가 마중한다. 조선의 제
10대 군주인 연산군(燕山君)이 교동도로 유배를 와서 죽었으니 그 유배처가 남아있을 것이고
그 현장이 이 부근에 있던 모양이다.


▲  연산군유배지 표석 (2014년)

연산군유배지 표석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반질반질한 하얀 피부를
지녔다.
이 땅의 사람들은 연산군(1476~1506)하면 다들 폭군, 신하들 때려죽이기, 불효자, 할머니 죽
인 패륜아, 흥청망청, 기생 잡기 등 그야말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허나 그는 우리
가 생각한 것 외로 그렇게 쓰레기 군주는 아니었다.

연산군은 조선 9대 군주인 성종(成宗)과 폐비윤씨의 아들로 성종의 장자(長子)이다. 폐비윤씨
가 한 성깔 하던 여인이라 성종과 자주 마찰이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성종의 어머
니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와 성종에 의해 폐비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고, 1482년 사사(賜死)
되고 만다. 성종은 이 사실을 아들이 알까 두려워 신하들에게 100년 동안 윤씨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명했다.

연산군은 왕자 시절부터 말썽을 핀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상은 다르다. 그는 10년 이상 허침(
許琛)과 조지서(趙之瑞) 등에게 학문을 배웠고, 시문(詩文)과 음악, 악기에 매우 능했으며,
많은 시를 남겼다. 또한 효성도 지극해 부왕 성종이 중병으로 눕자 밤을 새며 간호했으며, 자
신의 생일 하례를 취소시켰다. 또한 1494년 부왕인 성종이 승하하자 삼사(三司)의 반대를 뿌
리치고 부왕의 명복을 비는 수륙재(水陸齋)를 지내기도 했다.

1494년 왕위에 오르자 비융사(備戎司)를 설치해 갑옷과 무기를 생산하여 국방에 신경을 썼고,
두만강(豆滿江)에서 소란을 피우는 여진족(女眞族)을 토벌해 투항한 여진족에게 토지와 상급
을 내렸다. 또한 변방의 안정을 위해 백성들의 이주를 독려했다.
종묘 제도를 정비하고 사창과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해 물가를 안정시켜 굶주리는 백성을 구
제했으며, 호적식년(戶籍式年)을 개정해 백성의 불편을 덜었다. 그리고 '경상우도지도(慶尙右
道地圖)','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지리서와 '국조보감(國朝寶鑑)','역대제왕시문잡저(歷代
帝王詩文雜著)' 을 편찬해 제왕 수업에 귀감으로 삼았다.
또한 성종 이후 계속된 태평성대로 관리들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사치향락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연되자 금제절목(禁制節目)을 만들어 강력히 단속을 했으며, 전국에 암행어사(暗
行御史)를 풀어 지방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 잡고, 백성들의 동정을 살폈다. 그리고 문신(文臣
)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케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다시 실시해 학
문 발달에 크게 신경을 썼다.

연산군은 신하의 눈치를 받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왕권 강화를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면
서 그 유명한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와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가 터졌고, 왕에게
불경죄를 저지른 이들이 많이 피를 보았다. 또한 어머니 윤씨의 사망 이유를 알게 되면서 다
소 이성을 잃게 된다.
이렇게 그의 패도정치(覇道政治)가 나날이 심해지자 왕을 갈아야 된다는 무리들이 조금씩 고
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 주역은 바로 연산군과 가까웠던 박원종(朴元宗)과 성희안(成希顔)이
었다. 성희안은 금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으로 왕에게 혼이 난 적이 있었고, 박원종
은 확실치는 않지만 연산군이 그의 누이를 건드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둘은 앙심을
품고 홍경주(洪景舟)까지 끌어들여 반란을 모의했고, 1506년 9월 2일 박원종 일당은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쳐들어갔다.
그때 왕은 연회를 베풀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반란군의 침입에 왕은 크게 당황하여 아무런 말
도 못했다고 하며, 결국 제대로 저항도 못해보고 반란군에게 옥새를 내주고 말았다.

반란군은 정현왕후(貞顯王后, 성종의 계비)의 허락을 구해 왕을 동궁(東宮)에 가두고 그녀의
소생인 진성대군(晉城大君)을 데려와 익선관(翼善冠)을 쓴 상태로 왕위에 올렸다. 그가 바로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이다. 이 사건을 세상에서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라 부른다.

동궁에 유폐된 연산군은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을 통해 궁밖으로 추방되어 교동도(喬桐島)로
유배되었다. 유배된지 2달 뒤인 11월 역질(疫疾)에 걸리자 중종은 약을 보냈는데, 어찌된 영
문인지 불과 며칠 만에 갑자기 죽으니 그때 그의 나이 겨우 30살이었다. 기록에는 단순히 병
으로 죽었다고 나와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없는데, 이상한 것은 한겨울에 역질이란 전염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또한 중종이 보냈다는 약도 상당히 의심쩍다. 그래서 병사가 아닌 독살되었
다는 설이 강하게 설득력을 얻고 있다.

싸늘한 주검이 된 연산군은 교동도에 매장되었으며, 1512년 12월 부인 신씨가 남편의 무덤을
자신의 외조부 땅(서울 방학동)으로 이장해 줄 것을 청하자 중종이 이를 허락해 1513년 2월
왕자의 예로 이장되고 양주군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했다.
연산군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부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넣었으나 그 요구는 거절당했다
고 한다. (연산군묘 제사는 처가집인 거창신씨 집안에서 지내고 있음)

그는 왕이었음에도 그 흔한 묘호(廟號)도 받지 못했으며, 시호(諡號)도 없다. 그냥 왕자 시절
의 칭호인 연산군을 그대로 썼다. 김정국(金正國)과 유숭조(柳崇祖) 등은 그에게 시호를 올려
왕으로 추봉(追封)하고 양자(養子)를 들여 제사를 받들 것을 건의했으나 중종과 반정파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를 두고 이긍익(李肯翊)은 그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김정국 등을
높이 평가하며, 연산군의 제사가 끊긴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라 기록했다.

