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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4.02 경북 예천 겨울맞이 나들이 ~~~ (곱게 잘늙은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3층석탑, 초간정과 초간정 원림)
  2. 2017.10.11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이 깃들여진 첩첩한 산골의 절집, 북한산 삼천사 ~~~ (삼천사계곡)

경북 예천 겨울맞이 나들이 ~~~ (곱게 잘늙은 개심사지5층석탑, 동본리3층석탑, 초간정과 초간정 원림)



' 경북 예천 나들이 '
(개심사지5층석탑, 초간정 일대)

▲  예천 초간정


 

 

겨울 제국(帝國)이 늦가을을 몰아내고 천하 지배의 반석을 다지던 11월의 마지막 주말에
경북 예천(醴泉)을 찾았다.
초겨울의 냉랭한 기운이 짙게 감돌던 이른 아침, 도봉동 집을 나서 동서울터미널에서 예
천행 직행버스에 나를 싣고 2시간 20여 분을 달려 용궁(龍宮)에 두 발을 내렸다. 거기서
20분 정도를 기다려 안동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잡아타고 예천터미널 다음 정류장인 남본
교차로에서 하차했다. (예천터미널에서 남본교차로까지 약 1.2km, 거기서 환승하거나 걷
기도 애매하여 용궁에서 갈아탔음)

남본교차로 북서쪽에 안면이 2번 정도 있는 개심사지5층석탑이 있는데, 여기서 남쪽에서
오는 일행들과 만나기로 했다. 길을 일부러 더디게 왔음에도 일찍 도착하여 30분 정도를
오들오들 떨며 기다리니 남쪽 일행을 태운 관광버스가 구세주처럼 내 앞에 나타났다. 오
랜만에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지척에 있는 개심사지5층석탑으로 다가섰다.
(그때 시간 대략 10시)


 

♣  너무나 곱게 늙은 단아한 모습의 고려 초기 석탑
개심사터 5층석탑(開心寺址 五層石塔) - 보물 53호

▲  옛 개심사터를 홀로 지키고 선 5층석탑

남본교차로 서북쪽 벌판 한복판에 맵시가 도드라진 5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고려 초에 창건
되어 신기루처럼 사라진 옛 개심사(開心寺)의 유일한 흔적으로 윗층 기단(基壇)에는 아주 감
사하게도 탑과 관련된 내용<석탑기(石塔記)>이 새겨져 있어 그의 신상명세를 조금이나마 알려
준다. 다만 그 글씨들은 장대한 세월의 거친 흐름 속에 크게 닳고 깨져서 알아보기는 힘들다.

석탑기에 따르면 그는 1010년에 세워졌으며, 이곳에 개심사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고려 3대 제왕인 정종(定宗, 재위 945~949)이 거란(요나라)과의 전쟁에 대비코자 조직한 광군
(光軍)에 대한 내용이 짧게 깃들여져 있어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  개심사터와 5층석탑으로 인도하는 길

고려 초에 세워진 석탑답게 2중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땅바닥에 접한
아랫층 기단에는 몸통은 사람이고 머리는 동물인 지신상(支神像)을 1면에 3개씩 모두 12지신
상을 새겼다.
윗층 기단에는 부처의 법을 지키는 8명의 존재,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있는데 1쪽 면에 2명씩
8명을 맞추었으며 이들은 불법(佛法) 대신 이 탑을 지킨다. 개심사는 이미 오래전에 녹아 없
어졌지만 이 탑은 그들의 가호 덕에 1,000년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너무 온전하고 생동
감 있게 살아있어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들의 모습은 탑이 심어진 시기에
고려 군사의 모습으로 불상의 얼굴도 그렇고 의복(衣服)이나 보살상, 불교 관련 존재들의 모
습은 왕족이나 귀족, 승려, 여인들을 모델로 많이 삼았다. 그러니 무인(武人) 계통의 팔부중
상은 당시 늠름했던 고려 군사를 참고하여 만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부처나 보살의 얼굴이
나 불교 관련 존재들의 모습과 의복 등은 딱히 정형화된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  12지신상과 팔부중상이 새겨진 석탑의 기단부 ▼
제일 밑에 3인 1조로 자리한 존재가 12지신상, 윗부분에 무기를 들고
2인 1조로 지키고 선 존재가 팔부중상이다.

윗층 기단과 1층 탑신 사이로 탑신을 떠받들기 위해 연꽃무늬의 괴임돌을 두었는데 이는 고려
탑의 특징이다. 1층 탑신의 남쪽에는 문고리와 인왕상을 새겼는데, 혹 열쇠가 있어 저 문고리
를 딸 수만 있다면 탑 안에 안치된 보물과 개심사의 정체를 흔쾌히 밝혀줄 존재가 나오지는
않을까 싶은 엉뚱한 생각이 든다. 우리집 열쇠라도 들이밀어 저 문고리를 풀어보고 싶다.

탑의 높이는 4.33m, 기단 폭 2.15m로 체감률이 안정되어 안정적인 비례를 이루고 있으며 예천
에 왔다면 꼭 보고 가야되는 이 고을의 소중한 보물이다. 또한 2011년 가을에는 탑 주변 논을
갈아엎고 주변 정비 및 개심사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렇게 잘 생긴 탑을 보니 절의 모습 또한 대단했을 듯 싶으나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려진 것
이 없다. 다만 절터의 위치가 한천(漢川) 가에 있어 아주 오래 전에 홍수로 망한 듯 싶다. 어
째서 산에 세우지 않고 평지인 이곳에 터를 닦았는지는 모르지만 이 자리가 예천에서 안동(安
東)과 영주로 넘어가는 길목이고, 안동과 경북 동해안 지역에서 개경(開京)으로 가려면 이곳
을 거쳐 하늘재를 넘어야 했다. 그러니 예천 토박이 세력에서 그 길목의 절을 세워 지역간의
교역과 길손들의 숙식 제공 장소로 삼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다만 절이 너무 일찍 사라져버
려 그 정답을 알 수 없는 것이 흠이면 흠이다.


▲  1층 탑신에는 문고리를 사이에 두고 2명의 인왕상(仁王像)이 있다.
그 아래로 연꽃 무늬가 새겨진 괴임돌이 보이는데 너무 선명하게
남아있어 탑의 나이를 의심케 만든다.

