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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7.24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더울 때는 땅 속이 최고!!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 광명시 광명동굴 (가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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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5.05.26 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연등축제(연등회), 조계사 연등 나들이

피서의 성지를 찾아서 ~~~ 더울 때는 땅 속이 최고!!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 광명시 광명동굴 (가학산)



'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 광명시 광명동굴 '

▲  광명 와인동굴 (광명동굴)

▲  황금폭포

▲  광명동굴의 마스코트, 아이샤


 


서울에서 자연산 동굴을 구경하려면 400~500리나 떨어진 강원도 정선이나 영월, 태백, 충

북 단양까지는 가야 된다. 몸에 좋은 탄산약수만큼이나 보기가 참 어려운데, 2011년 이후
서울 근교에도 드디어 동굴이 하나 생겨 멀리 가야 되는 수고로움이 조금은 덜해졌다. 단
양이나 정선처럼 자연산 동굴이면 참 좋겠지만 현실은 광산(鑛山) 출신의 인공 동굴로 그
주인공은 광명시에 있는 광명동굴(가학광산)이다.
비록 인공으로 다져진 굴이지만 내부는 자연산 굴과 많이 닮았으며, 울산 울주군(蔚州郡)
의 자수정동굴처럼 버려진 광산을 관광용으로 잘 재생한 케이스로 널리 칭송을 받고 있다.
그러니 자연산 동굴이 아니라고 그리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정 자연산을 원한다면 강원도
나 단양, 울진(성류굴), 제주도로 쿨하게 날라가면 된다.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로 오랫동안 입소문을 탄 광명동굴은 2012년 11월에 이미 인연
을 지은 바가 있다. 그때는 가학광산동굴이라 불렸는데, 개방 초창기라 광산 시절 그대로
의 모습을 거의 간직하고 있었다. 허나 볼거리는 별로 없었으며 가이드를 따라 30분 정도
동굴을 둘러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야말로 광산 동굴 산책이다.
이후 광명시의 무한 정성에 힘입어 나날이 진화를 보여 이제는 명실상부한 수도권 제일의
동굴 명소이자 광명시(光明市)의 꿀단지로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하여 그가 얼마나 달라
졌는지 확인도 해볼 겸, 오랜만에 다시 인연을 지었다.

햇님이 하늘 중간에 걸린 늦가을의 어느 날 14시, 개봉역(1호선)에서 후배를 만나 광명동
굴의 발, 광명시내버스 17번(개봉역↔광명동굴)을 탔다.
이 버스는 철산동(鐵山洞)과 하안동, 소하동, 가학동 등 광명 동부와 남부를 정신없이 강
제투어를 시켜주며 거의 1시간 만에 광명동굴 종점(광명시 자원회수시설 앞)에 우리를 내
려놓는다.


 

♠  광명동굴 입문

▲  광명동굴 밑에 자리한 광명시 자원회수시설

버스에서 내리니 하얀 구름 무늬를 지닌 붉은 피부의 거대한 건물이 우리를 맞는다. 하늘을 찌
를 듯 높이 솟은 굴뚝이 적지 않게 위압감을 선사하고 있는데 그는 '광명시 자원회수시설'이라
불리는 존재로 원래는 쓰레기 소각장이다. 광명 지역에서 거둬들인 잡다한 쓰레기를 태우고 처
리하던 현장으로 예전 가학광산 시절에는 광산 폐기물을 무방비로 모아두던 곳이었다.

2012년에 왔을 때는 정말 우중층한 모습 그 자체였는데, 광명동굴의 주변 미관을 위해 구름 무
늬를 겯드려 붉은 색 옷을 입혔다. 그래서 그때보다 밝고 화사하게 보인다. 건물 내부에는 광
명업사이클아트센터, 에코에듀센터가 들어서 폐자원을 활용한 문화/예술/교육 공간으로 쓰이고
있으며 식당 등의 편의 시설도 갖추고 있다. (건물 남쪽에 동굴 주차장이 있음)


▲  주차장 주변에 조성된 귀여운 조형물(사슴과 다람쥐, 광명동굴의
마스코트인 아이샤와 쿠오)과 늦가을에 잠긴 단풍나무


▲  자원회수시설에서 광명동굴로 인도하는 오르막 길

자원회수시설에서 3~4분 오르면 바로 광명동굴 앞이다. 동굴 앞에는 광장이 펼쳐져 있는데, 매
표소와 방문자센터, 쉼터, 광차 모형, 광부 모형 등이 있으며, 북쪽에는 아이샤 숲이라 불리는
조그만 공원이 있다. 광장 남쪽에는 막연히 하늘로 이어질 것만 같은 계단길이 길게 펼쳐져 있
는데, 그 길은 가학산(駕鶴山, 220m) 정상과 서독산, 구름산, 광명둘레길로 이어진다.


▲  동굴 앞에 닦여진 공원(아이샤숲)과 광부석상 (가학산 근린공원)
늦가을도 광명동굴의 소문을 들었는지 살며시 다가와 동굴 주변을 곱게 물들였다.
하얀 피부의 광부상은 한때 이곳의 주인공이었던 광부를 재현한 것으로
열심히 광물을 쏟아내던 옛 시절을 회상하게 한다.

▲  광명동굴 광장 (오른쪽 창구가 매표소, 그 오른쪽이 가학산 등산로)

▲  열려라 참깨~~!! 광명동굴이 활짝 빗장을 열었다.

▲  가학산으로 인도하는 계단길
여기서 가학산 정상까지는 40분 정도 걸린다.

▲  드디어 동굴의 속살로 들어서다.
(바람길)


※ 칙칙한 광산에서 관광용 동굴로 거듭난 현장,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 광명동굴
시골 풍경이 진하게 서려있는 광명시의 남쪽 변두리 가학동(駕鶴洞), 그 가학동을 둘러싼 가학
산 서남쪽 자락에 천하의 쟁쟁한 동굴들을 긴장시킨 광명동굴이 웅크리고 있다.
서울 근교의 거의 유일했던 광산이자 유일한 동굴<북한이 남침을 위해 파거나 우리 군에서 작
전상 판 땅굴은 제외>로 1912년 4월 왜인(倭人)이 발견하여 광산 사업을 벌이니 그것이 광명동
굴의 시작이었다.

이곳에서는 구리, 아연, 은, 금 등이 푸짐하게 쏟아져 나왔는데, 여기서 나온 광물은 왜열도로
넘어가 그들의 배때기를 찌우는데 주로 쓰였다. 하지만 지역 사람들로 이루어진 노동자들은 가
혹한 노동 착취에 쥐꼬리보다 못한 저임금을 받으며 힘들게 살아갔다.
왜정(倭政) 말기에는 징용을 피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광산을 찾았다. 여기서 일하면 징용 대상
자에서 빠지기 때문이다. 어딘지도 모를 이역만리로 끌려가느니 차라리 고향과 가까운 곳에서
고생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허나 지원자가 얼마나 줄을 섰던지 인맥을 동원해야 겨우 발을
들일 정도였다.

1945년 이후, 광산은 지역 사람에게 넘어가면서 비로소 이 땅을 위해 광물을 내놓기 시작했다.
채광 기록이 부실하여 1955년부터 1972년까지의 기록만 남아있는데 그 17년 동안 동 1,247톤,
아연 3,637톤. 금 52kg, 은 6.070kg을 생산하여 주력 광물인 동, 아연 외에 다양한 광물이 담
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지역 주민들이 광산으로 피난해 화를 면했으며 그 피난 시절에 광산
에서 태어난 아이를 '굴댕이'라 부르기도 했다.

1961~1962년에는 노동운동이 일어나 언론을 타기도 했으며, 그 시절에는 시흥광산이라 불렸다.
(그때는 '경기도 시흥군'이었음) 또한 1960년대 중고등학교 지리, 사회과지도에 주요 광물 생
산지로 절찬리에 등장해 이 땅에서 존재감이 꽤 컸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최대 500여 명이 일
을 했었다.

그렇게 잘나갔던 가학광산은 1972년 한순간의 실수로 거지가 되고 만다. 광산에서 채굴하여 버
린 돌을 광산 서쪽에 무방비로 쌓아두었는데, 홍수로 그것들이 죄다 떠내려가 가학동과 시흥시
목감동의 들판을 들이친 대형사고가 터진 것이다. 돌로 뒤덮힌 경작지는 30~40년 동안 경작이
불가능했을 정도였으니 그만큼 광물 찌꺼기의 맹독성은 심했다.
졸지에 터전을 잃은 농민들이 항의하자 이를 보상해야 했고 만만치 않은 보상금을 치르면서 재
정이 바닥나 결국 망하고 말았다.

다행히 인수자가 있어 폐광은 면했으나 바로 그해 7월, 가학산 주변이 그린벨트로 묶이면서 광
산의 목구멍은 막히고 말았다. 개발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광산 안에는 수십 년을 쓸 수 있
는 광물이 묻혀 있고, (1950년 조사 때 광산 내 매장량은 약 19,000톤으로 측정됨) 금도 적지
않게 깃들여져 있던 상태에서 그린벨트란 굴레가 씌워진 것이다.
그래서 1978년부터 2010년까지 소래포구에서 의뢰 받은 젓갈을 저장하는 창고로 간신히 연명했
으나 그걸로는 본전도 뽑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1994년 6월, 이름 뿐인 광업권까지 소멸되면서
광물 채굴은 어림도 없게 되었다. 채굴이 불가능한 광산은 천상 입구에 못질을 하고 문을 닫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라질 위기에 처한 가학광산에게 의외의 구원자가 두 손을 내밀었다. 바로 광명시였다.
광명시는 이 기회에 동굴 하나 장만하여 폐광산 테마공원으로 꾸밀 계획을 세우고 2011년 1월
광산과 주변 토지 10만
를 43억원에 매입했다. 마땅히 천하에 내세울 명소가 변변치 못하였던
광명시가 버려진 광산을 주목하고 모험을 건 것이다.
그래서 7개월 동안 갱도 내부를 손질하고 홍보 영상까지 제작해 천하에 널리 뿌렸으며, 그해 8
월 22일 가학광산에 동굴 2자를 붙여 '가학광산동굴'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그동
안 어둡고 칙칙했던 광산 이미지를 확 벗어 던지고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로 새롭게 거듭
난 순간이었다.
이때가 1차 개방으로 그해 12월 11일까지 약 110일 동안 문을 열었으며, 11월에는 최초로 동굴
음악회가 열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개방 기간에 무려 17,000명이 찾아와 이곳의 전망이 결
코 어둡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그해 12월 12일 다시 빗장을 잠구고 2012년 3월 16일까지 보수 작업을 벌여 3월 17일 다시 빗
장을 열었으며 그해 11월 30일까지 2차 개방을 실시했다. 이때는 입장 시간을 변경해 9시부터
16시 20분까지 입장시켰으며, 동굴 100주년 기념 행사와 음악회, 영화 상영, 출판 기념회 등의
이벤트를 가졌다.
그리고 다시 빗장을 잠구고 2013년 3월까지 다시 내부를 손질하여 천하 최초의 '동굴예술의전
당'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개관 기념으로 동굴문명 특별전이 열렸으며, 최초의 동굴 패션쇼와
보석쇼 등의 이벤트를 열어 동굴의 명성을 드높였다. 또한 국토교통부의 의견을 거쳐 동굴 주
변을 가학산 근린공원으로 조성했다.

2014년에는 국내 최초로 판타지 콘셉트 디자인 공모전을 개최했고, 동굴 최초 영화 '터널3D'를
촬영해 시사회를 가졌다. 또한 볼거리를 계속 확충하여 아쿠아월드, 빛의 세계전, 동굴 레이저
쇼 등을 갖추었으며, 이 해까지 100만 명이 다녀가 동굴의 높은 인기를 보여주었다.
2015년에는 조촐하게 와인동굴까지 선보여 서울 근처에서도 동굴에서 숙성된 와인을 즉석에서
마실 수 있게 되었으며,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뉴질랜드 웨타워크숍과 손잡아 판타지 콘셉
트 디자인 공모전을 벌였다. 그리고 프랑스와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고자 2016년 4월부터 9월
까지 라스코 동굴벽화 국제순회 전시회를 벌이는 등, 천하 제일의 동굴 관광지를 위해 열심히
날개짓을 하고 있다.
또한 동굴 이름도 가학광산동굴에서 광명동굴로 갈면서 광산 이미지를 지웠고, 동굴에 들인 본
전을 뽑고자 2015년 4월부터 달갑지 않은 입장료까지 얹혀 이제는 유료의 동굴이 되었다. 유효
화 이후에는 사람이 줄기는 커녕, 풍부하게 넣어든 볼거리와 수도권 유일의 동굴 관광지란 타
이틀 때문에 오히려 증가하여 광명시의 곳간을 채우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광산 갱도의 총길이는 7.8km, 갱도의 깊이는 275m<해발 180m에서 지하 95m까지>이며, 내부 면
적은 42,785㎡<유역 면적 342,797㎡>, 갱도 폭 2~5m<평균 3.5m>, 갱도 높이 1.5~4m<평균 2.75m
> 이다. 하루 선광량은 350톤, 갱도 재질은 석회규산염암과 편암이며, 동공 수는 50여 개로 동
공에는 위 아래를 연결하는 통로를 두었고, 권양기(捲揚機)라는 기계를 와이어로 감아 크고 작
은 광석을 광차를 이용해 실어날랐다.
광산으로 쓰였던 곳이지만 내부 통풍에는 지장이 없어 산소가 충분하며, 평균 13도 가량을 유
지하고 있다. 그래서 한여름에는 시원해 피서의 성지로 아주 제격이다. 내부로 들어가는 곳은
이곳 외에 소하동(所下洞)에도 있으나 그곳은 닫혀 있으며, 갱도 높이가 들쭉날쭉해 정문에 비
치되어있는 안전모를 필히 써야 머리에 탈이 없다.

광명동굴(가학광산 동굴), 그곳을 처음 접했을 때 동굴이란 2글자가 붙어 있어 자연산과 인공
이 섞인 동굴이라 생각했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단어 장난이었다. 순 100% 사람이 삽질해서
판 인공굴이었던 것이다. 자연이 손댄 부분은 하나도 없으나 굴을 둘러보면 정말 자연산 동굴
처럼 느껴져 사람의 힘이 정말 대단함에 놀라게 된다. 먹고 살기 위한 집념과 노다지를 캐려는
집념이 이런 커다란 동굴을 빚었던 것이리라.
땅굴 파기는 북한이 천하 제일이지만 우리도 그에 못지 않다. 아쉬운 건 이곳이 왜정 때 이 땅
의 백성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현장이라 조금은 씁쓸하다는 것이다.

