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08.02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달달한 폭포, 밤골계곡 숨은폭포 (북한산둘레길 효자길, 효자비)
  2. 2015.03.16 서울 도심의 이색 명소 ~ 인왕산과 선바위 (국사당, 해골바위)
  3. 2013.12.13 볼거리와 조망이 일품인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석구상, 한우물, 칼바위...)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달달한 폭포, 밤골계곡 숨은폭포 (북한산둘레길 효자길, 효자비)

 


'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북한산 숨은폭포(밤골계곡) '



▲  숨은폭포 (윗폭포와 아랫폭포)


 

여름 제국의 무더위 갑질이 극성이던 8월의 한복판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뒷통수에 숨
겨진 숨은폭포를 찾았다.
날도 징그럽게 더워서 도심에서 가까운 계곡에서 밤을 담구며 잠시 여름의 핍박을 피하기로
했는데, 처음에는 구파발(舊把撥)에서 가까운 진관사계곡이나 사기막골(효자동계곡)을 염두
에 두었으나 밤골계곡에 숨겨진 숨은폭포가 격하게 땡겨 그곳으로 출동했다.

여름의 기운이 제법 강했던 14시에 연신내(3,6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폭포에서 섭취할 간단
한 먹거리와 막걸리를 구입했다. 그런 다음 서울시내버스 704번(부곡리,송추↔서울역)을 타
고 박석고개와 구파발역, 북한산성입구, 효자비를 지나 효자2통 정류장에서 두 발을 내렸다.
여기서 밤골계곡으로 인도하는 길을 들어서면 농가들이 여럿 나오는데, 그들을 지나면 바로
무성한 숲길이 펼쳐지면서 천하를 녹여먹을 정도로 강렬한 햇살로부터 다소 자유로워진다.
그 숲길을 조금 들어서면 북한산둘레길 11구간(효자길)과 만나게 되며, 거기서 2분 정도 가
면 밤골공원지킴터와 북한산(삼각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게이트(문)가 나온다.


▲  북한산국립공원 밤골공원지킴터와 공원 게이트(문)


 

♠  밤골계곡(숨은벽계곡)

▲  녹음(綠陰)이 짙은 밤골계곡 산길

밤골공원지킴터를 지나면 본격적인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이다. 숲도 녹음(綠陰)도 더욱 짙어져
원시림(原始林)을 방불케 하는데, 날씨는 덥지만 숲이 베푼 바람과 갖은 내음으로 땀은 줄행
랑 치기가 바쁘다.

밤골계곡은 숨은벽능선 북쪽에서 시작해 창릉천(昌陵川)으로 흘러가는 계곡으로 숨은벽계곡이
라 불리기도 한다. 북한산(삼각산)에는 여름 제국의 염통을 쫄깃하게 만드는 일품 계곡이 참
많은데, 대표적인 것으로 북한산성계곡, 우이동계곡(우이9곡), 소귀천계곡, 구천계곡(구천폭
포), 정릉계곡, 구기동계곡, 불광사계곡, 진관사계곡, 삼천사계곡 등이 있다. (도봉산과 사패
산 구역은 제외)
이들은 일찍이 천하에 널리 알려져 서울과 경기도 사람들의 피서지로 바쁘게 살았는데, 밤골
계곡은 그들에 비해 인지도는 낮으나 계곡 풍경은 그들 못지 않다. 게다가 계곡의 수질도 매
우 청정하여 신선들의 비밀 피서지로 손색이 없으며, 계곡 중간에 있는 숨은폭포는 북한산의
일품 폭포로 찬양을 받는다.

밤골계곡 코스(또는 숨은벽 코스)는 숨은폭포를 지나 숨은벽능선을 거쳐 북한산의 지붕인 백
운대(白雲臺, 837m)로 이어지며. 숨은벽능선은 바위 구간이 많아 제법 험하다고 하는데 대신
조망과 풍경이 국보급이다. 숨은벽이란 이름은 북한산 뒷쪽(북쪽)에 숨은 듯 자리해 있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이 참 귀여우면서도 정감이 많이 간다.

북한산(삼각산)을 많이 갔다고 자부하는 본인이나 아직 숨은벽능선은 미답처(未踏處)로 남아
있다. 그 능선으로 들어가는 계곡과 폭포도 이번이 첫 인연이라 기대와 설렘이 아주 큰 편인
데, 밤골안내소에서 숨은폭포까지는 1km 정도 된다. 길은 거의 평탄한 수준으로 처음에는 산
길과 계곡이 조금 거리를 두고 펼쳐지다가 끝내는 서로가 붙어 나란히 이어지면서 폭포에 이
르게 된다.


▲  밤골계곡 물이 잠시 정체를 빚는 계곡 건널목


▲  인적이 거의 없는 밤골계곡 산길
길을 가다가 혹여 신선 형님이나 선녀 누님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폭포에 대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열심히 산길에 임한다.

▲  밤골계곡 산길 ~ 우리들은 점점 푸른 산속에 묻혀 간다.

▲  밤골계곡에서 만난 기묘하게 생긴 바위

숨은폭포로 열심히 가다보면 홀쭉하게 선 기묘한 바위를 만나게 된다. 마치 옛 유적에서 많이
나오는 기와 조각이나 도자기 파편을 크게 확대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하늘에서 천제(
天帝)의 명으로 토목공사를 하다가 인부가 실수로 떨어트린 기와 파편이 그대로 곤두박질 친
것 같다.

바위 피부에는 자연이 입힌 이끼와 고된 세월의 때가 가득해 시커먼 모습이며, 중간에는 누구
에게 얻어 맞은 듯, 움푹 패인 자국들이 있다. 바위 윗쪽에는 속인(俗人)들이 얹혀놓은 돌이
널려있는데, 산길에 접한 바위 피부에도 조금의 틈이 보이는 곳에는 꼭 돌들이 여러 개 얹혀
져 있다.
이곳을 지난 사람들이 유독 눈에 띄는 이 바위에 소망과 정성을 담아 얹힌 돌로 일종의 산악
신앙(山岳信仰)의 현장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지어준 이름도 있을 듯 싶으나 전해오는 것은
딱히 없는 것 같으며, 사람들이 얹힌 돌이 많이 붙어있어 그 흔한 '붙임바위'라 불러도 손색
은 없어 보인다. (기와 파편처럼 생겼으니 기와바위라 불러도 될 듯)


▲  기묘하게 생긴 바위 옆모습

▲  여기저기 절경과 벼랑을 빚은 밤골계곡


 

♠  북한산 뒷통수에 숨겨진 비경, 숨은폭포(숨은벽폭포)

▲  숨은폭포의 아랫폭포

밤골공원지킴터에서 넉넉잡아 20분 정도 들어가면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진하게 귀청을 때리
면서 숨은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숨은벽폭포라 불리기도 하는데 숨은벽능선으로 오르는 길
목에 있어서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대자연 형님이 북한산이란 대작품을 빚고 혼자 두고두고 보려고 북한산 뒷쪽에 몰래 이 폭포
를 만든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첩첩한 산주름 속에 소리도 없이 묻혀있다. 북한산에 안긴
폭포 가운데 단연 으뜸으로 물이 매우 맑고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며, 경승지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였던 선비와 양반들도 이곳의 존재를 몰랐던지 폭포에 대한 기록이나 시문(詩文)은 전하
는 것이 없다. 다만 북쪽에 있는 효자리계곡(사기막골)에 조선 후기에 지어진 육모정과 서산
정사터 등이 남아있어 그곳을 찾은 일부가 이곳에 왔을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폭포는 2~3개(엄밀히 따지면 3개이나 2개로 봐도 무방)로 이루어져 있는데, 윗폭포가 더 일품
이다. 단순히 폭포를 보러 온 이들은 윗사진의 아랫폭포가 전부인줄 알고 이거만 보고 돌아가
는 경우가 많은데, 반드시 1단계 더 올라 윗폭포도 보기 바란다. 그래야 괜히 애꿎은 땅을 치
며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숨은폭포에게도 숨겨진 별칭이 있다고 하는데, 아랫폭포를 총각폭포, 윗폭포를 색시폭포(처녀
폭포)라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것은 아니며, 그에 대한 사연과 전설은 딱히 전
해지는 것이 없다. 지금은 많이들 찾아오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동네 사람이나 아는 사람만
찾아오던 숨겨진 비경이다 보니 그들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아랫폭포의 높이는 대략 10m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30~40도의 경사진 바위를 미끄럼
을 타듯 내려온다. 어제까지 비가 많이 내려서 계곡의 수량이 크게 증가해 물줄기가 성난 기
세로 쏟아져 마치 하얀 비단을 드리운 듯 하다. 우렁찬 폭포수 소리가 천하를 흔드니 여름 제
국도 크게 놀라 식은땀을 흘리며, 폭포에서 부는 선선한 바람은 지금이 여름의 한복판이란 사
실 조차 흐릿하게 만든다.
폭포 앞에는 폭포수가 담긴 못이 있는데, 물이 얼마나 해맑은지 바닥이 훤히 보인다. 허나 바
닥이 보인다고 괜히 방심하지는 말자, 폭포수가 떨어지는 바로 앞은 수심이 깊으니 주의해야
된다.


▲  숨은폭포의 아랫폭포의 위엄 ▼



▲  풍덩 안기고 싶은 아랫폭포 못

폭포에 도착한 우리는 어린 아이 마냥 신이 났다. 때가 묻지 않은 폭포수에 발과 다리를 담구
니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이 무척 시원해진다. 기분 같아서는 온몸으로 계곡물과 짜릿하게 스킨
쉽을 즐기고 싶지만 여벌의 옷을 챙겨오지 않아 다리와 발을 담구는 선에서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마치 폭포를 전세낸 듯 한없이 다리를 담구니 다리가 정말 하얗고 매끄러워진
것 같다.

그렇게 발을 담구며 주변 풍경을 사진에 담고 즐거운 간식 시간을 갖는다. 적당한 돌에 속세
에서 사들고 온 막걸리와 김밥, 과자, 커피 음료 등을 차려놓고 열심히 섭취를 했다. 폭포가
안겨준 시장기에 금세 동이 나고, 막걸리 또한 바닥을 보인다.