▲ 석탑기가 새겨진 1층 탑신 피부
심술쟁이 자연이 석탑의 피부를 마구 건드리면서 글씨를 확인하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 예천 개심사터 5층석탑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예천행 직행버스가 1~2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대구북부정류장과 동대구터미널에서 예천행 직행버스를 타고 예천터미널 전인 남본교차로(
  보통 삼거리라고 부름)에서 내리면 바로 탑이 보인다. (대구북부에서 1일 6회, 동대구에서
  1일 7회 운행)
* 영주, 안동에서 예천행 직행버스를 타고 3거리(남본교차로) 하차
* 상주, 김천에서 예천 경유 영주, 안동행 직행버스를 타고 예천터미널 다음인 3거리에서 하
  차
* 예천터미널과 예천역(경북선)에서 영주 방면 4차선 길(충효로)을 따라 한천을 건너 17분 정
  도 걸으면 남본교차로이다.
* 승용차
①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을 나와서 예천 방면 928번 지방도 → 동본4거리에서 좌회전
   → 남산교차로에서 우회전 → 남본교차로에서 직진 → 개심사지5층석탑
*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 200-3


 

♠ 이름 없는 옛 절터를 지키고 있는 신라 후기 석불과 석탑
예천 동본리(東本里) 3층석탑 /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  동본리3층석탑 - 보물 426호

▲  동본리 석조여래입상 - 보물 427호

개심사지5층석탑을 둘러보고 예천읍의 젖줄인 한천을 건너 한천 둑방길을 따라 동쪽으로 가니
동본리3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 나란히 우리를 마중한다.
이렇게 잘생긴 석탑과 석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절과 관련된 기록은 하나도 없고, 절터의 흔적도 딱히 나오지를 않아 현재로써는 그 절의 정
체를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절터의 흔적을 제대로 캐내려면 언제 한번 날을 잡아서 주변을 싹
뒤집어야 그나마 좀 나올 것이다. 다만 이곳이 한천변인지라 홍수의 흥분으로 강제로 문을 닫
았을 가능성이 크며 그렇게 절의 이름 석 자도 세상에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급하게 떠내려
간 모양이다.

절이 읍내에 있고 석탑과 석불의 조성시기가 신라 후기라고 하니 예천 토박이 세력의 지원으
로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 세력의 원찰(願刹) 역할을 했을 수도 있겠다. 다만 너무 오
래전의 일이라 속시원한 정답은 없다. 석불이 흔쾌히 입만 열어준다면 정말로 좋을텐데, 너무
머나먼 시기의 일이라 기억도 흐릿할 것이며. 집을 잃은 상처가 너무 커 입 밖에 드러내는 것
조차 싫어할 것이다.

절이 사라진 이후, 상류에서 떠내려온 흙들이 차곡차곡 주변에 쌓여갔으며, 그 흙에 논과 밭
이 들어서면서 절터의 흔적은 더욱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다만 탑과 석불은 마을 사람들이 신
앙 대상으로 삼아 정성으로 살펴주면서 지금도 정정한 모습을 자랑한다. 절의 이름을 모르니
석탑과 석불은 속 편하게 동네 이름을 따서 동본리 3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란 이름으로 살
아가고 있다.

▲  정면에서 바라본 동본리3층석탑

▲  동본리 석조여래입상의 뒷모습

우선 동본리3층석탑을 살펴보면 땅바닥에 네모난 바닥돌을 두고 그 위에 기단을 두었는데 그
밑 부분에 가운데돌을 두어 기단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윗층 기단에는 무슨 존재를 새겼는
데 이는 탑을 지키는 사천왕상(四天王像)으로 그런데로 모습을 갖추고 있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층과
2층은 5단, 3층은 4단이다. 1층이 윗층들보다 피부가 하얀데 이는 후대에 손질을 가한 듯 싶
으며, 탑이 윗층으로 갈수록 일정한 비율로 줄어드는 것이 원칙이지만 1층은 그 비율을 깨고
조금은 육중해 보인다. 탑 꼭대기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고
색의 때가 적어 1층 탑신을 손질할 때 새로 끼워놓은 듯 싶다.
탑신 지붕돌 밑면의 수가 줄어들고, 괴임돌이 간략해진 점으로 신라 후기 탑으로 평가받고 있
으며, 개심사지5층석탑만큼은 아니지만 건강 상태도 썩 양호한 편이다.

3층석탑과 나란히 한 석조여래입상은 신라 후기에 조성된 키 3.46m의 석불이다. 머리를 보면
꼽슬인 나발(螺髮)로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주렁주렁 달아놨으며, 머리 꼭대기에는 육계
(肉髻)가 두툼하게 솟아있다. 후덕함이 묻어난 둥근 넓쩍한 얼굴에는 좌우로 길다란 눈이 지
그시 감겨져 있는데 왼쪽 눈이 오른쪽에 비해 너무 희미하고 존재감이 떨어져 마치 애꾸눈을
보는 듯 하다. 코는 끝부분이 두툼하며,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입은 옛날의
일을 감추고 싶은지 다물어져 있다. 귀는 중생의 고충을 빠짐없이 들으려는 듯, 어깨까지 축
늘어져 있다.
그의 몸통을 보면 얼굴과 상반신의 비율이 너무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그만큼 얼굴을 크
게 만들어 신체비례가 많이 떨어진다. 얼굴과 몸통을 이어주는 목이 꽤 두꺼우며, 어깨가 좁
고 팔이 짧아 다소 기죽은 느낌을 준다. 오른팔은 옆으로 내려 옷자락을 붙들고 있고, 왼팔은
앞으로 들어 새끼 손가락을 제외한 손가락을 안으로 굽혔다. 몸에 걸친 옷은 통견의(通肩衣)
로 옷의 주름이 선명하게 표현되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것 같으며 이런 옷주름 표현은 신라
후기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 예천 동본리3층석탑/석조여래입상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예천시외터미널 옆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예천읍내로 들어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동본리정류
  장에서 내린다. 버스에서 내려 왼쪽을 보면 바로 3거리가 나오는데, 그 3거리에서 오른쪽으
  로 2분 가면 동본교란 다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길을 건너 한천 둑방길을 1분 정도
  가면 왼쪽에 내려가는 길이 나오는데 그 길로 가면 바로 동본리3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이다.
* 개심사지5층석탑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남본교차로에서 북쪽(읍내 방향)으로 가다가 예천교
  를 건너 오른쪽 한천 둑방길로 12분 정도 걸으면 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3층석탑 앞에 조그만 공터 있음)
①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을 나와서 예천 방면 928번 지방도 → 동본4거리 직진 → 동본
   교를 건너서 우회전 → 바로 보이는 왼쪽 길로 내려가면 동본리3층석탑이다.
*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동본리 474-4


 

♠  조선 중기에 세워진 사대부의 별서(別墅)이자 예천 제일의 경승지
초간정(草澗亭)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143호

예천읍에서 용문사(龍門寺)로 가는 길목인 죽림리에 초간정이라 불리는 경승지가 있다. 간장
의 하나인 초간장과 겨우 받침 하나 사이로 이름이 너무나 비슷하여 나도 모르게 초간장이라
불리게 되는 이곳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예천 출신인 초간 권문해(草澗 權文海, 1534~1591)가
세운 별서(別墅, 별장)이다.

권문해는 조선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보물 878호)'을 쓴 인물로 조
선과 요동(遼東), 만주, 명나라에 전해오는 수많은 문헌을 참고하여 옛 조선부터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쳐 자신이 살고 있는 시절(조선 명종 시절)까지 이 땅의 역사와 지리, 인물, 문학,
식물, 동물 등을 집대성하여 운별(韻別)로 분류했다. 책의 이름인 대동(大東)은 '동방대국(東
方大國)'으로 조선을 뜻하며, 운부군옥(韻府群玉)은 운별로 배열한 책이란 뜻이다.

이 책은 초간이 대구부사(大邱府使)를 지내던 1589년 20권 20책으로 편찬을 완료해 3벌을 정
서해두었다. 허나 1벌은 임진왜란 때 잃어버리고, 다른 1벌은 정구(鄭逑)가 빌려갔다가 개념
없게도 실수로 불에 태워버렸다. 그래서 겨우 1벌만 남아 초간의 외아들인 권별(權鼈, 1589~
1671)이 정산서원(鼎山書院) 원장으로 있을 때 정서하여 그 서원에 보관했으며, 1812년 간행
을 시작해 1836년 완료했다. 이후로도 여러 번 복판(腹板)을 했다.

