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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1.27 서울 도심의 꿀단지, 서촌 늦가을 산책 ~~~ 옥인동 박노수미술관,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기와집 흔적들
  2. 2016.02.27 서울 도심의 꿀단지를 거닐다. 북촌 겨울 산책 (고희동가옥, 삼청동길, 따스한 차1잔)
  3. 2016.01.01 서울 도심의 새로운 꿀단지, 서촌 나들이 (한옥마을)

서울 도심의 꿀단지, 서촌 늦가을 산책 ~~~ 옥인동 박노수미술관,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기와집 흔적들



' 늦가을 서촌 나들이 '

(박노수미술관과 친일매국노 윤덕영의 집)


▲  박노수 가옥(박노수 미술관)의 뒷모습

▲  박노수 가옥 뒷쪽 굴뚝

▲  청운동에서 바라본 북악산


 


▲  옛 청휘각(晴暉閣)터 주변에서 바라본 서촌(西村)

서울 도심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서촌(웃대)은 경복궁(景福宮) 서쪽 동네를 일컫는다. <청계
천 이북이자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는 북촌(北村), 청계천 이남은 남촌(南村), 창덕궁 동부는
동촌(東村)이라 불림>
흔히 서촌이라 불리는 경복궁 서부는 옛날부터 웃대라 불렸으며 원래 서촌은 경희궁(慶熙宮)
과 서대문 주변 지역이었다. 그러던 것이 인왕산 동쪽까지 확장된 것이다. 또한 세종대왕이
통인동에서 태어난 인연(1397년 출생)을 내세워 2011년 이후에는 종로구청과 지역 주민 주도
로 새롭게 '세종마을'을 칭하고 있다.

서촌(웃대)은 왕족부터 양반사대부(士大夫)부터 내시와 상궁(尙宮), 의관(醫官), 역관(譯官)
등의 중인(中人)과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이 살았는데 그중 중인 계급이 많이 살았다. 또한 인
왕산과 북악산(백악산)을 병풍으로 두룬 아름다운 절경으로 인해 조선 초부터 도성(都城) 내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런 곳은 늘 귀족들이 군침을 흘리는 법이라 안평대군(安平大君,
세종의 3번째 아들)부터 이항복(李恒福), 정철(鄭澈), 권율(權慄), 김상용(金尙容), 김수항(
金壽恒), 추사 김정희(金正喜)에 이르기까지 많은 귀족들이 집과 별장을 지어 머물렀다.
특히 이곳은 도시와 자연이 경계를 맞닿은 도성의 변두리로 지금과 달리 필운대로와 신교동교
차로만 지나면 완전 자연에 감싸인 한적한 곳이었다. 게다가 궁궐과 육조(六曹) 등의 관청이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워 고위 관리들의 주택, 별서 장소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서촌의 이름난 명소는 겸재 정선(鄭敾)이 그의 노련한 손끝을 통해 그림으로 남겼는데, 그 화
첩이 장동(壯洞)8경첩으로 여기서 장동은 서촌의 일원인 청운동 지역의 옛 이름이다. 조선 후
기에는 중인이던 천수경(千壽慶)이 송석원(松石園)이란 시사(詩社)를 세워 중인들의 문학 공
간으로 키웠으며, 왜정(倭政) 이후에는 윤동주(尹東柱), 이상범(李象範), 박노수(朴魯壽), 이
상(李箱) 등 많은 시인과 화가들이 서촌에 안겨 주옥 같은 작품을 그려냈다.

서촌은 북촌만큼은 아니지만 한옥들이 제법 많이 남아있다. 대략 700여 채의 한옥이 옥인동과
누하동, 사직동, 체부동, 창성동 일대에 흩어져 있는데, 120년 이상 묵은 한옥은 하나도 없고
, 20세기 개량 한옥이 주류를 이루며 박노수 가옥 등의 양옥도 섞여있어 20세기 초/중반 서울
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옥이 많긴 하지만 북촌처럼 정식적으로 한옥마을을 칭하
고 있지는 않다. (비공식적으로 '서촌한옥마을'이라 불리기도 하며, 창성동 일대 한옥을 따로
'창성동 한옥마을'이라 불리기도 함)

조선 후기까지 북촌과 더불어 잘나가는 동네로 이름을 날렸던 서촌이지만 옥인동 일대에 고래
등 저택을 짓고 인왕산의 맑은 공기를 축내던 친일파 윤덕영(尹德榮)과 이완용의 부정 때문인
지 왜정 이후 적지 않게 기울었고 해방 이후 개발제한구역에 묶이면서 거의 시골 읍내처럼 정
체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루면 강산도 변한다는 서울 도심 한복판임에도 북촌과 서촌만큼은 시간도 느릿느릿 양반걸
음을 하거나 뒷걸음을 치는 것이다. 조금만 나가면 21세기 한복판인데 서촌 상당수는 아직 20
세기 한복판에 머물러 있어 서울의 옛 모습을 더듬기에 좋다.
허나 시간이 너무 정체되면 지역 주민들의 삶이 힘들어진다. 북촌도 도심 속의 꿀단지로 화려
하게 재기를 하고 있지만 서촌은 근래까지 낙후된 모습으로 거의 남아있던 것이다. 그러다보
니 한옥 기피증이 생겨나 한옥이 감소하게 되었고 거기에 서울시의 무관심까지 더해져 서촌의
숨겨진 명소들도 은근히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 4월 서울시에서 '경복궁 서측
지구단위계획'을 발표하여 한옥 보존과 신축을 장려했고, 북촌으로 단단히 재미를 본 서울시
와 종로구청이 서촌을 새로운 꿀단지로 개발하면서 서촌도 드디어 때를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새로 지어진 한옥이 나날이 늘고 있고, 종로구청에서 서촌 답사코스를 개발하고 홍보
하는 한편, 새로운 명소를 발굴하고, 기존의 명소를 손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조
금씩 북촌을 추격하고 있다. 특히 수성동계곡 복원(2012년 7월)과 박노수 가옥을 구립 미술관
으로 해방시킨 사건(2013년 9월)은 서촌에 큰 활력을 불어넣는데 충분했다. 게다가 소규모 갤
러리와 공방도 조금씩 둥지를 틀면서 서촌의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서촌에는 수성동계곡과 박노수가옥(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이상범 가옥, 사직단, 황학정(
黃鶴亭), 단군성전, 선희궁(宣禧宮)터, 백호정 바위글씨, 백세청풍 바위글씨, 창성동 한옥단
지, 통의동 백송터, 신익희(申翼熙) 가옥, 백운동천, 송석원터, 청휘각터, 자수궁터, 보안여
관, 필운대, 배화여고 생활관, 체부동(體府洞) 홍종문가옥, 백운동천 바위글씨, 운강대 바위
글씨, 행촌동 은행나무, 딜쿠샤, 홍건희 가옥 등 조선과 근대, 현대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깃
들여져 있으며 갤러리아트가, 대림미술관 등의 온갖 갤러리와 문화공간, 금천교시장(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과 통인시장 등의 전통재래시장이 있다. 특히 금천교시장은 제2의 피마골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먹자골목이 크게 형성되어 있는데, 고깃집과 전집, 횟집, 분식집
등 다양한 식당이 즐비하여 학생과 직장인, 인왕산 등산객, 답사객으로 1주 내내 활기가 넘친
다. (나도 가끔 이용함)

부암동(付岩洞)과 성북동, 북촌과 더불어 나의 마음을 계속 훔치고 있는 서촌은 2011년 늦여
름부터 구석구석 발자국을 남기며 그의 숨겨진 속살을 계속 뒤집고 있다. 별거 없을 것 같은
겉보기와 달리 그 속은 신대륙 이상으로 다양한 보물을 품은 곳이 바로 서촌이다.

서촌 나들이는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나 2, 3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자하
문로나 사직공원 동쪽(경복궁역 1번 출구)의 필운대로를 중심으로 움직이면 되며, 자하문고개
에 있는 윤동주시인의 언덕(청운공원)에서 주요 명소를 거쳐 경복궁역으로 내려오는 것도 괜
찮다. 또한 조그만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고, 그 속에 여러 명소와 소소한 볼거리 등
이 숨겨져 있으니 너무 큰 길만 살피지 말고 서촌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골목길도 꼭 거닐어
보자. 그러면 정말 배부르고 알찬 서촌 나들이가 될 것이다. 단 서촌도 엄연히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므로 민폐를 부리지말고 조용히 둘러보기 바란다.


 

♠  친일파 윤덕영이 지은 근대 가옥, 화가 박노수의 삶터로 미술관으로
새롭게 거듭난 박노수 가옥(朴魯壽 家屋)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호

서촌 중심에 자리한 통인시장에서 수성동계곡으로 인도하는 옥인길을 따라가다보면 오른쪽 골
목 속에 서촌의 상큼한 명소로 등극한 박노수 가옥이 손짓을 한다. 이곳은 집 이름 그대로 우
리나라 미술계의 원로이자 현대 화가인 남정 박노수의 집으로 인근 이상범 가옥과 함께 현대
미술의 따끈따끈한 산실이며 2013년 9월 이후 속세에 개방되어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이하
미술관)'으로 새로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이야 천하에 공개된 현대 화가의 미술관으로 누구든 돈만 내면 안길 수 있는 명소가 되었
지만 이 집의 태생은 그렇게 곱지는 못했다. 바로 친일매국노로 개추잡한 이름을 날렸던 윤덕
영(尹德榮, 1873~1940)이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윤덕영은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큰아버지로 왜정(倭政)에 적극 협
력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며 배때기에 기름칠했던 1급 매국노이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친일파로 추잡한 뒷끝을 보인 윤치호(尹致昊) 조차도 '이 비열한 매국노
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웹스터 사전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라며 그의 만행을
꼬집었다.
하지만 사람이기를 포기한 윤덕영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손가락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이권에 개입해 많은 부를 쌓았고, 집과 땅에도 징그럽게 욕심을 부려 송석원(松石園)을
비롯한 옥인동(玉仁洞) 일대를 사들여 고래등 양옥 별장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지었다. 그
리고 그 주변으로 가족과 첩을 수요할 14동의 고래등 한옥을 주렁주렁 지어 완전 그만의 조그
만 세상을 만들어놓았다.
박노수 가옥은 그 14동의 하나로 딸과 사위를 위해 이 땅 최초의 근대 건축가인 박길룡(朴吉
龍)에게 의뢰하여 1937~1938년경에 지어진 것이다.


▲  세상을 향해 활짝 문을 연 박노수 가옥(미술관) 대문

▲  벽돌로 지어진 박노수 가옥 (박노수미술관)

이 가옥은 한옥 양식과 중원대륙 양식, 서양식이 잡탕이 된 이른바 절충식 기법의 집이다. 2
층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벽돌 건물로 반지하층을 가지고 있으며, 붉은 벽돌로 된 1층에는 온
돌방과 마루, 복도, 응접실이 있고, 하얀 피부로 이루어진 2층은 나무 구조로 지어졌는데 계
단을 중심으로 마루로 된 방이 널려있다.
그리고 3개의 벽난로를 설치해 온기가 머물 공간을 확보하고 집 서쪽에 현관을 두었으며, 벽
돌로 포치를 설치하여 집의 운치를 더욱 높였다. 지붕은 서까래를 노출한 단순 박공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2층의 증축 부분을 빼면 거의 원형 그대로 잘 남아있다.

박노수가 매국노의 악취가 진동하는 이 집에 들어온 것은 1973년이다. 왜 이곳을 골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스승인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의 집과도 가깝고, 집의 모습도 중후하고 운치가
진해 예술가의 집 분위기로는 아주 좋아 보인다. 게다가 뜨락도 넓고, 인왕산도 가깝고, 도심
과도 가까우니 시내 왕래가 잦았던 그에게도 딱 적당한 장소였을 것이다.
남정은 이곳을 집과 화실로 삼아 많은 작품을 그려냈으며, 그의 예술적이고 꼼꼼한 손맛이 담
긴 뜨락에는 그가 수집한 수석과 석물, 문화유산을 배치하고 다양한 꽃과 나무를 심어 자연과
문화, 수석이 어우러진 아주 참한 공간으로 꾸몄다.

왜정 때 박길룡이 설계한 건물로 당시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고 현대 미술화가인
박노수가 40년 가까이 머물며 작품 활동을 벌였던 현장이라 윤덕영이라는 친일파 괴물이 만든
건물임을 무릅쓰고 1991년 5월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그것도 1호라는 그럴싸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바로 그 점이 참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데 1호나 2호, 3호ㅡ 100호 등은 그저 지정된 번호
일 뿐 가치 순위는 아니기 때문에 그리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1호만큼은 신중
해야 된다고 본다. 국보 2호는 몰라도 1호는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1호의 의미는 이 땅에서
는 꽤 각별하기 때문이다. 해방이 된지 70년이 되도록 친일매국노 청산조차(청산은 커녕 그것
들이 더 활개치고 있음) 제대로 되지 못한 이 땅의 거지 같은 현실을 이 가옥이 보여주는 듯
싶어 마음이 참 쓰라리다.

