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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12.27 임진강을 건너 찾아간 통한의 땅, 파주 민통선(DMZ) 겨울 나들이 <임진각관광지, 자유의다리, 도라산역, 도라산전망대, 제3땅굴, 통일촌>
  2. 2015.01.10 이 땅의 유일한 오래된 쌍미륵불,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마애2불입상, 용암사)
  3. 2013.02.13 한겨울 산사 나들이 ~ 영조 임금의 효심이 깃든 파주 고령산 보광사

임진강을 건너 찾아간 통한의 땅, 파주 민통선(DMZ) 겨울 나들이 <임진각관광지, 자유의다리, 도라산역, 도라산전망대, 제3땅굴, 통일촌>

파주 민통선(DMZ) 나들이


' 파주 민통선(DMZ) 겨울 나들이 '
(임진각, 도라산역, 도라산전망대, 제3땅굴)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 (휴전선과 개성 지역)

▲  장단역 증기기관차

▲  경의선 도라산역

 



 

겨울 제국(帝國)이 무심히 깊어가던 연말 한복판에 파주(坡州) 민통선(DMZ)을 찾았다. 늦
가을이 저물고 겨울이 천하를 지배하면서 연말(年末)과 나이 1살 누적이란 우울한 선물을
뿌려대니 이때만큼은 참 기분이 꿀꿀하다. 이럴 때 딱 어울리는 곳은 천하에서 제일 예민
한 곳이자 민족의 통한이 깃든 남북의 경계선, 휴전선과 민통선 구역일 것이다.

민통선은 휴전선 주변에 그어진 금지된 땅으로 이들 지역에 주민들이 살고 있으나 외지인
의 출입은 아주 까다롭다. 그나마 신분증이 있으면 상당수 통과할 수 있지만 파주 임진강
이북(군내면, 진동면, 장단면)과 철원 북부, 화천 풍산리 이북 등은 신분증으로도 어림도
없다. 다만 파주 민통선 관광지는 제한적으로 개방되어 있어 임진각에서 DMZ관광이용권을
구입해 셔틀버스를 타고 둘러볼 수 있다. (단체 관광도 가능)



 

♠  남북분단이 빚은 안보관광지의 성지(聖地), 임진강(臨津閣)

▲  임진각

2001년 9월, 문산역에서 50년 가까이 끊겼던 남측 경의선이 임진강역까지 아주 살짝 연장되었
다. 임진강역은 임진각 바로 동쪽으로 연장 기념으로 발행된 기념승차권을 아는 경로를 통해
여러 장 입수하여 임진강역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임진각을 찾은 이후, 한참의 시간이 흐
르고 다시 그곳과 인연을 지었다.

간만에 찾은 임진각은 파주시 문산읍 임진강(臨津江)변에 자리해 있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
을 사이에 두고 금지된 땅, 민통선과 마주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안보관광지이자
민통선을 코앞에 둔 서울과 매우 가까운 북쪽 한계선으로 1972년 안보관광지로 야심차게 조성
되었다.
임진각은 윗 사진에 나온 건물 이름이지만 그 주변을 한 덩어리로 묶어 임진각(임진각 관광지
)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임진각 국민관광지','임진각 관광지','임진각 평화누리'로 많이 불
리지만 '임진각'이라 불러도 크게 상관은 없다.

이곳은 태생부터가 남북분단의 비애를 상징하는 안보 관광지라 그에 걸맞는 볼거리를 갖추었
다. 초창기에는 500만 이산가족을 위해 지은 망배단과 자유의다리, 경의선 철도중단점 표석,
종군기자비 등의 여러 조형물, 2000년에 조성된 평화의 종 등 오로지 분단의 매정한 현실을
생각하고 이산가족들의 한을 달래던 안보관광지의 역할만 하였으나 그것으로는 더 이상 관광
객을 유혹하기가 어려웠다.
하여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3만 평의 대형 잔디 언덕을 닦고 평화누리와 바람개비를
잔뜩 심은 바람의언덕, 음악의언덕 등을 지어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했다. 기존의 남북분단의
한이 깃든 우울한 이미지에서 조금이나마 화사한 이미지로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또한 매년
9월에는 세계평화축전(DMZ평화음악회)을 개최하는데, 이제는 인기가 상당하여 이때만 되면 사
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며, 2020년 9월에는 임진강 허공을 가로질러 금지된 땅으로 아주 살짝
들어가는 임진각평화곤돌라가 개통되었다.

임진각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한식당과 빵집, 커피집, 패스트푸드점, 편의점, 기
념품점, 옥상 전망대를 지니고 있다.

* 임진각관광지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마정리 1325-2 일대 (☎ 031-953-4744)


▲  자유의다리에서 바라본 임진각

▲  임진각 옥상 무료전망대 (옥상 전망대)

임진각 옥상 전망대는 무료임을 강조하고 있다. 허나 고작 3층 높이에 불과해 보이는 범위는
그리 넓지는 못하다. 이런 전망대로 감히 돈을 받는다면 이건 염치가 없는 것이지. 그러니 '
무료' 2글자는 좀 뺐으면 좋겠다.

이곳은 초창기부터 전망대로 쓰였는데, 임진각 관광지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현장이라 임진
각 일대를 훤히 조망하기에 좋다. 또한 맨눈으로 보는 조망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극복하고자
망원경을 넉넉히 깔아놓았는데, 그들은 오로지 500원짜리 동전만 밝히는지라 그것을 넣어야만
비로소 못생긴 눈을 뜬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두들겨 패도 깨어나지 않는다. 민통선 방향
인 북쪽과 서쪽에 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금지된 땅인 임진강 너머의 안부를
매우 궁금해 하기 때문이다.
허나 임진강 너머는 모두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겨우 강과 북쪽 땅을 가리고 앉은 산줄
기만 조망할 수 있다. 강 너머 산줄기는 비록 민통선이긴 하지만 엄연한 이 나라의 영토이니
괜히 이북 땅으로 오해하여 설레지 않도록 한다.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쪽 천하 ①
2002년에 개통된 경의선 임진강 철교와 6.25때 끊긴 옛 임진강 철교,
그들 너머로 민통선에 묶인 파주시 군내면 지역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자유의다리와 복원된 장단역 증기기관차 주변, 임진강, 경의선 철교,
파주시 군내면 지역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서남쪽 방향
망배단과 임진강, 그리고 무늬만 남은 파주시 장단면 지역(임진강 너머 지역)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임진강 물을 먹고 자라는 마정리 평야 (임진각 동남쪽)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⑤ 북쪽 방향
임진각 주차장과 바람의 언덕, 그리고 저 멀리 통일대교까지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⑥ 동북쪽 방향
평화랜드, 평화누리, 음악의언덕, 자유인터체인지(통일대교 남쪽) 등

▲  임진각 옥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⑦ 동쪽 방향
임진강역과 철도중단점 등

▲  이산가족의 한을 먹고 자란 망배단(望拜壇)

임진각 서쪽에는 이산가족의 한과 눈물을 어루만지느라 여념이 없는 망배단이 있다. 임진각이
조성된 이후 500만이 넘는 실향민들은 이곳을 찾아와 잃어버린 땅 북녘에 둔 가족과 부모를
그리워하거나 제사를 지냈다. 특히 설과 한가위(추석)에는 그들을 위해 합동 제단(祭壇)이 설
치되어 수백 명이 단체로 차례를 지냈는데, 설에 지내는 것을 연시제(年始祭), 추석에 지내는
것을 망향제(望鄕祭)라 불렀다.

이렇게 실향민들의 넋두리 현장이 된 이후, 임시 제단이 아닌 완전한 제단을 설치해줄 것을
염원하는 이들이 늘자 파주군과 내무부, 이북5도청이 5억의 돈을 들여 1985년 9월 26일 지금
의 망배단을 닦았다.
120평 대지에 제단과 향로를 두고, 중앙에 망배탑을 세웠으며, 그 좌우에 7개의 화강석 병풍
을 두어 병풍의 역할을 맡겼다. 이 병풍석에는 북쪽의 여러 문화유산과 풍물, 산천의 특징을
복합적으로 표현해 실향민의 상념을 달래주고자 배려했다.

허나 망배단 역시 남북분단이 빚은 통한의 산물이다. 그의 역할과 기능이 계속 이어질수록 이
산가족과 이 땅의 사람들의 한은 더욱 깊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속히 이 땅이 통일되어 망
배단의 역할이 완전히 끝나게 되기를 고대해본다. 그의 생명이 쓸데없이 늘어날수록 한은 정
비례로 늘고 그 생명이 끝날수록 그 한은 반비례가 된다. 하지만 빠른 통일은 힘들 것 같다.
남과 북의 위정자들이 죄다 썩어문드러졌고, 주변 오랑캐들도 우리의 통일을 반기지 않기 때
문이다. 그러니 망배단은 더욱 고개를 들 것이다.


▲  동쪽에서 바라본 자유의다리 - 경기도 지방기념물 162호

망배단 뒷쪽에는 임진각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자유의다리가 있다. 연못에 발을 담군 이 다
리는 임진각과 임진강 사이의 낮은 곳에 세워져 있는데, 원래 임진강 경의선 철교에 임시로
놓인 것을 임진각 관광지 조성 이후, 연못을 닦고 이곳으로 옮겼다.

서울과 신의주(新義州)를 잇던 경의선은 경부선(京釜線)과 더불어 2개의 철길로 이루어진 복
선(複線) 철도이다. 그러다 보니 임진강에 상행, 하행 2개의 철교가 있었으나 6.25때 폭격으
로 파괴되어 다리 기둥만 멀뚱히 남아있었다. 그렇게 다리가 파괴된 1951년 이후 경의선은 완
전 두 동강이 나버리게 된다.
이후 국군이 이곳을 탈환하면서 하행선 철교를 사람과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다리로 보수했
으며, 1953년 남한과 북한이 서로 포로를 교환할 때 기둥 위에 철교를 복구하고 그 남쪽 끝에
나무와 철제를 혼합하여 임시 다리인 지금의 자유의 다리를 놓았다. 다리 부근 노상리 쪽자연
마을의 이름을 따서 '독개다리'라 불렀으나 북한에 잡혀간 포로 12,773명이 이 다리를 건너서
귀환했기 때문에 자유를 찾았다는 의미로 '자유의다리'라 불리게 되었다. 그 시절 포로들은
차량으로 철교까지 와서 걸어서 이 다리를 건넜다.

판문점(板門店)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더불어 6.25의 비극을 상징하는 다리로 썩 유
쾌하지 않은 역할과 의미를 지녔다. 허나 어찌하랴. 시대를 잘못 탔으니 말이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회담 대표들이 이 다리를 건너 왕래를 했으며, 이후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고, 기존 철교는 육중한 다리 기둥만 남아있다.


▲  상판이 나무로 이루어진 자유의다리

자유의다리 길이는 83m, 폭 4.5m, 높이 8m 내외로 나무를 짜맞추어 만들었는데, 힘을 많이 받
는 부분은 철재를 섞어서 사용했다. 임시로 가설된 다리라 솔직히 작품성이나 개성은 없으나
6.25시절 '자유로의 귀환'이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현장으로 그 시절을 나타내는 산증인이
다. 그래서 지방기념물의 적당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임진각에 왔다면 꼭 거닐어야 되는 다리로 임진강과 접한 서쪽은 막혀있다. 하여 다시 제자리
로 돌아와야 되며, 막힌 곳을 넘어가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그 너머는 민통선 구역이기 때문
이다. 막힌 곳에는 통일을 염원하는 이 땅의 사람들이 달아놓은 온갖 종이와 천, 태극기 등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통일 염원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보여준다. 허나 열기가 아직은 빈약한지
휴전선을 녹이지는 못하고 있다.