▲  폭포 윗쪽에서 바라본 아랫폭포

▲  아랫폭포로 빠르게 흘러가는 계곡물

즐거운 간식시간을 마치고 계속 폭포 앞에 머물렀다. 이곳이 분명 숨은폭포는 맞는데 폭포와
관련된 사진에는 이거 말고 폭포가 더 있었다. 그러니 분명히 위로 올라가면 나머지 폭포가
있을 것이다. 하여 윗쪽으로 올라가니 평탄한 계곡이 나오고, 그 계곡을 조금 들어서니 바로
숨겨진 폭포가 모습을 비춘다. 바로 숨은폭포의 윗폭포이다.


▲  숨은폭포 옆구리를 지나는 산길에서 바라본 아랫폭포

▲  윗폭포와 아랫폭포 사이의 계곡

▲  모습을 드러낸 윗폭포 - 폭포수 소리가 여기까지 쩌렁쩌렁 울린다.

▲  정면에서 본 윗폭포의 위엄

아랫폭포과 윗폭포는 대략 1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같은 숨은폭포 형제지만 서로가 완전
히 다른 모습으로 30~40도의 경사를 이룬 아랫폭포와 달리 윗폭포는 거의 90도 직각을 이루며
패기 넘치게 물을 아래로 내리 쏟는다. 그러다보니 폭포수 소리는 아랫폭포보다 한층 더 우렁
차다.

벽처럼 늘어선 하얀 피부의 바위를 타고 장쾌하게 쏟아지는 윗폭포는 높이가 10m 남짓으로 폭
포 앞에는 물이 담긴 못 대신 바위 하나가 오랜 세월 물을 맞으며 누워있다. 한여름에야 시원
하겠지만 억겁의 세월 동안 종일 물을 맞으니 바위 피부가 완전 매끄럽다 못해 미끄럽다. 이
렇게 폭포 앞에 바위가 있으니 경북 청도(淸道)의 낙대폭포처럼 물맞이 장소로 적당하다.


▲  산길에서 본 윗폭포

윗폭포의 위엄을 제대로 보려면 계곡보다는 등산로(산길)에서 봐야 된다. 산길은 아랫폭포 옆
구리에서 바위를 타고 윗폭포 서쪽을 지나가는데, 윗폭포보다는 높은 곳에 있어 폭포와 그 윗
쪽까지 훤히 바라보인다.
윗폭포 윗쪽에는 못과 함께 폭포가 하나 더 숨어있는데, 그 폭포는 완만한 경사로 높이는 5m
정도 되는 듯 싶다. 허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지 나무에 대부분 가려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
고 귀차니즘 발동으로 그곳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
위에 있는 것도 그런데로 폭포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그가 윗폭포가 되고, 윗폭포를 중간폭포
라 불러야 되겠지만 위에 있는 폭포는 느슨한 경사라 윗/아랫폭포보다 멋이 떨어져 별도로 다
루어도 무리는 없어보인다.


▲  윗폭포 윗쪽 부분의 못과 폭포
선녀 누님의 숨겨진 욕탕은 아닐까? 나뭇꾼과 선녀에 나오는 나뭇꾼처럼
주변 숲에 숨어 그들을 노리고 싶다.


윗폭포를 둘러보고 다시 아랫폭포로 내려와 20분 정도를 머물다가 17시에 자리를 접고 폭포와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등을 돌리기가 얼마나 섭섭했던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다봤는지 모른
다. 삼척(三陟) 미인폭포(☞ 관련글 보러가기) 전설에 나오는 미인처럼 폭포를 끼고 살고 싶
었지만 내가 있어야 될 곳은 이곳이 아닌 아비규환의 속세이다. 그러니 돌아가야 된다.

* 숨은폭포, 밤골계곡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산 19-1


 

♠  호랑이와 효자의 애틋한 설화가 깃든 박태성 정려비(朴泰星 旌閭碑)
- 고양시 향토유적 35호

▲  효자비라 불리는 박태성 정려비

밤골계곡지킴터에서 북한산둘레길 11구간(효자길)을 따라 남쪽으로 10분 정도 넘어가면 효자
비(孝子碑)라 불리는 시커먼 피부의 비석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박태성 정려비로 비석 앞 도
로(북한산로)에 있는 정류장 이름도 무려 '효자비'이다.

이 비석은 조선 후기에 박태성(朴泰星, 1679~1758)이란 효자를 기리고자 만든 것으로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다.
1679년 박세걸(朴世傑)의 아들로 태어난 박태성은 자가 경숙(景淑), 본관은 밀양이다. 품성이
온화하고 효성이 대단한 인물로 3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집안에서는 고양시 효자동 뒷
산에 무덤을 썼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는데 그의 효행이 영조(英祖) 때 조
정에까지 알려지면서 음사(蔭仕)로 내의(內醫)에 천거되었다. 허나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데, 무슨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을 받겠습니까??'
하고 거절했다.

그는 효자란 이름에 걸맞게 종로구 효자동(孝子洞)에 살았는데, 부친이 별세한 갑년(甲年, 60
년)이 다가오자 63세에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 일찍 집을 나서
고양시 효자동에 있는 부친묘로 성묘를 다녔다. 그리고 성묘를 하고 도성으로 돌아와 궁궐로
등청(登廳)을 했다.
효자동에서 서대문을 거쳐 부친묘까지는 거의 30여 리(10리는 5km) 정도 된다. 지금이야 차량
으로 금방 오갈 수 있지만 그때는 오로지 두 발과 말 밖에는 없었다. 그는 큰 벼슬은 지내지
못했고 호랑이를 만나기 전에는 걸어다녔다고 하니 절하는 시간을 포함해 오가는데 왕복 7~8
시간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도성(都城) 성문이 새벽 3시에 열리니 성묘를 하고 11시까지 등
청을 한 듯 싶으며, 그걸 매일처럼 했다는 것은 지나친 효심과 근면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
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성묘를 하고자 새벽 일찍 집을 나서 무악재를 넘어가는데, 어둠 속에서 갑자
기 무서운 호랑이의 대명사인 인왕산(仁王山)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막는 것이다. 그는 순간
쫄았으나 용기를 잃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선친묘에 가는 길이다. 나를 잡아 먹으려면 잡아 먹거라!!'
그 말을 들은 호랑이는 그를 덮치기는 커녕 머리를 반대로 돌리고 뒷걸음질을 하여 그의 곁으
로 다가가 '내 등에 타라!' 신호를 보냈다. 그 신호를 알아들은 박태성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의 등에 올라탔다.

호랑이는 그를 태우고 깊은 산중으로 달려갔다. 자꾸 낯선 산속으로만 들어가니 박태성은 산
속으로 납치하여 잡아먹는 것은 아닌가 싶어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막상 당도한 곳은 다름 아
닌 부친묘 앞. 그제서야 마음을 놓은 그는 옷깃을 여미고 무덤에 절을 올렸다. 그리고 무덤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그때 새 1마리가 주변 나무 가지에 앉더니 슬피 울었다고 한다. (몇 년
동안 같이 울었다고 함)
호랑이는 그의 성묘 장면을 지켜보다가 성묘가 끝나자 그에게 다시 타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
래서 그를 타니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 처음 만났던 무악재에서 그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다음날에도 무악재에 이르니 호랑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고, 역시나 왕복으로 태워주어 편하
게 성묘를 다녀왔다. 호랑이는 무임으로 '무악재~효자동 선친묘'구간을 고속으로 셔틀 운행을
해준 것이다. 전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박태성은 자신을 매일처럼 태워주는 그를 위해 종종 고
기를 준비해 주지 않았을까 싶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것은 인지상정이기 때문
이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고 1758년에 박태성은 79세에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후손들은 그의 선
친묘 앞에 그의 묘를 썼다. 며칠 뒤, 후손들이 가보니 그의 묘 앞에 큰 호랑이 1마리가 엎드
려 죽어있는 것이 아닌가? 알고보니 박태성을 매일 태워주었던 그 호랑이였다. 이에 후손들은
호랑이의 시신을 수습하여 그 곁에 무덤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후 박태성의 이야기를 들은 고종(高宗)은 크게 감동을 먹고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1893년
하사금을 내려 사당과 효자비를 세워 포상을 했으며, 비문(碑文)은 박태성의 증손인 박윤묵(
朴允默)이 썼다. 또한 그의 효심에 감동한 사람들이 그의 무덤 주변으로 몰려와 마을을 이루
고 살면서 효자리(孝子里)가 되었다고 하며, 그의 효행을 길이길이 기억하게 해주었다.
<비석은 고종이 아닌 영조가 내렸다는 설도 있으며, 박태성이 부친묘에 성묘를 다니자 이곳에
들끓던 호랑이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효자리는 고양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효자동으로 변경
됨>


▲  박태성 정려비

효자비의 설화처럼 호랑이가 부친묘까지 매일
왕복 운행을 해주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호랑이가 동물의 제왕이면서 사람들이 제일로
두려워했던 존재다보니 전설/설화의 격을 높이
는 용도로 많이 등장한다. 이 설화 역시 후손
들이 그의 효행을 드높이고자 호랑이를 넣어
적절하게 꾸민 것으로 여겨지는데, 말을 타고
다닌 것을 호랑이로 둔갑시킨 것은 아닌지 모
르겠다.

1893년에 왕명으로 세운 효자비는 흑요석(黑曜
石)으로 된 검은 피부의 비석이다. 그의 피부
에는 박윤묵이 쓴 12자의 글씨가 있는데, '朝
鮮孝子朴公 泰星旌閭之碑'라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비석의 높이는 117cm, 폭은 40cm, 두께
는 12cm이다.

참고로 효자비에서 동쪽 산자락으로 300m 정도 들어가면 박태성의 묘역이 있다. 그의 묘역을
알리는 이정표가 없어서 나는 길을 찾지 못했는데 그 묘역에는 박태성과 그의 부인인 완산이
씨, 김해김씨의 묘가 있으며, 묘비는 1778년에 흑요석으로 세웠다.
묘 옆에는 귀엽게 만든 호랑이상이 있는데, 이는 효자비 부근에서 농원을 하는 사람이 사비를
들여 만든 것이며, 그 옆에는 호랑이의 묘로 전하는 조그만 봉분(封墳)이 있다. 그리고 묘역
에서 50m 떨어진 곳에 박태성의 부친인 박세걸 묘역이 있다.