만약 윤덕영의 후손이 염치없이 계속 살고 있었다면 화염병이나 폭탄을 던져 없는 화마(火魔)
라도 억지로 소환해 집과 함께 날려버려야 마땅하겠지만 박노수가 이곳에 살면서 집에 일종의
면죄부가 붙여졌으니 굳이 때려부실 필요는 없을 것이다. 허나 문화재 지정 후순위로 두어 천
천히 지정을 하던가 요즘 개나 소나 지정된다는 등록문화재로 삼는 것이 어땠을까 싶은 아쉬
움도 살짝 든다. 뭐 이렇게 써봤자 허공에 메아리에 불과하지만...


▲  가옥(미술관) 현관 앞 (가옥 서쪽)

★ 남정 박노수(藍丁 朴魯壽, 1927~2013)의 간략한 생애
박노수는 1927년 2월 17일 충남 연기군(현 세종시)에서 태어났다. 1940년대에 청전 이상범의
문하로 들어가 그림을 배웠으며, 해방 이후 서울대 회화과에 진학했다.

그의 작품활동은 주로 국전(國展)에서 이루어졌는데 1953년 국무총리상, 1955년에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1957년에는 추천작가를 지냈다. 이후 5.16민족상, 3.1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
을 받았고, 이화여대(1956~1962)와 서울대(1962~1982)에서 교수를 지냈다. 이후 서울대 명예
교수가 되었고, 국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운영위원을 역임했으며, 1995년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 6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왜열도 동경과 스웨덴, 미대륙에 다수의 국제전과 10
여 회의 국내외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화제를 취하면서도 간결한 문필과 강렬한 색감, 대담한 터치 등 독자적
인 화풍을 구축해 전통 속에서 현대적 미감을 구현한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으로
는 '달과 소년'이 있으며, 그의 많은 작품이 이곳에 진열되어 속인들의 정처없는 안구와 마음
을 다독거려준다.

남정은 1973년부터 2011년 말까지 이곳에 살았다. 2011년 죽음이 임박해진 그는 집과 소장품
등 재산의 상당수를 사회에 환원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해 11월 11일 자신의 집에서 미술
계 인사와 후배들, 제자들, 종로구청 관계자 등이 모여 기증협약식을 갖고 약속대로 집과 소
장품을 쿨하게 종로구청에 내주었다.
그가 기증한 물건은 그의 그림이 포함된 미술작품 500점, 수석과 여러 석물 379점, 오래된 가
구 66점, 개인 소장품 49점 등, 약 1,000여 점으로 그의 통 큰 기증은 서민의 쪽박까지 빼앗
으려 드는 졸부와 위정자들로 가득한 이 땅에 한줄기 빛과 같은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가 베
푼 대인의 기운은 친일파 집이라는 굴레를 지닌 이 가옥을 180도 달리 보이게 하는데 충분했
다.

종로구청은 남정의 뜻에 따라 기증받은 집을 종로구립 미술관으로 꾸미기로 하고 2012년 10월
에 개관하기로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못해 1년 연기되었다. 그 사이 남정은 그의 소망이던 미
술관 개관을 끝내 지켜보지 못하고 2013년 2월 25일, 86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숨을 놓고 말았
다.
그가 사라진 이후, 유족과 종로구청의 노력에 힘입어 남정의 손때와 예술혼이 서린 그의 집은
드디어 2013년 9월 11일,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 천하에 문을
열었다. 개관 기념전으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모아 '달과 소년전'을 가졌으며, 종로구 최초
의 구립 미술관으로 이곳이야말로 남정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작이자 아름다운 선물이다.

나는 근/현대 미술가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보니 남정이 왜정과 현대를 거쳐간 원로 화가의 하
나로만 알고 있었다. 허나 이번에 그의 깊은 부분까지 파고드니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못
지 않은 대인(大人)으로 그의 이름 3자가 제법 크게 다가온다.


▲  무늬가 살아있는 석조대좌(臺座) (현관 앞)
무엇을 받치던 대좌였길래 무늬가 저렇게 요염한 것일까? 허나 대좌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망연히 뜨락 장식물의 일원이 되었다. 정체성과 역사를 잃어버리는 것만큼
무섭고 한심한 것은 없다.

▲  미술관 개원 기념으로 종로구청장이 남정에게 바친 메세지

▲  야외 전시관을 방불케하는 미술관 남쪽 뜨락

박노수 가옥은 크게 미술관으로 변신한 2층 가옥과 남쪽 뜨락, 그리고 북쪽 벼랑에 설치된 전
망대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 뜨락에는 남정이 수집한 온갖 수석과 문화유산 등이 가득 흩어져 있고, 소나무와 감나무
등 여러 나무와 꽃이 자리해 있어 조촐하게 자연과 문화가 잘 버무려진 야외 전시장을 이루고
있다. 특히 그는 수석 취미가 대단하여 뜨락 안팎으로 수석들이 가득한데 군침이 돌 정도로
잘생긴 돌도 적지 않으며, 그가 도안해서 만든 석조 원탁과 돌의자 6기는 가족과 벗, 제자/후
배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던 정겨운 현장이다.

▲  남정이 만든 석조 원탁과 돌의자 6기

▲  비석의 지붕돌인 가첨석(加檐石)


▲  귀여움과 고색의 때가 묻어난 조그만 호랑이상
어디서 데리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조선 후기 작품으로 여겨진다.

▲  또다른 호랑이상
호랑이를 고양이로 만든 옛 사람들의 손때로 피부가 꺼무잡잡하다.

▲  머리 위에 또다른 머리 장식을 둔 특이한 석등(石燈)
피부가 아직 반질반질하고 머리 장식이 특이한 흔치 않은 석등으로 20세기
초/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음)

▲  향로석(香爐石)과 그 위에 수줍게 놓인 작은 수석

▲  물을 머금은 조그만 돌항아리와 분재들
벌써부터 수면에 떨어진 낙엽들이 인생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돌항아리는 저들의 인생을 마무리 짓는 블랙홀인 모양이다.

▲  늦가을이 깃든 상큼한 남쪽 뜨락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  수석과 잡초, 꽃으로 가득한 가옥 동쪽

     ◀  집 동쪽에 솟아난 늘씬한 소나무
박노수가 심은 나무로 하늘과 가까운 줄기 끝
에 소나무 잎이 덩어리로 몰려있는 모습이 특
이하다. 나무의 높이는 거의 가옥 2층 정도 된
다.

▲  키 작은 태산목(목련목)
양옥란(洋玉蘭)이라고도 하며 박노수가
심었다.

▲  포치가 달린 가옥(미술관) 현관
구한말, 왜정 때 지어진 개인 양옥 가운데
포치가 달린 집은 흔치 않다.


▲  현관 앞에 놓인 커다란 돌확


 

♠  박노수 가옥(미술관) 현관과 전망대 주변

▲  현관을 지키고 있는 목조 동자상
세월이 달아놓은 주름으로 빛이 좀 바래 보이지만 앳된 표정은 변함이 없다.

    ◀ 가옥 현관과 여의륜(如意輪) 현판
지금은 유료의 공간이 되버린 박노수 가옥 내
부는 포치가 달린 현관을 통해 들어서면 된다.현관문에서 신발을 버리고 실내화로 갈아타면
되는데, 반지하층을 제외한 1층과 2층 상당수
의 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미술관 사무실은 1층
에 있다. 또한 '달과 소년'을 비롯한 박노수의
그림은 주로 2층을 장식하고 있으며, 1층은 박
노수의 생애와 그림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
다. (내부 촬영은 통제됨)

현관문에는 한자로 쓰인 여의륜 현판이 걸려있다. 글씨가 꽤 큼지막하고 패기가 넘치는 모습
으로 박노수의 집에 있으니 그의 글씨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다.
현판에 담긴 여의륜이란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세간(世間), 출세간 이익을 더하는 것
을 본뜻으로 하는 보살(菩薩)을 뜻하는 말로 추사가 말년에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울 봉
원사(奉元寺)와 봉은사(奉恩寺), 팔공산 은해사(銀海寺), 해남 대흥사(大興寺) 등 천하에 유
명한 절을 유람하며 많은 글씨를 남겼다.

현판 우측에는 '승연노인(勝蓮老人)'이란 낙관이 찍혀있는데, 승연노인은 추사의 다른 아호(
雅號)이다. 이 현판을 손에 넣은 박노수는 현관문에 걸어두어 현관부터 미술가의 집 분위기를
진하게 우려냈다.


▲  근대 양옥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2층 벽난로
난방의 기능은 사라지고 이제는 무늬만 남아 한가로운 말년을 보낸다.

▲  2층 목조 다락방
다락방에 설치된 모니터에는 남정의 인터뷰 장면(1970~80년대로 여겨짐)이 나와
그의 생전에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 현관 앞에서 바라본 미술관 정문
조금씩 숨겨진 끼를 드러내며 경쟁자 북촌을 긴장시키는 서촌, 박노수 미술관은
바로 그 서촌의 새로운 활력소이자 허브이다. 평일임에도 제법 많은 이들이
찾아와 짧은 시간에 비해 너무 떠버린 이곳의 높은 인기를 실감케 한다.

▲  뚜껑이 닫힌 죽은 우물
친일파 윤덕영의 딸 내외와 박노수 가족의 목을 축여주었던 우물이다. 허나
천박한 개발의 칼질로 그 수맥이 끊기면서 이제는 껍데기만 남았다.

▲  커다란 수석 (현관 앞)
호랑이나 사자, 낙타가 웅크리고 앉아 망중한에 잠겨있는 모습 같다.

▲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과 홀을 쥐어든 조그만 석인(石人)

가옥 북쪽에는 수풀이 우거진 가파른 벼랑이 있다. 예술과 문학의 향이 깃든 가옥답게 대나무
도 삼삼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벼랑에 계단과 석물을 배치한 고즈넉한 산책로를 내
었고, 그 길의 끝에는 무려 전망대까지 두었다. 이 언덕 산책로와 전망대야말로 박노수 미술
관만이 가진 강한 매력이자 백미라 칭할 만하다.

산책로 입구에는 고색이 묻어난 조그만 석인이 홀을 쥐어들며 안내인처럼 자리해 있다. 제자
리를 잃고 방황하는 그를 남정이 데리고 온 것인데 고향을 잃은 충격 때문일까? 석인은 좀처
럼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긴 이곳에 이끌려온 석조 문화유산 모두 제자리를 잃
은 가련한 처지이다. 아마도 사람이 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속삭임으로 고향을 잃은 동병상련
의 한을 달래지는 않을까?
투박하게 닦여진 돌계단을 오르면 북쪽으로 난 아주 짧은 샛길이 있는데, 대나무로 둘러싸인
그곳에는 돌의자가 놓인 조그만 쉼터가 있다. 그리고 숲길을 마저 오르면 나무로 지어진 전망
대(전망데크)가 나타난다.

이 전망대는 박노수 가옥을 미술관으로 바꿀 때 지은 것으로 예전에는 그냥 나무와 풀만 있었
다. 숲길에는 조그만 돌의자가 여럿 있는데 남정은 이들 의자에 앉아 천하를 바라보며 작품을
구상하거나 온갖 망중한에 잠겼을 것이다.
전망대까지 인도한 숲길은 담장 앞에서 뚝 끊겨버려 적지 않게 달아오른 숲길의 여흥을 깨뜨
려버린다. 지금이야 이렇게 막혔지만 윤덕영이 한참 인왕산의 산소를 축내던 시절에는 바로
옆에 자리한 벽수산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전망대에 서면 가옥의 뒷모습을 비롯해 옥인동 일부와 옛 인경궁(仁慶宮)터인 배화여자대학이
바라보인다. 이곳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나 두 눈에 들어오는 천하의 범위는 우물안 개
구리 수준이다. 그래도 주어진 공간을 최대로 활용해 이런 곳까지 갖추니 정말 알차긴 알차다.

▲  숲길에서 만난 조그만 향로석

▲  숲길에서 만난 장명등


▲  숲길 끝 벼랑에 다리를 걸친 전망대
숲길과 돌의자, 석물은 박노수 시절의 것이고 전망대는 2013년에 단 것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가옥의 뒷모습과 지붕
건물의 모습은 양옥이지만 지붕만큼은 거의 한옥 스타일이다. 윤덕영이 14동의 한옥을
지을 때 자신의 벽수산장을 제외하고 모두 한옥으로 지었으면서 왜 딸의 집만
이렇게 이채로운 모습으로 지어주었을까?

▲  전망대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옥인동과 통인동 지역이 주류를 이루며, 광화문 부근도 조금씩 시야에 들어온다.

▲  모락모락 연기를 피우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굴뚝
지붕에는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굴뚝 5개가 뿔처럼 솟아나 집의 멋스러움을 한층
수식한다. 1층 지붕에는 2개, 2층에는 3개가 달려있는데, 이중 3개는
벽난로용, 나머지는 부엌용이다.