초간은 1582년 집 부근인 이곳에 정자를 지어 자신의 호를 따서 초간정이라 하였다. 그는 계
곡이 크게 굽이쳐 흘러 기암절벽과 소(沼)를 이루는 지금의 자리에 눈독을 들이고 바위 위에
돌을 쌓고 터를 다져 조촐하고 정자를 지었다. 지금은 팔작지붕 건물이지만 이는 1870년에 다
시 지은 거라 원래 모습은 알 수 없다. 아마도 지금보다 더 소박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여기서 휴식과 독서를 하였고 벗들과 어울려 곡차(穀茶) 1잔의 여유를 즐겼으며 별서 주
변에 소나무를 잔득 심어 이곳의 운치를 한껏 부풀렸다.
허나 임진왜란 때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왜군에 의해 부질없이 파괴되었으며, 1612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으나 1636년 불에 타 없어졌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불에 탔다고 나온다. 허나
병자호란 시절 청나라군은 경기도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았으므로 전란이 아닌 불을 잘못
취급하거나 우연히 화재를 입은 것으로 봐야 된다. 이후 오랫동안 터만 전해오다가 1870년 후
손들이 초간의 서적을 보관하고자 조그만 기와집으로 새로 짓고 담장과 부속건물을 갖추니 이
것이 지금의 초간정이 되겠다.

초간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앞면 왼쪽 2칸에 온돌방을 두었고, 나머지 4
칸은 대청마루로 삼아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끔 난간을 둘렀다. (그래봐야 난간의 높이가 낮음
) 또한 1636년 화재로 건물이 무너지고 초간정 현판 또한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는데 어느 날
늪에서 오색무지개가 피어오르자 종손(宗孫)이 이게 뭔가 싶어 그곳을 파보았더니 글쎄 현판
이 나왔다는 것이다. 즉 정자 앞 늪에서 현판을 발견한 것이다. 정말 현판이 오색무지개를 발
산했는지는 생각해볼 일이지만 전설 내용이 다소 불교틱하다.

아름드리 노송(老松)이 조촐하게 숲을 이루고 기암을 휘돌아 흐르는 물은 소를 이루어 절경을
자아낸 예천 제일의 경승지로 용문사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여행꾼과 답사객들이 문턱이
닳도록 찾아온다. 다행히 초간정은 일반에 개방을 하고 있어 신발을 벗고 정자까지 들어갈 수
있으며 그 서쪽에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기와집(초간정 부속 건물)은 민박으로 1박
머물 수 있다. 또한 초간정 주위로 심어진 나무들은 '초간정 원림(園林)'이란 이름으로 국가
명승 51호로 지정되었다.


▲  초간정 주차장에서 바라본 초간정과 소나무들
소나무가 초간정을 향해 거의 30도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을 있게 해준 초간에
대한 일편단심의 표현일까?

▲ 바위 위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둥지를 튼 초간정의 모습
자연에 거스르며 무식하게 크기만 한 현대식 별장보다는 소박하지만 저런 전통 기와집도
나름 정감이 많이 든다. 나도 나중에 경관이 적당한 곳에 조촐하게 전통식 정자나
한옥을 짓고 머물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과연 뜻대로 될련지? ㅠㅠ

▲  초간정 옆에서 90도로 굽이쳐 흐르는 계곡
초간이 바로 저 풍경에 반해서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높이는 낮지만 나름대로
기암절벽을 이루며 소소하게 그림 같은 절경을 자아낸다.

▲  초간정 상류 개울
초간정 원림의 서쪽 끝으로 소나무들이 개울을 향해 한결같이 30도로 구부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  개울 다리에서 바라본 초간정

▲  초간정 옆구리에 자리한 부속 기와집
1870년 초간정을 다시 일으켜 세울 때 그 곁에 부속 건물을 지어 초간의 서적
보관 및 정자 관리인의 숙소로 삼았는데, 현재는 민박으로 쓰이고 있다.

▲  초간정 부속 기와집 내부

▲  초간정으로 들어가는 문

이곳이 초간정으로 접근하는 유일한 문으로 문이 좁고 낮다. 왠만한 성인 남성은 고개를 숙이
고 들어가야 되고 한 사람이 지나가면 문이 꽉 찬다. 이는 당시 사람들의 키와 덩치가 반영된
탓도 있지만 자기 자신을 낮추고 겸손을 갖추라는 의미도 담겨져 있다.


▲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머리에 짊어진 초간정
좌측에 마련된 섬돌에 신발을 벗어놓고 정자에 오르면 된다. 단 섬돌과
대청마루까지는 높이가 좀 있으므로 주의요망

▲  초간정에 걸린 초간정사(草澗精舍) 중수기
글씨가 깨알같이 적혀 가독성이 다소 떨어지는 초간정사 중수기는 1870년 초간정을
다시 세웠을 때 작성된 것으로 초간정사는 초간정의 예전 이름이다.

▲  초간정 내부 대청마루
겉으로 보면 좀 부실해보여도 속은 현대식 건물 이상으로 매우 견실하다.

▲  초간정에서 바라본 계곡 건너편

초간정은 동쪽을 향한 건물로 정자를 받치는 기둥 중의 도끼 자국이 있다고 한다. 나는 그 자
국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조선 후기판 판문점(板門店) 도끼만행사건 비스므리한 일이 일
어났던 현장이라고 하며 다음의 전설이 전해온다.

조선 후기에 인근에 살던 선비가 과거준비를 하다가 초간정 난간을 100바퀴 돌면 과거 급제한
다는 전설을 믿고 난간을 돌았다. 허나 100바퀴를 다 돌기도 전에 어지럼증과 체력 고갈로 그
만 쓰러지면서 정자 밑에 있는 소(못)에 떨어져 죽었는데, 남편을 잃은 부인이 뚜껑이 폭발해
도끼를 들고 찾아와 도끼질을 했다고 한다. 그 도끼자국이 바로 그때 찍힌 자국이라는 것이다.
선비가 빠져 죽었다는 소는 옛날에는 매우 깊어서 명주꾸리 1개를 펴도 모자랄 정도였다고 한
다. 허나 지금은 많이 메워져 옛날의 명성은 많이 죽은 상태이다.

이런 경승지에 전설이 하나만 있으면 초간정도 초간 선생도 매우 섭할 것이다. 그래서 옵션으
로 전설이 더 전해온다.
때는 바야흐로 1864년경, 초간정을 소유한 예천권씨 집안에서 정자 주위를 거꾸로 100바퀴 도
는 사람에게 정자를 주겠다고 광고를 냈다고 한다. 그러자 어느 초립동이가 나서서 99바퀴까
지 돌았으나 나머지 1바퀴를 도는 과정에서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에 화
가 난 그의 어머니가 도끼를 들고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전설로는 옥매(玉梅)라는 예천 제일의 기생이 초간정에서 장고춤을 추다가 그
만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었는데 화가 단단히 난 그녀의 어머니가 도끼를 들고 찾아와 도끼질
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답고 풍류가 넘치는 곳에 왠 난데없이 무시무시한 도끼질 자국이 있는지 참 옥의
티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실수로 떨어져 죽어도 그렇지 죽은 이의 부인이나 어머니 등, 여
인들이 도끼를 들고 찾아와 난동을 부렸다는 것도 쉽사리 이해가 가질 않는다. 도끼가 보기와
달리 은근히 무게가 나가는 것인데 말이다. 어쨌든 어디까지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정
자를 새로 지을 때 목수의 실수로 도끼 자국이 생긴 나무 기둥을 그대로 썼을 수도 있을 것이
고, 19세기 중/후반 지배층의 수탈과 학정이 극에 달한 시절에 인근 백성들이 찾아와 난동을
부린 흔적일 수도 있겠다.


