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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2.17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구역, 후원 돌담길 겨울 나들이 <중앙고 본관, 창덕궁 후원 뒷길, 옥류정>
  2. 2016.02.06 서울 도심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을 거닐다 ~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돌담길, 송시열집터, 북묘터)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구역, 후원 돌담길 겨울 나들이 <중앙고 본관, 창덕궁 후원 뒷길, 옥류정>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신선원전, 창덕궁 후원 뒷길



' 북촌 중앙고등학교, 창덕궁 후원 뒷길
겨울 나들이 '

창덕궁 신선원전, 의효전

▲  창덕궁 신선원전, 의효전 구역

▲  중앙고등학교 (본관 주변)

▲  창덕궁 후원 돌담

 



 

겨울의 차디찬 한복판인 1월의 끝 무렵, 북촌(北村)에 자리한 중앙고등학교와 창덕궁 후
원 뒷길을 찾았다.
북촌과 창덕궁 후원 뒷길은 내 즐겨찾기 명소로 매년 여러 번씩 발걸음을 하고 있다. 이
미 지겹도록 복습을 한 곳이지만 자꾸만 손과 발이 가니 그들에게 단단히 중독된 모양이
다.
마침 며칠 전 겨울 제국(帝國)이 서울에 눈폭탄을 투하했는데 그들의 설경(雪景)이 갑자
기 당겨 눈이 녹을새라 부랴부랴 사진기를 챙겨들고 북촌으로 달려갔다. (본글에서는 중
앙고와 창덕궁 신선원전, 창덕궁 후원 뒷길만 다루겠음)



 

♠  북촌의 한류 명소이자 늙은 근대 건축물을 여럿 간직한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

▲  교문 옆에 자라난 계동(桂洞) 은행나무 - 서울시 보호수 512호

창덕궁과 맞닿은 북촌의 동북쪽 끝자락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중앙고등학교(중앙중고교)가
자리해 있다.
이곳은 100년 이상 숙성된 학교로 왜정(倭政) 시절과 1940~1970년대에 유명인사를 많이 배출
했던 현장이다. 또한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근대 건축물을 3개나 간직하고 있고, 비록 지금은
사라졌지만 인문학박물관이란 박물관까지 보유했으며, 창덕궁의 금지된 구역인 신선원전(新璿
源殿) 구역을 유일하게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21세기 이후 전파를 타고 한류
관광지로 격하게 뜨면서 북촌의 필수 명소로 성장했다.

북촌의 주요 골목길인 계동길의 북쪽 끝인 중앙고 교문은 언덕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인왕산(
仁王山)을 가리고 선 높은 고개를 넘으면 북촌로로 이어지며, 그 중간에 가회동11번지로 이어
지는 조그만 골목길이 가늘게 손을 내밀고 있다. 동쪽에도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높은 고개가
버티고 있는데, 그 고개를 넘으면 원서동(苑西洞)과 창덕궁길로 이어진다.

교문 바로 안쪽에는 500년 이상 묵은 큼직한 은행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앙상한 가지
를 드러내며 나처럼 추운 시절을 원망하는 그는 높이 20m, 가슴둘레 3.1m의 훤칠한 나무로 오
랜 세월 계동 지역의 수호신으로 숭상을 받아왔다. 하여 매년 가을, 지역 사람들은 오곡백과(
五穀百果)를 차려 당제(堂祭)를 지냈으며,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 개관을 기념하고자 이 나무
를 삼목이식을 하는 등, 나름 의미가 깊은 나무이다.
나무 옆에는 1941년에 지어진 수위실이 있으며, 언덕진 길을 오르면 중앙고등학교 본관이 수
면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햇님처럼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교문을 들어서면 학교 건물 사이로 운동장이 있기 마련이나 여기는 운동장 대신 콘크리
트로 다진 너른 뜨락이 닦여져 있으며, 그 공간 복판에 넓고 동그랗게 자리를 다져 테두리에
얕게 난간석을 두르고 그 안에 잔디를 깔아 그 핵심부에 학교를 일으켜 세운 인촌 김성수(仁
村 金性洙)의 동상을 세웠다.
또한 본관의 모습이 고려대학교 본관과 많이도 닮았고, 본관 주변 풍경은 여기가 고등학교가
아닌 고려대나 서양의 명문 대학교에 들어선 기분을 진하게 들게 만든다. 기존에 생각하고 있
던 고등학교의 모습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겉모습이 이러하니 누가 여길 고등학교라
보겠는가? 그냥 사진만 보면 오래된 대학교나 서구의 명문 학교라고 봐도 이상할 것은 없다.

본관 서쪽에는 원파도서관이, 동쪽 높은 곳에는 강당이 있으며, 본관 옆구리를 통해 뒤쪽으로
가면 고색이 깊은 서관과 동관이 나란히 나타나고 그 북쪽을 가린 신관(新館)을 지나면 비로
소 인조 잔디를 깐 축구장 겸 운동장이 나타난다. 운동장 북쪽에 보이는 건물은 중앙중학교이
며 운동장 동쪽 밑에 신선원전과 의효전이 뉘여져 있다.

* 중앙고등학교의 간략한 역사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6월 1일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가 세운 기호학교(畿湖學校)에서 비롯
되었다.
1910년 9월 흥사단(興士團)에서 운영하던 융희(隆熙)학교와 통합되었는데 그때 교장은 서유견
문(西遊見聞)으로 유명한 유길준(兪吉濬)이었다. 이후 기호학회는 호남, 교남, 서북 등 여러
학회와 통합해 중앙학회로 간판을 바꾸고 학교 이름 또한 중앙학교로 갈았으며, 1915년 4월에
김성수가 이를 인수했다.

1916년 이 땅 최초로 보트를 도입하여 수상스포츠인 조정부를 설치했으며, 1917년 웅원(雄遠,
높은 이상), 웅견(雄堅, 굳은 의지), 성신(誠信, 성실한 행동)을 학교의 3대 교훈(校訓)으로
삼고 교목(校牧)은 잣나무, 교화(校花)는 무궁화꽃으로 삼았다.
1917년 12월 김성수의 큰아버지인 김기중(金祺中)이 교사(校舍)를 지으면서 현재 자리로 학교
를 이전했다. 원파 김기중은 김성수 이상이나 중앙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1919년에는 교장 송진우(宋鎭禹)와 김성수가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3.1운동을 계획
했으며 백두산을 상징하는 백산(白山)으로 학교 이름을 바꾸려고 했으나 왜정의 방해로 1921
년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보)로 개명했다.
1921년 4월 고등학교 인가를 받아 본관과 서관, 동관을 세웠고, 1926년에는 6.10만세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9년 2월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1934년 12월 원인이 아리송한 화재로 본관이 무너지자 그 남쪽에 다시 본관을 만들어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으며 1941년에는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대강당을 지었다.

1938년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중앙중학교로 간판을 바꾸었으며, 1939년 왜정이 무궁화 모표를
폐지하라고 하자 월계관으로 임시로 모표를 바꾸기도 했다. 1940년에는 중앙고보 역사 교사인
최복현이 4학년 학생 5명과 민족정기 고취와 독립을 목적으로 '5인 독서회'를 조직하였는데,
1941년 한 학생의 연락 편지가 왜경에 발각되어 최복현과 관련 학생 모두 함흥교도소로 끌려
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 사건을 '중앙고보 5인 독서회' 사건이라고 한다.
그때 최복현은 재판정에서
'내 수업을 듣고 학생들이 항일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나를 처벌하고 학생들은 풀어달라'

호소하여 학생들은 3달 뒤 풀려나고 최선생은 2년 후 석방되었다.

1946년 9월, 6년제 중학교로 변경되고, 1950년 4월 대한교육법으로 4년제로 변경되면서 3년제
고등학교를 병설했다. 그래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꾸리게 되었다. 1960년 4.19시절에는
학교 학생들이 4.19시위에 동참했으며, 1964년에는 고려중앙학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1966년 신관을 짓고 김성수의 동상을 세웠으며, 1973년 신선원전과 인접한 운동장 동쪽에 축
대를 쌓아 운동장을 넓혔다. 1981년 학교 본관과 동관, 서관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문화
유산을 보유한 학교가 되었으며 1986년 6월 7일 교우의 날을 정해 행사를 거행했다.