▲  가옥 북쪽 굴뚝과 언덕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왼쪽)

▲  가옥 동쪽에 자리한 장독대와 창고

남정 일가가 사용하던 장독대가 창고 위에 놓여있다. 남정의 작품은 장독대에서 숙성된 여러
음식의 힘이라고 봐도 절대 과언을 아닐 것이다. 허나 그들이 떠난 이후 이제는 인생처럼 공
허한 장독대가 되어 뜨락 장식물의 일원으로 조용히 묻혔다.

※ 옥인동 박노수 가옥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찾아가기 (2017년 11월 기준)
* 지하철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
  서 종로구 마을버스 09번을 타고 박노수미술관 하차, 도보 1분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1,2번 출구)에서 도보 15분
* 입장료 : 성인(25~64세) 3,000원 (20명 이상 단체 1,800원) / 청소년 1,800원 (단체 1,200
  원) / 어린이 1,200원 (단체 600원) / 종로구민은 50% 할인
* 관람시간 : 10시~18시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설날과 한가위 당일은 휴관)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68-2 (옥인1길 34, ☎ 02-2148-4171)


 

♠  다쓰러져간 매국노 윤덕영의 고래등 기와집

▲  옛 윤덕영 집 돌계단

옥인동 47-133번지 주변은 새 주택과 헌 주택, 달동네 스타일의 집이 공존하는 현장이다. 바
로 그곳에 윤덕영의 기와집이 1채 남아있다.
윤덕영은 서촌(웃대)에서 가장 풍경이 아름다운 송석원과 옥인동 일대를 싹 매입하여 그곳에
자신의 탐욕을 풀어놓았는데 송석원에 큼지막한 서양식 별장을 짓기로 작정하고 프랑스 공사
(公使)를 지낸 민영찬을 통해 건물 설계도를 의뢰했다. 그 설계도를 바탕으로 독일인 감독관
을 고용하여 1914년 집을 짓기 시작해 10여 년의 공사 끝에 완성을 보았다.

그 집은 무려 222평 크기의 프랑스식 건물로 자신의 호를 따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 하였
다. 또한 송석원에 있다고 해서 '송석원별장'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었다. 산장 주변에는 14동
의 한옥을 지어 가족과 자식, 첩들과 모여 살았는데, 소나무와 사과나무가 무성하던 벽수산장
북쪽에 1고주 7량집의 99칸 기와집을 지어 첩의 거처로 삼았다. 그 집이 바로 이곳이다.

윤덕영이 1940년 골로 간 이후, 그의 자식들이 재산을 말아먹으면서 벽수산장은 왜열도 회사
인 미쓰이에게 넘어가고, 14동의 기와집도 거진 남의 손에 넘어갔다. 6.25 이후 서울의 폭발
적인 인구 증가로 벽수산장 주변에 무허가 집이 난립을 했고, 약간 처지가 괜찮은 이들은 윤
덕영의 한옥을 1칸씩 차지해 서울살이를 했다. 그렇게 서울을 휩쓴 근대화의 회오리로 그의
부질없는 한옥들은 대거 다운당했고, 지금은 박노수 가옥과 이 한옥만 간신히 남게 되었다.

한옥에는 현재 여러 가구가 살고 있는데, 대지를 공동으로 소유하며 각각 별도의 출입구를 두
어 1지붕 여러 가족을 이루고 있다. 매국노의 악취가 코를 찌르는 기와집이 힘겹게 서울살이
를 하는 서민들의 소박한 삶터가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형태가 적지않게 변질되고 수리도 제
대로 받지 못해 20세기 초반 최상류층 고래등 가옥은 이제 거의 쓰러지기 직전의 허름한 몰꼴
이 되었다. 마치 무관지옥으로 개처럼 끌려갔을 윤덕영과 아비의 재산으로 팔자좋게 살다가
가산을 말아먹은 그 자손들처럼 말이다.

비록 빛은 많이 바랬지만 한 시대를 나쁘게 풍미했던 권력자가 살던 현장이라 집에 쓰인 공사
자재는 거의 고급 수준이며, 단풍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한옥 동쪽에는 제법 품격이 돋보이는
석조 계단을 늘어뜨렸다. 지금이야 주택들 사이에 끼어있는 가련한 신세라 골목길 계단 정도
로 실감이 나진 않겠지만 왕년에는 궁궐 계단 못지 않은 위풍을 자랑했다. 게다가 일반 한옥
에서는 보기 힘든 계단의 소맷돌, 장대석 주초, 처마 장식, 장식이 새겨진 벽 등을 갖추고 있
어 예사 한옥이 아님을 귀띔해준다.
그러다보니 버리기는 좀 아까워 서울시에서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하면서 이 집을 옮
기려고 했는데, 나이에 비해 한옥이 너무 낡아 이전이 불가능하자 부득이 예전 모습 그대로
본을 따서 새롭게 짓는 선에서 끝을 냈다. 그리고 집 이름은 그 더러운 주인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냥 '옥인동 윤씨 가옥'이라 하였다. (가옥의 면적은 225.79㎡)

참고로 윤덕영의 아우로 형못지 않던 쓰레기 매국노인 윤택영(尹澤榮, 1866~1935)의 재실(齋
室)도 남산골한옥마을로 옮겨져 한가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  위에서 본 돌계단과 단풍나무

▲  계단 끝에 자리한 옛 윤덕영 집


▲  서민의 삶터가 되버린 옛 윤덕영 집
허름한 모습 속에 아직 고급 기와집의 기품이 남아있다.
 

계단을 오르면 윤덕영 집이 일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북쪽으로 휘어진 계단을 오르면 집
대문인데 서민들의 거처가 되버린 탓에 갖은 생활도구와 가스관, 전깃줄, 편지함으로 주변이
참 어수선하다. 게다가 대문도 굳게 잠겨져 있고, 골목길도 막혀버려 세세한 집 구경은 어려
운 실정이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혹여 나중에 개발의 칼질이 그어지면 이 한옥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다.
이미 남산골한옥마을에 본을 따서 지은 집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그곳의 집은 엄연히 새 집
이라 고색의 냄새가 없는 이 땅의 흔한 민속촌의 한옥 같은 인상이다. 반면 이곳은 100년 가
량 묵은 한옥이라 겉모습에서 벌써 고색의 향이 피어올라 고택의 기분을 들게 한다.
이곳을 만약 밀게 된다면 모두 가루로 만들지 말고 지붕과 벽, 목재 등을 모두 수습해 남산골
에 있는 윤씨가옥을 다시 손질했으면 좋겠다. 비록 매국노의 잔재라 껄끄럽긴 하지만 '박노수
가옥'도 박노수 화백 덕분에 개과천선하여 아주 새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이 한옥도 서민들의
오랜 삶터로 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현장이다. 게다가 20세기 초반 상류층 한옥의 형태
를 잘 간직하고 있으니 한옥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옛 윤덕영 집을 끝으로 늦가을 서촌의 일부 더듬기는 막을 내린다. 다른 명소는 별도의 글에
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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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꿀단지를 거닐다. 북촌 겨울 산책 (고희동가옥, 삼청동길, 따스한 차1잔)

 


' 북촌 겨울 나들이 '

▲  기기국 번사창


 


겨울 제국이 차디찬 위엄으로 천하를 꽁꽁 얼리던 연말에 후배 여인네와 북촌(北村)을 찾았
다. 유난히도 매서운 한파였지만 옷만 두둑히 챙겨 입으면 낮에는 햇님의 보우에 힘입어 그
런데로 다닐만하다. 날씨가 춥다고 마냥 집에 박혀있는 것도 그리 좋지는 못하지. 당당하게
겨울 제국에 대항하며 바깥 바람을 많이 쐬야 건강에도 좋고 추위에도 잘 적응이 된다.

서울 도심 속에 자리한 북촌(북촌한옥마을)은 부암동(付岩洞)과 성북동(城北洞), 북한산(삼
각산), 북악산(백악산)과 더불어 나의 즐겨찾기의 하나이다. 매년 적어도 10번 이상 발걸음
을 하는 편인데, 그렇다고 그곳에 나만의 꿀단지를 숨겨놓은 것은 아니다. 북촌한옥마을 자
체가 서울 도심 속의 꿀단지나 마찬가지이니 따로 나만의 꿀단지를 숨길 필요는 없겠지. 다
만 북촌을 얼마나 아느냐에 따라 꿀단지의 질도 틀려지며, 아는 것이 없으면 아무리 꿀단지
라도 빈 단지가 되고 만다.
북촌 답사의 갑(甲)은 본인이 늘 강조하지만, 단순히 사진 찍기 좋은 북촌8경이나 정독도서
관, 삼청동길 등의 유명 장소와 맛집, 까페만 찾아다니는 것이 아닌 골목 곳곳에 숨겨진 한
옥과 박물관, 공방, 문화유산, 그리고 북촌을 거쳐간 옛 사람들과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
의 삶과 향기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한옥과 삶터를 지나치게 건드리거나 뒤집지는 말자. 적당하게
선을 지키며 보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북촌은 껍데기만 남은 민속마을이 아닌 사람들이 살
며 삶을 꾸리는 살아있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살던 집
원서동 고희동 가옥(高羲東 家屋) - 등록문화재 84호

▲  붉은 벽돌담에 둘러싸인 고희동 가옥 외경

창덕궁길이 2갈래로 갈리는 원서동 빨래터 정류장에 붉은 피부의 벽돌 담장으로 둘러싸인 한옥
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곳이 바로 2012년 11월에 개방된 고희동 가옥이다. 우리나라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고희동, 그는 누구일까?

고희동은 제주 고씨 집안으로 호는 춘곡(春谷)이다. 1886년 3월 11일 서울 수표동(水標洞)에서
구한말에 군수(郡守)를 지낸 고영철(高永喆)의 3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대부(士大夫)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891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1899년 한성법어학교(
漢城法語學校)에 입학하여 4년 동안 프랑스어를 배웠다. 바로 그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서양화
를 처음 접했고, 자신이 그림에 소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04년 궁내부(宮內府) 주사로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프랑스어 통역과 문서 번역 등
을 담당했다. 1905년에는 궁내부 외사과 주사(主事)가 되었고, 전주 조경단(肇慶壇) 공사를 담
당한 공로로 6품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1906년 궁내부주사 판임관(判任官) 4등으로 승서되었고,
1907년에는 자신의 소질을 개발하고자 그 시절 그림으로 명성을 날렸던 안중식(安中植)과 조석
진(趙錫晉)을 찾아가 그림을 배웠다.
허나 당시 미술계는 동양화 일색이었다. 그런 동양화에 금세 진절머리가 난 고희동은 서양화를
배우기로 작정하고 장례원(掌禮院) 예식관 주임관 4등을 지내던 1909년에 황실의 지원을 받아
왜열도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해 이 땅의 사람으로는 최초로 서양화를 배웠다.
당시로는 생소한 서양화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그는 6년 동안 그림 수업을 마치고 귀국해 신미
술 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래서 졸업 작품으로 '자매','정자관을 쓴 자화상(현재
동경예술대학에 있음)'을 출품했고, 이때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 그를 '서양화가의 효시'라고
소개하면서 이 땅 최초의 서양화가로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또한 조선물산공진회에서 '가야금
을 타는 미인'을 출품했고, 중앙고보와 보성고보, 중동고보, 휘문고보 등 서울 장안에서 꽤 잘
나가던 중등학교의 미술선생으로 초빙되어 학생들을 가르켰다.

1918년에는 스승인 조석진, 안중식과 서화협회 창립총회를 개최했고, 바로 그해에 지금의 집을
설계하여 만들었다. 1919년에는 서울에 있던 왜인 화가와 연합해 고려화회(高麗畵會)를 발족하
여 고문이 되었고, 1921년에는 중앙고보에서 제1회 서화협회전을 개최해 자신의 서양화를 천하
에 선보였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어느 뜰에서'란 그림으로 입선했고,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
람회 유채수채화 부문에서 4등을 차지했다. 1936년에는 동아일보의 조선화단 칼럼과 제15회 협
전(協展)을 기고했으며, 1940년 중원대륙 북경(北京)에서 조선미술관이 개최한 '십대가산수풍경
화전'에 출품해 개인전을 가졌다. 1941년에는 조선예술상을 수상했으며, 해방이 되자 조선문화
건설중앙협의회 산하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조선미술협회 회장
도 겸했다.

1946년 10월에는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에서 열린 '해방기념 문화축전 미술전'에 출품했고, 동
화화랑에서 조선미술협회 제1회 회원작품전을 개최했다. 1947년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으로 천거되었고, 미국 국무부의 초청으로 미국을 1바퀴 둘러보고 왔다.
1948년에는 제1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949년 문교부 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해 정부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을 창설했는데, 1959년까지 국전 심사위원 및 초
대작가로 활동했다.

