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명당'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0.06.05 보은 땅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선병우고가, 선병묵고가 한옥 나들이
  2. 2019.08.14 기름진 논두렁과 밭두렁을 간직한 서울의 두메산골, 도봉산 무수골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무수골계곡)
  3. 2015.06.24 도심 속의 푸른 허파 ~ 서울 국립현충원, 동작충효길 나들이 (현충원숲길, 창빈안씨묘역)

보은 땅에서 만난 고래등 기와집 ~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선병우고가, 선병묵고가 한옥 나들이

 


' 새해맞이 충북 보은 나들이 '

▲  보은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사랑채


 

온갖 아쉬움 속에 묵은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밝았다. 올해는 제발 좋은 일이 많기를
애타게 소망하며 날씨가 최적화된 날을 택해 서울에서 고속/시외버스나 철도로 2시간 내
외 범위에서 새해 첫 답사지를 물색. 고르고 고른 끝에 보은(報恩)의 우당고택이 선정되
었다. 그곳이 그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명당(明堂)이라 하여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
문이다.

차디찬 기운이 가득한 이른 아침, 서울(남부터미널)을 출발하여 청주시내와 미원을 거쳐
보은읍에 이르렀다. 보은 읍내는 마침 5일장이라 장을 보러온 노인들로 활기를 띠었는데
읍내 한복판 중앙4거리에서 관기 방면으로 가는 군내버스를 타고 15분을 달려 장안3거리
에 두 발을 내린다.

장안3거리<개안리(開安里)>에서 북쪽으로 가면 장안면행정복지센터가 나오는데, 그 맞은
편에 우당고택으로 인도하는 하개교가 있다. 삼가천 위에 걸린 그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가면 선병우고가와 선병묵고가가 있는 개안리 마을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우당고택
이다.


▲  겨울에 잠긴 삼가천 (하개교 주변)
누렇게 뜬 갈대가 겨울 바람에 힘없이 흩날리며 소쩍새가 울 그날을 기다린다.
(왼쪽이 우당고택이 있는 섬, 오른쪽이 장안로와 장안면행정복지센터)


 

♠  20세기 초에 지어진 고래등 기와집, 우당고택<愚堂古宅,
선병국가옥(宣炳國家屋)> - 국가민속문화재 134호

▲  우당고택 사주문(四柱門, 정문)과 돌담길

화개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우당고택 주차장이다. 주차장 한쪽에는 문화유산해설사가 머
무는 조그만 집이 있는데, 거기서 안내 자료를 쥐어들고 바로 남쪽에 자리한 우당고택으로 이
동했다.

고택에 이르니 제일 먼저 북쪽 대문인 사주문이 마중을 한다. 이곳에는 대문이 남북으로 2개
가 있는데, 바깥에서 들어올 때는 무조건 사주문을 거쳐야 된다. 명문 부잣집의 대문답게 문
의 덩치도 크고 품격도 제법 깃들여져 있으며, 이미 세상에 공개된 집이라 낮에는 대문이 늘
열려있어 나들이객과 답사객, 사진꾼, 이곳에서 공부하는 고시생과 그들을 보러온 가족 등등
사람들이 마를 날이 거의 없다.

대문 옆에는 황토와 돌, 기와로 지어진 돌담이 고색의 내음을 물씬 풍기며, 조촐하게 돌담길
을 이룬다. 서쪽 돌담길로 가면 효열각과 고택의 남문인 솟을대문으로 이어지며, 대문을 들어
서면 고래등 기와집으로 유명한 우당고택 내부가 장대하게 펼쳐진다.
그럼 여기서 우당고택의 역사에 대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  우당고택 서쪽 돌담길

▲  정면에서 바라본 북쪽 대문(사주문)

속리산(俗離山)에서 발원한 삼가천(三街川)이 금강으로 흘러가면서 개안리에 조그만 삼각주(
三角洲) 섬을 빚어놓았는데, 바로 그 섬에 20세기 초기 대표적인 근대 한옥으로 손꼽히는 우
당고택(선병국가옥)이 포근히 둥지를 틀었다.
이곳은 보은 땅의 거의 유일한 자연산 섬으로 이 부근은 조선 때 나라에서 운영하던 마장(馬
場)이 있었다. 그래서 마장 안쪽 동네라 하여 '장안','장내'라 불렸으며, 지금도 그 지명은
유효하다.

우당고택을 지은 이는 보성선씨 집안인 우당 선영홍(愚堂 宣永鴻, 1861~1924)과 그의 큰아들
인 남헌 선정훈(南軒 宣政薰)이다. 이들은 원래 전남 고흥(高興) 출신으로 고흥 지역의 제일
가는 부자였다. 풍요로운 재산만큼이나 인심도 후하여 소작농에게 토지를 골고루 나눠주고 적
은 소작료를 받았으며, 어려운 사람들의 세금을 대신 처리해주는 등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인
심을 베풀었다.

선영홍은 아들이 4명 있었는데, 모두 끝이 훈(薰)자 돌림이다. (정훈, 남훈, 준훈, 동훈) 그
는 아들과 손자, 자손의 번창을 위해 천하에 제일가는 명당으로 터전을 옮기고자 이름난 지관
을 섭외하여 명당 자리를 물색했다. 그는 섬에 집을 지어야만 집안이 흥한다는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그에 걸맞는 자리를 찾은 끝에 서울 여의도와 충남 천안, 보은 개안리가 후보 장소로
꼽혔고, 지관인 심씨의 추천과 속리산과 가까운 개안리의 지형에 단단히 반해 1903년 이곳에
터를 닦았다.
이곳 지형은 삼가천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육지 속의 섬으로 그 모습이 마치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이라 하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 불린다. 이런 자리는 꽤 좋은 명
당으로 꼽힌다.

1919년 아들 선정훈과 함께 그 섬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자신과 후손들이 길이길이 살 명당
자리라 천하에서 제일 이상적인 집을 짓기로 했는데, 선정훈이 공사를 주도했으며, 그 시절
잘나가던 목공과 기술자를 비롯해 일꾼들까지 후하게 대접했다. 공사 자재에도 돈을 아끼지
않아 질이 좋은 목재와 재료를 사용했으며, 이때 도편수로 참여한 사람이 궁궐 목수로 이름난
'방대문'이었다.
섬의 지형이 모래로 되어있어 따로 배수시설은 닦지 않았으며, 왜식과 서양식이 섞인 개량형
한옥이 한참 주류를 이루던 때라 너무 전통식에 얽매이지 않고 그 시류에 흔쾌히 동참했다.
이렇게 큰 정성을 들여 5년 만인 1924년 집이 완성되니 집의 전체 면적은 3,900평. 집 크기는
99칸을 자랑했으며, 사랑채와 안채, 사당 3구역으로 구성되어 각각 담장을 둘렀다. 특이한 것
은 사랑채와 안채가 '工'구조로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옛날 집에서는 극히 꺼리던 형태
였다. (부수는 것을 뜻한다고 함)
그럼에도 집의 중요한 공간을 '工' 구조로 한 것은 집터가 길하지 않아서 흉택의 평면인 '工'
구조를 택하면 70~80년 이후부터 길하게 된다는 지관의 해석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즉 후손
대에 반전을 노린 것이다.

선정훈은 아버지와 별도로 대동상사(大東商社)를 운영했는데, 고흥의 토산물인 우뭇가사리를
왜열도와 중원대륙에 수출해 큰 돈을 벌었다. 그의 곳간만해도 무려 33칸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재산의 정도를 알만하다.
그들은 오늘날 이 땅에 썩어빠진 위정자와 상류층과 달리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
던 인물이다. 선영홍은 고흥에 대흥사(大興司)란 서숙(書塾)을 세워 인재를 양성했으며, 보은
에도 집 남쪽에 관선정이란 33칸짜리 서당을 세워 한학(漢學)을 교육시키고 우수한 학자를 초
빙해 수백 명의 후학을 길렀다. 또한 보은향교 명륜당(明倫堂)에 서숙을 지어주기도 했으며,
지역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덕행을 베풀었다.

6.25시절 폭격으로 대문 좌우 바깥행랑채와 주변 부속 건물이 파괴되어 사라졌다. 허나 그 외
에 건물은 별탈 없이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그 덕에 20세기 초에 지어진 전통 개량한옥
으로 학술 가치가 대단히 높다. 또한 6.25 때 군부대가 집 동쪽에 주둔을 했는데, 시간이 지
나면서 아예 그곳에 눌러앉았고, 동쪽 토지 2만 평은 그렇게 군부대 땅이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으로 집을 끼고 흐르는 하천 동쪽 물길을 막아 농토를 개간했으나 1980년
과 1998년 집중호우로 집이 물에 잠겨 돌각담들이 여럿 무너졌고, 집을 지키고자 안산(安山)
의 역할로 심은 소나무 숲까지 쑥대밭이 되는 피해를 입었다. 하여 현재 집 주인인 선민혁이
지역 사람들의 동의를 구해 하천을 현재 모습으로 복원했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수해를 입지
않았으며, 소나무 숲도 다시 복원해 옛날의 운치를 되찾았다.

선정훈은 집만 물려주면 된다면서 많은 돈을 썼으나 워낙 돈이 많아 결국 아들에게 많이 상속
되었다. (아 부러워라ㅠㅠ) 현재는 선병국의 아들인 선민혁이 집을 지키고 있으며,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선병국가옥'이었으나 근래에 선정훈의 호를 따서 우당고택으로 이름을 갈았다. 

1990년대에 안채에 있는 곳간채를 손질하여 고시원을 열었는데, 최소의 비용만 받고 고시생들
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다. 이는 교육에 아낌없이 돈을 던진 할아버지(선정훈)와 증조부(선
영홍)의 유지를 잇기 위함이다. 또한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문의 별미인 씨간장이 있
는데, 무려 350년 이상 되었다고 전하며, 간장 보존을 위해 특별히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 씨간장에 매년 새로 담구는 햇간장을 부어 보존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명품 로하스 식품
전'에 출품, 1리터가 500만 원에 팔리면서 유명세를 탔다. 그래서 우당고택(선병국가옥)이 천
하에 크게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현재 김정옥 종부(宗婦)가 '선씨 종가 아당골'이란 이름으
로 간장을 판매하고 있으며, 집 안팎에 700여 개의 장독을 두어 씨간장을 숙성/보관하고 있다.

이렇게 전통 한옥과 간장으로 이곳이 크게 떠오르자 보은군에게 2007년에 고택 북쪽에 주차장
을 닦고 대문 앞 소나무숲 주변에 잔디를 입히며 의자와 이정표를 지어주었다. 이곳이 보은의
새로운 꿀로 부상하자 그 꿀에 서둘러 그럴싸하게 단지를 입힌 것이다.

현재 고택 내부는 사랑채와 사주문에서 솟을대문으로 이어지는 통로만 개방되고 있으며, 안채
와 사당, 그밖에 건물은 개방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개방 공간은 변경될 수 있음~~) 고택
바깥에 있는 효열각과 비석, 복원된 관선정은 관람이 가능하며, 안채 곳간채에는 고시생들이
머물고 있는데, 이곳을 거쳐간 고시생이 1,000여명, 사법고시 합격자만 50명을 넘는다고 한다.
시내와 멀리 떨어진 외지이고 적막한 곳이라 고시생의 인기가 대단했으나 최근 관광객의 발길
이 증가하면서 고시생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  행랑채 북쪽에 자리한 장독대의 물결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사당을 품은 담장이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고택 내부로 인
도하는 너른 길이 나오는데, 그 왼쪽에 낮게 돌담을 두르고 키 작은 나무와 조촐한 텃밭, 씨
간장을 품은 장독대들의 공간이 있어 정겨운 분위기를 우려낸다. 그 장독대 너머로 행랑채와
안채가 있다.


▲  사주문에서 안채, 사랑채로 인도하는 너른 길
집 내부에 이렇게 넓은 길이 있다니? 집이 정말 넓기는 넓다. 조선과 왜정 때
지어진 어지간한 큰 기와집을 능가하는 규모로 완전 조그만 궁궐 같다.


▲  사당(祠堂)

양반가는 보통 집 내부에 가묘(家廟)라 불리는 사당을 갖추고 있는데, 이곳 역시 예외는 아니
다.
이곳 사당은 3칸 규모의 사당과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재실<齋室, 제수(祭需)채라고도 함>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당과 재실이 복도채로 연결되어 완전 한 몸처럼 되어 있어 자연히 'ㄱ'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제수채와 복도채를 둔 사당은 거의 흔치 않은 케이스로 복도 폭은 1.1m이며, 사당 각
칸 앞에는 시멘트몰탈로 이루어진 디딤돌이 있는데, 이는 건립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사당을
오래도록 보존하고자 그 시절 새로운 건축 재료가 시도되었다.
 
사당 주위는 돌담으로 꽁꽁 둘렀으며, 사당으로 인도하는 솟을삼문은 굳게 잠겨져 있는데, 선
씨 집안의 선조를 봉안한 공간이라 일반에는 공개하지 않는다.

