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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서 가까운 고즈넉한 산사, 아름다운 계곡을 옆구리에 차고 있는 ~~ 북한산 진관사 (진관사계곡)



' 북한산 진관사 여름 나들이 (진관사계곡) '

▲  진관사 경내

진관사 독성전, 칠성각

▲  진관사 독성전과 칠성각

▲  진관사계곡 폭포




뜨거운 도가니와 같았던 7월의 끝 무렵, 여름 제국(帝國)의 혹독한 핍박에서 잠시 벗어나
고 싶은 마음에 북한산(삼각산) 진관사계곡과 진관사로 피서 순례를 떠났다.

서울에서 계곡하면 북한산에 안긴 계곡들을 으뜸으로 쳐주는지라 서울에 몇 남지 않은 미
답처(未踏處)인 불광사(佛光寺)계곡으로 가려고 했다. 허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라고 이미
익숙해진 진관사와 진관사계곡으로 마음이 기울면서 오랜만에 진관사로 발걸음을 향했다.
서울 서북부의 중심지인 연신내역에서 일행을 만나 간단히 먹거리를 사들고 서울시내버스
701번(진관차고지↔종로2가)에 의지하여 진관사(삼천사)입구에서 두 발을 내린다. 여기서
전원 풍경이 눈을 시리게 하는 진관길을 7분 정도 들어서니 일주문이 멀리감치 나와 우리
를 맞는다.

진관사입구에서 일주문 사이에는 조선 성종(成宗)의 아들인 영산군묘역(寧山君墓域)과 영
산군의 생모인 숙용심씨묘표(淑容沈氏墓表) 등의 문화유산이 있고, 1968년 1,21사태를 일
으킨 김신조 공비 일당이 거쳐갔던 산길임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으며, 북한산둘레길의 마
실길과 구름정원길이 이곳에서 서로 간판을 바꾸어 제 갈 길로 흘러간다.


 

♠  진관사 입문

▲  진관사의 정문인 일주문(一柱門)

1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진관사도 그 몇 년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새 적지 않은 변화를 보여
주었다. 절에 들어서기도 전에 예전에는 없던 문이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으니 그 문은 바로
일주문이다.
그렇다면 그 문이 있기 전에는 진관사에 그 흔한 일주문이 없었을까? 그건 아니다. 여기서 경내
로 더 들어가면 1970년에 지어진 예전 일주문이 있다. 그 문이 40년 동안 일주문 역할을 하였으
나 2012년 속세 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주차장에 나무로 새 일주문을 만들고 기존 일주문은
해탈문으로 용도를 바꾸었다.

이전보다 더 크게 세워진 일주문은 그 위치가 길의 중앙이 아닌 너무 좌측으로 밀려나 있어 조
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기분을 준다. 그러다보니 산꾼과 중생들 대부분은 절의 관문인 일주문을
애써 지나지 않고 옆으로 지나간다. 문에게 그런 굴욕을 준 이유는 절을 찾는 차량들과 사람들
의 통행 편의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일주문 주변은 2008년 이전까지 조그만 마을이 터를 닦고 있었다. 산꾼과 속세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벌였던 식당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진관사에 갈 때마다 그들이 흘린 음식
냄새에 정신을 잃곤 하였다. 허나 북한산 주변을 정비하면서 마을을 모두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소나무와 갖은 나무를 심었으며, 마을까지 들어왔던 시내버스<7723번, 옛 454-2번>도 진관사입
구로 멀리감치 물러나 거기서 육중한 바퀴를 돌린다.

▲  극락교 밑을 흐르는 진관사계곡
(극락교 우측)

▲  진관사계곡과 나무 탐방로
(극락교 좌측)


▲  진관사 해탈문(解脫門)

일주문을 지나 극락교에서 졸졸졸~♪ 흐르는 계곡에 나의 번뇌를 힘껏 내던지며 흩어진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번뇌야 제발 바람 따라 멀리멀리 가거라~!' 주문을 해도 그 번뇌가 얼마나 무
거운지 떠내려가지도 않고 나를 기다리며 외친다. '잠시 너를 놓아줄테니 좋은 말 할 때 언능
내려와~~!!'

극락교를 지나면 시원스런 팔작지붕의 해탈문이 중생을 맞는다. 이 문은 원래 진관사의 일주문
으로 1970년에 진관이 만들었다. 전통 방식으로 만들지 않고 콘크리트로 기둥을 세우고 지붕만
나무로 한 형태로 한글로 가로식으로 쓰인 '삼각산 진관사' 현판이 걸려있었다. 콘크리트로 기
둥을 삼은 것도 그렇지만 현판 글씨도 전통식이 아닌 너무 현대식이라 옛 절의 면모가 다소 떨
어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진관사도 그 부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 2012년에 새로
일주문을 짓고 기존의 일주문은 해탈문으로 이름을 갈았다.

해탈문을 들어서면 숲에 가려 보이지 않던 진관사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며, 문의 이름처럼
해탈을 해야 하건만 그게 참 쉽지가 않다. 그래서 부처는 아무나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  석종형 승탑(僧塔)과 2기의 빛바랜 비석들

일주문을 지나면 왼쪽에 숲으로 인도하는 오솔길이 보일 것이다. 그 길은 삼천사로 넘어가는 산
길로 그 오솔길로 들어서면 근래에 지어진 때깔이 고운 사적비와 공덕비를 비롯하여 수풀 속에
자리한 석종형 승탑과 비석들이 나란히 3형제를 이루며 서 있는 모습이 두 눈에 들어올 것이다.

3형제 가운데 왼쪽에 자리한 승탑은 '혜월당대선사우성탑(慧月堂大禪師宇性塔)'으로 승탑에 잠
든 혜월당은 20세기에 활동했던 승려이다. 그 옆에 지붕돌을 인 빛바랜 비석은 조선 후기에 세
워진 것으로 정3품 벼슬을 지낸 전사명(全士明)의 석교송덕비(石橋頌德碑)와 자선송덕비(慈善頌
德碑)이다. 비석을 하나도 아닌 2개씩이나 지어줄 정도면 절에 대한 지원이 꽤 상당했던 모양이
다. 이래서 속세나 절이나 돈은 중요하다.