▲  자유의다리의 막다른 곳 (임진강 방향)

다리는 물줄기로 끊어진 양쪽을 이어주는 존재이다. 허나 이곳은 한쪽만 열려있고, 다른 한쪽
은 막혀 있어 다리의 기능을 온전히 하지 못한다. 마치 분단된 이 땅의 현실을 상징하듯 말이
다.
다리를 건넌 이들은 여기서 강제로 발길을 돌려야 되니 그 아쉬움을 종이와 천에 담아 봉쇄된
벽에 걸어두었다. 저 막힌 곳을 뚫고 북쪽으로 뻗어 나가야 되거늘 이렇게 70년 이상 묶여있
으니 참으로 답답할 따름이다,


▲  자유의다리 (막다른 곳에서 바라본 모습)

▲  장단역에서 가져온 낡은 철로

자유의 다리 북쪽에는 낡은 철로가 짧게 재현되어 있다. 이들은 민통선에 갇힌 옛 장단역(長
湍驛) 부근에 버려져 있던 레일과 침목을 가져와서 재활용한 것으로 침목 위에는 경의선의 민
통선 이북 철도역 28개(임진역, 개성역, 사리원역, 평양역, 신의주역 등)의 이름과 임진강역
부터의 운행 거리가 적혀 있어 분단의 아픔과 미답지 경의선 이북(以北) 구간에 대한 호기심
을 크게 자극시킨다.

▲  완전 고철이 되어버린 레일 변경 레버

▲  장단역 부근에서 가져온 레일과 못


▲  장단역 증기기관차와 재현된 역 플랫폼

정말 오래간만에 발을 들인 임진각에는 눈에 익지 않은 낯설은 존재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중
에는 분단의 지독한 현실과 남북의 해묵은 악감정만큼이나 낡고 빛바랜 존재가 아른거리고 있
었으니 바로 민통선에서 가져온 장단역 증기기관차와 앞서 언급한 철로였다.


▲  장단역 증기기관차 - 국가 등록문화재 78호

임진각의 새로운 명물로 등극한 장단역 증기기관차는 자유의다리와 더불어 임진각의 6.25전쟁
상징물이다.
이 기관차는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최고 속도는 80km, 기관차 길이 15m, 폭 3.5
m, 높이는 4m이다. 산악 지형에 최적화된 화물운송용으로 국군이 38선을 넘어 신나게 북진을
하던 1950년 늦가을 한복판에 군수물자를 바리바리 싣고 개성에서 평양으로 칙칙폭폭 달리던
중, 중공 개잡것들이 북한을 돕고자 전쟁에 불법 개입하면서 황해도 평산군 한포역에서 눈물
을 머금고 바퀴를 돌렸다.
남쪽으로 후진하던 열차는 장단역에 멈춰섰는데, 북한과 중공 잡것들이 개성 부근까지 내려온
상태라 국군과 연합군은 이 열차가 그것들에게 쓰일 것이 우려되어 군수물자만 서둘러 챙기고
폭파시켰다. (당시 이 열차 기관사는 한준기) 이때 증기기관차 1량만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1953년 휴전까지 장단, 파주 지역에서 치열하게 격전이 벌어지면서 다시금 무거운 상처를 입
었다. 그렇게 하여 그의 몸에는 1,020여 개의 총탄 자국이 박혔으며, 바퀴까지 휘어져 당시의
참혹했던 상황을 아련히 전해준다.

2006년 경기도는 이 열차를 주목하고 수풀을 뒤집어 쓴 채 웅크리던 증기기관차와 파편 292점
, 레일 관련 파편 132점을 수습해 화물차를 통해 임진각 보존센터로 옮겼다. 화통에서 자라던
뽕나무도 같이 가져와 그 곁에 심었으며, 녹슨 열차를 복원하고자 포스코에 의뢰하여 철제 문
화재 보존처리 기술과 재정지원을 받아 2년 동안 정밀조사, 구조보강, 녹 제거, 보호코팅제
도포 등을 거쳐 2008년 12월 보존처리가 마무리 되었다.
이후 자유의다리 북쪽에 기관차가 머물 자리를 닦아서 2009년 6월 25일 이곳으로 옮겨 천하에
공개했으며, 이때 장단역 부근에서 가져온 레일도 일부 복원했다.


▲  장단역 증기기관차 구제 과정을 담은 사진
버려진 기관차를 감싸던 수풀을 모두 제거해 화물차에 싣고 통일대교를 통해
임진각으로 가져오는 과정이 담겨져 있다.

▲  장단역 증기기관차의 뒷모습
그의 이름이 '장단역 증기기관차'가 된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바로 장단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경의선의 주요 역이자 장단군(長湍郡)의 관문이던 장단역,
허나 남북분단 앞에 '장단군'이란 고을은 아작나서 사라지고
지도에서도 자취를 감추었다. (파주시에 통합됨)

▲  장단역 증기기관차의 앞 모습
기관차 옆에 역 플랫폼을 설치하여 '임진각역'으로 삼았다. 물론 무늬만 역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기관차의 보호를 위해 일종의 지붕을 설치하여
비와 바람, 햇살로부터 그를 지킨다.

▲  하얀 피부로 이루어진 임진각역 표시판

장단역 증기기관차의 거처로 지어진 임진각역, 여기서 고려의 옛 도읍인 개성(開城)까지는 불
과 22km, 서울역에서도 겨우 75km로 천안보다도 가까운 거리이다. 허나 남북분단의 현실이 여
기서 개성까지의 체감 거리를 22억km 이상으로 늘려놓아 차라리 지구에서 떨어진 달나라로 가
는 것이 더 속이 편할 정도이다. 그만큼 개성은 우리에게 그림의 떡 같은 존재가 되었다.


▲  세월이 증기기관차 화통에 달아준 훈장, 뽕나무

50년 이상 버려졌던 증기기관차 화통에는 장대한 세월이 심어놓은 뽕나무가 감쪽같이 뿌리를
내렸다. 그 많은 자리 중에 왜 하필이면 연기가 나오는 화통에 둥지를 틀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과 증기기관차의 애환을 먹으며 어엿한 나무로 자라났다.

2006년 증기기관차를 수습하면서 같이 임진각으로 갖고 나와 이곳에 심었는데, 만약 열차 주
변에 뿌리를 내렸다면 이런 대접까지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제자리에 그냥 두었거나
열차 수습 과정에서 밀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증기기관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화통에 자
리를 닦은 탓에 이렇게 임진각에서 존재감도 드러내고 대우도 받는 것이다. 사람이든 무엇이
든 자리를 잘 잡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자리 하나에 팔자가 싹 바뀌니 말이다.


▲  증기기관차 주변에서 가져온 철길 레일과 파괴된 열차의 파편

▲  장단역 증기기관차 주변에서 바라본 임진강 경의선 철교

▲  통일을 꿈꾸는 평화의 종

장단역 증기기관차 북쪽에는 평화의 종을 머금은 커다란 종각(鐘閣)이 있다. 이 땅의 평화통
일을 염원하는 장소에 어울리게 '평화의 종'을 하나 장만하여 북쪽을 향해 은은한 종소리를
날려보내는데, 1999년에 조성하여 2000년 1월 1일 0시 첫 타종식을 치뤘다.
21세기 첫 날에 선보이는 종에 걸맞게 무게는 21톤이며, 높이 3.4m, 지름 2.2m로 그를 품고
있는 종각은 면적 21평, 높이 12.2m이다.

이 종은 누구든 칠 수 있으나 1회 타종에 10,000원의 돈을 줘야 된다. 타종 시간은 10시부터
17시까지이며, 임진각 관리사무소(☎ 031-954-0025)에 신청하면 된다.



 

♠  임진강을 건너 금지된 땅(민통선)에 들어서다. (도라산역)

▲  경의선 남측에 최북단 역, 도라산역(都羅山驛)

임진각에 발을 들이자 제일 먼저 임진각DMZ매표소를 찾았다. 거기서 민통선 관광 신청을 받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입장권을 구입하면 되는데, 가격은 12,200원(제3땅굴 모노레일 포함, 미
포함시 9,200원)이다. (신분증은 반드시 지참 요망)
DMZ관광코스는 제3땅굴과 도라산전망대, 통일촌직판장을 둘러보는 코스만 운영되고 있다. (평
일은 1일 10회, 주말 휴일에는 1일 12회 운행 / 매주 월요일과 주중 공휴일, 설날과 추석 당
일에는 운행하지 않음) 예전에는 도라산역도 필수로 경유했으나 지금은 가지 않으며, 허준(許
浚)묘와 해마루촌을 둘러보는 코스도 있으나 현재는 내놓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시간이 넉넉해 앞서 다뤘던 자유의다리와 장단역 증기기관차를 둘러보고 시간에
맞춰 돌아가니 민통선 내부로 우리를 안내해줄 셔틀버스가 막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버스에는 20여 명의 관광객이 탔는데, 양이(洋夷) 여인네 2두와 중공 잡것들 여러 두 등 외국
애들도 여럿 탑승했다. 우리를 비롯한 이 땅의 사람들도 그렇고, 외국 애들도 그렇고 다들 미
지의 땅으로 탐험가는 기분 마냥 들떠있었다. 분명 대한민국 영토가 맞고, 지구의 일부긴 하
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금지된 곳을 가기 때문이다.

시간이 되자 버스는 드디어 출발했다. 임진각 북쪽 자유인터체인지에서 1번 국도(통일로)로
진입하여 임진강에 발을 담군 통일대교로 들어섰다. 다리 북쪽 끝에 이르자 검문소가 민통선
으로 들어가는 차량들을 막으며 삼엄하게 검문을 하고 있었는데, 그 검문의 정도가 대충 보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철저하게 개미새끼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살피는지라 검문 시간
이 꽤 걸렸다.
드디어 우리의 셔틀버스가 검문 받을 차례가 되자 헌병 아저씨가 차에 올라 일일히 신분증을
확인했다. 외국 애들은 여권을 보여주면 된다. 만약 신분을 증명할 어떠한 증서도 없다면 여
기서 강제 하차를 당하거나 강제 회차를 당한다.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다.
참고로 통일대교를 건널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다리 이북에 사는 주민들과 학생, 거
기서 근무하는 군인이나 기타 근무자들, 개성공단 직원과 관계자 밖에 없으며, 차량 역시 신
고된 차량만 통행이 가능하다. 현지 주민이나 군인, 근로자 외에는 임진각에서 민통선 관광을
신청하여 셔틀버스로 이동하는 신분이 확실한 사람, 사전에 수속 절차를 밟은 단체 관광객을
태운 관광버스, 해마루촌이나 통일촌 사람들의 보증을 받은 민박이나 나들이, 업무 손님들은
그때에 한해서만 1회 출입이 가능하다.
그 외에 문산읍내(문산역)에서 대성동과 해마루촌으로 들어가는 파주시내버스 93번 시리즈를
타는 방법도 있으나 이 역시 현지 주민과 군인, 근로자가 아닌 사람은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통일대교 검문소에서 무조건 강제 하차를 당한다. 이 버스는 이 땅의 시내버스 중 민통선을
가장 깊숙히 들어간다. (판문점 직전 대성동까지 운행함)

검문이 끝나자 드디어 검문소를 통과했다. 검문소 주변은 혹시나 모를 북한의 침공에 대비해
그 넓은 도로에 장애물을 잔뜩 깔아놓아 잠시 지그재그로 움직여야 되는데, 그 구간을 지나면
통일대교 북단이다. 이제 임진강을 건너 미지의 땅, 민통선(민북선)에 완전히 들어선 것이다.
여기도 분명 우리나라가 맞는데, 왜 이렇게 낯설기만 한지. 잠시 다른 나라로 순간 이동을 당
한 기분이다. 창 밖 풍경도 이 땅에 흔한 풍경인데 말이다.