*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효자동 224


▲  봄이 빚은 아름다운 수채화 (효자비에서 북한산성입구 방향)

▲  효자동 내시묘역길에서 바라본 노고산(老姑山)

노고산에는 예비군훈련장이 많이 안겨져 있는데, 평일에는 예비군의 사격 훈련 총소리가 여기
까지 징하게 울려퍼진다. 그 정겨운 소리를 들으니 바람처럼 흘러간 예비군 시절이 진하게 떠
오른다.
이렇게 하여 북한산 숨은폭포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효자비와 노고산 사진은 봄에 별도로 담은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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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7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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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이색 명소 ~ 인왕산과 선바위 (국사당, 해골바위)

 


'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 인왕산(仁王山) 나들이 '

▲  인왕산 선바위의 위엄


 

겨울의 제국이 슬슬 고개를 들던 11월 끝 무렵에 일행들과 간만에 인왕산 선바위를 찾았다.
오후 2시에 독립문역에서 그들을 만나 회색빛 아파트촌으로 변해버린 무악동(毋岳洞) 동네
를 가로질러 선바위로 올라갔다.
선바위 밑에 자리한 인왕사 입구에 이르니 인왕사가 일주문을 내밀며 우리를 마중한다.

 


♠  한 지붕 다가족의 특이한 절집, 불교와 무속이 어우러진 도심 속의
이채로운 현장 ~ 인왕산 인왕사(仁王寺)

▲  인왕사 일주문(一柱門)

인왕사의 정문인 일주문은 속세살이만큼이나 각박한 경사면에 자리해 있다. 이 문은 다른 일주
문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1m 정도 솟은 기단 위에 기둥을 심고 그 기둥에 용을 그려 기둥을
휘감게 했다. 그리고 지붕 길이와 비슷한 평방(平枋) 위에 절 이름을 담은 현판을 내걸어 이곳
의 정체를 속세에 밝힌다.

일주문을 지나면 수레들이 바퀴를 접고 쉬는 조그만 주차장이 나오고, 여기서 국사당까지 선바
위로 오르는 콘크리트 계단길을 중심으로 조급한 경사면에 빼곡히 건물을 심은 인왕사 경내가
숨가쁘게 펼쳐진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각 건물마다 별도의 절 이름을 칭하고 있어 고개를 심
히 갸우뚱하게 한다. 분명 인왕사는 분명한데, 왜 건물들이 이름을 달리하는 것일까? 그것이 바
로 인왕사만이 지닌 독특한 개성이자 결점이다.

인왕사는 8개 종단에 15개(절집 수는 변경될 수 있음)의 절이 군락을 이루며 가람을 이룬 절이
다. 그러니까 인왕사란 테두리 안에 서로 다른 절이 각자의 영역을 가지며 인왕사란 한 지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종단도 다르고, 주지승도 각 절마다 달라 제각각 따로 놀았다.
이는 마치 13개의 연맹국(聯盟國)으로 이루어진 옛 가야(伽倻)와 비슷하다. 가야 역시 가야란
테두리 안에 무려 13개의 나라가 따로 놀지 않았던가.
이렇게 각 절들이 따로국밥처럼 되버리니 서로 갈등이 심해졌다. 하여 4년에 1번씩 절 전체를
총괄하는 주지승을 뽑아 절 전체의 살림과 행정을 맡기면서 조금씩 통합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속세만큼이나 복잡하게 이루어진 인왕사의 고유 건물은 선암정사(본원정사)와 대웅전, 관음전,
보광전, 극락전(極樂殿) 등이며, 이들을 중심으로 법회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이외에는 이
름만 같이 쓰고 있는 다른 절로 보면 된다.


▲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인왕사 (맞배지붕의 큰 건물이 대웅전)

인왕사는 1912년에 창건된 절로 역사가 이제 103년 밖에 안된다. 그러다보니 아직 내력(來歷)을
알리는 안내문도 갖추지 못했으며, 죄다 근래에 지은 건물이라 고색의 향기는 여물지도 못했다.
경내 위쪽에 국사당과 선바위 등의 문화유산이 있지만 그들은 애시당초 인왕사와는 관련이 없던
존재들이다.

인왕산에는 원래 조선 초기에 창건된 인왕사가 있었다. 지금의 인왕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존
재이나 이름이 같다보니 절과 관련된 자료에는 대부분 쾌쾌묵은 옛날 부분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옛날 인왕사는 어떤 절이었을까?
1392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1394년에 개경(開京)을 버리고 서울
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인왕산 동쪽 자락에 인왕사를 세워 궁궐 내원당(內願堂)에 머물던 승려
조생(祖生)을 보내 주지로 삼았으며, 인왕사란 이름은 부처의 법을 지키는 인왕상(仁王像)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규모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나 절이 있던 골짜기를 인왕동(仁王洞)이라 하
였고, 산 이름도 덩달아 인왕산이 되었을 정도니 절의 규모가 어느 정도는 되었음을 가늠케 한
다. 게다가 태조가 창건한 절이니 왕실의 지원도 넉넉했을 것이며, 세종(世宗)과 성종(成宗) 때
기록에도 가끔 절의 이름이 등장한다.

연산군(燕山君) 시절에는 인왕산에 안겨있던 인왕사와 복세암(福世庵), 금강굴(金剛窟)이 경복
궁(景福宮)보다 높은 곳에 자리해 궁궐을 누르며 바라보고 있다고 하여 인근 민가와 함께 부셨
다는 기록이 있다. 연산군은 전제왕권을 지향하던 군주로 절과 민가가 높은 곳에서 궁궐을 바라
보고 있는 것에 적지 않게 기분이 뒤틀렸을 것이다.
중종(中宗) 이후에 절을 다시 일으켰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소실되었다고 하며, 그 이후
로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12년 박선묵 거사가 선바위 밑에 절을 세우고, 선바위를 뜻하는 선암정사(禪巖精舍)
라 하였다. 기도처로 유명한 선바위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세운 듯 싶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왕사란 이름은 취하지 않았으며, 1914년 탄옹(炭翁)이 선암정사 곁에 대원암
(大願庵)을 지으면서 인왕사의 한 지붕 다가족 시대가 시작되었다.

1922년에는 극락전을 지었고, 1924년 자인(慈仁)이 안일암(安逸庵)을 세웠다. 1925년에는 남산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이 왜정의 태클로 인왕사 위쪽에 새롭게 둥지를 틀었으며, 1927년에는 극
락전을 중수하고 1930년 치성당(致誠堂)을 세웠다.
그러다가 1942년 각각 분리된 암자를 인왕사란 이름으로 통합하면서 잊혀진 이름 인왕사가 다시
속세에 고개를 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옛 인왕사를 계승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인왕사 위쪽에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인 선바위가 있다. 선바위는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던 시절
부터 산악신앙(山岳信仰) 및 아들을 비는 기자신앙(祈子信仰) 등 토속신앙(土俗信仰)의 성지(聖
地)였으며, 그 밑에 자리한 국사당은 무당이 굿판을 벌이는 도심 속의 무속 현장이다.
또한 선바위 주변 인왕산 서남쪽 자락은 대자연이 빚은 기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즐비하고 선바
위와 국사당의 영향으로 산자락과 바위, 약수터 곳곳에 자리를 피고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많
다. 게다가 매일 굿소리도 끊이질 않는다.

서울에 계룡산(鷄龍山) 같은 곳이자 도심 속의 이채로운 현장으로 민가(民家)와도 적당히 거리
를 두고 있어 굿을 벌이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인왕사는 바로 이런 토속신앙과 거리낌없이 한데
어우러진 무불(巫佛)의 공존 현장으로 색다른 신앙체계를 천하에 보여준다.


▲  국사당(國師堂) - 중요민속문화재 28호

선바위로 오르다보면 인왕사 경내 가장 윗쪽에 국사당이란 건물이 모습을 비춘다. 겉으로 보면
그리 오래된 티가 풍기질 않지만 엄연한 조선 후기 건물로 비록 자리를 옮기긴 했어도 조선 초
기부터 존재한 서울을 지키던 신당(神堂)이다.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비롯해 여
러 무속신(巫俗神)을 모시고 있으며, 무학대사를 모신 탓에 국사당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국사당은 정면 3칸(협칸을 포함하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목멱산(木覓山)
이라 불리던 남산(南山) 꼭대기 현 팔각정(八角亭) 자리에 있었다.
1396년 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서울을 지키는 존재로 신성시 했는데,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1404년에는 호국(護國)의 신으로 품격을 높이면서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렸다.

남산 꼭대기에서 서울 장안을 굽어보며 오랜 세월 별탈없이 지내온 국사당은 왜정(倭政) 시절에
강제로 정든 곳을 떠나야 했다. 때는 1925년 왜정이 지금의 남산도서관 자리에 조선신궁(朝鮮神
宮)을 지었는데, 국사당이 그보다 높은 곳에 들어앉은 것에 쓸데없이 뿔이 나 다른 곳으로 옮기
라고 요란하게 징징거렸다. 그래서 태조와 무학대사가 기도를 하던 곳이라 전하는 지금의 자리
로 급하게 이전되었다.
이전할 때 사당의 목재를 옮겨와 원형대로 복원했으며,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
하 기초는 없다. 그리고 석재와 흙으로 터를 평탄하게 다지고 단단한 돌을 쌓아서 1m 정도의 전
단(前壇)과 동단(東壇)을 만들었으며, 건물 양쪽에 마치 날개를 붙인 듯, 협칸 1칸씩을 달아 마
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듯 하다. 이 협칸<양측실(兩側室)>은 무당과 기도를 드리러 온 이들
의 휴식처 및 기도처로 쓰인다.

건물 면적은 11평 정도로 전체적으로 구조가 간결하고 목재도 튼튼해 18세기 건축 기법이 잘드
러나 있으며, 당시 서울 장인들의 솜씨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당집에 비해 건물이 견고한
편이다.

국사당은 거의 매일 굿이 열려 굿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굳이 굿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으로 찾아
와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많으며, 특히 정월에 많이들 찾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하는 굿은 사업
번창을 비는 경사굿과 병의 쾌유를 비는 병굿과 우환굿, 부모나 가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진
오귀굿 등이다. 허나 이곳은 무당이 상주하는 곳은 아니고, 김형재란 사람이 집안 대대로 관리
하는 건물로 그가 당주(堂主)이다. 무당의 요청이 있으면 돈을 받고 자리를 빌려주며, 굿은 3월
과 10월에 많이 열린다. 반면 음력 섣달은 거의 없다고 한다.