1952년에는 민주국민당 상임위원이 되어 정계에도 발을 들이기 시작했고, 1954년에 예술원의 종
신회원 겸 초대회장을 지냈다. 1955년부터는 민주당의 고문이 되었고, 1956년 국립박물관 국보
전 선정위원이 되었는데, 고희동 외에도 그의 열성제자로 간송미술관을 세웠던 간송 전형필(澗
松 全鎣弼)과 서양화가로 유명한 배렴이 그 위원에 선정되었다.
1957년 홍익대 명예교수가 되어 중앙공보관에서 '화필 50년 기념전'을 가졌고, 1960년 민주당의
공천으로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부인 조씨가 별세하자 실의에 빠진 나머지 천주
교에 귀의했고, 1965년 10월 22일, 79세의 나이로 영원히 붓을 놓고 만다.

고희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새로운 조형 방법을 가르친 현대미술의 선구자이다. 화단
을 조직하고 이끌었으며, 1925년 이후에는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전향해 서양화적 수법을 동양화
에 가미했다. 또한 휘문고보 재직시 제자였던 간송 전형필에게 문화유산 수호를 권해 그의 길을
인도한 등불 같은 존재였으며, 그를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높은 명성에 비해
그만의 그림 화법을 이루지 못했고, 많은 그림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세상은 그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생생히 기억은 하지만 정작 그의 그림을 별로 모르는 실정이다.
 
* 고희동 가옥
1918년에 고희동이 직접 설계하여 지은 것으로 대지 540㎡, 연면적 250㎡ 규모의 ㄱ자형 구조를
이룬 4동의 단층 기와집이다. 서양과 왜열도 주거문화의 장점을 반영하여 지었으며 이후에 사랑
채 겸 화실(畵室)을 추가로 증축했다.

고희동은 여기서 41년을 머물며 많은 제자를 길렀고, 여러 그림을 그려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사교성이 풍부하고 술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의 사랑방은 늘 손님들로 북적였다. 벗들이 안주 1
그릇씩 가져오면 주량대로 술을 마실 수 있도록 일기회(一器會)를 1주에 1번씩 열었다고 하며,
종종 흥취에 젖으면 즉석에서 벗들과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또한 한시(漢詩)에도 관심을 가져
한시 창작 모임에도 참가했다.

그의 집을 들락거리던 그의 벗으로는 1907년 같이 그림 공부를 했던 이도영(李道榮), 1918년 서
화협회를 함께 조직했으며 간송의 스승인 오세창(吳世昌), 그리고 노수현(盧壽鉉)과 이용우(李
用雨), 변관식(卞寬植), 이상범(李象範) 등 이름만 들어도 거진 알 것 같은 현대화가들이 주류
를 이룬다. 그 시절 문학가의 모임 장소가 성북동(城北洞)에 있는 이태준(李泰俊)의 수연산방(
壽硯山房)이었다면, 미술가의 모임 장소는 바로 이곳이었다.

고희동이 세상을 뜬 이후, 속세의 계속되는 무관심으로 폐가처럼 변해갔고, 2002년에는 한샘이
란 회사가 원서동에 사무실과 연구소를 두면서 주차장을 만든다며 이 집을 매입해 완전히 밀어
버리려고 했다. 그 회사의 부질없는 야욕 앞에 현대미술의 산실이 사라질 절대절명의 위기가 다
가온 것이다. 다행히도 내셔널트러스트 등 시민단체가 강하게 나서면서 한샘의 야욕은 보기 좋
게 좌절되었다.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가루가 되는 꼴은 면했다.
이후 서울시가 인수하여 쓰러지기 직전인 집을 보수해 비공개로 두다가 2012년 11월 비로소 속
세에 개방했으며, 그 기념으로 2013년 1월 중순까지 '춘곡 고희동의 집을 열다'란 테마로 오픈
기념 특별전을 열기도 했다.

북촌의 새로운 명소이자 현대미술의 성지(聖地)로 북촌의 기라성 같은 명소들의 염통을 쫄깃하
게 만들 정도로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 시간이 더 지나면 북촌의 주요 성지가 될 것으
로 기대된다.

※ 고희동 가옥 찾아가기 (2016년 2월 기준)
*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1번을 타고 빨래터에서 내린다. 허나 거리
  가 그리 멀지 않으므로 가볍게 걸어가는 것
  도 괜찮다. 안국역 3번 출구에서 도보 14분
* 창덕궁 돈화문에서 돌담길을 따라 도보 10분
* 관람시간 : 10시~16시까지 (매주 수~일요일
  에 무료 개방)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6
 (☎ 02-2148-4165)

 

◀  활짝 열린 고희동 가옥 대문


▲  고희동 가옥

복원된 고희동 가옥은 전체적인 모습은 한옥이지만 왜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개량 한옥의 일종이
다.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뜨락과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가옥이 나타나는데, 가옥 내
부에는 사무실을 비롯하여 사랑채와 화실, 2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옥 북쪽 부분은
통제구역이다.
왜식으로 이루어진 현관에서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고 준비된 실내화로 갈아신고 안으로 들어서
면 된다.


▲  뜨락 서쪽에 자리한 대나무의 위엄
겨울 제국의 압제로 푸른 기운을 찾기 힘든 시절이지만 대나무밭만큼은
겨울도 어쩌지를 못하는 모양이다. 제국에 저항하며 독야청청을
유지하는 대나무의 위엄 앞에 잠시 엄동설한을 잊어본다.

▲  뜨락에 놓인 동그란 나무 의자와
길쭉한 돌덩이

▲  가옥을 복원하면서 갖다둔 돌확으로
고희동 일가와는 관련이 없다.

▲  화실 방향 복도 (중간 문이 사무실)

▲  전시실 방향 복도


▲  예술 문인가의 향기가 느껴지는 사랑방
왜정 때 미술가의 모임 장소로 절찬리에 쓰였던 현장으로 고희동이 쓰던
물품과 가옥을 복원하면서 장식용으로 갖다둔 물품이 섞여 있다.

▲  문방사우가 갖춰진 탁자에 걸쭉하게 그려진 난초 수묵화
저들은 고희동과는 관련이 없다. 사랑방의 분위기와 고희동의 문향(文香)을
더해주고자 복원 이후에 갖다둔 장식품이다.

▲  옷걸이에 걸린 하얀 저고리 - 옷의 때깔이 무지 깨끗해 고희동의
체취가 담긴 옷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디까지나 장식용~~

             ▲  고희동 가옥 화실
사랑방과 이웃한 화실은 고희동의 여러 그림이
앞다투어 눈을 뜬 곳이다. 하지만 그의 화실과
관련된 기록이나 사진이 없어 그가 활동했던 왜
정 때와 1950~60년대 화실 스타일을 참조해 어
림짐작으로 재현했다.

 


◀  사랑채와 화실 복도


▲  전시실에 진열된 고희동 관련 문서들

가옥 서쪽 부분에는 2개의 전시실이 있다. 좌측에 자리한 전시실은 고희동과 관련된 문서와 사
진, 신문 등이 진열되어 있는데, 문서 중에는 복제품이 여럿 있다. 그리고 우측 전시실은 고희
동과 그의 벗들이 그린 그림이 있는데, 대부분이 복제품이라 아쉬움을 준다. 진품은 구우일모(
九牛一毛)처럼 섞여있지만, 어느 것이 진품인지 설명문에 표시가 없어 관계자도 아리송할 정도
이다.


▲  위에 있는 문서는 1905년 고희동을 9품 종사랑(從仕郞) 궁내부 주사로
임명한다는 고종황제의 칙령(勅令)이다. (복제품)
밑에 있는 것은 그의 동경미술학교 졸업장(1915년 졸업)이다. (복제품)

▲  고희동의 빛바랜 사진과 1901년 한성법어학교 재학 시절에
학업 우수로 받은 상장 (이것도 역시 복제품)

▲  고희동과 그의 가족 사진들
윗줄 가장 왼쪽 사진은 그의 부모 사진이며, 중간줄 왼쪽은 왕년의 그의 사진이다.
그 오른쪽은 간송 전형필 집에서 찍은 것으로 부채를 든 이가 간송이다.
오른쪽 그림들은 고희동이 그린 그림이다.

▲  한국 근대화단의 개척자란 이름으로 실린 고희동 (미술 1964년 6월호)
밑에는 왜정 때 이 땅의 화가들이 조직한 미술단체인 서화협회(書畵協會)에서
발간한 서화협회회보

▲  고희동 관련 신문기사와 사진들

윗줄 왼쪽은 춘곡의 개인전 소식을 알리는 매일신보 1940년 11월 5일 기사이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것은 고희동의 화필생애50년을 기념하는 작품전시회 목록(복사본). 그 오른쪽은 1940년에
서울부민관에서 찍은 개인전 기념사진이다. (사진에 상허 이태준도 있음)
아랫줄 왼쪽은 1957년 3월 30일 동아일보에 실린 춘곡의 변(辯)이란 신문기사로 '춘곡'이란 호
는 이름 희동에서 동(東)을 의미하는 춘(春)과 양곡(暘谷)이란 고문자에서 곡을 따서 지었다.
그리고 그 오른쪽은 양화 수입의 선구자라며 고희동을 소개한 1940년 1월 6일 동아일보 기사


▲  왼쪽부터 한국인물화전 팜플렛과 고희동을 소개한 한국현대미술사
서적(동양편 1976년, 서양편 1977년), 오른쪽은 '현대미술 100년
춘곡 고희동'이란 제목으로 그를 소개한 한국일보 신문기사

▲  자신의 모습을 담은 고희동의 그림들 (복제품)

◀  고희동 가옥의 뒷모습
붉은 벽돌 굴뚝이 모락모락 연기를 내뿜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며 우수에 젖어있다.


▲  삼청동(三淸洞)에서 만난 어느 갤러리

북촌에는 다양한 테마의 박물관과 전시관, 공방이 있어 북촌 나들이의 꿀맛을 더해주는데, 공예
품이나 장식물을 만들고 판매하는 갤러리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지나가는 길목에 만난 갤러
리(윗 사진)도 그 중 하나로 한국금융연수원 남쪽 언덕배기에 있다.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온갖
공예품을 전시/판매하고 있으며, 가격이 좀 야박하다. 굳이 구매가 아니더라도 북촌이나 인사동
에 이런 공간이 즐비하므로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  갤러리에서 만난 이쁜 공예품들


 

♠  구한말에 지어진 무기 창고 ~ 기기국 번사창(機器局 飜沙廠)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1호

경복궁 동십자각(東十字閣)에서 삼청동길을 따라 쭉 가다보면 한국금융연수원이 나온다. 이곳은
북촌 명소가 아닌 한국은행 소속의 연수원이라 많은 나들이객들은 '삼청동에 왠 연수원?' 고개
를 갸우뚱하며 지나갈 뿐이다. 허나 그 안에 조선 후기 무기 공장 겸 창고인 기기국 번사창(이
하 번사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생뚱맞은 한국금융연수원이 조금은 달리 보일 것이다.

번사창은 연수원 내부 북쪽에 있는데, 이곳을 보려면 연수원 정문 경비실에서 관람 허가를 받아
야 된다. 너무 이른 시간이거나 18시(겨울에는 17시) 이후가 아니면 거의 통과시켜주니 관람에
는 별 문제는 없다. 상황에 따라 번사창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안으로 들어서면 연수원 북쪽에
벽돌로 꼼꼼하게 무장된 번사창 건물이 듬직한 모습으로 답사객을 맞이한다.

건물 주위에는 공원용 의자가 넉넉하게 놓여져 있으며, 번사창 바로 북쪽에 화장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또한 번사창 남쪽 연수원 건물 바깥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는데 커피가 공짜이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음)
이곳에 들어온 연수생이나 직원, 기타 업무로 찾은 이들을 위해 공짜로 한 것인데, 시중 자판기
보다 종류도 다양하다. 그래서 종류별로 뽑아 마시며, 추위를 녹였지. 근데 상황에 따라 커피를
뽑지 못하도록 매정하게 잠궈 두는 경우도 있다.

그럼 번사창은 어떤 곳일까?
이곳은 격동의 시절인 구한말, 근대식 무기를 만들고자 세운 기기국(機器局) 소속의 무기 공장
겸 창고이다. 1883년 5월에 착공하여 1884년 6월에 준공된 것으로 1984년 해체 보수공사를 벌일
때 이응익이 쓴 상량문(上樑文)이 나와 건물의 탄생 시기와 성격을 알려주었다.
상량문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무기를 저장코자 터전을 반석 위에 정하고 쇠를 부어 흙과 합쳐
건물을 지으니 이를 번사창이라 하였다. ~~~ 칼과 창 등 정예한 무기를 제조/수선/보관하는 건
물은 기예의 으뜸가는 수준으로 지어져야 한다'

건물 이름인 번사(飜沙)는 '흙으로 만든 거푸집에 금속 용액을 부어 주조한 용기에 화약을 넣고
폭발시킬 때 천하가 진동하는 소리가 나고 빛은 대낮처럼 밝다'
는 뜻이다. 근대식 무기가 화약
무기 중심이니 딱 그에 걸맞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창(廠)은 공장을 뜻한다.