▲  사당의 솟을삼문(三門)

▲  'ㄷ'자로 이루어진 행랑채


▲  안채 북쪽

사당 남쪽에는 안채와 행랑채가 있다. 돌담으로 주변을 빙 둘러 눈으로 하얗게 바래진 지붕과
집 윗도리만 보일 따름인데, 이곳은 선씨 일가의 생활 공간으로 내부 관람은 통제되어 있다.
그러니 그들의 사생활과 재산 보호를 위해서라도 억지로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안채는 사랑채 동쪽에 자리하여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사랑채와 모습과 구조, 규모가 똑같
다. 그러니 괜히 안채를 기웃거려 안좋은 소리 듣지 말고 그냥 사랑채를 보면 된다. 집 모습
은 '工' 구조로 이 땅의 한옥 안채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안채를 받치고 있는 기
단(基壇)은 사랑채보다 1단 낮은 2단짜리 석축으로 가운데 4칸짜리 대청을 끼고 왼쪽이 안방,
오른쪽이 건너방이다. 건물 중앙에 마루가 있고, 무려 9개의 온돌방을 갖추고 있으며, 부엌은
큰살림에 걸맞게 상당히 크고 위에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앞뒤에 달린 툇마루가 복도
역할을 하여 모든 방과 부엌으로 이동할 수 있다.
안채 옆에는 'ㄷ'모양의 중행랑채를 두어 안채를 가리고 있는데, 그 사이로 조그만 안마당을
만들었고, 행랑채 남쪽 끝에 안대문을 두었다. 안대문 밖에는 담이 가로질러 있어서 바깥 대
문에서 안채로 가려면 'ㄹ'자로 꺾어 들어가야 했다.
행랑채 옆에는 쌀과 재물을 보관하던 곳간채가 있는데, 1칸 또는 1칸 반, 2칸 간격으로 있었
다. 허나 세월이 흐르면서 더 이상 쌀과 재물을 보관할 필요가 없게 되자 이들을 손질하여 고
시생들의 숙식 공간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곳이 세상에 널리 알려짐에 따라 관광/답사 수요가
늘면서 고시생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도 속세의 때를 크게 탄 모양이다.


▲  반쯤 열린 사랑채 중문

▲  우당고택의 백미, 사랑채

안채 서쪽에는 고택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사랑채가 있다. 안채와 같은 '工' 구조로 주위를
돌담으로 둘렀는데, 동쪽과 남쪽, 북쪽에 바깥과 사랑채를 이어주는 문을 냈으며, 남쪽에는
넓게 뜨락을 닦았다. 그리고 서쪽과 서남쪽, 동쪽, 북쪽 공터에는 소나무와 갖은 화초를 심어
사랑채 주변을 아름답게 꾸몄다.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2고주 5량가로 3단으로 싹둑 다듬
어진 석축 위에 큼직한 집을 세우고 8각으로 다듬은 화강암 주춧돌로 둥근 바깥 기둥을 받쳐
들고 있다. 집 구조는 안채와 같으며 가운데에 대청마루를 두고 그 좌우로 온돌방 8개, 창고,
부엌을 두었는데, 앞뒤로 툇마루(퇴칸마루)를 두어 일종의 통로를 두었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둘렀는데, 난간의 모양이 섬세하며, 대청에는 사분합문(四分閤門)을 설치했다. 처마는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서까래가 길다. 그리고 합작지붕의 박공면과 마루 밑은 붉은 벽돌로 쌓았는데,
이들은 나중에 손을 댄 것이다.

이곳은 일반에 공개된 공간으로 찻집과 전통체험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평일이라 사람이 없
다보니 거의 닫혀있다. (주말에는 북적댄다고 함) 그래서 굳이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고 소심
하게 바깥만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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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치 있게 자라난 사랑채 소나무

▲  이제 무늬만 남은 사랑채 서쪽 우물

▲  사랑채 동쪽 부분

▲  사랑채 뒷쪽(북쪽)


▲  사랑채 정면에 걸린 '위선최락(僞善最樂)' 현판의 위엄

사랑채 정면에는 파란 글씨로 쓰여진 '위선최락' 현판이 걸려있다. 글씨가 마치 살아서 율동
을 부리듯 필체의 힘이 대단한데 '위선최락'이란 '선을 베푸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란 뜻
으로 선영홍/선정훈 부자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 좌우명을 말로만 끝내지 않고 평생 실천하고 살았다. 지역 사람들과 전통 유학을
배우고 지키려는 인재들을 위해 많은 재산을 내던진 것이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송덕비와 시
혜비(施惠碑)까지 세워 그들을 기리겠는가?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위인이자 성인군자라 할만
하다.
이런 상류층이 많아야 이 땅도 정말 희망이 있을 것인데 이 땅의 상류층과 권력층들은 어찌된
것이 하나같이 치졸하고 욕심들이 과한지 모르겠다. (특히 친일매국노의 후손들과 친일 패거
리들, 20세기 중/후반 독재정권 패거리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없는 사람들을 등쳐먹고, 백성
들 등골 빼먹고, 공기업과 도시, 나라까지 말아먹는 걸 예사로 여기니 말이다.
허나 그 치졸한 작자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선정훈 부자가 '위선최락'을 실천하고자 많
은 돈을 썼다. 그렇다면 그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가만히 앉아서 받기만 했을까? 전혀 그
렇지가 않다. 소작농은 소작농대로, 선정훈이 세운 대동상사 사람들은 역시 그들대로 열심히
살며 그를 도왔고, 지역 사람들도 그들 일가에게 호의적이었다. 또한 그들의 지원을 받아 공
부한 인재들은 사회 곳곳에 진출했으니 그들로 인해 선정훈 일가의 이름은 더욱 크게 빛을 발
하는 것이다. 그러니 크게 보면 서로 상부상조하며 살아간 것이다. 선정훈 부자도 그들의 도
움을 크게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 계속 집안이 번영을 하고 있고, 그들의 덕을 받은 사람들도
무탈하게 지내고 있다. 반면 이 땅 대부분의 상류/권력층들은 거의 일방적으로 뜯어먹기만 하
지 상부상조할 줄을 모른다. 그러니 대다수의 백성들은 빈곤해지고, 상류/권력층의 배때기는
더욱 짙어만 간다. 그들에게 있어 '위선최락'은 '그게 뭐임? 먹는 거임? 그런 건 빨갱이들이
나 하는 거야!!' 하며 현판을 깨부실 것이다.

사랑채에는 '위선최락' 현판 외에도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도 있었다. 이것은 해남 대흥
사(大興寺)에 있던 추사 김정희의 무량수각 현판을 6.25 이후에 모각한 것으로 사랑채에 당당
히 걸려있었다. 허나 우당고택이 천하에 크게 존재감을 드러낸 이후, 찾는 이가 부쩍 늘었고
그 속에 불온한 무리까지 섞여서 들어오면서 2008년 2월 13일과 14일 사이 도난을 당하고 말
았다. 아직까지 현판의 행방은 오리무중이고, 그의 빈자리는 여전하다.


▲  솟을대문에서 바라본 사랑채 외곽 (담장과 중문, 사랑채)
사랑채 너머로 이곳의 든든한 후광이자 주산(主山)인 옥녀봉(玉女峯)이 바라보인다.

▲  가옥의 남쪽 대문인 솟을대문
사대부 기와집 대문의 품격이 느껴진다. 대문 바깥에는 너른 공터와 텃밭이
있으며, 서남쪽 소나무 숲에는 효열각과 3기의 비석이 서 있다. 대문
주변에는 바깥행랑채와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으나 6.25 전쟁 때
파괴되어 사라지고 지금은 대문과 돌담만 남아있다.


 

♠  우당고택 바깥쪽

▲  솟을대문 남쪽에 자리한 3기의 비석들

솟을대문 서남쪽에는 시대를 달리한 비석 3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가장 왼쪽에 있는 비석
은 '전승지성공 정훈공덕비(前承旨惺公 政薰功德碑)'로 20세기 중반에 선정훈을 기리고자 세
워진 것이며, 그 비석을 크게 업데이트한 것이 오른쪽 끝에 자리한 큰 비석 '남헌 선정훈 선
생 송덕비(頌德碑)'로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와 이수(螭首)까지 갖춘 당당한 모습이다.

선정훈은 매년 보릿고개가 되면 우리의 북방 영토인 만주에서 좁쌀을 수입해 보은 지역 빈민
들에게 나눠주었고, 지역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생활고로 고생하면 직접 해결해주곤
했다. 광복 이후, 공산당 세력인 남로당에 가입한 주민들이 많았는데, 국군이 그들을 잡아들
여 이유불문 모두 총살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선정훈이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고, 돈이 필요해 명의를 빌려주고 서명을 한 것 뿐이다!'
라며 주
민 구제에 나섰고 보은군수와 지역 유지, 국군을 설득하여 주민들을 모두 구제했다.
그렇게 지역 사람들에게 많은 공덕을 베푸니 그 은혜에 감동한 지역민들이 송덕비를 세운 것
이다. 처음에는 보은읍내에 있는 동헌(東軒)에 있었으나 근래 이곳으로 이전되었으며, 비문에
는 그의 덕행을 한자 16자로 표현했는데,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학군을 일으키고 가난을 구제하니, 대대로 내려온 덕행이다. 각박한 인심을 순화시키고 경각
심을 일으키니 길이길이 감명되어 마멸되지 않으리라'


▲  관선정 기적비(觀善亭 記蹟碑)

비석 3형제 가운데에 있는 지붕돌 비석은 '관선정 기적비'이다. 남헌 선정훈은 1926년 집 동
쪽에 '착한 사람들끼리 모이면 복을 받는다'는 뜻에 관선정을 지었다. 규모는 33칸으로 이곳
을 서당으로 삼아 왜정에 의해 시들해진 이 땅의 한문학과 유학을 배우고 닦는 공간으로 삼았
는데, 그는 보은향교 명륜당(明倫堂)에도 서숙을 설치해주어 당시 유명한 유학자인 홍치유(洪
致裕)를 초빙해 관선정과 보은향교에서 젊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가르치는 선생과 후학들의 숙식은 물론 생활비까지 두둑히 지원해주니 배우고는 싶으나 가난
앞에서 붓을 꺾어야 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와 시험으로 그들을 가려뽑았다. 무작정 다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곳을 거쳐간 학생 수는 무려 수백 명이 넘었으며, 그 많은 이들
을 선정훈이 다 책임졌다.
이렇게 관선정은 왜정의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이 땅의 전통유학을 교육시켜 민족정신 함양
은 물론 한문학과 전통문화계승 발전에 크게 공헌했는데, 이에 속이 뒤틀린 왜정이 1944년 강
제로 폐쇄시키고 건물까지 부셔버렸다.

관선정에서 수학한 사람들은 1960~70년대 우리나라 한문학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청명 임창순
(靑溟 任昌淳, 1914~1999)이 그 대표적이다. 그는 14살에 이곳에 들어와 6년 동안 한문학을
배웠다.
이들 관선정 학생들은 1951년 '관선정학우회'를 세워 매년마다 선정훈을 기리는 행사를 가지
고 있으며, 1973년 뜻을 모아 관선정기적비를 세웠다. 비문(碑文)은 왕희지(王羲之)의 필체를
집자(集字)했다.

왜정에 의해 철거된 관선정은 1945년 경북 상주에 다시 지어졌으며, 상주 화북면으로 옮겨져
계속 후학을 기르다가 1951년에 철거되었다.


▲  옛 관선정의 모습과 평면도
관선정은 2개의 공부방, 선생방, 2개의 대청, 부엌, 고지기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선공영홍시혜비(宣公永鴻施惠碑. 선영홍 시혜비)

비석 3형제 부근에는 철로 이루어진 철비(鐵碑)가 있다. 철비는 이 땅에서 그리 흔치 않은 비
석 스타일로 우당고택에서 전혀 생각치도 못한 그를 만나니 생소하면서도 무척 반가웠다.

이 철비는 선영홍을 기리는 시혜비로 시혜비란 은혜를 베푼 것에 대한 고마움의 뜻으로 세운
비석을 뜻한다. 선영홍이 전남 고흥에 살던 시절 자신의 토지를 소작농들에게 골고루 나눠주
고 소작료도 깎아주었다. 또한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이 굶지 않도록 도왔고, 세금을 대신 내
주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하여 그의 덕을 입은 고흥 두원, 점암, 남양, 남면 지역 소작
농은 그의 은덕에 감사를 표하고자 십시일반 돈을 모아 1922년 시혜비를 세웠다. 그러니 거의
100년 정도 묵은 소중한 은혜의 증표인 것이다.
왜정 말기에 고약한 왜정이 전쟁 물자로 쓰고자 몰래 빼돌렸으나 다행히도 여수에서 선영홍의
종손인 선민혁이 주민들의 도움으로 발견해 원래 자리로 옮겼다. 허나 도로 확장 사업으로 제
자리를 떠나야될 상황에 이르자 철비를 만든 사람들의 후손들과 협의해 2004년 이곳으로 옮겼
다.

부자가 많은 선행을 베풀어 그 선행에 감동한 지역 사람들이 손수 지은 비석으로 의미가 정말
남다르다. 정말 인간적인 미와 정이 넘치는 비석인 것이다.


▲  비석의 모습을 취한 선공영홍시혜비

▲  돌담에 둘러싸인 선처흠 효열각(宣處欽 孝烈閣)

시혜비 옆에는 돌담을 두룬 공간이 있는데, 그 안에 선처흠 효열각이 담겨져 있다. 이 효열각
은 선영홍의 부모인 선처흠과 경주김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1892년에 명정(命旌)하여 지어진
것으로 편액 우측에는 '효자증조 산대부동몽교관 선처흠지문(孝子贈朝 散大夫童蒙敎官 宣處欽
之門)', 좌측에는 '열녀 선처흠 처금인 경주김씨지문(烈女 宣處欽悽今人 慶州金氏之門)'이라
쓰여 있다.