한때 밀폐된 공간에 무엇을 그리 주섬주섬 만드는가 우려와 비판도 많았지만 그 우려를 잘 소
화하여 이제는 어엿한 동굴 관광지로 내 앞에 섰다. 광명시가 5년 넘게 갖은 정성을 들인 광명
의 진정한 꿀단지이자 서울 근교의 주요 명소로 우뚝 선 현장으로 비록 입장료를 씌운 점은 함
정이지만 그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나날이 진화를 보이고 있는 살아있는 동굴이다.

※ 광명동굴 찾아가기 (2017년 7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개봉역(1번 출구 밖 남부순환로변 정류장), 7호선 철산역(2번 출구 밖 2001아
  울렛 철산점 건너편 정류장), 1호선과 고속전철 광명역(7번 출구)에서 광명시내버스 17번을
  타고 광명동굴 종점 하차, 도보 5분
* 지하철 1,2호선 신도림역(1번 출구) 중앙차로 정류장, 7호선 철산역(2번 출구 밖 2001아울렛
  철산점 건너편 정류장)에서 광명시내버스 11-2번을 타고 소하동 광명동굴입구 종점 하차, 광
  명동굴까지 도보 30분 또는 코끼리차 아이샤를 타고 광명동굴까지 이동
  <코끼리차는 광명동굴 후문에서 광명동굴 제2매표소까지 운행하며, 9시20분부터 17시까지 20
  분 간격으로 운행, 요금은 청소년과 어른 2,000원 / 어린이 1,000원 (비나 눈이 오거나 강추
  위 때는 운행안함)>
* 지하철 7호선 철산역(2번 출구)과 광명역(2번 출구)에서 광명투어버스 이용, 광명역에서는 1
  일 4회, 철산역에서는 1일 6회 운행하며, 월요일은 운행하지 않는다.
  (광명투어버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 이곳을 클릭한다)
* 광명동굴 자원회수시설 남쪽(제1,2주차장)과 광명동굴 후문(제3주차장)에 주차장이 있음 (주
  차비 무료)

★ 광명동굴 관람정보 (2017년 7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6,000원(단체 5,000원), 군인 4,000원(3,500원), 청소년 3,500원(3,000원),
  어린이 2,000원(1,700원)  <광명시민은 50% 할인, 단체는 20명 이상>
* 관람시간 : 9시~18시 (17시까지 입장 가능, 매주 월요일 휴관)
* 동굴 체험활동 - 광물(보석) 채광 4,000원, 황금채취 6,000원, 광산모자만들기 3,000원, 동
  굴속 황금패 달기 5000원
* 2017년 7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동굴 안 라스코전시관에서 바비인형전이 열린다. (입장료
  는 별도, 자세한 것은 광명동굴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 산 17-1, 27일원 (가학로 85번길 142 ☎ 1688-3399)
* 광명동굴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온갖 색채의 조명이 길을 비추는 광명동굴 바람길


 

♠  지하 세계, 광명동굴 둘러보기 (바람길에서 황금궁전까지)

▲  한때 소박했던 웜홀광장 (2012년 모습)

우리는 입장권을 구입하고 안전모를 눌러쓴 다음 동굴의 속살로 들어섰다. 사람의 손으로 이룩
된 갱도는 휴전선에 있는 북한의 남침용 땅굴과도 조금은 비슷한 모습인데, 폭 2~5m, 높이 1.5
~4m로 상당수의 갱도는 2m 정도를 유지한다. 촘촘한 간격으로 조명 시설을 달아 다양한 색채로
갱도를 곱게 수식하며, 색이 바뀔 때마다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동굴의 시작인 바람길을 지나면 웜홀(Wormhole)광장이 나온다. 여기서 길(동공)은 3갈래로 갈
리는데 관람 순서가 정해져 있어 무조건 오른쪽 빛의 공간으로 가야 된다. 동굴을 1바퀴 돌면
다시 웜홀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는 옆 길로 들어서 와인동굴을 거친 다음 다시 웜홀로 나와서
밖으로 나간다. 그러니 동굴 관람 동안 웜홀을 총 3번 찍는 것이다. 그래서 동굴의 과거, 미래
, 현재를 둘러보는 입구라 하여 웜홀(우주에서 불랙홀과 화이트홀을 연결하는 통로)이라 이름
지었다.


▲  빛의 황홀한 터널, 빛의 공간 ▼

빛의 공간은 다양한 색채의 조그만 조명등을 터널처럼 씌운 구간으로 검은 도화지 속에 이렇게
찬란한 터널을 두니 마치 겨울 저녁 빛 축제 현장에 들어선 기분이다.
그렇게 빛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터널을 지나면 동굴 아쿠아리움과 예술의 전당이 모습을 드
러낸다.


▲  빛의 공간 남쪽 종점

▲  '황금동굴의 빛나는 생명체' 모형들

빛의 공간을 지나면 '황금동굴의 빛나는 생명체'란 이름을 지닌 요상한 동물 모형이 빛을 발하
며 나타난다. 이들은 동굴을 꾸미면서 달아놓은 테마 모형으로 그들을 만들고 적당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내용인즉 황금동굴(광명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는 황금을 먹고 빛을 내는 다양한 생명체가 살
고 있는데 동굴 벽면에서 살고 있는 젤리팻 가족과 동굴 안을 부유하는 어비스 피쉬가 대표적
인 빛의 생명체란 것이다. 이들은 LED조명 작가 권영준이 만든 것으로 다양한 조명을 씌워 시
간마다 다른 피부색을 낸다.
지금이야 우스개 소리로 듣고 흘리겠지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이야기도 세월만큼이
나 커져 무시무시한 전설로 바뀌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면 동굴에 머물며 사람들을 괴롭힌 괴
물,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런 비슷한 전설이 천하에 제법 많다.


▲  붉은 빛을 내는 '황금동굴의 빛나는 생명체' 모형들

▲  동굴 아쿠아월드(Aqua world)

동굴 속에 물고기를 담은 수족관이 있다면 믿겠는가? 바로 그 믿음의 현장이 광명동굴의 아쿠
아월드이다. 어떻게 동굴 속에 수족관을 만들 생각을 했는지 참 생각이 기발하기 그지 없는데
동굴에서 무한리필로 쏟아지는 지하 암반수를 활용하여 1급수에서 사는 물고기와 천하에 여러
물고기를 담아 조촐하게 아쿠아월드를 꾸몄다. 물론 물고기에 대한 설명도 덧붙였다.


▲  조그만 물고기의 세상, 동굴 아쿠아월드 수족관

▲  브라질 아마존강에서 넘어온 무서운 물고기, 피라냐
피라냐는 아마존 원주민 말로 '이빨이 있는 물고기'란 뜻이다. 날카로운 이로
아무거나 물어뜯는 미친 물고기로 사람까지도 물어뜯어 죽게 만든다.
저 쥐방울만한 물고기가 말이다.

▲  다양한 수족관과 물고기가 있는 동굴 아쿠아월드 내부

▲  스크린이 있는 동굴 예술의전당

동굴 남쪽 구석에는 '동굴 예술의 전당'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다. 이곳은 동굴 내부에서 가장
너른 공간으로 광산 시절에는 폭파 등의 위험한 일을 할 때 임시 대피소로 쓰였다. 그랬던 현
장이 문화예술 공간으로 상큼하게 변신하여 영화, 음악회, 뮤지컬, 패션쇼, 3D홀로그램 영상
등이 열린다. (350석 규모임)
2012년에 무대와 객석을 만들고 시범용으로 영화를 여러 차례 상영하여 좋은 호응을 얻었으며,
2013년에 스크린을 설치하여 그해 6월 29일 개관하였다. 이 땅 유일의 동굴 속 예술의전당으로
동굴 속살에 이렇게 극장 겸 공연장을 닦을 생각을 하다니 참으로 깜찍한 아이디어 같다. 계절
과 날씨에 방해 받지 않고 언제든 상영이나 공연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다만 깊은 굴 속이라
만약에 사태에 대비할 재난 메뉴얼은 꼭 필요하다.

* 매일 3D홀로그램 영상을 상영한다. 동굴 요정 아이샤와 쿠오가 동굴을 탐험하는 이야기를 다
  룬 3D입체 영상물로 상영 소요시간은 3분 30분 정도 (상영시간은 30분 마다, 변경 가능)


▲  동굴 예술의전당과 위로 향하는 계단
한여름에 여기서 공포 영화를 본다면 참 효과가 클 것 같다. 거기에 정선
화암동굴에서 여름마다 열린다는 귀신체험도 겯드린다면 아주 몸살날 듯.

▲  황금길

동굴아쿠아월드와 예술의전당에서 북쪽으로 가면 황금길이라 불리는 구간이 나온다. 금이 적지
않게 나왔던 동굴의 이력과 부자를 꿈꾸는 속인(俗人)들의 바램을 담아 황금길이라 했는데, 소
망을 적은 황금패를 걸어두는 소망의 벽이 있으며, 숲속 나무에서 나오는 음이온을 깃들여 놓
아 관람객들의 건강도 조금은 배려해주고 있다.


▲  황금길 구간
이곳을 거닐면 혹여 금이 뚝딱 떨어지지 않을까? 아직도 금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고 하니 곡괭이를 들고 몰래 잠입하여 무한정 캐보고 싶다.

▲  동굴 천정에 뚫린 구멍 - 동굴에 살던 용이 급하게
승천하던 자국은 아닐까?

▲  중생들의 소망을 먹고 자라는 황금길 소망의 벽

소망의 벽에는 중생들의 소망을 머금은 황금패(가짜 황금임)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황금패
를 5,000원에 구입하여 소망을 적은 다음 벽에 알아서 걸면 됨~~> 이 구간에는 건강에 좋다는
음이온이 깃들여져 있어 수복강녕(壽福康寧)의 길이라 불리기도 한다.


▲  동굴 속에 아름다운 수채화, 황금폭포

소망의 벽을 지나면 동공 속에서 울고 있는 황금폭포가 나온다. 관람객의 손길이 전혀 닿을 수
없는 곳에 자리해 있어 그야말로 그림의 떡 같은 폭포인데, 동굴 지하수를 활용해 높이 3.6m의
멋드러진 폭포를 빚었다.
시간당 약 1.2톤의 물이 흐르고 있어 가뭄으로 신음하는 바깥 세상과 달리 수량은 풍부하며 황
금빛 조명을 달아놓아 늘 황금색을 자아낸다. 다른 동굴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진귀한 폭포
로 광산 시절에는 호퍼(hopper)라고 채굴된 광석을 떨어뜨리던 구멍이 있었다.


▲  가짜 황금이 널부러진 황금의 방

황금폭포를 지나면 황금의 방이라 불리는 공간이 나온다. 이 역시 금이 나왔던 광산의 과거 이
력을 반영하여 지은 것인데, 마치 오래된 무덤의 내부나 숨겨진 공간의 석실(石室)처럼 분위기
를 내고 온갖 황금 덩어리를 그럴싸하게 풀어놓아 황금을 꿈꾸는 속인들의 마음에 불을 지른다.
허나 아쉽게도 저들은 모두 가짜이다. 그러니 가져갈 필요도 없다.


▲  광명동굴의 마스코트, 황금 망치와 황금을 든 아이샤(Aixia)

아이샤는 광산이나 동굴 속에서 산다는 난쟁이 요정이다. 그는 주로 금과 은, 보석이 많이 나
오는 곳에 출현한다고 하며, 그 연유로 그를 광명동굴의 마스코트로 삼아 귀여운 어린 여자아
이로 포장하여 내놓았다. 그의 황금 망치는 아무거나 뚝딱 황금으로 바꾸는 신비한 망치로 보
잘것없는 돌이라고 해도 그의 망치질을 받으면 황금으로 변신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샤는 광명시의 창작물이 아닌 서양의 옛 신화에 나오는 존재이기 때문에 '쿠오'라
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그와 짝을 짓고 동굴 요정으로 삼아 그럴싸한 이야기를 넣었다.

이야기인즉 쿠오는 동굴을 탐험하다가 간드레(광산에서 사용하던 등)를 줍는 과정에서 인간 세
계로 통하는 입구를 발견하니 그게 바로 광명동굴이라는 것이다. 동굴을 나온 아이샤는 하늘에
떠있는 별들에게 홀딱 반해 매일 동굴에서 별을 닮은 금석(金石)을 만들었다고 한다.

동굴 마스코트를 두는 건 좋지만 굳이 양이(洋夷)들의 캐릭터와 칭호를 쓰지 말고 동굴 자체적
인 캐릭터를 만들고 이름 또한 순 한글로 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지역 이름을 따서
'광명'이라고 하는 것도 좋을 듯 함>


▲  조명빨로 살아가는 황금궁전

황금의 방 부근에는 황금궁전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앞서 황금폭포처럼 탐방로 윗쪽에 붕 떠
있어 만지기가 어려운 존재인데, 황금궁전이라 하여 무슨 궁전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며 2~
3개의 동공이 있는 곳에 조명을 달고 수시로 색을 달리하는 것이 이곳의 전부이다. 그 모습이
제법 아름다워서 황금궁전이라 이름 지은 모양이다.


▲  초록색으로 변한 황금궁전

▲  동굴 지하 세계로 내려가는 길
저 계단의 끝에 지하에 숨겨진 또다른 세상이나 저승이 있는 것은 아닐까?

▲  동굴 지하 세계로

황금 궁전을 지나면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마치 지하 끝으로 이어질 것 같은 기세로 나타난
다. 지금까지는 동굴 입구와 해발 높이가 비슷한 수평 갱도였지만 여기서부터 지하1레벨로 내
려가는 것이다. 아주 잠시 말이다.
이 계단은 광부들이 광석을 채굴하고 그것을 나르던 통로로 경사는 약 32도이다. 광산이 폐쇄
된 이후, 지하 구역에 대한 손길이 끊기면서 지하수가 슬쩍 들어와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었으
나 2013년에 모두 퍼내어 길을 냈다.