이렇게 죽어서도 왕의 예우를 받지 못한 것은 물론 조선이 망할 때까지 종묘(宗廟)에 배향되
지도 못했다. 또한 무덤도 능(陵)이 아닌 묘(墓)로 사대부의 무덤 수준에 머물렀으며, 그의
사초는 실록이 아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로 격하되었다.
이렇듯 중종과 반정파에게 철저히 매장되고 왜곡되었으며, 명종(明宗)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
면서 연산군 3글자는 부정적인 의미이자 폭군의 대명사가 완전히 찍히게 된다. 사림파는 연산
군 때 죽은 사림 계열 사람들, 즉 자신의 선배들을 의로운 인물로 추앙했고, 연산군과 그 측
근은 죄다 쓰레기로 기록하여 그것을 후손들에게 계속 주입시켰다. 이는 패배자에게 인정을
두지 않는 역사의 매정한 현실이다.
승리자는 항상 영광스럽게 포장이 되지만 패배자는 아무리 공적이 뛰어나도 승리자의 구미에
따라 철저히 왜곡되고 파괴된다. 연산군은 바로 역사의 패배자의 정석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산군이 유배살이를 했던 현장은 3곳이 비정되고 있는데, 이곳과 교동읍성 부근, 교동관아터
부근 등이다. 허나 어느 곳이 정답인지는 아직도 오리무중(五里霧中) 상태, 교동읍성 부근과
교동관아터 주변은 유배지를 알리는 비석이 있고, 내가 찾은 화개산 유배지는 표석이 있어 서
로 연산군 유배지임을 내세운다. (근래에 그 시절을 재현한 초가와 연산군 인형 등을 설치했
음)


▲  화개산 서쪽 산길 (대룡리)

▲  교동도의 서울인 대룡리

연산군유배지를 둘러보고 대룡리로 내려갔다. 나를 진하게 감싸던 숲길은 어느덧 끝나고 주변
이 확 트인 평탄한 흙길이 나를 맞이해 교동면사무소까지 쭉 인도한다.
교동면사무소에는 큼지막한 화개산 안내도가 있는데, 안내도를 보니 화개산을 남과 동, 북,
서로 완전히 1바퀴를 돌았다. 소요시간은 2시간 정도로 강화나들길 9코스인 교동도 다을새길
과 코스가 겹친다. 다을새길은 월선포에서 교동향교~화개사~화개산 정상~석천당~대룡리시장~
남산포~교동읍성~동진포를 두루 거쳐 다시 월선포로 돌아오는 16km의 도보길이다.

교동면사무소를 나오면 바로 교동도의 서울인 대룡리 마을이다. 마을 한복판에는 대룡시장이
있는데 시간이 흐르다가 제대로 기절한 듯, 1970~80년대 분위기를 진하게 간직하고 있다. 시
장이라고 하나 가게와 음식점이 여럿 있는 짧은 거리에 불과하다.

시장 인근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사서 목마름과 배고픔을 조금 해소하며 바깥으로 나가는 군내
버스를 기다렸다. 정류장에 부착된 시간표를 보니 30분 뒤에 월선포를 출발한다고 한다. 월선
포에서 대룡리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해는 아직도 여전하나 시간은 이미 17시가 넘었고, 몸도 다소 지친 상태라 더 이상 섬을 둘러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그 지루한 시간, 허나 한번 밖에 없는 그 시간을 억지로 죽여
가며 정류장에 죽치고 앉았다. 나중에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교동도와의 인연은 또 있을 것
이다. 이번에 못가본 곳은 그때 인연을 지으면 될 것이요. 인연이 닿지 못하면 어쩔 수 없다.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며 억지로 인연 짓는 것도 딱히 좋지는 못하다.

시간이 되자 강화군내버스 18번이 동쪽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 친구를 만난 양 얼마나 반
갑던지. 그를 잡아타고 바다를 건너 다시 강화도로 돌아왔다.

이렇게 하여 교동도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하루 속히 남북이 통일되어 교동도
가 NLL의 동쪽 시작점, 민통선 구역이란 딱지를 떼었으면 좋겠다.

* 화개산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대룡리, 읍내리, 상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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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에 묶여있는 강화도 옆구리의 커다란 섬, 교동도 여름 나들이 ~~ (교동읍성, 교동향교, 성전약수, 화개사, 강화나들길 9코스)

 


~~~~~  강화 교동도 나들이
~~~~~

▲  화개산 숲길

▲  교동향교

▲  교동읍성

 


 

강화도(江華島)와 황해도 사이에는 교동도란 커다란 섬이 떠있다. 예전에는 강화도 창후
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했으나 2014년 7월,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1969년에 연륙된
강화도와 더불어 한반도의 어엿한 일원이 되었다. 육지(김포시)와 강화도(강화군), 강화
도와 교동도 등 바다에 놓인 다리를 2개나 건너야 되나 섬을 잇는 다리가 생김으로써 더
이상 날씨와 바다의 눈치 없이 차량으로 마음 편히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오랜 세월 목말라오던 교동도와 흔쾌히 인연을 짓고자 여름의 어
느 평화로운 날 아침, 길을 떠났다.
서울 서부와 일산신도시, 김포(金浦), 강화대교를 지나 오전 11시 반에 강화터미널에 도
착했다. 교동도 버스 시간까지는 아직 40~50분 정도 남아있어 환승시간도 연장할 겸, 강
화읍내로 나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여럿 구입하며 시간을 때웠
다. 무더운 날씨긴 했으나 바다에 감싸인 섬이라 여름 제국의 열기(熱氣)는 그리 거세진
않았다.