▲  초간정 바로 밑에서 무섭게 입을 벌리고 있는 소(못)

초간정 관람시 반드시 유의해야될 점이 있다. 문이 봉해진 온돌방은 통제구역이므로 애써 들
어가서는 안되며 그걸 어기면 자칫 속세에 개방한 초간정의 문이 쾅 닫혀질 수도 있다. 그리
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난간 부분에서 장난을 치거나 무리해서는 안된다. 난간 너머는 바로
초간정을 끼고 흐르는 개울로 정자와 개울까지는 높이가 약 6~7m 정도 되는 아슬아슬한 낭떠
러지이다. 게다가 난간의 높이도 난쟁이 반바지를 반 접은 정도 밖에 안될 정도로 낮고 오래
된 탓에 조금 부실하다. 괜히 난간에 기대거나 아찔하게 장난을 치다 소로 떨어져 사고를 당
할 수 있다.
소의 깊이가 예전보다는 온순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소는 소이다. 정자 위에서 소를 바라보
면 여전히 밑바닥이 보이질 않으니 깊은 것은 여전하다.


▲  초간정을 끼고 동쪽으로 흘러가는 개울
개울 주변에 대자연이 빚은 기암절벽이 심심치 않게 늘어서 초간정의 정취를
더욱 돋군다.

▲  하늘을 받치고 선 초간정 소나무
초간정을 둘러싼 소나무 숲은 초간정의 구수한 상징이다.

▲  초간정의 새로운 명물, 구름다리
초간정 동쪽 개울에 흔들거리는 구름다리를 닦았다. 초간정으로 들어갈 때는 주차장에서
다리를 건너 진입하고, 나올 때는 초간정 동쪽 소나무 숲을 거쳐 구름다리를 건너
주차장으로 나가면 된다.

▲  초간정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초간정 방향
개울이 조그만 협곡을 그리며 연주하는 물소리에 속세에서 오염된 청각이
잠시나마 정화되는 것 같다.

▲  초간정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동쪽
초간정 방향과 달리 평범한 개울로 흘러간다. 개울 양쪽에는 소나무가
가로수처럼 늘어서 속세로 흘러가는 개울을 배웅한다.

▲  떠나기가 몹내 아쉬워 잠시 뒤돌아본 초간정

초간정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 와서 보니 정말 그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님
을 알게 되었다. 개울 북쪽에 신작로(용문경천로)가 생긴 것과 현대의 이기(利器)들이 들어온
것 외에는 딱히 달라진 것이 없는 옛 모습으로 주변 경치와 어우러져 1폭의 수묵담채화(水墨
淡彩畵) 같은 절경을 자아내 사람들의 정처 없는 마음을 사뿐히 앗아간다.
겉으로 보면 작고 수수해 보여 누구나 쉽게 만들겠지 싶지만 조선시대에 저 정도의 별장을 소
유하려면 어느 정도의 재력과 지위가 있어야 했음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즉 지배층의 전유
물이었던 것이다. 허나 지나치게 큰 별장과 달리 소소한 모습에 정감이 많이 가며, 정자를 둘
러싼 풍경과 소나무 숲(초간정 원림)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지배하려 드
는 오늘날 인간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초간정을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여기서 가까운 용문사로 길을 향했다. 이후는 본글의 내용상
별도의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 초간정 찾아가기 (2018년 3월 기준)
* 예천터미널(예천역 북쪽) 옆 군내버스 정류장에서 용문사, 두천, 사부리로 가는 군내버스(1
  일 7회 운행)를 타고 원류(초간정)에서 내린다.
* 승용차 (주차장 있음)
① 중앙고속도로 → 예천나들목을 나와서 예천 방면 928번 지방도 → 동본4거리에서 우회전
→ 우계교차로에서 좌회전 → 백전3거리에서 우회전 → 용문 → 초간정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으며, 관람시간은 보통 9시부터 18시까지 (겨울에는 16~17시까지)
* 초간정에 딸린 기와집(초간정민박)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민박 관련 문의는 ☞ ☎ 054-655
  -9233
)
* 소재지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166 (용문경천로 874)



* 까페와 블로그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딱 9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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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8년 3월 15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달아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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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이 깃들여진 첩첩한 산골의 절집, 북한산 삼천사 ~~~ (삼천사계곡)

 


' 도심과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북한산(삼각산) 삼천사 '

▲  삼천사 대웅보전


 

♠  삼천사 입문

▲  알록달록 연등이 길을 안내하는 삼천사 길

따사롭던 5월의 첫 주말, 일행들과 북한산(삼각산) 삼천사를 찾았다. 연신내역에서 그들을 만
나 서울시내버스 7211번(진관차고지↔신설동)을 타고 삼천사/진관사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잘 닦여진 길을 따라 그곳으로 다가섰다.


▲  그늘에 자리한 족구장 - 이곳은 절터였다.

삼천사 숲길을 들어서면 식당을 옆에 낀 너른 공터가 나온다. 지금은 식당에 딸린 공간이지만
예전에는 사슴농장이 있었지~. 사슴의 숙성된 뿔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시절이 정말 엊그
제 같거늘, 그들은 죄다 어디로 갔는지 그들의 안부가 새삼 궁금해진다.

겉으로 보면 산이나 계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과 농장의 쉼터이지만 놀랍게도 이곳에 옛
절터의 흔적(삼천리골사지1)이 아주 희미하게 묻혀있다. (안내문은 없음) 그 절터는 공터를 중
심으로 주변 식당들까지 아우르고 있는데, 아직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절의 정체
를 알 수 없다. 다만 진관사(津寬寺)가 근처에 있어 그의 전신(前身)이라는 신혈사(神穴寺)터
로 보기도 하며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편의상 '삼천리골사지(寺址) 1'로 분류했다.
<삼천리골사지2는 삼천사계곡 상류에 있으며 삼천사터의 일부로 여겨짐>
여기서는 다량의 토기와 기와, 청자파편 등이 나왔는데, 행락지로 먹고 사는 사유지다보니 훼
손이 심각해 하루 속히 발굴조사가 절실해 보인다. 혹시 아는가 이곳이 정말 고려 8대 제왕인
현종(顯宗)과 인연이 아주 깊다는 신혈사의 마지막 흔적이었을지도?


▲  녹음(綠陰)이 짙은 삼천사 가는 길
저 짙푸른 녹음 속에 나를 잠시 숨겨본다.