1992년 2월 원파기념관을 세웠고, 2008년 6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인문학박물관을 개관하
면서 이 땅의 고등학교 중 최초로 박물관을 소유한 학교가 되기도 했다. 또한 주변 나라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전파를 타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북촌의
한류 관광지로 존재감을 크게 살찌웠다.
(예전에는 일요일과 공휴일에 학교를 개방했으나 2020년 이후에는 거의 개방하지 않음)
 
* 중앙고등학교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1 (창덕궁길 164, ☎ 02-742-1321~2)
* 중앙고등학교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6.10만세 기념비 (뒤쪽 건물은 원파도서관)

본관 뜨락 서쪽에는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6.10만세 기념비가 3.1운동 책원비가 있는 동
쪽을 바라보고 있다.

1926년 4월 26일 조선(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이 붕어(崩御)하자 중앙고보 학생
을 중심으로 격문(檄文) 3만장을 인쇄하여 주변 학교에 뿌렸다. 그리고 순종의 인산일(因山日
)인 6월 10일, 황제의 대여(大輿)가 종로3가 단성사(團成社)를 지나자 중앙고보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수천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 1,000매와 태극기를 군중에
게 뿌려 이른바 6.10만세 운동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 기념비는 6.10만세운동의 67주년이 되는 1983년 6월 10일 중앙고등학교 동우회와 동아일보
사가 합심하여 세웠다.


▲  중세시대 유럽 성처럼 생긴 원파도서관 (옛 인문학박물관)

본관 서쪽에는 서양식 건물인 원파도서관이 있다. '원파'는 학교를 크게 일으킨 김성수의 큰
아버지인 김기중의 호로 이곳에는 2008년 6월에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문을 열었던 인문학박
물관이 야심 차게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는 이 땅에서 거의 유일하게 고등학교에 차려진 박물관으로 그 이름 그대로 인문학(人文學)
자료를 풍부하게 머금고 있었으며 북촌의 다른 민간 박물관과 달리 입장료도 저렴하여 참으로
착한 박물관이었다. (어른 입장료가 1,000원이었음) 허나 이 땅의 인문학이 몰락했음을 상징
하듯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창밖에 빗방울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2010년과 2011년에 2
번 관람을 했음)


▲  본관 주변에 세워진 계원 노백린(桂園 盧伯麟) 집터 표석

이곳에는 대한제국 고위 무관이자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했던 노백린(1875~1926) 장군의 집
이 있었다.
그는 문무(文武)에 출중했고 기개가 높았으며 공군의 중요성을 깨달아 미대륙에서 최초로 한
인(韓人) 비행학교를 세워 독립군 공군을 양성했다. 이후 상해임시정부로 넘어와서 국무총리,
참모총장 등을 지냈으며 특히 군사 부분에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허나 1926년 1월 22일, 상해(上海) 프랑스 조계지(租界地)의 양옥 단칸방에서 조국의 독립을
누리지 못한 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중앙고를 일구었으나 친일파로 구린 모습을
보였던 김성수는 무려 64살씩이나 살았음)


▲  3.1운동 책원비(策源碑)

본관 뜨락 동쪽에도 기묘하게 생긴 형상과 함께 3.1운동 책원비가 자리해 6.10만세 기념비가
있는 서쪽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다.

3.1운동 발생 2달 전인 1919년 1월 왜열도 동경(東京)에서 유학을 하던 송계백(宋繼白. 1896~
1920)이 중앙학교 숙직실에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이곳 교사인 현상윤(玄相允, 1893~1950)에게
사각모에 담긴 비단에 쓰여진 2.8독립선언서 초안을 건네며, 동경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살
짝 알렸다.
현상윤은 그것을 교장 송진우와 김성수에게 급히 보여주었는데 그것을 본 그들은 크게 감동을
먹고 독립운동을 준비하게 된다. 그래서 숙직실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작성하고 3.1
운동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바로 이를 기념하고자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에서 세
웠다.


▲  창립30주년 기념관 (대강당)
본관 동쪽 높은 곳에 자리한 대강당은 1941년 11월 창립30주년 기념으로
지어졌다.

▲  중앙고등학교 본관 - 사적 281호

고려대 본관과 많이도 닮은 중앙고 본관은 콘크리트 철근의 2층 석조 건물로 1935년에 삽을
떠서 1937년 9월 완성을 보았다. 원래는 동관과 서관 사이에 있었으나 1934년 화재로 무너지
자 현 위치에 더 크고 화려하게 다시 지었다.

왜정 때 건축가인 박동진이 서구 학교의 건물을 모델로 삼아 설계하고 건축한 길다란 'H'형태
의 건축물로 지붕 부분을 포함하면 가히 3층 규모인데, 그 시절 이 땅의 사람들이 세운 큰 건
물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다.
건물 중앙에는 4층의 중앙탑을 높이 세워 본관의 위엄을 드높였고, 벽면은 돌을 질서 있게 쌓
아올렸다. 그래서 그 모습이 오래되고 전통이 있는 서양 학교나 중세시대 건축물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거기에 담쟁이덩굴까지 걸치고 있으니 고색과 중후한 멋까지 마음껏 드러낸다.
학교가 이렇게 크고 잘 나갔으니 왜정 때 이곳을 다녔던 학생들의 자부심은 자못 대단했을 것
이다. 비록 왜정의 눈치를 보며 살던 우울한 시기이나 여기서만큼은 왜인들도 오히려 부러운
눈빛으로 학교를 바라봤을 것이다.

현재 1층 중앙은 학교 행정공간으로, 나머지는
교실로 쓰이고 있으며, 근대 초기 양식으로 만
들어진 민족 교육의 현장이자 민간학교의 건물
로 유서가 깊다. 또한 20세기 중/후반 유명 인
사들이 많이 나온 현장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널린 학교 건물보다 더욱 정감이
가며, 저 건물에 들어가면 절로 책을 펴고 공
부에 임할 정도로 면학 분위기도 진하게 나온
다. 나도 이곳에서 공부를 했어야 했는데. 사
는 곳이 엉뚱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하긴 이곳
에 들어온다고 해도 내가 워낙 타고난 돌머리
라 효과가 얼마나 있었을지는 미지수이다.

▲  본관의 뒷모습
마치 중세시대 건축물이나 요새처럼 보인다.


▲  본관 뒤쪽에 숨겨진 빛바랜 종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중앙고보 시절부터 수업시간과 점심시간, 수업 종료 시간마다 땡땡땡~~♬ 종소리를 내며 학생
과 교사들을 분주하게 했던 위엄 돋는 종이었으나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나 이곳의 옛 유물로
마음에도 없는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왕년에는 몸을 흔들며 학교를 움직이는 큰 손이었건만 이제는 종소리를 울릴 일도 없으니 그
의 피부에는 그저 하얀 먼지만 가득할 뿐이며, 가끔 관광객들이 호기심 삼아 그를 흔들어 주
변의 적막을 살짝 깨뜨리곤 한다. (나도 몇 번 쳐봤음~) 그렇게 울려 퍼진 종소리는 예나 지
금이나 늘 비슷한 목소리이다. (그렇다고 요란하게 치지는 말자!)


▲  왕년을 생각하며 우수에 잠긴 종
사람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현역에서 물러나 뒤로 나앉은 모습은 정말
쓸쓸하기 그지없다. 허나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무엇이 있으랴?
그저 장대한 세월에 잠깐씩 몸을 담굴 뿐이다.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요. 천하만물의 운명이다.