건물을 소유한 당주는 당에 봉안된 신들을 위해 2년마다 동짓달에 날을 잡아서 '마지'라는 제사
를 올리는데, 무녀(巫女)를 불러 굿을 한다고 한다. 이처럼 서울에서는 거의 잊혀진 서울 무속
인들의 안식처이자 그들의 성지로 서울 무속신앙이 살아있는 거의 유일한 현장이다. 또한 국사
당과 선바위 주변은 굿판과 기도장소로 명성이 높아 무속인들과 기도를 하려는 속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국사당 내부 중앙에는 무속 신앙의 신을 그린 무신도(巫神圖) 18점이 있는데, 곽곽선생만 빼고
모두 비단 바탕에 그려졌다. 이들은 '국사당의 무신도'란 이름으로 중요민속문화재 17호로 지정
되었는데, 그림에 그려진 존재들은 태조 이성계인 아태조(我太祖)를 비롯해, 강씨부인, 호구아
씨, 용왕대신(龍王大神), 산신(山神)님, 창부씨(昌夫氏), 신장(神將)님, 무학대사, 곽곽선생,
단군(檀君), 삼불제석(三佛帝釋), 나옹대사(懶翁大師), 칠성(七星)님, 군웅대신(軍雄大神), 금
성(錦聖)님, 민중전(閔中殿), 최영(崔瑩)장군 등이며, 양쪽 협칸에는 각각 4점과 6점의 무신도
가 걸려있어 총 28개의 무신도가 있다.
또한 명도(明圖)란 이름에 명두(明斗) 7점이 무신도 사이에 걸려있는데, 명두란 무녀를 계승할
때 넘겨주는 일종의 증표로 큰무당이 자신을 이을 사람을 선정해 그 상징물로 명도를 주고, 이
것을 받은 무녀는 자신의 수호신처럼 귀하게 여긴다. 이 명두는 놋쇠로 만든 것으로 청동기시대
제천의식(祭天儀式)에 사용되었던 도구들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들 무신도는 한 사람이 그린 것으로 보이는 같은 화법의 조선 후기 그림과 이후에 제작된 것
으로 보이는 그림이 섞여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중 12점은 조선 인조(仁祖) 때인 17세기에,
나머지 16점은 고종 때 제작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없다.

▲  무신도의 하나인 아태조(이성계)
(문화재청 사진)

▲  강씨(康氏) 부인
(문화재청 사진)

태조 이성계가 그려진 아태조는 전주 경기전(慶基殿)에 있는 태조의 영정을 본떠서 그린 것이라
고 전하며, 강씨부인은 태조의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로 여겨지나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왕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로 보기도 한다. 허나 태조의 그림이 있으니 그 왕후인 신덕왕후일
가능성에 더 큰 무게가 쏠리고 있으며, 그림 이름도 강씨부인이니 신덕왕후와 성씨도 같다.
그림에 담긴 그들의 얼굴을 보면 태조는 조금 멍해보이고, 강씨는 뭔가 불만이 많은지 인상을
잔뜩 쓴 것 같다.

우리가 국사당에 이를 때는 건물 내부에서 굿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굿과 관련된 사람들
이 협칸에 머물러 있어서 당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새가슴처럼 잠깐씩 열려진 문을 통해 안을
살짝 보는 선에서 그쳤다. 기분 같아서는 안에 들어가 무신도를 마음껏 사진에 담고 싶었지만
괜히 그러다가 크게 안좋은 소리나 들을 듯 싶어서 그만두었다. 무신도와 관련 설명은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있으니 알아서 참조하기 바란다.


▲  선바위로 올라가는 도중에 바라본 국사당과 인왕사

▲  선바위로 인도하는 가파른 경사의 계단
계단 너머로 선바위가 삐죽 얼굴을 내민다. 그런데 계단 양쪽에 자리한 석등이
우리 전통식이 아닌 왜식(倭式) 석등인 것이 심히 눈에 거슬린다.
저 석등 좀 갈아치우면 안될까?


♠  대자연이 빚은 기묘한 바위, 산악신앙 및 기자(祈子)신앙의 오랜 성지,
인왕산 선바위<선암(禪岩)> - 서울 지방민속문화재 4호

인왕산 중턱 해발 140m 고지에 자리한 선바위는 인왕산의 오랜 명물이자 산악/기자신앙의 성지
로 2개의 커다란 돌이 마치 승려가 장삼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선바위(禪岩)란 이름을 지
니게 되었다. 하지만 제 눈이 안경이라고 사람에 따라 보이는 모습은 다른 법, 바위에 길쭉한
구멍이 많이 뚫려 있어 유령이나 귀신처럼 보이기도 하며, 한밤중에 그를 본다면 정말 오싹할
것 같다.
그리고 바위 뒤나 옆에서 보면 판초의나 우비, 모자 달린 잠바 등을 뒤집어 쓰고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도 보이며, 서양 동화나 영화에 많이 나오는 마법사(판초의 비슷한 걸 입고 나옴)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화를 많이 봤다면 그런 만화에 나오는 이상한 형체의 괴물이 떠오를 수도 있
겠다. (난 선바위를 정면에서 볼 때 마다 만화나 오락에서 나왔던 새 대가리 괴물이 떠오름)

대자연이 인왕산에 기가 막히게 빚어놓은 기묘한 작품으로 보면 볼 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이곳
주변에는 해골바위나 모자바위 등 준수한 바위들이 많아 인왕산이 과연 바위의 산 임을 실감케
한다. 이 산에 기암괴석이 많은 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이기 때문이다.

선바위는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 또는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며, 인
왕사가 밑에 둥지를 튼 이후에는 불상으로 대우를 받아 석불님, 관세음보살님으로 불리기도 한
다. 그래서 절 신도나 선바위를 받드는 이들은 그 바위를 양주(兩主)라 부르며, 인왕사의 든든
한 후광으로 그에 대한 지극정성이 대단하다.

이 바위는 그 신비한 자태 때문에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산악신앙 및 아들을 기원
하는 기자(祈子)신앙 및 민간신앙의 성지로 명성을 누렸다. 특히 아들을 원하는 부인들이 바위
에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이 찾아와 기도를 하는데, 작은 돌을 바위에 붙이면 효험이 더
크다고 하여 돌을 문질러서 붙인 자국이 많다. 그래서 붙임바위라 불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인왕사가 바위 밑에 둥지를 틀면서 불교의 신앙 대상이 되었고, 국사당까지 이곳으로
와 무속 신앙까지 더해져 복합적인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하나의 바위에 '민간신앙+
불교+무속'이 되버린 셈이고, 선바위부터 태조 이성계 부부의 상, 태조 상, 무학대사 상, 석불
님, 관세음보살님, 양주, 그리고 붙임바위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이름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속세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케 한다. 바위는 가만 있는데, 사람들이 알아서 난리
를 피우며, 그렇게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그의 공식 명칭은 '선바위')

2개의 큰 바위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으로 높이가 7∼8m, 가로 11m 내외, 앞뒤의 폭이 3
m 내외이다. 바위 밑에는 시멘트로 바른 제단이 있으며, 제단 좌우로 중생들의 소망이 담긴 촛
불을 가득 지닌 기와집 모양의 함이 있다.


▲  선바위의 깜찍한 뒷태
판초의나 모자 달린 우비를 쓰고 웅크리고 앉아 서울 시내를 보는 것 같다.


선바위는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와 얽힌 이야기가 서려있으며, 바위를 둘러싸고 정도전(鄭道傳)
의 유교와 무학대사의 불교 간의 대립이 일어났던 현장으로도 유명하다.

조선을 연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서 새로운 도읍 자리를 알아봐달라고 했다. 그래서 무학대
사는 전국을 뒤적거리다가 지금의 서울(한양) 땅을 찾고는 크게 기뻐했다. 허나 자리를 살펴보
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나라가 500년 밖에 못갈 팔자였다. 그래서 선바위에서 1,000일 기도
를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500년에서 겨우 18년이 추가된 518년 만에 나라가 쫄딱 망한 모양이
다. 이는 서울이 조선의 국도(國都)가 되는 데에 선바위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한토막 이야기이다.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자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느냐 성 밖에 두느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논쟁을 벌였다. 태조는 무학을 통해 그 바위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던 터라 쉽사리 결정을 내리
지 못하고 침소로 들어와 자버렸다.
그런데 그날 밤 초여름인 4월(음력 기준)임에도 눈이 쌓이는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깨어 밖을
보니 글쎄 눈이 성벽 모양으로 쌓여있고, 안쪽 부분의 눈이 녹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선바위는
그 밖에 있었다. 이에 태조는 하늘의 뜻으로 짐작하고 정도전의 의견대로 선바위를 성밖에 두
기로 했다.
그 말을 들은 무학대사는 단단히 뚜껑이 열려 크게 한숨을 쉬면서 '이제 중들은 선비 책보따리
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구나' 한탄했다고 한다. 그때 눈이 쌓인 자리에 도성을 만들었
다 하여 설성(雪城), 설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그게 이름이 바뀌어 서울이 되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의 선바위 사건은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유교(성리학) 패거리와 무학대사로 상
징되는 불교의 충돌로 볼 수 있다. 선바위를 도
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흥하는 것으로 자연히
도성 안에 절이 많아져, 고려처럼 불교 국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러니까 유교 위에 들
어앉게 되는 것이다. 허나 도성 밖으로 밀려나
면서 유교가 그 위를 점하게 되고, 나라의 중심
이념이 된 것이며, 불교는 점차 힘을 잃고 밀려
났다. 그래고 태조와 세종, 세조 때를 제외하고
는 혹독한 억불숭유의 시련을 겪게 된다.
도성 밖으로 밀려나 졸지에 조선 불교 몰락의
우울한 상징까지 떠맡게 된 셈이다.

인왕사는 음력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날, 그리
고 영산제(靈山祭) 때 바위에서 제를 지내고 있
으며, 절을 많이 하면 좋다고 하여 108배를 하
는 사람들이 많다. 바위 서쪽에는 바위를 지키
는 공간으로 조그만 건물을 지었으며, 바위 주
변으로 빼곡히 돌담을 둘러 성역으로 삼았다.