드디어 교동도(喬桐島)의 새로운 빛이자 발로 등장한 강화군내버스 18번(강화터미널↔월
선포)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허나 버스는 벌써부터 초만원이다. 다리 개통으로 물이 잔
뜩 오른 교동도 나들이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교동도까지 서서가야 되는가?' 우울한 마음 가득했으나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잡을 권
리는 없었다. 버스 아니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씩 사람이 빠져 다리 이전
인 인화리에서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교동대교 직전에는 인화리 검문소가 매의 눈으로 섬을 찾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다
리가 뚫리긴 했어도 교동도는 여전히 예민한 민통선이자 이 땅 최전방의 하나로 마치 군
사정권 시절로 강제 되감기를 당한 듯, 검문도 조금 까칠하다.
검문소에 이르면 군인아저씨의 통제에 따라 승객들은 버스에서 내려 검문소에 마련된 문
서에 이름과 연락처를 쓰고 신분증 검사를 받는다. 여럿이 온 경우에는 1명만 내려 작성
하면 되나, 상황에 따라 모두 검사를 받을 수 있으니 신분증은 꼭 지참해야 뒷탈이 없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다.
개인 차량으로 왔을 경우, 차에서 내려 신분증 검사와 이름, 연락처 등을 적고 통행증을
받는다. 통행증은 섬에서 나올 때 반환하면 된다.

승객이 많은 탓에 검문 시간이 길어져 버스는 약 7~8분 정도 그 육중한 바퀴를 멈추었다.
마치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국경선에서 출국수속을 밟는 기분이랄까?? 그 까칠한 절차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탑승하자 잠시 늘어졌던 버스는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수
평선 너머의 숨겨진 별천지로 인도할 것 같은 교동대교로 들어선다.

교동대교는 강화도 양사면 인화리와 교동면 봉소리를 잇는 3.44km의 연륙교로 2008년 9월
에 짓기 시작했다. 원래 2012년 개통 예정이었으나 바다 갯벌에 설치된 기초 말뚝이 2011
년 중순 손상되면서 공사 기간이 다소 늘어났다. 2014년 6월 20일 임시 개통을 했고, 10
일 뒤인 7월 1일 정식 개통되어 교동도의 새로운 관문이 되었다.
공사비는 총 904억 원이 소요되었으며, 다리 밑은 서해바다와 검은 갯벌이고, 바다 북쪽
은 바로 황해도(黃海道)로 북한 땅과 가장 가까운 바다 다리가 바로 교동대교가 되겠다.


 

♠  교동도 입문 (교동읍성)

▲  푸르게 익어가는 교동평야 (평야 너머로 보이는 섬이 석모도)

교동대교를 건넌 버스는 봉소리와 고구저수지, 교동도의 중심인 대룡리, 교동향교가 있는 읍
내리(邑內里)를 거처 섬 동쪽에 자리한 월선포에서 바퀴를 접는다. 월선포는 교동도의 옛 관
문으로 2014년 6월까지 강화도 창후리를 잇는 뱃편이 운행했다.

※ 교동도(喬桐島)는 어떤 곳인가?
교동도는 약 47.1㎢(또는 46.9㎢)의 넓은 섬으로 논 25.89㎢, 밭 2.57㎢, 임야 11.45㎢를 지
니고 있다. 다른 섬에 비해 유독 논이 넓은 편이라 마치 육지의 너른 평야를 보는 듯 한데 이
들 논을 교동평야(喬桐平野)라 부른다. 섬에 이렇게 너른 논이 있게 된 것은 고려 말부터 자
급자족을 위해 간척사업과 경지 개척을 꾸준히 벌인 탓이다. 게다가 해발 10m 이하의 땅이 섬
의 약 ⅔를 이루고 있어 경지 개척에도 매우 용이했다.
조선과 왜정(倭政)을 거쳐 현대까지 계속 땅을 다지고 수리시설을 개량하는 등 농업에 전념했
으며, 화개산 북쪽에는 섬 호수치고는 꽤 넓은 고구저수지가 있어 교동평야의 많은 농경지를
적셔주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농업에 집중한 결과, 자급자족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농산물을 내놓고 있으
며, 교동도 쌀은 질이 좋기로 명성이 높다. 어느 통계를 보니 교동도에서 1년간 생산된 쌀로
교동도 사람들이 약 58년, 강화군민이 약 4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그만큼 땅이 비
옥하다. 그래서 옛날부터 섬에 부자가 많았으며, 육지 사람들에 비해 전혀 아쉬울 것이 없어
교동민국이란 말도 생겨났다. 쌀 외에 보리와 콩, 감자, 인삼, 밤, 대추, 버섯 등의 농산/임
산물도 풍부하게 나온다.

섬 동쪽에 솟은 화개산(260m)은 섬의 지붕이며, 화개산 외에는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100m 이
하의 구릉들이 여럿 솟아있다. 해안선은 서해안치고는 단조로우나, 죄다 갯벌이다. 게다가 간
만의 차가 커서 선박 출입도 썩 편하지 못하다. 월선포 등의 항구가 있으나 조그만 수준이며,
겨울에는 해안의 유빙(流氷)과 북한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으로 강화도보다 좀 춥다.

교동도 동쪽에는 그를 거느리는 강화도가 자리해 있고, 남쪽에는 역시 강화도에 속한 석모도(
席毛島)가 있다. 그리고 서쪽은 황해도 연안군(延安郡), 북쪽은 황해도 배천군(白川郡)으로
모두 북한이다. 황해도 땅은 섬에서 불과 2~3km 거리에 불과해 섬 북쪽 해안과 화개산에서 뻔
히 바라보인다. 그 땅도 우리 땅이 분명하건만 그곳에는 북한이란 이상한 나라가 들어서 이렇
게 가까운 거리임에도 70년 이상 건너가질 못하고 있다.

