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위례성'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12.10 도심 속의 푸른 공간이자 너른 초원, 올림픽공원~몽촌토성 늦가을 나들이 (나홀로나무, 충헌공 김구묘역, 성내천)
  2. 2020.02.16 서울 송파에 깃든 옛 한성백제의 장대한 영혼터, 석촌동고분군~방이동고분군
  3. 2019.02.03 새해 해돋이 명소이자 우리나라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도심 속의 푸른 공간이자 너른 초원, 올림픽공원~몽촌토성 늦가을 나들이 (나홀로나무, 충헌공 김구묘역, 성내천)

 


~~~ 늦가을 올림픽공원(몽촌토성) 나들이 ~~~


▲  올림픽공원 몽촌토성

▲  올림픽공원 보호수 느티나무

▲  몽촌토성 동벽


 

늦가을이 한참 익어가던 11월 첫 무렵, 일행들과 나의 즐겨찾기 명소의 하나인 올림픽공원
을 찾았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린 14시에 몽촌토성역(8호선)에서 그들을 만나 올림픽공원으로 들어섰
는데, 너른 공원에는 주말을 맞아 늦가을 정취를 즐기려는 온갖 사람들로 그야말로 북새통
을 이루었다.


 

♠  올림픽공원(Olympic Park) 입문

▲  지구 평화를 위한 웅대한 날개짓, 허나 진정한 평화는
아직도 멀었다 - 세계평화의문


올림픽공원의 정문이자 올림픽공원9경의 제1경으로 손꼽히는 세계평화의문은 1988년 7월 건축
가 김중업이 만든 것이다.
문 높이 24m, 폭(전/후) 37m, 전면 길이 62m(날개 정면 폭)의 장대한 규모로 1988년 가을, 천
하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서울올림픽의 정신을 기리고 지구의 평화를 염원하는 뜻에서 세웠다.
그래서 문 이름도 거창하게 세계평화의문이다.
문의 생김새를 보면 마치 큰 새가 날개짓을 하는 것 같다. 날개 밑부분에 그려진 수려한 색채
의 그림은 서양화가 백금남이 그린 것으로 고구려(高句麗) 사신도(四神圖)를 바탕으로 우측에
는 현무(玄武)와 주작(朱雀), 좌측에는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를 그렸다. 그리고 문 앞쪽
좌/우에는 조각가 이승택이 만든 열주탈이 각각 30개씩 배열되어 장관을 이룬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의 둥근 곡선을 활용해 비상(飛上)과 상승의 이미지를 강조하였다고 하며,
올림픽공원의 얼굴이자 마스코트로 그를 보는 순간 이미 아득한 과거가 되버린 1988년 그 시
절, 그리고 서울올림픽 개최 하루 전, 잠실에서 봤던 성화봉송까지 그때의 추억이 모락모락
떠오른다.


▲  세계평화의문 성화(聖火)

세계평화의문 안쪽에는 서울올림픽 당시 전국을 누볐던 성화의 보금자리가 있다. 나 같은 서
민들은 미친 난방비에 허리가 아작날 지경인데, 성화는 당시를 상징하는 특별한 존재라 하여
매일 비싼 기름을 먹는다. (성화 밑에 기름관이 있음) 늘 넉넉히 제공되는 기름을 먹고 살이
오른 불꽃을 휘날리며 거의 영생(永生)의 삶을 사는데, 1시간도 꺼진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기름 낭비로 비춰지는 것도 사실이라 공원의 빗장을 걸어잠구는 새벽에 한해 불을 꺼
두어 기름도 아끼고 성화도 좀 쉬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저것도 다 눈먼 세금임..)


▲  국기광장과 올림픽운동조형물 '서울의 만남'

세계평화의문을 들어서면 평화의광장이 마중을 나온다. 광장 좌우에는 공원안내센터와 편의점
, 식당, 커피집 등이 늘어서 있고, 여기서 직진하면 몽촌해자로 막다른 곳에 국기광장과 서울
의만남 조형물이 배수의 진을 치고 있다.
국기광장은 서울올림픽에 참여한 161개 나라의 국기가 펄럭이는 곳으로 그 광장 중심부에 '서
울의 만남' 조형물이 자리해 있다. 이 석물은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SLOOC)와 국제올림픽
위원회(IOC)가 서울올림픽 1주년을 맞이하여 올림픽운동의 확산을 염원하고자 세운 것으로 조
형물 바닥에는 올림픽에 참여한 세계 각국의 돌을 깔았는데, 돌 수집을 위해 돌 축제를 기획
했으며, 이 축제를 통해 우리의 전통문화와 풍습을 널리 소개하기도 했다.
그럼 여기서 잠시 서울 올림픽공원의 역사에 대해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  '서울의 만남' 바닥에 화석처럼 박힌 세계 각지의 돌들

올림픽공원은 1986년 제10회 아시안게임과 1988년 제24회 올림픽을 위해 조성된 공원으로 예
전에는 몽촌마을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이곳이 서울올림픽 체육시설 건립지로 확정되자 막연히 백제시대 토성으로 전
해 오던 몽촌토성을 품은 일종의 사적공원으로 꾸미기로 하고 1983년부터 6년에 걸쳐 토성을
발굴조사를 하였다. 1984년 본격적으로 이 일대를 갈아엎으면서 몽촌 사람들은 강제로 고향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1985년 5월 30일까지 이주를 마쳤으며, 1986년 4월 공원이 완성되었
다.
이후 1988년 몽촌토성 발굴조사가 대충 완료되자 토성을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
으며,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두루 개최하면서 국제적인 명소로 거듭났다.

공원 면적은 무려 1,674,380.17㎡(506,500평)로 서울에서 제법 큰 공원이다. 공원은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쪽은 몽촌토성과 몽촌해자로 이루어진 자연/역사 공간으로 22만
평에 이르며, 동쪽은 온갖 경기장으로 이루어진 체육 공간으로 23만 평에 달한다. 그 외 5만
평은 체육대 등의 교육 공간으로 쓰인다.

공원에는 온갖 운동 경기와 공연이 열리는 경기장과 공연장을 비롯해 한성백제박물관과 소마
미술관, 몽촌역사관 등의 실내 전시 공간과 지구촌공원 등의 소공원, 공원 곳곳에 놓여진 온
갖 조각품들, 몽촌토성과 충헌공 김구 묘역 등의 문화유적, 몽촌해자와 성내천, 88호수 등의
호수와 생태계 공간, 평화의광장과 세계평화의문 등의 광장과 올림픽 상징물, 서울올림픽파크
텔 등의 숙박시설 등이 닦여져 역사와 문화, 미술, 체육, 음악, 자연, 여가생활을 두루 누릴
수 있는 복합적인 공원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입장료를 받았으나 무료로 해방되었으며, 관람시간도 크게 완화되어 밤
시간(22시~5시)에만 빗장을 걸어둔다.

올림픽공원은 크게 줄여서 '올팍'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공원의 품으로 인도하는 관문은 세계
평화의문과 올림픽공원역으로 이어지는 동1/2문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 북1/2문, 남1/2/3/4문
, 서1/2문이 있다.

* 올림픽공원 9경 명소 (한국사진작가 협회에서 추천한 사진 촬영 명소임)
- 세계평화의문, 엄지손가락 조각품, 몽촌해자 음악분수, 대화 조각품, 몽촌토성 산책로, 나
  홀로나무, 88호수와 팔각정, 들꽃마루, 장미광장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88-3 등 (올림픽로 424 ☎ 02-410-1114)
* 올림픽공원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몽촌해자(夢村垓子, 몽촌호)와 수변무대

▲  남쪽 수변무대 부근에서 바라본 몽촌해자와 몽촌토성

국기광장 뒷쪽에는 몽촌해자라 불리는 호수가 그림처럼 누워있다. 여기서 해자란 방어력을 높
이고자 성 바깥에 닦은 물길로 1983년 이후, 몽촌토성 외곽을 싹 뒤집고 발굴조사를 했을 때
성벽 밑에서 도랑 흔적이 나왔다. 하여 발견된 흔적을 바탕으로 넓게 호수를 조성하여 몽촌해
자라 했다. 물은 성내천(城內川)에서 가져왔으며, 호수 둘레 1,800m, 총면적 53,500㎡, 수심
1.4~2m, 담수량은 무려 76,000톤이다.

남한산(南漢山)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흘러가는 성내천은 송파구의 소소한 젖줄로 송파구의
동부를 흘러간다. 올림픽공원역(5/9호선)을 지나서 올림픽체조경기장, 수영경기장 옆까지 다
가선 성내천은 까치다리 너머로 88호수를 빚고, 올림픽공원 북쪽 경계를 더듬으며 공원과 속
세(俗世)의 경계를 가르다가 성내교 직전에서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직진하면 한강이고, 왼
쪽(서남쪽) 지류가 바로 몽촌해자로 이 해자는 소마미술관 북쪽 물레방아에서 뚝 끊긴다.

해자 중앙에는 포항제철에서 1989년에 달아준 음악분수가 있는데, 물줄기가 최고 30m까지 솟
아 올라 하늘을 긴장시키며, 140여 곡의 멜로디에 맞춰 14종 14,000여 가지의 황홀한 물줄기
를 연출한다. 이 음악분수는 올림픽공원9경의 3경으로 꼽히며, 해자 남쪽에는 국기광장을 사
이에 두고 수변무대 2개를 닦아놓아 다양한 음악회가 열린다. 또한 자연형 호안(湖岸)과 6개
의 식물섬을 띄워놓아 생태계를 적극 배려했다.

* 음악분수 활동 시간 - 5~11월, 11~17시 (매시 10분에 가동)
* 몽촌분수 활동 시간 - 5~11월, 11~17시 (연속 가동)


▲  몽촌해자 남쪽 끝에서 바라본 해자와 토성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호수 너머로 수목이 울창한 언덕이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몽촌토성이다. 이 해자는 토성을 지키고자 그 앞에
조성된 것으로 토성이 절찬리에 쓰이던 백제 때와 지금의
모습과는 크게 차이가 있다.

▲  누가 이리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방화를 저지른 것일까?
늦가을에 잠긴 놀이터 나무들 (평화의광장 동쪽)

▲  대자연 앞에 한없이 작아보이는 인간의 작품들
아무리 거장이 만든 작품이라 한들 대자연 형님이 지른 늦가을의
향연 앞에서는 일개 장난감에 불과하다.

▲  두 얼굴의 조각품 (올림픽공원9경의 4경인 '대화')

서울 올림픽공원은 세계5대 조각공원의 하나로 추앙을 받고 있다. 88호수 주변과 평화의광장,
소마미술관, 지구촌공원, 조각공원, 만남의광장에 우리나라 조각품 34점과 세계 조각품 177점
이 공원을 아낌없이 수식하고 있는데, 이는 이곳이 88서울올림픽이 열린 현장이자 지역 명소
로 끝나는 것이 아닌 자연과 역사, 문화, 체육이 어우러진 국제적인 명소로 계속해서 가꾸어
진 결과이기도 하다.
물론 88올림픽을 후광(後光)으로 삼아 이곳이 국제적인 명소가 되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관리
를 꾸준히 했기 때문에 빛은 그때보다 더욱 밝아졌다.

소마미술관에서 공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지구촌공원 건너편에 '대화'란 이름을 지닌 두 얼굴
의 조각품이 마중을 한다. 윗부분이 아작난 얼굴 2개가 서로 귀를 대고 있는 모습인데, 북아
프리카 알제리의 조각가 아마라 모한이 만든 것으로 1987년 7월부터 8월까지 50일 동안 이 땅
에 머물며 화강암을 깎고 다듬었다.
아마라 모한은 똑같이 생긴 쌍둥이가 서로 반목하며 대화를 끊자 발작한 신이 그들의 눈을 없
애 버려 서로를 볼 수 없게 만든 뒤, 평생 옆에 붙어 대화를 하도록 했다는 설화를 소재로 하
여 만들었다. 즉 말하기보다 듣는 것이 대화의 첫걸음이란 심오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자 머리가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모습을 통해 의사소통
을 위한 노력을 표현하고 있다. 단순 작품을 떠나서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참
아름다운 작품인 것이다. 허나 인간은 신과 말 못하는 동물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자리만 축내
는 존재라 그 단순한 진리를 쉽게 깨닫지 못한다. 당장 나도 그렇고, 이 땅의 백성들, 위정자
들이 그렇지 않은가?

▲  온갖 조각품이 누워있는 조각공원과 지구촌공원


 

♠  보호수 느티나무, 88마당, 몽촌토성 동벽 주변

▲  보호수 느티나무와 돌기둥 (오른쪽)

'대화' 작품을 지나면 불끈 솟은 하얀 피부의 돌기둥과 오래된 느티나무가 나란히 마중을 나
온다. 인간의 일개 작품이 감히 대자연이 빚은 작품과 나란히 서 있는 셈인데, 변화를 거부하
며 늘 같은 모습으로 일관하는 밋밋한 돌기둥보다는 계절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자연물이 더
아름답게 보여 자연산 작품에 자꾸 눈길이 간다. 돌기둥은 나무를 수식하는 들러리 정도 밖에
는 안보인다.