선처흠(?~1921)은 그의 아버지가 심한 안질로 고생하자 의원을 찾아가 침과 약으로 계속 안질
을 다스렸다. 허나 딱히 차도가 없자 의원이 매고기가 명약이라고 귀뜀을 해주었다. 하여 매
를 잡고자 영마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니 마침 1쌍의 매가 날아와 알아서 잡혀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잡아 부친에게 먹이니 차도가 있었고, 추운 겨울 눈보라를 무릅쓰고 산에 올라
단을 쌓고 7일 동안 기도를 하니 또 다시 매가 알아서 잡혀주어 끝내 안질이 완쾌되었다고 한
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픽션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사건으로 선처흠의 효행은 서울까지 알려
졌다.
선처흠의 부인인 경주김씨도 효성이 지극하고 남편을 잘 따랐는데, 남편이 위독하자 넙적다리
를 베어 먹이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였다고 한다. 이후 남편의 병이 낫자 열녀(烈女)로 명
성이 높아졌다.

그들 부부의 소식을 들은 조정은 이들을 효자와 열녀로 명정하여 효열각을 지어주었으며, 원
래 선처흠이 살던 전남 보성에 있었으나 자손들이 모두 보은으로 들어오면서 1928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효열각 역시 전혀 생각치도 못한 존재라 앞서 시혜비와 함께 우당고택이 나에게 덤
으로 얹혀준 선물이다.

▲  키가 작은 효열각 정문

▲  1칸 크기로 단촐한 효열각


▲  효열각 내부에 걸린 현판
오른쪽은 효자 선처흠, 왼쪽은 열녀 경주김씨의 정려문(旌閭文)이다.

▲  관선정과 간장의 숙성 공간, 장독대

효열각은 우당고택에서 가장 남쪽이다. 여기서 서쪽과 남쪽은 삼가천으로 막혀있으며, 동쪽은
고택의 텃밭이 있어 다시 고택으로 들어오던가 아니면 고택 서쪽 돌담길로 나와야 된다.
돌담길로 들어서면 근래 복원된 관선정과 기와 돌담에 둘러싸인 거대한 장독대의 보금자리를
만나게 된다. 관선정은 앞서 관선정기적비에서 소상히 다루었는데, 옛날과 달리 새로 지어진
지금은 강당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는 복원된 의미 정도로 머물러 있다.

관선정 앞에는 장독대들이 넓게 포진해 있는데, 이들은 이곳의 오랜 자랑인 씨간장과 그 간장
을 혼합한 햇간장을 보관하고 있다. 즉 우당고택의 듬직한 꿀단지들인 것이다. 350년째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씨간장에 매년 새로 담근 햇간장을 부어 간장을 생산하고 있는데, 콩 80kg
가마로 만든 메주에 간장이 10L밖에 나오지 않는다. 2009년부터는 문화재청이 밀어주는 '전통
한옥 관광자원 활성화사업'에 일환으로 '전통 장 만들기 체험 프로그램'을 내놓아 호응을 얻
고 있는데, 바로 전통 간장 덕분에 이곳이 크게 뜬 것이다.

장독대는 각 지역 스타일로 조성하여 지역 별로 모아 두었는데, 평안도(平安道)와 황해도, 경
기도,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장독대를 재현했으며, 그들은 모두 간장을 품
으며 숙성시키고 있다.

▲  황해도 장독대

▲  평안도 장독대

▲  제주도 장독대

▲  충청도 장독대

▲  관선정 옆 돌담길

▲  관선정 옆 송림에 묻힌 1칸짜리 정자


▲  우당고택 서쪽 돌담길과 돌담에 그려진 자연의 벽화
대자연이 그린 멋드러진 벽화가 황토 돌담의 품격을 드높인다. 그려진 폼을 보니
아마도 그만의 추상화 듯 싶은데, 아무리 천재화가가 모방해본들 자연이
그린 벽화만은 못하다.


서쪽 돌담길을 타고 고택의 시작인 사주문으로 나왔다. 고래등 기와집을 그런데로 1바퀴 둘러
본 셈이다. (통제 구역은 제외)
주차장에 있는 문화유산해설사 사무실을 바라보니 그 안에서 쉬고 있던 해설사 아저씨가 구경
잘 했냐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답을 하고 몇 가지를 물어보니 날도 추운데, 안으로 들어와 커
피 1잔 하라고 그런다. 내가 그런걸 마다할 이유가 없어 안으로 들어가니 따뜻한 커피 1잔을
제공해준다.
해설사 아저씨는 정년퇴직을 하고 해설사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주말에는 관람객이 많
지만 평일은 썰렁하고 해설 요청 수요도 주말 평일 가리지 않고 거의 없다며 거의 대충 보고
간다고 그런다. 그렇게 그와 오랜 시간 세상 이야기를 주고 받으니 어느덧 햇님의 퇴근시간이
임박해 왔다.
날이 겨울인지라 햇님도 동절기 근무로 일찍 퇴근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갈 곳이 몇 곳 남았
는데, 더 이상 꾸물거려서는 안될 듯 싶어 그에게 선병우/선병묵고가, 상현서원에 대해 물어
보고 작별을 고했다.

* 우당고택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 154 (개안길 10-2, ☎ 043-543-7177)


 

♠  개안리에 있는 선씨 일가의 다른 한옥 둘러보기

▲  보은 선병우 고가(宣炳禹 古家)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5호

개안리에는 우당고택(선병국가옥) 외에 선병우, 선병묵고가 등 3채의 오래된 한옥이 있다. 이
는 서울 북촌(北村), 전주한옥마을,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등 한옥 밀집 지역과 오래
된 전통 마을을 제외하고는 거의 흔치 않은 케이스로 이들 모두 선정훈 형제가 세운 것이다.
가장 먼저 선영홍/선정훈이 이곳에 자리를 닦았고 1940년대에 선정훈의 형제들도 본거지인 고
흥을 버리고 이곳으로 올라와 선정훈집(우당고택) 북쪽 삼가천 너머에 집을 지은 것이다. 이
들은 20세기 중반 개량 한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선병우고가는 선정훈의 동생인 선준훈(宣俊薰)이 세운 것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중문 등
을 갖춘 당당한 한옥이다. (선병우는 선준훈의 아들) 집주인이 남쪽에서 올라온 탓인지 집의
구조는 남부 지방 가옥 배치와 유사하며, 간실을 넓게 잡은 것이 특징이다. 건축양식은 우당
고택과 너무 비슷한데, 이는 선정훈이 좋은 목수를 보내주어 도와준 탓이다.
비록 우당고택보다는 작아도 커다란 한옥은 분명한지라 집 상당수를 식당으로 쓰고 있다. 식
당 이름은 '복해가든'으로 닭백숙과 돼지고기, 버섯찌개 등을 내놓고 있는데, 집 관람은 딱히
제한은 없으나 개인 집이기 때문에 안에는 굳이 들어가지 않고 대문 밖에만 잠깐 기웃거리고
선병묵고가로 이동했다.

* 선병우고가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안면 개안리142-1 (개안길 15-9, ☎ 043-543-0606)


▲  선병우고가 앞에 자리한 3기의 비석과 넓게 퍼진 큰 소나무

선병우고가 앞에는 청도 운문사(雲門寺)의 처
진소나무처럼 좌우로 넓게 퍼진 큰 소나무가
운치를 지어내고 있다. 그 앞에는 3기의 비석
이 나란히 자리해 있는데, 그들 중 가운데에
자리한 늙은 비석이 이 집을 세운 '국당(菊堂
) 선준훈 추모비'이다.
1940년대에 세워진 것으로 나이에 비해 비석
이 너무 낡자 근래에 기존 비석을 업그레이드
시킨 새로운 비석을 옆에 지어놓았다. 그래서
기존 비석에 비해 때깔이 무지 고우며, 비석
형태는 앞서 '남헌 선정훈 선생 송덕비'와 유
사하다.

▲  소나무 앞에 자리한 3기의 비석들


▲  보은 선병묵 고가(宣炳默 古家) - 충북 지방문화재자료 4호

선병우고가에서 동쪽으로 5분 정도 들어가면 뫼로 막힌 막다른 곳에 선병묵고가가 짧은 고색
의 기운을 드러내며 자리해 있다.

이 집은 선정훈의 동생인 선남훈(또는 선동훈)이 1940년대에 지은 것으로 그의 아들인 선병묵
이 소유하고 있다. 집 주위를 황토색 돌담으로 빙 두르고 그 안에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창
고로 쓰이는 초가 등을 두었는데, 남쪽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에 사랑채가 있고, 중
문을 지나야 안채가 나오는 분산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담장 서쪽 길에서 바로 사랑마
당과 안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서쪽 대문을 따로 내었는데, 이는 시대 변화에 따른 변형으
로 보면 된다.

현재는 우당고택(선병국가옥)처럼 집 일부를 고시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속세에 너무 알려
진 우당고택보다 찾는 이도 훨씬 적고 다소 외진 곳이며, 바로 옆에 산이 있어 공부는 정말
잘 될 것 같다.
이곳도 내부는 그런데로 공개되어 있으나(상황에 따라 비공개할 수도 있음) 개인 집이라 깊숙
하게 들어가지는 않고 사랑채까지만 보고 살짝 나왔다.

* 선병묵고가 소재지 - 충청북도 보은군 장내면 개안리 96 (개안길 60)

▲  선병묵 고가 남쪽 대문
대문은 맞배지붕을 취하고 있다.

▲  고가 내부 (남쪽 대문 안쪽)
집 내부에 조촐하게 텃밭을 두었다.

▲  담장 너머로 보이는 사랑채

▲  겨울 제국의 의해 꽁꽁 봉해진 연못


▲  삼가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선병묵고가
검은 피부의 기와집, 하얀 피부의 기와집, 그리고 누런 피부의 초가까지
다양한 집이 망라되어 있다.

▲  삼가천 둑방길에서 바라본 개안리와 옥녀봉

▲  눈에 젖은 삼가천 둑방길

선병묵고가를 둘러보고 아직 햇님 퇴근까지는 시간이 있어 북쪽 서원리에 있는 상현서원(象賢
書院)까지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선병국가옥 입구인 하개교에서 장안로를 따라 1.7km 정도 가면 상현서원인데, 차량의 눈치를
피하고자 장안로 동쪽 건너편, 그러니까 삼가천 둑방길로 걸어갔다. 서원에 다다르면 하천을
건너는 징검다리라도 있을 듯 싶어서였다. 둑방길은 거의 응달이라 눈이 좀 쌓여있었고, 주변
경작지와 삼가천 갈대는 죄다 누렇게 뜬 모습으로 겨울 제국이 속히 지나가기를 염원한다.

한참 둑방길이 잘 이어져 있다가 삼가천이 크게 구부러지는 곳에서 길이 끊기고 말았다. 하천
으로 내려가는 조그만 길은 있지만 눈과 얼음 투성이라 접근이 어려웠고, 괜히 내려가다가 큰
일 날듯 싶어서 자존심을 곱게 접고 되돌아나왔다. 괜히 차량의 눈치를 피한답시고 꾀를 부리
다가 오히려 그 꾀에 당한 셈이다. 그 사이 햇님은 더욱 기울어지고 첩첩한 산속이라 날씨까
지 다시 추워진다.

장안3거리로 다시 나와 군내버스를 타고 보은읍내로 들어서 후식거리로 보은동헌이라도 볼까
했으나 길을 헤매어 결국 우당고택 등 선씨 고택 3채를 보는 선에서 올해 첫 답사는 마무리가
되었다. 허나 날이 이날 뿐이랴..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숨쉬는 동안은 언제든 보은 땅에 찾아
올 수 있다. 그러니 그리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 땅에서 부디 선영홍/선정훈 부자 같은 대인배 부유/상류층이 많이 나오기를 염원하며 대단
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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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논두렁과 밭두렁을 간직한 서울의 두메산골, 도봉산 무수골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 전주이씨영해군파묘역, 무수골계곡)



' 서울의 두멧골, 도봉산 무수골 '

▲  무수골 논두렁 (초가을)

▲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

▲  무수골길 (성신여대 난향별원)

 


 

 

♠  서울의 숨겨진 별천지이자 논까지 간직한 상큼한 두멧골,
도봉산 무수골

▲  세일교 주변 (오른쪽 길은 무수골 북부, 도봉옛길 방면)

도봉산 동남쪽 자락에 포근히 묻힌 무수골은 도봉산에 널린 수많은 골짜기의 하나이다. 우리
집에서 매우 가까운 상큼한 곳으로 그저 숲과 계곡, 바위만 있는 계곡이 아닌 밭두렁과 산골
마을, 심지어 논두렁까지 담고 있는 산골마을로 좁게는 도봉산(道峯山)과 도봉구, 넓게는 서
울의 숨겨진 비경으로 꼽힌다.
천하 제일의 대도시로 콧대가 백두산만한 서울 바닥에 그런 서울을 비웃는 뜻밖에 별천지가
있었다니? 무수골에 발을 들인 나그네는 그곳의 뜻밖의 모습과 아름다운 풍경에 무한 감동을
먹으며 넋을 잃고 만다. 흔히 서울 하면 수많은 사람과 차량, 키다리 건물이 즐비한 번잡한
회색빛 풍경만 생각하기 일쑤이니 그 감동의 정도는 더욱 클 것이다. 솔직히 서울이라 해서
꼭 시가지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수골이 이렇게 개발의 칼질이 거의 닿지 않은 때 묻
지 않은 시골로 남게 된 것은 북한산국립공원 영역에 포함되어 개발의 칼날을 부러뜨렸기 때
문이다.