 

♠  지하 세계, 광명동굴 둘러보기 (지하세계에서 와인동굴까지)

▲  귀신의 집(공포체험관)과 후덜덜한 귀신 누님 모형

동굴 지하 세계로 내려오니 귀신의 집과 처녀귀신 모형이 으시시한 모습으로 마중을 한다. 시
작부터 아주 쎄게 관람객들의 염통을 건드리고 있는데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은 진짜 살아있는
여인처럼 보여 염통에 긴장을 더하게 한다.
다행히 움직이지는 않아 긴장의 정도는 이내 떨어지고 말지만 만약 저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면 <모형 대신 귀신이나 저승사자 분장을 한 사람을 배치하여 극적 효과를 높이는 것도 좋을
듯함~> 납량특집이 정말 따로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무서운 소리를 내며 살짝 쫓아오거나 수
평레벨로 오르는 계단을 잠시 끊어 공포 분위기를 높인다면 염통과 한여름의 무더위는 그야말
로 제대로 쫄깃해지겠지~~! 광명시는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  아득히 바라보이는 동굴 지하호수

광명동굴은 수평 갱도인 0레벨부터 지하 7레벨까지 총 8개 레벨로 이루어져 있다. 광산이 폐쇄
된 이후, 지하 1레벨까지 지하수가 찼으나 1레벨을 해방시키면서 2레벨 이후부터 물에 잠겨 있
다. 이들 물은 지하3레벨과 5레벨에서 나온다.

저 밑에 아득히 바라보이는 지하호수는 지하 2레벨로 접근하기가 꺼림칙할 정도로 무서운 무엇
인가가 툭 튀어나올 것 같다. 현재는 접근 불가이며 늘 암반수에 잠겨있어 비밀의 호수를 연상
케 한다.


▲  동굴 천정에 나타난 무시무시한 신비의 용

동굴 지하 세계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오면 '신비의 지하조망대'가 나온다. 이곳에는 용을 비
롯하여 여러 가지의 실감나는 모형을 만날 수 있는데, 천정에 붙어있는 용 모형은 마치 실물을
보는 듯 하여, 동굴 속에서 수백 년 동안 웅크리다가 드디어 하늘을 향해 몸을 푸는 모습 같다.
조명이 있으니 망정이지 그것마저 없는 상태에서 그를 봤다면 염통이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을
지도 모른다.


▲  윗쪽에서 바라본 신비의 용의 위엄

▲  광명동굴에 스미골이 나타났다~~! ▼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단단히 재미를 보았던 스미골이 광명동굴에 놀러 왔다. 그가 영화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공간과 이곳이 많이 비슷하기도 한데 반지의 제왕 이후 재미가 별로인지 요
즘 천하에 뜨고 있는 광명동굴까지 날라와 새롭게 안착을 했다.
나도 반지의 제왕 팬으로 그 모형을 본 것은 이곳이 처음인데 반지의 제왕을 만든 뉴질랜드 웨
타워크숍이 광명시와 손을 잡은 기념으로 간달프와 함께 제공한 것이다. 세계적인 영화의 캐릭
터를 이리 만나보다니 참 반갑기 그지 없다.


▲  네모난 상자 안에 담긴 간달프와 트롤 모형
조명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밝음과 어둠 2가지를 재현한다.

▲  여러 그림과 모형이 전시된 신비의 지하조망대
지하1레벨에서 다시 수평레벨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한 이곳은 공모전을
비롯하여 다양한 전시 공간으로 쓰이는 지하 갤러리이다.

▲  신비의 지하조망대에 전시된 여러 사진과 그림들 (공모전 작품)

▲  광명동굴 속의 유일한 샘터, 광부샘물

강원도 동해, 정선부터 제주도까지 많은 동굴을 다녀봤지만 굴 안에 샘터가 있는 굴은 광명동
굴이 처음이다. 그러고보면 이 동굴은 여러 번 사람을 놀라게 만든다.

광부샘물은 지하1레벨에서 나오는 암반수로 광산 시절 광부들이 마셨던 물인데 광산 내부는 광
물과 그것을 캐는 도구들로 늘 지저분하기 그지 없어 늘 식수 문제가 도사렸다. 그런 상황에서
이 물은 광부들의 목마름을 오랫동안 달래주던 소중한 물로 수질 검사에서도 적합 판정을 받아
여전히 샘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샘터라고 해서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수터가 아니라 공원 음수대와 같은 모습이다. 버튼을
누르면 물이 흔쾌히 나오는데, 한 모금 마셔보니 딱히 특별한 맛은 없다. 그냥 흔한 샘물 맛으
로 나중에 나올 와인 1잔과 함께 동굴에서 공짜로 누릴 수 있는 물이다.


▲  동굴의 빛바랜 흔적, 새우젓 저장고

가학광산이 강제로 광산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1972년 이후, 새우젓 저장고로 간신히 명맥을 유
지했다. 이곳이 깊은 지하인데다가 서늘하여 새우젓 보관에는 아주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광산
주인도 먹고 살고자 인근 소래포구에서 의뢰 받은 새우젓 보관 업무를 해주었는데, 1978년부터
2010년까지 32년 동안 그 역할을 하였다. 그 기간 소래포구를 거쳐간 새우젓은 거의 이곳의 신
세를 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새우젓 저장고의 역할은 2010년 그 막을 내렸으며, 옛 저장고 자리에는 새우젓 통이 재
현되어 이곳을 거쳐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여준다.


▲  불로문(不老門)

새우젓 저장고를 지나면 불로문이란 나무 현판을 내민 돌문이 나온다. 불로문 즉 '늙지 않는다
'는 뜻으로 황금 찾기와 더불어 사람들의 오랜 소망이기도 하다. 허나 아무리 늙음을 막으려고
용을 써도 우탁(禹倬)의 탄로가(嘆老歌)처럼 지름길로 알아서 찾아온다.

불로문은 바위를 뚫어서 만들었는데, 한자로 쓰인 불로문 현판은 광명 지역의 대표적인 서예가
인 운계 신성재가 예서체로 쓴 것으로 동굴을 찾은 사람들의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뜻에서 문의
이름을 불로문이라 했다.


▲  빛나는 광부 모형
황금 모형이 가득 담긴 광차를 밀고 있는 하얀 빛의 광부. 광부의 피와 땀이
서린 동굴의 과거와 노다지를 향한 광부의 소망을 그렇게 표현했다.
동굴은 바로 그 2가지 요인으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  옛 광산의 아련한 흔적, 조구통

조구통이란 광부들이 광석을 운반하고자 만든 조그만 구멍으로 통나무로 주변을 받쳤다. 광산
을 동굴로 손질하면서 이제 3군데만 남아있을 뿐인데, 광산 시절에는 필요에 따라 아무 때나
만들고 또한 메꾸었다. 방향에 따라서 '남나굴이','북나굴이'이라 불리기도 했고, 지하 사갱
에 만든 조구통에는 '1번 나굴이','2번 나굴이' 등 갱도의 레벨 번호를 붙이기도 했다.


▲  근대역사관에 전시된 광산 도구들

불로문을 지나 북쪽으로 가면 동굴의 100년 역사 및 옛 시흥/가학광산 시절을 머금은 근대역사
관이 나온다. 광명동굴에 걸맞게 동굴 속 컴컴한 곳에 자리를 닦은 역사관으로 광산 시절에 쓰
인 갖은 도구와 생산된 광물들, 광산을 안팎으로 재현한 디오라마 등이 전시되어 있다.


▲  광산이 토해낸 여러 광물들 (동, 아연 등)

▲  가학광산 내부 모형과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모습

현재 동굴은 수평레벨 상당수와 지하1레벨 일부만 문이 열려 있다. 나머지 지하 레벨과 수많은
가지굴은 여전히 닫혀있는 상태~ (지하2레벨 이후는 물에 잠겨 있음) 이들 닫힌 공간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다 공개하기에는 솔직히 무리인 듯 싶고 적어도 지하2레벨과 소하동 방면 가지굴
까지는 해방이 되지 않을까 싶다.


▲  가학광산 외부 모형 (오른쪽이 광물을 추출하던 선광장)

▲  암석을 뚫는 기구를 이용해 가학산의 속살을 들쑤시던 광부 모형

▲  광산의 이동 공간, 동공

▲  광물을 실어나르던 광차(鑛車)

▲  이제 와인동굴로 (와인동굴 입구)

근대역사관을 둘러보고 서쪽으로 가면 다시 웜홀광장이 나온다. 여기서 관람 방향에 따라 왼쪽
(동쪽)으로 가면 (오른쪽은 바람길과 동굴 정문임) 광명동굴의 명물인 와인동굴이 마중을 한다.
 
와인동굴은 수평레벨 동쪽 굴 194m 구간으로 2015년에 와인셀러, 와인레스토랑, 와인 창고, 와
인바(와인 시음장) 등을 닦았다. 그 동굴의 끝에는 와인들이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는 와인 창
고가 있으며 이곳에 보관 중인 와인은 170여 종의 1,000병이 넘는다.
와인바에서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는데 무료이긴 하나 어차피 그 비용이 입장료에 포함되어 있
다. 그러니 완전 공짜는 아니며 1인당 1~2잔 정도 마실 수 있다. 물론 와인 구매도 가능하다.
이렇게 굴 속에 와인터널을 둔 것은 깊은 지하라 와인 보관과 숙성에 아주 착한 온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이곳처럼 버려진 터널이나 인공굴을 손질해 와인 숙성 공간으로 활용하여
재미를 보는 곳이 여럿 있다. (무주 머루와인동굴, 청도 와인터널 등~) 그야말로 검은 터널의
화려한 변신인 셈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단순히 와인 숙성/보관 장소로 시작했으나 와인을 체
험하고 구매하는 현장으로 차차 인기를 모으면서 지역의 주요 명소로 대박을 터트렸다.


▲  와인에 대한 설명과 빈 와인병이 좌우에 가득 널린 와인동굴

▲  와인바(와인시음장) 직전

와인바에 이르면 그곳을 지키는 사람이 알아서 와인을 따라준다. (미리 몇 잔씩 차려진 경우도
있음) 그렇게 와인을 1잔 들이키고 와인 리필을 요청하면 어지간해서는 1잔을 더 따라준다. 나
는 1잔으로는 별로 느낌이 안와서 2잔을 마셨음.


▲  와인동굴 스타일의 상큼한 와인 조명등
가만 보니 술잔에 와인을 따르는 모습이다.

▲  바람길 (와인동굴입구~웜홀광장 구간)

▲  온갖 조명등이 길을 비춰주는 바람길 (웜홀광장~동굴 정문 구간)

▲  다시 빛을 보다. (동굴 정문 직전)
우리네 인생도 광산 갱도를 방황하는 것과 비슷하다. 잘 방황하면 금 노다지를
캐는 것이고 잘못 헤매면 광산에 갇히거나 벼랑으로 곤두박질~~


 

♠  광명동굴 마무리

▲  을씨년스러운 선광장(選鑛場) <2012년 모습>

동굴 내부를 1시간 정도 둘러보고 다시 햇살이 춤추는 바깥으로 나왔다. 욕심 같아서는 동굴의
금지된 속살까지 더 누려보고 싶으나 나한테는 그 금지를 풀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그러니 공
개 구역만 얌전히 둘러보고 나가야 된다.

동굴 남쪽에는 '선광장'이라 불리는 조금은 우울하게 생긴 공간이 있다. 이곳은 광산에서 캐낸
돌을 기계를 이용해 불에 달구거나 수작업으로 돌에 묻힌 광물을 뽑던 현장으로 광물을 빼앗긴
돌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 광산 서쪽에 쌓아두었다.
광산이 버려진 이후, 이곳에 쓰인 기계는 모두 고철로 버려지거나 엿으로 바뀌는 신세가 되었
으며, 그 작업을 했던 돌로 다진 현장과 기초석만 남아있을 뿐이라 마치 폐허가 된 고대 유적
지나 옛 군사시설, 영가(靈駕)를 보내던 화장터처럼 황량하기 그지 없다. 한밤중에 오면 은근
히 오싹할 듯~~
어쨌든 광산과 관련된 100년 이상 묵은 산업 문화유산으로 광산 바깥에 유일하게 남은 광산 시
절 흔적이라 등록문화재나 지방문화재 감으로 전혀 손색은 없어 보인다.


▲  다시 찾은 선광장

▲  광물을 추출하던 곳

▲  선광장 옆에 조성된 쉼터과 체험놀이터


▲  체험놀이터 (광물 채광 체험)

선광장 앞에는 체험놀이터가 닦여져 있다. 옛 광산에 걸맞게 광물 채광과 황금 채취, 광산모자
만들기 체험을 하는 곳으로 매표소에서 원하는 프로그램 체험권을 구입해 체험놀이터 체험부스
로 달려가 그것을 제출하고 체험에 임하면 된다. (체험 자료를 제공함)
이곳 체험 놀이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대단한데, 모래 속에서 황금(또는 광물)을 찾고자 하는
일념들이 대단하다. 지금이야 저런 방식으로 광물과 숨바꼭질을 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저런 방
식으로 광물을 잡아냈다.

* 체험놀이터 운영시간 : 10~18시까지 (17시까지 표를 구입해야 됨)
* 체험활동 가격 : 광물채광 4,000원 / 황금채취 6,000원 / 광산모자 만들기 3,000원


▲  광명동굴 북쪽 산자락에 있는 황금노두(黃金露頭, 노두바위)

일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동굴 매표소 옆 계단길을 올라 잠시 가학산의 품을 거닐었다. 계
단을 오르면 광명의 지붕인 구름산, 도덕산, 서독산, 가학산의 허리를 이어주는 산길이 나오는
데, 여기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기묘하게 생긴 커다란 바위가 두 눈을 단단히 부여잡는다.

그 바위는 '노두바위'로 근래 '황금노두'로 이름이 갈렸다. 바위 근처에 부엉이가 많이 살았다
고 해서 '부엉이바위'란 별칭도 가지고 있으며, 1912년 광산을 시작했을 때 여기서 뚫고 내려
갔다고 한다. 그러니 광명동굴이 시작된 첫 지점이 된다. 현재 그 시절에 뚫은 동공이 좁게 남
아있으며, 바위 주변에는 자갈과 온갖 조그만 돌이 가득 깔려 있고, 나무와 식물도 바위와 적
당히 거리를 두고 있어 흙과 돌만 가득한 사막이나 황량한 대지의 바위산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이국적인 풍경을 그려낸다.


▲  옆에서 본 황금노두 (바위 꼭대기에 동공이 있음)

▲  가학산 광명동굴 숲길에서 만난 쉼터

가학산 정상까지 가볼까 했으나 일몰이 눈치를 주어 중간에 있는 쉼터(윗 사진)에서 발길을 돌
렸다. 어차피 언젠가는 또 올 것이니 그때 정상까지 올라 천하를 굽어봐도 늦지는 않다.