삼천리골사지1을 지나면 식당들이 줄지어 나타나는데, 그 와중에 '삼천탐방지원센터'로 변신한
옛 매표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내야했으나 2007년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면서 더 이상 매표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삼천탐방지원센터에서 3분 정도 가면 고개가 나타난다. 고개 앞에는 삼천사를 알리는 돌기둥이
멀뚱히 서 있는데 여기서 고갯길과 계곡길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던 삼천사는 나오게 되어 있
으나 시멘트길인 고갯길은 다소 각박하고 돌아가는 편이며, 차량들의 왕래가 잦다. 반면 계곡
길은 빠르게 갈 수 있는 지름길로 계곡 주변에 주막들이 여럿 모여 앉아 절을 목전에 둔 속세
의 마지막 유혹을 펼친다.


▲  미타교 직전 고갯길

▲  계곡의 아름다운 경관을 크게 들쑤신 미타교(彌陀橋)

계곡길을 5분 정도 오르면 고갯길과 다시 만나면서 약간 경사가 진 고개가 나타난다. 그 고개
를 넘으면 북한산 일품 계곡의 하나로 널리 추앙받는 삼천사계곡(삼천리골) 중류가 나타난다.

이곳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초소에 출입신고를 하고 신분증을 맡겨야만 들어갈 수 있던 금지
된 구역이었다. 물론 삼천사 승려와 신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1992년 통행제한이 풀
리면서 삼천사계곡을 통해 북한산성(北漢山城)과 비봉능선까지 오를 수 있게 되었다. 허나 계
곡 주변에는 군사시설 일부가 옥의 티처럼 남아있으며, 삼천사와 옛 군부대 수영장 사이 계곡
은 여전히 금지된 계곡으로 묶여 속인들의 발길을 거부하고 있다. (옛 수영장 이후와 삼천사
위쪽 계곡은 출입이 가능함)

삼천사로 가려면 계곡을 1번 건너야 되는데 예전에는 키 작은 다리가 놓여있었으나 2011년 이
후 높이와 폭을 높여 미타교란 하얀 피부의 돌다리를 새롭게 깔았다. 다리를 업그레이드한 것
은 좋으나 문제는 주변 환경을 고려치 않고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크게 들쑤시며 만들었다는
것이다.

계곡 다리(미타교)에서 삼천사 중간의 짧은 계곡 풍경(밑에 있는 2011년 사진 참조)은 개인적
으로 참 좋아했던 풍경이었는데 다리를 놓으면서 잘생긴 바위와 반석을 깨뜨리고 자잘한 돌이
계곡 주변을 적지 않게 차지하면서 심히 안좋게 변해버린 것이다.


▲  예전의 경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미타교 주변)
계곡에 자잘한 돌들만 가득하여 마치 돌의 무덤처럼 황량하기 그지 없다.

▲  이제는 전설이 되버린 미타교 주변 삼천사계곡의 옛 모습 (2011년)
선녀 누님이 살짝 내려와 목욕을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고운 절경이었다.
허나 지금은 선녀는 커녕 맷돼지도 외면할 것 같다.


너무나 이질적으로 변해버린 삼천사계곡에 안타까움의 한숨을 여러 번 날려 보낸다. 자꾸 예전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려 부질없이 변해버린 현실을 인정하기가 싫다.

미타교를 건너면 각박한 경사의 오르막길이 중생을 주눅들게 만든다. 그 길을 3분 정도 오르면
옛 발해(渤海)의 국도(國都)인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석등(石燈)을 닮은 우람한 석등 1쌍
이 힘들게 올라온 중생들을 맞이하니 여기서부터 산사의 향기와 오래된 마애불의 인자함이 깃
든 산사, 삼천사 경내가 흔쾌히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잠시 삼천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경내 직전에 자리한 석등 1쌍

북한산(삼각산) 서쪽 삼천사계곡에 둥지를 튼 삼천사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磨崖佛)
을 품은 절이자 도심에서도 멀리 떨어진 첩첩한 산골의 산사이다. 1992년까지만 해도 사찰 출
입의 제한이 많았으나 비봉능선과 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개방되면서 자유의 공간이
되었다.

삼천사는 삼국시대가 한참 정리되고 있던 661년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하
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으면 정말로 곤란하다. 그가 세웠다는 기록이나 유물도 전혀 없고 그
당시 신라를 둘러싼 천하의 정세도 한가롭게 절이나 세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불교에
지나치게 목숨을 걸었던 신라(新羅)도 그 시절에는 왕경(王京, 경주)을 중심으로 절이 세워지
고 있었으며 원효대사 역시 바쁘게 움직였던 시기이므로 절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대사, 무열왕(武烈王)과
의 친분으로 그의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에게 장가들어 신라 왕실의 일원이 되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고자 귀족 중심으로 돌아가던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면서 당시 신라 불교
의 1인자였던 자장율사(慈藏律師)를 강원도 산골짜기로 밀어내고 의상(義湘)과 더불어 신라 불
교의 지존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삼천사가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661년, 당나라 고종(高宗)은
'이제 백제도 망했으니 고구려를
쳐도 별무리는 없을 것이다!'
싶은 엉뚱한 생각에 단독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 전
쟁에서는 당나라의 맹장으로 손꼽히는 방효태(龐孝泰)를 주장(主將)으로 하여 많은 군사를 보
냈는데 방효태는 천하장사로 손가락질 받던 그의 아들 12명(혹은 13명)을 모조리 데리고 나가
고구려 정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당군은 요하(遼河)를 건너 요동(遼東)을 용케도 통과, 압록강 부근에서 고구려군을 격퇴했다. 그 기세를 타고 평양성(平壤城) 부근인 사수<蛇水, 대동강의 지류인 합장강으로 여겨짐>까지
진격했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10만 대군은 몰살을 당했고 고구려를 꼭
무너뜨리겠다고 헛소리를 했던 방효태는 그의 아들과 나란히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만다.

한편 서해바다를 건너 평양 서쪽으로 기들어온 소정방(蘇定方)은 방효태의 대군이 절단났다는
소식에 그야말로 큰 충격에 빠졌다. 날씨는 춥지. 식량은 부족하지. 언제 고구려군이 들이닥쳐
자신들의 목을 댕강 칠지 모를 위험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하여 소정방은 쫄깃해진 간을 부여잡고 신라에 급히 사자를 보내 식량과 원군을 요구했다. 당
나라에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하며 그들의 비유를 맞추느라 급급했던 신라는 소정방의 요구를
흔쾌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요청을 무시하면 나중에 고구려를 치거나 공격을 받았을
때 도움을 받기가 어렵게 될 것이고 고구려에게 계속 고통을 받게 된다.
그래서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군량을 수송케 했는데 이때 분황사(芬皇寺)에 있던 원효가
그를 따라 종군(從軍)하게 된다.

김유신의 수송부대가 추운 겨울을 뚫고 고구려의 영역으로 들어오자 고구려군은 그들을 때려잡
기 위해 길목에 매복을 했는데, 소정방이 이를 알아내고 급히 복잡하게 쓰인 암호문을 보냈다.
그 암호문을 바로 원효가 해독한 것이다. 그래서 김유신은 고구려군을 격퇴하고 무사히 군량을
수송할 수 있었다.
이것이 661년부터 662년 초까지 원효대사의 행적이다.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던 그가 언제 고구
려와 신라의 접경 지역이자 전운이 감도는 북한산(삼각산)에 절을 세웠겠는가? 이것으로 이미
원효 창건설은 끝이 났다. 그렇다면 절은 언제 지어졌을까?
경내에 있는 마애불과 옛 절터의 유물을 통해 이르면 신라 말, 늦어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
로 여겨지며 조선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18세기에 간행된 북한지(北漢
誌)에는 최
대 3,000명이 머물 정도로 번창했다고 쓰여 있다.