다리를 건넌 버스는 통일촌4거리를 지나 북쪽으로 1km 떨어진 3거리에서 좌회전하여 '희망로'
로 들어선다. 이 길로 들어서면 도라산역과 도라산전망대, 개성공단으로 이어지며, 쿨하게 직
진하면 대성동과 판문점으로 이어지나 아쉽게도 그곳은 가지 않는다. 관광 코스에는 없기 때
문이다.
넓게 닦여진 도로(6차선)에 비해 지나가는 차량도 별로 없어 무척 한산한데, 개성공단 검문소
직전에서 좌회전하여 도라산역 주차장에서 바퀴를 멈춘다. 운전사는 여기서 20분을 줄테니 시
간을 맞추라고 그런다. (외국어 방송 서비스나 가는 곳에 대한 설명은 일절 없음)

▲  도라산역과 통일아트 스페이스 현수막

▲  2008년 9월에 개방된 도라산평화공원
안내도

▲  한산한 도라산역 내부 (측면)

▲  도라산역 남북출입사무소

도라산역은 경의선 남측에 북쪽 종점이다. 원래는 개성을 지나 사리원, 평양, 안주, 신의주,
그리고 우리의 옛 땅인 요동반도와 요서, 하북성, 중원대륙까지 달려야 될 철로이지만 남북분
단으로 인해 문산~개성 구간이 끊겨 남과 북이 서로 다른 경의선을 가지게 되었다. 하여 경의
선 남측의 북쪽 종점은 부득불 문산역이 되었고, 임진각에 철도중단점을 설치해 고자가 되버
린 경의선을 위로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끊어진 구간에 드디어 희망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 문산~도라산
역 구간 복원 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2001년 문산~임진강역 구간이 개통되었고, 2002
년 2월 도라산역까지 완성되면서 경의선은 50여 년 만에 임진강을 넘어 개성 코앞까지 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북한 개성과도 이어지면서 반백 년 만에 경의선은 하나가 되었다.

이곳 이름이 도라산이 된 것은 부근에 도라산전망대를 품은 도라산이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마지막 제왕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이 고려에 항복하고 개경(開京)에 입조(入朝)를
했는데, 그는 이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인 서라벌(경주) 방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고 한다. 그래서 도라(都羅)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전한다.

도라산역은 어지간한 시,군 철도역에 버금가는 규모로 산뜻하게 지어졌는데, 예민한 위치에
자리한 탓에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편이며, 그 큰 규모가 무색하게 무지 썰렁하다. 한때 서울
역에서 이곳까지 새마을호 열차가 운행하기도 했고, 서울~도라산, 문산~도라산 통근형 열차도
들어왔었으며, 그들을 대신해 DMZ관광열차도 들어왔다. 심지어 경의중앙선 전철 전동차도 DMZ
관광열차 대신 잠시나마 이곳까지 바퀴를 들인 적이 있었다.
허나 지금은 북한의 태클과 관광열차의 노후화 등으로 열차의 기적소리가 사라진 상태라 무늬
만 남은 철도역 신세가 되었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오랫동안 끊어진 경의선을 하나로 이어 장차 통일과 대륙 진출에 대비하며
민통선 안에 근사한 역을 지은 것에 그 의미를 둔 현장이다.

* 도라산역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노상리 556


▲  도라산역 내부 (정면)

▲  통일의 피아노 - 분단의 상징으로 통일을 노래하다.
장소가 장소인만큼 그에 걸맞는 이름을 지닌 피아노. 그는 특이하게 철조망을
개조하여 피아노 현을 엮었다. 그러다 보니 소리는 일반 피아노보다 조금
못한데, 이는 현재 남북의 온전치 못한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  통일을 염원하는 온갖 포스터들
우리는 잃어버린 땅이 오지게도 많다. 당장에 북한도 그렇고, 대마도(對馬島)도
그렇고, 만주와 요동, 연해주, 산동반도, 화북 일대, 그리고 왜열도까지
어느 세월에 다 찾지??

▲  도라산역 기공식 때 김대중 대통령 내외의 기념 서명이 담긴 침목

▲  침목에 쓰인 김대중 대통령 내외의 서명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시여'
도라산역 기공식이 열린 역사적인 2000년 9월 18일, 김대중 대통령 내외가
이곳을 찾아 소감을 밝히고 침목에 이렇게 서명을 남겼다.

▲  미국 부시 대통령의 기념 서명이 담긴 침목

2002년 2월 20일 미국 부시가 도라산역을 방문하여 침목에 기념 서명을 남겼다. 한글로 써야
마땅하지만 건방지게도 꼬부랑 알파벳으로 휘갈겨 썼는데, 내용은 '이 철도가 한민족을 이어
주기를 염원합니다' 이런 뜻이다. 허나 현실은 미국 양이(洋夷)나 러시아 양이, 중공 개잡것
들, 왜열도 원숭이들이 합심해서 통일을 방해하고 있다.


▲  미국 부시가 남긴 친필 서명



 

♠  북쪽을 향한 몸부림, 도라산전망대와 제3땅굴

▲  군부대 스타일로 지어진 도라산전망대(도라전망대)

도라산역은 역사(驛舍) 내부만 둘러봤다. 열차를 타는 플랫폼은 문이 잠겨있었고, 주어진 시
간도 20분에 불과해 역 북쪽에 닦여진 도라산 평화공원은 어림도 없었다.

우리의 조급한 셔틀버스는 도라산전망대로 길을 잡았다. 잠깐 희망로를 타다가 서쪽으로 난
조그만 길로 들어서 꼬불꼬불한 언덕 길을 오른다. 길 좌우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해골 마
크가 그려져 있는데, 이들은 지뢰가 매설된 곳이다. 이곳 외에도 희망로 서쪽 상당수의 숲과
산도 해골마크가 염통을 건드리는 지뢰 천국이다. 특히 도라산전망대로 올라가는 고갯길 좌우
는 완전 지뢰밭이며, 전망대 주변 숲도 상당수 지뢰밭이다.
그러니 여기서 바퀴를 잘못 놀리는 날에는 완전 지뢰 밥이 되고 마니 완전 공포 특집이 따로
없다. 은근히 쫄깃해지는 염통을 부여잡고 있으니 버스는 무사히 도라산전망대 주차장에 바퀴
를 접으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비록 해발은 낮지만 'S'라인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갯길이라 만약의 실
수를 대비해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쌓인 날에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관람시간을 30분 정도 주었다. 아무래도 북쪽 땅이 바라보이는 곳이라 넉넉히 주
는 모양이다. 주차장에서 내리니 바로 군부대 스타일로 지어진 얼룩무늬의 도라산전망대(도라
전망대)가 나오는데, 이곳은 도라산(156m) 정상부로 전망대 건물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으며,
일반 관광객은 그 서쪽에 닦여진 전망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된다.

도라산전망대는 휴전선 서부전선 군사분계선 최북단에 있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민통선 전
망대로 기존 송악산OP(관측소)가 폐쇄되면서 1986년 이곳에 북한을 바라보는 전망대를 닦아
1987년 1월 속세에 공개되었다.
고려에 항복한 신라의 마지막 군주, 경순왕이 개경에 입조하여 늘 이곳에 올라 고향, 경주를
바라보며 눈물 짓던 곳으로 오늘날 우리들은 여기서 금지된 땅 북한을 바라본다. 아마도 경순
왕이나 우리나 바라보는 마음은 조금은 비슷할 것이다. 그리워하는 마음만큼은 같기 때문이다.

전망대의 규모는 803.31㎡로 관람석 500석, VIP실, 상황실, 주차장(30~40대) 등을 갖추고 있
으며, 이곳이 개성을 비롯한 북한 땅과 가장 가까운 현장이라 개성공단과 북한의 선전용 마을
인 기정동, 거대한 규모의 김일성 동상, 개성 동부와 송악산(松嶽山) 등이 바라보인다고 한다.
허나 우리가 갔을 때는 날씨도 조금 흐렸고 거기에 중공산 미세먼지까지 요란하게 점을 찍으
면서 겨우 개성 동부 지역만 확인했다.
사람들의 시력 한계를 극복하고자 망원경 34대도 깔려있는데, 임진각 옥상 전망대처럼 500원
을 요구한다. (일부는 무료임)
 
* 도라산전망대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 390-2 (제3땅굴로 308)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①
개성 동부 지역과 개성공단 방향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②
개성 동부 지역과 개성공단 방향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③
개성 남부 지역과 개성공단 방향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④
파주 장단면과 개성 남부 지역


▲  도라산전망대에서 바라본 천하 ⑤ 파주 장단면 지역 (남측 민통선)
개성공단 남북출입사무소(검문소)에서 개성공단, 개성으로 이어지는 도로(희망로)가
바라보인다. 예전에는 판문점을 거쳐 북으로 갔으나 개성공단 개발로 인해
새로운 길이 생긴 것이다. 허나 아무나 갈 수 없는 콧대 높은 도로이니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림의 도로에 불과하다.

▲  도라산전망대 앞 휴전선 구역

도라산전망대는 2018년 10월에 기존 전망대(군부대 스타일로 지어진 건물)에서 약간 북쪽으로
신축 이전되었다.

허나 우리에게는 이런 콘크리트 전망대는 필요 없다. 그까짓 기정동과 개성 일부 지역을 봐서
무엇을 하겠는가? 서로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이런 것에 경쟁하지 말고 속히 통일이 되어
서로를 완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이런 소모적인 것들에 치중해야 되
는지 모르겠다. 단순히 북쪽 땅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닌 '한때 우리에게도 이런 우울한 시절이
있었구나' 추억에만 머무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  DMZ마크를 내민 제3땅굴 입구

보면 볼수록 한숨만 나오는 북쪽 땅을 20여 분 바라보고 다시 셔틀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크
게 긴장을 하며 마치 뱀 허리에 올라탄 듯 도라산을 조심조심 내려와 북쪽에 자리한 제3땅굴
로 이동했다.
제3땅굴은 땅굴 파기 전문인 북한이 남침용으로 뚫은 4개의 땅굴 중 하나이다. 3번째로 발견
되어 제3땅굴이란 단순한 이름을 달게 되었는데, 문산에서 12km, 서울에서 불과 52km로 서울
에서 가장 가까운 남침용 땅굴이다. 만약 발견되지 못했다면 자칫 상당히 예민한 상황을 맞았
을지도 모르겠다.

