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장전'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21.07.02 국립서울현충원 6월 나들이 ~~ 창빈안씨묘역과 신도비, 서달산 호국지장사, 현충원숲길
  2. 2020.12.31 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3. 2018.10.05 서울의 동북쪽 지붕 ~ 수락산 벽운동계곡, 귀임봉 나들이 (염불사, 황자굴)
  4. 2018.02.12 법정스님과 길상화(김영한)의 아름다운 넋과 무소유 정신이 깃든 도심 속의 포근한 절집 ~~ 성북동 길상사
  5. 2017.06.29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는 도심 속의 고즈넉한 산사,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 (서달산, 현충원 숲길)
  6. 2016.03.13 금빛 와불상과 우담바라를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 의왕 청계산 청계사

국립서울현충원 6월 나들이 ~~ 창빈안씨묘역과 신도비, 서달산 호국지장사, 현충원숲길

국립서울현충원 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 국립서울현충원 현충일 나들이 '
(창빈안씨묘역, 호국지장사)

호국지장사 지장전
▲  호국지장사 지장전 (지장보살입상)

창빈안씨 신도비 호국지장사 팔상도

▲  창빈안씨 신도비

▲  호국지장사 팔상도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 되면 진하게 생각나는 곳이 있다. 바로 호국(護國)의 신이 봉안
된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顯忠園)이다. 내가 애국심이 유별난 것도 아니요. 가족과 일
가 중에 그곳에 묻힌 이가 있는 것도 아니나 석가탄신일에 그날 본능에 따라 절 투어를
즐기듯 현충일에는 그날에 맞게 현충원을 찾아가 그곳에 깃든 늙은 문화유산과 숲길(동
작충효길)도 둘러볼 겸, 호국의 신을 기리며 그날의 분위기를 누리는 것 뿐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은 한강과 관악산 사이에 솟은 공작봉<孔雀峰, 서달산(西達山,197m)> 자
락에 넓게 터를 닦았다. 1954년에 조성되어 천하에 흩어진 6.25 전쟁 전사자를 모아 안
장했는데, 처음에는 지역 이름을 따서 '동작동 국립묘지'라 했으나 2006년부터 '국립서
울현충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본글에서는 '국립현충원' 또는 '현충원'이라 표시함)
이곳은 특히 명당 자리로 명성이 아주 자자한데, 마치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형세도 지니고 있어 좀 어려
운 말로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이라 부른다. 즉 동쪽인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를 보면
웅장한 산맥(山脈)의 흐름이 용이 머리를 들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호위하는 형상이
고 서쪽인 우백호(右白虎)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
우로 솟은 봉우리와 산허리는 천군만마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는 것이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마주 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물소뿔 같으며 한
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려 공작봉을 감싸 흘러내
려가고 있다.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이라 하여 명당 중의 명당으
로 통한다.
이렇게 의미가 남다른 곳에 호국의 신을 봉안했으니 그들의 후손과 이 나라가 잘되어야
마땅하지만 아직까지도 그 효과가 시원치가 못하다. (친일매국노와 자격 미달자가 적지
않게 자리를 축내고 있음)

현충원 내에는 창빈안씨묘역과 부안군 이석수 묘역(扶安君 李碩壽墓域), 호국지장사(지
장사) 등의 문화유산이 있는데, 본글에서는 현충원 단골 명소인 창빈안씨묘역과 호국지
장사를 다루도록 하겠다.
(부안군 묘역은 철책이 꽁꽁 둘러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음~)


 

♠  국립서울현충원의 옛 주인, 허나 지금은 뒷전으로 밀려난
창빈안씨묘역(昌嬪安氏墓域)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54호

국립현충원에 발을 들여 제일 먼저 현충원의 배꼽 부분인 창빈안씨묘역을 찾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 묘역 남쪽에 있음)
군인과 애국지사, 역대 대통령의 유택(幽宅) 밖에는 없을 것 같은 이곳에 뜬금없이 조선 왕족
의 늙은 무덤이 있으니 많은 이들이
'저건 뭐지?' 의아해 할 것이다. 하지만 현충원이 들어서
기 훨씬 이전부터 창빈 묘역은 이곳의 오랜 주인으로 현충원 일대를 거느렸다.
그러다가 1954년 이후 국립묘지가 닦이면서 묘역에 딸린 토지 대부분이 호국신의 공간이 되었
으며, 1965년 묘역 북쪽에 이승만 묘역을, 2009년에는 바로 남쪽에 김대중 전대통령의 묘역이
닦이면서 묘역은 더 쪼그라들었다.
게다가 2010년 이전에는 그의 묘역을 알리는 이정표도, 안내문도 전혀 없었다. 외진 곳도 아
니고 현충원 한복판에 있음에도 어떠한 안내문도 없었으니 그 앞을 지나쳐도 전혀 모른 것이
다. 다행히 2010년 이후, 묘역 북쪽에 묘역을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졌고 현충원 안내도에도
그의 묘역이 표시되어 뒤늦게나마 약간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곳의 오랜 터줏대감임에도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잉여로운 신세로 고통받고 있는 창빈묘
역, 그렇다면 묘역의 주인공, 창빈안씨는 누구인가?

창빈(1499~1549)은 조선 11대 군주인 중종(中宗)의 후궁이다. 1499년 경기도 시흥(始興)에서
안탄대(安坦大)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용모가 뛰어났다고 전한다.
집안이 어려워서 1507년에 궁녀로 들어갔으며, 20세에 중종의 사랑을 받아 22세에 상궁(尙宮)
으로 승급되었다. 그녀는 행동이 단정하고 정숙했으며, 자비로운 성품과 근검절약하는 생활태
도로 덕망이 높았다. 하여 중종의 모후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성종의 왕비)의 총애를 받
았으며, 시어미의 후원으로 31살에 숙원<淑媛, 내명부(內命婦) 종4품>이 되고 이어서 숙용<淑
容, 내명부 종3품>까지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영양군(永陽君), 덕흥군(德興君), 정신옹주(靜愼翁主) 등 2남1녀를 낳았는
데, 그중에서 덕흥군(1530~1559)은 조선 14대 군주인 선조(宣祖)의 아비로 조선 최초의 대원
군(大院君)으로 유명하다.

창빈은 1549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처음에는 양주 땅 장흥(현 양주시 장흥면)에
묘역을 썼으나 이듬해 3월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  500년 가까운 세월에도 정정한
모습을 잃지 않은 우측 문인석

▲  눈을 가늘게 뜬 좌측 문인석(文人石)


조선의 수많은 후궁 묘역의 하나로 자칫 잊혀질 뻔했으나 덕흥군의 아들이자 그녀의 손자인
하성군(河城君, 선조)이 왕위에 오르면서 잠시 호강을 받게 된다. 하성군은 왕위 계승권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때마침 적당한 인물이 없어 정말 운이 좋게도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에게
는 행운이었으나 조선과 이 땅에게는 불행이었음)
허나 선조는 적통이 아닌 서자(庶子)의 아들이란 이유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하여 자신
의 권위를 높이고자 아버지와 할머니를 이용하기로 작정하고 그들을 높이는데 지나치게 공을
들인다. 하여 1577년 할머니에게 창빈이란 시호를 올렸으며, 무덤의 격을 능으로 높이고 묘역
을 현충원 일대로 확장시켰다. 능의 이름은 이곳의 지명인 동작진(銅雀鎭)의 이름을 따 동작
릉(銅雀陵)이라 했으며, 아비인 덕흥군의 묘역 또한 백성들의 입소문과 많은 돈을 이용해 잠
시나마 덕릉(德陵)으로 높이는데 성공했다. (덕흥대원군 묘역 ☞ 관련글 보러가기)

그릇도 작고 꽤나 쪼잔했던 선조가 1608년 골로 가자 동작릉은 창빈안씨묘역으로 격하되고 만
다. 허나 이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 뿐이다. 창빈의 성격상 동작릉이란 이름에 꽤 부담을
가지며 손자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후 1683년 왕명에 따라 묘역 북쪽에 신도비를 세웠
는데 비문은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낸 신정(申晸, 1628~1687)이 짓고 글씨는 돈령부지사(敦
寧府知事)를 지낸 왕족 출신 이정영(李正英, 1616~1686)이 썼다.

창빈의 아비인 안탄대는 성품이 매우 유순하고 겸손했다. 딸이 왕의 후궁이 되었음에도 부귀
영화와 출세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겸손이 너무 지나쳐 비굴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어린이한테 잔소리를 들어도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성
품을 알만하다.
그는 스스로 천인(賤人)이라 자처하고 계속 가난하게 살았으며, 벼슬은 종7품 유순부위(油順
府尉)가 전부이다.

안탄대가 세상을 뜨자 선조는 우의정(右議政)을 추증했으며, 묘역은 안산시 반월공단에 있다.


▲  고된 세월의 때로 가득한 창빈안씨 묘표(墓表)

▲  구름과 용이 뒤엉킨 고품격 조각의 묘표 이수(螭首)
소용돌이가 치는 듯한 구름 사이로 꿈틀거리는 용이 현란하게 조각되어 있다.
저기에 적당히 색만 입히면 3D영화처럼 실감이 클 것이다.


못난 손자에 의해 한때 능의 대접까지 받았지만 창빈묘역은 조촐하기 그지 없다. 전형적인 후
궁의 무덤 양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부풀어오른 동그란 봉분(封墳) 앞에는 수려
한 조각의 이수를 지닌 묘표(묘비)와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그 좌우로 조그만
망주석(望柱石) 1쌍, 그 앞쪽에는 홀(忽)을 쥐어든 문인석 1쌍이 무덤을 지킨다. 봉분 뒤쪽에
는 기와를 지닌 곡장이 둘러져 있다.


▲  소나무 그늘에 자리한 창빈안씨 신도비(神道碑)

묘역 북쪽 소나무숲에는 창빈안씨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1683년에 세워진 것으로 높이는 3m
이며, 귀부(龜趺)와 이수를 갖춘 다른 신도비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모습으로 네모난 바닥
돌에 하얀 피부의 기단석(基壇石)을 얹히고 그 위에 날씬한 몸매의 비신(碑身)을 심어 창빈의
일대기를 적었다. 비석 꼭대기는 지붕돌로 마무리했는데 귀퉁이 추녀가 얕게 들려져 소소하게
경쾌감을 선사한다.

* 창빈안씨묘역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299-10


 

♠  국립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고즈넉한 산사,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고 있는 서달산 호국지장사(西達山 護國地藏寺)

▲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입구

국립현충원의 꼬리 부분인 공작봉(서달산) 북쪽 자락에는 호국지장사(지장사)가 포근히 둥지
를 틀고 있다.
처음에는 현충원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위해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절로 여기고 거의 관
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5년 이후 겉보기와 달리 문화유산을 넉넉히 품은 오래된 절임
을 알게 되면서 구미가 확 올랐고 그 이후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꼭 발걸음을 하고 있다.

호국지장사(이하 지장사)는 신라 끝 무렵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670년
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으나 서로 시기가 틀려먹음)
부동산 전문가인 도선은 북쪽으로 가다가 한강 언덕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어디선가 서기
(瑞氣)가 흘러나와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여 그 서기를 추적하니 그 기운이 나오는 곳에
칡덩굴이 엉켜있고 약수가 나오고 있었다. 하여 자리를 살펴보니 아주 기가 막힌 명당인지라
토굴(土窟)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장사에서 우기는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다. 봉은사(奉恩寺)에서
작성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1577년 선조가 창빈묘역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로 이 절이
다'
내용이 있으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보인(寶印)이 중창<또는 창건>하고 화장암(華
藏庵)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덩달아 전해오고 있어 이르면 고려 후기, 늦어도 1577년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절의 내력이 구체적으로 윤곽을 보이는 것은 16세기 말이다. 명종(明宗) 시절 창빈안씨묘역이
양주에서 절 부근으로 이장되었는데 1577년 선조가 친할머니인 창빈의 묘역을 동작릉으로 높
이면서 화장암을 창빈묘역을 지키는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화장사(華藏寺)로 이름이 갈
렸다고 하며, 그 인연으로 오랫동안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
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이 10대 시절 공부를 했던 곳으로도 전해진다.
1663년 절을 중수했으며, 영조 시절에 신경준(申景濬)이 작성한 '가람고(伽藍考)'에 '동작리
에 화장암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 그때까지도 꾸준히 법등을 지키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1862년 운담(雲潭)과 경해(鏡海)가 중건했으며, 1870년에 경파루(鏡波樓)를 지었고 1878년에
는 주지 서월(瑞月)과 경해가 대방(大房)을 수리했다. 1893년에는 경운(慶雲), 계향(戒香)이
불상을 개금하고 구품탱, 지장탱, 현왕탱, 독성탱,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1896년에 칠성각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1906년에는 풍곡(豊谷)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 단청하고 후불탱과 신중
탱, 감로탱, 신중탱, 칠성탱 등을 봉안했다.
1911년에는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으로 봉은사의 말사(末寺)가 되었으며, 1920년에 대
방을 수리했고, 1936년 주지 유영송(劉永松)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했다.

1954년 이후 절 밑에 국립묘지가 들어서면서 자연히 호국신을 책임지는 사찰이 되었다. 하여
지장도량(地藏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1983년 주지 혜성(慧惺)은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
력으로 모두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호국지장사<줄여서 '지장사'>로 이름을 갈았
다. 그야말로 현충원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능인보전과 삼성각, 극락전, 지장전, 심우당, 청심당 등 10동 가
까운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등은 동남향(東南向)을 취하고 있다. 경내 남쪽에는 약
수가 나와 주민들이 많이 물을 뜨러 오며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3,000좌의 조그만 지장보
살을 봉안해 절 이름 값을 톡톡히 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철불좌상과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3호), 극락9품도, 독
성도, 약사불도 등 무려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으며, 한강에서 건져 올렸다는 철불
좌상과 석가여래삼존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후기 탱화들이다. 그 외에 멀리 경주에서 왔
다는 신라 후기 3층석탑이 있는데 그것이 경내에서 가장 늙은 존재이다.

서울 도심과 무척 가깝지만 삼삼한 숲에 감싸여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하고
있으며 고즈넉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현충원에 발을 들였다면 꼭 둘러보길 권한다. 또한 짙은
숲에 가려 보이는 범위는 적으나 현충원 일대와 한강, 용산구 지역이 시야에 들어와 경치도
그런데로 괜찮다. 하여 이승만 전대통령도 꽤나 군침을 흘렸던 곳이기도 한데 그가 국립묘지
를 둘러보고 잠시 절에 들려 사람들에게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오~' 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자리가 좋은
곳이다.

이곳은 절의 마르지 않는 샘이자 든든한 후광(後光)인 현충원이 있는 한 배를 굶거나 문을 닫
을 일은 없다. 현충원의 일원으로 그와 운명을 함께 하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만약 현충
원이 없었다면 인근 상도동의 사자암(獅子庵,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숲과 주거지의 경계가
되거나 주거지에 거의 둘러싸여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석가탄신일과 현충일에는 절을 찾은 중생들에게 공양밥이나 국수를 제공하는데, 맛이 제
법 괜찮다. (현충일에는 보통 13시 이전에 공양을 제공함)

* 호국지장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305 (현충로 210 ☎ 02-814-5257)
* 호국지장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지장사로 인도하는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국립현충원
현충원은 물론 그 너머로 용산구 지역과 남산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지장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20-5호

지장사 입구에서 절로 인도하는 길은 각박한 속세살이처럼 경사가 다소 급하다. 그 길을 오르
면 커다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베풀며 중생을 맞이한다.
그는 350년 정도<1985년 10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15년> 묵은 나무로 높이
15m, 둘레 4.5m에 이른다. 오랜 세월 지장사의 이정표 및 정자나무의 역할을 해왔던 그는 아
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과 지장사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현충원에서
가장 장대하고 늙은 자연물이 되었다.
 
지장사에는 일주문(一柱門)이나 천왕문(天王門) 같은 문이 없다. 대신 삼삼한 숲이 일주문의
역할을 대신한다. 숲에서 불어오는 산바람과 절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염불소리는 천근만
근 무겁다는 번뇌를 참교육시키며 마음 바깥으로 쫓아낸다. 하지만 멀리 가지 않고 절 입구에
서 우두커니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 또한 그 번뇌를 찾으니 해탈이니 성불이니 하는 것은 그
저 먼 세상의 이야기인 모양이다.


▲  지장사 경내로 인도하는 숲길

▲  석등을 한복판에 띄운 네모난 연못
연못에는 여러 물고기들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  조촐한 모습의 능인보전(能仁寶殿)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에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로 한 지장전이, 오른쪽은 대웅전 구역, 왼쪽
에는 단출한 모습을 지닌 능인보전이 있다.
능인보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겉으로 보면 그저 작은 건물로 여기고 지
나칠 수 있다. 허나 그 안에 철불좌상과 신중탱 등 오래된 문화유산이 자리를 채우고 있으니
꼭 둘러보기 바란다.


▲  능인보전에 봉안된 철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5호
능인보전 약사불도(藥師佛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호


능인보전 불단에 홀로 자리한 철불좌상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경내에서 3층석탑 다음으
로 늙은 존재이다. 철불(鐵佛)이란 이름 그대로 철로 만든 불상으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잠깐 등장을 하는데, 그가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다면 도선국사가 세운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을 흔쾌히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그는 다른 곳에서 온 불상으로 이곳에 들어온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
은 전설이 아련하게 전해온다.

호랑이가 담배 맛을 알기 이전인 어느 옛날, 한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의 꿈에 이 불상
이 나타나 제발 빛 좀 보게 해달라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어부는 혹시나 싶어 그곳으
로 가 그물을 치니 녹슨 채로 버려진 그 불상이 걸려들었다. 하여 그를 가져와 깨끗하게 목욕
을 시키고 집에 봉안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고기도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연이어 생기는 것이다. 보통 이
런 전설에선 고기가 잘 잡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기 마련인데, 불상이 좀 심성
이 고약한지 그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어부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화장사(지장사)에 넘겼다고
하며 그 이후부터 비로소 잘 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절이 파괴되거나 도난, 배 침몰 등으로 강에 버려진 불상을 수습해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고향은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고향을 잃은 이 철불은 높이 98cm로 얼굴은 동그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눈이 유난히 길고
가는데 보는 위치에 따라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며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눈썹은 무
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으며, 굳게 다문 입에는 엷게나마 미소가 드리워져 환하게 웃음짓는
표정 같다.
어깨는 꽤 단련을 한 듯 당당하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법
의(法衣)는 주름선이 선명하다. 또한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불임을 알려
주고 있으며, 고려 초에 조성된 몇 안되는 철조약사여래불로 그 당시 약사여래 신앙에 중요한
자료로 판단되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철불 뒷쪽에 걸린 약사불도는 1906년에 봉감(奉鑑), 정운(禎雲), 긍법(肯法), 경조(敬照) 등
이 그린 것이다. 간략한 아미타존상의 형태와 음영법의 구사, 적색과 녹색의 탁한 색감이나
어두운 군청색을 많이 쓴 점, 불화의 횡적인 구도와 그림에 나타난 상을 간략하게 나타낸 점
등,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철불 좌우에는 조그만 금동불(金銅佛)이 각자의 작은 공간을 지니며 빼곡히 들어앉아 철불을
받쳐주며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들은 중생들의 돈과 소망을 담아 만든 원불(
願佛)로 약 400기 정도 된다.


▲  능인보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호

능인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약사불도와 같은 시기(1906년)에 같은 화승이 그렸다. 그
림은 수평 3단의 정연한 구도를 보이며, 범천(梵天), 제석(帝釋), 위태천(韋太天) 등 신중탱
의 대표적인 존재들이 모두 묘사되어 있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인체나 경직된 자세, 무겁고
탁한 색채 등은 전체적으로 불화의 품격이 떨어지던 20세기 초에 많이 나타난다.


▲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7호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1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권속들을 계
단식으로 배치했고 화폭 상단으로 갈수록 존상을 작게 묘사하여 원근법의 효과를 살렸다. 원
만한 인물의 형태는 18세기 후반 양식이지만, 오색 광선으로 표현된 광배와 도식(圖式)적인
천의, 단조로운 구름의 묘사는 19세기 불화 양식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많이 변색되긴 했으
나 일부 적색과 녹색은 비교적 밝게 채색되었다. (지장시왕도의 봉안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호국범종이 봉안된 범종각(梵鍾閣)
범종각은 1975년에 지어진 것으로 저 안에 같
은 해에 조성된 범종이 담겨져 있다. 국립현충
원과 절의 이름에 걸맞게 그 종을 호국범종이
라 부르며 애지중지한다.

     ◀  고색의 무게가 짙어보이는 돌판
대웅전 옆구리에는 고색이 자욱한 네모난 돌판
이 놓여져 호기심을 자극시킨다.
그의 피부에는 한문 여러 자가 새겨져 있는데,
눈이 침침해 제대로 확인은 못했다. 건물 주춧
돌이나 상석(床石)으로 여겨지나 정체가 아리
송하며, 돌판에 화분이 여럿 놓여져 그의 허전
한 머리를 달래주고 있다.


▲  멀리 경주에서 왔다는 3층석탑

범종각 옆에 자리한 이 석탑은 멀리 경주 남산(南山)에서 가져온 신라 후기 석탑이라고 한다.
이승만 시절에 국립묘지를 조성하면서 강제로 소환해 경상도를 상징하는 탑으로 삼았다고 하
는데,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버려진 것을 지장사에서 수습해 보수를 했다.
지장사에서 가장 늙은 존재라고는 하나 겉모습은 완전 20세기 석탑 같으며, 지붕돌과 석재 일
부에만 오래된 티가 보일 뿐, 머리장식과 탑신(塔身) 상당수는 지장사에서 새로 손질을 하여
늙은 돌과 새 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이고 있다.

그는 현충일 기념으로 소원지를 가득 머금고 있는데, 그 앞 탁자에는 소원지와 볼펜, 조그만
불전함이 깨알처럼 놓여져 있다. 탑과 주변 줄에 달아놓은 소원지는 나중에 불에 태워버리는
데 그래야만 소원지에 쓰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과연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  지장전(지장보살입상)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산신과 독성, 칠성 등 삼성(三聖)의 공간으로 1칸짜리 팔작지붕 집이다.

▲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호)와 석가여래상

삼성각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여래상은 근래에 조성된 것으로 동그랗게 표현된 풍만한
가슴과 가슴선이 제법 눈길을 부여잡는다. 그의 두툼한 얼굴에는 미소가 살짝 깃들여져 있고
물레방아처럼 생긴 법륜(法輪)을 왼손에 소중히 쥐고 있는데, 법륜의 8개의 바퀴살은 팔정도
(八正道)를 나타내며, 동그란 모양은 부처의 가르침인 담마(蕁麻)가 완전하다는 것을 뜻한다
고 한다.

그런 석가여래상 뒤에 자리한 칠성도는 1906년 보암긍법(普庵肯法)이 그린 것이다. 화면은 화
폭의 좌우대칭으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상하 2단으로 나눈 수평 구조로 경직된 형태와 선, 탁
한 색채 등은 20세기 초 불화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독성도(獨聖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호)와 독성상(獨聖像)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은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한이다. 승려 비슷한 복장으
로 앉아있는 모습이 안방 마님처럼 편안해 보이는데 머리털이 없어 허전하기만 한 그의 머리
에는 혹 같은 것이 두툼하게 솟아있다.

독성상 뒤쪽에 깃든 독성도는 소나무 밑에서 바위에 기댄 채 동자(童子)의 공양을 받고 있는
독성 할배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전형적인 19세기 독성도로 폭포와 나무, 꽃 등의 표현이나
늘어진 옷자락의 묘사는 다소 서투르나 독특한 자세와 온화한 얼굴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
리고 그림의 깊이를 살려준 투명한 광배의 표현 등이 눈길을 끈다.