교동도는 북방한계선(NLL)의 동쪽 시작점으로 강화도와 교동도 북쪽 바다는 남한과 북한의 완
충지대인 중립구역이다. 교동도 일대는 민통선으로 지금은 그나마 덜해지긴 했지만 출입이 썩
자유롭지 못했으며, 농업 외에는 개발이 어려워 1970~80년대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하고 있다.
남북분단의 비극이 교동도의 시간까지 막아버린 것이다.

지금은 하나의 섬으로 되어있지만 호랑이가 담배맛을 알기 이전에는 개화산과 율두산, 수정산
을 중심으로 3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교동평야에는 조수가 흘렀다고 하며, 대자연의
위대한 힘으로 이들 섬은 점차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석모도 상주산 사이의 바다가
육지화되어 사람들이 내왕했다가 1578년에 다시 바다가 되어 간조 때 외에는 왕래하지 못했다
는 기록이 있어 후빙기(後氷期) 이후 해면 변동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교동도는 고구려 때 고목근현(高木根縣)이라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景德王) 시절에 교동(喬
桐)으로 이름이 갈렸다. 이때 혈구진(穴口縣, 강화도)에 속했는데, 고려 명종(明宗) 때 감무
(監務)를 두어 섬을 통치하게 하면서 강화도에서 분리되었다.
고려의 끝 무렵인 우왕(禑王, 재위 1374~1388) 시절에는 피폐된 수군을 재건하고 정신없이 날
뛰는 왜구(倭寇)를 때려잡고자 전라도에서 바다에 익숙한 어부와 바닷가 사람들을 징발했다.
그들에게 경작지를 주는 조건으로 강화도와 교동도로 이주시켜 수군 훈련을 시켰는데, 이때
최무선(崔茂宣)이 개발한 화약을 이용해 화포(火砲) 훈련까지 병행했으며, 최무선은 단련된
그들을 데리고 1380년 금강 하류인 진포에서 왜구 500척을 때려잡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진포대첩(鎭浦大捷)이다.

1395년에는 만호(萬戶)와 지현(知縣)을 두었고, 이후 교동현으로 삼아 현감을 파견했다. 1629
년 경기수영(京畿水營)을 교동도로 이전하면서 강화도에 버금가는 부(府)로 승격되고 수군절
도사(水軍節度使) 겸 교동부사를 두었으며, 1633년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교동에 두면서
경기도와 충청도, 황해도의 바다를 관리했다.
1777년 교동부를 현으로 낮추었다가 1779년 삼도통어사를 강화로 옮기면서 교동부 겸 방어사(
防禦使)로 승격되었으며, 1789년 삼도통어영이 다시 교동으로 돌아왔다. 1866년에도 이와 비
슷한 일이 있었고, 1884년 해방영(海防營)에 통어사가 이속되면서 부사 겸 통어사로 격이 조
정되었다.
1895년 행정개편으로 강화에 일시 통합되었으나 1896년 교동군으로 분리되었으며, 1914년 강
화군에 편입되어 개화면과 수정면 2개 면을 두다가 1934년 교동면으로 통합되었다.

해방 당시 인구가 8,600명이었으나 6.25이후 실향민들이 북한과 가까운 이곳으로 대거 넘어오
면서 1965년에 12,443명에 달하기도 했다. 허나 민통선이라 개발도 거의 안되고 점차 낙후되
면서 인구가 감소해 현재는 3,000명대까지 떨어졌다.
6.25이전에는 4개의 정기연락선이 강화도와 황해도를 이어주었으나 6.25이후 강화도 외에 모
두 길이 끊기면서 외로운 섬이 되었다. 게다가 민통선이라 방문도 좀 까다롭고 교동도의 이
름 3자가 천하에 그리 알려지지 못해 실향민 외에 외지인의 방문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교
동대교가 닦이면서 섬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었고, 관광객과 답사/등산/낚시 수요가 늘면
서 차량의 왕래가 폭증했다. 다리로 인해 섬은 서서히 물이 오른 것이다.

교동도에는 등산 명소로 부상하고 있는 화개산을 비롯해 교동향교, 교동읍성, 화개사, 연산군
유배지, 대룡시장 등의 명소가 있으며, 강화도 둘레길인 강화나들길 가운데 2개 코스가 섬에
닦여져 교동도에 새로운 악세사리가 되고 있다. 또한 지엄한 민통선이라 개발도 오랫동안 피
해가면서 1960~80년대 농촌마을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오염원이 없어 그야말로 청정한 곳
이다.
 
섬까지 강화군내버스가 들어오지만 섬의 동부인 화개산 주변 봉소리, 대룡리, 읍내리 지역만
운행할 뿐, 그외 지역은 대룡시장에서 마을버스를 타거나 택시, 도보, 개인 차량을 이용해야
된다.
교동도의 중심은 대룡리로 면사무소가 있으며, 조그만 대룡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섬 서부로
갈때는 이곳에서 들어가면 된다.
육지와는 가깝지만 은근히 진입이 까칠한 곳이라 고려와 조선 때 유배지로 널리 쓰였으며 서
해바다와 예성강(禮成江), 한강이 만나는 지리적 위치로 군사적 요충지이자 교역지로 바쁘게
살아갔다.


▲  교동읍성(喬桐邑城) - 인천 지방기념물 23호

교동도에서 가장 먼저 문을 두드린 곳은 교동도의 옛 중심지인 교동읍성이다. 화개사입구 정
류장에서 남쪽으로 난 시골길을 조금 들어가면 장대한 세월에 형편없이 짓눌린 교동읍성과 남
문이 그 초췌한 모습을 비춘다.