▲  2012년에 세워진 진관사 사적비(事積碑)와
공적비(功績碑)

▲  초가로 이루어진 진관사 찻집
(2015년 이전)


▲  진관사 돌담길 - 길 오른쪽(홍제루 방향)에는 진관사계곡이
속세를 향해 힘차게 물-질을 한다.

 ◀  진관사 은행나무 - 서울시보호수 12-3호
진관사에는 오래된 보호수가 3그루가 있다. 그
중 찻집 옆에 서 있는 이 은행나무는 그 막내로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지정 당시 나이
가 약 115년이라고 하니 그새 30년의 세월이 추
가되어 약 150년 정도 된다. 높이는 26m로 경내
에서 가장 높으며 둘레는 3m이다.


▲  진관사계곡에 걸려있는 세심교(洗心橋)
선암사 승선교(昇仙橋)를 꿈꾸는 것일까?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세심교는 경내와
함월당, 길상원, 공덕원을 이어주는 돌다리로 근래에 지어졌다.

▲  홍제루 정면

경내를 가리고 선 홍제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중층 건물로 절의 속살을 보이기 싫
은지 좌우로 담장을 두르며 경내를 꽁꽁 가리고 있다.
이 건물은 1977년에 진관이 세운 것으로 지붕은 호화롭게 청기와로 꾸몄으며, 아랫 층은 경내로
인도하는 통로로 가운데 계단을 올라서면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가 흔쾌히 모습을 나타낸다.

홍제루 윗층은 교육 공간으로 수륙재를 비롯한 절의 행사 때는 단체 공양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 (예전 진관사 행사에 참여했을 때 여기서 점심공양을 한 적이 있음) 그리고 홍제루를 들어서
오른쪽으로 가면 커피 자판기와 두 다리를 쉴 수 있는 쉼터가 있다.


▲  홍제루 뒷면 (경내)

▲  홍제루 앞에 자라난 오래된 느티나무

홍제루 앞에는 오랜 세월을 머금은 느티나무 2
그루가 서로를 보듬으며 앞다투어 그늘을 드리
운다. 나무가 뿌리를 내린 위치가 평평한 곳이
아닌 계곡변 90도 벼랑이라 어떻게 저런 험난한
자리에서 어엿하게 자라날 수 있었는지 그저 신
기할 따름이다.
이들 느티나무는 1982년에 서울시 보호수 12-4,
12-5호로 지정되었는데, 지정 당시의 저들 나이
가 230년이라고 한다. 그새 30년에 세월이 얹혀
졌으니 나이는 260년 정도 된다. 높이는 각각
18m, 19m, 둘레는 3.1m, 2.5m이다. 둘이 워낙
따닥따닥 붙어있어 보호수 안내문이 아니면 누
가누군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  석조 옆 화단에 심어진 옛 주춧돌과 석물들
6.25때 파괴된 옛 건물의 주춧돌 3개가 화단에 벌러덩 누워 있다. 어느 건물을 받치던
주춧돌이었을까? 받쳐들 상대를 잃은 주춧돌의 허전한 대머리를 달래주려는 듯
합장인을 선보인 지장보살(地藏菩薩)과 거북이상을 그들 머리에 두었다.

▲  진관사 석조(石槽)
석조에는 북한산이 베푼 물로 조그만 바다를 이룬다. (가뭄 때는 맨바닥을 드러냄)
허나 속세의 때를 탔는지 식수 불가가 되어 석조에 고인 물은 그야말로
그림의 물이 되었고, 석조는 경내를 수식하는 장식물이 되고 말았다.
그럼 여기서 잠시 진관사의 내력을 짚어보도록 하자~~


※ 서울 서북부 제일의 고찰, 수륙재의 성지(聖地)인 북한산 진관사(津寬寺)
① 고려 현종의 이야기가 서린 진관사의 창건 설화
북한산(삼각산) 서쪽 자락에 포근히 둥지를 튼 진관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조계사의 말
사(末寺)이다. 조선시대부터 불암산 불암사(佛巖寺), 삼성산 삼막사(三幕寺), 북한산 승가사(
僧伽寺, ☞ 관련글 보러가기)와 더불어 서울 근교 4대 명찰의 하나로 명성을 누렸으며 서울 서
북부에서 가장 크고 잘나가는 절이었다.

진관사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고려 8대 제왕인 현종이다. 그는 자신을 구
해준 진관대사(津寬大師, 진관조사)를 위해 이 절을 지어주었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워
낙에 유명한 이야기라 사극이나 영화 소재로 써도 손색은 없을 것이다. (이미 사극 '천추태후'
에서 1번 써먹었음)

현종(992~1031, 재위 1009~1031)은 고려 태조(太祖)의 아들인 안종 왕욱(安宗 王郁, ?~997)과
태조의 손녀인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의 소생으로 이름은 왕순(王詢)이다. 헌정왕후는 태조
의 아들인 대종 왕욱(大宗 王旭, ?~969)의 딸로 그녀의 남편인 안종과 한자만 다를 뿐 이름은
같으며, 헌정왕후도 엄연한 왕씨이나 고려 황족(皇族)들은 족내혼(族內婚)을 너무 선호한 탓에
공주를 비롯한 왕족 여인들은 보통 외가의 성을 땄다. 그래서 외가인 황보<皇甫, 황해도 황주(
黃州) 지역 세력가>씨를 칭하게 된 것이다.

헌정왕후는 사촌인 경종(景宗, 재위 975~981)에게 시집을 갔으나 981년 경종이 붕어(崩御)하자
사저로 나와 살던 중, 숙부가 되는 안종과 친해지게 된다. 그들은 숙부와 조카 사이임에도 그
경계를 넘어섰고, 그 결과 현종(왕순)을 낫게 되었으나 극심한 산고(産苦)로 죽고 만다.
그의 오라버니인 성종(成宗)은 그 책임을 물어 안종을 멀리 경상도 사천(泗川)으로 귀양보냈는
데, 나중에 왕순을 내려보내 직접 기르도록 했다. 하지만 안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하고 997년
거기서 숨을 거둔다.
이후 성종은 왕순을 다시 불러 궁중에서 길렀고, 성종이 997년 붕어하자 왕순의 사촌인 목종(穆
宗)이 제위에 오른다. 목종은 경종과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왕순의 큰 이모)의 아들로 그
가 제위에 오르자 왕후는 그 이름도 유명한 천추태후(千秋太后)를 칭하게 된다.