▲  산신도(山神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호)와 산신상

길쭉한 흰 수염을 지닌 산신 할배는 왼손에 붉은 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이를 쓱쓱 쓰다듬고 있다. 호랑이가 아무리 무섭다한들 산신 앞에서는 그저 꼬랑지를 살
랑거리는 고양이에 불과하며, 산신 옆에 있는 동자는 무척 앳돼 보여 마치 할배와 손자처럼
다정해 보인다.

산신상 뒤에 걸린 산신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가 그렸다. 민화(民畵, 속화)풍의 나무
와 폭포, 호랑이의 모습은 19세기 말 산신도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원색적이고 장식적인
당시의 산신도와는 달리 은은한 중간 색조를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위엄과 격이 담긴
산신의 얼굴 묘사도 제법 돋보인다고 한다.


 

♠  호국지장사 마무리 (지장전, 대웅전 등)

▲  밑에서 바라본 지장전(地藏殿)

지장사의 백미(白眉)이자 최대 명물은 경내 뒤쪽에 자리한 지장보살입상과 3,000좌에 달하는
조그만 지장보살상의 장대한 물결일 것이다.
절에서는 이곳을 지장전으로 삼아 각별히 챙기고 있는데, 비록 건물은 아니나 석불이나 마애
불을 두고 각(閣)이나 전(殿)을 칭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능인보전과 삼성각, 대웅전 등
에 깃든 문화유산도 중요하지만 지장사의 성격을 분명히 밝혀주는 존재가 바로 이곳 지장전이
다.

지장전은 1983년 주지 혜성이 현충원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
원하고자 조성한 것으로 지장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육환장(六環杖)이란 긴 지팡이를 들며
온화한 표정으로 현충원을 굽어보는 지장보살의 뒷통수에는 동그란 두광(頭光)이 그를 빛내주
는데 마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햇님 같다. 그 뒤에는 그를 멀리서 둘러싸듯, 거대한 석벽을
병풍처럼 만들고 조그만 지장보살을 가득 입혀놓아 장관을 이룬다.


▲  극락전에서 바라본 지장전의 위엄

▲  지장보살상 좌우에 있던 5층석탑들

연꽃이 새겨진 기단(基壇)을 지닌 이들은 고색의 때가 다소 묻어나 보이는데, 그들에 대한 정
보가 딱히 없다. 탑의 생김새로 봤을 때는 왜정(倭政) 때나 20세기 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
겨지며 좌측 탑의 1층 탑신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현재 능인보전 주변으로
옮겨짐)

  ◀  지장전 우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예전에는 1칸짜리 팔작지붕 집이었으나 근래에
1칸짜리 맞배지붕 집으로 새로 갈았다. 아미타
불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후불탱 등
이 봉안되어 있으며, 대웅전 목조여래좌상 뱃
속에서 나온 옷의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  극락전에 있는 심초록 주 겹저고리

이 겹저고리는 2006년 5월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을 개금하던 중에 그의 뱃속에서 나왔다. 하여
문화재위원의 점검과 자문을 구해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보존처리와 보관을 의뢰했다.
1630~1650년 사이에 지어진 옷으로 여겨지는데, 색상이 보존된 몇 안되는 옷으로 원형 훼손을
막고자 유물 보수를 생략하고 펼친 상태로 오동나무 상자에 보관을 했으며,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을 맡기고 그 모조품을 극락전에 두었다. 가짜란 말에 설레던 마음이 90%는 날라가 버렸
으나 그래도 이번에 새로 인연을 지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  큼직한 맞배지붕을 지닌 대웅전(大雄殿)과 앞뜨락
대웅전 뜨락 주변에는 종무소(宗務所)와 심우당(尋牛堂)이 있고, 대웅전
뒤쪽에는 청심당과 공양간, 요사가 있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8호

지장사의 법당(法堂)인 대웅전은 맞배지붕 집으로 보통은 정면이 더 크지만 이 건물은 반대로
측면이 더 넓다. 2016년에 건물과 지붕, 내부를 손질하여 조금 젊어졌으며, 근래에 또 손질을
했는데, 제법 너른 대웅전에는 목조여래3존상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에 그려진 탱화들이 여럿
걸려있다. <호국지장사는 지방문화재 탱화와 탑의 위치를 자주 옮김>

법당의 필수 그림인 신중도는 인도의 토속신(土俗神)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된 호법신(護
法神)의 무리를 여백도 허용치 않고 꾸역꾸역 집어넣은 탱화이다.
1893년 금호약효, 정련(定鍊) 등이 그린 것으로 위태천과 범천, 제석을 중심으로 비교적 많은
이들을 담았는데, 좌우 대칭구도와 위태천과 제석 등이 이루는 역삼각형 구도가 다소 어수선
해 보인다. 특히 천녀(天女)들이 20여 종에 달하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본그림의 백미라
할만하다. 인체를 불균형하게 표현한 점과 과장된 안면의 묘사 등이 19세기 불화의 특징을 보
이는 작품으로 비록 색이 좀 퇴색되긴 했으나 조화로운 색채 구성으로 그림의 품격을 높였다.


▲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26호)과 그 뒷쪽에
자리한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4호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여래좌상(가운데 금동불)은 좌우로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상과 화려한 보
관(寶冠)을 눌러쓴 관세음보살상을 거느리고 있다. 그는 지장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10여 점의
지방문화재 중 가장 최근(2018년 8월)에 지정된 것으로 2006년에 그의 뱃속에서 후령통과 저
고리 등이 나왔다.
후령통은 1639년에 조성된 예산 수덕사(修德寺) 목조석가여래3불좌상 뱃속에서 나온 은제(銀
製) 후령통과 많이 비슷해 1639년 전후 것으로 여겨지며, 불상 또한 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목조여래좌상 뒷쪽에 자리한 아미타불도는 1870년에 원명긍우(圓明肯祐), 경은계윤(慶隱戒允)
등 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양 옆구리에 그의 식구를 배치했는데,
형태가 풍만하고 정교하며 무늬가 화려하다. 5가지 색깔의 광배(光背)가 눈길을 끌며 옷의 묘
사가 도식화되어 있다. 적색과 녹색 색상은 다소 탁하며 코발트 빛깔의 짙은 청색은 19세기
말 불화 양식을 잘 보여준다.
그는 대웅전 식구이나 한때 능인보전에 가 있기도 했으며, 다시 대웅전으로 돌아왔다. 즉 목
조여래좌상이 탱화갈이를 한 것이다.


▲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6호

감로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3명의 화승이 그렸다. 그림은 상부에 아미타여래 일
행이 지옥에서 온 중생을 맞이하러 가는 장면을 그렸고 중앙에는 성반의식(聖盤儀式,
우란분
경에서 7월 15일 승려 및 십방제불에게 백미를 올리고 발원하는 의식)
을 하는 모습을, 그 주
변에는 아귀(餓鬼)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로 가득한 지옥과 현실의 모습을 그렸는데, 7여래
의 장엄하면서도 원만한 얼굴과 옆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 성반의식을 치르는 승려의 모습과
산수의 표현 등은 19세기 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며, 나뭇잎 선의 처리와 산수의 음영처리 등
에서 19세기 말 불화양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  팔상도(八相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0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8개의 장면으로 그린 것으로 1893년 한곡돈법(漢谷頓法)이 그렸다.
이곳 팔상도는 부처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을 묘사했으며 형식적인 형태와 탁한 색조는
19세기 말 불화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5호

극락9품도는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16관 중의 제14, 15, 16관에 해당되는 9품의 극락왕생
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1893년 금호약효 등 3명이 그린 것으로 대구 동화사(桐華寺)의 부속암자인 염불암(
念佛庵)의 극락구품도와 같은 원본을 보고 그린 것이다. 등장 인물의 얼굴 이목구비를 섬약하
게 표현하여 조선 후기 극락구품도의 독특한 유형을 보여주며, 음영의 표현이나 적색과 녹색
의 대비, 화려한 꽃무늬 등은 19세기 불화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대웅전 앞에 차려진 아기부처상 세트

대웅전 앞에는 거하게 아기부처상 세트를 깔아놓았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아기부처상과 석
조는 연못 부근 옛 샘터에 있던 것으로 대웅전을 손질하면서 그 앞으로 가져왔는데, 임시로
만든 것이 아닌 돌로 단단하게 다진 것들이다. 하여 1년에 대부분을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지
내야 되는 다른 아기부처상과 달리 365일 햇살을 보고 있으며, 매일 관불의식이 가능하다.


▲  수풀 속에 묻힌 지장사 석조 안내문 (1972년 6월 작)

이 석조 안내문에서는 고려 공민왕 때 보인대사가 창건했다고 지장사(화장사) 스스로가 실토
하고 있다. 그러니 도선대사 창건설은 의미가 없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어쩌다가 도선대사
창건설까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서기 연도(年度)를 쓰기가 참으로 싫었을까? 20세
기 한복판에 640여 년 전이라니, 게다가 강희 2년이니 동치(同治) 원년이니 하는 구닥다리 표
현까지 쓰고 있어 다시 한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  청심당(淸心堂)

대웅전 뒷쪽이자 경내 북쪽에 자리한 청심당은 2016년에 지어진 한옥으로 요사(寮舍)와 선방
(禪房)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앞에는 공양간으로 쓰이는 햐얀 피부의 건물이 있는데, 현충
일과 석가탄신일 공양은 여기서 섭취하면 된다. 

이번 나들이에서 현왕도(現王圖)와 괘불을 놓쳤는데, 현왕도는 공양간 건물에 종종 출현하니
그 건물을 살펴보면 된다. 단 괘불은 친견하기가 무척 까다로운 존재라 어지간하면 마음을 비
우기 바란다. 석가탄신일 등 일부 날에만 잠깐씩 외출을 나오기 때문이다. (나도 아직 친견하
지 못했음)


▲  청심당에 걸린 화장사 현판의 위엄

▲  지장사와 국립현충원을 뒤로하며 (상도출입문 방면 숲길)
이렇게 하여 현충일 기념 국립서울현충원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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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21년 6월 1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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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산골에 푹 묻혀있는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백화산 반야사 (석천계곡, 반야사 호랑이, 문수전, 망경대)

 


' 봄맞이 산사 나들이, 영동 백화산 반야사 '

반야사3층석탑
▲  반야사3층석탑과 배롱나무

▲  영천과 망경대

▲  반야사계곡(석천계곡)

 


 

♠  백화산(白華山)의 첩첩한 산주름 속에 묻힌 고즈넉한 산사,
영동 반야사(般若寺) - 영동군 향토유적 9호

▲  반야사 경내
경내 뒷쪽으로 꼬랑지를 든 호랑이를 닮았다는 돌너덜(반야산 호랑이)이 보인다.


영동 고을의 동부를 맡고 있는 황간(黃澗), 그 황간 북쪽 우매리에서 석천계곡(반야사계곡)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그 길의 끝에 반야사가 그림 같은 모습으로 반겨준다.

백두대간의 일원이기도 한 백화산이 베푼 석천계곡이 태극문양으로 산허리를 감아 돌면서 연
꽃 모양의 지형을 이루는 그곳 한복판에 둥지를 닦은 반야사는 백화산의 남쪽 끝자락을 잡고
있다. 절을 둘러싼 주변 경관이 매우 곱고 절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청정하기 이를 데 없어 영동(永同) 지역 경승지이자 피서의 성지로 오랜 세월 찬양을 받고 있
다.

경관 하나는 아주 일품인 반야사는 신라 말에 무염(無染, 800~888)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
가 황간 지역 어딘가에 있었다는 심묘사(深妙寺)에 주석하고 있었을 때, 현재 절 자리에 있던
연못에 나쁜 악룡(惡龍)이 머물며 갖은 민폐를 부리자 사미승(沙彌僧) 순인(純仁)을 보내 그
들을 쫓아내고 연못을 메워 절을 닦으니 그것이 반야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용(龍)이 진짜로 있을 리는 없을 터이니 아마도 백화산에서 설치던 산적을 교화하
거나 때려잡고 그들의 본거지에 절을 세운 것으로 여겨지며, 비록 무염이 창건했는지는 의문
이나 대웅전에 신라 후기에 조성되었다는 불상이 있어 9~10세기에 창건된 것은 확실한 것 같
다.
무염의 창건설 외에도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원효(元曉)가 세웠다는 설과 의상(義湘)의 10
대 제자 중 하나인 상원(相源)이 세웠다는 설도 덩달아 전하고 있으나 원효와 의상의 창건설
은 이 땅에 많은 절에서 사골이 되도록 우려먹는 흔한 소재이다. 반야사도 예전에는 그들이
창건했다고 우겼으나 요즘은 한 발자국 물러나 그 부분을 생략하고 신라 후기에 크게 활약했
던 무염을 창건주로 내세우고 있다.
절 주변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절의 이름을 반야사라 했으며 산
이름을 지장산에서 백화산으로 바꾸어 문수도량임을 내세웠다.

창건 이후 오랫동안 사적(事績)이 전해오지 않다가 1352년에 중건되었다고 하며, 1464년 신미
(信眉)가 세조(世祖)의 허락을 받아 절을 크게 중창했다. 세조는 법주사(法住寺)를 방문했다
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에 들려 새로 지은 대웅전에 참배하고 '반야'란 현판을 내렸다고
하며 그때부터 절 이름이 '반야사'가 되었다고 한다. ('반야'는 문수보살의 지혜를 뜻함)
그 이후 500년 가까이 잠수를 탔다가 6.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970년대 이후부터 꾸준
히 불사를 벌여나갔고 1993년에 새 대웅전과 요사를 지어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대웅전과 극락전, 산신각, 지장전, 심검당 등 10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경
내에서 다소 떨어진 망경대 벼랑 위에는 이곳의 상징인 문수전이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닦았다.
절이 들어앉은 특성상 대웅전과 극락전 등 주요 건물들은 서쪽을 바라보고 있고, 문수전은 북
쪽을 향하고 있다, (경내에서 계곡 건너 서쪽에 전답과 관세음보살상이 있음)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이곳의 유일한 국가 지정문화재인 3층석탑을 비롯해 영동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대웅전 불상, 조선 후기 부도 2기가 있으며, 그 외에 500년 묵은 배롱나무 2그루와 신
중탱이 전하고 있다.
또한 절 뒷쪽 계곡 너머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파쇄석이 모인 돌너덜이 있는데,
마치 꼬랑지를 세운 호랑이 모습이라 절에서는 그를 '반야사 호랑이'로 삼으며 호랑이로 화현
(化現)한 산신(山神)으로 내세우고 있다. 경내에서도 그 돌너덜이 보이며, 그 너덜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자 이곳에 절을 닦은 모양이다.

반야사는 풍경도 좋고, 볼거리도 넉넉하나 교통편이 영 좋지 못한 것이 큰 흠이라 대중교통으
로 오려면 여간 힘들지가 않다. 허나 그만큼 첩첩한 산속으로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
거나 마음을 싹둑 다듬고 싶을 때 안기면 아주 좋은 곳이다. 게다가 이곳은 템플스테이도 운
영하고 있으니 세상사 잠시 내려놓고 고적한 산사에 묻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 소재지 :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151-1 (백화산로 652 ☎ 043-742-4199, 7722)
* 반야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주차장 남쪽에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문수도량과 산신기도 도량까지 내세우는 이곳에는 재미난 전설이 여럿 전하고 있는데, 그중 2
가지를 우선 꺼내보겠다. (다른 1가지는 영천 부분에서)

① 고려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1332~1339) 시절 글재주가 좋은 황도령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황간 관아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여했는데, 웃기는 것은 아주 쉬운 한자인 '수(
水)'와 '산(山)' 2자를 몰라서 백일장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이에 크게 발끈한 황도령은 바로 반야사로 달려가 그곳에 있던 일우에게 학문을 배웠다. 일우
는 학식이 뛰어난 승려로 그에게 많은 학문을 전해주었는데 언제부터인가 황도령의 얼굴색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어 얼굴을 살펴보니 글쎄 처녀귀신에게 씌인 것이 아닌가? 그냥 방치하다
가는 황도령이 골로 갈 수 있기에 그의 옷을 벗겨 온몸에 금강경(金剛經) 5,149자를 빼곡히
적어넣고 옷을 입혔다.
그날 밤, 황도령을 찾아온 처녀귀신은 도령 몸에 쓰인 금강경을 보고는 크게 발작했다. 금강
경의 위엄에 너무 괴로워한 나머지 황도령의 귀를 물어뜯고 줄행랑을 쳤는데 이는 일우가 금
강경을 쓸 때 귀 부분을 실수로 빼놓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황도령은 귀는 잃었지만 스승 덕
분에 살아날 수 있었고 그 인연으로 출가를 하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무이법사(無耳法師)라
했다. 귀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② 불교 탄압이 극성이던 조선 성종~연산군(燕山君) 시절, 벽계선사(碧溪禪師)는 그 소나기를
피하고자 머리를 기르고 속인(俗人)으로 가장하여 살았다. 그는 과부를 맞아들여 같이 살았는
데 어디까지나 위장 혼인일 뿐, 3년을 살아도 여전히 남남처럼 살았다. 부부의 재미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에 완전히 뿔이 난 과부는 어느 날 '야~ 나 갈꺼야~~!!'
선사 왈 '왜?'
과부 '이름만 부부지 과부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래서 살겠냐?'
선사 '그러면 말리지 않겠다. 그래도 3년 동안 밥해주느라 고생했는데 수고비로 이거나 가져
가셔~!'
하면서 은으로 만든 표주박을 주었다.

과부는 표주박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와 동구 밖 샘물가에서 그것으로 물을 떠마시며 팔자 한
탄을 간드러지게 하였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있던 표주박이 갑자기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자 그만 포기하고 3년 동안 천하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재혼처를 물
색했으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벽계선사를 다시 찾아갔다.
선사는 '내 다시 올 줄 알았다'
그 말에 과부는 '어찌 알았누?'
선사 '그 이유가 궁금함? 그런데 3년 전에 내가 준 표주박은 어따 팔아먹었노?'
과부 '아 그거... 마을 동구 밖 샘터에서 잃어버렸어. 쩝'
선사 '그 자리에 다시 가봐라. 아직 그대로 있을 것이다'
과부가 놀라서 '어째서?'
선사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 중이 되기를 500번이나 했는데, 처음 중이 되면서 지
금까지 남이 주지 않는 것은 가져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 인덕으로 무엇이든 내것이라 이
름만 지어놓으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지~~!'

과부는 웃기고 있네~~! 표정을 지으며 그 샘터로 가보니 과연 그 표주박이 3년 전 모습 그대
로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과부는 다시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으며 선사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잘살았다고 한다.

▲  반야사 심검당(尋劍堂)
2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종무소, 공양간의
역할도 하고 있다.

▲  반야사 용머리 연꽃 석조
백화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가득하여
그의 넉넉한 마음을 비춘다.

▲  반야사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大雄殿)
1993년에 지어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극락전이 대웅전 행세를 하였다.

▲  맞배지붕을 지닌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저승)의 식구들이
봉안되어 있다.


▲  대웅전 불단과 붉은 닫집, 그리고 석가3존상
(대웅전 불상 - 영동군 향토유적 12호)


대웅전 불단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普賢菩薩)로 이루어진 조그만 석
가3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은 경주 옥석(玉石)으로 조성되어 산뜻하게 도금을 입힌 것으
로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가운데 석가여래상은 검은 머리칼을 드러내고 있고
좌우 보살상은 화려한 보관을 눌러쓰며 석가여래 좌우를 받쳐준다. 그들 뒤로는 검은 바탕으
로 이루어진 석가후불탱이 든든하게 후광이 되어준다.

▲  대웅전 신중탱
대웅전을 지키는 온갖 호법신의 무리가
그려진 것으로 석가후불탱과 비슷한
스타일로 조성되었다.

▲  산신각(山神閣)
2단으로 다져진 석축 위에 높이 들어앉은
산신각은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의 보금자리이다.


▲  반야사3층석탑 - 보물 1371호

극락전 앞에는 하얀 피부의 3층석탑이 소박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지금이야 반야사의 일원
으로 완전히 묻혀있어 이곳의 오랜 유물로 봐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는 원래 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석천계곡 탑벌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던 것을 1950년에 주지 성학(性學)이 수습
하여 일으킨 것이다. 그 덕분에 반야사에 오래된 존재가 하나 늘었다.

이 탑은 네모난 바닥돌 위에 1층의 기단을 세우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얹힌 다음 머리장식
으로 마무리를 한 형태로 밑에서 머리까지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으며, 높이는 335cm이다. 바
닥돌은 모두 6매의 판석(板石)으로 이루어졌으며, 바닥돌 윗면 네 모서리에는 합각선이 돌출
되어 있고, 중심부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 기단면석이 꼽히도록 하였다.
기단부는 4매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와 탱주가 모각되었다. 갑석 윗
면은 1매의 판석으로 조성했으며, 중앙에는 깊이 3cm 정도의 홈을 파서 1층 탑신을 꼽도록 조
성했다. 그리고 갑석의 네 모퉁이에도 합각선이 돌출되어 있다.
1층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는데, 각 면에는 양 우주를 새겼으며, 남/북쪽 면석은 새
로 끼워 넣었다. 2,3층 탑신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2층 탑신에 모각된 우주에서는 엔
타시스 수법을 볼 수 있다. 3층 탑신은 현상으로 보아 새로 끼운 것으로 여겨진다.

옥개석(屋蓋石)은 1층에서 3층까지 모두 1석으로 조성되어 있다. 각층 옥개석의 낙수면은 길이
가 짧고 경사가 급해 보이며, 옥개석 받침은 1층 5단, 2/3층은 4단으로 되어 있다. 추녀는 비
교적 두껍게 조성되었는데, 직선화되는 보편적인 수법과는 달리 둥글게 표현되어 전각의 반전
은 예리한 편이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찰주(刹柱)가 관통된 노반(露盤)과 복발 등의 머리장식
이 남아있다.
이 탑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
으로 보기도 함) 1층 탑신의 결구 수법은 신라 석탑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기단 면석과
1층 탑신을 꼽도록 하면에 홈을 판 점은 백제계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제자리를
떠나긴 했지만 탑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고 건강 상태도 좋으며, 반야사의 보물로 묵묵히 살
아가고 있다.

▲  서쪽에서 바라본 3층석탑과 배롱나무
, 극락전

▲  범종을 비롯한 4물의 보금자리
범종각(梵鍾閣)


▲  배롱나무 - 영동군 보호수 13호

극락전과 3층석탑 사이에는 오래된 배롱나무 형제가 꿈틀거리고 있다. 이들은 추정 나이가 약
530년(1994년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500년) 정도로 높이는 각각 8m, 7m, 나무 둘
레는 각각 0.8m, 0.6m이다.
경내에서 대웅전 불상 다음으로 늙은 존재(3층석탑은 제외)로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자신이
가지고 댕기던 주장자(柱杖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갈라져 쌍배롱나무로 자랐다는 믿거나 말
거나 전설이 전해온다.
한여름(7~8월)에 왔더라면 배롱나무(백일홍)의 아름다운 붉은 향연을 제대로 누릴수 있을텐데
겨울과 봄의 팽팽한 경계선에 오다 보니 그 아름답다는 나무도 다른 나무와 비슷하게 그저 알
몸만 있다. 사람이나 나무나 걸치는 옷을 빼버리면 다 똑같거늘 왜 그리도 욕심을 부리고 계
급을 나누는지 모르겠다.