무수(無愁)골이란 이름은 근심이 없는 골짜기란 뜻이다. 바깥 세상은 늘 근심의 연속인데, 이
곳은 근심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니 이 얼마나 극락정토(極樂淨土)다운 이름인가? 그 유
래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조선 4대 군주인 세종(世宗)이 이곳에 왔다가 원터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며 '물도 좋고 풍경
이 좋은 이곳이야말로 아무런 근심이 없는 곳이다!'
찬양을 하여 무수골이 되었다고 하며, 세
종이 그의 아들인 영해군 이당(李瑭)의 묘역을 들러보고 원터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며 근심 없
는 곳이라 했다고 한다.
허나 영해군은 1477년에 죽었고 세종은 1450년에 붕어(崩御, 제왕의 죽음)했으니 서로 시기가
맞지 않으며, 성종이 영해군 묘역이 완성되자 직접 찾아와 참배하면서 근심이 없는 곳이라 했
다는 이야기도 있다. 거기에 근심 걱정이 없는 노인네인 무수옹(無愁翁) 이야기도 한 토막 덧
붙혀 전해오니 내용은 대략 이렇다.

때는 조선의 어느 시절, 나랏일로 골치가 아프던 왕은 세상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문을 품으며 이른바 무수인(無愁人)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아무리 잘나가는 부자도,
사대부(士大夫)도, 왕족도, 어린이도 몇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니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드디어 무수인 자격에 맞는 노인을 찾았다. 그 노인은 아들이 12명으로 모두 장가를
보냈으며, 아들과 며느리의 효성이 지극하여 노인은 만사가 즐거웠다. 하여 주변 사람들은 그
를 무수옹이라 불러 부러워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은 급히 그를 소환하여 이유를 물었다.
이에 노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소인은 아직 몸도 멀쩡하고, 마누라가 잘 보살펴주고 있으며, 자식과 며느리가 효도하고 벗
들도 많고, 자손들도 건강하고, 전하(殿下)께서 나라도 잘 다스려 주시고, 봄과 여름, 가을,
겨울도 있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샘이 단단히 난 왕은 그를 시험할 생각에 구슬을 건네주며 1달 후에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다.
노인은 왕에게 성대한 대접을 받고 집으로 오다가 한강에서 배를 탔는데, 뒤에 따라오던 사람
이 노인에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하여 구슬을 꺼내보이니 그때 그 사람이 실수
인양 팔꿈치를 치면서 구슬이 한강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람은 구슬을 물에 빠트리게 하려고
왕이 보낸 사람이었다.

구슬을 잃어버린 노인은 구슬을 어떻하나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식음을 전폐하고 몸저 눕게 되
었다. 가족들이 이유를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혼자 끙끙 앓으니 결국 건강까지 극도로 나빠졌
다. 걱정이 된 자식들은 잉어를 잡아 요리해주려고 했는데, 그 잉어 배에서 글쎄 구슬이 나온
것이다. 알고보니 강에서 잃어버린 그 구슬이었다. 노인은 너무 기뻐서 그동안의 근심을 흔쾌
히 털어버리고 잉어 요리를 폭풍 흡입하며 이내 건강을 되찾았다.
그리고 1달 후, 궁궐에 들어가 구슬을 바쳤다. 왕이 낸 숙제를 휼륭히 소화한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그 사연을 듣고 무한 감동을 먹었고, 이후 노인은 잘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런
무수옹 이야기는 무수골 뿐 아니라 전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옛 전설의 하나이다.


무수골은 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무수(無袖)골(무수동)이란 이름도 있다. 이는 무수골에 묻힌
영해군의 무덤 자리가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형국인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形)에
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춤을 뜻하는 '舞'가 '無'로 바뀜)
또한 영해군이 묻히기 이전(15세기 후반 이전)에는 대장장이들이 많이 살았는데, 그들이 운영
하는 대장간이 계곡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래서 '무쇠골', '수철동(水鐵洞, 무쇠골을 한자로
표현)'이라 불리다가 영해군이 묻힌 후 무수골(무수동)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무수골에 있던 무수울에 서낭당이 있어 이 마을을 '서낭당(성황당)'이라 불렸는데, 그
게 무수골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체로 성황당은 무수골 하류(도봉초교 주변)를 일컬
으며 그 이름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버스정류장 이름(도봉역, 성황당)으로도 절찬리에 쓰이고
있다.

참고로 무수골은 무수울, 무시울, 모시울, 성황당 등으로도 불렸는데, 무수울은 무수골 마을
의 대표 이름으로 조선 때 양주목 해등촌면(海等村面)을 이루던 12개 리의 하나였다. 무수골
은 윗말(무시울), 중간말, 아랫말로 나눠졌으며, 개성이씨가 먼저 터를 닦은 이후, 전주이씨
(영해군 후손들), 안동김씨, 함열남궁씨, 진주류씨도 이곳에 무덤을 쓴 인연으로 정착하여 오
랜 토박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무수골은 도봉산 산길 기점의 하나로 굳이 등산이 아니더라도 답사와 나들이, 피서, 농촌 체
험 등으로 안길 수 있는 꿀단지이기도 하다.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을 비롯해 무수골에 가장
먼저 묻힌 개성이씨 집안인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과 의령옹주(義寧翁主) 묘역, 오래된 느
티나무, 진주류씨묘역(도봉옛길 중간에 있음), 함열남궁씨 묘역 등의 문화유산이 즐비해 답사
지로도 손색이 없으며(옛 무덤 답사지로 아주 좋음) 서울시는 무수골 입구에서 윗무수골을 거
쳐 자현암까지의 길을 테마 산책길로 지정하여 '무수히 전하길(숲이 좋은 길)'이란 간판을 달
아주었다.
또한 무수골 하류(세일교 동쪽)에는 밭두렁이 넓게 펼쳐져 있는데, 시민들을 위한 주말농장도
여럿 있어 농촌 체험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무수골 계곡은 물이 깨끗하고 암반도 즐비하며
상류로 갈수록 숲이 짙어져 피서의 성지(聖地)로도 아주 바람직한 곳이다.
이 계곡은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망월사계곡)과 더불어 도봉산 3대 계곡의 하나로 추앙받으
며, 우이암 부근 원통사(圓通寺)에서 시작되어 '원통사계곡(또는 보문사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무수골은 '무수천'이란 간판을 달고 무수골의 만물을 촉촉히 어루만지며 흐르다가 도봉
역 서쪽에서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에 흡수되어 중랑천(中浪川)으로 흘러간다.

* 무수골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  도봉초교 주변 무수골 하류 (무수골 상류 방향)
도봉산 산줄기 너머로 북한산(삼각산) 백운대(836m)와 인수봉 등이 바라보인다.

▲  도봉초교 주변 무수천 (무수골 하류)
무수천 양쪽에 자전거 통행이 가능한 산책로를 내었는데, 무수골 주말농장
동쪽에서 시작되어 도봉역 북쪽을 거쳐 중랑천까지 이어진다.


무수골 나들이는 1호선 도봉역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도봉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도봉
역4거리인데, 여기서 도봉산이 바라보이는 서쪽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무수골로 인도하는 무
수천 둑방길(도봉로169길)이 나온다. 이곳에서는 문사동계곡에서 시작된 도봉천과 무수골에서
나온 무수천이 만나는데, 이들은 도봉천으로 합쳐져 중랑천으로 흘러간다.

무수천 둑방길을 따라 7~8분 정도 가면 무수교가 나온다. 이곳까지는 온갖 주택과 빌라가 즐
비한 서울에 흔한 주택가 풍경이나 여기서부터 집들이 크게 줄어들면서 서서히 시골 풍경으로
갈아탄다. 그런 전원 풍경 뒤로 북한산(삼각산) 북쪽 봉우리와 도봉산의 지붕이 바라보여 뒷
배경도 아주 탄탄하다. 이윽고 무수골 마을버스 종점(도봉08번)을 지나면 완전한 전원(田園)
분위기로 그림이 바뀐다.

무수천(무수골)은 수심이 매우 얕은 하천으로 비가 많이 내릴 때만 잠깐 물이 불어날 뿐, 평
소에는 물이 적은 마른 하천<건천(乾川)>이다. 그러다보니 가뭄이 심하면 갈증을 너무 심하게
타서 툭하면 맨바닥을 드러내기도 한다. 2007년 이후 무수골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벌
이면서 무수골 아랫쪽(도봉초교 주변) 주거 환경이 어느 정도 개선되었는데, 이를 맞추어 도
봉구에서 무수천을 정비하여 깨끗한 우리 동네 가꾸기 사업을 벌였다. 이때 하천 양쪽에 중랑
천과 이어지는 산책로를 닦았다.


▲  하얀 반석들 사이로 가늘게 흘러가는 무수골 하류 (무수천)

▲  북한산둘레길 방학동(放鶴洞)길 북쪽 관문

무수골주말농장을 지나면 세일교가 나온다.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오른쪽(북쪽)으로
가면 무수골 북쪽 마을과 북한산둘레길 도봉옛길로 이어지고, 정면의 세일교를 건너면 북한산
둘레길 방학동길 북쪽 관문과 무수골 안쪽, 원통사, 우이암 방면으로 이어진다.

무수골 북쪽에서 온 도봉옛길은 세일교에서 방학동길로 간판을 바꾸고 남쪽으로 흘러간다. 이
길은 방학동 정의공주(貞懿公主)묘역까지 이어지는 3.1km의 산길로 오르락내리락을 여러 차례
반복해야 되지만 그런데로 무난한 산길이다. 방학동길이란 이름은 방학동을 지나기 때문에 붙
여진 이름이다.


▲  무수골의 속살로 인도하는 성신여대 난향별원 돌담길 (무수골길)

방학동길 북쪽 관문을 지나면 바로 성신여대 난향별원 돌담길이 펼쳐진다. 처음에는 길 왼쪽
에 돌담이 펼쳐졌다가 절반 정도 들어서면 자리를 바꾸어 오른쪽으로 돌담이 펼쳐지는데, 비
록 덕수궁(德壽宮, 경운궁) 돌담길만은 못해도 그런데로 운치를 자아내고 있으며, 나무도 무
성하여 잠시나마 더위를 잊게 한다.
어디론가 끝없이 이어진 것 같은 난향별원 돌담길, 그 돌담길을 지나면 무엇이 나올까? 무수
골 초행자라면 더욱 짙어진 숲이 나오면서 본격적인 도봉산 산길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할 것
이다. 허나 그것은 착각이다. 무수골이 괜히 무수골이 아니거든..


 

 

♠  윗무수골 논두렁과 느티나무

▲  이제 기지개를 켜는 윗무수골 북쪽 논두렁 ▼

난향별원 돌담길을 지나면 흔히 생각하는 그늘진 숲 대신 햇살이 내리쬐는 뻥 뚫린 공간이 나
온다. 그 공간이란 다름 아닌 논두렁이다. 짙은 숲속에 묻힌 윗무수골 논두렁, 설마 이런 첩
첩한 산골에 논두렁이 있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논두렁의 크기는 속세와 비교하면 턱없는 수준이지만 산골치고는 그런데로 큰 편이다. 강원도
나 경북의 산골 논두렁으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인데, 길을 중심으로 남쪽에 조그만 논이 펼
쳐져 있고, 북쪽에 큰 논두렁이 여럿 있다. 그리고 영해군파묘역 밑에도 2~3개의 논두렁이 있
다.
이들 논두렁은 무수골의 오랜 상징이자 꿀단지로 무수골 사람들은 조선시대부터 이 논을 통해
곡물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량이 많아 배불리 먹고 살았다. 이렇게 산골에서 먹는 문제가 거뜬
히 해결되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食)은 걱정할 것이 전혀 없으니 근심이 없다는 무수골
이란 이름도 괜히 나온 것이 아닐 것이다.


▲  윗무수골 남쪽 논두렁

윗무수골 논두렁은 여전히 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보통 5월에 모를 심어 10월에 수
확을 한다.
친환경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벼들이 황금색으로 크게 숙
성되는 9월 이후의 논두렁 풍경은 무수골 풍경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


▲  남쪽과 북쪽 논두렁 - 그들 사이로 길이 지나간다.

▲  무수골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0-3호

논두렁을 지나면 바로 정면 약간 높은 곳에 큰 느티나무가 모습을 비춘다. 넓게 그늘을 드리
우며 무더위의 염통을 긴장시키는 그는 높이 22m, 가슴높이 둘레 3.7m로 1981년 보호수로 지
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15년이라고 하니 지금은 30여 년이 더해져 약 250살로 여겨진다.
계곡 부근 비옥한 땅에서 자라고 있어 왕성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으며, 가지가 꽤 굵고 묵직
하다. 이곳에 살던 영해군파 후손들이 심어 정자나무나 당산나무 용으로 사용했으며, 전주이
씨 영해군파 후손들이 애지중지 관리하고 있다.