▲  중앙고등학교 서관(西館) - 사적 282호

본관 뒤쪽에는 붉은 피부의 비슷한 모습을 지닌 서관과 동관이 있다. 서관은 1921년에 지어진
고딕양식의 2층 붉은 벽돌집으로 (지붕을 포함하면 3층) 'T'자형 구조이다. 본관과는 분위기
가 사뭇 다른데, 뾰족한 아치형 창틀, 가파른 고딕식 지붕, 그리고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엇
물려 지어 20세기 초반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붉은 벽돌이 고색의 향기를 더욱 우려내고 있으며, 여기서는 조선소년군 창설과 6.10만세운동
,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현재는 교실로 살아간다.


▲  중앙고등학교 동관(東館) - 사적 283호

서관과 마주하고 있는 동관은 1923년 10월에 지어진 2층 붉은 벽돌 건물이다. (지붕을 포함하
면 3층) 건물 구조와 전체적인 모습은 서관과 비슷하며 여전히 교실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신관에서 바라본 동관

▲  동관의 뒷모습


▲  선비의 모습으로 지어진 원파 김기중(金祺中) 동상

동관과 서관 사이에는 원래 본관이 있었다. 허나 1934년 화재를 만나 건물이 주저앉으면서 남
쪽으로 자리를 옮겨 더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본관의 강제 이전으로 비게 된 공간에는 소나무를 심어 조촐히 정원을 닦았는데 그 복판에 원
파(圓坡) 김기중(1859~1933)의 동상이 자리해 있다. 그는 김성수와 더불어 중앙학교를 일으킨
인물로 김성수의 바로 큰아버지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양복스타일의 김성수 동상과 달리 전
형적인 선비 스타일로 동상을 지어 그를 기린다.

김기중은 1886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1904년 용담(龍潭, 전북 진안) 군수(郡守)를 지내기도
했다. 1906년 정3품에 올랐으나 멸망의 끝으로 달려가는 나라꼴에 한숨을 쉬며 민중계몽을 위
해 교육사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하여 1908년 재산을 털어 영신(永新)학교를 세웠으며 왜열도
로 건너가 그곳의 교육 제도를 직접 살폈고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그리고 1921
년 다시 재산을 털어 지금의 자리에 교사를 만들면서 중앙학교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1932년 아우 김경중(金暻中)과 보성전문(고려대)을 인수하고 민립대학을 꿈꾸던 조카(김성수)
에게 운영을 넘겼으며 그 이듬해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허나 그때 죽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10년을 더 살았다면 친일파로 노선을 바꾼 조카에게 크게 실망
하여 피가 꺼꾸로 솟았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결국 그 잘난 조카가 큰아버지의 민족교육 사업
에 적지 않게 똥칠을 했다.


▲  신관 앞에 뿌리를 내린 히말리야시다나무 (종로구 2013-43호)
본관을 조금 닮은 신관 앞에는 어려운 이름처럼 이색적으로 생긴 히말리야시다나무가
조촐하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높이 13m, 둘레 190cm 정도로 100년 정도
묵었다고 하며 아마도 왜정 때 학교 행사 기념으로 심은듯싶다.

▲  옛 숙직실터에 새로 지은 삼일기념관(三一記念館)

대강당 뒤쪽에는 삼일기념관이라 불리는 단촐한 모습의 기와집이 있다. 네모나게 다져진 석축
위에 계단을 늘어뜨리며 들어앉은 이 건물은 김성수가 1917년에 지은 교장 사택 겸 숙직실(宿
直室)을 복원한 것으로 원래는 대강당 정문 앞에 있었다.
1919년 1월,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학교를 찾아와 이곳 숙직실에서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
윤에게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계획을 처음으로 알리고 2.8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했다,
즉 3.1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유서 깊은 현장인 것이다.

그 숙직실은 1941년 지금의 강당을 만들면서 철거되었는데 아마도 그런 사연을 알아챈 왜정의
강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73년 지금 자리에 다시 지어 3.1기념관으로 삼았다.
기념관 앞에는 어디서 업어온 문인석이 홀(忽)을 쥐어들고 서 있으며, 건물 뒤로 담장과 울창
한 수목이 보이는데 그곳이 동궐인 창덕궁이다.


▲  겨울에 푹 잠긴 중앙고 산책로 (신관, 동관 옆길)

▲  눈에 뒤덮힌 중앙중고교 운동장과 새 건물로 이루어진 중앙중학교
운동장을 경계로 남쪽은 중앙고등학교, 북쪽은 중앙중학교로 이루어져 있다.



 

♠  중앙고 운동장에서 바라본 창덕궁 신선원전(昌德宮 新璿源殿)
- 사적 122호


▲  비공개로 사람의 손때마저 희미해진 신선원전

중앙고에 왔다면 꼭 살펴봐야 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창덕궁의 숨겨진 속살인 신선원전이다.
그렇다고 신선원전이 중앙고 안에 들어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만약 그들이 교정에 있었다
면 중앙고가 지금의 자리에 속시원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중앙고를 둘러보고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면 축구장 골대가 있는 너른 운동장이 나온다. 운동
장 북쪽에는 중앙중학교가 있고, 그 뒤에 삼삼하게 우거진 산이 있는데, 이는 와룡산(臥龍山)
으로 북악산(北岳山, 백악산)의 동쪽 끝자락이다. 운동장 서쪽은 가회동(嘉會洞) 주택가로 막
혀있고 동쪽은 철책이 높이 쳐져 있는데, 그 너머로 숲이 펼쳐져 있다.
중앙고 본관이 주는 착시현상을 간파하고 서관과 동관을 거쳐 이곳까지 용케 들어온 사람들도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그 착시현상에 빠져 본관 앞만 맴돌다가 나가버림) 상당수 운동장만 보
고는 발걸음을 돌린다.
운동장 동쪽에 철책이 있고 마땅한 안내문도 없으니 비록 밑에 수상한 기와집들이 널려있어도
그냥 통과하는 것이다. 허나 그런 생각은 중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그 철책 너머가 바로 창덕
궁의 비공개 구역인 신선원전, 의효전이기 때문이다.

서울 도심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중 유난히 통제구역이 많았던 창덕궁, 그가 마음을 고쳐먹고
21세기 이후 후원(後苑) 상당수와 낙선재(樂善齋)를 공개하고 있지만 아직도 숨겨진 부분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 신선원전과 의효전 구역은 여전히 대문을 굳게 잠그며 공개를 꺼리고 있
으며, 그런 사유로 이곳의 존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후원 숲속에서 조용히 속살을 가린 채, 숨바꼭질을 즐기는 신선원전은 중앙고 운동장에서만큼
은 자존심을 곱게 접으며 그 속살을 일정 부분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운동장이 그곳보다 지
대(地臺)가 높기 때문이다. 다만 철책을 통해서 봐야 된다는 한계점이 있다.

중앙고는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중앙고가 창덕궁 궁역(宮域)보다 조금 지
대가 높긴 하지만 담장이 걸쳐진 곳<운동장 부분 제외>만큼은 교내보다 높으며 민가(民家)의
담장도 아닌 지체 높은 궁궐의 담장이라 감히 건드리기도 그렇다. 허나 운동장만큼은 사정이
달라 운동장이 신선원전과 궁궐 담장보다 더 높은 곳에 들어앉아 있다. 상황이 이리 된 것은
1973년 운동장을 넓히고자 축대를 높이 다졌기 때문인데, 철조망을 높이 친 것은 자칫 월담을
하거나 운동 도중 공이 넘어가 그곳의 적막을 깨뜨리는 것을 막고자 함이다.