▲  배롱나무의 여름 모습 (반야사 홈페이지 참조)
배롱이의 향연은 기껏해야 2달 정도이다. 6~7개월 정도는 푸른 옷을 걸치고 있으나
나머지 5~6개월은 겨울 제국에게 모든 것을 공출당한 채, 알몸으로 살아간다.


▲  경내에서 가장 늙은 건물, 반야사 극락전(極樂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원래는
이곳의 대웅전이었으나 1993년 바로 옆에 새 대웅전이 지어지면서 법당에서
물러나 아미타불의 거처인 극락전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  석천계곡(반야사계곡)과 반야사의 상징, 문수전

▲  석천계곡 (반야사계곡)

이렇게 경내를 둘러보고 '이제 다봤구나~!' 싶어서 발길을 돌리려고 하니 문수전을 알리는 이
정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발길을 붙잡는다. 문수전이라?? 반야사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나
싶어서 살펴보니 그곳으로 인도하는 산길이 경내 뒷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기왕 온 것이니 다
음에 안와도 될 정도로 말끔히 둘러봐야 나중에 명부(저승)에 가서도 꾸중을 듣지 않을 것이
다.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산길은 석천계곡을 따라 이어지는데, 계곡 풍경이 반야사 이전보다 더욱
장관이었다. 물은 깊고 청명하며, 바위와 벼랑이 적당히 나타나 여흥거리가 되어준다. 그리고
누런 갈대가 바람에 펄럭이며 나그네의 마음을 간지럽히고, 소나무 등 나무도 삼삼해 이런 곳
이야말도 진정한 신선(神仙)의 세계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이다.
신선의 세계는 인간계보다 시간이 빛의 속도만큼 빠르다고 한다. 신선의 장기를 구경하는 동
안 몇 대(代)가 흘러갔다는 난가(爛柯)의 전설도 있을 정도이니 괜히 이 계곡에 발을 들였다
가 기백 년 뒤에나 나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정도였다.


▲  대자연이 빚은 작품, 돌너덜 (반야사 호랑이)

반야사의 명물 중에는 '반야사 호랑이'라 불리는 돌너덜이 있다. 그 모습이 마치 호랑이가 꼬
랑지를 치켜든 모습과 비슷하여 그런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들은 순 자연산으로 수 만년
동안 흘러내린 파쇄석이 산자락에 자연스럽게 쌓이고 쌓여 높이 80여m, 길이 300여m에 이르는
돌너덜을 이루게 되었다. 근데 하필이면 호랑이 모습을 이루고 있어 대자연의 기가 막힌 작품
솜씨에 그저 놀라울 따름인데, 반야사는 그를 산신의 화현으로 삼고 있으며, 산신각 산신탱에
그려진 호랑이 모습과도 비슷하다.


▲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

▲  망경대(문수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둥지를 튼 문수전(文殊殿)

문수전으로 이어지는 계곡 숲길은 아주 느긋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착했던 길은 영천을 앞
에 두고 갑자기 180도 흥분하여 아주 각박한 오르막길로 돌변한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에
맞배지붕 건물 하나가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들어앉은 건물처럼 장엄하게 보이는데, 그것이
반야사의 상징인 문수전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벼랑 옆에 닦여진 가파른 길을 올라가
야 되는데, 경내에서도 다소 떨어져 있고, 길도 각박하여 문수전을 건너뛰는 사람도 있다.
허나 이는 갈비탕에서 고기를 빼먹는 거와 같을 정도로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문수보살에게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 주변 풍경이 가히 일품이니 조금은 힘들더라도 발품을 팔만하다.


▲  망경대 밑에 자리한 석천계곡 영천(靈川)

문수전을 강제로 머리에 이고 있는 망경대(문수바위) 밑 계곡을 영천이라 부른다. 이곳은 세
조와 문수보살에 얽힌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서려 있으니 내용은 이렇다.

세조가 신미의 청을 받아 반야사를 방문하니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홀연히 나타났다. 세조
가 예를 차리자 그는 왕을 영천으로 인도하여 몸을 씻을 것을 권했다. 그리고는
'왕이 불심(佛心)이 갸륵하니 부처의 자비가 따를 것이오'

한 마디 남기고는 사자를 타고 망경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다가 사라졌다.

왕이 목욕을 마치고 계곡 밖으로 나오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하며, 병을 낫게 해준 문수
보살을 기리고자 절 이름을 반야사로 갈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화는 가만보면 오대산 상원
사(上院寺)에 서린 세조와 문수동자 전설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아무래도 거기 설화를 가져와
서 반야사 스타일로 다듬은 듯 싶다.
세조가 과연 여기서 목욕을 했는지는 의문이나 그만큼 왕실의 인연과 지원이 각별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절 부근 경치 좋은 곳에 이런 전설을 갖다 붙인 듯 싶으며, 그 전설로 인해 영천
옆 벼랑을 문수바위 또는 망경대(望京臺)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망경대는 서울을 바라본다
는 뜻이니 절을 중창시켜준 세조와 왕실의 은혜를 두고두고 기리겠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  망경대 꼭대기에 자리한 문수전의 위엄

문수전은 세조와 문수보살의 설화가 깃든 망경대 벼랑 위 250m 고지에 북쪽을 바라보며 자리
해 있다. 건물을 짓기에는 다소 척박한 곳이지만 그 현장에 문수보살을 위한 건물을 지어야
문수도량의 뽀대가 나므로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건물을 지어올렸다.
문수전에 오르면 백화산 남쪽 자락과 석천계곡, 호랑이 돌너덜 등이 시원스레 시야에 들어오
나 주변이 칼처럼 솟은 높은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어 보이는 범위는 그것이 전부이다.


▲  문수전에 봉안된 문수보살상과 문수동자상

문수전은 북쪽을 향해 문이 나 있다. 그 문을 들어서면 늠름한 모습의 문수보살상이 파란 피
부의 목각사자상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려놓고 푸근한 표정으로 중생들을 맞는다. 그 좌우에
는 붉은 옷을 걸친 문수동자와 녹색 옷을 입은 문수동자가 두 손을 모아 합장인(合掌印)을 선
보이고 있어 그야말로 '문수'의 세상이다.
문수보살과 동자상은 근래 지어진 것들이라 고색의 때는 여물지도 못했지만 목각사자상은 조
선 후기 것이라고 하며. 그 좌우에 중생들의 시주를 받아 봉안한 조그만 금동 원불(願佛)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워 어두운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준다.


▲  문수전에서 바라본 반야사 호랑이(돌너덜)

▲  문수전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북쪽과 백화산 산줄기
다음에 오면 저 계곡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나의 존재를 잠시 지우고 싶다.

▲  백화산의 첩첩한 산줄기 (백화산 정상 방면)

▲  망경대 바로 밑에 펼쳐진 영천
영천 주변에 흙과 자갈이 넓게 깔려 있어 여름 피서 장소로 아주 제격이다.
혹시 아는가 여기서 물놀이를 하면 세조 임금처럼 병이 싹 나을지도~~?

▲  문수전에서 경내로 내려가는 산길

반야사 경내에서 문수전으로 인도하는 길은 2개가 있다. 우리가 이용한 계곡 길을 거쳐서 가
는 것과 경내 동쪽 산길로 오르는 길이 그것인데, 보통 계곡 길로 올라가서 문수전을 찍고 경
내 동쪽 산길로 내려오며 절에서도 그렇게 가기를 적극 권하고 있다. 이유는 계곡 길에서 망
경대 벼랑으로 오르는 길이 좁기 때문이다. (반대로 가도 상관은 없음)
계곡 길은 완만하게 가다가 망경대에서 아주 화끈하게 흥분을 하지만, 동쪽 산길은 서서히 오
르는 형태로 덜 가파르다. 그 길을 내려오면 잠시 떨어졌던 경내가 이내 모습을 드러내며, 주
차장 쪽으로 떨어진다.


▲  동쪽 산길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반야사 경내

▲  반야사 부도(浮屠) - 영동군 향토유적 10호, 11호

주차장 남쪽 산자락에 고색이 짙은 부도 2기가 나란히 자리해 있다. 이들은 주차장 부근에 있
어 찾기는 쉽지만 구석진 곳에 있어 자칫 놓치기가 쉬우니 꼭 등잔 밑을 살펴보기 바란다.

반야사 부도는 이 땅에 흔한 석종형(石鐘形) 부도로 왼쪽 1호 부도(향토유적 10호)는 검은 주
근깨(이끼)가 가득 핀 네모난 바닥돌 위에 대추알처럼 생긴 탑신을 얹히고 네모난 지붕돌로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오른쪽 2호 부도(향토유적 11호)는 네모난 바닥돌 위에 8각의 대석(臺
石)과 석종 모양의 탑신을 올리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지붕돌과 정체가 아리송한 기둥
모양의 머리장식을 올렸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누구의 승탑(僧塔)인지는 귀신
도 모른다.

▲  왼쪽 1호 부도

▲  머리장식이 특이한 오른쪽 2호 부도

▲  주차장에서 부도로 인도하는 돌계단

▲  주차장에서 바라본 석천계곡


▲  봄을 기다리는 석천계곡
백화산 등산을 하려면 저 다리를 건너면 된다. (관세음보살상도 저 다리를 건너면 됨)


부도를 끝으로 그림 같은 절, 반야사 관람은 흔쾌히 마무리가 되었다. 기분 같아서는 계곡 다
리를 건너서 관세음보살상까지도 가보고 싶고, 계곡길을 따라 일주문(주차장에서 우매리로 나
가면 중간에 있음)까지 걸어가며 계곡을 느끼고 싶지만 다음 답사지(경북 어느 지역)로 빨리
넘어가자는 일행의 독촉에 그 좋은 후식거리를 모두 포기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쉽긴 했지
만 반야사에 깃든 보물과 문수전, 영천과 망경대 등 볼만한 것은 거의 다 보았으니 별로 후회
는 없다.

시간은 어느덧 16시. 해가 많이 길어지긴 했지만 조금씩 어둠의 기운이 피어나 세상을 훔치려
들고 우리는 고적한 산사에 외마디 부릉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우리는 반야사란 절을 기억하겠지만 반야사는 잠깐 스치고 지나간 나를 기억이나 할련지 모르
겠다. 다음에 다시 인연이 된다면 (여름에 인연을 잡고 싶음) 계곡도 말끔히 둘러보고 세조가
몸을 씻었다는 영천에도 풍덩해보고 싶다.
이렇게 하여 반야사 나들이는 막을 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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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동북쪽 지붕 ~ 수락산 벽운동계곡, 귀임봉 나들이 (염불사, 황자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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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 여름 나들이 ~~~~~

▲  수락산 산줄기

▲  염불사 목관음보살좌상

▲  귀임봉에서 바라본 상계동 지역



수락산(水落山, 638m)은 서울 동북부 끝으머리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노원구 상계동(上溪
洞)과 경기도 의정부시, 남양주시 별내면에 걸쳐져 있다. 북한산(삼각산), 도봉산(道峯山
), 관악산과 더불어 서울 근교 4대 명산으로 격하게 찬양을 받고 있으며, 북한산(836m)과
도봉산(740m) 다음으로 서울에서 가장 하늘과 맞닿은 뫼로 서울의 주요 지붕을 이루고 있
다.

수락산은 북한산(삼각산)에 비해 덩치는 작으나 멋드러진 바위와 계곡이 많고, 산세가 유
려해 꽤 야무진 산이다. 거대한 암벽에서 물이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라 하여 수락산이
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며, 산 정상부와 능선에는 대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온갖 모습의 바위(물개바위, 기차바위, 코끼리바위)들이 포진해 있다. 또한 물이 들어가
는 산이라 약수터도 푸짐하며, 벽운동계곡과 수락골(수락계곡), 동막골, 금류계곡(청학리
계곡), 석림사계곡, 거문돌계곡 등의 알찬 계곡도 아낌없이 품고 있다.

예로부터 명산(名山)에는 절이 많은 법, 수락산도 명산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아온 뫼라 흥
국사(興國寺), 학림사(鶴林寺), 염불사, 용굴암(龍窟庵), 내원암(內院庵), 석림사(石林寺
) 등 오래된 절을 품고 있다. 그 가운데 흥국사에는 다량의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고 학
림사 또한 지방문화재 3점을 간직하여 고색의 위엄을 과시한다.
그밖에 노강서원(鷺江書院)과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묘, 수락산보루(堡壘) 등 오랜 명소
가 있고, 현대 사찰인 도선사(道詵寺)에는 지방문화재인 석삼존불상이 있다.

수락산 등산은 수락산역과 당고개역(학림사), 온곡초교, 동막골, 덕릉고개, 흥국사, 청학
리, 장암역(석림사), 산곡동(검은돌마을)에서 오르면 되는데, 수락산역과 당고개역, 청학
리에서 많이들 올라간다. 정상까지는 2~3시간 정도 걸린다.
수락산은 덕릉고개를 사이에 두고 남쪽에 불암산(佛巖山)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으며 동쪽
은 국사봉, 퇴뫼산과 살짝 이어져 있다.

나에게 있어 수락산은 꽤 인연과 추억이 깊은 산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가족 산행으로 여
러번 찾은 적이 있으며, 1994년에 수락산 그늘인 상계1동 아파트단지에 살게 되면서 수락
산은 나의 뒷동산이 되었다. 벽운동계곡과 수락골은 나의 쉼터이자 놀이터가 되었고 수락
산의 상계1동 구역은 계곡부터 약수터, 산길까지 나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수락산의 품에 수 없이 안기며 그와 진한 정을 과시했으나 2002년 겨울에 도봉동(
道峰洞)으로 이사를 가면서 수락산과도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주 멀리 이
사를 갔느냐? 그것도 아니다. 바로 옆 동네인 도봉동으로 조금 갔을 뿐, 집 부근 중랑천(
中浪川)에 가면 수락산 산줄기가 훤하게 바라 보인다.
그 이후 수락산에 안긴 횟수는 얼마 되지 않으며 꼭대기도 1~2번 가본 것이 고작이다. 한
때는 나의 뒷동산으로 나를 수없이 안아주었던 수락산, 허나 그에게 오랫동안 무심(無心)
을 보이며 살아오다가 그의 품이 문득 생각나 여름의 한복판에 카메라에 물통 1개 짊어지
고 오랜만에 수락산을 찾았다.

집에서 수락산까지는 그런데로 가까운 거리라 두 발에 의지하여 걸어갔다. 중랑천 둑방길
을 따라 노원교를 건너 수락산역까지 도보 20분, 여기서 10분을 더 가면 벽운동계곡 하류
이다. 계곡 밑까지는 회색빛 아파트가 가득 들어차 수락산을 가리고 있는데, 옛날에는 이
곳 모두 아름드리 숲이었다.


▲  벽운동계곡 하류에 세워진 수락산 표석의 위엄


 

♠  수락산 벽운동계곡 (벽운동 기점에서 염불사까지)

▲  벽운동계곡(碧雲洞溪谷) 하류

벽운동계곡(벽운계곡)은 수락산의 주요 계곡의 하나로 수락동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벽운동
이란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에서 보이듯이 조선 때 서울 근교 경승지로 선비와 양반들의 발길
이 빈번했으며, 그들이 우수한 경관에 부여하는 동천(洞天)의 지위까지 누리면서 벽운동천(碧
雲洞天)이란 별칭도 지니고 있다.

이 아름다운 계곡을 유람에서 끝내지 않고 별장까지 지어 머문 이가 있다. 바로 사도세자(思
悼世子)의 장인이자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 1713~1778)이다. 그
는 계곡 풍경에 퐁당퐁당 빠져 별장을 지었는데, 계곡에 바위가 하얗게 드러난 수락산 절경이
골짜기와 어우러져 마치 흰구름이 머무는 것 같다며 벽운동이라 하였다. 그래서 계곡 뿐 아니
라 계곡 밑에 자리한 마을까지 벽운동(碧雲洞)이란 간판을 달게 된 것이다.
이후 홍봉한이 영의정이 되고 조정의 실세가 되면서 많은 이들이 그의 벽운동 별장을 찾았다.
그로 인해 벽운동은 자연히 양반들의 순례 명소가 되었고, 혜경궁홍씨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벽운동계곡은 바위와 암반이 많고, 상류와 중류에 폭포와 소(못)이 여럿 널려 있다. 계곡 하
류(염불사 직전)는 수심이 얕고 숲이 무성하며 쉬어갈 자리도 넉넉하여 적은 발품으로 피서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덕성여대생활관 직전 계곡 북쪽에는 벽운동마을을 이루고 있는
식당들이 터를 닦고 있어 백숙과 도토리묵, 파전 등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허나 좀 더 세련
된 경관을 원한다면 하류를 버리고 과감히 위로 올라가길 권한다.

염불사를 지나면 암반들이 적지 않게 펼쳐지며, 벽운산악회를 지나면 이 계곡에서 가장 큰 폭
포(그래봐야 높이 5m도 안됨)와 못이 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큰 암벽과 조촐한 폭포 줄기
를 볼 수 있으나 더 이상은 괜찮은 곳이 없다.


▲  수락산의 품으로 인도하는 벽운동계곡길(동일로250길)

▲  물이 거의 말라버린 벽운동계곡 (덕성여대생활관 뒤쪽)

벽운동계곡 기점에서 염불사까지는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길이 잘 닦여져 있다.
이 길은 '김시습 문화 산책로'란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세조(世祖) 때 생육신(生六臣)의 하
나였던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梅月堂)이 이 계곡에서 잠시 은둔을 했었다. 하여 그를 기리고
자 그런 이름을 씌운 것이다. 허나 그와 관련된 유적과 설화는 딱히 전해오는 것은 없다.
포장길(동일로250길)이 싫다면 계곡 길로 가도 되며, 덕성여대생활관 북쪽 계곡에는 벽운동천
을 비롯한 바위글씨들이 숨어있으니 한번 숨바꼭질을 해보기 바란다. 계곡길은 염불사 부근까
지 이어져 있다.

포장길 중간에는 펜스가 둘러진 덕성여대 생활관이 있다. 이곳이 바로 홍봉한의 벽운동 별장
자리로 우우당(友于堂)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그마저 근래에 철거되어 주춧돌만 남은 실
정이다. 그는 'ㄱ' 모습의 건물로 우우당 현판은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썼다고 전하나 세월
의 거친 흐름 속에 누가 잡아갔는지도 모르는 상태이다. 홍봉한이 꽤 잘나갔던 시절에는 사랑
방으로 쓰였는데 손님들로 늘 부산했다고 하며, 혜경궁 홍씨가 어린 시절 이곳에서 계곡 경치
를 즐기며 감수성과 서정성을 키워나갔다.

홍봉한이 사라진 이후, 그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다가 19세기 후반에 서예가로 유명한 국봉 이
병직(鞠峰 李秉直)의 고조부가 사들였다. 우우당 바깥 계곡 바위에는 벽운동천(碧雲洞天), 운
원수(雲源壽), 국봉(鞠峰), 소국(小鞠) 등의 바위글씨가 있는데, 이는 이병직이 새겼다고 전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이병직은 국봉 외에 송은(松隱)이란 호도 가지고 있는데, 교육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으면서
후학 양성에 공을 들이다가 결국 거덜이 났다. 그래서 1957년 6월 덕성학원에서 매입해 생활
관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한옥 상당수를 밀어버리고 새 건물을 지으면서 우우당만 겨우 남게
되었다가 그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성북동 성락원(城樂園), 부암동 석파정(石坡亭)과 더불어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오래된 별장(
별서) 유적인 만큼 서울시에서 지방문화재로 지정하여 적극적으로 지켜주었으면 좋으련만 현
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  벽운동계곡의 주름진 반석들 (염불사 부근)

▲  염불사 정문 (오른쪽은 시립수락양로원)

벽운동계곡 기점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그 길의 끝에 염불사가 있다. 그 흔한 기와집 일주문(
一柱門) 대신 철로 된 철문이 일주문의 역할을 도맡고 있는데 낮시간이라 문은 활짝 열려있다.
철문을 들어서면 바로 날씬하게 솟은 염불사 표석이 중생을 맞이하고, 그를 지나면 허전한 주
차장과 아주 짧은 숲길이 나오면서 바로 염불사 경내가 모습을 내민다.

염불사는 수락산 그늘에 살던 시절, 수없이 수락산의 품을 오갔음에도 1번도 들어간 적이 없
었다. 왜냐?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현대 사찰로 생각을 하고 지나쳤던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눈길도 주지 않던 그곳에 이렇게 발을 들인 것은 생각 외로 좀 오래된 절이고 무려
지방문화재 2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최근에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인터넷의 도
움이 무지 컸다.
절이 오래되었음에도 내력을 알리는 안내문 조차 꺼내놓지 않았으니 그동안 지나친 것은 어쩌
면 당연하다. 오래된 역사에다 문화유산까지 지니고 있으니 그런 절만 보면 격하게 구미가 땡
기는 것이 본인의 습성인지라 이번에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  염불사(念佛寺) 경내 (왼쪽이 큰법당, 오른쪽이 대웅전)

수락산 벽운동계곡에 조촐히 터를 닦은 염불사는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창건하여
백운사(白雲寺)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유물이나 기록이 전혀 없어 아마도 조
선 중기나 후기에 살짝 지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참고로 서울에는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우기는 절이 유난히도 많다. 아무래도 그가 고려 말~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승려이고 서울 천도에도 크게 관여를 했으며, 태조 이성계의 스승이자
벗이었으니 그동안 많은 절에서 창건주로 우기던 원효(元曉)나 의상(義湘), 도선(道詵) 등의
쾌쾌묵은 존재보다는 더 무게감이 컸을 것이다.

어쨌든 창건 이후 오랫동안 마땅한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1903년에 상궁(尙宮) 김씨
가 돈을 대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지장전을 지었다. 이때 자신의 부모와 고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자 발원문(發願文)과 복장주머니를 남겼다.
6.25 때 절이 파괴된 것을 다시 지어 영몽사(靈夢寺)로 이름을 갈았는데, 이후 쌍몽사(雙蒙寺
), 염불사(念佛寺)로 간판을 바꾸었다. 1965년에는 하씨가 부인의 병이 나은 것이 수락산 산
신(山神)의 덕이라며 절에 산신각을 지어주었으며, 2005년에 2층짜리 큰법당을 짓고, 대웅전
을 부시고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큰법당과 대웅전, 지장전, 산신각(독성각)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으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목관음보살좌상 및 복장(腹臟) 일괄','지장시왕도'가 있
다. 이중 목관음보살좌상은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이나 원래부터 이곳 불상은 아니며 지
장시왕도와 함께 다른 곳에서 넘어온 것이다.

절이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고색의 기운은 싹 말라버렸으며, 수락산의 주요 산길인 벽운
동계곡 산길 옆에 자리해 있어 산꾼들의 떠드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은근히 들려 온다. 허나
절을 감싸고 있는 짙푸른 나무들이 그 소리를 크게 걸러주니 고적한 산사의 기운을 누리기에
부족함은 없으며, 일렁이는 숲과 멋진 계곡을 옆에 끼고 있어 산바람과 물바람, 풍경소리에
번뇌가 싹 달아난다.