▲  측면에서 본 선바위 -
약간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선바위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옛 국사당 자리에 솟아난 N서울타워(남산타워)가 중앙에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  선바위 뒤쪽에 새롭게 터를 다진 인왕사 삼성각(三聖閣)
3명의 성스러운 존재인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의 보금자리이다.

▲  송림 속에 우뚝 솟은 해골바위

▲  선바위약수터

인왕산에는 남산만큼이나 약수터가 많은데, 선바위 동쪽 계곡에 자리한 약수터도 그중에 하나이
다. 인왕산이 속세에 베푼 고마운 약수이나 물을 보니 수질이 조금은 의심스러워 바가지를 대진
않았다. 이곳은 예전에 굿터 많이 쓰였으나 행정기관에서 굿에 제한을 걸면서 요즘은 약수터 주
변에 조촐하게 파라솔 등으로 머물 자리를 만들어 치성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  선바위 동쪽 벼랑 (선바위약수터는 바로 밑, 윗부분에 솟은 바위가 선바위)


※ 인왕산 선바위(국사당, 인왕사) 찾아가기 (2015년 3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2번 출구를 나가면 선바위, 국사당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있다. 그
  이정표의 지시에 따라 골목길로 들어서 무악동주민센터를 지나 인왕산현대아이파크아파트 옆
  길을 오르면 인왕사 일주문이 나온다. 독립문역에서 일주문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일주문
  에서 선바위까지는 도보 4~5분 거리
* 독립문역 1번 출구를 나와서 바로 나오는 골목길로 들어가면 새마을금고가 나온다. 여기서 오
  른쪽으로 보이는 골든팰리스 앞을 지나면 통일로14길이 나오는데, 그 길로 직진하면 무악동주
  민센터이다. 이후는 앞 내용 참조
* 독립문역을 경유하는 시내버스(471, 701, 702, 703, 704, 705, 706, 720, 752, 7019, 7021,
  7025, 9701, 9703, 9709, 6005(공항버스), 서대문마을11번)번을 타고 독립문역 정류장에서
  하차, 독립문역 1,2번 출구를 찾는다.
* 승용차로 인왕사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일주문 윗쪽에 주차장 있음
* 매년 5~6월에 국사당에서 인왕산 산신대제가 열린다.

* 인왕사(국사당)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2 (통일로18가길 20 ☎ 02-737-4434)
* 선바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3-4 (통일로18가길 26)


♠  인왕산 마무리

▲  선바위에서 인왕산약수터로 올라가는 산길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은 해발 338m의 바위 봉우리이다. 동북쪽으로 자하문고
개를 경계로 북악산(342m)과 이어져있고, 서쪽은 의주로를 사이에 두고 안산(鞍山, 295.9m)과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은 홍제천(弘濟川)을 사이로 북한산(삼각산)과 이어진다. 북악산(北岳山,
백악산)과 낙산(洛山), 남산과 더불어 서울 도심을 안쪽으로 둘러싼 이른바 내사산(內四山)의
일원이기도 하다.
인왕산의 다른 이름으로 필운산(弼雲山)도 있는데, 이는 제왕이 있는 궁궐 오른쪽<제왕이 정전
(正殿)에 앉아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에 있어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는 의미이다.
배화여고 뒷쪽에 있던 이항복(李恒福)의 집 이름인 필운대(弼雲臺)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경복궁 서쪽인 서촌(西村)과 사직터널, 의주로, 부암동, 홍제동 사이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으
나 동서의 폭이 좁아 남북과 달리 경사가 각박하고 지형이 험하다. 시내에서 볼 때는 산세(山勢
)가 작아 보이지만 정작 그의 품에 안기면 보기와 달리 제법 넓으며, 독립문역에서 정상까진 1
시간 정도 걸린다. 정상을 찍고 홍제동(환희사, 개미마을)이나 홍지문, 창의문(자하문), 부암동
으로 내려갈 경우는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으로 남북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선바위, 치마바위, 모자바위, 범바
위, 기차바위 등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걸쭉한 바위들이 산의 장대한 경관을 돕고 있
으며, 정상을 이루는 바위 봉우리는 북악산에 버금갈 정도로 웅장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우백호
에 걸맞은 위엄을 드러내며 서울을 굽어본다. 18세기에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명성을 날린
겸재 정선(鄭敾)은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비롯하여 인왕산의 주요 명소와 장면을
그림에 남겨 인왕산을 격하게 찬양했다.

돌산이다보니 물이 귀할 것처럼 보이지만 선바위와 부암동, 옥인동(玉仁洞), 홍제동에 약수터가
많이 널려 속인(俗人)들의 목을 축여준다. 또한 산의 폭이 좁고 경사가 각박하다보니 속시원한
계곡은 거의 없으며, 그나마 개발의 칼질과 급격한 도시화로 대부분 숨어버렸다. 선바위와 인왕
사를 끼고 흐르는 계곡은 계곡이라 하기에도 뭐한 수준이고, 산 서쪽에는 환희사(歡喜寺) 주변
으로 약간의 계곡이 졸졸졸 소리를 낸다.
산 동쪽 옥인동에는 장안 제일의 경승으로 손꼽히던 수성동(水聲洞)계곡이 있으나 옥인아파트로
크게 훼손된 것을 2011년에 복원 공사에 들어가 2012년 여름에 완성되었으며, 효자동(孝子洞)에
는 청풍계(淸風溪)와 백운동천(白雲洞天) 계곡이 있었으나 주택가에 생매장당해 흔적도 보기 힘
들다. 부암동에는 청계동천(淸溪洞天)이란 계곡이 있었지만 이 역시 생매장당해 반계 윤웅렬 별
서(磻溪 尹雄烈 別墅, ☞ 관련글 보기)에 그 일부만 남았다.

인왕산은 1968년 1.21사건(김신조 공비 패거리 침투 사건)으로 정상 주변과 한양도성 길이 폐쇄
되어 선바위 주변을 비롯한 산 밑도리만 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김영삼 정권 시절에 개방되어
자유롭게 오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군부대와 초소가 한양도성 능선에 남아있어 통제구역이 조
금 남아있으며, 사진을 찍을 때도 약간 주의를 기울어야 된다.

인왕산에는 많은 명소가 있는데, 선바위와 국사당이 대표적이며, 중종과 단경왕후(端敬王后) 신
씨의 슬픈 사연이 서린 치마바위와 장안 제일의 경승지였던 수성동계곡, 근래에 벽화로 유명해
진 달동네 홍제동 개미마을, 자하문고개 서쪽에 자리한 청운공원과 윤동주(尹東柱)시인의 언덕
(☞ 관련글 보기), 석굴사원인 석굴암(石窟庵), 지방문화재 불상을 2기나 간직한 환희사 등이
있다. 또한 국사당과 선바위 일대는 토속신앙과 무속, 불교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서울에서 보
기 힘든 무속의 성지이기도 하다.

600년 동안 서울의 우백호로 있다보니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도 많이 서려있다. 태조 때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고 궁궐 자리를 정할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북악산과 남
산을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로 삼자고 했다. 허나 선바위 사건으로 사이가 단단히 틀어진 정
도전이 '옛부터 제왕은 남면(南面)을 하여 천하를 다스렸지, 동향을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태클을 걸면서 무학의 뜻은 다시금 꺾였다. 무학은 '내 주장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다시
도읍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지었다고 전하는 '산수비기(山水秘記)'에는 '도읍을 정할
때 승려의 말을 들으면 국가가 기운이 연장될 것이나, 만일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을 들으면
5대가 지나지 않아서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가 일어나 백성이 어육이 될 것이다'
란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5대 만에 세조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을 일으켜 조정을
갈아 엎었고, 딱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 내용은 19세기에 편찬된 한경지략(漢京識略
)에 실려있는데, 아마도 불교 쪽에서 무학대사에게 태클을 걸고 불교를 배척한 정도전과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억불숭유에 불만을 품고 그럴싸하게 지어낸 전설을 그대로 인용한 듯 싶다.

그리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의 주역이던 이괄(李适)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의 불만을 품
고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했다. 이 사건을 이괄의 난이라고 하는데, 어리석은 서인(西人)
패거리에 의해 왕위에 오른 얼떨떨한 인조(仁祖)는 서인 일당을 데리고 급히 충청도 공주(公州)
로 줄행랑을 쳤다.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은 인조의 어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토벌하고자 안산에
진을 치자 도성을 점령하여 잔뜩 자만감이 오른 이괄은 도성 사람들에게
'내가 저것들을 단숨에 때려잡을 것이니 나와서 싸움이나 구경하도록' 자신감을 강하게 내비췄
다. 그리고 군사<군사 가운데 임진왜란 때 투항한 항왜(降倭)들이 많았음>를 이끌고 인왕산 서
쪽으로 나가 장만의 군사와 대치했다.
도성 백성들은 그 싸움을 구경하고자 인왕산에 잔뜩 모였는데, 조선 사람들은 흰 옷을 주로 입
다보니 산을 가득 메운 그들로 인해 산이 마치 하얀 백로처럼 보였다고 한다.

관군을 맞은 이괄은 처음에는 여유롭게 전쟁을 진행했으나 난데없이 불어닥친 강풍에 기가 꺾여
장만에게 몰리고 말았다. 그래서 서둘러 도성으로 도망쳤으나, 백성들이 성문을 죄다 걸어 잠구
면서 결국 도성을 버리고 한강을 건너 이천, 여주로 줄행랑을 쳤고, 결국 부하에게 살해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살아남은 이괄의 부하들은 목을 붙잡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금(後
金)으로 도망쳤는데, 그들은 청태종(淸太宗)에게 광해군(光海君)의 복수를 구실로 조선을 치라
고 들쑤셨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이 된다.