교동읍성은 교동도에 경기수영이 설치된 1629년에 축성되었다. 성의 둘레는 약 430m로 동문과
남문, 북문 등 3개의 성문을 두었으며 모두 옹성(甕城)을 둘렀다.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
문은 유량루(庾亮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불렸는데, 1753년 여장을 고쳐 쌓았고, 1884
년에 남문을 수리했다. 바로 이 읍성(邑城) 안에 경기수영과 삼도통어영, 교동 고을의 관아가
있었다.

왜정 때 관리소홀과 왜정의 악의적인 훼손으로 동문과 북문은 쥐도새도 모르게 녹아 없어졌으
며, 성곽 역시 거의 앉은뱅이가 되었다. 남문은 다행히 모습은 건졌으나 1921년 폭풍우로 붕
괴된 것을 1975년에 해체,복원했으며 현재 남문과 그 좌우 성벽, 화개사입구에서 남문으로 넘
어가는 길목 등 약 300m 정도만 헝클어진 모습으로 남아있다. 제 아무리 장대했을 읍성도 결
국 세월과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모래성에 불과했던 것이다.


▲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린 교동읍성 남문(南門)

바다를 바라보고 선 남문은 문루를 상실한 채, 홍예문과 성벽, 옹성 일부만 남아있다. (최근
에 문루가 복원됨)
문 주변은 하얀 피부의 성돌이 상당수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 상당수는 1975년에 복원하면서
새로 끼어 맞춘 것이다. 그 좌우에는 고색의 때로 얼룩진 성돌이 가득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인다.

▲  남문 서쪽 성곽과 옹성의 흔적

▲  돌담처럼 낮아진 남문 동쪽 성곽


▲  남문 앞에 웅크리고 앉은 비석의 귀부(龜趺)

남문 앞에는 비석의 일부인 조그만 귀부가 누워있다. 거북 머리와 비석을 꽂던 비좌(碑座)만
남아있는데, 정작 알맹이인 빗돌이 없어 무엇을 머금던 비석이었는지는 귀신도 모른다. 아마
도 왜정 때 저 지경이 된 듯 싶은데, 교동읍성 축성/보수 관련 내용을 담은 비석으로 여겨진
다. (정답은 없음)
하지만 귀부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니 아무리 여기서 답을 내놓은들, 한낱 부질없는 메아리
에 불과하다.


▲  귀부의 뒷모습
귀엽게 표현된 꼬랑지가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 같다.

▲  풍년예감~! 남문 앞에 펼쳐진 교동평야

▲  남문 안쪽

교동읍성 남문 동쪽에는 교동부 관아터와 황룡우물,  연산군(燕山君) 유배지 등의 명소가 있
다. 나는 이들의 존재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남문 주변만 둘러보고 미련 없이 교동향교로 넘
어가고 말았다.
허나 늘 변명이긴 하지만 다음이란 것이 있으니 그리 아쉽지는 않다. 어차피 서울과 가까운
곳이라 나중에 다시 인연을 지으면 된다.

* 교동읍성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일원

▲  성문에 새겨진 남루(南樓) 글씨
성문의 성격과 이름을 말해준다.

▲  삼도(三道)~~ 문(門)이라 새겨진 글씨
여기서 삼도는 삼도통어영을 뜻한다.


▲  금지된 남문 안쪽 성벽
한때 잘나갔던 교동읍성은 이제 무너지는 것을 걱정해야 될 처지가 되었다.
읍성 보호를 위해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니 절대로 성벽을 오르지 말자~

▲  교동읍성의 아련한 흔적 (화개사입구에서 남문으로 넘어가는 길목)

▲  화개사입구 정류장에서 바라본 화개산(華蓋山)의 위엄


 

♠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로 꼽히는 교동향교(喬桐鄕校)
-
인천 지방유형문화재 28호

▲  교동향교 입구에 자리한 읍내리 비석군(碑石群)

교동읍성을 둘러보고 화개산 남쪽 자락에 안긴 교동향교를 찾았다. 화개사입구 정류장에서 교
동향교와 화개사를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화개산 쪽으로 1분 정도 들어가면 오래된 비석들이
옹기종기 모인 3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길로 가면 화개산과 화개사, 오른쪽으로 가면 교
동향교이다.

3거리에 무리를 지어 둥지를 튼 이들 비석은 총 40기로 '읍내리 비석군'이란 이름으로 살아가
고 있다. 이들은 읍내리 교동양조장 앞 비석거리에 있었는데, 1970년대에 교동도의 옛 역사를
정립한다는 뜻에서 옛 교동도의 관문인 남산포길로 옮겼다가 1991년 강화군과 교동향교 유림
들이 지금의 위치로 모두 집합시켰다.

비석 대부분이 교동도를 다스린 교동부사와 삼도통어사, 방어사(防禦使)의 선정비(善政碑)와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이다. 즉 그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인 것이다. 그들 중에 정말로 비
석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선정을 베풀고 큰 업적을 남긴 관리도 있겠으나 공덕이 쥐뿔도 없음
에도 강제로 세우게 한 것도 적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돈
을 뜯어가 자신의 배때기를 불린 관리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비석의 주인공이 과분에 넘치는 선정비를 누리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곳의 역사를
조금씩 머금은 교동도의 소중한 일기장으로 그들을 통해 누가 언제 이곳을 다스리고 거쳐갔는
지를 귀뜀해준다.

조선 중기와 후기, 20세기 초반에 걸쳐 지어진 비석들로 그중 앞줄에 자리한 3기는 특이하게
가로로 누워있는데, 이들은 거사대(去思臺)라 불리는 비석이다.