땅굴이 발견된 경위는 대략 이러하다. 1974년 북한에서 남침 땅굴 측량기사로 일했던 김부성
이 귀순을 했다. 그는 판문점 근처에 땅굴이 있음을 알려 주어 1975년부터 주변을 샅샅이 뒤
졌으나 3년이 넘게 발견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8년 6월 10일, 시추공 중 1개가 폭발하면서 역갱도 굴착 공사를 벌여 10월 17일
에 판문점 남쪽 4km 지점에서 땅굴을 발견했다. 땅굴 폭은 2m, 높이 2m, 깊이 73m, 총길이는
1,635m로 휴전선에서 무려 435m나 남쪽으로 들어왔으며, 임진각에서 4km, 통일촌 민가에서 겨
우 3.5km로 1시간에 최대 3만의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규모였다.

땅굴이 발견되면서 휴전선 남쪽 170m 지점을 철저하게 틀어막았는데, 북한은 엉뚱하게도 남한
이 판 땅굴이라 주장하며 소심하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허나 땅굴을 뚫을 때 폭파 흔적이 남
쪽을 향해 있어 그들의 오리발을 무색하며 만들었다.
이후 땅굴 내부를 손질하여 2002년 5월 31일 민통선 관광지의 하나로 세상에 내놓았으며, 미
니열차인 평화호(모노레일)를 바깥에서 땅굴 내부까지 깔았다. 허나 수용 인원에 한계가 있어
서 2004년 지름 3m의 도보 관람로를 따로 닦았다. 또한 DMZ영상관과 상징조형물, 기념품과 간
식거리를 파는 판매장을 설치해 땅굴을 보조한다.

북한이 우리에게 던진 불쾌한 선물인 제3땅굴, 허나 이제는 DMZ명소의 백미이자 파주시의 꿀
단지로 부상하여 파주시와 국방부의 애지중지가 대단하다. 매일 수백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니
말이다. 불쾌한 땅굴이 돈을 부르는 황금 땅굴이 된 것이다.

* 제3땅굴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점원리 1082-1 (제3땅굴로 210-358)


▲  휴전선을 435m나 돌파한 제3땅굴의 위엄

▲  제3땅굴 지하로 인도하는 평화호 모노레일

제3땅굴에서는 무려 1시간에 관람시간을 주었다. 아무래도 파주 DMZ관광지의 갑(甲)과 같은
존재이고 땅굴 내부까지 들어갔다 나오는 시간이 있어서 넉넉히 준 것이다.

이곳은 모노레일 평화호를 타고 땅 속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그 이전에 부근에 마련된 사물함
에 속세에서 가져온 가방과 카메라 등의 소지품을 반드시 넣어두고 가야 된다. 신분증과 지갑
, 핸드폰 정도만 지참이 가능하여 부득이 모든 것을 그곳에 털어넣고 열쇠로 잠구었다. (열쇠
는 비치되어 있음) 그런 다음 별도로 마련된 안전모를 쓰고 평화호에 탑승한다.
안전모 같은 경우는 땅굴 높이가 2m라고 하지만 북쪽 인간들이 오로지 남침에 눈이 어두워 콩
을 볶듯이 판 것이기 때문에 불규칙한 높이가 많다. 하여 땅굴 내부를 거닐다 보면 여러 차례
땅굴 천정과 부딪친다. 그러니 소중한 머리를 위해서 안전모 착용은 필수이다.
또한 땅굴 내부는 사진 촬영이 통제되어 있으며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다. 그만큼 예민한 곳이
며, 휴전선 코 앞까지 들어간다.

땅굴에 대한 호기심을 품은 사람들을 가득 태운 평화호는 슬슬 기지개를 켜며 지하를 향해 느
릿느릿 이동했다. 속도는 사람 걸음과 비슷하거나 조금 느린 정도로 평화호가 들어가는 터널
은 동굴을 관광지로 닦으면서 남측에서 판 것이다. 그렇게 몇 분을 들어가면 드디어 제3땅굴
승강장에 이르고 여기서 땅굴에 임하면 된다.

속세에 개방된 땅굴 구간은 265m로 휴전선을 불과 170m 앞둔 곳까지 들어갈 수 있다. 더 들어
가고 싶지만 그곳은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고 그 너머는 세상도 눈을 돌린 공간이라 눈물을 머
금고 발길을 돌려야 된다. 땅굴 높이가 다소 들쭉날쭉하여 심심치 않게 안전모와 천장이 부딪
치는 소리가 났으며, 동굴 통로는 2명이 지나다닐 정도의 폭이라 천정만 조금 조심하면 별무
리는 없다.
그렇게 휴전선 앞까지 갔다가 돌아나오는데, 여기서 많은 이들이 아쉬워한다. 말로만 듣던 휴
전선이 코 앞이라니 저기만 넘으면 북한인데, 왜 우리는 가지를 못할까? 한숨은 커져간다. 외
국 잡것들이야 남의 나라 이야기라 상관없는 표정이지만 이 땅의 민중들의 표정은 그렇지가
않다.
땅굴 내부는 지하라 시원하며, 딱히 볼거리는 없다. 다만 평화호 타는 곳 부근에 샘터가 있는
데, 수질은 괜찮은 편이라 1모금 마셔보았다. 민통선 땅굴에서 섭취한 물 맛은 속세에서 마시
는 약수 맛과 비슷한 것 같으니 바깥 세상과 이곳이 같은 나라 땅이라서 그런 모양이다.

땅굴에서 나올 때는 걸어나올까 했으나 마침 평화호가 들어와 관광객을 쏟아내고 있어서 다시
그의 신세를 지며 바깥으로 나왔다. 다시 햇살을 보니 눈이 부시면서도 지옥에서 급히 나온
듯 너무 반가웠다. 아직 20분 정도의 시간이 있어서 땅굴 수식용으로 지어진 DMZ영상관을 둘
러보았다.
시간 관계상 영상물은 시청하지 않았고, 그곳에 전시된 제3땅굴과 휴전선 관련 전시유물, 디
오라마, 사진, 안내문만 둘러보고 나왔다. 그러니 시간이 거의 딱 맞는다.


▲  제3땅굴을 파는 북한 군인 디오라마 - 역시 땅굴의 귀재들

▲  파괴된 장단면사무소 건물에서 가져온 타일들

장단군(長湍郡)에 속해있던 장단면사무소는 6.25를 겪으면서 건물이 모두 파괴되어 겨우 지붕
만 남아있다. 그 자리 또한 민통선에 철저히 묶이면서 세상 뇌리 속에 잊혀진지 오래이다. 장
단군, 장단면이란 지명까지 더불어...


▲  판문점 모형도

6.25시절 여기서 남북이 휴전 협정을 맺었고, 이후로도 쭉 남북의 대화 창구로써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땅이 통일되는 그 순간까지 판문점의 존재는 미치도록 이 땅의 한을 키울 것이다.
제발 모형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면서..


▲  1968년 1.21사태 때 체포된 김신조
31명으로 이루어진 공비 패거리 중, 유일하게 체포되었다. (29명 사살, 1명 도망)

▲  옛 경의선 측량기준석 (2003년 7월에 발견됨)

▲  옛 경의선의 흔적들 (볼트, 레일, 스파이크판, 석탄 등)
2002~2003년에 수습된 옛 경의선의 아련한 흔적들이다. (석탄은 장단역에서 수습됨)

▲  통일 염원 조형물
쪼개진 2개의 덩어리를 하나로 합치고자 하는
염원이 깃들여져 있다. 아직도 저 염원과
시도는 현재진행형~~

▲  제3땅굴을 수식하는 DMZ영상관


제3땅굴과 DMZ영상관을 둘러보고 아직 1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서 기념품 판매점으로 넘어가
과자와 음료수를 섭취했다. 그렇게 파주시 재정에 약간 도움을 준 다음, 시간에 맞춰 셔틀버
스에 올랐다.

우리의 버스는 도라산과 제3땅굴을 모두 뒤로 한 채,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대성동과 해마루
촌까지 모조리 둘러보고 싶지만 현실은 그러지를 못한다. 언제쯤이나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
을까? 그렇다고 버스에서 몰래 이탈하여 개인 행동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곳은 민통선이라
인원 점검이 철저하며 만약 이탈했을 경우 군인들의 수색 표적이 된다. 또한 월북 시도는 하
지 않는 것이 좋다. 이 땅의 현실도 시궁창이지만 저 북쪽은 더 시궁창이다. 게다가 곳곳에
지뢰밭이 도사리고 있으니 산 속을 잘못 헤매다가는 정말 큰일 난다.

버스는 통일촌교차로에서 우회전하여 마지막 행선지인 통일촌 직판장 앞에서 그 육중한 바퀴
를 멈춰선다. 이곳은 백련리로 군내면 장단출장소 북쪽이다. 직판장 주변에는 백련리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직판장이란 이름 그대로 민통선 주민들이 생산한 장단콩과 온갖 채소 등을
판매하고 있으며, 기타 간식류와 음식(콩요리 중심)도 팔고 있다. 버스가 이곳에 들른 것은
여기서 지역 특산품이나 간식 등의 소비 행위를 하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주어진 시간은 10분 정도라 마을 구경을 할 시간도 없다. 마치 다른 나라의 마을 같
은 그러나 이 땅의 흔한 시골 풍경을 지닌 백련리와 장단출장소까지 둘러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마을을 아주 조금 둘러보긴 했으나 시간 제약이 발목을 잡고 외지인이 함부로 돌아댕
기면 안되는 곳이라 새가슴처럼 바로 돌아와 음료수 하나 사먹고 차에 오른다.

참고로 파주 민통선 지역에 지역 주민들이 살고 있다. 집과 경작지를 가지고 있는데, 나라의
예민한 곳에 살고 있어 제약은 많다. 허나 그만큼 혜택도 적지 않다. 또한 일정한 인구 수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전입이 불가능하며, 전출하는 가구가 있어야 그 수만큼 전입
이 가능하다. 그러니 은근히 특별한 동네이다. 허나 휴전선이 코 앞이니 늘 북한의 도발이라
는 폭탄을 안고 살아야 된다.

통일촌직판장을 끝으로 파주 DMZ나들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통일대교를 건널 때는 별 다른 검
문 절차 없이 통과시켜 주었고 다시 임진각으로 돌아왔다. 마치 오후 낮잠에서 꿈을 꾼 듯 끝
이 난 것이다.

임진각으로 돌아와 앞서 살피지 못한 바람의 언덕을 가고자 했으나 후배가 힘들다며 반대 의
사를 내세워 별 수 없이 주변만 둘러보고 임진강역으로 나왔다. 경의중앙선의 문산~임진강역
셔틀 전철을 탈까 했으나 평일은 2회, 휴일은 4회 밖에 다니지 않아서 역 앞에 있는 버스 정
류장에서 파주마을버스 058번을 타고 문산읍으로 나왔다.