천추태후는 김치양(金致陽)이란 오랜 정인(情人)이 있는데, 그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아 부부행
세를 하기에 이른다. 유약한 목종은 특이하게도 동성연애를 빠져 점점 병약해지고 아들을 포기
한 태후와 김치양은 그들의 아들을 제위에 올리고자 안간힘을 쓴다. 마침 목종은 아들도 없었으
므로 그가 죽으면 별탈없이 김씨가 제왕이 될 수도 있다. 허나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친조카
인 왕순의 존재였다.

김치양은 고려 왕실을 뒤엎고 새 왕실을 세우려는 욕심 때문인지 왕순을 죽이고자 혈안이 된다.
그래서 그를 숭경사(崇慶寺)에 보내 죽이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진관사의 전신(前身)
으로 여겨지는 북한산 신혈사(新穴寺)로 쫓아내 비밀리에 자객을 보냈다.
당시 신혈사에는 진관대사가 머물고 있었는데, 왕순의 위급함을 눈치채고 불단(佛壇) 밑에 굴을
파 그를 숨기는 등 3년 동안 지켜주면서 자객은 결국 헛탕만 치고 만다. 젊은 나이에 드러누운
목종은 왕순을 후계자로 정하며 대량원군(大良元君)에 봉해 즉시 그를 데려오도록 했다.
그래서 왕순은 무사히 개경(開京)으로 돌아왔고, 1009년 북쪽에서 반란을 일으킨 강조(康兆)에
의해 제위에 오른다.

1010년 요나라(거란) 성종(成宗)이 강조의 난을 따진다는 이유로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
어왔다. 초반에 강조가 검차(檢車)를 이용하여 꽤 선전을 했으나 자만으로 인해 크게 패하였고,
그 여세로 개경이 함락되자 현종은 눈물을 머금고 나주(羅州)까지 먼 길을 몽진했다. 1011년 거
란군이 토벌되어 개경으로 환궁을 했는데, 바로 그 해에 진관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인근에 절을 지어주고 그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했다.
절은 1012년 가을에 완성되었으며, 대웅전이 10칸, 동/서 승당(僧堂)이 각각 30칸, 청풍당(淸風
堂)과 명월요(明月寮)가 10칸, 기타 일주문, 해탈문, 종각 등 규모가 상당했고, 불상과 온갖 물
품까지 현종이 하사했다. 그리고 진관조사를 국사(國師)로 삼았다.
이렇게 제왕의 어려웠던 시절을 구해준 깊은 인연으로 태어난 진관사는 고려 왕실의 지원을 두
고두고 입으며 크게 승승장구한다.

② 딱 천년 묵은 진관사, 창건 이후 지금까지의 과정
1090년 선종(宣宗)은 남경(南京, 서울 도심)에 행차하면서 진관사에 친히 들려 오백나한재(五百
羅漢齋)를 열었다. 그리고 1099년 숙종(肅宗)이, 1110년에는 예종(睿宗)이 남경을 순행하는 과
정에서 들리면서 여러 보물을 하사했다. 당시 진관사는 승가사, 장의사(長義寺)와 더불어 서울
에서 가장 잘나가는 절이었다.

1392년 천하가 조선으로 강제로 바뀐 이후에도 진관사의 명성은 여전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를 뒤엎으면서 마구잡이로 죽인 고려 왕족과 백성들의 혼을 달래고 민심 안정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수륙재(水陸齋)를 계획한다. 그래서 서울과 가까운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 사찰 가운
데 마땅한 장소를 물색했는데, 진관사가 딱 적합하다는 보고에 따라 재를 지낼 수륙사(水陸社)
를 짓게 했으며, 1397년 건물이 완성되자 친히 낙성식에 참여하여 거하게 수륙재를 여는 한편,
권근(權近)에게 '수륙사 조성기(造成記)'를 작성토록 했다. 그 인연으로 진관사는 수륙재의 중
심 도량이 되어 변함없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때 지어진 수륙사와 부속건물은 59칸 규모로 상/중/하단의 3단을 기본 구조로 하여 중/하단에
회랑(回廊)을 설치하는 등, 자못 위엄이 있는 규모였다.

참고로 수륙재는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물과 땅을 헤매는 고혼(孤魂)들을 천도하는 일종의 천도
재로 영산재에 비해 공익성이 큰 불교의 주요 행사이다. 양나라 무제(武帝, 502~549) 때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며, 이 땅에서는 940년(고려 태조 22년) 12월에 처음 시작되었다.

1413년 태종은 일찍 죽은 4번째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해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
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해 경비로 쓰게 했다. 그 이후 매년 1
월 또는 2월 15일에 국가 주도의 수륙대재가 열리면서 왕족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구름처럼 몰
려와 재에 참여했고, 서울 근교 제일의 사찰로 굳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421년에는 세종(世宗)이 부모인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고자 재를 지냈는데, 이때부터 왕실의
각종 재를 지내는 역할까지 담당하게 된다. 또한 1442년 세종은 집현전(集賢殿) 학사들의 공부
를 독려하고자 독서당(讀書堂)을 경내에 설치해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등 많은 문인
들이 이곳에서 머리를 싸매고 독서를 했다.

1452년에 중수를 벌였고, 1463년 화재로 건물 일부가 타버리면서 1470년에 중건했다. 이후 별탈
없이 지내오다가 1854년과 1858년에 중수했으며, 1879년에 당두화상(堂頭和尙) 경운(慶雲)이 34
칸을 지었다. 그리고 1908년 송암(松庵)이 경내에 오층석탑을 세웠으며, (경내 서쪽 외곽에 있
음) 명부전에 불상과 시왕탱을 개금했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짓고, 자신의 토지를 절에 기
증해 '백련결사염불회'의 자원으로 쓰게 했다.