올림픽공원에는 늙은 보호수가 3그루 있는데, 이중 2그루가 이곳에 있다. 겉으로 보면 가지가
크게 2개로 된 나무처럼 보이지만 잘살펴보면 서로 별개임을 알 수 있는데, 그들이 너무 달라
붙어 있어서 그런 착시가 생긴 것이다.
이들 가운데 곧게 솟은 좌측 나무는 높이 7.5m, 둘레 300cm이며, 그 옆에 45도로 기운 우측
나무는 높이 12.5m, 둘레 380cm이다. 그들의 나이는 470여 년(1989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 약 430년)으로 이제는 먼지처럼 사라진 몽촌마을 사람들의 정자나무 역할을 했던
존재이나 지금은 공원 탐방객들에게 매일 그늘을 드리운다.


▲  우애가 좋은 형제처럼 너무 붙어있는 보호수 느티나무
(왼쪽이 서울시 보호수 24-5호, 오른쪽이 서울시 보호수 24-6호)

▲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먹고 자란 몽촌유허비
몽촌유허비는 강제로 정든 고향을 떠난 몽촌마을 사람들(몽촌 향우회)이 그리움과
푼돈을 모아 2001년 12월에 장만한 비석이다. 귀부와 검은 피부의 비신(碑身),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이무기가 새겨진 이수(螭首)까지 싹 갖추고 있는
당당한 모습이다.


▲  늦가을에 잠긴 산책로 (88마당, 올림픽체조경기장 방면)

▲  너른 잔디밭인 88마당

88마당은 토성과 자연으로 이루어진 올림픽공원 서부와 경기장, 공연장으로 이루어진 동부의
경계 지점이다. 너른 잔디밭으로 이루어진 공간으로 서쪽에는 몽촌토성이 흐르고 있으며, 동
에는 한얼광장과 여러 경기장이 있다. 광장 구석에는 여러 조각품이 공원의 향수를 돋구며,
이곳은 주로 대형 음악회와 사생대회, 소풍 장소로 널리 쓰인다.

▲  88마당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조각품들
 

▲  한얼광장과 올림픽공원역을
이어주는 한얼교


▲  한얼광장에 놓인 붉은 피부의 조각품
하늘에 뜬 초승달을 잡아와 붉게 박제를 한 것은 아닐까? 한얼광장은 88마당
동쪽으로 체조경기장과 핸드볼경기장 사이의 너른 광장을 일컫는다.

▲  몽촌토성(夢村土城)  동벽 (동문터)

올림픽공원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인 몽촌토성(사적 297호)이
다. 몽촌토성은 이곳의 진정한 알맹이로 그가 없는 올림픽공원은 갈비가 없는 갈비탕과 같다.
그가 있기에 이곳이 역사가 깃든 사적공원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역사와 문화, 자연이 어
우러진 싱그러운 자연지대로 서울 부도심에 남게 된 것이다.

올림픽공원의 거의 40%를 장악하고 있는 몽촌토성은 백제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대표적인 한
성백제(漢城百濟)시대의 유적이다. 여기서 한성백제란 한강 유역인 현재 서울 강동구와 송파
구 일대에 있던 것으로 여겨지는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慰禮城, 또는 한성(漢城)> 시절을 일
컫는 말이다.
둘레 2.3km(2,285m)에 이르는 몽촌토성은 막연히 백제 때 토성으로 전해져 왔을 뿐, 거의 방
치되고 있었다. 토성의 이름인 몽촌은 이곳 지명에서 따온 이름이지 원래부터의 명칭은 아니
었다. 그러다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흔쾌히 선정되면서 1980
년대 초에 체육시설을 갖춘 공원을 이곳에 닦기로 했다. 그래서 공사 전에 토성의 비밀을 밝
히고자 1983년부터 서울대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벌였다.
1989년까지 6차에 걸쳐 조사를 받았으며, 그 결과를 토대로 지금의 모습으로 산뜻하게 복원되
었다. (1982년 7월 국가 사적 297호로 지정됨)

몽촌토성은 자연산 언덕과 지형을 이용해 진흙으로 다진 것으로 경주 반월성(半月城)과 대구
달성(達城)과 비슷한 유형을 하고 있다.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다듬기도 했으며, 동북
쪽 구릉에서는 외성(外城)의 흔적이 나왔다. 성 바깥으로 나가는 길목에서는 동/남/북문터가
확인되었고, 토성의 지형을 통해 남과 북, 동과 서를 잇는 도로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토성(土城)의 단점을 보완하고 수비력을 높이고자 서북쪽과 동벽 바깥에 목책을 세운
흔적과 서벽과 북벽 앞에 둘러진 도랑(해자)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북쪽 성벽은 성내천을
자연산 해자로 삼았다. 

토성 안에서는 출입구가 달린 6각형 모양의 움집터(12곳)와 건물터(4곳), 연못터(2곳), 저장
용 구덩이(30여 개), 무덤 등이 확인되었으며, 모두 한성백제 때 흔적이다. 그리고 한성백제
시절 유물이 앞을 다투어 무수히 쏟아져 나왔는데, 그중 서진(西晋, 3세기 후반)의 동전무늬
도기조각(陶器片) 3점이 성 내부 퇴적층에서 발견되어 토성 축성시기가 늦어도 3세기 후반 이
전임이 분명해졌다.
움집터는 토성을 지키던 군사들의 막사로 여겨지며, 건물터는 자갈을 다져 기단과 적심을 만
든 정면 3칸 이상, 측면 2칸의 큰 구조로 밝혀졌다. 저장용 구덩이는 입구가 좁고 아랫 바닥
이 넓은 복주머니 모양 구덩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구덩이는 음식물을 저장하기에
아주 좋다. 여기서 220개 이상의 큰 독이 출토되었으며, 부뚜막 시설과 조리용 토기, 배식용
토기 등이 나와 당시 백제인들의 식문화를 보여준다.
그리고 금동제 허리띠 장식과 금귀걸이, 세발토기, 굽다리 뚜껑항아리, 손잡이잔, 돌절구, 쇠
집게, 뼈갑옷, 화살촉 등 왕족과 귀족의 장신구부터 제사 유물, 군사 유물까지 다양한 유물이
나와 안그래도 많이 빈약한 한성백제 시절의 역사 이야기를 조금씩 채워주었다.

그렇다면 몽촌토성은 백제에게 어떤 곳이었을까? 아직 의견이 분분하나 풍납토성을 위례성의
중심으로 본다면 몽촌은 위례성을 보조하던 곳이거나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도읍으로 삼았다
는 한산(漢山)으로 여겨진다.<또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보기도 함> 풍납과 몽촌은 거
의 이웃처럼 자리해 있으니 이름은 조금 다르나 거의 같은 곳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바로
이들을 합쳐서 한성(漢城)이라 부르는 것이다.
발견된 유적과 유물을 통해 몽촌에는 제왕의 별궁과 관청, 군사시설, 왕족, 귀족들의 집이 있
던 것으로 여겨지며, 위례성의 중심으로 여겨지는 풍납은 왕궁과 관청, 귀족들의 집, 백성들
의 집, 시장이 있었다.

백제는 서울 송파/강동 지역(또는 하남시)에 위례성(한성)을 세워 5세기 말까지 아시아 해양
대국으로 크게 번영을 누렸다. 왜정(倭政) 때 확립된 식민사관 쓰레기들과 있는 역사도 왜곡
하고 축소시키는 영 좋지 못한 쓰레기들의 영향으로 백제하면 그저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제주도, 황해도를 차지한 조그만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허나 백제는 우리의 좁은 생각과 달리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나라였음이 많은 역사자료와 유
물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백제는 일찍이 바다를 활용한 나라이다. 수군을 강화시키고 대외무역을 늘려 중원대륙의 요서
, 산동반도, 강남 지역 등 대륙의 무수한 해안 지역을 점령했고, <저장성을 비롯한 수천 리의
영토를 점유했다는 기록, 탐라 남쪽의 큰 섬(대만?)을 통치했다는 기록, 최치원(崔致遠)이 고
구려와 백제는 강성할 때 군사가 수십만으로 대륙 상당수를 먹었다는 발언 등등> 4세기 이후
가야(伽倻)가 점유하고 있던 왜열도로 진출해 그곳을 백제의 별채로 삼았다. 그리고 중원대륙
을 넘어 동남아까지 힘을 뻗치며 담로(擔魯)를 설치했다는 학설도 크게 지지를 얻고 있다.
특히 동성왕(東城王) 시절 북위(北魏)의 기병 수십 만을 때려잡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 현장
은 바로 산동반도(山東半島)였다. 산동을 둘러싼 백제와 북위와의 싸움에서 백제는 크게 승리
. 남조(南朝)의 여러 나라에 국서를 보내 자랑을 하며 그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렇게 잘나갔던 한성백제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한강을 건너 위례성을 점령하고
백제 군주인 개로왕(蓋鹵王)을 처단하면서 아주 비참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웅진(熊津
, 충남 공주)으로 천도함> 그때 고구려는 위례성 일대를 싹 불지르고 파괴하면서 모두 잿더미
가 되었고, 위례성 3글자는 천하에서 지워지게 되었다. 바로 그 고구려의 만행 때문에 위례성
위치가 오랫동안 아리송했던 것이다. 한산으로 여겨지는 몽촌토성도 그때 철저히 파괴되어 사
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 된 것으로 보인다.


▲  몽촌토성 동문터 (북쪽에서 본 모습)

토성 내부 면적은 216,000㎡로 인근 해자와 성내천까지 합치면 542,542㎡까지 덩치가 올라간
다. 토성에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그어져 걷는 재미가 쏠쏠하며, 예전 송파/잠실이 개발되기
전에는 서벽에서 행주산성(幸州山城)까지 보였다고 전한다. 옛날처럼 왕성(王城) 방어용의 역
할은 상실되었지만 관광/나들이의 성지(聖地)로 바쁘게 살고 있으며, 올림픽공원에 왔다면 꼭
1바퀴는 돌아야 1년이 잘풀리는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 겸 꿀단지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곳을 올림픽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면서 몽촌토성은 그 주인공이 아닌 조
연이 되버린 것이다. (지금 보면 거의 주연처럼 보이긴 함) 물론 이곳이 공원이 되면서 몽촌
토성이 개발의 칼질에서 목숨을 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올림픽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되
었기 때문에 토성의 동쪽 부분은 죄다 체육시설에 자리를 넘겨주었다. 게다가 서둘러 운동경
기장을 만들고 공원을 닦으면서 발굴 조사도 속시원히 하지 못하고 6년 만에 뚝 멈춰섰다.
그러다가 2013년 11월 몽촌토성 발굴 30주년이 되자,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그 특별전을 기획했
고, 아직도 적지 않게 베일에 가려진 몽촌토성의 속살을 들추고자 2014년부터 다시 발굴 조사
를 벌이고 있다. 현재는 예전 내성농장 일대를 조사하고 있는데, 조사가 마무리 되면 보다 많
은 흔적과 유물이 쏟아져 나올 것이며, 주택가로 뒤덮힌 풍납토성(風納土城) 일대도 싹 뒤집
어 땅속에 묻혀 공백으로 남아있는 한성백제의 나머지 이야기도 싹 맞추었으면 좋겠다.


▲  몽촌토성 동문터 (남쪽에서 본 모습)

토성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된다. 높이는 왠만한 산성(山城)이나 석성(石城) 높이에 버
금가며 경사 또한 각박하기 때문이다. 높이가 낮은 곳은 5~6m, 높은 곳은 무려 10~15m에 달하
며, 몽촌해자와 접한 북벽과 서벽은 높이도 상당하고 경사도 아찔하다.
토성 보호를 위해 성벽 부분은 금줄을 쳐놓아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나 겨울 제국이 눈폭탄을
크게 투하해 은빛세계를 빚으면 포대자루 하나 들고 와서 썰매를 타고 싶은 곳이다. (물론 그
러면 절대로 안됨)


▲  몽촌토성 동벽에서 바라본 88마당

▲  몽촌토성 움집터 유적 (백제집자리전시관)

몽촌토성 동벽에는 백제시대 움집터를 담은 백제집자리전시관이 있다. 1983년부터 1989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이곳을 포함해 12곳의 움집터가 나왔는데, 여기서 발견된 움집터는 총
4곳으로 보존을 위해 특별히 푸른 피부의 보호각을 갑옷처럼 둘러 그들의 보금자리로 삼았다.