▲  삼천사지 대지국사탑비

▲  삼천사터 금당(金堂) 구역

고려 초에는 개경 현화사(玄化寺)의 초대 주지를 지낸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이 주지로
있었으며, 고려 왕실의 각별한 지원을 받아 큰 절로 성장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
(西山大師)의 지휘 아래 승병(僧兵)의 주요 집결지가 되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파괴되고 말았
다. 그때까지만 해도 절은 지금보다 1.5km 안쪽 산속에 있었으며 절 이름은 지금과 음은 같지
만 한자가 1글자 틀린 삼천사(三川寺)였다.
그 이후 진영화상이 삼천사의 암자가 있던 지금의 자리에 절을 중건하여 3천 명을 뜻하는 삼천
사(三千寺)로 이름을 갈았으며 6.25때 파괴된 것을 1960년에 중건했다.

1970년대 성운(聖雲)화상이 주지로 들어와 절에 있는 마애불이 오래된 불상임을 밝혀내었고 20
년 동안 계속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1994년에 사회복지법인 인덕원
을 설립해 복지사업에도 손을 뻗쳤다.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산령각, 천태각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
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또한 옛 삼천사터(고양시 북한동)에는 대지국사의 탑비(塔碑)
와 절터 주춧돌이 어지럽게 남아있는데 오랫동안 주목도 받지 못한 채, 버려져 있다가 서울역
사박물관에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발굴조사를 벌여 500여 점의 유물을 건져냈다. (2009년
이후에도 여러 번 발굴조사를 했음)
이처럼 북한산(삼각산) 제일의 절터 유적임에도 이상하게도 북한산 관련 지도에는 제대로 표시
조차 되어 있지 않으며, 그에 합당한 지정문화재의 지위도 얻지 못한 채, 계속 방치되고 있다.
(사적이나 지방기념물 등급이 적당해 보임) 또한 이곳에 있는 대지국사비는 태고사(太古寺) 원
증국사탑비와 더불어 북한산에 있는 고려 때 비석이자 북한산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나 그 역
시 비지정문화재에 머물러 있다. (절터 관람은 가능함)

※ 북한산 삼천사 찾아가기 (2017년 9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
  ) 입구 하차 → 삼천사까지 도보 30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3번 출구에서 7723번 시내버스 또는 1번과 2번 출구 중간에서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에서 하차
*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에서 삼천사 셔틀버스가 1일 4회 운행한다. (구파발역 출발 시간은
  8:20, 10시, 11시, 13:30) 법회와 절 행사가 있는 날에는 오전 8시부터 11시 3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석가탄신일에는 저녁까지 수시로 운행
* 삼천사까지 차량 접근이 가능하며 경내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음

* 삼천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 25-2 (연서로54길 127 ☎ 02-353-3004)
* 삼천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삼천사 종형사리탑과 마애여래입상


 

♠  삼천사 5층석탑, 대웅보전 주변

▲  나한사리를 머금은 5층석탑

삼천사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4마리의 석사자가 탑신(塔身)을 받들고 있는 5층석탑을 만
나게 된다. 1988년 삼천사 주지인 성운화상이 미얀마의 마하시사사나 사원을 방문했을 때, 그
곳 대승정(大僧正)인 아판디타에게 부처 사리 3과와 나한사리를 선물로 받았는데, 부처사리는
마애불 앞 종형사리탑에 봉안하고 나한사리는 일주문 앞에 이 탑을 조성하여 봉안했다.

이 탑은 바닥돌을 먼저 깔고 그 위에 여러 단으로 된 기단부(基壇部)를 둔 다음, 4마리의 사자
와 5층 탑신, 머리장식을 차례대로 갖춘 형태로 구례 화엄사(華嚴寺)와 제천 빈신사지(頻迅寺
址)의 4사자 석탑을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


▲  삼천사의 새로운 명물, 세존진신사리 불탑(佛塔)

5층석탑을 지나면 바로 9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법당도 아닌 경내 외곽에 서로 다른 모습
의 탑을 2개씩이나 지어 올린 경우는 거의 흔치가 않은데 삼천사는 법당 앞에 탑을 둘 공간이
여의치가 않아 공간이 넉넉한 이곳에 탑을 심은 것이다.

9층석탑 자리는 원래 주차장의 일부로 미얀마 대승정에게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7과를 봉안하
고 절의 위엄도 제대로 드러낼 겸, 거대한 탑을 또 짓기로 결정하고 2012년 초에 자리를 닦아
그해 5월 완성을 보았다. 이 탑 역시 9층석탑처럼 높게 기단부를 쌓고 그 위에 탑을 올렸는데
탑은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의 8각9층석탑을 비슷하게 재현했으며 탑의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
는 4두의 금빛 사자상은 인도의 사르나트 아쇼카 석주(石柱)의 사자상을 모방한 것이다.
금빛 사자상은 8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이 담긴 법륜(法輪)에 안치되었고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군주로 평화와 생명존중을 천명한 아쇼카왕(인도 마가다왕조의 3대 왕)의 '담마 왕령(王令)'
정신을 새기고자 아쇼카왕의 상징인 4두 사자상을 꼭대기에 얹혔다. 그리고 9류 중생의 안녕과
화엄 10지에 이른 후 정토세계의 9품 연대에 오르기를 발원하는 보리심을 9층탑으로 묘사했다.

탑이 완성되자 진신사리 7과를 비롯해 조그만 금동석가불과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 대장경(
大藏經) 1질, 600명의 신도들이 손수 제작한 금강경(金剛經) 600부, 신도들이 기증한 갖은 고
가품을 탑에 넣었다.
탑에게 주어진 첫 이름은 '세존진신 다보 9층대탑(世尊眞身 多寶 九層大塔)'이었으나 '세존진
신사리 불탑'으로 간단히 줄였다. 탑이 얼마나 큰지 사람들이 거의 개미로 보이며, 장대한 탑
의 모습이 마치 삼천사의 탄탄한 재정과 세를 부질없이 과시하는 것 같다.


▲  군인들의 안녕을 위해 노력하는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

9층석탑을 지나면 오른쪽 높은 곳에 화강암 통돌로 조성된 지장보살입상이 자리해 있다. 이 보
살상은 9층석탑과 5층석탑은 물론 절 서쪽에 있는 34사단 유격훈련장 방향(산을 올려다보면 유
격장이 보임)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34사단 장병들이 이곳에서 로프를 타고 훈련을 하는데 해마다 사고가 일어났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삼천사 주지승이 장병들의 덧없는 희생을 막고 더 이상의 사고와 살생이 일어나지 않도록
발원하는 뜻에서 유격훈련장이 보이는 곳에 지장보살입상을 세웠는데, 신기하게도 그 이후에는
더 이상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지장보살 형님의 가호가 진하게 피어나 그들
을 지켜준 모양이다.