삼삼하게 우거진 가학산 숲은 늦가을 절정에 퐁당퐁당 빠져 한참 타오르고 있었다. 성질 급한
나무들은 반년 동안 걸치던 잎사귀를 땅바닥에 떨구며 소위 낙엽을 배출하고 있다. 귀를 접고
누운 낙엽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노래하고 사람들은 낙엽 밟는 소리가 좋다며 그들을 무침히 밟
고 지나간다. 그렇게 잎은 가루가 되고, 분해자에 의해 썩고, 땅 속에 스며들어가 식물의 양분
이 되니 이것이 소위 생태계의 법칙이다.

광명동굴 숲길을 끝으로 늦가을 광명동굴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가학산에서 만난 일몰 (시흥시, 인천 방향)
칼출근/퇴근의 달인 햇님은 퇴근 시간이 임박함에 따라 슬슬 그만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꽁무니를 뺀다. 마침 그와 약속이라도 한 듯, 한무리의
구름이 몰려와 그를 가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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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도 나오는 서울 선사유적의 성지, 가족 나들이 추천 명소 ~~ 암사동 선사유적지 (움집, 선사전시관)

 

 

' 서울에서 즐기는 선사시대로의 여행, 암사동 선사유적지 '

▲  암사동 유적 움집들


 

봄과 여름의 팽팽한 경계인 5월이 저물고 여름의 초기 부분이라 할 수 있는 6월이 밝았다.
이제 6월 한복판임에도 여름 제국은 벌써부터 철통같은 무더위를 드러내며 천하의 숨통을
조인다.
아무리 여름이 시작부터 꽤 당차게 나와도 즐길 것은 즐기고 살아야 된다. 특히 여행이나
나들이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서울 장안을 대상으로 간단하게 어디로 갈까? 눈동자를 굴
리다가 서울 지역 선사 유적의 오랜 성지(聖地)이자 신석기 유적의 성지로 격하게 추앙받
는 암사동(岩寺洞) 선사유적지를 찾았다.
이곳은 유년 시절인 1990년대 초반에 2번 정도 인연을 지은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단
한번도 발걸음을 하지 못했다. 아니 안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선사시대가 썩 재
미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구석기(舊石器)와 중석기(中石器), 신석기, 청동기 관련 유
적은 덜 가는 편이다. 가봐야 하품만 나오니 말이다. 그러다가 그날 따라 무슨 바람이 났
는지 그곳 생각이 간절하여 20여 년 만에 다시 인연을 지었다.

햇님이 하늘 높이 걸려있던 14시에 도봉동 집을 나서 지하철을 타고 천호역(5,8호선)에서
서울시내버스 3411번으로 환승, 선사4거리 남쪽인 삼성광나루아파트(암사동 유적) 정류장
에서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4거리를 건너 시골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북쪽(서원마을)으로 8분 정도 가면 암사
동 유적 정문이 나온다. 정문 동북쪽에는 썩 달갑지 않은 매표소가 있어 사람들의 호주머
니를 간절하게 바라보는데 입장료가 무려 500원이나 한다. (옛날에는 무료였는데 ㅠㅠ)

나에게는 꿩 대신 닭을 잡을 권리는 애당초 없는지라 입장권을 구입하고 단촐하게 생겨먹
은 정문을 들어서니 여름 녹음에 잠긴 암사동 선사유적지가 펼쳐진다. 정문은 2개의 나무
기둥을 양쪽에 두고 그 위에 길쭉한 목재를 얹혀 마치 선사시대(先史時代) 마을의 정문처
럼 꾸몄는데 이곳과 하루가 멀다하고 변해가는 바깥 세상과의 경계를 가르는 담장은 모두
나무로 목책 비슷하게 둘렀다. 


▲  수천 년 전, 신석기시대로 인도하는 타임머신, 암사동 유적 정문

▲  신석기시대의 상징,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확대되어 재현된 빗살무늬토기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있음)


 

♠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 유적의 성지, 움집으로 유명한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지(암사동 유적) -
사적 267호

▲  나무가 무성한 암사동 선사유적지 (정문 주변)

서울 동쪽 암사동 한강변에 자리한 암사동 선사유적지(암사동 선사주거지, 암사동 유적)는 신
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초/중/고등학교 사회/국사책과 국사 관련 교양서적, 공무원 수
험서에 눈과 귀가 질릴 정도로 등장하는 유명 명소이다. 신석기 이전인 구석기시대 하면 공주
석장리와 연천 전곡리, 상원 검은모루동굴, 웅기 굴포리가 대표적이고 신석기시대 하면 암사동
이 딱 떠올릴 정도로 신석기 유적의 성지 같은 곳이다.

이곳은 억겁의 세월 동안 땅 속에 강제로 묻혀있다가 1925년 그 악명 높은 을축년(乙丑年) 대
홍수로 한강 주변이 죄다 떠내려갔을 때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며 수천 년 만에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고대 유적이 쏟아져 나오자 흥분한 왜정(倭政)은 학자 요꼬야마(橫山將三朗)와 후지타
등을 보내 땅을 뒤집게 했는데, 많은 양의 토기와 석기 등이 발견되어 천하를 놀라게 했으며,
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주거유적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발굴 범위가 좁았고 그 이후 별다른 조
사를 벌이지 않고 방치하면서 다시 경작지가 되고 만다.

논밭이 되버린 암사동 유적을 다시 깨운 것은 1957년으로 경희대가 조사팀을 보내 조촐히 발굴
을 벌였고, 1967년 서울대와 경희대 등이 대학연합발굴단을 조직하여 합동발굴을 하였다. 그러
다가 1968년 서울대 사범대학에서 정식으로 발굴을 하면서 주변을 모두 뒤집기 시작했고, 국립
중앙박물관까지 가세하여 1971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동안 발굴조사를 토대로 하여 1979년 7월 국가 지정 사적의 지위를 받게 되엇으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1981년부터 1988년까지 7년 동안 발굴조사를 벌이면서 유적을 정화하고 이곳
의 명물인 움집을 복원하여 1988년 8월 30일 속세에 개방했다.

1997년 1월 20일에는 '97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 성화를 이곳에서 채화(採火)했고, 1998년에는
제2전시관을 만들고자 주변을 발굴하여 많은 유물을 건져냈다. 2000년 1월 제2전시관이 완공되
고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유적지 일대를 정비하여 나무를 심었으며, 2010년 9월 선사체험마을
을 조성하여 살아있는 선사시대 체험의 장으로 변화를 꾀했다.
(2011년 7월 문화재청 지정 명칭이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암사동 유적'으로 변경됨)

▲  복원된 움집

▲  재현된 신석기 사람들의 생활모습

암사동 유적은 우리나라에 흔하게 널린 신석기유적 가운데 가장 큰 마을 단위 유적으로 그 이
름과 가치를 크게 드높였다. 방사성탄소(放射性炭素) 측정 결과 약 6,400년부터 3,500년 전에
걸쳐 조성되었음이 드러나 멀리 잡아도 약 7,000년 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음을 귀
띔해준다.
이곳 땅 속에서는 3개의 문화층(文化層)이 발견되었는데, 신석기시대의 상징물인 빗살무늬토기
가 발견된 신석기 문화층이 발굴 지역 전역에서 확인되었으며, 민무늬토기와 청동촉 등이 나온
청동기 문화층, 그리고 백제(百濟) 초기 이음식 독널무덤과 승석문(繩席紋)목단지, 쇠토끼 등
이 나온 백제 문화층도 조금이나마 나와 신석기시대부터 백제 중기(한성백제시대)까지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았음을 알려준다.

이곳은 크게 나무가 울창한 남쪽 구역과 움집과 제1,2전시관이 있는 중앙 구역, 그리고 체험마
을과 체험교실이 있는 북쪽 구역 등 3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중 남쪽 구역은 숲이 삼삼하여
돗자리를 피고 간식을 먹으며 주말 오후를 보내는 가족 단위 나들이객이 많으며, 전시관과 움
집이 있는 중앙 구역은 이곳의 핵심이다. 북쪽 구역은 짜투리 땅을 닦아서 만든 선사체험마을
로 딱딱하고 재미가 떨어지는 선사시대 나들이에 약간의 감칠맛을 더한다.

▲  선사박물관 전시관

▲  선사체험마을 움집군락

암사동 유적의 명칭은 '암사동 선사유적지','암사동 선사주거지'로 많이 불리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암사동 유적'이다. 허나 명칭이 무슨 대수랴, 서울 도심 속에 박힌 선사유적지로 비록
복원하고 재현한 것이긴 하지만 문명(文明)시대 이전의 향기가 담겨져 있으며, 서울에서 유일
하게 목숨을 건진 선사유적지이다.
참고로 서울에는 암사동 외에도 면목동(面牧洞) 구석기유적, 도곡동(道谷洞) 청동기 유적, 고
덕동(高德洞) 고인돌, 원지동(院趾洞) 고인돌, 우면동(牛眠洞) 고인돌 등의 선사유적이 있으나
제대로 우리 곁에 남은 것은 암사동이 유일하다. (원지동과 우면동, 고덕동 고인돌은 살아있긴
하나 상태가 고르지 못함)

그럼 지금부터 암사동에 서린 선사시대로의 여행을 흔쾌히 떠나 보자. 참고로 선사시대는 글자
가 생기기 이전 시대를 일컫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대가 선사시대인데...!!)

▲  덧무늬토기들

▲  암사동 선사유적지 산책로

※ 암사동 선사유적지 찾아가기 (2016년 6월 기준)
* 지하철 8호선 암사역(1번 출구)에서 강동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암사동 유적 하차
* 지하철 8호선 암사역(2번 출구)이나 5,8호선 천호역(3번 출구)에서 340, 3318, 3411번 시내버
  스를 타고 삼성광나루아파트(암사동 유적) 하차, 도보 10분

★ 암사동 선사유적지 관람정보 (2016년 6월 기준)
* 입장료 : 어른 500원 (30인 이상 단체 400원) / 어린이와 중고생 300원 (단체 200원)
* 7세 이하와 65세 이상, 국가유공자, 장애인 등은 무료
* 관람시간 : 9:30~18:00 (입장은 17:30분까지 / 1월 1일과 매주 월요일은 휴관)
* 동네 주민들을 위한 아침 운동시간 무료개방시간 : 5:30~9시까지 (10~3월은 6시부터임)
* 주차비 : 경차 1,000원 / 소형차 2,000원 / 대형차 4,000원 (이용시간 9:30~18시)
* 매년 10월 상반기에 금,토,일 3일 일정으로 선사문화축제가 열린다. 원시생활 체험과 소망등
  달기와 강동 락페스티벌과 길놀이 등 다채로운 공연 강동구 지역의 오랜 민속놀이인 '바위절
  마을 호상놀이(서울 지방무형문화재 10호), 원시퍼포먼스, 그림 그리기 대회, 직거래 장터
  등이 열린다.
* 초등학생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여러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움집만들기, 토기만들기, 선
  사인의 겨울나기, 수렵체험, 원시인 여름 즐기기, 채집체험, 어로체험, 어린이발굴체험 등이
  있으며, 운영기간은 프로그램마다 모두 다르다. (자세한 정보는 암사동 유적 홈페이지 참조)
* 소재지 -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 139-2 (올림픽로 875) <☎ 02-3425-6520)
* 암사동 유적 홈페이지는 아래 빗살무늬토기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암사동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의 위엄


 

♠  암사동 유적의 꽃, 움집 주변

▲  정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3거리와 함께 짙게 우거진 수목이 더위를 잠시
잊게 해준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숲 산책로이고 오른쪽으로 가야
움집과 전시관, 선사체험마을로 이어진다.

▲  신석기시대에 신석기 사람들과 경쟁하며 살았던 동물들의 모형

노루와 맷돼지, 말 등 지금 동물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허나 몇몇 사람들은 왜 공룡이 없지?
의아해한다. 선사시대하면 흔히들 잘못 생각하는 공룡과 신석기 원시인의 공존, 허나 공룡은
여기에 없다. 왜냐? 그들은 공존하지 않아 서로의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다. 선사인들이 생기기
훨씬 이전에 공룡은 빙하기로 죄다 씨가 말랐다.


▲  움집터 입구

▲  움집터 입구 옆에 자리한 커다란 소와
선사시대 어린이의 귀여운 모형

▲  태풍으로 날라간 남쪽 움집


▲  암사동 유적의 꽃, 움집들

움집터 일대에서는 30기의 집터와 돌무지시설 등이 발견되었다. 집터는 동그란 모양과 네 모서
리를 약간 줄인 구조<어려운 말로 말각방형(抹角方形)>로 모래땅에서 50~100cm 정도 움을 파고
그 위에 짚 등을 엮어서 거의 길쭉한 세모 모양으로 만든 형태이다. 집터 중앙에는 강돌을 둘
러 만든 화덕시설이 있고, 집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주로 남쪽에 두었다.
기둥 구멍은 한 집에서 여러 개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주 기둥과 보조기둥 혹은 이전의 기
둥을 갈 때 새로 난 자리가 섞여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집터 밖에는 야외노지(野外爐址)와
음식을 저장하던 저장구덩이, 돌무지시설 등이 있으며, 이들은 불의 기운을 받은 흔적이 역력
하다. 그리고 돌무지 밑에는 불에 탄 흙과 부식토와 함께 목탄이 많이 발견되었으며, 돌무지
사이에는 많은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어 토기를 굽던 가마터 또는 마을 공동의 화덕시설로 보
인다.

토기는 바닥이 뽀족한 것과 바탕흙에 활석이나 석면을 섞은 것, 그리고 무늬가 있는 것들이 주
류를 이루며 나왔다. 그리고 돌도끼와 그물추 등의 석기류도 같이 나왔는데, 뗀석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고 간석기로는 돌끌이나 창, 화살촉 등이 있으며, 갈돌과 갈판, 괭이, 보습, 돌낫 등
도 있다. 그외에 새뼈와 도토리 등이 조금 출토되었다.

집터에는 고증하여 복원했다는 움집 10기가 있는데, 이들은 기존 집터에서 2m 정도 흙을 엎고
그 위에 만든 것이다. 동쪽에 있는 체험용 움집을 빼고는 내부 출입을 막고 있다.


▲  움집들도 비가 마구 새는지 땜질한 흔적들이 역력하다.