이곳이 전시관이다보니 인근 소마미술관이나 한성백제박물관처럼 매주 월요일마다 빗장을 걸
고 쉰다. (마침 그날이 월요일이라 내부는 담지 못했음)

전시관에 담긴 움집터는 6각형 모양으로 동남쪽에 출입구 시설이 있으며, 긴 벽의 높이가 6m,
짧은 벽은 4m 정도 된다. 그리고 주거지 한쪽 벽을 따라 밖으로 나온 온돌 모양의 화덕이 설
치되어 있었고, 벽체 안쪽 바닥에는 20~30cm 정도의 기둥 구멍이 남아있는데, 긴 벽에는 10개
가, 짧은 벽에는 4~5개가 남아 있다.


▲  자연과 역사 속을 거닐다 ~ 몽촌토성 동벽 산책로

▲  나무의 착각 ~ 몽촌토성 동벽
대자연이 여기저기 내던진 씨앗들이 토성에 뿌리를 내려 큰 나무가 되었다.
토성이 얼마나 큰지 나무도 그곳을 언덕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  몽촌토성 동벽~북벽, 옛 내성농장 주변

▲  늦가을이 마지막 춤을 추는 목책 앞 산책로 (몽촌역사관 방향)

▲  자연산 숲터널을 이룬 목책 앞 산책로 (88마당 방향)
무성한 숲터널 사이로 겨울이 슬그머니 들어와 제국의 기반을 닦는다. 조만간
이 아름다운 숲길도 겨울에게 몽땅 털려 뼈와 낙엽만 남게 될 것이다.

▲  몽촌토성 목책(木柵)

몽촌토성 동벽 앞에는 나무를 엮어서 만든 목책이 있다. 목책이란 방어시설의 하나로 몽촌토
성 일대를 조사했을 때, 목책의 흔적이 드러났는데, 생토 암반층에 1.8m 간격으로 직경 30~40
cm, 길이 30~90cm의 구멍을 파고 큰 나무로 기둥을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보조 기둥
을 세웠다.
목책의 높이는 정확하진 않으나 2m 이상으로 여겨지며, 이곳 목책은 발굴조사된 목책 기둥 자
리를 따라 그 위에 조촐하게 상상을 얹혀 재현한 것이다.

아무래도 토성이다보니 석성보다는 방어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목책과 해자를 두
룬 것인데, 목책은 동벽과 남벽 일대에 주로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  가지런히 재현된 몽촌토성 목책

▲  늦가을이 우수수 떨어지면서 빈 자리도 조금씩 보이고 있다.

▲  올림픽공원 산책로(몽촌토성 산책로 제외) 가운데 가장 으뜸을 꼽으라면
목책에서 옛 내성농장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아닐까 싶다. 늦가을의 손길이
가장 아름답게 거쳐간 곳으로 사람들은 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올해도 속절없이 흘러가는 가을의 발목을 붙잡으려 든다.

▲  '무제'라는 이름의 이글루 모양의 조각품 (1988년 박충흠 작)

▲  몽촌토성 북벽 (북문터)

'무제'라는 이름의 작품 앞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토성 북벽과 내
성농장이, 오른쪽은 몽촌역사관과 성내천, 성내천을 앞에 둔 토성의 동쪽 부분이다. 이제 공
원의 40% 정도 돌아본 셈이다.


▲  잠시 과거가 되버린 내성농장 (북문터 안쪽)

토성과 언덕으로 울퉁불퉁한 몽촌토성 속살에는 넓은 편은 아니나 조촐하게 평원이 펼쳐져 있
다. 그 평원은 몽촌토성 북벽 안쪽에 자리해 있는데, 평원 가운데 6,600㎡에 농경지를 닦고
토성 안에 있다는 뜻에서 내성농장이라 했다.

내성농장은 밭벼와 목화, 고구마는 물론 유채꽃과 코스모스, 해바라기 등의 들꽃이 넉넉히 둥
지를 틀던 싱그러운 곳이었으나 몽촌토성과 한성백제의 숨겨진 비밀을 캐고자 3년 넘게 발굴
조사에 들어가 농장은 사라지고 발굴 지역 주변에 펜스가 빙 둘러져 있다. 여기서 많은 백제
유물과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발굴이 마무리가 되면 농장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관련 유적지
보호구역으로 살아갈 것이다.


▲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처럼 솟은 나홀로나무 (사진 가운데)

내성농장 북쪽을 살펴보면 평원 한복판에 다른 나무와 멀리 거리를 두며 고독을 즐기고 있는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는 그를 '나홀로나무'라고 부른다. 어떤 이들은 '외톨이나무',
'왕따나무','연예인나무'라고도 하는데, 올림픽공원9경의 제6경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 나무가 홀로 된 이유는 정말 별거 없다. 1985년 몽촌토성 내부를 싹 갈아엎는 과정에서 키
가 크고 모양이 괜찮은 나무만 남기고 모두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이 잘생기고 마음
에 드는 나무만 살려두고 모두 밀어버리면서 졸지에 나홀로나무가 된 것이다. 그렇게 친구를
잃고 홀로 되었지만 전화위복(轉禍爲福),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괜히 허언이 아닌 듯 이
곳의 사진 모델로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낸다.


▲  토성 북벽에서 바라본 내성농장 들판 (예전 모습)

▲  토성 북벽에 뿌리를 내린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24-2호

내성농장에서 토성 북벽을 따라가면 장대하게 자라난 은행나무가 그늘을 내밀며 마중을 한다.
이 나무는 올림픽공원에 깃든 보호수 3그루의 하나로 나이가 무려 580년(1968년 보호수 지정
당시 추정 나이는 530년)에 이르며, 높이 17.5m, 둘레 6m에 이른다.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
는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이렇게 어엿한 나무로 성장을 했는데, 이곳에 서면 내성농장과 성내
천, 풍납동(風納洞) 일대가 훤히 바라보인다.


▲  몽촌토성에서 가장 높은 북벽 (서쪽 방향)

▲  몽촌토성 북벽 (동쪽 방향)

▲  북벽 쉼터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토성 북벽과 성내동/둔촌동 지역, 내성농장 등)

▲  북벽 쉼터에서 바라본 토성 북쪽 산책로와 성내천
성내천은 양재천(良才川)과 더불어 생태 하천으로 크게 거듭난 현장이다.

▲  늦가을 오색 향연에 잠긴 몽촌토성 북부(올림픽파크텔 동쪽)와
그런 향연을 지켜보는 속세(시내)


 

♠  올림픽공원 마무리

▲  억새가 춤을 추는 몽촌토성 서벽
서벽은 북벽에 비해 높이가 조금 낮고 경사도 포근한 뒷동산처럼 느슨하다.
게다가 다른 구간과 달리 소나무가 무성해 솔내음이 그윽하며,
그늘도 깊다.

▲  소나무로 그윽한 몽촌토성 서벽

몽촌토성 산책로는 경사도 거의 느슨하여 누구든 편히 거닐 수 있는 착한 길이다. 제아무리
걷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길에는 퐁당퐁당 빠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걸
어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자꾸만 걷고 싶다. 누군가 나를 말리지 않았다면 햇님 주위를 도
는 지구처럼 토성을 몇바퀴씩 돌았을 지도 모른다.
우리집으로 살짝 가져와 나 혼자서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아름다운 길이다.


▲  충헌공 김구 묘역(忠憲公 金構 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9호

몽촌토성 서벽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서 왼쪽을 잘 살펴보면 소나무들 너머로 하얀 철책이 둘
러진 공간이 보일 것이다. 주마간산처럼 움직이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으니 속도를 조금 줄
이고 잘 살펴보자. 그 철책 안에는 올림픽공원의 숨겨진 옛 명소인 충헌공 김구 묘역이 조용
히 들어앉아 늦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다.
이 묘역은 약간 구석에 있다보니 기웃거리는 사람이 거의 없어 늘 한적하다. (무덤을 알리는
이정표도 없음;) 올림픽공원에서 몽촌토성, 보호수 3그루 다음으로 늙은 이곳의 토박이로 토
성 산책로를 거닌다면 꼭 챙겨보기 바란다.


▲  소박한 모습의 충헌공 김구 묘

묘역의 주인공은 김구이다. 여기서 김구는 친일파들이 싫어하는 애국지사 김구(金九)가 아니
라 조선 중기에 살았던 김구(金構)로 이름만 같지 한자는 다르다.

김구(1649~1704)는 청풍김씨 집안으로 김징(金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참봉 이의길(李義吉)
의 딸이며, 자는 사긍(士肯), 호는 관복재(觀復齋)이다.
166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83년 춘당대(春塘臺)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비로소 관
직 생활을 시작했다. 전적과 각 조의 낭관(郎官)를 거쳤고,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에 있을 때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의 계속되는 대립을 조정하려고 만언(萬言)에 가까운 시
무소(時務疏)를 올리는 등 애를 쓰기도 했다.

경연관(經筵官)과 승지(承旨), 황해도와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관찰사(觀察使)를 지냈고, 대
사간(大司諫)을 거쳐 1697년 강화유수(江華留守)가 되어 장녕전(長寧殿)을 경영해 공을 세웠
다. 허나 흉년으로 모든 역사(役事)가 중지된 마당에 내전(內殿)의 명을 받아 집을 지었다고
해서 오도일(吳道一), 이광좌(李光佐) 등에게 탄핵을 받기도 했다.

김구가 잘한 일을 하나 끄집어 본다면 바로 단종(端宗) 부부의 원통한 넋을 조금이라도 풀어
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판결사(判決事)로 있을 때 노산군(魯山君)의 복위를 숙종(肅宗)에
게 건의했다. 하여 노산군은 강제로 눈을 감은지 241년만인 1698년에 비로소 단종이란 묘호(
廟號)를 받게 된다. 그리고 단종의 부인인 송씨의 묘도 능으로 추봉(追封)할 것을 건의해 사
릉(思陵)이란 능호를 받게 했으며, 사릉 능역(陵域) 공사를 맡아 그 공으로 형조판서(刑曹判
書)가 되었다.
이렇게 단종 부부에게 큰 선물을 준 그는 1703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며, 1704년에 65세
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숙종은 충헌이란 시호를 내렸다.

김구는 제왕의 위엄에 굽히지 않았고, 의리에 따라 처신했으므로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
게 존경을 받았다. 육도(六韜)와 도가(道家) 관련 서적에 정통했으며,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
가 패기가 넘쳤다. 그가 남긴 글씨로는 강원도 고성(高城)에 있는 '백천교중창비(百川橋重刱
碑)'와 경상도 선산(善山)에 있는 '김주신도비(金澍神道碑)'가 있다.

그는 말년에 몽촌토성에 거주했는데, 광주유수(廣州留守)도 자주 찾아와 인사를 했다고 하며,
비록 죄인이라도 이곳에 들어오면 김구의 허락을 받아야 잡아갈 수 있었다고 하니 몽촌 지역
에서 그의 영향력이 제법 컸음을 알려준다.

묘역에는 커다란 봉분(封墳)과 비석, 상석(上席), 망주석(望柱石) 1쌍과 양석(羊石) 1쌍이 있
으며, 양석은 근래에 조성되었다. 예전에는 공원 산책로에서 묘역이 뻔히 보였지만 그 앞에
야생화단지를 꾸미면서 그 뒤에 숨어버렸다.


▲  충헌공 김구 신도비(神道碑)

묘역 동남쪽에는 김구의 행적이 소상히 적힌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고급 관료와 왕족의 묘
역에만 쓸 수 있던 비싼 비석으로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고 전하는 묘역 동남쪽에 세운다.
1743년에 세운 비석으로 비문(碑文)은 이의현이 짓고 글씨는 서명균(徐命均)이 썼다.
270년이 넘은 늙은 비석이지만 파리도 미끄러질 정도로 하얀 피부를 잘 유지하고 있으며, 네
모난 비좌(碑座)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 2마리가 다투는 모습을 새긴 지
붕돌을 얹혔는데, 조각 솜씨가 매우 현란하다.


▲  코스모스가 넝실거리는 야생화단지

김구 묘역 남쪽에는 야생화단지가 펼쳐져 있다. 가을이라 분홍색과 하얀색 코스모스가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들의 보금자리와 꽃을 짓밟으며 오로지 사진 찍기에 부산하
다. 꽃을 보호하려고 금줄까지 쳐놓았지만 인간들의 욕망은 그 금줄마저 무색하게 만든다.


▲  미로찾기
미로가 속세보다는 덜 복잡하여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치면 거뜬히
통과할 수 있다. 우리네 인생도 다 저런 미로가 아니던가..?

▲  몽촌토성 남벽 (남문터 주변)

충헌공 김구 묘역과 야생화단지에서 잠시 놓고 있었던 몽촌토성 산책로를 다시 더듬는다. 남
벽은 높이도 낮고 경사도 완만한 편으로 숲도 제법 우거져 있어 일부 구간은 숲길 분위기를
자아낸다.