▲  한글 현판이 인상적인 염불사 큰법당

▲  큰법당 석가3존불

경내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큰법당을 찾았다. 이곳에 염불사의 보물이 있을 듯 해서이다. 큰
법당은 이곳의 중심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2층 건물이다. 1층은 요사(寮舍)
와 종무소(宗務所), 공양간 등 복합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있고, 2층이 큰법당으로 옆으로 난
계단을 통해 오르면 된다. (1층 내부에서 올라가도 됨)

큰법당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불단에 장엄하게 자리한 석가3존불은 문수보살(文殊菩薩)
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대동하며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 뒤로 후불탱이 자리해 있고,
윗쪽에는 붉은 단청을 칠한 닫집이 화려하게 보궁(寶宮)을 이룬다. 천정에는 7마리의 새 모형
이 날개를 활짝 퍼득이며 날고 있다.
석가3존불 좌우에는 조그만 감실(龕室)을 가득 만들어 작은 금동불(金銅佛)을 안치했는데 이
들은 중생들에게 시주를 받아 달아준 원불(願佛)로 죄다 금빛을 내고 있어 너무 화사하다 못
해 눈이 부실 지경이다. 허나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은 대충 봐도 된다. 다 2005년 이후에 조
성된 따끈따끈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럼 무엇을 봐야 되느냐? 석가3존불 옆을 보면 3중으
로 이루어진 조그만 붉은 기와 닫집이 보일 것이다. 닫집 밑에는 유리막에 감싸인 불상이 있
는데, 그가 바로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인 목관음보살좌상이다. (그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염불사 목관음보살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0호

목관음보살좌상은 1695년에 조성된 보살상이다. 나무로 만들어 도금을 입힌 것으로 높이는 63
cm로 조그만 편인데, 그의 뱃속에서 조성시기가 담겨진 발원문(發願文)과 후령통(候鈴筒), 법
화경(法華經) 3책, 주사다라니 등의 복장 유물이 발견되어 그의 정체를 소상히 알려주고 있다.
발원문에 따르면 박삼룡과 박용산 등의 시주로 전라도 장흥 사자산 봉일암과 수도암(修道庵)
의 불상으로 조성되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 크게 활동한 조각승인 득우와 덕희가 만들었다.
봉일암과 수도암이 어떤 절이고 언제 없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이후 집을 잃고 이러지러 옮겨
다니던 것을 어찌어찌하여 이곳 염불사까지 흘러들어왔다.

그의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며, 조각 수법도 우수하다. 게다가 조성 관련 발원문이 남아있
어 17세기 후반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잘보여준다. 비록 보살상의 한계로 법당 불단을 차지하
지 못하고 옆으로 밀려났지만 석가3존불과 달리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귀한 몸이라 특별히 유
리막까지 씌워 그를 보호한다.

보살상 머리에는 화려하면서도 복잡한 무늬의
보관(寶冠)을 씌워져 있다. 보관은 귀까지 내
려와 있는데, 여러 장식물이 주렁주렁 달려있
고, 보관 밑으로 검은 머리가 약간 보인다. 넓
은 이마 한복판에는 동그란 백호가 찍혀 있고,
눈썹은 약간 구부러져 있으며, 눈초리는 가늘
고 길다.
코는 조그맣고, 입술은 붉으며, 수염이 가늘게
표현되어 있는데, 얼굴은 거의 사각형에 살이
좀 올라 보인다.

▲  옆에서 바라본 목관음보살좌상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고, 법의(法衣)는 양 어깨를 덮고 있는데, 가슴 쪽은 드러
냈으며, 오른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대고 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옷주름
선은 아래로 유려하게 흐르고 있고, 대좌(臺座)를 일부 덮고 있다. 붉은색 대좌는 닫집과 함
께 절에서 마련한 것으로 그의 거처가 은근히 탐이 난다.


▲  상궁김씨의 복장주머니와 목관음보살좌상에서 나온 복장 유물들

큰법당 남쪽 벽에는 오래된 문서와 주머니를 머금은 액자가 걸려있다. 이것들이 뭔가? 살펴보
니 글쎄 괘불(掛佛)보다 더 보기 힘들다는 복장 유물이 아닌가? 보통 절에서 복장유물은 공개
를 거의 하지 않는다. 혹 한다고 해도 박물관을 통해서 살짝 할 뿐인데, 유물 모두 부피가 가
벼운 것들이라 신변의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허나 염불사는 박물관도 아닌 그들 법당에 복장
유물을 과감하게 공개하는 위엄을 보였다.

액자 왼편에 있는 호리병 모양의 물건은 1903년에 상궁김씨가 지장전을 지어주면서 자신의 부
모와 고모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자 만든 발원문을 담은 복장주머니이다. 천하에 무려 300곳
이 넘는 절을 찾아갔지만 복장주머니는 처음 본다. 수락산이 이렇게 귀한 선물을 내려주는구
나. 나는 그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액자 오른편에 있는 문서는 목관음보살좌
상 뱃속에서 나온 문서로 법화경(法華經)과 주사다라니이다. 글씨는 모두 붉은색인데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다.


▲  염불사 지장시왕도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51호

복장 유물 액자 옆에는 빛바랜 지장시왕도가 있다. 이 그림은 1869년에 위국과 그의 처 박씨,
유오 등이 별세한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조성한 것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했던 화승(畵僧)
금암당 천여(錦巖堂 天如)가 그의 제자 취선(就善), 묘영(妙英)과 함께 그렸다.
처음에는 동대문 밖 감로암(甘露庵)에 있었으나 6.25로 염불사 탱화들이 죄다 못쓰게 되자 급
한데로 감로암에 있던 이것을 소환하여 봉안했다.

그림 중앙에는 승려 머리의 지장보살이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발산하며 하얀 대좌에 결
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고, 그 좌우로 저승의 10왕과 문관(文官)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일제히 지장보살을 바라보며 서 있다. 등장 인물이 그리 복잡하지 않아 다소 여유로
운 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정교한 필선과 정교한 금니 문양의 표현이 매우 뛰어나다.
19세기 탱화 채색은 거의 원색적인데 비해 이 탱화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색채 대비의 조화를
이루고 있고, 채도를 낮추어 은은하면서도 맑은 17세기 불화 채색 양식을 보여준다.

큰법당 보물들을 한참 살펴보고 있으니 1층에서 신도 아저씨가 올라와 주름진 인상을 보이며
왜 사진을 찍냐고 물어본다. 하여 적당히 답을 하니 그제서야 인상을 풀면서 여러 이야기를
끄집어 낸다.
예전에 서울시에서 이들을 지방문화재로 지정하면서 관련 문화유산을 사진에 담아갔는데, 복
장 유물은 방바닥에 펼쳐놓고 사진에 담았다고 하며 그때 찍은 복장유물 사진이 절에 있으니
필요하면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는데, 아직까지 관련 사진
은 오리무중이다. 허나 솔직히 필요는 없다.
지방문화재 보유 기념으로 2008년 4월 26일에 알만한 가수를 소환하여 '염불사 산사음악회'를
떠들썩하게 열기도 했다. 안그래도 오래된 내력에 비해 내세울 것이 없는 열악한 형편인데 이
렇게 지방문화재를 지니게 되었으니 이만한 꿀단지가 없다.
그 외에 개인적인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별을 고하고 법당을 나왔다.

          ◀  염불사 지장전(地藏殿)
큰법당 뒷쪽에는 지장전과 이제 막 피어난 마
애약사여래좌상이 있다.
지장전은 1903년 상궁 김씨가 지어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6.25때 파괴되어 다시 지었으며, 내부에는 지
장전의 주인인 지장보살(地藏菩薩)과 저승 10
왕, 금강역사상, 시왕탱, 지장탱 등이 봉안되
어 있다.

▲  색채감이 넘치는 지장전 내부

▲  근래 조성된 마애약사여래좌상

▲  1지붕 2가족, 산신각과 독성각

▲  산신 가족을 담은 붉은 색채의 산신탱
오른쪽 벽에는 붉은 칠성탱이 걸려있다.

지장전을 지나면 큰 바위와 산신각(山神閣)이 나온다. 산신각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맞배지
붕 건물로 1965년에 신도 하씨가 부인의 병이 나은 것이 수락산 산신의 덕이라며 흔쾌히 지어
준 것이다.
산신각은 산신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을 봉안하고 있는데, 칠성(치성광여래) 가
족을 담은 칠성탱은 산신탱 옆에 놓았으나 독성의 공간은 그 옆에 독성각(獨聖閣)이란 독자적
인 현판을 달며 1칸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지붕은 하나, 건물 이름과 현판은 2개를 이루고
있다. 건물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를 뒷배경으로 자리한 산신각의 모습이 마
치 산꼭대기 부근 바위에 홀로 자리한 모습처럼 보인다.

※ 수락산 벽운동계곡, 염불사 찾아가기 (2018년 9월 기준)
* 지하철 7호선 수락산역 1번 출구에서 5분 정도 가면 수락산입구 교차로이다. 여기서 오른쪽
  으로 들어서 은빛3단지를 지나면 벽운동계곡이다. 염불사는 수락산입구 교차로에서 도보 15
  분
* 벽운동계곡은 주차 공간이 여의치 않으니 대중교통 이용을 권한다.
* 벽운동계곡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1동
* 염불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1동 산51 (동일로250길 44-142, ☎ 02-938-9395)


 

♠  수락산 영원암(靈源庵)과 황자굴(皇子窟)

▲  싸리나무 담장에 감싸인 귀틀집 (지붕은 너와지붕)

염불사를 둘러보고 벽운동계곡을 따라 상류로 올라갔다. 10분 정도 오르면 벽운산악회 직전에
벽운교가 나오는데 여기서 다리를 건너면 벽운산악회와 수락산 정상 방면으로 이어지며, 오른
길로 가면 영원암과 수락골(노원골)로 이어진다. 나의 목적지는 하늘과 맞닿은 정상이 아닌
영원암(황자굴)과 귀임봉이기 때문에 다리를 건너지 않았다.

벽운교과 영원암 사이에는 수락산 도시산림공원이 자리해 있다. 이곳은 산림청에서 2002년에
'세계 산'의 해를 기념하고자 닦은 것으로 산길에 숲과 자연 정보를 담은 책상과 안내문, 귀
틀집 등을 설치해 숲의 대한 이해와 숲 체험을 돕고 있다. 특히 이곳에는 두충나무가 많이 자
라고 있어 조촐하게 산림욕을 겯드린 산책 명소로 쏠쏠하다.


▲  영원암 산길

영원암 산길은 벽운동계곡과 수락골(노원골) 윗쪽을 이어주는 길로 인적은 별로 없다. 도시산
림공원을 지나면 산길은 조금 각박해지는데, 여름 제국의 무더위 태클에 땀은 비오듯 하고 숨
도 은근히 차다.
그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산중턱 벼랑 밑에 자리한 영원암이 슬며시 모습을 비춘다. 이곳
은 상계1동에 서식했던 시절에 여러 번 왔던 암자인데 이번에 이리 발걸음을 한 것은 황자굴
이란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  영원암 중심 구역 (오른쪽 건물이 나한전)

수락산 서남쪽 산중턱 270m 고지에 살짝 둥지를 튼 영원암은 20세기에 지어진 아주 조촐한 암
자이다. 워낙 이름이 없는 곳이라 인터넷에도 정보가 거의 없는 실정인데 암자 뒷쪽에 눈썹바
위처럼 생긴 황자굴이 있어 예전부터 수행 공간이나 민간신앙의 현장으로 쓰였던 듯 싶다.

고색의 멋을 풍기는 문화유산은 아직 여물지도 못한 상태이며, 나한전을 비롯하여 영산전, 독
성각, 칠성각, 산신각, 요사 등 6~7동 정도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특히 산신각은 여기서 좀
멀리 떨어져 있는데, 앞서 귀틀집에서 서쪽 산길을 한참 올라가야 된다. 아마도 이곳만큼 경
내와 산신각의 거리를 멀리 둔 절은 없을 것이다.

절간 같다는 말이 바로 이곳을 두고 하는 말일까. 산바람 소리와 나의 발자국 소리가 이곳 소
리의 전부일 정도로 고적하기 그지 없으며, 인적도 거의 없어 이곳이 나의 비밀 아지트가 된
기분이다. 속세에서 잠시 나를 지우고 싶을 때 이곳에 잠시 푹 안겨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영산전에 봉안된 뜻밖에 존재들
용왕 2명과 용 2마리

▲  시골 농가 분위기의 요사


영원암 중심 구역에는 나한전과 영산전, 요사가 있다. 나한전(羅漢殿)은 석가불과 그의 제자
인 나한을 봉안한 건물로 절에는 따로 법당급의 건물이 없어 나한전이 법당의 역할을 수행하
고 있다. 어차피 석가불이 봉안되어 있으니 법당의 자격으로도 그리 손색은 없으며, 건물 앞
에는 수락산이 베푼 약수가 나오는 샘터가 있어 절과 나그네의 목을 축여준다. 그리고 뜨락에
는 누구나 쉬어갈 수 있도록 평상(平床) 등의 쉼터가 닦여져 있다.

나한전 옆에는 바위 밑에 자리를 닦은 건물이 있다. 현판은 없으나 기둥에 부착된 조그만 하
얀 딱지를 보니 영산전(靈山殿)이라 쓰여 있다. 영산전이라면 부처의 생애를 담은 8개의 그림,
팔상도(八相圖)를 봉안한 건물인데 문을 여니 정작 팔상도는 온데간데 없고 엉뚱하게 용을 타
고 있는 용왕 2기가 나를 맞이한다. 아니 이건 뭐지? 겉은 영산전인데 속은 완전 용왕각이었
던 것이다. 아마도 하얀 딱지에 건물 이름을 잘못 쓴 것이 아닐까 싶다. (용왕은 물을 관리하
는 존재임)

▲  6각형 모습의 독성각

▲  금색 옷을 걸친 독성

나한전 뒷쪽에 자리한 독성각은 독성(나반존자)의 보금자리로 특이하게 6각형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 뒷쪽에는 황자굴이라 불리는 큰 암벽이 병풍처럼 자리해 있는데, 독성각 옆으로 난
산길을 통해 굴까지 오를 수 있다. 허나 길 끝에서 벼랑을 좀 타야 되기 때문에 길이 조금 위
험하다. 비록 돌과 시멘트로 길을 닦긴 했지만, 바로 밑이 아찔한 낭떠러지이고 길까지 고르
지를 못하니 각별히 주의가 요망된다.


▲  대자연이 빚은 작품 눈썹바위 모습의 황자굴

황자굴이라고 해서 동굴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니 이름에 파닥파닥 낚이지 말자. 벼
랑 윗부분에 움푹 들어간 공간이 있는데, 그곳을 바로 황자굴이라 부르는 것이다. 굴 윗쪽에
는 바위가 눈썹처럼 크게 돌출되어 굴을 감싸고 있어 마치 석모도(席毛島) 보문사(普門寺)의
눈썹바위(☞ 관련글 보러가기)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왜 이곳이 황자굴이 되었을까? 천하에서 제일 크다는 정보의 바다 인터넷 조차도 '
황자굴이 뭐임? 먹는거임?'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황자굴은 말그대로 황제의 아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인데, 마침 인근에 고종의 왕후인 명성황
후(明成皇后) 민씨가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 때 줄행랑을 치다가 잠시 들려 기도를 올렸
다고 전하는 용굴암이 있다. 그런 것을 보면 황자굴은 명성황후의 아들<나중에 순종(純宗) 황
제>이 숨거나 기도를 올렸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순종은 황태자(皇太子) 시절, 수락산에 온 적도 없고, 임오군란 때 모후(母后)를 따라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냥 용굴암의 믿거나 말거나 전설을 따라서 용굴암은 황후, 이곳은 황태
자가 각각 숨어 지냈다는 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봐야될 것이다.


▲  황자굴 바로 직전 (돌과 시멘트로 계단을 다짐)

▲  황자굴 내부
비바람을 피하기에는 아주 제격인 황자굴에는 조그만 단과 하얀 패가 있다.
천태산(天台山)이 언급되어 있는 걸 보면 독성을 봉안한 공간인 듯 싶다.

▲  황자굴에 봉안된 패

▲  황자굴에서 바라본 도봉산

▲  석굴로 이루어진 칠성각(七星閣) 내부

나한전과 좀 떨어진 칠성각은 바위를 파서 만든 일종의 석굴이다. 석굴 내부는 한여름임에도
시원하기 그지 없는데, 광배를 갖춘 하얀 피부의 석가불을 중심으로 하얀 피부 일색인 칠성(
치성광여래) 7기가 그 좌우와 뒷쪽에서 석가불을 지킨다. 보통 칠성각은 칠성탱이란 탱화를
걸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석고로 칠성상을 만들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두 손으로 홀을 쥐어든
모습과 겉모습, 머리 장식까지 죄다 비슷하지만 표정만큼은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인다.

* 영원암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상계1동 산1 (☎ 02-937-1973)


 

♠  수락산 마무리 (귀임봉)

▲  구암약수터

영원암을 둘러보고 수락골 쪽으로 오르다보면 하얀 바위 밑에 자리한 구암약수터가 모습을 비
춘다. 조그만 파이프를 통해 수락산이 베푼 물이 실타래처럼 조금씩 흘러나오는데, 인내심을
가지고 컵에 가득 담아 들이키니 속이 시원하다. 이곳은 좀 외진 곳이라 인적은 그리 없으며,
속세와 멀리 거리를 둔 곳이라 수질은 아직 양호하다.


▲  구암약수터에서 수락골 능선길로 인도하는 길
영원암에서 수락골 능선으로 가는 산길은 가파른 산자락이다. 그래서 길 옆은
늘 아찔한 경사가 벼랑처럼 펼쳐져 있다.

▲  수락골 능선길 영원암입구 (왼쪽 길은 영원암, 오른쪽 길은 수락산 정상)

구암약수터에서 다시 길을 재촉하면 수락골 능선길로 이어진다. 여기서 서쪽으로 내려가면 수
락골과 수락산역 방면, 동쪽으로 올라가면 용굴암과 도솔봉, 수락산 정상으로 이어지는데, 수
락골 갈림길 부근 숲속에 예전에 종종 물을 뜨러 가던 약수터가 있어 찾아보았으나 길이 바뀌
었는지 찾지 못했다.


▲  수락골 갈림길 주변 조망대에서 바라본 노원구와 도봉구 지역,
그리고 북한산(삼각산)과 도봉산의 힘찬 산줄기

▲  수락골 갈림길에서 귀임봉으로 인도하는 수락골 남쪽 능선길

수락골 갈림길에서 귀임봉으로 이어지는 수락골 남쪽 능선길로 접어들었다. 이 산길은 상계1
동과 상계3,4동 경계를 가르며 서남쪽으로 달리는 산줄기로 중간에 바위가 일품인 귀임봉이
있고, 산줄기의 끝 봉우리에는 고구려(高句麗) 유적인 수락산보루터가 있다. 길 중간에는 학
림사와 당고개역으로 내려가는 산길이 있어 속세와도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있다.

능선길이 매우 완만하고 부드러우며 숲이 짙어서 여름 햇살도 살짝 몸을 사리며 200~300m 고
지라 약간의 등산으로 충분히 접근이 가능하다. 게다가 능선 양쪽으로 수락산 산줄기와 노원
구(蘆原區) 지역이 훤히 바라보여 조망까지 일품이다. 마치 천상(天上)의 산책로를 거니는 기
분이다. 그래서 내가 수락산에서 가장 즐겨찾던 산길이기도 했다.


▲  귀임봉 조망대

약간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을 뿐,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달리던 능선길은 귀임봉에 이르러
아주 조금 흥분을 한다. 다시 하늘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귀임봉은 해발 약 280m로 거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꼭대기 동쪽에는 조망대가 있는데, 수
락산 산줄기와 정상, 덕릉고개, 불암산, 상계3,4동 지역이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가운데 높은 봉우리가 정상)

▲  귀임봉에서 바라본 수락산 남쪽 줄기와 덕릉고개, 불암산 북쪽 줄기

▲  귀임봉에서 바라본 불암산과 상계3,4동 지역
상계3,4동은 서울에서 가장 동북쪽 동네로 수락산과 불암산 사이에 포근히
감싸여 있다. 허나 아직 달동네가 적지 않게 남아있어 이 땅의 몹쓸
고질병인 빈부격차의 극심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  귀임봉 서쪽 바위길
하얀 피부의 잘생긴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현장으로 수락산이 산 끝에
살짝 빚어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중계동 지역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동과 창동, 도봉구, 성북구 지역
산 밑이 온통 아파트 일색~~ 이 땅에 너무 흔한 풍경이다. 가까이에 보이는
봉우리 정상에 수락산보루가 깃들여져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회색빛
아파트의 물결이 거치게 출렁이는 외로운 섬을 보는 듯 하다.

▲  귀임봉 서쪽에서 바라본 상계1동과 도봉동, 도봉산

수락산보루까지 거침없이 내려가려고 했으나 일몰시간이 자꾸 눈치를 주어 귀임봉에서 수락골
로 철수했다. 아쉽긴 하지만 일몰 바로 직전이라 설령 가서 사진에 담더라도 일그러지게 나올
것이다. 그래서 다음을 기약하며 미련없이 속세로 내려왔다. 어차피 집과도 가까우니 수락산
이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 종종 찾아와 그의 품에 안길 생각이다.

이날 수락산 코스는 '수락산역 → 벽운동계곡 → 염불사 → 영원암 → 수락골 갈림길 → 귀임
봉 → 수락골'로 소요시간은 출사 시간을 포함하여 4시간 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간만에 찾은 수락산 나들이는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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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과 길상화(김영한)의 아름다운 넋과 무소유 정신이 깃든 도심 속의 포근한 절집 ~~ 성북동 길상사


' 성북동 길상사 겨울 산책 '

▲  길상사 관음보살상


 

묵은 해가 천하만물의 아쉬움 속에 그렇게 저물고 따끈따끈한 새해의 햇살이 천하를 막 보
듬던 1월의 첫 주말, 후배 여인네와 성북동 길상사를 찾았다.
길상사는 1년에 4~5회 이상 찾을 정도로 지겹게 발걸음을 한 곳이다. 허나 도심 속의 별천
지 같은 그곳에 마음이 퐁당퐁당 빠져 질리기는 커녕 자꾸만 손과 발이 간다. 아마도 서울
장안에 있는 사찰 중, 종로에 있는 조계사(曹溪寺)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찾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몸이 길상사의 열성 신도나 법정스님의 팬이냐. 그것도 전혀 아니다.

길상사를 그렇게도 많이 찾았건만 모두 봄과 여름, 늦가을에 갔을 뿐, 한겨울에는 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곳의 설경(雪景)을 보고자 벼르고 있었으나 그저 다짐으로만 끝난 채 벌
써 여러 해의 겨울을 흘려 보내고 말았다. 그러다가 묵은해와 새해가 갈리는 시점에 큰 눈
이 내렸는데 이때다 싶어 새해 첫 주말 나들이 메뉴로 그곳을 택했다.

길상사는 성북동 북쪽 구석에 자리해 있는데 성북초교에서 2차선 골목인 선잠로를 따라 12
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걷는 것이 싫다면 성북구 마을버스 02번을 타면 됨~) 그 짧은 구
간은 권력층과 졸부들의 번쩍번쩍한 금입택(金入宅)이 덥수룩하게 펼쳐진 현장으로 보기만
해도 주눅이 잔뜩 들고 편한 마음마저 앗아가 버린다.
이 땅에서 나날이 심해져 가는 빈부격차를 보여주듯 담장은 거의 요새 같으며 대문은 충차
(衝車, 공성무기의 하나)로도 어림 없을 정도로 단단해 보인다. 그것으로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방범장치를 겹겹이 설치해 지나가는 선량한 나그네를 불편하게 응시하고 있으며 고
급빌라와 저택 뜨락에는 담장 밖으로 손을 내민 나무들로 가득하다.