1876년 어거지성의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으로 단단히 털린 조선 조정은 신식 무기를 만들고자
기기국이란 관청을 세웠으나 정작 무기 공장은 1884년에야 만들었다. 부국강병을 향한 조선의
꿈이 대단했는지, 기기국과 번사창의 위치를 삼청동 명당(明堂)에 세웠음을 상량문에서 밝혔다.
허나 조선은 시작부터 끝까지 일부 시절을 제외하면 늘 약소국을 면치 면했던 나라라 부국강병
은 그저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곧이어 터진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으로 일시 중단되었고,
이후 어지러운 국내 사정으로 제대로 그 빛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결국 1910년을 끝으로 기기국
의 역할은 강제로 마감되고 만다.

번사창은 장대석(長臺石)과 사괴석(四塊石)으로 기단을 다지고 바로 그 위에 검은색과 회색 벽
돌로 사방을 꽁꽁 둘렀는데, 이는 청나라 건축과 서양 건축을 적당히 섞어서 지은 청나라 양식
의 기와집이다. 이렇게 지어진 것은 1881년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배우고자 조선 조정에서 파견
한 영선사(領選使) 출신이 공사를 지휘,감독했기 때문이다.
1883년 번사창을 지을 때 종사관(從事官) 김명균(金明均)이 청나라 천진(天津)에서 청나라 장인
4명을 잡아와 5월부터 건물 공사에 들어갔는데, 영선사를 이끈 김윤식(金允植)을 비롯하여 박정
양(朴定陽), 윤태준(尹泰駿) 등이 감독을 했고, 김명균이 상해 험취소(驗取所)에서 무기 제조
기기를 구입해서 들어왔다. 그런데 정작 건물 준공이 늦어지자 인부들을 독려했으며, 이때 모래
뒤치는 곳, 쇠붙이 불리는 곳, 목양(木樣) 만드는 곳, 철모자 만드는 곳, 고방(庫房) 등을 만들
었다.

지붕은 맞배지붕을 띄고 있으며, 기존 조선의 건물과는 다른 청나라식 건물이라 조금은 이국적
이다. 허나 아무래도 보안이 필요한 무기고(武器庫)이다 보니 내부가 잘 보이지 않도록 저렇게
짓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건물의 길이는 33m, 폭 8.5m, 연면적은 217.58㎡에 이른다.

건물 정면 중앙에는 홍예 다리처럼 아치를 튼 붉은색 문을 내었고, 우측 부분에 조그만 문을 두
고 붉은색 벽돌로 띠를 넣었다. 내부 환기를 위해 5개의 창을 냈는데, 창문은 녹색이다. 측면에
는 문을 1개, 창문을 2개 냈으며, 지붕에는 무기 제조 및 수리로 인해 발생하는 열을 배출하고
자 조그만 창틀을 냈고 그 위를 맞배지붕으로 마무리 지었다.

번사창 자리는 조선 초기부터 철저히 군사용으로 쓰인 곳으로 군기시(軍器寺)의 창고인 별창(別
倉)이 있었다. 군기시 관청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창(北倉)이라 불렸으며, 화약무기를 제조했기
때문에 화약고(火藥庫) 터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개화기(開化期)에 기기국에 통합되어 이
일대는 기기국 소속이 되었으며, 500여 년 이상 군사용으로 쓰인 이곳의 전통은 군대해산 이후
1910년에 끊기고 만다.
주인을 잃어버린 기기국 관청은 왜정에 의해 죄다 사라지고 겨우 번사창 하나만 목숨을 건졌는
데, 왜정은 조선의 관아 건물을 모두 밀어버리거나 어정쩡하게 1~2개만 남겨 망국(亡國)을 철저
하게 우롱하였다. 그 이후 기기국 자리에 엉뚱하게 한국금융연수원이 들어섰고, 번사창은 그 뜨
락의 장식물이 되어 망국의 한을 간직한 채, 북촌의 숨겨진 명소가 되었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생각이지만 한국금융연수원을 외곽으로 쿨하게 옮기고 북촌과 삼청동을 위한
문화/쉼터 공간으로 닦았으면 좋겠다. 경복궁 건춘문(建春門) 동쪽에 있던 국군수도병원도 이전
되어 그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이 들어왔는데, 은행 연수원이 북촌 핵심에 굳이 있을 필요는 없
다. 청와대나 국무총리공관, 주변 군사시설 등 국가에 예민한 시설은 어쩔 수 없지만 연수원만
큼은 꼭 옮겨 북촌과 시민에게 돌려주었으면 좋겠다. 연수원은 유동인구가 많은 이런 곳보다는
한적한 외곽이 딱 제격이다.

※ 기기국 번사창 찾아가기 (2016년 2월 기준)
* 지하철 1,4호선 서울역(2번 출구), 1,2호선 시청역(4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11번을 타고 금융연수원에서 내리면 바로 한국금융연수원 정문이다.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4번 출구)에서 광화문과 삼청동길을 따라 도보 25분
* 공개시간 : 9시 이후부터 18시 이전(겨울은 그보다 일찍), 연수원 사정으로 개방이 안되는 경
  우도 종종 있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28-1 (삼청로 118)

▲  우측에서 바라본 번사창

▲  좌측에서 바라본 번사창


▲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북막골

겨울 제국에 저항하며 북촌을 이리저리 둘러보니 그새 햇님은 커텐을 치고 사라졌고, 달님이 검
게 탄 천하를 갸날프게 비추고 있었다. 그렇다고 시간이 꽤나 늦은 것도 아니다. 이제 6시인 걸.
제아무리 태양계에서 제일 크다는 햇님이라 할 지라도 겨울 제국의 위엄 앞에서는 맥도 못추는
모양이다.
본글에 언급한 명소 외에도 여러 곳을 덧붙여 둘러봤지만 상당수는 이미 지겹게 가본 곳이라 제
대로 사진을 남긴 고희동 가옥과 번사창만 다루었다. 본글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고희동가옥이
며, 번사창은 조연, 나머지는 엑스트라로 보면 된다.

세상이 검게 타들어가니 햇님의 눈치에 잠시 움츠려들던 추위가 다시 고개를 든다. 게다가 모락
모락 저녁밥이 그리운 시간이라 시장기도 추위와 앞다투어 나를 괴롭힌다. 삼청동을 비롯한 북
촌 일대에는 북촌의 오랜 전통만큼이나 괜찮은 식당이 꽤 많은데, 이번에는 안가본 곳을 가기로
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북악골도 아닌 북막골, 삼청동길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자
리한 식당으로 입구에 식당을 알리는 이정표가 요란하게 서 있다.
북막골은 한옥으로 이루어져 있어 발을 감싼 거추장스런 신발을 벗고 툇마루를 거쳐 안으로 들
어가서 방에서 식사를 해야 된다. 보온을 따스하게 했는지 방이 매우 따스하며, 천정에는 대들
보를 비롯해 한옥의 선이 우아하게 빛나 있고, 방에는 여러가지 전통 장식물이 달려있어 밥이
나올 때까지의 무료한 시간을 조금 달래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시간은 바로 밥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방에 앉아 메뉴판을 보니 떡국, 전골, 보쌈, 막국수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가격은 시중보다
조금 얹혀진 편. (삼청동과 인사동은 괜찮은 식당은 많지만 가격이 좀 있음) 떡국 가운데 겨울
별미라는 굴떡국(한시적 메뉴임)이 있길래 그것을 함 먹어보기로 했지. 어렸을 때는 굴과 담을
쌓고 살았지만 요즘은 그냥 퍼먹을 정도로 좋아한다.
잠시 뒤 밑반찬이 차려지고 떡국이 나오는데, 국물도 제법 숙성이 되어있었고 굴과 떡, 김, 파
가 어우러져 괜찮은 떡국을 자아내고 있었다. 밑반찬 가운데는 물김치(나박김치)가 있는데, 맛
이 시원해서 좋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나니 방의 온기와 배부른 뒤에 찾아오는 식곤증이 나를 희롱한다. 추운 곳에
서 오래 있다가 따스한 곳에 들어앉아 뜨끈한 것을 먹으니 졸려서 정신을 못차리겠다.


▲  북막골에서 먹은 굴떡국의 위엄

▲  북막골 툇마루에 있는 달덩이 같은 하얀 백자

▲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집에서 먹은 십전대보탕과 팥죽

저녁을 배불리 먹었으니 후식으로 차 1잔의 여유를 누려야 되겠지. 더군다나 북촌에 왔으니 차
생각은 더욱 간절하다. 
삼청동에는 맛집도 많지만 닭의 털처럼 찻집/까페도 많이 있다. 허나 북촌의 성격을 망각한 장
사치와 행정당국의 그릇된 생각으로 한옥 찻집이 줄어들고, 서구 스타일의 거의 획일적인 까페
와 양식당, 가게가 늘어나고 있다. 물론 적당히 있으면 상관은 없다. 무엇이든 적당하면 참 좋
은데, 그 바람은 북촌 곳곳을 들쑤시고 있으며, 삼청동길은 북촌인지 서구의 어느 구석인지 햇
갈릴 정도로 변해버려 뜻 있는 이들은 많이 안타까워한다.
일반 대중들이야 삼청동길이 이상하게 변하든 말던 이런 모습도 좋다고 찬양을 하겠지만 상술로
인해 지나치게 상업/서구화 되어 북촌의 성격과 개성에 크게 도전하는 것은 썩 좋지가 않다.

삼청동길이 서울 도심 이상이나 요란하게 변하고 있음에도 한결같은 모습을 지닌 찻집이 하나
있다. 이곳의 터줏대감 찻집인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이다. 찻집 이름치고는 너무나 긴 편
인데, 첫째로 잘하는 집도 아닌 둘째를 칭한 것이 참 이채롭다. 그렇다면 첫째로 잘하는 집도
있어야 되는데, 그 집은 아직 없는거 같다.
첫째를 칭하지 않고 둘째를 칭하는 것을 보면 좀 겸손해 보이기도 하고, 1등을 향해 열심히 장
사를 하겠다는 의지로도 보이며, 자칭 서울 2위라는 우월의식과 자부심도 느껴지기도 한다. 어
쨌든 이름부터가 확 눈에 띄는 이 집은 현란한 분위기의 까페와 달리 1960~70년대 빵집이나 다
방 같은 소박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찻집 내부도 그렇고, 의자와 탁자도 그렇지. 3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찻집으로 20대는 물론 중장년층도 많이 찾는다. 삼청동의 다른 까페/찻집은 거의
20~30대 위주인데 반해 여기는 전 연령층을 소화한다.

30여 년을 이어온 집에 걸맞게 손님도 많아 평일과 휴일 저녁에는 자리 잡기가 힘들다. 찻집 관
계자도 알아서 손님들이 와서 매출을 올려주니 조금은 배부른 모습이고, 내부를 조금 늘렸다고
는 해도 좁은 것은 마찬가지. 삼청동을 숱하게 들락거린 나도 이번에 처음 방문한다. 이곳을 몰
라서가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별로라서 그리 내키지가 않았고 늘 사람들로 가득하니 들
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동지(冬至)도 코앞에 다가오고 해서 문을 두드리니
다행히 자리가 하나 있어서 덥썩 물었다.

이 집은 십전대보탕과 녹각대보탕, 팥죽이 유명한데, 슬슬 건강을 생각할 때라 나는 십전대보탕
(十全大補湯)을, 여인네는 팥죽을 먹었다. 둘다 가격은 6~7천원선, 십전대보탕은 밤과 죽을 비
롯해 온갖 한약제가 뒤섞여 있는데, 차가 아닌 거의 한약이다. 찻집에서 먹는 한약, 이거 먹고
몸 좀 좋아졌으려나 모르겠네. 팥죽은 설탕을 많이 넣었는지 너무 달콤하기 그지 없다.