▲  늦가을에 잠긴 산책로 (목책 앞)
마지막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선보이며 겨울을 경계하고 있는 나무들,
그렇게 다들 늦가을을 붙잡건만 힘이 다한 가을은 결국 짐을 싸고
떠나려고 한다. 나무들은 늦가을의 떠남을 슬퍼하며 낙엽으로
눈물을 대신한다.

▲  성내천 산책로 (피크닉장 주변)

▲  생태계 복원의 정석, 성내천 (둔촌동 방향)

몽촌토성을 반 바퀴 정도 복습을 더 하고 아쉽지만 평지길로 갈아탔다. 목책(木柵)과 피크닉
장, 성내천 남쪽 산책로를 지나 속세와 공원의 경계를 가르는 성내천을 건넌다. 성내천에는
많은 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우리가 건넌 것은 무지개다리이다.
성내천은 한때 개발의 칼질로 망가진 저주 받은 하천이었으나 오랜 노력에 결과로 자연이 숨
쉬고 온갖 식물과 동물들이 발을 뻗고 자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다시 살아난 성내천을 보니
회색 도시에서 오염된 눈과 마음이 자연을 통해 확 정화됨을 느낀다. 역시 인간은 자연의 일
부로 살아야 별탈이 없다. 부디 복원이 무색하지 않게끔 앞으로도 철저히 관리를 해주어 우포
늪 수준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다리를 거쳐 속세로 나오니 어느덧 18시. 평온했던 공원에 잠시 익숙해졌다가 다시 속세로 나
오니 정말 딴 세계에 온 기분이다. 이렇게 하여 늦가을 올림픽공원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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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0년 11월 1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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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파에 깃든 옛 한성백제의 장대한 영혼터, 석촌동고분군~방이동고분군

 


' 서울 백제 유적의 성지, 송파구 나들이 '
(석촌동고분군, 방이동고분군)

▲  석촌동고분군 제4호분

▲  석촌동고분군 제5호분

▲  방이동고분군 제7,8,9,10호분


 

 

서울 동남부에 자리한 송파(松坡)는 장대한 해양대국을 일구었던 백제(百濟)의 도읍인 위
례성(慰禮城)의 변두리로 여겨지는 곳이다. 백제는 고구려(高句麗)의 위대한 시조인 동명
성왕(東明聖王, 추모성왕)의 3번째 아들, 온조(溫祚)가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와 졸본(
卒本) 세력을 이끌고 내려와 세웠다고 전한다.
그들은 한강(漢江) 이북 서울 어딘가에 도읍을 세우고 위례성이라 하였는데, 주변 세력의
침공이 잦고 자리가 영 좋지 못해서 한강 남쪽에 또 다른 위례성을 만들어 도읍으로 삼았
다. 그래서 이전 위례성을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 이후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위례성의 자리를 두고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부터 논란이 많았는데 고려와 조선시
대에는 천안의 위례산성(慰禮山城)으로 여겼으며, 18세기 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위례성은 한강 북쪽, 하남위례성은 광주(廣州, 하남시 지역)라 주장하면서 서울+광주설이
대세를 이루었다.

20세기 이후 남한산성(南漢山城)과 풍납토성(風納土城), 하남 춘궁동을 수상하게 여겨 조
사를 벌였는데, 풍납토성 일대에서 1세기부터 5세기에 걸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고 올
림픽공원 조성으로 조사를 받은 몽촌토성(夢村土城)에서도 비슷한 시기의 유물이 마구 쏟
아져 위례성은 풍납토성 일대, 근초고왕(近肖古王)이 370년에 도읍으로 삼았다는 한산(漢
山)은 몽촌토성 일대로 크게 여기고 있다.
허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불과 1km거리이니 둘은 거의 한곳이나 다름 없으며, 도성(都
城) 확장 차원에서 몽촌 일대를 개발하여 왕궁과 관청을 두었다. 그래서 위례성과 한산을
아울러 한성(漢城) 또는 한산이라 부르며, 이곳에 도읍을 하던 시절을 한성백제(漢城百濟
)라 부르기도 한다.

한성백제는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 시절까지 큰 번영을 누렸으나 475년 고구려 제
19대 태왕(太王)인 장수왕(長壽王, 재위 413~491)의 공격 앞에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고
구려는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개로왕을 생포하여 아차산성(阿且山城)에서 처단했고, 그것
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위례성이란 존재를 깔끔하게 파괴시켜 위례성 3자를 세상에서
영구히 지워버렸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 때문에 위례성을 찾느라 오랫동안 허벌나게 고생하고 있는 것이
다. 허나 위례성과 이어져있던 한산(몽촌토성)은 다 부시지 않고 그들의 군사기지로 삼았
다고 한다.
이렇게 고구려에게 도읍을 짓밟힌 백제는 왜열도와 산동반도를 비롯한 중원대륙의 무수한
해안 지역을 다스렸던 해양대국의 체통도 다 내버리며 형편없이 쫓겨가 간신히 웅진(熊津,
공주)에서 정신을 차렸다.

한성(위례성)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100% 맞는다면 석촌동과 방이동을 비롯한 송파 일
대는 도읍의 남쪽 변두리가 된다. 석촌동에는 한성백제 시절의 거대한 돌무덤이 남아있고,
방이동에도 백제 고분이 남아있으며, 가락동 등 송파 일대에 백제와 신라 때 고분이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었으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이 그들을 모두 앗아가버렸다.

본글에서는 한성백제 시절 고분군이자 나의 즐겨찾기의 일원인 석촌동고분군, 방이동고분
군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  옛 한성백제의 영화로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백제 초기의 무덤들
석촌동고분군(石村洞古墳群) - 사적 243호

▲  석촌동고분군 제3호분

송파구(松坡區) 한복판에 자리한 석촌동고분군은 천하에 몇 남지 않은 한성백제의 소중한 발
자국이다. 이곳은 한성백제 시절(1~5세기)에 다져진 백제 왕족과 귀족들의 묘역으로 특히 거
대한 적석총(積石塚, 돌무지무덤)으로 유명하다. 적석총은 5세기까지 고구려의 대표 무덤 양
식이라 흥미를 끌고 있는데, 무덤 주변에 호석(護石)까지 갖추고 있어 영락없는 고구려 무덤
꼴이다. 하여 고구려의 무덤 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가꾸었음을 귀뜀해주고 있으며, 석
촌동이란 지명도 바로 이들 적석총 무리에서 유래되었다.

백제의 적석총은 5세기 이후 석실분(石室墳, 돌방무덤)으로 모양이 점차 바뀌며, 방이동고분
군과 개발의 칼질로 사라진 가락동고분군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또한 백제의 중심이 웅진(공
주)으로 옮겨지면서 더 이상 고구려 스타일의 적석총은 등장하지 않는다.
백제는 잃어버린 한성을 되찾고자 200년 가까이 몸부림을 쳤으나 끝내 되찾지 못했고, 주인을
잃은 한성백제의 고분은 고구려와 신라의 침략군, 고려와 조선의 농민들, 대자연 형님의 집요
한 괴롭힘으로 끊임없이 고통 받으며 속세의 뇌리 속에서 잊혀지고 만다.

20세기 초반, 왜정(倭政)은 송파 벌판에 무리지어 펼쳐진 돌고분에 흥미를 던지며 조사를 벌
였다. 조선총독부가 1917년에 작성한 '조선고적도보'의 '석촌 부근 백제고분군 분포도'에 따
르면 석촌동 일대에서 89기(흙무덤 23기, 적석총 66기)의 고분이 기록되어 있으며, 가락동 등
송파구 일대에서 무려 290기 이상의 백제와 신라 고분이 존재하고 있었다. 허나 간단히 조사
만 벌이고는 무책임하게 방치해 버린다.
1974년에 이르러 서울대박물관이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벌였다. 1983년까지 조사를 벌여 적석
총 7기를 비롯하여 토광묘(土壙墓, 움무덤)와 독무덤(옹관묘), 즙석봉토분(葺石封土墳, 흙무
지무덤),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고분) 등 30여 기의 다양한 무덤과 화장(火葬) 흔적이 나왔
으며, 이들은 모두 한성백제의 무덤임이 드러났다. 하여 제왕과 귀족 뿐 아니라 하급 관리나
돈 꽤나 만지던 백성들도 이곳에 묻힌 것으로 여겨져 석촌동과 송파 일대는 한성백제 시절의
거대한 사후(死後) 안식처였음을 알려주며 시기를 달리하여 중복되게 조성된 무덤도 많아 오
랫동안 공동묘지로 쓰였음을 속삭인다.
하지만 그 조사는 송파 지역 도시정비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조사에 부실한 점이 꽤 많았
다. 게다가 송파 개발을 우선으로 두면서 송파 지역의 수많은 고분과 삼성동토성(三成洞土城,
강남구 삼성동) 등의 백제 유적이 천박한 개발의 칼질에 모두 희생을 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깔끔하게 밀어버려 그들의 흔적을 더듬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그나
마 석촌동고분군은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사적의 지위(1975년에 지정됨)를 얻으면서 칼날을
피해갔으나 겨우 몇 기만 살아남았다.

1986년부터 1987년까지 살아남은 고분을 중심으로 고분공원을 조성했는데, 3호분 동쪽 일대에
서 상층에 토광묘와 옹관묘가, 그 밑에 대형토광묘 등이 발굴되었다. 특히 대형토광묘는 천하
에 알려지지 않는 무덤 형태로 제일 아래층에 점토층을 파내고 그 안에 8기의 목관을 안치한
신선한 구조를 지녔다. 허나 공원을 만들면서 고분군 밑에 지하차도를 닦는 어리석음을 범했
고, 고분 주위로 주거지가 빼곡히 들어차 도시에 갇힌 답답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2015년부터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이곳의 숨겨진 이야기를 더 풀고자 석촌동고분군을 다시 들추
었다. 그래서 제2호분과 제3호분 주변을 조사했는데 숨바꼭질을 벌였던 새로운 적석총이 발견
이 된 것이다. 그 무덤의 기단 석축은 동~서,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고, 점토를 쌓아 올린 부
분이 여럿 확인되었다. 하여 처음 지어진 적석총에 잇대어 다른 무덤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또한 2019년에는 화장된 인골이 발견되어 백제 왕실에서 화장 문화가 적지 않게 유행했음을
알려준다. 수습된 인골의 무게는 총 4.3kg으로 여러 사람의 뼈로 여겨지며, 같은 부위의 뼈가
2개 발견되기도 했다. 다만 뼈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고온에서 화장되어 유전자 분석은 아쉽
게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여러 적석총이 100m 길이로 이어진 이른바 '연접식(連接式) 적석총'
형태도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네모꼴의 중소 규모의 적석총 16기와 이를 이어주는 연접구,
화장한 인골을 묻은 매장의례부 3개소를 맞붙여가며 지은 큰 규모의 특이한 형태로 이를 통해
석촌동에는 아직도 숨바꼭질을 즐기는 한성백제의 비밀이 적지 않음을 알려준다. 하여 남은
비밀을 모두 밝히고자 계속 조사를 벌이고 있다.

석촌동고분을 배경으로 한 석촌동고분공원의 면적은 약 49,999㎡로 적석총 3기와 흙무덤 1기,
무덤 흔적 4기를 지니고 있으며, 20여 기는 땅속에 묻어버렸다. 공원에는 소나무와 단풍나무
등을 넉넉히 심고 상큼하게 산책로를 닦았으며, 24시간 열린 공간으로 산책이나 운동을 나온
동네 사람부터 답사와 출사, 나들이객들까지 고루고루 찾아오는 서울의 굴지 명소이다.
비록 경주(慶州) 대릉원(大陵苑)의 위엄에는 미치지 못하나 인근의 방이동고분군과 함께 서울
에 딱 2곳 뿐인 고분공원으로 도심 속의 소중한 오아시스이자 쉼터, 그리고 고색이 깃든 사적
공원으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248일대 (가락로7길 21)


▲  남쪽에서 바라본 석촌동 제3호분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하고 신성한 제단(祭壇)처럼 보인다.


석촌동고분군 북쪽에는 이곳의 맏이격이자 백미(白眉)인 제3호분이 딱딱한 돌피부를 드러내며
길게 누워있다.
그는 3단의 네모난 적석총으로 고구려 적석총의 자존심인 장군총(將軍塚)과 많이 비슷해 눈길
을 끈다. 그 독특한 생김새로 '백제의 피라미드','서울의 피라미드'란 별명을 지니고 있으며,
무덤의 동서 길이 50.8m, 남북 길이 48.4m, 둘레는 무려 199m에 이른다. 그 대단한 덩치에 비
해 키는 겨우 4.5m에 불과해 사람으로 따지면 완전 초비만형 무덤인데, 1980년대 중반까지 민
가들이 건방지게 무덤 위에 들어앉아있었고, 세월 또한 이 무덤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로 인
해 무덤의 키와 덩치가 다소 깎여나갔다. 하여 원래 둘레와 폭, 높이는 지금보다 훨씬 컸다고
보면 된다.