▲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으로 인도하는 길

느티나무 앞에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산꾼들이 자주 오가는 서남쪽 길은 자현암(慈賢庵)
과 도봉산(원통사, 우이암) 으로 이어지고, 서북쪽 길은 느티나무가든으로 이어진다. 느티나
무가든은 입구에 문패를 내건 뻥뚫인 문이 있고, 좌우로 철책이 둘러져있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개인 사유지로 오해하기 쉬우나 생긴 것이 그렇게 생겼을 뿐, 들어가도 무방하다. 대중
에게 개방된 식당이고 마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느티나무가든은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당으로 백숙과 파전, 도토리묵, 고기류 등을 취급
하고 있는데, 그 식당 앞에서 길은 또 2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서쪽으로 가면 호안공 이등/
의령옹주 묘역으로 인도하는 길이 나오고, 식당을 끼고 북쪽 숲으로 들어가면 영해군파묘역이
나온다.

호안공 이등/의령옹주 묘역은 입구에 녹색 철책과 문이 둘러져 있으나 대낮에는 거의 열려있
다. (밤에는 닫아둠) 그 숲길을 2분 정도 들어서면 호안공의 후손이 사는 붉은 지붕 기와집이
나오는데, 정말 외딴 산골에 묻힌 시골집이다.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
리며 계속 걸음을 옮기니 집 앞을 지키고 선 큰 멍멍이가 무섭게 짖어대며 나를 경계한다.
물론 개는 줄로 묶여 있었지만 가까워질수록 멍멍 소리가 커지니 나도 모르게 염통이 쪼그라
든다. 내가 수상한 짓을 하러 온 것도 아니지만 단순한 개는 무작정 적으로 간주하고 맹렬히
멍멍 공격을 가하니 결국 그 공격에 꼬리를 내리고 뒷걸음을 쳤다.
개의 멍멍 소리에 집에서 사람이 나와서 무슨 일로 왔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이유를 말하면 되
지만 시간도 이미 18시가 다 된 상황이라 들여보내줄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인연
이 아닌 듯 싶어 이쯤해서 쿨하게 물러났다. (그 이후 아직까지 인연이 닿지 않고 있음)

참고로 호안공 이등(胡安公 李登, 1379~1457년)은 개성이씨로 태조의 서장녀(序長女)인 의령
옹주(義寧翁主, ?~1466)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1435년 계천군(啓川君)으로, 1444년 봉헌대부
(奉憲大夫)에 봉해졌으며, 이들 무덤은 무수골에 처음 정착한 무덤으로 조선 초기 무덤 양식
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영해군파묘역 밑에 자리한 논두렁

호안공 묘역을 포기하고 느티나무가든 북쪽 숲에 묻힌 영해군파묘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
해군파묘역 밑에는 느티나무가든에서 관리하는 커다란 야외 단체석과 족구장, 논두렁 등이 있
는데, 이들 논두렁도 아직 모를 심지 않아 마치 큰 연못처럼 보인다. 그들 너머로 나무가 삼
삼히 우거져 있고, 그 숲속에 영해군파묘역이 자리해 있다.


▲  영해군파묘역 20m 전

▲  영춘군 이인묘와 신도비로 올라가는 산길

영해군파묘역으로 가다보면 중간에 왼쪽 언덕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다. (계단처럼 주름진
길이 보일 것임) 그 길로 가면 영춘군 이인묘와 신도비가 나오며, 직진하면 그 산길의 끝에
무리지어 있는 영해군파묘역이 있다.


 

 

♠  조선 초기 무덤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조선 왕족들의 묘역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寧海君派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06호

무수골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영해군파묘역은 세종의 9째 아들인 영해군과 그의 후손들이 묻힌
왕족 일가의 묘역이다.
무수골은 뒤에 도봉산, 앞에 무수천이 흐르는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착한 명당(明堂)
자리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15세기 초반에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가 가장 먼저 이곳을 닦았
고, 영해군, 진주류씨, 함열남궁씨 순으로 무덤을 썼다. 이중 영해군파묘역이 가장 묘역이 넓
은데(1,630.4㎡) 신선이 소매를 펼치고 춤을 추는 선인무수지형(仙人舞袖之形)의 명당으로 꼽
힌다. (무수골의 이름도 거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음)

영해군파묘역은 크게 4구역으로 나뉜다. 묘가 몰려있는 중앙 구역은 묘역의 시조인 영해군 이
(李瑭) 내외를 비롯해 그의 장인어른인 신윤동(申允童), 영춘군의 아들인 강녕군 이기, 이
기의 노비인 김동(금동)의 묘가 있다. 이당 묘역 뒷쪽 산속에는 영춘군의 장남인
완천군(完川
君) 이희(李禧)와 완천군의 3째 아들인 평성수(平城守) 이질(李耋)의 묘가 있고, 동쪽 능선에
는 길안도정 이의의 묘, 묘역 직전 서쪽 능선에는 영해군의 장남인 영춘군 이인의 묘와 신도
비, 부원정 이이(영해군 손자의 아들) 내외의 묘가 있다.

묘역은 영해군을 시작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 증손자 4대가 묻혀있으며, 묘비가 없는 한참 후
손들의 무덤도 여럿 꼽사리로 끼어있다. 묘역은 영춘군 이인이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원종
공신(原從功臣)이 되면서 더 확대되었으며, 특히 중앙 구역 밑에 아주 조그맣게 충노(忠奴)로
포장된 금동의 묘가 있어 눈길을 끈다. 무덤들은 새로 손질된 부분이 거의 없는 16세기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조선 초기 왕족들의 무덤 양식과 석물의 변천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  충노 김동(金同)의 묘

묘역 중앙구역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충노 김동(금동)의 묘를 만나게 된다. 이 무덤은 영해군
파묘역의 다른 무덤과 달리 매우 아담한 모습인데, 이는 김동이 노비이기 때문이다. 밋밋하게
솟은 봉분(封墳)은 한 사람이 누우면 딱 적당할 정도로 작고, 풀도 별로 없다. 석물도 네모난
비좌(碑座)를 갖춘 묘비(높이 64cm, 너비 37cm, 두께 13cm)가 전부로 그 역시 꼬마 키보다도
작아 죽어서도 신분 차별을 주었다.
묘비는 비좌 위에 '故 忠奴 金同'이라 쓰인 빗돌을 세워 무덤의 주인을 알렸고, 빗돌 위는 반
원 모양으로 다듬었다. 그리고 그 위에 꽃봉오리 모습의 장식을 달았는데, 마치 위스키병처럼
보인다. (내가 술을 좋아해서 그런가?) 그러면 김동은 누구이고 왜 왕족 묘역 한쪽에 이렇게
무덤까지 있게 된 것일까?

김동은 강녕군(江寧君) 이기의 노비로 원래 이름은 금음동(今音同)이다. 연산군 시절에 흥청(
興淸)에 소속된 세은가이(世隱加伊)가 왕의 총애를 받자 그의 아비인 김숙화(金淑華)가 그 권
세를 믿고 이기의 집과 첩을 빼앗으려고 했다. 이기가 김숙화의 요구를 거절하자 뚜껑이 열린
김숙화는 이기가 노비 금동을 시켜 자신을 욕했다고 왕에게 하소연을 했다. (또는 이기가 노
비 금동과 함께 거친 말을 하며 항의했다고 함)
이에 뚜껑이 폭발한 연산군(燕山君)은 이기의 가족과 장인을 모두 연좌해 잡아들이고 집을 봉
쇄하고 노비까지 모두 압송케 했다. 이때가 연산군의 마지막 해인 1506년이다.

왕은 추관(推官)들에게 명해 낙형(烙刑)을 가하며 이기와 그의 아비인 영춘군 이인을 고문케
했다. 죄가 없는 이기 부자는 억울함을 토로했으나 허공의 메아리로 끝날 뿐, 아무 소용이 없
었다. 그러자 김동은 굳게 마음을 먹으며 '소인이 혼자 한 짓입니다. 나으리는 아무 것도 몰
라요!'
진술을 했다.
그 말을 신뢰하지 않던 왕은 거짓말 말라며 금동에게 6번씩이나 고문을 벌였다. 왕이 듣고 싶
던 말은 바로 이기가 했다고 자백하는 것이었다. 허나 금동은 끝까지 자기 소행이라 주장했고
그의 고집에 지친 왕은 결국 김동의 단독 범죄라 단정하여 그를 처단했다. 그리고 이기 부자
는 장형 100대, 이인은 장형 80대를 때려 유배형에 처했고 이기는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다.
이 사건을 통해 이기와 연산군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김숙화는 이를
악용해 이기의 집과 첩을 빼앗으려 했고, 연산군은 단순히 그의 무고만으로 이기를 잡아들였
으며, 김동이 자신이 벌인 일이라 자백하자 자신이 바라는 답변을 얻고자 더 고문을 가한 것
을 보면 이번에 아예 이기를 족치려고 작정했던 듯 싶다.

목숨을 건진 이기는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고, 김동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묘역 한쪽에 조촐
하게 그의 무덤과 비석을 만들어주었다. 그의 사연을 전해들은 중종(中宗)은 김동을 의노(義
奴)라 칭찬하며 1508년 4월 5일에 동네 어귀에 문려(門閭)를 세워주었고, 김동 가족의 요역(
徭役)을 면해주었다. 그리고 3년 뒤에 다시 명을 내려 집 앞에 정문을 세워 그의 희생을 길이
길이 기렸다.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그 공로로 김동과 그의 처자식은 면천이 되어 평민이 되었
고, 김씨 성을 하사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노비 김동의 묘가 무려 조선 왕족인 영해군파묘역 속에서 비록 작은 규모
이지만 주인 일가와 나란히 자리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거의 흔치 않은 노비의 묘로 묘비까지
갖춘 것은 아주아주 드문 케이스로 그 가치는 높다. 하긴 자신의 목숨을 던져 주인을 살렸으
니 이 정도 정성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  강녕군 이기(江寧君 李祺)와 그의 전/후처의 묘

김동 묘 옆에는 그의 주인인 강녕군 이기의 묘가 있다. 비록 무덤의 덩치는 김동 묘보다 크지
만 그와 거의 비슷한 높이에 자리해 있어 죽어서도 김동의 은혜를 잊지 않고 늘 함께 하겠다
는 주인의 지극한 마음이 담겨있는 듯 하다.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그리 했을 수도 있음, 속
사정이야 당사자만이 알 것이니)
이기와 그의 전/후처 등 3명이 합장된 무덤으로 왕족의 무덤치고는 매우 작은 모습이다. 호석
(護石)을 두른 네모난 봉분과 비좌와 이수를 갖춘 비석, 상석(床石)이 전부로 그 부친대까지
는 봉분도 크고 문인석과 장명등까지 갖추었지만 이기부터 무덤이 간소하게 변화된다. 그만큼
먼 왕족이 되고 벼슬도 크게 못했기 때문이다.

이기는 영춘군 이인의 차남으로 영해군의 손자가 된다. 부인은 양주조씨인 조방우(趙邦佑)의
딸이며, 후처는 전의이씨(全義李氏)이다. 그의 태어난 시기와 사망 시기는 전해오는 것이 없
으며, 연산군 말엽인 1506년에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세은가이의 아비 김숙화가 집을 뺏고자
시비를 걸자 이를 지키는 과정에서 그의 무고로 가족과 노비가 모두 압송되어 이기와 이당 부
자는 고문을 당하게 된다.
다행히 노비 김동이 자신을 불태워 이기의 가족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이기는 장형 100
대를 맞고 먼 곳으로 쫓겨나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다.

중종 때는 이정숙(李正淑) 등과 폐비 신씨(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청했다가 죄를 받은 김정
(金淨)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조광조(趙光祖) 등과 친분을 쌓았다. 허나 1519년 기묘
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 일당이 모두 아작이 나자 그의 일당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죽은 이후 그 흔한 시호도 받지 못했다가 1794년 유림에서 그도 기묘사화 때 화를 받은
이른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하나라며 시호를 내리자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문경(文景)이
란 시호를 내렸다.


▲  영해군 이당의 부인인 평산신씨(平山申氏)묘

강녕군 이기와 노비 금동의 무덤 윗쪽에는 영해군 이당의 부인인 평산신씨묘가 있다. 평산신
씨는 신윤동의 딸로 영춘군 이인과 길안도정 이의를 낳았으며, 남편의 무덤 옆이 아닌 친정
아비의 무덤 밑, 남편 무덤보다 2단계 밑에 따로 자리한 것이 이채롭다.

무덤은 동그란 봉분과 묘비, 상석 외에 장명등(長明燈)과 문인석(文人石) 2기까지 갖추고 있
으며, 이들 석물에는 500년 세월의 때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우측에는 묘비가 없는 후손 무
덤 2기가 봉긋 솟아있다.

▲  평산신씨묘와 묘비, 장명등

▲  고된 세월에 지쳐보이는 우측 문인석

▲  눈망울이 큰 좌측 문인석

▲  평산신씨묘에서 바라본 이기묘(왼쪽)와
금동묘(오른쪽)


▲  영해군의 장인인 신윤동(申允童)묘

영해군묘와 평산신씨묘 중간에는 영해군의 장인인 신윤동 묘가 자리해 있다. 영해군파묘역 중
간 구역에서 2번째로 높은 곳에 자리해 딸과 손자, 노비 금동의 무덤을 굽어보고 있는데, 사
위와 딸 무덤 사이에 둥지를 튼 점이 특이하다. 게다가 영해군 집안(전주이씨) 묘역에 부인도
아닌 다른 성씨의 인물이 잠들어 있는 점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아무리 장인어른이라고
해도 엄연한 다른 성씨이기 때문이다.
허나 조선 초까지는 집안 묘역에 사위나 장인 등 다른 성씨의 인물이 섞여 있는 경우가 흔했
다. 고려의 마지막 자존심이던 정몽주(鄭夢周) 묘역(용인시 능원리 소재)에도 정몽주의 손녀
사위인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과 그 후손이 묻혀 있고, 조선 10대 군주인 연산군은 부인인
거창신씨 집안의 땅에 묻혀있다.