이렇게 하여 북촌 겨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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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6년 2월 18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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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의 새로운 꿀단지, 서촌 나들이 (한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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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화여고 생활관

▲ 이상범 가옥 담장
◀ 배화여고 생활관
▶ 백세청풍 바위글씨
▼ 박노수 가옥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  옛 청휘각(晴暉閣)터 주변에서 바라본 서촌

서울 도심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서촌(웃대)은 경복궁(景福宮) 서쪽 동네를 일컫는다. <청계천
이북이자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는 북촌(北村), 청계천 이남은 남촌(南村), 창덕궁 동부는 동촌
(東村), 청계천 주변은 중촌(中村)이라 불림>
원래 서촌은 서대문 동쪽 동네를 일컬었고, 지금의 서촌은 '웃대'라 불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
르면서 서촌의 범위는 웃대를 넘어 자하문고개 밑까지 확장된 것이다. 그리고 세종(世宗)이 통
인동(通仁洞)에서 태어난 인연(1397년 출생)을 내세워 종로구청과 지역 주민 주도로 '세종마을
'이란 간판까지 달게 되었다.
서촌의 범위는 청운동(淸雲洞), 효자동(孝子洞), 옥인동(玉仁洞), 신교동(新橋洞), 누상동(樓上
洞), 누하동(樓下洞), 체부동(體府洞), 필운동(弼雲洞), 통의동(通義洞). 통인동, 창성동(昌成
洞), 사직동(社稷洞), 행촌동(杏村洞) 일대로 이들은 서울의 든든한 우백호(右白虎)인 인왕산(
仁王山)의 동쪽 자락이다.
1394년 서울이 조선의 도읍이 되면서 주거지가 조금씩 형성되었는데, 북촌이 양반사대부와 부유
층의 공간이었다면 서촌은 왕족과 양반사대부, 내시(內侍)와 상궁(尙宮), 의관(醫官), 역관(譯
官) 등 다양한 계층이 살았으며, 특히 중인 계급이 많이 살았다.

인왕산과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을 병풍으로 두룬 아름다운 절경으로 인해 조선 초부터 도성(
都城) 내 경승지로 아주 명성이 높았다. 이런 곳은 늘 귀족들이 군침을 흘리는 법이라 일찍이
안평대군(세종의 3번째 아들)부터 이항복(李恒福), 정철(鄭澈), 권율(權慄), 김상용(金尙容),
김수항(金壽恒), 추사 김정희(金正喜)에 이르기까지 많은 귀족들이 집과 별장을 지어 머물렀다.
특히 이곳은 도시와 자연이 경계를 맞닿은 도성의 변두리로 필운대로와 신교동교차로만 지나면
완전 자연에 감싸인 한적한 곳이었다. 게다가 궁궐과 육조(六曹) 등의 관청과는 엎어지면 코 닿
을 정도로 가까우니 귀족들의 별장 선호지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서촌의 이름난 명소는 겸재 정선(鄭敾)이 그의 노련한 손끝을 통해 그림으로 남겼는데, 그 화첩
이 장동(壯洞)8경첩으로 여기서 장동은 서촌의 일원인 청운동 지역의 옛 이름이다. 조선 후기에
는 중인이던 천수경(千壽慶)이 송석원(松石園)이란 시사(詩社)를 세워 중인들의 문학 공간이 되
었으며, 1910년 이후에는 윤동주(尹東柱)와 이상범, 박노수, 이상(李箱) 등 많은 시인과 화가들
이 자연과 가까운 서촌에 안기며 주옥 같은 작품을 그려냈다.

서촌은 북촌만큼은 아니지만 한옥들이 제법 많이 남아있다. 약 700여 채의 한옥이 옥인동과 누
하동, 사직동, 체부동, 창성동 일대에 흩어져 있는데, 정작 150년 이상 묵은 한옥은 하나도 없
고, 왜정 때 개량 한옥과 해방 이후 한옥이 전부이다. 그리고 왜식(倭式) 가옥과 박노수 가옥
등의 양옥도 섞여있어 20세기 초/중반 서울의 주거 양식을 잘 보여준다.
비록 한옥이 많긴 하지만 북촌처럼 정식적으로 한옥마을을 칭하고 있지는 않으며, 비공식적으로
서촌한옥마을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창성동 일대 한옥을 따로 '창성동한옥마을'이라 불리기
도 한다.

구한말까지 북촌과 더불어 장안에서 잘나가던 서촌이지만 옥인동 일대에 고래등 저택을 짓고 인
왕산의 맑은 공기나 축내던 악덕 친일파 윤덕영(尹德榮)과 이완용의 부정 때문인지 왜정 이후
적지 않게 기울었다. 게다가 해방 이후 개발제한구역에 꽁꽁 묶이면서 거의 시골 읍내처럼 오랫
동안 정체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루면 강산도 변한다는 서울 도심의 한복판임에도 북촌과 서촌만큼은 시간도 느릿느릿 양반걸
음을 하거나 뒷걸음을 친 것이다. 불과 조금만 나가면 21세기 한복판인데, 서촌은 아직 20세기
초/중반에 머물러 있어 서울의 옛 모습을 더듬기에 좋다.
허나 시간이 너무 정체되면 지역 주민들의 삶이 힘들어진다. 북촌도 도심 속의 꿀단지로 화려하
게 재기를 하고 있지만 서촌은 2011년까지 낙후된 과거 모습으로 남아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한옥 기피증이 생겨나 한옥이 적지 않게 사라졌고, 서촌의 숨겨진 명소들도 은근히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 4월 서울시에서 '경복궁 서측 지구단위계획'을 발표하여 한옥 보존과
신축을 장려했고, 북촌으로 단단히 재미를 본 서울시와 종로구청이 서촌을 새로운 꿀단지로 손
을 대면서 서촌도 드디어 때를 만나게 되었다.
그 이후 새로 지어진 한옥이 나날이 늘고 있고, 종로구청에서 서촌 답사코스를 개발하고 홍보하
는 한편, 새로운 명소를 발굴하고, 기존의 명소를 손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조금씩
북촌을 추격하고 있다. 특히 수성동계곡 복원(2012년 7월)과 박노수 가옥을 구립미술관으로 개
방한 일(2013년 9월)은 서촌에 큰 활력을 불어넣는데 충분했다. 게다가 소규모 갤러리와 공방(工
房),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조금씩 둥지를 틀면서 서촌의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서촌에는 수성동계곡과 박노수가옥(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 이상범 가옥, 사직공원, 황학정(
黃鶴亭), 선희궁(宣禧宮)터, 백호정 바위글씨, 백세청풍 바위글씨, 창성동 한옥단지, 통의동 백
송터, 신익희(申翼熙) 가옥, 송석원터, 청휘각터, 자수궁터, 이상 가옥, 필운대, 배화여고 생활
관, 체부동 홍종문가옥, 백운동천 바위글씨, 운강대 바위글씨, 보안여관, 행촌동 은행나무, 홍
건희 가옥 등 조선과 근/현대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깃들여져 있으며, 이상범 가옥과 박노수 가
옥, 신익희 가옥은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
그리고 대림미술관, 갤러리시몬 등의 온갖 갤러리와 문화공간, 금천교시장과 통인시장 등의 전
통재래시장이 있다. 특히 금천교시장(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은 제2의 피마골이라 불러도 손색
이 없을 정도로 먹자골목이 크게 형성되어 있는데, 온갖 고기와 해산물, 전, 한식, 분식 등을
내놓는 식당이 즐비해 학생과 직장인, 등산객, 답사객으로 1주 내내 활기가 넘친다.

성북동과 부암동(付岩洞), 북한산(삼각산), 북촌에 빼앗긴 나의 마음을 계속 훔쳐가고 있는 서
촌, 그들에 비해 늦게 인연을 맺었지만, 2011년부터 구석구석 발자국을 남기며 서촌의 숨겨진
속살을 계속 뒤집고 있다. 겉은 허름하고 그저 흔한 주거지로 보이겠지만 그 속은 신대륙 이상
으로 다양한 보물을 품은 곳이 바로 서촌이다.

서촌 나들이는 3호선 경복궁역(1,2,3번 출구)에서 시작하면 좋다. 여기서 자하문길이나 사직단
동쪽(경복궁역 1번 출구)의 필운대로를 중심으로 움직이면 되며, 창의문 옆에 자리한 윤동주시
인의 언덕(청운공원)에서 주요 명소를 거쳐 경복궁역으로 내려오는 것도 괜찮다. 또한 북촌처럼
조그만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고, 그 속에 여러 명소와 소소한 볼거리가 숨겨져 있으니
큰 길만 살피지 말고 서촌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골목길도 꼭 거닐어보자. 그러면 정말 배부르
고 알찬 서촌 나들이가 될 것이다.

본글에서는 서촌의 명소 일부를 소개하도록 하겠다. 다 다루기에는 너무 많음..

 

 


 

♠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근대 건축물이자 배화학당(培花學堂)의 옛 흔적
배화여고 생활관(培花女高 生活館) - 등록문화재 93호

▲  배화여고 생활관

사직단을 품은 사직공원 북쪽에는 옛 배화학당의 역사를 이은 배화여자대학교와 배화여중/여고
가 한 덩어리로 몰려 있다. 대학과 여중, 여고, 유치원까지 한 울타리 안에 담긴 흔치 않은 현
장으로 교복을 입은 앳된 사춘기 여중~여고생부터 자유분방한 차림의 20대 여대생이 한데 공존
하는 여인들의 공간이다.
여중은 교내 북쪽, 여고는 교내 서쪽에 자리해 있고, 나머지는 대학이 채우고 있는데, 이화학당
(梨花學堂)과 더불어 이 땅에서 제법 오래된 신식학교이자 여학교로 의미가 깊다.

배화학당을 세운 사람은 미국 텍사스에서 건너온 남감리교 소속 여자 선교사 '조세핀 필 캠밸(
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1853~1920)'이다. 그는 이 땅을 찾은 최초의 여자 선교사로
1897년에 들어와 그들의 목적인 기독교 홍보를 위해 조선 여인들의 교육 계몽을 벌이기로 했다.
그래서 그가 몸담았던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학생들에게 선교 기금을 받아 경복궁 인근 내자동
(內資洞)에 땅을 구입해 캐롤라이나 학당을 세웠다.

학교를 열자 청나라 여선교사 도라유의 도움으로 2명의 여자 아이와 3명의 남자 아이를 간신히
모집해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여자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 기숙사
를 두어 먹이고 재웠으며, 국어와 한문, 성경 등을 가르쳤다.
1902년 통학생의 입학을 허용하여 학생 수가 30명으로 늘어났다. 1903년 남감리교회 여선교부에
서 경비를 지원하여 학교 건물과 기숙사를 증축했고, 중학교 예비과를 설치했다. 1909년 고등과
를 설치했으며, 1910년 4월 배화학당으로 이름을 갈았다. 이때 초대 교장대리로 니콜스(Nicolls
)여사가 취임하면서 4년제 중학과와 4년제 소학과를 병설했다.
1910년 5월 16일 고등과 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가 친히 축사를
보내 그들의 졸업을 치하했으며, 그때 축사를 윤치호(尹致昊)가 대독했다.

1910년 이 땅에 어둠이 내려온 이후, 1914년 왜인 교사의 왜어(倭語) 수업을 거부하기도 했으며,
1916년 1월 지금의 자리로 학교를 옮겨 1915년에 미리 지은 과학관 건물에 보통과/고등과/유치
원을 담았다. 이때 3년제 고등과를 4년제로 개편했으며, 홍천에서 '무궁화 보급 운동'을 펼쳤던
남궁억(南宮檍)이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독립선언문'을 배포해 독립운동에 적극 동참했으며, 1920년 기숙생들
이 만세 사건을 벌이면서 많은 교사와 학생이 왜정에 잡혀갔다. 1922년 4년제 보통과를 6년제로
바꾸고 대학 예과를 설치했으나 이듬해 폐지했으며, 1924년에는 교가(校歌)가 지어졌는데,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가 노래 가사를 쓰고, 교사인 루비 리가 작곡을 했다.

1925년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이름을 갈았고, 1926년 캠벨기념관을 신축해 고등과가 이전했다.
1929년 11월 광주(光州) 학생운동이 터지자 격문(檄文)을 붙이는 등, 만세운동에 동참하여 왜정
의 염통을 잠시 쫄깃하게 만들었으며, 1938년 3월 배화여자고등학교, 배화여자소학교로 명칭을
갈았다.
1940년 왜정의 신사(神社) 참배 강요에 선교사들이 반발하면서 모두 그들 나라로 돌아가자 경영
난으로 일시 위기를 맞게 된다. 다행히 이민천(李閔天)의 재산 기부와 여러 교사들의 노력으로
문을 닫는 것은 면했다. 1943년 배화여자소학교를 경성여자배화학교로 변경했으며, 1944년 7월
왜군 통신부대가 캠벨기념관을 무단 점유하여 사용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1945년 9월, 경성여자배화학교를 폐교하고 재학생을 종로국민학교로 보냈으며, 1946
년 4월, 6년제로 개편하고 배화여자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허나 1950년 6.25가 터지면서 학
교는 부산(釜山) 초량동으로 내려가 임시 교사를 만들어 운영했으며, 서울의 학교는 폭격으로
상당수가 파괴되고 말았다.
1951년 5월, 교육법 개정으로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개편했으며, 1977년 배화여자대학을 설립
하여 지금에 이른다.

배화학당 초창기 시절, 이화학당도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조선이란 나라가 워낙 남녀유별이 심하
다보니 여학생 교육을 모두 여선교사들이 맡아서 했다. 단 한문(漢文)은 남자 선생이 맡는 경우
도 있었는데, 이때는 선생이 여학생을 마주 보며 가르치지 못하고 항상 뒤로 돌아앉아 여학생의
질문에만 대답을 하거나 선생과 학생 사이에 병풍을 치고 수업을 했었다. 지금으로써는 도저히
상상도 안되는 일이다.