1950년 6.25전쟁 때 공비 토벌 작전 과정에서 나한전과 칠성각, 독성전을 제외하고 모두 파괴되
는 비운을 겪었으며, 초라한 몰골로 있던 것을 1963년 비구니 최진관<진관(眞觀)>이 이곳 주지
로 들어와 절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비록 살아남은 칠성각 등 3동을 제외하고는 예전 가람과는
다르게 중창되어 아쉬움이 다소 있으나 진관의 노력으로 예전 규모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으며,
1980년 대웅전과 주요 건물의 기와를 청기와로 도배했다. 그리고 1992년 공양간과 요사를 새로
지었으며, 1996년 코끼리유치원, 2007년에 사회복지법인 진관 무위원을 세워 어린이 교육과 사
회복지, 포교에 나섰다.

2009년에는 칠성각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3.1운동 시절 승려 백초월이 사용했던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이 발견되어 매스컴을 크게 흔든 바가 있으며 이때쯤 수륙사터를 발굴 조사하였다.
2012년에는 일주문을 새로 지었고, 2015년에는 경내 북쪽을 싹 밀어 산사음식연구소, 보현다실
등 사찰 음식과 전통 찻집, 템플스테이를 다루는 건물을 요란하게 지어올려 절의 사세를 한껏
뽐내었다.
또한 진관의 주도로 오랫동안 잊혀진 옛 수륙재(국행수륙대재)를 복원하고자 동분서주하여 1982
년 자운율사의 의해 힘들게 복원에 성공, 이후부터 매년 윤년 윤달에 수륙재를 봉행하고 있으며
, 2012년부터는 매년 여름과 가을에도 개최하여 수륙재의 전통을 힘차게 이어나가고 있다. 그렇
게 진관사를 반석 위에 올렸던 우리나라 비구니의 원로, 진관은 바로 얼마 전 2016년 7월 3일
한낮에 88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어 영원히 진관사에 깃들게 되었다.

③ 진관사의 현재
경내에는 법당(法堂)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독성전, 칠성각, 나한전, 나가원, 요사, 서
별원, 홍제루, 범종각 등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세심교 건너에도 함월당과 길상원, 공덕
원 등의 여러 건물이 있어 도합 약 20동의 건물을 지니고 있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칠성각에서 발견된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등록문화재 458호)를 비롯해 칠성
각과 독성전, 석불좌상, 독성도, 소조3존불상, 소조16나한상, 산신도, 칠성도, 수륙무차평등재
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23호) 등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간직하고
있어 절의 오랜 내력을 대변해준다. 또한 이곳의 자랑인 수륙재는 '진관사 수륙재'란 이름으로
국가 무형문화재 126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100~200년 묵은 보호수 3그루가 있어 고색의
무게를 조금 보탠다.

서울 도심과 가까운 산사로 울창한 숲속에 묻혀있으며, 멋드러진 진관사계곡을 옆에 끼고 있어
경관도 일품이라 세종이 왜 이곳에 독서당을 지었는지 알만하다. 첩첩한 산골에 자리하여 산사
의 내음도 진하게 풍기고 있으며, 비구니 사찰이나 경내가 깨끗하고 정갈해 어수선한 마음마저
싹둑 가다듬게 만든다. 속세에서 나를 잠시 지우고 싶은데 멀리 가기가 힘들 때 찾아와 안기고
싶은 곳으로 한여름에 오면 절을 둘러보고 윗쪽 계곡에 올라가 피서를 즐기면 아주 극락이 따
로 없다.

※ 진관사 찾아가기 (2016년 8월 기준)
* 지하철 3/6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에서 701, 7211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
  입구)에서 하차하여 도보 15분
*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3번 출구)에서 7723번 시내버스를 타고 하나고(삼천사/진관사입구)에
  서 하차
* 연신내역 3번 출구 밖 하나은행 앞에서 진관사 셔틀버스 이용. 평일은 1일 4회, 행사가 있는
  날과 주말은 9회 운행한다. (8시부터 10시대까지 운행)
* 진관사 일주문 주변에 주차장이 있으며 홍제루까지 차량 접근 가능

★ 진관사 관람정보
* 진관사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주중이나 주말에 1박 2일을 머
  무는 휴식형(14시부터 다음날 10시까지)과 불교문화 체험형, 단체형, 어린이 템플스테이. 청
  소년 템플스테이 등이 있으며, 예불과 참선, 다담(茶談), 발우공양, 108배, 안행(安行), 연꽃
  등 만들기, 사찰음식 체험 등을 제공한다. 1박2일 가격은 성인 7만원, 청소년과 어린이는 5만
  원이며, 템플스테이 신청과 자세한 정보는 진관사 홈페이지를 참조한다.
  (문의 ☎ 02-359-8410)
* 진관사 홍제루에서 계곡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폭포가 등장하며, 여기서부터 진관사계곡의 숨
  겨진 절경이 마음을 앗아간다. 서울에서 제법 잘생긴 계곡이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또한 진
  관사계곡 산길은 2015년 이후 길이 다소 정비되었다고 하나 바위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
  심을 기해야 되며, 탐방로에서 계곡까지는 대부분 바위를 타고 내려가야 된다.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354 (☎ 02-359-8410)
* 진관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칠성각에 봉안된 귀여운 석불좌상과 칠성도


 

♠  진관사 대웅전 주변

▲  서쪽을 바라보고 선 대웅전(大雄殿)

홍제루를 들어서면 바로 정면으로 법당인 대웅전이 마주한다. 정면 5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 건
물로 1965년에 진관이 세웠으며, 1980년에 그 비싸다는 청기와를 입혀 화려함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불단에는 1966년에 조성된 석가/미륵/제화갈라보살상을 중심으로 1967년에 제작된 삼신불
후불탱, 신중탱(1967년), 오여래탱(1990년), 범종(1966년), 1934년에 그려진 현왕탱(現王幀) 등
이 내부를 눈부시게 수식한다.