▲  더운 여름에 하루나 이틀 정도 원시인이 되어 머물고 싶은 움집
원시인처럼 옷은 중요한 곳만 걸치고 움집에서 며칠 지내보면 어떨까? 물론 취사는
현대식 도구로 해우소나 간단한 세면은 정문이나 전시관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고 말이다. 아무리 선사체험이라고 해도 현대의 이기에 단단히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있어 완벽한 원시인 생활은 불가능하다.

▲  수수한 모습의 움집

한반도와 요동에 살던 구석기 사람들은 빙하기로 거의 다 사라지고 빙하기를 이겨낸 일부 사람
들이 새롭게 신석기시대를 열었다. 그들은 강가와 언덕에 움집을 짓고 마을 단위로 살았으며,
현대 사회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빈부격차와 신분제도가 없었다고 한다.
마을마다 지역마다 집을 짓는 기술과 집의 모습이 조금 차이가 있었을 뿐, 대부분 저런 집을
짓고 수수하게 살던 평등한 사회였다. (물론 가족간의 서열은 있었다)

그랬던 사회가 이른바 청동시기대에 접어들면서 돌로 모든 것을 때우던 시기는 그 막을 내렸으
며, 청동을 비롯한 광물의 등장으로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었다. 또한 신석기시대에 일부 이루
어지던 농경이 크게 확대됨으로써 자연히 빈부격차가 발생하게 되었고, 인간들은 점차 신분제
의 굴레 속에 갇히게 되었다.


▲  유일하게 공개된 동쪽 움집 (움집 생활 체험장)

암사동 10기의 움집 가운데 유일하게 속살이 공개된 동쪽 움집은 기존 움집 규격의 1.5배 정도
를 더해서 만든 것으로 움집 높이 4.5m, 가로 8.5m, 세로 12m에 이른다. 내부에는 4명의 원시
인 가족을 배치했고, 석기 등의 생활용품은 실물 크기로 재현하여 당시의 생활상에 대해 약간
이나마 이해를 돕게 만들었으니 한번 둘러보자.


▲  속세를 향해 문을 연 동쪽 움집 대문

▲  동쪽 움집에 재현된 원시인 가족 4인

동물 가죽 옷을 입은 원시인 가족들이 화덕 주위에 오손도손 둘러앉아 각자 일에 여념들이 없
다. 그들 가운데 유일하게 일어선 이는 이 집의 주인이자 가장인 아버지로 사냥을 할 창을 손
질하고 있고 그 옆에 아줌마 자세로 앉은 사람은 어머니로 돌판 위에 고기를 놓고 썰고 있다.
아들은 물고기를 굽고 있으며, (어머니나 아들이나 겉모습이 비슷하게 생김) 제일 덩치가 작은
꼬마는 막내딸로 어미와 오라비가 해준 음식을 한참 섭취하고 있다.
움집 중앙에 자리한 화덕은 불을 피우던 공간으로 음식을 조리하고 난방을 때워 안을 따스하게
유지하고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는 기능을 했다. 또한 화덕의 연기가 잘 빠져나가도록 천정에
구멍을 냈다.

재현된 모습이긴 하지만 그들의 작업에 방해가 될까봐 발자국 소리를 죽여가며 내부를 살폈다.


 

♠  암사동 유적 전시관

▲  제1,2전시관 (왼쪽 현관이 1전시관, 오른쪽이 2전시관)

암사동 유적 전시관은 모두 2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전시관은 1988년에 문을 열었
는데, 유적 발굴터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생활과 문화, 유물 등
을 머금고 있다.
제2전시관은 기존 전시관을 크게 확장할 필요가 있어 1999년에 그 옆에 이어서 만든 것으로 기
존 전시관의 내용을 바탕으로 암사동 유적의 발굴과 선사시대 개관, 서울과 경기도 지역 신석
기 유적 및 초기 청동기시대 문화를 다루었다. 그리고 2곳의 체험코너와 정보검색코너, 영상실
을 갖추어 전시관의 유물과 신석기시대의 이해를 최대한 돕게 했다.

유물들이 모두 선사시대 것이다 보니 화려함과는 극히 거리가 멀어 식상할 수도 있다. 죄다 토
기와 석기 투성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 시대를 발판으로 삼아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鐵器時代
)가 싹틀 수 있었고, 인간은 너무 쓸데없이 진화를 거듭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의 옛 원초적인 모습도 한번 살펴줘야 된다. 그 토기와 석기가 우리가 쓰는 물건들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소장 유물은 408개로 유감스럽게도 절반 이상이 복제품(169점)이거나 다른 데서 빌려온 것(167
점)이며, 순수 암사동 산은 고작 72점에 지나지 않는다. 태반은 국립중앙박물관이나 이곳 발굴
에 나선 대학교 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복제품은 그만 치우고 그곳에 있는 유물을 건네 받아
암사동 유물과 서울에서 출토된 선사시대 유물로 꽉 채웠으면 좋겠다.


▲  움집터 발굴 현장 - 움집터 8기와 저장공간 1기를 그대로 경화처리하여
보존한 것으로 이곳 전시관의 백미라 할 만하다.

▲  가지무늬토기와 붉은 그릇, 민무늬토기들

▲  빗살무늬토기와 동물의 뼈로 만든 골각기(骨角器)들

▲  빗살무늬토기 - 즐문토기(櫛文土器)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아마도 학창시절 때 귀가 따갑도록 들어봤을 것
이다. 이 토기는 신석기 사람들이 고기와 과실, 채소를 담거나 저장할 때 사용했다고 하며 구
덩이를 파고 500~600도의 온도에서 따끈하게 구워서 붉은 색이나 누런 색을 띄게 되었다. 토기
피부에는 빗살무늬(빗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 무늬를 내기 위해 생선과 동물 뼈를 주로 사
용했으며, 이들 토기를 어려운 말로는 즐문토기라고 한다.
지금은 그저 아무것도 아닌 토기이지만 원시 수준의 인간이 저 정도의 잘 생긴 토기를 만들기
까지는 무려 100만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  빗살무늬토기와 돌도끼, 돌살촉

▲  청동기시대 유물인 청동검과 마제석촉 - 이들은 부여 송국리와
화순 대곡리, 창원대에서 빌려온 것이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인간들은 비로소 광물을 다루게 되었다.

▲  전국 곳곳에서 집합시킨 빗살무늬토기와 온갖 토기들

▲  물고기 잡이에 쓰던 어망추와 낚시추바늘

겉으로 보면 주위에 흔한 자연석처럼 보여 눈길이 잘 가지 않는 존재들이지만 저런 돌 하나하
나에 원시인들의 사연과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새삼 다르게 보인다.
판별하기 어려운 저들을 밝히는데 많은 역사,고고학 교수/학자들의 노고가 참 컸다.


▲  타제석기(打製石器)들

▲  돌망치로 쓰인 돌맹이들

▲  제2전시관 한복판에 재현된 움집

▲  세월의 태클에 조각이 나버린 빗살무늬토기 파편들

▲  불에 탄 도토리(가운데)와 갈판과 갈돌, 석기들
탄화된 곡식과 과실 등은 절대로 분해자의 먹이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있었던 것이다. 지금 사람들도 도토리로 만든 묵을 즐겨먹는데,
신석기 사람들도 도토리를 채취해서 양식으로 썼던 모양이다.

▲  신석기 사람들의 무덤

신석기 사람들의 수명은 얼마나 되었을까? 지금이야 평균 수명이 너무 길어서 문제지만 그때는
너무 짧아 기껏 길어봐야 40~50 정도였을 것이다. 청동기시대에는 고인돌이라 불리는 돌무덤들
이 많이 있지만 신석기시대에는 적당한 무덤 유적이 거의 없다. 다만 근래에 남해안 지역에서
조개더미유적과 함께 무덤이 발견되어 조금씩 정답을 풀어주고 있다.
신석기시대 무덤은 죽은 이의 키 정도 길이로 얕게 땅을 파고 관곽(棺槨)도 없이 시신을 안치
했다. 시신은 대부분 곧게 안치했으나 쭈그린 상태로 묻힌 경우도 일부 발견되었다. 시신 위에
는 작은 돌을 덮어 봉분으로 삼았으며 아주 드물게 동굴이나 바위 틈의 구덩이를 파고 묻은 경
우도 있었다. 죽은 이는 목걸이와 팔찌 등의 꾸미개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부디 저
세상에 가서 쓰라며 토기와 석기,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재료 등을 두어 사후세계 관념을 가지
고 있었음을 귀띔해준다.

신석기 유적의 성지로 추앙받는 암사동에서는 아직 그들의 무덤이 발견되지 못해 약간은 허전
한 감을 준다. 무덤도 발견되면 아주 완벽한 성지감이 되는데 말이다.


▲  돌살촉과 석기들

▲  암사동 주거지 모형도


 

♠  암사동 유적 마무리 ~~ 선사체험마을

▲  선사체험마을 정문과 시간의 집

선사유적지 전시관 북쪽에는 2010년 9월에 조성된 선사체험마을이 있다. 선사체험마을을 알리
는 나무로 만든 문을 지나 조그만 또랑을 건너면 선사체험마을 구역인데, 시간의 집을 시작으
로 기억의 물길과 어로체험장, 움집마을, 수렵체험장, 발굴체험장, 선사체험교실 등이 있으며,
가장 북쪽에는 발굴체험장과 백제주거지 표석이 있다.
다른 선사유적지나 박물관과 달리 선사시대 체험장을 매우 넓게 닦아서 어린이와 학생들을 대
상으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해 여흥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굳이 체험이 아니더라도
당시를 재현한 여러 볼거리를 비롯하여 온갖 들꽃과 수풀이 무성한 산책로와 언덕, 여름 제국
의 기운을 약화시켜주는 개울까지 갖추고 잇어 전시관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쥐가 난 머리
를 잠시 식히기에는 아주 좋다. 단 그늘이 시간의 집과 개울 건너편 외에는 별로 없어 여름의
제국 시절에는 강렬한 햇빛으로 조금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  시간의 집

시간의 집은 동굴 형태로 구성된 공간으로 밖에서 보면 마치 길고 굵직한 뱀처럼 보인다. 이곳
은 신석기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 자료를 곳곳에 설치
된 모니터를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동굴의 길이는 약 60~70m 정도 된다. 이 동굴을 벗어나면
바로 움집군락으로 이어진다.


▲  시간의 집과 그 옆으로 나 있는 산책로와 개울(기억의 물길)

▲  움집군락에 재현된 움집들 - 이제는 움집도 지겨워진다.
그만큼 암사동 유적에서 차지하는 움집의 비율이 크다는 소리다.

▲  맷돼지 통구이 현장 - 저기서 불만
붙이면 바로 100% 통구이 재현이다.

▲  돌무더기 위에 놓인 빗살무늬토기 모형 -
집으로 가져와서 그릇으로 쓰면 안될까..?

▲  바쁘게 살아가는 신석기 사람들

▲  신석기 사람들의 취락 모습


▲  기억의 물길이라 불리는 서쪽 개울
장대하지만 무심하기도 한 세월이 물처럼 꾸준히 흐른다는 것을 상징하고자
기억의 물길로 이름을 지은 모양이다.

▲  움집군락 서쪽 산책로

▲  수렵체험장 - 맷돼지와 사슴 모형이 체험을 준비한다.

▲  사슴 1마리 월척하고 당당히 집으로 돌아가는 원시인의 위엄
모든 것이 꺼꾸로 보일 사슴이 좀 가련해 보인다.
나의 전생이 혹 저 사슴은 아니었을까..?

▲  발굴체험장

어린이 2명이 한참 흙을 파헤치며 오래된 보물을 꿈꾼다. 하지만 저기서 나오는 것은 흙 밖에
없으니 괜한 헛된 망상은 버리도록~~ 정식 발굴체험을 하는 경우 저 안에 토기와 석기 모형을
여럿 묻는다고 한다. 흙을 파다가 그것들을 발견하면 정말 보물이라도 찾은 듯, 그 기분이 정
말 환희(歡喜) 그 자체일 것이다.


▲  발굴체험장 동쪽에 있는 백제주거지터 표석

2003년과 2008년 11월에 6각형 모양의 백제 집터 1기와 여러 유물이 출토된 곳으로 이곳이 신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뿐만 아니라 백제 중기까지 주거지로 쓰였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이곳 일대는 한성백제 시절 강동/송파구로 여겨지는 도읍(위례성) 북쪽으로 농사를 짓거나 한
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백성들이 살았다. 귀족들은 이곳과 명일동, 고덕동 일대에 큰 농장을
소유하여 굴렸을 것이 분명하니 그와 관련된 유적(창고나 귀족 저택)일 가능성도 크다.


▲  백제주거터 인근에서 수줍게 미소짓고 있는 개망초의 위엄

▲  선사체험교실

▲  야외공연장으로 쓰이는 체험마당

▲  선사의 숲 사이로 난 산책로 - 선사의 숲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다.

▲  전시관 맞은 편에 마련된 농촌 체험 현장

답사 본능에 충실하며 1시간 반 동안 이루어진 '선사시대로의 짧은 여행'은 끝이 났다. 학창
시절에 만났던 옛날의 암사동 유적만을 생각하고 왔는데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나처럼 많이도
변해있어 조금은 놀랬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나 명소나 관광지나 적당히 변하지 않으면 살기가
힘든 것이 속세의 생리인 모양이다.
이렇게 하여 암사동 선사유적지 여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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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영롱한 연등의 향연 속으로 ~ 서울연등축제(연등회), 조계사 연등 나들이

 


' 서울 연등회(연등축제), 조계사 나들이 '

조계사 8각10층석탑
▲  조계사 8각10층석탑

▲  서울연등회 연등 ▲

 


봄과 여름의 경계인 5월은 계절의 여왕으로 일컬어진다. 꽃샘추위란 이름으로 4월까지 천하를
어지럽히던 겨울 제국의 잔여 세력이 봄에게 완전히 소탕되면서 세상은 비로소 안정을 되찾는
다. 이때가 되면 전국에서 많은 축제가 산발적으로 열려 나들이객을 참 바쁘게도 만드는데 그
중에는 서울연등회도 있다.

서울연등회(서울연등축제)는 봄 축제의 백미(白眉)이자 불교 축제의 으뜸으로 이제는 천하 제
일의 축제로 완전히 자리매김했다. 보통 석가탄신일 1주 전 주말에 열리는데 토요일에는 축제
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연등행렬이 장충동 동국대에서 동대문, 종로를 거쳐 광화문(종로1가)
까지 장엄하게 펼쳐지며, 일요일에는 우정국로를 중심으로 전통문화마당과 연등놀이가 열린다.
그래서 후배 여인네와 일요일 전통문화마당을 구경하러 나갔다. 이런 좋은 축제는 꼭 봐야 저
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다.