끝으로 인왕산은 호랑이들이 많았는데, 무서운 정도는 천하 제일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궁궐에
수시로 나타나 횡포를 부렸고, 심지어 종묘까지 침입했다고 하며, 백성들의 피해가 부지기수였
다. 그래서 '인왕산 모르는 호랑이가 없다. 머리는 인왕산 호랑이 같다'란 말도 나왔으니 인왕
산은 그야말로 천하 호랑이의 성지였다. 허나 지금은 호랑이는 온데간데 없고 그들의 먼 친척인
묘공(猫公)만 종종 보일 뿐이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비롯한 서울 호랑이들은 지방 호랑이와 달리 곶감 따위는 눈도 꿈쩍안했다고
한다. 그들이 무서워한 것은 다름 아닌 수진궁(壽進宮) 귀신이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재미
난 전설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옛날에 북악산(혹은 인왕산) 호랑이가 먹을거리를 찾으러 경복궁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송현
(松峴)고개로 마실을 나왔다. 마침 어느 집에서 애기가 징징거리며 우니 그 어머니가
'문 앞에 호랑이가 왔어. 뚝!'
허나 애기는 계속 징징거렸다. 그러자
'애기야 곶감 줄께. 뚝!'
곶감이란 말에 호랑이는 잠시 염통이 쫄깃해졌으나 역시 울음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흐흐흐 곶감의 시대는 이제 갔구나. 이제 흔쾌히 식사나 해야겠다'
환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어머니가
'수진궁 귀신이닷!!'
외치자 그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눈물을 뚝 그쳤다는 것이다. 그러자 호랑이는 '엥? 수진궁귀신
이라고??' 크게 놀라며 염통과 꼬리를 부여잡고 36계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어야 쫓을 수 있다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수진궁
은 혼인을 못하고 죽은 조선 왕족의 사당임)


▲  인왕산약수터

선바위약수터에서 북쪽으로 5분 정도 오르면 인왕산약수터가 나온다. 아직까지는 수질 적합 판
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뭄 탓인지 물이 실처럼 가늘게 나와 바가지 하나를 채우는데 많은 인내
력을 요한다. 물을 받는 바가지도, 그 물을 마시려는 사람도 그저 환장할 노릇이다.

우리는 여기서 속세에서 사온 과자를 먹으며, 지친 두 다리의 불만을 잠시 달래주었다. 배가 고
파서 그런지 과자에 자꾸 손이 가서 금세 가루만 날리는 빈 봉지가 되었다. 그렇게 일다경(一茶
頃)의 여유를 누리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  소나무 너머로 보이는 모자바위(왼쪽)와 인왕산 성곽능선

▲  소나무 너머로 흐릿하게 다가오는 서울 도심

▲  해골바위 (선바위 동쪽 산자락)

선바위 동쪽 산자락에 해골바위라 불리는 괴상한 모습의 바위가 천하를 굽어보고 있다. 바위 윗
부분에 구멍이 여러 개 파여 있어 마치 손상된 해골바가지를 보는 듯 하며, 화생방훈련 때 쓰는
방독면 마스크와도 비슷해 보인다. 구멍에는 치성의 흔적과 술판의 흔적, 속인(俗人)들이 남긴
하얀 글씨들이 흉물스럽게 화석처럼 박혀 바위에 적지 않은 흠집을 내고 있다.


▲  동쪽에서 본 해골바위

▲  해골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 독립문역 주변과 안산(鞍山)
바로 저 장소에서 1623년 이괄의 반란군과 장만의 관군이 충돌했다.

▲  해골바위에서 바라본 뿌연 천하

▲  모자바위 (오른쪽은 한양도성)

검은 때가 적당히 낀 매끄러운 벼랑 위에 어설프게 쓴 모자처럼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모자바위,
줌을 최대한 땡겨 확대해서 보면 마치 고개를 든 개나 동물로도 보이니 인간의 한낱 언어나 문
자로 표현한다는 것이 무례가 될 정도로 대자연의 숭고한 작품에 그저 탄사만 나올 뿐이다.

 
▲  인왕산 200m 고지에서 바라본 서울 도심 (북←종로구→남)
콧대 높은 서울 도심이 내 발 아래로 펼쳐지고, 나는 하늘과 보다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여유롭게 굽어본다. 하늘 아래의 저 세상이
이대로 나의 세상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  인왕산 200m 고지에서 바라본 천하 (무악동과 종로구, 중구)

▲  범바위와 그 너머로 삐죽 고개를 내민 매바위와 인왕산 정상
산 곳곳에 터를 닦은 각종 바위와 기암괴석들은 대자연이 인왕산에 내린 소중한 선물이다.
만약 저들이 없었다면 인왕산의 모습은 낙산이나 남산처럼 그저 그랬을 것이고
우백호의 완장마저 차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  내려가면서 담은 독립문역 주변 (가까이에 보이는 기와집이 인왕사)

해골바위에서 성곽이 보이는 방향으로 내려가면 한양도성 안으로 인도하는 철계단길이 나온다.
정상을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자존심을 곱게 접고 시내로 내려갔다. 어차피 나와 인왕
산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있으니 언제든 인연이 가능하다. 굳이 오늘 갈 필요는 없지~

이렇게 하여 인왕산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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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와 조망이 일품인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 (석구상, 한우물, 칼바위...)