대웅전 뜨락에는 푸른 잔디가 정갈하게 깔려져 입혀져 있고, 건물 바로 앞에 석등(石燈) 2기가
자리한다. 허나 법당 앞에 으례 있는 석탑은 없는데, 원래는 1908년에 세운 5층석탑이 하나 있
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지금은 경내 구석에 몰래 찌그러져 있으니 아마도 풍수지리(風水地理)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곳이 계란을 상징하는 지형인데, 탑을 세우면 계란이 자칫 깨질 수 있
어서 그런듯)


▲  대웅전 불단을 지키는 석가/미륵/제화갈라보살

법당의 3존불이면 보통 중심 불상과 협시불(夾侍佛)을 짧은 간격으로 배치하는데 반해, 이곳은
서로가 조금씩 거리를 두며 독자적인 모습으로 앉아있다. 이들은 1966년에 조성된 것으로 가운
데 앉아있는 불상이 불교의 1인자인 석가불이고, 그의 왼쪽은 미래의 부처로 일컬어지는 미륵보
살(彌勒菩薩), 오른쪽은 과거불인 제화갈라(提華褐羅)보살로 이들은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수기3존불(授記三尊佛)이다.
가운데에 자리한 석가불을 빼고는 모두 보살(菩薩)의 신분이라 탐이 날 정도로 화려한 보관(寶
冠)을 쓰고 있으며, 다들 온화한 미소로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격려한다. 그리고 그들 뒤에
는 각각 후불탱화가 걸려있는데, 이들은 1967년에 제작된 것으로 석가불 뒤에는 비로자나불(毘
盧舍那佛)을 담은 후불탱이, 미륵보살 뒤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이 담긴 후불탱화, 제화갈라
뒤에는 석가모니 후불탱화가 걸려있다.


▲  진관사 나가원(那迦院)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진 대웅전 뜨락 우측에는 나가원이 있다. 정면으로 요사인 동별당을 마주
하고 있는 나가원은 한때 경내에서 가장 큰 건물로 1972년에 진관이 지은 것이다. 정면 7칸, 측
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요사 및 대중방(大衆房), 종무소(宗務所)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신
도를 수용하는 대중방에는 1972~73년에 조성된 석조관음보살좌상과 아미타후불탱화가 있다.


▲  나가원 뒷쪽(종무소 쪽)에 놓인 맷돌들
조선 후기와 왜정 때 쓰인 맷돌 3형제가 어처구니를 상실한 채, 뜻하지 않은
장식물이 되어 쓸쓸한 노년을 보낸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건물이든 뒷전으로 밀려난 모습은 쓸쓸하기 그지 없다.

▲  진관사 동정각(動靜閣)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아련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의 보금자리로 1975년에 지어졌다.
종은 1974년에 조성된 것으로 그 흔한 범종각이 아닌 고요함을 흐트린다는 뜻의
동정각을 칭하는 점이 참 이채롭다.

▲  대웅전과 나가원 뒷쪽

▲  수륙재 행사 천막에 정면이 가려진
명부전(冥府殿)

대웅전 좌측에 자리한 명부전은 1968년에 지어진 것으로 1996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어졌
다. 지붕에는 푸른 기와가 입혀져 화려함을 더하며, 내부에는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10왕, 판관,
사자, 무독귀왕(無毒鬼王), 도명존자(道明尊者) 등 명부(冥府,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 내부를 사진에 담으려고 했으나 마침 비구니 1명이 안에서 염불을 중얼거리고 있어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  진관사의 보물창고 ~~ 나한전, 독성전, 칠성각

▲  왼쪽부터 독성전, 칠성각, 나한전

진관사에 왔다면 꼭 봐야되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경내 좌측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나한전과
칠성각, 독성전 3동(나한전 구역)이 그것이다. 이들은 진관사를 잿더미로 몰아넣었던 6.25 때
도 살아남은 진관사의 옛 건물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지어진 것들이다. 겉보기에는 청
기와로 번쩍이고 덩치도 큰 대웅전이나 나가원, 홍제루에 비해 보잘 것도 없고 구석에 몰려들
있어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정말 지나치기 일쑤다.
하지만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명언이 있듯이 진관사의 지정문화재(무형문화재 제외) 가운
데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를 빼고는 모두 이들 건물 안에 담겨져 있다.
게다가 자리 이동도 없이 예전의 가람배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진관사의 예전 모습을 더듬
는데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대웅전과 나가원 등은 대충 둘러봐도 되니 나한전 구역 건물들은 내부까지 꼭 살펴보도록 하자.
그래야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독성전과 칠성각은 서울에 있는 칠성각/독성각/산신각 계
열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  진관사 나한전(羅漢殿)

나한전 구역에서 유일하게 청기와를 눌러쓴 나한전은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필체의 힘이 넘쳐보이는 명부전 현판은 1886년에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이 쓴 것이라고 전하며, 내부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한 소조3존불을 비롯해 소조
16나한상, 영산회상도, 16나한도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나한전 소(塑, 소조) 3존불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3호
후불탱화로 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5호


나한전 불단 유리 안에 소중히 봉안된 소조 3존불은 흙으로 빚어서 도금을 입힌 것으로 가운데
불상은 석가불이고, 좌우에 보관을 쓴 이들은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다. 대웅전 불단에 봉
안된 수기3존불(授記三尊佛)과 같으며, 석가불은 통통한 얼굴에 좀 경직된 표정이지만 좌우 보
살은 온화한 표정으로 살짝 미소가 드리워져 있다.
이 3존불은 진관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진다. 서울 토박이 불상 가운데서도 나이가 많은 편으로 얼굴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그들이
입은 법의(法衣)는 통견의(通肩衣)로 옷주름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3존불상 뒤에 걸린 영산회상도는 부처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1884년 상궁(尙宮)들의
시주로 진철(震徹)이 그린 것이다. 구도는 중앙에 부처가 있고, 그 옆에 4명의 보살과 사천왕(
四天王), 6명의 제자를 배치했는데, 빈 공간에는 채운(彩雲)을 가득 채워 여백이 없다.
부처는 얼굴이 양감(量感)있게 표현되었고, 몸을 꽤나 단련한 듯, 힘찬 모습이다. 법의는 통견
으로 두 손은 아미타수인(阿彌陀手印) 비슷한 수인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제스쳐는 조선 후기
불화에서 많이 나온다. 그리고 부처 좌우에는 문수/보현보살이 큰 연꽃을 들고 서 있고, 사천
왕이 각자의 장비를 들고 그들을 호위한다. 또한 상체만 드러내며 합장인을 보이고 있는 제자
가 좌우에 3명씩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횡축의 화면과 단아한 형태, 밝은 주조색 등 19세기 후반 불화의 양식을 잘보여주고
있으며, 그 당시 서울 지역 불화의 베스트급으로 꼽힌다.