058번은 노선 특성상 운천리와 장산리 일대를 정신 없이 강제투어를 시켜주고 문산읍내에 우
리를 내려놓는다. 이렇게 하여 연말 파주 민통선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임진각에 있는 경의선 철도 중단점과 증기기관차

임진각을 조성하면서 이곳에 경의선 철도 중단점을 세웠다. 허나 2001년까지 경의선 남측 종
점은 문산역으로 여기보다 더 남쪽이며, 2001년 이곳까지 개통되면서 실질적인 중단점이 되었
으나 2002년 이후 임진강 너머로 이어지면서 중단점의 의미는 퇴색되었다. 허나 열차를 타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곳의 북쪽 중단점이 이곳(임진강역)이니 그 의미로 질긴 목숨을 이어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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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3년 12월 13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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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유일한 오래된 쌍미륵불,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마애2불입상, 용암사)

 


' 가을의 길목에서 만난 쌍미륵불 ~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龍尾里 石佛立像)'

파주 용미리석불입상 (마애2불입상)
▲  용미리 마애2불입상 (용미리 석불입상)
(* 용미리 석불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용미리 마애2불입상'이나 오랫동안
용미리 석불입상, 용미리 석불이라 불렸으므로 본글에서는 이들 명칭을 같이 썼음)


 

늦가을이 한참 여물어가던 10월 한복판에 쌍미륵불로 유명한 용미리석불(마애2불입상)을 찾
았다.
파주시 문산, 파주, 광탄 지역에서 서울을 이어주는 서울시내버스 703번(문산 선유리↔서울
역)을 타고 고양시 동부와 해음령, 용미리 남부 지역을 지나 용미1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
으면 고개 중턱 숲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올 것
이다. 바로 용미리석불이다. 석불 밑에는 그를 후광으로 절을 꾸리는 용암사란 조촐한 절이
있다.


▲  용암사를 알리는 표석

용암사 입구에는 절을 알리는 표석(標石)과 문화재가 있음을 알리는 갈색 이정표가 있어 석불
을 찾은 중생을 인도한다. 경내 남쪽에는 넓게 주차장이 닦여있으며, 경내까지 계단이 이어져
있다.
경내로 가는 길은 푸른 옷을 걸친 숲길이다. 나무들이 베푼 산내음이 코끝을 강하게 스치면서
번잡한 마음과 뇌리가 말끔히 정화된 듯, 시원해짐을 느끼며, 다른 절과 달리 절의 정문인 일
주문(一柱門)이 없다. 허나 그런 문이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 울창한 숲길로 들어섬으
로서 부처의 세계로 발을 내디딘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 용미리 마애2불입상을 지키는 조그마한 산사(山寺)
~ 장지산 용암사(長芝山 龍巖寺)

▲  용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석등, 5층석탑

용미1리의 동쪽을 이루고 있는 장지산 서쪽 자락에는 용미리석불입상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조그만 산사, 용암사가 포근히 안겨 있다.

용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이다. 창건 시
기는 전해오는 것은 없으나 경내 북쪽에 용미리 석불이 있고, 석불 조성과 관련된 절의 창건 설
―절 이름은 전해오지 않음―가 전해오고 있어 석불이 만들어진 11세기로 여겨진다. 허니 창
건 이후 이렇다 할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1936년 파주 지역 유지들이 돈을 모아 지금
의 절을 세우고
승려 혜성(慧城)이 그 불사를 담당하여 절 이름을 용암사라 하였다.

절을 이루는 건물로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범종각, 요사, 삼성각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지
금의 절은 1970년대 이후에 새롭게 지어진 것이라 고색(古色)의 멋은 찾아 볼 수 없다. 허나 절
집의 규모가 작고 조촐하여 아늑하기 그지없으며 건물들도 절의 규모 마냥 적당한 크기를 지니
고 있어 두 눈에 넣고 살피기에 별 무리가 없다.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보전이 있고 그 앞뜰에 5층석탑과 석등 2기가 하얀 피부의 반질반
질한 맵시를 드러내 보인다. 석등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참배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국토
통일 천일기도 광명등(光明燈)이란 기나긴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뜨락 중앙에 자리한 5충석탑
은 예전에 대웅전을 중수했을 때 세웠다.
작지만 위엄이 서려 보이는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78년에 지어졌
다. 석가3존불을 중심으로 뒤에 석가후불탱화가 있으며 주변으로 지장탱화, 감로탱화 등의 불화
(佛畵)가 건물 내부를 화려하게 수식한다.

절의 가람배치는 하나의 금당(=법당, 대웅보전)과 하나의 탑이 있는 1금당 1탑 형식으로 금당과
탑이 용미리 석불을 닮아서 그런지 한결같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하긴 절이 들어앉은 지형을
보니 남향(南向)으로 법당을 세우기는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대웅전 주변에는 요사, 범종각이 있고, 석불로 가는 길목에 삼성각(三聖閣)이 있다.

▲  용암사 삼성각(三聖閣)
칠성과 산신, 독성을 봉안한 건물로 원래는
용미리석불에게 기도를 올리는 용도로
세워졌다.

▲  삼성각 부근 공터에 놓여진 돌들
1936년 지금의 용암사를 세울 때 지어진
건물의 주춧돌로 여겨진다.


▲  용미리 석불에서 떨어져 나온 7층석탑과 동자불상

삼성각 좌측에는 소박한 모습의 아담한 동자불상(=동자상)과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는 7층석탑이
나란히 자리를 지킨다. 그 사이로는 이들의 유래가 적힌 표석이 누워 있다.

이들은 원래 용미리석불과 한 몸으로 지내던 것으로 1980년대 이전 석불 사진을 보면 동자불상
은 석불의 오른쪽(석불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 어깨 위쪽, 7층석탑은 그 오른쪽 아래에 있었
다. 이들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시주로 달아놓은 것이라고 하며, 이승만의 어머니가 용미
리석불에서 아들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려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래서 1954년 이승만이 용암사
를 방문하여 남북통일과 자손을 염원하고자 그들을 만들었는데, 어이없이도 이것을 용미리석불
에 주렁주렁 단 것이다.

그 이후 동자상과 7층석탑이 석불의 미관을 망치고 문화재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강하게 일어나
면서 1987년 석불에서 떼어내 요사 뒤쪽에 두었다가 2009년에 석불 밑인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
여 기념표석을 세웠다. 1987년 이전에는 동자상 때문에 2체불이 아닌 3체불(體佛)로 오인을 받
는 경우가 많았다.
7층석탑은 군살이 없는 날씬한 모습으로 백제의 칠지도(七支刀)를 연상케 만드며 동자상은 어린
동자를 보듯 포근한 표정이다. 그래도 이들은 60년 묵은 것들이라 반백년 세월의 때가 진하게
얼룩져 있다.

절에서 북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가볍게 1분 정도 오르면 나를 다시금 이곳으로 오게한 주인공,
머리 둘, 몸통 둘이 달린 거대한 불상, 용미리 마애2불입상을 만나게 된다.


▲  요사 뒤쪽에 있던 시절의 동자상과 7층석탑 (2007년 이전)


♠  숨막히게 거대한 고려시대 석불, 독특한 개성과 멋이 넘쳐흐르는
용미리 마애2불입상(磨崖二佛立像, 석불입상) - 보물 93호

고양시 동부와 파주시 동부를 이어주는 용암사 고개, 지금은 2차선 도로(혜음로)가 흘러가고 있
지만 옛날부터 황해도와 개성(開城), 파주(坡州) 지역에서 서울을 이어주는 주요 길목으로 사람
과 물자의 왕래가 빈번했다.
그 고개 동쪽이자 용암사 북쪽 산자락에는 고려 전기에 조성된 거대한 석불, 용미리 마애2불입
상이 커다란 바위를 몸통 삼아 자리해 있다. 무덤에 깃들여진 망자(亡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
는 것일까? 용미리 시립묘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석불은 오랫동안 미륵불(彌勒佛), 쌍미륵
불 등으로 불려왔으며, 광탄면에 있다고 해서 '광탄석불'로도 불렸다. 예전에 불광동서부터미널
에서 광탄까지 시외완행버스가 다니던 시절에는 석불 아래 정류장 이름도 '미륵불'이었다.
이 석불은 11세기 후반에 고려 선종(宣宗)의 3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의 지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전하며 석불의 위용은 한때 잘나갔던 궁주의 위세를 보여주는 듯 하다.

바위에 전신상(全身像)을 새기고 그 위에 다른 돌로 머리와 갓, 목 부분의 불두(佛頭)를 만들어
얹힌 형태로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바위에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어 마애불(磨崖佛)로
봐도 상관은 없다. 이런 형태의 마애불로 안동 제비원석불(이천동 마애여래입상)이 그 대표격인
데, 그 석불 역시 자연바위에 몸을 새기고 그 위에 다른 돌로 머리를 얹혔다.

본 석불의 가장 큰 특징은 머리가 2개, 즉 우리나라 유일의 쌍두불(雙頭佛)이라는 것이다. 절과
속세에서는 그를 쌍미륵불로 추앙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몸 하나의 머리가 둘 달린 괴물은 아니
다. 비록 하나의 바위에 의지해 있지만 바위 사이로 마치 둘을 가르듯 틈이 나 있으므로 몸통
둘의 머리 둘로 봐도 무방하다.


▲  석불 앞에 마련된 기도처
중생의 소망이 한가득 담겨진 연분홍 연등의 행렬이 아무도 없는
기도처 주변을 따스히 감싸 흐른다.


석불의 높이는 19.85m, 반올림하면 근 20m에 이르는 장대한 불상으로 바위에 그대로 만든 탓에 
신체비례가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그런 것이 바로 고려시대 석불이 지닌 강한 특징이자 개성이
니 이에 대해 뭐라 중얼거릴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려 때 만들어진 불상은 다른 시대와 달리 덩
치가 유난히 크며 얼굴과 외모가 수려한 불상보다는 생김새가 정말 가지각색인 개성파 불상들이
많다. 용미리 석불 역시 그 시대의 유행에 충실하여 불상이라기 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배어있
는 석불이라 하겠다.


▲  아래서 바라본 용미리 석불
900년의 세월을 견뎌 내면서도 그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바위 사이의 틈을 경계로 왼쪽의 불상은 선비마냥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이다. 보통 불상
들은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기 마련인데, 그런 화려함 대신 사람들이 많이 쓰고 다니는 갓을
씌워 놓아 무척 친근하게 다가온다. 은연히 미소가 깃들여진 그의 얼굴은 거의 네모난 모습으로
논산 관촉사(灌燭寺)의 은진미륵(恩津彌勒)과도 좀 비슷한 생김새이다. 불상의 얼굴이라기보다
는 그만의 특유하고 재미난 색채가 강하게 배어있으며, 목은 원통형이고 두 손은 가슴 앞에 대
고 연꽃을 살짝 들고 있다. 그리고 몸통이 들어앉은 바위에는 옷을 입혀놓았는데, 옷의 주름을
선각으로 세심히 처리했다.

오른쪽 불상은 동그란 갓 대신 네모난 갓, 즉 방립불(方笠佛)을 머리에 걸쳤으며 눈썹과 눈이
길다.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아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고 있으며, 왼쪽 불상보다 키가 약간 크
지만 덩치는 좀 작다. 하지만 듬직한 몸집에 넓은 어깨를 가지고 있어 은근히 웅장해 보인다.

지역 구전에 따르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네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고 하는
데 듣고 보니 정말 그럴듯한 모습이다. 금슬이 짙은 부부처럼 다정히 자리하여 중생들을 살펴보
는 모습이 꽤 훈훈해 보인다.