일개 학교의 운동장이 궁궐 사당보다 높이 떠있다는 것이 다소 신선하고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아무리 국제적인 호구 짓을 일삼다가 거하게 쪽박을 찬 옛 제국의 잔재물이라고 해도 이렇게
까지 해야 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허나 학교 입장에서는 여기 말고는 운동장을 다질 땅
이 없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  신선원전의 옆 모습

▲  신선원전의 두툼한 뒷모습

신선원전 자리에는 원래 대보단(大報壇)이 있었다. 조선은 명(明)의 충직한 제후국(諸侯國)이
라 명이 망하자 옛 명나라의 제왕을 기리고 그들의 은혜를 갚는다는 아주 꼴사나는 이유로 숙
종(肅宗) 때 대보단을 만든 것이다.
대보단에는 고려와 조선을 지극히 경계하고 두려워했던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과 식량을 과하게 보내주어 조선천자라고 손가락질 받았던 신종(神宗), 그리고 명
나라를 완전히 끝장낸 마지막 군주, 의종(毅宗)의 위패를 봉안해 매년 국가 재정을 축내며 제
사를 지냈다.

창덕궁에 선원전(璿源殿)이 지어진 것은 1656년이다. 이때 경덕궁(敬德宮, 경희궁)에 있던 경
화당(景華堂)을 인정전(仁政殿) 서쪽으로 옮겨 제왕의 어진(御眞)을 봉안하여 선원전으로 삼
았는데<이를 구(舊)선원전이라고 부름> 1921년 왜정이 대보단을 때려부시고 덕수궁(경운궁)에
있던 선원전을 이곳으로 옮겼으며, 구선원전과 덕수궁(경운궁) 선원전에 있던 어진과 관련 유
물도 거의 옮겨와 신선원전이라 하였다. (이전의 선원전과 구분하고자 그리 이름을 지었음)

이곳에는 태조에서 순종에 이르기까지 제왕 12명의 어진 48본이 봉안되었으며, 어진을 걸어두
던 12개 감실(龕室)은 1900년대 의궤도설(儀軌圖說)과 일치해 왕실의 전통적인 법식을 충실히
따랐음을 보여준다.
어진은 6.25가 터지자 서둘러 부산(釜山)으로 옮겼지만 대부분 관리소홀로 화마(火魔)의 먹이
가 되었으며, 제례에 쓰였던 의장물 상당수도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남아있던 노부(鹵簿, 제
왕이 나들이할 때 갖추던 의장물) 등 대부분의 유물은 2002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용상(龍床)과 오봉도(五峯圖), 모란이 그려진 병풍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들 유물은
19~20세기 궁중 미술의 경향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감실과 당가(唐家), 용상 등 가구와 시설
물은 주칠(朱漆)이 아닌 황색(黃色)으로 칠했다.

신선원전은 조선 왕실의 마지막 사당이란 점 때문에 여전히 비공개를 고집하고 있다. 하여 이
곳에서만큼은 거의 인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사람의 손때마저 보이질 않는다.
오늘도 변함없이 고요하기만 한 신선원전, 이곳이 과연 시끌벅적한 서울 도심 한복판이 맞는
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거기에 사당이라 그런지 종묘(宗廟)에서 느낄 수 있는 엄숙함도 적지
않게 배여 나온다. 다행히 늦게나마 이곳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년 동안 조사하여 '최후의 진전(眞殿) 창덕궁 신선원전'이란 도록을 발간하기도 했다.

신선원전은 의효전(懿孝殿)과 재실(齋室), 수직사(守直舍), 몽답정(夢踏亭), 괘궁정(掛弓亭),
진설청(眞說廳) 등을 거느리고 있으며 이들은 신선원전 권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창덕궁 후원
에서 신선원전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으며, 원서동 빨래터에 있는 외삼문(外三門)은 이곳의 정
문이다.


▲  신선원전 남쪽에 자리한 의효전(懿孝殿)

신선원전 남쪽에 있는 의효전은 원래 덕수궁(경운궁)에 있었다. 1904년 순종의 왕비인 순명효
황후(純明孝皇后)의 혼전(魂殿)으로 쓰인 적이 있으며, 1921년 덕수궁 선원전을 이곳으로 옮
길 때 덩달아 따라왔다.

사진에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의효전 옆에는 몽답정(夢踏亭)과 몽답지(夢踏池)란 작은 연못
이 있다. 몽답정은 훈련도감(訓鍊都監)의 훈련대장(訓鍊大將)을 지냈던 김성응(金聖應, 1699~
1764)이 지은 것으로 영조(또는 숙종)가 꿈속에서 이 정자를 찾았다고 하여 꿈에서 발걸음을
했다는 뜻의 몽답정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정조도 몽답정을 자주 찾았다고 하는데 창덕
궁과 창경궁의 도면인 동궐도(東闕圖)에는 그의 존재가 나와있지 않아서 원래 이곳에 있던 것
은 아닌 듯싶다.


▲  중앙중고 운동장에서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괘궁정(掛弓亭)

신선원전 구역에서 그나마 제일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존재가 괘궁정이다. 이곳은 돌담이 운동
장 축대 밑으로 막 내려가는 비탈진 곳에 있으며, 중앙고 축구부 휴게실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가장 가깝게 볼 수 있다.

괘궁정은 1849년에 지어진 것으로 훈련도감(訓鍊都監) 북영(北營)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
던 곳이라고 한다. 정자의 이름인 괘궁(掛弓)은 활을 걸어둔다는 뜻으로 왕실에서 종묘만큼이
나 애지중지했던 대보단 바로 옆에 활쏘기 연습을 하는 정자를 만든 것이 조금은 납득이 가질
않는다. 게다가 정자의 모습을 보면 일반 병사들이 연습을 했다기보다는 훈련대장 등 상위 등
급의 무관들이 활 연습을 하거나 군영(軍營)을 바라보는 용도로 사용했을 듯 싶다.
북영의 군사들은 제왕의 호위를 담당하는데, 제왕이 궁궐을 옮기면 북영 본부도 같이 옮긴다.
제왕이 창덕궁에 머무는 경우에는 궁궐에서 다소 구석인 대보단 인근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괘궁정은 달랑 1칸짜리 팔작지붕 정자로 돌로 축대를 만들고 그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워 정자
를 지었다. 얼마나 인적이 없는지 수북히 깔린 눈에 사람 발자국은커녕 새 발자국도 없으며,
정자에 정적만 감도니 언제 사람이 들어왔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언제 찾
아올지 모를 화마에 대비하여 소화기가 한쪽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운동장 철조망을 통해 신선원전 일대를 휴전선 너머의 금지된 땅을 보듯 구경했지만 언
젠가는 쿨하게 해방이 되지 않을까 싶다. (반드시 그래야 됨~) 그때가 되면 까치발처럼 힘들
게 구경해야 되는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 창덕궁 신선원전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1 (창덕궁5길 22-4)



 

♠  서울 도심 뒷통수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  중앙중고 후문과 창덕궁 돌담

창덕궁 돌담이 이어진 중앙중학교 동쪽 길을 오르면 고려사이버대학교가 나온다. 이들은 중앙
중고와 함께 고려대학교 계열로 여기서 길은 2갈래로 갈리는데 왼쪽(서쪽)은 북촌과 삼청동으
로 이어지며, 돌담이 펼쳐진 오른쪽(동쪽) 길이 바로 창덕궁 후원 뒷길이다. 사이버대학교 갈
림길이 중앙중고의 후문으로 정문과 달리 문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동쪽 길로 들어서면 길이 서서히 흥분을 하면서 경사를 이루기 시작하는데, 기와가 얹혀진 창
덕궁 돌담이 궁궐 돌담의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며 오른쪽으로 따라붙는다. 이 돌담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나란히 제 갈 길을 가는데 동쪽으로 갈수록 돌담의 해발
높이도 높아진다. 또한 돌담 너머로 삼삼하게 우거진 후원이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면서 도심
의 속된 기운을 정화시킨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고려사이버대학 동쪽)를 지나면 길이 얼핏 끊긴 듯 보여 '넘어가는 길이
과연 있을까??' 
주저하게 된다. 허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길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
이다.


▲  눈을 뒤집어쓰며 층층이 이어진 창덕궁 후원 돌담 (수구문 주변)

창덕궁 후원을 속세로부터 열심히 가리고자 지형을 이용하여 높이 돌담을 둘렀다. 지형이 낮
은 곳은 돌담 너머로 후원의 속살이 일부 보이기도 하나 보이는 것은 그저 숲밖에 없다.