어쨌든 북한과 만주, 요동(遼東), 왜열도 등 잃어버린 땅을 제외한 우리나라에서 경주 황남대
총(皇南大塚) 다음으로 덩치가 크며, 비록 장군총과 황남대총보다 키는 많이 작으나 둘레와
덩치는 그들을 능가한다. 만약 키까지 제대로 받쳐줬다면 그 위엄은 실로 대단했을 것이다. 

무덤은 약간 높은 지형을 평탄하게 다지고 40~50cm 두께로 진흙을 깐 다음, 자갈돌과 지댓돌
을 차례로 깔았다. 그 위에는 40cm가 넘는 크기의 깬돌과 작은 판자돌을 가로 누여서 층층히
다졌으며, 무덤 꼭대기에는 4호분과 달리 돌이 고여있다. 부장품이 많았을 것으로 여겨지나
이미 오래전에 싹 털려 금으로 만든 얇은 장식 조각인 달개, 백제 토기 조각, 동진(東晉) 시
대 도자기 조각 정도만 겨우 건졌다.

이르면 3세기 중반에서 적어도 4~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무덤의 위엄으로 봤을 때
백제의 전성기를 닦았던 고이왕(古爾王)이나 근초고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요즘에는 근
초고왕으로 무게가 더 쏠리고 있으나 출토 유물이 빈약하고 사료(史料) 또한 부족하여 이 역
시 허공의 메아리에 불과한 실정이다.


▲  제3호분의 옆모습

▲  제3호분의 뒷모습
자연석이 사람의 손을 타 차곡차곡 쌓이면서 거대한 적석총의 위엄을 이루었다.

▲  석촌동 제4호분

제3호분 남쪽에는 제4호분이 놓여져 있다. 3단으로 이루어진 네모난 적석총으로 제3호분의 축
소판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한 변의 길이는 17m 정도이며, 겉모습은 돌로 이루어져 있
고 내부는 흙으로 채워져 순 돌로 이루어진 고구려 적석총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하여 이
런 무덤 양식을 백제식 적석총(돌무지무덤)이라 부른다.

1974년 발굴조사 때는 윗쪽 3단에서 동서 4.6m, 남북 4.8m 크기의 돌방으로 여겨지는 부분과
너비 2m 정도의 널길의 윤곽이 확인되었으며, 1984년 조사 때는 진흙을 다져 쌓은 흙무지무덤
에 돌을 씌운 무덤임이 밝혀졌다.
시신을 묻은 흔적은 흙을 다져 쌓은 지점 3곳에서 각각 발견이 되었으며, 이미 내부가 싹 털
린 상태라 부장품은 거의 나오지 않았고 돌무지 속에서 벽돌과 기와, 토기 등의 조각만 일부
수습이 되었다.
4~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제3호분이 고이왕이나 근초고왕의 능(陵)이 맞다면 이 무
덤은 그의 왕비나 가족 무덤 정도 될 것이다. 제3호분과 달리 무덤 꼭대기는 돌 대신 풀이 돋
아난 흙으로 마무리를 지었으며, 무덤 아랫도리에는 작은 호석이 몸을 기대고 있다.


▲  옆에서 바라본 제4호분

▲  석촌동 제2호분

제4호분 남쪽에 자리한 제2호분은 제4호분과 쌍둥이꼴 모습으로 3단의 기단으로 이루어져 있
다. 동서 약 16.4m, 남북 16.5m, 둘레 65m, 높이 3.5m의 덩치를 지닌 그는 1985년 이후에 복
원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기단부의 1m 정도, 내부 흙무지는 높이 3.8m 정도가 겨우 살아남아
돌로 덮힌 낮은 봉우리 모습으로 있었고 그 주변으로 민가와 담장이 어지럽게 들어서 있었다.

제4호분처럼 겉은 돌, 속은 흙으로 된 백제식 돌무지무덤(적석총)으로 서북쪽 모서리에서 나
무관(나무널) 1기가 발견되었는데, 움을 파지 않고 널을 놓은 뒤 작은 봉분을 만들었다. 그리
고 나중에 무덤을 확장했다.
널무덤과 서남쪽 봉분 안에서는 3세기 말에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 굽다리접시와 곧은입 항아
리가 나왔을 뿐, 이미 속 빈 강정이 되버린 상태였다.


▲  서쪽에서 바라본 제2호분

▲  남쪽에서 바라본 제2호분과 제4호분, 그리고 제2롯데월드
적석총 너머로 일명 '사우론의 탑'이라 불리는 제2롯데월드가 하늘을 건드리며
아슬아슬하게 바라보인다. 이곳은 잠실 지척이라 고분공원 어디서든
저 이상한 키다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  석촌동 제2호 토광묘(움무덤) 모형

제2호분 동쪽 소나무 숲에는 제2호 토광묘의 모형이 누워있다. 이 무덤은 원래 여기서 북쪽으
로 10여m 떨어진 곳에 있으나 보존을 위해 땅속에 고이 묻고 대신 이곳에 모형을 두었다.
그는 땅을 파서 움을 만들고 관을 넣은 천하에 흔한 무덤 양식으로 평면은 장방형(長方形)이
고, 장축은 동남동에서 서남서로 두었다. 벽면은 바닥에서 위로 향해 약간 경사가 졌고, 별다
른 시설이 없는 바닥 동쪽에는 회백색에 짧은목 단지 1개가, 움 안 흙속에서는 지름 1.6cm 크
기의 민고리 금귀고리 1개가 발견되어 귀족의 무덤임을 귀뜀해 준다.

무덤의 크기는 길이 223cm, 너비 76cm, 높이 21cm로 제3호분 동쪽에서 집단 움무덤과 대형 움
무덤이 10여 기 이상 발견되었는데, 적석총 바닥보다 아래층에 자리한 것으로 보아 적석총보
다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  석촌동 회화나무 - 서울시 보호수 24-7호

제2호분 서쪽에는 다소 허전해보이는 회화나무 하나가 철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하고 있다.
그는 240년 정도 묵은 것으로 높이 12m, 둘레 2.3m인데, 2015년 이후, 회화나무와 제2호분 주
변에서 석촌동고분군의 숨겨진 이야기를 캐내려는 굳은 집념으로 나무 주변에 펜스를 두르고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다른 나무들은 거의 생생한 모습이나 이 나무는 벌써부터 노화가 되었는지 잎사귀는 커녕 가
지 조차 부실해 머리숯 일부만 남은 애처로운 신세가 되었다. 몸도 썩 좋아보이지 않아 저러
다 골로 가는 건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  제3호 움무덤(토광묘)

제1호분 북쪽에는 제3호 움무덤의 모형이 있다. 표토(表土) 밑 70cm에서 발견된 것으로 실물
은 보존을 위해 모형에서 50cm 땅속에 방수처리를 하여 묻었다.
무덤의 길이는 208cm, 너비 58cm, 깊이 26cm로 네 모서리가 둥그스름한 네모난 모습이다. 장
축은 동북-서남 방향으로 제2호 움무덤처럼 특별한 시설은 없었으며, 북서쪽 모서리에 회청색
짧은목단지 1개가 발견되었다.


▲  내원외방형(內圓外方形) 적석총(A호 적석총)의 흔적

내원외방형 적석총이란 바깥을 네모나게 만들고 그 속살을 동그랗게 다진 돌무덤을 일컫는다.
우뚝 솟은 적석총의 위엄은 온데간데 없고 그 밑도리 흔적만 아련하게 남아있는데, 어느 세월
이 잡아갔는지 무덤은 녹아 없어지고 그 자리에 민가와 경작지가 가득 들어앉은 것을 발굴조
사로 모두 치워버리고 무덤 기단부의 서남쪽 모서리와 서쪽, 북쪽의 기단 일부가 확인되었다.
하여 나온 것을 바탕으로 정리를 해보니 기단 안쪽은 지름 11.4m의 흙무지무덤이 있고, 기단
겉면은 한 변이 16m인 네모난 모습을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신라 무덤에서 볼 수 있는 호석처럼 안쪽에 둥근 원 모양으로 열을 지은 꺤돌이 봉분 자락에
놓여 있었고, 그 바깥에 자갈돌과 네모 모양으로 열을 지어 놓여진 테두리의 깬돌은 제1,2,3
,4호분처럼 계단식 적석총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1987년 발굴조사 때 돌무지 움무덤 2기와 돌널무덤(석관묘) 3기가 안쪽 바닥면에서 나왔는데,
돌무지무덤이 파괴된 이후에 조성된 무덤일 가능성이 있어 내원외방형 돌무지무덤과의 관련성
은 분명치가 않다. 또한 무덤 안과 밖에서 각종 토기와 손칼, 쇠못, 꺾쇠 등의 철기가 나왔으
나 이곳이 일종의 교란층(攪亂層)이라 백제 유물인지도 정확하지가 않다.

무덤의 모습이 확실치가 않아서 적석총의 내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겸, 복원하지 않고 이런
모습으로 깔아두었다.


▲  남쪽에서 바라본 내원외방형 적석총(A호 적석총)의 흔적

▲  석촌동 제1호분

내원외방형 적석총 서쪽에는 제1호분의 흔적이 있다. 제1호분은 사람들이 집을 만들고자 부셔
버린 탓에 정확한 구조를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었는데, 무덤을 깔고 앉던 집들을 밀어버리고
발굴을 벌여 무덤의 밑도리를 확인했다. 그 결과 무덤 2개가 남북으로 이어진 쌍분(雙墳)임이
밝혀졌으며, 북쪽 무덤은 3세기 중반, 남쪽 무덤은 3세기 말~4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
되고 있다.
북쪽 무덤은 동서 9.9m, 남북 8.9m, 남쪽 것은 동서 9.6m, 남북 9.8m 규모로 이들은 3.7m 정
도의 거리를 두고 있으며, 그 사이를 진흙으로 메우고 서쪽으로 길게 돌을 덧쌓아 무덤을 연
결했다. 또한 길이 20~30cm 크기의 깬돌로 네 벽을 쌓았으며, 바닥에는 10cm 안팎의 돌조각과
자갈을 깐 석곽(石槨) 4개가 있었다.
가장 큰 석곽은 길이 2.5m, 너비 2.3m 크기로 한가운데에 동서 방향으로 놓았고, 작은 석곽은
길이 1.2m, 너비 1m 크기로 3개를 북쪽 벽에 잇대어 나란히 놓았다. 석곽의 크기로 보아서 큰
것은 무덤 주인(물론 왕족이겠지), 작은 것은 그 가족으로 여겨진다.

여기서는 백제 토기와 기와, 금귀걸이 등이 조금 나왔으며, 고구려의 환인현(桓因縣) 고력묘
자촌 제15호분과 평안북도 송암리 제45호분과 비슷해 고구려 묘제를 따랐음을 보여준다. 현재
는 무덤의 밑도리만 밝혀진 상태라 일단 밑부분만 정비하였다.


▲  제1호분의 속살 (석곽이 발견된 밑도리 부분)

▲  석촌동의 유일한 흙무덤인 제5호분

석촌동고분군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한 제5호분은 이곳 유일의 흙무덤으로 즙석(葺石) 봉토분
이다. 이름도 참 어려운 즙석봉토분이란 내부 구조 위에 흙을 다져 쌓고 그 위에 강돌과 막돌
을 섞어서 깐 다음에 다시 그 위를 흙으로 엷게 덮은 무덤을 말한다.

이 무덤은 둘레 17m, 높이 3m의 동그란 봉토분으로 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왕족이
나 귀족의 묘로 여겨지는데,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은 적석총들과 달리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내부 조사를 딱히 벌이지 않고 봉분의 흙을 쌓은 형태만 확인했다. 봉분은 즙석식으로 봉긋하
게 닦았으며, 개발의 칼질로 사라진 가락동고분군 제1,2호분도 같은 즙석식으로 내부는 하나
의 봉분 안에 여러 개의 나무널과 독널이 들어있어 그와 비슷한 구조로 여겨진다.

백제의 즙석봉토분은 토착 세력의 무덤 양식에 즙석이라는 고구려식 요소가 가미된 설과 봉분
을 만들고 지상에 시신 안치 공간을 둔 마한(馬韓)의 무덤 양식이란 견해가 있으나 확실한 것
은 아직 모른다. (즉 고구려+백제 양식 혹은 백제+마한 양식)


▲  석촌동 돌마리 표석

석촌동고분공원 동문에는 '전통마을 돌마리' 표석이 이곳의 옛 추억을 상기시키고 있다. 돌마
리는 석촌동의 옛 이름으로 적석총에서 유래되었으며, 마리는 마을을 뜻한다.
돌마리는 이곳에 뿌리를 내린 마을이었으나 송파 개발에 휩쓸려 사라지고 지금은 서울의 일부
가 되어 그 이름만 남아있다. 지금은 도시 속에 파묻혀 옛 마을의 모습은 죄다 증발해버렸지
만 전통마을을 칭하는 것을 보면 돌마리 시절의 사람들이 적지않게 살고 있는 모양이다.