어진 어미의 모습처럼 자리한 보살상은 8각의 기단을 밑에 깔고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
에 여의주를 오른손에 들고 서 있으며 8각 대좌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와 도명존자(道明尊者)
, 시왕상 등이 새겨져 있다.


▲  연꽃의 와신상담 현장, 연못 (일주문 앞)

▲  삼천사 일주문(一柱門)

9층석탑을 지나면 문짝을 단 큰 문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일주문이라 부른다. 보통 일주문은 절
입구나 길목에 세우기 마련으로 미타교와 5층석탑 사이에 일주문을 둘 자리가 넉넉하나 삼천사
는 그 자리를 모두 내버리고 특이하게 대웅보전 입구에 갖다 놓았다.
세로로 걸린 현판에는 '三角山 三千寺'라 쓰여 있는데 쓰여진 글씨가 꽤 걸출하여 하늘로 날라
갈 것만 같다.


▲  새끼두꺼비 2마리를 등에 짊어진 어미 두꺼비상 (일주문 난간)
절의 지형 때문에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갖다둔 것은 아닐까?

▲  삼천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일주문을 들어서면 종무소(宗務所)와 법당인 대웅보전(대웅전)이 차례로 모습을 비춘다. 예전
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절의 법당)을 칭했는데 건물이 얼마나 허벌나
게 큰지 가히 절 이름값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붕 용마루 양쪽에는 치미가 날카롭게 솟아
북한산 봉우리와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고, 건물 내부에는 석가3존불을 비롯해 지장보살상,
신중탱, 16나한, 500나한상 등이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  대웅보전 앞에도 2마리의 새끼를
등에 진 두꺼비상이 있다.

▲  등장 인물로 빼곡한 신중탱(神衆幀)
모두 104명이 담겨져 있다.


▲  호화로움이 묻어난 석가3존불과 후불(後佛)목각탱

석가불이 조그만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석가3존불을 이
룬다. 그들 뒤에는 호화롭고 복잡해 보이는 후불목각탱화(木刻幀畵)가 병풍처럼 자리해 있는데
이들은 삼세불화(三世佛畵)를 표현한 것으로 가운데에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배치하고 왼
쪽에 약사회도(藥師會圖), 오른쪽에 극락회도(極樂會圖)를 배치했다.

▲ 석가3존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눠진 16나한(羅漢)과 500나한들
우리나라 인구처럼 가지각색의 모습과 표정, 의상을 취하고 있어 다들 개성들이 넘친다.


 

♠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명품급 마애불이자 삼천사계곡의 영원한 은둔자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보물 657호

▲  마애불과 그에게 보금자리를 내준 눈썹바위

대웅보전 옆구리를 지나면 왼쪽으로 범상치 않은 모습의 눈썹바위를 만나게 된다. 그 바위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마애불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깃들여져 있으니 그가 바로 서울에서 가장 오
래된 마애불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이다.

불상 앞에는 그에게 예불을 올리는 석조 공간이 넓게 닦여져 있는데 그 공간 밑에는 삼천사계
곡이 일조권을 강제로 빼앗긴 채 숨죽여 흘러간다. 한참 학창 시절이던 1992년 가을, 두근거리
는 마음을 다독거리며 이곳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지금처럼 계곡을 가리고 앉은 돌로 다진 공
간이 없었고 계곡을 건너면 마애불 앞에 조그만 예불 공간이 전부였다.

서울에 있는 4개의 고려시대 마애불<① 승가사 마애여래좌상 ☞ 관련글 보러가기, ② 안암동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관련글 보러가기, ③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④ 삼천사 마애여래입상>
의 일원으로 고려 초기(멀리 신라 말로 보기도 함)에 조성된 선각(線刻) 마애불이다. 불상 대
부분은 선을 그어 처리했지만 일부는 약간 튀어나온 얕음새김으로 전체 높이는 3m, 불상의 높
이는 2.6m이다.

이 마애불은 윤곽을 따라 금분이 칠해져 있었으나 2000년 이후에 사라졌고, 그의 왼쪽(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 부분에는 약간 붉은 색채를 띠고 있는데, 이는 그에게 채색을 했던 흔
적들이다. 마애불에 색을 입힌 경우는 이곳과 경북 칠곡군 왜관(倭館) 부근에 있는 노석리 마
애불상군 등이 있다.


▲  마애불 양쪽에는 네모난 구멍이 2개 있는데 저들은 마애불을 보호했던
보호각의 아련한 흔적으로 그가 감싸주던 부분은 어둠 속의 촛불처럼
유난히도 밝고 하얗다. 마치 광배(光背)에서 나온 빛이 그의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처럼 말이다.


불상의 머리 뒷쪽에 2겹으로 된 둥근 두광(頭光)이 그를 밝히고 있고 소발(素髮)한 머리 위에
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작고 갸름한 편으로 눈은 지그시 감아 명
상에 잠긴 모습이며 코의 끝부분은 두툼하다. 입은 살짝 오무려 약간의 미소를 선보이고 있고
눈썹 사이에는 둥그런 백호(白毫)가 박혀있다.
그의 키는 얼굴에 비해 꽤 긴 편으로 조금은 두꺼워 보이는 법의(法衣)를 걸치며 두 어깨를 가
렸고 발 밑에는 연화대좌(蓮花臺座)가 있으며, 몸 뒤에는 반짝반짝 윤기를 흐르는 광배(光背)
가 새겨져 있다.
신체적인 균형이 그런데로 비슷하며 몸매는 단정하고 단아한 인상을 풍긴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배 앞에서 받쳐든 모습인데, 이는 부처의 성도(成道)를 상징한다고 한다.

불상 어깨 좌우와 윗부분에는 네모난 구멍과 좌우로 길게 파여진 홈이 있는데 이는 자연현상이
아닌 마애불을 보호하던 목조 가구(架構)를 씌우던 흔적이다. 그 가구는 오래 전에 자연재해나
화재로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가 사라진 이후에는 불상 위쪽에 있는 눈썹바위의 보호를 받으
면서 눈과 비를 피했다. 게다가 첩첩한 계곡 바위에 자리한 탓에 태풍과 거센 바람의 공격을
피하기에 좋아 거의 천 년의 세월을 살았음에도 바위에 진하게 현신한 듯 건강상태는 좋다.

지금은 이렇게 답사객과 순례객의 발길이 빈번하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리 주목을 받
지 못했다. 게다가 민간인 통제구역에 묶여 출입도 부자유스러우니 아는 사람과 절 신도만 조
금 찾는 정도였다. 허나 삼천사와 삼천사계곡에 꽁꽁 씌워진 통제의 굴레가 벗겨지면서 삼천사
의 존재와 함께 마애불의 이름도 약간이나마 알려지면서 찾는 이가 늘었다.


▲  바위에 현신한 듯 두드러진 모습의 마애불 윗부분
불상을 수식하고 있는 두광과 신광은 마치 몸에 빛이 발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도록 그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꾸며준다.


▲  마애불의 아랫도리
연꽃으로 치장된 연화대좌 위에 불상이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에 걸쳐진
법의 밑에 그의 두 발이 나와 있는데 발가락이 다소 두터워 보인다.