▲  북악산(백악산)의 수분을 받아들이는 후원 수구문(水口門)

창덕궁 후원에는 연못이 참 많다. 그 연못을 살찌우는 물은 바로 북악산이 베푼 것으로 그가
내린 물이 이 수구문을 거쳐 후원으로 들어가 후원 곳곳에 물을 공급한다. 가뭄이 극성일 때
는 수구문도 흐르는 물이 거의 없어 한가하지만, 비가 많이 내릴 때는 수구문 철창을 녹여버
릴 정도로 물이 들어온다.


▲  석양이 지는 수구문 주변 후원 돌담

▲  후원 뒷길의 전환점(너른 공터) - 여기서부터 좁은 산길로 변한다.

차량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릴 수 있을 정도에 후원 뒷길은 옥류정 입구의 너른 공터에서 끝
이 난다. 여기서 길은 산길로 180도 돌변하며, 차량은 더 이상 바퀴를 들일 수 없다.
너른 공터를 지나면 근래 지은 계단길이 나온다. 그 계단을 오르면 길은 2개로 갈리는데, 오
른쪽은 후원 돌담을 따라 성균관대 내부로 이어지며, 왼쪽은 옥류정과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
점(종로구 마을버스 02번 종점)으로 이어진다.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은 북촌 권역에서 성균관대와 대학로를 빠르게 이어주는 도심
의 상큼한 뒷길로 아는 이가 별로 없고 사람들의 왕래가 적어 한적하고 고즈넉하다. 내가 좋
아하는 길의 일원이기도 한데, 다만 가로등 시설이 부족해 햇님이 퇴근한 이후에는 꽤 어둑어
둑해진다.


▲  옥류정으로 향하는 짧은 산길과 눈에 묻힌 계곡

옥류정으로 인도하는 짧은 산길은 경사가 느긋하다. 그 옆에는 갈증에 시달리고 있는 조그만
계곡이 눈에 묻혀있는데, 그는 북악산의 동쪽을 이루고 있는 와룡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로 적
지 않게 인공이 가해진 점이 다소 옥의 티이다.


▲  옥류정에서 창덕궁 후원 뒷길로 내려가는 길
이렇게 보니 정말 첩첩한 산주름에 푹 묻힌 기분이다. 여기가 과연
서울 도심 한복판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  북악산 와룡산 밑에 자리한 옥류정(玉流亭)

맑은 물이 흐른다는 뜻의 옥류정, 그 어여쁜 이름 마냥 후원 뒷쪽에 숨겨진 오래된 경승지로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1956년에 지어진 8각형 모습의 현대식 정자(亭子)이다. 그래도 후원
뒤쪽에 자리한 위치상 내가 알지 못하는 오래된 사연을 머금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런 것은
일절 없었다. 위치와 정자의 이름이 나그네의 마음을 잠시 설레게 만든 것이다.

이곳은 와룡산 밑으로 바로 동쪽 언덕에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이 있으며, 북쪽 높은 곳에는
와룡공원길이 흘러간다. 와룡산에서 발원한 계곡은 옥류정에서 잠시 묻혔다가 남쪽 연못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데, 정자 이름이 옥류정이 된 것은 북악산(백악산)의 맑은 계곡이 옆구
리에 흘러서 붙여진 이름 같기도 하고, 계곡이 후원 옥류천(玉流川)과도 살짝 이어져 있어 그
렇게 붙여진 것 같기도 하다. 정자 정면에는 푸른 피부로 쓰여진 옥류정 현판이 걸려있는데,
글씨에 생명을 불어넣은 듯, 아주 명필급이다.

옥류정은 숲에 둘러싸인 구석이라 늘 그늘이 머물고 있으며, 주변 경치는 좋지만 와룡공원길
이 바로 뒷쪽이라 차량들의 굉음이 수시로 두 귀를 때린다. 그래도 숲바람과 산바람이 교차하
는 곳이라 한여름에는 더위를 잊기에 좋다.


▲  후원 뒷길 고개
여기서는 창덕궁 돌담을 손으로 더듬으며 갈 수 있는데, 이곳은
창덕궁 후원의 가장 최북단이자 제일 높은 곳이다.


창덕궁 후원 뒷길은 중앙중고 후문(고려사이버대학교)에서 후원 뒷쪽 돌담길을 따라 성균관대
로 이어지는 1리 남짓의 짧은 고갯길이다. 감사원에서 성북동을 이어주는 와룡공원길 밑부분
으로 서울 도심에서 그리 흔치 않은 조촐한 오솔길이다.
이곳은 봄과 늦가을 풍경이 아주 일품으로 걸쭉하게 그려진 수채화의 일부처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돌담 너머로 후원의 청정한 숲이 펼쳐져 있고 돌담길 주변 역시 나
무들이 가득하니 그 아름다움의 농도는 더욱 짙어질 수 밖에 없다.


▲  후원 뒷길 고개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창덕궁의 뒷통수인 후원 뒷길 고개는 돌담 바로 옆구리라 돌담을 만지면서 갈 수 있다. 그 고
개를 넘으면 급하게 펼쳐진 울퉁불퉁한 산길이 나오고, 돌담 너머로 도심의 허파인 창덕궁 후
원이 속살을 비춘다. 숲 너머 동쪽에는 바로 성균관대 건물이 보이는데, 그 산길을 내려가면
돌담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성균관대 서쪽 부분인 법학관과 주차장, 대운동장에 이른다.
서울에 있는 궁궐 돌담길 중 가장 호젓하고 담백한 길을 꼽으라면 나는 이곳을 격하게 추천하
고 싶다. 그만큼 나의 마음을 두고두고 앗아간 길이다.


▲  잊혀진 제국의 궁궐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며 흘러가는
창덕궁 후원 돌담


창덕궁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가리고 있는 후원 돌담은 새로 손질한 부분이 여기저기 있어 오
래된 것과 어색한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 적지 않다. 허나 그것은 세월이 해결해줄 것이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후원은 창덕궁 관람료에 후원 관람료까지 얹혀야 들어갈 수 있는 비싼 공
간으로 성균관대 대운동장 주차장에서 후원의 북쪽을 장식하는 태극정(太極亭) 구역이 보이며
,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北墻門)도 시야에 들어온다.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에 이르면 지금까지 사각사각 밟고 지나간 흙길과 바위길이 밋밋한 시멘
트 길로 바뀌며, 후원 돌담과도 바다 너머의 섬을 보듯 멀어져 간다. 게다가 주차장부터 학교
돌담과 철책이 생기면서 둘 사이에 깊숙한 틈이 생기는데, 이는 성대가 교내를 넓히면서 후원
돌담보다 높게 또는 비슷한 높이로 터를 다지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비슷한 높이인 경
우에는 후원 돌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돌담의 북쪽 언덕을 끊어 멀리서만 보게끔 했으며, 둘
사이에 생긴 틈은 마치 휴전선이나 성곽(城郭) 주위에 두룬 해자를 보는 듯 하다.

이렇게 하여 겨울 한복판에 찾아간 북촌~창덕궁 후원 뒷길 눈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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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4년 2월 2일부터
* 글을 보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구 공감이나 추천을 흔쾌히 눌러주시거나 댓글 몇 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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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심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을 거닐다 ~ 창덕궁 후원 뒷길 (후원돌담길, 송시열집터, 북묘터)

 


' 창덕궁 후원 뒷길, 명륜동(明倫洞) 겨울 나들이 '

▲  창덕궁 후원 뒷길(후원 돌담길)


 

♠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호젓한 뒷길 ~
창덕궁(昌德宮) 후원 뒷길 (후원 돌담길)


▲  층층이 이어진 후원 돌담

북촌의 지붕이라 할 수 있는 감사원(監査院)로터리에서 동쪽 길로 들어서면 고려사이버대학교와
중앙중고교 후문이 나온다. 이들을 지나면 길이 서서히 경사를 이루기 시작하는데, 기와가 얹혀
진 창덕궁 후원 돌담이 오른쪽으로 당당한 모습을 드러내며 펼쳐져 있다.
이 돌담은 사람이 다니는 길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나란히 제 갈 길을 가는데, 그 사이에 소
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이 경계선 역할을 하며, 동쪽으로 갈수록 돌담의 해발 높이도 높아진
다. 또한 담 너머로 삼삼한 숲의 후원이 숨겨진 속살을 드러내며, 도심의 속된 기운을 정화한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입구를 지나면 길이 얼핏 끊긴 듯 보여 '과연 넘어가는 길이 있을까?' 주
저하게 된다. 허나 그런 걱정은 곱게 접어 후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버리고 계속 길을 재
촉하길 바란다. 이곳이 바로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비밀의 숲길(산책로), 창덕궁 후원 뒷길(후
원 뒷길, 후원 돌담길)이다.