▲  교동향교 홍살문

비석군에서 교동향교로 가다보면 향교의 정문인 홍살문이 마중을 한다. 홍살문은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차가운 모습으로 궁궐과 관아, 향교, 왕릉 입구에 주로 세우는데 문 바로 옆에는 무
조건 말에서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下馬碑)가 우두커니 서 있고, 그 옆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
다. 문 앞에 바리케이드 같은 것이 쳐져 있고, 차량 출입금지를 알리는 현대판 하마비가 곁에
서 있어 차를 타고 온 이들은 주차장에서 무조건 내려서 걸어가야 된다. 그러니 하마비의 '마
(馬)'만 달라졌을 뿐, 비석의 기능은 여전히 유효하다.


▲  지엄함이 여전한 하마비의 위엄

보통 하마비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 있으나 이곳은 '수령변장하마비(守
令邊將下馬碑)'라 쓰여 있다. 즉 수령과 변장, 그리고 그 밑은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홍살문과 하마비는 거의 빈껍데기가 되었으나 이곳 하마비의 위엄은 여전하
여 그 앞에서 차를 두고 걸어가야 된다.


▲  교동향교 외경

화개산 남쪽에 터를 닦은 교동향교는 고려 중기인 1127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원래는 화
개산 북쪽 자락에 있었다고 하며, 이 땅에 지어진 최초의 향교(鄕校)로 널리 알려져 있다.

향교란 나라에서 각 고을에 세운 중등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에는 서당을 졸업한 학생들이 진
학하여 공부를 했다.
1286년에 유학제거(儒學提擧)로 있던 회헌 안향(晦軒 安珦)이 몽골(원나라)에 갔다가 공자(孔
子)의 초상화를 들고 귀국했는데, 배를 타고 개경(開京, 개성)으로 오다가 개경 바로 밑에 자
리한 교동도에 잠시 들려 교동향교에 그 초상화를 봉안했다고 한다. 고려 제일의 국립 교육기
관으로 지금의 서울대와 같은 국자감(國子監)까지 제치고 지역 향교에 불과한 이곳에 가장 먼
저 공자상이 봉안될 정도라면 교동향교가 당시 꽤 잘나갔던 모양이다.
그 이후 각 고을에 공자와 맹자, 최치원(崔致遠) 등 중원대륙과 신라, 고려의 주요 유교 성현
(聖賢)의 위패를 봉안한 문묘(文廟)가 설치되었다. 그러니 이 땅 최초의 향교이자 유교 성현
을 봉안한 최초의 향교란 타이틀까지 지니게 되었다. 향교 문묘는 바로 대성전으로 이때부터
교육과 제사 2가지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1741년에 지부(知府) 조호신(趙虎臣)이 읍성 북쪽인 지금의 자리로 향교를 옮겼으며, 1966년
에 수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대성전과 명륜당, 동/서무, 동/서재, 제기고, 내삼문,
외삼문 등의 건물이 있으며, 향교 바깥에는 성전약수란 유명한 약수가 있다. 향교 건물은 모
두 18세기 이후 것들로 고려의 흔적은 싹 사라졌으며, 안향이 가져왔다는 공자 초상화도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지방의 중등교육을 담당하던 향교는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서서히 교육 기능을 잃
게 되며, 오로지 제사 기능만 남아 거의 빈껍데기가 되어버렸다.


▲  계단을 늘어뜨린 교동향교 외삼문(外三門)

향교는 조선시대에 전 고을에 설치되었다. 그러다보니 옛 고을 중심지에는 꼭 향교가 남아있
기 마련이다. 허나 향교는 고리타분한 유교의 공간이라 건물의 모습도 비슷비슷하고, 볼거리
가 풍부한 절과 달리 두 눈이 호강할만한 볼거리도 별로 없으며, 향교 상당수가 속세(俗世)에
폐쇄적인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어 내부 관람도 그리 쉽지가 않다. 또한 향교의 존재감도 너무
없어 나들이/답사 수요도 별로 없는 실정이다.

허나 교동향교만큼은 사정이 180도 다르다. 처음에는 관람객도 거의 없는 썰렁한 향교를 생각
했으나 정작 와보니 글쎄 관람객들로 북적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관람객이 많은 향교는
난생 처음이라 생소한 풍경에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교동대교 개통으로 교동도 관광객의
발길이 늘어나 향교 또한 그 덕을 제대로 본 탓이지만 화개산, 교동읍성과 더불어 섬의 주요
명소이자 교동도를 소개하는 정보에도 교동향교가 크게 다뤄지고 있어 교동도에 왔다면 꼭 들
려야 되는 필수 명소로 등극을 했다.
또한 향교가 화개산 산길의 기점인 화개사와 매우 가깝고 교동읍성과 강화나들길이 지척에 있
어 위치도 좋다. 게다가 문화유산해설사도 머물고 있어 향교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있으니
교동도에 왔다면 1번 꼭 들려보도록 하자.

향교는 사방을 돌담으로 둘렀다. 남쪽에 바깥과 이어지는 외삼문을 냈는데, 문 앞에는 3줄로
이루어진 돌계단이 펼쳐져 있다. 외삼문을 이루는 3개의 문 가운데 오로지 동쪽 문만 열려있
어 그 문을 통해 향교로 들어서면 된다.


▲  교동향교 명륜당(明倫堂)

외삼문을 들어서면 바로 명륜당이 정면을 막고 선다. 명륜당은 공자왈~맹자왈~! 공부를 하던
교육 공간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교육 기능은 이제 없어졌으니 명륜
당 또한 한가로운 신세가 되어 섬돌에 신발이 가득했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 한다.

명륜당 좌우에는 향교 학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다른 향교와 달리 특이하게도 '
ㄱ'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재는 향교 사무실로 쓰이고 있으며, 툇마루가 서재보다 넓어 잠시
쉬어가기에 좋다. 동재 옆에는 방을 따스하게 보듬던 온돌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을 긴장시키
던 굴뚝이 서 있는데, 그를 손질하면서 너무 시멘트로 떡칠을 한 점이 다소 아쉽다.