본글에서는 일요일 전통문화마당 일부와 조계사 주변에 전시된 연등, 그리고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인 조계사를 다루도록 하겠다.
(나머지는 별도의 글에서)


♠  서울연등축제 전통문화마당

▲  전통문화마당이 열리는 우정국로 북쪽 시작점(안국동로터리)

서울연등축제 전통문화마당은 조계사와 우정국로(종각역~안국동로터리) 일대에서 열린다. 우정
국로는 4발 수레들로 늘 번잡한 곳이지만 연등축제만큼은 도로를 통제하여 콧대 높은 수레들의
바퀴를 막는다. 그래서 도심 속 대로를 4발 수레의 눈치 없이 두 다리로 마음껏 거닐 수 있는 1
년에 몇 안되는 날이다.
서울연등축제는 석가탄신일(이하 초파일) 1주 전 주말에 열린다. 주말 전날인 금요일에 조계사
와 봉은사(奉恩寺), 청계천(청계광장에서 광통교 구간)에서 전통등 전시회가 그 서막으로 열리
며, 보통 초파일 다음날까지 불을 밝힌다.

축제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토요일 오후가 되면 동국대(東國大) 대운동장에서 어울림마당이 열
린다. 이 마당은 연등행렬의 사전 행사로 관불의식과 법회, 다채로운 전통 공연이 열리며, 18시
부터 연등회의 갑(甲)이라 할 수 있는 연등행렬(제등행렬)이 장엄하게 펼쳐진다. 동국대 대운동
장을 출발하여 동대입구역,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동대문, 종로를 거쳐 광화문4거리 직전까지 이
어지는데,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커다란 연등(장엄등) 상당수가 등장하면서 연등행렬의 분위
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행렬 진행시간은 3시간 정도로 조계사를 비롯해 서울의 상당수 사찰과 경기도와 지방의 일부 사
찰, 불교 종파와 단체/학교에서 보낸 사람들과 온갖 연등(燃燈)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때 선
보이는 등은 5~10만 개에 이른다고 하니 (2015년은 5만 개) 가히 연등의 성지(聖地)라 할만하며,
그 연등도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고 있어 전혀 식상하지 않다. 게다가
행진 중에 사물놀이와 가벼운 춤 공연, 율동 등이 끊임없이 펼쳐져 지루할 틈이 없다.

햇님이 지평선 너머로 꽁무니를 빼고 땅꺼미가 짙어지면 연등은 어둠을 걷어내고자 일제히 빛을
발산하면서 종로는 고운 연등빛에 잠기며, 연등행렬 시간에는 동대입구역에서 동대문, 동대문에
서 광화문4거리까지 도로를 통제한다.

연등행렬이 광화문4거리와 종로1가 사이에 다 모이면 보통 21시부터 회향(廻向)한마당이 펼쳐진
다. 종각역~광화문4거리 구간과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큰 법회와 전통 공연이 펼쳐지며, 거리를
행진한 장엄등(연등)은 이들 구간에서 모두 걸음을 멈추어 사람들의 사진 모델이 되느라 분주하
다. 특히 몇몇 장엄등은 몸을 움직이거나 불, 연기를 쏘는 것도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그
렇게 회향한마당은 23시경에 막을 내리고, 장엄등 일부는 조계사와 우정총국 주변에 둔다.

다음 날 일요일은 정오부터 조계사와 우정국로 일대에서 전통문화마당과 공연마당이 열린다. 우
정국로 전체가 온통 축제의 장이 되는데, 불교와 관련된 온갖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고, (체
험비를 받는 코너가 많음) 각가지 민속 놀이 공연, 영산재 등을 구경하면서 허기가 지면 한쪽에
마련된 먹거리 코너에서 떡이나 파전, 비빔밥, 식혜 등을 사먹으면 된다. 그리고 연등 만들기와
도자기 체험, 다도 체험, 사찰/전통 음식 체험을 비롯해 다른 불교 국가의 불교 문화도 많이 만
날 수 있어 이때만큼은 완전히 천하 불교의 성지가 된다.

전통문화마당은 19시까지 진행되는데, 17시부터 슬슬 자리를 정리하며 19시쯤 되면 연등놀이의
몸풀기 행사인 연등행렬을 벌인다. 조계사 등 몇몇 절과 불교 단체에서 보낸 사람들이 개량 한
복이나 공연에서 입는 고운 빛깔의 옷을 차려 입고 형형색색의 연등을 들며 커다란 장엄등을 이
끌고 거리를 행진하는데, 조계사를 출발해 인사동과 종로2가, 종각역을 거쳐 조계사 인근 연등
놀이 행사장까지 돈다. 행진 중간에 사물놀이와 조촐한 춤 공연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천천히 이
동한다. (1시간 정도 걸림)
연등놀이 행사장에 이르면 연등회의 마지막 행사인 연등놀이 공연이 펼쳐진다. 앞서 연등행렬에
참여한 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 공연부터 현대식 공연까지 다채로운 공
연이 흥겹게 펼쳐지며, 공연 마지막에는 보통 강강술래를 하는데, 공연자와 관람객이 한데 어우
러져 신명나게 몸을 흔든다. 이때 허공에서는 꽃비(분홍색 전통 종이)를 뿌려 흥겨운 분위기에
더욱 부채질을 한다.
이 공연은 21시대에 끝나며, 이것을 끝으로 이틀 동안 펼쳐진 연등회는 아쉽지만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때는 마음이 뻥뚫린 듯 얼마나 허전하던지, 지나간 시간이 원망스럽다.

이렇게 서울연등회는 단순히 불교 축제가 아닌 좁게는 서울, 넓게는 천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어울리는 대축제로 천하 제일의 축제로 치켜세워도 손색이 없다.


▲  우정국로 북부에 자리한 연등/연꽃장식 만들기 체험공간
이곳은 주로 외국 관광객들 위주로 진행된다. (물론 유료임, 돈좀 쓰고 가라는 뜻)


서울연등축제는 연등회(燃燈會)란 이름으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122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도시와 사찰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그렇다면 이 연등회는 언제부터 열리
기 시작했을까?

연등회의 시초는 확실하지 않으나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경문왕(景文王, 재위 861~875) 조에서
나온다. 당나귀 귀로 유명세를 탄 경문왕은 정월 대보름에 황룡사(皇龍寺)로 행차해 연등을 간
등(看燈, 등을 구경하다)했다고 하며,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 887~897)도 그랬다. 그런 것을
보면 신라 중/후기에 이미 연등을 밝혔음을 보여준다.
그런 연등회는 고려로 넘어오면서 국가적인 행사로 거듭난다. 태조 왕건(太祖 王建)은 그의 훈
요10조(訓要十條)를 통해 팔관회(八關會)와 함께 연등회를 중요시하라 했고, 무려 연등도감(燃
燈都監)이란 관청까지 두어 연등회를 담당했다. 이때 연등회는 매년 2회, 음력 정월 대보름과 2
월 보름에 열어 만백성이 즐겼고, 등을 며칠 동안 밝히면서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고 한다.
지금이야 석가탄신일이 연관되어 있지만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처럼 석가탄신
일에 연등회를 벌인 것은 의종(毅宗, 재위 1147~1170) 때로 백선연(白善淵)이 초파일에 연등회
를 연 것이 그 최초 기록이며, 1245년(고종 32년) 최씨정권의 2대 실력자인 최이<崔怡, 최우(崔
瑀)>도 초파일에 밤새도록 연회를 벌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조선으로 천하가 바뀌면서 조정의 불교 탄압으로 나라 주도의 연등회는 사라졌으나 백성들은 계
속 연등회를 즐겼다. 저녁에 등을 들고 나오는 관등(觀燈)놀이가 성행했고, 이종가(二從街) 관
등은 한양8경의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왜정 때도 연등 풍습은 여전했고, 초파일이 다가오면 절과 불교 단체에서 각가지 연등을 만들어
거리에 걸었다.

1955년 초파일에는 조계사 부근에서 연등행렬을 벌이면서 현대 연등축제의 시작이 되었고, 1976
년부터는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연등행렬을 벌이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1996년부터 동대문운동
장(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조계사로 코스를 크게 수정했고, 이후 동국대에서 출발하여 지금에
이른다.


▲  도심 속 대로(大路)에서 펼쳐진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배가 볼록 나온 아기부처가 빨간 일산(日傘) 밑에서 중생들의 시원한 하례를 받는다.

▲  멀리 해동(海東)까지 놀러온 태국 불상

5월(어쩔 때는 4월 말)만 되면 나도 모르게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연등회, 그 연등회의 전통문
화마당에서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불교 문화도 만날 수 있다. 중원대륙과 왜열도,
몽골, 네팔, 부탄, 베트남, 태국, 인도, 스리랑카 등이 서울연등회의 명성에 앞다투어 찾아와
공간을 하나씩 받아 그들의 불교 문화를 열심히 홍보한다. 이국적인 불상과 불교 용품은 물론
문화 체험과 다과 시식까지 가능하다.


▲  금박을 붙여서 만든 태국 불상의 위엄 ~~!
보시함에 돈이 참 수북하다. 저건 돌아갈 비행기 여비인가..?

▲  진지한 분위기의 도자기 만들기 체험장

▲  북청(北靑)사자놀음 - 중요무형문화재 15호

우정국로 공연장에는 온갖 전통 공연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중에서 단연 인기가 높은 것은 북청
사자놀음(북청사자놀이)이 아닐까 싶다. (그외에 남사당놀이도 있음) 서울연등축제에 매년 등장
하는 단골로 우리 땅임에도 전혀 들어갈 방법이 없는 함경남도 북청의 오랜 민속 놀이다.

북청사자놀음은 사자놀이와 가면놀이의 일종으로 대륙계와 북방계의 사자춤이 민속화된 대표적
인 예이다. 함경남도에는 많은 사자놀이가 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널리 이름을 떨친 것이 북
청이다.
북청의 주요 사자놀이패로 북청읍의 사자계(獅子契), 가회면의 학계(學契), 구 양천면의 영락계
(英樂契), 청해면 토성리의 사자놀이가 유명했으며, 특히 북청읍 사자는 댓벌 사자라 하여 이촌
/중촌/넘은개/동문밖/후평/북리/당포 사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마을마다 사자의 모습을 달리
해서 놀았다. 그리고 북청 관내에 사자들이 서로 자웅을 겨루며 경쟁하면서 사자놀이 패들이 많
이 통폐합되었다.

이 놀이는 음력 정월 14일에 여러 마을에서 장정들의 편싸움으로 그 막을 올리는데, 대보름달이
만연하게 뜬 뒤에 사자놀음이 펼쳐져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6일 이후에는 초청받은 집을
순회하며 노는데, 마당에 들어가 춤을 추면 사자가 마당을 거쳐 안방문을 열고 큰 입을 벌려 무
언가를 잡아먹는 시늉을 한다. 이는 악귀를 물리친다는 뜻이며, 그 다음에 부엌으로 들어가 같
은 행동을 취하고 마당으로 나와 춤을 춘다.
이때 집 주인의 요청이 있으면 부엌을 지키는 조왕(竈王)과 시렁 앞에 엎드려 그들에게 절을 한
다. 또한 아이를 사자 등에 태우면 오래 산다고 하며, 몰래 사자 털을 뽑아두면 장수한다고 하
여 사자 털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리고 장수를 빌면서 오색포편(五色布片)을 사자 몸에 매어주
기도 했다.

서울에서 한참이나 먼 북청의 사자놀이가 서울로 온 것은 해방 이후이다. 북한의 핍박을 피하고
자 내려온 사자놀이 기능보유자들이 서울을 중심으로 놀이를 퍼뜨렸는데, 객지라 그런지 고향처
럼 하기에는 좀 힘들고 해서 내용이 좀 달라졌다.
우선 퉁소와 북으로 반주를 하며 애원성춤을 추고, 마당돌이로 하인 꼭쇠(꺾쇠)가 양반을 데리
고 나와 그를 조금씩 야골리면서 마당을 진행한다. 양반이 심심하다고 하니 꼭쇠가 악사(樂士)
, 무동(舞童), 꼽새 등을 불러 한데 판을 벌인 다음 끝에 비로소 사자를 소환한다.

사자는 짐승의 왕이라 일컬어지는 용맹하고 무서운 동물이 분명하지만 여기서 만큼은 웃음을 머
금게 하는 귀엽고 해학적인 사자탈과 털이 달린 가죽을 뒤집어 쓰며 어슬렁 나타난다. 보통 2명
이 1마리의 사자를 이루는데. 많을 경우에는 3인 1조가 되기도 한다. 사자는 상좌승(上座僧)과
계속 춤을 추며, 다양한 재주를 부리다가 잠시 쓰러진다. 이에 양반은 상좌승을 불러 '반야심경
(般若心經)'을 외우게 하지만 사자는 꿈쩍도 안한다. 그래서 의원을 소환해 침을 놓으니 그때서
야 일어난다. 이때 꼭쇠가 토끼(예전에는 아이였다고 함)를 먹이니 사자는 먹는 시늉을 하며 굿
거리장단에 맞춰 극을 이끈다.
이에 양반은 기뻐서 사자 1마리를 더 소환하고 사자춤과 상좌승의 승무(僧舞)가 한데 어울린 다
음, 사자가 퇴장한 뒤에 마을 사람들이 '신고산타령' 등을 부르면서 군무를 추고 끝낸다.

북청사자놀음은 사자춤의 묘기와 흥겨움, 그리고 악의 기운을 쫓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기능을
수반한 민속놀이로 그 흔한 양반과 파계승(破戒僧) 풍자는 없다.


▲  승무와 어우러진 북청사자놀음의 위엄 (1)

▲  승무와 어우러진 북청사자놀음의 위엄 (2)

공연이 끝나면 사자춤을 춘 사람들은 사자탈과 보기만 해도 찜통같은 가죽을 벗고 본모습을 보
인다. 중장년층으로 생각했지만 그 속에서 나온 이들은 뜻밖에도 앳된 20대들. 수많은 옛 무형
자산들이 마땅한 계승자를 찾지 못해 고사 직전에 놓인 것들이 허다한데, 북청사자놀음은 저들
로 인해 무척 든든함을 느낀다. 내가 백발이 되는 먼 훗날까지 길이길이 이어갔으면 좋겠다.