이들의 작품성은 별로 우수한 편(안내문에 그리 나옴)은 못되지만 고려 왕족의 탄생설화가 담겨
져 있고 지방색이 짙은 고려 불상의 특징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소망을 들어주기로 소문이
자자하여 찾는 이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특히 아이가 없어 애태우거나 아이를 원하는 이들의
소망을 잘 들어준다고 한다.

▲  측면에서 바라본 용미리 석불

▲  용미리 석불의 전경


※ 용미리 석불입상의 설화
고려 13대 군주인 선종(宣宗, 재위 1083~1094)은 적당한 후사가 없어 늘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3번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 인주이씨 평장사 이정(李頲)의 딸>의 꿈
에 도승 2명이 나타나 하소연했다. '우리는 파주 장지산에 있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배가 고프
니 이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새겨주세요'

이상하게 생각한 궁주는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니 그럴싸한 큰 바위가 하나 발견되어 바로 불상
조성에 들어갔다. 그러고 얼마 뒤, 그 도승이 다시금 꿈 속에 나타나 왈 '왼쪽 바위에 미륵불을,
오른쪽 바위에 미륵보살상을 만들어 공양하고 기도를 드리면 아이를 원하는 사람은 아들을 얻고,
병이 있는 사람은 완쾌가 될 것입니다'

도승의 부탁대로 두 불상을 새기고 그 밑에 절(이름은 전해오지 않음)을 세워 기도를 올리니 과
연 몇달 뒤, 그렇게나 소망하던 아들 한산후 왕윤(漢山侯 王昀)이 태어났다.

허나 선종은 위의 설화와 달리 아들 왕욱<王昱, 2째 부인 사숙왕후(思肅王后)의 소생으로 14대
헌종>이 있었다. 그러나 태자(太子) 왕욱은 심히 병약하여 늘 병을 달고 살았으며 소갈증(消渴
症, 당뇨병)까지 앓고 있던 상황이라 만약을 위해 건장한 아들을 하나 더 얻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보람이 있는지 원신궁주는 한산후 외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아들 2명을 더 낳아 더욱 승승장
구하게 된다.

1094년 선종이 붕어하고 헌종이 제위에 오르자 자신의 오라버니인 '이자의(李資義)'와 공모하여
한산후를 왕위에 세우려고 모반을 꾀하다가 선종의 아우인 계림공 왕희(鷄林公 王熙, 뒤에 15대
숙종)에게 보기 좋게 털렸다. 결국 원신궁주 모자는 그 대가로 이름이 전하지 않는 머나먼 곳으
로 추방당하고, 그들의 행적과 사망 시기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허무하게 잊혀
져 갔다.


▲  앞쪽만 멀뚱히 바라보는 용미리 석불의 뒷통수
저들이 바라보는 곳은 용미리시립묘지 1구역이다.


석불과는 이미 여러 번의 안면이 있다. 몇년 만에 찾았음에도 그들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반면에 나는 그만큼의 세월이 누적되어 인정하긴 싫지만 그만큼 늙고 변해 있었다. 향
을 피워 그들에게 삼배(三拜)의 예를 올리며 마음 속으로 간절히 무언가를 소망한다.
평소에는 찾아와 안부도 전하지 않으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만 찾아와 '이러이러하니 제발좀 살
펴달라'
소망을 비는 것도 조금은 염치가 없는 것 같다. 정작 저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는 나는
과연 그들을 지킬 수 있을까? 나뿐만은 아니지만 소원만 빌러 오는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느껴지
기도 한다.

예불을 올리고 석불의 뒷쪽으로 올라갔다. 석불의 머리 부분까지는 산길이 나 있는데, 그들의
높이가 20m에 이르러 거의 조그만 언덕을 오르는 것 같다. 경사가 다소 있는 산길을 올라 문화
유산 보호 철책을 넘어 석불의 뒷통수로 살짝 숨어든다. 마치 앞쪽만 죽어라 쳐다보는 사람의
뒤쪽으로 살며시 다가가 팍 기습을 하려는 듯이 말이다.
석불의 뒷부분은 밋밋하고 간소하게 표현된 뒷머리와 목덜미가 전부이다. 그런 머리 위로는 머
리 크기만한 갓이 씌워져 있는데, 갓보다는 탑이나 석등의 윗부분을 보는 것 같다.