▲  후원 뒷길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부근)

▲  북악산(백악산)의 물을 받아들이는 후원 돌담 수구문(水口門)

▲  새롭게 손질된 돌담 - 오래된 돌담 사이에서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넓은 길이 끝나는 곳에 너른 공터가 펼쳐져 있는데, 여기서 정면에 보이는 계단을 올라 오른쪽
으로 가면 나머지 후원 돌담길이 펼쳐지고 (직선으로 가도 상관 없음) 왼쪽으로 가면 옥류정과
성대후문 마을버스 종점이다.

이곳 돌담길은 야트막한 고개로 흙길이라 상태라 조금 울퉁불퉁하다. 돌담 바로 옆구리로 돌담
을 어루만지며 갈 수 있는데, 그 야트막한 고개를 넘으면 바로 내리막 길이 펼쳐지고, 돌담 너
머로 도심의 허파인 창덕궁 후원이 살짝 속살을 비춘다. 숲 너머 동쪽에는 성균관대(成均館大)
건물이 진하게 보이는데, 그 길을 내려가면 돌담과 조금씩 멀어지면서 성균관대 서쪽 부분인 법
학관과 주차장, 대운동장에 이르게 된다.

후원(後苑) 뒷길은 중앙중고 후문을 기준으로 성대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까지 1리 남짓 거리다.
바로 감사원에서 성북동(城北洞)으로 넘어가는 와룡고개 밑부분으로 도심에서 그리 흔치 않은
조촐한 오솔길이다. 겨울이 깊어가는 시점에 와서 그렇지 봄이 무르익은 4월 이후나, 여름의 한
복판, 늦가을의 한복판에 왔더라면 걸쭉하게 그려진 수채화 속의 주인공처럼 아름다운 산길이다.
 
내가 후원 뒷길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2011년 말, 그 이전에는 이런 숲길이 있다는 것도 몰랐
다. 후원 북부에 워낙 통제구역이 많다 보니 와룡고개와 후원 사이 무성한 숲에는 국가의 예민
한 시설들이 숨겨져 있어서 출입이 금지된 것으로 알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호기심이 강한 나
도 그 공간은 애써 들어갈 생각을 못했는데, 알고 보니 언제든 안길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에
내심 놀라고 말았다. 허나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나 외에도 많을 것이다.
한때 비원(秘苑)이라 놀림 받았던 창덕궁 후원은 3살짜리 어린 애도 다 아는 대중적인 명소이지
만 후원 뒷길은 아는 이가 거의 없다. 서울 도심을 두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고갯길, 와룡고개도
사람과 차량의 통행은 많지만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


▲  후원 뒷길 고개 - 여기서는 돌담을 손으로 더듬으며 갈 수 있다.
이곳은 후원의 가장 최북단이자 제일 높은 곳이기도 하다.

▲  성균관대 쪽으로 급격히 내려가는 후원 돌담

창덕궁의 보이지 않는 뒤쪽을 가리며 숨겨진 후원 돌담은 근래에 보수를 하여 무너지거나 낡은
부분은 새로 만들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후원 북쪽 구역은 후원 특별 관람 때 들어갈 수 있
는 비싼 구역으로 대운동장 주차장에서 후원의 북쪽을 장식하는 태극정(太極亭) 구역이 보이고,
후원 북문인 북문(북장문)도 볼 수 있다. (북문과 태극정 주변 숲은 통행 불가)

대운동장 서쪽 주차장에 이르면 사각사각 밟고 지나간 흙길은 밋밋한 시멘트 길로 바뀌며, 후원
돌담과도 바다 너머의 섬을 보듯 멀어져 간다. 게다가 주차장부터 학교 돌담이나 철책이 생기면
서 둘 사이에 깊숙한 틈이 생기는데, 이는 성대가 교내를 넓히면서 후원 돌담보다 높게 또는 비
슷한 높이로 터를 다지는 바람에 그리 된 것이다. 비슷한 높이인 경우에는 후원 돌담에 접근하
지 못하도록 돌담의 북쪽 언덕을 끊어 멀리서만 보게끔 했으며, 둘 사이에 생긴 틈은 마치 휴전
선이나 성곽(城郭) 주위에 두룬 해자를 보는 듯 하다.


▲  성균관대 쪽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후원 뒷길

▲  가파른 길을 내려가면 평탄한 길이 부드럽게 펼쳐진다.

▲  궁궐과 속세의 경계를 가르는 후원 돌담

▲  성대 법학관 앞 후원 뒷길

▲  후원 돌담과 성대 돌담, 그 사이에 생긴 틈
사람이 다가서기 힘든 틈 속에는 낙엽이 가득 널려 그들의 마지막 세상을 열어간다.

▲  후원 담장 너머로 애타게 바라보이는 후원 태극정(太極亭)
태극정 부근에 소요정(逍遙亭)과 옥류천(玉流川)이 있다.

▲  후원의 북문인 북장문(北墻門)

후원 북문(북장문)은 후원 북쪽에서 유일하게 속세로 통하는 문으로 보통 궁궐의 문은 암문(暗
門)이라 할지라도 팔작지붕을 얹혀 문의 형식을 갖추는데 반해, 이곳은 담장 중간에 여닫는 문
짝을 만든 것이 고작이다.

북장문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의 막바지 현장으로, 정변 3일 째(양력 1884년 12월 6일), 창덕궁
에서 고종을 호위하며 머물던 개화당(開化黨)과 왜군은 명성황후가 소환한 청군의 공격에 후원
을 거쳐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왜국공사는 꼬랑지를 내리며 군사를 이끌고 급히 후원 뒷
길을 거쳐 도망쳤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들을 따랐다. 단 홍영식
과 박영교, 그들을 따르는 군인 7명은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로 들어갔다.

※ 창덕궁 후원 뒷길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각역(3-1, 8번 출구)이나 3호선 안국역(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2번
  을 타고 감사원 하차, 고려사이버대학교 쪽으로 쭉 들어간다. 안국역에서 도보 20분
* 성대입구(명륜3가) 정류장에서 성균관대 교내를 거쳐 법학관과 대운동장 쪽으로 가도 된다.
* 후원 돌담은 굳이 넘으면 안되며, 북장문 주변 돌담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명륜동/와룡동


 

♠  명륜동(明倫洞)에서 만난 조촐한 명소들

▲  흥덕사(興德寺)터 표석과 북묘(北廟) 하마비(下馬碑)

명륜동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에서 북서쪽으로 난 '성균관로 17길'을 따라가면 하마비와 함께 흥
덕사터를 알리는 표석이 나란히 반긴다.