비록 나같은 서민들에게는 기분이 영 좋지 않은 곳이긴 하나 그렇다고 졸부들의 하찮은 위
엄 앞에 지나치게 꼬리를 내릴 필요는 없다. 제아무리 구중궁궐의 저택이라 하여도 위대한
대자연 형님 앞에서는 모래성만도 못한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괜히 기죽지 말
고 당당히 가슴을 펴며 나들이객의 입장으로 산책을 즐기면 그만이다. 또한 성북동은 예로
부터 완사명월형(浣紗明月形)의 명당자리로 명성이 자자했다. 성북동에 우리나라의 0.1%
서식한다고 할 정도로 졸부들이 몰려든 것도 바로 명당의 기운을 누리고자 함이다. 그러니
명당의 기운을 졸부 따위들이 다 누리도록 두지 말고 성북동을 거닐면서 그 기운을 조금이
나마 챙겨가기 바란다.


 

♠  길상화(김영한)와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녹아든 도심 속의
포근한 산사, 성북동 길상사(吉詳寺)

▲  연등으로 주변을 치장한 극락전

서울 도심 속의 별천지이자 아늑한 산사인 길상사는 졸부들의 저택과 고급 빌라로 가득한 성
북동 북쪽에 둥지를 틀고 있다. 비록 주택가에 터를 닦았지만 이곳이 북한산(北漢山, 삼각산)
의 남쪽 자락에 해당되어 '삼각산 길상사'를 칭하고 있으며, 나무가 무성하고 계곡이 경내를
흐르고 있어 첩첩한 산골에 묻힌 산사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절
풍경도 제법 아름답거니와 도심에 있음에도 공기도 청정하다. 또한 다른 절에서는 접하기 힘
든 이채로운 볼거리도 여럿 있어 두 눈에 적지않게 흥분감을 던진다.

길상사는 고색의 내음이 서린 절도 아니요, 그렇다고 문화유산이 풍부하게 깃든 절도 아니다.
역사는 겨우 20여 년으로 나보다 한참이나 어리다. 이곳이 법등(法燈)이 켜진 시간에 비해 유
명세를 크게 탄 것은 군사정권시절 권력실세와 졸부들이 들락거리던 고급요정에서 누구나 의
지하고 찾을 수 있는 절로 변신한 전대미문의 현장이자 무소유(無所有)의 저자로 불교계의 큰
승려로 추앙받는 법정(法頂)이 가꾼 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고급요정을 흔쾌히 기증했던
김영한(길상화)의 인생 이야기도 속인(俗人)들의 마음에 적지 않은 감동을 선사한다.

법정은 20103111352분께 78세의 나이로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다음날 순천 송광
(松廣寺)로 운구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의 입적을 애도했다.


▲  창건주 김영한(길상화)의 영정 (극락전 내부 우측에 있음, 위치는
변경 가능)

* 길상사의 창건주,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의 생애와 고급요정에서 절로 탈바꿈된 길상사
  의 영화와 같은 탄생과정
길상사는 원래 성북동 서쪽 구석에 자리한 삼청각(三淸閣)과 더불어 고급요정으로 악명을 날
렸던 대원각(大元閣)이다. 군사정권의 실세들과 졸부들이 기생을 끼고 놀던 요정으로 이곳을
세운 이가 바로 김영한<법명 길상화(吉詳花)>이다.

김영한은 1916년 부유한 양반가의 딸로 태어났다. 허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뜨면서 집안은 풍
비박산이 났고 거의 팔려가다시피 하여 시집을 가게 되었다. 허나 그의 신랑은 몸이 매우 허
약했고, 15살에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중, 곁에 있던 남편이 실수로 우물에 빠져 죽으면서
그 어린 나이에 벌써 과부가 되고 만다. (아마도 우물 부근에서 놀다가 빠진 듯함)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의 이성 잃은 구박이 나날이 드쎄지자 이를 감당하기 힘들어 결국 집을
나왔으나 정작 정처(定處)는 없었다. 하여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
眞香)이란 이름으로 기생이 되었다. (그때 나이 16)

그는 가무와 궁중무, 시문 등 기생의 기본 소양을 익혔는데 타고난 미모에 지식과 문학, 예술
적 소질까지 넘쳐나 금세 서울 권번가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게다가 삼천리 문학에 수필까지
발표하는 등, 그야말로 팔방미인이었다. (거기에 사업 수완도 대단했음)
흥사단(興士團)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申允局)의 도움으로 1933년 왜열도 동경으로 유학을 갔
으나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에 그가 있다는 함경도 함흥(咸興) 감옥을 찾았다. 허나 만나
지 못하고 허탈한 마음에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 장소에 나갔는데 거기서 영어 교사로
있던 백석(白石, 1912~1996)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고 둘은 급 가까워진다.

김영한에게 퐁당퐁당 빠진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 부르며 그녀의 하숙에서 함께 지냈다.
거기서 거의 출퇴근을 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다가 그녀가 서울로 돌아가자 교사직까지 내
던지고 그를 따라 상경, 조선일보에 취직했다. 그리고 청진동(종로1)에 살림을 차리고 서울
과 함흥을 오가며 3년 동안 동거에 들어갔다.
허나 백석의 부모는 아들이 기생과 어울리는 꼴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들의 혼인을 쌍수들고
반대했고 극기야 다른 여자에게 강제로 혼인을 시키기에 이른다. 허나 백석은 혼인 첫날 밤에
도망쳐 김영한을 찾았고, 이후에도 그런 행위는 계속 되었다.

백석은 김영한과 부모 사이에서 머리에 쥐가 나도록 갈등하다가 아예 만주로 도망치자고 김영
한에게 제안을 했다. 허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이곳에 있자고 하였고 서로가 조금
씩 갈등의 골을 보이다가 결국 백석 혼자 만주로 훌쩍 떠나고 말았다. 이에 그녀는 그를 비운
에 빠트렸다며 늘 후회했다. (이후 백석은 북한에서 활동했음)
혼자가 된 김영한은 그 외로움을 돈벌이로 풀었다. 돈에 대한 강인한 집녑을 보이며 적지 않
은 재산을 긁어모았고 6.25전쟁이 한참이던 1951, 그녀의 나이 불과 35세에 거금 650만 원
을 들여 현 길상사 자리를 매입해 대원각의 전신이 되는 청암장(靑岩莊)이란 한식당을 내었다.
그는 계곡이 흐르고 경치가 빼어났던 그곳에 좋은 예감을 얻었다고 한다. 물론 성북동에 서린
완사명월형 명당 기운에도 적지 않게 욕심을 냈을 것이다.
또한 사업과 함께 공부도 병행하여 1953년 중앙대 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몇 편의 수필과 '
내 사랑 백석','하규일 선생 약전' 등을 쓰기도 했다.

잠시 식당 운영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도 했으나 이후 대원각으로 이름을 갈아 자신이 직접
챙겼고 군사정권 시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대원각의 명성에 정권 실력자와 졸부들이 구
름처럼 몰려들면서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서울의 3대 고급 요정으로 우뚝 선다. (청운각
대신 '오진암'을 넣기도 함)
대원각 단골들이 하나같이 잘나가는 작자들이라 삽도 모잘라 포크레인으로 돈을 쓸어담을 정
도 였고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있어도 소형차를 타고 오는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명성
을 드날렸다.

허나 그녀는 재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돈과 명예 등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거의 다하
고 악착같이 살았지만 나이를 강제로 먹으면서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서서히 깨닫던 중, 법정
'무소유'를 읽고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다가 미대륙 로스앤젤레스에 잠시 머물렀
1987년 그곳으로 설법을 하러 온 법정을 만나게 되었다.
그의 법문에 다시 감동의 파도를 느낀 그는 그의 모든 것이 담긴 대원각을 법정에게 기증하기
로 했다. 당시 대원각은 면적 7,000여 평, 건물만 40여 동에 이르렀으며 시가는 무려 1,000
을 헤아렸다. 하지만 갑자기 뜬금없는 거액의 기증에 법정은 크게 놀라며 거절했다. (바로 받
으면 그것 또한 모양새가 좋지 않음) 허나 김영한은 8년 동안 끈질기게 기증의 뜻을 보였고,
결국 법정은 1995년 그곳을 받아 일단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넘겼다.
갑자기 큰 보물단지를 얻게 되어 싱글벙글이 된 송광사는 대원각을 대법사(大法寺)로 이름을
갈아 송광사의 말사(末寺)로 삼았으며 1997년 송광사의 옛 이름이자 법정이 김영한에게 지어
준 법명인 길상화(吉祥花, 吉祥華)를 따서 길상사로 이름을 다시 바꾸고 그해 1214일 개원
법회를 열어 길상사의 탄생을 만천하에 알렸다.

개원법회에는 천주교의 고()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시민, 불자 4,000여명이
몰렸는데 법정의 이끌림에 대중 앞에 선 그는 자신의 부질없는 삶을 이렇게 드러내며 대중의
심금을 진하게 울렸다.
'저는 죄가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저쪽에 보이는 팔각정을 보면서)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요정 시절 기생들)이 옷을 갈아입던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
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길상사의 창건주가 된 김영한은 법정으로부터 염주(念珠)를 받았으며, 옛 사랑인 백석
을 기리고자 2억 원을 내놓아 백석문학상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불교에 귀의하며 인생의 끝 무렵을 보내던 그는 1999111483세의 나이로 외로
운 삶을 놓게되었다.
그가 죽기 하루 전날, 절에 들어와 목욕재계하고 예불을 올리며 길상헌에서 인생의 마지막 밤
을 보냈으며, 당시 길상사 주지 청학(靑鶴)에게
'내가 죽으면 눈이 내릴 때 절 마당에 뿌려주세요' 유언을 했다고 전한다.

중생의 통곡 속에 그의 육신은 산산히 화장되었고 유골은 49재 이후 유언에 따라 첫눈이 절을
하얀 수채화로 채색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그 자리에는 공덕비를 세워 그를
기리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7일에 기제(忌祭)를 올린다. 또한 절은 그의 뜻을 받들어 대
중에 널리 문을 열었고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여 명의 중고생에
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김영한은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자였지만, 돈을 신으로 받들며 사람 무시를 예사로 여기는 이
땅 태반의 졸부들과 달리 그 모든 것을 속세에 내버리고 빈털털이가 되어 인생을 마무리했다. 그가 대원각을 기증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아깝지 않냐고 물었는데 그는 '그래봐야 그 사람(
백석)의 시 한줄만도 못하다'
며 답을 했다고 한다.

그는 자손도 없고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지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그의 눈물어린
사연과 함께 아름다운 넋과 마음은 여전히 그의 유작(遺作)이라 할 수 있는 길상사에 고이 깃
들여져 속세에 오염되고 상처받은 중생의 메마른 마음에 한줄기 감동의 싹과 눈물을 선사한다.
또한 그가 속세에 준 커다란 선물(길상사) 덕분에 졸부들이 점거하여 진흙탕이 되버린 성북동
부촌(성북로 북쪽) 한복판에 진흙탕에 피어난 한송이 연꽃처럼 중생들이 편안히 찾아와 안길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생겨났다.

▲  김영한이 인생의 마지막 날을 보냈던
길상헌

▲  조촐한 모습의 길상화 공덕비

* 길상사의 현재
길상사의 불전(佛殿)은 지장전을 제외하고 대부분 요정 시절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하여 지장전, 설법전, 종무소, 범종각, 길상선원, 유마선방, 침묵의집,
진영각 등 30동 가까운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오래된 절이 아니라서 딱히 문화유산은 없
으나 200년 정도 묵은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절 뜨락에 그늘을 드리운다.
또한 시민운동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 매년 5월 법회와 길상음악회를 연
. 법회 때는 법정이 자주 법회를 주관했으며, 그를 보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길상음악회는 다양한 테마의 음악을 선보이는 자선음악회로 여기서 나오는 수입은 어려운 이
들을 위해 쓴다고 한다.

휴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넓은 경내에 빈 공간이 없을 지경이며, 평일에도 적지 않
게들 찾아와 길상사의 높은 인기를 보여준다. 그 방문객 수는 서울 굴지의 고찰인 조계사,
은사(奉恩寺), 도선사(道詵寺), 진관사(津寬寺) 못지 않다.


▲  길상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법정의 진영(眞影)

*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참선 프로그램들
길상선원(吉詳禪院) - 상설 시민선방으로 길상사에서 벌이는 12일 선수련회에 3회 이상
참여하거나 34일 여름 특별 선수련회 참여자, 또는 다른 절의 선수련회에 참여한 뒤 길상사
12일 선수련회에 1회 참여한 사람에 한해 방부<房付, 선방에 안거(安居)를 청하거나 승려가
다른 절에 가서 잠시 있기를 청하는 것>가 가능하다.
기존 이용자는 매월 25~31일까지, 신규 이용자는 매월 1~3일에 방부를 들일 수 있다. 방부가
승인된 사람은 일정액의 방부비를 내고 이용하면 되며, 한달에 5일 이상은 출석해야 된다.
원 출입시간은 매 정시에서 10분 사이이다.

침묵의집 - '침묵의집에서 침묵을! 침묵 속에서 고요함을! 고요함 속에서 평화를'이란 테
마로 누구나 자유롭게 명상과 좌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용시간은 10~17시이며, 일요
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만 짧게 이용이 가능하다. (특별행사가 있는 날은 거의 이용 불가)

템플스테이(Temple Stay) - 체험 위주의 프로그램으로 1달에 2(매월 3/4째주 토~일요일
12일 일정) 정도 열린다. 사찰예절과 경내 탐방, 예불습의, 발우공양, 참선, 108, 차담, 자유포행 등을 하며, 108배가 가능한 사람만 참여할 수 있다. 참가비는 무려 5만원으로 이곳
템플스테이에 1회 이상 참여했던 사람은 3만원으로 깎아준다. (여름선수련회와 3~4시간 일정
으로 이루어지는 템플라이프도 있음) <자세한 정보는 길상사 홈페이지 참조>

※ 길상사 찾아가기 (2018년 1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성북구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길상사 하차, 또는
  1111, 2112번 시내버스를 타고 홍익대부속중고등학교 입구에서 하차하여 도보 15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2동 323 (선잠로5길 68 ☎ 02-3672-5945)
* 길상사 홈페이지는 앞에 템플스테이의 링크된 부분이나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길상사 일주문, 설법전 주변

▲  길상사 일주문(一柱門)

속세에서 길상사로 진입하려려면 '三角山 吉詳寺'라 쓰인 일주문(정문)을 들어서야 된다.
문은 200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된 것으로 정문을 들어서면 도심 속의 별천지 같은 길상
사 경내가 1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장엄하게 펼쳐진다.


▲  일주문 천정 그림 (봉황일까? 극락조일까?)

일주문을 들어설 때면 다들 정면에 보이는 풍경에만 눈과 마음이 팔려있어 천정을 보는 이는
거의 없다. 아마 문을 들어서는 중생의 99.9%는 그냥 앞만 보고 갈 것이다. 그게 사람의 본능
이니까. 허나 여기서 잠시 목운동을 해보자. 고개를 90도 올려다보면 천정에 장엄하게 그려진
그림이 두 눈을 화들짝 놀라게 만들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구름무늬 사이로 하얀색의 긴 꼬랑
지를 가진 새 2마리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비상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새의 모습을 보니 거의 봉황(鳳凰)과 비슷하다. 그래서 봉황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이곳이 절
이다보니 딱히 봉황을 키울 이유는 없어보여 불교에서 많이 키우는 극락조<極樂鳥, 가릉빈가>
가 아닐까도 싶다. 그림이 꽤 수작(秀作)으로 어떻게 저런 곳에 교묘하게 숨어서 지나가는 중
생의 머리통을 보고 있었는지 정말 등잔 밑이 어두웠다. 길상사를 30번 이상 들락거렸음에도
그의 존재를 처음 눈치챈 것은 2012년 봄이었으니 진정한 숨바꼭질의 종결자가 아닐 수 없다.

   ◀  이국적으로 생긴 길상사 관음보살상
일주문에서 오른쪽 길을 오르면 설법전 앞에
늘씬한 모습의 관음보살상이 자리해 있다.
상사를 상징하는 명물로 꽤나 명성이 높은 존
재인데 그 흔한 관음보살처럼 생기지 않아 '
이건 무슨 스타일의 관음보살인가?' 고개를 좀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는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대좌(臺座)로 삼아
소탈하고 늘씬한 모습으로 곧게 서 있는데 머
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긴 했지만 유럽 왕관과
비슷한 모습이며, 머리결은 목 뒤쪽까지 내려
왔다. 얼굴은 자애로운 성모의 얼굴, 그 자체
라 거의 천주교 성모 마리아와 비슷하게 보인
. 오른손은 번쩍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
취했고, 왼손에는 관음보살의 필수 아이템인
정병(政柄)을 들고 있으며, 손 아래쪽은 아무
런 조각이 없다.

이 이국적인 관음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이자 우리나라 조각계의 거장인 최종태씨가 만든 것으
로 보살이 아닌 불모(佛母)로 삼아 만들면서 세상에 화제가 되었다. 2000428일에 봉안
되었으며, 높이는 1.8m이다. 비록 불상의 면모는 떨어지긴 하나 불교와 천주교가 서로 돕고
교류하여 이루어진 상징물로 그 가치는 크며 대좌에는 다음의 메세지가 적혀있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길상사의 뜻과 만든 이의 예술혼이 시절 인연을 만나 이 도량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이 모습을 보는 이마다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의 원력으로 이 세상 온갖 고통과
재난에서 벗어나지이다. 나무관세음보살'


▲  겨울 제국의 핍박에 물까지 끊긴 샘터

산사(山寺)에는 어김없이 샘터가 있기 마련이다. 완전한 산사는 아니지만 길상사도 나름 산사
의 분위기가 자욱한지라 인근 계곡물을 끌어와 범종각 밑에 조촐하게 샘터를 냈다. 길상사를
찾은 중생의 목마름을 해소해주는 고마운 샘터로 봄과 여름, 가을에는 늘 물로 가득했다.
나 지금은 겨울 제국 시절이라 물이 끊겨 연꽃무늬의 석조(石槽) 안에는 물 대신 눈이 가득하
. 그러다보니 바가지들도 딱히 소임거리가 없어 찬바람을 맞으며 꾸벅꾸벅 졸고들 있다.


▲  설법전 앞뜨락 (범종각과 샘터, 관음보살상)

▲  샘터 위쪽에 자리한 범종각(梵鍾閣)
이곳에는 길상화가 시주하여 만든 범종이
있었으나 2009년 9월 새로 만든 종으로
대체했다.

▲  관음보살 옆에 조그만 석불(마애불)
커다란 돌에 새겨진 추상화 같은 선각마애상
(線刻磨崖像)의 모습이 꽤 이채롭다. 그는
예전에는 극락전 좌측에 있었다.


▲  길상사 느티나무(왼쪽의 큰 나무) - 서울시 보호수 8-6호

길상사에는 2그루의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윗 사진의 느티나무는 관음보살상 건너편에 자
리한 것으로 마르지 않는 샘인 세월을 양분으로 삼아 제법 모습을 갖추었다. 허나 겨울 제국
에게 모든 걸 빼앗겨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가련한 신세로 몰래 봄을 잉태하여 쏟아낼 시간을
기다린다.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165년 정도라고 하니 지금은 19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12
m, 둘레는 2.5m이다.


▲  느티나무 그늘 쉼터에서 만난 법정스님 어록

▲  길쭉한 모습의 설법전(說法殿)

길상사 좌측 높은 곳에는 서쪽을 바라보고 선 설법전이 있다. 설법전은 일종의 강당(講堂)
로 교육과 템플스테이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기존 요정 건물을 개조한 탓에 절 건물의 이
미지보다는 거대한 한옥 민박집이나 강당 같은 이미지가 강해 보인다.
깔끔하게 정비된 설법전 내부는 연병장처럼 매우 넓고 깨끗하며, 20008월에 조성된 금동석
가불좌상이 제일 앞쪽에 봉안되어 있다. 볼살이 푸짐한 그의 표정은 너무 환하여 나도 모르게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며 그 모든 것이 금동으로 장엄되어 그 금빛에 침침한 두 눈이 멀 지경
이다. 석가불 주변에는 중생의 시주로 하나씩 올린 수백 개의 조그만 옥불(玉佛)이 석가불을
석굴처럼 에워싸 대장관을 이루는데 이들은 인도에서 가져온 옥으로 만들었다.

▲  무지 넓은 설법전 내부

▲  해맑은 표정의 금동석가불좌상


▲  길상사 유일의 석탑인 길상보탑(吉祥寶塔)

설법전 남쪽에는 201211월에 새로 심어진 길상보탑이 있다. 4마리의 석사자가 7층 탑신(
)을 받치고 선 이른바 4사자 7층석탑으로 그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길상사에는 그 흔한 석탑
도 하나 없었다. 탑이 없는 허전함을 계속 간직하고 있던 중, 2012년 영안모자 회장인 백성학
이 길상화와 법정의 높은 뜻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가 함께 한 종교간의 교류
의 의미를 널리 전하고자 흔쾌히 이 탑을 기증했다.

겉보기에는 20세기 탑처럼 보이나 조선 중기(17세기)에 조성된 탑이라고 하며 탑 안에 복장봉
안품을 넣어 봉안했다. 그러다가 2013825, 동남아 미얀마에서 1,600년 정도 묵었다는
오래된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처의 오색정골사리, 옹혈사리, 아라한 사리를 입수하
여 그것까지 복장유물로 넣으면서 내부도 아주 빵빵해졌다.

탑이 자리한 자리는 원래 '바람 속 향기'라 불리던 쉼터가 있던 곳으로 자판기 길다방과 음료
수 자판기, 조촐한 평상이 있었다. 허나 탑에게 밀려나 201210월 정랑 서쪽으로 자리를 옮
겼다.
탑은 보통 법당 앞에 세우기 마련이나 여기서는 극락전(법당) 대신 경내 동쪽 구석을 내주어
탑을 세웠다. 그렇다고 극락전 뜨락이 좁은 것도 아닌데 무슨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  사천왕(四天王)이 아로새겨진 기단부와
기단과 탑신의 경계를 이루는 석사자들

▲ 설법전 남쪽에서 바라본 좁은 천하
성북동 동부와 동선동(東仙洞), 낙산(駱山)
등이 바라보인다.


 

♠  길상사 극락전과 지장전 주변

▲  길상사 극락전(極樂殿)

길상사의 법당인 극락전은 옛 대원각의 중심 건물로 ''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 내부에
는 방이 꽤 많은데, 가운데 칸에는 극락전의 주인장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했고, 그 우
측 칸에 길상화와 법정, 절에 의탁된 망자들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좌측 칸은 중생
들이 예불을 올리거나 쉬어가는 쉼터로 방이 꽤 넓다. 여기서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속세를 잠
시 잊으며 쉬는 재미가 꽤 쏠쏠한데 미닫이씩 방문을 조금 열고 밖을 바라보면 정말 집 주인
이나 안방 마님이 된 기분이다.


▲  극락전 좌측에 자리한 법정의 영정 (영정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극락전 금동아미타3존불

극락전 불단을 장식하고 있는 아미타3존불은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199711월에
조성되어 12월에 봉안되었다. 길상사의 창건을 지켜본 불상으로 인자함이 가득 깃들여진 표정
으로 중생을 맞는다. 그의 오른쪽에는 육환장(六環杖)이란 지팡이를 든 지장보살(地藏菩薩)
, 왼쪽에는 보관을 갖춘 관음보살이 나란히 자리해 아미타3존불을 이루며, 두 협시보살(夾侍
菩薩) 역시 자애로운 표정은 아미타불 못지 않다. 그들 뒤로는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금니(
)후불탱화가 걸려있다.


▲  극락전 뜨락 느티나무 - 성북구의 아름다운 나무 3호
60년 정도 묵은 나무로 대원각 초창기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  극락전 우측의 돌문
궁궐이나 고급 한옥에서 만날 수 있는 품격 높은 돌문으로 옛 요정시절의
화려하면서도 어두웠던 시절을 아련히 전해준다.