신윤동은 좌의정에 추증된 신효창(申孝昌)의 손자이자 신자경(申自敬)의 아들이다. 그의 집안
은 왕실과 매우 가까워 세종의 왕자들에게 여럿 시집을 갔는데, 고촌사촌인 제안부부인(濟安
府夫人)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부인이며, 숙
부 신자수(申自守)의 딸은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에게, 자신의 딸은 세
종의 9남인 영해군 이당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니 집안도 배경도 다들 탄탄하다.
허나 영해군만큼이나 역사에 요란하게 이름을 남기지 못하여 인지도는 영해군파묘역에 와서야
확인이 될 정도로 매우 낮다.

신윤동의 행적에 대해서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서울시장)을 지내고 죽은 이후 의정부 좌
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는 것 등이며, 그의 할아버지인 신효창은 큰아들인 신자근이
아들을 얻지 못하고 일찍 죽자 막내 신자수를 신자근의 후사로 삼으려 했다. 허나 마음을 바
꾸어 신자경의 아들인 신윤동에게 신자근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는데, 신윤동이 사망하자 신효
창에 대한 제사를 누가 맡을 것인가를 두고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어났다는 내용이
전부이다. 또한 신윤동의 행적이 적혀있을 묘비(묘표)도 안타깝게도 마모가 되어 확인이 불가
능한 실정이다.

무덤의 구조는 동그란 봉분과 묘비, 상석, 문인석 2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석 앞면에 '증 의
정부 좌찬성 신윤동지?(贈議政府左贊成申允童之?)'라 쓰여 있다. 끝 자는 훼손되었으나 다른
묘비의 예를 볼 때 묘(墓)가 분명하며 우측에는 묘비가 없는 후손의 무덤 1기가 조용히 자리
한다.


▲  신윤동 묘의 뒷모습

▲  영해군 이당(寧海君 李瑭) 묘

신윤동 묘역 윗쪽에는 영해군파묘역의 시조인 영해군 이당의 묘가 있다. 묘역 중앙 구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들어앉아 장인과 부인, 후손의 묘를 굽어보고 있는 이 무덤은 동그란 봉분과
고색의 내음이 진한 묘비(묘표), 상석, 날씬한 장명등, 문인석 2기로 이루어져 있다.

영해군(1435~1477)은 세종의 9째 아들로 신빈김씨(愼嬪金氏) 소생이다. 처음 이름은 이장(李
璋)이었으나 나중에 이당으로 갈았으며, 성격이 화목하여 다투는 일이 없었다고 전한다. 7살
에 영해군에 책봉되어 소덕대부(昭德大夫)의 품계를 받았으며, 1477년 42세의 나이로 죽자 성
종은 안도공(安悼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400년이 흐른 1872년에 영종정경(領宗正卿)
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신윤동의 딸인 임천군부인(林川君夫人) 신씨로 영춘군 이인과 길안도정 이의 등 2남1
녀를 두었으며, 보통 부인과 같은 봉분에 묻히거나 봉분을 달리해서 나란히 배치한 것이 보통
이나 영해군은 2단 밑에 부인의 묘를 두었다.
영해군묘는 정확히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덤 뒷쪽 숲속에는 그의 손자인 완천군 이희(
영춘군 이인의 아들), 완천군의 3째 아들이자 영해군의 증손자인 평성수 이질 묘가 있으나 찾
지는 않았다. (그때는 몰랐음)
묘비 앞면에는 '영해군시 안도공당지묘(寧海君諡安悼公瑭之墓)'라 쓰여 무덤의 주인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으며, 뒷면에는 그의 생애가 적혀있으나 마멸이 심해 확인하기가 어렵다.


▲  뒷쪽에서 바라본 영해군묘
(그 너머로 신윤동, 부인 평산신씨, 이기의 묘가 있음)

▲  영해군묘 우/좌측 문인석
장대한 세월에 제대로 지쳤는지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다. 좌측 문인석은
세월이 씌워준 검은 때가 가득해 고색의 멋을 제대로 풍긴다. 세월이
달아준 얄미운 훈장이라고나 할까?

▲  길안도정 이의(吉安都正 李義)묘

영해군묘와 신윤동묘에서 동쪽으로 난 산길을 오르면 바로 길안도정 이의의 묘가 모습을 비춘
다. 동그랗게 솟은 봉분에는 이의와 그의 전/후처 등 3명이 잠들어 있는데, 그 앞에는 장대한
세월이 제대로 태워먹어 온통 검은 피부가 되버린 고색의 묘비(묘표)와 새로 세운 묘비, 상석
, 향로석(香爐石), 문인석 2기를 갖추고 있으며, 묘역 앞에 조촐하게 계단이 닦여져 있다.

이의는 영해군의 차남으로 구체적인 생몰시기는 전하는 것이 없다. 그는 여산송씨 집안의 송
자강(宋自剛)의 딸과 청주한씨인 한명회(韓明澮)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했으며, 은계군 이말숙
(銀溪君 李末叔, 한씨부인 소생), 시산군 이정숙(詩山君 李正叔, 송씨부인 소생), 청화수 이
창숙(淸化守 李昌叔), 송계군(松溪君), 벽계도정 이종숙(碧溪都正 李終叔), 옥계군(玉溪君)
등의 아들을 두었다. 그중 특히 벽계도정 이종숙은 황진이(黃眞伊)와 가까웠던 인물로 벽계수
(碧溪水)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의 묘비에는 '증 명선대부 길안도정행 창선대부 길안정(贈 明善大夫 吉安都正行 彰善大夫
吉安正)'이라 쓰여 있으며, 이의의 손자인 이휘(李徽)는 임진왜란 때 왜군을 격퇴한 공으로
그와 그의 아비, 할아버지 등 3대가 추증되었다. 그리고 이의의 아들인 이말숙의 묘비명에는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 이의와 사별했다고 나와있어 이의는 젊은 나이에 죽은 것으로 여겨진
다.

▲  이의묘의 옛 묘비와 새 묘비

▲  조각 솜씨가 일품인 옛 묘비의 이수(螭首)


▲  영춘군 이인(永春君 李仁)묘

영해군파묘역 중심 구역을 둘러보고 서쪽 산자락에 있는 영춘군 이인묘를 찾았다. 묘역 서쪽
구역에는 이인 내외와 부원정 이이 내외의 묘, 그리고 이인의 신도비가 있는데, 이 신도비는
이 묘역의 유일한 신도비로 이인의 높은 위치를 알게 해준다.

이인의 묘는 이인과 부인 유씨<유양(柳壤)의 딸>의 봉분을 비롯해 묘비 1기, 상석 2기, 혼유
석 2기, 장명등, 문인석 2기, 망주석(望柱石) 2기는 물론 무려 신도비까지 갖추고 있어, 영해
군파묘역 중의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묘역의 시조는 분명 그의 부친인 영해군이지만 그
부친보다 묘가 더 있어보여 이인묘가 이 묘역의 실질적인 주인공 같은 인상이다. (영춘군 이
인 묘역이라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
특히 이들 묘역의 무덤들은 무덤 필수품인 망주석이 하나도 없는데 반해 이인 묘에는 망주석
이 있으며, 무덤도 동그란 형태가 아닌 앞은 네모, 뒷쪽은 세모로 총 5각형으로 이루어진 특
이한 모습이다. 동그란 봉분과 네모난 봉분(조선 초까지 많이 나타남)은 많이 봤어도 5각형은
처음이라 참 신선하며, 봉분 밑에는 호석을 둘러 단단히 다진 다음 두툼하게 봉분을 쌓았다.

영춘군 이인(1465~1507)은 영해군의 아들로 자는 자정(子靜)이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 이씨(
신윤동의 부인)의 손에서 자라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다고 하며, 10살 때 정의대부(正義大夫
)의 영춘군에 봉해졌고,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를 거쳐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올랐다.
1506년 연산군이 총애하던 흥청 소속의 세인가비의 아비 김숙화의 무고로 이인과 이기 부자(
父子)가 압송되어 모진 고문 끝에 이인은 남해로 유배를 갔다. 다행히 중종반정(中宗反正)으
로 풀려나 복권되어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올랐으며, 1507년 4월 27일, 42살에 사망
했다. 하여 그해 8월 임신일에 지금의 자리에 장사를 지냈으며, 시호는 목성(穆成)이다.

이인은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대단했는데, 11살에 어머니 신씨가 세상을 뜨자 3년상을 치
렀고, 그 상이 끝나기도 전에 부친 영해군이 사망하자 다시 3년상을 치렀다. 상례를 잘하여
종친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으며, 평상시 생활이 담박하고, 이름난 꽃을 뜨락에 심는 것을 좋
아했다고 한다.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으며, 중종반정으로 원종공신에 오른 덕에 집안 묘역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  이인 묘비(묘표)
봉분 사이에 묘비 하나를 두었다.

▲  키 작은 장명등

▲  동자승처럼 생긴 우측 문인석

▲  홀을 쥐어든 좌측 문인석 (우측
문인석도 홀을 쥐어들고 있음)


▲  확트인 이인묘 앞부분
영해군이 묻힌 중심 묘역과 길안도정 이의묘는 숲속에 묻혀있어 시야가 좋지 못하다.
(주변에 보이는 건 나무, 위로는 하늘 뿐) 허나 이인묘는 나무의 눈치들이
적어 멀리 수락산과 불암산 산줄기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  이인 내외 묘의 뒷모습
앞은 네모, 뒤는 세모를 취한 독특한 모습으로 5각형을 이루고 있다.

▲  이인묘에서 바라본 수락산(水落山, 638m)의 위엄

▲  이인 신도비(神道碑)

이인묘에는 특별한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신도비이다. 신도비란 무덤 주인의 생애를 기록한
비석으로 고위 관료와 왕족들의 무덤에만 쓸 수 있던 비싼 존재이다. 이인 역시 부모를 잘만
나 모태부터 왕족이기 때문에 신도비를 지녔다. 하지만 그의 아비인 영해군과 아들의 무덤에
는 신도비가 없으니 이는 중종반정으로 원종공신에 봉해진 탓이 아닐까 싶다.

신도비는 보통 신도(神道)로 통한다는 무덤 동남쪽에 세우지만 이곳은 서남쪽에 비석을 두었
다. 땅바닥에 네모지게 바닥돌을 깔고, 거북 머리인 귀부(龜趺) 대신 연꽃 무늬와 안상이 새
겨진 두툼한 비좌를 얹힌 다음 백일석(白一石)으로 만든 빗돌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가 여
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을 다룬 머리장식인 이수(螭首)로 마무리를 지었다.
비석의 높이는 273cm로 장대한 세월이 강제로 달아준 검은 주근깨가 많이 끼어있지만 그 덕에
중후한 멋과 고색의 미가 크게 돋보인다. 특히 이수에 새겨진 이무기는 비대칭적으로 새겨져
있는데, 그 조각수법이 꽤 섬세하여 은근히 탐이 난다.

이 비석은 1509년 9월에 세워진 것으로 당당하고 기품이 넘치는 모습으로 16세기 초를 대표하
는 비석으로 꼽힌다. 도봉산 자락에는 신도비를 갖춘 조선시대 무덤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도 이 비석은 단연 갑(甲)이며, 17세기에 세워진 임당 정유길(林塘 鄭惟吉) 신도비(서울 사당
동에 있음)의 모델이 되기도 한다.
빗돌에는 이인의 생애가 빼곡히 담겨져 있는데, 아들 이기의 부탁으로 첨지중추부사 남곤(南
袞, 1471∼1527)이 글을 지었고 글씨는 승정원 주서(注書)인 김희수(金希壽, 1475∼1527)가
썼으며, '목성공신도비명(穆成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는 바로 김희수가 쓴 것으로 여겨진
다. 특히 도봉과 노원, 무수골의 옛 지명인 수철동 등 도봉/노원 지역의 옛 이름과 현재 이름
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지역 지명을 최초로 언급한 기록으로 여겨져 지역 연구에도 큰 열쇠
를 제공해준다. 겉모습만 착할 뿐 아니라 빗돌에 새겨진 내용들도 착한 것이다.

지금은 영해군과 그의 후손들 묘역이 '전주이씨 영해군파묘역'이란 이름으로 지방문화재로 지
정되어 있지만 원래는 이 신도비만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묘역 전체
로 확장된 것이다.


▲  현란한 조각 솜씨를 드러낸 신도비 이수
소용돌이치듯 흘러가는 구름들 사이로 2마리의 이무기가 재주를 부리며
여의주를 다툰다. 비록 검은 때가 자욱하긴 해도 아직은 정정한
모습을 자랑해 500년 나이를 무색하게 한다.

▲  이인 묘 밑에 자리한 부원정 이이(富原正 李㶊)와 부인 전주유씨 묘역
이이는 영해군 이당의 증손으로 조용히 살다간 사람이다. 이이 부부의 봉분을
비롯해 세월에 검게 그을린 묘비(묘표)와 상석, 향로석 등이 있다.