내 정보에는 전혀 없는 명륜동 흥덕사는 1401년(태종 1년) 태조 이성계가 옛집 일대를 회사해서
만든 절이다. 세종 때 불교를 선교(禪敎)와 교종(敎宗)으로 통폐합할 때, 교종의 도회소(都會所)
로 삼으면서 크게 성장했으며, 왕실의 사찰로 법등(法燈)을 두툼하게 유지했으나 연산군(燕山君)
시절 폐사되어 그 흔적을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그곳에 있던 불상과 유물은 인근 절로 흩어졌으나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며, 조선 효종 때 송
시열이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그가 살았던 동네란 뜻에 송동(宋洞)이라 불리기도 했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명성황후가 충주(忠州)로 줄행랑을 치면서 답답한 마음에 도중에
서 만난 이씨 무녀(巫女)에게 환궁 시기를 물었다고 한다. 과연 무녀의 말대로 그 시기에 환궁
을 하게 되자 황후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에게 바라는 것이 뭐냐고 물었다. 이에 무녀는 머리
를 조아리며 관우(關羽) 사당을 지어줄 것을 청했고, 그 이듬해 1883년 이곳에 사당을 지어주면
서 방향을 따져 북묘라 하였다. 그가 관우 사당을 요청한 걸 보면 아마도 관우를 중심 신으로
받들었던 모양이다.

관우는 중원대륙의 오래된 허접 소설, 삼국지(三國志)에 주요 인물로 촉나라를 세운 유비(劉備)
의 의제이다. 의형과 의제(장비)를 따라 사내들간의 돈덕한 의리를 남기며, 대륙을 누빈 인물이
나 220년 손권(孫權)의 수하인 여몽, 육손에게 보기 좋게 패해 그가 지키던 형주(荊州) 지역을
모두 잃고 그 자신은 손권에게 처단되고 만다.
이후 관우 신앙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점차 유교에 버금갈 정도로 대륙의 주요 민간신앙
으로 흥행했는데, 그 신앙이 이 땅에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때이다. 조선이 명나라에 원군을 요
구하자 명은 수만의 허접 군사를 보내 갖은 민폐를 아끼지 않았는데, 명나라 군사 중에는 관우
열성 신자가 많았다. 특히 진인(陳寅)이란 장수는 그 신앙이 매우 두터웠으며, 1598년 울산성(
蔚山城)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서울 남대문 밖에 집을 짓고(아마도 선조 임금이 집을 내려준 듯
) 쉬고 있었다. 그때 거처에 관우 사당을 지으니 그 사당이 이 땅 최초의 관우 사당, 남묘(南廟
)가 되겠다.

왜란이 끝나자 명나라 군주, 신종(神宗)은 관우의 혼이 도와 전쟁이 끝난 거라고 격하게 우기면
서 금 4,000냥을 보내 남대문 밖에 관우 사당을 지어달라고 했다. 이제 조선 조정은 그곳에 이
미 사당이 있으니 다른 곳이 좋겠다며 장소를 급히 물색하다가 동대문 밖에 세우게 되니, 이것
이 국립 관우 사당 1호이자 지하철 역에도 있는 그 유명한 동묘(東廟)이다.
17세기 이후 전국 주요 고을에 관우 사당이 지어졌으며, 관우신앙이 민간에도 널리 퍼지면서 민
간신앙의 하나로 조촐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  북묘 하마비

1883년에 명성황후가 지은 북묘는 그 이듬해인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마무리하는 현장이
되면서 크게 이름을 남겼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일을 벌인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당은 왜군과 협조
하여 고종(高宗)과 왕실을 호위하며 창덕궁(昌德宮)에 들어갔으나 청나라군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결국 후원 북장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일이 그르쳤음을 깨달은 김옥균과 박영효, 서
재필(徐載弼) 등은 왜군을 따라 북촌을 거쳐 왜국 공사관(公使館)으로 36계를 치고, 그들과 작
별한 홍영식(洪英植)과 박영교(朴泳敎)는 군사 7명과 고종을 호위하며 북묘에 들어갔으나, 곧
들이닥친 청나라군에게 살해되면서 갑신정변은 막을 내린다.
이후 고종은 1887년, 갑신정변 당시 허벌나게 고생했던 일을 떠올리며 민영환(閔泳煥)에게 글씨
를 쓰게 하여 북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것이 북묘비(北廟碑)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북묘는 1902년 관왕묘(關王廟)에서 관제묘(關帝廟)로 다른 관우사당보다 격이 높아졌다. 하지만
1908년 순종(純宗)의 칙령으로 국립 사당과 제단을 정리하면서 동묘에 싹 통합시켰고, 왜정 때
비어있는 북묘 건물과 토지를 민간에 팔면서 이곳에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과 동광학교(東
光學校)가 들어섰다.
불교중앙학림은 1917년 북묘터에 불교전수학교를 세웠으며, 바로 동쪽에는 수송동(壽松洞)에서
옮겨온 보성고등학교가 뿌리를 내렸다. 1930년 불교전수학교는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인가되었으
며, 1946년 동국대로 이름을 갈아 남산(南山) 북쪽으로 이사를 갔다. 그 빈 자리에는 조양보육
대학이 들어섰고, 1963년에 문을 연 은석초등학교(현재 서울 장안동에 있음)도 그 자리의 일부
를 쓰다가 모두 다른 데로 가면서 현재는 주택가와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 들어섰다.

옛 북묘터를 유일하게 지키고 있는 하마비는 왕릉이나 궁궐, 사당, 향교, 서원 앞에 세우는 비
석으로 그의 피부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쓰여있다. 이는 높고 낮은 사람 모
조리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북묘가 있던 시절에야 지엄한 하마비의 명령이 통했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발로 뻥차고 괴롭혀도 하소연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게다가 국가나 서울시에서 관
리하는 지정문화재도 아니니 찬밥 신세는 더하다.
왕년의 시절을 생각하며 우수에 젖은 그 옆에 역시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흥덕사터를 알리는 표
석이 있어 서로 동병상련의 이웃이 되어준다.


▲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집터에 새겨진 증주벽립(曾朱壁立) 바위글씨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7호

북묘 하마비에서 주택가로 2분 정도 들어가면 길 왼쪽 바위에 또렷하게 새겨진 '증주벽립(曾朱
壁立)' 4자의 바위글씨를 만나게 된다. 이 바위글씨는 송시열이 새긴 것으로 그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 집이 꽤나 넓었는지 동쪽은 북묘 하마비를 넘어 서울과학고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바위에 새겨진 증주벽립이란 '증자(曾子)와 주자(朱子)의 뜻에 따라 높은 절벽이 온갖 비바람에
꿋꿋이 버티듯 의로운 나의 길을 가겠다'
는 아주 의연한 뜻으로 4자의 글씨가 근래에 새겨진 듯
필체가 너무나 선명하고 패기가 넘쳐 흐른다. 그의 바위글씨는 이것 말고도 동쪽에 있는 서울과
학고등학교 교정에 '금고일반(今古一般,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과 '영반(詠盤, 올라앉아
시를 지은 바위)' 등 2개가 더 있다.
송시열이 간 이후, 증주벽립 바위글씨 주변은 송시열이 살았던 동네란 뜻의 송동(宋洞)이라 불
렸으며, 골짜기가 깊고 꽃나무가 많아 숙정문(肅靖門) 남쪽과 더불어 도성 봄꽃놀이 장소로 인
기를 누렸는데, 앵두꽃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1883년에는 이곳에 북묘가 들어섰으며, 왜정 때는 불교전수학교와 보성고등학교가 뿌리를 내렸
다. 이후 여러 학교를 거쳐 주택가로 변하면서 아름다웠던 정취는 죄다 한 토막 전설처럼 사라
지고, 글씨가 새겨진 바위 주변은 물론 그 머리까지 개념 없이 집들이 들어차 보기에도 정말 딱
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명세기 유서가 깊은 바위인데.. 1960년대 이후 무자비하게 자행
된 개발의 칼질이 이 바위에 보기도 흉한 콘크리트 칼을 씌워 죄인 아닌 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이렇게 콘크리트 칼을 강제로 뒤집어 쓴 바위글씨와 문화유산이 서울에 꽤 있음..)
지금은 힘들겠지만 혹여 나중에 서울시나 종로구에서 바위 주변 집들을 모두 매입해 부시고 바
위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개발의 칼질로 다친 부분을 치료한 다음, 주변에 앵두나무를 심고
소박하게 공원(공원 이름은 '송시열공원'이나 '송동공원'이 좋을 듯)으로 닦았으면 좋겠다. 허
나 아마 안될꺼야. 왜 이곳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대한민국이니까.. 만약 지방문화재로 지정되
지 못했다면 저 글씨도 진작에 돌가루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곳의 문화재청 지정 명칭은 원래 '우암구기각자증주벽립(尤庵舊基刻字曾朱壁立)'이었으나 이
름이 무지 어렵다하여 '우암 송시열 집터'로 가볍게 명칭이 바뀌었다.