▲  황토색과 하얀색(눈), 누런색으로 이루어진 극락전 뜨락

▲  길상사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물,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8-5호

극락전과 지장전 사이에는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인 느티나무가 자리해 있다. 이 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270년 정도라고 하니 지금은 300년 정도 되었으며, 높이
12m, 둘레 3.2m로 오랜 세월을 양분으로 먹고 자라 제법 덩치를 갖추었다.


▲  길상사 지장전(地藏殿)

경내 서쪽에는 '나누는 기쁨'이란 찻집(불교용품점도 겸하고 있음)과 지장전이 있다. 설법전
과 극락전 등이 기존 요정 건물을 손질한 건물인데 반해 지장전은 새로 지은 것으로 2004
1017일에 상량식(上樑式)을 가져 200558일 완성을 보았다.
정면 5, 측면 3칸의 우람한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3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은 밥을 먹
는 공양간인 선열당(禪悅堂), 2층은 도서관, 3층은 지장전이다. 건물 앞에는 보름달을 닮은
동그란 연못이 닦여져 있고 주위로 푸른 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으며, 건물 뒤에는 주차장이
있다.


▲  지장전 내부 (지장보살상)

지장전 불단에는 선운사(禪雲寺)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을 모델로 삼아 만들었다는 지장보살이
밝은 미소로 중생을 맞이한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염라대왕이 있으며, 붉은 색
의 지장후불탱화가 그들의 든든한 후광(後光)이 되어준다.

 ◀ 아미타불 염불이 종일 잔잔히 울러펴지는
 지장전의 숨겨진 복도 (영가들의 공간)

지장보살 불단과 그 앞에 펼쳐진 공간이 지장
전의 전부는 아니다. 불단 좌우로 보이는 문
을 들어서면 불단 뒤쪽에 숨겨진 복도가 마치
보물이 묻힌 비밀의 무덤 석실(石室)처럼 모
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죽은 이들, 즉 영가(靈駕)들의 공간으
로 그들의 이름이 적힌 위패가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물론 이들도 돈을 받고 해주는 것이
.
동쪽 벽에는 고운 색채로 치장된 석가삼존불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복도의 폭이 조금 좁다
보니 꽤 장엄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살아있는
이의 심금을 자극시키며 잔잔히 흘러나오는
아미타불 염불(念佛)은 엄숙한 분위기를 유도
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  지장전 영가들의 공간에 그려진 벽화
황홀한 색채를 자아내는 벽화에 석가불과 아리따운 모습의 관음보살이 그려져 있다.
월출산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후불벽화나 부안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의
후불관음탱화, 세계 최고의 불화로 손꼽히는 고려불화처럼 현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눈에 갇혀 고통받고 있는 지장전 뜨락과 연못

▲  지장전에서 바라본 경내 - 깊은 숲속의 절을 보는 듯 하다.

▲ 계곡 건너에 자리한 길상헌(吉詳軒)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요정 시절에는 길상화와 요정 식구들이 생활했으며
김영한이 인생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그 인생을 마감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경내 우측(일주문을 들어서는 기준으로 왼쪽)은 좌측과 달리 자연의 비중이 높다. 북한산 남
쪽 줄기(정릉 뒤쪽 산줄기)에서 발원한 계곡은 경내 서쪽을 가로질러 성북천(城北川)으로 흘
러가며, 나무로 우거진 언덕에는 조그만 집들이 가득한데 이들은 요정 시절 손님 접대 공간으
로 지금은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제법 풍치가 깃들여진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여러 개 있는데, 먼저 다리를 건너면 어른 승려
의 거처인 길상헌이, 그 다음 다리를 건너면 길상화의 공덕비가 있다. 경내에서 가장 북쪽 구
석에는 법정을 기리는 진영각이 있으며, 극락전 뒤쪽에는 침묵의집, 길상선원 등이 빼곡히 자
리를 채운다.


▲  길상화 공덕비로 인도하는 나무다리와 길상헌 뒤쪽 담장

▲  창건주 길상화(김영한) 공덕비 (예전 모습)

길상화 공덕비는 창건주 길상화를 기리고자 그의 2주기인 2001년에 세운 것이다. 비석을 칭하
고 있지만 앞서의 관음보살상처럼 기존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며, 비석 머리에는 사발 2개를
포개놓은 듯한 장식물이 눈길을 끈다.
길상화가 199911월 숨을 거두자 그의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한겨울에 이곳에서 그의
유골을 뿌렸다. 내가 찾아온 날도 눈이 푹신할 정도로 깔려 그때의 모습이 대략 그려진다.

나도 나중에 그에 못지 않은 대부자가 된다면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인생 말년에 모든 것을
세상을 위해 내놓을 수 있을까? 그 물음에 '그렇다'는 대답은 솔직히 자신이 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우선 돈부터 왕창 긁어모아 정승처럼 써보고 싶다. 부자가 되야 길상화를 따라하지
지금 같은 서민 신세에서 그렇게 따라하면 큰일난다. 뱁새가 괜히 황새를 따라하다가는 가랭
이가 절단난다.

◀  길상사 경내를 가로지르는 계곡

이 계곡은 정릉 뒷산에서 발원하여 성북천으
로 흘러가는 것으로 약간의 인공이 더해졌을
,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야말로 길상
동천(吉詳洞天)을 칭해도 손색이 없는 수려한
풍경이다. 김영한은 바로 이 계곡에 매료되어
이곳을 매입했다고 한다.
계곡 바위는 신선의 세계에서 몰래 슬쩍한 듯
멋드러진 모습을 자랑하며 조그만 폭포도 2
정도 있는데, 눈과 얼음에 갇혀 나래를 펼치
지 못하고 있다. 소쩍새가 울 때면 거추장스
러운 얼음을 박차고 졸졸졸 깨어나겠지.


 

♠  길상사 마무리 (진영각, 침묵의집)

▲  경내 서북쪽 언덕에 터를 닦은 집들 - 승려의 참선 및 처소로 쓰인다.

경내 서북쪽에는 자연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산책로가 그림처럼 펼쳐져 번뇌의 염통을 잠시
나마 쫄깃하게 만든다. 보통은 절로 들어가는 길이 멋드러진 경우<월정사(月精寺) 전나무 숲
, 내소사(來蘇寺) 전나무숲길>는 많으나 이곳처럼 경내에 어여쁜 길을 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자연이 어우러진 이 산책로야말로 길상사의 자랑거리이자 얼굴이다.


▲ 나무그늘 쉼터
경내 서북쪽 언덕에 2012년에 새롭게 터를 다진 낭만적인 이름의 나무그늘이 있다.
이곳은 좌선을 위한 공간으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으며 나무 그늘로 가득해
여름 제국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한다. (단 겨울 제국이 손을 대는 경우,
이곳 사용은 건강을 위해 포기해야됨)


▲  나무그늘에서 바라본 계곡과 길상헌 뒤쪽

▲  진영각(眞影閣)

경내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북쪽 구석에 자리한 진영각은 법정의 진영을 봉안한 건물로 그
의 유품을 머금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어른 승려의 생활공간으로 행지실(行持室)이라 불렸는데, 20127월부터 법
정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손질하여 11월에 마무리를 보았다. 그가 살았던 강원도의 오두막(
류산방)에서 쓰던 유품을 비롯해 신도들이 기증한 저서와 서적을 모아두었으나 공개는 하지
않고 있다가 그의 3주기이던 201337(음력 126) 진영 봉안식을 봉행하면서 비로
소 속세에 문을 열었다.

비록 늦긴 했지만 법정을 기리는 공간은 필요했다. 그의 손에서 자란 길상사 입장에서는 당연
히 그리하는 것이 도리겠지. 그러고 보면 이 절을 탄생시킨 길상화를 위한 건물도 하나 있어
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영정과 유품을 전시해 법정과 더불어 길이길이 기렸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법정이 이 절을 키우고 불교계의 명망 돋는 승려라고 해도 길상화가 아니었다면 지금
의 길상사는 없었다. 너무 법정만 띄우지 말고 길상화도 그에 못지 않게 1:1 비율로 띄워주기
바란다. 그게 길상사의 마땅한 도리이다.


▲  진영각에 봉안된 법정의 진영

진영각 중앙에 자리한 진영은 김호선 화백이 20113월부터 12개월 동안 정성을 다해 그
린 것이다. 전 문화재청이던 유홍준이 이 그림을 보고는 스님이 그림을 뚫고 뚜벅뚜벅 걸어나
올 것 같다며 격찬을 했는데 진영의 글씨와 진영각 현판은 서예의 대가인 여초 김응현의 제자
, 승려 기현(奇玄)이 썼다.


▲  법정의 사진과 유품, 온갖 문서들

▲  법정의 승려증과 건강보험증 (주민번호도 나와 있음)

▲  법정 관련 서적과 그가 쓰던 다기(茶器)들

▲  법정의 유품들 (불상과 그림, 모자 등)

▲  법정의 유품들 (승복, 염주, 법계증)

▲  법정의 법계증(法階證)


▲  법정의 유골이 뿌려진 곳

무소유의 소유자답게 그의 마지막 안식처는 참 조촐하기만 하다. 제자들의 권유를 흔쾌히 뿌
리치고 그 흔한 승탑(僧塔)도 두지 않아 길상화가 그랬던 것처럼 자연의 일부로 돌아갔기 때
문이다. 조그만 안내문과 돌탑, 그리고 그의 넋을 먹고 자란 꽃과 풀이 그의 영혼터임을 살짝
귀뜀해준다.


▲  길상선원(吉祥禪院) 앞길
길상선원은 시민들을 위한 참선 공간으로 선원장(禪院長) 승려의 지도로
참선이 이루어지는 좌선방(坐禪房)이다.

▲  길상선원에서 설법전으로 가는 길 - 마치 동네 골목길 같다.

▲  여염집 같은 적묵당(寂默堂)
신행단체 법회장소 및 석가탄신일 연등작업과
여러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예전에는
유마선방(維摩禪房)이라 불렸으나 2012년에
적묵당으로 이름을 갈았다.

▲  극락전 뒤쪽 자비실
승려의 생활 및 참선 장소로 지붕이 유난히
크다. 절집보다는 거의 별장 같은 분위기로
길상사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집이다.


▲  침묵(沈默)의 집

침묵의집은 중생들이 자유롭게 참선을 하거나 명상을 즐길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오전 10
부터 17(일요일은 16시부터 17시까지)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최대 인원은 8명 정도. 인원
이 찼을 경우는 방이 빠질 때까지 목이 빠지라 기다려야 된다.

◀  침묵의집에 걸린 불화
불화 앞 탁자에는 순천 송광사(松廣寺) 목조
3존불감의 모조품이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  길상사에서 누린 일다경(一茶頃)의 여유

길상사 관람을 마무리하고 '나누는 기쁨' 찻집에서 기분 좋게 차 1잔의 여유를 누렸다. 곱상
하게 생긴 작은 찻잔에 잣 2~3덩어리를 조각배처럼 둥둥 띄워 제공하는데 (나는 매실차를 마
셨음) 차의 가격은 3,000~5,000원선으로 인사동이나 삼청동에 비해 좀 저렴하며 대신 리필이
안된다. (상황에 따라 되는 경우도 있음)
전통차 외에 커피도 판매하고 있고 가격도 그런데로 착한 수준이니 잠시 발길을 멈추고 산사
에서의 차 1잔의 여유를 누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길상화(김영한)의 숭고한 뜻과 법정의 무소유 정신, 중생구제를 향해 고행도 서슴치 않던 부
처와 관음보살 누님의 고귀한 뜻에 따라 세상이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오로지 중생을 위해
헌신하며 세속과 겉멋에 물들지 않는 순수의 불교 수행 도량이자 도심 속의 극락, 길상사로
남기를 고대하면서 한겨울에 찾아간 길상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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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는 도심 속의 고즈넉한 산사,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 (서달산, 현충원 숲길)

 


' 6월 맞이 산사 나들이,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지장사) '

▲  호국지장사 지장전(지장보살입상)


 

국립서울현충원은 호국영령들이 잠든 이 땅의 영원한 성역(聖域)이다. 그러다보니 재미
없고 딱딱하며 어려운 곳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서울에 살고 있어도 학창시
절 소풍이나 백일장으로 가본 것이 고작인 사람이 적지 않으며 그곳으로 나들이를 가자
고 하면 의아해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들도 많다. 아무래도 나들이나 산책 등으
로 가기에는 왠지 실례가 될 것 같은 무겁고 조심스러운 곳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은 현충원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그곳은 북한산(삼각산)과 북악
산(백악산), 남산과 더불어 서울의 하늘을 정화시켜주는 듬직한 허파로 숲이 울창해 다
양한 동식물이 의지하고 있다. (현충원 외곽으로 숲이 짙게 둘러져 있음~) 게다가 현충
원 산책로는 천하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숲길이며, 창빈안씨(昌嬪安氏
)묘역과 부안군 이석수 묘역(扶安君 李碩壽墓域) 등의 문화유산, 호국지장사 같은 오래
된 절까지 품고 있어 오래된 볼거리도 풍부하다.
현충원은 분명 3척동자도 다 아는 그런 곳이지만 그곳의 매력과 속살을 제대로 알고 즐
기는 사람은 적은 것이다. 그러니 너무 딱딱한 쪽으로 현충원을 대하지 말고 숨겨진 매
력까지 모두 살피기 바란다. <매년 4월에는 현충원의 백미인 수양벚꽃축제가 열림>

국립현충원은 한강과 관악산(冠岳山) 사이에 솟은 공작봉(孔雀峰, 서달산) 자락에 넓게
터를 닦았다. 1954년에 착공되어 천하에 흩어진 6.25전사자의 유해를 안장했는데, 처음
에는 지명을 따서 '동작동 국립묘지(銅雀洞 國立墓地)'라 했으나 2006년에 '국립서울현
충원'으로 이름을 갈았다.
이곳은 특히 명당(明堂)자리로 명성이 자자한데, 공작이 아름다운 날개를 쭉 펴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며,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이른바 장군대좌형(將軍對座形)으로 통
하기도 한다. 즉 좌청룡(左靑龍)의 형세는 웅장한 산맥(山脈)의 흐름이 용이 머리를 들
어 꿈틀거리는 듯 한강을 감싸 호위하고 있는 형상이고, 우백호(右白虎)의 형세는 힘이
센 호랑이가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는 듯하며, 전후좌우로 솟은 사방의 봉우리와 산허리
는 천군만마가 줄지어 서 있는 형상과 같다.
정면 앞산을 바라보면 주객이 마주앉은 모양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마치 물소뿔 같으며,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명주 폭이 바람에 나부끼듯 하늘거리며 공작봉을 감싸 흘
러 내려가고 있다. 마치 목마른 코끼리가 물을 마시는 듯한 형상으로 명당 중의 명당으
로 통한다. 이렇게 의미가 깊은 곳에 호국의 신을 모셨으니 그들의 후손들과 이 나라가
잘되어야 마땅하지만 자격 미달의 작자들도 여럿 섞여있어서 그럴까? 아직까진 그 효과
가 시원치 못하다. <친일파들의 무덤은 꼭 뽑아버려야 됨~~!>

햇님이 하늘 한가운데에 걸린 6월의 어느 평화로운 날 14시, 동작역(4,9호선)에서 일행
들을 만나 현충원으로 향하는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창빈안씨묘역과 호국지장사 등 현
충원에 깃든 오래된 명소를 둘러보고 서달산 동작대(銅雀臺)로 넘어갔는데 여기서는 현
충원 뒤쪽에 자리한 호국지장사(화장사)만 다루도록 하겠으며, 나머지는 별도의 글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  국립현충원 호국지장사 입구


 

♠  국립현충원 뒷쪽에 자리한 오래된 절집,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책임지고 있는 서달산 호국지장사(西達山 護國地藏寺)

▲  호국지장사 경내로 인도하는 계단길

국립현충원의 꼬리 부분인 공작봉(서달산) 북쪽 자락에는 '호국지장사'라 불리는 오래된 절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처음에는 현충원에 묻힌 호국신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20세기 중반 이후에 지어진 절로 여기고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5년 이후 겉보기와 달리 문화유산을 넉넉히 품은 오래된 절
임을 깨닫게 되면서 구미가 확 올랐고, 그 이후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꼭 발걸음을 하고 있다.

호국지장사(이하 지장사)는 신라 후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670년에 도
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서로 시기가 안맞음~) 도선은 북쪽으로 가다가 한강 언
덕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어디선가 서기(瑞氣)가 흘러나와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여
그 서기를 추적하니 그 기운이 나오는 곳에 칡덩굴이 엉켜지고 약수가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자리를 살펴보니 아주 기가 막힌 명당자리인지라 그곳에 토굴(土窟)을 짓고 갈궁사(葛弓寺)라
했다고 한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장사에서 우기고 있는 믿거나 말거나 설화일 뿐이다. 봉은사(奉恩寺)
에서 작성한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는 '1577년 선조가 창빈묘역 부근 산기슭에 절을
창건하고 원찰을 삼으니 갈궁사가 바로 이 절이다~'
내용이 있어 그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
기도 하며, 고려 공민왕(恭愍王) 시절에 보인(寶印)이 중창<또는 창건>하고 화장암(華藏庵)이
라 했다는 이야기도 덩달아 전해오고 있다. 이곳의 조선 초기 이전의 역사를 속시원히 밝혀줄
역사 기록과 유물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쓸데없이 말만 무성한 것이다.

절의 내력이 그나마 구체적으로 윤곽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말이다. 명종(明宗) 때 창
빈안씨묘역이 절 부근으로 이장되었는데, 1577년 선조(宣祖)가 친할머니인 창빈의 묘역을 동작
릉(銅雀陵)으로 높이면서 화장암을 창빈묘역을 지키는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화장사(華藏
寺)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며 그 인연으로 오랫동안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오성과 한음
으로 유명한 이항복(李恒福)과 이덕형(李德馨)이 10대 시절에 공부를 했던 곳으로도 전해진다.
1663년 절을 중수했으며, 영조 시절에 신경준(申景濬)이 작성한 '가람고(伽藍考)'에 '동작리에
화장암이 있다'는 내용이 있어 그때까지도 꾸준히 법등을 지키고 있었음을 귀띔해준다.

1862년 운담(雲潭)과 경해(鏡海)가 중건했으며, 1870년에 경파루(鏡波樓)를 지었고 1878년에는
주지 서월(瑞月)과 경해가 대방(大房)을 수리했다. 1893년에는 경운(慶雲), 계향(戒香)이 불상
을 개금하고 구품탱과 지장탱, 현왕탱, 독성탱, 산신탱을 봉안했으며 1896년 칠성각을 새로 지
었다. 1906년에는 풍곡(豊谷)이 약사전의 불상을 개금 단청하고 후불탱과 신중탱, 감로탱, 신
중탱, 칠성탱 등을 봉안했다.
1911년에는 왜정(倭政)의 사찰령(寺刹令)으로 봉은사의 말사(末寺)가 되었고, 1920년에 대방을
수리했으며 1936년에 주지 유영송(劉永松)이 능인전(能仁殿)을 중수했다.

1954년 이후 절 밑에 국립묘지가 들어서면서 자연히 그곳에 안장된 호국신을 책임지는 사찰이
되었다. 그래서 지장도량(地藏道場)을 칭하게 되었는데 1983년 혜성(慧惺)은 호국신들이 지장
보살의 원력으로 모두 극락왕생이 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화장사에서 호국지장사<줄여서 '지
장사'라고도 함>로 이름을 갈았다. 그야말로 현충원과 호국신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경내에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능인보전, 삼성각, 극락전, 지장전, 심우당, 청심당 등 10동에 가
까운 건물이 있으며 대웅전과 삼성각, 심우당 등은 동남향(東南向)을 취하고 있다. (능인보전
은 서북향) 경내 남쪽에는 약수가 나와 주민들이 많이 물을 뜨러 오며 지장보살입상을 중심으
로 3,000좌의 조그만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어 절 이름 값을 톡톡히 한다.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철불좌상과 괘불도(掛佛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3호), 극락9품도, 독성
도, 약사불도 등 무려 지방문화재 10여 점을 지니고 있으며, 한강에서 건져 올렸다는 철불좌상
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 후기 탱화들이다. 그 외에 멀리 경주에서 왔다는 신라 후기 3층석탑
이 1기 있는데 그것이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이다.

서울 도심과 무척이나 가깝지만 삼삼한 숲에 감싸여 있어 산사(山寺)의 분위기를 여실히 간직
하고 있으며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현충원에 발을 들였다면 꼭 둘러보길 권한다. 또한 짙
은 숲에 가려 보이는 범위는 적지만 현충원과 한강, 한강 너머 지역(용산구 지역)이 시야에 들
어와 경치도 그런데로 괜찮다. 하여 이승만 전대통령도 꽤나 군침을 흘렸던 곳이기도 한데, 그
가 국립묘지를 둘러보고 잠시 절에 들려 사람들에게
'만일 이곳에 절이 없었다면 내가 묻히고 싶은 땅이다' 했다고 전한다. 그만큼 자리가 좋은 곳
이다. (그의 무덤은 창빈안씨묘역 북쪽에 있음)

이곳은 절의 마르지 않는 샘이자 든든한 후광(後光)인 현충원이 있는 한 배를 굶거나 문을 닫
을 일은 없을 것이다. 현충원의 일원으로 그와 운명을 함께 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만
약 현충원이 없었다면 인근 상도동의 사자암(獅子庵, ☞ 관련글 보러가기)처럼 숲과 주거지의
경계가 되거나 주거지에 거의 둘러싸여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찾아가기 (2017년 6월 기준)
* 지하철 4,9호선 동작역 8번 출구에서 현충원 정문을 거쳐 도보 20~25분
* 국립현충원(동작역) 경유 시내버스 노선 : 350번, 360번, 362번, 462번, 640번, 752번, 5524
  번, 6411번, 9408번(광역)

★ 국립서울현충원 호국지장사 관람정보 (2017년 6월 기준)
* 개방시간 : 6:00~18:00 <동절기(11월~2월) 7시~17시까지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국립서울현충원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현충로 210 ☎ 1577-9090, 02-813-9625)
* 호국지장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305 (☎ 02-814-5257)
* 호국지장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흔쾌히 클릭한다.


▲  지장사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20-5호

호국지장사 입구에서 절로 인도하는 길은 경사가 다소 각박하다. 그 길을 오르면 커다란 아름
드리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내밀며 우리를 마중한다. 그는 350년 정도(1985년 10월 보호수
로 지정될 당시 추정 나이가 약 315년) 묵은 나무로 높이 15m, 둘레 4.5m에 이른다. 오랜 세월
지장사의 이정표 및 정자나무 역할을 했던 존재로 아무리 먹어도 마르지 않는 세월이란 양분과
지장사의 보살핌으로 무럭무럭 자라나 현충원에서 가장 장대하고 오래된 자연물이 되었다.
 
지장사에는 일주문이나 천왕문(天王門) 같은 문이 없다. 대신 삼삼한 숲이 일주문의 역할을 대
신한다. 숲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산바람과 절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염불 소리에 아무리 천
근만근 무겁다는 번뇌도 줄행랑을 치고 만다. 허나 멀리 가지 않고 절 입구에서 우두커니 기다
리고 있고 나 또한 그 번뇌를 찾으니 해탈이나 성불(成佛)은 그저 먼 세상의 이야기 같다.