무수골을 주름잡던 영해군파묘역을 싹 둘러보니 어느덧 19시가 되었다. 햇님도 퇴근본능에 따
라 도봉산과 북한산(삼각산)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고 달님과 땅꺼미가 조금씩 드리우기 시작
한다. 오랜만에 찾은 무수골, 개발도 그 칼날을 접은 곳이라 아직 산골과 시골 분위기는 여전
했다.
집에서 도보로 25~30분 정도면 충분히 안길 수 있는 무척이나 가까운 곳이지만 1년에 고작 1~
2번 가는 것이 고작이다. 집 인근에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하여 도봉
산의 숨겨진 비경, 무수골 나들이는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1동 산81-1 (도봉로169라길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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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의 푸른 허파 ~ 서울 국립현충원, 동작충효길 나들이 (현충원숲길, 창빈안씨묘역)

 

 

' 국립 서울현충원, 동작충효길 산책 '

▲  국립현충원

 


6월 6일 현충일이 다가오면 거의 본능적으로 국립현충원(國立顯忠園, 국립 서울현충원)을 찾
는다. 그곳에 가족이나 친척이 있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국심이 대단한 것도 아
니다. 다만 석가탄신일에는 그날 본능에 따라 절을 찾듯이 현충일에는 그에 어울리는 현충원
을 찾아 호국의 신으로 산화한 이들을 기리며 현충일의 분위기를 누리는 것 뿐이다.

현충원이 나라의 성스러운 공간이다 보니 나들이로 가는 것은 생각도 못할 뿐더러 그저 무덤
밖에 없는 재미없고 딱딱한 곳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서울에 살고 있어도 학생 시절 소풍
으로 간 것이 고작인 사람이 부지기수이며 그곳에 가자고 하면 거의 대부분
'현충원에 나들이를 가자고? 거기 뭐 볼 거 있어?'하면서 화들짝 놀란다. 나들이로 가기에는
왠지 부담이 가는 곳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허나 그것은 현충원의 하나만 알지 둘은 모
르는 것이다. 그곳은 북한산(北漢山, 삼각산), 북악산(北岳山, 백악산), 남산(南山) 등과 더
불어 서울의 대기를 정화시키는 커다란 허파로 숲이 짙고 다양한 동식물이 살고 있다.
게다가 현충원을 외곽으로 둘러싼 산책로는 어디에 던져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숲길로
상도동과 사당동, 흑석동 후문으로 가는 길은 오솔길의 갑(甲)을 이루며, 매년 4월에는 이곳
의 명물인 수양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조촐하게 벚꽃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또한 창빈안씨
묘역과 부안군 이석수묘역, 호국지장사 등 문화유적과 오래된 절까지 소리소문 없이 품고 있
어 오래된 볼거리까지 넉넉히 선사한다. 현충원은 3척 동자도 다 아는 곳이지만 그곳의 숨겨
진 속살을 아는 사람은 무척이나 적은 것이다.

국립현충원은 한강과 관악산 사이에 솟은 공작봉<孔雀峰, 서달산(西達山,197m)> 자락에 넓게
터를 닦았다. 1954년에 착공되어 전국에 흩어진 6.25 전사자의 유해를 안장했는데, 처음에는
지명을 따 '동작동국립묘지(銅雀洞國立墓地)'라 불렀으나 2006년부터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
름을 갈았다. (국립현충원이라 많이 부르며, 본글에서는 '국립현충원' 또는 '현충원'이라 표
시함)
이곳은 특히 명당(明堂)자리로 명성이 자자한데, 지형이 마치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
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지세라 하여 장군대좌형(將軍對
座形)이라 부르기도 한다. 즉 동쪽인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를 보면 웅장한 산맥(山脈)의 흐
름이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는 형상이고, 서쪽인 우백호(右白
虎)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는 것이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마주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마치 물소뿔 같으며, 한
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려 공작봉(서달산)을 감싸 흘
러 내려가고 있다.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이라 명당 중의 명당으로 통
한다.
이렇게 의미가 남다른 곳에 호국의 신을 모셨으니 마땅히 그들의 후손과 이 나라가 잘되어야
하건만 아직까진 그 효과가 시원치 못하다.

본글에서는 창빈안씨묘역과 부안군이석수묘역, 동작충효길. 현충원내부순례길 등을 다루도록
하겠다. (호국지장사는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겠음)


♠  국립현충원의 오랜 주인, 허나 지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창빈안씨묘역(昌嬪安氏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4호

국립현충원의 배꼽 부분에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묘역이 있다. 그 서쪽에 소나무로
둘러싸인 조그만 동산이 있는데 그곳에 현충원의 숨겨진 오랜 속살인 창빈안씨묘역과 신도비가
자리해 있다. 군인과 애국지사, 역대 대통령의 유택(幽宅) 밖에는 없을 것 같은 이곳에 뜬금없
이 조선왕실의 오래된 무덤이 박혀있으니 많은 이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으
니 말이다.
허나 현충원이 들어서기 훨씬 이전부터 창빈묘역은 이곳에 오랜 주인으로 이 일대가 대부분 그
의 묘역에 속해있었다. 하지만 1954년 이곳에 국립묘지를 만들면서 묘역은 크게 축소되기 시작
했고 1965년 이승만의 묘역을 창빈묘역 북쪽에 쓰면서 묘역의 동쪽이 떨어져나갔다. 상황이 이
러니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임에도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그야말로 잉여로운 존재가 되버린 것
이다. 그래서 아는 이가 드문 것이다. 또한 2009년에는 김대중 전대통령의 묘역을 바로 남쪽에
쓰면서 남쪽 부분까지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다행스런 점은 2011년 이후 묘역 북쪽에 그의 묘
역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어떠한 안내판도 없었음)
그래서 '이 무덤은 뭐지?' 호기심 삼아 찾는 이의 발걸음이 조금 늘었다.

묘역의 주인인 창빈안씨(1499~1549)는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후궁이다. 1499년 경기도
시흥(始興)에서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용모가 뛰어났다고 한다. 집
안이 어려워 1507년 궁녀(宮女)로 들어갔으며, 20세에 중종의 총애를 받고 22세에 상궁(尙宮)이
되었다.

그녀는 행동이 단정하고 정숙하며, 자비로운 성품과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로 덕망(德望)이 높
았다. 그리하여 중종의 모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성종의 왕비)의 사랑을 받았으며, 시어
미의 후원에 힘입어 31살에 숙원<淑媛, 내명부(內命婦) 종4품>이 되고 얼마 뒤 숙용<淑容, 내명
부 종3품>으로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영양군(永陽君), 덕흥군(德興君), 정신옹주
(靜愼翁主)
등 2남1녀를 두었는데, 그중에서 덕흥군(1530~1559)은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宣祖)의 아비로
조선 최초의 대원군(大院君)으로 유명하다.
창빈은 1549년(명종 4년)에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며, 처음에는 양주땅 장흥(현 양주시 장
흥면)에 묘역을 썼으나 이듬해 3월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조선에 수많은 후궁 묘역의 하나로 자칫 잊혀질 뻔했으나 덕흥군의 아들이자 그녀의 손자로 하
성군(河城君, 선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잠시나마 호강을 하게 된다. 그는 왕위계승권과는 거리
가 멀었으나 때마침 적당한 인물이 없어 정말 운이 좋게도 왕위에 오른 것이다.
적통이 아닌 서자(庶子)의 아들이란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쪼잔한 선조는 자신의 권위를 높
이고자 아버지와 할머니를 높이는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막대한 공을 들인다. 1577년에는 할
머니에게 창빈(昌嬪)이란 시호를 올렸으며, 무덤의 격을 능으로 높이고 묘역을 현충원 일대로
확대시켰다. 능의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동작진(銅雀鎭)의 이름을 따서 동작릉(銅雀陵)이라 했
으며, 아비인 덕흥군의 묘역은 백성들의 입소문과 많은 돈을 이용해 덕릉(德陵)으로 높였다.
(덕흥대원군 묘역 ☞ 관련글 보러가기)

선조는 그릇이 작고 생각이 좁았던 군주로 마땅한 업적은 없다. 임진왜란도 잘 대처했으면 일찍
종료를 시키거나 미리 막을 수 있었는데, 안일한 생각과 간신배들과 어우러진 무능한 대처로 국
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백성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말년에는 한참 손녀뻘되는 왕비<인
목대비(仁穆大妃)>와 재미를 보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다.
그런 선조가 1608년 골로 가자 동작릉은 창빈안씨묘역으로 격하되고 만다. 허나 이는 원래의 자
리로 돌아온 것으로 창빈의 아름다운 성격상 동작릉이란 이름에 꽤 부담을 가지며 손자를 원망
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1683년(숙종 9년) 왕명에 따라 묘역 남쪽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는
데, 비문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신정(申晸, 1628~1687)이 짓고 글씨는 돈령부지사(敦寧
府知事)를 지낸 왕족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다.

창빈의 아비인 안탄대는 성품이 매우 유순하고 겸손했다. 딸이 중종의 후궁이 되었음에도 부귀
영화와 출세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겸손이 너무 지나쳐 비굴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
다. 심지어 어린 애한테 잔소리를 들어도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성품을
알만하다. 그의 겸손하고 검소한 성품은 오늘날 고위 공직자 등의 권력층과 돈에 치여 사는 상
류층들이 배워야 될 인품이 아닐까 싶다.
그는 스스로 천인(賤人)이라 자처하고 계속 가난하게 살았으며, 벼슬은 종7품 유순부위(油順府
尉)가 전부이다. 그의 성격상 그건 어쩔 수 없겠지만 너무 눈에 띄어도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안탄대가 세상을 뜨자 선조는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으며, 묘역은 안산시 반월공단에 있다.

▲  우측 문인석(文人石)

▲  좌측 문인석


▲  무덤의 주인이 쓰인 묘표(墓表)
묘표의 이수에는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구름 사이로 꿈틀거리는 용이 현란하게
조각되어 있어 속인들의 눈길을 끈다.


손자에 의해 한때 능의 대접까지 받았지만 창빈의 묘역은 그녀의 청렴함처럼 조촐하기 그지없다.
전형적인 후궁의 무덤 양식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부풀어오른 동그란 봉분(封墳) 앞에
는 현란한 조각의 이수를 지닌 묘표(묘비)와 상석(床石), 조그만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그 좌
우로 망주석(望柱石) 1쌍이 서 있다. 봉분 뒤쪽에는 곡장이 둘러져 있고, 무덤 앞에는 문인석 1
쌍이 한결같은 표정으로 홀을 들며 무덤을 지킨다.

  ◀▲  창빈안씨 신도비(神道碑) <사진 3장>
이 비석은 1683년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가 3m이
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춘 다른 신도
비와는 완전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 네모난 바닥
돌 위에 기단석(基壇石)을 얹히고, 그 위에 곧
게 솟은 사각형 비신(碑身)을 심어 창빈의 일대
기를 적었다. 비석 꼭대기는 지붕돌로 마무리했
는데, 귀퉁이 추녀가 얕게 들려져 있다.


♠  국립현충원에 꽁꽁 숨겨진 오래된 속살, 부안군 이석수 묘역
(扶安君 李碩壽 墓域)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29호

▲  정면에서 본 이석수 묘역
(뒷쪽에 자리한 무덤이 이석수의 손자인 이선룡 내외의 무덤)


▲  뒷쪽에서 본 이석수 묘역

국립현충원 서쪽에는 6.25시절에 나라를 지키다 전사한 경찰들의 충혼(忠魂)을 기리는 경찰충혼
탑이 있다. 충혼탑 바로 북쪽(현충원 정문 방면)에는 3거리가 있는데, 3거리에서 서쪽 산자락을
살펴보면 숲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산길이 눈에 아른거릴 것이다. 그 산길을 20초 정도 오르면
창빈안씨묘역과 더불어 현충원의 숨겨진 속살의 하나로 지금까지 꽁꽁 숨어지내던 숨바꼭질의
달인 부안군 이석수 묘역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이석수 묘역을 알게된 것은 2010년이다. 우연히 나의 머리에 입력된 그 묘역은 현충원 안
에 있다고 하는데, 현충원 안내도와 홈페이지에는 그 묘역의 위치를 알리는 어떠한 정보도 없었
다. 게다가 다녀간 이들도 전혀 없어 인터넷 세계에서도 그 위치에 대한 정보가 걸려들지 않았
다. 그래서 열심히 조사를 벌이다가 그 위치를 알게 된 것이다.
현충원은 참 많이도 갔지만 창빈안씨묘역은 2007년에나 발걸음을 했고, 호국지장사도 2006년에
나 처음 갔다. 이제 현충원의 숨겨진 오래된 속살은 다봤구나 싶었는데, 이석수 묘역까지 교묘
하게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그의 묘역을 찾아 술래를 면하게 되었다.