천하에 어느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무구한 세월의 시련, 그것을 100년도 아닌 900년이나 견뎌
내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모습을 간직한 석불을 친견하면서 나도 그처럼 영원히 한결같
은 인생을 살았으면 싶다.

~~~ 이렇게 하여 용미리 석불 답사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 용미리 마애2불입상(용암사) 찾아가기 <2015년 1월 기준>
* 서울시내버스 703번(문산 선유리↔서울역)을 타고 용암사(용미리 마애2불입상)에서 내린다.
* 703번과 환승이 가능한 전철역 - 5호선 광화문역(6번 출구), 1/2호선 시청역(8번 출구), 1/4
  호선 서울역(3,9-1번출구), 5호선 서대문역(6번 출구), 3호선 독립문역(1번 출구), 3호선 녹
  번역(1번 출구), 3/6호선 불광역(8번 출구),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 3호선 삼송역(8번
  출구를 나와서 도보 2분)
* 승용차
① 서울시내 → 구파발4거리에서 고양,파주방면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방면 39번 국도 → 고
   양2교 교차로에서 좌회전 → 고양동4거리에서 광탄 방면 → 벽제3거리에서 광탄방면 좌회전
   → 용미리 → 용암사 주차장
② 수도권외곽고속도로 → 통일로나들목을 나와 파주방면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방면 39번 국
   도 → 고양2교 교차로에서 좌회전 → 고양동4거리에서 광탄 방면 → 벽제3거리에서 좌회전
   → 용암사 주차장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8,9 (용암사 ☎ 031-942-0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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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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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4년 12월 30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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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산사 나들이 ~ 영조 임금의 효심이 깃든 파주 고령산 보광사


' 한겨울 산사 나들이 ~ 파주 보광사(普光寺)'

▲  보광사 목어


겨울의 제국이 강추위로 천하를 부들부들 떨게 만들던 겨울의 한복판에 파주(坡州)에 있는 보
광사를 찾았다. 이곳은 어린 시절에 2~3번 가본 인연이 있는 곳으로 구파발역에서 파주시내버
스 333번(금촌↔구파발)을 타고 보광사로 들어간다.

보광사에 가려면 고양시(高陽市) 벽제동과 파주시 광탄면(廣灘面) 동부 지역을 잇는 고갯길인
됫박고개를 넘어야 되는데 고개가 제법 패기가 있다. 이 고개는 조선 21대 군주인 영조(英祖)
와 인연이 아주 깊은데, 그는 소녕원(昭寧園,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 묘역)과 소녕원의 원찰
인 보광사를 자주 찾았다. 그때마다 이 고개를 싫든 좋든 넘어야했지.
고개가 제법 험준하여 다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지라 뚜껑이 열린 영조는 '고개를 더 파서
낮추라!'고 명했다. 그 연유로 '더 파기 고개'가 되었다가 나중에 됫박처럼 가파르다 하여 됫
박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4발 수레로 편하게 넘을 수 있다지만 그 수레들도 이 고갯
길만큼은 조심스레 바퀴를 굴리며 몸을 사린다.

버스에서 내리니 보광사 일주문(一柱門)이 여기까지 나와 중생을 맞는다. 문 좌측에는 고령산
에서 발원한 계곡이 숨을 죽여 흘러가고, 일주문을 들어서면 주막과 찻집이 주를 이루는 조그
만 마을이 고개를 내민다. 이곳은 절 밑에 터를 닦은 이른바 사하촌(寺下村)으로 보광사와 고
령산을 후광(後光)으로 삼아 밥장사를 하는데, 보리밥이 꽤 유명하다.

부처의 세계를 코앞에 둔 속세의 마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찻집과 주막의 유혹을 벗어나 10
분 오르면 보광사의 산문이 나타난다.


  보광사 일주문을 들어서다

▲  '고령산보광사'라 쓰인 보광사 일주문(一柱門)

대부분의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주문은 절의 정문이다. 보광사의 일주문은 1999년에 지어진
것으로 문이라고는 하지만 문을 여닫는 문짝이 없어 절을 찾은 중생이나, 산을 찾은 등산객, 부
자와 서민 등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반갑게 맞이한다. 일주문처럼 넓은 포용력을 지니며 살리
라 다짐을 하건만 돌아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잊어버리고 만다.


▲  보광사의 옆구리를 거쳐 속세로 흐르는 고령산 계곡
얼음 밑으로 숨죽여 흘러가는 계곡, 소쩍새가 울 때면 움츠려든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켤 것이다.

▲  겨울의 정령에 사로잡힌 보광사 가는 길
겨울의 제국 치하에 들어간 나무들은 잔뜩 몸을 움츠리며 봄의 해방군을 기다린다.

▲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

일주문을 지나 8분 정도 오르면 흙담장에 가린 보광사의 모습이 나타나면서 길이 2갈래로 갈라
진다. 길 오른쪽에는 윗 사진처럼 계곡 위에 걸린 돌다리를 건너 흙길과 계단을 거쳐 경내로 들
어가는 길과 경내까지 뚫린 수레길을 이용하여 가는 것이 있다. 어느 길을 이용하든 경내로 통
하지만 돌다리 코스가 운치가 있으며, 수레길이 없던 옛날에는 저 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섰다.

절을 받치고 있는 석축(石築)은 마치 산성(山城)처럼 3중으로 계단식으로 쌓여져 있으며, 그 위
에 담장을 두르고 넓게 터를 닦아 절을 일구었다. 만세루 남쪽은 석축을 1단으로 높게 쌓았다.


▲  보광사 설법전(說法殿)

갈림길에서 2분 정도 오르면 길 왼쪽에 설법전이란 길쭉한 건물이 있다. 이곳에는 찻집인 도솔
천(兜率天)과 종무소(宗務所)가 있으며, 여러 법회(法會)와 강좌가 열린다. 그리고 도솔천에서
는 다양한 전통차와 온갖 불교용품을 판매하고 있는데,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곳에서 일다경(一
茶頃)의 여유를 누리고 싶다.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명당자리, 영조 임금과의 각별한 인연으로
조선왕실의 원찰로 번영을 누린 ~ 고령산 보광사(古靈山 普光寺)

▲  겨울 햇살의 드넓은 손길이 구석구석 보듬고 있는 보광사

보광사는 서울과 가까운 고령산(621m) 서쪽 자락에 아늑히 안긴 산사(山寺)로 절 이름인 보광(
普光)은 넓은 광명(光明)을 뜻한다고 한다. 그렇게 좋은 뜻을 가지고 있으니 그 이름을 지닌 오
랜 절집만 서울 주변에 4곳(서울 우이동, 파주, 과천, 남양주)이나 된다. 그중에서도 이곳이 가
장 오래되고 제대로 남아있다.

보광사는 신라가 망해가던 894년(진성여왕 7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왕명에 따라 비보(裨補
) 사찰로 창건했다고 전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창건 이후 1215년 원진국사(元眞國師)가 중창을
했다고 하며, 법민대사(法敏大師)가 불보살(佛菩薩) 5위를 봉안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1388년에
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창을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22년에 설미(雪眉), 덕인(德仁)이 중건하고 1634년 범종을 만들었다.
그 범종이 보광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숭정7년명동종이다. 1667년에는 지간(智侃), 석련(石
蓮)이 대웅전과 관음전을 중수했다.

보광사가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누린 것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시절이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소생으로 그녀의 무덤인 소녕원(昭寧園)이 보광사 서쪽 영장리에
있다. 그런 인연으로 영조는 보광사를 소녕원의 원찰(願刹)로 삼아 많은 지원을 내렸으며, 그때
대웅보전과 관음전을 중수하고 절에서 가장 큰 건물인 만세루를 세웠다. 또한 소녕원에 참배하
러 갈 때는 보광사에 꼭 들렸다.
이렇게 원찰로서의 지위와 번영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쭉 이어져 1863년에 왕실의 지원에 힘입
어 나한전, 큰방, 수구암을 짓고,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석가3존불, 16나한상 등을 조성했으며,
1864년에는 관음전과 별당을 세우고, 1869년에 절을 중수했다. 1901년에는 상궁(尙宮) 천씨의
시주로 대웅전과 만세루를 중수하여 절의 면모를 크게 하였다.

이렇게 잘 나가던 보광사는 1950년 6.25전쟁으로 대웅전과 별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
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 이후 꾸준한 중창불사로 관음전을 새로 짓고 만세루를 해체하여 복원했
으며, 1981년에 석불전이라 불리는 거대한 대불(大佛)을 세웠다. 2003년에는 납골당(納骨堂) 사
업에도 손을 뻗쳐 경내 북쪽에 영각전을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고색의 기운이 진한 경내에는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원통전, 어각실, 응진전, 산신각, 지장전,
만세루, 수구암, 설법전, 영각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가득 들어차 있으며, 대부분이 서향(西向
)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북쪽을 제외하고 경내 주변을 토담으로 빙 둘러 속세와 부처의 세계의
경계를 가른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지방문화재인 대웅보전과 숭정7년명동종, 목조보살입상(지방유형문화재 248
호)을 간직하고 있으며, 지장탱화와 나한탱화등 19세기에 그려진 불화가 다수 있다. 만세루와
어각실, 응진전도 18~19세기에 지어진 건물이며, 어실각 옆에는 영조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무럭
무럭 자라고 있다. 또한 수구암(守口庵)과 영묘암(靈妙庵), 도솔암(兜率庵) 등 부속암자 3곳을
가까이에 거느리고 있다.

서울에서 가깝지만 깊은 산중에 안겨있어 고요함과 고즈넉함이 중생의 마음을 편하게 인도하며,
산새의 지저귀는 소리와 바람의 소리, 그리고 풍경소리와 목탁소리가 전부인 산사이다. 또한 절
을 알처럼 품은 고령산은 숲이 울창하고 봄과 가을에는 꽃과 단풍의 화려한 향연으로 이름을 날
려 휴일에는 많은 등산객이 찾아온다. 고령산을 오르려면 보광사를 거쳐가야 되기에 그날만큼
은 중생들로 경내는 시끌벅적하다.

▲  대웅보전을 옆에서 가린 요사채

▲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응진전 우측의 장독대들

※ 파주 보광사 찾아가기 (2013년 2월 기준)
* 3호선 구파발역(1,2번 출구)이나 삼송역(3호선, 8번 출구)에서 파주시내버스 333번을 타고 보
  광사 하차, 버스는 20~4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까지 수레 접근 가능)
① 서울 → 문산 방면 1번 국도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우회전 → 고양동에서 광탄
   방면으로 좌회전 → 벽제3거리에서 우회전 → 보광사입구 → 보광사
② 수도권외곽고속도로 → 통일로나들목에서 문산 방면 → 대자3거리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우회
   전 → 고양동에서 광탄방면으로 좌회전 → 벽제3거리에서 우회전 → 보광사입구 → 보광사

★ 보광사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으며, 경내와 일주문 부근에 주차장이 있다.
* 보광사 템플스테이(Temple stay)는 부정기적으로 열린다. 개인은 1박 2일, 단체와 어린이는 2
  박 3일 일정으로 진행되며, 자세한 것은 보광사 홈페이지를 참조한다. 참가 신청은 홈페이지
  에서 하거나 전화로 하면 된다.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13 (☎ 031-948-7700~1)
* 보광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꾹 누른다.


▲  대웅보전 뜰에서 바라본 고령산

▲  범종각(梵鍾閣)

경내로 들어서면 대웅보전을 가리고 선 요사 서쪽에 단촐한 모습의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 옆에
는 문화재안내판이 멀뚱히 서 있는데, 범종각에 걸린 종이 숭정7년명동종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은 범종각의 종이 그것인줄 안다. 허나 종을 잘 살펴보면 고색의
때도 거의 없을뿐더러 중간중간 한글이 보여 근래에 새로 만든 종임을 알 수 있다. 원래의 종은
최근까지 이곳에 있다가 건강을 이유로 대웅전으로 옮겼다.
범종각은 대웅전에 있던 숭정7년명동종를 위해 1990년에 지어졌으며, 만세루에 있던 목어(木魚)
도 이곳으로 잠시 옮겼으나 다시 원위치시켰다.


▲  대웅전 우측에 자리한 응진전(應眞殿)과 산신각(山神閣), 3층석탑

대웅전 우측 석축 위에는 단촐한 모습의 전각 2개가 오붓하게 자리해 있다. 우측에 자리한 응진
전은 1863년에 중건된 것으로 원래 이름은 나한전(羅漢殿)이었다. 내부에는 1863년에 조성된 것
으로 보이는 석가3존불과 16나한상이 있으며, 나한탱화는 1877년에 금곡영환(金谷永煥), 한봉창
엽(漢峯瑲曄) 등의 화승이 그렸다. 응진전 곁에 자리한 1칸짜리 산신각은 1893년에 중건된 것으
로 근래에 만든 산신상과 산신탱이 있다.
그들 앞에는 맵시가 돋보이는 3층석탑이 서 있는데, 원래는 대웅전 뜨락에 있었다.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원통전(圓通殿)

대웅전 좌측에는 관음보살을 봉안한 원통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
물로 이곳에는 예전에 쌍세전(雙世殿)이 있었으나 1994년에 부시고 새롭게 원통전을 지었다.
새로 지은 것이다보니 그냥 지나치고 말았는데, 알고보니 보광사의 불화(佛畵) 가운데 가장 오
래된 지장탱화(地藏幀畵)가 들어있었다. 순간의 방심으로 놓친 그 그림은 1802년 승려 경욱(慶
郁)이 그린 것으로 원래는 부속암자인 수구암에 있었다고 하며, 지장탱화와 나란히 있는 삼장탱
화(三藏幀畵)는 1898년에 제작된 것으로 경선응석(慶船應釋), 금화기동(錦華機同), 용담규선(龍
潭奎禪)이 그렸다.


▲  원통전 앞에 자리한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은 원통전과 마찬가지로 1994년에 지어졌다. 지장보살과 도명존자(道明尊者), 시왕상(十
王像)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의 존상(尊像)과 그림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중 장군탱화는 1872년
에 제작된 오래된 그림이다. 지장전에 있던 존상과 그림은 원래는 쌍세전에 있었다.