 

~~~ 볼거리가 풍부한 서울의 숨겨진 명산, 호암산(虎巖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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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호암산 석구상

호암산성터

▲  호암산 석구상

▲  호암산성터


서울 시흥동과 신림동, 경기도 안양시에 걸쳐있는 호암산(虎巖山, 385m)은 삼성산(三聖山,
480m)의 일원으로 삼성산 서북쪽에 자리한다. 호암산이란 이름은 산세가 호랑이를 닮았다
고 하여 유래된 것인데, 다음의 사연이 걸쭉하게 전해온다.

때는 바야흐로 1394년,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가 개경(開京, 개성)을
버리고 서울(한양)로 도읍을 옮겼다. 서울에 와서 주변 지형을 살피니 한강 남쪽에 호랑
이를 닮은 호암산과 활활 타오르는 불 모양의 관악산(冠岳山, 629m)이 사이 좋게 서울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즉 풍수지리(風水地理)적으로 서울을 크게 위협하는 존재로
봤던 것이다.
고구려(高句麗)의 시조인 동명성왕(東明聖王)처럼 화살을 잘쏘며 무인(武人)으로써 크게
위엄을 날렸던 이성계, 허나 대자연이 빚은 호암산과 관악산의 패기에 그만 염통이 쫄깃
해지면서 서울을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게 된다. 그래서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호암
산과 관악산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光化門)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
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는 등,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처럼 호암산에는 산의 매서운 기운을 누르고자 지은 호압사(虎壓寺)를 비롯하여 서울에
서 가장 크고 오래된 우물인 한우물, 비보풍수로 세워진 석구상, 신라 때 축성된 호암산
성터, 흔적만 아련히 남은 제2한우물터와 건물 유적, 호암산의 기운을 잠재우고자 기도를
올린 자리에 세워진 불영암,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처형된 프랑스 신부 3명이 묻힌 삼성
산성지(三聖山聖地) 등, 신라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옛 흔적들이 서려있어 이곳
의 중요성을 새삼 가늠케 한다. 
게다가 조망 또한 천하일품이라 서울 대부분과 안양, 광명, 부천, 인천(仁川)은 물론 북
한산(삼각산)까지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오며, 호랑이를 닮은 뫼답게 멋드러진 바위가 아
낌없이 포진해 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근래에는 호압사 남쪽에 넓게 소나무숲을
조성해 산림욕장을 닦았고, 벽산5단지 기점에는 비록 인공이긴 하지만 호암산폭포가 조성
되어 호암산의 새로운 명물을 꿈꾼다.

호암산은 호압사를 비롯해 벽산5단지, 신우초교, 삼성산성지, 서울대, 석수역, 시흥3동에
서 안길 수 있으며, 깃대봉과 장군봉을 거쳐 삼성산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2011년
11월에는 사당역에서 낙성대(落星垈), 서울대, 호압사, 산림욕장, 호암산폭포, 시흥계곡
을 거쳐 석수역까지 이어지는 관악산둘레길(13km)이 뚫리면서 북한산둘레길에 감히 도전
장을 내밀었다.


  부드러운 곡선의 호암산 남쪽 능선
 

▲  호암산 정상 입구에서 바라본 남쪽 능선

호암산 정상 밑에 자리한 호압사에서 한우물이 있는 호암산 남쪽 봉우리까지는 소나무 산림욕장
을 거쳐가는 것과 호압사 뒤쪽에서 정상 입구를 거쳐 가는 길이 있다. 각 길마다 장단점이 있겠
지만 좀 쉽게 가고자 한다면 산림욕장 길이 좋다.

호압사 남쪽에 넓게 터를 닦은 소나무 산림욕장은 솔내음이 진하게 나래를 펼치는 소나무 숲 사
이로 산책로가 실타래처럼 이어져 있고, 곳곳에 의자와 운동시설이 심어져 속인들의 편의를 제
공한다. 그리고 숲 남쪽에는 약수터가 있어 호암산이 베푸는 약수도 마실 수 있다. 그런데 1가
지 아쉬운 것은 약수터 주변을 흐르는 계곡을 자연 그대로 냅두지 않고 시멘트를 발라 둑과 물
길을 낸 것이다. 얼마나 보기가 흉하던지 애써 가꿔온 송림의 아름다움이 무색할 지경이다.


▲  호암산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시흥2동 벽산아파트를 비롯하여 금천구와 광명시 지역이 눈 아래 펼쳐진다.
 

▲  세상을 향해 머리를 들이민 호암산 남쪽 봉우리

반면 호압사 뒤쪽은 시작부터 꽤나 각박하여 힘겨운 산길을 올라야 되지만 그 거리는 10분 내외
로 짧다. 잠깐의 고통을 딛고 길을 올라서면 금세 호암산 정상 입구에 도달한다. 여기서부터 남
쪽 봉우리까지는 아주 느긋한 능선길(남쪽 능선)의 연속으로 능선을 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
는 조망을 두 눈에 주어 담으며 거닐면 된다. 이 구간이 바로 호암산의 가장 큰 매력으로 산길
곳곳에 멋드러진 바위가 호랑이의 이빨과 발톱처럼 포진해 있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조망의 맛
은 정말 꿀맛이다.

내가 호암산에 퐁당퐁당 빠진 것은 잠깐의 고생 끝에 정상과 능선까지 오를 수 있고, 거기서 이
렇게 꿀 빠는 조망을 누릴 수 있으며, 능선의 곡선이 매우 부드럽고 느긋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래된 명소도 풍부하니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착한 산이다.


▲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1)
흐린 하늘 아래로 서울 금천구와 구로구, 양천구, 영등포구 지역이 보인다.
호암산 능선에는 훤칠한 소나무부터 키가 작은 소나무까지 다양한 모습의
소나무가 뿌리를 내려 호암산을 아름답고 푸르게 수식한다.

▲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2)
시흥2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광명시 지역


▲  남쪽 능선에서 바라본 천하 (3) 서울 금천구와 구로구, 광명시 지역

▲  두툼하게 솟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

▲  솔내음이 춤을 추는 호암산 남쪽 능선길


♠  호암산 석구상(石狗像)과 호암산성터 주변

호압사와 정상에서 부드러운 곡선의 능선을 더듬으며 남쪽 봉우리에 이르면 한우물을 200m 가량
앞둔 지점에서 산길이 2개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바로 사방을 난간으로 두룬 돌로 쌓
은 기단(基壇)이 나오고, 그 안에 호암산의 상징물인 조그만 석구상이 북쪽을 바라보며 정말 귀
엽게도 앉아있다.

지금은 돌로 만든 개의 상, 석구상으로 통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정체에 대해 말들이 조금 있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광화문 해태상과 마주 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火氣)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해태상으로 여기기도 했는데, 한우물을 발굴조사하면서 '석구지(石狗池)'라 새겨진 장대석(長臺
石)이 출토되었고, 시흥읍지 형승조(始興邑誌 形勝條)에는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4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 지금 현남7리(縣南
七里, 시흥동)에 사견우(四犬偶, 개의 형상 4개)가 있다'
란 기록이 있어 해태상이 아닌 석구상
으로 크게 무게가 쏠리고 있다.

석구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m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랑지 부분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옆에서 바라본 석구상

▲  석구상 뒷부분의 위엄 (꼬랑지가 말려져 있다)

석구상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해태의 모습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완벽한 개의 모습이라 하기
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앞 모습을 보면 강아지의 모습 같기도 하지만 양과도 비슷해 보이
며, 어떤 이는 개구리를 닮았다고도 하니, 보면 볼수록 참 답이 안나오는 기이한 상이 아닐 수
없다. 아무래도 제 눈이 안경이라 사람마다 보이는 모습이 제각기 다를 것이다. 그의 뒷부분에
는 길다란 꼬리가 말려져 있는데, 이는 개의 꼬리가 아닌 고양이나 호랑이의 꼬리와 비슷하다.

석구상의 탄생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는 없으나 대략 조선 중기 이후로 여겨진다. 그는 정
확히 북쪽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데 정말로 광화문 해태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를
만든 이유도 딱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호암산의 기를 누르고 서울을 지키려는 비보풍수의 일환
으로 여겨진다.

석구상은 그 모습이 참으로 아담하고 깜찍하여 등산객들의 눈길을 제대로 잡아맨다. 보는 이들
마다 귀엽다는 말이 연거푸 터져 나오고,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적지 않은 웃음을 선사하며,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는 등 그의 인기는 좀처럼 식을 줄을 모른다.


▲▼  숲속 오솔길에 묻힌 호암산성터 - 사적 343호

석구상에서 바로 남쪽 능선길을 조금 가면 산길의 일부가 되버린 호암산성의 아련한 흔적을 만
날 수 있다. 흔적이라고 해봐야 성돌과 흙이 뒤섞인 1~2m 높이의 성터 윤곽이 전부로 이리저리
돌이 박혀있어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산길로 여기며 밟고 지나가기 일쑤다.

호암산성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에 둘러진 퇴뫼식 산성으로 자연 지형을 이용했다. 산성의 길이
는 약 1.250m로 지금은 300m 정도만 간신히 살아있다. 성곽은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쭉한 마름모꼴로 축성 시기와 목적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은 없으나 1990년 봄, 한우물과 호
암산성 일대를 발굴하면서 우물 2곳과 건물터 4곳이 드러났고, 6,500여 점에 이르는 막대한 토
기와 갖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들 유물과 관련 기록을 통해 신라 중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금천구청 자료에 따르면 672년(문무왕 11년) 신라가 당나라의 공격을 막고자 세운 요새
로 여기고 있는데, 당시 신라는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와 힘겹게 줄다리기를 하던 상황이었다.

조선시대에도 한우물과 관련된 여러 기록과 제2한우물터, 건물터 등의 흔적을 통해 산성이 그런
데로 구실을 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딱 1번 크게 쓰인 적이 있는데 바로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로 이때 수원 남쪽 독산성<禿山城, 오산 세마대(洗馬臺)>에서 왜군을 격파한 권율(權
慄) 장군이 서울을 수복하고자 행주산성(幸州山城)에 들어가 진을 치고, 전라병사(全羅兵使) 선
거이(宣居怡)에게 군사 4,000명을 주어 호암산성으로 보내 자신의 후방을 지키게 했다. 호암산
은 서울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모양의 뫼답게 서울로 공격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왜란 이후, 산성은 계속 유지되었으나 점차 그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조선 후기에 그 이름이 지
워지고 만다. 이후 산성의 운명은 지금의 상태가 여실히 말해준다. 버림을 받은 호암산성은 관
리 소홀과 자연의 무정한 장난, 그리고 세월의 덧없는 무게까지 더해지면서 서서히 녹아내려갔
고, 등산객들의 속절없는 발길이 성곽을 짓누르면서 담장만도 못한 상태가 되버린 것이다. 아무
리 인간이 멋드러지고 견고하게 건축물을 세워도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일개 장난감에 불과하다.


▲  오르막을 타는 호암산성터

▲  호암산성 능선에서 바라본 매끄러운 곡선의 삼성산 줄기
삼성산 줄기 너머로 관악산 정상이 흐릿하게 보인다.

▲  호암산성 능선에서 만난 바위
바위 밑은 천길 낭떠러지이므로 주의 요망~

▲  제2한우물터 북쪽에 뿌리를 내린
옛 사람의 무덤


석구상에서 제2한우물터로 가는 길목에 조그만 무덤 1기가 뿌리를 내렸다. 삼성산이 있는 동쪽
을 바라보는 이 무덤은 대략 100여 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다른 무덤과 달리 산의 기맥이 이어
져 있지 않고 그냥 봉분(封墳)만 올린 조촐한 형태로 그 뒤쪽에는 바위가 누워있다.

무덤 앞에는 묘의 주인을 알리는 묘비가 없어 무덤의 자세한 정보는 알 수 없으며, 별다른 장식
이 없는 소박한 모습으로 보아 인근에 살던 백성의 무덤으로 보인다. 비석과 상석(床石) 대신
돌을 두툼하게 깔아 예를 올리는 공간을 마련했고, 봉분은 자연석으로 네모나게 호석(護石)까지
둘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이가 서로 맞물린 듯 불규칙해 보인다.


▲  호암산성 건물유적

호암산성터를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호암산 남쪽 봉우리의 정상부이다. 이곳에는 잡초가
무성한 드넓은 공간이 있는데, 서쪽에는 제2한우물터가, 동쪽에는 건물유적이 있다.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지 수풀 속에 잠긴 건물유적에는 건물을 받쳤을 주춧돌과 건물터의
윤곽이 떠받들 대상을 상실한 채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으며, 나무에게 버림받은 낙엽들이 그 허
전한 빈터를 따스히 덮어주며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이곳은 조선 때 호암산성을 관