석촌동은 1963년 광주군 중대면(中垈面)에서 서울로 편입되어 강남구가 되었으며, 1988년 송
파구로 분리되어 송파구의 일원이 되었다.


 

 

♠  석촌동고분군과 쌍벽을 이루던 옛 한성백제의 무덤들
방이동고분군(芳荑洞古墳群) - 사적 270호

석촌동고분군만 보기에는 너무 허전하여 그날의 여로(旅路)를 한층 살찌울 겸, 두 다리를 다
시 재촉하여 방이동고분군으로 이동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약 1.7km로 쉬엄쉬엄 걸으면 20~
25분 정도면 닿는다. (나는 걸어갔음)
석촌동고분군과 올림픽공원 중간에 자리잡은 방이동고분군은 석촌동과 더불어 서울에 딱 2개
밖에 없는 백제 고분군이다. 송파와 광진구 지역에 무려 수백 기나 존재하던 백제의 무덤들이
개발의 칼질에 모두 목이 떨어지고 몸이 부셔져 겨우 석촌동과 방이동의 10여 기만 남은 것이
참으로 통탄스러울 따름인데, 조선총독부가 1917년에 송파 지역 고적조사사업을 벌이면서 방
이동고분군이 발견되었다.
허나 간단한 조사 이후 다시 버려졌으며, 철저하게 파괴되어 그 존재가 세월 속에 푹 묻히고
만다. 그러다가 1973년 김모씨의 집 뒷산 언덕이 무너지면서 숨겨진 석실고분(제1호분)이 속
살을 드러내니 그것이 방이동고분군의 20세기 후반 첫 세상 데뷔였다.

1976년까지 발굴 조사를 벌인 결과 8기의 고분이 확인이 되었으며, 한성백제 후반인 4~5세기
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무덤의 주인은 당연히 백제 왕족과 귀족으로 화려했을 부장
품은 옛날에 싹 털려 겨우 유약이 입혀진 회청색경질 굽다리접시와 굽다리접시 뚜껑, 약간의
토기와 철제류만 건졌을 뿐이다. 특히 제6호분에서 나온 회청색경질 굽다리접시는 신라 토기
와 비슷해 6~7세기 이후에 닦여진 신라 고분으로 보기도 한다.
허나 제1,4,6호분은 백제 스타일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고분)이라 백제 무덤으로 여기고
있으며 웅진백제 시절에 조성된 공주 송산리(宋山里) 제5호분과 구조와 형식이 비슷해 방이동
고분 양식이 공주로 이어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제5호분은 구덩식 돌덧널무덤으로 확인되었으며, 제3호분 같은 경우 백제가 일부 조성하고 이
후에 신라가 재활용했다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 귀족들의 묏자리로 쓰였다가 6세기 이후 서
울 지역이 신라 치하가 되면서 신라 조정에서 보낸 귀족과 관리의 무덤들이 들어선 것이다. (
신라로 넘어간 백제 관리와 귀족들의 무덤, 또는 그 후손들의 무덤으로 보기도 함) 그래서 백
제와 신라의 무덤이 공존하게 된 것이다.

방이동고분군은 석촌동고분군처럼 그 가치가 인정되어 국가 사적의 지위(1979년 12월에 지정
됨)를 부여 받았다. 그래서 개발의 칼질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누렸으며 서울시에서 1983년에
이들을 복원하고 고분공원으로 닦아 속세에 내놓았다.
현재 정비된 고분은 8기로 서쪽 언덕에 제1,2,3,6호분이, 동쪽 언덕에 제7,8,9,10호분 4기가
자리한다. 조사를 받은 무덤은 제1,4,5,6호분이며, 나머지는 아직 손을 대지 않았고, 제4,5호
분은 복원되지 못했다. 2011년에 석실을 비롯한 고분 상당수를 보수했으며, 2016년에 제3호분
봉분이 흘러내리면서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이를 복구할 겸, 재조사에 들어가 그 주변을 통제했
다.
이곳은 시내 한복판에 감싸여 있으며, 언덕에 자리해 있어 인근 시가지보다 해발이 조금 높다.
고분 주변에는 소나무와 단풍나무 등 온갖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산책로도 잘 닦아놓아 산책
의 운치를 더했으며, 석촌동과 달리 개방시간에 제한을 두어 6시부터 20시까지만 빗장을 열어
둔다. (12~2월은 9~18시) 들어가는 문은 오금로에 접한 서쪽에 딱 하나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송파구 방이동 125 (오금로 219 ☎ 02-410-3661)


▲  방이동 제1,2,3호분

방이동고분군은 크게 2개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정문을 기준으로 왼쪽(서쪽) 언덕에는 제1,
2,3,6호분, 오른쪽(동쪽) 언덕에는 제7,8,9,10호분이 자리해 있으며, 이들은 서로 200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그 사이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어 자연의 향기까지 아낌없이 보탠다.


▲  늦가을 단풍이 곱게 까페트를 이룬 제1호분 앞 산책로

▲  죽음 앞에서 처절한 아름다움을 드러낸 단풍잎들 (제1호분 앞)

벌써부터 시작된 겨울 제국(帝國)의 압박에 땅으로 떨어진 단풍들은 마지막 아름다움을 불사
르며 서서히 저물어가는 늦가을의 발목을 붙잡으려 든다. 허나 아무리 그들이 안간힘을 써본
들 약기운이 다 된 늦가을은 결코 겨울을 이기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단풍들의 부질없는 몸부
림일 뿐, 그들은 '낙엽'이란 우울한 이름이 되어 삶을 마감해야 된다.
단풍도 그렇지만 인간 역시 늦가을의 저물어감을 아쉬워하는 것은 마찬가지라 땅바닥을 장식
하는 단풍잎을 바라보며 '올해도 이제 다 저물었구나. 곧 1살이 강제로 누적되겠네' 우울감
에 적지 않은 고통을 받는다.


▲  방이동 제1호분

제1호분은 방이동고분군의 대표격인 존재로 무덤 안으로 인도하는 문이 무덤 서쪽에 달려있다.
이 무덤은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굴식돌방무덤)으로 시신과 부장품을 둔 현실(玄室, 널
방)과 바깥과 현실을 이어주는 연도(널길)를 갖추고 있다. 깬돌로 널방을 다졌으며, 석실 벽
이 위로 올라갈수록 모두 안쪽으로 기울어지게끔 다져 폭을 좁히고 맨 위에 큰 돌을 올려 천
장을 만들었다. 이런 식의 천장을 어려운 말로 '궁륭형'이라고 부른다.

무덤의 높이는 2.2m, 둘레 12m이며, 돌로 다진 현실은 길이 3.1m, 너비 2.5m, 높이는 2.15m로
중앙에는 시신을 안치했던 시상대(屍床臺)가 있다. 연도는 현실 남쪽 벽 서쪽에 닦여져 있는
데, 길이는 약 2.39m, 너비 1.06m, 높이는 1.1m이다. 그리고 널길 입구에는 1983년에 화강암
으로 문을 달아 흙과 돌이 무너지지 않게 했으며, 굳게 닫힌 문 창살을 통해 무덤 속살을 구
경할 수 있다. 방이동 식구 중 유일하게 속살(널길, 널방)을 개방하고 있으니 이곳에 왔다면
꼭 살펴보도록 하자.
무덤은 오래전에 도굴되어 나온 유물은 없으며, 인근 주민들에 의해 토기 3점이 수습되었다.


▲  돌로 차곡차곡 닦여진 제1호분의 속살(널길과 널방)
바로 앞에 보이는 널길(현도)은 바깥과 무덤 석실을 이어주는 짧은 통로로
저 통로의 끝에 무덤 주인과 부장품이 깃든 널방(현실)이 있다. 이곳에
가득했을 부질없는 부장품들은 나쁜 손에 의해 모두 털리고 이제는
먼지만 가득하다. (무덤 내부는 접근 금지)

▲  제1호분의 옆 모습

▲  나지막하게 누워있는 제2호분

▲  피가 묻힌 듯 붉은 단풍잎을 군데군데 걸친 제3호분

제1호분 동쪽에는 제2호분과 제3호분이 누워있다. 제2호분은 지름 13.4m, 높이 2.7m이며, 제
3호분은 지름 13.12m, 높이 2.9m 규모로 봉분 서북쪽 밑도리에 얇게 호석이 둘러져 있다. 이
들은 조사를 받지 않고 겉모습만 복원을 했는데, 2016년 봄에 제3호분 봉분 흙이 흘러내려와
봉분이 오목하게 변형된 사고가 발생했다.
송파구는 한성백제박물관에 점검을 의뢰했고, 박물관 측은 무덤 안쪽의 무너짐 방지와 보존
정비 대책을 세우고자 정밀발굴조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무덤을 정비 할 겸,
아직 열지 못한 제3호분의 뚜껑을 열고 한참 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번에는 부디 굵직한 것들
이 많이 나와서 이곳에 숨겨진 이야기 보따리가 흔쾌히 풀렸으면 좋겠다.


▲  제6호분

제6호분은 1976년에 조사를 받았다. 무덤 내부는 제1호분과 비슷한 횡혈식석실(굴식돌방) 구
조로 석실 중간에 벽을 쌓아 서쪽 주실(主室)과 동쪽 부곽(副槨)으로 나누었고 남쪽 벽 중앙
에 연도(널길)가 닦였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무덤의 지름은 10.6m, 높이는 2.1m이며, 여기서는 회청색경질 굽다리접시가 나왔는데, 그 굽
다리접시가 백제가 아닌 전형적인 신라 토기의 형식이라 6세기 이후에 조성된 신라 고분으로
보기도 한다. 


▲  늦가을이 너울치는 고분공원 중앙 동쪽 산책로 (남쪽 방향)

▲  고분군 중앙 동쪽 산책로 (북쪽 방향)
늦가을이 이곳에 마지막 작품을 빚으며 슬슬 올해를 정리한다. 이번에 그가
떠나면 내년 10월에나 기약을 해야 된다.

▲  누런 낙엽들이 귀를 접고 누워있는 현장
(고분공원 중간 부분)

▲  방이동고분군 남쪽 식구들 (제7,8,9,10호분)

방이동고분군 동쪽 언덕에는 제7,8,9,10호분이 조용히 누워있다. 푸른 소나무가 이들을 빙 둘
러싸며 그윽한 솔내음을 베풀고 있어 콧속에 낀 속세의 때를 긴장 타게 만드는데 이들 무덤은
1983년에 복원된 것으로 겉모습과 덩치는 서쪽 무덤들과 비슷하나 딱히 특이사항은 없다. 무
덤의 속살은 이미 도굴되어 유물도 없고, 방이동고분군 자료에도 북쪽 무덤만(제1,2,3,6호분)
만 부각시킬 뿐, 남쪽 무덤은 소외되어 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제7,8,9,10호분

▲  제8호분

▲  제9호분


▲  돌이 입혀진 고분군 남쪽 산책로

▲  솔내음이 가득한 고분군 중앙 서쪽 산책로

겨울 제국(帝國)의 등쌀에 점차 빛을 잃어가는 늦가을의 끝 무렵을 즐기며 1시간 정도 방이동
고분군을 둘러보았다. 이미 여러 번 인연을 지은 곳이나 올 때마다 마치 새로운 곳처럼 늘 새
롭다. 이렇게 하여 백제의 향기를 쫓을 송파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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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해돋이 명소이자 우리나라 고구려 유적의 성지, 아차산 나들이 ~~(아차산생태공원,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 고구려 유적의 성지, 서울 아차산 '
(아차산성, 아차산1보루, 3보루, 5보루)

▲  아차산 산줄기

▲  아차산3보루

▲  아차산4보루

 


 

아차산은 해발 295.7m의 뫼로 용마산과 망우산을 거느리고 있다. 서울 강북 지역의 동남
쪽 벽으로(동북쪽 벽은 수락산, 불암산 산줄기) 서울 광진구, 중랑구, 경기도 구리시(九
里市)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예전에는 중랑구 봉화산(烽火山)까지 아차산의 영역이었
다. (봉화산에 있는 봉수대를 '아차산 봉수대'라 부름)

아차산은 음은 같지만 한자 표기만 해도 무려 4개(阿嵯, 峨嵯, 阿且. 峩嵯)씩이나 되는데,
삼국시대에는 아차(阿且), 아단(阿旦)이라 불렸으며, 고려 때 지금 널리 쓰이는 '아차(峨
嵯)'란 이름이 나타난다. ('峩嵯'도 이때 나타남)
아단(旦)이란 이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세우고 이름을 단(旦)이라 고치자 제
왕의 이름을 피하는 법칙에 따라 '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
으며, 조선 때는 악계산(嶽溪山), 남쪽을 향해 솟아오른 산이라 하여 남행산(南行山)이란
별칭도 있었다.