▲  나한전 소(塑) 16나한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4호
16나한도(十六羅漢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6호


3존불 좌우에는 부처의 핵심 제자인 16나한상과 16나한도가 자리해 있다. 불단 좌우에 각각 8
구의 나한상이 16나한을 이루고 있고, 그외에 제석상(帝釋像) 1구, 사자상(使者像) 1구, 활력
이 넘치는 인왕상(仁王像) 2구 등 모두 20구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흙으로 빚어 색을 입힌 것으로 진관사를 찾는 수많은 중생처럼 제각각의 모습이라 어느
하나 같은 얼굴, 같은 포즈가 없을 정도로 개성이 넘친다. 게다가 자세나 얼굴 표정도 어느 양
식에 얽매이지 않은 사실적이고 해학적으로 묘사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서울, 경기도 지역의
나한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유물로 가치가 높다.

16나한도는 나한도 4폭과 제석신중도(帝釋神衆圖) 1폭, 사자신중도(使者神衆圖) 1폭 등 총 6폭
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한도(羅漢圖)는 4명의 나한이 산수를 배경으로 시자(侍者)와 동자를 거
느리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제석신중도와 사자신중도는 나한도 좌우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화면
을 2개로 나누어 구름 속에 있는 제석과 신중, 사자와 신중(神衆)을 그렸는데 근대적인 음영법
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그림은 영산회상도와 마찬가지로 상궁의 시주로 1884년에 진철(震徹), 축연(竺衍) 등이 그
린 것으로 세밀한 필선(筆線)과 정교한 문양 표현, 금니(金泥) 사용 등이 주목된다. 그리고 나
한도에 나와있는 경물(景物)은 당시에 유행하던 민화풍으로 그려져 있어 그 시절 회화 연구에
착한 자료가 되어준다.


▲  진관사 독성전(獨聖殿)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4호

칠성각 옆에 자리하며 나한전을 바라보고 있는 독성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아주 단촐한 맞
배지붕 건물이다. 부처의 제자로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의
보금자리로 2006년까지만 해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독성각이라 불렸으나 진관사에서 이 건물
에 대한 기대감이 큰지 각(閣)에서 전(殿)으로 등급을 높이면서 독성전이 되었다.

이 건물은 1907년에 지어진 것으로 상궁 4명과 부부 2쌍이 돈을 대주었다. 당시에 만들어진 독
성전 공덕기(功德記)에 시주한 사람과 공사 참여자 명단이 기재되어 있는데, 6.25때 운이 좋게
살아남았으며, 1969년에 진관이 중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그만 내부에는 소조독성상을 비롯해 독성도, 산신도 등이 있는데, 모두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독성상과 독성도는 유리로 봉해져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다.


▲  소(塑) 독성상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1호
독성도(獨聖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2호

▲  작고 귀여운 소 독성상의 위엄

독성전의 주인장인 독성상은 흙을 빚어서 만든 것으로 인형처럼 귀엽고 아담한 모습이다. 눈썹
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있고, 입술은 살짝 다물고 있으며, 입술 위에 엷은 수염이 있다.
눈은 양쪽으로 길게 뜨고 있고, 표정은 동자승을 모델로 만든 듯, 천진난만해 보인다. 이는 독
성의 존재가 백성들에게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왼쪽 어깨에는 옷을 고정한 금구장
식(金具裝飾)이 있으며, 몸통에 비해 얼굴이 좀 크고 무릎이 매우 낮아 신체가 다소 길어 보인
다.
19세기(이르면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고색이 묻힌 독성상이 꽤 많은 것 같지만 정작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는 거의 없어 진관사의 독성상은 꽤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당시 독성
상의 특징과 조각 수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지방문화재자료의 지위를 얻었다.

독성상 뒤에 걸린 독성도는 독성을 비롯하여 시자(비서)와 동자 등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와 인연이 깊은 천태산으로 보이는 돌봉우리가 여러 개 보이고, 동자 옆에는 소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그림 폭이 2m에 이르러 우리나라 독성도(독성탱) 가운데 제법 큰 편에 속한다. 이 그
림은 1907년 상궁 이씨와 홍순모(洪淳謨)의 시주로 경기도에서 활약하던 화승(畵僧) 경선당 응
석(慶船堂 應釋)이 그린 것으로 채색이 전체적으로 탁해 보이며, 같은 독성인데도 그림에 나온
독성과 앞에 있는 독성상의 모습이 너무 차이가 나 마치 독성의 한참 때 시절과 늙은 시절을
사이좋게 담은 것 같다.


▲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9호

진관사는 독성전과 칠성각을 갖추고 있지만 유독 산신의 건물인 산신각을 갖추지 않았다. 그래
서 독성전 한쪽에 조촐하게 그의 공간을 마련했다.
산신도에는 유난히 빨간 옷을 입은 산신(山神)과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데, 민
화에 나오는 호랑이 이상으로 너무 익살스럽고 귀여워 정말 쓰다듬고 싶다. 그의 긴 꼬랑지는
산신 왼쪽에서 살랑살랑 춤을 춘다. 산신은 인심 좋은 구멍가게 노공(老公) 같으며, 산신도(산
신탱)에 기본으로 등장하는 산은 나와있지 있고, 배경은 그냥 여백으로 남아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자세한 제작시기와 시주자, 화승에 대한 정보는
아쉽게도 전해오지 않는다.