내가 그의 존재를 알아챈 것은 1992년 가을, 진관사 부근 야산에 숨어있는 줄 알고 부근 야산
을 열심히 뒤적거리다가 미지의 세계나 다름이 없던 삼천사까지 들어왔다. 당시 적멸보궁이던
대웅보전 뒷쪽에서 나와 숨바꼭질을 한 마애불을 발견하고
'서울에도 이렇게 휼륭한 마애불이 있었다니!!' 감탄을 연발하며 북악산(백악산)의 백석동천<
白石洞天, 백사실계곡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그에게 은근슬쩍 빠져들고 말았지. 하여 매년
적어도 1~2회 정도 그를 찾고 있다. 나는 이곳에 들어올 때마다 점점 늙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비록 인간이 만든 조각물이긴 하지만 여
전히 정정함을 잃지 않으며 오늘도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맞느라 여념이 없다.

지금은 삼천사 경내지만 예전에는 옛 삼천사로 가던 길목으로 조그만 암자와 계곡, 바위만 있
었다. 그러다가 마애불 주변에 삼천사를 세우면서 지금처럼 경내 한복판이 되었고, 지금의 삼
천사를 일군 성운의 노력으로 오래된 마애불임을 입증받아 1979년 국가 보물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이 마애불은 영험(靈驗)이 있기로 소문이 자자해 많은 중생들이 먼 거리를 걷는 수고로움을 마
다하지 않으며 이곳을 찾는다.


▲  마애불 좌측 면에 새겨진 '일붕선사좌선대(一鵬禪師坐禪坮)' 바위글씨
20세기 큰 승려로 추앙받는 일붕(一鵬) 서경보 선사가 이곳에서
좌선한 것을 기리고자 새긴 것이다.

▲  꼬랑지가 인상적인 귀여운 다람쥐상 (마애불 예불 장소 난간)
(그의 존재의 이유는 모르겠음)

▲  부처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종형사리탑(鐘形舍利塔)

마애불 앞에는 네모난 기단 위에 심어진 석종형(石鐘形) 사리탑이 있다. 이 탑은 1988년에 성
운화상이 미얀마 마하시사사나 사원의 아판디타 대승정에게서 받은 부처의 진신사리 3과를 봉
안하고 있는데 그 연유로 서울에서 제일 처음 적멸보궁을 마련하여 석가의 진신사리를 머금은
사찰임을 천하에 어필했다.
마애불과 함께 삼천사의 성역으로 무척 애지중지되다가 2012년 진신사리를 담은 거대한 9층석
탑이 지어지면서 중요성이 조금은 떨어졌다.

◀  종형사리탑 우측의 세존진신사리비
미얀마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봉안한
과정과 이유를 소상히 담아 넣었다.


 2층 규모의 산령각(山靈閣)

마애불이 의지하고 있는 눈썹바위 옆구리에는 2층짜리 산령각이 있다. 산령각이란 절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산신각(山神閣)의 다른 이름으로 삼천사는 그 흔한 이름 대신 천태각이나 산령각
처럼 생소하고 어려운 이름을 선택해 중생들을 아리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산신
각이긴 하지만 독성(獨聖)과 칠성(七星)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어 삼성각(三聖閣)의 역할을 한
다.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산령각은 2층으로(1층은 창고 등으로 쓰임) 내부 중앙에는 금
칠을 한 거대한 산신탱이 걸려있다. 예전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童子) 등은 나무로 돋음새
김으로 새기고 나머지는 그림으로 상큼하게 처리했으나 돈을 좀 벌었는지 죄다 도금을 하여 금
색 옷으로 갈아입혔다.
화려하게 하는 것까지는 좋으나 산신의 수염과 동자의 머리를 빼고는 모조리 색이 같아서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벌이듯 분간이 쉽지 않아 눈만 아프다.

이렇게 산신탱은 삼천사에서 마애여래입상, 세존진신사리탑 다음으로 자랑하는 보물로 비록 고
색의 기운은 없지만 다른 절과 달리 산신을 크게 내세운 산신도량으로 절을 키우면서 '북한산(
삼각산) 산신이 보좌를 튼 절'임을 진하게 자처하고 있다.


▲  요란한 금칠의 산신탱과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올려진 공양미들

 독성(나반존자) 할배가 그려진 독성탱

 칠성들의 회합 현장, 칠성탱


▲  산령각과 마주한 눈썹바위 - 오랜 세월의 주름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  산령각에서 굽어본 마애불 예불 공간과 종형사리탑 주변,
그리고 대웅보전의 두툼한 뒷모습

▲  산령각에서 굽어본 삼천사 위쪽 다리
저 다리는 삼천사계곡 등산로로 북한산성과 비봉, 옛 삼천사터로 이어진다.
다리 주변 계곡에는 중생들이 쌓아올린 기하학적인 돌탑들로 가득해
조그만 돌탑의 세상을 이룬다.

 삼천사의 독특한 불전 ~ 천태각(天台閣)

산령각 옆에는 천태각이라 불리는 벽돌 건물이 있다. 천태각은 16나한의 하나로 천태산(天台山
)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보금자리로 독성각(獨聖閣)과 비슷하다. 삼천사
는 독성각이란 보편적인 이름을 취하지 않고 그가 일어난 천태산의 이름을 따서 천태각이라 했
는데 산령각에 독성탱이 있음에도 별도로 그만의 건물까지 두어 대우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9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건물 안에는 108개의 인등(引燈)이 내뿜는 열기와 기름냄
새로 가득해 더울 때 오면 정말 한증막이 따로 없다. 인등은 기름을 담고 심지를 넣어 불을 켠
것으로 하루 종일 불을 밝힌다. 그래서 건물 내부가 더운 것이다.
건물 지붕에는 매일 치솟는 열을 외부로 배출하고 공기를 통하게 하여 내부 온도를 유지시키는
통풍구가 있으며, 다른 건물과 달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2개로 바깥 문인 여닫이문은 언제나
열려있으나 안쪽 문인 미닫이문은 인등을 지키기 위해 항시 닫혀져 있다. 문을 들락날락 거릴
때는 반드시 문을 닫아야 인등의 건강에 지장이 없다.


 천태각의 주인, 독성상과 자연석으로 간단하게 손질한 16나한들

천태각 독성은 대머리의 둥근널쩍한 얼굴, 길다란 귀, 약간 두꺼워 보이는 옷(얼마나 더울까?)
, 그리고 배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를 취한 여유로운 모습이다. 명
상에 잠긴 그의 익살스런 표정은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머금게 하며 그 좌우에는 조그만 16나
한상이 포진해 있는데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가져온 자연석으로 정성스럽게 조성한 것이다.


▲  삼천사 위쪽 계곡을 가득 메운 돌탑의 물결

▲  삼천사 돌담길 (삼천사계곡 산길)

삼천사에서 북한산(삼각산)으로 오르려면 종형사리탑 좌측에 있는 대문으로 나가거나 일주문에
서 오른쪽 길로 가야 된다. 마치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기와집이나 궁궐 담장길을 거닐 듯, 운
치가 깃들여진 돌담길은 삼천사의 또다른 명물이라 할만하다.


 아비규환의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하다~~

 연등의 전송을 받으며 ~~
이렇게 하여 봄의 한복판에 찾아간 북한산 삼천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이후 내용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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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7년 9월 19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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