▲  지장사 약수터와 그곳을 지키는 약왕보살(藥王菩薩)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조그만 연못과 산사의 필수 요소인 약수터가 나온다. 약합을 쥐어
든 약왕보살이 엷은 미소를 보이고 있고 그의 앞에는 약수와 샘터 관리비 좀 보태라며 돈통이
옥의 티처럼 놓여져 기분을 약간 깨게 한다. 하지만 물은 무료이니 마음껏 누려도 된다.

이곳은 물을 뜨는 수요가 많아 아침과 휴일에는 상도동, 사당동 사람들이 몰려와 물을 담아가
며 가뭄에도 물이 별로 줄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호국신과 대자연의 가호가 깃들여진 모양
이다. <현재 약수터는 남쪽으로 50m 정도 옮겨졌으며, 기존 자리에는 동그란 석조와 아기부처
상이 세워짐>

▲  신이 난듯한 우측 사천왕상(四天王像)

▲  열이 난듯한 좌측 사천왕상

약수터를 지나면 좌우로 돌로 만든 4천왕상이 나온다. 그들의 거처인 천왕문을 따로 두지 않고
경내로 들어서는 길목에 석상(石像)으로 둔 것으로 비파와 칼을 든 우측 천왕들은 비파 연주에
흥이 난 표정이고, 좌측 천왕들은 악귀(惡鬼)들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지 열불이
난 표정 같다.


▲  조촐한 모습의 능인보전(能仁寶殿)

사천왕상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본격적으로 지장사 경내가 펼쳐진다. 왼쪽을 보면 단촐한 모습
의 능인보전이 눈에 들어올 것인데, 그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겉으로 보면
그저 작은 건물로 지나칠 수 있지만 철불좌상과 약사후불탱, 신중탱 등 오래된 문화유산이 자
리를 메우고 있어 꼭 둘러봐야 되는 건물이다.


▲  능인보전에 봉안된 철불좌상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75호
능인보전 약사불도(藥師佛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3호


능인보전 불단(佛壇)에 홀로 자리한 철불좌상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경내에서 3층석
탑 다음으로 오래된 존재이다. 철불(鐵佛)은 이름 그대로 철로 다진 불상으로 신라 말에서 고
려 초에 많이 나타나는데 그가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다면 도선국사가 세운 것까지는 아니더라
도 고려 초에 창건된 것을 조금이나마 입증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그는 다른 곳에서 온
불상으로 이곳으로 흘러 들어온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전설이 아련하게
전해온다.

아주 먼 옛날, 한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느 어부의 꿈에 이 불상이 나타나 제발 빛 좀 보게
해달라며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어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곳으로 가 그물을 치니 녹
슨 채로 버려진 불상이 걸려들었다. 그래서 그를 수습하여 깨끗이 목욕을 시키고 집에 모셨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이상하게도 고기도 잡히지 않고 나쁜 일만 연이어 생기는 것이다. 보통 이런
전설에선 고기가 잘 잡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데, 불상이 좀 심성이 삐딱한지
그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어부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화장사(지장사)에 넘겼다고 하며 그 이후
부터 잘 먹고 잘살았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통해 절이 파괴되거나 도난 등으로 강에 버려진 불상을 수습해왔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고향은 현재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또한 어부가 강이나 바다에서 불상을 발견하여 절을
만들거나 절에 기증했다는 전설이 많은데 이는 불상을 옮기던 배가 가라앉거나 취급 부주의나
재해로 강에 떨어지거나 떠내려온 불상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향을 잃어버린 철불은 높이 98cm로 얼굴은 동그랗고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눈이 유난히 길고
가는데, 보는 위치에 따라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며, 머리는 꼽슬인 나발(螺髮)이다. 눈썹은 진
하고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졌으며, 굳게 다문 입에는 엷게나마 미소가 드리워져 그의 전체적
인 표정은 환하게 웃음짓는 표정 같다.
어깨는 꽤 단련을 한 듯 매우 당당하며,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이른바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법의(法衣)는 주름선이 선명하다. 또한 왼손에는 약합이 들려져 있어 그가 약사여래(藥師如來)
임을 알 수 있다. 고려 초에 조성된 몇 안되는 철불약사불로 그 당시 약사불 신앙에 중요한 자
료로 판단되어 지방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철불 뒷쪽에 걸린 약사불도는 1906년에 봉감(奉鑑), 정운(禎雲), 긍법(肯法), 경조(敬照) 등이
그린 것이다. 간략한 아미타존상의 형태와 음영법의 구사, 적색과 녹색의 탁한 색감이나 어두
운 군청색을 많이 쓴 점, 불화의 횡적인 구도와 그림에 나타난 상을 간략하게 나타낸 점 등,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철불 좌우에는 조그만 금동불이 각자의 공간을 지니며 빼곡히 들어앉아 철불을 받쳐주고 건물
내부를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들은 중생들의 돈과 소망을 담아 만든 원불(願佛)로 약 400기
정도 된다.


▲  능인보전 철불좌상 주변을 가득 메운 원불의 금빛 물결

▲  능인보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4호

능인보전 좌측 벽에 걸린 신중도는 앞에 약사불도와 같은 시기(1906년)에 같은 화승이 그린 것
이다. 그림은 수평 3단의 정연한 구도를 보며, 범천(梵天), 제석(帝釋), 위태천(韋太天) 등 신
중탱의 대표적인 존재들이 모두 묘사되어 있다. 균형이 잡히지 않은 인체나 경직된 자세, 무겁
고 탁한 색채 등은 전체적으로 불화의 품격이 떨어지던 20세기 초에 많이 나타난다.


▲  능인보전 아미타불도(阿彌陀佛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4호

능인보전 우측 벽에 걸린 아미타불도는 원래 대웅전에 있었다. 1870년 원명긍우(圓明肯祐), 경
은계윤(慶隱戒允) 등 4명의 화승이 그린 것으로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양 옆구리에 그 식구
들을 배치했는데, 형태가 풍만하고 정교하며 무늬가 화려하다. 5가지 색깔의 광배(光背)가 눈
길을 끌며 옷의 묘사가 도식화(圖式化)되어 있다. 적색과 녹색 색상은 다소 탁하며, 코발트 빛
깔의 짙은 청색은 19세기 말의 불화양식을 잘 보여준다.

◀  호국범종이 봉안된 범종각(梵鍾閣)
1975년에 지어진 것으로 안에는 같은 해에
조성된 범종이 담겨져 있는데, 현충원과
절의 이름에 걸맞게 호국범종이라 불린다.


▲  하얀 피부의 승탑(僧塔, 부도)과 검은 피부의 비석들

능인보전과 범종각 뒷쪽에는 때깔이 고운 승탑 2기와 비석 여러 기가 숨겨져 있다. 이중 하얀
피부를 자랑하는 승탑은 부처의 사리가 담겨진 사리탑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고양시 대자동 봉
덕사(奉德寺)에 있었다. 그는 1983년에 조성된 것으로 이곳으로 옮겨진 이유에 대해선 딱히 알
려진 것은 없다.
그리고 승탑 앞에는 사리를 봉안한 기념으로 세운 봉안비(奉安碑)와 봉안공덕비(功德碑)가 있
는데 모두 봉덕사에서 넘어온 것이다.

그 우측에 있는 검은 피부의 비석 4기는 1938년부터 1949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크게 시주를
한 이들을 기리고자 세운 기념비이다.


 

♠  조그만 불교미술관 호국지장사 대웅전(大雄殿)

▲  지장사 대웅전

지장사의 법당인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보통은 정면이 더 크지만 이
건물은 반대로 측면이 더 크다. 상당히 너른 대웅전 내부에는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조선 후
기에 그려진 불화들이 내부를 가득 수식하여 그야말로 조그만 불화박물관을 이룬다,
그리고 건물 앞에 주렁주렁 달린 붉은 연등은 위정자들이 현충일을 맞이해 생색내기로 단 것으
로 그들의 부질없는 욕심이 담겼는지 일반 백성들의 연등보다 배 이상이나 크다.


▲  대웅전 옆구리에 자리한 3층석탑

대웅전 옆에 있는 3층석탑은 원래 대웅전 앞뜰에 있었다. 그는 멀리 경주 남산(南山)에서 가져
온 신라 후기 석탑이라고 하는데, 이승만 시절에 국립묘지를 조성하면서 강제로 소환해 경상도
를 상징하는 탑으로 삼았다고 한다. 허나 언제부터인가 방치되어 있던 것을 지장사에서 가져와
보수를 했으며 지금은 대웅전 옆구리에 두었다.

지장사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라고는 하나 겉모습은 거의 20세기 석탑 같으며 지붕돌과 석재 일
부만 오래된 티가 보일 뿐, 상륜부(相輪部)와 탑신(塔身) 상당수는 지장사에서 새로 손질을 하
여 오래된 돌과 새 돌이 서로 어색한 조화를 보이고 있다.
<지금은 범종각 옆으로 옮겨졌으며 그 자리에는 물을 머금은 동그란 석조가 들어섰음>


▲  금빛찬란한 대웅전 아미타3존불과 목각후불탱

▲  대웅전 감로도(甘露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6호

감로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외 3명의 화승이 그린 것이다. 그림은 상부에 아미타여래
일행이 지옥에서 온 중생을 맞이하러 가는 장면을 그렸고, 중앙에는 성반의식(聖盤儀式,
우란
분경에서 7월 15일 승려 및 십방제불에게 백미를 올리고 발원하는 의식)
을 하는 모습을, 그 주
변에는 아귀(餓鬼)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하단부에는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로 가득한 지옥과 현실의 모습을 그렸는데, 7여래의
장엄하면서도 원만한 얼굴과 옆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 성반의식을 하는 승려의 모습과 산수의
표현 등은 19세기 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며, 나뭇잎 선의 처리와 산수의 음영처리 등에서 19세
기 후반의 불화양식이 잘 드러나고 있다.


▲  대웅전 팔상도(八相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20호

팔상도는 부처의 일대기를 8개의 장면으로 그린 것으로 1893년 한곡돈법(漢谷頓法)이 그렸다.
이곳 팔상도는 부처의 생애 중 가장 극적인 장면만을 묘사했다고 하는데, 나는 그 내용은 잘
모르겠다. 형식적인 형태와 탁한 색조는 19세기 후반 불화양식을 반영한다.


▲  대웅전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8호

신중도는 인도의 토속신으로 불교의 일원으로 스카웃된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조금의 여백
도 없이 꾸역꾸역 집어넣은 그림이다.
1893년 금호약효, 정련(定鍊) 등이 그린 것으로 위태천과 범천, 제석을 중심으로 비교적 많은
이들을 담았는데, 좌우 대칭구도와 위태천과 제석 등이 이루는 역삼각형 구도가 다소 어수선해
보인다. 특히 천녀(天女)들이 20여 종에 달하는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본그림의 백미(白眉)
라 할만하다. 인체를 불균형하게 표현한 점과 과장된 안면의 묘사 등이 19세기 불화의 특징을
보이는 작품으로 비록 색깔이 퇴색하긴 했으나 조화로운 색채 구성으로 그림의 품격을 높였다.


▲  대웅전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7호

지장시왕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 등 14명의 화승이 그렸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권속
들을 계단식으로 배치했고, 화폭 상단으로 갈수록 존상을 작게 묘사하여 원근법의 효과를 살렸
다. 원만한 인물의 형태는 18세기 후반 양식이지만, 오색 광선으로 표현한 광배, 도식(圖式)적
인 천의, 단조로운 구름의 묘사는 19세기 불화양식을 보여준다. 전반적으로 많이 변색되긴 했
으나 일부 적색과 녹색은 비교적 밝게 채색되어 있다.


▲  능인보전에서 바라본 대웅전 뜨락 주변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종무소(宗務所), 오른쪽이 심우당>

▲  대웅전 옆구리에 지어진 새 요사

대웅전과 종무소 뒤쪽에는 청심당 등 승려의 생활공간 및 공양간으로 쓰이는 건물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 대웅전 바로 옆구리에 자리한 건물(윗 사진)은 2010년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이곳은
원래 공터였다.
건물의 모습이 기와집이 아닌 요즘 시골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주택 모습이라 다소 이색적인데,
그 옆에는 2016년에 새로 지어진 'ㄷ'자 모습의 청심당이 있다.

요사(寮舍)나 선방(禪房)은 공양간이나 교육이나 법회, 접대용으로 쓰이는 공간을 제외하면 절
의 사사로운 공간이라 거의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잘 들어가지는 않는 편인데, 예전
대웅전에 있었다는 극락9품도와 현왕도를 반드시 잡아 술래잡기를 끝내고 싶은 집념이 활활 불
타오르면서 요사 주변을 기웃거렸다. 요사에 있을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종무소 옆에 있는 공양간을 먼저 살폈는데 마침 문이 열러 있어서 그 사이로 시선
을 넣었으나 그림 같은 건 없었다, 하여 대웅전 옆에 있는 건물로 가서 창문 안으로 시선을 쓱
넣으니 글쎄 오래된 그림 2개가 나란히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확인해보니 극락9품도와 현왕도
였다. (지금은 다른 건물로 옮겨짐)
그들을 발견하고 마음 속으로 쾌재를 외쳤으나 주변에 아줌마 신도들이 있어 안으로 들어가지
는 못했고, 그렇다고 대놓고 사진에 담기도 그래서 창문을 살짝 열고 새가슴처럼 대충 사진에
담았다. 물론 신도와 승려에게 허가를 받고 마음 편히 사진에 담는 것이 좋겠지만 생활공간인
요사이다보니 협조를 안해줄 듯 싶었다.


▲  요사 안에 담긴 극락구품도(極樂九品圖, 왼쪽 그림)와
현왕도(現王圖, 오른쪽 그림)


극락9품도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5호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의 16관 중 산선관(散線觀)
인 제14, 15, 16관에 해당되는 9품의 극락왕생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1893년 금호약효(錦湖
若效) 등 3명이 그린 것으로 대구 동화사(桐華寺)의 부속암자인 염불암(念佛庵)의 극락구품도
와 함께 같은 원본을 보고 그린 것이라고 한다.
등장 인물의 얼굴 이목구비를 섬약하게 표현하여 조선 후기 극락구품도의 독특한 유형을 보여
주며, 음영의 표현이나 적색과 녹색의 대비, 화려한 꽃무늬 등은 19세기 불화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 옆에 있는 현왕도는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19호로 1893년에 금호약효 등 3명이 그렸다. 현
왕이란 염라대왕을 일컫는 것으로 죽어서 3일만에 그에게 심판을 받은 장면을 담았다. 화면은
둥근 구조 안에 그의 심판 장면을 그렸는데, 현왕의 우람한 체구와 세밀한 얼굴묘사에서 비교
적 예스러운 양식이 나타난다. 얼굴과 옷주름을 획일적으로 묘사했고 꽃무늬와 구름을 단색으
로 처리해 19세기 후반 불화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구품도와 현왕도를 찾아냄으로써 그들과의 부질없는 숨바꼭질은 끝이 났으며 이곳에 있는
지정문화재는 괘불도를 빼고 모두 인연을 짓게 되었다. 괘불이야 평상시에는 친견이 불가능한
아주 비싼 존재이니 석가탄신일이 아닌 이상은 아예 체념한 상태이다.


 

♠  호국지장사 마무리 (극락전, 삼성각, 지장전)

▲  지장보살입상 우측에 자리한 극락전(極樂殿)
정면 1칸, 측면 1칸의 조그만 팔작지붕 건물로 근래에 조성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 아미타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  극락전 아미타3존불과 아미타후불탱화

▲  지장보살입상 좌측에 자리한 삼성각(三聖閣)

▲  삼성각 식구들 <왼쪽부터 산신, 칠성(치성광여래), 독성>

▲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호)와 석가불

삼성각 가운데를 장식하고 있는 석가불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동그랗게 표현된 풍만한 가슴
과 가슴선이 제법 눈길을 끈다. 그의 두툼한 얼굴에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고 물레방아처럼 생
긴 법륜(法輪)을 왼손에 쥐고 있는데, 법륜의 8개의 바퀴살은 팔정도(八正道)를 나타내며 동그
란 모양은 부처의 가르침인 담마(蕁麻)가 완전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석가불 뒤에 자리한 칠성도는 1906년 보암긍법(普庵肯法)이 그린 것이다. 화면은 화폭의 좌우
대칭으로 권속들을 배치하고 상하 2단으로 나눈 수평 구조로 경직된 형태와 선, 탁한 색채 등
은 20세기 초 불화기법을 잘 반영하고 있어 지방문화재자료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  독성도(獨聖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6호)와 독성상(獨聖像)

독성<나반존자(那畔尊者)>은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존재이다. 승려 비슷한 복장으로
앉아있는 모습이 안방 마님처럼 편안해 보이는데 머리털이 없어 허전하기만 한 그의 머리는 바
로 뒤에 있는 독성도의 독성 머리 때문에 머리에 큰 혹이 난 것처럼 보인다.

독성도는 소나무 밑에서 바위에 기댄 채 동자의 공양을 받고 있는 독성 할배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데 전형적인 19세기 독성도로 폭포와 나무, 꽃 등의 표현이나 늘어진 옷자락의 묘사는 다
소 서투르나 독특한 자세와 온화한 얼굴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그림의 깊이를 살려준
투명한 광배의 표현 등이 눈길을 끈다.

▲  산신도(山神圖,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7호)와 산신상

길쭉한 흰 수염을 지닌 산신 할배는 왼손에 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으로 그의 애완동물인 호랑이
를 쓱쓱 쓰다듬고 있다. 호랑이가 아무리 무섭다한들 산신 앞에서는 그저 꼬랑지를 살랑살랑거
리는 고양이에 불과하다. 산신 옆에 서 있는 동자는 무척 앳돼 보여 마치 할배와 손자를 보는
듯 단란해 보인다.

산신상 뒤에 걸린 산신도는 1893년 금호약효(錦湖若效)가 제작했다. 민화(民畵, 속화)풍의 나
무와 폭포, 호랑이의 모습은 19세기 말 산신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원색적이고 장식적이
던 당시의 산신도와는 달리 은은한 중간 색조를 사용한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위엄과 격이 담
긴 산신의 얼굴 묘사도 제법 돋보인다고 한다.


▲  지장사의 명물, 지장전(地藏殿, 지장보살입상)

지장사의 백미(白眉)이자 명물은 경내 뒤쪽이자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지장보살입상과 3,000
좌(예전에는 2,500좌를 칭했음)에 달하는 조그만 석조지장보살의 장대한 물결이 아닐까 싶다.
절에서는 이곳을 지장전으로 삼아 꽤 애지중지하고 있는데 비록 건물은 아니지만 노천 법당으
로 석불이나 마애불을 두고 각(閣)이나 전(殿)을 칭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많다. 능인보전과 삼
성각, 대웅전에 서린 문화유산도 중요하지만 지장사의 성격을 분명히 해주는 존재가 바로 이곳
지장전이다.

지장전은 1983년 주지 혜성이 현충원에 잠든 호국신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이 되도
록 기원하고자 조성한 것으로 지장사의 최대 프로젝트였다.
육환장(六環杖)이란 길쭉한 지팡이를 들며 온화한 표정으로 현충원을 바라보는 지장보살의 뒷
통수에는 동그란 모양의 두광(頭光)이 그를 빛내주는데, 마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햇님 같다.
그 뒤에는 그를 멀리서 둘러싸듯, 거대한 석벽을 병풍처럼 만들어 조그만 지장보살을 가득 만
들어 가히 장관을 이룬다.

▲  지장보살상 좌우에 자리한 늘씬한 5층석탑들

지장보살 좌우에는 홀쭉한 몸매의 5층석탑 2기가 자리해 있다. 연꽃이 새겨진 기단(基壇)을 지
닌 이들은 오래된 때가 조금 묻어나 보이는데,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거의 걸려들지를 않
아서 꽤 애를 태우게 한다. 탑의 형식을 봤을 때는 왜정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좌측 탑의
1층 탑신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다.


▲  밑에서 바라본 지장보살상(지장전)

지장전을 장엄하게 꾸민 정성이 부디 명부(冥府, 저승)를 감동시켜 이곳에 깃든 호국신들이 하
나의 낙오자도 없이<단 친일파와 현충원에 묻힐 자격이 없는 작자들은 싹 무관지옥이나 떨어져
라~!> 극락왕생하길 기원하며 간만에 벌인 호국지장사 나들이를 마무리 짓는다. (그 외의 장소
는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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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와불상과 우담바라를 간직한 고즈넉한 산사, 의왕 청계산 청계사

 


' 늦겨울 산사 나들이, 청계산 청계사(淸溪寺) '

▲  청계사 와불상


 


겨울 제국(帝國)의 차디찬 위엄이 잠시 느슨해진 2월 끝 무렵에 후배들과 의왕시에 자리한
청계사를 찾았다.
그곳은 예전에 2번 발걸음을 한 적이 있는데, 간만에 그를 찾은 이유는 별거 없다. 그곳에
그냥 마음이 갔기 때문이다.

오후 3시, 안양(安養)의 동쪽 요충지인 인덕원역에서 그들을 만나 분식집에서 만두와 여러
과자 등을 사들고 대기하고 있는 청계산행 의왕시 마을버스 10번에 몸을 담는다. 평일이라
등산 수요는 거의 없지만, 대신 청계지구 주민들로 조그만 마을버스는 만석의 기쁨을 누린
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청계사입구에 조성된 청계지구에서 승객을 모두 쏟아내고 우리만 태운
가뿐한 상태에서 청계산의 품으로 들어갔다. '과천~의왕간 고속화도로'의 밑도리를 지나니
아파트와 시가지 대신 산과 들녘이 전부인 농촌 풍경이 정겹게 펼쳐진다.
청계사천(淸溪寺川)을 따라 계속 들어가던 버스는 청계산 주차장에서 그만 두 바퀴를 멈춘
다. 그곳이 그들의 종점이었던 것. 그래서 여기서부터 별수 없이 걸어가야 되는데, 천천히
가도 20분이면 충분하다.


 

♠  청계사계곡 숲길

청계지구에서 청계사로 가는 길목에는 맛과 분위기를 내세운 식당과 찻집이 즐비하다. 절을 목
전에 둔 속세(俗世)의 마지막 유혹이라고나 할까? 허나 그날이 평일이라 몇몇 식당을 제외하면
대부분 장사를 하는지 안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청계사 종점에서 7분 정도 가면 다리가 나오는데, 그곳을 경계로 더 이상 속세의 흔적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자연의 비율이 높았지만 여기서부터는 99% 자연 및 부처의 청정한 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또한 청계산에서 발원한 청계사계곡도 여기서 청계사천으로 간판을 바꾸며 속
세로 길을 재촉한다.
그 다리를 건너면 그동안 하나로 쭉 이어진 길(청계로)은 수레길과 숲길로 갈리는데, 어느 길로
가든 청계사로는 이어진다. 빨리 가고 싶다면 잘 닦여진 수레길을 이용하면 되지만 4발 수레의
적지않은 눈칫밥과 고약한 매연 냄새를 감당해야 된다. 그러니 차라리 친환경적인 숲길로 가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이 숲길은 통행 편의를 위해 나무로 길을 닦았는데, 늘씬하고 삼삼하게 솟은 나무들이 앞다투어
신선한 숲내음을 베푼다. 산바람이 아직은 차갑지만 청정하고 해맑은 기운이 담겨져 있어 바람
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오히려 심신(心身)이 맑아지는 기분. 게다가 숲길 옆에는 청계사계곡이
졸졸~♬ 흘러 그 나름대로 계곡의 바람을 선사하니 찰거머리같은 번뇌(煩惱)도 여기서만큼은 바
짝 긴장을 탄다. 