▲  가까이서 본 증주벽립 바위글씨

※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참으로 기나긴 인생
송시열은 이율곡(李栗谷)의 학풍을 계승한 노론(老論)의 우두머리로 17세기에 조선의 정치와 사
상을 주름잡던 조선 최대의 유학자였다.

그의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 호는 우암(), 화양동주()로 1607년 충
북 옥천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유학과 사상에 쓸데없이 타고
난 재능을 보였으며, 이후 논산 노성으로 집을 옮겨 김장생(金長生)의 배움을 받았다.

1633년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경릉참봉()이 되었으나 바로 그만뒀으며, 1635
년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의 스승이 되어 1년 동안 그를 가르켰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터지자 인조(仁祖)를 호종하여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불이나게 도망쳤
으며, 1637년 1월 인조가 송파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淸太宗) 앞에 항복하자 열받은 나머
지 고향으로 내려갔다.

1649년 봉림이 왕위에 오르자 예전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청나라에 우호
적이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다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허나 김자점이 파직되
면서 다시 관직으로 돌아왔으나 김자점이 홧김에 조선이 청나라 정벌을 준비한다고 청나라 조정
을 들쑤시는 바람에 그와 관련된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청나라의 압박으로 떨려난다.
그래서 낙향하여 후진을 기르다가 1658년 다시 관직에 나가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으며, 우
리나라의 마지막 대외정벌 프로젝트이자 효종의 야망인 청나라 정벌 계획인 북벌(北伐)을 도왔
으나 아쉽게도 이듬해 왕이 승하하면서 북벌 프로젝트는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고 만다.

현종(顯宗) 시절,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 자의대비()>의 복상문제(
)가 발생하자 기년설(: 만1년)을 주장하며 3년 설을 주장한 남인(南人)을 쫓아내 권력을
잡았다. 이렇게 서인(西人)의 우두머리가 되어 좌참찬(左參贊)이 되었으나, 효종의 장지(葬地)
를 잘못 옮겼다는 비난을 받고 다시 낙향을 했고, 1668년 다시 돌아와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
정(左議政) 허적()과의 다툼으로 또 사직했다. 1671년 다시 우의정으로 복귀하고 이듬해 좌
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가 승하하자 다시 자의대비(장렬왕후)의 복상문제가 거론되어 대공설
(: 9개월)을 주장했다. 허나 이번에는 남인(南人)이 주장한 기년설(만1년)이 채택되면서
또 떨려나 평안도 덕원(德源)을 시작으로 여러 곳을 유배투어를 했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떨려나자 중추부영사()가 되었으며, 1683년에
벼슬을 사직하여 봉조하(奉朝賀, 특별 명예직)가 되었다. 이후 남인에 대해 과격한 처벌을 주장
한 김석주(金錫胄)를 지지하여 비난을 많이 받았고, 그 사건으로 아끼던 제자 윤증(尹拯)과 감
정싸움이 격해지면서 서인은 윤증의 소론(少論) 패거리와 송시열의 노론(老論)패거리로 분열되
었다.

이후 관직에서 은퇴하여 속리산 화양동(華陽洞)에 팔자좋게 집을 짓고 제자를 기르다가 1689년
숙종이 희빈장씨(禧嬪長氏)의 소생(후에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를 쌍수 들고 반대
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로 떨려났다. 그리고 국문 때문에 서울로 소환되던 중, 정읍
(井邑)에서 숙종이 내린 쓰디쓴 사약을 1사발 쭉 들이키고 82세의 나이로 강제로 생을 마감했다.
이후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그는 고향인 충북 옥천을 시작으로 충남 논산, 서울 명륜동, 대전 가양동, 속리산 화양동에 집
을 짓고 살았으며, 유교(성리학, 주자학)의 새로운 역사를 쓴 인물로 제자가 참 많았다. 그래서
송자(宋子)로 추앙을 받았으며, 그를 배향한 서원이 전국에 즐비하다. 저서로는 송자대전(宋子
大全), 우암집(尤庵集), 송서습유(),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 등 방대하며, 그의 제자들이 정리하여 세상에 공개했다.

죽음에 임해서 제자들에게 명나라 군주 신종과 의종(毅宗)을 제사지내는 사당을 만들 것을 유언
했는데, 그래서 생긴 것이 그 악명 높은 만동묘(萬東廟)이다. 그가 이런 허무맹랑한 유언을 남
긴 것은 우리의 사촌 민족인 만주족(여진족)의 청나라에 대한 강한 반감도 있겠지만 성리학의
영향으로 사대부와 유생들을 중심으로 명나라에 대한 지극한 꼴통 사대주의(事大主義)가 팽배했
고, 거기에 임진왜란 이후 재조지은(再造之恩)까지 가세하여 명나라의 대한 존재가 경외의 수준
으로 커진 탓이다. 동아시아의 약소국이자 호구 국가였던 신라(新羅)도 당나라에 저렇게까지 하
지는 않았는데, 조선은 명나라를 아버지 이상으로 떠받들었던 것이다.
명이 망하고 구한말까지(심지어 왜정 때까지도) 명의 마지막 군주, 의종의 연호인 숭정(崇禎)을
두고두고 우려먹었으며,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명의 재건을 간절히 바라던 지배층의 문구가 많이
등장한다. 게다가 조선 왕실도 명나라 군주의 사당인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매년 제사를 지
내니 참 할말을 없게 한다. 명이 백제와 고구려, 또는 백제와 부여국(夫餘國)처럼 조선의 조상
나라라면 이해라도 하지만 둘은 전혀 관련도 없다.
어쨌든 정도전(鄭道傳)과 율곡 이이(李珥),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와 중농학파(重農學派) 계
열 등 몇몇 깨어있는 이들을 제외한 조선 지배층의 우둔함은 결국 부국강병을 멀리하고 민생을
외면했으며, 쓸데없이 유교 교리만 앞세워 헛소리만 떠드니 발전은 커녕 점점 퇴보하여 결국은
섬나라 왜국에까지 밀렸다. (조선 중기부터 밀렸다고 보면 됨) 그래서 결국은 아시아의 진정한
호구 국가가 되었으니, 그 휴유증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굴레처럼 남아있으며, 약소국의 비애
를 두고두고 누리게 만든다. 기분 같아서는 저 증주벽립 바위글씨를 깨부시고 싶지만 저 글씨가
무슨 잘못이 있으랴? 게다가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나보다 높은 신분의 존재이니 감
히 해꼬지는 어렵다

※ 송시열집터, 북묘 하마비 찾아가기 (2016년 1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3번 출구), 4호선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8번을
  타고 국민생활관 하차, 또는 혜화역(1/2번 출구)에서 종로구 마을버스 07번을 타도 된다. 국
  민생활관 정류장에서 내려서 왼쪽(종로 08번 하차 기준, 종로07번은 오른쪽임)으로 올림픽기
  념국민생활관 서쪽 담장길(성균관로17길)을 따라 2분 정도 가면 북묘 하마비이며, 여기서 왼
  쪽으로 2분 더 들어가면 송시열집터 증주벽립 바위글씨가 나온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1가 5-99 (성균관로17길 37)


▲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 정문 곁에 있는 송시열집터 표석
송시열 집이 쓸데없이 넓었던 모양이다. 증주벽립에서 여기까지 200m나 되니 말이다.
아니면 표석의 위치가 어긋나있을 수도~~ (위치가 틀린 옛터 표석도 은근히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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