▲  서재(西齋)

▲  동재(東齋)

▲  무늬만 남은 동재 굴뚝

▲  굳게 닫힌 내삼문(內三門)


▲  명륜당 뒷쪽에 비뚤게 자리한 노룡암(老龍巖)

명륜당 뒷쪽에는 노룡암이라 불리는 조그만 돌덩어리가 기울어진 모습으로 서있다. 그의 피부
를 가만히 살펴보면 조그만 글씨들이 깨알같이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원래 축대에 쓰
인 돌로 교동고을 동헌터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다. 돌의 상태상 반듯하게 세우기가 애매하
여 저리 비뚤어진 모습으로 세운 것 같다. 어차피 이 나라도 단단히 비뚤어져있으니 돌 하나
비뚤어지게 세운다고 문제될 것은 없다. 글씨만 알아보면 되니까 말이다.

노룡암은 교동고을 관아인 동헌(東軒) 북쪽 뜨락 층계 밑에 있었다. 그러니까 뜨락 석축의 일
원으로 있던 것이다. 층계 위에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중 오래된 소나무가 있고, 그
밑에 축대가 있었다. 1717년에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인 충민공(忠愍公) 이봉상(李鳳祥, 1676
~1728)이 그 축대에 늙은 용의 바위란 뜻에 '노룡암' 3자를 새겼는데, 1773년에 이봉상의 손
자인 이달해(李達海)가 이를 기리고자 석축 밑에 글을 새겼다.
1820년 통어사 이규서(李奎書)가 '호거암장군쇄풍(虎距巖將軍灑風)' 7자를 새겼는데, 이는 '
호거암장군이 풍기를 깨끗히 했다'는 뜻이며, 여기서 호거암장군은 이봉상이다. 1831년 봄에
석대로 쌓아있던 것을 1987년 교동향교로 옮겼다.

노룡암 뒷쪽 높은 곳에는 담장을 두른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으로 가려면 내삼문을 거쳐야 되
는데, 내삼문은 향사일(享祀日) 외에는 좀처럼 열리지 않으므로 제기고로 우회해서 들어가면
된다. 제기고는 말그대로 제사 도구를 간직한 창고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
다.


▲  제사 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  향교의 중심, 대성전(大成殿)

향교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향교의 중심 건물인 대성전이 자리해 있다. 남쪽을 바라보
고 있는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동이족 출신인 문선왕(文宣王) 공자
를 비롯해 증자(曾子), 안자(顔子), 맹자(孟子), 자사(子思) 등 초기 유교를 정립한 5명이 봉
안되어 있다.
청록색 피부를 지닌 대성전 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그 안에는 공자 등 5인의 위패와 위패를
간직한 상(床), 제사 도구 등이 들어있다. 그 앞뜨락 좌우에는 설총(薛聰)과 최치원, 정몽주,
이이(李珥) 등 신라와 고려, 조선의 유학자 20인을 봉안한 동무(東憮)와 서무(西憮)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들은 대성전의 보조 공간이다보니 대성전보다 볼품이 많이 떨어진다.

▲  한쪽 문이 열린 서무

▲  동무 (그 옆에 제기고와 명륜당으로
내려가는 문이 있다)


▲  향교 서쪽에 있는 성전약수(成殿藥水)

교동향교에 왔다면 꼭 맛봐야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대성전 서쪽 담너머에 있는 성전약수이
다. 이 땅에 많은 향교를 가보았지만 무려 약수터까지 갖춘 향교는 이곳이 처음이다.

성전약수는 교동도 제일의 약수로 위장병과 피부병, 아토피에 효험이 있다고 전한다. 게다가
향교 유생들이 이 약수 덕분에 과거에 많이 붙고 문성(文成)을 이룬 이가 많았다고 한다. 허
나 물은 평범한 맛을 지닌 약수로 특별한 것은 없으며, 과연 효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향
교를 수식하는 오랜 명물이자 꿀단지로 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대성전 밑에서 물이 발
원하여 성전약수라 불리니 그야말로 향교 스타일의 약수터 이름이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148 (교동남로 229-49 ☎ 032-932-9457)
* 향교 관리소에 문화유산해설사가 있다. 근무시간은 9~18시(겨울은 17시)로 휴일에는 향교에
  늘 머물러 있으며, 아침 시간과 오후 늦은 시간, 그리고 평일에 왔을 경우 관리소를 찾거나
  위의 연락처로 연락을 하면 향교 해설을 들을 수 있다.


▲  가늘게 쏟아지는 성전약수

▲  향교에 왠 하트 모양이??
성전약수 주변에 돌을 모아서 쌓은 하트 모양의 조형물이 있다. 사랑이란 말을
꺼내면 당장이라도 회초리를 1대 맞을 것 같은 그런 공간에서 이런 뜻밖에
존재를 보게 될 줄이야..? 속세를 향한 교동향교의 수줍은 마음은 아닐까?

▲  서쪽에서 바라본 교동향교
향교 서쪽에는 성전약수와 화장실, 관리소, 화개사로 통하는 숲길이 있다.


 

♠  화개산 남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조그만 산사
교동도 화개사(華蓋寺)

▲  교동향교에서 화개사로 이어지는 숲길 (교동다을새길)

교동향교 서쪽에는 화개사로 통하는 울창한 숲길이 있다. 이 숲길은 도보길 유행에 따라 강화
군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강화나들길의 일원인 강화나들길 9코스(교동다을새길)의 일원이다.