▲  전통문화마당이 열리는 우정국로 남쪽 시작점(종각역4거리 북쪽)

▲  종각역4거리 북쪽에 마련된 외줄타기 현장
어린이들이 부모 손에 의지하며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에 임한다.

▲  어지간해서는 참 보기가 힘든 괘불(掛佛)도 칠흑같은 괘불함을 박차고
서울로 올라왔다. 괘불 앞에서는 한참 승무가 벌어지고 있다. ▼


♠  서울연등축제 연등의 물결

▲  종각역4거리에 놓인 연등 (2013년)

조계사 북쪽과 우정총국(郵征總局) 주변, 그리고 종각역4거리 스탠다드차타드은행(옛 제일은행
, 2015년에는 이곳에 연등을 두지 않았음) 주변에는 크고 작은 연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날 연등행렬에 쓰인 장엄등도 몇 개 있음)
이들은 초파일 당일이나 다음날까지 이곳에 있으며, 낮에는 햇님의 눈치로 조용히 색을 입힌 모
형물로 웅크리고 있지만 그가 없는 저녁에는 마음껏 몸을 밝히며 연등의 이름값을 한다.


▲  여의주를 문 푸른 빛깔의 목어 (또는 용)
뒤쪽에 두툼하게 솟은 푸른 빛깔은 꼬랑지가 아닌 바다 물결이다.
물결을 헤치며 자기 갈 길을 가는 목어의 위엄~~


▲  반토막난 생선 쪼가리 목어를 열심히 두드리는 승려

▲  수초 사이를 유유자적 거니는 물고기 (목어를 상징)

▲  연잎과 물고기(목어)를 든 남녀 동자들

▲  하얀 구슬을 품은 연분홍 연꽃

▲  잔뜩 부풀어 오른 하얀 연꽃(백련)

▲  귀엽고 상큼한 모습의 달마대사 연등

▲  요즘 똥개도 물고 댕긴다는 스마트폰 연등
스마트폰 화면을 연등축제에 걸맞게 목어로 채웠다.

▲  우정총국 북쪽에 조촐하게 연등터널을 세웠다.

▲  부엉이 연등

▲  반야용선(般若龍船)
관음보살 누님이 용머리 배의 선장이 되어 망자(亡者)들을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
나중에 이승을 뜨게 된다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꼭 타보고 싶은 배이다.

▲  귀여운 동자승이 탑돌이를 하는 연등과 신들린 모습으로
법고를 치고 있는 승려 연등

▲  부처의 법을 상징한다는 하얀 코끼리 연등

▲  비파를 연주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사자에 올라탄 문수동자,
칼을 쥐어든 증장천왕(增長天王), 코끼리에 탄 보현동자 연등


♠  우리나라 현대 불교의 중심지이자 도심 속의 조촐한 휴식처
~ 서울 조계사(曹溪寺)

서울 도심의 완전 한복판인 금싸라기 땅, 종로1가 견지동(堅志洞)에는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
인 조계사가 자리해 있다. 견지동이란 이름은 뜻을 견고히 한다는 뜻으로 조선 때 견평방(堅平
坊, 견지동 주변)에 있던 의금부(義禁府)에서 민원이나 법을 집행할 때 굳은 뜻으로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조계사의 시초는 1910년에 창건된 각황사(覺皇寺)로 조계사 서쪽 수송공원(옛 중동학교터)에 있
었다. 조선시대에 서울 도심에는 정릉(貞陵)의 원찰인 흥천사(興天寺, 정동에 있었음), 탑골공
원에 있던 원각사(圓覺寺), 그리고 명륜동(明倫洞)에 흥덕사(興德寺)가 있었는데, 원각사와 흥
덕사는 연산군(燕山君) 때 파괴되었고, 흥천사는 중종(中宗, 재위 1506~1544) 때 사라지면서 서
울 도심의 사찰은 완전 씨가 마르게 된다. 하긴 억불숭유를 강조하던 조선 심장부에 버젓히 절
이 있다면 모양새가 좀 그렇긴 하겠다.
이후 400년의 공백을 깨고 조계사의 시초인 각황사가 도심에 싹을 내렸다.

1911년 왜정(倭政)이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을 선포하여 조선의 모든 절을 이토 히로부미의 원
찰(願刹)인 박문사(博文寺, 현재 장충동 신라호텔)에 귀속시키려 하자 해인사(海印寺)주지 회광,
마곡사(麻谷寺) 주지 만공(滿空), 승려 용운(龍雲) 등이 급히 각황사에 모여 31본산 주지회의를
열었다. 이때 용운의 제의로 총본산제도를 추진하면서 조계사(각황사)는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
사찰로 서서히 싹수를 트게 된다.

1929년 승려 104명이 모여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열어 종회법(宗會法)을 제정했다. 당시
절의 규모가 암자보다 못한 수준이라 만해 한용운 등이 중심이 되어 이곳을 명실상부한 조선 불
교의 총본산으로 키우려고 궁리했는데, 지암 종욱(智庵 鍾郁)이 총본산 건설 31본산 주지 대표
로 선출되었다.
그러던 중 1936년 전북 정읍을 기반으로 하던 보천교(普天敎)가 왜정에 의해 강제 해산되는 사
건이 터지면서 보천교의 중심 법당인 십일전(十一殿, 전북 정읍 소재)이 경매로 나왔다. 이 건
물은 1929년에 지어진 천하에서 가장 큰 목조 단층 건물로 지암은 그 건물에 반응을 보이며, 과
감히 매입을 단행했는데, 구입 비용은 무려 12,000원이 들었으며 (지금으로 환산하면 12억 이상
) 그 건물을 모두 분해하여 가져와 대웅전을 지었다.
공사를 맡은 이는 도편수(都片手) 최원식(崔元植)으로 1920년대에 창덕궁(昌德宮) 대조전(大造
殿) 재건 공사를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대웅전 건립을 위해 인근 경복궁(慶福宮)과 덕수궁 건
물을 조사했으며, 단청과 벽화를 맡은 이는 당시 그림으로 알아주던 금용 일섭(金蓉 日燮)이다.

1937년 민영환 집터와 우정총국 일대를 사들여 절을 옮겼고, 1938년 10월 25일 준공 봉불식(奉
佛式)을 거행해 서울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로 그 장엄함을 드러냈다. 또한 북한산성(北漢山城)
안에 있던 태고사(太古寺, 지금도 있음)를 이전하는 형식으로 하여 절 이름을 태고사로 갈았다.
대웅전 건설과 절 이건 비용을 위해 31본산에서 100,402원 47전을 모아 보냈으며, 중앙불교전문
학교 교수였던 권상노(勸相老)가 상량문을 작성했는데, 왜정의 눈치가 심하여 조선총독의 '심전
개발(心田開發)'을 기념하고자 대웅전을 지었다는 내용을 적었다. 또한 많은 중생이 각자의 소
중한 물건을 발원문을 첨부해 대웅전에 넣었다.
이토록 천하가 주목할 정도로 요란하게 절을 옮겼지만 정작 경내를 메운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
가 전부였다. 대웅전 하나가 여러 건물의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참고로 보천교는 증산교(甑山敎)에서 파생된 것으로 차경석(車京錫)이 교주(敎主)로 있었는데,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국호를 시국(時國)이라 하고 십일전 완성을 계기로 신도들로부터 차천자
(車天子)로 추앙을 받았다. 허나 교내 분열과 친일 행적 등으로 말썽이 많았고, 1936년 차경석
이 죽자 왜정은 보천교를 강제로 폐지하고 건물을 경매로 내놓아 짭짤하게 수입을 챙겼다.

1941년 조선의 사찰 및 승려를 통합하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의 인가를 받아 조선
불교 조계종이 발족했고, 제1대 종정(宗正)으로 한암이 취임했다. 1945년 9월에는 이곳에서 전
국승려대회가 열려 왜정 때 만들어진 사찰령과 태고사법 폐지를 결의하고 새롭게 조선불교 교헌
(敎憲)을 제정했다.

1950년 6.25전쟁 때 무심한 총탄으로 요사가 반이나 날라갔고, 대웅전도 우측 처마에 포탄을 맞
아 상처가 생겼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사찰정화담화문'을 계기로 인근 안국동 선학원(禪
學院)에서 불교 정화운동을 벌이던 승려들이 이곳에 들어와 조계종의 이름을 딴 조계사로 이름
을 갈았다.
허나 그로 인해 비구승과 대처승(帶妻僧)의 대립이 심해지자 대처승 세력은 조계사를 인정하지
않고 태고사를 고집했다. 그래서 절은 하나인데, 이름은 2개인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졌고, 비
구를 중심으로 간신히 조계종이 성립되면서 조계사로 이름이 통일되기에 이른다.

2003년에는 대웅전을 해체 보수했는데, 종도리를 받치는 통장혀 중앙부분 장방형 홈에서 1937년
대웅전 건립 때 넣은 상량문을 비롯해 217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 시절 생활사와 상황
을 고스란히 전해주었으며, 2005년에는 일주문을 세웠다.

법등(法燈)을 켠지는 이제 100년을 조금 넘었고, 지금에 자리에 둥지를 튼 것은 80년 남짓, 건
물도 대웅전이나 좀 나이가 있을 뿐 고색(古色)의 기운은 그리 익지도 않았다. 오래된 멋도 거
진 없고, 산사의 고즈넉함도 없고, 수수하게 생긴 절집도 아니다보니 그런 절을 선호하는 이들
에게는 썩 좋은 절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단점이 있다면 장점도 있다고 도심 속에 박힌 잇점과 속세에 늘 열려있는 공간으로 평일에
는 잠깐 들려 쉬었다가는 직장인과 도시인들이 많다. 아마도 이 땅의 절 가운데 직장인들이 가
장 많이 찾는 절이 아닐까 싶다. 휴일에는 신도와 관광객들로 미어터져 평일과 휴일 가리지 않
고 물갈이가 잘된다. 특히 서울연등회(연등축제)와 석가탄신일에는 발을 들일 공간 조차 없을
지경이며, 축제의 절정에 이른 조계사는 절과 사람의 향기, 그리고 흥겨움이 강하게 묻어난다.
그리고 매일 18시가 되면 범종,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四物)을 깨워 회색빛 도심에 잔잔하
게 사물의 소리를 베푼다.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지이자 조계종의 본산으로 경내는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나 대웅전과 현대
식 건축물 등 으리으리한 건물이 많다보니 경내가 제법 넓게 다가온다. 게다가 서울 도심 한복
판이라 교통과 접근성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다. (조계사는 지금 크기가 딱 좋은 거 같음)
대웅전과 극락전, 설법전, 종무소, 안심당, 범종루,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불교대학 등 1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천하에 희귀종인 백송
이 천연기념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고, 대웅전과 석가불도, 목불좌상 등의 지방문화재를 간직하
고 있다. 또한 대웅전 뜨락에는 500년 묵은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고, 경내 동북쪽에는 우정총국
이 자리해 있다.

번잡한 도심 속에 있는 건 분명하지만 그런 도심과 달리 절은 평온하기 그지없으며, 종로1가를
지날 일이 있으면 거의 꼭 들리는 단골 절집의 하나이기도 하다.


▲  조계사 일주문(一柱門)

동쪽을 바라보고 선 일주문은 조계사의 실질적인 정문이다. 경내가 사방으로 뻥 뚫려있다 보니
진입로가 많아 굳이 일주문의 검문을 받을 필요는 없겠으나 그래도 절의 상징적인 대문이니 경
내로 들어가거나 혹은 나갈 때 거쳐가는 것도 좋다.

원래 조계사는 일주문이 없었다. 절의 필수 요소인 일주문이 없는 허전함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
지 2005년 3월 절을 중창하면서 일주문의 백미로 꼽히는 부산 범어사(梵魚寺) 조계문을 모방해
하나 장만했고, 2007년 10월에 현판과 주련을 달아 최종 마무리를 지었다. 현판과 주련은 당시
한국서예가협회장이던 송천 정하건 선생이 쓴 것이고 서각은 철제 오옥진 선생이 했다.

명세기 이 땅의 중심 절집이다보니 문의 크기는 단양(丹陽) 구인사(求仁寺) 일주문의 다음 가는
규모로 지어졌다. 높이도 장대하거니와 특히 폭이 넓어 더욱 웅장해 보인다.


▲  또 다른 하늘을 이루고 있는 오색 연등의 위엄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허공을 가득 메운 연등의 장대한 오색 물결 앞에 두 눈이 제대로 놀라
고 만다. 입도 한없이 벌어져 좀처럼 다물어지질 않았지~~ 낮도 이러한데, 햇님이 꽁무니를 빼
는 저녁이 되면 더 황홀한 분위기를 연출할 것이다.


▲  연등 밑에 있는 커다란 연꽃무늬 연등

▲  조계사 사적비(事蹟碑)와 법등명(法燈明) 연등

조그만 다양한 연등이 걸린 법등명 수레 옆에 미끈한 피부의 비석이 보일 것이다. 그 비석은 조
계사의 역사를 담은 사적비로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智冠)이 2009년 10월에 세운 것이다.
지관은 현대불교의 큰 승려로 2012년 1월 정릉 경국사(慶國寺, ☞ 관련글 보러가기)에서 입적을
했는데, 그는 조계사에 마땅한 사적비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손수 자료를 모아 9천 자에 가
까운 내용을 담았다. 비석의 밑도리와 머리장식인 귀부와 이수는 여주 고달사(高達寺)의 원종국
사탑비(元宗大師塔碑)를 본따서 만들었다.


▲  연꽃을 들고 샤방하게 뛰어가는 동자승과 비파를 연주하는 동자 연등

▲  조계사 관불의식의 현장
오랜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부처의 표정이 무척 해맑아 보인다. 허나 석가탄신일이
지나면 강제로 다시 어두컴컴한 곳에 들어가야 되니 그의 심정도 모르고
떨어지는 해가 무척 야속할 것이다.


▲  왼손을 내밀고 있는 천진불

백송 앞에는 2006년 3월에 만든 천진불이 그 이름 그대로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요즘
이런 천진불을 갖춘 절이 제법 되는데, 표정과 모습이 귀여운 것은 좋지만 왼손을 내밀며 '야~
한푼 내놔~!!' 이러는 것 같아서 저 손짓만 고친다면 참 바람직한 천진불이 될 것 같다.