▲  붉은 피부로 이루어진 배화여고 생활관

내가 배화여자대학을 찾은 것은 단순히 여자 구경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정말임ㅠ) 바로 옛
배화학당 건물을 보고자 함이다. 교내(校內)를 들어서면 황금빛으로 물든 은행나무 뒷쪽에 붉게
물든 중후한 모습의 근대 건축물이 있는데, 바로 학교에서 2번째로 오래된 건물인 배화여고 생
활관이다.

언덕에 터를 닦은 배화여고 생활관(이하 생활관)은 배화학당이 내자동에서 이곳으로 둥지를 옮
긴 1916년에 선교사 주택으로 지어졌다. 선교사들 대부분 미국에서 건너와서 그런지 건물도 그
들의 고향, 미국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해방 이후 윌슨 선교사의 집으로 사용되었다
가 1971년 배화여고에 기증하면서 배화여고 생활관 및 동창회관으로 쓰였다. 그러다가 1997년
이후에는 동창회관으로만 쓰이면서 많이 한가해졌다.

서양식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반지하와 2층으로 이루어졌는데, 반지하는 완전 밖으로 노출되어
있어 준3층이나 다름이 없다. 건물 현관은 1층에 있으며, 반지하는 현관을 거쳐 내려가야 된다.
현관 앞에는 돌출된 지붕을 만들고 그 위를 발코니로 사용했으며, 건물 내부에는 홀과 계단이
있고, 그 양쪽으로 방을 두었다. 건물의 겉모습은 서양식 근대 건축물로 붉은 피부의 벽돌을 사
용했는데, 지붕은 흥미롭게도 한옥의 기와지붕을 취했다. 그래서 서양식과 우리식이 조화를 이
룬 건물로 지붕에는 2개의 붉은 굴뚝을 세워 연기로 하늘을 찌른다. 허나 난방 방식도 많이 바
뀌었으니 이제는 무늬만 굴뚝이 되어 모락모락 연기를 불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  늦가을이 씌운 황금옷을 입고 아장아장 신이 난 은행나무
(나무 그늘에 캠벨 여사의 흉상이 있고, 그 뒷쪽에 생활관이 있음)

▲  은행나무 그늘에 세워진 배화학당의 창시자 '조세핀 필 캠벨'의 흉상과
리드(Dr. C.F. Reid)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비(왼쪽), 그리고 2007년에
세운 배화학당 창립 110주년 및 대학 개교 30주년 기념비(오른쪽)

▲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배화여고 과학관

생활관 앞에는 넓게 운동장이 닦여져 있다. 그 북쪽에는 교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과학관이
붉은 피부를 드러내며 자리해 있는데, 배화학당이 필운동으로 자리를 옮기던 1915년에 2층으로
지어진 것을 나중에 3층으로 올렸다. 바로 옆 생활관보다 무려 1년이나 선배이지만 아직까지 문
화유산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아마도 학교에서 문화재 지정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사진에는 없지만 배화여고 본관(本館)도 생활관, 과학관과 마찬가지인 붉은 벽돌 건물로
1926년에 켐벨기념관으로 지어졌다. 1944년 왜군 통신부대가 무단으로 점유했으며, 6.25 시절에
반파된 것을 개축하여 현재는 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유치원 놀이터 옆에는 수북하게 자라난 회화나무 1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나이는 대략
20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아직 오래된 나무로써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보호수 등급도 따지
못했지만 그에게는 인간이 달아주는 보호수란 훈장 따위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끝으로 여기서는 빠졌지만 배화여고 필운관 뒷쪽에 필운대(弼雲臺)란 오래된 명소가 숨겨져 있
다. 이곳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오성 이항복(李恒福)의 집터로 필운(弼雲)은 그의 또다른
호이다.
오성의 집은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오래 전에 사라지고 고종 때 그의 후손인 이유원(李裕元)
이 '필운대' 3자와 이곳을 소개하는 바위글씨를 바위에 새겼다. 원래는 이들도 보려고 했는데
그만 깜박하고 말았다. 교문을 나오고 한참이 지나서야 앗차 생각이 나더군.. 아무래도 이번은
인연이 아닌듯 싶어서 쿨하게 다음으로 미루었다.

※ 배화여고 생활관, 필운대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에서 직진하면 사직동주민센터와 파출소가 나온다. 여기서 주
  민센터와 파출소를 왼쪽에 끼고 '사직로9길'로 들어서면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과 매동초교가
  나오며, 그들을 지나면 배화여자대학 정문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생활관의 옆구리가 정면에
  보이며, 필운대는 교내 서쪽 필운관(배화여고) 안쪽에 있다. (경복궁역에서 도보 10분)
* 경복궁역 2번 출구를 나와서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금천교시장)를 가로질러 직진하면(필운대
  로1길) 배화여자대학 정문이다.
* 사직단과 경복궁역(사직동주민센터) 정류장에서 도보 8분
  (이곳을 경유하는 시내버스 노선 - 171, 272, 601, 606, 700, 706, 707, 7025, 9703번)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산12 (배화여고 ☎ 02-724-0300)
* 배화여고 홈페이지는 아래 회화나무 사진을 클릭한다.


▲  유치원 운동장에 그늘을 드리우는 오래된 회화나무

 


 

♠  근/현대 동양화의 산실이자 왜정 때 개량한옥
이상범(李象範) 가옥 및 화실(畵室) - 등록문화재 171호

▲  이상범 가옥

배화여고 생활관을 둘러보고 서촌을 남북으로 가르는 필운대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누하동(樓
下洞) 주택가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펼쳐지는 갖은 골목길을 유심히 살펴보자. 앞서 배화여자대
학 유치원 회화나무가 가옥들 뒷쪽으로 짙게 보이는 골목길로 들어서면 그 막다른 곳에 서촌을
거쳐간 근/현대 동양화가 이상범의 가옥과 화실이 있다.
골목 입구에는 그를 알리는 이정표가 없기 때문에 동네 뒤로 보이는 배화유치원 회화나무를 단
서로 삼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찾아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눈뜨고도 놓칠 정도로 주택가
속에 파묻혀 있다.


▲  이상범 가옥과 화실이 있는 골목길
골목 끝에 자리한 집이 이상범 가옥이며, 그 뒤에 배화유치원 회화나무가 바라보인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푸른색 기와 대문 안쪽이 이상범의 화실과
그의 아들 내외가 거주하는 집이다.

▲  담장 너머로 바라본 이상범 화실 (청전화숙)

골목 끝 직전에는 이상범이 그림을 그리던 붉은 벽돌의 집이 있다. 그는 집 바로 동쪽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을 두어 그림을 그리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이 화실을 청전화옥(靑田畵屋)
또는 청전화숙(靑田畵宿)이라 불렀다. (여기서 '청전'은 이상범의 호)
겉을 보면 별로 오래되지 않은 주택처럼 보이지만 속은 1930년대에 지어진 왜식(倭式) 목조 건
물로 바깥에 빨간 벽돌과 기와를 씌웠다. 건물 남쪽에는 큰 창을 두어 실내를 밝게 하였고, 서
쪽에는 집과 이어지는 통로를 내었는데, 지금은 담장을 막아놓았다.
현재 화실은 그의 아들이 소유하고 있으며, 바로 동쪽에 그들이 사는 주택이 있다. 이상범 가옥
은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관리하면서 관람시간 내에 자유롭게 구경할 수 있지만 화실만큼은 아직
은 자유롭지 못해 관람을 원할 경우 초인종을 눌러 집주인에게 요청해야 된다. (나는 아직 화실
은 구경 못함)
화실에는 청전이 그림을 그리던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그의 손때가 탄 미술용품과 여러
유품, 서적이 전한다.

▲  화실 대문에 걸린 청전화옥 현판

▲  화실 담장에 걸린 표석


▲  함정이 깃든 이상범 가옥 바깥 대문

이상범 가옥의 철제 대문은 늘 굳게 닫혀져 있다. 그래서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비공개로 여
기고 발길을 돌리기 일쑤, 허나 그것이 대문의 함정이다. 화실은 몰라도 가옥은 2012년부터 속
세에 개방된 상태이므로 함정에 속지 말고 과감히 초인종을 눌러보자. 그러면 닫혔던 문이 확
열릴 것이다. 그렇게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쪽 대문이 나타나는데, 이 대문이 원래 것이다.
바깥 대문은 가옥을 손질하면서 새로 단 것이다.


▲  이상범 가옥 안쪽 대문 (예전 대문)

안쪽 대문을 들어서면 뜨락과 대문 사이에 자리한 문간방이 나온다. 이 방은 현재 가옥 관리인
이 머무는 일종의 경비실로 예전에는 청전의 3째 아들 부부가 거처하기도 했고, 4째 아들 이건
걸(李建傑)이 작업실로 쓰기도 했다.

    ◀  행랑채 응접실 (안쪽은 청전의 방)
문간방 맞은편에는 행랑채 응접실이 있다. 이곳
은 청전이 남자 손님을 맞던 방으로 탁자와 의
자가 놓여져 있으며, 안쪽 방은 청전이 생활하
던 방이다.
손님이 많았던 청전은 대문과 이웃한 행랑채 끝
방을 자신의 방으로 삼고 그 양쪽 방을 손님 응
접실로 삼았으며, 방 동쪽에는 별도 건물로 화
실(청전화숙)을 두어 직접 드나들었다.


▲  주인이 가고 없는 청전의 빈 방
청전은 여기서 잠을 자고 책을 읽으며 작품을 구상했다.

▲  청전의 방에서 바라본 안채 응접실
안채와 연결된 안채 응접실은 여자 손님을
맞이하던 방이다.

▲  거실에서 바라본 안채 응접실과
청전의 방


▲  거실(마루)과 안채 응접실(오른쪽)

이상범 가옥은 1930년대에 지어진 서울에 흔한 개량한옥으로 1942년 청전이 매입하여 1972년 세
상을 뜰 때까지 30년을 살았다. 가옥의 구조는 'ㄱ'자 안채와 'ㅡ'자 행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도시 한옥에서는 드물게 부엌에 찬마루를 갖고 있는 것이 이 집의 강한 특징이다.
가옥 서부는 가족들의 생활공간으로, 동부는 자신의 사회적 활동공간으로 구분했으며, 화실에서
그의 많은 작품이 숱한 인고의 노력 끝에 태어났다. 그리고 배렴과 박노수를 비롯한 많은 열성
제자들이 이곳을 거쳐 현대 미술의 한 획을 그으면서 현대 미술의 살아있는 성지(聖地)로 크게
추앙을 받았다.

청전이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자손들이 거주하다가 2006년 서울시에서 매입하면서 그들은 화
실 옆 주택으로 집을 옮겼다. 이후 2008년 복원 공사를 벌였으며 2012년 속세에 개방되어 자유
롭게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허나 집을 알리는 이정표도 아직 없고, 집의 인지도도 그의 높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너무 낮아 찾는 이는 별로 없는 실정이다.

가옥 내부에는 청전의 방과 안방 등 6개의 방과 마루(거실), 찬마루, 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청전 일가가 사용하던 TV수상기와 빨래 방망이, 돌판, 냉장고, 가구, 그릇과 밥상 등이 놓여져
청전의 숨결을 조금이나마 누리게 해준다.

▲  거실 한쪽에 자리한 냉장고
청전 식구들이 사용하던 냉장고라고 한다.

▲  막이 닫힌 오래된 TV수상기
그 밑에 빨래 방망이와 돌판이 있다.

▲  거실 서쪽에 자리한 안방
안방은 부인의 거처로 청전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  찬마루에 걸린 누하동천(樓下洞天) 현판
이 글씨는 청전이 쓴 것으로 그는 자신의
집을 누하동천이라 칭하며 소중히 여겼다.


▲  아랫방(왼쪽)과 찬마루(가운데), 부엌
아랫방은 청전의 2째 아들(이건웅) 부부가 살던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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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전 식구가 식사를 준비하거나 밥을 먹던 부엌 찬마루
그들이 사용하던 밥상과 놋쇠로 된 그릇이 고스란히 놓여져 갑자기
밥생각을 간절하게 만든다.

▲  껍데기만 남은 부엌 부뚜막과 검은 피부의 솥뚜껑
장작을 먹으며 모락모락 연기를 내뿜던 왕년의 시절을 그리워한다.
청전의 작품도 저 솥에서 나온 밥과 음식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  마당과 장독대, 고품격 무늬가 새겨진 남쪽 담장
담장 벽면에는 궁궐 담장이나 벽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무늬는 청전이 직접 제작한 것으로 벽면 절반이 뜯어져 나가
허전한 모습이다. 장대한 세월이 이곳을 방문한 기념으로
하나씩 뜯어간 모양이다.