교동도에는 강화나들길 9코스와 10코스 등 2개의 길이 닦여져 있는데, 9코스는 월선포에서 교
동향교~화개사~화개산 정상~석천당~대룡시장~남산포~교동읍성~동진포를 거쳐 다시 월선포로
돌아오는 16km의 코스로 화개산 주변을 1바퀴 돈다. 그리고 강화나들길 10코스(교동도 머르메
가는길)는 대룡리에서 난정저수지~수정산~금정굴~애기봉~죽산포~머르메~양갑리마을회관~미곡
처리장을 경유하여 대룡리로 돌아오는 17.2km의 코스로 교동도 서쪽을 돈다. 이들은 교동도의
명물만 골라서 짜놓은 알짜배기 탐방로라 나중에 꼭 거닐고 싶다.

교동향교에서 화개사로 가는 숲길은 선녀(仙女) 누님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림 같
은 흙길이다. 나무가 촘촘해 제아무리 뜨거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어림도 없다. 그 길을 2분
정도 가면 화개사로 오르는 포장길이 나타나며, 여기서 오르막길을 6분 오르면 교동도에서 가
장 오래된 절인 화개사가 빼꼼 모습을 비춘다.


▲  교동향교~화개사 숲길 (교동다을새길)

▲  조촐한 화개사 경내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전부임)

화개산 남쪽 자락에 자리한 화개사는 숲에 감싸인 조그만 산사(山寺)이다. 서울 조계사(曹溪
寺)의 말사(末寺)로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화개산 산신도 모를 정도이나 고려 후기에 목은 이
색(牧隱 李穡, 1328~1396)이 이곳에서 독서를 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나와있어 고려 때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진사대부의 핵심인 이색이 찾았을 정도라면 지
금과는 달리 제법 이름이 있던 절임이 분명하다.

조선 후기까지 딱히 전해오는 사적(事蹟)은 없으나 1690년대에 이형상(李衡祥)이 지은 '강도
지(江都誌)'에 절 이름이 나와있고,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쓴 가람고(伽藍考)에 화정
사(火鼎寺)라는 이름으로 나와있어, 조선 중/후기에도 그런데로 법등(法燈)을 유지했던 모양
이다.
왜정 때는 전등사(傳燈寺)의 말사가 되었으며, 1915년 절이 붕괴된 것을 1928년에 정운(晶雲)
이 중건했다. 1937년 이후 재정 문제로 문을 닫은 적이 있었고, 1967년 화재로 무너진 것을
이듬해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과 요사(寮舍)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근래에 다시 지어진 탓에
고색의 내음은 진작에 말라버렸다. 지정문화재는 하나도 없으나 조선시대 승탑 1기가 있고,
200년 묵은 장대한 소나무가 서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조금이나마 속삭여준다.

화개산으로 오르는 기점의 하나로 강화나들길 9코스가 이곳을 지나가며, 정상까진 넉넉잡아
30분 정도 걸린다. 산 중턱에 위치하여 서해바다와 석모도가 바라보이며, '절간같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고적한 산사의 멋을 누릴 수 있다.


▲  화개사 승탑(僧塔)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초췌한 모습의 승탑(부도탑) 하나가 마중을 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무척 초라해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로 겉모습과 달리 무척
값비싼 존재이다. 그러니 꼭 살펴보고 가자.
이 승탑은 언제 지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탑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지며
, 동그란 탑신(塔身)과 지붕돌, 두툼히 솟은 머리장식이 전부인 간결한 모습이다. 탑 밑에는
돌과 흙으로 대충 네모나게 바닥돌을 닦았는데, 근래 닦여진 것이라 아마도 제자리는 아닌 듯
싶다.


▲  화개사에서 바라본 서해바다와 석모도

▲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소나무 - 강화군 보호수 4-9-73호

근래 지어진 여염집 모습의 대웅전 앞에는 자태가 아름다운 소나무가 웅장하게 서있다. 나이
가 약 210년 정도로 높이 14m, 둘레 1.6m의 휼륭한 덩치를 지녔는데 나무가 드리운 시원한 그
늘이 조그만 경내를 거의 커버하고 있어 휼륭한 정자나무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의 그늘 앞
에서는 여름 제국도 슬쩍 비켜간다.

*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489-1 (교동남로 229-9, ☎ 032-932-4140)


▲  문무정(文武井)터

화개사를 둘러보고 정상으로 인도하는 산길을 조금 오르면 문무정터가 나온다. 지금이야 외마
디 전설이 되어 바람결에 사라졌지만 이곳에는 원래 동쪽에 문정(文井), 서쪽에 무정(武井)
등 2개의 샘물이 있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문정에 물이 많으면 문관(文官)이 많이 배출되고, 무정에 물
이 많으면 무관(武官)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샘물의 물빛이 바다 건너
송가도(석모도 북부)까지 비추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곳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졌다고 한다
. 그래서 이를 해결하고자 절치부심하던 중, 노승(老僧)이 알려준 방법에 따라 소금으로 우물
을 메우니 비로소 진정이 되었다고 한다.
송가도 사람들은 그 노승이 너무 고마워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는데,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
며, 우물은 나중에 하나로 합쳐졌다가 메워졌다. 이후 교동도에서 문관과 무관 배출이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과연 문무정이 교동도 사람들의 문/무과 급제에 크게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인할 길은 없으나 앞서 교동향교 성전약수와 더불어 이곳 사람들이 입신양명을 기원하고 이
를 상징하던 곳으로 보면 될 듯 싶다.


▲  정상을 향한 열망 ~ 화개산 산길 (문무정 이후)

▲  돌로 수북한 화개산 돌너덜길

섬 사람들의 출세 욕심이 담긴 문무정을 지나 화개산 정상으로 향했다. 자연이 닦아놓은 느긋
한 산길이 계속 이어져 그리 힘들지는 않는데, 삼삼하게 우거진 나무 사이로 서해바다와 석모
도 등의 섬이 바라보인다.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화개산 부분은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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