▲  조계사 백송 - 천연기념물 9호

대웅전 동쪽에는 이곳에서 제일 오래된 보물인 백송이 하얀 피부를 드러내며 경내에 짧게 그늘
을 드리우고 있다.
백송은 말그대로 하얀 소나무로 나이를 먹으면서 껍질이 벗겨져 줄기가 회백색이나 하얀색으로
변하는 매우 희귀한 소나무이다. 그들의 고향은 중원대륙 북부이나 그곳에서는 진작에 씨가 말
라버린 상태이며, 조선시대에 명나라 또는 청나라를 다녀온 사신이 기념으로 가져온 백송 일부
가 간신히 가쁜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다. 허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백송이던 통의동(通義洞)
백송을 비롯해 원효로(元曉路) 백송과 보은(報恩) 백송이 숨을 거두면서 그 개체수는 이제 한
손에 꼽을 정도이며, 다행히 그들의 후손이 사릉(思陵) 전통수목 양묘장과 재동(齋洞) 백송이
있는 헌법재판소 북쪽, 그리고 창경궁에서 자라나고 있어 품종 전멸은 면했다.

조계사 백송은 50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여겨지며, 누가 가져와 심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높이
는 약 14m, 뿌리부분 둘레 1.85m, 가슴 높이 둘레가 1.8m이며, 수송동(壽松洞)이란 지명도 바로
이 나무에서 비롯되었다. 즉 오래된 나무가 있는 동네란 뜻으로 원래는 지금의 수송공원에 있었
으나 그곳에 있던 각황사가 현 위치로 이전되면서 옮겨온 것이다.
그러다보니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져 외과수술을 크게 받을 적이 있는데, 그때 큰 줄기는 절단되
었다. 허나 절을 찾는 사람이 많고, 나무에게 주어진 땅이 좁기 때문에 나무의 기운도 예전 같
지가 않아 이 땅에 오래된 백송이 또 줄어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게다가 나무 주위를 연등
으로 화사하게 꾸며놓아 나름 눈요기감을 선사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를 가두는 꼴이 되어 조금
은 답답해 보인다. 연등 수입도 좋지만 천하에서 매우 희귀한 그에 대한 배려도 절실해 보인다.


▲  조계사 대웅전(大雄殿)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7호

조계사 대웅전은 우리나라 단층 불전(佛殿)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얼마나 허벌나게
크던지 건물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죄다 개미보다 못하게 보인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면적은 무려 155.7평에 이른다. 1936년 왜정
에 의해 해체되어 경매로 나온 보천교 십일전을 거금 12,000원으로 매입하여 그 자재로 만들었
는데, 옛 십일전의 모습도 어느 정도 살렸다.
조계사가 이 큰 건물에 눈독을 들인 것은 조계사가 바로 조선 불교를 대표하는 존재였기 때문이
다. 나날이 힘이 더해지는 왜식 불교에 맞서고 민족 대표 사찰에 걸맞게 법당을 크게 지을 필요
가 대두되면서 때마침 나온 십일전이 그 역할을 하게 되었고, 1938년 완성을 보았다.

대웅전은 조선 후기 양식을 보이면서도 나름 독특한 양식을 간직한 20세기 초/중기 건물로 사방
에 계단을 둔 높은 기단 위에 자리하여 안그래도 큰 건물이 더욱 커보인다. 건물 외벽에는 온갖
꽃창살과 벽화가 장엄했으며, 대웅전 건립 기념으로 영암 도갑사(道甲寺)에서 가져온 목불좌상
을 본존불로 삼았다.
이 불상은 조선 초기(조계사 홈페이지에는 15세기에 조성된 것이라 나옴, 반면 문화재청에는 조
선 전기 양식을 간직한 조선 후기 불상이라고 나옴)
에 조성된 것으로 대웅전 규모에 걸맞지 않
게 많이 왜소하다는 지적이 많자 2006년에 새롭게 거대한 석가3존불을 봉안했다. 목불좌상은 불
단 우측으로 옮겨졌으며, 추후 영산전을 만들면 그곳으로 옮길 계획이라고 한다. 이 목불좌상은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6호
이다.
그리고 대웅전 현판은 조선 선조(宣祖)의 8번 째 아들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珖)이 해서체로
남긴 화엄사 현판 글씨를 그대로 복사하여 만든 것이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그 뒤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불도(釋迦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5호

연병장처럼 넓은 대웅전 내부에는 예불을 하는 중생들로 가득하다. 불단 앞에는 중생들이 바친
온갖 제물로 상다리가 아작날 지경이고, 불상은 그것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보인다. 그리고 시
주함에는 돈이 넘쳐나 함이 터질 지경이다.

불단에 자리한 3존불은 2006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 땅에서 단층 불전에 봉안된 불상 가운데 제
일 크다. 그들이 너무 큰데다가 금빛 찬란해 두 눈이 달아날 지경으로 그들 뒷쪽에는 지방문화
재로 지정된 석가불도가 걸려있는데, 불상이 너무 커서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
석가불도는 석가불이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을 하는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로 20세기 초반에
조성되었다. 왜정 때 유명했던 불교미술작가 김일섭(金日燮)이 그린 것으로 그 시절 불교의 모
든 종단이 뜻을 합쳐 만든 불화라는 점과 김일섭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가 인
정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대웅전 앞에도 관불의식 장소를 두었다.
철모르고 찾아온 이른 더위에 시원하게 냉수욕을 하는 그가 얼마나 부럽던지..
그를 다른데로 내보내고 내가 그 자리에 서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
만약 그렇게 되면 관불은 커녕 바가지로 싸대기`맞겠지..?

▲  대웅전 뜨락 연등 구름
연등이 의기투합하여 하늘을 완전히 지웠다. 연등은 하늘을 메우는 구름이 되고
그들을 경계로 하늘과 땅으로 나눠진 것 같다. 연등 밑은 밝은 대낮임에도
연등의 위엄에 가려 어둡다.

▲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대웅전 뜨락

▲  조계사의 꿀재미, 연등 구름의 물결
측정불가의 깊은 하늘이 이날만큼은 대웅전 평방 높이로 팍 내려앉은 것 같다.

▲  하얀 연등이 수를 놓은 극락전(極樂殿)

대웅전 서쪽에 자리한 극락전은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좌우에 둔 아미타3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 건물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극락전, 2층은 설법전(說法殿)으로 쓰인다.

극락전 앞에는 다른 공간과 달리 하얀 연등이 가득한데, 이들은 죽은 이들, 즉 어려운 말로 영
가(靈駕)를 위한 연등이다. 저녁이 되면 일제히 하얀 빛을 발산해 알록달록 연등 빛보다는 다소
엄숙하거나 오싹할 수 있다. 

극락전 남쪽에는 범종루, 안심당(安心堂) 등이 있으며, 안심당 지하층(거의 지상 1층임)에는 만
발(萬鉢)이라 불리는 공양간이 있다. 만발은 1만개의 발우라는 뜻으로 3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  도시를 바탕에 둔 범종루와 극락전(오른쪽)

범종루에는 부처의 메세지를 담은 4개의 물건, 사물(四物)이 담겨져 있다. 오전 4시와 저녁 6시
가 되면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의 순으로 치는데, 같은 사물 소리라고 해도 첩첩한 산주름 속
에 자리한 산사에서 듣는 것과 도시 한복판에서 듣는 것이 참 다른 것 같다. 공해가 가득한 곳
에서 들으니 그때만큼은 잠시나마 외딴 산사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  연등 구름에 윗도리가 지워진 회화나무
대웅전 뜨락에 자리한 회화나무는 약 500년 이
상 묵은 것으로 여겨진다. 귀신도 모를 정도로
장대한 나이를 먹은 그는 높이 26m, 둘레 4m로
뜨락에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데, 옛날
에는 회화나무가 군락을 이루던 곳으로 회화나
무 우물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허나 그 많던 회화나무는 20세기 이후 죄다 사
라졌으며, 나무 윗도리는 연등 구름에 가려 보
이질 않는다. 이렇게 보니 구름에 감싸인 신묘
한 나무처럼 보인다.

            ◀  조계사 8각10층석탑
대웅전 뜨락에는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8각9층
석탑(국보 48호)을 유난히도 많이 닮은 8각10층
석탑이 자리해 있다.
조계사는 초창기부터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긴
왜식 석탑이 있었다. 허나 왜식 탑이라 말들이
많자 2009년 가을 기존의 탑을 불교중앙박물관
북쪽으로 치우고 고려 탑의 진수로 꼽히는 월정
사 탑을 모델로 삼아 지금의 탑을 세웠다.
탑 피부에는 8여래상, 8보살상, 8신중상 등을
새겼고, 왜식 탑에 들어있던 부처 사리 1과와
조그만 불상 14,000상을 봉안했다. 그 사리는
1913년 스리랑카 승려인 달마파라(達磨婆羅)가
기증한 것으로 그외에 논산 쌍계사(雙溪寺)에서
가져온 법화경 7권 1질과 25조 가사 1벌 등을
안치해 이 땅의 중심 사찰 석탑의 위엄을 갖추
었다.

  ◀  조계사 쉼터이자 야외까페인 가피(加被)
대웅전 뜨락 동남쪽에 늘씬한 키의 소나무가 여
럿 심어진 쉼터가 있다. 예전에는 그냥 허전한
공터였으나 조계사 신도회 부회장 오인석의 지
원으로 주변을 손질하여 2011년 4월 야외 까페
로 새로 태어났다.

이곳에 부여된 이름은 '가피'로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도와주고 지켜준다는 뜻이니 완전 사찰
까페에 맞는 이름이다.
(커피와 차는 2~4천원 선)


▲  한국불교 역사문화기념관 북쪽 산책로

조계사 북쪽에는 2005년에 세워진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전국 2,000여
곳의 사찰을 총괄하는 중심지로 총무원과 교육원, 포교원이 들어있으며, 지하 1층에는 2007년에
문을 연 불교중앙박물관이 자리해 있다. 이 박물관은 이 땅의 불교미술사를 정리하고 다른 절의
문화유산을 위탁 관리/보존하고 있는데, 관람료는 공짜이다. (특별전 제외)

* 불교중앙박물관 관람시간 : 9시~18시 <11~2월은 17시까지,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추석
  연휴 휴관>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우정국로 55 ☎ 02-2011-1960)

     ◀  뒷전으로 밀려난 조계사 7층석탑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북쪽에는 조촐하게 산
책로가 닦여져 있다. 그 산책로를 거닐면 왜열
도 스타일로 이루어진 길쭉한 탑을 만나게 되는
데, 그 탑이 대웅전 뜨락에 있던 조계사 7층석
탑이다.

1913년, 스리랑카 승려인 달마바라가 부처의 사
리를 지참하며 천하의 불교 성지를 찾아 댕기다
가 그해 8월 조선까지 들어 왔다.
조선의 여러 절을 둘러보다가 기분이 너무 좋아
서 사리 1과를 선사했는데, 각황사에서 이를 관
리했다가 사리를 담을 탑이 필요하여 1930년 지
금의 왜식 7층석탑을 지어 그 안에 담았다.
2002년 3월 도량확장 불사로 탑을 옮겼을 때 사
리를 꺼내 친견법회를 봉행했으며, 사리함을 보
수하여 다시 안에 넣었다.

그 이후 왜식 탑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생기자 2009년에 오대산 월정사 8각9층석탑을 모델로 하여
왜식 탑을 대체할 8각10층석탑을 세웠다. 그래서 왜식 탑에 담긴 사리를 새 탑에 넣었고, 왜식
탑은 부시기에는 좀 아까워 그해 10월 인적이 별로 없는 응달진 구석에 자리에 처박아 두었다.
단지 왜식 탑이란 이유에서였다.


▲  7층석탑의 1층 부분 - 난간 무늬와 덩굴무늬가 새겨져 눈길을 끈다.

탑을 구석진 곳에 두다보니 처음에는 탑을 완전 아작낸 줄 알았다. 아무리 왜식 탑이라 해도 그
들도 이 땅의 엄연한 역사이자 문화유산이다. 옛 조선총독부나 이 땅의 정기를 흐트리고자 꽂은
말뚝 등 심히 눈꼴사나운 것들은 정리해야 마땅하나 그외에 평범한 것들은 보존하여 관광/역사
자원으로 삼는 것이 좋다.
또한 이 탑은 80년 이상 묵은 것으로 조계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외지에서 만든 것과 백
송, 회화나무는 제외) 각황사와 태고사 시절의 역사가 담겨진 만큼 부시지 않고 자리만 옮긴 것
은 착한 결정이라 본다. 구석에 있어 찾는 이도 별로 없지만 탑 주변에는 늘 꽃이 가득하여 관
리는 그런데로 해주는 모양이다.

이 땅에 거의 흔치 않은 왜식 탑으로 왜인이 만든 것이 아닌 조계사에서 만든 것이며, 가야(伽
倻)를 밀어내고 왜열도를 점유한 해양대국 백제(百濟)가 왜인들을 교화하고자 불교를 내리면서
그곳에도 불교가 활짝 꽃피게 되었다. 왜열도로 전해진 불교는 차차 그들만의 불교 스타일로 변
화해 갔고, 격동의 구한말 시절, 그들의 불교가 그 전래지인 조선으로 넘어와 왜식 불교가 잠시
성행을 한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이 탑을 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문화란
다 돌고 도는 것이다.


▲  7층석탑 주변에서 만난 두툼한 불두화(佛頭花)의 위엄

조계사를 둘러보니 시간은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경내 북쪽에 대기하고 있던 장엄등이 슬슬 꿈
틀거리면서 연등회의 마지막인 연등놀이가 기지개를 켰다. 이후 내용은 생략~~~

※ 조계사 찾아가기 (2015년 5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2번 출구에서 도보 5분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를 나오면 안국동로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우정국로) 길로
  가면 조계사이다. (도보 6분)
* 조계사 경유 서울시내버스 노선
① 조계사 : 109번(우이동↔광화문), 151번(우이동↔중앙대), 162번(정릉동↔여의도), 172(하계
   동↔상암동), 606(부천시 상동↔종로1가), 1020(정릉동↔종로1가)
② 조계사 건너편 : 151, 162, 172, 401번(장지동↔광화문), 406번(개포동↔광화문), 704번(송
   추,부곡리↔서울역), 7022번(구산동↔서울역), 9401번(분당 오리역↔광화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5 (☎ 02-768-8600)
* 조계사 홈페이지는 위에 불두화 사진을 클릭한다.
* 서울연등축제(연등회) 홈페이지는 ☞ 이곳을 클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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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 공개일 - 2015년 5월 18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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