※ 청전 이상범(1897~1972)의 생애
이상범은 1897년 몰락한 선비 집안인 이승원(李承遠)의 3째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
워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공짜로 교육을 시키던 서화미술원에 입학하면서 그의 숨겨진 미술적
재능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 빛을 제대로 비추게 만든 이가 바로 그의 스승인 안중식(安中植
)으로 1917년 미술원을 수료하자 자신의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에 머물게 하며 미술을 가르쳤다.

1923년 이용우(李用雨), 노수현(盧壽鉉), 변관식(卞寬植)과 동연사(同硯社)를 조직하고 전통 회
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으나, 그해 11월 노수현과 2인전을 개최하는 선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으며, 그 인연으로 추천 작가와 심
사 위원을 역임했다.

이후 동아일보사에서 근무하다가 1936년 손기정이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1등을 먹자,
그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 사건으로 옥고를 치루었으며, 감옥을 나온 이후 집에 청전화
숙을 차리고, 오로지 그림과 제자 양성에 모든 것을 내던졌다. 그의 화숙을 거쳐간 이로는 배렴
과 박노수가 있으며, 청전의 그림 솜씨가 나날이 신을 닮아가면서 미술계의 춘원 이광수로 찬양
을 받기도 했다.

1947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추천 작가, 심사 위원, 고문 등을 역임했고, 1950년부
터 홍익대 교수를 지내다가 1961년에 퇴직, 집에서 그림을 벗삼으며 말년을 보내다가 1972년 세
상을 떠났다.

청전의 작품은 그의 스승이던 안중식의 영향으로 남북종(南北宗) 절충 화풍을 추구하였다. 그러
다가 1923년부터는 논과 개울을 근경에 두고 나지막한 야산을 원경에 배치해 횡으로 전개되는
독창적인 구도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때 나온 작품으로 '산수도'(1919년), '모연도(暮煙圖)'
(1924년), '초동도(初冬圖)'(1926년) 등이 있다.
그만의 독자적인 양식이 형성된 것은 1945년 이후로 농촌의 전원 풍경을 2단의 간단한 구도 속
에 배치했으며, 엷은 먹에서 점차 진한 데로 변화하는 농담(濃淡)의 묘를 살려 향토색 짙은 세
계로 승화시켰다. 특히 시골 산야의 정취를 계절 변화에 따라 특유의 기법으로 처리하면서 한국
적 서정성을 추구했다.
이 당시 대표작으로 '설로도(雪路圖)'(1957년), '고원귀려도(高原歸旅圖)'(1959년) 등이 있으며,
전통적 수묵 기법의 새로운 창조적 추구와 한국 산야와 전원의 향토적 분위기를 독자적인 사상
풍의 화법으로 이루어낸 우리나라 현대 한국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힌다.

※ 누하동 이상범 가옥 찾아가기 (2015년 12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1번 출구)에서 직진하면 사직공원 바로 직전에 사직동주민센터가 나온
  다. 여기서 오른쪽 필운대로길로 들어서 조그만 언덕을 넘으면서 왼쪽 골목길을 잘 살펴보자.
  커다란 회화나무가 바로 뒤에 보이는 조그만 골목길을 들어서면 그 길의 끝에 이상범 가옥과
  화실이 있다.
* 가옥 관람시간 : 9시~18시 (겨울은 17시, 매주 월요일은 쉰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하동 178, 181 (필운대로 31-7)

 

 


 

♠  서촌에 숨겨진 명소, 옛 백호정(白虎亭)의 아련한 흔적

▲  개발의 분별없는 칼질 앞에 외로운 신세가 된 옛 백호정터

주택들로 밀림을 이룬 누상동 서남쪽 구석에는 서울 장안의 활터로 유명했던 백호정터가 숨겨져
있다.
이곳에는 백호정 바위글씨와 글씨가 새겨진 바위, 죽은 샘터가 남아있는데, 바위 바로 윗쪽에는
배화여자대학이 콘크리트로 흉하게 터를 다지고 캠벨기념복지관을 세우면서 보기에도 참 가련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바위 머리까지 학교 땅이라고 해도 바위를 저렇게 짓누르면서까지
콘크리트를 바르고 건물을 세워야 했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가까운 청운동의 백세청풍(百世淸風) 바위글씨도 그 위에 졸부들의 빌라가 들어서 있고,
명륜동(明倫洞)에 있는 증주벽립(曾朱壁立) 바위글씨도 그 위에 집들이 들어앉아 그들을 깔아뭉
개니 그게 바로 개발이 철학도 없이 칼질을 자행한 결과이다. 인간이 저지른 개발의 칼질이 그
들에게 몹쓸 칼을 씌운 셈이다. 그래도 이곳은 바위가 그런데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주변에
수목도 조촐하게 숲을 이루어 백호정터를 감싸니 그나마 백세청풍이나 증주벽립보다는 좀 나은
상황이다.

백호정은 서촌에 있던 5개의 활터인 오사정(五射亭)의 하나로 무인들이 궁술을 연마하던 곳이었
다. 허나 굳이 활쏘기가 아니더라도 이곳은 풍경이 빼어나 많은 문인들이 바위가 닳도록 찾아왔
던 장안의 경승지였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오사정이 폐쇄되면서 그때 문을 닫았는데, 6.25이후 무분별하게
집들이 들어서면서 아련하게 남은 활터의 흔적마저 완전 지워지고 말았다. 다행히 백호정이란
바위글씨가 백호정을 엄호했단 바위 피부에 화석처럼 새겨져 백호정의 옛 정취를 조금이나마 풍
겨주고 있는데, 이 글씨는 엄한명(嚴漢明, 1685~1759)이 새긴 것으로 여겨지며, 글씨가 제법 크
고 당찬 모습이다.

백호정이란 하얀 호랑이란 뜻으로 천하 호랑이의 성지로 추앙받던 인왕산 호랑이와 관련이 있다.
조선 초기에 인왕산에 살던 병든 호랑이가 풀속에서 솟는 물을 마신 이후 병이 나았는데, 물이
솟는 자리에 가보니 조그만 샘이 있었더랜다. 그래서 그 샘을 약수터로 삼으니 그것이 백호정
약수로 이 물을 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이야기가 있어 왕년에는 많은 폐질환자들이 찾아와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렇게 장안에서 이름난 약수터였지만 개발의 칼질이 그 약수의 명
줄을 위협하면서 1980년대 이후 샘터는 끝내 숨이 끊겼고, 세상 뇌리 속에 완전 잊혀졌다.
다행히 1990년대 후반 이곳을 관리하는 효자동(孝子洞)에서 동네 명소로 지정하고 주변을 정비
하면서 그나마 바위글씨라도 유지하게 되었고, 2014년 6월,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얻어 개발의
칼질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문화재 지정 명칭은 '백호정') 하긴 서울에서 이렇게 처참한 모습
이 된 명소와 샘터가 어디 한둘이랴..?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누상동 1-33


▲  한토막 전설이 되버린 백호정 약수터

약수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라 샘터를 머금은 연두색 문은 거의 열릴 일이 없다. 방학동(放鶴
洞)의 원당(元堂)샘처럼 말끔히 복원을 하여 다시금 샘물이 콸콸 솟는 그날을 재현할 수는 없을
까? 허나 그전에 바위를 깔고 앉은 학교 건물과 인근 주택들 먼저 싹 지워야 될 것이다. 그래야
물도 마음 놓고 이곳까지 올 것이 아니던가?


▲  백호정 바위글씨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9호

▲  백호정 바위글씨가 새겨진 바위, 그리고 그 위에 굴레처럼 씌워진
흉물스러운 개발의 잔재물


▲  자수궁(慈壽宮)터 표석

필운대로는 사직공원에서 통인시장 서쪽, 맹학교와 농학교 앞을 거쳐 신교동로터리에서 끝을 맺
는 길이다. 서촌의 서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길로 길 주변에 사직공원, 배화여고 생활관, 이상
범가옥, 체부동 홍종문가옥(비공개), 홍건희가옥, 수성동계곡, 백호정 바위글씨, 박노수가옥,
송석원터, 자수궁터, 우당기념관, 선희궁터 등 명소가 풍부해 서촌의 꿀단지 같은 길이니 꼭 둘
러보기 바란다.

필운대로를 거닐다가 옥인아파트에 이르면 자수궁터 표석을 만날 수 있다. 자수궁은 광해군(光
海君)이 1616년에 지은 궁궐로 조선 초부터 이곳에는 북학(北學)이란 학당과 후사가 없는 후궁
들의 거처가 있었는데, 인왕산과 경희궁 자리에 왕기(王氣)가 서려있다는 풍수설(風水說)이 나
돌자 광해군은 그 기운을 막고 풍수설에 따른 백성들의 혼란을 잠재우고자 자수궁과 인경궁(仁
慶宮), 경덕궁(敬德宮, 경희궁)을 지었다.
궁이라고는 하지만 규모는 작았으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인경궁
은 철거되어 일부 건물과 목재가 창경궁으로 옮겨졌고, 자수궁은 후사가 없는 후궁들이 비구니
가 되어 말년을 보내는 일종의 이원()으로 형태를 전환하여 자수원()으로 이름을 갈
았다.

자수원은 한때 5,000명이 넘는 여승이 머물렀으나 경비가 많이 드는 등, 폐해가 심해 1661년 2
월 부제학(副提學) 유계() 등의 상소로 철거되었으며, 건물 목재는 성균관(成均館) 건물을
짓거나 보수하는데 동원되었다. 이후 자수궁 돌다리와 일부 건물이 왜정 때까지 남아있었으나
어느 세월이 잡아갔는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매국노의 대명사인 이완용(李完用)이 이곳을 매
입하여 잠시 살기도 했다. 이완용은 거의 공공의 적이 되어 목을 노리는 사람들이 나날이 많아
지자 그 더러운 목숨을 지키고자 여러 번 집을 옮겼다.


▲  송석원(松石園)터 표석

필운대로 통인시장 부근 길가에는 송석원터 표석이 있다. 송석원은 인왕산 계곡의 하나인 옥류
동(玉流洞)에 있던 천수경(千壽慶)의 집으로 그의 자는 군선(). 호는 송석원(), 송석
도인()이다.
천수경은 가난한 평민 출신으로 한시(漢詩)에 아주 능했으며, 1786년 옥류동에 집을 짓고 송석
도인을 칭하며 취미가 비슷한 중인 계급의 지식인 10여 명을 모아 일종의 동호회를 결성했다.
그 모임이 옥계시사(玉溪詩社), 또는 송석원시사()였다. <서사(西). 서원시사(西
)라고도 함>

그 모임은 그의 집인 송석원에서 열렸으며, 1817년 5월 천수경의 회갑을 기념하는 시사 모임에
추사 김정희(金正喜)도 찾아와 회갑 선물로 송석원 뒤에 있던 바위에 송석원 바위글씨를 남겼다.
당시 추사는 인근 통의동(通義洞) 백송터에 살고 있었다. (바위글씨는 1950년대 이후 동네 주민
들이 집을 지으면서 깨부심)

옥계시사는 천수경이 죽은 이후 점차 와해되었고, 송석원은 명성황후(明成皇后) 일가인 민규호(
閔奎鎬)와 민태호(閔台鎬)가 차례대로 접수했다가 친일매국노 윤덕영이 모두 매입했다.
그 작자는 1914년 독일인 감독을 시켜 222평의 양옥 건물인 벽수산장(碧樹山莊)을 지었는데, 무
려 10여 년이 걸렸으며, 산장 외에도 한옥 14동(그중의 박노수가옥도 있음)을 지어 그의 일가에
게 주었다.
당시 벽수산장은 서울 장안에서 제일 호화로운 주택으로 꼽혔는데, 사람들은 '돌문안 뾰족집'이
라 불렀다.

1940년 윤덕영이 지옥에 떨어지자, 그의 아들이 상속을 받았다. 허나 세상물정 모르던 금수저라
금세 재산을 말아먹었고, 집 유지비도 벅차서 1941년 왜열도 회사인 미쓰이(三井)에게 팔아넘겼
다. 미쓰이는 이때 부근 청풍계도 매입하여 그곳 절경을 싹 말아먹었다.

해방 이후 벽수산장에 덕수병원이 들어섰으며, 6.25시절에는 잠시 조선인민공화국 청사가 되기
도 했다. 청사로 쓰일 정도로 건물이 웅장하고 멋드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1951년 이후에는 유
엔군장교 숙소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 건물로 쓰였으며, 1966년 수리를 하던 중 불이나 건
물은 전소되었다. 그래도 부시기 아까운 건물이라 중수를 하려고 했으나 도저히 가능성이 없어
1973년 말끔히 부셔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벽수산장 외곽에 세운 돌기둥 3개가 남아있고, 그가 지은 한옥 1동이 옥인동 구
석에 남아있으며, 딸에게 준 2층짜리 건물은 박노수가 매입하여 2011년까지 살다가 2013년 9월
에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본글은 여기서 끝.. 나머지 명소는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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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12월 2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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