현충원의 터줏대감인 창빈안씨묘역도 처음에는 안내도에 나와있지 않다가 이제는 아주 작게나마
표시를 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묘역을 알리는 안내판도 세워 예전보다 찾기는 쉬워졌다. 허나
이석수 묘역은 아직까지 그 흔한 안내판도 없고 현충원 안내도에서 나와있지 않다. 그야말로 아
주 극소수만 찾는 현충원의 꼭꼭 숨겨진 속살인 것이다.
내가 갔을 당시에도 충혼탑 주변과 3거리에는 사람들이 좀 있었으나 산길과 묘역에는 인적은 커
녕 움직이는 어떤 것도 없었다. 묘역을 둘러보고 내려가니 3거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엥 저
기에 뭐있나??'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  홀을 쥐어들며 묵묵히 묘역을 수호하는 문인석(文人石)들

서달산 북쪽 자락에 자리한 이석수 묘역은 조선 성종(成宗)의 손자인 부안군 이석수(1524~1598)
와 그의 2번째 부인인 평강 채씨(平康 蔡氏)의 무덤이다. 호석(護石)도 없이 봉분만 두툼하게
부풀어져있고, 그 앞에 묘표와 상석(床石), 혼유석을 두었으며, 문인석 1쌍을 배열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은 작고 소박한 모습으로 왕족의 무덤치고는 작은 규모이다.

이석수는 성종과 명빈김씨(明嬪金氏)의 소생인 무산군(茂山君) 이종(李悰)의 아들로 처음에 창
선대부 부안정(彰善大夫 扶安正)에 봉해지고, 나중에 명선대부 도정(明善大夫 都正)을 제수받았
으며, 임진왜란 때는 손자가 되는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선무종훈(宣武從勳)이 되었다. (선조의
할아버지인 중종과 이석수는 이복형제임)
1598년 74세의 나이로 눈을 감자 선조는 정의대부 부안군(正義大夫 扶安君)이란 시호를 내리고
창빈안씨묘역 서쪽 산자락을 주어 무덤을 쓰게 했는데, 선조가 그의 부친인 덕흥대원군(德興大
院君)묘역과 더불어 성역화시키기에 혈안이 되있던 창빈묘역의 서쪽 땅을 떼어 무덤을 쓰게 할
정도면 그의 신임이 제법 두터웠음을 보여준다.

이석수 무덤 뒷쪽에는 그의 손자인 순안군 이선룡(順安君 李善龍) 내외의 무덤이 야트막하게 솟
아있는데, 왼쪽 봉분에는 그와 전처(前妻)인 남원윤씨가, 오른쪽에는 나중에 받아들인 여흥민씨
가 묻혀있다. 이들 무덤은 봉분만 조촐하게 솟아있으며, 일체의 석물은 하나도 없어 일반 백성
들의 무덤처럼 수수하게 보인다.


▲  부안군 묘표

부안군 묘표는 지붕돌과 비신, 비좌로 이루어져 있다. 비석을 꽂은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 같
은 것이 섬세하게 묘역의 초라함을 조금이나마 커버해준다. 상태가 양호한 비신(碑身)에는 부안
군의 5대손인 이태제(李泰齊)가 1727년(영조 3년)에 비를 세웠다는 내용부터 해서 부안군의 전
처인 김해 허씨(金海 許氏)와 맏아들의 묘역이 양주 장흥에 있다는 것이 쓰여 있으며, 뒷쪽에는
비석의 조성시기가 쓰여 있다. 지붕돌은 추녀가 살짝 들려져 선의 미를 선사한다.


▲  약간 측면에서 바라본 이석수 묘역

▲  이석수 묘역 남쪽에 자리한 경찰충혼탑

※ 국립현충원 (창빈안씨묘역, 부안군 이석수묘역) 찾아가기 (2015년 6월 기준)
* 지하철 4,9호선 동작역 4,7,8번 출구에서 도보 1분, 4호선을 이용할 경우 4번 출구가 가까우
  며, 9호선을 이용할 경우 7,8번 출구가 가깝다.

★ 국립현충원 관람정보 (2015년 6월 기준)
* 개방시간 : 6:00~18:00 <동절기(11월~2월)는 7시~17시까지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쉬는 날은 없으나 동절기 토요일과 휴일에 한해 사진/유품전시관은 휴관함
* 국립현충원 홈페이지는 이곳을 클릭한다
* 국립현충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동작역과 이어지는 정문과 동문이 있으며, 흑석동 후문과 상도
  동 후문, 사당동 후문 등 3개의 후문이 있다.
* 국립 서울현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현충로 210 ☎ 1577-9090, 02-813-9625)
* 부안군 이석수 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산41-2


♠  국립현충원 외곽 ~ 현충원내부순례길, 동작충효길(현충원길)

▲  호국지장사와 상도동 후문을 이어주는 현충원내부순례길

호국지장사에서 상도동 후문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있다. 이 길은 현충원의 남쪽 산책로인 현
충원 내부순례길로 상도동 후문에서 지장사를 거쳐 사당동 후문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이다. 길을
둘러싼 숲이 매우 삼삼하여 도심 속의 공간이라 사실을 까맣게 잊게 해주며, 나무들이 베푼 산
내음에 마음마저 시원해진다. 길 양쪽에는 서울의 주요 허파인 현충원의 숲을 지키고자 녹색 철
책이 빙 둘러져 있어 숲으로의 접근을 막는다.

이 숲길은 오르막길의 연속이다. 어느 정도 오르면 길은 평탄해지고 이윽고 현충원과 속세(俗世
)의 경계를 가르는 높다란 녹색 철책이 나타나 이 세상의 끝에 온 기분과 다른 미지의 세상으로
이어지는 듯한 기분을 안긴다.


▲  녹음에 묻힌 현충원내부순례길

▲  현충원 철책을 만나기 직전

▲  현충원과 속세를 이어주는 상도동 후문(상도 출입문)

지장사에서 오솔길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속세로 이어지는 상도동 후문이 나온다. 후문이라고
하지만 개인집 대문이나 휴전선, 통제구역 철책 사이에 난 조그만 철문이며, 문 안쪽에 초소가
있어 혹시 방향을 잃어 들어올지도 모르는 속세의 나쁜 기운을 경계한다.

상도동 후문에서 동작구의 둘레길인 동작충효길과 만나게 된다. 동작충효길은 동작구(銅雀區)의
야심작으로 2010년부터 2년 동안 갈고 닦은 길이다. 구내(區內)에 국립현충원이 있는 것을 착안
해 이름도 그럴싸한 동작충효길이라 명명된 이 길은 총 6코스로 산과 녹지대, 한강변을 따라 펼
쳐져 있으며,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부족해 동네 명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허나 조금씩 존
재감을 드러내고 있어 조만간 서울 굴지의 도보길로 격하게 추앙받을 것이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도보길이기 때문이다.


▲  동작충효길 안내도 (동작구청 홈페이지 참조)

현충원 상도동 후문에서는 동작충효길 1코스인 고구동산길(노들역 배수지공원~상도동 후문)과 2
코스인 현충원길(상도동 후문~동작역), 6코스인 동작마루길(상도동 후문~국사봉,빙수골마을공원
), 7코스인 까치산길(상도동 후문~사당역)이 만나는 분기점이다. 여기서 4개의 충효길이 시작되
고 끝을 맺는 충효길 교통의 요충지인 셈이다.

동작충효길이란 존재를 전혀 모르고 온 터라 생각치도 못한 존재 앞에 약간 멍을 때렸다. 원래
는 숭실대로 내려가려고 했으나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동작구의 새로운 꿀단지, 충효길
에 등장으로 코스를 수정해야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길은 그냥 지나치면 정말 섭하다.
여기서 노량진으로 갈까? 아니면 사당역? 아니면 동작역? 3개의 갈림길을 두고 궁리하다가 현충
원 경계를 따라 이어진 현충원길에 호감이 더 가서 그 길을 택했다.
현충원길은 현충원의 녹색 철책을 따라 동작역까지 이어지는 길로 마치 휴전선이나 국경선을 거
니는 기분을 들게 한다. 철책 안쪽은 성스러운 현충원이요. 내가 걷고 있는 바깥은 속세로 현충
원을 많이 들락거렸지만 경계선과 주변 산책로는 처음 간다. 정말 현충원은 뜨면 뜰수록 계속
용솟음치는 마르지 않는 샘이나 물건이 마구 나오는 마술 상자 같은 곳이 아닐 수 없다.


▲  현충원 철책과 나란히 이어진 현충원길 - 상도동 후문 북쪽

▲  현충원길 학수약수터 부근

▲  현충원길 사당동 후문 북쪽 오르막길

현충원길은 현충원 남쪽과 동쪽 산줄기에 닦은 산길로 이미 두툼하게 솟은 곳이라 길의 북쪽 종
점인 동작역이나 이수폭포를 제외하고는 급하게 솟거나 내려앉는 구간은 없다. 다만 이 길이 은
근 높은 지대이기 때문에 사당2동이나 사당3동, 정금마을 등에서 오를 때는 길이 좀 각박하다.

길 중간에는 사당3동으로 내려가는 길과 남묘(南廟), 사당동 후문, 정금마을과 갯마을, 이수폭
포 등 속세로 내려가는 길이 10개 정도 된다. 이중 남묘는 동묘(東廟)와 더불어 1599년 명나라
에서 금 4,000냥을 보내 지으라고 했던 관우(關羽)의 사당으로 원래는 서울역 동쪽에 있었다.
그러다가 주변이 개발되면서 1970년대에 사당3동 산동네로 떨려났고 지금은 거의 개인 절로 쓰
이고 있는데, 현충원길에서 남묘의 두꺼운 지붕들이 보인다. 그곳도 잠시 들릴까 하다가 귀찮아
서 그냥 지나쳤다. (내부 관람이 어려운 곳임)


▲  정금마을, 동작초교 갈림길

▲  끝없이 펼쳐진 현충원길과 현충원 철책의 위엄 (정금마을 갈림길 부근)

▲  길 중간중간에 설치된 메모리얼 게이트(Memorial Gate)

현충원길에는 이렇게 생긴 문이 심심치 않게 있다. 이 문은 현충원에 봉안된 순국선열을 추모하
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태극기를 형상화하여 문의 지붕은 태극모양처럼 넝실거리게 했고, 기둥
은 건, 곤, 감, 리로 표현했다고 한다. 허나 그런 심오한 의미와 다르게 문의 이름은 어렵게 영
어로 되어있어 고개를 심히 갸우뚱하게 한다.
문 이름은 보나마나 동작구청 공무원들이 없는 지식 쥐어짜서 만든 이름으로 보이는데, 굳이 영
어로 이름을 삼아야 폼이 나는 것일까? 그냥 순국선열의 문이나 애국의 문으로 하면 안되는거니
? 이 땅의 정말 과하기 그지 없는 영어 숭상은 실로 역겹기 그지 없다.


▲  현충원길의 거의 북쪽 끝인 이수갈림길에서 이수폭포로 가는 소나무길

▲  이수폭포 위에 세워진 단촐한 모습의 동작정(銅雀亭)

현충원길의 북쪽 마지막 갈림길이 이수갈림길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동작역과 국립현
충원 동문으로 이어지며, 동쪽으로 가면 이수폭포와 동작대로로 연결된다. 나는 여기서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와 보다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이수폭포로 방향을 잡았다.

이수폭포로 내려가는 길은 소나무가 무성하여 솔내음이 속세로 나가려는 나의 마음을 마지막으
로 사로잡는다. 길의 경사는 꽤 각박하여 오르기가 힘들며, 내려갈 때는 미끄러질 위험이 크게
도사린다. 게다가 길 왼쪽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는데, 거의 80도에 가까운 낭떠러지로 동작대로
와 지하철 4호선 터널이 보일락말락한다.
그 길을 정신 없이 내려가니 동작정이라 불리는 작고 단아한 정자가 나타난다. 이제 다 내려온
것이다. 정면과 측면이 1칸 밖에 안되는 동작정 안에는 어느 속인이 벌러덩 누워 책을 보고 있
었는데, 무척 그늘진 곳이라 피서지로는 딱 그만이다. 정자 앞에는 인공적으로 만든 조그만 개
울이 있는데, 정자 서남쪽에서 발원해 이수폭포로 떨어진다. 이 물은 자연수가 아닌 수돗물이다.

▲  동작정 앞에 놓인 나무다리

▲  이수폭포 윗쪽


▲  여름의 제국을 긴장시키는 이수폭포의 위엄

동작정에서 1분 정도 내려가면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인 동작대로와 함께 시원하게 쏟아지는 이
수폭포가 여름의 제국을 무척 똥줄타게 만든다. 이 폭포는 자연산이 아닌 인공폭포로 동작충효
길을 닦으면서 조성한 것인데, 폭포는 2개로 이루어져 서로 아름다움과 위엄을 뽐낸다. 성난 물
줄기가 쏟아져 하얀 비단이 아래로 드리운 듯 하며, 우렁찬 소리가 바위와 주변을 뒤흔들어 현
충원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나쁜 기운과 여름의 제국이 놀라 도망칠 정도이다.

폭포 주변 암벽에는 소나무와 여러 수풀을 심어 폭포의 운치를 돕고 있으며, 폭포 앞에는 조촐
하게 쉼터를 만들었다. 이곳에 앉아 폭포를 하염없이 보고 있으면 정말 삼척(三陟) 미인폭포 전
설에 나오는 미인처럼 시간가는 줄도 모르며 더위도 잠시 잊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현충일 기념 국립현충원과 동작충효길(현충원길)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 이수폭포(동작정), 현충원길 찾아가기 (2015년 6월 기준)
* 지하철 4,9호선 동작역 3번 출구를 나오면 현충원길이 나오며, 동작대로를 따라 6분 정도 가
  면 이수폭포가 나온다. 여기서 동작정을 거쳐 각박한 길을 오르면 현충원길과 만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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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개일 - 2015년 6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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