겉으로 보면 수도권에 널린 흔한 산처럼 보이지만 천하가 서울 도심의 주산(主山)인 북악
산<北岳山, 백악산 342m>보다 더 키가 작은 이 산을 격하게 주목하고 있다. 바로 고구려(
高句麗)의 영광스런 역사가 두텁게 깃든 거룩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특히 차디찬 북방(北
方)을 제외한 남한 영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몰린 유일한 곳으로 그 값어치는 남다르다.

양아치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고통받고 있는 우리나라는 안그래도 좁은 땅 남북으로 갈
라져 70년 이상 무의미한 소모전만 벌이고 있다. 그런 우리에게 너른 대륙과 바다를 경영
했던 고구려와 발해(渤海), 백제, 옛 조선(고조선), 금(金)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은 실로
크다. (저 잃어버린 방대한 옛 땅을 언제나 되찾을꼬??)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차산은 인지도가 낮은 동네 산이었다. 그러다가 1989년 아차산 일
대에 큰 산불이 났는데, 이를 진화하는 과정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길게 이어진 정체 불명
의 돌무지와 산봉우리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파인 구덩이가 여럿 발견되었다. 알고보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아차산 장성(長城)과 보루들이었다.
아차산장성은 아차산에서 용마산, 망우산까지 이어지던 성으로 돌성과 토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차산 주능선을 반달 모양으로 좌우 2겹으로 감싼 형태로 조성되었는데, 중랑천
을 건너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인 배봉산(拜峰山, 해발 110m)까지 이어졌다는 설이 있으며,
백제의 첫 도읍으로 서울 한강 이북 어딘가에 있었다는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흔적으
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들로 인해 아차산에 대한 호기심이 커진 구리시는 1994년 아차산 일대를 조사하여 15개
의 보루를 발견했고, 1997년 이후, 아차산4보루를 비롯해 땅 속에 잠긴 보루와 유물을 끄
집어냈는데, 이들이 거의 고구려 것으로 밝혀지면서 고구려 유적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남
한에 한줄기 단비를 선사했다.

보루의 무더기 출현에 힘입어 아차산 일대가 고구려 유적의 성지로 격하게 떠오르자 서울
광진구(廣津區)와 경기도 구리시가 이곳을 둘러싸고 서로 고구려의 도시임을 자처하며 경
쟁을 벌였고, 서울의 새로운 꿀단지로 부상하면서 등산/답사 수요가 크게 늘었다. 게다가
완만한 산세로 야간 등산(야등) 수요까지 늘어나면서 야등의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받게
되었다.
이처럼 든든한 후광인 고구려 유적과 완만하게 아름다운 산세, 그리고 일품 조망(眺望)으
로 관악산과 수락산(水落山)의 염통을 제대로 쫄깃하게 만든 아차산, 하지만 만약 고구려
유적이 없었다면 아차산은 그저 그런 평범한 산으로 조용히 누워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보
면 사람이나 산이나 때와 조건을 정말 잘 만나야 된다. 만약 그가 이북이나 만주 같은 곳
에 누워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꿀단지는 되진 못했을 것이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과 아차산성(阿且山城)

▲  아차산 표석과 사슴 모형등 (친수계곡 입구)

아차산과의 첫 인연은 1991년 중학교 시절이었다. 이후 20년 동안 인연이 없다가 2011년 야간
등산으로 2~3번을 찾았고, 2014년 여름 이후, 주말과 평일 야간 등산으로 발길이 무척 잦아졌
다가 2017년부터 다시 줄고 있다. (2018년에는 1~2번 정도 찾음)
북한산(삼각산), 호암산(虎巖山)과 더불어 나의 즐겨찾기 뫼의 하나라 아무리 많이 가도 질리
기는 커녕 반갑기만 하다. 그 아차산에 퐁당퐁당 빠진 이유는 그곳에 서린 고구려의 흔적 때
문이 아닐까 싶다. (그 다음은 빼어난 절경과 완만한 산세, 일품 조망)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오후 2시, 아차산역(5호선)에서 일행들을 만나 아차산으로 인도하
는 골목길을 쫓았다. 언덕길을 10여 분 오르면 동의초교(영화사입구)가 나오는데, 그곳을 지
나면 친수계곡 입구(고구려정 방면 산길)이며, 워커힐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아차산생태공원
이 모습을 비춘다. 우리는 여기서 소나무숲길을 통해 아차산의 품으로 들어섰다. 참고로 아차
산생태공원 남쪽에는 아차산 보루의 남쪽 끝인 홍련봉 보루 유적이 있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 입구

아차산생태공원 북쪽에는 소나무숲이 닦여져 있다. 소나무와 들꽃이 어우러진 상큼한 공간으
로 이곳 역시 생태공원의 일원인데 아차산성과 아차산 주능선으로 가려면 이 길로 가는 것이
빠르다. (생태공원과 광나루역 기준임)
소나무가 삼삼하여 따가운 햇살도 이곳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며 솔내음을 머금은 솔바람이 솔
솔 불어와 벌써부터 피어난 땀과 속세의 무성한 번뇌를 앗아간다. 소나무 그늘에는 들꽃이 가
녀린 미소를 머금으며 정처 없는 나그네의 마음에 무책임하게 돌을 던지고, 그런 꽃내음과 솔
내음이 어우러져 조촐하게 극락을 연출한다.


▲  아차산 소나무숲길 (1)

▲  아차산 소나무숲길 (2)
소나무가 삼삼하여 제아무리 뜨거운 햇살이라도 이곳만큼은 힘을 못쓴다.

▲  소나무숲길에서 아차산성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길

▲  아차산의 얼굴, 아차산성 - 사적 234호

아차산 남쪽 자락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차산성이 장대한 세월을 머금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다. 아차산생태공원에서 소나무숲을 지나 10여 분 정도 오르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덥수룩
하게 자라난 수풀에 거의 묻혀있던 것을 성곽을 둘러싼 나무와 수풀을 꾸준히 쳐내면서 서쪽
과 남쪽 성벽도 무리 없이 확인할 수 있다.
허나 아무리 꾸준히 이발을 하고 숯을 쳐내도 대자연의 의해 금세 수풀이 자라 성곽을 가리려
드니 역시나 인간의 피조물은 대자연 앞에서는 일개 돌이나 모래알에 불과하다.

아차산성은 언제 축성되었는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나 백제 9대 제왕인 책계왕(責稽王)이 위
례성(慰禮城)과 함께 수축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백제 초기(1~2세기 경)에 국도(國都)
인 위례성 주변 수비와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고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상당히
오래 묵은 성이다.
처음에는 아단성(阿旦城)이라 불렸는데, 5세기 이후부터 단(旦)과 비슷하게 생긴 차(且)로 변
해 아차산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한문은 비슷한 모양으로 인해 금석문(金石文)과 판각인쇄
에서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음은 같지만 한자만 달리 하여 '峨嵯山城'이라 쓰는 경우
도 많았으나 문화재청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한자로 선을 그으면서 아차산성(阿且山城)을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하여 아차산의 공식 한자 표기인 '峨嵯山'과 달리 산성은 예전 한자로 따로 놀고 있는 것이다.
아차란 이름 외에 장한성(長漢城), 광장성(廣壯城)이란 별칭도 있었다.

4세기 후반. 고구려의 위대한 군주,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재위 392~413)이 한강 이북을 말
끔히 장악하면서 이곳은 백제의 심장을 겨낭한 고구려의 화살과 같은 곳이 되었다. 위례성으
로 여겨지는 서울 강동/송파 지역이 훤히 바라보이는 잇점을 지닌 아차산을 흔쾌히 활용한 것
이다.
그렇게 위례성(한성)을 새가 땅을 바라보듯 감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중, 개로왕(蓋鹵王)이 무
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국력을 소모하고 고구려의 최대 라이벌이자 동시에 백제 자신의 라이벌
이기도 했던 북위(北魏)에게 사신을 보내 같이 고구려를 도모하자고 요구했다. <백제는 동성
왕(東城王) 시절에 산동반도를 둘러싸고 북위와 크게 경쟁을 벌여 북위의 수십 만 기병을 보
기좋게 묵사발을 만들기도 했음>
허나 그 소식을 들은 장수태왕(長壽太王, 재위 413~491)은 크게 발끈하여 3만의 군사를 휘몰
아 한성<漢城, 위례성과 하남위례성을 한성이라 부름>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화공(火攻)을 이용하여 한성 성문과 도성을 불태웠으며, 개로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치던 중, 자신의 장수였던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을 만났다. 이들
은 개로왕의 미움을 받아 고구려에 투항했는데, 왕을 잡고자 길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투항 사실을 알리 없던 개로왕은 크게 안심을 했으나, 그들은 왕에게 절을 하더니 바
로 그의 얼굴을 향해 침을 3번 뱉고 온갖 육두문자를 요란하게 내뱉은 다음 포박해 고구려에
넘겼다.

고구려의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성에서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왜열도와 중원대륙의 무수
한 영토를 거느렸던 백제의 도읍지, 위례성(한성)은 철저히 파괴되어 이 땅에서 영구히 지워
지고 말았다. 바로 장수태왕의 그 만행으로 조선 이후 지금까지 위례성을 찾느라 그야말로 진
땀을 빼고 있는 것이다.


▲  아차산성 서벽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한 고구려는 아차산성을 보조하고 한강, 중랑천, 서울 동부, 구리 지
역을 효과적으로 수비하고자 아차~용마~망우산 산줄기에 조그만 보루를 주렁주렁 달아놓았다.
이곳에 설치된 보루는 발견되지 않은 것까지 고려하여 최대 30개 정도로 여겨지며, 이들 보루
는 북쪽으로 봉화산(烽火山)과 수락산, 사패산(賜牌山), 불곡산, 양주, 연천 지역까지 이어지
고 있는데, 주목할 점은 오직 서울과 경기 북부에서만 발견되는 고구려의 독특한 요새라는 점
이다. 그만큼 이 지역의 중요성이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평원왕(平原王, 재위 559~590) 시절 온달(溫達)이 이곳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
하며, 이후 신라가 접수하여 고구려를 막는 요충지로 삼았다. 한때는 북한산성(北漢山城)이라
불리기도 했고, 7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종종 건드렸으나 결국 점령하지 못했다.
허나 8세기 이후 아차산의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서서히 버려지기 시작했고, 장대한 세월과 자
연에 의해 그 견고하던 산성이 헝클어지면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신세가 되었다.


▲  아차산성 안내문의 내용들

산성의 둘레는 약 1,125m로 산허리에 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테뫼식 성이다. 아차산 남쪽 자락
에서 워커힐 뒤쪽까지 이어져 있는데, 동문터와 남문터, 서문터, 수구(水口)터, 곡성(曲城)터,
장대(將臺)터, 건물터, 온달장군이 마셨다고 전하는 우물이 남아있다. 장대(장대터)는 전시에
는 장수들 지휘소로, 평상시에는 제사 공간으로 쓰였다고 하며, 커다란 왕개벚꽃나무가 자라
고 있는데, 덩치로 봐서 100~200년 정도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벽 높이는 평균 10m, 성 내부 면적은 약 103,375㎡이며, 광나루까지 성을 쌓은 흔적이 발견
되었으나 워커힐이 들어서면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997년과 1999년 광진구에서 부분 발굴조사를 벌여 고구려와 백제, 신라 토기와 기와파편, 흙
으로 만든 인물상, 철로 만든 솥과 쟁기날 등을 건졌고, 신라의 북한산성이 대략 이곳임이 밝
혀졌다.
그래도 아직 건드리지 못한 부분이 많아 애태우던 중, 2015년 광진구가 문화재청의 예산을 지
원받아 한국고고환경연구소와 함께 아차산성 남벽과 배수구 일대 4,575
를 대상으로 발굴조
사를 벌였다. 그 결과 여러 흥미로운 존재들이 햇살을 보았는데, 고구려의 연꽃무늬 기와장식
인 '연화문와당'이 나왔고 (인근 홍련봉1보루에서 발견된 와당과 비슷한 형태임) 남벽 90m 외
벽에서는 신라 건축의 특징인 외벽 보축(補築) 시설과 물을 내보내는 출수구 3곳, 내벽에서는
입수구 2곳이 나왔다. 또한 망대터에서는 내외성벽을 비롯한 치성(雉城)과 방대형 시설이 나
왔으며, 신라의 연화문와당 10여 점과 '북한산성'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신라의 북
한산성이 이곳임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다.