숲길 입구에는 의자가 여럿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서 속세에서 가져온 먹을거리를 섭취했다. 원
래 절 밑에서 먹으려고 했지만 다들 시장기가 높아 잠시 청계사를 잊고 여기서 자리를 펼쳤다.

▲  청계사계곡 숲길
겨울이라 실감이 덜해서 그렇지 봄이나 여름, 가을에는 정말 옆구리에 끼고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숲길이다.

▲  소리없이 봄을 잉태하고 있는 청계사계곡
눈과 얼음의 지배를 받으며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계곡, 허나 소쩍새가 우는
그날이면 거추장스러운 얼음을 박차며 봄의 해방군을 맞이할 것이다.


숲길을 10분 정도 가면 다시 수레길과 만난다. 여기서부터 경사가 잠시 각박해지는데, 그길을 5
분 정도 오르면 청계사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을 지나면 첩첩한 청계산 산주름에 묻힌 청계사
의 바깥 부분이 모습을 드러낸다.


▲  주차장 밑에 자리한 청계사 표석
바위 피부에는 붉은 글씨로 '우담바라 핀 청계사'라 쓰여 있다.

▲  주차장 동쪽에 자리한 승탑과 비석의 보금자리

청계사 주차장 동쪽에는 승탑(僧塔, 부도)과 비석(碑石)의 보금자리가 있다. 이들은 원래 극락
보전 서쪽에 있던 것으로 밑 석축에는 사적비를 비롯한 비석 3기가 심어져 있고, 윗 석축에는
승려의 사리가 담긴 승탑과 승탑 주인의 생애가 담긴 검은 피부의 가로형 비석들이 널려 있다.
이중에서 가장 오래 숙성이 된 존재는 청계사의 내력을 담고 있는 사적비로 고려 후기에 청계사
를 크게 일으킨 조인규(趙仁規)의 11대손 조운
(趙橒)과 조신(趙新)이 1689년에 세웠다. 조운이
문장을 짓고 윤창적(尹昌績)이 글씨를 썼는데, 비석 피부에는 세월이 그어놓은 주름과 검은 때
가 여럿 있지만 아직은 글씨를 알아보는데 지장은 없다.
<청계
사 관련 자료에는 1341년에 세웠다는 조정숙공사당기비(趙貞淑公祠堂記碑)가 있다고 하나
확인하지는 못했음>


▲  아직 정정한 모습을 잃지 않은 청계사 사적비(事蹟碑)

적비와 승탑을 둘러보고 주차장에서 경내로 인도하는 높은 계단을 오르면 경내 밑부분에 이른
다. 오를 때는 모르지만 계단이 조금 각박하니 내려갈 때는 각별히 주의하기 바란다.
그럼 여기서 잠시 청계사의 내력을 잠시 더듬어보도록 하자.


 

♠  청계산 남쪽 자락에 둥지를 튼 고색의 절집, 와불과 우담바라를
간직한 청계산 청계사(淸溪寺) -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호

청계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터를 닦은 청계사는 신라 후기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허나 기록이
없어 자세한 것은 알 도리가 없으며, 조선 후기에 봉은사(奉恩寺)에서 엮은 봉은본말사지(奉恩
本末寺誌)에도 단순히 신라 때 창건되었다는 1줄 뿐이다. 다만 신라 후기나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등(石燈)과 승탑의 잔재가 있다고 하니 (확인은 못했음) 적어도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조금은 열어두고 있다.
그래도 뚜렷한 기록과 유물이 없음에도 원효대사(元曉大師)나 의상대사(義湘大師), 자장율사(慈
藏律師),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세웠다고 강력하게 우기는 상당수의 절보다는 좀 양심적이다.

청계사의 본격적인 기록은 고려 후기부터 등장한다. 고려가 몽골(원)의 그늘에 있던 충렬왕(忠
烈王) 시절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을 지낸 조인규(趙仁規, 1227~1308)가 많은 자금을 들여 청
계사를 중창하고 집안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음) 그리고 절 아랫
쪽에 별당(別堂)을 지어 잠시 머무는 등, 청계사를 특별히 옆구리에 끼었다.
이렇게 당대 실력자인 조인규(평양 조씨)를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은 청계사는 오랜 세월 그
의 후손들의 지원에 힘입어 절을 꾸렸는데, 경내에 조인규의 영당(影堂)을 지어 그를 기렸으며,
1431년과 1448년에 영당을 중건했다고 전한다.

천하가 조선으로 바뀐 이후, 1407년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되면서 천태종(天台宗) 소속이 되었
으며, 1448년 경내에 있던 대장경(大藏經)이 인출되기도 했다. 연산군(燕山君)과 중종(中宗) 시
절에는 흥천사(興天寺)와 원각사(圓覺寺) 등 한양도성의 많은 사찰이 연산군 또는 유생에 의해
대거 박살이 나면서 봉은사를 대신해 선종(禪宗)의 본찰(중심 사찰)인 정법호지도량(正法護持道
場)이 되었다. 그래서 이때 잠시나마 조선 불교의 중심이 된다.
허나 그 영광도 잠시, 광해군(光海君) 시절에는 청계사 소속의 전답과 노비가 나라와 양반들에
게 대거 몰수당하거나 빼앗기는 비운을 겪었으며, 1689년 화재로 건물 대부분이 무너지자 성희
(性熙)가 평양조씨의 도움으로 절을 중건했다. (이때 사적비가 세워짐)

1701년에는 경내 제일의 보물인 동종이 조성되었으며, 정조가 왕세손(王世孫) 시절이던 1761년
친히 이곳을 찾아 원당(願堂)을 짓고, 밤나무 3,000주를 내려 원감(園監)을 두어 관리케 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정조는 1789년 경내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역인 현륭원(顯隆園)의 제각(
祭閣)을 지어 매년 2회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바로 그 해에 평양 조씨인 조심태(趙心泰)의 지
원으로 절을 중창했다.
1862년에는 괘불(掛佛)을 봉안했고, 1876년 3월 무심히 찾아온 화마(火魔)의 위엄 앞에 불전들
이 앞을 다투어 쓰러지자 1879년 주지 은곡(隱谷)이 중건을 벌였으나, 예전만큼은 못하여 간신
히 호흡이나 하는 지경이었다.

1900년 법당인 극락보전을 세웠고, 왜정 시절에는 봉은사의 말사(末寺)가 되었는데, 경허(鏡虛)
를 비롯한 만공(滿空), 월산(月山), 금오(金烏) 등 당대에 유명한 승려들이 주석하면서 선풍(仙
風)을 떨치기도 했다. 1955년 비구니인 아연(娥演)이 주지가 되면서 크게 중창을 벌이기 시작했
고, 1965년에는 용주사(龍珠寺)의 말사로 변경되었다.

1999년에는 와불상을 조성해 경내에 새로운 볼거리를 이끌어냈고, 2000년 이후 주지 종상이 경
내를 대대적으로 손질하고 진입로를 정비해 접근성을 높였다. 그리고 2001년에 극락보전을 중수
했는데, 바로 전년 10월에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의 협시(夾侍)인 관음보살상 상호 왼쪽 눈썹 주
변에 불교에서 매우 신성시하는 꽃인 우담바라가 피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담바라는
아직도 관음보살상 눈썹 주변에 진을 치고 있으며, 20여 송이나 피었다고 한다. 나는 이들의 존
재를 몰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했지만 청계사에 갈 일이 있다면 그 꽃을 꼭 눈에 담기 바란다.
(우담바라가 풀잠자리 알이라는 이야기도 있음)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삼성각과 지장전, 서요사, 동요사, 동종각 등 10
동 남짓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동종을 비롯하여 지방문화재로 지
정된 신중도와 소장목판(所藏木板, 1622년, 1623년, 1831년에 만든 14종 466판,
경기도 지방유
형문화재 135호
)과 조정숙공사당기비(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176호) 등이 있으며, 그외에 사적
비와 극락보전, 극락보전 아미타3존불, 괘불 등이 앞을 다투며 고색의 향기를 더해준다. (소장
목판은 비공개이며, 괘불은 석가탄신일과 등의 행사일에만 잠깐 얼굴을 비침) 또한 청계사 전체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6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첩첩한 청계산의 산주름 속에 묻혀 산사의 향기도 매우 진하며, 서울이나 안양, 성남, 의왕 등
기라성 같은 도시와 가까이 있음에도 꽤 멀리 나온 듯한 기분을 누리게 한다. 속세에서 잠시 나
를 지우고 싶을 때 어디론가 가서 마음을 싹둑 정리하고 싶으나 멀리 가기가 어려울 때 무작정
찾아와 안기고 싶은 포근한 산사이다.
또한 이곳은 산세가 수려하고 삼삼한 숲에는 산새가 지저귀며, 청정한 계곡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경승지로 수도권 명소로도 명성이 높다. 또한 청계산으로 오르는 주요 기점의 하나이기도
하여, 이곳을 시작으로 응봉을 경유해 과천(果川) 문원동이나 포일2지구로 내려가거나, 청계산
정상을 거쳐 서울 원지동, 옛골 방면이나 양재동 화물터미널로 내려가도 된다.

※ 청계산 청계사 찾아가기 (2016년 2월 기준)
* 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2번 출구)에서 의왕시 마을버스 10, 10-1번(10~15분 간격)을 타고 청
  계산 주차장 종점에서 도보 20분. 18시 이후에는 청계산주차장까지 들어가지 않고 그 이전인
  상청계(청계산입구)에서 차를 돌린다, (상청계에서 청계사까지는 도보 30분)
* 분당이나 죽전, 수지에서 접근할 경우에는 103번(분당 도촌동, 야탑역, 판교 백현마을), 303
  번(분당 오리역, 판교 백현마을), 좌석 1303번(모현 외대, 죽전 단대, 분당 오리역/정자역),
  좌석 1550-3번(광교, 수지구청역)을 타고 양지편에서 하차, 건너편 정류장에서 10, 10-1번
  마을버스를 이용한다. 양지편 전 정류장인 청계동주민센터과 한직골(청계농협)에서 내려도
  되지만 여기서는 10-1번 마을버스 밖에 없다.
* 청계사 셔틀버스가 인덕원역(4호선) 3번 출구 인덕원프라자 앞에서 출발한다. 평일에는 9시
  와 10시, 초하루와 석가탄신일, 백중, 칠석, 동지 때는 오전에 5회 운행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경내 바로 밑에 주차장 있음)
① 서울(과천)/안양/군포/의왕 → 인덕원4거리 → 안양판교로 → 청계사입구4거리에서 좌회전
   → 청계사
② 성남(분당/판교) → 안양판교로 → 청계사입구4거리에서 우회전 → 청계사

* 소재지 -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산11 (청계로 475 ☎ 031-426-2348)
* 청계사는 매일 12~13시에 점심 공양을 제공한다. (가끔 짜장밥이 나오기도 함)
* 청계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청계사 극락보전 주변 (오른쪽이 동종각)

▲  청계사 수각(水閣)

경내 밑에서 높이 5m 정도 되는 계단을 더 딛으면 비로소 경내에 이른다. 극락보전 뜨락은 하얀
피부의 박석(薄石)이 넓게 바닥을 이루어 꽤 깔끔해 보이는데, 그런 뜨락 중앙에는 달랑 1칸 밖
에 안되는 수각이 자리해 있다.
수각은 산사의 필수 요소인 샘터의 보금자리로 동그란 석조(石槽) 주위에 4개의 붉은 기둥을 세
우고 시원한 처마의 팔작지붕을 얹혀 소박하게 건물을 이루었다. 이렇게 샘터에 건물을 씌워 수
각으로 삼은 절이 꽤 되는데, 이는 물에 대한 일종의 보답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싶
다. 그만큼 물은 어디서든 소중하니 말이다. 특히 고적한 곳에 자리한 산사는 더욱 그렇다.

수각 석조에는 청계산이 베푼 옥계수로 늘 넘쳐나는데, 산사에 왔다면 그곳의 샘물은 꼭 마셔줘
야 된다. 졸고 있는 바가지를 깨워 한가득 담아 콸콸콸 마시니 그렇게 담백한 맛은 아니지만 몸
속에 낀 때가 싹 가신 듯, 시원하기 그지 없다. 다만 석조 안에 사람들이 무심히 투하한 동전이
여럿 잠들고 있어 그냥 마셔도 뒷탈이 없을지 모르겠다. 기분 같아서는 그들을 구제해주고 싶지
만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어서 그냥 두었다. 절에서는 이들 동전을 계속 방치해 수질에 영향
을 주지 말고 속히 구제하여 좋은 곳에 썼으면 좋겠다. 이들 동전도 다 비싼 세금을 들여서 만
든 것이니 말이다.

수각 서쪽에는 2층 규모의 서요사(西寮舍)와 가건물 찻집이 있다. 찻집에서는 전통차와 커피를
판매하고 있는데, 거기서 차와 커피를 구입하여 서요사 앞에 널린 의자에서 마시면 된다. 차와
커피 가격은 2~3천원선으로 속세와 거의 비슷하거나 조금 저렴한 수준, 서요사 앞에는 그보다
더 저렴한 길다방 자판기가 있어 돈이 궁한 경우에는 그를 이용하면 된다. 자판기 커피 가격은
300원선.. (자판기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청계사 동요사

▲  천의를 휘날리며 하늘을 유유자적하는
비천상(飛天像)의 위엄

▲  수각과 극락보전 경계선에 자리한 12지신상(十二支神像)

수각과 동/서요사보다 1단계 높은 곳에 다양한 모습의 12지신상이 자리해 있다. 거의 90도로 서
있는 다른 12지신상과 달리 편안한 포즈로 정면 또는 좌우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데, 특히 쥐 같
은 경우는 쌀가마니 위에 앉아 쌀을 축내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소소하게 웃음을 건네준다. 마치
이 땅의 현실을 그렇게 함축한 것일까? 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  연등을 평방(平枋)에 두룬 청계사 지장전(地藏殿)

뜨락에서 2단계 높은 곳에는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지장전이 자리해 있다. 극락보전 우측
에 자리한 지장전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
는 와불 자리에 있었다. 그러다가 1999년 와불을 조성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  지장전 뒤쪽에서 졸고 있는 청계사 연(輦)
석가탄신일이나 불교 행사 때 불상이나 불경을 운반하는 용도로 쓰인다.

▲  찻집 주변에 누워있는 옛 석조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조로 중간 부분이 깨져 있다. 그래서 새로운 석조에게
수각의 자리를 넘기고 이렇게 뒤로 물러나 물 대신 겨울 제국이 내린
하얀 눈을 강제로 머금으며, 왕년을 그리워한다.

▲  계단 끝에 자리한 청계사 삼성각(三聖閣)

지장전 뒤쪽 언덕에는 삼성각이 조촐하게 자리를 닦고 있다. 달랑 1칸짜리 맞배지붕 건물로 3명
의 성스러운 존재, 산신(山神)과 칠성(七星), 독성(獨聖, 나반존자)을 봉안하고 있는데, 경내에
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천하를 굽어본다.
이 건물은 근래에 지어진 것으로 그 뒤쪽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다.

▲  조그만 석불좌상과 칠성탱

▲  산신탱과 독성탱


▲  삼성각에서 바라본 청계사 경내


 

♠  청계사 극락보전, 와불 주변

▲  청계사 극락보전(極樂寶殿)

청계사의 법당인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겉으로 보면 200년 정도
들어보이지만 실상은 1900년에 지어진 것으로 이제 110여 년 정도 되었다. 대들보에서 '
庚子 三
年 三月'이란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시기를 따져보니 1900년이다.

불단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아미타3존불과 신중도 등이 봉안되어 있는데, 특히 아미타불 옆에
자리한 관음보살 상호 왼쪽 눈썹 주변에 우담바라가 피어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꽃이 조그
만하여 두 눈을 크게 부릅 떠야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우담바라는 21송이 정도 피어있으며, 길
이가 겨우 1cm 밖에 안되는 가녀린 존재이다.


▲  극락보전에 봉안된 아미타3존불 (아미타불 왼손 쪽이 관음보살)

극락보전 불단을 지키고 있는 아미타3존불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해 있다. 중심 불상인 아미타불은 높이 110cm, 협시보살은 107cm
로 다들 조선 후기(19세기 정도)에 조성되었다.


이들은 신체에 비해 얼굴이 다소 커보이는데, 거의 네모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볼살이 매우 푸
짐하다. 눈썹은 무지개처럼 살짝 구부러져 선의 미를 더해주고 있고, 눈은 좌우로 길고 가늘게
뜨고 있으며, 코는 작고 오목하다. 붉은 입술은 조그만 하며, 얼굴 좌우에 붙어있는 귀는 중생
의 민원을 하나도 빠짐없이 경청하려는 듯, 어깨까지 축 늘어졌다. 다들 표정도 온후하여 나름
미소를 선보이며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을 다독거리며, 두터운 목에는 삼도(三道)가 획 그어져
있다.
특히 아미타불 왼손 쪽에 자리한 관음보살상 같은 경우는 우담바라가 피어 화제가 되고 있는데,
대세지보살과 양식에서 다소 차이가 있어 대세지보다 이전에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하체
와 상체, 머리 부분에서 나발의 모습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점은 비슷한 시대의 다른 불상과
는 다소 다른 모습이다.

아미타불을 뒤에서 받쳐주고 있는 아미타후불탱은 아미타3존불을 중심으로
아난(阿難)과 가섭(
迦葉), 타방불(他方佛) 등이 그려져 있는데, 조선 철종(哲宗. 재위 1849~1863) 시절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  신중도(神衆圖)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274호

극락보전 좌측에는 색채가 고운 신중도(신중탱)가 자리해 있다. 신중도는 불법(佛法)을 지키는
신(神)들의 무
리를 담은 것으로 법당의 수호를 위해 법당 내부에 많이 걸어둔다.

이 그림은 1844년에 제작된 것으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경성(京城, 서울)
학파 승려의 화풍이 반영되어 눈길을 끈다. 이목구비에 음영을 주고 코발트색과 금니(金泥)를
사용해 색채가 매우 곱지만 등장 인물이 많아 (어림 잡아 30명은 넘음) 다소 빽빽하게 보인다.


▲  동종이 담긴 동종각(銅鍾閣)

극락보전 좌측에는 조그만 동종각(종각)이 자리해 있다. 범종각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다른 절
의 범종각보다 규모도 좀 작은 편이고, 그 안에 담긴 동종 역시 많이 왜소하다. 허나 작다고 그
냥 지나치지 말자. 이 동종은 경내에서 제일 가는 보물로 국가 지정 보물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비싼 몸이다.

▲  청계사 동종(銅鍾) - 보물 11-7호

동종각에 담겨진 동종은 높이 115cm, 입지름 71cm의 조촐한 종으로 그의 청동색 피부에 '康熙四
十年辛已四月日鑄成 廣州靑龍山淸溪寺大鐘七百斤'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어 1701년에 동 700근을
들여 조성되었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광주 청룡산은 청계산으로 이후에 절의 이름을 따서 청계
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광주(廣州) 고을의 범위가 이곳까지 미쳤음을 알
려준다.
청계사에서 조성된 동종이지만 한동안 봉은사에 머물러 있다가 1975년에 돌아왔으며, 경기도 지
방유형문화재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가 2000년에 사인 비구(
思印 比丘)가 만든 다른 종과 묶어서
보물 11호 계열로 승격되었다.

청계사 동종은 18세기에 활동했던 사인 비구가 만든 조선 후기 종으로 다른 범종에 비하여 작은
편이나 무게가 700근에 이르며, 종 꼭대기에는 2마리의 용이 종을 단단히 붙들고 있고, 종 윗도
리에 보살입상 4구와 9개의 유두가 달린 유곽이 2개 있다. 이 유두는 종을 옮길 때마다 하나씩
떼어낸다.
종 밑도리에는 보상화문(寶相花紋)이 연속으로 새겨져 있어 신라 범종의 제조 기법이 반영되어
있으며, 명/청나라의 범종 양식을 슬쩍 대입한 듯, 2줄의 굵은 횡선이 둘러져 있다. 또한 그 밑
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종의 신상명세를 알려준다.

이 종을 만든 사인은 종을 매우 잘만들었다. 이곳을 비롯하여 천하에 그가 만든 종이 8개가 전
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보물 11호로 지정되어 있다. 허나 그의 굵직한 작품에 비해 그의 삶
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야말로 세상에 조용히 나타나 조용히 종만 만들다가 조
용히
세상을 뜬 것이다.


▲  청계사 와불상(臥佛像) ▼

극락보전 좌측에는 너른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 청계사의 새로운 명물인 금빛의 와불상이 있다.
와불은 말그대로 누워있는 불상인데, 완전히 하늘을 보고 누운 것이 아닌 정면을 보며 옆으로
누워있는 자세이다. 이런 불상은 인도와 동남아에서 많이 보이는데, 우리나라에는 기껏해봐야
화순 운주사(雲住寺)의 와불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옆으로 누운 것이 아닌 하늘을 보며 누워있
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매우 보기 힘든 와불이 1990년대 이후 거의 유행처럼 번져 이제는 보기가 쉬워졌다.
청계사도 그 유행을 타고 1999년에 하나 장만했는데, 이곳에 있던 지장전을 극락보전 옆으로 밀
어내고 터를 넓게 닦아 와불을 봉안했다. 특히 이곳 와불은 돌을 깎아서 만든 것이 아닌 조그만
자갈을 모아서 만든 것으로 꽤 눈길을 끈다. 보잘 것 없는 자갈이 강인한 협동심을 발휘해 와불
이란 무시못할 작품으로 거듭났으며, 그 자갈을 일일이 모아서 만든 청계사의 노력도 참 대단하
다. 물론 새로운 명물거리를 만들어 절의 명성과 수입을 늘리려는 의도도 크게 작용했다.
처음에는 자갈에 색을 입히지 않아 거의 하얀 피부를 지녔으나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죄다 금칠
을 칠해 졸지에 금색 와불이 되었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자갈이 아닌 금동불로 보인다.

와불 앞에는 예불을 올리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고, 와불을 받치고 있는 기단에는 조그만 금동불
을 빼곡히 집어넣어 장관을 이룬다. 이들은 중생의 시주로 넣어둔 원불(願佛)이다.

▲  와불상 뒷쪽

▲  와불상의 발부분

내가 본 와불은 이곳을 비롯해 석모도 보문사(席毛島 普門寺), 기장 장안사(長安寺), 화순 운주
사(雲住寺) 정도이다. 운주사 와불을 제외하면 죄다 근래 조성된 것들로 지금은 그저 그런 존재
로 시선을 받고 있지만 시간이 꽤 흐르고 나면 20~21세기 불상 양식이라 하여 한국 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존재로 애지중지 될 것이다.

와불을 끝으로 간만에 찾은 청계사 관람은 마무리가 되었다. 서요사에 있는 길다방 커피에서 추
위에 시달린 몸을 달랠 겸, 커피 1잔을 뽑아마시며 잠시 두 다리를 쉬게 했다. 2월 하순이지만
햇님이 산을 싫어하는지 산속에서는 속세보다 해가 일찍 저문다. 이제 5시가 넘었음에도 땅거미
의 정도가 진해졌으며, 해가 기운 만큼 겨울 제국의 기운이 다시 용솟음치면서 찬바람의 패기도
제법 높아졌다.

청계사에서 머문 시간은 약 1시간 40분 정도, 겨울 제국의 차가운 등쌀에 떠밀려 청계사와의 짧
은 인연을 정리하고 속세로 길을 향한다. 우담바라를 친견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다음에 인연이
된다면 그때 와서 보면 된다. 내가 서울에 있는 한, 언젠가는 또 오지 않겠는가? 나 또는 청계
사가 멀리 떠나지 않는 이상은 언젠가 또 오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늦겨울 청계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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