▲  칠성각(七星閣)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3호

독성전 옆에 자리한 칠성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조촐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1911년에 지어
진 것으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서울, 경기도 지역의 사찰 건물에서 많이 나타나는 건
축 양식인 좌/우/후면을 벽돌로 처리한 화방벽(火防壁)이 설치되었다.
내부에는 석불좌상과 칠성도, 명호 스님 초상화 등이 있으며, 2009년 5월 칠성각을 해체/보수
했을 때 태극기와 독립신문류 등이 발견되어 속세를 한참 떠들썩하게 했다. 


▲  칠성각 석불좌상(石佛坐像)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10호
칠성도(七星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7호

▲  귀여움이 묻어난 칠성각 석불좌상의 위엄

유리로 봉해진 칠성각 불단에는 아기부처를 닮은 아주 조그만 불상이 앉아있어 보는 이로 하여
금 마음의 편안함을 안겨준다.
이 불상은 옥석(玉石)으로 만든 것으로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으며, 1969년에 진관이 개금(改金
)을 입혔다. 불상의 크기를 봐서는 천불상(千佛像)의 일원으로 조성되었다가 따로 떨어져 나온
것으로 여겨지며, 이런 불상은 서울과 경기도 북부, 강원도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불상의 머리는 나발로 머리 윗부분에는 육계(肉髻, 무견정상)가 완만하게 튀어나왔으며, 앳되
고 귀여운 인상으로 내가 친견한 불상 가운데 제일 편안하고, 귀여우며. 근엄하지도 무섭지도
없는 온화한 표정이다. 불상의 양손은 손의 바깥부분이 보이도록 다리에 대고 있는데, 그 의미
는 모르겠다. 저건 도대체 무슨 수인(手印)일까?

석불좌상 뒤에 걸린 그림은 칠성도로 1910년 춘담(春潭), 범천(梵天) 등이 그린 것이다. 그림
중앙에는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심으로 칠성(七星)과 성군(星君) 등이 있다. 청련화(靑
蓮花) 위에 앉은 치성광여래는 붉은 법의를 입고 오른손은 가슴 부위에, 왼손은 무릎 위에서
금륜을 얹고 있으며, 그 좌우에는 7구의 칠성이 여래를 향해 합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밑에
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이 여의(如意)를 들고 있는데, 일광은 붉은 해를,월광은 하얀 달이 그려진 보관(寶冠)을 쓰고 있다. 그 옆에는
도교식으로 표현된 칠원성군(七
元星君)이 홀을 들고 서 있다.

이 그림은 두터운 설채법(設彩法), 붉은 적색의 주조색(主調色)에 감색과 녹색이 조금 섞인 채
색, 등장 인물 얼굴에 칠해진 두터운 호분(胡粉) 등의 표현에서 20세기 초반 불화 양식을 보여
주고 있으며, 조성 연대와 그림을 그린 승려 등이 나와있고 서울에서 보기 드문 칠성도(七星圖
)의 작례(作例)로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  명호스님 초상(肖像)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48호

석불좌상과 칠성도 옆에는 독특하게도 승려의 초상(영정)이 걸려있다. 초상의 높이는 106.2㎝,
폭 83㎝로 그림 왼쪽 상단에 세로로 '影入山水圖 數珠看經(영입산수도 수주간경)~'으로 시작되
는 4줄의 찬시(讚詩)가 있고, 오른쪽 상단에는 한글로 '인사졀명호불영뎡'이란 문구가 있어 인
수사(또는 인사사)에 있던 명호의 영정으로 여겨진다.
그림 중앙에는 경상(經床)을 앞에 두고 정면을 향한 채 결가부좌한 승려의 모습을 가득히 그렸
는데, 그의 옆으로 불자(拂子)와 두루마리를 든 시자를 배치해 3존형식을 이루었다. 이러한 3
존 형식의 영정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것으로 크게 주목된다.
허나 그림의 제작시기와 그린 사람의 정보, 명호란 인물의 대한 기록과 인수사의 위치, 진관사
에 흘러들어온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그림에 속사정은 알 수 없으나 그림 구도와 채색으로 미
루어볼 때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3존 배치와 찬시, 한
글 제목 등은 다른 불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  90년 만에 햇살을 본 빛바랜 태극기 - 등록문화재 458호

2009년 5월 칠성각을 해체 보수했을 때 불단 내부와 벽체 사이에서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 독립
운동 관련 자료 6종 21점이 발견되어 속세의 진한 주목을 받았다. (이때 대들보에서도 칠성각
상량문이 발견되어 1911년에 지어졌음이 밝혀졌음)
이들은 진관사와 인연이 깊던 백초월(白初月, 1878~1944)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사용한 것
으로 여겨지는데, 독립신문과 자료들은 태극기에 포근히 감싸인 채로 발견되었다.
이렇게 90년 가까이 칠성각에 꽁꽁 숨겨진 것은 왜정의 탄압을 피하기 위함으로 보여지며, 기
나긴 세월 동안 광합성 작용을 받지 못했지만 빛이 좀 바랜 것을 빼고는 대체로 양호하여 알아
보는데 그리 지장은 없다. 단순해보이면서 심오한 뜻이 가득 깃든 태극기를 보니 그동안 진관
사에서는 누리지 못했던 가슴 뭉클함이 솟아 오른다.

태극기는 가로 89cm, 세로 70cm의 면직물에 바느질되어 있으며 중앙에 32cm 직경의 태극문양이
있고, 건과 곤, 감, 리의 4괘가 갖추어져 있다. 4괘의 위치가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
위원회가 제정한 국기 양식의 4괘와 동일하나 현재와는 위치가 달라 태극기 변천사에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진관사가 서울 지역 불교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음을 살짝 귀뜀해 준다.