2018년 7월에는 망대터 일대에서 건물터 10동과 백제와 고구려, 신라, 고려 초기 토기와 기와
등 유물이 발견되었다. 특히 깨진 구리거울 조각과 모형 철제마(鐵製馬), 철촉 등의 철기류도
나와 삼국시대 때 산성 안에서 이루어진 제사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외에 남
벽 일대에서 사다리꼴 형태의 집수시설과 목간, 씨앗 등이 나왔고, 집수시설 위에 닦여진 배
수로에는 부여 부소산성 출토품과 비슷한 대형 철촉이 나옴)

허나 아차산성의 적지 않은 부분이 워커힐 사유지로 묶여 있어 아직까지도 조사하지 못한 부
분이 많다. 산성은 물론 그 주변까지 싹 뒤집으면 보다 많은 유물과 숨겨진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인데 그 점이 몹시 아쉽다.

1999년 이후 산성을 복원 정비하였고, 그들의 건강과 사유지 보호를 위해 산성 주변에 철책을
둘러놓아 출입을 막고 있다. 그래서 이 땅에 널린 산성(山城) 유적 중의 거의 유일하게 접근
이 통제된 까칠한 성곽이 되었다. <휴전선과 민통선 지역의 성곽 유적은 제외>
2014년 이후부터 서울시와 워커힐이 협의하여 산성을 개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나 아
직까지도 감감무 소식이다.

서벽과 북벽 일부, 남벽 일부는 산길에서 휴전선 너머를 바라보듯 만날 수 있으나 그 외는 어
림도 없으며, 산성을 가리고 앉은 수풀을 싹 밀어버려 예전보다 단정한 모습이 되었으나 대자
연의 위대한 힘으로 금세 수풀이 자라나 성벽을 가리려고 드니 그나마 서벽만 제대로 눈에 넣
을 수 있다.
다만 겨울 제국(帝國) 시절에는 겨울이 수풀을 알아서 털어가기 때문에 북벽과 남벽을 그나마
제대로 살필 수 있다.

아차산성 내부를 정당하게 둘러보고 싶다면 '아차산 역사문화홍보관(아차산 생태공원에 있음)'
을 찾거나 '한강문화재연구원'에 도움을 청해보자. 나도 아직 아차산성 내로 들어간 적이 없
다. 그곳이 민주화(?)되기를 몇 년째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만 그 민주화란 것이 참으로 힘들
다. 마치 이 땅의 민주화가 힘들게 자리를 잡은 것처럼 말이다.

* 아차산성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5-11 (워커힐로 177)


▲  아차산성 서벽앞 산길 - 철책 너머가 금지된 성, 아차산성이다.

▲  아차산성 북벽 - 철책과 자연에 꽁꽁 감싸여 들어갈 틈이 없다.

▲  아차산성과 고구려정 사이에 자리한 낙타고개

아차산성 서쪽 옆구리를 지나면 낙타고개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성이 있는 남쪽 봉우리와 1
루로 이어지는 능선 사이에 쑥 들어가 있는데, 그 모습이 낙타의 목이나 등부분의 굽은 모양처
럼 생겼다 해서 낙타고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보루가 주렁주렁 달린 아차/용마산 주능선으로 이어지며, 서쪽은 친
수계곡, 동쪽은 구리시 아천동이다.



♠  아차산 주능선 더듬기

▲  무덤 갈림길

낙타고개에서 아차산 정상까지는 야간 등산에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길이 잘 닦여져 있다.
그 길을 조금 가면 석축 위에 둥지를 튼 조그만 무덤이 나오는데,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린
다. 아차산 정상과 주능선, 보루가 목적이면 왼쪽 계단길을, 대성암(범굴사)과 구리 지역을
원한다면 오른쪽 길로 가면 된다.


▲  무덤 갈림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무덤 갈림길에서 주능선을 오르면서 뒤와 옆을 살짝 돌아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그러면 아주
기가 막힌 조망이 두 눈으로 바로 달려올 것이다. 아차산이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 주
변이 거의 평지라 일품 조망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장쾌한 조망은 아차산 정상을 지나 용마산
산줄기까지 이어지는데, 이 일품 조망 때문에 고구려가 보루를 잔뜩 달아 군사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1)
광진구와 송파(잠실), 강남, 대모산 지역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2)
아차산성이 있는 아차산 남쪽 봉우리와 강동, 송파 지역

▲  해맞이광장 주변에서 바라본 천하 (3)
한강과 구리, 암사대교, 강동구, 하남시 지역

▲  광진구 해맞이광장 비석

무덤갈림길과 1보루 사이에 해맞이광장이 조촐하게 터를 닦았다. 이곳은 묵은 1,000년이 지고
새로운 1,000년이 도래한 2000년 1월 1일 아침 7시, 광진구청에서 하늘과 가까운 이곳에서 새
천년 해맞이 행사를 가지며 그것을 기리고자 비석을 세우고 해맞이 광장으로 삼은 것이다. 여
기서는 지는 해는 물론 뜨는 해도 맞이할 수 있으며, 광진구가 야심차게 닦은 서울의 주요 해
돋이 성지로 매년 1월 1일 아침마다 해맞이 행사가 절찬리에 열린다. (그때는 산이 무너질 정
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정신이 하나도 없음)


▲  아차산1보루 - 사적 455호

해맞이광장을 지나면 두툼히 살이 오른 아차산1보루터가 모습을 비춘다. 이곳이 넘버원 1보루
가 된 것은 별 이유 없다. 남쪽을 기준으로 발견된 순서대로 나열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해발 250m에 자리한 1보루는 봉우리를 활용해 닦은 것으로 1994년 발굴조사 때 고구려 토기가
여럿 나왔다. 동쪽과 남쪽에서 보루 성벽이 확인되었는데, 보루의 정체가 알려지기 훨씬 이전
부터 보루의 남쪽 성벽 흔적을 밀어버리고 산길을 냈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보루 주변
에 나무 목책을 둘러 접근을 통제하고 그 옆구리에 우회길을 내었다. 그러다가 2015년 이후로
다시 보루를 개방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아차산 보루 중 가장 남쪽으로(홍련봉 보루는 제외) 5보루와 함께 아차산성과 아차산 정상 사
이를 이어주는 요새였으며, 동쪽과 남쪽, 서쪽이 확 트여있어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특히 5보루와 남쪽 해맞이광장과 더불어 서울의 이름난 해돋이 명소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1
월 1일만 되면 사람들로 완전 북새통을 이룬다.

이곳에 들어앉아 천하를 굽어봤을 1보루는 장대한 세월의 매서운 흐름과 대자연의 오랜 괴롭
힘 앞에 완전히 녹아내리고 그 터만 겨우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줄 따름이다.
5보루와 함께 보루의 구체적인 생김새는 아직 파악되지 못했으나 고구려의 축성 양식과 복원
된 4보루를 흔쾌히 참고해 보루의 모습과 거기서 머물던 고구려 군사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
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폐허의 현장이고, 그들의 모습을 남긴 뚜렷한 사진
이나 기록도 없으니까 말이다.

고구려는 아차산을 비롯하여 홍련봉, 구의동, 자양동,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 봉화산, 사패
산, 천보산, 양주 불곡산, 연천 지역까지 많은 보루를 설치하여 아차산성 등의 주요 성을 보
조하며 주변 지역을 지켰는데, 이들 보루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아차산 보루 6곳, 용마산
보루 7곳, 망우산 3곳, 수락산 1곳, 홍련봉 2곳을 '아차산 일대 보루군'으로 한 덩어리로 묶
어 국가 사적 455호로 삼았다.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천하 (광진, 성동구, 동대문구 지역)

▲  아차산1보루에서 바라본 아차산5보루

▲  아차산5보루 - 사적 455호

아차산5보루터는 해발 267m 봉우리에 둥지를 튼 보루로 둘레 158m, 내부 면적은 1,818㎡ 정도
이다. 봉우리를 활용하여 보루를 다졌는데, 보루 성벽은 죄다 사라지고 겨우 흔적 일부만 남
아있는 상태이다. 북쪽 비탈면에 석축 일부가 남아있으나 보존을 위해 흙으로 덮었으며, 보루
를 잡아먹은 봉우리는 예전보다 다소 살이 두툼해진 상태이다.

그의 정체가 밝혀지기 이전에는 주능선 산길이 보루 복판을 가로질러 흘러갔으나 보루임이 밝
혀진 이후에는 그의 건강을 위해 서쪽에 우회길을 내었다. 다른 보루와 달리 신라 후기 토기
가 여럿 출토되었고, 봉우리 모습이 마치 신라 스타일의 고분과도 비슷해 이를 두고 신라(新
羅)가 기존의 고구려 보루를 밀어버리고 무덤을 쓴 것으로 보는 견해도 덧붙여 전해온다. 그
러고보니 정말 신라 무덤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나 신라는 산능선에 무덤을 잘쓰지 않는 편이
라 이 역시 설에 불과하다.

5보루터는 쿨하게 개방되어 있다. 길이 봉우리 남북으로 닦여져 있으며, 그 봉우리에 올라서
면 1보루를 비롯해 아차산 능선과 한강,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 광진구, 강남구, 대모산, 구
리시, 남양주시 서부 지역, 하남시 지역이 훤히 시야에 잡혀 왜 이곳에 보루를 쌓았는지 십분
이해가 된다.


▲  아차산5보루 남쪽 부분

▲  아차산5보루터 돌탑에서 바라본 천하
푸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구리시와 남양주시(도농, 금곡, 덕소), 서울 강동구,
하남시가 사이좋게 시야에 들어온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5보루를 지나 계속 주능선을 고집하면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로 지정된 키 작은 소나무를 만
나게 된다.
아차산이 광진구의 소중한 꿀단지라 광진구가 그에게 들이는 정성은 참 대단하다. 그만큼 기
대하는 것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 정성의 하나로 2009년 가을, 아차산에 있는 소나무
중 괜찮은 것을 골라 아차산의 새로운 명물로 키우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바로 이 나무가 그
대상이 되어 명품소나무 1호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바위 틈에 단단히 뿌리를 내려 천하를 굽어보고 있는데, 가지는 굴곡이 자연스러
우며, 피부가 붉고 아름다워 단아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나무의 나이는 40~50년 남짓으로
여겨지며, 나무 곁에 천하를 굽어보게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  아차산 명품소나무 1호 조망대에서 바라본 용마산, 아차산 북쪽 줄기

▲  아차산 명품소나무 2호

명품소나무 1호를 지나면 바로 명품소나무 2호가 나온다. 이 나무는 밑둥부터 여러 가지로 솟
아 올라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모습이 마치 중원대륙과 만주를 제패하던 고구려의 기상을 담
았다하여 명품소나무 2호로 지정되었다. 그 역시 1호 나무와 함께 광진구청의 보살핌을 받으
며 아차산의 차세대 명물을 꿈꾼다.


▲  명품소나무2호에서 아차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능선길

▲  아차산의 정상인 아차산3보루 유적 - 사적 455호

명품소나무 2호에서 6보루 입구를 지나면 아차산3보루가 있는 너른 봉우리가 나온다. 이곳은
아차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으로 해발 295.7m(296m)이다.

3보루는 아차산에 깃든 보루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성벽 둘레는 약 450m, 내부 면
적은 약 6,500㎡로 여겨지며, 정상부에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어 아차산 일대 보루 중 가장 규
모가 크다. 2005년 보루 일부를 들추면서 배수로와 건물터, 기단, 성벽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디딜방아의 불씨로 여겨지는 존재가 나와 이곳이 아차산 식량 창고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하지만 겨우 보루터의 일부만 조사된 상태라 하루 속히 나머지를 모두 들춰야만 이곳에 정확
한 기능과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허전한 모습의 아차산3보루

3보루터를 품은 봉우리는 마치 대머리처럼 황량한 모습이다. 봉우리 외곽은 나무가 무성한데
반해 봉우리 일대는 땅에 바짝 붙은 잡초와 탈모된 흔적 마냥 풀이 벗겨진 흙색 길, 그리고
잘려진 나무 밑둥이 대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  아차산3보루터 봉우리 정상
정상 주변 나무는 보루터 보호를 위해 대부분 밀어버렸다.

▲  아차산3보루터 봉우리
이곳에 있었을 3보루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 상상의 나래를 한번
살찌워보자. 이것이 바로 아차산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이다.

▲  아차산3보루 돌탑
이곳을 스쳐간 사람들이 하나씩 얹힌 돌이 어엿한 돌탑으로 성장했다. 돌탑을
이루고 있는 돌의 상당수는 3보루 성돌과 이곳에 있던 건물터
주춧돌로 여겨진다.

▲  아차산3보루 남쪽 끝
남쪽 끝부분은 경사가 조금 각박하다.

▲  아차산3보루 북쪽 끝
계단을 이루고 있는 돌은 보루터의 일부이다.


아차산3보루에서 북쪽으로 10분 정도 더 가면 아차산4보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글의 분량상
본글은 여기서 끝. 4보루 이후부터는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아차산4보루 - 사적 455호

▲  아차산4보루 내부

▲  아차산4보루 저수시설터

* 아차산 소재지 -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광장동,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 2019년부터 본인 답사기에서 교통정보와 관람정보는 제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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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9년 1월 7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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