리하던 관청이나 장대(將臺), 또는 군사들의 숙소나 창고로 여겨지며, 조선 후기에 무너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  수풀 속에 묻혀 분간이 쉽지 않은 호암산 제2한우물터

건물유적 맞은편에는 제2한우물터가 있다. 호암산성이 버려진 이후, 땅 속에 묻혀 강제로 기나
긴 잠을 자다가 1990년 발굴조사로 다시금 햇살을 보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우물의 길이는 남북이 18.5m, 동서 10m, 깊이 2m에 이르며
산꼭대기에 하나도 아닌 2개의 커다란 우물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지금은 실
감이 나지 않지만 옛날부터 호암산의 중요성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하늘에
제를 지내거나 기우제 등 여러 의식이 거행된 곳처럼 마냥 신비롭게 보여 우물 가까이 다가서기
가 두려울 정도다. 괜히 저곳에 내려가다가 천벌을 받거나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 말
이다.

제2한우물터는 발굴 이후, 한우물처럼 온전히 재현되지 못하고 풀이 무성하도록 방치되고 있으
며, 석축과 우물을 구성하는데 쓰인 돌들이 무수히 널려있다. 복원할 계획이 있다고는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지는 호암산 산신(山神)도 모른다. 어차피 복원된 한우물이 있으니 제2한우물은
그냥 저대로 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


♠  산 정상부에 둥지를 튼 거대한 옛 우물, 호암산 한우물
- 사적 343호

호암산 남쪽 봉우리 서쪽에는 호암산의 또 다른 상징물인 한우물이 누워있다. 여기서 한우물은
큰 우물이란 뜻으로 산 정상부에 이런 거대한 못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천하가
훤히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해 있어 하늘의 우물인 천정(天井) 분위기도 물씬 풍기며, 이곳에 물
을 대줄 마땅한 수원(水源)도 없다고 하는데, 어디서 그 많은 물이 나오는 것인지 늘 물로 풍부
하다. 특히 가뭄 때도 물이 가득해 그 신비로움을 더욱 끌어올린다.

한우물은 천정, 용복, 용초 등으로 불리기도 하며, 7~8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우물 자리 밑에서 신라 못의 흔적이 확인되었는데 그 시절에도 못의 규모는 상당하여 동서 약
17.8m, 남북 약 13.6m, 깊이 약 2.5m에 달했다고 하며, 이후 조선 때 그 위에 새롭게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의 장방형 우물을 덧씌웠다.

1990년 봄, 한우물을 발굴할 때 12개 기종의 1,313점의 유물이 햇빛을 보고자 앞을 다투어 쏟아
져 나왔는데, 그중 '仍伐內力 只來..' 글씨가 새겨진 청동 숟가락이 나와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열쇠가 되었다. 또한 지표에서 30cm까지는 백자 파편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많이 나왔다.


▲  불영암에서 바라본 한우물

임진왜란이 한참이던 1593년 1월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가 권율 장군의 명으로 군사 4,000명
을 이끌고 호암산성에 머물 때, 이 우물을 사용했으며, 세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
勝覽)에는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호암산에 견고한 성이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있어 일찍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란 기록이 있어 평시와 전쟁 때는 식수로 사용하고, 가뭄이 극성일 때
는 기우제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서울의 화재를 막으려는 방화용설(防火庸設)도 설
득력을 얻고 있다.
또한 석구지(石狗池)란 애칭도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한우물에서 '석구지'라 쓰인 장대석이 나왔
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서는 제2한우물터가 발견되었다.

한우물은 식수용으로 태어난 곳이지만 현재는 그의 보호를 위해 식수로는 쓰지 않는다. 우물 남
쪽에는 갈대가 둥지를 트고 있어 운치를 드리우며, 북쪽에는 소나무 1그루가 우물을 거울로 삼
아 자신의 매뭇새를 다듬는다. 그리고 우물의 건강을 위해 그 주위로 돌난간과 철제난간을 2중
으로 둘러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

한우물이 있는 곳은 호암산 남쪽 봉우리로 천하를 굽어보기 좋은 곳이다. 속세가 한눈에 바라보
이는 벼랑에 한우물조망대가 터를 닦아놓아 이곳에 서면 금천구를 비롯한 서울의 서남부와 경기
도 광명시, 부천시 지역이 거침없이 바라보여 두 눈이 너무 호강을 한다. 우물 주변에는 벤치가
여럿 설치되어있어 간식에 막걸리 1잔 걸치며 잠시 쉬어 갈 수 있다.

한우물은 처음에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호였으나 1991년 호암산성과 제2우물터, 건물유적을
한 덩어리로 묶어 사적 343호로 승진되었다. (지정명칭은 '서울 호암산성')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1)
시흥 벽산아파트와 시흥동과 독산동, 광명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2)
시흥동 벽산아파트와 금천구, 구로구, 광명시 지역

▲  한우물 조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3)
가까이에 벽산1/2단지와 호암산 서북쪽 줄기가 보이고, 그 산줄기 너머로
관악구와 영등포구, 동작구 지역은 물론 멀리 북한산까지 시야에 잡힌다.
사진 오른쪽 부분에는 호암산의 감시초소인 호압사가 바라보인다.


♠  한우물과 명품급 조망을 든든한 후광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 호암산 불영암(佛影庵)

▲  불영암 대웅전(大雄殿)

한우물 옆에는 그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암자, 불영암이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가파른 벼랑 위에 터를 다지며 속세를 향해 훤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호압사나 벽산아파트단
지, 호암로에서도 확 눈에 들어온다.

불영암의 내력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정보가 없어 파악하긴 힘들지만 관악산과 호암산의 기운으
로부터 서울을 지키고자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니 서울에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런 것을 보면 호랑이가 담배타령을 하던 조선 초기부터 조촐하게 기도처가 있었던 모양으로
호압사가 보일 정도로 가까우니 아마도 호압사 승려의 수행처 역할을 했던 곳으로 보인다. 보통
100년 이상 묵은 절은 그 내력을 담은 안내문을 절 앞에 당당하게 내걸지만 그런 것도 없는 것
으로 봐서는 1950년대 이후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가 무지 짧은 손바닥만한 암자로 대웅전과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로 쓰이는 작은 건물
이 전부이며, 그나마 대웅전만 불전(佛殿)의 분위기가 진할 뿐이다. 게다가 절이 들어앉은 위치
도 건물을 크게 짓거나 사세를 늘리기도 여의치 않은 협소한 수준이다. 허나 한우물이 곁에 있
어 물수급은 어렵지 않고, 벼랑에 자리한 탓에 조망 하나는 몸살이 날 정도로 좋다. 그러니 한
우물과 휼륭한 조망, 그리고 기존의 기도처를 후광으로 삼아 절을 세웠을 것이다.

이곳 높이는 해발 310m 정도로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하늘과 가까운 절이다. 예
전에는 대웅전과 요사만 있던 볼품 없는 모습이었으나 2009년 이후 대웅전 뒤쪽 바위에 커다란
불두(佛頭)를 얹히고, 절 앞에 돌탑을 심어 돌탑거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제2한우물
터 주변에서 발견된 절구통과 맷돌, 모서리돌 등을 돌탑 앞에 두어 오래된 볼거리를 추가했다.
특히 고려불화의 유일한 전수자인 승려 여지(如智)가 2005년에 그린 '104위 신중탱화(神衆幀畵)
'가 있어 눈길을 끈다.

불영암은 한우물의 이웃으로 그를 지켜주고 있으며, 조망은 천하 일품이라 절의 규모는 눈송이
같지만 뜨락 하나만큼은 천하 제일이다. 게다가 대웅전 옆에는 보기만 해도 정겨운 부뚜막을 설
치해 검은 가마솥으로 밥을 짓고 있는데, 인근에서 가져온 나무 장작으로 불을 땐다고 한다. 부
뚜막 옆에는 장작이 담을 이루고 있어, 심산유곡의 화전민 마을에 들어선 기분이며, 부뚜막이
장작을 먹어 모락모락 구름을 피어내면 나도 모르게 시장기가 돌면서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또
한 국수와 부침개, 식혜, 커피 등을 파는데, 커피는 500원, 국수와 부침개는 3,000원선이다.


▲  돌탑거리를 이루고 있는 불영암 앞길과 순찰중인 견공(犬公)

▲  바위에 머리만 꽂은 불영암 석불(石佛)

대웅전 우측 바위에 2009년에 만든 석불이 서쪽을 굽어본다. 석불이라고 하나 바위에 커다란 불
두만 심은 형태로 바위는 그의 자연산 몸뚱이가 되었다. 바위에 접착된 불두 주변에 하얀 석고
등이 가득해 다소 이질감은 들지만 장대한 세월의 흐름은 저들을 완연한 하나의 존재로 만들 것
이다. 석불 앞에는 키 작은 소나무가 하늘로 곧게 자라나지 못하고 옆으로 쳐져있는데, 그 모습
이 마치 불상에 예를 올리는 듯 하다.


▲  불영암 돌탑거리

▲  제2한우물터 부근에서 수습된 절구통(절구석)의 일부와 모서리돌
불영암 주지승과 처사가 발견한 유물로 신라 후기 것으로 여겨진다.

▲  제2한우물터 건물유적에서 발견된 절구통(절구석)과 맷돌

돌탑 앞에 놓인 절구통과 맷돌은 호암산성 군사들이 쓰던 것들로 시흥동 주민이 발견하여 불영
암에 알렸다. 그래서 2010년 이곳으로 수습했는데, 신라 또는 조선시대 것으로 여겨지며 다른
절구통과 달리 금, 은, 동, 철의 성분이 많아 상당히 무겁다고 한다. 옆에 맷돌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열심히 돌아가던 왕년을 그리워한다.


▲  불영암에서 바라본 호암산 북쪽 줄기, 그 중간에 호암산을 감시하는
호압사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  날카로운 모습의 바위이자 호암산의 또 다른 명물 ~ 칼바위

▲  예리한 칼날 같은 칼바위 (바로 밑에 벽산5단지)
서울을 위협하던 호암산의 날카로운 발톱은 아닐까?

불영암에서 5분 정도 내려가면 칼바위 조망대가 나온다. 바로 그 밑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피가
나올 것 같은 예리한 기세의 칼바위가 자리해 있는데, 가파른 산등성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해
있어 자칫 살짝만 건드려도 밑으로 쿨하게 굴러떨어질 것 같다. 이 바위는 위에서 보는 것보다
는 밑에서 봐야 그 위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당장이라도 속세를 향해 칼질을
벌일 것 같은 기세라 보기만 해도 염통이 긴장을 한다.

이런 바위에는 옛사람들이 붙인 그럴싸한 전설이 있기 마련이라 다음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한토막 전해온다.
때는 임진왜란 시절, 왜군이 시흥(始興) 고을<당시 시흥(금천)의 중심지는 시흥동>까지 쳐들어
오자 장사 1명이 혼자서 왜군을 때려잡으며 분투를 벌였다. 이에 염통이 쫄깃해진 왜장은 장사
가 이기면 무조건 물러가겠다는 조건을 달며 칼바위에서 턱걸이 내기를 제안했다. 그래서 장사
와 왜군 대표 병사와 손에 땀을 쥐는 턱걸이 승부를 벌였는데, 왜군이 100번째 턱걸이를 하려는
순간 힘이 다해 바위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 그때 바위 끝이 쪼개져 나갔다고 전한다.
내기에서 진 왜군은 분을 삼키며 철수를 하자 긴장이 풀린 장사는 소변을 보았는데, 그 줄기가
얼마나 강했는지 바위 한가운데가 움푹 패여 나갔다고 하며, 그 바위가 인근에 있는 팽이바위라
고 한다.

칼바위가 세워진 틈새는 매우 좁아보이지만 속은 매우 넓어서 6.25시절 이곳에 숨어 지낸 사람
도 여럿 있었다고 전한다. 허나 바위는 위치상 출입 통제구역이라 그것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  칼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1) - 벽산5단지와 금천구, 광명시 지역

▲  칼바위에서 바라본 천하 (2) - 시흥동, 광명시 소하동, 구름산과
가학산 산줄기, 그리고 일몰

※ 호암산 찾아가기 (2013년 12월 기준)
* 지하철 2호선 신림역(3번 출구)에서 152번 시내버스를 타고 호압사입구나 벽산5단지 하차
*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3번 출구)에서 5517, 6515번 시내버스를 타고 호압사입구나 벽산5
  단지(6515번만 해당) 하차
* 지하철 1호선 금천구청역에서 금천구 마을버스 01번 청색 차량을 타고 호압사입구 하차
* 올라가는 코스
① 호압사 → 소나무 산림욕장 → 약수터에서 왼쪽 → 호암산 남쪽 능선 → 한우물 (35분)
② 호압사 → 호암산 정상 → 호암산 남쪽 능선 → 한우물 (40~45분)
③ 벽산5단지 → 칼바위 → 한우물 → 석구상 → 호암산 남쪽 능선 → 호암산 정상 (45분)
* 한우물에서 내려가는 경우
① 한우물 → 칼바위 → 벽산5단지 또는 시흥5동
② 한우물 → 제2한우물터 → 남서울약수 → 석수역
③ 한우물 → 호암1터널 → 관악산둘레길 경유(시흥계곡) → 석수역

* 호암산성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 83-1외
* 한우물과 불영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2동 산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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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3년 12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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