태극기 안에 담긴 독립신문류는 신대한<(新大韓), 신채호(申采浩)가 창간한 신문> 3점, 독립신
문<(獨立新聞), 상해임시정부의 기관지> 4점,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 천도교에서 3.1운
동 당시 발행한 신문> 5점, 자유신종보(自由晨鍾報) 6점, 경고문(警告文) 2점으로 이중 자유신
종보는 이번에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진 매우 신선한 자료이다. 신문마다 태극기 도안과 태
극기와 관련된 내용이 게재되어 있고, 경고문은 독립에 대한 확신으로 끝까지 독립투쟁을 하자
고 호소하는 문서이다.
이렇게 귀중한 독립운동 관련 자료가 같은 곳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것에 그 의미가 크며, 1919
년 3.1운동 이후 12월까지 조선과 우리의 옛 땅인 중원대륙에서 펼쳐진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보충해주는 중요 자료로 그 가치가 높다. 현재 태극기는 칠성각에 공개하고 있으며, 독립신문
과 기타 문서는 비공개이다, ('진관사 소장 태극기 및 독립신문류'란 이름으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됨) 2010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진관사 태극기' 특별전에 이들이 처음 속세에 공개
되었으며, KBS에서 3.1절 특집으로 '초월의 비장, 진관사 태극기'를 방영하기도 했다.

이 태극기를 사용했던 백초월은 만해 한용운(韓龍雲)에 비견되는 항왜(抗倭) 승려로 3.1운동
이후 진관사에 주로 머물며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944년 왜정에 체포되어 그들의 잔인한 고문
끝에 광복을 1년 앞둔 청주교도소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진관사 뒷쪽에 숨겨진 서울 제일의 명품 계곡 ~ 진관사계곡

▲  진관사계곡에서 만난 1번째 폭포 (폭포 이름은 없음)

진관사에 왔다면 경내만 살피지 말고 기왕 여기까지 온 거 발품을 조금 팔아서 절 뒷쪽 계곡에
도 한번 올라가보자. 그렇다고 많이 올라갈 것도 없다. 조금만 가면 윗 사진의 폭포가 나오고,
여기서부터 금강산과 설악산도 질투할 정도로 1품급 경관이 펼쳐져 중생의 정처없는 마음을 단
단히 앗아갈 것이다.

진관사계곡(진관천)은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서 있던 비봉(碑峰) 북쪽에서 발원해 진관
사를 끼고 창릉천(昌陵川)으로 흘러가는 북한산 서쪽 계곡의 하나로 북한산성 안에 자리한 북한
산성계곡, 개연폭포 주변과 견줄 정도로 국보급 계곡을 자랑한다. 북한산에서 가장 빼어난 수준
의 계곡이자 서울 장안 으뜸의 계곡으로 키 작은 폭포가 주렁주렁 달려있어 경관을 크게 돕는다.
이들 폭포는 아직까지는 속세에서 지어준 이름이 없다.

1번째 폭포를 시작으로 대자연 형님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그림 같은 절경이 가히 숨을 질리
게 하는데, 1번째 폭포 윗쪽부터는 계곡 접근이 가능하여 여름 제국에 저항하며 피서를 즐기는
이들로 봐글봐글하다. (폭포 밑에서 진관공원지킴터 구간 계곡은 접근 통제)
우리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속세에서 가져온 먹거리로 황제 못
지 않은 간식 시간을 가지며 거울처럼 맑은 못에 꼬질꼬질한 발과 다리를 담구었다. 마음 같아
서는 온 몸으로 진하게 계곡과 스킨쉽을 즐기고 싶지만 여벌의 옷을 갖추지 않았다.


▲  물이 지그재그로 흐르는 2번째 폭포 주변

▲  장대한 세월의 거친 주름이 그어진 90도 벼랑과 계곡
벼랑 밑에 폭포와 좁은 목이 있다. 수심은 얕으나 큰 비가 내려 계곡이
잔뜩 흥분한 직후에는 조심하는 것이 좋다.
 

진관사계곡 산길은 1번째 폭포를 조금 지나 2번째 폭포 직전에서 계곡 북쪽으로 펼쳐지는데, 경
사가 각박한 벼랑길을 올라가야 된다. 다행히 2015년에 길을 크게 순화시켜 통행이 한결 편해졌
는데, 산보다 계곡이 주목적이라면 계곡을 따라 가는 것도 괜찮다. 중간중간 머물 자리도 많고,
계곡의 속살을 깊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 이름난 계곡은 여기 외에도 북한산 삼천리골(삼천사계곡)과 불광사계곡, 구기동계곡, 소
귀천계곡, 구천계곡(구천폭포, ☞ 관련글 보러가기), 동령폭포, 도봉산(道峰山) 무수골과 문사
동계곡, 도봉계곡, 북악산 백사실(백사골), 수락산 벽운동계곡, 관악산 암반천계곡 등이 있다.


▲  40~45도 기울어진 하얀 피부의 벼랑과 그 밑을 흐르는 진관사계곡
우리는 등산로에서 40도 벼랑을 타고 내려와 이곳에 자리를 피고 조촐하게
피서를 즐겼다. 끝없이 넓은 여름 제국에 대항하며 머문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임시 낙원이었다.

▲  40도 벼랑 밑에 숨겨진 청정한 못
하늘나라 선녀 누님들이 살짝 몸을 씻는 곳은 아닐까? 달님이 천하를 희미하게
비출 때 몰래 잠입하여 그들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고 싶다.

▲  장쾌하게 쏟아지는 40도 벼랑 밑 폭포의 위엄
하얀 명주를 급하게 늘어뜨린 듯, 폭포수의 기세가 대단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귀신이 다 도망칠 정도이다.

▲  진관사계곡 90도 벼랑
단양 사인암(舍人巖, ☞ 관련글 보러가기)의 축소판일까? 산길에서 보는 것보다는
계곡 40도 벼랑에서 보는 모습이 훨씬 장관이다.

▲  40도 벼랑에서 바라본 진관사계곡 최상류와 비봉 능선
마음 같아서는 더욱 깊숙히 파고들고 싶지만 이후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에
맡기며 여기서 길을 접었다. 다음에 오면 계곡 끝까지 꼭 올라가보리라~~~!

▲  다시 속세로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다. (진관사 앞 길)
이렇게 하여 명품 계곡을 겯드린 진관사 여름 나들이는 다음의 인연을 고대하며
대단원의 휘장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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