◀  어실각(御室閣)과 향나무

원통전 뒤쪽에는 조그만 1칸짜리 어실각이 있다.
이 건물은 1740년에 보광사를 소녕원의 원찰로
삼으면서 세운 것이라 전하며, 굳게 닫힌 내부
에는 숙빈최씨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건물 옆에는 겨울의 제국에도 아랑곳 않고 푸르
름을 간직한 10m 정도의 향나무가 자라고 있는
데, 이는 영조가 심은 것이라 한다. 세월을 양
분으로 삼아 무럭무럭 자란 향나무에는 영조의
혼이 깃들여 있는 건지 늘 어실각에 시원한 그
늘을 드리운다.


▲  왕실의 어보(御寶)처럼 특별하게 보이는 어실각
영조에 어미에 대한 그리움과 효를 읽을 수 있다.

▲  어실각 뒤쪽으로 끝없이 이어진 토담
흙으로 만든 토담의 모습이 너무 정겹다. 절과 속세의 경계선으로 그어진
토담 너머로 소나무가 속세의 악한 기운과 냄새로부터 절을 지킨다.


  안팎으로 다양한 볼거리와 보물을 간직한 보광사의 보물창고
대웅보전(大雄寶殿)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83호

경내 중앙에는 보광사의 법당(法堂)인 대웅보전(대웅전)이 만세루를 마주보고 있다. 만세루 다
음으로 규모가 큰 건물로 기와부터 기둥까지 고색의 내음이 진하게 묻어나 있다. 법당으로서의
품격과 위엄이 돋보이는 보광사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원래는 창건 시절부터 있었다고 하나 지금의 건물은 1740년에 중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웅전은 만세루보다 1단계 높은 석축 위에서 서쪽을 바라고 있다. 건물을 받치는 석축은 자연
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이용했으며, 돌마다 기나긴 세월의 때가 가득 입혀져 고색의 향기를
강하게 풍긴다. 건물의 벽은 흙벽이 아닌 나무벽으로 되어 있고, 좌우측벽에는 다른 절에서는
보기 힘든 5개의 색다른 벽화가 눈길을 단단히 붙잡는다. 이들 벽화는 1740년에 건물을 중건하
면서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불단에는 조선 후기 불상인 삼세불을 중심으로 한 5존불이
있으며, 1898년에 그려진 석가모니후불탱화를 비롯한 6개의 불화와 숭정7년명동종, 금고(金鼓)
등 오랜 보물이 깃들여져 있다. 그야말로 보광사의 보물창고인 셈이다.


▲  대웅보전 우측벽화

왼쪽에는 하얀 옷을 입은 백의관음보살이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 배를 움직이고 있는데,
중생을 이끌며 거친 파도를 헤치고 극락으로 가는 모습을 담은 것 같다. 오른쪽에는 상아가 탐
나보이는 거대한 코끼리와 등에 올라탄 승려가 담겨져 있는데, 코끼리는 부처의 법을 상징한다
고 한다.


▲  대웅보전 좌측벽화

▲  좌측벽화의 좌측 그림
창을 들고 옷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 사천왕의 하나인 광목천왕(廣目天王) 같다.
부처를 지키는 성스러운 존재로 팔에 주름진 근육이 그의 힘을 느끼게 한다.
허나 그의 표정은 천왕(天王)으로서의 위엄과 무서움보다는 귀엽다는
인상을 지을 수 없게 한다.

▲  좌측벽화 가운데의 그림
개와 비슷하게 생겼으면서 이상하게 생긴 커다란 동물과 동자(童子)로
보이는 승려가 그려져 있다.

▲  좌측벽화 우측 그림
갑옷 비슷한 것을 갖춰 입고 비파 같은 것을 연주하는 모습이
사천왕의 일종인 다문천왕(多聞天王) 같다.

▲  대웅전 우측 출입문 위에 걸린 '고령산보광사상축서(上祝序)' 현판

대웅전 우측 출입문 창방에는 낡은 현판이 걸려있다. 이것은 '고령산보광사 상축서(古靈山普光
寺 上祝書)'로 1869년 왕실의 시주로 절을 중수한 것을 기리고자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성상(聖上)은 고종, 왕비전하(王妃殿下) 민씨는 명성황후(明成皇后), 대원위(大院位)는 흥선대
원군(興宣大院君)으로 고종(高宗)의 가족이 보광사 중수에 크게 신경쓰고 지원했음을 보여준다.
현판에는 그들의 은혜로 절을 중수하여 그들의 성수무강(聖壽無疆)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
다.


▲  대웅전 불단(佛壇)에 모셔진 5존불

대웅전 불단에는 흔히 있는 3존불이 아닌 5존불이 봉안되어 눈길을 끈다.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
우에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앉아 있으며, 이들 불상은 이른바 삼
세불(三世佛)이다. 그들 좌우로 현란한 보관(寶冠)을 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 있는데, 이
들은 마땅히 둘 장소가 없어서 삼존불 옆에 배치하여 졸지에 5존불이 된 것이다. 그들 모두 지
그시 눈을 감으며 은은하게 미소를 드리운 포근한 표정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저보다 편안한 표정이 어디에 있을까?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은 1215년 원진국사가 절을 중창할 때 조성했다고 한다. 허
나 저들은 엄연히 조선 후기 불상이다. 그들 뒤로는 석가가 설법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후불탱화
가 걸려있는데, 1898년에 예운상규(禮芸尙奎), 경선응석(慶船應釋), 금화기동(錦華機同), 용담
규선(龍潭奎禪) 등의 화승이 그렸다. 후불탱에 깃들여진 빛바랜 고운 색채는 그림의 중후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신중탱화와 감로탱화, 칠성탱화, 독성탱화, 현왕탱화 등 5점의 불화(佛畵)
가 대웅전 내부 벽을 화려하게 수식하여 불화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이들 모두 후불탱화와 마찬
가지로 1898년에 제작된 것이다.

▲  독성탱화(獨聖幀畵)
지팡이를 쥐어들고 앉아있는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의 모습이다. 무슨 근심거리가 있는
것일까? 그의 표정에 우수(憂愁)가
서려 보인다.

▲  신중탱화(神衆幀畵)
조금의 여백도 허용치 않고 그림에 한가득
그려진 신들의 모습이다. 저들은 원래 인도의
토속신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  칠성탱화(七星幀畵)
칠성신앙은 우리의 고유 민간신앙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칠성(북극성)은
산신, 독성과 달리 부처에 준하는 대접을 받으며 치성광여래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여백이 없어 복잡한 신중탱화와 달리 이 그림은 눈이 편할 정도로 간결하다.

▲  현왕탱화(現王幀畵)

저승의 주인인 염라대왕(閻羅大王)이 심판을 하는 장면을 담았다. 여기서 현왕은 염라대왕을 지
칭하며, 대왕 주변으로 판관과 명부(冥府, 저승)의 여러 관리들이 구름처럼 모여있다. 대왕 앞
에 무릎끓고 앉아 있는 이는 이승에서 막 저승으로 들어온 사람인 모양이다. 그는 대왕에게 어
떤 판결을 받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  불단 우측에 있는 숭정7년명동종(崇禎七年銘銅鍾)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58호

단 우측에는 보광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숭정7년명동종이 놓여져 있다. (종의 위치는 바
뀔 수 있음) 이 종은 대웅전에서 계속 생활했으나 1990년 범종각을 지어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
다. 그러다가 근래에 종의 건강과 보호를 위해 다시 대웅전으로 옮기고 새 종을 만들어 범종각
을 지키게 했다.

이 종은 높이가 98.5cm로 범종각에 흔히 달려있는 범종(2~3m)보다 훨씬 작다. 종이 이렇게 작으
니 도난의 위험이 늘 도사리는 것은 당연하다.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범종으로 종 꼭대기에 2마
리의 용이 서로 뒤엉켜 종을 달리 위한 고리를 형성했다. 종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띠가 둘러져
있고, 그 가운데에 3줄의 띠가 둘러져 있어 종을 상하로 구분한다. 위쪽 부분에는 네모난 유곽(
乳廓) 4개와 보살입상(菩薩立像)이 4구가 있고, 아래쪽에는 파도무늬와 용이 종을 장식한다. 아
래 띠와 가운데 끼 사이에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는데 범종을 만든 시기와 제작자의 이름, 그리
고 보광사의 연혁이 길게 적혀 있다.
명문(銘文)에 따르면 이 종은 숭정7년에 제작되었다. 숭정7년은 1634년(인조 11년)으로 숭정은
명나라 황제인 의종(毅宗, 1611~1644)의 연호이다. 종의 이름은 바로 제작시기인 숭정7년에서
따온 것이다. 범종 불사에는 신관(信寬)이 화주를 맡았고, 설봉천보(雪峯天寶)와 3명의 승려가
범종을 조성했는데, 설봉천보는 1619년(광해군 11년)에 봉선사(奉先寺)의 대종(보물 397호)를
만들기도 했다.

대웅전 한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조그만 종을 치고 싶다. 종을 치면 그는 졸음에서 깨어나
은은한 종소리를 건물 내에 잔잔히 울리겠지, 허나 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존재이자 보광사에 소
중한 보물로 괜히 그를 건드리다가는 된소리를 들을 각오를 해야 된다. 그냥 보는 것으로 만족
하는 것이 쌍방에 이롭다.

사진에는 없지만 불단 좌측에는 조그만 금고(金鼓)가 있다. 가운데에 태극마크를 그리고 가장자
리에 꽃무늬가 있으며, 전면에 '大皇帝陛下萬萬歲(대황제폐하만만세)'란 명문이 있어 고종이나
순종 시절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황실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영조의 친필이라 전하는 대웅보전 현판의 위엄
빛바랜 하얀 현판에 쓰인 대웅보전의 4글자 마치 글씨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필체의 힘이 넘쳐 흐른다.

▲  푸른 하늘을 바다로 삼으며 그윽한 풍경소리를 베푸는
대웅전 풍경물고기


  보광사 마무리

▲  승방의 역할을 겸하는 만세루(萬歲樓)의 후면(後面)

대웅보전과 마주보고 있는 만세루는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승방이 딸린 독특한 'T'구조를 하
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누각으로 1740년경에 영조의 지원으로 절을 중수할 때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건물은 높은 석축을 발판으로 삼아 자리해 있다. 1913년과 1914년에 대한제국 상궁(
尙宮)의 시주로 중수를 했는데, 그때 만세루 옆으로 툇마루가 딸린 승방을 만들어 지금의 구조
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정면 9칸의 규모로 '염불당중수시시주안부록(念佛堂重修時施主案付
祿)'이라 쓰인 현판이 있어 한때는 염불당(念佛堂)이란 이름을 지녔음을 알 수 있으며, 누마루
정면에 걸린 '고령산보광사'란 현판은 영조의 친필로 전해진다.


▲  만세루의 정면
누마루 정면에 영조가 썼다는 '고령산보광사' 현판이 있으며, 좌측 가장자리에
만세루란 현판이 걸려있다. 툇마루와 난간까지 갖춘 모습이 제법 품격을 갖춘
양반가를 보는 듯하다.


▲  만세루 목어(木魚)의 위엄
용을 꿈꾸는 목어가 입에 여의주로 보이는 동그란 것을 물고 하늘을 거닌다.
크게 부릅뜬 두 눈과 이글거리는 듯한 지느러미, 살랑거리는 꼬리 등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그를 덥썩 붙잡고 하늘을 날고 싶어진다.

▲  만세루 우측에서 속세로 나가는 문
수겹의 줄무늬가 쳐진 토담 사이로 속세로 안내하는 기와문이 있다.

▲  오색영롱한 연등이 대롱대롱 중생을 맞이하는 문 바깥 부분

▲  경내 서쪽을 빈틈없이 에워싼 토담
2중의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터를 닦아 절을 지었다.
천리장성처럼 끝없이 펼쳐진 토담의 물결 앞에 절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 등의 악귀도 두 손을 들고 물러갈 것이다.

▲  납골당으로 쓰이는 영각전(靈覺殿)

경내에서 개울 건너 북쪽에는 2003년에 만든 영각전이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납골당으로 서쪽
에 납골당으로 들어가는 지하도가 있으며, 위의 건물은 영가(靈駕, 죽은 이들)들을 위한 49재나
천도재를 지내는 공간으로 쓰인다. 내부 중앙에는 아미타불과 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으
며, 외벽에는 고려불화(高麗佛畵)에 그려진 관음보살이 수려하게 그려져 있다.
* 납골당 문의는 보광사 영각전(☎ 031-948-4440)


▲  지하 납골당으로 들어가는 문 위쪽에 걸린 그림

관음보살이 영가를 배에 가득 태우고 넝실거리는 바다를 건너 극락으로 인도하는 장면이다. 판
옥선(板屋船) 비슷하게 생긴 큰 배에는 극락으로 가려는 이들로 가득하며, 배의 정원이 가득 차
서 따로 조그만 배 2척을 마련했다. 푸른 용과 붉은 용이 관음보살과 영가들을 지키며 극락으로
배를 이끈다. 출렁이는 물결이 마치 하늘로 치솟는 바위 산을 보는 듯 하다.


▲  석불전(石佛殿)

영각전 동쪽 높은 곳에 거대한 석불이 속세를 굽어보고 있다. 절에서는 이 석불(石佛)을 석불전
이라 부르는데, 그렇다고 건물은 아니다. 순천 금둔사(金屯寺, ☞ 관련글 보러가기)의 불보전처
럼 석불과 예를 올리는 공간을 통틀어 전(殿)이란 칭호를 준 것 뿐이다.

이 불상은 예전에는 나라를 지키는 호국대불(護國大佛)이라 불렀다. 1980년 1월 대웅보전 보살
상의 복장(腹臟) 유물이 도난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다행히 진신사리만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를 봉안하고자 1980년대 거액의 어음 사기 사건으로 악명이 높은 장영자의 시주로 경내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 터를 닦고 석불을 세웠다. 그리고 6.25전쟁 때 절 부근이 치열했던 격전지였
으므로 그때 죽어간 이들을 위로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호국대불이라 불리게 되었다.

석불의 복장에는 보살상에서 나온 진신사리 11과와 여러 나라에서 가져온 각종 보석, 법화경과
아미타경,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발원문(發願文)이 봉안되어 있으며, 불상의 높이는 대략 15m에
이른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잔잔히 미소를 드리운 석불은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서 있으며, 주변에
석등 2기가 그의 광명을 밝힌다. 이곳은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 경내가 두 눈에 훤히 들어
온다.


▲  석불전에서 바라본 경내 서쪽 (설법전 구역)

▲  절을 뒤로하며 다시 속세로 나오다.

석불전을 끝으로 정말 오랜만에 찾은 보광사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둘러본 시간은 대략 1시
간 정도로 그냥 경내를 나오지 않고 다시 대웅전과 만세루를 찾아 거기서 조금 다리를 쉬었다가
속세로 아쉬운 발길을 떼었다. 고요하고 평안한 절을 뒤로하고 속세로 나올 때는 마치 돌아오지
못할 전쟁터로 향하는 군인의 처절한 기분이다. 아비규환의 속세에서 살아가는 것은 하루하루가
전쟁이기 때문이다. 속세는 언제쯤이나 극락처럼 평안해질까? 과연 그것이 가능이나 할까? 
이렇게 하여 한겨울 보광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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